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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불께서 온갖 중생들이 육도 중에서 수레바퀴처럼 돌아다니며 고를 받으면서도 그 고를 벗어날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성도하신 후에 사십여 년 동안 팔만 법장을 설법 하시어 중생이 육도를 벗어나 성불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중생으로서 처음 발심하여 성불하기까지에는 삼아승기겁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닦아야하니 그러는 동안에는 무수한 생사를 반복하면서 한량없는 고난을 받아야 하므로 부처님께서 성불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며 생각하시기를 이법이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리고도 어려워서 중생들이 이 말을 듣고 겁이 나서 발심하지 못하거나 혹은 도를 닦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시어 빨리 성불할 수 있는 별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 법이 연종법문이니 어떤 중생이나 여러 생을 지내지 아니하고 일생에 염불한 공덕으로 육도윤회를 벗어나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아미타불의 설법을 듣고 필경에는 성불하는 법문이다.

 

다른 법문은 자기의 힘으로 도를 닦아서 온갖 번뇌를 끊어야 육도의 윤회를 면하고 성불하는 것이며 만일 조금이라도 번뇌가 남아 있으면 성불은 고사하고 육도의 윤회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종법문은 자기의 염불하는 수행과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인하여 설혹 임종할 때에 번뇌를 다 끊지 못하였더라도 대혹왕생 즉 혹을 띤 채 왕생하여 성불하게 되는 것이니 다른 법문에 비하여 알기 쉽고 행하기 쉽고 닦기 쉽고 성불하기 쉬운 절묘한 법문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

 

一.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

 

서방정토(西方淨土)란 것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와 같은 예토[穢土]에 대비하여 하는 말이니 서방[西方]의 성자[聖者]가 계시는데 오탁[五濁]의 더러움이 없는 정토[淨土]이므로 서방정토(西方淨土)라한다.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시방정토[十方淨土]중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계시는 정토[淨土]로써 고[苦]는 없고 낙[樂]만 있으므로 극락세계[極樂世界]라 하며 다른 정토보다 가장 수승[殊勝]한 정토이다.

 

二.극락세계의 유래[由來]

 

무량겁[無量劫] 전에 세자재왕불[世子在王佛]이 출세[出世]하시고 그 나라에 교시가[橋尸迦]라는 국왕이 있었는데 보리심을 발하여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법장비구[法藏比丘]가 된 후에 세자재왕불 앞에서 사십팔원[四十八願]을 세우고 그 소원이 성취되어 성불하였으니 그가 곧 아미타불[阿彌陀佛] 이시고 그 부처님이 교화[敎化]하시는 국토[國土]가 극락세계이다.

 

三.극락세계의 [位置]

 

화엄경[華嚴經]에 보면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맨 아래에 풍륜[風輪]이 있고 풍륜위에 향수해[香水海]가 있으며, 향수해 가운데에 대연화[大蓮華]가 있고 연화위에 십불가설[十不可說], 불찰[佛刹], 미진수[微塵數], 찰종[刹種]이 있으니 이것을 화장세계[華藏世界]라 하며 그 많은 찰종들은 모두 이십중세계[二十重世界]로 되어있다.

 

그 한 복판에 있는 찰종의 제십삼층[第十三層]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가 있는데, 십삼불찰[十三佛刹] 미진수세계로 둘러 싸였으며 사바세계의 서쪽으로 십만 억 세계를 지나가서 극락세계가 있으니 극락세계는 사바세계와 같이 제 십삼 층에 있다.


 

四.극락세계와 삼계[三界]와의 비교[比較]

 

극락세계는 삼계(三界 즉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이외의 정토[淨土]이니 삼계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一).극락세계는 오욕[五慾]등이 없으므로 욕계[欲界]가 아닌 비욕계[非欲界]이다.

 

욕계는 육천(六天 즉 위에서부터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화락천[化樂天], 도솔천[도率天], 야마천[夜摩天], 도리천[忉利天], 사왕천[四王天]인데 타화자재천에서 야마천까지는 공중에 의거[依居]하므로 공거천[空居天]이라 하고 도리천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에 머무르므로 지거천[地居天]이라 한다. 단 해와 달과 별은 공거천에 속한다.)

 

인[人] 아수라[阿修羅] 귀[鬼] 축생[畜生], 지옥[地獄]의 총칭이고 오욕(五欲 즉 재욕[財欲] 색욕[色欲] 음식욕[飮食欲] 명예욕[名譽欲] 수면욕[睡眠欲] 등이 있는 유정[有情]의 주소다.

 

(二). 극락세계는 땅에 의거[依居] 하므로 색계가 아닌 비색계[非色界]다.

 

색계는 욕계의 위에 있고 선정[禪定]을 닦아서 태어나는 제천중[諸天衆]의 주소[住所]니 이미 모든 욕[欲]을 여의고 물질[物質]이 뛰어나게 묘하며 정묘[精妙]하므로 색계라 하며 이 색계에 다음 十八天이 있다.

 

위에서부터 색구경천[色究竟天] 선견천[善見天] 선현천[善現天] 무열천[無熱天] 무번천[無煩天] 광과천[廣果天] 무상천[無想天] 복생천[福生天] 무운천[無雲天] 이상은 사선천[四禪天]이고 변정천[邊淨天] 무량정천[無量淨天] 소정천[小淨天] 이상은 삼선천[三禪天]이며,광음천[光音天] 또는 극광정천[極光淨天],무량광천[無量光天],소광천[小光天],이상은 이선천[二禪天]이고, 대범천[大梵天],범보천[梵補天],범중천[梵衆天], 이상은 초선천[初禪天]이다.이상 제천이 공거천이다.

 

(三)극락세계는 형상[形象]이 있으므로 무색계[無色界]가 아니다,

무색계는 식심[識心]만 있어서 심묘[深妙]한 선정[禪定]에 머무르므로 무색계라한다.

무색계는 물질[物質]이 없으므로 그 방처[方處] 를 정할 수 없으나 과보[果報]가 수승[殊勝]하므로 색계위에 있는 것이다.

무색계에 사천[四天]이 있으니 즉 위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인데 거처[居處]로써 이것을 나눌 수가 없으나 그 선정[禪定] 수명[壽命] 등의 승열[勝劣]에 의하여 차등을 세운 것이다.

 

五,극락세계의 별명

 

극락은 범어[梵語]로 수마제[須摩堤.須摩題]수마야[,須摩耶],수가마제[須呵摩提],소가박제[蘇珂?帝]를 번역한 것이며, 그 별명이 三十여종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극락(極樂), 안락(安樂), 안양(安養), 묘락(妙樂), 묘의(妙意), 호의(好意), 서방(西方), 서찰(西刹), 정토(淨土), 정방(淨邦), 연방(蓮邦), 연찰(蓮刹), 보국(寶國), 보방(寶邦), 보찰(寶刹, 낙방(樂邦), 불회(佛會), 보토(報土), 무위(無爲), 밀엄국(密嚴國), 청정처(淸淨處), 엄정국(嚴淨國), 제지토(諸智土), 열반성(涅槃城), 진여문(眞如門), 제불가(諸佛家),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장엄국(極樂莊嚴國),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대승선근계(大乘善根界), 대원청정보토(大願淸淨報土), 일승청정무량수세계(一乘淸淨無量壽世界).

 

청태국[淸泰國]을 극락의 별명으로 쓰는 이가 있으나 청태국은 부모[父母]등이 있는 미타국[彌陀國]으로서 예토[穢土] 출현[出現]의 상 이므로 청태국을 곧 극락정토라 함은 잘못이다.

 

 

六.극락세계의 장엄[莊嚴]

 

장엄은[莊嚴]은 선미[善美]로써 국토를 장식하는 것이니 극락세계의 장엄은 다음과 같다.

 

(가). 극락세계는 땅이 칠보[七寶]로 되어 광채가 빛나고 기묘하며 청정하기가 시방세계에 뛰어나고 국토의 넓기가 한량없으며 땅이 평탄하여 산과 구렁과 골짜기가 없고 바다와 강이 없으며 대, 중, 소의 보배 연못이 있고 육도[六道]중 지옥, 아귀[餓鬼], 축생, 아수라와 용[龍]이 없다.

 

(나). 극락세계에는 비와 눈이 없고 해와 달이 없으나 항상 밝고 어둡지 아니하여 밤과 낮이 없거니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으로 낮을 삼고 꽃이 지고 새가 쉬는 것으로 밤을 삼으며, 극락세계의 일주야는 사바세계의 일겁[一劫]이요 또한 기후도 차고 더운 것이 없어 항상 봄과 같이 온화하고 밝으며 상쾌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다). 극락세계는 땅위에서 허공에 이르기까지 한량이 없는 여러 가지 보배와 백 천 종류의 향[香]으로 되었으며, 장엄한 것이 기묘하고 절승하며 광채가 휘황한 것은 다 말 할 수 없다.

또 누각[樓閣]이 마음대로 높고 커서 공중에 떠 있는 것도 있고 마음대로 높거나 크지 못하여 땅위에 있는 것도 있나니 이것은 전생에 도를 닦을 때에 덕이 후하고 박함에 말미암은 것이다.

 

(라). 극락세계에는 여러 가지 보배로 된 보망[寶網]이 그 나라를 덮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보배나무도 위에는 보망이 덮이었고 그 주위에는 보배 난간[欄杆]이 둘렸으나 교묘하게 꾸미고 광채가 산란한 것은 형언 할 수 없고, 또 바람이 약간 불면 보배나무와 보배그물에서 미묘한 법음[法音]이 나며 꽃다운 향기가 퍼지고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백 천 종류의 음악소리와 같으며, 또 극락세계에는 각종 음악이 있어서 끊기지 아니하는데 그 소리가 시방세계의 음악 중에서 제일이며 또 모든 하늘에서 백 천 가지의 향화[香華]와 백 천 가지 음악을 가지고 내려와서 불[佛] 보살[菩薩]께 공양[供養]한다.

 

(마). 극락세계에는 바람이 불면 꽃이 흩어져서 전국에 가득차고 하늘에서도 꽃비가 오는데 제각기 그 빛을 따라 쌓이고 섞기지 아니하며 부드럽고 고우며 찬란한 광채와 꽃다운 향기가 나고 꽃이 네 치나 쌓이며 발로 밟으면 네 치를 들어갔다가 발을 들면 도로 올라오며 꽃이 시들면 바람에 날려 없어진다.

 

(바). 극락세계에는 칠보로 된 팔공덕수[八功德水]가 가득 찼는데 목욕할 때에는 물이 덥고 찬 것과 늘고 주는 것이 마음대로 되어서 더워라 하면 더워지고 차라 하면 차지고 무릎까지 올라오라하면 무릎까지 올라오고 허리까지 올라오라하면 허리까지 올라오고 목까지 올라오라하면 목까지 올라오고 또 다시 내려가라면 내려간다.

 

(사). 극락세계에는 각색연화가 전국에 차 있으며 칠보로 된 연못에는 크기가 수레바퀴 같은 각색 연화가 미묘하고 향기롭고 정결하며 또 물이 연꽃사이로 흘러서 아래위로 돌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내는데 제각기 소원대로 듣게 된다. 가령 설법소리를 듣고자 하면 설법소리를 듣게 되고 음악소리를 듣고자하면 음악소리를 듣게 된다.

 

(아). 극락세계에는 부처님과 보살이 설법하시거니와 아미타불이 변화하여 만든 여러 가지 기묘한 새들이 온화하고 청아[淸雅]한 소리로 주야육시[晝夜六時]에 설법한다.

 

(자). 극락세계에 태어날 때에는 칠보로 된 연못 속의 연화에 화생[化生]하여 젖으로 기르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자라고 수명이 무수겁[無數劫]이요, 온몸이 금빛으로 광명이 있으며, 용모가 잘 나고 못난 것이 없이 한결같고 형상[形象]이 단정하며 정결하고 수승하기가 세간[世間]사람이나 하늘사람으로는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의 걸인을 인간 임금에 비하면 그 추악하기가 비유할 수 없어 임금이 百千萬배나 수승하고 인간 임금이 사람 중에는 존귀하지만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하면 그 추악하기가 걸인을 임금에게 비한 것과 같고 전륜성왕이 천하에서는 제일이나 도리천왕[忉利天王]에게 비하면 도리천왕이 百千萬배나 수승하고 도리천왕을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에 비하면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이 百千萬배나 수승하고 타화자재천왕을 극락세계의 聖人에게 비하면 극락세계의 성인들이 百千萬배나 수승하다고 한다.

 

(차). 극락세계에는 여인이 없다. 설사 여인이 왕생 하더라도 여인으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장부[丈夫]가 된다.

 

(카). 극락세계의 사람은 육신통[六神通] 즉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신경통[神境通], 누진통[漏盡通]을 구족[具足]한다.

 

(타). 극락세계는 음식을 먹을 때에는 각색 보배 그릇이 마음대로 앞에 오는데 그 가운데에 백미[白米]가 구존[具存]한 음식이 담겨 있고 먹은 뒤에는 자연히 녹아 흘러서 남는 찌꺼기가 없고 혹은 빛만 보고 냄새만 맡아도 저절로 포만[飽滿]하여 몸과 마음이 부드럽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자연히 화[化]하여 가며 다시 먹고자 하면 또 앞에 나타난다.

의복도 입고자하면 마음대로 앞에 와서 놓이는데 바느질하거나 빨래하거나 물들이거나 다듬이 하는 일이 없다.

 

(파). 극락세계에는 사람들이 모두 지혜가 있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도덕[道德] 아닌 것이 없으며 입으로 말하는 것이 바른 일 아닌 것이 없고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며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일이 없으며 제각기 질서를 지키고 어긋나는 일이 없어서 움직이는 것이 예의[禮儀]에 맞고 화목하기가 형제 같으며 말이 진실하고 서로 가르쳐 주면 기쁘게 받아 어김이 없으며 신기[神氣]가 고르고 고요하며 체질[體質]이 가볍고 맑다.

 

(하). 극락세계에는 낙[樂]만 있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가 없나니 태생[胎生] 하는 데는 고가 있으나 화생[化生]하는 데는 연화에 화생하므로 생고[生苦]가 없으며 춘하추동이 없고 절기가 바뀌지 아니하며 기후가 항상 온화하므로 노고[老苦]가 없으며 화생한 몸이 미묘하여 향기롭고 정결하므로 병고[病苦]가 없으며 수명이 한량이 없으므로 사고[死苦]가 없다.

 

 

七. 극락세계 장엄[莊嚴]의 종류[種類]와 명칭[名稱]

 

극락세계의 정보[正報], 의보[依報]의 장엄을 표시[表示]하는데 십종장엄[十種莊嚴] 이십사락[二十四樂] 삼십종익[三十種益] 등이 있으며 다음과 같다.

정보[正報]는 과거의 업[業]으로 인하여 받는 나의 심신[心身]을 정보라 하니 범부[凡夫]나 성인[聖人]의 몸이다.

즉 인人 천天 제신諸神 보살 부처님 등을 말함이고 의보[依報]는 범부와 성인의 심신에 따라 존재[存在]하는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사물을 의보라 하니 국토[國土]등을 말하는데 이는 곧 정토[淨土], 예토[穢土]등을 말한다.

 

 

*십종장엄[十種莊嚴]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에 의하면 정보장엄[正報莊嚴]과 의보장엄[依報莊嚴]을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분류한다.

 

1. 法藏誓願修因莊嚴 [법장서원수인장엄]

2. 四十八願願力莊嚴 [사십팔원원력장엄]

3. 彌陀名號壽光莊嚴 [미타명호수광장엄]

4. 三大士觀寶像莊嚴 [삼대사관보상장엄]

5. 彌陀國土安樂莊嚴 [미타국토안락장엄]

6. 寶河淸淨德水莊嚴 [보하청정덕수장엄]

7. 寶殿如意樓閣莊嚴 [보전여의누각장엄]

8. 晝夜長遠時分莊嚴 [주야장원시분장엄]

9. 二十四樂淨土莊嚴 [이십사락정토장엄]

10.三十種益功德莊嚴 [삼십종익공덕장엄]

 

 

*이십사락[二十四樂]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의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에 이십사락[二十四 樂]을 말 하였는데 극락정토의 二十四종의 락상[樂相]이며 다음과 같다.

 

1. 난순차방락 欄楯遮防樂

2. 보망라공락 補網羅空樂

3. 수음통구락 樹陰通衢樂

4. 칠보욕지락 七寶浴池樂

5. 팔수징의락 八水澄漪樂

6. 하견금사락 下見金砂樂

7. 계제광명락 階梯光明樂

8. 누대능공락 樓臺凌空樂

9. 사연화향락 四蓮華香樂

10.황금위지락 黃金爲地樂

11.팔음상주락 八音常奏樂

12.주야양화락 晝夜兩華樂

13.청신책여락 淸晨策勵樂

14.엄지묘화락 嚴持妙華樂

15.공양타방락 供養他方樂

16.경행본국락 經行本國樂

17.중조화명락 衆鳥和鳴樂

18.육시문법락 六時聞法樂

19.존념삼보락 存念三寶樂

20.무삼악도락 無三惡道樂

21.유불변화락 有佛變化樂

22.수요라망락 樹搖羅網樂

23.십문동성락 十聞同聲樂

24.성문발심락 聲聞發心樂

 

 

* 삼십종익[三十種益]

 

극락정토 삼십종의 즐거운 상[相]이니 이것을 삼십락[三十樂]이라고도 한다.

석정토군의론[釋淨土群疑論]에 정토왕생을 권하기 위하여 칭찬정토불섭수경[稱讚淨土佛攝受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사십팔원[四十八願]에 의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니 다음과 같다.

 

1.수용종종공덕장엄청정불토익 [受用種種功德莊嚴淸淨佛土益]

2.대승법락익 [大乘法樂益]

3.친근공양무량수불익 [親近供養無量壽佛益]

4.유력시방공양제불익 [遊歷十方供養諸佛益]

5.어제불소문법수기익 [於諸佛所聞法受記益]

6.복혜자량질득원만익 [福慧資糧疾得圓滿益]

7.속증무상정등보리익 [速證無上正等菩堤益]

8.제대사등동일집회익 [諸大士等同一集會益]

9.상무퇴전익 [常無退轉益]

10무량행원염념증진익 [無量行願念念增進益]

11.앵무사리선양법음익 [鸚鵡舍利宣揚法音益]

12.청풍동수여천중락익 [淸風動樹如千衆樂益]

13.마니수류선설고공익 [摩尼水流宣說苦空益]

14.제악음성주제법음익 [諸樂音聲奏諸法音益]

15.사십팔원홍서원중영절삼도익 [四十八願弘誓願中永絶三塗益]

16.진금신색익 [ 眞金身色益]

17.형무미추익 [ 形無美醜益]

18.구족육통익 [ 具足六通益]

19.주정정취익 [ 住正定聚益]

20.무제불선익 [ 無諸佛善益]

21.수명장원익 [ 壽命長遠益]

22.의식자연익 [ 衣食自然益]

23.유수중락익 [ 唯受衆樂益]

24.삼십이상익 [ 三十二相益]

25.무유실여인익 [ 無有實女人益]

26.무유소승익 [ 無有小乘益]

27.이제팔난익 [ 離諸八難益]

28.득삼법인익 [ 得三法忍益]

29.신유광명주야상광익 [ 身有光明晝夜常光益]

30.득나라연역익 [ 得那羅延力益]

 

 

八. 태궁[胎宮]

 

태[胎]는 태생[胎生]이요 궁[宮]은 궁전[宮殿]이니 불지[佛智]의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의혹[疑惑]하는 행자[行者]가 자력[自力]으로 선[善]을 닦아 왕생[往生]을 원하면 저 정토에 왕생하되 연화 중에 포함되어 낳지 못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태중에 있어서 암둔[闇鈍]함과 같으므로 태생이라 하며 스스로 궁전 중에 머무름과 같이 생각하므로 궁전이라 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의하면 만약 어떤 중생[衆生]이 의혹하는 마음으로 모든 공덕[功德]을 닦아서 저 나라에 낳기를 원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의혹하여 믿지 아니하면서도 오히려 죄 복[罪 福]을 믿으며 선본[善本]을 닦아서 그 나라에 낳기를 원하면 이 중생들이 저 궁전에 낳아서 五白세가 되도록 부처님을 뵈옵지 못하며 경법[經法]도 듣지 못하며 보살 성문[聲聞]의 성중[聖衆]도 볼 수 없으므로 이것을 태생이라 하거니와 만약 중생들이 부처님의 제지[諸智]를 믿고 모든 공덕을 지어 신심[信心]으로 회향[廻向]하면 이 중생들이 칠보화[七寶華] 중에서 자연히 화생하여 가부좌[跏趺坐]하고 잠깐 동안에 신상광명[身上光明]과 지혜공덕이 구족 성취하리라.] 하였다.

 

극락세계의 삼성(三聖)

 

一. 삼성(三聖)의 인행(因行)

삼성(三聖)은 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이신 아미타불과 그 왼편에 계신(左脇侍)관세음보살님과 오른편(右脇侍)에 계신 대세지보살님을 말함이니 그의 인행(因行)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지나간 겁에 용진왕이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을 때에 신하의 두 딸인 녹파나와 세택가가 따라 들어가서 도를 배웠으니 왕은 지금의 아미타불이시고 녹파나는 관세음보살이시고 세택가는 대세지보살이시다.

 

二. 삼성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의 인행관계(因行關係)

 

삼성과 석가모니불과의 인행(因行)시의 관계된 사적의 일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지나간 겁에 한 세계가 있었으니 이름이 산제람(刪堤嵐)이요, 겁(劫)의 이름은 선지(善持)이다. 그 때에 한 전륜성왕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무쟁념(無諍念)인데 이분이 곧 아미타불이시고, 그 때의 대신(大臣)의 이름은 보해(寶海)이니 이분이 곧 석가모니불이시고, 보해의 아들이 출가하여 성불(成佛)하니 이분이 곧 보장여래(寶藏如來)이시다.

 

전륜성왕의 제일태자(第一太子)는 불순(不咰)이니 이분이 곧 관세음보살이시고, 제이왕자(第二王子)는 니마(尼摩)이니 이분이 곧 대세지보살이시다. 제삼왕자(第三王子)는 왕중(王衆)이니 곧 문수보살(文殊菩薩)이시고, 제팔왕자(第八王子)는 민도(泯圖)이니 이분이 곧 보현보살(普賢菩薩)이시다.

 

전륜성왕이 보해의 지도(指導)로 보장여래 앞에서 정토에 성불하기를 발원(發願) 하였고 왕의 천명의 아들과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소왕(小王)들도 보해의 지도로 발심하지 아니한 이가 없고 또 보해의 팔십며의 아들과 삼억 제자들도 보해의 지도로 발심하였으니 현겁(現劫) 때의 천불(千佛)과 당래(當來)의 미륵불(彌勒佛)도 보해의 제자이다.

 

*비화경(悲華經)

 

 

전륜성왕과 보해가 모두 보장여래에게 성불하려는 발원을 하였는데 전륜성왕은 청정장엄세계(淸淨莊嚴世界)에서 성불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기를 발원하시고 정토(淨土) 극락세계에서 성불하여 아미타불이 되시고, 보해는 오탁고뇌세계(五濁苦惱世界)에서 성불하여 일체 중생을 교화(敎化)하기를 발원하고 예토(穢土) 사바세계에서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이 되시었다.

 

三. 아미타불(阿彌陀佛)

 

(一). 아미타불의 인행시의 사적(事蹟)

 

아미타불이 무량겁 중 인지(因地)수행 시에 전륜성왕, 국왕, 왕자, 비구, 보살 등이 되셨는데 그 사적 중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 지나간 겁에 월계불(月髻佛)때에 전륜성왕이 있으니 이름이 혜기(慧起)인데, 선(善)을 닦아 복전(福田)을 심었으니 전륜성왕이 곧 아미타불이시다.

 

*지인경(智印經)

 

(나). 지나간 겁에 사자유희금광불(獅子遊戱金光佛)때에 한 국왕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승위(勝威)인데 부처님께 공양하고 선정(禪定)을 닦았는데 국왕이 곧 아미타불이시다.

 

*여환삼마지무량인법문경(如幻三摩地無量印法門經)

 

(다). 지나간 겁에 전륜성왕이 있었으니 이름이 지화(持火)요, 태자의 이름은 승공덕(勝功德)인데, 출가하여 불법을 수행 하였다.

태자는 곧 아미타불이시다.

*일향출생보살(一向出生菩薩)

 

(라). 지나간 겁에 무구염칭기왕불(無垢焰稱起王佛)때에 정명비구(淨命比丘)가 제경(諸經) 십사억(十四億) 부(部)를 가지고 중생의 원요(願樂)에 따라서 널리 설법 하셨다.

정명비구(淨命比丘)가 곧 아미타불이시다.

 

*대승방등총지경(大乘方等摠持經)

 

(마). 지나간 겁에 산상불(山上佛)이 멸도(滅度) 하신 뒤에 명상보살(明相菩薩)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서 널리 사리보탑(舍利寶塔)을 세웠다. 이 보살이 곧 아미타불이시다.

*대법거타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二).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과의 인행관계(因行關界)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인행 시에 관계된 사적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 지나간 겁에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때에 十六왕자가 출가하여 모두 성불하였으니 第九왕자는 아미타불이시고, 第十六왕자는 석가모니불이시다.

*법화경(法華經)

 

(나). 지나간 겁에 성리혜여래(成利惠如來)때에 한 국왕이 있었으니 이름이 염의(焰意)요, 그 태자의 이름은 복염(福焰)이니 왕이 태자와 함께 불법을 수행하였는데 국왕은 아미타불이시고, 태자는 석가모니불이시다.

*보적경(寶積經)

 

(다). 지나간 겁에 길의여래(吉義如來) 때에 한 국왕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액진무(額眞無)요, 그 태자의 이름은 덕광(德光)이니 왕이 태자와 함께 불법을 수행하였으니 국왕은 阿彌陀佛이시고, 태자는 釋迦牟尼佛이시다.

 

(라). 지나간 겁에 수달(首達)이라는 연장자(年長者)가 있었는데 그 제자 중에 유선(惟先)이라는 제자가 육만인(六萬人)을 교화하고 지혜와 용맹(勇猛)이 있는 것을 보고 모두들 숭배하려 하니 수달이 여러 학자에게 말하기를 [유선은 나이어리고 지혜가 적다]하고 유선을 비방하였으므로 수달이 지옥고(地獄苦)를 받았으니 수달은 아미타불이시고, 유선은 석가모니불이시다.

*불설생경(佛說生經)

 

(三). 아미타불 성불의 내력(來歷)

 

보장여래(寶藏如來)께서 무쟁념전륜성왕(無諍念轉輪聖王)을 위하여 정법(正法)을 說하시니 왕이 여래와 성중(聖衆)을 청하여 석 달 동안을 공양 하였고 또 불순태자(不純太子), 니마왕자(尼摩王子)등 천분의 왕자들도 도 여래께 공양하면서 三百五十세를 지냈으니 모두 보해(寶海)가 전륜성왕과 왕자와 무량중생(無量衆生)에게 권하여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이때에 보장여래가 삼매(三昧)에 들어 대광명(大光明)을 놓으시어 시방세계를 비치시니 오탁예악(五濁穢惡)의 세계도 있고 혹은 청정 미묘한 세계도 있는지라 전륜성왕이 보장여래께 이렇게 여쭈었다.

 

[모든 보살들이 무슨 업(業)으로 인하여 청정세계(淸淨世界)를 취(取)하며 무슨 업으로 인해서 부정세계(不淨世界)를 취 하나이까]하였더니, 여래(如來)께서 [보살의 원력(願力)으로 청정국을 취하기도 하고 예악(穢惡)국토를 취하기도 하느니라.]하셨다.

 

왕이[내가 이제 진실하게 보리도(菩提道)를 행하여 부정한 국토를 취하려 하지 아니하기를 원하오니 내가 성도(成道) 할 때에는 내 국토가 청정하여 모든 냄새와 더러운 기운이 없을 뿐 아니라 지옥 아귀 축생도 없고 중생들이 모두 금색이며 여인이 없고 한번 화생한 후에는 수명이 무량하며 또 다른 세계의 중생들이 내 이름을 듣고 모든 선의 근본을 닦아서 내 국토에 낳기를 원하는 이는 그 목숨이 마친 뒤에 와서 반드시 낳게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오역(五逆)을 지었거나 성인(聖人)을 비방하거나 정법(正法)을 파괴한 이는 제외할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이와 같이 깊은 원을 발한 뒤에 부처님께 수기(授記)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여래께서는 [서방으로 百千萬億 불토(佛土)를 지나서 존음왕여래(尊音王如來)의 세계가 있으니 청정한 장엄(莊嚴)이 너의 소원과 같으니라. 저 부처님이 입멸(入滅)하신 뒤에 또 세 부처님이 나셨다가 입멸하시고 그 후에 第一 항하사아승기겁(恒河沙阿僧祇劫)을 지내고 第二 아승기겁에 들어갈 때에는 그 세계를 안락(安樂 곧極樂)이라 할 것이고, 너는 이때에 성불하여서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가 되리라] 하셨다. 그다음에 제일태자 불순과 제이왕자 니마도 대원(大願)을 발하니 부처님께서 장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주셨다.

 

지나간 겁에 정광여래(錠光如來)가 세상에 나시고 그 다음에 또 다른 부처님이 차례로 나시고 하여 차례로 五十二 부처님이 나시고 그 다음에 五十三번째 부처님이 나셨는데 그 이름이 세자재왕여래(世子在王如來)이시다.

이때에 한 국왕이 있었는데 그 국왕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에 기뻐하여 나라와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법장비구(法藏比丘)가 되었다. 법장비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제가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마음을 발하였사오니 경법(經法)을 많이 연설하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제가 마땅히 수행하여 청정한 묘토(妙土)를 취하려 하오니 저로 하여금 속히 정각(正覺)을 이루어서 중생의 생사와 고의 근본을 뽑아 버리게 하옵소서.]

세자재왕불께서 이백이십억이나 되는 모든 불국토의 추하고 묘한 것을 말씀하시고 그 심원대로 이 여러 세계를 모두 보게 하셨더니 법장비구는 오 겁(五劫) 동안이나 여러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와 행을 생각한 뒤에 그 가운데서 고르고 골라 취하여 부처님 앞에서 사십팔원을 세웠다. 이때에 대지가 진동하며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공중에서 소리하기를 [결정 코 무상정각을 이루리라]하였다.

 

법장비구는 이때부터 불가사의 조재영겁에 무량의 덕행을 닦아 모은 후에 그 원이 만족하여 정각을 이루었으니 이름이 무량수불이고, 그 세계는 극락세계라 부르니 즉 여기서 서방으로 십만억 불토를 지나가서 그 세계가 있고 성불하신지는 십겁이 되며 지금도 그 세계에서 설법하시는 중이라 한다.

 

법장비구가 세운 사십팔원은 다음과 같다.

 

1. 악취무명원(惡趣無名願)

2. 무타악도원(無墮惡道願)

3. 동진금색원(同眞金色願)

4. 형모무차원(形貌無差願)

 

 

5. 성취숙명원(成就宿命願)

6. 생획천안원(生獲天眼願)

7. 생획천이원(生獲天耳願)

8. 보지심행원(普知心行願)

9. 신족초월원(神足超越願)

10. 정무아상원(淨無我相願)

 

 

11.결정정각원(決定正覺願)

12.광명보조원(光明普照願)

13.수량무궁원(壽量無窮願)

14.성문무수원(聲聞無數願)

15.중생장수원(衆生長壽願)

16.개획선명원(皆獲善名願)

17.제불칭찬원(諸佛稱讚願)

 

18.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

19.임종현전원(臨終現前願)

20.회향개생원(回向皆生願)

 

21.구족묘상원(具足妙相願)

22.함계보처원(咸階補處願)

23.신공타방원(晨供他方願)

24.소수만족원(所須滿足願)

25.선입본지원(善入本智願)

26.나라연력원(那羅延力願)

27.장엄무량원(莊嚴無量願)

 

 

28.보수실지원(寶樹悉知願)

29.획승변재원(獲勝辯才願)

30.대변무변원(大辯無邊願)

31.국정보조원(國淨普照願)

32.무량승향원(無量勝香願)

33.몽광안락원(蒙光安樂願)

34.성취종지원(成就總持願)

35.영리여신원(永離女身願)

36.문명지과원(聞名至果願)

 

 

37.천인경례원(天人敬禮願)

38.수의수념원(須衣隨念願)

39.재생심정원(纔生心淨願)

40.수현불찰원(樹現佛刹願)

41.무제근결원(無諸根缺願)

42.현증등지원(現證等持願)

43.문생호귀원(聞生豪貴願)

 

 

44.구족선근원(具足善根願)

45.공불견고원(供佛堅固願)

46.욕문자문원(欲聞自聞願)

47.보리무퇴원(菩提無退願)

48.현획인지원(現獲忍地願)

 

사십팔원

 

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에 지옥과 아귀와 축생의 三악도(惡道)가 있다 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수명이 다한 뒤에 다시 삼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중생들의 몸에서 찬란한 금색 광명이 빛나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중생들의 모양이 한결같이 훌륭하지 않고, 잘 나고 못난 이가 따로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숙명통(宿命通)을 얻어 백천억 나 유타겁(劫)의 옛 일들을 알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 다.
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천안통(天眼通)을 얻어 백천억 나 유타의 모든 세계를 볼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천이통(天耳通)을 얻어 백천억 나 유타의 많은 부처님들의 설법을 듣고, 그 모두를 간직할 수 없다면, 저는 차 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타심통(他心通)을 얻어 백천억 나 유타의 모든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 가 되지 않겠나이다.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신족통(神足通)을 얻어 순식간에 백천억 나유타의 모든 나라들을 지나가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모든 번뇌를 여의는 누진통(漏盡 通)을 얻지 못하고 망상을 일으켜 자신에 집착하는 분별이 있다면, 저는 차라 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만약, 성불하는 정정취(正定聚)에 머물지 못하고, 필경에 열반(涅槃)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 지 않겠나이다.
1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저의 광명이 한량이 있어서 백천억 나유타의 모든 불 국토를 비출 수가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저의 수명이 한정이 있어서 백천억 나유타겁 동안만 살 수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성문(聲聞)들의 수효가 한량이 있어서, 三천 대천세계의 성문과 연각(緣覺)들이 백천겁 동안 세어서 그 수를 알 수 있는 정도라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중생들의 수명은 한량이 없으오리니, 다만 그 들이 중생 제도의 서원에 따라 수명의 길고 짧음을 자재로 할 수는 있을지언 정, 만약 그 수명에 한량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좋지 않은 일은 물론이요, 나쁜 이름이라도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십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님들이 저의 이 름(아미타불)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십방세계의 중생들이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제 이름(아미타불)을 다만 열 번만 불러도 제 나라에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모든 공덕을 쌓고, 지성으로 저의 불국토에 태어나고자 원을 세울 제, 그들의 임종 시에 제가 대중들과 함께 가서 그들을 마중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듣고 저의 불국토(극락세계)를 흠모하여 많은 선근공덕을 쌓고, 지성으로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마음을 회향(回向)할 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 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모두 三十二대인상(大人相)의 훌 륭한 상호(相好:몸매)를 갖추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 다.
2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불국토의 보살들이 제 나라에 와서 태어난다면, 필경에 그들은 한생(生)만 지나면 반드시 부처가 되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자리에 이르게 되오리다. 다만 그들의 소원에 따라, 중생을 위하여 큰 서원을 세우고 선근공덕을 쌓아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또는 모든 불국토에 다니며 보 살의 행을 닦아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또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위없이 바르고 참다운 가르침을 세우고자 예사로운 순탄한 수행을 초월하여 짐짓, 보현보살의 공덕을 닦으려 하는 이들은 자재로 그 원행(願行) 에 따를 것이오나, 다른 보살들이 일생보처에 이르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입고, 모든 부 처님을 공양하기 위하여 한참 동안에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불국토에 두루 이 를 수가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드리는 공덕 을 세우려 할제, 그들이 바라는 모든 공양하는 물건들을 마음대로 얻을 수 없 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부처님의 일체지혜를 연설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천상의 금강역사(金剛力士)인 나 라연(那羅延)과 같은 견고한 몸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과 일체 만물은 정결하고 찬란하게 빛나며, 그 모양이 빼어나고 지극히 미묘함을 능히 칭량할 수 없으오리니, 만약 천안통을 얻은 이가 그 이름과 수효를 헤아릴 수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을 비롯하여 공덕이 적은 이들까지 도,그 나라의 보리수나무가 한없이 빛나고 그 높이가 사백만리나 되는 것을 알아 보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스스로 경을 읽고 외우며 또한 남 에게 설법하는 변재와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 나이다.
3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보살들의 지혜와 변재가 한량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불국토가 한없이 청정하여, 십방 일체의 무량무수 한 모든 부처님 세계를 모두 낱낱이 비쳐봄이 마치 맑은 거울로 얼굴을 비쳐 보는 것과 같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지상이나 허공에 있는 모든 궁전이나 누각이나 흐르는 물이나 꽃과 나무나, 나라 안에 있는 일체 만물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보배 와 백천가지의 향으로 이루어지고, 그 장엄하고 기묘함이 인간계나 천상계에 서는 비교할 수 없으며, 그 미묘한 향기가 시방세계에 두루 풍기면, 보살들은 그 향기를 맡고 모두 부처님의 행을 닦게 되리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불국토의 중생 들로서, 저의 광명이 그들의 몸에 비치어 접촉한 이는 그 몸과 마음이 부드럽 고 상냥하여 인간과 천상을 초월하오리니,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 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의 중생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듣고, 보살의 무생법인(無生法忍)과 깊 은 지혜 공덕인 다라니 법문을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 겠나이다.
3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부처님 세계의 여인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듣고 환희심을 내어 보리심을 일으키고 여자의 몸을 싫어한 이가 목숨을 마친 후에 다시금 여인이 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 가 되지 않겠나이다.
3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듣고 수명이 다한 후에도 만약 청정한 수행을 할 수 없고, 필경에 성불하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 겠나이다.
3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의 중생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듣고 땅에 엎드려 부처님을 예배하며 환희심과 신심을 내어 보살행을 닦을 제, 모든 천신(天神)과 인간들이 그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의복을 얻고자 하면 생각하는 대 로 바로 훌륭한 옷이 저절로 입혀지게 되는 것이, 마치 부처님이 찬탄하시는 가사가 자연히 비구들의 몸에 입혀지는 것과 같으오리니, 만약 그렇지 않고 바느질이나 다듬이질이나 물들이거나 빨래할 필요가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 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누리는 상쾌한 즐거움이 일체 번 뇌를 모두 여읜 비구와 같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청정 한 불국토를 보고자 하면, 그 소원대로 보배나무에서 모두 낱낱이 비쳐 보는 것이 마치, 맑은 거울에 그 얼굴을 비쳐 보는 것과 같으오리니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여러 보살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듣고 부처님이 될 때까지 육근(根)이 원만하여 불구자가 되는 일이 없으오리니 만 약 그렇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들은 이는 모두 청정한 해탈삼매를 얻을 것이며, 매양 이 삼매에 머물어 한 생각 동안에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도 오히려 삼매를 잃지 않 으리니,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듣고도 수 명이 다한 후에 존귀한 집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 겠나이다.
4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듣고 한없 이 기뻐하며 보살행을 닦아서 모든 공덕을 갖추오리니,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들으면, 그들은 모든 부처님을 두루 뵈올 수 있는 삼매를 얻을 것이며, 매양 이 삼매 에 머물어 성불하기까지 언제나 불가사의한 일체 모든 부처님을 뵈올 수 있으 오리니,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은 듣고자 하는 법문을 소원대로 자 연히 들을 수 있으오리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 나이다.
4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아미타불)을 듣고나서 일체 공덕이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에 이를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 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아미타불)만 듣고도 바 로, 설법을 듣고 깨닫는 음향인(音響忍)과 진리에 수순하는 유순인(柔順忍)과 나지도 죽지도 않는 도리를 깨닫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성취하지 못하고, 모든 불법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를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법장비구가 세운 四十八願 중 第十八願은 이러하다.

[설혹 내가 성불하더라도 시방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신요(信樂)하고 내 나라에 나고자하여 내 이름을 念하기를 열 번을 하고라도 만일 내 나라에 나지 못하면 나는 정각(正覺)을 취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다만 오역(五逆)과 정법(正法)을 비방한 이는 제외할 것이니라.]

 

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一). 관세음보살의 명칭과 의의

 

관세음은 구역이며 관음 또는 광세음이라 하며 신역에서는 관세자재 또는 관자재라 한다. 관세음이란 뜻은 세상 사람이 부르는 소리를 관하여 고통을 구한다는 뜻인데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서는[세간을 보고 소리를 따라서 고통을 구한다]하였고,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삼업(三業)의 귀의(歸依)를 보고 중생의 고를 빼어준다]하였다. 관음(觀音)은 관세음(觀世音)의 세자를 약한 것이요, 광세음(光世音)은 보살의 신광(身光)이 중생에게 비친다는 뜻이고, 관세자재(觀世自在)는 세계를 보아서 고를 빼고 낙을 주는 것이 자재(自在)하다는 뜻이요 관자재(觀自在)는 관세자재(觀世自在)를 약한 것이다.

 

(二). 천관(天冠)중의 화불(化佛)

 

관세음보살의 색신상(色身相)은 관무량수경에(觀無量壽經)에 천관(天冠)중에 서 있는 화불이 있으니 높이가 二十五유순(由旬)이라 하였는데 존각(存覺)의 보은기(報恩記)에는 관음은 사장(師長)의 은덕(恩德)이 무거운 것을 표하여 아미타를 이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三). 관세음보살의 인지(因地)

 

관음삼매경(觀音三昧經)에 말씀 하시기를 관음이 나(석가모니불)보다 먼저 성불하여 정법명왕여래(正法明王如來)가 되고 나는 고행 제자가 된 일이 있었는데 이 보살의 대비원력으로 일체 보살을 발기하고 모든 중생을 성숙하기 위하여 현재의 보살이 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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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겁에 아미타불이 용진왕으로 계실 때에 시녀(侍女)이던 녹파나가 곧 관세음보살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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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겁에 한 임금이 있었으니 이름이 장엄이시고 왕비는 보응이며 삼녀가 있으니 첫째는 묘안이고 둘째는 묘음이고 셋째가 묘선이니 묘선이 곧 관세음보살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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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겁에 천광왕정주여래가 출세(出世)하여 대비심대다라니를 설하고 금색 손으로 관세음보살의 정수리를 만지시면서 네가 심주(心呪)를 가지고 미래악세(未來惡世)에서 일체 중생을 위하여 이랄(利樂)을 지어라 하였다. 이때에 관세음보살은 초지(初地)보살로써 이 주문을 듣고 곧 뛰어서 第八地 보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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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겁에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한 국왕이 있었으니 이름이 선수(善首요), 태자의 이름은 선광(善光)이었다. 이때에 공왕관세음불이 出世 하였는데 선광태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제가 무수겁(無數劫)이래로 삼독(三毒)이 덮이어 악업을 많이 짖고 생사에 끊임없이 변천하다가 비로소 부처님 광명이 제 몸에 비침을 만나 생사고(生死苦)를 깨닫고 열가지 비원을 발 하였사오니 제가 미래세에 관세음이라 하고 일체 세계에서 일체신(一切身)을 나타내어 일체 중생의 고통 받는 것을 구하겠나이다. 하였으니 선광태자는 곧 관세음보살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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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겁에 금강사자유희여래가 出世 하시니 그때에 나라 이름이 무량덕취안락시현이요, 임금은 위덕(석가모니불)이다. 이 임금이 정원에서 삼매에 들었을 때에 좌우 땅에서 연화가 솟아나고 꽃 가운데에 두 동자가 화생하여 가부좌하고 앉았으니 하나는 보의요, 하나는 보상이다. 보희는 곧 관세음보살이시다.

 

(四). 관세음보살의 사호(賜號)와 성불의 수기(授記)

 

지나간 겁에 무쟁념전륜왕의 태자인 불순이 즉 지금의 관세음보살이신데 그 때에 대비9大悲)의 원을 세우니 보장불이 수기 하시기를 네가 일체 중생을 보고 대비심을 내어 그들의 모든 고뇌와 번뇌를 끊고 중생으로 하여금 안락에 머무르게 하려기에 이제 너를 관세음이라 이름하고 무량수불이 열반 한 후에 그 국토를 일체 진보소성취세계라 할 것이고 네가 성불하여 변출일체광명공덕산왕여래라 칭하리라 하셨다.

[悲華經]

 

지나간 겁에 금강사자유희여래때에 연화에 화생한 보희(관세음보살), 보상(대세지보살) 두 동자가 여래의 설법을 듣고 보리심을 발하니 성덕왕(석가모니불)이 열반하신 후에 관세음보살이 정각을 이루어 국토를 중보보집장엄이라 하고 불호는 보광공덕산왕여래라 칭하리라 하셨다.

[觀世音得大勢菩薩授記經]

 

(五). 관세음보살의 각종형상(各種形象)과 변화분신(變化分身)

 

관세음보살은 정관음외에 여러 가지의 형상이 있으니 육관음 팔관음 십오관음 삼십삼관음 등이 있고 또 여러 가지 변화신을 나타내는데 여인상을 많이 나타내는 까닭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보살의 근본이 여신인줄 오해하는데 여인상을 나타내는 것은 중생과 접근하시기에 편리하도록 함이며, 중국에서는 당나라 이후부터 여인상으로 조성 하였다.이 변화신에 대하여는 릉엄경(楞嚴經)에는 삼십이응신을 말하고 법화경에는 삼십삼신을 말하였다.

 

(六). 관세음보살의 정토

 

인도의 남해안에 관세음보살의 주처(住處)가 있으니 보타낙가산인데 광명산 해도산 소화수산이라 번역하고 산의 모형은 팔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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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역 화엄경에는 남방에 보탈낙가산이 있고 그 산에 보살이 있으니 이름이 관자재요 해상에 산이 있으니 성현이 많고 중보(衆寶)로 이루어져 극히 청정하고 꽃과 과일나무가 우거진 숲이 넓게 꽉 퍼져 있으며 천류지소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으며 용맹한 장부 관자재가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위하여 산에 머무르고 그 서면에는 바위골짜기사이에 샘물이 흘러 형영(擤映)하며 나무가 우거져 울창하고 향내가 좋은 풀이 유연하며 오른편으로 돌아 땅에 널리 퍼져있고 관자재보살이 금강보석위에 결가부좌 하신다고 하였다.

*

화엄경탐현기에는 남인도의 남변에 있는 산이 천축으로 본명은 포다라산이니 바른 번역은 없고 뜻을 번역하여 소수만장엄산인데 소수화가 항상 광명이 있어서 대비광명보무시현을 표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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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기에는 말라야산 동쪽에 포탈낙가산이 있으니 산경이 위험하며 바위골짜기가 기울어지고 산길에 못이 있어 거울과 같이 맑으며 물이 흘러 산을 이십 번을 둘러 남해로 들어가며 못가에는 석천궁(石天宮)이 있어 관자재보살이 왕래하신다 하였고, 천수경에는 한 때에 석가모니불이 보타낙산의 관세음궁전 보장엄도량중에 계시다고 하였다.

 

 

五.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一). 대세지보살의 명칭과 의의

 

범어로 마하나발을 득대세 또는 대세지라 번역하고 약하여 세지라 한다.

아미타불에 비지이문(悲智二門)이 있으니 관세음보살은 자비문(慈悲門)을 표하고 대세지보살은 지혜문(智慧門)을 표하는데 이름을 대세지라 한 것은

첫째 그의 큰 지혜가 모든 곳에 이르는 까닭이요

둘째 지혜광으로써 모든 중생에게 널리 비치어 삼도(지옥, 아귀, 축생)를 여의고 무상력을 얻게 하는 까닭이요

셋째 이 보살이 발을 들여 놓는 곳에 삼천대천세계와 마(魔)의 궁전이 진동하는 까닭이요

넷째 세간의 국왕대신과 같이 위세가 자재한 까닭이다.

즉 이 성자가 이와 같이 대비자재한 지위를 얻었으므로 이렇게 이름 하였다.

 

(二). 육계상(肉髻上)의 보병(寶甁)

 

대세지보살의 색신상은 관무량수경에 육계위에 있는 보병에는 모든 광명을 담아서 불사(佛事)를 나타낸다 하셨고, 또 존각의 보은기(報恩記)에는 세지는 부모의 은혜가 막중한 것을 표현하여 보병 중에 전생부모의 유골을 넣었다고 하였다.

 

(三). 대세지보살의 인지(因地)

 

대세지보살이 항하사겁 전에 초일월광불께 염불삼매를 배워 닦으시고 항상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중생을 섭취하여 정토에 왕생하게 하신다는 것은 릉엄경(楞嚴經)중에 보살이 말씀하셨으니 염불법문(念佛法門)을 전하신 시조(始祖)가 되시고 중국의 혜원등은 중국 연종(蓮宗)의 초조(初祖)라 할 것입니다.

*

지나간 겁에 아미타불이 용진왕으로 계실 때에 그 시녀이던 세택가가 곧 대세지보살이시다.

*

지나간 겁에 무쟁념전륜왕의 제이왕자인 니마가 곧 대세지보살이시다.

*

지나간 겁에 금강사자유희여래가 출세(出世)하였을 때 위덕왕이 정원에서 삼매에 들었을 때에 그 좌우 땅에서 솟은 연화중에 화생한 보상동자가 곧 대세지보살이시다.

 

(四). 대세지보살의 사호(賜號)와 성불(成佛)의 수기(授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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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겁에 보장불이 무쟁념전륜왕의 제이태자인 니마에게 수기(授記)하시기를 네가 큰 세계를 취하려 하므로 너를 득대세라 이름하고 또 미래에 성불하여 선주진보산왕여래라 칭하리라 하셨다.

[非華經]

*

지나간 겁에 금강사자유희여래때에 두 동자가 연화에서 화생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보리심을 발하였는데 석가모니불이 말씀하시기를 보상은 관세음보살이 열반 한 뒤에 성불하여 선주공덕보왕여래라 칭하리라 하셨다.

 

 

제三장. 왕생(往生)의 예(例)

 

 

一. 아미타불을 친견(親見)한 실례(實例)

 

 

 

*

 

천축(인도의 옛 이름) 계두마사의 오통보살(五痛菩薩)이 신력(神力)으로 극락세계에 가서 아미타불을 뵈옵고 여쭈기를 사바세계의 중생이 정토에 나기를 원 하오나 성상(聖像)을 뵈옵지 못하와 강림하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부처님께서 네가 먼저 내려가면 내가 따라 나타나리라 하셨다. 오통보살이 돌아와 보니 성중이 이미 오셨는데 한 부처님과 오천 보살이 각기 연화에 앉으시고 또 나뭇잎위에 계시었다. 이에 그 형상을 모사하여 전국에 널리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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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나라 때에 승려 혜해(慧海)가 강도의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러 지성으로 염불하더니 승려 도전이 제주에서 아미타불상을 모시고 왔는데 그 미묘하고 정교함이 세간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내력을 물은즉 이것은 천축의 계두마사의 오통보살이 극락세계에 가서 그려 온 것이라 하니 혜해가 감격하여 지성으로 예배하며 보니 신광이 찬란하게 비치었다. 이에 그 상을 본떠 그리며 극락에 왕생하기를 간절히 원 하였는데 그 후에 대수롭지 않은 병이 있더니 밤에 문득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예배한 후에 가부좌하고 새벽에 화거(化去)하였는데 산 사람과 같았다.[往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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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때에 승려 법조는 연종의 제四조인데 대종의 대력4년(서기769년)에 호동사에서 오회염불도량(五會念佛道場)을 개설하였는데 이때에 상운이 가득히 덮이고 구름속에 누각이 나타나며 아미타불과 관음 세지 두 보살이 나타나서 허공에 가득하므로 형주 사람들이 분향하며 우러러 절 하였다.

 

*

 

중국 송대에 여인 기씨는 구용(句容) 갈제지의 처인데 대대로 선술(仙術)을 배웠으나 기씨는 홀로 불법을 좋아하여 성심으로 염불하였다. 하루는 베를 짜다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니 공중이 청명하고 문득 보개(寶蓋) 당번(幢幡)이 서방으로부터 오는데 그 가운데에 부처님이 계시고 금색광명이 찬란하게 비치므로 기씨는 베 짜기를 멈추고 자세히 뵈오며 마음으로 기뻐서 경(經)에 말씀하신 무량수불이신가하고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갈제지를 끌어 부처님 계신 곳을 가리켜 보이나 남편은 단지 부처님의 반신과 번개(幡蓋)만을 보았다. 이때에 동리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불법(佛法)에 귀의한 사람이 많았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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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때의 여인 요파는 상당사람인데 범파라는 분이 염불을 권하므로 요파는 가연(家緣)을 끊고 일심으로 염불하더니 임종 때에 아미타불이 공중에 강림하시고 관음 세지 두 보살이 모신 것을 뵈옵고 요파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범파를 만나지 못하였더라면 어찌 부처님을 뵈옵게 되겠나이까. 부처님께서 잠간만 계시면 범파와 작별하겠나이다. 하더니 범파가 이르매 요파는 서서히 화(化)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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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의 승려 원과는 임종 날에 제자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은지 10년 후에 화장하라하였다. 제자가 10년 후에 관을 들고 뜰에 이르니 관 속에서 불이 일어나 타버렸다. 이때에 승려와 불자들이 보니 구름 속에 극락세계의 전경이 나타나는데 칠중란수 칠중라망 칠중항수 칠보지 누각 궁전이 금 은 유리 파려 자거 적주 마노 등으로 장엄하고 연못속에 청 황 적 백의 연화와 백학 공작 앵무 사리 가릉빈가 공명조 등이 불경에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중에서 천악이 울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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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거사 강암남은 안휘성의 무원사람인데 만년에 강역원거사의 권고로 매일아침 송경 염불하더니 서기1932년3월에 등에 종기가 발병하여 다시 살아나지 못할 줄을 알고 염불에 더욱 힘을 쓰니 병은 비록 중하나 고통을 느끼지 아니하며 또 서방극락세계를 관견한지라 강 거사에게 편지하기를 제가 3월25일 인시에 뇌우가 있은 뒤에 하늘이 낮같이 밝더니 문득 서방극락세계의 진경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 칠보장엄과 보수 보탑 등이 모두 기이하지 아니한 것이 없고 부처님이 공중에서 말씀하시는데 분명하게 들리지 아니하고 곧 흩어져 버렸으니 이로써 극락세계가 확실히 있는 줄을 알았노라 하였다. 강암남은 그 뒤부터 더욱 부지런히 염불하다가 그 해 4월 22일에 염불하면서 화거하였다.

 

[淨土聖賢錄]

 

 

 

 

二. 왕생을 내보(來報)한 실예(實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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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진나라 때에 궐공측거사가 여산(廲山)백련사(白蓮社)에서 염불의 정업(淨業)을 닦다가 극락에 왕생한 후에 그의 친구가 낙양의 백마사(白馬寺)에서 궐거사의 기제사를 지내는데 수목(樹木)과 전우(殿宇)가 문득 금색이 되고 공중에서 소리하여 말하되 [나는 궐공측이다 극락에 나기를 원하여 이미 왕생하였노라]하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아니하였다

 

*

 

중국 송(宋)나라 때에 가구가 명주에 있으면서 항상 법화경(法華經)을 외우며 정토에 나기를 원하므로 사람들이 구법화(久法華)라 부르더니 1093년에 나이 八十으로 앉은 채로 왕생 하였다가 三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내가 극락에 가서 모든 뛰어난 아름다운 현상을 보니 불경에 말씀하신 내용과 같았고 이 세상에서 정업을 닦는 이는 그 곳의 연화대(蓮華臺)위에 이름이 표기(標記)되었는데 금대(金臺)에 표기된 이는 성도(成都)에 있는 광교원(廣敎院)의 훈공(勳公), 명주(明州)의 손십이랑(孫十二郞), 가구(可久)요. 은대에 표기된 이는 명주 (明州)의 서도고(徐道姑)]라 하고 말을 마치고 다시 화거(化去)하였다. 五년후에 서도고는 운명할때에 말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고 十二년후에 손십이랑은 운명할 때에 천악(天樂)이 울리어서 가구의 말이 모두 증험 되었다.

 

*

 

중국 송나라 때에 위세자(魏世子)가 자녀를 데리고 염불하였으나 그 모는 염불하지 아니하였는데 그 딸이 十四세에 병사하였다가 七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 모에게 말하기를 [내가 극락에 가서보니 아버지와 오빠들은 이미 연화가 있어서 죽은 뒤에는 마땅히 왕생할 터인데 어머니의 연화는 없어서 마음에 대단히 섭섭하므로 내가 다시 와서 알려 주니 염불하세요.]하고 눈을 감았다. 그 모는 이 말을 듣고 감동하여 곧 신심(信心)을 발하여 부지런히 염불하다가 죽은 뒤에 극락에 왕생하였다,

 

三. 극락에 왕생하였다가 다시 와서 중생을 제도(濟度)한 실예(實例)

 

 

 

 

각명묘행보살(覺明妙行普薩)은 중국 진(晉)나라 때의 사람으로 빈한한 집에 태어났는데 그 빈고(貧苦)로 인하여 발원하기를 [내가 전부터 지은 행업(行業)으로 이 빈궁고(貧窮苦)를 받는 것인데 내가 만약 아미타불을 뵈옵고 극락국에 나서 일체 공덕을 성취하지 못하면 설사 몸을 잃어버리더라도 마침내 퇴식(退息)하지 않겠다]하고 七일 七야를 일심(一心)으로 염불하다가 마침내 아미타불의 상호(相好)광명을 보니 부처님이 각명묘행(覺明妙行)이란 칭호를 주시며 친히 수기(授記)하심을 받고 그 후 75세에 앉은 채로 해탈(解脫)하여 극락에 왕생하였다가 다시 이 세계에 와서 비구 거사 왕 신(臣) 여인 걸인 등이 되기도 하며 혹은 현신(顯身)혹은 은신(隱身)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하였다.

 

四. 극락삼성(極樂三聖)이 극락 왕생을 예보(豫報)

 

 

연종(蓮宗)의 초조(初祖)혜원대사(慧遠大師)가 여산(廬山)동림사(東林寺)에서 못에 백련(白蓮)을 심고 123인으로 더불어 백련사(白蓮社)를 설치하고 三十년 동안 염불의 정업(淨業)을 닦았다. 처음 十一년중에 극락삼성(極樂三聖)을 세 번 뵈었으나 대사는 발설하지 아니하더니 三十년 되던 七월 그믐날 저녁에 아미타불 신(身)이 허공에 가득하고 원광(圓光)중에 여러 화불(化佛)이 계시며 관음 세지 두 보살이 좌우에 모시고 서 계셨는데 아미타불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본원력(本願力)으로 와서 너를 위안(慰安)하노니 七일후에는 네가 내 나라에 왕생하리라]하셨는데 대사는 八월 초엿새에 대중을 모아 훈계(訓戒)하고 단정하게 앉아 화거(化去)하니 나이 八十三세이다.

 

 

五 .극락삼성(極樂三聖)이 대중(大衆)을 내영(來迎)

 

 

신라 경덕왕(景德王)17년 (서기 758년)무술(戊戌)년에 고성현(固城懸)원각사(圓覺寺 고려 때 에는 烈山縣 西鳳寺로, 현대에는 固城郡 乾鳳寺로 개명 하였다. 에서 발징화상(發徵和尙)이 승려 정신(貞信) 양순(良順)등 31인과 더불어 염불만일회(念佛萬一會)를 설치하고 염불하였는데 신도 1820인이 스스로 발심(發心)하여 그중 120인은 의복을 공급하고 1700인은 식량을 공급하더니 원성왕(元聖王)3년 (서기787년)정묘(丁卯)년에 도량(道場)문밖에 큰물이 나서 넘치며 아미타불이 관음 세지 두보살과 더불어 자금연대(紫金連臺)를 타시고 문 앞에 이르러 금색 팔을 펴시어서 염불대중을 접인(接引)하시니 대중이 크게 기뻐 뛰면서 좋아하였고 부처님은 대중을 거느리시고 반야선(般若船)에 올라 극락으로 다시 돌아 가셨는데, 이때에 도량승려 31인은 육신으로 하늘로 올라가 상품상생(上品上生)왕생하고 의복과 식량을 공급하던 염불신도 1820인 중 913인은 일시에 단정히 앉아서 화(化)하여 상품상생에 왕생하고 다른 18인은 상품중생(上品中生)에, 31인은 하품하생(上品下生)에 각기 왕생하였다.

 

제 四 장. 사바(裟婆)와 극락(極樂)과의 비교(比較)

 

一. 삼계(三界)와 극락의 비교

 

삼계(三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 하는데 삼계안의 중생들이 모든 혹(惑 곧 번뇌<煩惱>)으로 인하여 삼계를 벗어나지 못하거니 와 극락세계에는 안에 더러운 종자(鐘子)가 없어 밖으로 정방(淨方)을 나타내고 사폭류(四瀑流)를 멀리 여의어서 길이 삼계에 뛰어난 까닭으로 욕계라 한다.

 

 

*삼계

 

욕계-오욕(五欲) 등의 탐욕(貪欲)이 있는 까닭으로 욕계라 한다.

색계-형상(形狀)이 있는 까닭으로 색계라 한다.

무색계-형상은 없고 의식(意識)만 있는 까닭으로 무색계라 한다.

 

*극락

 

비욕계-음욕(淫慾)과 단식(段食)이 없는 까닭으로 욕계가 아니다.

비색계-땅에 의지(依支)하여 있고 색경(色境)에 염착(染着)하지 아니하므로 색계가 아니다.

비무색계-형상이 있는 까닭에 무색계가 아니다.

 

二. 육도(六道)와 극락의 비교

 

육도(六道)는 일체 중생이 자기의 지은 업(業)을 따라 육도를 돌아다니면서 낳았다 죽었다 하는 것을 쉬지 않고 연해 돌아다니는 것이 마치 수레바퀴가 한정 없이 돌아가는 것과 같으므로 윤회(輪廻)라 한다.

 

그 예를 들면 천중(天中)에서 죽어 인중(人中)에 낳고 인중에서 죽어 천중에 낳고 천중에서 죽어 지옥에 낳고 지옥 중에서 죽어 천중에 낳고 천중에 죽어서 아귀 중에 낳고 아귀 중에서 천중에 낳고 천중에 죽어서 축생 중에 낳고 축생 중에서 죽어 천중에 낳고 천중에서 죽어 다시 천중에 낳고 또 지옥 아귀 축생도에 ....

이와 같이 윤회하거니와 극락세계에는 윤회하는 일이 없으며 일체중생은 남녀 노유(老幼)빈부 귀천을 물론하고 다만 신(信 ) 원(願) 행(行)만 가지고 일심(一心)으로 나무아미타불 혹은 아미타불을 행, 주, 좌, 와,(行, 主, 座, 臥,)에 생각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으면 죽을 때에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부처님을 뵈옵고 무생인(無生忍)을 깨닫게 된다.

 

三, 도솔천과 극락의 비교

 

도솔천은 욕계육천(欲界六天)중의 제三천인 야마천(夜摩天)과 제五천인 화락천(化樂天)의 중간에 있는 제四 天인데 해면에서 三十二萬 유순(由旬) 허공에 많이 모인 구름위에 있고 종광(縱廣)이 八萬 유순이다.

 

도솔천궁 이 있는데 이궁에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의 구별이 있으며 내원에는 보살이 있고 외원에는 수 없이 많은 천인들이 살고 있다.

내원에서는 미륵보살(彌勒菩薩)에게 친근(親近)하는 까닭으로 퇴전(退轉)되는 일이 없으나, 외원에서는 오욕(五慾)에 탐착(貪着)하고 십악(十惡 )을 지으므로 흔히 삼도(三途)에 떨어진다.

 

극락세계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교주(校主)

극락 아미타불은 이미 성불(成佛)하셔서 지금 극락세계에 계시다.

도솔 미륵보살은 아직 일생보처(一生補處)로서 성불하지 못하였다.

 

주처(住處)

극락 극락은 정토(淨土)요 삼계(三界)를 초월(超越)한 위가 없는 不可思義)한 국토(國土)이다.

도솔 사바예토(裟婆穢土)요 욕계의 열천(劣天이다 (미륵보살이 계신 내원만은 정토다).

 

권속(眷屬)

극락 여인이 없다.

도솔 남녀가 많이 동거(同居)한다.

 

수명(壽命)

극락 무량아승기겁(無量阿僧祇劫)이다

도솔 四千세다.

그러나 중요(中夭)가 있어서 천수(天壽)다하자 못한다.

인간의 四百년이 도솔천의 一일 一야다.

 

내외원(內外院)

극락 내외원의 구별이 없고 일미평등(一味平等)하다.

또 구품(九品)의 우열이 있으나 모두 정정취(正定聚)에 머물므로 모두 성현(聖賢)이다.

도솔 내원 외원의 구별이 있다 혜업(慧業)이 많으면 내원에 낳아서 퇴전하지 않으나 혜업이 적고 복(福)이 많으면 외원에 떨어져서 윤회를 면치 못하고 삼도(三途)에 떨어진다.

 

신색(身色)

극락 순(純)진금색이요 광명이 百千유순을 비친다.

도솔 천형(天形)이 비록 청정(淸淨)미묘하나 죽을 때에는 오쇠상(五衰相)이 나타나서 신광(身光)을 잃어버린다.

 

상호(相好)

극락 아미타불 본원력(本院力)에 의하여 모두 삼십이대상(三十二大尙l 있고 좋음과 추함이 없다.

도솔 상호(相好)가 비록 단정하고 엄숙하나 남녀가 같지 않고 좋음과 추함이 있어 다르다.

 

고락(苦樂)

극락 근심과 괴로움이 없다.

도솔 우수(憂受) 희수(喜受) 고수(苦受) 낙수(樂受) 사수(捨受)의 오수(五受)가 있다.

 

권생(勸生)

극락 극락왕생을 권하는데 경문(經文)도 많을 뿐 아니라 석가모니불과 시방제불(十方諸佛)이 성실하고 간절하게 권하신다.

도솔 도솔천에 왕생을 권하는데 오직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만 있을 뿐이고 제불(諸佛)이 권하시는 것도 없고 범연(汎然)하여 간절하지 못하다.

 

멸죄(滅罪)

극락 나무아미타불을 일칭(一稱)하면 팔십억겁(八 十億劫)의 생사(生死) 중죄(重罪)를 멸(滅 )하고 극락에 왕생한다.

도솔 미륵보살의 명호(名號)를 일칭 하면 천이백겁 생사의 중죄를 제(際)하고 또 미륵보살의 명호를 듣고 합장(合掌)공경(恭敬)하면 五十劫 생사의 중죄를 제하며 또 미륵보살에게 경례하면 百겁 생사의 죄를 제한다.

 

접인(接引)

극락 극락에 왕생할 때에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으로 성중(聖衆)이 와서 맞는다.

도솔 도솔천에 왕생할 때에는 미륵보살이 미간(眉間)을 놓아 맞으신다.

 

수생(受生)

극락 칠보지(七寶池) 연화중에 화생한다.

도솔 남녀의 무릎 위 품속에 수생(受生)한다.

 

 

四. 인계(人界)와 극락의 비교

 

인계와 극락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극락 연꽃에 화생 하므로 출생 고가 없다.

인계 피와 살로 된 몸이 출생 고가 있다.

 

극락 추위와 더위가 변천하지 아니하므로 늙는 고가 없다.

인계 시절이 바뀌므로 날마다 쇠약하여 늙어간다.

 

극락 화신(化身)이 향기롭고 정결하므로 병이 나는 고가 없다.

인계 사대(四大)가 고르기가 어려우므로 병이 많이 난다.

 

극락 수량(壽量)이 한이 없으므로 죽는 고가 없다.

수명의 한정이 있을 뿐 아니라 죽을 때에 고가 있다.

 

극락 육친이 없으므로 이별하는 고가 없다.

인계 육친의 애정이 있어서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으면 좋겠는데 반드시 떠나게 되는 고가 있다.

 

극락 극히 착한 이들이 모여 있으므로 미운 원수를 만나는 고가 없다.

인계 미운 원수를 만나지 아니하였으면 좋겠는데 반드시 만나게 되는 고가 있다.

 

극락 의식(衣食)과 보물이 되어 있는 것을 받아쓴다.

인계 고난과 기한(飢寒)이 많으므로 탐(貪)하여 구하는 것이 맞지 아니한다.

 

극락 용모가 단정하고 몸에 광명이 있다.

인계 형체가 추악하고 병이 있는 몸이 많다.

 

극락 극락에 한번 태어난 후에는 다시 육도 윤회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삼악도란 이름조차 없다.

인계 수레바퀴가 도는 것과 같이 육도를 연해 돌아다니며 생사의 고를 받는다.

 

극락 극락의 땅은 황금으로 되어 평탄하고 보수가 하늘에 닿았으며 누각(樓閣)은 칠보(七寶)로 되고 연화가 네 가지 색으로 된다.

인계 땅이 흙과 돌로 되었으며 모든 산과 언덕 구덩이가 있고 모두 추악하다

 

극락 지금 극락에 아미타불이 계시어서 설법을 하신다.

인계 서가모니불이 이미 열반(涅槃)하시고 미륵불(彌勒佛)이 아직 나시지 아니 하였다

 

극락 극락에는 무수한 성인(聖人)들과 같이 승우(勝友)가 된다.

인계 여기서는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친히 뵈옵지 못하고 단지 존호(尊號)만 흠모(欽慕)할 뿐이다.

 

극락 부처님의 교화(敎化)가 통일되고 모든 마(魔)와 외도(外道)가 없다.

인계 모든 마와 외도들이 정행(正行)을 요란(搖亂)한다.

 

극락 성중(聖衆)이 모두 청정하고 여인이 없다.

인계 여색(女色)과 악우(惡友)와 올바르지 못한 말이 행자(行者)를 미혹(迷惑)하게한다.

극락 물과 새와 나무와 수풀들이 모두 묘법(妙法)을 설법한다.

인계 악한 모든 짐승과 이매등이 요망스럽고 간사한 소리를 낸다.

 

五 시방제불(十方諸佛)보살과 종사(宗師)들의 찬양(讚揚)

 

[칭찬정토불섭수경(稱讚淨土佛攝受經)]에는 시방제불(十方諸佛)이 극락정토를 극구(極口)찬양하셨고, [보적경(寶積經)]에는 서가모니불이 부왕(父王)정반왕(淨飯王)께 염불 왕생을 권하셨고, [보살내계경(菩薩內戒經)]에는 보살의 삼원(三願)중 第二원(願)이 아미타불국에 왕생을 원하는 것이고, [화엄경(華嚴經)]에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왕생을 발원하셨고, [문수발원경(文殊發源經 )]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왕생을 발원하셨고, 선종(禪宗)제 十二조(祖)인 마명보살(馬鳴菩薩)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왕생을 권장(勸獎)하였고, 선종 제 十四조인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 아미타불을 찬양하였고, 세친보살(世親菩薩)의 [무량수경론(無量壽經論)]에서 왕생을 발원 하였다.

 

선종의 마명보살 용수보살 이외에 선종의 선덕(先德)들이 정토법문(淨土法門)을 겸해서 닦으 되 혹은 들어나게 혹은 비밀하게 닦고

자기뿐만이 아니라 극락정토를 찬양하여 법문(法門)을 설(設)하기도하며, 논문(論文)을 지어서 극락왕생을 권장하기도 하고, 또 정토 경문(經文)을 주석하여서 정토법문을 발양(發揚)한 이가 많았으며 임제종(臨濟宗)의 백장회해선사(百丈懷海禪師)는 그 지은 백장청규(百丈淸規)에서 병승(病僧)과 망승(亡僧)을 위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念誦)하게 하였다.

 

또 선종 이외에 율종(律宗)삼론종(三論宗)천태종(天台宗)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등 각종(各宗)의 종사(宗師)들도 정토를 겸해서 닦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권하여 닦게도 하고 또 정토경(淨土經)을 주해하기도 하여서 정토를 떨쳐 일으킨 이가 많았다.

 

(六) 일념(一念)이 다념(多念)과 같다는 설(設)

 

한번 불명(佛名)을 염(念)하는 것이 여러 번 염하는 것과 같으냐 다르냐 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1) [락방문류(樂邦文類)]에 [서가모니불이 계실 때에 어떤 속가(俗家)의 늙은 남녀 두 사람이 곡식 한말을 가지고 수를 세어 가면서 아미타불을 염하여 정토왕생을 원하는 것을 보시고 [나무서방정토극락세계 삼십육만억일십일만구천오백 동명동호 대자대비 아미타불(南無西方淨土極樂世界 三十六萬億一十九千五百同名同號 大慈大悲 阿彌陀佛)]을 한번 염하는 것이 많은 곡식 수와 같이 염하는 것과 공덕이 같다]고 말씀 하셨다 한다.

 

그러나 이 불호는 모든 정토계에서 찾아볼 수 없고 당나라 비석선사(飛錫禪師)의 [보왕론(寶王論]에 비로소 이 불호로써 [일념다념문(一念多念門)]을 세웠고, 다음에 시랑(侍郞: 벼슬이름) 왕고(王古)가 [직지정토결의집(直指淨土決疑集)]에 이 일을 말하였다.

 

그 후에 [삼문직지(三門直指)]에는 [나무서방정토극락세계불신장광상호무변 금색광명 변조법계 사십팔원 도탈중생 불가설 불가설 전불가설 항하사불찰 미진수 도마죽위 무한극수 삼백육십만억일십일만구천오백 동명동호 대자대비 아등도사 금색여래 아미타불

(南無西方淨土極樂世界 佛身長廣 相好無邊 金色光明 邊照法界 四十八願 度脫衆生 不可說 不可說 轉不可說 恒河沙佛刹 微塵數 稻麻竹葦 無限極數三百六十萬億一十一萬九千五百 同名同號 大慈大悲我等導師 金色如來 阿彌陀佛)]의

 

명호(名號)가 [금색아미타불경(金色阿彌陀佛經)]에서 나온 것인데, 한 번 염하고 한 번 절하면 十념 예념(禮念)한 공덕과 같다고 하셨다.

 

위의 두 불호는 염불하는 사람이 이것을 참고로 한 번 볼 뿐이고 항상 [나무아미타불]혹은 [아미타불]만 오로지 염할 것이다

 

(2) 十념하여 왕생하는 것보다도 一념에 왕생하여 불퇴지(不退地)에 오르는 것이 정당하다.

 

그 이유는 오역(五逆)과 사중죄(四重罪)도 모두 一念에 악업(惡業)을 이루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는 것이 활 쏘는 것과 같고, 또 一念에 선업(善業)을 이루어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팔을 굽히는 것과 같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도 [일념염불(一念念佛)에 모다 왕생한다]하셨으나[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十念]이라 한 것은 임종 시에 극병(劇炳)이 있어서 기운이 없고, 마음이 줄어들므로 十念을 불러서 一念을 돕게 한 것이다.

 

중국 당나라의 장선화(張 善和)는 백정(白丁)을 직업으로 하여 생전에 지은 업(業)이 순전히 흑업(黑業)이므로 이와 같은 사람은 설혹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염불을 가르쳐 주더라도 一念만으로는 부족하므로 十念으로써 그 부족한 것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염심(念心)이 왕생하고 심신(心神)이 어리석고 둔하지 아니하면 다만 一念으로도 족하니 마치 실과 머리카락 같은 묘목(苗木)을 심어서 百아름이나 되는 거목(巨木)이 되는 것과 같이 一念의 힘이 굉장히 큰 것이다.

 

 

(三)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이 모두 一念으로 결과하는 것인데 一念이 일체염(一切念)을 갖추어 있으므로 一念이 十念보다 열(劣)하지 아니하고 또 十念이 즉 一念이므로 十念이 一念보다 우(優)할 것 없으나 부처님이 혹 一念을 말하시고 十念을 말씀하신 것은 여래(如來)의 뛰어난 방편(方便)이시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실 때에 간이(簡易)한 곳에서는 간이하게 말씀하시고 번다(繁多)한 곳에서는 번다하게 하셨으니, 간이한 곳에서 一念을 가르치신 것은 그 온 정력을 다하는 마음이 치밀하고 한결같으므로 一念이 다념(多念)보다 승(勝)한 까닭이고 또 번다한 곳에서 十念을 가르치신 것은 숙습(宿習)이 짙으므로 다념이라야 제거(除去)할 수 있으니 적은 염으로 삼매(三昧)를 이루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방편에 불과하고 실은 一이 곧 二요 二가 곧 一인 즉 一念 十念 분별 할 것이 없다.

 

(七) 십념 왕생(十念往生)의 의의(意義)

 

어떤 이가 묻기를[경에는 중생의 지은 업(業)이 저울과 같아서 무거운 데로 먼저 끌린다 하였는데 중생들이 오늘날까지 나쁜 짓을 짓지 아니한 적이 없거늘 어떻게 임종 시의 十念염불로 곧 왕생 할 수 있겠는가. 만일 十念으로 왕생한다면 무거운 데로 끌린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하였더니 그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은 나쁜 업(業)이 중하고 十念의 선(善)이 경(輕)하다 하거니와 十念으로 왕생되는 것은 곧 마음에 있고 연(緣 )에 있으며 결정(決定)에 있는 것이므로 시간의 오래고 짧음이나 일의 많고 적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마음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는 허망(虛妄)하고 전도(顚倒)된 마음으로 짓는 것이요 이 十念은 선지식(善知識)의 안위(安慰)에 의하여 실상법(實相法)을 듣고 염불하는 것이므로 하나는 허망하고 하나는 진실하거늘 어찌 대비할 수 있으랴 千념이나 묵은 어두운 방도 일찰나(一刹那)의 광명으로 밝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유일마니보경(遺一摩尼寶經)에는 [중생이 비록 수천거억만겁(數千巨億萬劫)을 애욕중(愛慾中)에서 죄에 덮여 있더라도 만일 불경을 듣고 一念이 선(善)하면 죄가 사라져 없어진다]하셨으니 이것이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나)연(緣)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는 망상(妄想)에 의하고 또 번뇌(煩惱)과보(果報)중생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나 이 十念은 무상신심(無上信心)에 의하고 또 아미타불의 진실 청정한 한량없는 공덕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독(毒 )한 화살을 맞아 골육(骨肉)이 깨어져 상하였더라도 멸제약고성(滅除藥鼓聲)을 들으면 화살이 나오고 독이 제거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연(緣)에 있는 것이다. 릉엄경[楞嚴經)]에 [비유하면 한약이 있으니 이름이 멸제(滅除)라 만약 전쟁할 때에 이 약을 북에 바르면 그 북소리를 듣는 이는 화살이 빠지고 독이 제거되는 것이니 보살마하살(菩薩摩?薩)도 이와 같이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에 머무르면 그 이름을 듣는 이가 삼독(三毒)의 화살이 저절로 빠져 나온다]하였다.

 

(다)결정(決定)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는 유후심(有後心) 유간심(有間心)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요 이 十念은 무후심(無後心) 무간심(無間心)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니 이것이 결정에 있는 것이다 [지도론(智度論)]에는 [일체 중생이 임종 시에 죽는 고(苦)가 매우 절박하여 대단히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므로 이때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대용맹(大勇猛)을 발하여 마음과 마음이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증상선근(增上善根)이 되어 곧 왕생케 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적(敵)을 대하여 진(陣)을 쳐부술 때에 평생에 있는 힘을 다 쓰는 것 같이 이 十念의 선근(善根)도 그러한 것이고 또 임종 시에 一念의 사견증상악심(邪見增上惡心)이 생기면 능히 삼계(三界)의 복(福)을 기우려서 곧 악도(惡途)에 들어가게 된다]하였다. [安樂集]

 

임종 시의 염불하는 마음 밖에 후심(後心)이 없고 후심이 없으면 딴 생각이 섞이지 않으므로 임종 시에는 무후(無後)무간(無間)의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맹렬하고 날카로운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고 평상시의 악업(惡業)은 유후(有後)유간(有間)의 견고하지 못하고 흔들리며 맹렬하지 못하고 날카롭지 못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十念에 왕생하는 것은 마음에 있고 경계(境界)에 있고 정(淨)에 있는 것이다.

 

(가) 마음에 있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은 허망심(虛妄心 )이요, 염불하는 것은 진실심(眞實心)이니 진실로서 허망(虛妄)을 떨어버리는 것이 마치 千년이나 된 어두운 방에 아침해의 밝은 빛을 막지 못하는 것 같은 것이다.

 

(나) 경계(境界)에 있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은 전도경계(顚倒境界)에 연(緣)한 것이요 염불은 뛰어나게 기묘한 공덕에 연한 것이니 眞正)으로써 허위(虛僞)를 여의는 것이다.

 

(다) 정(淨)에 있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은 염의(染意)요, 염불하는 것은 정심(淨心)이니 정심이 염의를 이기는 것이 마치 동자(童子)의 칼이 능히 천장(千丈)의 노끈을 끊으며 작은 불이 능히 萬속(束)의 땔 나무를 태우는 것 같은 것이다.

 

[문]중생의 지은 죄업(罪業)이 산같이 쌓이었는데 어떻게 十念으로 그 죄업을 멸(滅)할 수 있겠는가. 비록 百萬念을 하더라도 그 많은 죄업을 다 없앨 수 없거늘 어떻게 죄업을 다 없애지 못하고 정토에 왕생하겠는가. 이에 대하여 다음의 세 가지 뜻이 있다.

(-) 그 악업을 멸하지 아니하더라도 정토에 왕생할 이는 임종 시에 정념(正念)이 앞에 나타나 능히 시초 없는 이래로 또는 일생 이래의 지은 선업을 이끌어 서로 도와서 왕생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명호(名號)는 통틀어 만덕(萬德)을 이룬 것이니 일념염불(一念念佛)하는 이는 즉 一念중에 통틀어 만덕을 염하는 것이다.

 

(三) 시초 없는 이래의 악업은 망상(妄想)으로 지은 것이니 어두움과 같고 염불공덕은 진심으로 생기는 것이니 태양과 같다.

태양이 나오면 온갖 어두운 것이 없어지듯이 진심이 잠깐 일어나면 망심(妄心) 이 제하여지는 것이므로 임종 시에 十念을 성취하면 반드시 왕생하게 되는 것이다.

 

[문] 평시에 약간 염불하던 사람이라도 임종 시에 十念으로 왕생한다고 반드시 때를 정해 약속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평시에 염불하지 않던 사람이 어떻게 임종 시의 十念으로 왕생할 수 있겠는가.

 

(답) 약간 염불이라는 것은 일심으로 계속 염불하지 아니하고 매일 몇 번씩 염불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렇게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하지 아니한 이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약간 염불한 사람이거나 염불하지 아니한 사람이거나 임종 때에는 짧은 시간의 심력(心力)이 맹렬한 까닭에 十念으로 왕생할 수 있으니 다음 세 가지 뜻이 있다.

 

(-) 짧은 시간의 심력이 능히 종신(終身)토록 악 지은 사람을 이기는 것이니 비록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그 힘이 맹렬하여 이 마음의 맹렬한 결심이 곧 대심(大心)이며 몸을 버리는 일이 급하기가 마치 전쟁터에 들어 간 사람이 신명(身命)을 아끼지 아니함과 같은 것이다.

 

(=) 혹 승(乘 )이 급하고 계(戒)가 더디더라도 임종 시에 염불을 권하면 곧 신심(信心)이 생기고 비록 현세(現世)수행(修行)하지 않았더라도 역시 숙세(宿世)의 선업(善業)이 강하므로 임종 시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十念에 성공하는 것이다.

 

(三)염불할 때에 반드시 깊은 후회가 있어서 자신의 온 정력을 다하는 마음과 부처님의 원력(願力)으로 얻은 이 十念이 능히 百千萬念 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 )에 말씀하시기를[일체 중생이 아미타불의 원력에 지지(支持)되어 세세(世世)에 놓지 아니하시니 이 뜻이 있으므로 부처님의 대원해(大願海) 중에서 그 이름을 한 번 일컬으면 능히 八十億 겁 생사 중죄를 멸하고 곧 부처님을 따라서 왕생한다]하였다.

 

 

 

 

 

관상염불(觀想念佛)은 행자(行者)가 먼저 서향(西向)하여 결가부좌(結跏趺坐)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하고, 아미타불의 수인(手印)을 맺은 뒤에 부처님의 몸빛이 진금색(眞金色)으로 되신 일장육척(一丈六尺)의 불상(佛像)이 칠보(七寶)로 된 연못 위에 서 계시거나 앉아 계신 것을 관념(觀念)하며, 또 삼십이상(三十二相)을 한 상(相)씩 낱낱이 관념하거나 혹은 미간(眉間)백호상(白毫相)만 관념하는데, 이 백호상을 관념하는 것이 오래 되어서 숙습(宿習)하면 자연히 감응(感應)되어 32상을 관념하는 법은 32상 중의 발바닥이 편평하게 찬 족하평만상(足下平滿相)에서부터 관념을 비롯하여 거슬러 올라가며, 한 상(相)씩 관념하여 정계육골상(頂髻肉骨相)에 까지 이르고, 다시 정계육골상에서부터 순(順)으로 내려오면서, 한 상씩 관념하여 족하평만상까지 이르되 조금도 다른 관념이 없이 똑똑하게 관념하는 것이다.

 

미간 백호상을 관념하는 법은 부처님의 눈썹 사이에 위로 향하여 흰 털 하나가 있는 것을 미간 백호상이라 하니 빛깔이 선명하고 희며 광채가 있고 맑기가 백설(白雪)보다 더 희며 부드럽기가 도라면 과 같고 여덟모가 졌으며 가운데가 비고 주위가 다섯 치 이며 잡아당기면 길이가 일장오척(一丈五尺)이요 놓으면 오른 편으로 다섯 번 비틀려서 유리통과 같이 된다고 한다.

 

이 상(相)을 관념하는 법도 32상을 관념함과 같이 조금도 다른 잡념이 없이 명확하고 똑똑하게 관념하는 것이다.

 

 

五 조행염불(助行念佛)

 

행자(行者)가 조행을 닦으려면 먼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하나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에는 신심원리(身心遠離)희족소욕(喜足小欲)사성종(四聖種)의 삼정인(三淨因)이 있다. 이것을 신기청정(身器淸淨)의 삼인(三因)이라고도 한다.

 

(-) 신심원리(身心遠離)는 몸에는 악우(惡友)등과 악연(惡緣)을 멀리 여의고 마음에는 악(惡)의 사상분별(思想分別)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지니 이 신심원리를 성취하려면 희족소욕에 의하여야 한다.

