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관음기도 영험담 모음
관음 백일기도로 눈 뜬 중년신사 (법철스님 글 전재)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의 향가 가운데 도천수대비가를 조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관음전에 비옵나니, 천수(千手), 천안(千眼)의 그 중 한 눈, 눈 먼 저에게 주옵소서. 아아, 저에게 주옵시면 자비 더욱 크오리다.’
향가를 통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중생이 슬픔속에 관음보살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만산에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화창한 봄 날.
필자(법철스님)가 주지로 있던 산새소리 가득한 전남 강진 무위사에 중년의 남자가 찾아왔다.
필자는 그때 무위사 큰법당인 극락보전 앞에 있는 고목나무 밑에 놓여 있는 깨어진 멧돌 위에 정좌하여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남자는 필자에게 정중히 합장 인사를 하고는 어눌한 음성으로 무위사에 관세음보살님의 국보 벽화가 봉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찾아왔으며 관음기도를 지성껏 모셔보고 싶노라고 허락을 구해왔다.
그는 슬픈 얼굴로서 후리후리한 키에 회색 양복을 입었고 한 손에는 낡은 트렁크를 힘겹게 들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나 필자는 이내 그의 설명을 듣고 속사정을 알았다. 그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그는 경북 포항 사람으로 그동안 자그마한 개인 사업을 하며 일개미처럼 열심히 일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 왔다. 갑자기 두 눈이 어두워 오더니 마침내 눈 뜬 장님이 되다시피 되고 말았다.
“아, 내가 앞을 못 보게 되다니….”
그는 나날이 잃어가는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발악하듯 몸부림을 치며 유명하다는 병원의사는 성지순례하듯 찾았다.
병원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절망에 빠져 울고 있는 그에게 누군가 마지막으로 신불(神佛)께 기도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그는 무위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오정수(吳定洙). 필자는 오정수씨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무위사에서 기도할 것을 흔쾌히 허락하였다.
오정수는 각오의 뜻으로 삭도로 머리칼을 밀어 버렸다. 그리고 극락보전안에 있는 후불벽화인 수월백의관음벽화 앞에서 촛불과 향화를 받들면서 백일을 기한하고 천념 염주를 헤아리며 지성으로 관음기도를 올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오정수의 간절한 기도소리는 무위사의 적막한 도량을 넘쳐 흘렀다.
죽기를 한하고 지성으로 기도하던 오정수는 백일기도가 끝나가는 즈음에 놀랍게도 두 눈이 밝아졌다고 부르짖었다.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제 확신합니다.”
백일기도를 회향하고 오정수는 다시 트렁크를 들고 필자 앞에 섰다. 눈이 웬만하니 걱정하며 고대하는 처자에게 달려가고 싶고,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어 가장의 책무를 다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작별하는 즈음에 오정수는 호주머니에서 돈봉투를 꺼내 그동안 산사에서 체류하게 해준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부족한 돈이지만 시주금으로 받아달라고 간청하며 필자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필자는 빙긋 웃고 다시 그 돈을 돌려주며 기도하느라 고생 많았다고 치하만 했을 뿐이었다.
“우리 인연 있어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필자는 멀어져가는 버스 차창을 통해 오정수씨의 흔드는 손을 답례하여 마주 손을 흔들면서 내내 앞서의 신라의 향가를 생각하였다.
― 무릎꿇고 두 손 모아 관음전에 비옵나니, 천수,천안 그 중 한 눈, 눈 먼 저에게 주옵소서. 아아, 저에게 주옵시면 자비 더욱 크오리다. 무위사 수월백의관음보살님이 고해중생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고해대중이여, 우주에 의지할 성인 가운데 관세음보살님을 권장하오니, 우리 모두 때가 되면 이승의 인연들을 작별하면서 한과 눈물속에 홀로 머나먼 저승으로 떠나갈 때 까지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인생을 살아갑시다. 관세음보살님은, 우리가 세연이 다해 육신의 탈을 벗고 어둠속에 홀로 울며 머나먼 윤회의 길을 떠나려 할 때 반드시 광명으로 나투며 현신하여 우리의 영혼을 반드시 구원해주십니다.”
2. 김 갑숙님 관음신앙 수기 모음
(1)
부처님 아니 계신 곳 없으니
꿈에 흰옷 입은 할머니가 나타나
옆구리서 뱀한마리를 떼어낸 후
두통과 위장병이 깨끗이 나았다
나는 전생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지중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갔었다.
그 때가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이었다.
친구들이 교회에가면 맛있는 것과 선물을 많이 준다는
소리에 솔깃해서 따라 갔던 것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온 몸이 으스스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아멘’ 소리도 듣기 싫었다. 더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선물의 유혹도 뿌리치고 서둘러 교회를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부터 어떤 일이있어도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전남 송광사로 수학여행을 갔다.
송광사 법당에 계신 부처님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어찌나
환희심이 나던지 넋을 잃고 부처님의 상호를 쳐다봤다.
또 향내음이 왜 그리도 좋던지, 전생에 불연이 있었기에
이러한가 혼자 생각해 보곤 한다.
16년전 나는 남편과 중매로 만나 결혼을 했다. 하고 보니
시댁은 기독교 집안이었고 남편은 장남이었다.
내가 기독교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니 부처님께 귀의하기란
쉽지않았다. 하지만 기독교집안이라 해서 싫은 내색 보이지
않고 묵묵히 생활했다.
시어머니께서는 나를 교회로 전도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마음이 상하시지않게 "네"란 대답만 드릴뿐 가게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가족들 몰래
불경을 공부했다.
경전의 뜻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열심히 독경하고,
불교서적도 많이 탐독했다. 중요한 내용에는 밑줄까지 쳐가며
공부를 하다보니 <반야심경>등 법회 때 제일 많이 독송되는 경들이
줄줄 외워졌다.
결혼한지 3년 후인 13년 전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일년 후 1주기 제사를 시어머니 뜻대로 기독교식인 추도식
으로 모신후 큰 사고가 일어났다.
누가 보아도 차사고가 날 장소가 아닌 가게 앞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
밤에 잠을 자려다말고 남편이 가게 앞에 세워놓은 차에 탔는데
큰 사고가 났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나가는 남편을 극구 말릴
것을 하고 후회를 하게 되었다.
왜 자려다 말고 나갔느냐고 묻는 나에게 남편은 자신도 모르게 뭔가
끌리는 듯하고 자꾸 마음과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나로서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가 막힌 큰 사고였다.
그 후 우리부부는 사고 수습을 하느라 며칠은 가게 일도 볼 수
없을 정도로정신이 없었다.
나는 시아버지께서 제사를 유교식으로 모셔줄 것을 원하시어
장남인 우리 부부를 깨우쳐 주시려고 잠자려던 남편을 이끌고
나가 큰 사고를 내게 하시지 않았나 하는 얼토당토한 의심이
자꾸만들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뜻을 어길수가 없어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 또다시 우리 집안엔 시련이 닥쳐왔다. 그 때도 시어머니의
뜻대로 시아버지 제사를 추도식으로 모신후 였다.
당시 6살이던 아들이 가게 앞에서 놀다가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치어 어깨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한 달이나 입원을 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시아버지 제사를
추도식으로 지낸 다음 계속적으로 일어났기에 마음이 찜찜했지만
차마 시어머니께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큰 시누이가 어머니께 말씀드릴테니 올케가
기독교식이 아닌 전통식으로 정성스럽게 제사를 모시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용기를 얻었다. 남편과 상의를 하여 전통식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 후 법현스님이 쓰신 불교식으로 제사모시는
법에 대한 글을 읽고 지금은 불교식으로 모시고 있다.
그후 지금까지 우리 집안에 큰 사고없이 잘 지내고 있다.
아마 기독교 집안 맏며느리이지만 불교와의 인연이 있는
나를 일깨워주려고 그러한 어려움이 있지않았나 생각해본다.
그 후부터 나는 더욱 더 발심을 해 불교공부에 본격 매진했다.
절에 가야 부처님을 만나뵐 수 있고 절에 가야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처처마다 아니 계신 곳 없으신 부처님께 나는
집에서 아침 저녁으로 예불문을 읽고 관음정근, 발원문 순으로 하루도
빠지지않고 기도정진을 하였다.
무엇을 하든지 항상 불보살님을 관하고 나는 부처님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런데 나는 몸이 너무나 아픈
시련을 겪어야 했다.
머리가 터질 것같은 통증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서 며칠을 생활해야
했다. 내가 몸져 눕자 집안은 엉망이 되었다.
업친데 덮친 격이라고 했던가. 위장병까지 생겨 소화가 되지 않아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도 병명은 나오지 않고
신경성이라고만 할뿐이었다.
나는 불보살님께 의지하고픈간절한 마음이 생겼다.
나는 일심으로 관세음보살님께 의지했다.
어느날 관세음보살님을 일심으로 간절히 부르다
잠이들었다.
꿈에 하얀 옷을 입은 할머니 한분이 내 옆구리에서 뱀 한마리를
떼어내 어느 바위에 던지니 그 뱀이 바위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
지지 않는 꿈을 꾸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며칠을 두통과 위장병에 시달리던 나는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웠다.
불보살님이 나에게 감응해주신 것인가! 나는 은혜에 보답드리고자
더욱더 발심을 내어 기도정진하게 되었다.
나는 더 큰 발심을하고 가족들 몰래 가까운 절로 새벽기도를 다녔다.
하루종일 가게 보느라 피곤했지만 새벽기도에 동참하여 부처님을
만난다는 환희로움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다니며 날마다 108배를 했다.
그렇게 기도정진하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밤마다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며칠 동안이나 보였다.
아버지께서 천도를 원하심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가족들 몰래
절에다 아버지 영가위패를 모시고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영가를
위해 기도를 했다.
집에서는 49일 동안 <지장경> 1품에서 13품까지 독송하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츰부다라니는 21번, 광명진언은 108번, 지장정근은
1080번을 염송했다.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기도도 했다. 나는 49일 기도 회향 후
깨끗한 모래를 구해서 일곱 번 씻어말려서 하루에 광명진언 108번씩
염송하기를 21일 동안 했다.
그리고는 남편과 애들을 데리고 시골에 모셔진 아버지 산소에
가서 뿌려드렸다.
그날 밤 또 꿈을 꾸었다. 어느 할머니 한 분과 아버지, 두분이서
집으로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방에 계시고 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면서 밖으로 나가시는데
하늘에서 밝은 광채가 나는 꿈을 꾸었다.
그 후로 그렇게 꿈에 보이시던 아버지께서 꿈에 나타나지를 않으셨다.
천도가 된 것으로 생각해 마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어느날 밤 꿈에 하얀 옷을 입으신 할머니께서 나를 어느
깊은 산 속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잔디 위에는 집 한채가 있었는데 그 집에서 남편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꿈을 꾸고 난 후 기독교
집안의 장남이었던 남편이 내가 정식으로 절에 다닐 수 있도록 허락
하는 행운이 있게 됐다.
모든 원인이 내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참고 견디며
일체유심조 교훈을 생활화하고 있다
나한테 일어난 모든 일이 불보살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의 가피와 보살님의 가호하심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기독교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마음에도 없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기독교 집안의 장남이지만 불보살님의 가피로 마음의 문이
열려 부처님께 귀의하게 해준 남편의 배려가 너무나 고맙다.
덕분에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일요법회에 참석하여 덕 높으신
스님의 법문을 듣고 열심히 배우고 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불교의 진리는 이론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잊지않고 명심하여 부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발심하고 있다.
불법을 만나기 전에는 내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해결이 될 때까지
신경쓰고 고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결국 내 몸을 망치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신경쓰고 걱정하기
보다는 불보살님께 의지하여 기도정진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불보살님을 믿으며 의지하고 정진하다 보니 모든 일이 스스로 잘되어감을
느끼고 있다.
얼마전 치아에 이상이 생겼는지, 아니면 턱에 이상이 있었는지 잇몸의
통증으로 입을 벌리지도 못할 정도로 아팠다. 괜찮아지겠지 하는 생각
으로 참는 나에게 남편이 내일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검사를 받아 결과가 나쁘다면 최악의 경우 수술까지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저는 관세음보살님만 믿겠습니다. 제가 의지할 곳은
관세음보살님뿐입니다”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관세음보살님 도와주세요”하며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쉼없이
외쳤다. 한 호흡에 몇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념으로
부르다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꿈에 하얀 옷을 입으신 할머니께서 하얀 천을 내 턱밑에
깔아주셨다. 그 하얀천에는 탑이 그려져 있었고 그 탑 속엔 빨간
글씨가 빽빽히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이것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나를 안심시키고는 천을
정성스럽게 깔아주셨다. 이 꿈을 꾸고 난 다음날 나는 또 거짓말같은
기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통증으로 입을 벌리지 못할
정도로 아팠던 내 입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병원에 가라던 남편은 내가 꾀병을 했다고 할 정도로 믿지를 않았다.
나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감사드리고 더욱 발심하여 기도정진하게 되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불보살님께서 주신 은혜에 보답드리는 일이라 생각하고
아침 저녁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한다. 작은 보시함을 만들어
기도할 때마다 적은 돈이나마 꼬박꼬박 보시함에 담았다.
한달동안 모은 적은 돈이지만 매월 말일에 그 돈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불교방송 후원금으로 회향하고 있다. 불보살님께 입은 은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받은 은혜에 보답드리는 길이라 생각한다.
내가 받은 가피를 또 한가지 더 적어보고자 한다.
내 아들은 중학교 2학년이다. 그렇게 착하고 부모 말씀이라면 순종하던
아이였다. 그러던 그 아이가 지난 여름 방학 때부터 밖으로만 나가려고
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아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끝내는 엄마인 내가 제일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춘기때의 반항이려니 하면서도 변해 가는 아들을 타일러도
보고 꾸중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매도 들어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아들과 마주앉아 있었다. 그런데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흐리멍텅하게 정신이 없는 듯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섬뜩했다. 내 아들이 아닌 다른 아이를 보는 듯 낯설었다.
그렇다고 마약같은 것을 복용한 것도 아닐텐데 눈에 초점없음이
이상했다.
나는 놀라서 추궁하던 말을 멈추고 내 방에 들어가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무엇을 의미하는 눈물인지도 모를
눈물이 하염없이 흘려내렸다.
그리고 내 자식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은 업장으로 자식을 통해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참회의 기도를 열심히 일심으로 했다.
나는 100일을 정해서 아침에 예불문 천수경 관세음보살보문품
관음정근 발원 반야심경 순으로 기도가 끝나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08번씩 하는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한지 60일 정도 되는 어느 날 아들이 나에게 말을 했다.
“엄마, 너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공부 열심히 해서 부모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아들이 되겠습니다”라고 말이다. 나는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나는 내 업이 많아서 아들이 이렇게 되었구나 생각하고 부처님께
내가 지은 업으로 내 자식들이 불행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
하고 발원하고 열심히 기도정진하고 있다.
기독교 집안이지만 아들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여름불교학교에
보내고 부처님께 다가가게 했다. 엄마의 소망을 마다하지 않고 불교
학교에도 잘 다니던 아들이 순간 나쁜 길로 빠지려함이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을 원망하고 탓하기 보다는 모든게 다 내가 지은 업을 아들을
통해서 받고 있구나 생각했다.
나는 열심히 참회의 기도를 했다. 짧은 날이었지만 나에게 참회의
기도를 하게끔 깨우쳐준 아들은 지금은 학업에 열중하며 착하게
생활하고 있다. 모든게 불보살님의 가피라 생각한다.
이후에도 나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피를 체험했다.
그 체험을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아만심을 버리고 하심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내게 주어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전생에 나의 숙제라는
생각을 하며 기도로써 극복하며 생활하고 있다.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고 밖에서만 찾으려 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해결하려 했던 나는 불법을 만나고부터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불보살님을 의지하여 믿으며 어떠한 어려움도 기도로써 이겨내고자
한다.
마음 한 번 바꾸면 삼라만상이 부처님의 향기로 가득한 것을 모르고 항상
너와 나를 분별하여 무명 속에서 생활하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일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을 새기며 마음 한 번 바꾸니
고통의 괴로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도 전생에 내가 지어놓은 업을 받게 되는구나
생각하고 인욕으로써 참고 견디며 내가 지어놓은 업이 이 고통으로
인해서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만중생의 어버이이신 불보살님이 주신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한다.
