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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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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동림사-염불모음과 염불방법

 

東林佛號-欣賞版2019(1小時版) 廬山東林寺-南無阿彌陀佛聖號-Namo Amitabha Buddha Chantinghttps://youtu.be/kSf-MKNoQ-Q

東林佛號-清唱版廬山東林寺-南無阿彌陀佛聖號-Namo Amitabha Buddha Chantinghttps://youtu.be/HKPdK04oeqE

東林佛號-修行版廬山東林寺-南無阿彌陀佛聖號-Namo Amitabha Buddha Chantinghttps://youtu.be/aBm9Ilpf1y0

東林佛號-黄慧音版廬山東林寺-南無阿彌陀佛聖號-Namo Amitabha Buddha Chantinghttps://youtu.be/I6B-TOJRQYI

東林寺佛號六字 https://youtu.be/4uBTRnNzluA

南無阿彌陀佛東林佛號德德瑪https://youtu.be/In68PvB04eA

东林佛号欣賞版https://youtu.be/3YDY73UgQks

 

東林寺佛號 https://youtu.be/j23fNGXnx8w

東林佛號-現場經行版廬山東林寺-南無阿彌陀佛聖號-Namo Amitabha Buddha Chantinghttps://youtu.be/meHZSRb-DT4

東林佛號-標準版2018廬山東林寺-南無阿彌陀佛聖號-Namo Amitabha Buddha Chantinghttps://youtu.be/Y9kjOx5_N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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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思歸東林道風形象片最終版原創視頻-廬山東林寺https://youtu.be/t1l4XFJGpAI

2019年五一佛七大安法師傳授三皈五戒》【音頻-廬山東林寺https://youtu.be/h_7U1mEpJ-U

2012年夏令營紀實-淨宗祖庭廬山東林寺https://youtu.be/t3rQiq_uMsM->젊은학생들 수행모습

東林寺佛號https://youtu.be/j23fNGXnx8w->추운겨울눈보라에도 밖에서경행염불 하시네요

 

2018年東林佛號標準版(教學)https://youtu.be/X9Cu4EcUQcg->염불방법법문***

*東林佛號教學--->要注意三方面第一要調息第二要調身第三要調心

동림불호교학--->요주의 3방면: 1요 조식(호흡), 2요 조신(), 3요 조심(마음).

(1요는 호흡을 적합하게하고, 2요는 몸을 적합하게하고, 3요는 마음을 적합하게한다)

東林佛號教學版2016原創視頻-廬山東林寺大安法師https://youtu.be/bHK4xyK5dQ4

東林佛號培訓視頻2012https://youtu.be/2xdZi46Wxzw

여산 동림사의 나무아미타불 염불 무문관(閉關) 수행법 [자항 강설]https://youtu.be/CzmhYe81XkU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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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카페] 아미타부처님의 구제와 하나님의 구원에는 무엇이 다른가?  http://m.cafe.daum.net/amtb/8L2t/917?svc=cafeapp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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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조념에 관하여

 

 

1. 질문: 임종 때 입으로 염불을 할 수 없다면 마음속으로 염불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2. 질문: 임종 때 마음속으로 한마디 한마디씩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조차 어려워, 오직 한 생각 왕생을 원하는 마음만 갖고 있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무량수경의 하품중생下品中生이 바로 그런 경우다.

 

3. 질문: 임종 때 혼자 마음속으로 염불하기가 힘들어, 다른 사람을 따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칭념을 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무량수경에서 하품하생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본인의 마음이 무기력하여 의업意業으로 사유를 할 수 없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선지식을 따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칭념을 하였지만 역시 수승하게 왕생하였다. 예컨대 본인이 글을 쓸 줄 몰라도 글을 아는 사람이 자신의 손을 잡고 글을 쓴다면 이 역시 똑같은 글이다. 임종하는 사람의 마음으로는 이미 염불을 할 수 없으므로 선지식을 따라서 한마디 한마디씩 염불하는 것 역시 똑같은 염불이고, 똑같이 왕생한다.

 

4. 질문: 평소에는 왕생을 발원하고 염불하지만, 임종 때에 혼미하여 염불을 못한다면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왕생할 수 있다.

 

5. 질문: 어찌하여 평소에 염불을 하다가, 임종 때에는 염불을 못해도 왕생할 수가 있는가?

 

: 왕생이란 결코 반드시 임종 때가 되어서 결정되는 게 아니다. 평소에 전수염불하며 진심으로 왕생을 발원하는 사람의 왕생은 평소에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임종할 때 비록 염불을 못했어도 반드시 왕생한다. 이것을 정토종에서는 “평생업성平生業成”이라고 부른다.

 

마치 큰 나무 한 그루가 자랄 때부터 서쪽을 향해 기울었다면, 톱으로 자를 때에는 비록 힘을 더 주지 않더라도 자연히 서쪽을 향해 넘어가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일찍이 배에 올라 편안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설사 배가 부두를 떠날 때에 잠이 들어서 모른다 할지라도 편안하게 피안에 도달하는 데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과 같다. 선도대사께서, 염불이야말로 왕생에 있어서 ‘정정업正定業’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다.

 

6. 질문: 염불이 정정업이라면 어떠한 사람도 염불을 하면 모조리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찌하여 임종조념臨終助念이라는 일설이 있는가?

 

: 인광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임종조념의 법은 당나라 때 선도대사님이 발명하신 것으로서, 이를테면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들이 이 법에 의지하여 조념을 한다면 역시 왕생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임종조념은 주로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이 임종 때에도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바로 윤회를 하게 되므로, 이때는 이 사람을 데리고 함께 염불을 할 수 있도록 선지식의 지도와 도움이 필요한 시기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이때 선지식을 따라서 염불을 할 수 있다면 똑같이 왕생한다. 임종조념으로도 왕생할 수 있는데, 평소에 염불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염불이 왕생의 정정업이고, 만인이 닦아 만인이 왕생한다(萬修萬人去)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7. 질문: 지장보살을 염하고 󰡔지장경󰡕‧󰡔금강경󰡕을 읽거나 진언 등을 염하는 것도 조념에 속하는가?

 

: 전부 조념이 아니다!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이 조념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조념’이란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아미타불을 불러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다른 경전과 진언을 독송하고, 또 다른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도록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임종할 때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어서, 평소에 어떤 법문을 배웠던 간에 이때에는 전부 내려놓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한다. 더 이상 난잡하게 다른 것을 부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오히려 조념을 방해하고 왕생을 파괴하는 행위다.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해 지은 죄업은 임종할 때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8. 질문: 경을 읽거나 진언을 외우거나 모든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에도 전부 공덕이 있지 않는가? 어찌하여 조념을 파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전부 공덕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장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왕생을 한다고는 보장할 수 없다. 본래 임종조념이란 정토왕생을 통하여 성불을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인데, 결국 다른 경전과 진언을 독송하고 다른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름으로써 단지 인간과 천상의 좋은 과보만을 얻을 뿐이다. 그 다음 생에 다시 불법을 만나기 어렵고 삼악도에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이 어찌 성불이란 대사大事 인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9. 질문: 조념자가 가장 확실하게 알아야 할 근본은 무엇인가?

 

: 모든 장애요소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한마디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다.

 

10. 질문: 조념을 할 때에 법문의 주요 내용은 어떤 것인가?

 

: 우선 윤회의 괴로움과 극락의 즐거움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사람에게 마땅히 왕생발원을 할 것을 권장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에게 세간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하는데, 목숨이 다할 때에 아무리 집착을 해도 소용이 없을뿐더러 왕생까지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조념자를 따라 함께 염불을 하면서 부처님이 영접하러 오시면 바로 부처님을 따라 가도록 권해야 한다.

 

11. 질문: 가장 간단한 임종법문은 어떤 것인가?

 

: ‘아무개여! 죽은 뒤에 윤회를 한다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아미타불을 부르시고 부처님의 영접을 받아 극락세계로 왕생하십시오!’

 

12. 질문: 어째서 어떤 사람은 장시간의 조념법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는가?

 

: 그 사람의 목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마음속에 걱정거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조념하러 오신 사람들은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진행하셔서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걱정거리가 남아 있다면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되도록 빨리 해결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을 도와드려야 한다.

 

만약 채무관계가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의 권속들에게‘모든 채무관계를 저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잘 해결할 테니 안심하시고 떠나십시오!’라고 임종자를 위해 말씀드리도록 해야 한다. 만약 자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저희들이 이 자녀들을 잘 부양하고 도와줄 테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려야 한다.

 

만약에 원한으로 인하여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렵다면 ‘아무개도 지금 굉장히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곧 정토에 왕생하여 성불을 할 사람이니, 그 사람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 한다.이렇게 해서 만약에 그 사람의 걱정거리를 적중시켰다면 즉시 뚜렷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13. 질문: 조념과 법문 도중에 가장 주의하고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 첫째는 잡다한 것을 피해야 한다. 한마디 아미타불을 제외하고 그 외의 것은 일절 피해야 한다.

둘째는 병자 또는 망자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더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예컨대 ‘아무개여! 당신은 평생을 염불수행 하셨는데, 구하는 게 바로 극락왕생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이므로 반드시 정념正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만약 이 순간에 정념을 잃어버린다면 평생의 수행이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모두 부정적인 메시지가 그 속에 들어 있어서 임종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부담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 순간이 되면 스스로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조념을 해주는 사람이 지혜롭게 위로를 하여 그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고 온화하도록 해주는 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땅히 ‘아무개님! 당신이 평생 염불수행을 하시고 왕생을 원하신다는 것을 아미타불께서는 일찍부터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니, 그 공부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당신을 구제해주실 것입니다.

 

현재 비록 아미타불께서 몸을 나투시어 영접하러 오신 모습을 친견하지는 못했으나, 그건 당신의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아미타불의 사람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당신을 영접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시고 저희들을 따라서 염불을 할 수 있으면 저희들과 함께 염불을 하시고, 만약에 힘이 받쳐주지 않으시면 우리가 염불을 할 테니 듣고만 계셔도 됩니다. 당신은 안심하고 여기에 누워서 아미타불의 영접만을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14. 질문: 조념자는 마땅히 어떠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하는가?

 

 

: 첫째는 상대방의 입장, 즉 임종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바로 저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인데, 현재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행위가 임종자의 마음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아미타불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되 조념을 하면서 정말 왕생할 수 있을까? 아미타불께서 진짜로 오실까? 등에 대하여 의심하고 걱정해서는 안 된다.

조념을 해주는 사람이 오로지 염불에만 집중한다면 아미타불께서 당연히 오셔서 임종자를 구제하실 것이니,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따라서 지나친 걱정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염불하는 분위기에 방해가 된다.

 

15. 질문: 임종조념을 할 때에 법문과 염불 중에 어느 것을 위주로 해야 하는가?

 

: 염불을 위주로 해야 한다. 법문은 염불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방편일 뿐이다.

 

16. 질문: 조념을 할 때에 법문을 해줄 사람이 없으면 염불만 해도 되는가?

 

: 평생 불법을 만나지 못하였거나 왕생을 원치 않던 사람이라면 간단한 법문을 통하여 왕생발원을 하도록 권장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정말로 법문을 해줄 사람이 없다면 대중들이 다함께 입을 모아 염불만 해도 자연히 온 집안이 광명으로 가득해지고 불가사의한 효과도 있을 것이다.

 

17. 질문: 조념을 할 때에 창념唱念과 칭념稱念, 육자六字와 사자四字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좋은가?

 

: 임종을 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칭념(음률 없이 하는 염불)은 창념(음률을 넣은 염불)보다 수월하고 기력소모가 적어서 힘이 덜 든다. 중병 또는 임종을 하는 사람은 기가 부족하고 정신력이 쇠약하여 창념을 따라 하기가 어려우므로 칭념을 하는 게 적합하다. 육자(나무아미타불)는 사자보다 완전하고, 사자(아미타불)는 육자보다 급박하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전후에는 사자로 칭념해도 된다. 급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부처님 명호의 완전함을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외의 시간에는 상황이 급박하지 않으므로 육자로 부르는 게 비교적 원만하다.

 

18. 질문: 조념을 해주는 연우들이 많을수록 좋은가?

 

: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몇 조로 나누어 조념을 하되 한 조에 6, 7명 정도의 인원이면 충분하다. 사람이 적으면 항상 염불소리가 통일이 잘 되는데 사람이 많으면 번번이 난잡해지기 일쑤다. 조념을 하는 현장에서는 정신의 집중과 명호의 일치를 요구하므로 필요 없는 잡담을 삼가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움직여서도 안 되며, 선풍기 등의 기계가 작동하면서 나는 소리 등도 되도록 피해야 한다.

 

19. 질문: 염불기로 연우들의 조념을 대신할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 대신할 수 있는가?

 

: 사람의 심력心力의 감응이 크므로, 염불기가 조연助緣은 될 수 있을지언정 완전히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다. 특히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전후에는 더욱 대중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소리를 내어 칭념을 해야 하므로, 절대 사람이 염불하지 않으면서 염불기만 염불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경우는 잠시 염불기로 대신할 수 있다.

⑴ 조념을 할 사람이 없을 경우.

⑵ 조념자가 너무 피곤하여 지속하기 어렵거나, 병자의 상태가 아직은 평온하여 심각하게 위급하지 않을 경우.

⑶ 임종자 자신이 확신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조념이 필요 없을 경우.

⑷ 망자를 위해 최소한 8시간 이상의 조념을 했을 경우.

⑸ 망자의 왕생이 이미 확실해졌을 경우.

 

20. 질문: 수행력이 있는 사람이 조념을 한다면, 그 효과가 일반인보다 좋지 않겠는가?

 

: 정확히 말하자면,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과 정성을 다해 집중을 하는 사람일수록 조념의 효과는 더욱 좋다.

 

21`. 질문: 가족이 직접 염불을 해준다면 그 이익은 일반 조념자보다 더 나은가?

 

: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 사이의 연분이 가깝고 염불하는 마음이 정성스러워서 쉽게 감통感通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일지라도 성의 없이 대충대충 한다면 도리어 외부에서 조념을 하러 온 사람만큼 정성을 다해 집중을 하지 못하므로, 그 이익과 효과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연우들이 오셔서 조념을 해주고 가족 또한 참석하여 서로 감동을 주고받으면서 정성을 다해 염불에 집중한다면 효과가 가장 좋을 것이다.

 

22. 질문: 일생 동안 믿음과 발원을 가지고 전수염불을 한 사람도 임종 때 가족들이 울거나 옮기는 등의 인연을 만나면 왕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 과연 일생 동안 믿음과 발원을 가지고 전수염불을 한 사람이라면 일찍이 아미타불의 광명의 섭취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임종 때 어떠한 인연을 만나던 간에 전부 영향을 받지 않고 반드시 왕생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속마음을 다른 사람이 정확히 알기는 어렵고, 게다가 조념을 하러 온 이상 반드시 모든 가능한 장애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을 안전하고 완전한 계책(萬全之策)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임종을 하는 사람의 믿음과 발원이 어떻든 간에 조념을 할 때는 가족들이 울거나 옮기는 등의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

 

23. 질문: 가족들이 울거나 병자 또는 망자의 몸을 옮기는 등의 행위가 조념의 효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가?

 

: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은 병자 또는 망자에게 고통을 더해주기 때문에, 만약 평소에 믿음과 발원이 견고하고 염불에 숙달된 사람이 아니라면 탐착하고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삼악도에 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24. 질문: 만약 가족들이 조념을 반대한다면 마음속으로 묵묵히 그 사람을 위하여 법문과 조념을 해줘도 되는가? 그래도 효과는 동등한가?

 

: 그래도 좋다. 비록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묵념을 하더라도 온몸에 자연히 부처님의 광명이 있게 된다. 만약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집중해서 묵묵히 법문을 해준다면 불력佛力과 감응이 통하여 효과 역시 불가사의하다.

 

25. 질문: 아미타불께서 염불인을 영접하러 오실 때 혼자서 오시는가, 아니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도 함께 오시는가?

 

: 󰡔아미타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관음‧세지와 여러 성중들을 거느리고 함께 영접하러 오신다고 하셨다. 다만 개개인의 인연이 다르므로 보이는 바 또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똑같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처님만 보이고 보살은 보이지 않거나, 어떤 사람에게는 보살만 보이고 부처님은 보이지 않거나, 또 어떤 사람은 소수의 성중들을 보고 어떤 사람은 다수의 성중들을 보며, 어떤 사람은 단지 연꽃과 광명만을 보게 된다.

 

26. 질문: 아미타불께서 영접을 하러 오신 것을 보면 ‘뛰어 올라가야 한다(衝上去)’는 말을 들었는데, 아미타불을 친견한 뒤에 어떻게 뛰어 올라가야 하는가?

 

: ‘뛰어 올라감’이란 말은 경전에서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어떤 사람이 상상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상 왕생을 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데, 마치 연인들이 만났을 때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서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과 같다.

염불인이 영접을 하러 오신 부처님을 뵈면 아주 자연스럽게 부처님을 향해 다가갈 것이다. 마치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따뜻한 장소를 찾게 되고,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밝은 곳을 원하는 것과 같이 모두가 당연한 경향이다.

 

더군다나 아미타불의 위신력으로 섭취해주심이 있기 때문에, 이때에 왕생을 원하는 사람은 마치 작은 풀잎 하나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난 것과도 같이 자연히 부처님을 따라가게 된다. 예컨대 󰡔관경󰡕의 구품왕생은 전부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광명을 놓고 손을 내밀어 영접을 하시는데, 염불인은 자연스럽게 연화대에 올라 앉아 부처님의 뒤를 따라 곧바로 극락세계의 연못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오로지 염불만 할 뿐, 어떻게 연화대에 올라가고 어떻게 서방의 연못으로 왕생하는지는 전부 아미타불의 소관이시므로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27. 질문: 임종할 때에 마魔가 와서 아미타불의 모습으로 변화할 수도 있는가?

 

: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임종 때는 마가 붙을 때가 아닐뿐더러, 더욱이 염불인의 임종에는 아미타불과 관음‧세지‧제대보살들께서 광명신력으로 가호해주심이 있으므로 모든 삿된 마들이 가까이 범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정오의 태양 아래에는 검은 그림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28. 질문: 임종 때 혼미 상태일 때, 그 사람을 위해 조념을 해준다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 제3집에 보면, 황영부黃英夫는 식물인간처럼 혼미한 지 43일이 되었지만, 그를 위해 법문을 하고 염불을 해주자 여전히 수승하게 왕생하였으니, 그것이 곧 명백한 증거다.

 

29. 질문: 혼미 상태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을 텐데, 어찌하여 그 사람을 위해 법문을 하고 염불을 해준다고 왕생할 수 있단 말인가?

 

: 겉모습은 비록 혼미한 상태이지만 정신은 혼미하지 않으므로, 그 사람을 위해 법문과 염불을 해준다면 여전히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그 사람이 따라서 염불을 하고 정토왕생을 원한다면 틀림없이 왕생한다.

 

30. 질문: 만에 하나 임종 때 혼미하여 부처님이 영접하러 오신 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왕생할 것인가?

 

 

: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염불감응록󰡕에서 장묘신張妙信은 뇌혈관 파열로 하루 종일 혼미한 상태였으나, 깨어나자마자 갑자기 “부처님께서 나를 영접하러 오셨으니 나는 왕생한다”라고 말한 것이 곧 그 증거이다. 이 사례가 설명하듯이, 비록 육체는 혼미한 상태이지만 정신(神識)은 혼미하지가 않기에, 부처님께서 영접하러 오신 모습을 또렷하고 분명하게 뵙고 부처님을 따라서 왕생을 할 수 있다.

 

31. 질문: 임종자 또는 망자가 아미타불을 뵌 적이 없어서 부처님을 못 알아보면 어떡하는가?

 

 

: 부처님을 뵙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초목이 봄을 모르지만 봄이 오면 자연히 생기발랄해지는 것과 같다. 사람이 죽음의 고통 속에 있을 때 부처님이 영접하러 오시는 것은 마치 초목이 태양을 향하고, 추운 사람이 따뜻한 곳을 찾는 것과 같아 자연스럽게 부처님을 향해 기울게 된다. 중생들은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할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나무에는 불의 기운이 있어서 맹렬한 불속에 넣으면 자연히 타게 되고, 얼음에는 물의 성질이 있어서 끊는 물에 넣으면 저절로 녹게 된다. 그런데 어찌 나무가 불을 모르고 얼음이 물을 모를까를 걱정하겠는가? 더군다나 부처님께서 위신력으로 가지(加持, 가피)하심이 있거늘, 어찌 범부로 하여금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시겠는가!

