관세음보살 가피와 영험록 모음
관음의 가피로 목숨을 건진 한용운 스님
(일타스님 글)
승려요 독립운동가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스님은 1905년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관음기도처로 이름 높은 오세암(五歲庵)에서 보냈습니다.
스님은 이 오세암에서 불경을 공부하고 글을 쓰는 틈틈이, 관세음보살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1910년, 일본이 이 나라를 강제로 점령하고 국권을 찬탈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을 길 없었던 스님은 1911년 가을, 행장을 수습하여 표연히 만주로 떠났습니다.
스님은 만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그 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만나 막막한 나라의 앞길을 의논하고 서로를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간도지방에 도착한 스님은 동포들을 만나 이역(異域)의 생활을 묻기도 하고 고국의 사정을 전하기도 하였으며, 그 곳의 독립지사로 협력하여 동포를 보호할 방법과 독립운동의 방향등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족투사를 양성하는 의병학교를 순방하여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깨우쳐 주고 또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통화현(通化縣)에 갔을 때입니다. 그곳은 이상한 불안이 감격과 희망속에 뒤범벅된 묘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습니다. 조밥으로 연명하면서도 밤이면 관솔불을 켜 놓고 천하 대사를 논의하는 한편, 화승총을 가지고 조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국에서 온 사람에 대해 처음에는 불안으로 감시했고, 그 다음에는 의심으로, 마침내는 목숨을 빼앗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어찌된 영문인지 한용운 스님도 그 곳에서 정탐꾼의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만주 통화현에서도 한참을 들어간 두메산골에서 자고 나오는데, 스님을 바래다 준다며 20세 전후의 한국 청년 3인이 따라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길은 차츰 산골로 접어들었고, 일행은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우거져 대낮에도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고, 길이라고는 풀섶에 나무꾼들이 다니는 미로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스님의 뒤를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총을 쏘았습니다. 순간 귓전이 선뜩함을 느꼈고, 연이어 두번째 총소리가 나자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한 방의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때 스님은 그들을 돌아보며 잘못을 호령하고자 목청껏 소리를 질렀으나, 성대가 끊어졌는지 혀가 굳어졌는지 전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는 할 말을 다했는데 말소리를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피가 댓줄기처럼 뻗쳤고 격렬한 아픔이 전신을 휩쓸었습니다. 그러다가 심한 통증이 사라지면서 지극히 편안한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지금이 생(生)에서 사(死)로 넘어가는 순간이구나. 이제 죽는구나.'
이윽고 편안한 감각까지 사라지면서 스님은 완전히 혼절하여 죽음의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행했던 신앙이 환체(幻體)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바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 아름답구나. 기쁘구나.'
앞이 눈부시게 환해지면서 절세의 미인,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어여쁜 여인이 섬섬옥수에 꽃을 쥐고 누워 있는 스님을 향해 미소를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총을 맞고 누워 있는 사람에게 미소를 던지다니!'
순간 스님은 달콤하면서도 분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때 관세음보살께서 꽃을 던지며 말했습니다.
"네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
그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린 스님은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날은 어두웠고 피는 도랑이 되어 흘렀으며, 총을 쏜 청년 가운데 한 명은 짐을 조사하고 다른 한 명은 확인 살인을 위해 큰 돌을 들고 스님을 내리치려고 했습니다.
스님은 황급히 일어나 그 자리를 겨우 피하고, 피를 철철 흘리며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핏자국을 보고 뒤쫓을 그들이 자신들의 마을 쪽으로 가면 안심하고 천천히 쫓아올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이렇게 한참을 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어떻게 넘었는지도 모르게 산을 넘어 청(淸)나라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갔습니다.
그 곳의 마을사람들은 마침 촌장(村長)집에서 계(契)를 하고 있는데, 피를 흘리며 들어오는 스님을 보고 지혈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 때 총을 쏜 청년들이 쫓아왔고, 스님은 그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총을 쏠테면 쏘아라."
그들은 어쩐 일인지 총을 쏘지 않고 달아났으며, 스님은 귀 뒤와 몸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아야 헹습니다. 의사는 "매우 아플테니 마취를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스님은 굳이 마다하였습니다. 생뼈를 깎아내는 소리가 빠각빠각 나는 수술인데도 스님은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끝까지 견뎠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이 아니고 활불(活佛)이로다."
치료를 다 마친 의사는 감탄하여 치료비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용운 스님은 평소 관세음보살을 깊이 섬겼기 때문에 절대 절명의 순간에 이르러 큰 가피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면서 초인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신력의 힘이 아니라, 총을 맞은 그때 관세음보살의 가피 아래에서 생사를 초월한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한용운스님의 경우처럼 평소의 섬김이 위기를 구하고 업을 녹이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 모두 올바른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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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큰스님이 직접 겪으신 관음 가피력
이 이야기는 혜암 큰스님께서 직접 하신 이야기입니다.
여기 혜암 큰스님은 얼마전 열반에 드신 종정스님이 아니십니다.
근대 선종사에 큰 획을 긋고 오래전에 열반에 드신 큰 스님이십니다.
간단히 혜암스님에 대해 말씀드리고 글을 쓰고자 합니다.
혜암스님은 1886년에 황해도에서 3대독자로 출생하셔서 1900년
15세때 보암스님을 은사로, 금운스님을 계사로 득도하셨다 합니다.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으셨으며, 1984년 100세의 고령으로
미국 서부에 있는 능인선원의 봉불식에 참석, 대한항공 역사상
가장 고령 탑승객으로 기록되기도 하셨습니다.
1984년말에 설립된 덕숭총림의 초대방장으로 초대 되셨으며
1985년 101세(법랍89세)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신유년 여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혜암스님) 금강산 마하연에
있을때의 일이다. 대중이 몹시 웅성거려 나가보니, 얼굴이 잘생긴
어떤 청년이 목에 연두창이 터져 피고름과 함께 마치 송장이
썩는 것처럼 냄새가 지독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를 보고
"병원에 입원이나 하지 그 몸으로 뭐하러 다닙니까?" 하니
"예 제 직업이 바로 의사입니다. 영국에서 <곱살바>라는 부인이
공부를 시켜 그분을 모시고 병원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이 생긴뒤로 나는 물론 그 부인도 병을 고칠 수없어
이제는 완전히 체념하고 폐인으로 떠돌아 다닌 실정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기독교에 이런 말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 환자가 기독교인이였는 듯함)
부처님 말씀에는 <한정된 목숨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병에 걸린 것은 신심이 철저하고 독실하면 고칠 수 있다.>
하였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해 보겠습니까?" 하니,
그는 "이미 버린 목숨이니 하다가 죽어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스님으로 만드니 대중스님네는 냄새 때문에
같이 못있겠으니 데리고 나가라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그런 비방과 구설을 다 참고 내 방을 비워주면서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대로 살기 틀렸으니, 일심으로 <관세음 보살>을 지성껏
불러라. 병을 고치고 못 고치는 것은 오직 그대 정성과 결심에 달렸다."
고 일렀다.
한동안 나는 그의 동정을 살펴 보았다. 그는 밤을 새워 가며
눕지도 아니하고 오직 일념으로 <관세음 보살>만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은 반드시 병을 고칠 수 있겠다고 생각 했다.
한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다.
소복으로 단장한 젊은 부인이 어린애을 안고 있는데
그 애는 자꾸만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었다.
꿈 속에서도 하도 신기하여
"어쩌면 저렇게 어린애가 염불을 잘 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그 부인이 "왜 귀찮게 구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부인에게 다가가서 그 병을 고쳐 주십사 하고간청을 하였다.
그때 그 부인은 손가락으로 그의 목을 꼭 눌렀다. 그러자 마자
달걀 같은 것 두개가 목에 축 늘어져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부인은 가위로 그것을 자르려 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 하기를 "그 가위를 잘 소독하고 잘라 주십시오"하니
부인은 "너는 지금까지 의사 하던 버릇으로 그런 소리를
하지마는, 이 가위는 원래 독이 없는 것이다." 하고,
그 혹 같은 것을 잘라 주었다.
그는 다시
"이 겨드랑의 것도 잘라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그것은 아직 그대로 두어라." 하였다. 그리고는 이내꿈을 깨었다.
그뒤로 그 종기는 피고름이 차차 멎고 병이 아주 나았다.
이렇게 병을 고친 그는 내 첫 상좌로 법명은 동일(東日)로
지금은 이북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영험담은 밀알 출판사에서 나온
"벼랑끝에 서서 길을 묻는 그대에게"라는
큰스님의 법문책에 나와있는 글입니다.
혜암 큰스님의 오동송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 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
내게 말도 침묵도,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여의고
한마디 이르라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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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님의 중매
근세 조선 순조 7년(1819)때의 일이다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 몹시 가난한 집이 있었다
이 집에는 나이가 30 살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윤덕삼(尹德三) 이라는 노총각이 있었는데 70 을 넘은
부모를 모시고 나무장사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매일 첫 닭이 울면 나무짐을 짊어지고 나서는데
나무장사를 할지라도 촌 사람을 상대로 할 수가
없는 까닭으로 서울장안에 들어가 도시사람을 상대로
하여야만 팔기가 쉬웠다
서울을 왕래하자면 구파발을 거쳐 서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리하나 서대문 거리는 경쟁이 서로 심하여
발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의 서대문 밖 무학재 너머에 있는
홍제동에서 왼편으로 개천을 끼고 세검정을 향하여
넘어가기가 어려운 자하문을 넘어 들어가야만 쉽게
팔고 돌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매일같이 이길을 택하여 다녔다
농사 한마지기도 없이 춘하추동에 나무장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하다가는 만년 총각으로 장가를 들지 못하고 늙을 일을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슬퍼졌다 더우기 그는 3대 독자
외아들이였다
만일 정말로 장가를 못가게 된다면 자손이 끊기게 되므로
부모님께 참으로 죄송한 일이었다
윤덕삼은 이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별도리가 없었다
어느날 그는 나무짐을 지고 세검정을 향하여 가는데
귀에 서투른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다리도 아프고하여
나무지게를 내려놓고 바라보니
옥천암이라는 절에서 들려오는 것있었다 그런데 그 절 아래
개천옆에는 높이 수십척이 되는 바위가 문도 없는 편각속에
있는데 거기에는 크게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부처님 앞에서 수십명의 여자신도들이 스님들과 함께
향불을 피우고 제사지내듯 메를 올리고 절을 한고 있었다
그 전에도 이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으레 스님들이 하는
것이거니 하며 무심히 지났으나 이날은 이상하게도 의심이 생겼다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런 것을 할까?
저렇게 하면 돌부처가 무슨 소원이라도 들어 주는 것인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똑똑한 사람도 마음데로 못하는 일을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바윗돌이 무슨 재주가 있어 사람들을
도와준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과 회의에 잠겨있는 동안에 할머니들이 불공을
마치고 건너온다 덕삼은 한 노인일 향해 물었다
"저 바위에 새겨놓은 부처님은 누구며 할머니들은 무엇 때문에
거기에 대고 절을 하고 빕니까?"
"이 총각 나이는 많이 먹었어도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구먼
저 바위에 새긴 것은 해수관음이라는 관세음보살이신데
이 어른은 동해,서해,남해할 것 없이 모든 바다 언덕 위에
계시다는 보살님일세 이곳은 바다는 아니지만 개천가인 까닭으로
멀리 바다에 가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인연을 맺으라고
해수관음불상을 새겨 놓았지
그런데 영험이 대단하여 저 보살님께 정성을 들이면 틀림없이
소망을 다 이룬다네".
덕삼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돌부처가 무슨 신통이 있어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습니까?
"그것은 모르는 말.돌부처라도 그냥 바위가 아니고,부처를
새겨 모신 바위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름을 부르고, 지성으로
마음을 모아 빌면,부처의 신령이 천리 만리라도 걸림없이
오셔서 정성을 받고는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일세.
그러기에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정성이
부족하고 믿는 마음이 부족하면 그런 사람에겐 그저
돌 바위만 보이지만, 마음이 참되고 정성이 지극하면
모든 것이 모두 부처이고,드는 것이 모두 불경소리인지라.
무정한 돌도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변신해 나타나는 것일세.
그러므로 소원을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 돌부처께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의 정성과 신심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일세"
"참으로 그럴까요?"
"그렇고 말고. 이절에 다니는 신자가 수백명인데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거야
새상에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갖은 고생을 해가며 이 험한
산골짜기에 올라와 정성을 드리겠는가 생각을 해 보게.
그러기에 여자들은 마음이 간절해서 철저히 믿기 때문에
소원을 이루기가 쉽지만 자네같은 총각은 남자라 마음이
엇갈리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빌어도 건성으로 빌 것이니 어려울 것일세. 그럼 난이만
가네"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어데론가 가버렸다
온갖 고생을 거듭하고 쪼들릴대로 쪼들린 윤총각은 귀가
번쩍 트이는 것 같았다.
그 다음날부터 그는 이 곳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길가에
나무짐을 버티어 놓고 건너가서 해수관음에게 수십 번씩
절을 하고 마음속으로 축원하였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어서 제가 장가를 들어 자손을 보고, 부자가 되어서
나무장사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예배만으론 시원치가 않아 점심밥으로 먹을 도시락을
나무짐에서 꺼내어 가져다가 올리고 다시 절을 하였다.
도시락이라 하여도 보리밥 아니면 조밥이요 게다가
된장 덩어리가 끼어 있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도 가난뱅이가 이러는 것은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윤덕삼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나무짐을 지고 오갈때마다
그와 같이 하였다.
이렇게 백일을 하고 나니, 비록 돌부처라고는 하지만
어머니 마냥 친해져,보기만해도 다정함을 느꼈다
이제는 부끄럼없이 처다보고 농도 하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을것 같았고,그만하면 자기 소원도 들어
줄 만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생활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모두가 허사인듯 야속한 마음도 가끔 들었으나
자기의 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언젠가는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리라 믿었다.그럭 저럭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날이 되었다.
그 날도 나무를 성안에 팔고 돌아오는 길에 윤덕삼은
해수관음에게 들렸다.그런데 마침 비가 쏟아져 나갈
수가 없었다
덕삼은 문도 없는 관음각에 홀로 앉아 있다가 심심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우물꼬누'를 커다랗게 그려놓고
관세음보살님께 꼬누를 두는 내기를 하자고 말했다.
"관세음보살님,이제 저와 같이 내기 꼬누를 둡시다.
저는 이길 자신이 있으니,만일 제가 이기면 관세음보살님이
그 댓가로 저의 소원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덕삼은 꼬누를 두기 시작했다. 우물꼬누란 첫 수에 이기고
지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다. 덕삼은 조약돌 두 개를 주어다가
하나는 제 것이라 하고,하나는 관세음보살님 것이라 몫을 정해
놓고,혼자 천진스럽게 두었다.
"그럼 제가 먼저 두겠습니다"
첫 수에 관세음보살님을 이겨 버렸다.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을
우러러 보면서 기원드렸다.
"관세음보살님! 분명히 보셨지요? 꼬누는 분명 제가 이겼습니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속히 저의 소원을 꼭 성취시켜 주셔야 합니다"
덕삼은 이렇게 말을 하고 비가 그치자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꿈에 거룩하게 생긴 늙은
부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해수관음을 모시고 있는 옥천암에서 온 보살이다.
너의 정성이 하도 갸륵하여 너에게 도움이 될 말을 일러 주러
왔다.
너는 내일 첫 새벽 닭이 울 때에 나무짐을 지고 떠나서
밤이 새기 전에 자하문 밖에 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그리하여 문이 열리면,첫번째로 나오는 여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거라.
'남녀가 유별한데 먼저 말하기는 미안하지만,어디로 가시는
누구이신지는 모르지만 가시는 곳을 가르쳐 주시면,제가
안내하여 줄테니 저를 따라 오십시오'라고 이야기 하고
그를 너의 집으로 인도하면 너의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꿈속일망정 덕삼은 하도 좋아
"고맙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다짐을 나누며
깨어 보니 분명한 꿈이었다. 윤덕삼은 곧 이어 뒷집에서
첫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자 바뿌게 옷매무새를 고치고
밖으로 나왔다
나무 짐을 지고 집을 나오려 하자 어머니가 물었다
"애야,오늘은 먼동도 트지 않았는데 벌써 나가느냐?"
"네,오늘은 누구를 일찍 만나야 하기 때문에 일찍 나갑니다"
빈 속에 나무 한 짐을 지고 바뿐 걸음으로 삼십리를 걸어
자하문 밖까지 올라가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희망에 들뜬 몸이므로 배고픈 것도 무거운 것도
다 잊고 단숨에 자하문 밖에 이르러 나무짐을 괴어 놓고 보니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행으로 여기고 먼동이 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 틈으로 하얀 버선을 신은 발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관세음보살님이 거짓말은 하지 않으셨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있는데 마침
문이 열렸다.제일 먼저 보자기로 싼 것을 머리에 인 여자가
쏜살같이 세검정으로 내려갔다.
덕삼은 나무짐과 지게를 버리고 종종걸음으로 쫓아 내려가
소매를 붙들고 꿈 속에서 일러주신 대로 하였다
"놀라지 마십시요.남녀가 유별한데 먼저 붙잡고 말하기는
실례인 줄 아오나 어디로 가는 낭자이신지 제가 길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새침하게 톡 쏘고 말대답도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그 어여쁜
낭자는 뜻밖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저는 윤도령이란 총각을 만나려 갑니다"
윤덕삼은 너무나도 뜻밖이라 눈이 휘동그래져서 물었다.
"제가 윤총각인데요?
"네? 그러세요. 저는 심낭자입니다.그런데 어떻게 알고
나오셨나요?"
"이리 오실 줄 알고 마중 나왔습니다.간 밤의 꿈에 어떤
점잖은 부인이 나타나 말씀하시길,'너는 장안에 있는
낭자를 만나게 될터이니 잘 보살펴주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첫 닭이 우는 새벽 마중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제게도 그런 부인이 간밤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길
"네가 자하문을 나가면 첫번째로 어떤 사나이를 만날 터인데
그는 윤도령이라는 총각이다.그는 심덕이 좋아 따라가도
해롭지 않을 것이니 따라 가거라"
하시길래 그 말씀을 기억하여 여기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꿈이 같을 까요?"
"그게 다 천생연분인 까닭입니다"
"아이 망칙해라"
"망칙하기는 무엇이 망칙합니까? 세상 만물에는 다
임자가 있고,짝이 있는 법인데..."
두 사람은 초면같지 않게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나란히 내려왔다. 어느덧 절 가까이 왔다.
"여기서 잠깐 쉬어 갑시다"
덕삼은 심낭자를 관세음보살상 앞으로 인도했다
"자,우리 오늘의 일을 감사하기 위해 부처님께 절을 먼저 합시다"
절을 하려고 관세음보살님 앞에 선 심낭자는 깜짝 놀랐다
"어머나! 이분은 간밤의 꿈에 뵙던 분과 얼굴이 꼭 같습니다"
"그래서 절을 하자고 한 겁니다.우리의 인연은 관세음보살께서
맺어주신 것입니다"
덕삼은 몇 번이고 절을 하며, 감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감사하니다.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님!"
그런데 심낭자는 어찌된 사람인가? 그녀는 명문대가의 규수로
열여덟 살에 어떤 양반의 집으로 출가하였다.그러나 연분이
아니 였는지 신랑이 혼례 즉시 보기 싫다고 퇴박을 하였다.
그리하여 3년을 기다리다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돌아와
7년,10년을 동안을 수절하며 남편의 개심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도, 희망도 없었다.
그러니 말만 시집갔지 처녀나 다름이 없었고 그렀다고 평생토록
수절하며 혼자 지낼 수도 없었다.또 버젓이 개가할 수도 없는
처지라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어디론가 아무도 모른는 곳으로
길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딸이 불쌍하기만 했던 그의 어머니는
귀중한 금,은, 보석,산호,비취 등을 한 보따리 싸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연에 따라 마음대로 집을 떠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심낭자는 스물 여덟 살 되던 해에 길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밤 꿈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길
"너는 다른 문으로 나가지 말고 자하문으로 나가되,
문이 열린 후 첫번째로 만나게 되는 윤총각이라는
남자를 따라가면 행복하게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를 들은 윤덕삼은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실감하고
더없는 고마움과 행복을 느꼈다.윤총각은 날을 받아 일가친척을
모아 놓고 간단하게 혼례를 치루었다.
그리고 심낭자가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집과 논밭을 마련하고
또 산도 사서 아들 딸 낳고 평생부자로 큰 살림을 벌리니
신도면 일대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도 역시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근래에도 그의 5대손이
이러한 인연으로 불공기도 다니며 선조의 이야기를 전하였다.
출처/청신남 청신녀 (우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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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염불로서 불구의 다리을 고친 화엄스님
<일타스님의 글>
동해 동림사(東林寺)에는 수염을 길게 기른 화엄(華嚴) 스님이
계십니다. 이 화엄스님은 동산(東山)큰스님의 제자로서, 특별한
출가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1925년생인 화엄스님은 일찍이 일본 경도(京都)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으로 있다가, 학도병에 뽑혀 남양군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미군들과 전투를 치르던 어느 날, 갑자기 공중에서 포탄이
떨어져 수십 개의 파편이 다리 속으로 박히는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고, 파편 제거수술을 완벽하게 받아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이상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항상 저리고 아파서 올바로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절뚝절뚝 절게 되었습니다.
이 부상 때문에 제대를 하여 고향으로 오기는 했지만, 영영 불구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또 엎친 데 덮친다고, 때마침 그와 사귀던 여인마저
기숙사에 불이 나서 타죽고 말았습니다.
몸도 좋지 않은데다 마음의 상처까지 받은 그는 수양을 하기 위해
범어사 대성암(大聖庵)으로 들어갔고, 그 곳 스님들은 그에게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외울 것을 권하였습니다.
처음 심심풀이 삼아 보문품을 읽던 그는 차츰 관세음보살에 대한
믿음이 깊어졌고, 나중에는 틈만 나면 목청을 가다듬어
'관세음보살'을 염불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몇 달을 대성암에서 지낸 어느날 밤,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범어사 뒤의 금정산을 오르고 있는데,산 위로부터 갓을
삐딱하게 쓴 영감님 한 분이 내려오더니 대뜸 욕부터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잇. 지지리도 쓸모없는 놈! 의사란 놈이 다리를 절뚝절뚝
절고 다녀? 침을 한 대 맞아야 되겠구먼."
영감님은 품속에서 넓적하게 생긴 대패침 하나를 꺼내서 콧김을
쐰 다음 상투에 쓱쓱 문질렀습니다.
"이리 와."
그리고 강압적으로 팔을 잡아당기더니 대패침으로 파편이 박혔던
허벅지를 꽉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구 아야!"
그는 고함을 지르며 깨어났고, 깨고 보니 꿈인데 허벅지에서
고름이 한 사발이나 쏟아져 나와 있었습니다.
고름을 닦아 낸 그는 방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고, 묘하게도 그토록
아프고 저렸던 다리가 멀쩡하게 나아 있었습니다.
'내 다리가 낫다니! 의학을 전공한 나의 상식으로는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다.
인간의 의술이란 대의왕(大醫王)이신 불보살의 능력에 비한다면
태양 앞의 반딧불과 같은 것! 반딧불 같은 기술을 지닌 의사가 되어
무엇하랴. 정녕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됨이 옳으리라.'
이렇게 생각한 그는 동산스님의 제자가 되어 '화엄'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그가 처음 사미계를 받을 때 내가 인계승(引戒僧)노릇을
한 인연으로 그와는 꾸준히 친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교에는 대의왕이신 불보살들이 가득합니다.