모든 중생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다 행복하기를 바라며 나도 열심히
정진할 것을 약속한다.
김갑숙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현대불교신문(www.buddhapia.co.kr) 전재
(2)
꿈에서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받다
글· 김갑숙
제가 佛光불광과 인연이 된 지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불교에 입문하기 훨씬 전부터 「불광」을 구독해왔으니
불광이 저를 부처님 품안으로 이끈 스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연히 군법당에서 불광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니 우연이라기
보다 마음이 스산하여 문득 법당에 새벽기도를 갔다가 불광을
보고 열심히 구독해왔습니다.
저는 불광을 읽으면서 점차 불자가 되어갔고 본격적으로 불교에
입문한 지는 3년쯤 되었습니다. 시댁이 기독교 집안이라 불교에
귀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절에만 가야 부처님을
만난다는 생각을 버리고 생활 속에서 부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며
집에서 열심히 경전을 읽고, 염불하며 기도정진하고자 100일, 21일
기간을 정해놓고 계율을 지키고자 노력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반야심경, 천수경 등… 몇 가지의 경전을 달달 외우게
되었습니다. 뜻은 잘 모르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예불부터 시작하여
아침을 지으면서도 외우고 무엇을 하든지 머리 속에는 나는 불자다라
는 단어를 생각하고 입으로는 경전을 달달 외웠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금강경 사경하고 하루종일 기도가 끝나면 불교에 관한
책을 읽으며 불교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몇 년 부처님의
가피가 계셨음인지 기독교 집안의 장남인 남편이 절에 나가라고 허락
하였습니다.
남편은 지금은 저보다 더 적극적인 불자가 되었으니 그 또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얼마 전 원인 모르게 몹시도 아팠습니다. 머리가 쏟아지는 통증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누워서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위장병까지 나서
음식만 먹었다 하면 소화를 못 시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역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병원을 제집 드나들듯 하였지만 신경성이라고만
하지 뚜렷한 병명이 없었습니다.
약으로만 의지하던 저는 관세음보살님께 매달려 보기로 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어떠한 어려움도 다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생각으론 관세음보살님을 관하고 입으로는 쉬임없이 불렀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님 도와주세요."라구요.
그렇게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관세음보살님께서 저의 옆구리에서 뱀 한 마리를 떼어내려
하는데 그 뱀이 극구 떨어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님께서 힘껏 잡아당겨 떨어지는 뱀을 어느 바위에 던지니
그 바위에 그 뱀이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꿈을 꾸고 난 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며칠 동안이나 저를 괴롭게 만들던 통증이 언제 아팠느냐는
듯 몸이 날아갈 듯 가뿐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고 전 관세음보살님의 몽중가피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픔이 있을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꿈에 관세음보살님만
나타나시면 어려움이나 아픔이 사라졌습니다. 지면 관계상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전 지금도 관음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피와 관세음보살님의 가호하심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제가 불자로서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까요?
불법을 만나기 전에는 항상 제 잘못은 없고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는 듯 생각하고 상대방에 대해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했는데 불법을 만나고부터는 상대방의 잘못보다 나의 업을 생각하게
되었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도 왜 이럴까 하는 마음보다 제 마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시어머님께서도 교회에 나가시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제가
불자로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시어머니께서는 몇 년 전에 제 손을 잡으시면서 우리 집안을 맏며느리인
저에게 다 맡겨도 되겠다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로 큰 힘이 되어주십니다.
일상생활 처처마다 만나는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보답코자
불자로서 하루하루 보람있게 항상 불보살님을 잊지 않고 생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기도정진하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출처: 월간 불광 1999년 5월호
(3)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와 대화가 없었다면…
글·반야행 김갑숙
상대방의 생각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대화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희 가게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섬짓해 집니다. 상대방의 생각보다는 내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자존심이란 씨앗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작은 오해로 며칠을 고민하게 되었던 것임을 깨닫고 나의 어리석음에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 가게를 하면서 생활하는데 지금의 가게에서 8년이나 주인댁과 아무 일 없이 살게 되었고 저희 부부는 열심히 생활한 덕에 아파트를 사게 되었습니다.
아파트로 이사한 지 2년이 되었지만 내 집 장만하고 생활하는 마음의 풍요로움에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저희 부부는 30분 거리의 집과 가게를 왔다갔다 하면서도 피곤한 줄 모르고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작은 오해로 하마터면 가게를 옮기게 될 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요즈음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이유로 저와 아무런 상의 한마디 없이 남편이 일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주인 아저씨와 가게 임대료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임대료를 내려줄 수 없으면 가게를 빼달라고 대책없이 말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저와 남편간에 충분한 상의 뒤에 남편이 결정한 것으로 알고 가게를 빼려고 복덕방에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 놀라서 온몸에 힘이 빠지며 잠을 자지도 못하고 밥을 먹을 수도 없을 정도로 아무런 의욕이 없었습니다.
무엇에 그리도 집착을 하여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의욕 없이 맥이 탁 풀어져서 정신없이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며 '관세음보살님 도와주세요. 저는 절대 가게를 옮길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남편한테 다시 한번 주인아저씨와 충분한 대화를 나눈 다음 결정지으라고 애원하다시피 하였지만 남편의 마음은 자존심 때문인지 단호했습니다.
순간 저는 '부처님 제가 무슨 지은 업이 많아서 갑자기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제가 지은 업이라면 어떠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겠습니다.'라며 참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께 매달렸습니다.
관세음보살님!
관세음보살님께서 저를 외면하시지 않으신다면 저좀 도와주세요.
저는 혼자서 간절히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드리다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길이 있으리란 믿음으로 제가 어려움이 있을 때 어떻게 기도하라 하시며 도움을 주시는 스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스님은 "걱정하지 말고 한 사람이 뒤로 한발 물러서서 다시 한번 잘 얘기해보고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남편과 주인아저씨를 위해 아침, 저녁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세음보살님께 일심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변하지 않는 주인 아저씨와 남편의 팽팽한 자존심의 신경전을 내가 대화로써 풀어보자.' 하고 주인아저씨께 말씀드렸습니다.
아저씨의 속마음은 먼저 대화해주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저씨의 말씀은 제 걱정과 달리 제 생각도 남편생각과 같은 줄 알고 가게를 빼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에요 아저씨! 저는 여기서 가게를 하고 싶습니다." 하였더니 아저씨의 대답은 제 걱정과는 달리 내 보내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 대화로써 상대의 작은 오해가 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팽팽하던 남편의 마음도 순순히 풀어지며 그냥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혹시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망설이던 제 자신의 어리석음에 쓴웃음이 납니다. 혹시 주인 아저씨가 먼저 제가 살게 해달라고 해주길 원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생각도 해 봅니다.
저의 간절한 기도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없었고 제 마음을 털어놓는 대화가 없었다면 저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게 얻는다고 노심초사했겠지요.
이번 일로 저는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고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보다는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는 불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해 봅니다.
관세음보살님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월간불광 99년 12월호
3.
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를 받아 마시고
대구시 동구 덕곡동 대덕화보살님의 수기
저는 오래전부터 대장염을 앓아왔습니다.
빈혈이 심해 병원에 갔다가
궤양성대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원에도 몇 년간 꾸준히 다녔지만
증세는 좋아졌다간 다시 나빠지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얼마간 치료하면 낫는다고 하는데
저는 완치가 되지않고 더 심해졌습니다.
식이요법은 물론 좋다는 약은 다 먹어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빈혈로 밖을 다니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문제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모든 약을 중단하고 음식물로써 영양소를 섭취해야 하는데
몸이 그 음식을 받아주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유산을 권했습니다.
산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면서... .
그러다가 남편이 결혼 전에 가끔씩 나가던 영남불교대학에서
'좋은인연 신문'을 가지고 왔더군요.
집에서 끙끙거리는 내가 안쓰러워 뭐든지
읽을거리를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그 신문을 보다가 신행수기를 써 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도로써 가피를 입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기도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을 졸라 절을 찾았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또 지금 낳지 않으면 언제 또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몸이 더 건강해지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이상하게도 영남불교대학·관음사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불안감이 사라졌습니다.
노천법당에 서 계시는 관세음보살남을 뵙는 순간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습니다.그
러나 남편의 이런저런 이야기와 법당을 둘러보면서
오랫동안 서 있었기 때문인지 곧 어지럼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제 안색을 살핀 남편이 저를 얼른 노천법당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몸에서 힘이 좍 빠져나가고
저는 그만 남편에게 기댄 채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남편이 제 몸을 주무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봐도 숨조차 쉴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언뜻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제 옆에 서계신 관세음보살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흘렀습니다.
'관세음보살님,관세음보살님!
아기를 낳고 싶어요.살려주세요'
관세음보살님이 곁으로 다가오시더니 제 이마를 짚어보시고는
손에 든 감로수병을 천천히 기울였습니다.
갑자기 온몸에 향기로운 감로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저는 감로수에 머리까지 다 잠겨버렸습니다.
감로수는 햇살을 받아 사방으로 무지개 빛을 뿌렸습니다.
잠시 후 관세음보살님이 다가오시더니
다시 이마에 손을 짚으셨습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이제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이 많은 감로수를 저 혼자 다 써버려서 어떡합니까!"
관세음보살님은 환하게 웃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로수는 곧 저의 마음이니 한량없습니다.
이 온 우주,온 법계를 적시고도 수억겁 동안 흐릅니다."
저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그 감로수의 물결 속에서
삼배를 올렸습니다.절을 하면서도
몸이 얼마나 가벼운지 마치 날아갈듯 했습니다.
"여보!"
남편의 절박한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남편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옆에 계시던 회주스님께서 제 이마에 손을 얹고 계셨습니다.
"보살님,괜찮으십니까? 구급차를 불러두었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저는 활짝 웃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무릎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괜찮습니다.스님."
"여보?"
남편이 울먹이며 저를 불렀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를 마시고 완전히 몸을 담그기까지 했어요!"
남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괜찮은지 의심스러워 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보았습니다.
정말 멀쩡했습니다.어지럽거나 구토 증세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신기한지 나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뛰어도 보았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서야 남편은 제가 하는 말을 믿었습니다.
대장염은 물론이고 빈혈과 그 외
합병증도 증세가 완화되어 있었습니다.
생활하는데 조금의 불편도 없었고 약을 먹지 않고도
빈혈이 차츰차츰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2주 쯤 뒤에는 현기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이까지도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후,저는 가끔 회주이신 우학스님의 꿈을 꿉니다.
한번은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웃으시면서
'출연료를 받아야겠구만'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와
우학스님의 은덕에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출처: 인드라망 카페 (cafe.daum.net/indelamang)
4.
관세음 보살님의 가피로 일웅스님의 병이 치료되다.
대구 법흥사 주지로 일웅스님이 계십니다.
지금도 주지스님으로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스님께서 직접 겪으신 체험담입니다.
"기복으로 기도를 한 경우에도 기도에 몰입하여 마음이 비워지고
순수해졌을 때 영험이 나타나는 것이지,
마음속에 뭔가를 바라는 욕심이나 조급함이 가득차 있을 때는
영험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 주변에서는 기도의 영험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스스로 병을 치유한 나(일웅스님)의 체험담을 전해드릴까 합니다.
60세가 가까워지자 기력이 예전같지가 않았습니다.
40대시절 포교에 매진하면서 한편으로는 태고·조계종간의 분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기력을 소진했던 탓인지
피로가 누적되고 쉽게 회복되지가 않았습니다.
몸은 곧 마음을 반영합니다.
몸이라는 글자의 한획만 바꾸면 맘이 되는데 이는 곧 마음의 준말입니다.
예로부터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고 했어요.
자기 몸이라도 함부로 굴리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지요.
종단사태 이후 십수년을 쉴 사이없이 신경을 과도하게 쓰다보니
병이 올 수 밖에요.
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하고 약을 지어 먹어도 차도가 없자
큰병원을 찾게 되었는데 간경화말기증세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승려로 살다가 죽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지막으로 부처님전에 기도나 열심히 하다가 임종을 맞이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부터 관세음보살님께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는데
여러달이 지나면서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밤, 도저히 오늘밤을 넘길수 없겠다 싶어요.
“과거 수억겁을 지나오면서 아프지 않은 때가 있었겠는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것은 오직 마음의 상(相)일 뿐이다’고 한 생각을 돌이켜
몸을 간신히 추스리고는 법당으로 향했습니다.
부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일체가 다 내자신이 지은 업장때문임을
참회하고 성불의 인연짓기를 발원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기도중에 하얀 소복을 입은 부인이 찾아왔는데
안면은 있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요사채로 인도하니
“요즈음 스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어떻습니까?”고 안부를 물어요.”
“아직 많이 아픕니다”고 하니
부인이
“제가 아픈 곳을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해 아픈 곳을 보여주었더니
부인은 손으로 환부를 만지며 약봉지를 꺼내고는 먹기를 권해요.
꼭꼭 씹어서 먹었더니 부인은 “스님, 다음에 또 들리겠습니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갑자기 찬바람이 몸을 감싸는 것 같아 정신을 차려보니 방안이 아니라
법당에 앉아서 추운줄도 모른채 잠시 삼매에 빠져있었더라구요.
아프던 몸이 어느새 말끔하고 머리가 맑아요.
돌아서서 법당안을 둘러보니 부처님뒤 후불탱화에 그려진 백의관음께서
빙그레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랐지요.
비몽사몽간에 본 그 부인의 모습이 바로 백의관음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차츰 병이 나아져서 예전의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내 체험을 얘기했지만 기도의 힘은 상상이상으로 큽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거나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수행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에는 ‘나’라는 아상이 개입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상을 제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나무 관세음 보살..
5.
낭월 (朗月)스님의 관음기도 영험담
(낭월스님 글)
가끔은 방문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운(運)도 불리하고 여건도 좋지 않으면
종종 등장하는 것이 기도를 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하면 과연 "효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반문을 받는 것도
당연한 코스(?)라고 해야 하겠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대한 낭월의 경험담을 들려 드림으로써
나름대로의 소견을 밝히도록 할 참이다.
물론 실화일 뿐이며 단 한 글자도 조작은 되지 않았다는 점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1. 발단
낭월의 나이 20세였다.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 해였다고만 말씀을 드린다.
그 해의 간지는 丁巳년이었고, 1977년이었기도 하다.
그러니까 실제 나이로는 21살이었다고 해야 하겠다.
어느 봄날 아침에 자고 났는데, 천지가 온통 붉은 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물은 가까이는 보이고 멀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3~4일이 지나면서 점차로 그 붉은 기운은 짙어지더니
마침내는 아무 것도 식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는 고사하고 자신의 밥그릇을 찾아 먹기도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대구에 있는 동산병원이라고 하는 종합병원을 찾았다.
하루 종일 검사를 한 다음에 내린 결론은 '失明'이었다.
시력을 쓸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그리고는 끝이다.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으니 공부는 끝났고 자신의 생계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하였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자신이 건강할 적에는 부모형제가 필요 없다고
큰소리 뻥뻥 치면서 잘도 돌아다니지만, 막상 병이 들면 아무 곳에서도 오라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계시는 집으로 가서 민간약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병명은 '초자체혼탁'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대의 의술로는 치료를 할 방법이 없다고 하는
답이 명확하게 나왔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마음에 대해서 벗님은 생각이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입장에서는 절망이라고 밖에 드릴 말씀이 없었다.
2.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기도 동기
막판에 몰리면 지푸라기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낭월에게 주어진 것은 기도를 하는 것밖에 달리 답이 없었다.
그대로 머물러 있기보다는 기도라도 해야 뭔가 숨통이 트일 것으로 생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듬거리면서 찾아간 곳은 동해의 양양 낙산사였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기도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막판에서나마 마지막 기도를 한번 해보고 세상을 하직하고 몸을 바꿔서
다시 공부를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많이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비록 경치는 보이지 않았지만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낙산사에 도착을 했다. 시간은 저녁 11시경이었다.
원주 스님을 찾았더니 밤중에 중이 돌아다닌다고 푸념을 하셨다.
이해는 되지만 낭월의 상황은 그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죄송하기만 했다.