 

32. 질문: 살아생전에 염불을 한 적이 없던 사람이, 죽은 뒤에 조념을 해준다고 해서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육체는 비록 못쓰게 되었지만 영혼(神識)은 죽기 않고 평소보다 더욱 예민해지므로, 단지 법문을 듣고 염불을 하며 왕생을 원하기만 한다면 왕생하지 못하는 이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염불감응록󰡕 곳곳에 여러 증거가 있다.

 

33. 질문: 비명횡사를 한 사람도 조념을 해주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 곳곳에는 추락‧교통사고‧타살‧급사로 죽은 사람들이 조념염불을 통하여 모조리 왕생한 사례들이 있으니, 그것이 명백한 증거이다.

 

34. 질문: 자살한 사람도 조념을 해주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35. 질문: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난 사람도 조념을 해주면 역시 왕생할 수 있는가?

 

: 비록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난 사람일지라도 영혼이 아직 환생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위해 조념을 해주면 역시 왕생할 수 있다.

 

36. 질문: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났어도 조념을 통해 왕생할 수 있다면, 망자를 위해 조념하는 시간 배정을 어떻게 안배하는 것이 타당한가? 49일 동안 염불을 해주는 게 더욱 좋은 것인가?

 

: 조념과 천도는 망자가 죽은 시간과 가까울수록 좋으며, 그 시간을 차일피일 미룬다거나 따로 날짜를 잡는다던가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조념을 하는 시간의 길고 짧음은 마땅히 실제 사정에 따르되, 아무튼 길면 길수록 좋다.

 

37. 질문: 망자의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염불을 해줘도 왕생에 도움이 되는가?

 

: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공간을 초월하여 그 감응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염불감응록󰡕 제3집에 보면, 관영冠英이라는 사람은 대만에 살고 있었고, 돌아가신 부친은 중국대륙에 있어서 서로 수천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그가 부친을 위해 염불을 해주니 극락왕생을 했다는 사례가 바로 그 증거다.

 

38. 질문: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조념만 해주면 전부 정토왕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조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왕생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이른바 조념이란 본인 스스로 염불을 하게끔 도와주는 것으로서, (임종을 맞이한) 본인이 염불을 해야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조념을 해주더라도 만약에 본인의 선근이 적고 업장이 많으며, 왕생을 원치 않고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역시 왕생할 수 없다. 다만, 왕생을 못하더라도 목숨이 끊어질 때 한마디 부처님의 명호가 귀를 스쳐지나가기만 하면 최소한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음을 보장할 수는 있다. 그런 까닭에 그 공덕과 이익 역시 불가사의한 것이다.

 

39. 질문: 어떤 사람에게 반드시 조념을 해주어야만 왕생할 수 있거나 왕생을 확신할 수 있는가?

 

: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⑴ 부처님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

⑵ 염불을 하지 않는 사람

⑶ 왕생을 원치 않는 사람

이 세 종류의 사람은 반드시 조념이 필요하다.

⑷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진실하지 않은 사람

⑸ 잡행을 하는 사람

⑹ 의심이 많은 사람

이 세 종류의 사람 역시 조념을 해주어야만 왕생을 확신할 수 있다.

 

40. 질문: 어떤 사람이라야 조념이 필요 없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는가?

 

: 평소에 진심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왕생을 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은 임종할 때 조념의 유무와 상관없이 반드시 왕생한다.

 

41. 질문: 어째서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염불수행하고 진심으로 왕생발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역시 임종조념을 원하는가?

 

: 그것은 왕생이 결정되지 않아서 사람들의 조념이 필요한 게 아니라, 비록 왕생이 이미 결정되었지만 연우들을 모시고 임종할 때 배웅을 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일 뿐이다.

 

42. 질문: 염불인에게 어떠한 징표가 있어야 확실하게 왕생하였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 다음과 같은 징표이다.

⑴ 왕생할 때 앉고 눕는 것이 자유롭다.

⑵ 사전에 정토왕생을 하는 시간을 정확히 안다.

⑶ 염불을 하면서 숨이 끊어진다.

⑷ 임종할 때 스스로 극락세계의 거룩한 경계가 나타나고, 불보살님과 연꽃이 나타나 영접하러 오셨다는 말을 한다.

⑸ 임종조념을 해주던 사람이 극락세계의 불보살님과 연꽃이 영접을 하러 오심을 본다.

⑹ 친한 사람의 꿈속과 선정 속, 또는 염불 도중에 직접 그 사람이 정토왕생을 하는 모습이 뚜렷하고 확실하게 본다.

⑺ 죽은 뒤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으나 정수리만큼은 따뜻하다.

이상 일곱 가지 중에 어느 하나만 갖췄어도 틀림없이 왕생했다고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 외에도 염불인의 목숨이 끊어진 뒤에 얼굴에 미소를 짓거나, 신체가 유연하거나, 천상의 음악이 울리거나, 미묘한 향기가 나거나 하는 등의 현상도 기본적으로 정토왕생의 징표라고 볼 수 있다.

 

43. 질문: 만약에 위와 같은 그러한 상서로운 징조가 없었다면 정토왕생을 못했다는 것인가?

 

: 그렇지는 않다. 평소에 염불을 하고 믿음과 발원을 갖춘 사람이라면 비록 특별한 징조가 없더라도 틀림없이 왕생한다. 다만 이것은 부처님과 왕생자 본인만 알 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근본부터 말하자면, 왕생이 결정되는 것은 부처님의 원력이 헛되지 않기 때문이지 상서로운 징조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일반 초심자들은 부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원력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잠시 눈앞에 보이는 상서로운 징조들을 통해 그 사람의 믿음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44. 질문: 어떤 사람들이 왕생할 때 자유로운가?

 

: 왕왕 신분이 낮고, 우둔하고 지혜가 없으며, 마음씨가 착하고 부드러우며, 성실하게 염불을 하며, 떠벌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좋게 갈 수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여섯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⑴ 정진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사람

⑵ 어리숙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

⑶ 듬직하고 드러내기를 싫어하며 조용히 수행하는 사람

⑷ 자비롭고 착하고 유순한 사람

⑸ 염리심(厭離心: 생사를 싫어하여 벗어나려는 마음)이 간절한 사람

⑹ 숙세에 선근이 있는 사람

 

45. 질문: 어떤 사람이 왕생할 때 비교적 자유롭지 못한가?

 

: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⑴ 잡행을 하는 사람

⑵ 게으른 사람

⑶ 의심이 많은 사람

⑷ 교만한 생각으로 잘난 척하는 사람

⑸ 명예와 이익을 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⑹ 고집이 센 사람

⑺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

이상 일곱 부류의 사람들은 숙세에 큰 선근이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자유롭게 왕생하기란 어렵다.

 

46. 질문: 어떤 염불인이 미리 왕생할 시간을 알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미리 시간을 알 수 있는가?

 

: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⑴ 염불의 공력이 많이 쌓인 사람

⑵ 숙세의 선근이 깊고 두터운 사람

이런 사람들은 선정 속에서나 또는 염불을 하고 있는 도중에 불보살님의 계시를 받아서 알 수 있다. 혹은 다른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남들은 신기하게 느껴지겠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마치 눈앞에 놓인 사물을 보는 것과 같아 전혀 특별할 게 없다.

 

47. 질문: 평소에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왕생을 못할까 두려워서, 사전에 미리 연우들에게 연락하여 때가 되면 와서 조념을 해줄 것을 부탁해도 되는가?

 

: 사전에 연우들에게 조념을 부탁하는 것은 괜찮다. 그렇다고 평소에 염불수행을 하지만 왕생이 결정되지 않아 반드시 조념을 해야만 왕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조념의 유무와 상관없이 반드시 왕생한다”고 깊이 믿어야 한다. 다만 범부들은 세속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임종을 할 때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기 쉽다.

 

또한 불교를 믿지 않고 염불을 하지 않는 가족들이 세속적인 방식으로 임종을 처리해서 염불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염불인의 염원을 어긴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에 만약 연우들이 오셔서 함께 염불을 한다면 위안과 따뜻함을 배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서 현재 동일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장래에 동일한 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니, 친한데다가 더 친해진 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종 때 서로 배웅을 해주는 것은 피차간에 아주 즐겁고도 위안이 되는 일이다.

온정적이면서 장엄한 염불은 임종을 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족들에게 이별의 슬픔을 덜어주고 그분들이 불법에 대한 선근과 신심을 증장시켜주며, 정토를 동경하고 염불왕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다.

 

적잖은 사람들이 바로 연우들이 오셔서 그분의 가족을 위해 염불을 해준 덕택에 불법의 이익을 얻고 감동을 한 나머지 불교를 믿고 염불을 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조념을 해주러 오신 연우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애심愛心으로 봉사하고, 무상無常함을 체험하며, 현장에서 아미타불의 자비로운 구제를 견학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48. 질문: 평상시 염불과 임종시 조념의 사이에 마땅히 어떤 마음으로 취사取捨를 해야 하는가?

 

: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염불인이다. 임종할 때 설사 그 자리에 아무도 없더라도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청정대해중보살清淨大海眾菩薩들을 거느리시고 영접하러 오실 것이다.’

다만 사바세계의 업보가 다할 때에, 연우들이 염불을 하며 배웅을 해준다면 세속적인 인연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서로가 기뻐하고 위안이 되니, 역시 매우 수승한 일이다.

 

만약에 자신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오로지 염불수행을 하여 부처님 원력의 배를 타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에 힘써야지, 왕생을 임종조념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면 임종할 때 되도록 가서 조념과 위로를 해줘야 한다.

 

염불왕생에 관하여

 

 

1.질문: 살생을 하고 죄업을 많이 지은 사람의 경우는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아마 왕생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 사람은 누구나 죄가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바로 우리와 같이 죄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들을 구제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죄업을 지었지만 마음을 돌이켜 염불을 한다면 왕생을 못할 이가 없다. 관무량수경의 하품왕생에는 일생 동안 십악과 파계, 오역이라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임종할 때에 겨우 염불을 하였음에도 모조리 다 왕생한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2. 질문: 그렇다면 염불하는 사람들은 악을 끊고 선을 닦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 그건 또 그렇지 않다. 불법 중에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끊고 선을 닦을 필요가 없다는 법문은 결코 없다. 염불하는 사람들은 더욱 마땅히 신분과 능력에 따라 악을 끊고 선을 닦아야 한다.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서 염불을 한다면 자신과 타인에게 있어 공덕과 이익은 더욱 크다.

⑴ 죄를 지으면 많은 고통이 따르게 되고, 선을 닦으면 크게 안락하다.

⑵ 죄를 지으면 잘 죽기가 어렵고, 선을 닦으면 선종善終을 하기 쉽다.

⑶ 죄를 짓는 사람은 중생들이 싫어하여 설사 염불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신임을 얻기 어렵고, 착한 사람이 염불을 하면 중생들이 환희심을 내어 믿고 따른다.

⑷ 죄를 지으면 사회가 혼란스럽고 불법이 쇠하게 되며, 선을 닦으면 도덕이 창명昌明하고 불교가 흥성하게 된다.

⑸ 죄를 지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제불이 싫어하고,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 제불의 가르침을 수순하므로 제불이 기뻐하신다.

따라서 마땅히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며 염불해야 한다.

 

3. 질문: 악을 끊기도 어렵고 선을 닦기도 어려운데, 어떡해야 하는가?

 

: 사람이 성현이 아닌 이상, 항상 악을 끊고 선을 닦을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인연에 따라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 항상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염불을 많이 하면 된다. 이렇게 하다 보면 비록 악업을 깨끗하게 끊기는 어렵겠지만 절대 큰 죄를 저지르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고, 비록 선행을 원만하게 닦지는 못하더라도 아무튼 한 생각 착한 마음을 잃지 않은 것이니, 아미타불께서도 반드시 가피를 주실 것이다.

 

4. 질문: 채식을 하지 못했는데도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念佛感應錄: 정종법사 편집, 전체 3집)에는 많은 분들이 채식을 하지 않았지만 전부 염불왕생을 한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상황을 봐야겠지만, 채식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채식에는 이로운 점들이 많다. 부처님의 자비심에 수순하고, 중생들에게 두려움이 없는 무외無畏를 베풀며, 자신의 건강에도 이롭고, 에너지를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며, 임종할 때에 업장을 줄일 수 있다.

 

5. 질문: 삼보에 귀의를 하지 않았어도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에 여건이 허락하다면 그래도 귀의를 하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귀의를 한다는 것은 신앙을 정하고 불법문중에 들어와서 불제자가 되는 첫걸음인데, 어떻게 염불을 하고 싶고 왕생을 하고 싶은 사람이 귀의를 원치 않을 수 있겠는가?

 

6. 질문: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염불을 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진정한 발보리심(중생무변서원도: 중생이 가없어도 다 건지기를 서원합니다)은 매우 어렵다. 만약에 반드시 보리심을 발해야만이 왕생할 수 있다면, 감히 이 세상에 왕생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려고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보리심을 발해야만이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관무량수경의 상삼품上三品의 왕생에는 비록 발보리심이 있지만, 중하육품中下六品의 왕생에는 전부 발보리심이 없다. 󰡔염불감응록󰡕에 수록된 왕생사례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보리심이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니, 하물며 발보리심이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비록 보리심을 모르지만 염불을 하고 왕생을 원한다면 모조리 왕생할 수 있다.

 

일단 왕생을 하고 나면 자연히 성불하고 중생구제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토염불법문의 묘한 점이다. 정토법문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왕생을 하려는 마음(願生心)을 일으키는 것인데,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곧 정토법문에서의 보리심이며, 이 마음은 사람마다 다 일으킬 수 있는 마음이다.

 

7. 질문: 만약에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지 못하였다면, 그래도 염불을 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경󰡕에서 중품하생 이하는 전부 계를 받은 적이 없거나, 계를 파하고 죄를 지었지만 임종할 때에 염불하여 왕생을 한 사람들이다. 일반법문의 수행은 전부 ‘부지런히 계‧정‧혜를 닦아 탐‧진‧치를 소멸함’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계율은 가장 기초가 된다. 따라서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지 못하면 인간과 천상(人天)의 선과善果조차 얻을 수 없는데 해탈하여 성불을 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것은 필경 너무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계‧정‧혜를 닦아 탐‧진‧치를 소멸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고도 드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많고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염불이라는 특별법문을 설하신 것이다. 이 염불법문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생각하며 부름)하면서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기만 하면 되므로, 왕생은 단지 염불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지, 계정혜가 있고 없고와는 무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의지하는 것은 오직 배의 힘이므로, 승객이 수영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와는 전혀 상관없이 배를 타기만 하면 전부 강을 건널 수 있다.

 

염불 역시 마찬가지다. 염불을 하기만 하면 전부 아미타불의 원력의 배를 올라탄 것과 같아, 계정혜가 있든 없든 모두 왕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자대비’라고 하고, ‘특별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8. 질문: 그렇다면 염불하는 사람은 계율을 지킬(持戒)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 계율이 비록 왕생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염불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각자 자신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 지킬 수 있는 데까지 계율을 지켜야 한다.지계持戒에는 지계의 공덕과 이익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몸이 불구인지 건강한지는 비록 왕생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불구의 고통을 받기를 원치 않고, 왕생과 무관하다고 해서 자신을 보호하는 데 소홀히 하여 몸이 불구가 되거나 손상을 입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계에는 지계의 안락함이 있고, 파계에는 파계로 인한 괴로운 과보가 있다. 다만 계율을 잘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꾸준히 염불을 하라는 것이지, 결코 염불하는 사람들은 계율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관무량수경의 구품 중에 상중육품上中六品은 전부 계를 지켰거나 선행을 닦은 사람들이 염불왕생을 한 것이고, 하삼품下三品은 파계를 했거나 악업을 지은 사람들이 염불왕생을 한 것이다.

 

9. 질문: 비록 염불을 하고는 있지만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잡념이 분분한데, 그래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에 수록된 여러 왕생사례들은 전부 평범한 염불인들로서, 많든 적든 간에 잡념이 있었지만 모두 왕생하였다. 사실상 마음이 청정하고 못하고, 염불을 하는 데 잡념이 있고 없고는 왕생을 하고 못하고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전수염불專修念佛을 하면서 진심으로 왕생을 원한다면, 설사 온종일 잡념이 분분할지라도 조금도 아미타불의 구제를 막을 수 없고, 조금도 왕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이 몸이 이미 큰 배 위에 앉아 있는 이상, 설사 마음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하더라도 안심하고 배 위에 있으면서 배에서 내려오지만 않는다면 이 배는 여전히 우리들을 태우고 피안에 도착할 것이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아미타부처님께 귀명歸命하여 우리들의 해탈과 성불의 생명을 부처님께 바치고, 꾸준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서 안심하고 아미타불의 구제에 맡긴다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아미타불의 대원大願의 배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며, 아미타불과 한 몸(一體)이 되는 것이다.

 

설령 제6의식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전진영사前塵影事’와 ‘허망상상虛妄想像’일 뿐이어서, 그 자체는 생멸하고 무상하여 자성이 없는 것인데, 어찌 아미타불의 구제를 방해할 수 있겠으며, 아미타불의 대원력의 배를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아미타불의 걸림 없는 광명(無碍光)은 아주 가뿐하고도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우리들을 서방극락세계로 구제하실 수 있다.

 

다만 한 사람에게 망상과 잡념이 많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기가 쉽지 않고, 마음속에 번뇌가 많다는 것이므로, 염불을 하는 사람은 그래도 잡념이 적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있다. 바로 최대한 세상사에 대하여 담담하게 바라보고 염불을 많이 하면서 오래오래 지속하다 보면 자연히 잡념들이 줄어들 것이다. 인광대사님의 ‘십념기수법十念記數法’은 마음을 집중하여 염불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10. 질문: 왜 나는 염불을 하지 않을 때는 마음이 청정하고 망념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염불만 하면 도리어 망념이 더 많은 것을 느끼는가?

 

: 염불을 하지 않으면 이 사람 전체가 번뇌와 습기를 따라가게 되고, 망념과 동일한 방향이 되므로 망념이 있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염불은 망념과 역방향이어서, 염불만 하면 망념이 엄청 많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차역에서 붐비는 인파를 따라 개찰구를 통과하여 안쪽으로 들어갈 때에,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크게 느낄 수 없는데 이것은 방향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반대의 입장이 되었을 때, 인파가 안쪽으로 밀려오는데 본인 혼자서 바깥으로 빠져 나오려고 한다면 즉각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인산인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실은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사람의 수는 똑같이 많다. 염불하여 생사의 흐름에 역행해서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것도 바로 이와 같다. 처음 염불을 하는 사람들이 망념이 많음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다.

 

11. 질문: 염불을 할 때에 망념이 많다는 것은 염불이 효험이 없다는 게 아닌가?

 

: 망념이 이렇게 많고, 이렇게 치솟아 오르는데도 여전히 염불을 할 수 있고 망념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바로 염불의 효험을 얻은 것이다. 마치 개찰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안쪽을 향해 몰려드는데, 본인 혼자서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큰 힘을 지닌 사람이거나 위세가 있는 사람, 예컨대 국왕이 역을 나온다면 만인이 전부 길을 양보하고 회피해야 하므로, 이때에 우리는 국왕의 뒤를 좇아 그 기세를 따라 밖으로 나올 수 있다.

 

한마디 아미타불은 마치 국왕과도 같다. 아미타불이 우리들을 구하러 오신다는 것은, 곧장 삼악도로 달려가는 우리들을 업력과 망념의 흐름으로부터 구제해주시는 바이므로 무시겁 이래의 망념의 방향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단지 부처님 명호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순조롭고 편안하게 육도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음속에 부처님의 명호를 한 번 떠올리면 모든 망념이 자연히 피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망념이 많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방향이 상반되기 때문인데, 사실상 이 망념은 더 많아진 것도 아니고, 아미타불의 구제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12. 질문: 글을 쓸 줄도 모르고 독경을 할 줄도 모르며 지혜도 없는 사람인데, 염불을 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 속의 여러 불자님들은 글을 모르지만 전부 왕생하였다. 사실상 글을 알고 모르고, 독경을 하고 안하고, 지혜가 있고 없고는 왕생을 하느냐의 여부와는 서로 조금도 관계가 없다.

 

13. 질문: 매일 염불을 하고 있지만 그 숫자가 많지 않다.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염불의 숫자에는 정해진 기준이 없다. 각자 있는 능력껏 염불을 하면서 진심으로 왕생을 원한다면 비록 염불의 숫자가 적더라도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에 기록된 염불인들은 매일 많게는 수만 번, 적게는 수천 수백 번씩 염불하였지만 모조리 왕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증명인 셈이다.

