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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식 제사법
- 책마다 조금씩 내용이 다른 것을 모아 놓았으므로 각자 읽고 합당하다고 생각되는대로 선택해서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제1절 불교식 제사법
우리 불자들은 불교신자이면서도 그 제사법은 유교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불자들의 불교식 제사라고는 절에 와서 지내는 구병시식이나 천도제가 고작인데, 이것도 본래의 성격을 상실한 채 의식만 불교식이지 그 취지나 성격은 무당이 지내는 굿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이 치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불자는 그러한 행위를 반성하고, 지금 지내는 유교식 제사법을 불교식으로 바꾸어 보기 바란다.
제1항 유교식 제사법의 폐단
유교에서의 제사는 죽은 영혼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취급하여, 효를 행한다는 것을 그 근본 뜻으로 삼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에 음식을 차려 그 영혼을 불러서 대접하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러기에 제사도 귀신들이 활동하기 좋다는 시간인 오밤중이나 새벽녘에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효를 행한다는 생각은 옳은 생각이나 죽은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취급하여 음식을 차리고 대접한다는 것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큰일 날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영혼이 차린 음식을 먹으러 온다면 그것은 조상들이 천도가 안 되어 중음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천도를 해 주어야 하는데, 천도를 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에서 맺은 인연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여 자신이 이승을 살면서 지은 업과 공덕으로 부처님의 나라든 육도윤회의 세계든 가게끔 영가에게 법문을 들려 그들을 설득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천도를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거꾸로 음식을 차려서 일 년에 한 번씩 대접을 함으로써 이승에 미련을 가지게 만든다면 그 집안은 누대로 쌓인 업에 의하여 움직이는 집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교식 제사법은 귀신을 불러들이는 제사법이므로 그러한 제사법을 행하게 되면 그 집안은 영가적인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도 유교식으로 음식을 차려 놓고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제2항 불교식 제사법의 의의
우선 불교에서 지내는 제사의 의의부터 말하겠다.
모든 생명이 죽어서 가는 곳에는 세 군데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나라인 극락이고, 둘째는 윤회의 세계이고, 세째는 중음의 세계이다.
극락은 살아 생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서 믿고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이 가는 곳이고, 윤회의 세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몰라 실천을 하지 못한 생물이 가는 곳이며, 중음은 자신이 죽기 전에 살았던 세계에 집착하여 극락왕생도 못하고 윤회도 못하며 이승을 떠돌아 다니는 영혼들의 세계를 말한다.
윤회의 세계는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6가지 세계를 말하는데, 이 중에서 인간의 세계를 제외한 모든 세계는 인간계에서 지은 업을 받기 위한 세계이며, 인간계는 이러한 세계들을 떠돌아다니며 업을 소멸시키고 남은 잔업을 가지고 오는 세계이다.
사람들은 인간세계를 살면서 선행도 하고, 화도 내고, 어리석은 짓도 하고, 욕심도 부리고, 악행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정도에 따라서 육신을 버린 후 각기 머무는 세계에 길고 짧음이 있을지언정 한 번씩은 지은 업을 받는 것이다.
즉,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은 천상으로 갈 것이며, 화를 많이 낸 사람은 수라에 갈 것이고,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축생이 될 것이며, 욕심을 많이 부린 사람은 아귀가 될 것이고,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이다.
이렇게 지은 업에 따라 서로 다른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업을 받으나, 그 양이 너무 적어서 다른 세계에서는 소멸시킬 수 없는 잔업이 남게 되는데, 그것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계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남은 잔업을 다 소멸시켜서 극락왕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업장을 소멸시키기는 커녕 업을 짓는 행위들을 일삼고 있다.
그래서 윤회의 세계는 끝이 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면 업장을 소멸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업이 있다' 함은 우리들의 영혼이 가난하고 병들어 있음을 말하는 것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육신의 가난과 질병 등으로 생각하기 일쑤이다.
영혼의 가난과 질병을 치료하지 않고 거꾸로 자신의 육신의 질병이나 가난만을 문제 삼으니 말이다.
육신의 질병이나 가난이 찾아 온 것은 자신의 영혼의 가난이나 질병을 치료키 위함인데, 그것을 모르고 거꾸로 업만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범부중생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육신이 없으면 자신의 영혼의 가난과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신이란 자신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육신은 누구 덕분에 있게 된 것일까?
우리들 위에 우리들의 부모님이 계시고, 그 위에 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고, 또 그 위에 그분들을 낳으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모님이 계셨고. 이러한 식으로 이 지구에 생명이 탄생하던 순간까지만이라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오늘날 나의 육신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존재하였을까?
만약 그 분들이 안 계셨다면 오늘날 내가 이러한 육신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분들이 존재하였음으로 받게 된 육신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업장을 소멸시켜 성불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환경에 대하여 조상님들을 원망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그러한 조상님을 만난 것은 나의 업이 그 조상님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조상님은 나에게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육신을 주신 감사한 분이면서, 또 전생의 나의 업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내가 있음으로 나의 자손이 있고, 그 자손이 있음으로 또 그들의 자손이 생길 것이고, 이와 같은 식으로 이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내려가 보자.
내가 지금 존재함으로써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존재하겠는가?
즉 나의 육신의 존재로 인하여 앞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업장을 소멸하여 성불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제사의 의의는 나의 업이 소멸될 수 있는 기회에 연이 되어 주신 조상님들께 감사하며, 지금 존재하는 나의 육신이 과연 나의 업장을 소멸시키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참회함과 동시에 조상님들의 삶이 나의 업장소멸의 연이 되었던 것처럼, 나의 후손들에게도 나의 삶이 그들의 업장소멸의 기회에 연이 되었다는 것을 교육하여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바르게 잡아주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 그 의의인 것이다.
제3항 불교식 제사법
① 친자가 제사를 모신다
유교식 제사법에서는 제사를 증손이 물려받지만 불가에서는 그 자식들이 물려받는다.
즉. 할아버지 제사를 아버지가 지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할아버지의 제사를 증손이 물려받는 것이 유교식의 제사법이다.
하지만 불가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 그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며, 어머니도 돌아가시게 되면 작은아버지가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그 작은아버지가 또 돌아가시면 작은어머니가, 또 작은어머니까지도 돌아가시면 세째 작은아버지가, 이러한 식으로 해서 제사는 친자식들이 살아 있는 동안만 모시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없이 딸만 있는 집에서는 큰사위가 그 제사를 지내는데, 큰사위가 죽으면 큰 딸이, 또 큰딸까지도 죽어서 없으면 둘째 사위가 등등 이러한 식으로 친딸들이 살아 있을 때까지만 제사를 모시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외아들이 손자를 남기고 먼저 죽었을 경우의 할아버지 제사는 그 장손이 지내는데, 돌아가신 지 60년까지만 모셔드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불교식의 제사법에서는 유가에서처럼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얼굴도 잘 모르는 조상님들의 제사를 모시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조상님들의 제사를 전혀 모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제삿날, 조상 모든 분들의 위폐를 모시고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불교식이니, 다른 조상님들의 제사 또한 아버지 어머니의 제사 때마다 모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② 위패 쓰는 법
오로지 아버지 어머니의 제사만 모시는 관계로 불교에서는 그 위패를 쓰는 법도 유교식과는 아주 다르다.
한가운데 '나무아미타불' 의 여섯 자 부처님의 명호를 모신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모든 조상님들의 위패를 모시는데, 만약 그 집안이 김해 김 씨이며, 제주가 김아무개라 하면 위패의 오른쪽 하단에는 '효행자 김아무개 복위' 라 쓰고, 중앙에 '김해 김 씨 누대조상 각각등 영가' 라 쓴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제사 지내시는 분의 위패를 모시는데, 김아무개가 김해 김 씨에 김길동이라는 성함을 가지신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경우에는, 위패의 오른쪽 하단에는 '효행자 김아무개 복위' 라 쓰고, 중앙에 '망부 정신사 김해 김 씨 길동 영가'라 쓴다.
그리고 김아무개가 김해 김 씨에 김길동이라는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는 경우에는, 오른쪽 하단에 '효행자 김아무개 복위'라 쓰고 중앙에 '망모 정신녀 김해 김 씨 길동 영가' 라 쓴다.
즉 위패는 한 가운데 부처님의 명호를 모시고, 왼쪽으로는 누대 조상님의 위폐와 오른쪽에는 제를 지내는 분의 위패를 모심으로써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아미타불을 옹위하는 형태처럼 모시는 것이다.
③ 상 차리는 법
음식을 차리는 것은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하는 것이지, 본래 불교 의식은 아니기에 그것이 습관화된 우리에게는 또 음식 장만을 안 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 상을 차리는 것에도 불교적인 의미를 부여한 불교식이 있는 것이다.
음식을 장만하는 의미는 다만 정성인 것뿐이지 실제로 영가가 와서 먹으라고 차리는 것은 아니다.
제사상을 차림에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은, 부처님이 공양을 드실 때는 색과 향과 소리로 공양을 하신다고 하기에 이 점을 지켜 차려야 한다.
색이란 꽃이니 반드시 싱싱한 꽃이 있어야 하며,
향이란 우리가 절에서 사용하는 향으로 제사에 향을 사용함은 물론이고,
그 이외에도 제사상에는 비린 음식 즉 고기류나 생선류는 사용하면 안 되며,
술 대신 차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술 사용을 전혀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술을 사용할 때도 그 냄새가 독한 술을 사용하여서는 안 되며, 또 가게에서 파는 그러한 술을 사용하여서도 안 된다.
향기로운 나뭇잎으로 담근 술을 사용하는데, 이렇게 담근 술은 제사에서 처음 사용되어야지 이미 개봉하여 누가 마시던 것을 사용하면 안 된다.
제사상을 차림에 있어서 보통 삼단으로 차리는데, 삼단이 안 되면 일단으로 차리더라도 세 줄로 차려야 한다.
첫째줄에는 나물과 전 각각 세 가지,
둘째줄에는 밥과 대추와 과자류를 놓는데 이때 과자는 요즘 사람들이 잘 먹는 것으로 한다.
세째줄에는 과일류와 떡을 놓는데, 떡 대신 케익을 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앞에다가 향로와 촛대를 놓는다.
그리고 돌아가신 조상들의 영혼이 직접 와서 그 음식을 드시는 것은 아니기에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으며, 제사가 끝난 후에도 음식을 조금씩 덜어서 버리는 의식도 하지 않는다.
제사상은 음식의 양이나 종류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가족과 친지들이 한데 모여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서 부처님과 조상님께 공양을 올리고 나누어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음식을 만드는 자리에 많은 친지가 참가하고 또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기에 제사상은 효심과 불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우리들의 정성이 나의 업을 밝히고, 후손들의 업을 밝힘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제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운 색깔에 조화가 이루어지게끔 음식을 준비한다.
2) 냄새나는 음식이나 술은 사용하지 않는다. 즉 육류나 생선류는 금하고, 냄새가 나지 않는 채소류로 장만한다.
3) 꽃을 반드시 준비하여 제단을 장엄한다.
4) 향기가 좋은 향을 쓴다.
5) 밥과 국을 올리면서 청수도 함께 올려 중간에 밥을 내리고 물을 올리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6)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지 않는다.
7) 스님이 독경을 할 때 모두가 소리를 맞추어 같이 한다.
8) 법문을 들을 때 진지하게 듣는다.
9) 제사가 끝난 후 음식을 조금씩 덜어 물에 타서 버리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10) 제사 시간은 모든 가족이 다 함께 동참할 수 있는 시간으로 한다.
④ 제사의 집전
유가에서는 그 집안의 가장이 제주가 되며 또 그 가장이 불가의 승려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에 가장이 집전을 하지만, 불가에서는 반드시 스님을 모셔다가 스님으로 하여금 집전을 하게 한다.
독경이 끝난 후 스님은 반드시 법문을 하여서 그 법석을 장엄하여야 한다.
그러나 스님을 모실 수 없는 형편에서는 가장이 집전할 수도 있다.
만약 가장이 집전할 경우, 먼저 부처님의 경전을 다같이 독경하고 나무아미타불을 1분 정도 정근한 후에 축문을 읽는다.
이때 축문이라 하여 어려운 한문으로 쓴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를 써서 낭독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가족이 다같이 앉아서 불교성전의 그 날 정한 부분을 읽고 가장이 약간의 해설을 첨가한 후 그것을 법문으로 대신한다.
그 후 가장이 앞에 나가서 잔을 올리면 모두가 함께 세 번 절한다.
그리고 가장이 또 잔을 따른 후 혼자서 세 번 절한다.
그 다음 가장의 부인, 형제, 아이들 순서로 나아가면서 잔을 올리고 세 번 절한다.
모두가 잔을 올렸으면 가장이 또 나아가 잔을 올리면 다같이 세 번 절을 하고, 위폐를 사른 후 제사를 마친다.
⑤ 보시
제사에 있어서 보시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신 분을 대신하여 욕심을 버려주는 의식이며,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비워진 마음으로 조상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현재의 삶을 참회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또 빈자리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기 위한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제사에 있어서 보시란 가장 중요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는 스님이나 절에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에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보시는 흰 봉투에 넣어서 겉봉에 '어불전(御佛前)' 이라 쓰고 그 밑에 제삿날과 가장의 이름을 쓴다.
그리고 이 보시는 제사를 집전하여 주신 스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사가 끝난 다음날 제주가 직접 절에 가지고 와서 보시함에다가 넣거나 주지스님에게 전달하여야 한다.
또 스님이 집전하지 않고 가장이 집전하였다 하더라도 보시는 제사를 지낸 다음날 절에 가지고 와서 보시함에 넣어야 한다.
또한 보시는 자식들이 욕심을 버리는 행위이므로 금액에 상관하지 않고 욕심이 버려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고 제사에 참가하는 다른 일가 친척들도 반드시 보시를 준비하여야 하는데, 봉투를 쓰는 방법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이 보시는 제사를 지내기 전에 제단에다 올려놓아야 하는데, 이 보시는 다른 일가 친척들이 부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 조상님께 하는 것이므로 보시는 절로 가지고 와서 는 안되며 제주가 사용하여야 한다.
⑥ 주의 사항
제사가 시작되면 의식을 집전하는 스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독경 시에는 그 음률을 따라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소리내서 크게 경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며, 법문을 주의 깊게 듣고, 순서는 집전하는 스님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제4항 제사를 마치는 법
불교의 제사는 돌아가신 지 60년이 되면 마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을 사갑이라 한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 중에는 사갑이란 환갑을 못 지내고 돌아가신 분이 환갑을 맞이하여서 지내드리는 의식을 사갑이라고 하는 이가 있다.
더욱이 웃지 못할 일은, 돌아가신 분의 생일을 맞이하여 생일을 지내 드린다는 이도 있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효심에서 시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어불성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생일은 살아 있기에 그날의 탄생을 기리는 말이고, 제사는 돌아가셨기에 죽은 날을 기리는 날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은 생일을 찾아 잔치를 하는 것이고, 제사는 죽음을 맞이한 날을 찾아 의식을 거행하는 날이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돌아가셨음에도 생일을 기리는 이는 성인들밖에 없다.
부처님 오신 날이나 크리스마스가 그런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부처님은 육신은 돌아가셨어도 그 분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들 가슴속에 살아서 지금도 중생구원의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기에, 부처님의 제사를 지내드리지 않고 생일을 찾아 우리들이 축하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만약 자신의 부모님이 부처님과 같은 성인이라고 생각하면 생일을 찾아드려야 하겠지만 그때는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면서 또 생일을 찾아준다는 것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환갑이라고 하면 60년을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축복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이 환갑을 지내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환갑을 맞이하였다 하여 그것을 사갑이라는 말로서 명명하여 제사를 지낸다니 무엇을 축하하자는 것인가?
의미도, 뜻도 없는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어쨌든 사갑이란, 환갑을 지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이 환갑을 맞이하게 된 것이 사갑이 아니라, 돌아가신 지 60년이 되는 해를 사갑이라 하고, 이 사갑의 제사를 마지막으로, 그 분에 대한 모든 제사의식은 마치게 된다.
이 때는 절에 가서 그 분의 천도제를 지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60년을 한결같이 제사 때가 되면 욕심을 비우고 그 비운 자리에 법문을 넣어드리기 위하여 보시를 하고 법문을 들려드렸는데. 아직도 이승에 미련이 있어서 저승으로 가시지 못하였다면 이 천도제를 마지막으로 하여 떠나시라고 하는 의식이며, 나아가서는 마지막까지 효를 다하려는 마음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제사가 다 끝나게 되면, 그분의 위패는 조상님들의 공동위패 속에 들어가 다른 분의 제사 때 합동으로 제를 지내게 되는 것이다.
제5항 유교식 제사법을 불교식으로 바꾸는 법
유교식으로 몇 대에 걸쳐서 제사를 지내 온 이들이 갑자기 조상님들의 제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의 제사만을 모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또 갑자기 그만두어서도 안 된다.
그러기에 유교식으로 지내는 제사를 불교식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조상님들에 대한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
그리고 천도재를 지낸 다음 그 제사법을 불교식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 불교식 제사 (佛敎式祭祀)
불교에서는 소기[小基 : 장례 후 1년]와 대기[大基 : 장례후 2년]를 맞이하거나 죽은 이의 생일을 맞이하면 절을 찾아가 추도 의식을 갖는다.
추도식 진행 순서
1) 개식(開式) - 먼저 사회자, 즉 법사(法師)의 개식 선언으로 추도식을 시작한다.
2) 삼귀의례(三歸依禮) - 불, 법, 승의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의식을 베푼다.
3) 독경(讀經) - 반야심경을 법주가 읽는다.
4) 묵도(默禱) - 참석자 일동이 입정[入定 - 방에 들어가 앉아 선정(禪定)에 듦을 뜻하는 말]하여 드린다.
5) 추도문 낭독(追悼文 朗讀) - 죽은 이의 약력보고를 함께 하기도 한다.
6) 추도사(追悼辭) - 법주가 하는 것으로, 추도와 위안을 겸한다.
7) 감상(感想) - 내빈 중 대표자가 가족에 대한 위로의 말을 한다.
8) 분향(焚香) - 유족이 먼저 하고, 다음에는 참가자가 분향한다.
9) 답사(答辭) - 내빈의 감사에 대한 답례로 제주가 한다.
10) 폐식(閉式) - 개식을 선언한 사회자가 한다.
이외에도 재(齋)와 영반(靈飯)이 있는데, 재(齋)는 사십구재(四十九齋)와 칠칠제(七七齋)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인이 돌아가신 후 49일만에 지내는 불공이 사십구재이고, 고인이 돌아가신 후 77만에 지내는 불공이 곧 칠칠재인 것이다.
Ⅱ. 가정에서의 불교식 제사[齋] 의식집
1. 『불교의식의 이해와 바람직한 집전방법』(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단)
2. 『법요의례』(대한불교진각종)
3. 『광명의 나라』(불광사·불광법회)
4. 『한국의 불교의례』(正覺)
5. 『불자예절과 의식』(김길원)
6. 『현대불자가례』(김근수)
7.「조상에 대한 감사의식을 가족법회로 모시자」(노희순)
1. 『불교의식의 이해와 바람직한 집전방법』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단)
< 가정 제사 (차례) >
# 가정 제례의 필요성
전통적인 제사는 영혼을 위로하는데 그치지만, 불교의 제사는 영가로 하여금 애착심을 버리고 미혹에서 벗어나 왕생극락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명절에는 반드시 엄숙한 불교의식 차례를 봉행함으로써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문의 소중함과 바른 의식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 도리이다.
모든 가족들이 빠짐 없이 동참하도록 하여 화합과 효도의 근본을 배우고, 사후의 세계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도록 어른들이 모범을 보임으로써 교육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 위패 쓰는 법 1
예) 남자인 경우 : 선 엄부 해주후인 무상 최 공 항 영가
先 嚴父 海州后人 無常 崔 公 恒 靈駕
여자인 경우 : 선 자모 남양유인 보리심 홍 순 녀 영가
先 慈母 南陽孺人 菩提心 洪 順 女 靈駕
* 위패 쓰는 법 2
남자인 경우 : 청신사(淸信士) ○○○ 영가
여자인 경우 : 청신녀(淸信女) ○○○ 영가
* 제사를 모시는 사람
윗사람인 경우 : 伏爲
아랫사람인 경우: 記付
불명은 후인, 유인 다음에 쓴다.
두 분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경우는 어느 때나 함께 모신다.
가정 제례 의식
병풍이 있으면 사용한다. 병풍이 없으면 없는대로 제례를 한다.
위패와 사진을 잘 모시고 음식을 진설한다.
생전에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순으로 준비하되, 나물과 과일을 기본으로 한다.
떡, 나물, 전, 송편, 떡국, 과일 등을 준비하며, 불교적인 차례상은 좌우에 국화 등 현란하지 않은 꽃으로 장엄을 한다.
잔을 올리는 것은 녹차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차례상 첫줄은 과일과 과자, 둘째줄은 나물류와 식혜, 셋째줄은 채소와 탕류(湯類), 넷째줄은 전(煎)과 송편, 차(茶), 다섯 번째줄은 밥[메], 갱[국]등의 순으로 진설한다.
위패 병풍
<차례식순>
거불
청혼
공양
묵념
보공양진언
광명진언
찬불가(극락왕생하소서)
발원
음복
거불-대중이 함께-
擧佛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을 청하는 미타거불)
:●●●●●●●●● ●
:●●●●●●●●● ●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절)
南無 極樂道師 阿彌陀佛
:●●●●●●●●● ●
나무 좌보처 관세음보살(절)
南無 左補處 觀世音菩薩
:●●●●●●●●● ●
나무 우보처 대세지보살(절)
南無 右補處 大勢至菩薩
청혼-합장, 대표자가 보통음으로-
請魂(조상님 영가를 모시는 의식)
금일 지극정성 설향봉청 제자 (주소) 거주 가족 등 복위 ○○○ 영가시여, 저희들이 모시는 [추석, 설 및 제사] 차례에 강림하시어 감응하여 주시옵소서.
수위안좌진언
受位安坐眞言
옴마니 군다니 훔훔 사바하(3번)
* 제주는 찻잔을 올리고 모두 3 번 절한다.
공양-합장, 대표자가 보통음으로-
供養 (공양 올리는 의식)
저희 자손들이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의 오분향을 공양하오니 자성의 대지혜를 발하고, 반야의 밝은 등을 켜서 삼계의 어둠을 밝히나이다.
선망부모에게 맑은 차를 드리오니 목마름이 다 없어지옵소서.
선계의 진품과일을 올리오니 진향하시옵고,
진수를 올리오니 든든함이 영원하시길 발원하옵니다.
* 제주는 밥그릇 뚜껑을 연다.
* 가족이 돌아가며 차례로 차를 올린다.
* 절 3번을 한 뒤 가부좌 자세로 앉아 죽비를 3번 치고 잠시 입정을 한다. 끝날 때도 죽비를 3번 친다.
* 보공양진언부터 광명진언까지는 송주목탁으로 집전한다.
-대표자 보통음으로-
오늘 조상님 영가께 올린 모든 진수는 저희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올린 것이니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보공양진언-대중이 함께-
補供養眞言 (영가님께 공양을 올리는 진언)
옴 아아나 삼바바 바아라 훔(3번)
보회향진언
補回向眞言
(두루 공덕을 되돌려주는 진언)
옴 삼마라 삼마라 미만나 사라마하 자거라바 훔(3번)
광명진언
光明眞言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 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 타야 훔(3번)
* 숭늉을 올리고 밥을 떼서 세 번 숭늉에 덜어 넣는다.
발원-대표자-
發願
오늘 저희들이 올린 공양을 받으시고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으시어 아미타부처님의 국토, 극락세계에 태어나시어 저희 후손들이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으로 올바른 삶을 영위하여 깨달음을 얻는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발원하옵니다.
* 다 함께 아미타경, 반야심경, 원각경, 보안장, 무상계, 금강경 중에서 하나를 독송한다.
* 나무 아미타불(7번 또는 21번)-대중이 함께-
* 모두 절 3번 한 후 헌식을 하고 그릇의 뚜껑을 닫고 위패를 사룬다.
* 음복 또는 회음
飮福 會飮
(모여서 차를 마심)
2. 『법요의례』(대한불교진각종)
제5장 제례
제21조 (제례의 구분) 제례는 기제, 절사, 연시제로 구분한다.
제22조 (기제) ① 기제의 대상은 제주로부터 2대조까지로 한다.
② 기제의 시작은 열반하신 날의 묘시[오전 5∼7시]와 진시[오전 7∼8시]로 한다.
제 23조 (절사) ① 절사의 대상은 직계 조상으로 한다.
② 절사는 매년 추석 아침에 종손의 가정에서 지낸다.
③ 절사의 참사자 범위는 직계 자손으로 한다.
제 24조 (연시제) 연시제는 매년 1월 1일 아침에 지낸다.
제 25조 (향적반<제수>) ① 향적반은 생미와 다과로써 설시하고, 사진이나 지방을 사용한다.
②향적반(제수)을 차리는 방법은 별지 7호와 같다.
③절사와 연시제의 경우에도 기제에 준한다.
제 26조 (제식 절차) 기제 및 절사와 연시제의 진행절차는 다음과 같다.
1. 일동 참석
2. 정공
3. 헌화
4. 법식
5. 훈향 재배(제주만 훈향재배하고, 참사자는 일동 합장례한다.)
6. 독경(무상게송[법불교 p.144] 추선불사[법불교 p.70]
명 마칠 때 복닦음에 따라 모든 죄를 소멸함[법불교문 p.141])
7. 유가삼밀(5분간)
8. 고사(별지 8호)
9. 반야심경 독송
10. 일동합장례
11. 폐식
제 27조 (부척) 본 준칙은 결의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우리 진각종단인으로써는 본 종단에서 제정한 의례준칙을 실천 준수하고 본종의 교리 자체가 국민의 의무를 적극 실천하는 법이므로 국령에서 제정된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시행 규칙에 위반되는 행은 일체 하지 아니하는 것이 곧 법신 부처님의 본뜻이 되는 것이다.
[별지 6호] 고결식 고사
존영이미 육식떠나 영식홀로 들어나서
진언밀종 인도받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밀엄국토 왕생하여 영겁성불 하시도록
이제법을 베풀어서 영결뜻을 고하옵고
유가삼밀 상응으로 길이추복 하나이다
진기 년 월 일
○ ○ ○
[별지 8호]
기제의 고사
부모, 조부모의 경우
전기 년 월 일
아들(또는 손자) ○○○ 는
(할아버님,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 열반하신후 기일이 다시 돌아와 (할아버님,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의 큰 은혜 더욱 새로워집니다. 생멸없는 법신과 동일한 법으로 길이 받들어 생존하실 때를 추념하여서 향적반을 이루었아오니 법신 부처님의 가지력으로써 영겁에 성불하시옵기 추복하나이다.
[별지 8호] ⑵
년시제 및 절사의 고사
부모, 조부모의 경우
전기 년 월 일
후손 ○○○는 선조 여러 어른님 영위 전에 삼가 고하나이다.
오곡이 무르익은 추석절을(추석의 경우) [희망에 찬 새해(년시제의 경우)를] 맞이하여 여러 선조님의 높으신 은덕이 더욱 새로워 집니다. 생멸 없는 법신과 동일한 법으로 길이 받들어 생존하실 때를 추념하셔서 향적반을 이루었사오니 법신 부처님의 가지력으로써 영겁에 성불하시옵기를 길이 추복하나이다.
[별지 8호] ⑶
기제의 고사, 부부의 경우
전기 년 월 일 남편 ○○○ 는 [아내 ○○○ 는] 당신의 영위 앞에 고합니다.
당신이 열반하시던 날을 다시 당하오니 지난날의 은혜가 더운 새로워집니다. 생존 하실때를 추념하여서 향적반을 이루었사오니 법신 부처님의 가지력으로써 영겁에 성불하시옵기 길이 추복하나이다.
3. 『광명의 나라』(불광사 · 불광법회)
< 불광제례의식 >
1) 불광제례의식의 구조
천도의식으로서의 시식은 부처님 위신력으로 영가에게 자비심을 심어주고 영가로 하여금 미혹을 풀어서 보리도를 이루도록 하는 것으로서 확실한 믿음이 따르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시식의 절차는 먼저 부처님 전에 불공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부처팀의 위신력을 입어 영가를 청하기 위함이다.
제례의식도 시식의식의 축소판으로서 비록 별도의 불공은 생략하지만 부처님전 예경, 찬탄, 축원이 선행되어 불공을 대신하고 청혼과 창혼 절차로 조상의 영가를 초청한 다음 독경을 하여 불법을 전하고, 차와 음식을 공양하며 축원과 염불을 한 후 봉송하는 절차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불광 제례의식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제사의 종류, 시기, 제기와 제수의 준비 및 진설 등 물적인 사항은 종래 시행되어온 제례의식의 관습에 따른다.
(2) 제사중의 독경, 염불시에는 목탁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였다. 그러나 불자가정에서 여건이 허락하는 경우에는 목탁을 사용하여도 좋다.
(3) 제사의 소요시간은 약 30분이며 독경을 더 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반야심경의 봉독 후에 적당한 경전을 택하여 독경할 수 있다.
2) 제사의 준비물
일반적으로 제사의 준비물로서는 제구와 제찬, 그리고 지방, 축문 등이 있다. 제구로서 향안, 향로, 향합, 촛대와 각종 제기를 있는 대로 준비하되, 강신의 절차를 하지 않으므로 모사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축문의 내용은 의식문 중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독축을 하지 않으며 따라서 축문을 준비하지 않는다. 신위는 사진을 모셔도 좋고 지방을 써서 모셔도 좋으나 가급적이면 불교식의 위패를 쓰도록 권장한다. 위패 쓰는 요령은 다음과 같다.
위패 쓰는 요령
예) 홍길동 집안
(1) 조상님들인 경우
先亡祖考 祖上 列位列各 靈駕
(2) 할아버지인 경우
亡祖父 南陽後人 洪公 判書 靈駕
(3) 할머니인 경우
亡祖母 安東孺人 金氏 慶子 靈駕
(4) 아버지인 경우
亡嚴父 南陽後人 洪公 萬重 靈駕
(5) 어머니인 경우
亡慈母 慶州孺人 崔氏 末子 靈駕
(6) 큰아버지인 경우
亡伯父 南陽後人 洪公 千重 靈駕
(7) 작은 아버지인 경우
亡叔父 南陽後人 洪公 百重 靈駕
(8) 남편인 경우
亡家父 南陽後人 洪公 吉童 靈駕
(9) 부인인 경우
亡室人 全州孺人 金氏 順伊 靈駕
(10) 형인 경우
亡舍兄 南陽後人 洪公 徹童 靈駕
(11) 누나인 경우
亡舍姉 南陽後人 洪氏 達子 靈駕
(12) 아우인 경우
亡舍弟 南陽後人 洪末童 靈駕
(13) 누이인 경우
亡舍妹 南陽後人 洪美子 靈駕
영가가 수계불자로서 위패에 법명을 쓰고자 할 때에는 성(姓) 앞에 법명을 기재한다.
예)
法玄 洪公 吉童 靈駕
淸淨行 金氏 順子 靈駕
제사를 지내는 제주(祭主)는 물론 조상의 장남이나 장손이 되며 제사의식을 주관한다. 그러나 제주가 사정상 불광제례의식의 집전이 곤란한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인례를 하도록 한다.
3) 불광제례의식의 진행절차
불광제례의식의 절차는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하여 진행된다.
(가) 입정(入定)
(나) 십념(十念)
(다) 봉향찬(奉香讚)
(라) 정례(頂禮)
(마) 반야심경(般若心經)
(바) 헌다게(獻茶偈)
(사) 권공소(勸供疏)
(아) 가지소(加持疏)
(자) 축원(祝願)
(차) 염불(念佛)
(카) 봉송(奉送)
입정부터 봉향찬까지는 부처님에 대한 예경과 찬탄에 해당하고 정례는 창혼과 청혼 절차에 해당한다. 반야심경은 영가에게 먼저 부처님의 법문을 들려주는 절차이다. 헌다게, 권공소는 영가에게 차와 음식을 공양하는 절차이며 축원, 염불, 봉송은 발원과 회향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의식의 진행절차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입정(入定)
제상에 제수의 진설이 끝나고 위패 등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면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루어 올린 다음 참석자들이 꿇어 앉는다. 바닥에는 좌복(방석)을 준비하며 참석자 중에서 몸이 불편한 사람은 편히 앉도록 한다. 일반 제례의식에서는 강신절차중에 분향재배가 있으나 불교의식에는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영가를 청하는 정례(頂禮)가 있기 때문에 분향을 특별한 절차에 포함시키지 않고 다른 공양물과 같이 의식의 시작전에 올리면 된다. 그러나 참석자중에서 분향 재배와 뇌주재배의 절차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행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
제사의 준비가 끝났으면 인례는 제사가 시작됨을 알리고 정중한 목소리로 “입정 하시겠습니다”라고 하여 다같이 입정하도록 한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제주의 자녀와 아이들로 참석인원이 소수이고 위와 같이 하는 것이 어색한 때에는 “입정” 또는 “입정들 하자”라고 분위기에 맞도록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2) 십념(十念)
십념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열 분의 불보살님 명호를 외우는 것으로서 부처님에 대한 예경이며 시식절차와 비교하면 불공에 해당한다. 통상 십념은 삼 편을 하는데 제례의식에서는 한 번만 하도록 한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구품도사 아미타불
당래하생 미륵존불
시방삼세 일체제불
시방삼세 일체존법
대성 문수사리보살
대행 보현보살
대비 관세음보살
대원본존 지장보살
제존보살 마하살
마하반야 바라밀 <반배>
3) 봉향찬(奉香讚)
인례가 다음과 같은 봉향찬을 낭송하며 대중은 이를 경청한다. 낭송방법은 근엄한 분위기의 조성을 위하여 독축과 같이 길게 뽑으며 천천히 읽는다.
일심지성 기울여 향을사르니
향 구름 걸림없이 널리퍼지매
거룩하온 덕성은 밝게빛나고
부처님의 크신은덕 넘치시나니
이르는 곳곳마다 상서일어라. (반배)
향 구름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소원을 싣고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는 곳을 어디든지 가며 향 구름으로 인하여 조상과 자손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인례자를 위시하여 모든 대중이 끓어앉은 채 진행하였다. 그리고 진설된 제수의 메 뚜껑은 열지 아니하였으며 잔반에 청정수도 채워지지 아니한 상태이다.
4) 정례(頂禮)
부처님께 삼배 올리고 영가를 청하는 절차이다. 인례자는 다음과 같이 안내를 하여야 한다.
"다 함께 일어나서 향운개 보살 마하살께 삼배를 올리겠습니다."
제사의 참석대중은 모두 일어나서 오체투지의 큰 절로 삼배를 올리는데 절할 때에 다음과 같은 염불을 한다.
" 나무 향운개 보살 마하살
(南無 香雲蓋 菩薩 摩訶薩)"
불보살님을 염하며 예경할 때에는 모두 다같이 입으로 창을 하면서 동시에 절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예불올릴 때와 같이 절의 속도에 맞추어 길게 염불을 창하여 삼창 삼배를 하여야 하는데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큰 소리로 창을 하는 것이 숙달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때에는 먼저 인례자가 ‘나무 향운개 보살 마하살’을 평상음으로 세 번 외우고 별도로 삼배를 해도 되고 또는 절할 때마다 매번 염불을 외우고 각각 세 번의 절을 해도 된다.
부처님전 삼배가 끝나면 인례자는 모두 꿇어앉도록 안내를 하고 다음과 같은 창을 한다.
"일심정례 성덕묘고 대원적주
(一心頂禮 聖德妙高 大圓寂主)
망(부, 모) ○○후인(유인) ○공 영가”<반배>
이것은 청혼(請魂)과 창혼(唱魂)을 겸한 것으로 세 번 하도록 하며 한번 할 때마다 합장반배를 한다. 그리고 재래제사의 독축과같이 소리를 길게 뽑아서 낭송하도록 한다.
예컨대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경우에 성이 김해 김 씨라면 ‘일심정례 성덕묘고 대원적주 망엄부 김해 후인 김공 영가’와 같이 제주를 중심으로 관계의 호칭을 부른다. 우리나라 예절에서는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덕성이 수미산만큼 높으시고 청정한 열반의 세계에 들어 가신 아버님 김해 김 씨 영가에게 인사드린다는 내용이다. 인례의 청혼 삼창이 끝나면 모두 일어나서 영가에게 재배한다. 이때에는 부처님전과 마찬가지로 합장하고 오체투지의 큰절을 하도록 한다.
기제사가 아니고 차례를 지내는 경우에는 여러 조상님께 제사를 올리는데 직계 존비속간의 겸상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옛날의 예절을 지키기 위하여 제삿상을 각각 차려서 여러 번 제사를 지내는 집안도 있다. 그런데 불교의식은 모든 대중이 함께 동참하여 공양받고 법문을 듣는데 그 의의가 있으므로 이와 같이 여러 번 각각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종래의 풍습과 상치되어서는 안 되므로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제사 모시는 여러 대의 조상님 영가를 모두 부른 다음 재배하는 것이 아니고 한 대(代)의 양위분 영가를 3청 한 다음 재배하고 다시 다음 대의 영가를 3청 한 후 재배하도륵 한다. 이렇게 각각 영가를 청하여 재배함으로써 영가가 서열을 찾아 앉게 되는 것이므로 각상을 차리는 것으로 대신하여 독경, 염불 및 법식의 공양을 다함께 받으시도록 한다. 또 이와 같은 내용을 집안 어른들께 말씀드려서 오해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
5) 반야심경 봉독
재배가 끝나면 참석대중이 꿇어앉아 인례의 안내에 따라 반야심경을 독송한다.
6) 헌다(獻茶)
부처님와 위신력으로 영가를 청하여 반야심경의 법문을 공양하였으므로 이제는 차와 음식을 공양할 차례이다.
먼저 제주가 일반 제례의식의 초헌에 해당하는 절차를 행한다. 잔을 올리고 메 뚜껑을 연 다음 젓가락을 진수에 걸고 재배를 한다.
인례는 다음과 같은 헌다게(獻茶偈)를 낭송하며 대중은 합장하고 경청한다.
향기로운 백초림 신선한맛을
조주스님 몇천번을 권하였던가
돌솥에 강심수 고이다려서
영가님 앞앞마다 드리옵나니
작은정성 거두시어 받아드시고
밝은마음 가득하여 안락하소서. <반배>
헌다게의 낭송이 끝나면 차례로 잔을 올리고 재배하는데 아헌 또는 종헌의 절차를 진행해도 되고 수를 헤아리지 않고 참석자들이 잔을 올려도 된다.
헌다가 끝나면 유식 절차와 같이 삽시와 정저를 하고 참석 대중이 다함께 재배를 한다.
7) 권공소(勸供疏)
권공소(勸供疏)를 인례와 대중이 다 함께 독경식으로 낭송한다. 만일 대중이 함께 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인례가 혼자 낭송하고 대중이 경청하여도 무방하나 가급적이면 모든 대중이 함께하는 것이 영가를 위해서 많은 공덕이 된다.
제가이제 비밀한말 베푸옵나니
부처님의 미묘법문 위신력받아
몸과마음 윤택하고 모든업쉬어
모든고통 벗어나서 해탈하소서
보공양진언(普供養眞言): 옴 아아나 삼바바 바아라 훔 (3번)
권공소의 낭송이 끝나면 재래 제사의식중 진다(進茶)에 해당하는 절차를 진행한다. 즉, 철갱, 진숙냉, 철시, 합반개인데 국을 물리고 숙냉을 올린 다음 영가전의 메에서 밥을 세 번에 나누어 데서 물에 말아 수저를 물그릇에 담가 놓음으로써 정성스럽게 권하는 것이다. 이때 수저의 자루가 왼쪽(영가를 중심으로는 오른쪽)에 놓여야 하며 진수에 놓여있던 젓가락의 끝을 가지런히 맞추어 다른 진수에 옮겨 놓는다.
잠시후 숙냉그릇에 담가 놓은 수저를 거두어 시첩 위에 놓고 메 뚜껑을 닫은 후에 제주가 분향하고 잔을 올리며 참석대중이 다같이 재배한다.
8) 축원(祝願) 및 염불(念佛)
대중이 합장하고 꿇어앉은 가운데 인례는 다음과 같은 축원문을 낭송한다. 축원문은 일반 행사에서 축사 또는 답사를 읽을 때와 같이 낭독하면 된다.
축원문(祝願文)
저희들 우러러 일심기울여
대원적 조상님 생각하올때
천품이 어지시고 밝으시옵고
성인의 크신뜻을 받드셨어라
덕성은 온이웃에 널리떨쳤고
정행은 불보살을 본받으시니
온천지가 받드는 덕본이시라
세간의 인연이 다하시오매
무상이 소리없이 찾아들으니
번뇌몸 집착없이 시원히벗고
극락국 구품연대 이르셨어라
저희들 아손들은 눈물삼키고
크신은덕 새기며 감격하여서
자용을 우러러 망극합니다.
저희들이 불보살님 크신성호를
일심지성 기울여서 봉송하오며
미성다한 진수다과 올리옵나니
해탈식 법식으로 거둬주시사
대보리 연화좌에 자재하소서. <반배>
축원문의 낭송이 끝남과 동시에 다함께 바라밀 염송을 21편한다.
염불(念佛)
나무삼세불모 성취만법 무애위덕
마하반야바라밀 ― ―(21편)
저희들이 지은바 이공덕이
일체의 중생들의 공덕이되어
모든중생 빠짐없이 성불하옵고
위없는 불국토를 이뤄지이다. <반배>
9) 봉송(奉送)과 철상(撤床)
봉송은 재래 의식의 사신(辭神)과 마찬가지로 신위에 하직인사를 올리는 것이다. 인례의 다음과 같은 안내에 의하여 참석대중이 일어나서 봉송인사로 재배를 한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봉송 인사로 재배하십시오.”
봉송인사로 재배가 끝나면 일어선 채 인례가 다음과 같이 낭송하며 참석대중은 합장하고 경청한다.
상래에 초청하온 영가이시여
부처님의 법력빌어 내림하여서
법다운 공양받고 법문들으니
이제 극락국에 이르옵소서. <반배>
다음과 같이 철상과 음복을 하며 인례자는 밖으로 나아가서 위패를 사르며 다음과 같은 진언을 외운다.
상품상생진언(上品上生眞言)
옴 마리다리 훔훔 바탁 사바하 (3)
4. 『한국의 불교 의례』(正覺)
< 다례(茶禮) >
『송사(宋史)』의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조에 " 매년 정월 초하룻날에 …… 조상의 사당에 제사지냅니다"는 기록이 발견되고 있음을 미루어 원단(元旦)에 조상께 제사 올리던 풍속의 연원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고려도경(高麗圖經)』가운데 "원단에 … (중략) … 조상의 신주(神主)에 제향을 드리는데, 부중(府中)에 그 화상을 그려 놓고 승려들을 거느리고 범패(梵唄)를 노래하며 밤낮을 계속한다."고 기록되기도 하는 바,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행하는 가운데 스님들의 의해 범패가 불리워졌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이후 고려말 이래 조선조에는 주자(朱子)의 『주문공가례(朱門公家禮)』에 따른 관혼상제(冠婚喪祭)가 행해졌던 바, 고려 말 조준(趙浚).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의 주청에 의해 『주문공가례』에 의한 관혼상제 가운데 다례(茶禮)가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재(李縡)는 『사례편람』을 저술하는 가운데 "차는 본래 중국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사용되지 않기에 『가례』의 절차에 나와 있는 설다(設茶).점다(點茶: 차를 끓여 올리는 것)와 같은 글귀는 모두 빼버렸다"고 말하고 있으며, 『열양세시기』에 "『사민월령(四民月令)』에 술잔을 올리는 순서는 ……"이란 기록이 남아 있음을 미루어 18세기 전후로 제사(祭祀)를 행함에 있어 술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서울 풍속에 이 날 사당이나 집마다 제사 지내는 행사를 차례(茶禮)라고 한다"라 하여 차례란 용어가 등장하는 바, 차(茶)로 제사 지내는 것을 존다(尊茶)라 말하고도 있다.
한편 『경도잡지』의 「채연(采烟)」조에, "차는 연경에서 사오거나 혹은 작설(雀舌). 생강. 꿀을 이에 대신한다"는 표현 중 '작설'이란 차의 이름이 등장하는 점을 미루어, 일부에서는 차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이에 제사가 아닌 차례의 경우 술을 올림이 아닌 차(茶)를 공양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조 후기에 형성된 『열양세시기』 가운데 "승려들은 제석(除夕)날 밤 자정이 되면 마을의 인가에 내려와서 '제(祭)를 올릴 쌀을 주시오' 하고 시주를 구한다"라는 기록 외에, 승가에서 행하던 제사 및 차례의 행법 등에 대한 문헌이 전해지지 않는 관계로 이에 대한 확정을 행할 수는 없다.
다만 근래에 들어 ′97년 천중사에서는 일반 차례를 모시는 데 사용될 차례 의식의 양태를 시험 복원해서 선보였던 바, 이는 다음의 행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절에서 차례를 행할 경우) 먼저 법당의 상단(上壇)에 꽃(모란.작약.연꽃)과 중단(中壇)에는 과일과 떡.과자류를, 하단(下壇)에는 밥과 차.향료 등을 (감로왕탱화의 예를 따라) 진열하고,
② '현고학생부군신의'등의 위패 명목 대신 '선엄부(先嚴父) ??? 영가(靈駕)'거나 '선자모(先慈母) ??? 영가(靈駕)' 및 스님의 경우 '??당(堂) 대종사(大宗師) ??화상(和尙) 각령(覺靈)'으로서 위패의 목(目)을 작성한 다음,
③ 『불교차례상 차림표』(도표24)와 같이 상을 차리고 위패를 모심으로서 차례 준비를 마친다.
이어 ④ 차례의 순서로서, ?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을 모시는 『거불(擧佛)』을 행한 다음, ? 『다게(茶偈)』를 독송함과 함께 조상의 영가(靈駕)를 모시는 『청혼(請魂)』의식을 행한다.
다음으로 ? 찻잔을 올리고 절 2번과 함께 「차(茶)와 반(飯)」의 공양을 올린 후 ? 「공양게(供養偈)」와 ? 「보공양진언(普供養眞言)」을 독송함으로서 영가에게 공양을 올린다. 다음으로 ? 공양의 공덕이 널리 법계의 중생들에게 회향되기를 원하는 내용의 「보회향진언(普回向眞言)」및 ? 「발원」을 행함으로서 제사를 마무리하며, 제사가 끝난 다음 ? 영단(靈壇)에 큰절을 두 번 올린 후 ? 「헌식(獻食)」과 함께 ? 위패(位牌)를 사르는 순서로서 전체 차례의식을 마무리하는 바, 이에는 천도(薦度)의 기원을 담은 재(齋)의 의미까지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차례를 행함에는 일반적으로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공훈이 많아 4대가 지나도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된 위패)의 조상과 함께 4대 조상의 위패가 모셔진다.
한편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남녀 어린이들이 새 옷으로 갈아 입는 것을 세장(歲粧)이라 하고, 문중의 친척.어른.노인을 찾아가서 문안하고 절하는 것을 세배(歲拜)라 한다"고 하며, "새해인사의 말은 나이 어린 친구들을 보면 '금년에는 꼭 과거에 장원하시오', '벼슬이 올라가시오', '생남(生男)을 하거나 돈을 많이 버시오' 하고 인사말을 한다.
이 말을 덕담(德談)이라 하며, 상호간에 축하하는 풍속이다"라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차례를 필두로 새해 첫날은 시작된다.
그리고 차례가 끝난 후 축원의 말로서 행해지는 미래 단정형의 덕담. 이것은 인간 언어에 깃든 영적(靈的) 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생겨난 것으로서 이해된다.
5. 『불자 예절과 의식』(김길원)
< 불자와 제사 >
예로부터 전해오는 제례의식이나 현재 가정의례준칙에 의한 제례의식은 종교와 무관한 것으로 확실한 신앙심이 없이 조상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시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상이 직접 강림하여 흠향하신다는 막연한 가정으로 최고 어른을 대하는 엄격한 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의식의 내용을 보면 초헌, 아헌, 종헌, 유식 등 주로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엄격한 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조상에 대하여 공경심을 갖게 하는 한편 후손에 대한 과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자손들에게 조상의 제사를 보여줌으로써 도덕적, 교육적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대부분이 헌작과 재배로 일관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불자가 조상을 대하는 태도는 그 이상이다. 불자는 조상에 대한 공경심과 추모의 뜻을 가지는 것은 물론이며 조상의 영가로 하여금 반야의 지혜를 깨달아 정각을 이루도록 하여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은 천도의식의 내용에서 충분히 그 의의를 살펴보았다. 불교 의식중에는 아직까지 통일된 재가의 제례의식을 마련하고 있지 않다. 천도의식이란 작법이 간단하지 않고 작법자의 법력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아무나 집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재가의 제례의식과 비교할 때에 음식과 술을 신위전에 올리고 절을 하며 추모의 정을 나타내는 독축도 중요하지만 영가에게 염불 또는 독경으로 법문을 들려주는 것이 훨씬 보람있는 일이라 하겠다. 물론, 재래의 제례의식을 배타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제사가 끝난 후에 다음과 같이 일심으로 염하고 독경염불을 하여도 좋을 것이다.
"조상님을 위하여 이제 염불 독경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시고 무한의 공덕이시니 염불 독경하면 대자대비 은혜를 입습니다. 저희 이제 일심으로 염하오니 독경소리 들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염불하시어 부처님의 크신 은혜입고 극락세계에 나소서."
그리고 염불 끝에는 다음과 같이 염을 한다.
"조상님 이렇게 제사를 받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부디 염불공덕으로 극락세계에 나시고 부처님의 공덕을 입으셔서 크게 깨달으사 모든 중생을 제도하소서. 이만 제사를 마치오니 안녕히 가시고 다른날 청하는 때에 다시 왕림 하옵소서."
그런데 현재의 실정은 유교식 제사마저도 점점 잊혀져 가고 있어 제사의식 자체의 존립이 위태로운 지경이다. 이러한 때에 재가의 제례의식을 다시 익혀서 제사를 지내고 독경염불을 하는 것보다는 불자들에 알맞는 재가 제례의식의 제정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천도의식은 조상뿐만 아니라 여러 영가를 초청하여 그들에게 법문을 들려주는 것으로서 작법에 밝아야 하고 작법자의 법력이 필요하므로 가정에서 시식을 행하는 것은 적당하지가 않다. 구러나 아주 간단히 조상의 영가만을 초청하여 제수를 올리고 독경, 염불하는 형식의 제사는 그 필요성이 인정된다 하겠다.
6.『현대불자가례』(김근수)
<불교식 제례(祭禮)>
1. 불교 제례의식의 근본
불교의 제례는 기제사 등 일반의 제사를 모두 포함하고 여기에 백중(白衆:음력 7월 15일)일에 봉행하는 우란분재(盂蘭盆齋) 그리고 수시행사로 위령제나 수륙재(水陸齋) 등의 법요를 추가하면 됩니다.
불교의 제례의식은 일종의 천도의식으로 부처님 위신으로 영가에게 지혜를 밝혀주고 자비심을 심어 주어 미혹을 풀어서 보리도를 이루도록 하는 것으로 굳은 신심을 바탕으로 한 의식입니다.
2. 제사의 준비 및 위패
일반적으로 제사의 준비물으로서는 제주와 제찬, 그리고 지방, 축문 등이 있고, 제구로서 향안, 향로, 향합, 촛대와 각종 제기를 모두 준비하되 강신의 절차는 하지 않으므로 모사를 준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교제례의식에서 술과 고기를 쓰지 말고 차와 과일, 떡, 나물, 밥 등을 준비합니다.
축문의 내용은 의식문 중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독촉을 하지 않으며 따라서 축문은 준비하지 않습니다. 신위는 영정 또는 사진을 모셔도 좋고 지방을 써서 모셔도 좋으나 가급적이면 불교식의 위패(位牌)를 쓰는 것이 좋습니다.
* 위패 쓰는 요령
① 조상님의 경우 : 先望祖考 祖上 列立列各 靈駕
② 할아버지 : 亡祖父 ○○後人 ○公 判書 靈駕
③ 할 머 니 : 亡祖母 ○○孺人 ○氏 ○○ 靈駕
④ 아 버 지 : 亡嚴父 ○○後人 ○公 萬重 靈駕
⑤ 어 머 니 : 亡慈母 ○○孺人 ○氏 靈駕
⑥ 남 편 : 亡家父 ○○後人 ○公 靈駕
⑦ 부 인 : 亡室人 ○○孺人 ○氏 靈駕
⑧ 형인 경우: 亡舍兄 ○○後人 ○公 ○○ 靈駕
⑨ 누나 경우 : 亡舍姉 ○○孺人 ○氏 ○○ 靈駕
⑩ 아우 경우 : 亡舍弟 ○○後人 ○○○ 靈駕
⑪ 누이 경우 : 亡舍妹 ○○孺人 ○○○ 靈駕
※ 영가가 수계불자로서 위패에 법명을 쓰고자 할 때 성(姓)앞에 법명을 기재합니다.
- 法玄 ○公 ○○ 靈駕
- 淸淨行 ○氏 ○○ 靈駕
⑴ 입정(入定) …………………………………………………… 모두가
⑵ 십념(十念) …………………………………………………… 모두가
⑶ 봉향찬(奉香讚) ……………………………………………… 인례자
⑷ 정례(頂禮) …………………………………………………… 인례자
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봉독 ……………………………… 모두가
⑹ 헌다(獻茶) …………………………………………………… 인례자
⑺ 권공소(勸供疎) ……………………………………………… 다같이
⑻ 축원(祝願) 및 염불(念佛) ………………………………… 인례자
⑼ 장엄염불(莊嚴念佛) ………………………………………… 인례자
⑽ 무량수 불설왕생정토주(無量壽 佛說往生淨土呪) ……… 다같이
⑾ 봉송(奉送)과 철상(撤床) ……………………………………인례자
⑿ 우리말 무상계(無常戒) ………………………………………다같이
⒀ 보회향 진언(普回向 眞言) ………………………………… 인례자
■ 입정 (入定)
제상에 제수의 진설이 끝나고 위패 등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면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루어 올린 다음 참석자들이 모두 끓어 앉습니다.(좌복준비)
일반 제례의식에는 강신절차등에 분향재배가 있으나 불교의식에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영가를 청하는 정례가 있기 때문에 분향을 특별한 절차에 포함시키지 않고 다른 공양물과 같이 의식의 시작 전에 올리면 됩니다.
제사준비가 끝났으면 인례가 제사가 시작됨을 알리고 정중한 목소리로 "입정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입정합니다.
■ 십념(十念)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구품도사 아미타불
당래하생 미륵존불
시방삼세 일체제불
시방삼세 일체존법
대지문수 사리보살
대행보현보살 대비 관세음보살
대원본존지장보살 제존보살마하살
마하반야바라밀 <반배>
■ 봉향찬(奉香讚)
모두 끊어 앉은 상태에서 인례자는 봉향찬을 길게 뽑으며 천천히 읽습니다.
"일심 지성 기울여 향을 사르니 향 구름 걸림 없이 널리 퍼지매 거룩하온 덕성은 밝게 빛나고 부처님의 크신 은덕 넘치시나니 으르는 곳마다 상서 일어라" <반배>
■ 정례(頂禮)
부처님께 삼배 올리고 영가를 청하는 절차입니다.
"다같이 일어나 향운개 보살 마하살 하면서 큰 절 삼배를 올리겠습니다." 라고 하고, 삼배를 올리면서
"나무 향운개 보살 마하살(南無 香雲蓋 菩薩 摩訶薩)"
합니다.
부처님전 삼배가 끝나면 인례자가 모두 끓어앉도록 하고 다음과 같이 창을 3번하고, 한 번할 때마다 합장 반배하도록 합니다.
"일심정례 성덕묘고 대원적주 (一心頂禮 聖德妙高 大圓寂主)
망(부, 모) ○○後人(孺人) 공(씨) 靈駕" <반배> (3번)
이것은 청혼(請魂)과 창혼(唱魂)을 겸한 것으로 기제사가 이나고 차례를 지내는 경우에는 한 대(代)의 영가를 3청 한 다음 재배하고, 다시 다음대의 영가를 3청한 후 재배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각각 영가를 청하여 재배함으로써 영가가 서열을 찾아 앉게 되고 이것으로 각상을 차리는 것으로 대신하여 독경, 염불 및 법식의 공양을 다함께 받으시도록 합니다.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헌다(獻茶)
영가에게 차와 음식을 공양하는 순서입니다 먼저 제주가 일반 제례의식의 초헌에 해당하는 절차를 행합니다.
잔을 올리고 메 뚜껑을 연 다음 젓가락을 진수에 걸고 재배를 합니다.
그리고 인례자는 다음과 같은 헌다게(獻茶偈)를 낭송하며 대중은 합장하고 경청하도록 합니다. (요령)
백초임중일미신 향기로운 백초림 신선한 맛을
白草林中一味新
조주상권기천인 조주스님은 몇 사람에게 권했던가.
趙州上勸幾千人
팽장석정강심수 돌솥에 강심수 정성스레 다렸아오니
烹將石鼎江心水
원사망령헐고륜 바라옵건대 영가시여 윤회에서 벗어나소서
願使亡靈歇苦輪
원사고혼헐고륜 바라옵건대 고혼이시여 윤회에서 벗어나소서
願使孤魂歇苦輪
원사제령헐고륜 바라옵건대 모든 영가여 윤회에서 벗어나소서
願使諸靈歇苦輪
상래소청제불자 향설오분지진향 훈발대지
上來召請諸佛子 香?五分之眞香 熏發大智
등연반야지명등 조파혼구 다헌 조주지청다
燈燃般若之明燈 照破昏衢 茶獻 趙州之淸茶
돈식갈정 과헌 선도지진품 상조일미
頓息渴情 果獻 仙都之眞品 常助一味
식진향적지진수 영절기허 금일영가 어차물물
食進香積之眞羞 永絶飢虛 今日靈駕 於此物物
종종진수 부종천강 비종지용 단종재자지일편
種種眞羞 不從天降 非從地聳 但從齋者之一片
성심유출 나열영전복유상향-요령 내림
誠心流出 羅列靈前伏惟尙饗
헌다게의 낭송이 끝나면 차례로 차를 올리고 재배합니다. 가족의 잔올림이 끝나면 다함께 재배합니다.
■ 권공소(勸供疎)
권공소(勸供疎)를 인례와 대중이 다 함께 독경식으로 낭송합니다. 만일 대중이 함께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인례가 혼자 낭송하고 대중이 경청하여도 무방하나 가급적이면 대중이 함께 하는 것이 영가를 위해서 많은 공덕이 됩니다.
제가 이제 비밀한 말 베푸옵나니 부처님의 미묘 법문 위신력 받아 몸과 마음 윤택하고 모든 업 쉬어 모든 고통 벗어나서 해탈하소서.
권공소의 낭송이 끝나면 재래 제사 의식중 진다(進茶)에 해당하는 절차를 진행합니다. 국을 올리고 숙냉을 올린 다음 영가전의 메에서 밥을 3번 나누어 떠서 물에 말아 수저를 물그릇에 담가 놓음으로써 정성스럽게 권합니다.
이때 수저의 자루가 왼쪽(영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놓아야 하며 진수에 놓여있던 젓가락의 끝을 가지런히 맞추어 다른 진수에 옮겨 놓습니다.
잠시후 숙냉 그릇에 담가 놓은 수저를 거두어 시첩 위에 놓고 메 뚜껑을 닫은 후에 제주가 분향하고 잔을 올리고 참석 대중이 다같이 재배합니다.
■ 축원(祝願) 및 염불(念佛)
축원문
저희들 우러러 일심 기울여서 대원적 ○○○을 생각하올 때 천품이 어질고 밝으시옵고 성인의 크신 뜻을 받드셨어라. 덕성은 온 이웃에 널리 떨쳤고 정행은 불보살을 본받으시니 온천지가 받드는 덕본이시라.
세간의 인연이 다하시오매 무상이 소리 없이 찾아들으니 번뇌몸 집착없이 시원히 벗고 극락국 구품연대 이르소서.
저희들 아손들은 눈물 삼키며 크신 은덕 새기며 감격하여서 자용을 우러러 망극합니다.
저희들이 불보살님 크신 성호를 일심정성 기울여서 봉송하오며 미성다한 진수다과 올리옵나니 해탈식 법식으로 거둬 주시사 대보리 연화좌에 좌재하소서. <반배>
※ 축원문 대신으로 발원문을 어린 자녀가 봉독해도 좋습니다.
발원문 (할아버지 할머니 평안하소서)
삼가 조상의 영전에 향사르며 우리 후손들 모두가 배례하나니 할아버지 할머니 평안하소서.
저희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리며 이렇게 발원합니다.
당신들이 남기신 생전에 남기신 뜻은 크고 훌륭하며 자손들은 대대로 받아 지녀 사회와 겨레를 위해 그 뜻을 펴고 있으니 할아버지 할머니 부디 기뻐하소서.
그리고 후손들을 기특히 여기소서.
아득한 옛부터 닦아온 이 땅에는 수많은 선조들의 지혜가 숨쉬고 오늘은 저희들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배달민족들의 핏줄은 반드시 이어져야 하고 그 기세를 만방에 떨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사명이고 소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로는 부처님 말씀을 받아 겨레에게 전하고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들고자 인욕과 정진의 길을 닦고 있으니 이 또한 부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위대하십니다. 세존의 말씀이시여.
또한 거룩하시어라 조상의 슬기여.