3. 첫 번째의 힌트 '감이 좋았다'
새벽에 꿈을 꿨다. 꿈에도 낭월이 낙산사로 기도를 하러 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절 안에서 늙은 여스님이 동자를 데리고
바삐 어디론가 출장을 가시느라고 나오고 있었다. 합장을 했다.
그래도 꿈에는 사물이 바로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 비구니 스님이 흘낏 보시더니 걸음을 멈추고 하시는 말씀.
"기도하러 왔구만? 하고 있어! 난 좀 급히 다녀올 데가 있네~!"
"예, 다녀오십시오."
그 뿐이다. 비구니 스님이 사라진 곳을 멀거니 바라다보다가 꿈을 깼다.
그리고 그 감은 매우 좋았다.
몇 달 동안의 암흑에서 빛을 발견할 가망성을 얻었다고 해야 하겠다.
아마도 그 비구니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었을 것이라고 저 좋을 대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는 주지스님을 찾아서 기도를 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게 될 줄은
이미 꿈을 깨고 나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100일간의 기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3. 하루 16시간의 정진
막판에서 할 일은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절실히 느끼고 또 깨달았다.
잠자는 시간 6시간과 공양시간 3시간을 빼고는 모두 기도에 매달렸다.
그야말로 자나깨나 '관세음보살'이었다. 그렇게 집중이 잘 될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하겠다.
잡념이 없어진다는 것은 큰 일을 당하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잡념이 많다는 말은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망상은 한가로움의 푸념인 것이다.
참으로 절박한 막다른 길에서는 오로지 일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고 해도
아마 실감이 드실 것이다. 그 해는 낙산사의 해수관음보살을 점안한 해인 것으로도
기억이 된다. 낭월의 기도는 낙엽도 다 지고 난 늦가을에 시작되었다.
4. 스님들의 조언 "무리하지 말아라"
당시에 함께 살았던 대중 스님들이 6명인가 되었는데 하나같이 낭월의 기도를
염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도를 시작한지가 며칠이나 되었을까 싶은 날에
책임자 되시는 분이 조용히 불러서 말씀하셨다.
"스님. 고생이 많소. 근데 지금 스님의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대중 스님들이 불안해하고 있구랴. 왜냐면 기도하다가 쓰러지겠다는 염려로 인해서요.
그러니 매일 8시간만 법당에서 하고 나머지는 스스로 조용하게 한다면 대중도 편안하고
본인은 자신의 기도가 법당에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닌 줄은 알 것이므로
그 방법을 택해 보도록 하시오."
그 말을 듣고 보니 또한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불안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따르기로 했다. 그렇거나 말거나 목탁을 두드리면서 하는 기도 시간만
줄었다는 것이지 여전히 목숨을 달고 관세음보살에 매달렸다.
물론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그래도 새벽에 눈을 뜨면 어떤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로 불빛을 바라다 봤고,
여전히 같은 상태에서 실망감을 갖게 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5. 잊지 못할 기억을 갖는 꿈
약 두 달 정도가 지났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기도는 순일하게 진행이 되었다. 기도를 마치고는 생을 마감하겠다는 생각(적어도 당시에는 그랬다)으로 인해서
담담하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다음 생의 준비를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 나가던 상황이었다. 그 어느 날 밤에 꿈을 한 자리 얻었다. 지금도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낭월이 동해안 유람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 지역의 사령관 댁을 발견하고는
방문을 하였다. 들렸으니 인사를 하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인해서이다.
그 집은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한참 올라가서 있었다. 계곡이 가팔랐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초가집이 있었고, 문안을 드리고 절을 세 번했다.
물론 속인에게 절을 세 번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지만, 당시는 그렇게 했다.
그러자 그 분이 하는 말씀.
"자, 저쪽 밝은 데로 가시지." 해서 창가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해맑고 따스한 햇살이 쏘여들었다.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그래 혹 나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지."
"예 실은 전입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 어디 보세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민 것은 예전에 동산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였다.
그는 진단서는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질문만 했다.
"거기에 이러이러한 항목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그럼 저러저러한 항목은 있나?"
"그러한 항목도 없는데요."
"그럼 염려할 것 없네. 내가 해결해 줌세."
"예, 고맙습니다."』
이것이 꿈의 전부였다. 그리고 잠에서 깨여나니 새벽 1시 반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아무리 벗님이 둔하다고 해도 이게 무슨 메시지인지는 감이 잡히실 것으로 짐작을 한다.
이제 눈을 고쳐주겠다는 암시가 아니고 뭐겠느냔 말이다.
그대로 가사장삼을 걸치고 법당으로 가서는 목이 터져라 하고 관세음보살을 불러댔다.
그리고 아침 공양을 하는데 대중들이 낭월의 눈치를 보면서
분위기가 술렁술렁함을 느꼈다. 어느 스님이 말했다.
"기도를 하시다가 오늘 새벽에는 다른 것을 하시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 말은 혹시 기도하다가 돌아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서 의사를 타진해 보는 것으로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말씀 드렸다.
"아, 대중 스님들께 미안합니다. 기도가 잘 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중은 함께 기뻐해 줬다.
6. 한 겹씩 벗겨지는 혈의 장막
그렇게도 세상을 붉은 천지로 만들었던 짙은 색이 그 후로 조금씩조금씩 옅어져갔다.
그 환희심을 벗님도 이해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보름 정도가 지나자
저 멀리 안개 속으로 느꼈던 사물들이 어느 정도 식별을 할 수가 있는 정도가 되었다.
비로소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뜨면 매일 쳐다보던
전등의 유리 윤곽선이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 무렵의 마음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7. 묵언(默言) 기도
100일 기도의 회향을 3주일 남겨놓고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묵언을 하기로 했다.
묵언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대중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대중은 당연히 허락을 했고, 그래서 이제는 아무와도 말을 나눌 필요가 없이 오로지
기도에만 전념을 했다. 약 90일 정도가 경과하자 이번에는 신문지의 글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도는 더욱 흥겹게 진행이 되었다. 밖에서 산책을 하는데 관광객들이 자꾸 질문을 하는 것이 귀찮아서 '묵언'이라고 쓴 패를 가슴 앞에 달았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그 아래에다가 '말못함'이라는 추가문구를 넣었다. 비로소 효과가 있었다.
"에구... 쯧쯧... 벙어리 스님이네...."
"나이도 젊은데 우짜다가....."
"얼굴도 참하구만..... 안되었다..... 쯧쯧...."
8. 회향
드디어 백일 기도를 마쳤다. 전날 내린 눈이 대지를 하얗게 바꿨고,
그 빛은 반사가 되어서 법당을 환하게 비췄다.
그러나 낭월이 보기에는 법당의 관세음보살님이 방광을 하시는 것으로만 보였다.
참으로 원만한 성취가 된 셈이다.
9. 후기
그로부터 3년인가 지나서 다시 낙산사를 찾았다.
그 절의 스님이 관광객을 상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3년 전에 눈먼 스님도 여기에서 기도를 해서 눈이 밝아졌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혼자서만 미소를 지었다는 것을 그 스님은 모를 것이다.
10. 기도 권유
이러한 기도의 경험을 갖고 있는 낭월이다.
기도를 하면 소원을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은 이렇게 경험으로 확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통일이 되어서 소원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반드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관세음보살이 되겠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절대자들도 절대로 없다고 고집을 부릴 수가 없는 것도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이고, 寅木대운의 丁巳년의 흉함도 戊午년의 고통도
기도를 통해서 말끔히 정돈을 했다는 것도 노력은 기적을 만든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래서 낭월이 방문자에게 기도를 하시라는 권유는 그냥 단순히 말이 궁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글을 읽으시는 벗님은 아실 것이다.
물론 운이 흉할 적에 권유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1. 그 때의 간절함은 어디로 가고.....
기도를 할 적에는 눈만 보이면 쓸데없는 것은 절대로 보지 않고
오로지 경전만 보도록 할 것이며, 열심히 공부해서 많은 중생들에게
빛이 되도록 하겠다는 서약을 백천번도 더 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를 관세음보살 님이 보신다면 아무래도
한숨을 쉬시지나 않을까 싶다.
그래도 단 한가지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저 어디엔가 '그 분'은 반드시 계시고,
언제라도 온몸으로 부른다면 답을 들을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렇게 더불어 고민을 나누면서도 그러한 절박함을 경험했기에
어쩌면 더욱 절실하게 이해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역경이 반드시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고,
인생의 성장 과정에서 어쩌면 한번 정도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여하튼 일생 눈으로 인해서 겪는 고통이 많은 것은
아무래도 전생에 살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
※ 낭월 스님은 현재 계룡산(鷄龍山)의 남쪽 감로사에 주석하고 계십니다.
6.
관세음보살의 몽중가피
-일타스님의 생활속의 기도법-
꿈은 우리 생활의 그림자요 마음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불보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면
낮에 먹은 마음이 그대로 연장되어 밤의 꿈 가운데
나타난다. 이것이 몽중가피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소망이 꼭 이룩되게 해주십사' 하고
지극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그 사람의 소망에 부응하는 편지 한 장을 주거나,
약을 주거나, 차를 한 잔 주는 꿈을 꾸게 된다.
이와 같은 꿈을 꾸면
자기의 소망은 그대로 성취되는데,
이를 일러 관세음보살의 몽중가피라고 한다.
곧 꿈속에서 받는 통지서는 합격 통지서요,
차를 한 잔 받아 마시거나 청심환 한 알을
얻어먹으면 몸이 좋아진다는 징조이다.
꿈 가운데 열쇠를 하나 받으면 이튿날
생각지도 않던 돈이 들어오게 된다.
불가(佛家)에 전해지고 있는 기도 영험담 중에는
삼종가피 중 이 몽중가피가 가장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약 1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서울 미아리에 40대의 보살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전생에 닦은 복이 많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유복하게 자랐고
돈도 잘 벌고 가정도 잘 돌보는 남편을 만났으며,
아이들도 착실하게 공부를 잘하여 근심 없이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입안이 허는 병이 생겼다.
한두 군데도 아니고 온 입안이 헐어서 음식은커녕
물조차 먹기 힘든 지경이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고,
한의원을 찾아가니
'입안이 허는 병은 위장에서 온다'고 하며
위장약을 지어 주었으나 역시 효험이 없었다.
설상가상이라 더니,
마침내는 혀를 움직일 때마다 입안이 아파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몰골은 여위어만 갔고,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신경만 날카로워지게 되었다.
남편의 자상한 보살핌,
아이들의 재롱도 귀찮게 느껴질 뿐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고 있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집 가까이 있는 절을 찾아갔다.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살려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으나,
엎드리면 이빨이 다 쏟아지는 것 같아 절도 할 수 없었다.
입안이 퉁퉁 붓고 헐어서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가만히 앉아 부처님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빌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제 입병 좀 낫게 해주십시오."
온 종일 부처님만 쳐다보면서 이렇게 한마음으로
빌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기를 며칠, 그녀는 꿈을 꾸었다.
그녀가 열심히 부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불단을 내려 오셨다.
그리고는 다기(茶器)에 담겨 있는 물을 찻잔에 가득 따라 주셨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마시려는데 부처님께서 일러주셨다.
"그냥 삼키지 말고 입안에서 우물우물하다 넘겨라."
그녀는 시키는 대로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거짓 말처럼 입병이 말끔히 나아 있었다.
매운 음식, 짠 음식,
그 어떠한 것을 먹어도 입안이 아프지 않았다.
'세상에 어찌 이토록 신기한 일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감격하여 불교 신문에 이 사실을 투고하였다.
글 솜씨는 서툴지만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가피력을 알리고자 투고하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다급한 일을 당한 불자라면
몽중가피를 입을 때까지 일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꼭 소리를 내어 염불을 해야만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 念'자 염불(念佛). 꼭 입으로 부르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열심히 생각하면 그것이 참된 염불이요,
생각하고 매달리는 마음이 간절하면
부처님과 하나가 되어 저절로 가피를 입게 되는 것이다.
7.
백의관음의 가피를 입다- 김 태환스님(태고종 보광사 주지스님)
불교는 소원성취의 길 - 태환스님(보광사 주지)
(1) 큰 병에 걸리다
한 평생 살도록 감기 한번 앓은 적이 없어 병이라고는 모르고 지냈다. 학생 때부터 여러 가지 운동을 활발히 했었고, 출가한 후에는 참선 수행을 꾸준히 했으므로 도대체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체험하지 못하고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작년 12월25일, 의례 하듯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을 올리고 아령운동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을 가고 싶어 달려갔다.
용변을 마치고 나오려 하는데, 오른쪽 가슴에서 무슨 숨기운이 곧바로 치솟더니 오른쪽머리에 숨구멍이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스런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원래 건강하여 이 나이까지 버스를 타더라도 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었고, 걸음도 빨라 젊은 사람도 따라오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숨길이 한번에 몸에 뻗친 다음부터는 걸음이 불편해지고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1월3일 '간염예방접종주사'를 맞으러 우리 사찰 신도네 병원인 시흥의 김택준내과를 가게되었다. 그런데 의사가 "스님, 전에는 참 건강해 보이셨는데, 오늘 뵈니 어째 숨소리도 이상하네요." 하기에 "내가 뭐 이상하오? 난 건강합니다." 하였다.
그래도 의사는 "스님, 아무래도 이상하니 진찰 좀 해봅시다."하곤 X레이 검사를 해보더니 '기흉(氣胸)'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폐에 구멍이 두 군데 나고 제 위치를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즉시 입원을 권했지만 "내가 무슨 입원이냐?"라고 일축하곤 귀사 하였다. 그러나 사찰의 보살한테 의사가 몇 번이고 전화를 하여 입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몇 번 식구들과 실갱이를 벌리다 결국 병원에 이끌려 갔다. 그래서 1월5일 한강성심병원 819호실에 입원하였는데, 진찰을 해보더니 오후에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른쪽 가슴을 마취시켜 구멍을 내더니 한 7cm가량의 관(?)같은 것을 넣으니 아주 시원해지는 것이었다.
폐와 근육 사이의 불필요한 바람을 뺐으니 이제 원만하게 붙어 이상이 없으리라 하였다. 그후 며칠간 경과를 진찰하더니, 8일에는 뭔가 굳어지며 이상이 있다하더니 11일에는 물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었다. 물을 빼는 치료를 며칠 하더니, 이 치료 갖곤 안되니 권위자인 홍박사를 찾아 재수술을 받아야 한다 하였다. 17일엔 옆구리에 물주머니를 달고 강남성심병원으로 옮겨서 수술에 임하게 되었다. 19일엔 정밀검사를 한 다음 일주일 후인 24일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2)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다
물론 평상시에 늘 염하던 '관세음보살'을 불러왔지만, 수술실로 가면서부터는 더욱 일심으로 불렀다. 부르다 거꾸러져 죽어버리면 몰라도, 숨이 붙어 있는 한은 쉼이 없이 염불하리라 작정하였다.
항시 관음보살 님의 대자대비에 젖어서 살아온 탓인지, 마음이 동요되거나 불안한 것을 몰랐다. "나에게 세상 인연이 다했으면 관음보살님 께서 숨을 걷어 가실 것이고, 만일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으면 뭔가 영험을 보이시겠지. 알아서 하십쇼." 라며 오로지 관음보살 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9시에 수술을 시작하려는데, 비몽사몽간에 백의관음이 보이는 것이었다. 하얀 장삼도포에 머리와 얼굴도 온통 새하얀 보살님 주변에 여섯의 동자들이 있는데, 평소에 내가 지극히 좋아하던 연꽃이 쑥 치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활짝핀 연꽃 아래로 동자들이 모여들자 연의 뿌리가 또한 땅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백의관음님이 "산삼, 산삼, 산삼!"하고 '산삼'소리를 세 번 하는 것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그 소리까지였다. 그 이후 난 마취 상태로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장장 8시간의 대수술이 진행되었다. 이런 경우 수술 후에 몇시간이고 감각 없이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한 이틀간 정신을 못 차린다 하는데, 수술이 딱 끝나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수술 안 하십니까?" 물으니, 깜짝 놀란 의사는 "수술 끝났습니다."고 얼떨결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의사들 모두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라며 놀라 마지않았다. 갈증이 나서 물을 찾으니 물을 주기에 시원스레 마셨다. 마신 것이 있으니 얼마 후엔 하기 마련.