그분들은 어떠한 병이라도 능히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감응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열쇠를 쥐고 있는가?
바로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부디 마음을 모아 기도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불보살의 밝은 자비가 우리와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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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기사회생과 관음기도
(일타스님 글)
일제시대 평양에 살았던 유제규(劉濟奎)거사는
평양교당(平壤敎堂)에 다니다가 젊은 법사인
정지월(鄭指月)스님으로부터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문득 신심이 샘솟는 것을 느낀 유제규는 보문품을 배껴 부부가
날마다 보문품을 독송하였습니다.
그렇게 매일 보문품을 외우기를 몇 달,
1928년 12월 18일 밤의 일이었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그날, 가족끼리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9시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유제규 거사는 매일의 일과대로 보문품을 세번 독송하고,
'관세음보살' 3천념(三千念)을 한 다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약 30분정도 숙면을 취하였을까? 비몽사몽간에 흰옷 입은
노부인(老夫人)이 나타나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라.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잠만 자고 있느냐!"
그는 정신을 차리려 하였으나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여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노부인의 손을 잡고 일어나서 정신을 차려 보니,
흰옷 입은 부인은 간 곳이 없고 옆에 누워 자고 있던 아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눈이 까뒤집힌 채 말 한마디 못하고 일그러진
표정만 짓고 있었습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쳐서
집안 식구들로 하여금 의사를 부르도록 하였고,
자신은 아내의 몸을 주무르고 코밑을 비벼 주고
인공호홉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아내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숨소리는 점점 더 가늘어졌고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뒤늦게 온 의사도 진찰을 해보더니,
이미 숨을 거두어 어쩔 수 없다면서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제규 거사는 의사에게 주사라도 한번 놓아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심장마비라고 하면서 돌아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제규 거사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여 비통하게 울다가,
문득 보문품의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衆生被因厄 중생들이 곤란과 액난을 당해
無量苦逼身 한량없는 고통이 다다를지라도
觀音妙智力 관세음보살의 묘한 지혜와 힘은
能救世間苦 능히 세간의 모든 고통을 구해 주시도다
具足神通力 신통력 모두 갖추시고
廣修智方便 지혜와 방편 널리 닦으사
十方諸國土 시방의 모든 국토에
無刹不現身 몸을 나투지 않은 곳 없으시도다
그는 관세음보살을 외우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아내의
기사회생(起死回生)을 기원했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관세음보살께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약 30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죽어 있었던 아내가
가늘게 호흡을 시작하더니, 정신이 드는듯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어나 앉았습니다.
절망과 근심에 빠져 있다가 환호하는 가족들에게 유제규 거사의
부인은 말했습니다.
"사경을 헤매다가 숨이 끊어지자 혼이 공중으로 둥실 떠오르더구나.
너희들은 모두 슬피 울고 있고, 네 아버지는 나를 살려 달라며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더구나.
나도 엉겁결에 관세음보살을 따라 불렀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부인이 나에게 약물을 한 종지 주셨단다.
그 약물을 받아 마시자 내 혼이 다시 몸 속으로 들어가면서
숨이 통하지 않겠느냐."
유제규 처사 부부는 이토록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체엄을 한다음
불교를 더욱 열심히 믿었으며, 이런 사실이 평양 바닥에만
알려지는 것이 애석하여 1929년 2월의 <불교> 잡지
제 56호에 투고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불보살의 가피력! 그러나 지극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불보살의 가피가 끊임없이 미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지극하게만 해보십시오.
'나'도 충분히 가피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계(法界)에는 불보살의 자비와 묘지력(妙智力)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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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속의 관음상
중국의 당나라 문종(文宗)황제 때 일이니까 지금부터 1천 3백여년 전
일이라 할수있다. 문종황제는 불도에 귀의한 신심이 남달리 돈독한
불교 신자였다. 그는 바쁜 정사 가운데도 전국의 명찰을 순례하며
참배도 하고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또 내전에 불당을 차려놓고
거기에 관음상을 모시고 있었다.
당시 종남산(終南山)에는 유정(惟政)선사라는 고승이 있었는데
황제는 그를 몹시 존경하고 좋아했다. 특히 그를 왕사처럼 모시고
자주 초대하거나 또는 찾아가서 그의 지도를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황제는 국가에 대사가 있을 때에는 예외 없이 먼저
궁전에 모신 관세음보살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했다.
또 그럴 때마다 그는 관세음보살님으로부터 현몽을 얻게 되었다.
황제는 그 현몽대로 일을 처리했다. 그러면 무슨 일이나 어려움없이
순조롭게 풀리고 또 성취가 되었다.
문종황제는 불교에 귀의한 뒤로부터는 일체 고기를 먹지 않았다.
육물이건 해물이건 입에 대지를 아니 하고 멀리 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조개만은 끊지를 못 했다.
그것만은 먹지 않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개만은 그냥 수랏상에 올라오도록 했다.
어느날 아침이었다. 그 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관세음보살 전에 가서
기도를 올리고 돌아와 수랏상을 받았다. 역시 수랏상에는
거의가 채소반찬이었으나 유독 해물로는 조개 한 접시가
올라와 있었다. 황제는 역시 조개에 먼저 손이 갔다.
벌어진 조개를 하나하나 까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까먹어 가다보니
그 가운데 껍데기가 벌려있지 않은 놈이 하나 있었다.
황제는 젓가락으로 조개를 벌리려 했으나 잘 벌려지지를 아니 했다.
그래서 할수없이 손으로 조개를 집어들고 힘을 주어 쪼갰다.
그랬더니 이게 웬 일인가. 벌어진 조개안의 조갯살이 금방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황제가 자세히 보니
그것은 관음상이었다.관음상은 서서히 광명까지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제는 처음 보는 일이라 놀랍기고 하고 또 알수없는 일이라서
종남산에 있는 유정선사를 불렀다. 달려온 유정선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황제는 그 조개의 속을 그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선사님, 이 조개 속을 좀 보십시오. 짐이 아침 수라를 들다가
조개를 먹는데 그 중에 입을 벌리지 아니 하고 오무리고 있는
놈이 있기에 벌려 보았더니 이 속에 이렇게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있지 않겠습니까. 조개속에 진주가 들어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처럼 보살님이 들어있는 것은 처음 보는 일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일까요”
유정선사도 기이한 듯 그 관음상을 드려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폐하, 이것은 관세음보살님께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조개로
응화하신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인 것 같사옵니다.”
황제가 이에 대답을 했다.
“저도 경전에서 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화현을 하신다 하더라도 불신 아니면 보살신 또는
벽지불이라든가 장군신, 비구신, 비구니신, 부녀신, 동남동녀신,
팔부금강신 같은 몸으로 화현하는 경우는 있어도 조개로 화현한
조개신에 대해서는 경전 어디에서도 읽은 기억이 없고
또 일찍이 들은 바도 없습니다.”유정선사가 다시 말을 했다.
“부처님 말씀에 불보살은 백억화신을 나투신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렇다면 백억화신 가운데 어찌 조개로 나타나는 조개화신인들
없겠사옵니까. 있을수 있는 일이옵나이다”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이 조개신은 누구를 제도하러
이렇게 내 수라상에 올라와 있을까.
그래서 황제가 선사에게 다시 물었다.
“선사님, 그렇다면 이 조개신, 즉 이 관음보살은 누구를 제도하기
위하여 오늘 이처럼 짐의 수랏상에 올라온 것입니까.
그것이 매우 궁금합니다.”선사가 말했다.
“폐하, 그것이 그리도 궁금하시옵니까. 관음보살은 자비로써
모든 중생을 제도하시옵나이다. 어느 특별한 생명 하나만을
제도하시고자 화현하시는 것은 아니옵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제도의 대상이 다를수도
있사옵나이다.”
황제가 선사의 말을 끊고 이렇게 물었다.
“그 말씀은 또 무슨 뜻입니까.”
선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소승이 이 관세음보살을 보고 접하게 되면 보살님께서
소승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렇게 화현을 나투시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수가 있사옵나이다. 그렇게 되면 소승이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과거의 모든 잘못을 참회하고 새로운 신심을 얻을 수도 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옵나이다.
또 이 관세음보살님을 폐하께서 보실 때 폐하께서 바로 짐을
제도하기 위해서 관세음보살님이 짐이 드시는 조개속에
화현하셨구나 생각하신다면...”
황제는 다시 선사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리고 자기가 말을 했다.
“알았습니다. 지금 관세음보살님께서 여기 이렇게 화현하신 것은
짐으로 하여금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좀더 선행을 하고
자비심을 베풀고 백성을 위해 더욱 봉사하라는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뜻을 잘 받들어 더욱 정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사가 감탄하여 말했다.
“폐하께서는 과연 훌륭한 부처님의 제자이시옵니다.
폐하께서는 관세음보살님의 설법을 아주 잘 듣고 계시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폐하께 바로 그러한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오늘 이렇게 수랏상의 조개속에 그 몸을 나투셨는지도
알수가 없사옵나이다.
부디 불보살과 같은 지혜를 발휘하시고 또한 불보살과 같은 자비를
온 백성과 중생에게 골고루 베푸셔서 창생이 환희하고
나라가 번성하는 태평성대를 누리시옵소서. 모든 백성이
폐하의 덕을 기리고 찬탄하며 존경하는 성제가 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황제는 그 뒤부터는 조개까지도 먹지를 아니 했다.
따라서 수랏상에도 조개반찬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조개 속에서 나온 관세음보살상을 산관음이라 하여
원불로 모셨다. 또한 항상 몸에 모시고 다니는 호신불을 삼기도 했다.
이와 같이 누구나 불보살을 진심으로 깊이 믿으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불보살이 그에게 화신으로 나타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영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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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독송의 가피력/진각스님
만약 불자님들의 가정에 한 가족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어느 병원에서도 소생할수 없다는 의사의 판명이 나온다면
당장 불자님이 무엇을 할수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잘 아시겠지만 그 때는 의지가 최대한 약해 지는 시기 인지라
모두가 기독교인은 하나님에게 크리스챤은 성모마리아님에게
불자님들은 각 사찰의 불보살님에게
그리고 설령 종교가 없던 사람 마저도 어느 한 종교에 매달릴 겁니다.
【 살려 주십사 】 하고 말이죠.
그 어떤 대상을 선택하여 기적의 의지를 갈구 하려는 것이 우리 중생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어떻한 어려움에 빠졌을 때
우리는 흔히들불보살님들에게 무아의 기도를 통하여
기적같은 가피를 입어 그 어려움에서 헤어 나오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불안하고, 평상심을 잃을 때
혹은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때
그때 사람들은 기도를 할 겁니다.
다시말해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때는
기도 하려는 마음들이 없다가
본인이나 가족이 급한 경우에는 매달리려 한다는 것 입니다.
기도 정진은 불교에서는 가장 신성한 종교의례 입니다.
기도의 가피는 불보살님의 법력을 얻자는 것인데
그런 급한 경우가 아닌 매일 매일 하는 습관을 들이자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써 내려 가려는 이야기도
평상시에 반야심경과 108 배를 게을리 하지않던 어느 법우의 이야기 입니다.
【 묘법연화경 】 【 보문품 】에
" 선남자야, 만약에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가지의 고뇌를 받을 때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 "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관세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아니라
여러 백천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 이제 그 가피력을 입은 법우의 이야기를 적어 봅니다.
1991 년 6 월 3 일 오후 2 시에 서울 잠수교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김 준환이라는 학생이 (당시 고대 3 학년) 구입한지 5 개월이 되는
현대 스쿠프 승용차를 운전하여 강북쪽으로 가던 중
잠수교 타널 안에서 옆의 차를 피하려다가
앞에 가던 유조차 뒷 부분에 부딪히고 튕겨져 나가
옆의 옹벽에 부딪치며 전복되어 차가 엎어진채로
20 여 M 데굴데굴 굴러 갔습니다.
유조차 운전자는 순간
큰 사고가 났음을 알고 정지 하였으며,
사고차는 유조차 앞으로 미끌어져 나갔습니다.
유조차 운전자가 내리려는 순간, 그는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다름이 아닌 전복된 사고차가 안보일 정도로
하얀 모습의 커다란 부처님 형상이 차를 덮고 있는게 아닙니까?
순간, 그 유조차 운전자는 섬뜩함을 느꼈으며,
잠시후 그 부처님 형상이 없어지자 그는 차에서 내려
사고가 난 차에 가보니 차는 폐차 직전으로 찌그러져 버렸고
이상하게도 사고차의 운전자가 보이질 않는 것 이었습니다.
당시 51 세의 유조차 운전자는 운전 경력이 많은 사람이었고,
믿는 종교는 크리스챤이라고 했었습니다.
분명 이런 정도의 사고라면 운전자는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찾아보니
운전자는 보이질 않고 옹벽 옆에서 한 학생이 책가방을 들고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조차 운전기사가 그 학생에게 다가가
" 학생 ! 혹시 저 차 운전하던 운전자 못 보았는가? "
그러자 그 사고차를 운전하던 김 준환 학생이
" 제가 저 차를 운전했는데요 "
유조차 운전기사는 믿기지 못하여 다섯번이나 물어 보았었습니다.
정말 운전자라면 이렇게 살아 있을수가 없으며,
더구나 온 몸에 상처도 없이 서 있을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조차 기사는 그 학생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며
사고처리를 해 주고는 그 학생의 아버지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김 준환 학생의 사고 소식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학생의 아버님에게 유조차 기사가 혹시 종교가 있으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학생의 아버지는 종교는 불교 집안 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제서야 유조차 운전자는 자기가 본 형상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고
그 학생의 아버지에게 그 때 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난 뒤 유조차 기사가 김 준환 학생에게 다가가
그 사고 당시의 일이 궁금하여 물어 보니
" 사고 순간 차가 부딪히는 것을 보며
누군가가 자기를 감싸 안는 느낌을 받고 보니 차가 거꾸로 있는데
옆 유리창이 보이므로 안전벨트를 풀고책가방을 지자
누군가가 안아서 차에서 내려주었습니다 " ....그랬습니다.
자 !, 한번 생각 해 봅시다.
자동차 유리창 부분은 작습니다.
그 부분을 빠져 나오려면 멀쩡한 상태에서도 쉽게 빠져 나올수 없는 것 입니다.
당시 김 준환 법우도 회상을 할 때
" 저 창문으로 내가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모릅니다 "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마 이러한 일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수 없는 부분이라 여기시죠?
이것이 바로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가피력입니다.
그 차는 결국 대파되어 폐차를 시키고 키가 181 Cm 였던
김 준환 법우는 그런 대형사고를 당하고도
큰 상처하나 없이 무사히 그 구멍으로 온 것 그것이 바로 불보살님의 가피력 입니다.
그의 가정을 잠시 소개해 보면,
그 법우는 2 대 독자로 그의 어머니 김월맹심 보살은
20 년 전 부터 시부모님의 영정을 처음 백련사로 모실때
그 인연으로 불교와 인연이 되어 불교에 귀의를 했고
백련사에서 정진하며 전국 어느 사찰이든
【 우란분절 백중 기도 천도제 】가 있는 곳이면 빠짐없이 동참하며
하루도 정진을 게을리 않고 매주 토요일이면 철야정진을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1995 년 쯤으로 기억) 백련사 재무로 일했으며
사고가 나기 2 년 전부터 아들 (김 준환 학생)에게
매일 아침마다 【 반야심경 】을 독송하라고 하면서
절을 최하 50 번 조금 더 하면 108 배를 시켰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들이
" 법당도 아니고 부처님도 안 계신데 어디에 절을 하냐 " 고 하자
김월맹심보살님은
" 지금 네가 앉은 자리가 법당이니 그냥 열심히 해 봐라 " 고 대답 했었답니다.
아들이 성품이 착하여 어머니 말씀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기도를 하고 난 뒤에 학교를 다녔다는 것입니다.
사고후 월맹심보살님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그의 집안은 늘 부유하고 걱정은 없었으며
백련사에서 기도 할 때는 특별히 원을 세운 것은 없으나
기도 중에는 '원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그저 좋은 인연이 맺어지기'를 바랐으며
사고 후 기도의 공덕을 부처님의 가피지묘력을 확신하고
기도드린 정성보다 너무 큰 가피를 입었다고 하면서 더 정진을 했었습니다.
불자 여러분.!
이와같이 기도는 어떻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삶이 기도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이 불자의 집안처럼
앞으로 닥쳐오는 불행을 불보살님의 가피지묘력으로 미리 피할수 있다는 것 입니다.
모든 열매는 열매가 맺기 까지의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도 없이 나무한 그루 탁 심어 놓고
느닷없이 열매 맺기를 바라는 멍청한 사람이 되지 마시고
그 나무를 정성스레 가꾸며 결실을 기다리는 현명한 사람처럼
늘 쉬지않고 기도정신 수행을 하시면 불보살님이 감응하시와 가피를 주실 겁니다.
즉,
부처님이나 불보살님은 어느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가운데 계신 불보살님에게 가피를 청하는 기도를 타력이라고 하겠습니까?
기도로 마음을 허공처럼 깨끗이 비워 버리면,
바로 그 마음 속으로 부처님이 자리를 하시는 겁니다.
본래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나
그 마음이 탐진치 삼독의 때가 끼어 볼수가 없는 것이죠.
용맹정진하는 수행 속에서
몸과 마음의 때를 벗기어 내는 청소를 하는 수단으로 통하여
각자의 마음이 청정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가피를 입을수 있는 것 입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를 참고 견디는 '인욕바라밀'이 없이는
불보살님의 가피를 기대 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보통 어떤 기도를 하면 한 번 기도를 시작하고 보면
늘 수많은 장애가 따르는 법입니다.
그 장애가 생길 때 반드시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재가불자 여러분 그리고 법우 여러분 !
사람에게는 누구나 소망과 희망 이라는 것이 잇습니다.
소박하고 작은 것에서 부터
크고 위대한 온갖 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발심하시어
우리들의 원을 실현키 위한 기도를 오늘 다시 정하여
쉼없는 용맹정진을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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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기도로 불치의 병이 사라짐
(진각스님 글)
언젠가 광명사 신도회 총무 장상원 거사님은
당시 주소가 충북 청원시 석교동 육거리에 있는 뉴~코리아나 관광여행사이다.
몇 년 전부터 청원군 미원면 운교리에서 정미소를 하고 인삼 재배도 하며,
동네 이장도 보면서 시골에서 살고 있었으나, 얼마전 까지만 해도 청주에 나와 살았었다.
지금으로 부터 10 여년 전
장 상원씨가 간경화로 지라까지 붓고 아파서 수술도 못할 상태였다.
좋다는 약만 구해서 먹다가 병이 악화되어
다들 위험하다고 했는데 그의 형 두분이 서울에 잇으면서,
특별히 의사에게 부탁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부터는 절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큰 아들 정 현태군이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와서 집안 일을 도왔다.
겨울방학이 되자 경운기로 볏짚도 실어나르고 벼짝을 메어 나르며 장정 부럽잖게 일을 하였는데
봄이 되자 오른쪽 다리가 아프고,
허리 척추뼈가 3 개가 튀어나와 학교에 못 다니게 되었다.
청주의료원에서 디스크 병으로 진찰이 나와
고치려고 두 달이 넘도록 치료를 하였으나 병은 낫지를 않았다.
대전 대학병원으로 서류를 넘겻으나 그만두고,
스님의 권유로 휴학계를 내고 약도 썼다.
여름방학이 되어 구인사로 가서 한달 기도를 하였어도 병은 낫지를 않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닥쳐왔다.
스님은 또 권유를 하여 태현군을 구인사로 한 달 기도하도록 보내고
부친은 가까운 절에서 한 달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장 상원씨는 동네 이장도 보고 인삼포며 방앗간 때문에
낮에는 기도를 못하고 밤에 열두시가 넘어서야 기도를 할수가 있었다.
오랜 질병에 지쳤는지 하루는 스님 보고
"나는 내년 4 월을 못 넘길 것 같다" 는 마음 약한 소리를 하더라는 것이다.
스님은 몸이 달아서 장 상원 처사님을 데리고 구인사로 가서 태현군을 만나
"너는 병을 못 고치면, 병신의 몸으로 가정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너의 부친은 본인의 아픈 것에 대한 기도는 하지 않고 네 병이 낳기만 바라며
밤 12 시가 넘어서도 밤마다 절에와 너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
어젯 밤에는 내게 하는 말이 내년 4 월 까지를 못 넘길 것 같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게 급하니 네가 한달이 넘도록 기도를 하여야만이
병이 나아 너의 아버지가 너를 보고 신심이 생겨나 기도를 할 것이고 그래야 병이 나을 것이다."
라고 강조를 하였다.
장 상원씨는 아들을 보고
"병이 낫지 않으면 병신 자식 보기 싫으니 영춘강에 빠져 죽든지
집에는 오지도 말라" 고 하고서 왔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병이 낳았다.
태현군은 반가움과 두려움에 스님에게 달려 왔다.
태현군이 병은 나았지만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었다.
밤이 되어 부모와 함께 절에 온 태현군이 스님께 인사를 하니
스님은 게속 기도를 해야 한다며 다시 기도를 시켰다.
그런데 태현군이 관세음보살을 몇 번 부르더니
':쯔쯔 쫘쫘 쯔쯔 떠떠.........' 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부모는 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다 말고
"스님 얘가 집에서도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스님은 '기도를 열심히 하면 그런 소리를 할수도 있다' 라고 말씀 하셨다.
교회에서는 이런 경우를 방언이라고 하고
절에서는 이런 경우를 변음이라고 하는데
자꾸 기도를 하다보면 과거의 업장이 들어나 없어지면서
그런말이 나오게 된다' 고 부모를 안심시켰다.
스님이 태현군이 언제 부터 그랬냐고 물으니까
태현군이 말하기를........
"스님이 다녀 가신 뒤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낮에도 부르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힘껏 뺨을 때리잖아요.
그래서 누군가 하고 돌아보니 아무도 안 때렸다는 거예요.
볼을 만져보니 분명 손가락 자욱 같은 것이 있었는데 말이예요.
그래서 기분이 나빠서 방에서 나와 대조사스님 묘소에 올라 갔더니
보살님들이 많기에 나는 한 쪽에 조용한데 가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데
또 누가 뺨을 너무 아프게 때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두 이상해서 묘소 지키는 스님에게 물어 보았더니
스님은 웃으시면서 '너 기도 열심히 하라'고 신장님이 때리시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후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는데 누가
'학생 공양하러 가지' 하는 소리는 들리는데, 처음에는
관세음보살소리가 잘 되다가 ':쯔쯔 쫘쫘 쯔쯔 떠떠.........' 그러면서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부르려해도 자꾸만 이상하게 변음이 나왔어요.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기도를 하였는데 언제 부터인가 다리가 안 아팠어요.
이말을 들은 부친도
"나도 이제 부터 기도를 열심히 해야겟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신심이 생겨나 남마다 잠들기 전에 꼭 관세음보살을 정진하고
낮에는 길에 다니면서도 불럿는데
하루는 꿈에 혜만스님이 :차차 괞찮아 질거요" 하더라는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차도가 점 점 좋아져 농사일을 그만두고
그 뉴~코리아 관광여행사를 하고 잇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믿지 못할 이야기 같지만
관세음보살 부르다가 우는 사람, 귀신하고 싸우는 사람, 변음이 나오는 사람,들도 왕 왕 있다.
정성이 지극하면 그만큼 사람마다 다르게 신기한 일들을 경험 할수 있다.