당신들의 크나큰 뜻 깊이 받들어 오늘 이처럼 배례하오니 섭수하소서 세존이시여,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평안하소서
우리 함께 자리하여 공양 올리나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장엄염불(莊嚴念佛)
원아진생무별념 아미타불독상수 심심상계옥호광
願我盡生無別念 阿彌陀佛獨相隨 心心常係玉毫光
염염불리금색상 아집염주법계관 허공위승무불관
念念不離金色相 我執念珠法界觀 虛空爲繩無不貫
평등사나무하처 관구서방아미타 나무서방대교주
平等舍那無何處 觀求西方阿彌陀 南無西方大敎主
무량수여래불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만 다 같이함)
無量壽如來佛 南無阿彌陀佛
* 극락세계 십종장엄(極樂世界 十種莊嚴)
법장서원수인장엄 사십팔원원력장엄 미타명호수광장엄
法藏誓願修因莊嚴 四十八願願力莊嚴 彌陀名號壽光莊嚴
삼대사관보상장엄 미타국토안락장엄 보하청정덕수장엄
三大四觀寶像莊嚴 彌陀國土安樂莊嚴 寶河淸淨德水莊嚴
보전여의누각장엄 주야장원시분장엄 이십사락정토장엄
寶殿如意樓閣莊嚴 晝夜長遠時分莊嚴 二十四樂淨土莊嚴
삼십종익공덕장엄
三十種益功德莊嚴
* 미타인행 사십팔원(彌陀忍行 四十八願)
악취무명원 무타악도원 동진금색원 형모무차원 성취숙명원
惡趣無名願 無墮惡道願 同眞金色願 形貌無差願 成就宿命願
생획천안원 생획천이원 실지심행원 신족초월원 정무아상원
生獲天眼願 生獲天耳願 悉知心行願 神足超越願 淨無我想願
결정정각원 광명보조원 수량무궁원 성문무수원 중생장수원
決定精覺願 光明普照願 壽量無窮願 聲聞無數願 衆生長壽願
개획선명원 제불칭찬원 십념왕생원 임종현전원 회향개생원
皆獲善名願 諸佛稱讚願 十念往生願 臨終現前願 回向皆生願
구족묘상원 함계보처원 신공타방원 소수만족원 선입본지원
具足妙相願 咸階補處願 晨供他方願 所須滿足願 善入本智願
나라연력원 장엄무량원 보수실지원 획승변재원 대변무변원
那羅延力願 莊嚴無量願 寶樹悉知願 獲勝辯才願 大辯無邊願
국정보조원 무량승음원 몽광안락원 성취총지원 영리녀신원
國淨普照願 無量勝音願 蒙光安樂願 成就總持願 永離女身願
문명지과원 천인경례원 수의수염원 자생심정원 수현불찰원
聞名至果願 天人敬禮願 須衣隨念願 ?生心淨願 樹現佛刹願
무제근결원 현증등지원 문생호귀원 구족선근원 공불견고원
無諸根缺願 現證等持願 聞生豪貴願 具足善根願 供佛堅固願
욕문자문원 보리무퇴원 현획인지원
慾聞自聞願 菩提無退願 現獲忍地願
인례자 : 나무서방정토 극락세계 삼십육만억 일십일만구
南無西方淨土 極樂世界 三十六萬億 一十一萬九
천오백 동명동호 대자대비 아미타불 나무서방정토 극락세계
千五百 同名同號 大慈大悲 阿彌陀佛 南無西方淨土 極樂世界
불신장광 상호무변 금색광명 변조법계 사십팔원 도탈중생
佛身長廣 相好無邊 金色光明 ?照法界 四十八願 度脫衆生
불가설 불가설 전 불가설 항하사 불찰미진수 도마죽위 무한극수
不可說 不可說 轉 不可說 恒河沙 佛刹微塵數 ?麻竹葦 無限極數
삼백육십만억 일십일만구천오백 동명동호 대자대비 아등도사
三百六十萬億 一十一萬九千五百 同名同號 大慈大悲 我等導師
금색여래 아미타불
金色如來 阿彌陀佛
나무문수보살 나무보현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南無文殊菩薩 南無普賢菩薩 南無觀世音菩薩 南無大勢至菩薩
나무금강장보살 나무제장애보살 나무미륵보살 나무지장보살
南無金剛藏菩薩 南無除障碍菩薩 南無彌勒菩薩 南無地藏菩薩
나무일체청정 대해중보살마하살
南無一切淸淨 大海衆菩薩摩訶薩
원공법계제중생 동입미타대원해
願共法界諸衆生 同入彌陀大願海
시방삼세불 아미타제일 구품도중생 위덕무궁극 아금대귀의
十方三世佛 阿彌陀第一 九品度衆生 威德無窮極 我今大歸依
참회삼업죄 범유제복선 지심용회향 원동염불인 진생극락국
懺悔三業罪 凡有諸福善 至心用回向 願同念佛人 盡生極樂國
견불요생사 여불도일체
見佛了生死 如佛度一切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願我臨欲命終時 盡除一切諸障碍 面見彼佛阿彌陀
즉득왕생안락찰
卽得往生安樂刹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如衆生 當生極樂國 同見無量壽
개공성불도
皆共成佛道
원왕생 원왕생 원생극락견미타 회몽마정수기별
願往生 願往生 願生極樂見彌陀 獲蒙摩頂受記押
원왕생 원왕생 원재미타회중좌 수집향화상공양
願往生 願往生 願在彌陀會中坐 手執香華常供養
원왕생 원왕생 원생화장연화계 자타일시성불도
願往生 願往生 願生華藏蓮華界 自他一時成佛道
* 무량수 불설왕생정토주(無量壽 佛說往生淨土呪)
나무 아미다바야 다타가다야 다디야타 아미리 도바비 아미리다 싯담바비 아미리다 비가란제 아미리다 비가란다 가미니 가가나 깃다가례 사바하(3번)
* 봉송(奉送) 및 철상(撤床)
봉송은 제례의식의 사신(辭神)과 마찬가지로 신위에 하직인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인례의 다음과 같은 안내에 의하여 참석대중이 다같이 일어나서 봉송인사로 재배를 합니다.
"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봉송 인사로 재배하십시오"
봉송인사로 재배가 끝나면 일어선 채 인례자가 다음과 같이 낭송하여 참석대주은 합장을 하고 경청합니다.
상래에 초청하온 영가이시여
부처님의 법력빌어 내림하여서 법다운 공양받고 법문 들으니 이제 극락국에 이르옵소서 <반배>
그리고 우리말로 무상계를 다같이 합니다.
철상과 음복을 하고는 가족중에 한분이 위패를 들고 인례자를 따라 밖으로 나가 위패를 사르면 진언을 합니다.
* 보회향진언
옴 사마라 사마라 미만나 사라마하 자가바라 홈(3번)
계수서방 안락찰 접인중생 대도사 아금발원 원왕생 유원자비 애섭수 고아일심 귀명정례
稽首西方 安樂刹 接引衆生 大導師 我今發源 願往生 唯願慈悲 哀攝受 故我一心 歸命頂禮
7. 조상에 대한 감사의식을 가족법회로 모시자(노희순)
< 제사 >
제사의 종류에는 몇 가지가 있으나 여기서는 기제사(해마다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제사는 본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성립된 의식이며 조상에 대한 '감사'의 뜻을 갖고 있다. 우리 전통의식 대부분이 유교와 불교 그리고 토속신앙이 혼합된 형태의 것이지만, 제사는 특히 유교적 색채가 강한 고유의 풍습이다. 불교에서의 제사는 본래 윤회설을 바탕으로 한, 죽은 후에 7일 간격으로 지내는 초재에서 49재까지의 천도재가 거의 전부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기제사는 스스로는 유교 신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도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특정 종교인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 특유의 전통풍습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불자들도 '아름다운 우리의 것'을 지키는 마음으로 그 근본 뜻인 조상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을 거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교적으로 치러야 합이 옳을 것 같다.
제사는 다른 어떤 의식보다 정성을 가장 우선으로 한다. 음식의 많고 적음이 정성의 가늠자가 아니다. 집안 형편에 맞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올리면 그것이 곧 정성을 다하는 것이며 조상께 효도하는 후손으로서의 마음가짐이다. 하여 옛 어른들은 제삿날이 되면 목욕으로 몸을 청결히 했고, 재계(齋戒)로서 마음을 맑게 하지 않았던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은 작은 소반에 받쳐 제사상에 올리는데 상을 놓는 방향은 북쪽으로 한다. 이 까닭은 북쪽이란 방향을 '높은 자리'로 신성시하는 동양적 민속신앙 때문인 듯하다.
전통적인 제사음식을 그대로 차리는 것도 무방하지만 생명을 존중하는 계율에 따라 가능하면 고기종류의 음식을 피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딱이 무슨 무슨 음식만을 어떻게 차리라고 정해진 것은 없으니 평소 고인이 즐겨하던 음식을 올리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기본적인 상차림에는 향, 초, 차(茶), 과일, 꽃, 밥, 국, 나물, 떡과 전 등을 준비하는데 이때 과일이나 꽃 그리고 나물 등은 계절에 따라 바뀔 수 있으며 특별히 가리는 것은 없다.
상의 중앙에는 위패나 사진을 모시게 된다. 과일은 세 가지 색을 준비하여 붉은 과일은 동쪽에, 다른 색은 서쪽에 놓고 맨 앞쪽의 좌우에는 촛대를, 그 가운데에는 향로를 놓는다. 그 외에는 전통의식의 상차림과 비슷하며 단지 술 대신 차를 올리고 꽃을 꽂아 놓는 것도 바람직하다.
간단한 의식순서는 ① 삼귀의, ② 헌향 및 헌다 ③ 독경 ④ 추도의 노래 ⑤ 정근 ⑥ 발원문 ⑦ 사홍서원으로 진행하는데, 불가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의식인 관음시식과 적당히 배합하여, 후손의 정성어린 마음과 고인의 왕생극락을 염원하는 뜻이 담겨있는 새로운 의식을 만드는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제사의 진행은 주로 제주(祭主)가 하지만, 모든 가족들이 같이 동참하도록 한다. 목탁이 있으면 목탁을 사용하고 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제주가 먼저 시작하고 가족들이 뒤따라하는 방법으로 한다.
제사상에 음식을 다 차려놓고 온 가족이 위패(또는 사진)를 향해 서서 삼귀의례를 올리며 삼배한다. 삼귀의는 전통식으로 해도 좋으나 아이들까지 있는 자리라면 노래로 같이 부르는 것이 더 좋다.
헌향 및 헌다의 순서에서는 가족을 대표로 한 사람이 하고, 이때 각자 준비한 꽃 한 송이씩을 영전에 바치는 것도 적당하다. 독경은 보통 금강경, 반야심경, 가라니 중에서 온 가족이 함께 영송할 수 있도록 선택하고, 고인이 이 경을 듣고 천도되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행한다.
추도의 노래는 『통일법요집』 510쪽의 '빛으로 돌아오소서'나 520쪽의 '아미타불송'을 목탁에 맞춰 합장하고, 정근은 '아미타불'을 온 가족이 함께 한다.
가족들 중에서 한 사람이 고인에 대한 애틋한 정과 그리움 그리고 왕생극락을 축원하는 뜻의 발원문을 서서 낭독하거나, 『통일법요집』의 발원문을 인용하여 낭독하는 것도 좋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제사 순서가 끝나면 참석한 모든 사람이 차려놓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고인을 기억하고, 생전의 인생관이나 일화 등을 얘기하며 함께 추모하는 자리를 갖는다.
제사는 씨족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튼튼히 해주는 화합의 역할을 해왔다. 현대 핵가족제도가 빚어낸 친척간의 이질감을 극복하고, 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끈끈한 혈육의 정을 갖게 하는 가족모임이 되도록 경건하고 감동적인 분위기로 진행한다면, 우리 후손에게 물려 줄 좋은 유산이 될 것이다.
< 차례 >
차례는 제사와 순서에 있어 다른 점이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는다. 제사가 고인 한 분만을 모시고 기리는 것이라면 차례는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에 그간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과 한자리에 모여 자신들을 있게 해준 조상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축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차례의 관해서는 아직 불가에서 정립된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아마 전통적인 차례의식에 별다르게 문제점을 느껴오지 않은 까닭으로 보인다.
차례상을 차리는데 있어서 제사상과는 많이 다르지 않다. 단지 제사상의 멧밥이 차례상에는 오르지 않고 대신에 정월 초하루에는 떡국을 올리기도 한다.
식순도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보는 가족 법회형식으로 봉행하는 것을 고려해 볼만하다.
한 해 기제사를 올리는 모든 조상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차례차례 공양하되 식순은 삼귀의례를 시작으로 부처님과 조상님의 은덕에 감사하고, 순서대로의 공양이 끝난 후에 정근과 발원문 봉독을 마친 후, 사홍서원으로 회향한다. 차례로 금강경, 반야심경, 법성게, 다라니 등을 독경하고 발원문 또한 왕생발원문 형식을 선택하여 낭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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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래의 글은 어떤 분이 세기경과 기세경 기세인본경 등에서 간추려서 정리한 내용을 올려 놓은 걸 퍼왔습니다.
참고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불교의 우주관
1) 세계의 기원
세계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함경 가운데 ,<세기경(世記經)>, <기세경(起世經)>,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들의 업력(業力)에 의해 허공에 바람이 일어 풍륜(風輪)이 생기게 됩니다.
다시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풍륜 위에 구름이 일어나 수륜(水輪)이 생기고 또 다시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금륜(金輪)이 생깁니다. 금륜 위에 산(山)이 솟아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데 이를 기세간(器世間)이라 합니다. 여기까지 1소겁(小劫)의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2) 유정(有情)의 출현
기세간이 형성되면 여기에 중생이 나타나는데 이를 유정세간(有情世間)이라 하며 각 중생은 자기의 업에 따라 태어나게 됩니다. 중생은 욕심의 정도에 따라서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로 나뉘어지는데 욕계는 욕심으로 꽉 차있는 세계이며, 색계는 욕심은 없어졌으나 형색이 남아있는 세계며, 무색계는 형색은 없어졌으나 미세한 분별 심은 남아 있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방법에 따라 사생(四生) 즉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火生)으로 나누어집니다.
3) 삼계(三界)
(1) 욕계(欲界) :
욕계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육욕천(사천왕,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이 있습니다. 욕계의 중생들은 삼독에 찌들려, 욕심이 꽉 차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① 지옥(地獄) : 중생이 고통스럽게 사는 세계를 말하며, 8대 지옥, 10대지옥 등 으로 나누게 됩니다.
② 아귀(餓鬼): 아귀란 '배고픈 귀신' 이란 뜻이며 배는 태산처럼 큰데 목구멍 은 바늘구멍처럼 작아 비록 음식이 있다 해도 먹지를 못해 항상 배고픔을 면치 못하고 굶주리는 세계를 말합니다.
③ 축생(畜生): 벌레나 날짐승, 물고기 따위를 말하는 것인데, 무려 34억 종류가 있으며 이들은 공중, 물, 육지의 세 곳에 각기 나누어 살고 있다고 합니다.
④ 아수라(阿修羅) : 줄여서 수라라고도 하는데,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으로 인식 되며 항상 증오와 질투심을 가지고 있어서 33천과 싸우는 것 을 본업으로 한다 고 합니다. 야단스러운 곳이나 처참하게 된 곳을 비유하여 아수라장 같다고 하 는데 이는 곧 아수라로부터 나온 말입니다. 아수라장은 아수라들이 제석천왕과 싸우는 장소를 말합니다.
⑤ 인간(人間) : 인간이란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을 뜻합니다. 최초의 인간에 관하 여는 장아함경중 소연경(所緣經), 세기경 본연품, 중아함경 범지품 등에서 보이 며 내용도 같습니다. 그 대강을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색계 제2선천중 제2천인 광음천(光音天=)에서 복이 다하고 수명이 다한 天人이 내려 왔다고 합니다.
즉 불교의 경전에 의하면 인간은 天人이 이 세상에 化生한 것 입니다. 이 天人은 몸이 스스로 광명을 발하고 말 할 때 입으로부터 맑은 빛을 내어 그 빛이 말이 되어서 의사를 소통한다고 하며, 신통력이 있어서 자유로 날아 다녔다고 합니다. 또한 음식은 생각만으로 포만감을 느꼈다고 하며 서로 들 중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땅에서 샘이 솟아났는데 이를 감천(甘泉)이라 했는데, 天人들은 호기심에서 먹어보고 달고 맛이 있자 감 천을 먹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자 몸이 거칠어지고 살이 찌게 되어 자연 天人 의 아름답고 미묘한 형색을 잃었으며 몸에서 나는 광명도 줄어들고 날아다니는 힘도 잃어서 땅을 걸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감천을 많이 먹은 사람은 적게 먹은 사람보다 몸이 더 거칠어지고 추해지기 시작하자 서로 시기하고 미 워하여 투쟁심을 일으키는 사이에 감천은 사라지고 지미(地味)가 자연 생기게 되었고, 천인들은 이 지미를 먹고 살다가 많이 먹은 사람은 또 몸이 거칠어지 고 추해지기 시작했으며 덜한 천인들과 서로 시기, 질투, 투쟁하게 되자 지미는 자연 사라지고 지비(地肥)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지비를 주식으로 하 다가 또 많이 먹은 사람은 적게 먹은 사람보다 더 추해지고 서로간에 반목, 투 쟁하게 되자 지비는 사라지고 파라(婆羅)가 나오게 되었으며 파라도 같은 과정 을 거쳐 없어지게 되자 자연경미(自然粳米)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쌀 종류의 모 양으로 아침에 베면 저녁에 나고 저녁에 베면 아침에 돋아났으며 간이 맞고 거 칠은 겨도 없어서 먹을만 했다합니다.
중생들은 자연경미를 먹으면 서부터 차차 형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어떤 중생은 남자의 형상이 되고 어 떤 중생은 여자의 형상이 되어 서로가 호기심으로 쳐다보고 살피는 동안에 애 착심을 갖게 되어 성욕이 생겨 더욱 친근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부부가 생기고 복과 수명이 다한 중생이 이 세간에 올 때 어머니의 태중에 드니 이것이 여러 경전에서 보이는 이 세상 최초의 인간에 관한 기록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의 경전에서는 인간은 색계 제2선천중 제2천인 광음 천의 천인(天人)이 화생(化生)했다는 점인데 이는 중생의 본성은 원래 청정하고 동요가 없지만 미혹하여 번뇌를 일으키고 마음이 동요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중생들의 차별경계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또한 광음천 중생이 번뇌를 일으키 자 더 이상 광음천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 땅에 화생하게 되었으며 이들도 번뇌를 일으키고 음식을 탐하게 되자 점점 거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급기야 는 자연경미를 먹게 되면서부터는 남녀상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중생들이 경계에 빠져들어 감각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또 대립을 일삼을 때 중생들의 생활상은 점차 타락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돌 이켜 생각해 볼 때 최초의 인간 설에 관한 경전의 말씀을 되새겨 보면 보다 강 한 자극과 욕망을 추구하는 현대의 물질문명이 결코 인류에게 더 나은 삶의 상 태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곳은 다음과 같은 사주의 구별이 있다고 합니다.
㉮ 남염부주(南閻浮州) : 염부주라 한 것은 수풀과 과일이 풍부한 염부나무가 번성 한 나라라는 뜻입니다. 염부나무는 인도에 널리 분포된 나무이며, 불교의 발생 지가 인도이기 때문에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염부나무를 들어 그 이름을 만들은 것 같습니다 .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합니다.
㉯동승신주(東勝身洲) : 수미산이 동쪽에 있는 대주(大洲)로써 이곳의 사람들은 몸 (身)의 형상이 매우 훌륭(勝)하므로 승신주라고 합니다.
㉰서우화주(西牛貨洲) : 수미산의 서쪽에 있는 대주(大洲)입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 들은 소(牛)가 많으므로 시장에서 금전(貨)과 같이 쓰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북구로주(北俱盧洲) : 구로주는 번역하여 승처(勝處)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중 생, 처소, 재물 등이 사주 중에서 제일 수승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상이 사 주(四洲)인데 이중에서 제일 수승한 곳은 북구로주이고, 우리가 사는 곳은 남섬 부주라고 합니다.
⑥ 육욕천(六欲天) : 육도(六道)로 보면 천(天)에 속하나 아직까지 욕심을 떠나지 못 한 세계이므로 삼계로 나눌 때는 욕계에 넣게 됩니다.
㉮사왕천(四王天) : 사대천왕이 있어 사주를 수호하며 그 권속들과 살고 있다고 합 니다. 사대천왕이란, 동주를 주로 수호하는 지국천왕, 남주를 주로 수호하는 증장천왕, 서주를 주로 수호하는 광목천왕, 북주를 주로 수호하는 다문천왕의 넷을 말하며, 인간의 50년이 이 하늘의 하루 낮, 하룻밤이며, 천수(天壽)는 5백 살이 며[5백 살은 곧 인간의 9만 살임.]이곳에도 남녀의 구별은 있어 혼인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몸과 몸을 가까이 하여 기운으로써 음양을 이루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1-2세와 같고 키는 반 유순이라고 합니다.
큰 절에 가면 입구에 천 왕문(天王門 )이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사대천왕을 모신 곳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밖에서 오는 삿된 마귀를 방어하는 뜻에서 세워져 있는 것 입니다.
㉯도리천(利天): 33천이라고도 합니다. 이 도리천을 33천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중 앙에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왕이 있는 선견성(희견성이라고도 함)을 중심으로 하 여 사방에 각기 8성씩 32성이 있어 도합 33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 태어났 을 때는 인간의 2-3세 같고 인간의 백년이 이 하늘의 하루이며 수명은 천 살 임 자연히 화현하여 천 (天)에 앉는다고 합니다. 이곳의 왕인 제석천왕은 사 천왕과 삼십 이천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이들을 보호 하고 아수 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합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위해 석 달 동안 올라가 설법하고 내려오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하는 하늘 이며, 육욕천 중에서 사왕천과 도리천의 둘은 수미산을 의지해 있기 때문에 지 거천(地居天)이라고 하는데 사왕천은 중턱에, 도리천은 정상에 있다고 합니다.
㉰야마천(夜摩天) : 사왕천과 도리천이 지거천(地居天)임에 반하여 야마천부터는 공중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공거천(空居天)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때에 따 라 오욕락을 받는다고 합니다. 도리천 보다 수승한 하늘로, 남녀가 음양을 이룰 때에는 서로 가까이만 해도 되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3-4세와 같고 인 간의 이백년이 하루이며 수명은 이천살 입니다.
㉱도솔천(兜率天) : 지족천(知足天), 희족천(喜足天), 묘족천(妙足天)이라고 번역하 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자기가 받는 오욕락에 스스로 만족한 마음을 내어 안 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선 남녀가 서로 손을 잡는 것으로도 음양을 이룬 다고 하는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4-5세와 같다고 합니다. 수명은 사천살 이며 몸에는 광명이 있는데, 염마천의 것보다 훌륭함 그리고 이곳엔 내원(內院) 과 외원(外院)이 있는데 외원은 천인들의 욕락처가 되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 토로써 미륵보살은 이곳에 있으면서 남염부주에 하강하여 성불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도솔천내 원궁에서 호명보살로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화락천(化樂天) : 오욕의 경계를 스스로 변화하여 즐기기 때문에 화락천이라고 합니다. 남녀가 바라다보고 있으면 음양을 이룬다고 하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5-6세와 같고 인간의 팔백년이 하루이며 수명은 팔천살.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 이 하늘은 남의 즐거운 일들을 자유롭게 자기의 락으 로 삼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합니다. 이곳에선 잠시 바라만 보아도 음양을 이룬 다고 하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6-7세와 같고 인간 천육백년이 하루 이며 수명은 만 육천세. 욕계는 이 타화자재천에서 끝나게 됩니다. 경에 의하면 남녀의 구별이 있는 것도 혼인하는 일이 있는 것도 여기 까지라고 합니다. 이 이상의 하늘엔 남녀의 구별도 없다고 하니 혼인하는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2)색계(色界):
색계란 모든 탐욕은 여의였으나, 아직 완전히 정신적인 것은 되지 못한 중간의 세계로 욕계의 상층에 있으며 욕계보다 수승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 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초선천, 이선천, 삼선천, 사선천의 사천이 있어 색계 사 천이라 하며 이를 세분하여 색계 십팔천이라 하기도 합니다. 이 색계의 사선천 은 사선정을 닦아서 선정의 차제에 의해 나는 하늘입니다.
①초선천 : 궁전은 순전히 황금이고, 몸은 흰 은빛[색계는 다 그렇습니다.]이며, 옷은 금빛 옷입니다. 선(禪)을 행하여 욕심을 여의며, 화광삼매(火光三昧)를 닦아 익히기 때문에 몸에서는 해와 달보다 뛰어난 묘한 광명이 빛납니다. 남자도 아 니고 여자도 아니며, 선열(禪悅)로써 밥을 삼으며, 수명은 1겁(劫)이며 혹은 그 보다 덜 사는 이도 더 사는 이도 있고 키는 1유순 이상..범중천, 범보천, 대범천 ②이선천 : 선미[禪味]로써 밥을 삼으며, 수명은 2겁이며 그보다 덜 사는 이도 더 사는 이도 있음. 소광천, 무량광천, 광음천
③삼선천 : 선락(禪樂)으로 밥을 삼으며, 수명은 3겁이며 혹은 그보다 덜 사는 이도 더 사는 이도 있음. 소정천, 무량정천, 변정천
④사선천 : 선열(禪悅)로써 밥을 삼으며, 수명은 4만 겁이며 혹은 그보다 덜 사 는 이도 있음. 복애천, 복생천, 광과천, 무상천,
불번천(不煩天) 선열(禪悅)로써 밥을 삼으며, 광명은 무상천보다 더 뛰어남.
무번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색구경천
이상이 색계18천입니다. 이 색계는 일정한 지형이 없고 다만 중생이 그 세계에 태어나고 죽고 하는데 그 거주하는 천궁이 현멸하므로 어떤 고정적인 유형 색을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3)무색계(無色界):
완전히 정신적인 세계로 삼계 중 가장 수승한 곳입니다.
①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 욕계와 색계의 모든 색법을 싫어하고 무색정(無色定) 을 닦되 색의 상을 버리고 허공관(虛空觀)을 닦는 이 가 태어나는 하늘입니다. 수명은 만겁이며 이보다 더 사는 이도 덜 사는 이도 있습니다.
②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 공무변처가 오히려 바깥 허공이라는 대상이 있으므로 이를 싫어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관인 식이 무변하다는 이치를 알고 수행하 여 태어나는 하늘입니다. 수명은 2만 1천겁.
③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 식무변처가 오히려 식이라는 소유감이 있으므로 이마 저도 싫어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공도 식도 모두 소유가 없다는 무색정을 닦아 그 힘으로 태어나는 곳입니다. 수명은 4만 3천겁.
④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 : 삼계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이라 는 뜻에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합니다. 이 하늘을 비상 비비상이라 하는 이 유는 식무변처천은 무한한 식의 존재를 관상(觀想)하므로 유상(有想)이요, 무 소유처천은 공도 식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관상하므로 비상(非想)인데, 이것은 유상을 버리므로 비상이요, 비상도 버리므로 비비상이라고 하는데 거칠지 않고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는 생각의 상태인, 이러한 정을 닦아 그 힘으로 태어나 는 하늘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명은 8만 4천겁.
여기 까지가 중생계이며 4선에서 신통(天眼,天耳,神足,他心,宿命)의 기적이 생기나 모든 번뇌 다한 지혜(漏盡)인 참다운 신통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아서 비상비비상처의 생각을 떠나 상지멸정(想知滅定)을 얻으면 이것이 제1의 위없는 생각이 되는 것이며 상지멸정이란 염행(念行)도 하지 않고 사유(思惟)도 일으키지 않아 미묘한 생각도 멸하고 추한 생각도 생기지 않은 상태로서, 말 그대로 모든 생각과 앎(지식)이 멸한 상태로 새는 것이 다한 누진(漏盡)즉 생사해탈의 상태입니다.
신통으로 최고인 범천의 세상에 갈 수 있지만 이런 번뇌 남은 신통으로는 결코 위없는 열반은 실현하지 못하며, 모든 부처님은 신통력 때문에 부처가 된 것이 아니고 일체가 적멸한 열반을 실현하셨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며 모든 부처님들은 신통력으로는 까마득히 미칠 수 없는 열반의 경지를 실현하셔서 일체 분별없는 분별의 일체지지(一切智智)와 참으로 큰 위력과 큰 신통력을 갖추셨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인 생사해탈(生死解脫)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길입니다.
4) 극락세계
극락은, '지극히 즐겁다' 는 말이요 정토는 '깨끗한 땅' 이란 뜻입니다. 극락정토는 자연환경이 좋고 물질이 풍부할 뿐 아니라 모든 대중이 자유와 평등 속에 있으면서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불국토(佛國土)입니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부처님은 아미타불인데 아미타불은 과거 53불 중 마지막 부처님인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의 법문을 듣고 한나라의 부귀와 임금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가 48가지 원을 세워 이룩한 불국토입니다. 극락세계는 삼악도의 불행 이 없고, 몸은 황금빛 광채가 나며, 수명이 한량이 없고, 여기에 태어나는 사람은 반드시 열반에 도달하게 되고, 이생을 마치고 다음 생에는 반드시 불과(佛果)를 증득하게 되는 세계입니다.
5) 우주의 변화
(1) 변화의 형태:
기세간인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생멸변화 하게 됩니다.
①성겁(成劫) : 기세간과 유정세간이 형성되는 시기를 성겁이라 합니다. 성겁은 20소겁이 소요되는데. 중생들의 공업(共業)에 의해 허공에 바람이 일기 시작하 여 풍륜이 생기고, 그 위에 구름이 일어나 수륜이생기고, 수륜위에 바람이 일어 나 수면을 때리고 응결시켜 금륜이 발생합니다. 금륜 위에 수미산이 생기고, 그 주위에 7산이 생긴 뒤, 그 가장자리에 철위산이 둘러 앉아 각산 사이에는 8海 가 생기게 되고 수미산 부근의 7산 사이의 바다를 내해(內海)라 하며 그들과 맨 바깥쪽 철위산 사이에 나타난 바다를 외해(外海)라고 합니다. 이 외해 속에 사대주(四大洲)가있어 수미산의 사방에 위치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은 수미산남쪽의 섬부주(贍部洲)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하늘이 이루어지게 됩니 다. 이것이 중생들이 몸담고 살아가게 될 우주(器世間)가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최초의 풍륜으로부터 이러한 세계가 형성되는데 1소겁(小劫)의 시간이 걸린다 고 합니다. 그리고 기세간이 생긴 다음에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 色界)의 삼계(三界)에 중생들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유정세간(有情世間)이라고 합니다. 욕계(欲界)는 애욕이 있는 경계로 애욕과 고통의 정도에 따라 천(天),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의 육도(六道)의 중생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색계(色界)는 애욕은 없어졌지만 물질에 대한 집착 은 남아 있는 세계로 18천(天)으로 분류됩니다. 무색계(無色界)는 물질에 대한 집 착 마저 사라진 정신적인 세계로 4천(天)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정세간(有情世 間)이 생기게 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19소겁이 걸리게 됩니다. 이처럼 기세간 (器世間)과 유정세간(有情世間)이 발생하게 되는 시기를 성겁(成劫)이라고 합니다.
② 주겁(住劫) : 성겁 다음에 주겁의 시대가 옵니다. 주겁도 20소겁이 소요되며 기세간은 별 변동 없지만 유정(有情)의 과보에는 많은 변동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처음에는 빛을 내며 하늘을 날 수 있으며 수명도 장구합니다(8만세). 그러나 좋은 맛을 탐닉하고 나쁜 마음들로 악업은 심해져 수명은 짧아지며 사고, 질병 등의 삼재(三災 水, 火, 風)가 발생하여 많은 인간들이 죽어가며 수명이 줄어들게 됩니다(10세). 다시 인간은 죄업을 뉘우치고 선업을 행하여 그 수명이 8만세가 됩니다. 여기까지 시간을 1소겁이라고 하는데, 주겁의 기간 동안 20번을 계속합니다.
③ 괴겁(壞劫) : 그 후 세계는 서서히 파괴되어 갑니다, 이를 괴겁시대라 하는데 역시 20소겁이 소요됩니다. 먼저 유정세간이 파괴되는데 19소겁이 소요되고, 다음에 기세간이 파괴되는데 수(水), 화(火), 풍(風)의 삼재가 발생하여 풍륜으로부터 색계 제3천에 이르는 세계를 모조리 소멸시켜 버리게 되는데 1겁이 걸리게 됩니다.
④ 공겁(空劫) : 괴겁의 시대가 지나면 허공만이 존재하는 공겁의 시대가 오는데 이 기간도 20소겁이 걸리게 됩니다. 공겁 다음에는 다시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성, 주, 괴, 공이 반복하여 이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게 됩니다. 20소겁을 1중겁이라 하고 4중겁을 1대겁(大劫)이라 하므로 결국 한 우주는 1대겁(大劫)을 시간단위로 하여 생성, 소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주괴공을 되풀이하는 세계는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무한대의 세계 중 욕계, 색계, 무색계의 중생들이 모여 사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의 세계를 1사천하(一四天下) 혹은 1세계라고 하는데 '1사천하'가 천(千) 모인 것을 '1소천세계(一小千世界)'라 하고, 그 '소천세계'를 천 합한 것이 '1중천세계(一中千世界)'가 되고, '중천세계'를 천 합한 것을 '1대천세계(一大千世界)'라 하는데, 이처럼 '1대천세계'에 '소천, 중천, 대천' 3종(三種)의 천(千)이 있으므로 3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 하며, 한 부처님이 주재하는 세계라고 합니다. 이러한 삼천대천세계가 제 각각 끊임없이 성·주·괴·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 이 우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삼천대천세계가 미진수로 있어서 시방미진수세계(十方微塵數世界) 또는 항하의 모래수 만큼 많이 있어서 시방항하사수세계(十方恒河沙數世界)로 전개됩니다.
(2) 겁 :
불교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겁(劫)은 범어로는 Kalpa이며 범천의 하루가 1겁입니다. 곧 인간 세계의 4억3천2백 만년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겁을 말할 때는 보통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을 말할 때 쓰는데, 겁에는 개자겁(芥子劫), 불석겁 (拂石劫), 증갑겁(增感劫), 진묵겁(盡墨劫) 등이 있습니다.
① 개자겁(芥子劫) : 사방 40리 안에 개자씨를 가득 넣고 장수하는 천인(天人)이 3년에 한 알씩 가져가 그 수가 다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② 불석겁(拂石劫) : 반석겁(磐石劫)이라고도 하는데 사방 40리 되는 바위가 있다 고 가정하고 장수하는 천인이 있어 3년에 한 번씩 천의(天衣)로써 둘레를 한 바 퀴 스쳤을 때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을 말합니다.
③ 증감겁(增減劫) : 인간의 수명에 따른 정의인데 인간의 수명은 10세에서 8만4 천세까지, 8만4천세에서 10세까지 백년에 한 살씩 증(增) 또는 감(減)한다고 하 였는데, 증하는 기간을 증겁(增劫), 감하는 기간을 갑겁(減劫)이라하며 증감을 합 해 증감 겁이라고 합니다.
④ 진묵겁(盡墨劫) : 한량없는 세월을 말합니다. 법화경의 화성유품에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형상이 있는 모든 것들을 갈아서 먹(墨)을 만들어 동쪽으로 가며서 일천국토를 지날 때마다 티끌만한 한 점을 내리쳐서 그 먹이 다하도록 가게 되면 그 국토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게 됩니다. 이 사람이 지나가며 점을 친 국토나 점을 치지 않은 국토를 모두 모아 부수어 티끌을 만들어서 그 티끌 하나마다 한 겁씩 계산하여 그 티끌이 다하도록 계산한 것이 진묵겁이라 하였으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나긴 세월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과 수량을 나타내는 말들로는 겁(劫 kalpa), 찰나(刹那 ksana. 75분의1초), 나유타(那由他 nayuta 천만 혹은 천억), 미진수(微塵數, parmanu 세세하게 부서진 것 같이 수 많음), 항하사수(恒河沙數), 항하에 모래처럼 많은 수량 또는 항하진수(恒河塵數)라고도 함. 모호(模湖, 확실하지 않은 모양 또는 애매한 상태), 순식(瞬息, 수유의1/10)., 탄지(彈指, 찰나의10배), 수유(須臾, 순식의10배 또는 준순(浚巡의 1/10), 준순(浚巡, 수유의 10배 또는 모호의 1/10 곧 10-14)등이 있습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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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의 의의
방생이란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병들은 중생을 구호하고 가난한 중생을 구호하며 윤회중생을 해탈시켜 주는 것이 방생입니다.
그러므로 살려주는데 특별한 규거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불교에서 방생을 하는 것은 죽어가는 생명을 건져 살리는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다시는 윤회악도에 물들지 않게 하고
설사 자기 서원에 의하여 윤회에 빠졌더라도 그 윤회에 속지 않게 하기 위하여
법문을 일러주는 것으로 방생의 체를 삼기 때문에 형식적이나마 이러한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연지대사일곱가지불살생 (蓮池大師七種 不殺生)
첫째는 생일에 살생하지 말라.
상서(尙書))에 가라사대 슬프다 부모시여 나를 낳아 수고하셨다 하셨으니 내몸이 출생하든 날은 어머님께서 거의 죽을 뻔하든 때라 이 날은 결코 살생을 경계하며 재계를 가지고 널리 선사(善事)를 행하여 선망부모로 일찍이 초승(超昇)을 얻게 하고 현재 부모로 복수를 증장케 함이어늘 애닯다 어찌 하야 어머니 곤란 겪은 경위를 잊고 망녕스리 생명을 살해하며 위로 부모에게 누를 끼치고 아래로 자기 몸에 이롭지 못하게 하는고, 이것을 온 세상이 습관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둘째는 자식을 낳거든 살생하지 말라
대저 사람이 자식이 없으면 슬퍼하고 자식이 있으면 기뻐하는데
일체금수도 각각 그 새끼 사랑함을 생각지 못하는구나
내 자식을 낳는 것은 좋아도 남의 자식은 죽게 함은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대저 어린 것이 처음 남에 적덕(積德)을 못할지언정
도리여 살생하야 업을 짓는 것은 가정 어리석음이라
이것을 온세상이 습관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셋째는 제사 지낼 때 살생하지 말라.
망령(亡靈)의 기일과 춘추소분(春秋掃墳)에 마땅히 살생을 경계하야 명복을 자라게 할 것인데
살생하야 제사 지내는 것은 한갖 악업만 더할지라 대저 팔진미(八珍味)를 망령 앞에 놓을지라도
어찌 구천(九泉)에 가신 유골을 일으켜 흠양(歆饗)토록 하겠는가.
조금도 이익은 없고 해만 됨이어늘 이것을 온 세상이 습관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넷째는 혼례에 살생하지 말라.
대저 혼인이라는 것은 생민(生民)의 시초가 아닌가.
삶의 시초에 살생을 하는 것은 이치가 벌써 틀린 것이요
또 혼례는 길사(吉事)인데 길일로써 흉한 일을 행함이 또한 참혹지 않은가
또는 결혼식을 하면 반드시 부처해로(夫妻偕老)를 축사하나니
사람은 해로하기를 원하면서 금수는 먼저 죽기를 좋아하는가
또 시집보내는 집에서 삼일(三日)동안 초 불을 끄지 않는 것은
모녀(母女)가 서로 갈린 것을 앗기나니 사람은 이별을 괴롭다 하면서
금수는 이별을 낙으로 하든가 혼례살생에 온 세상이 습관이 되어서
그 잘못됨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다섯째는 연회 할적에 살생을 말라.
양진미경(良辰美景)에 주빈(主賓)이 상대하여 담담(淡淡)한 다과(茶果)와
소식채갱(蔬食菜羹)이 말근 취미에 방해됨이 없거늘
어찌 살생을 많이 하여 목을 따고 배를 가름에 슬픈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니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야 어찌 비참하지 아니하랴.
만일 식탁에 아름다운 맛이 도마 위에 고통으로 쩧이 왔구나 하야
저에 극한 원한으로 나에 극한 환락을 작만 하였거니
생각하는 동시에 비록 먹더라도 목이 메일 것이어늘 연회살생(宴會殺生)에
온 세상이 습관이 되야 그 잘못됨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여섯째는 기도에 살생하지 말라
세상사람들이 병이 들 때 살생기도하여서 복받기를 바랄 뿐이고
자기가 기도하는 목적이 죽기를 면하고 살기를 구하는 줄 생각지 못함 이로다.
남의 목숨을 죽여다가 나의 목숨을 느리고져 함이 벌써 천리에 어기지 않는가.
목숨은 느리지도 못하고 살생업만 갖추는 것이다.
다시 살생하야 자식을 구하고 살생하야 재물을 구하고 살생하야 벼슬을 구하면서
그 아들과 재물과 벼슬이 다 본인의 분정(分定) 한 것이고
귀신의 능력이 아님은 알지 못하는도다 어찌 타원대로 되게 되면 이는 귀신이 신령하다 하야
더욱 믿고 더욱 행하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일곱째는 직업을 경영함에 살생하지 말라.
세상사람이 의식을 위해서 혹 전렵(佃獵)도 하며
혹 고기도 잡으며 혹 소도 잡고 개도 잡아서 생계를 하지만은
나는 생각하기를 이 노릇을 안하더라도 밥먹고 못입어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살생으로 직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천리를 어겼을 따름이라 지옥에 깊은 인(因)을 심고
내세에 악보를 받음이 이보다 심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따로 생계를 구하지 못하는고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적석도인의 일곱가지방생 (赤石道人 七放生)
첫째는 자식없는 자는 반드시 방생하라
세상사람이 자식을 두고저 함에 약먹기로 힘을 쓰나
그러나 왕왕히 한평생 먹더라도 효험을 못보는자 많은지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병이 있거든 약을 먹고 자식이 없거든 방생하라 하노니
대저 천지의 큰덕은 가로대 생함이라
그러므로 사람을 생하고 만물을 생해서 생생지이(生生之理)가 끊어지지 않나니
진실로 생해주는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서 저를 생해주는 것이
반드시 생함이라 방생만 하고 보면 꼭 다 남자(男子)의 경사를 얻을 것이라.
둘째는 자식을 배거든 반드시 방생하여서 산모를 보전하라.
세상사람은 자식을 배매
혹 귀신에게 빌어서 생산에 안녕을 바라고 방생하여서
만전지책(萬全之策)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도다.
대저 잉태해서 자식을 보는 것은 사람과 만물이 다르지 않고 사람과 만물은 천지의 생한바라
짐승의 새끼 뱀을 내가 구하여 주는데 내가 자식 뱀이 있으면 하늘이 어찌 보호하지 않으랴.
셋째는 기도함에 반드시 방생하여서 복을 맞으라.
세상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은 소식(素食)하고 귀신은 혈식(血食)한다 하나니 이는 크게 오해이다. 대저 부처님은 천과 신의 스승이요
신이란 자는 부처님을 받들어 어김이 없는 자이라
호생지덕(好生之德)은 신 불이 같은 배니 진실로 신불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체달하야
금수만물이 급한 경우를 당하거든 다소를 불구하고 보는대로 사서 놓아줄지며,
만일 금전이 없어서 어찌할 수 없는 동시는 염불이라도 하여 주면
자연히 상천이 감동되야 복을 얻음이 한량없을 것이니라.
넷째는 예수(預修)코져 하거든 방생부터 먼저하라.
세상사람이 매양 중을 청해서 불사를 작하야
미리 닦는 것은 진실로 죽은 뒤에는 육도(六途)에 윤회함에 업식이 망망(茫茫)할지라.
미리 불보살이 불쌍히 생각하여 줌을 구함이 아닌가.
대저 세간자선(世間慈善)은 방생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내가 자비지심(慈悲之心)으로 방생하야 불보살의 자비지덕에 감동되면
반드시 불보살의 복을 입을 것이니라.
다섯째는 재계를 가짐에 반드시 방생하라.
제불보살이 중생의 재계가짐을 좋아 하심은 만물의 자비심두기를 바람이라
일체중생이 불자아님이 없나니 진실로 재계를 가지는 날에 더욱이 방생으로 힘을 쓰면
제불보살이 몇 배나 환희심을 내지 아니하랴.
여섯째는 녹(祿)을 구함에 먼저 방생하여 복을 쌓으라.
개미가 송기(宋祈)에게 보은하고 용자(龍子)가 사막(思邈)에게 보은하였으니
방생하여 이익을 얻음은 결코 헛됨이 아니라. 대저 부귀명복은 요행으로 되지 않고
오직 복을 지은자가 반드시 명복을 얻나니 사람이 어진마음으로 물을 아껴서
그 목숨을 구제할 것 같으면 나의 구제를 입은 자가 기회를 보아 보답할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닌가.
일곱째는 염불함에 반드시 방생부터 하라.
산중에 있어서 참선을 오래도록 하다가 하루 아침에 견성오도(見性悟道)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홍진중(紅塵中)에 있어 염불하는 자는 자비심으로써 방생을 주로 할지라.
물(物)을 구제함이 인(人)을 구제함보다 낫다 함은 아니지만
사람이 극형을 범하는 것은 대개 자작장난(自作障難)이나 동물을
무슨 죄로 참혹한 환란을 자주 만나는가.
누구든지 연지대사와 영명연수선사의 방생으로써 급무(急務) 삼음을 보아 깨칠지니라.
아 --- 이 얼마나 거룩하신 말씀인가. 대저 방생은 불타의 마음이요 천인의 마음이라.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기를 불타에게 공양 올림을 게을리 할지라도 방생부터 부지런히 하라 하니
왜냐하면 보라.
어떤 사람이 자식을 많이 두었는데 다 각각 자작지화로 어떤 자식은 옥에 갇혀있고
어떤 자식은 수해중에 빠져 있거든 이웃사람이 그 여러 자식들의 고통은 모른 체 하고
진수성찬을 차려 그 아버지에게 받든다 하면 아버지된 자가 그 밥맛이 있다 하겠는가.
한 사람은 그와 반대로 옥에 갇힌 자식을 놓아주고 수화에든 자식을 건져준다 하면
그 아버지는 밥을 아니 먹어도 배가 부를 것이고
또 건져준 사람에 대하여 감사한 생각이 아까 밥을 주는 자에 비하겠는가.
대저 부처님은 태란습화 생을 적자가치 생각하는지라 한중생이라도 고통을 받는다면
부처님의 대자비로써 뼈가 녹는 듯 불쌍히 여기실지라 그 고통받는 중생을 건져주는자에 대하여
복을 주심이 공양 받드는 자보다 천만억배나 수승할 것은 정한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공부자께서도 부모의 입과 몸을 봉양함보다 부모의 마음을 보양함이 참으로 효자라 하셨으니
우리 불교신자도 불타의 본회를 체달하며
연지대사와 적석도인의 말씀을 실행함이 급선무라 하여 힘써 행할 지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는 싫어합니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치던 사람도 막상 죽음을 당하게 되면
두려움에 떨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칩니다.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소도
한결같이 큰 눈을 휘 번득 거리면서 뒷걸음질을 친다고 합니다.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축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한결같이 자기의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은 새나 물고기와 같은 축생이라고 해서 덜하고
사람이라고 해서 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똑같은 불성을 갖고 있습니다.
불성이란 모든 생명체의 근원입니다. 바로 생명체의 주인공입니다.
비록 겉 모습은 새와 물고기가 다르고 사람과 짐승이 다르지만
그 속의 주인공인 불성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보리수아래서 성도하신 후에
모든 중생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놀랍게도 모든 중생들이
똑같이 지혜의 성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널리 일체중생을 살펴보니
모두가 여래와 똑같은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래는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성품이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도를 깨치신 후에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똑같은 불성을 갖고 있는데 사람도 되고 개도 되고 물고기도 되느냐?
똑같은 불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천태만상의 차별상을 이루는 까닭은
각자가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가 될 짓만 하다가 죽으면,
다음 생에는 개로 태어나게 되고 소가 될 짓을 하다가 죽으면
다음 생에는 한 마리의 소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태어나기도 하고 아귀도나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축생이나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도 모두가 자기의 지은 바 업에 의한 것입니다.
중생들이 똑같은 불성을 생명의 근원으로 하면서도
갖가지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이처럼 자기가 지은 바 업에 의한 것입니다.
자작자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작자수의 과보로 태어나는 중생의 종류에는 육도(六道)가 있는데
천상. 인간. 지옥. 아귀. 축생. 수라라는 여섯갈래의 중생들입니다.
이 가운데 축생이란 일반적으로 이리석음을 상징하는 중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살아 생전에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하거나,
죽어서 영혼이 다음 세상으로 갈 때 어리석은 생각을 해도 새둥지가 대궐로 보이고
물 속이 황금 연못으로 보여 새가 되기도 하고 물고기가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잘못하면 다음 세상에 축생보를 받게도 된다 - 이 말입니다.
이처럼 윤회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찮은 짐승이라고 업신여기는 강아지가
어쩌면 전생에서는 여러분의 부모형제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아귀도에 떨어졌다가
존자의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다음에는 개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짐승이라고 해서 물고기라고 해서
함부로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여러 생명들과 부부나 부모자식 형제자매의 인연들을 맺고 살아왔으므로
알고 보면 어느 생명이든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무연중생(無緣衆生)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언제부터 방생을 하게 되었는지
그 유래를 바로 알아 보다 뜻 깊은 방생법회가 되도록 합시다.
남들이 방생을 하니까 나도 덩달아 한다든가
아무런 뜻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하니까 방생법회에 동참한다고 해서야
어찌 참다운 불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먼 과거세에 유수장자라는 유명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유수장자는 의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마음이 자비로워서
병고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다녔습니다.
어느날은 깊은 산골을 지나가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독수리. 승냥이. 이리 등 육식동물들이 모두 한 곳을 향하여 날아가고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유수장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들이 달려가는 곳을 찾아 가보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작은 연못은 물이 줄어들어 이제 바닥이 막 드러나려는 찰나였습니다.
독수리. 솔개등 날짐승과 이리. 승냥이들이
모두들 작은 연못으로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서 모여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못 속에는 수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의사인 유수장자로서는
차마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는 참혹한 정경이었습니다.
마치 물고기들이 의사인 유수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던 것입니다.
유수장자는 그들을 살리려고 주변에서 물줄기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적당한 물이 없었습니다. 마침 한 곳에 큰 강물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줄기를 다른 데로 돌려
물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수해서 마른 연못에 물을 댄다는 것도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황급히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에게 엎드려 사정을 하였습니다.
"제가 백성들을 위하여 제반 질병을 고쳐주어 모두 편안하게 해주고 길을 가다가
마침 한 비어있는 못에 이르렀더니 그 못이 마르려고 하는데
수많은 물고기들이 햇빛에 쬐어 멀지 않은 장래에 죽게 되었습니다.
원컨데 대왕이시여 자비를 베푸셔서
저에게 큰 코끼리 20마리만 주시면 물을 길러다가 고기의 목숨을 건지겠습니다.
제가 여러 병든 사람의 목숨을 건지듯 이 물고기의 목숨을 건지도록 하여 주십시요"
라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왕은 평소에 유수의 공로를 잘 알고 있던 터라 순순히 승낙을 하였습니다.
장자는 큰 코끼리 20마리를 빌리고,
또 가죽주머니를 많이 빌려가지고 강으로 가서
가죽주머니에 물을 가득 담아 코끼리에 지워가지고 연못으로 갔습니다.
코끼리에 지워온 물을 작은 연못에 쏟아부으니 금방 연못은 물이 가득찼습니다.
장자는 기쁜 마음으로 연못주위를 돌면서 물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들이 이상하게도 장자를 따라서 물가를 빙빙돌아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장자는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물고기들이 그동안 물이 줄어 물 속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파서 그러는 줄을 깨달았습니다.
즉시 다시 코끼리를 집으로 보내어 물고기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가져와 물 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유수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일단 음식을 보시하여 물고기들의 목숨을 구했으니,
이제 이들이 목숨을 마친후에는 좋은 세상에 태어나도록 해야겠다>이렇게 생각하고는
"나무 과거 보게여래.... 이 부처님은 옛적에 보살행을 닦을 때에 이런 서원을 세웠다.
시방세계 모든 중생이 목숨을 마쳐 죽을 때에
나의 이름을 듣는 이는 33천에 태어날지어다"라고 말하고 나서
12인연법을 물고기들을 위하여 설하였습니다.
법문까지 해주고는 두 아들과 함께 흡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한편 그 연못의 물고기들은 똑같이 목숨을 마치고는 33천에 태어났습니다.
삼십삼천은 도리천이라고 하는 살기좋은 하늘나라를 말합니다. 천당과 같은 곳입니다.
이 이야기는 <금광명최승왕경>에 나오는 설화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은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시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 유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득한 전생에 바로 석가모니부처님 자신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 부처님께서도 과거세에 이처럼 물고기들을 위해서
마치 의사가 병든 사람을 구제하듯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부처님의 행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불자입니다.
그러므로 방생법회는 부처님께서 전생에서 하신
거룩한 행을 본받아 우리들이 지금 행하는 것임으로 참으로 뜻 깊은 불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는지 모릅니다.
꼭 소나 돼지나 물고기를 직접 죽이지 않는다고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을 보면 남의 생명을 빼앗아 만든 것이 대부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식물이라도 생명체이기 때문에 채식만 한다고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 칠 수는 없습니다.
또 식물을 가꾸기 위해서는 농약을 살포해서 얼마나 많은 곤충들을 죽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부득히 최소한도의 살생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다거나,
도살장에서 소나 돼지를 죽이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살생은
그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하는 공업(共業)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이 길을 가다가 벌래들을 밟아 죽이는 것을 염려해서
벌래들이 무성한 여름철에는 제자들에게 출입을 금지시키셨습니다.
여름철에 석달동안 하안거라고 해서 스님들이 두문불출하고 정진하는 것도
사실은 이처럼 생명을 고귀하게 여긴대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행승이 아닌이상 생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전혀 살생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라의 원광법사는 세속오계를 통해 살생유택(殺生有擇)을 화랑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살생을 하더라도 가려서 하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연지대사는, 특별히 살생을 해서는 안되는 날을 정했는데,
자기생일, 자식을 낳았을 때, 결혼식 때, 제사 때 기타 즐거운 연희 때는
절대로 살생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살생을 하면 그 인과가 분명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한을 사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미물이라도
자기의 목숨을 빼앗은 상대에게는 강한 원한을 갖게 됩니다.
그 원한은 언젠가는 살생을 한 당사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방생은 이 원한을 씻어주는 공덕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살생을 한데 대한 참회의 의식이기도 합니다.
여러 신도님들은 방생의 유래와 그 의미를 아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그 뜻이 아무리 좋아도 방법 또한 좋아야만 참다운 공덕이 됩니다.
방생은 <죽을 목숨을 살려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멀쩡한 고기를 잡아다가 다시 살려주는 것은 참다운 방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말로 병 주고 약주는 것입니다.
죽을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단순히 물고기에만 국한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것에는 다 해당하는 것입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며,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는 일도 방생입니다.
그러나 절에서 굳이 물고기를 상대로 방생을 하는 것은 하찮아 보이는 미물일지라도
어엿한 생명, 불성을 가진 고귀한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 불자들이 깨달아서
일체중생이 평등함을 일깨우는데 보다 더 큰 뜻이 있다고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경전을 통하여 산 생명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내 몸과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생명의 고귀함과 모든 생명의 평등함을 일깨워주신 말씀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방생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차별하는 마음,
독한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몰아내고,
부처님처럼 일체중생을 내 몸처럼 생각하는 동체대비심으로 가득 채워 다같이 성불합시다.
나무아미타불
유산가(遊山歌)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和方暢)하니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山川景槪)를 구경가세
죽장망해(竹杖芒鞋) 단표자(簞瓢子)로
천리강산(千里江山) 들어가니
만산홍록(滿山紅綠)들은 일년일도(一年一度) 다시피어
춘색(春色)을 자랑노라.
색색(色色)이 붉었는데
창송취죽(蒼松翠竹)은 창창울울(蒼蒼鬱鬱)하고
기화요초(琦花瑤草) 난만중(爛漫中)에
꽃속에 잠든 나비 자취없이 나라난다.
유상앵비(柳上鶯飛)는 편편금(片片金)이요
화간접무(花間蝶舞)는 분분설(紛紛雪)이라
삼춘가절(三春佳節)이 좋을씨고,
도화만발(桃花滿發) 점점홍(點點紅)이로구나
어주축수애산춘(漁舟逐水愛山春)이라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예 아니냐
양류세지(楊柳細枝) 사사록(絲絲綠)하니,
황산곡리당춘절(黃山谷裡當春節)에
연명오류가(淵明五柳)가 예 아니냐.
제비는 물을 차고, 기러기 무리져서
거지중천(居之中天)에 높이 떠서
두 날개 훨씬펴고 펄펄 백운간(白雲間)에 높이 떠,
천리강산(千里江山) 머나먼 길에 어이 갈고 슬피운다.
원산(遠山)은 첩첩(疊疊)
태산(泰山)은 주춤하야,
기암(奇巖)은 층층(層層)
장송(長松)은 락락(落落),
에이 구부러져
광풍(狂風)에 흥을 겨워
우줄우줄 춤을 춘다.
층암(層巖) 절벽상(絶壁上)에
폭포수(瀑布水)는 콸콸,
수정렴(水晶廉) 드리운듯,
이골물이 주루루룩 저골물이 솰솰,
열에 열골물이 한데 합수하야,
천방져 지방져 소크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건너 병풍석(屛風石)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소부(巢父) 허유(許由) 문답(問答)하던
기산(箕山) 영수(潁水)가 예 아니냐
주각제금(住刻啼禽)은 천고절(千古節)이오,
적다정조(積多鼎鳥)는 일년풍이라
일출낙조(日出落照)가 눈앞에 버려나니,
경개무궁(景槪無窮) 조흘씨고.
* 해설 꽃이 봄 성에 난만하고, 만물이 한창 소생하여 기를 펴고 자라나는구나. 때가 좋구나 친구들아, 산천 경치를 구경 가세. 대 지팡이 짚고 미투리 신고, 표주박하나 들고 머나먼 강산에 들어가니, 산에 가득한 붉은 꽃과 푸른 초목은 일 년에 한 번씩 다시 피어 봄빛을 자랑하느라고 여러가지 빛으로 붉어 있는데, 푸른 소나무와 푸른 대나무는 울창하게 무성하고, 기이한 꽃과 아름다운 풀이 찬란하게 얽혀 있는 속에 자고 있던 나비가 흔적 없이 날아가버리는 구나. 버드나무 위에 꾀꼬리가 날아가는 모양은 조각조각의 금덩이요, 꽃 사이에 나비가 춤추는 모양은 사방팔방으로 휘날리는 눈송이와 같도다. 봄 석달 동안의 아름다운 시절이 좋구나. 복사꽃이 활짝 피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양이 마치 붉은 점을 찍어 놓은 것 같구나. 고기잡이 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산 속의 봄철을 사랑하는 격이 되었으니, 저 도연명이 말한 복사 꽃이 만발한 무릉현의 별천지가 여기가 아니냐? 버드나무의 가는 가지가 수많은 실과 같이 늘어져 푸르니, 황산의 골짜기에 봄철을 당한 셈이요, 도연명이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다는 오류촌이 여기가 아니냐? 제비는 물을 차고 기러기는 떼를 지어서 하늘 허공을 높이 떠서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펄펄 흰 구름 사이에 높이 떠서 천리나 되는 머나먼 강산을 어떻게 갈꼬 하고 슬프게 우는구나. 먼 산은 겹겹이 포개져 있고, 큰 산은 달리다가 문득 멈춰 선 듯이 우뚝 솟았으며, 기이한 바위는 층층으로 쌓이고, 길고 큰 소나무는 가지가 축축 늘어져 한쪽으로 치우쳐 구부러져서, 미친 듯이 사나운 바람에 흥을 못 이기어 우쭐우쭐 춤을 추는구나. 층층이 쌓인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 위에 폭포수는 콸콸콸 떨어져 수정 알로 만든 발을 늘어뜨린 것 같고, 이 골짜기의 물이 주루루룩, 저 골짜기의 물이 솰솰솰 소리를 내며, 백이나 되는 골짜기의 물이 한 곳에 합치어서, 일정한 방향도 없이 흘러, 혹은 위로 솟아 부풀어 오르고, 또는 옆으로 벙벙하게 흘러, 넝쿨과 같은 물줄기를 이루기도 하고, 또는 물방울을 이루기도 하여, 저 건너 병풍처럼 둘러친 석벽으로 으르르렁 콸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결이 백옥같이 흩어지니, 옛날 소부가 송아지를 몰고 가다가 귀를 씻는 허유를 보고 서로 주고받고 이야기하던 기산과 영수가 여기가 아니냐? 주걱새 울음소리는 먼 옛날 태고의 시절같이 한가롭고, 소쩍새 울음소리는 한 해의 풍년들 징조를 알리는 구나. 해 돋는 풍경 해지는 풍경이 눈 앞에 벌어지니, 경치가 끝없이 좋기만 하는구나.- 진각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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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인간
◎종교는 왜 필요한가?
인간의 삶을 진실하게 하기 위해서 종교는 필요합니다. 개인적 삶도, 사회적 삶도, 또한 역사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진실하게 되기 위하여 종교는 필요합니다. 종교는 근원 진리를 밝히고 진리에 의한 참 인간을 밝혀서 참된 인간의 삶과 역사적 사회적 발전의 지표를 세워 줍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없는 개인이나 사회는 진리도 방향도 없는 무궤도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오직 야망이 우글대는 괴물이 십자가두 위에서 좌충우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과 역사의 진리를 모르므로 어떤 것이 참된 인간의 길이며 역사의 길인가를 모릅니다. 오직 욕망따라 왕성하게 달리고 또는 충돌하여 상처도 입고 적당히 자기 조절을 하여 움추리기도 하며 때로는 공포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정의도 질서도 확정한 기준없이 다만 요령껏, 눈치껏, 극단을 피해가며 일신의 영락만을 위해 살아가는 맹목적 군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개인을 참되게 하고 개인의 삶을 보람있게 하며 역사의 방향을 가치있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중심 역할을 합니다. 이와같이 인간과 그 생명과 근원 진리를 밝히는 종교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참된 진리를 갖추지 못한 종교가 있다면 그 해독도 참으로 클 것입니다. 종교를 달리 한다고 하여 대립하고 무자비하게 파괴하는가 하면, 인간도 역사도 부정하고, 환상을 쫓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종교를 배우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하겠으며 모든 사회적 시설이 또한 그러하여야 하겠습니다.