 

14. 질문: 그렇다면 정진하여 염불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단 말인가?

 

: 각자 능력에 따라 마땅히 정진해야 한다. 틈만 나면 염불을 해야 하는데, 특별히 마음을 쓰고 머리를 써야 할 상황이 아니면 전부 염불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염불을 습관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염불을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망상잡념을 생각하게 되고, 망상잡념을 생각하면 바로 업장과 감응하여 업장만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염불을 해서 부처님과 감응하여 업장을 소멸하고 복을 증장시키는 것만 못하다.

 

15. 질문: 나는 이미 나이도 많은데다가 염불한 시간도 짧다. 그런데도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무량수경의 하품왕생에는 임종 전에 단지 열 번 내지 한 번 정도 염불을 한 사람들도 다 왕생한다고 하셨으니, 이보다 염불의 시간이 더 짧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16. 질문: 그렇다면 평소에 염불을 안 하다가, 임종할 때가 돼서 염불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

 

 

: 아니다. 이런 생각들은 굉장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고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몸에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어 수시로 폭발할 위험이 있는데, 다만 정확히 언제 폭발할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라 하자. 그렇다면 일단 이 사실을 알고 나서는 즉각 폭발물을 떼어내야지, 곧 폭발하기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떼어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종할 때를 기다렸다가 염불을 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단 말인가? 절대 정해진 임종의 시간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임종이 정해지지 않은 이상, 현재의 일분일초가 전부 임종일 수가 있으므로, 임종염불이 곧 현재염불이요, 현재염불이 곧 임종염불이다. 더군다나 사람이란 전부 현재 이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인데, 현재를 제외하고 임종이란 없다. 그러니 당연히 지금부터 염불을 해야 한다.

 

또한 현재에 염불법문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염불을 하지 않는 사람이, 확정지을 수 없는 임종을 기다렸다가 염불을 하겠다는 것은, 염불의 이익을 모르고 있는 것이며 진심으로 염불할 생각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진심으로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재물을 보는 순간 바로 그 재물을 얻고 싶을 것이요, 진심으로 병을 고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묘약이 있다는 사실을 안 즉시 그 약을 복용하고 싶을 것이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이 면사패免死牌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면사패를 즉각 손에 넣고 싶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사전에 미리 면사패를 몸에 지니면서 잘 보관해 두지 않는다면, 어느 날 야밤에 끌려 나가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 때가 되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임종할 때에 과연 염불을 할 수 있다면 당연이 똑같이 왕생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죽을 때에는 몸은 사대가 분리되고, 마음은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번뇌하며, 게다가 권속들이 아버지, 어머니 불러가며 큰 소리로 울부짖고, 원수가 와서 목숨을 앗아가려 하는데, 이때가 되면 좀처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평소에 부처님이 계심에도 부르지 않던 사람은 이때가 되면 부처 ‘불’자는 일찍이 어디에다 버렸는지도 알 수 없거늘, 어떻게 다시 염불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죽음의 인연이란 일정치가 않아, 공난(항공사고), 해난海難, 교통사고, 광난(礦難, 광산 사고) 등 여러 가지 사고사가 있고, 몸에 칼을 맞고 총탄이 머리를 관통하며, 독약, 독가스 등으로 인한 죽음도 있으며, 중풍으로 언어능력을 잃고, 혼미하여 정신이 맑지 않으며, 목이 잠기고 혀가 오그라들면서 죽는 등 수많은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너무나 갑작스러워 미처 막아낼 방법이 없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에만 걸려도 염불을 할 수 없다.

 

17. 질문: 보아하니, 지금부터 염불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 그렇다! 일찍 염불하면 일찍 평안하고, 일찍 재난을 면하고, 일찍 업장이 소멸되며, 일찍 복이 자라나고, 일찍 왕생이 결정된다.

 

 

출처/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 전문보기 → http://cafe.daum.net/amtb/5IRX/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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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그가 아미타부처님께서 오신 것을 본 것이 첫 번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채 가시지 전에, 여흥이 다하기도 전에, 관음·세지 양대보살님이 나타나십니다. 아! 파도가 더 크고 기쁨도 더 충만합니다. 숨 돌릴 새도 없이 또 한량없는 청정대해중보들이 나타나십니다. 오! 거기에는 선도대사·법연상인·인광대사…… 전부 오셔서 그를 영접하시니, 기쁨 중의 기쁨이요,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습니다.

 

이 기쁨도 채 가시지 전에 아미타부처님께서 보배 손을 아래로 드리우자 한 가닥 금빛이 손에서 “쉭”하고 나오고, 미간으로부터, 온몸의 팔만사천 털구멍으로부터, 보배 손바닥으로부터 빛이 나와 그 사람의 몸을 비추자 즉각 모든 병고가 무더운 여름날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즉각 더위가 사라지듯이 모든 병고가 당장에 사라지고, 심신이 유쾌하고 즐겁습니다. 또한 남은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아미타부처님께서 “선남자여, 그대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까닭에 내가 그대를 맞이하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아! 부처님께서 그 사람을 선남자라고 찬탄하며 영접하러 오셨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때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합니다. ‘아! 너무 좋다! 이번 생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틀림없이 왕생하는구나!’ 이렇게 머리를 숙이고 있을 때 아미타부처님께서 보배 손으로 한 번 손짓하고 가볍게 들어 올리시니, 그는 마치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전혀 힘들이지 않고 아미타부처님의 보배 연화대에 오릅니다.

 

따라서 그가 밑에서 부처님께 아직 절을 올리기도 전에 이미 연화대에 오른 것입니다. 연화대에 오르니 아미타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사바세계에서 고생이 많았지? 이제 나와 함께 극락세계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렇지요? 머리를 들어보니 이미 극락세계에 도착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가 직접 부처님을 만나 뵙고 직접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겠습니까? 극락세계에 도착만 하면 그의 몸은 바로 크게 변합니다.

 

이때 연꽃이 열리면 그는 천천히 연화대에서 내려옵니다. 내려온 다음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께서 광명의 법복을 그에게 입혀주시면 그는 바로 보살동자의 몸을 나타내고 자신의 몸에도 광명이 나옵니다. 천천히 걸어서 황금 땅을 밟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황금으로 되어 있는 땅이구나! 내가 사바세계에서 여태까지 독경을 했지만 이런 모습일 줄을 몰랐네!” 좋아요! 이때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께서 “아무개야, 이제 우리가 자네를 데리고 대자대비하신 아버지 아미타불을 뵈러 갈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그래서 아미타부처님을 뵙게 되는데(이 부처님은 화신불이 아니라 진정한 보신불입니다. 신상身相이 원만하고 광명은 시방세계를 두루 비춥니다), 이때 어떻게 예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깊이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머리를 드는 사이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되고, 즉각 여섯 가지 신통을 얻게 됩니다. 법안法眼으로 모든 세계를 두루 볼 수 있어서 동방의 아촉비불…… 등등을 전부 보게 됩니다.

 

이때 시방제불께서는 동시에 보배 손을 내밀어 그에게 마정수기를 해주시며 “아무개야, 그대가 나의 가르침에 수순하여 극락세계로 왔으니, 그대는 선남자이고 그대는 진정한 불제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극락세계의 갖가지 법희들이 몸에서 샘솟듯 하는데, 복을 실컷 누리기도 전에 ‘시방제불은 나에게 교화의 은덕이 있으니, 지금 나는 그 부처님들을 예방하여 직접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 생각이 들자마자 아미타부처님의 본원 위신력의 가피를 받아서 순식간에 시방으로 분신을 나투어 시방제불들(관음·세지·지장·미륵……)을 남김없이 예방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선도대사님께서 『반주찬』에서 적은 것을 보면, 우리의 왕생은 굉장히 생생하고 멋지고 기뻐하며 장면도 굉장히 성대합니다. 극락세계에 도착하면 관음·세지가 의장대의 대장이 되어 우리를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시고, 온갖 보살들이 우리를 위해 공중에서 신통변화를 보이시며 새로 왕생한 사람들을 환영해 주십니다.

 

우리 같은 죄악범부를 환영해주기 위해 보살님들이 신통변회를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우리를 데리고 법림法林으로 들어가거나 보루寶樓에 들어가거나 연못에 들어가거나 혹은 허공모임에 참석하든가 연꽃모임에 참석하든가, 온갖 회상會上에서 여러 불보살님께서 하시는 갖가지 묘법을 듣게 됩니다. 이 얼마나 자재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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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승에서 한번만 명호를 불러도 아미타불께서 몸을 나투신다고 하는데, 이승에서 아미타불은 왜 허공중에 나투시지 않습니까?


(정종법사 답)

 

: 이 질문은 엄밀하지가 못합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이승에서도 몸을 나투십니다. 누가 언제 염불을 하던 간에 아미타불께서는 항상 허공중에 몸을 나투시지만 당신이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볼 수 없다고 해서 나투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투시더라도 당신이 반드시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허공중에 나투시는 아미타불의 모습을 뵐 수 없을까?”

 

  그럼 왜 이승에서 뵐 수 없지만 저승의 중생들은 뵐 수 있을까요? 하나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겠습니다.

 

  예컨대 대야 속에 담겨 있는 물이 끊임없이 출렁일 때 주변의 경물景物들은 그 속에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대야의 물이 크게 출렁이지 않고 차츰차츰 고요해지려 할 때 주변의 경물들은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하면서 차츰차츰 나타나게 됩니다. 로 그런 이치입니다. 상대적으로 고요할 때 나타나고, 출렁일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죠.

 

  상대적으로 말한다면, 저승은 업을 짓는 곳이 아니라 업을 녹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승의 중생들의 마음은 모두 비교적 맹렬하여 업을 짓는 것도 아주 용맹스럽고 의식의 힘도 아주 강합니다. 마치 대야 속의 물처럼 이승에서 중생들의 마음의 물결은 모두 출렁이고 있고 전체 업의 기운도 특별이 강성하여 방해가 매우 크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물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승의 중생들의 마음은 업을 짓는 게 아니라 업을 녹이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방해가 비교적 적습니다. 그래서 쉽게 나타나는 거죠.

 

  또 마치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낮에 어떤 곳에서는 맑게 들리지 않거나 아예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소리가 너무 시끄럽게 때문이죠. 그러나 밤이 되면 주변이 모두 조용해졌기 때문에 이 때에는 아주 맑게 들립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승의 사람들은 생각과 의식이 번잡하고 출렁이고 있는데,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공업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쉽게 불보살님들의 현신을 뵐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모두가 집중하여 일치된 목소리로 함께 염불을 한다면, 예컨대 임종조념 또는 큰 법회를 하는 경우에 왕왕 서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건 거짓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때 대중들의 마음이 모두 비교적 정성스럽기 때문인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전혀 출렁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비교적 많겠지만, 상대적으로 사회에서 예를 들어 기차역에 수천 수만명이 이런저런 온갖 생각하는 것과는 당연히 다르겠지요.

 

  비록 법회를 하는 도중에도 출렁이는 생각들이 있겠지만, 필경 대중들의 마음이 부처님쪽에 모여 있고 큰 방향이 모두 일치하기 때문에 이 곳의 에너지와 기운은 비교적 고요하게 됩니다. 이때에 만약 대중들이 모두 염불을 한다면 어떤 서상들은 쉽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사 어떤 사람이 불보살님을 뵙고 연꽃을 보았다하더라도 이런 서상들은 극락세계와 같은 걸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일부만 나타난 것입니다. 마치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대야의 물이 그다지 출렁이지 않을 때 바깥 경물들의 그림자가 그 속에 있지만 길어졌다 짧아졌다하므로 본래의 경물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완전히 같게 하려면 반드시 완전히 정지되어 거울처럼 고요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본 불상은 크고, 어떤 사람이 본 불상은 작으며, 어떤 사람이 본 불광佛光은 크고, 어떤 사람이 본 불광은 작습니다. 이는 개개인마다 마음이 고요한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차별이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염불만 하면 우리가 보던 못 보던 상관없이 아미타불은 사실상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번뇌에 눈이 가려져 뵐 수는 없지만 대자비는 피곤함이 없이 항상 나를 비추신다.” 비록 우리들의 눈이 번뇌로부터 가려져 뵐 수는 없지만, 아미타불의 대자비는 피곤함이 없이 항상 우리들을 비추시고 있습니다.

 

출처 / 純淨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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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불, 아타불

 

(능행스님 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좋은 일도 못하고 죄만 짓고 살았는데...... 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죽음 앞에서 불안해하는 환자에게 나는 아미타불을 부르게 한다.

아미타불은 영원한 생명의 빛을 의미한다.

임종시 아미타불은 우리의 영혼을 맞이하려 오신다

 

이러한 믿음은 내가 죽어가는 환자들 곁에서 염불하면서,

임종한 환자들은 통해 실제로 경험한 사실

이다. [극락왕생 사례 게시판의 능행스님 글(닉네임: 정토마을)을

 고하세요  http://cafe339.daum.net/_c21_/bbs_list?grpid=2LVx&fldid=ZEF ]

 

 

마지막 한 호흡까지도 염불을 하셨던 육십칠 세 할머니. 환자가 임종한

병실에선 미묘한 향기가 진동하였고. 부처님께서 자신을 데리러 왔으니

극락으로 먼저 간다고. 스님도 나중에 그곳으로 오시라고,

그곳에서 다시 만난자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는 웃으면서 가셨다

 


예순네 살의 위암 환자는 종교가 없는 분이셨다.

차분하고 강직해 보이시던 환자는 늘 "나는 나를 믿는다!" 라고

말씀하시는 2남 3녀의 아버지였다

무엇을 믿는냐고 물어보면 "착하게 살아왔으니 착한 곳으로 가겠지유"

하시면서 웃곤 하셨다

 

 

다가가서 "착한 곳을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했더니 그러라고 승낙하셨다

 

"자~ 이렇게 하면 저절로 길이 생기게 될 거예요"

 

"어떻게유......?"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하고 주문을 계속 외우면 착한 곳으로 가게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좋아라 하셨다. 그 후로 환자는 아미타불의 '미'자는 꼭 빼먹고

 '아타불, 아타불' 하시며 염불 하셨다

 

 

 내가 "아미타불인데......" 그러면

 "기운이 없어서......" 하시며 또 "아타불......" 그렇게 두어 달 하시고 떠나기 나흘 전,

 손을 흔들며 나더러 들어와 당신 곁에 앉기를 권하셨다.

 

 

 "저기, 그게 꿈은 아닌 것 같은디...... 스님 주문 때문에유. 길이 다 만들어졌시유.

 그래서 지가 저승에 갔다 온 것 같은데유"

 

 "어떻게요?"

 

"'아타불' 하면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아 저 마당에 여러가지 꽃으로

 만들어진 엄청 좋은 마차가 서 있고, 어린아이가 날더러 타라고 해서 탔더니

 꽃마차가 연꽃이 무지하게 많이 핀 들판을 지나서 엄청 긴 다리를 건너 꽃과

 나무들이 끝없이 늘어선 길을 한참 달려가더만유. 그러다 내리라 해서 내렸더니

 이제 이곳에서 살게 될 거라더만유".

 

 

목이 말라서 개울에 흐르는 맑은 물을 먹어도 되겠냐고 아이에게 물었더니

그러라고 해서 마셨는데 물맛이 달고 시원한 게 그리 상쾌하고 좋더란다

 

"그동안 물먹기도 힘들었는디...... 창자가 다 시원하데......"

 

빛이 하늘에서 아지랑이처럼 당신 몸에 설설 내리는데 몸이 새털처럼 가볍고

좋아서 병이 다 나은 줄 알았다고 하신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셨어요?"

 

"그 애에게 부탁했지. 내가 살던 데 잠시 갔다 와야 할 일이 있다고......"

 

소도 새끼 낳을 때가 되었는데 어떻게 하라고 일러 주어야 하고.

작은애(작은 아들은 객지에서 번 돈을 모아 아버지께 소를 사 드렸고,

아버지는 소를 키워 새끼를 낳으면 팔아서 통장에 작은 아들 몫으로

저축을 하셨다)결혼식 때 집이라도 한 칸 사주려고 모아둔 돈도 집식구에게

맡겨야 하고...... 정리할 게 있다고 잠시만 같이 가자고 했단다

 

"좋았시유...... 암만, 그만하면 최고지."

 

 만족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내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나도 없는디, 그기가 그리 좋시유"

 

하시자,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며 웃으시더니

 

"당신도 애들하고 잘 살다가 그기로 와"

 

"저 양반 참말로 죽을란갑네. 그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가유."

 

"저기 시님께 물어보면 되야."

 

흘 동안 평안히 더 계시면서 아들딸  다 만나보고, 새끼 밴 소도 부탁하시고,

베개 안에 넣어둔 통장도 위임하시고, 가무잡잡하고 마른 얼굴에 환한 미소를

아내와 나에게 선물로 주시고 '아타불, 아타불'을 부르면서 가셨다.

 

 

_________________________

 

불교 호스피스(http://www.jungtoh.org/)에 원력 크신

능행스님의  저서   ('이 순간' 2010년 4월 발행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BOK00010165941IN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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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부처님의 구제와 하나님의 구원에는 무엇이 다른가? 


(정종스님)


대답: 어떤 종류의 구제든 간에 모두 귀하고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간략히 말하면 양자에는 열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 공간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구에 국한되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시방의 일체 세계에 편만해 있습니다.


둘째: 시간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마감일이 있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영원히 멈추지 않습니다.


셋째: 넓고 좁음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인류에게만 미치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널리 일체 천인·인간·지옥·아귀·축생 등의 육도중생에게 미칩니다.


넷째: 확률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한 사람에게 단 한 번의 기회만 있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누구나 무수한 기회가 있어서, 설사 금생에 구제되지 못해 삼악도에 들어가더라도 아미타부처님은 여전히 따라다니면서 포기하지 않고 구제를 해주시거나 혹은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여 구제될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지가 않아서 반드시 일부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구제될 수 없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설사 죄업을 짓고 지옥에 들어간 중생일지라도 맹세코 한 중생도 빠짐없이 구제를 해주시기 때문에 끝없는 시간으로부터 볼 때 어떠한 중생도 백퍼센트 극락정토로 구제될 확률이 갖고 있습니다. 


다섯째: 역할이 다르다. 하나님은 구원자이자 또한 심판자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은 순전히 구제자이지 심판자가 아닙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죄업을 짓고 고통 받는 중생을 자비로 가엾이 여겨 죄업이 두텁고 고통이 깊을수록 더욱 구제를 해주시고 나아가 영원히 아비지옥에 떨어진 중생도 맹세코 구제하려 하십니다. 


여섯째: 어렵고 쉬움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하게 믿음만 강조하여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간단한 수단이 부족한 듯하다보니, 누군가 믿지를 못한다거나 믿음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언제 어디서나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할 수 있어서 편리하고 간단하고 쉽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들이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믿음이 깊든 믿음이 얕든 간에 모두 아미타부처님과 연결되고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의 비춤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일곱째: 이익이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천당에 태어나게 하지만, 진리와 완전한 한 몸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조물주는 영원히 평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께서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왕생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성불하고 진리와 완전한 한 몸이 되어 전혀 다름이 없는 절대적으로 평등한 진리의 경계입니다.  


여덟째: 자비가 다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구원은 자비가 작으면서 한계가 있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자비가 크고도 무한합니다.


아홉째: 이론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창세론을 기반으로 합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만들었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조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구제를 해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은 불성과 연기론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고, 또 불성은 청정하고 평등하여 한 몸으로 둘이 아님이 진리의 본체이므로 창조도 없고 피조도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이 불성을 미혹하고 스스로 전도되어 죄업을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제불보살님들은 이 불성을 깨달아 대해탈과 대자유를 누리면서 중생이 미혹되고 전도되어 죄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연스럽게 평등한 대자비심으로 구제를 해주려고 하십니다.