여기서 나의 얼마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 곳 보성의 움막에 처음 올때만 해도
컴퓨터를 전혀 몰랐다. 크고 켜는 것조차 모르는 상태인데
얼떨곁에 컴퓨터 한 대를 보시 받고 나서
10 년 동안 비어있던 이 폐가로 들어와 홀로 책을 구입하여 보면서 컴퓨터를 공부했다.
그러다 5 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우연히 인터넷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인터넷으로 인하여 사이버사찰을 만들게 된 동기가 되었다.
나의 신기한 가피는 이때 부터 일어났다.
오늘 처음 글을 남기는데 아마 가피를 입어 보질 못한 사람들은
지금 부터 내가 적는 글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고 설마...설마...할 것이다.
하지만 원력을 입었거나 가피를 입은 재가불자들은 당연 하리라 생각을 한다.
내가 컴을 혼자 배운지 5 개월이 넘으면서 부터
홈 페이지 제작에 들어 갔다.
가피는 그 때 부터 일어나기 시작 했다.
홈 페이지를 주무르다가 분명 컴퓨터도 사람이 만든 것이니
분명 이렇게 하면 될 것도 같은데 왜 안 되지.....? 하면서
그날 밤 끙 끙 앓으며 헤메다가 잠이 들면
꿈 속에서 얼굴도 볼수없는 하얀 가사장삼을 수한 사람이 나타나
정확하게 홈 페이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소스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럼 그 꿈을 꾸자마자 당장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그 생생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보면
과히 아니 놀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 가피를 무려 1 년이 넘는 동안 매일 꿈 속에서
그렇게 배워 오면서 사실 지금의 인터넷 사찰의 기본 틀이 짜여 졌다고 보면 된다.
기도란..........
죽음의 직전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 마냥
약에 의존하지 않고 돈에 의존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이나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고
오직 마지막으로 부처님에게만 의지하지 않으면 않되겠다고 생각 할 때
그 때야 말로 참다운 기도정진이 된 다는 것이 보통 스님들의 한결 같은 말씀들이다.
다른 잡된 생각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한 생각 관세음보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보살님을 불렀을 때
관세음보살은 그 사람을 도와 주는 가피를 내리는 것이다.
그런 기도정진을 함으로써
불자들은 어려운 난관을 미리막고,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수가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모두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야 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닌
진실로 나는 하나의 원을 세우고 그 원에 대한 끊임없는 수행정진을 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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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선사의 기도 성취
현대의 대선사 금오(金烏, 1896-1968) 스님이 젊었을 때인
1920년대 초기,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인 수월(水月)스님을 뵙고
지도를 받기 위해 만주 봉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조선 땅과 만주 땅과 러시아 땅이 합해지는 회령 지방을
조금 지나 막 러시아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마적 떼들이 어느 부잣집을 털다가 반항하는 주인을 죽인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부잣집 안 주인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범인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러시아 경찰들은 불심검문을 하다가
장비처럼 생긴 금오스님을 체포하여 그 부인에게 보였다.
"이 사람이 그 마적 떼요?"
"그런 것 같아요, 마적 떼 대장과 비슷하게 생겼어요."
정신이 반쯤 나간 그 부인의 말 한마디에 금오스님은 완전히
범인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고문을 당하면서 자백을 강요받았다.
"나는 수도하는 승려이지 마적 떼가 아닙니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은 믿지 않고 밤낮없이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러더니 며칠이 지나자 고문을 중단하고 감옥에만
가두어 놓는 것이었다.
'웬일일까? 고문도 그만두고 감옥에만 가두어 두다니..'
이렇게 고민을 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한국인 한 명이 그 감방에 들어왔다.
학교 선생인 그는 산골짜기에 아편을 심었다가 발각되어
잡혀 온 것이라고 하면서 물었다.
"스님이 살인 강도의 누명을 쓰고 들어온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스님, 범인은 이미 잡혔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석방시켜 주지 않는 거요?"
"아마, 이 감옥에서 나가기가 어려울 걸요?"
"왜요?"
"우선 조선 사람은 나라가 없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힘을 써 주지 않습니다.
설사 러시아 쪽에서 풀어 준다고 하더라도,
조선 사람이 러시아 감방에서 죄없이 갇혀 있었다는 것을 구실로
일본은 러시아에 보상을 요구합니다.
러시아로서는 공연한 말썽거리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므로,
차라리 감옥에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보복을 두려워한 그 부잣집 안주인이 돈을 써서
스님을 풀어 주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큰일났구나. 이 감옥에서 살다가 죽어야 하다니!
이토록 난감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가? 필경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탈출을 하는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겠구나.'
금오스님은 감옥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다.
참선도 화두도 그만두고 오로지 관세음보살의 구원만을 갈구하며
부지런히 염불하였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어떤 사람이 철창 바깥에 나타나 감방 안을
들여다보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쇠창살 두 개를 잡고
쑥 뽑아 올리자, 쇠창살이 그대로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뽑힌 쇠창살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어 스님을 향해
'씩 -' 웃고는, 다시 쇠창살을 꼿아 놓고 사라졌다.
비몽사몽간에 이 일을 접한 금오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데 쇠창살 두 개를 뽑아 보았다.
이상하게도 쇠창살이 쏙 뽑히는 것이었다.
스님은 감방을 빠져나와 형무소 문 쪽으로 다가갔고,
때마침 문지기들이 졸고 있어 몰래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완전히 형무소를 탈출하여 달려가다가 다리가 아파
수수밭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말을 탄 간수들이 나타나 탈옥수를 찾는 수색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스님이 다시 안전한 곳을 찾아 피해 가는데,
한 간수가 말을 몰아 쫓아오더니 잡으려고는 하지 않고
묻기만 하는 것이었다.
"탈옥수 한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소?"
"보지 못했는데요."
"이상하다. 어디로 사라졌지?"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관세음보살의 가피로구나.'
스님은 불보살님의 은혜에 크게 감격하면서,
만주 봉천의 깊은 산림 속 토굴에 계신 수월스님을 찾아가,
1년 동안 모시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금오스님은 후일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그때의 일을 자주
들려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참선하는 수좌도 가끔은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이 금오스님의 말씀처럼 참선 수행자도 장애가 있으면
한바탕 기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도를 하면서 원(願)을 새롭게 가꾸고,
가피를 입을 일이 있으면 가피를 받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한 번의 기도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도심(道心)에 걸림이 없을 때까지 거듭거듭 행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갈등이 있으면 기도하라.
장애가 많고 공부가 잘 되지 않으면 기도를 통하여
거듭거듭 발심하라. 불보살님께서는 틀림없이 큰 힘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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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관세음보살과 의상대사
의상대사(625~702)는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때 가장 존경을
받았던 유명한 고승이다
그는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불법을 배우고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많은것을 깨닫고 670년에 귀국한 분이다
그는 귀국 후 관세음보살님이 머물고 계신다는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落山寺)앞 바닷가로 가서 목욕 재계하고
절벽에 있는 굴 입구를 향하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관세음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한 기도를 올렸다
7일째 되는날 새벽
이제 관세음보살님께서 광림 하실 때가 되었음을 느낀 의상대사는
기도할 때 깔고 앉았던 방석을 물 위에 뛰우자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들이 나타나 의상대사를 굴 속으로 인도 하였다
텅 빈 굴 안에서 의상대사는 공중을 향해 합장을 하고 절 하였다
어쩐 일인지 관세음 보살님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벌만 하사 하였다
의상대사가 수정염주를 받아 가지고 굴 밖으로 나오려는데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여의보주 한개를 바치는 것이었다
의상대사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아! 나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구나.
의상대사는 다시 7일을 더 기도한 뒤 또 굴 안으로 들어가
3일 동안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자 기도했다
그러자 드디어 관세음보살님께서 모습을 드러내고 서
의상대사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그대가 서 있는 곳 바로 위 산 꼭대기에 대나무가 두그루
솟아 있을 것이다.그곳에다가 절을 짓도록 하라
의상대사는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합장을 하고 굴 밖으로 나와
산위로 올라 가보니 과연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나 있었다
그는 이곳이 참으로 관음진신께서 머무르시는 곳임을 확인하고는
그 곳에 터를 닦고 절을 지었다.
이 절이 바로 관음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지금의
강원도 양양 낙산사(落山寺)이다
의상대사는 낙산사를 창건한 후 관세음보살님의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법당에 모셨는데
그 원만하고 아름다운 상호가 꼭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그러자 대나무는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 뒤, 원효(元曉)대사가 관음진신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곳 낙산사를 찿아왔다
처음 원효대사가 남쪽 동구 밖에 이르렀을 때였다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농담삼아 그 여인에게 벼를 좀 달라고 하자
그 여인도 흉년이 들어서 쭉정이 밖에는 없다고
농담 삼아 말 하였다.원효대사는 좀 언짢았다
다시 원효대사는 그 곳을 지나
낙산사 쪽으로 가다가 다리가 놓인 시냇가에 이르렀다
다리 밑에서 한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그여인 곁으로 다가가서 물 한 모금을 청하였다
그런데 그여인은 깨끗한 물을 떠 주는 것이 아니라
빨래를 헹군 더러운 물을 떠 주는 것이었다
원효대사는 몹시 불쾌하여 망설일 것도 없이 얼른 그물을
버리고 위에서 다시 맑은 물을 떠서 마셨다
바로 그 때였다.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에서
푸른 새 한 마리가 지저귀면서 말했다.
제호(醍호,훌륭한 음료수)를 버리다니,
화상은 관음보살 친견은 단념하시오,"
그 소리를 들은 원효대사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다보니
새는 간 곳이 없고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새가 울던 그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대사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목적지인
낙산사에 도착하여 법당으로 들어가 관세음보살님께 합장하고
절을 하려는데, 관음보살상의 좌대 아래에 또 한짝의
신발이 떨어져 있는게 아닌가?
이에 원효대사는 비로소 앞서 만났던 두여인이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새가 울었던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
원효대사는 또 전에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던
굴 속으로 들어가 다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 하고자 했으나,
풍랑이 너무 심하여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효대사는 끝내 다시는 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삼국유사)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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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보문사 관세음보살의 영험
강화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남해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관음기도 도량이다
이곳을 구경하고 돌아오다가 거센 풍랑을 만났으나
관음기도 공덕으로 간신히 살아난 이야기가 있다
일제 때의 일이다,근대 우리나라 불교계의 석학 중에 유명한
권상로(權相老)박사가 있다.
이분은 원래 스님으로서 훗날 동국대학교 총장까지 지냈던 분인데
이분의 친척으로서 경북 선산군 해평에서 면장까지 지낸
우용택(禹龍擇)이라는 분이 이었다
이 분이 어느 해 가을,
친구 몇 사람과 더불어 강화도 구경을 가게 되었다
그들은 강화도의 명소인 마이산과 전등사 등을 구경한뒤
마지막으로 관음기도 도량으로서 유명한 강화 보문사를
구경하지 않을수 가 없었다
그들은 삼산 나루터에서 목선을 타고 보문사에 도착하여
"굴법당 마애관음" 등을 구경한뒤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하였다.그런데 인천으로 가던 중에 멀쩡하던 하늘에 갑짜기
시커먼 먹구름이 뭉치더니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돌풍이 일기 시작하였다. 배는 거센 풍량에 흔들리면서
기우뚱 기우뚱했다.
갑작스러운 상항에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당황해 어쩔줄 몰랐다
게다가 산더미 같은 파도가 계속 배를 때리자 배는 곧
부서질듯 '우지직 우지직,하였으며 갑판위로 바닷물이 쉴새없이
넘쳐 들어 왔다. 우용택의 일행을 비롯하여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다.그 중에는 살아 보려고 배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는사람,마냥 정신없이 '엉엉'우는 사람 등 갖가지였다
그런데 이처럼 급박한 상항이 전개되고 있는데,어디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간절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승객 중 한 사람이 거의 무아지경에 이른 상태로
오로지 "관세음보살"만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 풍량에서 살아 남기를 바란다면 모두들
한마음으로 '나무 관세음보살,을 부르십시오
그리고는 또다시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이 곳 강화에는 낙가산 보문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험 있는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니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모두 함께 관세음보살님을 부른다면 반드시 그 묘지력에 의하여
살아 돌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끝나자 불교를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모두 동시에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 하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것 저것 가릴 사항이 아니었다
배 안은 갑자기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합장 소리로 가득 하였다
사실, 우용택과 그 일행은 유생 이었다. 한번도 불러본적이 없는
"관세음보살"을 부르자니 선뜻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머뭇거리고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부르라고 하던
그사람이 우용택을 향하여 말 하였다
"노형,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 십시오.그러면
필히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있을 것이니 어서 속히 부르십시오"
워낙 위기일발의 상황인지라 우용택 역시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 하였다.그래도 여전히 풍량은 심하게 몰아쳤다.
배는 곧 가라앉을 듯 더욱더 기우뚱기우뚱 하였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악,하고 절규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도 정신이 들면 모두들 그승객을 따라 더욱더 소리높여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이 때 기적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높은 곳에 앉아서 "관세음보살"을 선창하고 있던 그 승객이
벌떡 일어 나더니 우용택을 향해 하늘을 가리켰다
'저것 보시오."
우용택이 그의 손짓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니 오색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비치면서 그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이선명하게 현신한 것이었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은'이젠 살았구나'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순간에
또다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배를 때려 돛대를 부러 뜨렸다.
모두들 또 한번 '악'하고 절규의 소리를 질렀다
'아'이젠 정말 죽었구나.
관세음보살의 신통력도 별수 없구나.'
우용택도 이렇게 생각 하면서 너도 나도 살 궁리를 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돛대가 부러진 뒤로는 그렇게 거세던 풍량도
점점 약해지고 빗줄기도 가늘어지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해가 나고 바다는 거의 평소처럼 정상이 되었다
배는 폭풍을 만나 몇군데 부서진 곳이 있었으나 운행에는 큰
지장이 없었고 여러 사람들이 물을 퍼내고 힘을 합하여
무사히 인천항에 도착 하였다.그야말로 몇시간 사이에
생사의 갈림길을 왕래 하다가 간신히 죽음에서 살아 난 것이었다
그 후 관세음보살님의 영험에 감탄한 우용택은 고향으로 돌아가
선산 도리사의 신도가 되었으며,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모두
관세음보살님을 열심히 믿게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보문사에 와서 자주 관음기도를 올렸으며,
우용택과 친척간이었던 권상로 박사가 김대은 스님께
이야기하여 (관음신앙)에 수록하였던 것을 다시 정리 한 것 이다
"만약 큰 물결에 떠내려 간다고 할지라도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곧 얕은 곳으로 이르게 되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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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의 몽중가피
-일타스님의 생활속의 기도법-
꿈은 우리 생활의 그림자요 마음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불보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면
낮에 먹은 마음이 그대로 연장되어 밤의 꿈 가운데
나타난다. 이것이 몽중가피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소망이 꼭 이룩되게 해주십사' 하고
지극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그 사람의 소망에 부응하는 편지 한 장을 주거나,
약을 주거나, 차를 한 잔 주는 꿈을 꾸게 된다.
이와 같은 꿈을 꾸면
자기의 소망은 그대로 성취되는데,
이를 일러 관세음보살의 몽중가피라고 한다.
곧 꿈속에서 받는 통지서는 합격 통지서요,
차를 한 잔 받아 마시거나 청심환 한 알을
얻어먹으면 몸이 좋아진다는 징조이다.
꿈 가운데 열쇠를 하나 받으면 이튿날
생각지도 않던 돈이 들어오게 된다.
불가(佛家)에 전해지고 있는 기도 영험담 중에는
삼종가피 중 이 몽중가피가 가장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약 1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서울 미아리에 40대의 보살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전생에 닦은 복이 많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유복하게 자랐고
돈도 잘 벌고 가정도 잘 돌보는 남편을 만났으며,
아이들도 착실하게 공부를 잘하여 근심 없이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입안이 허는 병이 생겼다.
한두 군데도 아니고 온 입안이 헐어서 음식은커녕
물조차 먹기 힘든 지경이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고,
한의원을 찾아가니
'입안이 허는 병은 위장에서 온다'고 하며
위장약을 지어 주었으나 역시 효험이 없었다.
설상가상이라 더니,
마침내는 혀를 움직일 때마다 입안이 아파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몰골은 여위어만 갔고,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신경만 날카로워지게 되었다.
남편의 자상한 보살핌,
아이들의 재롱도 귀찮게 느껴질 뿐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고 있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집 가까이 있는 절을 찾아갔다.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살려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으나,
엎드리면 이빨이 다 쏟아지는 것 같아 절도 할 수 없었다.
입안이 퉁퉁 붓고 헐어서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가만히 앉아 부처님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빌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제 입병 좀 낫게 해주십시오."
온 종일 부처님만 쳐다보면서 이렇게 한마음으로
빌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기를 며칠, 그녀는 꿈을 꾸었다.
그녀가 열심히 부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불단을 내려 오셨다.
그리고는 다기(茶器)에 담겨 있는 물을 찻잔에 가득 따라 주셨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마시려는데 부처님께서 일러주셨다.
"그냥 삼키지 말고 입안에서 우물우물하다 넘겨라."
그녀는 시키는 대로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거짓 말처럼 입병이 말끔히 나아 있었다.
매운 음식, 짠 음식,
그 어떠한 것을 먹어도 입안이 아프지 않았다.
'세상에 어찌 이토록 신기한 일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감격하여 불교 신문에 이 사실을 투고하였다.
글 솜씨는 서툴지만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가피력을 알리고자 투고하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다급한 일을 당한 불자라면
몽중가피를 입을 때까지 일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꼭 소리를 내어 염불을 해야만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 念'자 염불(念佛). 꼭 입으로 부르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열심히 생각하면 그것이 참된 염불이요,
생각하고 매달리는 마음이 간절하면
부처님과 하나가 되어 저절로 가피를 입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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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이마의 도끼
-철원:심원사-
옛날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 심원사에
묘선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었습니다.
강원 공부를 마친 지 얼마 안되는 스님은 매사에 의욕적이었지요.
어느 날, 노스님을 모시고 산책을 하던 묘선스님은
노스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했답니다.
『스님,
아무래도 절이 너무 낡아 보수를 해야 되겠습니다.』
『알고 있다.
그러나 살림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디 엄두를 내겠느냐.』
『스님, 오늘부터 제가 백일기도를 드려 불사를 하겠습니다.』
묘선 스님은 그날로 백일기도에 들어갔지요.
젊은 스님의 기도는 간곡했다. 백일기도를 회향하는 날 밤.
『묘선아, 네 기도가 그토록 간절하고 불심이 장하니
반드시 시주가 나타나 절 중창을 이루게 될 것이다.
내일 아침 일찍 화주를 구하러 나가도록 해라.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이 심원사 중창불사의 시주가 될 것이니라.』
꿈에 나타나신 부처님은 이렇게 일러주셨습니다.
잠에서 깬 묘선은 거뜬한 마음으로 길 떠날 채비를 차리곤
노스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소승 화주길에 오르겠습니다.』
『오냐, 잘 다녀오너라.』
묘선 스님이 막 산문 밖을 나서는데 왠 나무꾼 하나가
아침 일찍부터 나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치려다 꿈 생각을 한 묘선 스님은 나무꾼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아랫마을에 사는 머슴 박씨였습니다.
『머슴 박씨가 우리 절 중창 불사 시주가 될 수는 없을 텐데…
그냥 지나칠까.』
묘선 스님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아냐,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인데….』
묘선 스님은 박씨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일찍 나오셨습니다.』
『아이구, 심원사 스님이시군요. 어디 먼길 떠나십니까?』
묘선스님은 일손을 멈추고 공손히 인사하는 박씨에게
간밤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주가 되겠느냐고 물었셨지요.
박씨는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었습니다.
「50평생 못 간 장가, 이제 가서 뭘하나.
차라리 그 동안 머슴살이로 모은 재산 절 짓는데 보시하여
부처님께 공덕이나 지어야지.」마음을 결정한
박씨는 기꺼운 마음으로 스님께 대답했다.
『스님께서 제게 시주가 되라는 데는 큰 뜻이 있을 것입니다.
스님 말씀에 따라 40년간 모은 저의 전 재산을 불사기금으로
시주하겠습니다.』
『참으로 고맙소. 이 인연공덕으로 다음 생(生)에 좋은 인연을
받을 것입니다.』
박씨의 시주로 심원사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머슴 박씨가 시주를 한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그만 자리에 몸저눕고 말았다.
그러나 돈을 모두 절에 시주한 박씨는 약도 쓸 수가 없었다.
주인집에서는 머슴이 일을 못하고 눕게 되자
공밥을 먹일 수 없다고 박씨를 절로 보냈다.
절에서는 박씨를 위해 극진히 간병하면서 정성껏 기도를 올렸으니
차도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병은 악화됐고, 끝내 박씨는 죽고 말았다.
마을에서는 묘선 스님이 순진한 머슴 박씨를 속여
결국은 죽게 했다고 이웃동네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묘선 스님은 더이상 심원사에 머물 수가 없었다.
절을 떠나기로 결심한 스님은
새벽예불을 올리러 법당으로 들어갔지요.
희미한 촛불 속에 부처님을 바라보는 묘선 스님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가피는 커녕 시주자를 죽게 한 부처님」이란
생각을 갖게 된 묘선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헛간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스님의 손에는 어느새 도끼가 들려 있었다.
스님은 법당으로 다시 들어가 부처님 이마를 도끼로 내리치고는
황망히 절을 빠져 나갔다.그 뒤 전국을
만행하는 묘선 스님의 발걸음은 늘 무겁기만 했다.
심원사 부처님 이마에 박힌 도끼가 빠지지 않는다는 소문은
전국에 퍼져 있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어느 날.
묘선 스님은 심원사 부처님께 용서를 빌고 자신이 그 도끼를
뽑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심원사로 갔다.
절은 30년 전 불사가 중단된 모습 그대로였고 부처님 이마엔
도끼가 박혀 있었다.
묘선 스님은 참회하는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마침 그 무렵 새로 부임한 젊은 사또는 돈독한 불자로서
심원사 부처님 이마의 도끼를 손수 뽑겠다고 절에 와 있었다.
법당에 들어선 사또는 삼배를 올린 후 부처님 이마의 도끼를 뽑았다.
도끼는 쉽게 빠졌다.
그 도끼를 들여다본 사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화주 시주 상봉」도끼에는 이렇게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모습을 법당 문밖에서 바라보고 있던 묘선 스님은
그때 비로소 부처님이 머슴 박씨를 죽게 한 뜻을 깨달았다.
스님은 사또 앞으로 나아갔다.
『소승이 바로 30년 전 이 도끼로 부처님 이마를 찍은 사람입니다.
사또님의 전생은 이 절에 시주하신 머슴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시 시주를 구한 화주승은 바로 저이지요.
화주승과 시주가 인연 있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시주 화주 상봉」이란 바로 오늘의 인연을 부처님께서
미리 계시하신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묘선 스님의 설명을 들은 사또는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간 일어나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스님, 이제 멀리 떠나지 마십시오.
부처님 뜻으로 인연 맺어 스님과 제가 다시 만났으니
심원사 불사를 완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요한 돈은 제가 시주하겠습니다.』
심원사 중창불사는 30년만에 다시 시작되었다.
묘선 스님은 심원사를 중창한 후 그 절에 오래 머물면서
큰스님이 되어 많은 신도를 교화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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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운속죄(時雲續罪)
묘향산 염선봉 절벽 위의 조그마한 암자 상원암(上元庵)에는
시운선사(時雲禪師)와 혜성(慧成)이라는 어린 동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시운선사와 절친한 친구의 아들인 혜성의 본명은 최치록(崔致祿)으로,
갓난 아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스님을 따라와서
이 암자에 살게 된 것입니다.