1) 최초 인간과 생활
질문1), 인간의 시초에 대해서 여러 말이 있습니다. 유인원이 진화했다고도 하고 어떤 종교에서는 신이 흙으로 만들어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관심은 없으나, 불교에서 사람의 시초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 가라고 물어올 때 답할 말이 없습니다. 최초의 인간에 대하여 경의말씀은 어떠하온지 또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다든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요.
우선 경전의 말씀부터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최초의 인간이 어떠하였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경전〈장아함경중 소연경, 세기경본연품, 중아함경 범지품.대루탄경 등등〉에 보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같습니다. 최초의 인간에 관한 경전의 말씀을 우선 요점만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최초의 사람은 색계(色界) 제2천광음천에서 복이 다하고 수가 다한 천인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광음천이란 색계천 제2선천에 3천이 있는 중, 그중의 제 3천으로 무량광천이라고도 하고 극광천이라고도 합니다. 이곳에 사는 중생(하는사람)은 말이 없이도 몸에서 발하는 광명으로 의사를 통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시초는 어떤 권능자가 와서 무엇무엇을 반죽하어 만든 것이 아니라 천상사람이 이 세계에 화생(化生)한 것입니다. 화생이란 말은 태어서 난 것이 아니라 변화하여 났다는 말입니다. 몸에서 스스로 광명을 내고 신통력이 있어서 자유로이 날아 다녔습니다. 새와 인간이 결합한 것 같은 날개돋친 사람이 아니라 천상사람이 지닌 정력의 연장으로 정상적 인간인 채로 날아다닌 것입니다. 음식은 생각만 하면 배가 부르고 시장을 몰랐습니다. 이런 샹태는 오랜 동안 계속됐는데 서로들 스스로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였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 땅에는 샘이 솟아났는데 그것을 감천(甘泉)이라 했습니다. 우유 같기도 하고 꿀 같기도 하여 맛이 매우 달았다고 합니다. 그때 중생들은 감천을 보고 「이것이 무엇일까. 한 번 먹어볼까」하다가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았습니다. 매우 맛이 좋으므로 마침내는 두 손으로 움켜쥐고 퍼마시고 싫은 줄을 몰랐습니다. 많은 중생들이 역시 그렇게 감천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중생들의 몸이 거칠어지고 살이 찌며 몸이 굳어져 천상사람의 아름답고 미묘한 형색을 잃었답니다. 뿐만 아니라 몸에서 나는 광명도 줄어들고 날아다니는 힘을 잃어 땅을 걸어다니게 됐습니다. 그후에 중생들은 다만 지미(地味)를 먹으면서 이 세간을 살아갔는데 그 가운데 지미를 많이 먹은 자는 얼굴빛이 거칠고 추하며 적게 먹은 자는 아직도 몸에서 광택이 났으니 이때부터 사람의 얼굴에 추한 사람과 단정한 사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서 단정한 자는 교만심을 내어 추한 사람을 업신여기며 얼굴이 추한 자는 또한 단정한 자를 질투하고 미워하게 되니 여기서 분쟁이 생기게 되었답니다. 이와 같이 서로 불목하고 다투고 음식에 탐식을 내면서부터 저절로 감천은 사라지고 그후에 자연 지비(地肥)가 생겨났습니다. 빛깔도 곱고 맛도 좋으며 향기로와서 먹을만 했습니다. 중생들은 이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기를 오래오래 지낸 동안 지비를 많이 먹은 자는 얼굴이 추하고 적게 먹은 자는 아직도 밝게 빛났습니다. 지비를 먹고 사는 동안에도 얼굴이 단정한자는 교만심을 내어 추한 자를 업신여기고 추한 자는 또한 단정한 자에 대해 미움과 질투심을 내니, 중생들은 또한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생활이 이렇게 거칠어지자 지비는 다시 나지 않았답니다. 자비가 없어지자 새로운 식량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파라(婆羅) 혹운 추후지비가 나왔답니다. 이것도 먹을 만하여 향기롭고 맛이 좋았다고 합니다. 중생들은 이것을 먹으며 오랜 동안 살았습니다. 파라도 여느때와 같이 많이 먹은 자는 얼굴이 추해지고 그 중에서 덜먹은 자는 얼굴이 밝으니 서로 미워하고 다툼을 일으켰고 끝내는 파라마저도 나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후에 자연 경미(自然경米)가 났습니다. 이것은 쌀 종류인 모양인데 빛은 희고 깨끗하며 거기에는 거친 은 겨가 없어서 그냥 먹을 수 있었답니다. 길이는 4치 정도이고 아침에 베면 저녁에 나고 저녁에 베면 아침에 돋아났으며 간이 맞고 먹음직했답니다. 중생들이 이것을 먹으면서부터 차차 모양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중생은 남자 형상이 되고 어떤 중생은 여자 형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녀의 형상이 생김을 서로 보고서 「악중생」이 났다고 말을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한 사람이 생기자 중생들은 서로 쳐다보고 살피고 하는 동안에 마음이 물들고 번뇌를 일으키며 마침내는 서로 애착심을 일으켜 성욕이 생겨 더욱 친근하게 되었답니다. 이윽고 부정행을 저지르니 다른 중생들이 보고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며 크게 꾸짖었습니다. 부정행을 한 남자도 스스로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내가 잘못했다 하고 땅에 엎드려 일어날줄 몰랐습니다. 부정행을 함께 한 여인이 음식을 갖다주니 여기에서 처(妻)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후에 중생들은 부정행을 더욱 더하게 되니 스스로 집을 만들어 그안에서 때도 없이 정욕을 함부로 했답니다. 여기에서 부부가 생기고 수명과 복이 다한 중생이 명을 다하고는 이 세간에 태어나 어머니의 태중에 드니 이것이 인간 태생의 최초랍니다. 이상이 여러 경전에 보이는 이 세상 최초의 인간에 관한 기록입니다. 어쩌면 일종의 신화라고 웃어 넘길런지 몰라도 그럴 수 없는 중요한 시사와 교훈을 거기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땅에 최초의 인간은 어떤 신이나 권능자가 만든 것이 아니고 천상사람이 화생했다는 점입니다. 색계천 중광음천에 사는 천인이 복이 다하고 명이 다함에 인간으로 화생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이 원래로 청정하여 동요가 없지만 중생은 미혹하여 번뇌를 일으켜 여러 가지로 그 마음이 동요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중생차별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그렇다면 광음천 중생이 번뇌를 일으켜 보다 거친 마음의 파동을 일으키게 될 때 당연히 광음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삼매력)정도의 세계를 만나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 땅에 회생한 광음천인도 그 마음이 더욱 거칠어지기전까지는 자기 광명으로 살고 생각으로 음식을 삼으며 자유로이 날아다녔다고 하는 점은 광음천 천인의 정력 속성인 것도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인간의 생활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는 매우 흥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식량문제인데 최초에는 감천을 마셨고 다음에는 지미를 먹었으며 3단계에서는 지비, 4단계에서는 파라, 5단계에서는 자연경미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초의 생각으로 음식을 삼았던 중생이 음식물에 마음을 일으키고 그 맛에 낙착하여 음식을 탐색하였을 때 몸에서 나던 광명은 사라지고 신통력은 잃었으며 미묘 단정한 천상사람의 모습을 잃어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활의 차별이 생겨 추한 자와 단정한 자가 심하게 나타나고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여 투쟁심을 일으키고 그러는 사이 식량은 점점 거칠어지고 생활은 어려워져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인간이 외적 감각에 탐착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거친 마음이 날 때 중생 자신이 원래로 지녀온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점점 상실하게 되고 또한 식량이라는 생활 조건의 변동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인간이 당초에는 남녀 구별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가 지닌 삼매의 힘이 어느 정도 남아 있고 감천이나 지미, 지비등을 양식으로 하고 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남녀의 성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만해도 광음천의 기본적 삼매력이 존속되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자연 경미를 먹기 시작한 때부터 남녀상이 나타나고 남녀가 서로 보매 점차 정욕심이 생겨서 서로 친근해지자 당시에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인간의 시초와 그 생활상을 살펴볼 때 무엇이 인간의 향상이며 무엇이 인간의 타락인가를 여실히 보는 것입니다. 경계에 빠져들어 감각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나아가 그 마음에 대립심이 생기며 증오하고 다툼이 일어날 때 이것은 인간 타락의 길이었습니다. 인간의 정신적 타락이나 생활상의 타락은 단순한 인간 자신의 타락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 생활환경이 급격히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적 감각에 의존하여 욕망을 일으키고 그 추구에 빠져들었을 때, 첫째는 인간이 지닌 정신적 능력이 감퇴하였고 다음에는 그 얼굴이나 몸매와 모습이 거칠고 추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생활 환경에 일대변화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최초의 인간설에 관한 경전의 말씀에서 우리들은 많은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보다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환락과 증대를 인간 조건으로 생각하며 물질 만능 문명의 지향성에 대하여 우리는 깊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자성불과 믿는 힘
질문2), 불교는 자기 성품이 부처님이며 마음이 부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믿고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하나 저희들은 힘이 없는 범부중생입니다. 저희들이 무엇은 할 수 있겠습니까? 어려움을 당하여 당황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부처이며, 마음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의 선포입니다.인간권위와 가치와 자력개발은 위해서 만들어 낸 이론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인의 실상이 부처이며 본성이 법입니다. 그런데 인간 실상이 부처이건만 우리가 의식하고 생활하는 세계는 미혹의 세계이며, 업의 세계입니다. 실재는 부처의 세계이건만 미혹과 업장 때문에 그렇게 보고, 그렇게 살아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품이라 하고 마음이라 말해도 그것은 미혹속의 말이며, 해탈을 말하고 청정을 말해도 업혹속의 말이 됩니다. "나"라고 말하나 그 "나"도 미혹된 의식입니다. 우리가 쓰고 의식하는 것은 업력의 소산이라는 말이 됩니다. 비록 그러하나 우리의 생명 본성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영겁을 통하여 변함없이 "여기 지금"에 있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부처님이 여기 계신다는 말이 됩니다. 부처님은 조금도 멀리계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자성불이라고 하는 말은 부처님은 곧 자기 본성이란 뜻이며 본성이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생각하고 움직이며 온갖 일을 이룩하는 것도 근본 힘인즉 죄업의 힘이 아니라 부처님의 위신력입니다. 우리 생명의 본바탕이 부처님의 은혜로운 신력으로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줄을 모르고 경계에 집착하여 미혹세계를 의식합니다. 우리가 의식하는 미혹세계는 장애도 많고 고난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장애와 고난이라는 것이 우리의 본래 세계인 부처님의 은혜의 세계에는 원래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애와 고난속에 헤매는 범부중생들이 고난에서 벗어나자면 고난이 없는 부처님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염불이지요. 부처님을 생각함으로써 미혹의 속박이 무너지고 은혜로운 공덕세계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 도리를 안다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염불하는 것이 먼 데 있는 부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기 참 생명인 부처님을생각하여 함께하는 것입니다. 자성불이라고 말하나 자성불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불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성불이라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미혹된 생각이 낳은 분별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깨달아 스스로 부처님 법을 사무처 보던지 아니면 대자대비, 무애 위신력인 부처님을 믿고 일심염불하는 것이 요긴합니다. 물으신 분은 힘이 없는 범부라고 하시나 자성불이 부처님이며, 가장 가까운 부처님이며, 진실한 자기 생명인 부처님인 것을 믿고 일심 염불하신다면 처처에 불신력이 나타난 것을 보실 것입니다.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불력으로 살며 업보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공덕세계를 사는 것을 보시리라 믿습니다.
3)부처님은 무한 진리일진대.............
질문3), 진리가 우리의 본성 자체라면 어찌하여 부처님이 우리에게 공덕을 주신다고 합니까? 또 진리 자체가 석가모니 부처님은 특징적으로 한정된 부처님인데 어찌하여 거기에 절대 무한한 진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말씀과 같이 진리 자체가 만인의 본성입니다. 그것은 법이며 일체 제불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주고 받을 것이 없습니다. 원래로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참 모습은 그런 것이지만, 범부들이 의식하고 있는 경계는 착각된 경계인 까닭에 그 원래의 진리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착각된 상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착각상태인 범부의 경지를 인정해 두고 말을 하자니 부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또는 원래부터 주셨다는 표현을 하게 된는 것입니다. 범부로서는 또한 그것이 사실입니다. 또 석가모니불이라는 명자에 사로잡혀 보면 부처님은 절대영원성이 아니고 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름과 모양에 사로잡혀서는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금강경에 거듭 말씀되고 있는 것을 다시 살피시기 바랍니다.
4)창조와 한정
질문4), 스님께서는 창조는 무한성의 자기 한정이라고 하셨고, 또한 "꿈의 날개를 펼쳐라, 자기 한정을 하지 말라" 고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잘 물으셨습니다".
우리 본성은 무한이며 한계를 넘어선 절대의 권능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자성을 모르고 항상 자기를 "이 정도다"하고 한정하고 생각하며 그렇게 자신을 비소한 존재로 생각하고, 환경과 조건 속에 갇히고 육체에 갇힌 자그마한 존재라고 자기 한정을 함으로써 사람의 능력과 성장이 위축되고 정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한정을 두지 말고 본성의 무한성과 원만성을 깨닫고 믿어서 용기있게, 활기차게 큰 꿈의 날개를 펼치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을 한정하고 환경조건의 종속자라고 생각하는데서 자기 힘은 개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에 '창조는 무한성의 자기 한정' 이라 한 것은 그 차원이 다른데 있는 것입니다. 원래로 진리 자체는 어떤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유(有)도 무(無)도 멀리 초월한 절대존재입니다. 그것이 시간과공간이라고 하는 선상에 구체적으로 형상을 나툰다고 하는 것은 무한성인 근본원리를 이러한 시공성 속에 한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그러므로 우리들은 무한절대의 자성진리를 구체적으로 깨달아서 원래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원만성으로 살고, 그것을 역사성 앞에 구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역사라 하는 시간과 공간적인 한정을 가함으로써 현상적 현실의 창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근본 형식입니다. 이 점을 혼동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5)진실이란 무엇인가?
질문5), 진실이란 과연 무엇이며 진실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
진실의 반대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진실의 반대는 허위이고 허망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 허망하다 하는 것은 주체적 자기 생명에 충실하지 못한 삶을 말하게 됩니다. 욕망을 쫓고 환경 적응에 시달리고 관계 상황에 한 눈을 팔며 팔랑개비처럼 돌아가는 인간의 삶이란 삶 자체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합니다. 인간이란 단지 욕망의 도구인가, 환경의 노예인가, 관계상황의 시녀인가, 물질 축적의 기계일 뿐인가.... 허다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그러한 활동의 근본에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기를 잃어 버린, 삶의 지표를 잃어 버린 인생은 이래서 공허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주체적 자기로 사는 것입니다. 본성대로 사는 것입니다. 본성인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가를 아는데서 옵니다. 본성을 알자면 허망한 그림자를 쫓는 생각을 놓아야 하며 밖에서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하며 어떤 확정적인 것에 대한 주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주착과 집착에서 벗어날 때 거기에 진실한 우리는 확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진실한 생명을 가리키고, 그 길을 행하게 하는 것이 불도입니다. 말이 추상적인 것에 치우친 감이 있어 말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욕망과 명예와 소득에만 매달리고 형상만 쫓는 삶은 허망합니다. 자비한 마음으로 일체에 화합하고 따뜻하게 대하며 대립없는 마음으로 부지런하고 활발하게 창조적 삶을 열어가는 것은 이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은 자기 생명을 사는 것이며 진리를 사는 것이며, 창조와 번영과 기쁨을 가져오고, 이웃에 평화 화합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진실하지 않은 삶의 특징은 이기심, 대립감정, 나태, 옹고집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6)왜 무능한가?
질문6), 사람은 누구나 본성이 불성이라 하는데 어째서 저에게는 고통이 많고 무능합니까?
고통이 많고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소견입니다. 고통이 많다 하지만 한 두 가지 고통 빼놓고 즐거운 일이 얼마나 당신에게 많습니까?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가 있고 밥이 있고 학교가 있고 사회가 있고 또 아름다운 자연이 무한정으로 있습니다. 또 몸만 하더라도 심장이 뛰고 맑은 피가 돌며 마음껏 호흡할 수 있고 따뜻하고 시원한 것을 분별하며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니 이 얼마나 풍부한 행복스런 환경입니까. 고통스럽다 하는 것은 그때 그때 흘러가는 흰구름 같은 것입니다. 생명의 진리에 어긋난 행을 했을 때 나타나는 적신호이고 새롭게 배울 것을 가르쳐 주는 교재입니다. 우리는 교재를 이수해서 참된 자기 생명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또 무능하지도 않습니다. 무능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무능의 시작입니다. 필요한 것, 참으로 바라는 것, 참으로 하고자 하는 것을 신념으로 흔들림 없이 계속해 나간다면 뜻한 바는 이루어 집니다.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참된 소망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바른 믿음과 결단적 행동과 지속적인 정진이 요구됩니다. 무지와 나태로는 손에 쥐어진 여의주도 결코 행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7)선악이 있는가
질문7),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서로 상대가 되어있는 듯이 보입니다. 선의 근본은 무엇이며 악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선과 악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지혜의 눈으로 보면 악은 원래로 없는 것이라 합니다. 있는 것이란 선 하나 뿐이라는 것이지요. 원래로 이 세계는 서로 돕고 힘이 되면서 제각기의 개성을 키워가며 전체를 아름답고 조화있게 꾸며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범부들은 그런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 속에서 착각을 일으켜 곡해도 하고 탐착을 냅니다. 그래서 원래로 밝고 착한 세계속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지혜의 눈을 열어 이 세계의 인간이 선하고 이 국토, 이 세계에 선이 가득한 것을 발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근본은 선입니다. 악은 없는 것이나, 미혹하여 악을 보고 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8)선악의 절대기준
질문8), 옳고 그름, 좋고 나뿜의 절대적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겉으로 보면 선악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도 보일 것입니다. 그때 그때 상황과 조건따라 기준을 달리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그 내면에 눈 돌리면 몇가지 통일된 공통의 기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평등과 공동성과 개성 존중과 발전입니다. 그렇지만 개성의 존중과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공동성이 깨질 때도 있고 평등이 위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발전을 능률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때로는 개성의 존중이 억압될 수도 있습니다. 공동성과 평등의 추구가 때로는 개아의 존엄과 창조적 발전을 저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나 방법을 들어서 이것이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됩니다. 여기서 돌이켜 살펴보면 하나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자칫하면 어떤 방법으로 고정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하는 것은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며 수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무엇을 위한 수단이며 방법인가에 착안하여아 합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과 사회의 진실한 안정이며 성숙이며 발달입니다. 인간이 참되게 안정되고 성숙하며 발전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그때 그때 상황과 존건따라 주의 사상과 방법과 체제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주의나 사상도 방법이나 체제도 그것이 절대적일 수 없으며 인간의 상위에 설 수 없으며 인간에 군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인간을 위한 수단이며 봉사를 위한 기능 이상의 것이 아니며 상황과 조건에 상응한 시간적 공간적 한계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 가치의 기준은 참된 인간성의 존중과 원만한 성숙과 자유스러운 계발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을 바꾸면 불성의 자유스러운 계발과 역사적 현장에서의 그 구체적 실현이라 할 것입니다.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신앙과 그를 위한 환경조건의 보장과 진리 실현의 의미는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큰 의미가 있음을 이런데서 이해하게 됩니다. 선악의 절대기준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선악을 만드는 자
질문9), 우리의 자성이 선과 악을 다 만드는 것입니까? 그래서 그 과보를 받는 것입니까?
겉보기에는 우리의 청정자성이 선악을 잘못 분별하여 선을 짓고는 천상에 나고, 악을 짓고는 악도에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청정자성은 오직 청정할 뿐입니다. 언제나 밝고 착하고 오직 진리공덕만이 가득합니다. 그밖의 것이란 없습니다. 청정자성에 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청정자성은 원만한 공덕이 충만한 것으로 믿어야 하겠고 그 밖에는 없는 것으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악한 법은 청정자성에는 본래 없는 것인데, 미혹하여 착각을 일으켜 나쁜 현상에 끄달려 악을 짓고 악한 과보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혹을 돌려 깨달음에 이르면 미혹의 결과인 온갖 고통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악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악에 적극적인 실체가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은 잘못입니다.
10)두뇌의 생각과 법성
질문10), 우리의 두뇌로 생각하는 것이 법성에 속한 것인지 육체의 연장인지 알고 싶습니다.
육체와 마음을 보는 범부의 경계는 모두가 색수상행식의 오온의 전개입니다. 두뇌는 색이고 생각은 식입니다. 그러므로 범부가 보고 느낀 것, 오온으로써 법성 자체를 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온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의식할 뿐이고 사실은 법성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래로 말하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법성의 실현입니다. 범부는 그것을 오온으로 삼고 달인은 오온에서 법성을 보는 것입니다.
11)천인이 있는가?
질문11), 하늘 사람이 정말 있습니까?
우리의 인간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만큼 역시 천상사람도 현실적으로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평상적인 인식능력,의식차원으로는 인식할 수가 없는 것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범부의 인식권밖에 있다는 말입니다. 원래 범부들은 본성에 있어서 법성이며 진리성입니다. 그런 만큼 완전합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미혹하여 완전한 진리본성을 그대로 개현하지 못하므로 중생이라 하는데 본성을 개현하지 못한 정도에 따라 무수한 차별중생이 있게 됩니다. 여기서 6도중생이 벌어지는 것이고 그 가운데 인간도 천상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천상 사람도 범부입니다. 본성은 미혹하고 있으나 그래도 디립심 미운 마음보다는 평화와 자비와 밝은 마음이 많은 중생이 천인보를 받습니다.(욕계의 경우) 5계를 지키면 인간이 되고 10선을 닦으면 천상에 난다는 말은 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천상에도 여러 차별이 있습니다. 미혹한 상태, 착하고 밝은 마음의 정도가 다르므로, 여러 천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중에도 착한 마음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천상도 있습니다. 그것은 색계천인데 거기에는 산란심이 없는 깊은 마음(선정)의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천상의 이름만 열거해 보겠습니다.1. 욕계천(6천) : 사왕천, 야마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
2. 색계천(18천)범중천, 범보천, 대범천(이상 초선천) 소광천,무량광천, 극광정천(이상은 제2선천),소정천,무량정천,변정천(이상제3선천)무운천,복생천,광과천,무번천,무열천,선현천,선견천,색구경천(이상제4선천)3. 무색계천(4천):공무변처천,식무변처천,무소유처천,비상비비상처천.
12)천상과 욕락
질문12), 천상에 태어난 하늘 사람에게도 세간과 같은 욕락이 있습니까?
천상도 중생이 사는 삼계 가운데에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천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삼독심이 담담하거나 마음이 착하고 맑고 안정된 상태에 있는 차가 있습니다. 천상이라 하여도 욕계천 색계천 무색계천에 차별이 있어서 그 사이에 세간적 욕락이 있고 차이가 있습니다. 욕계천에 태어난 천인들은 세간적 욕락이 모두 갖추어 있어 행복을 누립니다. 색계천 이상이 천상에서는 그 경지를 넘어서 맑고 안정된 마음의 기쁨을 누리므로 욕계천과는 질적인 차가 있습니다. 또 욕락을 즐기는 욕계천이라 하더라도 천상에 따라 즐기는 방법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욕계언의 사람들이 음사를 행할 때에 사왕천과 도리천에서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육체로 사귀고, 야마천에서는 서로 포옹하며 도솔천에서는 손을 잡고 화락천에서는 서로 쳐다보고 웃으며 타화자재천에서는 서로 쳐다봄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을 욕천의 오음이라 합니다만....
13)악인은 죽어야 하는가?
질문13), 세상에서 악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꼭 죽어야 하는지 의심이 갑니다.
악한 사람은 죽여야 하는가? 가장 이성적인 집단인 국가가 악인이라고 하여 죽인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형벌로써의 사형제도 있다는 것은 국가가 어떤 사람에게 대하여 교정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인간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한 까닭이라 생각합니다. 악인은 원래로 없는 것입니다. 악한 환경, 악한 조건에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그릇된 행을 해서 자신도 사회도 국가도 함께 해룰 주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가로 죽음을 안길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천번 다시 될 수 있습니다. 겉모양이 잘못되었을지라도 스스로는 천번 만번 새로워져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원래가 본성이 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형법제도로써 사형을 두는 것은 통치 질서와 사회 안정상 부득이 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형이 가지는 일반 위혁적 효과와 악한 일을 한 자에게는 악한 과보가 따라야 한다는 인과응보적인 사고방식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하여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 속죄하며 원결을 푸는 것이 몇배나 나은 것입니다. 또 범죄로부터 사회를 방위한다는 이론도 반드시 사형을 합니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차라리 적정한 교도 방법을 통하여 그가 사회로부터 일정기간 격리되는 속에서 참회와 교욱으로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새 희먕을 부어줌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서 재생시킬 노려을 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한다 하겠습니다. 국가는 마땅히 인간에게 주어진 높은 가치를 계발하기를 도울지언정 근본적으로 파괴할 수는 없다고 샟각합니다. 그래서 설사 악인이라 보이더라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인리라는 판단이 결코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판단. 그 결과로서의 사형,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과오 이러한 무고한 짓을 어찌 정의의 이름에서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인생이란 영원을 향하여 성장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14)상근기와 하근기
질문14), 사람에 따라 상근기. 하근기가 원래로 있는 것인지 말씀하여 주십시요.
법보단경 반야품에서 혜능조사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원래 사람에게는 반야지혜가 갖추어 있어 거기에는 큰 지혜있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것이 없으며 다만 미록한 정도가 같지 않은 것 뿐입니다. 하근기라고 하는 것은 이와같은 본래로 차별이 없는 원만한 반야지혜를 알지 못하고 삿된 소견에 물들어 경계를 집착하고 망념을 일으키게 되므로 언제 나 명랑한 반야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줄만 알고 번뇌를 쉬면 거기에 어찌 근기의 크고 작은 것이 있겠습니까. 원각경에 말씀하시기를 <정법의 바른 수행문을 만나면 근기의 대소차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성불한다.>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15)인구와 본성
질문15), 세계는 지금 인구가 크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나 중생의 성품도 늘어나고 줄어듬이 있는지요?
지구상의 인구가 는다고 하지만 본성을 미혹한 중생의 영혼<영식>은 인간에게만 있어서 그것이 미국이나 영국이나 박씨나 김씨의 집으로 뱅뱅도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의 영식은 지옥. 아귀. 축생 내지 천상에 이르는 6도에 널려있습니다. 다만 자성을 깨달아야 중생경계를 벗어나고 6도 윤회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인구 절대수가 는다는 것은, 인간 외의 다른 중생이 인간으로 올수도 있고 천상이나 귀신계에 있던 중생도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거기에 모순은 없습니다. 영혼은 본성을 깨달을 때 중생성을 벗어나는 것이며. 중생의 본성에는 늘고 줄어듬이 없는 생각 밖의 <무한성>이라는 것을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제2장 : 부처님
1)부처님은 왜 불멸인가?
질문16), 부처님은인도 가비라국에서 출생하시고 구시나가라에서 입멸하신 것이 불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런데도 스님은 부처님은 불멸이라 하시고 영원한 현재성을 말씀하시니 어찌된 말씀입니까?
잘 물으셨습니다. 부처님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 불타관이 명확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경을 대하거나 믿는다면 흔들리게 됩니다. 사실 고오타마.싯달타, 석가모니 부처님은 약 3천년 전에 인도에서 나시어 그곳에서 입멸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부처님은 열반을 보이되 죽음이 아니며 실로는 항상 현재하건만 범부들이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사의 비유를 들어, 병들은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약을 만들어 놓고 먹을 것을 권하며, 다시 먹게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외지에서 죽었다고 말을 하고, 아들들이 약을 먹고 병이 나으니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비유처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자비심으로 짐짓 멸도상을 나투는 것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형상이나 음성으로 볼 수 없다 하시고, 여래는 온다거나 간다거나 생사의 모양이 실로 없다 하시고 <진여가 여래며 불성이 여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래로 부처님에 대한 이해를 분류하여 변화의 몸과 닦아서 이루신 완전한 몸과 법성생명 본래의 몸의 세가지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법성의 몸이시기에 생멸 거래가 상관이 없는 법성진여 그대로의 몸이십니다. 이것이 법신입니다. 부처님의 본래 몸입니다. 법신인 부처님은 원래로 대자대비하시므로 짐짓 닦는 상을 보이시며 성불상을 보이시며 또한 세간의 풍파와 고뇌속에 출현하시어 ㅜ행도 고행도 열반도 보이십니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보신이나 화신을 통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때로는 보신을 때로는 천백억 화신을 나투십니다. 3천년전에 룸비니에 나시고 구시나가라에서 멸도를 보이신 것도 대비 시현의 변화상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법성으로써 빛나는 지혜와 뜨거운 자비가 막힘없이 자약하시며,산너머 바다 너머 구름 너머 푸른 하늘에 영원한 태양처럼 자재하십니다. 어떤 분은 <법신은 비로자나불이시니 석가모니불이 아니다. 석가모니불은 법신이 아니라 화신일 뿐 >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신을 여읜 화신이 없고 보신도 없습니다. 화신에서 화신만 본다면 그성은 중생견입니다. 실로 일체 화신은 일찍이 법신을 어의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불은 법신이며 일체불의 대표적 명호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올 때 부처님은 오직 부처님일 뿐이며 그 이름은 석가모니불이라 하고 석가모니불의 화신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뜻은 법화경 수량품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처님은 3천년 전에 돌아가신 과거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위대한 교훈을 남기시고 먼 곳으로 떠나고 마신 영원한 인류의 스승만은 아닙니다. 오고 가시는 부처님이 아니시고 생사열반에 자재하신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은 영원한 현재성으로 영원한 공간에서 우리 모두의 절대적 주체성에서 가장 가까운 나의 생명의 원형으로 이해되고 파악되며 또한 그런 것이 영원한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가장 자비롭게 우리 생명을 키우고 살피시는 부처님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경에도 말씀하셨습니다.<너희들이 맑고 곧은 마음으로 일심으로 나를 찾으면 곧 내가 앞에 나타나서 '나 여기 있노라'하리라.> 이 믿음을 갖고 수행하는 모든 사람이 생생한 부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2)불교는 철학 사상인가 ?
질문17), 부처님은 29세에 출가하시어 35세에 성도하시고 80세에 열반에 드셨으니 우리는 오늘날 부처님 안계신 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의 말씀의 기록과 행적을 따라서 부처님을 우러러 보기도 하고 가르침을 따라 수행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교학체계, 사상체계를 따라서 가파른 길을 닦아 올라가는 듯한 적막감과 외로운 감정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옳은 생각이겠습니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신앙이 그렇게 허술해서는 안됩니다. 경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부처님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몸이 아닙니다. 항상 머무는 몸이시며 허물어지지 않는 몸이시며 밥을 잡수셔서 유지된는 몸이 아니십니다. 금강의 몸이시며 진리의 몸 법신이십니다. 불자는 모름지기 <부처님은 법신이다>하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법신이시므로 불생불멸 부증불감 하시고 영원자재 하시고 원만구족하시고 대자대비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래가 멸도의 모습을 보이지만 실로는 멸하지 않고 너희들이 곧고 바르고 간절한 마음으로 찾으면 언제나 네 앞에 나타나 '나 여기 있노라'하시고 >법을 설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부처님은 법신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법신이신 까닭에 인간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습을 하시고 인간계에 태어나 인간과 더불어 고뇌하시면서 해탈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면 인간들이 부처님을 알 수 없고 해탈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해탈의 뜻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천상중생을 제도하실 때는 하늘사람 모습을 나투시어 법을 설하십니다. 육도중생 앞에 천백억 화신의 몸을 나투시지만 실로 그 모습은 변화신이며, 중생을 위한 응화신이십니다. 부처님 자신은 일찍이 오신 바도, 가신 바도, 변화하신 바도, 열반에 드신 바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필요에 따라 바다에 갈 때는 수영복을 입고 산에 오를 때는 둥산복을 입으며 예식자리에 나아갈 때는 예복을 입고 달나라에 갈 때에는 그에 적합한 우주복을 입되 옷을 입은 주인공인 우리들 자신은 조금도 변화도 손상도 없는 거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또는 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보였다 하여 부처님이 온 것도 아니며, 간 것도 아니며, 멸도에 든 것도 아닙니다. 항상 법신으로써 여여할 뿐입니다. 대자대비하시고,대지혜이시고,대위신력 충만하신 부처님은 영원히 그대로이십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여래는 간 바도 없고 온 바도 없다.>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현재로서 일체처 일체중생 앞에 항상 나타난 계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법신인 도리를 안다면, 언제나 자비하시고 따뜻하시며 끝없는 은혜로 감싸주시는 부처님을 알게 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때나 흔들림없이 대자비 위신력에 의지해서 역경을 이기고 창조적 생화를 열어가게 됩니다. 끝없이 자비로우시고 영원 자재하신, 법신인 부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를 철학사상이니, 운리종교니, 교주가 죽은 적막종교니 하고 비방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거듭 기억해 두십시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열반을 보이시되 실로는 열반에 듬이 아니고 대자비 열반상, 대자비 구족상이 영원 불멸하고 항상 현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부처님은 몇분인가?
질문18), 설법을 듣거나 경을 읽어 봐도 많은 부처님이 계신 듯 합니다. 석가여래부처님, 아미타불, 미룩불 그밖에도 퍽 많습니다. 우리는 서가모니불을 본사라고도 하는데 또 미타경에서는 아미타불을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사방에 많이 계셔서 서로 찬탄하시면서 그 가르침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결국 우리들은 여러 부처님을 다 배워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좋을지요.
말씀하신 바와 같이 경에는 여러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연등불이 계시고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도 계십니다. 국토에 따라 여러 부처님이 계시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의 근원은 둘이 없습니다. 법인 부처님이 계실 뿐입니다. 참으로 부처님을 보는 사람이면 법을 본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도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또 <여래는 나고 죽는 몸이 아니며 음식을 먹어 지탱하는 몸이 아니라 금강신이며 항상 머무는 몸이며 법의 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본 몸은 법이고 법은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법인 까닭에 그 수명이 한량이 없고 또한 한량없는 국토에서 중생들을 교화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다. 나는 항상 사바세계에서 설법 교화하였으며 그밖에 다른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국에서 중생들을 교화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나는 연등불에게서 법을 얻었다고 말하고 또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방편으로 분별한 것이다. 나는 중생들의 근성을 관찰하여 그에 마땅한 바에 따라 제도하였으니 여러 곳에서 말하는 이름이 같지 않고 나이가 각각 다르며 열반에 든다고도 말한다.> <내가 성불한지는 매우 오래이고 한량없는 아승지겁 동안을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면 결국 부처님의 근원은 법이고 법인 부처님의 근원인 석가모니불이라 하여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석가모니불이란 이름이 석가족에서 난 성인이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어서 마땅하지 않은 점도 있으나 경전의 말씀을 비추어 그렇게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부처님은 필경, 일불이고 일불이 일체불인 것입니다. 중생을 위하여 나시는 국토나 때가 다르고 명호가 다르지만 그것은 중생을 위하여 발편을 따를 뿐이고 원래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라 하겠습니다. 대반야경에는 <반야바라밀이 세존이고, 세존이 반야바라밀이다.>하셨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근원부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법으로써 영원하시고, 법으로써 항상 현재하시며, 법으로써 대자대비하시고,법으로써 원만구족하신 부처님을 볼 뿐입니다. 가시지 않고 오시지 않고 언제나 법성으로 원만하시고 자재하시고 자비하신 은혜의 부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부처님은 일불인 동시에 다불이고 다불인 동시에 일불이시나, 법이신 부처님은 유무에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다 둘이다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 것을 알겠습니다.
4)부처님의 가피력
질문19), 우리들의 본래 생명은 불성 자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로운 가피력을 미칠 수 있는지요?
훌륭한 말씀입니다. 부처님은 불성자체로 계시며 우리의 본성이 또한 불성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우리의 본성과는 둘이 아닙니다. 주고 받을 것이 없습니다. 더하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우리의 본분을 잊고 있습니다. 망념에 사로잡혀 엉뚱한 경계를 짓고서 그에 빠져 삽니다. 우리의 본분 생명이 부처님과 하나이면서도 부처님 경계와는 아주 딴판인 경계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범부중생들의 경계는 실지가 아니고 허망한 것이어서 몽환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꿈세계에서 깨어나 본분세계에 돌아갈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꿈속에서마저도 욕심을 구하고 안락을 추구합니다. 이런 때에 부처님께서는 큰자비와 큰지혜로써 방편의 문을 여시어 우리를 제도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몽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부처님은 방편으로 몽환의 몸을 지으셔 우리에게 접근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타이르고 마침내는 깨달을 수 있도록 온갖 자비 시설을 베풉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 방편으로 몽환 속의 우리들은 안락과 기쁨과 성공도 얻고, 노력하고 정진하여 깨달음의 길로 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몽환 속의 범부를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자비심이 얼마나 지중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한다면 불성 본분에서는 도움을 주고 받을 것이 없지만 중생을 위하는 부처님의 대비방편에서 가피력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깨달음과 부처님 공덕
질문21), 부처님의 공덕이란 깨달음을 의미합니까? 법과 공덕과는 다른 것입니까?
부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진리란 위없는 법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은 법이며 진리이며, 진리가 곧 부처님이란 말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라 하셨는데 이것을 법불일여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공덕이란 진리가 지닌 모든 지혜와 자비와 위덕과 방편시설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완전하시고 무한하시며 원만하십니다. 멀고 가까운 거리도 없고 과거와 미래의 시간에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현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경계는 막힌곳이 없이 어느 때나 어느 곳에나 원만하지만 우리는 미혹하여 망견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부처님을 모르고 지냅니다.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믿고 닦아 나아가면 그 마음이 맑아짐에 따라 부처님의 자비하신 위신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범부들은 <부처님 은혜를 입었다. 부처님 공덕으로 성취되었다.>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안다면 우리는 언제나 부처님의 크신 진리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하겠으며 진실을 행하고 마음을 밝혀 일찍이 우리에게 주신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매사에 자신의 것으로 쓰도록 하여야 하게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환희와 창조의 생활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6)함께 하시는 부처님
질문22), 부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처님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법이시며, 법을 깨달으심이며, 중생을 위하여 대자대비 방편을 열으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에 두 부처님이 없습니다. 일체불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참 몸을 억지로 말하여 법신불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 부처님이 중생을 건지시고자 가지가지 형상을 가진 부처님으로 나투시기도 하고 또한 열반에 드시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 자체이시므로 시간 이전이시며 공간 이전이시니, 우리의 생각이나 논리나 비유로서는 집작하지 못합니다. 이 부처님이 뜨거운 자비심에서 한량없는 원력의 구름을 일으키시어 백천 방편을 베푸시게 되니 우리는 거기에서 부처님 말씀에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부처님이시고 우리의 모든 생활환경이 부처님의 크신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7)부처님이 복을 주시는가?
질문23), 부처님께서는 <니이다이> 같은 사회 최하계급 사람에게 지극한 자비를 행하셨는데 우리는 복을 비는 신앙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복은 우리가 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친히 행하여 보이신 절대평등의 자비행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그러나 복은 불보살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에 대하여는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범부들에게는 부처님께서 친히 보신 바 무량복덕세계를 모릅니다. 자기가 지어서 복을 얻는다는 견해는 부처님의 무진장 공덕문을 수용하는 자세가 못됩니다. <내가 짓는다>는 아견이 쉬어야 합니다. 그럴때 이미 주신, 바꾸어 말하면 현재 이미 갖추어져 있는 원만공덕문을 열게 됩니다.다시 말하면 무량공덕을 자유로이 쓰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을 제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무량공덕의 바다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생활조건과 환경과 뜻하는 바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기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짓는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아견과 집착을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서 보살의 원을 따라 행을 열어간다면 하나하나의 행에서 무량공덕이 넘쳐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온갖 것<복>은 부처님에게서 오는 것을 알 것입니다.
8)어머니 같은 부처님
질문24), 부처님이 어머니같은 친근감이 언제부터인지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왜그런지 알고 싶습니다.
나쁜 생각을 지니거나 불법을 비방한 사람은 부처님에게 친근감이 가지 않고 두려운 생각이 들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됩니다. 염불을 많이 하고 예경 많이하는 사람일수록 부처님께 친근감이 갑니다. 이것은 전생이나 금생이나 똑 같습니다. 아마도 귀하는 전생부터 염불을 많이 한 것으로 봅니다. 더욱 많이 염불하시고 부처님께 감사하여 부처님이라는 생각의 흔적도 없는 데까지 이르기를 바랍니다.
9)부처님이 무서울 때
질문25),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친한 감정이 우러나는 방법이 없습니까?
부처님 상호가 무섭게 생겨서 두려운 생각이 날 때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고 부처님 상호가 미묘 단정하더라도 단청과 울긋불긋한 원색적 강한 빛깔이 두려운 분위기를 자아낼 때도 있겠지요. 어쩌면 부처님은 선악을 꿰뚫어 보시고 죄있는 사람을 벌해 주는 거와 같은, 신비스럽고 두려운 존재라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그렇지 않은데 부처님이 두렵게 생각될 때는 좋은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첮째 부처님 앞에 떳떳한 바르고 큰 원을 세울 것이며, 둘째로 부처님은 지극히 자비하신 성인이라는 것을 깊이 믿고 일심으로 끊임없이 염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일체 중생과 자신의 무량겁으로부터 내려오면서 지은 바 모든 악업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만 실천하시면 부처님은 바로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임을 느끼게 될 것이고, 우리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용서하시고 언제나 조건없이 도와주시는 부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참회하고 부처님과 원을 같이 하는 사람, 지극히 자비하신 부처님을 믿고 일심으로 염불하는 사람, 그 사람은 부처님이 다시 없는 자비하신 아버지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10)부처님과 거리감
질문26), 부처님을 높은 진리를 깨달으신 위엄있는 성인으로 믿고 있으면 거리감이 있기 쉬운데 어떻게 하면 친근하게 부처님을 대하고 거리감같은 벽을 없앨 수 있을까요?
세 가지를 말씀드리지요. 첫째는 부처님의 구세대비원력을 같이 하여야 합니다. 둘째는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오기 전부터 또한 먼 미래까지 우리에게 절대적인 진리의 은혜를 베풀어 키워주고 계심을 믿고 나의 본래 면목이 부처님 진리생명이며 공덕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부처님 앞에 나의 진실한 소원을 바치고 그것이 지금 순간 순간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염불하고 독경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3장교리, 불교상식
1)불교는 자력인가?
질문27), 불교는 스스로 노력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종교이므로 자력의 종교라고 알고 있습니다마는 한편으로는 불보살님을 믿어서 그 위신력으로 고난을 이기고 장애에서 벗어나는 면도 있어 이점은 타력을 믿는 신앙으로 생각이 듭니다. 불교가 자력의 종교라 할지, 타력의 종교라 할지 어떻게 알고 있어야 할지 궁금합니다.
불교가 번뇌를 쉬고 마음을 바꾸며 바른 행을 통하여 힘써 수행하는 측면이 강한 것이 특색입니다. 힘들여 수행하는 것을 강조하고 수행의 결과로 깨달음의 영광을 얻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번뇌를 없애어 자성광명을 빛내는 것을 수행이라 하고 있으므로 철저한 자력주의 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를 자력종교냐 아니냐의 문제를 생각하는 데는 편의상 우리 스스로가 노력하는 측면과 노력하여 성취하는 측면을 일단 나누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하고 노력하는 나는 번뇌의 마음이 가득한 번뇌의 몸입니다. 번뇌 속에서 판단하고 번뇌 몸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번뇌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차원에서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번뇌 뿐 일 것입니다. 먹을 갈면 검은 먹물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수행하는 몸과 마음이 깨달음의 광명을 이룬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력으로 수행은 하지만 <깨달음>은 자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유를 들면 태양을 가린 구름이 범부요 번뇌라면 아무리 하더라도 검은 구름이 태양이 될 수가 없습니다. 노력하여 구름을 흩트려 버리든지 구름 밖으로 뛰어나오든지 또는 구름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태양을 만납니다. 거듭 말해서 우리가 밝아지고 막힘없이 자유스러워지고 허공처럼 일체를 갈무리는 무한 자율성은 번뇌인 구름으로 어찌했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건만 번뇌의 구름에 싸여있는 자가 깨닫지 못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번뇌를 없이하는 노력이요, 밝아지는 결과라 하겠습니다. 본래 밝은 자성은 나의 힘으로 밝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의 노력으로 더욱 밝아질 것도 없습니다. 원래부터 밝은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은 밝음을 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 뿐 입니다. 우리가 자력으로 이루는 수행이란 번뇌에서 벗어나는데 있는 것이고 우리가 밝아지는 것은 청정자성의 본래 공덕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살펴볼 때 수행은 우리의 노력으로 하는 것이지만 노력의 결과로 밝음을 이루는 것은 부처님 공덕이라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부처님 공덕은 번뇌가 본래없는, 자타가 없는 차원에서 오는 광명입니다. 법성 진여 자성광명의 존재성이 원래로 자타 분별을 여읜 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밝아지고 성취하고 기뻐할 온갖 공덕은 부처님에게서 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자타를 초월한 경지에 계시므로 자력이다. 타력이다 하는 분별심이 있는 상태에서는 부처님은 끝까지 저 언덕에 계시고 우러러 볼 상대입니다. 자타분별이 끊어지고 번뇌가 말끔히 쉬었을 때, 비로소 저 언덕, 이 언덕이 없고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는 법성 생명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는 자력이자 불력이요, 불력이자 자력이라 할 것입니다. 자력이란 자기의 불성으로 승화된 경지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것을 원만 성취시키는 숭고한 공덕은 어차피 말하자면 부처님의 것이며 부처님에게서 온 것이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바를 정리해 보면 불교는 스스로의 수행에 의하여 부처님을 이루는 종교입니다. 거듭 말씀드려서 일체를 성취시키는 거룩한 공덕은 모두가 부처님의 위덕이요,부처님의 공덕이며 우리를 완성시키는 지혜도 자비도 깨달음의 위력도 부처님의 위신력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의 공덕을 성취시키는 힘은 불력인 것입니다. 범부에 있어 불력은 타력으로 보이지만 번뇌를 쉬어 분별심이 끊어지면 불력은 불력이요, 타력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2)불성과 무명
질문28), 인간의 본성은 원래 불성이지만 미혹으로 인하여 중생이 되었다고 하는데 불성 자체인 우리가 어찌하여 미혹에 빠질 수 있습니까?
본래 밝은 눈으로 보면 실로는 미혹에 빠진 적이 없으며 범부중생을 따로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천번 만번 미혹하여 중생이 되었다 하더라도 실로는 불성청정이 있을 뿐입니다. 그 점은 물으신 분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중생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밝은 불성으로 살면서 밝은 불성에 착각을 일으킨 것입니다. 본래 밝은 불성에서 밝은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본래 청정하여 화활 자재한 자기 자신에게 어느 한 부분에 주착한 것이니 여기에서 자기 본성을 등지게 되고 집착으로 인하여 경계가 생기고 경계에서 분별이 생기고 다시 그것을 반복하게 되므로 중생의 미혹은 깊어집니다. 알고 보면 미혹하였다 하나 딴 것이 있는 것이 아닌데 착각을 일으킨 것 뿐입니다. 본래 청정한 자성국토에서 부질없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중생으로 비유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생각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보면 일찍이 청정본분이 조금도 변한 바가 없음을 알게 되고 일찍부터 본성을 보면 일찍이 청정본분이 조금도 변한 바가 없음을 알게 되고 일찍부터 자신에게 감추어진 무가보주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신과 영의 구별
질문29), 신과 영혼과는 어떻게 다르며 부처님의 위치는 어떤 것입니까?
영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과 같은 것이며 이것은 인간이 육체로써 생존하다가 육체가 무너져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합니다. 스스로의 진리성품을 미혹한 상태인 점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으나 다만 육체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났으므로 육체에 대한 강한 집착의 여파로 심히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이 영의 일반상입니다. 여기에서 영에게 깨달음을 주고 의지할 곳을 가르치며 새로운 밝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기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천도입니다. 그러므로 영은 스스로 새로운 삶을 받든지 천도의 공덕을 입어 새 생을 받아 태어나면 그것으로 안정됩니다. 그런데 새로 태어나는 생이 인간과 같은 육체형태를 갖지 않을 때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악신, 잡신,천신같은 경우입니다. 이러한 신들이 착한 마음을 내어 불법을 옹호하면 선신이라 하고 설사 천상에 태어난 천신이라도 불법을 믿지 않는 신도 있고 그릇된 집착<사견>을 가지는 신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천상에 태어난 신은 선량하고 위덕이 있고 행복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신들은 저급신으로서 미혹한 생을 거듭하는 범부적 생애를 반복하게 됩니다. 천신 가운데는 큰 지혜와 높은 덕성과 큰 위력을 가진 고급 천신이 있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러한 위덕은 일반적으로 착한 마음, 정결한 행을 닦는 데서 오는 과보이므로 원인이 유위이고 유한이므로 천상의 복락도 유한합니다. 복이 다하면 다시 새로운 생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색계천에 태어나는 천신이나 무색계천에 태어나는 천신들은 대개 착하고 정결한 행을 닦는 외에도 정력을 갖추어 선정의 힘으로 뒷받침 되어 있으므로 수승한 경계를 누리기는 하나 이것 역시 유위이므로 유한합니다. 인간에 있어서 법을 깨달아야 하는 것처럼 영혼들도 진리를 깨달아야 고와 속박과 유한에서 벗어나며, 저급신이나 천신이나 고급신들도 마땅히 법을 깨달아야 중생의 속박경계를 벗어납니다. 법을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근원진리인 법성을 회복한 것으로서 법성 생명을 완전 회복한 것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진리자체이시므로 일체에 걸림이 없고 완전하고 원만하며 무한정의 생명과 대자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신성과 위덕의 근원이라 할 것입니다.
4)불교에서 신앙이란 부당한가?
질문30), 불교는 깨달음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까? 따라서 거기에는 각을 탐구하고 각을 실천하는 행위가 있을 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교에서 신앙을 말하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저는 불교에서 신앙이라는 말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귀하의 말씀에서 불교는 각이고 각행이 모두라는 말씀은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거나,말로만 각을 말할 것이 아니라 직접 깨닫고 깨달음의 행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불가불 수행이 있게 되는데, 이 수행과정에서는 불가불 신앙이 있게 됩니다. 깨닫지 못한 자는 완전히 깨달은 분을 믿고 그 가르침을 배워서 행하여야 합니다. 깨닫지 못한 자가 깨달은 분을 믿지 않고 그 가르침에서 구원을 받을 뜻이 없으면 몰라도 깨달은 깨달음을 이루려는 뜻이 있는 한 깨달음의 법과 깨달은 부처님과 그 밖에 성자에 대한 믿음과 숭앙이 반드시 따르게 됩니다. 미완성인 자는 완성을, 중도에 있는 자는 궁극에 이른 자를, 가고 있는 자는 승리하고 돌아오는 자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수행에서는 믿음과 이해가 온전히 갖추어야 바른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깨달음 자체이신 부처님이 나 밖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듯 하여 도 수행이 진행됨에 따라 부처님은 사뭇 가까이 계시고 마침내는 귀하 말씀대로 다시 밖으로 더 구할 것이 없는 본래상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스스로 각이오, 스스로 각행을 전개할 뿐인 것을 바르게 실천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큰 믿음에서 큰 수행,큰 수행에서 큰 성취가 있다는 말을 다시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5)쉬운 불교
질문31), 불교는 그 구성이 너무나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반대중은 접근하기 어렵고 포교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불교의 핵심을 쉽게 알고 전법하는 법문을 말씀해 주십시오.
불교는 원래 가장 쉬운 가르침인데 배우는 사람들이 온갖 논리적 무장을 가지고 있어 믿지 않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어려운 법문도 열려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불교는 높은 철학이 있는가 하면 치밀한 논리가 있고 접근하기 어려운 웅대한 교학체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불교의 진리나 불교가 설명하고 있는 온갖 중생의 차별세계는 부처님이 중생교화를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달나라에 갔다 온 사람이 달나라 설명을 한다 하여 그 사람이 달세계를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부처님의 말씀도 부처임의 밝은 지혜에 드러난 것을 설명한 <사실>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도 진리는 그렇게 있고우리가 믿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 존재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부처임의 가르임은 모두가 진실이고 중생을 미혹과 고뇌에서 건지시려는 지극한 자비이시고 최상의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워도 법문은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밝히는데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원래부터 온전히 드러나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인데 이런 법문을 어렵다고 회피하여 허망한 경계를 방황한다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물으신 바 가장 쉬운 법문 하나를 소개하지요. <모든 사람은 본성이 불서입니다. 원래부터 부처님의 무한 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스스로 존경하고 모든 이웃을 존중하며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에게 갖추어진 부처님의 무한공덕 무한능력을 발휘합시다. 수행하는 방법은 부처님께 감사하며 일심 염불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예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하면 부처님의 무한공덕 세계가 우리와 사회와 국토 위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행복과 성공이 있게 됩니다.
6)모든 종교는 6같은가?
질문32), 우리 주변에는 불교 외에도 여러 종교가 있습니다.그런데 이 모든 종교들이 필경한 진리에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모든 종교는 필경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서로 대립하는 것인가요?
우리 사회에 어떤 명목으로든 뿌리 내리고 있는 종교들은 각기 나름대로 우리 사회와 우리 겨레에게 도움을 주는 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종교들의 근원 진리가 하나인데서 그렇다기 보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역사 속에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점이 같다고 해서 종교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평화와 안녕을 가져오는 종교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목표하는 바와, 진리와 추구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습니다. 비유를 약방에 있는 약을 들어 말한다면, 어떤 약은 감기치료에 유효하고 어떤 약은 소화촉진에 도움이 되기도 할 것이며, 어떤 약은 위장을 튼튼하게 만드는 건위제도 될 것이며, 또 어떤 약은 몸 전체를 튼튼하게 하는 보약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약은 외부 세균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하고, 또는 일시적 마취나 진통의 효과를 가져오는 약도 있습니다. 이런 약들이 모두 건강에 필요하다는 점은 같으나 기능과 효용의 범위에는 큰 차이가 있씁니다. 어떤 약은 잠정적으로 써야지 자주 쓰면 해로운 임시적 효용이 있기도 하고, 어떤 약은 몸을 해롭게도 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또 어떤 약은 장복할수록 심신을 건전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종교도 어쩌면 약을 비유로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 교설이나 수행론이 일시적 위안이나 안정을 가져올 때도 있고, 때로는 그런 방법이 심화하면 할수록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부정하고 인간의 삶의 의미를 부정하는 해독을 낳는 종교 주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설사 똑같이 자비와 관용의 실천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가 목표하는 진리에 있어서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입니다. 일체 대립을 초월한 완전무결한 절대적 주체적 진리에는 원래로 아가 없고 따라서 대립이 없고 따라서 원만과 긍정과 진실과 창조가 있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지혜의 깊고 옅음에 따라 그가 도달한 진리도 높고 낮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처음부터 깊은 지혜로 높은 진리를 믿고 닦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여 가령 옅은 진리에서 대립과 차별과 죄악과 고뇌가 있는 차원의 종교에 머물어 있게 되면 필경 낭패를 봅니다. 고뇌에서 해탈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모르고 인간가치를 몰각하며 인간과 역사의 방향을 그르치게 되니 그런 종교의 해독은 참으로 큽니다. 때로는 인간이 어떤 절대적 권능자의 종속화가 되어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혹은 피아대립으로 사회계층의 대립이 격화되며 아나가 혼란, 전쟁이 떠나지 않게 됩니다. 종교는 모름지기 근원진리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체존재와 대립이 없는 궁극적 평화, 구원, 번영을 기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같이 살펴볼 때 우리 주변에 있는 건전한 종교들은 모두가 함께 우리 인간사회에 이익을 주는 점이 있고 대립하는 바가 설사 없다 하더라도 그가 목표하는 바나 근거한 진리에 옅고 낮음이 있으므로 같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7)번뇌의 본질
질문33), 번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번뇌는 원래없는 것입니다. 번뇌 번뇌하고 찾고 이것이 번뇌다라고 추궁하는데에 번뇌가 있게 됩니다. 원래없는 번뇌를 있다고 하는 것은 밖을 향하여 경계를 위하고 다시 경계를 집착하여 분별심을 일으키는 데서 생기게 됩니다. 혜능스님 말씀과 같이 <밖을 향하여 닦는 것을 국집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마음에서 바른 지견을 일으키면 >번뇌에 물들을 리가 없고 번뇌에 상관이 없게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체번뇌 경계를 당하여 오직 취하거나 버리지를 아니하면 번뇌는 원래로 없는 것이므로 깨달음도 또한 없어서 일체작용이 모두가 대광명체가 되는 것입니다.<다만 집착하지만 아니하면 곧 업에서 벗어난다.>하신 달마스님의 말씀은 이런 뜻에서도 이해될 줄 압니다.
8)멸도가 의미하는 것
질문34), 멸도에 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멸도에 들었다 함은 원래 열반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번뇌가 다 위어서 청정한 본 성품 경계가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멸도라 하면 열반을 증득한 것, 대도를 통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용은 좀 다릅니다. 이 몸이 있는 것은 번뇌의 표시이므로 이 몸이 죽었을 때를 번뇌가 사라진 것으로 해석을 하여 멸도에 들었다고도 말하며, 대개는 스님들이 입적하신 것을 멸도에 들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9)본 생명이 있는 곳
질문35), 생명은 나지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면 원래의 본 생명은 어디에 있다는 말이 됩니까?
사람은 생멸이 있는 면과 없는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육체 생명은 모태에 수태할 때에 시작하고 육체의 죽음으로 끝이 됩니다. 그러나 육체 생명을 가져온 뿌리인 미혹된 업식은 무명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이 무명 때문에 집착과 증애가 반복되어 여러 형태의 업식을 낳고 변화하는 생을 반복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육도를 윤회하며 생멸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의 눈에서 보면 무명이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본래 청정한 본성뿐이요,바라밀뿐이요,진여법성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생멸이 없습니다. 이것을 법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인간이 본성을 깨달아 법신을 알게되면 생멸이 없는 생명을 얻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생멸이 없는 속에서 무한히 생멸을 맛보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미혹중생이지요.본 생명이 있는 곳을 물으셨는데 저에게 질문하시고 저의 대답을 듣는 곳에 있다 하겠습니다.
10)지혜와 방편
질문36), 지혜와 방편의 차이는 어떤 것입니까?
지혜는 사람마다 자기 본성의 밝은 빛을 말합니다. 본성은 지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죄 지어서 변질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때 묻을 것도, 변할 것도, 다시 얻을 것도, 없는 본성 자체는 바로 법성이며 위 없는 진리입니다. 이 본래로 밝은 자성의 빛을 지혜라고 할 것이고 방편은 미혹한 사람에 대한 자비심과 밝음으로 이끄는 지혜가 미혹한 중생병에서 베풀어지는 특색이 있습니다.
11)불공의 활물
질문37), 스님께서 쓰신 <반야심경강의>를 보니 <무소득>에 대한 설명 가운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그러나 죽은 것이 아니라... 불공의 활물이라>하셨는데 유도 무도 아닌데 어째서 불공이라 하며 또한 활물이라 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요긴한 대문에 착안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무는 유의 한 형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밖에 어떠한 무도 우리 생각속의 유입니다. 그러므로 유.무도 아닌 도리로 헤아려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첫째 믿고 닦아가면 스스로 알아집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바로 이 유도 무도 아닌 한 물건의 전면적인 현전이라고만 우선 말씀드리겠습니다.
12)삼세상과 육추상
질문38), 범부들이 도를 깨달으려면 삼세 육추를 끊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삼세 육추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요?
자세한 것은 사전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는 이해에 참고가 되는 정도로 말씀드리지요. 삼세육추란 중생의 마음속에 형성되고 있고 미혹상태를 세밀한 것 3가지와 거친 것 6가지로 분류한 것입니다. 기신론에 있는 말씀입니다. 인간본성인 진여가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온갖 생멸과 유무를 나타내고 유전하는 미혹의 현상을 9가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세밀한 것이란 진여본심에서 주관도 객관도 나누어짐이 없이, 그 작용하는 형태가 미세하여 분명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거칠다고 하는 것은 근본 마음에서 주관과 객관이 대립하고 서로 상응하여 작용을 일으켜 그 모습이 거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청정보성에서 최초의 미세한 미혹은 삼세가 되고, 경계를 대하여 대상을 집착하고 분별하는 것이 육추가 됩니다. 삼세란 1. 무명업상을 말합니다. 그냥 업상이라고도 합니다. 근본무영에 의하여 청정진여심이 움직인 최초의 상태입니다. 여기에는 아직 주관도 객관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2. 능견상 : 견상이라고도 하고 전상이라고도 합니다. 무명업상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이것이 대상을 인식합니다. 즉 주관심입니다. 3. 경계상 : 현상 또는 경상이라고도 합니다. 능견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망령되이 나타나는 인식대상 즉 객관을 말합니다. 그리고 육추란 1.지상 : 이것은 경계상에 의하여 나타난 망령된 경계를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움직여 그 대상에서 맑다든가 더럽다던가 구별하여 혹은 좋아하고 혹은 멀리하는 지혜의 작용을 말합니다. 2. 상속상 : 앞서의 지상이 계속하는 모습으로 여기서 고와 낙을 구별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3> 집취상 : 고락을 구별하므로써 더욱 크게 집착을 일으킵니다. 4. 계명자상 : 집착한 사물에 대하여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형성합니다. 5. 기업상 : 이상에 집착과 미혹에 의하여 가지가지 선악행위를 하여 업을 짓습니다. 6. 업계고상 : 업을 지으므로써 괴로운 과보를 받고 육도에 속박되어 자유를 잊어 버린 상태입니다. 이상을 살펴보면 세밀한 데서 거친 데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힘써 업을 쉬고,집착을 쉬며,분별심을 여의는 수행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삼세심을 끊는데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이 삼세육추 상을 끊는 것이며, 그중에서 삼세심을 끊으므로써 필경 해탈이 있게 됩니다. 참선수행은 삼세심을 끊는데 중요한 방법이라 할 것입니다.중생의 망령된 경계가 삼세육추 상의 전개된 모습인 것을 알 때, 중생 경계 모두는 실로 공허하고 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르침에서 우리들은 망경에서 벗어나 항상 진여본성을 비추어 청정행을 닦아 나아갈 것을 힘써야 하겠습니다.