소변을 보겠다고 하니 변기를 받쳐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들어 누워서는 용변을 못 보니,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였다. 간호사가 한사코 변기를 받치며 재촉하고 의사들이 권하였지만,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는 소변보기 싫다고 우겼다.
그때가 25일 아침이었는데, 내 고집에 고개를 흔들어 대던 의사 한사람이 "정 일어나려면 일어나쇼!"라고 퉁명스레 내뱉었다. 괜히 고집세우는 것이지 어찌 상체의 반을 절개한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겠냐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의사의 말을 그대로 믿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소피를 시원스레 보았다.
침대에 돌아오니 의사와 간호사가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뭔가 다릅니다."고 한 의사는 입을 열었다. 나중에 다른 환자들의 상태를 듣고는, 이미 수술 전에 백의관음께서 현신 하시어 수술 내내 가피력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더욱 관세음의 영험에 감격하여 무수히 감사의 염불을 하였다. 아마도 나에겐 이 세상에서 보살 행을 더하라고, 자비하신 모습을 보이신 것임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나 퇴원할 수 있느냐고 홍박사에게 물으니, 대개 1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니 내년 2월쯤에나 퇴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입원4주만인 2월22일에 퇴원할 수 있었다.
(3) 소원성취의 조건
육체는 숨넘어가면 썩어 없어지는,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어서, 이것이 영험을 나타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험을 일으키고 무엇이 생명의 주인공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인 불성(佛性)인 것이다. 산하대지와 일월성신 모두가 실로 부처님 생명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주인공을 파악하는 일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밭(心田)을 가는 수행을 해야한다. 그리 하여 자신의 참된 생명가치를 깨달아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경지를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비로소 모든 소원은 남김없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나 꼭 출가하여 사찰에서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항상 자기의 본래 생명인 관세음보살 님을 성취되는 것이다. 출세간 적인 일의 성취는 물론, 우리의 평범한 소원도 성취시키는 것이 불교인 것이다
8.
삼풍 붕괴 현장의 기적 같은 생환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순식간에 일어난 서울 서초동 삼풍 백화점의
붕괴사고는 온 나라를 경악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5백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인재 서울의 한 최고급 백화점의 붕괴가 가져다 준
충격!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방향을 잃은 듯 애만 태워야 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준 기적이 있었습니다.
사지(死地)에서 230여 시간 만에 구출되어 첫 번째 기적을 연출한
20세의 최명석군, 285시간만에 극적으로 생환한 18세의 유지환양,
19세 소녀의 힘으로 죽음과의 싸움에서 당당히 승리하고
16여일 만인 377시간만에 제3의 기적을 일궈낸 박승현양.
그런데 이들의 기적적인 생환 뒤에 하나같이 기도와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특히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15일 17시간을 버틴 박승현 양의 생존은
우리 불자들에게 큰 교훈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간밤에 놀러온 고등학교 동창 정원이와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다 새벽에야
잠이 든 탓인지 승현이가 6월 29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몸이
찌뿌등한 상태였습니다. 그날은 원래 비번이었지만,
집안 일이 있다는 선희 언니와 근무 날짜를 교대하였던 것입니다.
‘바꾸지 말 것을 그랬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친구 정원이와
삼풍백화점으로 함께 출발했습니다.
오후 5시 50분. 정원이와 항께 지하 3층 식당에서 간식을 먹은 승현이는
지하 1층의 아동복 코너로 갔고,
정원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매장 으로 향했습니다.
승현이가 매장안의 카운터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바닥이 쿵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리더니 천정에 붙어 있는
벽돌들이 눈앞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승현아! 피해!"
누군가가 소리를 쳤지만 바닥이 흔들리고 먼지가 앞을 가려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물탱크가 뒷머리를 때려 승현이는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은 깜깜했고 뒷머리에서는 피가 흘러 뜨뜻했습니다.
옷을 찢어 머리에 댄 승현이가 조심스레 손발을 뻗어 보았더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몸을 옆으로 굴려 보니
두세 바퀴 구를 정도의 여유는 있었습니다.
사방에서는 절규와 신음소리가 들렸고, 오른쪽에서는 같은 매장에서
근무하는 언니의 비명소리도 들렸습니다.
머리 뒤에서도 옆 매장에서 근무하는 언니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서로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바닥을 만져 보니 물이 고여 있었지만
심한 냄새가 나는 녹물이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원한 포도주스가 내내 승현이의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같은 매장에 근무하는 언니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언니 ?
그러나 옆 매장의 언니만 힘없는 신음소리를 낼 뿐 같은
매장 언니의 대답은 영영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승현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옆 매장 언니의 꺼져가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도 곧 죽을 것 같애----
"언니, 언니 !"
그러나 정적뿐이었습니다
그때 포크레인이 머리 위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습니다.
'누가 구하러 왔는가 보다
입이 바짝 탔습니다. 그러나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오히려 양쪽 옆의 콘크리트 더미가 밀려들면서
팔을 제대로 뻗을 수도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른쪽 무릎에도 콘크리트 더미가 밀려들어 무릎을 펴기도 힘들었습니다.
갑자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습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돼. 나는 꼭 살아야해.
몇 달 전 장사가 안 된다고 식당을 그만둔 엄마 아빠를 위해서도,,,...
동시에 승현이는 평소 다녔던 금용사 주지 월공스님의 법문이 떠올랐습니다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송 하세요.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소원을 천수천안(千手千眼),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보살펴 주십니다."
승현이는 그때부터 관세음보살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찾았습니다.
한편, 승현이의 어머니 고순영 보살도 낮에는 서울교육대학교에 설치된
실종자 가족본부 임시 법당에서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불렀고,
밤에는 금용사를 찾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불공을 드렸습니다.
안팎에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시간의 흐름마저
잊어버린 승현이가 갈증과 허기로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어 올 때쯤이었습니다.
깜빡 잠이 든 승현이에게 연초록빛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는
숲이 보였습니다. 동시에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람도 불어왔습니다.
타는 목을 축일 수 있는 감로수도 거북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승현이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눈에 익은 그곳은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자주 찾았던 월계동 금용사였습니다.
승현이는 평소에 하던 것처럼 법당을 향해 합장을 했습니다.
그때 법당으로부터 노스님 한 분이 천천히 걸어나와,
너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무언가를 승현이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빨간 사과였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눈을 뜨자 사과는 손에 없었고, 잠깐의 자유는 꿈이었습니다.
갑자기 위에서 "탕탕탕" 소리가 들렸습니다.
때마침 지하 1,2층 잔해 제거를 하던 안양소방서 119구조대원들이
잔해더미 속에서 높이 10cm, 너비 30cm가량의 구멍을 발견하고,
구멍을 넓히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순간 승현이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살려 주세요.
이때가 7월 15일 오전 10시 58분.생존자 확인 무전이 지휘본부에 전달되었고
현장과 온 나라는 환호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발견된 지 불과 17분만에 구조되어 승현이는 병원 으로 향했습니다.
15일 17시간 만에 구출되어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겨진 승현이를 진찰한 의사들은,
"맥박이 조금 빠를 뿐, 호흡과 혈압은 거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의료진들은 승현이가 매몰된 후 구조될 때까지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의학적으로 볼 때 물을 전혀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보통 5--7일. 길게 잡아야 7--10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권위 있는 의사들은 한결 같이 말했습니다.
"오래 물을 먹지 않아 탈수현상이 일어나면 콩팥 기능에 이상이
먼저 발생하는데, 박승현 양은 콩팥 기능에 별로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물을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바,
만일 사실이라면 놀라운 기적으로,의학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박승현 양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 같은 생환! 과연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관세음보살의 가피요 불보살의 불가사의한 신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첫 번째 기적을 보인 최명석 군의 어머니도 절에서 불공을 드리는 심정으로
간절히 관세음보살을 불렀고, 유지환 양의 어머니 정광임 보살도 낮에는
자원봉사자, 밤에는 중풍으로 입원한 남편을 간호하면서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였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염송을 통하여 이룩된 이 세 기적은 불심(佛心),모심의 승리요,
온 국민의 승리로서 영원히 기록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9.
출처: 생활속의 관음경 (우룡큰스님저, 도서출판 효림발행)
몇 년전 90세 가까운 나이로 돌아가신 덕운성 보살은 50대 중반에 자궁암에 걸렸습니다. 부잣집 외동 아들인 남편이 평생을 돈 쓰는 재미로 살면서 남편이 물려받은 재산은 물론 처갓집 재산까지 모두 탕진하고 죽었으므로, 덕운성 보살은 날품팔이를 하며 혼자 1남 2녀를 키웠습니다.
"말기 자궁암입니다. 앞으로 3개월정도는 살 수 있으니 주변을 정리하시지요."
대구 동산병원의 의사로부터 이 말을 들은 것은 그녀의 두 딸은 결혼을 하고 아들은 중앙대학교 전자공학과 2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자궁암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30여년 전에는 말기 자궁암이 반드시 죽는 병에 속하였기에, 덕운성 보살에게는 의사의 말이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습니다. 서울로 시집을 간 큰 딸에게 울면서 사실을 알리자, 큰 딸은 포기할 수 없다며 세브란스 병원으로 모셔가 다시 진찰을 하게 했습니다.
"3달은 너무 성급한 진단입니다. 그러나 6개월 이상은 보장하기 힘듭니다.""
그녀는 의사를 붙들고 울면서 사정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를 2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제 아들이 대학 2학년이니, 졸업할 때까지만 살게 해주십시오."
의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단칸 셋방이 있는 김천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는 매달릴 데가 없었습니다. 오직 한 분, 관세음보살님 뿐이었습니다.
기도비가 없었던 그녀는 집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저녁은 물론이요 틈만 나면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일기도 마지막 날 새벽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녀는 김천 청암사 극락암에 모셔진 42수관세음보살상(지금은 도난 당하였음)앞에서 끝도 없이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백발의 노스님 한 분이 불단 앞에 나타나 약 세 봉지를 주셨습니다. 엉겁결에 무릎으로 기어가 약봉지를 받았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먹어라."
"물이 없습니다."
그러자 노스님은 부처님 앞에 놓인 다기물을 손바닥에 부어주셨고, 그 물로 한 봉지를 먹고 나자 또 물을 부어주며 말했습니다.
"또 먹어라."
"마저 먹어라."
세 봉지째 약을 먹었을 때 어떻게나 거슬리든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꿈을 깨고나서도 그 약 냄새는 그녀의 몸과 집안에 진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은 그녀는 말기 자궁암이 완전히 나아 아들의 대학 졸업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30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10.
대원심 보살 아들의 병을 완치시켜주신 관세음보살
안성에 사는 대원심 보살은 아들이 위암말기로 진단되어 죽음을 선고받자 괴로움을 가눌 길이 없어 청룡사의 관세음보살을 찾아갔다. 이미 80세가 넘은 노보살인지라 절을 올리기 힘든 처지였다. 대원심 보살은 다만 가만히 벽에 기대어 앉아 관세음보살을 우러러보며 念(염)하였다.
"관세음보살님,부모가 죽은 다음 자식이 죽는 것이 이 세상의 순리이온데, 저의 업이 얼마나 중하길래 이렇게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보아야 하나이까?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님! 제발 아들을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3일 밤낮을 아들의 병이 기적처럼 쾌유되기를 기원하며 관세음보살을 찾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때 스님 한 분이 활짝 핀 연꽃 한송이를 대원심보살에게 주었다. 꿈을 꾼 것이었다.
보살은 상서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과 함께 치유불능이라는 진단을 했던 서울대학교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재검사결과 위암의 흔적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담당의사는 있을 수 없는 불가사의라며 매우 신기해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이 아들의 병을 완치시킨 것이었다.
출처: 도서출판 효림 관음신앙. 관음기도법 김 현준저
11.
생사의 절망 끝에도 관음은 계셨습니다/신화규(가정주부)
출처: 월간 불광(www.bulkwang.org)
내소사에 들어서는 순간,
천여 년을 거슬러 올라온 것처럼 세상살이의 시끄러움은 없다.
일주문을 지남과 동시에 날려 보내지 않았나 싶다.
이 곳의 모든 것들은 기본이 몇 백년이다.
그래서 그런지 낯설지 않고 정다운 느낌,
오래 전에 와 봤던 곳에 다시 온 느낌이다.
혹시 전생에 이 곳에서 수행하는 복을 누리지는 않았었는지….
유명한 대웅전의 문살무늬,
천년된 나무의 웅장함,
그런 것들을 일일이 따지지 않더라도 그냥 편안하고 좋은 느낌,
이 자리가 바로 내 자리가 아닐까 싶다.
도량석 도시는 스님의 목탁소리에 잠을 깨어
상쾌한 공기와 천년가람의 숨결을 느끼며 들어선
빛바랜 대웅전의 새벽예불.
수술 후 처음으로 혼자 나선 여행길이다.
1.극심한 두통…알고보니 뇌종양
포교사가 된 지 1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제대로 되지 않은 공부에
사람들 앞에서 포교사라고 말하기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끝이 없기만 한 부처님 공부,
하지만 운명적인 이 길이기에 나는 기꺼이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공부하고 싶다.
관세음보살님께서 다시 주신 나머지 인생은 회향하는 의미로
한 알의 의미 있는 씨앗의 역할을 하고 싶다.
6년 전 전철역 계단에서 갑자기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풀려
굴러 떨어진 후로 매일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너무 심해서 한 움큼의 진통제로 생활하다가 그것도 안 되자
새벽이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술을 마시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병명을 몰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직전,
MRI를 찍고서야 뇌종양이라는 병으로 판명이 되었다.
급히 수술하지 않으면 혹이 너무 커서 죽는다는
담당의사의 말에 그냥 담담하게 말했다.
“선생님 수술 한 번 하나요? 아니면 두 번 하나요?”
뇌수술은 성공해도 기본이 두 번이고 두 번 하고도 결국은
죽은 가까운 친구의 남편을 지켜보았었기 때문에
두 번의 수술이라면 하지 않고 그냥 전국에 있는
기도처에서 원 없이 기도나 하다 죽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 당시의 상황은 혹이 너무 커서 신경을 누르기 때문에
모든 기능이 정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먹을 수도 없고 대소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됐었다.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걸을 수도, 집안일도 할 수 없었다.
옷을 뒤집어 입거나 거꾸로 입어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판단이 안 될 정도로 심한 상태였다.
그 때의 심정으로는 그냥 정확한 병명을 알았으니 됐고,
그냥 그대로 죽어도 이 고통만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이곳에서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노느니 염불한다고 108염주를 손에 들고 돌리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님 살려 주세요’라는 말도
‘아이들을 부탁해요’라는 원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무심의 마음으로 ‘저는 인연 따라 따르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 뜻대로 하세요.’하는 마음으로 염주를 계속 돌렸다.
그 순간 가슴 속으로 치닫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가슴가득 차지한 그 무엇! 그 후로는 두려움도 고통도 없어졌다.
막연한 두려움에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가족들이 계속 설득하고 있던 중이었다.
제일 두려운 것은 수술 후 얼마일지 모르는 막연한 시간 동안
여러모로 나로 인해 고통 받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그냥 이대로 조용히 눈감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면'하는 생각이었다.
염주를 돌리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관세음보살님께서 금빛 찬란하게 나타나셔서
땀을 흘리며 더워서 쩔쩔매는 나에게 시원한 냉기를 주시며,
“덥지? 내가 시원하게 해줄게 걱정하지 마라.”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었다.
그 후론 아무 두려움이 없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다.
“관음보살님, 뜻대로 하세요”
아이들 선생님께도 전화해서 숙제나 준비물이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엄마가 없어서 그러니 이해 해달라는 부탁까지 해놓고
이것저것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빈 자리를
최대한 줄이려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깎았지만 주위사람들에게
“두상이 이쁘냐, 미우냐?”고 농담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다니던 절의 스님과 신도들이 오셔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할지 몰라
쩔쩔매실 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반드시 살 거고
다시 살아나면 부처님 일을 할 거예요.”하고 말씀드렸더니,
“보살님은 앞으로 공부 많이 하실 거예요.”하신다.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그 때는 몰랐었다.
“신화규씨 정신이 드세요.