시운선사는 "내 아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 달라."는 친구의
유언대로 혜성이에게 정성껏 글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혜성이의 나이 스물에 이르자 혜성이의 장원급제를 위한
천일 기도를 남몰래 시작하였고,
천일 기도가 끝나는 날 혜성이를 불렀습니다.
"혜성아. 이제 속세로 내려가서 과거를 보도록 하여라."
"아니되옵니다. 스님. 저는 아직 공부가 미흡할 뿐 아니라
스님을 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습니다.
스님. 조금만 더 있게 해주십시오."
"장원급제하여 백성들을 잘 보살피는 것도
부처님과 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
이제 때가 되었느니라.더 이상 고집 부리지 말고 내려가도록 하여라."
스님의 단호한 태도에 혜성은 더 이상 보채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스님. 부디 만수무강하옵소서."
큰 절을 올리고 떠나가는 혜성의 뒷모습을 보며
시운스님은 끝없이 축원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디 혜성이가 입신양명하도록 은덕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어느덧 해가 바뀌어 화창한 봄날이 돌아오자,
시운스님은 묘향산 밑의 안주(安州)로 내려가 탁발을 했습니다.
이 집 저 집을 돌면서 적지 않은 공양미를 시주받은 스님은
암자를 향해 발길을 돌리다가 몇 가지 물건을 사기 위해
장터로 갔습니다.스님이 막 장터로 들어섰을 때,
젊은 거지 하나가 장삼자락을 잡고 애처롭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한푼만 보태 주십시오. 며칠을 굶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시운스님은 엽전 몇 닢을 꺼내어 가엾은 거지의 손에 쥐어 주다가,
문득 거지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니, 너는 혜성이 아니냐?"
"앗. 시운스님!"
"그렇게도 오랫동안 부처님께 빌었건만,
장원급제는 고사하고 거지 신세라 말이냐?"
시운스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습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기구한 운명과 처참한 현실에 대한
저주와 분노가 부처님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스님은 몸을 돌려 상원암으로 향했습니다.
백여 리나 되는 험한 산길을 한달음에 뛰어올라온 스님은
칼을 집어 법당으로 달려들어 갔습니다.
"이 허수아비 부처야! 그렇게도 사람을 속일 수 있단 말이냐?
에잇!"
스님의 손에 들린 칼은 쇠로 만든 부처님의 복부로 향했습니다.
"찡-."
칼은 부처님의 배에 깊이 꽂혔고,
실성한 듯 시운스님은 절을 뛰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방방곡곡을 돌면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저주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어언 3년의 세월이 흘렀고,
시운스님의 발걸음은 묘향산 아래에 이르렀습니다.
"상원암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아, 부처님의 배에 꽂은 칼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스님의 발길은 저절로 상원암으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암자에 도착하여 법당 문을 열자,
배에 칼을 꽂은 부처님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깊이 죄의식을 느낀 시운스님은 먼저 부처님의 배에 꽂힌
칼을 뽑아 드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들어 갈 때는 그토록 쉽게 들어갔던 칼이
아무리 힘을 써도 뽑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꽂힌 칼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포기하고 법당 앞뜰에 앉아 옛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산 아래에서 요란한 풍악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귀를 의심하여 아래로 내려다 보았더니,
여러 관속과 하인들을 거느린 행렬이 암자를 향해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절 마당이 요란해지더니
젊은 관속 하나가 소리쳤습니다.
"안주 목사 행차시오."
할 수 없이 시운스님은 목사의 행차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가마에서 내린 안주 목사가 스님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안주 목사 최치록이옵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오. 혜성아! 네가 틀림없는 혜성이렷다?"
스님과 안주 목사가 된 혜성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곧이어 혜성은 그때 암자를 떠난 직후 몹쓸 병에 걸려 고생을 하던 중
시장에서 스님을 만났다는 것과,
그뒤 병이 나아 과거에 급제하고 안주 목사에 제수되어
가장 먼저 스님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잠시 후 혜성은 시운스님을 모시고 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합장 배례한 후,
부처님께로 다가가서 배에 꽂힌 칼을 한 손으로 쉽게
뽑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당돌한 소행을 용서하옵소서.
실은 어젯밤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이 칼을 빼도록 일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뽑은 칼을 시운스님께 건네 주는데,
그 칼에는 뚜렷이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시운속죄(時雲續罪)."
시운스님은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1백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행하는 참회좌선(懺悔坐禪)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 앞에 청수(淸水) 한 그릇과 부처님을 찔렀던 칼을 놓고
깊이 깊이 참회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21일이 지나자 칼에 새겨졌던
'시운속죄'라는 글씨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시운스님은 참회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자기의 죄가 소멸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윽코 단식참회 30일이 되었을 때 탈진한 시운스님은
부처님 앞에 쓰러져 입적하였습니다.
그때가 1459년(세조 5) 8월이었고,
소식을 들은 안주 목사 혜성은 후히 장례를 치르고,
절기에 따라 극진히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가피가 빨리 찾아올 때도 있고
늦게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같은 태양이 천하를 비추지만,
봉우리에는 빛이 먼저 찾아 들고 골짜기에는 빛이 나중에
찾아 드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의 가피가 조금 늦게 찾아 든다고 하여 조급증을 낼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큰 애착과 큰 기대는 큰 착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마치 이 시운스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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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살려준 염불신행
(보광스님)
14살때 어머니위해 철야 관음기도
대학생때 15일간 지장기도 죽을 각오로 기도발원, 지금까지도 큰힘
나의 경험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기도에 대한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기도에 몰입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이니 14살 때인 것 같다.
우연히 득병하신 어머님에게는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 마을 뒤 단석산에 있는 백석암(白石庵)이라고 하는
암자에 가서 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으며,
법당에는 바람이 불면 촛불이 꺼질 정도로 외풍이 세었다.
주지스님의 지도에 따라서 음력으로 12월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납월 팔일에 회향하는 관세음보살 기도였다.
스님께서는 어린 나를 두고 “너희 어머니가 회복하려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밤잠도 자지말고 다른 생각도 말며,
오직 관세음보살만 찾아라”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관세음보살님이 어머님을 살려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법당에서 하룻밤, 이틀 밤을 세우면서
일심으로 불렸을 뿐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7일이 지나 회향일이 되었으며,
그 날이 바로 성도절이었다.
7일 동안을 법당에서 철야을 하였으나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른다.
추웠다는 생각보다는 한 밤중에 바람이 불면 촛불이 꺼질 것 같아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밤 새워 치는 목탁소리에 주지스님도
방에서 잠을 자지 않고 염불하셨던 것 같다.
당시의 기억 가운데 가장 신기하였던 것은 회향을 하고 하산하는데
마을의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소 우는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등 모든 소리가 관세음보살의 염불소리로 들렸던 적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이틀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물론 어머님의 병세도 호전되어 완쾌하셨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출가한 뒤에야,
“모든 삼라만상이 부처님 아님이 없으며,
모든 소리가 법음(法音)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또 한 번의 경험은 출가 한 뒤 대학 2학 때였던 것 같다.
그 해 여름 방학에 은사 스님이 계시는 경주 ‘중생사(衆生寺)’에서
지장기도를 15일간 철야로 한 일이 있었다.
처음 시작 할 때는 법당에서 기도하다가 죽을 각오로 기도발원을 하였다.
앉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눕지도 않고, 기대지도 않고,
서서 목탁을 치면서 24시간을 계속하여 염불을 하였다.
밥 먹고, 세수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법당에서
염불을 계속하였다. 처음 하루는 시작하는 마음으로 보냈으며,
이틀 삼일 사일이 지날수록 더욱 힘들었으며, 칠일이 고비였다.
한 밤 중에 기도를 하고 있으면, 약간 떨어진 요사채에서 잠자는 소리,
코고는 소리, 잠꼬대하는 소리까지 들리곤 하였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팔일이 되고,구일이 지나 십일이 넘어서니
모든 잡념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몸은 피골이 상접하였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으며, 상쾌하였다.
마치 날아갈 것 같이 정신은 맑았다.
보름 동안의 철야기도를 회향하고 나니,
몸무게는 10키로가 줄었다.
그러나 너무나 또렷하고 맑은 마음은 마치 유리그릇과 같이
투명하다고 생각하였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경험은 지금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정토염불신행을 하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어릴때의 관음기도와 청년기의 지장기도가 이제는
아미타불염불로 계속되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 볼 때,
나의 근기에는 염불신행이 가장 적합한 수행방법인 것 같다.
보광스님/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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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 보살님의 가피로 고친 허리병
(일타스님)
경북 영천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50대 초반의 처사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지금부터 수년 전, 그 처사는 갑자기 심한 통증을 느끼며
굴신 조차 할 수 없는 허리 병에 걸리고 말았다.
처사는 들것에 실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고,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다니며 침도 맞고 한약도 달여 먹었지만
전혀 효험이 없었다.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구니 스님이 된 처사의 여동생이 찾아왔고,
여동생은 관세음보살 기도를 할 것을 권하였다.
"오라버니, 관세음보살을 지성껏 부르면 죽을병도 능히 고칩니다.
그까짓 허리 병 하나 못 고치겠습니까? 누워서 특별히 할 일도 없을 것이니,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부지런히 관세음보살을 외우십시오"
얼마 동안 처사는 동생이 시키는 대로 관세음보살을 외웠다.
그러나 깊은 믿음이 없었던 그는 열심히 외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영영 불구자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과 함께 염불 자체에 대한 회의에 빠져 버렸다.
'관세음보살을 외운다고 어찌 허리 병이 나을까 보냐? 나도 참 바보지.
일은커녕 걷지도 못하고 방구석에만 누워 있어야 하는 이내 신세....
아, 차라리 콱 죽어버리자.'
그는 가족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일도 못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
먹고 죽어버리게 농약 가져오너라. 빨리 가져 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족들을 향해 '농약 먹고 죽어버리겠다.'고 소리치자,
견디다 못한 가족들은 다시 동생 비구니 스님을 청하였다.
"오라버니,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간절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러 보세요
틀림없이 허리가 나아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병원에서도 치료하지 못하는 병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관세음보살이 어떻게 고쳐? 여러 소리 말고 농약이나 가져 와! 콱 죽어버리게."
"그렇게 농약 먹고 발광하다 죽고 싶소?
"그래, 이제 사는 것도 지겹다. 빨리 농약이나 가져 오너 라."
헛간으로 뛰어간 동생 비구니는 농약 한 바가지를 푹 퍼 가지고 와서
오라버니의 입 앞에 갖다대며 소리쳤다.
"자, 입을 벌려요 내가 부어 넣어 줄 테니까."
"뭘 망설여요? '아'하라는데,처사는 여동생의 당돌한 행동에 깜짝 놀라
입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농약을 먹지 않으려거든 지금부터 관세음보살을 부지런히 외우세요
부지런히 외워 꿈속에서도 관세음보살을 외우게 되면,
묘한 약이 생기기도 하고 용한 의사를 만나 병이 금방 낫게 될 것입니다."
여동생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처사는 그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소리내어 관세음보살을 찾기가 쑥스러워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7일째 되던 날 저녁, 처사는 문득 꿈을 꾸었다.
처사가 사는 동네에 의사 한 명과 세 명의 간호사가 갑자기 찾아와서,
"악성 전염병이 돌고 있으니 모두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동네 사람 모두를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처사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의사 앞으로 가자,
의사는 다른 사람은 거들떠볼 생각도 않고 처사를 끌어당겨
청진기로 진찰을 하는 것이었다.
"보통 주사로는 당신 병을 고칠 수가 없소 저 침대 위에 누우시오"
처사가 침대 위에 눕기 바쁘게 의사는 맥주병 만한 큰 주사기를 가져 와서
인정사정을 두지 않고 허리에 꽉 찌르는 것이었다.
"아야 ! " 처사는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고.
꿈에서 깨어나서 보니 자신이 벌떡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불편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구제불능의
허리 병이 완전히 나아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처사가 조급증과 무기력 속에 잠겼을 때 영영 기도를 그만두었다면
어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을 수 있었겠는가?
여동생 스님의 적절한 방편으로 처사는 관세음보살을 찾는 기도를
마음속으로라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허리 병이 완쾌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수많은 생각들을 잘 단속하여야 한다.
오히려 잡생각이 일어날수록 마음을 굳게 다져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나를 속일 불보살은 없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더욱 부지런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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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된 동래 온천장의 막내보살
(일타스님)
부산 동래 온천장에는 내가 아는 보살들이 몇 있습니다.
그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다고 하여
'막내보살'로 불리는 이 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막내보살은 오래 전부터 진로소주 도매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보살계를 받고 부터는
자꾸만 자신의 직업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술 장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 보살의 십중대계 중
제5계로 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절에 갈 때마다
부처님 전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습니다.
"부처님!술 도매업 대신 다른 직업을 갖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절을 찾을 때마다 빌기를 3년,
하루는 아는 사람이 와서 자꾸만 땅을 사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하였는데,
거듭거듭 재촉 하는 바람에 갖고 있던
여유 돈으로 땅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빈땅을 그냥 놀리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 땅에 울타리를 치고 조그마한 움막 한 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땅을 돌볼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게 되다 보니
자연 식수가 필요해져서 우물을 파게 되었습니다.
인부를 사서 땅을 꽤 깊이까지 파들어 갔을 즈음,
아주 큼지막한 바위 하나가 걸려 좀처럼 진척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새로이 다른 곳을 뚫자니 그동안의 공이 아까웠습 니다.
"어렵더라도 바위를 부숩시다."
이렇게 하여 바위를 쪼개었더니,
놀랍게도 그 사이로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땅 값이 수십 배나 뛰어올라 막내보살은 큰 부자가 되었고,
그 땅에다 몇 채의 호텔을 지어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마음에 걸렸던 술 도매업은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활 속의 기도.
심중의 소원을 불보살님께 고하면서 기도 하다 보면,
변화의 인연이 자연스럽게 찾아들게 됩니다.
반대로 좋은 소원, 좋은 마음가짐을 가졌다가도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해 버리면
결코 벗어나지도 새롭게 변화할 수도 없게 됩니다.
포기하거나 버리지 말고 수시로 기도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힘이 생겨나게 되고,
힘이 모이면 성취가 저절로 뒤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타스님기도영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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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 붕괴 현장의 기적 같은 생환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순식간에 일어난 서울 서초동 삼풍 백화점의
붕괴사고는 온 나라를 경악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5백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인재 서울의 한 최고급 백화점의 붕괴가 가져다 준
충격!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방향을 잃은 듯 애만 태워야 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준 기적이 있었습니다.
사지(死地)에서 230여 시간 만에 구출되어 첫 번째 기적을 연출한
20세의 최명석군, 285시간만에 극적으로 생환한 18세의 유지환양,
19세 소녀의 힘으로 죽음과의 싸움에서 당당히 승리하고
16여일 만인 377시간만에 제3의 기적을 일궈낸 박승현양.
그런데 이들의 기적적인 생환 뒤에 하나같이 기도와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특히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15일 17시간을 버틴 박승현 양의 생존은
우리 불자들에게 큰 교훈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간밤에 놀러온 고등학교 동창 정원이와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다 새벽에야
잠이 든 탓인지 승현이가 6월 29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몸이
찌뿌등한 상태였습니다. 그날은 원래 비번이었지만,
집안 일이 있다는 선희 언니와 근무 날짜를 교대하였던 것입니다.
‘바꾸지 말 것을 그랬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친구 정원이와
삼풍백화점으로 함께 출발했습니다.
오후 5시 50분. 정원이와 항께 지하 3층 식당에서 간식을 먹은 승현이는
지하 1층의 아동복 코너로 갔고,
정원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매장 으로 향했습니다.
승현이가 매장안의 카운터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바닥이 쿵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리더니 천정에 붙어 있는
벽돌들이 눈앞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승현아! 피해!"
누군가가 소리를 쳤지만 바닥이 흔들리고 먼지가 앞을 가려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물탱크가 뒷머리를 때려 승현이는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은 깜깜했고 뒷머리에서는 피가 흘러 뜨뜻했습니다.
옷을 찢어 머리에 댄 승현이가 조심스레 손발을 뻗어 보았더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몸을 옆으로 굴려 보니
두세 바퀴 구를 정도의 여유는 있었습니다.
사방에서는 절규와 신음소리가 들렸고, 오른쪽에서는 같은 매장에서
근무하는 언니의 비명소리도 들렸습니다.
머리 뒤에서도 옆 매장에서 근무하는 언니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서로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바닥을 만져 보니 물이 고여 있었지만
심한 냄새가 나는 녹물이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원한 포도주스가 내내 승현이의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같은 매장에 근무하는 언니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언니 ?
그러나 옆 매장의 언니만 힘없는 신음소리를 낼 뿐 같은
매장 언니의 대답은 영영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승현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옆 매장 언니의 꺼져가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도 곧 죽을 것 같애----
"언니, 언니 !"
그러나 정적뿐이었습니다
그때 포크레인이 머리 위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습니다.
'누가 구하러 왔는가 보다
입이 바짝 탔습니다. 그러나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오히려 양쪽 옆의 콘크리트 더미가 밀려들면서
팔을 제대로 뻗을 수도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른쪽 무릎에도 콘크리트 더미가 밀려들어 무릎을 펴기도 힘들었습니다.
갑자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습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돼. 나는 꼭 살아야해.
몇 달 전 장사가 안 된다고 식당을 그만둔 엄마 아빠를 위해서도,,,...
동시에 승현이는 평소 다녔던 금용사 주지 월공스님의 법문이 떠올랐습니다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송 하세요.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소원을 천수천안(千手千眼),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보살펴 주십니다."
승현이는 그때부터 관세음보살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찾았습니다.
한편, 승현이의 어머니 고순영 보살도 낮에는 서울교육대학교에 설치된
실종자 가족본부 임시 법당에서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불렀고,
밤에는 금용사를 찾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불공을 드렸습니다.
안팎에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시간의 흐름마저
잊어버린 승현이가 갈증과 허기로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어 올 때쯤이었습니다.
깜빡 잠이 든 승현이에게 연초록빛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는
숲이 보였습니다. 동시에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람도 불어왔습니다.
타는 목을 축일 수 있는 감로수도 거북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승현이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눈에 익은 그곳은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자주 찾았던 월계동 금용사였습니다.
승현이는 평소에 하던 것처럼 법당을 향해 합장을 했습니다.
그때 법당으로부터 노스님 한 분이 천천히 걸어나와,
너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무언가를 승현이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빨간 사과였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눈을 뜨자 사과는 손에 없었고, 잠깐의 자유는 꿈이었습니다.
갑자기 위에서 "탕탕탕" 소리가 들렸습니다.
때마침 지하 1,2층 잔해 제거를 하던 안양소방서 119구조대원들이
잔해더미 속에서 높이 10cm, 너비 30cm가량의 구멍을 발견하고,
구멍을 넓히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순간 승현이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살려 주세요.
이때가 7월 15일 오전 10시 58분.생존자 확인 무전이 지휘본부에 전달되었고
현장과 온 나라는 환호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발견된 지 불과 17분만에 구조되어 승현이는 병원 으로 향했습니다.
15일 17시간 만에 구출되어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겨진 승현이를 진찰한 의사들은,
"맥박이 조금 빠를 뿐, 호흡과 혈압은 거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의료진들은 승현이가 매몰된 후 구조될 때까지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의학적으로 볼 때 물을 전혀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보통 5--7일. 길게 잡아야 7--10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권위 있는 의사들은 한결 같이 말했습니다.
"오래 물을 먹지 않아 탈수현상이 일어나면 콩팥 기능에 이상이
먼저 발생하는데, 박승현 양은 콩팥 기능에 별로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물을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바,
만일 사실이라면 놀라운 기적으로,의학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박승현 양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 같은 생환! 과연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관세음보살의 가피요 불보살의 불가사의한 신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첫 번째 기적을 보인 최명석 군의 어머니도 절에서 불공을 드리는 심정으로
간절히 관세음보살을 불렀고, 유지환 양의 어머니 정광임 보살도 낮에는
자원봉사자, 밤에는 중풍으로 입원한 남편을 간호하면서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였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염송을 통하여 이룩된 이 세 기적은 불심(佛心),모심의 승리요,
온 국민의 승리로서 영원히 기록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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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와 인과응보를 깨닫다/일타스님
현대의 고승 중 제선스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은사인 윤포광 스님이 제주도에서 왔다고 하여
'제선'이라는 법명을 주었습니다
스님은 출가하기 전,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을 다니면서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졸업 후 제주도로 돌아와서 하는 일 없이 지내자,
일본 경찰들이 요시찰인물로 지목하여 감시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집안 어른들이 적당한 색시가 있다며 결혼을 시켰고,
얼마 후 잘생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나무랄 데 없는 놈이야.
얘를 대통령감 으로 키워서 이 나라를 독립시켜야지?
아들에게 특별한 정을 느꼈던 그는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키웠습니다.
옷도 최고급,먹는 것도 제일 좋은 것들로만 사 주면서 애지중지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
잘 놀던 아이가“아야?”하더니
탁 쓰러져서 영영 깨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이의 시체를 안고 몇 날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울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의 우울증은 커졌고 집안은 엉망이 되어갔습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돈 백원을 주면서 여행을 다녀올 것을 권했습니다.
"금강산 구경이나 다녀오너라."
그러나 금강산을 가기는커녕 서울에서 내기 바둑을 두다가
돈 백원을 모두 날려 버렸습니다.
어차피 특별한 의욕이 없었던 그는 노동판에서 일도 하고 구걸도 하며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럭저럭 그의 발길은 묘향산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넓은 감자밭을 일구며 토굴살이 하는 스님을 만났습니다.
토굴에서 며칠을 붙어 살다가 스님과 조금 가까워지자,
그는 아들을 잃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스님, 그 아이가 왜 그렇게 죽어 버린 것일까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는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
"그것 알아보는 것이야 간단하지.
7일만 잠 안자고 기도하면 금방 알 수 있어."
"정 말입니까?"
"만일 그렇게 해서 기도성취 못하면 내 목을 베어라.
아니,부처님 목도 떼어 버려라."
"좋습니다 "
그날부터 기도는 시작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런데 평소 때는 그토록 잠이 없던 사람이 기도를 시작하자
잠이 퍼붓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그 졸음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졸면 언제 나타났는지 주장자로
머리를 탁 때리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때려치워라 벌써 졸았으니 소용없어
기도성취 보려거든 다시 시작해."
며칠 동안 졸고 혼나고 졸고 혼나기를 거듭한 그는
'먼저 잠안자는 연습부터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깡통을 두드리며 감자밭 주위를 돌아다녔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렇지만 졸음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밭두렁에서 떨어져 거꾸로 처박혔는데,
거꾸로 처박힌 채 잠에 골아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깨어나서 보면 목이 퉁퉁 부어 있고.....
이렇게 갖은 고생을 하며 잠과 싸운지 42일째 되는날,
물건들이 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하는 등
시야는 흐렸지만 잠은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기도를 시작해라."
스님의 지시대로 그는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끊임없이 불렀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죽은 까닭을 알 수 없었습니다.
'속았구나 부처도 관세음보살도 원래 없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불상의 목을 떼겠다며 불단 앞으로 가다가
탁자에 소매가 걸려 앞으로 넘어졌습니다.
바로 그 찰나,아들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반가워 안으려 하자,
아들은 '히죽' 웃으며 저만치 물러서는 것이었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겨우 다가가면
또 도망가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마침내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습니다.
