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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欲界,色界,無色界>

1. 지옥(地獄)  *8열지옥(등활,흑승,중합,호규,대규,염열,대열,무간(아비))

                       8한지옥(알부타,니랄부타,알찰타,확확바,호호바,올발라,발특마,마하발특마)

 

                     <등활의 경우 - 하루(1일)가 욕계 6천의 사왕천의 수명(인간의 900만년)이며,

                                            또한 머무는 기간(수명)도, 사왕천과 같아서 500년 이다.>

                     <흑승의 경우 - 하루(1일)가 도리천의 수명과 같고, 머무는 기간(수명)도 도리천에

                                            해당하며,  이후의 지옥도 기간은 증가하며,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2. 아귀(餓鬼)  *아귀는 인간의 한달(약30일)을 하루로, 수명은 약 500년(인간의 1만 5천년)이다.      
3. 축생(畜生)   (하늘의 용과 금시조의 수명은 약 1겁이다) 

4. 수라(修羅)  *인간의 100년이 하루, 수명은 약 1000년(인간의 약 3600만년),신장(키) 약 1유순

 

 *염마라계의 중생의 수명은 7만 2천세이다.

 

5. 인간(人間)  - 동승신주(수명 약 250년),서우화주(수명 약 500년),북구로주(수명 1000년)

                        남섬부주(수명은 최후는 10년이나, 최초는 헤아릴수 없다)

 

*신선(10종류) -지행선,비행선,유행선,공행선,천행선,통행선,도행선,조행선,정행선,절행선

                        천년이나 만년이상을 산다.
 

6. 천상(天上)

   

     註 : 신장(키)의 단위  < 1구로사 = 약 2km, 1유순(8구로사) = 약 16km >

 

   *欲界의 1일 : <사왕천=인간의 약 50년, 도리천=인간의 약 100년, 야마천=인간의 약 200년, 

                         도솔천=인간의 약 400년, 화락천=인간의 약 800년, 타화자재천=인간의 약 1600년 >

                      * 마왕천(파순)=인간의 약 3200년

 

 

 

   *色界(無色界) : 범보천,범중천,대범천,소광천의 1겁은 인세의 40중겁(800번의 각 소겁)과 같다.

                          무량광천부터~                         1겁은 인세의 대겁(80중겁-1600번의 각 소겁)이다.

 

       <*중겁:기세간의 住劫시 인간의 수명이 헤아릴수 없는 때부터 10세에 이르고, 다시 증감이

                  18번 있고, 최후로 증가하여 8만세에 이를때를, 중의 20겁(20번의 각 소겁)즉 중겁

                  이며, 중겁의 기간은 자세히 계산하기 힘듬. >         

       <*대겁:80중겁- 1600번의 각 소겁>

 

       <1소겁( 20번의 증감에 각 소겁의 길이는 다름) : 8만4천세를 기준으로 계산할때 = 약 1680만년 >

            인세의 수명 : 10 살에서 8만4천세까지 ~ 8만 4천세에서 10살까지를 기준으로 한 1소겁임.

            (인세의 1살 증감당 100년이 걸린다 - 단 인간의 수명이 100세 전후는 정해져 있지 않음)

   

                

   註:(출처)수능엄경,장아함경(기세인본경),아비달마구사론등  

                                 

 

 

     欲 界


(1) 사왕천(四王天)…"수미산" 중턱의 4방에 있는 하늘 나라로 동방지국천왕
     (東方持國天),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 북방다문천왕
     (北方多聞天)의 사왕천과 천인들이 사는 곳.

     (아내와 첩의 애정을 버리지 못하나, 정당치 못한 음행에는 마음이 흘러가지 않는 이들이 난다.)


* 신장(키)은 약 1/2유순(약 8km), 수명은 약 500년(약 900만년) 

  
(2) 도리천(도利天)…33천(삼십삼천), 수미산 꼭대기에 제석천(帝釋天)의 궁궐을

     중심으로 하여, 4방에 여덟 하늘 나라(八天)가 있고, 중앙에 한 곳을 합하여 33천임.

    (자기 아내에게도 애욕이 없어졌으나, 깨끗하게 있을적에 온전한 맛을 얻지 못한 이들이 난다.) 

 

* 신장(키)은 약 1유순(약 16km), 수명은 약 1000년(약 3600만년) 

(3) 야마천(夜摩天)…"선시천(善時天), 시분천(時分天)"이라 번역하며,

     때를  따라 쾌락을 받으므로 그렇게 이름함.(수염마천이라고도 함)  

     음욕의 경계를 만나면 잠깐 어울리나, 떠나면 생각이 없어진자들이 난다.

     여기서부터는 해와 달빛이 올려비치지 못하며, 제각기 광명이 있다. 

 

* 신장(키)은 약 2유순(약 32km), 수명은 약 2000년(약 1억 4400만년)

 

(4) 도솔천(兜率天)…지족(知足)이라 번역하며, 자기가 받는 5욕락(五欲樂)에
     만족한 마음을 내는 까닭으로 그렇게 이름함.

  (*내원(외원)궁에 미륵보살이 거주하고, 3재의 괴겁(화재,수재,풍재)시 내원은 파괴되지 않는다) 

 

* 신장(키)은 약 4유순, 수명은 약 4000년(약 5억 7600만년) 

(5) 화락천(和樂天)…"낙변화천(樂變化天)"이라고도 하며, 5욕의 경계를 스스로
     변화하여 즐김으로 그렇게 이름함.

 

* 신장(키)은 약 8유순, 수명은 약 8000년(약 23억 400만년) 

(6)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다른 이로 하여금 자재하게 5욕 경계를 변화케
     하므로 그렇게 이름함.

 

* 신장(키)은 약 16유순, 수명은 약 1만 6000년(약 92억 1600만년) 

 

 

 

     마왕천(魔王天) : 욕계와 색계 사이에 있슴

 

 * 신장(키)은 약 32유순, 수명은 약 3만 2000년(약 184억 3200만년) 

 

 

  註: 마왕천까지의 욕계의 천은 인간의 남녀처럼 혼인한다.  

 

 

 

    色 界

 

 

 *註: 색계천부터는 남녀(마음대로 변화)의 구분이 없고, 애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1) 범중천…색계 18천 중 맨 아래의 제1위 하늘, "초선천"의 제1천 
     "범파리사(梵派梨沙)"라 음역, 애욕이 생기지 않이하고 욕계를 머물고자 아니하면 이곳에 난다.


(2) 범보천…색계 18천 중 제2위의 하늘, "초선천"의 제2천

     "범부루혜(梵富樓醯)"라 음역하고 정사(淨師)라 번역함.

     이 하늘의 천중(天衆)들은,모두 "초선천"을 주제하는 "대범천왕"을 도우고 있는 신하들이며,

     욕계의 버릇이 없어지고, 욕심을 현저히 여의여서 계율을 좋아한다. 
 
(3) 대범천…색계 18천 중 제3위의 하늘, "초선천"의 제3천

     이 하늘은 계행을 깨끗이 가지며, 여러 범천의 대중을 통솔하는 대범왕들이 나는 곳이다.  
    

*범천의 하늘의 수명은 약 1겁이다.

 

 


(4) 소광천…색계 18천 중 제4위의 하늘, "제2선천"의 제1천, 파율아파(波栗阿婆)라 음역

     이 하늘은 범천사람들을 거느리고, 범천의 행을 원만이 하여, 스스로의 몸에서 광명을 발한다.


(5) 무량광천…색계 18천의 제5위 하늘, "제2선천"의 제2천

     이 하늘에 나면,  몸이 발하는 광명이 한량 없어 시방세계가 수정같이 비친다고 함.


(6) 광음천…색계 18천 중의 제6위의 하늘, "제2선천"의 제3천, "아파회제바
     (阿波會提婆), 아파회(阿波會), 아회긍수(阿會亘修), 아파긍수(阿波亘修),
     아파최라차(阿波최羅遮)"라 음역하고 "극광정(極光淨), 승변광(勝遍光)"이라
     번역, 이 하늘의 중생은 음성이 없고 말할 때에는 입으로 광명을 내어 말의
     작용을 대신한다고 하며, 청정한 교화의 작용이 다함이 없다고 한다. 

 

 *광음의 하늘의 수명은 약 2겁이다.

 

 註: 삼재중의 火災시 광음천의 아래 하늘까지는 모두 타서 무너진다.

   (*지옥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생들이 광음천과 그 이상으로 오른다) 

 

 


(7) 소정천…색계 18천 중 제7위의 하늘, "제3선천"의 제1천, "파율다수바(波栗多首婆)라 음역

     이 하늘 사람들은 적멸의 즐거움과 통하며, 광명이 음성이 되고 소리를 내어 정밀한 행을 이룬다.    

 

 (8) 무량정천…색계 18천 중 제8위의 하늘, "제3선천"의 제2천, "아바라나마(阿婆羅那摩)"라 음역

     이 하늘에는 마음에 즐거운 감각인 낙수(樂受)가  있으며, 그 아래 "소정천"에 견주어 보면

     그보다 승묘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9) 변정천…색계 18천 중 제9위의 하늘, "제3선천"의 제3천.

     이 하늘은 세계와 몸과 마음이 깨끗하여지고, 깨끗한 덕을 성취하여 의탁할만한 좋은 경계가

     앞에 나타나서 적멸한 즐거움에 돌아간다. 

 

*변정의 하늘의 수명은 약 3겁이다.   

 

註: 삼재중의 水災시 변정천의 아래 하늘까지는 모두 뜨거운 잿물에 녹아 무너진다.

  (*지옥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생들이 변정천과 그 이상으로 오른다) 

 

 


(10) 복생천…색계 18천 중 제 10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1천

       이 하늘은 괴롭고 즐거운 두 마음을 한꺼번에 버려서, 깨끗한 복의 성품으로 난다.

       (註:수능엄경, 아비달마논에서는 무운천을 "제4선천"의 제1천으로 함.) 

 

(11) 복애천…색계 18천 중 제11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2천

       이 하늘은 깨끗하고 한정없는 복의 묘함에 수순함으로 태어난다.

       (註:수능엄경, 아비달마논에서는 복생천을 "제4선천"의 제2천으로 함.)

 

(12) 광과천…색계 18천 중 제12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3천 
       이 하늘은 깨끗한 빛이 한량없고, 복과 덕이 뚜렷하게 밝아 태어난다.

 

*광과의 하늘의 수명은 약 4겁이다.

 

註: 삼재중의 風災시 광과천의 아래 하늘까지는 모두 바람으로 무너진다.

  (*지옥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생들이 광과천과 그 이상으로 오른다) 

 

 


(13) 무상천…색계 18천 중 제13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4천

       이 하늘에 태어나면 모든 생각이 없어짐으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함.

       성품을 밝히지 못하여, 처음 반겁동안은 없어지고 나중 반겁은 도로 난다. 

 

*수명은 약 500겁이다.

 

(14) 무번천…색계 18천 중 14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5천, "5정거천"의 한 곳으로,

       이 하늘은 욕계의 괴로움과 색계의 즐거움을 모두 끊고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전혀 없게 된다고 함.

 

*수명은 약 1000겁이다. 

(15) 무열천…색계 18천 중 15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6천, "5정거천"의 한 곳으로, 
       이 하늘의 심경(心境)은 의(依)도 없고 처(處)도 없어 청량자재(淸凉自在)하여,

       열뇌(熱惱)가 없는 하늘이라 함.

 

*수명은 약 2000겁이다.

 

 


(16) 선견천…색계 18천 중 16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7천, "5정거천"의 한 곳으로, 
      "수제사(須提舍), 수달칭(須達稱)"이라 음역하는데, 장애함이 없어
       시방(十方)을 보는 것이 자유 자재한 하늘이라 함.

 

*수명은 약 3000겁이다. 

(17) 선현천…색계 18천 중 17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8천, "5정거천"의 한 곳으로, 
      "수달시(須達尸), 수제사나(須提舍那)"라 음역하고 "선호견(善好見)"이라고도 번역함,

       천중(天衆)의 선묘(善妙)한 과보(果報)가 나타나므로 그렇게 이름함.

 

 *수명은 약 4000겁이다. 

(18) 색구경천(아가니타천)…색계 18천의 맨 위 하늘로 "제4선천"의 제9천, "5정거천"의 한 곳이고,

       색계 18천의 마지막이다.  

 

 *수명은 약 5000겁이다.

 

 

 

     無 色 界
 
 
(1) 공무변처천…무색계의 제1천, 물질의 하나인 이 육신을 싫어하고 한
     없는 허공의 자재함을 즐겨하며, 공(空)이 무변(無邊)하다는 이치를 알고
     수행하여 태어나는 하늘이라 함.

 

  *수명은 약 1만겁이다.

 


(2) 식무변처천…9지의 하나이고 무색계의 제2천, "식지천(識知天), 식처천(識處天)"이라고도 함,

     공(空)이 무변함을 싫어하여 마음을 돌려 식(識)을  반연(攀緣)하며, "식"과 상응하여,

     마음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아니하고, 3세(三世)의 "식"이 다 정중(正中)에 나타나서,

     청정하고 적정(寂靜)한 과보(果報)를 얻게 되는 하늘이라 함.

 

  *수명은 약 2만 1000겁이다.

 


(3) 무소유처천…9지의 하나이고 무색계의 제3천, "식무변처"에서는 "식"이 "3세"에 걸쳐

     끝이 없다고 관(觀)하나, 이 하늘에서는 "식"의 그러함을 싫어하여,

     소연(所緣)이 아주 없는 것임을 관하여 무소유(無所有)의 해(解)를 얻어

     수행함으로써 태어나게 되는 하늘이라 함.

 

  *수명은 약 4만 2000겁이다. 



(4) 비상비비상처천…무색계의 제4천으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라고도 함,

     이 하늘은 "3계"의 맨 위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하는데, 이 하늘에

     태어나는 유정은 하지(下地)와 같은 거친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비상(非想) 또는

     비유상(非有想)이라 하며, 그러면서도 세밀한 생각이 없지는 아니하므로 비비상(非非想)

     또는 비무상(非無想)이라 하였다.
     비유(非有)이기 때문에 외도(外道)들은 혹 진열반처(眞涅槃處)라 생각하게 되나, 또한

    "비무상"이므로, 이곳 하늘도 생사(生死)가 존재한다.

 

  *수명은 약 8만 4000겁이다. 

 

 


 < 여러 천상의 세계와 극락정토 > 


아래 글 내용은 문답으로 진행이 되며, 이해를 돕고자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불자님들의 천상과 극락에 관한 이해의 자료로 작게 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퍼옴(수정함) - 옮긴이>

 


 천상의 세계 (1)

"마음을 고요히 해라. 그리고 천상을 관하여 보아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집중하였다. 처음에는 뚜렷하지 않았으나 점점 확실해졌다. 제 1천을 관하였다.

그 위 차원의 제 2천, 그 다음 차원의 제 3천, 그 다음 제 4천 이상을 위로 관하여 올라갔다. 


"제 1천 아래 차원도 살펴보아라."
제 1천 아래차원의 세계는 천상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으나 분명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제 4천을 보아라. 나에게 설명해 보아라." "여기에 나는 천인들은 마음이 순수하고 선행을

많이 행한 공덕으로 이곳에 몸을 받습니다.


국토의 넓이는 끝이 없는데, 아래 하늘세계보다는 두 배 정도 됩니다. 그리고 두 곳으로 구분이 됩니다. 한 곳은 성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의 주인은 거룩하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모습이 어떠한가?"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대성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세계는 도솔천이며, 그 분은 내원궁의 미륵보살님이다. 계속 살펴보아라."
"산하 대지와 궁전들이 보배로 치장되고 매우 아름답습니다. 한곳은 그곳보다는 위광이 조금 떨어지고 천인들도 공덕이 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집착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이곳의 천주는 미륵보살님을 매우 예경하고 있습니다."

"수명은 얼마인가 보아라."
"이곳의 하루는 인간세의 400년에 해당하고 천상의 세월로는 4000년 전후를 삽니다.

 이곳 천인들의 키는 거대한 산과 같습니다.

 너무 커서 천인들의 키에 비하면, 인간의 키는 마치 벌레처럼 작게 보일 것입니다."

"음식은 무엇을 먹는가?"
"무슨 음식이든지 생각만 하면 앞에 나타나고 바로 섭취됩니다. 그러나 전생의 복력에 따라 색깔이 조금씩 다릅니다. 여기서도 욕심을 많이 내면 수명이 단축됩니다. 몸은 청정하여 부정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과 같이 핏줄, 힘줄, 변, 오줌 등 부정한 것은 없는데 모든 천상계가 차이는 있으나 다 그러합니다."

"평상시에 늙거나 병이 있는가?"
"없습니다. 늙거나 병은 없지만 죽을 때는 쇠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어떤 것인가 살펴봐라."
"머리의 화환이 시들어 버리거나 몸에 때가 낍니다. 옷도 지저분해지고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오래 앉아 있기를 싫어하게 되는 것과 눈을 자주 깜박이는 것 등입니다."

"그렇다. 그것을 다섯 가지 쇠하는 상이라 한다.

그 현상은 몸의 기력이 다하고 힘이 다해서 몸에 때도 끼고 꽃도 시들고 하는 것이다.

인간도 기운이 잘 돌지 않고 신체기능이 떨어지면 냄새가 평소보다 더 나고, 한곳에 좀 앉아 있으면

이내 몸이 뒤틀려서 오래 앉아 있기를 싫어하게 된다.

천인이 인간과 다른 것은 죽을 때가 되어야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천인은 죽으면 시체가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화생하기 때문이다. 남녀가 있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이 있는가 보아라."

 


"내원궁 미륵보살님이 계신 곳은 성스러운 성인들의 세계라서 결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곳은 남녀도 있고 결혼도 합니다. 이곳은 손만 잡으면 서로 기운이 통하여 아이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처럼 태로 나지 않습니다.

  기운으로 형성되어서 불현듯 나타나며 처음에 크기는 인간의 4~5세 정도 되나, 음식을 생각해서 섭취하고는 곧바로 어른이 됩니다. 부모가 양육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전생의 기억을 살려서 천상에 몸을 받은 까닭이 선한 공덕을 지어서 난 줄 압니다.

 그래서 더욱더 큰 공덕을 지으리라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 가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저기 오락에 취하다 보면 그 결심은 곧 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아래 제 2천 도리천을 보아라. 그 세계 천인들의 수명은 어떤가?"
"제 4천 도솔천보다는 수명이 반의 반밖에 안 됩니다. 이곳의 하루는 인간의 100년에 해당하고

 수명은 1000년 정도 됩니다. 키는 도솔천에 비하면 4분의 1입니다. 복력도 4분의 1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키에 비하면 몇 백배가 됩니다."

거기는 도리천이라 하고 천주를 흔히 제석천왕이라고 한다. 다른 것도 살펴보아라."
"이곳의 천주는 위력과 복력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이 하늘 세계는 다른 하늘 세계보다 인간계와

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다. 제석천왕이라고도 하고 옥황상제로도 칭한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한님, 하느님, 또는 한울님이라고 칭하면서 인간들의 삶을

좌우하는 우주의 주인으로 믿어 왔다."

"그곳은 종교가 있는가?"
"이 세계는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황홀한 세계인지라 진리를 닦을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도리천왕은 석가모니불의 재세시에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어서 진리를 닦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다른 대다수 천인들도 절실하지는 못하지만 성인을 흠모하고 법문 듣기를 좋아합니다.

또 성현의 법을 공경하고 깨달은 이나 진실한 수행자, 그리고 밝은 마음의 사람들을 위호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잘못 쓰면 위호하다가도 어느덧 떠나가고 맙니다.

하늘 사람들은 인간 세상에 부처님이나 깨달은 성인들이 나타나 법을 설하면 즐겨 경청하기를 좋아하는데, 그 까닭은 대다수 천인들은 전생에 수행을 잘한 사람들이거나 선행을 많이 하여 천상에 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너무 즐겁기 때문에 특별히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천상의 하늘 사람들은 대부분 대동소이합니다."

 

 


 천상의 세계 (2)


"그렇지. 우리 인간들도 남보다 조금만 앞서도 아만심을 일으켜서 조심하여 마음을 닦으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그들이야 오죽하겠는냐! 그러면 천인들의 정신구조를 살펴보아라."

"잠재의식이 압도적으로 발달해 있습니다. 천리 만리를 일순간에 왕래하고 천 가지 만 가지를 동시에 듣고 보는 등 신통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의지가 약한 데다 기억하는 힘이 인간에 비해서 약합니다. 굳이 오래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작 고집을 부려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또 놀기를 좋아해서 진리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다하면 다시 전 세상의 업에 따라서 윤회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 천상은 어디라도 공덕이나 선정의 힘이 다하면 수명이 다하고 다른 세계로 타락한다. 천상세계는 종교가 무엇이든 사상이 무엇이든 거기에 태어날 업에 해당이 되면 태어난다. 널리 베풀고 선행을 하여 악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누구라도 태어나는 것이다. 밝은 마음에 의한 복업으로 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도솔천 내원궁만은 공덕만 가지고는 안 되고 선정력과 원력이 있어야 된다. 내원궁은 미륵보살의 위신력으로 유지되는 세상이기에 그렇다. 내원궁은 욕계천이지만 괴겁시 모든 천상이 다 파괴되어도 그곳만은 파괴되지 않는다.

 

"욕계 제6천을 지나서, 색계천 및의 마왕천(파순)을 보아라."

"여기도 인간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곳의 천인들은 아래 차원의 천상들처럼 음욕이 남이 있는지라 남녀가 있고 결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하기도 합니다. 이곳의 수명은 제 4천 도솔천의 8배요 복력도 그러합니다. 키도 도솔천의 8배입니다. 이곳의 궁전과 가옥은 칠보로 광채가 찬란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국토는 광대하고 더러움이 없고 춥지도 덥지도 않습니다. 이곳의 천인들은 때로는 다른 천인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귀신 또는 축생의 모습, 드물게 부처님의 모습을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제 색계 제3천인 대범천을 살펴보아라." 
대범천은 색계 "초선천" 제3천에 해당하며  "이곳은 생각으로 남성을 생각하면 남자가 되고

여성을 생각하면 여자가 됩니다. 남녀의 구별이 의미가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남녀가 없습니다. 따라서 결혼도 하지 않고 생산도 없습니다. 여기에 나는 천인은

스스로 날 뿐 부모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화생으로 나지만 음욕은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있다고는 하지만 미세합니다. 

이곳 대범천주는 현겁이 시작될 때에 나서 지금까지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불멸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을 뵙고서야 자기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간혹 전세의 숙업을 신통력이 있는 사람들은 대범천주를 마음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일부분만 살펴보고는 우주를 창조한 신으로 굳게 믿게 됩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종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선정력이 있어야 태어나는 세상이고 복업만 가지고는 올 수 없습니다."

"색계 제6천인 광음천을 보아라."
"이곳은 대범천보다 비할 데 없이 수승하고, 선정력이 없으면 복력만 가지고는 올 수 없는 곳입니다. 음욕이 다한 곳인지라 역시 남녀가 없으며, 생각에 따라서 남자나 여자의 모습으로 변성됩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법은 없습니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화생하여 곧 어른이 됩니다.

수명은 대범천보다 4배 정도 됩니다. 이곳은 대화할 때면 입에서 빛이 나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자연히 그 내용을 읽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계가 처음으로 시작될 때에 이곳의 천인들이 최초로 인간계에 많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천상은 인간계와는 시간 차이가 많이 나는데,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인간계는 감각으로 느끼는 시간이 천상과는 다르다. 인간은 천인들에 비해서 마음이 매우 초조하다. 그리고 인간들이 처한 환경도 같은 인연으로 만들어졌기에 빨리 변혁한다. 그러나 천상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고 느긋하다. 그에 따른 인연으로 구성된 자연환경도 역시 그렇다. 하루가 이제 저무는 구나 하는 순간 인간계는 수백년, 심지어는 수만년이 지나가고 마는 것이다.

마음이 욕심과 번뇌로 조바심을 치면 이미 타고난 수명도 더욱 단축된다. 사형수가 며칠 만에 머리가 희어졌다는 이야기가 참고가 될 것이다. 우리 인간계는 빛의 속도 속에 살고 있지만, 천인들은 빛의 속도 속에 살고 있지 않다. 당연히 시간개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차원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 체계로는 천상세계가 옆에 있어도 만지거나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리 이동 수단이 발달하여도 도달할 수가 없다. 차원이 다르면 존재 자체도 모르기 때문이다. 천상의 모든 모습은 정신의 갖가지 차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수준에 따라서 천상의 경계도 달라지고, 또한 모습도 달라진다. 그래서 천상은 실재하지 않으면서도 실재하는 것이 된다.

생각의 차원이 천상이면 곧 천상을 보고 느끼는 것이며, 따로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차원의 이동에는 우리각 생각하는 거리와 시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간도 공간도 그 차원 안에 있을 뿐이다. 이 중생계는 서로 엉켜 있지만 자리 싸움을 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거울 속에 논도 비치고 밭도 비친다. 너의 얼굴도 비치고 나의 얼굴도 비춘다. 겹쳐 비춘다 해도 자리가 비좁지 않고 그 위치가 문제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왕천의 천인들은 다른 중생들의 모습으로 마음대로 나타납니다. 간혹 신이나 부처님의 흉내도 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게 어찌 마왕천뿐이겠느냐? 천인들은 다 변화하는 힘이 있다.  천인들은 전생에 남의 어려움을 대신하여 해결하고 그 선행을 다른 사람에게 회향하기를 즐겨했다.

그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잘 부린다.

겉모습은 부처님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거룩한 모습을 다 나타낼 수는 없다. 그리고 위신력도 당연히 다 나타낼 수 가 없는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적멸의 이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밝은 수행자는 결코 속지 않는다."

 

 

 


 극락과 천상(1) 

 
"이제 천상의 세계를 쭉 관하여 보아라. 네가 어느 천에서 생활할 수 있겠느냐? 평등하게 대화가 되고 모든 것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몸의 세계다." "제 3천 대범천까지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대범천도 상층부는 잘 되지 않습니다." 

  상층부는 능히 자유롭게 살필 수는 있었으나 체감으로 보고 듣고 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우리 실생활 속에서 사는 계층이 다르면 옆에서 볼 수는 있어도 같은 수준으로 생활을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냐? 어느 천상이라도 차별이 있다. 형상이 있는 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아라한의 세계든 불보살의 세계라도 형상의 세계로 보면 차별이 발생한다.

본래 근본처로 보면 천상과 지옥이 결코 둘이 아니지만 모양으로 볼 때는 아무리 미세한 분자 원자의 세계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세계를 상품.중품.하품으로 나누어서 보아라. 어느 세계까지 생활이 가능한가?"
"대범천은 중품까지만 대화가 되며 같이 오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음식과 옷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라."

"중품까지는 옷도 입을 수 있고 음식도 먹을 수 있지만 상품의 천인들이 먹는 음식은 먹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옷도 같은 종류의 옷은 사용할 수 없고요."
"그들의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어떠냐?"
"대범천의 천인들은 선정력에 의한 즐거움으로 음식을 삼아 생명을 유지합니다. 저는 그 음식을 섭취할 수가 없습니다. 음식을 생각해도 상품의 음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그런다고 보느냐?"
"저의 실질적인 선정력이 미치지 못해서 그런가 합니다."
"누가 일부러 못 먹게라도 하느냐?"
"아닙니다. 공덕과 선정력에 의해 형성된 업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공덕이나 선정력이 약하면 자연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정력의 뿌리가 있다고 보느냐?"
"없습니다."

"그런데 선정력이 부족하여 상품의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는 말이냐? 너의 마음에 무엇이 '된다.안된다, 능력이 있다.없다, 공덕이 있다.없다'를 망령되게 논하느냐?"
"스님, 말씀 따라 과연 그러합니다. 그러나 어쩐지 안 됩니다."
"그런가? 그래 중품의 음식 맛은 어떠냐?"
"향기롭게가 한량없고 인간의 음식 맛으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 아래 천상인 범보천의 음식 맛은 어떠냐?"
"똑같이 선정의 즐거움으로 음식을 삼지만 그 맛은 대범천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음식 맛이든 옷이든 대체적으로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음식 맛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대범천 중간까지는 정신의 몸을 나투어서 일상 생활에서처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먹고 마시고

할 수 있었다. 정신으로 나툰몸이지만 실상의 몸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물론 먹으면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러면 아주 지상의 음식을 먹지 않고 살 수도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천상은 희락과 선정력이 음식이기 때문에 자기 선정의 힘만큼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힘이 다하면 천상의 음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유지하는 한은 더욱 그렇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선정력이다, 공덕이다.' 하는 망령된 생각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 그리고 나의 말을 들어라." 

...시간이 흐른 후
스님이 던지는 자비의 창 앞에 관념은 무참히 꿰뚫리고 부숴져 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잠재해 있던

자기도 잘 알 수 없는 사고가 하나하나 깨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었다.

이제는 대범천 위의 소광천, 무량광천, 광음천, 소정천, 무량정천, 변정천, 복생천, 복애천, 광과천,

무상천, 무번천, 무열천, 선견천, 선현천, 색구경천까지 모조리 걸림 없이 동일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상위천으로 갈수록 수명도 배로 증가할 뿐만 아니라 옷도 화려하고 음식도 달랐다. 또한 생각 따라 나타나는 집의 장엄도 다 달랐다. 어느 천상이든 그 천상 안에서도 차별이 분명하여 크게 상.중.하로 나눌 수가 있었다. 

또한 색계천을 넘어 무색계천에 속하는 공무변천, 식무변천, 무소유처천, 비상비비상천까지도

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동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이 말씀하셨다.
"천상을 떠나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를 살펴보아라."
"극락세계는 부처님이 계시는 곳과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시는 곳은 너무도 화려 장엄합니다."

"천상과 극락세계를 비교해 보아라."
"차이가 많이 납니다."
"왜 그런 차이가 발생한다고 보느냐?"
"극락세계는 윤회의 세계가 아닌 부처님의 대정각의 위신력으로 건립된 정토인 반면에 천상세계는 중생의 업으로 이루어진 윤회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가 합니다."

"극락세계 성중들의 모습은 어떠냐?"
"장엄하고 빛나는 모습을 억지로 비교 표현한다면, 가장 훌륭한 천상의 천인과 비교해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천인의 모습이 인간에 비하면 너무나 뛰어난 것이지만, 극락세계의 성중에 비하면 아득히 떨어집니다."

"그렇다. 이러한 것은 부처님이 이미 경전에 말씀해 놓으셨지만 그것은 실제로 그렇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을 말하여 보아라."

"첫째로, 이곳에는 진리가 있고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성중은 누구나 다 한생에 깨달음에 들어가 해탈을 성취하게 됩니다. 다시는 악도에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 성중의 공통된 운명이랄 수도 있고 '업'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상은 복이나 선정의 힘이 다하면 다시 다른 세계로 윤회합니다. 천상은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극락세계의 수명이 영원합니다. 그곳은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영위되는 세계이고 진리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상은 비록 수명이 한량이 없다고는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천계는 진리의 세계가 아니고 중생들의 업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극락세계의 성중들은 신통력이 광대합니다. 진리의 바탕에서 전개되는 신통력이기 때문에 천상의 얕은 복업이나 조그만한 선정력에서 오는 신통력과는 아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넷째, 극락세계의 집이나 자연 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장엄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기자기함과 광대함이 두루 다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천상은 아기자기한가 하면 광대하지 못하고, 광대한가 하면 아기자기하지 못합니다. 또 극락세계는 더러움이란 말이나 글자도 없으며, 악도라는 말도 없습니다.


극락과 천상(2)

"자연 환경을 보이는 대로 이야기해 보아라."
"극락세계의 모든 물은 감로수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물을 먹고 목욕만 해도 마음이 청량하고 온몸이 충만해집니다. 병이라는 말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대지는 칠보로 장엄되어 있고, 먼지니 더러움이니 하는 말조차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풀과 나무도 온갖 보배 나무로 장엄되어 있으며, 바람에 흔들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음악과 법문이 흘러나와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청량하게 합니다. 극락세계의 모든 대자연은 아미타불의 분신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가 법이며, 실질적으로 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가지가지의 아름다운 새들의 울음소리도 그 자체가 음악이요 법문입니다. 듣는 자로 하여금 생명력을 얻게 합니다. 모든 사물의 움직임은 생각과 의질을 넘어서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천상과 다릅니다. 천상은 생각을 하면 이루어지지만 극락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성취됩니다. 집이 필요할 때는 자동으로 집이 현신하며, 필요치 않을 때는 사라집니다.

물에서 목욕을 하는 경우에도 물은 자연히 스스로 물의 높이와 온도 등이 조절되므로 극락세계의 성중은 그러한 곳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최상의 깨달음에 의한 대열반의 즐거움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따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관찰했다. 지금 극락세계의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법문을 들을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자세히 살필 수는 있지만 먹고 마실 수는 없습니다. 아직 힘이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냐? 그것이 어렵다면 한없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한 가닥 망념만 제한다면 별로 어렵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망념이 무엇이며, 본래 없는 이치도 너는 잘 알고 있다. 생각 이전의 뿌리깊은 느낌이 녹아져야만 몸으로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뿌리 없는 나무는 허공의 신기루와 같다. 전혀 걸림없지만 스스로 나가 떨어진다.

그 까닭은 오랫동안 훈습하여 온 관념 때문이다. 그 옷을 벗어 버려야 한다. 어떠한 장애도 태초부터 없는 줄 굳게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 심지어 몸도 극락세계도 한 눈을 돌이키면 허망할 뿐이다. 그런데 무엇을 일러 무겁다, 가볍다 할 것인가?"
스님의 말씀은 감히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다시 스님의 도움이 있었다.

...시간이 흐른 후.
.
"부처님을 뵈옵고 법문을 듣고, 음식도 먹고 마시고 해 보아라." 
고요한 상태에서 정신의 몸을 나누어 몸을 날려 부처님 전에 나아가 예배를 드린 후에 한쪽에 조용히

앉으니, 부처님의 낭랑하신 옥음이 귀에 파고들었다. 거기에서 남이 없는 무생심법을 경청하였다.

그런 연후에 스님의 말씀대로 감로수를 마셨다. 감로수는 몸 구석구석을 청량한 기운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그때 극락세계의 음식이 저절로 앞에 이르렀다. 극락세계의 음식은 진리의 힘에 의한 음식으로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천상의 음식과는 과연 이토록 차이가 날까 할 정도였다. 극락은 대열반의 환희로 음식을 삼기 때문에 음식 아닌 음식인 것이다. 

몸은 숭고한 빛이 나는 옷이 이미 감싸고 있었다. 이리저리 이동하여 극락세계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온갖 자연 산천은 성중의 편리에 따라서 가지가지 모습으로 자유 자재로 변화를 보여 주고, 그 넓이는 끝이 없고 성중의 숫자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스님, 극락세계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극락세계는 아미타 부처님의 오랜 원력과 위신력에 의하여 이룩된 국토다. 여타 중생계가 중생의 욕심과 집착에 의해 이룩된 세계라면 극락세계는 성스러운 진리에 의해 성립된 세계다. 이러한 불국토는 극락세계 외에도 수없이 많이 있다.

 

지옥으로부터 아귀,축생,인간,수라,천상세계를 한 소천세계라 하는데, 이러한 소천세계 1000개를

한 중천세계라한다.

중천세계 1000를 한 대천세계가 한다. 대천세계  3000개를 삼천대천세계라고 하는데, 이러한 세계를

일컫어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있는 삼계육도라고 한다. 이는 극락세계와 그리고 다른 부처님의 불국토와는 구별되는 세상이다.

여러 부처님의 정토 중에서도 극락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매우 인연이다. 누구나 발원만 하면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천상은 전생에 선행을 닦아서 그 공덕의 힘으로 또는 선정력을 스스로 닦아서 그 힘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그러한 공덕이 없으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막지를 안 하지만 보통의 인간으로 천상에 나기가 힘이 드는 것이다.

극락세계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한 인도하심을 입어서 나는 것이다. 때문에 간절히 그 세계에 나기를 발원하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혹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다 날 수 있는 것이다. 극락세계에 난 성중들은 다시는 윤회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정코 성불하기 때문이다.

잘하든 못하든 여하한 구별도 하지 않는다. 자기의 노력이라고는 왕생하고자 하는 발원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다만 의심의 마음을 발원을 하면 변지에 왕생해서 오랫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이미 <관무량수경> 이나 <아미타경>에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죄업을 많이 지은 자라도 지극히 참회하고 온 힘을 다하여 왕생을 발원하면 임종 후에 곧바로 왕생할 수 있다. 그것은 죄업의 근본이 결정적인 모양이 아니고 허깨비와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기 때문이다. 왕생하고자 하는 마음의 힘이 강하면 문제없이 차고 뛰어넘어서 부처님의 인도하심을 힘입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평상시에 멀쩡하게 딴 마음을 살다가 갑자기 선한 마음을 내어서 어찌해 보려고 하면 아무래도 잘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평상시 부지런히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평소에 준비를 하지 않으면 임종시 몸이 무너질 때에 본래 지은 악업이 발동을 하면 한 순간 이성을 상실하고 만다. 지은 대로 끌려서 다른 곳으로 전도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이 멀쩡하고 이성이 살아 있을 때에 원력을 깊이 새겨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업의 결정성이 근본으로 없다해도, 형상이 있는 한 과보를 면할 수 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 있는 사람이나 잘 닦은 사람이나 다 같이 차별없이 나느냐?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평시에 경을 읽고 수행을 잘하고 많은 공덕을 지은 이는 극락에 태어나도 상품에 나는 것이다. 그래서 빨리 부처님을 뵙고 성인 반열에 들게 된다.

그렇지 못한 이는 한없이 늦게 서야 하품에 나서 부처님을 뵙게 된다. 결국 오랜 후에야 성인 반열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 반열에 들고 나서는 나 같게 된다. 전생에 깊은 수행과 많은 공덕을 지은 이라도 극락세계에 나기를 발원해야만 왕행하게 된다.

업에 따라서 자동으로 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범부는 부처님의 인도가 없을 시는 극락에 이를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자칫 자기가 지은 업대로 다른 세계에 태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끝.

 

 

나무아미타불!

 

성불하세요.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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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선생의 저승문답


이 글은 1945년경 중국의 유명한 재판관인 여주선생이란 사람이
실제 살아서 저승에 가서 명부 재판관을 지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우리가 간간이 들어왔던 저승에 대한 얘기를
명부에서 벌어지는 재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글들이 전부 사실이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저승세계에 대해 조금 더 접근해 갈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되돌아 보게 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원저 : 유명문답록(幽冥問答錄)


구 술 : 여주선생
수 록 : 임유양
번 역 : 박금규(원광대학교 사범대 한문교육과 교수)




번역자의 이끄는 말

이 '저승문답'은 최근(1945) 중국의 제2의 포청천으로 명성을 드날렸던
명판관 여주(黎澍)선생의 실제 저승 재판기록이다.

여주선생은 다 아는 바대로 나이 많고 덕이 높고 또 명판관으로 법률계에 소문이 난 사람이다.

그는 늘 평소에 자신이 저승의 재판관으로 다년간 있었고,
수면중에 잠깐 명부(冥府)에 가서 그 옥안(獄案)들을 처리했노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때 중국군의 참모장 임유양은 그와 매우 절친한 사이로 그러한 저승이야기를 자주 듣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 바쁜 와중에도 어느 날 하루 짬을 내어 본격적으로 임참모장이 그간의 경위를 직접 묻고
그에 대한 여주선생의 구술(口述)을 손수 수록하여 저승문답이란 한 권의 책이 이루어진 것이다.

흔히들 요즘 신세대인들은
자칭 소위 과학과 문화를 연연하여 저 신명세계 귀신이야기를 하면
아주 질겁을 하고 무슨 벌레를 씹었거나 똥밟은 것처럼 몸서릴 치고 도망간다.
그리고 아주 무지몽매한 미개인 취급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저 신명세계를 부정하는 현대 문화인들이
살인, 강도, 강간, 부정, 비리를 이처럼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일까?
생혈을 빨고 인육을 뜯는 저 막가파나 지존파 등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이 '심령' '신명세계'에 중점을 두고 교화하는 것일텐데,
이렇게 번창한 종교의 주장이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불교의 윤회설은 차치하고서라도 인류의 영원한 스승인 공자도 그 주역(周易) 계사편에서

" 역은 위로는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를 살피고 있다.
그러므로 이승과 저승의 일을 알며, 사물의 시초를 미루어 사물의 종말을 알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고 사는 이치를 알 수 있으니,
정기(精氣)가 엉기어 모인 것이 생물이 되고, 변하여진 것이 영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의 실체와 정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고, 또 중용(中庸)에서 말하기를,

" 귀신의 덕됨이 왕성하기도 하구나.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본체가 되어 있어 빠뜨릴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위 사대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귀신을 무시한다든지 귀신을 말하기를 꺼린다는 것은
바로 공자를 무시한 것이며, 주역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우주 자연의 섭리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모난 것이 있으면 둥근 것이 있는 것이다.

이걸 미루어 생(生)과 멸(滅),음(陰)과 양(陽),유(幽)와 명(明),인(人)과 귀(鬼)가
모두 상대적으로 넓혀져 존립하는 것이 사물의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두렵고 놀라서 무서워 떨면서 지나온 일들을 반성하고 다짐하였다.

귀신을 믿고 안믿고간에 어쨌든 이 한편의 책은 권선징악의 공이 모두 갖추어 있어서
세상인심을 바로 잡는 데에 유익된 바가 없지 않겠기에 여기에 번역하여 게재하는 바이다.


선생이 지난날, 일찍이 저승의 재판관이 되었었다 하셨는데 정말 그랬습니까?
그렇습니다. 세간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모두 괴이하게 여길 터이지만
나로서 볼 것 같으면 그 일이 일상적인 일이어서 조금도 괴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느 때의 일이었습니까?
청나라말 광서(光緖) 경자(庚子, 1900)무렵의 일로써, 내 나이 열아홉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소임은 어떤 직무에 관계했으며 어느 부 밑에 속했습니까? 그리고 직원은 몇 명이 있었는지요?
동악부(東嶽府) 아래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동악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사건을 집행한 뒤에 공사를 가지고 보고를 올렸을 뿐입니다.
나는 그때 분정(分庭)의 정장(庭長)을 책임 맡았었는데, 따로 배심원 네사람을 두었었고
봉사한 귀졸(鬼卒)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저승재판관을 몇 년이나 맡았었습니까? 그리고 그 일은 매일 가서 처리했습니까?
또 어느 지방을 관할했었습니까?
전후 4~5년간을 했었고, 날마다 가서 했습니다.
관할구역은 화북(華北)의 다섯 성을 맡았었습니다.

저승에서는 왜 선생을 재판관으로 삼았었는지요?
나 또한 일찍이 같은 사건을 맡아서 조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또 수전세(數前世)에서도 저승판관을 했었습니다.
그 속세 인연의 끈으로 해서 다시 그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저승에도 규정 법률이 있습니까? 있다면 선생은 그런 율법을 학습하지 않았을 터인데,
어떻게 재판에 착오가 없을 수 있을까요?
내가 그 규정 법률이 있었던 것을 못 보았던 것 같은데,
다만 그 제안을 판결하면 저절로 그 급소에 정확히 들어맞았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선생이 맡아서 했던 일은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습니까?
내가 맡았던 일은 사람이 죽은지 10개월 이내의 것으로,
그 사람의 생전에 지은 선행과 악행의 사건을 맡아서 했습니다.
기한을 넘긴 일을 따로 맡아서 처리하는 주무자가 있었습니다.

선생은 그때에 염라대왕을 보았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생전에 하였던 선악의 행위를 귀신이 어떻게 다 알고 다 볼 수 있단 말입니까?
빠뜨리지 않고 다 기록되어 있습니까?
예. 귀신은 형체가 없는 것도 능히 다 볼 수 있고, 소리가 없는 것도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 세계의 온갖 사상과 행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귀신은 스스로 다 알고 다 알 수 있습니다.
그 기록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귀신은 사람의 머리 위의 붉고, 누렇고, 희고, 검은 빛깔을 보고서
그 사람의 행위와 생각의 선악을 다 알 수 있습니다.

죄 지은 귀신도 또한 교활한 변명을 합니까?
예. 극히 많습니다. 죄 지은 귀신은 그가 지은 죄악에 대해서 역시 교활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다가 그 죄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면 그때에서야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아무 말이 없습니다.

일찍이 한 귀신을 심판하는데,
그 사람이 생전에 겉으로는 위선적인 행위를 닦으면서 남 모르게 못된 짓을 다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악행 범죄의 사실에 대해서 극력 부인을 하는데,
내가 보니까 그 사람의 죄악이 산처럼 쌓여 있었어요.

증거를 확실히 파헤쳐서 극형을 가하려 하는 찰라에,
그 귀신이 뜻밖에 금강경(金剛經)을 외우고 있어요.
그러니까 좌우 배심원들이 그 귀신의 머리 위에 붉은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심판을 정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그 배심원들이 그 귀신한테서 뇌물을 받고 사정에 끌려서 그러는가 하고
이에 형을 더 무겁게 가하려 하니 그 귀신이 더욱 힘써 금강경을 외우는 것입니다.
좌우 배심원들이 나더러 "빨리 일어나서 삼가 공손히 서 있어라"고 하더군요.

내가 이르기를 ,
" 나는 공판정의 우두머리인데 어찌하여 범죄자를 향하여 공손히 서 있어야 하느냐? "고 했더니,
좌우 배심원들이 이르기를, "아닙니다. 이 귀신의 머리정수에 불광(佛光)이 이미 나타났는데,
그런데도 그를 심판하면 부처님을 모독한 게 되니 심판을 정지한 것만 못합니다"라 해요.

내가 그때 그들을 보니까 그들은 모두 일어서서 두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공경한지 극히 장엄해요.

내가 그들에게 묻기를,"그러면 이 죄인을 어떻게 판별하여 처리하려 하는가?" 하고 따졌더니,
그들이 이르기를, "그를 판결하기를 사람의 태에 보내기를 수차례하여 그로 하여금
금강경을 기억하여 외울 수 없을 때를 기다려 그때에 가서 다시 그 죄를 다스리면 됩니다."그래요.

내가 말하기를,
"그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면 그로 하여금 오히려 유익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또 그를 수차례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면, 그가 응보(應報)를 받게 되는 것은
수백년 이후라야 되는데, 어찌 그리 더디게 하여 그르치려 하는가?" 고 했더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그로 하여금 잠깐 태어났다가 금방 태안에서 죽게 하면
몇 년이 안 가서 이미 몇 대를 거친 것이 되니, 그가 지은 죄업은 죄업대로 과보를 받게 되고,
금강경을 외운 것은 또한 금강경을 외운 공덕이 있게 되니,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훗날 그가 지은 죄업을 분별하여 응보를 받게 하면
두 가지 일이 조금도 어그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마침내 그렇게 하도록 윤허를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 그 귀신의 뜻은 얼이 빠져 꿈속 같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맑고 성성하여 평상시와 같습니까?
맑고 성성하여 살아 있을 때와 같습니다.

저승에 들어갈 때는 매일 어느 때입니까? 그리고 그 안건을 심리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최초에는 매일 해질 무렵이지만, 그후로는 대낮에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오후에 갑니다.
오고 갈 적에는 모두 간단한 상여를 타고 가는데, 달리는 발걸음이 매우 빠릅니다.
그리고 안건을 심리하는 시간은 언제나 짧은 시간 내에 합니다.
그러나 복잡한 안건을 만나면 역시 연장하여 여러 날이 걸리기도 합니다.
다만 이런 안건은 극히 적습니다.

저승에 들어갈 때에 그 사람의 신체는 현재 수면(睡眠)상태입니까?
저승에 들어갈 때에는 몸은 평상 위에 누워 있고 모습은 깊이 잠이 든 것 같습니다.
마시지도 않고 먹지 않아도 또한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어떤 때에는 친한 벗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또 불편한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눈을 감은 채 건성건성 대답하는데, 모습이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어떤 객이 와서 묻고 하면 또한 그 물음에 따라 대답하는데,
다만 말이 입에서 나오지도 않고, 또 객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승 갔다가 되살아 나오면 정신도 또한 피곤한 줄을 깨닫습니까?
정신은 조금 피곤하고 모습은 마치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습니다.

저승길에도 음식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음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저승 재판관의 복장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또 그 공문의 격식은 어떻습니까?
내가 저승판관으로 있을 때는 아직 청나라가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복장과 공문의 격식은 모두 만주국 청나라의 법식과 똑 같았습니다.
다만 중화민국이 들어선 이후로는 고쳐져서 새 제도를 따랐습니다.

저승판관도 역시 봉급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다만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쓸 곳이 없기 때문에 수령하지 않습니다.

저승의 형벌의 종류는 얼마나 됩니까?
저승의 형벌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이 인간세상의 형벌에 비교하면 참혹하기가 백배나 됩니다.
만약 지금 사람들이 그걸 본다면 참혹한 형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경력으로 보면, 인류가 차라리 인간 세상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절대로 저승 법정에서는 형벌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형을 받으면 형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저승에서는 형이 끝난 뒤에도 또 다시 그 죄과에 따라 재형을 받습니다.

비유하자면,
이 세상에서는 열 사람을 죽였다면 그 죄는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
저승에서는 반드시 열 번의 형을 받습니다.

형이 끝나면 다시 생을 바꿔 태어난 십대의 생까지 살인죄의 사형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톱으로 자르고, 맷돌로 갈고, 칼끝이 뾰쪽뾰쪽 세운 산 위를 맨발로 걸어서
오르게 하고, 기름 가마솥에 넣고 수레로 사지를 찢고 하는 등의 형이 실제로 있습니다.
죄의 응보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이와 같으니까요.

저승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어떤 종류의 덕행입니까?
그리고 최악의 죄로는 어떤 종류의 죄업입니까?
저승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남자는 충과 효이고, 여자는 절개와 효도입니다.
이 두 가지를 행한 사람은 비록 죄업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경감하여 줍니다.

최악으로 여기는 것은 음탕과 살인죄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살인죄는 또 음탕에 비하여 더욱 무겁습니다.

만약에 음탕으로 인하여 인명까지 살해한 자는
두 가지 중죄를 함께 저질렀기 때문에 한결 죄를 덧씌운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만가지 악 가운데 음탕이 첫째요, 백가지 선 가운데 효도가 먼저다"라고
한 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닙니다.

저승에는 이미 문장으로 이루어진 성문법률(成文法律)이 없는데,
그 죄의 가볍고 무거운 것을 어떻게 저울질합니까?
여기에서 그 범죄의 동기와 발생의 결과를 보고 그 정황을 살피고 사리를 참작하여서
그 경중을 결정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절도죄를 한 것을 가지고 비유한다면,
그 절도질을 한 사람이 본래 생계에 압박되어 한 것이고,
망녕되어 다른 나쁜 데에다가 쓰려고 한 짓이 아니라면,
그리고 도둑맞은 사람이 부자인 한 사람에만 관계되었고, 그 액수도 크지 않으며,
또 그 부자의 생계에 별 영향도 없고 그 부자가 그 도둑맞은 것에 대해 또한 크게 애석하게
여기지도 않는다던가, 또 그 도둑맞은 것이 장차 그걸 가지고 가서 음탕한 짓이나, 도박을 하거나,
담배, 술등 정당하지 못한 부정한 곳에 용도로 쓰려고 한 것이라면, 그 죄는 되려 가볍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도둑맞은 부자가 그것을 하인들에게 의심을 두고 심하게 꾸중을 하여,
그 책망을 받은 하인이 억울하고 분이 나서 자살을 하게 되었다면,
또 가난한 사람의 쌀 사고 약 살 돈이라면,
그리고 도둑맞은 것으로 인하여 굶어죽고 병들어 죽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또는 압박을 받아 스스로 몸을 빼어 싸움에 뛰어들어 인명을 살상하는 데 이르렀다면
그 정황을 살필 때 매우 무겁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는 보통의 절도죄만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저승의 법정에서 죄를 심판할 때도 간혹 착오가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저승법정에서는 범인의 죄상에 대해서 모두 일찍이 정밀히 조사해 두었고,
또 확실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그 심판은 지극히 공정합니다.
따라서 착오된 일이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범인은 하룻사이 또는 일생동안에 한 생각 일어났다가 한 생각 없어지는 것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또 선행을 한 것, 악행을 저지른 것을 바로 자기도 다 기억을 못합니다.
그러나 저승 법정에서는 사람들의 공과 죄를 아주 미세한 것까지도 죄다 기록되었다면
또 어찌 그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것이 이와 같음을 꺼리지 않을까요?
사람의 사상이란 게 마치 한 생각 일어났다가 한 생각 사라지고
갑자기 해놓고선 이내 잊어버리곤 하여 저 공중의 새 발자국 같고 물위에 뜬 거품 같아서
저승에서도 역시 다 기재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한 마음을 오로지 쏟아서 그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 떠나지 않으면
비록 나타나지 않은 행위일지라도 또한 공과 죄가 있으면 기록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생각이 행위로 이뤄진다면 그 공과 죄는 더욱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죽은 뒤에 역시 저승에 가서 재판을 받습니까?
저승 법정에서 관리하는 것은 모두 업(業)안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용록(庸碌)한 사람도 평범한 사람들로서 큰 선행도 없고 큰 악행도 없는 사람들을 관리합니다.

만약에 크게 수행한 사람은
죽은 뒤에 곧바로 극락,천당(天界)에 올라가기 때문에 저승을 거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저승명부에 이름이 없기 때문에 저승에서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중 혹시 천당에 오르는 것이 조금 늦는 사람은 어쩌다가 저승을 거쳐가기도 하는
데, 이런 사람이 저승에 오면, 저승판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려서서 그를 맞이합니다.
그러면 그 혼백은 걸을 때 마다 점점 높아져서 마치 구름사다리를 걷는 것 같습니다.
그가 저승법정에 가까이 오면 그 높이가 법정지붕의 용마루와 나란히 섭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름점고가 끝나는 즉시 곧바로 천당에 오르기 때문에 잡아매어 둘 수가 없습니다.