열 번째: 깨달음이 다르다. 만약 “사랑이 곧 진리이다”라고 말한다면, 사랑의 깊이와 넓이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에 따라 결정됩니다. 두 가지를 서로 비교해보면, 매우 분명한 것은 유신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주·신)의 사랑과 아미타부처님의 자비는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신종교에서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한계가 있다 보니, 마치 안개 속에서 꽃을 보는 것처럼 억측의 성분이 있어서 합리적인 질의를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불교와 같이 확철대오를 통해 대자대비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이치와 사실은 어떤 질의도 이겨낼 수 있는 것만 못합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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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극락을 보고 온 지윤이 엄마 전화를 받고

(비움과 소통 대표 김성우 거사님 글)

광우스님(서울 화계사 교무)의 소나무에 소개된, 6살 허지윤 양(지금은 8세)이 꿈에 지장보살님의 손을 잡고

극락구경을 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 어머니(강릉 김경아 보살)께서 정공 큰스님 법문을 유튜브를 통해 보다가

제게 전화를 주셔서 극락세계에 대한 여러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불교TV 내용 보다 더 훨씬 리얼하네요).

무량수경에 묘사된 극락세계 불보살님들과 극락조, 칠보연못, 음식 등등 경전에 묘사된 그대로에 다가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극락세계와 7대 불보살님의 모습에 엄청난 환희심이 났습니다.

광우스님은 지윤이가 출가했으면 하는 뜻을 비췄고 아미타불 염불행자가 된 가족 모두 찬성이라고 합니다.

극락에서 다시 온 원력보살(在來人)일까요? 한국불교에 소중한 자산이 탄생하였습니다.

잘 자라서 일가친척 43인이 출가한 일타스님 외증모님처럼 정토법문을 증명하는 큰 역할을 다하기를 발원합니다.

유튜브 : https://youtu.be/kqbR0k2E6KY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광우스님의 소나무 전체보기→ http://www.btn.co.kr/pro/Program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1&page=6&pid=P938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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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과 “나무아미타불”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부르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대답: 대다수 중국인들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이 명호에 대해 낯설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러본 적이 있고 본 적이 있으며 혹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부처님 명호는 거의 불교의 대명사가 될 정도입니다.


  이 명호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어떻게 불러야 효과가 있을까요?

  신앙이 없고 잘 모르는 사람도 부를 수 있을까요? 

  부르면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일반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불법의 입장에서 말하면 이 명호는 우리가 들어봤거나 본 적이 있는 모든 명사·이름·언어와 다릅니다. “나무아미타불”은 부처님의 명호로서 사람의 이름과도 같습니다. 부처님의 이름은 사람의 이름과 같은 점이 있는데, 모두 한 사람을 대표하거나 한 부처님을 대표합니다. 예컨대 우리 사람의 이름이 곧 한 사람을 대표하므로 이름과 실체는 관련이 있지요. 부처님의 명호는 곧 부처님 자신이며 부처님의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실질적인 작용이 없고 이익이 없으며 공덕이 없습니다. 사람은 어느 한 사람의 이름을 한 평생 부르지 않습니다.


  그럼 부처님의 명호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부처님의 명호에는 부처님의 공덕과 이익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름은, 예컨대 유엔 사무총장의 경우, 만일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 아니고 일반인이라면 그의 이름은 단지 그 사람 개인의 신분·가정·능력·복보·운명 등등만 대표할 뿐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가 유엔 사무총장직을 맡게 되면 이 이름은 달라지겠지요. 그 속에는 그의 권력과 이 직업에 상응하는 모든 할 수 있는 일들이 이 이름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그가 한 번 사인을 하면 바로 그에 상응하는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부처님의 명호는 더욱 달라서 부처님의 명호는 성불을 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세간 사람들 중에는 아무개 부처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명호는 수행공덕이 원만하여 성인이 되어야만 비로소 이러한 이름이 있게 되기 때문에 명호와 우리 범부들의 이름은 다릅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와 광대한 신통은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바로 부처님의 명호 속에서 명호를 통해 작용을 일으킵니다.


  민간에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염불을 하거나 관세음보살을 부를까요? 다들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합니다. “관세음보살님, 제가 평안하고 부귀하고 돈 많이 벌고 높은 관직이 오를 수 있게 살펴주십시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는 관세음보살님의 신통·지혜·원력을 대표하고,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는 아미타부처님의 신통·지혜·원력을 대표합니다.


  부처님의 명호자체에 공덕과 이익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기만 하면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신앙하고 언제 명호를 만났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나무아미타불”을 눈으로 봤든 귀로 들었든 상관없이 모두 공덕과 이익이 있습니다.


  『관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염념 중에 80억겁의 생사중죄를 소멸하느니라.


  80억겁은 80년 8만년이 아닌 80억 뒤에 또 ‘겁’이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겁’이란 얼마나 긴 시간이냐면 경전에 하나의 비유가 있는데 반석겁磐石劫이라 부릅니다. 큰 돌이 있는데 길이가 20킬로에 넓이도 20킬로, 높이도 20킬로가 됩니다. 천상에 사는 천인이 백년마다 한 번씩 인간세상에 내려와서 얇고 가벼운 천으로 돌 위를 한 번 스치고 가는데 백년에 한 번씩 스쳐서 이 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를 반석겁이이라 부른다는 겁니다. 이 시간은 너무나 길어서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부르면 우리의 80억겁의 모든 생사중죄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중죄’는 보통의 죄가 아닙니다. ‘죄’는 곧 업장입니다. 예컨대 탐심·진심·치심이 있고, 육식하고 남을 욕하고 타인과 대중을 해를 끼치는 등등이 있습니다. 불자가 아닌 사람들은 무엇이 ‘죄’인지를 모를 수 있습니다. ‘난 성실한 양민이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마치 우리 모두 죄가 없는 사람 같습니다. 이 ‘죄’는 세간에서 말하는 범법·범죄가 아닙니다. 


  불법의 입장에서 말하면 사람마다 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행위·신체·언어 그리고 우리의 생각마다 모두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으로는 살생과 육식을 하고 사회와 대중들 심지어 가족들을 해를 끼치는 나쁜 일들을 하게 되고, 입으로는 욕설을 하고 사기를 치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할 줄 아는 것으로 스승이 없이도 스스로 터득하게 됩니다. 또 우리의 마음도 설사 어떤 사람들은 말로써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도 마음속에는 화내는 마음이 있습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도 남에게 좋지 않은 생각들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렇게 생각으로 짓는 업도 ‘죄업’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해탈을 못하고 공덕이 원만하지 않으면 모두 죄업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번뇌가 있고 고통이 있고 순조롭지 못한 일들을 만나게 되는데, 자기 자신에게 또 해결할 능력이 없다보니 관음재일이나 미타성탄과 같은 재일들을 만나면 많은 사람들이 절에 가서 향을 사르고 절을 하러 갑니다. 이렇게 어려움만 만나면 불보살님들을 찾아가지요. 


  불보살님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고 명호 속에 공덕이 있기 때문에 불보살님의 명호만 부르면 우리의 업장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간혹 번뇌가 일어날 때 염불만 하면 마음이 청정해지기도 하고, 만일 우리가 지혜를 얻고자 하면 염불을 해도 역시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복보를 증장시키고 싶으면 염불만 해도 복보를 증장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염불하기 전에 매우 가난하고 혹은 몸이 좋지 않다거나 번뇌가 매우 많았습니다. 아무튼 자신의 운명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염불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염불하면 내일 바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개개인마다 효과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겁니다. 부처님의 명호자체에 이러한 잠재적 능력이 있기에 우리가 부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상응하는 효과를 얻게 됩니다. 예컨대 수박처럼, 수박은 갈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먹기만 하면 갈증을 해소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많이 목마른 사람도 수박을 먹으면 바로 갈증이 사라집니다. 이 효과는 매우 뚜렷합니다.


  우리가 이 명호를 부르면 불법의 이치를 알든 모르든, 신앙이 깊든 깊지 않든, 심지어 어린이들이 별 생각 없이 불러도 업장소멸의 방면에서 나타나는 효과는 똑같습니다. 


  만일 신앙이 있고 불법을 이치를 이해하고 명호의 공덕이 타인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염불이 업장소멸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방향에 영향을 끼쳐서 우리의 인생의 질을 더욱 높이고 더욱 광명한 경계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불법은 중생들에게 사실 더욱 크고 더욱 많은 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해탈을 하게하고 우리로 하여금 고해로부터 벗어나 해탈과 성불의 길로 걸어가게 해주는 것이지요. 불법 중에 이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입니다.


  염불하면 성불을 할 수 있기에 이 이익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우리는 성불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명호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이익입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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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실용문답


 

 정종淨宗스님 법문 / 정전淨傳스님 번역

 

 

1. 현세의 이익에 관하여

 

1. 질문: 왕생을 구하려면 아미타불을 부르고, 평안함과 재난의 소멸이나 수명의 연장 등 현세의 이익을 구하려면 따로 관련된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거나, 경전 또는 진언을 독송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관념들은 옳은 것인가?

 

: 옳지 않다. 일반적으로 처음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의 신앙심이 비교적 얕기 때문에 때로는 이러한 관념들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그 사람이 정토왕생을 발원한 사람이라면 왕생을 위해서나, 아니면 현세의 이익을 구하는 데 있어서나 모두 마땅히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지 다른 것을 부를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경전에서 말씀하시길 “아미타불은 모든 부처님 중의 왕이시고, 아미타불의 명호 속에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 경전과 진언의 공덕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오로지 아미타불 한 부처님만 염念하면 모든 불보살님과 경전 그리고 진언을 전부 염한 공덕과도 같다”(경전의 뜻을 취함)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모든 불보살님과 경전, 진언을 염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아미타불을 염하여도 전부 얻을 수 있다. 반면에 아미타불을 불러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다른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거나 다른 경전과 진언을 독송한다면 반드시 전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백관대신百官大臣들이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일들은 국왕으로서 당연히 해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국왕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백관대신들이 반드시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둘째,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세간의 이익도 얻을 수 있으므로, 두 가지 방면에서 모두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잡다하게 여러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거나 경전과 진언 등을 독송한다면 왕생이 결정되지 않을뿐더러, 얻을 수 있는 세간의 이익 역시 적다.

 

2. 질문: 아미타불을 부르면 다만 왕생을 할 수 있을 뿐이지, 현세의 여러 이익과는 상관없지 않은가?

 

: 그렇지 않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에는 현세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이 전부 포함된다. 이것을 정토종에서는 “현세와 내생의 두 가지 이익(現當二益)”이라 부른다. ‘당當’은 당래(장래, 내생)로서 당래의 이익은 왕생하여 성불을 하는 것이고, ‘현現’은 현세로서 현세의 이익에는 예를 들어, 재난을 소멸하고 복과 지혜가 자라나며, 병을 물리치고 장수할 수 있으며, 평안하고 하는 일이 뜻대로 잘 되고, 위로는 조상을 천도하고 아래로는 자손들을 보우保佑하는 등의 모든 이익이 그 속에 포함된다.

 

3. 질문: 관세음보살님은 구원의 소리를 찾아서 고난에 처한 중생들을 구제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재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야 한다는데, 이는 옳은 것인가?

 

: 관세음보살님을 “대자대비 구고구난 광대영감”이라고 부르는데,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면, 보살님께서 즉시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를 살피시고 구원을 해주신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한 치의 그릇됨도 없다. 하지만 평소에 염불수행을 하던 사람들은 관세음보살님을 바꿔 부를 필요는 없다. 이치적으로 설명하자면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미타불께서 소리를 찾아서 고통을 구제해주시는 능력은 관세음보살님보다 훨씬 뛰어나다. 관세음보살님은 현재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는데 아미타불의 상수上首제자이시다. 이 보살님의 자비와 능력은 전부 스승이신 아미타부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아미타불께서는 성불을 하시기 전에 보살도를 닦으실 때 명호로써 중생구제를 하시겠다는 발원을 하시고 수행을 하셨다.

 

 다만 당신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입을 벌려 소리를 내어 부르든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부르든, 위급할 때에 부르든 아니면 평소에 부르든, 전문적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부르든 아니면 비교적 산란한 마음으로 부르든, 심지어 염불을 하는 사람이 부처님을 믿든 믿지 않던 간에 아미타불께서는 즉각 감응하여 바로 광명을 놓아 비춰주시고, 동시에 몸을 나투시어 그 사람을 보호해주시겠다는 것이다.

 

감응의 속도는 전등의 스위치를 누르면 빛이 바로 환하게 비추는 것보다 더욱 빠르다. 염불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광명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므로 즉시에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되고, 재난이 소멸되어 상서롭게 된다. 또한 평소에 자주 염불을 하지 않고 어떤 일을 당하여 간혹 염불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감응은 역시 이와 같다.

 

만약 평소에도 늘 염불을 하던 사람이라면, 아미타불의 광명은 주야로 이 사람을 비춰주고 보호를 해주시며 그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일생 동안 줄곧 평안하게 지내다가, 임종할 때가 되면 부처님의 영접을 받아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관세음보살님이 소리를 찾아 고통을 구제해주시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전면적이며 철저하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임시적으로 다른 불보살님들을 바꿔 부를 필요가 없다.

 

둘째, 아미타불을 부르면 관세음보살님은 따로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오신다. 관세음보살님은 당신의 스승이신 아미타불을 매우 존경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항상 아미타불을 머리 위에 이고 계신다. 우리가 보고 있는 관세음보살님의 머리 위에 화불化佛 한 분이 서 계시는데, 이분이 바로 아미타불이시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은 아미타불을 수시로 따라다니시는데, 아미타불이 어디를 가시든지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으신다.

 

 따라서 평소에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들은 아미타불께서 이미 광명을 놓고 몸을 나투시어 그 사람을 보호해주시는 이상,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 그리고 수많은 대보살님들도 당연히 함께 오셔서 보호를 해주신다.예컨대 󰡔관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듯이,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은 관세음과 대세지 양대 보살님이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항상 그 사람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이 염불하는 사람을 보호해주심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그 사람의 훌륭한 벗이 되어 주시고, 자비로써 모든 일에 도움을 주신다고 하셨다. 따라서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설사 관세음보살님을 부르지 않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은 당연히 오셔서 보호를 해주신다. 그 밖의 불보살님들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불보살님들을 부를 필요가 없다.

 

셋째, 평소에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들은 항상 부처님 광명의 보호 속에 있으므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재난들이 자연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위급한 때에 임시적으로 보살님께 도움을 청하게 될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숙세의 업을 피할 길이 없어 작은 재난과 장애가 있더라도 진정으로 신앙심이 깊고 염불수행에 바탕이 있는(습이 배인) 사람이라면 자연히 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지, 이 보살님 저 부처님을 부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흔들이고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이 전일專一하지 않다는 증거다. 따라서 어떤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든지 효과적으로는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과 전혀 비교할 수가 없다.

 

4. 질문: 세간에는 자식을 낳게 해주는 송자관음送子觀音이 있다.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자식을 구하려면 반드시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야 한다는데, 이는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가 없다. 아미타불을 불러도 똑같이 자식을 구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

 

5. 질문: 문수보살님은 지혜제일이시다.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지혜가 증장하고 시험을 보는 데 순조롭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문수보살을 불러야 한다고 한다.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가 없다. 문수보살님은 지혜를 상징하고 보살대중 가운데서 지혜제일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어쨌든 부처님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아미타불의 지혜와 광명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조차 따라갈 수 없다고 하셨으니, 하물며 보살제자들은 더더욱 동등한 입장에서 논할 수 없다. 따라서 지혜를 구하고자 한다면 역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6. 질문: 지장보살님께는 정해진 업을 소멸시켜주는 멸정업진언滅定業眞言이 있으시다.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업장소멸을 하려면 반드시 지장보살님을 불러야 한다는데, 옳은 것인가?

 

: 그렇지 않다! 아미타불을 불러도 똑같이 업장소멸을 할 수 있다. 불보살님들의 명호에는 전부 공덕이 들어 있고, 공덕이 있으므로 죄업을 소멸할 수 있다. 지장보살님의 공덕이 진실로 불가사의하나, 아미타불과 비교를 한다면 여전히 백천만억 배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석정토군의론(釋淨土群疑論, 군의론)󰡕에서 “일대겁 동안 지장보살을 부르는 것은 아미타불을 한번 부르는 것만 못하다”고 말씀하셨고, 󰡔무량수경󰡕에서는 “아미타불의 공덕은 위없고, 광명은 제일이어서 시방제불이 따라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미타불을 불러 업장소멸을 하는 것은 마치 햇빛이 어둠을 없애주는 것과 같고, 지장보살 등의 기타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불러 업장소멸을 하는 것은 마치 달빛이 어둠을 소멸하는 것과 같다.

 

7. 질문: 지장보살님은 유명교주幽冥敎主로서, 오로지 유명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신다. 비록 지금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망령亡靈을 천도하고 지옥중생을 구제하려면 반드시 지장보살님을 불러야 한다고 한다. 이는 옳은 것인가?

 

: 그렇지 않다. 지금 지장보살과 아미타불을 비교하여 간략하게 일곱 가지 점을 들어 비교될 수 없음을 밝히겠다.

 

⑴ 공덕의 부족함과 원만함이 비교되지 않는다. 지장보살님께서는 발원하시길 ‘지옥이 텅 비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므로, 수행공덕이 아직 원만하지 않고, 그 원력 역시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다. 아미타불은 인지因地에서 발원하시길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아비지옥의 고통받는 중생들을 남김없이 제도하겠다’고 하셨는데, 수행 공덕이 이미 원만하였고, 그 원력 역시 이미 실현되어 성불을 하셨다. 그러므로 양자 간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⑵ 지위가 높고 낮음이 비교되지 않는다. 지장보살님은 유명교주이시고, 아미타불은 제불의 왕이시므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⑶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므로 비교되지 않는다. 󰡔군의론󰡕에서는 “부처님은 법왕이시고 보살은 법신法臣인데, 임금이 출타할 때 대신들은 반드시 따라나선다. 큰 것은 작은 것을 포괄할 수 있으니, 염불을 많이 하면 공덕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지장보살님은 자연히 아미타불을 모시고 따라오셔서 지옥중생들을 구제해주신다.

⑷ 알려진 명성의 범위가 비교되지 않는다. 아미타불의 명호는 시방제불들이 다 경앙하고 찬탄하시는 바이므로 비교되지 않는다.

⑸ 광명의 크기가 비교되지 않는다.

⑹ 소멸된 죄업의 양이 비교되지 않는다.

⑺ 구제의 이익이 비교되지 않는다. 지장보살을 부르면 대부분 삼악도의 중생들을 건져 인간과 천상의 선도善道에 태어나게 할 수 있지만, 아미타불을 부르면 삼악도에서 곧장 정토로 초월하여 성불할 수 있다.

 

8. 질문: 사람이 임종할 때는 왕왕 업장이 나타나서 원친채주怨親債主들이 서로 와서 끌고 가려고 핍박을 한다고 한다. 이때 반드시 먼저 󰡔지장경󰡕을 독송하고 지장보살님의 명호를 불러서 업장소멸을 하고 난 다음, 다시 아미타불을 부르며 왕생을 구해야 한다고 한다. 옳은 것인가?

 

: 옳지 않다. 임종할 때는 사람이 위로 올라가느냐, 아래로 내려가느냐를 판가름할 가장 중요한 시기다. 이때는 어떠한 다른 불보살님과 경전, 주력도 전부 너무 늦어 급한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시급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가장 큰 구제의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업장소멸과 극락왕생을 동시에 완성시킬 수 있다.

 

󰡔관경󰡕에서는 대승의 12부 경전을 들어도(독송하여도) 단지 천겁의 죄업을 소멸할 수 있을 뿐 왕생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크게 부족한 반면, 아미타불을 한 번 부르는 즉시 50억겁의 죄업이 사라지고, 곧장 사바세계를 초월하여 정토로 왕생할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계산을 해보면, 한 번 아미타불을 부르는 공덕이야말로 수천만 부의 󰡔지장경󰡕과 󰡔금강경󰡕 등 대승경전을 독송하는 공덕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 질문: 위타보살(韋陀菩薩: 신중의 한 종류)은 호법을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수행을 하는 데 도움을 얻고, 장애의 인연을 줄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타보살을 모셔야 한다. 이는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 없다. 오로지 아미타불을 모시고 아미타불을 전념하며 정토왕생을 발원한 사람은 󰡔관경󰡕, 󰡔아미타경󰡕, 󰡔시왕생경󰡕에서 설하신 것처럼 아미타불께서 항상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머물고, 관음‧세지보살께서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보호를 해주시며, 갠지스 강의 모래와 같이 많은 제불들이 함께 오셔서 호념護念을 해주신다. 그리고 25분의 대보살들이 여러 대보살들을 거느리고 일체시처一切時處에서 옹호를 해주신다.