'저런 놈은 아예 죽여 버려야 한다.
저놈을 어떻게 잡아죽일까?
돌멩이로 머리를 박살낸 다음 밟아 죽일까?'
이렇게 못된 생각까지 하다가 아이의 엉덩이를 발로 차자,
아이는“아야,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돌아섰습니다.
그러더니 개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그의 뇌리로 일본 유학 시절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 머물렀던 친척 아저씨 집에는
개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개는 그를 열심히 따랐을 뿐 아니라 말귀도 매우 밝았습니다.
산책을 갈 때도 극장구경을 갈 때도 개는 열심히 쫓아왔습니다.
"너는 극장에 못 들어간다.집에 가 있다가 나중에 오너라.
그러면 개는 집으로 갔다가 그가 극장에서 나올 시간에 맞추어
다시 와서 좋다고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영리하던 개가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통 먹지를 않았습니다.
얼마 더 지나자 뼈만 앙상하게 남아 곧 죽을 것 처럼 되었습니다.
보기가 애처로워진 친척 아저씨는 개를 버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개가 죽으면 재수가 없다
상자에 실어서 교외로 가지고 나가 버려라."
할 수 없이 개를 담은 상자를 자전거에 싣고 교외로 나간 그는,
숲 속에 상자를 내려놓고 개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버리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구나
네가 죽을 병이 들어 밥도 먹지 않으니.......
여기 있다가 편안하게 죽어라"
순간,개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아팠 지만 일어서서 자전거를 끌고 가는데,
개가 '왕'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습니다.
비실비실 쫓아오다가 쓰러지고, 쫓아오다가 쓰러지고.......
어느덧 날도 저물어 교외의 어떤 집에 들어가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하였는데 거기까지 쫓아온 개는
그의 곁에 바짝 붙어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버리고는 못간다'는 듯이.
마침 바짝 마른 개를 측은하게 여긴 그 집 주인은
된장국에 밥을 말아 주었고,
이제까지 먹지 않던 개는 기운을 차려야 겠다는 결심이나 한 듯
그릇까지 싹싹 핥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도 된장국 한 그릇을 말끔히 먹고는
병이 나은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하자 개는 죽을 힘을 다하여 쫓아왔습니다.
천천히 달리면 천천히, 빨리 달리면 빨리 쫓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개가 미루나무에 기대 오줌을 누는 틈을 타서
자전거를 힘껏 몰았습니다.최대 속력을 낸 결과,
그는 개를 따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 달이 지난 후,그 개가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학교가 파하고 돌아와 보니 개가 와 있었는데,
개는 섬뜩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고,
만지는 것도 옆에 오는 것도 허락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주일 정도 집에 있다가 개는 다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하, 그 개가 나의 아들로 태어나서
제 찢어진 마음의 앙갚음을 나에게 하였구나?
그는 인과의 법칙을 깨닫고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 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뒤 제선스님은 참선수행하여 높은 경지를 이루었고,
나이 육십이 조금 못 되었을 때 천축산 무문관으로 들어가
방 밖으로 한 발자욱도 나오지 않고 6년 동안 정진하였습니다.
그런데 6년을 며칠 앞두고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한 거사가 스님의 수행을 자랑한답시고
TV인터뷰를 강요하였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도 자취를 감추고 계신 제선스님은
사람의 인적이 닿지 않는 곳에서
고고한 학처럼 살아가고 계실 것입니다.
부디 바라건대 부지런히 기도해 보십시오,
일이 내 뜻과 같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꼭 풀어야 할 일인데도 풀리지 않을때,
불보살님의 큰 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해 보십시오.
특히 잠을 자지 않고 하는 기도라면 기간은 7일로 족합니다.
반드시 풀어야 하고 해결해야만 할 간절한 문제가 있다면
잠을 자지 않고 7일 동안만 기도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모든 매듭이 풀어지고 뜻과 같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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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께 백일기도하고 눈 뜬 중년신사 (법철스님글 전재)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의 향가 가운데 도천수대비가를 조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관음전에 비옵나니, 천수(千手), 천안(天眼)의 그 중 한 눈, 눈 먼 저에게 주옵소서. 아아, 저에게 주옵시면 자비 더욱 크오리다.’
향가를 통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중생이 슬픔속에 관음보살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만산에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우는 화창한 봄 날. 산새소리 가득한 강진 무위사에 중년의 남자가 찾아왔다.
필자는 그때 무위사 큰법당인 극락보전 앞에 있는 고목나무 밑에 놓여 있는 깨어진 멧돌 위에 정좌하여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남자는 필자에게 정중히 합장 인사를 하고는 어눌한 음성으로 무위사에 관세음보살님의 국보 벽화가 봉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찾아왔으며 관음기도를 지성껏 모셔보고 싶노라고 허락을 구해왔다.
그는 슬픈 얼굴로서 후리후리한 키에 회색 양복을 입었고 한 손에는 낡은 트렁크를 힘겹게 들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나 필자는 이내 그의 설명을 듣고 속사정을 알았다. 그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그는 경북 포항 사람으로 그동안 자그마한 개인 사업을 하며 일개미처럼 열심이 일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 왔다. 갑자기 두 눈이 어두워 오더니 마침내 눈 뜬 장님이 되다시피 되고 말았다.
“아, 내가 앞을 못 보게 되다니….”
그는 나날이 잃어가는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발악하듯 몸부림을 치며 유명하다는 병원의사는 성지순례하듯 찾았다.
병원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절망에 빠져 울고 있는 그에게 누군가 마지막으로 신불(神佛)께 기도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그는 무위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오정수(吳定洙). 필자는 오정수씨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무위사에서 기도할 것을 흔쾌히 허락하였다.
오정수는 각오의 뜻으로 삭도로 머리칼을 밀어 버렸다. 그리고 극락보전안에 있는 후불벽화인 수월백의관음벽화 앞에서 촛불과 향화를 받들면서 백일을 기한하고 천념 염주를 헤아리며 지성으로 관음기도를 올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오정수의 간절한 기도소리는 무위사의 적막한 도량을 넘쳐 흘렀다.
죽기를 한하고 지성으로 기도하던 오정수는 백일기도가 끝나가는 즈음에 놀랍게도 두 눈이 밝아졌다고 부르짖었다.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제 확신합니다.”
백일기도를 회향하고 오정수는 다시 트렁크를 들고 필자 앞에 섰다. 눈이 웬만하니 걱정하며 고대하는 처자에게 달려가고 싶고,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어 가장의 책무를 다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작별하는 즈음에 오정수는 호주머니에서 돈봉투를 꺼내 그동안 산사에서 체류하게 해준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부족한 돈이지만 시주금으로 받아달라고 간청하며 필자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필자는 빙긋 웃고 다시 그 돈을 돌려주며 기도하느라 고생 많았다고 치하만 했을 뿐이었다.
“우리 인연 있어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필자는 멀어져가는 버스 차창을 통해 오정수씨의 흔드는 손을 답례하여 마주 손을 흔들면서 내내 앞서의 신라의 향가를 생각하였다.
― 무릎꿇고 두 손 모아 관음전에 비옵나니, 천수,천안 그 중 한 눈, 눈 먼 저에게 주옵소서. 아아, 저에게 주옵시면 자비 더욱 크오리다.
무위사 수월백의관음보살님이 고해중생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고해대중이여, 우주에 의지할 성인 가운데 관세음보살님을 권장하오니, 우리 모두 때가 되면 이승의 인연들을 작별하면서 한과 눈물속에 홀로 머나먼 저승으로 떠나갈 때 까지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인생을 살아갑시다. 관세음보살님은, 우리가 세연이 다해 육신의 탈을 벗고 어둠속에 홀로 울며 머나먼 윤회의 길을 떠나려 할 때 반드시 광명으로 나투며 현신하여 우리의 영혼을 반드시 구원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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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를 받아 마시고
대구시 동구 덕곡동 대덕화보살님의 수기
저는 오래전부터 대장염을 앓아왔습니다.
빈혈이 심해 병원에 갔다가
궤양성대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원에도 몇 년간 꾸준히 다녔지만
증세는 좋아졌다간 다시 나빠지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얼마간 치료하면 낫는다고 하는데
저는 완치가 되지않고 더 심해졌습니다.
식이요법은 물론 좋다는 약은 다 먹어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빈혈로 밖을 다니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문제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모든 약을 중단하고 음식물로써 영양소를 섭취해야 하는데
몸이 그 음식을 받아주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유산을 권했습니다.
산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면서... .
그러다가 남편이 결혼 전에 가끔씩 나가던 영남불교대학에서
'좋은인연 신문'을 가지고 왔더군요.
집에서 끙끙거리는 내가 안쓰러워 뭐든지
읽을거리를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그 신문을 보다가 신행수기를 써 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도로써 가피를 입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기도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을 졸라 절을 찾았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또 지금 낳지 않으면 언제 또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몸이 더 건강해지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이상하게도 ㅇㅇ불교대학·관음사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불안감이 사라졌습니다.
노천법당에 서 계시는 관세음보살남을 뵙는 순간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습니다.그
러나 남편의 이런저런 이야기와 법당을 둘러보면서
오랫동안 서 있었기 때문인지 곧 어지럼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제 안색을 살핀 남편이 저를 얼른 노천법당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몸에서 힘이 좍 빠져나가고
저는 그만 남편에게 기댄 채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남편이 제 몸을 주무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봐도 숨조차 쉴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언뜻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제 옆에 서계신 관세음보살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흘렀습니다.
'관세음보살님,관세음보살님!
아기를 낳고 싶어요.살려주세요'
관세음보살님이 곁으로 다가오시더니 제 이마를 짚어보시고는
손에 든 감로수병을 천천히 기울였습니다.
갑자기 온몸에 향기로운 감로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저는 감로수에 머리까지 다 잠겨버렸습니다.
감로수는 햇살을 받아 사방으로 무지개 빛을 뿌렸습니다.
잠시 후 관세음보살님이 다가오시더니
다시 이마에 손을 짚으셨습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이제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이 많은 감로수를 저 혼자 다 써버려서 어떡합니까!"
관세음보살님은 환하게 웃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로수는 곧 저의 마음이니 한량없습니다.
이 온 우주,온 법계를 적시고도 수억겁 동안 흐릅니다."
저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그 감로수의 물결 속에서
삼배를 올렸습니다.절을 하면서도
몸이 얼마나 가벼운지 마치 날아갈듯 했습니다.
"여보!"
남편의 절박한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남편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옆에 계시던 회주스님께서 제 이마에 손을 얹고 계셨습니다.
"보살님,괜찮으십니까? 구급차를 불러두었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저는 활짝 웃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무릎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괜찮습니다.스님."
"여보?"
남편이 울먹이며 저를 불렀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를 마시고 완전히 몸을 담그기까지 했어요!"
남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괜찮은지 의심스러워 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보았습니다.
정말 멀쩡했습니다.어지럽거나 구토 증세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신기한지 나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뛰어도 보았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서야 남편은 제가 하는 말을 믿었습니다.
대장염은 물론이고 빈혈과 그 외
합병증도 증세가 완화되어 있었습니다.
생활하는데 조금의 불편도 없었고 약을 먹지 않고도
빈혈이 차츰차츰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2주 쯤 뒤에는 현기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이까지도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후,저는 가끔 회주이신 우학스님의 꿈을 꿉니다.
한번은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웃으시면서
'출연료를 받아야겠구만'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와
우학스님의 은덕에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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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심 보살 아들의 병을 완치시켜주신 관세음보살
안성에 사는 대원심 보살은 아들이 위암말기로 진단되어 죽음을 선고받자 괴로움을 가눌 길이 없어 청룡사의 관세음보살을 찾아갔다. 이미 80세가 넘은 노보살인지라 절을 올리기 힘든 처지였다. 대원심 보살은 다만 가만히 벽에 기대어 앉아 관세음보살을 우러러보며 念하였다.
"관세음보살님,부모가 죽은 다음 자식이 죽는 것이 이 세상의 순리이온데, 저의 업이 얼마나 중하길래 이렇게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보아야 하나이까?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님! 제발 아들을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3일 밤낮을 아들의 병이 기적처럼 쾌유되기를 기원하며 관세음보살을 찾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때 스님 한 분이 활짝 핀 연꽃 한송이를 대원심보살에게 주었다. 꿈을 꾼 것이었다.
보살은 상서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과 함께 치유불능이라는 진단을 했던 서울대학교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재검사결과 위암의 흔적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담당의사는 있을 수 없는 불가사의라며 매우 신기해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이 아들의 병을 완치시킨 것이었다.
출처: 도서출판 효림 관음신앙. 관음기도법 김 현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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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길에서 다시 인간으로' (관음기도 영험담)
1924년 7월의 '불교'지 창간호에는 '冥路(명로)에서 다시 인간'이라는 제목의 신행영험담이 수록되어있다.
이 영험담의 주인공인 원각화보살은 서울 대각사의 신도로서,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 순득을 키우며 살았다. 원각화보살은 7일에 한번씩 백용성 스님께서 설법하는 대각사 법회에 참석하였고, 평소에도 관세음보살 염불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원각화보살에게 뜻하지않은 시련이 닥쳐왔다. 금쪽같은 딸 순득이가 16세가 된 해 12월에 병을 얻은 것이다. 처음 감기처럼 시작한 병은 폐렴으로 악화되더니, 심한 기침과 고열이 계속되면서 점점 사경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종합병원에 입원을 시켰으나, 순득의 병은 낫지않았고, 명의를 찾아다니며 온갖 약을 다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방법으로 수술을 해보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수술을 받는다고해도 환자의 몸이 쇠약할대로 쇠약해져 있어 살아나면 천행이라는 것이었다.
수술을 해야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원각화 보살은 기로에 놓이게 되었고,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위험하기가 마찬가지라면 수술을 하지않고 최선을 다해보자. 이제 내가 의지할 분이라고는 관세음보살님밖에 없다.'
원각화보살은 딸을 대각사로 업고 가서 법당 바닥에 눕혀놓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순득이가 죽더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들으며서 죽게 하겠다는 각오로 관세음보살을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다. 그야말로 일념의 기도를 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이 잠들어 있던 딸이 부르짖었다.
"싫어요, 가기 싫어요.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래요."
원각화보살은 딸을 급히 깨웠고, 순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꿈 이야기를 하였다.
오색찬란한 가마가 누워있는 순득이앞으로 다가오더니, 가마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내려 말씀하셨다.
"순득아, 나와 함께 이 가마를 타고 가자꾸나."
"관세음보살님, 저는어머니를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해요."
순득이가 거듭거듭 고집을 부리자 관세음보살은 측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씀하셨다.
"순득아, 너의 정해진 수명은 17세란다. 하지만 너의 효성이 지극하고 어머니의 신심이 돈독하니 명을 연장시켜주지 않을 수 없구나."
순득의 꿈 이야기를 들은 원각화보살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더욱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찾았고, 며칠 후 관세음보살은 원각화보살에게 현몽하엿다.
"순득의 병을 완전히 고치려면 감로수를 마셔야 한다. 감로수는 삼청동 성채의 절 뒷쪽에 있는 석벽과 석벽 사이에서 솟아나오느니라."
이튿날 원각화보살은 삼청동으로 가서 하루종일 감로수를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피로에 지친 그녀는 잠시 바위위에 주저앉았고 , 바위 앞쪽으로 배어나오는 물기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급히 그곳을 파서 웅덩이를 만든 다음 고여드는 물을 떠다가 딸에게 먹였지만 효험이 없었다.
원각화 보살은 감로수를 찾기위해 매일 삼청동 뒷산으로 올라갔다. 입으로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외며 감로수를 찾아 헤맨지 일주일. 마침내 원각화보살은 북악산 정상 가까이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석벽을 찾아냈다. 맑고 정갈한 물이 분명 돌틈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원각화보살은 관세음보살께 감사드리며 그 물을 담아다가 딸에게 먹였다. 그리고, 물에 몸을 씻기기도 하였다. 10여일이 지나자 딸의 엉덩이에서 흐르던 고름이 멎었고, 얼굴에는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시 10여일 후 순득의 병은 완치되었다. 의사가 병을 고쳐준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께서 고쳐준 것이다 어머니의 일념에 감응한 관세음보살께서...
출처: 관음신앙.관음기도법(김 현준저) 도서출판 효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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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절망에서 벗어나게 한 관세음보살의 가피력
일제 말기, 논산군 논산읍 등화동에는 강태희라는 이가 살고 있었다. 선대에는 한 해에 수천석을 추수하던 집안이었으나 차츰 몰락하여 산비탈의 오두막을 빌려 살 지경에 이르렀다. 집안의 몰락과 함께 모든 의욕을 상실한 강태희씨는 깊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고, 부인이 떡장수를 하여 겨우 연명하였다.
하루는 강태희씨의 집에 보명사의 자명스님이 찾아왔다. 강태희씨의 문중 산에 보명사를 짓도록 해준 것에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집안사정과 병들고 지친 모습을 접한 자명스님은 간곡히 권하였다.
"불교에 귀의하십시오. 내 혼자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는 부처님께 의지하고 매달려 조르는 것이 제일입니다. 정성껏 기도해 보십시오."
"지금 형편으로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처사님, 기도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스러운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맑은 물 한 그릇을 올리고 불보살님의 이름만 외워도 됩니다. 속는 셈치고 노는 입에 염불을 해보십시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서 기도하기 힘들면 우리 절에 찾아오십시오. 소승과 함께 염불을 하십시다."
자명스님이 간곡히 기도를 권한지 10여일이 지난 어느 날, 강태희씨는 보명사를 찾아왔고, 스님은 반갑게 맞이하여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우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십시오."
그는 스님의 지도에 따라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고, 백일 정도 지났을 무렵 관세음보살의 현몽이 있었다. 노인으로 모습을 바꾼 관세음보살이 불그스름한 물을 건네준 것이다.
"마셔라."
姜泰熙씨는 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몸은 날아갈듯이 가벼워져 있었다. 그 뒤 그의 가족은 열렬한 불자가 되었고, 집안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강태희씨의 부인은 떡장수를 그만두고 물감장수 행상을 하였고, 물감을 팔러다니다가 알게된 주단 포목 도매를 하는 사람으로부터 "옷감을 외상으로 줄테니 옷감장수를 해보라."는 제의를 받았다. 마침내 그녀는 옷감을 떼어 시골로 다니며 파는 보따리 장수를 시작하였고,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 3년이 지나지않아 가게를 얻을 수 있을만큼의 돈을 모았으며, 운이 활짝 열려 가게를 연지 몇 년만에는 논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갑부가 되었다.
어두운 불행의 기운을 밝음으로 바꾸어 놓는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있었던 것이다.
출처: 도서출판 효림간 김 현준저 관음신앙,관음기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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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부른 첫번의 영험
-글쓴이/모이-
나무대자대비 원력홍심 구고구난 관세음보살마하살
처음은 불교를 입문하기전
불교를 다니고싶다는 마음만 가득할때 아마 그때는
부산에 살면서 범어사라든가 통도사에 걍 절에가기만 했지
법당에 들어가 참배 하는법도 몰라 멀건히
법당 문앞에 서서 부처님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지나가는 스님께서 들어가서 절을해도 된다는 말씀에
아무도 안볼때 얼른 들어가서 절을 한번하고 나오는데도
누가 날볼까봐 후닥닥 뛰쳐 나왔던 기억이 나는데
그시절에 집을 이사하게되어서 이사하고 이틀째되는 날 .......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나 혼자 자는 방에
저만치 구석에 왠 여자의모습이
위에옷은 흰색부라우스에 검정치마를입고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잠결이지만 그럴리가 없으니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재확인을하고 잠을 자야할것 같아서
마음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종전 모습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었다
재차 확인했을때는 확~ 무서움이 덮쳐서
몸을 꼼짝달싹 할 수없었다 귀신을 본것이다 확실하게...
확인까지하면서 눈을 딱 감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려 하는데 말이 안나온다
목이 막혀 얼굴에 온힘을 다주는데도
"관"자도 말이 혀가 굳어서 안나오는데
각...가...관...세...음...보...살 있는 힘을다해
토해내듯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정신을 바짝차리고 일념으로 한참 부르고 나니
얼마나 불렀는지 한참만에 마음이 진정되고
편안해진 다음에 살그머니 눈을떠 보았다
날 바라보던 귀신이 없어졌다 방 한가운데 누어있던 나는
일어나서 불을 키고 시계를 바라보니 한밤중 정각2시였다
불을켠채 다시 잠들어 아침에 일어났다
지금부터 25년전 기억이다
근데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어떻게 알고 불렀는지 모른다
정식으로 절에 다니기 전이라서 관세음보살 염불을 해본적이 없는데...
그집은 일제시대 일본사람이 살던 적산가옥이라
집이 음기가 돌고 집터가 센 그런 집이어서 난
셋방으로 이사갔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집 주인은 이사와서 3일만에 부인이 말도 못하고 죽었다했다
귀신한테 붙잡혀 죽을 뻔한건데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른공덕으로
아직 난 살아있어서 이글을 올림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마하살......
세번의 영험중 초발심전의 첫번째 영험이었습니다
두번째는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관세음보살염불 공덕으로 두동자를 보내주시다◈
순수한 믿음이 마음밭에 심어지면
불심의 싹이 돋아나게 되는가
부산에 3년 살고 서울로 와서 명동에 의상실을 하게되고
어느날부터 절에나가 차츰차츰 불교공부에 맛을 알게될 무렵
혜력화보살님이 음악 발표회의 무대에 입고나갈
부라우스에 반짝이는 스팡크를 달아 달라해서
새벽4시까지 날을새며 정성것 스팡크를 달아서 드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혜력화보살님이 어느날 보답으로
경기도 벽제에 술마시러 가자고...
안간다해도 가야한다고 실랑이끝에 따라 나섰다
대여섯명이 함께 혜력화보살님 도반이 하는
대학주점 동동주집을하는 벽제의어느 동동주집에서
동동주를 첨으로 마셔보았는데 틉틉하면서 달달하고
소주처럼 독한느낌이 없고 맛이있어 모두 한잔씩 돌리고
조금 남은것을 마져 내가 마셔버렸다
사실은 몸에서 술이 체질적으로 받지를 못해
좀 마시면 토하기 일수인데 생각없이 마신후에 취해서
온통 세상이 거꾸로 돌아버리고 주정을 부리다
결국은 화장실에서 위경련으로 토해도 토해도 멈추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기만하면 위에 경련이 일어나 죽을지경에
가까스로 제자리로 돌아와 주점의 긴의자에 누어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눈을 떴을때
모두서서 내가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몸을추스려 일어나 동행들과 서울가는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은 겨우갔는데 다음정거장에서
버스가 멈추어 위경련이 다시 시작되어
구토증세로 몸이 견딜 수가 없어서 막움직이려는 버스를
일행은 두고 혼자서 뛰어내려 캄캄한 밤에 혼자서
거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른체 쭈구리고 앉아
이젠 헛구역질만 계속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조그만 약국이 불빛이 보였다
무슨 안정제 드링크를 마셨지만 위는 가라않지안고
몸을 움직일 수도없고 그드링크 마신것 마져 거부를해
한참을 약국입구 옆쪽에 웅크리고 있으려니
약사가 걷거나 움직여서 취기를 없애야한다고 걸으라한다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모르지만 사방은
시골길이라 칠흙같이 어두울 뿐이다
혼자서 걷자니 무서움을 달래기 위해서
관세음보살 염불이 저절로 나왔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그런데 처음 걷는 길이 양쪽은 논두렁인데
얼마전 꿈속에서 본것같고 낮설지 않는 느낌을 주었는데
아마 염불을 하고부터 마음이 안정이 되고
그렇게 느낀것 인가싶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남자가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주위를 배회하다 사라지고 한참더 걸어가고
이제는 산을 양쪽을 깍아세워 길이 난곳에서 갑자기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뭉치는가 싶은데
앞에서 약5 미터 전방에 무엇인가 나타났는데
느낌으로 7살에서 10살 정도의 두동자가 사쁜사쁜 뛰어간다
이상하다 양쪽은 분명 산을 반듯하게 깍아서
낭떨어진데 어디서 나타났지?