 

(=) 희족소욕(喜足小欲)의 희족(喜足)이라 함은 이미 얻은 의복 음식 등에 만족함을 말함이고 소욕(小欲)은 아직 얻어지지 아니 하였을 때 크게 구하지 아니함이니 이것으로써 불희족대욕(不喜足大欲)을 고친다.

불희족대욕은 욕계(欲界)의 탐번뇌(貪煩惱)요 희족소욕은 무탐(無貪)의 심소(心所)니 삼계(三界)및 무루(無漏)에 통하는 것으로 이 희족소욕에 의하여 사성종(四聖種)에 머물음을 얻는다.

 

(三)사성종(四聖種)은 의복희족성종(衣服喜足聖鐘), 음식희족성종(飮食喜足聖種), 와구희족성종(臥具喜足聖鐘), 악단수성종(樂斷修聖鐘)의 네 가지를 말함인데, 앞의 셋은 의복 음식 와구(곧 住處)에 대하여 희족(喜足)의 마음에 머무는 것을 말함이요. 뒤의 하나는 번뇌(煩惱)를 끊고 성도(聖道)를 닦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니 이것은 삼계(三界)의 탐(貪)을 버리는 것이므로 무탐(無貪)을 성(性)으로 한다 할 것이다. 이 사성종의 네 가지는 모두 성도(聖道)를 낳게(生起)하는 시초이므로 성종(聖種)이라 한다.

 

(=) 예배(禮拜)

행자(行者)는 매일 조석으로 사성례(四聖禮)를 행하여야 할지니 먼저 깨끗한 방에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삼성(三聖)의 상(像)이나 화상(畵像)을 모시되 아미타불을 동향(東向)하여 모시고 그 왼편에는 관세음보살, 오른편에는 대세지보살을 모실 것이다. 만일 삼성의 상이 없으면 아미타불상 만을 동향으로 모시고 그 앞에는 향로 하나를 놓고 다른 물건은 많이 두지 말 것이다 만약 불상이 없으면 불명(佛名)을 써서 족자(簇子)를 만들어 걸 것이며 그것도 없으면 서향(西向)하여 사성례(四聖禮)만을 행하되 먼저 분향하고 바로 서거나 꿇어앉거나 결가부좌 혹은 반가부좌하고 합장(合掌)또는 아미타불 수인(手印)을 맺고 사성예문(四聖禮文)을 외우며 예배한 후에 물러난다.

 

조석으로 사성례 뿐 아니라 무시로 불상에 예배하여야 할지니, 불상에 대하여는 진불(眞佛)을 뵈옵는 것과 같이 공경하고 조금도 소홀한 생각을 가지지 아니하여야 한다.

[염불경(念佛鏡)]에 석가모니불이 그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을 위하여 도리천(忉利天)에 올라 가셔서 설법하시고 90일이나 계셨는데, 그 때에 인도의 우진왕(優瑱王)이 부처님을 생각하나 뵈올 수가 없으므로 장인(匠人)을 보내어 불상(佛像)을 만들었더니,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므로 우진왕이 모든 신하(臣下)를 거느리고 맞을 때에 불상도 부처님을 맞아서 부처님이 불상과 같이 서시니 불상이 부처님과 흡사한지라 부처님이 손으로 불상의 이마를 만지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미구에 열반(涅槃)할 터이니 네가 오래 세간에 있어서 유정(有情)을 교화하라]하셨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도 불상을 공경하시거늘 하물며 유정이야 어찌 공경하지 아니하리오. 또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에는 [한 사냥꾼이 가사(袈裟)를 입었더니 코끼리가 일어나서 공경한 덕으로 코끼리는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나서 91겁(劫)동안이나 낙(樂)을 받았다. 불상도 이와 같이 공경하면 존귀(尊貴)영화(榮華)를 누리고 정토에 난다]하셨다. 불상의 시초는 인도의 우진왕이 최초에 전단(栴檀)나무로 불상을 만들고 파사왕(波斯王)은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업보차별경(業報差別經)]에는 예불(禮佛)일배(一拜)에 열 가지 공덕을 얻는다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 묘색신(妙色身)을 얻는다.

(=)말을 내면 사람이 믿는다.

(三)중(衆)에서 처(處)하여 두려움이 없다.

(四)부처님이 항상 돌보아 주신다.

(五)큰 위의(威儀)를 갖춘다.

(六)많은 사람이 친히 붙는다.

(七)하늘이 애경(愛敬)한다.

(八)큰 복덕(福德)을 갗춘다.

(九)명종(命終)하면 왕생한다.

(十)속히 열반(涅槃)을 증(證)한다.

 

(三) 공양(供養)

 

공양(供養)은 공급(供給)자양(資養)하는 뜻이니 제불(諸佛)께 공양하기 위하여 향(香)화(華)음식 등을 공양하는 것이니 공양에 세 가지가 있다.

(-)이양 공양(利養供養)은 음식 의복 와구(臥具 곧 住處)등이고,

(=)공경 공양(恭敬供養)은 향(香)화(華)등명(燈明)증개(增蓋)당번(幢幡)등이며,

(三)행 공양(行公供養)은 보리심 을 발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行)을 닦는 것이다.

이양공양과 공경공양을 합하여 재공양이라 하고 행 공양을 법공양(法供養)이라 한다.

 

(四) 경문(經文)과 주문(呪文)

 

불경(佛經)이나 주문(呪文)도 불상(佛像)과 같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하며 깨끗한 곳에 두되 경책위에 다른 외전(外典)이나 물건을 놓지 말 것이며, 또 경(經)을 볼 때에는 깨끗한 손으로 단정히 앉아서 보고 몸을 파탈(擺脫)하였을 때나 누웠을 때와 같이 술 취하였을 때에는 보지 말 것이며 경(經)책을 베개로 삼지 말고 아무리 헌 경책이라도 불을 때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경전(經典)과 세간(世間)의 서적이 문자는 비록 같으나 불경은 중생을 널리 이익케 하는 것이며,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모두 옳은 줄로 믿고 받드는 것이므로 이것을 범연한 서적에 비할것이 아니다.

세간의 폐서는 설사 다 태워 버리더라도 오직 불경만은 태워 버릴 수 없나니, 불경(佛經)의 복혜(福慧)가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세간의 서적보다 월등한 까닭이다.

불경이 헐어 못 쓰게 되어 읽을 수 없게 되었을 경우에 깨끗하게 태운 후에 그 재를 정한 헝겊에 사서 강물에나 바다에 띄워 보낼 것이다.

 

부처님이 극락세계의 일만을 말씀하신 경문(經文)에[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이 있는데,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은 번다(繁多)하여 항상 읽기 어려워서 간혹 보는 것이 좋고, [아미타경]은 간단하여 외우기 편리하므로 이 경과 왕생주(往生呪)등을 매일 한번이나 여러 번 외워도 좋으며, 왕생에 관한 경문이나 주문 이외의 경문이나 주문은 읽거나 외우지 말 것이다.

 

(五) 참회(懺悔)

 

참(懺)은 앞서지은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고 회(悔)는 장차 지을 허물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다. 염불하는 사람은 앞서 지은 죄업(罪業)을 참회하고 다시 죄업을 짓지 아니하여야 한다. 참회하지 아니하면 무량겁(無量劫)이래의 죄업이 제거되지 못하는 것이니, 마치 때 묻은 옷은 빨아야 신선하고 먼지 앉은 거울은 닦아야 밝은 것과 같이 업장(業障)이 제거되어야 마음이 청정(淸淨)하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부처님 앞이나 자기의 마음속에서 진심성의(眞心誠意)로 불전(佛典)에 죄장(罪障)을 참회할 것이며, 또 어쩌다가 죄과(罪過)를 범하였거든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곧 참회 하여야 한다. 참회에는 작법참(作法懺 )취상참(取 相懺)무생참(無生懺 )의 세 가지가 있다.

 

(-)작법참(作法懺)은 불전(佛典)에 향하여 죄과를 낱낱이 펴 놓아서 언어 동작의 소작(小作)이 법도(法度)에 따르는 것이니 이것은 계율을 범한 죄를 멸하는 것이다.

(=)취상참(取相懺)은 매우 성실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부처님이 오시어서 손으로 이마를 어루만지시는 등의 상서로운 징조를 느끼는 것을 기한(期限)으로 하는 것이니 이것은 번뇌(煩惱)의 죄성(罪性)을 멸하는 것이다.

(三 )무생참(無生懺)은 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서 무생(無生)의 이(理)를 관(觀)하는 것이니, 이것은 중도(中道)를 장(障)하는 무명(無明)을 멸하는 것이다. 일구(一句)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능히 80억겁(劫)의생사의 중죄(重罪)를 멸하며, 염불이 세 가지 참회에 통하는 것이니, 참회하며 염불하는 것이 간단하고 쉬운 참회법이 된다.

 

(六 ) 애련탐착(愛戀貪着)을 끊을 것

 

예전에 어떤 사람이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겁결에 [나무불(南無佛)]을 부른 공덕으로 선근(善根)이 익어져서 나중에 성불하였다는 것과 같이 불법을 알면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설혹 지옥에 떨어졌다가도 그 뒤에 사람이 되어 다시 불법을 닦아서 육도(六道)의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끝이 없이 전전(轉轉)하여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면할 수 있거니와 만약 전혀 불법을 알지 못하면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자주법사개시록(慈舟法師開示록錄)에 영긍기신타지옥(寧肯己身墮地獄)불이불법작인정(不以佛法作人情) 즉 차라리 내 몸이 지옥에 떨어질지언정 불법으로 인정(人情)을 짓지 말라 하였다. 이것은 나는 염불할 생각이 있으나 권속(眷屬)들이 반대하면 애정에 끌리어 염불을 단념하는 것을 인정을 짓는다고 한 말이다 처자 권속은 전세의 인연으로 모이게 되는 것이니 연(緣)이 있으면 모였다가 연이 다하면 서로 헤어지고, 헤어진 뒤에는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옛말에[부모는 은혜가 깊고 부부는 의(義)가 무거우나 필경에는 서로 이별하는 것이니 마치 새가 한 나무에 함께 앉았다가도 제 각기 여러 곳으로 날아가는 것과 같다]하였거니와 이것은 죽을 때가 오면 각기 헤어져 버린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처자 권속의 애정이 아무리 무겁고 길더라도 죽을 때에는 할 수 없이 이별하게 되는 것이고, 재산이 아무리 아깝더라도 죽 을 때에는 맨손으로 가는 것이니, 이것을 공수래(空手來)공수거(空手去)라고 한다. 옛말에[일일무상도(一日無常到) 방지몽리인(方知夢裏人) 만반장불거(萬般將不去) 유유업수신(唯有業隨身) 단염아미타(但念阿彌陀) 왕생안락국(往生安樂國)]하였다.

 

즉 [죽을 때가 오면 다른 것은 모두 가지고 가지 못하나 오직 업(業)만은 따라가는 것인데, 다만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극락국에 왕생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처자 권속이나 금, 은, 재산은 고스란히 놓고 가거니와 일생에 지은 선악의 업만이 끝까지 나를 따라가는 것이니 나쁜 업을 지었으면 악도로 가고 착한 업을 지었으면 선도로 가고 염불하는 업을 지었으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거나 혹은 이런 말을 듣더라도 믿지 아니하고 처자 권속과 토지 재산 등에만 애착하다가 임종시에 대사(大事)를 그르쳐서 왕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七) 염불하는 사람은 마땅히 자비심(慈悲心) 희사미(喜捨心) 지계심(持戒心) 정진심(精進心) 인욕심(忍辱心) 겸하심(謙下心) 평등심(平等心)등 일체 선심(善心)으로 염불하며 극락에 왕생하기를 구하면 임종시에 반드시 왕생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그 마음이 부처님의 뜻과 서로 맞아 부처님의 자비(慈悲)로 접인(接引)하시는 까닭이다.

 

그러나 만일 간탐심(慳貪心) 진한심(瞋恨心) 치애심(癡愛心) 오만심(傲慢心) 질투심(嫉妬心) 기광심(欺誑心) 첨곡심(諂曲心) 모해심(謨害心)같은 일체 악심(惡心)으로 염불하며 극락에 왕생하기를 구하면 임종시에 왕생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것은 그 마음이 부처님의 뜻과 서로 어긋나서 부처님도 자비(慈悲)를 드리워서 접인(接引)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은 청정심(淸淨心)을 발하여 탁악심(濁惡心)을 버리고 염불할 것이니 염불은 입으로만 염하는데 있지 않고, 심행(心行)이 정직하여야 비로소 효과를 얻는 것이므로 행자(行者)는 반드시 이것을 알아 두어야 한다.

 

*자비심(慈悲심)-중생에게 낙(樂)을 주는 것이 자(慈)요 고(苦)를 없애주는 것이 비(悲)니 즉 중생에게 낙을 주려는 마음과 고를 없애주려는 마음이다 또는 고를 없애주는 것을 자(慈),낙을 주려는 것을 비(悲)라 하기도 한다.

 

*희사심(喜捨心)-정사(淨捨), 정시(淨施)라고도 한다. 기쁜 마음으로 재물(財物)을 보시(布施)하는 마음이다.

 

*지계심(持戒心)-불법에 제정(制定)한 계행(戒行)을 받아 가지는 마음이다.

 

*정진심(精進心)-온갖 곤란을 물리치고 선법(善法)을 닦고, 악법(惡法)을 끊는 마음이다

 

*인욕심(忍辱心)-온갖 모욕(侮辱)과 번뇌를 참고 원한(怨恨)을 일으키지 아니하는 마음이다.

 

*겸하심(謙下心)-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내 몸을 낮추어 공손(恭遜)하는 마음이다.

 

*평등심(平等심)-일체 중생에게 대하여 원친(怨親)등의 차별이 없이 한결같이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다.

 

*간탐심(慳貪心)-물건을 아끼고 남에게 주지 않으며 탐내어 구하면서 만족할줄 모르는 마음이다.

 

*진한심(嗔恨心)-눈을 부릅뜨고 한탄(恨歎)하는 마음이다.

 

*치애심(癡愛心)_ 아깝게 여기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오만심(傲慢心)-잘난체 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다.

 

*질투심(嫉妬心)-미워하고 속을 태우는 마음이다.

 

*기광심(欺誑心)-남을 속이는 마음이다.

 

*첨곡심(諂曲心)-남에게 아양 거리며 교묘히 돌려서 귀염을 받으려는 마음이다.

 

*모해심(謀害心)_모략(謀略)을 써서 남을 해롭게 하려는 마음이다.

 

*심행(心行) 심의(心意-즉 마음과 정신)의 작용을 말함이다.

자기가 얻은 신념(信念)에 따라 삼업(三業)으로 일어나는 행업(行業)을 말한다.

 

(八) 선사(善事)를 행할 것.

 

염불하는 사람은 반드시 오계(五戒)와 십계(十戒)를 가질 것이고, 오계 십계를 계속하여 가지기 어려울 경우에는 팔관재계(八關齎戒), 육재일(六齎日), 십재일(十齎日), 월재일(月齎日)을 가질 것이며 부모를 효도(孝道)로써 받들어 모시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하며 형제간에 우애(友愛)하고 부부간에 화순(和順)하며 친척과 화목하고 사찰(寺刹)을 지으며 불상(佛像)을 만들고 부처님께 공양하며 승려에게 보시(布施)하고 경문(經文)을 출판하며 선법(善法)을 널리 통용케 하고 주린 사람에게 밥을 주며 떠는 사람에게 옷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며 죽은 이에게 관(棺)을 주고 다리를 놓으며 길을 닦는 등 善事)공덕을 지어 정토에 회향(回向)하여 극락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일심(一心)으로 염불할 것이다.

 

(九) 세간효(世間孝)와 출세간효(出世間孝)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의 조행(助行)으로 부모에게 세간(世間)의 孝와 출세간(出世間)의 孝를 행하여야 하나니, 세간의 효는 부모에게 승순(承順)하고 감지(甘旨)로 부모를 받들어 모시며 작록(爵祿)으로 부모를 영화(榮華)롭게 하는 등이요. 출세간의 효는 부모에게 염불법문(念佛法門)을 권하여 정토에 왕생케 하는 것이니, 세간의 효는 소효(小孝)요 출세간의 효는 대효(大孝)다.

 

부모의 열가지 대은(大恩)이 있으니

(-)회탐수호은(懷眈守護恩)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

(三)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

(四)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

(五)회간취습은(回幹就濕恩)

(六)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七)세탁부정은(洗濯不淨恩)

(八)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

(九)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

(十)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이다.

 

[최승불정존승다라니 정제업장경]에는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쪽 어개에 어머니를 업고 수미산(須彌山)을 百千萬 번을 돌아서 피가 흘러 복사뼈까지 잠기더라도 그것으로 하루 동안 젖먹인 은혜도 갚을 수 없거늘 어찌 나쁜 마음으로 경하게 성을 내리오]하셨고, [대승본생심지관경]에는 자부(慈父)비모(悲母)의 장양(長養)으로 인하여 모든 남녀가 모두 안락(安樂)하나니 자부의 은혜는 산과 같이 높고 비모의 은혜는 바다와 같이 깊다]하셨고, 또 [사람이 부모의 모든 은혜를 갚기 위하여 一劫동안을 지나도록 매일 삼시로 자신의 살을 베어 부모를 받들어 모시어도 一일의 은혜도 갚을 수 없다]하셨고, 또[부모의 은혜는 부(父)에 자은(慈恩)이 있으며, 모(母)에 비은(悲恩)이 있다.

 

어머님의 비은(悲恩)은 내가 세간(世間)에 사는 一겁(劫)동안에 말하여도 다 말할 수 없나니, 가령 어떤 사람이 정행대바라문 백사람 오통제대신선 백사람 선우(善友) 백사람들을 칠보(七寶) 위묘당(妙堂)에 모시고 百千가지의 아주 썩 잘 만든 진기하고 맛 좋은 음식과 모든 영락과 많은 보배와 전단 침향의 향나무와 백보로 장식한 앉고 까는 침구와 모든 병을 치료하는 백가지 탕약으로써 百千겁이 차도록 일심(一心)으로 공양하더라도 일심(一心)의 효순심(孝順心)으로써 아주 적은 물건으로 비모를 받들어 모시며 곳을 따라 공경하여 모시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셨고, 또 [모든 세간에 무엇이 가장 부(富)하며 무엇이 가장빈(貧)하냐 비모가 집에 있는 것이 부(富)요, 비모가 있지 않는 것이 빈(貧)이며 비모가 있을 때가 한낮이요 비모가 죽었을 때가 해가 진 것이며, 비모가 있을 때가 달빛이 밝은 것이고 비모가 죽었을 때가 어두운 밤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부지런히 효행(孝行)을 닦아서 부모를 효도로써 받들어 모시면 공불(供佛)하는 것과 복이 같을 것이니 이와 같이 부모의 은혜를 갚으라]하셨다

 

(十) 이종회향(二種廻向)

 

자기가 닦은 선근공덕(善根公德)을 돌리어서 다른 중생에게나 자기의 보리열반(菩提涅槃)에 취향(趣向)하는 것을 회향(廻向)이라고 하고 또 망자(亡子)를 위하여 선근(善根)을 닦는 추선(追善)도 회향이라 하는데 이 회향에 왕생회향(往生廻向) 환상회향(還相廻向)의 두 가지가 있다.

 

 

(-)왕생회향(往生廻向)은 자기가 닦은 선근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시(廻施)하여 다른 중생과 함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염불할 때에 발원이 없이 염불하거나 세간의 탁복(濁福)을 발원하여 염불하거나 세간 탁복과 극락왕생을 혼동하여 발원 염불하면 극락에 왕생하기 어려우니 단지 왕생만 발원하여 염불하고 그 공덕을 극락에 회향하여야 왕생이 쉽고 품위(品位)도 높을 것이며, 설사 그릇 악행(惡行)을 지었더라도 성심(誠心)으로 참회하고 상속심(相續心)을 끊으면 참회하는 힘이 능히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니라.

 

(=)환상회향(還相廻向)은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일체 공덕을 성취하고 다시 사바세계에 돌아와서 중생을 제도하여 불도(佛道)에 향하게 하는 것이다.

 

(十日)염불인(念佛人)의 신광(身光)

 

[정토첩요(淨土捷要)에는 대아미타불경(大阿彌陀佛經)에 말씀 하시기를 [염불하는 사람은 四十리(里)광명(光明) 몸빛이 있어 마(魔)가 능히 범치 못한다]하셨고, [비장지남(秘藏指南)]에는 [중국 동성(桐城)의 두 사람이 함께 객지에 갔다가 한 사람이 객사하매 그 동행(同行)이 장사를 치룬 뒤에 그 유산을 갖고 망자의 집에 가서 그 처에게 부음(訃音)과 유산을 전하였더니, 그 미망인이 부음을 전한 동행에 대하여 자기 남편을 살해(殺害)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하거늘 그 동행은 대단히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망자(亡者)의 영전에 가서 자기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니, 망자의 귀신이 이 말을 듣고 동행의 억울함을 변명하기 위하여 망자의 귀신이 동행과 함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동행이 우연히 아미타불을 한번 염불하였더니 귀신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어찌하여 광(光)을 놓아 나를 무섭게 하는가]하니 동행이 또 한 번 염불하니 귀신이 무서워하면서 [네가 한 번 염불하는데 네 가슴에서 별안간 십여장)十餘丈)이나 되는 오색광(五色光)이 나와서 내 마음과 눈을 어지럽히고 아찔하게 하니 다시는 너와 같이 갈수 없으므로 네가 혼자 내 집에 먼저 가서 내 처를 나에게 보내면 내가 너의 억울함을 잘 설명하겠노라]하였다.

 

그 후 그 동행은 깨닫고 출가하여 고승(高僧)이 되었다]고 하였다

 

 

 

 

 

제 七장 제사(諸師)의 법어(法語)와 연종(蓮宗)과 선종(禪宗)

 

一. 제사(諸師)의 법어(法語)

 

제사(諸師)가 칭명염불법(稱名念佛法)에 대하여 불법을 설(說)한 중에서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선도대사(善導大師)의 말

 

선도대사는 염불수행에 대하여 전수(專修) 무간수(無間修)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수(專修)]

중생이 업장(業障)이 두텁고 경(境)은 가늘며 마음은 미하여 관법(觀法)을 성취하기가 어려우므로 대성(大聖)이 이를 불쌍히 여기사 명호(名號)만 오로지 생각함을 권하셨다.

이것은 이름은 부르기 쉽고 계속하여 끊어지지 아니함이 잘 되어서 곧 왕생하게 되는 것이니 능히 염념(念念)이 계속하여 끊어지지 아니하여 명(命)이 마칠 때가지 반드시 됨을 기약하면 열이면 열이 왕생하고 백이면 백이 왕생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깥의 잡연(雜緣)이 없어서 정념(正念)을 얻게 되고 부처남의 본원(本願)에 서러 맞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순종(順從)하는 까닭이니 이것을 전수(專修)라 한다.

 

그러나 만약 전수(專修)를 버리고 여러 가지 업(業)을 닦아서 왕생을 구하는 이는 백(百)에 하나나 둘이고 千에 三, 四인 밖에 왕생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잡연(雜緣)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정념(正念)을 잃고 부처님의 본원(本願)과 서로 맞지 못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고 부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계념(繫念)이 계속하지 못하고 염불을 계속하여 끊어지지 아니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마음이 없고 비록 업행(業行)은 있으나 항상 명리(名利)와 서로 맞고 잡연(雜緣)에 접근하기를 좋아하여 정토에 왕생함을 스스로 장애(障碍)하는 까닭이다.

 

[무간수(無間修)]

몸으로는 오로지 아미타불께만 예배하고 다른 예배는 섞지 아니하며 입으로는 오로지 아미타불만 부르고, 다른 명호(名號)는 부르지 아니하고 다른 경은 읽지 아니하며 뜻으로는 오로지 아미타불만 생각하고, 다른 생각을 섞지 아니하며 만일 탐(貪) 진(瞋) 치(癡)를 범하였거든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곧 참회하여 항상 청정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무간수(無間修)니라.

 

(2). 영명대사(永明大師)의 말

 

행자(行者)가 일심(一心)으로 삼보(三寶)에 귀명(歸命)하고 보(報)가 끝나도록 정진(精進)하여 닦되, 앉고 누울 때에 얼굴을 항상 서쪽으로 향하고 행도(行道)예배할 때나 염불 발원할 때에 지성으로 간절하게 하고, 다른 생각은 없는 것이 마치 형장(刑場)에 나갈 때와 같이 옥중에 갇혔을 때와 원수에게 쫒길 때와 수화(水火)의 재난을 만났을 때와 같이, 일심(一心)으로 구원을 구하되 빨리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 무생(無生)을 증(證)하기를 원하며 함령(含靈)을 널리 제도하고 삼보(三寶)를 융숭(隆崇)하며 사은(四恩)갚기를 서원(誓願)할 것이다.

 

이와 같이 지성을 다하면 허사가 되지 아니하려니와 만일 말과 행이 일치하지 아니하며 신(信)과 원(願)이 가볍고 적어서 염념(念念)이 계속하여 끊어지지 아니하는 마음이 없고 자주 자주 끊어지면서 임종시에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면 업장(業障)이 가려져서 선우(善友)를 만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뜻밖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이 괴롭게 굴어 정념(正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이 인(因)이요 임종이 과(果)가 되는 것이니 인이 실하면 과가 허하지 않는 것이 마치 소리가 화(和)하면 울리는 소리가 순하고 형상(形狀)이 곧으면 그림자가 단정한 것과 같은 것이다.

 

(3). 연지대사의 말

 

요점만 가려서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을 단정히 하고 악을 멸하면서 염불하는 이를 선인(善人)이라 하고, 마음을 섭수(攝受)하고 산란(散亂)을 제하면서 염불하는 이는 현인(賢人)이라 하고, 마음에 깨닫고 혹(惑)을 끊으면서 염불하는 이를 성인(聖人)이라 한다.

 

세상 사람은 누구를 물론하고 모두 염불할 수 있으니 염불 법문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물을 것 없이 일심으로 염불만 하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인즉 한 사람도 염불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가령 부귀한 사람은 의식이 넉넉하니 염불하기 좋고 가난한 사람은 집이 작고 성가심이 적으니 염불하기 좋고 자손이 있는 사람은 나의 힘을 덜어 주니 염불하기 좋고 자손이 없는 사람은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으니 염불하기 좋고 무병한 사람은 몸이 건강하니 염불하기 좋고 병 있는 사람은 죽을 때가 가까운 줄 아니까 염불하기 좋고

 

한가한 사람은 마음이 번거롭지 아니하니 염불하기 좋고 바쁜 사람은 바쁜 중에라도 틈을 탈 수 있으니 염불하기 좋고 출가한 사람은 세간을 뛰어 났으니 염불하기 좋고 집에 있는 사람은 이 세계가 화택(火宅)인 줄을 아니 염불하기 좋고 총명한 사람은 정토 일을 잘 아니 염불하기 좋고 어리석은 사람은 별로 능한 것이 없으니 염불하기 좋고 계행을 가지는 사람은 계행이 불법이니 염불하기 좋고 경을 읽는 사람은 경이 부처님의 말씀이니 염불하기 좋고 참선하는 사람은 선(禪 )이 부처님의 마음이니 염불하기 좋고 깨달은 사람은 불도를 증(證)하였으니 염불하기 좋은 것이다.

 

(4). 우익대사(藕益大師)의 말

 

염불공부는 다만 진실한 신심(信心)이 귀중한 것이니

첫째로 나는 앞으로 될 불(佛)이요, 아미타불은 이미 이루어진 불(佛)로서 그 체(體)가 둘이 아닌 것인 줄을 믿을 것이고, 둘째로 사바(娑婆)의 고(苦)와 극락(極樂)의 낙(樂)을 믿어서 고를 싫어하고 낙을 구할 것이고, 셋째로 지금의 일거일동이 모두 서방극락세계로 회향(廻向)할 수 있음을 믿을 것이다.

 

만일 회향하지 아니하면 비록 상품선(上品善)이라도 왕생하지 못하고 회향할 줄 알면 비록 악행(惡行)을 지었더라도 빨리 상속심(相續心)을 끊고 참회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참회하는 힘만으로도 능히 왕생할 수 있거늘, 하물며 계(戒)를 가지고 복을 닦는 등 여러 가지 승업(勝業)으로 어찌 정토에 왕생하지 못할 이(理)가 있으랴.

 

염불 일문(一門)이 百千법문(法門)을 원섭(圓攝)하는데 염불이 정행(正行)이 되고 계(戒) 정(定) 혜(慧) 등이 조행(助行)이 되어 정(正) 조(助)를 합행(合行)하며 순풍을 만난 배와 같을 것이고, 다시 판삭(板索: 곧 널빤지와 밧줄)을 가하면 빨리 저 언덕에 이를 것이다.

 

염불의 법이 비록 많으나 지명염불(持名念佛)이 가장 간편하고 지명염불법 중에도 기수념(記數念)이 더욱 좋으니라.

 

자력(自力)으로 혹(惑)을 끊고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것을 수출삼계(竪出三界)라 칭하니 일이 어렵고 공(功)이 차차 이루어지는 것이고, 불력(佛力)으로 접인(接引)하여 서방에 왕생하는 것을 횡초삼계(橫超三界)라 칭하니 일이 쉽고 공(功)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다.

 

혜원조사(慧遠祖師)는

“공(功)이 높고 낳기 쉽기로는 염불이 첫째라” 하였고 경(經)에는 “말세에는 億億 사람이 수행하여도 성도하는 사람이 드물거니와 오직 염불을 의지하면 도탈(度脫)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마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 같아서 공력(功力)이 들지 아니하는 것인데 능히 서방의 지름길을 열성 있고 진실하게 믿고 지성으로 발원하며 일심으로 염불하여 왕생을 구하는 이는 참으로 대장부(大丈夫)라 하려니와 만약 참되지 못하고 원(願)이 간절하지 못하며 행(行)에 진력하지 아니하면 이는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로 주시는 배에 중생이 타기를 즐겨 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라 윤회(輪廻)하는 고를 빨리 벗으려면 지명염불(持名念佛)하여 극락에 왕생함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고 극락에 왕생코자 하면 신(信)을 전도(前導)로 하고 원(願)을 후편(後鞭)으로 함이 가장 필요하니라.

신(信)이 결정되고 원(願)이 간절하면 흩어진 마음으로 염불하여도 반드시 왕생할 수 있거니와 신이 진실치 못하고 원이 지극하지 못하면 일심으로 염불하더라도 왕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信)이란 것은 (1).아미타불의 원력(願力)을 믿고 (2).석가모니불의 교어(敎語)를 믿고 (3).육방(六方)제불(諸佛)의 찬탄(讚歎)을 믿는 것이니 세간의 성인(聖人)군자(君子)도 헛된 말이 없거늘 하물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고 육방 제불이 어찌 헛된 말이 있으랴 이것을 믿지 아니하면 참으로 구(救)할 수 없는 것이니라.

 

원(願)이란 것은 일체 시중(時中)에 사바(裟婆)에서 생사(生死)하는 고를 싫어하고 정토에서 보리(菩提)의 낙(樂)을 좋아하며 선악(善惡)의 지은 바를 따라서 선(善)은 회향(廻向)하여 왕생하며 악(惡)은 참회하여 왕생을 바라고 다시 두 뜻이 없을 것이니, 신과 원이 구비하면 염불은 정행(正行)이 되고 악을 뉘우치고 고치면 선을 닦는 것이 모두 조행(助行)이 되어 공행(功行)의 깊고 얕음을 따라서 구품(九品) 사토(四土)를 나누어 왕생하게 되는 것이다 .

 

만약 깊은 신심과 간절한 원력(願力)으로 염불하면서도 염불할 때에 마음이 흩어져 어지러운 이는 하품하생(下品下生)에 날 것이고 염불할 때에 흩어져 어지러운 마음이 점점 적어진 이는 하품중생(下品中生)에 날 것이고 염불이 사일심불란에 이르러 먼저 견혹(見惑) 사혹(思惑)을 끊고 또 능히 무명(無明)을 복단(伏斷)하는 이는 상삼품생(上三品生)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信), 원(願) 으로 지명염불하는 이는 능히 구품(九品)에 왕생함이 틀림없고 또 신, 원으로 지명염불하여 업장(業障)을 없애고 혹(惑)을 띠고 왕생하는 이는 범성동거정토(凡聖同居淨土)에 날 것이고 신, 원으로 지명염불하여 견혹 사혹을 모두 끊고 왕생하는 이는 방편유여정토(方便有餘淨土)에 왕생하고 신, 원으로 지명염불하여 일분(一分) 무명(無明)을 깨뜨린 이는 실보장엄토(實報莊嚴土)에 왕생하고 신, 원으로 지명염불하여 구경(究竟)의 곳(處)에 들어가 무명을 단진(斷盡)한 이는 상적광정토(常寂光淨土)에 왕생할 것이니 그러므로 지명염불이 능히 사토(四土)를 정(淨)하는 것이 또한 틀림없는 것이다.

 

(5). 육조대사(六朝大師)

 

[선정쌍수집요(禪淨雙修集要)]에는 옛 적에 한 사람이 육조대사(六朝大師)에게 묻기를 “염불에 무슨 이익이 있나이까.” 하고 묻는 말에

 

육조대사는 “일구(一句)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이 만세(萬世)의 괴로움을 뛰어나는 묘도(妙道)요, 불(佛)을 이루고 조(祖)가 되는 정인(正因)이요, 삼계(三界)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이요, 마음을 밝히고 성(性)을 보는 혜등(慧燈)이요, 지옥을 깨뜨리는 맹장(猛將)이요, 많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베는 보검(寶劍)이요, 五千대장(大臧)의 골수(骨髓)요, 팔만총지(總持)의 중요한 길이요, 흑암(黑暗)을 여의는 명등(明燈)이요,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양방(良方)이요, 고해(苦海)를 건너는 타고 가는 배요, 삼계(三界)에 뛰어나는 지름길이요, 최존(最尊) 최상(最上)의 묘문(妙門)이며,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공덕이니라. 이 일구(一句)를 기억하여 염념(念念)이 항상 나타나고 시시로 마음에 떠나지 아니하여 일이 없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고 일이 있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안락할 때도 이와 같이 염불하고 병고(病苦)가 있을 때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살았을 때에도 이렇게 염불하고 죽어서도 이렇게 염불하여 이와 같이 일념(一念)이 분명하면 또 무엇을 다시 남에게 물어서 갈 길을 찾으랴. 이른 바 일구미타무별념, 불로탄지도서방(一句彌陀無別念,不勞彈指到西方)이라”하였다.

 

 

 

(八)장. 유심정토(唯心淨土)와 자성미타(自性彌陀)의 변론(辯論)

 

세상사람 중에 혹은 극락정토와 교주(敎主) 미타(彌陀)를 부인(否認)하면서 유심(唯心)이 정토(淨土)인데 유심 외에 무슨 정토가 따로 있으며, 자성(自性)이 미타(彌陀)인데 자성 외에 무슨 미타가 또 있겠는가. 하여 오해하는 이가 있다 이에 대한 선덕(先德)들의 가려 밝힌 중에서 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왕룡서거사(王龍舒 居士)의 설(設)

 

참선하는 사람들이“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를 주장하여 극락세계를 부인하려는 이가 있으나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왜냐 하면 서방정토가 이치도 있고 사실의 형적도 있는 것이니 그 이치로 말하면 능히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므로 일체가 모두 청정하니 진실로 유심정토가 되는 것이요.

사실의 형적으로 말하면 실로 극락세계가 있어서 부처님께서 틀림없이 자세히 말씀하셨으니 어찌 헛된 말씀이라 하랴.

사람마다 성불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자성미타란 말도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니 마치 불상(佛像)을 조각할 만한 좋은 재목이 있더라도 불상을 조각한 연후에야 비로소 불상이라 칭할 것이요.

 

재목을 그대로 두고 불상이라고 예배 공양할 수는 없는 것 같은 것이니 소위 유심(唯心)이 정토니 따로 정토가 없고 자성(自性)이 미타니 따로 미타가 없다는 것은 옳지 못한 주장이다.

또 어떤 이는 정토가 있는 것을 믿으면서도 유심설(唯心設)에 구애되어 서방에 왕생할 것이 없다하거나 참선은 직접으로 견성(見性) 성불(成佛)하는 것이므로 아미타불을 볼 것이 없다는 말은 모두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 하면 저 서방 정토는 탐(貪). 연(戀), 진(瞋), 치(癡)가 없거니와 우리의 마음에도 탐, 연, 진 ,치가 없는가.

또 서방 정토에는 옷을 생각하면 옷을 얻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을 얻으며 고요하고자 하면 고요하여지고 가고자 하면 가는 것이지마는 내가 옷을 생각하여 얻지 못하면 찬 것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며 음식을 생각하여 얻지 못하면 주림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며 고요하고자 하다가 고요할 수 없으면 흩어져 움직이게 하는 것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고 가고자 하다가 갈 수 없으면 계루(繫累)가 마음을 고달프게 하니 소위 유심정토라 함은 진실로 이르기 쉽지 못한 것이다.

 

아미타불은 복혜(福慧)가 충분히 갖추시고 신통(神通)이 광대(廣大)하여 지옥을 변하여 연화를 만드시는 일이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쉽고 한이 없는 세계를 보시는 것이 눈앞에 있는 것 같거늘 나는 항상 숙업(宿業)이 깊고 무게가 있어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거늘 어떻게 연화로 고쳐 만들 수 있으며 또 벽 사이의 거리의 일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한이 없는 세계를 볼 수 있으랴.

소위 자성미타라 함은 참으로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므로 나의 마음이 정토가 될 수 있다 하나 별안간에는 정토가 될 수 없는 일이고 나의 성품이 가히 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 하나 갑자기는 될 수 없는 것이거늘 어찌 정토를 소홀히 생각하고 닦지 아니하며 아미타불을 버리고 뵈옵기를 원치 아니 하리요.

 

정토의 업(業)을 닦아서 아미타불을 뵈옵고 보리(菩提)를 이루기는 어렵지 않거니와 만약 이 세계에서 참선(叅禪)하여 견성(見性) 성불(成佛)하기는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정토를 수행하는 것이 참선에 방해되지 않거늘 어찌하여 참선하는 이는 정토를 소홀히 여기고 닦지 아니하겠는가.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에 말씀하시기를 “시방(十方)의 한량이 없는 보살이 있어 아미타불국에 왕생하였다”하였거늘 나는 어떠한 사람인데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치 아니하니 내가 과연 모든 보살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하는가. 통틀어 말하면 [유심정토와 자성미타]란 말은 많은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니라.

즉 정토법문을 지송(持誦)수행하면 사람마다 반드시 정토에 낳아서 속히 윤회(輪廻)를 벗을 것이니 저 거짓과 불성실한 마음이 있는 이로부터 그 거리의 먼 것이 천지(天地)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2). 성암대사(省庵大師)의 설(設)

 

누가 묻기를“즉심시불(卽心是佛)인데 어찌하여 다시 아미타불을 보려는가.” 하였더니 답하기를 “즉심시불이란 말은 얼음을 가리켜 물이라 하는 말과 같다 즉 얼음이 비록 물이기는 하나 물이 얼어붙었으므로 태양의 열을 빌려서야 비로소 녹아 풀어져서 물이 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불(佛)이기는 하나 전체가 어지럽고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불일(佛日)의 힘을 빌려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거늘 어찌 사리에 어두운 마음만을 고집하고 부처님을 뵈옵기를 원하지 아니 하리요” 또 묻기를 [즉심정토(卽心淨土]라 하는데 어찌하여 다시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가 하였더니 답하기를[즉심정토라 함은 나무를 가리켜서 기둥이라 함과 같다.

 

즉 나무가 기둥이 될 수는 있거니와 나무 그대로가 기둥이 되지는 못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비록 정토를 지을 수는 있으나 마음 그대로가 정토는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十二시(時)중에 일체 경계(境界)에 대하여 한털끝 만치라도 잡념(雜念) 염오심(染汚心)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곧 예상(穢相)이 공(空)하지 못한 것이거늘 어떻게 즉심정토라 하겠는가. 이와 같은 말은 모두 스스로 속는 것이다 만일 정토에 왕생하지 아니하면 유심정토가 끝끝내 드러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3). 대우선사(大佑禪師)의 설(設)

 

어떤 이가 묻기를 관경(觀經)에는 [이 마음이 불을 짓고 이 마음이 곧 불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다른 불을 염불하는가.] 하고 답하기를 [마음이 본래 부처이므로 저 부처를 염불하게 하는 것이다] 범망경(梵網經)에는 [나는 앞으로 될 부처요, 여러 부처는 이미 이룬 부처인줄 알라]하였으니, 너의 마음의 부처님 앞으로 될 부처이고 아미타불은 이미 이룬 부처이다.

 

앞으로 될 부처는 오랫동안 욕해(欲海)에 잠겨서 번뇌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출리(出離)할 때를 정하여 약속함이 까마득하나 이미 이룬 부처는 이미 보리(菩提)를 발하고 위신(威神)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중생을 도와서 보호하시므로 여러 부처님이 염불을 권하신 것이니, 즉 나의 앞으로 될 부처로써 다른 이미 이룬 부처를 구(求)하여 도와서 보호를 얻는 것이다 .

 

그러므로 중생이 만약 염불하지 아니하면 성인과 범부가 영원히 사이가 떨어지고 부자(父子)가 항상 괴리(乖離)하며 오래도록 윤회(輪廻)에 처(處)하여 서로 떨어진 거리가 먼 것이니라.

 

四 극락정토 권(權) 실(實)의 변(辯)

 

중국 당나라 때의 조백(棗栢) 이통형장자(李通玄長者)가 화엄합론(華嚴合論)을 짓고, 그 중에 십종정토(十種淨土)의 육권사실(六權四實) 즉 열 가지 정토 중에 여섯은 권(權)이요, 넷은 실(實)이라는 것을 열거 하면서 그 중의 아미타불 정토를 권이라 하고 실이 아니라 하였으나, 이 장자는[사십화엄경(四十華嚴經)]이 당나라에 들어오기 이전이어서[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을 보지 못한 까닭으로 아미타불 정토를 실이 아니고 권이라고 그릇 인정한 것이다.

 

누가 묻기를[서방 정토는 성인(聖人)이 권방편(權 方便)에 들어가게 되면 무엇 타력(他力)을 빌리리오.] 하였더니 답하기를[부처님이 계신 때의 문수(文殊) 보현(普賢)보살과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마명(馬鳴) 용수(龍樹)보살과 중국의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와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가 모두 왕생을 발원하였으니, 이네들이 모두 둔근이겠는가.

 

[보적경(寶積경)]에는 석가모니 세존께서 부왕(父王)께 정토왕생을 권하여 육萬 석종족(釋種族)이 모두 왕생하였으니 이네들은 모두 평범한 이들이라 하랴 또 이 성현(聖賢)들이 모두 지금의 소위 재능이 예리하고 뛰어난 이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만일 서방 정토를 권이라 하면 어떠한 것을 실이라 하겠는가. 중국의 손신로학사(孫莘老學士)가 처음에 정토를 의심하다가 양차공(楊次公)과 왕민중시랑(王敏仲恃郞)을 만나서 논(論)하는 도(道)가 꼭 들어맞아 드디어 의심을 풀었다 양차공 왕민중시랑 두 사람은 선(禪)을 배우다가 모두 정토 귀의(歸依)에 쉬지 않고 노력하였으니 정토는 성인(聖人)의 권설(權設)이 아니고 진실로 선려(禪侶)의 서지(棲止)할 곳이다

 

 

제 九장 운명(殞命)의 전후

 

1. 사대(四大)가 이산(離散)

 

사람의 몸을 만들어서 이루어진 것 가운데 단단한 것은 지대(地大)에 속하고 흐르는 것은 수대(水大)에 속하고 더운 것은 화대(火大)에 속하고 움직이는 것은 풍대(風大)에 속한다. 이 네 가지를 사대(四大)라 하니 사람이 죽을 때에는 이 사대가 제 각기 흩어지는 것이다.

 

[염불구도중음법(念佛救 度中陰法)]에는 [지대(地大)가 수대(水大)에 내릴 때에는 전신에 무거운 압력을 느끼며 내장과 뼈마디에까지 미치어 숨이 막혀 답답하고 무거운 고통은 말할 수 없나니, 이때에 수족이 끌어당기고 근육이 떨린다.

수대가 화대(火大)에 내릴 때에는 전신이 한냉하고 냉기가 골수에 들어가 내장이 떨리며 간장이 얼음 같이 차서 화로 불로도 냉고(冷苦)를 제하기 어려운 것인데 이때에는 얼굴빛이 회백(灰白)하고 숨이 차고 몸이 떨리게 된다.

화대가 풍대(風大)에 내릴 때에는 생기(生氣)가 태반이나 감퇴하여 저항력이 약하고 바람을 부치면 불이 성하는 모양 같아서 내장과 외지(外肢)가 다리고 찌는 것 같고 살과 힘줄을 베고 쪼개는 것 같은데, 이때에는 얼굴빛이 붉고 신기(神氣)가 혼미(昏迷)한 것이요 풍대가 따로 떨어질 때에는 문득 광풍(狂風)이 온 몸을 불어 찢어 부스러뜨리는 것과 같은 감각을 느끼며 그 고통의 극심함은 형용할 수 없는데 이때에 사대가 흩어지며 육근(六根)이 망가지고 오직 그 신식(神識)만이 생전에 지은 업(業)의 경중을 따라서 과보(果報)를 받아 간다]하였다.

 

[중유론9中有論)]에는 [장차 죽을 때에는 사대(四大)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순서로 따로 따로 떨어지는데 지대(地大)가 분리할 때에는 신체는 무거운 물건으로 온 몸을 누르는 것 같고, 네 팔다리는 끌어당기는 것 같은데 극히 고통이 되고 그 다음에 수대(水大)가 따로 떨어질 때에는 몸에 땀이 나고 혹은 머리에서 땀이난다.]하였다.

 

[지도론(智度論)]에는 [악업(惡業)을 지은 사람은 풍대(風大)가 먼저 흩어지므로 몸이 움직이며 화대(火大)가 먼저 가므로 몸이 덥고 선행(善行)을 한 사람은 지대(地大)가 먼저 가므로 몸이 고요하며 수대(水大)가 먼저 가므로 몸이 차다]하였다.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에는 [임종시에 도풍(刀風)이 모두 일어나 천 개의 뾰족한 칼로 몸을 찌르는 것 같다]하였다.

이와 같이 사대가 흩어질 때에 악도에 가서 날 사람은 죽을 때에 고통을 받으나 인도에 날 사람은 별로 고통이 없고 천도에나 극락세계에 왕생할 사람은 고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상쾌한 감각이 있다고 한다.

 

2. 신식(神識)이 시체(屍體)에서 떠나가는 방법

 

신식(神識)즉 속칭 영혼(靈魂)이 시체에서 떠나갈 때에 전신이 별안간에 일시에 식어지는 것이 아니고 몸 아래서부터 먼저 식거나 혹은 몸 위서부터 먼저 식는다.

 

몸의 더운 기운이 최후에 발에 와서 식으면 지옥에 낳는 것이요 무릎에 와서 식으면 축생도에 낳는 것이요 배에 와서 식으면 귀도(鬼道)에 낳는 것이요 가슴에 와서 식음녀 인도(人道)에 낳는 것이요 눈에 와서 식으면 천도(天道)에 나는 것이고 정수리에 와서 식으면 성도(聖道)즉 극락에 나는 것이다 아수라(阿修羅)는 종류가 많아서 식는 곳을 확실히 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3. 아뢰야식(阿賴耶識)과 중유(中有)

 

우리가 안이비설신의(眼耳費舌身義)의 육근(六根)으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에 대하여 보고,(見) 듣고,(聞) 맡고,(嗅) 맛보고,(味) 닿고,(覺) 알고,(知)하는 것을 잘 알아서 분별하는 작용(作用)을 생(生)하는 것을 식(識)이라 하니 곧 안이비설신의의 육식(六識)이라 하고 여기에 말나식(末那識)과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가하여 팔식(八識)이라 한다.

 

사람이 처음 생길 때에는 아뢰야식 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말나식과 육식이 생기며 죽을 때에는 육식과 말나식이 먼저 가고 아뢰야식이 나중에 가나니 아뢰야식은 곧 우리의 신식 즉 영혼이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수태(受胎)할 때에는 아뢰야식이 먼저 오는 까닭으로 아이가 태중에 있어서 활동하게 되고 사람이 죽은 후에는 전신 중의 어느 부분이든지 더운 기운이 아주 없어져야 아뢰야식이 완전히 떠난 것이다.

아뢰야식이 처음 와서 우리의 신심(身心)이 생긴 것을 생유(生有)또는 생음(生陰)이라 하고 출생한 후부터 죽기 전까지의 신심을 본유(本有)라 하며 죽은 뒤의 신심을 사유(死有)또는 사음(死陰)이라 하고 사유 후와 생유 전의 중간에 있는 신심을 중유(中有)또는 중음(中陰) 중음신(中陰身)이라 하니 이 네가지 종류를 사유(四有)라 한다.

이 사유는 오직 아뢰야식의 이름을 바꾸었을 뿐이고 그 본질(本質)은 바구지 아니한 것이니 중유가 곧 아뢰야식이요 아뢰야식이 곧 중유이다[구사론(俱舍論)]에서는 사유(四有)의 시간을 말하되[생유(生有),사유(死有)는 각각 생사(生死)의 일찰나간(一 刹那間)]이고 본유(本有) 중유(中有)는 길고 짧음이 같지 않다]하였고 [유식론(唯識論)]에는 [생유(生有) 사유(死有)는 일찰나간 보다 조금 길고 본유(本有) 중유(中有)는 길고 짦음이 일정하지 않다]하였다

 

4. 중유(中有)의 작용(作用)

 

중유(中有) 의 형체(形體)는 본유(本有)의 양(量)과 같다 하며 혹은 사람의 중유는 일체의 반이라 하고 또 욕계(欲界)의 중유는 五, 六 세의 아이와 같고 오근(五根)이 완전히 갖추었으나 의복이 없으며 색계(色界)의 중유는 신량(身量)이 원만한 것이 본유와 같고 의복이 몸과 같이 있고 보살은 형량(形量)이 원만하며 모든 용모 형상이 구비하고 의복이 있으며 인천(人天)의 중유는 깨끗하고 삼악도(三惡道)의 중유는 흑암(黑暗)하며, 또 지옥에 날 중유는 그 형상이 지옥과 같고, 하늘에 날 중유는 하늘 사람과 같다고 한다.

 

중유는 냄새를 먹는데 그 먹는 냄새는 복덕(福德)을 따라서 차별이 있으니 즉 복 있는 중유는 꽃과 과실 같은 경청(輕淸)한 냄새를 먹고 복 없는 중유는 대소변과 썩은 음식 과 같은 것의 더러운 냄새를 먹는데 중유가 먹는 분량이 극히 적어서 중유가 비록 많아도 모두 먹을 수가 있다 한다.

 

중유의 견량(見量)은 중유의 승열(勝劣)에 따라 같지 아니하니 승(勝)한 중유는 열(劣)한 중유를 보거니와 열한 중유는 승한 중유를 보지 못하며 같은 종류의 중유는 서로 본다고 한다.

 

중유가 신통력(神通力)이 강하고 속하여 공중을 날아다니는 까닭으로 금강산도 장애가 되지 아니하고 부처님도 억제 할 수 없으며 산과 물과 돌과 벽과 내지 수미산(須彌山)같은 것도 무난히 통과하여 다니되 오직 보리가아(菩提泇蕥)즉 부처님의 금강좌(金剛座)와 모체의 자궁은 통과하지 못하며 또 일찰나(一刹那)에 사대주(四大洲)와 수미산을 돌아다니며 어느 곳에나 순식간에 왕래할 수 있으므로 중유가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한 번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즉각에 앞에 와 서 있고 또 중유가 모든 근(根)이 영리하여 전에 지은 일을 잘 기억하되 그 기억력이 생시보다 九배(倍)나 되고 생시에 비록 용열(庸劣)하고 둔탁(鈍濁)하던 사람이라도 중유에 들면 매우 영민(潁敏)하게 되는 것이다

 

5. 중유(中有)의 생연(生緣)을 얻는 기한(期限)

 

중유가 생유로 낳기 전에 중유로 머물러 있는 기한에 대한 네 가지 설이 있다

(-) 비바사제사(琵婆沙諸師)는 [일체의 중유가 태어나기를 즐겨 구하므로 속히 생(生)을 받고 반드시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하였고,

(=)세우존자(世友尊者)는 [七일을 극장(極長)으로 한다]하였고,

(三)설마달다존자(設摩達多尊者)는 [七七일을 극장(極長)으로 한다]하였고,

(四)법구존자(法救尊者)는[머물러 있는 기한이 일정하지 않다]하니,

 

즉 수생(受生)하는 연(緣)에 더딤과 빠름이 있고 만약 생연(生緣)을 만나지 못하면 중유가 항상 있다는 것이다.

 

[법화문구(法華文句)]에는 [인간의 중유는 동자(童子)와 같고 반드시 七일을 一기(期)로 하여 본생처(本生處)에 나는데, 만약 七일이 끝날 때까지 생연(生緣)을 얻지 못하면 또 다시 중유 七일을 계속하여 第二, 七일의 종말에 또 본생처에 낳고 이렇게 七일을 一기(期)로 하여 그 기한이 가장 긴 것은 제 七기까지 이르고 七기의 종말에는 반드시 어는 곳에든 태어나는 것이니 이 七七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칭한다.

 

이와 같이 생연을 아직 결정짓지 못한 동안에 추천(追薦)하는 일을 베풀어 그 힘으로 좋은 곳에 나기를 바랄 것이다.]하였다.

 

[관정경(灌頂經)]에는 [명종한 사람이 중음(中陰)중에 있어서 몸이 소아와 같고 죄 복이 아직 결정짓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복을 닦아서 망자(亡者)의 신식(神識)으로 하여금 정토에 낳기를 원하면 이 공덕으로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하였다.

 

 

 

제 十장 운명(殞命)할 때의 행사(行事)

 

사람이 운명(殞命)하기 전에 미리 준비할 일과 주의 할 일이 있거니와 운명 후에도 주의 할 일은 법대로 염불하며 도를 잘 닦은 운명 시에도 행사를 잘하여야 할 것이거니와 평시에 염불했다 하여도 법대로 못한 사람은 운명할 때에 행사를 잘하지 아니하면 극락에 왕생하기 어렵고 평시에 염불을 아니한 사람이라도 운명할 때에 행사를 잘 하면 극락에 왕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운명 전후의 행사가 망자(亡者)에게 이와 같이 큰 관계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사람이 운명하려 할 때에는 빨리 운명하기만 기다리고 운명한 후에는 속히 장사하려는 생각만 하고 긴요한 행사를 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러므로 그 운명 전후에 행할 일과 주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一. 서방삼성(西方三聖)의 상(像)을 모실 것

 

운명할 사람의 방에는 극락세계의 삼성(三聖)의 상(像)(흑이나 나무나 금속이나 돌로 만든 불상)또는 화상(畵像)을 모시되 동향으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아미타불의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을 모실 것이며 만약 삼성의 상을 구하기 어려우면 아미타불 상만 동향하여 모시고 불상 앞에는 향로와 [아미타경] 등 왕생에 관한 경책 이외에는 다른 물건을 많이 놓지 말 것이고 불상이 없으면 [나무아미타불]여섯 자나 [아미타불] 넉 자를 글씨로 크게 써서 모셔도 좋고 그것도 할 수 없으면 다만 서향하여 염불할 것이다

 

二. 운명(殞命)하는 사람은 일심(一心)으로 염불할 것

 

운명하는 사람은 자기 일신상 일이나 집안일이나 세상사를 모두 방하착(放下着)하고 오직 극락왕생만을 발원하고 일심(一心)으로 염불할 것이며 설사 병고(病苦)가 중하더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염불만 할 것이다.

이렇게 염불하는 사람은 만약 목숨이 다하였으면 반드시 극락에 왕생할 것이고 또 만약 목숨이 다하지 아니하였으면 병이 속히 나을 것이니 이는 매우 성실한 마음의 염불로 인하여 지난 세사의 업장(業障)을 없애 버리는 까 닦이다.

그러나 잡념(雜念)을 하거나 병이 나을 생각만 하고 염불을 성실하게 하지 아니한 사람은 왕생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병이 낫기만 바라고 왕생을 구하지 아니한 까닭이며 설사 목숨이 다하지 아니하였더라도 병이 속히 낫지 못하고 도리어 병고가 더하게 되느니라.

 

三. 다른 이는 염불을 권하며 조념(助念)할 것

 

행자(行者)가 평시에 염불법을 알고 법대로 수행한 사람도 운명할 때에 가족 친척들이 옆에서 조념(助念)함이 매우 유익하거니와 염불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염불을 하였더라도 성실히 수행하지 못한 사람의 운명할 때에는 조념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운명할 사람이 조념 할 경우와 조념을 싫어하여 반대할 경우에는 조념하는 방법이 같지 아니하다.

 

(-). 운명할 사람이 병이 없거나 병이 경하여 정신이 있고 조념을 희망 혹은 반대하지 않는 때에는 친족들이 반을 짜서 매일 교대로 염불하여 염불소리가 운명할 사람의 귀에 들리게 하며 운명할 때까지 계속하되 소리의 높음과 낮은 것과 느린 것과 빠른 것과 목탁을 치는 여부는 운명할 사람의 의사에 의할 것이다.

 

(=). 운명할 사람이 정신이 혼미(昏迷)하거나 병이 중하여 자신이 염불하지 못하더라도 조념하는 사람들은 매일 반을 자서 교대하여 운명할 때가지 고성으로 염불할 것이고 혹 운명할 사람이 염불하기를 싫어하거나 자기는 물론 조념까지도 반대할 경우에는 운명할 사람에게 염불 소리를 듣는 것 이 크게 이익 되는 것을 간절히 설명할 것이며 운명할 사람이 듣고 듣지 않는 것에 불구하고 운명할 때까지 염불을 계속하는 것이 좋다.

 

四. 운명할 때의 좌와(坐臥)는 자유로 하게 할 것.

 

평소에 염불을 하지 아니하였거나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사람이면 운명할 때의 몸 가지는 태도를 자유에 맡길 것이고 억지로 서향하게 하지 말 것이다. 그러나 평시에 법대로 수행한 사람이면 운명할 때에 몸 가지는 태도에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 서향하여 전가부좌(全跏趺坐) 혹은 반가부좌(半跏趺坐)하고 합장(合掌)하거나 혹은 아미타불 수인(手印)을 맺고 염불하면서 운명 하는 것.

 

(=). 서향하여 오른쪽으로 누워 염불하는 것이니 이것을 길상유(吉相遊)라 한다. 서가모니불께서도 열반(涅槃)하실 적에 이렇게 누우셨다.

 

(三). 서향하여 곧게 서서 합장하거나 아미타불 수인을 맺고 운명하는 것의 세 가지다.

 

五. 가족의 주의 할 일

 

가족이나 친족들은 운명할 사람에게 언어와 행동을 매우 조심하여 왕생의 큰일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할 것이다.

 

(-). 운명할 사람에게 슬픈 기색을 보이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 것이며,

(=). 운명할 사람에게 애정을 못 이기어 섭섭한 말이나 집안일이나 세상일을 말하지 말 것이며

(三). 요란하게 떠들지 말아야 한다.

 

이상과 같은 일로 인하여 운명하는 사람에게 슬픈 마음을 일으키거나 애정에 끌리거나 다른 일에 마음이 산란하게 되면 정념(正念)을 잃고 악도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 무당 판수 외도(外道)들의 하는 행사를 혼용하지 말 것이니, 이것은 해만 있고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법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까닭이 된다. 운명한 후에도 조념(助念)을 계속하되 염(殮)하는 시간을 제하고는 四十九일까지 영전(靈前)에서 가족들이 염불할 것이며 또 선지식(善知識)을 청하여 중유(中有)에게 설법하되 [중유가 어떠한 경계(境界)를 당하든지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일심(一心)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라]고 설명하여 들려주면 중유는 염불하는 소리와 선지식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의 힘을 얻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망자(亡者)가 정신을 잃은 후에 곧 울거나 옷을 갈아입히거나 손발을 거두거나 몸을 자리를 움직여서 옮기지 말고 신식(神識)이 다 떠나간 후에 최소한 8시간 이후에 행사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시체에 만약 한 곳이라도 따듯한 기운이 있으면 신식이 아직 다 떠난 것이 아니고, 그 시체가 다만 입으로 말만 못하고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이고 지각(知覺)은 아직 남아 있으므로 이때에 우는 소리를 들으면 애정이 생기고 불법 생각이 식어지는 까닭으로 애정의 마음을 따라서 몇 번이고 형상을 바꾸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에서 해탈(解脫)할 수 없고 몸을 자리를 움직여서 옮기면 고통이 되어 성난 마음이 생기고 불법 생각이 적어져서 악도에 떨어지기 쉬우니라.

이때에 가장 이익을 얻는 것은 염불이 제일이고 가장 해를 끼치고 왕생에 절대 불가한 것은 떠드는 소리나 흔드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에서 망인이 운명하자마자 손발을 거둔다고 손목과 발목을 묶어서 염(殮 )할 때까지 두는 습관이 있으나 이것은 운명 후에 시체를 그대로 두면 골절이 굽어 굳어져서 염하기가 불편하다고 해서 하는 일이나 만일 신식이 시체에서 떠나기 전에 손발을 거두다가 신식이 고통을 느끼어 성이 나면 안 될 것이니, 손발을 거두지 말고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그대로 두었다가 설사 굽어 굳더라도 뜨거운 물에 수건을 담갔다가 물을 짜고 굳은 곳에 대어 두면 굳은 것이 부드러워지는 것이니 염려할 것 없다. 또 유가(儒家)의 습관인 초혼(招魂)도 부를 필요가 없으니 지성으로 염불하여 망자의 명복(冥福)을 빌면 부처님의 원력(願力)으로 명부(冥府)에 가지 않고 곧 극락으로 직행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시체를 염할 적에 금강경탑다라니 천수탑다라니 수구다라니 등을 넣어서 망인이 다라니의 공덕으로 선도(善導)에 태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위의 다라니 외에 대관정광진언(大灌頂光眞言)즉 광명진언(光明眞言)이 가장 좋으니 이것은 글자 수가 간단하여 二十여 자에 불과하고 또 범자(梵字)의 획(劃)이 시체에 닿으면 정토에 태어난다는 계송(偈頌)이 있으니

 

진언범자촉시골-(眞言梵字觸屍骨)

망자즉생정토중-亡者卽生淨土中)

견불문법친수기-見佛聞法親授記)

속증무상대보리-(速證無上大菩提)라 하였다.

 

망인을 위하여 복을 짓는 도(道)는 보시(布施)가 위주(爲主)이며 그 중에서도 망인의 유물로 복을 짓는 것이 가장 좋으니 망인이 많은 이익을 얻는 까닭이다.

[무상경(無常經)]에는 [망인의 신구(新舊)의복이나 몸에 따라 쓰던 물건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그 망인을 위하여 부처님, 달마(達磨),승가(僧家)에 보시하면 이로 인하여 망자의 업장(業障)이 가벼워지고 공덕 복리(福利)의 이익을 얻을 것이니 좋은 의복을 시체에 입혀 보내는 일은 하지 말라]하였다.

그러므로 망인의 유산이 있으면 전폐(錢幣)로 바꾸어서 불상(佛像)을 장엄(莊嚴)하고 경전(經典)을 출판하고 승가에 보시할 것이며, 또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생물(生物)을 놓아 보내는 등 유정에게 유익한 일을 할 것이다.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는 [만일 부모가 죽어서 아귀도에 낳았을 때에 그 자손이 망령(亡靈)을 위하여 복을 지으면 아귀가 곧 이익을 얻을 것이요. 만일 망령이 천도(天道)에 낳았으면 천도에는 뛰어나게 기묘한 보장(寶藏)을 성취하였으므로 인간의 물건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지옥에 낳았다면 몸에 극심한 고를 받으므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고 축생도 그러하며 아귀도 원래 애탐간린(愛貪慳隣)으로 인하여 아귀도에 떨어진 것이므로 아귀가 된 후에는 항상 그 허물을 후회하고 추천(追薦)의 이익을 생각하므로 그 이익을 얻는 것이니 슬기가 많은 사람은 아귀를 위하여 부지런히 복덕을 지을 것이라]하였다.

(슬기가 많은 사람이란 즉 智者의 뜻이다)

 

[관정수원왕생시방정토경(灌頂隨願往生十方淨土經)]에는 [유정(有情)이 삼보(三寶)를 믿지 않고 법계(法戒)를 행(行)치 아니하다가 죽은 뒤에 삼도팔난(三途八難)에 떨어져서 모든 고통을 받을 적에 친족들이 망인을 위하여 복을 닦으면 七분(分) 중에 一분의 복을 망인이 얻는다]하였고,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에는 [세상에 있을 때에 선인(善因)을 닦지 아니하고 많은 중죄((重罪)를 지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친척들이 망인을 위하여 온갖 성사(聖事)를 지으면 망인은 七분(分)의 一 공덕을 얻고 六분 공덕은 산 사람이 얻는다]하였다.

 

六 . 법사(法師)는 도행(道行)이 구족(具足)한 이를 청할 것.

 

상중(喪中)에 법사(法師)를 청할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도행(道行)이 진정(眞正)하고 지해(智解)가 명철(明哲)한 이를 택할 것이니 법사의 계행(戒行)이 깨끗지 못하였거나 법요(法要)의 의식(儀式)이 분명하지 못하거나 사리(私利)를 탐(貪)하는 일이 있거나 하면 중유(中有)가 신통력(神通力)이 있어서 아는 까닭으로 실망하거나 회한(悔恨)하여 성난 마음이 생기면 고취(苦趣)에 떨어지기 쉬우니라.

중국의 송(宋)나라 소흥년간(紹興年間)의 회음(淮陰)때에 어떤 사람이 딸이 죽어 한식이 지나도록 천도(薦度)하지 못함을 한탄하여 그 어머니가 머리털을 잘라 팔아 돈 六百을 만들어 법사를 청하여 불사를 지으려 하였더니 마침 승려 다섯 사람이 문 앞을 지나가므로 맞아 들여서 불사를 청하였더니 그 승려들이 서로 미루다가 그 중 한 승이 허락하고 금광명경(金光明經) 일부를 독송(讀誦)하여 회향(廻向)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노상(路上)에서 먼저 간 네 사람의 동행을 만나 술집에 들어갔더니 별안간에 창밖에서 소리하여 부르기를 [경 읽은 스님은 술을 마시지 말라]하는지라 승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는 스님이 금광명경을 읽던 집 주인의 죽은 딸로서 오랫동안 어두운 데 빠져 있다가 법사의 독경 공덕으로 죄업(罪業)을 벗고 나오게 되었는데 법사가 만일 술을 먹어서 재(齋)를 깨드리면 나는 벗어날 수 없노라]하고

어디론지 가버렸다.

그리하여 그 승려들은 이 말을 듣고 마침내 지계(持戒)수행하여 성도(成道)하였다 한다.

 

七. 제사(祭祀)에 살생(殺生)하지 말 것

 

제사(祭祀)에 생물(生物)을 죽이는 것은 크게 금하고 꺼려야 할 것이니 즉 살생으로 인하여 중유(中有)가 악보(惡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중유가 살생하는 것을 보고는 살생하지 말라고 가족에게 이르지마는 가족이 알아듣지 못하고 살생하면 중유는 성난 마음을 내어 곧 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제물에 살생하지 말고 소찬(素饌)으로 차리고 조객에게도 육류(肉類)를 대접하지 말 것이며 설사 조객에게는 불만이 있을망정 망인에게는 죄를 얻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에는 [너희들이 살생한 것으로 음식을 차려 놓고 아무리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더라도 망인에게는 터럭만큼도 이익이 되지 못하고 단지 죄연(罪緣)만 맺게 되어 죄가 더욱 깊고 무거워질 뿐이다.

가령 내세나 현세에 성분(聖分)을 얻어서 인(人) 천(天) 중에 태어날 것이라도 죽게 된 때에 모든 식구들이 이 악인(惡人) 즉 살생 같은 것을 지은 인연으로 망인에게 해와 괴로움을 받게 되어 인(人), 천(天)에 낳는 일이 늦어질 것이거늘 하물며 망인이 생시에 조금도 선근(善根)이 없으면 각각 본업(本業)에 따라 스스로 악보(惡報)를 받게 되겠거늘 어찌하여 식구들의 잘못으로 망인의 업(業)을 더하게 하랴 비유컨대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이 양식(糧食)은 끊어진지가 삼일이 되었는데 등에 짊어진 짐은 무게가 百근이 넘는데 만일 별안간에 이웃 사람을 만나서 또 다른 물건을 첨가한다면 짐이 무거워서 꼼짝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八. 왕생의 징조(徵兆)와 서응(瑞應)에 구애되지 말 것.

 

 

염불인 중에 극락에 왕생할 사람은 죽을 때에 이상한 징조나 여러 가지 길한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 보이는 것이니 염불인은 그런 일에 구애되지 말고 극락왕생만 발원(發願)하고 일심(一心)으로 염불만 할 것이다.

가령 길한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 보이더라도 거기에 마음이 움직이어 염불이 한결같지 못하거나 염불을 중단하여서는 옳지 않으니 길한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 보일수록 더욱 침착하며 일심으로 염불을 계속할 것이며 또 길한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 보이지 않더라도 역시 일심으로 염불을 계속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구제하시는데 현저히 하시기도 하고 은연히 하시기도 하여 범부로서는 추측할 수 없는 것이니 설사 일시에 길한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로 인하여 실망하지 말고 일심으로 염불할 것이다 이 일심으로 염불하는 것이 극락에 왕생하는 요결(要訣)이니라.

 

제 十一장. 구품왕생(九品往生)과 변의 (辨疑)

 

무량수경(無量壽經)에는 삼배생(三輩生)이 있는 것을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에는 삼배생을 구품(九品)으로 나누었다 극락정토에 왕생하는데 그 행업(行業)의 우열(優劣)에 따라서 구품의 계급을 세운 것이다.

(-). 상품상생(上品上生)은 금강대(金剛臺)를 타고 저 나라에 가서 난다.

(=). 상품중생(上品中生)은 자금대(紫金臺)를 타고 가서 저 나라에 가서 나되 하룻밤을 지낸 뒤에 연꽃이 핀다.

(三). 상품하생(上品下生)은 금연화(金蓮華)를 타고 가서 나되 하루 낮 하루 밤을 지낸 뒤에 연꽃이 핀다.

(四). 중품상생(中品上生)은 연화대(蓮華臺)를 타고 가서 낳되 오래지 아니하여 연꽃이 핀다.

(五). 중품중생(中品中生)은 칠보연화(七寶蓮華)를 타고 가서 나되 七일을 지낸 뒤에 연꽃이 핀다.

(六). 중품하생(中品下生)은 연화대 말이 없고 곧 극락세계에 가서 낳는 다는 말뿐이다

(七). 하품상생(下品上生)은 보연화(寶蓮華)를 타고 가서 나되 七七일을 지낸 뒤에 연꽃이 핀 다

(八). 하품중생(下品中生)은 천화(天華)를 타고 가서 나되 六겁(劫)을 지낸 뒤에 연꽃이 핀다.

(九). 하품하생(下品下生)은 금연화를 타고 가서 나되 十二대겁(大劫)을 지낸 뒤에 연꽃이 핀다.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에 상품하생자 와 하품하생자가 타는 연화를 모두 금연화라 하였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문] 구품왕생은 수행에 우열(優劣)이 있고 성중(聖衆)이 맞는데 많음과 적음이 있고 연꽃이 피는데 이름과 늦음이 있고 진대(珍臺) 보화(寶華)에 모두 차별이 있는데 상품하생과 하품하생에 같이 금연화라 하여 차별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답] 이에 대하여 세 가지 해석이 있으니

 

(-). 하품하생의 금연화는 왕생하는 사람이 타는 것이 아니고 맞으러 오신 부처님이 타신 연화인가 한다.

그 사람이 업장(業障)이 무거워서 부처님은 뵈옵지 못하고 오직 부처님의 좌대(座臺)만 뵈옵는데 그것도 분명치 못하며 일륜(日輪,일륜이라 한 것은 華를 일륜에 비유한 것이고 그 量이 큰 것을 형용한 것이다)과 같이 몽롱하게 보는 것이다.

 

(=). 하품하생의 사람이 업장이 무거워서 부처님이 맞으시는 것을 뵈옵지 못하고 오직 금연화만 얻어 정토에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경(觀經)에는 금연화가 그 사람 앞에 머문다 하였으니 만일 이것이 타는 연화라면 어찌하여 보화(寶華)에 앉는다고 말하지 아니 하였으랴.

 

(三). 하품하생의 금연화는 타는 연화니 상품하생의 금연화와 이름은 같으나 크고 작은 것과 승(勝)하고 열(劣)한 것과 추(僦)하고 묘한 것이 다른 것이다.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에 중품하생자에는 부처님이 와서 맞으신다는 말이 없는데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문]구품왕생은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으로 인하여 행인(行人)을 맞아서 불국토에 낳게 하시는 것인데 오직 중품하생은 성중(聖衆)이 와서 맞는다는 말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답] 이에 대하여 해석이 두 가지가 있으니

 

(-). 부처님의 48원에 [행인(行人)의 임종 때에 만일 와서 맞지 아니한다 하면 정각(正覺)을 취하지 아니한다]하였고 또 하품하생(下品下生)에도 성중이 와서 맞는다는 말이 있는데 중품하생에 그 말이 없는 것은 혹은 번역한 사람이 빼였거나 혹은 생략하고 말하지 아니한 것일 게다.

 

(=). 아미타불의 四十八원 중에 [시방(十方)중생이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모든 공덕을 닦고 지심으로 발원하여 내 나라에 나려 하는데, 그 임종 때에 가령 대중(大衆)으로 더불어 그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아니한다면 정각(正覺)을 취하지 않는다]하셨으니, 이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무상(無上)대보리심(大菩提心)을 발하는 것인데 중품(中品)의 세 사람은 무상 대보리심을 발하지 못하고 오직 공덕만 닦아서 왕생하려는 것이므로 왕생할 때에 오셔서 맞으신다는 말이 없는 것이 경문에 빠진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와서 맞으시지 않더라도 그 본원(本願)에 어김이 없는 것이다.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한 자는 제하고 오역(五逆) 십악(十惡)을 짓더라도 왕생할 수 있다는데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문] 무량수경(無量壽經)]에는 [왕생하기를 원하는 이는 모두 왕생할 수 있으나 오직 오역과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한다]하였고,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오역 십악을 짓고 모든 불선(不善)을 갖추었더라도 왕생할 수 있다]하였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답] [무량수경(無量壽經)]에는 [오역과 정법을 비방한 두가지 중죄(重罪)로 인하여 왕생하지 못한다]한 것이고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오역 십악 등 죄를 지었으나 정법을 비방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왕생하게 된다는 것이니 이것은 오역죄를 지었더라도 정법을 비방하지 아니하였으면 왕생할 수 있고 오역죄를 짓지 아니하였더라도 정법을 비방하면 왕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경에[오역죄인은 아비대지옥(阿鼻大地獄)에 떨어져서 一겁(劫) 중죄(重罪)를 받고 정법을 비방한 자는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가 이 겁(劫)이 다하면 또 다시 다른 곳의 아비지옥으로 옮겨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百千 아비지옥을 지나는데 부처님도 그 나올 시절을 알지 못한다]하셨으니 정법을 비방한 죄가 극히 무거운 까닭이요, 또 정법은 곧 불법이니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 정법을 비방하면서 어찌 정토에 나기를 원할 이가 있겠는가.

가령 부처님 국토가 안락(安樂)한 것만 탐하여 왕생을 원하는 이가 있다 하면 이것은 물이 아닌 얼음을 구함이며 또 연기 없는 불을 구함과 같으니 어찌 그 얻을 이가 있으리오.

 

정법 비방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문] 어떤 것이 정법을 비방하는 것인가

 

답] 만약 부처도 없고 불법도 없다면 보살도 없고 보살법도 없다는 소견(所見)을 제가 생각하였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듣고 그 마음이 결정된 것이 모두 비방이다.

 

문] 이런 것은 단지 자기에게 관한 것인데 중생에게 무슨 해독(害毒)이 있어서 오역 중죄보다 더 중하다 하는가.

 

답] 여러 부처님과 보살이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의 선법(善法)을 설법하시지 아니하면 중생을 교화하는 이가 어떻게 선악(善惡)을 가려낼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세간의 온갖 선법이 모두 없어지고 출세간의 모든 현성(賢聖)이 모두 없을 것이 아닌가.

그대는 오직 오역죄가 중한 줄만 알고 오역죄가 정법이 없는 데서부터 나는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법을 비방하는 죄가 가장 무거운 것이다 오역죄가 혹은 왕생할 수 있다 하고 혹은 왕생하지 못한다 하므로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문] [관경(觀經)]에는 [오역죄 등을 범하고도 왕생할 수 있다]하고 [무량수경(無量壽經)]에는 [오역죄 등을 범하면 왕생하지 못한다]하였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석 하는가.

 

답] 이에 다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 은 사람에 대하여 해석한 것인데

 

첫째는 오래 전부터 대승심(大乘心)을 발한 사람이 악연(惡緣)을 만나서 역죄(逆罪)를 지은 것이 아사세왕과 같은 것인데 이것은 비록 역죄를 지었으나 반드시 깊이 후회하고 발심하여 깨달은 세계로 들어가기를 구하므로 능히 중죄를 없애 버리고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관경의 뜻이고

둘째는 자고이래(自古以來)로 대승심(大乘心)을 발하지 못한 사람이 또 역죄를 짓고도 많이 후회 하지 못하면서 능히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지 못하므로 왕생하지 못 하는 것이니 이는 무량수경의 뜻이다.

 

(=). 는 행(行)에 대하여 해석한 것인데 행에 정(定)과 산(散)이 있다.

 

첫째 사람이 다시 역죄를 지었더라도 능히 十六정관 (正觀)의 선행(善行)을 닦고 깊이 불덕(佛德)을 관(觀)하면 중죄를 없애 버릴 것이므로 왕생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관경의 뜻이고,

둘째 사람이 역죄를 지은 뒤에 능히 관불삼매(觀 佛三昧)를 닦지 못하면 비록 여선(餘善) 즉 다른 선행(善行)을 지었더라도 능히 죄를 없애 버릴 수 없으므로 왕생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무량수경의 뜻이다.

 

 

제 十二장. 염불하여 왕생한 예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극락에 왕생한 사람들이 심히 많으나 이들 가운데서 몇 사람만 다음에 적어 본다.

 

一. 우리나라 사람

 

(-) 광덕(光德)과 엄장(嚴莊)

신라의 문무왕(文武王)때에 광덕(光德) 엄장(嚴莊)두 사문(沙門)이 있어 사이가 매우 두터워서 항상 서로 약속하기를 먼저 극락에 가는 사람이 뒤 사람에게 알려 주자고 하였다 광덕은 경상북도 경주에 있는 분황사(芬皇寺) 서쪽 마을에 은거(隱居)하면서 신 삼는 일을 업으로 하고 아내를 두고 살았고 엄장은 남악(南岳)에 있으면서 농사를 짓고 혼자 살았다.

하루는 석양(夕陽)볕이 산마루에 옆으로 비스더미 비치어 솔나무 그늘이 고요히 내리는데 광덕이 창 밖에서 “나는 벌써 서방 극락에 갔으니 그대는 잘 있다가 나를 따라 오라”하는 소리에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구름 속에서 풍악 소리가 들리며 광명이 땅에까지 뻗치었다.

이튿날 광덕을 찾아가 보니 과연 죽었다.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함께 장사를 치르고 그 아내에게 “광덕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한가.”하였더니 그 아내가 허락하므로 그 집에 그대로 머물러 살다가 어느 날 동침을 요구하였더니 아내는 이상하게 여기면서 “스님이 정토에 왕생하려 함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서 생선을 잡으려 함과 같소.”하였다.

그러므로 엄장이 “광덕도 그랬을 터인데 어찌하여 나는 그렇지 못하는가.”하였다.

아내는 또 말하기를 “남편이 나와 십년을 같이 살았지만 한 번도 한 자리에서 잔 적이 없었는데 하물며 몸을 더럽힐 리가 있으랴 남편은 매일 단정히 앉아서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거나 혹은 십육관(十 六觀)을 닦았으며 그러다가 관(觀)이 성취되고 달빛이 창틈으로 들어오면 달빛 위에 올라가 가부좌하고 앉아서 지성으로 공부하였으니, 그러고야 서방 극락세계에 아니 가고 어디로 가겠소.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첫 걸음부터 알 수 있다는데 이제 스님의 하는 것을 보면 동으로는 갈지 모르나 서방으로는 갈 것 같지 못 합니다.”하였다.

엄장은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부끄럽게 여겨 돌아 와서 원효(元曉)스님을 찾아보고 정성껏 공부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원효스님은 쟁관(諍觀)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엄장은 그 후부터 일심(一心)으로 관(觀)을 닦다가 역시 서방 정토에 왕생하였다.

 

(=) 욱 면(郁面)

신라 경덕왕(景德王)때에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晉州)의 선남(善男) 수십 명이 모여 서방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그 고을 경내(境內)에 미타사(彌陀寺)를 처음으로 세우고 萬일 기한으로 염불회를 결성하고 염불하였다.

이 때 아간귀진(阿干貴珍) 집의 계집종 욱면이 상전(上典)을 따라와서 길 뜰 가운데 서서 염불을 하곤 하였다.

주인이 저할 일을 아니하고 따라 와서 염불하는 것을 밉게 여겨 매일 곡식 두 섬씩을 주면서 하루 저녁에 찧게 하였더니 욱면은 일경(一更)쯤 되어 벌써 찧어 마치고 곧 절에 가서 또 염불을 하면서 밤낮으로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마당 가운데 좌우 양쪽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노끈으로 말뚝에 메고 합장(合掌)한 채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지성으로 수행하더니 한 번은 공중에서 소리 나면서“욱면 아씨도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 하는 것이었다.

대중이 이 소리를 듣고는 욱면을 권하여 법당에 들어가서 대중과 함께 염불하게 하였다.

그러한지 얼마 후에 하늘 풍악이 서쪽에서 들려오면서 욱면이 자리에서 솟아서 지붕을 뚫고 공중으로 올라가서 서쪽으로 향하더니 교외(郊外)에 이르러 형체를 버리고 진신(眞身)을 나타내어 연화위에 앉아 광명을 놓으면서 천천히 서방으로 가는데 풍악 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승전[僧傳)]에는 동량화주(棟樑化主) 팔진(八珍)은 관음보살이 변하시여 나타나신 것으로 신도(信徒)千인을 데리고 있으면서 두 반으로 나누어 한 반은 노력을 제공하고 한 반은 수행하였다.

노력하는 반에서 일 보는 사람이 계(戒)를 지키지 못하고 축생도에 떨어져서 부석사(浮石寺)의 소가 되어 항상 경(經)을 싣고 다니더니 경을 실었던 공력(功力)으로 아간귀진의 집에 변해 낳아서 계집종이 되었으니 이름이 욱면이라 볼 일이 있어 하가산(下柯山)에 갔다가 꿈을 꾸고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였다 한다.

아간(阿干)의 집이 혜숙법사(惠宿法師)가 처음으로 세운 미타사(彌陀寺)에서 떨어진 거리가 멀지 아니하였고 아간이 매양 미타사에 가서 염불하였는데 욱면도 따라 가서 뜰 가운데서 염불하였다 하며 이렇게 염불하기 九년 동안 을미년 정월 二十一일에 예불(禮佛)하다가 지붕을 뚫고 공중으로 올라 가다가 소백산(小伯山)에 가서 신 한 짝을 떨어 뜨렸는데 그 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지었고 산 밑에 이르러 육신(肉身)을 버렸는데 그 곳에 二보리사를 짓고 현판을 [욱면등천지천]이라 하였다 한다.

 

(三) 염불사(念佛師)

 

경주(慶州)의 남산 동족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촌중에 절이 있으니 이름을 피리사(避里寺)라 하였다.

그 절에 스님이 있으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소리가 성중(城中)三百六十방(坊)十七萬호(戶)가 다 같이 듣게 되는데 그 소리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언제나 한결같이 들리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존경 하면서 [염불스님]이라고 불렀다.

염불 스님이 입적(入寂)한 뒤에 흙으로 등상을 만들어서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있던 피리사는 염불사라고 이름을 고치고 그 절 곁에 있는 작은 절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하였다.

 

(四) 포천산(布川山)의 다섯 비구(比丘)

삽양주 동북(東北) 二十리 쯤에 포천산 이 있고 산중에 석굴(石窟)이 있어 매우 이상하고 고와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파서 만든 것 같았다.

다섯 비구(比丘)가 그 굴에 와서 있었는데 이름은 알 수 없고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하기 수십년이 되었다.

하루는 문득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맞으므로 다섯비구가 각각 연대(連臺)에 올라 앉아 공중에 떠서 가다가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유련(留連) 하면서 하늘 풍악이 잡히었다.

절승이 나가 보니 다섯 비구가 무상(無常) 고(苦) 공(空)의 이(理)를 풀어 밝히고는 육신(肉身)을 벗어 버리고 대광명(大光明)을 놓으면서 서쪽으로 가버렸다. 육신을 버린 곳에 절승들이 정사(亭榭)를 짓고 치루(置樓)라 이름 하였는데 지금도 있다 한다.

 

(五) 발징화상(發徵和尙)

신라 경덕왕(景德王)때에 발징화상이 건봉사(乾鳳寺)에서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치하고 지성으로 염불하다가 도반(道伴)三十一명과 함께 허공으로 올라가 왕생한 일은 第三장 五에 있다.

 

 

二. 중국사람

 

(-) 혜원대사(慧遠大師-蓮宗 初祖)

 

대사(大師)는 동진(東晋)때 안문(雁門)의 번루(煩樓)사람으로 성은 가(賈)씨요 이름은 혜원(慧遠)이다.