저승법정에서도 서양인을 잡아옵니까? 만약에 서양인이 오면 피차에 언어는 어떻게 회통합니까?
만약에 양인이 없다면 양인이 죽은 뒤에는 어디에 가서 심판을 받습니까?
내가 저승판관이 되었을 때가 마침 경자년(庚子,1900)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한 지
55일만에 항복한 뒤이기 때문에 국내외의 군대와 민간인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승에도 다소의 서양사람들이 법정에 들어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승에서는 저절로 그들의 말이 통해(通解)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난리에 죽은 한 제독(提督)과 또 충성으로 나라를 보위하다가 의분이 복받쳐
슬퍼하고 한탄하다가 몸을 버린 자가 심리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나는 친히 그들이 똑같이 곧바로 천계(天界)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한번도 그들의 심리를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중국의 저승 재판소가 이 한 곳만이 아니고,
또 구미(歐美)의 각 나라도 또한 따로 저승 재판소가 있어서 각기 그 정황에 따라 처리합니다.

저승에서는 어떻게 이승 사람을 써서 저승으로 데려갑니까?
부유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그 저택에는 항상 많은 신들이 수호하고 있고,
그 사람의 좌우에서 심부름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날쌔고 힘이 장사이어서
양기(陽氣)가 왕성하기 때문에, 저승사자가 그 사람 병상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비유하면 장군이 병영 안에서 병들어 죽으면 그 4주동안은 경위가 삼엄하고 창과 대포가
죽 늘어서 있으며, 영내의 병사들은 또 모두 소년들이어서 양기가 펄펄 끓고 있어서
저승사자 귀신이 그 앞에 가까이 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산 사람의 혼을 써서 그를 끌어갑니다. 그래서야 심리할 안건이 도달합니다.

칼로 목이 잘려 죽거나 기타 참혹하게 죽은 귀신들은 그 몸뚱이와 머리가 온전치 못한데,
그 영혼들은 보통 병들어 죽은 귀신들과 구분이 있습니까?
그 영혼만은 모두 온전하여 보통귀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오직 그 얼굴 모습만이 조금 모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상처에 핏자국이 남아 있고, 용모가 참척하여 고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귀신도 또한 소멸의 기한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내가 본 옛 귀신은 멀리는 송나라, 원나라 때까지에만 이르고,
당나라 이상의 귀신은 절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선불(仙佛)이 된 분을 제외하고는 만고에 길이 생존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에 이르는 동안에 용모가 점점 변하여 가는데,
귀신의 용모도 또한 나이에 따라 노쇠해집니까?
귀신의 용모는 그 병들어 죽을 때까지는 똑 같습니다.
해가 오래 지났다고 해서 노쇠해지지 않습니다.

저승에도 낮과 밤이 있고, 해와 달, 별들이 있습니까?
저승에도 역시 낮과 밤이 있어 이승과 똑 같습니다.
그러나 오직 해와 달, 별들은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 정확한 모습은 마치 사천(四川)에 큰 안개가 낀 것 같고
화북(華北)에 뿌연 황사 덮인 날씨와 같아서 이승의 밝은 세계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귀신들은 따스한 8시 이후부터 11시까지에 이르러서야 그칩니다.
그리하여 귀신들은 양기가 터지기 시작하면 모두 어둡고 그늘진 곳으로 피하여 숨습니다.
오후에 그늘이 점점 많아지면 외출합니다.

저승에도 역시 춥고 덥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다만 여름에는 이승같은 무더위가 없고 겨울에도 이승같은 매서운 추위에 비해 덜 춥습니다.

저승에도 역시 음식점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승 사람이 만든 종이돈을 저승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예, 음식점이 있지요. 거기에는 나물 음식종류가 많습니다.
이승 사람이 만든 지전(紙錢)을 저들도 또한 사용하여서 물건을 살수가 있습니다.

저승에서도 매일 세끼 밥을 먹습니까?
거기에서는 매일 한끼만 먹어도 여러 날 배부를 수 있어서 날마다 꼭 세끼를 먹지 않습니다.

저승에서도 잠을 잡니까?
예, 거기에도 역시 침상과 잠자리, 요, 이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자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겨우 가다가 잠깐 벽에 기대든지, 눈을 감고 조금 쉬든지 하면 곧 수면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승사람들처럼 매양 잠잘 때 꼭 7~8시간씩 자는 것은 아닙니다.

저승에도 시가지가 있고, 상점이 있습니까?
예, 있지요. 그러나 규모가 매우 작아서 여기 인간 세상의 작은 점포와 다름이 없습니다.
거기서 파는 것은 음식과 잡용품들이 많고, 다만 웅장하고 화려하고 넓고 큰 인간세계의
큰 공사(公司)라든지 양행(洋行)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승에서 만든 음식을 귀신들도 먹습니까?
그렇습니다. 오직 그 기(氣)만을 흠향할 뿐이요, 진짜로 먹지는 않습니다.

만약 여름철에 식품이 두 그릇이 있어서
한 그릇은 귀신에게 제공을 했고, 다른 한 그릇은 제공하지 않았다면
이 제공한 음식은 제공하지 않은 음식과 비교하여 반드시 먼저 부패합니다.
그것은 귀신이 이미 그 음식의 기를 섭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저승의 음식을 이승의 것과 비교하여 어떤 게 더 좋습니까?
아마 이승의 것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귀신도 그 분묘에 가서 살고 쉬고 하는 곳으로 삼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이 처음 죽을 때 영혼이 육체를 떠날 적에 역시 고통이 있습니까?
사람이 죽을 때는 모두 질병이 있고,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는 마치 방문을 열고 외출하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곤란이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아프고 괴로운 고통을 되돌아보면 도리어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가 처자식들을 불쌍히 여기고 또는 두고 온 재산에 미련을 두어 마음속에 간직하고
숨이 떨어지지 못하면 영혼이 쉽게 육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때가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만약이 사람이 타고난 성품이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없고,
처자식과 재산에 대해서 또한 미련과 끌리는 욕심이 없다면,
영혼이 육체를 떠날 적에 곧바로 옷을 벗듯이 훌훌 떠나가는데,
조금도 힘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스님들이 경을 외워 죽은 혼령을 천도하면 망인에게 결국 이익이 있습니까?
스님이 경을 외우면 망인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특별히 일괄적으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비유하자면 그 사람이 생전에 큰 선행을 하였으면 죽은 뒤에 곧바로 극락,천계에 오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본래 경 읽은 공덕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생전에 크나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죽은 뒤에 즉시 지옥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그 사람 역시 쉽게 이 경 읽은 공덕을 받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에게 이르러서는 생전에 큰 선행도 악행도 없는 사람은 경을 읽어서
천도를 얻으면 어두운 지옥세계가 환하게 밝아져서 죄업이 경감되고 이익이 특별히 커집니다.
그리고 경을 외우는 사람의 도의 행적이 높고 낮음에 따라서 또한 막대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경을 외우는 사람이 도가 높은 고승이고 효자 현손과 관계가 있으면,
그 경 한권을 외우는 것이 보통 중이 외우는 것보다 열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어떤 보통 평범한 스님이라도 경을 지극 정성으로 외우면 또한 상당한 이익이 있습니다.

만약에 행이 없는 막행막작의 스님이고 또 마음이 전일치 못하여 건성건성 외운다면
이익도 적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터럭 끝만큼도 이익 되는 게 없습니다.
더구나 망인의 과보에는 효과에 이르지 못합니다.

또 송경의 가장 좋은 효과는 망인의 7일,49일 이내가 좋고,
이 기간을 지나면 망인이 지은 업에 따라 이미 다른 데에 생을 바꿔 태어나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공덕이 돌아가서 죽은 자는 바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귀신과 사람의 수효가 어느 것이 더 많고 어느 편이 더 적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귀신을 무서워하는데, 귀신도 사람을 무서워합니까?
귀신세계의 귀신의 수효는 인간세계의 사람들의 수효에 비해 그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오고 가고 가고 오고 울타리에 맞대고 담벼락에 붙어 있어 가는 곳마다 모두 다 귀신들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도, 귀신들은 길 한 가운데보다는 도로 양편 곁으로 많이 걸어 다닙니다.
사람들은 밝은 곳을 따라 다니는데, 귀신들은 어두컴컴한 곳을 따라 다닙니다.

그런데 사람도 귀신을 무서워 하지만 귀신도 또한 사람을 무서워합니다.
그리하여 귀신도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또한 반드시 피하여 달아나 버립니다.
정직한 사람과 군자는 귀신도 반드시 공경하지만 그 귀신들이 업신여기고 농락하는 자는
모두 심성이 바르지 못하거나 시운이 쇠미해진 사람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오후부터 해질 무렵 저녁 늦은 시간까지는 길을 걸어갈 때에
절대로 길 양편 가장자리나 어두컴컴한 그림자 진 곳은 걷지를 말아야 합니다.
저녁 늦은 시간에 문밖에 나설 때에는 반드시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걷되
가끔씩 기침소리를 내어서 그들로 하여금 피해 달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뜻밖에 나오면 귀신과 대질러서 그 충격으로 거꾸러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람 몸도 역시 오싹 한기가 끼치고 겁내어 떨리게 되는데,
이것은 음과 양이 서로 상충되어 피차가 모두 불편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걸어 다니는 것과 산사람이 걷는 것과 구분이 있습니까?
귀신의 발 부위는 분명치 못하여 마치 안개 속을 걸어 다니는 것 같고
걸음걸이가 매우 빨라서 사람의 느린 걸음과는 같지 않습니다.

귀신이 닭울음소리를 무서워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햇빛이 밝아오면 영혼이 불안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햇빛을 피하여 달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불이 달궈진 큰 기계의 용광로 열기를 무서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몸가짐이 품행있는 귀신은 역시 닭울음소리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선생의 전세에서부터 쌓은 그 근기가 이와 같고 또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셨으니,
아마 내세에도 역시 윤회생사(輪回生死)를 면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윤회생사를 뛰어 넘는다는 게 어찌 그리 용이할 수 있습니까?
즉 나의 내생에도 역시 면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같은 종사자에게 부탁하여 이에 대하여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이르기를,
나의 내세에는 응당 반드시 하남과 남양일대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단 수십년 이내에 세상의 물정과 세태인사(世態人事)가 변천하여
아마 저승의 기록도 고쳐질 수도 있을겁니다.

저승의 관리들도 역시 인간세상을 바꿔 생을 받아 태어납니까?
그렇습니다. 비유하자면 현재 공무원으로 있는 사람은 특히 높이 취직하는 것이
무직자인 보통사람에 비해 쉬운 것과 같습니다.

귀신이 인태(人胎)에 들어가는 것은 수태(受胎)시에 즉시 들어 갑니까?
아니면 출산시에 들어갑니까?
두 가지 다 있습니다.

여러 귀신들이 우글우글 왕성한 것은 오랜동안 저승에 떨어져 있어서
어찌하여 일찍이 빠져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사람은 적고 귀신은 많기 때문에 그에 배당하여 분배할 수 없어서입니다.
그리고 또 태어나는 집도 그 귀신과 원래 인연이 있어야지 바야흐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생전에 교제가 넓어서 서로 아는 사이가 많다 보면
바로 그 사람 집에서 투태 되기가 자연 쉬워집니다.

만약에 빈궁한 사람이 늙어 죽을 때까지 동구 밖까지도 나가보지 못해서
평소 사람들과의 교제가 극히 적으면 그 사람은 죽은 뒤에 귀신무리에 젖어들어
생을 받는 어떤 기회의 인연으로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오랫동안 기다려야 됩니다.
그리하여 인연이 있는 자를 만나면 이에 곧 생을 받아 투태하게 됩니다.

불교를 배운 사람은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도교를 배운 사람은 통천복지에 태어나지만
유교를 배운 사람들은 죽은 뒤에 어디에 가서 태어납니까?
역시 하늘나라 천계(天界)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선생은 그 뒤에 어찌하여 저승판관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고,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휴직하기를 빌었지만 번번이 모두 허락을 받지 못했었는데
그 뒤에 동사자들이 금강경(金剛經)을 많이 외우도록 가르쳐 주어서 그 법대로 시행했더니
그 공덕이 쌓여 2천번 이상이 찼기 때문에 드디어 다시는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선생은 평소에도 늘 귀신을 볼 수 있습니까?
내가 저승판관으로 있을 때에는 귀신을 호출했을 때나 안했을 때를 막론하고 늘 귀신을
볼 수 있었지만 중화민국(中華民國)초 이후부터는 귀신을 보는 것이 점점 적어지더니,
중화민국 10년 이후에는 완전히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맨 처음 저승판관으로 들어오라는 것을 어떻게 통지 받았습니까?
어느 날 밤에 꿈속에서 옛 의관을 단정히 갖춘 한 사람이 찾아와서
내 방으로 들어서서 이르기를 "중대한 일이 있어서 정성스레 받들어 모시려하니
수고스럽겠지만 바쁜 일을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합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가 어떤 일을 위임하려는 지는 모르나, 다만 내 힘이 모자랄까 두렵다"고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제발 윤허만 해준다면 할 수없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기에,
나는 그가 본 뜻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오직 그의 예의바른 용모가 단정하고 공경하며,
그 태도가 지극정성 간절하여 정의상 차마 물리칠 수가 없어 마침내 묵묵히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면서 서로 약속한 수일 뒤에 곧 모시러 오겠노라고
다짐하고 드디어 이별하였습니다. 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내 자신 속으로 한낮 꿈이라 여기고 특별히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드디어 4~5일이 지난뒤에,
꿈속의 그 사람이 또 와서는 내게 일러 말하기를 "지난번의 승낙해주신 은혜를 받잡고
특별히 가마를 준비하여 정성스레 받들어 모시려고 왔습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내가 보니까 말 한 필의 수레가 문밖에 메어 있어서 드디어 함께 수레에 올랐더니,
얼마 안가서 어떤 관아(官衙)에 이르렀습니다.

수레에서 내려서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 사람이 나를 인도하여 한 행랑방에 이르러 자리에 앉은지 조금 후에 바로
대청마루에 올라 안건을 심리하도록 청하였는데, 한 범죄인을 끌어다가 놓고
좌우배심원들이 원안을 진술하여 주면서 나에게 판결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본래 이의 설정을 모르는데 어찌 감히 망령되이 판결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거절을 하니,
좌우 배심원이 이르기를, "그대가 성심으로 미루어 헤아려 보면 그 의사가 어떠한지를
곧 법에 비추어 징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잠깐 자세히 생각해보고 이르기를
"이러 이러한 것이냐"고 했더니, 좌우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곧 나에게 판결문에 서명하도록 하고 죄범을 끌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마차로 나를 돌려 보내주었습니다.

선생의 부모님도 이 실정을 아셨습니까?
내가 저승판관이 된 최초에는 그 비밀을 잘 보전하려고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었는데,
그 뒤에 부모님이 내가 빈방에 혼자 있으면서도 간간이 사람과 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차차 그 실정을 아시게 되었습니다.

대개 내가 저승판관이 된 뒤부터는
항상 저승친구들의 왕래가 있었는데 오직 나만이 볼 수 있고 나만이 들을 수 있었지,
다른 사람은 모두 듣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오직 나의 말만을 들었었지요.

저승친구들이 올 때에는 역시 음식을 많이 장만하고 초대합니까?
아닙니다. 다만 맑은 차 한 잔이면 이미 그 정을 다하는 데 족합니다.

저승에서도 역시 해마다 그 명절과 휴가가 있습니까?
예. 이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음력 설날과 청명, 한식, 단오, 추석, 동짓날 등을 만나면 역시 반드시 며칠을 쉽니다.
그러나 단 아직 일, 월, 화, 수, 목, 금, 토 등의 주일은 없었습니다.

귀신은 어떻게 그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까?
모든 귀신들은 모두 마음대로 변환(變幻)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반드시 저승 법정의 허가를 얻어야 됩니다.

선생은 일찍이 무슨 무슨 중요한 안건을 심판하였습니까?
일체의 모든 안건이 모두 다 매우 평범한 안건으로서
절대로 인정과 사리의 밖의 것은 없었습니다.
또 그 죄상도 환히 밝아서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복잡 다단하여 밝히기 어려운 정황은 없었습니다.

일찍이 각처를 유람한 경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소의 머리를 하고 말 얼굴을 한 귀신이 정말 있습니까?
모두 가면의 도구를 쓰고 흉폭한 혼령들을 공포케 하려고 한 것입니다.
만약 어질고 착한 혼령들에게는 이런 흉칙한 모습은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새, 짐승의 혼령은 역시 새, 짐승의 형상을 하였습니까?
이것은 따로 한 부에서 맡아서 관할한 바로써 나에게는 관계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승에서도 염불하면서 수행하는 자가 있습니까?
염불을 하고 송경(誦經)을 한 사람은 이미 이런 공덕이 있는데, 저승의 모든 귀신들이 어찌
빨리 염불 송경을 하여 지옥에서 벗어나서 극락,천당으로 오르기를 구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염불을 할 줄을 모른다면 어찌 다른 사람의 염불하는 것을 따라서 본받지 않는지요?
한 번 저승에 도착하면
바로 그의 업력(業力)에 가로 막혀서 자연 그 염불하고 송경할 줄을 모릅니다.
즉 우리가 염불하고 송경을 하면 저들도 보고들은 바가 없기 때문에
수행은 마땅히 이 한 입기운이 끊어지기 전에 해야지 한번 숨이 끊어지면 힘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귀신은 이미 형체가 없는 것(無形)을 볼수가 있고 소리가 없는 것을 들을 수가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우리들의 염불 수행하는 것은 도리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것입니까?
자기의 업력에 가리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험삼아 비교하여 봅시다.
세간의 어떤 사람이 본래 신앙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굶주리고 추위에 핍박되어서
우리들의 염불수행에 대하면 역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곧 그로 하여금 우연히 보고 듣게 하면
그러나 그 사람의 욕심에 끌리고 얽매여서 그 신심(信心)이 일어나지 않고,
또 신심이 견고하지 않아서 마침내 수행하지도 않고 염불하지도 않습니다.
저 귀신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귀신의 말소리와 우리 인간의 말소리와 어떻게 다릅니까?
귀신의 말소리는 날카롭고 짧고도 급합니다.

이 세상을 귀신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과 귀신이 함께 섞이어 사는 게 되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승과 저승이 둘로 동떨어진 것인게 결국 그 경계는 어떻게 구분합니까?
그 나눠진 경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분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하여
이런 정황은 참으로 뚜렷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산 사람의 혼과 죽은 사람의 귀신이 그 형상과 그 얼굴빛이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그 때 거기에 대해서는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당연히 조금은 분별이 있지요?

귀신도 역시 어떤 감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 그들도 역시 감각이 있어 심히 괴로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몹시 슬픈 것이 많습니다.

귀신이 사람의 태에 들어갈 때(入胎)에 저승에서는 무슨 교훈(敎訓)이 없습니까?
가령 그들로 하여금 악을 돌이켜 선으로 향하라는 말 따위 말입니다.
없습니다. 오직 새나 짐승의 태에 던져질 때에는 귀신으로 하여금 그 정황을 모르게 하고,
또 남자 여자를 바꿔 만들 때에는 반드시 어떤 누각에서 좋은 경치를 구경케 한다든지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속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갖게 합니다.

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해와 달이 밝게 비치고 있는데,
어찌 저 저승(幽界)에는 비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어떤 물건이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만일 이승과 저승이 다른 지역이라면 어떻게 사람과 귀신이 함께 길을 갈 수가 있습니까?
항상 구름과 안개가 막아 가리웠기 때문에, 저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귀신들은 밝은 데서 어둡고 그늘진 곳으로만 갈 수 있고 더욱이
그 밤사이에 활동하기 때문에 사람과 귀신이 동행할 수 있습니다.

저승에서는 어떤 책력을 씁니까? 음력입니까? 양력입니까?
그리고 모든 공문서에 역시 년, 월, 일을 씁니까?
예, 만청(滿淸)시대에는 만청시대의 책력을 썼고,
공문서에서 쓰는 년, 월, 일도 이승과 똑 같습니다.

저승에도 또한 비,바람,눈,서리가 있습니까?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이승의 비, 바람, 눈 서리를 만날 때 저승의 모든 귀신들이 역시
그 추위에 덜덜 떨면서 괴로워하고 또 잔뜩 웅크리고 오그라들어 편치 못한 상태를 보입니다.

귀신들도 또한 서로 응수(應酬)하고,애경사에 경축하고 조문하는 예절이 있습니까?
예, 이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향촉(香燭)은 어디에 쓰입니까?
촛불은 그 광명(光明)을 취하고, 향은 그들을 불러오게 하는 데 쓰입니다.

폭죽은 어디에 쓰입니까?
귀신들은 폭죽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므로 적의하게 쓰일 데가 없는것 같습니다.

그 염불송경이 그렇게 큰 공덕이 있다면, 유가의 경서를 읽는 것도 또한 공덕이 있습니까?
예, 공덕이 있습니다.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은 위다요,도교의 호법신은 왕영관(靈官)인데
유교도 또한 호법신이 있습니까?
모릅니다. 유교는 신도(神道)로써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호법신의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경전, 서적은 귀신의 가호를 받는 것은 역시 의심할 의의가 없습니다.

저승의 봉급은 어디에서 마련하여 옵니까?
이것 역시 금전, 양곡, 세금의 항목으로 거두어들인 것입니까?
일찍이 이것에 대해서 그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들은 나에게 묻지 말라고 부탁합디다.
그래서 잘 모릅니다.

사람의 머리 위의 빛깔은 무슨 색으로써 선과 악을 삼습니까?
붉고, 희고, 누런 색을 좋게 여기고, 검은 색을 나쁘게 여깁니다.

귀신이 사람으로 변하고, 사람이 귀신으로 태어난다면
결국 이 세간에는 사람이 먼저입니까, 귀신이 먼저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마땅히 두 방면으로 나누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먼 상고시절 이전에 혼돈이 처음 열리고 순박(醇朴)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먼저 인간이 있은 뒤로부터 뒤에 귀신이 있었고, 그 후세에는 귀신이 먼저 있은 뒤로부터
사람이 있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도 역시 생각이 있어서 이승의 아내와 여자아이들을 그리워합니까?
예, 귀신들도 역시 매우 그리워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일이 오래가면 자연 담백해집니다.

염불인은 저승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평소 나무아미타불 염불신행자는 저승문서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극락정토의 보배 연꽃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지며
염불인이 임종시에는 아미타부처님과 괸세음보살 대세지보살등
여러 불,보살님이 마중오시어 환희심과 광명중에
삼계와 생사윤회(천상은 복이 다하면 타락하여 다시 생사윤회에 빠짐)를
영원히 초월한 극락정토로 인도하십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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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우리출판사 발행    죽음을 준비 합시다 (현장스님 역) 


 


중음신(中陰身) 제도법(濟度法)


[불법을 알게 되면 태어남과 죽음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죽지 않는 오직 한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길이다.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무생(無生;나지 않음)의 경지를 깨달아야 한다. 무생만이 죽지 않는 길이니 영생을 구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죽음과 환생사이의 영혼을 제도하는 밀교와 정토의 가르침

      - [중음신(中陰身)제도법(濟度法)]



"중음신제도법"은 본디 밀종(密宗)에서 전하는 해탈 법 가운데 하나다.


정토종의 제도법과 밀종의 제도법은 그 뿌리가 같다. 다만 밀종에서는 중유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현교인 정토종에서는 중유의 세계는 말하지 않고 제도법만 다루고 있음이 다르다 하겠다.


그렇다면 두 가지 제도법 가운데 어떤 제도법이 이 말법시대에 적합한 제도법이 될 것인가? 밀법수행자는 지혜로운 근기가 있어야하고, 특별한 인연으로 깨우침을 얻은 금강상사(金剛上師)를 만나야 한다.


상사란 밀주(密呪)를 전하는 이를 말하는데 밀종에 귀의한 수행자는 상사가 전해준 이 주문을 날마다 염송해야 한다. 그러면 죽음을 맞을 때 밀주의 가지력(지켜주는힘)으로 중유에 빠지지 않는다. 혹 중유에 빠진다 해도 밀법의 힘으로 그 중유에서 빠져나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참으로 깨우침을 얻은 금강상사는 봉황의 털보다 더 드물고 더구나 그런  금강상사를 만나는 일은 더 어렵다. 물론 상사 없이도 한 가지 밀주를 정해놓고 수행할 수는 있겠지만 말법시대에 홀로 밀주 수행을 이루기란 참으로 어렵다 하겠다. 거의 대다수의 중생이 죽을때 중유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이시대에 밀주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기에 그 가지력 또한 약하다는 말이다.


 말법시대에 밀주를 수행하는 일이란 마치 도둑을 보고 입으로만 경찰을 부르는 것과 같다. 입으로만 경찰을 불러서는 도둑을 물리칠 수 없다. 도둑을 물리치려면 전화로 경찰을 불러야 한다.


지혜 있는 이가 밀주를 수행함이란 이와 같다.  정토종의 염불문에는 조건이 없다.  어떤 사람일지라도 바르게 염불만 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정토에 갈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간편하고 정확한 해탈법이다.


 이 염불문 속에서는 지혜로운 이, 어리석은 이, 죄가 있는 이, 죄가 없는 이, 업이 가벼운 이, 업이 무거운 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중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염불하면 왕생하는데 어찌하여 이 책에서는 중유의 세계를 설명하는가?  염불수행을 하지 않는 불교인과 종교가 다른 사람에게 중유의 세계를 알려주고 그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제1장 : 불교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구제법의 다른점

1. 다른 종교의 구제법


다른  종교란 불교 밖의 종교로, 신(神)을 섬기는 종교를 말한다.

신을 섬기는 종교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 섬기는 일신교(一神敎)와 여러 신을 섬긴다는 다신교(多神敎)가 있다. 신을 섬기는 종교의 공통점은 자신이 섬기는 신이 아니면 모두   부정해 버린다는 점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믿는 신과 교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친다. 역사상 일어났던 수많은 종교 간의 분쟁과 전쟁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자신의 종교만 옳고 다른 종교는 사악 하다는,신을 섬기는 종교의 가르침은 중생을 구제하기에 앞서 파멸에 빠뜨리기 일쑤다.


이와 같이 신을 섬기는 종교는 그 가르침이 가진 한계 때문에 사람을 구하고 돕는다는 생각이 넓지 못하고 구제할 대상도 신을 맞는 이들로 한정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저들은 이러한 구제법이 "신의 뜻"이라 믿기에 "따르는 이는 살 것이요 따르지 않는 이는 죽을 것 이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불멸의 진리라고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종교의 생명은 자비심이다. 자비심은 중생을 섬기고 보살피는 정신이다. 자신이 믿는 신을 섬기는 이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정신은 바로 그 종교가 갖는 자비의 폭이 좁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이다.


신을 섬기지 않거나 신을 모르는 사람, 또 지옥이나 짐승의 세계에서 괴로움을 받는 중생들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자비심을 귀히 여기는 이라면 이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2.불교의 구제법


불교는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다. 인과법을 소중하게 여기고 스스로 깨우치는  일을 삶속에서 이루어내는 길이요, 가르침이 불교다.


물론 불교에서도 신과 천국에 매달리지 않고 사는 것을 더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긴다. 삶의 가치를 하나라고 고집할 때 삶을 이어주는 유기 관계는 어김없이 깨지고 그 본디 생명력이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신을 섬기든 섬기지 않 든 그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고집함이 없이 사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저런 신을 섬기는 이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 왔을 때 삶의 진실을 말씀 하셨을 뿐 섬기는 신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바른 가르침이란 주의(主義)가 아니라 삶의 진실에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바로 삶의 진실에 눈을 뜨는 일이다.


깨달음이란 덧없음과 무엇이, 무엇이 아님을 밝게 몸소 겪는 일이다. 선과 악, 참과 거짓, 신과 사람의 덧없음, 그것이 그것 아님을 밝게 알 때만 끝없는 자비심이 피어난다.

그래서 깨달은 이는 종교나 중생의 모습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행복과 기쁨을 공양(共養)하는 것이다.

 

악마까지도 행복한 존재가 되어야 나도 행복하겠다는 마음은 다른 종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불교의 독특한 정신이라 하겠다. 신을 섬기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과 악마는 선과 악이 맞섬을 상징한다. 그런 종교에서는 또 사람은 죄악에 물든 존재라 규정한다.

 

 신을 믿으면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악마를 따르면 영원히 타락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신을 내세우는 종교에는 인류의 시작부터 악마가 등장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류의 죄악을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전지전능한 신이 왜 완전한 사람을 창조하지 못했나 하는 점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악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죄악은 삶의 현상이요. 삶의 사건이다 현상과 사건은 참으로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예측 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다.


이 변화의 흐름을 결정짓는 힘을 업(業)이라 하는데 이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겪는 선악 갈등의 괴로움은 업기운 (業氣運)의 맑고  어두움 가볍고 무거움에 달린 것 이지 신이나 악마의 존재와는 관계가 없는 것 이다.


아무튼 크게 깨달은 이는 삶의 진실에 들어 맞게 살뿐 틀 지워진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깨달은 이, 곧 부처님이나 보살들은 꼭 착하고 좋은 모습만으로 악인을 구제 하지는 않는다.


악인의 모습으로 착한 사람을 제도하기도 한다. 불교는 조직으로 힘을 삼는 종교가 아니라 끝이 없는 자비심으로 힘을 삼는 종교다.  불교는 어떤 종교를 따르는 중생이든 어떤 모습을 한 중생이든 그들이  괴로움에 빠졌을 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아가 나고 죽는 윤회의 흐름을 길이 쉴 수 있게 도와주는 가르침이다.


불교는 조직이나 단체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 삶의 진실에 눈을 뜨고 업의 기운을 바꾸는 일을 중히 여길 뿐 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고 또 마땅히 배워야 할 가르침이다 이것이 불법(佛法)이다.


우리가 불법을 가벼이 여기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괴로움은 더욱 커지고 길어질 것 이다.  그러므로 참된 불교인이라면 순간, 순간 중생의 괴로움을 잊지 말아야 하고 기회를 찾아 인연을 만들어 그들을 이끌면서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생은 업이 무거워 진실성과 조화성을  나 몰라라 하는 삶의 방식에 깊이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생을 바르게 제도 하려면 너나 가릴 것 없이 그 어떤 보상 조건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중생의 삶을 당장 바꾸어 줄 수 없더라도 바른 가르침이란 반드시 꽂을 피우기 마련인 죽지 않는 빛과 생명의 씨앗임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구제 정신이다. 특히  중음신 구제법은 의식이 아홉 배 맑아져 지난 일을 환히 기억할 수 있는 중유기에 든 중생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 중요함과 뛰어난 공덕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제 2 장 : 죽음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1.왜 태어나는가?


죽음은 태어남에서 생긴다.

죽음과 태어남은 윤회하는 삶의 주된 특징으로, 어리석음(無明)의 힘을 알맹이로 삼는다.


참으로 우리들의 삶이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꿈속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 이 같은 어리석음의 파동이 겹겹이 일어나서 업을 키워나가는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리석음에서 일어난 업의 생은 컴퓨터의 기억장치처럼 삶의 모든 행동의 뿌리가 되어버린다. 어리석음에서 일어난 업력은 나와 ‘맞다’ 또는 ‘안 맞다’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 같은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지어낸다. 그래서 힘살, 뼈, 피따위를 ‘나’ 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앞뒤 안 가리고 이 나를 지키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그럼으로 해서 ‘나’ 라는 존재를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업력에 따라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미움 따위를 가린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업력이 같은 사람이 모이면 친근감이 생기고 업력이 다른 사람이 모이면 관계가 성글어 진다. 이른바 정신없이 어지러운 탁‘濁’이 생기는 것이다.


업력은 몸으로써 자기를 한껏 나타내려고 한다. 또 고집된 ‘나’ 로 하여금 이득이 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을 얻으려는 한 마음으로 차차 눈, 코, 귀, 혀, 촉각신경과 생각하는 기능 같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지어낸다.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형성되면 고집된 가짜 ‘나’ 가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활동은 먼저 바깥과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과 같이 모든 감각기관이 저마다 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 같은 바깥과의 접촉은 어머니 배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태교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접촉에 따라 여러 가지 느낌이 아주 민감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 에게 이득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면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하고 맞선다.


그래서 사람의 성격이 바뀌면 좋아하지 않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떤 사물에 좋고 나쁜 특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업력의 차이 때문이다. 무엇을 좋아하면 그것을 가지려는 행위로 이어진다. 그것이 소유욕이다.


가지려는 욕심도 소유욕이지만 갖지 않으려는 욕심도 소유욕이다. 중생은 이 같은 방식으로 ‘나’ 라는 몸뚱이를 끝까지 소유하고 싶어서 가지가지 억지를 부린다. 이것이 중생의 삶인데 죽음은 이런 저편에 있는 것으로 두려움과 괴로움을 던져준다.


2.왜 죽는가?


중생의 삶이란 무명의 업력이 일으킨 파장이다. 그렇다고 중생의 삶이 업력 하나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업력과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조건들이 함께 해야 중생의 삶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태어남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경전에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천만겁을 헤맨다.”고 했다. 이 말을 새겨 보면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움을, 한 번 사람 몸을 잃게 되면 길이 삼악도에 떨어져 헤매게 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 때문으로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누구를 죽이거나 삿된 음행, 거짓말, 도둑질을 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짐승이나 지옥처럼 만들어, 죽으면 바로 그 업의 힘에 따라 그런 곳에 태어나게 된다. 업력에 따라 받은 몸을 보신(報身)이라 하고 업력에 따라 받은 세계를 보토라고 한다.


태어난 뒤로도 많은 조건들에 따라 업력은 바뀌어 가고 삶을 지탱하는 조건들이 다 하게 되면 죽게 된다. 사람마다 업력이 다르기 때문에 목숨도 저마다 다르다, 목숨은 결코 신이 정해 준 것이 아니다. 목숨이 저마다 다른 것은 ‘원인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는 말씀처럼 아주 마땅한 이치이다.


중생은 결과만 보고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생의 원인이 내생의 결과 됨을 알지 못한다. 만약 삶의 진실을 깨달아 인과에 눈을 뜨지 않으면 윤회하는 삶의 괴로움은 태어날 때마다 이어질 것이다.


중생의 생명은 삼라만상과 마찬가지로 조건의 형성으로 태어나고 조건의 이어짐으로 살아가고 조건이 무너짐으로 시들어가고 조건의 없어짐으로 죽는다. 이것이 이른바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 生老病死의 변치않는 네 과정인 것이다.


좋은 조건을 태어나면 살아가기에 좋다. 그래서 좋은 인연을 만드는 일이 수행에 필요한 길이 된다. 불법을 알게 되면 태어남과 죽음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길이다.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無生의 경지를 깨달아야 한다. 무생만이 죽지 않는 길이니 영생을 구하는 일은 환상일 뿐이다.


3 죽음이란 무엇인가?


중생은 저마다 업에 따라 몸과 세계를 받는다. 사람들은 업력과 환경이 비슷하기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는다. 이 같은 삶의 조건들이 사라지면 업력도 바뀌고 보고 듣는 세계도 바뀐다.


이처럼 업이 다른 세계로 옮기는 것을 佛敎에서는 전류(轉琉)라 한다.

현대과학에 빗대어 말하면 업력은 전파와 같다.

같은 세계에 태어난 중생은 한 전파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사라지면 전파가 바뀌어 세계가 달라진다. 죽은 사람은 이제 더는 있었던 세계를 볼 수 없고 산 사람은 죽은 이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이것은 마치 TV 채널 1과 채널 2의 전파가 틀려서 채널에 따라 화면이 달라지는 현상과 같다. 중생은 지난 생의 업력에 따라 새로운 몸과 세계를 받는다. 이 같은 진실은 어떤 신의 이름을 불러도 바뀌지 않는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는 자성(자기라고 고집할 만한 성품)이 없어서 저마다 허상일 뿐이다.”고 가르쳤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태어남과 죽음의 관계를 밝게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되면 죽음이란 결코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준비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왜 불교도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않는가?”


이런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매우 어긋나는 말이다. 업력이 끝나지 않았다면 마땅히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과보를 받기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오히려 나쁜 업을 짓게 되어 다음 생에 더 많은 괴로움을 받게 된다.


죽음을 맞는 준비란 무엇인가? 생명의 기원과 그 끝을 알아 모든 생명이 다 거쳐 가는 과정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날마다 염불하면 업력이 부처님의 감응을 받아, 죽을 때 윤회가 사라진 정토에서 태어날 수 있다. 염불수행을 정성스레 하면 스스로 죽을 날짜를 알 수 있고 병고가 없이 맑은 선정 속에서 극락왕생한다. 이것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염불과 인연을 맺지 못한 불자나 다른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이들이 죽음을 맞을 때 스스로 구제하는 자기 구제법을 다음 장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자기 구제법이란, 비록 나쁜 내생의 길이 나타나도 그 길에 들지 않고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특별한 법이다.



제 3 장 : 네 요소(四大: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地水火風)가 흩어짐


1.죽음의 앞뒤


사람은 한 기간의 업보가 끝나면 저절로 죽음을 맞는다. 불법을 수행한 사람이라면 죽음을 맞는 방법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을 때 큰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재산 때문에,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설사 이 같은 문제가 없고 걱정 않는 사람일지라도 죽음 앞에서 큰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죽음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면 여러 가지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고, 어떤 종교를 믿었건 상관없이 스스로의 업력에 따라 가지가지 현상들을이 보인다.


살아서 十善을 베푼 이는 천상의 노래가 들리고 하늘사람이 이끌어 준다. 또 악을 행한 이는 지옥이나 아귀 모습이 나타나 끝없는 괴로움을 받는다.


이같이 악을 행한 이들은 심한 병고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때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그 사람들을 이끌어 주는 이가 없다면 그는 업력에 따라 삼악도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큰 선이나 큰 악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면 죽을 때 며칠이나 몇 주 동안 앓기도 하고, 야차, 맹수, 원혼 같은 괴이한 현상을 보기도 한다. 이것 모두가 스스로의 업력이 불러온 것이다.

이때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어떤 이는 눈을 감으려 하지 않고 어떤 이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욕하면서 눈앞의 괴물을 내쫓으려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네 가지 기운(四大)은 흩어지게 된다.


2. 네 기운이란 무엇인가?


네 기운이란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인 흙, 물, 불, 바람의 네 가지 기운을 말한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우주법계에 없는 곳 없기에 크다(大)라고 부른다. 사람의 사대는 어머니 뱃속에 들면서부터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자라면서 네 기운은 강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된다.


이때 네 기운은 무엇을 판단하는 기능을 지닌 ‘나’가 된다.

사람이 죽으면 네 기운이 흩어지고 인식작용도 사라진다. 다만 업력에 따라 또 하나의 생명을 가진 네 기운을 이루어 그 업력의 기능을 수행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는 이 점을 명심해서 네 기운의 덧없는 모습에 속지 말아야 한다.


3. 네 기운(地, 水, 火, 風)이 흩어짐


네 기운으로 뭉친 몸이 흩어질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흙 기운이 물 기운으로 바뀌는 현상이다. 이때 죽음을 맞는 사람은 둘레의 압력이 아주 세게 몸을 짓눌러 오는 것을 느끼는데, 그 흙 기운은 몸의 모든 털구멍 속으로 스며들어 와 내장과 뼈를 짓누른다. 매우 심하게 숨이 막히고 큰 괴로움 속에서도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옆에 있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의 몸이 떨리고 손발에 경련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만지거나 주물러서는 안 된다. 이 같은 행동은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 더욱 더 심한 괴로움을 줄 뿐이다.


다음은 물 기운이 불기운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때 몸은 찬 기운이 세게 느껴지고 뼈마디와 내장이 얼어붙는 듯한 괴로움이 하고 심해서 방 안에 난로가 있어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같은 괴로움은 알몸으로 얼음 속에 있는 것보다 더하고 얼굴빛이 잿빛으로 바뀌면서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다음으로 불기운이 바람기운으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때 죽는 사람은 몸의 기능이 다 되어 저항력이 사라지면서 더욱 심한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갑자기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 불에 타는 듯한 괴로움이 내장과 팔다리에 스며들고 힘살과 힘줄을 도려내는 듯한 괴로움으로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 버린다.


불에 타는 듯이 얼굴이 붉어지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마시는 숨보다 내쉬는 숨이 길어지다가 마침내 숨길이 멈춘다.


마지막으로 바람기운이 흩어진다. 갑자기 심한 바람기운이 죽는 이의 온몸을 몰아치며, 몸이 조각조각 먼지로 흩어지는 극심한 괴로움을 겪게 된다.


이쯤이면 네 기운이 흩어지고 힘살이 무너져 의학에서는 죽음으로 본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제8식이 아직 떠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죽음이라 하지 않는다. 이때 친척들은 절대로 죽는 이의 몸을 만져서는 안 된다. 몸을 만지면 죽는 이에게 극심한 괴로움을 주기 때문에 화를 나게 하여 죽는 이가 삼악도에 떨어질 수 있다.


죽음을 맞는 사람은 나쁜 신뿐만 아니라 선신이 나타나도 따라가지 말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죽음을 맞기 앞서 넉 달이나 한 달, 3주나 이틀 동안이라도,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른 염불행자는 죽을 때 아래와 같은 상서로운 현상을 경험한다.


①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편안하다.


② 죽을 날짜를 뚜렷이 안다.


③ 온갖 끄달림이 사라진다.


④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⑤ 단정히 않아 합장한다.


⑥ 평화로운 빛이 온몸을 감싼다.


⑦ 염불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다.


⑧ 미묘한 향기가 밀려온다.


⑨ 하늘의 음악이 들려온다.


⑩ 지켜보는 이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위의 상서 가운데 두 가지만 나타나도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특히 두 번째, 죽을 날짜를 알 수 있는 상서는 아주 중요하다.



4. 죽을 때의 다른 징조들


사람이 죽을 때 스스로가 살아온 삶의 습기인 선과 악이 모두 눈앞에 나타난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이는 아랫몸이 먼저 식고 나쁜 일을 많이 한 이는 윗몸이 먼저 식는다.


마지막으로 식는 곳이 얼굴인 사람은 하늘나라에, 심장이면 사람, 배면 굶주린 아귀, 무릎이면, 짐승으로 태어나고, 발이 마지막으로 식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러나 윤회를 벗어난 사람은 온몸의 온도가 식어버리고 다만 머리 위에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


[지옥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증상]


l 사나운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고,

사랑하는 사람한테도 무서운 얼굴을 한다.


l 공중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고 한다.


l 다른 사람이 좋은 말을 해도 듣지 못한다.


l 매우 슬프게 운다.


l 똥, 오줌을 못 가린다.


l 눈을 감고 뜰 생각을 못한다.


l 자주 얼굴과 머리를 가린다.


l 옆으로 누워서 가래를 삼킨다.


l 입과 온몸에서 나쁜 냄새를 풍긴다.


l 다리를 몹시 떤다.


l 코가 옆으로 기운다.


l 눈에 핏발이 선다.


l 엎드려 눕는다.


l 몸을 움츠리며 왼쪽으로 눕는다.



[아귀를 감응할 때 나타나는 증상]


l 입술을 자주 핥는다.


l 몸이 뜨겁다.


l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 무언가 먹으려 한다.


l 눈을 뜨면 감을 줄을 모른다.


l 두 눈이 말라 버린다.


l 오줌을 안 누고 똥을 가리지 못한다.


l 오른쪽 무릎이 먼저 차가워진다.


l 오른손으로 자주 주먹을 쥔다.



[짐승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증상]


l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 보고 싶어 한다.


l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츠리려 한다.


l 온몸에 땀이 흐른다.


l 목소리가 쉬어버린다.


l 입맛을 계속 다진다.



[사람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증상]


l 편안하고 착한 생각이 든다.


l 몸이 아프지 않다.


l 말이 많지 않고 부모 생각을 한다.


l 배우자를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고 친척의 이름을 듣기 좋아한다.


l 선악을 가려내고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


l 마음이 진실 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l 친척과 가족을 알아본다.


l 친척들이 한일을 칭찬한다.


l 집안일을 부탁하고 재산을 터놓는다.



[천인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증상]


l 연민심이 생긴다.


l 착한 생각이 든다.


l 기쁜 생각이 든다.


l 밝은 생각이 든다.


l 나쁜 냄새가 나지 않는다.


l 코가 옆으로 기울지 않는다.


l 화내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l 재산과 가족에게 미련이 없다.


l 눈이 맑다.


l 웃는 얼굴을 한다.



제 4 장 : 중유기로 들어가는 앞뒤단계


 

1.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


임종중음(臨終中陰)


죽어 몸과 마음이 흩어져 버리면 신령한 의식인 영식靈識이 중음이 세계로 들어간다.

이때 생긴 신령스런 몸이 바로 中陰身이다.


중음신은 괴로움, 두려움, 허둥댐의 시기를 맞는다. 죽음에 바로 든 이가 해탈할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갖는다.


첫 번째 기회는 죽는 순간 첫 번째 빛이 나타날 때이고 두 번째 기회는 죽은 뒤 빛이 나타 날 때 이다. 중음신이 이때 나타나는 빛을 바르게 가릴 수 있다면 바로 해탈을 얻는다.


실상중음(實相中陰)


l 첫 번째 7회의 해탈기회와 위기


죽은 뒤 사흘 반부터 열흘 반까지를 이른다. 이 시기에 중음신은 해탈할 수 있는 기회를 일곱 번 갖는다. 그러나 육도에 윤회할 수 있는 위기도 7번 갖게 된다.


본문에서 말하는 가르침을 잘 알아두고 해탈의 빛을 잘 헤아려 알면 바로 해탈에 이른다.


l 두 번째 7회의 해탈기회와 위기


죽은 뒤 열흘 반부터 열이레 반까지 이른다. 이 시기에도 중음신은 해탈할 기회를 일곱 번, 육도 윤회할 위기도 일곱 번 맞는다.


본문에서 말하는 가르침을 잘 알아두고 해탈의 빛을 잘 헤아려 알면 바로 해탈에 이른다.


투생중음(投生中陰)


죽은 뒤 열이레 반부터 49일까지를 이른다.


중음신은 환경이 더 없이 나빠져 육도에 태어나 다시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받게 될 시기이다. 이때 중음신은 냉정하게 이 책에서 일러준 가르침을 생각해 내어 스스로를 육도윤회에서 건져내야 한다.


중음신은 어떤 상황 속에 있더라고 또 어떤 모습과 소리가 보이고 들리더라도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아미타부처님께서 정토로 이끌어 주시기까지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염불해야 한다.


2.임종


몸을 구성하고 있던 네 요소가 흩어지고 제8식이 몸을 떠나면 中有기에 이르니 이때의 몸을 中有身이나 중음신(中陰身)이라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방황기이다.


죽을 때 마지막 숨을 내뱉고 들이쉬지 않는다고 온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이때 둘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울거나 만져서는 안 된다.


이렇듯 죽은 듯한 상태가 얼마나 이어지는 가는 죽은 이의 건강상태에 달렸다. 구멍에서 노란 액체가 나오면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은 이가 아미타불을 염불하게 되면 큰 빛을 볼 수 있다.

이런 빛은 두 번 나타난다. 영식이 몸을 떠나면 혼수상태에 빠지고 사나흘이 지나야 깨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음신이 되는 첫날이다. 그래서 중유기간인 49일은 죽은 그날이 아닌 사나흘이 지난 뒤부터 계산한다.


3.중음신의 일반상황


중음신은 일종의 미묘한 네 요소(사대)로 이루어진 몸으로, 생전의 아홉 배에 이르는 기억력을 지니고 있고 대부분이 스스로가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장례를 치르는 친척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때서야 자신이 죽은 몸 곁으로 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한다.


어떤 중음신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없는 것을 보고 죽었다는 것을 알기도 한다. 이때 중음신은 무척 마음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자마자 큰 괴로움을 느낀다.


중음신은 생전의 몸을 잊지 못해 자주 죽은 몸 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때 마다 타는 듯한 괴로움을 느낄 뿐이다.


중음신은 이렇게 정처 없이 헤맨다. 잠시 쉬려고 하지만 중음신은 사람과 달리 목숨이 길지 못하다. 어떤 때는 살아있던 때의 몸이 그리워 집에 돌아가 보지만 몸은 이미 땅 속에 있거나 불에 태워져 사라져 버린 뒤다. 중음신의 괴로움은 더욱 커가고 끝내 중음신은 이 같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다.


이때 중음신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바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중음신은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고 구원을 갈망하는 사이에 여섯 가지 빛을 보게 된다.


이 여섯 가지 빛은 육도윤회의 빛으로 자기와 감응이 깊은 세계의 빛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늘세계는 흰색,

사람은 노란색,

아수라는 연초록색,

짐승은 연파랑 색,

아귀는 연붉은색,

지옥은 검은색 빛이다.


이 빛들은 약한 빛으로 큰 밝음이 없다.


만약 중음신이 이 여섯 가지 빛 가운데 어느 한 빛 속으로 빠져들면 윤회의 굴레를 쓰게 된다. 중음신은 이 빛들이 뜻하는 바를 모르기 때문에 오직 직감과 업력으로 빛을 선택한다.


이때 오방불계(五方佛界)에 계시는 부처님들이 윤회하는 삶들을 건지려고 다섯 가지 빛을 뿌린다. 매우 밝지만 찬란하지 않은 파란빛, 청정한 흰빛, 곱고 부드러운 노랑 빛, 고귀한 붉은 빛, 맑고 성스러운 풀빛이 그것이다.


중음신은 이 빛에 따르면 바로 정토에 태어난다.


그러나 중음신은 스스로의 업력 때문에 이 빛을 두려워하면

마계(魔界)의 빛으로 잘못 알아 윤회(輪廻)의 길로 빠지고 만다.


이 부처님의 빛은 함께 나타나지 않고 하나씩 나누어서 나타난다.


4.악업을 받는 낌새


짐승


중음신(中陰身)은 보통 일주일에 한 번씩 기절하여 다시 깨어난다. 몹시 불안해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장례식에서 동물이나 집짐승을 죽여 만든 음식으로 대접하면 무서운 형상이 나타나 삼악도로 이끈다. 그러므로 반드시 채식으로 상을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는 큰 괴로움을 당한다.


중음신의 몸은 아주 가벼운 깃털처럼 바람 따라 정처 없이 휘날리게 된다. 또 갑자기 맹렬한 빛과 함께 우렁찬 천둥소리가 터지고 손에 흉기를 든 무서운 야차가 끝없이 나타나고 무서운 맹수들이 쫓아오고 산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큰 불꽃이 쫓아온다.


중음신은 겁에 질려 도망친다. 횐 색, 검은색, 붉은색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높은 낭떠러지에 이른다. 야차와 맹수들은 계속 쫓아온다. 그때 홀연히 동굴이 보여 너무 기쁜 나머지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동굴은 짐승의 세계다. 야차와 맹수와 소리와 불꽃은 생전에 지은 자신의 업력(業力)이 일으키는 환상(幻像)이다.


흰색, 검은색, 붉은색은 업의 세 요소인 세 가지 毒素이다.


중음신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흔들림 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해야한다.


아귀(餓鬼)


아귀의 욕심은 끝이 없다. 아귀의 삶은 ‘구해도 얻을 수 없음’으로 줄곧 이어진다.


중음신에게 이 같은 악업이 있다면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나 동굴에 홀로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아귀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보통 복덕이 있는 아귀와 복덕이 없는 아귀로 나눈다.


복덕이 있는 아귀를 세력 귀라 부른다.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 가운데는 이 세력 귀들이 끼어 있다. 야차, 산신, 토지신이 여기에 속한다. 생전에 보시를 하면서 가난한 이를 도왔으나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거나 남을 속여서 돈을 모은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복덕이 없는 귀신에는 소아귀, 다아귀, 전아귀의 세 종류가 있다.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남을 위해 베풀지도 않은 이는 소아귀로 태어난다. 소아귀는 얼굴이 검고 말랐고 남색이나 붉은색이다. 눈에 눈물이 흐르고 손발이 부서지고 머리카락이 기러 얼굴을 가리고 있다. 목마름이 심하나 자손이 제사지내는 음식이나 절에서 공양하는 음식만 먹을 수 있다.


다아귀도 소아귀와 비슷하나 소아귀보다 괴로움이 심하다.

전아귀는 완전히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입에서 불길이 나와 음식이 입에 닿자마자 타버린다.

거기다 배는 크고 목구멍은 바늘보다 가늘어 배고픔이 극심하다. 우란분회에서 공양하는 음식만 먹을 수 있다.


만약 중음신이 이런 아귀와 감응할 징조를 느끼면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해야한다.


지옥


중음신이 살아있을 때 아주 나쁜 업을 지었다면 아래와 같은 현상을 보게 된다.


슬픈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그 음악소리를 따라가면 검거나 횐 돌로 만든 집이나 동굴로 들어서게 되고 깜깜한 지하도를 건너게 된다. 이것은 지옥에 떨어질 징조이니 중음신은 한마음으로 염불해야한다.


또 어떤 중음신은 추운 비바람 속에서 갑자기 뜨거운 불을 보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불이 있는 곳으로 가면 불꽃지옥에 떨어진다. 거꾸로 뜨거운 바람 속에 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마나 그 바람 곁으로 가면 얼음지옥에 떨어진다.


이럴 때도 중음신은 한마음을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아수라


아수라는 본디 좋은 세계에 들지만 자주 성내는 마음을 일으켜 싸우는 것을 좋아하니 아주 좋은 세계라고 볼 수는 없다.


남자 아수라는 하늘사람들과 쉬지 않고 싸움을 하고 여자 아수라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 한다.

아수라는 비록 괴로움을 받지는 않지만 목숨이 다하면 삼악도에 떨어질 위험이 많다.


살아있을 때 이기는 것을 좋아하고 지나치게 선악을 가려 낸 중음신은 중유기에 아름다운 숲을 보게 된다.

또 두 개의 불 바퀴가 나란히 도는 것을 보고 좋아서 가까이 가면 아수라로 태어난다.


이럴 때 중음신(中陰身)은 반드시 염불을 해야 한다.


5.선업을 받는 낌새


사람 


『아함경』에 따르면 인간계에는 네 가지 세상, 사대부주(四大部州)가 있다. 동승부주,남섬부주,서우하주,북구로주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사람이 살고 있는 남섬부주 말고는 불법이 없다.


북구로주는 복과 목숨이 길고 향락에 빠지기 쉬운 곳으로 절대로 이곳에 태어나서는 안 된다. 동승신주를 감응한 중은신은 아름다운 기러기들이 살고 있는 큰 호수를 보게 된다. 이런 경치에 이끌리면 이곳에 태어난다.


남섬부주에 감응한 중음신은 심한 추위로 피할 곳을 찾게 되는데 업에 따라 큰 집이나 작은집을 만나게 된다. 만약 벽만 있는 집을 만나게 되면 가난한 이로 태어난다. 이럴 때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모든 현상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서우하주에 감응한 중음신은 소가 풀을 뜯는 호수를 보게 될 것이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즐거움이 많고 오래 살 수 있으나 불법이 없는 곳이니 절대로 따라 들어가면 안 된다.