제 말을 알아 들으시겠으면 눈을 떠 보세요.”
그 말을 듣고 눈을 떴다.
여러 줄로 묶여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서있는 많은 사람들,
담당의사들과 간호사, 가족들이었다.
눈을 뜬 나에게 의사선생님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가’하는 판단을 여러 가지로 시험해보았다.
‘이름이 뭐라든가,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자든가,
왼발을 들어 보라든가’라는 물음에 평상시와 같이 웃으면서
자신 있게 대답하고 하라는 대로 정확하게 하자
모두들 살았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그 때까지는 그냥 원래 예상 했던 대로 6시간의 수술 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곳은 신경외과 중환자실이었고 나는 20시간의 생사를 가르는
대수술 끝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감동은 남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말로는 예상된 6시간이 지나고 12시간이 지나도
수술이 끝났다는 불은 안 꺼지고 아침 8시에
첫 번째로 들어간 사람이 저녁때가 되도 소식이 없더니
새벽이 되자 담당의사가 가족들을 소집해놓고
지혈이 안 되니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은 달리 방법이 없어 자기는 부처님도 믿지 않고
하나님도 안 믿고 기도 할 데도 없어서 나에게,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은 할 수 있으니
당신의 의지로 꼭 일어나”라고 기도했단다.
2.수술대 위의 기적
수혈이 40봉 이상은 위험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서
계속 70봉 정도의 수혈을 하고 있을 때 지혈이 되었고,
의사선생님은 자기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서 기다렸을 뿐
말로만 듣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놀라워하셨다.
내가 부처님을 믿는 것을 모르니까 남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게 정말 있나 보다고 해서, 나는 조용히 자신 있게
“이건 신의 기적이 아니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천주교를 믿는 시어머님께도 기독교를 믿는 친구에게도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고….
3.관세음보살님 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
나는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뇌수술 후의 중환자실은 마치 아비지옥을 연상할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의가 혼수상태의 환자들로 소리소리 지르고 심지어는 욕을 하고
몸부림 칠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의가 진통제로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아프지 않다는 사실이다.
수술실에서 옮겨진 뒤로 진통제 한 대 맞지 않고
삼매에 든 것 같은 편안한 마음과 표정으로 있었다.
4.아비규환의 중환자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의 생활은 시작됐고 그 곳에서
산소호흡기와 여러 개의 줄로 이어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새벽예불과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 일뿐이었다.
하루에 적어도 두 명씩은 죽어나가고,
새로 수술하고 와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몇 달째 정신이 안 들어 울면서 하소연하는 보호자들,
나는 지옥을 미리 와본 느낌이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도 금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 법만 미리 알았다면 이토록 고통도 느끼지 않고
편안하고 환희심 속에서 병원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신경외과의 중환자실은 24시간 긴장상태이기 때문에
불을 끄지 않는다. 달리 잠자는 시간이 없다.
잠을 잘 수도 없고 잠도 오지 않아 새벽 4시쯤 되면
물을 놓고 기억나는 대로 예불문과 천수경 반야심경을 하고
관음정근을 하고 그 물을 마셨다.
간호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혼자 모든 걸 해내려고 애썼다.
수술결과는 아무 것도 보장 받을 수 없었다.
팔다리의 마비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될지 수술 후에도
중풍환자처럼 팔다리 마비상태로 그냥 지내야 될지
어떤 후유증이 올지 다시 재수술을 해야 할지 모든 게 미지수였다.
하지만 나는 매일 매일이 즐겁고 감사했다.
며칠 만에 멀겋게 나오는 미음에도 감사하고
친절한 의사선생님과 간호사,
면회 와서 걱정해주는 가족 친구들 남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신 관세음보살님 모두가 감사했다.
아직은 어린 둘째딸이 어린 나이 때문에 면회가 되지 않자
울다, 울다 그냥 갔다고 친정엄마가 전했다.
갑자기 엄마가 걷지도 못하고 이상한 짓을 많이 해서
엄마 옆에서 심부름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너무나 급하다고 해서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얼굴도 못 보고 당부도 못 하고 갑자기 와버렸다.
아이들 때문에 나는 내 힘과 의지로 일주일 만에 나가리라 작정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기도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했다.
그 결과 너무도 빨리 회복되고 있었다.
중환자실에는 여러 개의 침대가 굉장히 넓게 분포돼 있는데,
나의 가장 가까운 쪽의 침대에 있는 50대 초반 정도의
아주머니 환자는 8개월째 혼수상태로 있었다.
하루 종일 엄마를 찾으며 부른다.
아마 무의식 중에도 엄마만 있으면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리라는 생각에서인가 보다.
밥도 안 먹고 약도 안 먹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산소호흡기와 뇌로 연결된 여러 줄 중 하나라도 빠지면
위험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온몸을 꽁꽁 묶어 놨다.
그러니 면회시간에 온 열 몇 살짜리 아들과 스물이 갓 넘은 듯한 딸은
엄마를 붙들고 “엄마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라며 울다, 울다 간다.
그 어린것들이 막대한 병원비를 감당 못해
의사선생님께 그냥 퇴원 시켜달라고 하소연한다.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울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했다.
‘관세음보살님 차라리 저분 대신에 저를 데려가세요.
저는 부처님 법 속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고 또 죽는다 해도
어떤 방법으로든 부처님 법 속에서 살 테니까
저분 대신에 저를 데려가 주세요.’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그 아주머니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누워서 꼼짝할 수는 없으니 천장을 본 채로 소리를 질렀다.
“아주머니 제 말 잘 들으세요.
제 말 잘 들으면 엄마한테 가실 수 있어요.
지금처럼 밥도 안 드시고 약도 안 드시고
간호사선생님 말씀 안 들으시면 절대로 낫지 않아서
엄마한테 갈 수 없으니 꼭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50대 무의식 환자의 “엄마, 엄마”
그 아주머니께서 듣든지 못 듣든지 큰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아주머니께서 그 때부터
식사도 하고 약도 고분고분 드신다는 것이었다.
그 후 갑자기 일반 병실로 옮겨도 좋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중환자실에서 6일 만에 일반병실로 옮겼다.
그 후 그 아주머니의 상태를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잘 치료가 됐으리라고 생각한다.
일반병실에 와서 재수술 들어가며 불안해하는 여대생에게
팔에 있던 합장주를 껴주며 기도해 주었고,
치매로 불안해하는 할머니께는 10년간 지닌 108염주를 쥐어주며
돌리는 법을 알려드렸을 때 편안해 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런 인연들을 맺게 해주신 것에 대해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하지만 나의 너무나 부족한 공부를 절감하였고
여기서 퇴원하면 부처님 공부를 제대로 해보리라 결심했다.
그 이후로 2년간의 불교대학공부,
그 후에 다시 승가대학부설 김포불교대학에 재입학하여 포교사가 되었다.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며 지금은 제대로 된
포교사가 되어보려고 연수와 기도, 군법회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그 때 만난 관세음보살님은 지금도 매월 초하룻날이면
홍련암의 파도소리에 어우러지는 비구니스님의 간절한
염불소리와 함께 만난다.
병실에서 혼자 물 한 잔을 놓고 올리던 새벽예불을 이제
홍련암을 비롯해 직지사, 법주사 등 전국에 있는 모든 절에서
삼라만상을 깨우는 범종소리, 목탁소리와 함께 올리고 있다.
5.불교대학 입학…보살행 서원
언제까지 이 행복한 시간이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남겨진 시간동안 여러 방편으로 부처님법을 펴고 싶어
방송대 국문과에도 입학해서 하루를 48시간으로 쓰고 있다.
나를 걱정해주시는 분들은 건강을 염려하지만,
아직은 재발의 위험도 없이,
물론 약간의 후유증으로 힘들기는 하지만 그 또한
기도정진을 게을리 말라는 뜻으로 알고 함께하련다.
어디 어느 곳을 가나 부처님 법음이 가득한 이 도리를
보다 많은 이들이 깨달아‘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실천하는 진정한 불자의 길을 가게 해달라고 발원해본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조금은 절절히 느껴
형식적인 위로가 아닌 부처님 마음의 끝자락이라도
흉내 내며 가슴 아파할 수 있게 됐다.
이제 10월 첫째 주에는 매월 나가는 군법회의 창립법회행사,
둘째 주의 해인사 보살계 행사,
셋째 주의 적멸보궁 철야기도,
넷째 주의 선운사 문학기행 등 바쁜 일정이지만
만나는 사람 모두가 한 분 한 분 부처님이라 생각하며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드린다.
단풍이 지고 있는 초겨울에 나는 다시 또
새로운 부처님을 만나러 떠날 것이다.
-월간불광(www.bulkwang.org) 창간 30주년 기념 신행수기 공모 최우수상-
12.
오늘 또 다시 한번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을 체험하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지난 2년간 거의 매일을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할 때마다 제가 아는 언니 기도를 항상 같이 했었습니다...
9년전 직장에서 알게 된 언니인데 알면 알 수록 그 사람의 됨됨이나 인품이 착해서 항상 마음이 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비방하는 말도 하지 않고, 전하는 말은 물론이요 거짓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나 한번도 저에게 교회가라고 강요하지 않고 제 종교인 불교를 인정해 주는 그런 언니입니다.
그런데 ?언니가 반려자 인연을 찾지 못해 항상 힘들어 하고 외로워 하던 중 재 작년 하나뿐인 어머니 마져 돌아가시니 앞이 망막하고 힘들었던지 샤워하던 중 본인의 배를 칼로 자해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가슴이 미어지던지....외국에 있어서 같이 있어주지도 못하는데..그로부터 꼭 언니가 원하는 베필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 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언니는 남자들을 만났지만 이상하게도 다들 하나같이 언니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어떤 사람은 언니돈 500 만원도 떼먹고 달아나더군요...그래도 전 언니에게 매일 말했습니다..내가 언니 기도 매일 하니까 언젠가는 내 기도 들어주실꺼야..언니는 말이라도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몇달전에 제가 그 언니 꿈을 꿨는데 언니가 꿈에서 너무나 서럽게 울면서 그 남자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냐면서 저에게 하소연을 하더라구요..그래서 바로 한국에 있는 언니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언니 지금 만나는 남자 있어? 있으면 그 남자 만나지마....언니가 또 상처 받을꺼 같애...그랬더니 언니는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그리도 5일이 지났습니다. 그 언니한테 이 메일이 왔는데 내용이 심상치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전화를 했더니...언니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더라고요....말을 듣고 보니 기도 안차더라고요,...그리곤 놀랐습니다..이렇게 꿈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구나...
그리곤 한동안 연락을 안하다가 방금전 언니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는데...언니가 결혼을 한다는 겁니다...10월 정도인데 날짜는 아직 안 잡았고 결혼하자마자 신랑 따라서 일본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서류절차를 밟고 있다고 하더라고요...거기다가 언니가 임신 3개월 이라는 더 좋은 소식까지....언니가 나이가 마흔이 넘었기 때문에 결혼도 포기하고 아이도 포기 했었는데..게다가 남편될 사람이 아기를 갖기 아주 힘든 사람이라고 합니다...(무정자증은 아닌데 애들이 헤엄을 잘 못친다나?? 말이 좀 그렇긴 한데..)
두 사람다 너무 좋아서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간다고 하더라고요..너무너무 축하한다고 말했습니다..그리고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님...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을 계속 되뇌었습니다.
학교 졸업하고 지난 2년동안 취직이 되질 않아서 기도하는 것에 많은 회의를 느끼지 시작했는데 다시한번 깨닫게 해 주신것 같습니다..이제 곧 제 기도도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불자님들 성불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원각행 합장.
출처: 나무아미타불 카페 원각행님 글 (cafe.daum.net/amtb)
13.
관세음보살님과의 인연 |
나의 인연 이야기
묘정스님 (통영 천음사 주지)
출처: 월간 불광 (www.bulkwang. org) 2004년 9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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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관세음보살님을 만나게 되었고 불법에 심취되어 결국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출처: cafe.daum.net/buruna21 온누리님 글
관세음보살을 꿈속에서 친견하다.
태고종 총무원의 부원장을 맡아 종단의 재정 안정에 힘쓰고 있는 혜공 스님, 항상 온화하고 자상하게 주위 사람들을 살피고 배려하기 때문에 늘상 찾는 사람들로 바쁘다. 일에 있어서는 원칙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면서도 어우러짐의 미학을 발휘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는 합리적인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태고종 종정을 역임하신 백암 스님이 속가의 아버지이자 불가의 스승이다. 승단 분규를 겪던 시절, 백암 스님은 대구로 내려와 살다가 동화사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팔공산을 다 뒤져서 갓바위 부처님을 찾아내었다고 한다. 당시의 갓바위 부처님은 소나무와 칡넝쿨이 우거진 속에 숨어(?) 있었다. 때문에 수행에는 안성맞춤이었지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려고 불기에 담아서 올라가면 다 식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주변을 정리하여 땅을 일부 파내고 움막을 지어서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혜공 스님은 연세가 드신 백암 스님보다는 자신이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래 절에는 내려오지도 않고 열심히 기도 정진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뒤가 묵직하고 힘이 빠지더니 하혈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경북대병원에 가서 진단을 하였더니 직장암이라는 것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다른 병원을 몇 군데 더 가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요즘에는 의술이 발달해서 치료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암에 걸렸다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천형으로 여기던 터라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터여서 경북대학교 병원에 수술 날짜를 잡았다.
수술하기 전날 백암 스님께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수술해서 나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하노? 신도들에게는 늘 부처님께 매달려 기도하면 소원성취한다고 말해 놓고……”
스님의 뜻이 무엇인지 읽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그러한 마음이 있어서 대답했다. “저 수술 안 받으렵니다. 절에서 기도하겠습니다. 다만 기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우리 종단의 명찰인 선암사에 가서 기도 정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경북대병원에 가서 포기각서를 쓰고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진 선암사 원통전으로 향했다. 당시 선암사 주지 용곡 스님에게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원통전에서의 기도를 허락 받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죽음을 무릅쓴 기도에 들어갔다. 빗자루와 깨끗한 걸레를 여러 개 준비해서 법당 바닥을 열심히 쓸고 닦았다. 어리석음을 벗어나고자 애쓰는 슈리판타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믿고 따른 것처럼 구석구석 닦고 또 닦았다.
별로 크지도 않은 법당이지만 몸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든 상태여서 닦기만도 힘이 들었다. 법당을 닦고 나면 간절한 마음으로 관음경을 읽은 뒤에 관세음보살을 목이 터져라 부르면서 참회 정진을 하였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기도의 공덕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하였으나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물러나지 않고 정진했다. 그러나 그것도 보름이 지나면서 아주 허망하게 느껴졌다. 만일 이 기도가 성취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자 엎드렸던 몸이 다시 일어나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엎드려 있는데 이상하게도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한참을 그러고 났더니 갑자기 그렇게 미워하며 죽이고 싶었던 어떤 사람이 생각났다.
은사 스님과 자기를 쫓아내기 위해서 무리를 지어 찾아와서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욕설을 하면서 몽둥이질까지 하였다. 자신과 부딪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연세가 드신 은사 스님마저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필 그 순간에 생각이 났고, 묘하게도 그에게 찾아가서 용서하고 미워한 마음을 사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리저리 그가 살고 있을 곳들을 마음속으로 찾아내어 만나서는 무릎 꿇고 빌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오히려 계면쩍어 하면서 자기들이 한 일이 본의가 아니었음을 내비쳤다. 그렇게 그 사람을 용서하고 나니 다시 기도하는데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잠자고 예불하고 공양하고 뒷간 가는 시간만 빼 놓고는 쉬지 않고 정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진하는 모습을 본 용곡 스님이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관세음보살님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혜공 사주寺主의 기도를 들어주시것제.”라고 하였다고 한다.
삼칠일 기도를 마치기 전날 밤 4분정진의 마지막 기도를 하고 나서 몸을 씻고 잠이 들었는데 신기한 꿈을 꾸었다. 공양 시간이 되어 대웅전 왼쪽 옆에 있는 설선당說禪堂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사찰에는 발우공양을 하므로 대중들이 청산, 백운으로 나뉘어 방안에 빙 둘러 앉았다. 수십 명의 대중이 발우를 펴고 공양을 하는데 갑자기 어간문이 활짝 열리더니 큰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다들 놀라서 쳐다보는데 자신은 대통령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주지 스님을 지나쳐 혜공 스님에게로 가서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진작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이제 찾아와서 죄송하다고 하면서 품속에서 무슨 서류 봉투를 꺼내서 주었다.