사람이 맞는건가?
계속 의심이들어 확인할려면 캄캄한 길이라
차가 지나갈때 해트라이트로 비추면 알수있을텐데
그때까지 앞에가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걷는다
옳지! 먼데서 뻐스가 나타나더니 지나갔다
불빛에 분명히 아이들인데 그림에 나오는 두 동자의 모습이었다
한 동자는는 더벅머리고
또한 동자는 양쪽으로 토끼귀처럼 짧게 위로 묶었다
24년전이지만 남자아이 머리를 그렇게 묶지 않는다
한참을 걸었고 아스라이 마을이 나오자 동자들은
마을쪽을 향해 사라져서 내가 마을어귀에 도착했을때는
동자들이 없어졌을꺼란 추측을 뒤엎고 그들은 골목에서
여전히 사뿐사뿐 뛰어가고 있었지만 난 서을을 향헤 계속 걸어갔다
이제는 정신이 나서 위경련도 멈추었고
밤새도록 걷더라도 서울은 멀다 서을가는 차를 세워야하는데
손을 흔들어도 몇대의 차들이 그냥 스친다
걱정이 시작되어 조바심이 날무렵 한대의 버스가
불빛이 없고 해드라잇만 켜진 상태로 나타나서
무조건 손을 흔들었는데 멈추드니 태워 주었다
그 버스는 효도 관광 갔다 모두 내려드리고 돌아가는 빈 버스였다
기사님 말씀이 수색까지만 가니까
그곳에서 다른차로 갈아타라 하셨다
물론 그곳에서는 택시를 타고 그때 다니던 절이
서대문에 있어서 집은 더멀리 있었으니까
절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2시 쯤이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벽제는 화장터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염불한 공덕으로 두동자를 보내주시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고 무탈하게 지켜 주셨던것같다
나중에 또한가지 알게 된것은 논두렁을 지날때의 길은
경기도 고양군 나의 아버님과 조상이 대대로 묻힌
큰선산이 있는곳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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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손길로 늘 지켜주시는 부처님
신정희(수원 용광사신도)
저는 수원 용광사에 나가고 있는 신정희라고 하는 천태종도입니다
어릴 때부터 지병을 앓아온 저는 주위에서
온갖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별 진전을 보이지 못하자
모두들 가망이 없다고 포기한 상태에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주위 분들의 권유로 구인사를 알게 되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3년 전인 1983년 여름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다 해보았던 저는 막상 구인사를 찾았으면서도
병을 치유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지탱할 수 없는 아픈 몸을 이끌고
구인사에서 기도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요사이 생각해도 참으로 부처님의 가피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뒤 시간이 날 때마다 구인사를 찾아 기도하던 중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경기도 화성군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시아주버니의 회사 사람들 문제로 이사를 하면서도
날짜가 촉박하여 큰스님 전에 친견도 못하고
짐을 꾸려 간 곳이 작은 면소재지였습니다.
저희 가족은 아이 아버지와 두 딸,
그리고 저, 이렇게 4식구입니다.
이사와보니 막내 딸이 친구가 없는데다가 몇몇 있는 아이들은
교회에 나가 저는 별 생각 없이 교회에 다니라고 했습니다.
이사를 하고난 뒤 저는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는 가운데
작은 일들이 자꾸 생겨 한동안 구인사에 가지 못했습니다.
몇달이 지난 뒤 구인사를 다녀오려고 아이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짐을 꾸려놓고 자려고 하는데,
작은 아이가 누워 기도를 하는 게 아닙니까.
그것도 교회에서만 하는 사도신경을 외우는 모습을 보고
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아이는 온몸이 불덩이같이 열이 났습니다.
아이 아픈 것을 보고는 아이 아버지는 구인사 가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라고 했습니다.
아이도 다음에 가라고 졸라 속이 상했지만 짐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팠던 아이가 금방 괜찮아지는 것을 보고는
순간 제 마음에 시련이 오겠구나 생각하고는
아이를 교회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두달 뒤 겨울방학이 되면
구인사에 가기로 약속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저희 집에는 모두 3가구가 살고 있는데,
저희만 불제자고 나머지 두 집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어느날 저는 아침 밥상을 들고 나오다 땅에 밥상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깨진 그릇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설거지를 끝내고 있는데,
옆집 새댁이 와서는 저희 집 그릇을 내밀었습니다.
그릇을 물에 담가두었을 뿐인데 깨져서 가져왔다고 하길래
그때부터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그래도 구인사에 다니는데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아보기도 했지만
께름찍한 것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점심 때가 가까워오자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시장에 가자고 했습니다.
일행들과 함께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작은 아이가 저를 보더니 함께 책 사러 가자고 졸랐습니다.
마땅히 장볼거리가 없었던 저는 책을 사러 함께 가기로 했는데
아이가 잠깐 사이 큰 길 건너 가게에서 껌을 사가지고 나오다
달려오는 오토바이에 치었습니다.
10m 정도 끌려가다 멈춰 있는데 제가 달려가보니 깨어나질 못했습니다.
순간 저는 눈 앞이 깜깜해지고 아찔하면서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금 후에 아이는 깨어났지만 아이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릴까봐 마음으로만
‘관세음 보살,을 부르면서 병원으로 급하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부터 한동안 저는 충격 때문인지 손에 마비가 오고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다친 뒤로는 제 몸도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마음은 약할 대로 약해져 하루하루를 근근히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교회 종소리였습니다.
교회 종소리만 나면 무섭고 두려워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밖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
시간단위로 종소리를 울려댔습니다.
몸이 약해져 있던 저는 이런 종소리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절에 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집을 나와 수원까지 택시를 타고 나왔습니다.
손으로는 구인사에서 산 염주를 돌리고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빨리 절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처음 길이라 용광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전화를 걸어
행선지를 알아낸 뒤 물어물어 간신히 절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법당에 들어서기 무섭게 저는 눈물을 추스릴 겨를도 없었습니다.
부처님과 조사스님이 저를 따뜻하게 반겨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상스럽게 절에 도착하니 마음이 놓이고 안정이 되었습니다.
절에 얼마를 있다보니 구인사에 가고 싶어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야단이었습니다.
회사 사람들의 밥은 어떻게 하며,
또 아픈 아이는 어떻게 할거냐며 절에 미쳤다고 막 야단을 쳤습니다.
전화를 통해 저는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무섭고 두려워서 혼자서는 구인사까지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이런 저를 이해했는지 아침에 데리러 가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안심이 된 저는 초저녁부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하는 도중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목덜미를 탁 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려 기도를 하는데 어느 분이 숟가락으로
약을 떠주길래 세번이나 받아 먹었습니다.
아침에 절에 온 아이 아버지와 함께 구인사에 도착했습니다.
일이 바쁜 아이 아버지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고 저만 남아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기도 도중에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구인사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제 자신이 허망해 보였고,
집에 기브스를 하고 누워 있는 딸아이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듯 답답했습니다.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이 고통에서 구원해주십사’ 하고.
그밖에 큰스님을 친견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기도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2일을 보내고 하루 더 있다가 가리라 마음먹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한참 후에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뛰더니 저의 입에서
영어가 술술 나오며 예수님이 저의 머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이어서 제 입에서는 법음이 나오고 부처님이 예수님을 꾸짖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에 오신 두 분의 뜻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저를 자기 제자로 삼으려고 하시고 부처님은 제가 불자이니
괴롭히지 말라는 뜻을 전한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 제 안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가는 중
저는 마음으로 맹세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필요 없고 영원한 불제자가 될 것이다’라고.
그 뒤부터 기도가 바로 되고 부처님의 말씀이 나오면서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화주 보살님께 조사전 마루불사를 위한 시주금으로
20만원을 올리고 기도를 하는데, 또 다시 눈물이 나왔습니다.
기도 도중에 여러 스님이 저희 집으로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저는 기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집에서도 저는 구인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집에서 기도를 한지 3일 후에 안면도 없는 기독교인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찬송가를 부르고 아이 아버지와
시비조로 싸우려고 했습니다.
순간 저는 구인사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아이 아버지를 달랬습니다.
그날 세 차례나 찾아온 교인들로 인해 저희 가족들은 무척 힘이 들었지만
이것도 하나의 수행에 보탬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흙탕물에 저의 신발 한 짝과 십자가가 떠내려가는데,
저는 저의 신발만 건지고 십자가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꿈을 꾸었는데,
조사스님이 하늘 한중간에 밝은 빛을 발하시며 스님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조사스님을 보고 제가‘언제 가시겠습니까’ 하니
조사스님께서‘내일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그로부터 3일 후 저는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듯 몸이 가벼워졌고
정신도 또렷해졌습니다. 아픈 것도 없어졌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우리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있어도 반드시 구원하시는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에
종도 여러분들은 열심히 기도정진하고 노력을 하십시요.
부처님께서는 여러가지 방편을 쓰시면서 결국에는
우리를 고통에서 구원하여주십니다.
모두 성불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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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 보살님의 가피로 일웅스님의 병 이 치료되다.
대구 법흥사 주지로 일웅스님이 계십니다.
지금도 주지스님으로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스님께서 직접 겪으신 체험담입니다.
"기복으로 기도를 한 경우에도 기도에 몰입하여 마음이 비워지고
순수해졌을 때 영험이 나타나는 것이지,
마음속에 뭔가를 바라는 욕심이나 조급함이 가득차 있을 때는
영험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 주변에서는 기도의 영험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스스로 병을 치유한 나(일웅스님)의 체험담을 전해드릴까 합니다.
60세가 가까워지자 기력이 예전같지가 않았습니다.
40대시절 포교에 매진하면서 한편으로는 태고·조계종간의 분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기력을 소진했던 탓인지
피로가 누적되고 쉽게 회복되지가 않았습니다.
몸은 곧 마음을 반영합니다.
몸이라는 글자의 한획만 바꾸면 맘이 되는데 이는 곧 마음의 준말입니다.
예로부터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고 했어요.
자기몸이라도 함부로 굴리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지요.
종단사태 이후 십수년을 쉴 사이없이 신경을 과도하게 쓰다보니
병이 올 수 밖에요.
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하고 약을 지어 먹어도 차도가 없자
큰병원을 찾게 되었는데 간경화말기증세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승려로 살다가 죽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지막으로 부처님전에 기도나 열심히 하다가 임종을 맞이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부터 관세음보살님께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는데
여러달이 지나면서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밤, 도저히 오늘밤을 넘길수 없겠다 싶어요.
“과거 수억겁을 지나오면서 아프지 않은 때가 있었겠는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것은 오직 마음의 상(相)일 뿐이다’고 한 생각을 돌이켜
몸을 간신히 추스리고는 법당으로 향했습니다.
부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일체가 다 내자신이 지은 업장때문임을
참회하고 성불의 인연짓기를 발원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기도중에 하얀 소복을 입은 부인이 찾아왔는데
안면은 있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요사채로 인도하니
“요즈음 스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어떻습니까?”고 안부를 물어요.”
“아직 많이 아픕니다”고 하니
부인이
“제가 아픈 곳을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해 아픈 곳을 보여주었더니
부인은 손으로 환부를 만지며 약봉지를 꺼내고는 먹기를 권해요.
꼭꼭 씹어서 먹었더니 부인은 “스님, 다음에 또 들리겠습니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갑자기 찬바람이 몸을 감싸는 것 같아 정신을 차려보니 방안이 아니라
법당에 앉아서 추운줄도 모른채 잠시 삼매에 빠져있었더라구요.
아프던 몸이 어느새 말끔하고 머리가 맑아요.
돌아서서 법당안을 둘러보니 부처님뒤 후불탱화에 그려진 백의관음께서
빙그레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랐지요.
비몽사몽간에 본 그 부인의 모습이 바로 백의관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일이 있은 뒤로 차츰 병이 나아져서 예전의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내 체험을 얘기했지만 기도의 힘은 상상이상으로 큽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거나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수행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에는 ‘나’라는 아상이 개입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상을 제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나무 관세음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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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여 큰스님께서 직접 보고 들으신 체험담
현재 조계종 기초 선원장이시며 축서사 조실이신
무여 큰스님께서 직접 보고 들으신 체험담을 소개해 드립니다.
『삼십여 년 전에 지리산 실상사에 객으로 하룻밤을 유숙한 적이 있었습니다.
객실 옆방에 자기 나이도 모르는 한 12, 3세 가량이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 나이를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말도 거의 못 하고
겨우 밥이나 먹고 그저 변소나 다니는 참 어리석고 둔한 불쌍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에게 무엇을 시킬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주지스님이 "너는 관세음보살님만 써라."고 해서
하루종일 관세음보살을 쓰고 있었습니다.
한글도 모르는 아이라 관세음보살을 쓰는데, 쓴다기보다 그린다고 할까요?
그 글씨는 자세히 보아야 알아볼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그렇게도 흉내를 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둔재 중의 둔재라 사람이라기보다 때로는 짐승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둔한 사람이지만 전혀 때묻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뭘 시키면 기억하는 한 시키는 대로
아주 끈질기게 하는 그런 장점이 있었어요. 시키는 그것밖에 모르는 아이예요.
그러나 성의는 아주 대단해서 하루종일 관세음보살을 쓰고 기도했습니다.
그 사람은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라는 대로만 할뿐이었어요.
그런 바보지만, 그렇게도 못 쓰는 관세음보살이지만 계속쓰면서,
염하고 쓰면서 염하고 끈질기게 하니까 일념이 되었는 거예요.
드디어 3년만에 머리가 터져버렸어요.
아주 명석한 두뇌가 되어서 기억력도 좋고
창의력도 보통사람보다 훨씬 우수한 머리가 되었어요.
훗날 수계(受戒)를 합니다. 즉, 스님이 되었어요.
스님이 되고는 강원(講院)이라고 스님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어요.
그러고는 전라도 어떤 절의 주지노릇을 잘 하다가 스님답지 않게 여자복이 있는지,
두 보살하고 인연을 맺어서 두 여자몸에서 아들딸을 5남매나 낳고 복많은 중님,
팔자좋은 중님으로 살다가 지금은 미국인가 어디로 이민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도는 그 실상사의 행자처럼 지극하게, 성심성의껏 해야 됩니다.
기도할 때는 오직 그것뿐이듯이, 최선을 다하듯이 해야 돼요.
좋은 일도 생각하지 말고 나쁜 일도 생각하지 말며
아주 급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거든
일체를 다 놓고 쉬어서 마음을 텅텅 비워서 오직 기도만 지극하게 하십시오.
기도는 가급적이면 쉬지 말고 하시고 끊임없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거나
말이 없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히 있거나
항상 관세음보살님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자칫 사회에서 버림받으며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뻔했던 한 소년이
관세음보살을 염하므로써, 그 운명이 바뀌어 버린 실화입니다.
(축서사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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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 (朗月)스님의 관음기도 영험담
(낭월스님 글)
가끔은 방문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운(運)도 불리하고 여건도 좋지 않으면
종종 등장하는 것이 기도를 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하면 과연 "효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반문을 받는 것도
당연한 코스(?)라고 해야 하겠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대한 낭월의 경험담을 들려 드림으로써
나름대로의 소견을 밝히도록 할 참이다.
물론 실화일 뿐이며 단 한 글자도 조작은 되지 않았다는 점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1. 발단
낭월의 나이 20세였다.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 해였다고만 말씀을 드린다.
그 해의 간지는 丁巳년이었고, 1977년이었기도 하다.
그러니까 실제 나이로는 21살이었다고 해야 하겠다.
어느 봄날 아침에 자고 났는데, 천지가 온통 붉은 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물은 가까이는 보이고 멀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3~4일이 지나면서 점차로 그 붉은 기운은 짙어지더니
마침내는 아무 것도 식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는 고사하고 자신의 밥그릇을 찾아 먹기도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대구에 있는 동산병원이라고 하는 종합병원을 찾았다.
하루 종일 검사를 한 다음에 내린 결론은 '失明'이었다.
시력을 쓸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그리고는 끝이다.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으니 공부는 끝났고 자신의 생계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하였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자신이 건강할 적에는 부모형제가 필요 없다고
큰소리 뻥뻥 치면서 잘도 돌아다니지만, 막상 병이 들면 아무 곳에서도 오라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계시는 집으로 가서 민간약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병명은 '초자체혼탁'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대의 의술로는 치료를 할 방법이 없다고 하는
답이 명확하게 나왔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마음에 대해서 벗님은 생각이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입장에서는 절망이라고 밖에 드릴 말씀이 없었다.
2.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기도 동기
막판에 몰리면 지푸라기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낭월에게 주어진 것은 기도를 하는 것밖에 달리 답이 없었다.
그대로 머물러 있기보다는 기도라도 해야 뭔가 숨통이 트일 것으로 생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듬거리면서 찾아간 곳은 동해의 양양 낙산사였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기도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막판에서나마 마지막 기도를 한번 해보고 세상을 하직하고 몸을 바꿔서
다시 공부를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많이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비록 경치는 보이지 않았지만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낙산사에 도착을 했다. 시간은 저녁 11시경이었다.
원주 스님을 찾았더니 밤중에 중이 돌아다닌다고 푸념을 하셨다.
이해는 되지만 낭월의 상황은 그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죄송하기만 했다.
3. 첫 번째의 힌트 '감이 좋았다'
새벽에 꿈을 꿨다. 꿈에도 낭월이 낙산사로 기도를 하러 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절 안에서 늙은 여스님이 동자를 데리고
바삐 어디론가 출장을 가시느라고 나오고 있었다. 합장을 했다.
그래도 꿈에는 사물이 바로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 비구니 스님이 흘낏 보시더니 걸음을 멈추고 하시는 말씀.
"기도하러 왔구만? 하고 있어! 난 좀 급히 다녀올 데가 있네~!"
"예, 다녀오십시오."
그 뿐이다. 비구니 스님이 사라진 곳을 멀거니 바라다보다가 꿈을 깼다.
그리고 그 감은 매우 좋았다.
몇 달 동안의 암흑에서 빛을 발견할 가망성을 얻었다고 해야 하겠다.
아마도 그 비구니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었을 것이라고 저 좋을 대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는 주지스님을 찾아서 기도를 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게 될 줄은
이미 꿈을 깨고 나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100일간의 기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3. 하루 16시간의 정진
막판에서 할 일은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절실히 느끼고 또 깨달았다.
잠자는 시간 6시간과 공양시간 3시간을 빼고는 모두 기도에 매달렸다.
그야말로 자나깨나 '관세음보살'이었다. 그렇게 집중이 잘 될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하겠다.
잡념이 없어진다는 것은 큰 일을 당하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잡념이 많다는 말은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망상은 한가로움의 푸념인 것이다.
참으로 절박한 막다른 길에서는 오로지 일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고 해도
아마 실감이 드실 것이다. 그 해는 낙산사의 해수관음보살을 점안한 해인 것으로도
기억이 된다. 낭월의 기도는 낙엽도 다 지고 난 늦가을에 시작되었다.
4. 스님들의 조언 "무리하지 말아라"
당시에 함께 살았던 대중 스님들이 6명인가 되었는데 하나같이 낭월의 기도를
염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도를 시작한지가 며칠이나 되었을까 싶은 날에
책임자 되시는 분이 조용히 불러서 말씀하셨다.
"스님. 고생이 많소. 근데 지금 스님의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대중 스님들이 불안해하고 있구랴. 왜냐면 기도하다가 쓰러지겠다는 염려로 인해서요.
그러니 매일 8시간만 법당에서 하고 나머지는 스스로 조용하게 한다면 대중도 편안하고
본인은 자신의 기도가 법당에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닌 줄은 알 것이므로
그 방법을 택해 보도록 하시오."
그 말을 듣고 보니 또한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불안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따르기로 했다. 그렇거나 말거나 목탁을 두드리면서 하는 기도 시간만
줄었다는 것이지 여전히 목숨을 달고 관세음보살에 매달렸다.
물론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그래도 새벽에 눈을 뜨면 어떤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로 불빛을 바라다 봤고,
여전히 같은 상태에서 실망감을 갖게 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5. 잊지 못할 기억을 갖는 꿈
약 두 달 정도가 지났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기도는 순일하게 진행이 되었다. 기도를 마치고는 생을 마감하겠다는 생각(적어도 당시에는 그랬다)으로 인해서
담담하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다음 생의 준비를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 나가던 상황이었다. 그 어느 날 밤에 꿈을 한 자리 얻었다. 지금도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낭월이 동해안 유람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 지역의 사령관 댁을 발견하고는
방문을 하였다. 들렸으니 인사를 하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인해서이다.
그 집은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한참 올라가서 있었다. 계곡이 가팔랐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초가집이 있었고, 문안을 드리고 절을 세 번했다.
물론 속인에게 절을 세 번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지만, 당시는 그렇게 했다.
그러자 그 분이 하는 말씀.
"자, 저쪽 밝은 데로 가시지." 해서 창가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해맑고 따스한 햇살이 쏘여들었다.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그래 혹 나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지."
"예 실은 전입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 어디 보세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민 것은 예전에 동산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였다.
그는 진단서는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질문만 했다.
"거기에 이러이러한 항목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그럼 저러저러한 항목은 있나?"
"그러한 항목도 없는데요."
"그럼 염려할 것 없네. 내가 해결해 줌세."
"예, 고맙습니다."』
이것이 꿈의 전부였다. 그리고 잠에서 깨여나니 새벽 1시 반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아무리 벗님이 둔하다고 해도 이게 무슨 메시지인지는 감이 잡히실 것으로 짐작을 한다.
이제 눈을 고쳐주겠다는 암시가 아니고 뭐겠느냔 말이다.
그대로 가사장삼을 걸치고 법당으로 가서는 목이 터져라 하고 관세음보살을 불러댔다.
그리고 아침 공양을 하는데 대중들이 낭월의 눈치를 보면서
분위기가 술렁술렁함을 느꼈다. 어느 스님이 말했다.
"기도를 하시다가 오늘 새벽에는 다른 것을 하시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 말은 혹시 기도하다가 돌아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서 의사를 타진해 보는 것으로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말씀 드렸다.
"아, 대중 스님들께 미안합니다. 기도가 잘 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중은 함께 기뻐해 줬다.
6. 한 겹씩 벗겨지는 혈의 장막
그렇게도 세상을 붉은 천지로 만들었던 짙은 색이 그 후로 조금씩조금씩 옅어져갔다.
그 환희심을 벗님도 이해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보름 정도가 지나자
저 멀리 안개 속으로 느꼈던 사물들이 어느 정도 식별을 할 수가 있는 정도가 되었다.
비로소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뜨면 매일 쳐다보던
전등의 유리 윤곽선이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 무렵의 마음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7. 묵언(默言) 기도
100일 기도의 회향을 3주일 남겨놓고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묵언을 하기로 했다.