나이 31세에 출가하고 태원(太元)15년에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승속(僧俗)123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結成)하고 염불 수행하면서 30년 동안 산 밖에 나가지 아니하고 처음 11년 동안에 세 번이나 성상(聖像)을 뵈었으나 말하지 아니하다가, 그 후 19년 만에 즉 의희(義熙)12년 (서기 四一六년)7월 그믐날에 정(定)에서 일어날 때에 아미타불 신(身)이 허공에 가득하고 원광(圓光)속에 무수한 화신(化身)이 있으며 관음 세지 두 보살이 모시고 서 계셨는데 아미타불이 말씀하시기를[내가 본원력(本願力)으로 와서 너를 위안하노니 네가 七일 후에는 마땅히 내 나라에 나리라]하시고 또 불타야사(佛陀耶舍) 혜지(慧持) 혜영(慧永) 유정지(劉程之)등이 옆에 있다가 읍(揖)하면서 [사(師)가 우리보다 먼저 뜻을 세웠는데 지금에야 오십니다 그려]하였다.

이해 八월 초하룻날에 병이 나더니 초엿새 날에 도중(徒衆)을 모아 훈계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입적(入寂)하니 나이가 83세이다.

 

(=) 선도대사(善導大師)蓮宗 弟二祖)

 

대사(大師)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정관년(貞觀年)중에 서하(西河) 도작선사(道綽禪師)의 구품도량(九品道場)을 보고 기뻐하여 말하기를[이것이 참으로 불(佛)에 들어가는 진요(津要)니 다른 행업(行業)을 닦아서는 우벽(迂僻)하여 성취하기 어렵고 오직 이 법문아라야 속히 생사를 초출(超出)하리라]하고 이에 주야로 예송(禮誦)하되 집에 있어서는 장괘(長跪) 창불(唱佛)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토법문을 연설하기 三十여년 동안 잠을 자지 아니하며 계행(戒行)을 깨끗이 가져 범치 아니하고 좋은 음식은 남에게 주고 나쁜 것은 자기가 먹으며 가사(袈裟)와 병발(甁鉢) 등도 자기가 지고 다니며 다른 사람에게 의뢰하지 아니하였으며 타인과 동행하면 세상의 일을 말하게 된다고 항상 혼자 다녔다.

또 아미타경 十萬여 권을 쓰고 정토변상(淨土變相) 三百벽 을 그렸으며 탑(㙮) 절을 수리하며 영조(營造)하고 항상 사람을 교화(敎化)하였다 그의 교화를 받은 사람 중에는 아미타경은 十萬 번 내지 五十萬 번을 외운 이가 있고 불명(佛名)을 萬번 내지 十萬번을 일과로 하는 이도 있어서 그 중에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어 정토에 왕생한 이도 많았다.

어떤 이가 [염불하면 정토에 왕생하느냐]물으면 대사는 답하되 나와 같이 염불하면 너의 소원을 이루리라]하고 대사가 이에 스스로 一 성(聲)을 염불하니 한 광명이 입에서 나오고 十성하고 百성하매 광도 또한 이 수 대로 나왔다 대사가 하루는 [나는 이제 서(西)로 돌아가겠다]하고 절 앞에 있는 버드나무에 올라가서 서향하여 축원하되[부처님이 나를 접인(接引)하시고 보살들이 나를 도우시어 나로 하여금 정념(正念)을 잃지 않고 안양(安養곧 極樂)에 왕생케 하소서]하고 몸을 던져서 죽으니 고종(高宗)이 그 신이(神異)함을 알고 절 현판을 내려 주면서 [광명(光明)]이라 하였다.

 

(三) 영명지각 연수대사(永明知覺 延壽大師) 蓮宗 弟六祖)

 

대사는 북송(北宋)때의 단양(丹陽)사람으로 이름은 연수(延壽) 자(字)는 충현(沖玄)이고 호(號)는 포(抱)한 자이다.

나이 三十이 넘어서 출가하여 영명사(永明寺)에 머물렀으므로 세상에서 영명선사(永明禪師)라 칭하였고 또 오월(吳越)의 충의왕(忠懿王)이 지각선사(知覺禪師)라 호(號)를 내려 주었다.

대사가 출가 후 처음에 선종(禪宗)의 법안종(法眼宗)에 속하였다가 뒤에 염불의 정업(淨業)을 전수(專修)하여 매일 일백팔사(一百八事)를 행하여 밤에는 별봉(別峰)에 가서 행도염불(行道念佛)하는데 옆의 사람들이 천악(天樂)소리를 들었다.

대사는 十五년 동안 영명사에 있으면서 제자 千七百 인을 도(度)하였고 계(戒)를 준 것이 萬여 인 四十萬 본(本)의 미타탑(彌陀塔)을 찍어서 보시하고 또 관음변재(觀音辯才)로써 염불을 권장하여 연종(蓮宗)을 널리 퍼뜨려 실행되게 함에 진력하였는데 세상에서 지씨(慈 氏)가 하생(下生)하였다 칭한다. 대사는 임종 때에 갈 때를 미리 알고 개보(開寶)八년 二월 二十六일 새벽에 일어나 분향하고 가부좌하고 앉아서 화(化)하였다 수가 七十二세이다.

 

(四) 운서연지 주굉대사(雲棲蓮池株宏大師 蓮宗 第八祖)

 

대사는 명(明)나라 때 항주(杭州) 인화현(仁和縣)사람으로 성은 심씨(沈氏) 이름은 주굉(株宏)자(字)는 불혜(佛慧)이고 호(號)는 연지(蓮池)이다 대사는 四十이 넘어서 출가 하였는데 세상에서 연지대사(蓮池大師) 또는 운서화상(雲棲和尙)이라 불렀다.

처음에 대사의 이웃집에 한 노파가 있어서 불명(佛名)수천 번을 일과로 부르므로 그 연고(緣故)를 물으니 노파가 말하기를 [선부(先夫)가 염불하다가 병 없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염불 공덕이 불가사의함을 알고는 그 후부터 정토에 마음을 두어 안두(案頭)에[생사사대(生死事大)]넉 자를 써서 스스로 경책(警策)하고 그 후에 선종(禪宗)의 제사(諸師)를 만나 진리를 깨달았으나 더욱 연종을 널리 퍼뜨려 실행되게 함에 전력하여 널리 염불을 권장하였다. 대사는 계살문(戒殺文) 등을 지어 계율(戒律)을 다시 일으키고 중선(衆善)을 널리 닦아서 정업(淨業)에 자(資)하고 또 아미타경소초(阿彌陀經疏抄)등의 저서가 많이 있는데 후세의 사람이 집록(集錄)하여 운서법휘(雲棲法彙)라 하였다.

대사가 만력(萬曆)四十년 七월 七일 저녁에 말하기를[나는 내일 가겠다]하더니 이튿날 저녁에 미질(微疾)이 있어 눈을 감고 앉았다가 다시 눈을 뜨고 대중에게 말하기를 [노실(老實)하게 염불하라]하고 서향하여 염불하면서 앉아서 화(化)하니 나이 八十一 세이다.

 

(五) 승 예(僧叡)

 

진(晉)나라 때의 장악(長樂)사람으로 여산(廬山)에 들어가 혜원(慧遠)에 의하여 염불의 정업(淨業)을 닦아서 안양(安養-곧 極樂)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행, 주, 좌, 와(行主左瓦)중 서(西)를 등지지 않더니 원가(元嘉) 十六년에 병 없이 문득 승중(僧衆)을 모아 작별을 고하고 목욕한 후에 서향하여 앉아서 합장하고 화(化)하니 오색향연(五色香煙)이 가득하였다. 나이 六十七세이더라.

 

(六) 유정지(劉檉之)

 

진(晉)나라의 팽성(彭城) 사람으로 성은 유(劉)씨 이름은 정지(檉之)이고 자(字)는 중사(仲思)호(號)는 유민(遺民)이다.

정지(檉之)는 처음에 부참군(俘叅軍)이 되었다가 공경(公卿)들의 인천(引薦)을 모두 사퇴하고 여산(廬山)에 들어가서 햬원(慧遠大師) 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정토업(淨土業)을 닦았다.

정지가 정중(定中)에 불광(佛光)이 땅에 비치어 금색이 되는 것을 보았고 또 염불할 때에 아미타불의 옥호광(玉毫光)이 비치며 손을 드리워 위접(慰接)하시는 것을 뵈옵고 정지가[어찌 감히 여래께서 나의 정수리를 만지시며 옷으로 덮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까]하니, 부처님이 이마를 만지시며 가사를 끌어 덮어 주셨고, 다른 날 꿈에는 칠보지(七寶池)에 들어가 청백색의 연화를 보고 그 물이 잠잠한데 목에 원광(圓光)이 있고 가슴에 만자가 있는 사람이 연못물을 가리키면서 [팔공덕수(八功德水)를 마시라]하매 정지가 그 물을 마셨더니, 맛이 달고 꿈이 깬 뒤에도 이상야릇하게 좋은 향기가 털구멍에서 발하는지라, 이에 대중에게 말하기를[내가 정토의 연(緣)이 왔다]하고 불상(佛像)에 대하여 분향재배하면서 축원하기를 [내가 서가모니불이 남기신 가르침에 의하여 아미타불이 계신 것을 알았으니 이 향을 서가여래께 공(供)하고 다음에 아미타불과 묘법연화경(妙法連華經)에 공(供)하고 일체 유정(有情)이 모두 정토에 원하나이다.]하고 서향하여 합장하고 앉아서 화(化)하니 때는 진의희(晋義熙) 六년이요. 수가 五十九세이다.

 

(七) 문언박(文彦博)

 

송(宋)나라 때에 분주(分州) 개휴(介休)의 사람인데 자(字)는 관부(寬夫)이다. 송나라의 인(仁) 영(英) 철(哲)의 四왕조(王朝)에 역사(歷仕)하여 출장입상(出將入相)한지 五十여 년에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고 역경윤문사(譯經潤文使)를 겸하여 노국공(㯝國公)을 봉(封)하였다.

노국공이 원래 불법에 귀신(歸信)하여 만년(晩年)에는 아미타불을 전념(專念)하고 발원하기를[내가 항상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불도에만 열중하여 일체선(一切善)을 근수(勤修)하기를 원하며 내가 심종(心宗)을 깨닫고 널리 모든 함식(含識)을 제도(濟度)하기를 원한다]하고 경사(京師)에 있어서 정엄법사(淨儼法師)로 더불어 十萬 인을 모아 정토회(淨土會)를 만들었더니, 사대부(士大夫)를 쫓는 이가 많았고 임종(臨終)에 안연(晏然)히 염불하며 앉아서 화(化)하니 九十二 세이다.

 

(八) 왕일휴(王日休)

 

송(宋)나라 때의 여주(廬州) 용서(龍舒)사람으로 자(字)는 허중(虛中)이다.

위인(爲人)이 마음이 바르고 얌전하며 검소하고 깨끗하였으며 고종조(高宗朝)에 국학진사(國學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나가지 아니하였고 경사(經史)를 박통(博通)하였으나 하루아침에 버리고 말하기를 [이것은 다 업습(業習)이요, 구경법(究竟法)이 아니니 나는 서방으로 돌아간다]하고 그로부터 염불에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불도에만 열중하였고 나이 六十에 포의소식(布衣蔬食)으로 천배(拜)하며 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을 지었는데 왕공(王公) 사대부(士大夫)로부터 도자(屠者) 걸개(乞丐) 노복(奴僕) 비자(婢子) 배우(俳優) 기녀(妓女)등에 이르기까지 정토법문(淨土法門)으로써 귀의(歸依)하기를 권인(勸引)하였으며 쉬운 말로써 간곡히 알아듣게 일러 주는 것이 부형이 자제(子弟)를 교훈하듯이 하였다.

왕일휴는 명종(命終)하기 三일 전에 여러 친지에게 작별을 고하며 다시 보지 못하겠다는 말이 있더니 기일에 이르러 평소와 같이 염불하다가 문득 큰 소리로 아미타불을 부르고 [부처님이 와서 맞으신다]하면서 서서 화(化)하였다.

 

 

(九) 서 뢰(徐雷)

 

중회민국 절강(浙江) 낙청(樂淸) 사람으로 음주(飮酒)와 야유(冶遊)를 좋아하여 팽할(烹割) 음연(飮讌)이 허일(虛日)이 없더니 경신년(庚申年)즉 1920 년 정월 보름날 밤에 어떤 사람의 수족을 네 기둥에 얽어매고 두 귀졸(鬼卒)들이 몽둥이로 그 등을 치는데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뢰가 가까이 가서 보니 곧 자기라 놀랍고 두려운 중에 사지(四肢)는 얽어매었고 등에는 통겪(痛擊)을 받으므로 아픔을 참지 못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더니 공중에서 염불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따라서 염불하다가 깨어나니 등이 아직도 아픈지라 대단히 무서워서 평일에 사행(邪行)하던 것을 생각하니 부끄럽고 후회되기 짝이 없었다.

곧 맹성(猛省)하여 [내가 들으니 불도를 배우면 가히 생사(生死)를 요(了)할 수도 있고 지옥의 고를 면할 수도 있다더라]하고 그 후부터 앞서 저지른 악행(惡行)을 통개(通改)하고 매일 아미타불의 명호(名號)와 [화엄경 보현행원품(華嚴經普賢行願品)]을 외우더니 하루는 저녁에 그 처에게 말하기를 [내일은 불보살이 오셔서 나를 접인(接引)하실 터이니 방을 깨끗하게 하고 분향 예배하라]하고 이튿날에 목욕한 뒤에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서 염불하면서 죽었다.

 

(十) 정진니(淨眞尼)

 

당나라 때의 니승(尼僧)으로 장안(長安)의 적선사(積善寺)에 있으면서 열성 있고 진실하게 염불하더니 하루는 제자들에게 말하기를[다섯 달 동안에 열 번 부처님을 뵈었고 또 보연화(寶蓮華)위에 동자가 유희하는 것을 보았으니 나는 상품생(上品生)을 얻었노라]하고 가부좌하고 화(化)하니 서광(瑞光)이 절 안에 가득하였다.

 

(十一) 과인니(果仁尼)

 

중화민국 팽택(彭택澤) 도(陶)씨의 딸로 광서(光緖) 병오년(丙午年)에 읍(邑)의 정토암(淨土庵)에서 출가하여 중화민국 원년(元年)즉 서기 1913년에 정토법문(淨土法門)을 듣고 곧 신심(信心)을 발하여 부지런히 염불하더니 갑자년(甲子年)겨울에 대단하지 않은 병이 있었는데, 그 도제(徒弟) 상삼(常參)이 섣달 八일 꿈에는[동자 넷이 앞에서 당번(幢幡)을 들고 또 네 사람은 뒤에서 교자(轎子)를 메고 말하기를[이 집 사장(師丈)을 접인(接引)하여 서방으로 간다]하였고, 다음 해인 을축년(乙丑年) 四월 二十일 과인니의 꿈에는 어떤 스님이 왼 손에는 연화발(連華鉢)을 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드리워 무릎을 지나는데 과인니에게 말하기를[너는 마땅히 六월 五일에 연좌(連座)에 오른다] 하였고, 또 六월三일 상삼(常參)의 꿈에는 어떤 스님의 신장이 열 자가 넘으며 붉은 가사(袈裟)를 입고 가슴 앞에 한 가닥의 띠를 비스듬히 걸었는데 [나무서방아미타불]이라 썼고 머리에는 연꽃잎 모지를 쓰고 이마에는 백연화(白蓮華) 일타(一朶)를 나타내고, 한 부처님이 그 위에 가부좌하고 앉으셔서[이 집 사장(師丈)을 청하여 같이 간다]하셨다.

六월 초 五일에 과인니가 서쪽으로 돌아 갈 것을 예언하여 도제(徒弟)들이 와서 조념(助念)하였고 점심 후에 과인니가 대중에게 이르기를[날씨가 매우 덥고 나는 무시에 갈 터이니 각기 집에 돌아가서 목욕하고 다시 와도 늦지 않다]하였다.

그래서 대중이 제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보니 과인니는 가부좌하고 앉아서 염불 수성(數聲)에 화거(化去)하였다.

이튿날 감(龕)에 넣었을 때에도 용모가 생시와 같았고 유서에 의하여 골회(骨灰)를 길에 흩으려 뜨려 중생의 연(緣)을 맺었다.

 

(十二) 독고황후(獨孤皇后)

 

수(隨)나라 문제(文帝)의 황후(皇后)로서 성은 독고(獨孤)이다 황후는 비록 궁중에 있으나 깊이 여질(女質)을 싫어하고 대승(大乘)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하며 염불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정의(淨衣)를 갈아입고 침수향(沈水香)을 씹어서 입을 깨끗이 하였다.

인수(仁壽) 二년 즉 서기 六O二년 八월 갑자일에 영안궁(永安宮)에서 죽었는데 이상야릇하게 좋은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고 천악(天樂)이 하늘에서 떨쳐 울렸다.

문제(文帝)가 범승(梵僧) 사제사나 에게 무슨 길조(吉兆)이냐고 물었더니 범승은 정토에 아미타불이 계시는데 황후가 정토에 왕생하셨으므로 이런 길조가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十三) 왕 씨(王氏)

 

송(宋)나라 형왕(王)의 부인으로 성은 왕씨인데 정업(淨業)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닦아 밤과 낮에 끊임없이 쉬지 아니하였고 모든 첩과 계집종들을 인도하여 서방 정토에 마음을 돌리게 하였는데, 그 중의 한 첩이 게으르므로 왕부인이 꾸짖기를 [너 한 사람으로 나의 규구(規矩)를 깨뜨릴 수 없다] 고 하니 그 첩이 뉘우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력을 다하여 나가다가 하루는 동무들에게 말하여 [나는 가노라]하더니, 그날 밤에 이상야릇하게 좋은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면서 병 없이 죽었다.

이튿날 그 동무가 왕부인에게 꿈에 죽은 첩을 만났는데 [부인의 훈책(訓責)으로 말미암아 서방에 왕생케 되어 덕을 느낌이 무량 하노라.] 하거늘 그 사실을 부인에게 말하였더니 왕부인은 내가 꿈을 꾸어야 믿겠다. 하더니 그날 밤 부인의 꿈에 죽은 첩이 나타나 여전히 그렇게 치사하는지라 부인은 나도 서방 정토에 가 볼 수 있느냐 하니 첩이 갈 수 있다. 하면서 죽은 첩이 부인을 인도하여 한 곳에 이르니 큰 연못 속에 연화가 있는데 크고 작은 것이 간착(間錯)하였으며 혹은 성하게 잘 된 것도 있고 혹은 시들은 것도 있거늘 부인이 그 연고를 물으니 죽은 첩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서방 정토를 닦는 이가 겨우 일념(一念)을 발하여도 이 못에 연꽃 한 송이가 생기는데 정력을 다하여 나가는 이는 성하게 잘되고 게으른 이는 시드는 것이니 만일 오래오래 정력을 다하여 나가서 쉬지 아니하면 염(念)이 성숙하고 관(觀)이 성취되어 육신(肉身)을 버리고 이 가운데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조복(朝服)을 입고 보관(寶蒄) 영락(瓔珞)으로 몸을 장엄(莊嚴)하고 앉았으므로 부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죽은 첩이 말하기를 [양걸(楊傑)이라]한다.

또 한 사람은 조복(朝服))을 입고 앉았으나 꽃이 시들었으므로 누구냐고 물으니 죽은 첩이 마우(馬玗)라]한다.

부인이 나는 어느 곳에 나느냐 물었더니 죽은 첩이 부인을 인도하여 수리(數理)를 가서 바라보니 한 화대(華臺)가 황금색과 푸른색이 찬란하고 광명이 휘황(輝惶)한데 죽은 첩이 이것이 부인의 생처(生處)로서 금대(金臺) 상품상생(上品上生)이라 하였다.

부인이 꿈을 깨니 기쁨과 슬픔이 교집(交集)한다.

부인은 이 해 생일에 일찍 일어나 향로를 받들고 관음각(觀音閣)을 바라보면서 섰거늘 권속들이 앞에 가서 자세히 보니 이미 화거(化去)하였다.

 

(十四) 염불파(念佛婆)

 

원(元)나라 때에 어떤 염불할머니가 있었는데 지순(至順) 원년(元年) 경오년(庚午年) 즉 서기 1320년에 절서지방(浙西地方)에 여러 해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이가 많았다.

굶어 죽은 송장들을 육화탑(六和塔) 뒷산 큰 구렁에 가져다가 버렸더니 그 중에 한 여자 송장은 수십 일을 지내어서도 썩지 아니하고 언제나 여러 송장들 위에 올라와 있는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송장의 몸을 뒤져 본 즉 품속에 작은 주머니가 있고, 그 속에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세 폭이 들어 있었다.

이 일을 관청에서 알게 되어 관(棺)에 넣어 화장하였는데 화염(火炎)중에 보살 상(像)이 나타나고 광명이 찬란하였다.

이로 인하여 발심 염불하는 이가 심히 많았다 한다.

 

(十五) 장선화(張善和)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서 소 잡는 직업을 하였더니 임종 때에 수십 마리 소가 사람의 말을 하면서 [네가 나를 죽였으니 내 목숨을 도로 내노라]하므로 장선화는 대단히 무서워서 처를 불러 급히 승(僧)을 청하여 염불하게 하여달라 하므로 처가 승을 청하니 승이 와서 말하기를[관경(觀經)]에 말씀하시기를[만일 중생이 불선업(不善業)을 지어서 마땅히 악도(惡道)에 떨어질 사람이라도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십념(十念)하면 八十억 겁(劫)의 생사(生死)의 죄를 없애 버리고 곧 극락세계에 왕생 한다. 하셨으니 곧 염불하라]하였다. 장선화는 지옥이 조금의 여유도 없이 매우 급하게 되었으니 향로를 가져 올 겨를이 없다 하면서 왼 손으로 불을 들고 오른 손으로 향을 잡고서 서향하여 소리를 높여 염불하니 십성(十聲)이 차기도 전에 문득 말하기를[부처님이 오시어서 나를 맞으신다]하고 죽었다.

지옥이 조금의 여유도 없이 매우 급한 것을 보고 안타깝고 황급하여 그 간절한 정성이 다시 딴 생각이 없으므로 이때의 十념이 다른 때의 百千萬億 념(念)을 초과하는 것이니 결정코 왕생하는 이치가 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

 

 

제 十三장. 연종(蓮宗)사성예문(四聖禮文)

 

행자(行者)는 매일 조석(朝夕)으로 서향(西向)하여 사성례(四聖禮)를 행(行)한 후 다음의 사성예문(四聖禮文)을 외워야 한다.

 

정삼업진언 (淨三業眞言) _일송(一誦)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_(三誦)

아금지차일주향 변성무진향운개 봉헌극락사성전 원수자비애납수

我今持此一炷香 變成無盡香雲蓋 奉獻極樂四聖前 願垂慈悲哀納受

_일송일배(一誦一拜)

 

나무서방정토극락세계대자대비대원대력접인도사아미타불

南無西方淨土極樂世界大慈大悲大願大力接引導師阿彌陀佛

_삼송삼배(三誦三拜)

 

나무서방정토극락세계만억자금신관세음보살마하살

南無西方淨土極樂世界萬億紫金身觀世音菩薩摩訶薩

_삼송삼배(三誦三拜)

 

나무서방정토극락세계무변광지신대세지보살마하살

南無西方淨土極樂世界無邊光智身大勢至菩薩摩訶薩

_삼송삼배(三誦三拜)

 

나무서방정토극락세계만분이엄신청정대해중보살마하살

南無西方淨土極樂世界滿分二嚴身淸淨大海衆菩薩摩訶薩

_삼송삼배(三誦三拜)

 

유원사성대자대비수아정례명훈가피력원공법계제중생동입미타대원해

唯願四聖大慈大悲受我頂禮冥熏加被力願共法界諸衆生同入彌陀大願海

_일송일배(一誦一拜)

 

대자보살찬불참죄회향발원게(大慈菩薩讚佛懺罪回向發願偈)

_일송(一誦)

 

시방삼세불_十方三世佛

아미타제일_阿彌陀第一

구품도중생_九品度衆生

위덕무궁극_威德無窮極

아금대귀의_我今大皈依

참회삼업죄_懺悔三業罪

범유제복선_凡有諸福善

지심용회향_至心用回向

원동염불인_願同念佛人

진생극락국_盡生極樂國

견불요생사_見佛了生死

여불도일체_如佛度一切 _일송(一誦)

 

원아임욕명종시_願我臨欲命終時

진제일체제장애_盡除一切諸障礙

면견피불아미타_面見彼佛阿彌陀

즉득왕생안락찰_卽得往生安樂刹 _일송(一誦)

 

원왕생원왕생_願往生願往生

원재미타회중좌_願在彌陀會中坐

수집향화상공양_手執香華常供養 _일송(一誦)

 

원왕생원왕생_願往生願往生

원생극락견미타_願生極樂見彌陀

획몽마정수기별_護蒙摩頂授記莂 _일송(一誦)

 

원왕생원왕생_願往生願往生

원생화장연화계_願生華藏蓮華界

자타일시성불도_自他一時成佛道 _일송(一誦)

 

행자(行者)는 조석(朝夕)으로 위의 사성예문을 외는 동시에 다음의 아미타경과 왕생주(往生呪)등을 외울 것이다.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一誦 一拜 또는 三誦 一拜)

 

 

아미타경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덕망이 높은 큰 비구 대중 천 이백 오십 인이 함께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모두 위대한 아라한들로서 널리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진 선지식들이었다. 곧 장로 사리불, 마하목건련, 마하가섭, 마하가전연, 마하구치라, 라바다, 주리반타가, 난타, 아난타, 라후라, 교범바제, 빈두로파라타, 가루타이, 마하겁빈나, 박구라, 아누루타 등의 여러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문수사리법왕자와 아일다보살(미륵보살), 건타하제보살, 상정진보살 등의 여러 위대한 보살들과, 범천, 제석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상 대중들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 때 부처님께서 장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十만 억의 불국토를 지나서 한 세계가 있는데, 그 이름을 극락이라 하느니라.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 명호(이름)를 아미타불이라 하며, 지금 현재도 그 극락세계에서 설법하고 계시느니라.


사리불아, 그 나라 이름을 어찌하여 극락이라 부르는가 하면, 그 나라의 중생은 아무런 괴로움이 없고 다만 모든 즐거움만을 받으므로 극락이라 하느니라. 사리불아, 또한 극락세계에는 일곱 겹의 난간이 있으며, 일곱 겹의 그물이 드리우고, 또한 일곱 겹의 가로수가 무성한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금.은.유리.파려 등의 네 가지 보배로 이루어져, 두루 온 나라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그 나라를 극락이라 하느니라.


사리불아, 또 극락세계에는 七보로 된 연못이 있는데, 여덟 가지 공덕을 갖춘 청정한 물이 그 안에 가득하며, 그 보배 못 바닥은 순전한 금모래가 깔려 있고, 사방 못 가에는 층계가 있는데, 금.은.유리.파려 등의 보배로 이루어졌느니라. 그리고 그 층계 위에는 누각이 있으며, 그것은 금.은.유리.파려.자거.진주.마노 등의 七보로 장엄하게 꾸며져 있느니라.또한 보배 연못 가운데는 큰 수레바퀴만한 연꽃이 수없이 피었는데, 푸른꽃에서는 푸른 광채가 나고, 누른 꽃에서는 누른 광채가, 붉은 꽃에서는 붉은 광채가, 흰 꽃에서는 하얀 광채가 나는데, 지극히 미묘하여 향기롭고 정결하느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이러한 공덕과 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그리고 극락세계에는 항상 천상의 음악이 청아하게 울려퍼지고, 황금으로 이루어진 땅 위에는 밤낮으로 끊임없이 천상의 만다라꽃이 비오듯이 흩날리고 있느니라. 그래서 극락세계의 중생들은 언제나 새벽마다, 가지가지의 미묘한 꽃을 꽃바구니에 담아서, 다른 十만억 불국토의 부처님들께 공양을 올리느니라. 그리고 바로 식전에 극락세계에 돌아와서 식사를 마치고는 산책을 즐기느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이와같은 공덕과 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그리고 또 사리불아, 극락세계에는 여러 빛깔의 기묘한 새들이 있는데, 백조와 공작과 앵무새.사리새.가릉빙가.공명새 등이 밤낮없이 항상 평화롭고 청아한 노래를 하느니라. 그 소리는 한결같이 설법 아님이 없으며 五근(根)과 五력(力)과 七보리.八성도(聖道) 등 성불하는 가르침을 아뢰고 있느니라. 그래서 극락세계의 중생들은 이 소리를 듣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불법을 생각하고 불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느니라.


사리불아, 그대는 이 새들이 이 세상의 새들처럼 실제로 죄업의 과보로써 생겼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극락세계에는 지옥.아귀.축생 등의 三악도가 없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그 불국토에는 三악도라는 이름도 없는데, 어찌하여 축생인 새가 실제로 있을 수 있겠느냐? 이러한 여러 새들은 모두가 아미타불께서 법문을 널리 베풀고자 하시는 자비로운 위신력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것이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에는 사늘한 미풍이 불어서 갖가지 보배 나무와 보배 그물을 흔들면, 마치 백천 가지 음악이 일시에 울리는 것과 같으니라. 그래서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불법을 생각하고 불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느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참으로 이러한 헤아릴 수 없는 공덕과 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사리불아, 그대 생각에 저 극락세계의 부처님을 어찌하여 아미타불이라고 부르는 지를 아느냐?

 

사리불아, 저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어서, 시방세계의 모든 나라를 두루 비추어도 걸림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량한 광명의 부처님(無量光佛) 곧 아미타불이라 하느니라. 또한 그 부처님의 수명과 그 나라 사람들의 수명이 한량이 없고 끝이 없는 아승지겁이니, 그러므로 무량한 수명의 부처님(無量壽佛) 곧 아미타불이라 이름하느니라. 사리불아,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지는 이미 열 겁(十劫)의 세월이 지났느니라.


사리불아, 저 아미타불에게는 무수히 많은 성문(聲聞)제자들이 있어서 모두 아라한의 깨달음을 성취하였는데, 그 수는 산수로 능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한 여러 보살 대중들도 이와같이 많으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이와 같은 공덕과 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모두, 다시 미혹되지 않고 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경지에 있는 이들이며, 그 가운데는 다음 생(生)에 부처가 되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들도 한량없이 많아서 산수로는 능히 다할 수 없으며, 다만 무량 무수한 아승지로 비유할 뿐이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의 거룩한 장엄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서원을 세워,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해야 하느니라.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그들은 극락세계에서, 가장 선량한 이들과 한 데 모여 살 수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사리불아, 적은 선근과 하찮은 복덕의 인연으로는 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


사리불아, 만약 착한 사람들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그 명호(이름)를 굳게 지니어, 하루나 이틀이나 혹은 사흘.나흘.닷새.엿새 혹은 이레동안을 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거나 부르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그 사람이 수명이 다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인 대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투시느니라. 그래서 그는 끝내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바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느니라.


사리불아, 나는 이와 같은 위없는 이익이 되는 도리를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니,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서원을 세워 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해야 하느니라.

사리불아, 내가 이제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하는 것처럼, 동쪽 여러 세계에 계신 아촉비불.수미상불.대수미불.수미광불.묘음불을 비롯한 항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여러 부처님들께서도 또한 각기 그 계시는 나라에서, 두루 三천대천 세계에 미치는 간곡하고 진실한 설법을 하시기를,


{너희 중생들은 마땅히 믿을지니, 모든 부처님들께서 한결같이 찬탄하시고 호념(護念)하시는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는 이 경을 진심으로 믿으라.}고 하시기를, {너희 중생들은 마땅히 믿을지니, 모든 부처님들께서 한결같이 찬탄하시고 호념하시는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는 이 경을 진심으로 믿으라.}고 하시느니라. 사리불아, 서쪽 여러 세계에 계시는 무량수불.무량상불.무량당불.대광불.대명불.보상불.정광불을 비롯한 헤아릴 수 없는 여러 부처님들께서도, 각기 그 계시는 나라에서, 두루 三천대천 세계에 미치는 간곡하고 진실한 설법을 하시기를, {너희 중생들은 마땅히 믿을지니, 모든 부처님들께서 한결같이 찬탄하시고 호념하시는 부사의한 공덕이 있는 이 경을 진심으로 믿으라.}고 하시느니라.


사리불아, 북쪽 여러 세계에 계시는 염견불.최승음불.난저불.일생불.망명불을 비롯한 헤아릴 수 없는 여러 부처님들께서도, 각기 그 계시는 나라에서 두루 三천대천 세계에 미치는 간곡하고 진실한 설법을 하시기를, {너희 중생들은 마땅히 믿을지니, 모든 부처님들께서 한결같이 찬탄하고 호념하시는 부사의한 공덕이 있는 이 경을 진심으로 믿으라.}고 하시느니라. 사리불아, 저 아래쪽 여러 세계에 계시는 사자불.명문불.명광불.달마불.법당불.지법불을 비롯한 헤아릴 수 없는 여러 부처님들께서도 각기 그 계시는 나라에서 두루 三천대천 세계에 미치는 간곡하고 진실한 설법을 하시기를,


{너희 중생들은 마땅히 믿을지니, 모든 부처님들께서 한결같이 찬탄하시고 호념하시는 부사의한 공덕이 있는 이 경을 진심으로 믿으라.}고 하시느니라. 사리불아, 저 위쪽 여러 세계에 계시는 범음불.숙왕불.향상불.향광불.대염견불.잡색보화엄신불.사라수왕불.보화덕불.견일체의불.여수미산불 등을 비롯한 헤아릴 수 없는 여러 부처님들께서도, 각기 그 계시는 나라에서, 두루 三천대천세계에 미치는 간곡하고 진실한 설법을 하시기를,


{너희 중생들은 마땅히 믿을지니, 모든 부처님들께서 한결같이 찬탄하시고 호념하시는 부사의한 공덕이 있는 이 경을 진심으로 믿으라.}고 하시느니라. 사리불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찌하여 이 경 이름을 [모든 부처님들께서 호념(護念)하시는 경]이라고 하는 지를 아느냐? 그것은, 만약 착한 사람들이 모든 부처님들께서 한결같이 말씀하신 바 [아미타불의 명호(이름)와 이 경의 이름]을 듣고 잊지 않으면 그들은 모든 부처님들께서 함께 기억하여 보호하시게 되고, 위없는 바른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사리불아, 그대들은 마땅히 내 말과 여러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잘 믿어야 하느니라.


사리불아, 어느 누구이든,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이미 발원하였거나, 이제 발원하거나, 또는 장차 발원한다면 그들은 모두 위없는 바른 진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극락세계에 벌써 왕생하였거나, 이제 왕생하거나, 또한 장차 왕생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리불아, 나의 가르침을 믿는 선량한 이들은 마땅히 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해야 하느니라. 사리불아, 내가 이제 모든 부처님들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함과 같이, 저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또한 나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하시기를,


{석가모니불께서 참으로 어렵고 희유한 일을 능히 하셨도다. 시대가 흐리고, 견해가 흐리고 번뇌가 흐리고, 중생이 흐리고, 수명이 흐린 이 사바세계의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능히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으시고, 중생들을 위하사 세상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미묘한 법을 말씀하셨도다.}하시느니라.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나는 五탁의 악한 세상에서 갖은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 모든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이 믿기 어려운 미묘한 법을 설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아미타경)을 설법하여 마치시니, 사리불을 비롯한 여러 비구들과 모든 세간의 천인(天人).아수라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깊이 명심하여 부처님께 예배하고 물러갔다.

아미타경 끝

 

무량수불설왕생정토주(無量壽佛說往生淨土呪) (一誦)

 

나모 아미다바야 다타가다야 다지야타 아미리도 바비 아미리다 싯담바비 아미리다 비가란제 아미리다 비가란다 가미니 가가나 기다가례 사바하 (三誦)

 

결정왕생정토진언(決定往生淨土眞言) (一誦)

 

나모 사만다 못다남 옴 아마리 다바베 사바하 (三誦)

 

상품상생진언(上品上生眞言) (一誦)

 

옴 마리다리 훔훔바닥 사바하 (三誦)

 

아미타불심주(阿彌陀佛心呪) (一誦)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 (三誦)

 

아미타불심중심주(阿彌陀佛心中心呪) (一誦)

 

옴 로게 새바라 라아 하릭 (三誦)

 

무량수여래심주(無量壽如來心呪) (一誦)

 

옴 아미리다 제체 하라훔 (三誦)

 

무량수여래근본다라니(無量壽如來根本陀羅尼) (一誦)

 

나모라 다나다라야야 나막 알야 아미다바야 다타아다야 알하제 삼먁 삼못다야 다냐타 옴 아마리제 아마리도 나바베 아마리다 알베 아마리다 싯제 아마리다 제체 아마리다 미가란제 아마리다 미가란다 아미리 아마리다 아아야 나비가레 아마리다 냥노비 사바레 살발타 사다니 살바갈마 가로삭사 염가레 사바하 (三誦)

 

대보부모은중진언(大報父母恩重眞言) (一誦)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아아나 사바하 (三誦)

 

선망부모왕생정토진언(先亡父母往生淨土眞言) (一誦)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출제류리 사바하 (三誦)

 

불삼신진언(佛三身眞言) (一誦)

 

옴 호철모니 사바하 (三誦)

 

법삼장진언(法三欌眞言) (一誦)

 

옴 불모규라헤 사바하 (三誦)

 

승삼승진언(僧三乘眞言) (一誦)

 

옴 수탄복다헤 사바하 (三誦)

 

계장진언(戒藏眞言) (一誦)

 

옴 흐리부니 사바하 (三誦)

 

정결도진언(定決道眞言) (一誦)

 

옴 합불니 사바하 (三誦)

 

혜철수진언(慧徹修眞言) (一誦)

 

옴 라자바니 사바하 (三誦)

 

행보불상충의주(行步不傷蟲蟻呪) (一誦)

 

축언 (祝言)

 

종조인단직지모 일체중생자회호 약어족하오상시 원여즉시생정토

從朝寅旦直至暮 一切衆生自回護 若於足下誤傷時 願汝卽時生淨土 (一誦)

 

옴 지리지리 사바하 (七 誦)

 

답살무죄진언(踏殺無罪眞言) (一誦)

 

축원(祝言)

 

종조인단직지모 일체중생자회호 약어족하상기형 원여즉시생정토

從朝寅旦直至暮 一切衆生自回護 若於足下傷其形 願汝卽時生淨土 (一誦)

 

옴 이데리니 사바하 (七誦)

 

참회계(懺悔偈)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一誦)

 

참회진언(懺悔眞言) (一誦)

 

옴 살바 못자 못지 사다야 사바하 (七誦)

 

보회향진언(普回向眞言) (一誦)

 

옴 삼마라 삼마라 미마나 사라마하 자거라바 훔 (三誦)

 

원성취진언(願成就眞言) (一誦)

 

옴 아모까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훔 (三誦)

 

보궐진언(補闕眞言) (一誦)

 

옴 호로호로 사야목케 사바하 (三誦)

 

회향발뤈문(回向發願文)

 

계수서방안락찰 접인중생대도사 아금발원원왕생 유원자비애섭수

稽首西方安樂刹 接引衆生大道師 我今發願願往生 唯願慈悲哀攝受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輿衆生 當生極樂國 同見無量壽 皆共成佛道

(一誦)

 

 

(蓮宗集要 / 홍인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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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염불인들은 망상잡념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정종법사 답)

답: 망상잡념에 대하여 염불인들은

첫째, 조급해하지 말고

둘째, 두려워하지 말고

셋째, 마땅히 기뻐해야 하고

넷째, 생각을 바꿔야 한다.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한다. 조급한 마음에 망상잡념을 단박에 제거하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겁생 동안 우리들은 망상잡념에 너무나 습관화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담배와 술을 끊고 마약을 끊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어려운지 모른다. 바로 이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염불을 하고 부처님의 원력에 기대어 왕생을 하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여 망상잡념을 제거하고 마음을 정화하여 왕생하려 한다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망상잡념이 있는 것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모든 범부들은 전부 망상잡념이 분분한 존재들이고, 아미타불께서 구제하시려는 대상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아미타불께서 이미 당신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왕생을 할 수 있다는 보증을 해주신 이상, 설령 망상잡념이 있으면 어떠한가? 이렇게 망상잡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망상잡념 역시 큰 파도를 일으킬 수 없어서 온순해지고 잠잠해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망상잡념을 두려워한다면 도리어 말썽을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굉장히 무섭게 느껴지도록 한다.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어째서 망상잡념이 있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망상잡념을 조복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자각했다면 곧 나는 계‧정‧혜 삼학을 원만하게 닦을 수 없고 염불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아미타불께서 구제하려는 중생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사가 치료할 대상은 환자이지 건강한 사람이 아니듯이, 망상잡념이 있는 내가 어떻게 아미타불께서 구제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약에 망상잡념이 없는 성인聖人이라면 아미타불께서 굳이 그런 성인을 위하여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나야말로 아미타불의 구제대상에 딱 부합되므로, 내가 염불을 하면 틀림없이 왕생하게 되니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염불을 할 때에 자신에게 망상잡념이 많음을 안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아미타불로부터 구제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본래 염불을 하지 않을 때는 아직 자신에게 잡념이 많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염불만 하면 즉각 잡념이 분분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달이 없으면 나무의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지만 달빛이 밝을수록 나무의 그림자 역시 짙어지는 것과 같다. 내가 염불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광명이 나의 마음속을 비춰주신 것이고, 그때서야 자신의 망상잡념을 보게 된 것이니 어찌 내가 이미 부처님으로부터 구제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 망상잡념인줄 알아차리면 즉시 내려놓고 상대하지 말며, 생각을 바꿔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예컨대 달빛 아래의 나무 그림자를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볼수록 그 그림자는 더욱 어둡게 느껴지게 된다. 이럴 땐 두 눈을 돌려 허공 속에 떠 있는 맑고 밝게 비치는 달을 보고, 얼굴을 스치는 산들산들한 맑고 신선한 바람을 즐긴다면 마음은 단박에 탁 트이게 될 것이다.

경전에서 “일향전념一向專念”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망상잡념이 생기면 그냥 내버려두고 함께 뒤엉키지 말며, 오로지 아미타불을 향하여 염불만 하면 된다. 망념은 스스로 생겨났다가 다시 스스로 사라지게 되는 존재이므로, 억지로 망념이 사라지게 할 필요는 없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여전히 우리는 범부의 본분을 지키면서 착실하게 염불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범부로서 망상잡념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이라면 눈과 귀가 있듯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임을 안다면, 이 망상잡념을 내 몸 이외의 것(身外之物)이라 생각하여 반드시 제거를 해야 통쾌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망상으로 인해 망상이 더 생겨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침 옛말 중에 “세상에는 본래 아무 일도 없건만,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구는구나!”라는 구절과 잘 어울린다. 이 구절을 다시 달리 표현하면“염불만 하면 아무 일도 없건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구는구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염불을 하면 아미타불 편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시고 어떠한 제한적 조건도 없으시건만, 우리들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여 자기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다.

 

출처/純淨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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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方極樂世界{觀經--十六觀3}



西方極樂世界{觀經--十六觀2}



西方極樂世界{觀經-十六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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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제작 / 돌아오는 길님

유튜브 출처 /원왕생님 https://www.youtube.com/user/TheAmit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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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귀의처 극락정토, 그 환희의 음악과 소리

 

 

1. 황홀 찬란한 극락세계

 

《무량수경》 상권에서는 아미타불의 성불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아미타불이 48원이라는 서원의 설계도로 건립한 서방정토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한다.

 

♧보배 나무들의 행진

 

“그 국토에는 칠보로 된 갖가지의 나무가 온 세계에 꽉 차 있는데, 금으로 된 나무, 은으로 된 나무, 유리 나무, 파려 나무, 산호나무, 마노 나무, 자거 나무들이 있으며, 혹은 두 가지 보배, 혹은 세 가지 보배에서 일곱 가지 보배를 합하여 이루어졌느니라. 금 나무에는 은으로 된 잎과 꽃과 열매가 열리고,

 

은 나무에는 금으로 된 잎과 꽃과 열매가 달리고, 혹은 유리 나무에 파려의 잎과 꽃과 열매, …… 혹은 어느 보배 나무는 자거를 뿌리로 하고 자금의 줄기와 백은의 가지와 유리의 줄기에 수정의 잎과 산호의 꽃과 마노의 열매로 되었나니, 이와 같이 칠보가 서로 번갈아 뿌리가 되고 줄기가 되고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된 보배 나무들이 극락세계에 가득 하느니라.

 

이런 보배 나무들은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데, 줄기는 줄기끼리 마주보고, 가지는 가지끼리 , 잎과 잎, 열매와 열매가 서로 바라보고 따르고 하여 그 찬란한 광채는 눈이 부시어 바라볼 수 없으며, 맑은 바람이 보배 나무에 살랑거리면 다섯 가지 소리가 미묘하게 울리며 자연히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느니라.“

 

♧묘법을 설하는 보리수

 

“또한 무량수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의 도량수(道場樹;보리수)는 높이가 4백만리이고, 밑동의 둘레는 50유순이며, 가지와 잎은 사방으로 20만 리나 퍼졌는데 갖가지 보배로 이루어졌느니라. 더구나 이것들은 모든 보배의 으뜸인 월광마니와 지해륜보(持海輪寶)로 자연스럽게 꾸며져 있느니라.

 

이 도량수의 가지와 가지 사이에는 보배로 장식한 영락을 드리웠는데, 그 빛깔은 백천 가지로 변화하고 그 광염은 한없이 비추어 다함이 없고, 나무 위에는 그지없이 귀하고 묘한 보배로 된 그물이 덮였나니, 이와 같이 일체의 아름다운 장엄들이 바라는 대로 저절로 나타나느니라. 가벼운 산들바람이 보배 나무 가지에 살랑거리면 한량없는 묘법의 음악을 아뢰고, 그 소리가 울려 퍼져 모든 부처님 나라에 두루 하느니라.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듣거나, 향기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광명이 몸에 비추거나, 마음으로 그러한 장엄을 생각하는 중생들은 모두 생사를 깨닫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에 머물며, 성불할 때까지 육근(六根)이 청정하여 아예 번뇌와 시름이 있을 수 없느니라.

 

아난아, 저 나라의 인간이나 천신들이 이 도량수를 보면 삼법인(三法忍)을 얻게 되는데, 첫째는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 마음이 안온한 음향인(音響忍)이요, 둘째는 진리에 따라 법대로 행하여 깨닫는 유순인(柔順忍)이며, 셋째는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닫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니라. 이러한 장엄과 공덕은 모두 무량수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한 것이고, 법장비구 때 세운 본원력 때문이며 또한 원만하고 분명하고 견고한 원력 때문이며, 끝까지 성취하고자 하는 구경의 서원력 때문이니라.“

 


♧맑고 미묘한 극락의 음악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였다.
극락세계에 있는 보배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은 이 세상 제왕들의 백천 가지 음악보다, 혹은 전륜성왕의 음악보다, 더 나아가서 육욕천상의 모든 재주를 다한 음악보다 천억 만 배나 더 훌륭하느니라. 또한 보배 나무의 음악 외에도 자연히 울리는 천만 가지의 음악이 있는데, 그 음향은 모두가 진리를 설하는 소리로서, 한량없이 맑고 애절하며 미묘하여 아늑하고 시방세계의 모든 음악 가운데 가장 으뜸이니라.”

 

♧여덟 가지 공덕을 갖춘 호수

 

“또한 강당과 절과 궁전과 누각들은 모두 칠보로 장엄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저절로 변화해서 이루어졌으며, 진주와 명월마니주로 엮은 보배 그물로 그 위를 덮었느니라. 그 안팎과 죄우 양편에는 여러 가지 목욕할 수 있는 맑은 호수가 있으며, 크기는 10유순에서 20유순 혹은 30유순, 나아가서는 백천 유순도 되느니라. 그 호수들은 각기 가로와 세로와 깊이가 다 같고 여덟 가지의 공덕이 있는 팔 공덕수가 충만한데, 청정하고 향기로운 맛은 마치 감로수와 같으니라.……

 

그 호수에 목욕을 하면 정신이 열리고 몸이 상쾌하여 마음의 때가 말끔히 씻겨지느니라. 또한 그 물은 너무나 맑고 투명하여 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서, 호수 바닥의 보배 모래가 환히 드러나 아무리 깊은 곳이라도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며, 잔잔한 물결은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고 그지없이 아늑하게 출렁거리고 있느니라.

 

이와 같이 청정하게 굽이치는 잔물결은 한량이 없으며, 미묘하고 은은한 파도소리는 자연히 울려 나와 진리를 아뢰나니, 그래서 듣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을 수 있느니라. 혹은 부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고, 법문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스님네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고, 고요한 열반의 소리나 일체 만법이 본래 공(公)하여 내가 없다(無我)는 소리, 대자비의 소리 …… 보살이 수행을 마칠 때 부처님이 그 정수리에 감로수를 뿌리는 감로관정(甘露灌頂)의 소리 등 여러 가지 미묘한 진리의 소리가 원하는 대로 들려 와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도 한량이 없느니라.

 

이러한 소리를 듣는 이는 마음이 청정하여 모든 탐욕을 여의고, 생사를 초월한 참다운 진리를 따르며, 불, 법, 승 삼보와 네 가지 두려움 없는 사무소외(事務所畏)와 부처님만이 지니는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을 따르고, 모든 신통지혜를 통달하여 보살과 성문들이 수행하는 진리의 대도(大道)를 따르느니라.

그 불국토에는 지옥과 아귀와 축생 등 삼악도의 이름마저도 들을 수 없으며, 오직 상쾌하고 즐거운 음악만이 저절로 들리나니, 그 나라의 이름을 안락(安樂, 극락)이라 부르느니라.“


♧수승한 극락세계 사람들

 

“아난아, 저 불국토에 태어나는 이는 누구나 그와 같은 청정한 몸과 아름다운 미묘한 음성과 모든 신통력과 공덕을 갖추게 되며, 그들이 거처하는 궁전을 비롯하여 의복과 음식과 여러 가지의 묘한 꽃과 향이며 장식물들이 마치 제6천(타화자재천)에 자연히 갖추어 있는 것들과 같으니라. 만약 음식이 먹고 싶을 때에는 곧바로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산호, 호박 등 칠보나 명월주나 진주로 된 그릇들이 원하는 대로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갖가지 백미(百味) 음식이 자연히 가득 담겨 저절로 앞에 와서 놓이게 되느니라. 그러나 이와 같은 풍족한 음식이 있더라도 실지로 먹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 색깔을 보고 향기만을 맡으면 먹었다는 생각이 들어 자연히 배부르게 되느니라. 그리고 몸도 마음도 부드럽고 상쾌하여 음식의 맛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러한 식사를 마치면 그릇과 음식은 자연히 사라지고, 원하는 때가 되면 다시 나타나느니라.

 

또한 저 불국토는 청정하고 안온하며 미묘하고 상쾌하여 안온한 열반의 경계에 달했느니라. 그곳에 있는 성문과 보살과 인간과 천신들은 지혜가 한량없이 밝고 신통이 자재하여 모두 한결 같은 모양으로서 달리 생긴 형상이 없느니라. 다만 다른 세계의 인연에 의해서 인간과 천상의 이름이 있을 뿐이며, 그 얼굴과 모습은 단정하고 미묘하여 세상에서 뛰어난 천상과 인간에 비교할 수 없나니, 그들은 모두 허공과 같이 형상이 없는 몸이며 끝이 없는 불멸의 몸이느니라. ……

 

아무리 인간 중에서 가장 존귀하고 용모가 단정한 임금이라 하더라도, 이를 전륜성왕에 비한다면 그 천하고 볼품없음은 마치 저 빈궁한 거지를 임금 곁에 앉혀 놓은 것과 같고, 비록 전륜성왕의 위엄이 늠름하고 빼어나서 천하에 제일이라 하지만, 이를 도리천왕에 비교한다면 또한 천하고 추하기가 만억 배나 차이가 있으며, 도리천왕을 제6천의 타화자재천왕을 저 무량수불의 극락세계에 있는 보살이나 성문들에 견준다면, 그 빛나는 얼굴과 단정한 용모의 차이는 백천만 배나 되어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느니라.


♧여섯 차례의 꽃바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극락세계의 모든 천신과 인간들의 의복과 음식과 꽃과 향과 영락과 비단일산과 깃대와 미묘한 음악과 거처하는 저택궁전누각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은 천신과 인간들의 모양과 처지에 따라서 높고 낮고 크고 작음이 잘 어울리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한 가지 보배로 되기도 하고 혹은 두 가지 보배, 혹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배로 이루어져 그들이 바라는 대로 나타나느니라.

 

가지각색의 보배로 수놓은 아름다운 비단이 두루 땅에 깔려 있는데, 천신과 인간들이 사뿐히 밟고 거닐며, 한량없는 보배 그물은 널리 온 불국토를 덮었느니라. 그것은 금실과 진주와 백천 가지의 기묘하고 진귀한 보배로 장엄하게 꾸며졌으며, 사방에는 보배 방울이 드리워져 미묘하게 울리나니, 그 찬란하고 청정한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느니라.

 

덕스럽고 온화한 미풍이 저절로 이는데, 그 바람은 잘 조화되어 춥지도 덥지도 않고 서늘하고 따스하며 세지도 약하지도 않느니라. 부드러운 바람이 보배 그물과 보배 나무에 살랑거리면 한없이 미묘한 진리의 소리가 들리고, 만 가지의 온화한 덕의 향기가 그윽히 풍기느니라. 이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으면 저절로 모든 번뇌와 때묻은 버릇들이 일어나지 않으며, 그 바람이 몸에 닿으면 그지없이 상쾌함이 마치 수행자가 일체 번뇌와 모든 분별시비를 모조리 끊어버리는 멸진삼매(滅盡三昧)를 얻는 것과 같으니라.

 

맑은 바람은 꽃잎을 불어와서 두루 불국토에 뿌리는데, 꽃잎은 가지각색으로 어우러져 찬란하게 빛나고 그윽한 향기를 사방에 풍기느니라. 꽃잎을 밟으면 네 치나 들어가고 발을 들면 다시 전과 같이 올라오며 꽃잎의 쓸모가 다하면 문득 땅이 갈라져 그 속으로 사라져 한송이의 흔적도 없으며, 때가 되면 바람은 다시 꽃잎을 불러오는데, 이와 같이 밤낮 여섯 차례 되풀이하느니라.“

 


♧연꽃과 부처님

 

“또한 여러 가지 보배로 된 아름다운 연꽃이 온 불국토에 가득 피었는데, 보배 꽃송이마다 백천 억의 꽃잎이 있고 꽃에서 발하는 광명은 한량없는 빛깔로 이루어졌느니라. 푸른 빛깔에는 푸른 광명, 흰 빛깔에는 흰 광명이 빛나는데, 이와 같이 검은빛□노란빛□붉은빛□자줏빛 등 각기 광명을 발하여 그 찬란함은 해와 달보다 한결 빛나고 밝느니라.

 

하나 하나의 꽃송이마다 36백천 억의 헤아릴 수 없는 광명을 발하고, 그 하나 하나의 광명 속에 또한 36백천 억의 부처님이 모습을 나투시는데, 몸은 자금색으로 빛나고 상호는 뛰어나게 훌륭하시니라. 이 부처님들은 각기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광명을 비추시고, 두루 시방세계의 중생을 위해 미묘한 법문을 설하시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중생들을 부처님의 바른 도리에 안온히 머물게 하시느니라.“


한편《아미타경》에서는 극락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 때 부처님께서 장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서쪽으로 10만 억의 불국토를 지난 곳에 세계가 있는데, 그 이름을 극락이라 하느니라.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 명호를 아미타불이라 하며, 지금 현재도 설법하고 계시느니라. 사리불아, 그 나라 이름을 어찌하여 극락이라 부르는가 하면, 그 나라의 중생들은 아무런 괴로움이 없고 오직 갖가지 즐거움만 받기 때문에 극락이라 하느니라.

 

사리불아, 또한 극락세계에는 일곱 겹의 난간이 있고, 일곱 겹의 그물이 드리워져 있으며, 일곱 겹의 가로수가 무성한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금□은□유리□파려 등의 네 가지 보배로 이루어져, 두루 온 나라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그 나라를 극락이라 하느니라.

 

사리불아, 또 극락세계에는 칠보로 된 호수가 있는데, 여덟 가지 공덕을 갖춘 청정한 물이 그 속에 가득하고, 호수 밑바닥에는 순금 모래가 깔려 있으며, 못의 사방에는 층계가 있는데 금□은□유리□파려와 같은 보배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층계 위에는 누각이 있으며 금, 은, 유리, 파려, 자거, 진주, 마노와 같은 칠보로 장엄하게 꾸며져 있느니라.

 

연못 속에는 큰 수레바퀴만한 연꽃이 피었으며, 푸른 꽃에서는 푸른 광채, 노란 꽃에서는 노란 광채, 붉은 꽃에서는 붉은 광채, 흰 꽃에서는 흰 광채가 나는데 미묘하고 향기로우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이러한 공덕과 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사리불아, 또한 극락세계에는 항상 천상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황금으로 이루어진 땅 위에는 하루에 여섯 번 천상의 만다라 꽃이 비오듯 흩날리고 있느니라. 극락세계의 중생들은 언제나 새벽마다 갖가지 미묘한 꽃을 바구니에 담아서 다른 십만 억 불국토의 부처님들게 공양을 올리고, 식전에 극락세계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즐기느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이와 같은 공덕과 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그리고 또 사리불아, 극락세계에는 여러 빛깔의 기묘한 새들이 있는데, 백조, 공작, 앵무새, 사리새, 가릉빈가, 공명새 등이 하루에 여섯 번 평화롭고 청아한 노래를 부르느니라. 그 소리는 오근(五根). 칠보리분(七菩提分), 팔성도분(八聖道分)등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느니라. 그래서 극락세계의 중생들은 이 소리를 듣고 부처님(佛)을 생각하고 불법(法)을 생각하고 불제자(僧)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느니라.

 

사리불아, 그대는 이 새들이 이 세상의 새들처럼 실제로 죄업의 과보로써 생겼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극락세계에는 지옥, 아귀, 축생 등의 삼악도가 없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그 불국토에는 삼악도라는 이름조차 없는데 어찌하여 축생인 새가 실제로 있을 수 있겠느냐? 이러한 여러 새들은 모두 아미타불께서 법문을 널리 베풀고자 하시는 자비로운 위신력이 변화해서 이루어진 것이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에는 미풍이 불어와 보배 나무와 보배 그물을 흔들면 마치 백천 가지 음악이 일시에 울리는 것과 같으니라.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불법을 생각하고 불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느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참으로 이러한 헤아릴 수 없는 공덕과 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2. 극락세계의 장엄

 


(1). 극락세계는 땅이 칠보[七寶]로 되어 광채가 빛나고 기묘하며 청정하기가 시방세계에 뛰어나고 국토의 넓기가 한량없으며 땅이 평탄하여 산과 구렁과 골짜기가 없고 바다와 강이 없으며(원하면 나타나보임) 대, 중, 소의 보배 연못이 있고 육도[六道]중 지옥, 아귀[餓鬼], 축생, 아수라와 용[龍]이 없다.


(2). 극락세계에는 비와 눈이 없고 해와 달이 없으나 항상 밝고 어둡지 아니하여 밤과 낮이 없거니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으로 낮을 삼고 꽃이 지고 새가 쉬는 것으로 밤을 삼으며, 극락세계의 일주야는 사바세계의 일겁[一劫]이요 또한 기후도 차고 더운 것이 없어  항상 봄과 같이 온화하고 밝으며 상쾌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3). 극락세계는 땅위에서 허공에 이르기까지 한량이 없는 여러 가지 보배와 백 천 종류의 향[香]으로 되었으며, 장엄한 것이 기묘하고 절승하며 광채가 휘황한 것은 다 말 할 수 없다. 또 누각[樓閣]이 마음대로 높고 커서 공중에 떠 있는 것도 있고 마음대로 높거나 크지 못하여 땅위에 있는 것도 있나니 이것은 전생에 도를 닦을 때에 덕이 후하고 박함에 말미암은 것이다.


(4). 극락세계에는 여러 가지 보배로 된 보망[寶網]이 그 나라를 덮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보배나무도 위에는 보망이 덮이었고 그 주위에는 보배 난간[欄杆]이 둘렸으나 교묘하게 꾸미고 광채가 산란한 것은 형언 할 수 없고, 또 바람이 약간 불면 보배나무와 보배그물에서 미묘한 법음[法音]이 나며 꽃다운 향기가 퍼지고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백 천 종류의 음악소리와 같으며, 또 극락세계에는 각종 음악이 있어서 끊기지 아니하는데  그 소리가 시방세계의 음악 중에서 제일이며 또 모든 하늘에서 백 천 가지의 향화[香華]와 백 천 가지 음악을 가지고 내려와서 불[佛] 보살[菩薩]께 공양[供養]한다.


(5). 극락세계에는 바람이 불면 꽃이 흩어져서 전국에 가득차고 하늘에서도 꽃비가 오는데 제각기 그 빛을 따라 쌓이고 섞기지 아니하며 부드럽고 고우며 찬란한 광채와 꽃다운 향기가 나고 꽃이 네 치나 쌓이며 발로 밟으면 네 치를 들어갔다가 발을 들면 도로 올라오며 꽃이 시들면 바람에 날려 없어진다.


(6). 극락세계에는 칠보로 된 팔공덕수[八功德水]가 가득 찼는데 목욕할 때에는 물이 덥고 찬 것과 늘고 주는 것이 마음대로 되어서 더워라 하면 더워지고 차라 하면 차지고 무릎까지 올라오라하면 무릎까지 올라오고 허리까지 올라오라하면 허리까지 올라오고 목까지 올라오라하면 목까지 올라오고 또 다시 내려가라면 내려간다.


(7). 극락세계에는 각색연화가 전국에 차 있으며 칠보로 된 연못에는 크기가 수레바퀴 같은 각색 연화가 미묘하고 향기롭고 정결하며 또 물이 연꽃사이로 흘러서 아래위로 돌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내는데 제각기 소원대로 듣게 된다. 가령 설법소리를 듣고자 하면 설법소리를 듣게 되고 음악소리를 듣고자하면 음악소리를 듣게 된다.


(8). 극락세계에는 부처님과 보살이 설법하시거니와 아미타불이 변화하여 만든 여러 가지 기묘한 새들이 온화하고 청아[淸雅]한 소리로 주야육시[晝夜六時]에 설법한다.


(9). 극락세계에 태어날 때에는 칠보로 된 연못 속의 연화에 화생[化生]하여 젖으로 기르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자라고 수명이 무수겁[無數劫]이요, 온몸이 금빛으로 광명이 있으며, 용모가 잘 나고 못난 것이 없이 한결같고 형상[形象]이 단정하며 정결하고 수승하기가 세간[世間]사람이나 하늘사람으로는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의 걸인을 인간 임금에 비하면 그 추악하기가 비유할 수 없어 임금이 百千萬배나 수승하고 인간 임금이 사람 중에는 존귀하지만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하면 그 추악하기가 걸인을 임금에게 비한 것과 같고 전륜성왕이 천하에서는 제일이나 도리천왕[忉利天王]에게 비하면 도리천왕이 百千萬배나 수승하고 도리천왕을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에 비하면 他化自在天王이 百千萬배나 수승하고 타화자재천왕을 극락세계의 聖人에게 비하면 극락세계의 성인들이 百千萬배나 수승하다고 한다.


(10). 극락세계의 사람은 육신통[六神通] 즉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신경통[神境通], 누진통[漏盡通]을 구족[具足]한다.


(11). 극락세계는 음식을 먹을 때에는 각색 보배 그릇이 마음대로 앞에 오는데 그 가운데에 백미[白米]가 구존[具存]한 음식이 담겨 있고 먹은 뒤에는 자연히 녹아 흘러서 남는 찌꺼기가 없고 혹은 빛만 보고 냄새만 맡아도 저절로 포만[飽滿]하여 몸과 마음이 부드럽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자연히 화[化]하여 가며 다시 먹고자 하면 또 앞에 나타난다. 의복도 입고자하면 마음대로 앞에 와서 놓이는데 바느질하거나 빨래하거나 물들이거나 다듬이 하는 일이 없다.


(12). 극락세계에는 사람들이 모두 지혜가 있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도덕[道德] 아닌 것이 없으며 입으로 말하는 것이 바른 일 아닌 것이 없고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며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일이 없으며 제각기 질서를 지키고 어긋나는 일이 없어서 움직이는 것이 예의[禮儀]에 맞고 화목하기가 형제 같으며 말이 진실하고 서로 가르쳐 주면 기쁘게 받아 어김이 없으며 신기[神氣]가 고르고 고요하며 체질[體質]이 가볍고 맑다.


(13). 극락세계에는 낙[樂]만 있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가 없나니 태생[胎生] 하는 데는 고가 있으나 화생[化生]하는 데는 연화에 화생하므로 생고[生苦]가 없으며 춘하추동이 없고 절기가 바뀌지 아니하며 기후가 항상 온화하므로 노고[老苦]가 없으며 화생한 몸이 미묘하여 향기롭고 정결하므로 병고[病苦]가 없으며 수명이 한량이 없으므로 사고[死苦]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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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대의念佛大意

 

출처 / 純淨時代

 

 

말법시대 오탁악세의 중생들이 왕생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다른 법문을 닦아서는 안 되고, 오직 선도화상의 해석에 의거하여 일향전수一向專修를 하는 염불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한결같이 믿고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

 

왜냐하면 다른 법문에 마음을 두고 있거나 혹은 염불의 공덕을 귀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토왕생을 위한 진실한 발원과 전일하고도 깊이 믿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드문 것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이러한 이치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설사 천태종과 법상法相종에 관련된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모든 경론을 배우더라도 뜻이 전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러나 불도를 닦으려면 마땅히 시대와 근기를 잘 살펴야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다섯 번째 오백년이 되면, 지혜를 밝히고 번뇌를 끊기가 어려울뿐더러 마음의 물을 맑혀서 선정을 얻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수행자들이 염불문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으니, 도작선사와 선도화상 과 같은 정토종의 조사들이 바로 그 시기의 사람이다.

 

하물며 요즘은 다섯 번째 오백년, 즉 투쟁이 견고한 시대여서 여타의 법문은 더욱 성취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염불법문은 말법의 말기에도 이익을 얻을 수 있거늘, 하물며 지금은 말법 만년의 초입인데 한 번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어찌 왕생할 수 없겠는가! 비록 우리들이 그 그릇이 못 된다 하더라도 어찌 말법시대 말기의 중생들과 같겠는가!

 

또한, 설사 석가세존의 재세시라도 즉신성불卽身成佛을 한 자는 용녀龍女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설사 즉신성불을 할 수 없더라도 이 성도문을 닦기에 적합한 보살·성문과 이 밖의 권자(權者:불보살의 화신)·성인聖人과 이 안의 비구·비구니 등과 지금의 경론의 배우는 학자·『법화경』의 수행자 등, 이들은 모두 최상의 근기와 최상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처한 시대와 근기로는 설사 성도문을 배우더라도 그 사람들에게는 더욱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말법시대의 중생들을 아미타불께서 미리 아시고 오겁 동안의 사유를 통하여 마흔여덟 가지 서원을 세우신 것이다. 그 중의 제18원에서 “시방세계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나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셨는데, 이미 성불을 하신지 10겁의 세월이 흘렀다.

 

이는 석가세존께서 설하신 경, 즉 『무량수경』 등의 정토삼부경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우리와 같은 중생들은 마땅히 오로지 염불수행을 하며 왕생을 기약해야 한다. 만약 악업이 많은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서원만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석가세존이 설하신 정토삼부경에 진실한 말씀이 어찌 한 마디도 없겠는가? 더군다나 시방제불의 증성(證誠:석가불의 말씀이 진실함을 증명함) 역시 오직 이 경에서만 보일 뿐, 다른 법문 중에 이와 같은 증성을 본 적은 없다.

 

그러므로 성도문의 시대가 이미 지났고 우리의 몸 역시 감당할 수가 없으니, 선정과 지혜를 닦기 보다는 차라리 현재에 이익이 있으면서도 제불이 증성하신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한, 수행자 중에 어떤 사람은 극락은 천박하고 아미타불은 열등하다고 여기면서 밀엄화장密嚴華藏의 세계를 기대하는데, 이는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무명을 끊은 보살만 갈 수 있을 뿐, 그 외에는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일향전수一向專修를 하는 염불문에 들어와서 매일 별도로 삼만 번, 혹 오만 번·육만 번, 내지 십만 번씩 전수염불을 하는 까닭에 여태껏 수지독송의 공덕을 쌓아오던 여러 경전들을 더 이상 독송하지 못한다면 죄가 될까 두려워하는 이러한 의심을 가진 무리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말법시대의 중생들이 성취하기 어려운 행을 닦을 바에는 어찌 먼저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고 염불왕생을 성취하여 정토에서 아미타불·관음·세지를 친견하고 모든 법문을 배우면서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만 하겠는가?

 

또한, 말법시대의 중생들이 전수염불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수많은 해석이 있다.

그 중에 『관경소』 제3 「산선의」에서 선도화상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다.

 

나머지 모든 행들은 비록 선善이라 부르지만, 만약 염불과 비교를 한다면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여러 경전 중의 도처에서 염불의 공덕을 널리 찬탄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무량수경』 의 48대원 가운데서는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왕생을 하는 것을 밝히셨고, 또 『아미타경』 가운데서는 하루에서 이레 동안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왕생하는 것을 밝히셨으며, 또 시방세계의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들께서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셨고, 또 이 경(관무량수경)의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글 가운데서는 오직 명호를 불러 왕생함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예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널리 염불삼매를 드러냄을 마친다.

 

또한, 선도화상의 『왕생예찬』 중의 ‘전수와 잡수에 대한 글’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잡수雜修를 하여 왕생을 하는 자는 백 명 중에 한·두 명이 드물고, 천 명 중에 세 명·다섯 명이 드물다. 전수專修를 하는 자는 열이면 열이 왕생하고, 백이면 백이 왕생한다.

 

이러한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염불문으로 들어온 이상, 일향전심으로 다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높은 산에 사는 사람조차 왕래할 수 없는 가파른 산을 힘이 약한 사람이 돌 모서리나 나무뿌리를 잡고 올라가려는 것은 마치 잡행을 닦아서 왕생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에 저 산봉우리로부터 드리워진 밧줄을 잡고 오른다면 마치 아미타불의 원력을 깊이 믿고 한결같이 염불하여 왕생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일향전수를 하는 자에게는 세 가지 마음三心이 저절로 갖춰지게 된다.

세 가지 마음이란 첫째는 ‘지성심至誠心’이요, 둘째 ‘심심深心’이요, 셋째는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지성심’이란, 다른 부처님께 예배하지 않고 오직 아미타불께만 예배하며, 다른 수행을 하지 않고 오직 아미타불만 부르니 전일하고 또 전일하다는 것이다.

 

‘심심’이란, 아미타불의 본원을 깊이 믿는 것이다. 내 몸은 시작 없는 옛적부터 죄악생사범부로서 생사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으나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본원에 기대어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명호를 부른다면 염념念念마다 80억겁의 생사중죄를 소멸하게 되며 마지막 임종 시에는 틀림없이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게 된다.

 

‘회향발원심’이란, 자타의 행을 모두 진실한 마음으로 회향하고 발원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이 갖춰지면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이라도 빠지면 왕생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한다면 다른 행을 섞는 것이 비록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을 따져본다면 여전히 염불만 해서는 왕생이 결정되지 않을 거라고 여겨 조금이나마 의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법문을 덧붙이는 것이다.

 

또한, 이 세 가지 마음 중의 ‘지성심’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이해를 하고 있는데, 특히 본인이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확고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미타불의 본원의 본뜻에 위배되는 것으로 신심이 부족한 것이다. 아무리 지극정성인 사람이라도 역시 죄업을 짓는 범부의 몸으로, 자신의 역량에 의지하여 왕생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오직 아미타불 본원의 불가사의함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다.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본원은 본래 깊은 정성도 없고 착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세우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진실로 전수염불을 할 수 있는 자는 이 세간에 드문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담란대사께서 비록 지혜가 고원高遠하나 역시 사론四論의 강설을 버리고 오로지 왕생의 업을 닦으신 것인데, 한결같이 오로지 끊임없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현재 이미 왕생을 하셨다.

도작선사 역시 강설을 버리고 염불수행을 하셨으며, 선도화상도 잡수雜修가 싫어 전수염불을 부지런히 하셨던 것이다. 또 도작선사의 권유에 따라 병주 지방 세 현(幷州三縣)에 사는 사람들 중 칠세 이상이 한결같이 염불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일본)의 말법중생들은 어찌 감히 잡수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오직 마땅히 속히 아미타불의 본원과 석가세존의 말씀, 그리고 도작·선도의 주석을 배워야 할 것이다. 잡수를 해서 왕생이 결정되지 않을 바에는 어찌 전수를 하여 왕생이 결정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저 도작·선도 등은 비록 염불문 중의 대덕일지라도 따를 자가 없으시다.

 

법상종의 자은慈恩대사가 『서방요결』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다.

말법 만년에 다른 경전들은 다 사라지고 아미타불의 한 가르침만이 더욱더 중생을 이익케 한다.

 

또 말씀하시기를,

삼공구단(三空九斷)의 문장과 십지오수(十地五修)의 가르침을 배우기에는 살아있는 세월이 촉박하고 죽을 날이 멀지 않다. 그러니 다문多聞의 광업廣業을 그만두고 염불의 한 가지 수행에 전념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셨다.

 

게다가 『대성죽림사기大聖竹林寺記』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대산 죽림사의 대강당에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동서방향으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중생들을 위해 미묘한 법문을 설하셨다. 이때 법조선사가 무릎을 꿇고 문수보살님께 여쭈었다.

 

“말법악세末法惡世의 범부들이 어떤 법을 닦아야만 영원히 삼계를 벗어나 정토에 왕생할 수 있습니까?” 이에 문수보살이 답하셨다.

 

“정토에 왕생하고자 한다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수행만한 것이 없고, 단박에 보리(깨달음)를 증득하는 길은 오직 칭념을 하는 한 (염불)문에 있다. 그런 까닭에 석가세존 일생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아미타불에 대한 찬탄이 많은 것이니, 하물며 미래 악세의 범부들이겠는가!”

 

이처럼 중요한 문구와 지혜로운 자들의 가르침을 듣고도 여전히 신심이 없고, 태어나기 어려운 인간 세상에 태어나고도 쉽게 갈 수 있는 정토에 가지 않는다면 후회한들 어찌하리오!

그러나 요즘 전수염불을 하는 행자들 가운데 자주 비방과 비난·조롱을 받는 이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것 역시 옛날의 권자權者들이 미리 알고 있었던 일이다.

 

선도화상의 『법사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존의 설법이 끝날 무렵,

은근히 미타의 명호를 부촉하시니

오탁이 증가할 때 의심과 비방이 많아지고

승속이 서로 싫어하여 들으려 하지 않는다네.

수행자를 보면 화를 내고

방편으로 파괴하여 서로 원한이 생겨나네.

이 같은 생맹生盲과 천제闡提의 무리들이

돈교를 훼손하고 길이 침륜하니

대지의 티끌 수 겁이 지나도록

삼악도의 몸 벗어날 수 없구나.

대중은 한 마음으로

정법을 파괴한 모든 죄업 참회함세.

 

그리고 『평등각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와 같은 정토법문을 듣고 희비가 교차하여 온몸의 털이 선다면 이 사람은 과거에 이미 불도를 닦았던 사람임을 알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도 아무런 믿음과 기쁨이 없다면 이 사람은 삼악도로부터 왔음을 알라.

 

또한, 십선十善을 굳게 지키지 못하면서 도리천·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상응하기 극히 어렵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오역죄를 지은 사람도 염불에 의지해 왕생하거늘, 하물며 십악을 지은 사람은 더욱 장애가 없다.

또한, 비록 미륵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기대하지만 56억 7천만년이나 되는 세월을 기다리기란 더욱 어렵다. 타방의 모든 정토에는 이러한 본원이 없고, 오직 극락정토만이 아미타불의 별도의 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아미타불의 원력이 깊을 진데 어찌 다른 것을 구하리오! 또한, 이 생에 이미 불법과의 인연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생三生·사생四生 후의 해탈에 마음을 두는 무리들이 있는데, 이러한 발원은 굉장히 확실치가 않다.

 

대통여래大通如來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비록 참괴(慚愧:부끄러움)의 옷 속에 일승의 값을 매길 수 없는 옥을 품고 있음을 믿고 기뻐하고 있으며, 다음 생에 바로 잊지 않았으나 삼천 티끌 수 겁 동안 육도윤회를 하지 않았던가!

 

설사 삼생·사생 내에 반드시 해탈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여기서 기다리는 동안 받게 될 윤회의 고통은 가장 참기 어렵다. 우리는 이번 생에 처음으로 인간계에 태어난 것이 아니며, 이미 세세생생 동안 여러 부처님의 교화와 보살들의 홍경(弘經:불경을 세상에 널리 퍼뜨림)을 만났을 터인데 오직 믿지 않음으로 인해 그 교화로부터 빠진 것이다.

 

삼세의 제불과 시방의 보살들을 생각해보면 모두 옛적의 친구들이었다. 석가세존도 오백 티끌 수 겁五百塵點劫전의 옛날에, 아미타불도 십겁 동안 성불하기 전에 서로 부모형제사이였던 것이다.

 

부처님은 앞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선지식의 권유를 믿으며, 일찍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성불한지 오래지만 우리들은 신심이 얕은 까닭에 지금까지도 생사에 머물고 있다. 과거에 윤회를 할 때를 돌이켜 보면 미래에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비록 이승(성문·연각)의 마음을 내어보지만 보살의 마음을 내기란 어렵다.

그렇게 때문에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보여주시고, 타력왕생의 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오탁악세의 중생이 비록 자력에 힘쓰며 백천 겁이 지나도록 난행고행難行苦行을 하더라도 부지런히 힘쓴 바는 오히려 타력왕생의 법만 못하다.

 

또한, 저 성도문을 닦는 자들은 반드시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그 행을 닦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만약 게으르고 신심이 없다면 수행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를 얻게 된다.

그러나 염불문을 닦는 이라면, 걸을 때나 멈출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깨어있을 때나 잠을 잘 때나 명호를 부르는데 어려움이 없어 매우 편리하면서도 죄나 허물이 없으며, 어떠한 근기도 마다하지 않아 모두 왕생의 업이 된다.

 

래서 법조대사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저 부처님 인중因中에서 세우신 크신 서원

이름 듣고 나를 부르면 모두 마중 나온다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아니하고

어리석음과 지혜를 가리지 않으며,

많이 듣고 청정한 계율 지키는 자 가리지 아니하고

파계하여 죄 깊은 이 가리지 않으시니

다만 마음 돌려 염불 많이 하면

깨어진 기와 조각도 금덩이로 변한다네.

 

또한, 미묘하고 수승한 성인의 말씀이 담긴 경론일지라도 마지막 임종 시가 되면 비록 지혜로운 자라도 그 문장들을 암송할 수 없다. 그러나 염불행자라면 설사 목숨을 마칠 때라도 명호를 칭념하기가 어렵지 않다.

또한, 제불의 서원을 논한다면 약사여래의 열두 가지 서원에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원력이 없으시고, 천수(관세음보살)의 발원에는 비록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다지만,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하셨다.

 

오직 아미타불께서 발한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만이 성취되어 성불하신지 이미 십겁의 세월이 지났다. 아미타불의 서원을 믿는 사람은 다른 법문의 신앙으로 따라올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한결같이 전수염불하며 다른 마음이 없이 하루 종일 조석으로 행·주·좌·와에 게으름 없이 명호를 칭념해야 할 것이다.

 

전수염불을 하던 사람들이 금생에 이미 왕생한 사례는 그 수자가 매우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잡수雜修를 한 사람들이 왕생했다는 얘기를 들어보기란 극히 어렵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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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나는 용렬하고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하여 비록 불법을 공부한지는 여러 해가 지났지만, 여태껏 불법의 심오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였다. 비록 전수(專修)염불을 하고는 있지만 극락세계 왕생에 대하여 시종 자신이 없었다.

 

  번뇌 망상은 마치 폭풍이 불고 소나기가 내리듯이 잠시도 멈추질 않았고, 억지로 부처님의 명호로 짓누르려고 하면 도리어 더욱더 거세지기만 하였다. 그래서 오랜 시간동안을 매일같이 방황하였으며 의지할 데가 없어, 늘 걱정되고 불안하였다.

 

  다행히도 나중에 정토종의 선도류(善導流) 계열의 저술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글을 읽는 순간 문득 시원한 물줄기가 가슴 속 깊이 흘러드는 것 같았다.

 

  아! 본래 아미타불께서는 십겁이란 세월동안 항상 우리처럼 유랑(流浪)하고 있는 고아들을 부르고 계시며, 절실한 마음으로 우리들이 하루 속히 고향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구나!

 

  이 인연으로 우리 모두가 비록 깊고 무거운 업력을 가진 범부들이지만 역시 모두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완전히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한 것이므로,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바로 아미타불의 대원력의 배에 타고 있는 것과도 같아서, 반드시 극락세계 내 고향에 안온(安穩)하게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2009년 여름, 대중(大衆)들이 중국 심양에서 정토법문을 듣기 위해 혜정법사(慧淨法師)님을 초청하였는데, 자비하신 법사님께서는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법문을 하는 동안, 나는 스님 곁에서 법문을 들으면서 법희(法喜)로 충만되었고,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스님의 법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오하고 현묘(玄妙)한 이론들을 언급하시지 않으면서 완전히 당신 자신의 진실한 신앙의 발로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법문 중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이러한 신앙은 바로 당신의 생명이다. 신앙이 있다면 당신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이고, 신앙이 없다면 당신에겐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해탈의 생명이 없으며 성불의 생명 또한 없다. 따라서 신앙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이고 가장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부모님도 중요하고 자식도 중요하며, 남편과 아내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맨 나중에는 전부 우리를 버리고 떠나게 된다. 결국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뿐이고, 오직 우리 자신의 신앙뿐이다."

 

  이런 말씀들은 구구절절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며 가슴을 설레게 하였고, 말씀마다 철저하게 진리를 보여 주셨는데, 한 치의 꾸밈도 없이 완전히 진실한 믿음의 표출이셨다.

 

  초학자(初學者)들에 대하여 스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은,'나는 염불을 하는데 숫자를 정하지 않고 애써서 억지로 하지도 않는다. 염불은 제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며 염불을 하고 있다.'라 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 사람이 염불을 하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있어서, 익숙한 것이 생소하게 바뀌고 생소한 것이 익숙하게 되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온종일 망상과 잡념 속에서 살면서 하루 동안 염불한 숫자를 통계해 보면 몇백 번도 채 안될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조석으로 시간을 정해서 조용히 앉아 염불을 하거나, 아니면 하루 동안 규칙적으로 천 번, 오천 번, 만 번의 숫자를 정해서 염불을 한다면, 아무리 염불을 못해도 최소한 정해놓은 천 번, 오천 번, 만 번의 숫자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초학자들은 매일 염불하는 숫자를 정해두어야 한다. 조석으로 조용히 앉아서 염불을 하는 것 외에, 만약 낮에도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숫자를 정해서 염불을 하셔야 한다. 이렇게 오래오래 하다보면 습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설사 여러분이 염불의 숫자를 정하지 않고, 또 염주를 돌리며 염불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부처님을 떠올리며 염불을 하게 되는데, 입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자주 염불을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다."

 

  평이하고 통속적이며, 낭랑하고 힘찬 이런 말씀들은 현대인들의 경망스럽고 나태한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하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완렴나립(頑廉懦立)의 효과를 거두었으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연 있는 연우(蓮友)님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 혜정법사님의 법문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나의 천박함을 헤아리지 않고 법문하신 내용에 대하여 간략히 목차를 편집하고 정리를 하였다.

  하지만 수준에 한계가 있으므로 불가피하게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여러 대덕님들께서 바로 잡아주시길 간절히 청하는 바이다.

 

                                                                     부끄러운 후학 진우(陳羽)

                                                                      심양 대불사에서 삼가 적음.

 


제1장 두 가지 정토

 

  정토법문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수당(수나라와 당나라)의 정토이고,

  둘째는 송명(송나라와 명나라)의 정토이다.

 

   수당의 정토는 순수한 정토이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정토란 곧 정토종 선도류(善導流)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위로 용수(龍樹), 천친(天親), 담란(曇鸞), 도작(道綽)을 이어 선도(善導)에 이르기까지 전해져온 법맥의 정토교리사상이다.

이 법맥은 매우 순수한 정토여서, 잡다한 교리가 섞이지 않았고 장황하여 번잡하지가 않다.

순수하기 때문에 정확하다는 것인데 잡다한 교리가 섞이지 않고, 장황하여 번잡하지 않으므로 두루뭉술하지가 않다.

  이 법맥을 의지해 수행을 한다면, 곧 이른바백 명이면 백 명이 왕생하고, 만 명이면 만 명이 왕생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 법문에 의지해서 수행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극락세계에 왕생을 할 수 있으며, 금생에 바로 극락세계 성중(聖衆) 가운데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당의 정토로서, 선도류 법맥의 정토법문을 가리킨다.


 

  송명의 정토는 잡다한 교리가 섞인 정토이다.

  송나라와 명나라의 정토란 바로 북송(北宋)때 부터 줄곧 명나라 내지는 청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정토다. 이 정토와 수당(隋唐)시대 선도대사의 정토를 비교하자면 비록 똑같은 정토법문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송명의 정토는 이미 천태, 화엄, ()의 사상이 그 속에 섞여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는 매우 풍부하고 아주 광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성도문의 사상이 들어가 있으므로, 그 결과 수학(修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생의 큰일에 대하여 불확정적이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였다.

 

   법보의 유실

 

  무엇 때문에 송명의 정토가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선도대사의 이 정토법맥과 관련된 저서들인, 천친(세친)보살의왕생론, 담란대사의왕생론주, 도작대사의안락집, 선도대사의59은 당나라 말엽에 점차적으로 중국에서 유실되어 일본으로 전해졌는데, 일본에서 그 빛을 크게 발하게 되었다.

 

  청나라 말엽에 이르러 양인산(楊仁山) 거사님께서 일본에 거주하는 지인을 통하여 중국에서 유실된 경론들을 다시 중국으로 반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더불어 남경에서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를 설립하고, 이미 유실(遺失)되었던 경론들을 판각하고 인쇄를 하여 유통시켰다.