13)정토는 극락 뿐인가 ?
질문39), 저희들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정토는 극락세계 뿐인지, 또 있는지 말씀하여 주십시요.
정토는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공덕이 충만한 청정 국토입니다. 반대로 중생들이 사는 곳을 예토라고 부르는 것은 번뇌 때문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락에 머물어 계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중생들을 제도하시며, 그러기 위하여 큰 원을 세워, 오랜 겁을 닦으셔서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깨달음의 진리 자체이므로 둘이 없고 깨달음의 정토도 둘이 없을 것이나, 부처님께서 중생제도를 위하여 원을 세웠기 때문에 원을 따라 성취한 정토가 또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고 하였으므로 깨달음에 따라 청정을 성취하면 거기에 정토가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사바세계가 곧 정토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정토는 하나이고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은 깨달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 부처님께서 각기 원에 따라 정토를 성취하시므로 여러 정토가 있게됩니다.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라던가, 아촉불의 동방묘희세계, 약사불의 동방정유리세계라든가 여러 정토가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의 정토가 얼마나 수승한 공덕장엄인가는 유마경 불국품에 잘 보이는 바입니다.
14)오탁악세란 무엇인가?
질문40), 사바세계는 오탁악세라 하여 혼란이 많다고 말을 합니다. 오탁악세란 어떤 것입니까? 확실히 있는 것입니까?
오탁이란 5가지 장애요인을 말합니다. 첫째는 겁탁인데 시대가 오염되어 이 시대에 들면 기근, 역병등 천재나 전쟁 등이 발생하여 사회가 악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견탁인데 모든 삿된 사상이나 견해가 번창하여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고, 셋째는 번뇌탁인데 중생들이 탐심,진심등 온갖 정신적 폐단이 왕성하다는 것이고, 넷째는 중생탁인데 중생의 신심적 자질이 저하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명탁인데 수탁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수명이 짧아집니다. 이 오탁설은 인간 수명이 짧아지면서 오탁현상이 나타나고 처음에는 오탁이 희박하다가 차차로 성장하여 치열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탁현상은 원래 인간수명이 8만세에서 2만세가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지혜가 협소해져서 그에 따라 사회적 정신적, 생리적 혼돈현상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지견에 의지해서 굳세게 닦는 사람은 오탁현상에 상관없이 청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구체적 예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오탁악세에서 성불하시고 교화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시대와 환경을 탓하지 말고 바른 믿음을 세워 견고하게 정진하므로써 길이 청정한 자성을 빛내고 국토를 밝힐 결의가 있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반야바라밀법문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더욱 강한 자신감을 주고 있음은 다 아는 바입니다.
15)두타행이란 무엇인가?
질문41),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가섭존자를 두타제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두타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두타란 범어로 Dhuta입니다.한문으로는 頭陀,杜多,投多라고도 씁니다. 두타가 뜻하는 바는 닦고 털고 버린다는 뜻입니다.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려서 심신을 닦는 것을 뜻합니다. 털어 버린다는 것은 번뇌의 티끌을 털어 버리고 망념과 혼침을 털어 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두타수행에는 12항의 생활규범이 있어서 이것ㄱ을 12두타행이라고 합니다. 1) 인가를 멀리 한 조용한 곳에 머물고 2) 항상 걸식하며 3)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로 걸식하고 4) 하루에 한번 먹으며5) 절도를 지켜 과식하지 않으며 6)오후에는 먹지 않으며 7) 헌 누더기 옷을 입으며 8) 옷 3벌만 가지며 9) 묘지에 머물고 10)나무 밑에 머물고 11)빈 땅에 앉고 12) 항상 앉아 수행하고 눕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타행은 부처님 당시의 인도스님들의 생활규범이었는데 후세와 와서 두타는 산과 들을 다니며 고생을 견디며 행각 수행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행하며 행각수행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가섭존자는 가장 모범적으로 두타수행을 하셨다 합니다.
16)금강경 법문
질문42), 금강경은 <파의집현삼공> 법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무슨 뜻입니까?
금강경은 의심과 집착을 파하고 세가지가 공한 도리를 드러낸 법문이란 뜻입니다. 금강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평상대로 공양하시고 발을 씻고 법좌에 앉으시니 수보리존자가 의문되는 것을 부처님께 묻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의심을 풀어주시면 수보리는 다시 <법이 이런 것이거니>하는 지견을 내어 집착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그것마저도 옳지 않음을 말씀하시어 거듭 미혹의 구름을 헤쳐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설법은 중생들이 아에 집착을 하고 다음에는 법에 집착을 하고 다음에는 아도 법도 아닌 중도에 집착을 하며 유두 무도 아닌 삼제에 집착하는 것을 확연히 깨뜨려 버립니다. 이렇게 하므로써머문 바 없고 상이 없고 집착할 것이 없는 법성본분을 명랑하게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러기에 금강경법문이 일체지불과 일체제불의 법이 나온 곳이라 하는 것이며 반야를 일컬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 하는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17)옴의 뜻
질문43), 진언 앞에는 대개 <옴>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진언은 해석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옴자에 대하여 뜻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요.
진언은 번역하지를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진언은 범어이므로 당연히 뜻이 있습니다. 수행상 번역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므로 옛부터 번역하지 않았는데 뜻도 여러 가지를 지니고 있어 한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옴자에 대해서 참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옴은 범어 옹의 음사입니다. 기도할 때에 쓰는 말로 신성한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부터 기도어로써 쓰이고 철학 종교서의 첫머리에 두었다고 합니다. 원래의 음은 아 우 움의 합성된 것으로써 부라만교에서 늑별히 존중하는 3신을 뜻하기도 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진언 첫머리에 두는 것은 다 아는 바입니다. 수호국계다라니경에서는 옴은 부처님의 법신,보신,화신의 3신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여 옴자를 관할 것을 권하고 있고 그 공덕으로 무상보리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옴자에는 귀명, 공양, 3신, 깨달음, 섭복의 5가지 뜻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옴자가 법신, 보신, 화신 3신을 포함한 큰 뜻을 지닌 것으로 안다면 옴자를 염하고 관하는 방법도 얼마간 아해가 될 줄을압니다.
18)대세지보살은 누구인가?
질문44), 극락세계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얼마간 들어서 알고 있지만 대세지보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간략한 설명을 바랍니다.
대세지보 살은 득대세지, 득대세,대정진이라고도 번역되는 보살인데 세지는 그 약칭입니다. 대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에 의하면 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곁에서 모시는 미타삼존입니다. 대세지보살은 대지혜의 문을 주관하여 큰 지혜가 일체처에 이르러 대세력을 갖고 있으며 그 광명과 지혜가 제일이라고 합니다. 대세지보살의 지혜광명이 일체를 두루 비추어 지옥. 아귀. 축생에서 벗어나게 하며 또한 위없는 능력을 얻게 한다 하였습니다. 또한 이 보살이 가는 곳마다 항상 땅을 울리며 그 세력으로 인하여 수행자를 보호하고 악신 무리들의 장난을 끊는다고도 합니다. 또 아미타불이 열반에 들면 관세음보살이 성불하며, 다시 관세음보살이 입멸한 뒤에는 대세지보살이 성불하여 서방안락세계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19)금강경 사구게
질문45), 저는 금강경을 지송하고 있습니다만 경에는 사구게라고 읽고 외워 남을 위하여 해설해 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구게가 무엇입니까?
글자대로 말하면 4글귀로 된 게송을 사구게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8자로 된 4글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경의 뜻인 즉 4 글귀의 하나의 법문을 이룬 짧은 글이라 할 것이므로, 짤막한 법문이라도 읽고, 외우며,다른 사람을 위하여 해설해 주라는 것이 원뜻 같습니다. 종애에 사구게는 4글귀로 된 게송이라고 일러 오고 금강경에 4구게 또는 7사구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지송하는 금강경에는 게송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짤막한 글귀로 하나의 법문을 이룬 대문은 퍽 많습니다. 그러므로 금강경 사구게에 대해서도 경전 서술 형식에서 게송이라고 한 것 외에 ㅈ짤막한 법문 그 모두는 경에 말씀한 수지돗송하고 남을 위하여 설해 줄 사구게로 알아도 좋을 것입니다.
20)금강경 사구게는 어느 것인가?
질문46), 사구게에 대한 말씀 잘 알았습니다. 4글귀로 하나의 법문을 이룬 것을 사구게라 하셨는데 금강경에서는 어떤 것이 사구게가 되는지 다시 말씀해 주시면 저도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겠습니다.금강경에는 사구게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라는 것이 퍽 많습니다.
★흔히들 아시는 법문인데 또 물으시니 대답하지요.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여래는 보지 못하리라
◎무릇 있는 바 상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나의 설한 바 법을 뗏목으로 비유한 줄 알지만 법도 오히려 버리려든 하물며 법 아님이겠는가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잠깐이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여길지니라.
◎여래는 오는 바도 없고 또한 가는 바도 없으니 여래라 하느니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응당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이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아가 없고 인이 없고,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이 일체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글귀로 하나의 법문을 이룬 경전대문을 찾아보면 더 많이 있겠으나 우선 널리 알려진 것 몇 귀만 소개합니다. 잘 읽고 기억하시고 뜻을 이해하시어 수행에 힘쓰고 이웃에게도 널리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1)밀교는 무엇인가?
질문47), 밀교(密敎)가 무엇입니까?
밀교란 비밀하게 말씀하신 가르침으로서 겉만 보는 범부 지견으로는 알 수 없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원래 우리들이 이해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을 건지시고자 한량없이 닦으신 큰 공덕을 성취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중생들의 성질이나 능력에 상응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현교(顯敎)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의 몸이신 법신불(法身佛) 자신의 깨달은 내용을 보이신 가르침은 오직 부처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신불인 대일(大日) 여래의 설법을 밀교라 합니다.
22)밀교의 삼밀수행은?
질문48), 밀교의 삼밀(三密)수행이란 무엇입니까?
비밀한 삼업(三業)이란 뜻입니다. 부처님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행위를 범부들은 짐작할 수 없으므로 삼밀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삼업중 진리의 작용인 용대(用大)는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어서 삼밀이라 합니다. 또 중생들이 닦는 바 삼업이 부처님의 삼밀과 서로 응하게 되면 중생의 삼밀도 성취하게 됩니다.원래로 부처님의 삼밀은 전 우주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중생이 몸으로 결인(結印)을 하고 입으로 진언을 외우며 뜻으로 본존을 관하면 이것을 유상(有相)의 삼밀이라 하는데, 이 중생의 삼밀 위에 부처님의 삼밀이 가(加)하게 되면 삼밀 상응(相應)이라 하여 수행자와 부처님이 한 몸이 되어 그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 합니다.
23)신통이 사실 있는가?
질문49), 축지법이나 천안통 같은 신통이 사실 있는 것입니까?
범부로서는 헤아릴 수 없고 걸림없는 신력을, 마음을 닦는 사람은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이나 물리학의 법칙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것을 능히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원래 우리의 상식이나 과학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평상시의 의식차원에 건립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범상적 인간의 의식 차원을 깨뜨려 깊은 삼매와 같은 높은 의식 차원에 이르면 우리의 상식이나 과학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경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귀하에게 부탁할 것은 신통력은 도를 닦아 가는데서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것이 도이거나 법은 아니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신통에 관심을 아주 버리고 바른 깨달음에 노력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24)불교의 이타행
질문50), 불교는 석가모니불이 인간에서 출발하여 성불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불교는 스스로 수행하는 데 치우치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행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불교는 자기 일신 수도에만 힘쓰는 이기적인 종교가 아닙니까?
원래로 자기와 남을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약하면 세간이 불행하고 자신이 발고 덕스러우면 그만큼 사회는 밝고 따뜻해집니다. 스스로 힘써 닦는다는 것, 그것이 이기행만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남을 돕고 이롭게 하자면 자타 대립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오직 남을 위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자기 수행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 순수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위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자신에 있는 불심을 닦고 키우며 발휘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수행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리와 이타는 나눌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수행이 있습니다. 자기 수행에만 치우친다고 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성불의 길을 닦는 보살의 수행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 하여야 합니다. 거기에는 일체 중생을 위하여 또한 무상보리를 위하여 영겁을 두고 심신을 바치는 봉사와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귀하의 말씀은 불교 수행에서 각(覺)을 내세운 나머지 이기적 고집이나 안일을 경계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25)천당과 천상
질문51), 스님은 기독교의 천당을 인정하고 기독교 성경의 진실성을 인정하십니까? 또 기독교의 천당과 불교의 천상은 같은 것입니까?
기독교의 천당에 대하여는 그쪽에 물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성경의 말씀에 혹 불합리한 점이 있더라도 합리가 곧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부정하기 보다는 진실한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이 공부인의 자세입니다. 기독교 성경이 예수님이나 기독교 성인의 말씀의 기록이라면 그런 성인의 지견에 도달하여야 그 말씀의 뜻이 해독되리라 생각됩니다. 선행을 하고 계행을 가지면 천상에 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신 즉 성인을 믿고 사랑을 실천하면 어찌 선과가 없겠습니까? 천당과 천상의 이동(異同)에 대하여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불교가 보는 천상에도 많은 차별이 있습니다. 욕계천에서 무색계천에 이르는 사이에 28천이 있다 합니다. 따라서 천상이라 해도 복덕과 수명의 차이가 현격합니다. 기독교의 천당이 어떤 것인지는 성경 말씀에 근거 해야할 것입니다. 다만 두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함이 있는(有爲) 선행에는 유한의 과(果)가 따른다는사실과, 선행을 했더라도 법을 깨달아야 영원과 자재의 법본연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행을 했더라도 선심의 차이 정도에 차가 있어 선행의 결과인 선과에도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며, 선행도 유한하므로 선한과보도 유한이 되고 선과가 다하면 다시 다른 생을 받게 되니 결국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필경 법을 깨쳐 청정본성을 회복하여야 윤회에서도 벗어나고 영원과 자재를 누린다는 말입니다. 한 말씀 덧붙일 것은 불교의 천상은 이것이 상징이나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활 환경 국토가 엄연하듯 천상도 엄연한 중생 현실입니다.
26)불교의 종파에 대하여
질문52), 불교의 종파는 얼마나 됩니까? 종파가 벌어진 원인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불교 종파는 아마도 18개(80년10월 당시)정도가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것은 문화공보부에 등록된 단체입니다. 원래 불교 종파는 세 가지 기본요건을 갖추어야 성립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 : 종조(宗祖)가 명확하며, 둘째 : 부처님의 일대교설 가운데서 종조가 주장하는 종파로서의 독특한 교판(敎判)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교판은 부처님의 일대교설 중에서 자신의 교파가 뚜렷이 독립해서 성립하며 그것이 독립한 교단으로 성립될 만한 교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 그러한 종조가 주창한 특별한 종지(宗旨)를 여실하게 수행하는 수행자의 모임이있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종도(宗徒)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있는 약20개에 달하는 불교 종파가 과연 이 세 가지 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불교종파가 역사적으로 깊은 연원을 가진 종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정부의 법령에 따라 등록함으로서 종파가 된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등록과정에서 이와같은 불교의 독립된 종파로서 성립될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불교 전문가들의 권위 있는 심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27)불교의 현주소
질문53), 어떤 사람이 불교의 현주소를 물어 왔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종겠습니까?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는 어두운 황야에 횃불을 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땅 범부들이 진리를 모르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속에 지혜의 등불을 들고 나타나신 것이 바로 부처님이 오신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중생의 어두운 곳의 빛으로 오셨으니 불법의 주소를 묻는 다면 첫째 : 중생이 사는 곳, 둘째 : 중생이 고통받는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경에이르기를 "중생을 알면 불성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중생을 여의고 불법이 없고, 세간을 여의고 다른 곳에 불법을 구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횃불을 들고 중생 곁에 오신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들 불자들은 중생과 세간 살이에 모든 현실 속에 의한 평화 광명이 드러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8)사업장애와 선세업장
질문54), 저는 쉬운 일도 많은 곡절과 장애가 따릅니다. 이것은 선세업장인지요?
장애나 고난은 업장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무사, 안한(安閑), 안락보다는 고난이 오히려 인생을 키워가는데 요긴하고 정상일 수 있습니다. 수난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움은 우리의 힘을 길러주고, 용기와 자신을 키워줍니다. 지혜도 열리고 여러 가지 성격상의 결함도 고쳐줍니다. 고난이라 하는 인생에 대한 저항 요인이나 부담물이 없다면 인생은 발전하기 어렵고 오히려 퇴보하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업장이라고 생각될 만한 재난도 이것이 중대한 인간 수행을 가져다 주는 것이며 또한 선세에 지은 바 잘못된 허물이 소멸되는 과정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므로 고난이 나타나면 그것으로 고난 된 원인은 소멸되는 것이니 새로운 인을 짖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과거에 지은 허물이 잠복 상태에 있다가 나타나면서 소멸되니 이 점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나와 나의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이 과거에나 금생에서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행으로 새로운 인을 심어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어떠한 고난이라도 진실한 바른 믿음을 새워 굳은 신앙으로 나아가면 그 모두는 마침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재난 앞에 두려워 떨고 회피나 일시적 호도책을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여곡절이 많다" 그것은 생각 나름입니다. 그런 생각보다는 희망과 성취가 앞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가져 적극적, 긍정적, 낙관적, 희망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지혜이며 자기 자신의 생활을 밝혀가는 등불인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29)어떻게 업장을 소멸할까?
질문55), 우리의 생활에 고난과장애가 있는 것이 모두가 업장 탓이라고들 합니다. 업장을 소멸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입니까?
업장이라는 것이 원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니 의지에 의한 심신의 활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청정한 본성을 어기고, 상대와 경계를 보고 생각하며 활동하는 그 모두를 말합니다. 그런고로 본성을 어겨 경계를 보고, 상대에 떨어져 대립관계에 있게 되므로 업의 결과는 진리세계에서 벗어난 대립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업의 결과로써 장애가 생기니 이것이 업장입니다. 그러면 업장을 소멸하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 미혹에서 벗어나 청정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향하여 수행하는 염불참선이나 그밖의 수행들이 모두가 업장소멸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둘째 : 자기 중심의 생각을 버리고 집착을 버린 자비한 마음으로 보시를 행하는 등 애착된 마음을 너그럽게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탐심을 버리고 자비보시하는 모든 행이 업장을 소멸시킵니다.
셋째 : 대립감정을 버리고 자비심으로 협동하고 너그럽게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움을 버리고 원망을 버리고 노여움 등 대립감정에서 오는 일체 감정을 버리도록 힘쓰며, 평화하고 너그러운마음이 업장을 소멸시킵니다
넷째 : 사심없는 평등행을 행하고, 매사에 남을 돕는 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대립이 없고 밝고 청정한 참자기를 운용하는 것으로 큰 지혜의 행이 됩니다. 미혹에서 오는 속박된 행을 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 하루하루의 생활은 이것이 지금까지 지어온 바 과거업의 실현이므로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이 하루하루 업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새로이 업을 짖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청정본성행을 행할 때 많은 업장은 소멸됩니다. 원래 업은 미혹한 중생의 경계이고, 깨달은 본분에는 없는 것입니다. 본분상에 업이 없고, 업장이 없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반야입니다. 그러므로 청정본분을 깨달아 끊임없이 청정을 닦고 행하는 것이 해탈의 길을 행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이나 보현행원 등은 모두가 청정본분을 행하여 업장의 무(無)를 실현하는 수행이기도 합니다. 항상 부처님의 대자비 위신력을 믿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구하는 바 없이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업장소멸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참회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지은 바 모든 허물을 지성으로 참회하는 것입니다. 알고도 범하고, 모르고 범하기도 한 모든 허물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불보살전에 깊이 참회하며 염불 독경 기타 선행을 닦습니다. 참회에서 주의할 것은 진심으로 참회하면 죄업이 소멸되는 것을 믿고 무거운 죄의식이나 자기 처벌의식에서 벗어나 밝은 마음으로 선공덕을 닦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30)업장과 성불
질문56), 업장이 두터운 저희들도 성불할 수 있습니까?
업장이 있다고 하나 그 뿌리를 찾아보면 업장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오히려 공부를 방해하였던 업장이나 번뇌 망상이 깨달음의 광명인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록 지금 업장이 망망하여 업장에 갇혀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미혹하여 그렇게 느낄 뿐 실로는 불성광명 찬란한 것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현실로 느끼는 온갖 사항에 마음 팔리지 않고 일심으로 마음의 근원을 추궁하는 등 공부를 지어가면 아침 해가 솟아오르듯 우리의 마음의 진리의 태양도 밝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밝은 성품을 보면 다시 성불을 논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견성이 성불인 것입니다. 견성공부는 번뇌심으로 시작하는 것이지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조사들이 그러하였습니다.
31)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관계
질문57),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반감을 일으키거나 원한이 없이 오히려 감사하라고 들었습니다만 가해자는 내생에 과보를 받고 피해자와 위치가 바뀌어 다시 대립관계가 있게 되는 것입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반감을 일으키거나 원한이 없이 오히려 업장소멸이라고 생각하고 감샇면 그 사람은 가해자와 관계에서 같은 대립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생에 입장을 바꾸어서 다투는 일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피해자 측이 피해의식없이 용서하고 무심하여졌지 때문입니다. 만약 분하게 여기거나 보복심을 일으키면 설사 금생에 보복하지는 않았더라도 후생에 위치가 바뀐 대립관계가 밥복됩니다.또한 피해자는 용서하고 무심한데 가해자가 가해심이 쉬지 않으면 가해자 마음이 거칠고 불량하므로 그 과보를 단독으로 받게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32)지은 업과 견성
질문58), 견성한 사람이라도 견성하기 전에 지은 업을 받게 됩니까?
지은 업에 따른 과보는 반드시 받습니다. 그러나 견성한 사람에게 과보가 나타나도라도 과보로서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비유를 들어 말하면 과보라는 구름이 덮여 와도 견성한 사람은 구름 위 태양 같은 위치에[ 있으므로 구름이 구름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하여 도력을 이룬 사람이 업장이 소멸된다는 것도 이런 뜻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3)윤회의 근거
질문59), 윤회는 참으로 있는 것입니까? 윤회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윤회는 눈을 열고 보면 고통스러운 생사의 세계가 아니고 온 천지가 해탈 경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는 윤회는 윤회가 아니게 됩니다. 또 미혹한 경계의 연속인 윤회는 이것이 미혹에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윤회전체가 하나의 꿈속을 돌고 도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꿈을 깬 자리에서 보면 윤회가 없는 것이고 꿈속에서 보면 분명히 윤회가 있는 것입니다. 귀하가 참으로 눈을 열었다면 윤회로써 자재할 것이며 또한 윤회가 없는 경계를 수용하겠지만 만약 그러하지 못한다면 윤회의 경계를 엄연한 현실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하면 윤회의 근본인 힘은 자성의 신령하고 묘한 힘이라고 하겠으며 윤회라는 경계를 나투게 되는 것은 이 자성을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경계를 취하므로서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해답도 있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자성을 깨닫는 것이요, 둘째는 경계를 취하지 않고 경계에 물들지 아니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아니하고 항상 마음에서 정견을 일으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34)영혼의 존재
질문60), 사람이 죽어서 영육이 분리되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질문과 같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었을 때를 말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사유라 한다. 사유라는 말은 죽는 순간의 존재를 뜻하는데 이는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진실한 생명체는 영원하고 불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불멸하는 생명체는 곧 아라야식이라고 한다. 이 아라야식은 윤회의 주체로서 업력에 따라 인연이 화합하는 세계에 가서 태어났다가 만약 인연이 다 되면 또 그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출생하고 사망하는 것을 겉으로만 보고 몸이 무에서 출생하고 또 그 몸은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사라져 없어진다고 하는 단절된 견해를 갖기 쉽다. 그러나 내면의 생명체는 몸의 출생과 사망에 관계없이 영원한 것이다. 다만 선업과 악업 등의 업력과 이승에 사는 부모의 연과 화합하여 나타나는 과보 즉 인간의 몸을 나투고 동시에 그 몸에 의탁하여 일생을 이승에 머물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이 의탁하고 이ㅐㅆ는 이승의 몸은 생.노.병.사 등 무상한 진리에 의하여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몸에 의탁할 수 없는 시기가 오면 아라야식은 곧 몸에서 이탈하여 또 다른 인연처를 만나러 떠나게 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이 몸에서 떠나는 순간을 사유라 하고 또 세속적으로는 죽음이라 표현한다.그러므로 아라야식의 체성은 <몸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사람이 죽으면 영원히 없어져 버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며 여기에 허무감을 갖게 된다. 이러한 허무감과 생명의 단절 사상을 없애주는 것이 운회사상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몸에서 벗어난 아라야식,즉 영혼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까지를 중유라고 한다. 중유라는 말은 다른 인연처를 만나기 전까지의 중간 생명체를 뜻하는 것인데 이 중유의 존재시기설은 다양하다. 그것은 중생들의 업력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인간의 영혼에 업력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 죽자마자 즉시 저승에 가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는 영혼이 중유기간을 갖지 않고 사후 즉시 지옥이나 색계 이상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왜냐하면 지옥에 가는 영혼은 악업이 너무나도 강하고, 또 무색계등에 내어날 중유는 선업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이다. 최고로 강한 업력은 즉시 힘을 발휘하여 또 다른 과보를 즉시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영혼은 우주공간에 머물러 있다가 저승에 태어나게 된다. 저승에 태어날 때까지의 머무르는 기간은 매우 다양한 것으로서 어떤 영혼은 1주일 또는 2주일만 머물다가 인연을 만나 태어나게 된다. 그래도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3주일,4주일 5주일 내지 7주일을 공간에 머무르게 된다. 7주일일이 되면 거의 저승의 인연을 만나 각양각색의 몸을 받고 또 환경을 만나 출생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7주일이 되어도 인연을 만나지 못한 혼이 있으면 그후로도 계속 우주의 고혼으로서 기약없이 헤매게 된다고 한다.그런데 저승에 태어나기 이전의 중유는 업력에 의하여 윤회하는 것이 잠시도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다만 내생의 몸만 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윤회하고 있는 모습은 이승과 똑 같다는 것이다. 그 중유의 모습들은 이승의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하며 그것은 각자가 지은 업력이 천태만상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장으로 어떤 장소에 다 찍으면 그 장소는 도장과 같이 인쇄되듯 이 중유의 업력도 마치 도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유는 금생의 업력에 의하여 허공애 존재하게 되며 크기는 인간의 5,6세 정도의 몸을 가지고 생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 중유들 가운데 악업을 많이 지은 중유는 흑색의 광명을 나누며 살고 또 항상 암흑세계에서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선업을 많이 지은 중유는 백색의 광명을 나투며 광명의 세계에서 별고 구애없이 자유록베 거주한다고 한다. 이 흑색의 광명설은 흑은 악을 뜻하고 백은 선을 의미한다는 경전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리고 악은 무지이면서 고와 연결되고 선은 지혜로우면서 낙과 연결되기 때문에 중유의 기간에 있는 중생들도 비록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몸은 받지 안했다고 하더라도 이승에서 지은 선악의 업력에 의하여 찰나 찰나 고락의 과보를 받으면서 생활한다. 그러므로 이들 중유의 영혼은 이승의 중생들과 같이 몸이 사망하고 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업력에 의한 생과 사가 있게 된다. 업력이란 습기가 본질인 것이며 각자가 습관적으로 익힌 기운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중유의 중생들도 이승에서 습관을 익힌대로 생활하게 되는데 선업을 가진 중유들은 역시 악업을 가진 중유들끼리 모여 산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제각기 업력대로 관찰하기는 하지만 모든 장애물의 구애를 받지 않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천안을 갖고 있으며 도시에 서로 보고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다.그리고 식사는 냄새만을 먹고산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공갼에 있는 냄새를 식사한다고 해서 중유를 건달바라고 이름한다. 또 다른 이름을 보면 다음의 생을 구하려 한다는 뜻에서 구유라 하고 또 정신적인 체성이라는 뜻에서 의성이라고도 별명을 붙인다. 이들 이름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중유 기간에 있는 영혼들도 자신의 생의 애착이 강하다. 동시에 중유들은 선도와 악도에 태어날 가능성을 뜻하는 표시로 업력에 따라 그 태도가 다르다고 한다. 예를 들면 색계와 같은 선도에 가서 태어날 중유들은 머리를 위로 쳐다보며 행동하고,반대로 지옥과 같은 악도에 가서 태어날 중생들은 머리를 아래로 쳐다보며 행동하는 등 여러 가지 태도를 나타내며 생활을 한다. 이는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익히고 배운 습관에 의하여 언어와 행동등을 서로 다르게 행동하는 것과 같이 미루어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유기간에 있는 영혼들은 의성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바와 같이 뜻이 매우 예민하여 색다른 인연을 만나면 즉각 변화를 일으키는 가능성이 가장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천도식을 거행할 때 그 천도의식에 나타난 독경의 진리가 곧 중유에게 전달될 수 있고 또 영혼의 악업을 없애주고 극락세계로 천도할 수 있는 기회는 곧 중유의 기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중유가 멀리 볼 수 있는 천안도 가지고 있지만 먼 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천이와 천안은 멀리 보고 듣고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뿐이며 천국의 천인들과 같은 청정무구한 천안과 천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유는 업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 업을 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존재임을 생각의 예민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망하고 있는 도중은 물론 사망 직후와 적어도 49일 까지는 천도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그 사망자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다.
35)인간으로 태어남
질문61), 어떤 절차로 다음생의 육체를 만나는가?
앞에 사후의 영혼의 존재하는 모습들에 대해서 말한 바와 같이 사망 직후와 또는 49일까지는 내생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밖의 주장은 49일 이후에도 내생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우주 공간에 더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중유기간에 자신이 태어날 곳을 쉴새없이 찾아 헤맨다고 한다. 그러다가 만약 자신이 태어날 곳을 발견하게 되면 즉각 태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중유기간의 아라야식<영혼>은 이승에서 지은 모든 업력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존하고 있는 가운데 악업은 곧 무명이라는 번뇌와 같기 때문에 진실을 왜곡하고 착각을 야기시키는 쪽으로 영혼을 유도한다. 반대로 선업은 지혜와 같은 슬기를 조장해 주며 모든 사물을 올바로 관찰하도록 영혼을 유도한다. 이와 같이 악업과 선업의 작용이 아주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악업은 영혼의 지혜를 가로막고 지옥과 아귀와 축생 등의 삼악도라 할지라도 오히려 낙원으로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선업은 지옥과 같은 악도는 괴로운 곳이고, 천상세계와 극락세계와 같은 곳은 곧 안락한 곳이라는 진실 그대로 알 수 있는 지혜를 갖게 한다. 이러한 업력의 장난 때문에 아라야식에 해당하는 영혼은 악업에 의하여 지옥을 낙원으로 착각하고 즉시 가서 태어나는가 하면 선업의 힘으로 천상세계와 극락세계를 올바로 관찰하고 즉시 가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업력의 힘을 불가사의하게 발휘된다. 그런데 태어나는 모습은 태에 의지해서 태어나는 것과 알에 의지하여 태어나는 것과 습기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과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단독으로 몸을 타나내는 것등 사생의 형태가 있다. 이 가운데 태생은 우리 인간이 태어나는 모습이기 때문에 이를 비유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가령 어떤 영혼이 인간으로 태어나려 한다면, 첫째로 삼대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부친과 모친과 영혼이 서로 화합하여야 하며 그 가운데 부모에게 병이 있거나 또는 부모들의 뜻이 서로 맞지 아니하면 그곳에 내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영혼은 중유기간에는 신통력이 대단하여 자유롭게 다니고 활동하지만 만약 태어날 곳을 발견하고 또 그곳의 환경과 인연이 화합하는 조건이 마련되면 그때는 중유의 업력이 그 부모와 환경에 알맞는 업력으로 변화한다. 왜냐하면 업력이란 자신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면서 현세에도 그 환경에 적응되지만 내세에도 그곳의 환경에 적응되도록 하는 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 인간이 평소에 보고 듣고 한 지식이 현재의 생활에 적응하는 힘을 발휘하듯이 내생에도 자신이 익힌대로 그 사회의 환경에 적응시미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인간으로 태어날 때는 인간적인 정신과 몸을 받아 살도록 하는 업력이 있는데 이를 불공업이라 한다. 불공업이란 말은 곧 자신만이 수용하는 업력이며 다른 사람과는 공동으로 수용하는 업력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이 조성한 업력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수용하는 업력이 있는데 이르 공업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비롯한 사회 등과 함께하고 대자연을 함께 수용할 수 있는 업력을 우리는 현재 조성하고 있고 또 인간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그러한 업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업력은 개인과 공동의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인력이 있는데 그서을 한 말로 표현 하여 계계라고 한다. 계계의 의미는 업력은 자신이 태어나는 세계에 계박 또는 구속시킨다는 뜻이다.다시 말하면 업력대로 삼계육도 가운데 어디든지 가서 그 세계의 몸과 환경을 받아 살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업력을 낚시바늘에다 비유하기도 한다. 낚시바늘이 비록 작지만 큰 고기를 꼼짝 못하도록 하고 목적지까지 끌고 가는 것을 업력에다 비유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업력은 영혼을 꼼짝 못하게 하여 전생에 지은대로 그 세계에 가서 과보를 받오록 한다. 만약 인간세계에 태어날 업력을 가진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은 인간계의 부모와 환경을 택하도록 하고 또 부모들의 모습을 닮아 의식생활까지도 유사하게 하도록 하는 업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욕계에 속한 인간의 부모는 애정을 갖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로 태어날 영혼도 업력대로 부모를 발견하게 되면 그 부모에게 필연적으로 애정을 품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욕계중생은 오욕이 있으며 오욕 가운데서도 음욕이 우선하는 업력이 발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약 남자로 출생할 영혼은 특히 어머니에게 애정을 품고 점점 접근하게 된다. 또 여자로 태어날 영혼은 인간세계의 성생활과 간이 성의 반대인 부친에게 애정을 품고 접근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영혼에게는 어머니 의 태중이 마치 궁중과 같이 보이고 또 더없는 낙원으로 착각하며 그곳에 도착한다고 한다. 아라야식이 중유의 기간을 마친 순간은 곧 어머니 태중에 도착한 순간을 말하며 태중에 도착한 순간을 생유라 한다. 생유는 모태에 순간을 뜻하는 것이며 동시에 바로 인간으로서 생활하는 본유가 시작된다. 본유는 어머니 태중에 태어나서 지상에 나와 죽는 순간까지를 말한다. 생유에 대해서 좀더 말해보기로 한다. 영혼<아라야식>은 전생의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있고 또 그 업력으로 말미암아 본래 윤회의 주체인 아라야식을 비롯한 모든 정샌계와 육체까지도 출생케 할 수 있다는 뜻에서 총인, 또는 이숙인이라 한다. 이러한 업인은 연을 만나지 못하면 결과인 과보를 받지 못하게 되는데, 이때의 연은 곧 부모가 된다. 그리하여 전생의 아라야식<영혼>을 중심한 모든 업력은 인이 되고 부모는 연이 되어 이 두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라는 형태를 마련할 수 있는 과보를 받게 된다. 이때의 과보를 총보라 하는데 그것은 이 최초의 과보가 바탕이 되어 다음의 이목구비와 오장육부등 모든 인간 형체를 구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총보에 대하여 다음의 여러 형체는 별보라고 하는데 별보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인간의 정신계는 아라야식이 최초로 변화하여 말나식과 의시등 칠식을 발생시킨다고 해서 초능변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최초의 생명체인 아라야식이 동시에 육체 등 여러 형체도 발생시킨다.소승불교를 비롯한 여러 논전에는 이러한 최초의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를 갈라람이라 한다. 갈라람은 응활이라고도 번역하는데 그것은 부모의 정혈과 전생의 업력을 가진 아라야식<영혼>과 화합한 최초의 태아가 응고된 물방울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태아가 한낱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부모도 잘 모르는 태아기를 뜻한다. 그리고 갈라람은 생후 일주일을 뜻하는데 이로부터 액부담위와 폐시위등의 오위 내지 팔위의 성장을 거쳐 9개월 또는 10개우러 만에 모태로 이 지상에 태어나게 된다. 우리는 이 지상에 태어난 것을 생일이라고 하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위에서 말한 생유의 순간인 것이다. 영혼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대략 이상과 같으며 이는 신앙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만이 그 내용과 부합될 것이다.
36)전생사의 기억
질문62), 우리가 전생사 등 과거에 대해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전생사 등 과거사에 대해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기억력을 방해하는 업력 때문이다. 업력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혜롭게 무엇이나 알수 있도록 하는 힘도 발휘하지만 그 반면에 지혜롭지 못하게 하는 방해의 역할도 한다. 왜냐하면 정신과 육체는 전생의 업력에 구속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계계(繫界)의 법칙에 의해서 그러하다. 또 하나는 번뇌의 장애 때문이다. 번뇌는 진리를 바로 알고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알 수 있는 지혜를 방해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번뇌를 장애(障碍) 또는 부폐라고도 부른다. 이는 마치 장님이 무엇이든지 볼수 있는 심안(心眼)을 가지고 있지만 눈이 불구가 되므로 서 육안(肉眼)의 장애를 받아보지 못함과 같다. 이와 같이 인간은 전생사를 기억해 낼 수 있는 지혜가 있지만 무명(無明)을 비롯한 번뇌의 장애를 받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부처님과 보살님들과 같이 육신통(六神通)의 신통력을 이미 보존하고 있지만 번뇌와 업력의 장애 때문에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색계천(色界天)에 살고 있는 천인들은 전생의 일들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것은 산업과 지혜를 많이 갈고 닦았기 때문이다. 선업(善業)은 몸을 자유롭게 해주고 또 지혜를 나타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거천(空居天)의 천인들은 업력과 번뇌의 장애를 받지 않아서 전생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계는 물론 선도(善道)에 속하기는 하지만 아직 업력이 두텁고 번뇌의 장애가 심하기 때문에 전생사는 물론현생에서 경험한 일도 자주 잃어 버리게 된다. 그러나 수년 전에 기억 상실증에 걸려 과거사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다가 다시 과거사를 생생하게 기억해 내는 경우가 있는 바와 같이 우리도 전생에 경험했고 체험했던 일들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아라야식이라는 마음의 주체에 모든 과거사를 저장해 놓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재생하여 기억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라야식은 모든 업력을 유실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정신체로서 업력과 번뇌가 정화되면 과거에 체험했던 모든 일들을 정화된 지혜를 통하여 생생하게 기억하고 또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이때의 지혜는 과거사를 알 수 있는 숙명통을 비록해서 육신통이 될 수 있고 또 성소작지(成所作智)와 묘관찰지(妙觀察智)와 평등성지(平等性智)와 대원경지(大圓鏡智)등 사지(四智)를 말한다. 이들 지혜는 번뇌의 마음과 업력이 정화되므로서 다시 나타나는 인강의 본성이다. 이들 지혜는 모든 지혜를 대표할 수 있으며 또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전생사뿐 아니라 무엇이든지 알 수 있도록 하는 본성의 작용이다. 우리는 업력과 번뇌 때문에 어머니 태중에 태어나서 지상에 출생할 때까지 어떻게 해서 태어나는지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본성이 항상 지혜로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정화하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사는 것이 불자의 생활이라 생각한다. 수행의 목적은 내생에 극락 가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금생에 모른 것을 알 수 있고 또 모든 진리를 알고자 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데 수행 목적이 있으며 더욱 나아가서 보살이 되고 성불까지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전생사를 아는 것쭘은 오히려 지말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사망하여 태어날 때까지의 중간 생명이 무엇ㅇㅣㄴ가를 알고 싶고 또 태어나는 과정과 전생사를 알고 싶어하는 충동이 가끔 있다. 그러나 모두 인간세상 이전의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 적은 것이 추상적인 것이 될 우려가 없지 않으나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확실히 믿고 그 말씀에 의하여 여기에 간단히 소개한 것이다.
37)윤회의 끝
질문63), 범부는 자기가 지은 바에따라 육도를 윤회한다 하는데 윤회에 끝이 있는 것입니까?
윤회란 미혹에서 있는 말이며 미혹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잘못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입자에서 보면 윤회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또 범부가 미혹으로 인하여 윤회가 시작되었을진데 깨달음에 이르면 윤회는 없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미혹과 함께 끝이 없습니다.
38)바라밀 수행과 해탈
질문64), 불교의 근본 목적은 열반에 들어 일체 속박에서 해탈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다면 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듯이 자신을 닦아가며 국가와 사회를 밝게 해 나가도록 정진하는 것은 윤회를 끊고 해탈하는 목적과는 거리가먼 것이 아닙니까?
좋은 말씀입니다. 열반이란 일체 번뇌가 없는 것이므로 만약 열반을 이루면 번뇌를 근거로 하는 일체 속박에서 해탈하고 윤회라는 몽환의 휘돌림을 벗어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해탈의 길에 이르는 수행하고 닦는 방법이 어떤 것이냐가 문제되어야 합니다. 물으신 분도 말했듯이 국가 사회를 혁명적으로 개혁하기에 앞서 먼져 자신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미망에서 벗어났을 때 그가 행하는 모든행동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에 진리의 빛을 비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닦아 간다는 것이 요점인데 닦는데는 대체로 두 길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본래로 번뇌가 없고 속박도 없고 생사가 없는 것을 깨닫는 길이고 또 하나는 자기 본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번뇌가 없으며 오직 진실만이 참자기인 것을 알아서 그것을 구김없이 내어 쓰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머무름 없이 집착함이 없이 청정행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위 두가지 방법에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며 그 모두는 닦는 것이 근본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닦아가며 사회를 밝히는 수행이 불교 목적과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궁극 목적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39)영혼니 오고 가나?
질문65), 사람의 영혼은 수백개라고들 하던데요, 49재를 베풀어 영가가 좋은 곳으로 태어났다면 그 사람의 기일에 제사 지낼 필요가 있을 까요? 그런데도 천도행사에 오래된 선망부모까지 동참 축원할 필요가 있을까요? 영가는 벌써 업을 따라 육도중 어느곳이든 가지 않았겠습니까? 또 혼이 여러개 있어서 혹은 업대로 가고 혹은 무덤에 남아 있기도 하는가요? 또 집터에 명당이 있다던가 사주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는가요? 금생의 노력에 따라 운명적 사주팔자도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불법은 원래가 이론이나 사유밖에 도리이므로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원래가 어려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물을 대하여 사유하고 논리적 합리과정을 거쳐 긍정도 부정도 하고 있으므로 말이 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역시 말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문하신 바 혼에 대하여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째 물음이 혼이 하나이냐? 여러개이냐? 인데 혼은 미혹한 의식형태,행위와 사유의 의식적 형태라고 할런지... 하여튼 혼이란 업의 총체적 표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미혹상태는 우리가 육체로 볼 수 있듯이 업의 형태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체는 원래가 법성진여가 있을 뿐이고 미혹하여 나타난 겉현상은 실이 아닙니다. 미혹한 경계에서만 있게 되는 것이지요. 법성은 원래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라고도 할 수 없고 절대라고 하여도 부득이 한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실로는 법성 본성이므로 나뉘어도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절대적인 하나 법성진여일 뿐입니다. 깨달아도 그것, 미혹해도 그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인간이 댔든,죽었든,천상에 태어났든, 이웃집 아기로 태어났든 원래가 동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이 수백 개라고 말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디에 태어났든 그를 향하여 공양하거나 그를 위하여 독경하는 것은 그 사람의 면전에서 하는 거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위패를 차려 놓고 제사지내는 그 자리와 새로 태어난 천상이나 이웃 사람과 거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위패를 차려놓고 제사지내는 그 자리와 새로 태어난 천상이나 이웃 사람과 거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49재 이후 타방세계에 태어난 사람에게 제사나 도경공양하는 것이 유효합니다. 기도때나 우란분재에 천도공양해도 유효합니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영가가 간다 온다 하지만 법성은 본래가 거래가 없는 것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또 집에서 3대까지 제사를 모시는데 그 제사에 올 영가가 없다는 생각도 해답이란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삼흔칠백을 물으셨는데 저는 아직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미혹한 사람의 구조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예 : 심령학), 사람은 육체 아래에 감정과 욕망을 통솔하는 유체가 있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에텔제, 그리고 유체보다 깊고 안정된 이성체인 영체 그리고 근본 중심인 실체, 또는 본체가 있다고 하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깊은 심성과 겉육체에 이르는 사이에 다층의 단계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보면 욱체에 가까운 유체나 에텔제 등은 육체는 설사 허물어져도 잠정적 존속이 가능하나 그것은 깊은 본체의 뒷받침이 없으므로 조만간 소멸된다고 볼 것입니다. 옛부터 이르기를 사람이 죽으면 혼은 극락에 돌아가고 백은 땅속 유택에서 편히 머물라 한 것도 이런데서 온 생각이 아니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이 분열될 수 없고 나뉠 수 없습니다. 육체다, 영혼이다. 나누는 것은 현상적인식을 토대로 한 입장에서 분별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 부별에 따르면 현상적인 일을 이해하는데 혹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실다운 지리로 사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법성본분과 독존난사의 믿음을 바탕으로 모든 일에 하나하나 정성을 다하는 것을 권합니다. 끝으로 명당자리와 사주를 물으셨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런 일에 관심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런 문제는 너무 관심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운명은 스스로가 지운 것이며 또한 지금 스스로 짓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묵은 타성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그것이 확고하여 오늘 우리에게 위압적 힘으로 작용해 오는 듯 보여도 그 모두는 원래가 공이므로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바꾸어 법성진리에 수순한 확신으로 살아갈 때 밝은 앞날이 열리리라 생각됩니다.
40)인과는 속박인가?
질문66), 우리들은 전생에 지은대로 금생을 운명적으로 만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인과에 속박되어 전생에 지은대로 살아가는 참으로 답답한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인과라고 하는 것은 남이 만들어서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인공입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새로운 인연을 지으며 끝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과는 연을 따라오는 것이지요. 마치 그림자와도 같습니다. 본체가 움직이는 대로 위하는 자세대로 그림자는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생각하지 말고 자기의 바른 목표를 향하여 지혜롭고 용기있게 전진하는 것이 인간 자세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과는 속박의 법이 아니라 창조의 법이며, 자율의 법이며 해탈의 법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인과법칙을 속박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고난의 현실이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내가 만나는 사건 등은 물론 이제까지 우리 자신이 지은 원인에 대한 과보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우리가 만든 것이며 지금도 새로운 원인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완전한 채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것입니다. 절벽을 만났으면 몸을 회전하고 장애물을 만났으면 그를 넘어서 가듯이 무한 대한 지혜와 힘을 우리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착안하여 창조적 생애를 열어가는 것이 인과법입니다. 아무리 기왕에 지은 업의 타성이 밀어 닥쳐도 그 업의 조종자는 우리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때 꼭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업의 실체는 실로 무라는 사실입니다. 있어도 환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있는 것은 법성 실상 뿐이요, 자성 광명 뿥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알면 자재하게 인과법을 구사하여 뜻대로 스스로와 환경에 변혁을 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과를 위한 방식이 아니라 진리를 사는 원리인 것입니다.
41)불구아와 과보
질문67), 사람이 태어날 때에 불구자나 기형아로 태어난 경우 이것도 인과에 따른 과보를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요?
신생아가 가진 신체적 특징은 일반적으로 전생의 과보로 보아야 하겠지요.나쁜 과보를 특별히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전생의 미혹으로 인한 업인에 근거하여 업과를 받은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그런 과보가 나타나므로써 업인이 소멸하는 것입니다. 다만 예외도 있습니다. 높은 영적 수준을 가진 고급령들이 보다 높은 수업으로 자기향상을 하고자 짐짓 선택한 불구아의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태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심히 격한 노여움이나 기타 감정을 품었을 때 그로 인한 독성 때문에 아기가 귀머거리가 되는 경우입니다. 그밖에는 역시 태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약을 잘못 먹었을 경우인데 이것은 현대의학이 증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42)전생업과 수행
질문68), 선한 업을 지으면 좋은 과보를 받고, 악한 행을 한 자는 나쁜 과보를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고 수행하여도 전생의 악한 과보를 받는 것입니까?
하나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계속되는 행위를 중단하거나 변경하였을 때도, 그 결과 발생도 정지되거나 변경되는 것도 또한 필연의 이치입니다. 대개 원인에 대한 결과는 동시에 있는 것이지만은 원인에 대해 진행을 중단시미는 새로운 행위를 하였을 때 중단시킨 방향으로 수정되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행위의 결과는 같은 생에 받기도 하고 다음 생에 받기도 하고 사뭇 그 뒷 생에 받기도 하지만 전생이나 금생에 들어와 지은 행위의 과보도 참회 염불수행을 통하여 과보가 변경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을 맑고 바른 방향으로 바꾸었을 때 보다 자비롭고 본성에 가까운 방향으로 바꾸는 수행을 하였을 때 마음에 나타나는 환경이 또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과거인에 대한 결과를 수정한 것이 됩니다. 또 깊은 수행에 그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설사 과거생에 지은 과보가 나타나더라도 고통으로 작용하지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다 갚은 수행에 머물게되면 근본적으로 업으로 인한 관계가 없는 경계에 이르게 되므로 일체 업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름지기 과거 업을 마음에 두지 말고 항상 부처님의 본성 공덕을 생각하여 자비와 보시를 행하고 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며 본래 청정한 자성을 깨닫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43)선행에 복이 오는가?
질문69), 착한 행을 하면 복이 온다는 것은 착한 행을 권하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까?
착한 행을 하고 착한 마음을 가지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착한 행을 하면 스스로 그 마음이 밝고 기쁘니 복을 받는 것이고, 착한 행을 받은 상대방이 기쁘니 다른 사람의 기쁨을 보는 것이 복을 받는 것이고 착한 행을 하여 그 마음이 밝아졌으니 마음이 밝음에 따라 복의 문이 열리므로 복스런 과보를 받을 것이고 그러한 마음이 뿌리가 되어 그와 인연되는 새로운 복연이 열리게 됩니다. 착한 행을 하여도 복된 결과를 받지 않는다면 선행의 복보다는 말이 거짓이 되겠지만 이것이 사실일진대 어디까지나 사실에 대한 설명이며 모르는 자에 대한 지혜의 말씀입니다. 선행을 하면 내생에 훌륭한 과보를 받는다는 거솓 또한 사실입니다. 선행에서 커가므로 선심이 뿌리가 되어 새로운 선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도 무지자가 모르는 사실을 지혜자가 사실대로 설명해 준 것입니다. 결코 방편설이 아닙니다.
44)인연은 순응한가?
질문70),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의 뜻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곧잘 처합니다. 그런 때에도 제 자신을 죽이며 함께 따라가야 하는 것을 잘 알도 있습니다.그러나 저의 뜻이나 저의 천품으로 보아서나 전혀 관계없는 방향으로 일이 돌아갈 때 이런 것도 인연이라 생각하고 저항없이 순응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생활에 대자대비 부처님의 위신력이 부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긍정이며 또한 그것을 받는 행위일지언정 나타난 현상적인 사항 모두를 옳다고 인정하여 행동을 함께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환경이나 사건들은 미혹한 범부들이 과거생이나 현세에 지은 업연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연을 짓는 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업연을 받아들여서 행동하는 주체자가 우리들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큰 깨달음을 이루어함이 없는 청정열반을 증득하지는 못하더라도 끊임없는 새로운 행을 전개하므로써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받는 자세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며 밝고 창조적인 새로운 행을 지으므로써 밝고 창조적인 새 환경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적이며 창조적인 권능은 누구이든 주어져 있으며 결코 빼앗긴 자가 없고 빼앗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인연은 새로운 창조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아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개혁할 거룩한 뜻을 펴나가야 하겠습니다. 불자가 가지는 인연관에는 이와같이 평화적인 긍정의 원리와 적극적인 변혁의 원리와 함께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45)운전기사의 내생
질문71), 저는 택시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내생이 분명히 있어 또 금생과 같이 고생하고 택시 운전이나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할 때가 있습니다. 내생이 꼭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좋은 내생을 받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요.
금생에 살고 있는 범부로서의 이 생활이 고통스러운 생활로 느껴지지만 조금더 지혜의 눈으로 비춰보면 오늘의 범부적 삶이 실로는 깨달음의 삶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망견으로 망령되게 고통스러운 중생경계를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범부가 보는 고통세계는 미망의 결과이므로 실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망이 끊이지 않는 한 중생세계는 끝이 없이 계속됩니다. 본성을 깨닫거나 미망의 꿈을 깨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삶을 알게 되며 금생이나 내생의 분단적인 삶의 종말이 오게됩니다. 귀하가 금생에 깨치지 못하면 분명히 범부적 내생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과와 필연의 법칙이 작용하게 됩니다. 오늘의 삶에 불평불만을 버리고 매사에 거룩한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한 생각을 항상 그리고 끊임없이 하면 반드시 밝은 내생을 환희와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삼보님을 깊이 믿고 정결한 마음을 항시 가지며 어려움을 이기며 자비로서 보시를 실천하면 반드시 인간세상에서나 천상에서 큰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지금 종사하시는 일은 많은 사람에게 친절과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좋은 직업입니다. 힘들고 돈벌이 적은 직종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요.돈벌이에 인생을 판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끊임없는 인내와 봉사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수행하고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행복해지며 나날이 밝은 날이 되고 내생에는 더욱 행복한 생을 받을 것입니다.
46)전생과 금생의 인과
질문72), 보통 사람은 인과에 따라 후생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정신박약아 또는 백치들은 후생이 어떻게 됩니까?
스스로 판단할 정신적 능력이 없는 백치같은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지은 업의 한 단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금생에 비록 의지적인 행이라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더라도 범부업식의 내면에는 보다 많은 과거행의 축척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치의 후생은 선세에 지은 업의 반영이므로 새 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보통 사람과 다른점은 선세에 지은 바 업에 대하여 좋거나 나쁘거나 적극적인 수정행위가 없었다는 점이고 백치라는 결과를 받으므로써 그런 업이 소멸되는 소극적인 업식의 수정은 건강인과 다름없이 당연히 있게 됩니다. 이상은 법력이 없는 범부의 경우이고 법력이 있거나 신령한 삼매의 힘이 있어 스스로 선택하여 행위 무능력자가 되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47)천상과 극락
질문73), 저는 25세 때 별안간 병이 나서 걷지 못하게 됐는데 절에가서 불공을 하고 나았습니다. 그런데 근래 기독교인이 말하기를 내생을 생각해서 예수를 믿으라 하니 어찌할까요?
예수님을 바로믿고 사랑을 행하면 내생에 천당 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믿어 극락에 나면 끝없는 자유를 얻고 성불하여 온 세상을 마음데로 출입하며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니, 내생이라면 극락보다 나은 것이 없지요. 천상은 유한이며 극락은 무한이며 퇴전이 없습니다.
48)천상도 불완전한가?
질문74), 세상에서는 착한 일을 하여 천상에 난다고 흔히 말합니다. 또 어떤 종교는 천국을 지상목표로 삼는 것도 있습니다. 천상은 완전항 국토입니까?
인강이 자기 본성의 진리를 바로 깨달으면 진리 본연의 완전한 국토를 즉시 보게 됩니다. 그것은 불국토지요. 그러나 본성을 깨닫지 못하고 탐욕심을 억제하여 보시를 행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제어하여 청정한 계행에 힘쓴다면 착하고 청정한 마음 정도에 상응하는국토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천상이지요. 따라서 천상도 여러 차별이 있게 됩니다. 착하고 안정된 마음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천상이 28천이 있어 모두가 같지 않으며 또한 완전한 것도 아닙니다. 중생이 지은 선업이 나타나는 과보일 따름입니다.
49)재일이 무엇인가?
질문75), 6재일, 10재일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재일이란 세속에 사는 신자가 몸과 마음을 삼가고 착한 행동을 닦으며 정진하는 날입니다. 1일, 8일, 15일을 4재일이라 하고;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을 6재일이라 하며; 이날은 4천왕이 그 권속들과 더블어 세간을 돌아보고 인간의 선악을 특별히 관찰한다는 날이라 합니다. 이밖에 6재일에 1일, 18일, 24일, 28일을 더한 것을 10재일이라고 합니다. 또 삼장재일이 있는데 정월, 5일, 9월의 석달의 전반 15일동안 재가 8계를 지키는 것을 삼장재라고 하고 거기에 6재일을 보태어 9재일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8일의 약재일, 15일의 미타재, 18일의 지장재, 24일의 관음재일을 숭상하고 있는 것은 잘 아싱 것입니다.
50)불공은 장사속인가? (불공의 뜻)
질문76), 불공을 장사속이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공의 뜻을 가르쳐 주십시요.
장사란 돈을 주고 그에 상당한 물건이나 봉사를 받는 것입니다. 돈과 재화나 그 밖의 가치의 교환이지요. 그러므로 불공도 돈내고 그에 상당하는 물겅이나 봉사를 구하는 것이라면 장사속이라 하겠지요. 그러나 불공을 장사속이라 말하는 사람 가운데는 진실한 불공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개 불공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며 그 의식 절차는 귀의, 예경, 참회, 공양, 발원으로 이루어 집니다. 이 절차는 불자로서의 기본적인 수행 법식이기도 하지요. 삼보께 귀의하고, 예경하며, 참회하고, 공양하며, 다시 커다란 보살의 서원을 세운다는 것은 참으로 무엇에도 비유하기 어려운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마음으로 거룩한 행을 할 때에 당연히 거룩한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며 거룩한 공덕도 이 세간 현실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점은 여러 경전의 말씀이 그렇고 또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역력히 체험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러한 불공의 성스러운 뜻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불공하고 복을 받는다는 것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장사속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는 사기속이라 할 것입니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는 제바부부가 병장바라문에게 오백냥을 빛을 내어 그 손으로 부처님과 대중을 공양한 대문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빛을 내어 공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으시고 그에게 법문을 하시며 축복을 하셨습니다. 제바부부는 부처님과 대중이 떠난 후 마당 한구석에서 보물을 파내게 되어 큰 부자가 된 기록이 있습니다. 부처님께 공양하고 복을 바란다는 것은 그 심리가 비속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 복이 흘러 오는데야 어찌합니까. 또 불공에는 부처님에게 음식을 공양하기도 하고 옷이나 약이나 그 밖의 생활도구를 공양할 때도 있습니다. 또 스님들이나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공양하고 저들을 안락하게 하는 공양도 있으니 그 모두는 불공이고 그 공덕은 불가사의합니다. 불공의 참뜻이 부처님께 공양하고 중생을 성숙시키며 자신의 깨달은 마음을 밝혀가는 것이니 우리는 불공의 뜻을 바로 알아 영원히 끊임없이 지칠줄 모르는 불공을 겨속 하여야 하겠습니다. 경에 이르기를 "이 길이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길"이라 하였으니 소소한 세간 복보를 얻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51)방생은 필요한가?
질문77), 사람의 희생과 고난은 못본 체 하고 고기 방생에 열을 올리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방생은 인간 방생을 위주로 하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지당한 말씀입니다. 인간이 한 사회에서 불우하고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을 때 그를 돕고 그의 권익을 찾아 주도록 힘쓰는 것은 방생의 뜻을 아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방생은 자비의 종자를 심고 키우는 불사입니다. 모든 생명의 신성을 존중하고 필경 성취를 도모하는 것이 방생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물고기나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꾸어가고 생명가치를 존중하고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의 성숙을 도모하며 내지 협동과 우예로 진리를 존중히 열어가는 평화운동으로 발전될 것입니다. 고기를 방생한다는 것이 한 낱 물고기를 보호하고 그 생명을 해탈인연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물고기 방생하는 사람 마음 속에 자비와 깨달음의 빛이 더해간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52)식사때의 의식
질문78), 불교에서는 식사때 어떤 의식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한번 답변해 드린 적이 있으나 다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식사 때 의식은 오늘날 대중생활을 하시는 스님들이 잘 행하고 계십니다. 요점만 말씀드리면 먼저 발우를 내리고 공양을 받음에 임해서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비라에서 나시고 마갈타에서 성도하시고 바라나에서 법문 설하시고 구시라에서 열반에 드셨으니" 이렇게 소리를 내어서 외우고 발우를 폅니다. 그리고 10념으로 불보살님의 명호를 외우며 생각합니다. 그 다음 발우에 공양을 받고 오관계를 외우고 나서 신들에게 밥을 주고 공양을 듭니다. (그 다음 약간의 의식이 있습니다만 생략합니다. ) 위에서 살펴 보면 공양 때의 의식의 핵심은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과 오관계에 있다 하겠습니다. 오관계는 다음과 같은 5가지입니다.
첫째 : 식사가 되기까지의 농부나 취사인 등의 노력이 귀하고 또한 시주의 은혜가 큰 것을 생각한다.(計功多小量彼來處)
둘째 : 자기 수행의 다소를 돌이켜 보며 음식을 대한다.(忖己德行全缺應供)
셋째 : 악한 마음을 막고 허물을 멀리하는 데는 탐심을 버리는 것이 요긴하다.(防心離過 貪等爲宗)
넷째 : 음식은 기갈을 면하고 병나지 않게 하는 좋은 약이라고 생각한다.(正思良藥過 爲療形枯)
다섯째 : 진리의 길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 음식을 먹는다.(爲成道業 應受此食) 등입니다.