중음신은 사람으로 태어나기 앞서 남녀가 결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아버지와 가까이 하려는 생각을 일으키면 여자로, 어머니와 가까이 하려는 생각을 일으키면 남자로 태어난다.


중음신은 자유로워 시공에 걸립이 없으나 한 번 어머니 배 안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남녀가 결합한 모습을 보게 된 중음신은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해야 된다.


하늘사람


살아 있을 때 착한 업을 쌓은 중음신(中陰身)은 중유기(中有期)에 부드럽고 흰 빛을 보게 되고 기분이 날아갈 듯 편안하다.

하늘세계와 하늘사람들을 보게 되고 마음이 기쁘다.


어떤 이는 죽을 때부터 하늘음악 소리를 듣게 되어 둘레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늘세계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저마다 각가지 즐거움이 넘치고 목숨이 길기지만 인연이 다하면 다시 윤회하는 길에 들게 되니,

 

 이 같은 하늘 세계에 끄달려서는 안 된다. 중음신은 하늘세계나 하늘 사람인 천사들을 보면 여기 끌리지 말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그래야 윤회에서 벗어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제 5 장 : 사람이 죽어서 49동안에 겪는 일들과 자기구제법


임종중음(臨終中陰)...죽은 직후 영혼의 상태


죽음을 맞는 이의 숨길이 끊어진지 스무 시간이나 서른 시간이 되면 죽은 이의 심령(心靈)은 밝은 빛 속에 있으면서 잠깐이나마 더 없는 편안함과 만족을 느낀다.


가족들은 죽은 이의 이런 상태가 깨뜨려지지 않도록 잘 살펴주고 정토염불법을 닦는 벗들이나 스님들을 불러 염불로 중음신의 의식을 더욱 밝혀주어야 한다.


염불을 해주면 중음신은 의식이 어두워지지 않고 바로 눈부신 빛 속에서 해탈에 이를 수 있으니 이것이 중음신에 해탈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이다.


잠깐 동안 밝은 빛이 터졌다 사라지는 경계가 계속 이어지는데 이때 중음신은 스스로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살아 있을 때처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이들을 보고 그들이 나누는 말을 듣는다.

 

이때는 무서운 업력(業力)에서 나오는 갖가지 환영(幻影)이 나타나기 전으로 중음신은 아주 밝은 빛 속에 있다.


만약 중음신이 살아 있을 때 이 가르침을 보거나 들었다면 바른 생각을 일으켜 계속 터지는 빛 속으로 해탈할 수 있다.


그러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부르거나 그밖에 무서운 모습들을 보게 되면 이는 중음신을 삼악도로 이끌려는 현상임을 알아야 한다.

또 아름다운 하늘여인이 맞이하려 해도 결코 마음이 흔들려 따라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윤회하는 괴로움 바다에 빠지게 된다. 살았을 때 움켜쥐었던 그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려야 한다.

꿈같고 물거품 같은 그것들에 끄달리고 그것들을 잊지 못하는 것은 중음신에게 큰 괴로움을 줄 뿐이다.


다 놓아버리지 않으면 끝내 해탈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다시 육도윤회에 빠지게 된다.


모든 생각을 다 버리고 아미타부처님께서 정토로 이끌어 주시어 나고 죽는 괴로움에서 건져 주시기를 마음 다해 기원해야 한다.


2.실상중음(實相中陰)..본격적인 저승길에 들어선 영혼


살아 있을 때 바른 가르침이나 스승을 만나지 못한 중음신은 중유기(中有期)에 헤매고 괴로워한다.


죽은 뒤 사흘부터 다시 깨어난 중음신은 눈, 귀, 혀, 몸, 의식의 기능이 본디대로 살아나 중유기간인 49일 동안 활동한다. 장님이나 벙어리였던 중음신도 이 기간에는 걸림 없이 보고 말할 수 있다. 중음신의 몸과 의식은 지극히 섬세하고 맑아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다. 중음신은 가족과 벗들이 슬피 울고 외쳐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중음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중음신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가족과 벗들에게 마음이 상해 자리를 떠난다. 이 단계에서는 업력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환영들이 잠깐씩 나타나기도 한다.

중음신은 해탈의 기회를 7번, 육도윤회에 빠질 위기도 7번 맞이한다.


만약 중음신이 이 가르침을 잘 외우지 못하거나 아미타불을 염불할 수 없어 업력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가지 무서운 현상들에 휘몰려 정신없이 쫓겨 다닌다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 가운데 떨어져 무서운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다.

 

중음신은 앞장에서 말한 일반현상 말고도 날마다 여러 가지 현상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 같은 현상에 휘말려 들지 않으려면 그 낱낱 현상들을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러면 반드시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희락부제존(喜樂部諸尊)자기제도법


[죽은 뒤 첫이레 동안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투는 여러 불보살을 만남]


첫째 날 : 중음신은 마치 맑고 푸른 가을 하늘처럼 보이는 온통 파란색의 세계를 본다.


그 파란색의 한가운데서 비로자나부처님이 사자좌에 앉아 가슴으로 부터는 눈이 부신 파란빛을 중음신에게 내린다. 이 때 부드럽고 옅은 흰빛도 함께 온다.

중음신은  이 흰빛이 아니라 반드시 파란빛으로 들어 가야한다.


둘째 날 : 물 기운의 맑고 깨끗한 흰빛이 중음신을 향해 쏟아진다.


이는 금강부의 부처님이 상황보좌를 타고 중음신을 이끌려고 내리는 빛으로 부처님 곁에는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있다. 이때 안개와 같은 검은 빛이 함께 오는데 이빛은 지옥의 빛이니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된다.


셋째 날 : 흙 기운의 눈이 부신 황금빛이 중음신에게 내려온다.


이는 보생여래(寶生如來)가 보마보좌(寶馬寶座)를 타고 중음신을 건지려고 내린 빛으로, 부처님 곁에는 허공장보살과 지장보살과 보현보살이 있다. 이때 옅은 노란색에 파란색을 띤 빛이 함께 내려온다. 이 빛은 사람세계로 이끄는 빛이다. 해탈을 바라는 중음신은 눈부신 황금빛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넷째날 : 불기운에 붉은 보배광명이 중음신에게 내려 온다.


이는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이 공작왕(孔雀王)보좌를 타고 중음신을 건지려고 내린 빛으로 부처님 곁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있다.


이 때 아귀세계로 이끄는 연 붉은 빛도 함께 내려온다.

결코 붉은 보배광명을 피하면 안 된다. 아귀세계에 빛은 부드럽지만 욕심이라는 업의 기운에서 나오는 빛이다.


다섯째 날 : 바람기운의 맑고 깨끗한 초록빛이 중음신에게 내려온다.


이는 불공성취불(佛空成就佛)이 인신조체수왕(人身鳥體獸王)보좌를 타고 중음신을 건져내려고 내린 빛으로 부처님 곁에는 금강수 보살과 제개장보살이 있다. 이때 아수라 세계로 이끄는  어두운 초록빛도 함께 내려온다.


어두운 초록빛은 성내고 탐내는 나쁜 업의 기운에서 나타난 것이니 절대 이빛속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여섯째 날 : 이날에는 아직 방황하고 있는 무거운 업의 중음신을 향해 앞에 나타난 다섯 부처님들의 빛이 함께 내려온다.

이 빛은 본디 맑고 깨끗한 스스로의 깨달음의 빛인 참고향이니 중음신은 이 가운데 한 빛을 따라가게 된다. 이때 자신의 업력에 빛인 옅은 빛도 함께 나타난다.

하늘나라는 옅은 흰빛, 사람은 옅은 노란빛, 아수라는 옅은 초록빛, 짐승은 어두운 파란빛, 아귀는 옅은 피 빛, 지옥은 뽀얀 검은빛이다.


이 같은 빛들은 깨달음의 빛 속에 섞여 내려온다.

결코 맑고 눈부신 빛을 피해 약하고 부드럽고 어두운 빛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살았을 때 신을 숭배하고 하늘나라에 태어나기를 소망했던 중음신들은 그런 소망을 비워야 한다. 만약 비우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는 흰빛을 따르면 나고 죽는 윤회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일곱째 날 : 엿새 동안에 기회를 다 놓친 중음신은 다시 7일을 맞이하게 된다. 이 날은 오부존자(五部尊者)가 동, 서, 남, 북, 중앙에서 오른손으로는 항복수인(降伏手印)을 지으면서 보배 칼을 높이 들고 왼손에는 피가 담긴 해골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중음신에게 빛을 내린다.


이 때 짐승에 길로 이끄는 파란빛이 내려온다. 존자가 내려 주는 빛 속에는 천배로 증폭된 천둥소리가 들린다. 중음신을 결코 두려워 면서 짙은 파란빛으로 들어서서는 안 된다.


존자들에 내려주는 지혜에 빛은 본래 스스로의 본디 광명에서 오는 것이고 축생도의 빛은 어리석은 업력(業力)에서 나온 것이다.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정토(淨土)에서 태어난다.




분노부제존(忿怒部諸尊)의 자기구제법…살아생전에 화를 낸 업력이 나타남


죽은 뒤 둘째 7일 동안에 성낸 모습 짓는 불보살을 만나게 된다.


자비의 모습으로 인도받지 못한 중음신은 분노의 모습을 통해 이끌림을 받게 된다.


악업을 지은 중음신은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친근감이 일어나 고향에 돌아 온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불보살은 중생의 악한 성품을 잘 알고 있기에 가지가지 성내는 모습을 나투어 그 중생을 제도한다. 이것은 중생을 괴로움에서 건지려는 불보살의 자비이자 스스로의 깨달음의 성품이 스스로를 회복하려는 자연스런 움직임이다. 이때 중음신은 이런 현상이 불보살의 자비이고 스스로의 의식이 지어낸 현상임을 알아 겁내거나 달아나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제도법을 한번 보게 되면 의식이 아홉 배나 맑아진 중유기에서 바르고 두려움 없이 윤회를 벗어 날 수 있다.


이것은 중유기에서 자기를 제도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니 종교와 상관없이 다른 방법으로 자기를 구할 수 없다.


여드렛 날 : 피를 빨아 먹는 성난 모습의 존자가 나타난다.


짙은 홍갈색의 몸을 하고 얼굴 셋에 손이 여섯이고, 발은 넷이다.


오른쪽 얼굴은 흰색, 왼쪽얼굴은 붉은색, 가운데 얼굴은 흙 갈색으로 온 몸이 불꽃에 휩싸여 있고 아홉 개의 눈으로 빛을 쏘아 내고 있다.


날카로운 이빨과 눈썹에서는 번개 같은 빛을 내고 산이 무너지는 큰소리로 ‘아라하, 하하!’하고 소리친다. 이는 비로자나부처님께서 중음신을 건져주려고 나타낸 모습이다. 절대 겁내지 말고 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정토에 태어난다.


아흐렛 날 : 금강부의 피를 빨아먹는 성난 모습의 존자가 나타난다.


짙은 파란색으로 얼굴 셋에 팔은 여섯 개, 발은 넷이다.


오른쪽 얼굴은 흰빛, 왼쪽얼굴은 붉은빛, 가운데 얼굴은 파란빛이다.


이는 자신의 업식에 따라 감응해 나타난 금강보살의 화현으로 귀의하면 정토에 태어난다.


열흘 날 : 보부(寶部)의 피를 빨아 먹는 성난 모습의 존자가 나타난다.


짙은 황색으로 얼굴 셋에, 팔이 여섯, 발이 넷이다. 오른쪽 얼굴은 흰빛 ,왼쪽 얼굴은 붉은빛, 가운데 얼굴은 노란빛이다.


이는 업식에 따라 감응해 나타난 보생여래(寶生如來)의 화신(化身)으로 귀의(歸依)하면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열 하룻날 : 연화부의 피를 빨아 먹는 성난 모습의 존자가 나타난다.


짙은 녹색으로 얼굴 셋, 팔 여섯, 발은 넷이다. 오른쪽 얼굴은 흰빛, 왼쪽 얼굴은 파란빛, 가운데 얼굴은 붉은빛이다. 이는 자신의 업력에 따라 감응해 나타난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귀의 하면 정토에 태어난다.


열 이튿날 : 갈마부의 성난 모습의 존자가 나타난다. 짙은 녹색의 얼굴 셋, 팔이 여섯에, 발이 넷이다. 오른쪽 얼굴은 흰색, 왼쪽얼굴은 파란빛, 가운데 얼굴은 풀빛이다.


이 또한 자신의 업력에 따라 감응해 나타난 불공성취불(佛空成就佛)의 화신(化身)으로 귀의(歸依)하면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열 사흗날 : 이때는 중음신의 업력에서 나오는 집착으로 허깨비와 같은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주 위험하다. 이때는 동서남북 그리고 그 사이와 위, 아래 팔방에서 무서운 얼굴을 한 분노존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중음신의 업력에서 일어난 환상(幻像)이니 절대 겁먹거나 달아나지 말고 한마음으로 귀의 하면 정토에 태어난다.


열 나흗날 : 이날에 중음신 스스로의 업에서 나타난 화내는 존자와 이십팔여신이류존자(二十八女神異類尊者)들이 보인다. 그 모습은 다음과 같다.


1.동쪽 


l 짙은 붉은색의 소머리와 방패, 해골을 들고 있다.


l 황홍색의 뱀머리와 연꽃을 들고 있다.


l 검은 초록색의 표범머리와 삼지창을 들고 있다.


l 검은 원숭이 머리와 굴레를 들고 있다.


l 붉은 곰머리와 짧은 창을 들고 있다.


l 흰곰 머리와 쇠줄을 들고 있다.




2.남쪽


l 노란색의 박쥐머리와 칼을 들고 있다.


l 붉은 사자머리와 향로를 들고 있다.


l 붉은 전갈머리와 연꽃을 들고 있다.


l 흰독수리 머리와 방패를 들고 있다.


l 검은녹색의 여우머리와 곤봉을 들고 있다.


l 검은 황색의 호랑이 머리와 해골그릇을 들고 있다.




3.서쪽


l 검은 녹색에 독수리 머리와 짧은 곤봉을 들고 있다.


l 붉은색 말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송장을 들고 있다.


l 흰독수리 머리와 곤봉을 들고 있다.


l 노란개머리와 방패, 칼을 들고 있다.


l 붉고 목이 길면서 부리가 굽은 새머리와 활을 들고 있다.


l 녹색 사슴머리와 보배 솥을 들고 있다.


4.북쪽


l 파란색의 늑대머리와 작은 깃발을 들고 있다.


l 불고 굽은 뿔을 한 산양머리와 앞이 날카로운 곤봉을 들고 있다.


l 검은 멧돼지 머리와 이빨로 이어진 고리를 들고 있다.


l 붉은 까마귀 머리와 아이의 송장을 들고 있다.


l 검녹색의 코기리 머리와 송장, 해골을 들고 있다.


l 파란색 뱀머리와 긴 줄을 들고 있다.


5.바깥쪽에 있는 네 문


l 동문 : 검은 꾀꼬리 머리와 쇠고리를 들고 있다.


l 남문 : 노란 산양머리와 밧줄을 들고 있다.


l 서문 : 붉은 사자머리와 쇠줄을 들고 있다.


l 북문 : 녹색의 뱀머리와 종을 들고 있다.


이 같은 진노존자(嗔怒尊者)들은 모두 자비심에서 태어난 모습이니 겁내지 말고 잘 가려내어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바로 정토에 태어날 것이다.


만약 중음신이 49일 동안에도 정토에 태어나지 못하고 헤매게 되면 온갖 마왕들이 흉악하고 난폭한 모습으로 중음신을 잡아먹으려 할 것이다.


이럴 때도 중음신은 절대로 겁내지 말고, 염불발원(念佛發願)하면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3.투생중음(投生中陰)


투생중음과 심판


투생중음이란 다시 태어나는 중음신을 말한다.


중음신이 만약이 지은 악업에 걸려 두렵고 무서움의 괴로움을 받으면서 죽은 지 17일반이 지나도록 정토에 태어나지 못하면 처참하고 더욱 괴롭고 무서운 경계를 만나게 된다.


악업을 지은 중음신은 무섭게 불어 대는 악업의 바람에 날리고 끝없는 암흑 속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죽여라! 죽여라!”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산목숨을 즐겨 죽인 중음신은 나찰에게 잡아먹히거나 무서운 맹수들에게 쫒기거나 추위, 뜨거움, 큰물, 눈 조각, 암흑, 거친 바람, 무너지는 산, 하늘까지 타오르는 불길, 살을 에이는 칼바람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만난다.


중음신은 줄 곳 무섭고 두려움에 쫓겨 스스로의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붉은빛, 흰빛, 검은빛의 낭떠러지를 만나게 된다.


이때 중음신이 받는 괴로움은 말로 다할 수 없고 그 처참하기가 그 보다 더할 수 없다. 생각은 재처럼 죽고 뜻은 얼음처럼 차가워져서 춥지 않은데도 심하게 떤다.


이에 중음신은 자신이 머물던 몸을 찾지만 몸은 이미 죽어 얼었거나 썩었거나 아니면 화장이 되었거나 땅에 묻혀 있는 것을 보고는 큰 바위틈에 짓눌리는 것 같이 말할 수 없는 큰 괴로움을 받는다. 이때 육도로 이끄는 빛이 중음신을 비추는데 만약 중음신이 몸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스스로 지은 업에 따라 여러 갈래 빛 가운데 어느 한 빛 속으로 들어가 끝없는 육도윤회의 괴로움을 받게 된다.


이때 중음신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사나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칠 흙 같은 어두운 안개 속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의 무리들이 하늘 가득 타오르는 불꽃을 보기도 하고 큰 산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또 성난 바다가 덮쳐오는 듯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귀를 막는 희고 붉고 검은 세계의 큰 낭떠러지를 만나기도 한다. 중음신이 두려워 거나 놀라서 숨을 곳을 찾으면 가지가지 짐승의 몸으로 태어나게 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저 두렵고 무서운 중음의 상황들이란 실재하지 않는 허깨비로, 놀라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온 마음을 기울여 아미타불을 부르면 한 생각 사이 금빛 몸의 아미타불께서 백호로 눈부신 빛을 비추시며 바로 눈앞에 나타나 정토로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이다.


중음신은 가지가지 험한 모습을 한 귀왕들에게 심판을 받고 온갖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럴 때 중음신은 이 모든 현상이 스스로가 지은 나쁜 업에서 흘러나온 현실임을 알고 『반야심경』에서의 가르침인 “모양이 비어 있음이고 비어 있음이 곧 모양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가르침이나 『금강경』말씀인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보리라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의 진실한 뜻을 잘 관조해야 한다.


그러면 중음신은 살아있을 때보다 아홉 배 맑은 영성으로 쉽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만약 그래도 진실한 뜻이 밝혀지지 않으면 모든 두려운 모습들에 눈을 팔지 말고, 다만 아미타불만을 지극하게 부르면 험한 중음계를 벗어나 정토에 태어난다.


만약 중음신이 남녀가 음행하는 모습을 보거든 냉정함을 잃지 말고, 절대로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샘내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만에 하나 이런 마음을 내면 바로 윤회하는 아기집 속에 들어가 짐승의 몸을 받아도 본인의 의식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이럴 때 중음신은 결코 탐애, 성냄, 교만, 시기심을 일으켜서는 안 되고 평정을 잃지 말고 오직 염불하는 마음만을 이어가야 한다.


만약 이 같은 노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모든 경계가 실재가 아님을 깨닫기 어려우면 음행하는 남녀를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한마음 한뜻으로 예배하면 모든 욕심이 사라져 아기집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또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거룩한 모습의 아미타부처님께서 눈앞에 나타나 어느새 정토로 이끌어 주신다.


윤회하는 아기집에 들어가지 않는 길


희락부의 오방부처님의 빛과 분노제존의 빛은 중음신 스스로의 본디 생명이 빛이다.


그 빛을 받고도 지어놓은 나쁜 업력에 이끌려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또 바른 생각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지 않아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면 중음신은 더더욱 험하고 위험한 투생중음의 단계로 접어든다.


투생중음기의 중음신은 스스로의 선악업력의 감응에 따라 자신의 존재가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떨어지거나 옆으로 옮아가는 느낌이 든다. 뒤이어 폭풍, 찬바람, 우박, 진눈깨비, 암흑이 펼쳐지는 상황을 만나거나 누군가 뒤쫓아 오는 느낌을 받는다.


좋은 업을 쌓지 못한 중음신은 괴로운 경계를 피해 도망 다니기 바쁘고 좋은 업을 쌓은 중음신은 아주 편안한 느낌을 갖는다.


중음신은 스스로의 업력에 따라 다시 태어날 몸을 받는데 이때 중음신을 이끄는 빛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중음신이 한번 이 빛 가운데 들어서면 다시 윤회하는 삶인 육도의 아기집속에 빠져들게 된다.


투생중음기에 모든 사악한 생각을 버리고 참되고 맑은 생각을 일으키면 바로 육도윤회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만약 음행하는 남녀를 보면 흔들림이 없도록 해야 되고 결코 마음이 움직여 탐애심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자신의 생명의 어머니인 관세음보살이 화현하신 모습이라 여기고 절하고 예배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아기집의 문이 저절로 닫힌다.


만약 중음신이 아주 무거운 업력 때문에 위에서 말한 방법으로도 여전히 아기집의 문이 닫히지 않아 이미 아기집 속에 들어갔음을 알게 되었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아기집을 벗어 날 수 있다.


아기집에 들어갈 때 스스로의 경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허깨비임을 관찰하고 거짓을 참으로 삼는 집착을 깨뜨리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아기집을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 중음신은 앞에 펼쳐지는 현상들을 이렇게 밝게 보아야 한다.


“아! 부모여, 함께 몸을 섞는 모습이여, 검은 빗줄기여, 거친 바람이여, 간장을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소리여, 울부짖는 귀신의 외마디여, 모두가 덧없어 참으로 있는 것이 없구나.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이 어떤 소리든 그것은 마치 물거품처럼, 거울 속의 그림자처럼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것은 다만 나의 업식에서 일어난 모습과 소리인 것을…이제 다시 내가 그것들과 함께 어우러진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나의 업식도 본디 덧없는 것인데 하물며 그것이 지어낸 모습과 소리가 실재일 수 있는가!


이 같은 진실을 모르고, 거짓을 참으로 삼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겨 끝없는 윤회의 강물에 휩쓸려 지금에 이르렀으니 아! 윤회여, 이제는 사라지거라, 물거품 같은 윤회여.”


이렇게 관조하면 어느 새 큰 평화로움이 밀려오고 중음신은 태어남이 없는 고요함 속에 더없이 말고 밝아져 윤회하는 아기집을 영원히 떠나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중음기에는 살아 있을 때보다 영성의 힘이 아홉 배나 밝으니, 이 힘을 한껏 활용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투생중음신은 난생, 태생, 습생, 화생 가운데 어느 하나로 태어나게 된다.

정자와 난자가 서로 만나는 순간 중음신은 큰 쾌락을 느끼며 이 쾌락 속에서 의식을 잃고 알이나 태속에서 몸을 받고 태어나 두 눈을 뜬 뒤에야 자신이 돼지, 소, 개, 염소 또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또는 육도에 윤회하는 몸을 받아 갖가지 괴로움을 받게 된다.


거꾸로, 지금 살아서 닦는 수행은 중음기보다 아홉 배나 어려운 수행이라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이생에 닦는 수행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중음기에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큰 것이다.


만약 근기가 낮고 업장이 무거운 데다 한량없는 옛 생부터 지어온 나쁜 버릇으로 모든 해탈법문이 도움이 되지 않는 중음신은 제4장에서 밝힌, 투생중음이 맞는 여섯 가지 세계를 잘 가리고 나아갈 길을 바르게 잡아 마지막 해탈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제 6 장 : 제 8 식과 중음신(中陰身)-마지막 의식구조


1.식(識)의 감응


중유기에 경험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전능한 신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가장 깊은 의식 구조인 제 8식(아뢰야식)이 지어낸 현상들이다. 어찌 중유기의 현상들 뿐 이겠는가.


태어남, 죽음, 윤회, 괴로움, 즐거움 같은 삶의 현상들도 다 마찬가지다.


제 8식은 주관과 객관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 삶의 마당인데 갈무리한 삶의 모든 내용과


그 기능이라는 쪽에서 아뢰야식 이라고 한다.


아주 강력한 탐욕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생의 아뢰야식은 끝없는 망상 속에서 자기를 본떠 만들어서 몸과 환경을 지어 가는데 그 과정이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뢰야식의 특징은 놀라운 갈무리 능력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저지르는 모든 삶의 경험들을 컴퓨터와 같이 고스란히 갈무리한다.


이렇게 갈무리한 낱낱의 삶의 경험들을 종자, 곧 씨앗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때 말하는 씨앗의 개념은 수행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꾸어질 수 있다.


그리고 아뢰야식(제8식)은 이러한 씨앗과 씨앗 사이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유기적 생명활동이라는 점에서 콩씨, 팥씨나 컴퓨터의 기억내용과는 다르다.


중생이 수많은 삶을 살면서 얻은 삶의 경향은 모두가 욕심, 성냄, 어리석음, 잘난 체함. 삿된 의심 같은 번뇌에서 온 것이다. 번뇌가 없다면 윤회의 괴로움도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삶을 윤회로 이끄는 뒤바뀐 삶의 경향을 업(業)이란 한다.


중생은 이 같은 업으로 스스로의 삶의 마당인 제8식을 삼고 있는 것이다.


8식은 새로운 생명활동을 결정짓는 힘이다. 죽을 때는 마지막으로 떠나고 다시 태어날 때는


먼저 들어가 생명형성의 조건을 결정짓는 힘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지어놓은 8식에서 터져 나오는 삶의 현상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할 때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든다.


중유기에도 마찬가지이다.


8식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환상들을 바르게 읽지 못하면 윤회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창조신을 숭배하고 삶과 죽음까지도 창조신의 조화로 여기는 행위도 자신이 지어놓은 깊은 의식인 8식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처럼 중유기에 든 중생이 8식의 감응을 바르게 아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8식에서 일으키는 선악의 생각에 따라 중음신은 천당이나 지옥 같은 가지가지 세계를 지어낸다. 그러나 이렇게 지어낸 세계는 좋든 싫든 영원한 것은 없다. 지어낸 세계에 따라 그 기간이 길거나 짧은 차이는 있지만 이것은 모두 8식의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과보로, 8식의 조건이 바뀌면 세계고 바뀌기 마련이다. 신을 섬기면 신의 세계가 나타나고 욕심을 섬기면 욕심의 세계가 나타난다.


중생의 어리석음은 이같이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8식의 현상들을 진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있다.


제8식 아뢰야식이 무엇인지 바르게 아는 일이야 말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관(如實觀)이고 어리석음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2.염불법문(念佛法文)의 감응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이들은 염불법문의 오묘함을 알지 못한다.


중생은 시작이 없는 옛적부터 스스로의 삶을 굴려온 허깨비 같은 8식의 힘을 한꺼번에 없애버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서는 끝없는 자비원력을 일으켜 중생들로 하여금 건너기 힘든 윤회의 강을 쉽게 뛰어 넘게 하신다.


아미타불의 자비원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8식의 본디 모습인 아미타불의 세계를 청정한 마음으로 불러 정토에 태어나게 한 뒤 그 근기에 따라 저도 모르게 8식에 녹아 있는 삼독번뇌를 남김없이 없애주는 위없는 방편을 말한다.


이것은 중생이 윤회하는 삶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힘 있는 실천법이다.


사람이건 앵무새건 원숭이건 지극한 한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그는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 윤회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나무아미타불’은 신비한 암호와도 같아서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괴로움일지라도 쉽게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업장이 무거운 중생일수록 염불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종파가 있고 종파에 따른 독특한 가르침이 있다.


가르침은 저마다 뛰어나고 훌륭하다. 그러나 염불법문 밖의 가르침들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려면 많은 생을 두고 닦은 숙세(宿世)의 근기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중생의 성품이 흐리고 생활이 복잡한 시대에는 섣불리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수행법이나 실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오직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왕생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아미타경』을 비롯해 『무량수경』.『관무량수경』.『법화경』.『화엄경』.『능엄경』.『대집경』.『대운경』 『반주경』같은 많은 경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도 염불을 발원했고, 마명스님, 용수스님, 혜원스님, 천태스님, 원효스님, 서산스님, 감산스님, 같은, 불문이 수많은 용상대덕(龍象大德)들이 염불법문을 수행했다.


염불법문은 불법의 큰 줄기다. 선종(禪宗)에는 돈(頓),점(漸)두 파가 있는데 돈파(頓波)에서는 근기(根機)에 따라 문득 깨달아 불법의 모든 것을 이루게 하고 점파(漸派)에서는 점차로 수행을 닦아 본성을 되찾게 하는 가르침을 편다.


염불법문은 돈, 점의 수행공덕을 함께 이루어 준다.


또 꾸준히 염불하면 스스로 죽을 날을 알게 되어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죽음을 맞는 법을 몸으로 가르치고 보여 주어서 그 사람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공부를 하게 하는 큰 공덕을 지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죽음에 거의 다다라 좋은 스승을 만나서 염불수행을 하다 바로 정토에 태어나기도 하니, 이것은 돈파(頓波)에서 말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참선수행은 마념(魔念)의 침해를 쉽게 받지만 정토수행(淨土修行)에는 그럴 위험이 거의 없다.


밀종(密宗)의 수행은 만트라를 수지하는 수행법이지만 밀법수행도 숙세의 근기가 있어야 한다. 끈기 있게 애써 수지한다면 이룰 수도 있지만 죽음을 잘 맞을 수도 있다는 보장이 없다.


죽을 때 무거운 업장 때문에 자칫 정념(正念)을 잃어 만트라를 수지하지 못한다면 다시 윤회 속에 빠지고 만다.


염불법문은 말법시대에 가장 맞는 수행법이다. ‘아미타불’,이 염불은 만트라 가운데 만트라로서 한 번 불러도 왕생하고 열 번 불러도 왕생한다.


그래서 목련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염불법문처럼 쉽고 간단한 법문을 수행하지 않고 다른 수행법을 실천하는 것은 마치 장님이나 귀머거리 같다.”


염불법문은 너무나 간단하다. 그저 딴 생각 없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수행하면 아미타불의 큰 원력을 믿게 되고 윤회하는 괴로움을 절실히 느껴 해탈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수행하면 시작 없는 옛날부터 지어온 업장을 참회하고 참된 귀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이렇게 수행하면 덧없는 나고 죽음의 절박함을 알게 되어 결코 게으르지 않게 된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진리의 힘을 8식의 내용이 바뀌면서 본디의 자기 모습인 끝없이 밝은 佛性이 환히 드러나니 이것이 바로 ‘자성미타(自性彌陀)’이다. 자성미타는 생명의 참 모습이자 부처님의 염통이다.


중생은 삼독번뇌로 육도의 업보를 받게 되고 깨달음으로 정토에 태어난다. 날마다, 날마다 아미타불을 부르면 8식이 부처님의 세계로 피어나고, 그릇된 업으로 살면 8식이 삼악도를 지어낸다.


또한 염불도 입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해야지 입만 염불하고 마음으로는 나쁜 생각을 한다면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오히려 악한 사람일지라도 참마음으로 염불하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3.부모불(父母佛)의 감응


머무름이 없는 열반인 무주열반에 드신 부천님은 인연중생을 건져 주시려고 가지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중음신의 윤회는 비록 업력 때문에 이루어지지만 중음신은 윤회할 생명으로 아기집 속에 들어가기 앞서 부모가 결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음행의 업에 물든 중생은 쉽게 생각이 뒤집혀 버린다. 이 일을 잠깐 뉘우쳐 보지만 그것은 이미 아기집 속에 든 뒤의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같은 중생을 제도하시려고 남녀가 끌어안고 있는 쌍신불의 모습을 나투신다.


부모불의 모습에 이끌려 들어와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바른 귀의를 이룬 중음신은 정토에 태어나게 된다. 이 같은 부모불의 모습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은 중유기에 들어간 중음신이 이 같은 모습을 보면 곧 다가가 정토에 왕생하라는 뜻이다.


부모불의 뜻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부모불에 사악한 느낌을 갖기 쉽다. 하지만 부모불이 사악하다고 한다면, 사람을 창조해 놓고 지어낸 사람이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나쁜 짓을 저지를 때 사정없이 벌을 내리는 창조신은 어떠한가.


부모불의 모습까지 나투며 끝까지 어린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부처님의 자비심은 참으로 끝이 없다 하겠다.


 

제7장 : 죽는 법과 죽는 이 보살펴 주기


1.죽기에 앞서  주의할 일들


l)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정신이 아직 맑을 때 스님을 모셔온다. 그래서 정토에 대한 믿음과 반드시 그 곳에 태어나겠다는 원을 일으켜 주고 기쁜 마음으로 염불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또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제지보살이 크나큰 빛살을 타고 오시어 정토로 이끌어 주시는 것 말고는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흔들림이 없도록 잘 일러주어야 한다.




2) 죽을 사람이 염불하기를 싫어하거나 괴로워 발버둥치거나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살려달라고 하는 것은 업장이 드러난 것으로 정토에 태어나는 길에 걸림돌이 된다.


이럴 때일수록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염불참회하거나 왕생주(往生呪)를 108번 지송하거나 『지장경』을 읽고 그 공덕을 죽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서 함께 염불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3)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더는 목숨을 이어가기가 어렵다고 판단될 때는 바로 가족들과 상의해서 빨리 병에서 집으로 데려간다.


죽은 사람이 조용하고 편안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염불하도록 해야 한다.



4) 죽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고 혹시나 당부할 일이 있는지 물어서 죽은 사람이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하거나 매달리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


당부하거나 정리할 일을 다 말하게 한 뒤로는 모든 세상인연을 다 놓아버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여 정토에 태어나 육도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5) 가족들은 죽는 사람의 곁에 모여 함께 염불한다. 불보살님께서 자비를 드리워 죽는 사람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길 정성스런 마음으로 기원해 주어야 한다.



6) 가족들이나 벗들은 절대로 죽는 사람의 마음이 약해질 만큼 지나치게 부드럽고 사랑스런 말을 건네거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죽는 사람이 가족에 끄달려서 바른 생각을 잃고 나쁜 길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목숨을 거둔 뒤에 주의할 일들



죽는 사람의 의식은 숨을 거둔 뒤에도 몸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 여전히 지각활동을 하고 있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12시간쯤 지나 죽는 사람의 온몸이 차갑게 식고 의식이 몸을 떠난 뒤에 비로소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12시간 안에는 모든 행동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여 죽은 이가 동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 좋은 방편으로는 죽은 이를 편한케 하여 바른 믿음을 내게 해준다.

스님이나 함께 염불할 수 있는 벗들을 불러 죽은 이의 상황에 따라 정토로 이끌어 준다.

염불할 때는 실제 상황에 따라 때에 맞게 이끌어 주고 왕생에 대한 믿음과 바람을 일깨워 준다.




2) 번갈아 가면서 염불한다.


가족이나 친척들이 경건하게 염불해 주는 것이 가장 좋다.


죽은 이의 신식(神識)이 염불하도록 이끌어 주고 아울러 염불 공덕을 죽은 이에게 돌려준다.



3)결코 죽은 이의 몸을 만지거나 흔들어서는 안 된다.


죽은 이의 몸을 바삐 씻거나 옷을 입히거나 영양제 주사바늘 같은 것을 뽑거나 하는 것은 죽은 이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괴로움을 주는 행동이다.


만일 어쩔 수 없이 죽은 이를 옮겨야 할 때는 반드시 큰 소리로 염불해야 한다.


끊임없이 주의해야 할 것은 모기, 파리, 개미 같은 벌레가 죽은 이의 얼굴이나 몸에 붙거나 기어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4) 소리 내어 울거나 죽은 이의 몸에 눈물을 떨러 트려서는 안 된다.


울음을 참을 수가 없거든 다른 곳에 가서 울고 가라앉으면 다시 돌아와 염불해준다.




5)시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


염불하는 곳에서 기침이나 하품, 재채기를 하거나 전화소리, 가족들이 의논하는 소리를 내서 염불하는 망자의 의식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




6) 세상 풍습에 따라 죽은 이에게 종이돈을 올리는 등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죽은 이에게 끄달리는 마음을 일으켜 정토에 태어나는 일을 방해  해서는 안 된다.


또 염불하는 방안의 공기를 더렵혀서 염불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7) 병원에서 목숨을 마친 이의 몸을 냉동처리 하거나 방부 처리를 해서는 안 된다.


냉동처리 하면 죽은 이에게 얼음 지옥에 빠진 것과 같은 괴로움을 준다.


송장이 썩을 까봐 걱정되면 좋은 향을 피우거나 얼음을 방안에 놓아두되 절대로 얼음을 송장위에 놓거나 너무 가까운 곳에 두어서는 안 된다.



8) 송장이 차갑게 식은 뒤에 두어 시간 지난 뒤에 목욕을 시켜주고 옷을 입힌다.


절대로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잘 아는 이나 경험 있는 이를 불러서 처리해야 한다.


만약 이런 사람이 없거든 가족들이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뼈마디가 굳었을 때에는 더운물에 적신 수건을 덮어 주면 저절로 펴진다.




9) 화장은 7일 뒤에 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에 하나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다치거나 병을 앓다 죽은 경우에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3.왜 염불해 주어야 하는가?




죽은 이가 정토에 태어나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염불해주는 이는 왕생정토에 대한 도리와 방법을 분명히 알아야 죽은 이를 도울 수 있다.


죽은 이에 따라 신식(神識)의 모습이 저마다 다르다. 숨길이 끊어져 죽으면 살아온 삶의 경향이 낱낱이 그림자처럼 나타나고 이것이 본성에 달라붙어 바깥 경계를 향해 설쳐댄다.


이때에는 완전히 업이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는데 힘이 큰 업일수록 곧바로 들어난다.


악업(惡業)을 많이 지은이는 악종자(惡種子)의 힘이 커서 이 씨앗의 기운이 들어나면 삼악도에 떨어진다. 선업(善業)을 많이 지은이는 善種子가 하늘 세계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살아 있을 때 염불공부를 한 이라면 염불 씨앗이 있기 마련이다.


이 염불 씨앗의 힘이 아주 커서 다른 씨보다 먼저 나타나면 불보살의 힘이 아주 커서 다른 씨보다 먼저 나타나면 불보살의 자비광명을 따라 정토에 태어난다.


그러나 염불씨앗의 힘이 적어서 잘 나타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이 곁에서 염불을 도와주면 죽은 이의 염불씨앗이 쉽게 나타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살아 있을 때 경전을 독송한 이, 만트라 수행을 한 이 가릴 것 없이 죽음에 다다르면 오직 ‘아미타불’이 염불씨앗이 나타나야 힘이 되고 빛이 되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4. 어떻게 죽는 이를 도울 수 있는가?


『지장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이가 죽은 날에는 산목숨을 죽이는 일 같은 나쁜 인연을 짓거나 신에게 기대는 행동을 하지 말라.


왜 그런가? 이 같은 행위가 털끝만큼도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쁜 인연만을 크고 깊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 이런 말씀도 있다.


“만약 죽은 지 49일 안에 널리 착한 일을 지어 모든 중생들이 나쁜 세계를 여위게 하고 하늘이나 사람으로 태어나 뛰어나고 묘한 기쁨을 얻게 해준다면 그 공덕이 끝이 없다.”


그러므로 죽은 이를 위해 49일 안에 복을 닦는 일이야 말로 죽은 이나 살아 있는 이에게 가장 뛰어난 공덕이요 이익 된다 하겠다.


아래 사항들은 49일 동안 지킬 일들이다.




1) 장례음식은 필히 나물을 써야 한다.


짐승을 죽여 재물로 쓰면 죽은 이에게 죄업을 더해 고통을 줄 뿐이다.


2)가족들은 49일 동안 최소한 나물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찾아온 손님들도 그렇게 맞아야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된다.



3)『관경』에 말씀하시길 “한 번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팔십억 겁의 악업이 사라진다.” 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죽은 이를 위해 가족들이 날마다 염불해 주는 일이야 말로 가장 절실하고 큰 공덕이며 저세상이나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



4) 사람이 죽은 지 49일 안에는 부부일지라도 잠자리를 해서는 안 되며 5계를 잘 지켜야 한다.



5)죽은 이가 모은 재산은 좋은 일에 잘 쓰고 그 공덕을 죽은 이 에게 돌려준다.



6) 스님이 죽은 이를 천도 해줄 때는 가족과 벗들을 불러 바른 생각을 세워 부지런히 수행할 수 있는 인연을 심어 주고 그 공덕을 죽은 이에게 돌려준다.



7) 가족들은 49일 동안 절에 가서 죽은 이를 천도해준다.

천도는 정성이 중요하지 천도재에 드리는 재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5. 장례지내는 법



1)스님이나 불교장례를 잘 아는 이를 불러서 할일들을 잘 처리 한다.


2) 장례는 간소하면서 엄숙하게 치루고 가족의 체면 때문에 돈을 허투루 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삼보(三寶)께 공양을 올리고 경전을 보시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갇힌 생명들을 놓아 주는 일을 해서 죽은 이게도 참된 도움이 되고 가족들에도 큰 복이 되게 해야 한다.


3) 화장을 하면 절이나 납골당에 잘 모신다.




6. 정토에 태어나는데 걸림돌이 되는 나쁜 습관들


염불수행자가 죽을 때 바른 생각이 뚜렷하다면 이는 정토에 태어나는 길을 얻은 셈이지만 살생하는 습관과 음행한 습관이 있다면 이는 왕생정토에 태어나는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죽이는 습관


경전 말씀에 “고기를 먹으면 좋은 공덕을 구해도 이룰 수 없고 모든 하늘신이 가까이 하지 않고 만나는 중생들이 무서워한다. 죽으면 나쁜 곳에 떨어져 큰 괴로움을 받는다.”고 하셨다. 이 말씀에 따르면 고기를 즐겨 먹는 이는 원한을 품고 죽은 중생들의 기운 때문에 하는 일이 뜻과 같이 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집안이 편안하고 몸이 건강하고 사업이 잘 풀리고 아이들이 효순하고 서로 화목하기를 아무리 바란들 이 같은 바람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온갖 번뇌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 속에서 길이 헤매게 된다.


염불수행자가 5계도 지키지 못하고 죽은 중생의 몸을 부끄럼도 없이 아귀처럼 먹는 다면 이미 자비심이 죽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름만 염불수행자요, 불교인으로써 짓는 일마다 마업(魔業)을 이루니 염불수행자는 참으로 이를 삼가 해야 한다.


고기를 먹어 생기는 좋지 않는 재앙은 죽을 때 낱낱이 나타난다.


원한을 품은 중생들이 끝없이 나타나 죽음을 맞는 염불행자에게 바른 생각을 잃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여 정토에 태어나지 못하고 삼악도에 떨어지게 한다.


삼악도에 떨어지면 부끄러움 없이 삼켰던 고기 한 점 한 점에 깃든 아픔과 원한을 다 갚아야 한다.


또 삼악도를 벗어나 사람으로 태어나도 목숨이 짧고 병이 많은 과보를 받게 되니, 세 치 혀끝으로 맛을 탐해 저지른 끝없는 재앙이 끝내 정토에 나는 일을 이룰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지혜 있는 이라면 고기 먹는 나쁜 습관을 결정 코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짐승의 알과 오신채는 염불수행자가 먹어서는 안 될 먹거리로, 마땅히 멀리해야 한다.


『현식론(顯識論)』에 이런 말이 있다.


“생명의 형태는 태(胎),란(卵),습(濕),화(化)네 가지가 있다. 알은 이 가운데 두 번째의 생명형태다. 알에는 미묘한 목숨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중생의 목숨이란 그 신령스럽고 묘하기가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알 하나를 먹는 일은 목숨 하나를 죽이는 일과 같다.


『능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삼매를 이루고자 하는 중생은 세상 사람들이 즐겨 먹는 오신채를 입에 대지도 말아야 한다. 오신채는 익혀 먹으면 음욕이 일어나고 날로 먹으면 성내는 기운이 커진다.”


이 말씀에 비춰보면 오신채에 들어 있는 정갈하지 못하고 탁한 기운은 사람의 욕심을 길러주고 오신채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는 사람의 성내는 마음을 키워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경에 말씀하시기를 “오신채를 먹는 이는 비록 경전을 막힘없이 말하더라도 시방세계 모든 하늘 신들이 그 냄새를 싫어해 다 멀리 떠나버린다.” 하셨다.


이와 같이 오신채가 주는 허물과 화는 음심과 화내는 마음을 키우는 일 말고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주는 호법 신장들이 멀리 떠나버리게 하여 날로 복덕이 줄어들고 깨달음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음행에 대한 생각과 음행습관




오늘날의 세상풍조를 보면 남녀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 절제할 줄을 모르고 한 몸뚱이의 즐거움만을 탐내 뱃속아이를 지우는 살생 업을 되풀이하고 자기 살붙이를 무참히 죽이고 있다.


호랑이나 독사도 자기 새끼는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은 이렇듯 멋대로 자기자식을 죽이니 죽은 아이들이 원한을 품지 않겠는가?


이 같은 나쁜 업과 그 인과를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이 같은 짓을 저지르고도 집안이 평안하고 식구가 화목하고 몸이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아들딸이 효순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모든 선은 효도를 으뜸으로 삼고 모든 악은 음욕을 머리로 삼는다.”는 말이 있다. 염불수행자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부부 사이라도 법도가 없이 애욕을 탐해서는 아니 되는데 삿된 음행이야 더구나 안 될 일이다. 음욕을 탐하거나 삿된 음행을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으로 그 과보가 빠르고도 무서워 화가 자손에까지 미친다.


『원각경』말씀에 “저 모든 세계 모든 중생의 모습인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은 다 음욕으로 몸과 마음을 받는다.”고 하셨고


『능엄경』말씀에 “저 모든 세계 육도중생이 마음에 음욕이 없으면 생사윤회를 따르지 않는다. 너희가 닦는 삼매는 본디 욕심과 번뇌를 벗어난 세계이니 음욕을 없애지 않으면 번뇌를 벗어날 길이 없다.”하셨다.


그러므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음욕과 음행 짓는 습관을 끊어 없애고 맑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음행하는 업과 음행하는 습관은 우리의 신식(神識)을 속박해서 해탈할 수 없게 하는 크나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음욕과 그것에 대한 생각을 말끔히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 중음에 태어나 남녀가 음행하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날 때 염불하는 바른 생각을 잃어 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음행하는 경지에 들어가 순식간에 사생육도를 맴도는 중생의 몸을 받아 윤회의 온갖 괴로움을 받게 된다.


다시 정리해 보자.


목숨을 죽이는 일과 음행하는 일은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다.


그것은 살아서 과보도 무섭거니와 죽어서는 정토에 태어나는 일을 가로막는 무거운 업장이 된다.


죽을 때 염불하는 바른 생각이 또렷하도록 하려면, 죽이고 음행하는 나쁜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죽여서 그 고기를 먹고 음행하고 사음하는 악업을 하루라도 빨리 끊어버리고


스스로의 삶과 죽음의 세계를 바르게 지켜보아야 한다.


계율을 잘 지키고 채소 음식을 먹으면 결정코 한때 쾌락에 눈이 멀어 끝없는 괴로움의 세계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 8장 : 한 번 보고 한 번 들어도 정토에 태어난다.


1.정토에 태어나게 하는 기회



(1)늘 공경히 염불수행을 닦는 이는 죽을 때 스스로 죽을 시간을 알 수 있고 마음이 뒤집히는 일이 없이 아미타부처님의 영접을 받아 잠깐 사이에 정토에 태어난다.

이들은 중음의 단계를 거치는 일 없이 바로 해탈세계에 이른다.


 다른 수행법으로 공부를 이룬 이나 스스로를 제도하는 법인 이 책을 익혀 공부한 이도 중음의 세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다.


(2)수행한 공력이 (1)만 못해도 이 책을 익혀 공부한 이는 죽어 나타나는 빛을 바르게 인식하는 힘으로 바로 위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또 아미타불을 놓치지 않고 부르는 바른 생각의 힘으로 정토에 태어나 해탈한다.


 (3)비록 공부가 보잘것없는 이라도 죽은 뒤 열나흘 동안 이 책에서 말하는 가르침을 보고 들어서 거룩한 빛을 잘 가려내어 그 속에 들어가거나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바로 해탈한다.


(4)착한 인연도 보잘것없고 업장이 깊고 무거워 한두 번 방황하다 나쁜 길에 들어선 중음신이라도 이 책에서 말한 가르침을 보고,  기억하고, 생각하여 가르침에 따라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부처님의 자비원력의 힘으로 극락정토에 태어나 바로 해탈한다.


(5)죽어 두렵고 무서움에 시달리는 이라도 이 책의 가르침을 보거나 듣고 아미타불을 부르면 바로 해탈한다. 또 이 책에서 가르치는, 아기집에 들어가지 않는 법과 아기집을 잘 가리는 법에 따르면 원하는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다.


(6)어리석기 말할 수 없는 이라도 아미타불의 큰 원과 가피의 힘을 믿고 따르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원만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바른 스승과 가르침을 만나 앞으로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 있다.



2.어떻게 이 가르침을 보고 듣고 해탈하는가?


(1) 죽으면 아는 힘이 살아있을 때보다 아홉 배가 밝아진다.


그래서 여러 가지 빛이 나타나거나 모습이 나타날 때 이 가르침을 기억하거나 보고 듣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거나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른다면 아미타부처님이 정토로 이끌어 주시어 육도윤회의 나고 죽는 괴롬바다를 벗어난다.


(2) 죽은 이가 중음신이 되면 거칠고 걸림이 많던 몸이 사라져 모든 것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감수성에서 한마음으로 지극하게 아미타불을 부르면 정토에 태어나 해탈할 수 있다.


(3) 거센 업의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중음신은 뛰어난 감각과 아는 힘이 있다.


그래서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걸림이 없어진다. 이 가르침을 일러주는 이의 부름을 한번만 들어도 곧바로 그곳에 가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 한번 가르침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마음이 열리고 뜻이 밝아져 마음 다해 아미타불을 부르게 되고, 그러면 정토에 태어나 해탈을 얻는다.


3.육도윤회를 벗어나는 법


 스스로 벗어나는 법


살았을 때 늘 이 책을 읽고 죽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마음에 새겨두자.


그러면 죽은 뒤에 무섭고 두려운 현상이 나타났을 때 살았을 때보다 아홉 배 뛰어난 기억력과 영상으로 가지가지 현상을 바르게 알아차릴 수 있다.

또 두려움 없이 한마음으로 염불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죽음의 길을 끊어버린다.


다른 이의 해탈을 도와주는 법


이 책에 나와 있는 중음세계의 여러 가지 단계를 잘 이해한 뒤에 죽은 이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을 베풀어 준다. 또 죽은 이가 가장 크게 매달리는 것, 큰 걱정거리에 대해 그것이 덧없고 이익이 없는 것들임을 가장 간단하고 알기 쉽게 차근차근 일러준다. 그리고 죽은 이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고 둘레상황에 대해 알려고 할 것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게 한다.


죽은 이는 이렇게 해서 눈부신 빛의 몸, 끝없는 빛의 몸인 아미타부처님을 따라 극락정토에 태어나 참된 해탈을 얻게 된다.



다른 이의 해탈을 도와주는 보기


 먼저 청정한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여 아미타불을 108번 부른 뒤 죽은 이에게 아미타부처님의 가피가 내리길 기원한다.


"ㅇㅇㅇ영가시여, 허둥대거나 방황하거나 두려워 하지마소서.ㅇㅇㅇ영가시여, 아미타불을 부르는 염불 소리와 지금 내가 영가에게 드리는 말에 크게 귀를 여소서. 영가는 이제 죽음에 이르러 떠도는 중음세계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오직 불보살님만이 영가를 도울 수 있으니 영가는 의심하지 말고 깊고 맑은 믿음을 일으키소서.


불꽃이 휘날리고 얼음바람이 휘몰아쳐도 한마음 한뜻으로 한결같이 아미타불만을 부르소서.


이렇게 하면 두려움과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면 악업에서 일어나는 두려운 현상들이 맑게 개입니다.

이렇게 하면 아미타부처님께서 영가를 품에 안아 정토에 태어나게 하십니다.


영가시여, 세상 그 어떤 것도 본디 덧없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과거. 현제. 미래. 그 어떤 일도 놓아버리고 한 순간 한 순간 아미타불을 부르소서. 누구도 영가를 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아미타불만이 영가의 빛이 되고 길이 될 수 있으니 맑은 맘 다 기울여 우리와 함께 아미타불을 부릅시다."


염불은 많이 할수록 좋다. 짧아도 108번 하고 그 공덕을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해 주면 영가는 반드시 극락정토에 태어날 것이다.  



제 9 장 :  염불은 한 생각에 해탈 하는 길


1.어떤 중생이라도 염불하면 해탈한다.


인광(印光:1862-1940.중국 정토종 13조)조사께서 쓰신 극락도<極樂圖>머리글 가운데는 정토법문을 높이 기리는 이런 말씀이 있다


"정토법문은 이 마음이 부처되고 이 마음이 부처임을 가르치는 법문이다. 선종에서 말하는 '바로 마음을 가리킴도, 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이룬다는 정토의 가르침만 못하다.


 깨달음을 이룬 모든 수행자들은 모두 이 드높은 가르침을 드날렸으니 정토법문은 위. 아래. 가운데 중에 모든 근기의 중생들을 함께 끌어안고 율종. 선종. 같은 여러 종파들을 다 아우르는 법문이다.


정토법문은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때맞춰 내리는 단비와 같고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는 큰 바다와 같다.


변(邊),원(圓),돈(頓)점(漸)의 모든 가르침이다 이 법문 가운데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을 한데 아울러 모두 참 진리를 얻게 하고 성인과 범부를 함께 이끌어 정토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구계(九界)가 모드 귀의하고 시방세계가 함께 찬탄하고 경전마다 이 가르침을 밝히고 논장마다 이 가르침을 펴니, 이는 가르침의 가르침이고 위없는 일승의 큰 빛이라 이를만하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말법시대 중생들에게 이 정토법문에 귀의해 해탈 하라고 가르치셨다.


관음, 세지, 문수, 보현, 같은 모든 위대한 보살들도 정토법문을 수행하고 아미타불을 염불해서 극락정토에 태어나 물러섬이 없는 땅에 이르러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라고 권하셨다.


2.염불법문에는 어떻게 한 생각에 부처를 이루는 힘이 있는가?