 

  바로 이 선도류(善導流)라는 법맥의 정토교리사상이 당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실전(失傳)되었기 때문에, 그 뒤의 고승대덕들은 스스로 정토법문을 닦는다던가, 혹은 정토를 선양하는데 있어서 각자 본종(本宗)의 교리에 입각하여 해석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정토법맥의 교리를 설해놓은 서적들의 전거(典據)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천태종은 천태의 교리에 의거하여 정토를 해석하게 되었고, 화엄종은 화엄의 교리에 의거하여 정토를 해석하였으며, 선종에서는 선의 교리로써 정토를 해석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다보니 정토사상이 순수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이행도(易行道)

 

  순수한 정토는 쉬운 법문이면서도 수승한 법문이다. 용수보살께서는 당신의 저서인이행품(易行品)에서 이 법문을이행도라고 말씀하셨다.

 「()란 곧 용이(容易: 쉬움)하다는 말로서 어떤 사람이라도 닦을 수 있고, 전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으며, 모두 빨리 성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용이하다(쉽다)고 하는 것이다.

  쉬운 원인은 순수한 정토법문은 다만 한마디 나무아미타불만 불러도 충분히 왕생할 자격이 있으므로, 매우 간단하여 다른 경전과 진언을 독송하고, 다른 법문을 닦을 필요가 없는데 있다.

  만약에 다른 경전과 진언, 혹은 기타 공덕과 수행이 섞여야만 왕생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번잡하여 간단하지가 않을 것이다.

 

  한 마디 나무아미타불은 단지 여섯 글자뿐이다. 간단하고 쉽기 때문에 세 가지 근기에 두루 가피를 줄 수 있어, 상근기·중근기·하근기를 막론하고 모두 배울 수 있고, 출가자든 재가자든 전부 닦을 수 있다.

  이른바,세 가지 근기에 두루 가피를 주고, 영리하고 둔한 근기를 모두 거두어들이니, 만인이 닦아 만인이 왕생한다.는 것 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염불하는 사람은 금생에 극락왕생을 확정지을 수 있고, 왕생을 하면 신속하게 성불을 할 수 있으므로, 간단함의 이면에 경계의 높고 뛰어남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간단하지만 한 평생 동안 성취를 할 수 있을지 결정되지 않았다거나, 혹은 간단하여 왕생을 할 수는 있어도 왕생을 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성불의 과위를 증득할 수 있다면 수승하다고 말할 수 없다.

 

 

  배를 타는 비유[乘船喩]

 

  용수보살께서는 이 법문을 간단하면서도 쉽고, 편안하면서도 즐거운 법문이라 말씀하시면서 배를 타는[乘船] 비유를 드셨다.

  배위에 앉아 있으면 신체가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행동이 자유롭든 자유롭지 못하든 상관없이 단지 배위에만 앉아 있으면 모두 편안하고 즐겁고 평등하게 여기(사바)에서 저 피안(극락)으로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로서, 생사윤회를 벗어나는데 있어 우리 범부들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 범부들은 사실상 업을 짓는 능력만 있을 뿐, 윤회를 벗어나고, 나아가 성불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래서 용수보살님께서는 어떠한 법문도 정토법문을 제외하고는 전부난행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난행도(難行道)

 

  이 어려움[]을 용수보살님께서는 하나의 비유로드셨는데, 바로길을 걸음[走路]이다. 우리가 천 리, 만 리 먼 길을 가고자 했을 때, 만약 배나 혹은 비행기가 있다면 매우 가뿐할 것이고, 길을 걸어서 가야 한다면 매우 수고로울 것이다.

 

  설사 수고스럽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넌다 하더라도 반드시 도착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길이 요원하여 도사리고 있는 위험부담이 많고 온갖 어려움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용수보살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드셨다. 마치 우리들의 두 손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들어 올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니, 어떻게 들어 올릴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힘으로는 50, 100근 정도는 들 수 있겠지만 삼천대천세계는 아무리 애써 봐도 절대로 들어 올릴 수 없다.

  용수보살님은 이러한 비유로써 자신의 힘으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고, 나아가 불과를 성취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표현하고 계신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처럼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비행기를 타면 하늘에서 짧은 시간을 비행할 수는 있겠지만 만약 비행기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단지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른다, 곧 아미타불의 원력의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아서 여러분이 출가자든 재가자든, 수행을 할 줄 알든 모르든, 마음이 청정하든 청정하지 않던, 전부 극락세계에 왕생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미 육도윤회를 하는 범부가 아니라 극락세계 성중(聖衆) 가운데 일원이라 말할 수 있으며,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은 원인[如是因]이면 반드시 이와 같은 결과[如是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잡다한 교리가 섞인 수행

 

  송명의 정토도 역시 염불을 위주로 하며, 극락세계 왕생을 목적으로 하지만, 여러 가지 조건들이 붙으므로 염불 외에 공덕을 쌓아서 보조수행(助行)으로 삼아야 한다.

염불 외에 기타(다른) 공덕을 닦아서 조행으로 삼아야 했을 때, 공덕을 쌓을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쌓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덕에는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이 있는데, 사실상 우리가 지은 공덕에는 모두 탐··치가 들어 있으므로 모두 오염된 것이고, 유루(有漏)이며 진실한 공덕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공덕으로 어떻게 왕생의 자량을 삼을 수 있겠는가?

  동시에 송명 정토사상에서의 염불은 반드시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를 하고 있는데, 이른바공부가 한 덩어리를 이룸[功夫成片]이거나, 혹은 견혹과 사혹을 끊어서 사일심(事一心)을 이룬다던가, 혹은 진사혹(塵沙惑)과 근본무명혹을 깨트리고 이일심(理一心)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왕생의 품위(品位)가 높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선도대사님의 이 법맥의 견해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여서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극락은 나의 고향

 

  극락세계는 아미타불께서 우리 시방세계 중생들을 위해 건립한 곳이다.

  시방세계 중생에는 성인이 있고 범부가 있으며, 또 범부 가운데는 선인(善人)도 있고, 악인(惡人)도 있으므로 모든 중생들을 전부 포괄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 건립한 곳으로서, 소유권과 사용권이 모두 우리들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공덕자량과 극락세계에서의 빠른 성불 또한 모두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위해 완성하신 것이며, 이 한 마디󰡐나무아미타불󰡑육자명호 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

 

   만덕홍명(萬德洪名)

 

  모든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할 때, 그 정인(正因)과 정업(正業), 공덕자량은 어디에 있는가?

  나무아미타불의 육자명호 속에 있다. 이 명호는 원만하고 구족하며, 심지어 초월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 한마디 아미타불의 명호에는 84천 법문의 공덕이 원만이 들어있고, 84천 법문의 공덕이 구족하며, 84천 법문의 공덕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락왕생에 필요한 정인, 정업, 자량과 공덕은 이 한마디 아미타불의 명호 가운데 전부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미타불 명호의 공덕은 왕생자에 대해서나, 성불에 대해서나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조금도 빠짐이 없이 원만하게 갖춰져 있으므로 이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을만덕홍명이라 존칭하는 것이다.

 

  칭명을 하면 반드시 왕생한다[稱名必生]

 

  선도대사의 이 법맥에 의거하여 염불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반드시 왕생한다.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중생들이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한다[衆生稱念, 必得往生]" 고 하셨으니, 단지 염불만 하면 백프로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

  또 말씀하시길,

  "저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반드시 왕생한다[乘彼願力, 定得往生]" 고 하셨으니, 아미타불의 원력을 의지하면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미타불께서는 본래부터 우리들을 위해 극락세계를 성취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셨으며, 만덕홍명인 이 한 마디 명호를 염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부 극락세계로 왕생할 수 있도록 발원하셨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저 부처님의 원력을 타면 반드시 왕생 한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부처님의 원력으로 쉽게 왕생한다[以佛願力, 易得往生]" 고 하셨으니, 아미타불의 원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이 모두 쉽게 왕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부처님의 원력으로 전부 왕생한다[以佛願力, 莫不皆往]" 고 하셨다.

아무튼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 면 성인과 범부, 선인과 악인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전부 아미타불의 정토로 왕생하게 되어 한 사람도 누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인천(人天)의 선악 범부가 모두 왕생하고, 저 극락세계에 이르면 아무런 차별 없이 다 함께 퇴전하지 않는다" 고 하신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타방세계의 범부와 성인이 원력을 타고 왕래하고, 저 극락세계에 이르면 차별 없이 다 같이 퇴전하지 않는다 "고 하셨다.

 

  그러므로 선도대사님의 정토 교리는 기필코 왕생[必得往生]하는 법문이고, 반드시 왕생[定得往生]하는 법문이며, 쉽게 왕생[易得往生]하는 법문이고, 전부 왕생[皆得往生]하는 법문이며, 다 같이 퇴전하지 않는[齊同不退] 법문이다.

  만약 이러한 교리가 아니라면 왕생이 확실치가 않다. 마음이 일단 확실치가 않으면 수행이 불안해지게 되는데, 마음이 결정되지 않는 사람을 누가 감히 그 사람이 현재 이미 왕생이 결정되고 왕생의 몫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오로지 선도대사님의 이 계통의 법문을 닦는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경전의 근거[經典依據]

 

  이 법맥은 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만약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법이 아니라 외도이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뜻을 해석하면 삼세의 부처님들이 억울하다고 하시고, 경전에서 한 자라도 어긋나면 마설과도 같다[依文解義 三世佛冤, 離經一字 等同魔說]" 는 말씀이 있듯이, 어떠한 법문을 제창하든 간에 불교의 법문이라면 반드시 경전에 의거하여야 한다.

 

  그럼 용수, 천친, 담란, 도작, 선도의 이 법맥에서 의거하는 것은 어떤 경전들인가?

  정토삼경(淨土三經)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수많은 경전을 설하셨는데, 그 가운데 아미타불의 정토와 관련된 경전은 대략 2백여 부로서 전부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에 대하여 언급을 하셨다.

 

  이 2백여 부의 경전 중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여시아문부터작례이거에 이르기까지 구구절절 전부 순전히 극락세계의 장엄과 수승함, 아미타불의 구제의 공덕을 설하신 경전은 오직 삼부의 경전 밖에 없으니, 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이다. 따라서 이 삼부경을정토삼부경이라 부른다.

 

  정의와 방의(正依旁依)

 

  이 법문을 제대로 설명을 하려면 반드시 이 삼부의 경전을 의거해야만 순수한 것이다. 다른 경전은 보조역할만 할 뿐, 백 프로 의거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정식으로 의지하는정의(正依)와 참고로 의거하는방의(旁依)의 차별이 있다.

 

  정식으로 의거함이란, 곧 백 프로 의거한다는 것이고, 참고로 의거함이란 다만 해당 경문 가운데 관련 있는 부분만 취하여 참고 또는 보조역할을 하고, 해당사항이 없는 부분은 채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정토법문에서 정식으로 의거하는 경전은 단지정토삼부경뿐이라는 것이다.

  용수, 천친, 담란, 도작, 선도 이 분들께서는 순수하게 정토삼부경을 의거하여 정토법문을 해석할 뿐, 다른 종파의 교리가 그 속에 섞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엄선을 거쳤기 때문에 순수하여 혼잡하지 않고, 또한 이치에도 맞고 근기에도 계합한다.

 

  전수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함[專修必定]

 

  전수염불을 지향하는 이 순수한 정토법문은 방법상으로도 간단하고 쉬워서, 우리가 다만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곧 왕생의 직접적인 원인[正因]이 되어 반드시 왕생을 할 수 있다.

만약에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지 않는다면 결정되지 않아 왕생을 할 수도 있고 왕생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어느새 오로지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하게 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불력(佛力)과 원력, 공덕력에 의지하게 된다.

한 사람이 만약 전적으로 아미타불을 의지하고, 또 의지하는 대상이 의지할만한 대상이라면, 그렇다면 어찌 금생에 성취할 수 없겠는가?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 전수(專修)를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꼭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218원과 제19

 

    48원의 분류

 

  지금부터무량수경에서 왕생과 관련 있는 원()에 의거하여 방금 말씀드린 이치의 근거로 삼고자 한다.

 

  아미타불은 총 48대원이 있으신데, 만약 이 48대원을 귀납하고 분류를 한다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극락세계의 국토와 관련된 원과 아미타불 자신과 관련된 원과, 그리고 우리들의 왕생공덕과 관련된 원이 있다.

 

  극락의 과보는 불가사의하다

 

  이 48대원 중에 정토와 관련이 있는 원을 예로 들면, 앞부분의 제1원은무악취원(無惡趣願)으로서 극락세계에는 삼악도가 없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대자대비와 대원대력을 갖춘 아미타불께서 삼악도에 떨어지게 될 중생들과 삼악도의 죄업을 지은 중생들을 구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두 번 다시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무악취원(無惡趣願)을 세웠기 때문이다.

 

  제2원은불갱악취원(不更惡趣願)으로서, 염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극락세계에 왕생한 뒤, 시방세계를 다니면서 중생구제를 발원하며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2원이다.

 

  제3원은실개금색원(悉皆金色願)이고, 4원은무유호추원(無有好醜願)이다.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아미타불과 똑같은 금색신이고 생김새도 모두 똑같다.

  여러분이 어떠한 신분으로 왕생하든 간에 생김새는 전부 아미타불처럼 32, 내지는 84천상으로 모두 똑같이 만덕장엄(萬德莊嚴)을 갖추게 된다.

마치장엄경에서 말씀하셨듯이부처님의 금색신과 같아 미묘한 상호가 전부 원만하다[如佛金色身 妙相悉圓滿].

 

  제5원에서 제10원까지는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한 중생들은 전부 여섯 가지 신통을 갖추게 된다는 원이다.

  제11원은필지멸도원(必至滅度願)이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한 사람들은 전부 곧바로 열반을 증득하게 되는데, 아미타불이 우리들을 위해 성취한 극락세계에는 이러한 공덕과 기능이 있다.

 

  이어서 제12원은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이고, 13원은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으로서, 이 두 원은 제11원에서 증득한 불과(佛果)와 아미타불이 똑같음을 나타낸다.

아미타불이 무량수이므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우리도 똑같이 무량수가 되고, 아미타불이 무량광이므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우리도 똑같이 무량광이 된다는 것이다.

 

  저 부처님은 우리가 어떠한 중생이든 간에, 성인이든 범부이든, 출가자든 재가자든, 심지어 선인이든 악인이든 일단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만 하면, 전부 성불을 할 수 있게 해주신다.

  따라서 본래 마땅히 삼악도에 떨어져야 할 사람이지만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나면 다시 삼악도에 떨어질 필요 없이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여 삼악도의 죄업이 소멸되고, 아미타불의 공덕에 의지하여 신속하게 성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제1원부터 제13원 까지만 보더라도 극락세계의 수승하고 장엄하며, 불가사의한 과보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 찬탄하시면서 해석하시길,

  "극락은 무위의 열반 경계요[極樂無爲涅槃界], 염불이 곧 열반의 문이로다[念佛卽是涅槃門]."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길,

  "티끌과 같은 옛 업들이 지혜에 따라 사라지고[微塵故業隨智滅],

   어느새 열반의 문으로 들어가네[不覺轉入涅槃門].

   크고 작은 아승지겁도[大小僧祇恒沙劫]

   역시 손가락 한번 튕길 사이와 같구나[亦如彈指須臾間]."고 하셨다.

 

 

  중생들을 극락으로 거두어들이는 세 가지 발원[攝生三願]

 

  48원 가운데 아미타불이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제18, 19, 20원에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원을섭생삼원(攝生三願)이라고 부른다.

 

  「섭생삼원이란 곧 이 세 가지 원으로써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하여, 시방세계 중생들로 하여금 극락세계로 왕생하여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전부 성불을 할 수 있으며, 12원과 제13원을 통하여 아미타불과 같이 무량광, 무량수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 원력인 18원과 19, 20원이다.

 

  만약 이 세 가지 원이 없다면, 설사 극락세계가 제아무리 청정하고 장엄하며, 제아무리 시방국토를 초월한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돌아올 몫은 없다. 따라서 이 세 원은 우리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당기원과 결연원[當機願 結緣願]

 

  이 세 가지 원은 아미타불께서 시방세계 중생들을 섭수하여 구제하는 원력이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원의 내용은 다르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근기가 천차만별이므로 아미타불께서 일체 중생을 두루 섭수하기 위하여 반드시 18원과 19원과 20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원 가운데 18원과 19원을당기원(當機願)이라 부르는데, 이 두 가지 서원에 부합하면 금생에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것이다.

  20원에 부합하는 중생을결연원(結緣願)이라 부른다. 비록 금생에 왕생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아미타불과 인연을 맺었으므로 부처님께서 영원히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연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 그 사람을 인도하여 다음 생, 혹은 다다음 생에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하신다는 원이다.

 

  고승대덕들이 제20원을 표현하기를,

"바늘을 삼킨 물고기가 물속에서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제18원은 쉬움 중의 쉬움이다[易中易]

 

  18원과 19원의 이 두 원은 모두 당기원(當機願)이다. 그러나 만약 자세하게 분석해보면, 오직 제18원만이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이행도의 법문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18원에서는 단지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함을 말하므로 이행도라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어린애도 부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앵무새도 부를 수 있으므로 가히 쉬움 중의 쉬움이며, 이행도의 극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9원은 쉬움 가운데 어려움이다[易中難]

 

  제19원은 정토종에서 난행도에 속하는데, 보리심을 일으키고 온갖 공덕을 닦은 다음 회향하여 왕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도문의 난행도와 비교를 한다면 여전히 이행도의 범주에 속하지만, 그러나 쉬움 중의 어려움이므로 제18원의 쉬움 중의 쉬움과는 이러한 차별이 있다.

  

  18원은 아미타불의 본마음이다[彌陀本懷]

 

  제18원은 아미타불의 본래 마음이시다.

  따라서 제18원에 의지하여 염불하는 중생은 아미타불과 직접적이면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러한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계는 갈라놓을 수가 없다.

 

  제19원의 중생은 아미타불과 본래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보리심을 발하여 온갖 공덕을 닦는 등, 기타 법문으로 회향하는 것은 오로지 아미타불을 의지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므로 아미타불과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연관이 없다고 말하지만 역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닦은 공덕을 회향하여 정토왕생을 발원하였기 때문에 대자대비하신 아미타불께서는 구제할 수 있는 중생이라면 최선을 다해 구제해 주신다.

 

  이 사람이 보리심을 내어 온갖 공덕을 닦아 극락왕생을 원한다면, 아미타불께서는 당연히 이 기회를 잡아서 그 분을 구제할뿐더러 그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임종할 때에 영접을 하셔서 극락왕생을 할 수 있도록 보증을 해주신 것이다.

 

  다만 두 원을 서로 비교해보면, 아미타불의 본뜻은 제18원의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에 있으므로 선도대사께서는,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데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본원은 제19원이 아니다.


18

 

  지금부터 내가 원문(願文)을 따라 해설을 하겠다.

  "만약 제가 부처님이 될 적에, 시방세계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좋아하며,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여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렀을 때에[乃至十念],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 다만 오역죄와 정법을 비방한 자들은 제외하겠다."

 

  우선 제18원부터 해석하겠다.

  제18원은 총 서른여섯자로 이루어졌는데, 원문의 대의(大意)는 이러하다.

  아미타불께서 만약 성불을 하지 않으셨으면 몰라도, 만약 성불을 하셨다면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당신의 구원을 믿고, 당신의 극락세계야 말로 시방세계 중생들의 영원한 안락처임을 믿으며, 극락세계왕생을 발원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반드시 왕생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시다.

 

  지극한 마음[至心]

 

지심이란 완전히 자신의 내심으로부터 나온 마음인데, 진심(眞心) 또는 진정(眞正)이란 뜻이다. 우리가 일처리를 하거나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반드시 진심이어야 한다.

  만약 진심이 아니라면, 그 일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친구를 사귈 때에 반드시 진심으로 대해야 비로소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지, 만약 거짓된 마음으로 서로 이용만 하려 한다면 어찌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매일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회향문만 읽을 뿐,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진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발원이 아니라면, 이것은지심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지심이란 여기서는 아주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으니, 곧 내가 진심으로 극락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진심으로 극락왕생을 원하며, 진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지심이라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지심을 해석하는데 상당히 복잡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매우 현묘(玄妙)하기까지 하여 일반인들이 이해를 할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정토법문이이행도인 이상, 교리적으로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 뿐더러 방법상에도 쉽게 실천을 할 수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지심이란 두 글자는 진심, 즉 진실한 마음이란 뜻이다. 만약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바로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이다.

 

  내가 지극정성으로 간절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지극정성으로 간절하게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한다는 뜻이다따라서지심은 믿음까지 관철(貫徹)되어야 하므로, 믿음은 자신의 내심으로부터 나온 진정한 믿음이어야 한다.

 「지심은 또한 발원까지 관철되어야 하므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발원은 진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발원이어야 한다. 지심은 역시 염불에도 관철되어야 하므로 염불 역시 진정한 염불이 되어야지 성의 없이 적당히 하고 만다든가 마지못해 형식적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 혹은 다른 사람들이 부르니까 나도 따라 부르는 식으로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지심··삼자량에 관철되어야 한다.

 

  믿고 좋아함[信樂]

 

 「()은 곧 믿음으로서, 극락세계가 실제로 있고 아미타불이 진실로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인데, 이것은 초보적인 믿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락세계는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위해 발원하고 만드셨으므로 우리들의 세계이고, 우리들의 집이며, 우리들의 소유임을 믿고, 모든 소유권과 사용권이 전부 우리들의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돌아가려면 아주 자연스럽게 돌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극락세계가 우리들의 집인 이상,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일종의 천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이다.

  우리가 좋아하면서 신심과 환희심을 갖고 극락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곧신요(信樂)이다.

 

  그 다음은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信受彌陀救度]. 아미타불께서는 적극적으로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구제해 주시고, 아무런 조건 없이 구제해 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을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미타불의 구제는 적극적이고 평등하며, 조건이 없으시다.

 

  아미타불께서는 5겁의 사유를 통하여 널리 48대원을 세우시고, 또 한량없는 세월[兆載永劫] 동안 보살의 덕행을 쌓고 심으셨다. 한량없는 세월 전에 아미타불께서는 이미 우리들을 위해 발원을 하셨고, 우리들을 위해 수행을 시작하셨다.

  그 시절에 우리들은 육도윤회를 하면서 삼악도에 빠져 머리를 잠깐 내밀었다가 다시 빠지곤 하였다.

  그때에 아미타불께서는 적극적으로 우리와 같이 어리석고 괴로우며, 죄업을 지어 끊임없이 윤회를 하고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발원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미타불께 부탁을 했거나 합장하며 그 분께 구걸을 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적극적(주동적)으로 우리들을 구제하겠다는 발원을 하신 것이다.

 

   모자의 비유[母子喩]

 

  부모가 아기를 낳고 나면 자연히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서 그 애를 사랑하고 키우고 교육을 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이 갓난애가 부모에게 합장을 하며 부탁을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육하고 키우는 것은 일종의 천성이다. 천성에는 꾸밈이 없고 배양할 필요도 없어 자연스럽게 선천적으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로서는 억지로 강요할 필요 없이 자연히 자식을 아끼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녀들이 안전하도록 보호를 해줄 것이다.

 

  우리들의 부모님은 탐··치 삼독이 있는 업력범부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까지 해줄 수 있는데 하물며 부처님이시겠는가?

  그 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시방세계 중생들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평등하면서도 조건 없이 우리들을 구제해 주시겠다고 발원을 하셨다.

 

  부처님께서 우리 범부들처럼 차별적인 관념이 있겠는가? 없으시다!

  부처님은 이른바 아견(我見), 인견(人見), 중생견(衆生見), 수자견(壽者見)이 없을뿐더러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역시 없으시다.

  또한 원수와 친한[寃親]이 평등하고 자타(自他)가 하나인 분으로서, 이런 분이라야 비로소 부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은 상대적인 관념 속에 계시지 않으므로 성인과 범부, 선인과 악인, 재가자와 출가자라는 관념이 없으신데 이런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만약 아직도 이런 차별된 관념을 갖고 계신다면 여전히 범부이지 부처님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한다면[欲生我國]

 

 「욕생아국(欲生我國)이란 이 네 글자는 부처님께서 발원하시는 입장에 서서 말씀하신 것이다.

아미타불께서 발원하신 목적은 시방세계 중생들을 불러서 구제하려는데 있다.

 "너희들은 나의 극락세계로 오너라!

  너희들은 빨리 나의 극락세계로 오너라!

  너희들이 오고 나면, 다시는 윤회를 하며 죄업을 짓고 괴로움과 어려움을 겪지 않을뿐더러 영원히 늙고 병들지 않으며, 영원히 죽지도 않는다.

  여섯 가지 신통력을 구족할 뿐만 아니라 신속히 부처님의 과위(佛果)를 증득할 수 있느니라"

 

  아비지옥의 고통 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

 

장엄경에서 아미타불은 시방세계 중생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셨다.

 "윤회를 하는 중생들이여! [輪廻諸趣衆生類]

  속히 나의 나라에 태어나 안락을 누려라. 速生我刹受安樂].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유정들을 건지시니, [常運慈心拔有情]

  아비지옥 중생 남김없이 제도하리라." [度盡阿鼻苦衆生].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께서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欲生我國]라고 부르(외치)신 것이다.

 

  육도윤회를 하고 삼악도에 빠져있는 모든 중생에게,

 "속히 나의 나라에 태어나 안락을 누려라.

  빨리 극락세계에 왕생하거라.

  이곳이 너희들의 편안하고 즐거운 집이니라."

 

  그렇지 않으면,

 "삼계가 편안하지 않기를 마치 불타는 집과도 같아 온갖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매우 두렵고 무섭다"라고 외치신 것이다.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유정들을 건지시니,

   아비지옥 중생 남김없이 제도하리라

   아비지옥의 중생은 세간에서 죄업이 가장 무거운 중생이다. 그들이 지은 죄업은 모든 죄업 가운데서 가장 무겁다는 것이다.

 

  아미타불께서는 항상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부르고 계시며, 영원히 평등하고도 조건 없는 자비심으로 아비지옥의 중생을 포함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해 주시는데, 그들이 극락왕생 발원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

 

  단지 극락왕생 발원만 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으므로,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유정들을 건지시니, 아비지옥 중생 남김없이 제도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욕생아국,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라는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구제이시다.

 

  열 번만이라도[乃至十念]

 

  이어서 아미타불께서는내지십념을 말씀하셨다. 내지십념은 염불을 하는데 최소한의 기준이어서, 이것보다 더 적을 수는 없다. 거의 아무런 조건과 넘어야할 문턱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전부 실천할 수 있고 전부 희망이 있게 된다.

 

 「내지십념이란, 곧 내지 일생동안 불법을 배우고, 염불수행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임종할 무렵 짧은 시간동안 겨우 열 번 나무아미타불을 불러도 역시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는 말로서, 지금부터 극락왕생 발원을 하고, 지금부터 염불수행을 한다면 전부 왕생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내지십념으로 모든 염불하는 중생들을 포함시키며 어떠한 사람도 염불만 하면 전부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내지십념이란 곧평생의 근기는 위로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임종의 근기는 아래로 열 번 내지 한 번까지의 염불을 말한다.

  내지 십념할 때의십념은 이 사람이 곧 임종할 사람으로서, 평소에 불법을 배우고 염불하고 선행을 실천하고 덕을 쌓은 적이 없을 뿐더러, 심지어는 삼귀의조차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많아야 열 번 정도의 염불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을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아무리 어리석고 졸렬하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염불을 열 번 이상은 했을 것이니, 그런 사람들도 왕생을 하는데 하물며 우리들이겠는가?

  아미타불께서는 이것을 기준으로, 다만 왕생을 발원하고 칭명염불을 한다면 어떤 사람들도 모두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왕생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만약에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 [若不生者, 不取正覺]

 

  아미타불께서는 중생을 구제하시는데 조건이 없으시다. 부처님께서는 내지십념, 즉 우리가 단지 오로지 당신의 명호만 부르면 된다고 하시고, 그 다음에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만약에 가르침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생을 할 수 없다면, 당신께서는 부처가 되지 않겠으며, 반드시 수행을 계속 더 해서 우리가 왕생을 할 수 있는 공덕을 쌓아야만 성불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18원에 의지하는 염불중생들은 아미타불과 직접적이면서 밀접한, 심지어 한 몸으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약불생자, 불취정각(若不生者, 不取正覺)이란 이 두 구절의 여덟 글자의 뜻은 매우 심원(深遠)하다.

 

 "너희가 왕생을 할 수 없다면, 나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이 반드시 왕생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불을 하겠다."

 "내가 없으면 너희들은 왕생을 할 수 없겠지만, 만약 내가 있다면 너희들은 반드시 왕생을 할 수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정각(正覺)을 이룬 부처님의 몸을 볼모로, 시방세계의 모든 죄악 중생들을 구하여 육도윤회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여 성불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여덟 글자 속에 이러한 뜻이 담겨져 있으니, 어찌 아미타불의 성불과 우리들의 왕생이 한데 묶여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데 묶여 있다는 것은 한 몸이 되어 분리될 수 없다는 말로서, 만약 우리들의 왕생이 없다면 아미타불이 있을 수 없고, 아미타불이 없다면 우리들의 왕생 역시 없다는 뜻이다.

 

  바른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의 명호 [正覺佛名]

 

  그러므로 이내지십념이란 무엇을 염()한다는 것인가? 바로 아미타불이라는 정각을 이룬 부처님의 명호를 염(부름)하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당신께서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의 명호로써 중생들을 구제하시므로 이 부처님의 명호를 중생들에게 부르도록 하시고,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전부 이 육자명호 속에 갖춰져 있으므로 시방세계 중생들이 칭명을 하면 반드시 왕생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미타불께서는 만약 이러한 공덕이 있는 명호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성불을 못한다면 이 부처님의 명호 역시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이 명호가 있어서 칭명염불을 하는 모든 중생들이 왕생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성불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니약불생자, 불취정각이란 이 여덟 글자는 우리들과의 관계가 매우 중대하고 매우 밀접하다.

 

  물론 제18원의 글자마다 하나하나의 내용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겠지만 이 여덟 글자에 담긴 뜻은 특별히 깊고도 크다.

  제18원 속에서 우리와 아미타불, 아미타불과 우리는 영원히 함께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18원이 성취되어야만 모든 원력이 성취되고, 18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모든 원력이 성취될 수가 없다.



17

 

  18원과 17원은 서로 연관이 있다. 18원의내지 십념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서, 이 한 마디 명호는 우리가 제17원으로부터 들은 것이다.

 

 17원에서 아미타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부처님들이 모두 나의 이름을 찬탄하지 않는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

 

  다시 말하면, 아미타불께서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이 전부 당신 명호의 위신력과 공덕을 찬탄하고 당신 명호의 불가사의함을 찬탄하도록 원력을 세우신 것이다.

  이처럼 찬탄을 함으로써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공덕이 광대하고 무량무변하며, 불가사의한 이 한 마디 아미타불의 명호를 들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17원의 뒤에 바로 제18원이 있는 것이다.

 

  사실상 제17원과 제18원의 두 원은 하나이다. 18원의 내지 십념은 17원에서 모든 부처님이 선양하고 찬탄하시는 이 한 마디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17원이 있었기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아미타불의 이 명호로써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는 공덕력(功德力)을 설하신 것이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정토법문을 설하시면서 아미타불의 명호에 담긴 무량무변하고도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부처님의 명호를 듣게 되었고, 비로소 오로지 이 한 마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잡수잡행(雜修雜行)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명호 속에 모든 공덕이 들어 있다 [名號具萬德]

 

  제17원에서 모든 부처님이 찬탄하신 아미타불 명호의 공덕은 모든 공덕을 초월하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명호를 만덕홍명(萬德洪名)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이 명호의 공덕은 오계의 공덕을 초월하고 십선의 공덕도 초월하며, 육도만행(육바라밀)의 공덕을 초월하고 모든 중생이 보리심을 내어 온갖 공덕을 닦는 공덕 또한 초월한다.

 

  그래서 아미타불의 명호의 공덕을 듣고 우리는 감동을 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 이 한 마디 나무아미타불 속에 들어있는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을 믿을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한 마디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아미타불의 명호에는 모든 공덕이 들어 있으며, 이러한 공덕은 또한 왕생의 바른 원인[正因]이기도 하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자량(資糧)은 이 명호 속에 전부 들어 있어서 조금도 부족하지가 않다.

왕생이든 성불이든 이 한 마디 아미타불의 명호 속에 전부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명호의 공덕을 듣고 나서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이란 이 명호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왕생과 성불, 중생과 부처는 하나다 [往生正覺, 機法一體]

 

  동시에 아미타불께서는 만약 중생들이 칭념(稱念)하고 왕생할 수 있도록 이 명호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성불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가히 우리들과 한데 묶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왕생과 성불, 중생과 부처는 하나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의 왕생과 아미타불의 정각(성불)은 한데 묶여 있다. 우리들의 왕생이 없다면 아미타불의 성불이 있을 수 없고, 아미타불의 성불이 없다면 우리의 왕생 역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아미타불은 우리가 자력수행을 통하여 능히 왕생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야 성불을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하여 왕생의 공덕을 완성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18원이다.

 

  친연(親緣)

 

  따라서 제18원의 염불중생은 아미타불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 관계를 정토종의 조사이신 선도대사님은친연(親緣)으로 해석하셨다.

 

  마흔 여덟 크신 서원 [弘誓多門四十八]

 오직 염불이 가장 친함을 나타내니 [偏標念佛最爲親],

 사람이 염불하면 부처님 또한 이 사람 염하고 [人能念佛佛還念]

 전심으로 부처님 생각하면 부처님은 이 사람을 알지니라[專心想佛]佛知人].

 

마흔 여덟 크신 서원은 아미타불께서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하는 크고도 넓은 서원이 마흔 여덟 가지가 있음을 나타내고, 그 중에오직 염불이 가장 친함을 나타냄에서()오직[]이란 뜻인데, 곧 유일(唯一)하여 둘도 없고, 전일(專一)하여 잡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제18원인 염불왕생원이야말로 아미타불과의 관계가 친하여 소원하지 않고 가까우며 멀지가 않다. 기타 두 원인 19원과 20원은 아미타불과의 관계가 친하지도 가깝지도 않다.

 

  따라서 오직 제18원만이 친한 관계이므로오직 나타냄[偏標]이라고 하신 것이다.

 

 「자의 해석[親字解]

 

  우리 염불하는 중생들과 아미타불의 관계는 얼마나 친할까?

  우리는 먼저()자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의 한문은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부 자체의 내용이 있다. 비단 외관적으로 예술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내면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이자는설 립()자와나무 목()자와 볼 견()자로 구성되었는데, 높은 나무 위에 서서 사방을 향해 멀리 바라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교통수단이 편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차량이나 전화 핸드폰 등이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밖에서 일을 하거나, 혹은 자신의 어린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저녁이 되었거나 비가 올 때, 애지중지하던 자식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지 얼른 나무위에 올라가서 저 멀리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이다.

 

  세간의[世間親]

 

  우리와 아미타불의은 한 몸이면서 불가분의이다. 우리 세간의 친에는 일등 친(일촌), 이등 친(이촌), 삼등 친(삼촌) 등이 있다. 부모와 자식은 일등의 친(일촌관계)이며, 이등의 친과 삼등의 친은 일등의 친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예를 들면, 큰 아버지와 삼촌, 고모와 이모 등은 일등의 친이 있기 때문에 이등의 친과 삼등의 친이 있는 것이지, 만약 부모님의 형제자매가 없다면 어떻게 그 분들을 큰 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친 가운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가장 친하다. 이 친은 선천적인 것으로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다. 자식은 부모가 낳았기 때문에 부모가 없으면 자식 역시 없다.

자식은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만났을 때에, 자신의 신식(神識: 영혼)이 입태(入胎)를 해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영혼 외에도 부모의 정혈(精血)이 있어야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식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부모의 피지 큰아버지, 또는 삼촌의 피가 아니며, 외부 사람들의 피는 더욱이 아니다. 이 친은 선천적이면서 자연스런 친이다.

  그의 몸은 부모로부터 유전자와 정혈(精血)을 물려받았으므로 외부 사람들이 제아무리 친하다 할지라도 친생(親生)의 관계는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관계는 선천적이고 천륜(天倫)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미타불과의 친[彌陀親]

 

  이처럼 아미타불과 우리들과의 친한 관계도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시방의 부처님들은 우리들을 위해,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우시지 않았지만, 오직 아미타불만이 우리들을 위해"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라는 발원을 하셨기 때문이다.

 

  아미타불께서,"너희들이 왕생할 수 없다면 나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너희들의 왕생이 곧 나의 성불이고 나의 성불이 곧 너희들의 왕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계를 선도대사님께서는"오직 염불이 가장 친함을 나타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미타불과 제불[彌陀與諸佛]

 

  시방세계의 제불은 모두 부처님이시며, 모두 대자대비하시다. 이른바"염불을 한번 하면 항하사 모래와 같은 죄업이 소멸되고, 부처님께 한번 예배하면 한량없는 복이 자라난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 업장을 소멸하고 복과 지혜가 자라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방제불 중에 어느 부처님이 극락세계를 지어 우리들에게 주셨던가? 없다!

 

  우리가 시방제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삼계육도를 벗어나서 신속하게 성불을 할 수 있겠는가? 없다!

  시방제불 중에,"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우신 부처님이 계시는가? 없다!

 

  시방제불 중에 오직 아미타불만이 우리들을 위하여 48대원을 세우셨으며, 18원에서"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왕생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미타불께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 성불을 한 공덕에 있다. 부처님의 공덕이 우리들의 공덕이 됨이 마치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우리의 몸이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공덕이 곧 우리의 공덕이고, 아미타불의 재산이 곧 우리들의 재산인 셈이다.

  아미타불에게 무엇이 있으면 우리에게도 무엇이 있게 되는데, 마치 아버지에게 무엇이 있으면 아들에게도 무엇이 있듯이 아버지의 재산이 곧 아들의 재산인 것과도 같다.

 

  아미타불께서 시방제불을 초월하는 원력이 있기 때문에 널리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으시다. 그래서 시방제불이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찬탄을 하시고, 아울러 시방세계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며,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 것을 권유하신 것이다.

 

  염불이 원인이고, 왕생은 결과다[念佛是因, 往生是果]

 

  따라서 우리가 염불만 하면 반드시 왕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염불이 원인이고 왕생은 결과이듯이, 이와 같은 원인은 반드시 이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우  리가 염불을 했음에도 왕생을 하지 못한다면 원인은 있지만 결과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토법문을 닦는다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 것이며, 절대로 잡수잡행(雜修雜行)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전수(專修)염불을 하면 왕생을 하는데 자신의 몫이 있으며,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이야말로 비로소 순수하고도 바른 정토법문의 교리적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정업(正定業)

 

  선도대사님께서는 염불이 곧정정업이라고 말씀하셨다.

 한결같은 마음(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와에 시간의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고 염념마다 (명호를) 버리지 않는 것을 정정의 업[正定業]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원력을 따르는(수순하는) 까닭이다.

 

  염불이 곧정정업이다.정정(正定)부정(不定),사정(邪定)과 서로 대조적인 관계로서, 정정이란 곧 백 프로 이러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이러한 결과가 있다는 것이며, 이것을정정(正定)이라고 부른다.

 

  부정과 사정[不定與邪定]

 

  무엇이부정(不定)인가?

  원인이 잡다하므로 그 사람은 이 결과(왕생)를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부정이라고 부른다.

 

 「사정(邪定)이란 이 사람에게 전혀 원인이 없으므로 이러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표현으로, 이것을사정이라 부른다. 이 사()는 사악하다는 사가 아니라 피차지간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음을 나타낸다.

 

  염불이 곧 정정업이다[念佛卽是正定業]

 

  정토법문의 입장에서는 제18원인 염불왕생원이 곧정정업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선도대사께서정정업이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정토수행을 하지만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지 않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원력을 의지하지 않으며, 잡수잡행을 한다면 이것은정정업이라 할 수 없다.

 

  만약 다른 법문을 닦는 사람들이 정토법문을 닦지 않고 극락세계왕생을 발원하지 않았다면, 정토왕생의 입장에서는 이것을사정업(邪定業)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이 법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도대사님께서는 염불이 곧정정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19

 

  이제 계속해서 제19원을 해석하겠다.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보리심을 일으켜 온갖 공덕을 닦고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발원을 하였으나, 그들의 임종시에 내가 대중들과 함께 그 사람을 둘러싸고 앞에 나툴 수 없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

 

  온갖 공덕을 닦음[修諸功德]

 

온갖 공덕[諸功德]할 때,온갖[]은 매우 많다는 뜻이다. 온갖 공덕은 육도만행(六度萬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계·십선·사성제·십이연기·육바라밀 등의 모든 법문의 수행과 모든 선업(善業)의 실천을 포함하여 전부온갖 공덕을 닦음[修諸功德]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온갖 공덕을만행(萬行)혹은제행(諸行)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의 입장에서는 온갖 공덕을 닦아 회향하여 왕생하는 것을 선도대사께서는잡행(雜行)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너무 많고 너무 잡다하여 순일하지도 한결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온갖 공덕을 닦는 것은 불교도들의 기본적인 실천 덕목이지만 아미타불의 정토법문에 있어서는, 온갖 공덕으로써 회향하여 왕생하는 조건으로 삼았기 때문에잡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의지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구제를 의지한다면 온갖 공덕을 닦더라도 잡행이라고 할 수 없다.

  자신이 닦은 온갖 공덕에 의지하여 왕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명호의 공덕에 의지하여 왕생을 하기 때문이다.

 

  아미타불께서 이 제19원을 세우신 것은 주로 온갖 공덕을 닦는 근기를 가진 중생을 접인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모든 근기들이 전부 곧바로 제18원으로 들어 올 수 없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이러한 근기를 가진 중생에게,

  "너희가 닦은 모든 공덕을 극락세계에 왕생하는데 회향을 하기만 하면 내가 너의 임명종시에 대중을 거느리고 너의 앞에 몸을 나투어 너를 영접해주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19원이다.

 

  이 제19원은 첫째,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둘째,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가 아니다.

 

  두 원의 차이[兩願差別]

 

  제19원과 제18원은 다르다. 18원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오로지 아미타불 한 부처님만 의지한다.

  동시에 아미타불께서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발원을 하셨기 때문에 염불하는 사람과 한데 묶여 있으며, 일대일의 관계다.

  염불인의 왕생이 곧 아미타불의 성불이고 아미타불의 성불이 곧 염불인의 왕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왕생과 성불과 일대일로 한데 묶여 있다.

 

  제19원은 자신을 의지하여 스스로 보리심을 일으키고 자신의 근기로 온갖 공덕을 닦는다. 이러한 근기는, 성인의 근기든 범부의 근기든 영리한 근기든 하열한 근기든 각자 닦은 크고 작고 깊고 얕은 공덕으로 회향하여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아미타불께서 오셔서 이 사람을 영접해 주신다는 것이므로, 19원과 아미타불은 거의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사람이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하기를 발원하였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그 사람을 영접하러 오신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미타불의 성불은 주로 제18원의 근기들을 위해 성취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불을 하심과 동시에 간접적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지 않고 오로지 아미타불을 의지하지 않는 중생을 접인하여, 그런 부류의 중생도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법문을 닦는 중생은 왕생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9원과 18원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하나는 아미타불과 불가분의 관계로서 아미타불은 이러한 중생을 위하여 성불을 하신 것이고, 하나는 아미타불과 분리가 되어있어서 본래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왕생발원을 하였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임종할 때에 오셔서 이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없이 큰 이익[無上大利]

 

  동시에 제18원은 제17원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으로, 시방제불이 이 명호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함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19원은 그렇지 않다. 각자 자신의 근기에 따라 닦은 공덕이기 때문에, 그들이 닦은 공덕과 아미타불의 이 명호의 공덕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아미타불의 공덕은 부처님의 공덕이고 무루(無漏)의 공덕이다. 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의 이 명호를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의 명호라고 하셨다.

  그리고무량수경에서 제18원의 염불공덕을 드러내면서 말씀하시길:

  "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뛸 듯이 기뻐하거나 내지는 한 번만이라도 염()한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됨을 마땅히 알아라."고 하셨다.

  따라서 염불은 위없는 큰 이익이고 위없는 공덕이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범부들이 스스로 일으킨 보리심은 대부분이 거짓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보리심을 가지고 아미타불의 진실하고도 불가사의한 공덕과 비교를 한다면 어떻게 비교가 되겠는가?

  우리가 닦을 수 있는 공덕은 많아봐야 오계, 십선의 공덕이다. 이로부터 여기에서 말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고 온갖 공덕을 닦으며, 내지는 여러 법문을 함께 닦고, 여러 법문을 함께 선양하더라도 전부 이 명호와는 비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보리심을 일으키고 온갖 공덕을 닦는 공덕을 훨씬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18원의 성취문[十八願成就文]

 

  그래서 제18원의 성취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중생들은 그 명호를 듣고 신심을 내어 기뻐하거나, 혹은 한 생각만이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하여 극락국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한다면 즉시 왕생하여 불퇴전에 머물게 될 것이다. 오직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된다."

 

  제18원의 성취문은 바로 제18원에 대한 해석이다. 아미타불이 이미 성불을 하셨기 때문에 제18원의 기능이 이미 드러나서 자체의 역량(力量)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18원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이와 같은 과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곧 제18원의 성취문이다. 18원의 성취문 앞에는 제17원의 성취문이 있다.

"시방세계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들도 전부 무량수불의 불가사의한 위신력과 공덕을 찬탄하느니라."고 하셨다.

 

  이어서 바로 제18원의 성취문인데, 중생이 시방제불께서 찬탄하시는 불가사의한 위신력과 공덕을 구족한 이 한 구절 명호를 들은 다음에, 내지 일념만이라도 부처님을 의지한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즉시 왕생하여 불퇴전에 머물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퇴전(不退轉)

 

  이 사람은 바로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퇴전(물러남)을 하지 않는다. 불퇴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의 불퇴전이란 성불의 경지에서 퇴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즉시 불퇴전에 이르며, 또한 바로 일생보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시길,

"극락세계에 태어난 중생들은 전부 아비발치(불퇴전)이며, 그 가운데는 수많은 일생보처가 있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일생보처란 바로 등각보살을 의미하는데, 성불을 기다리는 그런 지위를 말한다.

 

  태자의 비유[太子喩]

 

  이것은 마치 태자가 천자의 자리에 올라서 황제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동궁에서 거처하면서 태자라고 불린다.

  황제가 만약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그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태자는 국왕의 자격은 있지만 때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전부 성불의 자격이 주어진다. 그러나 극락세계에는 아직 아미타불이 부처님으로 계신다.

  아미타불은 무량수이므로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비록 아미타불과 똑같은 무량광 무량수이지만 그래도 한 단계 내려와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같은 일생보처의 보살로 불리게 된다.

 

  흰 연꽃의 비유[芬陀利花喩]

 

  그래서관무량수경에서는 염불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며 찬탄하셨다.

 만약 염불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은 사람 중의 흰 연꽃(분다라화)과도 같으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 사람의 훌륭한 벗이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염불하는 사람은 바로 사람 가운데 흰 연꽃과도 같다. 이 흰 연꽃은 부처님의 대명사이며, 부처님이 바로 흰 연꽃이다.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을 이미 흰 연꽃과도 같은 존재라고 찬탄하신 것은 염불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왕생을 하게 되고, 또한 극락세계는 성불의 경지이므로 반드시 성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우리의 훌륭한 벗이 되는 것이다.

 

   훌륭한 벗의 해석[勝友解]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도 탐··치 삼독을 구족한 범부라 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고 성질을 부리기도 한다. 매사에 불평불만이 있어 한 번 화를 내면 마치 태풍이 불고 소나기가 내리는 것과도 같다.

  단지 우리가 염불을 한다는 이유로 등각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데 이는 우리가 염불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오로지 염불을 의지하지 않고 잡수잡행을 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18원과 19원은 신분과 기능이 완전히 다른데, 성취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중생들은 그 명호를 듣고 신심을 내어 기뻐하거나, 혹은 한 생각만이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하여 극락국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한다면 즉시 왕생하여 불퇴전에 머물게 될 것이다."

 

  즉시에 왕생을 할 수 있는 신분을 갖추고 바로 불퇴전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락의 글은 제18원을 해석하는 것이지, 19원에 대한 해석은 아니다.

 

  제19원에서는 보리심을 일으키고 온갖 공덕을 닦는다고 했다. 그 사람이 비록 보리심을 일으키고 여러 가지 법문을 닦은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한다지만 사실상 그 사람의 공덕은 여전히 유루(有漏)여서 번뇌가 섞여있다.

 

  오로지 아미타불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결코즉시 왕생하여 불퇴전에 머무른다.는 이러한 신분을 얻지 못한다.



제3장 문답  

 

  1. 믿음에 관하여  

 

  염불에는 여러 가지 이익이 있다고 했는데 무슨 증거가 있는가?  

  저희가 편찬한《염불감응록》속에는 여러 가지 수승한 사례들이 있는데, 여러분이 한 편으로는 염불의 이치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염불에 관한 감응사례들을 보면서 서로 대조하면서 확인을 해본다면 믿음을 일으킬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불성이 있고 불성 속에서 지혜의 성품[慧性]이 있기 때문에 책을 많이 보다보면 이치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여러분들 스스로 사고하고 분별하여 판단을 할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교리도 모르고 이러한 사실의 증거도 모른다면 당연히 의문이 생길 것이다. "진실로 그런 일이 있을까?" "아미타불을 친견한 사람은 극소수 일뿐인데…."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부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아직 인연이 닿지 않아서 일뿐이지, 언젠가는 친견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우리가 임종할 때가 되면 반드시 아미타불을 친견할 수가 있다.  

  지금 우리가 아직 부처님을 뵙지 못했지만 우선 《염불감응록》을 통하여 아미타불의 존재와 아미타불의 구제, 그리고 염불하는 사람들이 재난을 소멸한 사례들을 많이 보고나면 자연히 믿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믿고 나서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다.

 

  그런데 믿고 나서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다면 지금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상 사람은 모두 번뇌가 있으므로 때로는 탐·진·치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가끔씩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을 품을 수도 있다.  

 

  만약에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무방하다. 스스로 우리들에게 두 번째 길이 없고, 오직 염불을 해야만 구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비록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심이 들더라도 크게 장애되지는 않는다.  

  여러분이 설사 의심이 있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여전히 아미타불의 존재를 믿고 아미타불의 구제를 안다면 여전히 계속해서 염불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아미타불의 광명의 섭취 가운데 있으므로 임종시에 아미타불께서 몸을 나투셔서 영접을 하게 된다.

 

  우리의 법문은 여러분이 알든 모르든, 믿든 믿지 않던 간에 염불만 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중생들이 칭명을 하면 반드시 왕생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원점으로 돌아와서 만약 여러분이 전혀 이해를 못하고 전혀 믿을 수 없다면 전수염불을 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를 하고 믿음을 일으켜야 전수염불을 할 수 있으며, 이렇게 되어야만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지 않고 장애가 되지 않는다.

 

  2.염불의 숫자  

 

  저는 금강념(金剛念)을 강조하는데 가늘게 흐르는 물이 끊임없이 오래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음이 무기력하면 입으로써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마음속에 힘이 없다면 입을 이용해야 한다. 염불하는 사람이 입을 움직이면 마음도 자연히 따라서 부르게 되는데, 만약 입을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마음속으로만 부른다면 아주 쉽게 염불을 잃게 되고 쉽게 망상과 잡념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는 염불을 하는데 숫자를 정하지 않고 애써서 억지로 하지도 않는다. 염불은 제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며 염불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 사람이 염불을 하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있어서, 익숙한 것이 생소하게 바뀌고 생소한 것이 익숙하게 되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온종일 망상과 잡념 속에서 살면서 하루 동안 염불한 숫자를 통계해 보면 몇 백 번도 채 안될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조석으로 시간을 정해서 조용히 앉아 염불을 하거나, 아니면 하루 동안 규칙적으로 천 번, 오천 번, 만 번의 숫자를 정해서 염불을 한다면, 아무리 염불을 못해도 최소한 정해놓은 천 번, 오천 번, 만 번의 숫자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초학자들은 매일 염불하는 숫자를 정해두어야 한다. 조석으로 조용히 앉아서 염불을 하는 것 외에, 만약 낮에도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숫자를 정해서 염불을 하셔야 한다.

 

  이렇게 오래오래 하다보면 습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설사 여러분이 염불의 숫자를 정하지 않고, 또 염주를 돌리며 염불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부처님을 떠올리며 염불을 하게 되는데, 입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자주 염불을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다.  

 

  3. 신앙은 곧 생명이다  

 

  인생에서 신앙은 매우 중요하며 신앙은 곧 수행인의 생명이다.

  나의 신앙은 오직 불교만이 육도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고, 오직 불교만이 우주와 인생의 진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8만 4천 법문 중에서 나는 오직 아미타불만이 나를 위하여 48대원을 세웠고, 나를 위해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우셨음을 믿는다.  

  시방세계에 부처님이 비록 많고 많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오직 아미타불 한 분만 계신다.  

  8만 4천 법문 중에서 나의 마음속에는 오직 나무아미타불께서 중생들을 구제해주시는 이 법문만이 나로 하여금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고, 비단 육도윤회를 벗어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생하여 성불을 할 수 있으며, 다른 부처님과 다른 법문에는 없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몸과 마음의 생명, 즉 생사윤회를 하는 이 목숨을 전부 아미타불에게 바쳐 의지해야 한다. 오직 아미타불 한 부처님만을 내가 이 몸이 다 할 때까지 목숨 바쳐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 빨리 성불을 할 수 있는 의지대상으로 삼을 뿐, 두 번째 부처님도 세 번째 부처님도 없고 다른 법문 역시 없다.  

 

  이럴 수만 있다면 이러한 신앙은 바로 당신의 생명이다. 신앙이 있다면 당신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이고, 신앙이 없다면 당신에겐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해탈의 생명이 없으며 성불의 생명 또한 없다. 따라서 신앙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이고 가장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부모님도 중요하고 자식도 중요하며, 남편과 아내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맨 나중에는 전부 우리를 버리고 떠나게 된다. 결국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뿐이고, 오직 우리 자신의 신앙뿐이다.  

 

  4. 아미타불은 본존이다[彌陀本尊]  

 

  우리의 법당에 모셔진 본존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한 분 뿐이다. 그 외에 다른 불보살님도 없고 서방삼성(西方三聖)도 없으며, 오직 아미타불 한 분밖에 없다. 왜 그런가?  

 

  가장 근본이고 가장 중요하며, 가장 높고 가장 귀하며, 유일무이하여 대신할 수 없는 분을「본존(本尊)」이라 부른다. 본존은 신앙자의 근본이며 유일무이하게 받드는 분이시며, 신앙자가 생명의 전부를 의탁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이 본존이 계셔야 자신의 생명이 있고, 이 본존이 안 계시면 자신의 생명 역시 없으므로, 자신의 해탈의 생명과 성불의 생명은 전적으로 본존에게 의지하게 된다. 따라서 본존은 왕과도 같아서, 제일 높고 절대적이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유일무이하여 둘도 셋도 넷도 없다.

  절대로 이 불보살님은 나의 본존이고, 저 불보살님도 나의 본존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일은 없다.  

 

  아미타불에 대해 비교해서도 안 되고 동등한 입장에서 논해서도 안 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을 수도 없다. 우리의 본존은 시종일관 아미타불 한 분밖에 없으시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려면 오직 아미타불께만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께 예배를 하려면 오직 아미타불께만 예배하며,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려면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만 불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專)이다. 여기서 한 사람의 유일무이한 신앙이 드러난다. 진리는 하나다. 따라서 우리의 법당은 잡다하지 않게 오직 나무아미타불 한 분만 모셔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법문을 닦으신다면 수행하는 법문에 따라 각자 다른 본존을 모실 수 있다.

  그러나 정토법문을 닦는 분이라면 법당에 모시는 부처님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한 분이면 족하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은 아미타불의 협시(脇侍)이자 시자이며 아미타불을 의지하여 왕생한 분들로서, 우리와는 훌륭한 벗의 관계이므로 따로 본존으로 모시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전부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 등 여러 대보살님들도 항상 따라다니므로 오로지 아미타불을 믿고 명호를 부른다면 자연스럽게 수승한 효과를 보게 된다.  

 

  우리가 만약 이 부처님도 모시고 저 보살님도 모신다면 믿음이 순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행도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수승한 효과를 볼 수가 없다.  

 

  5. 법당의 배치  

 

  우리의 법당에 걸려 있는 것은 전부 극락세계와 아미타불, 우리의 이 법문과 전부 관련이 있다. 관련이 없는 것들은 우리는 걸지도 배치해 두지도 않는다. 우리는 아미타불의 내영도, 극락세계장엄도, 혹은 이 법문의 경전법어, 조사 법어를 걸어둘 수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신앙을 나타내는데, 그 사람에게는 신앙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속(專屬)적인 신앙이 있어 잡신잡행(雜信雜行)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6. 수행자의 생활  

 

  우리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할 줄 알아야 한다. 집안에 물건들의 배치는 소박하면서 간결하여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하거나 뒤죽박죽 난잡해서도 안 된다. 필요한 것만 꺼내놓고 필요 없는 것들은 일절 배치해두지 않으며, 배치를 한다면 반드시 가지런하면서 청결하게 해야 한다.  

 

  이 세상은 우리들이 잠시 머무는 여관과도 같고 우리들은 잠시 쉬었다가는 나그네와 같다. 따라서 불필요한 잡동사니들은 신외지물(身外之物)이므로 너무 세속적인 물건들은 배치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배치를 하더라도 전부 불법과 정토와 관련이 있는 것들로, 우리의 눈에 띄는 것들은 전부 극락세계와 관련 있는 풍경들이여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나타내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가 아직 부족하고 한계가 있으며 심지어 천박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앙이 깊을수록 그 법문의 정수(精髓)를 얻을 수 있으며, 우리의 이 법문은 신앙이 깊고 전일(專一)할수록 천명이 닦으면 천명이 왕생하고, 만 명이 닦으면 만 명이 왕생할 수 있다.  

 

  원컨대 이 공덕으로 [願以此功德]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게 베푸나니 [平等施一切],  

  다 함께 보리심을 내어 [同發菩提心]  

  극락세계에 왕생할지어다 [往生安樂國].

 

             출처 / 純淨時代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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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이초 (歎異抄)

 

탄이초》(歎異抄)는 일본유이엔(唯圓, 1222∼1289)이 그의 스승인 신란스님(親鸞, 1173∼1263)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이다.

 

정토진종(淨土眞宗)을 개척한 신란스님은 일본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잘 알려진 스님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20∼30년 사이에 직계 제자들마저 하나둘씩 사라져가면서 아쉽게도 그의 신심과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이 사태를 슬퍼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느낀 제자 중 한 사람인 유이엔이,

 

스승 신란스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계승되어 세상의 빛이 되어가기를 기원하면서 만든 것이 이 《탄이초》다. 그는 진실한 신심에 대해 스승이 남긴 말씀을 글로 모으고, 나아가 잘못된 신심에 대해 비판을 덧붙이기로 했다. 그 결과, 그가 스승의 말을 기억하며 쓴 이 《탄이초》는 후대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탄이초 (歎異抄)

 

제1장.

아미타부처님께서 목숨을 걸고 맹세하시고 약속하신 본원의 불가사의한 작용으로 구제를 받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난다는것을 굳게 믿고 염불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 바로 아미타부처님께서 거두시어 버려지지

않으시는 최대의 이익을 주시어 무량한 지혜와 자비의 작용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는 노인이라든가, 젊은이라든가, 선인이라든가, 악인이라든가 하는 차별은 없다.

단지 신심 하나만은 긴요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는 것은, 악만을 겹쳐서 죄가 깊은 우리,

타고 있는 불과 같이 번민하고 괴로와하는 마음이 격렬한 우리들을 구제하겠다고 발원하신 것이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원을 믿는데는 다른 어떠한 선도 필요없다. 염불보다 수승한 선은 없기때문이다. 어떠한 악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방해할 만한 악은 없기때문이다. 라고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2 장.

당신들이 머나먼 간또에서 교도까지 십여개국의 국경을 넘어서 생명을 걸고 찾아온 그 목적은 아미타부처님

정토에 왕생하는 길을 물어 듣고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신란이 염불 이외에 정토에 가는

길을 알고 있다거나, 또는 그러한 것들이 쓰여져있는 경전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여 그 진상을 알고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나라나 히에이산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정토에

왕생하는 요점을 납득하고 흡족할 때까지 잘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란에게는 단지 염불하여

아미타부처님에게 구제받고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그것을 믿을 뿐 특별한 연유라고 하는것은 하나도 없다.

염불은 참말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씨앗이 되는 것일까? 또는 지옥에 떨어지는 업일 것인가? 하는 것들은

나에게는 알바가 아니다. 가령 호넹상인(법연스님)에게 속아서 염불하여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염불 이외에 수행함으로써 부처가 될 수 있는 몸이 염불을 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다면 속았다하는 후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수행도 하지 못하는 이 몸이기에,

나에게는 어차피 지옥은 면할 수 없는 결정된 곳이기 때문이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이 진실이라면 석존께서 설하신 가르침도 거짓말이 아닐 것이며 석존이 설하신 가르침이

진실이라고 하면 선도대사의 해석도 거짓말이 아닐 것이며, 선도대사의 해석이 진실이라면 호넹상인(법연스님)의

가르침 또한 어찌 거짓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호넹상인(법연스님)의 가르침이 진실이라면 신란도 지금까지 허망한 거짓말을 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답답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몸이 받은 나의 신심은 이런 것이다. 그러니 이 후로는 염불을 받아들여

믿든 않든 그것도 당신들 각자가 결정할 일이라고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3 장

선인조차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하물며 악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세간 사람들은 항상 이런식으로 말하고 있다.
악인인데도 정토에 태어난다. 하물며 선인은 말할 것도 없다 고 말한다.

여기에는 우선 그럴듯한 도리가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들지 모르나 아미타부처님의 본원 타력의 마음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힘을 신뢰하고 선행을 닦아서 그것에 의하여 깨달음을 열고자 하는 사람은

한줄로 본원의 작용을 믿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미타부처님 본원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자력에 빠진 마음을 뒤집어 타력을 믿으면 아미타부처님 진실의 세계에 태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번민이나 걱정거리를 모두 다 구비해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염불 이외에 다른 어떠한 수행으로도

미혹의 인생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깊이 슬퍼하시어 본원을 일으키신 아미타부처님의 진의는 이러한 악인을 부처로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 때문에

타력을 믿는 악인은 가장 수승한 왕생의 정인인 것이다. 그러기에 선인조차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하물며 악인은 말할 필요가 없다 라고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4 장

자비에도 성도의 자비와 정토의 자비 두 가지가 있다.
성도의 자비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온갖 생물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보육하고저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구제하기란 지극히 곤란하다.
정토의 자비라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본원을 믿고 염불하여 서둘러서 부처가
되어 부처의 대자대비의 마음을 가지고 마음먹은 대로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을 구제하는 것을말한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애처럽고 가여운 일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일이 있어도 자기 마음대로
구제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성도의 자비는 수미일관(처음부터 까지 한결같이 )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본원을 믿고 엄불하는 것만이 참답고 철저한 대자대비라고 할 수 있다라고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5 장

신란은 부모님에게 명복을 빌며 불공을 올리고 염불한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다라고 말한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모두 다 기나긴 세월동안 생애을 윤회하는 동안에 부모로도 되고 형제로도 되어왔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나 다 염불하는 사람들은 다음생애는 부처가 되어 구제할 것이다. 염불이 만약에

자기 힘을 신뢰하여 이루어지는 선행이라고 한다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불공도 올리고

염불을 회향하여 부모님을 구제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력에 사로잡힌 마음을 버리고 염불하여 부지런히 아미타부처님

정토에 태어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정토의 깨달음을 연다면, 가령 지옥에서도 아귀에서도 축생에서도

어떠한 세계에서 어떠한 고통에 빠진다해도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작용으로 우선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구제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6 장

오로지 염불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중에는 "자기제자다" "다른 사람 제자다" 하며 다투고 있는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란은 제자라고 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은 자기 역량으로 사람에게 염불을 하도록
할 수 있다면 제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나 다만 순전히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이끌려
염불하는 사람을 자기 제자라고 하는 것은 전혀 말도 안된다.
"맺을 연이 있으면 맺어지고 헤어지는 연이 있으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까지 모시고 염불하는

스승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따라 염불을 한다면 아미타부처님 세계에 태어날 수 없다. 고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부처님께서 주신 신심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돌려 받고자 하는 것인지, 그러한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아니될 일이다.

만약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의 자연도리에 맞는다면 스스로 부처의 은혜를 알고, 또 스승의
은혜도 알 것이다 라고 이렇게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7 장

염불은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외줄의 큰 길이다.
(그러기에 염불하는 사람을 무애일도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염불을 믿는 사람에게는 천지신명이 공경하고 모시기 때문에 마계에서나
외도에서도 방해할 수 없다.
어떠한 죄악도 그 행위결과를 느끼는 일이 없다. 어떠한 선도 이 염불에 미치는 것이 없다.
그러기에 염불은 무애일도인 것이다. 라고 신란성인께서 말씀하셨다.

제 8 장

염불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행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자기의 분별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이라고 한다.
자기의 분별로서 이루어지는 선도 아니기 때문에 비선이라고 한다.
염불은 전혀 아미타부처님 본원의 작용인 타력이지 자력의 분별을 벗어나 있다.
그러기에 염불을 칭하는 행자에 있어서는 행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라고 이렇게 신란성인께서 말씀하셨다.

제 9 장

"염불을 칭하고 있으나 펄쩍 뛰어오를 것같이 환희의 마음이 그토록 절실히 느끼지 못하며
또 부지런히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에 가고자 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하고 물어본 즉 '신란도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유이엥보야, 너도 같은
마음을 기지고 있었느냐? 곰곰히 생각하고 생각해보면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춤을 출 만큼
기뻐해야할 일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정토에 점점 왕생하는 것은 결정된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뻐할 마음을 누르고 기뻐하지 않게 하는 것은 번뇌의 짓인 것이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은 이미 이런 것들을 잘 알고,
"번뇌덩어리인 범부야" 하고 불러 주시기 때문에 아미타부처님의 타력의 비원은 이와같은
우리들을 구제하시기 위하여 일으키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더 믿음직하게 생각
될 것이다. 또 아미타부처님의 정토로 급히 가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잠시 병이라도 나면
죽는것이나 아닐까 하고 마음 졸이게 되는 것도 번뇌의 짓인 것이다.

먼 옛부터 지금까지 헤매어 오던 고뇌의 고향을 버리기 어렵고 또 태어나 보지도 않는 것은
참말로 어디까지나 번뇌의 심한 뿌리가 강하고 단단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헤어지기 섭섭할지라도 이 세상 연이 다 되어 자기로서는 어찌하지 못하게
되어 생명이 끝날때 아미타부처님의 정토로 가게 되는 것이다.

아미타부처님께서는 급히 정토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특히 측은하게 생각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점점 아미타부처님의 대자대비의 본원은 믿음직하며 왕생이
결정된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펄쩍 뛰어오를 환희의 마음도 있고 급히 정토로 가고싶다고
하면 번뇌는 없는 것일까? 하고 도리어 의심스럽게 생각될 것이다. 라고 이와같이 신란성인
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10 장

염불에는 인간의 분별이 없는 것을 가지고 본의로 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려나 분별을
가지고서는 말로 나타내어 찬사를 하거나 설하는 것도 생각으로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신란성인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11 장

문자하나 모르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염불을 칭하고 있는데 대하여 '너는 아미타부처님
서원의 불가사의를 믿고 염불하는 것인가' 하는 등으로 겁을 줄 뿐, 서원과 명호의 두 가지의

불가사의한 뜻을 잘 이해하도록 설명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헷갈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일은 아무쪼록 주의하여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아미타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을 전부 빠짐없이 구제하시고야 말겠다는 서원의 불가사의한
활동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유지하고 부르기 쉬운 명호를 골라서 ' 이 명호를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정토에서 맞이하리라' 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아미타부처님의 대비본원에서 나오는 불가사의한 힘에
구제받아 이 미혹의 세계를 떠나 정토에 태어난다. 고 믿고 염불을 부를 수 있는 것도
부처님의 마음에 의한 것이다라고 결정한다면 거기에는 자기의 사려에 그대로 아미타부처님

본원에 이루어져 진실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원의 불가사의가 구제의 근본이라고 믿으면 스스로 거기에는 명호의 위대한 활동도

갖추어지므로 서원불사의와 명호불사의는 원래 하나인 것이지 달리 틀린 것이 아니다.


다음에 스스로의 사려나 분별에 있어서 선과 악의 두 가지에 대하여 선은 왕생에 도움이 되고 악은 왕생에

방해가 된다는 두가지의 양상으로 구별하여 생각한다. 이것은 서원의 불사의를 믿지 않고 자기의 마음으로

왕생하기 위한 행을 분발하여 원래 염불은 본원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부르는 염불조차도 자력의

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본원의 불사의를 의심하고 염불하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명호의 불가사의도 믿지는 않는 것이다.
본원과 명호의 불가사의는 믿지는 않으나 염불의 힘으로 변지, 해만, 의성, 태궁이라는 방편세계에 왕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력의 염불을 하는 사람도 구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완수하시겠다는
맹세로 마침내 진실한 정토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명호의 크나큰 힘에 의한 것이며 이것은 그대로 서원불사의한 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서원과 명호는 완전히 하나인 것이다.

제 12 장

여러 가지 경전과 그 주석서를 읽으며 학문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토에 왕새할 수 있을 것인지 미덥지가 않다고

말하는데 대하여 이것은 전혀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의 진실한 취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 모든 성교는 어떠한 것이든 본원을 믿고 염불하면

부처가 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외에 어떠한 학문이 왕생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하는 것일까, 참말로 이 도리에

갈팡질팡 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학문을 해서 본원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경전과 주석서를 읽어가며

공부를 한다해도 성교의 참마음을 몰라서야 너무나 딱한 일이다.

문자 하나 모르는 무학자로서 경전과 주석서의 줄거리조차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하고자 하는

 나무아미타불의 명호이기 때문에 이 염불을 이행이라고 한다.
이것에 대하여 학문을 중심으로 자력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성자의 길로서 이것을 난행이라 이름한다.

'학문하면서 방향을 잘못 잡아 명예나 재물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이 일생이 끝이 나고
다음에는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가 된다는 것도 어떻게 되겠는지' 하고 가르쳐 주시는
확실한 문서도 현재에 있는 것이다.

오로지 염불만 하며 생활하는 사람과 성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 교의에 대하여 논쟁을 하며
'자기의 종지만이 우월하고 타인의 종지는 뒤떨어진다' 는 등의 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불법을 비방하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자기가 믿는 불법을 파괴하고 가르침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모든 종파사람들이 똑같이 '염불은 쓸데 없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 종교는 천박하고 저속하다.

고 말하더라도 조금도 다투지 말고 우리와 같은 능력도 없고 평범한 인간이고
문자 하나 모르는 무학자가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한 줄기로 믿으면 즉시 구제된다는
가르침을 듣고 믿고 있기 때문에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자력으로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저속한 가르침으로 보일 것이나 우리에게는 더없는 거룩한 가르침이다.

가령 염불보다 다른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는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거기에 쫓아서

수행할 수 없다.
'나나 다른 사람도 다같이 생사의 미혹에서 벗어나 깨닫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본의일 것이나 우리들이

염불하는 것을 제발 방해하지 마십시요' 라고 말하고 보기 싫은 태도를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적대하겠는가.

거기에 또 '논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여러 가지 번뇌가 일어난다. 진실로 지혜 있는 자는 다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라고 하는 확실한 가르침의 말씀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안 계신 신란성인이 말씀하시기를 ' 이 염불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또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라고 전부터 부처님께서 설하여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미 믿고 있다.

그러나 또 비방하는 사람이 있음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실한 것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점점 결정된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
만약 비방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믿는 사람은 있을 것이나 어째서 비방하는 사람이 없을까 하고 생각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꼭 사람에게서 비방을 받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전부터 믿는 사람과 비방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잘 알고 계시어 사람들에게
의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설하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최근에는 학문을 하여 그 힘으로 사람을 비방하는 것을 누르고 오로지 노의나 문답에 주력을

집중하고자 몸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학문을 하면은 점점 깊이 부처님의 본원의 진실한 마음을 알아 그 비원이 얼마나 광대한 것인가를 양해하고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죄심한 몸으로는 대체로 왕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는 선인, 악인이라든가 정결한 사람, 더러운 사람이라든가 하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설하여 들려 주므로서 그것이 학문했다는 사람의 가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 일도 없이 순박하게 본원의 마음에 맞게 염불하는 사람에게 까지도
'학문해야만 왕생 할 수 있다'는 등 하는 말로 겁을 주는 것은 불법을 방해하는 악마이며
부처님에게 덤벼드는 적인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자신에게 본원타력의 진실한 신심의 부족할 뿐 아니라 잘못하여 타인에게도 갈피를

못 잡게 하게 되는 것이다. 삼가 두려워해야한다. 신란님의 마음을 거역함은 더 한층 슬픈 일이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 어긋나는 것을.

탄이초 13장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고 하여 악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요컨데 본원에 응석부리는

본원자랑으로서 그런 사람은 정토에 왕생시킬 수 없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이것은 본원을 의심하는 것이며

또 다시 선악이 숙업에 의한 것임을 모르는 것이다.

또 악을 생각해서나 행하는 것도 어쨓든 과거의 악행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지금은 안계신 신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토끼털이나 염소털 끝에 묻은 먼지만큼의 아무리 지응 죄악이라

해도 과거의 사려나 언동에 의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또 어느때 유이엔보는 내 말을 믿느냐. 하고 물으시기 때문에 네 믿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내가 하는

말에 절대 거역하지 않겠느냐하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래서 겸손하게 승락했던바 성인께서는 그렇다면 우선 사람을 천명 죽여주겠느냐, 그러면 너의 왕생은

틀림없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존엄한 말씀이나 단 한사람도 이 나의 힘으로는 죽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니 그렇다면 어째서 신란의 말을 거역하지 않겠다고 했느냐고 말씀하시며 이것으로 잘 알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왕생하기 위해서 천명 죽이라면 당장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사람도 죽일수 있는 업연이 없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는 것이다. 또 반대로 아무리 죽이지 않겠다고

생각해도 백명 천명이라는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우리들이 자기 마음이 좋은 것은 왕생을 위하여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이 나쁜 것은 왕생을

위하여 나쁜일이라고 스스로의 생각에 사로잡혀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의 불사의한 힘으로 구제 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 주신것이다.

일찌기 신란께서 살아계실때 비뚤어진 생각에 빠진 사람이 있어 죄악을 범한 사람을 구제하시러 나쁜 짓을

좋아하고 그것을 가지고 왕생의 업으로 삼고자 여러 가지 나쁜 짓을 거듭한다는 소문을 들으신 성인께서는

서신을 통하여 아무리 독을 없애는 약이 있다고 하여 독을 좋아서 마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고 쓰신 것은

그러한 사견에 사로잡히지 못하게 하기 위한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악이 왕생하는 방해된다는 것은 아니다.
계율를 지키므로서 만이 본원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어찌하여 생사의 미혹에서

해방할 수 있겠는가. 이와같이 한심한 죄악의 몸이라고 해도 본원을 만나 그 부처님 마음을 얻음으로써 참으로

본원의 존중함을 뽐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몸에 갖추어지지 않은 악업은 설마 범할 수도 없을 것이다.

또 바다나 강에서 그물을 치고 낚시를 하여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들과 산에서 새와 짐승을 수렵하여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나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모두 다 똑같아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될 업연에 재촉

받으면 인간은 어떠한 짓이라도 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신란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요즘에는 정말로 자기가

 

신심가나 되는 것처럼 굴면서 착한 사람만이 염불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혹은 염불도량에 써서 붙이기를

이러이러한 짓을 한 사람은 이 도량에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전혀 표면의 형체만 가장 재지에

우수한 자만이 선행 분발하고, 오직 불도에 정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고 있으나 그 내실은 잘못된

거짓말로 꽉 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본원을 자랑삼아 그것에 응석부려 범한 죄악도 숙업에 재촉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무엇이든 모두다 과거 행위의 결과라고 받아들이고 오직 본원을 믿어 타력에

의하여 살게되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유신초에도 아미타부처님에게는 도대체 얼마만한 힘이 있는 것이라고 알기에 자기와 같은 죄가 깊은

몸은 도저히 구제되기 힘들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닌가.

본원을 자랑하며 그것에 응석을 부릴만한 마음에 있어서만이 타력을 믿은 신심도 확실히 정해질 것이다. 대체로,

이 몸의 죄악과 번뇌를 완전히 끊어버린후에 본원을 믿는다고 한다면 본원에 응석부리는 마음이 없어도 좋을

것이나 번뇌를 끊어버리면 곧 부처가 되기에 그 부처에게는 오겁사유의 본원은 전혀 필요없는 것이 될 것이다.

본원을 자랑마라. 응석부리지 말라하고 경고하는 사람들도 역시 죄나 불결한 것을 모조리 그 몸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본원을 자랑하고 응석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떠한 악을 본원에 응석부리는 본원자랑이라고

하는 것일까. 결국은 본원을 자랑하는 사람은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실은 도리어 본원을 받아들일

마음이 얕고 유치할 것이다.

제 14 장


한 마디 염불로서 80억겁 동안이나 기나긴 세월을  두고 고통 속에서 헤메이는 중죄를 멸한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이 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이것은 십악, 오역의 중죄를 범한 사람이 평소에는
염불한 일이 없어도 생명이 다하려고 할 때에 처음으로 좋은 스승이 가르침에 따라 한 소리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면 80억겁이라고 길고 긴

 

세월동안의 죄가 소멸되고 열 번 소리내어
염불하면 또다시 그10배나 되는 중죄가 소멸되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십악오역이라는 죄의 중하고 심오한 것을 알리고자 일성의 염불, 십성의 염불로 말씀하신
것일까.


특히 이것은 임종에 있어서의 멸죄의 이익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멸죄를 기대하고 염불을
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믿는 타력 신심에는 아직도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을
비추어 소중히 지켜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한번 염불을 부를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금강과
같은 존중하고 견고한 신심을 주시므로

 

그떄 이미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가 된다는 불퇴전의
지위에 머무르게 해주시어 생명이 끝날 때는 일체의 번뇌나 악의 방해가 방향을 바꾸어 생사를 떠나
절대무한, 그 자체가 된다는 무상의 깨달음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이 대비의 본원이 없더라면 우리들과 같은 한심한 죄악의 몸이 어떻게 생사의 미혹에서 자유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일생동안 부르는 염불은 모두가 다 이와 같은 우리들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의
자비의 은혜에 보은하는 그 광대한 공덕에 감사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염불을 할 때마다 그 염불의 힘으로 죄를 없애 보자고 미든 그것은 이미 자기의 힘으로 죄를 없애고 정토에
왕생하고자 힘쓰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일생 동안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은 전부 이 생사의 미혹의 세계에서 나의 몸을 붙들어
매는 굴레가 아닌 것은 없기 떄문에 생명이 다 할 최후까지 부지런히 염불을 지속해서만이 정토에
왕생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는 하나 인간의 생활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한정이 있을 것이니 어떠한 생각도 안했던
뜻밖에 일을 만나게 될른지 또 병으로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려 정념을 잊은 채로 생명이 끝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염불을 한다는 것은 좀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 염불을 부르지 못한 그간의 죄는
어떻게 없애겠다는 것일까.
만약 죄가 없어지지 않았으면 정토에는 왕생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그러나 섭취불사원을 신봉하면 어떠한 뜻하지 않는 일을 당하여 죄업을 범하여 염불을 부르지도 못하고
생명이 끊어 졌다 하더라도 즉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행히도 임종시에 염불을 하게 되는 것도 그것은 확실히 진실한 깨달음이 열리려고 할 때가 가까워
짐으로써 점점 깊이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믿고 광대한 은혜에 보사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염불하여 죄를 멸하고 그것에 따라서 왕생 할려고 생각하는 것은 자력의 마음으로 이것은 임종정념을
믿고 있는 사람의 본심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람에게는 타력의 신심이 부족한 것이다.

 

제 15 장

신심을 얻은 사람은 온갖 번뇌를 구비하고 있는 이 육신을 가진 채 그대로 이미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이것은 당치도 않는 일이다.
현재 살고 있는 이 육신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진언종에서 설하는 비밀의 가르침의 근본 마음이고
이것은 수행자의 손에 인을 맺고 입으로는 진언을 부르고, 마음으로는 본존을 본다는 삼밀의 수행의
대일여래의 신구의 삼밀에 상응되어 얻어지는 깨달음이다.


또 신심(안이비설신의)의 더러움을 씻어 흘려버려 깨끗이 하고 자유자재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승의 가르침인 법화경에 설하신 곳에 사안락행을 닦음으로써 감득하는 경지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부 보통사람이 행하기에는 어렵고 특히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아니면 견디지
못할 수행으로서 망념을 털어버리고 마음을 가라앉혀 진실을 관찰하고 체득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깨달음이다.


이것에 대하여 미래에 정토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여는 것은 정토진종, 절대타력의 근본정신이다.
다시 말하면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믿었을 때 바른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가 된다고 결정하는 길이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리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행하기 쉽고 보존하기 쉬운 염불의 대도이고
선인과 악인을 차별하지 않고 구제해주시는 진실교법인 것이다.
대체로 이 인생에 있어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번뇌와 악의 방해를 끊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기 때문에 진언이나 법화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성승조차도 이생애가
끝이 나면 다음에는 정토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열기를 비는 것이다.


하물며 이 우리들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서 깨달음을 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에게는 규율을 지켜 바르게 생활하는 일도 아니고 진실한 지혜를 가지고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일도 없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본원선에 승탁하여 끝이 없는 생사의 고해를 건너 정토의
피안에 도착하면 번뇌의 먹구름은 바로 거치고, 진여의 깨달음의 달은 신속하게 나타나 만월과
같이 빛나서 어떠한 것에도 방해 받지 않고 시방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비추는 아미타부처님의
광명과 한몸이 되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을 구제할 것이다.


그때야말로 진실로 깨달음을 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육신을 가진 채 깨달음을 열어
부처가 된다고 하는 사람은 석존과 같이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끌기 위하여
그 사람의 능력과 요구에 응하여 여러 가지로 모습을 변화하여 나타내는 그 몸은 크게는
32상, 적게는 80종호의 부처로서 귀중하고 뛰어난 특징을 전부 갖추고 법을 설하고
사람들을 구제하시는 것일 것이다.

 

이 석존과 같이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을 이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
의 모범이라고 말하고 것이다.
신랑성인께서는 와상에 흔들림이 없는 진실한 신심이 결정될 그때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대비의
광명에 섭취되어 영구히 생사의 미혹을 벗어나게 해주신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과 같이 진실의
신심이 결정할 때 한번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속에 섭취되면 두 번 다시 버려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벌써 이미 미혹의 세계에 돌아가 끝도 한도 없는 생사를 반복하는 일은 없다. 그러기에 영구히
생사의 미혹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고 아는 것을 어찌하여 깨달음을 열어서 부처가 된다고 얼버무리는 것으로 좋을
것인지 참으로 애처롭고 딱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정토진종의 가르침은 이 현생에 있어서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믿고 염불하는 몸이 되어
피안의 정토에 왕생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라고 호넹상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라고
지금은 안계신 신랑성인께서는 말씀하신 것이다.

제 16 장

본원을 믿고 염불을 부르고 있는 사람은 알게 모르게 무의식중에 화를 내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같은 염불을 배우는 친구끼리 언쟁할 때는 그 때마다 반드시 회심해야 한다는 말은 자기힘으로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닦아서 정토에 왕생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그저 한마음으로 본원을 믿고 염불만을 부르는 사람에 있어서는 회심이라는 것은 생애에 단
한번 밖에 없다.


그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아미타부처님의 본원과 절대타력으로 많이 구제될 수 있다고 설하는
정토진종의 가르침을 몰랐던 사람이 아미타부처님 지혜를 얻어 지금까지 먹고 있든 마음으로서는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력에 빼앗겼던 마음을 뒤집어 본원타력을 믿는 것을
회심이라고 한다.


만약 모든 것이 조석으로 쉴새없이 회심하여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의 목숨은 내뱉은
숨을 들어마시기도 전에 목숨을 거두게 될것인즉 회심도 못하고 온화하고 평화한 마음,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거역하지 않는 인욕의 마음이 되기도 전에 목숨이 끊어진다면, 모든 사람들을 섭취불사
한다는 아미타부처님의 서원은 아무 역할도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입으로만 본원의 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악인을 구제 하겠다고 하는
본원이 아무리 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역시 선인을 우선 구제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염불의 가르침을 받고 있으면서도 본원의 힘을 의심하고 타력을 믿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진실한 정토에서는 멀고먼 변지에 태어나서 거기에 머물러 있게되어 결국에는 구제 받지 못하고
끝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한번 신심이 결정되면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아미타부처님의 뜻대로 하시게 되는 것인지라 결코
자력으로 분별해서는 안된다.
내 몸의 나쁜 것을 안다고 해도 점점 이와 같은 악인을 구제하시는 본원의 힘을 받들면 자연의 도리에
의하여 유화하고 인욕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왕생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똑똑한 체하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홀딱 반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의 은혜가 심중하다는 것을 언제나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그러면 염불도 혼자서 부를 수 있어, 이것이 자연이다.
우리 인간들의 사려나 분별이 섞이지 안고 자력의 계량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한다.
이것이 말하자면 본원타력인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과는 별도로 특별한 것으로 있는 것같이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한탄스러운 일이다.

제 17 장

정토의 변지에 왕생하는 사람은 최후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느
경전, 주석서에 그 증거가 될만한 문서가 있단 말인가?
거기다 이런한 말이 학자라고 하는 사람 중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경전이나 주석서 등의 성전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진실의 신심이 부족한 염불은 아미타의 본원을 의심하기 때문에 정토의 변지에 태어나 본원을
의심한 죄의 깊음을 알아서 그 죄를 다 받은 다음 진실한 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열어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다.


진실한 신심을 얻은 염불자는 적기 때문에 아미타부처님께서는 자력으로 염불을 불러 본원을 의심
하는 사람도 정토에 끌어들여 넣고자 그 과정으로서 변지에 왕생할 것을 많이 권장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 변지에 왕생하는 사람은 최후에는 허무하게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되는 것이다.