 

 또한 무수한 부처님과 관음‧세지 등 보살들이 화신으로 오셔서 백 겹 천 겹으로 둘러싸고 주야로 이 사람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 모든 천신天神과 지기(地祇, 토지 신)들도 모두 공경하고 보살펴주며, 모든 악귀와 악신들도 그 틈을 노릴 수 없고, 일체의 액난과 재해, 장애들은 저절로 사라진다. 위타보살 역시 분명히 여러 보살님들을 따라 청하지 않아도 당연히 오셔서 호념을 해주실 것이다.

 

10. 질문: 제불보살님들의 신주神呪에는 큰 위신력이 있으시다. 비록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삿된 것을 물리치고 마구니를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주를 지송해야 한다. 이는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 없다. 한마디 아미타불은 주력 중의 왕과도 같으므로, 일체의 신주를 통해 이룰 수 있는 효능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도 전부 얻을 수 있다.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은 아미타불과 제불, 관음과 세지, 여러 큰 보살님들의 직접적인 호념을 받으므로, 비록 주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모든 사마외도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된다.

 

11. 질문: 약사부처님은 중생들의 모든 병고를 치료해주시겠다고 발원을 하셨다. 비록 아미타불의 정토법문을 닦고 있지만 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약사부처님을 불러야 한다는데,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 없다. 아미타불을 전념해도 똑같이 병을 치유할 수 있다.

 

12. 질문: 약사불을 다른 이름으로 ‘소재연수약사불消災延壽藥師佛’이라고도 부른다. 비록 아미타불의 정토법문을 닦고 있지만 재난을 소멸하고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약사불을 불러야 한다는데, 이는 옳은 것인가?

 

: 그럴 필요 없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이라고도 불린다. 아미타불을 전념한다면 똑같이 재난을 소멸하고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 선도대사께서는 󰡔관념법문󰡕에서 “아미타불을 칭념하며 왕생을 발원한 자는 현생에서 장수를 누릴 수 있고, 아홉 가지 횡액을 피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2. 염불왕생에 관하여

 

13. 질문: 살생을 하고 죄업을 많이 지은 사람의 경우는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아마 왕생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 사람은 누구나 죄가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바로 우리와 같이 죄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들을 구제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죄업을 지었지만 마음을 돌이켜 염불을 한다면 왕생을 못할 이가 없다. 󰡔관경󰡕의 하품왕생에는 일생 동안 십악과 파계, 오역이라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임종할 때에 겨우 염불을 하였음에도 모조리 다 왕생한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14. 질문: 그렇다면 염불하는 사람들은 악을 끊고 선을 닦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 그건 또 그렇지 않다. 불법 중에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끊고 선을 닦을 필요가 없다는 법문은 결코 없다. 염불하는 사람들은 더욱 마땅히 신분과 능력에 따라 악을 끊고 선을 닦아야 한다.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서 염불을 한다면 자신과 타인에게 있어 공덕과 이익은 더욱 크다.

⑴ 죄를 지으면 많은 고통이 따르게 되고, 선을 닦으면 크게 안락하다.

⑵ 죄를 지으면 잘 죽기가 어렵고, 선을 닦으면 선종善終을 하기 쉽다.

⑶ 죄를 짓는 사람은 중생들이 싫어하여 설사 염불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신임을 얻기 어렵고, 착한 사람이 염불을 하면 중생들이 환희심을 내어 믿고 따른다.

⑷ 죄를 지으면 사회가 혼란스럽고 불법이 쇠하게 되며, 선을 닦으면 도덕이 창명昌明하고 불교가 흥성하게 된다.

⑸ 죄를 지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제불이 싫어하고,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 제불의 가르침을 수순하므로 제불이 기뻐하신다.

따라서 마땅히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며 염불해야 한다.

 

15. 질문: 악을 끊기도 어렵고 선을 닦기도 어려운데, 어떡해야 하는가?

 

: 사람이 성현이 아닌 이상, 항상 악을 끊고 선을 닦을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인연에 따라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 항상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염불을 많이 하면 된다. 이렇게 하다 보면 비록 악업을 깨끗하게 끊기는 어렵겠지만 절대 큰 죄를 저지르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고, 비록 선행을 원만하게 닦지는 못하더라도 아무튼 한 생각 착한 마음을 잃지 않은 것이니, 아미타불께서도 반드시 가피를 주실 것이다.

 

16. 질문: 채식을 하지 못했는데도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念佛感應錄: 정종법사 편집, 전체 3집)에는 많은 분들이 채식을 하지 않았지만 전부 염불왕생을 한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상황을 봐야겠지만, 채식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채식에는 이로운 점들이 많다. 부처님의 자비심에 수순하고, 중생들에게 두려움이 없는 무외無畏를 베풀며, 자신의 건강에도 이롭고, 에너지를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며, 임종할 때에 업장을 줄일 수 있다.

 

17. 질문: 삼보에 귀의를 하지 않았어도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에 여건이 허락하다면 그래도 귀의를 하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귀의를 한다는 것은 신앙을 정하고 불법문중에 들어와서 불제자가 되는 첫걸음인데, 어떻게 염불을 하고 싶고 왕생을 하고 싶은 사람이 귀의를 원치 않을 수 있겠는가?

 

18. 질문: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염불을 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진정한 발보리심(중생무변서원도: 중생이 가없어도 다 건지기를 서원합니다)은 매우 어렵다. 만약에 반드시 보리심을 발해야만이 왕생할 수 있다면, 감히 이 세상에 왕생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려고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보리심을 발해야만이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관경󰡕의 상삼품上三品의 왕생에는 비록 발보리심이 있지만, 중하육품中下六品의 왕생에는 전부 발보리심이 없다. 󰡔염불감응록󰡕에 수록된 왕생사례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보리심이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니, 하물며 발보리심이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비록 보리심을 모르지만 염불을 하고 왕생을 원한다면 모조리 왕생할 수 있다.

 

 일단 왕생을 하고 나면 자연히 성불하고 중생구제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토염불법문의 묘한 점이다. 정토법문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왕생을 하려는 마음(願生心)을 일으키는 것인데,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곧 정토법문에서의 보리심이며, 이 마음은 사람마다 다 일으킬 수 있는 마음이다.

 

19. 질문: 만약에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지 못하였다면, 그래도 염불을 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경󰡕에서 중품하생 이하는 전부 계를 받은 적이 없거나, 계를 파하고 죄를 지었지만 임종할 때에 염불하여 왕생을 한 사람들이다. 일반법문의 수행은 전부 ‘부지런히 계‧정‧혜를 닦아 탐‧진‧치를 소멸함’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계율은 가장 기초가 된다. 따라서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지 못하면 인간과 천상(人天)의 선과善果조차 얻을 수 없는데 해탈하여 성불을 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것은 필경 너무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계‧정‧혜를 닦아 탐‧진‧치를 소멸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고도 드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많고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염불이라는 특별법문을 설하신 것이다. 이 염불법문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생각하며 부름)하면서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기만 하면 되므로, 왕생은 단지 염불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지, 계정혜가 있고 없고와는 무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의지하는 것은 오직 배의 힘이므로, 승객이 수영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와는 전혀 상관없이 배를 타기만 하면 전부 강을 건널 수 있다.

 

염불 역시 마찬가지다. 염불을 하기만 하면 전부 아미타불의 원력의 배를 올라탄 것과 같아, 계정혜가 있든 없든 모두 왕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자대비’라고 하고, ‘특별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20. 질문: 그렇다면 염불하는 사람은 계율을 지킬(持戒)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 계율이 비록 왕생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염불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각자 자신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 지킬 수 있는 데까지 계율을 지켜야 한다.지계持戒에는 지계의 공덕과 이익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몸이 불구인지 건강한지는 비록 왕생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불구의 고통을 받기를 원치 않고, 왕생과 무관하다고 해서 자신을 보호하는 데 소홀히 하여 몸이 불구가 되거나 손상을 입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계에는 지계의 안락함이 있고, 파계에는 파계로 인한 괴로운 과보가 있다. 다만 계율을 잘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꾸준히 염불을 하라는 것이지, 결코 염불하는 사람들은 계율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관경󰡕의 구품 중에 상중육품上中六品은 전부 계를 지켰거나 선행을 닦은 사람들이 염불왕생을 한 것이고, 하삼품下三品은 파계를 했거나 악업을 지은 사람들이 염불왕생을 한 것이다.

 

21. 질문: 비록 염불을 하고는 있지만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잡념이 분분한데, 그래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에 수록된 여러 왕생사례들은 전부 평범한 염불인들로서, 많든 적든 간에 잡념이 있었지만 모두 왕생하였다. 사실상 마음이 청정하고 못하고, 염불을 하는 데 잡념이 있고 없고는 왕생을 하고 못하고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전수염불專修念佛을 하면서 진심으로 왕생을 원한다면, 설사 온종일 잡념이 분분할지라도 조금도 아미타불의 구제를 막을 수 없고, 조금도 왕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이 몸이 이미 큰 배 위에 앉아 있는 이상, 설사 마음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하더라도 안심하고 배 위에 있으면서 배에서 내려오지만 않는다면 이 배는 여전히 우리들을 태우고 피안에 도착할 것이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아미타부처님께 귀명歸命하여 우리들의 해탈과 성불의 생명을 부처님께 바치고, 꾸준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서 안심하고 아미타불의 구제에 맡긴다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아미타불의 대원大願의 배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며, 아미타불과 한 몸(一體)이 되는 것이다.

 

 설령 제6의식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전진영사前塵影事’와 ‘허망상상虛妄想像’일 뿐이어서, 그 자체는 생멸하고 무상하여 자성이 없는 것인데, 어찌 아미타불의 구제를 방해할 수 있겠으며, 아미타불의 대원력의 배를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아미타불의 걸림 없는 광명(無碍光)은 아주 가뿐하고도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우리들을 서방극락세계로 구제하실 수 있다.

 

다만 한 사람에게 망상과 잡념이 많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기가 쉽지 않고, 마음속에 번뇌가 많다는 것이므로, 염불을 하는 사람은 그래도 잡념이 적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있다. 바로 최대한 세상사에 대하여 담담하게 바라보고 염불을 많이 하면서 오래오래 지속하다 보면 자연히 잡념들이 줄어들 것이다. 인광대사님의 ‘십념기수법十念記數法’은 마음을 집중하여 염불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22. 질문: 왜 나는 염불을 하지 않을 때는 마음이 청정하고 망념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염불만 하면 도리어 망념이 더 많은 것을 느끼는가?

 

: 염불을 하지 않으면 이 사람 전체가 번뇌와 습기를 따라가게 되고, 망념과 동일한 방향이 되므로 망념이 있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염불은 망념과 역방향이어서, 염불만 하면 망념이 엄청 많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차역에서 붐비는 인파를 따라 개찰구를 통과하여 안쪽으로 들어갈 때에,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크게 느낄 수 없는데 이것은 방향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반대의 입장이 되었을 때, 인파가 안쪽으로 밀려오는데 본인 혼자서 바깥으로 빠져 나오려고 한다면 즉각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인산인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실은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사람의 수는 똑같이 많다. 염불하여 생사의 흐름에 역행해서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것도 바로 이와 같다. 처음 염불을 하는 사람들이 망념이 많음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다.

 

23. 질문: 염불을 할 때에 망념이 많다는 것은 염불이 효험이 없다는 게 아닌가?

 

: 망념이 이렇게 많고, 이렇게 치솟아 오르는데도 여전히 염불을 할 수 있고 망념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바로 염불의 효험을 얻은 것이다. 마치 개찰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안쪽을 향해 몰려드는데, 본인 혼자서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큰 힘을 지닌 사람이거나 위세가 있는 사람, 예컨대 국왕이 역을 나온다면 만인이 전부 길을 양보하고 회피해야 하므로, 이때에 우리는 국왕의 뒤를 좇아 그 기세를 따라 밖으로 나올 수 있다.

 

한마디 아미타불은 마치 국왕과도 같다. 아미타불이 우리들을 구하러 오신다는 것은, 곧장 삼악도로 달려가는 우리들을 업력과 망념의 흐름으로부터 구제해주시는 바이므로 무시겁 이래의 망념의 방향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단지 부처님 명호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순조롭고 편안하게 육도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음속에 부처님의 명호를 한 번 떠올리면 모든 망념이 자연히 피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망념이 많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방향이 상반되기 때문인데, 사실상 이 망념은 더 많아진 것도 아니고, 아미타불의 구제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24. 질문: 글을 쓸 줄도 모르고 독경을 할 줄도 모르며 지혜도 없는 사람인데, 염불을 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 속의 여러 불자님들은 글을 모르지만 전부 왕생하였다. 사실상 글을 알고 모르고, 독경을 하고 안하고, 지혜가 있고 없고는 왕생을 하느냐의 여부와는 서로 조금도 관계가 없다.

 

25. 질문: 매일 염불을 하고 있지만 그 숫자가 많지 않다.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염불의 숫자에는 정해진 기준이 없다. 각자 있는 능력껏 염불을 하면서 진심으로 왕생을 원한다면 비록 염불의 숫자가 적더라도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에 기록된 염불인들은 매일 많게는 수만 번, 적게는 수천 수백 번씩 염불하였지만 모조리 왕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증명인 셈이다.

 

26. 질문: 그렇다면 정진하여 염불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단 말인가?

 

: 각자 능력에 따라 마땅히 정진해야 한다. 틈만 나면 염불을 해야 하는데, 특별히 마음을 쓰고 머리를 써야 할 상황이 아니면 전부 염불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염불을 습관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염불을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망상잡념을 생각하게 되고, 망상잡념을 생각하면 바로 업장과 감응하여 업장만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염불을 해서 부처님과 감응하여 업장을 소멸하고 복을 증장시키는 것만 못하다.

 

27. 질문: 나는 이미 나이도 많은데다가 염불한 시간도 짧다. 그런데도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경󰡕의 하품왕생에는 임종 전에 단지 열 번 내지 한 번 정도 염불을 한 사람들도 다 왕생한다고 하셨으니, 이보다 염불의 시간이 더 짧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28. 질문: 그렇다면 평소에 염불을 안 하다가, 임종할 때가 돼서 염불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

 

: 아니다. 이런 생각들은 굉장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고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몸에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어 수시로 폭발할 위험이 있는데, 다만 정확히 언제 폭발할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라 하자. 그렇다면 일단 이 사실을 알고 나서는 즉각 폭발물을 떼어내야지, 곧 폭발하기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떼어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종할 때를 기다렸다가 염불을 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단 말인가? 절대 정해진 임종의 시간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임종이 정해지지 않은 이상, 현재의 일분일초가 전부 임종일 수가 있으므로, 임종염불이 곧 현재염불이요, 현재염불이 곧 임종염불이다. 더군다나 사람이란 전부 현재 이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인데, 현재를 제외하고 임종이란 없다. 그러니 당연히 지금부터 염불을 해야 한다.

 

또한 현재에 염불법문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염불을 하지 않는 사람이, 확정지을 수 없는 임종을 기다렸다가 염불을 하겠다는 것은, 염불의 이익을 모르고 있는 것이며 진심으로 염불할 생각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진심으로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재물을 보는 순간 바로 그 재물을 얻고 싶을 것이요, 진심으로 병을 고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묘약이 있다는 사실을 안 즉시 그 약을 복용하고 싶을 것이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이 면사패免死牌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면사패를 즉각 손에 넣고 싶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사전에 미리 면사패를 몸에 지니면서 잘 보관해 두지 않는다면, 어느 날 야밤에 끌려 나가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 때가 되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임종할 때에 과연 염불을 할 수 있다면 당연이 똑같이 왕생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죽을 때에는 몸은 사대가 분리되고, 마음은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번뇌하며, 게다가 권속들이 아버지, 어머니 불러가며 큰 소리로 울부짖고, 원수가 와서 목숨을 앗아가려 하는데, 이때가 되면 좀처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평소에 부처님이 계심에도 부르지 않던 사람은 이때가 되면 부처 ‘불’자는 일찍이 어디에다 버렸는지도 알 수 없거늘, 어떻게 다시 염불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죽음의 인연이란 일정치가 않아, 공난(항공사고), 해난海難, 교통사고, 광난(礦難, 광산 사고) 등 여러 가지 사고사가 있고, 몸에 칼을 맞고 총탄이 머리를 관통하며, 독약, 독가스 등으로 인한 죽음도 있으며, 중풍으로 언어능력을 잃고, 혼미하여 정신이 맑지 않으며, 목이 잠기고 혀가 오그라들면서 죽는 등 수많은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너무나 갑작스러워 미처 막아낼 방법이 없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에만 걸려도 염불을 할 수 없다.

 

29. 질문: 보아하니, 지금부터 염불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 그렇다! 일찍 염불하면 일찍 평안하고, 일찍 재난을 면하고, 일찍 업장이 소멸되며, 일찍 복이 자라나고, 일찍 왕생이 결정된다.

 

3. 임종조념에 관하여

 

30. 질문: 임종 때 입으로 염불을 할 수 없다면 마음속으로 염불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31. 질문: 임종 때 마음속으로 한마디 한마디씩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조차 어려워, 오직 한 생각 왕생을 원하는 마음만 갖고 있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경󰡕의 하품중생下品中生이 바로 그런 경우다.

 

32. 질문: 임종 때 혼자 마음속으로 염불하기가 힘들어, 다른 사람을 따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칭념을 해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관경󰡕에서 하품하생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본인의 마음이 무기력하여 의업意業으로 사유를 할 수 없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선지식을 따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칭념을 하였지만 역시 수승하게 왕생하였다. 예컨대 본인이 글을 쓸 줄 몰라도 글을 아는 사람이 자신의 손을 잡고 글을 쓴다면 이 역시 똑같은 글이다. 임종하는 사람의 마음으로는 이미 염불을 할 수 없으므로 선지식을 따라서 한마디 한마디씩 염불하는 것 역시 똑같은 염불이고, 똑같이 왕생한다.

 

33. 질문: 평소에는 왕생을 발원하고 염불하지만, 임종 때에 혼미하여 염불을 못한다면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왕생할 수 있다.

 

34. 질문: 어찌하여 평소에 염불을 하다가, 임종 때에는 염불을 못해도 왕생할 수가 있는가?

 

: 왕생이란 결코 반드시 임종 때가 되어서 결정되는 게 아니다. 평소에 전수염불하며 진심으로 왕생을 발원하는 사람의 왕생은 평소에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임종할 때 비록 염불을 못했어도 반드시 왕생한다. 이것을 정토종에서는 “평생업성平生業成”이라고 부른다.

 

마치 큰 나무 한 그루가 자랄 때부터 서쪽을 향해 기울었다면, 톱으로 자를 때에는 비록 힘을 더 주지 않더라도 자연히 서쪽을 향해 넘어가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일찍이 배에 올라 편안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설사 배가 부두를 떠날 때에 잠이 들어서 모른다 할지라도 편안하게 피안에 도달하는 데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과 같다. 선도대사께서, 염불이야말로 왕생에 있어서 ‘정정업正定業’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다.

 

35. 질문: 염불이 정정업이라면 어떠한 사람도 염불을 하면 모조리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찌하여 임종조념臨終助念이라는 일설이 있는가?

 

: 인광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임종조념의 법은 당나라 때 선도대사님이 발명하신 것으로서, 이를테면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들이 이 법에 의지하여 조념을 한다면 역시 왕생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임종조념은 주로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이 임종 때에도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바로 윤회를 하게 되므로, 이때는 이 사람을 데리고 함께 염불을 할 수 있도록 선지식의 지도와 도움이 필요한 시기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이때 선지식을 따라서 염불을 할 수 있다면 똑같이 왕생한다. 임종조념으로도 왕생할 수 있는데, 평소에 염불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염불이 왕생의 정정업이고, 만인이 닦아 만인이 왕생한다(萬修萬人去)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36. 질문: 지장보살을 염하고 󰡔지장경󰡕‧󰡔금강경󰡕을 읽거나 진언 등을 염하는 것도 조념에 속하는가?

 

: 전부 조념이 아니다!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이 조념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조념’이란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아미타불을 불러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다른 경전과 진언을 독송하고, 또 다른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도록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임종할 때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어서, 평소에 어떤 법문을 배웠던 간에 이때에는 전부 내려놓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한다. 더 이상 난잡하게 다른 것을 부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오히려 조념을 방해하고 왕생을 파괴하는 행위다.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해 지은 죄업은 임종할 때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37. 질문: 경을 읽거나 진언을 외우거나 모든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에도 전부 공덕이 있지 않는가? 어찌하여 조념을 파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전부 공덕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장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왕생을 한다고는 보장할 수 없다. 본래 임종조념이란 정토왕생을 통하여 성불을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인데, 결국 다른 경전과 진언을 독송하고 다른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름으로써 단지 인간과 천상의 좋은 과보만을 얻을 뿐이다. 그 다음 생에 다시 불법을 만나기 어렵고 삼악도에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이 어찌 성불이란 대사大事 인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38. 질문: 조념자가 가장 확실하게 알아야 할 근본은 무엇인가?