이런 힘의 뿌리는 아미타불의 48원의 알맹이인 "결정코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겠다(決定正覺願)".는 원력과 "열 번 아미타불을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게 하겠다(十念往生願)". 는 원력에 있다.


"결정코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는 원력이란 무엇인가?


극락정토에 태어난 이는 이미 지은 업장의 무겁고 가벼움에 가릴 것이 없이 한결같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겠다는 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토에 갈수 있는가?


아미타불을 부르면 그렇게 된다. "열 번 아미타불을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원력이란 무엇인가?


아미타부처님은 과거 원력 보살로 수행할 때 "내가 만약 성불하면 시방중생이 나의 국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고 내 이름을 열 번만 부르면 정토에 태어나게 하리라. 만약 한 중생이라도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깨달음을 이루지 않으리라,"는 원을 세우셨다.


시방중생이란 사람뿐만이 아니다. 중음세계의 중생이든 나아가 짐승, 아귀, 지옥중생 할 것 없이 신령하고 밝은 깨달음의 성품은 그대로이니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손에 이끌려 정토에 태어나 성불하고 만다.


더욱이 중음세계의 중생은 그 영성이 생전보다 아홉 배가 밝으니 이 같은 영성으로 지극하게 아미타불을 부르면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고 한 생각 사이에 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이룬다.



3.중음세계가 아무리 험해도 아미타불만을 부르면 벗어날 수 있는가?



성불하기에 가장 쉽고 빠른 길은 밝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중음신에게 보이는 온갖 밝은 빛, 기쁨과 성냄의 모습을 나투는 여러 성상과 나찰, 맹수, 우박 같은 현상은 모두 스스로의 의식이 바뀌어 나타난 모습이다.


살아 있을 때 중음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어서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경계를 만나면 그런 경계들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해 자성불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구제할 기회를 놓쳐 윤회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만다.


이와 같이 참으로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만약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구하면 문득 허망 된 의식의 흐름이 끊어지고 변화해 나타난 허망한 경계들이 사라진다.


아미타불은 결코 스스로 세우신 서원을 저버리시는 법이 없다. 부르는 소리를 따라 바로 오시고 이끌어 정토에 태어나게 하신다. 부르는 중생이 비록 삼천 대천 세계의 큰 불로 가득 찬 곳에 있다 하더라도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이 활활 타는 불꽃 바다를 뛰어넘어 정토에 태어나 바로 깨달음을 이룬다.



4.죄업이 깊고 무거운 중생도 아미타불을 부르면 구제될 수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에게 달렸다. 그대로 믿고 정토에 태어나기만을 바라고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른다면 틀림없이 구제될 수 있다.


<관무량수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중생이 오계. 팔계. 구족계. 같은 청정한 계율을 깨뜨리고 살면서도 참회하는 마음이 없다면 죽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죽어 지옥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대부분은 "이제는 영영 지옥을 피할 길이 없겠구나"하고 체념해 버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런 때라도 좋은 스승을 만나 광명이 끝없는 아미타불의 공덕과 서원을 찬탄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염불하면 팔십억 겁의 죄업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무서운 지옥불은 맑고 서늘한 바람이 되어 가지가지 하늘 꽃을 흔들고 그 꽃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부르는 중생을 맞아 주시니 한 생각에 극락정토의 연꽃 속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죄업이 무겁고 깊어 지옥, 아귀, 축생, 같은 삼악도에 떨어져 끝없는 괴로움을 받을 이라도 염불하는 한 생각 속에 팔십억 겁의 죄업을 없앨 수 있다.


그리하여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고 극락정토에 태어나, 길이 윤회의 바다를 건너 바로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니 지옥에 떨어질 중생이라도 죽어 지옥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한 생각에 깨달음을 이루게 됨이 결코 허망한 말이 아님을 뚜렷이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인과에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질 이가 어떻게 아미타불을 부르는 한 생각으로 무서운 인과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는가?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부르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뜻밖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인연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의 씨앗이 무르익어야 피어난다. 지옥불 앞에서 아미타불을 염불 하는 마음이야말로 무르익은 인연이요. 공덕의 끝이 아닌가.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님들은 한결같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염불하는 공덕은 금강을 먹는 것과 같아서 그 기운과 힘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팔만 겁 전에 길을 가던 나그네가 큰 호랑이를 만났다. 나그네는  너무 바쁜 나머지 "나무불(南無佛)"하고 외쳤다. 이한마디 염불 공덕으로 나그네는 팔만 겁이 지난 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아라한과를 이루었다.


염불수행자는 결코 염불공덕을 의심 하지 말고 나고 죽음을 생각하는 참 마음으로 용맹염불 해야 한다.


염불이야말로 금강식(金剛識)인 것이다.


5. 염불문은 늙은이에게나 맞는, 낮은 수행법이 아닌가?


정토법문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지혜 있고 공덕을 짓는 이의 말이 아니다.


왜 그런가.


정토법문을 믿고 수행할 수 있는 이는 수많은 생을 통해 수행 공덕을 쌓는 큰 지혜 인으로 낮은 근기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량수경>에 "이미 복과 지혜를 닦지 않은 이는 이 정토 법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 하셨고 또 "어떤 선남자 선 여인이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기쁜 마음을 일으켜 우러러 아미타불께 귀의하고 염불수행 한다면 이런 이는 작은 근기가 아님이라. 그런 사람은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제자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참으로 정토법문을 듣고 맑은 믿음으로 받들어 실천하는 이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지난 생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수행한 복덕과 지혜가 크고 깊은 이들로써 으뜸가는 부처님 제자인 것이다. 부처님조차도 찬탄하신 이 법문을 얕잡아 보는 일은 참으로 삼가고 삼가 할 일이다.


염불법문의 수승한 공덕은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도 잘 밝혀주고 있다. 더 깊이 공부해보려는 이는 <정토오부경>을 보면 된다.


<무량수경> 에서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의 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고 <아미타경>에서는 근기가 서로 다른 중생들이 염불수행으로 빠짐없이 구제를 받는 불가사의한 경계를 알 수 있다.


또<대세지보살염불원통장>과 <화엄경><보현보살행원품> 에서는 시방세계의 모든 큰 보살들이 깨달음의 과위에 올라서야 염불법문의 뛰어남을 알고 한마음으로 염불하고 부처를 이루어 모든 중생들에게 염불해서 극락정토에 태어나길 가르치심을 알 수 있다.


아. 우리가 지금 이같이 수승한 염불법문을 만나게 된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생에 이같이 으뜸가는 법문을 만났으니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간절한 원을 세우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정토에 태어나길 희망하자.


이생에 만난 이 귀중한 인연을 헛되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6. 이 시대에는 어떤 수행을 닦는 것이 가장 좋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대집경>  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법 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수행하나 깨달음을 이룬 이는 참으로 드물다. 염불수행만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말법시대에는 가르침도 많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가르침과 사람의 근기가 서로 맞지 않아서 깨달음을 얻은 이가 드물다.


염불법문을 수행하는 이만이 나고 죽음의 괴롬바다를 뛰어넘고 육도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부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빛 가운데 빛이시고 부처님 가운데 부처님이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앞서 말법중생들에게 해탈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정토법문을 남겨 주셨다. 불자라면 부처님이 일러주신 이 정토법문을 기쁘게 받아 지녀야 할 것이다.



7. 마(魔)는 수행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인데, 염불법문을 수행하면 마(魔)가 없을까?



<수능엄경 오십음마장)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다.


"여러 귀신의 무리들과 함께하는 말법시대에 이르면 천마(天魔),외도, 귀신, 요정 같은 기운들이 불길처럼 일어나 모든 수행자들을 괴롭힌다.


참선이나 밀법을 닦는 이가 계율을 지키지 않고 바른 견해가 없으면 바로 마군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 그러나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고 염불법문을 받아 지닌 이는 삿된 마군의 괴롭힘에 걸려들지 않는다."


왜 그런가?


<십왕생경>말씀을 보자.

"어떤 중생이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정토에 나기를 원하면 아미타불께서 스물다섯분의 큰 보살을 보내어 수행자를 보살펴. 가거나 앉거나 머물거나 눕거나 밤이거나 낮이거나 어떤 때 어떤 곳을 가림 없이 악귀나 악신이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또<아미타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경>을 받아 지니거나 여러 부처님의 이름을 들으면 이 선남자 선여인들은 모두 부처님들께서 보살펴 주시나니, 모두 물러섬이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듯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수행자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님들이 보살펴 주시사 언제나 40리에 뻗치는 밝은 빛 속에 있어 어떤 마(魔)도 가까이 할 수 없다.


염불법문이야말로 이 말법시대 중생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가장  근기에 맞는 수행법이자 생사해탈을 가장 완전하고 빠르게 이루어주는 성불의 문이다.


8.염불 수행자는 꼭 채식을 해야 하나?


<수능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육도에 윤회하는 중생이라도 마음에 죽이는 기운이 사라지면 더 이상 태어남과 죽음의 윤회를 따르지   않는다. 삼매를 닦아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죽이는 마음을 없애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고기가 맛이 있고 그래서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은 죽이는 마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는 마음을 없애려면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어떤 수행법으로 수행을 하든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은 태어남과 죽음의 윤회에서 해탈할 수 없다.


목숨을 죽이거나 그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이 죽음에 이르면 빚을 진 생명들이 나타나 바른 생각을 잃게 하여 정토에 태어나는 길에 큰 걸림돌이 된다.


염불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혼자 몸이 아니라 보이고 들리는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큰 자비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자비심이야말로 염불수행자의 생명이다. 그래서 염불수행자는 채식을 해야 하고 알이나 오신채도 먹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관무량수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맑은 업을 닦아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중생은 마땅히 다음과 같은 복덕을 쌓아야 한다.


첫 번째는 부모께 효도하고 스승께 헌신하고 자비심으로 목숨을 사랑하면서 열 가지 착한 업을 닦는 일이다. 두 번째는 삼보께 귀의하고 맑은 계율을 받아 지녀 자비행자의 위의를 잃지 않는 일이다. 이와 같이 맑은 업은 삼세 모든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이룬 씨앗이니 정토행자는 염불과 정업을 닦는 일을 치우침 없이 함께 닦아 나가야 한다.


<지장경>말씀에 "깊고 큰 업력은 해탈의 길을 막는 수미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고 하셨다. 비록 아미타부처님의 서원과 자비심이 끝이 없기는 하지만 죽음에 이르러 집착을 놓아 버리지 못하고 맑고 바른 생각으로 염불하지 못하는 중생은 제도해 줄 수 없다.


한편으로는 염불하고 한편으로는 죽이고 즐겨 고기를 먹다가 죽음에 이르러서 바른 생각을 잃어 버리면 길이 삼악도에 떨어지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이것은 스스로 지여 스스로 받는 과보이지 부처님의 자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고기가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다. 그래도 염불 수행이 아주 잘 된다 나는 채식에 집착 하지 않는다. " 이 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생명을 죽이는 기운이 살아있는 입으로 어떻게 염불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은 자비심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사바세계의 모습과 소리와 맛과 냄새와 느낌과 생각에서 해탈하여 저 맑은 나라인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수행자라면 어떻게 사바의 어두운 고기 씹는 버릇에 집착 하겠는가?


연지대사는 말했다


 "죽이고 그 고기를 즐겨 먹는 마음이여!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흉악하고 슬프고 독한 마음이 또 어디 있으리."


자비심은 모든 불보살의 생명이다. 자비의 세계인 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어떻게 고기 먹는 나쁜 업을 즐겨 쌓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고기를 즐겨 먹으면 오래 살지 못하고 병치레를 많이 하는 과보를 받게 된다. 병에 걸려 괴로울 때 바른 생각으로 염불 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은 "사람 몸을 잃어버리는 중생은 땅과 같은데 사람 몸을 잃지 않는 중생은 손톱 밑에 흙과 같다"고 말씀 하셨다.


슬프다. 맛에 집착하지 않는다며 즐겨 고기를 먹다가 사람 몸을 잃어버리고 삼악도에 떨어져 헤매는 중생이 수미산과도 같음이여! 참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능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생명을 죽이면 그 생명을 갚아 주어야 한다. 중생은 이 같은 인연의 고리 속에서 길이 나고 죽는다."


정토에 태어나길 발원하는 염불행자는 반드시 나고 죽음의 흐름을 끊어 버려야 한다. 목숨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어. 나고 죽음의 씨앗을 만드는 일은 염불행자가 할일이 아니다.


"보살은 그 씨앗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그 열매를 두려워한다"하셨다. 태어남과 죽음의 고리 속에서 벗어나려고 수행하는 수행자는 태어남과 죽음의 씨앗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의 씨앗이 바르지 못하면 바른 삶의 열매를 거둘 수 없다.


하련(夏蓮)거사는 이렇게 노래했다.


"슬프구나. 흐르는 과보의 물결이여. 흘러흘러 윤회의 바다에 넘치네. 아. 어디에서 왔는가. 하늘에 가득한 괴로움의 불길이여. 목숨을 죽이는 한 생각에서 왔네."


염불행자는 채식을 해야 하는가?이것은 따지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염불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바른 길이요.기쁜 길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다른 중생들도 싫어한다. 염불행자는 언제나 스스로의 삶을 비춰보고 잘 다스려 나가야 한다. 




 제10장 : 나고 죽음을 벗어나는 빈틈없는 해탈공부




어렵고 어려운 일은

죽음뿐

모든 것이 사라 질 때

죽음이 올 때

그대여,

죽음을 죽음이라고 알아서

그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가?

나고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그대는 공부를

해 두었는가?


『화엄경』<보현행원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 모든 감각은 다 흩어져버리고 가족도 이웃도 다 떠나버린다. 명예도 위엄도 재물도 다 사라진다. 따르던 이들도 헐뜯던 이들도 함께 갈 수 없는 죽음의 길에 오직 함께하는 것은 정토를 그리던 이 마음뿐. 자나 깨나 아미타불을 그리던 마음의 빛이 죽음의 길을 환하게 비추어 한 순간에 정토에 태어나게 하리라.


정토에 태어나면 아미타불,문수보살,보현보살,관세음보살,미륵보살 같은 수많은 보살님께 에워싸여 연꽃 속에 태어나며 부처님께 수기를 받으리라.


죽으면 가장 아끼던 몸이며, 눈, 귀, 코, 혀, 같은 모든 감각기관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다시는 쓸 수 없게 된다. 그뿐인가.

사랑하던 가족과 이웃들도 영영 헤어지게 되고 피땀 흘려 모은 재산도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부리던 이라도 숨길 한번 끊어지면 한 사람도 뜻대로 부릴 수 없다. 이 같은 죽음을 맞이하여 창자를 끊는 듯한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중음의 세계는 친척도 없고, 벗도 없고 기댈 사람도 없다. 시커먼 어둠의 두려움 속에는 살려달라고 부를 이름도 모습도 없어 지은 업대로 곤두박질치며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살아 있을 때 가족이나 이웃이 이런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힘이 될 수 있을까.나아가 우리는 스스로 이 같은 중음의 고통 속에 빠져있을 때를 대비해 지금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나고 죽음만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삶의 문제를 깔끔히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삶의 온갖 현상은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음을 깨달아 욕심과 애착을 놓아버려야 한다.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아미타불을 그리는 마음을 키워나가고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원을 닦으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해야 한다.


이렇게 힘써 수행한 이는 죽음에 이르러 한꺼번에 온갖 세상 인연들이 사라질 때 불보살님의 가피의 빛살이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정토로 이끌어 주신다.


그리하여 한 순간에 극락정토의 연화 속에 태어나 아미타불님의 수기를 받고 자기가 성불할 때와 나라와 이름을 밝게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뛰어나고 시원한 일인가! 이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이는 죽음을 뛰어넘어 번뇌의 굴레를 벗어나서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나아가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들까지도 인연 따라 구제하게 될 것이니 어찌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을 윤회의 깊은 강에서 건지지 못할까 걱정할 것인가.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도 이 정토의 맑은 가르침을 따른 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해 보기가 어려운 모든 근심과 집착을 놓아 버리게 된다.


또 정토의 부신 빛살에 눈이 뜨여 한마음 한뜻으로 정토에 태어나길 소원하게 되나니, 다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게 되더라도 끝내 정토를 향한 큰 소망을 남김없이 어느 생엔가는 이루게 된다.


사람 몸을 받고서도 정토의 길 안 닦으면

보배산에 들어가서 빈손으로 나옴과 같도다.   




제11장 : 돌고 도는 생명의 수레바퀴


-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 -


1. 육도 중생을 위한 기도


티벳 불자들은 새해 초에 오체투지의 성지순례를 한다. 온몸을 땅 위에 던지면서 그 사람들이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는 자기의 소원이나 집안의 행복이 아니다. 조국 티벳의 독립도 아니다


티벳 불자들은 여섯 갈래의 존재계에 윤회하는 중생들이 모두가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기를 축원한다. 그 사람들은 윤회하는 세계 속에서 얻는 행복과 권력과 재산 같은 것은 모두 참된 것이 아니고 괴로움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삶의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은 삼보에 귀의하여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공덕을 쌓고 깨달음을 얻는 데 있다고 본다.



2. 마음속의 세 마리 짐승, 세 가지 독


티벳의 절 어귀마다 그려놓은 벽화가 있는데.


“생명의 수레바퀴”라고 일컫는 이 그림은 욕심, 성냄, 어리석음 의 세 가지 독으로 선업과 악업을 쌓고 그 결과 끝없이 여섯 갈래를 윤회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맨 가운데 동그라미를 보면 세 마리 짐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시계바늘 가는 쪽으로 돌고 있다.


수탉은 뽐내기를 좋아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중생의 탐냄과 애욕을 나타내고, 독뱀은 미움과 샘냄처럼 다른 이를 해치려고 하는 원한과 분노를, 돼지는 고통의 원인과 소멸에 이르는 법(사성제)과 삼세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같은 진리를 모르고 망상과 모든 번뇌의 뿌리인 어리석음을 뜻한다.


바로 이 세 마리 짐승이 사람의 마음속에 살면서 여섯 갈래를 떠돌아 괴로움을 겪게 하는 뿌리가 된다. 그러니 괴로움과 두려움이 끝이 없는 윤회를 벗어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원인을 없애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 세 마리 짐승을(탐심, 화내는 마음, 어리석음의 삼독) 원수처럼 여기고 잘 다스려야 한다. 두 번째 동그라미 오른쪽은 세 마리 짐승의 힘에 끌려 다니면서 어둠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림인데 이 세계는 나쁜 업과 나쁜 인연으로 맺어진 검은 업의 세계다.


동그라미 왼쪽 그림은 선지식을 만나 육도윤회의 괴로움을 깨닫고 아미타불의 원력과 가피력으로 윤회세계에서 벗어나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내용이다.


그림 오른쪽 위 그림은 석가모니께서, 괴로움을 겪는 중생들이 해탈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여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태어나도록, 오른쪽을 들어 해탈의 바른 길을 가르치고 계시는 내용이다.


왼쪽 윗 그림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이다.


죽을 때 바른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아미타불의 은빛광명의 길을 타고 곧바로 극락정토에 태어남을 보여 준다.


3. 여섯 갈래의 중생세계, 육도윤회


그림 가운데 있는 여섯 개 그림은 여섯 갈래의 윤회 세계를 뜻한다.

위쪽에는 계율을 지키고 공덕을 쌓아 태어나는 천상세계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사람 세계가 있다. 그 아래에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욕심을 부리다가 떨어지는 굶은 아귀의 비참한 세계가 있다.


맨 아래 가장 큰 그림은 지옥세계의 여러 가지 괴로운 모습이다.


지옥 왼쪽에는 네 발 달린 짐승과 물고기, 새 같은 축생들의 세계가 있고, 그 위에는 질투와 싸움의 업보로 태어나는 아수라 세계가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뿐 아니라 우주법계의 모든 생명들은 스스로 지은 선악의 업보에 따라 여섯 갈래의 세계에 끝없이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육도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데는 두 가지 큰 길이 있다.


첫째는 자기 수행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는 원인을 없애 열반에 이르는 성도해탈문(成道解脫門) 자력(自力)수행이고


둘째는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여 육도윤회에서 바로 벗어나는 왕생정토문(往生淨土門) 이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현실세계에서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윤회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해주는 일을 으뜸으로 한다.


꿈속에서 착한 일을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꿈을 깨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직 해탈하지 못한 중생이 꿈에서 깨어나는 12가지 법칙이 있는데 이것을 12연기(緣起)라 한다. 12 인연법을 또렷이 깨달아야 자기만 알고 자기만 고집하는 그릇됨에서 벗어나 나만을 내세우지 않고(무아) 자기 것만을 고집하지 않는(무소유) 해탈 세계에 이르러 고해를 벗어 날 수 있다.



4. 열두 가지 인연법칙(12연기)


육도윤회의 여섯 개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열두 개의 그림은 12 연기법을 그린 것이다


시계바늘 도는 쪽으로 첫 번째 그림은 어리석음인 ‘무명(無明)을 뜻한다. 눈 먼 늙은이 그림은 빛이 없는 어둠의 상태, 삼세인과와 사성제 같은 진리의 가르침에 어두워 사물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처음의 한 생각을 나타낸다.


두 번째 그림은 행위를 뜻하는 ‘행(行)’을 나타낸다.


짐을 나르는 사람 그림은 업보가 만들어짐, 곧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집착하는 대상을 실제화 하는 현선작용이다.


세 번째 그림은 분별작용인 ‘식(識)’을 나타낸다. 나무 위의 원숭이 그림은 개체가 만들어지면 자기를 가운데 두고 분별작용을 계속하는 인식이 생겨남을 뜻한다.


네 번째 그림은 정신과 물질이 하나로 맞붙는 ‘명색(名色)을 나타낸다.


나룻배에 두 사람이 타고 있는 그림은 정신적인 명(名)과 물질적인 색(色)이 결합하는 것을 뜻하는데, 명색(名色)은 식(識)을 인연으로 생긴다.


다섯 번째 그림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입(六入)’을 나타낸다.


창문이 여섯 개 달린 집 그림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뜻하는데 위의 名과 색(色)이 결합하면 이 감각기관이 생긴다.


여섯 번째 그림은 감촉기관인 촉(觸)을 나타낸다.


다정한 여자와 남자 그림은 감각기관이 경계를 만나 느끼는 감촉작용을 상징한다.


일곱 번째 그림은 느낌작용인 ‘수(受)’를 나타낸다. 눈에 화살 맞는 사람 그림은 느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즐거움과 괴로움 등 모든 느낌을 뜻한다.


여덟 번째 그림은 이성을 그리는 감정인 ‘애(愛)를 나타낸다.


술 취한 사람을 여자가 시중들고 있는 그림은 즐거운 느낌에 따라 즐거움의 대상을 끝없이 갈구하는 눈 먼 욕망을 상징한다.


아홉 번째 그림은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인 ‘취(取)’를 나타낸다.


과일 따는 사람 그림은 욕망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바라는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마음의 작용을 뜻한다.


열 번째 와 열한 번째 그림은 나고 죽음을 되풀이 하는 존재가 만들어 지는 ‘유(有)’로 말미암아 생명이 탄생함을 나타낸다.


열두 번째 그림은 삶의 여러 가지 괴로움, 노사우비고뇌(老死優悲苦惱)’이다


송장 나르는 사람 그림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삶의 갖가지 괴로움과 슬픔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12연기법은 모든 현상이 서로 관련되어 존재하고 인연 따라 일어난다는 인연(因緣生起)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사상을 뒷받침해 주는 이론이다.


12연기설은, 중생들이 업력에 따라 삼세에 걸쳐 끝없이 나고 죽음을 되풀이 하는 과정을 사실에 뿌리를 두고 12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 관찰하는 법이다.


모든 괴로움과 불행의 원인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12 연기의 가르침이다.


불행한 사람은 어리석은 값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대품반야경』에 

“사람의 큰 죄는 어리석음이다. 불행과 괴로움은 어리석음의 갚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여 진리의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참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모든죄업 참회하고 나쁜습관 바꾸어서

이몸이제 맑고맑은 보살의길 닦으리라

아침이슬 우리인생 모든슬픔 사라져라

사람의삶 뜻이없다 어느누가 말했던가

비우고또 맑히는일 우리행복 아니던가


      南  無  阿  彌  陀  佛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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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하라,

그렇게 하면 부처님의 수호를 언제든 받으리라

 - 대방광불 화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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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0월 14일(월) 서울 명동부근 로얄호텔 2층 에머랄드 실에서는 세계 최초로 물 빙결(氷結) 결정(結晶) 사진집 『물로부터의 메시지』 을 발간하여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일본의 파동 연구가 에모또 마사루(江本 勝) 박사의 내한(來韓)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에모또씨는 파동연구를 15년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물이 사람의 의식을 반영한다는 것을 알 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의 물빙결 결정 사진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그의 연구의 결론은 말씀드리면 에너지란 진동(振動, vibration)으로 나타나게 되며 진동이 없어지면 생명력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생명(生命)이란 글자를 나누어 보면 ‘명’(命)이란 글자 안에는 두드릴 ‘고’(叩)자가 들어가 있는데 두드린다는 것은 바로 진동을 의미하며 이는 다른 말로는 파동(波動)입니다.생명은 한마디로 파동이라고 설명하고 있죠 

 

  그리고, 그는 모든 에너지의 근본은 물[水]이며 물은 인간의 의식을 반영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에너지가 있는데, 이는 주는 쪽과 받는 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감사, 불↔물, 태양↔ 달, 산소↔수소’ 등입니다(바로 음양을 나타내죠)물의 결정사진은 물이 얼어서 결정이 되었다가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물로 돌아가기 직전의 어느 한 순간, -5°C에서 0°C사이에서 결정을 추출하여 사진을 찍습니다.

 

 

                   <보통의 물>
  물은 한문(漢文)의 水자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의 결정 사진 촬영시 어떤 물도 이와 같은 상태를 거쳐서 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한문 글자를 만든 우리 옛 성인들의 통찰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영국 런던 수돗물>
  건강한 물의 상징인 아름다운 6각형의 결정은 찾아 볼 수가 없네요. 한국의 수돗물이 이와 비슷하다고 하는 군요.

            <미국 뉴욕 수돗물>
 보통 불소를 첨가하고 오존으로 처리한다고 합니다. 저자는 내한 강연회 때 뉴욕 수돗물이 다른 도시와는 달리 삼나무 통에서 보존되다 각 가정으로 배수된다는 설명을 하며 그래서 6각형의 결정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벤쿠버 수돗물>
아마도 오염이 덜 된 원수(原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을 하네요 ^

 

사람의 마음은 소리에 즉각 반응한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 부산해지고 불안해 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물은 음악을 듣고 어떻게 반응 할까요? 물은 음악에도 반응했습니다.

      <쇼팽의 Raindrops빗방울>
  물도 사람의 마음처럼 음악에 즉각 대응했습니다. 잘 보세요. 큰 결정 좌측 위로 또 하나의 작은 결정이 보이지요.마치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지 않으세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물의 결정이 마치 아름다운 발레리나가 늘씬한 다리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연상되지 않으세요?

 

  다음의 결정 사진은 누구나가 좋아하는 비발디의 사계를 들려주었을 때 물 결정 사진입니다. 사계’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대표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네편의 시에 의거해서 4계절의 분위기와 색채를 즐겁고도 섬세하게 표현해낸 표제음악의 걸작이죠. 비발디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과 그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묘사하려고 했답니다. 네 곡은 짧은 곡들이기는 하지만 내용 면에서 아주 뛰어나며 비발디의 아름다운 시정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봄>

                       <여름>
 분열하는 여름 이미지가 느껴지죠?

                    <가을>
 새로운 생명을 간직하는 듯이 6각형 결정 안에 또 하나의 작은 결정이 보입니다.

                    <겨울>
가만히 움츠려 성숙하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물은 이렇게 서로 다른 반응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물은 인간의 의식을 반영한다고 할까요, 아니면 물에도 의식이 있다고 할까요? 분명한 것은 ‘물은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말과 의식에도 반응을 할까요? 다음의 사진을 보면 그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물에 문자를 보여 주었을 때 물은 어떠할까요? 물에 여러 글을 보여준 후 결정사진을 찍은 사진입니다. 물은 신비하게도 문자에도 반응했습니다.  

<중국어 ‘감사합니다’(多謝)>

         <타갈로그어 ‘감사합니다’>

      <말레이시아어 ‘감사합니다’>

<권유형 ‘합시다’ >

  물은 아름다운 6각형의 결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라는 우리말 속담이 있지요. 물도 그렇게 상대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령형 ‘해라’>
  
6각형의 아름다운 결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습니다. 물이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 같군요. 같은 값이면 부드럽고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물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를 죽이겠다’라는  글자>
보세요. 마치 복면을 쓴 어떤 사람이 좀 더 작은 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고 죽이기라도 하듯 주먹질을 하는 것 같지 않나요? 물이 살기(殺氣)를 띄고 있다고 할까요? 이렇게 살기 받은 물을 마시면 상대방은 어떻게 될까요? 말은 그대로 에너지가 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

          <'악마'라는 글자>

<'천사'라는 글자 >

 악마(惡魔)’라는 문자를 보여주었을 때 큰 대조를 보이고 있지요?   ‘천사’는 아름다운 보석의 모습이고 ‘악마’는 무언가 추한 모습이네요

 

 

MBC뉴스데스크 보도자료 보기 ☞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9373350

 

 

 

기도는 물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물을 앞에 놓고 강력한 기도를 하면 그 물은 어떻게 바뀔까요? 상생의 마음으로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그 물에는 상생의 기운과 치유에너지가 충만해 집니다

물결정모양이 아주 선명하고 예쁘죠?

 

인간의 마음에 응답하는 물의 신비


인간의 인체(人體)는 70~8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물이 각종 소리, 문자, 생각에 반응하는 것을
밝혀준 책이 일본에서 발행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파동 연구가인 '에모또 마사루'가 물의 '동결결정사진'을 모아 발간한
『물로부터의 전언』이 그것이다.



에모또 마사루 지음
(1999년 6월 발행 파동출판사)

에모또의 물에 대한 연구는

미국의 물 연구가 Lee H.Lorenzen박사의 '육각수'
역시 Lee박사가 소개한 '공명자장분석기',
이 두가지를 접목시키는 데서 비롯한다.

에모또에 의하면 좋은 물, 나쁜 물,
즉 물에 대한 올바른 정보는 눈으로는 쉽게 알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그는 여러가지 물을 얼려서 결정사진을 잡는데 성공하여
가시화함으로써 '물의 얼굴'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에모또는

'결정사진을 볼 때는 6각형이 뚜렷한 결정구조
를 이루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촬영을 위해 결정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몇천번이나 보아왔다.
그렇게 하다보니 신기하게도 물에
생명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본래 물은 '좋은 물이 되자! 좋은 물이 되고 싶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전하려고 하고 있다'

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물의 결정사진 뿐만 아니라,
물에다 음악을 들려주거나 기도를 보내거나 글자를 보여주는 등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물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고자 하였다.


水라고 하는 文字는…


물의 결정사진 촬영시에는 어떤물도
옆의 사진과 같은 상태를 일단 거쳐서 물로 돌아갑니다.

물이 얼어서 결정이 되었다가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물로 돌아가기 직전의 어느 한순간,

-5℃에서 0℃사이에 있어서,
'水'라는 한자와 똑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옛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서 '水'라는 글자를 만들었을까요.



바하의 '골드베르그의 변주곡'을 들려 주었을 때의 물의 결정체



이 곡은 바하가 신세졌던 골드베르그님을 위하여
감사의 뜻을 담아서 바친 곡이라고 합니다.

기본이 되는 정제수와 비교하면
6각형이 생기고 있는 모습을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성장을 촉진한다고 한다면
좀 철학적이지요.



쇼팽의 '이별곡'을 들려 주었을 때의 물의 결정체


유명한 피아노 곡으로
멜로디를 들으면 누구나 다 알 만한 친숙한 곡입니다.

그리고 연구팀이 이 결정사진을 얻었을 때만큼
깜짝 놀란 적도 없었습니다.

'이별곡'이기 때문일까,
기본적인 6각의 결정체에서 멋지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야말로 잘게 쪼개어졌군요.
현미경의 배율은 같았는데도 말입니다.



한국민요 '아리랑'을 들려 주었을 때의 물의 결정체



아시다시피 한국의 민요입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헤어져 가는 연인끼리의 이별가.

떠나는 남자를
뒤에서 전송하는 여인이
애절하게 가슴 앓이를 하고 있는 것과 흡사한 결정이지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들려 주었을 때의 물의 결정체



결정은 매우 아름답고
잘 균형잡힌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골든베르그'변주곡을 들려주었을 때
나타난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너는 나를 괴롭게 해. 죽여버리겠어'를 들려 주었을 때의 물의 결정체


이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는 말들이다.

이러한 단어들에 물을 노출시키자 물은 이내
우리가 예상했던 그대로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정은 추하게 왜곡되어 이그러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명백하게 '너는 나를 괴롭게 해. 죽여버리겠어'의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폭력적 언어들이 마구 횡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하여 뭔가 해야하는 때가 다가왔다.



Healing음악, 'Hado'를 들려 주었을 때의 물의 결정체


이 음악은 아픔을 진정시키고
몸의 면역기능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사진은 특별한 기술을 구사하며 제작된
미국의 치유음악 CD를 들려준 결정체입니다.

가지 부분이 힘차게 쑥쑥 뻗어 있어 마치 영양가가 높은
식용 버섯처럼 아름다운 결정사진입니다.

실제로 이 곡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생리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Heavy Metal'의 곡을 들려주었을 때의 물의 결정체


이 노래의 가사 내용은 노여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을 매도하고 있는 듯한 곡입니다.

기본적인 6각구조의 결정체가
보기 좋게 산산조각이 나 있습니다.


이 곡조에 대해서
물은 뚜렷이 부정적인 반응을 모이고 있습니다.

꼭 Heavy Metal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가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500명의 사랑의 기운과 혼을 받아 응답하는 물


일본 전국에 있는 500명의 파동 Instructors
(내가 주최하는 파동학의 졸업생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1997년 2월 2일 오후 2시,
사무실의 나의 탁자 위에
동경 시나가와의 수돗물을 담은 컵을 얹어 놓았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의 상념(想念)을 발신(發信)하여 주세요.

물론 이 물이 좋은 물이 될 수 있게
'물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소원을 담아서,
각지에서 동시적으로
'사랑의 기운과 혼(魂)을 보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전국 각지에서
'사랑의 기운과 혼'을 보내온 결과로 얻은 결정사진이 바로 이 사진입니다.
물론 물리적인 작용은 조금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훌륭한 결정을 얻게 된 것에 대해서,
촬영반 일동은 감동을 넘어서 눈물이 솟는 것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본래의 물(시나가와의 수돗물)-실험 전의 촬영

평범한 수돗물이 500명 사랑의 기운과 혼을 받아
위의 결정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물에 문자를 보여주다


물에 음악을 들려준 것에 대해
물은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물에게 문자를 보여준다면…'
이라고 하는 문제에 접근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손으로 쓴 글자가 아닌 워드프로세서로 친
일정한 문자를 병에 붙여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물은
문자에 대해서는 분명한 응답을 보여주었습니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실험자에게 미리 사전정보를 주지 않고 실험하거나,
실험자를 바꿔보아도 같은 반응이 나왔습니다.


하루 밤 동안 병에 붙여두었던 '바보자식'이란 문자를 보고 있었던 물의 사진입니다.
'어떤 헤비메탈 곡'을 들려주었던 물의 사진과 매우 닮았습니다.

또 같은 뜻을 갖는 영어의 'You Fool'도 붙여 실험해 보았습니다.
결과는 같았습니다.



'사랑.감사'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물의 결정체


수없이 많은 결정사진을 촬영해 왔습니다만,
이 사진만큼 아름다운 결정을 본 적은 없습니다.

역시 이 세상에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능가하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만으로

몸의 둘레에 있는 물 또는 몸안에 있는 물
이와 같이 변화하여 준다면…….


물의 '동결결정사진'이란 얼린 물을 현미경에 놓고
첨단장비를 동원하여 초특수상황의 한 순간에 촬영하여 얻어진 6각구조의 사진이라고 한다.

물의 결정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시료용 물 한 방울을 실험용 접시에 떨어뜨린 후 냉동실에 2시간 동안 보관한다.
그 결빙상태에서 물 결정을 추출하여 현미경으로 200~500배의 배율로 촬영한다.

한번만 찍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조건에서 가능하면 많이 촬영한다.
찍을 때마다 물의 결정이 조금씩은 달라지지만,
시료에 따라 격자(grid) 또는 판상(laminar)결정구조 등의 뚜렷한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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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다’는 말을 들은 밥은 향기가 좋다

 

 

과학부 기자

▲ 왼쪽:감사하다 / 오른쪽:망할자식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는 물 결정에 관한 실험 이후에 또 다른 실험을 하였다.


그 대상은 밥이었다. 밥을 똑같은 두 유리병 속에 넣었다. 그런 다음에 한 유리병에는 ‘감사하다’ 라는 글귀를 붙이고  다른 유리병에는 ‘망할 자식’ 이라는 글을 써서 붙여 놓았다.

날마다 두 초등학생에게 그 글귀를 각각 병에 대고 읽게 하였다.
‘감사하다’ 가 붙어있는 유리병을 향하여서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망할 자식’이 붙어 있는 병에 대하여는 망할 자식이라고 말하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 달을 지속하고 보니 ‘감사하다’는 말을 들은 밥은
발효되어 향기로운 누룩 냄새가 났다. 그러나 ‘망할 자식’ 이라는 말을 들은 밥은 부패해서 검은 색으로 변하였으며 악취를 풍겼다.

실험 보고서에서 “이번 실험을 통해서 단지 물만이 이런 정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생물도 외부 정보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좋은 정보로 인하여 미생물이 사람에게 유익한 발효작용을 할 수 있고,
악의적인 정보는 사람에게 유해한 부패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유효미생물을 연구하는 일본의 히가 데루오는 말하기를,
“사실 미생물 세계에서 나쁜 균과 좋은 균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대부분의 균은 무해하고 기회주의적인 균이다.


이런 균은 나쁜 균과 좋은 균의 세력을 살피다가 강한 쪽으로 붙는다.” 라고 하였다.
이 사실은 외부의 정보에 따라 밥이 발효하는가
부패하는가를 결정한다는 마사루의 실험결과와 일치하고 있다.

글과 생각이 하나의 정보에너지로 작용하여 미생물에게 영향을 준다는 위 실험결과는
여러 가지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미생물이 그러하다면 다른 일반 세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수히 많은 세포로 구성되어있는 인간의 경우,
이들 각각의 세포가 외부 정보에너지에 이와 같이 반응한다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바로 건강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명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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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도 칭찬 받아야 `쑥쑥'

(철원=연합뉴스)

 

이해용 기자 = "칭찬은 `양파'도 춤추게 한다"
 
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 최전방지역의 한 군부대가 내무반에서 양파를 키우며 칭찬의 효과를 살펴보는 이색 실험을 진행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육군 3사단 포병연대는 작년 12월 2일부터 각 내부반별로 한 쌍의 양파를 똑 같은 장소에 놓고 병영생활에서 칭찬과 폭언, 사랑과 미움이 생물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기 시작했다.이에 장병들은 한쪽의 양파에게는 좋은 말과 관심을 표시하고 다른 양파는 병영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해소할 겸 욕설과 폭언을 3개월째 퍼붓고 있다.
 
또 칭찬을 해주는 양파는 마치 애완견을 다루듯이 잎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거나 정성스럽게 물을 갈아주었으며 욕설을 하는 대조군 양파는 손가락으로 슬쩍 찌르는 행동을 병행했다. 이 결과 장병들의 사랑과 칭찬을 받는 양파는 뿌리를 빨리 내리고 풍성하게 성장한 반면 폭언을 들은 양파는 덜 자라거나 가늘고 심지어 구불어지는 상태를 보이고 있다.
 
병사들은 이 같은 `사랑의 양파 키우기'를 통해 칭찬과 배려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하게 됐으며 이를 통해 상대방의 장점을 칭찬하는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정성운(24) 병장은 "칭찬을 받으면 잘 자라는 양파와 폭언으로 점점 죽어가는 양파를 보면서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면서 "나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부대 관계자는 "병사들의 폭언과 욕설이 생물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자는 연대장의 제안으로 실험을 시작했다"면서 "칭찬받는 양파는 건강하게 성장하는 반면 욕설과 스트레스를 받은 양파는 성장이 느리거나 시들시들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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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보살님 게송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항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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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은 운명을 좌우 한다

 

일본 관상가 미즈노 남보쿠水野南北

 

 


                       (가난하지 않으면 일찍 죽을 상이라 합니다.)


미즈노 남보쿠(水野南北, 1757~?) 그는 우리나라에는 ‘절제의 성공학’이라는 책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관상가(觀相家)입니다. 그의 관상 저서들은 한국에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남북상법(南北相法) 10권, 신상전편정리해(神相全篇精理解), 연산상법이해(燕山相法理解), 상법대역변론기린(相法對易弁論麒麟)의 책, 봉황지권(鳳凰之卷), 초목전(草木傳), 남북상법수신록(南北相法修身錄), 군신제후전(君臣諸侯傳) 등이 있습니다.


그가 유명한 이유는 관상을 배우기 위해서는 때밀이, 장의사 등등을 다 거쳐야 한다는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그의 중요이론 중 ‘天糧論’(천량론이란 태어나면서 평생 먹을 양식을 하늘이 내려주는데 그 양식을 다 소비하면 죽는다는 운명법칙) 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절제의 성공학 서문’에 있는 글과 인터넷에 있는 미즈노 남보쿠의 글들 정리해 보았습니다.( 문기자 주.)

 

일본의 관상가(觀相家) 미즈노 남보쿠(水野南北, 1757~?)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대장장이를 하던 작은 아버지 밑에서 키워졌습니다. 10세 때부터 술을 배우고, 도박을 일삼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을 일으키다가 결국 18세 되던 해에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반 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남보쿠는 밖에서 보아왔던 사람들과 감옥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꽤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감옥에서 죄인들의 모습을 관찰하던 남보쿠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의 운명을 알기 위해 관상가를 찾아갔습니다.


“1년안에 칼에 맞아 죽을 관상이니, 이 길로 속히 절에 가서 출가하기를 청하시오.”

 이 말을 들은 남보쿠는 그 길로 가까운 절에 가서 출가를 청했으나, 절의 주지 스님은 “중이 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오. 앞으로 1년 동안 보리와 흰콩으로만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오면 그때 받아주겠소”라며 거절했습니다.

 남보쿠는 바닷가에서 짐꾼으로 힘들게 일하면서도 살기 위해 보리와 흰콩만을 먹고, 술도 끊고 버티었습니다. 어울리는 무리들이 난폭하여 종종 싸움이 일어났지만, 작은 상처만 입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1년을 무사히 넘기고 출가하기 위해 절로 향하던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던 관상가에게 찾아갔습니다. 남보쿠를 알아본 관상가는 크게 놀라며 물었습니다.

“완전히 관상이 바뀌었군요. 어디서 큰 덕을 쌓았소, 아니면 사람의 목숨을 구했소?”

“생명을 구한 일은 없지만, 스님의 말씀 따라 보리와 흰콩만 먹고 1년을 살았습니다.”

식사를 절제한 것이 큰 음덕을 쌓았구려. 그것이 당신을 구했소!”

관상가에게 요절할 운명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남보쿠는 출가보다는 관상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머리 만지는 사람의 제자가 되어 3년간 사람의 얼굴 모양을 연구했습니다. 그 다음 3년은 목욕탕에서 일하며 사람의 벗은 모습을 관찰했고, 마지막 3년간은 화장터의 인부로 일하면서 죽은 사람의 골격을 연구했습니다. 이렇게 9년간의 수업을 마친 후에 관상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남보쿠는 상을 볼 때, 좀 의심쩍으면 옷을 벗기고, 체상(體相)과 골격까지도 감정하여 백발백중 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사람이 오면 일부러 거친 음식을 대접하여,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 관찰하여 운명을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관상뿐 아니라 선(仙)이나 호흡법에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새끼손가락을 불로 태우거나, 양팔뚝에 큰 뜸을 하는 것과 같은 힘겨운 수행을 하고, 50일이 넘는 단식과 냉수욕도 병행했다하니, 상법(相法)의 한길을 향한 그의 집념이 무섭기까지 합니다.


남보쿠의 용모는 괴이하여,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실제로 그를 만나보고는 진짜인지 의심하였고, 지방에 출장을 가도 가짜라고 봉변을 당하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용모를 묘사하는 아래와 같은 글을 각지에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키는 작고 얼굴은 좀스럽다.

입은 작고 눈은 험하게 들어갔다.

이마는 좁고 눈썹은 거의 없다.

코는 낮고 광태뼈는 높게 나와 있다.

치아는 짧고, 발도 작다.

새끼손가락은 불에 탔으며, 양팔뚝에 뜸자리가 있다.

 

미즈노 남보쿠는 일본 강호시대(=德川幕府도쿠가와막부시대)의 중간시기쯤 경도(京都,교토)에 살았고 성덕태자(쇼오토쿠태자)를 교조로 모시고 신도(神道), 유교(儒敎), 불교(佛敎)를 깊이 연구했다.

3년간 이발소의 조수로 두상을 연구하고, 3년간 목욕탕 때밀이로 체상(體相)을 연구하였으며, 또 3년간은 화장장 소체부(燒體夫)로 죽은 자의 골상(骨相)을 철저히 연구하는 등 상법(相法)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깊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백발백중 틀리는 일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동서고금에서 비할 수 없는 상법(相法)의 권위자로 평생의 제자가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미즈노남보쿠(水野南北)의 개운의 비결

 

나는 오랫동안 꾸준히 사람의 인상을 보아왔으나 한낱 인상만으로 판단하면 돈을 벌고 출세하여 장수할 상을 가진 사람도 빈한하게 요절하는 사람이 있고 빈한하고 요절할 상을 가진 사람도 실제로는 부유하고 출세하며 장수하는 사람이 있어 여간하여 맞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때 문득 사람에게 있어 먹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사람의 운과 불운, 수명은 모두 음식을 조심하느냐 조심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닌가를 살펴본 결과 1년 안에 큰 어려움이이 닥칠 관상을 가진 사람도 음식을 조심한 결과 어려움을 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이 생겼다.

평생 빈궁해야할 상(相)의 사람이 음식을 조심한 결과 상응한 부귀를 누리고 지금은 크게 출세한 사람이 있다.

전에는 병약하고 단명한 것으로 판단했던 사람이 매일 음식을 조심한 결과 심신이 공히 건강하고 장수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런 예를 들자면 셀 수 없는 정도였다.

사람의 관상을 볼 때 그 사람의 평생 음식먹는 실태를 알아보고 그에 따라 일생의 운과 불운을 판단하였던 바, 만 명 중에서 한 사람의 오판도 없음을 알게 되어 사람의 운명은 오직 음식하나라고 확신하고 이것을 나의 상법의 비결로 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권할 뿐 아니라 나 자신이 직접 실행하여 일생에 쌀도 안 먹고 오직 보리를 1일 1홉씩만 먹고 술을 즐기지만 이것도 1일 1홉으로 정하였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하루빨리 음식을 조심하여 개운행복하고 장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일생의 길흉은 오직 그 사람의 음식에 달려있다.

무서워할 것은 음식이다. 조심할 것은 음식이다.

음식을 체격에 비하여 적게 먹는 사람은 인상이 안 좋아도 길하고 상응하는 복을 받고 장수 행복하게 된다.

음식을 체격에 비하여 많이 먹는 사람은 설혹 인상이 좋아도 만사 순조롭지 않고 매사 뒤늦은 결과로 평생 걱정하게 되고 만년이 불길하다. 소식으로 엄격히 조심하는 사람은 예컨대 빈한하고 나쁜 인상이라도 상응하는 복을 받고 장수하며 만년이 행복하고 영양이 부족하게 보여도 병을 앓지 않는다.


대식(大食)하고 거기다 그 양도, 시간도 정한 바 없는 사람(식사량이 일정하지 않고 식사시간도 들쭉날쭉 정해지지 않은 사람)은 말할 것 없이 평생불운하고 결국 가정도 무너지고 병에 걸린다.

음식에 규범을 정했어도 때에 따라 많거나 적거나 일정치 않으면 수입도 많아지고 적어진다.

음식이 일정불변하면 수입도 일정불변하니 오직 식사를 일정하게 엄수하는 것이 좋다.

수명의 장단은 오직 인상만으로 정하기 어렵고 평소의 식사량을 알아보고 관상을 보면 만인에 일인도 실수가 없다.


병이 없고 길상인 사람이라도 젊어서부터 매일 사치한 식사를 한 사람은 연로하여 위장병에 걸린다.

매일 일에만 열중하는 것만으로 입신출세하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검약하고 대식을 삼가고 조금이라도 하늘에서 받은 식록(食祿)을 아끼고 이를 기반으로 입신출세하기를 힘쓰는 것밖에 없다.

음식에 호사를 다하고 입신출세를 바라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거듭거듭 음식을 조심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강조하는 바이다.

액년(厄年)에다가 대난(大難)의 상을 가진 자라도 언제나 절제있는 식사를 하고 엄중하게 지키는 사람은 액운을 면하게 된다.


술이나 고기를 많이 먹고 비대한 사람은 평생 출세 발전하지 못하고 만년에도 불행해진다.

입신출세하고자 하면 우선 제일로 음식을 줄이고 엄중히 지킬 것이다.

이것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입신출세하고 못한 사람은 평생 입신출세할 가능성은 적다.

번영하던 집에 운이 다하여 기울어가더라도 만약 후계 주인이 식사를 줄이고 엄중히 지키면 수입이 자연히 늘어나고 가운이 번성한다.


예컨대 빈궁하고 고생이 많은 인상이라도 스스로 가난한대로 조식(거친 음식)을 먹고 이것을 지켜내면 자연히 가난을 벗고 상응한 재산을 이룬다. 이것을 자복자득이라고 한다.

술이나 고기를 배부르게 마시고 먹고 가장 건강한 듯 뽐내는 것은 본래 천리에 역행하는 것으로 오래갈 수 없다.

겸손하게 처신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언제까지나 길이 오래 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천일천야 기도했다 하여도 그 정성이 깃들지 않았다면 결코 신명이 감응치 않는다.


참으로 정성껏 기도하고자 한다면 자기의 목숨(즉 음식)을 神에게 바치라.

음식은 내 생명을 보양하는 근본이니 음식을 바치는 것은 자기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은 정직한 자를 돕는다. 탁한 것은 받지 않는다.

매일 식탁을 향하여 자기가 신봉하는 신불(신이나 부처)을 마음에 모시고 기도한다면 어떠한 소원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한 가지 일에 뛰어난 사람은 아무리 그 뜻이 견고하더라고 하늘은 그 사람을 더욱 곤궁하게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더 한층 정진하도록 하려는 천심(天心)이다.

대인(大人)은 이럴 때 마음쓰지 않고 더욱더욱 노력함으로써 마침내 천하에 이름을 남긴다.

소인은 마음이 바로 흔들려 포기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일생을 우왕좌왕하며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비록 소인일지라도 음식을 근신하고 단단히 결심하면 흐트러지지 않는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머지않아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럼으로 우선 음식을 조심하고 그 외 어떠한 일이든지 선하다고 여기는 일을 실행하면서 천운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운은 돌아온다. 선악이 모두 자기의 행위에 따라 돌아온다.

운은 보답한다. 내가 한번 좋은 일을 하면 그 보답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


길흉간의 그 보답이 돌아오는 것은 천지의 법칙이다.

운은 옮겨온다. 자기가 행하는 선행이 작더라도 그것이 점점 쌓여갈 때 천하의 큰 선행을 이루어낸다.

생명이 있는 한 누구에게나 운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매일 일에 열중하고 그리고 음식을 조심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자연히 천리에 부응하여 운은 점점 열려온다. 이것을 개운이라고 한다.


음식을 조심하고 있으면 마음과 몸이 건강하여 기(氣)가 자연히 열려온다.

기가 열리면 운(運)도 그에 따라 열려온다.

결코 틀림이 없다.

우선 3년을 조심해 보라.


그렇게 해서도 만일 운이 열리지 않는다면 세계에 神은 없는 것이고 나 미즈노 남보쿠는 천지의 대적(큰 도둑)이다.

인상의 선악을 분명히 알고 싶으면 우선 자신의 음식을 조심하고 모든 낭비를 하지 말고 그리고 3년을 계속한다면 인상의 선악은 자연히 확연해진다.

나는 언제나 이것을 실행하고 자연의 선악을 내가 충분히 납득하고서 모든 인상의 판단을 내렸다.

이것이 상법(相法)의 대도(大道)이다.


내가 이것을 하지 않고 어떻게 남의 선악을 점칠 수 있겠는가.

타인을 점칠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수양이 전제가 된다.

나의 상법(相法)의 비결은 결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일본의 유명한 관상학자 미즈노남보쿠(水野南北)는 그의 <상법수신록(相法修身錄)>에서


 '얼굴생김은 하늘이 주는 것이지만, 절제에 의해서 어떻게든 바꿀 수가 있다. 설사 가난하고 단명한 상이라도 식사에 주의하면 유복하고 장수하게 된다. 또 비록 부귀하고 장수할 상을 지니고 있을 지라도 많이 먹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병이 들거나 단명하게 된다'고 했다. 얼굴생김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손금은 식생활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바른 생활을 하지 않으면 건강하게 될 수도 없고 손금도 개선되지 않으며, 좋은 운명을 맞이하기도 어렵다.

그러면 이상적인 식생활은 어떤 것일까?

 

원칙(原則) : 음식물에 관해서는 자기 정신이 기본이므로, 음식물의 분량이 일정하지 못하다가 날마다의 식사 분량(평소에 포만량의 80%만 먹으면서 3년을 하면 개운(改運)이 됨)이 일정해지면 비로소 그 정신도 자연히 안정된다. 평정한 마음에는 재난이 닥치지 않는다.사람이 귀하게 되거나 천하게 되는 것은, 한결같이 음식물의 신중 여하에 달려 있다. 사람은 심기를 기본으로 하므로 입신출세를 하려고 뜻하는 자는 우선 식사를 줄이고, 또 날마다의 분량을 엄중히 정해 놓아야 한다. 이렇게 정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입신출세를 한다. 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평생 입신출세를 못하기 마련이다.


소식(少食) : 식사분량의 한도보다도 적게 먹는 사람은 그에 상응한 복을 받고 장수하며, 노년에는 길하다. 소식으로 정해 놓은 분량을 엄중히 지키는 사람은, 비록 빈악의 상일지라도 상당한 복을 받고 장수한다.