제 18 장

불사를 하고 있는 사원이나 승려에게 시주 돈을 많이 내고 적게 내는 데 따라 정토에 태어나서
큰 부처가 되고 작은 부처가 된다는 것은 전혀 언어도단인 것이며, 매우 꽤씸한 일이다.
우선 먼저 부처님 몸이 크고 작다는 그 분량을 정한다는 것 등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저 안양정토의 교주이신 아미타부처님의 불신의 크기를 경전에 설하고 계신 것도 그것은 우리들이
부처님의 진실과 그 무한한 힘에 눈 뜨게 하시기 위하여 설하신 임시의 모습인 방편의 형태인 것이다.
만약 한번 진실하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여법성의 깨달음을 열고 길다거나 짧다거나 사각이라든가
둥글다거나 하는 모양을 초월하여 청,황,적,백,흑 이라는 색을 떠난다면 어떻게 불신의 크고 작음을
정할 수 있겠는가.


경전에는 염불을 부를 때 그 사람 세계에 모습을 나타내 주시는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설하고 계신
것을 성교에서는 큰소리로 염불하면 큰 부처님을 보고 작은 소리로 염불하면 작은 부처님을 본다고 말씀했던
말인가.


또는 그 경전 말씀을 가지고 시주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큰 부처님과 작은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리고 또 이것은 불도수행에 있어서 보시행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인가. 그러나
아무리 제보를 아까워 하지 않고 부처님 전에 바치고 은사와 승려에게 기부를 한다고 해도 신심이
부족하면 전혀 의가 없는 것이다.


가령 단 종이 한 장이고 돈 반푼조차 사원이나 승려에게 기부하지 안더라도 본원타력에게 마음을 던져
놓고 신심이 깊어지면 그것이야말로 본원의 마음에 들어맞은 일이다.
대체로 모든 불법을 핑계삼아 세속적인 욕망이 있는 것이라 이런 말을 하여 염불의 가르침에 결속된
동붕을 공갈하는 것일까.

후서

이상 밝힌 18조의 이의는 어느 것이든 모두다 신랑성인이 밝히신 진실의 신심과 틀리기 때문에
일어난 것일 것이나 지금은 안 계신 성인께서 일찍이 이러한 것을 말씀해 주신 일이 있었다.


호넹상인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제자들 중에서 상인과 같은 신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신란은 동붕들과 신심에 대해서 논쟁을 하신 일이 있었다는 것은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젱싱의 신심도 호넹상인의 신심이나 동일하다.고 한즉 세이강보와 넹부쓰보 등의 여러 동붕들이
그런 말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라고 반박하면서 어찌하여 호넹상인의 신심과 젱싱보의 신심과
동일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하니 신랑성인께서는 과연 호넹상인은 지혜나 재능이 뛰어나신 분이다.
그래서 그것과 같다고 하면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정토에 왕생하는 신심은 전혀 달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뿐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어째서 그런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다. 하며 의문과 비난이 있었음으로
결국 호넹상인이 계신 곳에서 쌍방이 주장에 어느 것이 옳은지를 결정하게 되어 이러한 말을 상세히
말씀드렸더니 호넹상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겡구의 신심도 부처님에게서 얻은 신심이다

.

그러기에 전혀 동일하다. 이것과 다른 신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경구가 가고자 하는 정토에
는 설마 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거이나 요사이 오직 염불만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신랑성인
의 신심과 동일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니 한탄스럽게 생각된다.

번뇌덩어리같은 우리 범부는 불타는 집과 같이 덧없는 이 무상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다
거짓이고 가짜뿐이고 무엇하나 진실은 없는데 다만 염불만이 진실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귀의심이 아미타불에게 향하고 있으면 염불이고 정토에 향하고 있으면 왕생이 된다.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고는 하지만 그 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는 것이다.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신호에
불과하다.


염불은 원생의 신호이고 그 길은 아미타부처님께서 안에서 열어주시는 것이다.
신랑에게는 선인 호넹상인의 가르침을 무조건 믿을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염불은 행자를 위해서는 비행비선이다.
그것은 나의 분별에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염불을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격려하지 않아도 부르게 되는 것이고, 부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아니나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필경에는 내가 염불하는 것이 아니고 염불이 나를 나로 이룩해주는 것이다.

내생이라고 하는 것은 현생을 현생으로 이루어주는 것으로서의 차원인 것이다.
따라서 내생이야 말로 현생에 있어서 말하자면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이 있으면 내세가 없을 수 없고, 내세가 없다면 금생은 있을 수 없다.
미래의 정토를 귀의처로 하지 않고 현생의 생활이라는 것이 있을수 있겠는가.
범부가 말하면 정토는 없을 것이라는 몽상을 해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다면은 정토는
있다고 말할 것이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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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실용문답


 

 정종淨宗스님 법문 / 정전淨傳스님 번역

 

 

1. 현세의 이익에 관하여

 

1. 질문: 왕생을 구하려면 아미타불을 부르고, 평안함과 재난의 소멸이나 수명의 연장 등 현세의 이익을 구하려면 따로 관련된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거나, 경전 또는 진언을 독송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관념들은 옳은 것인가?

 

: 옳지 않다. 일반적으로 처음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의 신앙심이 비교적 얕기 때문에 때로는 이러한 관념들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그 사람이 정토왕생을 발원한 사람이라면 왕생을 위해서나, 아니면 현세의 이익을 구하는 데 있어서나 모두 마땅히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지 다른 것을 부를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경전에서 말씀하시길 “아미타불은 모든 부처님 중의 왕이시고, 아미타불의 명호 속에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 경전과 진언의 공덕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오로지 아미타불 한 부처님만 염念하면 모든 불보살님과 경전 그리고 진언을 전부 염한 공덕과도 같다”(경전의 뜻을 취함)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모든 불보살님과 경전, 진언을 염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아미타불을 염하여도 전부 얻을 수 있다. 반면에 아미타불을 불러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다른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거나 다른 경전과 진언을 독송한다면 반드시 전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백관대신百官大臣들이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일들은 국왕으로서 당연히 해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국왕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백관대신들이 반드시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둘째,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세간의 이익도 얻을 수 있으므로, 두 가지 방면에서 모두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잡다하게 여러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거나 경전과 진언 등을 독송한다면 왕생이 결정되지 않을뿐더러, 얻을 수 있는 세간의 이익 역시 적다.

 

2. 질문: 아미타불을 부르면 다만 왕생을 할 수 있을 뿐이지, 현세의 여러 이익과는 상관없지 않은가?

 

: 그렇지 않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에는 현세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이 전부 포함된다. 이것을 정토종에서는 “현세와 내생의 두 가지 이익(現當二益)”이라 부른다. ‘당當’은 당래(장래, 내생)로서 당래의 이익은 왕생하여 성불을 하는 것이고, ‘현現’은 현세로서 현세의 이익에는 예를 들어, 재난을 소멸하고 복과 지혜가 자라나며, 병을 물리치고 장수할 수 있으며, 평안하고 하는 일이 뜻대로 잘 되고, 위로는 조상을 천도하고 아래로는 자손들을 보우保佑하는 등의 모든 이익이 그 속에 포함된다.

 

3. 질문: 관세음보살님은 구원의 소리를 찾아서 고난에 처한 중생들을 구제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재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야 한다는데, 이는 옳은 것인가?

 

: 관세음보살님을 “대자대비 구고구난 광대영감”이라고 부르는데,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면, 보살님께서 즉시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를 살피시고 구원을 해주신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한 치의 그릇됨도 없다. 하지만 평소에 염불수행을 하던 사람들은 관세음보살님을 바꿔 부를 필요는 없다. 이치적으로 설명하자면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미타불께서 소리를 찾아서 고통을 구제해주시는 능력은 관세음보살님보다 훨씬 뛰어나다. 관세음보살님은 현재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는데 아미타불의 상수上首제자이시다. 이 보살님의 자비와 능력은 전부 스승이신 아미타부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아미타불께서는 성불을 하시기 전에 보살도를 닦으실 때 명호로써 중생구제를 하시겠다는 발원을 하시고 수행을 하셨다.

 

 다만 당신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입을 벌려 소리를 내어 부르든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부르든, 위급할 때에 부르든 아니면 평소에 부르든, 전문적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부르든 아니면 비교적 산란한 마음으로 부르든, 심지어 염불을 하는 사람이 부처님을 믿든 믿지 않던 간에 아미타불께서는 즉각 감응하여 바로 광명을 놓아 비춰주시고, 동시에 몸을 나투시어 그 사람을 보호해주시겠다는 것이다.

 

감응의 속도는 전등의 스위치를 누르면 빛이 바로 환하게 비추는 것보다 더욱 빠르다. 염불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광명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므로 즉시에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되고, 재난이 소멸되어 상서롭게 된다. 또한 평소에 자주 염불을 하지 않고 어떤 일을 당하여 간혹 염불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감응은 역시 이와 같다.

 

만약 평소에도 늘 염불을 하던 사람이라면, 아미타불의 광명은 주야로 이 사람을 비춰주고 보호를 해주시며 그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일생 동안 줄곧 평안하게 지내다가, 임종할 때가 되면 부처님의 영접을 받아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관세음보살님이 소리를 찾아 고통을 구제해주시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전면적이며 철저하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임시적으로 다른 불보살님들을 바꿔 부를 필요가 없다.

 

둘째, 아미타불을 부르면 관세음보살님은 따로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오신다. 관세음보살님은 당신의 스승이신 아미타불을 매우 존경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항상 아미타불을 머리 위에 이고 계신다. 우리가 보고 있는 관세음보살님의 머리 위에 화불化佛 한 분이 서 계시는데, 이분이 바로 아미타불이시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은 아미타불을 수시로 따라다니시는데, 아미타불이 어디를 가시든지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으신다.

 

 따라서 평소에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들은 아미타불께서 이미 광명을 놓고 몸을 나투시어 그 사람을 보호해주시는 이상,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 그리고 수많은 대보살님들도 당연히 함께 오셔서 보호를 해주신다.예컨대 󰡔관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듯이,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은 관세음과 대세지 양대 보살님이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항상 그 사람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이 염불하는 사람을 보호해주심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그 사람의 훌륭한 벗이 되어 주시고, 자비로써 모든 일에 도움을 주신다고 하셨다. 따라서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설사 관세음보살님을 부르지 않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은 당연히 오셔서 보호를 해주신다. 그 밖의 불보살님들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불보살님들을 부를 필요가 없다.

 

셋째, 평소에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들은 항상 부처님 광명의 보호 속에 있으므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재난들이 자연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위급한 때에 임시적으로 보살님께 도움을 청하게 될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숙세의 업을 피할 길이 없어 작은 재난과 장애가 있더라도 진정으로 신앙심이 깊고 염불수행에 바탕이 있는(습이 배인) 사람이라면 자연히 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지, 이 보살님 저 부처님을 부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흔들이고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이 전일專一하지 않다는 증거다. 따라서 어떤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든지 효과적으로는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과 전혀 비교할 수가 없다.

 

4. 질문: 세간에는 자식을 낳게 해주는 송자관음送子觀音이 있다.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자식을 구하려면 반드시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야 한다는데, 이는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가 없다. 아미타불을 불러도 똑같이 자식을 구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

 

5. 질문: 문수보살님은 지혜제일이시다.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지혜가 증장하고 시험을 보는 데 순조롭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문수보살을 불러야 한다고 한다.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가 없다. 문수보살님은 지혜를 상징하고 보살대중 가운데서 지혜제일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어쨌든 부처님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아미타불의 지혜와 광명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조차 따라갈 수 없다고 하셨으니, 하물며 보살제자들은 더더욱 동등한 입장에서 논할 수 없다. 따라서 지혜를 구하고자 한다면 역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6. 질문: 지장보살님께는 정해진 업을 소멸시켜주는 멸정업진언滅定業眞言이 있으시다.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업장소멸을 하려면 반드시 지장보살님을 불러야 한다는데, 옳은 것인가?

 

: 그렇지 않다! 아미타불을 불러도 똑같이 업장소멸을 할 수 있다. 불보살님들의 명호에는 전부 공덕이 들어 있고, 공덕이 있으므로 죄업을 소멸할 수 있다. 지장보살님의 공덕이 진실로 불가사의하나, 아미타불과 비교를 한다면 여전히 백천만억 배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석정토군의론(釋淨土群疑論, 군의론)󰡕에서 “일대겁 동안 지장보살을 부르는 것은 아미타불을 한번 부르는 것만 못하다”고 말씀하셨고, 󰡔무량수경󰡕에서는 “아미타불의 공덕은 위없고, 광명은 제일이어서 시방제불이 따라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미타불을 불러 업장소멸을 하는 것은 마치 햇빛이 어둠을 없애주는 것과 같고, 지장보살 등의 기타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불러 업장소멸을 하는 것은 마치 달빛이 어둠을 소멸하는 것과 같다.

 

7. 질문: 지장보살님은 유명교주幽冥敎主로서, 오로지 유명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신다. 비록 지금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망령亡靈을 천도하고 지옥중생을 구제하려면 반드시 지장보살님을 불러야 한다고 한다. 이는 옳은 것인가?

 

: 그렇지 않다. 지금 지장보살과 아미타불을 비교하여 간략하게 일곱 가지 점을 들어 비교될 수 없음을 밝히겠다.

 

⑴ 공덕의 부족함과 원만함이 비교되지 않는다. 지장보살님께서는 발원하시길 ‘지옥이 텅 비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므로, 수행공덕이 아직 원만하지 않고, 그 원력 역시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다. 아미타불은 인지因地에서 발원하시길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아비지옥의 고통받는 중생들을 남김없이 제도하겠다’고 하셨는데, 수행 공덕이 이미 원만하였고, 그 원력 역시 이미 실현되어 성불을 하셨다. 그러므로 양자 간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⑵ 지위가 높고 낮음이 비교되지 않는다. 지장보살님은 유명교주이시고, 아미타불은 제불의 왕이시므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⑶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므로 비교되지 않는다. 󰡔군의론󰡕에서는 “부처님은 법왕이시고 보살은 법신法臣인데, 임금이 출타할 때 대신들은 반드시 따라나선다. 큰 것은 작은 것을 포괄할 수 있으니, 염불을 많이 하면 공덕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지장보살님은 자연히 아미타불을 모시고 따라오셔서 지옥중생들을 구제해주신다.

⑷ 알려진 명성의 범위가 비교되지 않는다. 아미타불의 명호는 시방제불들이 다 경앙하고 찬탄하시는 바이므로 비교되지 않는다.

⑸ 광명의 크기가 비교되지 않는다.

⑹ 소멸된 죄업의 양이 비교되지 않는다.

⑺ 구제의 이익이 비교되지 않는다. 지장보살을 부르면 대부분 삼악도의 중생들을 건져 인간과 천상의 선도善道에 태어나게 할 수 있지만, 아미타불을 부르면 삼악도에서 곧장 정토로 초월하여 성불할 수 있다.

 

8. 질문: 사람이 임종할 때는 왕왕 업장이 나타나서 원친채주怨親債主들이 서로 와서 끌고 가려고 핍박을 한다고 한다. 이때 반드시 먼저 󰡔지장경󰡕을 독송하고 지장보살님의 명호를 불러서 업장소멸을 하고 난 다음, 다시 아미타불을 부르며 왕생을 구해야 한다고 한다. 옳은 것인가?

 

: 옳지 않다. 임종할 때는 사람이 위로 올라가느냐, 아래로 내려가느냐를 판가름할 가장 중요한 시기다. 이때는 어떠한 다른 불보살님과 경전, 주력도 전부 너무 늦어 급한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시급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가장 큰 구제의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업장소멸과 극락왕생을 동시에 완성시킬 수 있다.

 

󰡔관경󰡕에서는 대승의 12부 경전을 들어도(독송하여도) 단지 천겁의 죄업을 소멸할 수 있을 뿐 왕생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크게 부족한 반면, 아미타불을 한 번 부르는 즉시 50억겁의 죄업이 사라지고, 곧장 사바세계를 초월하여 정토로 왕생할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계산을 해보면, 한 번 아미타불을 부르는 공덕이야말로 수천만 부의 󰡔지장경󰡕과 󰡔금강경󰡕 등 대승경전을 독송하는 공덕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 질문: 위타보살(韋陀菩薩: 신중의 한 종류)은 호법을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수행을 하는 데 도움을 얻고, 장애의 인연을 줄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타보살을 모셔야 한다. 이는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 없다. 오로지 아미타불을 모시고 아미타불을 전념하며 정토왕생을 발원한 사람은 󰡔관경󰡕, 󰡔아미타경󰡕, 󰡔시왕생경󰡕에서 설하신 것처럼 아미타불께서 항상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머물고, 관음‧세지보살께서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보호를 해주시며, 갠지스 강의 모래와 같이 많은 제불들이 함께 오셔서 호념護念을 해주신다. 그리고 25분의 대보살들이 여러 대보살들을 거느리고 일체시처一切時處에서 옹호를 해주신다.

 

 또한 무수한 부처님과 관음‧세지 등 보살들이 화신으로 오셔서 백 겹 천 겹으로 둘러싸고 주야로 이 사람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 모든 천신天神과 지기(地祇, 토지 신)들도 모두 공경하고 보살펴주며, 모든 악귀와 악신들도 그 틈을 노릴 수 없고, 일체의 액난과 재해, 장애들은 저절로 사라진다. 위타보살 역시 분명히 여러 보살님들을 따라 청하지 않아도 당연히 오셔서 호념을 해주실 것이다.

 

10. 질문: 제불보살님들의 신주神呪에는 큰 위신력이 있으시다.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삿된 것을 물리치고 마구니를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주를 지송해야 한다. 이는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 없다. 한마디 아미타불은 주력 중의 왕과도 같으므로, 일체의 신주를 통해 이룰 수 있는 효능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도 전부 얻을 수 있다.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은 아미타불과 제불, 관음과 세지, 여러 큰 보살님들의 직접적인 호념을 받으므로, 비록 주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모든 사마외도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된다.

 

11. 질문: 약사부처님은 중생들의 모든 병고를 치료해주시겠다고 발원을 하셨다. 비록 아미타불의 정토법문을 닦고 있지만 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약사부처님을 불러야 한다는데,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 없다. 아미타불을 전념해도 똑같이 병을 치유할 수 있다.

 

12. 질문: 약사불을 다른 이름으로 ‘소재연수약사불消災延壽藥師佛’이라고도 부른다. 비록 아미타불의 정토법문을 닦고 있지만 재난을 소멸하고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약사불을 불러야 한다는데, 이는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 없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이라고도 불린다. 아미타불을 전념한다면 똑같이 재난을 소멸하고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 선도대사께서는 󰡔관념법문󰡕에서 “아미타불을 칭념하며 왕생을 발원한 자는 현생에서 장수를 누릴 수 있고, 아홉 가지 횡액을 피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2. 염불왕생에 관하여

 

13. 질문: 살생을 하고 죄업을 많이 지은 사람의 경우는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아마 왕생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 사람은 누구나 죄가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바로 우리와 같이 죄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들을 구제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죄업을 지었지만 마음을 돌이켜 염불을 한다면 왕생을 못할 이가 없다. 󰡔관경󰡕의 하품왕생에는 일생 동안 십악과 파계, 오역이라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임종할 때에 겨우 염불을 하였음에도 모조리 다 왕생한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14. 질문: 그렇다면 염불하는 사람들은 악을 끊고 선을 닦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 그건 또 그렇지 않다. 불법 중에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끊고 선을 닦을 필요가 없다는 법문은 결코 없다. 염불하는 사람들은 더욱 마땅히 신분과 능력에 따라 악을 끊고 선을 닦아야 한다.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서 염불을 한다면 자신과 타인에게 있어 공덕과 이익은 더욱 크다.

⑴ 죄를 지으면 많은 고통이 따르게 되고, 선을 닦으면 크게 안락하다.

⑵ 죄를 지으면 잘 죽기가 어렵고, 선을 닦으면 선종善終을 하기 쉽다.

⑶ 죄를 짓는 사람은 중생들이 싫어하여 설사 염불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신임을 얻기 어렵고, 착한 사람이 염불을 하면 중생들이 환희심을 내어 믿고 따른다.

⑷ 죄를 지으면 사회가 혼란스럽고 불법이 쇠하게 되며, 선을 닦으면 도덕이 창명昌明하고 불교가 흥성하게 된다.

⑸ 죄를 지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제불이 싫어하고,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 제불의 가르침을 수순하므로 제불이 기뻐하신다.

따라서 마땅히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며 염불해야 한다.

 

15. 질문: 악을 끊기도 어렵고 선을 닦기도 어려운데, 어떡해야 하는가?

 

: 사람이 성현이 아닌 이상, 항상 악을 끊고 선을 닦을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인연에 따라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 항상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염불을 많이 하면 된다. 이렇게 하다 보면 비록 악업을 깨끗하게 끊기는 어렵겠지만 절대 큰 죄를 저지르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고, 비록 선행을 원만하게 닦지는 못하더라도 아무튼 한 생각 착한 마음을 잃지 않은 것이니, 아미타불께서도 반드시 가피를 주실 것이다.

 

16. 질문: 채식을 하지 못했는데도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念佛感應錄: 정종법사 편집, 전체 3집)에는 많은 분들이 채식을 하지 않았지만 전부 염불왕생을 한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상황을 봐야겠지만, 채식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채식에는 이로운 점들이 많다. 부처님의 자비심에 수순하고, 중생들에게 두려움이 없는 무외無畏를 베풀며, 자신의 건강에도 이롭고, 에너지를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며, 임종할 때에 업장을 줄일 수 있다.

 

17. 질문: 삼보에 귀의를 하지 않았어도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에 여건이 허락하다면 그래도 귀의를 하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귀의를 한다는 것은 신앙을 정하고 불법문중에 들어와서 불제자가 되는 첫걸음인데, 어떻게 염불을 하고 싶고 왕생을 하고 싶은 사람이 귀의를 원치 않을 수 있겠는가?

 

18. 질문: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염불을 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진정한 발보리심(중생무변서원도: 중생이 가없어도 다 건지기를 서원합니다)은 매우 어렵다. 만약에 반드시 보리심을 발해야만이 왕생할 수 있다면, 감히 이 세상에 왕생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려고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보리심을 발해야만이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관경󰡕의 상삼품上三品의 왕생에는 비록 발보리심이 있지만, 중하육품中下六品의 왕생에는 전부 발보리심이 없다. 󰡔염불감응록󰡕에 수록된 왕생사례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보리심이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니, 하물며 발보리심이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비록 보리심을 모르지만 염불을 하고 왕생을 원한다면 모조리 왕생할 수 있다.

 

 일단 왕생을 하고 나면 자연히 성불하고 중생구제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토염불법문의 묘한 점이다. 정토법문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왕생을 하려는 마음(願生心)을 일으키는 것인데,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곧 정토법문에서의 보리심이며, 이 마음은 사람마다 다 일으킬 수 있는 마음이다.

 

19. 질문: 만약에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지 못하였다면, 그래도 염불을 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경󰡕에서 중품하생 이하는 전부 계를 받은 적이 없거나, 계를 파하고 죄를 지었지만 임종할 때에 염불하여 왕생을 한 사람들이다. 일반법문의 수행은 전부 ‘부지런히 계‧정‧혜를 닦아 탐‧진‧치를 소멸함’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계율은 가장 기초가 된다. 따라서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지 못하면 인간과 천상(人天)의 선과善果조차 얻을 수 없는데 해탈하여 성불을 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것은 필경 너무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계‧정‧혜를 닦아 탐‧진‧치를 소멸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고도 드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많고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염불이라는 특별법문을 설하신 것이다. 이 염불법문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생각하며 부름)하면서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기만 하면 되므로, 왕생은 단지 염불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지, 계정혜가 있고 없고와는 무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의지하는 것은 오직 배의 힘이므로, 승객이 수영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와는 전혀 상관없이 배를 타기만 하면 전부 강을 건널 수 있다.

 

염불 역시 마찬가지다. 염불을 하기만 하면 전부 아미타불의 원력의 배를 올라탄 것과 같아, 계정혜가 있든 없든 모두 왕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자대비’라고 하고, ‘특별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20. 질문: 그렇다면 염불하는 사람은 계율을 지킬(持戒)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 계율이 비록 왕생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염불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각자 자신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 지킬 수 있는 데까지 계율을 지켜야 한다.지계持戒에는 지계의 공덕과 이익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몸이 불구인지 건강한지는 비록 왕생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불구의 고통을 받기를 원치 않고, 왕생과 무관하다고 해서 자신을 보호하는 데 소홀히 하여 몸이 불구가 되거나 손상을 입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계에는 지계의 안락함이 있고, 파계에는 파계로 인한 괴로운 과보가 있다. 다만 계율을 잘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꾸준히 염불을 하라는 것이지, 결코 염불하는 사람들은 계율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관경󰡕의 구품 중에 상중육품上中六品은 전부 계를 지켰거나 선행을 닦은 사람들이 염불왕생을 한 것이고, 하삼품下三品은 파계를 했거나 악업을 지은 사람들이 염불왕생을 한 것이다.

 

21. 질문: 비록 염불을 하고는 있지만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잡념이 분분한데, 그래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에 수록된 여러 왕생사례들은 전부 평범한 염불인들로서, 많든 적든 간에 잡념이 있었지만 모두 왕생하였다. 사실상 마음이 청정하고 못하고, 염불을 하는 데 잡념이 있고 없고는 왕생을 하고 못하고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전수염불專修念佛을 하면서 진심으로 왕생을 원한다면, 설사 온종일 잡념이 분분할지라도 조금도 아미타불의 구제를 막을 수 없고, 조금도 왕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이 몸이 이미 큰 배 위에 앉아 있는 이상, 설사 마음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하더라도 안심하고 배 위에 있으면서 배에서 내려오지만 않는다면 이 배는 여전히 우리들을 태우고 피안에 도착할 것이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아미타부처님께 귀명歸命하여 우리들의 해탈과 성불의 생명을 부처님께 바치고, 꾸준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서 안심하고 아미타불의 구제에 맡긴다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아미타불의 대원大願의 배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며, 아미타불과 한 몸(一體)이 되는 것이다.

 

 설령 제6의식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전진영사前塵影事’와 ‘허망상상虛妄想像’일 뿐이어서, 그 자체는 생멸하고 무상하여 자성이 없는 것인데, 어찌 아미타불의 구제를 방해할 수 있겠으며, 아미타불의 대원력의 배를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아미타불의 걸림 없는 광명(無碍光)은 아주 가뿐하고도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우리들을 서방극락세계로 구제하실 수 있다.

 

다만 한 사람에게 망상과 잡념이 많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기가 쉽지 않고, 마음속에 번뇌가 많다는 것이므로, 염불을 하는 사람은 그래도 잡념이 적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있다. 바로 최대한 세상사에 대하여 담담하게 바라보고 염불을 많이 하면서 오래오래 지속하다 보면 자연히 잡념들이 줄어들 것이다. 인광대사님의 ‘십념기수법十念記數法’은 마음을 집중하여 염불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22. 질문: 왜 나는 염불을 하지 않을 때는 마음이 청정하고 망념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염불만 하면 도리어 망념이 더 많은 것을 느끼는가?

 

: 염불을 하지 않으면 이 사람 전체가 번뇌와 습기를 따라가게 되고, 망념과 동일한 방향이 되므로 망념이 있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염불은 망념과 역방향이어서, 염불만 하면 망념이 엄청 많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차역에서 붐비는 인파를 따라 개찰구를 통과하여 안쪽으로 들어갈 때에,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크게 느낄 수 없는데 이것은 방향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반대의 입장이 되었을 때, 인파가 안쪽으로 밀려오는데 본인 혼자서 바깥으로 빠져 나오려고 한다면 즉각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인산인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실은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사람의 수는 똑같이 많다. 염불하여 생사의 흐름에 역행해서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것도 바로 이와 같다. 처음 염불을 하는 사람들이 망념이 많음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다.

 

23. 질문: 염불을 할 때에 망념이 많다는 것은 염불이 효험이 없다는 게 아닌가?

 

: 망념이 이렇게 많고, 이렇게 치솟아 오르는데도 여전히 염불을 할 수 있고 망념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바로 염불의 효험을 얻은 것이다. 마치 개찰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안쪽을 향해 몰려드는데, 본인 혼자서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큰 힘을 지닌 사람이거나 위세가 있는 사람, 예컨대 국왕이 역을 나온다면 만인이 전부 길을 양보하고 회피해야 하므로, 이때에 우리는 국왕의 뒤를 좇아 그 기세를 따라 밖으로 나올 수 있다.

 

한마디 아미타불은 마치 국왕과도 같다. 아미타불이 우리들을 구하러 오신다는 것은, 곧장 삼악도로 달려가는 우리들을 업력과 망념의 흐름으로부터 구제해주시는 바이므로 무시겁 이래의 망념의 방향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단지 부처님 명호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순조롭고 편안하게 육도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음속에 부처님의 명호를 한 번 떠올리면 모든 망념이 자연히 피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망념이 많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방향이 상반되기 때문인데, 사실상 이 망념은 더 많아진 것도 아니고, 아미타불의 구제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24. 질문: 글을 쓸 줄도 모르고 독경을 할 줄도 모르며 지혜도 없는 사람인데, 염불을 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 속의 여러 불자님들은 글을 모르지만 전부 왕생하였다. 사실상 글을 알고 모르고, 독경을 하고 안하고, 지혜가 있고 없고는 왕생을 하느냐의 여부와는 서로 조금도 관계가 없다.

 

25. 질문: 매일 염불을 하고 있지만 그 숫자가 많지 않다.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염불의 숫자에는 정해진 기준이 없다. 각자 있는 능력껏 염불을 하면서 진심으로 왕생을 원한다면 비록 염불의 숫자가 적더라도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에 기록된 염불인들은 매일 많게는 수만 번, 적게는 수천 수백 번씩 염불하였지만 모조리 왕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증명인 셈이다.

 

26. 질문: 그렇다면 정진하여 염불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단 말인가?

 

: 각자 능력에 따라 마땅히 정진해야 한다. 틈만 나면 염불을 해야 하는데, 특별히 마음을 쓰고 머리를 써야 할 상황이 아니면 전부 염불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염불을 습관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염불을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망상잡념을 생각하게 되고, 망상잡념을 생각하면 바로 업장과 감응하여 업장만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염불을 해서 부처님과 감응하여 업장을 소멸하고 복을 증장시키는 것만 못하다.

 

27. 질문: 나는 이미 나이도 많은데다가 염불한 시간도 짧다. 그런데도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경󰡕의 하품왕생에는 임종 전에 단지 열 번 내지 한 번 정도 염불을 한 사람들도 다 왕생한다고 하셨으니, 이보다 염불의 시간이 더 짧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28. 질문: 그렇다면 평소에 염불을 안 하다가, 임종할 때가 돼서 염불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

 

: 아니다. 이런 생각들은 굉장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고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몸에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어 수시로 폭발할 위험이 있는데, 다만 정확히 언제 폭발할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라 하자. 그렇다면 일단 이 사실을 알고 나서는 즉각 폭발물을 떼어내야지, 곧 폭발하기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떼어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종할 때를 기다렸다가 염불을 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단 말인가? 절대 정해진 임종의 시간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임종이 정해지지 않은 이상, 현재의 일분일초가 전부 임종일 수가 있으므로, 임종염불이 곧 현재염불이요, 현재염불이 곧 임종염불이다. 더군다나 사람이란 전부 현재 이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인데, 현재를 제외하고 임종이란 없다. 그러니 당연히 지금부터 염불을 해야 한다.

 

또한 현재에 염불법문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염불을 하지 않는 사람이, 확정지을 수 없는 임종을 기다렸다가 염불을 하겠다는 것은, 염불의 이익을 모르고 있는 것이며 진심으로 염불할 생각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진심으로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재물을 보는 순간 바로 그 재물을 얻고 싶을 것이요, 진심으로 병을 고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묘약이 있다는 사실을 안 즉시 그 약을 복용하고 싶을 것이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이 면사패免死牌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면사패를 즉각 손에 넣고 싶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사전에 미리 면사패를 몸에 지니면서 잘 보관해 두지 않는다면, 어느 날 야밤에 끌려 나가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 때가 되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임종할 때에 과연 염불을 할 수 있다면 당연이 똑같이 왕생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죽을 때에는 몸은 사대가 분리되고, 마음은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번뇌하며, 게다가 권속들이 아버지, 어머니 불러가며 큰 소리로 울부짖고, 원수가 와서 목숨을 앗아가려 하는데, 이때가 되면 좀처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평소에 부처님이 계심에도 부르지 않던 사람은 이때가 되면 부처 ‘불’자는 일찍이 어디에다 버렸는지도 알 수 없거늘, 어떻게 다시 염불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죽음의 인연이란 일정치가 않아, 공난(항공사고), 해난海難, 교통사고, 광난(礦難, 광산 사고) 등 여러 가지 사고사가 있고, 몸에 칼을 맞고 총탄이 머리를 관통하며, 독약, 독가스 등으로 인한 죽음도 있으며, 중풍으로 언어능력을 잃고, 혼미하여 정신이 맑지 않으며, 목이 잠기고 혀가 오그라들면서 죽는 등 수많은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너무나 갑작스러워 미처 막아낼 방법이 없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에만 걸려도 염불을 할 수 없다.

 

29. 질문: 보아하니, 지금부터 염불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 그렇다! 일찍 염불하면 일찍 평안하고, 일찍 재난을 면하고, 일찍 업장이 소멸되며, 일찍 복이 자라나고, 일찍 왕생이 결정된다.

 

3. 임종조념에 관하여

 

30. 질문: 임종 때 입으로 염불을 할 수 없다면 마음속으로 염불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31. 질문: 임종 때 마음속으로 한마디 한마디씩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조차 어려워, 오직 한 생각 왕생을 원하는 마음만 갖고 있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경󰡕의 하품중생下品中生이 바로 그런 경우다.

 

32. 질문: 임종 때 혼자 마음속으로 염불하기가 힘들어, 다른 사람을 따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칭념을 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경󰡕에서 하품하생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본인의 마음이 무기력하여 의업意業으로 사유를 할 수 없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선지식을 따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칭념을 하였지만 역시 수승하게 왕생하였다. 예컨대 본인이 글을 쓸 줄 몰라도 글을 아는 사람이 자신의 손을 잡고 글을 쓴다면 이 역시 똑같은 글이다. 임종하는 사람의 마음으로는 이미 염불을 할 수 없으므로 선지식을 따라서 한마디 한마디씩 염불하는 것 역시 똑같은 염불이고, 똑같이 왕생한다.

 

33. 질문: 평소에는 왕생을 발원하고 염불하지만, 임종 때에 혼미하여 염불을 못한다면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왕생할 수 있다.

 

34. 질문: 어찌하여 평소에 염불을 하다가, 임종 때에는 염불을 못해도 왕생할 수가 있는가?

 

: 왕생이란 결코 반드시 임종 때가 되어서 결정되는 게 아니다. 평소에 전수염불하며 진심으로 왕생을 발원하는 사람의 왕생은 평소에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임종할 때 비록 염불을 못했어도 반드시 왕생한다. 이것을 정토종에서는 “평생업성平生業成”이라고 부른다.

 

마치 큰 나무 한 그루가 자랄 때부터 서쪽을 향해 기울었다면, 톱으로 자를 때에는 비록 힘을 더 주지 않더라도 자연히 서쪽을 향해 넘어가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일찍이 배에 올라 편안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설사 배가 부두를 떠날 때에 잠이 들어서 모른다 할지라도 편안하게 피안에 도달하는 데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과 같다. 선도대사께서, 염불이야말로 왕생에 있어서 ‘정정업正定業’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다.

 

35. 질문: 염불이 정정업이라면 어떠한 사람도 염불을 하면 모조리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찌하여 임종조념臨終助念이라는 일설이 있는가?

 

: 인광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임종조념의 법은 당나라 때 선도대사님이 발명하신 것으로서, 이를테면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들이 이 법에 의지하여 조념을 한다면 역시 왕생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임종조념은 주로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이 임종 때에도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바로 윤회를 하게 되므로, 이때는 이 사람을 데리고 함께 염불을 할 수 있도록 선지식의 지도와 도움이 필요한 시기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이때 선지식을 따라서 염불을 할 수 있다면 똑같이 왕생한다. 임종조념으로도 왕생할 수 있는데, 평소에 염불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염불이 왕생의 정정업이고, 만인이 닦아 만인이 왕생한다(萬修萬人去)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36. 질문: 지장보살을 염하고 󰡔지장경󰡕‧󰡔금강경󰡕을 읽거나 진언 등을 염하는 것도 조념에 속하는가?

 

: 전부 조념이 아니다!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이 조념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조념’이란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아미타불을 불러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다른 경전과 진언을 독송하고, 또 다른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도록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임종할 때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어서, 평소에 어떤 법문을 배웠던 간에 이때에는 전부 내려놓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한다. 더 이상 난잡하게 다른 것을 부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오히려 조념을 방해하고 왕생을 파괴하는 행위다.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해 지은 죄업은 임종할 때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37. 질문: 경을 읽거나 진언을 외우거나 모든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에도 전부 공덕이 있지 않는가? 어찌하여 조념을 파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전부 공덕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장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왕생을 한다고는 보장할 수 없다. 본래 임종조념이란 정토왕생을 통하여 성불을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인데, 결국 다른 경전과 진언을 독송하고 다른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름으로써 단지 인간과 천상의 좋은 과보만을 얻을 뿐이다. 그 다음 생에 다시 불법을 만나기 어렵고 삼악도에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이 어찌 성불이란 대사大事 인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38. 질문: 조념자가 가장 확실하게 알아야 할 근본은 무엇인가?

 

: 모든 장애요소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한마디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다.

 

39. 질문: 조념을 할 때에 법문의 주요 내용은 어떤 것인가?

 

: 우선 윤회의 괴로움과 극락의 즐거움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사람에게 마땅히 왕생발원을 할 것을 권장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에게 세간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하는데, 목숨이 다할 때에 아무리 집착을 해도 소용이 없을뿐더러 왕생까지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조념자를 따라 함께 염불을 하면서 부처님이 영접하러 오시면 바로 부처님을 따라 가도록 권해야 한다.

 

40. 질문: 가장 간단한 임종법문은 어떤 것인가?

 

: ‘아무개여! 죽은 뒤에 윤회를 한다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아미타불을 부르시고 부처님의 영접을 받아 극락세계로 왕생하십시오!’

 

41. 질문: 어째서 어떤 사람은 장시간의 조념법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는가?

 

: 그 사람의 목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마음속에 걱정거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조념하러 오신 사람들은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진행하셔서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걱정거리가 남아 있다면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되도록 빨리 해결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을 도와드려야 한다.

 

만약 채무관계가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의 권속들에게‘모든 채무관계를 저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잘 해결할 테니 안심하시고 떠나십시오!’라고 임종자를 위해 말씀드리도록 해야 한다. 만약 자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저희들이 이 자녀들을 잘 부양하고 도와줄 테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려야 한다.

 

만약에 원한으로 인하여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렵다면 ‘아무개도 지금 굉장히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곧 정토에 왕생하여 성불을 할 사람이니, 그 사람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 한다.이렇게 해서 만약에 그 사람의 걱정거리를 적중시켰다면 즉시 뚜렷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42. 질문: 조념과 법문 도중에 가장 주의하고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 첫째는 잡다한 것을 피해야 한다. 한마디 아미타불을 제외하고 그 외의 것은 일절 피해야 한다.

둘째는 병자 또는 망자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더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예컨대 ‘아무개여! 당신은 평생을 염불수행 하셨는데, 구하는 게 바로 극락왕생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이므로 반드시 정념正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만약 이 순간에 정념을 잃어버린다면 평생의 수행이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모두 부정적인 메시지가 그 속에 들어 있어서 임종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부담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 순간이 되면 스스로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조념을 해주는 사람이 지혜롭게 위로를 하여 그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고 온화하도록 해주는 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땅히 ‘아무개님! 당신이 평생 염불수행을 하시고 왕생을 원하신다는 것을 아미타불께서는 일찍부터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니, 그 공부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당신을 구제해주실 것입니다.

 

 현재 비록 아미타불께서 몸을 나투시어 영접하러 오신 모습을 친견하지는 못했으나, 그건 당신의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아미타불의 사람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당신을 영접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시고 저희들을 따라서 염불을 할 수 있으면 저희들과 함께 염불을 하시고, 만약에 힘이 받쳐주지 않으시면 우리가 염불을 할 테니 듣고만 계셔도 됩니다. 당신은 안심하고 여기에 누워서 아미타불의 영접만을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43. 질문: 조념자는 마땅히 어떠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하는가?

 

: 첫째는 상대방의 입장, 즉 임종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바로 저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인데, 현재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행위가 임종자의 마음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아미타불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되 조념을 하면서 정말 왕생할 수 있을까? 아미타불께서 진짜로 오실까? 등에 대하여 의심하고 걱정해서는 안 된다.

조념을 해주는 사람이 오로지 염불에만 집중한다면 아미타불께서 당연히 오셔서 임종자를 구제하실 것이니,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따라서 지나친 걱정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염불하는 분위기에 방해가 된다.

 

44. 질문: 임종조념을 할 때에 법문과 염불 중에 어느 것을 위주로 해야 하는가?

 

: 염불을 위주로 해야 한다. 법문은 염불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방편일 뿐이다.

 

45. 질문: 조념을 할 때에 법문을 해줄 사람이 없으면 염불만 해도 되는가?

 

: 평생 불법을 만나지 못하였거나 왕생을 원치 않던 사람이라면 간단한 법문을 통하여 왕생발원을 하도록 권장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정말로 법문을 해줄 사람이 없다면 대중들이 다함께 입을 모아 염불만 해도 자연히 온 집안이 광명으로 가득해지고 불가사의한 효과도 있을 것이다.

 

46. 질문: 조념을 할 때에 창념唱念과 칭념稱念, 육자六字와 사자四字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좋은가?

 

: 임종을 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칭념(음률 없이 하는 염불)은 창념(음률을 넣은 염불)보다 수월하고 기력소모가 적어서 힘이 덜 든다. 중병 또는 임종을 하는 사람은 기가 부족하고 정신력이 쇠약하여 창념을 따라 하기가 어려우므로 칭념을 하는 게 적합하다. 육자(나무아미타불)는 사자보다 완전하고, 사자(아미타불)는 육자보다 급박하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전후에는 사자로 칭념해도 된다. 급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부처님 명호의 완전함을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외의 시간에는 상황이 급박하지 않으므로 육자로 부르는 게 비교적 원만하다.

 

47. 질문: 조념을 해주는 연우들이 많을수록 좋은가?

 

: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몇 조로 나누어 조념을 하되 한 조에 6, 7명 정도의 인원이면 충분하다. 사람이 적으면 항상 염불소리가 통일이 잘 되는데 사람이 많으면 번번이 난잡해지기 일쑤다. 조념을 하는 현장에서는 정신의 집중과 명호의 일치를 요구하므로 필요 없는 잡담을 삼가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움직여서도 안 되며, 선풍기 등의 기계가 작동하면서 나는 소리 등도 되도록 피해야 한다.

 

48. 질문: 염불기로 연우들의 조념을 대신할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 대신할 수 있는가?

 

: 사람의 심력心力의 감응이 크므로, 염불기가 조연助緣은 될 수 있을지언정 완전히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다. 특히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전후에는 더욱 대중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소리를 내어 칭념을 해야 하므로, 절대 사람이 염불하지 않으면서 염불기만 염불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경우는 잠시 염불기로 대신할 수 있다.

⑴ 조념을 할 사람이 없을 경우.

⑵ 조념자가 너무 피곤하여 지속하기 어렵거나, 병자의 상태가 아직은 평온하여 심각하게 위급하지 않을 경우.

⑶ 임종자 자신이 확신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조념이 필요 없을 경우.

⑷ 망자를 위해 최소한 8시간 이상의 조념을 했을 경우.

⑸ 망자의 왕생이 이미 확실해졌을 경우.

 

49. 질문: 수행력이 있는 사람이 조념을 한다면, 그 효과가 일반인보다 좋지 않겠는가?

 

: 정확히 말하자면,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과 정성을 다해 집중을 하는 사람일수록 조념의 효과는 더욱 좋다.

 

50. 질문: 가족이 직접 염불을 해준다면 그 이익은 일반 조념자보다 더 나은가?

 

: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 사이의 연분이 가깝고 염불하는 마음이 정성스러워서 쉽게 감통感通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일지라도 성의 없이 대충대충 한다면 도리어 외부에서 조념을 하러 온 사람만큼 정성을 다해 집중을 하지 못하므로, 그 이익과 효과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연우들이 오셔서 조념을 해주고 가족 또한 참석하여 서로 감동을 주고받으면서 정성을 다해 염불에 집중한다면 효과가 가장 좋을 것이다.

 

51. 질문: 일생 동안 믿음과 발원을 가지고 전수염불을 한 사람도 임종 때 가족들이 울거나 옮기는 등의 인연을 만나면 왕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 과연 일생 동안 믿음과 발원을 가지고 전수염불을 한 사람이라면 일찍이 아미타불의 광명의 섭취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임종 때 어떠한 인연을 만나던 간에 전부 영향을 받지 않고 반드시 왕생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속마음을 다른 사람이 정확히 알기는 어렵고, 게다가 조념을 하러 온 이상 반드시 모든 가능한 장애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을 안전하고 완전한 계책(萬全之策)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임종을 하는 사람의 믿음과 발원이 어떻든 간에 조념을 할 때는 가족들이 울거나 옮기는 등의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

 

52. 질문: 가족들이 울거나 병자 또는 망자의 몸을 옮기는 등의 행위가 조념의 효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가?

 

: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은 병자 또는 망자에게 고통을 더해주기 때문에, 만약 평소에 믿음과 발원이 견고하고 염불에 숙달된 사람이 아니라면 탐착하고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삼악도에 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53. 질문: 만약 가족들이 조념을 반대한다면 마음속으로 묵묵히 그 사람을 위하여 법문과 조념을 해줘도 되는가? 그래도 효과는 동등한가?

 

: 그래도 좋다. 비록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묵념을 하더라도 온몸에 자연히 부처님의 광명이 있게 된다. 만약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집중해서 묵묵히 법문을 해준다면 불력佛力과 감응이 통하여 효과 역시 불가사의하다.

 

54. 질문: 아미타불께서 염불인을 영접하러 오실 때 혼자서 오시는가, 아니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도 함께 오시는가?

 

: 󰡔아미타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관음‧세지와 여러 성중들을 거느리고 함께 영접하러 오신다고 하셨다. 다만 개개인의 인연이 다르므로 보이는 바 또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똑같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처님만 보이고 보살은 보이지 않거나, 어떤 사람에게는 보살만 보이고 부처님은 보이지 않거나, 또 어떤 사람은 소수의 성중들을 보고 어떤 사람은 다수의 성중들을 보며, 어떤 사람은 단지 연꽃과 광명만을 보게 된다.

 

55. 질문: 아미타불께서 영접을 하러 오신 것을 보면 ‘뛰어 올라가야 한다(衝上去)’는 말을 들었는데, 아미타불을 친견한 뒤에 어떻게 뛰어 올라가야 하는가?

 

: ‘뛰어 올라감’이란 말은 경전에서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어떤 사람이 상상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상 왕생을 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데, 마치 연인들이 만났을 때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서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과 같다.

염불인이 영접을 하러 오신 부처님을 뵈면 아주 자연스럽게 부처님을 향해 다가갈 것이다. 마치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따뜻한 장소를 찾게 되고,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밝은 곳을 원하는 것과 같이 모두가 당연한 경향이다.

 

 더군다나 아미타불의 위신력으로 섭취해주심이 있기 때문에, 이때에 왕생을 원하는 사람은 마치 작은 풀잎 하나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난 것과도 같이 자연히 부처님을 따라가게 된다. 예컨대 󰡔관경󰡕의 구품왕생은 전부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광명을 놓고 손을 내밀어 영접을 하시는데, 염불인은 자연스럽게 연화대에 올라 앉아 부처님의 뒤를 따라 곧바로 극락세계의 연못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오로지 염불만 할 뿐, 어떻게 연화대에 올라가고 어떻게 서방의 연못으로 왕생하는지는 전부 아미타불의 소관이시므로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56. 질문: 임종할 때에 마魔가 와서 아미타불의 모습으로 변화할 수도 있는가?

 

: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임종 때는 마가 붙을 때가 아닐뿐더러, 더욱이 염불인의 임종에는 아미타불과 관음‧세지‧제대보살들께서 광명신력으로 가호해주심이 있으므로 모든 삿된 마들이 가까이 범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정오의 태양 아래에는 검은 그림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57. 질문: 임종 때 혼미 상태일 때, 그 사람을 위해 조념을 해준다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 제3집에 보면, 황영부黃英夫는 식물인간처럼 혼미한 지 43일이 되었지만, 그를 위해 법문을 하고 염불을 해주자 여전히 수승하게 왕생하였으니, 그것이 곧 명백한 증거다.

 

58. 질문: 혼미 상태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을 텐데, 어찌하여 그 사람을 위해 법문을 하고 염불을 해준다고 왕생할 수 있단 말인가?

 

: 겉모습은 비록 혼미한 상태이지만 정신은 혼미하지 않으므로, 그 사람을 위해 법문과 염불을 해준다면 여전히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그 사람이 따라서 염불을 하고 정토왕생을 원한다면 틀림없이 왕생한다.

 

59. 질문: 만에 하나 임종 때 혼미하여 부처님이 영접하러 오신 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왕생할 것인가?

 

: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염불감응록󰡕에서 장묘신張妙信은 뇌혈관 파열로 하루 종일 혼미한 상태였으나, 깨어나자마자 갑자기 “부처님께서 나를 영접하러 오셨으니 나는 왕생한다”라고 말한 것이 곧 그 증거이다. 이 사례가 설명하듯이, 비록 육체는 혼미한 상태이지만 정신(神識)은 혼미하지가 않기에, 부처님께서 영접하러 오신 모습을 또렷하고 분명하게 뵙고 부처님을 따라서 왕생을 할 수 있다.

 

60. 질문: 임종자 또는 망자가 아미타불을 뵌 적이 없어서 부처님을 못 알아보면 어떡하는가?

 

: 부처님을 뵙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초목이 봄을 모르지만 봄이 오면 자연히 생기발랄해지는 것과 같다. 사람이 죽음의 고통 속에 있을 때 부처님이 영접하러 오시는 것은 마치 초목이 태양을 향하고, 추운 사람이 따뜻한 곳을 찾는 것과 같아 자연스럽게 부처님을 향해 기울게 된다. 중생들은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할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나무에는 불의 기운이 있어서 맹렬한 불속에 넣으면 자연히 타게 되고, 얼음에는 물의 성질이 있어서 끊는 물에 넣으면 저절로 녹게 된다. 그런데 어찌 나무가 불을 모르고 얼음이 물을 모를까를 걱정하겠는가? 더군다나 부처님께서 위신력으로 가지(加持, 가피)하심이 있거늘, 어찌 범부로 하여금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시겠는가!

 

61. 질문: 살아생전에 염불을 한 적이 없던 사람이, 죽은 뒤에 조념을 해준다고 해서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육체는 비록 못쓰게 되었지만 영혼(神識)은 죽기 않고 평소보다 더욱 예민해지므로, 단지 법문을 듣고 염불을 하며 왕생을 원하기만 한다면 왕생하지 못하는 이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염불감응록󰡕 곳곳에 여러 증거가 있다.

 

62. 질문: 비명횡사를 한 사람도 조념을 해주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 곳곳에는 추락‧교통사고‧타살‧급사로 죽은 사람들이 조념염불을 통하여 모조리 왕생한 사례들이 있으니, 그것이 명백한 증거이다.

 

63. 질문: 자살한 사람도 조념을 해주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64. 질문: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난 사람도 조념을 해주면 역시 왕생할 수 있는가?

 

: 비록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난 사람일지라도 영혼이 아직 환생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위해 조념을 해주면 역시 왕생할 수 있다.

 

65. 질문: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났어도 조념을 통해 왕생할 수 있다면, 망자를 위해 조념하는 시간 배정을 어떻게 안배하는 것이 타당한가? 49일 동안 염불을 해주는 게 더욱 좋은 것인가?

 

: 조념과 천도는 망자가 죽은 시간과 가까울수록 좋으며, 그 시간을 차일피일 미룬다거나 따로 날짜를 잡는다던가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조념을 하는 시간의 길고 짧음은 마땅히 실제 사정에 따르되, 아무튼 길면 길수록 좋다.

 

66. 질문: 망자의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염불을 해줘도 왕생에 도움이 되는가?

 

: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공간을 초월하여 그 감응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염불감응록󰡕 제3집에 보면, 관영冠英이라는 사람은 대만에 살고 있었고, 돌아가신 부친은 중국대륙에 있어서 서로 수천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그가 부친을 위해 염불을 해주니 극락왕생을 했다는 사례가 바로 그 증거다.

 

67. 질문: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조념만 해주면 전부 정토왕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조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왕생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이른바 조념이란 본인 스스로 염불을 하게끔 도와주는 것으로서, (임종을 맞이한) 본인이 염불을 해야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조념을 해주더라도 만약에 본인의 선근이 적고 업장이 많으며, 왕생을 원치 않고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역시 왕생할 수 없다. 다만, 왕생을 못하더라도 목숨이 끊어질 때 한마디 부처님의 명호가 귀를 스쳐지나가기만 하면 최소한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음을 보장할 수는 있다. 그런 까닭에 그 공덕과 이익 역시 불가사의한 것이다.

 

68. 질문: 어떤 사람에게 반드시 조념을 해주어야만 왕생할 수 있거나 왕생을 확신할 수 있는가?

 

: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⑴ 부처님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

⑵ 염불을 하지 않는 사람

⑶ 왕생을 원치 않는 사람

이 세 종류의 사람은 반드시 조념이 필요하다.

⑷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진실하지 않은 사람

⑸ 잡행을 하는 사람

⑹ 의심이 많은 사람

이 세 종류의 사람 역시 조념을 해주어야만 왕생을 확신할 수 있다.

 

69. 질문: 어떤 사람이라야 조념이 필요 없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는가?

 

: 평소에 진심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왕생을 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은 임종할 때 조념의 유무와 상관없이 반드시 왕생한다.

 

70. 질문: 어째서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염불수행하고 진심으로 왕생발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역시 임종조념을 원하는가?

 

: 그것은 왕생이 결정되지 않아서 사람들의 조념이 필요한 게 아니라, 비록 왕생이 이미 결정되었지만 연우들을 모시고 임종할 때 배웅을 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일 뿐이다.

 

71. 질문: 염불인에게 어떠한 징표가 있어야 확실하게 왕생하였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 다음과 같은 징표이다.

⑴ 왕생할 때 앉고 눕는 것이 자유롭다.

⑵ 사전에 정토왕생을 하는 시간을 정확히 안다.

⑶ 염불을 하면서 숨이 끊어진다.

⑷ 임종할 때 스스로 극락세계의 거룩한 경계가 나타나고, 불보살님과 연꽃이 나타나 영접하러 오셨다는 말을 한다.

⑸ 임종조념을 해주던 사람이 극락세계의 불보살님과 연꽃이 영접을 하러 오심을 본다.

⑹ 친한 사람의 꿈속과 선정 속, 또는 염불 도중에 직접 그 사람이 정토왕생을 하는 모습이 뚜렷하고 확실하게 본다.

⑺ 죽은 뒤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으나 정수리만큼은 따뜻하다.

이상 일곱 가지 중에 어느 하나만 갖췄어도 틀림없이 왕생했다고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 외에도 염불인의 목숨이 끊어진 뒤에 얼굴에 미소를 짓거나, 신체가 유연하거나, 천상의 음악이 울리거나, 미묘한 향기가 나거나 하는 등의 현상도 기본적으로 정토왕생의 징표라고 볼 수 있다.

 

72. 질문: 만약에 위와 같은 그러한 상서로운 징조가 없었다면 정토왕생을 못했다는 것인가?

 

: 그렇지는 않다. 평소에 염불을 하고 믿음과 발원을 갖춘 사람이라면 비록 특별한 징조가 없더라도 틀림없이 왕생한다. 다만 이것은 부처님과 왕생자 본인만 알 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근본부터 말하자면, 왕생이 결정되는 것은 부처님의 원력이 헛되지 않기 때문이지 상서로운 징조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일반 초심자들은 부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원력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잠시 눈앞에 보이는 상서로운 징조들을 통해 그 사람의 믿음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73. 질문: 어떤 사람들이 왕생할 때 자유로운가?

 

: 왕왕 신분이 낮고, 우둔하고 지혜가 없으며, 마음씨가 착하고 부드러우며, 성실하게 염불을 하며, 떠벌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좋게 갈 수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여섯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⑴ 정진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사람

⑵ 어리숙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

⑶ 듬직하고 드러내기를 싫어하며 조용히 수행하는 사람

⑷ 자비롭고 착하고 유순한 사람

⑸ 염리심(厭離心: 생사를 싫어하여 벗어나려는 마음)이 간절한 사람

⑹ 숙세에 선근이 있는 사람

 

74. 질문: 어떤 사람이 왕생할 때 비교적 자유롭지 못한가?

 

: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⑴ 잡행을 하는 사람

⑵ 게으른 사람

⑶ 의심이 많은 사람

⑷ 교만한 생각으로 잘난 척하는 사람

⑸ 명예와 이익을 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⑹ 고집이 센 사람

⑺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

이상 일곱 부류의 사람들은 숙세에 큰 선근이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자유롭게 왕생하기란 어렵다.

 

75. 질문: 어떤 염불인이 미리 왕생할 시간을 알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미리 시간을 알 수 있는가?

 

: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⑴ 염불의 공력이 많이 쌓인 사람

⑵ 숙세의 선근이 깊고 두터운 사람

이런 사람들은 선정 속에서나 또는 염불을 하고 있는 도중에 불보살님의 계시를 받아서 알 수 있다. 혹은 다른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남들은 신기하게 느껴지겠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마치 눈앞에 놓인 사물을 보는 것과 같아 전혀 특별할 게 없다.

 

76. 질문: 평소에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왕생을 못할까 두려워서, 사전에 미리 연우들에게 연락하여 때가 되면 와서 조념을 해줄 것을 부탁해도 되는가?

 

: 사전에 연우들에게 조념을 부탁하는 것은 괜찮다. 그렇다고 평소에 염불수행을 하지만 왕생이 결정되지 않아 반드시 조념을 해야만 왕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조념의 유무와 상관없이 반드시 왕생한다”고 깊이 믿어야 한다. 다만 범부들은 세속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임종을 할 때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기 쉽다.

 

또한 불교를 믿지 않고 염불을 하지 않는 가족들이 세속적인 방식으로 임종을 처리해서 염불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염불인의 염원을 어긴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에 만약 연우들이 오셔서 함께 염불을 한다면 위안과 따뜻함을 배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서 현재 동일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장래에 동일한 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니, 친한데다가 더 친해진 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종 때 서로 배웅을 해주는 것은 피차간에 아주 즐겁고도 위안이 되는 일이다.

온정적이면서 장엄한 염불은 임종을 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족들에게 이별의 슬픔을 덜어주고 그분들이 불법에 대한 선근과 신심을 증장시켜주며, 정토를 동경하고 염불왕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다.

 

 적잖은 사람들이 바로 연우들이 오셔서 그분의 가족을 위해 염불을 해준 덕택에 불법의 이익을 얻고 감동을 한 나머지 불교를 믿고 염불을 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조념을 해주러 오신 연우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애심愛心으로 봉사하고, 무상無常함을 체험하며, 현장에서 아미타불의 자비로운 구제를 견학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77. 질문: 평상시 염불과 임종시 조념의 사이에 마땅히 어떤 마음으로 취사取捨를 해야 하는가?

 

: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염불인이다. 임종할 때 설사 그 자리에 아무도 없더라도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청정대해중보살清淨大海眾菩薩들을 거느리시고 영접하러 오실 것이다.’

다만 사바세계의 업보가 다할 때에, 연우들이 염불을 하며 배웅을 해준다면 세속적인 인연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서로가 기뻐하고 위안이 되니, 역시 매우 수승한 일이다.

 

만약에 자신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오로지 염불수행을 하여 부처님 원력의 배를 타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에 힘써야지, 왕생을 임종조념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면 임종할 때 되도록 가서 조념과 위로를 해줘야 한다.

 

4. 일상생활에서의 마음가짐에 관하여

 

78. 질문: 어째서 나는 염불을 안 하면 마음이 그나마 편안한데, 염불만 하면 도리어 마음이 답답해지고 염불하기가 싫어지는가?

 

: 이것이 바로 당신이 염불의 이익을 얻었고 염불이 당신에게 적합하다는 증거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마작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축구경기를 좋아하며 어떤 사람은 인터넷 게임을 좋아해서, 한 번 시작했다 하면 날이 새는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쌩쌩해지는 것은 망념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염불을 하면 여기가 불편하지 않으면 저기가 답답한 것은, 부처님의 명호로써 망념을 다 잡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야생마에게 처음으로 고삐를 채울 때에 당연히 자유롭지 못해서 반항을 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 마음속의 망념 역시 야생마와도 같아서, 부처님의 명호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힘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다. 따라서 염불을 오래오래 하다 보면 망념이 자연히 길들여지는 것이, 마치 야생마가 좋은 말(良馬)로 되는 것과 같다. 만약에 염불은 하지 않고 망념이란 야생마를 좇아 치달린다면 이 야생마는 우리를 태우고 곧장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79. 질문: 어째서 나는 염불을 하지 않을 땐 활력이 넘치는데, 염불만 했다 하면 쉽게 졸리는가?

 

: 이것은 일반인들의 마음이 항상 망상에게 점령당하고 망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덩달아 망념을 참마음으로 여기고 남을 자신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염불을 하지 않을 때는 망념이 활기를 띠면서 흥분 상태에 있기에 본인은 자신의 활기가 넘친다고 느끼지만, 염불을 하면 부처님 명호의 위력으로 인해 망념이 억제되어 더 이상 흥분 상태에 처해 있지 않게 되므로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졸리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마치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한 장소에 덕망이 높고 위엄이 있는 제왕이 나타나면 즉시에 늦가을의 매미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염불을 하면 졸리는 것 역시 염불의 이익을 얻은 것으로서, 위에서 염불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서 불편한 경우보단 한층 더 나은 편이다. 다만 아직은 완전히 부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때에 망념을 간파하여 (망념을) 따라가지 않고 부처님을 가까이한다면, 염불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욱 밝고 깨끗해질 것이다.

 

80. 질문: 어째서 나는 운전을 하거나 길을 걸을 때에 염불을 하면 순조롭게 오랫동안 할 수 있는데, 앉아서 조용히 염불하려고만 하면 순조롭지도 않고 오랫동안 지속할 수도 없는가?

 

: 성격이 지나치게 활발하거나 생각이 지나치게 활기찬 사람들이 이렇게 되기 쉽다. 하지만 개의치 않아도 된다. 자신의 습관화된 방식에 따라 염불하면 되니, 왕생에 있어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81. 질문: 염불인들은 망상잡념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 망상잡념에 대하여 염불인들은

첫째, 조급해하지 말고

둘째, 두려워하지 말고

셋째, 마땅히 기뻐해야 하고

넷째, 생각을 바꿔야 한다.

⑴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한다. 조급한 마음에 망상잡념을 단박에 제거하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겁생 동안 우리들은 망상잡념에 너무나 습관화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담배와 술을 끊고 마약을 끊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어려운지 모른다. 바로 이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염불을 하고 부처님의 원력에 기대어 왕생을 하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여 망상잡념을 제거하고 마음을 정화하여 왕생하려 한다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⑵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망상잡념이 있는 것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모든 범부들은 전부 망상잡념이 분분한 존재들이고, 아미타불께서 구제하시려는 대상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아미타불께서 이미 당신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왕생을 할 수 있다는 보증을 해주신 이상, 설령 망상잡념이 있으면 어떠한가? 이렇게 망상잡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망상잡념 역시 큰 파도를 일으킬 수 없어서 온순해지고 잠잠해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망상잡념을 두려워한다면 도리어 말썽을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굉장히 무섭게 느껴지도록 한다.

 

⑶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어째서 망상잡념이 있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망상잡념을 조복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자각했다면 곧 나는 계‧정‧혜 삼학을 원만하게 닦을 수 없고 염불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아미타불께서 구제하려는 중생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사가 치료할 대상은 환자이지 건강한 사람이 아니듯이, 망상잡념이 있는 내가 어떻게 아미타불께서 구제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약에 망상잡념이 없는 성인聖人이라면 아미타불께서 굳이 그런 성인을 위하여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나야말로 아미타불의 구제대상에 딱 부합되므로, 내가 염불을 하면 틀림없이 왕생하게 되니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염불을 할 때에 자신에게 망상잡념이 많음을 안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아미타불로부터 구제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본래 염불을 하지 않을 때는 아직 자신에게 잡념이 많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염불만 하면 즉각 잡념이 분분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달이 없으면 나무의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지만 달빛이 밝을수록 나무의 그림자 역시 짙어지는 것과 같다. 내가 염불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광명이 나의 마음속을 비춰주신 것이고, 그때서야 자신의 망상잡념을 보게 된 것이니 어찌 내가 이미 부처님으로부터 구제된 것이 아니겠는가?

 

⑷ 생각을 바꿔야 한다. 망상잡념인줄 알아차리면 즉시 내려놓고 상대하지 말며, 생각을 바꿔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예컨대 달빛 아래의 나무 그림자를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볼수록 그 그림자는 더욱 어둡게 느껴지게 된다. 이럴 땐 두 눈을 돌려 허공 속에 떠 있는 맑고 밝게 비치는 달을 보고, 얼굴을 스치는 산들산들한 맑고 신선한 바람을 즐긴다면 마음은 단박에 탁 트이게 될 것이다.

 

경전에서 “일향전념一向專念”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망상잡념이 생기면 그냥 내버려두고 함께 뒤엉키지 말며, 오로지 아미타불을 향하여 염불만 하면 된다. 망념은 스스로 생겨났다가 다시 스스로 사라지게 되는 존재이므로, 억지로 망념이 사라지게 할 필요는 없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여전히 우리는 범부의 본분을 지키면서 착실하게 염불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범부로서 망상잡념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이라면 눈과 귀가 있듯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임을 안다면, 이 망상잡념을 내 몸 이외의 것(身外之物)이라 생각하여 반드시 제거를 해야 통쾌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망상으로 인해 망상이 더 생겨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침 옛말 중에 “세상에는 본래 아무 일도 없건만,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구는구나!”라는 구절과 잘 어울린다. 이 구절을 다시 달리 표현하면“염불만 하면 아무 일도 없건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구는구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염불을 하면 아미타불 편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시고 어떠한 제한적 조건도 없으시건만, 우리들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여 자기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다.

 

82. 질문: 정토법문을 만났지만 도심道心이 강하지 못해 염불을 하다가 말다가 하는데, 그래도 왕생할 수 있는가?

 

: 도심道心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왕생을 원하는 마음(願生心)이고

둘째는 정진하는 마음(精進心)이다.

만약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 듯 없는 듯하고 왕생을 해도 되고 못해도 되며, 염불을 하다가 말다가 한다면, 그렇다면 왕생을 보장할 수 없다.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면 왕생하고 뒤로 물러서면 왕생을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근기 자체가 게으르고 나약하여 염불을 하는 데 용맹정진을 못하고 하다가 말다가 하지만, 왕생을 원하는 진실한 마음만은 바뀌지 않는다면 여전히 왕생할 수 있다. 또한 진심으로 왕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염불은 저절로 점점 더 증진하게 될 것이다.

 

83. 질문: 나는 매일 염불을 하는 것 외에도 여전히 마작을 즐기는데, 그래도 왕생할 수 있는가?

 

: 그것은 본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 만약에 염불왕생을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습성 때문에 마작을 즐긴다면, 그래도 왕생을 할 수는 있다. 다만 마작을 끝내고 나면 본인도 이건 시간낭비이고 염불을 하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시일이 지나다 보면 저절로 적게 하게 되고 결국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염불은 겉치레에 불과하고 마작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주객과 경중이 전도된 것으로서 왕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84. 질문: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염불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염불을 많이 할 것을 시시각각 상기시킬 필요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마작을 하면서 자신의 왕생에 대하여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며 소탈하고 자재할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옳은 것인가?

 

: 이런 인식은 매우 편파적인 것이다. 마땅히 자신의 왕생을 걱정하지 않는 동시에, 염불을 많이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각자 염불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에 관해서는 사람에 따라서 틀리겠지만, 많이 하고 싶다는 생각만큼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통 재가자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한다든가 마작을 한다든가 하는 것은 아마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진심으로 염불왕생을 원한다면 물론 무방하겠으나, 그래도 텔레비전을 적게 보고 마작을 적게 하며 염불을 많이 하는 것만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소탈함과 자재함을 말하자면, 역시 염불하는 것이 소탈하고 자재한 것이다.

 

범부의 마음이란 본래부터 제멋대로인 데에 익숙하므로, 이제 겨우 염불을 시작하면 이내 속박을 느끼게 된다. 애써 상기시켜도 염불을 늘 잊어버리는 판국에, 자유의지에다 맡긴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는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아마도 자신은 틀림없이 아미타불을 의지한다고 생각하면서 염불을 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마음조차 희미해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텔레비전과 마작 속에 빠져들고 만다. 부처님을 의지하고 염불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관념일 뿐이고, 자신을 위해 찾은 변명거리에 불과하며, 염불은 아주 적게 하거나 심지어 아예 염불을 안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85. 질문: 사후에 장기기증을 하는 것은 보살행이 틀림없으나, 범부의 신분으로서는 집착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왕생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 그건 개인의 발심을 봐야 한다. 만약 삼매력이 부족하고 원력이 견고하지 않다면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된다. 왕생한다는 것은 큰일(大事)이므로, 마땅히 큰일을 보전하여 결정된 왕생을 구함으로써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그 다음에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오면, 그때는 석가모니불처럼 제 몸을 던져 매와 호랑이를 먹이는 일도 어렵지 않게 되니, 하물며 다른 일들이겠는가!

 

86. 질문: 나는 상품상생을 원하는데, 그래도 되는가?

 

: 아미타불의 구제에 맡기기를 발원하는 것만 못하다. 역대 정토종 조사들 중에 이와 같이 발원하신 분은 듣지 못했다. 인광대사께서 “왕생만 할 수 있다면 하품하생일지라도 만족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오로지 아미타불을 따르겠다는 뜻이다.

 

87. 질문: 나는 ‘왕생할 때에 몸에 병으로 인한 고통이 없고, 단정히 앉아서 왕생하고, 선정에 든 듯하며, 기이한 향기가 온 방안에 가득하고, 하늘 음악이 허공에 울려 퍼지도록 함으로써 대중들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는 발원을 하려는데, 괜찮은가?

 

: 참으로 이런 원력이 있다면 안 될 건 없다. 그렇다면 남들이 모르게 면밀하게 실행에 옮겨야 한다. 만약에 진정한 공행功行이 있다면 설사 이런 발원을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러한 광경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진실한 행도 없으면서 이미 큰소리를 친 상태라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면, 진심으로 왕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보기 좋게 꾸미려는 가식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렇다면 왕생할 때가 되면 도리어 장애가 되어 왕생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염불왕생은 사람 됨됨이와 같아서, 진실하고 분수에 맞게 살며 자신의 무게가 얼마면 얼마만큼의 말만 해야 한다. 착실하게 염불하고 착실하게 왕생한다면, 비단 죽을 때만 사람들의 믿음을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더욱 더 사람들의 믿음을 일으킬 수 있다.

 

88. 질문: 나는 불치병이 낫고, 건강하고 장수하기를 발원하여 이것으로 표법表法을 하려는데, 괜찮은가?

 

: 모든 것이 다 무상한데 무슨 법을 표하겠단 말인가? 이는 마음속에 왕생할 생각이 없으면서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진심으로 왕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120세까지 살아도 좋고 오늘 밤에 죽어도 좋으므로, 장수와 단명에 대하여 일절 신경 쓰지 않고 병이 깊을수록 더욱 왕생발원을 할 것이다.

 

89. 질문: 나는 왕생의 이익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건강과 장수, 부귀와 영화 등 생선과 곰발바닥을 다 얻고자 발원하는데, 괜찮은가?

 

: 오로지 왕생발원만 있으면 된다. 가난과 부유함, 장수와 단명은 앞서 지은 운명에다 맡기고 삶과 죽음, 빈곤과 영달은 전적으로 아미타불께 의지할 일이다. 금생에 받은 몸(報身)은 전생에서 지은 업의 결과이다. 이미 그 과보가 나타난 이상, 설사 염불을 통하여 바꿀 수 있다고는 하지만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의 복력이 부족하여 큰 부귀를 감당할 수 없다면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반드시 큰 부귀를 누리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이미 다 지은 초가집을 개선하려면 다만 일정한 범위 내에서 보수와 리모델링을 하여 사람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는 있겠지만, 헌집을 허물고 다시 짓지 않는 한 초라한 초가집을 호화로운 별장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도 하여금 정토왕생을 하여 철저한 부귀와 영원한 수명을 얻을 수 있도록 발원하신 것이다.

 

90. 질문: 나는 왜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가?

 

: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활달하고 얽매임이 없는 사람은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들으면 죽을 날이 멀지 않고 왕생할 날이 가까워졌음을 알기에, 이것이 바로 자신이 기대하던 것이므로 기뻐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세속적인 감정에 얽매여서 목숨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세간에 대한 미련이 많기 때문에,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바뀌지만 않는다면 여전히 왕생할 수 있다

 

. 이 ‘죽음’이라는 글자는 본래 가명에 불과하며, 생명은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업에 따라 몸을 바꾸고 태어나는 처소를 달리하는 것을 죽음이라 부를 뿐, 사실상 진정한 죽음이란 없다. 더욱이 염불하는 사람은 임종 때에 부처님이 내영을 하시므로 목숨이 다하면 영혼은 곧바로 정토에 태어나게 되니, 사실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91. 질문: 만약에 근근이 왕생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왕생한 뒤에 빨리 성불할 것을 고려해 현세에서 보리심을 발하고 널리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자신의 심성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한다면, 이는 괜찮은가?

 

: 발보리심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은 것이다. 발보리심을 했다면 현세에서 이미 보살인데, 이 세상에 보살 한 분이 더 있으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다만 문제는 사람들이 보리심을 발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만일 착실하게 전수염불을 하면서 여력이 남아 있으면 대승경전을 독송하고, 마음을 넓혀서 염불하기를 더욱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왕생한 뒤에 빨리 성불을 하기 위해 사전준비를 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어두운 밤중에 열 개의 촛불 빛이 물론 하나의 촛불보단 밝겠지만, 촛불을 많이 준비해서 태양이 떠오를 때 더 밝게 빛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어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는 기껏해야 어두운 밤에 촛불 빛의 밝고 어두운 차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불일佛日의 대광명大光明 경계이므로, 일단 왕생하면 부처님 경계 속으로 들어가 부처님과 똑같이 수용受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도대사께서는 “심성心性은 백천 개의 태양보다 밝게 빛나고 자비와 지혜를 동시에 운용함이 그대로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시고 “극락왕생하여 연꽃이 피고 미묘한 법문을 들으면 십지보살의 원행願行이 저절로 드러나리라”고 하셨다. 이처럼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따라 모두 신속하게 성불할 수 있거늘, 또 어떤 인위적인 힘이 있어서 아미타불의 서원을 가속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92. 질문: 자신의 왕생이 결정된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매일 경전과 다라니를 독송하여 천도 불사를 함으로써 발보리심 하여 자신을 장엄하는 실제 행동으로 삼고자 하는데, 괜찮은가?

 

: 그럴 필요는 없다. 염불하는 사람은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전부 한마디 아미타불이다. 어떤 사람이 공덕 불사를 부탁해도 역시 그분을 위해 염불을 해주어야 한다. 과연 자신의 왕생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해주시는 이 법문을 열심히 널리 선양하는 데 노력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염불하여 성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발보리심이고 위없는 공덕 장엄이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경전과 진언을 독송하는 불사에만 열중하다 보면, 결국에 왕생은 그림 속의 떡이 되고 말 것이다.

 

93. 질문: 나는 염주를 들고 용맹스럽게 염불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자력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옳은 것인가?

 

: 이런 견해는 옳지 않다. 결코 용맹스럽게 염불하는 것은 자력이고, 게을러서 염불을 안 하는 게 오히려 타력인 것은 아니다. 마음속으로 아미타불의 서원을 우러러 의지한다면 비록 하루에 수만 번씩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지라도 역시 타력(불력)인 것이다. 남들이 용맹스럽게 염불하는 것을 보면 마땅히 본받으려고 해야 하며, 본받을 수 없으면 마땅히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94. 질문: 염불을 하려면 전수專修를 해야지 잡수雜修를 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는데, 오욕락도 잡수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범부로서 오욕락이 전혀 없도록 한다는 것은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어쩔 수 없는 타락과 고의적인 타락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 오욕五欲은 인생의 현상이므로 잡수라고 말할 것까진 없다. 천상에는 수승하고 미묘한 오욕이 있고, 사람에게는 거친 오욕이 있으며, 더 나아가서 악도인 축생들에게도 약간의 오욕락은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합리적인 오욕락은 누릴 수 있지만, 법과 인륜을 어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본래부터 오욕중생이므로, 이런 신분을 가지고 꾸준히 염불하는 것이 곧 전수專修이다.

 

95. 질문: 비록 왕생을 원하지만 일시에 전수염불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는데, 믿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 전수염불은 언뜻 보기엔 간단한 것 같아도 자세히 알고 보면 불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법문이다. ‘염불만 하면 누구나 왕생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선근이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믿기 어려운 것이다.

󰡔무량수경󰡕에서는 “부처님의 지혜를 분명히 믿음(明信佛智)”이라 하시고 “어려움 중의 어려움은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難中之難 無過此難)”고 말씀하셨으며, 󰡔관경󰡕에서는 굉장히 긴 지면을 할애하여 먼저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수행법을 설명하여 복선을 깔아놓고, 맨 마지막에서야 칭명염불법을 부촉하셨다.

 

󰡔아미타경󰡕에서는 직접적으로 “믿기 어려운 법(難信之法)”이라 부르셨는데, 이를 육방제불께서 넓고 긴 혀를 내밀어 증명해주셨다. 따라서 일시에 전수염불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해(解)와 수행(行)이라는 두 측면을 통하여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볼 수 있다.

 

‘해解’는 이해이다. 전수염불에 대한 교리 관련 서적과 전수염불을 하여 왕생한 사례들을 기록한 왕생실록들, 그리고 인과응보에 관한 서적들을 많이 보면서, 그 속에서 아미타불의 자비와 원력의 위대함, 명호 속에는 모든 공덕이 들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하열함과 무능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행行’은 곧 행지(行持: 명호를 지니고 염불함)이다. 진실한 마음과 겸손하고 하심下心하는 마음으로 착실하게 염불수행을 해야 한다. 진정한 수행자는 수행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수행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임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진정으로 청정한 계율을 엄격히 지킨다는 기준으로 따져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지킬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진정으로 자신이 효자가 되고자 했을 때에야 비로소 쉽지 않음을 알게 되며, 진정으로 보시를 하려 할 때에 비로소 자신의 마음속에 늘 미련이 남고 늘 나와 남의 분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선행이 누적됨에 따라서 한편으로는 선근이 더욱 더 두텁게 쌓이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더욱 더 자비롭고 부드러워질 것이다. 게다가 관련된 교리와 감응의 작용에 대하여 듣고 훈습을 하면서 이른바 ‘이해와 수행을 함께 닦아 나아간다(解行並進)’면 점차적으로 전수염불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볼 때는 선택을 해서 봐야 하고, 수행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만약 성도문의 수행과 관련된 책들을 보게 되면 서로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적 상응하지 않는다. 비록 선행을 닦으면서 수행을 한다고는 하지만, 만약 허망한 명예와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고 또 아주 교만하다면 자신은 수행을 굉장히 잘하고 있고 덕행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을 공부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아상我相은 더욱 커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역시 상응하지 못한다.

󰡔무량수경󰡕에서 “겸손하고 공경한 마음으로 듣고 받들어 행하여 환희심에 뛰놀며 크게 기뻐하리라. 교만하고 삿되고 게으른 사람은 이 법을 믿기 어렵도다”라고 하신 말씀과 󰡔관경󰡕에서 반드시 “지성심至誠心‧심심深心‧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을 갖추고 정업삼복淨業三福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96. 질문: 전수염불을 하기 전과 전수염불을 시작한 뒤에 똑같은 선행을 하고 있다면, 양자 간에 차별이 있는가?

 

: 당연히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국왕을 호위하는 의장병이 단독으로 외출할 때와 국왕을 따라나설 때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호위를 맡은 인원이 비록 장삼이사張三李四와 같이 다른 이름을 가졌어도, 국왕의 뒤를 따라나선다면 개인적인 신분은 사라지고 국왕의 지휘를 따르는 군인의 신분으로 통일되므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감히 그들을 범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다. 비록 똑같은 사람이지만 개인의 신분으로 모여 있다면, 설령 개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백성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여 특별히 존귀한 것은 아니다.

 

염불은 국왕과 같고 그 외의 모든 선善은 백성과도 같다.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은 온갖 선행을 닦고 있어도, 본인은 온갖 선행을 닦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공로를 완전히 염불의 공덕으로 돌린다. 만약에 꼭 그분들의 선행을 따지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심지어 몸 둘 바를 몰라 할 것이다. 마치 국왕의 호위병이 완전히 국왕의 위덕을 받아쓰기 때문에 그 사람은 본인에게 어떠한 위덕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전수염불을 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선을 닦고 있어도, 마치 일반 백성이 국왕의 지도가 없으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것과 같다. 다만 개인의 능력이 크고 작음을 논할 수는 있겠지만,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난다 할지라도 국왕의 위덕과는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선도대사께서는 전수염불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닦은 모든 선을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隨緣雜善)’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이러한 선의 힘에 의지해 아미타불의 보토에 왕생하려 한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미타불께 귀명하는 마음으로(󰡔관경󰡕에서 설하신 지성심 등의 세 가지 마음) 닦은 선은 설사 그 선이 아무리 작고 아무리 적을 지라도 하나하나의 선을 ‘진실한 업(眞實業)’이라고 부르시고, 이를 회향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선행을 닦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들이 닦은 선은 설사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최상의 선이 된다. 염불의 뒤에 붙어 따르는 까닭에 염불과 하나가 되고, 자신의 공덕에 집착하지 않고 본래 그러한 공성空性과 무아無我의 이치에 잘 계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잡다하게 온갖 선을 닦는다면 설령 그 선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진실한 업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무아와 공성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예컨대 사자성어에 “점철성금點鐵成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쇠와 금은 비교할 수 없으나 이 쇠를 신령스런 손가락으로 한 번 대기만 하면 쇠가 금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범부들이 닦은 인천의 모든 선은 원인이든 결과든 전부 전도된 것이고 전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말할 가치도 없지만, 일단 전수염불에 들어오게 되면 명호라는 신령스런 손가락에 한 번 살짝 닿은 것처럼 본래의 잡다한 선이 진실한 업으로 바뀌게 되고, 범부는 현생에서 불퇴전의 지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이야말로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들은 선을 닦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견해다.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들은 다만 모든 선을 닦으면서 결코 자신에게 선을 닦은 공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염불에다 그 공을 전부 돌릴 뿐이다.

 

97. 질문: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은 법당을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가?

 

: 법당을 설치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의 신앙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규범이 되어주고 우리들의 수행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준다. 법당을 설치할 때 기본적인 원칙은, 반드시 본인이 수행하고 있는 법문과 상응하도록 전일하되 잡다하지 않고, 간단하되 번잡스럽지 않으며, 청정하고 장엄해야 한다.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은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신 오정행(五正行: 독송‧관찰‧예배‧칭명‧찬탄)에 따라 오로지 아미타불께만 예배하고, 오로지 아미타불께만 공양하고 찬탄해야 한다. 그래서 법당에는 오직 아미타불 한 분만 모시면 된다. 부처님 한 분, 등 하나, 향 하나, 깨끗한 물 한 잔, 그리고 전적으로 아미타불만 염송하는 염불기 하나만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육근이 상대하는 경계가 단조로울수록 마음 또한 전일해지기 때문이다.

 

화학성분이 들어 있는 향료는 사용하지 말고 되도록 최고급의 전단향(또는 침향)을 사용해야 한다. 집안에 설치된 법당의 크기가 작으면 향을 한 대만 피우면 되므로 세 대를 피울 필요가 없다.

불단을 모시면 다음과 같은 좋은 점이 있다.

 

첫째는 염불수행에 도움이 되니, 경계와 인연을 만날 때마다 정념을 일으킬 수 있다.

 

둘째는 어린이들의 심신의 교육과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이롭다. 법당은 특별한 교실과 같고, 아미타불은 무언의 스승님과도 같아서 은연중에 감화하는 작용은 어떠한 사람과 어떠한 교육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법당이 설치되어 있는 가정에는 어린이들이 어려서부터 절을 하고 염불을 하며, 부처님의 명호를 들음으로써 선근을 심게 되고, 복과 지혜가 자라나게 되며, 인과를 깊이 믿게 된다. 나중에 커서는 자연히 규율을 잘 지켜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어질고 착하고 정직하고 유용한 인재가 될 것이다.

 

셋째는 법당의 광명은 온가족이 평안하고 행복하도록(吉祥) 보호해줄 수 있다. 가족 중에 밖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걱정이 된다면, 집에 모신 부처님께서 아시고는 그들을 보호해주실 것이다.

만약 법당을 설치할 여건이 안 된다면 마음속에 모시면 된다.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빛나는 법당으로 만들고, 그 법당에다 오직 아미타불 한 분만 모시며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된다.

 

 늘 이 한마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항상 아미타불의 공덕 향을 사르는 것과 같아서, 아미타불께서는 한결같이 다 아신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더러 당신을 모시고 예배하라고 요구하신 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부처님을 모시고 염불하여 자신이 이익을 얻는 것이다.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음과 얕음, 수행의 전일함과 잡다함(專雜), 왕생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는 그 사람의 법당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대체로 법당의 배치가 난잡하면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은 아직 낮은 단계에 있고 단지 평범한 신앙일 뿐이며, 중심이 없고 마음속에 주인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설사 그 사람이 불교를 믿은 시간이 아무리 길더라도 모두 단지 불법과 인연을 맺는 성질의 것이고 불교의 초심자일 뿐이니, 수행도 당연히 아직 궤도에 오르지 못한 것이고 왕생 역시 결정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직 왕생을 위하여 법당에 오로지 아미타불 한 분만 모시고 본인도 오로지 아미타불만 부른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매우 깊고 전일하고 순수함을 알 수 있으므로,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단정적으로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오정행五正行에 부합하고, 수행이 정정업正定業이기 때문이다.