묵언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대중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대중은 당연히 허락을 했고, 그래서 이제는 아무와도 말을 나눌 필요가 없이 오로지
기도에만 전념을 했다. 약 90일 정도가 경과하자 이번에는 신문지의 글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도는 더욱 흥겹게 진행이 되었다. 밖에서 산책을 하는데 관광객들이 자꾸 질문을 하는 것이 귀찮아서 '묵언'이라고 쓴 패를 가슴 앞에 달았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그 아래에다가 '말못함'이라는 추가문구를 넣었다. 비로소 효과가 있었다.
"에구... 쯧쯧... 벙어리 스님이네...."
"나이도 젊은데 우짜다가....."
"얼굴도 참하구만..... 안되었다..... 쯧쯧...."
8. 회향
드디어 백일 기도를 마쳤다. 전날 내린 눈이 대지를 하얗게 바꿨고,
그 빛은 반사가 되어서 법당을 환하게 비췄다.
그러나 낭월이 보기에는 법당의 관세음보살님이 방광을 하시는 것으로만 보였다.
참으로 원만한 성취가 된 셈이다.
9. 후기
그로부터 3년인가 지나서 다시 낙산사를 찾았다.
그 절의 스님이 관광객을 상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3년 전에 눈먼 스님도 여기에서 기도를 해서 눈이 밝아졌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혼자서만 미소를 지었다는 것을 그 스님은 모를 것이다.
10. 기도 권유
이러한 기도의 경험을 갖고 있는 낭월이다.
기도를 하면 소원을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은 이렇게 경험으로 확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통일이 되어서 소원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반드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관세음보살이 되겠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절대자들도 절대로 없다고 고집을 부릴 수가 없는 것도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이고, 寅木대운의 丁巳년의 흉함도 戊午년의 고통도
기도를 통해서 말끔히 정돈을 했다는 것도 노력은 기적을 만든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래서 낭월이 방문자에게 기도를 하시라는 권유는 그냥 단순히 말이 궁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글을 읽으시는 벗님은 아실 것이다.
물론 운이 흉할 적에 권유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1. 그 때의 간절함은 어디로 가고.....
기도를 할 적에는 눈만 보이면 쓸데없는 것은 절대로 보지 않고
오로지 경전만 보도록 할 것이며, 열심히 공부해서 많은 중생들에게
빛이 되도록 하겠다는 서약을 백천번도 더 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를 관세음보살 님이 보신다면 아무래도
한숨을 쉬시지나 않을까 싶다.
그래도 단 한가지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저 어디엔가 '그 분'은 반드시 계시고,
언제라도 온몸으로 부른다면 답을 들을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렇게 더불어 고민을 나누면서도 그러한 절박함을 경험했기에
어쩌면 더욱 절실하게 이해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역경이 반드시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고,
인생의 성장 과정에서 어쩌면 한번 정도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여하튼 일생 눈으로 인해서 겪는 고통이 많은 것은
아무래도 전생에 살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
※ 낭월 스님은 현재 계룡산(鷄龍山)의 남쪽 감로사에 주석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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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감사드립니다.●
-출처/나무아미타불-
안녕하세요.
저는 양양 낙산사에 다니는 불자입니다.
제가 이번에 기도하여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과거 숙생의 죄업이
산과 같이 많은 것을 느끼고 저로 인해 고통 받은
영가들을 위해 3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집에서 천수경을 한 번 읽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번씩 읽을 때마다
관세음보살님께 영가들을 극락왕생하여 주십사 3번씩 기원하였습니다.
3일째 날 회향하고 잠을 잤는데 제가 어느 절터에 있었습니다.
한 비구 스님이 아이 3명을 데리고 계셨는데
석불상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거처하는 집은 시골의 허름한 집같이 초라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일 작은 한 아이가 석불상을 들어서 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같이 불상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리면서 사탕을 줄터이니
불상을 깨트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잠이 깼습니다.
그 주에 저는 관세음보살님께
아이들이 배고프지 않게 해달라고 사탕을 한 봉지 사가지고 갔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 사탕을 올리면서 간절히
영가들을 돌보아 달라고 기원하였습니다.
눈물을 너무나 많이 흘렸습니다.
천수경을 독경하면서도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저는 영가들이 아직도 천도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7일 기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밤에 자기 전 한 시간씩 대비주를 외우며 다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항상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염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하였습니다.
어제 기도회향을 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 날 피곤한 일이 있어서 잠을 설쳤습니다.
새벽에 잠이 어렴풋이 들었는데 바닷가였습니다.
백의관세음님이 아주 장대한 몸으로 동자 3명을 데리고 계셨습니다.
동자들을 모두 금신으로 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윽고 관세음보살님이 금색초롱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동자들도 그 뒤를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며 환희스런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 번 주에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감사하는 뜻으로 꽃을 회향하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함에 감사드리며
무릅끊고 지심귀명례합니다.
불자님들도 항상 대우주의 자비이신
관세음보살님을 칭명하시고 염불정진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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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우룡 큰스님저 생활속의 관음경 (도서출판 효림)
1.
경상남도 고성군 옥천사(玉泉寺)에 담력도 크고 가끔씩 괴이한 행동을 하는 오관수 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6.25사변말기에 포탄이 떨어지는 일선 쪽으로 가서 군인들을 돕는 노무자들과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 속에서 동사섭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스님은 같은 노무자가 되어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모두 함께 장단을 맞추어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일합시다.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 동안에는 틀림없이 무사할 수 있습니다. "
총알과 지뢰와 포탄 속에서 벌벌 떨고 있던 노무자들은 범상치않은 오관수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삽질을 하면서도 '관세음보살' 포탄을 나르면서도 '관세음보살'을 외쳤습니다.
이렇게 소리를 맞추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하다보니, 얼마 지나지않아 불안감이 사라졌고 두려움없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의 능률이 올랐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가 포탄이나 지뢰의 피해를 한 차례도 입지않았다고 합니다.
6.25사변후 오관수 스님을 진주 의곡사에서 뵙게 되었을 때, 스님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체험을 했지. 그 많은 노무자들에게 어떠한 탈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일세. 참으로 함께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공덕은 불가사의한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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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시대 말기에 효성(曉性)스님은 13세에 쌍계사로 출가하여 대웅전 노전 스님의 상좌가 되었습니다.
전등을 밝히는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저녁 예불이 끝난 다음부터 새벽 예불 때까지 법당 안에 등불을 밝혔습니다. 둥근 그릇 모양의 등잔에 참기름을 가득 붓고 종이 심지를 달아 밤마다 불을 밝히면 3일은 쓸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법당 청소를 하다가 등잔을 살펴본 노전스님은 참기름이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분명히 어제 기름을 넣었는데 왜 한 방울도 없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노전스님은 기름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살펴보니 또 기름이 없었습니다. 등잔을 살펴보았으나 깨어진 흔적은 커녕 구멍하나 없었습니다. 괴이하게 여기며 스님은 또다시 등잔에 참기름을 채웠고, 그 이튿날도 꼭같은 일이 일어나자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밤마다 등잔에 손을 대는 것이 틀림없구나.'
그날 밤 노전스님은 13세의 효성사미를 데리고 법당의 신중단 탁자 밑으로 들어가 밤을 새웠습니다. 탁자는 천으로 가리워져있어 밖에서는 그 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탁자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효성사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은사스님의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놈, 게 섰거라!"
깜짝 놀란 효성사미가 눈을 떠보니, 법당 가운데의 문 앞에 키가 9척이나 되고 검은 옷을 입었는지 검은 털이 났는지 분간이 되지않는 괴물이 서 있었습니다. 머리와 팔다리와 몸뚱이가 모두 있고 우뚝 서 있었지만, 사람은 아닌 듯했습니다.
고함을 치며 神衆壇 탁자 밑을 나간 노전스님은 그에게 앉도록 한 다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람이냐? 짐승이냐?"
"사람도 짐승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목신(木神)입니다."
"목신이면서 어찌 감히 부처님 전에 올리는 등잔의 기름을 훔치는 것이냐? 그 과보가 얼마나 큰 지를 모르느냐?"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하오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냐?"
"저는 이 절 밑의 화개마을 이판서댁 뒤 뜰에 서 있는 은행나무입니다. 이제 나이가 많아 발들이 땅 밖으로 나와 있는데, 무식한 머슴들이 제 발등에 나무를 올려놓고 도끼질을 해서 장작을 팹니다.
판서댁에서 겨울 내내 쓸 장작을 여러 머슴들이 계속 준비하다보니, 제 발들의 이곳 저곳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고맙니다. 이 상처와 아픔을 달랠 약은 다른 곳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께 올리는 이 등잔의 기름을 발라야만 하룻밤 사이에 아픔이 사라지고 딱지가 앉습니다. 그런데, 머슴놈들이 매일 장작을 패기 때문에 며칠동안 계속 부처님의 기름을 바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네가 진짜 목신이라면 인간보다는 힘이 셀 것이 아니냐? 얼마든지 보복을 할 수 있을텐데?"
"보복을 하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집의 運이 다하지 않았는지 이판서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나면 정좌를 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 번 읽습니다. 그 힘 때문에 지기(地氣)를 비롯한 어떤 기운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든이 넘은 이판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이판서가 죽고나면 보복을 할 생각입니다."
"내가 가서 앞으로는 머슴들이 너의 발등 위에서 장작을 패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니, 보복을 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인간들이 해를 가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가 먼저 해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그렇게만 해주시면 그 이상 고마울 일이 있겠습니까?"
목신은 절을 한 다음 사라졌고, 노전스님은 날이 밝기가 바쁘게 이판서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이판서는 머슴들을 불러모아 땅위로 노출된 은행나무의 뿌리를 부드러운 흙으로 덮도록 하고, 허리 높이 정도의 울타리를 만들어 누구도 나무에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사상을 차려 은행나무에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 뒤 쌍계사 대웅전의 등잔 기름은 훼손 당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13세의 사미 시절에 이와같은 일을 경험한 효성스님은 노년에 나를 비롯한 여러 승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수백년된 목신은 힘이 없어 보복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늙은 이판서가 날마다 외우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의 가피력 때문에 어떻게 보복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껏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어, 어떠한 사기(邪氣)도 이판서의 집안을 범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명훈가피요, '누구라도 감히 해칠 수 없다'는 관음경의 시실불감해(時悉不敢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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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매하(梅下) 최 영년(崔 永年)은 문장이 뛰어난 석학이요, 시인으로 이름난 분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늦도록 자식이 없자, 서울 자하문 밖의 옥천암 해수관음상 앞에서 삼칠일(21일)동안 생남기도를 올렸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아들을 점지하여 주시되, 재주가 비상한 문장가를 점지하여 주옵소서."
아버지는 기도 회향일 새벽에 잠깐 꿈을 꾸었는데, 점잖은 중년 부인이 양쪽 팔에 옥동자와 석동자를 안고와서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옥동자와 석동자 중에서 어느 동자를 갖기를 원하느냐?"
"이왕이면 옥동자를 주십시오."
"이 옥동자는 네 복에 지나치다. 석동자를 가지고 가거라. 이 석동자만하여도 그대가 원하는 재주가 비상한 문장가는 되느니라."
"그러시다면 석동자를 주십시오."
마음에 섭섭하기는 하였지만 석동자를 받고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과연 그 뒤에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최 영년이며, 얼굴모습도 꿈에 받은 석동자와 꼭 닮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석동자를 받았으므로 돌처럼 병도 없고 수명 장수하리라 여겼는데, 과연 최영년은 무병장수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성하여 정 만조(鄭 萬朝), 여 하정(呂 荷亭) 등과 어깨를 겨룰만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만약 최 영년의 아버지가 삼칠일이 아닌 백일기도를 하였다면 옥동자를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에도 인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곧 정성을 많이 기울였으면 더 좋은 결과가 돌아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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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세음보살님만이 아니라 다른 불보살님께 올리는 기도에도 반드시 기도시험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기도를 하여 아들.딸이나 사위.며느리, 상좌 등을 얻게 되었을 경우, 처음부터 마음에 딱 맞는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아이구, 저런 게..'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옵니다. 이것이 불보살님의 기도시험입니다.
1)
일제강점기에 해인사에 계셨던 우련스님은 상좌가 없어서 관세음보살님께 백일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기도 회향일에 새까맣고 꼴불견인 아이가 찾아와 하는 수 없이 상좌로 맞아들였습니다. 우련스님은 그와 같은 상좌에 대해 불만이 없지않아 평소에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쯧쯧, 백일기도 회향일에 들어왔기에 할 수 없이 상좌로 삼았어. 어찌 관세음보살님께서 저런 걸 보냈을꼬?"
하지만 그 상좌가 자라 뒷날 백용성 스님의 율맥(律脈)을 이은 경하(景霞)스님이 되었으니, 우련스님의 기도가 어찌 그릇된 결과를 낳았다고 하겠습니까?
2)
해인사 희랑대의 현응스님도 나반존자께 '좋은 상좌 하나 점지해주소서.'하면서 백일기도를 하여 얻게 된 상좌가 몽견선생(夢見先生)입니다. 눈만 초롱할 뿐 잘생기지 못한 이 상좌에 대해 현응스님은 만족을 하지 못하였지만, 몽견선생은 오오사카 의전을 나와 만주에 불교병원을 세워 사람들을 치료하였으며, 병원에 부처님을 모시고 많은 이들에게 염불을 권하고 불교를 가르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기도 끝에 시험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당장 눈에 딱 드는 사람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 덕으로 얻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품고서 키우고 같이 있다보면, 남보다 더 뛰어난 면이 있는 사람, 사회의 어느 한쪽을 능히 지탱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기도시험에 속지말 것을 당부 드립니다. 스스로가 행한 기도를 믿고, 또 불보살님을 믿고 기도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아들딸을 키우고 며느리와 사위를 데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속을 뿐, 불보살님은 절대로 중생을 속이는 법이 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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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몇 년전 90세 가까운 나이로 돌아가신 덕운성 보살은 50대 중반에 자궁암에 걸렸습니다. 부잣집 외동 아들인 남편이 평생을 돈 쓰는 재미로 살면서 남편이 물려받은 재산은 물론 처갓집 재산까지 모두 탕진하고 죽었으므로, 덕운성 보살은 날품팔이를 하며 혼자 1남 2녀를 키웠습니다.
"말기 자궁암입니다. 앞으로 3개월정도는 살 수 있으니 주변을 정리하시지요."
대구 동산병원의 의사로부터 이 말을 들은 것은 그녀의 두 딸은 결혼을 하고 아들은 중앙대학교 전자공학과 2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자궁암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30여년 전에는 말기 자궁암이 반드시 죽는 병에 속하였기에, 덕운성 보살에게는 의사의 말이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습니다. 서울로 시집을 간 큰 딸에게 울면서 사실을 알리자, 큰 딸은 포기할 수 없다며 세브란스 병원으로 모셔가 다시 진찰을 하게 했습니다.
"3달은 너무 성급한 진단입니다. 그러나 6개월 이상은 보장하기 힘듭니다.""
그녀는 의사를 붙들고 울면서 사정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를 2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제 아들이 대학 2학년이니, 졸업할 때까지만 살게 해주십시오."
의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단칸 셋방이 있는 김천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는 매달릴 데가 없었습니다. 오직 한 분, 관세음보살님 뿐이었습니다.
기도비가 없었던 그녀는 집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저녁은 물론이요 틈만 나면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일기도 마지막 날 새벽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녀는 김천 청암사 극락암에 모셔진 42수관세음보살상(지금은 도난 당하였음)앞에서 끝도 없이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백발의 노스님 한 분이 불단 앞에 나타나 약 세 봉지를 주셨습니다. 엉겁결에 무릎으로 기어가 약봉지를 받았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먹어라."
"물이 없습니다."
그러자 노스님은 부처님 앞에 놓인 다기물을 손바닥에 부어주셨고, 그 물로 한 봉지를 먹고 나자 또 물을 부어주며 말했습니다.
"또 먹어라."
"마저 먹어라."
세 봉지째 약을 먹었을 때 어떻게나 거슬리든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꿈을 깨고나서도 그 약 냄새는 그녀의 몸과 집안에 진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은 그녀는 말기 자궁암이 완전히 나아 아들의 대학 졸업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30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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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雨龍 큰스님저 생활속의 관음경(도서출판 효림)
이상으로 法華經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 곧 관음경에 대한 강의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나의 관음신앙 체험담을 들려드리면서 마무리 짓고자합니다.
1.
8.15 해방 후,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해인사로 출가한 나는 고봉(高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강원(講院)에 들어가 경전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해인사의 어른스님들은 불교의 여러가지 공부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화두공부는 어떻게 하는건지, 주력공부는 어떤건지, 염불정진은 어떤 식으로 해야하는 것인지를 제시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옛날 스님들은 이렇게 공부하셨다, 저렇게 공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뿐입니다.
나는 스스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願)을 세웠습니다.
'중노릇 잘 하게 해주십시오. 지혜 총명을 주시어 장애없이 경전공부를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때 나는 치문을 배우고 있었는데, 책 읽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관세음보살 염불에 몰두하였습니다. 밥 먹을 때도 '관세음보살', 화장실에서도 '관세음보살', 걸어다닐 때도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당시의 강원에서 공부를 배우는 학인은 여러가지 사중(寺中)업무를 한가지씩 맡아 돕는 급사노릇도 하였는데, 나는 해인사 산중 암자들을 돌며 공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공문서를 가지고 한 암자의 원주스님께 전하면 읽은 다음 사인을 해주었으며, 다시 다른 암자로 가서 원주스님의 사인을 맡았습니다.
2~3일에 한번씩 공문서를 들고 산내암자를 다닐 때에도 나는 오로지 관세음보살을 외웠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관세음보살을 찾다보니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관세음보살이 끊어지지 않는 차원에 이르렀습니다. 대화는 대화대로 잘되고, 내 가슴 속에 분명히 관세음보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염불을 시작한 지 1년 가량 지났을 무렵, 한밤중에 해인사 밑쪽에서 산불이 일어나 모든 대중이 진화작업에 나섰습니다. 특별한 소방장비가 없었으므로, 제1진이 불난 곳 가까이의 아직 불 붙지않은 풀을 낫으로 베면 제 2진이 벤 풀을 갈퀴로 끌어내고, 제3진이 괭이로 땅을 파면 제4진이 맞불을 지펴 불이 스스로 꺼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산불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나는 진화작업에 참여하였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쪽에서만 불이 못 올라오도록 맞불을 놓을 것이 아니라 불이 올라오는 뒤쪽으로 가서 진화작업을 하게되면 훨씬 빨리 끌 수 있겠다.'
그 생각과 함께 나는 큰 바위를 타고 불길 저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바위 밑쪽에서 불이 치솟아 올랐고,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엉겁결에 바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린 나는 불 속을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썩은 나무에 불이 붙은 그곳은 완전히 벌겋게 탄 숯구덩이였습니다.
산불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나마저 불 속에 굴러 떨어졌으니.... 대중들은 크게 술렁거렸습니다. 어른 스님들의 다급한 음성도 들려 왔습니다.
"저 아이가 죽다니! 불보다도 아이의 시신부터 건져야 한다."
하지만 불구덩이 속을 구르다가 일어선 나는 소리쳤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불 끄세요. 저는 여기서 불을 끌게요.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대중스님들은 그 불 속에 굴러 떨어졌으니 죽었거나 큰 화상을 입었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사실 나는 다친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팔의 살결이 가벼운 화상을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대중들은 하나같이 말했습니다.
"기적이다. 불보살님의 가피야."
그 때 나는 확신을 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어떤 액난도 고난도 사라지고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할 수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2.
그리고 6.25사변이 일어나기 전, 해인사에 빨치산이 들어왔습니다. 빨치산 사령관 유 성균이 4백여명의 대원을 이끌고와서 꼭 한달동안 해인사를 점령했습니다. 당시 해인사에는 학인스님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빨치산들은 해인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신상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자네는 집에 간다지? 오늘밤 우리 짐을 옮기는데 도와줘야겠어."
그들은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붙들어 갔습니다. 그 때 나는 지금의 관음전 큰 방에 동료들 7~8명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빨치산이 그들을 다 붙잡아 갔지만 나에게는 가자는 말도 않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 잡혀간 큰 방에 홀로 우두커니 있을 때에도 빨치산들이 여러차례 문을 열고 기웃기웃하였지만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듯 했습니다.
당시에 잡혀간 사람들은 빨치산들과 함께 생활하며 모진 고생을 하였으며, 그 중 반이상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빨치산의 눈에 보이지조차 않아 잡혀가지 않았을 뿐더러, 꾸준히 공부를 잘 할 수 있었으니.....
어찌 이것이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 곧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아니겠습니까?
내 나이 20세 이전에 체험한 이 두가지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누구든지 관세음보살을 念하면 모든 두려움.재난.불행에서 벗어나 願과 같이 살 수있게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이 觀音經을 읽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불자님들께 진정으로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디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겠다고 작정하였으면 한 경지에 오를 때까지 꾸준히 해 나가십시오.
그 한 경지가 무엇인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나의 가슴 속에서 관세음보살 염불이 계속 이어지는 단계입니다. 대화는 대화대로 잘 되고 관세음보살 염불이 쉬임없이 또렷하게 이어지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재난이 스스로 피해가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뜻하는 바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독히하면 백일, 길어도 3년을 작정하면 이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으니 부디 부지런히 염불해 보십시오. 대지비의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하는 우리또한 대자비의 무궁한 힘을 지닐 수 있게되며, 주위를 평화롭고 아름답게 바꿀 수 있게됩니다.
그 날까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생각하고 함께하여 크나큰 행복을 이루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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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관음의 가피를 입다- 김 태환스님(태고종 보광사 주지스님)
불교는 소원성취의 길 - 태환스님(보광사 주지)
(1) 큰 병에 걸리다
한 평생 살도록 감기 한번 앓은 적이 없어 병이라고는 모르고 지냈다. 학생 때부터 여러 가지 운동을 활발히 했었고, 출가한 후에는 참선 수행을 꾸준히 했으므로 도대체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체험하지 못하고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작년 12월25일, 의례 하듯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을 올리고 아령운동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을 가고 싶어 달려갔다.
용변을 마치고 나오려 하는데, 오른쪽 가슴에서 무슨 숨기운이 곧바로 치솟더니 오른쪽머리에 숨구멍이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스런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원래 건강하여 이 나이까지 버스를 타더라도 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었고, 걸음도 빨라 젊은 사람도 따라오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숨길이 한번에 몸에 뻗친 다음부터는 걸음이 불편해지고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1월3일 '간염예방접종주사'를 맞으러 우리 사찰 신도네 병원인 시흥의 김택준내과를 가게되었다. 그런데 의사가 "스님, 전에는 참 건강해 보이셨는데, 오늘 뵈니 어째 숨소리도 이상하네요." 하기에 "내가 뭐 이상하오? 난 건강합니다." 하였다.
그래도 의사는 "스님, 아무래도 이상하니 진찰 좀 해봅시다."하곤 X레이 검사를 해보더니 '기흉(氣胸)'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폐에 구멍이 두 군데 나고 제 위치를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즉시 입원을 권했지만 "내가 무슨 입원이냐?"라고 일축하곤 귀사 하였다. 그러나 사찰의 보살한테 의사가 몇 번이고 전화를 하여 입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몇 번 식구들과 실갱이를 벌리다 결국 병원에 이끌려 갔다. 그래서 1월5일 한강성심병원 819호실에 입원하였는데, 진찰을 해보더니 오후에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른쪽 가슴을 마취시켜 구멍을 내더니 한 7cm가량의 관(?)같은 것을 넣으니 아주 시원해지는 것이었다.