과식(過食) : 식사의 분량 한도보다도 많이 먹는 사람은 비록 상이 좋을지라도 성공하지 못하며, 한평생 근심 걱정이 끊일 사이 없을 뿐 아니라 노년에는 흉하다. 부잣집의 주인이 만일 대식, 폭식이면 그 가독은 길지 못하다. 하루 세끼니 식사가 똑같지 못하고 일정하지 않은 사람은 심신이 아직 부정한 것이다. 부인이 대식하면 남편을 이기는 상극이요 부부의 인연이 변화하게 된다. 항상 대식하고도 차차로 말라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식사로 인하여 병을 얻어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신체가 강건한 사람이라도 항상 대주(大酒), 대식을 하고 보면, 혈색이 쇠퇴해서 발전할 기운을 잃고 출세하기는 어렵게 된다.


조식(粗食 : 검소한 음식) : 그 수입, 지위, 신분 따위에 비해서 조식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가난뱅이의 상일지라도 상당한 복을 받고 또 수명도 받아서 노년기에 길하기 마련이다.


미식(美食) : 햇것이나 풋것 같은 음식물을 즐겨 먹는 사람은 아무리 인상에는 복이 있더라도 산재를 하고 가정을 망치게 된다. 더구나 가난뱅이는 덕이 어디로 사라져서 행방불명이 된다.미식하는 사람은 한 평생 발전하지 못한다. 번창(繁昌)하는 곳에서는 미미육식(美味肉食)을 보통으로 생각하며 생물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음으로써 사람 마음이 어느덧 오만불손해지고 드디어는 악해진다. 그러나 항상 조식(粗食)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스스로 안전하고, 따라서 악심을 일으키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시골이나 두메 사람에게는 악인이 적고, 도회지에는 많은 것이다.

 

식사 분량이 일정한 사람

 

식사를 엄중히 일정하게 먹는 사람은, 비록 현재의 운이 나쁘더라도 출세를 할 수 있다. 식사를 일정하게 정해 놓은 사람은 몸이 다스려지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바라는 일이 성취되며 스스로 올바르고 성실해 보인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덕이다. 또 식사를 한정하는 자는 뜻이 있으며 마음도 엄중하다. 따라서 그 신체도 엄중하다.

소식하더라도 식사를 일정하지 않게 먹는 사람은 반드시 다병(多病)이다.

 

식사 분량이 일정하지 못한 사람

 

식사의 분량(分量)이 일정하지 못한 사람은 인상이 좋더라도 흉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일이 안정되지 않고, 거의 다 되어가던 일도 그만 무너져 버리고 만다. 식사 분량이 일정한 사람의 경우, 저절로 그 분량이 흐트러지면 틀림없이 흉사의 전조이므로 속히 엄중한 정량을 정해 놓아야 한다. 식사 분량이 흐트러져서 고르지 않은 사람은 겉으로는 엄중한 듯이 보이더라도 그 마음은 엄중하지 않고 반드시 겉면을 치장하는 격이다.

 

식(食)은 운명(運命)을 좌우한다.

 

인간 생명의 근본은 음식이다. 가령 어떠한 좋은 약을 쓴다 해도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하면 생명을 유지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진정으로 좋은 약은 바로 음식인 것이다.

이것은 옛날 증국에서 말하는 식약일체(食藥一體)의 원리로서, 우리말의 “밥(食)이 약이다.”라고 하는 뜻이다.

진정한 약은 음식(食)이다. 중국에서는 옛부터 식치법(食治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식치법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식양법(食養法): 매일 먹는 식사에 신경을 쓰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식사요법: 병에 걸렸을 때 더 심해지기 전에 대응하는 식품으로 만들어 먹는다.

이 두 가지는 입과 신체의 양생을 목적으로 한다.

 

미즈노 남보쿠는 수년간 관상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지만, 음식의 중요성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빈궁 단명의 상을 하고 있어도 유복하게 장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부귀하고 오래 살 수 있는 유복 장수의 상을 가진 사람도 실제로는 빈궁 단명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당시 관상가로서 그 사람의 운명의 길흉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때가 되서야 사람의 운명은 음식을 절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길흉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관상을 볼 때 먼저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의 양을 묻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의 생애의 길흉을 점치게 되면 만의 하나라도 틀리는 법이 없다는 사실에 자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관상법의 가장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심오한 뜻으로 생각하고 관상법의 근본으로 정했다 한다.


중국의 식치법(食治法)은 질병만을 다스리기 위해서 입과 신체의 양생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미즈노 남보쿠는 입과 신체, 그리고 마음의 양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음식에는 성질과 맛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 몸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보리의 성질은 차고 맛은 달다. 술의 성질은 따뜻하고 맛은 달고 쓰며 쏜다(甘苦辛). 보리를 매일 먹으면 몸을 차게 하는 작용이 있는 반면 술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작용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즈노 남보쿠는 온냉(溫冷)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만약에 술을 싫어하는 사람이 보리를 매일 먹으면 꼭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보리의 맛이 달다는 것은 비위(脾胃)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많이 먹으면 비장과 위장이 상한다. 술은 달고 쓰며 쏘기 때문에 비위와 심장, 그리고 폐가 상하기 쉽다. 그러나 하루 한 홉이면 약이 된다. 따라서 사람의 부귀와 빈천, 장수와 단명, 곤궁과 안락, 그리고 입신 출세와 영달은 모두 음식을 절제하고 신중히 하는데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절제하고 신중히 하기를 바랄 뿐이다.

 

운명의 길흉은 식(食)으로 결정된다.

 

사람들이 매일 먹는 식사의 양에 따라 그 사람의 빈부와 수명, 그리고 미래의 운명까지도 예지 할 수 있다. 다음에 열거하는 사실은 그다지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노동의 내용에 따라 식사 량의 적량이 정해져 있고, 또 신체의 크기나 노동의 강약에 따라서도 식사 량의 적당량이 달라진다. 이 원칙도 나이가 젊거나 한 집안의 주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젊지만, 그 집안의 주인이라고 하면 그가 매일 섭취하는 식사 량의 다소에 따라 가세와 운명의 길흉이 결정된다.


옛날 선인들의 말 중에 "하늘의 녹(祿)이 없는 사람은 출생하지도 않고, 땅에 뿌리 없는 풀은 돋아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에 따라 누구라도 하늘에서 주어진 일정한 식사량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욕심을 내어 먹는 자는 하늘의 규율을 파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늘에서 베푸는 식사량이 정해져 있는 법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음식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 할 수 있고, 생명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면 먹을 것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생명이 발생한다. 따라서 음식은 생명의 원천이며 생명은 음식에 따라 유지 될 수 있다. 인간 한평생의 길흉은 모두 음식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 할 것은 음식이요. 또한 신중히 해야 할 것도 음식이다. 그러니 음식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 있겠는가?


식사량이 적은 사람은 관상학적으로 불길한 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운세는 좋고, 그 나름대로 축복 받는 인생을 보내며 젊어서 죽는 법이 없다. 특히 이런 사람은 만년에 길하다. 식사를 항상 적당량 이상으로 지나치게 먹는 사람은 관상학 적으로는 길상이라 해도 몸의 컨디션이 무너지기 쉽다. 손이 뒤틀린다든지, 말초신경에 장애를 일으키기 쉽고 평생 동안 스트레스로 번민하게 되며, 만년의 운세 또한 흉하다.


64괘(卦) 중에 절(節)이라는 것이 있다. 절이란 절도 또는 조절이라는 뜻이다. 기후의 사계절이나 24절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한평생에도 일정한 리듬과 절도가 있다. 이것을 무시하고 과식한다면 당뇨병, 췌장염, 심장병, 간장병, 신장병, 뇌졸증 등의 뇌혈관 장애에 걸리기 쉽다. 따라서 절도를 무시한다는 것은 아무리 장수의 상을 갖고 있다 해도 실제로는 단명하든지, 아니면 질병의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게 되는 법이다.

 

왜 성공하지 못할까

 

왜 진정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줄 아시오? 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줄 아시오?

언제나 작은 성공에 술과 고기를 즐기고 스스로 조그만 성취에 취하여 놀 줄은 알아도, 진정으로 혼신을 다해 일 할 마음은 없기 때문이오.


그러니 항상 시작은 좋은 것 같아도 모든 일이 지지부진하여 끝내는 성공을 보지 못하는 것이오.

참을성이 없으니 작은 실패에도 또 다른 직업을 찾아다니다가 결국엔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세상을 마치게 되는 것이라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한 길을 이루지 못했다면 일백 년을 산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소.

살아도 그 의미가 없으니 말이오.


이런 사람은 주위에도 덕을 쌓지 못해 죽어도 가까운 사람 몇몇만이 저승으로 가는 길을 쓸쓸히 지킨다오. 사람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오.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없소.

기술이나 직업도 마찬가지요.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 십 년까지 심혈을 기울이면 아무리 바보라도 그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어진다오. 때야 비로소 성공의 문이 열리는 것이오.


당신은 지금까지 혼신을 다해 일한 적이 없소.

당신과 같이 이리저리 마음의 가닥을 잡지 못하고 직업을 바꾸는 사람은 마치 광주리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개구리와 같소.

대나무 광주리는 안에서 보면 사방팔방 구멍이 다 뚫려 있으니 미련한 개구리는 자기가 그 많은 구멍으로 다 도망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오. 그래서 이 구멍으로 나가려다 안되면 저 구멍으로 나가려하고 또 힘들면 다른 구멍을 찾는 것이오.


당신은 미련한 개구리와 같이 무수한 성공의 길들 중에서 헤매는 것이오.

그렇게 이 구멍, 저 구멍 들쑤시기만 하다가 결국엔 제풀에 죽어 광주리에 그냥 갇히게 되는 것이오.

그런 식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소. 그렇게 살다간 결국 고생만 하다가 인생을 마치게 될 것이오.

광주리의 구멍이 다 똑 같은 것 같지만 그래도 구멍 중에는 조금이나마 큰 구멍이 있게 마련이오. 현명한 개구리는 그 구멍으로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한다오.


개구리가 빠져나가기엔 엄청나게 작은 구멍이지만 그 길 밖에 살 길이 없는 줄을 알기에 그 구멍만을 뚫는 것이오.

몸에 상처가 좀 생겨도 머리에 피가 흘러도 한 구멍만을 판 개구리는 빠져 나올 수 있소.

사람이 혼신을 다해 한 길로 가고자 한다면 태산이라도 뚫을 수 있는 것이오.

한 길을 추구하다 보면 성공하지 못할 일이 없소.


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단 말이오.

수백만의 군사가 사방을 포위한다 해도 필사적으로 한 곳만을 뚫으면 살아서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오.

사방팔방의 적들과 다 싸우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처참한 죽음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당신이 쓸쓸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면 한 가지를 끝까지 이룬 후에 다른 것을 시작하시오.

 

하늘로부터의 시련

 

당신은 절제함으로써 더욱 큰 꿈을 이룰 것이오.

큰 뜻을 이루기 전에는 하늘로부터 시련이 내릴 수도 있소.

하늘이 시련을 내리는 이유는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큰 뜻을 더욱 단단하게 하려 함이오.

대인(大人)은 어떤 시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길로 정진하고 정진하여 결국엔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것이오.


하지만 소인은 작은 시련에도 운명을 탓하며 하늘을 원망하다가 더욱 더 곤궁함에 빠지게 되는 것이오. 절제를 엄중히 지키면서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오. 운(運)이라는 글자는 세상이 돌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소.

언젠가는 자신에게 때가 온다는 것이오.

성공의 운명을 가진 사람은 때를 기다림에 있어 절제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오.


성공과 실패는 다 스스로 하는 바에 따라서 생기는 것이오.

작은 실패에 마음 뺏겨 정신상태가 헤이해지면 성공의 때가 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오.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절제하는 사람에게 빈궁함은 일시적인 일이오.

즐거움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괴로움이 끝나면 즐거움이 오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오.

진전을 다하는 노력이 하늘에 닿으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라오.

 

스스로 성공하는 힘

 

항상 선배나 윗사람을 공경으로 대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선배의 덕을 중히 여기는 것이 정도(正道)입니다.

새로 시작한 사람은 열심히 배우는 것이 본분입니다.

본분을 잊지 않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본분을 아는 사람이 교활하거나 불성실할 수 없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약삭빠르고 술과 음욕을 즐기면 성장가도에 있다가도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선택한 직업에 전념하고 생활을 엄중히 절제해야 합니다.

쾌락을 성공과 바꿀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가난함을 알면

 

부자가 가난함을 알면 재물의 시작과 끝을 다 아는 사람이므로 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복을 불러들인 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인자하고 윗사람에게 공손합니다.

절대로 교만하지 않기 때문에 가세가 기우는 일은 없습니다.

부귀란 사방의 가난이 모여서 생기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많고 부귀한 사람이 적은 이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이 부귀의 근본이니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가난함이 근본임을 명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귀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미천함을 근본으로 합니다.

임금도 자신보다 미천한 신하가 깍듯이 모실 때 올 곧은 임금이 되며 가난한 백성이 자신의 근본임을 잊지 않는 임금에게 환란은 없습니다. 미천했을 때를 잊지 않고 아랫사람을 대하면 자연스럽게 부귀는 늘어납니다.

아랫사람을 자식같이 생각하면 아랫사람 또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아랫사람이 힘들 때는 여동생을 대하듯 위로하고 병이 들었을 때에는 자식같이 품어 보살피고 항상 위아래 구별 없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자신은 절제를 위해 술을 금하고 있다 해도 아랫사람들까지 똑 같은 절제를 시켜서는 안 됩니다. 절제는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혹시 아랫사람에게 음식을 베풀더라도 자신은 세끼 식사 외에는 먹지 않는 절제의 생활을 하면 지금보다도 더 큰 가운(家運)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야 성공 운명이 된다

 

운(運)이라는 것은 기(氣)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운명을 운기(運氣)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상 천지의 기 흐름이 좋으면 세상이 건전해 지는 것이고 내 몸의 기 흐름이 좋으면 운명이 반듯해 집니다.

해가 뜬 이후에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리 관상이 좋아도 운명이 온전하게 돌아가지 못합니다. 해가 솟아오를 때의 기운은 성공의 기운이며 그 기운을 받지 못하면 온 몸의 기가 제대로 돌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사람들은 건강이 좋지 못한 것입니다.

아침에 태양의 기운을 받지 못하면 하늘로부터 받고 태어난 원기(元氣)가 약해지고 마음도 옳지 못한 곳에 머물게 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과 늦게 일어나는 사람의 정신상태 또한 같을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온전치 못하니 성공의 근처도 갈 수 없습니다.

늦잠을 즐기면 평생의 반은 누워서 보내고 나머지 반은 이것저것 먹는 것을 찾아다니느라 소비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일에 시간을 다 보내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죽자 살자 일해 봤자 무엇을 이뤄낼 수 있겠습니까?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사람 중에는 밤에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이 다 쓸데없이 밤을 새우는 것입니다.

밤은 음(陰)의 시간이라 자야 하는데 깨어 있고 태양이 뜬 양(陽)의 시간에는 자고 있으니 음양을 도적질하는 셈입니다.

해가 벌써 중천인데 오밤중처럼 잠만 자고 남들이 다 일어나서 일을 할 때야 일을 할려니 손에 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럭저럭 아침시간을 때우고 점심밥을 먹고서야 일을 시작하니 운이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면 자연은 응당한 대가를 돌려주는 법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태양의 기운을 받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운명을 개척하는 길입니다.

성공할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귀천을 막론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늦잠을 삼가고 일찍 일어나 직업에 전념하는 것이 곧 성공의 길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모든 것이 조용하기 때문에 마음이 상쾌해지고 좋은 생각만 떠오릅니다.

밤에는 나쁜 생각이 쉽게 떠오르고 아침에는 좋은 생각이 나는 것은 그냥 그런 것이 아니라 기(氣)의 흐름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늦잠은 빈궁(貧窮)단명(短命)의 원인입니다.

 

먹는 것보다 큰 기쁨

 

벼슬아치는 높은 벼슬에 올라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농부는 풍작이 되어 알곡이 늘어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기술자는 자신의 기술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뛰어난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상인은 장사가 번창하여 큰 가업을 이루는 것이 기쁨입니다.

어찌 먹는 것같이 하찮은 것을 이런 기쁨에 비할 수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이런 것들이 즐겁고 기쁘지 않다면 음식으로 그 기쁨을 찾아도 될 것입니다.

음식을 즐기기 전에 먼저 성공을 즐기세요.

성공한 다음에 음식을 즐겨도 늦지 않습니다.

 

항상 가난한 이유

 

저는 어렸을 때부터 나쁜 짓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 왔습니다.

그런데, 왜 항상 가난하며, 사람들은 제가 한 일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착하게 대할지 몰라도 세상만물을 함부로 대하기 때문이오. 세상 만물이 아무 뜻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아보이지만, 세상 모든 것에 귀하지 않은 것이 없소.


아무 물건이나 함부로 낭비하고, 물자가 귀한 것을 모르면 결국은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온다오. 지금처럼 낭비하면 앞으로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물론, 세상 모든 것들에게서 버림받을 것이오. 사람만 소중히 여긴다고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만물이 모두 쓸모없이 보여도 그것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면 그것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니, 자연스럽게 운명을 개척하게 되는 것이오.


윗사람에게나 아랫사람에게도 이와같이 대하는 것이 제일이오.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긴다는 것이지, 남들이 보기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오.

평생의 길흉을 어찌 한 순간의 관상으로 말할 수 있겠소?

지금부터라도 사람과 만물에 대해 고귀한 섬김의 자세를 가진다면 반드시 당신도 섬김을 받을 것이오.

 

죽을 때 괴로움이 없으려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다 음식이 원인입니다.

음식을 절제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작은 일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동요하지 않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술과 고기를 먹으면 마음이 쉽게 흥분되고 흐트러져서 생각지도 않은 나쁜 짓을 하게 됩니다. 또한 과식하게 되면 몸 안의 기가 무겁게 되어 마음이 제 갈 길을 정하지 못합니다.


수행을 깊게 하는 사람들은 오후 4시 이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방법은 다 기(氣)를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음식을 절제하지 않으면 밤낮 기도를 해도 마음이 항상 혼미하니 어찌 신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에 다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현생에서 음식을 절제하여 이를 천지에 남기면 전생의 악연을 풀어 현생의 명복을 늘릴 수 있습니다.

현생에서부터 안락세계에 사니 자연스럽게 임종 또한 편안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죽을 때 괴로운 마음이 없으면 다가올 세상에도 괴로운 마음이 없는 세계에서 살게 됩니다.

 

자녀의 운명은 부모하기 나름

 

어린 아기가 가난하고 나쁜 운명을 갖고 태어났더라도 부모가 절제하면 아기의 운명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초년에 부모가 하는 바에 따라 악상(惡相)도 좋게 바뀌는 일이 많습니다.

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근본입니다.

근본이 바로 서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바르게 됩니다.

혹시 아기에게 태어나기 전 악연이 있다 해도 이것을 푸는 것은 부모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부모가 이 인연을 풀지 못하면 커가면서 자신의 행동에 따라 인연의 실타래가 풀립니다.

나쁜 인연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음덕을 쌓는 일입니다.

몰래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계속 하세요.

보통 사람들의 음덕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스스로 매일 먹는 음식에서 절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이지만 매일 절제를 실행하면 자손의 나쁜 인연을 풀어 아기의 가난함과 병약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날마다 새롭게 변한다.

 

처음 세상이 만들어질 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후에 음양의 기가 만들어지면서 사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양의 기가 근본이고, 신체는 나중입니다.

그래서 관상이나 생김새를 먼저 논하는 것보다 기(氣)를 중심으로 인생을 논해야 합니다.

잘살고, 못살고, 오래 살고, 빨리 죽는 일이 다 스스로 만드는 기운에서 생깁니다.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은 다 이러한 기운을 근본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음양의 기운을 보는 것이 내 관상의 비법입니다.

우주의 기운은 너무 커서 눈앞에 있다 해도 쉽게 볼 수 없습니다.

관상은 먼저 우주의 기운과 세상이 이치를 근본으로 해서, 스스로 덕을 배우고 몸을 삼가는 것이 첫째 일입니다.

세상 만물은 모두가 날마다 새롭게 변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변하는 것을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만물을 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자세로 만물을 바라보면 하루하루의 길흉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이 태어남과 돌아감을 반복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올 필요가 있을 때 생겨나고,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새롭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상(相)을 보아도 그 이치를 미루어 알 수 없습니다.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남의 운명은 물론, 자신의 운명조차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천하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줄 압니다.

이를 모르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교만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특히 상(相)을 보는 사람은 이 이치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이치를 모르는 관상가는 정확한 상(相)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을 가르칠 수도 없으며,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절제, 즉 스스로 멈출 줄 아는 것이 최고의 선(善)이며 , 만물을 다스리는 근본 이치입니다.

천운(天運)은 무절제한 사람에게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천운을 받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수신(修身)하기 쉬워집니다.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나무나 돌보다도 못한 사람입니다.

나의 상법의 비결은 오로지 절제(節制)를 첫째로 하여, 하늘의 안목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제자가 많지만 이것을 제대로 아는 자는 극히 드물어 안타깝습니다.

가끔 알아듣는 제자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치를 가볍게 여겨 중도에서 물러나는 일도 많습니다.

만약 배우고자 한다면, 절제가 무엇인지 먼저 깨우쳐야 하며, 만물이 나의 근본임을 알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치의 심오한 의미를 깨달으면 내 비결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니 나에게 배울 것이 없습니다.

 

절제는 인생을 만들어 가는 도구다.

 

 절제란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남이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운명을 바꾸는 계기는 언제나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다스리는 사소한 절제가 결국 인생의 성공이라는 길로 가는 열쇠이다.

 

절제의 성공학 (요약)

 

* 혼신을 다해 한 길을 가라.

* 큰 뜻을 이루기 전에는 시련이 온다.

* 잡기(雜技)는 즐겁게 노는 도구일 뿐이다.

* 초심자는 열심히 배워라

* 노력이 성공이다.

* 돈은 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간다.

* 줄어야 다시 찬다.

* 부(富)는 가난이 모여서 된다.

* 검소와 인색은 다르다

* 부하를 그림자처럼 아껴라.

* 일찍 일어나야 성공 운명이 된다.

* 삼가고 삼가는 것이 성공의 길.

* 운명은 정성에 따른다.

* 가난을 다 채우면 복이 들어온다.

* 운은 누구에게나 있다

* 쓸데없는 자존심은 버려라.

* 검소함은 자신을 빛내는 일이다

* 음식을 즐기지 말고 성공을 즐겨라.

* 불규칙한 식사는 운명을 (좋지 않게) 바꾼다.

* 음식은 금은보화보다 소중하다.

* 패가망신의 지름길, 폭식

* 주는 것이 받는 것의 기본이다.

* 좋은 운명을 만드는 소식(少食)

* 넉넉한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흐른다.

* 절제하면 망하지 않는다.

* 삼가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다.

* 육식은 마음을 탁하게한다.

* 차면 기운다.

* 마음이 가난해서 항상 배고프다.

* 음식으로 병을 고친다.

*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진다.

* 자녀에겐 (재산을 믈려주기 보다는) 절제를 물려줘라.

* 만물을 소중하게 절제하라.

* 자녀의 운명은 부모하기 나름.

* 세상은 날마다 새롭게 변한다.

*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 종교의 근본원리는 같다.

* 음식이 운명을 좌우한다.

 


출처: 미즈노 남보쿠저, 최진호편저 <食은 운명을 좌우한다>(도서출판 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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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어느 ROTC장교의 영혼 부탁

(광덕스님 글)


이것은 필자가 봉은사를 맡아 있던 1965년 여름의 일이다. 그 해 홍수가 났다. 신문에는 피해복구공사 중에 장교(중위) 한 분이 순직했음을 알았다. 그 얼마 후 한 노신사 부부가 봉은사를 찾아왔다. 신문에서 본 그 군인의 천도를 의논해 온 것이다. 노부부는 망인의 부모님었다. 7재를 올리기로 한 그 얼마 후 노신사의 이야기다.

"얼마 전 점심을 먹고 잠깐 앉아 있다가 아마 잠깐 졸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역력합니다. 내 곁에 죽은 자식이 찾아오지 않았겠어요. 나는 멍청히 그 애의 얼굴만 쳐다 보았어요. 그 애는 평상시와 같이 활달했어요.

나에게 하는 말이 '아버지, 어머님을 위로 해 주십시요. 어머님은 제가 죽었다고 저렇게 슬퍼하고 계시는데 조금도 그러실 것 없습 니다. 아버지 저기를 보십시요.' 합디다.

그래 손으로 가르키는 곳을 보니 좀 떨어진 멀 지 않은 곳에 한 세계가 벌어져 있지 않겠어요. 자세히는 못 보았어도 아름다운 동산에 거루고각이 대궐같이 솟아 있었어요.

자식이 하는 말이 '저 집이 멀지 않아 제가 가서 살 집입니다. 이 세상 즐거움이란 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아버님 어머님 부디 제 걱정을 하지 말아주십시요.

그리고 아버님은 이제 좀 한가로우시니 어머님을 위로해 주십시요. ' 하지 않겠어요. 사실 저는 얼마 전까지 시골에서 공직생활(면장이었다)을 하며 살아왔고, 우리집 사람은 아이가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서울에 와 있었어요. …"

노부부에게는 아들이란 이 하나뿐이었다.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장교로 입대했었다.
그런데 7재가 지난 후 다시 그의 어머니에게도 나타났다. 현몽이었다. 안락처로 간다는 인사였다.



2. 여고생 영혼의 어리광

(광덕스님 글)


그 때는 필자가 범어사 선원에 있던 1951년 여름의 일이다. 산 너머 양산군 동면 내송리 사베부락에서 중년 부부가 찾아왔다. 맏딸이 갑자기 죽어서 서러워서 왔다.

딸은 동래여고 3년,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두고 바깥마당에 나가더니 차에 밀려 쓰러졌다. 외상 하 나 없는데 혼은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그 여학생의 7재는 올려지고 위패는 지정전 한 모퉁이에 안치되었다.

그런데 절에 재식이 겹치는 날이면 병풍이 여럿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쉬울 때 나는 여학생 영단에 펼쳐 있던 병풍을 다른 곳으로 가져다 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님이 왔다.

망인의 현몽을 전해 온 것이다.
"어제 낮 방에서 비몽사몽간에 애가 보였어요. 그리고 생전에 어리광 부리듯 내 두 무릎에 매달리면서 '스님들 정성으로 제가 아주 좋은 데로 간답니다. 그런데 내 곁에 병풍은 왜 자주 가져가지요?' 하며 못마땅해 하더군요."

이 사실은 필자만이 아는 사실이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학생 영단에 놓으려고 다홍빛 산리라를 몇 번이고 꺽어왔다. 그 후 7재를 마친 후에도 부부는 오래도록 절에 와서 염불을 하고 설법을 들었다.

7재 후에 죽은 딸이 부모에게 기쁜 얼굴로 현몽하며 '이제 저는 아주 좋은 곳으로 태어납니다. 엄마 아빠 안녕'하더라는 것이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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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선원 천도법어

 

영가여! οοο 영가여!

지금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영가들은 분명히 지금 이 자리에 오셔서 천도薦度 법어를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어서 더러는 모양이 있고 모양이 없고 합니다. 인연 따라서 과거세에 지은 그런 업의 힘으로 해서 한동안 사람 같은 몸을 받았다 해도 인연이 다하면 사람 같은 모양은 사라집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생명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모양이 있는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 바람기운, 또는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기운들이 모여서 하나의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그때는 죽음도 있고 이별도 있고 또는 아프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천지우주라 하는 것도 역시 달이 있고 지구가 있고 해가 있고 이렇게 한다고 생각 할 때는 이것도 형체가 이루어졌다가 또는 그런 모양이 변화가 됐다가 또는 그 모양이 파괴가 됐다가 다시 모양이 텅텅 비어버리는 것입니다. 텅텅 빈 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생명자체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생명자체는 불생불멸 不生不滅이라. 생명자체는 본래 낳지 않고 또는 모양이 바꿔진다 하더라도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습니다.

 

오늘 천도를 받으시는 영가들이시여! 금생今生에 인연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가 인연이 다해서 다시 저승길로 가신 것입니다. 저승길은 어두운 세계입니다. 사람도 어두운 밤길을 갈 때에는 등불이 없거나 안내인들이 없으면 헤매기도 하고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죽음 길도 그와 똑같아서 한 번 죽어서 갈 길을 모르면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십 년도 머무르는 것이고 때로는 백년도 머무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복아 많으셔서 좋은 후손들을 두셔서 어두운 길을 밝히는 참다운 등불, 참다운 지혜를 오늘 들으시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사람이라 하는 것은 금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과거 전생에는 사람보다 못 한 개나 소나 돼지 같은 그런 축생畜生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그 보다 더 못해서 과거 전생에 어느 생에는 지옥이라 하는 지독한 그런 고생만 연속되는 세계에도 태어났다가 다시 죽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어떠한 누구나가 다 그런 지옥 같은 생도 받았고 또는 사람이외에 동물 같은 생도 받았고 또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귀신같은 그런 생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과거 전생에 닦은바가 있어서 생각도 좋은 생각을 하고 말도 좋은 말을 하고 행동도 바른 행동을 취해서 사람 될 만치 착한 그런 성품 때문에 금생今生에 사람 몸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또는 헤어지는 것입니다. 또는 이별도 있는 것이니까 사람도 별로 좋은 데는 아닌 것입니다. 사람보다 더 좋은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만이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이 제일 좋다.’ 합니다만 사실 인간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죽음이 있고 또는 이별이 있고 슬픔이 있고 또는 병도 있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 하나의 고해苦海란 말입니다. 우선 그때그때 쾌락적인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모두가 다 고의 원인으로 해서 이루어져서 잠시간 허망한 찰나에 불과합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사람으로 계시다가 지금 어두운길을 헤매시는 가운데 이와 같이 좋은 후손들을 만나서 정말로 참다운 행복한 나라, 헤어짐도 없고 병도 없고 죽음도 없는 그런 나라로 가시는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사람보다 좋은 천상세계가 있습니다. 천상세계 중생들의 몸은 사람 같은 그런 몸이 아닙니다. 사람 몸은 아프기도 하고 또는 배가 고프면 물질적인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만 천상세계는 그런 것을 먹지 않더라도 살 수 있는 세계입니다. 천상세계는 몸도 이렇게 냄새가 나고 때가 묻고 하는 그런 몸이 아닌 것입니다. 천상세계의 몸은 광명신光明身이라, 빛으로 몸이 되어 있습니다. 빛으로 몸이 되어 있거니 때 묻지 않고 또는 이러한 물질적인 껍데기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천상세계가 한 군데 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선량한지, 얼마나 바로 살았는가 하는 그런 행위 따라서 천상도 28층이라, 스물여덟 층의 천상단계가 있습니다. 업장業障이 무거운 사람들은 저 아래층에 가 있는 것이고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업장이 가벼운 만치 거기에 비례해서 보다 높은 천상에 있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그러나 천상이 최상의 세계는 아닙니다. 비록 천상일지라도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서 몇 천 년, 몇 만 년을 산다고 합니다. 업장 가벼운 중생이 태어나면 가벼운 중생들일수로 더 오래 사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천상은 팔만 겁이라 하는 오랜 세월을 삽니다만 이것도 역시 인연이 다하면 죽음이 도래합니다. 따라서 이런 천상세계도 역시 사실은 죽고 살고 헤어지고 하는 것을 면치 못 하는 중생세계입니다. 이렇게 뱅뱅 돌아서 천상으로 갔다가 다시 복이 다하면 인간으로 뚝 떨어졌다가 또 지옥으로 갔다가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 중생은 정말 답답하기도 하고 개미 쳇바퀴 돌듯이 참담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이 이러한 고생바다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사람이나 천상이나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그런 세계만 뱅뱅 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세계를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스러운, 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병도 없고 헤어짐도 없는 세계인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러한 영생해탈, 영생행복의 길을 가르쳐주고 계신데 다만 중생들이 게을러서 가고 안 가고 합니다. 극락세계는 중생들에게 좋은 일 하라고 방편方便으로 한 말씀이 아닙니다. 극락세계는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의 세계입니다. 사람세계나 또는 축생의 세계나 천상세계나 이러한 것은 하나의 흘러가는 과정적인 세계에 불과합니다만 극락세계는 흘러가는 세계가 아닙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성인成人들은 분명히 본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번뇌에 가리어서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는 번뇌만 거두시면 바로 극락세계에 가시는 것입니다. 지금 가리고 있는 번뇌가 무엇인가? 가시는 길에 번뇌는, 사람으로 계실 때 쓰시던 칠팔십 년 동안 자기 평생에 무척이나 아끼던 몸입니다. 어느 누구나 사람이면 자기 몸이 제일 소중합니다. 몇 십 년 동안 그 몸을 아껴왔으나 죽은 뒤에 몸뚱아리는 화장을 하면 재가 되는 것이고, 땅에 파묻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만 번뇌를 못 벗어나고 지혜가 밝지 못한 그런 중생들은 죽은 뒤에도 평소에 쓰던 몸에 대해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 쓰시던 그 몸은 이미 영가들의 몸이 아닙니다. 영가들의 몸은 화장 하면 재가 되고 파묻으면 흙이 되고 마는 그러한 것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가들이 쓰시던 마음은 몸과 더불어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은 영생하는 참다운 생명입니다. 몸은 뜬구름 같고 거품 같이 한 동안 인연 따라서 모아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존재입니다. 광야에다 집을 지을 때 나무요, 흙이요 이것저것 다 모아서 집을 올리면 하나의 집이 되겠지요. 그러나 나중에 집을 헐고 집을 파괴해버리면 집은 흔적도 없습니다. 나무나 흙이나 그런 것으로 밖에는 안 남아 있습니다. 그와 똑같이 사람 몸뚱아리도 산소요, 수소요, 탄소요, 질소요 그런 원소의 기운이 업장業障기운 따라서 하나의 형상을 나툰다 하더라도 생명자체의 인연이 다해 생명의 힘이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 떠나가면 몸뚱아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자기 몸에 대한 애착, 자기 목숨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자기 갈 길을 바로 못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번뇌는 자기 권속에 대한 애착, 자기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요, 자기 남편이요 이러한 자기가 금생今生에 인연 따라서 사람세상의 인연 따라서 만난 그런 권속, 자기 친구 그러한 인연들 때문에 잘 못 가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가 돌아간 뒤에 자기 아들을 생각하고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으면 그런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살아있는 자기 권속들이 행복하면 좋은데 그 반대로 돌아가신 분들이 자꾸 뒤돌아보고 남은 분들을 생각하면 생각한 만치 남아있는 분들한테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자기가 쓴 자기 세간, 자기 집, 자기 논밭, 자기 금붙이 같은 것은 허물어지는 몸뚱아리가 있을 때 필요한 것이지 몸뚱아리가 한 번 떠나버리면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자기가 쓰던 세간 때문에 자꾸만 뒤돌아보고 또 애착이나 미련을 갖습니다. 이것도 역시 무서운 번뇌가 되어서 여러분이 갈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자기 몸도 흙이 되고 재가 되고 마는 허망한 것이거니 아들이나 딸이나 역시 한 동안 만난 허망한 인연에 불과합니다. 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집도 허망한 것에 불과합니다. 허무한 것에 불과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간에서 쓰던 버릇 때문에 내 것이요, 내 권속이요 하는 마음 때문에 바로 못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그러한 것은 가치가 없고 거품이요, 메아리인 것이고 실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가들이 가실 곳은 오직 생사를 초월하고 행복만 있는, 또는 영원히 아프지 않고, 영원히 이별도 없고, 영원히 살 수 있고, 또는 모든 안락을 다 얻을 수가 있고, 또는 지혜를 다 얻을 수가 있는 곳은 극락세계뿐입니다. 지금 지옥에 사는 중생이나 또는 축생畜生으로 있는 중생이나 사람중생이나 또는 천상중생이나 결국 모두가 다 극락세계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고향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다시 이루어지고, 허물어지고하는 그런 과정에서 어쩌다가 우리는 극락세계에서 생각을 한 번 잘못해서 뚝 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어떠한 존재나 본 고향은 모두가 다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부처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모든 것이, 거기에 사는 존재나 또는 그 환경이나 모두가 다 조금도 흠축이 없는 그런 청정미묘한, 불변한 광명光明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극락세계를 다시 바꿔서 말하면 광명정토光明淨土라고 합니다.

 

영가여! 천지우주는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번뇌에 때 묻은 영가의 몸이라던가,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라던가, 추한 것, 좋은 것. 나쁜 것, 그런 것 모두가 청정미묘한 극락세계의 광명으로 된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서 자기를 소중히 하는 그런 이기심, 그것 때문에 가리어서 탐욕심을 내고 또는 무엇을 얻지 못하면 성을 내고 자기 기분이 안 내키면 분노를 하고 하는 어리석은 마음들 때문에 우리가 천지우주의 그러한 행복스러운 본질을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우주의 본질이라 하는 것은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시고 또는 예수나 공자나 그 뒤에 달마스님이나 그런 위대한 도인들이 다 말씀하신 그대로 우주란 것은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광명세계입니다. 광명세계, 이것은 영원히 변치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이 탐욕심 또는 분노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러한 마음에 가리어서 그런 광명세계를 잘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가 그 극락세계, 광명정토光明淨土에 가시기 위해서는 광명정토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다른 곳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광명정토는 우리들 고향이다. 내가 영원히 쉴 고향이다.’ 이와 같이 생각을 하십시오.

 

그리고 광명정토의 이름인 동시에 일체중생의 본마음이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우리 고향인 광명세계를 마음으로 생각하십시오. 과거에 쓰던 자기 몸, 자기 권속, 자기 세간이 모두가 다 한 동안 인연 따라서 쓰던 허망한 것에 불과합니다.

 

영가들이시여! 영원한 세계, 극락세계는 나무나 또는 땅이나 모두가 다 광명으로 이루어져있는 행복스러운 세계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헤어지지 않는 세계입니다. 극락세계의 참 이름은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또는 일체중생의 참 이름도 역시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지장보살이고 문수보살입니다. 극락세계의 대명사, 극락세계의 모두를 합한 이름이 아미타불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를 생각하시고, 또는 극락세계의 참 이름인 아미타불을 일념으로 외우신다고 생각할 때는 영가들은 한 생각 가운데 그냥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유가족, 친지들이시여! 지금 어두운 길을 빠져나가신 영가를 위한 가장 좋은 공덕은 이와 같이 재를 모셔 부처님 법문으로 해서 극락세계의 길을 가시도록 천도해드리고 안내해 드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가는 가르침입니다. ‘나’라는 것에 집착을 내지 말고, ‘나’라는 것에 이기심을 내지 말고, ‘나’라는 이 몸뚱아리 때문에 한 동안 살다 허물어지고 마는 거품 같은 몸뚱아리 때문에 집착을 내지 말고, 탐욕심을 부리지 말고 또는 어떠한 경우도 우리가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또는 얻는 것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해서 성내는 마음, 그러한 마음을 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은 더욱 더 굳어지고 오염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더욱 더 오염되고 몸도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업장業障, 우리의 죄가 더욱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본래 고향인 극락세계에서, 아미타불 그 자리에서 더욱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 성내면 성낸 만치, 한 번 탐욕심을 부리면 부린 만치, 나쁜 걸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내면 낸 만치, 우리 마음도 어두워지고 몸도 어두워집니다.

 

성자의 말씀은 조금도 거짓말이 없습니다. 석가나 예수나 공자나 노자나 그런 분들이 무슨 필요로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살아있는 자기 행복을 위해서나 오늘 재를 받으시는 영가를 위해서나 부처님을 생각하고, 극락세계를 생각하고 한 생각도 생각을 놓치지 말으시고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생각하시는 것이 돌아가신 어버이를 위해서 가장 지극한 최상의 효심인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를 생각하시고 아미타불을 생각하시고 한 생각에 최상의 행복, 우리가 필경 돌아가야 할 고향자리로 왕생하시길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1990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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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천도법어

 

 

부처님 말씀 중에 ‘영겁회귀永劫回歸’라는 귀중한 금언金言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이나 또는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나 영겁회귀라 하는 소중한 금언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어느 것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두가 다 순간 찰나찰나 변화무상해서 종단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종단에는 다 하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 하나의 자리가 무엇인가?’ 하나의 자리가 바로 대총상법문대총상법문 자리입니다. 그럼 대총상법문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가? 대총상법문이란 것은 바로 우리의 자성自性, 우리 인간의 본성 자리이자 우주의 본성 자리가 대총상법문 자리입니다. 마명馬鳴대사의『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심진여心眞如시대총상법문체是大總相法門體하라 ‘심진여心眞如’라, ‘마음 심자 ‘참 진자 ‘같을 여자 우리 마음 바탕인 진여, 이것이 바로 모든 만법의 기본적인 본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법을 말할 때 어떤 때는 그때그때 법의 줄거리를 그냥 잊어버리고서 법의 상대유한적인 상을 많이 말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더욱 더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그래서 꼭 본체를 안 여읜다는,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부처님 법을 말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보가 너무 적으면 장사도 잘못 하고 공부도 암중모색하는 그런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현대는 아시는 바와 같이 정보의 홍수시대 아닙니까. 정보의 홍수시대에 우리가 정보를 적당히 처리를 못 하면 우리 마음이 항상 산란스럽고 혼란스러워서 스트레스를 도저히 해소시킬 길이 없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서구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200년 동안이나 산업사화가 계속 되어서 물질생활은 상당히 편리하고 풍요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보의 홍수라 하는 우리가 바라지 않는 것이 이루어져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도 정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정보를 적당히 소통시키고 정화를 시키는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부처님 법 같은 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우주에 홍수같이 밀려 내려오는 그런 정보를 정화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간적인 가르침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대유한적인 복잡한 가르침입니다. 하나의 상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본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본체를 여의지 않는 이것이 아까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총상법문입니다. 이른바 진여의 불성이 바로 본체란 말입니다. 『육조단경六祖』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아소설법我所說法불리자성不離自性’ ‘내가 지금 설한 법문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니 불’자, ‘떠날 리자,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을 떠난 것은 상대적인 말씀이란 말입니다. 상대적인 말이란 것은 우리를 더욱 좁게 만듭니다.

 

‘자성’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가 자성에 대해서 특히 명심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성’이란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육조혜능 스님께서는 『육조단경』에서 ‘자성’이라는 말씀을 백 번도 더 했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자성’이라는 말씀을 더러 많이 들으십니다. ‘자성’이라는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란 말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모두가 본래 성품자리는 자성입니다. 자성을 또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자, ‘불성’이라는 말이나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自性’이라는 말이나 똑 같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무명無明 가운데, 무명의 그 중요한 근원이 무엇인가? 우리 중생이 무지하기 때문에 사물의 본래면목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이나 저것을 자꾸 분할을 시킨다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일원적인 진리인데 우리 중생들은 일원적인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둘로 나누어 보고 셋으로 나누어서 보고 이와 같이 구분하고 분할한단 말입니다. 제가 허두에 ‘영겁회귀’라는 말씀을 했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본래로 자성이라 하는 청정미묘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어디로 갈 것인가? 다른 데로 가지 않고서 바로 자성으로 돌아갑니다. 자성에서 왔다 자성으로 돌아갑니다. 현대기계문명이라든가 그런 상대적인 가르침과 우리 부처님 가르침과의 차이는 그 모든 존재를 하나의 진리로 보는 그런 원만 무결한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이렇게 저렇게 구분해서 보는 가르침은 과학이라든가 다른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인간 존재가 미처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나 자성은 본래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서 예지叡智가 발동합니다. 예란 ‘슬기로울 예자 ‘지혜 지’자 예지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한테나 미처 계발은 못 되었다 하더라도 예지는 항상 조금도 흠결이 없이 갖추어있습니다.

 

사실은 예수 같은 분도 부처님 가르침같이 원대한 말씀을 못 했다 하더라도 좋은 말씀은 많이 했습니다. 복음 성서에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 그러면 무엇이든 그대에게 갖추어지리라.” 이런 것도 우리 불교에서 “자성을 깨달으면, 본래면목을 깨달으면 모두가 다 부처가 된다.”는 말씀이나 흡사한 말씀입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같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사람과 사귄다 하더라도 ‘사람과 화해하는 것이 우주에 맞고 불교에 맞는 도리가 아닌가.’ 생각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과, ‘우리가 본래로 저 사람이나 나나 모두가 다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하고서 이웃과 사귀는 것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주위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한 이웃이 있다고 합시다. 이웃을 볼 때에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까 그냥 보통 생각에서는 아무리 친하게 사귀려고 해도 사귀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논리적으로 ‘저 사람도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똑같은 진여불성을, 그 본래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은 다 뿌리가 똑같단 말입니다. ‘생명의 뿌리가 똑같다.’ 고 생각할 때는 저 사람한테 함부로 하면 생명의 뿌리가 똑같기 때문에 나한테도 그냥 해가 온단 말입니다. 그 반대로 저 사람한테 우리가 용납을 하고 관대하다고 생각할 때는 나한테도 그냥 그대로 복덕이 돌아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이라 하면 달마스님께서 ‘문자를 배격하고서 오직 마음만 깨닫는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통 가르침을 받드신 조사님들은 절대로 하나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법이 본래로 원융무애하고 또는 한결같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 진여불성을 떠나지 않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신 법문도 여러 가지 법문이 많이 있으나 보통『소실육문少室六門 』에서 여섯 문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어요. 그런 가운데 후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고증을 받아가지고서 ‘『소실육문』 가운데서 두 가지는 달마스님이 했으나 네 가지는 달마스님 법문이 아니다.’ 이렇게도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달마스님의 두 가지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을 때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종교를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종교란 것은 우리 마음을 평온히 하고 모든 사람끼리 서로 화해하고 더불어서 영원한, 자성 청정한 진리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인데,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마음이 편안치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마음이 편안한 안심법문이 중요한가.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흔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깊이 느끼시고 명심해서 그렇게 말하는 분들은 많지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정말로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을 논할 수가 없고 우리 마음밖에 부처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본래 부처입니다. 나 같이 별스럽지 않은 그런 마음이 어떻게 부처라고 할 것인가.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 범부중생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육조단경』에서도 또 말씀했습니다만, 우리 마음, 바로 이것이 우리 자성인데, 우리 자성 가운데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에 본래로 포함되어 있는 모든 불성 지혜공덕이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입니다. 그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모양을 나투고 또는 변화하는 그러한 차원에서는 천백억화신불千百億化입니다. 즉, 우리 마음 가운데에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삼신이 원만히 들어있습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우주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우주생명과 더불어서 둘이 아닌, 법신이 온전히 다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또는 그 가운데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는 생명과 또는 다시없는 행복스러운 극락의 행복과 또는 신통자재하는 대아大我라, 이른바 삼명육통明六通을 다 갖출 수가 있고 만덕을 갖춘 것이 우리 마음과 관계되어 있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의 본체는 번뇌가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청정이란 말입니다. ‘때가 끼었다, 때가 안 끼었다.’ 그런 것은 우리 중생이 봐서 그런 것이지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사실은 때가 낄래야 낄 수가 없습니다. 도둑질을 많이 해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만한 그런 죄를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사실은 오염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잘못 생각해서 자승자박이라, 스스로 자기 어리석음에 묶여서 분노가 되고 내가 나쁜 놈이다 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성, 공간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금생에 잘못 살아서 한도 끝도 없이 오랫동안 지옥고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청정한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 가운데는 부처님의 청정법신이 그대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라 그 자리는 지혜, 행복, 자비, 능력이 다 들어있습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분은 대천재라 불렸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될 것인가?’ 이렇게 조금도 의심을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슈바이처 같은 분은 아프리카밀림의 성자이지 않습니까. 의사인 동시에 철학자요, 신학자요, 대음악가라고 합니다. ‘그런 천재는 잘나고 나는 대체로 무엇인가?’ 이렇게 비교를 해 볼 때는 한심스럽겠지요. 그러나 아인슈타인이나 슈바이처나 또는 성인이라고 하는 간디나 우리나 마음자리는 똑 같습니다. 조금도 흠절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자리나, 예수 마음이나, 달마스님 마음이나 마음의 본바탕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할 일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겁회귀永劫回歸라. 우리는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다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가 되어버리면 또 어떨 것인가?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중생의 공업력共業力 따라서 텅텅 빈 그런 공겁空劫으로 부터서 다시 우주가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성겁成劫이라, 성겁이 되면 그때는 여러 가지 동물이나 식물이나 존재가 의지해서 산다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겁住劫이라, 그럼 차근차근 찌꺼기가 생깁니다. 물질이란 것은 오랫동안 되다보면 불가역에너지라, 이른바 다시 활용할 수 없는 에너지로 화한단 말입니다. 그 에너지가 찌꺼기가 자꾸만 쌓이면 나중에는 그것이 산화되어서 불이 난단 말입니다. 괴겁壞劫이라, 우주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파괴가 됩니다. 파괴가 된 뒤에 물질은 허공무물虛空無物이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심식心識은 남아 있습니다. 무색계 중생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그 무색계 중생이 텅텅 빈 공겁세계에서 아직은 중생이니까 ‘좋다, 싫다.’ 하는 그런 마음이 있겠지요. ‘좋다, 싫다,’ 하는 그런 마음, 그런 에너지가 상호작용 되어가지고서 다시 우주를 형성합니다. 그럼 다시 텅텅 빈 공겁에서 우주가 성겁이 되고 그럼 또 중생이 살고 또 다시 파괴되고 텅텅 빈 우주가 되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도 역시 영겁회귀 합니다. 우주 존재가 바로 텅텅 비어버린 다음 다시 이루어지고 다시 모든 존재가 살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역시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꼭 부처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어가는 하나의 나그네 길에 있습니다.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정보의 홍수 가운데서 부처님 가르침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지를 모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것저것 알기는 많이 알지만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인간이 할 일이 뭐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다행히 부처님 가르침을 알기에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모든 것이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다 환상이나 같단 말입니다. 있다는 것이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분명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있지 않은 것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있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제법공 도리를 몇 십번, 몇 백번 들으셨겠지요. 오온개공五蘊皆空 이라, 오온개공도 물질이라는 것은 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도 변하지 않고서 변화무상한 즉, 다시 어려운 말로 하면 공간성, 시간성이 없단 말입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공간성이 있고 시간성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인연생의 법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은 시간성, 공간성이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여!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우리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본래는 태어남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한데, 본래로 우리 생명의 본바탕인 것이기 때문에 거품 같은 모양으로 해서 이런 사대색신四大色身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멸본무멸滅本無滅이라, 이 육신六身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다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자체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불생불멸하는 생명의 존재는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해서 영원히 존재합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를 인격화 시킬 때 아미타불이요, 약사여래불이요,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불생불멸한 영원한 생명이니까 무생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아미타불이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라, 영원한 생명이란 뜻입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아미타불에 갖추어져 있는 모든 공덕이 끝도 갓도 없이 많다는 말입니다. 또 광명무량光明無量이라, 진리의 광명이란 것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내가 생명이거니 내 생명의 본고향 자리가 바로 법신불입니다. 바로 영원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바로 우주생명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생명이니까 훨씬 크고 내 마음자리는 아주 왜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질 같으면 비교가 되겠지만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은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다 들어가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다 들어가고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어서 오직 하나의 진리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은 참 복덕이 많습니다. 해인사 주지스님은 아주 덕이 높으신 스님이시고 염불도 아주 잘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침에 와서 보니까 주지스님 염불소리가 도량에 쩌렁쩌렁 울려서 저도 그냥 환희심이 났습니다. 영가들도 춤을 추면서 극락세계에 가게 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니까 ‘영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존재가 허망虛妄 무상無常하지만 이와 같이 존재의 뜻이, 영혼이 우리 중생의 제한된 육안肉眼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안天眼이라든가 불안佛眼이라든가 법안法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인간 모양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생명인데 그 생명이 갈 곳을 잘 모르면 이른바 중음中陰에 오랫동안 헤매는 것이고 갈 곳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혼연히 올라가는 것입니다. 극락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 따지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들한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권유하는 권선징악의 방편이지 극락이 어디 있을 것인가? 천상도 마찬가지 아닌가? 천상도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우리 인간도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하면 다 무상이라, 꿈같은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대로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천상도 천상세계도 다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란 것은 생명자체가 본래의 생명에 안주하는 자기고향에 돌아가는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태어난 분들은 모두가 다 광명의 몸입니다.

 

‘극락이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을 근원적으로 따지는 사람들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열심히 보시면 부처님께서 어떻게 극락세계를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이 생길 줄로 믿습니다.

 

극락은 분명히 우리가 생명의 본고향에 돌아가는 곳입니다. 진여불성의 자리에 돌아가는 그러한 성자의 영혼이 안주하는 곳이 극락입니다. 이른바 영생의 고향이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극락에서 쉬다가 다시 중생세계로 돌아온다고 할 적에 중생들이 불쌍해서 그 자리에서 원력을 세워서 중생계로 태어나기도 하고 천상에 내려오기도 하고 지옥도 가고 그런 것입니다. 진여불성이 되어 온갖 인간고뇌가 없고 오직 행복으로 존재하는 그런 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감회에 불과한 그런 허무의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광명을 몸으로 하고 우주를 몸으로 한, 그런 자리는 물질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순수생명자리이기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오늘 인연 따라서 모이신 모든 불자들이여! 저 밖에 계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법이 얼마나 수승하면 아직도 싸늘한 날씨인데 추운 곳에 앉아 계신다고 생각할 때 송구스럽고 한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부처님 법은 대총상법문이라, 모든 법을 다 포섭해 있습니다. 과학이나 무엇이나 부처님 법안에는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과학 자체가 전문 과학이 되어서 우리가 여러모로 편리를 많이 봅니다만 차곡차곡 가면 갈수록 우리 부처님 법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의 본바탕, 이것은 다 허무한 것이란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상 자체는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대물리학이 증명합니다. 어떻게 증명하는가? 하이덴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라, 이것은 그 어느 존재 어느 미세한 물체에 있어서도 그 위치와 운동을 동시에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측정이 안 되니까 불확정성의 원리라, 물질이 가장 미세하게 되면 사실은 증명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자나 양자나 그런 것도 항상 그대로 고요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상호작용이 되어서 ‘이것이 되었다, 저것이 되었다’ 합니다. 금방금방 그러한 소립자는 그대그때 사라지게 됩니다.