관음경에 보면, 관세음보살이 중생교화를 위해 32응신을 나투실 때 국왕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음 날부터 몸과 마음이 가뿐해졌고, 며칠 뒤 경북대병원에서 다시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주치의가 깜짝 놀랐다. 암 덩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기도를 통해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온몸으로 입은 것이다. 스님은 현재 백암 스님의 은법을 이어 관암사를 대구의 전법 사찰로 잘 지켜가고 있다. “웬만한 것은 다 양보하는 것이 좋아. 정말 바쁘게 해야 할 일은 마음공부야.” 하며 웃는 그는 정말 닮고 싶은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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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관음가피지묘력으로 강릉 성원사 대작불사 성취
<영험>불사금 든 손가방 휴게소에 ‘깜빡’
사람 눈엔 쓰레기봉지로…2시간만에 찾아
강원도 오대산 자락에 대가람 성원사를 개창하고, 선원을 열어 참선수행지도를 하고 있는 주경 스님이 경험한 관세음보살 가피 이야기다.
생전 생불로 추앙받았던 (강)청화 큰스님의 제자 주경 스님은 홍련암에서 기도를 하던 시절부터 남다른 기도정진력으로 정평이 난 스님이었다. 스님의 기도모습에 감동한 재가불자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님을 부처님처럼 존경하며 따르는 것을 보면 스님의 여법한 기도정진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주경 스님은 백두대간을 따라 새로운 수행처를 물색하던 중 지금의 성원사 터를 발견하고 대작불사의 원력을 세웠다.
스님의 원력과 정진력을 알고 있던 여러 불자들의 도움으로 스님은 불사를 시작할 수 있는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경상도 어느 지역에서 거금을 받아 손가방에 넣고 직접 운전을 하면서 강릉으로 올라오던 중이었다. 소중한 불사금이었기에 손가방을 늘 손에 들고 다녔다. 그러다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한 휴게실에 들렀다. 그런데, 그만 화장실 옷걸이에 손가방을 걸어놓은 것을 까맣게 잊은 채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강릉방향으로 차를 몰았던 것이다.
한 두 시간쯤 운전을 했을까. 강릉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스님은 요기를 하기 위해 휴게소를 찾아, 국수 한 그릇을 먹고는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을 찾다가 그만 손가방을 먼저 들렀던 휴게소 화장실 벽에 걸어놓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혼비백산! 스님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가슴은 두근대고 조바심이 나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던 스님은 차를 돌려 먼저 들렀던 휴게소를 향했다.
가속페달을 밟으며 정신없이 달려갔다. 입에서는 저절로 관세음보살 정근이 터져나왔다. 늘 정근을 하던 터라 관세음보살 염불을 했겠지만, 스님은 이때처럼 간절하게 염불정근을 했던 기억이 드물었다고 술회했다.
정신없이 달려가 화장실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침 청소를 하는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스님은 숨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여기 화장실 옷걸이에 걸어놓은 손가방을 보지 못했소?”
“아, 손가방은 보지 못했고, 누가 비닐 쓰레기봉지를 걸어 놓았던데 그것은 그 안에 그대로 걸려 있습니다.”
“비닐봉지요? 아니, 손가방이 아니고요?”
“네, 스님. 비닐봉지라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누가 쓰레기봉지를 저기에다 걸어놓았나 싶어 이제 막 치워버리려던 참이었어요.”
주경 스님은 부리나케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옷걸이를 살폈다. 그런데, 믿기지 않게도 손가방이 걸어놓을 때의 모습 그대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가방을 내려 급하게 열어보았다. 돈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스님은 땅이 꺼지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방이 그대로 걸려 있군요. 고맙소. 아저씨.”
주경 스님은 청소부 아저씨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돈 몇 만원을 꺼내 감사의 표시로 전했다. 생각지도 않은 돈을 받은 아저씨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돈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스님. 그게 손가방이었습니까? 이상하네. 금새 보았을 때도 분명히 비닐봉지였는데. 내가 잘못보지는 않았을 것인데. 참 희한한 일입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아저씨. 어쨌든 고맙습니다.”
주경 스님은 청소부 아저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스님은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스님은 이 모든 것이 관세음보살님께서 가피를 내린 것으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그 화장실에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이 손가방은 가방이 아닌 쓰레기를 담아놓은 비닐봉지로 보였다는 말이 아닌가. 가방으로 보였다면 손을 탔을 것이 분명할 터. 스님은 부지불식간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관세음보살님께서 가피지묘력으로 사람들의 눈에 이 손가방을 쓰레기 봉지로 보이게 위신력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일이 있은 후 주경 스님은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할 대작불사를 해낼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호가 함께하는 불사인데, 두려울 것이 없었다.
맨손으로 강원도 산골 산꼭대기에 오늘날과 같은 큰 도량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경 스님의 깊은 신심과 초인적인 기도정진력에 관세음보살님께서 내려주신 가피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경 스님은 지금도 도량을 돌아볼 때면 그 때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곤 한다. 간절한 기도가 있다면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다는 주경 스님. 스님은 어려울 때일수록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불자들에게 당부했다.
출처: www.mediabuddha .net
16. 관세음보살의 가피력
혜인 스님
기도는 절하면 참회기도라 하고 관음보살을 부르면 관음기도,
지장보살을 부르면 지장기도 입니다.
또는 성현의 명호나 경을 쓰면 사경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를 통해 무념무상의 상태로 계속 정진하다보면 탁한물이
고요해져 삼라만상이 비춰지듯 기도로 인해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기도는 일관되게 계속해야 힘이 생기며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가피력을 얻게 됩니다.
가피력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몽중가피는 꿈 가운데 어떠한 선몽을 얻는 것이고,
명훈가피는 자신도 모르게 시간과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점점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증가피는 갑작스런 통찰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중요한것으로 저도 부처님의 가피를 받았습니다.
저는 전생에 술을 많이 마셨나봅니다.
그 과보로 어려서 학교다닐때 항상 30등 미만이었습니다.
절에 들어와서도 다른 도반하고 차이가 있었습니다.
천수경을 외워야하는데 외워지지가 않는것입니다.
도량송을 하다가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면 끝이 안나와요.
비슷한 말이 많다보니 끝없이 반복하는것입니다.
그래서 불공이 들어오면 먼저 신도에게 천수경을 할줄아냐고 물었습니다.
천수경을 모르는 보살들 앞에서는 경을 서로 모르니
요령껏 불공을 했지만 경을 외우는 보살들은 겁이 난것이지요.
그래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습니다.
천수경에보면 …만월보살 마하살 수월보살 마하살 군다리보살마하살…
이란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보살이름이 생각이 나지않아 …
목탁보살 마하살 요령보살마하살….했습니다.
그런데도 보살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별탈없이 불공을 잘했습니다.
제주도 양진사 주지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양진선원을 건립하고 주지로서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피력을 얻지 못해 사람 다섯명만 모여도
가슴이 달달달 떨리고 얼굴이 발개져버리고
앞이 탁막혀 말을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낙성식이 두달정도남았는데 인사말은 한마디 해야하겠고
걱정이었습니다. 미리 준비를 해야하겠다하고
문자하나를 찾아 외운것이 원근각처였습니다.
멀고 가까운곳에서 오신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이지요.
이말을 중심으로 말을 풀어야겠다 하고서 낙성식날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낙성식이 시작되고 사람들 앞에 서고보니
아니나다를까 앞이 탁 막혀버려요. 가슴은 떨리는 중에
다행히 미리 외웠던 원근각처라는 말은 생각이 났습니다.
원근각처에서 많이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원근각처에서…., 원근각처에서….
법회가 끝나고 어느 비구니스님이 인사말을 하는동안 원근각처를
8번 했다며 그말밖에는 할말이 그렇게도 없었냐며 웃었습니다.
이렇게 사람 다섯사람만 있어도 떨었던 이가
여기에 있는 혜인스님이었습니다.
또한 복이 없고 덕이 없어 출가한지 15년이 되어도
양말하나 러닝셔츠하나 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구에서 해인사를 가는데 차비가 없어 많은 괄세도 받았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루는 원주에서 강릉 보현사를 가는데 차비가 530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진 것은 130원 밖에 없어 안내양에게 사정을 말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있던 운전기사가
130원 거리만큼만 태워주고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중간에 내려 인근의 비구니스님 절에가서 사람들앞에서
노래하듯 초파일 연등만드는 비구니 스님 앞에서
초발심자경문을 외우고 차비를 얻어 보현사를 갔습니다.
해인사 강원에 있을때도 남들은 신도들이나 도반들이 책을 사주는데
저는 복이 없어 책한권 사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먼저 출가한 누이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
다른비구니 스님이 쓰던 책으로 강원공부를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머리가 우둔하고 잠이 많고 가슴이 떨리고
복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저는 관세음보살 주력염불을 하고
해인사 장경각에서 부처님전에 하루 5천배씩
이백일 동안 백만배를 하니 구름이 걷히니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거울의 먼지를 닦으니
환한 모습이 보이듯이 자신이 환하게 보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분명히 부처님의 가피력을 받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후로 지금은 수만명을 앞에 두고 법문을 해도 떨리는 것이 없고
마음먹었다 하면 다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하겠다고 마음먹어서 안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제주도 약천사 대웅전을 짓는데 돈이 백억원 이상이 들어갔습니다.
공부하는 승려가 돈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기도한후 마음먹는대로 일이 되기에 부처님집을
최고로 지어야겠다 생각하고 시작한것입니다.
이제 제주도 중문단지에는 동양최대의 대웅전이
웅장하게 자리해 있습니다. 무사히 불사를 회향한 것입니다.
또한 백만배 절을 했으니 백만이란 숫자와 인연이 있어
백만평의 땅에 부처님마을을 조성하기로 하고
충북단양에 철쭉 백만그루를 심고있습니다.
현재 80만평을 이루었습니다.
사주와 관상이 나쁘더라도 운명적으로 이렇게 밖에 살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관상학적 이야기입니다.
길이 아니라도 불도저가 지나가면 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불교는 내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운명과 팔자는 바뀔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마음을 찾는 종교요,마음을 보는 종교요,마음을 아는 종교요,
마음을 깨달는 종교요, 마음을 잘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한마음이 청정하면 일신이 청정하고
일신이 청정하면 중생이 모두 청정해집니다.
마음이 달라지면 모습이 달라지고 관상이 바뀌면
내 운명과 팔자가 바뀝니다.
부처님의 가피력이 아니면 저는 오늘의 여기에 있을수 없습니다.
소나무를 의지해 칡넝굴이 소나무를 타고 끝까지 올라갈수 있지만
잔디밭에 깔린풀은 석자도 올라가지 못합니다.
부처님과 부처님말씀 그리고 가피력에 의지하면
얼마든지 행운과 훌륭한 운명을 개척할수있는것입니다.
지난 과거를 회고해 보면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그리고 남 법문하던 것을 부러워하던 시절,
나도 언젠가는 내생에 가서라도 저런사람이 되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기도를 하고나니 내생까지 갈것도 없더군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오늘의 법회를 계기로 해서 기도 정진하는데 게으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관세음 보살기도에 대해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보면
「무진의 보살은 잘 들어라. 관세음 보살을 부르는 자는
물에 들어가도 빠져죽지 않을 것이며,
불에 들어가도 타죽지 않을 것이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악한자에게 밀려 낭떨어지에 떨어 진다해도
다치지 않으리라. 죄가 있거나 없거나 수갑을 채우고
쇠사슬에 묶여 감옥살이를 해도 관세음 보살을 부르는 사람은
해탈을 얻으리라. 악한짐승 나쁜 귀신들이 혹은
태풍에 밀려도 결코 거기서 다치지 않고 살아가리라.
아들을 원하는 자여 관세음 보살을 부르라 귀한 아들을 얻으리라.
딸을 구하는 자여 지극한 마음으로 관세음 보살을 부르라
생각생각에 마음을 항상 관세음 보살에게 두어라.
우는아이에게 젖을 주듯이 관세음보살은 그대의 음성속에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고 서른두가지 몸을 나퉈 중생을 이익하게 하고
중생의 고통을 나누고 가지가지 방법으로 의사가 천만가지 약이 있어도
명의가 환자의 아픔아픔을 알아서 치료하듯이
관세음보살은 큰 의사이니 중생의 고통과 모든
근심걱정을 다 해결해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관세음보살 가피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습니다.
일제때 청일전쟁당시 만해 한용운스님이 서울 작은 토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학도병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끌려갔었습니다.
어느 보살이 삼대독자인 아들을 전쟁터에 보냈놓고 걱정을 하니
주위에서 만해 큰스님을 찾아보라하여 스님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만해스님은 생각생각 언제든지 관세음보살을 찾으라 했습니다.
좋은일이 있거나 나쁜일이 있거나 자나깨나
관세음보살을 찾으라 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아들에게도 편지에 관세음보살을 염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아들이 죽었다고 부고가 오고 유골이 왔습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보살은 낙심하여 관세음보살이고 부처님이고 필요없구나 했습니다.
49제를 지내고 자기팔자를 생각하며 실컷울고
자기도 죽으리라 식음을 전폐했는데 갑자기 밖에서
어머니 어머니 하며 아들의 목소리가 났습니다.
보살은 귀를 의심하고 혹 귀신이 온것아닌가 하며 문을 여니
군복입은 아들이 서있었습니다. 아니 귀신도 꼭 사람과 같네 하며
나가보니 귀신이 아닌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 중국에 왔었지요하며 묻는데 사연을 듣고보니
이러했습니다. 중국으로 끌려가 총알이 콩복듯 하는중에 하루는
보초를 서는데 산너머에서 재명아 재명아하면서 어머니가 부르더랍니다.
그래서 어차피 죽을목숨 중국까지 찾아온 어머니나 만나고
죽자라며 개울밑으로 도망쳐 어머니에게 가는데
어머니목소리는 계속멀어져 갔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못찾고 날이새 다시 부대로 돌아와보니
전우가 한명도 남지않고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래 혼자서 49일간을 걸어서 돌아온 것입니다.
보살과 아들은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으로 살아났음을 알고
감사의 뜻으로 살던집을
관음암으로 바꾸어 평생 기도하면서 살았습니다.
관세음 보살을 부르던지 지장보살을 염하든지
지극정성을 보이면 이렇듯 가피력은 반드시 옵니다
17. 관세음보살의 가피력
관세음보살의 가피력
기도 정진중 꿈에서 약병 받고…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부산 삼광사에 다녔다. 그래서 집안 식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며 기도정진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집안의 이런 분위기 탓에 친정 오빠들도 일부러 사찰을 찾아가 절을 올릴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하지만 내가 불가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친정 어머니의 병환이었다. 어머니는 5년전부터 병명도 모르는 상태로 몸져 눕게 되었다. 여기저기 이름있는 병원들을 다 찾아다녔지만 조금도 차도가 보이질 않았다. 온 집안식구들이 어머니 때문에 근심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니를 구인사로 보내 요양을 시키고 온 가족이 정성을 다해 기도해 볼 것을 적극 권했다.
처음에 가족들은 거동을 못하는 어머니를 먼거리의 구인사로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현대의학으로는 별다른 처방이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한 번 매달려 보기로 했다. 오빠들은 생업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구인사로 갔다. 구인사에서 방을 하나 얻어 어머니를 눕혀 놓고 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1080 염주를 돌려가며 어머니 병이 낫게 해달라고 매일 5시간씩 기도를 올렸다.
구슬땀이 흘러 방석을 흠뻑 적실 정도로 정성껏 절을 했다. ‘부처님,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이렇게 병들어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저를 데려 가시고 어머니를 낫게 해주세요’ 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희구하며 염주를 굴렸다.
어머니에게도 누워서나마 부처님께 의지해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라고 권했다. 이 동안에는 가정일 등 모든일을 제쳐두고 오로지 어머니를 살려야 겠다는 일념으로 기도에만 집중했다. 절에서의 기도 정진은 한달 넘게 계속됐다.