 

: 모든 장애요소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한마디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다.

 

39. 질문: 조념을 할 때에 법문의 주요 내용은 어떤 것인가?

 

: 우선 윤회의 괴로움과 극락의 즐거움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사람에게 마땅히 왕생발원을 할 것을 권장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에게 세간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하는데, 목숨이 다할 때에 아무리 집착을 해도 소용이 없을뿐더러 왕생까지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조념자를 따라 함께 염불을 하면서 부처님이 영접하러 오시면 바로 부처님을 따라 가도록 권해야 한다.

 

40. 질문: 가장 간단한 임종법문은 어떤 것인가?

 

: ‘아무개여! 죽은 뒤에 윤회를 한다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아미타불을 부르시고 부처님의 영접을 받아 극락세계로 왕생하십시오!’

 

41. 질문: 어째서 어떤 사람은 장시간의 조념법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는가?

 

: 그 사람의 목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마음속에 걱정거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조념하러 오신 사람들은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진행하셔서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걱정거리가 남아 있다면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되도록 빨리 해결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을 도와드려야 한다.

 

만약 채무관계가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의 권속들에게‘모든 채무관계를 저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잘 해결할 테니 안심하시고 떠나십시오!’라고 임종자를 위해 말씀드리도록 해야 한다. 만약 자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저희들이 이 자녀들을 잘 부양하고 도와줄 테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려야 한다.

 

만약에 원한으로 인하여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렵다면 ‘아무개도 지금 굉장히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곧 정토에 왕생하여 성불을 할 사람이니, 그 사람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 한다.이렇게 해서 만약에 그 사람의 걱정거리를 적중시켰다면 즉시 뚜렷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42. 질문: 조념과 법문 도중에 가장 주의하고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 첫째는 잡다한 것을 피해야 한다. 한마디 아미타불을 제외하고 그 외의 것은 일절 피해야 한다.

둘째는 병자 또는 망자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더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예컨대 ‘아무개여! 당신은 평생을 염불수행 하셨는데, 구하는 게 바로 극락왕생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이므로 반드시 정념正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만약 이 순간에 정념을 잃어버린다면 평생의 수행이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모두 부정적인 메시지가 그 속에 들어 있어서 임종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부담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 순간이 되면 스스로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조념을 해주는 사람이 지혜롭게 위로를 하여 그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고 온화하도록 해주는 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땅히 ‘아무개님! 당신이 평생 염불수행을 하시고 왕생을 원하신다는 것을 아미타불께서는 일찍부터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니, 그 공부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당신을 구제해주실 것입니다.

 

 현재 비록 아미타불께서 몸을 나투시어 영접하러 오신 모습을 친견하지는 못했으나, 그건 당신의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아미타불의 사람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당신을 영접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시고 저희들을 따라서 염불을 할 수 있으면 저희들과 함께 염불을 하시고, 만약에 힘이 받쳐주지 않으시면 우리가 염불을 할 테니 듣고만 계셔도 됩니다. 당신은 안심하고 여기에 누워서 아미타불의 영접만을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43. 질문: 조념자는 마땅히 어떠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하는가?

 

: 첫째는 상대방의 입장, 즉 임종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바로 저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인데, 현재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행위가 임종자의 마음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아미타불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되 조념을 하면서 정말 왕생할 수 있을까? 아미타불께서 진짜로 오실까? 등에 대하여 의심하고 걱정해서는 안 된다.

조념을 해주는 사람이 오로지 염불에만 집중한다면 아미타불께서 당연히 오셔서 임종자를 구제하실 것이니,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따라서 지나친 걱정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염불하는 분위기에 방해가 된다.

 

44. 질문: 임종조념을 할 때에 법문과 염불 중에 어느 것을 위주로 해야 하는가?

 

: 염불을 위주로 해야 한다. 법문은 염불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방편일 뿐이다.

 

45. 질문: 조념을 할 때에 법문을 해줄 사람이 없으면 염불만 해도 되는가?

 

: 평생 불법을 만나지 못하였거나 왕생을 원치 않던 사람이라면 간단한 법문을 통하여 왕생발원을 하도록 권장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정말로 법문을 해줄 사람이 없다면 대중들이 다함께 입을 모아 염불만 해도 자연히 온 집안이 광명으로 가득해지고 불가사의한 효과도 있을 것이다.

 

46. 질문: 조념을 할 때에 창념唱念과 칭념稱念, 육자六字와 사자四字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좋은가?

 

: 임종을 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칭념(음률 없이 하는 염불)은 창념(음률을 넣은 염불)보다 수월하고 기력소모가 적어서 힘이 덜 든다. 중병 또는 임종을 하는 사람은 기가 부족하고 정신력이 쇠약하여 창념을 따라 하기가 어려우므로 칭념을 하는 게 적합하다. 육자(나무아미타불)는 사자보다 완전하고, 사자(아미타불)는 육자보다 급박하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전후에는 사자로 칭념해도 된다. 급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부처님 명호의 완전함을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외의 시간에는 상황이 급박하지 않으므로 육자로 부르는 게 비교적 원만하다.

 

47. 질문: 조념을 해주는 연우들이 많을수록 좋은가?

 

: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몇 조로 나누어 조념을 하되 한 조에 6, 7명 정도의 인원이면 충분하다. 사람이 적으면 항상 염불소리가 통일이 잘 되는데 사람이 많으면 번번이 난잡해지기 일쑤다. 조념을 하는 현장에서는 정신의 집중과 명호의 일치를 요구하므로 필요 없는 잡담을 삼가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움직여서도 안 되며, 선풍기 등의 기계가 작동하면서 나는 소리 등도 되도록 피해야 한다.

 

48. 질문: 염불기로 연우들의 조념을 대신할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 대신할 수 있는가?

 

: 사람의 심력心力의 감응이 크므로, 염불기가 조연助緣은 될 수 있을지언정 완전히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다. 특히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전후에는 더욱 대중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소리를 내어 칭념을 해야 하므로, 절대 사람이 염불하지 않으면서 염불기만 염불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경우는 잠시 염불기로 대신할 수 있다.

⑴ 조념을 할 사람이 없을 경우.

⑵ 조념자가 너무 피곤하여 지속하기 어렵거나, 병자의 상태가 아직은 평온하여 심각하게 위급하지 않을 경우.

⑶ 임종자 자신이 확신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조념이 필요 없을 경우.

⑷ 망자를 위해 최소한 8시간 이상의 조념을 했을 경우.

⑸ 망자의 왕생이 이미 확실해졌을 경우.

 

49. 질문: 수행력이 있는 사람이 조념을 한다면, 그 효과가 일반인보다 좋지 않겠는가?

 

: 정확히 말하자면,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과 정성을 다해 집중을 하는 사람일수록 조념의 효과는 더욱 좋다.

 

50. 질문: 가족이 직접 염불을 해준다면 그 이익은 일반 조념자보다 더 나은가?

 

: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 사이의 연분이 가깝고 염불하는 마음이 정성스러워서 쉽게 감통感通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일지라도 성의 없이 대충대충 한다면 도리어 외부에서 조념을 하러 온 사람만큼 정성을 다해 집중을 하지 못하므로, 그 이익과 효과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연우들이 오셔서 조념을 해주고 가족 또한 참석하여 서로 감동을 주고받으면서 정성을 다해 염불에 집중한다면 효과가 가장 좋을 것이다.

 

51. 질문: 일생 동안 믿음과 발원을 가지고 전수염불을 한 사람도 임종 때 가족들이 울거나 옮기는 등의 인연을 만나면 왕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 과연 일생 동안 믿음과 발원을 가지고 전수염불을 한 사람이라면 일찍이 아미타불의 광명의 섭취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임종 때 어떠한 인연을 만나던 간에 전부 영향을 받지 않고 반드시 왕생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속마음을 다른 사람이 정확히 알기는 어렵고, 게다가 조념을 하러 온 이상 반드시 모든 가능한 장애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을 안전하고 완전한 계책(萬全之策)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임종을 하는 사람의 믿음과 발원이 어떻든 간에 조념을 할 때는 가족들이 울거나 옮기는 등의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

 

52. 질문: 가족들이 울거나 병자 또는 망자의 몸을 옮기는 등의 행위가 조념의 효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가?

 

: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은 병자 또는 망자에게 고통을 더해주기 때문에, 만약 평소에 믿음과 발원이 견고하고 염불에 숙달된 사람이 아니라면 탐착하고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삼악도에 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53. 질문: 만약 가족들이 조념을 반대한다면 마음속으로 묵묵히 그 사람을 위하여 법문과 조념을 해줘도 되는가? 그래도 효과는 동등한가?

 

: 그래도 좋다. 비록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묵념을 하더라도 온몸에 자연히 부처님의 광명이 있게 된다. 만약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집중해서 묵묵히 법문을 해준다면 불력佛力과 감응이 통하여 효과 역시 불가사의하다.

 

54. 질문: 아미타불께서 염불인을 영접하러 오실 때 혼자서 오시는가, 아니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도 함께 오시는가?

 

: 󰡔아미타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관음‧세지와 여러 성중들을 거느리고 함께 영접하러 오신다고 하셨다. 다만 개개인의 인연이 다르므로 보이는 바 또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똑같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처님만 보이고 보살은 보이지 않거나, 어떤 사람에게는 보살만 보이고 부처님은 보이지 않거나, 또 어떤 사람은 소수의 성중들을 보고 어떤 사람은 다수의 성중들을 보며, 어떤 사람은 단지 연꽃과 광명만을 보게 된다.

 

55. 질문: 아미타불께서 영접을 하러 오신 것을 보면 ‘뛰어 올라가야 한다(衝上去)’는 말을 들었는데, 아미타불을 친견한 뒤에 어떻게 뛰어 올라가야 하는가?

 

: ‘뛰어 올라감’이란 말은 경전에서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어떤 사람이 상상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상 왕생을 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데, 마치 연인들이 만났을 때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서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과 같다.

염불인이 영접을 하러 오신 부처님을 뵈면 아주 자연스럽게 부처님을 향해 다가갈 것이다. 마치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따뜻한 장소를 찾게 되고,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밝은 곳을 원하는 것과 같이 모두가 당연한 경향이다.

 

 더군다나 아미타불의 위신력으로 섭취해주심이 있기 때문에, 이때에 왕생을 원하는 사람은 마치 작은 풀잎 하나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난 것과도 같이 자연히 부처님을 따라가게 된다. 예컨대 󰡔관경󰡕의 구품왕생은 전부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광명을 놓고 손을 내밀어 영접을 하시는데, 염불인은 자연스럽게 연화대에 올라 앉아 부처님의 뒤를 따라 곧바로 극락세계의 연못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오로지 염불만 할 뿐, 어떻게 연화대에 올라가고 어떻게 서방의 연못으로 왕생하는지는 전부 아미타불의 소관이시므로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56. 질문: 임종할 때에 마魔가 와서 아미타불의 모습으로 변화할 수도 있는가?

 

: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임종 때는 마가 붙을 때가 아닐뿐더러, 더욱이 염불인의 임종에는 아미타불과 관음‧세지‧제대보살들께서 광명신력으로 가호해주심이 있으므로 모든 삿된 마들이 가까이 범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정오의 태양 아래에는 검은 그림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57. 질문: 임종 때 혼미 상태일 때, 그 사람을 위해 조념을 해준다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 제3집에 보면, 황영부黃英夫는 식물인간처럼 혼미한 지 43일이 되었지만, 그를 위해 법문을 하고 염불을 해주자 여전히 수승하게 왕생하였으니, 그것이 곧 명백한 증거다.

 

58. 질문: 혼미 상태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을 텐데, 어찌하여 그 사람을 위해 법문을 하고 염불을 해준다고 왕생할 수 있단 말인가?

 

: 겉모습은 비록 혼미한 상태이지만 정신은 혼미하지 않으므로, 그 사람을 위해 법문과 염불을 해준다면 여전히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그 사람이 따라서 염불을 하고 정토왕생을 원한다면 틀림없이 왕생한다.

 

59. 질문: 만에 하나 임종 때 혼미하여 부처님이 영접하러 오신 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왕생할 것인가?

 

: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염불감응록󰡕에서 장묘신張妙信은 뇌혈관 파열로 하루 종일 혼미한 상태였으나, 깨어나자마자 갑자기 “부처님께서 나를 영접하러 오셨으니 나는 왕생한다”라고 말한 것이 곧 그 증거이다. 이 사례가 설명하듯이, 비록 육체는 혼미한 상태이지만 정신(神識)은 혼미하지가 않기에, 부처님께서 영접하러 오신 모습을 또렷하고 분명하게 뵙고 부처님을 따라서 왕생을 할 수 있다.

 

60. 질문: 임종자 또는 망자가 아미타불을 뵌 적이 없어서 부처님을 못 알아보면 어떡하는가?

 

: 부처님을 뵙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초목이 봄을 모르지만 봄이 오면 자연히 생기발랄해지는 것과 같다. 사람이 죽음의 고통 속에 있을 때 부처님이 영접하러 오시는 것은 마치 초목이 태양을 향하고, 추운 사람이 따뜻한 곳을 찾는 것과 같아 자연스럽게 부처님을 향해 기울게 된다. 중생들은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할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나무에는 불의 기운이 있어서 맹렬한 불속에 넣으면 자연히 타게 되고, 얼음에는 물의 성질이 있어서 끊는 물에 넣으면 저절로 녹게 된다. 그런데 어찌 나무가 불을 모르고 얼음이 물을 모를까를 걱정하겠는가? 더군다나 부처님께서 위신력으로 가지(加持, 가피)하심이 있거늘, 어찌 범부로 하여금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시겠는가!

 

61. 질문: 살아생전에 염불을 한 적이 없던 사람이, 죽은 뒤에 조념을 해준다고 해서 왕생할 수 있겠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육체는 비록 못쓰게 되었지만 영혼(神識)은 죽기 않고 평소보다 더욱 예민해지므로, 단지 법문을 듣고 염불을 하며 왕생을 원하기만 한다면 왕생하지 못하는 이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염불감응록󰡕 곳곳에 여러 증거가 있다.

 

62. 질문: 비명횡사를 한 사람도 조념을 해주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염불감응록󰡕 곳곳에는 추락‧교통사고‧타살‧급사로 죽은 사람들이 조념염불을 통하여 모조리 왕생한 사례들이 있으니, 그것이 명백한 증거이다.

 

63. 질문: 자살한 사람도 조념을 해주면 왕생할 수 있는가?

 

: 왕생할 수 있다.

 

64. 질문: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난 사람도 조념을 해주면 역시 왕생할 수 있는가?

 

: 비록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난 사람일지라도 영혼이 아직 환생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위해 조념을 해주면 역시 왕생할 수 있다.

 

65. 질문: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났어도 조념을 통해 왕생할 수 있다면, 망자를 위해 조념하는 시간 배정을 어떻게 안배하는 것이 타당한가? 49일 동안 염불을 해주는 게 더욱 좋은 것인가?

 

: 조념과 천도는 망자가 죽은 시간과 가까울수록 좋으며, 그 시간을 차일피일 미룬다거나 따로 날짜를 잡는다던가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조념을 하는 시간의 길고 짧음은 마땅히 실제 사정에 따르되, 아무튼 길면 길수록 좋다.

 

66. 질문: 망자의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염불을 해줘도 왕생에 도움이 되는가?

 

: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공간을 초월하여 그 감응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염불감응록󰡕 제3집에 보면, 관영冠英이라는 사람은 대만에 살고 있었고, 돌아가신 부친은 중국대륙에 있어서 서로 수천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그가 부친을 위해 염불을 해주니 극락왕생을 했다는 사례가 바로 그 증거다.

 

67. 질문: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조념만 해주면 전부 정토왕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조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왕생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이른바 조념이란 본인 스스로 염불을 하게끔 도와주는 것으로서, (임종을 맞이한) 본인이 염불을 해야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조념을 해주더라도 만약에 본인의 선근이 적고 업장이 많으며, 왕생을 원치 않고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역시 왕생할 수 없다. 다만, 왕생을 못하더라도 목숨이 끊어질 때 한마디 부처님의 명호가 귀를 스쳐지나가기만 하면 최소한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음을 보장할 수는 있다. 그런 까닭에 그 공덕과 이익 역시 불가사의한 것이다.

 

68. 질문: 어떤 사람에게 반드시 조념을 해주어야만 왕생할 수 있거나 왕생을 확신할 수 있는가?

 

: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⑴ 부처님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

⑵ 염불을 하지 않는 사람

⑶ 왕생을 원치 않는 사람

이 세 종류의 사람은 반드시 조념이 필요하다.

⑷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진실하지 않은 사람

⑸ 잡행을 하는 사람

⑹ 의심이 많은 사람

이 세 종류의 사람 역시 조념을 해주어야만 왕생을 확신할 수 있다.

 

69. 질문: 어떤 사람이라야 조념이 필요 없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는가?

 

: 평소에 진심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왕생을 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은 임종할 때 조념의 유무와 상관없이 반드시 왕생한다.

 

70. 질문: 어째서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염불수행하고 진심으로 왕생발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역시 임종조념을 원하는가?

 

: 그것은 왕생이 결정되지 않아서 사람들의 조념이 필요한 게 아니라, 비록 왕생이 이미 결정되었지만 연우들을 모시고 임종할 때 배웅을 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일 뿐이다.

 

71. 질문: 염불인에게 어떠한 징표가 있어야 확실하게 왕생하였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 다음과 같은 징표이다.

⑴ 왕생할 때 앉고 눕는 것이 자유롭다.

⑵ 사전에 정토왕생을 하는 시간을 정확히 안다.

⑶ 염불을 하면서 숨이 끊어진다.

⑷ 임종할 때 스스로 극락세계의 거룩한 경계가 나타나고, 불보살님과 연꽃이 나타나 영접하러 오셨다는 말을 한다.

⑸ 임종조념을 해주던 사람이 극락세계의 불보살님과 연꽃이 영접을 하러 오심을 본다.

⑹ 친한 사람의 꿈속과 선정 속, 또는 염불 도중에 직접 그 사람이 정토왕생을 하는 모습이 뚜렷하고 확실하게 본다.

⑺ 죽은 뒤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으나 정수리만큼은 따뜻하다.

이상 일곱 가지 중에 어느 하나만 갖췄어도 틀림없이 왕생했다고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 외에도 염불인의 목숨이 끊어진 뒤에 얼굴에 미소를 짓거나, 신체가 유연하거나, 천상의 음악이 울리거나, 미묘한 향기가 나거나 하는 등의 현상도 기본적으로 정토왕생의 징표라고 볼 수 있다.

 

72. 질문: 만약에 위와 같은 그러한 상서로운 징조가 없었다면 정토왕생을 못했다는 것인가?

 

: 그렇지는 않다. 평소에 염불을 하고 믿음과 발원을 갖춘 사람이라면 비록 특별한 징조가 없더라도 틀림없이 왕생한다. 다만 이것은 부처님과 왕생자 본인만 알 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근본부터 말하자면, 왕생이 결정되는 것은 부처님의 원력이 헛되지 않기 때문이지 상서로운 징조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일반 초심자들은 부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원력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잠시 눈앞에 보이는 상서로운 징조들을 통해 그 사람의 믿음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73. 질문: 어떤 사람들이 왕생할 때 자유로운가?

 

: 왕왕 신분이 낮고, 우둔하고 지혜가 없으며, 마음씨가 착하고 부드러우며, 성실하게 염불을 하며, 떠벌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좋게 갈 수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여섯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⑴ 정진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사람

⑵ 어리숙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

⑶ 듬직하고 드러내기를 싫어하며 조용히 수행하는 사람

⑷ 자비롭고 착하고 유순한 사람

⑸ 염리심(厭離心: 생사를 싫어하여 벗어나려는 마음)이 간절한 사람

⑹ 숙세에 선근이 있는 사람

 

74. 질문: 어떤 사람이 왕생할 때 비교적 자유롭지 못한가?

 

: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⑴ 잡행을 하는 사람

⑵ 게으른 사람

⑶ 의심이 많은 사람

⑷ 교만한 생각으로 잘난 척하는 사람

⑸ 명예와 이익을 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⑹ 고집이 센 사람

⑺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

이상 일곱 부류의 사람들은 숙세에 큰 선근이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자유롭게 왕생하기란 어렵다.