 

역시 현대과학 자체가 ‘물질이란 것도 비어있구나, 본래 허망하구나,’ 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 법의 제법공諸法空 자리를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다만 현대 과학이 물질이란 것은 공이 아닌 생명 그 자리, 생명 본래 자리, 진여불성 자리라는 것을 알 턱이 없습니다. 어째서 모르는 것인가 하면 물질이 아니니까 측정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마음이 바로 부처님 자체입니다. 우리 마음이 일체가 바로 청정법신이요, 모든 지혜, 자비, 공덕, 행복 이런 모든 것을 갖춘 즉 말하자면 원만보신입니다. 모든 행동과 모든 작용과 모든 모양 이런 것이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입니다. 이 삼신三身이 우리한테 온전히 다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삼신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안 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려는 것입니다. ‘일체중생一體中生 개유불성皆有佛性, 일체중생一體中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두가 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꼭 반드시 단정적으로 부처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영가들이여! 그 어두운 중음세계에 헤매지 마시고 부처님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아서 영원히 극락세계에서 안주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많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2001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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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천진암 천도법어

 

 

제법 추운 날씨에 밖에 계시게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살다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생활을 본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복잡다단한 생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뭐라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사生死문제,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대체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인가?’ 하는 삶의 정의 문제 또는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죽음 문제, ‘죽어서 가는 곳은 대체로 어떤 곳인가?’ ‘죽은 뒤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는 생사대사生死大事라, 석가모니가 나오신 것이나 또는 다른 도인이 나오신 것이나 모두가 다 생사대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오셨단 말입니다. 오늘은 3년 지장기도 회향일입니다. ‘생사대사라 하는 인간의 큰 문제와 지장기도를 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런 것에 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을 대체로 구분해보면 어두운 생활과 밝은 생활이 있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사는 세계는 역시 어두운 세계와 밝은 세계가 있습니다. 어두운 세계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유명계幽冥界 ’라 ‘그윽할 유자’, 어두울 명자‘ 어두운 세계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밝은 세계가 있습니다.

 

어두운 세계는 어떤 곳인가 하면 우리 중생이 자기 인생이나 또는 모든 존재의 참다운 본성을 모른다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모릅니다. 그래서 ‘나 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주는 무엇인가?’ 그런 원인을 모른다 말입니다. 원인을 모르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말도 바르게, 이치에 맞게, 도리에 맞게 못할 것이고 행동도 또 바른 행동이 나오기가 어렵겠죠. 그러한 자기 인생이나 또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근본 도리를 모르는 세계는 어두운 세계, 유명세계입니다.

 

그에 반해서 밝은 세계는 한문 투로 말하면 광명세계光明世界가 되겠지요. 지장보살님은 어두운 세계를 구제하는 이른바 유명교주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지장보살님을 오늘 청해서 여기에 인연 깊은 영혼들뿐만 아니라, 법계法界라 하는 것은 온 우주를 말하는 것인데 법계의 모든 유주무주有住無住영혼들을 천도하는 법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그렇게 헤매서 어두운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인간의 본래 생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자기를 모른단 말입니다. 참 자기라 하는 본래면목을 조금 어려운 불교말로 하면 그때는 천진불天眞佛이라, 천진자성天眞自性이란 말을 씁니다. 영가 현각스님이라, 그 분은 6조 혜능스님한테서 법을 받은 위대한 스님입니다. 영가 현각스님이 지은 증도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 가운데서 ‘법신각료法身覺了 무일물無一物’이라, 법신法身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그때는 ‘무일물’이라, 물질이라는 것은 없단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없다.’ 는 그 말이 굉장히 엄청난 말씀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분명히 있고 또는 산하대지에 산천초목이 있는 것인데 어째서 ‘물질이 없다.’ 하는 것인가? 물질은 분명히 있는데 잘 닦아서 본래면목을 훤히 아는 그런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법신각료 무일물’이라, 법신을 깨달아 놓고 보면 그때는 물질은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없는 그 자리가 그냥 없는 허망한 자리가 아니라, ‘본원자성천진불本源自性天眞佛’이라, 사람이나 일체존재의 모든 그런 끄트머리의 본 성품은 천진불天眞佛이라, 조금도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운 모든 공덕을 갖춘 부처란 말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장보살님은 그러한 어두운 세계에서 헤매는 중생을 구제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자기의 본래면목을 못 깨달았으면 어두운 세계입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 하는 갔다왔다하는 육도六道중에 저 밑은 지옥 아닙니까. 가장 컴컴한 세계, 가장 번뇌가 무거운 세계가 지옥 아닙니까. 좀 나아지면 그때는 아귀라, 아귀는 귀신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천도하는 그러한 존재들은 보통 다 아귀계입니다. 어두운 세계에는 그런 중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어두운 세계 아귀계라, 조금 덜 어두우면 축생계라, 그 다음에는 아수라세계, 아수라세계는 싸움을 좋아한단 말입니다. 지금 같이 서로 분열하고 서로 투쟁하고 이런 때는 아수라세계가 굉장히 극성을 부린단 말입니다. 아수라세계의 그런 기운이 범람하니까 이와 같이 싸우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광명세계로 나아가면 그때는 인간계라, 그 다음은 하늘세계, 하늘세계라 하는 것은 우리 불교적인 의미에서 풀이하면 하늘이라는 뜻은 바로 광명이란 뜻입니다. 빛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중생의 번뇌가 좀 엷어져서 어둠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더 나아가면 그때는 성문聖聞의 세계로 우주의 본성을 그때는 안단 말입니다. 알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다 알지는 못했단 말입니다. 더 올라가면 연각緣覺세계, 더 올라가면 보살菩薩세계라, 가장 끄트머리 광명자체가 되어버리는 생명이나 부처님한테 의지하는 환경이나 모두가 다 광명정토光明淨土라, 광명세계가 되어버리는 그 자리가 부처란 말입니다.

 

이러한 광명자체가 되어버리는 생명자체의 본래면목자리,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진한 꾸밈도 없고 번뇌의 때가 조금도 안 묻은 그대로의 본래세계가 부처님세계란 말입니다. 부처님세계는 바로 극락세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은 그러한 본래면목자리인, 본래천진부처자리인 그런 불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때는 어두운세계가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성자가 되어서 훤히 알아버리면 사실은 지장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지장천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자체가 성자가 못되어 놓으면 아직은 어두운 세계에 있기 때문에 지장천도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어두운 세계라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분상에서 중생이 잘 못 봐서 어두운 것이고, 깨달은 부처님 분상에서 생각할 때는 어두운 세계도 사실은 어두움이 깔려있지 않습니다.

 

현대는 그렁저렁 살 때가 아닙니다. 상당히 복잡한 때라서 우리가 먼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두운 세계는 그냥 어두움만 깔려있어서 조금도 광명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두운 세계에 주눅들어가지고서 밝은 지혜가 없는 것이니까 어둡게 보는 것이지, 비록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장 못되고 어두운 지옥이 있고 또는 아귀가 있고, 축생이 있고, 아수라가 있고 또는 그렁저렁 하는 인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버릇이 되어가지고서 미처 광명세계를 몰라 그렇지 정말로 광명세계가 되어버리면 부처님뿐입니다. 성자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도 훤히 빛나고, 아귀도 훤히 빛나고, 축생계도 훤히 빛나고,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세계도 싸우는 그대로 훤히 빛나있고, 인간도 훤히 빛납니다. 그런 도리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의 물이 기온이 낮아 얼어서 얼음이 된다 말입니다. 얼음이 되고, 기온이 높아져 녹아서 물이 되고, 다시 열을 가해서 수증기가 되고 말입니다. 다시 구름이 되어 올라가서 물방울이 되고, 이렇게 가지가지로 모양은 변한다 하더라도 물이라 하는 산소와 수소가 합해서 된 성분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천지만유의 근본성품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만이 실상實相이고 실존이기 때문에 우주의 본바탕인, 실상인 부처님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지옥도 되고 또는 아귀도 되고, 축생도 되고 이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부처라는 그 자리는 조금도 변질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의 수분이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고 또는 얼음이 된다 하더라도 수분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인생이나 우주의 본래면목인 부처자리, 부처님이라는 성품,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그때는 불성, 부처님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나쁜 버릇을 붙인단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서 불성만 있는, 다시 말하자면 물질은 조금도 없이 광명만 존재하는 광명정토, 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다시 광명 그 자체에는 불성으로서 무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다시 이것이 오랜 시간이 경과 되면 다시 우주가 형성 됩니다. 형성이 되면 또 그 자리에서 중생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생이 나오면, 그 중생들이 그냥 제한이 없이 나온다면 모르지만 제한을 받는단 말입니다. 제한을 받으면 우리는 제한을 받은지라 본래 불성자리를 그때는 제대로 못 봅니다.

 

사람으로 생겨나버리면 그때는 사람으로 제한되어 버리니까 가장 시초야 부처님이지만 이렇게 저렇게 순환과정에서 우주가 텅 빈 광명자리에서 성겁成劫이 되고, 형체가 이루어지고 또는 중생이 살고 그런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아서 각 중생이 여러 가지 차이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래 놓으면 자기 본래면목 자리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한데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이요 또는 아귀요, 축생이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태어나서 한 번 버릇되어 놓으면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또는 성자 같은 분들이 안 나오시면 우리가 절대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나면 인간만치 좋은 곳에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고 그렇게 하다가 다시 죽어지면 또 인간으로 된단 말입니다. 또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우리가 본래 선근이 깊지 못해 가지고서 나쁜 일을 많이 한단 말입니다. 아주 표독스럽단 말입니다. 표독스러우면 표독스러운 그런 업장에 묻혀서 그때는 지옥으로 간단 말입니다. 다른 것에 비례해서 욕심을 많이 부린단 말입니다. 욕심이 지독하게 강하면 그때는 다른 데로 못가고 욕심이라는 그것에 구속당해서 아귀로 간단 말입니다. 또 사리분별을 못해 놓은 그런 어리석은 사슬에 걸려서, 그것에 꽁꽁 묶여서 그때는 축생으로 간단 말입니다. 싸움 좋아하고 투쟁을 잘해 놓으면 그때는 거기에 구속당해서 아수라가 된단 말입니다.

 

사람이 된 것은 그래도 오계五戒라, 다섯 가지 계율은 지켰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인간의 늪에서, 어두운 세계에서 헤어나야 하겠는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은 부처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가 못 되면 그때는 천만년도 헤매는 것입니다. 천만년도 뱅뱅 쳇바퀴 돌듯이 헤맨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런 자리에서 헤어날 것인가.

 

헤어나기 위한, 즉 말하자면 위대한 성인 가운데서 한 분이 지장보살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부처님이라 하면 지장보살님도 계시지만 관세음보살 또 무슨 보살 그런 여러 가지 부처님이나 보살님들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관세음보살님은 어떤 분이고 지장보살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는 의심을 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들은 지장보살님을 외우면 좋은 분들은 ‘지장보살님이 최고다.’ 이렇게 해서 관세음보살님을 몇 십 년 동안 하신 분한테도 ‘그것 말고 지장보살님 외우십시오.’ 이렇게 하는 분도 있단 말입니다.

 

또는 인연이 관음보살님과 깊은 분들은 관음보살님으로 해서 가피加被도 입고, 그런 분한테 ‘지장보살님은 별것 아닙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외우십시오.’ 이렇게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불교가 참 저급한 종교가 되고 맙니다. 그뿐만 아니라 문수보살, 보현보살 같은 보살님 이름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현대적인 불교인들은 마땅히 그런 면에서 회통이라, 이런 보살 저런 보살, 이런 부처님 저런 부처님 명호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통일 원리로 해서 회통시키는 그런 지혜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 대상은 내내야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인데 ‘부처님을 어째서 이렇게 저렇게 많이 부르는 것인가?’ ‘부처님이 따로따로 지장보살님 몸 또는 문수보살님 몸이 따로 있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인가?’ 이래저래 의심을 많이 품습니다. 상당히 불교를 공부 한 분도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편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신 보람으로 모든 보살님, 부처님을 다 통틀어서 모아서 하나로 회통시키는 바른 이해가 꼭 필요합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이른바 우주나 인생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른 생활을 하려고 애씁니다만 바르게 못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 실상을 모른단 말입니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 잘나고 못나고 남녀가 모두 있지 않은가. 마음이야 보이지 않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갖는 무명無明 가운데 가장 못된 무명입니다. 이른바 인간관, ‘인간이 무엇인가?’ 이걸 잘 모른단 말입니다. 이걸 모르니까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 우리 인생의 바른 의미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인간은 물질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이 꽁꽁 얼어서 얼음이 된다 하더라도 얼음 그 자체가 실상이 아니라 얼음의 그 실상은 역시 물이듯이 우리 인간도 우리가 번뇌업장 따라서 이런 몸뚱이를 지녔다 하더라도 인간은 절대로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이것은 다 불성이란 말입니다. 머리카락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불성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불성입니다.

 

인간의 몸뚱이를 분석해 놓으면 내내야 미세한 하나의 원자란 말입니다. 원자 또는 가장 미세한 것은 텅텅 비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제일 미세한 원자라고도 할 수 없는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 산이나 냇이나 모든 존재를 다 분석한 가장 미세한 물질이 내내야 소립자나 원자 아닙니까. 그런 것은 텅텅 비어있는 물질이 아닌 무엇인가의 하나의 파동, 진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 중생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가? 우주의 순수한 생명 그것이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불성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 부처님의 불성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고 진동해서 양성자가 되고 전자도 되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몸뚱이가 대체로 무엇인가? 우리 중생의 제한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남자고 여자고 잘나고 못나고 하더라도 내내야 분석해 놓으면 그때는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란 말입니다. 더 분석하면 그때는 원자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원자가 무엇인가해서 더 분석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의 그야말로 참 광명만 되어버리고 말입니다. 가장 미세한 것은 그야말로 참 광파光波라 또는 광립자라 하나의 광명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광명자체는 무엇인가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인들은 훤히 보는 것입니다. 성자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훤히 우주의 본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견성見性이라, ‘볼 견'자, '성품 성’자 말입니다. 불성을 보기 때문에 견성이란 말입니다. 불성은 무엇인가? 불성은 물질이 아닌 시간이나 공간성이 없는 천지우주의 근본성품을 말합니다. 그런 불성을 본단 말입니다. 불성을 못 보면 그때는 범부인 것이고, 불성을 보면 성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천지우주는 그와 같이 모두가 다 사실은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제가 허두에서 몇 말씀하다 말았습니다만 ‘법신각료法身覺了 무일물無一物’이라, 법신은 우주의 본래모양, 본래실상이 법신인데 법신을 깨달아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일물이라, 물질은 그때는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우리가 많이 씁니다. 그러나 ‘어째서 모두가 마음뿐인가?’ 이렇게 깊이 생각을 잘 못한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정신뿐, 순수한 생명뿐입니다. 물질은 없단 말입니다. 다만 순수 생명이 이렇게 저렇게 진동함으로 해서 상이 보인단 말입니다. 상이 보이니까 중생은 그 상만 봅니다. 법성法性은 못 보고 그 상만 봅니다.

 

불교라는 것은 모두가 상을 떠나서 본성으로 가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어두운 세계가 없단 말입니다. 그때는 유명세계, 어두운 세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본 성품이 불성이기 때문에 항상 훤히 빛나 있단 말입니다.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고, 영원히 시공을 떠나서 빛나있는 그런 영생의 생명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 자리는 조금도 변동 없는 또는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있는 하나의 부처님 생명뿐이기 때문에 또는 그런 불성으로 부터서 일체의 것이 나오기 때문에 잘나고 못나고 또는 재주가 있고 없고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있는 기운입니다. 자비나 지혜나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불성은 영원히 존재하고 또 거기에 들어있는 성품공덕은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그런 공덕들을 한 말로, 한 개념으로 표현을 못합니다.

 

따라서 어두운 세계를 다스리는 그런 부처님 공덕으로 해서 표현할 때는 지장보살인 것이고 또는 자비로운 쪽으로 표현 할 때는 관세음보살이고 또는 지혜로운 면으로 말할 때는 문수보살이고 약이나 또는 의술로 해서 중생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약사여래입니다. 그리고 한 번에 다 몰아서 말할 때는 이른바 총대명사라,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내내야 우주의 근본생명은 하나의 생명인데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알아서 회통을 딱 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가령 지장보살님을 우리가 외운다 하더라도 관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이나 거기에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여기에 촛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광명이 이렇게 있습니다만 이 촛불 빛이나 저 촛불 빛이나 서로 상충이 안 됩니다. 촛불이 이 법당 안에 몇 십 개가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촛불의 광명과 밝음에 대해서 다툼이 없단 말입니다. 불꽃은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같이 다 하나가 되어서 혼연일체가 되어서 그때는 하나의 밝음만 있을 뿐인 것이지, 이 촛불 빛 저 촛불 빛 따로따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천지우주에는 천만번 부처님의 이름을 우리가 외운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그때그때 따로따로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제가 말씀 드린바와 같이 원융무애한 부처님인데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는 것이고 또는 부처님 지혜라는 것은 하늘의 별도 되고 또는 그야말로 태양도 되고 또는 달도 되고 또는 산천초목이 되고 인간이 되고 각 중생이 그 자리에서 나왔으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신통지혜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면 그냥 일시에 천개 만개 부처님 광명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부처님의 모양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차원에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융무애한 하나의 불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바른 이해를 한 후 공부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유주무주의 영가들이여!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이시여!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또는 수라나 인간이나 천상이나, 천상도 아직은 번뇌를 다 끊은 세계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세계만이 참다운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결국 부처님의 세계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一體中개유불성皆有佛性이요 일체중생一體中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은 다 본래생명이 부처거니 마땅히 부처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게으름 부리고 나쁜 짓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종당에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고생고생하고 뱅뱅 돌다가 되겠지요.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우리사회나 모두가 다 혼란스러운 것은 참다운 자기 본성을 모르는데서 온단 말입니다. 본 성품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본 성품은 바로 밝은 것이고 또는 일체 공덕을 갖춘 그런 것이 본 성품이기 때문에 나쁜 말을 할 수 없고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어두운 세계를 떠나서 광명세계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둡다는 것은 다른 것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광명세계뿐인데 다만 우리가 지혜가 없어서 그렇게 못 본단 말입니다. 어두워서 못 봅니다. 따라서 그런 어리석음은 벌써 어두운 것이고, 어리석기 때문에 그때는 내내야 ‘나’를 고집한단 말입니다.

 

바른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원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몸뚱이를 우리가 한계를 세워서 ‘내 몸뚱이 내 몸이요 내 손이요’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잘못 보니까 ‘나’라고 한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리석어서 ‘나’ 라는 한계를 세운 다음에 나한테 좋게 하면 그때는 욕심을 낸단 말입니다. 이 몸뚱이에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고, 이 몸뚱이에 보다 더 옷도 좋게 입고 싶단 말입니다. ‘나’ 라는 관념이 생겨버리면 그때는 나한테 대해서 좋게 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것이 욕심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한테 해로운 것, 내 몸뚱이에 대해서 욕을 한다거나 할 때에 진심瞋心이라, 싫어하는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나’ 라는 생각이 벌써 이와 같이 어두운 생각입니다. 욕심을 내면 낸 만치 더욱더 어두워집니다. 이런 것이 모이고 쌓여서 그때는 더 집착하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이란 말입니다.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마음이 투영되어서 가장 컴컴한 세계가 지옥세계 아닙니까.

 

인간이란 그 보다는 좀 나아서 오계五戒를 지켰기 때문에 인간으로 온 것입니다. 살생을 않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도둑질도 별로 않고, 음란한 짓도 않고 말입니다. 거짓말도 도둑질도 않고 술 같은 것도 맑은 정신으로 덜 먹고 말입니다. 오계는 제법 지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그래도 인간이 되었단 말입니다. 인간이 되었다 하더라도 인간 그 자리에서 참다운 밝은 등불이 없으면 참다운 지혜가 없으면 그때는 다시 인간으로 되는 것이고 또는 잘 못살면 그때는 지옥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밝은 지혜란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너무 옹색한 생각으로 버릇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 라는 관념을 버리기가 어렵지요. 무아無我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기가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분명히 내가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 것인가? 역시 그러한 것은 견성이라, ‘근본성품 자리, 나의 근본도 불성이요, 너의 근본도 불성이요 천지우주가 불성뿐이다.’ 이렇게 딱 되어버린 뒤에는 분명히 무아가 되겠지요. 그러나 못 본 사람들은 아무리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안 보이니까 ‘무아’라 또는 ‘원래 소유가 없어야한다.’ 이런 말을 해도 실감이 잘 안 온다 말입니다. 그러나 안 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진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저 밖에 있는 대밭 너머에 차가 몇 대가 있다고 합시다. 그 차를 본 사람은 ‘차가 있다’고 한단 말입니다. ‘대밭 저쪽에 차가 몇 대가 서 있습니다.’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차가 안 보이는 사람은 ‘차가 없다’고 하겠지요. ‘차가 없다’고 부인 하겠지만 분명히 그 차를 자기 눈으로 보고 와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우리가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똑 같이 부처님께서나 각 도인들은 그런 인생과 우주의 본래성품을 훤히 보신 분이란 말입니다. 보신 분들의 말을 우리가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성인의 말씀을 안 따르면 그때는 고생이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인생고해人生苦海라, 생노병사의 고 또는 기타 가지가지 고생을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렁저렁 삼독심三毒心으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부처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보다 심각한 인생의 그런 고통의 구렁으로 안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가정이나 우리를 어두운 길로 이끌어가는 못된 어리석음 또는 탐욕심 또는 성내는 불끈한 마음 그런 마음을 우리가 떠나지 않고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본 생명도 부처요, 너의 본 생명도 부처요 천지우주가 다 본래로 부처라고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이요, 우리 중생이 바로 못 봐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나쁜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다.’ 이렇게 우리가 지혜로 해서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참다운 화합이나 또는 참다운 행복의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은혜를 『화엄경』에 십종대은十種大恩이라고 풀이 하고 있습니다. 십종대은 가운데서 어떤 은혜가 있는가 하면 ‘은승창렬은隱勝彰劣恩’이라, ‘숨을 은’자, ‘수승할 승’자 말입니다. 창렬이라 ‘나타날 창’자 ‘용렬할 렬’자 말입니다. 좋은 점을 감추고서 나쁜 점을 보이는 은혜란 말입니다. 도둑놈이나 그런 나쁜 사람들은 겉의 상은 비록 나쁘게 보인다 하더라도, 본래는 부처기 때문에 부처의 자리에서는 김가라는 부처, 박가라는 부처, 부처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근본은 똑같단 말입니다.

 

하나의 바닷물에서 천파만파 파도가 나온다 하더라도 똑같은 바닷물이듯이, 부처 가운데서 일체만유의 중생이 나온다 하더라도 같은 부처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눈앞에서 나쁜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상뿐인 것이지 본래가 나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만덕을 갖춘 부처님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상으로 그와 같이 나쁘게 우리한테 보인단 말입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무엇인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안단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아는 것이 불교란 말입니다.

 

불교의 참다운 신앙은 자기가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나나 너나 천지우주의 모든 생명의 본바탕은 부처님이다. 모든 공덕을 갖춘 부처님이다.’ 이렇게 믿는 그것이 불교의 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 믿음이 확실하면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 믿을 신자, 가득할 만滿자, 믿음만 확실하면 그때는 성불하는 것입니다. 참선도 않고 또는 염불도 않더라도 말입니다. 정말로 온전히 믿으면 그때는 성불한단 말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성불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잘나고 못나고 지금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꿈을 깨면 그때는 다 같은 부처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릇이 많기 때문에 금생에 길들여진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고 잘못 말한 버릇, 과거 전생에 우리가 붙인 버릇 그런 버릇 때문에 그렇게 온전히 다 믿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보통 불교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성을 훤히 보는 분이 아니고서는 항상 회의심에 가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불성이 있을 것인가?’ ‘정말로 불성이 빛날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믿음을 자꾸만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님도 한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그렇게 부르면 부르는 만치 그때는 우리 마음이 정화되어 온단 말입니다. ‘명호부사의名號不思義’라 부처님 이름은 모두가 다 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모두가 다 우리 삼독심을 녹이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이 자리에도 염주를 헤아리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모두가 다 한번 헤아리면 한번 헤아리는 대로 업장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먼저 딱 믿고서 화두를 드는 사람들은 화두를 들고, 염불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염불을 하고 또는 주문을 외우는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는 그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 지켰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하면 큰 공덕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 천진암 스님네가 3년 동안 지장보살을 모시듯이, 염불도 기도하려면 부단염불不斷念佛이라, ‘아니 불’자 ‘끈을 단’자 말입니다. 간단이 없이 해야 합니다.

 

어두운 세계에서 헤매는 영가들이시여! 우리는 좋아서 고기를 먹습니다만 고기에는 축생의 탐욕심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으면 그때는 업장 많은 축생의 세포가 우리한테 들어오니 좋을 턱이 있습니까. 고기를 적게 먹어 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말썽 많은 고기를 수입할 필요가 있습니까.

 

오늘 천도를 받는 모든 영가들이시여! 사람이 낳을 때는 생유生有요, 사는 것은 본유本有요, 죽을 때는 사유死有요, 죽어서 가는 데는 중유中有입니다. 그 중유에서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아직 갈 곳을 못가고 헤매는 그런 영가들이여! 축생 영가들이여! 우주에 있는 모든 영가들이여! 바로 생각 한다고 할 때는 그대들의 본 모습도 역시 천진불天眞佛이거니, 부처님의 위없는 법문을 믿고서, 바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온전히 믿음만 가지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그대들이 앉은 그 자리가 바로 훤히 빛나는 광명으로 빛나는 연꽃 연화대蓮花臺로 화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여! 그대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본래는 나와 남이 없고 천지우주가 천차만별로 삼천대천세계가 구분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원융무애한 부처님뿐이거니, 지장보살을 외우나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참다운 염불이라 하는 것은 그 자리를 안 놓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그냥 부처님한테 우리가 기원 드려서 도를 찾는다.’ 그것은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천지우주가 부처님이거니, 우리 중생은 너무나 버릇이 많아놔서 그냥 잊어버린단 말입니다. 그 자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 사부대중이시여! 영가들이시여!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은 모두가 다 우리가 본래면목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운문스님의 똥 마른 막대기라, 소중한 부처님을 똥 마른 막대기라, 달마스님께서 온 뜻은 우리한테 모두가 다 어두운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헤치고서 성불하게 만들기 위해서 왔단 말입니다. 그런 성불하게 만드는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을 묻는데 똥 마른 막대기라 이렇게 대답했단 말입니다. 똥 마른 막대기나 다른 모두가 다 바로 보면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원통한 것은 그와 같이 우리가 어두워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리석은 마음 또는 탐욕심 내는 마음 또는 성내는 마음 이런 마음이 컴컴하니까 이런 것에 가리어서 못 본단 말입니다. 우리 원수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남한테만 탓을 합니다. 물론 정치를 하는 분들은 제도도 바르게 하고 해야 하겠지만 기본적인 원수는 자기한테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본래면목, 천지우주가 부처님인데 부처님을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마음 또는 어리석음을 더욱 깊게 하는 탐욕심, 더욱 깊게 하는 성내는 마음, 이것이 자기 원수입니다. 남을 탓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남을 탓하지 않고 자기한테 있는 어리석음, 탐욕심, 성내는 마음, 그 마음만을 우리가 정화시키고 나간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인간사는 그냥 즉시에 그야말로 광명정토, 영원히 화락한 세계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부대중 또는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내가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나의 본래면목, 우주존재의 본래면목은 천진불天眞佛이라 했습니다. 마땅히 천진불이란 그 말을 꼭 외우셔야 합니다. 천진불이라, 우리 본래면목이 천진불입니다. 아무리 미운자라도 천진불입니다. 천진불임을 믿고서 천진불이 못되게 하는 원수인 어리석은 마음 또는 탐욕심 또는 성내는 마음, 이 마음을 제거해서 영생의 공부에서 염불도 그야말로 부단염불을 간단치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더라도 그지없이 염념불멸念念不滅해서 생각생각에 딴 생각이 못 끼게끔, 그렇게 하염없이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말씀하면 ‘아! 그대 같은 스님들은 할 수가 있지만 우리 재가불자는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재가불자님도 충분히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아내나 자기 남편이나 자기 아들이나 또는 못된 놈이나 말입니다. 지금 먹는 음식이나 바로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아내를 봐도, 아들을 봐도 부처님 말입니다.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다시 인연 따라서 아내의 도리, 남편의 도리, 아버지의 도리들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근본 생각만은 ‘다 부처님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공부해서 꼭 금생에 성불하시기를 바라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지장보살!

나무관세음보살!

                                                                                                  1989년 10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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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 천도법어

 

 

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자연도 우리 인생도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 하나의 진리 이른바 불이법문不二法聞이라, 하나의 진리를 깨달은 분이 이른바 성인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나 공자나 노자나 예수나 마호메트나 그런 성인들은 하나의 진리를 깨달은 분들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인데 하나의 생명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중생이고 범부凡夫인 것입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개인적인 불행이라든가 또는 민족사의 그런 비극이라든가 모두가 다른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의 생명을 모르는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사의 수난 가운데서 그때그때 그 억울하게 산화하신 영혼들, 그러한 영령들의 품은 한은 영령들 개인적인 한인 동시에 우리 민족의 한인 것이고 또는 우리 민족 자체의 무명無明의 소생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 무지 때문에 업을 짓는 개인적인 죄업이 있고 또 공통적으로 우리 인간 자체가 다 같이 짓는 그런 공업共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래가 진리가 둘이 아닌 것인데 둘이라고 생각하고 셋이라고 생각하고 ‘불교만이 옳다’, 또는 ‘기독교만이 옳다’, 또는 ‘노자만이 옳다’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 가운데서는 필연적으로 현대사회의 비극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위신력 또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따라서 이 자리에 나와 계시는 지리산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우리 민족사의 불행과 더불어서 사망하신 영령들이 이 자리에 분명히 계시는 것입니다.

 

영령들이여! 깊이 명심하시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영령들이나 우리 인간이나 모든 생명존재가 그 과정 중에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사람이라 하는 그런 과정에 있는 것이고 또는 영령들은 영령대로 삶의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영령들이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인가? 모든 존재의 본 고향은 천당이고 바로 극락極樂인 것입니다. 표현만 다른 것이지 절대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천당이나 극락이라 하는 것은 영생의 자리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그 인생의 나그네 길에서 또는 영원히 그런 저승에서 헤매다가 필경 돌아가야 할 근본 고향이 바로 천당이고 극락인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특히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영령들이 그러한 여러 가지 업, 또는 공업共業으로 해서 설사 한이 있다 하더라도 한, 이것은 사실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이나 우리 인간이 그때그때 사실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보면 모두가 다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 몸이라 하는 것도 역시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역시 각 원소가 합해서 잠시간 모양을 낸 것이지 실존적으로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이 시간 스쳐지나가는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령들이여! 제 명명대로 못 살다간 그런 한을 절대로 품어서는 안 됩니다. 한을 품는다는 것은 결국 무지에서 옵니다. 자기 몸뚱이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이고 잠시간 인연 따라서 할애된 하나의 허망한 존재에 불과한 것인데 그런 것에 우리가 한을 품고 집착하고 애착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산이나 물이나 공기나 모두가 따로따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도 내 생명과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물도 내 생명과 더불어서 둘이 아닙니다. 우주생명, 우주의 순수한 에너지가 물에 가 있으면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용왕이라 하는 것이고 산에 가 있으면 산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우주의 하나의 생명이 우주의 기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우주의 기가 땅에 가 있으면 지장보살이라 하는 것이고 태양에 가 있으면 관세음보살이라 하는 것이고 별에 가 있으면 묘견보살이라 하는 것이지 따로따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사상, 무슨 주의, 무슨 이데올로기 같은 허상이 아니라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聞 입니다. 진리가 절대로 둘이 아닌, 하나의 법문이란 말입니다.

 

영령들이시여! 모든 한을 없애시고 영령들이 돌아갈 고향인 천당이나 극락세계로 가셔야 영령들이 영생의 행복을 보장 받을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영령들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봉사 하는 것도 영령들이 그 저승이라 하는 방황하는 그런 미혹된 세계를 벗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정성에 사무친 추도사를 해주시고 또는 열화와 같은 기도로 영령들이 보다 빨리 저승길에서 헤매지 않고서 극락세계나 천상에 가도록 까지 기원해 주셨습니다. 대단히 축복스러운 일입니다.

                                                                                                         2001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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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암 천도법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사의不思義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우리 인간 존재가 실존적으로 있다고 생각할 때 마음도 실재합니다. 그와 똑같이 부처님이라는 우리가 숭앙하는 신앙대상도 역시 지금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는 분들은 ‘우리 마음도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실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실존적으로 분명히 있다고 생각할 때 부처님도 분명히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과 부처님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똑같은 생명의 실상實相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 최상의 그런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체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비열하고 가장 위선적인 그것도 역시 우리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잘 쓰면 부처요, 마음 잘 못쓰면 바로 지옥이요, 축생畜生이고, 또는 아수라阿修羅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을 지금 제대로 공부하고 계십니까? 저는 법회 때마다 가끔 인용을 합니다만 그 마하트마간디 같은 성인成人이 기독교를 평할 때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천을 싫어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네들이 예수를 따르지 않으니까 싫어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 불교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부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을 제대로 닮고 있는 것인가? 칠순이 될 때까지 부처님을 의지해서 한 50년 세월동안 지내온 저 같은 사람 역시 ‘부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을 닮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괴무참慙愧無慙합니다. 과거를 생각해 보면 조금씩 애는 썼지만 온전히 부처님을 닮아 보지를 못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궁무진 합니다. 우선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구분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아셔서 소승적인 차원을 떠나서 대승적인 차원으로 우리 마음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소승이고 어떠한 것이 대승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교리체계가 있지만 우선 간단히 한 말씀으로 하면 소승은 부처님을 석가모니부처님으로 한정 짓지만 대승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과거나 현재, 미래 언제나 실존적으로 계시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이른바 법신法身부처님입니다. 소승의 가르침은 법신부처님이란 말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 마음과 부처님은 온전히 한 몫, 한 생명입니다. 내 마음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시간성이나 공간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성이나 공간성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은 내 몸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끝도 갓도 없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생명의 존재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도 자비를 좀 베풀고 남한테 봉사도 좀 하고 자기 가족은 훨씬 더 사랑하고, 자기 이웃에게는 우리가 더 관심을 두고 이런 정도로 연다는 것은 참다운 것은 못됩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이른바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소식을 알아야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 것인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은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도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닮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공덕功德, 무한 공덕이 우리한테도 미치는 것이지 부처님을 닮지 않고서 부처님 공덕이 우리한테 올 수가 없습니다. 법신부처님,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영생불멸하게 나지 않고 죽지 않는 그런 참다운 부처님, 이 부처님은 그냥 영생불멸하는 그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는 만공덕장滿功德藏이라, 헤아릴 수 없는 무수무량의 공덕이 온전히 거기에 다 갖추어 있습니다. 법신부처님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도 역시 그와 같이 한없는 그런 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만 믿으면 그런 마음 공덕功德을 다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마태복음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가 자기 제자들한테 하는 말씀인데 “그대들이 겨자씨만한 신앙심이 있다고 하면 앞에 보이는 산을 보고 저쪽으로 옮겨가라고 하면 틀림없이 옮겨가는 도다.” 이랬단 말입니다. 불자님들 실감이 안 나시지요. 아무리 공부를 한 성자라 하더라도 산을 어떻게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거짓말을 할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법신法身부처님, 불성佛性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마음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몸뚱이라 하는 것은 우리마음의 그런 업식業識 따라서 잠시간 인연으로 합해진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시간성, 공간성이 없는 업식이라 하는 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인 세포가 우리 몸이기 때문에 이것도 사실은 참말로 있다고 보기는 힘든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는데 부처님의 실상實相을 알고 믿어야 우리에게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공덕이 온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실상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믿고 있는 신앙의 대상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합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100% 믿어야 하는 것인데 그 신앙대상의 공덕이 제한된다거나 또는 인격이 온전하지 못하면 참다운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허망虛妄무상無常한 것이 자기생명, 자기 몸뚱이를 다 바친다 하더라도 조금도 회한이 없다 할 정도로 신앙이 되어야 온전한 신앙이 될 것인데, 신앙대상에 대한 그런 공덕을 믿지 못하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많은 영가들을 천도薦度 합니다만, 우리가 잘못하면 부처님 법을 닦는 것을 뒤로 미루고 영가천도에만 매달리는 폐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가들이 모양이 안 보인다 해서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마음이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듯이 영혼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죽어지면 죽어있는 생이라, 이른바 쉬운 말로 하면 저승입니다. 저승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바로 살았으면 지은대로 극락極樂도 가고 또는 십선업十善業을 닦았으면 천상도 가고 또는 오계五戒를 잘 닦았으면 인간으로 다시 인도환생도 되고 하는 것입니다. 오계마저도 제대로 못 닦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자기가 지은대로 분명히 지옥도 가는 것이고 축생畜生도 되는 것이고 또는 아귀餓鬼라 하는 그런 귀신도 되는 것입니다. 현상적인 눈에 보이는 그런 세계만 긍정하는 현대인들은 ‘영가를 천도薦度한다.’ 라고 하면 자칫하면 미신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이것은 미신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시아귀施餓鬼라, ‘베풀 시施’자 아귀는 음식을 구하지만 미처 얻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귀 귀신세계인데, 구하기는 구하지만 얻지를 못하는 그런 고통이 굉장히 크지 않습니까. 이른바 구부득고求不得苦라, 그 구부득고가 우리 중생세계에도 있지만 특히 아귀세계는 더욱 더 치성한 것입니다. 먹고는 싶지만 사람처럼 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귀 목구멍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음식을 넘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애써 구하지만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기 후손들이나 또는 불자님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바치지만 가까스로 냄새만 맡지 먹을 수가 없습니다. 냄새, 그것 역시 부처님법문이 들어가야 이른바 법식法食이라, 비로소 냄새를 맡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귀의 음식이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전쟁에서 죽은 그런 영가들, 또는 돼지 영가, 소 영가, 닭 영가 또는 뱀들의 영가 말입니다. 그런 영가들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계 천변지이天變地異라, 폭풍우가 일어나고 그런 몹쓸 병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도 영가들하고 관계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다 있겠지만 우주의 그런 부조화스런 기류 또는 모든 곤충이나 이른바 병균들도 역시 영가들하고 아주 상당히 깊은 관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영가니까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것이 더 번식이 되더라도 알 길이 없단 말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부처님 법문을 깊이 들으시고 중음계中陰界라 하는 그런 세계를 떠나셔야 합니다. 영가들도 우리 사람의 마음과 똑같이 영가들의 마음도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또는 개나 소나 그런 영가들의 마음도 역시 불심입니다. 우주만유가 불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도리가 불교 술어로 하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법성연기法性緣起라,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란 말입니다. 불심佛心이라 하는 그 한도 끝도 없는 생명의 실체가, 모든 공덕을 갖춘 생명의 실체가 그때그때 자기의 갖추어진 인연 따라서 태양이 되고, 달이 되고, 해가 되고, 인간이 되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란 것은 깊이 들어가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부처님 아니고는 아무 것도 없는 이른바 화엄사상의 화장세계華藏世界라, 화장세계란 특별히 빛나는 어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사는 이렇게 모순으로 차 있고 이렇게 위기일발의 무섭고 어려운 세계 역시 화장세계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눈으로 봐서 제대로 볼 수가 없을 뿐입니다.

 

우리는 복을 짓지 않고 복을 받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복만 지으면, 원인만 지으면 그때는 ‘복불가피福不可彼’라, 복은 피할 수 없이 우리에게 오고야 맙니다. 그런데 우리 행동이 그 반대의 행동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고불가피苦不可彼’라, 인생고를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 인생고를 초래하는 원인인 것인가? 어떠한 것이 우리의 참다운 행복과 아울러서 영생의 행복을 우리한테 보장하는 그런 원인이 될 것인가?’ 이런 것을 아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불자님들 우리 눈에 마음이 안 보여도 분명히 있고 부처님이 안 보여도 부처님이 우주에 충만히 계시듯이 부처님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계가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나 우리 몸에나 또는 공기에나 물에나 어디에나 다 들어 계십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안목이 밝다고 생각할 때는 흙을 보나, 물을 보나, 사물을 보나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입니다. 우리 중생의 업에 가리어서 인간 정도의 업을 짓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한계 있게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밉다’고 해서 꼭 실존적으로 미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영원적인 차원, 그 불성佛性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인데 불성차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자만이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같은 물도 사람이 볼 때는 먹는 물 아닙니까. 거기에 사는 고기가 본 다고 할 때는 고기가 사는 집이란 말입니다. 천상사람들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청정한 유리보배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보실 것인가? 청정한 부처님 안목, 번뇌를 떠나 버린 실상實相을 실상대로 볼 수 있는 부처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존재, 물이나 산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그런 세계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만이 실제 존재하는 실존적인 세계입니다. 또는 그 세계는 이 우주가 형성되기 전에도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는 물질적인 한계가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는 사람의 생사에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이루어지고 또는 중생이 살고 파괴가 되고 또는 텅텅 비어버리는 공겁空劫이 되고 이런 것에도 극락세계라는 참다운 세계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낳지 않고 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른바 무생無生의 세계입니다. 낳지 않는 세계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새삼스럽게 낳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또 그때는 없어질 필요도 없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짤막한데도 그런 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원래 진리란 것은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하지도 않고 덜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염될 것도 없고 오염을 받을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의 가르침을 다 포함해 있습니다. 우리가 금생今生에 부처님 가르침을 믿었다는 것은 얼마나 전생前生에 복을 많이 지었던가 스스로 우리가 반조를 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지금 겪고 있는 이 경제 한파 또는 세계적인 위기상황 또는 무서운 이데올로기 싸움 말입니다. 이러한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인간존재가 바로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바른 가치관, 인생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철학의 부재, 철학의 빈곤이라, 현대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과학만능시대이고 과학으로 해서 우리의 생활이 편리하고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라 하는 것은 형체가 있는 한계, 상대적인 경계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의 근본 본체를 아는 것은 종교뿐입니다. 종교도 부처님 가르침 같은, 아주 궁극적으로 다른 성인들은 부처님처럼 진리당체를 궁극적으로 다 밝히지는 못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하나부터 백까지 모두를 다 훤히 밝게 가르친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그 중음계中陰界라 하는 어두운 세계를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과거 생에 잘못 살아서 원인을 지어서 지금 옥고를 받고 있습니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욕심 때문에 아귀餓鬼라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철학도 못 배우고 과학도 못 배우고 참다운 진리를 못 배웠기 때문에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축생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는 투쟁을 좋아하고 걸핏하면 진심瞋心을 많이 내고 그러한 생활을 한 분들은 틀림없이 아수라阿修羅 세계에서 싸움으로 자기 생명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계시든지 간에 그러한 모든 생명의 근본은 부처님입니다. 지옥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아귀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또는 축생畜生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세계도 근본은 다 부처님입니다. 사람을 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받아서 곧 사형집행이 될 그런 사람들 역시 똑같이 다 본래성품은 부처님입니다. 이런 것을 본래로 다 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사회의 부조화는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관심론觀心論』에서, 『관심론』은 그 전에는 달마達磨스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요즈음은 신수神秀스님의 저작이라 하기도합니다. 달마스님의 말씀이 아닌 신수스님의 말씀이라 해도 모두가 다 진리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약능요심若能了心만덕구비萬德具備”라 제가 풀어서 말씀 드리면 만약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깨닫는다면 만덕萬德이 구비具備라, 만덕을 갖추게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고뇌나 개인적인 그런 몸의 아픔이나 가족적인 그런 갈등이나 우리 민족적인 그런 불행이나 모두가 다 마음을 깨닫는 쪽에 초점을 두고 생활한다고 할 적에는 모두가 다 해소가 됩니다.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 한 점 눈이 녹아내리듯이 해소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우리 생활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어려운 길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이 제일 쉬운 길입니다. 부처님을 애쓰고 찾으려고 몇 십 년 동안 지내온 저 같은 사람도 그때그때 많은 경험도 하고 또는 체험을 해서 실증도 어느 정도는 많이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믿는 것이 제일 쉽고 제일 편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스님 법문에도 ‘안심법문安心法問’이라는 법문이 있어요. 안심법문이라, 부처님법문은 안락법문安樂法問입니다. 참 쉬운 법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란 것은 우주의 법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모두가 다 우주의 법도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의식이 발달된 우리 인간은 우주의 법도대로 잘못 따른단 말입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말도하고 잘못된 행동도 합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고통의 씨앗을 심은 것이니 필연적으로 인생고를 받습니다.

 

우주의 법도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부처님의 계율戒律과 부처님한테다가 마음을 집중시키는 선정禪定말입니다. 또는 ‘우주 자체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느끼는 지혜와 이것이 바로 불교의 정견正見이란 말입니다. 같은 정견도 소승정견과 대승정견의 구분이 있습니다. 소승정견은 그냥 ‘모두가 다 허망虛妄무상無常하다’ ‘이런 저런 것이 인연 따라 낳으니까 이것저것이 허망하고 무상하다’ 그러니까 ‘모두가 다 허망한 공이다’ 이런 정도만 말씀을 했습니다. 허망하고 무상한 것은 사실입니다. 인연 따라 생겨난 인연생의 존재는 모두가 다 허망하고 무상합니다. 실상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내 것이다, 좋다, 궂다’ 하는 생각은 분명히 실상實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은 무상하고 허망하고 결국은 ‘공’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공’이 허망이 아닌 생명의 본체, 이것은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진리’인 동시에 바로 ‘부처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법성法性’이나 ‘주인공’이나 또는 ‘실상’이나 ‘열반’이나 또는 ‘도’나 ‘진리’나 ‘하나님’이나 모두가 다 같은 뜻인데 이런 자리에서는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이것은 인도음인데 ‘광명변조光明邊照’라 번역됩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안 보이듯이 우리 중생은 그 자리가 안 보이는 것이니까, 보이는 것이 다 라고 생각해서 보이는 것 때문에 노예가 된단 말입니다. 불교는 심심미묘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눈이 안 보이는 세계,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긍정하지 않으면 불교가 못 됩니다. 어려우셔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올곧은 정견을 가져야 그래야 부처님한테서 오는 공덕功德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아까 제가 법회 시작하기 전에도 여러분들이 아프고 집안도 잘 안된다고 저한테 호소를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고생이라고 느끼는 것은 사실은 허무한 것입니다.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자취가 없는 것을 우리가 자취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 범부들은 없는 것은 있다고 생각하고 참말로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도리를 그 영가永嘉 현각玄覺스님이 『증도가證道歌』에 여실하게 표현했단 말입니다.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天’이라, 우리 인간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내가 있다고 생각한 이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꿈입니다. 고유한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들, 내 소유인 내 재산,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꿈속의 잠꼬대나 똑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현각스님도 ‘몽리夢裏’, ‘꿈 몽’자, ‘속 리’자,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육취明明六趣’라, 명백히 지옥이고, 아귀고, 축생이고, 인간이고, 아수라고, 천상이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지요.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축생도 있고 또는 천상은 안 보이지만 조금 맑아져서 천안통天眼通을 하면 천상도 보인단 말입니다.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天’이라, 깨달은 뒤에 정말로 우주의 실상實相을 보는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대천無大天’이라, 내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네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하늘에 있는 천체나 달이나 별이나 태양이란 것도 사실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오온五蘊이 화합되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변하고 있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도 세포가 화합되어 변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그 변동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렇게 아셔서 정견正見을 가지셔야 불교를 비로소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견을 가지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고를 떠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의 해탈解脫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냥 재산 좀더 많이 모이고 또는 내 몸이 더 건강한 그런 정도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온전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어지간한 병 같은 것은 사실은 다 물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가 그와 같이 산을 움직일 수가 있다고 정말로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스스로도 신통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몸이 하늘로 솟아오른다고 꼭 믿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위시해서 위대한 도인들이 신통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신통은 외도外道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성공덕佛性功德을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도 훤히 보이고 미래도 훤히 보고 자기 몸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런 무한신통을 온전히 구족원만具足圓滿이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은 존엄스럽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 하찮은 것 때문에 우리 생명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영생으로 비약 할 수 있는 것인데 있지도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낭비를 많이 합니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무아無我의 도리인데 감투인들 어디에 있습니까. 간디 같은 그러한 대 철인, 양심의 표본 같은 그런 분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에 예수를 닮지 않은 크리스천이 좋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한국이나 일본이나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을 닮지 않은 우리 불교인들이 좋게 안 보이겠지요. 바로 살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떠나서 비켜서면 전복되고 말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우주의 도리를 못 따라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불행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가 위기상황을 겪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지어서 우리가 받습니다. 남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남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이런 것도 모두 다 허망한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나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고기 먹지 마십시오. 저번에 어디 가서 보니까 생명나누기 운동을 하는 분들도 역시 고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생명나누기 운동을 하면서도 고기를 먹는단 말입니다. 얼마나 모순이 되겠습니까. 생명나누기 운동, 그냥 ‘산 생명만 조금 보살핀다.’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또 ‘사람한테 우리가 장기를 보시한다.’ 그것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다 똑같은 생명입니다. 근본은 다 부처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과거 전생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르는 개가 과거 전생 어느 때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고기를 우리가 먹는단 말입니다. 죽이기는 남이 죽이고 먹기는 자기가 먹고 얼마나 용렬한 짓입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을 온전히 바치고도 조금도 회한이 없는 그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과거 전생담을 보면 부처님께서 살타 왕자 때 새끼를 아홉이나 낳고 주려서 죽게 된 범한테 조금도 아낌없이 자기 몸을 바쳤단 말입니다. 그 덕에 살타 왕자는 12겁이나, 무려 한 겁도 무량세월인데 12겁이나 빨리 성불成佛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의 몸뚱이를 부처님 법을 위해서 몽땅 바친다고 생각할 때는 그와 같이 몇 겁을 빨리 성불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 아낀다고 그래서 더 건강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기를 먹어서 절대로 살로 안갑니다. 피로 안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려서 돼지 죽이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돼지를 죽일 때 동네가 떠나가도록 까지 아주 원망스러운 소리를 냅니다. 거기에 진심瞋心이나 원망이 얼마나 사무치겠습니까. 그 고기에는 그 원망과 진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돼지는 사람보다 훨씬 더 진화가 더딘 것입니다. 그런 고기가 보다 더 진화된 우리 세포에 들어온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세포가 좋겠습니까. 고기 먹고 싶은 하찮은 버릇은 버리셔야 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주의 궤도에 따라야 합니다. 우주의 도리를 안 따르는 그때는 우주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때는 전복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부처님 법은 영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그러한 법입니다. 영가들이 지금 계시는 중음계中陰界는 괴로운 세계입니다. 구해도 구하지 못하고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세계입니다. 또는 고통이 한도 끝도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의 고통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부처님 말씀을 깊이 새기십시오. 영가들의 본래 생명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 부처님자리를 굳건히 믿고서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신앙이 됩니다. 의심 없이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부처님 공덕功德이 온전히 자기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바른 견해를 가지고서 바른 행동을 취하고서 꼭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는 영생해탈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광명의 세계입니다. 행복만이 있는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우리가 떠나온 고향입니다. 우리 중생은 실향민입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계율戒律은 우리 인간이 성불하기 쉬운 하나의 법도입니다. 그 계율을 떠나면 되겠습니까? 자기가 자기의 행복을 훼손시키면 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 선지식들 말씀을 신수봉행해서 꼭 금생에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의 도리, 누구한테 꿀 것도 없는 부처님 가르침을 깨달아서 영생의 행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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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명사 천도법어

 

궂은 날씨에 오시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 기상 이변 때문에 여러 가지로 우리가 고난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 인생살이 한 세상 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이렇게 일기마저도 불순하니까 더욱 더 고난이 심각해집니다. 사실은 이 일기라 하는 것도 우순풍조雨順風調라, 비도 적당히 오고 바람도 순탄하면 좋을 것인데 이렇게 되지 않아서 우리가 그때그때 살아가는데 장애를 많이 받습니다.

 

사실은 이 바람이나 비나 이런 것도 우리 인간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오존층 파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존층은 태양과 우리 지구와의 사이에 있는 성층권成層圈도 미처 못 가서 하나의 탄산가스라던가 그런 가스로 해서 구성된 구름층입니다. 그런 구름층이 있으니까 태양광선이 지구까지 온다 하더라도 대체로 우리 인간에게 유해한 그런 광선은 다 흡수해 버리고 가리어서 인간에게 유익한 광선만이 오는 것이니까 우리가 이 태양광선을 제대로 받고 삽니다만 만일 오존층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생활에 유해한 그런 광선이 오기 때문에 우리가 지대한 장애를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업사회라 하는 사회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에너지를 소모하다 보면 이른바 이산화탄소 그 탄산가스라 하는 것이 생성되어 차근차근 더 쌓이고 농도가 짙어지는 것 때문에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오존층을 파괴한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태양으로부터 우리한테 무익한 해로운 광선이 올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바람이나 그런 것도 역시 나쁜 영향을 받아 순탄하게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또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인간의 마음도 이 기상관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남을 지독하게 미워한다고 생각할 때는 미워하는 그 마음이 우리가 사는 이 주변 공기를 오염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또 나쁜 쪽으로 이산화탄소보다도 더 독한 쪽으로 우리 공기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또는 그와 동시에 우리가 욕심을 많이 부리는 그런 탐욕심도 역시 우리 분위기, 우리가 사는 공간 세계를 오염시킨단 말입니다. 그런 것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비가 더 많이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야말로 태풍도 불고 이런 것 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맞이하는 여러 가지 그런 자연적인 환경 모두가 다 우리가 스스로 지어서 우리가 도로 되받는단 말입니다. 이심전심以心轉心으로 우리가 남을 지독하게 미워하면 또 그 사람도 우릴 미워하듯이 그런 사람 사람끼리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연과 우리와의 관계도 밀접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함부로 하면 그만치 우리가 더 보복을 받는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오늘 이렇게 영혼 천도薦度를 하시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영혼세계를 잘 모르고 천도 하는 것과 영혼세계에 관해서 그 윤곽이나마 상식적으로 알고 하는 것과는 아주 차이가 많습니다. 이렇게 천도하면서도 영혼이 지금 눈에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관욕灌浴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례적으로 하는 것이지 영혼이 정말 있을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고 우리도 이렇게 천도를 하는 것 아닙니까. 영혼이라 하는 것은 삶의 형태만 우리 인간과 차이가 있는 것이지 생명적인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뚱이가 천만 번 바뀌든, 바뀌어지지않든 영혼자체는 절대로 소멸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실은 우리 영혼은 그대로 영생永生하는 것입니다. 본래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는 도리를 분명히 알면 그때는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하는 그런 법문하고 걸맞은 말씀이 되겠지요. 따라서 죽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금생에 사람이라 하는 인간의 세간적인 인연이 다하면 그때는 죽는단 말입니다. 기계도 쓰다보면 차근차근 노화되어 가지고서 못쓰게 된단 말입니다. 못쓰게 되면 응당 바꿔야 하는 것인데 이 몸뚱이에 의지해 살다 보니까 이제 바꾼다고 생각할 때는 바꾸기가 싫단 말입니다.