 

98. 질문: 나는 본래 많은 불상을 모셨었지만 지금은 오로지 아미타불 한 분만 모시려 하는데, 원래 있던 불상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 본래 모시던 불보살상들을 깨끗이 닦고 살짝 향냄새가 배게 한 다음, 인연 있는 사람에게 보시하면 된다. 그 사람이 지장보살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아직 모시지 않았고, 마침 당신에게 있다면 그분에게 주면 된다. 그 불상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기념적 가치가 있든 간에 기꺼이 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과의 인연은 세간의 재물로써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상을 그 사람에게 보내주면 지장보살의 분신으로 작용을 하지만, 본인이 갖고만 있으면 불보살님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모시던 불상을 인연 있는 사람들이 모시도록 주면 그 사람이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께 예배하며 지은 복은 자연히 본인에게도 한 몫이 돌아올 것이다.

 

 

5. 의심스럽고 판단하기 힘든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해답

 

 

99. 질문: 어째서 간단하고 쉬운 염불은 왕생의 정정업이 되어 반드시 왕생하며, 그 외의 어렵고 심오한 수행은 도리어 정정업이 아니어서 왕생이 결정되지 않는가?

 

: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시기 전에 발원을 하시길 ‘만약 어떤 사람이 나의 명호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할 수 없다면 난 맹세코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현재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서원이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므로, 우리가 염불하면 당연히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염불왕생은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보증해주신 것이다.

 

 다른 수행은 비록 어렵고 수준이 있고 심오하기는 하나,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보증됨이 없이 오직 수행자 본인의 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당연히 왕생이 결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한다면 배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반드시 바다를 건널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개인적으로 헤엄쳐 바다를 건너려 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어서, 설사 매우 뛰어난 수영 기술을 가졌다 하더라도 반드시 건널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100. 질문: 어떤 것이 믿음과 발원을 갖춘 염불이고, 어떤 것이 믿음과 발원을 갖추지 못한 염불인가?

 

: ‘아미타불의 서원이 헛되지 않아 내가 그분의 명호를 부르면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다. 이것 외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곧 믿음을 갖춘 것이고, ‘이번 생에 꼭 왕생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면 곧 발원을 갖춘 것이다. 만약 이와 정반대라면 믿음과 발원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101. 질문: 나는 염불을 하고 있지만 나 자신이 믿음과 발원을 갖추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진심으로 왕생을 원한다면 반드시 왕생한다.

 

102. 질문: 어째서 염불을 하면 반드시 왕생하는 것 이외에도 재난을 소멸하고 복이 자라나며 수명을 연장하는 등 갖가지 현세의 이익들이 있는가?

 

: 아미타불의 명호가 범부들로 하여금 왕생하여 성불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명호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위없는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무량무변한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업장을 소멸하고 복과 지혜가 자라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업장이 소멸되면 당연히 병이 낫고 수명이 연장되며 재난이 사라지고, 복과 지혜가 자라나면 자연히 여러 인연들이 잘 모여서 원하는 일들이 뜻대로 다 이루어지게 된다. 설사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루어지고, 반드시 이루어진다.

 

103. 질문: 어째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잡다하게 여러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는 것보다 얻게 되는 세간의 이익이 월등히 뛰어난가?

 

: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⑴ 전념專念은 잡념雜念보다 뛰어나다.

⑵ 아미타불은 다른 모든 부처님보다 뛰어나다.

사람 마음의 힘에는 한계가 있기에, 원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마음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야만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옛말에 “익숙해지면 요령이 생기게 되고, 마음이 정성스러우면 영험하다”고 했듯이, 전념을 하면 정성도 있고 익숙하기도 하기 때문에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게 없지만, 잡념(잡다하게 부름)을 하면 정성도 없거니와 익숙해지지도 않으므로 구하는 것을 얻기 어렵다. 게다가 아미타불께서 특별히 명호로써 중생들을 이익케 하겠다는 발원을 하셨으며, 제불의 왕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잡다하게 제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보다 뛰어난 것이다.

 

104. 질문: 어째서 사람들은 아미타불을 얘기하면 항상 왕생만을 떠올릴 뿐, 현세의 이익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가?

 

: 이 점이 바로 아미타불의 위대함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세의 이익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불보살님들도 모두 소원을 이루게 해주실 수 있지만, 극락왕생하여 성불을 하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근본적인 이익은 반드시 전적으로 아미타불을 우러러 의지해야만 비로소 백 퍼센트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얘기하면 왕생을 떠올리고, 왕생을 얘기하면 아미타불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미타불을 부르면 왕생만 할 뿐 현세의 이익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치적으로 말하자면, 아미타불을 부르면 왕생하여 성불을 하는 크나큰 이익조차 얻을 수 있거늘, 하물며 현세의 갖가지 적은 이익들이겠는가! 예컨대 대신에게는 죄수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해줄 수 있는 권한은 있어도, 죄수가 지은 죽을죄를 사면해줄 권한은 없다. 반면에 국왕은 죄수의 죽을죄도 사면해줄 수 있으므로, 죄수들의 환경을 개선해주는 것쯤은 당연히 해줄 수 있다.

 

105. 질문: 아미타불을 부르면 현세의 이로움과 안락함에서부터 왕생하여 성불에 이르기까지 전부 도맡아 처리해주신다는 수많은 장점들이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염불법문 하나만 설하시면 될 텐데 또 무엇 때문에 다시 그렇게 많은 불보살님들의 명호와 경전, 다라니를 설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염송하도록 하셨는가?

 

: 이것은 중생들이 근기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비록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뛰어난 법문으로서 일체 법문을 원만히 거두어들이고 원만히 초월하고 있지만, 만약 겨우 이 한 가지 법문만 설하신다면 일부 중생들은 한 번에 계합해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여러 종류의 근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이익을 전부 얻을 수 있도록 고려함과 동시에, 그들을 나중에 모두 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도록 편리하게 인도하기 위해서 갖가지 법문을 강설하면서 다른 불보살님들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누각이 너무 높아서 한 걸음으로 오르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계단이 필요한 것과 같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서 여러 가지 법문을 닦다가 맨 마지막에 염불수행으로 돌아서지만 이미 크게 우회한 것이다. 만약 이미 염불을 시작했고 또 이러한 이치를 알았다면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오직 지름길로 가는 수행을 해야 하나니, 단지 아미타불만을 부를 뿐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06. 질문: 어째서 똑같이 염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얻은 현세 이익의 크기는 각자 다른가?

 

: 중생들의 근기가 다르고 과거전생에 지은 선업과 금생에서의 마음씀씀이 역시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동일한 태양이 비추고 있지만 나무들은 각각 높고 낮음이 있는 것과 같다.

 

107. 질문: 어째서 현세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단지 왕생만을 원했을 뿐인데, 얻은 현세의 이익이 도리어 더 수승한가?

 

: 세간은 무상하고, 무상하기에 괴롭다. 오직 왕생만을 구할 뿐 세간의 일체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완전히 부처님께 의지하게 되므로, 부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부처님과의 감응 역시 가장 원활하며,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는 것도 가장 강력하고 업장소멸도 가장 빠르다. 업장이 소멸된 이상, 세간의 갖가지 이익을 구할 줄도 모르고 구하지도 않더라도 자연히 온갖 수승한 이익을 얻게 된다.

 

만약 현세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왕생을 구하지 않거나, 심지어 왕생을 두려워한다면 이 사람의 마음은 부처님과 서로 떨어져 있게 되어 업장소멸이 더디고 얻은 세간의 이익도 오히려 열등하다. 예컨대 어두운 방에 있는 사람이 바깥의 햇빛을 그리워하며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모든 창문들을 활짝 열어버린다면 설사 잠시 무슨 일이 있어서 집밖을 나서지 못하더라도 집안은 더욱 환해질 것이다. 그런데 만일 방안에만 있고 싶고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서 창문을 반쯤 열고 반쯤 닫는다거나, 심지어 햇빛이 너무 강렬할까봐 두려워서 커튼을 쳐서 차단시킨다면 방안은 당연히 밝지 않을 것이다.

 

108. 질문: 어째서 똑같이 병이 생겨 염불을 했음에도 어떤 사람은 병이 나아 기사회생하고, 어떤 사람은 병이 낫지 않고 여전히 죽게 되는가? 염불하여 병을 치료한다는 게 도대체 영험이 있긴 한가?

 

: 중생들의 업감(業感: 업으로 인한 과보)이 각자 다르고 염불하는 마음도 한결같지 않은데, 어떻게 똑같은 결과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업감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만약 한 사람의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설사 의학계에서 필사의 병이라고 판명이 났어도, 염불을 하여 업장을 소멸한다면 역시 기사회생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한 사람의 수명이 이미 다 됐다면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용심(用心: 마음씀씀이)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만약 두 사람이 모두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일심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왕생만을 구하는 사람은 늘 오래된 지병이 빨리 낫게 되지만, 마음속에 걱정이 많고 오로지 병이 낫기만을 바라며 죽음이 두려워서 왕생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 효과가 크게 떨어질 것이다.

 

염불은 본래 오로지 이 몸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을 치유하는 데 영험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염불을 하면 업을 소멸할 수 있고, 업이 소멸되면 어떤 병들은 저절로 낫게 되기 때문에, 때로는 병을 치유하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자비하신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영접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광명과 수명이 무량한 자유로운 몸과 마음을 얻어 영원히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면할 수 있도록 발원하신 것이다. 염불을 한다고 금생에서 이 몸의 병을 반드시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량겁 동안의 생사윤회의 큰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우리의 현세의 이 몸은 자신이 지은 업의 과보이다. 어떤 사람은 염불을 겨우 몇 번밖에 안하고는 아미타불께 자신의 신체가 건강하고 지혜가 뛰어나며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길 보장해달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 영험이 없다고 탓하는데,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예컨대 자신이 만든 차의 재료가 전부 고철덩어리라면 설사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정비소에서 수리를 했더라도 절대 길에서 고장이 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고장이 났다고 해서 정비소를 탓한다면 그것은 옳지가 않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너의 몸을 내가 비록 유지하고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모든 책임을 다 질수는 없다. 만약 나의 명호를 부른다면 내가 너를 위하여 (극락에 왕생시켜) 금강처럼 단단하며 파괴되지 않는 몸으로 바꿔주겠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게 보장해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109. 질문: 병이 생겼을 때 자신의 명이 다했는지 다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아는가? 만약 명이 다한 줄 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염불을 하면서 왕생만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아미타불께서 나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도 되지 않겠는가?

 

: 비록 알 수는 없지만 당신이 염불을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모두 틀림없이 죽을 거라는 생각으로 염불을 하면서 모든 것을 아미타부처님께 맡겨야 한다. 심지어 평소에 아무런 병이 없을 때에도 곧 임종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관’이다.

 

예컨대 차를 끌고 정비소에 들어갔을 때 전문가들은 척 보면 알 수 있다. 만약에 이 차가 아직 사용가치가 있으면 수리를 해주겠지만, 그럴 가치가 없다면 다른 새 차로 바꿀 것을 건의하면서 더 이상 수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염불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몸을 아미타부처님께 맡기기만 하면 부처님께서는 당연히 계속해서 보양하고 손볼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새 것으로 바꿔야 하는지를 알고 계신다.

 

110. 질문: 본래 병이 생겨 곧 죽을 것만 같은데, 어떤 사람이 염불을 가르쳐주면서 병이 낫기를 바라지 말고 오로지 왕생만을 구하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본래 나을 수 있는 병도 못 낫고 더 빨리 죽게 되는 게 아닌가?

 

: 그렇지 않다. 필사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며 왕생만을 구하고, 병이 낫기를 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오로지 염불에만 집중한다면 항상 불가사의한 기적을 이루게 된다. 이때 만약에 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업장이 신속히 녹아내리고 병고가 신속히 낫게 된다. 만약 명이 다했다면 비록 병이 있어도 큰 고통 없이 편안하고 순조롭게 불국토에 왕생할 수 있다. 병이 낫든 안 낫든 간에 모두 이익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111. 질문: 세속적인 일이 많고 자녀에 대한 미련도 버릴 수 없기에, 염불하여 우선 병이 낫기를 구하고 왕생은 구하지 않아도 되는가?

 

: 아미타부처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 ‘지금은 자녀들이 아직 어려서 저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는 저를 위해 주관자가 되어 저와 자녀들의 앞뒤와 인과를 살펴봐주세요! 만약에 남아서 그들을 보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저의 병이 하루 빨리 나을 수 있도록 해주시고, 만약에 필요가 없다면 저는 부처님을 따라 왕생하겠습니다. 자녀들은 부처님께 부탁드리오며, 저는 미련을 버리겠습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간에 전부 아미타불의 안배에 맡기는 게 가장 온당하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오안五眼과 육신통이 있어서 과거와 미래를 아시고, 모든 사람의 업보의 인연을 잘 알고 있으시기에, 각 방면의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가장 좋은 안배를 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생각이 꼭 가장 좋다고 할 수는 없으며, 어쩌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부처님께 표현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어떻게 해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꼭 자신의 고정된 생각에 집착하려 한다면 도리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장애하게 될 것이다.

 

112. 질문: 만약 아미타불께서 먼저 병을 치유해주신 다음에, 다시 극락으로 영접하여 주신다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다소 유감을 느낄 것이다.

 

: 이것은 모두 범부들의 생각으로 부처님의 지혜를 헤아리는 것이다. 아무리 말해봤자 다 우리가 이 몸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진짜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말씀하시면서, 인생은 본래부터 유감스러운 것이라고 하셨다. 병이 나으면 유감이 없을까? 병이 나으면 다시 장수하고 싶어지고, 장수하면 부귀를 바라고, 부귀하면 또 다시 자손들이 모두 영달하기를 바라고…… 언제쯤 끝이 있겠는가?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만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사바세계에서는 온통 모두가 유감일 뿐이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왕생하여 성불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원만하고 유감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언제 왕생하고 어떤 인연 속에서 왕생하는가에 관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고 적절한 안배가 있을 것이다.

 

113. 질문: 어째서 염불하는 사람 중에는 재물을 구하면 재물을 얻는 사람이 있고, 재물을 구해도 재물을 얻지 못할뿐더러 도리어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는가? 그 외에 구하는 바도 마찬가지로 소원을 들어주는 경우도 있고,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경우도 있는가?

 

: 재물을 구하여 재물을 얻게 되는 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이 사람의 복이 두터워 마치 두꺼운 판자가 무거운 물건을 견딜 수 있듯이 재물도 있고 누릴 복도 있으며, 자신과 다른 이에게 모두 이익이 된다면 부처님께서는 지혜의 거울로써 비추어 아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신다.

 

둘째, 이 사람의 심성이 연약하고, 과거의 선근을 볼 때에 뜻을 거스르지 않고 제도하는 게 적합한 경우이다. 만약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바로 의기소침해지고 부처님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되며 선근이 성숙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그 소원을 들어준다면 신심이 자라나고 선근이 점점 성숙해져서 불법문중으로 이끌어 들이기가 편리해진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지혜의 거울로써 비추어 아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다.

재물을 구해도 손해를 보는 데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이 사람은 본래 마땅히 크게 손해를 보게 될 상황이었지만 염불을 했기 때문에 은연중에 작은 손해로 바뀐 것이다. 이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염불을 하여도 여전히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이 사람이 박복하여 마치 얇은 판자가 무거운 물건을 감당할 수 없듯이 만약 재물이 있어도 누릴 복이 없으면 뜻밖의 재난과 소송, 납치, 사망을 당하는 등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이익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지혜의 거울로써 비추어 아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므로 재물을 구해도 재물을 얻지 못한다.

 

셋째, 이 사람의 심성은 고집이 세고 교만하며, 과거의 선근을 볼 때 뜻을 거스르며 제도하는 게 적합하다. 만약 소원을 들어주면 도리어 교만한 마음만 커지게 되고 세속에 더욱 더 빠져들고 미혹하여 돌아올 줄 모른다. 만약 그 교만한 기세를 꺾어 준다면 점차적으로 마음을 돌려서 불법을 믿게 된다. 부처님께서 지혜의 거울로써 비추어 아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기에, 재물을 구하지만 도리어 손해를 보게 된다. 그 밖에 구하고자 하는 것들도 이러한 예로써 알 수 있다.

 

아무튼 부처님의 지혜란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각자 정성을 다하여 구한다면 각자의 분에 알맞게, 많지도 적지도 않게 얻을 수 있다. 마치 대지에 만물이 생장하는 데 있어 높고 낮음과 크고 작음이 각각 적절하여, 많지도 적지도 않은 것과 같다.

 

114. 질문: 󰡔염불감응록󰡕 속에 보면 병으로 고통받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기적처럼 회복할 수 있었는데, 어째서 나는 정성을 다해 염불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인한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가?

 

: ⑴ 과거의 업력이 불가사의하여 본래 더욱 큰 병고가 있을 터인데, 염불을 하는 인연으로 은연중에 사라져서 더 이상 받지 않고 단지 지금의 병고만 있을 뿐이다.

⑵ 병이 낫기만을 바라고 왕생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조급하고 허망하여 부처님과 감응을 이루기 어려워 염불의 효과가 떨어진다. 일심으로 염불하여 숙세의 업장이 소멸되면 각자 그 이익을 얻을 것이니, 의심하지 말지어다.

 

115. 질문: 많은 사람들이 승용차와 별장을 즐기면서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사회발전으로 인한 기득 이익자(기득권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바세계에 대한 염리심을 내라고 권장한다는 것이 어찌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미타불께서는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치중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 논리에 맞다. 왜냐하면 인생이 무상하고 괴롭기 때문이다. 돼지가 음식의 즐거움을 탐하다가 드디어 살육을 당하게 되고, 사람은 오욕의 즐거움을 탐하다가 결국 윤회의 과보를 받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미혹하여 돌아올 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일찌감치 벗어나기를 구한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른바 사회의 고층과 저층이 있지만, 아미타불의 입장에서는 모두 같은 부류로 고뇌하고 죄를 짓는 범부들일 뿐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평등하여 간택이 없으시며, 어떤 사람이라도 모두 ‘아미타불께서는 나를 가장 편애하신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부귀한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부귀를 탐하고 좋아하는데, 극락정토에는 순전히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다. 그러니 어찌 아미타불께서 나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가난한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가난과 고생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가장 간절히 구제를 바라고 있다. 자비하신 아미타불께서 괴로움을 덜어주시고 즐거움을 채워주시니 어찌 극락세계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116. 질문: 어째서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들도 임종 또는 죽은 뒤에 조념을 해주면 따라서 염불을 하고 왕생을 할 수 있는가?

 

: 평소에 염불을 못한 것에는 세 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그 사람에게 염불을 말해주는 좋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비록 염불을 말해주는 사람을 만났지만,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에 염불을 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는 비록 염불을 믿기는 하지만 세속적인 일에 얽매여서 항상 차일피일 미루다가 염불을 못한 것이다.

 

⑴ 지금은 임종 또는 이미 죽은 상태에서 누군가 오셔서 염불법문을 해주시니, 곧 첫 번째 장애가 사라진 것이다.

⑵ 본인의 임종 때에 중음신의 경계가 나타나거나 죽은 뒤에도 영혼이 소멸되지 않음을 직접 체험하고 나니, 부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인과응보가 실제로 존재함을 믿게 되니, 이로써 두 번째 장애가 사라진 것이다.

⑶ 평소에 큰 짐이 되었던 아내와 자식, 재산과 사업 등을 이때가 되면 내려놓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선지식의 법문을 들음으로 문득 깨닫게 되니, 곧 세 번째 장애가 사라진 것이다.

이로써 세 가지 장애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염불을 할 수 있고, 염불을 하면 바로 왕생하게 된다.

 

117. 질문: 어째서 평소에 염불하여 왕생을 구하던 사람들도 임종할 때에 갑자기 염불을 하지도 않고 왕생을 구하지도 않는 경우가 있는가?

 

: 이것이 바로 이른바 전도顚倒라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갑자기는 아니다. 이 경우는, 그 사람이 평소에 염불하여 왕생을 구한다는 것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단지 입으로만 말한 것이었음을 입증해준다. 이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진짜로 죽는 것도 두렵고, 아내와 자식 등에 대한 애착도 버릴 수가 없어서 오로지 더 살고 싶다는 생각에 왕생을 원치 않는 것이다. 진심으로 왕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왕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절대 전도되어 왕생을 하기 싫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염불하여 왕생을 구하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야지, 겉으로 말만 있어서는 안 된다.

 

118. 질문: 내가 수행을 많이 하신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은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암 제거 수술을 받은 뒤에 건강과 즐거움을 되찾았기 때문에 법희가 충만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불교를 믿을 것을 권장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항상 겸손하게 ‘저는 수행을 제대로 잘 하지 못해서 아직은 왕생할 수 있는 조건과의 거리가 굉장히 멉니다’라며 말씀하곤 하셨다. 그러던 그분이 임종할 때가 되자 도리어 육식을 하려 하고 조념을 해줘도 효과가 없었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

 

: 이것이 바로 업장이 나타나서 전도가 된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매우 큰 경각심과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 염불왕생에는 본래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스스로 조건을 정해놓고 자신은 그 조건과의 거리가 멀다고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미타불의 서원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왕생의 조건을 상정한다면 임종 때에 당연히 업장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일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착실하게 염불하고, 부처님을 의지하며, 자력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면 절대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염불이 천번만번 온당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119. 질문: 어째서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 한 번 영접하러 오시면 바로 따라가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 두 번, 세 번 영접하러 오셔야 비로소 왕생하는가?

 

: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간절한 사람이라면 부처님의 모습을 보자마자 진심으로 기뻐하며 즉시 부처님을 따라서 왕생한다.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고 세속의 일에 미련이 많은 사람은 비록 부처님께서 오셨음을 보았지만 마음속에서는 망설이게 된다. 부처님을 따라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지혜의 거울로써 비추어 아시고, 이 사람이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면 자비로운 마음으로 연화대를 들고 기다리신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왕생을 하기로 결정하면 부처님은 바로 이 사람을 연화대에 태워 극락으로 돌아가신다. 이 사람이 만약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부처님은 바로 모습을 감추신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다시 왕생을 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부처님께서 다시 오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자비는 비유할 방법이 없다.

 

120. 질문: 처음에 부처님을 따라서 왕생하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반드시 다시 한 번 오시는가?

 

: 꼭 그렇지는 않다. 만약 이 사람이 다시 한 번 왕생을 하려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부처님께서는 틀림없이 몸을 다시 나투신다. 그러나 만약에 이 사람이 왕생을 하려는 마음이 사라지면 부처님 역시 다시 오지 않으신다.

 

121. 질문: 만약 임종인이 세간에 대한 미련이 많고, 부처님도 오셨다가 다시 가셨음을 발견했다면, 이때는 어떡해야 하는가?

 

: 임종 때에 부처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고 중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고, 중생 자신이 왕생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중생이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진실하지 않고 부처님의 기대를 저버렸음을 입증해준다. 다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구제를 하려면 반드시 첫째는 울거나 억지로 붙잡지 말아야 하고,

 

둘째는 지혜롭게 위로와 법문을 해주어 그 사람에게 세속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윤회에 떨어질 것이니, 다시 염불법문을 만나서 정토에 왕생하기란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이로써 임종 때 선지식의 법문과 조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122. 질문: 어째서 임종조념을 할 때는 종종 쉽게 불보살과 연꽃 등 수승한 경계를 볼 수 있는가?

 

: 첫째는 아미타부처님께 임종내영의 원력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조념하는 대중들이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하여 한 목소리로 염불을 하면 감응력이 크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있다.

무릇 염불을 하는 곳에는 반드시 불보살님과 광명이 있고, 그 외의 다른 장소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염불에 전념한다면 마찬가지로 쉽게 볼 수 있다.

 

123. 질문: 같은 장소에서 함께 염불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부처님과 광명, 연꽃 등을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볼 수 없는가? 그리고 어째서 보이는 경계에도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가?

 

: 이는 개개인의 근기와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종류의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다.

⑴ 선정의 공부가 깊은 사람

⑵ 좌선을 좋아하고 마음이 고요한 사람

⑶ 평소에 쉽게 통령通靈할 수 있는 사람

⑷ 음양 눈(陰陽眼)이 있는 사람

⑸ 숙세에 유사한 근기를 가진 사람

⑹ 어린이들

⑺ 조념을 받는 자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

 

124. 질문: 임종조념 때에 보이는 불보살님과 연꽃 등은 극락의 진실한 모습인가?

 

: 범부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감응현상으로, 극락세계 참모습의 투영일 뿐 완전히 진실한 모습은 아니다. 만약 삼매를 얻었다면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25. 질문: 갖가지 현상들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수행을 잘하고 공부가 깊다고 볼 수 있는가?

 

: 꼭 그렇지는 않다! 만약 선도대사처럼 깊은 삼매에 들어 항상 정신(영혼)이 정토를 노닐 수 있다면 당연히 두말할 것도 없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갖가지 경계를 볼 수 있는 것도 여러 가지 다른 인연이 있는 것이니,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123문問 참조) 따라서 경계를 볼 수 있냐 없느냐를 수행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대한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되며, 마땅히 착실하게 염불을 해야 한다. 보고 못보고는 각자의 근기와 인연에 달렸다. 경계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추구하지 말고, 경계를 보았다고 해서 기뻐하지도 말아야 한다. 평범하게 염불을 하는 것이 가장 온당하고 가장 안전하며 가장 수승한 것이다.

 

126. 질문: 아미타불께서 적극적이고 평등하게 모든 중생을 구제하신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이승에 남아 있는 권속들이 망자를 위하여 염불을 하여 천도불사를 해줘야만 비로소 그들을 구제해주시는가?

 

: 아미타불께서는 사람들이 망자를 위하여 천도불사를 해줘야만 비로소 그들을 구제해주시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권속들이 그 사람을 위해 염불하여 회향을 해주는 인연을 통하여 그 사람을 구제하시는 것이다. 마치 태양의 빛이 비치지 못하는 어두운 구석에 거울이 있어서 태양의 빛을 반사시켜 준다면 똑같이 비쳐지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살아 있는 권속들이 망자를 위해 염불하여 회향을 해준다면 그 작용은 바로 이 거울과 같다. 망자가 염불하여 회향한 공덕력에 힘입어 이고득락하여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자비 원력의 작용이다.

 

127. 질문: 살아생전에 염불을 하지 않다가, 오직 죽은 뒤에 사람들을 불러서 천도해주기를 바라도 되는가?

 

: 이런 생각은 매우 경솔한 것이다.

⑴ 자신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반드시 자신을 위하여 사람들을 불러 천도를 해줄 것이란 보장은 없다.

⑵ 설사 누군가 사람들을 부르려 해도 반드시 부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⑶ 설사 사람을 불렀다 하더라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⑷ 설사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천도를 해주는 사람이 충분히 정성스럽고 충분히 전념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⑸ 설사 천도를 해주는 사람이 충분히 정성스럽고 충분히 전념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죽은 뒤에 어느 도로 갈 것인지, 업장은 얼마나 두터운지, 부처님과 감응을 이룰 수 있는지의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다.

⑹ 설사 감응이 있다 하더라도 감응의 크기를 장담할 수 없다. 지옥에서 아귀로 태어난다거나 아귀에서 축생으로, 축생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천상으로 태어난다면 여전히 윤회를 할 뿐 정토에 왕생하지는 못한다.

⑺ 설사 (나중에는) 정토에 왕생한다 해도 무엇 하러 억울하게 삼악도를 다녀온단 말인가! 왜 지금부터 염불하여 살아서는 부처님의 보살핌을 받아 업장소멸을 하고, 죽어서는 정토왕생을 하여 다함께 불퇴전을 얻으려 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염불은 단지 일념의 마음속에 있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살아서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어찌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는가!

 

128. 질문: 망자를 천도하는 효과의 크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이 망자를 천도하는 효과를 결정한다.

첫째: 망자의 선근의 깊이

둘째: 살아 있는 권속들이 천도를 하는 정성

셋째: 천도를 하는 방법

망자의 선근의 깊이는 이미 정해져 있고, 천도하는 방법은 전수염불이 가장 좋으며, 마음은 정성스러울수록 좋다.

 

129. 질문: 절에서 천도재를 지내고 싶지만 길이 멀어서 직접 절에서 분향을 할 수 없으니, 어떡해야 하는가?

 

: 향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형체가 있는 향이다.

둘째, 형체가 없는 향이니 바로 우리의 경건하고 정성스런 마음이다.

셋째, 부처님 공덕의 향이니 곧 아미타불의 명호다.

절에서 분향을 하는 목적은 엄숙하고 장엄한 의식을 통하여 우리들이 경전하고 정성스런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대중스님들의 인도 하에 염불을 함으로써 망자에게 이익을 주려는 것이다.

 

절에서 천도재를 지내는데, 비록 길이 멀어 직접 현장에 참석할 수 없지만 본인의 집에서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 망자에게 회향을 해준다면 최상의 부처님의 공덕 향을 피우는 것과 같아, 시간과 돈을 들이지도 않고 먼 길을 가는 수고로움도 덜며 실제로 망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 만약 단지 형식만을 바라면서 염불을 버리고 먼 길을 바쁘게 뛰어다닌다면, 설사 절에서 분향을 하더라도 집에서 염불하는 것보다 훨씬 못하다.

 

130. 질문: 이미 돌아가신 망자가 환생을 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가 없는데, 천도를 해도 효과가 있는가?

 

: 환생을 했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다 효과가 있다. 만약에 아직 환생을 못했거나, 이미 지옥 또는 아귀도에 환생하였다면 염불회향을 해주면 곧바로 천도할 수 있다. 만약 천상‧인간‧축생으로 환생했다면 염불회향을 통하여 그분의 복덕을 추가해주고, 생활환경을 개선해주며, 또는 과보가 다했을 때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

 

131. 질문: 조념과 천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까운 사람이 별세하셨을 때 조념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천도를 선택해야 하는가?

 

: 조념의 대상은 주로 임종 또는 갓 돌아가신 사람이고, 천도의 대상은 주로 죽은 지 오래 된 사람들이다. 만약 일반도량이라면 조념은 비록 여전히 염불로 하겠지만, 천도는 대부분 그 외의 경전과 진언을 독송한다. 예컨대 수륙법회水陸法會‧염구焰口‧참법懺法을 하는 등이다. 정토종에서 조념과 천도는 모두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이다. 전념을 하기 때문에 효과도 좋다. 가까운 사람이 별세하셨을 때는 우선 조념을 해야 하고, 조념의 기회를 놓쳤을 때는 다시 천도를 하여 구제를 해야 하는데, 그 시기는 사망일로부터 가까울수록 좋다.

 

정종淨宗법사님 법문 / 정전淨傳스님 번역


출처 / 純淨時代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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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블로그 '한마음으로 가는 길'
 
1.

눈 속에 갇힌 보살 구출작전
2014.2.11
 
 이 절에는 아주 특이한 보살이 살고 있다.
 그녀는 구태여 산 중턱에 버려진 토굴에서 혼자 살겠다고 하여
 대중들과는 떨어져서 살고 있었다.
 음산한 기운이 들기까지 하는 곳에서 어찌 여인네가 간도 크지...
 
 그런데 그 토굴이 이번 폭설로 인해 고립되어 버렸다.
 해서 이틀째 그녀는 토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간 큰 그녀는 일주일 정도 갇혀있어도 상관없다며 전화통화에서 웃었다.
 이참에 단식수행하니 얼마나 좋으냐며...
 
 그래도 우린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온 직원이 눈을 치우느라 쳤으니 외딴 산 중턱에 있는 그곳에 어찌 가느냐가 문제였다.
 다들 눈에서 넘어지고 구르고 하여 몸들이 말이 아닌데...
 
 그런데 오늘 구원의 전사들이 나타난 것...짠~하고 말이다.
 
 인적이 끊긴 이 곳에 점심이 되어갈 무렵 무림의 고수같은 사나이들이 도량에 나타난 것,
 그들은 입구에서 부터 눈을 헤치며 (사실은 오히려 길을 내며) 들어왔다.
 그들의 손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아마도 사진작가들인 것 같았다.
 폭설에 잠긴 산사를 촬영하기 위해 일부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이곳에 감히(?) 오겠는가.
 
 우린 순간적으로 저 사람들을 꼬셔서 ^^ 그녀를 구출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촬영을 끝내고 가려는 그들에게 웃음을 흘리며 공양간으로 끌어들였다.
 "공양 들고 가세요"
 여자들의 집중 공세에 남정네들은 얼싸좋다 하고 들어왔다.
 ㅎㅎㅎ
 
 그리고 식사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 내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 부탁드릴게 있는데요. 이왕 오셨으니 좋은 일좀 해주시면 어떨까요.
 산 중턱에 갇힌 보살이 있는데 그녀를 좀 구해주십시오.
 이틀째 굶고 있어요."
 
 씨익 미소짓는 사나이들이 우째 그리 멋있게 보이는지 ^^
 그들은 흔쾌히 그러마 했다.
 나는 커피까지 타서 서비스를 하며 그들의 마음을 녹였다.ㅎㅎ
 
 차를 마신 그들은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출발...
 나는 혹시라도 그들이 변심해서 산밑으로 가면 어쩌나 싶어 따라나섰다.
 눈길에 미끄러질까봐 빗자루 하나를 스틱삼아 들고서...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다섯명 중에 가장 젊은 남자분이 앞장서서 걸어가는데
 그 분은 눈 속을 헤엄치듯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지를 걷는 사람과 같았다.
 중간쯤에서 네명의 남자들은 사진 촬영한다고 멈추고 앞장섰던 한 남자만이 눈길을 헤치고 나가는데
 아주 특이한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는 눈치우는 삽으로 눈을 푹 누르고는 등산화로 밟고 나아갔다.
 뒤따라 가는 나는 허우적 거리면서 따라가는데 그는 조금도 지친 기색도 없었다.
 
 "혹시 특공대 출신입니까?"
 
 "아닙니다. 산악인입니다."
 
 "오우 그래요? 어쩐지..."
 
 "저 에베레스트까지 다녀왔습니다. 세계 50개국을 등반했어요."
 
 "흐음...그렇군요. 당신에게 이정도는 마른땅 걷기일 뿐이군요."
 
 산신님이 도우신게 틀림없어.
 토굴에서 홀로 정진하는 그녀를 예쁘게 여기신 산왕대신이 이 분을 불러들인게 틀림없어.
 
 토굴에 도착해서 그녀를 부르니 그녀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섯명의 남자가 삽으로 눈을 치우며 와도 3시간을 걸릴 거리를 불과 삼사십분만에 도착한 것이다.
 
 그녀 또한 온갖 운동을 한...철인3종경기 까지 했으며
 암벽등반에 윈드서핑에 스킨수쿠버까지 한 여자인데도 엄두를 못낸 눈 길을
 너무 간단히 제압하고 온 이 남자에게 호기심어린 눈으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처사님, 삽으로 눈을 누르는 방법좀 가르쳐주세요."
 
 대단한 체력을 가진 그녀가 그의 가르침을 따라 해 보았으나
 한마디로 텍도 없었다 ^^
 130센티 정도 쌓인 눈을 누르기에는 그녀의 팔힘이 너무 약했다.
 겨우 30센티 정도가 눌려졌다.
 
 오우...남자의 대단함이 새삼 느껴졌다.
 암튼 그 남자의 도움으로 우린 쉽게 목적달성을 하게 되었다.
 
 아...너무도 감사한 분,
 예리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던 거사님 감사합니다.
 좋은 일 한 공덕으로 올 한해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특이한 보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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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미스테리한 여자
 2014.2.11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묘한 여자를 이곳에서 만났다.
 그래서 난 이여자를 '미스테리녀' 라고 부른다.
 
 나이는 나보다 두살 아래이니 같은 세대를 살아온 사람이다,
 처음에 이여자를 봤을때는 꼭 청학동출신 같이만 보였다.
 화장기없는 얼굴에 생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고 늘 회색법복을 입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이여자의 고집스러운 표정이 영 접근불가를 느끼게 했다.
 
 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어려워하고 한편으로는 마땅치 않아하는 여자였다.
 매사가 너무 완벽하니 그녀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못마땅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일은 엄청나게 열심히 하는 일꾼이기도 했다.
 
 누가 이 고집세고 별스런 여자를 다스려야할지 고민들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으니 내보낼 수도 없는 일.
 스님들조차도 어려워했으니...
 
 그런 이여자와 내가 생각지 않게 가까와지게 되었다.
 이여자의 정식업무는 빨래보살이다.
 하지만 시간을 쪼개서 공양간 일도 돕고 있었다.
 마침 공양주 한 분이 그만두는 바람에 내가 공양간에 투입되어 일을 하면서 이여자와 말을 트게 되었다.
 처음엔 냉정하게 바라보던 그녀와 조금씩 말을 나누게 되면서
 난 참으로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청학동에서 온 것 같은 이여자,
 무뚝뚝하게 생각했던 이여자는 의외로 상냥하고 부드럽게 나를 대했으며
 나에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으며 자신의 이력을 들려주었다.
 
 명문가문에 태어나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해운업을 했었다고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돈도 벌었다고...
 
 난 깜짝 놀랐다.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이여자가 명문가문의 여자라고?
 그것도 해운업을 했었다고?
 오마이 갓!!!
 
 왜 이런 삶을 자청해서 사느냐의 질문에,
 "어느 순간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굶주린 이리같이 보였어요.
 정말 다들 이리같아요. 탐욕의 이리들 말에요.
 그런 세상이 너무 역겹고 싫었어요.
 나의 남편도 그랬어요.
 그래서 이혼을 요구했죠.

 다행히 아이가 없었으니 미련도 없었죠.
 짧은 결혼 생활을 마감했죠.
 제가 이 세상에서 사랑할 사람은 부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알았어요.
 엄청난 부를 걸머졌으나 제 가슴은 항상 허전했어요.
 참 화려한 삶을 살았지요.
 사업을 정리한 후에 산으로 들어왔어요."
 
 "왜 출가를 하지 그랬어요?"
 
 "했었지요. 행자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제 이력에 결격사유가 있어서 승인이 나지 않았죠.
 일찍 죽은 여동생의 딸을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제 호적에 올렸거든요. 
 양육할 자녀가 있으면 안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선지식 찾아다니며 공부하고 살았어요.
 삼년 후엔 타종단으로 출가할까도 생각하고 있어요.

 절을 지어서 선지식 모시고 살려고요.
 제가 존경할 만한 선지식만 만난다면 전 그 분을 업어서 모시고 살 수도 있어요.
 농사 지으면서 공양하며 살고 싶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참 선지식이 없네요...많이 찾아 헤맸는데..."
 
 물욕도 애욕도 이미 떨어져 나갔다는 그녀가 들려주는 그녀의 삶은 참 재미있었다.
 호기심 많은 나는 여러가지를 질문하고 물고 늘어졌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은 어디에 숨겨두었어요?"
 
 "호호...바다에 던져 버렸어요."
 
 "저런...차라리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시지..."
 
 "언젠가 제가 필요할 때가 되면 바다에 가서 건져오지요 뭐. 호호호
 전 화려하게 살았던 지난 날 보다 지금이 더 행복해요. 아주 좋아요."
 
 하루는 그녀가 자신이 혼자 살고 있는 토굴로 초대를 하였다.
 버려진 토굴인데 스스로 자청해서 살고 있었다.
 귀신이 출몰한다고 하여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집이었다.
 담력있는 스님들이 도전했다가는 다 포기했다는 토굴이었다.
 
 소문대로 토굴주변에선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육이오 전쟁터였던 곳이라 비명에 간 젊은 영혼들이 많이 떠돌고 있다고 하였다.
 미스테리녀는 몇군데에서 출몰했던 영혼들을 만났던 이야기
 그들을 염불의 힘으로 천도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그당시의 비밀스런 일들도 스크린처럼 보았다고 했다.
 
 그런 영적인 능력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런 능력은 치열한 수행의 결과 얻어진 것이에요?"
 
 "아뇨...어려서부터 있었어요. 그래서 세상이 더 시시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누군가 무슨 말을 하면 전 그 결과가 그려졌거든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달려가더라구요.
 그것을 떨구어보려고 공부에 몰두했고, 일에 미쳐서 살았고
 한때는 운동에 미쳐서 살기도 했지요.
 그러다 부처님 법을 만나서 큰 깨우침을 얻고는 세속을 접었답니다."
 
 그녀의 토굴에 들어가니 그 안은 밝고 맑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루종일 나무아미타불 염불테잎을 틀어놓고 있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정진을 하고,
 저녁에 일이 끝난 후엔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토굴에서 염불정진을 한다고 했다.
 티비도 컴퓨터도 없었다. 
 오로지 책과 염불테잎만 있었다.
 
 "염불하는게 그렇게도 좋수?"
 
 "그럼요...넘 행복해요. 언니 우리 나중에 꼭 극락세계에서 만나요.
 그곳에서 같이 수행하여 성불한 다음에 다시 중생제도하러 지구에 옵시다."
 
 "난 자신없는데? 그대는 자신있수?"
 
 "예...전 결정코 극락왕생할 겁니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을 절대적으로 믿거든요."
 
 오...참 그 지극한 신심이 부러웠다.
 내게는 없는...또는 부족한 면을 그녀는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는 온순하고 순종적인 면도 있었다.
 절식구들이 모두 마땅치 않아 하는 그녀의 단점.
 즉, 자신이 이 절 일을 모두 하는 것같이 상을 내는 점,

 자신이 없으면 이 절이 안 돌아갈 것 처럼 생각하는 점.
 그 점을 내가 조심스럽게 지적했더니 의외로 잘 받아들였다.
 강하게 부정하거나 반기를 들을까 좀 염려했었는데.
 역시 배운여자인지라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사람에겐 무장해제였다.
 
 "모든 사람들이 절 그렇게 생각했다면 제가 한참 공부가 안되었다는 증거네요.
 제가 고쳐야지요...이 도량이 너무 좋아서 3년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 짤리고 싶지는 않아요 ㅎㅎ. 
 제가 맞추고 살아야지요. 고치도록 노력할게요."
 
 요즘 너무 부드러워진 이보살,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한다.
 어쩜 자신의 세계를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난 기쁨때문인지도???
 
 요즘은 대화가 통하는 이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나의 기쁨이기도 하다.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기쁨을 어디에 비교하랴?
 
 "언니...하산하면 서울 삼청동에 있는 ㅇㅇㅇ 요리집에 가서 제 이름 대고 식사하세요.
 언니가 먹고 싶은 것 어떤 것이든지요...제가 돈은 지불할게요."
 
 호우... 그 비싼 요리집에???
 은근하게 자신의 재력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사회의 유명인사들과의 인맥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명가의 여인이니...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전혀 세련되지도 않은 
 흰머리가 꽤 많은데도 염색도 하지 않고 질끈 동여맨 이여자의 모습을 보고
 누가 명가의 여인이며 명문대 출신의 여자로 보겠는가.
 그것도 큰 사업을 해서 막대한 부를 이룬 여자로???
 하지만 이여자의 강한 기질로 봐서는 그런 사업을 했었음직해 보였다.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도 좋으냐니 상관없다 했다.
 이여자의 수행기는 또 다른 기회에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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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는 오직 나무아미타불입니다
2014.3.15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니 그녀의 수행기를 듣다보면
 마치 큰스님이 내 앞에 앉아서 설법을 하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내가 만난 보살들 중에서 최고의 근기와 수행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아니 전문 수행자들도 흉내내기 힘든 수행을 한 여자였다.
 
 매일 삼천배를 삼년이나 했으며...그것도 공양주를 하면서...
 위빠사나,참선,아비라기도,주력수행 등 해보지 않은 수행이 없었다.
 
 "전 전생에 천태지관 수행도 치열하게 했었어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일반사람들이 들으면 정신병자라든지,
 뭐에 잔뜩 씌인 사람의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들을때는 대단한 그녀의 이야기에 귀가 쫑긋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점차 내게 비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수많은 전생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때 어떤 수행을 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 생에도 내로라 하는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그 분들의 시중을 들어가며 수행을 했다고 했다.
 이런 공개적인 블로그에는 올릴 수 없는 많은 선지식들의 비화를 들려주었다.
 
 "그런 결과 저는 나무아미타불 염불만이 이 말세중생에게는 최고의 수행법임을 확신했답니다.
 솔직히 참선하는 사람들 화두가 뭔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이 시대에 참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사람 없습니다."
 
 참으로 건방지게 또는 교만하게 보이는 그녀의 결론적 견해였다.
 
 "좌복에 앉아서 보살들이 해주는 공양을 드시면서 편안하게 참선을 해서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그 분들에게서 전 치열함을 보지 못했어요. 원력도 없는데 뭔 도를 얻습니까"
 
 당돌한 그녀는 머무는 사찰의 스님들에게도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산신기도를 하는 스님에게는,
 "스님은 어찌 산신기도를 하십니까? 부처님 제자면 당연히 부처님께 귀의를 해야지요.
 그리고 이 산신각에 산신 없습니다"
 
 나는 놀랍기도 한 그녀의 당당한 발언에 호기심도 나서 은근히 물어보았다.
 "정말 이 산신각에 산신이 없습니까? 이 곳은 명산인데?"
 
 " ㅎㅎ...산신이 어디 산신각에만 앉아 계신답니까?
 여기 저기 돌아다니시지요. 이 절의 산신은 공부의 경지가 굉장히 높은 분입니다.
 산신각에 와서 복을 빈다고 들어주고 그런 분이 아닙니다.
 아마 누군가 산신상에 돌을 던져도 아무런 반응을 안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승려라는 분이 산왕대신 찾으면서 무언가를 빌고 있다니 우습지 않아요?
 이곳의 산신은 도가 높은 분이라 세분으로 몸을 나투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손을 들어
 "저기에 한 분...또 저기에 한 분...또 저기..." 하면서 산신이 계신 곳을 가르쳐 주었다.
 솔직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
 
 도량의 신장들을 보고 있었으며 신장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스님들의 얼굴만 보아도 그 스님이 어느정도 수행을 하셨는지 꿰뚫어 보았다.
 한 번은 염불을 열심히 하시는 젊은 스님에게도 직격탄을 날렸었다.
 
 "스님,요즘은 밤에 방에서 염불은 안하시고 계시나봅니다.
  스님 얼굴을 뵈니 기(氣)가 막혀있네요.
  장애가 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시는 겁니까? 상기가 되셨지 않습니까?
 그럭저럭 수행하며 사실라면 뭐하러 출가를 하셨습니까?
 이론은 탄탄하시지만 행이 안되고 있질 않습니까? "
 
 어휴...^.^
 그래도 &#51922;겨나지 않고 절에 머물고 있는게 기적이었다.
 그런데도 스님들이 그녀의 앞에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를 두려워하기 까지 했다.
 아마도 그녀는 이미 타심통도 한 것 같았다.
 스님들의 얼굴만 보아도 그 스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예불시간에 스님들의 독경소리만 듣고도
 그 스님이 지금 망상에 젖어서 하는지 어떤지를 알았으며,
 목소리만 들어도 수행을 얼만큼 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녀는 영 불편한 보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도 내보낼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보내려 한다면 많은 곤욕을 치뤄야 함을 알기에...
 아마 종정스님에게 찾아가서 왜 자신이 해고를 당해야 하는 지 낱낱이 따지고 들 사람이었다.
 사실 그녀처럼 주인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온갖 허드렛 일은 그녀의 몫이었다.
 쓰레기를 치울 때는 영락없는 머슴의 모습이었다.
 
 "전 지게를 지며 사는 게 제일 좋아요. 호 호 호..."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 날 화려한 인생을 산 여자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녀와 내가 친한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어떻게 저런 여자와 가깝게 지내는지 기적같다며...뭔 비결이냐고...
 
 비결이라구요?
 난 다만 그녀의 근기를 알아보았으며 그녀를 존중해 주었으며
 그리고 이제는 존경까지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기도 많이 했다, 수행 많이 했다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보았지만
 그녀처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머슴처럼 살면서 수행하는 사람은 보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오직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하기를 내게 권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확고한 이론과 수행으로 무장한 그녀의 설법에 어찌 반발할 수 있으랴.
 
 "우리가 왔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너무도 그리운 우리의 고향이지요...나무아미타불..."
 
 그래 그렇다.
 이 세상의 어떤 단어도 이 보다 아름답고 거룩할 수는 없다.
 나무아미타불...
 그리고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만큼 거룩한 원이 어디 있을손가.
 
 "말세중생에게는 염불수행법이 최고입니다.
 다른 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화두를 든다고 하지만 오분이상 지속하기 힘들어요.
 그래갖고는 이생에 성불하긴 어렵습니다.
 이렇게 업장이 두터운 몸으로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제가 참선을 해보지 않았다면 이런 말 못해요.
 전생에도 전 참선을 치열하게 했었어요. 천태지관수행도 치열하게 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 모양 이꼴로 살고 있습니다.
 제 업이 너무도 두터우니 또 윤회를 하여 온 것이지요.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했답니다.
 저의 스승은 오직 아미타부처님 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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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전생에 심은 소나무 두 그루 
2014.3.15
 
 그녀가 내게 산책을 하자고 제의를 했다.
 햇살이 아름다우니...
 하지만 아직은 눈이 다 녹지 않아서 봄을 느끼기에는 먼 느낌이 들었다.
 
 우리 둘은 도량을 걸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는데,
 도량 입구에 있는 적송이 많은 곳에 이르렀을 때 였다.
 
 "보살님, 저 끝에 있는 저 두 그루의 소나무 보이시죠.
 저 두 그루의 소나무는 전생에 제가 제 도반과 심은 소나무예요.
 그 도반과 다음 생에 이 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는데
 그 도반은 아직 나타나지 않네요."
 
 "그래요? 혹시 그 도반이 나 아닌가요?"
 
 " 호 호...그럴지도 모르지요. 호 호 호 "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앞서서 걸어갔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
 그녀는 가끔 의미심장한 얘기를 내게 던지고는 더 이상 말이 없고는 했다.
 내게 연애 편지라며 건네주고 간 쪽지에는
 '전생애를 걸어 염불하는 것은 약간은 어려운 일 같지만 현생에는 복을 수용하고
 생명이 다하면 곧바로 정토에 태어나서 영겁으로 완전하고 평안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또 부처가 될 때까지 생사의 어두움을 헤매는 일이 없다.' 이런 류였다.

 수시로 내 방에 와서 법담을 나누길 좋아했고,
 내게 필요한 물품들을 말없이 사다가 들여주었다.
 내가 피곤에 지쳐서 누워있으면 그녀는 옆에 앉아 무량수경을 읽어 주었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여서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그 사찰에 온 이래 그렇게 밝은 얼굴을 보인적이 없다고 모두들 얘길 하니
 어쩌면 전생의 도반을 만난 기쁨 때문에 상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도 그 도량에 가기 전에 의미있는 꿈을 꾸었었고
 누군가 지중한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을 예감했었다.
 그리고 그 꿈의 주인공은 대단한 큰스님이었다.

 이미 그녀는 큰스님의 경지고 또 전생에 대단한 스님이었을 게 분명하니
 현생에 승복을 입고 안 입고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전생에 티베트에 살았던 얘기, 일본에 살았던 얘기, 조선시대에 살았던 얘기 등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발뒤꿈치도 따라가기가 힘든 사람이다.

 그녀처럼 살 자신조차도 없다.
 삼년을 기도하기 위해 그 도량에 왔다고 했으므로
 특별한 일이 아니면 도량 밖을 나가지 않았고,
 단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았다.
 직원들의 회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철저히 계율에 충실했다.
 
 그런 그녀가 볼 때,
 백일기도를 왔다는 스님들이 툭하면 도량밖을 나가시는 게 못마땅할 것은 뻔했다.
 
 "백일도 저렇게 못참으시나 원..."
 
 참으로 어려운 보살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나도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내게는 늘 깍듯했고 다정했다.
 아마 미혹에서 헤매고 있는 전생의 도반을 끌어올려주기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속세에 대한 아무런 탐착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절에서 주는 보시금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절이 어려운 것 같을 땐 보시금 받기를 사양하기도 했다.
 아직 미혹이 많이 남아 있는 나로서는 부러운 그녀였다.
 
 그녀의 절대적 신심이 한없이 부러웠으며 또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새벽에 가장 먼저 일어나서 도량을 정비하는 그녀,
 기도스님이 나오시기 전에 이미 그녀는 법당에 앉아서 염불을 했다.
 단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염불삼매에 들어서 본 현상들을 내게 얘기해주곤 했다.
 떠도는 수많은 영혼들이 찾아온 이야기 그리고 그들과 같이 염불한 이야기 등...
 
 그리고 이제는 염불도 중요하지만 어울려 사는 법을 공부해야 겠다고 했다.
 그녀의 수행담과 법담은 글로 다 옮기기 힘들다.
 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많으므로...
 나의 질문에 늘 확고한 답변을 해준 그녀,
 그녀의 그 확고함이 부러웠다.
 
 남자들의 유혹에 직면했던 이야기를 해 줄 때는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아이구...자기처럼 청학동 낭자같은 여자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런 소리 말아요. 옛날에는 그래도 예쁘다는 소리 많이 들었고
 몸매도 죽여준다고 했어요."
 
 "응??? 몸매가 죽여준다고라??? 
 그럼 어디 한 번 벗어 봐. 호 호 호..."
 
 최근에 겪었던 유혹에 대한 이야기는 더 배를 쥐게 했다.
 또 그녀의 답변이 더 재미있었다.
 "그 양반이 워낙 궁한 사람이라 나같은 여자라도 찍었겠죠."
 
 호 호 호...
 
 화장기 없이 생머리를 질끈 동여맨 그녀지만 예쁘장한 얼굴인 것은 사실이었다.
 키도 보기 좋게 컸고...
 하지만 그녀의 진면목을 알면 모두 도망갈 것인데...^.^
 
 소나무 두 그루는 정말 그녀와 내가 심었던 것일까?
 아님 다른 도반과 그녀가 심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도반이 빨리 그녀 앞에 나타나길 빌어 주고 싶다.
 
 그녀의 나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지극한지
 그녀는 자신의 돈으로 법당에 내 등을 달아주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소나무의 주인공은 아닐지 몰라도 그녀와 한 때 도반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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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난 상근기의 잣대가 아닌 하근기의 잣대로 사람을 보거든요
2014.3.15
 
 어쩌면 완벽한 수행자의 자세와 마인드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누군가가 볼 때는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점도 많이 있었다.

 최상승근기를 가진 그녀였으니 도무지 세상 사람들이 마음에 들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자세로 절에 와서 살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식의 말이 수시로 나왔다.
 그럴때 마다 나는 그녀가 지적하는 사람을 감싸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그녀는 못마땅했었나 보다.

 "수한보살님도 사람을 잘 못 보시는 것 같아요.
 어떻게 저런 사람을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합니까.
 얼마나 꾀를 부리면서 일하는지 모르세요?"

 그녀의 질타에 나도 한 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살님은 상근기의 잣대로 사람을 보지만, 
 나는 하근기의 잣대로 사람을 보거든요?
 내 잣대는 그리 세지 않기 때문에 왠만하면 다들 괜찮게 보일 뿐이에요."
 
 "알았어요 알았어요...ㅎ ㅎ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생각이 잘못 되었네요."
 
 웃으면서 수긍하는 그녀의 얼굴에 가식이나 불쾌함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점이 대단한 그녀의 장점이기도 했다.
 
 너무도 뛰어난 그녀였기에 사실은 매우 외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물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고, 산이 높으면 오르려 하는 사람이 없듯이
 그녀 주변에 사람이 많을리는 없었다.
 가끔씩은 그런 그녀가 안쓰럽게 보였으며,
 내 견해로는 그녀가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안쓰럽게 보였다.
 내 눈에는 모두가 힘겨운 중생살이를 하는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치열하고 뛰어난 그녀에게 부족한 점은 중생에 대한 사랑이었다.
 내가 보는 견해로는 그랬다.
 아니 어쩌면 나의 견해가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절에 사는 개나 고양이에게는 지극한 애정을 보였으므로...
 그녀석들은 그녀를 엄마처럼 따랐다.
 심지어 나무 한 그루에게도 지극한 마음을 보이곤 했다.
 때로는 나무와도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하지만 왠지 사람에게만은 참으로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 난 사람에게 따듯함을 줄 수 있는 그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었다.
 그래서 까다로운 그녀의 잣대를 무너뜨리는 말을 많이 하게 되었었다.
 
 아무리 뛰어난 수행을 한 사람이라도 중생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사람을 난 좋아하지 않으므로...
 서로 사랑하고 살아도 부족한 삶이며, 다 아픈 중생들 아닌가.
 다들 깊은 얘기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삶이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 고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치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으랴.
 전문 수행자라도 말이다.
 가끔씩 사찰에서 물의를 빚고 떠나는 스님들을 볼 때도 
 한편으론 한심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측은했다.
 아직은 중생의 탈을 벗지 못하였으니 측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난 그녀가 중생을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수행자가 되기를 바랬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살려고 하는 그녀의 삶이 때로는 버거워보이기도 했으며 너무 고독해 보였다.
 외로운 소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살면 외롭지 않나요?"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요. 전 너무 행복해요.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사는데 뭐가 외롭습니까?"
 
 철저한 그녀의 신심이 부럽기도 했지만 
 때로는 사람의 냄새가 나는 그녀가 되었음 했다.
 독각승의 이미지를 풍기는 그녀가 난 안쓰러웠다.
 아무리 자신은 괜찮다고 하지만 
 난 그녀가 중생들과 더불어 울고 읏으며 사는 보살이 되기를 바랬다.
 염불을 하여 극락왕생하는 것도 좋지만 
 이 생에서 사람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수행자가 되었음 했다.
 많이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사람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변해갔다.
 나의 바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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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삼천배 한 것이 뭔 자랑입니까
2014.3.15
 
 보통은 한 달에 한 번 삼천배만 하여도 대단하다고 하며
 백일을 삼천배를 했다면 존경해 마지 않는 것이 풍속이다.

 그런데 그녀는 삼천배를 삼년을 했다고 했다.
 그것도 공양주를 하면서...
 그러니 하루종일 일하고 절만 했다는 얘기 아닌가.
 이건 사람이 아니다 싶었다.
 그 결과 그녀는 다리 관절이 망가져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공양주 노릇도 얼마나 치열하게 했는지 손이 엉망이었다.
 저 여자가 한 때 그렇게 화려하게 산 것이 맞는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한문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보았으며
 나와의 깊은 대화에서 상당한 인텔리임을 알아보았으니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일 삼천배를 삼년을 하였다???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얘기였다.
 
 "아니 어떻게 삼쳔배를 삼년씩이나 할 수 있어요? 사람 맞아요?"
 
 나의 질문에 바로 튕겨져 나온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삼천배 한 게 뭐 자랑할게 되는 일입니까?
 오죽 업이 많았으면 그렇게 지독하게 참회기도를 해야 했겠습니까?
 전 전생에 00나라의 큰 벼슬아치였는데 46살에 사약받고 죽었어요.
 그리고 지옥에 떨어졌지요.
 그 지옥의 고통을 기억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그래서 그 업을 참회하느냐고 치열하게 수행했어요."
 
 허억...나는 그녀의 답변에 입을 벌리고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저는요, 사람들이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때로는 한심해보여요.
 수많은 살생의 업을 가진 사람들이 어찌 건강해지기를 바란답니까.
 그것처럼 강한 탐욕이 없어요. 너무 염치없는 바램이지요.
 건강해서 뭐할라구요.

 조금더 명이 길어지는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건강한 몸으로 큰 일을 하려는 원이 있으면 모를까 그 탐욕은 버려야 합니다.
 전 스님들이 시자들에게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 모습도 영 마땅치 않았어요.
 아직 촉의 경계에 끄달리고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다리가 아프면 아픈대로 그 경계를 공부로 삼으면 되는데 왜 남한테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지..."
 
 아이쿠...나는 말문이 막혔다.
 누가 감히 그녀에게 수행을 말할 수 있으랴.
 
 "그런데 이 도량에 소나무를 심은 것은 어느 전생이유?"
 
 "전전생이에요. 그때 제가 수행을 하다 잠시 옆길로 빠졌거든요.
 그래서 그 다음생에는 벼슬아치가 되었고...탐욕도 부렸고 결국 사약받고 죽었지요 뭐.
 바로 환생에 들지 못하고 오랫동안 지옥고를 겪다가 이 생에 몸을 받았지요.
 이 생에 몸을 받아가지고도 전생의 탐욕이 남아가지고 사업을 했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 여겨져 세속을 접었어요.
 사람들은요 자신들이 얼마나 업보중생인지 모르고 탐욕만 부려요.

 그러니 부지런히 참회기도를 해야해요.
 참회기도 없이는 도를 못이룹니다.
 백날 가부좌 틀고 앉아 있어봤자 소용없어요.
 업장에 가려서 화두가 들리지 않아요. 온갖 장애가 일어나는데요 뭐.
 참회기도 없이는 그 장애를 뛰어넘지 못해요."
 
 참회기도 없이는 장애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녀의 말이 가슴깊이 와 닿았다.
 사실은 나도 선방에서 꽤 수행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엄청난 장애에 침몰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너무나 가슴 아픈 기억이었다.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다.

 한 경지에 이르려는 그에게 엄청난 마장이 왔었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조금은 실망도 했었고, 회의도 했었고, 슬프기도 했었다.
 꼭 엑소시스트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그것은 전생의 무서운 업에 의한 장애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녀도 나와의 대화로 인해 변해갔지만 
 나도 그녀와의 대화로 인해 변해갔다.
 더 깊이 내 속에 있는 탐욕의 근원을 보게 되었고 버리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대단한 선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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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그녀는 미타행자
2014.3.21

 미타행자,
 그녀의 호칭을 이렇게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직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만을 염하고 있으며 극락세계를 관하고 사는 여자이고
 모든 사람에게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를 전하는 원력을 세운 미타행자이기에...
 
 나는 그녀가 얼마만큼의 수행과 이론으로 말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
 이리 찔러 보고 저리 찔러 보면서 그녀를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때 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를 긴장하게 했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게 했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어설픈 수행력으로 하는 말들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 그녀가 잠시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고자 했던 분들은 
 왠만한 사람은 감히 친견하기 조차 어려운 당대의 선지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왜 화두를 들지 않느냐고 질문했을 때
 이런 글에서 밝히기는 좀 거북한 많은 경험담들을 들려주었다.
 도를 구하고자 선지식들의 시봉들기를 주저하지 않은 치열함
 그 당대의 선지식들에게서 공부하고 느꼈던 점들의 거침없는 설명은 나를 놀라게 했었다.
 생각외로 그녀가 굉장히 깊이 갔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선지식들께 원력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떠나왔다는 그녀의 당돌함엔
 통쾌하기도 하고 어의없기도 하고 미소짓게도 하고 그랬다.
 
 "솔직히 화두 제대로 두는 사람없어요. 모두 말장난이에요.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들을 하고 있어요.
 화두는 의심을 일으키는 것인데 그 의심을 과연 제대로 일으킬 수 있을까요?
 설사 일의킨다해도 몇분간 지속할 수 있을까요.
 금새 망념이 들어오고 대부분 졸고 앉아 있어요.
 고요함이 화두는 절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달마대사로부터 이어져온 선을 부정하는 겁니까?"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말법시대라 참선을 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우리나라 불교의 한심한 문제는 이상하게 선을 하는 사람은 굉장히 높이 보고
 염불하는 사람은 하근기 할매들이나 하는 것으로 무시하는 풍토라는 겁니다.
 진정 화두가 뭔지도 모르면서 선을 높이 보고
 진정 염불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시들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일반적으로 염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길로 알고 있잖아요?"
 
 "물론 염불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게 염불이기도 합니다.
 입으로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왼다고 다 염불은 아니지요.
 진정 그 마음속에 부처님을 담고 하는 것인지,
 부처님의 원력을 백프로 확신하고 하는지는 모를 일이지요,
 그냥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그건 염불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특히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는 상근기가 아니면 할 수가 없어요.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온갖 망념과 탐진치에 쩔어서 염불을 한들 그게 염불이 되겠습니까
 전 위빠사나든 참선이든 주력이든 염불이든 절수행이든 어떤 질문에도 확고하게 답변할 수 있으며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자신있게 지적할 수 있어요. 
 제가 다 치열하게 해보았으니까요."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상근기가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이라?"
 나의 의외의 답변에 좀 놀라왔다.
 내가 그동안 염불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살아온 듯 했다.
 
 "그럼요...근기에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염불이긴 하지만
 상근기가 아니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나무아미타불 염불입니다.
 우리의 본래면목 자리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며 하는 염불인데 쉽다고 보면 안되지요.
 솔직히 평생을 화두들었다는 큰스님들의 임종에 얽힌 비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다들 실망할 겁니다. 임종의 순간에도 화두를 들어야 하는데 놓친다 이 말입니다.

 그만큼 화두 드는것이 쉬운게 아닌데 왜 참선타령들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거기다 제대로 염불도 안 해 본 사람들이 왜 염불을 우습게 아는지 모르겠어요.
 그 마음 속에 진정한 신심도 없으며 원력도 없는 사람들이..."
 
 "....."
 나는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할 말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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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도량이 염불하는 것을 보세요 
2014.3.21
 
 "수한 보살님 얼른 산신각으로 와 보세요 좋은 것 보여줄께요"
 
 그녀가 상기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난 ' 알았어' 하고는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올라가지를 못했다.
 한시간 쯤 지나서 그녀가 내 방을 두드렸다.
 
 "왜 아까 산신각으로 오라고 했을 때 안왔어요.
 제가 근사한 선물을 드릴려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올라갈 기운이 없더라고, 그런데 무슨 선물을 준다고 그래
 누가 산신각에 좋은 공양물이라고 올렸는감?"
 
 "호호... 그게 아녜요.
 오늘 이 도량이 염불을 하더라구요.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수한보살님께 보여주려 했어요.
 산신각에서 보면 도량 전체가 다 보이잖아요."
 
 "하이구...도량이 염불을 한다구요?"
 
 "그럼요. 도량도 염불을 하지요."
 
 "흐음...그렇다한들 내가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말이지..."
 
 "그때는 도량전체에 바람이 분답니다.
 하지만 그냥 부는 바람하고는 달라요. 
 보살님과 같이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다음에 제가 부르면 얼른 오세요, 보여줄게요.느껴라도 보시라구요."
 
 완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네...^.^
 
 " 도량에 계신 산신님은 저와 천 년 전에 인연이 있던 분에요."
 
 "으잉??? 그것까지 안다고라???"
 
 "예...천 년 전에 이 곳 산신님은 ㅇㅇ국의 왕자님이었고 전 일본 귀족의 딸이었지요.
 그 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었어요.호호호...^.^
 왕자님은 다음 생엔 ㅇㅇ국의 큰스님이었던 ㅇㅇ국사로 불리었지요.
 아주 도가 높은 큰스님이었던 분이 이 곳 산신으로 계신답니다."
 
 못살아 정말...
 
 "그래서 이곳에서 만나니 기뻤겠네요?"
 
 "호...이미 남녀의 애욕을 떠나신 분인데요 뭐 호호..."
 
 "그래 두 분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수?"
 
 이 대화만큼은 나만 알고 있어야 겠다? ^.^
 
 "근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다 알 수가 있어요?"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죽어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보살님이 알고 싶은 것 다 알 수가 있어요.
 그리고 전 전생에 천태지관수행을 치열하게 했었다고 했잖아요."
 
 상기된 얼굴로 미소지으며 내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맑고 어린아이같이 귀엽다.
 별난 그녀와 별난 이야기들을 나누는 기쁨만이 그 도량에서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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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미타행자 그녀는 날 두렵게 했다
2014.3.21
 
 미타행자 그녀는 늘 간곡하게 내게 염불하기를 권했다.
 말세중생이 생사의 고해를 건너가는 방법은 나무아미타불 염불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에, 즉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있다고  했다.
 그 본원력에 의지하지 않고 고해의 바다를 건널 생각을 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생각이라고.
 아니 어림도 없는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점점 한숨이 나왔으며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고,
 그녀의 경지가 날 두렵게도 했다.

 그녀는 선지식들이 쓴 책만보고도 그 사람의 사생활까지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감히 그녀 앞에서 나를 자랑한다든가 거짓을 말한다든가 하는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어느 사람들은 신기가 있다고 폄하해서 말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듣는 것도 다 자신이 전생에 사람들의 운명같은 것을 봐준 업보임을 알기에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쉽게 신기가 있어서라고 폄하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내로라 하는 선지식들과 법거량을 하면서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여자이니...
 나는 매우 깊이 있게 그녀를 점검해 보았었고,
 그녀에게서 나오는 답변은 늘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삼매에 드는 것도 진정한 삼매는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업장이 소멸되지 않고는 삼매에 들 수 없다고 했다.
 욕계의 중생은 설사 삼매에 든다고 해도 거친 삼매에 들 뿐이라고 했다.
 모두들 진정한 삼매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말장난들을 한다고 강하게 항변했다.
 
 화두를 든다고 하나, 의정을 일으키는 게 무언지 제대로 알고 하는 사람이 없으며
 조사의 경지에 간 선지식이 아니면 화두를 제대로 들 수 없다고 했다.
 자신도 한 때는 화두를 들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속았다고 말했다.
 화두를 든다고 생각하는 순간 화미에 빠지는 것이며
 진정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를 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것이라고...
 
 "그럼 일반적으로 견성이라는 것을 생각이 끊어진 무념의 자리를 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또 어느 선지식은 화두는 적극적인 무념이라고 하셨는데?"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본래면목자리라고 본다는 것은 너무 한심한 생각입니다.
 본래면목자리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화두를 적극적인 무념이라고 말했다면 그 분은 화두가 뭔지를 진정으로 모르고 계신 겁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무념은 참나의 경지가 아닙니다.
 선에서 말하는 그 자리 하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 하고는 전혀 다른 얘깁니다.
 다들 참선을 이상하게 이해하고 말하고 있어요."
 
 "그래도 요즘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공부가 익은 사람은 걸음걸이도 다르고 손놀림도 달라요.
 전혀달라요...자칭 깨달았다고 하는 분들 만나보니 아니었어요.
 다들 말장난 하고 있고, 그 말장난에 속고들 있어요.
 진짜 화두를 들라면 깨달은 이후에나 들 수 있다고 전 생각해요.
 그 전에는 절대로 화두 못 들어요.
 그러니 보살님도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염불이나 부지런히 하세요."
 
 참으로 단호하고도 무서운 말이었다.
 점점 그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같이 웃고 떠들면서도 그녀는 나의 행동거지를 모두 들여다 보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모두를 그녀를 그냥 좀 특이한 여자, 또는 별난 여자,
 때로는 지멋에 겨워 사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수행에 관한 한 그녀의 공부는 굉장히 깊었다.

 이론적으로도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년기도 중 지금 2년 가까이 되었는데 단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았으며
 단 하루도 정진을 빠뜨리지 않을 만큼 치열했다.
 그러면서도 도량의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

 쓰레기 치우고 지게지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보통의 사람이면 월급을 더 달라고 할 터이지만
 그녀는 자기는 돈 쓸데가 없는 사람이니 그 마저도 받지 않으려 할 때가 많았다.
 그녀와 대화를 하면서 내 다리에 힘이 빠져갔다.
 맥이 탁 풀렸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내가 한 공부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갑자기 수행에 대해서 누구와 얘기 하는 것도
 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감히 근기도 안되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산 것은 아닌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행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잘못된 관념을 버리고 고치고 하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바르게 선지식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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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처님의 손을 잡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014.3.21
 
 미타행자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이제껏 제대로 부처님의 세계를,
 또는 부처님의 본원력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성찰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날 나의 스승이었던 분의 경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했다.
 나의 근기가 너무 하열했으므로...
 
 나는 오랜만에 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이제서야 왜 정토삼부경이 모든 경전을 공부한 후에 마지막으로 공부해야 하는 경전임을 알게 되었다.
 그냥 환상의 세계같은 아미타경이 얼마나 어려운 경전인지 인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는 아직 아미타경을 이해는 커녕 읽을 수 있는 경지도 아니라고 했다.
 관무량수경을 읽으나 극락세계를 제대로 관할 수도 없는 하열한 경지이며
 업보중생의 몸으로는 솔직히 극락세계를 마음에 그리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위대하고 심오한 경전을 너무 쉽게 해석들을 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나는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이 얼마나 위대한 원인지 새삼 느끼게 되어
 마음이 착잡하고 힘들고 슬프기 까지 했다.
 지난 날 나의 스승은 어느 사찰에 가든 늘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을 읽으셨다.
 그 분이 왜 그러셔야 했는지를 그 분의 그 간절한 심정을 이제서야 제대로 알게 되어 슬프기도 했다.
 
 그 분은 늘 말세중생은 부처님의 손을 잡고 가지 않고는 절대로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강조하셨었다.
 이 생에서 내가 만난 백프로의 절대적인 신심을 가진 유일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번에 미타행자인 그녀를 만나면서 그녀 역시 백프로의 신심을 가진 여자임을 알게 되었다.
 
 아, 지난 날 나는 왜 그리 어리석었을까.
 나의 스승이 내게 한 눈 팔지 말고 부처님을 염송할 것을 그리 권하셨으나
 나는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며 진실하게 정진하지를 않았었다.
 아니 나에겐 믿는 마음이 부족하였으니...
 
 그녀도 내게 믿는 마음이 부족함을 나무랐다.
 나를 염불행자로 만들기 위해 그녀는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을 깊고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다시금 부처님을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아니 내 마음 속에 지극하게 모시기 위하여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의 수행은 이제부터 진정 시작됐다고 해도 될 터였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수행의 첫시작으로...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이제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만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며 행복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날의 방황과 공부가 헛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방황과 공부는 값진 거름이 되었다.

 보다 넓게 세상을 알게 되었고 수많은 편견도 버리게 되었으니...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은 죽는 날까지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난 모든 진리의 말씀은 사랑할 것이며
 법을 전하는 모든 선지식들을 경배할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이 여섯자 속에 얼마나 많은 공덕이 들어있는지 아느냐고 그녀가 말했었다.
 그래서 이 여섯자를 염송하는 사람은 그 어떤 무거운 업도 소멸할 수 있다고 했다.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의 힘에 의해 그리 된다고 강조했다.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을 의심하지 말고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생사의 바다를 건너자고...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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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우리 공양주 결사 해볼까요? 
2014.3.23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수한보살님 우리 둘이서 일년 동안 공양주 결사 한 번 안해볼래요?"

 "응...? 공양주 결사라고요? 호 호 호..."

 난 너무 우스웠다.
 만일염불 결사도 아니고 공양주 결사라니?
 
 "같이 한 번 해보고 싶어요.
 공양주 노릇 하는 것이 공부에는 최고에요.
 공양간에서 일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어요.
 밥 먹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이 보이고 공부정도가 보여요.
 또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을 지으면서 자신을 보는 공부도 되고요.
 복도 짓고 업장소멸도 하고...공양주가 최고지요."
 
 공양주 일은 이미 회향했다더니 왠일이래?
 아마도 나와 공양간에서 일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재미있고 좋았나?
 그녀의 소임은 빨래와 청소지만 공양간에 항상 사람이 부족하다보니
 수시로 공양간을 들락거리며 일을 거들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눈빛에서 
 어쩌면 그녀가 나에 대한 배려로 그런 제의를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업을 팍팍 녹여줄라고...
 그래야 소멸될 업을 그녀가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계획이 있고 또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승낙을 못했다.
 그녀와 같이라면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녀가 있었기에 그동안 어떤 도량에 머물때 보다 즐거웠으며 행복했다.
 대화가 통하는 도반과 같이 살고 같이 일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즐겁다.
 하루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그녀의 얼굴이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듯이...
 
 그녀는 나를 설레게 했다.
 오늘은 또 어떤 대화들을 나누게 될까 해서...
 난 점점 그녀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사랑하게 되었다.
 또 한 사람의 선지식으로서...
 
 공양간에서 일하다보면 공양주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이
 스님들의 음식타박이다.
 이 점은 나역시도 가장 못마땅한 부분이었다.
 매우니 싱거우니 짜니...
 
 그때마다 그녀의 입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참내 스님도... 자성이 없다고 하시고서 와그라시노?
 매운 맛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조금 있으면 사라질터인데
 왜 없는 자성에 끄달리신단 말인고?"
 
 "호 호...그러게 말이야."
 
 "제가요. 아무개큰스님 밑에서 시봉을 들었었는데요.
 세상에나 얼마나 음식이 까다로우신지요 공양주들 죽여주데요.
 그러시고서 무슨 한소식을 했다고 그러시는지...
 전 음식타박 하는 스님은 절대로 한소식했다고 인정 안합니다.
 한소식했으면 그럴 수가 없어요.
 미각에 걸려 있는데 무슨 한소식입니까?"
 
 그녀는 출가수행자보다 더 계율에 철저했다.
 육식은 절대로 안했는데,
 그 이유가 살생의 인연을 맺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들 업 중에서 가장 큰 업이 바로 살생의 업이라고...
 오신채도 음욕과 화를 북돋운다고 먹지 않았으며 오후불식 하였다.
 
 "제대로 수행을 한 사람은 육식을 하라 해도 못합니다.
 오신채도 먹으면 몸에서 금방 신호가 와요. 
 그걸 못느낀다면 그는 수행을 제대로 한 사람이 아니지요.
 계는 일부러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야 해요.
 또 여러가지 음식을 먹는 것은 일견 골고루 먹어서 좋은 것 같지만
 수행자에게는 산만심을 길러줘요.
 음식을 간결하게 먹는 사람일수록 수행의 깊이가 있다고 보면 돼요."
 
 그녀가 있어서
 그녀에게 법문을 들을 수 있어서
 그녀에게 어떤 궁금한 질문도 할 수 있어서 
 그래서 그곳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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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렇게 살기 위해 많은 걸 버렸답니다
2014.3.26
 
"전 이렇게 살기 위해 모든 걸 다 버렸어요. 하지만 후회도 미련도 없어요."

 청소 하고 빨래 하고 남는 시간은 치열하게 염불정진하는 그 삶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도 안가고 안타깝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몇달 전에 그녀의 동생이 찾아와 언니가 사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바가지로 흘리고 갔다고 했다.
 
 하긴 그렇기도 할 것이다.
 세속말로 스펙이 화려한 그녀이니 기가 막히기도 했을 것이다.
 
 불교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카톨릭교도 였으며 모태신앙이라고 했다.
 그녀는 의대를 나와서 한동안 카톨릭계에서 운영하는 나환자들을 위한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었다고 했다.
 그녀의 보살심은 이미 타고난 것이었나 보다.
 가장 낮은 곳으로...가장 힘든 곳으로 가려고 하는 보살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종교의 보살행과 불교의 보살행은 비교할 수 없는 경지라고 말했다.
 타종교의 보살행은 '나'가 남아있지만 불교의 보살행은 철저히 '나'를 부정하고 내세우지 않는 행이라고,
 
 여차여차한 사유로 인해 의사생활을 접고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이유는 오직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는 그 돈으로 중생구제사업을 할 생각을 했다고 했다.
 고아들 40명쯤 데려다 키울 생각을 했었다고...
 그 뜻을 같이 할 남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던 중
 뒤늦은 나이 사십에 겨우 만나서 결혼을 하였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니 남편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더 큰 돈만 추구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단다.
 허탈한 마음에 우연히 해인사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운명을 전환할 발심을 하게 되었단다.
 해인사 부처님에게 홀딱 반해서 이혼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이혼을 안해주려는 남편과 힘들게 정리를 했지요.
 이혼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락을 해 오는 남편 때문에 많이 울었답니다.
 눈에 핏줄이 터지도록...저의 친정부모님은 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까지 했어요.
 신부가 된 두명의 삼촌들은 불교로 개종한 저를 무척 나무라셨습니다.
 결국 식구들 몰래 산으로 도망갔어요."
 
 "... 혹시 남편에 대한 미련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나요?"
 
 "아니요...전생의 빚을 갚기 위해 만났던 건데요 뭐.
 제가 전생에 큰 벼슬아치였는데 당연히 많은 첩을 두었겠지요?
 그때 오로지 저만 바라보고 일편단심 사랑한 여인이 현생의 남편이었어요.
 사랑을 혼자 독차지하고 싶던 그 열망때문에 이생에 부부로 만난 것 같애요."
 
 "지금의 삶에 대한 후회같은 건 없어요?"
 
 "ㅎ 어느 사찰에 있을 때 어떤 보살님이 제게 그러데요.
 '이렇게 젊고 고운 보살이 아깝게 왜 이렇게 사느냐' 고요.
 ㅎㅎ 제가 이렇게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요.
 세속의 인연들 때문에 밤이 하얗게 새도록 운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늘 결론은 똑같았어요.
 이 선택을 잘했다구요.이렇게 사는 것이 넘 행복하답니다."

 
 "아직도 고아들을 키우고 싶다던 꿈은 간직하고 있나요?"

 "불교로 개종하고나서 그것만이 최선의 삶의 방식은 아님을 알았답니다.
 좋은 일...하면 좋지요. 하지만 전 이생에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싶답니다.
 몇년 후 다른 종단으로 정식출가를 하여 절을 하나 짓고 살까 생각도 하는데
 그때 그 꿈을 펴게 될 수도 있지요.

 지금은 그저 기도에만 충실하고 싶어요.
 무엇을 하든 제 업이 왠만큼 소멸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어오는 업장의 바람을 막을 수 없거든요.
 참회기도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종교인들이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전 참회해야 할 업이 너무 많은 사람에요."
 
 그녀는 참회기도의 중요성을 늘 내게 강조했다.
 업장이 두꺼운 사람들은 기도도 잘 안되고 어떤 수행을 해도 마장에 걸려 넘어지며
 세속의 일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일단은 내 안의 쓰레기들을 먼저 치우고 깨끗한 그릇을 만든 다음에
 무엇을 담아도 담아야 한다고...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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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전 선(禪)을 할 근기가 못됩니다 
2014.3.26
 
 오직 나무아미타불 염불만을 할 것을 강조한 그녀지만 선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수승한 선을 하지 않고 왜 염불을 선택했습니까" 물어보았다.
 
 "아이고 보살님...제가 선을 할 근기가 안되니까 그렇지요.
 선이야 말로 최상상근기가 하는 것 아닙니까.
 해보니 제 근기같고는 안되더라 였어요."
 
 "그런 대단한 근기를 갖고도 선을 할 수 없다면 누가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선을 할려면요.
 걸식수행을 하여야 하고,
 분소의를 입어야 하고,
 한 나무 밑에서 하루 이상 잠을 자지 않을 정도가 되야 해요.
 이 시대에 그럴 수 있는 수행자 있습니까?

 편하게 선방에 앉아서 보살들이 해드리는 공양 드시면서 무슨 선을 합니까?
 그건 제대로 된 수행이 아닙니다. 그래갖고는 선은 못합니다 어림도 없지요.
 다들 수행이라는 겉멋만 잔뜩 들어있어요.
 재가자들도 선방에만 다니면 목에 힘주고 다녀요.
 웃기는 착각들이고 작태들이지요.
 선이 뭔지 화두가 뭔지 알고나 그러는지 한심해요."
 
 난 할 말이 없어서 헛헛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내게 하는 말이,
 "보살님도 이제는 염불할 근기가 된 것 같습니다."
 
 "와 하 하...이제서야 염불할 근기가 되었다구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상당히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쁜 말이기도 했지만
 난 어처구니가 없고 기운이 빠지기도 해서 한바탕 웃어제꼈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내게 했으면 심하게 반격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행의 고수가 하는 말이니 수긍하지 않을 수도 없고...ㅎㅎㅎ
 
 "염불이 아무나 하는 건줄 압니까.
 입만 달싹거린다고 염불이 아니잖아요.
 그동안 이런 수행 저런 수행 하면서 간도 보고 맛도 보았을터이니
 이제는 흔들림없이 염불수행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느정도 진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도 있고 업장도 많이 녹아내린 사람이 할 수 있는게 염불수행입니다.
 복을 비느냐고 하는 염불은 참된 염불이 아닙니다.
 그건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듯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에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라?"
 그녀는 참으로 신랄했다.

 "제가 그렇게 말하니 어떤 사람이 항의하데요.
 그럼 기도할 수 있는 근기가 되는 사람도 없겠다고요."
 
 "그렇게 반격할 수 있지요. 중생의 마음이란 건 소원성취에 목이 마르니까요."
 
 "소원성취는 참회기도를 열심히 하면 저절로 되요.
 업이 녹아내리면 저절로 되는 것인데 자꾸 부처님이나 신들에게 청탁을 하고 거래를 하려고 드니 문제에요."
 
 "그럼 참회기도는 어찌해야 합니까?"
 
 "저는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를 지극하게 염하면 참회는 저절로 된다고 봐요.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없이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면서요.
 그러면 업장이 녹아내려요.
 전 저의 이 몸뚱이는 부처님을 예경하는데만,
 이 입은 염불을 하는데만 쓰고 살다 가고싶어요.
 그런데 요놈의 입은 그게 잘 안되네요. ㅎㅎㅎ "
 
 참으로 절대적인 신심을 가진 여자다.
 난 그녀의 신심이 너무 부러웠다.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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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주력수행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2014.3.26

 "내가 말했다.
 전 주로 주력수행(진언,다라니)을 많이 했어요."
 
 "제가 봐도 보살님은 전생에 주력수행으로 한 경지에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주력수행을 그만두고 염불을 하라 합니까?"

 "부처님의 명호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주력수행은 위험성이 많아요.
 저도 한 때는 백련암에서 아비라 기도를 했습니다.
'아비라의 여신'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치열하게 했습니다.
 남들은 두꺼운 방석을 깔고 호궤합장을 하였지만 저는 얇은 방석을 깔고 했어요.
 삼천배를 21일 한 후에 시작하였죠.
 당연히 능엄주와 법신진언도 치열하게 했지요.

 그때 많은 경계체험을 했습니다.
 제 전생도 보이고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의 전생도 보이고 뭐 그랬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니겠지요.
 능엄주를 할 때 아주 이상한 현상을 겪었어요.
 보통 5분이면 일독을 하는데 하루종일 했는데도 21일독을 못 넘어가는 거에요.
 입에서는 계속 침이 나와서 옆에 물컵을 두고 침을 뱉어가면서 했어요.
 죽어라고 하는데도 21일독을 겨우했어요.

 그리고 무서운 경계를 보았어요.
 그 이후 '아, 능엄주는 아무나 해서는 안되는구나' 깨닫고는 접었답니다.
 성철스님도 하루 7독이상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지금의 한국불교에선 능엄주를 하루 백팔독,또는 그 이상을 하고 있어요.
 전 매우 문제가 심각하다고 봅니다.
 능엄주를 하면 모든 부처님과 신들과 조사들까지 다 불러들여 모시고 하는 것인데
 다 모셔놓고는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요?

 수습할 능력도 뭣도 없으며서 잔뜩 불러서 모셔놓고 어떡하겠다는 건지...
 다른 주력수행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주력은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그 다라니를 수호하는 신들까지 청하는 것이거든요.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결려서 무서운 현상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수행법이 염불법임을 알게 된 겁니다."
 