이상의 식사의식은 출가한 스님들이 행하는 바이지만 재가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주원을 하고 식사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대자대비 부처님, 크신 은혜 이 공양, 일체중생 발보리 마하반야바라밀"이것은 식사를 당하여 합장하고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크신 은혜로 이 공양을 받습니다. 바라옵건데 일체 중생이 보리심을 발하여 무상도를 이루어지이다." 하는 뜻인데 이렇게 기원하고 공양을 드는 것입니다.
53)불교의 결혼의식
질문79), 세간에서 결혼의식은 일생에 한번 있는 중대사입니다. 불교의식으로 결혼의식을 올리는 것을 봅니다만 그 구성과 내력이 어찌된 것입니까?
불교의식에서 결혼의식은 신랑신부가 함께 불도를 다짐하며 출발한다는 점이 일반 결혼의식에 첨가되어 특색이 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현제 가정의례준칙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랑신부가 서로 만나 예를 교환하고 결혼서약을 하고 주례자는 성혼을 선언하며 주례사를 하는 것이 일반의식의 골격입니다. 그리고 축가를 부른다던가 신랑신부가 내빈에게 인사를 한다던가가 첨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의식내용은 결혼당사자가 생애를 같이할 부부가 된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주례가 그것을 확인하는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불교의 결혼의식은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 삼귀의를 하여 어느 곳에서든지 부처님의 광명 아래에서 의식을 행하는 것이 되고,
둘째 : 부처님께 축도를 올려 당사자 두사람이 결혼함에 부처님 인행 때의 보살도를 함께 원을 세웠던 것처럼 금일의 결혼 또한 그러하기를 발원하며 아울러 부처님의 증명과 자비하신 가호를 기원합니다.
셋째 : 헌화인데 이것은 신랑신부가 과거세에 세웠던 보살서원을 상징하고 이 꽃이 신부에게 간직된 것을 결혼의사 합의를 통하여 꽃을 부처님께 헌공하여 금생에 다시 피어나는 보살의 행을 뜻합니다. 그밖에 일반 결혼의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불교의 결혼의식의 골격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주례법사와 신랑신부가 차례로 입장 등단하고, 둘째 : 모두가 삼귀의례를 행하며,
셋째 : 주례법사가 축도문을 봉독하고, 넷째 : 신랑신부가 맞절하며,
다섯째 : 심부에게 꽃을 받아 헌화하며, 여섯째 : 결혼서약,
일곱째 : 주례법사의 성혼선언, 여덟째 : 주례사,
아홉째 :내빈깨 인사, 행진, 기념촬영 등으로 행하여집니다.
전체적으로 부처님 광명 아래 성불의 길을 닦는 보살생애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점이 진하게 착색된 의식입니다.이 불교의 결혼의식은 아마도 약50여년 전(1931년) 안 진호 강백이 종래의 불교의식문을 총망라하여 석문의법이라는 의식문을 출판할 때에 창작 수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불교의식의내력은 부처님이 과거세에 선혜라는 수행자로 있을 때 부처님께 꽃을 헌공하고자 어떤 여인에게서 꽃을 사서 공양한 고사를 인용하여 의식문을 구성한 것입니다. 그 때에 성혜행자가 올린 꽃이 일곱송이라하여 오늘도 그리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54)구병시식
질문80), 병이 나면 병을 고치는 불교의식이 있습니까?
몸에 병이 났다는데 대하여는 의학적 고찰 외에 몇 가지 관찰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 마음속에 미움이나 노여움이나 슬픔이나 그밖에 어둡고 불안한 생각들을 가졌을 때입니다. 이것이 병을 부르는 뿌리이므로 모든 집착을 놓고 이제까지 지었던 생각들을 다 풀고 참회하여야 합니다.
둘째 : 그릇된 소견에 빠져 정법을 등지고 아집과 탐착으로 진리를 등진 때입니다. 이런 때에는 바른 믿음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셋째 : 미혹한 영과의 관계입니다. 다시말하면, 인연있는 영들이 미혹하여 방황하고 또는 그 영들이 가까이 접근하여 고통을 호소하는 등 가까운 관계에 있을 때입니다. 이런 때에는 영으로 하여금 미혹을 돌려 집착을 버리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인도하여야 합니다. 미혹의 원인인 상에 대한 스릇된 집착이나 분노나 원망이나 또는 굶주림 등의 고통을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영들의 고통을 살펴서 그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 요긴합니다.
위의 세 가지 이유중 첫째와 둘째의 경우에는 대개 불전에 기도하고 염불독경하며 귀의, 참회, 발원, 회향식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쁜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의 영의 집착의 경우에는 구병시식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망령의 미혹된 마음을 열어 주고 집착을 풀게 하며, 굶주림을 채워주고 밝은 길로 인도하는 의식입니다.
55)불교의 상례의식
질문81), 불교의 상례의식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불교의 상례의식은 망인으로 하여금 생과세간에 대한 애착심을 쉬고마음을 밝히도록 인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개 상례의식을 3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망인이 숨을 거두고 출상할 때까지의 의식이며, 둘째 : 출상 의식이고,
셋째 : 다비 또는 매장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의식에서는 염불, 독경이 위주인데 그중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무상게와 시세, 장엄의식입니다.
무상게는 이 몸을 위시하여 온 세계가 필경 허물어지는 것이며, 특히 이 몸은 생노병사우비고뇌가물결쳐 필경 죽고 사대원소로 돌아가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몸이 흩어짐에 애착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으니 애석한 마음을 놓게 합니다. 그리고 12인연법을 일러주어 점차로 관하여 생멸에서 벗어난 신령한 본성을 깨닫게 합니다. 시세의식에서는 머리를 정결히 하고 목욕을 시키고 손과 발을 씻어 주며 새 옷을 입히고 입감할 때까지의 일일 과정에서 망인이 본성을 깨달아 생사에서 벗어난 신령한 자성에 눈뜨도록 인도합니다. 시세입감의 열까지 단계의 의식이 모두가 그런 법문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장례차비가 다 되었을 때 영결식을 합니다. 영결식에서는 역시 망인이 육체나 생전 감정에 휘감기지 않고 생사에서 벗어난 훤출한 자성에 눈뜨도록 인도합니다. 그 사이에 설법이 있고, 독경이 있고. 제문을 낭독하고, 부처님의 광명으로 장엄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셋째 다비의식인데 시체를 화장할 때에 불을 붙이고 뼈를 거두어 뼈를 갈아 흩어 버릴 때까지 그때마다 망인이 일체 애착에서 벗어나고 훤출하고 초촐한 자성을 깨우쳐 갑니다. 화장하였을 때는 그렇고 매장할 때는 좀 간단합니다. 영결식까지는 같고 하관하는데 이르러서 망인이 심신이나 세간의 애착을 끊도록 누누히 말해주고 본성을 깨달아 극락국에서 안식하도록 염불을 합니다. 불교의 상례의식의 골격은 이상과 같이 첫째는 망인이 육체나 세간사에 대하여 애착을 쉬고 생사 없는 자기 본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요. 둘째는 염불 독경하여영가가 마음을 쉬고 부처님 광명에 의지하여 극락세계에 안주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56)예수재란 무엇인가?
질문82), 근일 예수재를 권유 받았는데 예수재의 뜻을 잘 모릅니다. 또 망인도 예수재를 한다고 하는데 천도와 예수재는 같은 것입니까?
예수재는 생전예수재란 것으로 죽은 후에 천도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복을 짖고 허물을 멸하여 왕생공덕을 닦는 의식입니다. 예수재는 불보살님께 헌공하고, 명부시왕과 그 권속들에게 공양하며, 한편 명전을 바쳐 빛을 갚고 경전을 독송하여 지혜를 닦으며, 기도하고 청법하여 깨달음의 덕을 닦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예수재는 의식을 진행하는 가운데에 이와 같이 참회, 발원, 공양, 수복혜를 행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미혹의 허물을 소멸하고 밝은 본분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재 의식이 갖는 뜻은 진실하고 무량공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의 진행과 수행을 여법히 하여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근일 예수재의 뜻을 잘못 알고 허망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예수재가 지닌 참뜻을 이해하지 않은데서 온 것으로 봅니다. 예수재는 당연히 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망인을 예수재에 동참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는 예수재의식이 망령을 깨우쳐주고 공덕을 닦아주며 기도에 불가사의 위력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재는 대개 49일 기도가 병행됩니다. 또 우리의 일상 수행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면 그것이 바로 무상공덕을 닦아가는 것으로서 원만한 예수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재를 해야 한다고 강조되는 것은 평소에 여법한 수행을 하기 어려운 분에게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57)천도재가 무엇인가?
질문83), 불교에서 망령을 천도하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어떤 법식으로 천도하는 것입니까?
사람은 본래 본성이 불성입니다. 범부가 되었다고 하여 불성이 변질되거나 그 능력이 감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범부는 미혹하여 어떤 경계를 보고 그것에 착함으로써 분별망상을 거듭하게 되고범부성을 더해가는 것입니다. 이 범부성이라는 것도 범부의 생각으로 망령스러이 그렇게 불 뿐이지 범부성이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에 이르기를 "무 색수상행식, 무 성향미촉법, 무 안계내지, 무 의식계"라 한 것도 이 뜻입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하나 본래는 생사가 없는 가운데 망령되이 생사를 보는 것 뿐입니다. 이 미혹을 깨닫고 본성에 눈뜨게 하는 것이 천도의식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천도의식은 생사가 없다는 것을 기초로 삼고 생사가 꿈인 것을 깨닫도록 인도합니다. 사람이 죽었다고하나 실로는 죽을 수 없는 것이므로 방편으로 이도리를 말해주면 망자도 깨닫게 됩니다.
천도의식에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작법우로 영가를 천도합니다.
첫째 : 부처님의 크신 위덕을 여는 큰 법문을 굴립니다. 여기에는 경전을 읽기도 하고 다라니를 외우기도 하며 설법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혹한 망령들이 정신을 가다듬게 하고 고통속에서 고통이 없는 방향으로 마음을 일깨웁니다.
둘째 : 망령을 위하여 착한 공덕을 짓는데 거기에는 출판하거나 대법회를 가지거나 무차시회를 베풀거나 하여 공덕을 닦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범중에 큰 횃불을 밝히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셋째 : 망자의 목마르고 시장함을 채워 주고 인정에 수순하는 음식을 차려 공양하며 애착을 끊고 법식을 먹어 해탈하도록 인도합니다.
넷째 : 망자와 함께 염불하거나 선정에 들어 망자가 지혜를 밝히는 길을 도와 줍니다.
천도재는 위 4가지를 모두 행하기도 하고 그 중 일부를 행하기도 하여 천도합니다.
58)불사에 차별이 있는가?
질문84), 우리들은 불법을 믿으면서 절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불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어느 불사에나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불사는 다 똑 같다고 보이야 할지요. 특별히 수승한 불사는 있는지요? 이런 불사는 꼭 동참하여야 한다는 특별한 불사가 있는지요?
불사란 깨닫는 사업이며 깨닫게하는 사럽이라 할 것입니다. 불(佛)이란 곧 깨달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미혹을 밝혀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모든 사업이나 행사는 불사라 할 것입니다. 또 밝은 깨달음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는 일체의 사업을 불사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사의 첫째 목표가 중생을 건지고 사회를 밝히며, 진리의 가르침을 빛내는데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법회를 열어 설법하고 염불하며 독경하고 수행하는 것은 말할 곳도 없고 참선하고 경을 출판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모두가 불사입니다. 수행하고 법을 전하며 지혜와 자비를 실현하는 사업이 불사의 핵심입니다. 이와 같은 불사를 하자면 여러 가지 물자도 필요하고 노력도 시설도 필료합니다. 이러한 물자나 시설이나 노력은 깨닫는 사업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도 불사입니다. 설법하고 참선, 염불수행하기 위하여 선원이나 설법전이나 그에 필요한 시설에 관한 사업 등 모두가 불사가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이러한 전법 또는 수행을 위하여 필요한 것과 전법, 수도, 구호, 사회사업 등 모든 불사시설을 운영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업도 불사가 됩니다. 이렇게 살펴볼 때 불사는 첫째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 깨달음의 가르침을 전하는 전법이 불사의 핵심이고, 둘째로 그러한 불사를 위한 모든 시설을 위한 사업이 불사이며, 셋째는 구러한 시설의 운용을 위한 사업도 불사라 하는 것입니다. 위 세 종류의 불사에 우열은 없으나 불사의 목표가 첫째 종류에 있는 것임을 알아서 수행과 깨달음과 전법의 기여도가 낮은 사업은 낮은 불사라 할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반성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사는 반드시 깨달음과 수행과 전법에 직접 또는 간접, 크게 기여하는 방향으로 기획되고 운용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목표는 소흘히 하고 화려한 시설이나 관광 목적이나 위락의 효과를 관심한다면 불사의 순수성은 그만큼 감소될 것입니다. 만약 불사의 명목 아래 수행도 전법도 아랑곳없이 다른 목적에 초점을 거두나, 깨달음의 법을 전하는 것이 아닌 미혹한 행사를 불사로 잘못 알고 있지 않나 주의할 것입니다. 끝으로 불사라 하더라도 오늘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불사가 수승한 불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를 효도에 든다면 병든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집이나 짓고 새옷나 만들어 드리고 진수성찬만 바친다면 그것은 잘목된 효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간이 미혹의 어둠에 덮여 물질주의, 관능주의의 탁류가 도도히 흘러 그 속에 겨레와 인류가 자기 상실로 인한 고난과 악에 빠져 있는데, 이들에게 법을 설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사회가 참된 인간을 위한 광명 질서로 바뀌도록 노력하지 않고 집 단장이나 관광시설이나 교통편의에힘쓴다면 불조에 효도의 불사라 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위에 말씀 드린 바를 비추어 불사의 우열과 선후와 요점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59)신중단의 구성과 신앙
질문85), 법당에는 정면에 부처님을 모시고 그 곁에 신장님을 모신 것이 일반입니다. 그런데 신장님은 어떠한 분이신지 우리는 어떻게 공경하고 대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니요.
신중단은 불법을 옹호하는 성중들을 모십니다. 진리의 세계는 깨달음의 법밖에 다른 것이 없지만 미혹한 중생에게는 미혹한 수많은 중생들이 뒤엉켜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인간도 있고 인간 외의 중생들도 있어서 혹은 되는대로 막 살기도 하고 나쁜마음에 젖어 악행을 업으로 삼아 살고 있는 중생도 있고 성인의 가르침을 배워 참된 길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발심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착한 일을 돕고 정의에 편드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사람이 아닌 신중(神衆)가운데도 역시 발심하여 착한 사람과 착한 일을 돕고자 하는 선신도 있으며, 진리를 깨달아 중생들을 깨우치고 가르치고 온갖 모습을 나투는 성현도 계십니다. 신중단에는 불법을 옹호하고 착한 사람을 돕고자 발심한 선신들과 불법과 발심한 사람들을 돕고자 서원력으로 화신을 나투신 성현들도 계십니다. 팔대금강신장은 발심한 성현이고, 이 땅을 착하고 평화하게 지키고자 하는 제석천이나 사왕천 대범천 등은 천상의 성중들이며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등 팔부 신장 신부의 성중입니다. 그밖에 많은 호법선신들이 있어 부처님을 찬탄하고 불법을 옹호하고 착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이와같이 신중단에는 부처님이 아닌 호법을 발원한 선신들을 모셨으므로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를 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신앙은 부처님이며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중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때로는 기원을 할 때도 없지 않으나 신앙의 표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중단에 모신 성현들은 지혜스럽고 자비로우며 위력이 대단합니다. 혹은 자비, 혹은 위엄을 나투시면서 정법을 수호하고 착한 사람들을 가호합니다.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을 수호하겠다고 원을 세웠고 또 부처님에게서 부촉을 받은 바이므로 특별히 청하지 않아도 착한 불자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60)산신과 칠성은 무엇인가?
질문86), 큰 절에 가면 칠성각이나 산신각이 있습니다. 어떤 불교책을 보니 산신과 칠성은 토속신앙이 불교에 들어온 것이고 원래 불교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절에 산신과 칠성을 모신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고유 풍습 가운데 산신 숭배나 칠성신앙이 있어 왔고, 그것이 전래의 토속신앙이거나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점은 저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찰에 봉안된 산신이나 칠성은 이름은 같지만 토속신앙이나 다른 교회에서 들어온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경에 보이는 신앙 또는 산신이라 하는 불교의 신앙은 불보살의 부촉을 받고 불법을 외호하며, 불교 믿고 착한 사람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선신의 종류입니다. 산신은저급의 선신도 있겠지만 보살화현의 대비원력을 지닌 산신이 그 근본이 되므로 외도의 산신과는 같지 않습니다. 또 칠성도 칠성여래의 화현으로 나툰 칠원성군이 착한 사람을 돕고 착한 원을 보호해 주는 거룩한 성현입니다. 이들 산신이나 칠성은 그가 나투는 형상이 천상사람으로 나투고 그 본분이 불법외호에 있으므로 불교에서는 호법성중이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산신이나 칠성은 불교도의 신앙대상이 아니고, 불교를 돕고 불교도를 보호하는 외호중인 것입니다. 불교의 신앙은 부처님이시고, 보살은 큰 선배님이시고, 조사는 스승이시며, 천상과 신장 중에 발심한 것은 외호중이 됩니다. 따라서 법당에 가면 신중단이 있는데 거기에는 발심한 천상의 천왕이라든가 금강신장 등과 함께 산신 칠성 등이 옹호중으로서 봉안되고 있습니다.
61)신중단과 반야심경
질문87), 법당에서 예불할 때 부처님께 예경한 다음 신중단에 대하여는 예경을 하지 않고 반야심경만 독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신중단에는 어떤 성인을 봉안하였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 어느분의 질문에서 잠시 언급하였습니다만. 사찰에서 성현을 봉안하는데 불보살님은 상단이라 하고, 신장님은 중단이라고 합니다. 신중단에는 불법을 외호하는 성현을 모셨는데 거기에는 대개 세 가지로 분류되는 성현이 봉안됩니다.
첫째 : 불보살의 화현이라 하는 금강신장들입니다.
둘째 : 대범천왕 등 여러 천상의 성현들입니다.
셋째 : 그밖에 호법선신들입니다.
불자들은 상단 불보살님께 예경하고 신중단에 대하여서는 항상 저두하는데 그치는 것은 신중단의 성현들이 호법신으로 나투었기 때문입니다. 호법신중들은 불법을 외호하는 것이 본분이며 불법을 외호하고 스님들을 돕는 것으로 공덕을 삼기 때문에 비구스님에게 예경을 받으면 도리어 손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선신중보다 높은 화현신이라 하더라도 신중으로 나투었기 때문에 그 점은 같습니다. 따라서 신중들은 불법을 듣는 것이 소망인 것입니다. 이 점을 감안하여 종전 예경때에는 스님들이 신중단에도 일일이 삼시로 예경하였으나 근래에 와서 반야심경에 그치고 있습니다.
62)사리는 무엇입니까?
질문88), 고승이 열반에 들어 다비하고 나서 사리를 얻었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재가 신자에게도 사리가 나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리는 어떤 것이며 어떤 사람에게서 얻어지는 것입니까?
종래 스님들이 입적했을 때 절에서 다비를 합니다. 다비할 때 보면 장작이나 숯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놓으며 그 위를 젖은 가마니로 두릅니다. 그리고 시신 바로 아래 깊숙히 밀폐한 단지를 묻고 단지에는 물을 담습니다. 또 화장장 사방 네모퉁이에도 물 그릇을 놓습니다. 이 단지와 물 그릇은 사리를 거두자는 뜻입니다. 종래 사리는 이와같이 해서 다비한 후에 단지나 물그릇에서 얻은 구슬모양의 영체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사리는 시신에서 나온 신령한 구슬로 일러지고 고승에 한하여 나오는 것으로 알려 옸으며, 때로는 고승의 사후 기도해서 얻은 사리도 있고 그밖에 신비하게 볼 수 있는 사리도 있다 했습니다. 오늘날에 사리라는 것이 어떻게 얻어지고 있는지 분명치 않으나 어쨌든 구슬같은 영골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리는 원래 신체, 신골의 뜻으로서 시신이나 유골을 말합니다. 범어의 샤리이라를 사리라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사리는 이와같이 유골의 뜻이며 통상적으로 부처님의 유골을 불사리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신령한 구슬의 일종으로 알려지고 이것은 두터운 신심으로 산 사람, 정결한 계행을 가진 사람, 중생을 위하여 널리 헌신한 사람, 깊은 경지의 수행을 쌓은 사람에게만 나오는 것이며, 그러므로 사리는 원래적인 의미보다 통설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63)목탁의 요령
질문89), 불공, 기도 등 불교의식에는 목탁 요령을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의식에 목탁, 요령이 어떤 뜻이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요.
목탁에 대하여는 이미 몇 번인가 언급한 것으로 생각되니 간단히 말씀 드리지요. 목탁은 미혹한 마음, 침체한 마음을 흔들어 깨우친는 뜻이 있습니다. 원래 어리석은 마음이 근본이 되어 탐심을 함부로 부려 악도에 떨어진 것을 목탁소리를 울려 깨우치게 하고 경계하는데 목탁의 유래가 있습니다. 오늘날 염불, 독경하며 목탁을 울린단는 것은 염불하는 대중에게 운곡을 맞게 한다는 뜻 이상의 항상 말끔한 정신을 일으켜 깨달은 마음이 드러나도록 하는데 주된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또 요령은 흔들어서 쇠소리 즉 방울소리를 냅니다. 종소리든 쇠소리든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사무치는 특성이 있어 활활 일어나는 생각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습니다. 종소리를 울려 서 번뇌를 끊는다는 말은 이 뜻입니다. 번뇌가 쉬므로 마음이 안정되고 밝아집니다. 그래서 종을 울리면은 마음이 평화로와지고 지옥불이 꺼진다고 합니다. 마침내 깨달음의 빛을 보고 윤화라는 범부경계를 벗어나 성불하게 됩니다. 요령도 비록 작기는 하지만 번뇌를 쉬고 중생들이 미혹된 업ㅇㅡ로 지은 여러 장벽을 허물며 지옥이니 천상이니 모든 막힘을 털고 햇살이 막힘없이 비치듯 어떤 것이나 막히는 것없이 통하는 위력이 있습니다. 불교의식에서 요령을 사용하는 때는 진언을 풍송할 때나 성형이나 천인이나 망령들을 초청할 때에 많이 쓰입니다. 종소리가 온 누리에 떨쳐 진언의 법력이 두루 퍼지며 또한 여러 성현이나 고혼들 세계를 통하게 하는 뜻을 지닌 것을 알겠습니다.
64)종각에 있는 것(사물)
질문90), 절에 가면 종각이 있고 거기에는 큰 종과 북등이 걸려 있습니다. 종각에서 울리는 종이나 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종각 도는 종루라고 하는 건물에는 종, 북, 묵어, 운판이 장치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사물이라고 합니다. 이 사물은 새벽 예불이나 저녁 예불 때 울립니다. 종에대하여는 앞에 말한 것으로 대신합니다. 북을 치는 것은 축생들을 미혹과 혼침에서 각성하게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운판은 구름모양을 한 청동으로 만든 편편한 판인데 이것은 허공계 중생들의 번뇌를 쉬게 하고 사심을 멀리하게 합니다. 목어는 나무로 만든 것인데 고기 형상을 하고 있고 이것을 울리는 것을 물 속의 중생들을 깨닫게 하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참고로 : 종을 울릴 때에 생각하고 읊는 글귀를 소개하겠습니다. [바라건데 이종소리 법계에 퍼져 철산위 깊은 지옥 밝아 지이다.삼악도 벗어나고 지옥이 깨져 일체 중생 빠짐없이 성불하여지이다.]
65)염주의 내
질문91), 염주의 내력과 염주를 지니는 뜻을 말씀해 주십시요.
염주에 관하여서는 소파호동자청문경(蘇婆呼童子請問經) 불설교량수주공덕경(佛說校量數珠功德經) 금강정유가염주경(金剛頂瑜伽念珠經) 그밖에 요러 경전에 말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염주는 일찍부터 사룔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율장에 언급이 없고 중국에도 전해오지 않는 듯 중국에서는 도작스님(562~645)이 처음으로 염주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경에는 "마음이 탁란하지 않게하고저 하거든 수주를 사용하라" 하고 있습니다. 염주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염불할 때나 진언을 외울 때에 그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 염주를 가집니다. 염주는 오늘날 번뇌를 끊는 도구 즉 수행하는데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염주알을 굴릴 때 마다 번뇌가 끊어지므로 그 만큼 부처님 광명이 자신에게 충만해지고 죄업이 소멸되고 복이 납니다. 이런 점에서 염주 한 알은 바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라는 신앙이 있게 되고 따라서 염주는 불보살처럼 소중히 여기는 신앙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염주는 108개로 만드는 것이 기준입니다. 108번뇌를 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는 그 10배인 1,080개일 때도 있으며, 그반인 540개일 때도 있습니다. 으리나라에서 염주를 만드는 재료는 한정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리자, 금강주, 모간주, 연실, 율무, 향나무, 그밖에 향단으로도 만듭니다. 또 호박, 마뇌, 유리, 산호, 진주 등으로도 만들고 있습니다. 불자들은 염주를 가지고 염불하므로 항상 반야광명이 충만하고 지혜와 자비와 용기를 쓰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66)목탁이 의미하는 것
질문92), 목탁은 불교에서 상징이라 하리만치 절에서 많이 쓰는데 그 내력이 어찌된 것입니까?
오늘날 절에서 대강 3가지 의미를 담아 쓰이고 있습니다.
첫째 : 목탁을 울려서 사람을 모이게 하는 등 신호하는 도구요.
둘째 : 독경, 불공 등 의식에 소리를 맞추는데 쓰이고.
셋째 : 혼침에 들었을 때 정신을 차리라고 깨우치게 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목탁의 원형이라 할 목어(木魚)는 종루[종, 북, 운판, 목어 등을 장치한 누각]에 걸어놓고 울리는데 이것은 수중중생들을 깨우치고 편안하게 하는 뜻이 있으니 목어는 의식에 쓰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목탁은 고기 형상으로 만든 목어를 변형한 것입니다. 또 목탁에는 2마리의 용머리를 손잡이로 하고 몸은 하나인 형상으로 만들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는 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는 것처럼 범부에서 성인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탁은 고기 형상을 그리지 않고 이ㅆ지만 이것은 편의에 따른 것 뿐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목탁에 고기 형상을 새기게 된 내력은 다음 2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설 :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침에 빠지지 않고 말끔히 깨우친 상태를 뜻합니다.
둘째설 : 망인을 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께 공양할 음식을 장만하다가 먼져 먹은 과보로 물고기가 되고 그 물고기 등에 나무가 나서 고통이 심하므로 물고기가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면서 자기 등에 난 나무를 베어 두들겨 사람을 경계하여 달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우치를 거울삼아 세간 사람들을 경책하게 하고 그렇게 한 공덕으로 자기가 혜탈을 얻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돌이켜 보면 목탁은 원래 혼침과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원래의 뜻이라 하겠고 그 다음에 집단생활에서 집합신호나 의식도구로 쓰이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사회의 경종이 되는 행위를 사회의 목탁이라 이르게 된 것도 이런데서 온 것이 겠지요.
67)연꽃이 의미하는 것
질문93), 불교에서 연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읍니까?
연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진흙에 뿌리박고 있되 그 잎은 진흙에 물들지 않으며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꽃이 필 때 연밥(연실)이 동시에 생깁니다. 불교에서 연꽃은 세간과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심을 의미합니다. 연꽃은 높은 산이 아닌 진흙같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보살을 의미합니다. 또 청정한 행은 그것이 바로 깨달음과 불국토가 동시에 형성된다는 인과가 함께 있는 진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68)절의 명칭에 대하여
질문94), 절의 명칭에는 사 또는 암 또는 정사라고 한 곳이 있고 큰 절에는 총람이라 하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절의 명칭에 대해서 어떤 구분이 있는지요.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여러 명칭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나 부처님 존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이 머물며 수행과 전법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 절입니다. 대개로 사, 암, 정사, 난야, 총림과 같이 여러 이름이 있으나 뜻은 같은 것입니다. 범어에 비하아라와 상가아라아마가 있는데 전자는 유행처라고 번역되고 후자는 가람이라고 적고 중원이라고 번역되나 모두다 정사라고 통역돠고 있습니다. 정사는 수행에 힘쓰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라고 하는 것은 원래 중국의 관청 부서의 명칭인데 외국인을 접대하는 홍로사에 맨 먼저 오신 분이 서역에서 온 분이었기 때문에 뒷날 스님이 머무는 곳을 모두 사라고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혼자 수행하는 곳을 암자라고 하나 이것은 다만 작은 절이라는 뜻 이상의 규정은 없습니다. 난야는 범어의 아랸야를 적은 것인데 산중 또는 돌판이라는 것이 원뜻입니다. 스님들이 머물며 수행하기 적당한 처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워리처(遠離處), 적정처(寂靜處), 공한처(空閑處), 무쟁처(無諍處)라고 번역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절의 명칭은 사, 암, 정사, 난야 어느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총림은 숲처럼 많은 스님들 이 모여서 규율 바르게 화합하며 도를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종합 수도원을 의미하고 또 종단에서 총림으로 인정을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종합적 수도원 시설이란 선을 공부하는 선원과 교학을 공부하는 강원과 율을 공부하는 율원 등 시설을 갖춘 곳을 말하는데 오늘날의 총림은 그러한 수도원의 격을 말할 뿐 사찰 명칭으로는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제4장 : 수행에 관하여
1)믿음의 내용
질문94),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어떤 종교에서 말하듯이 만물을 만들어내는 조물주처럼 믿는 것입니까?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완전구족한 불별의 진리가 부처님인 것을 믿는 것이며 또한 그 부처님 진리는 일체 중생에 있어서 차별없이 같은 법성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원래로 부처님 진리 자체이지만 그것이 미혹한 정도에 따라서 온갖 경계를 나타나며 그 속에 사는 것이 범부중생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세계 그 모두는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생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며 중생이 중생 세계를 구성하는 원동력은 부처님 진리라 할 것이고 중생이 중생 세계를 출현하는 직접 계기는 무명(無明)이며, 미혹이며하여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만들어 내는 창조자입니다.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밝은 세계를 창조하고 미혹이 깊을수록 어두운 중생 세계를 그 속에 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지옥도 천당도 어떤 권능자가 만들어 놓고 맞이 하거나 끌고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자신이 지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은 끊임없이 깨달음을 통하여 참된 진리 공덕을 드러내고 이 땅위 우리의 삶이 그모두가 불국토를 이루어 가는 창조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닦아가는 것을 보살행이라 합니다.
2)죽지 않는 도리
질문95), 불도를 믿는 것은 진리를 알아서 밝고 보람있게 산다는 것이 저희들의 목적이며 동기입니다. 그런데 불도를 닦으면 생사를 면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니 과연 불법수행을 하면 죽지 않는 것입니까? 도인들이 죽지 않는 도리를 안다고 합니다만 근거가 있는 말입니까?
불법을 믿는 것은 물론 밝고 기쁜 생활, 값있는 생활을 하자는 것이 본 뜻일 게고, 그 이상의 사업이 잘 된다거나, 병이 낫는 다거나, 죽지 않는 다거나,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좋지 않게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법을 믿어서 밝고 값 있게 산다는 것은 단순한 깨끗하고 높은 인격을 닦아가는 교양있는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확실히 생명의 바른 모습인 진리를 믿고 닦으며 자기 향상의 길을 가는데서 결과적으로 밝은 생활도 있고, 인격 향상도 있으며, 때로는 이변적인 성공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불법을 믿어 건강해졌다든가 사업이 원만해졌다던가 생사 없는 도리가 있다던가, 하는 말은 결코 우매한 사람의 말이거나 요사한 마음의 바램도 아닌 진리에 상응한 자연스런 결과인 것입니다. 우선 불도를 닦아서 생사를 벗어나느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범부들은 대개 미혹한 세계에 세계에 살고 있어 업을 짖고 그 결과로 미혹한 세계를 출입합니다. 이것이 생사이고 윤회입니다. 미혹상태가 개선되거나 해결되지 않는 한 업은 쉴 날이 없고 생사도 끝없이 반복하게 되며 고뇌의 세계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런 줄을 알아서 미혹을 돌리고 깨달음을 향하여 닦아감으로써 생사가 없는 열반경지에 이르게 되니 이것이 해탈입니다. 여기에는 수행하는 정도에 따라서 몇가지 차별이 있습니다.
첫째 : 일반 범부의 경우인데 선악의 업을 짖고 번뇌를 일으켜서 그 과보를 받는 가운데 한몸이 다하면 다시 욕계이던 삼계에 과보를 받아 태어납니다. 이 땅에서 몸을 버리고 나서 새 과보의 몸을 받는 것이지요. 이런 때 받는 과보의 몸은 수명의 장단이라던가 육체의 대소라던가 등 일정한 제한적 특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런 몸을 분단신(分段身)이라고 하며 범부들은 모두가 분단신을 받아서 인간이나 천상 등 6도를 윤회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사를 분단생사(分段生死)라고 하지요. 불법을 믿고 수행한다 하더라도 삼매의 힘을 얻거나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분단생사는 면하지 못합니다. 착한 행을 해서 천상에 나고 혹은 인간에 나며 잘못해서 악도에 떨어지지요. 불도를 닦아 선정의 힘을 이루거나 깊은 진리를 깨달으면 분단생사를 받지 않는 경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수행하여 도력을 이루신 성현들, 나한님, 벽지불 그밖에 대보살 등은 분단생사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깨달아 알고 있는 것이 도리어 장해가 되어[所知障] 이것 때문에 삼계 밖의 수승한 과보를 받은 몸이 됩니다. 이것을 의생신(意生身)이라고 합니다. 의생신을 받은 도인들은 그 몸으로써 써 삼계내에 다시 들어와 보살행을 닦기도 하며 그래서 보다 향상하여 성불하기도 합니다. 대자비 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명도 육체도 자유로이 바꿀 수 있으므로 이것을 변역신(變易身)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대개 불도를 바르게 닦아 깊은 지혜를 이룬 도인들은 자유로이 육체의 몸을 벗을 수 있으며, 육체를 벗어서 범부들은 죽었다고 말하나 본인은 항상 살아서 변함이 없는 도리를 수용합니다. {누구나 힘써서 참선하거나 염불하면 사람은 원래가 죽지 않는다. 죽음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여름에 무성했던 풀이 말라도 오히려 그 뿌리는 단단하고 더욱 실해서 새 인연을 만나 보다 큰 싹을 피우고 꽃과 과실을 맺는거와 같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불법은 철저한 진리의 길을 배우는 것이며, 닦고 개달아서 성취하는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의 세계를 헤아릴 수 없어서 불가사의라고 하는데, 설사 우리의 자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여 부정하거나 과소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참된 뜻을 알지이다} 하는 경건하고 진지한 자세가 대 진리를 배우는 불자의 기본자세입니다.
3)믿음을 키우는 법
질문96), 저는 불교교리는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해일 뿐 절대적 믿음이 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자라나도록 도와 주십시요.
불교교리는 깨달음에 이르는 안내기라고도 말합니다. 그렇다면 안내기만 가지고 있어서는 저 언덕에 이르는 기쁨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불법은 모두 실천하는 데서 진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바라건데 경의 말씀을 믿고, 삶의 목표를 부처님 법 안에서 분명히 하고 큰 소망 큰 원을 발하십시요. 재가불자로서 조석으로 독경 염불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끊임없이 부어지는 부처님의 자비 위신력을 생각하면서 일심으로 기도 정진 하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럴 때 기쁨도, 자신도, 새로운 희망도 보다 뚜렷하고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4)믿음과 수행
질문97), 부처님 법은 수행이 위주가 되는지 믿음이 앞서는 것인지 가르쳐 주십시요.
부처님 법은 자기 성품을 깨닫고 법의 안목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법의 안목이 밝지 못한 범부들은 먼저 닦아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닦아야 자성과명을 밝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닦자면 불가불 부처님 법을 크게 믿어야 하며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도 없고, 바른 이해도 없이 닦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믿고 바로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수행하여 법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바로 믿고 교법에 대한 이해가 명료하다 하더락도 그것은 닦아서 법안이 열린 다음에야 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법을 배우는 사람은 큰 믿음과 바른 이해의 기초 위에서 끊임없는 수행이 있어야 하겠고 수행에 따라 믿음과 이해도 보다 참되고 밝아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5)참믿음의 방해요인
질문98), 일체 성취의 근원이 되는 믿음을 갖는데 방해되는 요인을 끄집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귀하의 뜻에 맞게 꼬집는 것이 되는지 모르겠으나 대충 말씀드리는 것으로 양해를 바라며 또한 이에 관련된 사항에 대하여는 제가지은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의 기도분에 얼마간 적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결정적 믿음의 방해요인이 되는 것으로 이 자리에서는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 [부처님은 열반에 드셨다. 3천년 전의 부처님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부처님을 말한 것이 못됩니다. 형상인 부처님은 중생교화를 위하여 방편으로 변화신을 나투신데 불과합니다. 변화로 나투신 몸을 부처님 본신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옛부터[부처님의 보신도 화신도 참이 아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은 법신(法身)입니다. 진리의 몸입니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이 없습니다. 그 모두에 뛰어나고 현재하시는 법신입니다. 지금 부처님의 법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다만 3천년 전에 80년간 재세했던 위대한 성자라고만 알고 그렇게 책에 ㅆ고 선전하는 것을 보니 딱한 노릇입니다. 부처님은 법신이라는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영원히 현재 설법하시는 대자대비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 들 것은 중생이 이 몸은 육체이고 죄가 쌓인 몸이고 업보가 뭉친 몸이고 숙명적 고난 속의 인생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몸의 현상적 관찰에서 나온 말입니다. 으리의 육체는 현상적으로 온갖 고뇌와 망념과 장애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그 내면을 살펴보고 다시 반야의 가르침에 마음을 돌릴 때 인간은 측면이 사뭇 다른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체이고, 물질이고, 정신이고, 감정의 덩어리인 듯한 이 몸은 미혹의 눈에 드러난 형상일 뿐 그 본성은 법성(法性)이요, 진여(眞如)요, 불성(佛性)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에 이으기를 [오온<육체와 정신>은 공했다]하였으며 또한 {일체 중생이 여래덕성이 구족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말을 믿지 않고 {나는 죄인이다. 업보로 된 몸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성취할 것은 불행과 실패 뿐입니다.
셋째 : 생각할 것은 진실하지 못한 점입니다. 마음속에 허위와 감정과 대립과 불신 등을 품고 있으면서 참회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런 어두운 덩어리를 가슴 속에 품고서 버리고자 하지 않으면 거짓이 되고 마빈다. 일체 성취의 믿음을 이루자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일체허물을 참회하여야 합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어두운 마음, 뭉쳐진 마음, 집착한 마음, 모두를 털어 놔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을 뿌리내리지 못하게하고, 성장을 가로막으며, 병고와 불행을 부르게 됩니다.
넷째 : 진지한 자세의 결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명의 진실로 진지하게 받아들려야 합니다. 이론으로 알아서 지식화하거나 관념적인 이해로 만족하여 실천이 없고 자기 혁신이 없어서는 참된 믿음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 감사하고 돈이나 물자를 흔연히 보시하며 수행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어려움을 참아 견디면서 남을 이롭게 하는 전법보살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진지한 자세가 선행되는 것입니다. 이상 간략한 네 가지를 참고하시어 일체 성취의 큰 믿음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시기를 합장 기원합니다.
6)왜 예경하는가?
질문99), 박가리경에 박가리비구가 부처님께 예배하려하니 [이 몸뚱이에 절을 해서 뭘 하려느냐? 절을 그만 두어라.]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어째서 부처님께 예경해야 합니까?
박가리경에서 부처님은 박가리비구에게 말씀하시기를 [법을 보는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법을 보는 자야말로 부처님을 뵙는 것이며 예경하게되는 것이니 이것은 실상례(實相禮)라고 할 것입니다. 법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님의 유무, 내외, 거래가 없음을 요달하여 그와 같은 평등성지에 머무는 것은ㄴ 무상례라고 할 것입니다. 따로 형상을 취하여 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부처님의 지혜와 덕성과 뜨거운 자비와 가없는 서원력을 우러러 합장하고 일심이 되고 몸을 굽혀 지극존경심의 뜻을 나툴 때 여기에 공경례가 있는 것이며 몸의 공경의 뜻을 나타내고 그 마음이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향하며 그 생각이 일심일 때 비록 범부의 예경일 망정 부처님께 예경하는 의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유한, 속박의 범부성에서 무한, 자재의 부처님을 향한 공경례로서 부처님에 대한 예경은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으신 분은 실상례를 행하시던 분을 따라서 거기에 부처님의 공덕바다는 함께 너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겉모양은 비록 예경의 거동을 취하더라도 아상을 여의지 못하고 공경심이 순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경이 아니요 이른바 아만례가 되니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7)예불의 뜻
질문100)저희들은 오늘날 부처님께 예배드릴 때나 공양드릴 때 3배, 7배 또는 그밖에 절을 많이 할 때가 있습니다. 부처님님께 예경하는 횟수에 대하여 그 골격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3보께 에경드린다는 뜻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3배를 하게 됩니다. 7배나 10배나 20배를 하더라도 그 내용은 역시 3보입니다. 예를 들어 7배의 경우를 말한다면 처음 1배는 석가모니불께 두 번째는 그밖에 모든 부처님께 그리고 세 번째는 부처님의 거룩한 법보께 예배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등 그밖의 많은 보살 님들께 예경하고, 다써번째는 부처님 당시의 수많은 아라한 등 성자들한태 예경하며, 여섯 번째는 부처님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조사님께 예경하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그밖의 모든 스 님들께 예경하는 것입니다. 위에 말한 것은 예경할 때의 기본적인 것을 말한 것이고 그밖에 특별히 참회하거나 특별한 원을 세우신 부처님께 따로 예경하는 것은 별도입니다.
8)예불하는 마음가짐
질문101), 예불할 때의 마음자세를 어떻게 가져야 할지 말씀하여 주십시요.
어떻게 하는 것이 참 예경인가에 대하여는 앞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좀 각도를 바꾸어서 말씀드리지요. 예경은 참되게 합장한 마음이 근본자세라 할 것입니다. 두손을 합한 일념에는 모든 때묻은 생각이나 사사로운 생각들이 말끔히 없어집니다. 합장 앞에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일념이 된 때에는 이것이 바로 자기를 비우고 부처님 광명 앞에 자기의 온 몸을 던진 것이 됩니다. [몸과 말과 뜻을 모두 기울여서 예경한다.]는 것은 정성스럽게 몸을 낮추고 오체투지하며 일심으로 산란한 마음을 비워 오로지 거룩한 광명만을 우러러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을 기울여 무념이 되어 청정심이 되었을 때 거기에 비로서 예경하는 마음이 이루어 졌다고 하겠습니다. 먼져번에 말씀드린 실상례, 무상례, 공경례도 여기서 있계되는 것이며 이 마음자세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비록 겉모양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예경의 진실은 잃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9)수행일과의 시간
질문102), 수행일과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 일정한 시가ㄴ에 꼭 일과정진을 한다는 것은 그 정성과 노력의 정도가 시간 있을 때 아무때나 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간절합니다. 일정한 시간에 정근하므로써 신앙과 정성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둘째 : 수행하는 생활의 기틀이 잡힙니다. 하루의 생활에서 일생 동안의 생활이 진리에 계합되고 생명 발전 원리에 부합되는 생활로 생활이 정돈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셋째 : 영가나 조상을 위하여 독경할 때 꼭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천도받는 영혼이 복받는데 편리한 이유가 있습니다.
10)수행일과 시간(재가자로서)
재가불자로서 수행일과 시간은 어느 때가 좋습니까?
수행은 모든 시간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 수행일진대 수행은 살아있는 모든 시간이 수행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일과시간을 말하게 되는 것은 모든 생활이 수행이 되기 위해서 특별히 시간을 정해서 하는 것입니다. 즉 귀의, 예경, 염불 독경, 발원, 좌선 등을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하는 것이지요. 수행일과가 이러한 성격의 것이므로 그 시간은 하루의 시작인 아침이 좋을 것이고 잠자는 시작인 자기 전에 시작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한결 같은 수행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생활사정상 조석시간이 어렵다면 그 밖의 시간도 무방합니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되도록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지켜가는 것이 좋을 뿐만아니라 중요합니다. 불법 수행은 일과염불만이 아니므로 불자들은 생활하는 모든 시간에 항상 밝은 마음과 바른 행을 닦아가야 합니다.
11)일과 공부를 못하게 될 때
질문103), 집에서 일에 쫓기거나 부득이한 일이 생겨서 조석일과를 못 지키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일과공부를 못하게 될 때라도 할 수 없다 하고 포기하여서는 안됩니다. 설사 부득이한 일이 생겨서 정해진 시간에 일과공부를 못하더라도 마음에서는 놓치지 말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시간 아니라고도 다른 시간에 하게 되고 설사 정해진 일과를 다 못하더라도 반이나 일부만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매일 108배 하는 사람이 그날에 못하였으면 다음날에는 배를 더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공부자세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방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정이 있어 부득이 했다 하고 이유를 붙여 방심하면 믿음은 퇴실하기 쉽습니다. 결코 이유를 붙여 방심하지 마십시요.
12).경전 독송시 마음가짐
질문104), 저는 조석으로 독경을 합니다. 한문 경전 독경할 때에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요.
독경할 때에는 경건히 합장하는 마음으로 모든 망념을 쉬어야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한참 동안 좌선 또는 염불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체 망념을 놓은 맑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내가 읽는 것이나, 실제는 경전 독송을 통해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맑은 마음에서 일심으로 독경할 것이고 반연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더욱이 서두르거나 과도하게 소리치는 것은 독경 태도가 아닙니다. 청정심으로 정중하게 일심으로 반복 독송하면 진정 부처님의 자비하신 진리의 은덕이 우리의 심신에 넘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13).독경하는 장소가 따로 있는가?
질문105), 저는 집에서 조석으로 금강경을 읽고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지장경도 천수경도 독송합니다. 그런데 스님들이나 신도들간에 금강경은 집에서 읽지 않는다던가 지장경은 영단 또는 절에서나 읽는다는 등 말이 많습니다. 또 천수경도 집에서 독송하지 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근일 유식한 사람이 많아서 경전에 대하여 절에서 읽는 경전, 집에서 읽는 경전, 스님들이 독송하는 경전, 신도들이 독송하는 경전을 가려 말하는 모양입니다. 저도 어느 누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수지 독송에 대하여는 경전에 직접 말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전의 말씀을 따를 것이요. 경전의 말씀과 어긋나는 유식한 사람들의 말을 따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금강경도 선남자 선여인이 수지독송하라 했으니 재가출가를 묻지 않는 것이고 지장경이나 그밖의 경전이 모두 그렇습니다. 지장경도 일체 죄고중생들을 위하여 설하시고 일체 중생이 수지독송하여 무량공덕을 얻는 것인데 경전에 어긋나는 그릇된 주장은 사견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전은 재가이든 출가이든 지심으로 수지독송하는 데서 무량무변 공덕을 얻는 것입니다.
14).위패와 가정독경
질문106), 가정에서 위패를 모셔 놓고 독경을 해도 좋습니까?
가정에서 망인의 복을 돕기위해 독경만으로 족합니다. 일심으로 독경하면 맑은 마음과 지혜광명이 나타나 부처님의 위덕이 적용합니다. 그래서 독경은 수행이며, 기도이며, 부처님의 공덕을 받는 행위이며, 자신과 주위를 밝히는 작법이기도 합니다. 특정한 사람을 위하여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수행공덕을 입게 됩니다. 일심으로 독경하는 것이 중요할 뿐, 특정한 망인의 위패를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15)독경 공덕의 차이
질문107), 염불 독경하는 사람따라 다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 공덕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원래로 충만합니다. 그 공덕밖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처님 공덕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미혹에 의한 분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으로 염불독경 수행하여 망견을 버리고 미혹을 돌리고 망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서 범부들은 부처님의 공덕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중생의 근기와 염불독경 수행하는 정도에 따라 저들이 느끼는 공덕의 차이가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불보살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 차별없이 완전한 것을 주시지만 중생의 수행따라 받는 것에 차이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16)오계의 근본정신
질문108), 오계법문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오계에는 살아 있는 목숨을 죽이지 말라.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등 금지하는 형식으로 이룩된 5개의 덕목입니다. 이 하지마라는 형식 부작위형식으로 규정된 계의 본뜻은 무슨 행위를 하지 않고 가만 있는 것이 계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적극적으로 어떤 비른 행을 할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 목숨 죽이지 마라)는 계는 목숨을 존중한는 행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계의 뜻인 즉 아무 행위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첫째 : 생명을 존중하고 억압하거나 아니면 손상하거나 내지는 죽이지 말라.
둘째 : 아낌없이 그 생명에게 베풀어주고 그리고 결코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하지 말라.
셋째 : 청정행을 행 할 것이요.결코 사음을 하지 말 것이요.
넷째 : 진실한 말만을 할 것이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다섯째 : 바른 마음을 항상 지키고 술에취해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계는 적극적인 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계를 지킨다는 것은 진실하고 청정한 행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계가 추구하는 청정 진실행의 근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즉 육체도 번뇌도 감각도 마음도 온갖 분별도 모두 여윈 법성행입니다. 우리의 진면목인 법성, 즉 불성을 구체적 생활 가운데 내어 쓰는 행동을 5가지로 분류한 것이 오계라 하겠습니다. 오계는 바로 불성의 표현이며 법성면목의 산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계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은 우리의 본분을 순수하게 지켜가고 본분공덕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계를 행하는 사람은 법성여여하게 행하고 오계를 행하는 상이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오계를 가지므로써 법성이 지닌 무한 공덕을 함께 하게 됩니다. 오계가 가지는 큰 뜻을 우리는 잘 알아 실천해 가야겠습니다.
17) 불살생
질문109), 불교에서는 불살생을 첫째가는 계명으로 삼는 것 같습니다. 그 본뜻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지키는 것인지요?
불살생의 본 뜻은 생명을 존중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은 절대 가치입니다. 생명은 모든 생명에서 동일하고, 인간과 역사가 발전한다고 해도 필경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생명이 무시되거나 위협받거나 존중되지 않는다면 그밖에 훌륭한 것이 아무리 많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의 안전과 충분한 보호에서, 불안 공포가 제거되고 생명이 가장 자유스러운 상태에 놓여 생명이 가지는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여 참으로 생명이 보람을 누릴 수 있는 생활과 역사를 이룩해 가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생명의 무한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생명이 바로 불성의 실현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소중한을 깨달아 스스로 존귀하고 모든 이웃이 존경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이 지니고 있는 무한의 능력, 무한의 지혜와 덕성을 발휘하여 온 이웃을 위하여 내어 써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삶의 보람은 여기서 거둘 수 있습니다. 이런 생명존중은 개인 뿐만아니라 모든 국가 사회의 제도를 통하여도 보장되고 조성되어야 합니다. 생명존엄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유물주의 사상이며두째는 이기주의입니다. 이 그릇된 사상들이 인간생명을 야욕 달성을 위한 도구이거나 물량생산의 기계로 삼고 인간사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존엄을 실현하는 방법은 스스로 생명이 불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모든 이웃에게 깨닫도록 가르치는 일입니다. 여기서 상해도, 살생도, 억압도 없는 그래서 진정 빛나는 생명가치를 모두 발휘하는 아름다운 진리의 국토가 이룩됩니다.
18)계행과 수행
질문110), 계행을 지키는 거와 수행하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염불 수행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처님 광명을 자신 위에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염불하면 번뇌가 쉬고 마음이 맑아지며 지혜가 나고 힘이 납니다. 그러므로 염불은 바로 부처님의 공덕의 문을 여는 작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계행을 가지는 것은 부처님의 행, 즉 깨달은 행을 닦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 행을 행하며 부처님 공덕을 마음에서 이루면 이것이 깨달음이며 바로된 스행입니다. 만약 염불 수행을 하면서 계행을 닦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음과 행이 서로 어긋나서 수행이 될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면 나무에 불을 붙이고자 하는 사람이 부지런히 불을 붙이는 것은 염불 수행이고 나무를 말리고 부채질하는 것은 계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행을 가지며 수행하여야 바른 수행이 됩니다.
19)마하반야 바라밀의 의의
질문111), 마하반야 바라밀에 대해여 그 의의를 알고 싶습니다.
마하반야 바라밀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큰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관심을 가질 것은 장차 완성한다든가 어떤 조건이 붙은 완성이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완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어떻다고 설명할 수 없는, 생각이나 마음을 초월한 무한 절대의 완성, 진리 본연의 완성을 뜻합니다. 경에 이르기를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이 나온 곳" 이라고 하여 불모(佛母)라고 합니다.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게 된 근거는 반야바라밀이라 하였으며 모든 부처님에 앞서 반야바라밀을 공경하고 공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구하는 사람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완성에 있어서나 사회의 완성에 있어서나 역사와 국토의 완성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반야바라밀을 구하라는 뜻이 됩니다. 반야바라밀은 근원적 진리이며 주체적 진리입니다. 우주와 시간이 벌어지기 이전의 원모습이며, 시간과 역사가 벌어진 후에도 그 원모습이며, 무한한 시간과 공간과 존재와 발전의 근원적 원모습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을 생각하고 부처님과 그 거룩한 진리를 알려면 반야바라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멸의 근원이 반야바라밀이고, 우리의 참모습이 반야바라밀이고, 일체 존재를 초월한 실존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참된 인간을 확립하고 진실한 자기를 회복한다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아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이 땅, 이 사회, 이 질서가 진리 본연의 질서가 되어 인간 생명을 진리로 가꾸고자 하면 역시 반야바라밀에 의한 사회이어야 하겠고 그에 따른 운영이어야 하는 말도 됩니다. 인간 개개인의 덕성과 지혜와 창조적 힘을 발휘하는 것도 반야바라밀의 활용에서 오게 됩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반야바라밀은 진리이며, 실존이며, 일체 생명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일체 생명이 삶의 보람을 누리고 발전과 평화를 이루자면 모름지기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반야심경은 이 점을 가장 짧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둘러싼 감각적, 육체적, 물질적, 자연적, 정신적 일체의 한계를 초극합니다. 일체 고난을 없이하고 일체 장애와 두려움을 소탕합니다. 반야바라밀은 무상진리로 인도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반야바라밀은 문자 그대로 대 지혜의 완성이며, 진리 생명의 완성이며, 진리 국토의 완성이라 할 것입니다.
20)신념과 마력
질문112), 신념이 있으면 무엇이든 이루어 질 수 있습니까?
신념은 일체 환경을 움직이고 자신을 새롭게 형성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 어긋나는 그릇된 신념은 이루어질 수 없고 자기를 해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된 신념도 때로는 성취를 가져올 수 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고 번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법이 무엇인가 바로 알아, 바르고 착하고 모두가 합께 이로울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1)운명에 도전하는 법
질문113), 사람이 살아가는데 부닥친 고난을 이기고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에 도전한다고 할까요,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생활상에 당하는 여러 가지 뜻하지 아니하는 일들, 특히 병 같은 고난스런 일들은 그 원인을 대체로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스스로가 알던 모르던 간에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일입니다. 미워하거나 분노하고 있었거나 슬퍼하거나 그릇된 생각에 빠져 있거나 여러 가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반성해서 고쳐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타나는 현상들은 과거에 지은 원인이 해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일에 대하여 그것이 비록 고통스러운 일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나타나면서 사라지는 것이다"하고 생각하여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재난의 업장이 소멸된다"고 기뻐하여야 합니다. 운명적인 어려움을 당하여 그것을 뜻하는 바 방향으로 열어가는 방법은 한가지 있습니다. 자신이 부처님의 무한 공덕을 지신 안에 지니고 있는 자이며, 자신의 참 생명은 무한 공덕 그 자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큰 진리에 뒷 받침이 되는 자신의 꿈을 크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실현을 향하여 용기 있게, 자신있게, 지혜스럽게, 실천해 나아가는 일입니다. 세간에 그릇된 일들은 모두가 허망한 그림자 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뒷받침이 된 참된 원을 세워서 진리의 믿음으로 용기 있게 실천해 나아갈 때 마침내 현실 위에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운명이라 하는 것이 자기에게 압박해 올여지가 없어집니다. 운명은 타인이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과거에 지은 것입니다. 금생에 받음으로서 소멸되고, 금생에 진리적인 힘을 전개 함으로써 새로운 운명이 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거나 운명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진리의 주인공으로서 창조행을 전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2)부동심 수행방법
질문114), 어떠한 경계에 부닥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지려면 어떤 수행을 하여야 합니까?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마음이 흔들린다고 하는 것은 여러 경우가 있으나 그 중에서 불안한 흔들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경계에 의하여 마음을 내고 경계에 의존하여 안정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계가 흔들리면 마음도 흔들리고 불안해 집니다. 경계란 끊임 없이 변하는 것이며 그 뿌리를 추궁해 보면 공허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계에 매달리면 끊임없는 변화 속에 안정을 잃고 불안하기도 하며 경계에 매달려 인생을 살다보면 그 마음이 공허하고 적막해지며 더욱이 육체가 노령에 가까워질수록 쇠약해지니 심각한 허무감에 빠져 듭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경계란 그림자이며 필경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경계에 부닥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경계에 의지함이 없는 본 마음의 수행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 수행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불교의 모든 수행이 경계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일심 수행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염불도 그렇고 참선도 또한 매 한가지입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염불 수행할 때에 일체 바깥 경계를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의 경계도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시고 한량없는 공덕을 생각하고 무조건 동요되지 않는 부동심을 얻고 크게 안온한 땅에 미루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23)사랑(愛慾)을 버릴 것인가?
질문115), 사람은 사랑즉 애욕심(愛慾心)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것을 버렸을 때 어떻게 되는 것이지 말씀하여 주십시요.
경(經)에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이 은애(恩愛)와 탐욕(貪慾)으로 말미암아 윤회가 있게 되고 모든 중생이 음욕(陰慾)으로 인하여 그 목숨을 정하나니 따라서 윤회는 사랑이 근본이 된다."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중생에 있어 사랑이 그 목숨의 근본과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을 알겠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어떻게 써야 바른 것인지 사랑의 근본이 어떤 것인지를 밝힌 연후에야 사랑을 버리고 혹은 안 버리고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욕망과 결합하여 자기 세계를 형성합니다. 그 욕망은 협소한 작은 것에 탐착할수록 자기가 적은 것으로 전략하고 큰 것을 욕망하여 그것을 사랑으로 충만할수록 가치는 확대되고 기쁨도 보람도 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욕망이나 사랑이 나쁜 것이 아니고 대상을 작은 것으로 구하고 그것에 탐착할수록 저열 저질의 사랑이 될 것이며 욕망의 대상을 한 사회라든가 국가라든가 공익이라든가 하는 등으로 넓게 구하고 거기에 사랑이 확충될수록 값있고 성스러운 사랑으로 빛을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이나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선택하고 발휘하는 지견과 지혜에 따라 차별이 벌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원래 욕망은 대상을 선택한 것이고 사랑은 그와 더블어 둘이 아님을 나타내는 힘입니다. 사랑의 뿌리는 탐이며 탐은 진리의 직접 표현인 힘이라 하겠습니다. 진리가 만법과 둘이 아님을 이루는 힘이 탐이니 말을 바꾸면 탐은 진리의 동력이라 할 것입니다. 순수한 입장에서 관찰하면 탐은 선악을 초월하여 있으며 일체를 성취시키는 힘이라 할 것이므로 이를 허물하기 보다 오히려 거룩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탐애를 죄악시하는 것은 탐애의 근본인 진리 본연대로 그 탐을 쓰지 아니하고 일신이나 일가족이나 일당을 위하는 식으로 협소하고 편벽지게 쓰기 때문에 그 결과는 전체와 조화를 깨뜨리고 부조화와 혼란을 야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탐의 표현이며 탐애는 법성진리의 동력이므로 탐애를 넓고 크고 높은 차원에 두고 {원대하고 고매한 욕망} 생을 펴나갈 때 거기에는 성자의 출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고에 악명 높은 도적은 자기 일신을 중심산아 탐애를 부린 것이요, 국민경재를 혼란시키는 독점기업의 횡포는 자기 사업에 탐애의 준심을 둔 것이요, 충무공이나 안중근의사는 조국에 탐애의 중심을 둔 것이요,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예수는 인류를 일신으로 삼는 욕망에 산 사람이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온 법계 일체중생을 자신으로 삼는 법 본분을 중심하여 탐의 힘을 발휘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밝은 눈, 평들한 지혜로 큰 사랑을 펼쳐갈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무런 욕망도 없고 의욕도 없다는 것은 자기생명 본분에 대한 반역입니다. 부처님의 무연대비를 배우고 차별없는 대자대비를 닦는다는 것은 이것이 법성 본연의 사랑을 쓰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애욕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자칫하면 육체적인 개아나 자기 일가족 중심으로 욕망을 일으키기 쉬운 범부의 타성에서 벗어나라는 뜻이지 욕망을 없애라는 뜻은 아닙니다. 애욕은 육체적 애착을 의미하는 것으로 협의로만 본다 하더라도 그 도리는 매 한가지입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분별하고 치우치지 아니하고 평등 속에 차별을 차별속에 집착이 없는 사랑이란 이것이 허물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24)이성에 무심해서야...