 

사람 고생 가운데 죽음이라 하는 고생이 제일 심각한 고생 아닙니까? ‘자기가 죽는다.’ 그 금쪽 같이 아끼는 자기가 죽는단 말입니다. 그 자기 몸을 아끼기 위해서 반지 끼고 별별 옷을 다 입고 말입니다. 어떤 때는 귀에 구멍 뚫어 가지고 귀걸이를 다 걸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 봐야 결국 죽고 만단 말입니다. 자기 몸도 그렇고 자기 아내 몸도 그렇고 자기 남편 몸도 그렇고 자기 아들이나 딸 모두가 결국은 죽고 맙니다. 죽고 말지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허망한 몸뚱이, 바로 전생의 업장 따라서 잘나고 못나게 생긴, 그 몸뚱이만 사라지는 것이지 생명자체는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가령 지금 교통사고를 만나 가지고서 당장에 머리가 깨지고 사지가 찢어지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자체는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자기 생명자체는 자기 몸뚱이가 지금 머리가 깨지고 사지가 찢어지는 그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지, 생명의 본 고향이 어디인지를 안 생명들은 그냥 해매임 없이 갑니다만 보통은 갈 곳을 모릅니다.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저승에서 평생 또 오랫동안 해맬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죽은 다음에는 굉장히 해매는 것입니다. 저승에는 스승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인간 세상이야 스승도 있고 책도 있고 그러니까 배우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그러지만 저승은 그믐 같은 껌껌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길을 모르면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네 동생이나 우리네 아들이나 또 누구네 남편이나 그런 분들이 갑자기 죽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영혼이 갈 곳으로 쉽게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괴로우니까 괴로운 걸 면해줘야 할 것인데, 괴로움을 면해주지 못하면 첫째는 그 영혼이 한없이 심각한 고통을 받는 것이고 동시에 괴로운 영혼들, 방황하는 영혼들이 산사람 근처에서 보통은 자기 가족들 근처에서 오락가락 해매는 것입니다. 해매다 보면 그냥 더러는 스치기도 하고 만지기도 한단 말입니다. 산사람 끼리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면 좋겠지만 죽은 영혼이 우리 몸에 닿아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산사람은 굉장히 시달림을 받습니다. 분명히 아파서 병원에 가서 진찰 해봐도 무슨 병명이 안 나온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프기는 분명히 아프고 그런 때는 틀림없이 영혼이 스쳐가고, 영혼이 만지고 그래서 아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리 형제간이 죽고 이런 경우에는 의무적으로 부처님 법으로 해서 꼭 길을 알려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집안에 영혼들은 천도薦度를 많이 해주고 사람도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천상도 갔겠는데, 그랬으면 그만인 것이지 자주 되풀이 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건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가령 우리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지금 천도도 하고 또 오랜 세월이 되가지고서 인도환생이라, 다른 사람 세상에 태어났다고 합시다. 이러는 경우는 우리가 소박한 생각에서는 ‘태어나시면 그만인 것이지 우리가 뒤에 사람들이 무슨 불공佛供을 모셔드리고 하는 것이 무슨 보람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만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느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수명이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고 재수도 더 많고 적고 병치레도 많이 하고 않고 그러겠지요. 그러는 경우도 우리 후손들이 불공도 해주고 또는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또는 방생도 하고 하여튼 어떻든 간에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생명이라 하는 것은 신비하기 때문에 우리 자손이 좋은 일을 하면 틀림없이 인간 세상에 자기 조상이나 형제가 있던 또는 저 천상에 가 있던 어느 세상에 있던지 간에 틀림없이 거기 가 있는 그 분들이 그만치 우리가 공을 들인 만치 행복을 받는 것입니다. 가피加被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녀들이 지금 미국이나 영국이나 있다 합시다. 그렇게 있다고 생각할 적에 한국에서 그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모시면 가피가 있으니까, 덕이 있으니까 기도를 모시고 하는 것이지 미국이나 어디나 그렇게 멀게 있는 자기 자식들이나 친척들이 아무 도움도 못 받는데 여기서 우리가 한국에서 기도를 모시고 공을 빌고 하겠습니까?

 

염력念力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염력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광파光波도 초속이 30만 킬로미터㎞라, 뻔쩍하는 광명하나에도 그 속도가 일초에 30만 킬로미터㎞입니다.

 

모든 것을 다 만드는 것이 마음입니다. 어떠한 존재나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마음, 네 마음도 둘이 아니라 원래 마음이라는 것은 우주에 가득 찬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입니다.

부처님 성품이라, 법성法性 ‧ 불성佛性 다 같은 뜻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은 우주의 어느 곳에나 언제나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또한 낳고 죽음도 없단 말입니다. 영생불멸하고 상주부동한 그런 생명체가 우주에는 항상 있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지구가 이루어지고 달이 이루어지고 또는 사람이 태어나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뭣 때문에 하는 것인가? 우리 중생들은 지금 겉만 보고 삽니다. 중생은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겉만 보고 삽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 우주의 진여불성이라 하는 부처님 기운에서 이루어진 것이 우주의 모든 만물이란 말입니다. 내 몸이나 네 몸이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산이나 냇이나 하늘에 있는 별이나 모두가 다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순수생명 위에서 인연법因緣法 따라서 이루어지고 또는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고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일은 생명의 본체인 생명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 자리 그 자릴 깨닫는 것이란 말입니다. 기독교나 도교나 또는 유교나 다 그런 것입니다.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잠시간 있다가 스러지는 그러한 모양인 상을 떠나서 그 모든 상의 근본자리인 부처님 자리, 불성자리, 참된 진리자리, 그 자리를 깨닫는 것이 모든 철인이나 성자의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가르침 가운데서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철저하고 가장 투철하고 완벽하고 가장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모든 철인哲人, 성인成人들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하나의 방향으로 허망 무상한 상을 떠나서 본 성품으로 가는 것인데 다른 성인들은 확실히 잘 모르니까 어렴풋이 말도 하고, 또는 공부를 조금 더 한 분들은 더 확실히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조금도 흠절이 없이 원만 무결하게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생명의 근본자리를 밝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치 더 훌륭하고 위대하고, 그 자리에서 멀어지면 멀어진 만치 더 어리석고 어둡고 불행하단 말입니다. 참다운 행복은 그 자리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밝혀야 자기 생명이 무엇인가도 알고 또는 참다운 행복이 있습니다. 자기 생명의 근본도 모르고 고향도 모르고 집도 모르면서 어떻게 자기가 있겠습니까. 참다운 자유나 평등이나 모두가 다 생명의 근본을 밝히는 자리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자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중생들이 애지중지 하는 자기 몸뚱이, 자기 가족 몸뚱이 그것 때문에 탐욕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한단 말입니다. 가장 훌륭한 지혜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지혜라 하는 것은 방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모든 상을 떠나서 천지만유가 본래로 하나다. 본래로 하나의 부처님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라, 반야般若의 지혜란 말입니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다 그런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의 업에 가리운 흐릿한 그런 마음으로 보는 것이니까 잘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근본은 안 보이고서 그냥 현상만 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 못 보는 그런 이른바 가상假相 말입니다. 그게 바로 망상입니다. ‘망상을 얼마만치 많이 떠나는가.’ 이것에 따라서 우리 인생의 가치가 규정됩니다. 양심적인 사람들은 그런 망상, 탐욕심, 분노의 마음 그런 마음을 더 많이 떠날 것이고 흐리멍덩한 사람들은 자기 몸뚱이에 평생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자기 가족 몸뚱이의 평생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 가상을 떠난 그 자리, 실상의 자리를 밝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원 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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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천도법어

 

 

 

오늘 천도를 받으시는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하나님의 믿음과 부처님의 믿음 아래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 모양이 있고 또는 이름이 있는 상대유한적인 세계에서는 모양도 믿음도 차이가 있습니다만 모양과 믿음을 떠난 영원적인 세계에서는 모양도 믿음도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부처님이고 부처님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모든 진리는 영원적인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 부처님입니다. 영가들 가운데는 기독교를 신뢰하는 분도 계시고 부처님을 신뢰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는 종교를 믿지 않는 무종교인도 계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한결같이 우주생명을 근거로 하는 이른바 우주종교 세계종교 이런 차원에서는 모든 종교가 다 하나의 진리로 귀의됩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생차원에서 볼 때는 분명히 죽음도 있고 이별도 있고 그러한 차이가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참다운 진리 세계에서는 죽음은 절대로 없습니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우리 몸뚱이 형상만 있고 인연 따라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는 과거이래에 한 번도 죽어본 적도 없고 또는 종교를 통해서 미래에 영구히 다시 죽지 않습니다. 영생불멸이라는 것은 우리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지금 저승에 계십니다. 길목에 계십니다. 저승이라 하는 것은 오랫동안 머무를 장소가 아닙니다. 영생의 안락安樂을 약속하는 그런 천당세계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잠시간 머물다 가는 어둡고 망망한 세계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비록 현상계에서는 우리 몸뚱이라는 그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모양이 아닌 순수생명 자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생명들은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와 남의 차별이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참다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몸뚱이만을 자기로 생각하고 또는 가상가명假相假名에 지나지 않는 그런 모든 분별시비를 참다운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형상을 떠나서 보는 형이상학적인 근원적인, 궁극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봐서는 일체생명이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중생이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잘못 살아서 지옥도 가고 또는 조금 잘 살아서 인간도 되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옥이나 인간세상이 영원적인 참다운 세계가 아닙니다. 잠시간 지나가는 하나의 길목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방편方便을 떠나서 진실로 말하면 우리 인간존재의 그 각자 마음이 모두가 바로 하나님이요 부처님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분명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바로 느끼지 못하면 우리가 잘못 살아서 끝없이 지옥도 가고 인간존재로 나서 무서운 생로병사 만나고 아프고 늙고 또는 죽는 그러한 한계상황 속에서 인생고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슬퍼할 것도 없고 또는 불안하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인간이 무명無明에 가리어서 분별하고 그러는 것이지 생명자체는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원래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런 영생불멸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차원에서는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이요 부처님입니다. 여러 가지 각 종교에서 방편으로 말씀을 하시지만 어느 성인들이나 말씀의 근원적인 뜻은 다 똑 같습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냥 영가들이 잘못 알고서 무명에 사로잡히면 갈등 없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생로병사를 맛봐야 되는 거지요. 또는 영생의 윤회과정이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잘못 살아서 지옥도 가는 것이고 또 돼지나 소 같이 살아서 분명히 축생畜生으로 전락이 되는 것이고 조금 낫게 살아서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자체도 역시 우리가 영원히 그리워하고 추구할 그런 곳은 못됩니다. 인간도 역시 제행무상諸行無常한 우주의 법칙 따라서 잠시 살다가 가는 하나의 길목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 장차 돌아가실 고향은 천당이요, 극락세계입니다. 천당이나 극락세계는 각 종교의 차별도 없습니다. 오직 그 하나의 진리, 우주적인 진리만을 위하기 때문에 정말 진정한 천당세계 또는 극락세계로 가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영가들은 아직은 중생세계인지라 자기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몸뚱이는 지금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의 몸뚱이도 뜬구름 같이 다 허망한 것입니다. 하물며 그 몸뚱이를 인연 따라서 잠시 버리고서 지금 저승에 계신 영가의 몸뚱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고, 영가가 먹었던 음식이라던가, 또는 영가가 사용했던 재산이라던가, 그런 것도 모두가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 본래적으로 영가의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뚱이도 자기 것이 아닌데 인간세상에서 잠시간 만났던 자기 권속, 자기의 지위 또는 자기의 재산, 이런 것이 참다운 자기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마음을 고요히 해서 깊이 명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우리 생명은 어느 때 언제나 우주에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부처님과 더불어 영가들의 마음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는 우리는 어디에 있으나 다 안락하고 행복스럽고 평온을 느끼게 됩니다만 우리 중생들이 꼭 개별적인 자기 몸뚱이에 국한된 그런 인연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불안스럽고 막막하고 또는 인생의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 차별하는 그런 마음을 버리셔야 됩니다. 그와 동시에 영가들이 지금 계시는 저승세계는 정말로 불안스럽고 잠시간 거쳐 가지 않을 수 없는 어둠의 세계인 것이지 우리가 안식할 그런 세계는 절대로 못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느끼시고 과거에 자기가 쓰던 몸에 대한 애착도 버리시고 또는 사랑하는 권속도 극락세계나 천당 가서 영원으로 만나는 그런 세계에서 만나야 참답게 만나는 것이므로 인간세상에서 만나는 그런 인연들에 대해서 집착을 뿌리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하나님, 부처님 또는 모든 종교들의 근원적인 것은 하나의 자리인 것이고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그 현세에 잘못된 삶을 산 사람들의 마음이라든가 이런 마음도 역시 현세에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근원적인데 있어서는 다 똑같이 하나님이요 부처님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분명히 깨달으셔서 영원히 생명이 없는 그런 세계에 가서 태어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영가천도를 마련해 주신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과 화엄사, 오늘 천도재의 모든 경비를 맡아주신 임창욱 거사님, 박영규 거사님의 공덕에 대해서도 영가를 대신해서 산승의 입장에서 심심한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정말로 유가족 되시는 분들은 가슴이 오죽이나 슬프시겠습니까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에서 만나는 것은 잠시간 만나는 것입니다. 어차피 언젠가 헤어져도 헤어질 것을 인연이 도래해서 금생今生에 비참하게 이별을 하셨다 하더라도 또 영원히 만나는 천당이나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만나는 그런 인연으로 다시 그렇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우선 영가들이 방황하는 저승을 떠나서 극락세계나 천상에 편히 계셔야 할 것이고 또는 남아있는 분들이 정말로 차별이 없는 종교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꾸만 차별을 하니까 인간세상에서 모순이 생기고 서로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본래 없고 모든 생명이 하나의 진리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도 똑같이 하나님으로 보고 부처님같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간세상의 모순이나 갈등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조금도 주저마시고 정말로 환희심을 내십시오. 영가들은 지금 아무 손해가 없습니다. 생명자체가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통해서 죽지 않고 영생을 하는 것이고 지금 행복만이 약속된 천당 극락세계에 영가들은 분명히 가시는 것입니다. 사람 몸이 있으면 그냥 들어 갈 수가 없으나 영가들은 지금 사람 몸이 아닙니다. 사람 몸이 아닌 영가 몸이기 때문에 한 생각 바로 하면 극락세계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지금 사람 몸이 아니어서 그런 총명한 정도가 수승한 것입니다. 한 생각 바꾸셔야 합니다. 한 생각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한 생각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자기의 본래 생명이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사실은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생각은 다 방편적인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우리 생명의 본고향인 천당이나 극락세계에 가셔서 영원의 행복을 느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오늘 이 법회를 마련한 모든 인연들에 대해서 영가를 대신해서 다시금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나무 하나님!

나무아미타불!

나무 유명세계 지장보살마하살!

마하반야바라밀!

 

                                                                                                                  2001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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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타회 천도법어

 

현시대에 있어서 가장 결핍된 분야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철학의 빈곤입니다. 철학이라 하는 것은 순수하게 인과율因果律을 따져 들어가서 ‘가장 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내 생명의 근본뿌리는 무엇인가? 우주의 근본도리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밝혀 아는 것이 철학이란 말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근본뿌리는 모르고서 그냥 겉만 본단 말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세상은 갈등이나 반목이나 불행이 항상 연속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경전에도 “상을 떠나지 못하고 사는 생활은 괴로움이요 또는 가시의 종기”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상만 보고 삽니다. 현상적인 상에만 구속 되어서 사는 생활, 이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괴로움입니다. 천지개고天地皆苦라, 천지가 다 괴로움뿐이란 말입니다. 낳고 죽고 병들고 다 괴로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 중생이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다른 묘방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중생이 잘못 본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상을 떠나는 것은 어떻게 떠나는 것입니까? 우선 자기 존재를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결국은 자기 존재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인데 또는 이 공기가 아니면 내가 살 수 없는 것이고 물이 아니면 살 수 없고 흙이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와 같이 종종무진으로 이렇게 얽히고 저렇게 얽히고 우리 생명이 이와 같이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리 가운데서 한 고리만 떼어버려도 안 됩니다.

 

그러기에 진리라는 것은 우주 가운데 티끌 하나만 없어도 진리가 못 된다 말입니다. ‘나쁜 놈 저놈 때문에 우리가 불행하다. 저놈을 그냥 지구상에서 온전히 소멸을 시켜버려야 되겠다.’ 이래서 우리가 이제 사형선고를 내려 가지고 사형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소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으면 원한을 품은대로 어디 가서 태어난단 말입니다. 생명자체는 영원불멸한 것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생불멸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우주가 모두 다 개별적이 아닌,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현대에 있어서 가장 부족한 것은 ‘무슨 지식이 부족하다. 또는 무슨 재산이 부족하다.’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그 궁극적인 철학, ‘내 생명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우주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하는 철학의 빈곤이란 말입니다. 우리 사회나 가정이나 또 학교나 대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투철하게 생명의 본질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무슨 도덕적인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때는 자기 가장 가까운 인연인 자기 부모한테 함부로 하겠습니까. 형제간에 함부로 하겠습니까.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우리가 생각할 때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만 생각한 사람들은 ‘영가 따위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한번 죽어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자기 스스로를 생각할 때는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내 생명이 어딘가에는 남아있겠지.’하고 기대를 갖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 생명이 본래로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마음, 석가모니 마음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보통은 ‘나는 그렇게 정직하게 살지도 않고 그렁저렁 살았기 때문에 내 마음은 석가모니 마음과 다르지 않은가.’ 이렇게 자기를 비하하기가 쉽지만 우리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지금 현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우리 마음은 순수하고 정다웁고 또는 무한의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나쁜 버릇 때문에 가리어서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지 실상實相의 상태에서는 똑같습니다.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우수한 특징입니다. ‘나는 잘못 살았으니까 내 마음은 그야말로 참 못된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이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모양이 없는 것은 오염시킬래야 오염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나쁜 버릇 때문에 옹고집을 내가지고서 자기 스스로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할 때에 돈오頓悟라, 문득 깨닫는 것 아닙니까. 돈오라, 나쁜 짓도 많이 하고 때 묻은 그런 마음이라고 하면 문득 깨달을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쁜 짓이라는 것도 역시 흔적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모양이라 하는 불교말로는 상이라, 모양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연구를 하십시오. 깊이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모양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잘못 하시면 우리 생활도 역시 깊은 생활이 못됩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같이 여법한 생활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모양, 이것이 본래로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모양이 있지가 않은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자기 정신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본래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 모양이 어째서 있지가 않은 것입니까? 천지우주가 모양 때문에 서로 ‘좋다, 궂다, 싸우고 죽이고’ 하는 것인데 성자들의 그 맑은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백백히 모양은 없는 것입니다. 모양이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승려들이 우리 중생더러 욕심을 내지 않기 위해서 모양이 있는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모양이 없는 것입니까? 아까 인연법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느 것이나 인연 따라서 잠시간 가상假相을 낸단 말입니다.『반야심경』에 있는 법문 아닙니까. 우리 몸뚱이나 우리 몸은 가화합假和合이란 말입니다. 법이 가짜로 임시간 이렇게 모여 있단 말입니다. 오온가합五蘊假合이라, 오온五蘊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반야심경』 해설을 보셨지요. 오온 이것은 물질을 구성한 색인 지地 ‧水 ‧火 ‧ 이라, 물질을 구성한 지 풍과 또는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또는 우리가 응용하고 우리가 분별하고 말입니다. 수水 ‧ 이란 말입니다. 지 풍인 물질과 또는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응용하고 분별 시비하는 그 마음이 모인 것이 내 마음과 몸이란 말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내 몸이나 마음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다 아시지 않습니까. 현대식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것으로 우리 몸뚱이를 구성해 있습니다. 그런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고유하게 있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에너지 기운이 어떻게 진동하는가?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 그것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각 원소가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분석하고 분석해서 더 분석할 수 없는 작은 알갱이가 전자, 중성자, 양성자 그런 것 아닙니까. 전자 그것이 본래로 고유한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정기가, 우주의 기운이 어떻게 지금 움직이고 있는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우주의 정기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그것 따라서 전자라 이름 붙이고 양자라 이름 붙인단 말입니다. 마이너스 기운을 내면 전자고 플러스 기운을 내면 양자란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 모든 물질의 구성은 가장 작은 알맹이가 결국은 따지고 보면 결국 우주정기, 하나의 에너지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에너지란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란 것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있기 때문에 물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에너지는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가짜 상을 낸단 말입니다. 가짜 모양을 낸 것입니다. 그림자 같이 말입니다.

 

항상 말씀드립니다만 이 ‘다 비었다.’는 ‘모양이 본래 없다.’는 소식을 우리가 알기가 어려워서 그때그때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 모양이 분명히 있는데 부처님은 ‘없다’ 했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모양이 없다’는 것을 알아들어야 그래야 비로소 소승을 떠나서 대승이 됩니다. 그걸 모르면 『반야심경』『금강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모르면 그때는 참다운 불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각할 때는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지만물 각 산소, 수소, 철이요, 금이요, 다이아몬드가 있지만 성자들은 근본바탕에서 보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근본뿌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비어 있단 말입니다. 아무리 어려우셔도 이 도리는 꼭 아셔야 됩니다.

그것을 모르면 자기 상을 못 떠나고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자기 몸을 구성한 것이나 우리 마음을 구성한 것이나 오온법五蘊法이 다 비었다고 깨달아야 비로소 인생고를 떠난단 말입니다. 우리 정신이나 우리 몸뚱이나 일체 물질이 비었다는 소식을 모르면 그때는 인생고를 못 떠납니다.

 

불교는 인생고를 떠나는 것입니다. 슬기롭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불교란 말입니다. 무엇이 슬기입니까? 참다운 지혜라는 것은 부처님 지혜, 제법諸法이 공한 도리, 제법이 공한 도리를 모르니까 우리 승가나 속가나 부질없이 분별하고 싸운단 말입니다. 다 비었다는 소식을 알아야 몸도 시원하고 가뿐합니다. 정말로 우리 번뇌의 뿌리가 다 뽑혀서 정말로 확실하게 비었다고 확신이 생기면 우리 몸이 하늘로 뜨는 것입니다. 본래로 빈 것이니 모여서 금이 되고 몸뚱이 되고 했거니 본래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에너지가 무슨 무게가 있습니까. 무게가 없는 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운동함으로 해서 가상假相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가상을 ‘참말로 있다.’고 생각한데서 마음도 무거워지고 몸도 무거워지고 한단 말입니다. 남을 지독하니 미워할 때 우리 몸도 훨씬 무겁습니다. 무게로 재서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 기운이 무겁습니다.

 

정말로 예수의 기적이라든가, 석가모니 삼명육통三命六通 그런 것이 거짓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보다 더 깊은 신앙을 주기위해서 그런 기적을 말하고 부처님 신통을 말했다.’ 이렇게 보통 봅니다. 우리 스님네도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신통神通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함경』은 부처님 육성 같은 초기 경전인데, 아함경 수십 군데에 ‘삼명육통’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하면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간성, 내 마음 자리, 내 마음의 본바탕인 불성佛性자리를 분명히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내 마음 가운데 모든 행복과 모든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밖에서 안 구해도 다 들어있습니다.

 

성인들은 그 자리를 깨달아서 그 자리에 자기 마음이 머물러 있으니까 다른 헛된 짓을 않습니다. 예수가 큰 교회당을 짓고 설법했습니까. 갈릴리 해안에서 그 구차한 사람들과 그 같이 모여 가지고서 베드로나 요한이나 모두가 다 어부 입니다. 이리 저리 다니면서 설법했단 말입니다. 석가모니도 집을 나간 뒤에 팔십 노인이 어디 집에 들어가 돌아갔겠습니까. 나무 밑에서 도를 통하고 동시에 나무 밑에서 가셨단 말입니다. 가장 존귀한 우리 교조가 나무 밑에서 도를 깨닫고 한데서 자고 돌아가실 때도 한데서 낙엽을 깔고 다 떨어진 누더기 걸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절 가지고 싸우겠습니까. 뭘 가지고 싸우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지금은 본질적으로 문제를 생각할 때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살면 절대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병은 가벼운 병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무명無明병이라, 무지無知병입니다. 밝지 못한 병입니다. 어떻게 밝지 않는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그와 같이 난행고행을 해가지고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우주의 실상實相을 그대로 다 깨닫고서 우리한테 말씀해 주셨건만 우리 중생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꼭 쥐꼬리만 한 자기 범부소견 이른바 관견管見이라, 바늘구멍으로 하늘을 보면 다 보이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지금 동굴에 갇힌 어두운 안목으로 삽니다. ‘나요 너요 좋다 궂다’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어두운 동굴에서 어두운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흐리멍덩한 눈으로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이 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절대로 다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다 우리 인간을 마음 편하고 번뇌를 다 해탈하고 참다운 행복으로 인도한단 말입니다.

 

을 쭉쭉 외운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공부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런 상을 떠나면 성자고, 상이 있으면 범부凡夫란 말입니다. 상을 두고서 행복을 구하면 연목구어緣木求魚라, 나무에 올라가서 고기를 구한단 말입니다.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떠나지 않으면 자기 마음의 평화도 없고 지상의 참다운 평화나 어떠한 안락安樂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경전에도 우리가 상을 떠나지 않고서 진리를 구하려고 할 때는 증사작반蒸沙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한단 말입니다. 모래를 삶으면 밥이 되겠습니까. 우리 중생은 그런 모양입니다. 감투를 구하고 황금을 구하고 욕심으로 행복을 구합니다. 모양만 갖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모래를 삶아서 밥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맨날 노력해도 안 됩니다. 유구한 역사가 다 증명하지 않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정말 깊이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한 공식입니다. 한 치도 오류가 없습니다. 상을 떠나면 이것은 참다운 행복과 성자의 길로, 해탈의 길로 가는 것이고 상을 못 떠나면 범부로서 항상 부딪치고 남과 갈등되고 반목되고 합니다. 우리 범부가 어떻게 상을 떠날 것인가? 우리 범부는 상 가운데 사는데 어떻게 상을 떠날 것인가? 그렇게 절대로 낙담을 말으십시오.

 

우리한테는 본래로 불성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하에서 도를 이루셨습니다. 석가모니 당신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산천초목이나 중생이 모두가 다 부처란 말입니다. 요새 지존파 같은 나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석가모니가 보면 어떻게 볼 것인가? 그 나쁜 사람도 역시 겉만 그런 것이지 성자가 본 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뿌리를 못 봅니다. 그 뿌리를 보지 못하니까 상만 내세운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뿌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나쁜 사람이다 해서 사형선고를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실은 불성佛性을 말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적어도 상을 못 떠나는 우리 중생들은 다 공범자입니다. 허물이 더 많고 적고 차이뿐인 것이지 성자가 아닌 한에는 모두가 다 공범자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욕심도 내고 더러는 음욕淫慾도 내고 말입니다.

 

우리 병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골수에 사무쳐있는 무명無明병입니다. ‘남한테 조금 베푼다, 조금 참는다.’ 그런 걸로 해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도덕이 부재不在라, 도덕성은 지금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왜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인가? 인간성을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지키지 말라고 해도 자동적으로 다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어느 누구한테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자연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라 때 무상無相대사는 중국 사천성에 들어가서 그 당시에는 청나라인데 아주 험준한데 들어가서 어떻게 음식을 얻을 수 없단 말입니다. 산중에서 황토를 먹고 살았습니다. 황토에도 영양이 있습니다. 흙도 영양이 있습니다. 공기도 영양이 있습니다. 하물며 물 같은 액체가 영양이 없겠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꼭 무슨 단백질 얼마를 먹고 칼로리 얼마를 섭취하고 그래야만이 건강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인간의 물질관을 고쳐야 됩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선진국으로 가고자해서 발돋움을 합니다. 그러나 너무 먹거리 때문에 힘을 굉장히 낭비 합니다. 지금 미국 같은 곳도 관광지에 가서 보면 음식점이 통 눈에 안 보입니다. 관광지에서 나와서 다른 곳에는 있겠지만 관광지에서는 음식점이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조용하게 그렇게 관광만 즐기고 감상한단 말입니다. 한국 관광지 가면 횟집이고 갈비집이고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로 우리는 우리 몸뚱이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질로 해야 된다고 생각할 때는 행복은 절대로 얻을 수가 없고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제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참선을 해서 우리 마음을 맑히고자 해도 우리 몸뚱이가 맑혀져야지 몸뚱이는 마약도 하고 또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함부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몸뚱이가 정화가 안 됩니다. 마땅히 부처님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매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범부심으로 해서 함부로 모양에 취해서, 모양에 노예가 되어서 살던 것을 돌이켜서 회광반조回光反照라, 다시 속된 흐름을 역류해서 영생해탈의 그런 청정한 흐름에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안에는 약간 무리가 되겠지요. 고기 먹던 사람이 안 먹으면 그것도 약간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뿐입니다. 단식을 안 해본 사람들은 단식을 일주일이나 이주일이나 한 뒤에 그때 소생되는 그 무서운 힘을 느끼지를 잘 못하실 것입니다. ‘생명은 얼마나 먹어야 된다. 칼로리를 얼마나 먹어야 된다.’ 그런 공식만 생각한 사람들은 단식을 일주일이나 이주일이나 한 뒤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솟아나오는 힘을 느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해를 못합니다.

 

이 ‘나’라는 것의 생명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우리 마음의 생명위에 상응되어 이루는 하나의 거품에 불과합니다. 거품 그것 때문에 우리가 너무나 힘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미국 사람들도 보면 5분의 3이 비만 때문에 고생한단 말입니다. 몸이 비만하면 가지가지 병의 원인이 됩니다. 너무 많이 먹었을 겁니다.

 

을 못 떠나면 불자가 아닙니다. 상은 본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한 모양을 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림자 같이 메아리 같이 메아리 그것이 모양이 있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리 몸뚱이도 본질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양이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그림자를 보듯이 잘못 본단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상實相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상假相만 봅니다. 부처님 말씀이니까 그걸 믿고서 자기 스스로 그런 가상을 떠나야 한단 말입니다. 가상을 떠나기 위해서 불경이 있는 것이고, 주문이 있는 것이고, 기도를 모시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이 안 보여도 우리가 지장보살을 열심히 부르지 않습니까. 지장보살은 우리 지구를 축으로 해서 충만해 있는 에너지기운이란 말입니다. 그런 기운 따라서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지장보살만 부르고 관세음보살은 부르지 말 것입니까.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 때문에 지금 사람들은 굉장히 갈등을 많이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몇 십 년 동안 한 사람한테도 ‘지장보살이 좋다’는 말 듣고서 그 사람한테 ‘관세음보살 그만 두고 지장보살 하십시오.’ 합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그 분이 여태까지 생리나 심리에 ‘관세음보살’이 딱 배어있는데 그걸 그만 두고서 ‘지장보살’ 하자니 굉장히 무리가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저는 법문 때마다 말씀을 꼭 드립니다만 부처님 믿는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모양이 없는 세계 아닙니까. 형이상학적인 모양이 전혀 없는, 모양이 없는 생명자체, 생명자체의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자리란 말입니다. 근본의 뿌리자리, 현대 물리학적으로 순수에너지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자린인데 그 자리는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있어야 ‘이것이 뭣이다.’ ‘저것이 뭣이다.’ 그럴 것인데 모양이 없어서 어떻게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만 있고 어디에는 없는 게 아니라 모양이 없기 때문에 천지우주에 두루 해 있습니다. 무량무변無量無邊이라,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두루 해 있는 것이 모양이 없는 우리 마음자리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모양이 없는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님인지라, 그 부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것입니까? 그 부처님 자리는 무한의 그런 공덕功德자리, 일체만덕을 갖춘 자리이기 때문에 그 덕상을 전부 다 헤아려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호가 있고 또는 이름이 있고 자가 있고 하더라도 내내야 그 사람 아닙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 명호도 그 무량무변의 공덕 따라서 모양이 없는 자리를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기 때문에 어떻게 말하나 하나의 부처님을 부른다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지장보살을 구태여 안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왼다 하더라도 천도薦度가 되고 공덕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이른바 총대명사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진리만을 구할 때는 다른 보살이름도 좋습니다만 ‘나무아미타불’을 보통 많이 합니다. 또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할 때는 천지우주의 교주, 부처님의 총대명사가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보통 많이 부르는 것입니다. 또는 참선할 때도 역시 참선을 염불로 하실 때는 나무를 떼버리고서 아미타불 넉자를 화두로 해서 ‘아미타불, 아미타불.......’ 이와 같이 부처님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염불선念佛禪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아까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안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고, 안 보이는 그런 우리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기 때문에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긍정하지 않으면 불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심信心이라,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지 우리 눈에 안 보이니까 우리가 ‘의심한다.’ ‘안 믿는다.’그래 버리면 그때는 바른 신앙이 될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그런 영가나 살아계신 분이나 다 동일생명의, 하나의 생명의 끈에 다 매어져 있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우리 부모님이나 모두가 다 우리생명과 같은 끈으로 같은 생명의 줄로 이어져있습니다. 우리 형편이 좋지 않아 천도를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활이 부처님 앞에 정당하고 신심있고 남한테 베풀고 남하고 화해하고 그런 때는 그만치 화해한 기운, 정당한 기운이 우리 조상들한테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오늘 부처님의 상이 없는 법문, 무상법문無相法門을 듣고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는 그러한 도상道上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나 유명幽冥에 있는 영가들이나 모두가 다 지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중생계에서 영생해탈의 길로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만치 내가 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모양에 집착을 해서 자기 재산 또는 자기 몸뚱이 또는 밉다. 사랑한다 하는 그런 것, 자기 관념 이런 것에 집착되면 집착된 만치 우리는 길을 잘 가지 못하고 한눈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한눈을 팔고 있는 것인가? 않은 것인가? 이것은 상을 두는 것과 안 두는 것의 차이입니다. 상은 본래로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중생이 잘못 봐서 상을 두는 것입니다. 같은 상도 천상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같이 보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정당하다는 것도 천상에서 본다고 할 때는 부당하게 볼 수 있단 말입니다. 초등학생이 옳다고 보는 것을 대학생이 꼭 옳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인간의 그런 성품 차원에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이 꼭 옳지가 않단 말입니다. 성자가 보는 것만이 사실을 사실로 보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성자의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나’라는 상상,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라는 상 또는 ‘우리 생명이 짧다, 길다.’는 상 이런 것이 모두가 다 허망한 상인 것입니다. 우리생명은 본래로 영생불멸한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본래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지 않은 것인데 다만 인연 따라서 업장業障으로 해서 잠시간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지 생명은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근본을 보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모양이 좀 아프면 큰 탈이구나.’ ‘모양이 없어지면 내 생명 전체가 손해구나.’ 이렇게 낙담, 절망할는지 모르겠지만 모양에 애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지금 바로 살았다고 하면 내 목숨이 떠나자마자 즉시에 뒤에 보다 더 나은 좋은 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 믿는 분들은 대체로 가시자마자 훨씬 더 좋은 몸을 받습니다. 따라서 어느 때 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조금도 섭섭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극락세계는 모든 상을 떠난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이 번뇌를 떠나버린 세계입니다. ‘나’라는 것을 떠나보낸 세계입니다. ‘나’라는 관념, ‘너’라는 관념 또는 ‘좋다, 궂다, 밉다, 사랑한다.’ 하는 관념을 떠나버린 세계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극락세계의 땅이나 또는 극락세계의 물이나 극락세계의 나무나 항상 영생불멸한 미묘한 부처님법문을 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극락세계까지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우선 천당만 간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들을 수 없는 음악이 항상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런 것을 듣지 못합니다. 왜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상 때문에 가리어서 못 듣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중생이 ‘나’라는 관념, ‘있다’는 관념, ‘사랑한다’는 관념을 떠나버린다고 생각할 때는 들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오늘 천도법회에 나오신 우리 불자님들! 오늘 지금 법회에 계신 법주, 바라제하신 스님은 굉장히 공부를 잘 하신 스님입니다. 참다운 스님입니다. 영가란 것은 모양이 안 보이는 생명인데, 모양이 안 보이는 그런 생명이기 때문에 같은 염불소리도 굉장히 청아하고 정말로 사무친다고 생각할 때는 훨씬 더 감명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영가들은 참 행복하신 영가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데 상에 구속된 사람들은 지옥도 가는 것입니다. 지옥이나 아수라阿修羅나 축생畜生이나 인간이나 모두가 다 얼마만치 상에 매이는가, 상의 경중 따라서 상이 무거운가, 가벼운가 따라서 삼악도三惡道로 갈 것인가 좋은 데로 갈 것인가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이 정말로 무아행無我行이라, 이런다고 생각할 때는 즉시에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조상님 천도가 절대로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생명과 같은 생명의 줄로 이어져 있어서 우리 조상이 갈 곳으로 못가고 중음계中陰界라, 어두운 세계에서 헤맨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세상도 항상 막히고 곤란스럽고 어디가 아프기도 합니다. 정말로 병원에 가서 무슨 병인지 진단도 안 나오는데 그런 아픈 병들은 대체로 영가 때문에 그럽니다. 따라서 영가천도가 절대로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영가천도를 참 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염불도 하고 법문도 하지만 여러분들께서 바르게 생활을 하셔야지 여러분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여러분들이 바른 정당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조상들이나 영가들이 자꾸만 뒤돌아보고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또는 같은 핏줄이기 때문에 우리 살아있는 분들이 정당하게 바른 생활을 하면 돌아가신 영가들의 생명을 나중에 증장시키는 것이고, 우리가 정당하지 못하면 오염된 기운이 영가한테로 미치는 것입니다. 꼭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한테 효성 하는 것이 영가천도만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부모님 묘를 잘 정리해서 장엄스럽게 꾸미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르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성자의 길 따라서 산목숨 죽이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은 갖지 않아야합니다. 낭비하는 것도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은 훔친다 그러면 꼭 남의 것을 훔치는 것만을 죄로 알는지 모르겠지만 부처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 없이 목걸이하고, 필요 없이 팔찌끼고 이런 것도 모두가 다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우리생명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됩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은 저 아프리카에 있는 생명이나 우리나 같은 생명의 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네들이 불행할 때는 우리가 행복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우간다나 방글라데시나 이런 데는 지금도 하루에 몇 백 명씩 아사餓死해서 죽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우리가 둘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닙니다. 진리로 여법히 가는 길입니다. 보다 더 결단을 내려서 인생을 바르게 사십시오. 바르게 살려면 될수록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는 물질은 덜 붙이고 살면 됩니다. 그렇게 바르게 사신다고 생각할 때는 영가들도 춤추고 극락세계로 빨리빨리 왕생할 것입니다.

 

오늘 천도薦度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부디 모든 허망상을 다 여의십시오. 자기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 외에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몸뚱이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자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의 공덕功德위에서 영생해탈을 가기위해서 잠시간 이런 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바르게 공부하셔서 우리 살아계신 불자님들, 우리 영가들 금생에 모든 번뇌를 여의시고 금생에 극락세계로 지상의 행복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나무 지장보살마하살!

 

                                                                                                 1994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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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당 추월선사 49재 천도법어

 

 

 

삶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추월스님을 뵌 지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유명幽冥을 달리하시고 다만 식만이 우리 앞에 남아 계십니다.

 

이와 같이 무상無常은 신속합니다. 그러나 다만 중생의 안목으로 봐서 무상無常을 보고 허무를 보고 또는 이별의 슬픔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상에서 바로 본다고 생각하면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원래 생이라 하더라도 참다운 생이라 할 수 없는 것이고 또는 멸본무멸滅本無滅이라, 이생에 우리 생명이 다해 돌아간다 하더라도 역시 돌아가는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와 같이 생이 없고 멸滅도 없는 생멸生滅을 떠나버린 그 자리, 참다운 불성만 상주하는 참다운 생만 상주하는 그런 실상세계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어리석어서 그러한 실상경계를 보지 못하니까 그냥 생멸生滅을 보고 생겨났으면 났다 하고 인연 따라 사대四大가 합해지고 또는 거기에서 사대오온四大五蘊이 결합되어서 이것이 하나의 모양을 나투면 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연이 다해서 사대四大가 흩어지고 또는 오온五蘊이 각기 소멸되어서 흩어져 버리면 그때는 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보면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다만 하나의 진여법성, 실상만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생멸生滅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태안사를 떠나시는 추월스님이시여!

스님께서는 인생을 바로 사셨고 또한 여법히 살다 가신 것입니다. 영가가 가시는 길은 오직 한 곳 실상세계, 생멸을 떠나고 시비나 분멸을 떠나버린 영원한 실존세계, 이러한 세계에 가신 것입니다. 그 세계는 영가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지금 추월스님께서는 극락세계에서 영접해 오시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삼존보살님과 거기에 따르는 무수한 보살들이 내미는 금색바라의 연화대에 올라 계신 것입니다.

 

추월스님이시여!

스님이 바라시는 참다운 고향인 극락세계에 가신다 하더라도 스님의 본래 서원은 그냥 극락세계에서 자기 혼자만 영생을 누리는 소승의 마음은 아니십니다. 스님의 대 서원은 설사 우리 사회 속에서 괴롭다 하더라도 사바세계 중생과 더불어서 모든 중생을 제도 하시겠다는 대 서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추월스님이시여!

부디 극락세계에서 잠시간만 사바세계의 괴로움을 쉬시다가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오셔서 스님의 본래서원대로 무량중생을 제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스님이시여!

안녕히 가십시오.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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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를 보내는 49재 천도법어

 

 

 

ΟΟ후인 ΟΟΟ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시게. 영가와 헤어진지가 100일도 못 되어서 이렇게 유명幽命을 달리하고 만나게 되니 감개무량하고 또한 비감悲感을 이루 말할 수 없네.

 

영가여!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만나고 헤어짐은 우리 사바세계의 철칙이거니 나이 많은 사람이 나중에 갈 수도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이 먼저 갈 수도 있으나, 순리로 봐서는 내가 먼저 가고 영가가 내 조문을 해줘야 할 것인데 거꾸로 됐네.

 

영가여! 사바세계의 도리는 이렇게 무상하고 허무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본래의 자리, 사바세계를 떠나버린 깨달음의 세계에서 본다고 할 적에는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원래 낳는다 하더라도 낳음이라 하는 것이 없는 것이고 또는 죽음이라 하더라도 역시 참다운 죽음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네. 참다운 죽음이 있을 수가 없기에 영가는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천도법어를 듣는 것이 아닌가.

 

영가여! 깊이 생각하고 잘 관찰해서 본래 생이 없고 또는 본래 죽음이 없는 그 자리를 깨달아 주길 바라네.

 

영가여! 우리 중생들은 모양만 보고 참다운 생명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모양이 없어지면 죽었다 하고, 모양이 있으면 살았다고 좋아 하는 것이네. 그러나 바른 눈으로 본다고 할 적에는 우리가 보는 모양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아서 이것은 실제 모양이 아닌 것이네. 구름 따라서 갔다 왔다 하는 그러한 존재, 또는 잠시간 풀끝에 맺힌 이슬 같은 존재, 또는 안개 같은 그런 허무한 존재, 안개가 일었다가 그냥 사라지고 말듯이 구름이 생겼다가 소멸되고 말듯이 풀끝에 맺힌 이슬이 금방 떨어지고 말듯이 그와 같이 이 마음은 허망한 것이네.

 

다만 바람기운 또는 불기운 또는 물 기운 또는 땅기운 그러한 원소의 기운들이 우리 업장業障 따라서 잠시간 모여서 사람모양을 하는 것인데 사실은 그 모양도 실제가 없는 것이네. 이렇게 모여서 다만 빙빙 돌고 있는 세포덩어리를 우리 사람들이 잘 못 봐서 ‘사람 몸’이라고 하는 것이고 거기다가 이름을 붙여서 박 씨 집안 태어나면 ‘박 누구’라고 하는 것이고 김 씨 집안 태어나면 ‘김 누구’라고 하는 것이네. 그러나 실제에서 본다고 할 때에는 정말 모양이 없는 것이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시게. 영가는 지금 살아서의 그러한 모양이 없는, 사실로 봐서는 헛된 모양인 구름 같은 몸뚱이 또는 이슬 같은 몸뚱이, 안개 같은 몸뚱이를 버리고서 참다운 세계,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이별이 없는 그 세계로 가는 것이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시게. 사람이 죽어서 갈 때는 자기 모양이 허망한 것인데 ‘내 모양이 있다’ ‘내 뼈가 있다’ 이와 같이 집착을 하는 것이네. 아까 법당에서 관욕灌浴을 할 때에 영가가 분명히 허망한 몸을 완전히 벗어 버린 것을 나는 느꼈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시게. 그 몸뚱이 애착 때문에 참다운 세계, 허망한 세계를 못 떠나서 참다운 극락세계를 못 가는 것이고 또는 내 몸이라고 생각할 때는 내 아내가 있고, 내 자식이 있고, 내 친구가 있고 그런 것이네. 또는 내 몸이라고 생각할 때는 금생今生에 잠시간 왔다가는 그 몸뚱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그에 따른 재산도 내 것이고 모든 그런 세간이나 또는 권력이나 이것이 내 것이라고 고집을 하는 것이네. 이러한 자기 몸에 대한 애착심, 자기 권속에 대한 애착심 또는 자기 재물에 대한 애착심 이런 것에 걸리고 구속돼서 바른 길로 못 가는 것이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시게. 이러한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만났다 헤어지는, 꿈결에서 만났다 헤어지는, 꿈에서 싸우기도 하고 꿈에서 사랑도 하고 좋아도 하지만 꿈에서 깨면 무엇이 남던가.

 

영가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정말 꿈인 것인데, 사람들은 꿈을 꿈으로 못 보니까 자기 몸에 붙들리고 또는 남의 몸에 붙들리고 자기 아내 몸에 붙들리고 자기 자식 몸에 붙들리고 또는 모두가 다 헛것인데 권력도 헛것이요, 이름도 헛것이요 모두가 헛것인데 그런 것에 다 붙잡히고 구속이 돼서 자기 갈 길을 못 가는 것이네.

 

바로 살지 못 하는 것도 모두가 다 그런 모양에 집착한 데서 원인이 있는 것이네. 모양에 집착 안 하면 성인成人이고 부처고, 모양에 구속이 돼서 모양에 집착하면 범부凡夫요 중생인 것이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시게. 뒤돌아보고 누구한테 애착을 품고 과거에 쓰던 자기 재산, 과거에 사귀던 자기 아내, 자기 자식, 자기 권속들 이렇게 자꾸만 못 잊어 뒤돌아보는 이것이 영가가 할 일이 아니네. 영가가 뒤돌아보면 그만치 영가의 권속도 더욱더 애착을 가지고 영가를 추모할 것이고 영가의 권속이 영가를 추모하고 영가가 자기 유가족을 자꾸만 뒤돌아보고 생각할 때는 영가는 영가의 갈 길을 못 가고 영가의 권속도 바른 생활을 못하는 것이네.

 

영가여! 깊이 생각하고 깊이 관찰하소. 영가가 가는 곳은 오직 극락세계인 것이고 영가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가는 종국의 고향은 극락세계인 것이네.

 

극락세계는 어떠한 곳인가? 극락세계는 광명光明으로 되어있는, 부처님의 무량광명無量光明으로 되어있는 세계이네. 극락세계는 땅도 광명으로 빛나고 나무도 광명으로 빛나고 시냇물도 광명의 물인 것이고 극락세계에 있는 누각들도 역시 모두가 다 극락세계의 장엄 찬란한 그런 세계인 것이네. 또는 극락세계에는 무수한 성자들이 아미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항상 행복에 충만한 곳이네. 환희와 행복이 완벽한 곳이 극락세계인 것이네. 우리 중생은 애초에 극락세계에서 살았는데 어쩌다가 인과因果의 수레바퀴에 걸려서 사람이 되고 또는 잘못 살면 지옥 갔다가 또 좀 나아지면 아귀餓鬼가 됐다가 좀 더 나아지면 축생畜生이 됐다가 좀 더 나아지면 아수라阿修羅세계로 갔다가 더 나아지면 우리 같이 인간세계로 오는 것이네. 개미가 쳇바퀴 돌 듯, 누에가 자기 몸에서 나온 실로 해서 고치를 만들어서 그것에 갇히듯 우리 중생은 그러하네. 사람이 되면 사람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인데, 과거의 몸이 현생에 닮은 그런 몸도 아닌 것인데 말일세.

 

영가여! 과거의 영가의 몸은 今生금생에 나와서 가진 ΟΟΟ와 같은 그런 몸이 아니었네.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가 또는 그 속에서 죽어서 과거 전생에 지은 업장業障 따라서 금생에 인간이 되가지고서 ΟΟΟ이라 는 몸을 받았던 것이네.

 

그러나 영가여! 영가가 뒤돌아보고 영가가 영가의 권속을 생각하고 영가의 재물을 생각하고 이러할 때에는 다시 구속을 받아서 구속이 심하면 지옥으로 뚝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좀 나아진다 하더라도 다시 인간 몸 받고서 생로병사의 고생과 그 무수 무량한 인생고를 받는 것이네.

 

영가여! 사람이라 하는 것은 몸뚱이 때문에 죄를 짓고 남도 미워하고 사랑도 하는 것이네. 다행히 원수와 같은 그 몸뚱이 그것을 벗고서 지금 극락세계로 가는 것이네. 영가와 나는 세속에서도 사제지간이고 또는 자네가 한 때나마 승려생활을 할 때에도 스승과 제자가 됐네.

 

영가여! 생각해보게. 얼마나 인연이 깊은가. 극락세계라 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이 다 들어가서 영원히 행복스럽고 영원히 이별이 없는 세계네. 그 세계를 놔두고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

 

영가여! 몸을 벗으실 때에, 아까 자네가 관욕灌浴을 할 때에 분명히 나는 느끼고 보고 냄새를 맡았네. 영가가 몸을, 헌옷의 껍데기를 벗는 그 소릴, 영가가 모든 번뇌의 때를 벗는 환희심, 그것을 분명히 나는 느끼고 보았네.

 

영가여! 영가가 정말로 영가의 몸에 대한 애착을 뿌리치고 영가의 권속에 대한 그런 미련을 갖지 않고 재물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을 때에 영가는 홀연히 벗어나네. 영가가 그런 모든 번뇌를 벗어나서 미움도 사랑도 집착도 다 벗어나서 눈을 들고 바로 보게. 아미타불이 모든 보살님들을 데리고 계시고 영가가 타고 갈 그 광명 찬란한 금색 찬란한 연화대蓮花臺가 영가 옆에 있을 것이네.

 

영가여! 뚜렷이 보게. 자기 몸에 대한 애착, 자기 뼛가루에 대한 애착, 자기 권속에 대한 애착, 자기 자식에 대한 애착,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을 다 버리고 이것이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이 다 꿈같은 것인데 꿈을 벗어야지 않겠는가? 꿈을 벗어나야 하네. 꿈을 벗고서 분명히 눈을 들고 보게.

 

극락세계로 가는 길은 무수 무량의 먼 거리지만 번뇌를 털어버리면 그런 청정한 영가에 있어서는 순식간에 한 생각에 거기에 입성할 수가 있는 것이네. 이렇게 하는 것이 영가가 가장 아내를 사랑하고 가장 자식을 사랑하고 자기 친구를 사랑하고 모든 것을 위한 최선의 길인 것이네. 영가가 미련 두고 있는 것은 도리어 아내한테도 해롭고 또는 자식한테도 해롭고 누구한테나 해로운 것이네. 영가가 극락세계에 가서 극락세계의 그런 신통 자재하는 힘으로 해서 아내를 생각하고 자식을 생각하고 자기 권속을 생각해야 할 것이네.

 

유가족들이여! 돌아가신 분을 위한 가장 좋은 길은 무엇입니까? 자꾸만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영가를 위한 길이 아니라 ‘모든 것이 허망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든 것이 허망하고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만났지만 돌아가신 분은 응당 극락세계에 하루 빨리 가셔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극락세계의 교주 또는 우주의 교주, 인생과 우주 모든 만 중생의 구세주이신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와 같은 부처님한테 귀의하는 것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가장 최선의 효성이 되는 것이고 정성이 되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가 가고자 하는 그런 극락세계, 영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서 또는 만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 『반야심경』을 외우지 않았는가. 『반야심경』의 도리가 모두가 허망하다는 도리인 것이네. 그것을 다시금 느껴서 자네 앞에 있는 연화대蓮花臺에 올라타서 극락세계에 가서 영생의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네. 영가의 유가족도 금생에 부처님 바로 믿고 남한테 베풀고, 없는 사람한테 동정하고, 아픈 사람한테 간호하고 이렇게 베풀다가 나중에 인연 따라서 가게 되면 그냥 즉시에 극락세계에 가서 똑같이 영생의 행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1989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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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ΟΟΟ거사 49재 천도 법어

 

 

 

ΟΟ후인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영가를 뵌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영가는 비록 백수풍신白首風神이시지만 늠름하시고 당당하신 그런 풍채이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과거 전생에 바로 사셨고 또는 금생今生에 나오셔서 정직하게 인생을 사신 그러한 상으로 생각됩니다.

 

한번 생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 하는 이른바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생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일체 모든 현상은 모두 무상한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생인지라 각 성인成人들의 가르침은 이러한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영가는 지금 저승이라 하는 세계에 계신 것입니다. 사람이 막 태어나서는 ‘생유生有’, 사는 동안에는 ‘본유本有’, 죽는 동안에는 죽을 ‘사’자를 써서 ‘사유死有’, 그리고 저승에 가는 것은 ‘중유中有’, 즉 저승길입니다. 영가는 지금 저승길에 계시다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타고서 이 자리에 계시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나와서 바로 살기도 어려운 것이고 그 가운데서 참다운 종교를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종교라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특히 불법佛法은 인생과 우주의 참 도리를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대체로 무엇이고 대체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인생은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다행히 과거 전생의 선근공덕善根功德으로 해서 금생에 나오셔서 불법을 만나셨습니다. 불법을 만났어도 복이 적은 사람, 게으른 사람들은 바로 못 믿습니다. 바로 못 믿으면 자기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라 하는 소중한 법도 그르치고 마는 것입니다. 승가에서나 속가에서나 부처님 법을 빙자하고서 바로 못 사는 사람들은 자기도 죄를 짓고 부처님법도 망치는 것입니다. 영가가 비록 세속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렇게 의젓하고 당당하신 것은 바로 사셨고 부처님법도 바로 믿으셨다는 그런 증거였습니다. 영가가 그렇게 바로 살고 부처님 법을 바르게 실천하셨기 때문에 임종 때도 여여하게 도인 행색같이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흔연스럽게 가신 것입니다.