 "하긴 전에 저의 스승였던 분께서도 능엄주나 천수다라니 하는 것을 경계하셨어요.
 당신의 체험으로는 능엄주는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아니면 안되고
 천수다라니는 보살행을 서원하는 사람이 아니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어요.
 주력수행을 하다보면 당연히 신통이 오는데 그걸 감당할 근기들이 아니면서 
 이상한 욕심에 끌려서 하고 있으니 위험하다고 했지요."
 
 "사실은 저에게도 신통이 왔지요.
 손에서 열이나고 얼마나 뜨거운지 합장조차 할 수 없었어요.
 누군가가 제 손으로 다른 사람의 아픈 부위를 만지면 나을 수 있을 거라 했어요.
 손에 치유의 능력이 왔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 능력을 안쓰면 오히려 제게 화가 미칠거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 그 능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안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인가 손의 열이 식기 시작하더군요."
 
 '대부분은 그 능력을 쓰고 싶어 했을텐데 용케 극복하셨네요."
 
 "전 누구 운명 봐주고 병 고쳐주고 그런 것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다고 운명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병 고쳐준다고 그 사람이 영원히 삽니까?
 신통한 사람의 능력에 의존하여 병을 고치면 다른 것으로 곤욕을 치뤄야 합니다.
 그게 철저한 인과법의 세계거든요. 이 세상엔 공짜 없습니다.
 전 한때 신장에 이상이 생겨서 이식수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를 상황까지 갔지만
 그 모든 것을 저의 업으로 알고 오직 참회기도를 하여 병을 낳았습니다.
 작은 병은 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지만 큰 병은 참회기도 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느 선지식께선 참회기도만 하고 가도
 이 생에서 훌륭한 수행을 하고 가는 것이라고 했나 봅니다.
 아, 저도 근기도 안되는 사람이 너무 많이 기웃거리고 산 것 같습니다."
 
 "ㅎ 하지만 해보지 않은 것보다는 해보는 것이 나아요.
 그래야 그 문제점도 알고 다시는 흔들림 없이 염불정진할 수 있으니까요.
 경전공부도 해야 할 땐 해야해요.그러지 않으면 자칫 사도에 빠질 수 있거든요.
 이제는 보살님도 흔들림없이 염불수행을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처음 이 곳에 오실 때보다는 업장이 엄청 녹아내렸어요.
 아주 짧은 시간에 무척 많이 녹아내린게 보이네요.
 이제 진짜 염불을 하실 수 있는 근기가 된 것 같아요.
 염심히 해보세요. ㅎㅎㅎ "
 
 "흐음...ㅎ ㅎ ㅎ "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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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수행할 땐 명산의 지기를 받는 것도 좋아요 
2014.3.26

 그녀는 내가 그 도량에 오래 머물기를 청했으나
 나는 한 도량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떠나겠다고 말했다.
 한 곳에 오래 있다보면 타성이 생기고 이런 저런 문제들에 휘말려들어가기가 쉽다.
 그때부터 수행은 끝이다.
 
 이런 내 의중을 그녀는 십분 이해했다.
 자신도 한 도량에 일년 이상 머문 적이 없는데 이 곳 만큼은 2년가까이 머물고 있다고...
 3년 기도를 발원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3년 기도를 꼭 한 도량에서 할 필요는 없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도량이 편해져서 내 집같은 마음이 들면 그때부터 나태함이 고개를 듦을 경계하고 있었다.
 자신도 언제 떠날지 모른다며 내게 지리산 쪽을 한 번 가보라고 권했다.
 
 "수행을 할 때는 이 곳 저 곳의 명산의 지기를 받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옛 수행자들이 만행을 하면서 돌아다닌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분들은 아무리 좋은 명산 명찰이라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지요.
 좋은 것에 탐착하는 마음을 경계한 때문이겠지요.
 공부가 경지에 오르면 그 때는 명산 명찰을 찾는 마음도 버려야 하겠지만요.
 그래도 경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좋은 지기를 받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게 제일 좋은 공부지요."
 
 '호 호...전 뭐 그런 거창한 뜻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고
 이왕이면 삶의 다양함을 체험하는 게 좋아서 그래요. 여행 삼아서...
 많은 사람들과 많은 경계에 직면하다보니 저의 모난 면들이 깎이더라구요.
 이젠 아무 곳에서나 자도 잠도 잘 오고,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고...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게 되었어요.
 그저 주어지는데로 사는 것이지요.

 전에는 내 집이 아니면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는데
 현재 제가 머무는 곳이 제 집이거니...현재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려니 하고 살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공부는 뭔가를 늘 생각하지요.
 거창하게 도를 구한다거나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아서 그럴 뿐입니다.
 더 늙으면 이 짓도 못하겠지요.^.^ "

 내가 떠난다니 그녀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는가 보았다.
  "이 세상에 도반같이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서로 용기도 북&#46167;아주고, 나태할 땐 충고도 해주면서 같이 가는 게 얼마나 좋아요?
 제가 나중에 절을 지으면 그 때는 조념염불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려 해요.
 조념염불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평상시 염불을 잘 했어도 임종시에는 무척 힘들거든요.
 그 때 도반이 곁에서 조념염불을 지극정성 해주면 왕생의 길이 더 순탄할 겁니다.
 그 때 저의 도량에서 머물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환영할께요.
 단 조건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꼭 해야 한다는 겁니다.ㅎㅎ
 제가 바다 속에 던진 업을 건져와서 설립을 하게 될 수 있어요.
 아직은 생각뿐이지만요."
 
 바다속에 던진 그녀의 업???
 그녀는 한 때 사업을 하여 번 돈을 자신의 업이라고 표현했다.
 그 많은 돈을 어디에 감춰두었냐고 물으면 웃으면서 "바닷속요" 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으면 사랑은 해보았습니까?"
 
 "안해봤을것 같아요? 제가 혈액형이 B형에요. 얼마나 감정이 섬세한데요.
 수행을 안했음 아마 황진희처럼 살았을지도 몰라요 호 호.
 제가 성당에 다닐 때 신부님 한 분이 저때문에 옷을 벗기도 했어요.
 당신 혼자 짝사랑한 것이니 제 책임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훗날 제가 삼천배 할 때 그 또한 제 업임을 알고 많이 울었어요.
 그 업으로 인해 삼천배 할 때 무척 힘들었답니다."
 
 "옷을 벗겼다구요? 난 옷을 입혔는데? "
 
 와 하 하 하...우리 둘은 배를 쥐고 웃었다.
 흠...거짓말이 아닌데...
 
 진정한 보살은 세속에 쩔은 남자를 세속을 벗어나게끔 인도한다는데???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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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화두를 든다는 착각을 하고 있지요 
2014.3.27

 내로라 하는 선승들 밑에서 선을 공부한 그녀가 자신은 선을 할 근기가 아니라며
 염불수행을 하고 있으니 그녀가 알고 있는 선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래서 우리는 염불에 대한 대화보다는 선에 대한 대화를 더 많이 했었다.
 오히려 선방에 머물때 보다,
 선수행자들과의 대화에서 보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선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선을 하는 사람들은 망념이 일어날 때 '이 뭐꼬' 하고 얼른 화두를 챙긴다고 말합니다."
 
 "그게 바로 착각이지요.
 그건 화두를 드는 게 아닙니다.
 망념이 일어날 때 '이 뭐꼬'를 하는 것은 
 망념이 일어날 때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지요.
 망념에 다른 언어를 대입하는 것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냥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편이지 화두는 아닙니다.
 화두는 철저히 의정이 일어나야 하는데 솔직히 의정이 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은 저도 선방에 있을 때 그것이 참 갑갑했습니다.
 스님께선 참선 초보자들에게도 '의정이 일어나느냐' 고 질문을 하시는데
 전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거든요.
 의정이 뭔지 저도 솔직히 모르겠더라구요.
 제 성격이 확고한 이해가 없이는 발을 들이지 않는 지라 머리가 아팠습니다.
 회의도 들었구요."
 
 "그게 작금의 불교계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어떤 선수행자에게 물었습니다.
 '참선이 무엇이냐' 구요.
 그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내려놓는 것' 이라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위빠사나 아닙니까."
 
 "그렇지요, 위빠사나의 수행법이지요.
 그래서 선을 지도하는 사람들도 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관수행법입니다.
 참으로 좋은 수행이지요. 자기자신을 늘 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경지입니다.
 하지만 선은 직지인심입니다.
 즉각 본래면목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업보중생이라 업의 작용으로 인해 그 자리를 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면 왜 스님들은 우리에게 화두를 챙기라고 하시는 걸까요?"
 
 "비록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망념을 줄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또 그러다보면 그 중에 누군가는 진짜 화두를 드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그럼 선수행을 많이 한 선승들이 입적 때 방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분들이 제대로 화두를 들지 못했음에도 방광하지 않습니까."

 "그건 마음을 한데 모으는 수행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선수행이 아니라 염불이나 주력수행등 기타 수행을 많이 한 사람들도 방광을 하지 않습니까.
 범부중생들은 망상이 많기 때문에 마음의 에너지가 분산이 되고 있지만
 수행자들은 마음의 에너지가 하나에 모이기 때문에 방광을 하는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그가 방광을 하였다하여 도를 성취했다고 보는 것은 고려해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그 점을 경계하셨으니까요.
 그런 현상에 취하는 것이야말로 외도라 하셨습니다."
 
 "그럼 선을 할 수 있는 근기란 어떤 상태를 말함입니까?"

 "저는 청정심이라고 생각해요.
 근기란 어느만큼 그가 청정한가의 척도라고 전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선이란 최고의 경지를 말함이니 그만큼 청정심이 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다고 봐요.
 안타깝게도 저도 아직은 선을 한 근기가 아닙니다.
 청정하지도 않은 수행자가 삼매니 선정이니 말하는 것은 신뢰할 것이 못됩니다.
 혼침의 상태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거나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행위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참선 참선하고 있는 걸까요?
 참선 수행자에게는 공양도 지극정성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공덕이 엄청나다고 하지 않습니까."
 
 "겉보기에 선을 한다고 하면 멋져 보이잖아요. ㅎㅎ
 염불을 한다면 왠지 촌스러워보이구 구닥다리같고 하근기같고...ㅎㅎ
 사실 수행자들이 선을 제대로 할려면 걸식수행을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상이 떨어져나가야 하거든요.
 오죽하면 잠도 한 나무 밑에서 하루 이상 자면 안된다고 할까요.
 길들고 편안해지고 정이들고 이런 모든 것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죠.

 그 무엇에도 맛에도 잠자리에도 옷에도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진짜 선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계에서 하는 선은 겉멋만 잔뜩 부리고 있어요.
 너무 편안하게 수행들을 하고 있지요. 그건 수행이 아닙니다.
 대부분 앉아서 졸고 있든 망상에 빠져 있든 그래요.
 얼마나 의정을 일으키고 또 그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지는 본인들이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좀더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렇군요...참 수행이란 게 하면 할 수록, 알면 알 수록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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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염불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2014.3.27
 
 "염불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능엄경에 나오는 이근원통법이 최고지요.
 처음엔 저도 경전을 읽을 때 묵독을 주로 했고 염불도 그리했어요.
 그런데 그건 좋은 수행법이 아니더라구요.
 망념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어느새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래서 가장 원초적인 수행법이 가장 좋은 수행법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묵송엔 문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묵송을 하다보면 금방 염불을 놓치더라구요.
 그런데 전 소리내서 하면 몸이 많이 지치더라구요.
 에너지가 빠져나가서요."
 
 "그건 염불법이 바르지 않아서 그럽니다.
 질량불변의 법칙에 의해 나의 에너지는 일정하게 존재합니다.
 바르게 염불을 하면 빠져나간 에너지가 다시 들어옵니다."
 
 "ㅎ...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염불법입니까?"
 
 "전 일정한 톤과 소리와 리듬을 갖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빠르게 하다 느리게 하다 높이 하다 낮게 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몸을 상하게 합니다.
 처음엔 저도 잘못해서 기맥이 막히곤 했습니다. 상기도 되구요."
 
 그러면서 그녀는 대만에 계신 혜정스님의 염불법을 들려주었다.
 나무...아미...타...불...
 정확히 네번 끊어서 하는데 톤이 높지도 낮지도 않으며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처음 대하는 염불법에 의아하기도 신기하기도 또 적응이 안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꾸 듣고 하다보니 마음에 평정심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혜정스님의 염불테입에서 금빛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내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원...^.^
 
 "그런데 참선이든 염불이든 치열하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십리 밖도 보이고
 부처님도 보이고 신장들도 보이고 영가들도 보이는가 본데 이건 뭡니까?
 본인도 그런 현상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대단한 것 아닙니다.
 실은 색.수.상.행.식에서 색의 경계를 못벗어났다는 증거지요.
 그 또한 마경이라고 하지 않슴까.
 다만 집착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에 탁 걸려서 넘어지니까 문제지요.
 혹자는 대단한 경지인양 자랑하고 또 그런 사람을 추종하는 게 더 문제겠지요.
 그냥 염불만 열심히 하세요.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환해짐을 체험할 겁니다."
 
 "환해진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함인지요."
 
 "ㅎㅎ 뭐가 보인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알아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사물의 이치등이 그냥 알아집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어느 경계에 떨어져있는지
 또 어떤 업에 의해서 그 사람이 그런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 알게되며
 앞으로 어떤 상태에 떨어질지도 알게 되고 죽어서 어디로 떨어질지도 그냥 알게 됩니다.
 죽어라고 한 번 해보세요. 그러면 알고 싶은 것 다 알게 되요.
 물론 저도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직 그 경지는 아녜요. ㅎㅎ"

 
 그녀와 같이 법당에서 염불을 할 때
 난 그녀의 목소리와 자세가 한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보았다.
 염불을 하며 법당을 한시간 가량 도는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난 간간히 비틀거리는데...ㅎ
 목소리 톤도 굵기도 모두 일정했다.
 저래서 염불삼매에 들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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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자성을 모르는데 어떻게 자성염불을 한다고 말합니까
2014.3.28
 
 미타행자 그녀에게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했던 자성염불에 대해 질문을 했다.

 "염불이 깊어지면 자성염불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본인도 자성염불이 되고 있습니까?"
 
 "자성염불요? 아니 자성이 뭔지도 아직 모르는데 어떻게 자성염불을 합니까?"
 
 난 순간 멍해졌다...의외의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염불이든 주력이든 치열하게 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몸의 어느 부분에선가
 나오는 염불이나 주력소리를 듣는다고 하던데요?
  주력으로 유명한 어느 보살의 수행기를 읽어보니 그럽디다.
 다라니가 몸의 어느 한 부분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 돌아갔으며
 자신은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됐다구요."
 
 "그건 굉장히 위험한 얘깁니다.
 저도 한 때는 가슴의 중앙 부분에서 염불소리가 났었어요.
 하지만 나중에 그곳의 기맥이 막힌 것을 알고 부황을 떠서 피를 많이 뽑아냈어요.
 몸의 이 곳 저 곳에 다라니나 염불소리가 자리잡는다는 것은
 그가 기운용을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봐요.
 그것을 자성염불이라고 말한다니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솔직히 우리는 아직 자성이 무엇이라고 확고하게 말할 급수가 아니에요.
 말로만 자성 자성하지 자성을 보기라도 했습니까?
 학문적 용어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들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서 얘기들을 하는데 참 안타까워요."
 
 "호오...그런가요.
 그런데 저도 가끔은 어디선가 들리는 염불소리를 듣곤 했어요.
 비구스님인데 아주 청아하게 염불을 하시더라구요.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가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근원은 없는데
 제 귀에는 분명 들렸습니다.그래서 그런 현상이 자성염불인가 생각했거든요."
 
 "그건 보살님이 전생에 비구승였을 때의 그 모습을 보고 들은 것이지요.
 아뢰야식에 새겨진 전생의 식이 작동했다고 보는게 옳을 거에요."
 
 "전 꿈에서도 가끔은 염불이나 특히 다라니를 많이 하곤 했습니다.
 어떤 땐 전혀 해보지 않은 왕생정토주를 하기도 했어요.
 꿈에서 깨어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는 그 다라니가 왕생정토주임을 알았지만요."
 
 "아마 보살님은 전생에 주력수행으로 한경지를 갔을 겁니다.
 앞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다보면 그 때 어느 경지까지 갔었는지 스스로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현상을 자성염불의 경지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봐요.
 그건 그냥 식에 깊게 새겨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자성이 뭔지도 잘 모르지 않습니까.
 기도를 하다가 어떤 특이한 현상을 체험하게 되면 그것을 한 경지를 얻은 것인양 착각하면 안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수행 중에 특이한 현상을 경험하면 거기에 탁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 신비감에 빠져서 이상해지기도 하구요."

 "그래서 염불을 할 때도 항상 소리를 내서 하라는 겁니다.
 소리를 내기 힘들 때는 입모양이라도 내야 합니다.
 그래야 몸 전체의 기운도 같이 움직이거든요.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너무 빨리해도 기맥이 막힐 수 있어요.
 조금할 때는 모르지만 아주 많이 할 때는 반드시 장애가 옵니다."
 
 "보통은 망상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빨리 하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군요."
 
 "제 경험으로는 기맥이 막혀서 혼났습니다.
 대만의 혜정스님을 뵈었을 때
 '아, 이 염불법이야 말로 내가 찾던 염불법이구나' 했답니다.
 마음이 들뜨지도 않고 기맥이 막히지도 않는 아주 수승한 염불법이지요.
 나무아미타불을 관하면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염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나도 혜정스님의 염불법을 따라하다보니
 굉장히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처음 대했을 &#46468;는 너무 생소해서 이상하기만 하더니
 익숙해지니 전에 하던 염불법이 오히려 어색했다.
 특히 여섯자를 관하면서 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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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가위눌리는 현상에 대하여
2014.3.29
 
 "전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가위에 많이 눌렸답니다.
 잠을 자기가 두려울 정도로요.
 늘 나를 죽이러 온 누군가가 내 방에 들어올까봐 방문을 잡고 늘어지다 깨고
 어떤 때는 그 존재가 제 목을 조르거나 제 목에 칼을 댈때 진언을 외고는 간신히 풀려나곤 했어요.
 아마도 제가 전생에 악업을 많이 지은 것 같아요."
 
 내 얘기를 듣던 그녀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했다.
 
 "그렇다면 전생의 악연이 가까이에 있다는 증거에요."
 
 "오...그래요?"
 
 "예, 악업의 결과가 몇 생 후에 받아야 할 업인 경우는 그런 꿈을 꾸지 않습니다.
 그 악연이 지금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런 현상을 겪는 겁니다.
 내 옆에서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지요.
 겉으로 볼 &#46468;는 좋은 사이일 수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거나 부부이거나 자식일 수 있지만
 인과의 세계에서는 전생에 깊은 악연으로 맺어진 사람일 수 있는거죠.
 그래서 내게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줍니다."

 아, 하고 난 탄성을 질렀다.
 그 악연이 누구인지를 나라고 모르겠는가.
 내 인생이 심한 휘오리바람에 휘말렸을 때는 유독 그런 현상이 나타났으니까.
 가위에 눌린다는 것은 일단 운세가 하향세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지만
 물론 몸이 허약해서 가위에 눌리기도 하겠지만
 그 허약함도 사실은 전생에 살생을 많이 한 연고이니 그 또한 악연의 장애라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가위에 눌린다면 가까이에 악연이 원수갚을 태세를 하고 있든 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은
 그녀에게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럼 빙의는 왜 되는 걸까요?"
 
 "전생의 빚받으러 오는 거지요.
 그래서 늘 염불을 하면 그 존재도 좋은 세계로 인도할 수 있으니 장애가 해결됩니다.
 오래 염불을 하면 귀신의 장애를 스스로 알 수 있어요.
 왔구나 하는 것도 갔구나 하는 것도요.
 그리고 그들과 같이 염불하여 그들이 집착과 원한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전에 어느 사찰에 머물 때의 일이었어요.
 굉장히 수행이 깊은 도반이었는데 한 밤중에 이상한 경계에 처한 것을 보게되었답니다.
 큰 방에서 여러명이 같이 잤는데요 갑자기 괴성을 지르는 겁니다.
 그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짐승, 그것도 수컷이 울부짖는 소리였어요.

 우린 너무 무서워서 다들 머리가 쭈뼛 섰답니다.
 소름이 쫙 끼치더군요. 얼마후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코를 골며 자더군요.
 아침에 잠에서 깨어서도 그 도반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대단한 수행이력을 가진 사람이 왜 저럴까 실망스럽기도 슬프기도 했어요
 그 현상은 뭐였을까요?"
 
 "전생의 까르마가 작동했을 수도 있고 빙의 현상이라고 봐야겠지요.
 그 현상을 극복하는 방법은 지극한 참회기도 밖에 없습니다."
 
 "......"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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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사경보다는 염불이 수승합니다
 2014.3.30

 "그런데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지 않고 사경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전 염불보다는 사경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사경보다는 염불하는 게 더 수승합니다.
 사경이 산란한 마음을 집중하는 데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염불만큼의 공덕은 입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견해로는 그렇습니다.
 염불을 하게 되면 온몸의 기운도 같이 돌기 때문이며
 염불 할 때 나오는 파동에너지가 온 몸 세포 구석 구석까지 전달되기 때문이며
 주변에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도 그 파동이 전달되기 때문에 많은 공덕을 입습니다."
 
 "예...현대물리학에서도 파동에너지의 효과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언의 효과에 대해서도 긍정적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티벳에서는 절벽 위에 사원을 지을 때 수많은 스님들이 모며 진언을 외움으로써
 그 파동의 힘으로 무거운 돌을 들어올려 건축하는 비밀이 전해내려 오고 있답니다.
 피라미드도 그렇게 건축했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때의 진언은 진언으로 높은 경지에 간 수행승들에 의해 선택된
 진언을 하겠지요. 그래서 밀교라고 하잖아요.
 제 체험으로는 진언만큼 위험한 수행이 없다고 봐요.
 진언수행이야말로 스승없이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진언을 잘못하면 때로는 귀신을 불러들이기도 하니까요.

 저도 한 때 옴마니반메훔을 죽자사자 했었는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경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었지요. 많은 신묘한 체험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요.
 밀교수행은 밀교수행으로 한경지를 이룬 사람의 검증하에 해야한다고 전 주장합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따라한다는 식의 진언수행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염불수행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예...염불수행법을 만나기 위해 전 천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전생에도 염불수행을 한 적은 있겠지요. 하지만 제대로 하지를 않았지요.
 염불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으니까요.
 이생에도 호기심이 많아서 온갖 수행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수행법입니다.
 이제는 흔들림없이 갈 수 있습니다."
 
 "칭명염불에도 여러부처님의 명호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왜 아미타불입니까"
 
 "아미타부처님이 법장비구로 계실 때의 원력 때문이지요.
 아미타부처님의 48원을 능가할 수 있는 대원이 있습니까?
 아미타란 명호에는 48원의 힘이 다 들어있고
 아미타란 세글자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법장비구의 서원과 공덕으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란 명호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공덕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란 명호에서 나오는 파동에너지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건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어요.
 나무아미타불 염불 수행을 하면서 많은 장애가 사라졌어요.
 그래서 자신있게 권하는 겁니다."
 
 "그런데 테이프를 틀어놓고 염불을 듣는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큰 공덕은 없습니다.염불 할 수 있는 종자는 심어지겠지만요.
 어떤 수행이든 수행은 철저히 스스로 힘들여 해야 공덕이 있습니다.
 온 몸을 부딛쳐서 수행하지 않으면 도를 얻기 힘들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다보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찾아오는지 몰라요.

 뱀도 있고,곤충들도 있고...그런데 그들이 염불소리를 듣고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때로는 금빛 몸으로 떠나는 것을 보면 얼마나 환희로운데요.
 일체중생이...온 법계가 같이 염불한다는 것을 알게 될거에요.
 아미타불 염불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그만큼 선근이 있어야 한답니다."
 
 "그럼 아미타불 염불을 하면 천도재같은 것은 안해도 되는 겁니까?"

 "꾸준히 열심히만 하면 그렇지요.
 꾸준히 하다보면 인연 있는 영가들이 환희로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얽혀있는 주변도 서서히 정리가 됨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것이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의 힘입니다."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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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공양올리는 수행을 해보려했으나 
2014.3.31
 
  그녀가 말했다.
 "저는 한때 공양올리는 것으로 수행을 해보려 했던 적이 있어요."

 "공양을 올리는 것도 수행이라고요?"

 "그럼요. 대단한 수행이지요.
 공양을 올리는 자의 마음도 청정해야 하고,
 공양물도 청정해야 하고,
 공양을 받는 자의 마음도 청정해야하지요.
 세가지가 다 청정해야 공양올리는 것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공양은 공양의 완성은 아니겠군요.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니까요."
 
 "그렇지요...
 제가 어느 암자에 머물때 였습니다.
 그곳 주지스님이 법당에 작은 종불사를 하고 싶다고 하시는거에요.
 스님은 삼백만원이면 될 것 같다고 하셨어요.
 오죽하면 저에게 말씀하시나 싶었어요.
 수중에 돈은 없고해서 궁리를 했지요.
 조금 경제적여유가 있는 아는 스님께 전화를 드렸지요.

 '스님 제가 이러저러해서 돈 삼백만원이 필요하니 통장으로 입금해주십사' 하고요.
 그대신 제가 일년 동안 그 절에 가서 공양주살이를 해드리겠다고 했지요.
 스님은 좋다고 하시며 얼른 부쳐주시데요.
 삼백만원을 종불사에 쓰시라고 드리고 저는 약속대로 공양주살이 하러 갔었어요."
 
 "맙소사...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갔듯이요?
 그래서 정말 일년 동안 공양주살이로 삼백만원을 갚았습니까?"
 
 "일년은 아니고 십개월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 지극한 신심으로 불사금을 드린 것인데
 후에 알게된 사실은 그 스님은 다른 보살들에게도 그런식으로 여러 차례 돈을 받았음을 알았어요.
 매우 화도 나고 실망도했지요.
 그때 깨달은 것은 이 사바세계에선 청정한 공양의 완성은 있을 수 없겠구나 였습니다.
 욕계의 세계에선 뭐든지 완성은 할 수가 없음을 알았어요.
 수행의 완성도요...

 그래서 더 극락에 나기를 원을 세우게 되었고,
 일단 극락에 왕생한다음에 그곳에서 청정한 수행을 마무리지어 성불해야겠다구요.
 성불한 후에는 다시 사바세계에 와서 보살행을 해야지요.
 말이 보살행 보살행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요?
 진정한 보살행은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라는 상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청정한 보살행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요...청정한 보살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냥 주변 사람과 더불어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할 뿐이지요.
 다만 보살행의 씨앗을 뿌리는 수준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니 수한보살님 우리 꼭 극락에서 만납시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을 죽는 날까지 놓치지 마세요.
 그럼 왕생할 수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끄덕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난 그녀처럼 수행할 자신은 없다.
 결정코 극락에 나겠다는 간절한 원도 아직은 미흡하다.
 그녀처럼 청정한 수행자의 길을 가기에는 아직 소멸해야 할 업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그녀가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어쩌면 저렇게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청정한 마음으로 수행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내 손을 잡는 그녀의 손은 나무껍질같았다.
 얼마나 일을 심하게 했으면...
 무엇이 부럽고 무엇이 아쉬워 곱상한 여인네의 몸으로 저렇게 살기를 좋아할까.
 
 "전 태를 받아 태어나는 고통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이 생으로 끝마치려고요. 수행중에 수많은 전생을 보았는데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져요.
 이제 가장 수승한 염불법문을 만났으니 이 문으로 계속 가려구요."
 
 그러시구려...그러시구려...꼭 극락왕생하시구려.
 님이 극락왕생하지 않으면 누가 극락왕생할 수 있을손가.
 
 어쩌면 그녀는 내 인생에 만났던 사람중에 가장 수승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또 그런 수행자를 만날 수 있을까 싶다.
 한점의 의심도 없이 부처님의 세계를 믿고 행을 하는 수행자.
 
 공부도 치열하게 했고,
 일도 치열하게 했고,
 돈도 치열하게 벌었고,
 봉사도 치열하게 했고,
 수행도 치열하게 한 여자...
 난 그녀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또 만나겠지만 그 인연줄에 &#50614;매이는 여자가 아니니 나 또한 연연하지는 않으리라.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후에 또 만난다면 그때 또 다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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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대부분 혼침을 삼매로 알고 있습니다
2014.04.01
 
 미타행자 그녀와 나의 인연이 지중했음인가,
 어제부로 그녀의 이야기를 마치려했으나 오늘 아침 수행 중 궁금한 현상이 있어
 그녀에게 전화를 하여 물어보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혼침입니다..."

 "호...그럼 혼침중에도 전생이 보이고 빛이 보이기도 하고 그런 겁니까?"
 
 "예...대부분 수행 중에 보이는 현상은 혼침 중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삼매가 아닙니다.
 저도 앉아서 십리 밖 백리 밖도 보았어요.
 때로는 제모습도 보았고 미세한 박테리아까지도 보였어요.
 사람의 몸을 보면 뼈속까지 보여서 어디에 병이 있는지 그 병이 언제 어떻게 될지까지 다 알았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기도하는데 제가 그 사람 앞에 앉아있었다며
 혹시 유체이탈한 것 아니냐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유체이탈도 아니고 바람직한 경계가 아닙니다.
 선방에 앉아 있다보면 대부분 혼침에 빠져서 헤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 그가 혼침 중에 어떤 현상에 취해있는 지 알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대부분 스님들은 제자가 혼침에 빠져 있어도 모르던지
 설사 알아도 어떻게 인도해줄지 몰랐습니다.
 그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제가 영가가 보인다고 하면 스님들은 '신기가 있어서 보이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말하는 스님도 영가를 보고있는게 보였습니다.
 스님들은 자신의 경계는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말하고 속이곤 했지요.
 자신의 경계는 도력이고 우리의 경계는 마장이고 신기라고 폄하해서 말하더군요.
 저도 제가 빙의가 된 게 아닌가 많이 의심하고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답을 알아갔습니다.

 그런 경계는 제가 무언가 바라는 게 있을 때 일어난다는 것을요.
 소원성취라든가,어떤 경계를 체험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을때요.
 염불수행을 하면서 많은 답을 얻었습니다.
 건방진 말인진 몰라도 솔직히 아직 전 이 땅에서 저를 인도해줄 스승은 못 만났습니다.
 기도 중에 한 분이 계신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아직 인연이 아닌지 만나지 못했어요."

 "그럼 대부분의 수행자가 삼매에 들어서 무언가를 보았느니 하는 게 삼매가 아니란 겁니까?"

 "혼침에 들어도 어떤 경계가 쫙 펼쳐집니다. 그걸 삼매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혼침 중에 일어나는 현상은 70%가 귀신의 장난입니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수행 중 무언가 보았다고 해도 그것은 생사해탈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그런다고 인생이 바뀌는 것도 현실적인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요."

 "어떤 사람은 참선을 하다가 자성불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구요. 그것도 마경입니까?"
 
 "ㅎㅎ 예,마경입니다. 아니면 집착으로 인해서 오감을 통하여 환(幻)이 보인거지요.
 다들 그런 경지가 대단한 줄 알고 자랑하고 부러워하고 그러는 것이 안타까와요.
 그냥 수행 중 일어나는 현상일 뿐인데요."

 "누군가는 명상 중에 빛을 보거나 백회가 열리는 체험도 했다 합니다."

 "별거 아녜요. 혼침 중에 보는 겁니다.그건 백회가 열리는 게 아닙니다.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쓰잘데 없는 말들에 취해서 사람들이 다들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것 같아요.
 전 사람들이 제게 그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봅니다.
 전 그사람의 미세한 마음작용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걸로 그 사람의 경지를 알 수 있어요.

 다들 혼침 상태를 삼매로 착각하고 말하더군요.
 변덕이 죽끓듯 하고,화도 잘 내고 탐욕을 부리고 여자라는 생각,남자라는 생각을 못 벗어나고
 입고 싶은 것,먹고 싶은 것,갖고 싶은 것, 이런 저런 두려움, 근심 걱정...
 그런 것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삼매에 듭니까 택도 없습니다.
 삼매는 업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는 못듭니다."

 "그럼 본인은 삼매에 듭니까?"

 "저도 아직은 아닙니다. 들었다해도 거친 삼매일뿐이지요.
 해인삼매의 경지는 어림도 없지요."

 "그럼 삼매의 경지는 어떤 겁니까?"
 
 "글쎄요...말로 딱히 하기는 힘드네요.태풍의 눈 같은 고요한 상태라 할까요.
  굳이 표현하자면 삼매가 공의 상태라고 말할 순 있겠네요."

 "그런데 요즘 잠자리에 누워서도 염불을 하는데 괜찮습니까?"

 "괜찮지만 그때는 묵송을 하여야 합니다.
 누운상태에서 소리를 내어 염불을 하면 기 순환에 혼란이 옵니다."

 "예...그렇군요.
 그런데 철야기도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지마세요. 혼침에 빠져 마경에 떨어질 확률이 높아요.
 기도는 욕심내지 말고 낮에 하세요. 깊은 밤에는 안 하는 게 좋아요.
 일할 땐 일 하고 잠 잘땐 잠 자고 염불할 땐 염불하고 그러면 돼요.
 저는 하루종일 기도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일을 하면서 하는 게 더 좋아요.
 하루 종일 앉아 있는다고 도를 얻지는 못해요.
 이상한 경계에 빠질 위험이 커요.
 백장청규가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경지에 이르렀습니까?"
 
 "아유...어림없어요. 그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데 제가 거기에 이릅니까.
 잠시 그런 상태에 이른다해도 그게 얼마만큼 지속이 되겠습니까?
 업이 덕지 덕지 묻어 있는 이 몸으로는 힘들어요."

 "그런데 삼천배를 삼년씩이나 했다면서 그땐 어땠습니까?"

 "ㅎ...솔직히 전 삼천배하는 것 보다 염불하는 게 더 힘들어요.
 염불이 절 보다 더 수승하고 어려운 수행입니다.
 몸을 조복 받고 하심하는 데는 절이 좋지만요."

 "염불이 삼천배보다 어렵다구요? "

 "그럼요...보통사람들이 중얼중얼 하는 것은 염불이 아녜요.
 그건 염불도 아니고 수행도 아니고 뭣도 아녜요.
 제대로 염불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무언가 바라는 것도 없이 해야 해요.
 오로지 내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부처님께 지극하게 귀의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라 하지만 그건 염불에 대한 모독입니다."

 아 어렵다 어려워...
 그녀와 대화를 하다보면 이제까지의 나는 염불을 한 것도 수행을 한 것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부처님께 공양 올린 것도 보시한 것도 불사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다 내가 무언가 바라는 마음으로 했으니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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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우리 탁발 나갈까요?
2014.04.10

 이제는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미타행자 그녀,
 그곳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그리워지곤 하는데...

 오늘은 문득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보살님 우리 저자거리로 탁발 나갈까요?"

 "으잉??? 탁발이라고라? "

 호.호.호...

 경기가 않좋아서든 불교계의 침체로 인해서든 요즘 어느 사찰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인데
 그곳이라고 예외일리는 없었다.
 지난 겨울엔 눈까지 너무 많이 내려서 인적이 끊긴 상태였었다.
 그녀는 나름 절 운영 문제가 신경이 쓰였었나 보다.
 '이달엔 월급을 안받아야 되나 어쩌나' 고민하는 모습이더니
 어느 날 갑자기 탁발하러 가자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
 내가 얼마나 당혹스럽고 우스웠겠는가.

 "호 호 호...그래 그럴까?
 대신 목탁은 자기가 치고 깡통은 내가 들께 호 호 호..."

 그녀는 일년 동안 행자생활을 했던 경력이 있는지라 목탁을 기가막히게 잘쳤응께.
 나는 농담을 하며 배를 쥐고 웃었는데 그녀는 전혀 농담이 아닌 얼굴이었다.
 
 "이 상태로 가면 초파일이 되어도 얼마나 등이 달릴지 모르겠어요.
 초파일 전에 한 번 나가면 좋을 것 같은데...등 많이 달라고 권선하면서리..."

 "그래 그래보지 뭐...초파일 경기가 너무 않좋을 조심이면 그때 한 번 나가보자구."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나도 농담만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탁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녀라면 시내 한복판에서 하루종일 절을 하면서 시주금을 걷을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눈이 녹기 시작했을 때 그 곳을 떠나왔으니 그녀와의 탁발수행은 해보지 못하게 되었다.
 솔직히 좀 아쉽다....ㅎㅎ
 
 이제껏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별스럽고 대단한 그녀였으니...
 그녀는 밥을 먹을 때도 꼭 탁발해서 먹는 것 처럼 먹었었다.
 대접에다가 밥과 국 반찬을 모두 섞어서 퍼먹었다.
 처음엔 왜 밥을 그리 품위없이 먹느냐고 한 마디 했었는데
 그래도 그녀는 늘 그렇게 먹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가 일부러 그렇게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먹는 것도 그녀에겐 철저히 수행이었다.
 짜니 싱거우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하는 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간단하게 식사를 하곤 했다.

 내가 꼭 청학동에서 내려 온 사람같다고 놀리면 굉장히 좋아하였다.
 마치 그 모습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양...
 늘 회색 법복에 생머리 질끈 동여매고 화장도 전혀 안하고
 전혀 안하는 정도가 아니라 스킨 조차 바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어느 산에서 지게 지다가 내려왔냐" 고 물으셨다 한다.
 또 어느 스님은 한글도 모르는 판무식쟁이로 아셨다가
 어느 기회에 그녀가 영어를 쓰는 것을 보고 뒤로 넘어지셨다나??? 
 이런 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즐겁게 웃곤 했었는데...
 이젠 그 시간이 추억이 되었버렸다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무상하게만 느껴진다.

 그저 현재를 사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인가 보다...
 
 그래도 가끔씩 그리워할 추억마저 없으면 삶이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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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꿈속에서 염불하기를 권하다 
2014.04.26

  오랫만에 신묘한 꿈을 꾸었다.
  기도를 열심히 할 때는 신묘한 꿈들을 꾸지만 최근 몇 년 간은 기도보다는 공부를 했기 때문인지
  신묘한 꿈은 별로 꾸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요즘 마음 먹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서 그런가,

  오늘 새벽 꿈이다.

  어느 여인이 나를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보살님 저의 집에 자꾸 귀신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인의 얼굴엔 탁기가 가득 서려있었다.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황당하기도 하고 뭐라고 답변해주어야 할 지 막막했다.
  그 때 누군가가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라고 하면 되잖아,'
  그래서 나는 그 여인에게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세요' 했지만 
  왠지 내 말에 힘이 없는 것이 느껴졌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확연히 알 수 없으면서 무조건 염불만 권한다고 될 일인가 싶었다.
  그때 꿈속인데도 난 미타행자 그녀를 찾았다.

  그녀에게 물으면 답을 말해 줄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니 
  확실하게 상황 판단을 하여 처방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녀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 여인은 떠나지 않고 내 옆에 앉아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어쩌란 말인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왜 난 힘있게 권하지 못하는가.
  과연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한다고 그 여인네 집의 문제가 풀릴까.
  그러다 내가 생각해 낸 것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에 곁들여 아미타경을 매일 1독씩 21일간 하면 될 것이라는...

  아미타경을 읽어 귀신들을 정토로 인도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그러면 왠지 힘이 붙을 것 같았으며 그 여인네 집에 더 이상 귀신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론 누구에게나 그렇게 처방을 내려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하고는 꿈에서 깨어났다.
  
  너무도 선명한 꿈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사념에 잠겼었다.
  내가 염불을 자신있게 권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내게 염불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그러기에 당황하고 안절부절 못했으며 힘있는 미타행자를 찾았던 것이다.

  부처님이 내 공부를 점검하기 위해 여인의 몸으로 나투신 것이 아닐런지...
  내 공부가 아직 많이 시원찮은 것이다.
  치열하게 정진을 하여야 하는데...
  왜 전처럼 힘이 붙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번뇌가 많은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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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염불하는 중에 찾아오는 영혼들
2014.4.26

  미타행자 그녀는 염불하는 중에 많은 영혼들이 찾아 온다고 하였다.
  그녀가 있는 사찰은 6.25 전쟁 격전지였던 곳인지라 젊은 나이에 죽은 병사들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지박령이 되어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한 맺힌 영혼들이 그녀에게 하소연을 한단다.
  어느 병사는 너무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던 장면을 보여주는데
  영화 스크린처럼 그 장면이 그녀의 눈 앞에 펼쳐&#51220;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 병사에게 인과법을 설하고는 나무아미타불 염불하기를 간곡하게 권했고
  그 때부터 새벽기도 시간이면 그 병사가 법당에 나타나서 같이 염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병사는 손을 흔들며 떠났다고 한다.
  그런 예가 부지기수 였다.
  때로는 산에서 죽은 동물들까지 법당에 나타나서 염불하는 것을 듣고는 했다 한다.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럼 모든 영혼들을 다 볼 수 있느냐'고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찾아오는 영혼 또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죽은 영혼이 보이면 무섭지 않냐고 했더니,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몸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인데 뭐가 무섭냐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게 일반적인데.
  그녀는 산 자와 죽은 자를 평등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섭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떠도는 영혼들을 제도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를 전하는 것을 사명인양 생각하는 듯 했다.
  일체중생이 극락에 나기를 간곡히 원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그녀와 도량을 걷다보면 참 재미있었다.

  "저 일주문 앞에 지금 횐빛이 나는 신장님이 서 계시네요.
  그 옆에 계시는 신장님은 금빛 몸이구요."

  그러면 나는 그 앞에서 얼른 합장을 하면서
  "신장님 안녕하세요. 저 잘 좀 봐 주세요. 제 소원이 뭔지 아시죠?" 하며 장난기를 부리기도 했다.
  도무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니 어쩌랴...

  완전히 혼자 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그녀,
  쉽게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세계에서 살고 있으니 나름대로 고충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늘 행복해 했다.
  염불하는 낙으로...

  정토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나 이제는 빨리 가고 싶다는 마음도 놓았다고 했다.
  이 생에서 업갚음을 다 하고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업으로 오는 장애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했다.
  설사 업으로 인해 귀머거리, 장님이 된다 해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업을 닦아서 극락에 갈 수만 있다면 그녀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그녀의 그런 신심 하나는 정말 너무나 부러웠다.
  하지만 난 아직도 업의 장애는 두렵고 피하고 싶다.
  어느 생에나 그녀와 같은 근기를 갖출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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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축생도 염불을 하나요? 
2015.04.29

 ㅡ 수 한
 
 미타행자 그녀가 있던 절에서 머물때 였다.
 
 아침 공양시간에 그녀가 내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어 왔다.
 "수한 보살님, 오늘 새벽기도를 하는데요.
 하얀 산토끼 한마리가 법당 탁자 위에 누워 있는거에요.
 이상하다 생각하며 산토끼를 위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주었더니
 이내 아주 평온한 얼굴이 되어갔어요."
 
 "뭣이라구라?
  산토끼 영가님이 오셨다구라?  호호..."
 
 그렇게 가볍게 받아 넘겼는데,
 그날 정오시간 쯤 되어서 제설작업을 하던 거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제설작업을 하는데 눈 속에 얼어죽은 산토끼 한마리를 발견했어요.
 어제 밤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죽었나 봅니다.
 대충 땅 파서 묻어 주고 왔어요."
 
 난 팔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잽싸게 그녀에게 달려가서 사건을 알려주고 질문을 하였다.
 
 "축생들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좋아하는가?
 그리고 그들도 염불을 할까?"
 
 "당연하지요 보살님.
 어떤 때는 날개가 반쪽 밖에 없는 나방도 제가 염불할 때 찾아와서 염불소리를 듣곤 해요.
 뱀도 있고...그들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답니다."
 
 호오라...영적인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나의 경험으로도 꿈 속에서 축생들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것은 본 적이 있지만...
 한창 조상천도 기도를 할 때인데,
 자는데 내 방 앞에 새 한마리가 찾아와서 구슬프게 울었다.
 새는 이윽고 나무아미타불을 외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꼭 산 사람처럼 울었다.
 꿈이니 나는 그냥 상징으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그녀는 심안이 열리고 영안이 열린 사람인지라,
 보통사람은 볼 수 없는 세계를 보는 여자이니...
 
 그녀는 잠시 스승으로 모시려 했던 스님께서 
 '축생이 무슨 염불을 하냐' 고 하시는 바람에 발길을 돌렸다고 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힘이 쫘악 빠지는 느낌이었어요.
 기운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 분의 강설은 단지 교학일 뿐이라고 단정지었어요."
 
 그녀의 그 마음이 요즘 내게도 있다.
 새로운 선지식을 발견했다고 좋아서 열심히 강의를 들었던 어느 분의 말씀 중에
 "축생에겐 마음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순간 나도 힘이 쫘악 빠졌다.
 아니 삼라만상이 모두 마음으로 지어진 것인데 어찌 축생이라고 마음이 없다 하시는가.
 나무들도 마음이 있어 목이 마르면 물.물.물 찾기에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온다는데,
 단순한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나무들이 스스로 우주의 수기(水氣)를 불러들인다고 하지 않는가.
 사막의 물주머니 개미는 수억년 동안의 진화과정을 거쳐 배에 물주머니를 달고 태어나게 되었다는데
 어느 학자의 말이 그것은 개미들의 집단 무의식이 뜨거운 사막에서 물을 찾는 마음이
 물주머니를 창조했다고 발표를 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창조의 주체이며 결과물이다.
 그런데 어찌 인간만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인지...
 
 오...진정한 선지식은 없는 것인가.
 물론 고차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은 축생에게 없을 수 있다.
 아니 이것도 틀린 말일 것이다.
 축생중에도 수행자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실례들이 많지는 않지만 있긴 하니까.
 
 작금의 선지식이라고 하는 분들이 너무 교학에만 밝은 게 아닌지...
 심안이 열려서 법계를 보는 사람의 말처럼 가슴에 와 닿지 않으니...ㅠㅠ
 어쩌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이나 하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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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어떤 사람이 화주를 하여야 할까
2015.05.02 14:25 

          ㅡ 수 한

 오랫만에 미타행자 그녀에게 전화를 했더니
 청소보살에서 이젠 법당소임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축하해. 진급했구먼?"
 
 그러자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설레 설레 한다.
 
 "보살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전 청소보살이 더 좋습니다.
 갑자기 법당보살이 그만두는 바람에 제가 임시로 하게 되었는데
 벌써 몇 달째 사람이 구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슴다.
 화주까지 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업 짓는 소임입니까.
 그래서 저는 스님에게 화주는 못하니 그냥 오는 사람 반갑게만 맞이 하겠습니다 했어요."
 
 "솔직히 자기처럼 법당보살로 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어?
  교학도 탄탄하겠다. 수행력과 법력도 있겠다..."
 
 "아이고...보살님 제가 무슨 법력이 있습니까. 중생에겐 법력같은 건 없습니다."
 
 그녀의 말 뜻이 무엇인지는 안다.
 중생심에서는 참다운 법력이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법력은 참나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히 신도들에게 축원카드 많이 받는 거 좋은 일 아닙니다.
 그거 다 빚지는 겁니다.
 그래서 화주 잘못하면 지옥행이라고 하지 않슴까.
 법당보살을 하고 있으니 별별 사람들이 다 매달립니다.
 어떻게 소원성취가 안 될까 하고요.
 그럴 때 마다 바른 법으로 인도하느냐고 진땀이네요.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가는 저를 교주처럼 따르려 할 테고...ㅠㅠ
 전에 있던 화주보살님은 신도들에게 옷도 얻어 입고 했다는데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 보살님이 몰라서 그랬겠지요.
 아울러 스님들도 신도들에게 공양받는 거 무서운 일인지 아셔야 하는데...
 그게 다 빚입니다. 빚...
 잘못하면 이생에 빚만 잔뜩 지고 가는 겁니다."
 
 그렇겠지 빚만 지고 가는 것이겠지.
 중생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공양물을 어찌 두려워 하지 않으랴.
 백일기도니 천일기도니 입재한 신도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부쳤겠는가.
 때로는 처절한 심정으로, 
 &#46468;로는 벼랑끝에 몰린 심정으로,
 때로는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나름대로의 수많은 사연과 염원과 한이 서려 있다고 보아야 겠다.
 그 염원이 담긴 축원카드를 아무 생각없이 
 그저 주소와 이름 석자 읽어주는 식으로 축워카드를 읽어서야 무슨 효험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 축원에 목이 마른 중생의 애처로움이란...
 
 그래서 화주를 겸한 법당보살은 아무나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일체중생을 위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저 호구지책으로 또는 생각없이 하고 있다면 신중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내가 아는 서울 큰 사찰의 화주보살님은 화주로서의 자격을 갖추신 분이었다.
 물론 직업이 아닌 봉사로서 하시고 있지만...
 그분은 화주 역할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부처님 법으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보살님은 화주노트를 늘 가방에 넣어 갖고 다니시는데
 차를 타고 갈 때는 화주노트를 무릎에 놓고 거기에 적힌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신다.

 하루의 일을 끝낼 때는 그 날 시주를 한 사람들의 명단을 읽고 
 그 분들을 위해 금강경을 읽어 주신다.
 그래서 그런지 그 분은 화주역할을 참으로 잘하고 계셨다.
 한 마디로 척 척 붙는다.
 이런 사람들이 화주의 자격을 갖추었다 할 것이다.
 중생을 위한 마음이 열린 대보살들이 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이다.
 
 내게도 법당보살 소임을 맡아달라는 청이 여러 번 있었지만 거절하였다.
 아직 내가 그럴 만한 그릇이 안되었으므로...
 말로야 중생을 위한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진짜 그런가?
 아직은 사사로운 마음이 많이 도사리고 있으니 청을 받아들이기가 조심스럽다.
 
 미타행자 그녀야 말로 법을 아는 사람이니 염려하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그 기회는 부처님이 그녀에게 주신 선물이며 숙제라고 생각 한다.
 이제 공부가 익었으니 중생에게 그 공부를 회향하라고 하심이 아닐런지.
 그녀의 뛰어난 수행력은 인정하지만 보살행의 부분에서는 소극적이라 아쉬움이 있었는데
 부처님이 그 것을 아시고 그녀에게 보살행의 길을 열어주심이다.
 보다 한 차원 더 공부시키기 위함이 아니시겠는가.
 
 진흙밭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연꽃을 딸 수 있으랴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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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3년 결사 중이에요                                                       

 2016.03.01 20:41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린다.

 모니터를 보니 미타행자 그녀가 아닌가.

 "어...왠일야? 전화를 다 하고?"

 실로 오랜만의 전화였다.

 늘 치열하게 정진을 하는 그녀인지라 누군가에게 전화를 잘 하지도 않으며

 나 또한 방해할까봐 전화를 하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오늘 아침 갑자기 보살님 생각이 났어요."


 "어구...그래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니 반갑구랴."


 "잊다니요?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잊을 수가 있어요?

 늘 마음 속엔 남아 있지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내 생각이 난거야?"


 "실은 오늘 아침에 법당에 나가 보니 누군가가 갖다 놓은 경전이 한 권 보였어요.

 자비도량참법 인데... 누군가가 법보시 한 경전이더라구요.

 혹시 이 경전이 보살님 스승이었다는 분이 법보시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경전 겉장에 뭐라구 쓰여 있던데 맞나요? 이 분이 보살님 스승 맞지요?"


 "에고...귀신이구먼 맞아.

 그 경전 우리가 돈 천만원 모아서 천권 찍어서 전국에 무료로 배포한 경전야."


 "호오...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스승님은 아직도 소식이 없으신가 보죠?"


 "응... 아마도 만행 하고 계시겠지 싶어.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그곳에서 3년 기도 끝났지 않나?"

 "작년 6월에 회향 했지요.

 글구 다시 3년 기도 입재 했는데요.

 이 번에는 산문밖 출입을 안하기로 하고 정진 중입니다."


 "흐음...암튼 대단하셔.

 어떻게 3년 동안 밖에를 안나가고 하려고해?

 가끔 병원에도 가고 해야 할텐데..."


 "그러잖아도 다리 아픈게 도져서 한동안 걷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한 때 하루에 3쳔배씩 3년을 정진했던지라 무릎이 다 망가져 있었다.

 

"으응??? 그런데 그 다리로 견디고 있다는 것이야?

 미쳤구먼 그러다 앉은뱅이 되면 어쩌려구?"

 "그저 부처님을 믿는 마음으로 밀어붙였더니

 이제는 걷는데는 별 지장이 없어요. 살만해요."


 "에고...참으로 대단해.

 다음에 내가 신유능력이 있는 어떤 보살을 한 번 데리고 가 볼까?

 나도 그녀에게 망가진 손가락 하나 치료 받았는데 좋아졌거든? "


 "보살님... 그런 능력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에요.

 불보살의 경지에 가지 않고 쓰는 신유능력은 진정 사람을 구제하지 못합니다.

 자기 공부에 방해만 될 뿐에요."


 "그래도 중생에게 이롭게 쓰면 되지 뭘.

 그녀는 돈 안받고 치료해 줘.

 지금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거든? 인도 유학파고 말야."


 내가 이런 저런 설명을 했더니

 조금 관심이 가는 가 보았다.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문제라면 대개 그들이 그 능력을

 자신의 돈벌이에 쓴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물론 먹고 살아야 하니 자연히 그리되는 것인데

 그 유혹을 뿌리치고 보살행을 한다는 것은 왠만한 경지가 아니면 기실 어려운 일이다.


 "암튼 보살님. 언제 놀러오세요.

 저는 3년 회향 하기 전에는 절대로 절 문 밖에 나가지 않을 것이니

 보살님이 와 주세요. 보고 싶네요."


 그려...그려...

 이 세상에 도반처럼 좋은 관계가 있으랴.

 밤을 세워 도담을 나누어도 지치지 않는 사이가 도반 아니던가.

 

 "그런데 보살님, 요즘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계속 하고 계신가요?
 혹시 다른 수행 하고 계신 것 아니죠?"

 ㅋㅋ 내 가슴이 잠시 뜨끔했다.

 "아냐 하고 있어."


 "흐음... 다행이네요.

 우리 꼭 극락에서 만나야 지요. 아셨죠?"


 그래...극락에서 만날 수 있음 좋겠다.

 나야 그녀처럼 염불만 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아미타불께 지심귀명례는 드리고 있다.

 그리고는 나 하고 싶은 수행을 하고 있당께???

 그녀에게 쪼끔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녀이고 나는 나인데 뭐.

 나도 내 스타일대로 사는 거지 뭐.




[ 위의  글들은 현재 강원도 모 사찰에서 (자세한 소재지와 연락처공개를  염불행자님께서 원치 않아 공개하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종무하며 오롯이 나무아미타불 염불하시는 염불행자님의 실화입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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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과 극락 (광덕스님)

[질문]

저는 25세 때 별안간 병이 나서 걷지 못하게 됐는데
절에 가서 불공하고 나았습니다
그런데 근래 기독교인이 말하시를 내생을 생각해서
예수을 믿으라 하니 어찌할까요?


[광덕스님 답변]

예수님을 바로 믿고 사랑을 행하면 내생엔 천당 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믿어 극락에 나면 끝없는 자유를 얻고 성불하여
온 세상을 마음데로 출입하며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니

내생이라면 극락보다 나은대는 없지요
천상은 유한이며 윤회가 있고 극락은 무한이며 퇴전이 없습니다.

출처: 삶의 빛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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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와 천상의 차이 (죽창수필에서)

구더기가 변소에 살고 있는 것을 개나 양이 보고는
그 고통이 더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구더기는 전혀 고통을 모를 뿐 아니라 도리어 즐거워 하며,

개나 양이 바깥에 살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는
그 고통이 더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개나 양은 고통을 모를 뿐 아니라 도리어 즐거워하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천상 사람들이 보고는
그 고통이 한량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것을 모를 뿐 아니라 도리어 즐거워하니,
궁극까지 추궁해 보면 천상의 고락도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런 줄을 알고 정토에 태어나기를 구하는 것은,
요지부동의 상책인 것이다.


연지대사 (죽창수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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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행스님 자료제공)

극락과 천상은 엄연히 다릅니다
우주에는 수많은 불국토와 천상계가 있는데,
그중 지구에서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면
극락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선행이나 복덕으로는 극락에 가지 못합니다
극락은 무량수 부처님의 원력으로 세워진 세계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발원에 따라 염불이나 수행의 공덕과 선업을
아주 많이 쌓아야 갈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땅에서 성불하기 어려우니
수많은 불국토 중에서
가장 수승한 극락으로 가라고 가르쳐주셨지요.

극락은 윤회가 없는 즐거움만 있는 곳이며
한번 그곳에 태어나면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수 있고
마침내 성불을 이루게 되는곳입니다

천국과 지옥과 인간계는 우리의 마음이 만든 곳이며
우리의 지은 업대로 갑니다.
천상계도 업에 의해 지어진 곳이기때문에
부처님의 원력으로 만들어진 극락과는 비교가 못됩니다

선업을 쌓았을 경우 그곳에 태어나지만
업이 다하면 또다시 윤회를 해야 하는 곳이지요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말입니다.

무량수불은 그러한 고통을 아셨기 때문에
불국토중에서 가장 수승한 극락이라는 곳를 만드셨고,
그래서 극락에는 윤회나 일체 고통이 없습니다.

다시말해 극락은 깨달음을 얻기위해 공부하는
부처님이 만드신 세계이고
천국은 선업으로 존재하는 즐거움과 쾌락만이 있는
우리 마음이 만든 곳입니다.

누가 대신 심판해주는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 그리고 이 세계도 다 마음이 만든것이므로
우리의 마음이 심판을 합니다
삶이 苦라, 불교는 여기서 해탈하기 위한 종교입니다.

우리의 삶은 무의식 중에 다 기록이 되는데,
그 지은 업대로
죽을때가 되면 그 업에 끌려가게 됩니다

불교는 귀신이나 신을 믿지 않습니다
영가도 중생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일체만물이 다 부처입니다
모든 마음안에는 원래 불성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업에 가리워져 모를 뿐입니다.

불교의 우주관에 대해 알아보시면 알듯합니다
불교는 그 불성, 내 마음자리를 찾아 부처가 되는 공부이지
신에게 빌거나 의지하는
종교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이렇게 답변 달아도 될런지..

그리고 극락에 대해 알고싶으시다면
극락정토 자료 게시판을 참고하시면 되겠네요
극락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랍니다.
극락왕생 사례도 읽어보세요.

이곳에서 성불하기 어렵다면
그곳에서 부처님의 도움으로 성불할수 있습니다.
가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염불공덕의 업으로 극락에 태어납니다.

무량수 부처님께서는 10번만이라도 내 명호를 부르는 자는
반드시 그곳에 태어나게 하겠다고 발원하셨지요.
나무아미타불 염불 하시면서 극락에 왕생하길 바라시면 됩니다
염불공덕을 쌓으면 극락에는 님의 연꽃이 열립니다.

아주 열심히 하셨다면,
임종시에는 그 업에 이끌려서
극락의 연꽃에 반드시 화생하실 겁니다.
도움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천계란 윤회(輪廻)세계의 하나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물은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세계로서 다음 여섯
가지 세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이 큰 것부터 순서대로
열거하면,

1. 지옥(地獄)…「지하의 뇌옥(地下의 牢獄)」의 뜻.
2. 아귀(餓鬼)…굶주려 있는 상태입니다.
3. 축생(畜生)…새, 짐승, 벌레, 고기 따위.
4. 수라(修羅)…노(怒)하고 있는 마귀들을 말합니다.
5. 인간(人間)
6. 천인(天人)…천계(天界)에 살고 있습니다.

이상 여섯 가지입니다. 이를 육도(六道)라 부릅니다.
이 중에서 천인(天人)이 살고 있는 세계가 천계(天界)입니다.

천인에게는 엄청난 장수(長壽)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제일 하층의 천인도, 또한 장수가 제일 짧은 천인일지라도,
구백만년의 수명이 약속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장수하는 천인이라 하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죽습니다.
죽으면 다시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인의 어느 것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도란 결국
윤회(輪廻)의 세계입니다.

이와 같이 천계는 윤회의 세계에 속하지만,
이에 대해서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는 영원의 세계입니다.
윤회의 바퀴 밖으로 나온,육도윤회를 초월한 정토 입니다.
시방의 많은 부처님이 찬탄하시며 왕생을 권유하시는 극락정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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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정토와 천상세계에 대하여



극락정토는 흔히 말하는 천상(천당, 천국)과는 달라 삼계와 육도를
벗어난 곳이다. 천상은 육도 윤회 중의 최상의 곳으로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는 곳이지만 이곳도 업에 끌려가는 윤회의
세계이므로 복이 다하면 다시 삼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정토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벗어났으며 육도 윤회를
벗어난 세계이므로 그곳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그곳은
고통이 없고 기쁨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극락이라고 하는데

이 즐거움도 천상의 즐거움이 비길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천상의
즐거움은 한계가 있어 유루복에 그치지만 정토의 즐거움은 진리
속에서 나고 진리와 함께 하는 법락(法樂)으로 무루복인 것이다.

따라서 천상의 복덕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공덕이 있으니 바로 성불의
터전인 것이다. 극락은 무한이며 퇴전이 없으나 천상은 유한이며
윤회가 있다

천상은 욕계,색계,무색계등 28천이 있어 모두가 같지 않으며 또한
완전한 것이 아니다 즉 , 중생이 지은 선업이 나타나는 과보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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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天上)과 불국정토(佛國淨土)▒


불교에서는 지옥의 무리들과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등 중생이 선업
(善業)을 쌓아 고통이 없는 하늘 나라에 나기를 갈구하는데, 그 천상의
세계도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에게 한결같지 아니하여 각기 쌓은 "업인"에
따라 태어날 수 있는 하늘이 다르다고 한다.

천상계는 셋으로 나뉘어 3계(三界)라 하며,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나뉜다. 그 가운데에 "욕계"의 하늘이 6천(六天)이라
"욕계6천(欲界六天), 6욕천(六欲天)"이라 하며, 그 "6천"은 다음과 같다.
"3계" 중 다음 여섯 하늘 나라를 "욕계"라 하는 까닭은 이 하늘 사람들이
아직은 중생의 각종 욕락(欲樂)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식욕(食欲), 음욕(淫欲),
수면욕(睡眠欲)" 등 탐욕이 아직도 불과 같이 이는 가운데에 있으므로
욕천(欲天)이라 하였다.

(1) 4왕천(四王天)…"수미산" 중턱의 4방에 있는 하늘 나라로 동방지국천
(東方持國天), 남방증장천(南方增長天), 서방광목천(西方廣目天), 북방다문천
(北方多聞天)의 네 왕과 그에 딸린 중생들이 사는 하늘 나라.

(2) 도리천(도利天)…33천, 수미산 꼭대기에 제석천(帝釋天)의 궁궐을 중심으로
하여 4방에 여덟 하늘 나라(八天)가 있어 모두 33천

(3) 야마천(夜摩天)…"선시천(善時天), 시분천(時分天)"이라 번역하며, 때를
따라 쾌락을 받으므로 그렇게 이름함.

(4) 도솔천(兜率天)…지족(知足)이라 번역하며, 자기가 받는 5욕락(五欲樂)에
만족한 마음을 내는 까닭으로 그렇게 이름함

(5) 화락천(和樂天)…"낙변화천(樂變化天)"이라고도 하며, 5욕의 경계를 스스로
변화하여 즐김으로 그렇게 이름함

(6)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다른 이로 하여금 자재하게 5욕 경계를 변화케
하므로 그렇게 이름함.

위 "6천" 중 "4왕천"은 "수미산" 허리에 있고 "도리천"은 그 꼭대기에 있으므로
아직 땅에 의지하고 있다 하여 "지거천(地居天)"이라 하고, "야마천" 이상은
공중에 있어 "공거천(空居天 )"이라 한다.

위 설명 가운데에 나타나는 "5욕락" 혹은 5욕(五欲)은 "오묘욕(五妙欲),
묘오욕(妙五欲)·오묘색(五妙色), 오묘(五妙), 오경(五境)"이라고도 하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눈, 귀, 코, 입, 몸" 등 5관
(五官) 곧 5감각기관(五感覺器官)의 뜻인 5근(五根)의 대상이 되어 "가의(可意),
가애(可愛), 가락(可樂)"토록 함으로써 모든 욕망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의 오경(五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 "5경"은 욕구의 대상이고 욕구 그 자체는 아닌데, 이 "5경"이 모든
욕망을 일으키므로 "5욕"이라 한 것이다. 혹은 "5욕"을 일컬어 "재욕(財欲),
색욕(色欲, 性欲),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으로 나누기도 한다.

또 5근(五根)은 5관(五官) 곧 5감각 기관(器官)인 "눈, 귀, 코, 혀, 몸"을
가리키고 5력(五力)이라고도 하는데, 보리(菩提)에 도달하기 위해서 다스려야
하는 다섯 가지 향상기관(向上機關)의 방법으로 일컬을 때에는 "신근(信根),
진근(進根), 염근(念根), 정근(定根), 혜근(慧根)"의 "5근"을 나누기도 한다.

"욕계 6천" 위의 하늘 나라로 "색계" 18천(十八天)이 있으려니와 그 하늘들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곧 초선천(初禪天)이 3천(三天)이니,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 대범천(大梵天)"이며, 2선천(二禪天)이 또 "3천"인데,
"소광천(小光天), 무량광천(無量光天), 광음천(光音天)"이며, 3선천(三禪天)이
다시 "3천"인데, "소정천(少淨天), 무량정천(無量淨天), 변정천(遍淨天)"이고,
4선천(四禪天)이 도합 "9천"인데 "무운천(無雲天), 복생천(福生天),
광과천(廣果天),무상천(無想天), 무번천(無煩天), 무열천(無熱天), 선견천
(善見天), 선현천(善現天), 색구경천(色究竟天)" 등이다. 이 "색계"
하늘 사람들은 음욕,식욕 등의 탐욕은 끊었으나 아직 "무색계"처럼 물질을
완전히 끊고 순수 정신적인 상태로는 되지 못한 중간 상태의 물적 세계인데,
선정(禪定)의 얕고,깊고, 거칠고, 묘함에 따라 다음과 같은 4종(四種)
선천(禪天)으로 나누어지며,그 아래에다 각각 여러 하늘이 하위 분류되는데,
이들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같다.

(1) 범중천…색계 18천 중 맨 아래의 제1위 하늘, "초선천"의 제1천,
"범파리사(梵派梨沙)"라 음역, 대범왕(大梵王)이 영솔하는 하늘 사람들이
이곳에 산다 하며 키는 반 유순(由旬), 목숨은 반 겁(劫)이라 함

(2) 범보천…색계 18천 중 제2위의 하늘, "초선천"의 제2천, "범부루혜
(梵富樓醯)"라 음역하고 정사(淨師)라 번역함, 이 하늘의 천중(天衆)들은
모두 "초선천"을 주제하는 "대범천왕"을 도우고 있는 신하들임, "천왕"은
중앙의 높은 곳에 있으며, 어디를 행차할 경우 반드시 이 천중들이 앞에
가면서 "천왕"의 이익을 편다고 함, 이 천중의 키는 1유순, 목숩은
1 겁이라 함

(3) 대범천…색계 18천 중 제3위의 하늘, "초선천"의 제3천, 이 하늘을 주제
하는 왕이 "대범천왕"인데 고루 거각에 있으면서 사바 세계를 차지하여
다스린다 함, "천인"의 키는 1유순, 수명은 1겁 반

(4) 소광천…색계 18천 중 제4위의 하늘, "제2선천"의 제1천, 파율아파
(波栗阿婆)라 음역, 이 하늘 사람은 몸에서 광명을 발하나 그 양이
적다고 함.

(5) 무량광천…색계 18천의 제5위 하늘, "제2선천"의 제2천, 이 하늘에 나면
몸이 발하는 광명이 한량 없다 함

(6) 광음천…색계 18천 중의 제6위의 하늘, "제2선천"의 제3천, "아파회제바
(阿波會提婆), 아파회(阿波會), 아회긍수(阿會亘修), 아파긍수(阿波亘修),
아파최라차(阿波최羅遮)"라 음역하고 "극광정(極光淨), 승변광(勝遍光)"이라
번역, 이 하늘의 중생은 음성이 없고 말할 때에는 입으로 광명을 내어 말의
작용을 대신한다고 함

(7) 소정천…색계 18천 중 제7위의 하늘, "제3선천"의 제1천, "파율다수바
(波栗多首婆).라 음역, 이 하늘 사람들의 의식은 항상 즐겁고 청정한데,
천인의 키는 16유순이고 수명은 16겁이라 함

(8) 무량정천…색계 18천 중 제8위의 하늘, "제3선천"의 제2천, "아바라나마
(阿婆羅那摩)"라 음역, 이 하늘에는 마음에 즐거운 감각인 낙수(樂受)가
있으며, 그 아래 "소정천"에 견주어 보면 그보다 승묘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함, 천인의 키는 32유순이고 수명은 32겁이라 함

(9) 변정천…색계 18천 중 제9위의 하늘, "제3선천"의 제3천, 이 하늘에는
맑고 깨끗하며 쾌락이 가득차 있다 하며 천인의 키는 64유순이고 수명은
64겁이라 함

(10) 무운천…색계 18천 중 제 10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1천, 이 하늘은
구름 위의 구름 없는 곳에 있다 함

(11) 복생천…색계 18천 중 제11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2천, "생복천
(生福天), 무량엄식천(無量嚴飾天), 무량광천(無量光天)"이라고도 함, 이
하늘에는 수승한 복력으로 태어나므로 그런 이름이 붙었고, 천인의 키는
250유순, 목숨이 250겁이라 함

(12) 광과천…색계 18천 중 제12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3천, 제4선천 중
범부(凡夫)가 사는 데로는 가장 좋은 하늘이라 하는데, 이 하늘 사람의 키는
5백 유순이고 수명은 3겁이라 함.

(13) 무상천…색계 18천 중 제13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4천, 이
하늘에 태어나면 모든 생각이 없어짐으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함

(14) 무번천…색계 18천 중 14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5천, "5정거천"의
하나, 이 하늘은 욕계의 괴로움과 색계의 즐거움을 모두 끊고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전혀 없게 된다고 함

(15) 무열천…색계 18천 중 15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6천, "5정거천"의
하나, 이 하늘의 심경(心境)은 의(依)도 없고 처(處)도 없어 청량자재
(淸凉自在)하여 열뇌(熱惱)가 없는 하늘이라 함

(16) 선견천…색계 18천 중 16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7천, "5정거천"의
하나, "수제사(須提舍), 수달칭(須達稱)"이라 음역하는데, 장애함이 없어
시방(十方)을 보는 것이 자유 자재한 하늘이라 함

(17) 선현천…색계 18천 중 17위의 하늘, "제4선천"의 제8천, "5정거천"의
하나, "수달시(須達尸), 수제사나(須提舍那)"라 음역하고 "선호견(善好見)
"이라고도 번역함, 천중(天衆)의 선묘(善妙)한 과보(果報)가 나타나므로
그렇개 이름함

(18) 색구경천…색계 18천의 맨 위 하늘로 "제4선천"의 제9천, "5정거천"의
하나,

위 가운데에서 "무번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색구경천" 등 다섯 하늘은
성문(聲聞) 제3과(第三果)인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증득한 성자(聖者)가
나는 하늘이라 하여 특별히 5정거천(五淨居天) 혹은 5나함천(五那含天)이라
한다.

"색계"의 위에 존재하는 하늘이 무색계(無色界)의 4천(四天)이 되는데, 그
이름이 "무색계"인 것은 이 하늘 사람들이 물질의 욕심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순수 정신적인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색계"의 천인들처럼
아직껏 빛깔과 형상이 있는 육신인 색신(色身)에 얽매여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음을 싫어함으로써 더욱 정진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
천인들에서 비로소 온갖 형색(形色)이 사라지고 오직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등 4온(四溫)만이 남는다고 한다. 그 하늘들의 나뉘어진
이름은 각각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무소유처천
(無所有處天),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인데,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공무변처천…무색계의 제1천, 물질의 하나인 이 육신을 싫어하고 한
없는 허공의 자재함을 즐겨하며, 공(空)이 무변(無邊)하다는 이치를 알고
수행하여 태어나는 하늘이라 함

(2) 식무변처천…9지의 하나이고 무색계의 제2천, "식지천(識知天), 식처천
(識處天)"이라고도 함, 공(空)이 무변함을 싫어하여 마음을 돌려 식(識)을
반연(攀緣)하며, "식"과 상응하여 마음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아니하고, 3세
(三世)의 "식"이 다 정중(正中)에 나타나 청정하고 적정(寂靜)한 과보(果報)
를 얻게 되는 하늘이라 함

(3) 무소유처천…9지의 하나이고 무색계의 제3천, "식무변처"에서는 "식"이
"3세"에 걸쳐 끝이 없다고 관(觀)하나, 이 하늘에서는 "식"의 그러함을
싫어하여 소연(所緣)이 아주 없는 것임을 관하여 무소유(無所有)의 해(解)
를 얻어 수행함으로써 태어나게 되는 하늘이라 함

(4) 비상비비상처천…무색계의 제4천으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
"라고도 함, 이 하늘은 "3계"의 맨 위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하는데, 이 하늘에 나는 이는 하지(下地)와 같은 거친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비상(非想) 또는 비유상(非有想)이라 하며, 그러면서도 세밀한 생각이
없지는 아니하므로 비비상(非非想) 또는 비무상(非無想)이라 하였다.
비유(非有)이기 때문에 외도(外道)들은 혹 진열반처(眞涅槃處)라 생각하게
되나, 또한 "비무상"이므로 불교에서는 이곳 하늘도 생사(生死)함이
존재하는 하늘로 치부한다.

위 28 하늘 나라를 통틀어 "3계"라 하였는데, 이 "3계"의 다른 이름을
"6도(六道), 25유(二十五有), 9지(九地)"로 나누기도 함을 이미 본 바
있거니와, 이 모든 하늘 나라의 사람들도 아직껏 생사(生死)와 "공(空),
식(識), 상(想)" 등을 완전히는 떨어버리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 "6취"와
"3계"는 여태 "예토(穢土)"요 "예국(穢國)"일 뿐 불국(佛國)이나 정토
(淨土)라고는 할 수 없는 곳이다. 여기의 예(穢)자는 더럽고 추악하고
부정한 것이 가득참의 뜻인데, 부처의 국토는 당연히 그러함이 없어야
하니 불국정토는 이 28천을 지나 훨씬 더 높은 곳의 하늘이어야 할 것임을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여러 천상의 세계와 극락정토



아래 글 내용은 벽공스님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문답으로 진행이 되며, 이해를 돕고자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불자님들의 천상과 극락에 관한 이해의 자료로 작게 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올립니다. (편집)

천상의 세계 (1).

"마음을 고요히 해라. 그리고 천상을 관하여 보아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의 말씀대로 조용히 집중하였다. 처음에는 뚜렷하지 않았으나 점점 확실해졌다. 제 1천을 관하였다. 그 위 차원의 제 2천, 그 다음 차원의 제 3천, 그 다음 제 4천, 점점 위로 관하여 올라갔다.

그 위의 8천부터는 아래층과는 확연히 구분이 되는 층이 계속되었다. 8천부터는 아래층과는 확연히 구분이 되는 층이 계속되었다. 8천에서부터 시작해서 29천까지만 보이고 그 위층은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모든 세계가 스쳐 가면서 이해가 되었다. 그것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님의 말씀이 울려왔다.
"제 1천 아래 차원도 살펴보아라."
제 1천 아래차원의 세계는 천상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으나 분명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제 4천을 보아라. 나에게 설명해 보아라." "여기에 나는 천인들은 마음이 순수하고 선행을 많이 행한 공덕으로 이곳에 몸을 받습니다.

국토의 넓이는 끝이 없는데, 아래 하늘세계보다는 두 배 정도 됩니다. 그리고 두 곳으로 구분이 됩니다. 한 곳은 성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의 주인은 거룩하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모습이 어떠한가?"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대성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세계는 도솔천이며, 그 분은 내원궁의 미륵보살님이다. 계속 살펴보아라."

"산하 대지와 궁전들이 보배로 치장되고 매우 아름답습니다. 한곳은 그곳보다는 위광이 조금 떨어지고 천인들도 공덕이 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집착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이곳의 천주는 미륵보살님을 매우 예경하고 있습니다."

"수명은 얼마인가 보아라."
"이곳의 하루는 인간세의 800년에 해당하고 천상의 세월로는 4000년 전후를 삽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으로는 한량이 없습니다. 이곳 천인들의 키는 거대한 산과 같습니다. 너무 커서 천인들의 키에 비하면, 인간의 키는 마치 벌레처럼 작게 보일 것입니다."

"음식은 무엇을 먹는가?"
"무슨 음식이든지 생각만 하면 앞에 나타나고 바로 섭취됩니다. 그러나 전생의 복력에 따라 색깔이 조금씩 다릅니다. 여기서도 욕심을 많이 내면 수명이 단축됩니다. 몸은 청정하여 부정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과 같이 핏줄, 힘줄, 변, 오줌 등 부정한 것은 없는데 모든 천상계가 차이는 있으나 다 그러합니다."

"평상시에 늙거나 병이 있는가?"
"없습니다. 늙거나 병은 없지만 죽을 때는 쇠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어떤 것인가 살펴봐라."
"머리의 화환이 시들어 버리거나 몸에 때가 낍니다. 옷도 지저분해지고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오래 앉아 있기를 싫어하게 되는 것과 눈을 자주 깜박이는 것 등입니다."

"그렇다. 그것을 다섯 가지 쇠하는 상이라 한다. 그 현상은 몸의 기력이 다하고 힘이 다해서 몸에 때도 끼도 꽃도 시들고 하는 것이다. 인간도 기운이 잘 돌지 않고 신체기능이 떨어지면 냄새가 평소보다 더 나고, 한곳에 좀 앉아 있으면 이내 몸이 뒤틀려서 오래 앉아 있기를 싫어하게 된다. 천인이 인간과 다른 것은 죽을 때가 되어야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천인은 죽으면 시체가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화생하기 때문이다. 남녀가 있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이 있는가 보아라."
"내원궁 미륵보살님이 계신 곳은 성스러운 성인들의 세계라서 결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곳은 남녀도 있고 결혼도 합니다. 이곳은 손만 잡으면 서로 기운이 통하여 아이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처럼 태로 나지 않습니다.

바로 기운으로 형성되어서 불현듯 나타나며 처음에 크기는 인간의 4~5세 정도 되나, 음식을 생각해서 섭취하고는 곧바로 어른이 돼버립니다. 부모가 양육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전생의 기억을 살려서 천상에 몸을 받은 까닭이 선한 공덕을 지어서 난 줄 압니다. 그래서 더욱더 큰 공덕을 지으리라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 가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저기 오락에 취하다 보면 그 결심은 곧 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아래 제 2천 도리천을 보아라. 그 세계 천인들의 수명은 어떤가?"
"제 4천 도솔천보다는 수명이 반의 반밖에 안 됩니다. 이곳의 하루는 인간의 200년에 해당하고 수명은 1000년 정도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로는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키는 도솔천에 비하면 4분의 1입니다. 복력도 4분의 1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키에 비하면 수천 배가 됩니다."

거기는 도리천이라 하고 천주를 흔히 제석천왕이라고 한다. 다른 것도 살펴보아라."
"이곳의 천주는 위력과 복력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이 하늘 세계는 다른 하늘 세계보다 인간계와 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다. 제석천왕이라고도 하고 옥황상제로도 칭한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한님, 하느님, 또는 한울님이라고 칭하면서 인간들의 삶을 좌우하는 우주의 주인으로 믿어 왔다."

"그곳은 종교가 있는가?"
"이 세계는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황홀한 세계인지라 진리를 닦을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도리천왕은 석가모니불의 재세시에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어서 진리를 닦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다른 대다수 천인들도 절실하지는 못하지만 성인을 흠모하고 법문 듣기를 좋아합니다. 또 성현의 법을 공경하고 깨달은 이나 진실한 수행자, 그리고 밝은 마음의 사람들을 위호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잘못 쓰면 위호하다가도 어느덧 떠나가고 맙니다.

하늘 사람들은 인간 세상에 부처님이나 깨달은 성인들이 나타나 법을 설하면 즐겨 경청하기를 좋아하는데, 그 까닭은 대다수 천인들은 전생에 수행을 잘한 사람들이거나 선행을 많이 하여 천상에 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너무 즐겁기 때문에 특별히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천상의 하늘 사람들은 대부분 대동소이합니다."

천상의 세계 (2).

"그렇지. 우리 인간들도 남보다 조금만 앞서도 아만심을 일으켜서 조심하여 마음을 닦으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그들이야 오죽하겠는냐! 그러면 천인들의 정신구조를 살펴보아라."

"잠재의식이 압도적으로 발달해 있습니다. 천리 만리를 일순간에 왕래하고 천 가지 만 가지를 동시에 듣고 보는 등 신통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의지가 약한 데다 기억하는 힘이 인간에 비해서 약합니다. 굳이 오래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작 고집을 부려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또 놀기를 좋아해서 진리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다하면 다시 전 세상의 업에 따라서 윤회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 천상은 어디라도 공덕이나 선정의 힘이 다하면 수명이 다하고 다른 세계로 타락한다. 천상세계는 종교가 무엇이든 사상이 무엇이든 거기에 태어날 업에 해당이 되면 태어난다. 널리 베풀고 선행을 하여 악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누구라도 태어나는 것이다. 밝은 마음에 의한 복업으로 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도솔천 내원궁만은 공덕만 가지고는 안 되고 선정력과 원력이 있어야 된다. 내원궁은 미륵보살의 위신력으로 유지되는 세상이기에 그렇다. 내원궁은 욕계천이지만 괴겁시 모든 천상이 다 파괴되어도 그곳만은 파괴되지 않는다. 몇 단계 위로 제 7천 마천을 보아라."

"여기도 인간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곳의 천인들은 아래 차원의 천상들처럼 음욕이 남이 있는지라 남녀가 있고 결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하기도 합니다. 이곳의 수명은 제 4천 도솔천의 8배요 복력도 그러합니다. 키도 도솔천의 8배입니다. 이곳의 궁전과 가옥은 칠보로 광채가 찬란하기가 그지없습니다.

국토는 광대하고 더러움이 없고 춥지도 덥지도 않습니다. 이곳의 천인들은 때로는 다른 천인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귀신 또는 축생의 모습, 드물게 부처님의 모습을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시 몇 단계 위로 가서 대범천을 살펴보아라."
경안은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어느 곳을 말씀하시는지 즉시 알았다. 대범천은 제 11천에 해당함을. "이곳은 생각으로 남성을 생각하면 남자가 되고 여성을 생각하면 여자가 됩니다. 남녀의 구별이 의미가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남녀가 없습니다. 따라서 결혼도 하지 않고 생산도 없습니다. 여기에 나는 천인은 스스로 날 뿐 부모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화생으로 나지만 음욕은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있다고는 하지만 미세합니다. 수명은 참으로 길어서 '여기서 하루는 인간의 수억년이 넘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나이로 수억년은 살게 되므로 인간의 시간으로는 가히 영구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곳 대범천주는 현겁이 시작될 때에 나서 지금까지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불멸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을 뵙고서야 자기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간혹 전세의 숙업을 신통력이 있는 사람들은 대범천주를 마음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일부분만 살펴보고는 우주를 창조한 신으로 굳게 믿게 됩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종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선정력이 있어야 태어나는 세상이고 복업만 가지고는 올 수 없습니다."

"제 15천을 광음천을 보아라."
"이곳은 대범천보다 비할 데 없이 수승하고, 선정력이 없으면 복력만 가지고는 올 수 없는 곳입니다. 음욕이 다한 곳인지라 역시 남녀가 없으며, 생각에 따라서 남자나 여자의 모습으로 변성됩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법은 없습니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화생하여 곧 어른이 됩니다.

수명은 대범천보다 16배 정도 됩니다. 이곳은 대화할 때면 입에서 빛이 나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자연히 그 내용을 읽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계가 처음으로 시작될 때에 이곳의 천인들이 최초로 인간계에 많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스님,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천상은 인간계와는 시간 차이가 많이 나는데,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인간계는 감각으로 느끼는 시간이 천상과는 다르다. 인간은 천인들에 비해서 마음이 매우 초조하다. 그리고 인간들이 처한 환경도 같은 인연으로 만들어졌기에 빨리 변혁한다. 그러나 천상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고 느긋하다. 그에 따른 인연으로 구성된 자연환경도 역시 그렇다. 하루가 이제 저무는 구나 하는 순간 인간계는 수백년, 심지어는 수만년이 지나가고 마는 것이다.

마음이 욕심과 번뇌로 조바심을 치면 이미 타고난 수명도 더욱 단축된다. 사형수가 며칠 만에 머리가 희어졌다는 이야기가 참고가 될 것이다. 우리 인간계는 빛의 속도 속에 살고 있지만, 천인들은 빛의 속도 속에 살고 있지 않다. 당연히 시간개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차원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 체계로는 천상세계가 옆에 있어도 만지거나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리 이동 수단이 발달하여도 도달할 수가 없다. 차원이 다르면 존재 자체도 모르기 때문이다. 천상의 모든 모습은 정신의 갖가지 차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수준에 따라서 천상의 경계도 달라지고, 또한 모습도 달라진다. 그래서 천상은 실재하지 않으면서도 실재하는 것이 된다.

생각의 차원이 천상이면 곧 천상을 보고 느끼는 것이며, 따로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차원의 이동에는 우리각 생각하는 거리와 시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간도 공간도 그 차원 안에 있을 뿐이다. 이 중생계는 서로 엉켜 있지만 자리 싸움을 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거울 속에 논도 비치고 밭도 비친다. 너의 얼굴도 비치고 나의 얼굴도 비춘다. 겹쳐 비춘다 해도 자리가 비좁지 않고 그 위치가 문제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천의 천인들은 다른 중생들의 모습으로 마음대로 나타납니다. 간혹 신이나 부처님의 흉내도 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게 어찌 마천뿐이겠느냐? 천인들은 다 변화하는 힘이 있다. 마천의 천인들은 전생에 남의 어려움을 대신하여 해결하고 그 선행을 다른 사람에게 회향하기를 즐겨했다. 그 공덕으로 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잘 부린다.

겉모습은 부처님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거룩한 모습을 다 나타낼 수는 없다. 그리고 위신력도 당연히 다 나타낼 수 가 없는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적멸의 이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밝은 수행자는 결코 속지 않는다."

