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생에 염불을 권하는 이유(3)
방생에 염불을 권하는 이유 (3)
방생자는 후생에 인간이나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더하여 염불을 하면 방생자와 방생물이 아미타불과 인연 되어지는 무량공덕이 됩니다
질문: 아미타부처님의 구제와 하나님의 구원에는 무엇이 다른가?
(정종스님 대답)
대답: 어떤 종류의 구제든 간에 모두 귀하고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간략히 말하면 양자에는 열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 공간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구에 국한되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시방의 일체 세계에 편만해 있습니다.
둘째: 시간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마감일이 있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영원히 멈추지 않습니다.
셋째: 넓고 좁음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인류에게만 미치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널리 일체 천인·인간·지옥·아귀·축생 등의 육도중생에게 미칩니다.
넷째: 확률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한 사람에게 단 한 번의 기회만 있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누구나 무수한 기회가 있어서, 설사 금생에 구제되지 못해 삼악도에 들어가더라도 아미타부처님은 여전히 따라다니면서 포기하지 않고 구제를 해주시거나 혹은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여 구제될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지가 않아서 반드시 일부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구제될 수 없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설사 죄업을 짓고 지옥에 들어간 중생일지라도 맹세코 한 중생도 빠짐없이 구제를 해주시기 때문에 끝없는 시간으로부터 볼 때 어떠한 중생도 백퍼센트 극락정토로 구제될 확률이 갖고 있습니다.
다섯째: 역할이 다르다. 하나님은 구원자이자 또한 심판자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은 순전히 구제자이지 심판자가 아닙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죄업을 짓고 고통 받는 중생을 자비로 가엾이 여겨 죄업이 두텁고 고통이 깊을수록 더욱 구제를 해주시고 나아가 영원히 아비지옥에 떨어진 중생도 맹세코 구제하려 하십니다.
여섯째: 어렵고 쉬움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하게 믿음만 강조하여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간단한 수단이 부족한 듯하다보니, 누군가 믿지를 못한다거나 믿음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언제 어디서나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할 수 있어서 편리하고 간단하고 쉽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들이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믿음이 깊든 믿음이 얕든 간에 모두 아미타부처님과 연결되고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의 비춤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일곱째: 이익이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천당에 태어나게 하지만, 진리와 완전한 한 몸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조물주는 영원히 평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께서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왕생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성불하고 진리와 완전한 한 몸이 되어 전혀 다름이 없는 절대적으로 평등한 진리의 경계입니다. (천상은 윤회하는 세계이며 극락은 윤회를 초월한 세계임)
여덟째: 자비가 다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구원은 자비가 작으면서 한계가 있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자비가 크고도 무한합니다.
아홉째: 이론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창세론을 기반으로 합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만들었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조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구제를 해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은 불성과 연기론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고, 또 불성은 청정하고 평등하여 한 몸으로 둘이 아님이 진리의 본체이므로 창조도 없고 피조도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이 불성을 미혹하고 스스로 전도되어 죄업을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제불보살님들은 이 불성을 깨달아 대해탈과 대자유를 누리면서 중생이 미혹되고 전도되어 죄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연스럽게 평등한 대자비심으로 구제를 해주려고 하십니다.
열 번째: 깨달음이 다르다. 만약 “사랑이 곧 진리이다”라고 말한다면, 사랑의 깊이와 넓이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에 따라 결정됩니다. 두 가지를 서로 비교해보면, 매우 분명한 것은 유신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주·신)의 사랑과 아미타부처님의 자비는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신종교에서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한계가 있다 보니, 마치 안개 속에서 꽃을 보는 것처럼 억측의 성분이 있어서 합리적인 질의를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불교와 같이 확철대오를 통해 대자대비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이치와 사실은 어떤 질의도 이겨낼 수 있는 것만 못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출처/純淨時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