한달이 지난 어느날,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관세음보살님이 어머니에게 먹이라고 약을 하나 주고는 미소를 머금고 하늘로 올라갔다. 소스라 치게 놀라 깨니 꿈이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자 오빠들에게 연락이 왔다. 노인들의 병에 유명한 한의사를 아는 사람한테 소개받았다며 부산으로 급히 내려 오라고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동래구쪽에 있는 한의원으로 갔다. 진맥을 본 한의사는 기가 몹시 약해져서 온 풍일 가능성이 많다며 침을 놓고 한약을 지어주었다. 한의사는 정성껏 치료를 할테니 한 번 믿어보고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어머니는 1주일에 두 번씩 통원치료를 받았다.
나는 집에서 <천수경>을 독송하며 계속 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3개월을 치료받더니 어머니는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조금씩 걸어다니면서 식사도 정상적으로 하는 등 기력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어머니의 병회복을 위해 부처님께 지극 정성을 드린 것이지만 이것이 계기가 돼 이제는 새벽과 밤에 집에서 예불을 모실 정도로 불교에 깊이 몰입해 있고, 참다운 불제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머니께서도 항상 염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시며 부처님께 의지하고 계시다. 병명조차 모르고 앓으시던 어머니에게 의사를 만나는 인연을 맺어 주셨으니 이 모두가 다 부처님의 가피가 아닌가 한다.
김연숙(부산시 진구 범천동)
출처: 현대불교신문(www.buddhapia.com)
18.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감사드립니다.●
-출처/나무아미타불카페(cafe.daum.net/amtb)
안녕하세요.
저는 양양 낙산사에 다니는 불자입니다.
제가 이번에 기도하여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과거 숙생의 죄업이
산과 같이 많은 것을 느끼고 저로 인해 고통 받은
영가들을 위해 3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집에서 천수경을 한 번 읽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번씩 읽을 때마다
관세음보살님께 영가들을 극락왕생하여 주십사 3번씩 기원하였습니다.
3일째 날 회향하고 잠을 잤는데 제가 어느 절터에 있었습니다.
한 비구 스님이 아이 3명을 데리고 계셨는데
석불상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거처하는 집은 시골의 허름한 집같이 초라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일 작은 한 아이가 석불상을 들어서 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같이 불상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리면서 사탕을 줄터이니
불상을 깨트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잠이 깼습니다.
그 주에 저는 관세음보살님께
아이들이 배고프지 않게 해달라고 사탕을 한 봉지 사가지고 갔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 사탕을 올리면서 간절히
영가들을 돌보아 달라고 기원하였습니다.
눈물을 너무나 많이 흘렸습니다.
천수경을 독경하면서도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저는 영가들이 아직도 천도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7일 기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밤에 자기 전 한 시간씩 대비주를 외우며 다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항상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염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하였습니다.
어제 기도회향을 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 날 피곤한 일이 있어서 잠을 설쳤습니다.
새벽에 잠이 어렴풋이 들었는데 바닷가였습니다.
백의관세음님이 아주 장대한 몸으로 동자 3명을 데리고 계셨습니다.
동자들을 모두 금신으로 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윽고 관세음보살님이 금색초롱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동자들도 그 뒤를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며 환희스런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 번 주에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감사하는 뜻으로 꽃을 회향하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함에 감사드리며
무릅끊고 지심귀명례합니다.
불자님들도 항상 대우주의 자비이신
관세음보살님을 칭명하시고 염불정진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19. 출처: 일타큰스님의 '기도' (도서출판 효림)
1960년대 초까지 가야산 해인사에는 인격을 구비한 강사요, 법사인 장보해(張寶海) 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어린 시절 출가하여 해인사 백련암에서 노 스님을 시봉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15세가량이 되자 배가 불룩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위궤양으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밥을 잘 먹지 못하다 보니 기운이 크게 떨어졌고, 기운이 떨어지다 보니 자주 드러눕게 되었으며,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수행은커녕 시봉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노 스님은 이러한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보해 스님을 불렀습니다.
"이놈아! 세상 사람들에게는 쌀이 양식이지만, 중에게는 신심이 양식이다. 중이 아픈 것은 신심이라는 양식이 모자라기 때문이야. 그렇게 신심 없이 빌빌거리며 살 바에는 마을로 내려가서 거지가 되어 살아라."
노 스님은 주장자로 때리면서 보해 스님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스님 네는 요즘 승려들과 달랐습니다. 교통이 불편하여 집에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지만, 일단 절에서 쫓겨나면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여겼습니다.
보해 스님은 멀리 가지 못하고 백련암 조금 아래쪽의 가운데가 푹 파인 동구나무 속에 들어가 가마니를 덮고 누워 생각했습니다.
'노 스님께서 어찌 그릇된 말씀을 하셨으랴? 나의 병은 신심이 부족한 데서 온 것이 분명하리라. 지금부터라도 신심을 기르자. 일찍이 스님께서는 위급하고 어려운 일에 다다랐을 때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신심도 생겨나고, 나의 병도 나을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은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기원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저는 지금 위급합니다. 제발 저를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꾸준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잠이 들면 자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허기가 지면 노 스님의 눈을 피하여 백련암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찾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또 부르고…….
약 7일이 지났을 무렵,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영천 은해사(銀海寺)에 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절 주위에는 소나무가 가득하고, 바위가 좋은 계곡에는 시퍼런 물이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아, 참 좋구나. 해인사 계곡만 좋은 줄 알았더니 여기 계곡도 참 좋구나. 이 은해사는 처음 가는 절이니 옷을 단정히 입고 정신을 차려서 부처님께 절을 해야지.'
스님이 법당 앞의 배례석(拜禮石)에 이르러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순간, 법당 안에서 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왔느냐?"
그리고는 법당 안으로부터 흰 가운을 걸치고 청진기를 건 스님, 주사기를 든 스님, 왕진가방을 든 스님들이 여러 명 나왔고,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스님이 말했습니다.
"여기, 이 침대 위에 누워라. 먼 길을 왔으니 수술을 해주어야지."
그 의사 스님은 배를 만져 보더니 부엌칼처럼 생긴 칼을 꺼내어 배를 쫙 가르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창자들이 나오자 칼로 창자를 잘라내어 큰 시루에 옮겨 담았고, 금방 시루 하나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의사 스님이 옆에 있던 뚱뚱한 간호사에게 눈짓을 하자, 간호사는 시루를 이고 계곡으로 가서 콸콸 흐르는 물에 창자를 넣어 씻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창자 속에서 돌도 나오고, 모래도 나오고, 가시도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간호사는 창자를 모두 씻은 다음 비틀어 짜더니, 깨끗이 닦은 시루에 담아 가지고 와서 배에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그 감촉이 너무나 차서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앗! 차가. 으 차가워."
이렇게 창자를 모두 집어넣고 나서 바늘로 이불을 꿰매듯 배를 꿰매 주더니, 의사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이제 됐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거라!"
보해 스님은 깨어났고, 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조금도 아픔이 없었던 은해사 의사 스님들의 대수술……. 스님은 꿈속의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배를 만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렀던 배가 푹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배의 이곳저곳을 만져보았지만 조금도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날이 새자 보해 스님은 백련암으로 올라가 노 스님 앞에 꿇어앉았습니다.
" 스님, 배가 아프지 않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이제 신심이 조금 생긴 것 같구나.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닦아라."
그 뒤 보해 스님은 해인사 강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약 10년이 지나 평소 꼭 가보고 싶었던 은해사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묘하게도 은해사는 꿈속에서 수술을 받을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 나는 전생에 은해사 중이었던가 보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꿈속에서나마 전생 인연이 있는 이 절에 와서 병을 치료받게 된 것이 틀림없다."
보해 스님은 은해사로 승적(僧籍)을 옮겨 은해사에 살고 싶었지만, 노 님을 생각하여 해인사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더욱 열심히 도를 닦다가 약 20년 전에 입적하였습니다.
20. 나무아미타불 카페 지혜월64님글
100일기도중 관세음보살 정근과 천수경,108를 했는데 70일쯤에 관세음보살불상이 안방문을 통해 제가 기도하고 있는 자리로 붕붕떠서 들어오시는것을 봤습니다.
물론 기도중이였기때문에 너무 놀란가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생시같은 느낌입니다... 그 후로 모든일이 술술풀렸습니다...
21. 대원심 보살 아들의 병을 완치시켜주신 관세음보살
안성에 사는 대원심 보살은 아들이 위암말기로 진단되어 죽음을
선고받자 괴로움을 가눌 길이 없어 청룡사의 관세음보살을
찾아갔다.
이미 80세가 넘은 노보살인지라 절을 올리기 힘든 처지였다.
대원심 보살은 다만 가만히 벽에 기대어 앉아 관세음보살을
우러러보며 念하였다.
"관세음보살님,부모가 죽은 다음 자식이 죽는 것이 이 세상의
순리이온데, 저의 업이 얼마나 중하길래 이렇게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보아야 하나이까?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님! 제발
아들을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3일 밤낮을 아들의 병이 기적처럼 쾌유되기를 기원하며 관세음
보살을 찾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때 스님 한
분이 활짝 핀 연꽃 한송이를 대원심보살에게 주었다.
꿈을 꾼 것이었다.
보살은 상서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과 함께 치유불능이라는
진단을 했던 서울대학교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재검사결과 위암의 흔적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담당의사는 있을 수 없는 불가사의라며 매우 신기해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이 아들의 병을 완치시킨 것이었다.
- 출처: 도서출판 효림 김현준저 관음신앙 관음기도법
22. 네이버 지식in wpgody님 글
51세 된 남자 인데요.
31세 때 결혼해서 바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고 악몽을 꾸기 시작했어요.
제 아내도 마찬가지로 악몽을 꾼다고 하더라구요,.
온갖 병원을 찾아도 해결이 되지를 않고 신경성 질환이라고 하는데
신경을 쓰지 말고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하라고 하더라구요.
밤이면 악몽에 시달리는데 편안한 마음이 들겠어요?
친척의 소개로 관세음 보살님의 가피로 소원이 잘 이루어 진다는 가까운 절에 큰스님과
상담을 하게 되었죠.
그 후로 108배를 틈 날때 마다 절에가서 관세음보살님 전에 올렸죠.
직장에 다니는 관계로 매일 못가고 주말에 주로 갔죠.
젊은 사람이 절 108배도 제대로 못할 만큼 건강이 안 좋았죠.
주말에 가서 절도 하고 법당 청소도하고 봉사활동을 많이 했죠.
신도님들의 칭찬이 대단했죠.
제가 청소를 잘해서 법당이 깨끗해 졌다고 보시는 분마다 칭찬이 대단했죠.
더욱 힘이나서 뭐든 시간이 되는데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스스로 열심히 했죠.
부처님 오신날이 다가 오면 연등도 만들고, 달고, 이름표도 붙이고, 행사진행도 돕고, 마치면 철거해서
잘 정리도 해 두고,
어느 날 꿈에 큰스님께서 가사장삼을 입으시고 나타나셔서
알약 세개를 주시면서 절 만번을 하고 한알씩 먹어라고 하시더군요.
몇 달을 벼르고 벼르다 제 생월에 30일간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시작했죠.
1일 부터 아침 일찍 절에 가서 천배씩 하고 출근 했죠.
10일째 만배를 채우는데 사타구니 아래 부터 발끝까지 무좀, 움직일때 뼈 또독또독 소리나는 것,
발 저림 현상, 일체의 장애가 없어 졌어요.
11일 부터 20일 까지 2만배를 채우는데 오목가슴까지 뱃속이 더부룩 한거나, 소화가 안되거나,
허리가 아프거나, 일체의 장애가 없어졌죠.
마지막 3만배를 마칠 즈음 어깨와 목이 만나는 지점까지 손이 저리거나 , 팔이 힘이 없거나, 손톱이
못생겻거나, 뼈가 으드득거리거나, 집중력이 흐리거나, 일체의 장애가 없이 15년간 하늘을 날듯이
가볍게 잘 살았죠.
그러면서 조금씩 게으름이 생기고 함부로 행동하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게 또 몸이 안 좋아졌죠.
2년여 죽을 고생하다 지금은 또 열심히 부처님의 가피아래 잘 살고 있죠.
간략하나마 요점은 정리된 것이니 , 진실로 사실임을 밝힙니다.
이 내용은 저의 주변인들은 모두 아는 일입니다.
23.
일심으로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나서 죽음의 땅을 탈출한 이야기가 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민족의 기쁨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38선이 그어지기 시작하였다.
남한은 자유국가,북한은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북한은 무력으로 남북을 통일시킬 계획을 수립하고 전쟁준비에 박차를 기했다.
그리하여 허구한 날 주민들을 강제 노동과 군사 훈련 등으로 달달 볶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정권 유지를 위하여 주민들을 통제하였으며 개인의 자유마저
박탈해 버렸다.이 때 강원도 회양 땅에 최기일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공산치하를 견디다 못해 월남 하기로 작정하였다.
철조망을 뚫고 북한군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38선을 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돈을 받고 월남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는 전문
안내꾼이 있었다. 그들을 통하면 대체로 38선을 넘어올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갖가지 희비극이 벌어졌다.
최기일 역시 집과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안내꾼을 한 사람 매수한 뒤 야음을 틈타
남하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밤에만 행군하여 이틀만에 겨우 북방한계선을 넘어
38선 부근 한탄강에 이르렀으나 문제는 이 강을 어떻게 건너느냐였다.
당신 한탄강을 건너는 데 주로 사용된 유일한 방법은 야음을 이용하여 작은 배로
건너는것이었다.이제 약속한 대로 배가 온다면 그야말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조그마한 마음으로 한탄강가에서 배를 기다렸다.거기서 며칠을 기다리자
비로서 접선이 되어 다음 날 새벽 3시에 배가 오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는 본래 고향에서부터 불교신도로서 특히 관세음보살을 독실히 믿었던 사람이었다.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여 왔는데 월남하게 되자 출발시점부터 더욱더 마음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사실 죽을 가능성이 많은 모험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 속에 믿는 것이라곤 오직 관세음보살뿐이었다.
최기일은 캄캄한 강가에서 초조하게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한 대로 배가 와야 하는데
만일 돈만 받아먹고 정작 배가 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말 큰일이었다.시간은 새벽 2시,
이제 한 시간만 기다리면 배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더욱더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그런데 잠깐 졸았다고 생각이 되는 찰라에 평소 이북에 있을 적부터 모셔온 관세음보살상과
똑같은 부인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약속한 뱃사공은 결코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니 시각을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어서 속히
철로를 따라 남하하여라!"
그 부인의 말투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간곡하고 애절하게 타이르는 모습이었다.
그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나서 생각하였다.
"과연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일까?"
하지만 한탄강 위의 철길을 건너다가 자칫 발각이 되는 날에는 총알이 온몸을 벌집을 쑤셔
놓은 듯이 놔두지 않을 것이다. 한 시간만 기다리면 배가 오기로 되어 있는데 어렴풋 꾸었던
꿈을 믿고 모험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뱃사공을 믿느냐,관세음보살의 계시를 믿느냐?"
만일 뱃사공이 오지 않는다면 여긴 낭패가 아니었다. 일생일대의 운명의 순간이었다.
그는 결국 "약속한 뱃사공은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되니 속히 철길을 따라 남하하라"는
그 부인(관세음보살)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살금살금 철길을 지키고 있는 북쪽 초소로
다가섰다. 초소 안에는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엉금엉금 기어서 철길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오로지 그의 마음 속엔 관세음보살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드디어 다리 끝이 보였다.
자유의 몸이 된 것이었다. 그는 그 동안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고는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출발부터 탈출하기까지 그야말로 숨막히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하여 38선을 넘어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자기가 38선을 넘어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자기가 38선을 무사히 넘을 수 있엇던 것은 오로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서울로 와서도 끊임없이 절에 다니면서 관세음보살을 믿었다
이즈음 그러니까 그가 탈출하여 서울에서 산 지 여려 해가 지난 1905~60년대에 당시
서울에 남성 신도들로 주축이 되어 활동하던 거사림이라는 큰 신도단체가 있었다.