질문116), 중생세계는 모두 이성관계를 통해서 번창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성관계에 무심한 도(道)를 닦는다는 것은 중생세계가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중생세계 모두가 이성관계를 통해서 번창한다는 생각은 속단입니다. 중생이사는 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 하여 삼계라고 합니다만 그 중 욕계만이 탐욕으로 움직이는 세계이고 그 외는 탐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색계만 하더라도 이성관계를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본래 인간은 본성이 나뉠 수 없는 하나이며 따라서 대립될 존재가 없습니다. 순수하고 전성적(全性的)이며, 전일적(全一的)이며, 절대적인 것이 본성이며 원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전일적 인간 존재가 경계를 보고 혹은 집착하고 대립하는 데서 중생세계가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자성이 순수한 상태일수록 큰 안정과 화합과 전일성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고, 자성의 순수성을 벗어난 정도에 따라 그 안정성도, 전일성도 그만큼 적은 것이 되고 거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성이 순수 할수록 큰 순수삼매를 지키는 것이고 자성을 몰각한 정도에 따라 산란심이 더해 마음이 격한 파랑이 일게 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안정정된 상태에는 대립이 없거나 어찌 이성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색계천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합니다. 경계를 보고 마음이 움직여 산란심이 많은 욕계에 이르러서 이성도 생기고 탐욕심도 생기고 탐착행위도 거칠게 발달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욕계라 하더라도 인간계가 아닌 욕계천(欲界天) 정도가 되면 이성을 탐착하는 음욕행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욕계천 천인들이 음욕행위를 할 때, 사왕천과 도리천에서는 인간세계와 같이 육체로 행하고야마천에서는 서로 포옹하며 도솔천에서는 손을 잡고 화락천에서는 서로 웃으며 타화자재천에서는 쳐다보는 것으로 음사가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육체관계와 서로 웃는 차이에서 보듯이 낮은 중생일수록 거친 음욕행위를 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이성관계는 자성의 순수성에서 벗어난 세계의 현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성관계에서 되도록 무심(無心)하고 평등(平等)하며 차별없이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욕걔의 중생들이 탐욕이 바탕이 되어 있으므로 이성 현상이 벌어져 있어도 성욕에 탐착하여 욕락에 빠지는 것은 자기의 본성 상태에서 멀어지고 마음상태를 거칠게 움직이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므로 삼가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불교에서는 인간의 이성관계를 정상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되 탐착하지 말고 경계를 당하되 되도록 본심의 안정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그 질을 향상시키는데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가 인에 있어서는 이성관계를 인정하되 절도와 예절을 가르치고, 출가 수행인에게 무심을 가르치며, 모두가 거룩한 가치를 지닌 자로써 존중하고 그 완성을 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계를 발전시키는 것이요. 인간을 거룩한 차원으로 향상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에 이르시기를 "중생이 생사에서 벗어나 윤회를 면하고자 하거든 먼져 탐욕(貪慾)을 끊고 애갈심(愛渴心)을 제하라" 하셨으며 또한 "ㅇ'ㄹ체 중생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무명(無明)을 발휘한다" 고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필경 우리를 생사없는 대각(大覺)의 언덕으로 인도하시는 깊고 큰 곳에 뜻이 계심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25)미운 사람을 사랑하라.
질문117), 미운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은 이해가 됩니다만 미운 사람을 사랑하고존중하라는 뜻은 어떤 이유인지 알고 싶습니다.
밉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밉게 보이는 것은 미운 것이 자기를 떠나서 자기 마음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밉다고 하는 것도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마음은 본래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모든 우주 만물과 함께하는 크고 너그럽고 하나인 생명, 하나인 존재로서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대립하고 미워할 대상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대립도 자기 마음의 분별을 다시 분별하도록 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미운 것도 자기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나와 대립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자기와 한 마음, 한 몸입니다. 한 자리, 한 자비, 하나의 따사로운 체온으로 살고 있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대립할 자 없고, 미워할 자 없습니다. 한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원래의 도리입니다. 나는 넓은 마음이고 미운 짓 하는 상대방은 어리석은 존재이니까 불쌍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밉게 본 것은 보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망령되 소견으로 대립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닦아 행복하고자 한다면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합니다. 넓고 큰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미운 생각 버리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그 행복을 기원하며 감사하는 일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미워하는 가슴이 어둡고 괴로워 집니다. 심하면 병이 생기고 생활 환경에 불행이 찾아 옵니다. 어두운 마음에서 어두운 결과가 찾아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자비하고 사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일수록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밝아지고 행복해 집니다.
26)은혜와 애착
질문118), 불교에서는 애착을 끊으라고 하고 한편은 사랑에 대하여 보답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은애를 알아 갚으라는 것입니까? 무심하라는 것입니까?
불교에서는 은애(恩愛)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뜻으로 봅니다. 즉 부부 친자의 사이처럼 강한 집착과 애정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사람들은 부모에 대하여 애착에 젖어 항상 서로 엉켜 속박되고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은애로 된 감옥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은애를 버리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은혜를 갚는 것이라 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 사랑에 대하여 몇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탐착하고 집착하는 것이며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욕망의 포로가 되어 만족을 구하는 심정입니다. 이것은 성욕이나 정욕같은 욕애와 생존을 추구하는 유애(有愛) 등입니다. 그리고 한편에는 법으로 청정해진 애가 있습니다. 애착으로 물든 애와 애착이 끊긴 청정한 애의 두가지를 볼 수 있는데 전자는 탐착이 근본이고 후자는 믿음이 근본입니다. 그래서 경론에는 욕애(欲愛)와 법애(法愛)의 두가지를 말하기도 합니다. 욕애란 처자 등을 애착하는 탐욕이 뿌리이고, 법애는 일체 중생에게 평등한 자비심이 근본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물들은 애욕은 버리라 하는 것이고 삼보의 은혜,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 국가 사회의 은혜 등에는 깨달은 밝은 마음으로 받들어 섬기게 되면 그것은 속박이 아니라 자성의 문을 열어가는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27)말세의 근거
질문119), 말세에는 장애가 많아서 고통도 많고 수행도 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어떤 것입니까?
말세란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실하게 실천하기 어렵게 되다는 역사관에 근거한 것입니다. 정법시대, 상법시대, 말법시대로 나누고, 말법시대가 끝나면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 힘들다는 설이 있습니다. 대개 부처님의 교법과 그 실천 수행과 교법의 증득이 모두 갖추어진 시대를 정법시대라 하고, 교설과 수행만이 있는 시대를 상법이라 하며, 교설만이 있는 시대를 상법시대라 하고 있습니다. 대개는 정법 오백년, 상법 일천년, 말법 일만년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반야의 가르침에서 살펴 볼 때 부처님 법이 숨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워래로 정법은 영원하다 할 것입니다. 다만 범부들이 형상에 집착하고 불법도 관념적 이해를 앞세우기 때문에 상법이나 말법시대가 논의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정법 영원을 믿고, 믿음을 견고히 하며 수행을 한결같이 해 나갈 때, 그와 같은 수행자체가 이미 불법의 증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말세를 탓하지 말고 정법을 바로 배워 여실히 수행하는 것이 요긴하다 하겠습니다.
28)어떻게 창조 생활을 할 것인가?
질문120), 우리들은 번뇌와 업보의 몸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번뇌가 끊어진 열반의 공덕을 쓸 수 있겠습니까? 깨칠 때까지를 기다려야 합니까? 알도록 가르쳐 주십시요.
우리들의 몸을 번뇌와 업보에 매인 숙명적 고통을 안고 있다고 보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지혜의 눈을 뜬 반야(般若)의 안목에서 보면 그러한 중생의 구속적 차별 현상의 꿈이요, 환상이요, 실이 아닙니다. 오직 청정한 부처님의 무량공덕이 활발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견성(見性)하신 조사님들은 이 도리를 분명히 보시고 의심없이 활발하게 수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참 공덕(供德)을 가로막고 있다는 번뇌(煩惱) 망상도 실로는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가히 제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불자들은 부처님의 깨달은 경계의 말씀을 바르게 믿고 솔직하고 용감하게 실천함으로서 우리의 참 면목에 깃든 부처님의 무량공덕(無量供德)을 받아쓰고 내어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 모두와 온 세계에 평화와 창조의 찬란한 빛이 넘치게 됩니다. 부디 반야 법문을 굳게 믿고 슬기로운 창조적 실천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9)외로움을 이기는 법
질문121), 저는 처음 법회에 나왔습니다.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고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이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덜 느끼고 될 수 있으면 떨쳐 버리고 초연하게 살 길은 없는지 말씀해 주십시요.
외로움이란 우리들 가슴에서 지우기 어려운 검은 점인가도 합니다. 어쩌면 구름에 갇힌 달처럼 숨박꼭질하듯 우리 마음에 숨었다가는 얼굴을 내미는 요물인가도 합니다.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자아의식의 성장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과 가족의 품에서 안정을 얻고 지내다가 점점 자아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가정밖에 자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좀 더 성장하면 부모님도 자기와 다른 몸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좀 더 개아(開我)에 눈을 뜰 때 자신은 사회와의 관계 속의 개아(開我)이며 자연도, 우주도 자기 밖의 자연과 우주로써 그 관계는 홀로 스스로가 짓고 홀로 짊어지고 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자아가 형성해 감에 따라 인간은 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런 의식의 성장과정에는 여행이라든가, 군에 입대 한다든가, 혼자 먼 곳으로 떠나간다든가, 또는 어려운 과업 앞에 홀로 대결 한다든가. 하는 인생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개아의식의 성장과 생활환경의 변화과정에서 우리의 가슴에는 외로움이 고이게 됩니다. 어떤 때는 막연한 외로움일 때도 있고, 때로는 심각한 고독과 쓰라린 공허감 일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외로움의 근원은 인간 심정의 공허에 근거 합니다. 이런 외로움을 당하여 우리는 대개 그 해결보다도 도피 또는 외면 하는데 급급한 것이 현실입니다. "즉 군중 속에 파묻히고, 향락에 빠지고, 자극과 환락속에 뛰어드는가하면, 망각으로 피신하기도 합니다. 또 그러는 사이에 결혼을 통하여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텅 빈 가슴을 채우기도 하고, 부귀나 권력으로 안정을 쌓기도 하며, 왕성하고 화려한 활동 속에 자신을 사정 없이 몰아 넣어 외로움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으로는 일시적 호도나 잠시 잠시 회피는 할 수는 있지만 그런 것으로는 근원적인 인간의 공허가 치유 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텅 빈 가슴은 더욱 황량한 가슴으로 마음으로 깊어 지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간 고독은 다시 고개를 들게 되고 인생은 필경 허무라는 것을 가슴과 마음으로 뼈져리게 그리고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권세도, 부귀도, 형제도, 친족도, 모두가 자기를 버리고, 떠나며, 결국에는 홀로 자기만이 남은 적막한 고독을 느끼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우선 결혼으로 일시적으로 잠재울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고 가정 속에 묻혀 사는 동안 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 해결은 거기에는 없습니다. 참된 자기를 발견하며 참된 진리 생명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 진리인 생명, 영원 불멸한 생명, 모두와 함께한 만덕 구족한 생명, 대자대비 행복한 생명등, 이러한 도리를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믿고 일심 염불하여야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설사 큰 진리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일심 염불하는 생활을 지어가면 가슴에 외로움의 물결이 밀려 오지를 못합니다. 염불의 힘이 성장할수록 점점 안정과 기쁨이 용솟음치고 가슴에서 밝은 태양이 빛나는 따뜻한 언덕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자비심을 행하고 베풀고 돕는 행을 닦아 가면 기쁨이 솟아오고 생활 속에서 부처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는 외로움의 그림자가 찾아 들지 못합니다. 항상 기쁨과 편안이 함께 하게 됩니다.
30)고난을 당할 때
질문122),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여러 고난을 단하게 됩니다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대하여야 합니까?
세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 고난이 나타난다는 것은 자기의 현재나 과거생활 속에서 그 마음가짐이 어딘가 청정하고, 자비하고, 따뜻하게 화합한 자기 본 성품을 제대로 가꾸어 가지 않은 데가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난이 닥치거든 원인을 밖으로 구하지 말고 자신을 향하여 먼져 살펴 보십시요. 신뢰와, 사랑과, 헌신과, 향상적인 노력과, 그밖에 어딘가에 잘 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대립하거나, 원망하고 성을 내고 슬퍼하거나, 게으르고 침체하고 어두운 마음으로 있다거나, 남의 잘못을 꼬집어 파고 비판하는데 열을 내거나, 등등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을 발견해서 참회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반드시 바꾸어야 합니다.
둘째 : 현재 나타나는 현상은 이것이 과거에 지은 것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나타나면 즉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잠복상태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슬퍼하거나, 원망하거나, 마음 졸이기 보다는차라리 시원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셋째 : 이미 말한 바이지만 나타나 보이는 모든 현상은 실로는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크게 빛나는 권능적인 본분을 발휘하되 사자와 같이 용맹스럽게, 코끼리와 같이 온건 착실하게 지어나가 역사의 중심이 자기 한 몸에서 열려 간다는 깊은 긍지를 닦아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편안한 것은 구하고 고난은 피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지요. 그러나 실로는 굴하지 않는 활기찬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고난만큼 숨은 능력을 발휘하게 하고 진실한 자기 능력과 덕성을 키우는 것이 없습니다. 편안한데 낙착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여 오히려 고난을 오히려 희롱하듯 활기차게 피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맡 부딪처서 이겨나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 할 것이고 바라밀 행자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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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1). 영명대사(永明大師)
영명대사는 후세의 학자에게 염불과 참선(叅禪)의 관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정선(淨禪)사료간(四料簡)을 지어서 그 뜻하는 바를 알게 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사료간(四料簡)
유선유정토(有禪有淨土)-유여대각호(猶如戴角虎) 현세위인사(現世爲人師)-내세작불조(來世作佛祖)
무선유정토(無禪有淨土)-만수만인거(萬修萬人去) 약득견미타(若得見彌陀)-하수불개오(何愁不開悟)
유선무정토(有禪無淨土)-십인구차로(十人九蹉路) 음경약현전(陰境若現前)-별이수타거(瞥爾隨他去)
무선무정토(無禪無淨土)-철상병동주(鐵床竝銅柱) 만겁여천생(萬劫與千生)-몰개인의호(沒箇人依怙)
이 사료간(四料簡)에 대하여 중국 청나라 때의 인광대사(印光大師)가 해석한 개의(槪意)는 다음과 같다 .
유선유정토(有禪有淨土) 행인(行人)이 선종(禪宗)을 깨달아 견성(見成)하고 또 여래의 권실법문(權實法門)을 갖추어 안중(眼中)에 오직 신, 원, 염불의 일법(一法)으로써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行)을 행하는 것이다.
유여대각호(猶如戴角虎) 행인이 정토와 선을 같이 닦으면 대지혜(大智慧) 대선정(大禪定) 대변재(大辯才)가 있어서 사마(邪魔)와 외도(外道)가 이름만 들어도 낙담상혼(落膽喪魂)하고 호랑이가 뿔난 것 같아서 사나운 위엄 있는 기세가 짝 없는 것이 가위(可謂) 금상첨화(錦上添花)다.
현세위인사(現世爲人師) 배우는 사람에게는 그 능력(能力)과 성능(性能)을 따라서설법(說法) 교화(敎化)하여 상중하근(上中下根)이 하나도 그 혜택을 입지 아니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내세작불조(來世作佛祖) 임명종(臨命終)대에 부처님의 접인(接引)을 입어서 상품(上品)에 왕생(往生)하여 곧 부처님을 뵈옵고 무생인(無生忍)을 증(證)하여 속히 성불하는 것이다.
무선유정토(無禪有淨土) 비록 견성(見性)을 못하더라도 결심하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하는 것이다.만수만인거(萬修萬人去) 지성으로 염불하면 감응도교(感應道交)하여 부처님의 섭수(攝受)하시는 것을 입어서 왕생하게 되는 것이니 오역(五逆) 십악(十惡)도 임종 때에 부끄러운 마음을 발하고 염불하여 십성(十聲) 내지 일성(一聲)에도 왕생하게 되는 것이다.
약득견미타(若得見彌陀)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부처님을 뵙는 것이다. 하수불개오(何愁不開梧) 부처님을 뵈옵고 불법을 들어 깨닫는 것이다. 유선무정토(有禪無淨土) 선종(禪宗)을 깨달아서 견성(見性)은 하였으나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십인구차로(十人九蹉路) 왕생도 구하지 않고 견혹(見惑) 사혹(思惑)의 번뇌도 끊지 못하므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면치 못하여 생사(生死)의 바다는 깊고 보리(菩提)의 길은 멀어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크게 깨달은 사람도 열 사람중 아홉 사람은 이러한 것이다.
음경약현전(陰境若現前) 음경(陰境)은 중음신(中陰身)의 경(境)이니 즉 임명종(臨命終)때에 현생(現生)과 지나간 겁(劫)의 선악(善惡)의 과보(菓報)를 가져 오는 업(業)의 큰 힘이 나타나는 것이다. 별이수타거(瞥爾隨他去) 음경(陰境)이 한번 나타나면 순식간에 가징 맹렬한 선악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의 큰 힘을 따라서 선악도(善惡道)중에 태어나서 조금도 능히 자기의 힘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무선무정토(無禪無淨土) 선종(禪宗)을 깨닫지 못하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하지도 아니하고 다른 법문을 닦아서 혹(惑)을 끊어 진리를 증(證)하지도 못하고 또 부처님의 자력(自力)에 의하여 혹을 가진 채로 왕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철상병동주(鐵床並銅柱) 다른 법문을 닦아서 혹을 끊지는 못하였으나 그 공덕을 많이 지었으면 第二의 생(生)에는 인천(人天)에 태어나서 그 복보(福報)를 받는 중에 오욕(五欲)에 빠져서 악업(惡業)을 많이 짓고 악보(惡報)를 면하기 어려워서 第三의 생(生)에는 지옥에 떨어져서 철상(鐵床)동주(銅柱)의 형구(形具)로써 그 죄보(罪報)를 받는 것이다.
몰개인의호(沒箇人依怙) 모든 부처님 보살이 비록 자민(慈愍)을 드리우시나 악업장(惡業障)이 무거운 까닭으로 능히 그 이익(利益)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2). 혜원조사(慧遠祖師)
혜원조사는 말하기를 [요사이 선종(禪宗)들이 염불하며 정토를 닦는 이를 보고는 착상수행(着相修行)한다 하며 비방하고 참선견성(叅禪見性)하여 진상(眞常)을 돈오(頓悟)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천근(淺根)한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염불도 아니 하고 경(經)도 보지 아니하며, 진무(塵務)중에 있어서 입으로는 참선(叅禪)을 말하나 마음에는 도(道)를 행하지 아니하며 정토를 비방하고 왕생을 믿지 아니하니,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아미타불이 무상(無上)한 심묘선(深妙禪)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커다란 도리(道理)를 궁구(窮究)하지 아니하고 분별(分別)을 망생(妄生)하는 것이니 참선견성(叅禪見性)코져 하면 따로 화두(話頭)를 들것이 없이 다만 일구(一句)아미타불만 가지고 자참자념(自叅自念)하여 오래 되면 자연히 소득이 있을 것이오. 이때에 설사 개오(開悟)하지 못하더라도 명종(命終)하면 상품상생(上品上生)을 얻을 것이다]하였다 .
(3). 감산대사(憨山大師)
감산대사는 말하기를 참선[叅禪)하는 이가 많으나 반드시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것 아니고 염불하는 이는 생사에서 벗어날 것을 의심할 것 없나니 왜냐 하면 참선은 상(想)을 여의기를 요하나 염불은 오로지 상(想)에 있는 것인데 중생이 오랫동안 망상(妄想)에 침륜(沈淪)하여 이 상(想)을 여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만일 염상(念想)으로써 정상(淨想)으로 변하면 이것은 독(毒)을 다스리는 것을 바꾸어 놓는 법이다 그러므로 참구(叅究)는 깨닫기가 어렵고 염불은 이루기가 쉬운 것이다]하였다.
(4). 왕룡서거사(王龍舒居士)
왕룡서거사는 말하되 [참선(叅禪)하여 크게 깨달아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를 벗어나는 것이 진실로 상(上)이 되거니와 이에 이르는 이가 百에 二,三인도 없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닦으면 윤회를 벗어나 생사(生死)가 자여(自如)하여 萬에 하나도 빠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나는 승가(僧家)의 상근기(上根器)에 권하고져 하는 것은 참선하는 외에 매일 짤막한 겨를을 내어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권하고 싶다 만약 참선하여 크게 깨달아서 윤회를 벗어났다 하더라도 오히려 불지(佛地)와 떨어진 거리가 극히 멀고도 멀으므로 다시 아미타불을 가서 뵈옵고 전례(展禮)하여 치경(致敬)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不可)하며 만약 크게 깨닫지 못하고 수수(壽數)가 문득 다하여 명종 하더라도 서방에 가서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들으면 어찌 크게 깨닫지 아니할 것을 근심 하리오
만약 정토를 닦지 아니하면 업연(業緣)을 따라 가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이므로 청초당(靑草堂) 오조계선사(五祖戒禪師) 진여철(眞如喆)도 윤회에 골몰하였으니 참으로 가외(可畏)한 일이다 만일 이 도를 정심(情心)으로 닦아 사람을 화도(化導)하고 다시 서로 권화(勸化)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명승(名僧)이라 하여 반드시 그말을 낙종(樂從)할 것이니 그 이익(利益)됨이 무궁하고 반드시 상품상생(上品上生)에 나리라]하였다
(5). 철오대사(徹梧大師)
철오대사는 말하기를 [관 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시심작불(是心作佛) 시심시불(是心是佛)]과 선종(禪宗)의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비교하면 참으로 직절(直截)통쾌하다 왜냐하면 견성(見性)은 어렵고 작불(作佛)은 쉬운 까닭이니, 견성은 심(心), 의(意), 식(識)을 여의고 영광(靈光)이 병로(迸露)하여야 비로소 견성이 되는 것이므로, 견성은 어렵고 작불(作佛)은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염지(念持)하며 부처님의 의보(依報) 정보(正報)를 관(觀)하면 곧 작불이 되므로 작불이 쉬운 것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부처님을 생각할 때에 그 마음이 곧 32상(相) 80종호(八十種好)라]하셨으니 이것이 부처님을 상념(想念)함으로써 곧 작불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작불과 시불(是佛)의 이치가 둘이 아닌 것과 견성과 성불(成佛)의 어렵고 쉬운 것이 이렇게 판이하게 다르니, 염불로써 참선에 비교하면 더욱 직절 통쾌한 것이다.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하나는 조사(祖師)의 말이니,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하며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릴 것인가. 학자는 한 번 완미(玩味)하여 검점 (檢點)하면 반드시 이 말이 그릇되지 아니한 것을 수긍할 것이다]하였다.
(6). 인광대사(印光大師)
인광대사는 염불하는 사람은 선가(禪家)의 참구(叅究)에 간섭할 것이 아니요. 참구염불(叅究念佛)도 염불할 때에 이것이 [누군고] 하는데 치중해야 깨닫기만 구할 뿐이다.
행인(行人)이 신(信), 원(願)으로써 염불하여 왕생하게 되면 깨닫지 아니하는 자가 없고 ,또 깨달아 흑업(黑業)이 다하면 마땅히 생사를 마칠 것이되 만약 깨닫기만 구하고 신, 원이 없는 경우에는 흑업이 다하지 못하였으면 능히 자력(自力)으로 생사를 마칠 수도 없고, 또 능히 불력(佛力)에 의하여 생사를 마칠 수도 없으므로 자력 불력에 모두 근거가 없어서 윤회(輪廻)를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법신보살(法身菩薩)도 성불하기 전에는 모두 불력에 의하므로 업력(業力)의 범부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니 불력 자력의 대소가 어찌 천연(天淵)의 차이에 그치리오]하였다. |
유심정토(唯心淨土)와 자성미타(自性彌陀)의 변론(辯論)
세상사람 중에 혹은 극락정토와 교주(敎主) 미타(彌陀)를 부인(否認)하면서 유심(唯心)이 정토(淨土)인데 유심 외에 무슨 정토가 따로 있으며, 자성(自性)이 미타(彌陀)인데 자성 외에 무슨 미타가 또 있겠는가. 하여 오해하는 이가 있다 이에 대한 선덕(先德)들의 가려 밝힌 중에서 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왕룡서거사(王龍舒 居士)의 설(設)
참선하는 사람들이“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를 주장하여 극락세계를 부인하려는 이가 있으나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왜냐 하면 서방정토가 이치도 있고 사실의 형적도 있는 것이니 그 이치로 말하면 능히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므로 일체가 모두 청정하니 진실로 유심정토가 되는 것이요.
사실의 형적으로 말하면 실로 극락세계가 있어서 부처님께서 틀림없이 자세히 말씀하셨으니 어찌 헛된 말씀이라 하랴. 사람마다 성불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자성미타란 말도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니 마치 불상(佛像)을 조각할 만한 좋은 재목이 있더라도 불상을 조각한 연후에야 비로소 불상이라 칭할 것이요.
재목을 그대로 두고 불상이라고 예배 공양할 수는 없는 것 같은 것이니 소위 유심(唯心)이 정토니 따로 정토가 없고 자성(自性)이 미타니 따로 미타가 없다는 것은 옳지 못한 주장이다. 또 어떤 이는 정토가 있는 것을 믿으면서도 유심설(唯心設)에 구애되어 서방에 왕생할 것이 없다하거나 참선은 직접으로 견성(見性) 성불(成佛)하는 것이므로 아미타불을 볼 것이 없다는 말은 모두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 하면 저 서방 정토는 탐(貪). 연(戀), 진(瞋), 치(癡)가 없거니와 우리의 마음에도 탐, 연, 진 ,치가 없는가. 또 서방 정토에는 옷을 생각하면 옷을 얻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을 얻으며 고요하고자 하면 고요하여지고 가고자 하면 가는 것이지마는 내가 옷을 생각하여 얻지 못하면 찬 것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며 음식을 생각하여 얻지 못하면
주림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며 고요하고자 하다가 고요할 수 없으면 흩어져 움직이게 하는 것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고 가고자 하다가 갈 수 없으면 계루(繫累)가 마음을 고달프게 하니 소위 유심정토라 함은 진실로 이르기 쉽지 못한 것이다.
아미타불은 복혜(福慧)가 충분히 갖추시고 신통(神通)이 광대(廣大)하여 지옥을 변하여 연화를 만드시는 일이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쉽고 한이 없는 세계를 보시는 것이 눈앞에 있는 것 같거늘 나는 항상 숙업(宿業)이 깊고 무게가 있어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거늘 어떻게 연화로 고쳐 만들 수 있으며 또 벽 사이의 거리의 일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한이 없는 세계를 볼 수 있으랴.
소위 자성미타라 함은 참으로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므로 나의 마음이 정토가 될 수 있다 하나 별안간에는 정토가 될 수 없는 일이고 나의 성품이 가히 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 하나 갑자기는 될 수 없는 것이거늘 어찌 정토를 소홀히 생각하고 닦지 아니하며 아미타불을 버리고 뵈옵기를 원치 아니 하리요.
정토의 업(業)을 닦아서 아미타불을 뵈옵고 보리(菩提)를 이루기는 어렵지 않거니와 만약 이 세계에서 참선(叅禪)하여 견성(見性) 성불(成佛)하기는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정토를 수행하는 것이 참선에 방해되지 않거늘 어찌하여 참선하는 이는 정토를 소홀히 여기고 닦지 아니하겠는가.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에 말씀하시기를 “시방(十方)의 한량이 없는 보살이 있어 아미타불국에 왕생하였다”하였거늘 나는 어떠한 사람인데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치 아니하니 내가 과연 모든 보살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하는가. 통틀어 말하면 [유심정토와 자성미타]란 말은 많은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니라.
즉 정토법문을 지송(持誦)수행하면 사람마다 반드시 정토에 낳아서 속히 윤회(輪廻)를 벗을 것이니 저 거짓과 불성실한 마음이 있는 이로부터 그 거리의 먼 것이 천지(天地)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2). 성암대사(省庵大師)의 설(設)
누가 묻기를“즉심시불(卽心是佛)인데 어찌하여 다시 아미타불을 보려는가.” 하였더니 답하기를 “즉심시불이란 말은 얼음을 가리켜 물이라 하는 말과 같다 즉 얼음이 비록 물이기는 하나 물이 얼어붙었으므로 태양의 열을 빌려서야 비로소 녹아 풀어져서 물이 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불(佛)이기는 하나 전체가 어지럽고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불일(佛日)의 힘을 빌려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거늘 어찌 사리에 어두운 마음만을 고집하고 부처님을 뵈옵기를 원하지 아니 하리요” 또 묻기를 [즉심정토(卽心淨土]라 하는데 어찌하여 다시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가 하였더니 답하기를[즉심정토라 함은 나무를 가리켜서 기둥이라 함과 같다.
즉 나무가 기둥이 될 수는 있거니와 나무 그대로가 기둥이 되지는 못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비록 정토를 지을 수는 있으나 마음 그대로가 정토는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十二시(時)중에 일체 경계(境界)에 대하여 한털끝 만치라도 잡념(雜念) 염오심(染汚心)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곧 예상(穢相)이 공(空)하지 못한 것이거늘 어떻게 즉심정토라 하겠는가. 이와 같은 말은 모두 스스로 속는 것이다 만일 정토에 왕생하지 아니하면 유심정토가 끝끝내 드러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3). 대우선사(大佑禪師)의 설(設)
어떤 이가 묻기를 관경(觀經)에는 [이 마음이 불을 짓고 이 마음이 곧 불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다른 불을 염불하는가.] 하고 답하기를 [마음이 본래 부처이므로 저 부처를 염불하게 하는 것이다] 범망경(梵網經)에는 [나는 앞으로 될 부처요, 여러 부처는 이미 이룬 부처인줄 알라]하였으니, 너의 마음의 부처님 앞으로 될 부처이고 아미타불은 이미 이룬 부처이다.
앞으로 될 부처는 오랫동안 욕해(欲海)에 잠겨서 번뇌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출리(出離)할 때를 정하여 약속함이 까마득하나 이미 이룬 부처는 이미 보리(菩提)를 발하고 위신(威神)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중생을 도와서 보호하시므로 여러 부처님이 염불을 권하신 것이니, 즉 나의 앞으로 될 부처로써 다른 이미 이룬 부처를 구(求)하여 도와서 보호를 얻는 것이다 .
그러므로 중생이 만약 염불하지 아니하면 성인과 범부가 영원히 사이가 떨어지고 부자(父子)가 항상 괴리(乖離)하며 오래도록 윤회(輪廻)에 처(處)하여 서로 떨어진 거리가 먼 것이니라.
四 극락정토 권(權) 실(實)의 변(辯)
중국 당나라 때의 조백(棗栢) 이통형장자(李通玄長者)가 화엄합론(華嚴合論)을 짓고, 그 중에 십종정토(十種淨土)의 육권사실(六權四實) 즉 열 가지 정토 중에 여섯은 권(權)이요, 넷은 실(實)이라는 것을 열거 하면서 그 중의 아미타불 정토를 권이라 하고 실이 아니라 하였으나, 이 장자는[사십화엄경(四十華嚴經)]이 당나라에 들어오기 이전이어서[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을 보지 못한 까닭으로 아미타불 정토를 실이 아니고 권이라고 그릇 인정한 것이다.
누가 묻기를[서방 정토는 성인(聖人)이 권방편(權 方便)에 들어가게 되면 무엇 타력(他力)을 빌리리오.] 하였더니 답하기를[부처님이 계신 때의 문수(文殊) 보현(普賢)보살과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마명(馬鳴) 용수(龍樹)보살과 중국의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와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가 모두 왕생을 발원하였으니, 이네들이 모두 둔근이겠는가.
[보적경(寶積경)]에는 석가모니 세존께서 부왕(父王)께 정토왕생을 권하여 육萬 석종족(釋種族)이 모두 왕생하였으니 이네들은 모두 평범한 이들이라 하랴 또 이 성현(聖賢)들이 모두 지금의 소위 재능이 예리하고 뛰어난 이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만일 서방 정토를 권이라 하면 어떠한 것을 실이라 하겠는가. 중국의 손신로학사(孫莘老學士)가 처음에 정토를 의심하다가 양차공(楊次公)과 왕민중시랑(王敏仲恃郞)을 만나서 논(論)하는 도(道)가 꼭 들어맞아 드디어 의심을 풀었다 양차공 왕민중시랑 두 사람은 선(禪)을 배우다가 모두 정토 귀의(歸依)에 쉬지 않고 노력하였으니 정토는 성인(聖人)의 권설(權設)이 아니고 진실로 선려(禪侶)의 서지(棲止)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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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참선과 정토(염불)는 근본 이치상으로는 둘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수행현실을 따지자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오. 참선은 확철대오하고 완전히 증득(證得)하지 아니하면 생사 윤회를 벗어날 수 없소. 그래서 일찍이 위산(僞山)* 선사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돈오(頓悟)의 올바른 인연을 만나야만 비로소 홍진을 벗어나는 점진적인 계단에 들어서며, 매 생애마다 퇴보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단계도 틀림없이 기약할 수 있다.”
“처음에 마음이 인연에 따라 어느 순간 자성(自性)을 단박 깨달을 수 있지만, 시작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 쌓여온 업습(業習)의 기운은 그렇게 단박에 모두 사라질 수 없다. 그 업습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말끔히 제거하여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오. 천하의 선지식들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공덕이 성인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조(五祖) 계(戒) 선사는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는 노공(魯公)으로 다시 출생한 거라오. 예로부터 확철대오하고서도 완전히 증득하지 못한 대종사(大宗師)들이 이처럼 수없이 많소.
이는 정말로 오직 자력(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구하지 않은 탓이오. 미혹이나 업장이 말끔히 제거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반면 정토 염불은 믿음과 발원과 수행〔信願行〕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이미 깨달아 증득한 사람은 곧장 부처의 후보 자리〔補處〕에 오르게 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할지라도 불퇴전(不退轉:阿婢跋致)의 경지를 증득하게 되오.
그래서 연화장(蓮華藏) 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한결같이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선종과 교종의 수많은 선지식들이 나란히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거라오. 이는 부처님의 자비가피력에 완전히 의지하여 자신의 간절한 믿음과 발원을 행하기 때문에 쌍방의 마음이 서로 교류되어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감응이 나타나는 것이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참선보다는 정토 염불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이오. 한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마음 가운데서 만 가지 공덕을 두루 갖춘 위대하고 거룩한 나무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는 것이오.
더러 소리 내어 염송하기도 하고 더러 소리 없이 조용히 암송하기도 하되, 끊어짐이나 잡념망상이 없도록 하며, 반드시 생각〔念〕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자기 귀로 들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살아있고 한 구절 한 구절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염송해야 하오.
이렇게 염불을 오래 계속하다 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되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몸소 증험(證驗)하고 서방정토의 풍취를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그래서 대세지보살이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을 모두 추스려 청정한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수행으로 삼매에 이르는 최상의 원통(圓通) 법문을 삼은 것이오. 정토 염불로 곧장 선정(禪定)에 드는 방편이 이보다 더 묘한 게 또 어디 있겠소?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을 구하지 않소. 그래서 공부에 힘이 붙어 진짜와 가짜가 서로 뒤섞여 공격해 올 때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번쩍 나타났다가 번쩍 사라지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쉽소.
그러한 경계들은 마치 잔뜩 흐리고 비오던 날씨가 장차 개이려고 할 때 두터운 구름장이 터지면서 문득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다가 눈 깜박할 사이 다시 어두컴컴해지기를 반복하여 도대체 날씨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와 비슷하오.
이러한 상황은 진짜 도안(道眼)이 뜨인 자가 아니면 식별해낼 수가 없소. 이 때 만약 한 소식(消息) 얻은 걸로 착각하면 악마에 집착〔走火入魔〕하여 미쳐 날뛰게 되고 어떤 의약으로도 고칠 수 없게 되오.
염불 수행하는 사람이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온갖 공덕을 갖춘 위대한 명호〔萬德洪名:南無阿彌陀佛〕를 염송하는 방법은 마치 밝은 해가 중천에 걸린 대낮에 큰 길을 가는 것과 같아서, 단지 마귀나 요정, 도깨비들이 얼씬도 못하고 자취를 감출 뿐만 아니라 샛길로 빠지거나 옳고 그름을 따질 염두조차 일어날 여지가 없다오.
이러한 염불 수행을 꾸준히 계속하여 공부가 순수해지고 힘이 지극히 붙으면 결국 “온 마음이 부처이고 온 부처가 마음이 되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마음과 부처가 하나가 되는〔全心是佛, 全佛是心, 心佛不二, 心佛一如〕”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러한 이치와 이러한 수행은 단지 사람들이 이를 잘 몰라서 부처님이 중생들을 두루 제도하시고자 한 원력에 부합하지 못할까 걱정될 따름이오. 그러니 어찌 은밀히 숨겨 두고 전해 주지 않거나 또는 어떤 특정인에게만 전해주는 일이 있겠소? 만약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입과 마음으로만 전수하는 미묘한 비결이 있다면, 이는 삿된 악마나 외도(外道)일 것이며 불법은 아니라오.
법당 화상(法幢和尙)은 숙세에 영특한 근기를 타고나, 처음에는 진실한 유학자〔眞儒〕였다가 나중에 진실한 스님〔眞僧〕이 되셨으니, 글공부하고 도 닦은 게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칭송할 만하오. 세상에 진짜 유학자가 있어야 비로소 진짜 스님이 있게 되오. 별 볼일 없이 어중이 떠중이로 노닐던 무뢰한(無賴漢)들이 출가하면 정말로 거의 모두 불법을 파괴하는 마왕(魔王)과 외도가 되기 십상이오.
법당 화상의 어록은 모두 사람들 마음의 눈을 곧장 통쾌하게 확 틔여 주는 훌륭한 법문으로, 인쇄하여 널리 유통시키고 선가(禪家)의 보배로도 삼을 만하오. 그러나 이는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길을 밝혀 놓았을 따름이오.
우리들은 오로지 정토염불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니, 그 말씀의 구절들을 붙잡고 씨름하여 둘다 손해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기 바라오. 선가에서 주창하는 것은 오직 근본 요지에 국한되며, 그밖에는 일체 밝히지 않소. 원인을 닦아 과보를 얻고 미혹을 끊어 진아(眞我)를 증득하는 일은 모두 스스로 묵묵히 수행해 나가야 할 공부라오.
그런데 문외한들은 선가에서 이러한 수행과 증득의 도리를 뚜렷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선가에서 이러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는 곧 선가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불법을 비방하는 죄악이오.
교리를 좀 아는 총명한 사람들은 으레 염불수행이 왜 굳이 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고 선택하는지 따져 묻지요? 마치 상대적인 분별과 취사선택을 완전히 초월한 수행만이 절대궁극인 양 여기는가 보오. 그러나 이는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궁극의 경지는 부처가 된 다음의 일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다면 설령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것조차 모두 취사선택의 편에 속하오.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취사선택을 인정한다면, 염불법문이 동방 대신 서방을 향하고 혼탁한 사바 고해를 떠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는 발원을 어찌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참선 법문 같으면 취사선택이 모두 잘못이지만, 염불 법문에서는 취사선택이 모두 옳다오. 참선은 오로지 자기 마음〔自心〕만 참구하는 것이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함께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렇게 서로 판이한 법문의 근본원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망령되이 참선 법문을 가지고 염불 법문을 공격 비판하는 것은 그 의도가 몹시 잘못되었소. 참선에서 취사선택을 안 하는 것은 본디 최상의 정수이지만 염불에서도 취사선택을 없애려 한다면 곧 독약이 되고 만다오.
여름에 모시옷 입고 겨울에 털가죽옷 입으며,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리 아니겠소? 서로는 비난할 수도 없거니와 또 어느 한쪽만 옳다고 고집해서도 안 되오. 오직 각자의 근기와 본성에 적합한 방편을 골라 잡는다면 폐해가 없이 유익할 것이오.
동방을 버리고 서방을 취하는 것이 생멸(生滅)이라고 비방하는 자들은 거꾸로 동방을 고집하여 서방을 버리는 것이 단멸(斷滅)임을 모르고 있소. 대저 아직 미묘한 무상정각을 증득하지 못한 중생이라면 누가 취사선택을 벗어날 수 있겠소?
3아승지겁을 수련하고 백겁 동안 원인 자리를 닦아 위로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일체의 수행과정이 어느 것 하나 취사 선택의 연속이 아니겠소? 모름지기 여래께서 모든 중생들이 한시 바삐 진리의 몸〔法身〕과 고요한 광명〔寂光〕을 증득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하여 특별히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지송(持誦)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라고 간곡히 권하셨음을 잘 알고 명심해야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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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2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법문은 모두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으며,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않고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법문은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하오. 그런데 염불 법문은 미혹을 끊은 자가 왕생하면 법신(法身)을 곧장 증득하고 미혹과 업장을 짊어지고 왕생하더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우뚝 올라서게 되니, 이 아니 수승(殊勝)하오?
하나는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지하고 하나는 오로지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힘을 아울러 보태니, 두 가지 법문의 쉽고 어려움은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겠소?
으레히 보면, 총명한 사람들이 선서(禪書) 좀 섭렵하다 재미있는 걸 느끼고는 마침내 참선을 최고로 여기고 마치 사방으로 통달한 도인처럼 자처하는 경우가 많소. 대부분 참선과 염불의 이치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과대망상에 잠긴 부류라오.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결코 따라서는 안 되오. 만약 이들을 따르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일은 티끌처럼 수많은 겁(劫)이 지나도록 전혀 가망이 없을 게요.
권(權)이란 여래께서 중생의 근기를 굽어 보시고 거기에 맞춰 드리운 방편 법문〔臨機應變〕을 일컫고, 실(實)이란 부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증득한 도의(道義) 그대로 설법하심을 일컫소.*
또 돈(頓)이란 점차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빠르게 한번에 뛰어 넘어 들어감을 일컫고, 점(漸)이란 점차 닦아 나아가고 점차 증험해 들어가 반드시 많은 세월과 생명의 과정을 거쳐 바야흐로 실상(實相)을 몸소 증득하는 것이오.
그런데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선의 법문이야말로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불도를 이루게 하는〔見性成佛〕 법문으로 정말로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으레히 자랑하는구려. 설사 참선으로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본다〔明心見性〕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진리와 본성상의 부처〔理性佛〕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요.
만약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확철대오하면서 증득하여 스스로 삼계고해를 벗어나 영원히 생사윤회를 벗어남과 동시에, 위로 불도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여 복덕과 지혜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 수 있겠소. 그러나 이러한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갖춘 경우는 이른바 확철대오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백천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 할 따름이라오.
그 나머지 근기가 조금만이라도 처지는 사람은 제아무리 미묘한 도를 확철대오했을지라도 보고 생각하는 번뇌〔見思煩惱〕를 완전히 끊을 수 없어서 여전히 삼계고해에서 생사윤회를 되풀이해야 한다오. 그렇게 생사를 되풀이하다 보면 깨달음에서 미혹으로 빠지는 경우가 훨씬 많고 미궁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게 사바세계 수행의 현실이오. 이러한 즉, 참선법문이 비록 제아무리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할지라도 정말로 근기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실(實)과 돈(頓)의 진짜 이익을 받지 못하고, 결국 권(權)과 점(漸)의 방편법문이 되고 마는 게 아니겠소?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기 때문이오. 자신의 힘이 백퍼센트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소? 그러나 현실상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진리와 본성을 단지 깨달을 수 있을 뿐 몸소 증득할 수는 없게 되오. 지금 말법시대에 확철대오한 사람도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인데, 하물며 확철대오한 바를 증득한 사람은 말할 나위가 있겠소?
여기에 비하면, 염불(念佛) 법문은 위로도 통하고 맨 밑바닥까지 통하며, 임기응변의 권(權)이면서 항상 불변의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漸〕적이면서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漸〕적이면서 단박에 뛰어넘는〔頓〕 수행법이기 때문에 보통의 교리로 시비우열을 따질 수가 없다오. 위로는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等覺菩薩〕로부터 아래로는 아비지옥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닦아 익혀야 할 법문이오.
여래께서 중생에게 설법하심은 오직 생사윤회를 끝마치고 벗어나도록 이끌기 위함일 뿐이오. 다른 법문들은 최상의 근기를 지닌 자만이 그 일생에 생사를 마칠 수 있으며 낮은 근기의 중생은 수많은 겁을 닦아도 해탈하기 어렵소. 오직 염불 법문 하나만은 어떤 종류의 근기와 성품을 타고난 중생이든지 모두 현생(現生)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생사윤회를 끝마칠 수 있다오. 이처럼 곧장 빠르게 갈 수 있는데 어찌 점차〔漸〕 수행법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겠소? 비록 제아무리 뛰어난 근기로 참선수행을 하더라도 보통의 근기로 원만하고 곧장 닦아가는 염불만은 못할 것이외다. 겉보기에는 느리고 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법문의 위력과 여래의 서원이 평범한 중하근기 중생들도 막대한 이익을 단박에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니, 그 이익은 완전히 부처님의 자비광명 가피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지요.
무릇 참선하거나 강경(講經)하는 사람들이 정토 염불 법문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으면 너무 평범하고 쉽다고 여겨 가볍게 보거나 거들떠 보지도 않기 일쑤라오. 만약 그들이 염불 법문을 한번만 제대로 깊이 연구해 본다면 마음과 힘을 다해 널리 펼치게 될 것이 틀림없소. 그런데 어찌 권(權)이네 실(實)이네, 돈오돈수네 돈오점수네 하는 잘못된 시비논쟁에 끄달려 스스로를 망치고 중생들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만 저지르고 있겠소?
‘집착하지 말라(不執着)’거나 또는 ‘집착을 놓아 버려라(放下着)’ 등의 말은 추상 이치로는 지극히 옳지만 구체 현실 상황은 보통 평범한 중생들이 행할 수 있는 바가 결코 아니오. 온 종일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사치스럽게 지꺼리는 것은, 며칠 동안 물 한 잔 쌀 한 톨 얻어 먹지 못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허기져 금방 쓰러져 죽게 생긴 사람이 “나는 용의 간이나 봉황의 골수조차 더러운 쓰레기로 보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는 판인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물건들을 거들떠 보기라도 할소냐?”고 허풍 떠는 것과 똑같은 빈말〔空談〕에 지나지 않소.
요즘 세상에 불교의 이치〔敎理〕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곧장 참선에만 파고 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텅빈 해탈병〔空解脫病〕에 걸려 있소. 좌선 좀 하여 생각이 맑아지고 텅빈 경계〔空境〕가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잡념망상을 고요하고 맑게 가라앉혀 어쩌다 펼쳐지는 환상의 경계〔幻境〕에 지나지 않지요. 그런데 이를 마치 무슨 소식(消息)이라도 얻은 것처럼 착각하여 크게 환희심을 내면 마음을 잃어버리고 미쳐 날뛰게 되어 부처님도 고칠 수 없게 된다오. 다행히 수행자가 이를 몸소 알아차리고 집착하지 않으면서 환상과 망상을 내버리면 마침내 모든 법문을 일관회통(一貫會通)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소. 비유하자면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헤쳐 걸은 뒤 문득 사통팔달의 큰 길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말법시대의 우리 중생들은 근기가 형편 없는데다가 선지식조차 매우 드물다오. 만약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에 의지하여 정토염불 법문 수행에 전념하지 않고서 단지 자신의 힘만 믿고 참선에만 매달린다면, 마음을 밝혀 본성을 보고〔明心見性〕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斷惑證眞〕하는 이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환상을 진짜로 착각하며 홀림을 깨달음으로 오인하고 악마에 집착하여 미쳐 날뛰는 자들이 정말 많아질 것이오. 그래서 영명(永明) 선사나 연지(蓮池) 대사 같은 선지식들이 시절인연과 중생근기를 관찰하여 염불 정토법문을 적극 힘써 펼친 것이라오.
참선이라는 법문을 어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겠소? 옛날 위대한 수행자 가운데 조주(趙州)의 염(念) 선사 같은 분은 어려서 출가하여 나이 여든이 넘도록 행각(行脚)을 계속 했다오. 그래서 그를 칭송한 시에도 “조주는 여든에 여전히 행각하였으니, 단지 마음자리가 아직 고요해지지 않아서였네.”라는 구절이 있소. 장경(長慶) 선사는 좌선으로 방석 일곱 개를 닳아뜨린 뒤 돌아다녔으며, 설봉(雪峯) 선사는 세 번 투자산(投子山:舒州 소재)에 올랐고 아홉 번이나 동산(洞山)에 오르기도 하였소. 이처럼 위대한 조사들도 확철대오하기가 그토록 어려웠거늘, 악마에 들린 무리들은 악마의 말을 한번 듣고서 모두 다 깨쳤다고 날뛰고들 있으니, 앞에 말한 조사들이 몸소 이들의 신발을 들어준다고 할지라도 쓸 데가 없구료.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것은 부처님의 마음 새김〔佛心印〕을 전하여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見性成佛〕 하기 위함이었소. 그러나 여기서 보고 이룬다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천진불성(天眞佛性)을 가리켜 말함이오.
사람들에게 먼저 그 근본을 알아차리게 하면 수행과 증득의 법문은 모두 그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으며, 마침내 더 이상 닦을 게 없고 더 이상 증득할 것도 없는 궁극의 경지에서 저절로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 번 깨달음과 동시에 곧장 복덕과 지혜가 함께 나란히 갖추어지고 궁극의 불도(佛道)가 원만히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오. 마치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어 넣으면〔畵龍點睛〕 용이 곧장 살아나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휘황찬란하게 날아 오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그 효용은 각자 몸소 받아 느낄 수밖에 없소. 그래서 그대로 곧장 마음이면서 부처인 도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법이 함께 나란히 온 세상에 쫙 퍼지게 되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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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3
타고난 근기가 뛰어난 자는 한 경계 한 기미에 곧장 그 조짐을 알아차리고 진리의 말을 토해내며, 평범의 소굴에서 스스로 벗어나 나고 죽음에 걸림이 없이 대자유와 대해탈을 누리게 되오. 그러나 근기가 조금만 처지는 자는 설령 확철대오할지라도 번뇌업습의 기운이 말끔히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면서 중음(中陰)을 거치고 태반(胎盤)을 나오면서 대부분 혼미와 후퇴를 거듭하기 마련이오. 확철대오한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그래서 정말로 부처님의 자비가피력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정토 염불 법문에 전심진력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온당한 계책이라오.
율종(律宗)이나 교종(敎宗)·선종(禪宗)은 맨처음 교리(敎理)를 분명히 배운 뒤 그에 따라 수행하여야 하오. 수행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바야흐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되지요. 그런데 교리조차 잘 알지 못하면 눈 먼 소경수행〔盲修轄煉〕이 되어, 뭔가 조금 얻으면 다 통했다고 착각하거나 악마에 들려 미쳐 날뛰기 십상이오.
설사 교리를 분명히 알고 수행공부가 깊어졌다고 할지라도 미혹을 다 끊지 못하고 터럭끝만큼만 남겨 두면 여전히 윤회 고해를 벗어날 수 없게 되오. 미혹과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 생사고해 벗어나기를 계속 기대하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와는 너무도 멀리 동떨어져 얼마나 수많은 겁(劫)을 더 수행하여야 비로소 부처의 과보를 원만히 이룰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소.
비유하자면, 평범한 서민이 태어나면서부터 몹시 총명하고 지혜로워 책 읽고 글 공부 시작한 지 십여 년 만에 갖은 고생 끝에 어느 정도 학문이 이루어져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과 같겠소. 그가 아주 큰 재주와 능력이 있다면 낮은 관직부터 점차 승진하여 재상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오. 재상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 정점의 관직으로 모든 신하 중의 으뜸 자리지요. 그러나 재상도 만약 태자에 비교한다면 귀천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차이 나오. 하물며 황제에 빗대겠소? 평생 신하로서 군주의 명령을 받들어 행하며 신명을 다 바쳐 나라 다스림을 도와야 할 운명일 따름이오.
그러나 이러한 재상 직위도 오르기가 정말 쉽지 않소. 반평생 힘과 재주를 다해 수고하면서 온몸으로 감당한 뒤 운 좋게 황제에게 인정받아야 말년에 잠시 그 자리에 오를까 말까 하는 거요. 만약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그 자리에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할 것은 당연하오. 그러한 자가 백천만억이나 되는데, 이는 곧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존하는 것이라오.
학문과 재능은 교리를 분명히 알아 그에 따라 수행함을 비유하고, 직위가 재상까지 승진하는 것은 수행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함을 비유하며, 단지 신하로 일컬어질 뿐 끝내 군주가 될 수 없는 것은 비록 생사윤회를 벗어날지라도 아직 불도를 이루지는 못함을 비유하오.(신하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소. 황실에 탁생(託生)하여 황태자로 태어나지 않는 한. 마찬가지 이치로 기타 법문을 수행하여도 부처가 될 수 있지만 다만 정토염불 법문과 서로 비교하면 너무 동떨어진 차이가 나게 되오. 독자들은 이 비유가 함축하는 뜻을 잘 음미하고 문자에 얽매이지 않기 바라오.
그런데 화엄경의 맨 끝에 보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조차 오히려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회향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재상이 황실에 탁생하여 황태자로 태어나겠다는 비유와 의미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소. 염불 법문이 화엄경을 얻음으로써, 마치 큰 바다가 온 강물을 집어 삼키고 너른 허공이 삼라만상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밝혀졌으니 정말로 위대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고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 재상이 되지 못하는 자가 몹시 많다는 것은 미혹을 완전히 끊지 못하여 생사고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이 너무도 많음을 비유하는 것이 되겠소. 그런데 염불법문은 설령 교리를 잘 모르고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단지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만 지송(持誦)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면 임종 때 틀림없이 부처님께서 친히 맞이해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되오.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은 뒤 바로 그 생애에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르지요.
이는 부처님의 힘〔佛力〕이자 또 자신의 힘〔自力〕을 겸비하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부처님을 감동시킴이요, 48대 서원으로 극락왕생을 바라는 모든 중생을 자비로이 맞이하시는 것은 부처님의 힘이 나에게 호응(응집)하심이라오. 감동과 호응〔感應〕의 통로가 서로 교차하여 이와 같은 효험을 얻게 되오.
또 만약 교리를 깊이 분명하게 알고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한 사람이 극락에 왕생하게 되면 그 품위(品位)가 더욱 높고 불도를 훨씬 빨리 원만하게 성취하게 되오. 그래서 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을 포함한 화장(華藏) 세계의 대중이나 마명(馬鳴)과 용수(龍樹) 같은 역대 위대한 종사(宗師)와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극락왕생을 발원한 것이오.
비유하자면, 황실에 태어나면 한번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고귀한 태자로 모든 신하를 거느리게 되는 이치와 비슷하오. 이는 바로 황제의 힘이오. 태자가 자라면서 점차 학문과 재능이 하나씩 갖추어지면 마침내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아 천하를 다스리게 되고 모든 신하와 백성이 그의 말을 따르게 될 것이오. 이는 황제의 힘과 자신의 힘을 겸비한 것이겠소.
염불 법문 또한 이와 같소. 미혹과 업장을 완전히 끊지 못한 채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면서 바로 생사고해를 벗어남은 태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신하를 압도하는 것과 비슷하고, 방생한 뒤 미혹과 업장이 저절로 끊어져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름은 태자가 자라면서 학문과 재능을 갖추어 황제 지위를 물려받음과 비슷하오. 또 이미 미혹과 업장을 끊은 이는 마명이나 용수 같은 역대 조사와 같고, 벌써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른 이는 문수 보살이나 보현 보살과 같으며, 화장 세계 대중이 모두 왕생을 발원한 것은 마치 예전에는 변방 시골에 처박혀 감히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엄두도 못내던 이들이 지금은 동궁(東宮)에 거처하면서 머지 않아 등극(登極)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오.
우리 중생들의 심성은 부처와 똑같소. 단지 미혹되어 진리를 등짐으로써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을 따름이오. 이를 불쌍히 여기신 여래께서 자비로이 근기에 맞춰 설법하심으로써 모든 생명에게 본래의 집에 되돌아갈 길을 열어 주셨소. 그 법문이 비록 많긴 하지만 크게 둘로 요약될 수 있소.
바로 참선과 정토염불이오. 둘 모두 해탈이 가장 쉽지만, 참선은 오직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겸비하기 때문에 양자를 서로 비교하면 염불 법문이 시절인연과 중생근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셈이오. 비유하자면, 사람이 강이나 바다를 건널 때 직접 헤엄치지 않고 배에 올라타야만 안전하고 재빨리 저쪽 언덕(彼岸)에 도달하면서 몸과 마음 모두 가뿐한 것과 같은 이치요.
말법시대의 중생들은 오직 크고 안전한 배와 같은 염불 법문에 의지해 수행할 수 있다오. 그렇지 않고 한번 근기에 어긋난 법문에 들어서 시절인연을 놓치면 애써 수고만 다할 뿐 도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대보리심을 발하고 진실한 믿음과 서원을 내어 평생토록 오직 나무 아미타불 명호만 굳게 지니고 염송하기 바라오. 염송이 지극해지면 모든 감정을 잊어버리고 염송 그 자체가 무념(無念)이 되어 선종과 교종의 미묘한 의리(義理)가 저절로 철저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임종에 이르면 부처님과 보살님이 몸소 오시어 직접 맞이해 갈 것이니, 곧장 최상의 품위에 올라 앉아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되오. 오직 한 가지 비결이 있을 따름이니 정말 간절히 일러 주겠소.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면, 미묘하고 또 미묘하고 미묘하리로다.(竭誠盡敬, 妙 妙 妙 妙)
글·/보적(寶積) 김지수(전남대 법대교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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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광(印光)대사(1861-1940)
중국 청나라 말엽에서 민국(民國) 초기에 걸펴 정치사회가 혼란하고 불법의 쇠퇴가 극심할 당시 염불법문을 수행하여 중생교화와 불법포교에 헌신한 고승대덕으로 중국에서는 연종(蓮宗;정토종) 제 13대 조사로 추앙받는다.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라고 권하였으며, 평생 삭발한 출가 제자는 한 명도 받지 않았고 재가신자들에게 주로 서신으로 설법하였다. 평생 동안 어떠한 절의 주지도 맡은 적이 없는 인광 대사는 후학을 가르침에 귀를 붙잡고 얼굴을 마주 대하듯 자상하고 간곡히 이르되, 경론(經論)에 바탕을 두고 가슴 속으로부터 쏟아냈는데, 그 내용은 인과법칙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알맹이 없이 빈 말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또한 모든 사람이 먼저 세상의 현명하고 착한 사람 노릇을 한 다음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받아 평범을 뛰어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인도하며, 사람들에게 행하지도 못할 거창한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어 `죽과 밥만 축내는 중(粥飯僧)', 항상 부끄러운 중`이라는 별호를 즐겨 쓰기도 한 스님은 입적 후 수없이 많은 사리가 나왔다.
여기 실린 가언록(嘉言錄)은 대사의 서신설법을 편집한 것으로 이 글이 세상에 발행되자 말마다 진리를 드러내고 글자마다 종지(宗旨)로 귀결되며, 위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에 들어맞으며, 선종(禪宗)과 정토(淨土)의 오묘한 법문을 떨치면서 그 사이의 쉽고 어려움을 잘 가려내어 실로 이전 사람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곳을 훤히 파헤쳤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방생의 의의 (0) | 2020.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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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빛을 찾아서(광덕 큰스님) (0) | 2020.04.18 |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르는 이유 (0) | 2020.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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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재의 자세한 설명 (0) | 2020.04.18 |
아미타불, 즉 아미타부처님은 '무량수불', '무량광불'이라고 하는데,
한없는 수명을 가진 부처님, 끝없는 광명인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오랜 옛날 법장 비구로 수행할 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흔여덟가지의 큰 서원을 발하여
훌륭한 세상을 세울 것을 다짐하고, 마침내 성불하여 서방에
극락세계를 이룩하신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항상 그곳에 계시면서 이 세상의 온갖 괴로움에서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을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시는 부처님이십니다.
극락은 서쪽으로 십만억국토를 지나서 있다고 하여
서방극락세계라고도 합니다.
모든 불국토 중에서 가장 장엄한 세계라고 합니다.
극락에 나면 죄와 고통이 없고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며,
더없이 청정한 곳이기 때문에 법문을 듣고 수행하면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이 누구나 성불하게 됩니다.
이러한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미타부처님을
진심으로 믿고 염불하면, 이 부처님의 원력에 의해 극락세계에 태어나므로,
염불을 할 때 아미타부처님을 생각하여 그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이 부처님은 원만무애한 자비, 지혜, 신력과 무한한 광명과 수명을
가진 분으로서, 아무리 죄업이 두텁고 사악한 사람이라도 아미타부처님을
생각하며 일심으로 염불하면, 이 부처님의 위대한 신통력에 힘입어
임종시에 극락에 태어납니다.
관세음보살님은 '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관음보살이라 하기도 합니다.
관자재란 밝은 지혜를 얻어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재한 힘을
가졌다는 뜻이고, 관세음이란 이름 그대로 세상의 음성을
관장한다는 뜻입니다.
대자대비의 덕을 근본서원으로 하는 극락세계에서 아미타부처님을
돕는 보살님입니다.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시방세계를 비롯한 다른
모든 세계에 나타나서, 석가모니부처님을 돕는 자비의 화신입니다.
경전에 의하면 관세음보살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중생이 온갖 고뇌와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누구든지 나를 생각하고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어디에 있든지
천개의 귀로써 듣고, 천개의 눈으로 보아 그를 고통에서 구할 것이다."