 

영가여! 몸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각 물질이 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합한 것은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고 맙니다. 바로 전생의 인연, 부모님의 인연 따라서 사람 몸 받아서, 인연이 다하면 다시 그런 것은 흩어지고 맙니다. 본래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뚱이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에 몸뚱이가 얼마나 소중합니까만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전생에 이런 몸뚱이가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죽은 뒤에 이런 몸뚱이가 다시 또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영가여! 영가는 지금 저승길에서 극락으로 가는, 우리 인생이 종단에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가는 응당 극락에 가실 것을 믿습니다. 영가와 깊은 인연이 있는지 한 번 밖에 안 만나 뵈었지만 백수풍신白首風神의 그 늠름한 모습이 산승山僧의 눈에는 지금도 선합니다. 그러한 인연 따라서 산승의 노파심으로 마지막 천도薦度법어를 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인간이 자기라는 것이 허망한 것인데 허망한 것에 집착할 적에 가지가지의 재앙을 만나는 것입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있는 것은 사람 몸이나 물질이나 지위나 모든 것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중생은 그림자 같은 것을,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그림자가 아니고 실제라고 생각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몸도 허망한데, 자기 몸도 두고 가는 것인데, 자기 처자식도 데리고 갈 수도 없는 것이고 자기가 쓰던 재산이나 권력이나 모두 다 팽개치고 가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못 따라 갑니다. 몸도 못 따라 가는데 다른 것이 따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영가여! 우리 중생들은 그런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는 데서 문제가 생겨서 탐욕심을 내는 것이고 또 그러한 물질이라던가, 또는 지위나 몸뚱이에 해를 끼치면 성내고 진심瞋心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인셍의 무지無知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무지라는 것은 방금도 말씀한 바와 같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는 것입니다. 몸, 이것도 허망한 것인데 허망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고, 권력도 허망한 뜬구름 같은 것인데 이것도 사실로 소중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시초에 모두가 다 극락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 본 고향은 극락인 것입니다. 어쩌다가 우리 몸뚱이에 가려서 본래 참다운 성품을 못 보는 것입니다. 참다운 성품은 어느 누구나가 다 부처님과 똑같은 것입니다. 석가모니, 예수, 공자, 또는 노자 그런 분들의 마음이나 우리 중생의 마음이나 똑같이 우주의 본바탕, 본 진리를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우주의 본바탕 진리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본바탕이 부처님이고 하느님인데 이것이 우리가 쓰다 버리는 몸뚱이 때문에, 몸뚱이 잘 먹이고 몸뚱이 치장하고 또는 자기 몸뚱이에 인연된 아들이요 딸이요 또는 친구요 하는 그런 인연 때문에 얽혀서 바로 못사는 것입니다.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는 깊이 느끼시는 분이셨습니다. 영가는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영가가 쓰던 모든 그런 세간이라던가, 영가의 권속이나 그런 것을 가시는 길에 뒤돌아보시고 애착을 품을까 봐서 산승山僧이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영가여! 중생이 바로 못 보는 것이 모두 다 번뇌가 되어서 번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저 밑에 지옥으로, 또는 좀 더 나아다면 아귀餓鬼로, 또는 더 나아지면 축생畜生으로, 더 나아지면 아수라阿修羅로, 더 나아지면 인간으로, 우리 인간도 이것이 별로 좋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나쁜 일도 해가지고 지옥으로 뚝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마음 잘 먹고 행위를 바르게 해가지고 천상이나 극락으로 갈 수도 있는 것도 인간입니다. 업장業障이 가벼우면 인간에서 천상으로, 천상에서 우주의 도리를 아는 그런 성문聲聞 또는 연각緣覺으로 또는 중생과 더불어서 진리를 깨닫는 그런 보살로 그렇게 되어서 부처가 됩니다. 이와 같이 비록 우리가 지금 저 지옥에 있다 하더라도 또는 하나의 소가 되고 개가 되고 말이 되고 한다 할지라도 근본마음은 모두 다 부처님인 것입니다. 모두가 다 업장이 무거워서 그런 곳으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영가여! 영가는 지금 극락으로 가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그냥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애착을 뿌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대한 애착, 자기 권속에 대한 애착 또는 자기 재산, 자기권력, 자기에 관계된 그런 모든 구속을 벗어버려야 극락에 가시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몸도 마음도 무게도 없는 그런 광명의 몸, 조금도 무게가 없는 그런 중생만이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가여! 한 생각 놓아서 몸에 대한 애착, 권속에 대한 애착 또는 생전에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뿌리치십시오. 그리고 영가가 눈을 들고 보시면 극락세계는 훤히 보이시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어느 중생한테나 다 보이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스스로 못 보는 것입니다.

 

‘자작범부自作凡夫’라, 우리 중생이 스스로 잘못 생각해서 업장을 짓고 스스로 고를 받는 것입니다. 번뇌를 짓는 것이고 이 무지無知 때문에 우주의 본바탕,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기 본래 실존을 잘 모르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고 번뇌 때문에 나쁜 말을 하게 되고 나쁜 행동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인생고를 받는 것입니다. 인생고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 때문에 잘 못 봐서, 잘못 보기 때문에 잘못 행동해서 자기 스스로 자업자득으로 받는 것입니다.

 

영가여! 오는 모이신 유가족들이시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본래 행복스러운 것인데 중생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해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행복스럽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삼복三福을 지어라”는 부처님말씀이 있습니다. ‘석 삼’자, ‘복 복’자 세 가지 복입니다.

 

맨 처음에는 ‘세복世福’이라, ‘인간 세世’자, ‘복 복’자 인간 복입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어른들을 공경하고 또는 일반대중들한테 베풀어주고 이런 것이 세상복인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나와서 세상 복을 받는 사람들은 우연히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금생에는 별로 안 지었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모두가 그와 같이 복을 지었던 것입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어른들을 공경하고 친구지간 우애하고 신의가 있고 또는 남한테 모두를 베풀고 이런 사람만이 정말로 태어나면서부터 행복을 받는 것입니다. 잘못 생긴 사람, 불행한 사람은 과거 전생에 세복世福을 못 지은 것입니다.

 

그 다음은 ‘계복戒福’이라 계행戒行을 지키는 복이란 말입니다. 계복은 어떤 것이냐 하면 생물을 죽이지 않고 또는 훔치지 않고,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고 정당한 수입이 아니면 갖지 않고 또는 자신의 배필 이외의 이성들 하고 음란한 짓을 않고, 또는 거짓말· 욕설·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고 또는 술 먹지 않고 이러한 등등의 계행을 지켜야 만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돌아가신 ΟΟ영가와 같이 그렇게 당당하시고 늠름하신 분들은 모두가 이와 같이 세상 복을 짓고 또는 계행을 지키는 그런 복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행복行福’이라, ‘행할 행’자, ‘복 복’자, 이것은 성자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자의 길이라는 것은 우주의 도리입니다. 공자나 석가나 예수나 맹자나 노자나 모두가 우주의 길을 깨닫고서 우주의 길을 가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주의 길, 우주의 도리를 따를 적에 인간의 행복이 오고 사회도 평안스러운 것입니다.

 

우주의 도리를 안 따를 적에 개인의 마음도 불안스럽고 또는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전생에 지은 복으로 인해서 금생에 좀 잘산다 하더라도 바로 못 살면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이와 같이 세상 복을 짓고 계행을 지키는 복을 짓고 또는 성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동하는 그런 삼복三福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극락세계가 저 십만 억 국토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눈앞에 바로 이 자리,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바로 이곳이 극락세계입니다. 이 세상이 바로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극락세계인데 중생은 무지無知로 또는 탐욕심으로 또는 성내는 진심瞋心으로 가리어서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여! 모든 그런 얽힘을 다 떠나십시오. 허망한 이름, 눈에 보이는 일체 현상들은 모두가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중생이 꿉 같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가상가명假相假名’이라, 가짜 상 가짜 이름을 떠나서 저 극락세계 광명정토光明淨土 끝도 갓도 없이 빛나는 그 극락세계를 생각하십시오. 극락세계에 계시는 분은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그와 같이 무수한 부처님, 보살들, 성자만이 계십니다.

 

영가여! 그렇게 생각하실 적에 영가는 극락세계에 순식간에 가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 앞에 있는 오색찬란한 그런 구름을 타고서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그런 구름을 타고서 영가는 순식간에 극락세계에 가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아미타불은 극락세계 교주의 이름인 동시에 모든 중생의 본래 이름이고 또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근본 뿌리입니다. 일체중생 본래성품, 본래 실상實相 자리는 아미타불입니다. 영가가 지금 생각하실 것은 광명이 빛나는 극락세계이고 영가가 지금 부르실 것은 아미타불입니다. 우주의 진리인 동시에 자기의 참 이름 극락세계의 교주인 그 아미타불을 일심으로 생각하십시오.

 

김가 박가 같은 그 이름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붙인 가명假名에 불과합니다. 유가족들도 지금 극락세계에 가시는 어른을 위해서 추모하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영가와 똑같이 참다운 우리 생명의 이름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입으로 속으로 외시고 생각으로는 극락세계의 끝도 갓도 없이 훤히 빛나는 극락세계를 생각하시는 것이 돌아가신 어른을 추모하는 가장 최선의 길입니다.

 

영가여! 주저 없이 뿌리 치셔서 해탈의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1989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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ΟΟΟ와 유가족을 위한 49재 천도법어

 

 

 

ΟΟΟ영가여! 세월은 흘러가는 강물 같아서 영가가 가신지가 49일이 지났습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중생은 ‘모양이 있으면 살았다 하고 모양이 없으면 죽었다’ 합니다. 그러나 모양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생명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이 없고 바로 영생永生 하는 것인데 중생이 어두워서 생명의 본질을 못 보기 때문에 모양이 있으면 살았다 하고 모양이 안 보이면 죽었다 합니다. ‘금유전무今有前無’라, 지금은 있어도 앞에는 모양이 없었습니다. 박아무개 김아무개라 하는 그런 인간 존재가 지금 있다고 하더라도 과거에는 없었습니다. 없다가 부모 인연 따라서 금생今生에 사람 몸 받아 나와서 사람 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금유후무今有後無’라, 금생에는 모양이 있다 하더라도 인연이 다해서 자기 몸이 사라지면 다시 죽은 다음에는 모양이 없습니다. 과거에 없던 모양이 금생에 있고 금생에 있던 모양이 미래에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양이 있고 없고 간에 생명은 존재합니다.

 

 

ΟΟΟ영가여! 생각해 보십시오. 영가는 분명히 이 자리에 와서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바고해는 언제나 탐욕심이나 또는 분노심이나 또는 사물을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마음 때문에 바른 생활을 못합니다. 바른 생활을 못 하기 때문에 여러 갈래로 헤매는 것입니다. 자기 업장業障의 무게에 따라서 업장이 가장 무거워지면 지옥으로 갔다가, 좀 가벼우면 축생畜生 갔다가,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서 육도윤회六道輪廻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阿修羅· 인간· 천상 이와 같이 육도를 헤매는 것입니다.

 

이런 업장의 무게가 다 끝나서 본래마음, 본래 생명으로 돌아가면 그때는 한계를 초월해서 욕심을 주로 하는 욕계欲界나 또는 모양이 있는 색계色界나 의식만 존재하는 무색계無色界나 이런 삼계를 초월해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업장의 무게라는 것은 탐욕심이나 또는 분노심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마음이지만 더없이 사물에 집착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업장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몸이 있다가 사라질 때에는 세 가지 무거운 업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쓰던 몸이 내 것이다’ 하는 집착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 각 원소가 모이고 우리 의식이 모여 이것이 부처님 말씀대로 하면 사대오온四大五蘊인데 사대오온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여 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몸이 인연이 다하면 그때는 각 원소는 원소대로 해서 흩어지고 마는 것이고 다만 그 쓰던 이 마음만 가지고 갑니다.

 

평소에 쓰던 그 마음은 몸은 사라졌다 하더라도 생명은 존재하는 것인데 그러한 마음에 집착이 붙어 놓으면 그런 집착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 그런 삼계三界를 뱅뱅 돌면서 해탈解脫을 못 하는 것입니다. 해탈을 못 하면 우리생명의 본고향인 극락세계에 못 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우리 인간이 돌아갈 적에 집착심인가 하면 우선 자기 몸에 대한 집착심입니다. 내 얼굴, 내손, 내발 이와 같은 것에 대한 집착심입니다. 매장하면 매장하는 거기까지 따라가면서 ‘아! 저 몸이 내 몸이다. 지금 땅에 묻힌 몸이 내 몸이다’ 하면서 집착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화장하면 집착심은 적어지지만 그래도 역시 그러한 집착한 흔적 때문에 자기 쓰던 몸에 대해서 느끼던 그런 애착심은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각 원소가 합해지고 또는 자기의식, 자기 분별 시비하는 그런 식이 합해져서 사람 몸이 이루어졌습니다. 자기 몸을 구성했던 그런 원소가 흩어져버리면 몸은 간 곳이 없습니다. 흔적이 없습니다. 텅 빈 광야에다가 여러 가지 자재를 구해서 집을 만듭니다. 그러나 집이 필요 없어서 또는 인연이 다해서 집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러면 흙 또는 텅 빈 광야만 남습니다. 그와 똑같이 사람 몸도 역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몸으로 나툴 뿐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그때는 모양은 없습니다. 몸을 구성하는 산소는 산소대로 수소는 수소대로 또는 탄소는 탄소대로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로 보면 이와 같이 중생의 몸은 없는 것인데 그러면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두컴컴할 적에 지푸라기를 잘못 보고서 ‘저건 뱀이다’ 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그릇된 상을 냅니다. 그러나 지푸라기나 새끼토막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뱀이라고 느끼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수水··풍사대四大가 합해진 각원소가 합해진 그 몸뚱이들을 ‘내 것이다’ 하는 그것은 마치 어두컴컴할 적에 짚으로 꼬아진 새끼토막을 뱀이라고 보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이것은 정유리무情有理無라, 다만 우리 망상된 마음이 있는 것이지 사실은 없습니다. ‘나다’하는 강 아무개, 김 아무개 하는 그것도 역시 방금 말씀드린 대로 똑같이 어두컴컴할 적에 새끼토막을 가리켜서 잘못 보고서 ‘이것은 뱀이다’ 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새끼토막에 불과한 것인데 따라서 바로 보면 새끼토막이고 정말로 바로 보면 그때는 지푸라기뿐입니다. 성자들은 그러한 그릇된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새끼토막을 보고 ‘뱀이다’ 이래 가지고서 ‘뱀이다’라는 그 마음 때문에 자꾸만 업을 짓습니다. 이 몸뚱이가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인데 ‘내 것이다’하는 잘못된 개념 때문에 이 몸뚱이에 좋게 하면 그때는 환희심을 내는 것이고 몸뚱이에 싫게 하면 그때는 성내는 진심瞋心을 내는 것입니다.

 

바른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지금 몸뚱이 이것이 내 것이 아니다’는 지혜, 즉 말하자면 ‘몸뚱이를 구성한 내 몸이 본래 없다’ 하는 마치 물에 비치는 달그림자 같이 ‘사실은 달이 아니고서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느끼지 못하는 한에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그러한 윤회하는 길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새끼토막의 본질은 지푸라기이듯이 우리 사람도 역시 본바탕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본바탕은 부처님인데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못 본단 말입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이 우리 중생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본바탕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으로 보는 이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보는 그런 견해가 없는 한에는 우리 중생은 몇 만생의 생을 나고 죽고 되풀이 하면서 욕계欲界나 색계 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아수라阿修羅, 인간, 천상 이러한 경계를 뱅뱅 돌아서 윤회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 하십시오. 우리 인간이 돌아갈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어느 곳도 머물 곳이 없습니다. 머물 곳은 그때그때 무상한 일시적인 것입니다. 몸은 흔적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마음도 역시 집착하는 마음, 욕심을 부리고 또는 성을 내고 또는 자타自他를 구분하고 하는 그런 마음은 삼계三界를 윤회하는 저 지옥으로 뚝 떨어졌다가 또는 조금 나아지면 귀신이 됐다가 또는 축생이 되었다가 그렇게 헤매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중생이 가야 하는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광명光明으로 이루어져서 극락세계의 나무나 숲이나 집이나 또는 환경, 모두가 다 찬란한 광명으로 이루어진 빛나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영생하는 세계입니다. 여기로 가야만이 우리 인생은 비로소 인생고를 떠나서 생로병사를 떠나서 또는 영원히 만나서 헤어지지 않는 그러한 무량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생명이 본바탕은 바로 부처고 우리가 가야할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이시여! 영가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도 역시 우리의 참 모습은 우리의 참 생명은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참 생명은 바로 부처님이시고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비록 우리 인연이 복잡해서 바로 극락에는 못 가도, 참 생명인 부처님이 바로 못 되도 언젠가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못 가고 못 되면 우리는 그만치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또는 아수라阿修羅 그런데서 헤매고 생로병사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가서 영생하는 길 외에는 모두가 다 죽고 살고 아프고 늙고 하는 생로병사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영가가 가는 길은 오직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또는 금생今生에 대한 그런 미련을 버리고 또는 자기가 아끼던 주변의 세간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오직 부처님한테 가는 길, 부처님 되는 길뿐입니다. 부처님 되는 길이나 극락세계에 가는 길은 똑 같은 길입니다. 부처님이 되어야 비로소 극락세계에 가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가야 참다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극락은 바로 인간 누구나 갈 수 있는, 꼭 가야하는 우리 근본생명의 고향인 것입니다.

 

영가여! 자세히 관찰하십시오. 돌아갈 고향인 극락세계는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세계입니다. 아미타부처님, 관세음보살님 또는 대세지보살님 무수한 보살님들이 계시는 세계입니다.

 

영가여! 집착만 버리고, 욕심이나 진심瞋心이나 어리석은 마음이나 그러한 업장業障을 구성하는 마음만 버리고 눈을 들면 극락세계의 찬란스러운 영원의 세계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께서 관음보살이나 무수한 보살을 거느리고 계시고 영가가 타고 가실 찬란한 연화대蓮花臺가 보이는 것입니다.

 

영가여! 눈을 바로 들고서 보살님들이 내미는 그런 금색 연화대에 오르셔서 조금도 미련 없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유가족이시여! 돌아가신 ΟΟΟ 영가를 위하는 가장 지극한 효심은 오직 영가가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의 참다운 이름 또는 영원한 생명의 이름 또는 우주의 이름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하는 것입니다.

 

유가족이시여! 다시 명심하십시오.ΟΟΟ영가를 위한 가장 큰 효심은 영가를 위해 무수한 재물을 쌓는 그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다만 영가를 위해서 바른 생각, 바른 마음을 가지고서 바른 생활을 하면서 오직 인간 모두의 참 이름, 일체 중생의 참 생명의 이름 또는 우주의 이름, 내 생명의 참 이름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님을 일심으로 외우면서 ΟΟΟ영가가 하루 빨리 극락세계에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최선의 효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돌아가신 영가나 우리 사부대중이나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 본고향인 극락세계로 하루 빨리 돌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1987년 3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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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ΟΟ거사 49재 천도법어

 

 

 

 

사바세계의 인연은 무상無常하고도 허무합니다. ΟΟΟ,ΟΟΟ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몸이라 하는 것은 색신色身이기 때문에 모양이 있고 또는 여러 가지 거기에 따르는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 몸인 법신法身은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사람은 죽어서 화장을 하면 재만 남는 것이고 매장을 하면 그냥 흙만 남는 것입니다. 영가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영가의 몸은 지금 매장 되서 묻혀있습니다. 그러나 영가의 법신은, 법신위에 때 묻은 영가의 업식業識은 분명히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이 자리에 와서 천도薦度법어를 듣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떠나온 본래 자리는 가상假相 가명假名을 떠난 순수한 불성佛性입니다. 우리의 참 면목은 모든 명상名相을 떠나버린 순수한 생명, 순수한 불성인 것인데 사바세계의 인연 따라서 헤매다가 거꾸로 잘못 보기 때문에 각 원소가 그때그때 합해진 이러한 몸을 자기 몸이라 고집하고 또는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또는 분별시비하는 그러한 업을 자기 마음이라 고집합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風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은 인연이 다하면 그냥 허물어져서 아무 것도 없는 자리로 돌아가고 맙니다. 모양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냄새도 공이요, 다 공입니다.

 

영가여! 영가가 가시는 길에는 아무도 못 따라갑니다. 영가의 사랑하던 아내도, 아들도 딸도 다 못 따라갑니다. 영가의 재산도 영가를 못 따라갑니다. 중생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잘못 보기 때문에 자기 몸이 아닌 것을 자기 몸이라 고집하고 자기 마음이 아닌 것을 자기 마음이라 고집하기 때문에 삼계육도삼계육도에서 한량없는 고생을 받는 것입니다. 욕심을 못 떠나면 욕계欲界중생, 진심瞋心을 아직 못 떠나면 그때는 색계色界중생, 무명심無明心의 끄트머리를 못 떠나면 그때는 무색계無色界중생, 이러한 삼계三界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 세계입니다. 이 자리에서 자기 본래 생명을 바로 못 볼 때는 영원히 윤회하고 마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는 오늘 자기가 아닌 그런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서 참다운 면목을 발견해서 우리 생명의 본래 고향인 극락세계로 가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가시는 길에 장애가 무엇인가? 자기 몸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꾸로 본 그런 망상된 생각들이 자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권속이 있고 또는 자기 몸이 있고 자기 재산이 있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기가 평생 동안 쓰던 몸을 굉장히 소중히 여깁니다. 더러는 분도 바르고 더러는 향수도 바르고 또는 금가락지도 끼고 또는 다이아몬드 반지도 끼고 이렇게 해서 사랑하고 가꾸고 합니다. 몇 십 년 동안 그렇게 아끼고 자기 몸을 아끼는 나머지 더러는 남을 죽이기도 하고 배신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이렇게 해서 아낀 자기 몸이기 때문에 인연이 다해서 갈 때에도 자기 몸 때문에 잘 못 갑니다.

 

한 번 죽어지면 죽어진 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장하면 재만 남고 땅에 파묻으면 썩어서 흙만 남습니다. 몸의 피는 수분으로 돌아가고 불기운, 물 기운과 같은 모든 원소는 다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 남습니다. 참다웁게 남는 것은 본래면목자리, 참 생명뿐입니다. 영원하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내 몸이라고 의지해서 살 때에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자기아내, 자기남편, 자기자식, 이런 자기 권속들을 내 것이라고 고집합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재산도, 아내도, 권속도 아무 것도 못 따라갑니다. 다만 영가가 평소에 쓰던, 어떻게 마음을 썼던가 하는 그런 업식만 영가를 따라갑니다.

 

영가여! 영가는 복이 많은 분입니다. 영가와 산승山僧이 만난 지도 상당히 깊은 인연입니다. 영가는 훌륭한 부인을 두셨습니다. 재재 때마다 천리 길을 마다 않고 자녀분들을 거느리고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하셨습니다. 오는 이와 같이 지성스런 불자님들이 많이 모이신 것도 영가의 복이요, 영가가 훌륭한 부인과 자식을 두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불성佛性, 부처님 성품인 것이고 바로 부처님입니다. 지장보살이고 관세음보살이고 아미타불이고 또는 문수보살이고 또는 대일여래이고 모두가 다 부처님이름입니다. 우리 부처님 공덕功德은 한도 끝도 없고 부처님 공덕은 바로 내 본 성품 공덕인 것이고 부처님 공덕은 바로 우주고 바로 우주의 진리, 우주가 부처님 몸이고 우주의 모든 존재, 모든 능력 이것이 부처님 공덕인 것입니다.

 

부처님 공덕이 한량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자비나 지혜광명이 빛나는 자리에서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고 또는 부처님의 지혜나 자비광명은 우주에 가득 차 있으니까 광명변조光明邊照이고, 부처님한테 깃들어 있는 모든 존재의 생명에 깃들어 있는 그러한 기쁨은 한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 또한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라, 또는 우리 본래면목인 동시에 우주의 본래면목 자리인 부처님은 기쁨이나 그런 행복이 한이 없기 때문에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자비나 능력이나 어떠한 것이나 원만무결하게 갖춘 것이 부처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 부처님 자리하고 우리 중생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는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업을 지어서 지금 김 아무개, 박아무개고 이렇게 부른다 하더라도, 이것은 겉만 차이가 있고 형상적인 차이만 있는 것이지 본래면목자리는 김가나 박가나 또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떠한 광물이나 모두가 다 똑같은 부처님 성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중생의 몸 어느 부분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 머리카락부터 발가락까지 조금도 빈틈없이 부처님이 꽉 차 계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영가가 쓰시던 그 몸은 영가의 참다운 몸이 아닙니다. 잉연 따라서 잘못 봤기 때문에 본래면목자리, 불성佛性자리를 잘 못 봤기 때문에 삼계육도삼계육도에서 오랫동안 헤맸던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오랜 나그네 길입니다. 고향 떠나와서 바로 못 보면 천만 생 윤회하고 윤회하다가 고생만 받는 것입니다.

 

영가여! 본래면목을 깨닫고서 지금 바로 눈을 뜨십시오. 자기 몸에 대한 애착, 자기권속에 대한 애착, 모든 애착을 다 털어버리고서 바로 눈을 뜨십시오. 사바세계의 만남은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사바세계의 삶은 결국 죽고 마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금생今生에 만났던 그런 좋은 인연들, 훌륭한 아내, 선량한 자식들 또는 좋은 친구들 이런 분들하고 영생에 만나는 길은 무한공덕인 것입니다. 부처님 공덕功德을 자비로운 쪽으로 보면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보면 문수보살, 또는 유명계幽冥界의 중생을 다스리는 쪽에서 볼 때는 지장보살, 우리 중생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또는 극락세계의 교주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실상實相의 명호名號, 이것이 아미타불인 것입니다. 극락세계의 교주인 동시에 영가의 본래면목의 이름이기도 한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처님은 모든 중생을 극락세계의 교주인 동시에 영가의 본래면목의 이름이기도 한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처님은 모든 중생을 극락세계에 오도록 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아미타불 부처님이 관세음보살님을 거느리고 영가 앞에 지금 서 계십니다. 금색찬란한 그런 광명으로 이루어진 연화대蓮花臺가 바로 영가 앞에 있습니다. 모든 상을 떠나버린 참다운 극락세계의법성法性이 영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가여! 훌훌 털어버리시고서 정말로 쾌활한, 정말로 가벼운 그런 몸으로 연화대에 앉으셔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1989년 5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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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ΟΟ스님 모친 49재 천도법어

 

 

ΟΟΟ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한 아들이 출가해서 도를 닦아서 공부를 하면 구족九族이 생천生天 하는데 네 아들이 다 출가해서 공부를 하고 계시고, 또 한 아들은 5년째 묵언수행을 하고 계십니다. 그 공덕功德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물며 오늘 49재를 맞이해서 성실하고 반듯하신 좋은 시식施食을 받고 계십니다. 따라서 영가께서는 틀림없이 왕생극락을 하실 것입니다.

 

산승山僧은 영가 아드님과는 사제지간의 인연관계가 있고 또한 영가하고도 인연이 깊습니다. 산승이 새삼스럽게 좋은 법문을 안 한다 하더라도 영가의 그런 선근공덕善根功德으로 해서 극락왕생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한 인연관계로 해서 산승이 노파심에서 마지막 인도의 법문을 하겠습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사람이라 하는 것은 마음이 밝을 때는 어떠한 것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그대로 마음세계뿐이고 또는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아수라阿修羅나 인간이나 천상天上이나 그러한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무명無明에 가릴 때는 분명히 지옥도 있고 아귀도 있고 축생도 있고 아수라도 있고 인간도 천상도 모두 있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천지우주가 모두 다 광명光明뿐이고 또는 찬란한 화장세계華藏世界인데 깨닫지 못하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삼계三界가 있고 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그런 육도六道중생의 갈래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잘못 살면, 마음 깨닫지 못하고 어두우면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삼악도三惡道로 전락되는 것이고 조금 잘 살면 아수라, 인간, 천상으로 갈 것이나 이것도 역시 인간의 본마음 자리는 못됩니다.

 

영가여! 영가는 과거 전생에 선근善根을 많이 심어서 자연히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금생今生에 나와서는 네 분의 출가사문을 낳을 정도로 훌륭한 어머니셨습니다. 또 영가는 어떤 곤혹스러운 때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선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린 적이 없습니다. 산승山僧이 여기 칠장사에 머물다가 5년 전에 여기를 떠나갈 적에 영가께서는 산승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 그 전에도 여러 차례 만났는데 그럴 때마다 한 번도 얼굴이 흐린 적을 못 보았습니다. 그 밝은 얼굴, 밝은 미소가 산승의 뇌리에는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영가께서는 선근善根이 지극히 깊어 보이십니다. 그러기에 네 분의 스님을 낳으셨습니다.

 

영가여! 영가가 생전에 하신 공부도 많으셔서 영가의 공덕功德으로 해서는 틀림없이 극락왕생이 결정되시지만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육근청정六根淸淨한 그런 성자의 존재가 못 되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차마 잊어버리실까봐 산승이 노파심에서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연을 만나서 한 번 나오면 그때는 ‘날 생’자, ‘있을 유’자 ‘생유生有’라 하는 것입니다. ‘생유’에서 낳고 ‘본유本有’에서 한 세상 살고 또는 ‘사유四侑’에서 바로 죽고, 죽어서 미처 갈 곳을 모르고서 헤매는 그때는 ‘중유中有’란 말입니다. 영가는 지금 ‘중유’에서 극락세계로 비약적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은 업장業障이 무거워서 헤맬 때는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삼계三界를 윤회하는 것이지만 한 생각 깨달아서 밝은 마음이 생기고 또는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깨달아 버리면 그냥 극락세계로 바로 왕생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도 자기 바탕 근본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극락세계가 하품하생下品下生이요, 그 다음이 하품중생下品中生이요, 그 다음이 하품상생下品上生이요, 또는 올라가서 업장이 가벼우면 중품하생中品下生이요, 올라가서 중품중생中品中生이요, 올라가서 중품상생中品上生이요, 또는 올라가서 상품하생上品下生, 상품중생上品中生, 또는 상품상생上品上生이라, 바로 깨달아서 마음의 그림자 하나라도 없으면 그때는 상품상생으로 가는 것입니다.

 

영가여! 사람 몸이라 하는 것은 과거 전생에 업 따라서 자기 몸을 구성한 지·수·화·풍 사대, 지금으로 말하면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탄소나 그러한 각 원소가 합해서 우리 몸이 됩니다. 이런 것이 합해서 몸이 되는 것인데 우리의 마음은 대체로 어떤 것입니까? 마음은 우리가 잠수하고 또는 상상하고 또는 의식하고 또는 분별시비하고 수와 상과 행과 식이 모여서 우리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범부라 하는 것은 그 오온五蘊 이것이 허망한 줄을 모르고서 사대四大가 합해진 색신色身 이것이 참다운 자기 몸이요 또는 분별 시비하는 그 마음이 자기 마음이라고 집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나’라고 집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라 하는 것은 지·수·화·풍 사대가 잠시간 합해졌기 때문에 이런 것은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잠시도 지·수·화·풍 사대가 합해서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순간도 자기 몸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몸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것이나 산하대지 삼라만상 두두물물 모두가 이러한 물질적인 존재는 어느 순간도 머물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무상인 것입니다. 어느 공간에 머물러 있어야 그래야 시간적으로도 존재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어느 공간에도 머물러 있지가 않거니 어느 시간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무상無常이요, 공입니다. 무상이요, 공인 것은 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공인 것입니다.

 

바로 본다고 할 때는 어느 사람이나 어느 존재나 모두가 다 무상한 존재요, 무상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은 공이요, 또는 공이기 때문에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본체를 못 보고 현상적인 그런 모양만 보기 때문에, 모양도 그때그때 잠시간 모여서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을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몸뚱이 이것이 내 몸이요, 분별 시비하는 마음이 내 마음이라 합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우리 중생들이 성품을 못 보고서 그냥 현상만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본체를 못 보고 이름에 걸리고 이른바 명상名相에 집착하기 때문에 참다운 자기 생명을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여! 참다운 생명은 자기 몸, 이 색신이 아니고 자기가 지금 분별 시비하는 이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거품같이 또는 뜬구름 같은 가상假相에 불과합니다.

 

영가여! 오늘 인연 따라서 모이신 우리 사부대중이시여! 도둑놈 가운데서 참 도둑놈 또는 배신자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배신자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몸뚱이가 가장 지독한 도둑놈이고 가장 악독한 배신자입니다. 생전에 제아무리 산해진미로 호위호식을 시키고 또는 온갖 비단으로 해서 몸을 치장을 시키고 또는 금 은 폐물을 몸에 찬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종당에는 인사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태우면 재가 되고, 흙에 묻으면 그때는 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피나 우리 고름이나 우리 눈물이나 흔적도 없습니다.

 

ΟΟΟ영가여! 우리 사부대중이시여! 이 몸이 대체로 무엇입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몸 이것은 안개가 모인 것과 같고 또는 꿈의 부스러기가 모인 것과 같습니다. 지· 수· 화·풍風 사대의 땅기운 지도 역시 허망한 것이요 또는 물 기운 수도 허망한 것이요 또는 불기운 화 이것도 허망한 것이요 또는 바람기운 풍 이것도 허망한 것입니다. 산소도 허망한 것이요, 수소도 허망한 것이요, 질소도 허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에너지라 하는 물질이 아닌 하나의 생명이 진동하고 운동해서 그러한 것이 될 뿐입니다. 중생들은 본바탕을 못 보고 상만 보기 때문에 한동안 이루었다가 사라지는 구름 같은 존재를 ‘나’로 고집합니다.

 

그러나 이 도둑놈은 어떠한 경우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도둑놈은 욕심도 한정이 없어서 백만 원이 있으면 천만 원이 갖고 싶고 천만 원이 있으면 억대를 갖고 싶고 정말로 히말라야 산 보다도 더 많은 금덩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 못하는 것이 도둑놈 호주머니입니다. 다이아반지를 끼어 보나 무얼 끼어 보나 죽은 다음에는 자기 손가락이 흔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참다운 우리 생명의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가 바로 부처님인데 이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바로 그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지옥으로 아귀餓鬼로 축생畜生으로 헤매는 것입니다. 무명심만 없다고 할 때는 바로 내 몸이 천지우주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나의 본 생명 또는 일체 존재의 본 생명 이것을 아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뿐인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학인 동시에 철학이요 또는 종교인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인 인과율因果律 이것은 철두철미한 과학인 것이고 또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아는 참다운 철학, 또는 그 자리를 증명하는 참다운 종교는 역시 불교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허망虛妄무상無常한 상을 떠나서 참다운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를 믿고 사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인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가 갈 곳은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삼독심三毒心을 떠나버린 곳으로 무명심無明心을 떠나버린 분만이 갈 수가 있습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극락세계는 필경 돌아가야 할 일체 중생의 고향입니다. 극락세계는 땅도 황금으로 되어있고 나무도 숲도 모두가 다 금색 찬란한 광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극락세계는 광명정토光明淨土입니다. 극락세계의 교주는 극락세계에서 우리 중생에게 법문하시는 부처님은 아미타불입니다. 또한 극락세계는 삼독심을 떠난 무수한 보살들이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에 가는 첩경捷徑을 말씀하신 법문인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에는 법장비구가 극락세계를 건립할 때에 세운 48원의 원력願力이 있습니다. 그 원력 가운데서 십팔원이라,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 염불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그러한 법문이란 말입니다. 그 법문 가운데서 우리 중생이 설사 업장이 무겁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누구가 업장이 없겠습니까. 삼독심이 있는 중생이라면 누구나가 다 업장이 있습니다. “범부凡夫가운데서 비록 업장이 무겁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참다운 마음으로 열 번만 ‘나무아미타불’을 왼다고 하면 틀림없이 극락세계에 태어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전에 일심으로 조금도 남을 미워하지 않고 참다운 평등심을 가져야 할 것인데 보통 사람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가여! 영가의 참 생명은 영가의 몸도 아니요, 영가의 자식도 아니고, 영가의 처자도 아닙니다. 자기의 몸도 자기를 못 따라오고 자기 자식도 자기를 못 따라오는 것이고, 자기 아내도 자기 남편도 못 따라옵니다. 어떠한 것도 못 따라옵니다. 오직 자기의 그런 업식業識만 가지고서 홀로 가는 것이 우리 중생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몸이 있고 자식이 있고 형제가 있고 이럴 때는 일념이 되기가 어려우나, 업식만 가지고 있는 그러한 심식心識이기 때문에 마음만 잘 먹어 한 생각 돌이키면 그냥 일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무한의 세계이기 때문에 어떠한 세계나 한도 끝도 없이 모두가 다 극락세계입니다. 우리 중생이 본다고 할 때에는 극락 따로 있고 지옥 따로 있습니다만 밝은 분들이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비단 도인들이 가는 그 세계가 극락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도 바로 화장세계華藏世界라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우리 중생들은 상만 보고 또는 겉만 보는 것이지만 본 성품을 보는 성자의 안목에서는 본 성품이라 하는 것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기 때문에 나무나 소나 어떠한 것이나 우리 중생들이 상에 가려 중생들이 나쁘고 더럽다하더라도 더러운 것은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이대로가 바로 극락세계요 화장세계이기 때문에 극락세계라 하는 것은 정말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광명정토라 어느 곳 어느 처소 모두가 다 진여불성의 청정미묘한 영생의 광명으로 충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영가여! 영가가 아직은 그렇게 안 보인다 하더라도 영가가 가실 극락세계는 조금도 흠이 없는 훤히 빛나는 자비慈悲요, 지혜요, 또는 일체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그러한 광명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극락세계의 그 마음을 단 한 순간도 안 놓치기 위해서 극락세계의 교주, 참다운 생명의 이름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부르십시오.

 

영가여! 극락세계, 우리가 갈 참다운 고향 또는 우주의 참다운 실상實相인 동시에 일체존재, 일체중생이 돌아가야 할 참다운 고향 이 자리를 마음에 간직하시고서 다만 한시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참다운 이름, 우리 진여불성자리의 참다운 이름인 동시에 우주의 이름 또는 극락세계의 교주의 이름인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부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우리 사부대중이시여! 오늘 천도薦度를 받는 청신녀

ΟΟΟ영가의 극락왕생을 돕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섭섭하다, 슬프다’ 그러한 습정習情에서 우러난 말들은 극락세계의 왕생을 돕는 힘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다운 생명의 고향은 극락세계다 우리 참다운 생명의 본체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믿고서 참 이름, 우주의 참 이름 또는 일체 존재의 참 이름인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외우시기바랍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오늘 극락세계로 바삐 가시는 ΟΟΟ영가의 왕생을 촉진하는 제일의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그러한 중생의 망념으로 볼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밝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러한 것은 흔적도 없이 모두가 다 청정미묘한 광명세계인 것입니다. 깨달으면 바로 부처요 또는 바로 극락이고 깨닫지 못하면 바로 지옥이요 또는 아귀요 또는 축생이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간에 있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무서운 도둑놈인, 가장 배신자인 내 몸뚱이 이것을 생각하고 참다운 생명을 외면할 때는 영원히 청정한 빛을 등지고 어두운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우리 인간에 있어서는 어두움과 광명이 따로 있습니다. 자기 몸뚱이만 생각하고 자기와 가까운 권속의 몸뚱이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물질위주만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주의 참다운 도리 이것은 누구나가 참다운 진리의 부처님을 딱 믿고서 그 자리를 확신하고서 그 자리에 가도록 가상假相이나 또는 가명假名을 떠나서 우리가 생활도 하고 공부도 하는 것이 우리가 우주의 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진리에 반하는 길은 참다운 자유와 참다운 행복이 없습니다. 진리를 따라야 만이 참다운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1990년 9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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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ΟΟΟ49재 천도법어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우리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죽고 살고 하는 생사生死입니다. 다른 것은 그때그때 허망虛妄무상無常합니다만 생사대사生死大事, 이것은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영가들은 지금 죽음 길에 계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삶만 있고 죽음은 없으면 좋겠고 또는 만남만 있고 이별이 없으면 좋겠습니다만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하는 것은 꼭 상대적으로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또는 밤이 있으면 낮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영영 죽어져버려서 다시 부활이라 하는 신생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나쁜 것이겠습니다만 죽음이라 하는 것은 금생今生에 어설픈 인간이 생生을 그만 두고서 새로운 생으로 다시 한 단계 높은 생으로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세상이 완벽한 지상의 행복이 아닐 바에는 꼭 죽음은 필요한 것입니다.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사람 생명이 한 번 있으면 꼭 네 가지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탄생이라 하는, 출생이라 하는 남이 있고 한 번 났으면 오랫동안 인연이 다 할 때까지 살아야 하는 그런 생이 있고, 그 다음에는 다시 다른 생으로 옮기는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 다음에는 다시 중유中有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과정 즉 맨 처음에 태어나는 그런 생유生有와 그 다음에 한 세상 사는 그런 본유本有라, 그 다음에 죽어지는 ‘죽을 사’자 사유死有라, 그 다음에 죽어서 다음 세상 까지 가는 그런 죽음세계, 저승세계 이것이 이른바 중유세계입니다. 생유, 본유, 사유, 중유 이러한 네 가지 과정은 누구나 다 거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 지금 바르게 사셨고 복도 많으시기 때문에 이 자리에 이렇게 유족들이 많이 계셔서 영가들의 명복을 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 하는 것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풀잎 끝에 이슬같이 허망虛妄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죽음은 노소부정老小不定이라, 늙은이라 해서 빨리 가는 것도 아닌 것이고 나이가 적다해서 반드시 뒤에 가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중생들은 그런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것을 허망하지 않다고 하는데서 우리 중생의 고뇌가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몸은 어떠한 것인가? 사람 몸이란 것은 불교적인 술어로 하면 땅 기운 또는 물 기운 또는 불기운 바람 기운 이러한 기운이 모여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대적인 말로 한다 하면 역시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이러한 것들이 잠시간 인연 따라 모여서 우리 몸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 있는 이 몸은 본래 있던 몸이 아닌 것이고 바로 전생에 이와 닮은 몸도 아니었습니다. 또는 태어 날 때는 이와 같이 성인成人의 몸도 아니었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금생에도 그때그때 변동해서 잠시간 각 원소가 모여서 구성 되는 그 몸, 그 몸은 종당에는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변동해서 마지않는 그 몸 또는 내생 가서는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그 몸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는 데서 모든 인간의 고뇌가 생겨납니다. 내 몸도 그렇고 또는 자기 아내 몸도 그렇고 자기 남편 몸도, 자기 자식 몸도 똑같이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습니다. 현재도 그때그때 변동해서 마지않습니다. 이렇게 허망한 것을 우리 중생들이 잘 모르고 내 몸이요, 네 몸이요, 내 권속이고 내 아내고 그렇게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근본도리를 탐구하는 깊은 철학이라던가, 인생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던가 이러한 것은 모두가 다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역설합니다. ‘허망虛妄무상無常’하다, ‘꿈같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꿈’인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우리 인간이 죽음도 없고 이별도 없고 상대적인 허망 무상한 것을 떠나서 가는 세계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생명이 정말 허망 무상으로 끝나버리면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이 본래적으로 떠나온 생명의 고향도 있는 것이고 또는 장차 돌아가야 할 생명의 고향도 있습니다. 이것이 극락세계입니다. 어떠한 누구나가 다 극락세계에서 와서 다시 극락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어째서 극락을 떠나 왔는가? 혹시 천지 우주의 순환과정 따라서 그때그때 인연이 우리 심식心識을, 우리 마음을 덮어 버리면 모두가 다 본래에서 ‘나’라는 것이 없는 것인데 ‘이것이 나다’ 이렇게 고집하는 데서, 그래서 우리가 극락세계라 하는 영원한 낙원, 영원히 행복스러운 데서 추방되는 것입니다.

 

추방은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둡기 때문에 잘 몰라서 이래저래 구하고 헤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죄를 많이 지어 이 몸뚱이에 너무나 지나치게 탐욕심을 내다보면 그때는 저 아귀餓鬼로도 뚝 떨어지는 것이고 또는 이 몸뚱이 지키기 위해서 이 몸뚱이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해치면 지옥으로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더욱 보호하고 자기 권속이나 자기 가족의 몸뚱이를 더욱 더 보호하기 위해서 살다보면 사람이 거칠어지고 아수라阿修羅 같은 세상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다행이 그런 가운데도 탐욕심도 그렇게까지는 많이 안내고 성내는 그런 번뇌도 그렇게 많이 안내고 또는 거칠어지는 마음도 어느 정도는 사라지고 선행善行도 하고 나쁜 마음도 내고 이렇게 우리가 생활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과거 전생에 선행을 많이 지어서 금생今生에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제가 뵙기에 굉장히 선량한 어른이셨습니다. 그래서 금생에 인생을 살고 가실 때는 마땅히 돌아갈 근본고향으로 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고향으로 못 가시면 다시 인간으로, 복이 적으면 인간 가운데도 박복하고 병도 많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갈래고 윤회하는 것인데 앞서 말한바와 같이 가장 못 살면 지옥 가는 것이고, 분명히 지옥도 실존적인 세계입니다.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더러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지옥이나 그런 세계는 우리 중생의 권선징악을 위해서 우리 중생한테 선행을 권장하기 위해서 방편方便으로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나 이것은 방편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분명히 있듯이 지옥 존재도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인간 존재가 허망하듯이 지옥도 허망할 뿐입니다. 잘못 살면 지옥으로, 조금 낫게 살면 그때는 일반 동물로, 더 낫게 살면 아귀餓鬼귀신으로, 조금 나아지면 싸움만 좋아하는 그런 신의 세계인 아수라신으로, 더 나아지면 사람으로, 조금 더 나아지면 천상으로 또는 성문聲聞으로, 연각緣覺으로, 보살로 부처로 이렇게 뱅뱅 도는 것입니다만 생명의 본바탕은 부처님입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라 하는 이것이 본래의 생명인데 불성을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모양을 ‘내 것이다.’ 집착하는 데서 나한테 좋게 하면 탐욕심을 내고, 남을 시기하고 성내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마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근본번뇌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의 몸, 이것이 허망한 것인데 허망하지 않다고 보고 ‘이 몸이 영구히 존재한다.’ 이렇게 고집하는 데서 우리 무지無知의 근본된 번뇌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탐욕심이 나오고 성내는 마음이 나오고 그렇게 해서 이 세계라 하는 것은 아수라阿修羅라 하는 혼란스러운 그런 갈등된 세상이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가 가실 곳은 극락세계입니다. 또는 만 중생이 돌아갈 세계도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 이것은 광명光明의 세계이고 죽음도 없고 이별도 없고 또는 실패도 없는 영원한 만남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상대적인 것을 떠나보내는 참다운 시작의 세계이기 때문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불구부정不咎不淨이요, 청정하거나 더러워질 것도 없고, 또는 부증불감不增不感이라, 더하고 덜하지 않은 그러한 세계입니다. 마치 에너지가 천차만별로 무수한 그런 현상계가 나온다 하더라도 에너지 불멸법칙이라, 에너지는 조금도 늘지 않고 감하지 않듯이 부처님의 세계, 영원의 실상세계인 극락세계도 역시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행복만 충만한 세계입니다. 한번 만나면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세계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우리가 돌아갈 근본고향인 것입니다.

 

영가여! 이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의 눈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석가모니를 위시한 예수나 또는 공자나 무수한 성자가 다 증명한 길입니다. 명명백백한 실상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영원히 존재하는 광명으로 충만된 세계, 이러한 물질적인 몸이 아니라 순수한 장엄스러운 광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땅도 숲도 모두가 다 광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세계를 가기위해서는 분명히 이 자리를 믿어야합니다. 본래 이 자리가 우리 마음의 본성자리지만 이 자리를 안 믿으면 이 자리에 갈 기약이 없습니다. 딱 믿고서 그 자리에 계시는 모든 그런 성중聖衆들, 모든 성중들이 본래 생명자리, 모든 성중들을 거느리는 가장 어른자리, 그 자리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생명 본바탕인 동시에 극락세계의 바탕이고 또는 주인공이고 또는 모든 중생의 본래 주인공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다 아미타불이 본래 생명자리인데 거기까지 미처 못 가니까 구분해서 보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도 역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상품상생上品上生이요, 상품중생上品中生이요, 상품하생上品下生이요, 우리의 그런 업장業障이, 우리 번뇌가 녹아짐에 따라서 비록 가벼운 업장 때문에 극락세계는 갔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가장 순수한 단계는 온전히 부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순수하지 못하면 상품중생이요, 상품하생이요, 중품상생中品上生이요, 중품중생中品中生이요, 중품하생中品下生이요, 하품상생下品上生이요, 하품중생下品中生이요, 하품하생下品下生이요, 이런 세계는 가장 순수한 곳에는 미치지 못하는 세계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도 극락極樂의 범주이기 때문에 고통도 없고, 이별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순수도가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되어서 완전무결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중생이나 모두가 다 이것이 근본자리이기 때문에 인간뿐만이 아니라 딴 동물이나 딴 식물이나 딴 무생물이나 모두가 다 근본은 그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부처님자리인 것입니다. 하나의 티끌이나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자리로 부터서 인연 따라서 이렇게 태어나고 저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음이온 양이온 결합하는 양에 따라서 산소나 수소나 그런 구분이 있고 또는 거기에서 각 세포라던가 일체 물질이 구성되듯이 일체 존재 역시 모두가 근본, 가장 순수한 에너지, 가장 순수한 생명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이 자리에서 모든 중생이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은 종당에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몸뚱이는 좋아하고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 몸뚱이는 싫어하겠지요.’ 이렇게 구분하고 업을 짓기 때문에 본래 고향자리, 부처로 못 가는 것입니다.

 

영가여! 극락세계는 우리 눈앞에 훤히 전개가 되어 있습니다. 에너지가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전자가 되고 한다 하더라도 에너지 자체는 변동이 없듯이 부처님자리, 부처님의 그런 생명자리는 어떻게 변화가 됐다 하더라도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광명光明은 사람한테나 또는 하나의 티끌에나 또는 독사한테나 어디에나 훤히 빛나 있습니다. 다만 중생이 색안경에 가리어서 중생의 번뇌에 가리어서 부처님의 그런 참다운 도리, 참다운 광명을 못 볼뿐입니다.

 

영가여! 영가의 몸은 영가의 몸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받은 몸입니다. 따라서 이 몸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영가여! 영가의 권속도 어쩌다가 금생今生에 태어나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나그네 길에서 스쳐가듯이 인연지은 인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권속도 영구히 자기의 소유가 못 됩니다. 자기가 쓰던 그런 세간, 재물, 자기 권력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것도 자기 마음 외에는 자기 순수한 마음 외에는 자기 것이 못 됩니다. 이러한 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할 때는 우리 본 고향인 극락에 못 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꿈같은 것입니다.

 

영가여! 그러나 금생에 지은 인연이 참 소중한 것입니다. 영가가 금생에 지은 아들이요 딸이요 자기 형제간들이 잘 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베품은 무엇인가? 이것은 극락세계의 도리, 부처님의 도리, 우주의 진리에 따라서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것을 허망 무상하다고 분명히 인식하고 극락세계로 바로 가시는 그것이 자기 권속들한테 가장 좋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적에 자기 아들이나 딸이나 아내가 다 극락세계의 길로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 사람 역시 극락세계의 길로 지향해서 허망한 것에 대해서 집착을 끊고서 바른 생활로 ‘원래 나와 너는 둘이 아니거니 천지우주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우주라 하는 그러한 하나의 생명체와 동질성이라, 모두가 다 같은 차이가 없는 생명체 가운데서 다만 바다 가운데 일어나는 거품 모양으로 나요 너요 구분이 있습니다만 모두가 바닷물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체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느껴버려야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을 끊습니다.

 

영가여! 자기 몸은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거품과 똑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서 극락세계로 빨리 가시는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권속들한테, 또는 친구들한테 누구한테도 가장 좋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권속 또한 역시 극락세계, 자기 본래적인 고향으로 빨리 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뿌리가 하나고, 같이 상통하기 때문에 ‘내 자식이나 내 친구가 빨리 바른 우주의 진리에 따라서 바른 길로 가야하겠구나.’ 이렇게 한번 마음먹을 적에 그런 기운이 거기에 미치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薦度에 동참하시는 유가족들이시여! 돌아가신 영혼에 대해서 가장 좋게 우리가 받들어 드리는 그런 명복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슬프게 울고불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많은 물질로 공양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계시는 유족들이 행동을 바르게 하고 말을 바르게 하면서 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우리 본고향 자리를 지향해서 애쓰고 바르게 사시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내 개인만 내가 아니라 우주가 하나의 생명인데 ‘모든 생명과 더불어 내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적에 자기를 위해서 남을 구박한다거나 해코지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모든 생명은 본바탕에서 본다고 할 때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기랑 뿔뿔이 헤어진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모든 생명이란 하나’라는 생각, 그 생각을 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 ‘자기 이웃을 위해 베풀어야 하겠다. 자기만을 위해서 착취를 안해야 하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는 말도 중생의 마음을 상하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모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 역시 생물은 근본이 같거니 하나의 곤충이나 모두가 다 근본생명이 같거니 어떠한 것도 생물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 또 음탕한 행동도 말고 거짓말도 않고 허튼 음식도 먹지 않고 이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 생명은 본래생명 자리로 보다 빨리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돌아가신 영가에게 귀중한 최상의 효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시면 나중에 같이 극락세계에 가셔서 영생의 만남, 영생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자기 본래 생명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인 부처님을 생각하시고 아미타불을 생각하시고 이렇게 하셔서 한 생각도 흐트러짐이 없이 한 생각도 부처님을 생각함에 후회함이 없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극락세계를 생각한다고 할 때는 순식간에 영가는 극락세계에 상품상생上品上生, 가장 좋은 그런 윗자리에 계시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왕생극락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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