극락과 천상

정진을 시작한 지 15일이 되었다.
"경안아, 천상의 세계를 쭉 관하여 보아라. 네가 어느 천에서 생활할 수 있겠느냐? 평등하게 대화가 되고 모든 것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몸의 세계다." "제 12천 대범천까지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대범천도 상층부는 잘 되지 않습니다."

경안은 상층부는 능히 자유롭게 살필 수는 있었으나 체감으로 보고 듣고 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우리 실생활 속에서 사는 계층이 다르면 옆에서 볼 수는 있어도 같은 수준으로 생활을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냐? 어느 천상이라도 차별이 있다. 형상이 있는 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아라한의 세계든 불보살의 세계라도 형상의 세계로 보면 차별이 발생한다.

본래 근본처로 보면 천상과 지옥이 결코 둘이 아니지만 모양으로 볼 때는 아무리 미세한 분자 원자의 세계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세계를 상품.중품.하품으로 나누어서 보아라. 어느 세계까지 생활이 가능한가?"
"대범천은 중품까지만 대화가 되며 같이 오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음식과 옷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라."

"중품까지는 옷도 입을 수 있고 음식도 먹을 수 있지만 상품의 천인들이 먹는 음식은 먹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옷도 같은 종류의 옷은 사용할 수 없고요."
"그들의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어떠냐?"
"대범천의 천인들은 선정력에 의한 즐거움으로 음식을 삼아 생명을 유지합니다. 저는 그 음식을 섭취할 수가 없습니다. 음식을 생각해도 상품의 음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그런다고 보느냐?"
"저의 실질적인 선정력이 미치지 못해서 그런가 합니다."
"누가 일부러 못 먹게라도 하느냐?"
"아닙니다. 공덕과 선정력에 의해 형성된 업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공덕이나 선정력이 약하면 자연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정력의 뿌리가 있다고 보느냐?"
"없습니다."

"그런데 선정력이 부족하여 상품의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는 말이냐? 너의 마음에 무엇이 '된다.안된다, 능력이 있다.없다, 공덕이 있다.없다'를 망령되게 논하느냐?"
"스님, 말씀 따라 과연 그러합니다. 그러나 어쩐지 안 됩니다."
"그런가? 그래 중품의 음식 맛은 어떠냐?"
"향기롭게가 한량없고 인간의 음식 맛으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 아래 천상인 범중천의 음식 맛은 어떠냐?"
"똑같이 선정의 즐거움으로 음식을 삼지만 그 맛은 대범천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음식 맛이든 옷이든 대체적으로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음식 맛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경안은 대범천 중간까지는 정신의 몸을 나투어서 일상 생활에서처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먹고 마시고 할 수 있었다. 정신으로 나툰몸이지만 경안의 입장에서는 실상의 몸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물론 먹으면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러면 아주 지상의 음식을 먹지 않고 살 수도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천상은 희락과 선정력이 음식이기 때문에 자기 선정의 힘만큼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힘이 다하면 천상의 음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유지하는 한은 더욱 그렇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선정력이다, 공덕이다.' 하는 망령된 생각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 그리고 나의 말을 들어라."

증가법의 수련이 있었다. 시간이 흐른 후.
스님이 던지는 자비의 창 앞에 경안의 관념은 무참히 꿰뚫리고 부숴져 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잠재해 있던 자기도 잘 알 수 없는 사고가 하나하나 깨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었다.

이제는 대범천 위의 광천, 소광천, 무량광천, 정천, 소정천, 무량정천, 변정천, 엄식천, 소엄식천, 무량엄식천, 과실천, 무상천, 무조천, 무열천, 선견천, 대선견천, 아가니타천까지 모조리 걸림 없이 동일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상위천으로 갈수록 수명도 배로 증가할 뿐만 아니라 옷도 화려하고 음식도 달랐다. 또한 생각 따라 나타나는 집의 장엄도 다 달랐다. 어느 천상이든 그 천상 안에서도 차별이 분명하여 크게 상.중.하로 나눌 수가 있었다. 경안은 그러한 모든 것을 그곳의 천인과 동일하게 향유할 수 있었다.

또한 색계천을 너머 무색계천에 속하는 공무변천, 식무변천, 무소유천, 비상비비상천까지도 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동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이 말씀하셨다.
"천상을 떠나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를 살펴보아라."
"극락세계는 부처님이 계시는 곳과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시는 곳은 너무도 화려 장엄합니다."

"천상과 극락세계를 비교해 보아라."
"차이가 많이 납니다."
"왜 그런 차이가 발생한다고 보느냐?"
"극락세계는 윤회의 세계가 아닌 부처님의 대정각의 위신력으로 건립된 정토인 반면에 천상세계는 중생의 업으로 이루어진 윤회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가 합니다."

"극락세계 성중들의 모습은 어떠냐?"
"장엄하고 빛나는 모습을 억지로 비교 표현한다면, 가장 훌륭한 천상의 천인과 비교해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천인의 모습이 인간에 비하면 너무나 뛰어난 것이지만, 극락세계의 성중에 비하면 아득히 떨어집니다."

"그렇다. 이러한 것은 부처님이 이미 경전에 말씀해 놓으셨지만 그것은 실제로 그렇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을 말하여 보아라."

"첫째로, 이곳에는 진리가 있고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성중은 누구나 다 한생에 깨달음에 들어가 해탈을 성취하게 됩니다. 다시는 악도에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 성중의 공통된 운명이랄 수도 있고 '업'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상은 복이나 선정의 힘이 다하면 다시 다른 세계로 윤회합니다. 천상은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극락세계의 수명이 영원합니다. 그곳은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영위되는 세계이고 진리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상은 비록 수명이 한량이 없다고는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천계는 진리의 세계가 아니고 중생들의 업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극락세계의 성중들은 신통력이 광대합니다. 진리의 바탕에서 전개되는 신통력이기 때문에 천상의 얕은 복업이나 조그만한 선정력에서 오는 신통력과는 아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넷째, 극락세계의 집이나 자연 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장엄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기자기함과 광대함이 두루 다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천상은 아기자기한가 하면 광대하지 못하고, 광대한가 하면 아기자기하지 못합니다. 또 극락세계는 더러움이란 말이나 글자도 없으며, 악도라는 말도 없습니다.

극락과 천상(2)

"자연 환경을 보이는 대로 이야기해 보아라."
"극락세계의 모든 물은 감로수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물을 먹고 목욕만 해도 마음이 청량하고 온몸이 충만해집니다. 병이라는 말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대지는 칠보로 장엄되어 있고, 먼지니 더러움이니 하는 말조차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풀과 나무도 온갖 보배 나무로 장엄되어 있으며, 바람에 흔들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음악과 법문이 흘러나와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청량하게 합니다. 극락세계의 모든 대자연은 아미타불의 분신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가 법이며, 실질적으로 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가지가지의 아름다운 새들의 울음소리도 그 자체가 음악이요 법문입니다. 듣는 자로 하여금 생명력을 얻게 합니다. 모든 사물의 움직임은 생각과 의질을 넘어서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천상과 다릅니다. 천상은 생각을 하면 이루어지지만 극락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성취됩니다. 집이 필요할 때는 자동으로 집이 현신하며, 필요치 않을 때는 사라집니다.

물에서 목욕을 하는 경우에도 물은 자연히 스스로 물의 높이와 온도 등이 조절되므로 극락세계의 성중은 그러한 곳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최상의 깨달음에 의한 대열반의 즐거움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따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관찰했다. 지금 극락세계의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법문을 들을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자세히 살필 수는 있지만 먹고 마실 수는 없습니다. 아직 힘이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냐? 그것이 어렵다면 한없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한 가닥 망념만 제한다면 별로 어렵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망념이 무엇이며, 본래 없는 이치도 너는 잘 알고 있다. 생각 이전의 뿌리깊은 느낌이 녹아져야만 몸으로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뿌리 없는 나무는 허공의 신기루와 같다. 전혀 걸림없지만 스스로 나가 떨어진다.

그 까닭은 오랫동안 훈습하여 온 관념 때문이다. 그 옷을 벗어 버려야 한다. 어떠한 장애도 태초부터 없는 줄 굳게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 심지어 몸도 극락세계도 한 눈을 돌이키면 허망할 뿐이다. 그런데 무엇을 일러 무겁다, 가볍다 할 것인가?"
스님의 말씀은 경안에게 감히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다시 스님의 도움이 있었다.

시간이 흐른 후.
스님의 구체적인 증가법의 도움이 있자, 경안은 비로소 또 한 번 자각하여 온몸이 뒤흔들렸다.
"부처님을 뵈옵고 법문을 듣고, 음식도 먹고 마시고 해 보아라."
경안은 고요한 상태에서 정신의 몸을 나누어 몸을 날려 부처님 전에 나아가 예배를 드린 후에 한쪽에 조용히 앉으니, 부처님의 낭랑하신 옥음이 귀에 파고들었다. 거기에서 남이 없는 무심심심법을 경청하였다.

그런 연후에 스님의 말씀대로 감로수를 마셨다. 감로수는 몸 구석구석을 청량한 기운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그때 극락세계의 음식이 저절로 앞에 이르렀다. 극락세계의 음식은 진리의 힘에 의한 음식으로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천상의 음식과는 과연 이토록 차이가 날까 할 정도였다. 극락은 대열반의 환희로 음식을 삼기 때문에 음식 아닌 음식인 것이다.

경안의 몸은 숭고한 빛이 나는 옷이 이미 감싸고 있었다. 이리저리 이동하여 극락세계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온갖 자연 산천은 성중의 편리에 따라서 가지가지 모습으로 자유 자재로 변화를 보여 주고, 그 넓이는 끝이 없고 성중의 숫자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스님, 극락세계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극락세계는 아미타 부처님의 오랜 원력과 위신력에 의하여 이룩된 국토다. 여타 중생계가 중생의 욕심과 집착에 의해 이룩된 세계라면 극락세계는 성스러운 진리에 의해 성립된 세계다. 이러한 불국토는 극락세계 외에도 수없이 많이 있다. 지옥으로부터 아귀.축생.인간.아수라.천상세계를 한 세계라 하는데, 이러한 세계가 천세계가 모이면 소천세계라 하고, 소천세계가 천이 모이면 중천세계라한다.

중천세계가 천이 모이면 대천세계가 된다.대천세계가 한량없이 있는 것을 삼천대천세계라고 하는데, 이러한 세계를 일컬어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있는 사바세계이며 예토라고 한다. 이는 극락세계와 그리고 다른 부처님의 불국토와는 구별되는 세상이다.

여러 부처님의 정토 중에서도 극락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매우 인연이다. 누구나 발원만 하면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천상은 전생에 선행을 닦아서 그 공덕의 힘으로 또는 선정력을 스스로 닦아서 그 힘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그러한 공덕이 없으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막지를 안 하지만 보통의 인간으로 천상에 나기가 힘이 드는 것이다.

극락세계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한 인도하심을 입어서 나는 것이다. 때문에 간절히 그 세계에 나기를 발원하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혹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다 날 수 있는 것이다. 극락세계에 난 성중들은 다시는 윤회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정코 성불하기 때문이다.

잘하든 못하든 여하한 구별도 하지 않는다. 자기의 노력이라고는 왕생하고자 하는 발원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다만 의심의 마음을 발원을 하면 변지에 왕생해서 오랫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이미 <관무량수경> 이나 <아미타경>에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죄업을 많이 지은 자라도 지극히 참회하고 온 힘을 다하여 왕생을 발원하면 임종 후에 곧바로 왕생할 수 있다. 그것은 죄업의 근본이 결정적인 모양이 아니고 허깨비와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기 때문이다. 왕생하고자 하는 마음의 힘이 강하면 문제없이 차고 뛰어넘어서 부처님의 인도하심을 힘입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평상시에 멀쩡하게 딴 마음을 살다가 갑자기 선한 마음을 내어서 어찌해 보려고 하면 아무래도 잘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평상시 부지런히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평소에 준비를 하지 않으면 임종시 몸이 무너질 때에 본래 지은 악업이 발동을 하면 한 순간 이성을 상실하고 만다. 지은 대로 끌려서 다른 곳으로 전도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이 멀쩡하고 이성이 살아 있을 때에 원력을 깊이 새겨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업의 결정성이 근본으로 없다해도, 형상이 있는 한 과보를 면할 수 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 있는 사람이나 잘 닦은 사람이나 다 같이 차별없이 나느냐?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평시에 경을 읽고 수행을 잘하고 많은 공덕을 지은 이는 극락에 태어나도 상품에 나는 것이다. 그래서 빨리 부처님을 뵙고 성인 반열에 들게 된다.

그렇지 못한 이는 한없이 늦게 서야 하품에 나서 부처님을 뵙게 된다. 결국 오랜 후에야 성인 반열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 반열에 들고 나서는 나 같게 된다. 전생에 깊은 수행과 많은 공덕을 지은 이라도 극락세계에 나기를 발원해야만 왕행하게 된다.

업에 따라서 자동으로 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범부는 부처님의 인도가 없을 시는 극락에 이를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자칫 자기가 지은 업대로 다른 세계에 태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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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세계에 대하여 (공파스님)

극락세계는 열반이 아니다. 열반의 세계가 바다라면 극락세계는 큰 강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곳은 일체중생들이 궁극적으로 회귀해야 하는 정점지가 아니다. 그러나 큰 강의 흐름에 일단 합류하게 되면 바다가 끌어당기는 흡인력에 의해 자연히 바다에 유입되어 지는 것처럼 극락세계에 일단 태어나게 되면 시간의 장단이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반드시 열반의 세계에 무사히 안착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락세계는 열반이 아니다. 그곳은 열반에 들어가는 행로에 아미타불이 인간완성의 기치로 거대하게 건립해 놓은 수련도장일 뿐이다. 그곳에서 수련을 마친 부처들이 시시때때로 배출되어 인연따라 전 중생세계에 고루 나타나서 그들을 제도하고 그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락세계는 부처를 생산해 내는 거대한 부처학교라고 표현할 수 있다.

사실 이 사바세계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우주 중생계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하기로 소문난 곳이기 때문에 이 사악한 세상에서 공덕과 선행을 부지런히 닦아서 성불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일단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극락세계에 가 태어나기만 하면 공덕과 선행을 닦는 데 있어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그곳에 왕생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미타불 밑에서 하루 동안 선행을 닦으면 이 세상에서 수만년을 힘들게 선행을 닦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고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처럼 그곳은 학군적으로 이 우주 가운데서 가장 완벽한 교육시설을 갖추어 놓고 근기가 나약하고 지혜가 박약한 말세의 중생들을 부처로 양육하는 최적의 교육장소인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곳은 박복하기 그지없는 미완성된 인간을 불러다가 복덕과 지혜가 충만하게 완성된 부처로 양육하는 거대한 인큐베이터 같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극락세계를 열반의 세계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엄격히 말해서 극락은 우주에 무수히 산재해 있는 중생계의 각 행성에서 부처가 되고자 위대한 꿈을 갖고 왕생한 거룩한 수행자들이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공덕을 닦는 엄격한 수련도량이지 게으르게 안락을 누리며 호의호식으로 태평가를 부르고 무위도식으로 세월만 하릴없이 보내는 그런 곳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은 이 지상 어느 곳보다도 더 열심히 수행하고 더 바쁘게 부처님을 공양하면서 더 부지런히 공덕과 선행을 닦아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믿지 않고 또한 자신도 부처가 되고자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곳에 결코 태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본인이 직접 그 세계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끝없는 공덕을 쌓고 하염없이 염불을 하여야 그곳에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 일이지, 본인이 지성으로 원하지 않는데 후손들이 아미타 부처님께 통곡으로 애원하고 그를 떠밀다시피 하여 억지로 왕생시킬 수 있는 곳은 결코 아니라는 것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가 되고 싶지 않는 사람이 그 세계에 가 태어나게되면 그 출생 자체가 이미 고역이고 더 없이 불행한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곳을 극락이라고 부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무리 괴롭다 하더라도 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 속고 서로 속여가며 반복해서 또 힘들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절대로 그곳에 왕생하려고 노력해서는 결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일단 그 극락세계에 가 태어나게 되면 윤회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져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이 땅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부처가 되지 않는 이상 다시 이 사바세계에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흡사 유능한 인솔자가 되기 위해 훈련소에 입소한 생도가 훈련을 다 마차기 전에는 결코 귀가할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그러므로 가족을 부처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지금부터 그들을 우주 최고의 명문학교인 극락세계에 입학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학교에만 입학하게 되면 그들은 완전 장학생으로 최적의 환경과 최고의 캠퍼스에서 끝없는 공덕과 선행을 닦아 모든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는 깨달음의 방법을 완벽하게 배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 학교의 총장은 물론 아미타불이며 임직원들은 바로 수많은 대승의 보살들로 구성되어 있고 지도교수는 사바세계에 자비의 화신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최고의 스승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맡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일단 그곳에 가 태어나기만 하면 모두 다 부처가 되는 것은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부처학교의 입학요건은 환경대학이나 노인대학에 들어가는 절차보다도 더 쉽고 더 간단하여 누구든지 지성스런 마음으로 굳게 발원만 한다면 언제든지 왕생할 수 있도록 아직도 그 대문은 사바세계 쪽으로 주야장창 열려져 있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과 영생을 원하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이제 더 이상 그 세계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태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극악무도한 죄업을 지은 자들은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없다. 그리고 또 있다. 불법을 비방하거나 열 가지 악행을 저지른 자들도 엄격히 제외된다. 부처님은 본문에서 그런 자들은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 자격이 상실된다고 단호하게 밝히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경전들도 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 이 무량수경을 고심 끝에 설하시게 된 이유는 불쌍하게 죽은 영혼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산 사람들을 위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영생의 길을 고구정년하게 제시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죽기 전에 이 한 권의 경전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사실 인생 중에서 가장 큰 행운을 잡는 절호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입이 열리고 골절이 움직이고 있는 신실한 사람들은 오탁이 치성한 이 사바세계를 벗어나 극락세계에 기필코 왕생하여 부처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분을 염불하고 그분의 공덕을 찬탄하며 그분의 본원에 경배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수많은 공덕과 선행을 부지런히 닦아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이며 지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자는 최고의 미덕을 닦고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꾸게 되어 후일 전 중생들의 영원한 귀의처가 되는 부처가 틀림없이 되게 될 것이다.
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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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성의 슬픈 이야기 (부처님께서 관무량수경을 설해지게 된 동기)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쯤 중부 인도에 부국강병으로 경쟁하던 두 나라가 있었다. 하나는 카필라 왕국이었고, 또 하나는 마가다 왕국이었다. 그 두 나라의 왕들은 모두 다 덕망있는 군주들로서 백성들을 어짊으로 잘 다스렸기 때문에 인도 전역에서 가장 살기 좋고 가장 평화로운 나라로 손꼽히게 되어 모든 작은 나라 왕들이 매우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그 두 나라의 왕에게는 나이가 모두 50이 다 되어가는데도 왕위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부유한 나라들이었지마는 이상하게도 그들 사이에는 후손이 생겨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카필라 국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났다. 그 소식을 들은 마가다 국의 빔비사라 왕은 미칠 것만 같았다. 팽팽하게 맞서오던 균형이 무너지고 모든 세력이 이제 카필라국의 정반왕에게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도 이제 기필코 왕자를 가져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전국에 산재해 있는 모든 신전에 수많은 은전을 내리고 복을 빌어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간곡히 기도를 했다. 그러나 별 효험이 없었다. 이웃의 싯다르타 태자는 나날이 성장해 가고 있는데 그에게는 왕자가 태어날 기미조차 없으니 그 초조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결과는 모두 헛일로 끝나 버렸다. 빔비사라 왕은 전국에서 이름난 모든 주술가와 점술가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통하게 미래를 잘 예언한다는 한 명의 선인을 힘들게 가려내어 그에게 은밀히 물어 보았다.

“내 팔자에는 정녕 자식이 없는가? ”
“왕으로 태어나 덕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은 전생에 수많은 공덕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 자식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왜 자식이 없는가?”

“대왕에게 자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대왕의 혈통을 받고 태어날 만한 복을 가진 자가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즉 대왕을 아버지로 모시고 태어날 만한 복을 가진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 자식이나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 복이 있건 복이 없건 간에.”

대왕은 애가 탔다. 거지 자식이라도 좋으니 자식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넋두리를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고양이 새끼를 낳고 호랑이는 호랑이 새끼를 낳습니다. 모두 다 자기의 분수와 복덕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자식이 태어나 같이 어우러져 살게 됩니다. 대왕의 가계에는 후일 왕이 될 그런 재목이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복이 없는 정령들은 왕비마마의 태중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복덕이 갖추어지지 않는 정령을 억지로 태중에 착임시키면 대왕도 나라도 그 복없는 자식에 의해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고통이 아닌가? 더군다나 저 카필라 국의 싯다르타 왕자는 나날이 커가고 있는데, 이러다가 후일 내 나라가 저 왕자에게 빼앗기지나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에게는 엄청난 복덕이 있기 때문에 그 복덕의 힘이 있는 한 결코 나라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이 없는 자식이 태어나면 대왕의 복을 그 왕자에게 반으로 나누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적은 복덕을 갖고서는 나라가 이처럼 계속 풍요롭게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평생에 결국 왕자를 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한명이 대왕의 왕자로 태어날 복을 거의 완벽하게 다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 복이 완전해지면 그가 곧 죽게 되고, 그러면 이내 왕비마마의 태중에 잉태되고 드디어 아주 고귀한 신분의 왕자로 탄생할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대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도대체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대왕은 마른 침을 삼키며 숨쉴 틈도 주지 않고 그 점술가를 다그쳤다.
“그는 선인이며 현재 비부리산 동굴에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가자. 내가 직접 찾아가리다.”

대왕은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점술가가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간곡하게 만류했다.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가 대왕의 태자로 태어나는 복을 완벽하게 구비하려면 아직도 삼 년이나 더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지금 가시면 그의 수행에 장애가 생겨 그만큼 복덕을 쌓는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대왕은 생각했다. 3년 동안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그 시간은 너무 길다. 3년 동안 저 정반왕과 모든 왕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비웃음을 받아야 한다니. 이왕 내 자식으로 태어나게 되어 있다면 그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그는 결심하고 일어섰다. 그 선인과 담판을 지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군사들을 지휘하여 비부리 산으로 말을 달려 나아갔다. 그리고는 이잡듯이 그 산을 뒤져 동굴에 은거하고 있던 백발의 수행자를 간신히 찾아내었다. 왕은 모든 신하들과 군사들을 뒤로 물리고 선인과 담판을 짓기 시작했다.

“언제 죽을 것인가?”
“3년이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지금 죽어서 내 왕자로 태어나도록 하시오.”
대왕은 윽박지르듯이 애걸했다.

“아니 됩니다. 그러면 천리를 어기게 됩니다. 내가 지금 스스로 죽는다고 해도 이 복을 가지고서는 대왕의 자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기껏해야 공주 정도로 태어나는 복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3년이 지나야만 대왕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덕망 있는 태자로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다시 생각했다. 3년은 너무 길다. 만약 내가 지금 자식을 가지면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사건이 될 수 있는 일인데, 3년 동안 기다려야 한다니 그것은 절대 안될말이다. 내가 그때까지 기다리다가 혹 정신이 혼미하여 선정을 베풀지 못해 복덕을 소비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나라도 왕자도 모두 다 잃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니 한시가 더욱 급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도저히 죽을 수가 없단 말인가? 그대의 신통 같으면 분명 왕자나 공주 몸 정도는 쉽게 바꿀 수 있을 터인데.”
“3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복을 완벽하게 갖추어야 제가 대왕의 뒤를 이었을 때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안락할 수 있습니다. 복덕이 갖추어지지 않는 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천기가 어지럽고 백성이 불안할 뿐만 아니라 나라에 큰 재난이 그치질 않게 됩니다.”

선인은 애원했다. 그러면서 또,
“카필라 국에 태어난 싯다르타 태자는 분명 부처가 될 것입니다. 저는 전륜성왕이 되어 전 세계를 통일하여 하나의 거대한 동일국가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애원이 대왕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는 칼을 빼어들었다. 그리고는 애원하며 부복하고 있는 선인의 목을 내리쳤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점술가도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비부리 산을 짙게 훑고 지나갔다.

그로부터 왕비 위제희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 선인의 영혼이 잉태된 것이 분명했다. 왕과 대신들은 기쁨에 들떠 있었다. 이제 당당하게 왕자를 가진 대국의 왕이 될 수 있다는데 대하여 위안을 가지게 되었다. 드디어 아주 잘 생긴 왕자가 탄생했다. 왕은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모든 죄수들을 특별사면했다. 모든 이웃나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고 진귀한 예물을 바쳤다. 대왕은 이제 부러울 것이 없었다.

잔치가 무르익어갈 때 대왕은 정반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유명한 관상가를 불러 태자의 관상을 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왕자의 얼굴에 원한이 서려 있습니다. 이것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대왕과 무슨 원한이 얽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잘못 하다가는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라마저 위태롭게 될는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듣고 빔비사라 왕은 새삼스럽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인은 결국 원한을 가지고 태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아사세라고 했다. 그 뜻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원한을 가졌다는 의미로 미생원이라고 번역된다.

왕은 큰 고민에 빠졌다. 이제 어떻게 할 도리가 엇었다. 그는 관상가를 옥에 가두고 왕비와 함께 왕자를 안고 큰 누각위로 올라가 술을 줄기차게 퍼마시기 시작했다. 이 아이가 장성했을 때를 생각하니 두려움이 일어나 몸서리가 쳐지는 것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혼미한 상태로 결국 아이를 누각 아래로 떨어뜨려 버렸다. 즉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엄지손가락 하나만 부러지고 멀쩡한 상태로 구성지게 울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손가락 하나만 부러졌다고 해서 절지(折指)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아무리 원한을 갖고 태어났다고 해도 일단 자기 자식으로 태어났고 또 저렇게 슬피울고 있는 것을 보니 측은하기가 이를 데 없어 왕은 가급적 모든 것을 잊고 그 태자를 잘 키우기로 결심했다.

왕자는 어쨌거나 부왕의 바람대로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준수한 모습에다 준수한 기골로 모든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면서 왕위를 이어받을 재목으로 나날이 성장해 나아갔다.

어느날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빔비사라 왕은 그제야 한시름 놓게 되었다. 이제 카필라 왕국은 자기의 경쟁국이 될 수 없다는 안도감이 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왕자는 어느새 건장한 청년태자가 되어 있었고, 이제 인도 전역을 아무런 장애없이 하나로 통일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던 걸림돌도 속시원하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편 싯다르타 태자가 대각을 이루어 부처가 되었다는 소식이 인도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 소식을 매우 충격적으로 전해들은 곡반왕의 아들, 즉 부처님에게는 사촌동생이 되고 아난 존자에게는 친동생이 되는 데바닷다가 흑심을 품고 출가를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싯다르타 태자를 시기하고 질투해 왔다. 태자는 그 때문에 여러 번 아주 헤어나오기 힘든 어려운 일에 봉착되기도 했다. 이제 그가 불교교단에 들어와 복 없는 부처님 제자 500여 명을 감언이설로 꾀어 그의 제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따로 하나의 독립된 교단을 만들어 언제나 부처님께 사사건건 시비하고 맞서면서 늘 도전적으로 부처님을 모함해 궁지에 몰아 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 해서든지 부처님을 파멸시켜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술수와 유언비어를 사방으로 퍼뜨리고 다녔다. 그는 부처님을 죽이고 자기가 부처가 되어 전 인류의 사표가 되고 전 중생계의 귀의처가 되어야 겠다는 야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아사세 태자를 만나 그에게 권력의 힘을 빌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사세 태자를 유혹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전륜성왕이 되라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러면 자기는 부처님을 살해하고 부처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면 천하가 우리 것이고 그것을 함께 공유해서 태평성세를 누리자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아사세 태자는 이제 과거의 원한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현 듯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부왕과 왕비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자기를 애지중지 곱게 키워주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제 부왕의 모습과 목소리는 물론 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사세 태자는 내면에서 치솟아오르는 원한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반역을 일으켜 부왕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는 바로 모든 왕권을 찬탈하여 즉시 왕위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제바달다를 왕사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바로 왕사성에서 일어난 희대의 비극적 사건이 된 것인고, 관무량수경이 설해지게 된 동기가 되어진 것이다. 관무량수경의 내용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상 공파스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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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지자대사(智者大師)의 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


(천태지자대사 : 천태종의  개조(開祖)

 

 

정토십의론서(淨土十疑論序)

 

사랑(애착)이 끈끈하지 않으면 사바고해에 태어나지 않으며, 생각(염불)이 한결같지 않으면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못한다〔愛不重, 不生娑婆;念不一, 不生極樂〕. 사바세계는 더러운 땅〔穢土〕이며, 극락세계는 깨끗한 곳〔淨土〕이다. 사바세계의 수명은 유한하며, 저 곳의 수명은 무한하다.

 

사바세계에는 모든 고통이 두루 갖춰져 있지만, 저 곳인즉 평안히 수양〔安養〕하며 어떠한 고통도 없다. 사바세계에서는 업장에 따라 생사고해를 윤회하지만 저 곳은 한번 왕생하면 영원히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며, 만약 중생을 제도하길 원하면 어떠한 업장에도 얽매임 없이 뜻대로 자유자재롭게 할 수 있다.

 

두 곳의 깨끗함과 더러움, 수명의 장단, 괴로움과 즐거움, 생사 윤회 등이 이처럼 천양지차로 판연히 다르다. 그런데도 중생들이 까마득히 모르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아미타부처님께서는 극락정토에서 중생들을 거두어 받아들이는攝受〕 교주이시고, 석가여래께서는 여기 사바세계에서 극락정토를 가리켜 안내하시는 스승이시며,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께서는 부처님을 도와 중생교화를 널리 펼치시는 분들이시다.

 

이러한 까닭에 석가여래께서 한평생 가르침을 펴신 경전들은, 도처에서 간곡하고 자상하게苦口汀獰〕 극락왕생을 권유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께서는 커다란 원력의 배〔大願船〕를 타시고 생사고통의 바다〔生死海〕에 뜨시어, 이 쪽 언덕〔彼岸:사바세계〕에도 집착하시지 않고, 저 쪽 언덕〔彼岸:극락정토〕에도 머물지 않으시며, 중간 물살〔中流:천상이나 중음세계?〕에도 멈추지 않으신 채로, 오직 중생 제도를 불사(佛事)로 행하신다.

 

그래서 아미타경(阿彌陀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부처님을 듣고 그 명호를 붙잡아 지니기를 하루 내지 이레 동안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으면〔一心不亂〕, 그 사람이 목숨 다할 때 아미타부처님께서 뭇 성인 대중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시리니, 이 사람은 목숨이 끊어질 때 마음이 뒤바뀌지(흔들리지) 아니하면 곧장 극락국토에 왕생하게 된다.”

 

또 경전〔無量壽經〕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나의 명호를 듣고 나의 국토〔극락정토〕를 생각하며, 온갖 공덕의 뿌리를 심으면서 나의 국토에 생겨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 기도하여, 정말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할 것 같으면, (나는 결코) 올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루지 않겠노라.”

 

그래서 기환정사(祇桓精舍:기원정사)의 무상원(無常院:선가에서는 열반당 또는 연수당(延壽堂)이라고 하는데,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스님이나 노스님한테 인생무상을 관조하라고 특별히 배치한 장소. 햇빛이 들지 않는 서북쪽 구석에 두었다고 함)에서는, 병든 환자들에게 서쪽을 향해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생각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대저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막힘이나 한량이 없어 시방법계를 두루 비치면서, 염불(부처님을 생각)하는 중생들을 빠뜨림 없이 모두 거두어 받아들이시기〔攝受〕 때문이다. 성인(부처님)과 범부(중생)는 본디 한 몸〔聖凡一體〕인지라, 기연(機緣)만 맞으면 서로 감응(感應)하여 통하기 마련이다. 모든 부처님 마음 안의 중생은 티끌티끌마다 극락세계이고, 중생들 마음 속 정토는 생각생각마다 아미타부처님이다〔諸佛心內衆生, 塵塵極樂;衆生心中淨土, 念念彌陀〕.

 

내가 이러한 이치로 보건대, 누구나 쉽게 극락왕생할 수 있다. 지혜로운 자는 의심을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선정(禪定)에 드는 이는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지 않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다. 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는 온갖 오염을 멀리하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보시를 즐겨하는 이는 나〔我〕라는 생각이 없어서 쉽게 왕생할 수 있다. 또 인욕을 잘하는 자는 성내지 않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용맹스럽게 정진하는 이는 뒤로 물러나지 않기에 쉽게 왕생할 수 있다.

 

그리고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짓지 않는 자는 생각이 오로지 한결같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온갖 죄악을 지어 업보가 눈 앞에 나타나는 이는 정말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기에 쉽게 왕생할 수 있다. 그런데 비록 온갖 선행을 쌓았더라도, 만약 정성과 신심이 없고 깊은 마음[深心]도 없으며 (극락왕생에) 회향발원하는 마음도 없는 자라면, 상품상생(上品上生)에 왕생할 수 없다.

 

오호라!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는 지니고 염송하기가 몹시 쉽고, 극락정토는 왕생하기가 매우 쉽다. 그런데도 중생들이 염불할 수 없고(줄 모르고) 왕생할 수 없다면, 부처님인들 그런 중생들을 어찌하랴!

 

 

천태지자대사(智者大師)의 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1.


의문

모든 불보살님들께서는 대자대비를 본업(本業)으로 삼으신다는데, 만약 중생들을 제도하시고자 한다면, 정말로 오직 삼계(三界)에 몸을 나투시어 오탁악세(五濁惡世)와 삼악도(三惡途) 가운데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셔야 마땅할 줄 압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스스로 자기 생명만 평안히 수행하며 중생을 내버리고 떠나시려 한단 말입니까? 이는 대자대비가 없는 것이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이니, 보살이 추구하는 보리도(菩提道)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답변

 

보살에도 두 종류가 있소. 하나는 오랫동안 보살도(菩薩道)를 닦고 행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분으로서, 이 분들은 진실로 자기 책임(사명, 원력)을 감당할 수 있소. 다른 하나는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분들과 이제 막 보살의 마음〔初發心〕을 낸 범부들이오.

 

두 번째의 범부보살(凡夫菩薩)들은 모름지기 어느 때고 부처님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오. 그렇게 (항상 부처님 곁에 머물면서) 무생법인의 법력〔忍力〕을 성취하여야만, 비로소 삼계 안에 몸을 나투어 오탁악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지도론(智度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번뇌와 업장에 얽매인 범부중생이 제아무리 큰 자비심을 지녔더라도, 오탁악세에 태어나길 발원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오탁악세는 번뇌가 매우 강렬하여, 스스로 무생법인의 법력을 지니지 못한 자는 마음이 바깥(사물) 경계에 따라 돌기(흔들리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이 빛과 소리에 얽매여(물들어) 스스로 삼악도에 떨어질 판인데, 어떻게 다른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가령 인간 세상에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성인의 도(聖道)를 얻기가 어렵소. 더러 보시나 지계 등의 수행으로 복을 지어 인간 세상에 태어나 국왕이나 대신이 된다고 합시다. 전생의 복덕으로 자유자재로이 부귀영화를 누리다 보면, 설령 훌륭한 선지식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가르침)을 믿고 따르려 하지 않고, 그저 탐착과 미혹에 휩싸여 안일하게 방종하면서 온갖 죄악을 두루 짓기 마련이오. 이러한 악업을 짊어지고 한번 삼악도에 들어가면, 한량없는 겁〔無量劫〕이 지나야만 비로소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소.

그것도 몹시 가난하고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고, 만약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또다시 지옥에 떨어지기 십상이오. 이와 같이 생사윤회를 되풀이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지금 사람이란 사람은 죄다 이 모양 이 꼴이라오. 이것을 일컬어 ‘수행하기 어려운 길〔難行道〕’이라고 부르오.

 

그래서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자기 질병도 구제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병든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自疾不能救, 而能救諸疾人)” 또 지도론(智度論)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예컨대 두 사람이 똑같이 각기 자기 가족이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았다고 비유하자. 한 사람은 감정이 다급하여 곧장 물 속에 뛰어들어 구해내려 했으나, 적절한 방편의 힘이 전혀 없어 그만 물에 빠진 사람이나, 구하려는 사람 모두 다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훌륭한 방편을 생각해 내고, 곧장 가서 배나 뗏목(또는 밧줄이나 튜브)을 가져다가 그를 무사히 건져 올려 마침내 둘 다 익사의 고비를 벗어났다.”막 보리심을 낸 보살도 또한 이와 같은 이치라오. 이처럼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보살은 스스로 중생을 구제할 수가 없소. 이러한 까닭에 항상 모름지기 부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오. 무생법인을 얻은 다음에라야 바야흐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소. 마치 위의 비유에서 배를 얻은 사람처럼 말이오.

 

또 논 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비유하자면 갓난아기가 어머니 품을 떠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에 어머니 품을 벗어난다면, 더러 깊은 구덩이나 우물에 빠지거나 또는 젖에 굶주려 죽을 것이다. 또한 비유하자면 새끼 새가 날개에 깃털이 완전히 자라나지 않았을 때에는, 단지 나무에 의지하여 가지 사이나 옮겨갈 수 있을 뿐, 멀리 공중으로 날아가지는 못하는 것과도 같다. 날개에 깃털이 온전히 자라나야, 비로소 허공에 날아올라 걸림없이 자유자재로이 비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범부 중생은 스스로 힘이 없으므로, 오직 ‘아미타불(阿彌陀佛)’만을 일념으로 생각하고 염송하여 삼매(三昧)를 이루도록 해야 하오. 그렇게 청정한 도업이 성취되기에, 임종에 한 생각 추스려 결정코 극락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한 다음, 다시 삼계에 되돌아와 무생법인의 큰 배〔船〕를 타고서 생사고해의 중생들을 구제하며, 자기 뜻〔발원〕대로 자유자재로이 부처님 사업(事業)을 널리 펼치는 거라오.

 

그래서 또 논 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지옥에 돌아다니며 노닐고 싶은 자는 (먼저) 저 나라〔彼國: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무생법인을 얻은 다음에, 다시 생사윤회의 나라〔生死國〕에 되돌아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교화하게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보살들도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노니, 진실로 그 가르침을 잘 알고 따르길 기원하오. 그래서 용수(龍樹) 보살님의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 정토염불법문을 ‘쉽게 수행하는 길〔易行道〕’이라고 이름 붙였다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2.

 

의문

모든 법의 본체는 텅 비어〔諸法體空〕 본래 생겨남이 없고〔無生〕 평등하며 적멸(寂滅)한데, 지금 이내 이 곳을 내 버리고 저 곳을 좇아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다는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바란다면, 이 어찌 이치(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또 경전에 이르시기를, “만약 정토를 구하거든 먼저 자기 마음을 정화시킬지니,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불국토도 청정해지니라(若求淨土, 先淨其心 ; 心淨故, 卽佛土淨).”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뜻이 통하겠습니까?


답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소. 첫째는 전체(총론)적인 답이고, 둘째는 개별(각론)적인 답이오. 첫번째 전체적인 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소.

 

그대가 만약 아미타부처님의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하는 것이 이 곳을 내버리고 저 곳을 좇는 행위로 이치(진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대가 이 곳에 매달려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하지 않는 것은, 거꾸로 저곳을 내 버리고 이 곳에 집착하는 행위로, 이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고 병(病 : 잘못)이 된다오.또 전계(轉計:사람인지 책인지 미확인)가 이렇게 말했소. “저 곳에 왕생하길 바라지도 않고 또한 이 곳에 생겨나길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단멸견(斷滅見)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수보리여, 그대가 만약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阿 多羅三 三菩提心)을 내는 사람은 모든 법이 단멸(斷滅)이라고 설한다고 생각하거든, 이런 생각일랑 하지 말게나. 왜냐하면 보리심을 낸 사람은 법에서 단멸의 모습(斷滅相)을 (보거나) 말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일세.”

 

두 번째 개별(각론)적인 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소.
무릇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모든 존재가) 생겨나는 인연〔生緣〕 가운데 모든 법이 조화롭게 합쳐질〔諸法和合〕 따름이며, 자기 성품을 지키지(고집하지) 않소〔不守自性〕. 따라서 생겨나는 본체〔生體〕에서 뭔가 찾으려 해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소.

 

이 생명이 생겨날 때 어디서부터도 오는 바가 없기에〔無所從來〕, 그래서 ‘불생(不生)’이라고 일컫는다오. 또 ‘불멸(不滅)’이란, 모든 법(존재)이 흩어져 사라질 때, 역시 자기 성품을 지키지(고집하지) 않기에 내가 흩어져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소.

 

이 생명(존재)이 흩어져 사라질 때도 어디로도 가는 바가 없기에〔去無所至〕, 그래서 ‘불멸(不滅)’이라고 일컫는다오.인연이 조화롭게 합쳐져 생겨나는 것 이외에 따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바라지 않는 것을 가리켜 ‘무생(無生, 無生法忍)’이라고 일컫지도 않소.

이러한 까닭에 (龍樹보살이 지으시고 구마라집이 漢譯하신) 중론(中論)의 게송에 이런 말씀이 있소.

 

인연에 의하여 생기는 법을
나는 곧 공(空)이라 하는데
또 가짜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또 중도의 뜻이라 하기도 한다.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亦名爲假名 亦名中道義

 

중론(中論)에는 또 이런 말씀도 있소.

모든 법(존재)은 스스로 생기지 않고
또한 다른 것에서 생기지도 않으며,
함께 하지도 않고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런 까닭에 생기지 않음을 안다.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그리고 유마경(維摩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비록 모든 부처님 나라와 중생이
공(空)인 줄은 알지만은
항상 정토를 닦아
모든 중생들을 교화한다.


雖知諸佛國 及與衆生空
而常修淨土 敎化諸群生

 

또 유마경에는 이런 비유도 있소.
“예컨대 어떤 사람이 큰 궁궐을 짓는다고 하자. 만약 그가 텅 빈 땅에 의지(기초)하여 짓는다면, 아무 어려움 없이 뜻대로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공에 의지하여 지으려 한다면, 끝내 성공할 수 없다.”

모든 부처님의 설법은 항상 두 가지 진리〔二諦〕에 의지하신다오. 즉 가짜 이름〔假名〕을 깨뜨리지(떠나지) 않으면서도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實相〕을 설하시는 것이오.

 

지혜로운 이는 치열하게 극락정토 왕생을 간구하면서도, 생겨남(왕생)의 본체〔生體〕는 (텅 비어) 얻을 수 없는 줄 훤히 통달하므로, 이것이 진짜 생겨남이 없는 무생(無生)이오. 이런 걸 일컬어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도 청정해진다.”고 말하는 것이오.

 

반면 어리석은 자들은 생겨남(또는 왕생)에 얽매여, 생겨난다는 말을 들으면 생겨난다고 알아듣고, 생겨남이 없다〔無生〕는 말을 들으면 생겨남이 없다고 곧이 듣소. 그래서 생겨남이 곧 생겨남 없음이며, 생겨남 없음이 바로 생겨남인 줄은 전혀 모른다오.

 

이러한 이치를 훤히 깨닫지 못하기에 함부로 시비를 다투며, 남들이 극락정토 왕생을 구하는 것에 대해 핏대를 올리면서 비판하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이오? 이러한 자들은 바로 정법을 비방하는 죄인이며, 삿된 견해〔邪見〕에 빠진 외도(外道:異端)일 따름이라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3


의문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의 일체 정토(불국토)는 그 법성(法性)이 평등하며, 그 공덕(功德) 또한 똑같은 줄 압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그러한 일체 공덕을 두루 생각하면서 일체의 불국정토에 왕생하길 염원해야 할텐데, 어찌하여 지금 꼭 한 부처님(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만 외곬으로 구한단 말입니까? 이는 평등성과 어긋나는 것이니, 어떻게 정토에 왕생하겠습니까?

 

답변

시방 세계의 일체 불국토는 진실로 모두 평등하오. 다만 우리 중생들은 근기가 둔하고 마음이 혼탁하며 산란스러운 자가 많소. 그래서 만약 오로지 한 마음으로 한 경계를 붙들어 잡지 않는다면, 삼매(三昧)가 이루어지기 어렵다오.

 

오로지 ‘아미타불’만을 사념(염송·염원)함이 곧바로 일상삼매(一相三昧)라오. 마음을 오롯이 모으기 때문에 그 불국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오. 그래서 수원왕생경(隨願往生經)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보광보살(普廣菩薩)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시방 세계에 모두 정토(淨土:불국토)가 널려 있는데,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에 오직 서방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만 내세워 찬탄하시며, 오롯이 아미타부처님에 전념하여 극락왕생하라고 권하십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보광보살한테 이렇게 답하셨다.

 

‘염부제 중생들은 마음이 매우 혼탁하고 산란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서방 한 부처님 정토만을 내세워 찬탄하느니라. 모든 중생들한테 마음을 한 경계〔一境:나무 아미타불 명호〕에 오롯이 집중(전념)하여 정말 아주 쉽사리 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줌이니라.

 

만약 일체의 모든 부처님을 전부 다 사념할 것 같으면, 염불의 경계(목표)가 너무 넓어서 마음이 산만해지고 삼매가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따라서 정토에 왕생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또한 한 부처님의 공덕을 구한다고 해도, 일체 부처님의 공덕과 전혀 차이가 없소.

 

부처님 법의 성품이 한결같이 똑같기 때문이오. 이러한 까닭에 아미타부처님을 사념(염송)함이 곧바로 일체 부처님을 사념(염송)함이며, 한 (극락)정토에 왕생함이 또한 곧 모든 부처님의 정토(불국토)에 왕생함이 되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몸은
곧 한 부처님의 몸이니,
한 부처님의 마음이고 지혜이며,
위신력과 무외심 또한 그러하네.”


一切諸佛身 卽是一佛身
一心一智慧 力無畏亦然

 

또 이렇게 말씀하셨소.

“비유하자면 맑고 둥근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비추듯,
물 속 그림자 비록 수없어도
본래 달은 결코 둘이 아닐세.
이와 같이 걸림없는 지혜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 이루신 분
일체 국토에 두루 모습
나투시어도
부처님 몸은 본디 둘이 아닐세.”


譬如淨滿月 普應一切水
影像雖無量 本月未曾二
如是無 智 成就等正覺
應現一切刹 佛身無有二

 

지혜로운 이는 비유로써 이해하고 깨닫는다오. 지혜로운 이여! 그대는 일체의 모든 달 그림자가 곧 한 달의 그림자이고, 거꾸로 한 달의 그림자가 곧 일체 모든 달 그림자인 줄 깨닫겠소?

달과 그림자가 둘이 아니지 않소? 만약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한 부처님이 곧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시고, 거꾸로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곧 한 부처님이신 줄도 아시겠구려. 법신(法身)은 본디 둘이 아니기 때문이오. 이러한 까닭에 한 부처님을 치열하게 지성으로 염송할 때, 곧바로 일체 모든 부처님을 염송하는 것이라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4

 

의문

 

한 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하길 염원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 정토에 왕생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시방 세계 수많은 불국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어느 한 부처님의 정토를 염원하여 거기에 왕생하면 될텐데,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않고 하필 아미타불만 염송해야 된다고 외곬으로 주장하십니까?

 

답변

우리 범부 중생들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감히 스스로 독단해서는 안 되고, 부처님 말씀을 오롯이 듣고 따라야 하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만 염송하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오.

그러면 어째서(어떻게) 부처님 말씀을 듣고 따른단 말이오. 위대하신 스승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한 평생 설법하신 걸 보면, 거룩하신 가르침 곳곳에서 오로지 중생들한테 일심 전념으로 아미타불만 외곬으로 염송하여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간곡히 권하셨소.

 

예컨대 무량수경(無量壽經)이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왕생론(往生論) 등, 수십여 부의 경전과 논장(論藏)들에서 한결같이 서방정토에 왕생하라고 은근히 가르치고 간곡히 당부하셨소. 그래서 아미타불만 외곬으로 염송하라고 내세우는 것이오.

 

또 아미타부처님께서는 특별히 대자대비하신 48대 서원을 세워 우리 중생들을 이끌어 맞이하시고 계시오. 그리고 관무량수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아미타부처님은 팔만사천 상(相)을 지니셨는데, 하나하나의 상(相)마다 각각 팔만사천 호(好)가 간직되었고, 하나하나의 호(好)마다 각각 팔만사천 광명(光明)을 나투시어, 모든 법계의 염불하는 중생들을 두루 비추시면서,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거두어 들이시니라.

 

그래서 만약 아미타불을 염송(사념)하기만 하면, 그 착한 근기와 정성이 부처님의 서원과 서로 감응(感應)하여 틀림없이 결정코 극락왕생하느니라.”


또 아미타경이나 대무량수경·고음왕다라니경(鼓音王陀羅尼經) 등에서도 이르기를,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들 경전을 설법하실 때, 모두 한결같이 갠지즈강(恒河) 모래알 수만큼 많은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들께서 각각 그 혀를 길게 드리우시어 삼천대천 세계를 두루 뒤덮으신 채, “일체 중생이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본원력(本願力)의 가피를 받잡기 때문에, 결정코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고 증명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소.

 

우리는 아미타부처님이 우리 사바세계와 자못 각별한 인연이 있으심을 알아야 하오. 어찌 그런 줄 아는고 하면, 무량수경에 “말세(末世)에 부처님 법이 소멸하는 때, 특별히 이 경전만 세상에 백년 더 남겨 두어 (인연 있는) 중생들이 저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맞이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의 지독히 혼탁하고 사악한 중생들과 자못 각별한 인연이 있으심을 알 수 있다오. 물론 그 밖의 다른 부처님들의 모든 정토도 한두 경전에서 중생들한테 거기에 왕생하길 발원하라고 대략 권하고는 계시오.

 

그렇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처럼 수많은 경론(經論)이 도처에서 고구정녕으로 은근하고 간곡하게 왕생하길 전하시는 불국토는 전혀 없소.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5


의문

 

번뇌망상에 얽매인 범부 중생들은 죄악의 업장이 몹시 두텁고 무거워, 한없는 번뇌망상을 터럭 끝만큼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방정토는 시방 삼계를 벗어나 있다고 하던데, 번뇌망상에 얽매인 범부중생들이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답변

 

두 가지 연분(緣)이 있으니, 첫째는 자력(自力:자기 힘)이고, 둘째는 타력(他力:남의 힘)이오. 자력이라 함은, 자기 스스로 이 (사바) 세계에서 도업을 닦는 것이니, 진실로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없소. 그런 까닭에 영락경(瓔珞經)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번뇌망상에 얽매인 범부중생이 불법승 삼보도 모르고 선악의 인과응보도 알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보리심(菩提心)을 낸 때부터 믿음을 바탕으로 부처님 가르침 안에 머물면서, 계율을 근본으로 삼고 보살계를 받아 지닌 다음 한 생 한 생 계속 이어가며 계율을 지킴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수행해 나간다. 그렇게 하기를 1겁(劫), 2겁, 3겁 계속해 나가야 비로소 초발심주(初發心住)에 이른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10신(信) 10바라밀(波羅蜜) 등을 꾸준히 닦아 가면서, 한량 없는 발원 수행〔行願〕을 잠시도 끊임없이 계속하여 1만겁(萬劫)이 꽉 차야 바야흐로 제6정심주(正心住)에 이르게 된다.

만약 여기서 더 한층 정진하여 제7불퇴주(不退住)에 이를 것 같으면, 여기가 곧 종성위(種性位)이다.”이상은 자력 수행의 대강을 말씀하신 것인데, 끝내 서방 정토에는 왕생하지 못하는 것이오.

 

반면 타력(수행)이라 함은, 아미타부처님께서 염불(念佛:아미타부처님을 생각하며 명호를 염송)하는 중생들을 모두 대자대비의 원력을 거두어(받아) 주심을 굳게 믿고서, 곧장 보리심을 내어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수행을 하는 것이오.

 

시방 삼계에 중생의 몸 다시 받는 걸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며, 신심을 내어 보시와 지계로 복덕을 닦아가되, 하나하나 수행마다 한결같이 아미타부처님의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회향 발원하는 것이오.

그러면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 가피에 편승하여, 중생 자신의 근기와 정성이(부처님의 원력과) 서로 감응(感應)함으로써, 곧장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그래서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사바) 세계에서 도업을 닦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닦기 어려운 길〔難行道〕이고, 다른 하나는 닦기 쉬운 길〔易行道〕이다. 닦기 어려운 길이라 함은,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는 한량 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어 중생을 제도하시어도 중생이 아비발치(阿 致跋致:不退轉)를 닦아 얻기가 아주 몹시도 어려움을 말한다.

 

그 어려움은 수없는 티끌처럼 많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아주 중요한 것만 말하자면 대략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외도(外道)가 착한 모습으로 다가와 보살도〔正法〕를 어지럽힌다.
둘째, 사악한 무뢰한들이 남의 훌륭한 덕을 깨뜨린다.
셋째, 좋은 결과〔善果〕에 걸려 넘어져 청정한 수행〔梵行〕이 무너지기 쉽다.
넷째, 자신만 이롭기 바라는 성문(聲聞)에 머물러 대자비의 보살행에 장애가 된다.
다섯째, 오직 자력 수행만 있고, 타력의 가피가 없다. 비유하자면, 절름발이가 도보로 길을 걷자면, 하루에 고작 몇 십 리도 못 가면서 지극히 힘들고 고생만 하는데, 이것이 자력 수행에 해당한다.

 

반면 닦기 쉬운 길이라 함은,

부처님 말씀을 믿고 염불삼매의 가르침에 따라 정토 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니, 아미타부처님께서 염불 중생을 거두어(받아) 들이시겠다는 원력의 가피를 받아 의심할 나위 없이 결정코 극락 왕생함을 뜻한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순풍에 돛 단 듯이 나아감에, 잠깐 사이에 천리에 이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타력 수행에 해당한다. 달리 비유하자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시중들게 되면, 하루 밤낮 사이에 네 천하(四天下)를 두루 돌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전륜성왕의 위력 덕택이다.”

 

만약 번뇌 망상에 찌든〔有漏〕 범부 중생들은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번뇌망상에 찌든 범부중생들은 부처님 몸(佛身)도 또한 뵈올〔親見할〕 수 없다는 말이 되오.

그런데 염불삼매는 물론 번뇌망상을 여읜〔無漏〕 선근(善根)들이 들어갈 수 있지만, 번뇌망상에 찌든 범부중생들도 각자 수행의 정도에 따라 부처님 몸을 거친 모습으로나마 어렴풋이 뵈올(친견할) 수 있다오. 보살 경지에 이른 분들은 미세한 모습까지 뚜렷이 친견하는 것일 따름이오.

 

극락정토 또한 마찬가지라오. 비록 번뇌망상을 여읜〔無漏〕 선근(善根)들이 왕생하지만, 번뇌망상에 찌든 범부중생들도 위 없는 보리심을 내어 정토 왕생을 발원하면서 늘상 염불하게 되면, 그 힘으로 번뇌를 다스려 소멸시키고 극락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오.

 

다만 각자 염불 수행〔번뇌 소멸〕의 정도에 따라 거친 모습을 어렴풋이 친견하되, 번뇌가 스러진 보살은 미세한 모습까지 뚜렷이 친견하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니, 이러한 이치를 어찌 의심한단 말이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이르시기를, “일체의 모든 부처님 국토는 한결같이 두루 장엄하고 청정하거늘, 중생의 업장과 수행이 달라 각자 보는 게 같지 않을 뿐일세(一切諸佛刹 平等普嚴淨, 衆生業行異 所見各不同).”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러한 뜻이라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6

 

의문

 

번뇌망상에 얽매인 범부 중생들이 설령 아미타부처님의 원력 가피로 서방 정토에 왕생한다고 하더라도, 사견(邪見)과 탐진치 삼독(三毒) 등이 늘상 일어날텐데, 어떻게 서방정토에 왕생한 다음 곧장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얻어 삼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답변

서방 정토에 왕생하게 되면, 다섯 가지 인연으로 불퇴전의 경지에 들 수 있다오.

첫째, 아미타부처님께서 대자대비 원력으로 거두어 지켜주시기 때문에 불퇴전을 얻을 수 있소.

둘째, 부처님 광명이 늘상 비추기〔佛光常照〕 때문에, 보리심이 늘상 증진하기만 하고 줄어들거나 물러남이 없소.

 

셋째, 물 소리·새 소리·나무 소리·바람 소리 등의 교향 음악이 모두, 육도 윤회 중생계의 과보가 본디 괴롭고〔苦〕 비었으며〔空〕, 덧없고〔無常〕 나라고 할 게 없다〔無我〕는 진리를 설하기 때문에,

이를 듣는 사람들이 늘상 부처님을 생각하고〔念佛〕 부처님 가르침을 생각하며〔念法〕 그 가르침을 수행하는 분들을 생각하는〔念僧〕 마음을 내게 되어 불퇴전에 머문다오.

 

넷째, 그 서방 정토에서는 순전히 보살님들만 있어 훌륭한 벗〔良友:道伴〕이 되기 때문에, 사악한 연분이나 경계가 전혀 없소. 밖으로는 사악한 귀신이나 마장(魔障)이 없고, 안으로는 탐진치 삼독 등의 번뇌가 언제까지라도 전혀 일어나지 않기에, 불퇴전이 된다오.

 

다섯째, 그 서방 정토에 왕생하면, 수명이 보살이나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영겁(永劫)토록 계속되기 때문에, 수행이 후퇴하거나 정체할 염려가 없소.

여기의 사바 고해 오탁악세는 목숨도 아주 짧고 덧없지만, 그 곳은 아승지겁을 지나도록 다시는 번뇌 망상이 일어남이 없이 오래도록 도업을 계속 닦아나갈 수 있소. 그런데 어떻게 무생법인을 얻지 못하겠소? 이러한 이치가 아주 분명하거늘,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소.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7

 

의문

미륵보살님께서는 일생보처(一生補處)에 계시면서 바로 다음 생에 성불하실 분입니다. 우리 중생이 열 가지 착한 일(十善)1)을 닦아 상품(上品) 수행이 되면, 미륵보살님께서 계시는 도솔천(兜率天)에 생겨날(올라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고 수행하다가, 미륵보살님께서 사바세계에 내려오실〔下生〕 때 함께 따라내려 오면, 세 차례의 법회〔龍華會上〕 교화를 받아 저절로 성인의 과위〔聖果:아라한과〕를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꼭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답변

 

도솔천에 생겨나길(올라가길) 구하는 것도 또한 ‘도를 듣고 부처님을 뵙는다〔聞道見佛〕’고 말들 하니, 외형상 얼핏 보기에는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과 비슷하게 여겨질 듯하오. 하지만 좀더 세밀히 비교하자면, 우열의 차이가 아주 크게 벌어진다오. 그 논거로 두 가지만 들어보겠소.

 

첫째, 설령 열 가지 선행을 닦아 지닌다 해도, 꼭 도솔천에 생겨난(올라간)다는 보장은 없는 것 같소. 왜 그런가 하면,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에 “뭇 삼매를 수행하여 올바른 선정에 깊이 들어야만 바야흐로(도솔천에) 생겨날(올라갈) 수 있다〔行衆三昧, 深入正定, 方始得生〕.”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오.

 

이걸 보면 미륵보살님께서는 그밖에 달리 특별히 중생을 이끌어 맞아들이시는 방편법문을 가지시지는 않는 것이오. 이와는 달리, 아미타부처님께서는 본래 서원의 힘과 광명의 위신력을 바탕으로, 단지 부처님을 생각하고 명호를 염송하는 중생이 있기만 하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거두어 받아들이신다오.

 

게다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구품(九品)연화의 방편법문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시면서, 서방정토에 왕생하도록 은근하게 이끄시고 간곡하게 당부하셨소. 그래서 단지 중생들이 아미타부처님을 생각하면서 그 명호를 염송하기만 하면, 근기와 정성이 두 부처님의 자비원력 및 가르침에 서로 감응하여 반드시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마치 우리 세간에서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사모할 때, 그 상대방이 사모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마음만 내면, 서로 의기(意氣)가 투합(投合)하여 틀림없이 그 일(인간관계, 연분)이 이루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오.

 

둘째, 도솔천도 기껏해야 욕계(欲界)에 속하기 때문에, 수행의 경지에서 후퇴하는 자가 많다오. 그리고 극락세계처럼 중생들이 듣고서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고 번뇌를 여의며 보리심을 낼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물소리, 새소리, 나무소리, 바람소리 같은 미묘한 교향음악도 있지 않소.

 

또 거기에는 여인이 존재하여, 뭇 천상인간들한테 다섯 욕망〔五欲〕2)에 애착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오. 게다가 도솔천의 여인들은 매우 미묘하고 아름다워서, 뭇 천상 인간들이 그들과 어울려 놀고 즐기기에 정신 팔려 스스로 수행에 힘쓸 수가 없을 정도라오.

 

그러니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와 같겠소. 극락세계에는 물소리, 새소리, 나무소리, 바람소리 등의 교향음악이 울려 퍼지는데, 중생들이 이 소리들을 들으면 모두 한결같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보리심을 내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날 수도 없다오.

 

또 여인도 없고 성문(聲聞)이나 벽지불( 支佛:緣覺) 같은 이승(二乘:小乘)의 마음이 전혀 없이, 오로지 순수한 대승보살들만이 청정하고 선량한 도반으로 계신다오. 이러한 까닭에 번뇌망상이나 죄악업장이 언제까지라도 전혀 일어나지 않고, 마침내 무생법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오.

 

이것만 비교해도 그 우열이 현저히 판가름나거늘, 어찌 다시 의심할 나위가 있겠소? 예컨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몸소 교화하실 때에도, 부처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대로 수행했으면서 성인의 과위(聖果:아라한)를 얻지 못한 이들이 갠지즈 강 모래알만큼이나 수없이 많았소.

 

앞으로 미륵부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도 또한 마찬가지로,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 이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오. 그러니 어찌 아미타부처님의 서방정토에 견줄 수 있겠소? 극락세계에는 단지 왕생하기만 하면, 모두 무생법인을 얻게 되고, 어느 한 사람도 다시 삼계에 떨어져 나와 생사윤회의 업장에 묶이는 법이 없다오. 또 서국전(西國傳))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소.

 

세 보살이 계셨는데, 한 분은 무착(無著)이고, 다른 한 분은 세친(世親)이며, 또다른 한 분은 사자각(師子覺)이셨소. 이 세 분은 서로 마음과 뜻이 맞아, 다함께 도솔천에 생겨나(올라가)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기로 결의하고서, 누구든지 먼저 죽어 미륵보살님을 친견하는 자가 남아 있는 이한테 그 소식을 알려주기로 서약하였소. 그러다가 사자각이 먼저 죽었는데, 한 번 가더니만 몇 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캄캄 무소식이었소.

 

그 뒤에 세친이 가게 되었는데. 임종 때 무착이 “만약 자네가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거든, 곧장 되돌아 와서 알려 주게나.” 하고 신신당부를 했다오. 그런데 세친이 간 뒤로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찾아왔길래, 무착이 이렇게 물었다오.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찾아온단 말인가?”그러자 세친이 이렇게 대답했다오. “거기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님의 설법을 한 바탕 듣고서, 곧장 되돌아 내려와 소식 전하는 것일세. 거기 도솔천은 하루(시간)가 매우 길어, (거기서 잠깐 머물렀는데도) 여기서는 벌써 3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라네.”그래서 무착이 “그러면 사자각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묻자,

 

 세친의 대답이 참으로 가관이었소. “사자각은 도솔천의 즐거움을 누리고 다섯 욕망〔五欲〕을 즐기느라, 이미 바깥 권속이 되어 버렸네. 한번 도솔천에 올라간 뒤로 여태껏 미륵보살님은 뵌 적도 없다네.”(미륵보살님이 계시는 도솔천 내원에 동참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돈다는 뜻인듯) 경지가 낮은 조그만 보살들은 거기 도솔천에 생겨나도(올라가도) 이처럼 천상의 미묘한 오욕(五欲)에 빠지기 십상이거늘, 하물며 보통 범부 중생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

 

이러한 까닭에,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해서 틀림없이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이르겠다고 발원해야 하며, 도솔천에 올라가서 미륵보살님 뵙기를 구해서는 안 된다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8

 

의문


우리 중생들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無始〕부터 한량없는 악업을 지어 왔습니다. 금생에 다행히 사람 모습을 타고나긴 했지만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였고, 그래서 또다시 죄악이란 죄악은 짓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모든 죄업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臨終〕에 ‘나무 아미타불’ 명호 열 번만 염송〔十念〕해 내면 곧장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시방 삼계를 벗어나고 생사윤회의 악업을 끝마칠 수 있다고 하십니까? 도대체 어떠한 도리로 해명하시렵니까?

 

답변


중생들이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어 온 선행과 악업의 종자가 얼마나 많고 얼마나 강한지는 결코 알 수도 없소. 다만 목숨이 다할 때 선지식을 만나 (그 가르침을 믿고 따라) ‘나무 아미타불’ 명호 열 번 만이라도 염송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숙세(宿世)의 선행공덕〔善業〕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에 비로소 임종에 선지식을 만나 열 번 염불〔十念〕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오.

 

만약 악업이 많은 중생이라면, 그런 선지식을 만날 수조차 없는 법인데, 하물며 어떻게 목숨이 끊어지는 그런 순간에 (정신을 집중하여) 열 번의 염불을 성취할 수 있겠소? 또 그대가 (질문하는 걸 보니)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어온 악업만 아주 무겁게(중대하게) 생각하고, 목숨이 다할 때 ‘나무 아미타불’ 염송 열 번 해내는 공덕은 대수롭지 않게 가벼이 여기는 모양인데,

 

이제 세 가지 도리(道理)로 비교해 본다면, 악업만 공덕의 경중이라는 게 꼭 일정하게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시간(세월)의 길고 짧음이나 수량의 많고 적음에만 달린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소. 그 세 가지 도리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마음(心)에 달려 있고, 둘째는 연분(緣)에 달려 있으며, 셋째는 의지 결정(決定) 여하에 달려 있소.

 

첫째, 마음에 달려 있다 함은 이렇소.

중생이 죄악을 지을 때는 허망(虛妄)하고 앞뒤가 뒤바뀐〔顚倒〕 번뇌망상으로부터 말미암지만, 염불(念佛)하는 것은 선지식으로부터 아미타부처님의 진실(眞實)하고 공덕(功德) 원만한 명호에 대해 설법을 들음으로써 비롯되오.

 

이렇듯이 하나(죄업)는 허망하고 하나(염불 공덕)는 진실하니, 어떻게 둘을 서로 나란히 비교할 수 있겠소? 비유하자면 마치 만 년 동안 깜깜했던 암실(동론)에 햇빛이 잠시만 비쳐 들어도 암흑은 단박에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소. 어찌 오래된 암흑(죄업)이라고 해서 순간의 햇빛(염불 공덕)에 사라지지 않을 리가 있겠소?

 

둘째, 연분에 달려 있다 함은 이러하오. 죄악을 지을 때는, 허망(虛妄)하고 어둡고 어리석은 마음이 허망한 경계의 연분을 만나 본말이 뒤바뀌어 죄악을 짓게 되오. 그러나 염불하는 마음은 부처님의 청정(淸淨)하고 진실(眞實)하며 공덕 원만한 명호를 듣고서 더할 나위 없는 보리심〔無上菩提心〕을 연분으로 생겨나기 마련이오.

 

이처럼 하나는 거짓되고 하나는 진실하니, 어떻게 둘을 서로 나란히 비교할 수 있겠소?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맞았는데, 독이 극렬하고 화살이 깊이 박혀 근육을 손상시킴은 물론 뼈까지 파괴되었으나, 한번 독약을 말끔히 사라지게 하는 신령스런 북〔藥鼓〕 소리를 듣자마자, 금세 화살이 저절로 뽑혀 나오고 독기운도 스스로 풀려 버리는 것과 같소. 그런데 이 경우 화살이 좀 깊이 박히고 독이 극렬하다고 해서, 어찌 안 빠지고 해독 안 될 리가 있겠소?

 

셋째, 의지 결정에 달려 있다 함은 또 이러하오. 죄악을 지을 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상황에서 이거 한번 해볼까 하는) 한가한 마음〔閒心〕과 (나중에 뉘우치고 속죄할 기회가 있겠지 하고) 뒷날을 은근히 기대는 마음〔後心〕이 으레 있기 마련이오.

 

하지만 염불할 때는, 지금 당장 숨 넘어가면 생명이 끝날 판인데, 그런 한가한 마음과 뒷날을 기대는 마음이 도대체 있을 수 없소. 그래서 착한 마음〔善心〕으로 맹렬하고 예리하게 정신 바짝 차려 염불하게 되므로, 곧장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오.

 

비유하자면, 열 겹으로 묶은 밧줄은 천 사람도 끊을 수 없지만, 어린애가 칼 한번 휘두르면 순식간에 두 동강 나는 것과 같소. 또 천년 동안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콩알만한 불씨 가지고도 짧은 시간에 죄다 타버리는 것과 같소. 그리고 반대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한 평생 동안 열 가지 선행〔十善業〕을 꾸준히 닦아 마땅히 천상에 올라가야 할 인연인데, 임종 때 한 순간의 결정(決定)적인 삿된 생각〔邪見〕을 품음으로써 곧장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것과도 마찬가지 이치라오.

 

악업이라는 게 허망한데도 불구하고, 임종 때 한 생각이 맹렬하고 예리했던 까닭에, 오히려 한 평생 동안의 선행 공덕을 죄다 물리치고 지옥이라는 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만든 것이오. 하물며 임종 때 맹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염불한다면, 한가한 생각없는 진실한 마음의 선행공덕은 오죽하겠소? 그러한 결연한 마음의 염불공덕으로,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어온 악업을 말끔히 물리치고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면, 이는 정말 말도 안 되오.

 

또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한 순간의 염불 공덕으로 80억 겁 동안 생사윤회의 죄업을 소멸시킨다고 하는데, 이는 염불할 때의 마음이 아주 맹렬하고 예리하기 때문이오. 그렇듯이 악업을 말끔히 소멸시킨다면, 결정코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소.

 

그리고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말씀 가운데, ‘나무 아미타불’ 열 번 염송하는 공덕을 성취하는 걸 (금생에 과보를 얻는 게 아니라 내생을 기약하는 인연 종자 정도로) 다른 때〔別時〕의 의미로 판단(해석)하는 견해가 더러 있는데, 이는 결코 그럴 수 없소. 어찌 그런 줄 아는가 하면, 섭론(攝論:無著보살이 지은 攝大乘論)에는 “오직 발원만 하는 까닭에 수행이 전혀 없다.”는 말씀이 나온다오.

 

또 잡집론(雜集論)1)에는, “만약 안락(安樂:극락) 국토에 왕생하길 원하면 곧장 왕생할 수 있고, 만약 티없는〔無垢〕 부처님 명호를 들으면 곧장 아누다라삼먁삼보리(阿 多羅三 三菩提:無上正等正覺)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른 때의 원인〔別時之因〕으로 전혀 수행이 없다.”고 하고 있소.

 

그렇지만 (단지 발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임종의 순간에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한가한 생각 없이 맹렬하고 예리(간절)하게 열 번 염불하는 십념(十念)의 선행공덕까지 (내생의 극락 왕생을 위한 인연 종자 정도로) 다른 때〔別時〕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오도(誤導)하는 커다란 잘못이 되겠소?

원컨대, 염불 수행자 여러분께서는 이 이치를 깊이 생각하여 자기 마음을 굳게 다잡아 결연히 행하고, 다른 견해를 잘못 믿어 스스로 함정에 떨어지는 일이 결코 없기를 간절히 바라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9

 

의문


이제 결정코 서방 정토 왕생을 발원하여 구하렵니다. 그런데 어떤 수행 공덕을 닦아야 할 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종자(인연)로 그 나라(극락정토)에 생겨날 수 있습니까? 또 우리 세속에 사는 범부 중생들은 모두 처자식(배우자)이 있는데, 음욕(淫欲)을 끊지 않아도 거기에 왕생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결정코 서방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 수행을 갖추면 틀림없이 거기에 왕생할 수 있소. 첫째는 싫어하여 떠나는 염리행(厭離行)이고, 둘째는 흔연히 기뻐하며 바라는 흔원행(欣願行)이오. 우리 범부 중생들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오욕(五欲)에 얽매여 오도(五道:六道 가운데 阿修羅를 뺀 나머지 다섯 문맥상 육도와 같은 의미)를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아 왔소.

 

그러므로 이 오욕을 싫어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 오도 윤회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소. 그러한 까닭에 늘상 이 몸뚱아리 보기를, 피고름과 똥오줌 등 온갖 불결하고 냄새 나며 더러운 오물 덩어리를 관찰하는 것이오. 그래서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와 같이 육신의 성〔身城〕은 어리석고 멍청한 나찰(羅刹)이 그 안에 살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자라면 누가 이 몸을 좋아하고 즐기겠는가?” 또 경전에 이렇게도 말씀하셨소.

“이 몸은 온갖 괴로움이 모인 곳으로, 일체 모든 것이 죄다 깨끗지 못하고, 온통 종기나 피고름 투성이로 좋고 이로운 것은 근본적으로 없나니, 위로 아무리 높고 훌륭한 천상 세계라 할지라도 모두 이와 같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걷거나 앉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간에, 늘상 이 몸이 즐거움이란 조금도 없이 오직 괴로움뿐임을 관찰하여, 이 몸을 몹시 싫어하고 떠나버리려는 마음을 깊이 내어야 한다.”

 

그리고 방사(房事:부부관계, 성욕)는 설사 단박에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점차 싫어하고 멀리하는 마음을 내면서 다음의 일곱 가지 부정관(不淨觀)을 하면 좋겠소.

 

첫째는, 이 음욕의 몸뚱아리가 탐착과 애욕의 번뇌로부터 생겨났으니, 바로 그 근본 종자가 깨끗하지 못함을 관조하는 것이오.

둘째는, 부모가 성관계를 맺을 때에 붉은 피(난자)와 흰 정액(정자)이 화합하였으니, 이는 바로 생명을 받음〔受生:受胎〕 자체가 깨끗하지 못함이오.

 

셋째는, 어머니 태〔母胎〕 속에서 머물 때, 위로는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 장기〔熟臟〕가 떠받치고 있으니, 이는 바로 거주하는 곳이 깨끗하지 못함이오.

넷째는, 또 어머니 태 속에 있을 때, 오직 어머니의 피를 통해 영양을 먹었(섭취했)으니, 이는 곧 음식 섭취가 깨끗하지 못함이오.

다섯째는, 해와 달이 꽉 차서 머리가 출산의 문을 향해 나올 때, 피고름이 함께 왕창 쏟아져 더러움과 피비린내가 흥건히 퍼졌으니, 이는 곧 첫 출생이 깨끗하지 못함이오.

여섯째는, 얇은 살갗 한 겹으로 겉만 그럴듯이 뒤덮여 있을 뿐, 그 안은 어느 곳이나 온통 피고름으로 꽉 차 있으니, 이는 바로 온몸이 깨끗하지 못함이오.

 

일곱째는, 그러다가 나중에 죽은 뒤에는 시신이 부어 오르고 문드러져 뼈와 살이 사방으로 널려 여우나 이리떼의 먹이가 되고 마니, 이는 바로 궁극까지 깨끗하지 못함이오.

이렇듯 자기 몸이 그러할진대, 남의 몸도 또한 그러할 것은 당연하오. 좋아하고 사랑하는 경계(境界)나 남녀의 몸 따위도 모두 그러하거니, 늘상 깨끗하지 못함을 관조하여 몹시 싫어하고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깊이 내어야 할 것이오.

 

만약 이와 같이 몸뚱아리가 깨끗하지 못함을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음욕의 번뇌망상이 점점 줄어들 것이오. 이와 함께 경전에서 널리 말씀하고 계시는 열 가지 생각〔十想〕 등의 관찰법도 행하면 좋겠소.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원컨대, 제가 삼계에서 온갖 더럽고 냄새나며 오욕에 탐닉하는 깨끗하지 못한 잡식성 남녀의 몸뚱아리를 영원히 벗어나서, 극락정토의 법성의 몸〔法性身〕 받아 생겨나길 간절히 바라옵니다.’라고 발원하는 것이오.

 

그리고 바로 싫어하여 떠나는 염리행(厭離行)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소. 첫째는 먼저 극락왕생을 구한다는 뜻을 분명히 함이오. 둘째는 그 극락정토의 장엄들을 보고 믿어 흔쾌한 마음으로 왕생을 구하고 바라는 것이오. 우선 왕생의 뜻을 분명히 함은 이렇소. “정토왕생을 구하는 까닭은 일체 모든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함인데, 지금 자기 스스로를 생각해 보건대 나 자신은 아무런 힘도 없다.

 

이렇게 험악한 세상에서는 번뇌망상의 경계가 너무 강렬하여, 나 스스로 업장에 얽매여 삼악도에 떨어지고 한없는 세월이 지나도록 계속 윤회할 것이다.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윤회하며 여태껏 잠시도 쉰 적이 없는데, 어느 때나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뭇 불보살님들을 가까이 하려고 구하는 것이오. 그래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해야만 바야흐로 험악한 세상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가 있소.

 

그런 까닭에 왕생론(往生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보리심을 낸다〔發菩提心〕 함은 바로 부처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고,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란 곧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이며,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은 바로 중생들을 거두어 들여 부처님 나라에 생겨나도록 이끌겠다는 마음이다.”

 

그리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원하면, 모름지기 다음 두 가지 수행을 갖추어야 하오. 첫째는 보리문(菩提門)을 가로막는 세 가지 나쁜 법을 반드시 멀리 떠나야 하고, 둘째는 보리문으로 순조롭게 이끄는 세 가지 좋은 법을 모름지기 얻어야 하오.

보리문을 가로막는 세 가지 나쁜 법을 멀리함은 바로 이런 것이오.

 

첫째, 지혜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이오. 자신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내 마음이 내 자신에 탐착하는 걸 멀리 떠날 수 있는 법문이기 때문이오.

둘째는 자비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이오. 일체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편안치 못한 중생의 마음을 멀리 떠날 수 있는 법문이기 때문이오.

 셋째는, 방편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이오.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려 하고, 자기 자신을 공경하고 공양하려는 마음일랑 멀리 떠날 수 있는 법문이기 때문이오.

이와 같이 하여 보리문을 가로막는 세 가지 장애를 멀리할 수 있다면, 바로 보리문에 순응하는 다음의 세 가지 법을 얻게 되오.

 

첫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온갖 즐거움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無染淸淨心〕을 얻게 되오. 보리〔菩提〕는 본디 물들지 않고 청정한 곳이오.

만약 자신을 위해 즐거움을 구한다면, 이는 곧 몸과 마음을 더럽게 물들이고 보리문을 가로막는 것이오. 그래서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은 보리문에 순응하는 것이오.

둘째는,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 주기 때문에, 편안스런 청정한 마음〔安淸淨心〕을 얻게 되오. 보리심은 일체 중생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는 청정한 곳이오.

 

만약 일체 중생을 건져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는 곧 보리문에 어긋나는 것이오. 그래서 편안스런 청정한 마음은 보리문에 순응하는 것이오.

셋째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보리(大菩提)와 열반을 얻게 하려고 바라기 때문에, 즐거운 청정한 마음〔樂淸淨心〕을 얻게 되오. 보리와 열반은 궁극의 항상 즐거운〔常樂〕 곳이오.

만약 일체 중생들한테 항상 궁극의 즐거움을 얻게 해 주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이는 보리문을 가로막는 것이오(그래서 즐거운 청정한 마음은 보리문에 순응하는 것이오.).

 

그러면 이 보리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얻어지겠소? 핵심 요체는 바로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늘상 부처님 곁을 떠나지 않는 데에 있소. 거기서 무생법인을 증득한 다음에 다시 생사윤회의 사바국토에 나와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되, 자비와 지혜가 안으로 혼융일체가 되어 선정으로 항상 사용하며 조금도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로운 것이 바로 참된 보리심이오. 이것이 첫번째 극락정토 왕생을 구한다는 뜻이오.

두번째 흔쾌한 마음으로 정토왕생을 원한다 함은 이러하오.

 

극락왕생을 바라는 마음이 흔쾌히 일어남은 아미타부처님의 인연 때문이오. 법신(法身)이나 보신(報身)이나 금색 광명 찬란한 가운데 8만4천 큰 모습〔相〕을 나투시고, 큰 모습 하나하나마다 다시 8만4천 작은 모습〔好〕을 나투시며, 작은 모습 하나하나마다 또다시 8만4천 광명을 쏟아내시어, 항상 온 법계를 두루 비추시면서 염불하는 중생들을 빠짐없이 거두어 들이시는 것이오.

 

그러므로 우리 중생들은 극락정토의 칠보장엄(七寶莊嚴)과 미묘한 즐거움 등은 물론,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에 설해져 있는 16관법 등의 가르침을 잘 관찰하고 사유하여, 항상 염불삼매와 보시·지계 등의 모든 선행을 함께 닦아나가야 하오. 그래서 그러한 수행공덕으로 일체 중생들이 다함께 극락국토에 왕생하도록 회향기도하는 것이오. 그러면 결정코 틀림없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이것이 바로 흔쾌한 마음으로 극락왕생을 원하는 것이오.

 


천태지자대사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

정토십의론 후서(淨土十疑論後序)

송(宋) 좌선의랑(左宣義郞) 진환(陳瓘) 씀

 

사람 마음 덧없고, 법 또한 일정함이 없다. 마음과 법이 천차만별이지만, 그 근본은 여기에 있다. 이것을 믿으면 두루 믿게 되나니, 그래서 화엄경에서 열 가지 믿음〔十信〕을 말씀하셨다. 반대로 이것을 의심하면 두루 의심하게 되나니, 그래서 천태지자 대사께서 정토에 관한 열 가지 의심을 해설하셨다. 의심을 벗어나서 믿음으로 들어가되, 한 번 들어가면 영구히 들어가게 되나니, 여기에서 떠나지 않고 확실히 믿으면 궁극의 경지〔究境處〕를 얻는다.

 

극락정토란 바로 그러한 궁극의 경지〔究境處〕이다. 이 곳에 설법하시는 주체가 계시니, 바로 무량수불이시다. 이 부처님께서 설법하심은 일찍이 쉬거나 끊인 적이 없건만, 우리 중생들 의심이 귀를 막아 귀머거리처럼 그 설법을 듣지 못하고, 우리 중생들 의심이 마음을 뒤덮어 흐리멍텅하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죄악의 업습에 편안히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생각〔念佛〕하지 않음을 찬탄하며, 거칠고 산만한 마음을 좋아라고 기뻐〔隨喜〕하면서, 극락정토에서 연꽃 봉오리를 보금자리로 생겨나는 게 허황된 거짓이라고 망령된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썩어 문드러질 이 육신이 어떻게 얻어졌고 또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끝내 생각지도 않는다. 모태의 감옥〔胎獄〕 지저분하고 더럽기 짝이 없으니, 진실(眞實)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말로 업식(業識)에만 믿고 의지하니, 진실한 성품 바탕과는 저절로 거리가 멀다. 한바탕 허깨비 같은 꿈속 경계에서 진실〔성품〕을 못 보고 허깨비〔업식〕에 매달린 까닭에, 생애생애마다 신령스러움을 잃고 성인의 길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 석가여래께서 대자비와 연민심을 내시어, 사바고해 오탁악세에서 큰 소리로 저기 서방정토의 지극하고 미묘한 즐거움을 찬탄하셨다.

 

생사윤회의 고해 가운데 위대한 뱃사공〔船師〕이 되시어, 우리 중생들을 진리의 배〔法船〕에 실어 날라 저 쪽 극락 언덕〔彼岸〕으로 건네 주시면서, 밤낮으로 중생을 제도하심에 잠시도 쉴 틈이 없으신 것이다. 그렇지만 아미타불의 언덕(정토)은 본디 피(안)차(안)가 없고, 석가여래의 배는 실제로 오고 감〔往來〕이 없다. 비유하자면, 한 등불이 팔방의 거울에 각각 나누어 비치는 경우에, 거울의 위치는 동쪽과 서쪽이 있을지라도 빛과 그림자는 결코 둘이 아닌 것과 같다.

 

아미타불의 설법은 팔방의 거울에 두루 빛을 비추는데, 석가여래의 방편 법문은 오직 서쪽 거울만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피안에 다다른 이는 피안과 차안(의 구별)을 잊을 수 있지만, 아직 법계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들이 어떻게 스스로 동쪽과 서쪽(정토)을 분간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 법문 가운데서 아직 궁극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방향에 얽매이지도 말고 피(안)차(안)도 가리지 말며, 단지 부처님 말씀을 올바른 생각으로 굳게 믿기만 하면 된다. 이 점이 바로 두 성인(아미타불과 석가여래)의 본래 의도이며, 또 지자 대사께서 믿음을 내신 까닭이다.

 

믿음이란 모든 선행의 어머니이며, 의심은 모든 죄악의 뿌리이다.〔信者, 萬善之母;疑者, 衆惡之根〕 선행의 어머니(믿음)에 순응하여 죄악의 뿌리(의심)를 솎아낼 수 있다면, 앞에서 의심의 업장에 귀와 마음이 막힌 중생들도 귀가 트여 다시 듣고 마음이 열려 다시 깨닫게 된다.

 

또 아직 생사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은 생사 윤회를 벗어나고,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못한 중생은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된다.석가여래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라 아미타불을 향해 극락왕생하고, 다시 아미타불의 원력에 따라 나와 석가여래를 돕게 될 것이다.

 

이렇듯이 시방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면, 서쪽을 향하여 팔방의 모든 거울에 두루 들어가는 셈이다. 두 성인께서 정토법문을 세우신 이래 이와 같이 행한 사람들이 갠지즈 강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데, 어찌하여 믿지 아니하고, 또 무엇을 의심한단 말인가? 이러한 법문(진리)을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면, 또 좋은 방편을 마련하여 아직 믿지 못하는 뭇 사람들한테 믿지 않을 수 없도록 일깨워야 하리라.

 

바로 그 때문에 천태지자 대사께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이 정토십의론을 설하신 것이다. 명지(明智) 대사께서 한가운데 우뚝 서서 지자 대사의 도를 배워 본받으셨는데, 그 문장은 따라갈 수 없지만 그 대자비심만은 따르실 만하다. 그래서 또 이 정토십의론을 다시 인쇄 발행하시게 되었는데, 맨 앞의 서문은 양공이 쓰셨으니, 이에 법문이 더욱 널리 전파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여 몇 자 부연 서술한다.

 

끝.

 

번역 / 보적(寶積) 김지수 교수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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