이렇듯 관세음보살님은 무한한 자비의 능력으로 우리의 곁에서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면,
언제 어디라도 오셔서 그 원하는 바를 들어주시고 편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머니와도 같으신 관세음보살님은 중생의 근기나 형편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몸을 나투시고 다가오기 때문에,
누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평등하게 구제해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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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재의 자세한 설명 (0) | 2020.04.18 |
불자의 기초 지식 (0) | 2020.04.18 |
▣ 사찰의 문
1.일주문 * 절 입구에 양쪽 하나씩의 기둥으로 세워진 건물
* 일주문을 경계로
문밖을 속계,
문안을 진계라 부름
2.천왕문
*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문 : 일명 봉황문
* 동쪽에 지국천왕-비파 가짐
* 서쪽에 광목천왕-여의주,새끼줄 가짐
* 남쪽에 증장천왕-보검 가짐
* 북쪽에 다문천왕-보탑을 가짐
* 금강력사(인왕)-절의 어귀나 문 양쪽에 모신 수문장(반나체 모습)
3.해탈문
* 모든 번뇌와 망상을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문
4.불이문
* 중생과 부처, 선과 악, 유와 무, 공과 색 상대적 개념에 의한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불교진리의 불이사상을 나타내는 문
▣ 사찰의 전
대웅전
*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봉안한 불전(금당)
대적광전
*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봉안한 불전(대광명전)-화엄종 주불
* 주불이 아닐 경우는 비로전이라 부름
* 삼존불일 경우
석가모니불(화신)/ 비로자나불(법신)/ 노사나불(응신)
극락전
*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주불전-주불전이 아닐 경우 미타전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의 미타 3부경에서 유래함
약사전
*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불전-만월전으로도 부름
미륵전
* 미륵부처님이나 미륵보살을 모신 불전-용화전으로도 부름
원통전
*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불전-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 부름
지장전
(명부전)
*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염라대왕 등 10왕을 함께 모시면 시왕전
응진전
* 부처님의 제자 16나한을 모신 전각-500나한을 모신 나한전
팔상전
* 부처님의 일대기를 8장면으로 도해한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
영산전
*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도를 모신 전각-영취산 설법모임 그림
칠성전
* 치성전여래를 모신 전각 또는 북두칠성을 부처님화한 전각
산신각
* 산신(주로 호랑이)을 모신 전각-삼성각은 산신,칠성,독성을 모심
각 (주불전-부처님을 모신 불전 : 일명 금당)
▣ 불상의 존칭
석가모니불 * 대웅전의 주불로 봉안
* 응진전, 나한전, 영산전, 팔상전에도 주불로 봉안 됨 * 협시보살로 좌측에 문수보살과 우측에 보현보살 좌측에
관음보살과 우측에 허공장보살 또는 좌측에 관음보살과 우측에 미륵보살로 배치함
비로자나불 * 대일여래부처님으로 법신 또는 진신의 부처님 * 협시보살로 좌측에 문수보살과 우측에 보현보살 배치함
* 삼존불일 경우 좌측-보신 노사나불과 우측-응신 석가모니불 모심
아미타불 * 서방극락 정토세계의 부처님 * 형식적 특징은 수인인데 아미타 정인과 9품인을 하는 것이 원칙
* 협시보살로 좌측에 관음보살과 우측에 대세지보살 또는 지장보살
약사여래불 * 약사유리광여래 또는 대의왕불로도 부름 *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또는 약사 12지신상을 거느림
* 의식주와 무병장수의 깨달음을 주시는 부처님-손에 약합을 든 계인
노사나불 * 삼신불의 한분인 보신불 *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의 공덕으로 나타나신 부처님
미 륵 불 * 메시아로 알려진 미래(석가모니불 열반56억7천만년 이후)의 부처님
* 석가모니부처님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할 부처님
연 등 불 * 정광여래, 정광불-석가모니에게 미래세 성불할 수기를 주신 부처님
▣ 보살의 존칭
관음보살 * 관자재보살 또는 관세음보살로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
* 손에는 감로수의 정병 또는 연꽃을 잡음-대자대비로 중생을 제도함
* 머리의 보관 중앙에는 반드시 아미타불의 화신인 화불을 나타냄
대세지보살 * 아미타부처님의 오른쪽에 위치-지혜의 문으로 중생을 제도함
* 머리의 보관내에 보배병을 나타냄-손에는 연꽃을 들거나 합장 모습
문수보살 * 문수사리보살로 석가모니부처님의 대지혜를 상징하며 협시보살
* 오른손에 지혜의 칼을 쥐거나 푸른 연꽃을 지니고 좌대는 연화대를
이용하거나 청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함
보현보살 * 석가모니부처님의 대행을 상징하며 협시보살로 왼쪽에 위치함
* 연화대 위에서 합장하는 모습으로 손에는 연꽃을 쥐고 있음
*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는데 대해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나타남
지장보살 * 육도윤회에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
* 석가모니부처님이 입멸 후 미륵부처님 출현시까지 중생을 교화함
* 형상은 민머리거나 특수한 가운형 두건을 쓰고 가사를 입고 연꽃을
들고 있으며 바른손에 보배구슬 혹은 석장을 짚은 모습을 나타냄
* 명부를 주재하는 지옥 10왕을 거느림
◈ 부처님의 名呼(명호)
☞부처님께서 갖추신 공덕을 10가지 면으로 존칭한 이름
여 래 * 진리를 몸으로 나타내신 분
응 공 * 세상의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분
정변지 *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신 분
명행족 * 지혜와 행동이 완전하신 분
선 서 * 훌륭한 일을 완성하고 가신 분
세간해 * 세상일을 완전히 깨달으신 분
무상사 * 인간 중에서 더없이 높으신 분
조어장부 * 사람을 다스리는데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분
천인사 *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되시는 분
불세존 *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스승
◈ 부처님의 십대제자
사리불 지혜제일(智慧弟一) 우바리 지계제일(持戒弟一)
목건련 신통제일(神通弟一) 부루나 설법제일(設法弟一)
마하가섭 두타제일(頭陀弟一) 수보리 해공제일(解空弟一)
아나율 천안제일(天眼弟一) 가전연 논의제일(論議弟一)
아 난 다문제일(多聞弟一) 라후라 밀행제일(密行弟一)
◈ 불교의 4대 성지 ◈ 불교의 5대 명절
부처님의 탄생지 카필라국 룸비니 동산 석탄절 음력 4월 8일
부처님의 성도지 마갈타국 부다가야 출가절 음력 2월 8일
최초의 설법지 바라나시 녹야원 성도절 음력12월 8일
부처님의 열반지 쿠(구)시나가라 열반절 음력 2월15일
우란분절 음력 7월15일
잠깐만....?
전통사찰을 참배할 때 : 입구-산문-해탈문(교)-일주문-천왕문-금강문-불이문-탑- 대웅전-각 부속전각 등의 순서
로 참배하는데 큰법당을 제쳐두고
스님 거처나 산신각 혹은 다른 전각과 건물을 찾아 참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아둡시다.
三寶寺刹
(삼보사찰) 1. 佛寶(불보)사찰 - 경남 양산 영축산 통도사
2. 法寶(법보)사찰 -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3. 僧寶(승보)사찰 - 전남 승주 조계산 송광사
부처님 진신사리
5대 적멸보궁 1. 양산 영축산 통도사 2. 정선 태백산 정암사
3. 영월 사자산 법흥사 4. 평창 오대산 상원사
5. 양양 설악산 봉정암
조계종 5대 총림 1. 양산 통도사 영축총림 2. 합천 해인사 해인총림
3. 승주 송광사 조계총림 4. 예산 수덕사 덕숭총림
5. 장성 백양사 고불총림
육법공양 1. 향(해탈향) - 지계 2. 등(반야등) - 지혜
3. 차(감로다) - 보시 4. 꽃(만행화) - 인욕
5. 과일(보리과)-선정 6. 쌀(선열미) - 정진
육바라밀 1. 보시-조건없이 베풀고 2. 지계-어김없이 지키며
3. 인욕-어려움을 참고 4. 정진-끊임없이 노력하며
5. 선정-고요히 생각하여 6. 지혜-수행으로 반야를 득
육도윤회 1. 지옥 2. 아귀 3.축생 4. 아수라 5.인간 6.천상도로
돌고 돌아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함을 말함
사성제(四聖諦) 1. 고성제(苦聖諦) - 모든 존재는 고통스러운 것 -결과
2. 집성제(集聖諦) - 이 고통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원인
3. 멸성제(滅聖諦) - 무명과 갈애를 제거하여 멸한 상태-해탈
4. 도성제(道聖諦) - 멸에 이르기 위한 방법 -수행
팔정도(八正道) * 사성제를 이루기 위한 8가지의 올바른 길(수행방법)
1.正見 2.正思惟 3.正語 4.正業 5.正命 6.正精進 7.正念 8.正定
삼법인(三法印) ※ 一切皆苦(일체개고)가
1. 諸行無常 2. 諸法無我 3. 涅槃寂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삼학(三學) 1. 계 - 불살생 불투도 불음행 불망어 불음주
2. 정 -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법을 닦는 선정
3. 혜 - 사성제를 관하여 번뇌를 끊은 무루의 경지
잠깐만....?
天上天下 唯我獨尊“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의 참 뜻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곧 뭇 생명이며 그 생명체들은 각기 보배로운 불성을
지니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깊은 뜻을 한마디로 압축, 표현된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 석가모니부처님의 팔상성도(八相成道=팔상도) 보는 순서
1.도솔내의상(兜率來儀相) - 도솔천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오심(兜 거둘 두)
2.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룸비니동산에서 마야부인의 몸을 통해 태어나심
3.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생, 노, 병, 사의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
4.유성출가상(諭城出家相) - 한밤중에 카필라밧투성을 떠나 출가수행자가 됨
5.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출가수행자로 히말라야 산속에서 6년간 수도하심
6.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보리수 아래서 마구니의 항복을 받고 우주와 인생의
최고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심
7.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심
8.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쿠시니라의 두 그루 사라나무 아래서 입멸(열반)하심
▣ 보시(布施)
0 보시란 남에게 무엇을 베푸는 것을 말하며, 보시중의 으뜸은 무주상 보시입니다.
0 보시에는 세 가지 형태의 법시(法施), 재시(財施),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1. 법시(法施) - 진리를 모르고 무명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 즉 말씀을 전하는 보시를 말함
2. 재시(財施) -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보시의 개념인 물질적인 것을
남에게 베푸는 보시를 말함
3.무외시(無畏施) -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불안이나 공포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함
▣ 무재칠시(無財七施)
0 물질(재물)을 가지지 않고도 7가지의 보시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을 말 합니다.
1. 화안시(和顔施) -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對)함
2.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 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을 대(對)함
3. 언사시(言辭施) -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을 대(對)함
4. 신시(身施) - 내 몸을 수고롭게 하여 남들을 도움(助力)
5. 심시(心施) - 착하고 어진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對)함
6. 상좌시(床座施) - 다른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자리를 양보함
7. 방사시(房舍施) -잠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방을 내어주고 친절히 대함
잠깐만....?
불단 앞에 나아가 향을 올릴 때는 반배한 후 오른손으로 향을 촛불에 붙인 다음 왼손
을 받쳐 이마 위로 약간 올렸다가 향로에 꽂고 반배한 다음 물러나 예배를 드립니다.
▣ 불교의 맥을 이은 계보
본사 석가모니불(本師 釋迦牟尼佛)
1대 마하가섭(摩詞迦葉) 26대 불여밀다(不如蜜多) 50대 응암담화(應庵曇華)
2대 아난타(阿難陀) 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 51대 밀암감찬(蜜庵減儏)
3대 상나화수(尙那和修) 28대 달마(達磨) 52대 파암조선(破庵祖先)
4대 우바굽다(優婆毬多) 初祖↔28대까지 인도스님 53대 무준원조(無準圓照)
5대 제다가(提多迦) 29대 二祖 慧可(혜가) 54대 설암혜랑(雪岩慧郞)
6대 미차가(彌遮迦) 30대 三祖 僧燦(승찬) 55대 급암종신(及庵宗信)
7대 바수밀다(婆修蜜多) 31대 四祖 道信(도신) 56대 석옥청기(石屋淸琪)
8대 불타난제(佛陀難提) 32대 五祖 弘忍(홍인) 以上 中國支那스님
9대 불타밀다(佛陀蜜多) 33대 六祖 慧能(혜능)
-傳法終- 57대 태고보우(太古普愚)
10대 협(脇) 34대 남악회양(南嶽懷讓)
自稱傳愛傳授 58대 환암혼수(幻庵混修)
11대 부나야사(富那夜奢) 35대 마조도일(馬祖道一) 59대 귀곡각운(龜谷覺雲)
12대 마명(馬鳴) 36대 백장회해(百丈懷海) 60대 벽계정심(碧溪正心)
13대 가비마라(迦毘滅) 37대 황벽희윤(黃檗希運) 61대 벽송지암(碧送智岩)
14대 용수(龍樹) 38대 임제의현(臨濟義玄) 62대 부용영관(芙蓉靈觀)
15대 가나제바(迦那提婆) 39대 흥화존장(興化存獎) 63대 청허휴정(淸虛休靜)
16대 나후라다(羅喉羅多) 40대 남원도옹(南阮道顒) 64대 편양언기(鞭羊彦機)
17대 승가난제(僧迦難提) 41대 풍혈연소(風穴延沼) 이하는 사실상 맥계가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맥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18대 가야사다(伽耶舍多) 42대 수산성념(首山省念)
19대 구마라다(鳩滅多) 43대 남양선소(南陽善昭)
20대 사야다(奢夜多) 44대 자명초원(慈明楚圓)
21대 바수반두(婆修盤頭) 45대 양기방회(揚岐方會)
22대 마라나(滅那) 46대 자운수단(自雲守端)
23대 학륵나(鶴勒那) 47대 오조법연(五祖法演)
24대 사자(師子) 48대 원오극근(園悟克勤)
25대 가사사다(伽舍斯多) 49대 호구소융(虎丘紹隆)
◈ 고승(高僧)의 호칭
호 칭 의 미
祖師(조사) * 석가모니부처님의 정통 법맥을 이어 받은 덕이 높은 스님
禪師(선사) * 오랫동안 선을 수행하여 선의 이치에 통달한 분
宗師(종사) * 한 종파를 일으켜 세운 학식이 깊은 스님
律師(율사) * 계율을 전문적으로 연구했거나 계행이 철저한 스님
法師(법사) * 경전에 통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는 스님
和尙(화상) * 평생 가르침을 받는 은사스님
師門(사문) * 인도말로 쉬라마나 즉, 출가수행자
大德(대덕) * 덕이 높은 큰 스님
大師(대사) * 큰 스님
국사, 왕사, 제사 * 한나라의 정신적 지도자의 명칭으로 황제나 국왕이 명한 직책
◈ 사찰에서의 스님의 호칭
호 칭 의 미
회주(會主)스님 *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 하나의 모임을 이끌러 가는 큰 어른
법주(法主)스님 * 불법을 잘 알아서 불사나 회상의 높은 어른으로 추대된 스님
조실(祖室)스님 * 선으로 일가를 이루어서 한 파의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진 스님
* 원래는 조사의 내실을 의미하며, 스님이 주요사찰에 주재함을 의미
방장(方丈)스님 * 총림의 조실스님/원래는 사방 1장인 방으로 선사의 주지가 쓰는 거실
도감(都監)스님 *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일이나 그 사람을 말함
부전(副殿)스님 * 불당을 맡아 시봉하는 소임을 말하며, 예식 불공 등의 의식집전 스님
지전(知殿)스님 * 殿主(전주)스님-불전에 대한 청결, 향, 등 등의 일체를 맡은 스님
* 대웅전이나 다른 법당을 맡은 스님을 노전스님이라 함
주지(住持)스님 * 사찰의 일을 주관하는 스님-사찰의 전권을 행사하는 총책임자 스님
원주(院主)스님 * 사찰의 사무를 주재하는 스님-監寺, 監阮으로 살림살이를 맡는 스님
강사(講師)스님 * 강원에서 경론(經論)을 가르치는 스님(講伯스님)
칠직(七職)스님 * 7가지 직책의 스님-포교,기획,호법,총무,재무,교무,사회 각 국장스님
◈ 불교교단의 구성원
명 칭 설 명
비 구 * 출가한 성년의 남자스님(인도어 비크슈)-250계의 구족계 수지
비구니 * 출가한 성년의 여자스님(인도어 비크슈니)-348계의 구족계 수지
사 미 *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지 않은 20세 미만의 남자-10계를 지님
사미니 *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지 않은 18세 미만의 여자-10계를 지님
식차마나 * 18세-20세 사이의 여성출가자(정학녀)-6법계를 지님
우바새 * 재가의 남자신자(청신사)-인도어 우파사카
우바이 * 재가의 여자신자(청신녀)-인도어 우피시카
잠깐만....?
사대부중 -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합친 모두를 말함
◈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 경은 뜻을 잘 알고 열심히 염불, 염송, 독송을 함으로서 공덕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
(般若心經) - 정식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600권의 대품반야경의 반야사상을 260자로 압축하여 표현한 경
- 공(空)의 이치와 도리를 설한 가르침
즉, 세상 만물은 인연 따라 발생하는 연기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사물들 자체로는 홀로 서지도 못하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이치 그러므로
공의 도리를 깨달아야 함을 설함
금강경
(金剛經) - 원래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
- 선종에서 독송하는 경
- 금강석 같이 견실한 지혜의 배를 타고 생사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도달하기 위한 가르침
-집착이 없는 가르침,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하라는 즉,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
법화경
(法華經) - 정식 명칭은 묘법연화경
-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경(대승과 소승불교의 갈등을 교리적으로 통일
- 성문, 연각, 보살이 결국에는 부처님의 품에서는 일불승(一佛乘)으로
귀착 된다는 가르침
- 지의 천태대사의 중국 천태종을 창종의 바탕이 된 경
화엄경
(華嚴經) - 정식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 (대승경전의 왕이라 할만한 경)
- 40화엄(보현행원품), 60화엄, 80화엄 3가지가 있음
- 수행과 서원의 가르침으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타행의
실천을 통해서 세상의 실상을 실현하는 것을 설함
-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210자의 법성게를 가지고 도표로 만듬
열반경
(涅槃經) - 소승열반경 : 부처님의 열반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경과를 서술한 경
- 대승열반경 : 부처님의 열반이 갖는 의미를 밝힌 경 (일명 열반경)
- 대승열반경의 3가지 사상
첫째-부처님은 법신 그 자체로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설함
둘째-열반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설함
셋째-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설함
즉, 집착을 경계하라는 중도의 가르침
유마경
(維摩經) - 원명은 유마힐소설경 또는 불가사의해탈경
- 유마힐거사(유마거사)가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한 경
- 보통의 생활 그대로 불교의 진수인 공의 도리를 체득하여 그것을 실천한
내용으로 상대와 차별을 넘어선 절대평등의 경지인 불이에 대하여 무언
설법을 함
천수경
(千手經) - 원명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
- 84귀절로 된 문장
- 천수천안관세음보살께서 대자대비 심으로 모든 중생이 안락을 얻고 모든
중생이 구하는 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부처님의 하락을 얻어 설한 경
아함경
(阿含經) -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으로 구분
- 모든 경전의 사상의 뿌리로 불리는 경
-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의 초기 교설
- 보시, 인욕, 바른 지혜, 바른 제도, 바른 도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가르침을 설함
사십이장경 - 아함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 42가지 덕목을 발췌하여 엮은 경전
아미타경 - 정토 3부경중의 하나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상주하는 아미타불을 신앙하여 선근공덕을 닦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내용 중심
승만경 - 원명은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대승불교의 특색인 재가주의
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경전(승만부인은 아유타국 왕비)
능엄경 - 원명은 대불청여래밀인수증요의재보살만행수능엄경/대불정수능엄경
- 수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경전
능가경 -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부처님을 만나는 길의 가르침
- 名, 相, 分別 등의 5법과 현상계의 자성을 3가지 성질로 구분하여
변계(邊計), 의타(依他), 원성(圓成)의 3성과 8식(八識)에 관하여 설함
원각경 - 원명은 대방광원각수의전요의경
- 문수,보현 등 12만명의 보살이 차례로 등장하여 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함
육조단경 - 원명은 육조법보단경/법보단경/단경
- 중국 선종의 6조이신 혜능선사께서 조계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한 것을
기록한 자서전적인 경전
지장경 - 원명은 지장보살본원경
- 대승대진지장십륜경, 점찰선악업보경과 함께 지장 3부경의 하나
- 지장보살의 사상과 그 원력 및 중생의 업보를 점쳐 지장보살에게 참회
함으로써 모든 업장을 소멸케 하는 실천법을 설함
법구경 - 진리의 말씀을 담은 짧은 구절의 가르침(일종의 불교시집)
불유교경 -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설법
본생담(경) -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
불소행찬경 -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에 관한 장편 대서사시
- 불교시인이라 일컫는 마명스님이 서술 함
* 이 밖에 수행과 서원 및 실천에 관한 가르침으로 2,900여종의 경전이 있습니다.
◈ 불교 경전의 분류
내용의 구분 경 전 의 종 류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 법구경, 자설경, 여시어경, 장로(니)게경
선생경, 기세인본경, 대반열반경
인연 ․ 설화 경전 본생경, 불본행집경, 출요경, 인과경, 비유경,
현우경, 백유경, 육도집경
삼매 ․ 수행 경전 안반수의경, 수행도지경, 반주삼매경, 관불삼매경,
금강삼매경, 능가경, 해심밀경
반야 경전 반야심경, 금강경, 팔천송반야경, 문수반야경,
대품반야경,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방등 경전 대집경, 대보적경, 대방등여래장경, 유마경, 승만경,
원각경, 능엄경
법화 ․ 화엄 경전 법화경, 대승열반경, 십지경, 화엄경
밀교 경전 대일경, 금강정경, 유희야경, 천수경
계율 경전 우바새계경, 범망경, 보살영락본업경, 보살지지경
신앙 ․ 찬탄 경전 정토삼부경, 미륵삼부경, 지장보살본원경, 약사여래본원경,
비화경, 금광명경, 인왕반야경
교계(敎誡) 경전 유교경, 사십이장경, 부모은중경
◈ 부처님의 인상(印相)
부처님이나 보살의 손가락의 특정한 모습을 印相이라 합니다.
인상명칭 취하는 모양
선정인(禪定印) * 결가부좌일 때 취하는 수인 입니다.
*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곱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
을 위로해서 겹쳐놓되 두 엄지손가락은 서로 맞댐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 * 항마인, 촉지인, 항마촉지인으로 석가모니만이 취하는 수인
* 선정한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땅에 댐
전법륜인
(轉法輪印) * 최초로 설법할 때 취한 손 모양을 말함
* 왼손의 엄지와 검지의 끝을 서로대고 장지, 약지, 소지는 편다,
오른손도 같이 하고 왼쪽 손바닥은 위로하고 약지와 소지의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을 향한 모양 임
시무외인
(施無畏印) * 이포외인(離怖畏印) 이라고도 함. 서계신 부처님이 주로 취함
*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위로 뻗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모양 임
여원인(與願印) * 시여인, 시원인, 여인이라고도 함. 서계신 부처님이 주로 취함
* 손의 모습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다섯 손가락을 펴서 밑으로
향하고 손 전체를 늘어뜨리는 모양 임(시무외인과 반대 모습)
지권인(智拳印) * 대일여래불(비로자나불)이 결하는 수인 입니다.
* 좌우 두손 모두 엄지를 속에 넣고 주먹을 쥔 다음에 온손을 가슴까지
들고 검지를 펴서 세운 다음 오른손의 소지로서 편 왼손의 첫째 마디를
잡는다. 주먹 속에서는 오른손 엄지 긑과 왼손 감지 끝을 서로 댄다
미타정인
(彌陀定印) * 아미타여래인의 수인으로 묘관찰지정인이라고도 함
* 선정인과 같은 모습에서 검지를 세워서 엄지와 서로 끝을 마주 대어
검지의 등이 사로 닿게 하는 모양으로 미타정인에는 9품(九品)이 있음
◈ 사찰의 법구
※ 종을 매단 곳을 종루 또는 종각, 북을 매단 곳을 고루 또는 고각 이라한다.
명 칭 의 미 와 내 용
범종(梵鐘) * 절에서 사용하는 종으로 지옥의 중생을 깨우기 위해 울린다고 함
* 조석예경이나 기타 법요행사 때 대중에 알리기 위해 사용됨
법고(法鼓) * 조석예불 때와 의식을 치를 때 치는 북
*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나가 참다운 이치를 전하여 줌을 뜻함
* 짐승세계의 중생을 깨우기 위해 울린다고 함
목어(木魚) * 나무를 잉어모양으로 만들어 속을 비게 파낸 것으로 “방”이라 함
* 조석예불 때와 경전을 읽을 때 두드린다고 함
* 물속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을 위해 울린다고 함
운판(雲版) * 청동으로 된 판을 구름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함
*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모든 것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울림
* 참선을 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끼니때를 알리기 위해서 울리기도 함
목탁(木鐸) * 목어에서 발전된 둥근 모양으로 염불, 독경, 예배할 때 두드림
*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으로 사용됨
다기(茶器) * 부처님 앞에 청정수를 올리는 그릇(참고 : 아침은 차, 저녁은 향)
염주(念珠0 * 부처님을 생각하기 위한 구슬로 염불의 도구 임
* 부처님께 예배할 때 손에 걸거나 돌리며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며
수를 헤아려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기 위함
* 백팔염주, 천염주 등이 있고 7개,16개,21개의 손목용 단주가 있음
죽비(竹篦) * 대나무를 두 쪽으로 갈라지게 만든 것으로 손바닥을 쳐서 소리를 냄
* 참선의 입정과 출정을 알리기 위해 사용함 - 각각 3번씩 침
* 장군죽비는 대형 죽비로 대중이 모여 참선할 때 졸음을 쫓는 도구임
요령(搖鈴) * 의식을 치를 때 오른손으로 잡고 흔드는 놋쇠로 만든 물건
* 의식에서 요령을 잡은 사람이 법주, 목탁을 잡은 사람이 바라지 임
* 요령사용법에는 일자요령, 심자(心字)요령, 상하요령이 있음
◈ 절의 또 다른 이름
0 0 사(寺) * 원래는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관사”였으나 스님이 머물면서 유래
도량(道場) * 불법의 도를 닦는 곳 이란 뜻 - 한문으로는 도장(道場)을 음역 함
가람(伽籃) *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 - 범어 한역 “승가람마”의 약자
정사(精舍) *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이 계시는 곳 - 범어 “비하라=寺=머무는 집”
선원(禪院) * 스님들께서 참선 수행하시는 곳
사찰(寺刹) * 법당 앞에 세우는 당간(幢竿)을 찰(刹)이라고 하는데서 유래 함
사원(寺院) * 담으로 둘러진 집과 회랑이 있는 집으로 당나라 때 불교건축물에 씀
암자(庵子) * 큰절에 딸린 작은 절이라는 뜻 - 주로 큰절 안에 있음
산림(山林) * 산과 나무가 있는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이라는 뜻
총림(叢林) * 선원, 율원, 강원, 염불원을 모두 갖춘 종합도량 - 종합대학 격임
아란야(阿蘭若) *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수행하기 적당한 한적한 숲”이란 뜻
포교당(布敎堂) * 포교원이라고 함 - 불교의 포교를 전문으로 하는 곳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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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齋)의 의미
재(齋)는 범어 uposadha의 번역어도
재계(齋戒)와 재회(齋會)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재계는 몸과 마음을 청정히 가지고 나태해진 마음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8가지 계 즉 팔재계(八齋戒)나 8번째인
“정오를 지나면 먹지 않는다”는 계를 지목해 재계라고도 합니다.
시식(施食)은 불사법요(佛事法要)에 음식을 공양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식을 동반하는 법회를 재회라 합니다.
『능엄경』에 의하면,
제사를 의미하는 제(祭)가 죽은 자인 신(神)에게 음식을 올리는 것으로
귀신을 모시는 것인데 반해 재(齋)는 재공(齋供)
즉 반승(飯僧)의 뜻으로 마음을 닦는 절차를 의미합니다.
즉 재는 몸·입·마음으로 짓는 삼업(三業)을 청정히 해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죽은 영혼이나 산 사람에게 그 공덕을 널리 회향해 베풀어 줌으로써 시방세계에
두루하는 모든 제불보살과 천룡팔부 및 선신(善神)들의 가피를 입도록 하는
의식[齋會]을 말합니다.
때로는 절에서 하는 일체의 불사(佛事)를 통털어서 재라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재는 재계와 재회의 두 측면을 포괄하는 말로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
성대한 불공(佛供), 죽은 이의 천도를 위한 법회를 통털어 재라 하며 그 가운데
재계를 지킬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재의 종류로는 사십구재·백일재·천도재·태아령재.영산재·수륙재·예수재 등이 있습니다.
천도재와 49재의 의미 및 절차
천도를 위한 재로는 49재가 일반적이지만 백일째 되는 날 백재를 지내거나
1주기, 3주기에 천도재를 지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영산재·수륙재 등이 있습니다.
천도재는 주로 49재 외에 별도로 영가를 위한 재를 올리는 것입니다.
49재를 미처 올려주지 못했거나 49재를 지내고 난 뒤라도 무엇인가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경우,
다른 사정이 있을때 영가를 천도해야 할 필요를 느낄 때 올리는 재입니다.
『지장경』등의 경전에 의하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로 바로 왕생하는
아주 선한 사람이나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극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중간적 존재인 중음신(中陰身)으로 49일 동안 떠돌게 된다고 합니다.
영가(靈駕)가 돌아가신 날로부터 7일마다 한번씩 7번 재를 올리는데
그 일곱 번째 재를 막재, 칠칠재 또는 사십구재(四十九齋)라고 합니다.
보통 칠일마다 올리는 재는 간소히 하고
마지막 사십구일이 되는 날 올리는 재는 비교적 성대히 합니다.
이렇게 칠일 만에 한번씩 재를 올리는 것은 7일을 일주기로 하여
7주기 동안 유명계(幽冥界)의 시왕(十王)이 죽은 이를 심판한다는 시왕신앙에서 유래되었습니다.
49일이 지나면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이 기간동안에 유가족이 영가를 위해 공덕을 지으면
영가가 하늘세계나 인간세계 등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영가가 좋은 곳으로 잘 건너가도록 인도해 주는 것을 영가천도(靈駕薦度)라 합니다.
이 49재는 『법화경』·『지장경』·『아미타경』·『약사여래경』등의 사상에 근거한
우리나라 불교의 고유 의식(儀式)입니다.
영가를 위한 재를 올릴 때 사용하는 의식작법으로는
관음시식·화엄시식과 종사열반작법·상용영반 등이 있는데
일반 불자들의 49재는 관음시식(觀音施食)으로,
스님들의 경우는 종사영반(宗師靈飯)으로 거행합니다.
청정하게 수행해 깨달으신 스님의 경우는 이미 극락왕생하여 굳이 천도할 필요가 없겠지만
존경과 공양의 뜻에서 독경과 염불을 하며 중생교화를 위해
다시 사바세계에 오시라고 청하는 것이 종사영반입니다..
재를 올리는 절차는 영가를 목욕재계시키는 관욕,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고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호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불공의식인 상단불공,
큰스님을 초청해 영가법문을 듣고 재를 올리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관욕(灌浴) 및 대령(對靈)은 영가가 다생억겁에 지은 죄업을 씻어주는 의식으로
단을 따로 만들어 병풍으로 가리고 세수 대야에 물을 떠놓고
수건과 옷 등을 준비하여 영가가 목욕재계하고, 새 옷을 갈아입게 합니다.
제단 위에 위패를 만들어 모신 후 영가를 향해 일체의 법문을 설합니다.
이 물은 죄업을 씻어주는 감로수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음의 지장청(地藏請)은 지장보살을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죽은 혼령이 지옥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 드리는 것입니다.
관음시식(觀音施食)은 관음보살님의 법력으로 영가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천도가 되는 원리
49재를 비롯한 천도재는 단지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 아니라
영가에게 부처님의 법을 들려주는 의식이므로 영가를 인도해
스스로 생전의 죄업을 참회하도록 권하고 법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
수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결국 영가 자신이 업장(業障)을 소멸함으로써 죄업의 과보를 면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유가족이 영가를 위해 재를 지내거나 선업을 지으면 이것이 죽은 이의 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유가족도 재를 통해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고
재계를 지키게 됨으로써 업장을 소멸하고 공덕을 짓게 됩니다.
『지장경』에도
죽은 이를 위해 재를 지내면 그 공덕의 7분의 1은 영가에게,
7분의 6은 재를 지내는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가족은 천도재를 지내는 동안 팔재계를 지키고 삼업을 청정히 하고
영가가 극락왕생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경건하게 지내도록 합니다.
이처럼 영가를 위해 재를 지내는 것은
불법을 듣게 해서 영가에게 마음 닦을 기회를 주고
유가족이 불보살과 승려 및 대중에게 음식 등을 회향함으로써
영가를 위한 공덕을 쌓아주는 것입니다.
바다에 던지면 가라앉을 바위도 배에 실으면 가라앉지 않는 것과 같이,
유가족이 영가를 위해 공덕을 짓고 죄업중생이 재(齋)를 통해 참회하고
간절히 기원하면 죄업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구제하고자
큰 서원을 세우신 불보살님의 원력(願力)과 감응하게 되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천도재의 이유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님들이 살아 생전에 업이 많아서
그 영혼이 지옥ㆍ축생ㆍ아귀의 三惡道에 빠졌다든가 구천세계에서 헤맨다든지,
혹은 시신을 안장한 조상의 묘터가 안정되지 못해서 살풍이 몰아치고,
물과 습기로 썩은 땅에 조상을 매장해 놓았을 경우 유골이 썩어가고 고통 받게 되어
부모와 조상 영의 나쁜 氣가 후손에 전달되어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ㆍ육체적 이상을 겪게 됩니다.
즉 살아 생전에 인연지은 가족이나 자손ㆍ친척에게 感應하고 交流되어서
그 가족들은 가정불화의 파란, 사업부진, 사업실패, 교통사고,
가족의 사망, 불치병, 난치병 등의 불화가 끊임 없이 일어나고,
매사에 되는 일이라곤 없게 됩니다.
특히
부부생활이나 남녀관계에서 저지른 낙태아와 자연유산아,
사산아들의 영혼들은 몇 겹이나 몇 생을 거쳐 겨우 다시 생을 얻어
어머니의 태를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고자 했던 것을 죽여 버린 결과가 되므로
부모형제에 대한 원한이 깊어 구천 세계에 떠돌며 평생 이런 고통에서 벗어 나기 위해서는,
조상 영, 부모형제의 영, 친인척등의 영, 낙태아 영들의 위패를 작성하여 안치시키고
스님의 기도법력과 신도의 정성으로 구천을 떠도는 모든 영혼들을
지장보살님의 인도로 佛法과 인연을 맺어,
지장경 안에서 스스로 法文을 깨달아 괴로움와 미움을 버리고
즐거움으로 나아가 밝은 세계에 안주하도록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천도재와 49재에 읽으면 좋은 경전
◐ 금강경
금강경은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해공제일,
즉 공(空)사상의 으뜸인 수보리 존자와 부처님의 대화로 이루어진 경전입니다.
금강경의 주된 내용은 한마디로 공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땅이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즉 일체의 것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메시지가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금강경 사구게에 보면 ”모든 모습을 모습 아닌 것으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는 경구가 나오는데
이는 중유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환영으로부터 영가가 자유로워 질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 천수경
천수경은 제불보살 모두를 칭송하면서 그 공덕으로 집착을 여의고
마침내 부처가 되기를 서원하고 다짐하는 경전입니다.
천수경은 그 내용이 구체적이라 다른 경전에 비해 독경할 때 그 내용이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영가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홀로 가기엔 두렵고 막막한 저승길에 듣는 천수경은
제불보살님에 의지해 반야선을 탄 듯 마음이 편해질 것입니다.
◐ 반야심경
반야심경은 대반야경 600권의 사상을 260자로 짧게 압축해
부처님 가르침의 진수만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육신이나 감각에 구애되지 말고
또 그 모든 것이 허구임을 바로 알아 무상정각(최고의 깨달음)을 얻도록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핵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자라면 누구나 수지독송하면서 피안을 향하는
수행의 걸음을 늦추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 무상계
49재에 빠지지 않고 항상 독송하는 것으로는 무상계가 있습니다.
무상계는 영가에게 무상의 법을 설하는 내용으로 49재 뿐 아니라
모든 불교의례 과정에서 항상 읽혀지고 있습니다.
육신이 어떻게 흙으로 돌아가며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소멸되어 가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 줌으로써 영가가 비로서 무상의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에 들 수 있도록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 무상계란 열반으로 들어가는 요기한 문이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자비의 배이니라.”라는 첫 구절이 말해주듯이
무상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을 이루는 길임을
영가와 남아 있는 우리 모두가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 아미타경
아미타경은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를 관장하시면서
법을 설하고 계신 아마타부처님의 대원력과 위신력을 설해 놓은 경전입니다.
고통도 미움도 괴로움도 없는 극락정토는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들에겐 그립고 또 그리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아미타경을 읽어보면 극락세계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중생구제의 원력이 크므로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생각하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
임종자에게나 영가에게 아미타불을 염송하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정리하면서 일어나는 복잡한 마음을
오로지 아미타불게 의지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극락왕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이며 위신력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갑작스럽게 아미타불을 염송한다고 입에서 술술 나오지 않습니다.
매순간 틈틈이 계속해서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염원해야 삼매에 들듯이
아미타불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영가의 가족과 친지들은 영가가 다른 환영에 시달리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서 들려주어야 합니다.
◐ 지장경
지장경은 대원본존 지장보살님의 원력을 설해 놓은 경전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일찍이 정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 되기를 마다하신 분입니다.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고통 받는 중생들 곁에 있겠다는
대원력을 펼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장보살님께 귀의 참회하면 그 동안 쌓아온 크고 작은 모든 업이
지장보살님의 원력으로 소멸된다고 합니다.
단 한 번이라도 지장보살님을 일념으로 염하면
업장이 소멸되어 더 이상 업에 끄달이지 않습니다.
업이 두터운 영가는 중음신으로 떠돌면서 무섭고 험악한 환영 때문에
큰 괴로움을 겪게 되는데 이럴 때 지장보살님께 의지하게 해 준다면
영가의 업장은 소멸되어 바른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법성게를 비롯해 법화경, 원각경등 다른 대승경전도 영가에게 들려주면 좋습니다.
그리고 삼칠일 동안 영가를 위해서
광명진언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을
외우는 것도 좋은데, 광명진언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힘을
영가가 좋은 인연을 맺도록 하는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합니다.
49재와 천도재를 맞아 이와 같은 경전을 읽어주는 것은 영가의 바른 천도를 위해서 입니다.
어느 경전이 좋다 나쁘다 할 것 없이 모두 영가에게는 법등의 역할을 해줍니다.
영가가 생전에 특별히 가까이 했던 경전이 있다면 그 경전을 읽어주면 더욱 좋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위의 경전을 사경(손수 베껴씀)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법보시를 한다면 그 공덕이 수승할 것입니다.
불보살님을 닮는 마음으로
경전을 보면 수많은 불보살님이 등장합니다.
깨달음을 가르쳐 주시는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자비의 손길을 펴는 관세음보살님과 중생구제의 대원력을 세우신 지장보살님 등등,
이렇게 저마다 다른 손길로 다른 음성으로 그 모습을 보이시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타정신입니다.
남을 위하는 마음, 남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자비를 바탕으로 제불보살님들은 수많은 원력을 세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수 많은 중생들을 정토세계로 이끌까,
어떻게 하면 수 많은 중생들을 고통 없는 마음을 가지게 할까,
오로지 중생들의 눈빛과 마음을 헤아리는 데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불교에 귀의 하였다면 우리는 이러한 이타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나를 비우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자비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천도재는 그러한 행보의 하나입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 더 이상 내게 득이 될 것도 해가 될것고 없는 사람,
그의 열반과 극락왕생을 위해 일념으로 기도정진하는 것이 천도재의 참뜻입니다.
천도재를 올리는 동안만은 부처님을 닮는 마음으로 아니 부처님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영가는 반드시 좋은 인연으로 새로운 생을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가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천도재를 올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마음가짐입니다.
건성으로 하거나 아니면 슬픔에 젖어 울며 불며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극락왕생을 염원해야 하고 진심으로 불법을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가는 생각을 결코 돌릴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생각을 돌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영가는
우리들보다 의식이 무려 아홉 배나 밝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진심이 아닌
건성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영가는 다 알 수 있습니다.
영가는 입으로 외는 소리가 아닌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진심으로 영가의 해탈과 극락왕생을 염원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영가가 감응을 받고 한생각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윤회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고
천도재의 중요성을 바르게 인식하여만 합니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르는 이유 (0) | 2020.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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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알아야 할 불자의 기초 지식 (0) | 2020.04.18 |
불자의 기초 지식 (0) | 2020.04.18 |
법당의 이름과 여러 부처님, 보살님들 (0) | 2020.04.18 |
불교에서의 28 하늘 [ 28 天 ] (0) | 2020.04.18 |
▣ 사찰의 문
1.일주문 * 절 입구에 양쪽 하나씩의 기둥으로 세워진 건물
* 일주문을 경계로
문밖을 속계,
문안을 진계라 부름
2.천왕문
*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문 : 일명 봉황문
* 동쪽에 지국천왕-비파 가짐
* 서쪽에 광목천왕-여의주,새끼줄 가짐
* 남쪽에 증장천왕-보검 가짐
* 북쪽에 다문천왕-보탑을 가짐
* 금강력사(인왕)-절의 어귀나 문 양쪽에 모신 수문장(반나체 모습)
3.해탈문
* 모든 번뇌와 망상을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문
4.불이문
* 중생과 부처, 선과 악, 유와 무, 공과 색 상대적 개념에 의한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불교진리의 불이사상을 나타내는 문
▣ 사찰의 전
대웅전
*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봉안한 불전(금당)
대적광전
*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봉안한 불전(대광명전)-화엄종 주불
* 주불이 아닐 경우는 비로전이라 부름
* 삼존불일 경우
석가모니불(화신)/ 비로자나불(법신)/ 노사나불(응신)
극락전
*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주불전-주불전이 아닐 경우 미타전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의 미타 3부경에서 유래함
약사전
*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불전-만월전으로도 부름
미륵전
* 미륵부처님이나 미륵보살을 모신 불전-용화전으로도 부름
원통전
*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불전-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 부름
지장전
(명부전)
*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염라대왕 등 10왕을 함께 모시면 시왕전
응진전
* 부처님의 제자 16나한을 모신 전각-500나한을 모신 나한전
팔상전
* 부처님의 일대기를 8장면으로 도해한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
영산전
*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도를 모신 전각-영취산 설법모임 그림
칠성전
* 치성전여래를 모신 전각 또는 북두칠성을 부처님화한 전각
산신각
* 산신(주로 호랑이)을 모신 전각-삼성각은 산신,칠성,독성을 모심
각 (주불전-부처님을 모신 불전 : 일명 금당)
▣ 불상의 존칭
석가모니불 * 대웅전의 주불로 봉안
* 응진전, 나한전, 영산전, 팔상전에도 주불로 봉안 됨 * 협시보살로 좌측에 문수보살과 우측에 보현보살 좌측에
관음보살과 우측에 허공장보살 또는 좌측에 관음보살과 우측에 미륵보살로 배치함
비로자나불 * 대일여래부처님으로 법신 또는 진신의 부처님 * 협시보살로 좌측에 문수보살과 우측에 보현보살 배치함
* 삼존불일 경우 좌측-보신 노사나불과 우측-응신 석가모니불 모심
아미타불 * 서방극락 정토세계의 부처님 * 형식적 특징은 수인인데 아미타 정인과 9품인을 하는 것이 원칙
* 협시보살로 좌측에 관음보살과 우측에 대세지보살 또는 지장보살
약사여래불 * 약사유리광여래 또는 대의왕불로도 부름 *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또는 약사 12지신상을 거느림
* 의식주와 무병장수의 깨달음을 주시는 부처님-손에 약합을 든 계인
노사나불 * 삼신불의 한분인 보신불 *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의 공덕으로 나타나신 부처님
미 륵 불 * 메시아로 알려진 미래(석가모니불 열반56억7천만년 이후)의 부처님
* 석가모니부처님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할 부처님
연 등 불 * 정광여래, 정광불-석가모니에게 미래세 성불할 수기를 주신 부처님
▣ 보살의 존칭
관음보살 * 관자재보살 또는 관세음보살로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
* 손에는 감로수의 정병 또는 연꽃을 잡음-대자대비로 중생을 제도함
* 머리의 보관 중앙에는 반드시 아미타불의 화신인 화불을 나타냄
대세지보살 * 아미타부처님의 오른쪽에 위치-지혜의 문으로 중생을 제도함
* 머리의 보관내에 보배병을 나타냄-손에는 연꽃을 들거나 합장 모습
문수보살 * 문수사리보살로 석가모니부처님의 대지혜를 상징하며 협시보살
* 오른손에 지혜의 칼을 쥐거나 푸른 연꽃을 지니고 좌대는 연화대를
이용하거나 청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함
보현보살 * 석가모니부처님의 대행을 상징하며 협시보살로 왼쪽에 위치함
* 연화대 위에서 합장하는 모습으로 손에는 연꽃을 쥐고 있음
*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는데 대해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나타남
지장보살 * 육도윤회에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
* 석가모니부처님이 입멸 후 미륵부처님 출현시까지 중생을 교화함
* 형상은 민머리거나 특수한 가운형 두건을 쓰고 가사를 입고 연꽃을
들고 있으며 바른손에 보배구슬 혹은 석장을 짚은 모습을 나타냄
* 명부를 주재하는 지옥 10왕을 거느림
◈ 부처님의 名呼(명호)
☞부처님께서 갖추신 공덕을 10가지 면으로 존칭한 이름
여 래 * 진리를 몸으로 나타내신 분
응 공 * 세상의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분
정변지 *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신 분
명행족 * 지혜와 행동이 완전하신 분
선 서 * 훌륭한 일을 완성하고 가신 분
세간해 * 세상일을 완전히 깨달으신 분
무상사 * 인간 중에서 더없이 높으신 분
조어장부 * 사람을 다스리는데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분
천인사 *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되시는 분
불세존 *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스승
◈ 부처님의 십대제자
사리불 지혜제일(智慧弟一) 우바리 지계제일(持戒弟一)
목건련 신통제일(神通弟一) 부루나 설법제일(設法弟一)
마하가섭 두타제일(頭陀弟一) 수보리 해공제일(解空弟一)
아나율 천안제일(天眼弟一) 가전연 논의제일(論議弟一)
아 난 다문제일(多聞弟一) 라후라 밀행제일(密行弟一)
◈ 불교의 4대 성지 ◈ 불교의 5대 명절
부처님의 탄생지 카필라국 룸비니 동산 석탄절 음력 4월 8일
부처님의 성도지 마갈타국 부다가야 출가절 음력 2월 8일
최초의 설법지 바라나시 녹야원 성도절 음력12월 8일
부처님의 열반지 쿠(구)시나가라 열반절 음력 2월15일
우란분절 음력 7월15일
잠깐만....?
전통사찰을 참배할 때 : 입구-산문-해탈문(교)-일주문-천왕문-금강문-불이문-탑- 대웅전-각 부속전각 등의 순서
로 참배하는데 큰법당을 제쳐두고
스님 거처나 산신각 혹은 다른 전각과 건물을 찾아 참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아둡시다.
三寶寺刹
(삼보사찰) 1. 佛寶(불보)사찰 - 경남 양산 영축산 통도사
2. 法寶(법보)사찰 -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3. 僧寶(승보)사찰 - 전남 승주 조계산 송광사
부처님 진신사리
5대 적멸보궁 1. 양산 영축산 통도사 2. 정선 태백산 정암사
3. 영월 사자산 법흥사 4. 평창 오대산 상원사
5. 양양 설악산 봉정암
조계종 5대 총림 1. 양산 통도사 영축총림 2. 합천 해인사 해인총림
3. 승주 송광사 조계총림 4. 예산 수덕사 덕숭총림
5. 장성 백양사 고불총림
육법공양 1. 향(해탈향) - 지계 2. 등(반야등) - 지혜
3. 차(감로다) - 보시 4. 꽃(만행화) - 인욕
5. 과일(보리과)-선정 6. 쌀(선열미) - 정진
육바라밀 1. 보시-조건없이 베풀고 2. 지계-어김없이 지키며
3. 인욕-어려움을 참고 4. 정진-끊임없이 노력하며
5. 선정-고요히 생각하여 6. 지혜-수행으로 반야를 득
육도윤회 1. 지옥 2. 아귀 3.축생 4. 아수라 5.인간 6.천상도로
돌고 돌아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함을 말함
사성제(四聖諦) 1. 고성제(苦聖諦) - 모든 존재는 고통스러운 것 -결과
2. 집성제(集聖諦) - 이 고통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원인
3. 멸성제(滅聖諦) - 무명과 갈애를 제거하여 멸한 상태-해탈
4. 도성제(道聖諦) - 멸에 이르기 위한 방법 -수행
팔정도(八正道) * 사성제를 이루기 위한 8가지의 올바른 길(수행방법)
1.正見 2.正思惟 3.正語 4.正業 5.正命 6.正精進 7.正念 8.正定
삼법인(三法印) ※ 一切皆苦(일체개고)가
1. 諸行無常 2. 諸法無我 3. 涅槃寂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삼학(三學) 1. 계 - 불살생 불투도 불음행 불망어 불음주
2. 정 -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법을 닦는 선정
3. 혜 - 사성제를 관하여 번뇌를 끊은 무루의 경지
잠깐만....?
天上天下 唯我獨尊“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의 참 뜻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곧 뭇 생명이며 그 생명체들은 각기 보배로운 불성을
지니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깊은 뜻을 한마디로 압축, 표현된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 석가모니부처님의 팔상성도(八相成道=팔상도) 보는 순서
1.도솔내의상(兜率來儀相) - 도솔천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오심(兜 거둘 두)
2.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룸비니동산에서 마야부인의 몸을 통해 태어나심
3.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생, 노, 병, 사의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
4.유성출가상(諭城出家相) - 한밤중에 카필라밧투성을 떠나 출가수행자가 됨
5.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출가수행자로 히말라야 산속에서 6년간 수도하심
6.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보리수 아래서 마구니의 항복을 받고 우주와 인생의
최고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심
7.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심
8.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쿠시니라의 두 그루 사라나무 아래서 입멸(열반)하심
▣ 보시(布施)
0 보시란 남에게 무엇을 베푸는 것을 말하며, 보시중의 으뜸은 무주상 보시입니다.
0 보시에는 세 가지 형태의 법시(法施), 재시(財施),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1. 법시(法施) - 진리를 모르고 무명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 즉 말씀을 전하는 보시를 말함
2. 재시(財施) -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보시의 개념인 물질적인 것을
남에게 베푸는 보시를 말함
3.무외시(無畏施) -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불안이나 공포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함
▣ 무재칠시(無財七施)
0 물질(재물)을 가지지 않고도 7가지의 보시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을 말 합니다.
1. 화안시(和顔施) -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對)함
2.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 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을 대(對)함
3. 언사시(言辭施) -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을 대(對)함
4. 신시(身施) - 내 몸을 수고롭게 하여 남들을 도움(助力)
5. 심시(心施) - 착하고 어진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對)함
6. 상좌시(床座施) - 다른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자리를 양보함
7. 방사시(房舍施) -잠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방을 내어주고 친절히 대함
잠깐만....?
불단 앞에 나아가 향을 올릴 때는 반배한 후 오른손으로 향을 촛불에 붙인 다음 왼손
을 받쳐 이마 위로 약간 올렸다가 향로에 꽂고 반배한 다음 물러나 예배를 드립니다.
▣ 불교의 맥을 이은 계보
본사 석가모니불(本師 釋迦牟尼佛)
1대 마하가섭(摩詞迦葉) 26대 불여밀다(不如蜜多) 50대 응암담화(應庵曇華)
2대 아난타(阿難陀) 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 51대 밀암감찬(蜜庵減儏)
3대 상나화수(尙那和修) 28대 달마(達磨) 52대 파암조선(破庵祖先)
4대 우바굽다(優婆毬多) 初祖↔28대까지 인도스님 53대 무준원조(無準圓照)
5대 제다가(提多迦) 29대 二祖 慧可(혜가) 54대 설암혜랑(雪岩慧郞)
6대 미차가(彌遮迦) 30대 三祖 僧燦(승찬) 55대 급암종신(及庵宗信)
7대 바수밀다(婆修蜜多) 31대 四祖 道信(도신) 56대 석옥청기(石屋淸琪)
8대 불타난제(佛陀難提) 32대 五祖 弘忍(홍인) 以上 中國支那스님
9대 불타밀다(佛陀蜜多) 33대 六祖 慧能(혜능)
-傳法終- 57대 태고보우(太古普愚)
10대 협(脇) 34대 남악회양(南嶽懷讓)
自稱傳愛傳授 58대 환암혼수(幻庵混修)
11대 부나야사(富那夜奢) 35대 마조도일(馬祖道一) 59대 귀곡각운(龜谷覺雲)
12대 마명(馬鳴) 36대 백장회해(百丈懷海) 60대 벽계정심(碧溪正心)
13대 가비마라(迦毘滅) 37대 황벽희윤(黃檗希運) 61대 벽송지암(碧送智岩)
14대 용수(龍樹) 38대 임제의현(臨濟義玄) 62대 부용영관(芙蓉靈觀)
15대 가나제바(迦那提婆) 39대 흥화존장(興化存獎) 63대 청허휴정(淸虛休靜)
16대 나후라다(羅喉羅多) 40대 남원도옹(南阮道顒) 64대 편양언기(鞭羊彦機)
17대 승가난제(僧迦難提) 41대 풍혈연소(風穴延沼) 이하는 사실상 맥계가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맥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18대 가야사다(伽耶舍多) 42대 수산성념(首山省念)
19대 구마라다(鳩滅多) 43대 남양선소(南陽善昭)
20대 사야다(奢夜多) 44대 자명초원(慈明楚圓)
21대 바수반두(婆修盤頭) 45대 양기방회(揚岐方會)
22대 마라나(滅那) 46대 자운수단(自雲守端)
23대 학륵나(鶴勒那) 47대 오조법연(五祖法演)
24대 사자(師子) 48대 원오극근(園悟克勤)
25대 가사사다(伽舍斯多) 49대 호구소융(虎丘紹隆)
◈ 고승(高僧)의 호칭
호 칭 의 미
祖師(조사) * 석가모니부처님의 정통 법맥을 이어 받은 덕이 높은 스님
禪師(선사) * 오랫동안 선을 수행하여 선의 이치에 통달한 분
宗師(종사) * 한 종파를 일으켜 세운 학식이 깊은 스님
律師(율사) * 계율을 전문적으로 연구했거나 계행이 철저한 스님
法師(법사) * 경전에 통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는 스님
和尙(화상) * 평생 가르침을 받는 은사스님
師門(사문) * 인도말로 쉬라마나 즉, 출가수행자
大德(대덕) * 덕이 높은 큰 스님
大師(대사) * 큰 스님
국사, 왕사, 제사 * 한나라의 정신적 지도자의 명칭으로 황제나 국왕이 명한 직책
◈ 사찰에서의 스님의 호칭
호 칭 의 미
회주(會主)스님 *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 하나의 모임을 이끌러 가는 큰 어른
법주(法主)스님 * 불법을 잘 알아서 불사나 회상의 높은 어른으로 추대된 스님
조실(祖室)스님 * 선으로 일가를 이루어서 한 파의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진 스님
* 원래는 조사의 내실을 의미하며, 스님이 주요사찰에 주재함을 의미
방장(方丈)스님 * 총림의 조실스님/원래는 사방 1장인 방으로 선사의 주지가 쓰는 거실
도감(都監)스님 *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일이나 그 사람을 말함
부전(副殿)스님 * 불당을 맡아 시봉하는 소임을 말하며, 예식 불공 등의 의식집전 스님
지전(知殿)스님 * 殿主(전주)스님-불전에 대한 청결, 향, 등 등의 일체를 맡은 스님
* 대웅전이나 다른 법당을 맡은 스님을 노전스님이라 함
주지(住持)스님 * 사찰의 일을 주관하는 스님-사찰의 전권을 행사하는 총책임자 스님
원주(院主)스님 * 사찰의 사무를 주재하는 스님-監寺, 監阮으로 살림살이를 맡는 스님
강사(講師)스님 * 강원에서 경론(經論)을 가르치는 스님(講伯스님)
칠직(七職)스님 * 7가지 직책의 스님-포교,기획,호법,총무,재무,교무,사회 각 국장스님
◈ 불교교단의 구성원
명 칭 설 명
비 구 * 출가한 성년의 남자스님(인도어 비크슈)-250계의 구족계 수지
비구니 * 출가한 성년의 여자스님(인도어 비크슈니)-348계의 구족계 수지
사 미 *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지 않은 20세 미만의 남자-10계를 지님
사미니 *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지 않은 18세 미만의 여자-10계를 지님
식차마나 * 18세-20세 사이의 여성출가자(정학녀)-6법계를 지님
우바새 * 재가의 남자신자(청신사)-인도어 우파사카
우바이 * 재가의 여자신자(청신녀)-인도어 우피시카
잠깐만....?
사대부중 -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합친 모두를 말함
◈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 경은 뜻을 잘 알고 열심히 염불, 염송, 독송을 함으로서 공덕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
(般若心經) - 정식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600권의 대품반야경의 반야사상을 260자로 압축하여 표현한 경
- 공(空)의 이치와 도리를 설한 가르침
즉, 세상 만물은 인연 따라 발생하는 연기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사물들 자체로는 홀로 서지도 못하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이치 그러므로
공의 도리를 깨달아야 함을 설함
금강경
(金剛經) - 원래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
- 선종에서 독송하는 경
- 금강석 같이 견실한 지혜의 배를 타고 생사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도달하기 위한 가르침
-집착이 없는 가르침,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하라는 즉,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
법화경
(法華經) - 정식 명칭은 묘법연화경
-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경(대승과 소승불교의 갈등을 교리적으로 통일
- 성문, 연각, 보살이 결국에는 부처님의 품에서는 일불승(一佛乘)으로
귀착 된다는 가르침
- 지의 천태대사의 중국 천태종을 창종의 바탕이 된 경
화엄경
(華嚴經) - 정식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 (대승경전의 왕이라 할만한 경)
- 40화엄(보현행원품), 60화엄, 80화엄 3가지가 있음
- 수행과 서원의 가르침으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타행의
실천을 통해서 세상의 실상을 실현하는 것을 설함
-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210자의 법성게를 가지고 도표로 만듬
열반경
(涅槃經) - 소승열반경 : 부처님의 열반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경과를 서술한 경
- 대승열반경 : 부처님의 열반이 갖는 의미를 밝힌 경 (일명 열반경)
- 대승열반경의 3가지 사상
첫째-부처님은 법신 그 자체로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설함
둘째-열반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설함
셋째-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설함
즉, 집착을 경계하라는 중도의 가르침
유마경
(維摩經) - 원명은 유마힐소설경 또는 불가사의해탈경
- 유마힐거사(유마거사)가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한 경
- 보통의 생활 그대로 불교의 진수인 공의 도리를 체득하여 그것을 실천한
내용으로 상대와 차별을 넘어선 절대평등의 경지인 불이에 대하여 무언
설법을 함
천수경
(千手經) - 원명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
- 84귀절로 된 문장
- 천수천안관세음보살께서 대자대비 심으로 모든 중생이 안락을 얻고 모든
중생이 구하는 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부처님의 하락을 얻어 설한 경
아함경
(阿含經) -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으로 구분
- 모든 경전의 사상의 뿌리로 불리는 경
-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의 초기 교설
- 보시, 인욕, 바른 지혜, 바른 제도, 바른 도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가르침을 설함
사십이장경 - 아함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 42가지 덕목을 발췌하여 엮은 경전
아미타경 - 정토 3부경중의 하나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상주하는 아미타불을 신앙하여 선근공덕을 닦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내용 중심
승만경 - 원명은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대승불교의 특색인 재가주의
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경전(승만부인은 아유타국 왕비)
능엄경 - 원명은 대불청여래밀인수증요의재보살만행수능엄경/대불정수능엄경
- 수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경전
능가경 -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부처님을 만나는 길의 가르침
- 名, 相, 分別 등의 5법과 현상계의 자성을 3가지 성질로 구분하여
변계(邊計), 의타(依他), 원성(圓成)의 3성과 8식(八識)에 관하여 설함
원각경 - 원명은 대방광원각수의전요의경
- 문수,보현 등 12만명의 보살이 차례로 등장하여 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함
육조단경 - 원명은 육조법보단경/법보단경/단경
- 중국 선종의 6조이신 혜능선사께서 조계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한 것을
기록한 자서전적인 경전
지장경 - 원명은 지장보살본원경
- 대승대진지장십륜경, 점찰선악업보경과 함께 지장 3부경의 하나
- 지장보살의 사상과 그 원력 및 중생의 업보를 점쳐 지장보살에게 참회
함으로써 모든 업장을 소멸케 하는 실천법을 설함
법구경 - 진리의 말씀을 담은 짧은 구절의 가르침(일종의 불교시집)
불유교경 -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설법
본생담(경) -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
불소행찬경 -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에 관한 장편 대서사시
- 불교시인이라 일컫는 마명스님이 서술 함
* 이 밖에 수행과 서원 및 실천에 관한 가르침으로 2,900여종의 경전이 있습니다.
◈ 불교 경전의 분류
내용의 구분 경 전 의 종 류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 법구경, 자설경, 여시어경, 장로(니)게경
선생경, 기세인본경, 대반열반경
인연 ․ 설화 경전 본생경, 불본행집경, 출요경, 인과경, 비유경,
현우경, 백유경, 육도집경
삼매 ․ 수행 경전 안반수의경, 수행도지경, 반주삼매경, 관불삼매경,
금강삼매경, 능가경, 해심밀경
반야 경전 반야심경, 금강경, 팔천송반야경, 문수반야경,
대품반야경,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방등 경전 대집경, 대보적경, 대방등여래장경, 유마경, 승만경,
원각경, 능엄경
법화 ․ 화엄 경전 법화경, 대승열반경, 십지경, 화엄경
밀교 경전 대일경, 금강정경, 유희야경, 천수경
계율 경전 우바새계경, 범망경, 보살영락본업경, 보살지지경
신앙 ․ 찬탄 경전 정토삼부경, 미륵삼부경, 지장보살본원경, 약사여래본원경,
비화경, 금광명경, 인왕반야경
교계(敎誡) 경전 유교경, 사십이장경, 부모은중경
◈ 부처님의 인상(印相)
부처님이나 보살의 손가락의 특정한 모습을 印相이라 합니다.
인상명칭 취하는 모양
선정인(禪定印) * 결가부좌일 때 취하는 수인 입니다.