그는 여기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열심히 불교를 공부하였는데 특히 시간이 있을 때마다
월남하던 때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만해 한용운스님의 제자로서 같은 거사림회 회원이었던 김관호 선생이
듣고서 초고한 것을 김대은스님이 <관음신앙>이라는 책에 수록하였고 이것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출처: 나무아미타불 카페 발원님 글 옮김
24. 가난한 부부에게 다가온 관세음보살의 가피
출처: 법철스님 글 (www.bubchul.net)
해인사 밑 신부락에 박도일(朴道日)이라는 사십이 갓 넘은 사내가 처자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젊은 부부는 부모로부터의 유산도 없었고, 배움이 없어 달리 일자리도 없고 하여 남편 박씨는 관광버스나 노선버스가 도착할 즈음이면 버스정류장에 달려가 관광객들에게 자신이 일하는 여관에서 숙박을 하도록 하는 소위 호객행위와 함께 여관의 종업원으로 일하고, 부인 진씨는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두 부부는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월세 방에 사는 가난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집을 장만하는 날을 기다리는 기약 없는 희망으로 살고 있으나, 서로 가족 사랑하는 마음은 남달랐고, 가난한 두 부부는 남다른 불심이 깊었는데,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다.
쉬는 날이면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온가족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기도를 올렸고, 집에서, 일하면서 염염불리(念念不離)의 마음으로 관세음보살께 기도를 올렸다.
"대자대비하옵신 관세음보살님, 저희들이 알게 모르게 지은 전생의 악한 정업을 소멸하여 주소서."
박씨 부부의 지극지성의 기도는 드디어 관세음보살님과 감응도교(感應道交)를 이루는 날이 도래했다.
어느날, 풍채좋은 재일교포 노인이 수행원들을 데리고 수소문하여 왔노라며 박씨의 아내를 찾아왔다.
노인은 박씨의 아내인 진씨를 만나 고향을 물어보고 부모님의 성함을 묻는 등 여러가지 질문을 하더니 덮석 진씨의 손을 잡고 진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나의 유일한 조카가 틀림없다. 내가 너의 막내 삼촌이다.
내가 십대 후반에 잘못을 저지르고 집을 뛰쳐 나갔는데 일본으로 밀항을 했단다.
내가 성공하여 부모형제를 도우려고 하였지만, 내가 몸담은 단체가 조총련이어서 조국에 돌아올 수가 없었지.
이제 정치적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어 부모형제를 찾아 고향산천에 돌아오니 부모는 물론이요, 너의 부친인 나의 형마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더구나.
내가 조총련에서 활동하여 고향의 부모형제들이 얼마나 고통이 많았겠느냐.
내가 부모형제께는 씻을 수 없는 대죄를 지었다.
형의 혈육을 찾으니 그나마 죽고 너 혼자 남았더구나.
오늘에서야 너를 찾는 못난 삼촌을 원망해다오.”
노인은 조카의 손을 잡고 목을 놓아 울었다.
박씨 부부는 말로만 전해들은 삼촌에게 큰절을 올리고, 손자손녀도 예를 갖춰 작은 할아버지께 절을 올리게 했다.
삼촌은 조카 부부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가족이 먹고 살 수 있겠나? ”
박씨 부부는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개숙여 이렇게 말했다.
"배운 것은 없지만, 그저 무슨 일이던 열심히 하겠습니다. ”
처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한 달 후, 박씨 부부는 가족과 함께 서울 여의도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박씨는 용산에 있는 제법 큰 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필자도 박사장의 초청을 받아 회사를 방문한 바 있다. 자리가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대운이 도래하니 사람이 변화하는가, 사장석에 버티고 앉은 박사장은 예전의 해인사 밑 호객꾼의 티는 말끔히 가시고 보이지 않았다. 박사장의 아내인 진씨도 여의도 아파트에 사는 품위있는 부인이 되어 있었다.
필자는 박사장의 후의로 배가 터지게 얻어먹고 여비도 두둑히 얻은 바 있다.
당시 진씨의 삼촌은 과거 박정희 시절에 조총련 재무부장을 역임한 재일 교포의 재력가였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고국 땅이 미치도록 그리웁고 부모형제가 그리워지는데 거의 밤마다 소년시절 헤어진 부모와 형이 울고 있는 어린 조카를 부탁하더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박정희 정권에 거액을 상납하고, 전향하여 대한민국에 들어와 꿈속에 울고 있는 어린 조카를 찾아 나선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관세음보살이 갑자기 나타나 황금을 주는 것이 아니다.
박씨 부부의 경우는 관세음보살이 육친의 친화력을 작용하여 일본의 삼촌이 도와주도록 작용한 것이다.
이 또한 어찌 관세음보살의 부사의(不思議)한 기도의 응답과 가호가 아니겠는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뜻은 세웠지만, 전생의 나쁜 정업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속에 신음하는 고해대중이여,
영험한 대자대비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기도하며 인생을 살지어다.
25. 불가사의한 관세음보살님의 가피
월간불광 창간 25주년기념 신행수기 당선작)
(월간불광 99년 11월호에 실림)
-글·김광현-
저는 지금도 마산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한 믿음을 갖고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중생입니다.
월간 「불광」을 1999년 5월 20일에 처음 접하게 되어
여러 훌륭한 법어들과 재미있는 일화들을 감동 깊게 읽어본 후
저도 모르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도 남과 다른 특이한 경험을 한 것이 있어
저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여러 불자님들에게 소개해 보고픈 욕심으로
이렇게 나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속칭 산골 중학교를 나와 광주상고를 졸업한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곧바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고자
해병대 하사관에 지원 입대하여 4년 6개월 동안 복무하였습니다.
해병대를 제대한 후 다시 사회로 돌아와 이것 저것
안해본 것 없이 해오다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곱게 키우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0여년이 흐른 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저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죄악이라고 하는 살인을
저지르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그리하여 뜻하지 않게
저는 교도소에 수감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죄를 짓기 전에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기도하는
자세한 법은 몰랐어도 가끔씩 관세음보살님을 어느 누구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외곤 하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제겐 어떠한 어려움이 없는지라 간절한
바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1심 재판을 시작하려는 그 시기부터 저는 가슴 밑에서 솟구쳐
나오는 눈물을 한없이 쏟아가며,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기,
아니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원칙을 지켜가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짚어 108번을 정확히 세어가며
관세음보살님에게 기도를 하고 나서 그 뒤에는 제 소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눈물로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울부짖었음에도
불구하고 맨처음 1심 심리구형에서 무기징역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기징역이라는 검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재판 받은 후
대기하는 대기실 의자에 앉혀져 있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또다시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을 찬 채 교도소를
향하여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너무 절망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어버릴까하는
잔인한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저도 모르게 정신이 맑아지며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뜻에서 용기를 내어
관세음보살님께 진심어린 구원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다른 재소자들이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서
108번 관세음보살님을 부른 후
“제발 5년형만 받게 해주십시오.”라며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도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속깊이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재판 전까지 열심히 관세음보살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1심 선거공판에서 저는 징역 10년 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저의 애절한 기도 소리를 듣고 저를
이렇게 도와주셨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저도 모르게
감사의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습니다.
재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심 재판인 항소심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관세음보살님을 믿고 용기 백배하여 항소를 하였습니다.
며칠 후 항소심을 받기 위하여 인천교도소에서 안양교도소로
이감을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관세음보살님께 열심히 기도한 덕분인지 인정미가 넘쳐
흐르는 좋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거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안양교도소에 이감간 후 저는 매일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드린 후
재판장님께 탄원서와 반성문을 적고 또 적었습니다.
거의 하루에 한 부씩 탄원서나 반성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는 더도 덜도 말고 징역 5년만 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로 세월을 보내던 중 드디어 결심 재판날이
다가왔습니다.
재판 전날 꿈에서 관세음보살님을 만나 앞으로
다시는 하찮은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 애원하던
차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날 아침밥도 목이 메어 다 먹지 못한 채 또 수갑을 차고
법원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법정에 도착할 때까지 저도 모르게 입 속에서 중얼중얼
관세음보살님만 계속하여 찾게 되었습니다.
의지할 곳은 기도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웬일입니까?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의 담당 판사님께서 저에게 저지른 죄는 밉고 또 밉지만
수없이 많은 반성문과 탄원서를 보낸 점을 참작하여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형에 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는 느낌이었고 “법정에서 나가시오”
라는 말도 듣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제자리에 서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하고 있을 때 교도관이 제 손을 잡고 교도소를 향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재판은 끝이 났습니다.
다시 안양교도소로 돌아오자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이 관세음보살님께 매일 기도하고 수많은 반성문을
제출한 덕분에 일어난 기적이라면서 저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날도 관세음보살님께 뜨거운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2개월 후 씩씩한 마음으로 의정부교도소로 남은 징역을 살기 위해
이감을 떠나는 날에도 저는 저도 모르게 관세음보살님을 108번
부르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여유를 부리며 짚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저를 틀림없이 좋은 방으로 보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의정부 교도소에서 제가 생활해야 할 방에
고향 동생이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게 작은 것 같지만 엄청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동생은 그 방에서 위치가 높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여러모로
저를 배려해 주게 되니 저는 정말 마음 편하게 그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기도드린
관세음보살님의 보살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밖에 있을 때 해보지도 않은 핸드백 만드는 공장으로
출력을 해 1년 정도 수감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루도 빠짐없이 관세음보살님께 이제 제 소망은 그리운
가족들이 있는 집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 속에서 제가 피해를 입혔던 그분이 나타나
“너의 잘못을 이제 모두 용서해 줄테니 앞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살인을 범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고
말하고 어디론지 떠나버리며 제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랐고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몸을 꼼짝도
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아침 기상시간에도 저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고,
결국 교도관들과 동료 재소자의 등에 업혀 급히 의무실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너무 많이 아팠기 때문에 교도소의
의무실에서는 치료를 할 수 없어 사회의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본 모든 분들은 제가 죽을 것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저는 몸은 움직일 수가 없었어도 어느 정도 의식은
남아있어서 마음 속으로는 관세음보살님께 간절히
빌 수 있었습니다.
저는 ‘ 저같이 할 일이 많이 남은 사람을 보내려 합니까? 살려주십시요’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홀어머님과 제 자식들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병신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몇 시간이 흘러 집에서 돈을 가지고 오자 응급처치를 하고
MRI촬영을 하게 되었으며, 아픈 몸으로라도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몸은 아프지만 계속 관세음보살님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3일 지난 후 아내가 평상시에 집에서 입는 옷을 가지고 와서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제게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아내의 말인즉 검찰에서 검사님이 오셔서 저를 형집행
정지시켜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아내는 방긋 웃으며 당분간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통원치료를 계속 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때야 비로소 ‘관세음보살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집에 한번 갔다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말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약 7개월 동안 치료를 해서
아픈 몸이 완쾌할 수 있었으며,
다른 정상인과 똑같은 건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다 해놓고 다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감이 된 후에도 모든 욕심을 버리고 남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끝까지 관세음보살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하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이 계속 생기고 있지만 모두
생략하고 한 가지만 더 털어놓겠습니다.
마산교도소에서 몇 개월 생활하고 있던 어느 날
느닷없이 기쁜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저의 수인 번호를 관구실에서 부르길래 무슨 일이 잘못되었나,
집에서 면회 올 일도 없는데 하며 관구실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감형 8개월이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인가 하여 머리도 쥐었다 놨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습니다.
감형장을 가지고 제가 있는 공장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
주위에 알고 지낸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혼자서 다 관세음보살님 덕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감형을 받게되어 올 9월 30일이면 관세음보살님 덕으로
가족의 품으로 안기게 되어 면회 안 오던 여든이 다된
홀어머님과 아들, 딸도 만나게 되었다고
여러 불자님께 전하고 싶습니다.
저의 이 신기하고도 감사한 이적을 가슴에만 묻어 두기에는
저의 기쁨이 너무나 커서 마침 월간 「불광」에서
신행 수기를 모집하고 있어 이렇게 글로 한 번 적어 보았습니다.
제가 위의 글에서 밝힌 일은 한 점도 거짓이 없음을
관세음보살님께 아뢰며 이 글을 마감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언젠가는 꼭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 불자님들이 꼭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26.
관세음보살 가피로 죽음에서 살아나
관세음보살님은 대자대비의 화신이다.
항상 천개의 눈으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시고 또한 천개의 손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신다.
언제 어디서든지 부르면 곧바로 감응하시는 것이 관세음보살님이시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로 죽음 직전에서 살아나 현실적인 방편으로 생활불교를 구현하고 있는 성지 관음회 혜천법사, 그는 연세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무역회사를 경영하면서 불심이 돈독한 아내의 권유로 사찰에 가 법당에 참배를 하면서 그는 자신이 전생에 깊은 불연이 있었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법당 본존불만 참배하자 " 법당에 있는 여러 부처님께 다 참배를 해야지 왜 본존불만 참배하냐"는 아내의 책망에 그는" 여러 부처님을 한 곳에 모셔놓고 참배를 했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이미 불성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무역업을 할 당시 큰 오다를 따기 위해 고심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항공봉투를 주시더군요. 예삿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거뜬히 일이 성사가 되었지요. 그때부터 마음 속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무역회사가 잘되어 '수출의 탑'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잘 나가던 무역회사를 접어야만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발끝부터 근육이 마비되더니 서서히 가슴까지 마비되는 병에 걸려 그만 눈 뜬 시체가 되었던 것이다.
병원의사들 또한 병명도 모른 채 손을 놓고 있었고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관세음보살님께 "제가 앞으로 할 일이 없다면 여기서 멈추지 마시고,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면 여기서 멈추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그러자 목전까지 차 오른 마비증상이 3일 동안 멈추더니 서서히 풀리기 시작해 죽음 직전에서 다시 살아난 불가사의한 가피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 후유증으로 걷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도 발끝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혜천 법사는 발등을 슬며시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20여년 전 성지 관음회 설립 동기를 설명한 혜천법사는 "팔만사천 대장경이 다 방편으로 설해 놓은 것이라"며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방편에는 시비(是非)와 정사(正邪)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관세음보살님은 이 땅, 이 우주 어느 곳에라도 계시기 때문에 성지관음회(聖地觀音會)라고 명명했다는 그는 현재 전국적으로 회원이 3만여명이 된다며 강한 자부심을 피력했다
[출처] 불교인물탐방/ 성지관음회(聖地觀音會) 회장 혜천 법사/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방편에 시비(是非)와 정사(正邪)가 있을 수 없다 ㅡ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로 죽음 직전에 다시 살아나 ㅡ|작성자 불계
27.
꿈에 관세음보살님 친견하고 치암이 낫다
6년전의 일입니다. 어쩌다 보니 앞니 위에 흰 몽우리가 생겨서 수수을 받았는데 다시 생겨서 치과를 찾으니 치근에 생기는 암이랍니다. 그래서 서울대학병원치과와 원자력연구소에서 방사선 치료도 여러차례받았지만 별효과를 보지못했습니다. 저는 놀라고 불안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몇몇친구들과 의논하니 두번이나 수술을 하고도 그렇게 치료가 되지 않는다면 기댈 곳은 부처님밖에 없다며 친구가 권하는대로 자정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밤 열두시에서 새벽한시까지 집에서 부처님을 향하고 앉아 염주를 쥐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에게 온 심념을 기울여서 염불을 하는 동안 부처님이 사뭇 저에게 가까이 감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삼일간의 기도를 마치고 잠이 들었습니다.
어ㅡ덧 꿈속에서 목에 염주를 건 스님모습의 성자를 만났습니다. 머리는 정결히 깎고 흰저고리에 회색바지의 한복차림이었는데 꿈속에서도 저는 관세음보살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심으로 염불하며 우러러 보았습니다. 어느덧 보살의 상호는 거룩한 빛을 더하는 듯하더니 목에 건 염주의 주세불 아래에서 샘줄기처럼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물로 입을 씻어라"하시기에 저느 성큼 두손으로 받아서 입안에 머금고 입을 씻고는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자 관세음보살은 목에 걸었던 염주를 저의 목에 걸어 주셨고 꿈을 깨었습니다. 운각사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그런 꿈은 아무나 못꾸는 꿈이오 신심이 지극해서 감로수를 마셨오. 이젠 걱정마시오 라며 기뻐해 주셨습니다.
그 때 이후 이제 8년이 지났으니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