 

75. 질문: 어떤 염불인이 미리 왕생할 시간을 알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미리 시간을 알 수 있는가?

 

: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⑴ 염불의 공력이 많이 쌓인 사람

⑵ 숙세의 선근이 깊고 두터운 사람

이런 사람들은 선정 속에서나 또는 염불을 하고 있는 도중에 불보살님의 계시를 받아서 알 수 있다. 혹은 다른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남들은 신기하게 느껴지겠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마치 눈앞에 놓인 사물을 보는 것과 같아 전혀 특별할 게 없다.

 

76. 질문: 평소에 염불수행을 하고 있지만 왕생을 못할까 두려워서, 사전에 미리 연우들에게 연락하여 때가 되면 와서 조념을 해줄 것을 부탁해도 되는가?

 

: 사전에 연우들에게 조념을 부탁하는 것은 괜찮다. 그렇다고 평소에 염불수행을 하지만 왕생이 결정되지 않아 반드시 조념을 해야만 왕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조념의 유무와 상관없이 반드시 왕생한다”고 깊이 믿어야 한다. 다만 범부들은 세속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임종을 할 때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기 쉽다.

 

또한 불교를 믿지 않고 염불을 하지 않는 가족들이 세속적인 방식으로 임종을 처리해서 염불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염불인의 염원을 어긴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에 만약 연우들이 오셔서 함께 염불을 한다면 위안과 따뜻함을 배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서 현재 동일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장래에 동일한 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니, 친한데다가 더 친해진 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종 때 서로 배웅을 해주는 것은 피차간에 아주 즐겁고도 위안이 되는 일이다.

온정적이면서 장엄한 염불은 임종을 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족들에게 이별의 슬픔을 덜어주고 그분들이 불법에 대한 선근과 신심을 증장시켜주며, 정토를 동경하고 염불왕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다.

 

 적잖은 사람들이 바로 연우들이 오셔서 그분의 가족을 위해 염불을 해준 덕택에 불법의 이익을 얻고 감동을 한 나머지 불교를 믿고 염불을 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조념을 해주러 오신 연우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애심愛心으로 봉사하고, 무상無常함을 체험하며, 현장에서 아미타불의 자비로운 구제를 견학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77. 질문: 평상시 염불과 임종시 조념의 사이에 마땅히 어떤 마음으로 취사取捨를 해야 하는가?

 

: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염불인이다. 임종할 때 설사 그 자리에 아무도 없더라도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청정대해중보살清淨大海眾菩薩들을 거느리시고 영접하러 오실 것이다.’

다만 사바세계의 업보가 다할 때에, 연우들이 염불을 하며 배웅을 해준다면 세속적인 인연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서로가 기뻐하고 위안이 되니, 역시 매우 수승한 일이다.

 

만약에 자신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오로지 염불수행을 하여 부처님 원력의 배를 타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에 힘써야지, 왕생을 임종조념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면 임종할 때 되도록 가서 조념과 위로를 해줘야 한다.

 

4. 일상생활에서의 마음가짐에 관하여

 

78. 질문: 어째서 나는 염불을 안 하면 마음이 그나마 편안한데, 염불만 하면 도리어 마음이 답답해지고 염불하기가 싫어지는가?

 

: 이것이 바로 당신이 염불의 이익을 얻었고 염불이 당신에게 적합하다는 증거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마작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축구경기를 좋아하며 어떤 사람은 인터넷 게임을 좋아해서, 한 번 시작했다 하면 날이 새는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쌩쌩해지는 것은 망념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염불을 하면 여기가 불편하지 않으면 저기가 답답한 것은, 부처님의 명호로써 망념을 다 잡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야생마에게 처음으로 고삐를 채울 때에 당연히 자유롭지 못해서 반항을 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 마음속의 망념 역시 야생마와도 같아서, 부처님의 명호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힘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다. 따라서 염불을 오래오래 하다 보면 망념이 자연히 길들여지는 것이, 마치 야생마가 좋은 말(良馬)로 되는 것과 같다. 만약에 염불은 하지 않고 망념이란 야생마를 좇아 치달린다면 이 야생마는 우리를 태우고 곧장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79. 질문: 어째서 나는 염불을 하지 않을 땐 활력이 넘치는데, 염불만 했다 하면 쉽게 졸리는가?

 

: 이것은 일반인들의 마음이 항상 망상에게 점령당하고 망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덩달아 망념을 참마음으로 여기고 남을 자신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염불을 하지 않을 때는 망념이 활기를 띠면서 흥분 상태에 있기에 본인은 자신의 활기가 넘친다고 느끼지만, 염불을 하면 부처님 명호의 위력으로 인해 망념이 억제되어 더 이상 흥분 상태에 처해 있지 않게 되므로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졸리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마치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한 장소에 덕망이 높고 위엄이 있는 제왕이 나타나면 즉시에 늦가을의 매미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염불을 하면 졸리는 것 역시 염불의 이익을 얻은 것으로서, 위에서 염불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서 불편한 경우보단 한층 더 나은 편이다. 다만 아직은 완전히 부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때에 망념을 간파하여 (망념을) 따라가지 않고 부처님을 가까이한다면, 염불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욱 밝고 깨끗해질 것이다.

 

80. 질문: 어째서 나는 운전을 하거나 길을 걸을 때에 염불을 하면 순조롭게 오랫동안 할 수 있는데, 앉아서 조용히 염불하려고만 하면 순조롭지도 않고 오랫동안 지속할 수도 없는가?

 

: 성격이 지나치게 활발하거나 생각이 지나치게 활기찬 사람들이 이렇게 되기 쉽다. 하지만 개의치 않아도 된다. 자신의 습관화된 방식에 따라 염불하면 되니, 왕생에 있어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81. 질문: 염불인들은 망상잡념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 망상잡념에 대하여 염불인들은

첫째, 조급해하지 말고

둘째, 두려워하지 말고

셋째, 마땅히 기뻐해야 하고

넷째, 생각을 바꿔야 한다.

⑴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한다. 조급한 마음에 망상잡념을 단박에 제거하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겁생 동안 우리들은 망상잡념에 너무나 습관화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담배와 술을 끊고 마약을 끊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어려운지 모른다. 바로 이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염불을 하고 부처님의 원력에 기대어 왕생을 하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여 망상잡념을 제거하고 마음을 정화하여 왕생하려 한다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⑵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망상잡념이 있는 것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모든 범부들은 전부 망상잡념이 분분한 존재들이고, 아미타불께서 구제하시려는 대상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아미타불께서 이미 당신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왕생을 할 수 있다는 보증을 해주신 이상, 설령 망상잡념이 있으면 어떠한가? 이렇게 망상잡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망상잡념 역시 큰 파도를 일으킬 수 없어서 온순해지고 잠잠해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망상잡념을 두려워한다면 도리어 말썽을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굉장히 무섭게 느껴지도록 한다.

 

⑶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어째서 망상잡념이 있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망상잡념을 조복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자각했다면 곧 나는 계‧정‧혜 삼학을 원만하게 닦을 수 없고 염불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아미타불께서 구제하려는 중생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사가 치료할 대상은 환자이지 건강한 사람이 아니듯이, 망상잡념이 있는 내가 어떻게 아미타불께서 구제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약에 망상잡념이 없는 성인聖人이라면 아미타불께서 굳이 그런 성인을 위하여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나야말로 아미타불의 구제대상에 딱 부합되므로, 내가 염불을 하면 틀림없이 왕생하게 되니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염불을 할 때에 자신에게 망상잡념이 많음을 안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아미타불로부터 구제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본래 염불을 하지 않을 때는 아직 자신에게 잡념이 많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염불만 하면 즉각 잡념이 분분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달이 없으면 나무의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지만 달빛이 밝을수록 나무의 그림자 역시 짙어지는 것과 같다. 내가 염불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광명이 나의 마음속을 비춰주신 것이고, 그때서야 자신의 망상잡념을 보게 된 것이니 어찌 내가 이미 부처님으로부터 구제된 것이 아니겠는가?

 

⑷ 생각을 바꿔야 한다. 망상잡념인줄 알아차리면 즉시 내려놓고 상대하지 말며, 생각을 바꿔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예컨대 달빛 아래의 나무 그림자를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볼수록 그 그림자는 더욱 어둡게 느껴지게 된다. 이럴 땐 두 눈을 돌려 허공 속에 떠 있는 맑고 밝게 비치는 달을 보고, 얼굴을 스치는 산들산들한 맑고 신선한 바람을 즐긴다면 마음은 단박에 탁 트이게 될 것이다.

 

경전에서 “일향전념一向專念”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망상잡념이 생기면 그냥 내버려두고 함께 뒤엉키지 말며, 오로지 아미타불을 향하여 염불만 하면 된다. 망념은 스스로 생겨났다가 다시 스스로 사라지게 되는 존재이므로, 억지로 망념이 사라지게 할 필요는 없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여전히 우리는 범부의 본분을 지키면서 착실하게 염불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범부로서 망상잡념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이라면 눈과 귀가 있듯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임을 안다면, 이 망상잡념을 내 몸 이외의 것(身外之物)이라 생각하여 반드시 제거를 해야 통쾌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망상으로 인해 망상이 더 생겨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침 옛말 중에 “세상에는 본래 아무 일도 없건만,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구는구나!”라는 구절과 잘 어울린다. 이 구절을 다시 달리 표현하면“염불만 하면 아무 일도 없건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구는구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염불을 하면 아미타불 편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시고 어떠한 제한적 조건도 없으시건만, 우리들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여 자기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다.

 

82. 질문: 정토법문을 만났지만 도심道心이 강하지 못해 염불을 하다가 말다가 하는데, 그래도 왕생할 수 있는가?

 

: 도심道心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왕생을 원하는 마음(願生心)이고

둘째는 정진하는 마음(精進心)이다.

만약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 듯 없는 듯하고 왕생을 해도 되고 못해도 되며, 염불을 하다가 말다가 한다면, 그렇다면 왕생을 보장할 수 없다.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면 왕생하고 뒤로 물러서면 왕생을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근기 자체가 게으르고 나약하여 염불을 하는 데 용맹정진을 못하고 하다가 말다가 하지만, 왕생을 원하는 진실한 마음만은 바뀌지 않는다면 여전히 왕생할 수 있다. 또한 진심으로 왕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염불은 저절로 점점 더 증진하게 될 것이다.

 

83. 질문: 나는 매일 염불을 하는 것 외에도 여전히 마작을 즐기는데, 그래도 왕생할 수 있는가?

 

: 그것은 본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 만약에 염불왕생을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습성 때문에 마작을 즐긴다면, 그래도 왕생을 할 수는 있다. 다만 마작을 끝내고 나면 본인도 이건 시간낭비이고 염불을 하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시일이 지나다 보면 저절로 적게 하게 되고 결국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염불은 겉치레에 불과하고 마작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주객과 경중이 전도된 것으로서 왕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84. 질문: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염불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염불을 많이 할 것을 시시각각 상기시킬 필요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마작을 하면서 자신의 왕생에 대하여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며 소탈하고 자재할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옳은 것인가?

 

: 이런 인식은 매우 편파적인 것이다. 마땅히 자신의 왕생을 걱정하지 않는 동시에, 염불을 많이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각자 염불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에 관해서는 사람에 따라서 틀리겠지만, 많이 하고 싶다는 생각만큼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통 재가자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한다든가 마작을 한다든가 하는 것은 아마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진심으로 염불왕생을 원한다면 물론 무방하겠으나, 그래도 텔레비전을 적게 보고 마작을 적게 하며 염불을 많이 하는 것만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소탈함과 자재함을 말하자면, 역시 염불하는 것이 소탈하고 자재한 것이다.

 

범부의 마음이란 본래부터 제멋대로인 데에 익숙하므로, 이제 겨우 염불을 시작하면 이내 속박을 느끼게 된다. 애써 상기시켜도 염불을 늘 잊어버리는 판국에, 자유의지에다 맡긴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는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아마도 자신은 틀림없이 아미타불을 의지한다고 생각하면서 염불을 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마음조차 희미해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텔레비전과 마작 속에 빠져들고 만다. 부처님을 의지하고 염불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관념일 뿐이고, 자신을 위해 찾은 변명거리에 불과하며, 염불은 아주 적게 하거나 심지어 아예 염불을 안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85. 질문: 사후에 장기기증을 하는 것은 보살행이 틀림없으나, 범부의 신분으로서는 집착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왕생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 그건 개인의 발심을 봐야 한다. 만약 삼매력이 부족하고 원력이 견고하지 않다면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된다. 왕생한다는 것은 큰일(大事)이므로, 마땅히 큰일을 보전하여 결정된 왕생을 구함으로써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그 다음에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오면, 그때는 석가모니불처럼 제 몸을 던져 매와 호랑이를 먹이는 일도 어렵지 않게 되니, 하물며 다른 일들이겠는가!

 

86. 질문: 나는 상품상생을 원하는데, 그래도 되는가?

 

: 아미타불의 구제에 맡기기를 발원하는 것만 못하다. 역대 정토종 조사들 중에 이와 같이 발원하신 분은 듣지 못했다. 인광대사께서 “왕생만 할 수 있다면 하품하생일지라도 만족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오로지 아미타불을 따르겠다는 뜻이다.

 

87. 질문: 나는 ‘왕생할 때에 몸에 병으로 인한 고통이 없고, 단정히 앉아서 왕생하고, 선정에 든 듯하며, 기이한 향기가 온 방안에 가득하고, 하늘 음악이 허공에 울려 퍼지도록 함으로써 대중들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는 발원을 하려는데, 괜찮은가?

 

: 참으로 이런 원력이 있다면 안 될 건 없다. 그렇다면 남들이 모르게 면밀하게 실행에 옮겨야 한다. 만약에 진정한 공행功行이 있다면 설사 이런 발원을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러한 광경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진실한 행도 없으면서 이미 큰소리를 친 상태라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면, 진심으로 왕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보기 좋게 꾸미려는 가식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렇다면 왕생할 때가 되면 도리어 장애가 되어 왕생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염불왕생은 사람 됨됨이와 같아서, 진실하고 분수에 맞게 살며 자신의 무게가 얼마면 얼마만큼의 말만 해야 한다. 착실하게 염불하고 착실하게 왕생한다면, 비단 죽을 때만 사람들의 믿음을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더욱 더 사람들의 믿음을 일으킬 수 있다.

 

88. 질문: 나는 불치병이 낫고, 건강하고 장수하기를 발원하여 이것으로 표법表法을 하려는데, 괜찮은가?

 

: 모든 것이 다 무상한데 무슨 법을 표하겠단 말인가? 이는 마음속에 왕생할 생각이 없으면서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진심으로 왕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120세까지 살아도 좋고 오늘 밤에 죽어도 좋으므로, 장수와 단명에 대하여 일절 신경 쓰지 않고 병이 깊을수록 더욱 왕생발원을 할 것이다.

 

89. 질문: 나는 왕생의 이익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건강과 장수, 부귀와 영화 등 생선과 곰발바닥을 다 얻고자 발원하는데, 괜찮은가?

 

: 오로지 왕생발원만 있으면 된다. 가난과 부유함, 장수와 단명은 앞서 지은 운명에다 맡기고 삶과 죽음, 빈곤과 영달은 전적으로 아미타불께 의지할 일이다. 금생에 받은 몸(報身)은 전생에서 지은 업의 결과이다. 이미 그 과보가 나타난 이상, 설사 염불을 통하여 바꿀 수 있다고는 하지만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의 복력이 부족하여 큰 부귀를 감당할 수 없다면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반드시 큰 부귀를 누리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이미 다 지은 초가집을 개선하려면 다만 일정한 범위 내에서 보수와 리모델링을 하여 사람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는 있겠지만, 헌집을 허물고 다시 짓지 않는 한 초라한 초가집을 호화로운 별장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도 하여금 정토왕생을 하여 철저한 부귀와 영원한 수명을 얻을 수 있도록 발원하신 것이다.

 

90. 질문: 나는 왜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가?

 

: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활달하고 얽매임이 없는 사람은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들으면 죽을 날이 멀지 않고 왕생할 날이 가까워졌음을 알기에, 이것이 바로 자신이 기대하던 것이므로 기뻐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세속적인 감정에 얽매여서 목숨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세간에 대한 미련이 많기 때문에,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바뀌지만 않는다면 여전히 왕생할 수 있다

 

. 이 ‘죽음’이라는 글자는 본래 가명에 불과하며, 생명은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업에 따라 몸을 바꾸고 태어나는 처소를 달리하는 것을 죽음이라 부를 뿐, 사실상 진정한 죽음이란 없다. 더욱이 염불하는 사람은 임종 때에 부처님이 내영을 하시므로 목숨이 다하면 영혼은 곧바로 정토에 태어나게 되니, 사실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91. 질문: 만약에 근근이 왕생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왕생한 뒤에 빨리 성불할 것을 고려해 현세에서 보리심을 발하고 널리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자신의 심성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한다면, 이는 괜찮은가?

 

: 발보리심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은 것이다. 발보리심을 했다면 현세에서 이미 보살인데, 이 세상에 보살 한 분이 더 있으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다만 문제는 사람들이 보리심을 발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만일 착실하게 전수염불을 하면서 여력이 남아 있으면 대승경전을 독송하고, 마음을 넓혀서 염불하기를 더욱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왕생한 뒤에 빨리 성불을 하기 위해 사전준비를 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어두운 밤중에 열 개의 촛불 빛이 물론 하나의 촛불보단 밝겠지만, 촛불을 많이 준비해서 태양이 떠오를 때 더 밝게 빛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어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는 기껏해야 어두운 밤에 촛불 빛의 밝고 어두운 차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불일佛日의 대광명大光明 경계이므로, 일단 왕생하면 부처님 경계 속으로 들어가 부처님과 똑같이 수용受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도대사께서는 “심성心性은 백천 개의 태양보다 밝게 빛나고 자비와 지혜를 동시에 운용함이 그대로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시고 “극락왕생하여 연꽃이 피고 미묘한 법문을 들으면 십지보살의 원행願行이 저절로 드러나리라”고 하셨다. 이처럼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따라 모두 신속하게 성불할 수 있거늘, 또 어떤 인위적인 힘이 있어서 아미타불의 서원을 가속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92. 질문: 자신의 왕생이 결정된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매일 경전과 다라니를 독송하여 천도 불사를 함으로써 발보리심 하여 자신을 장엄하는 실제 행동으로 삼고자 하는데, 괜찮은가?

 

: 그럴 필요는 없다. 염불하는 사람은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전부 한마디 아미타불이다. 어떤 사람이 공덕 불사를 부탁해도 역시 그분을 위해 염불을 해주어야 한다. 과연 자신의 왕생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해주시는 이 법문을 열심히 널리 선양하는 데 노력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염불하여 성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발보리심이고 위없는 공덕 장엄이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경전과 진언을 독송하는 불사에만 열중하다 보면, 결국에 왕생은 그림 속의 떡이 되고 말 것이다.

 

93. 질문: 나는 염주를 들고 용맹스럽게 염불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자력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옳은 것인가?

 

: 이런 견해는 옳지 않다. 결코 용맹스럽게 염불하는 것은 자력이고, 게을러서 염불을 안 하는 게 오히려 타력인 것은 아니다. 마음속으로 아미타불의 서원을 우러러 의지한다면 비록 하루에 수만 번씩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지라도 역시 타력(불력)인 것이다. 남들이 용맹스럽게 염불하는 것을 보면 마땅히 본받으려고 해야 하며, 본받을 수 없으면 마땅히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94. 질문: 염불을 하려면 전수專修를 해야지 잡수雜修를 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는데, 오욕락도 잡수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범부로서 오욕락이 전혀 없도록 한다는 것은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어쩔 수 없는 타락과 고의적인 타락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 오욕五欲은 인생의 현상이므로 잡수라고 말할 것까진 없다. 천상에는 수승하고 미묘한 오욕이 있고, 사람에게는 거친 오욕이 있으며, 더 나아가서 악도인 축생들에게도 약간의 오욕락은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합리적인 오욕락은 누릴 수 있지만, 법과 인륜을 어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본래부터 오욕중생이므로, 이런 신분을 가지고 꾸준히 염불하는 것이 곧 전수專修이다.

 

95. 질문: 비록 왕생을 원하지만 일시에 전수염불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는데, 믿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 전수염불은 언뜻 보기엔 간단한 것 같아도 자세히 알고 보면 불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법문이다. ‘염불만 하면 누구나 왕생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선근이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믿기 어려운 것이다.