*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곱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
을 위로해서 겹쳐놓되 두 엄지손가락은 서로 맞댐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 * 항마인, 촉지인, 항마촉지인으로 석가모니만이 취하는 수인
* 선정한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땅에 댐
전법륜인
(轉法輪印) * 최초로 설법할 때 취한 손 모양을 말함
* 왼손의 엄지와 검지의 끝을 서로대고 장지, 약지, 소지는 편다,
오른손도 같이 하고 왼쪽 손바닥은 위로하고 약지와 소지의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을 향한 모양 임
시무외인
(施無畏印) * 이포외인(離怖畏印) 이라고도 함. 서계신 부처님이 주로 취함
*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위로 뻗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모양 임
여원인(與願印) * 시여인, 시원인, 여인이라고도 함. 서계신 부처님이 주로 취함
* 손의 모습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다섯 손가락을 펴서 밑으로
향하고 손 전체를 늘어뜨리는 모양 임(시무외인과 반대 모습)
지권인(智拳印) * 대일여래불(비로자나불)이 결하는 수인 입니다.
* 좌우 두손 모두 엄지를 속에 넣고 주먹을 쥔 다음에 온손을 가슴까지
들고 검지를 펴서 세운 다음 오른손의 소지로서 편 왼손의 첫째 마디를
잡는다. 주먹 속에서는 오른손 엄지 긑과 왼손 감지 끝을 서로 댄다
미타정인
(彌陀定印) * 아미타여래인의 수인으로 묘관찰지정인이라고도 함
* 선정인과 같은 모습에서 검지를 세워서 엄지와 서로 끝을 마주 대어
검지의 등이 사로 닿게 하는 모양으로 미타정인에는 9품(九品)이 있음
◈ 사찰의 법구
※ 종을 매단 곳을 종루 또는 종각, 북을 매단 곳을 고루 또는 고각 이라한다.
명 칭 의 미 와 내 용
범종(梵鐘) * 절에서 사용하는 종으로 지옥의 중생을 깨우기 위해 울린다고 함
* 조석예경이나 기타 법요행사 때 대중에 알리기 위해 사용됨
법고(法鼓) * 조석예불 때와 의식을 치를 때 치는 북
*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나가 참다운 이치를 전하여 줌을 뜻함
* 짐승세계의 중생을 깨우기 위해 울린다고 함
목어(木魚) * 나무를 잉어모양으로 만들어 속을 비게 파낸 것으로 “방”이라 함
* 조석예불 때와 경전을 읽을 때 두드린다고 함
* 물속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을 위해 울린다고 함
운판(雲版) * 청동으로 된 판을 구름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함
*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모든 것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울림
* 참선을 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끼니때를 알리기 위해서 울리기도 함
목탁(木鐸) * 목어에서 발전된 둥근 모양으로 염불, 독경, 예배할 때 두드림
*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으로 사용됨
다기(茶器) * 부처님 앞에 청정수를 올리는 그릇(참고 : 아침은 차, 저녁은 향)
염주(念珠0 * 부처님을 생각하기 위한 구슬로 염불의 도구 임
* 부처님께 예배할 때 손에 걸거나 돌리며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며
수를 헤아려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기 위함
* 백팔염주, 천염주 등이 있고 7개,16개,21개의 손목용 단주가 있음
죽비(竹篦) * 대나무를 두 쪽으로 갈라지게 만든 것으로 손바닥을 쳐서 소리를 냄
* 참선의 입정과 출정을 알리기 위해 사용함 - 각각 3번씩 침
* 장군죽비는 대형 죽비로 대중이 모여 참선할 때 졸음을 쫓는 도구임
요령(搖鈴) * 의식을 치를 때 오른손으로 잡고 흔드는 놋쇠로 만든 물건
* 의식에서 요령을 잡은 사람이 법주, 목탁을 잡은 사람이 바라지 임
* 요령사용법에는 일자요령, 심자(心字)요령, 상하요령이 있음
◈ 절의 또 다른 이름
0 0 사(寺) * 원래는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관사”였으나 스님이 머물면서 유래
도량(道場) * 불법의 도를 닦는 곳 이란 뜻 - 한문으로는 도장(道場)을 음역 함
가람(伽籃) *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 - 범어 한역 “승가람마”의 약자
정사(精舍) *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이 계시는 곳 - 범어 “비하라=寺=머무는 집”
선원(禪院) * 스님들께서 참선 수행하시는 곳
사찰(寺刹) * 법당 앞에 세우는 당간(幢竿)을 찰(刹)이라고 하는데서 유래 함
사원(寺院) * 담으로 둘러진 집과 회랑이 있는 집으로 당나라 때 불교건축물에 씀
암자(庵子) * 큰절에 딸린 작은 절이라는 뜻 - 주로 큰절 안에 있음
산림(山林) * 산과 나무가 있는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이라는 뜻
총림(叢林) * 선원, 율원, 강원, 염불원을 모두 갖춘 종합도량 - 종합대학 격임
아란야(阿蘭若) *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수행하기 적당한 한적한 숲”이란 뜻
포교당(布敎堂) * 포교원이라고 함 - 불교의 포교를 전문으로 하는 곳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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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의 이름과 여러 부처님, 보살님들
법당이란 법을 설하는 건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이곳에 황금색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고 해서 금당(金堂)이라 불렀습니다.
법당은 불보살을 모시고 있기에 궁전이라는 뜻의 전(殿)이라 존칭하고 있습니다.
법당은 그곳에 모셔져 있는 불보살님이 어떤 분인가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을 갖고 특징지워집니다. 특히 사찰의 정중앙에 자리잡은 법당은 큰법당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모든 번뇌를 쓸어버리고 깨달음을 얻었기에 위대한 승리자요 위대한 영웅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대웅(大雄)이라 불렀으며 이 분을 모신 곳을 대웅전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보통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는 협시보살이나 다른 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 아미타부처님과 약사여래가 자리잡고 있을 경우 그곳은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화엄경에 등장하는 주존 부처님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법당입니다.
비로자나부처님이란 태양의 빛이 만물을 비추듯이 우주의 일체를 비추며 일체를 포괄하는 부처님입니다.
진리의 본체라 하여 법신불(法身佛)이라 일컫기도 하지요.
이 법신부처님은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혀 설법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법신불의 미간 백호에서 광명이 비춰 나와 시방 세계의 모든 나라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침묵 속에서 찬란한 진리의 빛을 발한다 하여 이 법신불을 모신 큰법당을 대적광전, 적광전, 대광명전(大光明殿), 보광전(普光殿)이라고도 부릅니다.
비로전(毘盧殿)이라는 명칭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법당입니다.
이 부처님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불이기 때문에 이분을 모신 법당을 극락전이라 한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은 또한 무한한 빛이요 생명의 부처님이어서 무량광불(無量光佛), 혹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불리기에
극락전은 무량수전, 무량광전 으로도 일컬어집니다. 이 밖에 아미타전, 미타전 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습니다.
좌측에 있는 분이 관세음보살이고 우측에 있는 분이 대세지보살입니다.
여기서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대세지보살은 지혜를 각각 상징합니다.
당래불(當來佛)이 미륵부처님이고 이 분을 모신 법당이 미륵전입니다.
이 법당은 미륵부처님에 의해 정화되고 펼쳐지는 새로운 불국토인 용화세계를 상징한다고도 하여 용화전(龍華殿) 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분을 모신 전각이 약사전입니다.
약사여래는 의왕여래(醫王如來)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이름했고 동방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의 주불이므로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유리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약사여래의 좌협시 보살이 일광보살(日光菩薩), 우협시 보살이 월광보살(月光菩薩)입니다.
여러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모신 법당 또한 자리잡고 있습니다.
원통전ㆍ관음전ㆍ지장전 등이 그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고통스러운 음성이나 바램을 관찰하여 그들을 구해내는 자비로운 보살님입니다.
그래서 이 분을 일러 대비성자(大悲聖者), 구제대비자(求世大悲者)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원통대사(圓通大士)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능력이 두루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의미하는 말 입니다.
원통전은 이 관세음보살의 원통대사로서의 능력을 강조한 명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처참한 살풍경이 벌어지는 지옥 중생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 그곳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는 분이 지장보살님입니다.
이 지장보살님을 모신 법당을 지장전이라 합니다. 한편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지옥의 세계인 명부세계 주존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장전은 명부전(冥府殿)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부전에는 망자를 심판하는 열명의 심판관이 들어서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 지칭하기도 합니다.
나한전
아라한은 번뇌를 남김없이 끊어버린 분들로서 진리와 합치하기 때문에 응진(應眞) 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응진전은 나한전의 또다른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나한전은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했다 해서 영산전(靈山殿)으로도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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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서의 28 하늘 [ 28 天 ] ▣
※ 차 례
1. 욕 계 (慾 界) : 6天
2. 색 계 (色 界) : 18天 [초선천 3, 이선천 3, 삼선천 3, 사선천 9]
3. 무색계 (無色界) : 4天
1. 욕 계 (慾 界) : 6天
욕계는 천(天)에 속하나 아직까지 욕(慾)을 떠나지 못한 세계이기에 삼계(三界)로 나눌 땐 욕계(慾界)에 넣는다.
(1) 사천왕천(四天王天)
호세천(護世天)이라고도 하는데 사대천왕이 있어, 수미(須彌)의 사주(四州)를 수호하며 그 권속들과 살고 있다고 한다.
사대천왕이란 1) 동주(東州)를 주로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
2) 남주(南州)를 주로 수호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
3) 서주(西州)를 주로 수호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
4) 북주(北州)를 주로 수호하는 다문천왕(多聞天王)
의 넷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의 성(城)은 모두 난보(暖寶)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에도 남녀의 구별이 있어 혼인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아수라, 도리천과 마찬가지로 몸과 몸을 가까이 하여 기운으로써 음양을 이루며, 이곳에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1 - 2 세 아이와 같아 자연히 화현(化現)하여 천(天)의 무릎에 앉는다고 한다. 우리가 큰 절에 가면 입구에 천왕문(天王門)이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곧 이 사대천왕을 모신 곳으로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밖으로부터 오는 마(魔)를 방어하는 뜻에서 세워진 것이다.
(2) 도리천(刀利天)
사천왕천(四天王天)위에 있으며 33천(天)이라고도 한다. 이 도리천을 33천이라고 하는 이유는, 중앙에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帝釋天)이 있는 선견천(善見城)[혹은 희견천(喜見城)]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 8성(城)씩 32성(城)이 있어 도합 33성(城)이 되기 때문이다. 제석천은 사천왕과 32천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한 이들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한다.
이 도리천에 대해서는 일찌기 부처님께서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위하여 석 달 동안 올라가 설법을 하고 내려오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이상 육욕천(六欲天) 중에서 사천왕천과 도리천의 둘은 수미산을 의지해 있기 때문에 지거천(地居天) 이라고 하는데 사천왕천은 중턱에, 도리천은 정상에 있다고 한다.
(3) 야마천(夜摩天)
이 야마천부터는 앞의 이천(二天)이 지거천(地居天)임에 반하여 공중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공거천(空居天)이라고 한다. 야마천은 염마천(焰摩天), 염천이라고도 하며 번역하여 선시천(善時天), 시분천(時分天)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때에 따라 오욕락(五欲樂)을 받는다고 한다. 도리천보다 수승한 하늘로서,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3 - 4세 아이와 같다고 한다.
(4) 도솔천(兜率天)
지거천(知足天), 희족천(喜足天), 묘족천(妙足天)이라 번역하여 쓰기도 하는데 야마천보다 위에 있는 더 나은 하늘이다. 이 곳에서는 자기가 받는 오욕락(五欲樂)에 스스로 만족한 마음을 내어 안정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4 - 5세 아이와 같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내외의 이원(二院)이 있는데 외원은 천인들의 욕락처(欲樂處)가 되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미륵보살은 이 곳에 있으면서 남염주부에 하강하여 성불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이곳 도솔천 내원궁에서 호명(護明)보살로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계셨다고 전하여 온다.
(5) 화락천(化樂天)
화자재천(化自在天), 化自樂天 樂變化天이라고도 한다. 도솔천보다 위에 있는 하늘로서, 오욕의 경계를 스스로 변화하여 즐기기 때문에 化樂天이라고 한다. 이 하늘에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5 - 6세 아이와 같다고 한다.
(6) 타화자재천(靑化自在天)
靑化天이라고도 한다. 화락천보다 더 수승한 하늘로, 욕계 중 가장 높은 데 있는 제일가는 하늘이다. 이 하늘은 남이 변해 나타내는 즐거운 일들을 자유롭게 자기의 쾌락으로 삼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다고 한다. 이곳에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인간의 6 - 7세 아이와 같다고 한다.
2. 색 계 (色 界) : 18天
색계란 앞의 욕계가 중생의 모든 탐욕을 주로 하여 이룩된 세계이고, 무색계가 순 정신적인 세계임에 비하여, 모든 탐욕은 여의었으나 아직 순 정신적인 것은 되지 못한 중간의 세계로, 욕계의 상층에 있으며, 욕계보다 수승한 물질로 되어있다.
(1) 초선천(初禪天) : 初禪定을 닦은 이가 나는 하늘
1) 범중천(梵衆天) : 초선천의 주인인 大凡王(大凡天王)이 영솔하는 천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2) 범보천(梵輔天) : 대범왕의 신하들이 살고 있으며, 대범왕이 어디를 갈 적에는 반드시 이 신하들이 앞서 가면서 왕의 이익을 생각한다고 한다.
3) 대범천(大梵天) : 대범왕이 있는 곳으로 그 누각과 寶臺가 아름답다고 한다.
(2) 이선천(二禪天) : 제2선정을 닦는 이가 나는 하늘
1) 소 광 천(少 光 天) : 二禪天 중에서 광명을 놓는 것이 제일 적다고 한다.
2) 무량광천(無量光天) : 이 하늘에서 나면 몸으로 광명을 놓는 것이 한량없다고 한다.
3) 극광정천(極光淨天) : 광명이 앞의 것보다 더하여 自靑을 비춘다고 한다.
(3) 삼선천(三禪天) : 제3선정을 닦는 이가 나는 하늘
1) 소정천(少淨天) : 이 하늘의 五識은 즐겁고 청정하기에[樂受] 淨이라 하며, 三禪天 중에서는 가장 저열하다고 한다.
2) 무량정천(無量淨天) : 樂受가 있으며 소정천에 비하면 훨씬 勝妙하여 한량이 없다.
3) 편정천(遍淨天) : 이 하늘은 맑고 깨끗하며 즐거움이 가득 찼기에 遍淨이라고 한다.
(4) 사선천(四禪天) : 제4선정을 닦는 이가 나는 하늘
1) 무운천(無雲天) : 이 하늘부터는 구름위에 있어 구름이 없는 곳에 있으므로 무운이라고 한다.
2) 복생천(福生天) : 이 하늘엔 수승한 福力으로 태어나므로 복생이라 한다.
3) 광과천(廣果天) : 사선천 중에서 범부가 사는 하늘로는 가장 좋다고 한다.
4) 무상천(無想天) : 위의 광과천 안에 있는 하늘로, 이 하늘에 태어나면 모든 생각이 없으므로 무상이라고 한다.
5) 무번천(無煩天) : 욕계의 괴로움과 색계의 즐거움을 모두 여의어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첫 번째 하늘이다.
6) 무열천(無熱天) : 심경이 依處가 없고, 淸凉自莞하여 일체의 熱惱가 없다.
7) 선현천(善現天) : 天衆의 善妙의 果報가 나타나므로 선현이라고 한다.
8) 선견천(善見天) : 장애가 없어 十方을 보는 것이 자재로운 하늘이라고 한다.
9) 색구경천(色究竟天) : 색계중 가장 위에 있는 하늘이다.
3. 무색계 (無色界) : 4天
무색계란 無色定을 닦아 受生하는 하늘로 순전히 정신적인 세계이며, 三界 중 가장 수승한 곳 이다. 그리고 무색정에는 四無色定이라고 하여 空無邊處定, 識無邊處定, 無所有處定, 非想非非想處定의 넷이 있으므로 자연히 이에 따라 四天이 있게 된다.
(1)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 욕계와 색계의 모든 색법을 싫어하고, 벗어나려 無色定을 닦되,
색의 想을 버리고 虛空觀을 닦는 이가 태어나는 하늘이다.
(2)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 앞의 공무변처가 오히려 바깥 허공이라는 대상이 있으므로 이를 싫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관인 識이 무변하다는 이치를 알고 수행하여 태어나는 하늘이다.
(3)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 앞의 식무변처가 오히려 식이라는 所有感이 있으므로 이마저도
싫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空도 識도 전연 所有가 없다는 무색정을 닦아 이 定力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4)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 : 삼계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이라는 뜻에서
유정천(有順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을 비상비비상이라 하는 이유는 식무변처정은 무한한 식의 존재를 觀想하므로 有想이요, 무소유처정은 공도, 식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관상하므로 非想인데, 이것은 유상을 버리므로 비상이요 비상도 버리므로 비비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定을 닦아 그 定力으로 태어나는 하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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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세계에 두루하신 부처님◆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몇 분이나 계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또는 부처님은
신인지 인간인지 등에 대해서 많은 혼란을 일으킨다.
여기서는 우리가 모시는 부처님은 어떠한 분인지
교리적 측면에서 이해해 보고자 한다.
1) 그와 같이 오신 분, 여래
석가모니는 인도의 석가 부족의 위대한 성자라는 의미로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뒤의 호칭이다.
그리고 부처님이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도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에 대한 우리말이다.
또한 석가모니불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말은
경전 등에 나오는 부처님에 대한 정식 호칭은 아니고
아미타 부처님과 같은
다른 부처님과 구별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시기 이전에
이미 여섯 분의 부처님들이 계셨고
서방 정토에는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등
많은 부처님들이 계신다.
바른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여래(如來)라는 부처님의 호칭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래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사회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을 일컫는
고유 명사였지만 불교에서는 보다 깊은 뜻을 지니게 되었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
‘타타가타(Tatha-gata)’를 옮긴 말로 직역하면
‘그와 같이 오는 것’,
‘있는 그대로 오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타타가타를 여거(如去)라고도 하는데
‘그와 같이 가는 것’,
‘있는 그대로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있는 그대로 (tatha-)’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부처님 혹은 부처님의 법은
시방(十方 : 동서남북, 동북, 동남, 서북, 서남, 상하)과
삼세(三世 : 과거, 현재, 미래)에
두루 걸쳐 항상 변함없이 있음을 말한다.
두 번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는 출가하여 단지
6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중생 제도를 하시다가
열반에 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로
우리 인간 세계에 오기 전 오랜 과거 생애동안
보살로서 꾸준히 수행하며 수많은 중생을 제도한 결과
마침내 현생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부처님의 법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되지 않고 항상 변함없이
중생 제도를 목적으로 다른 명칭과 다른 몸,
즉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여러 부처님들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2) 법신ㆍ보신ㆍ화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에 관해 우리는
소박한 질문을 하나 할 수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면
왜 죽음은 피할 수 없었던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법(法)과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지 당신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중생 하나 하나가 스스로
깨달음의 주체임을 말씀하셨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법에 의지하라는 말씀 중의 법은
무엇을 의미하고 부처님과 법의 관계는 어떤지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한편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몸은 법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본래 모습은 법 그 자체인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과 같은 몸을 빌려
중생의 세계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중생의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우리 중생들은 본래 부처님의 법
그 자체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존재이므로
그 법을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중생과 같은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처님과 법의 관계를 불교 교리에서는
삼신설(三身說)로 설명하고 있다.
삼신이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첫 번째
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법(法)이라는 말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하다.
불교에서의 법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우선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교 교리를 말한다.
두 번째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얻은 깨달음을 일컫는 말로
모든 중생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의 본질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내가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할 때
나라는 존재는 보는 주체가 되고,
보이는 사물은 대상 그리고 눈은 보는 수단이 되듯이
우리의 의식이 주체가 되어
어떤 것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이 되는 것을 법이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린 시절의 어떤 추억을 회상할 때
그 추억이란 우리 의식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법신의 법이란 두 번째의 법을 의미한다.
이 법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도
그리고 열반에 든 이후에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함없이 존재하는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따라서 법신이란
이와 같이 영원불변하고 유일한 법을
부처님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
오분향 예불문’의 첫머리에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라고 나오는데,
계율을 지키고[戒],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定],
참된 지혜를 갖추고[慧],
깨달음을 얻어 속박에서 벗어나고[解脫],
그 깨달음으로 얻은 자유자재 함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解脫知見],
이 다섯 가지가 법신불이 갖추고 있는 덕목이라 한다.
대표적인 법신불로서는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를 들 수 있다.
두 번째 보신은
응신(應身)이라 하는데
보신의 보(報)나 응신의 응(應)은 모두 받는다는 뜻으로
깨달음을 얻은 뒤 그 깨달음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했던 과보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법신이 중생을 직접 제도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보신은 법신과 같은 덕목들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중생의 간절한 서원에 따라 중생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내생에 그 중생을 제도하기도 하는
부처님이 보신불이다.
아미타 부처님이 대표적인 보신불이다.
마지막으로 화신이란
보신과 같이 본래 법신의 부처님이지만
중생 제도를 위해 중생의 몸으로 바꾸어
직접 중생의 세계로 오신 부처님을 말한다.
따라서 보신불과는 달리 중생은
현생에서 언제나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표적인 화신불이다.
앞에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자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열반에 드셨을까 하는 소박한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법을 스승으로 삼고 당신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 말씀을 통해 그 의문을 해결하고자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이란
법신으로서의 부처님을,
그리고 당신은 화신의 부처님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여러 부처님들
우리는 여래라는 부처님의 호칭과 삼신설을 통해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도 여러 부처님이 계셨고
이후에도 계실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삼세와 시방 세계에 걸쳐
어떤 부처님들이 계시는지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여섯 분의 부처님,
즉 비파사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이 계셨다고 하는데
이 여섯 부처님에 석가모니불을 포함하여 과거칠불이라 부른다.
또한 석가모니불 다음에 미래에 오실 부처님으로 미륵불이 계신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인간 세계로 오시기 전에
도솔천에서 보살로 머물면서 정진했던 것처럼
지금 도솔천에서 미륵보살로 있으면서
부처님이 되기 위해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세계를 지금 우리가 우주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규모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하는 작은 별이고
태양계는 은하계에 속하고
우주 공간은 시방으로 무한대로 뻗어 나가며
수많은 별들이 존재한다.
이와 비슷하게 불교의 세계관은
수미산을 중심으로 시방으로 무수한
세계가 존재하는데
그 수를 헤아려 삼천대천세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 무수한 세계 각각에는
부처님이 반드시 한 분씩 계셔
각 세계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계신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셨고,
동방의 묘희(妙喜) 세계에는 아촉불이 계시고,
서방의 정토세계에는
아미타불이 계신다.
이와 같이 불교에는 수많은 부처님들이 계시지만
그 본연의 모습은 오직 법신불로서 모두 동등하다.
3. 부처님의 덕성
우리가 흔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
혹은 욕심이 많다 등으로 말한다.
또한 어떤 종교에서 그들의 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신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신은 완벽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성품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비록 부처님의 성품을
말로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불교는 우리들이 보다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아주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부처님의 덕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부처님은
열 가지 지혜의 힘,
네 가지 확신,
세 가지 바른 마음자세,
그리고 중생을 어여삐 생각하고
구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성품은 모두 합하면 열여덟 가지이고
오직 부처님만 가지고 계신다고 하여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라 한다.
1) 열 가지 지혜의 힘
부처님께서는
열 가지 지혜의 힘을 가지고 계신데 이를 십력(十力)이라고 한다.
십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리와 도리가 아닌 것을 분명히 분별하시는 지혜의 힘이다(處非處智力).
둘째,
업과 그 과보를 분명히 아시는 지혜의 힘이다(業異熟智力).
셋째,
여러 가지 선정(禪定)에 통달하신 지혜의 힘이다(靜慮解脫等持至智力).
넷째,
각 중생은 깨달음에 대해 저마다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아시는 지혜의 힘이다(根上下智力).
다섯째,
각 중생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의욕이
저마다 다름을 분명히 아시는 지혜의 힘이다(種種勝解智力).
여섯째,
각 중생의 성품을 분명히 아시는 지혜의 힘이다(種種界智力).
일곱째,
각 중생이 수행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의 단계를
분명히 아시는 지혜의 힘이다(遍聚行智力).
여덟째,
시작 없이 윤회한 각 중생의 전생(前生)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분명히 아시는 지혜의 힘이다(宿主隨念智力).
아홉째,
끝없이 윤회할 각 중생의 내생(來生)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분명히 아시는 지혜의 힘이다(死生智力).
열째,
중생들의 모든 번뇌가 다하면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시는 지혜의 힘이다(漏盡智力).
2) 네 가지 확신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확신,
즉 두려움 없는 네 가지 마음을 가지고 계신데
이를 사무소외(四無所畏)라고 한다.
사무소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조금의 의심도 없는 확신이다(正等覺無畏).
둘째,
모든 번뇌가 다 소멸되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조금의 의심도 없는 확신이다(漏永盡無畏).
셋째,
모든 번뇌를 다 소멸시키는 데 방해가 되는
그른 수행법을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조금의 주저도 없는 확신이다(說障法無畏).
넷째,
모든 번뇌를 다 소멸시키는 바른 수행법을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조금의 주저도 없는 확신이다(說出道無畏).
3) 세 가지 바른 마음 자세
세 가지 바른 마음 자세란
중생이 부처님을 다음 세 가지 방법으로 생각해도
부처님의 마음은 흔들림 없이
항상 그 자리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삼념주(三念住)라 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중생이 부처님을 받들고 따르더라도
기쁜 마음에 흔들리지 않고
항상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생각하신다(初念處).
둘째,
모든 중생이 부처님을 믿지 않고 비방하더라도
불안한 마음에 흔들리지 않고
항상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생각하신다(第二念處).
셋째,
어떤 중생은 부처님을 받들고 따르지만
또 어떤 중생은 믿지 않고 비방하더라도
기쁜 마음과 불안한 마음에 흔들리지 않고
항상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생각하신다(第三念處).
4) 중생을 어여삐 생각하고 구제하려는 마음
우리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부처님’,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이라고 한다.
대자대비의 대(大)는 크고 깊다는 뜻이고
자(慈)란 중생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것이고
비(悲)란 중생의 괴로움을 불쌍히 여겨 구제하려는 것이다.
부처님은 열 가지 지혜의 힘,
네 가지 확신,
그리고 세 가지 바른 마음자세로
중생에게 대자(大慈)를 베풀고
대비(大悲)로 고통과 번뇌의 세계에서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어여삐 생각하여 구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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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좋은 불자상식
▣ 사찰의 문
1.일주문 |
* 절 입구에 양쪽 하나씩의 기둥으로 세워진 건물 * 일주문을 경계로 문밖을 속계, 문안을 진계라 부름 |
2.천왕문 |
*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문 : 일명 봉황문 * 동쪽에 지국천왕-비파 가짐 * 서쪽에 광목천왕-여의주,새끼줄 가짐 * 남쪽에 증장천왕-보검 가짐 * 북쪽에 다문천왕-보탑을 가짐 * 금강력사(인왕)-절의 어귀나 문 양쪽에 모신 수문장(반나체 모습) |
3.해탈문 |
* 모든 번뇌와 망상을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문 |
4.불이문 |
* 중생과 부처, 선과 악, 유와 무, 공과 색 상대적 개념에 의한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불교진리의 불이사상을 나타내는 문 |
▣ 사찰의 전
대웅전 |
*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봉안한 불전(금당) |
대적광전 |
*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봉안한 불전(대광명전)-화엄종 주불 * 주불이 아닐 경우는 비로전이라 부름 * 삼존불일 경우 석가모니불(화신)/비로자나불(법신)/노사나불(응신) |
극락전 |
*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주불전-주불전이 아닐 경우 미타전 *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의 미타 3부경에서 유래함 |
약사전 |
*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불전-만월전으로도 부름 |
미륵전 |
* 미륵부처님이나 미륵보살을 모신 불전-용화전으로도 부름 |
원통전 |
*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불전-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 부름 |
지장전 (명부전) |
*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염라대왕 등 10왕을 함께 모시면 시왕전 |
응진전 |
* 부처님의 제자 16나한을 모신 전각-500나한을 모신 나한전 |
팔상전 |
* 부처님의 일대기를 8장면으로 도해한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 |
영산전 |
*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도를 모신 전각-영취산 설법모임 그림 |
칠성전 |
* 치성전여래를 모신 전각 또는 북두칠성을 부처님화한 전각 |
산신각 |
* 산신(주로 호랑이)을 모신 전각-삼성각은 산신,칠성,독성을 모심 |
각 (주불전-부처님을 모신 불전 : 일명 금당)
▣ 불상의 존칭
석가모니불 |
* 대웅전의 주불로 봉안 * 응진전, 나한전, 영산전, 팔상전에도 주불로 봉안 됨 * 협시보살로 좌측에 문수보살과 우측에 보현보살 좌측에 관음보살과 우측에 허공장보살 또는 좌측에 관음보살과 우측에 미륵보살로 배치함 |
비로자나불 |
* 대일여래부처님으로 법신 또는 진신의 부처님 * 협시보살로 좌측에 문수보살과 우측에 보현보살 배치함 * 삼존불일 경우 좌측-보신 노사나불과 우측-응신 석가모니불 모심 |
아미타불 |
* 서방극락 정토세계의 부처님 * 형식적 특징은 수인인데 아미타 정인과 9품인을 하는 것이 원칙 * 협시보살로 좌측에 관음보살과 우측에 대세지보살 또는 지장보살 |
약사여래불 |
* 약사유리광여래 또는 대의왕불로도 부름 *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또는 약사 12지신상을 거느림 * 의식주와 무병장수의 깨달음을 주시는 부처님-손에 약합을 든 계인 |
노사나불 |
* 삼신불의 한분인 보신불 *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의 공덕으로 나타나신 부처님 |
미 륵 불 |
* 메시아로 알려진 미래(석가모니불 열반56억7천만년 이후)의 부처님 * 석가모니부처님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할 부처님 |
연 등 불 |
* 정광여래, 정광불-석가모니에게 미래세 성불할 수기를 주신 부처님 |
▣ 보살의 존칭
관음보살 |
* 관자재보살 또는 관세음보살로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 * 손에는 감로수의 정병 또는 연꽃을 잡음-대자대비로 중생을 제도함 * 머리의 보관 중앙에는 반드시 아미타불의 화신인 화불을 나타냄 |
대세지보살 |
* 아미타부처님의 오른쪽에 위치-지혜의 문으로 중생을 제도함 * 머리의 보관내에 보배병을 나타냄-손에는 연꽃을 들거나 합장 모습 |
문수보살 |
* 문수사리보살로 석가모니부처님의 대지혜를 상징하며 협시보살 * 오른손에 지혜의 칼을 쥐거나 푸른 연꽃을 지니고 좌대는 연화대를 이용하거나 청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함 |
보현보살 |
* 석가모니부처님의 대행을 상징하며 협시보살로 왼쪽에 위치함 * 연화대 위에서 합장하는 모습으로 손에는 연꽃을 쥐고 있음 *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는데 대해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나타남 |
지장보살 |
* 육도윤회에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 * 석가모니부처님이 입멸 후 미륵부처님 출현시까지 중생을 교화함 * 형상은 민머리거나 특수한 가운형 두건을 쓰고 가사를 입고 연꽃을 들고 있으며 바른손에 보배구슬 혹은 석장을 짚은 모습을 나타냄 * 명부를 주재하는 지옥 10왕을 거느림 |
◈ 부처님의 名呼(명호)
☞부처님께서 갖추신 공덕을 10가지 면으로 존칭한 이름
여 래 |
* 진리를 몸으로 나타내신 분 |
응 공 |
* 세상의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분 |
정변지 |
*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신 분 |
명행족 |
* 지혜와 행동이 완전하신 분 |
선 서 |
* 훌륭한 일을 완성하고 가신 분 |
세간해 |
* 세상일을 완전히 깨달으신 분 |
무상사 |
* 인간 중에서 더없이 높으신 분 |
조어장부 |
* 사람을 다스리는데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분 |
천인사 |
*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되시는 분 |
불세존 |
*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스승 |
◈ 부처님의 십대제자
사리불 |
지혜제일(智慧弟一) |
우바리 |
지계제일(持戒弟一) |
목건련 |
신통제일(神通弟一) |
부루나 |
설법제일(設法弟一) |
마하가섭 |
두타제일(頭陀弟一) |
수보리 |
해공제일(解空弟一) |
아나율 |
천안제일(天眼弟一) |
가전연 |
논의제일(論議弟一) |
아 난 |
다문제일(多聞弟一) |
라후라 |
밀행제일(密行弟一) |
◈ 불교의 4대 성지 |
◈ 불교의 5대 명절 |
||
부처님의 탄생지 |
카필라국 룸비니 동산 |
석탄절 |
음력 4월 8일 |
부처님의 성도지 |
마갈타국 부다가야 |
출가절 |
음력 2월 8일 |
최초의 설법지 |
바라나시 녹야원 |
성도절 |
음력12월 8일 |
부처님의 열반지 |
쿠(구)시나가라 |
열반절 |
음력 2월15일 |
|
|
우란분절 |
음력 7월15일 |
잠깐만....?
전통사찰을 참배할 때 : 입구-산문-해탈문(교)-일주문-천왕문-금강문-불이문-탑-
대웅전-각 부속전각 등의 순서로 참배하는데 큰법당을 제쳐두고 스님 거처나 산신각
혹은 다른 전각과 건물을 찾아 참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아둡시다.
三寶寺刹 (삼보사찰) |
1. 佛寶(불보)사찰 - 경남 양산 영축산 통도사 2. 法寶(법보)사찰 -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3. 僧寶(승보)사찰 - 전남 승주 조계산 송광사 |
부처님 진신사리 5대 적멸보궁 |
1. 양산 영축산 통도사 2. 정선 태백산 정암사 3. 영월 사자산 법흥사 4. 평창 오대산 상원사 5. 양양 설악산 봉정암 |
조계종 5대 총림 |
1. 양산 통도사 영축총림 2. 합천 해인사 해인총림 3. 승주 송광사 조계총림 4. 예산 수덕사 덕숭총림 5. 장성 백양사 고불총림 |
육법공양 |
1. 향(해탈향) - 지계 2. 등(반야등) - 지혜 3. 차(감로다) - 보시 4. 꽃(만행화) - 인욕 5. 과일(보리과)-선정 6. 쌀(선열미) - 정진 |
육바라밀 |
1. 보시-조건없이 베풀고 2. 지계-어김없이 지키며 3. 인욕-어려움을 참고 4. 정진-끊임없이 노력하며 5. 선정-고요히 생각하여 6. 지혜-수행으로 반야를 득 |
육도윤회 |
1. 지옥 2. 아귀 3.축생 4. 아수라 5.인간 6.천상도로 돌고 돌아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함을 말함 |
사성제(四聖諦) |
1. 고성제(苦聖諦) - 모든 존재는 고통스러운 것 -결과 2. 집성제(集聖諦) - 이 고통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원인 3. 멸성제(滅聖諦) - 무명과 갈애를 제거하여 멸한 상태-해탈 4. 도성제(道聖諦) - 멸에 이르기 위한 방법 -수행 |
팔정도(八正道) |
* 사성제를 이루기 위한 8가지의 올바른 길(수행방법) 1.正見 2.正思惟 3.正語 4.正業 5.正命 6.正精進 7.正念 8.正定 |
삼법인(三法印) |
※ 一切皆苦(일체개고)가 1. 諸行無常 2. 諸法無我 3. 涅槃寂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
삼학(三學) |
1. 계 - 불살생 불투도 불음행 불망어 불음주 2. 정 -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법을 닦는 선정 3. 혜 - 사성제를 관하여 번뇌를 끊은 무루의 경지 |
잠깐만....?
天上天下 唯我獨尊“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의 참 뜻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곧 뭇 생명이며 그 생명체들은 각기 보배로운 불성을
지니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깊은 뜻을 한마디로 압축, 표현된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 석가모니부처님의 팔상성도(八相成道=팔상도) 보는 순서
1.도솔내의상(兜率來儀相) |
- 도솔천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오심(兜 거둘 두) |
2.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 룸비니동산에서 마야부인의 몸을 통해 태어나심 |
3.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 생, 노, 병, 사의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 |
4.유성출가상(諭城出家相) |
- 한밤중에 카필라밧투성을 떠나 출가수행자가 됨 |
5.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 출가수행자로 히말라야 산속에서 6년간 수도하심 |
6.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 보리수 아래서 마구니의 항복을 받고 우주와 인생의 최고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심 |
7.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심 |
8.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 쿠시니라의 두 그루 사라나무 아래서 입멸(열반)하심 |
▣ 보시(布施)
0 보시란 남에게 무엇을 베푸는 것을 말하며, 보시중의 으뜸은 무주상 보시입니다.
0 보시에는 세 가지 형태의 법시(法施), 재시(財施),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1. 법시(法施) |
- 진리를 모르고 무명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 즉 말씀을 전하는 보시를 말함 |
2. 재시(財施) |
-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보시의 개념인 물질적인 것을 남에게 베푸는 보시를 말함 |
3.무외시(無畏施) |
-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불안이나 공포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함 |
▣ 무재칠시(無財七施)
0 물질(재물)을 가지지 않고도 7가지의 보시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을 말 합니다.
1. 화안시(和顔施) |
-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對)함 |
2.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
- 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을 대(對)함 |
3. 언사시(言辭施) |
-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을 대(對)함 |
4. 신시(身施) |
- 내 몸을 수고롭게 하여 남들을 도움(助力) |
5. 심시(心施) |
- 착하고 어진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對)함 |
6. 상좌시(床座施) |
- 다른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자리를 양보함 |
7. 방사시(房舍施) |
-잠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방을 내어주고 친절히 대함 |
잠깐만....?
불단 앞에 나아가 향을 올릴 때는 반배한 후 오른손으로 향을 촛불에 붙인 다음 왼손
을 받쳐 이마 위로 약간 올렸다가 향로에 꽂고 반배한 다음 물러나 예배를 드립니다.
▣ 불교의 맥을 이은 계보
본사 석가모니불(本師 釋迦牟尼佛) |
|||||
1대 |
마하가섭(摩詞迦葉) |
26대 |
불여밀다(不如蜜多) |
50대 |
응암담화(應庵曇華) |
2대 |
아난타(阿難陀) |
27대 |
반야다라(般若多羅) |
51대 |
밀암감찬(蜜庵減儏) |
3대 |
상나화수(尙那和修) |
28대 |
달마(達磨) |
52대 |
파암조선(破庵祖先) |
4대 |
우바굽다(優婆毬多) |
初祖↔28대까지 인도스님 |
53대 |
무준원조(無準圓照) |
|
5대 |
제다가(提多迦) |
29대 |
二祖 慧可(혜가) |
54대 |
설암혜랑(雪岩慧郞) |
6대 |
미차가(彌遮迦) |
30대 |
三祖 僧燦(승찬) |
55대 |
급암종신(及庵宗信) |
7대 |
바수밀다(婆修蜜多) |
31대 |
四祖 道信(도신) |
56대 |
석옥청기(石屋淸琪) |
8대 |
불타난제(佛陀難提) |
32대 |
五祖 弘忍(홍인) |
以上 中國支那스님 |
|
9대 |
불타밀다(佛陀蜜多) |
33대 |
六祖 慧能(혜능) -傳法終- |
57대 |
태고보우(太古普愚) |
10대 |
협(脇) |
34대 |
남악회양(南嶽懷讓) 自稱傳愛傳授 |
58대 |
환암혼수(幻庵混修) |
11대 |
부나야사(富那夜奢) |
35대 |
마조도일(馬祖道一) |
59대 |
귀곡각운(龜谷覺雲) |
12대 |
마명(馬鳴) |
36대 |
백장회해(百丈懷海) |
60대 |
벽계정심(碧溪正心) |
13대 |
가비마라(迦毘摩羅) |
37대 |
황벽희윤(黃檗希運) |
61대 |
벽송지암(碧送智岩) |
14대 |
용수(龍樹) |
38대 |
임제의현(臨濟義玄) |
62대 |
부용영관(芙蓉靈觀) |
15대 |
가나제바(迦那提婆) |
39대 |
흥화존장(興化存獎) |
63대 |
청허휴정(淸虛休靜) |
16대 |
나후라다(羅喉羅多) |
40대 |
남원도옹(南阮道顒) |
64대 |
편양언기(鞭羊彦機) |
17대 |
승가난제(僧迦難提) |
41대 |
풍혈연소(風穴延沼) |
이하는 사실상 맥계가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맥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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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
가야사다(伽耶舍多) |
42대 |
수산성념(首山省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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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
구마라다(鳩摩羅多) |
43대 |
남양선소(南陽善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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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
사야다(奢夜多) |
44대 |
자명초원(慈明楚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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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
바수반두(婆修盤頭) |
45대 |
양기방회(揚岐方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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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
마라나(摩羅那) |
46대 |
자운수단(自雲守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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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
학륵나(鶴勒那) |
47대 |
오조법연(五祖法演) |
||
24대 |
사자(師子) |
48대 |
원오극근(園悟克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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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
가사사다(伽舍斯多) |
49대 |
호구소융(虎丘紹隆) |
◈ 고승(高僧)의 호칭
호 칭 |
의 미 |
祖師(조사) |
* 석가모니부처님의 정통 법맥을 이어 받은 덕이 높은 스님 |
禪師(선사) |
* 오랫동안 선을 수행하여 선의 이치에 통달한 분 |
宗師(종사) |
* 한 종파를 일으켜 세운 학식이 깊은 스님 |
律師(율사) |
* 계율을 전문적으로 연구했거나 계행이 철저한 스님 |
法師(법사) |
* 경전에 통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는 스님 |
和尙(화상) |
* 평생 가르침을 받는 은사스님 |
師門(사문) |
* 인도말로 쉬라마나 즉, 출가수행자 |
大德(대덕) |
* 덕이 높은 큰 스님 |
大師(대사) |
* 큰 스님 |
국사, 왕사, 제사 |
* 한나라의 정신적 지도자의 명칭으로 황제나 국왕이 명한 직책 |
◈ 사찰에서의 스님의 호칭
호 칭 |
의 미 |
회주(會主)스님 |
*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 하나의 모임을 이끌러 가는 큰 어른 |
법주(法主)스님 |
* 불법을 잘 알아서 불사나 회상의 높은 어른으로 추대된 스님 |
조실(祖室)스님 |
* 선으로 일가를 이루어서 한 파의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진 스님 * 원래는 조사의 내실을 의미하며, 스님이 주요사찰에 주재함을 의미 |
방장(方丈)스님 |
* 총림의 조실스님/원래는 사방 1장인 방으로 선사의 주지가 쓰는 거실 |
도감(都監)스님 |
*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일이나 그 사람을 말함 |
부전(副殿)스님 |
* 불당을 맡아 시봉하는 소임을 말하며, 예식 불공 등의 의식집전 스님 |
지전(知殿)스님 |
* 殿主(전주)스님-불전에 대한 청결, 향, 등 등의 일체를 맡은 스님 * 대웅전이나 다른 법당을 맡은 스님을 노전스님이라 함 |
주지(住持)스님 |
* 사찰의 일을 주관하는 스님-사찰의 전권을 행사하는 총책임자 스님 |
원주(院主)스님 |
* 사찰의 사무를 주재하는 스님-監寺, 監阮으로 살림살이를 맡는 스님 |
강사(講師)스님 |
* 강원에서 경론(經論)을 가르치는 스님(講伯스님) |
칠직(七職)스님 |
* 7가지 직책의 스님-포교,기획,호법,총무,재무,교무,사회 각 국장스님 |
◈ 불교교단의 구성원
명 칭 |
설 명 |
비 구 |
* 출가한 성년의 남자스님(인도어 비크슈)-250계의 구족계 수지 |
비구니 |
* 출가한 성년의 여자스님(인도어 비크슈니)-348계의 구족계 수지 |
사 미 |
*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지 않은 20세 미만의 남자-10계를 지님 |
사미니 |
*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지 않은 18세 미만의 여자-10계를 지님 |
식차마나 |
* 18세-20세 사이의 여성출가자(정학녀)-6법계를 지님 |
우바새 |
* 재가의 남자신자(청신사)-인도어 우파사카 |
우바이 |
* 재가의 여자신자(청신녀)-인도어 우피시카 |
잠깐만....?
사대부중 -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합친 모두를 말함
◈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 경은 뜻을 잘 알고 열심히 염불, 염송, 독송을 함으로서 공덕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 (般若心經) |
- 정식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600권의 대품반야경의 반야사상을 260자로 압축하여 표현한 경 - 공(空)의 이치와 도리를 설한 가르침 즉, 세상 만물은 인연 따라 발생하는 연기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사물들 자체로는 홀로 서지도 못하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이치 그러므로 공의 도리를 깨달아야 함을 설함 |
금강경 (金剛經) |
- 원래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 - 선종에서 독송하는 경 - 금강석 같이 견실한 지혜의 배를 타고 생사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도달하기 위한 가르침 -집착이 없는 가르침,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하라는 즉,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 |
법화경 (法華經) |
- 정식 명칭은 묘법연화경 -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경(대승과 소승불교의 갈등을 교리적으로 통일 - 성문, 연각, 보살이 결국에는 부처님의 품에서는 일불승(一佛乘)으로 귀착 된다는 가르침 - 지의 천태대사의 중국 천태종을 창종의 바탕이 된 경 |
화엄경 (華嚴經) |
- 정식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 (대승경전의 왕이라 할만한 경) - 40화엄(보현행원품), 60화엄, 80화엄 3가지가 있음 - 수행과 서원의 가르침으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타행의 실천을 통해서 세상의 실상을 실현하는 것을 설함 -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210자의 법성게를 가지고 도표로 만듬 |
열반경 (涅槃經) |
- 소승열반경 : 부처님의 열반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경과를 서술한 경 - 대승열반경 : 부처님의 열반이 갖는 의미를 밝힌 경 (일명 열반경) - 대승열반경의 3가지 사상 첫째-부처님은 법신 그 자체로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설함 둘째-열반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설함 셋째-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설함 즉, 집착을 경계하라는 중도의 가르침 |
유마경 (維摩經) |
- 원명은 유마힐소설경 또는 불가사의해탈경 - 유마힐거사(유마거사)가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한 경 - 보통의 생활 그대로 불교의 진수인 공의 도리를 체득하여 그것을 실천한 내용으로 상대와 차별을 넘어선 절대평등의 경지인 불이에 대하여 무언 설법을 함 |
천수경 (千手經) |
- 원명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 - 84귀절로 된 문장 - 천수천안관세음보살께서 대자대비 심으로 모든 중생이 안락을 얻고 모든 중생이 구하는 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부처님의 하락을 얻어 설한 경 |
아함경 (阿含經) |
-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으로 구분 - 모든 경전의 사상의 뿌리로 불리는 경 -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의 초기 교설 - 보시, 인욕, 바른 지혜, 바른 제도, 바른 도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가르침을 설함 |
사십이장경 |
- 아함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 42가지 덕목을 발췌하여 엮은 경전 |
아미타경 |
- 정토 3부경중의 하나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상주하는 아미타불을 신앙하여 선근공덕을 닦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내용 중심 |
승만경 |
- 원명은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대승불교의 특색인 재가주의 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경전(승만부인은 아유타국 왕비) |
능엄경 |
- 원명은 대불청여래밀인수증요의재보살만행수능엄경/대불정수능엄경 - 수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경전 |
능가경 |
-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부처님을 만나는 길의 가르침 - 名, 相, 分別 등의 5법과 현상계의 자성을 3가지 성질로 구분하여 변계(邊計), 의타(依他), 원성(圓成)의 3성과 8식(八識)에 관하여 설함 |
원각경 |
- 원명은 대방광원각수의전요의경 - 문수,보현 등 12만명의 보살이 차례로 등장하여 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함 |
육조단경 |
- 원명은 육조법보단경/법보단경/단경 - 중국 선종의 6조이신 혜능선사께서 조계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한 것을 기록한 자서전적인 경전 |
지장경 |
- 원명은 지장보살본원경 - 대승대진지장십륜경, 점찰선악업보경과 함께 지장 3부경의 하나 - 지장보살의 사상과 그 원력 및 중생의 업보를 점쳐 지장보살에게 참회 함으로써 모든 업장을 소멸케 하는 실천법을 설함 |
법구경 |
- 진리의 말씀을 담은 짧은 구절의 가르침(일종의 불교시집) |
불유교경 |
-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설법 |
본생담(경) |
-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 |
불소행찬경 |
-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에 관한 장편 대서사시 - 불교시인이라 일컫는 마명스님이 서술 함 |
* 이 밖에 수행과 서원 및 실천에 관한 가르침으로 2,900여종의 경전이 있습니다. |
◈ 불교 경전의 분류
내용의 구분 |
경 전 의 종 류 |
초기 경전 |
숫타니파타, 법구경, 자설경, 여시어경, 장로(니)게경 선생경, 기세인본경, 대반열반경 |
인연 ․ 설화 경전 |
본생경, 불본행집경, 출요경, 인과경, 비유경, 현우경, 백유경, 육도집경 |
삼매 ․ 수행 경전 |
안반수의경, 수행도지경, 반주삼매경, 관불삼매경, 금강삼매경, 능가경, 해심밀경 |
반야 경전 |
반야심경, 금강경, 팔천송반야경, 문수반야경, 대품반야경,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
방등 경전 |
대집경, 대보적경, 대방등여래장경, 유마경, 승만경, 원각경, 능엄경 |
법화 ․ 화엄 경전 |
법화경, 대승열반경, 십지경, 화엄경 |
밀교 경전 |
대일경, 금강정경, 유희야경, 천수경 |
계율 경전 |
우바새계경, 범망경, 보살영락본업경, 보살지지경 |
신앙 ․ 찬탄 경전 |
정토삼부경, 미륵삼부경, 지장보살본원경, 약사여래본원경, 비화경, 금광명경, 인왕반야경 |
교계(敎誡) 경전 |
유교경, 사십이장경, 부모은중경 |
※ 내용출처 : http://www.buddhistbook.co.kr/books/42.html 불교신문사
◈ 부처님의 인상(印相)
부처님이나 보살의 손가락의 특정한 모습을 印相이라 합니다.
인상명칭 |
취하는 모양 |
선정인(禪定印) |
* 결가부좌일 때 취하는 수인 입니다. *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곱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 을 위로해서 겹쳐놓되 두 엄지손가락은 서로 맞댐 |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 |
* 항마인, 촉지인, 항마촉지인으로 석가모니만이 취하는 수인 * 선정한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땅에 댐 |
전법륜인 (轉法輪印) |
* 최초로 설법할 때 취한 손 모양을 말함 * 왼손의 엄지와 검지의 끝을 서로대고 장지, 약지, 소지는 편다, 오른손도 같이 하고 왼쪽 손바닥은 위로하고 약지와 소지의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을 향한 모양 임 |
시무외인 (施無畏印) |
* 이포외인(離怖畏印) 이라고도 함. 서계신 부처님이 주로 취함 *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위로 뻗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모양 임 |
여원인(與願印) |
* 시여인, 시원인, 여인이라고도 함. 서계신 부처님이 주로 취함 * 손의 모습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다섯 손가락을 펴서 밑으로 향하고 손 전체를 늘어뜨리는 모양 임(시무외인과 반대 모습) |
지권인(智拳印) |
* 대일여래불(비로자나불)이 결하는 수인 입니다. * 좌우 두손 모두 엄지를 속에 넣고 주먹을 쥔 다음에 온손을 가슴까지 들고 검지를 펴서 세운 다음 오른손의 소지로서 편 왼손의 첫째 마디를 잡는다. 주먹 속에서는 오른손 엄지 긑과 왼손 감지 끝을 서로 댄다 |
미타정인 (彌陀定印) |
* 아미타여래인의 수인으로 묘관찰지정인이라고도 함 * 선정인과 같은 모습에서 검지를 세워서 엄지와 서로 끝을 마주 대어 검지의 등이 사로 닿게 하는 모양으로 미타정인에는 9품(九品)이 있음 |
◈ 사찰의 법구
※ 종을 매단 곳을 종루 또는 종각, 북을 매단 곳을 고루 또는 고각 이라한다.
명 칭 |
의 미 와 내 용 |
범종(梵鐘) |
* 절에서 사용하는 종으로 지옥의 중생을 깨우기 위해 울린다고 함 * 조석예경이나 기타 법요행사 때 대중에 알리기 위해 사용됨 |
법고(法鼓) |
* 조석예불 때와 의식을 치를 때 치는 북 *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나가 참다운 이치를 전하여 줌을 뜻함 * 짐승세계의 중생을 깨우기 위해 울린다고 함 |
목어(木魚) |
* 나무를 잉어모양으로 만들어 속을 비게 파낸 것으로 “방”이라 함 * 조석예불 때와 경전을 읽을 때 두드린다고 함 * 물속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을 위해 울린다고 함 |
운판(雲版) |
* 청동으로 된 판을 구름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함 *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모든 것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울림 * 참선을 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끼니때를 알리기 위해서 울리기도 함 |
목탁(木鐸) |
* 목어에서 발전된 둥근 모양으로 염불, 독경, 예배할 때 두드림 *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으로 사용됨 |
다기(茶器) |
* 부처님 앞에 청정수를 올리는 그릇(참고 : 아침은 차, 저녁은 향) |
염주(念珠0 |
* 부처님을 생각하기 위한 구슬로 염불의 도구 임 * 부처님께 예배할 때 손에 걸거나 돌리며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며 수를 헤아려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기 위함 * 백팔염주, 천염주 등이 있고 7개,16개,21개의 손목용 단주가 있음 |
죽비(竹篦) |
* 대나무를 두 쪽으로 갈라지게 만든 것으로 손바닥을 쳐서 소리를 냄 * 참선의 입정과 출정을 알리기 위해 사용함 - 각각 3번씩 침 * 장군죽비는 대형 죽비로 대중이 모여 참선할 때 졸음을 쫓는 도구임 |
요령(搖鈴) |
* 의식을 치를 때 오른손으로 잡고 흔드는 놋쇠로 만든 물건 * 의식에서 요령을 잡은 사람이 법주, 목탁을 잡은 사람이 바라지 임 * 요령사용법에는 일자요령, 심자(心字)요령, 상하요령이 있음 |
◈ 절의 또 다른 이름
0 0 사(寺) |
* 원래는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관사”였으나 스님이 머물면서 유래 |
도량(道場) |
* 불법의 도를 닦는 곳 이란 뜻 - 한문으로는 도장(道場)을 음역 함 |
가람(伽籃) |
*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 - 범어 한역 “승가람마”의 약자 |
정사(精舍) |
*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이 계시는 곳 - 범어 “비하라=寺=머무는 집” |
선원(禪院) |
* 스님들께서 참선 수행하시는 곳 |
사찰(寺刹) |
* 법당 앞에 세우는 당간(幢竿)을 찰(刹)이라고 하는데서 유래 함 |
사원(寺院) |
* 담으로 둘러진 집과 회랑이 있는 집으로 당나라 때 불교건축물에 씀 |
암자(庵子) |
* 큰절에 딸린 작은 절이라는 뜻 - 주로 큰절 안에 있음 |
산림(山林) |
* 산과 나무가 있는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이라는 뜻 |
총림(叢林) |
* 선원, 율원, 강원, 염불원을 모두 갖춘 종합도량 - 종합대학 격임 |
아란야(阿蘭若) |
*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수행하기 적당한 한적한 숲”이란 뜻 |
포교당(布敎堂) |
* 포교원이라고 함 - 불교의 포교를 전문으로 하는 곳을 말함 |
※ 이 자료는 현묵 김광호 님의 저서 “엄마 따라 절에 가기”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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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의 분류
경전은 크게 경(經), 율(律), 논(論) 세가지[삼장(三藏)]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을 시대적이며 사상적으로 구분하여 분류할 경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까지의 경전은 원시경전 최고 불전인 숫타니파타, 아함경, 열반경, 범망경, 법구경, 자타카, 백유경, 유교경, 밀린다왕문경 등을 묶어 소승경전이라 하고, 대품반야경,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무량의경, 유마경, 화엄경, 무량수경, 아미타경, 능가경 등을 묶어 대승경전이라 한다.
경전을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으로 이분하는 것은 인도로부터 내려오는 습관에 지나지 않으며 엄밀하게 말하면 대·소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전이 많다.
소승경전은 아함경에 국한하지만 대승경전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어 소·대승분류는 정밀하지도 않으며 큰 의미도 없다. 경의 분류는 천태종의 지자대사(智者大師)가 교상판석(敎相判釋)할 때 쓴 것으로 화엄경류, 아함경류, 방등경류, 반야경류, 법화경류로 나누는 오분법(五分法)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족한 점이 많아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에서는 아함부(阿含部), 본연부(本緣部), 반야부(般若部), 법화부(法華部), 화엄부(華嚴部), 보적부(寶積部), 열반부(涅槃部), 대집부(大集部), 경집부(經集部), 밀교부(密敎部)의 10류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현재 가장 합리적인 경전 분류로 인정되고 있다.
1) 아함부
아함이란 팔리어 Agama로 표기하며 말뜻은 전해 내려온 부처님 말씀을 모아서 완성했다는 의미의 경전이다. 아함경이란 모든 소승경전을 총칭하는 말로서 주로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 불교의 기본사상에 관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장아함경은 비교적 긴 내용만을 추려서 엮은 경, 중아함경은 중간정도의 길이 경을 모아 엮은 경, 증일아함경은 법수에 따라 설한 경이며 잡아함경은 짧은 내용을 모아 엮은 경이다.
2) 본연부
본연은 본생 또는 본기라고도 하는데, 주로 부처님이 아득한 과거세의 영겁다생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자아의 완성을 위한 보살행을 한 일종의 고사, 전생설화 등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경전이 자타카 즉, 본생경으로서 이 경이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생경, 현우경, 잡보장경, 육도집경, 보살본연경, 보살본행경, 보살본생만론 등으로 불려진다.
3) 반야부
대승불교 초기의 경전으로 주로 공(空)사상을 설한 경전이며 금강경과 반야심경이 들어 있다.
4) 법화부
법화경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경이며 "무량의경", "관보현경"과 더불어 법화삼부경이라고 불리어 진다.
법화경 이전에 설한 삼승(三乘: 성문, 연각, 보살)은 참다운 진리에 이르는 방편이었음을 밝히고[會三歸一]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설한 경이다.
5) 화엄부
대방광불화엄경 화엄경이라고 줄여 부르는 대방광불 화엄경은 대승보살도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이면서 부처의 성도와 과덕, 그 경계를 문학적으로 장엄하게 기술하면서 실천하는 과정에 52위의 보살이 있음을 교리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만나 대승보리심을 일으킨 뒤 52명의 선지식(先智識: 부처님의 지혜와 덕을 갖춘 이)을 찾아 불법을 묻고 보살도를 닦아 마침내 해탈경계를 성취하는 입법계품으로 끝맺는다.
6) 보적부(보적경寶積經)불교의 여러 경들을 모아 편집한 혼합 경전.
대보적경 보살이 수행하는 법과 장차 미래세에 부처가 되어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받는 수기성불 등에 관한 경전을 말한다.
보통 원제대로 《대보적경(大寶積經)》이라고 하는데, 명칭은 법보(法寶)의 누적이라는 뜻에서 연유한다. 단독경(單獨經)이 아니라 120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49회(會) 77품(品)으로 꾸며져 있는데, 매회 각기 상이한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 대체로 보살의 실천 덕목, 보리심(菩提心)의 함양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한역본(漢譯本)은 당(唐)나라에서 인도의 승려 보리류지(菩提流支)가 왕명으로 706~713년간에 그 당시까지 유포되고 있던 경전들을 모아서 이미 번역되어 있는 23권과, 뜻이 통하지 않는 것을 다시 번역한 15권과, 아직 번역되지 않은 12권을 번역, 편집한 것이다. 보리류지 외에 축법호(竺法護) ·의정(義淨) ·달마급다(達磨笈多) 등 명성 있는 번역가들이 번역한 부분도 많다.
7) 열반부
열반경은 석존께서 입멸하기 직전 라자가하에서 입멸하신 구시나가라까지 가는 동안의 행적과 설법내용을 담고 있으며 입멸 후의 다비, 사리의 분배, 봉안 등이 자세히 설해진 경으로 이 중에는 나라를 지키는 7가지 법과 교단이 번영하는 7가지 법, 유명한 자등명(自燈明)자귀의(自歸依)의 설법, 순타의 공양과 발병, 최후의 유훈(遺訓) 등이 실려 있다.
8) 대집부
대방등 대집경 대집부에 해당하는 모든 경을 다 모았다는 뜻으로 이 경전은 13종의 독립적인 대승경전들을 분(分) 또는 품(品)단위로 분류하여 하나의 경전처럼 엮었다.
주 내용은 보살이 닦아야 할 불도를 반야경의 공사상에 근거하여 설교한 것이다.
대승대집지장십륜경을 줄여서 "지장십륜경"이라고도 하는데 내용은 지장보살의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이 10종의 불륜(佛輪)을 설한 것이다.
9) 경집부
인왕경, 유마경, 입능가경, 약사경, 미륵삼부경, 부모은중경, 우란분경, 원각경, 능엄경 등이 여기에 속한다.
10) 밀교부
밀교는 다신교적이고 힌두교적인 요소가 불교에 유입되면서 대승불교 발전사에서 마지막에 나타난 사상으로 주로 진언과 다라니로 이루어져 있다.
대일경은 당 선무외 삼장이 번역했으며 구체적인 경전 명칭은 대 비로자나 성불신변가지경이라 한다. 전7권으로 되어 있으며 경의 본문은 6권이고 공양하는 순서와 방법에 대한 의식이 1권으로 묶여있다. 대일여래가 불가사의한 위신력으로 스스로 증득한 법신 자체의 경지를 말하는 경전이다. 금강정경은 불공 삼장의 역본이 유통되고 있으며 금강정 일체여래 진실섭 대승대교왕경이 있다.
우리가 신앙 측면에서 널리 독송되는 천수경과 진언은 의레적으로 밀교적 관음신앙 경전들에서 수용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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