폐와 근육 사이의 불필요한 바람을 뺐으니 이제 원만하게 붙어 이상이 없으리라 하였다. 그후 며칠간 경과를 진찰하더니, 8일에는 뭔가 굳어지며 이상이 있다하더니 11일에는 물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었다. 물을 빼는 치료를 며칠 하더니, 이 치료 갖곤 안되니 권위자인 홍박사를 찾아 재수술을 받아야 한다 하였다. 17일엔 옆구리에 물주머니를 달고 강남성심병원으로 옮겨서 수술에 임하게 되었다. 19일엔 정밀검사를 한 다음 일주일 후인 24일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2)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다
물론 평상시에 늘 염하던 '관세음보살'을 불러왔지만, 수술실로 가면서부터는 더욱 일심으로 불렀다. 부르다 거꾸러져 죽어버리면 몰라도, 숨이 붙어 있는 한은 쉼이 없이 염불하리라 작정하였다.
항시 관음보살 님의 대자대비에 젖어서 살아온 탓인지, 마음이 동요되거나 불안한 것을 몰랐다. "나에게 세상 인연이 다했으면 관음보살님 께서 숨을 걷어 가실 것이고, 만일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으면 뭔가 영험을 보이시겠지. 알아서 하십쇼." 라며 오로지 관음보살 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9시에 수술을 시작하려는데, 비몽사몽간에 백의관음이 보이는 것이었다. 하얀 장삼도포에 머리와 얼굴도 온통 새하얀 보살님 주변에 여섯의 동자들이 있는데, 평소에 내가 지극히 좋아하던 연꽃이 쑥 치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활짝핀 연꽃 아래로 동자들이 모여들자 연의 뿌리가 또한 땅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백의관음님이 "산삼, 산삼, 산삼!"하고 '산삼'소리를 세 번 하는 것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그 소리까지였다. 그 이후 난 마취 상태로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장장 8시간의 대수술이 진행되었다. 이런 경우 수술 후에 몇시간이고 감각 없이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한 이틀간 정신을 못 차린다 하는데, 수술이 딱 끝나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수술 안 하십니까?" 물으니, 깜짝 놀란 의사는 "수술 끝났습니다."고 얼떨결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의사들 모두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라며 놀라 마지않았다. 갈증이 나서 물을 찾으니 물을 주기에 시원스레 마셨다. 마신 것이 있으니 얼마 후엔 하기 마련.
소변을 보겠다고 하니 변기를 받쳐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들어 누워서는 용변을 못 보니,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였다. 간호사가 한사코 변기를 받치며 재촉하고 의사들이 권하였지만,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는 소변보기 싫다고 우겼다.
그때가 25일 아침이었는데, 내 고집에 고개를 흔들어 대던 의사 한사람이 "정 일어나려면 일어나쇼!"라고 퉁명스레 내뱉었다. 괜히 고집세우는 것이지 어찌 상체의 반을 절개한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겠냐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의사의 말을 그대로 믿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소피를 시원스레 보았다.
침대에 돌아오니 의사와 간호사가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뭔가 다릅니다."고 한 의사는 입을 열었다. 나중에 다른 환자들의 상태를 듣고는, 이미 수술 전에 백의관음께서 현신 하시어 수술 내내 가피력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더욱 관세음의 영험에 감격하여 무수히 감사의 염불을 하였다. 아마도 나에겐 이 세상에서 보살 행을 더하라고, 자비하신 모습을 보이신 것임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나 퇴원할 수 있느냐고 홍박사에게 물으니, 대개 1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니 내년 2월쯤에나 퇴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입원4주만인 2월22일에 퇴원할 수 있었다.
(3) 소원성취의 조건
육체는 숨넘어가면 썩어 없어지는,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어서, 이것이 영험을 나타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험을 일으키고 무엇이 생명의 주인공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인 불성(佛性)인 것이다. 산하대지와 일월성신 모두가 실로 부처님 생명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주인공을 파악하는 일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밭(心田)을 가는 수행을 해야한다. 그리 하여 자신의 참된 생명가치를 깨달아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경지를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비로소 모든 소원은 남김없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나 꼭 출가하여 사찰에서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항상 자기의 본래 생명인 관세음보살 님을 성취되는 것이다. 출세간 적인 일의 성취는 물론, 우리의 평범한 소원도 성취시키는 것이 불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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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받다/글:김갑숙
제가 불광과 인연이 된 지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불교에 입문하기 훨씬 전부터 「불광」을 구독해왔으니
「불광」이 저를 부처님 품안으로 이끈
스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연히 군법당에서 불광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니 우연이라기보다 마음이 스산하여
문득 법당에 새벽기도를 갔다가 불광을 보고 열심히 구독해왔습니다.
저는 불광을 읽으면서 점차 불자가 되어갔고
본격적으로 불교에 입문한 지는 3년쯤 되었습니다.
시댁이 기독교 집안이라 불교에 귀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절에만 가야 부처님을 만난다는 생각을 버리고
생활 속에서 부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며
집에서 열심히 경전을 읽고, 염불하며 기도정진하고자
100일, 21일 기간을 정해놓고 계율을 지키고자
노력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반야심경, 천수경 등…
몇 가지의 경전을 달달 외우게 되었습니다.
뜻은 잘 모르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예불부터 시작하여
아침을 지으면서도 외우고 무엇을 하든지 머리 속에는
나는 불자다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입으로는 경전을 달달 외웠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금강경 사경하고 하루종일 기도가 끝나면
불교에 관한 책을 읽으며 불교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몇 년 부처님의 가피가 계셨음인지
기독교 집안의 장남인 남편이 절에 나가라고 허락하였습니다.
남편은 지금은 저보다 더 적극적인 불자가 되었으니 그
또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얼마 전 원인 모르게 몹시도 아팠습니다.
머리가 쏟아지는 통증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누워서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
리고 위장병까지 나서 음식만 먹었다 하면 소화를 못 시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역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병원을 제집 드나들듯 하였지만
신경성이라고만 하지 뚜렷한 병명이 없었습니다.
약으로만 의지하던 저는 관세음보살님께 매달려 보기로 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어떠한 어려움도 다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생각으론
관세음보살님을 관하고 입으로는 쉬임없이 불렀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님 도와주세요라구요.”
그랗게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관세음보살님께서 저의 옆구리에서
뱀 한 마리를 떼어내려하는데 그 뱀이 극구 떨어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님께서 힘껏 잡아당겨 떨어지는 뱀을
어느 바위에 던지니 그 바위에 그 뱀이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꿈을 꾸고 난 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며칠 동안이나 저를 괴롭게 만들던 통증이
언제 아팠느냐는 듯 몸이 날아갈 듯 가뿐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고 전 관세음보살님의 몽중가피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픔이 있을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꿈에 관세음보살님만 나타나시면 어려움이나 아픔이 사라졌습니다.
지면 관계상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전 지금도 관음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피와 관세음보살님의 가호하심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제가 불자로서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까요?
불법을 만나기 전에는 항상 제 잘못은 없고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는 듯 생각하고 상대방에 대해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했는데
불법을 만나고부터는 상대방의 잘못보다 나의 업을 생각하게 되었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도 왜 이럴까 하는 마음보다
제 마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시어머님께서도 교회에 나가시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제가 불자로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시어머니께서는 몇 년 전에 제 손을 잡으시면서
우리 집안을 맏며느리인 저에게 다 맡겨도 되겠다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로 큰 힘이 되어주십니다.
일상생활 처처마다 만나는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보답코자 불자로서 하루하루 보람있게
항상 불보살님을 잊지 않고 생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기도정진하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출처: 월간 불광 199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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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이 다시 주신 생명
생사의 절망 끝에도 관음은 계셨습니다/신화규(가정주부)
내소사에 들어서는 순간,
천여 년을 거슬러 올라온 것처럼 세상살이의 시끄러움은 없다.
일주문을 지남과 동시에 날려 보내지 않았나 싶다.
이 곳의 모든 것들은 기본이 몇 백년이다.
그래서 그런지 낯설지 않고 정다운 느낌,
오래 전에 와 봤던 곳에 다시 온 느낌이다.
혹시 전생에 이 곳에서 수행하는 복을 누리지는 않았었는지….
유명한 대웅전의 문살무늬,
천년된 나무의 웅장함,
그런 것들을 일일이 따지지 않더라도 그냥 편안하고 좋은 느낌,
이 자리가 바로 내 자리가 아닐까 싶다.
도량석 도시는 스님의 목탁소리에 잠을 깨어
상쾌한 공기와 천년가람의 숨결을 느끼며 들어선
빛바랜 대웅전의 새벽예불.
수술 후 처음으로 혼자 나선 여행길이다.
1.극심한 두통…알고보니 뇌종양
포교사가 된 지 1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제대로 되지 않은 공부에
사람들 앞에서 포교사라고 말하기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끝이 없기만 한 부처님 공부,
하지만 운명적인 이 길이기에 나는 기꺼이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공부하고 싶다.
관세음보살님께서 다시 주신 나머지 인생은 회향하는 의미로
한 알의 의미 있는 씨앗의 역할을 하고 싶다.
6년 전 전철역 계단에서 갑자기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풀려
굴러 떨어진 후로 매일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너무 심해서 한 움큼의 진통제로 생활하다가 그것도 안 되자
새벽이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술을 마시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병명을 몰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직전,
MRI를 찍고서야 뇌종양이라는 병으로 판명이 되었다.
급히 수술하지 않으면 혹이 너무 커서 죽는다는
담당의사의 말에 그냥 담담하게 말했다.
“선생님 수술 한 번 하나요? 아니면 두 번 하나요?”
뇌수술은 성공해도 기본이 두 번이고 두 번 하고도 결국은
죽은 가까운 친구의 남편을 지켜보았었기 때문에
두 번의 수술이라면 하지 않고 그냥 전국에 있는
기도처에서 원 없이 기도나 하다 죽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 당시의 상황은 혹이 너무 커서 신경을 누르기 때문에
모든 기능이 정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먹을 수도 없고 대소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됐었다.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걸을 수도, 집안일도 할 수 없었다.
옷을 뒤집어 입거나 거꾸로 입어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판단이 안 될 정도로 심한 상태였다.
그 때의 심정으로는 그냥 정확한 병명을 알았으니 됐고,
그냥 그대로 죽어도 이 고통만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이곳에서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노느니 염불한다고 108염주를 손에 들고 돌리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님 살려 주세요’라는 말도
‘아이들을 부탁해요’라는 원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무심의 마음으로 ‘저는 인연 따라 따르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 뜻대로 하세요.’하는 마음으로 염주를 계속 돌렸다.
그 순간 가슴 속으로 치닫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가슴가득 차지한 그 무엇! 그 후로는 두려움도 고통도 없어졌다.
막연한 두려움에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가족들이 계속 설득하고 있던 중이었다.
제일 두려운 것은 수술 후 얼마일지 모르는 막연한 시간 동안
여러모로 나로 인해 고통 받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그냥 이대로 조용히 눈감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면'하는 생각이었다.
염주를 돌리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관세음보살님께서 금빛 찬란하게 나타나셔서
땀을 흘리며 더워서 쩔쩔매는 나에게 시원한 냉기를 주시며,
“덥지? 내가 시원하게 해줄게 걱정하지 마라.”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었다.
그 후론 아무 두려움이 없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다.
“관음보살님, 뜻대로 하세요”
아이들 선생님께도 전화해서 숙제나 준비물이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엄마가 없어서 그러니 이해 해달라는 부탁까지 해놓고
이것저것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빈 자리를
최대한 줄이려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깎았지만 주위사람들에게
“두상이 이쁘냐, 미우냐?”고 농담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다니던 절의 스님과 신도들이 오셔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할지 몰라
쩔쩔매실 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반드시 살 거고
다시 살아나면 부처님 일을 할 거예요.”하고 말씀드렸더니,
“보살님은 앞으로 공부 많이 하실 거예요.”하신다.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그 때는 몰랐었다.
“신화규씨 정신이 드세요.
제 말을 알아 들으시겠으면 눈을 떠 보세요.”
그 말을 듣고 눈을 떴다.
여러 줄로 묶여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서있는 많은 사람들,
담당의사들과 간호사, 가족들이었다.
눈을 뜬 나에게 의사선생님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가’하는 판단을 여러 가지로 시험해보았다.
‘이름이 뭐라든가,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자든가,
왼발을 들어 보라든가’라는 물음에 평상시와 같이 웃으면서
자신 있게 대답하고 하라는 대로 정확하게 하자
모두들 살았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그 때까지는 그냥 원래 예상 했던 대로 6시간의 수술 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곳은 신경외과 중환자실이었고 나는 20시간의 생사를 가르는
대수술 끝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감동은 남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말로는 예상된 6시간이 지나고 12시간이 지나도
수술이 끝났다는 불은 안 꺼지고 아침 8시에
첫 번째로 들어간 사람이 저녁때가 되도 소식이 없더니
새벽이 되자 담당의사가 가족들을 소집해놓고
지혈이 안 되니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은 달리 방법이 없어 자기는 부처님도 믿지 않고
하나님도 안 믿고 기도 할 데도 없어서 나에게,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은 할 수 있으니
당신의 의지로 꼭 일어나”라고 기도했단다.
2.수술대 위의 기적
수혈이 40봉 이상은 위험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서
계속 70봉 정도의 수혈을 하고 있을 때 지혈이 되었고,
의사선생님은 자기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서 기다렸을 뿐
말로만 듣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놀라워하셨다.
내가 부처님을 믿는 것을 모르니까 남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게 정말 있나 보다고 해서, 나는 조용히 자신 있게
“이건 신의 기적이 아니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천주교를 믿는 시어머님께도 기독교를 믿는 친구에게도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고….
3.관세음보살님 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
나는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뇌수술 후의 중환자실은 마치 아비지옥을 연상할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의가 혼수상태의 환자들로 소리소리 지르고 심지어는 욕을 하고
몸부림 칠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의가 진통제로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아프지 않다는 사실이다.
수술실에서 옮겨진 뒤로 진통제 한 대 맞지 않고
삼매에 든 것 같은 편안한 마음과 표정으로 있었다.
4.아비규환의 중환자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의 생활은 시작됐고 그 곳에서
산소호흡기와 여러 개의 줄로 이어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새벽예불과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 일뿐이었다.
하루에 적어도 두 명씩은 죽어나가고,
새로 수술하고 와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몇 달째 정신이 안 들어 울면서 하소연하는 보호자들,
나는 지옥을 미리 와본 느낌이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도 금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 법만 미리 알았다면 이토록 고통도 느끼지 않고
편안하고 환희심 속에서 병원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신경외과의 중환자실은 24시간 긴장상태이기 때문에
불을 끄지 않는다. 달리 잠자는 시간이 없다.
잠을 잘 수도 없고 잠도 오지 않아 새벽 4시쯤 되면
물을 놓고 기억나는 대로 예불문과 천수경 반야심경을 하고
관음정근을 하고 그 물을 마셨다.
간호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혼자 모든 걸 해내려고 애썼다.
수술결과는 아무 것도 보장 받을 수 없었다.
팔다리의 마비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될지 수술 후에도
중풍환자처럼 팔다리 마비상태로 그냥 지내야 될지
어떤 후유증이 올지 다시 재수술을 해야 할지 모든 게 미지수였다.
하지만 나는 매일 매일이 즐겁고 감사했다.
며칠 만에 멀겋게 나오는 미음에도 감사하고
친절한 의사선생님과 간호사,
면회 와서 걱정해주는 가족 친구들 남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신 관세음보살님 모두가 감사했다.
아직은 어린 둘째딸이 어린 나이 때문에 면회가 되지 않자
울다, 울다 그냥 갔다고 친정엄마가 전했다.
갑자기 엄마가 걷지도 못하고 이상한 짓을 많이 해서
엄마 옆에서 심부름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너무나 급하다고 해서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얼굴도 못 보고 당부도 못 하고 갑자기 와버렸다.
아이들 때문에 나는 내 힘과 의지로 일주일 만에 나가리라 작정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기도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했다.
그 결과 너무도 빨리 회복되고 있었다.
중환자실에는 여러 개의 침대가 굉장히 넓게 분포돼 있는데,
나의 가장 가까운 쪽의 침대에 있는 50대 초반 정도의
아주머니 환자는 8개월째 혼수상태로 있었다.
하루 종일 엄마를 찾으며 부른다.
아마 무의식 중에도 엄마만 있으면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리라는 생각에서인가 보다.
밥도 안 먹고 약도 안 먹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산소호흡기와 뇌로 연결된 여러 줄 중 하나라도 빠지면
위험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온몸을 꽁꽁 묶어 놨다.
그러니 면회시간에 온 열 몇 살짜리 아들과 스물이 갓 넘은 듯한 딸은
엄마를 붙들고 “엄마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라며 울다, 울다 간다.
그 어린것들이 막대한 병원비를 감당 못해
의사선생님께 그냥 퇴원 시켜달라고 하소연한다.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울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했다.
‘관세음보살님 차라리 저분 대신에 저를 데려가세요.
저는 부처님 법 속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고 또 죽는다 해도
어떤 방법으로든 부처님 법 속에서 살 테니까
저분 대신에 저를 데려가 주세요.’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그 아주머니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누워서 꼼짝할 수는 없으니 천장을 본 채로 소리를 질렀다.
“아주머니 제 말 잘 들으세요.
제 말 잘 들으면 엄마한테 가실 수 있어요.
지금처럼 밥도 안 드시고 약도 안 드시고
간호사선생님 말씀 안 들으시면 절대로 낫지 않아서
엄마한테 갈 수 없으니 꼭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50대 무의식 환자의 “엄마, 엄마”
그 아주머니께서 듣든지 못 듣든지 큰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아주머니께서 그 때부터
식사도 하고 약도 고분고분 드신다는 것이었다.
그 후 갑자기 일반 병실로 옮겨도 좋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중환자실에서 6일 만에 일반병실로 옮겼다.
그 후 그 아주머니의 상태를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잘 치료가 됐으리라고 생각한다.
일반병실에 와서 재수술 들어가며 불안해하는 여대생에게
팔에 있던 합장주를 껴주며 기도해 주었고,
치매로 불안해하는 할머니께는 10년간 지닌 108염주를 쥐어주며
돌리는 법을 알려드렸을 때 편안해 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런 인연들을 맺게 해주신 것에 대해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하지만 나의 너무나 부족한 공부를 절감하였고
여기서 퇴원하면 부처님 공부를 제대로 해보리라 결심했다.
그 이후로 2년간의 불교대학공부,
그 후에 다시 승가대학부설 김포불교대학에 재입학하여 포교사가 되었다.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며 지금은 제대로 된
포교사가 되어보려고 연수와 기도, 군법회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그 때 만난 관세음보살님은 지금도 매월 초하룻날이면
홍련암의 파도소리에 어우러지는 비구니스님의 간절한
염불소리와 함께 만난다.
병실에서 혼자 물 한 잔을 놓고 올리던 새벽예불을 이제
홍련암을 비롯해 직지사, 법주사 등 전국에 있는 모든 절에서
삼라만상을 깨우는 범종소리, 목탁소리와 함께 올리고 있다.
5.불교대학 입학…보살행 서원
언제까지 이 행복한 시간이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남겨진 시간동안 여러 방편으로 부처님법을 펴고 싶어
방송대 국문과에도 입학해서 하루를 48시간으로 쓰고 있다.
나를 걱정해주시는 분들은 건강을 염려하지만,
아직은 재발의 위험도 없이,
물론 약간의 후유증으로 힘들기는 하지만 그 또한
기도정진을 게을리 말라는 뜻으로 알고 함께하련다.
어디 어느 곳을 가나 부처님 법음이 가득한 이 도리를
보다 많은 이들이 깨달아‘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실천하는 진정한 불자의 길을 가게 해달라고 발원해본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조금은 절절히 느껴
형식적인 위로가 아닌 부처님 마음의 끝자락이라도
흉내 내며 가슴 아파할 수 있게 됐다.
이제 10월 첫째 주에는 매월 나가는 군법회의 창립법회행사,
둘째 주의 해인사 보살계 행사,
셋째 주의 적멸보궁 철야기도,
넷째 주의 선운사 문학기행 등 바쁜 일정이지만
만나는 사람 모두가 한 분 한 분 부처님이라 생각하며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드린다.
단풍이 지고 있는 초겨울에 나는 다시 또
새로운 부처님을 만나러 떠날 것이다.
-월간불광 창간 30주년 기념 신행수기 공모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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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소가현(昭歌縣)에서
일본의 소가현(昭歌縣)이란 시골의 빈촌 농가에 정자라는 딸을 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느 사람의 소개로 동경에 있는 부호집에
정자를 하인같은 가정부로 보내게 되었는데
집안이 극빈하여 떠나는 딸자식에게 아무것도 기념으로 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불심이 깊은 사람이라 '나무관세음보살'의
글자를 얇은 종이에 써서 조그만 주머니 속에 넣어서
그것을 옷깃 깊숙이 넣고 바늘로 꿔매주며 그 딸에게 이르기를
'정자야,너의 옷깃 속에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니 그리 알고
불철주야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불러라. 그리하면 너의
신상이 편안하고 장차 귀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일러 주었다.
정자는 착하고 고지식하여 동경으로 가서 가정부로 일하면서
어머니가 가르친 대로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찾았다.
그 부자집에는 10 여명의 일하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신참인
정자에게 온갖 궂은 일만을 골라서 떠 맡겼다.그래도 정자는
관세음보살만을 생각하며 불평불만 없이 열심히 맡은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를 반년이 지나서 정자가 생각하기를
관세음보살을 몸에 지닌 채 화장실에 드나드는 것이
불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사이에 옷깃 속에서 주머니를
꺼내어 복도 마루기둥 갈라진 틈새에 살짝 끼워 놓았다.
그후 정자는 밤마다 다른 아이들이 잠자는 틈을 타서 살짝
일어나서 기둥을 향하여 수십번씩 절을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그러다가 어느날,이것을 안 한 아이가 정자를 놀릴 속셈으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짜고 정자를 밖으로 심부름 보내놓고
그 주머니를 꺼내고 그 자리에 멸치대가리를 대신 넣어 놓았다.
그리고 몇일이 지난 뒤에 여러 아이들이 밤늦도록 자지않고
있었는데 그날도 여전히 정자가 나아가서 그 기둥을 향하여
절을 하는 것을 본 아이들이,
"야! 이 못난 것아,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절을 하느냐.
아직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쓴 쪽지가 있는 줄 알고
절을 하느냐.
우리들이 벌써 주머니를 꺼내고 거기에 지금은 멸치대가리 밖에
없는데 그것을 모르고 절만 하는구나.이 어리석은 것아,
그만두고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거라"
하였다. 그러나 정자는
'너희들이 그런 못된 장난을 하였구나.너희들이 멸치대가리로
바꾸어 넣었거나 말거나 나는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는 것으로
믿고 예배 공양을 할 따름이니 너희들이나 참견말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절만 한다.그런데 여러 아이들이
살펴보니 멸치대가리를 끼워 놓은 기둥 구멍에서 방광(放光)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구멍에서 관세음보살님이 오색구름을 타고 나타나시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여러 하녀들은 무의식적으로 '나무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무수히 예배하였다.
이 사실이 주인에게 알려지게 되자,신심이 강한 주인 내외분은
이 아이를 며느리로 삼게 되었으니 여러 하인들이 이제까지
촌뜨기 바보라고 업신 여겨왓던 정자를 이제는 아씨 상전으로
모시고 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 일본에서는 "멸치대가리도 신앙심이 진실하기만
하면 관세음보살로 화현(化現)한다" 라는 말이 유행 되었다.
도서(초발심불자를 위하여)에서 옮김
글 전체출처 /다음 카페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