󰡔무량수경󰡕에서는 “부처님의 지혜를 분명히 믿음(明信佛智)”이라 하시고 “어려움 중의 어려움은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難中之難 無過此難)”고 말씀하셨으며, 󰡔관경󰡕에서는 굉장히 긴 지면을 할애하여 먼저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수행법을 설명하여 복선을 깔아놓고, 맨 마지막에서야 칭명염불법을 부촉하셨다.

 

󰡔아미타경󰡕에서는 직접적으로 “믿기 어려운 법(難信之法)”이라 부르셨는데, 이를 육방제불께서 넓고 긴 혀를 내밀어 증명해주셨다. 따라서 일시에 전수염불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해(解)와 수행(行)이라는 두 측면을 통하여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볼 수 있다.

 

‘해解’는 이해이다. 전수염불에 대한 교리 관련 서적과 전수염불을 하여 왕생한 사례들을 기록한 왕생실록들, 그리고 인과응보에 관한 서적들을 많이 보면서, 그 속에서 아미타불의 자비와 원력의 위대함, 명호 속에는 모든 공덕이 들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하열함과 무능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행行’은 곧 행지(行持: 명호를 지니고 염불함)이다. 진실한 마음과 겸손하고 하심下心하는 마음으로 착실하게 염불수행을 해야 한다. 진정한 수행자는 수행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수행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임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진정으로 청정한 계율을 엄격히 지킨다는 기준으로 따져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지킬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진정으로 자신이 효자가 되고자 했을 때에야 비로소 쉽지 않음을 알게 되며, 진정으로 보시를 하려 할 때에 비로소 자신의 마음속에 늘 미련이 남고 늘 나와 남의 분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선행이 누적됨에 따라서 한편으로는 선근이 더욱 더 두텁게 쌓이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더욱 더 자비롭고 부드러워질 것이다. 게다가 관련된 교리와 감응의 작용에 대하여 듣고 훈습을 하면서 이른바 ‘이해와 수행을 함께 닦아 나아간다(解行並進)’면 점차적으로 전수염불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볼 때는 선택을 해서 봐야 하고, 수행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만약 성도문의 수행과 관련된 책들을 보게 되면 서로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적 상응하지 않는다. 비록 선행을 닦으면서 수행을 한다고는 하지만, 만약 허망한 명예와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고 또 아주 교만하다면 자신은 수행을 굉장히 잘하고 있고 덕행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을 공부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아상我相은 더욱 커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역시 상응하지 못한다.

󰡔무량수경󰡕에서 “겸손하고 공경한 마음으로 듣고 받들어 행하여 환희심에 뛰놀며 크게 기뻐하리라. 교만하고 삿되고 게으른 사람은 이 법을 믿기 어렵도다”라고 하신 말씀과 󰡔관경󰡕에서 반드시 “지성심至誠心‧심심深心‧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을 갖추고 정업삼복淨業三福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96. 질문: 전수염불을 하기 전과 전수염불을 시작한 뒤에 똑같은 선행을 하고 있다면, 양자 간에 차별이 있는가?

 

: 당연히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국왕을 호위하는 의장병이 단독으로 외출할 때와 국왕을 따라나설 때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호위를 맡은 인원이 비록 장삼이사張三李四와 같이 다른 이름을 가졌어도, 국왕의 뒤를 따라나선다면 개인적인 신분은 사라지고 국왕의 지휘를 따르는 군인의 신분으로 통일되므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감히 그들을 범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다. 비록 똑같은 사람이지만 개인의 신분으로 모여 있다면, 설령 개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백성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여 특별히 존귀한 것은 아니다.

 

염불은 국왕과 같고 그 외의 모든 선善은 백성과도 같다.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은 온갖 선행을 닦고 있어도, 본인은 온갖 선행을 닦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공로를 완전히 염불의 공덕으로 돌린다. 만약에 꼭 그분들의 선행을 따지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심지어 몸 둘 바를 몰라 할 것이다. 마치 국왕의 호위병이 완전히 국왕의 위덕을 받아쓰기 때문에 그 사람은 본인에게 어떠한 위덕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전수염불을 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선을 닦고 있어도, 마치 일반 백성이 국왕의 지도가 없으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것과 같다. 다만 개인의 능력이 크고 작음을 논할 수는 있겠지만,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난다 할지라도 국왕의 위덕과는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선도대사께서는 전수염불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닦은 모든 선을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隨緣雜善)’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이러한 선의 힘에 의지해 아미타불의 보토에 왕생하려 한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미타불께 귀명하는 마음으로(󰡔관경󰡕에서 설하신 지성심 등의 세 가지 마음) 닦은 선은 설사 그 선이 아무리 작고 아무리 적을 지라도 하나하나의 선을 ‘진실한 업(眞實業)’이라고 부르시고, 이를 회향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선행을 닦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들이 닦은 선은 설사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최상의 선이 된다. 염불의 뒤에 붙어 따르는 까닭에 염불과 하나가 되고, 자신의 공덕에 집착하지 않고 본래 그러한 공성空性과 무아無我의 이치에 잘 계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잡다하게 온갖 선을 닦는다면 설령 그 선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진실한 업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무아와 공성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예컨대 사자성어에 “점철성금點鐵成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쇠와 금은 비교할 수 없으나 이 쇠를 신령스런 손가락으로 한 번 대기만 하면 쇠가 금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범부들이 닦은 인천의 모든 선은 원인이든 결과든 전부 전도된 것이고 전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말할 가치도 없지만, 일단 전수염불에 들어오게 되면 명호라는 신령스런 손가락에 한 번 살짝 닿은 것처럼 본래의 잡다한 선이 진실한 업으로 바뀌게 되고, 범부는 현생에서 불퇴전의 지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이야말로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들은 선을 닦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견해다.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들은 다만 모든 선을 닦으면서 결코 자신에게 선을 닦은 공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염불에다 그 공을 전부 돌릴 뿐이다.

 

97. 질문: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은 법당을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가?

 

: 법당을 설치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의 신앙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규범이 되어주고 우리들의 수행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준다. 법당을 설치할 때 기본적인 원칙은, 반드시 본인이 수행하고 있는 법문과 상응하도록 전일하되 잡다하지 않고, 간단하되 번잡스럽지 않으며, 청정하고 장엄해야 한다.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은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신 오정행(五正行: 독송‧관찰‧예배‧칭명‧찬탄)에 따라 오로지 아미타불께만 예배하고, 오로지 아미타불께만 공양하고 찬탄해야 한다. 그래서 법당에는 오직 아미타불 한 분만 모시면 된다. 부처님 한 분, 등 하나, 향 하나, 깨끗한 물 한 잔, 그리고 전적으로 아미타불만 염송하는 염불기 하나만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육근이 상대하는 경계가 단조로울수록 마음 또한 전일해지기 때문이다.

 

화학성분이 들어 있는 향료는 사용하지 말고 되도록 최고급의 전단향(또는 침향)을 사용해야 한다. 집안에 설치된 법당의 크기가 작으면 향을 한 대만 피우면 되므로 세 대를 피울 필요가 없다.

불단을 모시면 다음과 같은 좋은 점이 있다.

 

첫째는 염불수행에 도움이 되니, 경계와 인연을 만날 때마다 정념을 일으킬 수 있다.

 

둘째는 어린이들의 심신의 교육과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이롭다. 법당은 특별한 교실과 같고, 아미타불은 무언의 스승님과도 같아서 은연중에 감화하는 작용은 어떠한 사람과 어떠한 교육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법당이 설치되어 있는 가정에는 어린이들이 어려서부터 절을 하고 염불을 하며, 부처님의 명호를 들음으로써 선근을 심게 되고, 복과 지혜가 자라나게 되며, 인과를 깊이 믿게 된다. 나중에 커서는 자연히 규율을 잘 지켜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어질고 착하고 정직하고 유용한 인재가 될 것이다.

 

셋째는 법당의 광명은 온가족이 평안하고 행복하도록(吉祥) 보호해줄 수 있다. 가족 중에 밖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걱정이 된다면, 집에 모신 부처님께서 아시고는 그들을 보호해주실 것이다.

만약 법당을 설치할 여건이 안 된다면 마음속에 모시면 된다.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빛나는 법당으로 만들고, 그 법당에다 오직 아미타불 한 분만 모시며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된다.

 

 늘 이 한마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항상 아미타불의 공덕 향을 사르는 것과 같아서, 아미타불께서는 한결같이 다 아신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더러 당신을 모시고 예배하라고 요구하신 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부처님을 모시고 염불하여 자신이 이익을 얻는 것이다.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음과 얕음, 수행의 전일함과 잡다함(專雜), 왕생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는 그 사람의 법당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대체로 법당의 배치가 난잡하면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은 아직 낮은 단계에 있고 단지 평범한 신앙일 뿐이며, 중심이 없고 마음속에 주인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설사 그 사람이 불교를 믿은 시간이 아무리 길더라도 모두 단지 불법과 인연을 맺는 성질의 것이고 불교의 초심자일 뿐이니, 수행도 당연히 아직 궤도에 오르지 못한 것이고 왕생 역시 결정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직 왕생을 위하여 법당에 오로지 아미타불 한 분만 모시고 본인도 오로지 아미타불만 부른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매우 깊고 전일하고 순수함을 알 수 있으므로,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단정적으로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오정행五正行에 부합하고, 수행이 정정업正定業이기 때문이다.

 

98. 질문: 나는 본래 많은 불상을 모셨었지만 지금은 오로지 아미타불 한 분만 모시려 하는데, 원래 있던 불상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 본래 모시던 불보살상들을 깨끗이 닦고 살짝 향냄새가 배게 한 다음, 인연 있는 사람에게 보시하면 된다. 그 사람이 지장보살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아직 모시지 않았고, 마침 당신에게 있다면 그분에게 주면 된다. 그 불상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기념적 가치가 있든 간에 기꺼이 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과의 인연은 세간의 재물로써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상을 그 사람에게 보내주면 지장보살의 분신으로 작용을 하지만, 본인이 갖고만 있으면 불보살님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모시던 불상을 인연 있는 사람들이 모시도록 주면 그 사람이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께 예배하며 지은 복은 자연히 본인에게도 한 몫이 돌아올 것이다.

 

 

5. 의심스럽고 판단하기 힘든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해답

 

 

99. 질문: 어째서 간단하고 쉬운 염불은 왕생의 정정업이 되어 반드시 왕생하며, 그 외의 어렵고 심오한 수행은 도리어 정정업이 아니어서 왕생이 결정되지 않는가?

 

: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시기 전에 발원을 하시길 ‘만약 어떤 사람이 나의 명호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할 수 없다면 난 맹세코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현재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서원이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므로, 우리가 염불하면 당연히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염불왕생은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보증해주신 것이다.

 

 다른 수행은 비록 어렵고 수준이 있고 심오하기는 하나,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보증됨이 없이 오직 수행자 본인의 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당연히 왕생이 결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한다면 배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반드시 바다를 건널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개인적으로 헤엄쳐 바다를 건너려 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어서, 설사 매우 뛰어난 수영 기술을 가졌다 하더라도 반드시 건널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100. 질문: 어떤 것이 믿음과 발원을 갖춘 염불이고, 어떤 것이 믿음과 발원을 갖추지 못한 염불인가?

 

: ‘아미타불의 서원이 헛되지 않아 내가 그분의 명호를 부르면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다. 이것 외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곧 믿음을 갖춘 것이고, ‘이번 생에 꼭 왕생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면 곧 발원을 갖춘 것이다. 만약 이와 정반대라면 믿음과 발원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101. 질문: 나는 염불을 하고 있지만 나 자신이 믿음과 발원을 갖추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왕생할 수 있는가?

 

: 진심으로 왕생을 원한다면 반드시 왕생한다.

 

102. 질문: 어째서 염불을 하면 반드시 왕생하는 것 이외에도 재난을 소멸하고 복이 자라나며 수명을 연장하는 등 갖가지 현세의 이익들이 있는가?

 

: 아미타불의 명호가 범부들로 하여금 왕생하여 성불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명호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위없는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무량무변한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업장을 소멸하고 복과 지혜가 자라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업장이 소멸되면 당연히 병이 낫고 수명이 연장되며 재난이 사라지고, 복과 지혜가 자라나면 자연히 여러 인연들이 잘 모여서 원하는 일들이 뜻대로 다 이루어지게 된다. 설사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루어지고, 반드시 이루어진다.

 

103. 질문: 어째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잡다하게 여러 불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는 것보다 얻게 되는 세간의 이익이 월등히 뛰어난가?

 

: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⑴ 전념專念은 잡념雜念보다 뛰어나다.

⑵ 아미타불은 다른 모든 부처님보다 뛰어나다.

사람 마음의 힘에는 한계가 있기에, 원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마음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야만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옛말에 “익숙해지면 요령이 생기게 되고, 마음이 정성스러우면 영험하다”고 했듯이, 전념을 하면 정성도 있고 익숙하기도 하기 때문에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게 없지만, 잡념(잡다하게 부름)을 하면 정성도 없거니와 익숙해지지도 않으므로 구하는 것을 얻기 어렵다. 게다가 아미타불께서 특별히 명호로써 중생들을 이익케 하겠다는 발원을 하셨으며, 제불의 왕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잡다하게 제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보다 뛰어난 것이다.

 

104. 질문: 어째서 사람들은 아미타불을 얘기하면 항상 왕생만을 떠올릴 뿐, 현세의 이익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가?

 

: 이 점이 바로 아미타불의 위대함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세의 이익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불보살님들도 모두 소원을 이루게 해주실 수 있지만, 극락왕생하여 성불을 하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근본적인 이익은 반드시 전적으로 아미타불을 우러러 의지해야만 비로소 백 퍼센트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얘기하면 왕생을 떠올리고, 왕생을 얘기하면 아미타불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미타불을 부르면 왕생만 할 뿐 현세의 이익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치적으로 말하자면, 아미타불을 부르면 왕생하여 성불을 하는 크나큰 이익조차 얻을 수 있거늘, 하물며 현세의 갖가지 적은 이익들이겠는가! 예컨대 대신에게는 죄수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해줄 수 있는 권한은 있어도, 죄수가 지은 죽을죄를 사면해줄 권한은 없다. 반면에 국왕은 죄수의 죽을죄도 사면해줄 수 있으므로, 죄수들의 환경을 개선해주는 것쯤은 당연히 해줄 수 있다.

 

105. 질문: 아미타불을 부르면 현세의 이로움과 안락함에서부터 왕생하여 성불에 이르기까지 전부 도맡아 처리해주신다는 수많은 장점들이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염불법문 하나만 설하시면 될 텐데 또 무엇 때문에 다시 그렇게 많은 불보살님들의 명호와 경전, 다라니를 설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염송하도록 하셨는가?

 

: 이것은 중생들이 근기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비록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뛰어난 법문으로서 일체 법문을 원만히 거두어들이고 원만히 초월하고 있지만, 만약 겨우 이 한 가지 법문만 설하신다면 일부 중생들은 한 번에 계합해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여러 종류의 근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이익을 전부 얻을 수 있도록 고려함과 동시에, 그들을 나중에 모두 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도록 편리하게 인도하기 위해서 갖가지 법문을 강설하면서 다른 불보살님들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누각이 너무 높아서 한 걸음으로 오르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계단이 필요한 것과 같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서 여러 가지 법문을 닦다가 맨 마지막에 염불수행으로 돌아서지만 이미 크게 우회한 것이다. 만약 이미 염불을 시작했고 또 이러한 이치를 알았다면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오직 지름길로 가는 수행을 해야 하나니, 단지 아미타불만을 부를 뿐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06. 질문: 어째서 똑같이 염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얻은 현세 이익의 크기는 각자 다른가?

 

: 중생들의 근기가 다르고 과거전생에 지은 선업과 금생에서의 마음씀씀이 역시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동일한 태양이 비추고 있지만 나무들은 각각 높고 낮음이 있는 것과 같다.

 

107. 질문: 어째서 현세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단지 왕생만을 원했을 뿐인데, 얻은 현세의 이익이 도리어 더 수승한가?

 

: 세간은 무상하고, 무상하기에 괴롭다. 오직 왕생만을 구할 뿐 세간의 일체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완전히 부처님께 의지하게 되므로, 부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부처님과의 감응 역시 가장 원활하며,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는 것도 가장 강력하고 업장소멸도 가장 빠르다. 업장이 소멸된 이상, 세간의 갖가지 이익을 구할 줄도 모르고 구하지도 않더라도 자연히 온갖 수승한 이익을 얻게 된다.

 

만약 현세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왕생을 구하지 않거나, 심지어 왕생을 두려워한다면 이 사람의 마음은 부처님과 서로 떨어져 있게 되어 업장소멸이 더디고 얻은 세간의 이익도 오히려 열등하다. 예컨대 어두운 방에 있는 사람이 바깥의 햇빛을 그리워하며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모든 창문들을 활짝 열어버린다면 설사 잠시 무슨 일이 있어서 집밖을 나서지 못하더라도 집안은 더욱 환해질 것이다. 그런데 만일 방안에만 있고 싶고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서 창문을 반쯤 열고 반쯤 닫는다거나, 심지어 햇빛이 너무 강렬할까봐 두려워서 커튼을 쳐서 차단시킨다면 방안은 당연히 밝지 않을 것이다.

 

108. 질문: 어째서 똑같이 병이 생겨 염불을 했음에도 어떤 사람은 병이 나아 기사회생하고, 어떤 사람은 병이 낫지 않고 여전히 죽게 되는가? 염불하여 병을 치료한다는 게 도대체 영험이 있긴 한가?

 

: 중생들의 업감(業感: 업으로 인한 과보)이 각자 다르고 염불하는 마음도 한결같지 않은데, 어떻게 똑같은 결과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업감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만약 한 사람의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설사 의학계에서 필사의 병이라고 판명이 났어도, 염불을 하여 업장을 소멸한다면 역시 기사회생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한 사람의 수명이 이미 다 됐다면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용심(用心: 마음씀씀이)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만약 두 사람이 모두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일심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왕생만을 구하는 사람은 늘 오래된 지병이 빨리 낫게 되지만, 마음속에 걱정이 많고 오로지 병이 낫기만을 바라며 죽음이 두려워서 왕생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 효과가 크게 떨어질 것이다.

 

염불은 본래 오로지 이 몸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을 치유하는 데 영험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염불을 하면 업을 소멸할 수 있고, 업이 소멸되면 어떤 병들은 저절로 낫게 되기 때문에, 때로는 병을 치유하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자비하신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영접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광명과 수명이 무량한 자유로운 몸과 마음을 얻어 영원히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면할 수 있도록 발원하신 것이다. 염불을 한다고 금생에서 이 몸의 병을 반드시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량겁 동안의 생사윤회의 큰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우리의 현세의 이 몸은 자신이 지은 업의 과보이다. 어떤 사람은 염불을 겨우 몇 번밖에 안하고는 아미타불께 자신의 신체가 건강하고 지혜가 뛰어나며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길 보장해달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 영험이 없다고 탓하는데,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예컨대 자신이 만든 차의 재료가 전부 고철덩어리라면 설사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정비소에서 수리를 했더라도 절대 길에서 고장이 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고장이 났다고 해서 정비소를 탓한다면 그것은 옳지가 않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너의 몸을 내가 비록 유지하고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모든 책임을 다 질수는 없다. 만약 나의 명호를 부른다면 내가 너를 위하여 (극락에 왕생시켜) 금강처럼 단단하며 파괴되지 않는 몸으로 바꿔주겠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게 보장해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109. 질문: 병이 생겼을 때 자신의 명이 다했는지 다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아는가? 만약 명이 다한 줄 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염불을 하면서 왕생만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아미타불께서 나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도 되지 않겠는가?

 

: 비록 알 수는 없지만 당신이 염불을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모두 틀림없이 죽을 거라는 생각으로 염불을 하면서 모든 것을 아미타부처님께 맡겨야 한다. 심지어 평소에 아무런 병이 없을 때에도 곧 임종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관’이다.

 

예컨대 차를 끌고 정비소에 들어갔을 때 전문가들은 척 보면 알 수 있다. 만약에 이 차가 아직 사용가치가 있으면 수리를 해주겠지만, 그럴 가치가 없다면 다른 새 차로 바꿀 것을 건의하면서 더 이상 수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염불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몸을 아미타부처님께 맡기기만 하면 부처님께서는 당연히 계속해서 보양하고 손볼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새 것으로 바꿔야 하는지를 알고 계신다.

 

110. 질문: 본래 병이 생겨 곧 죽을 것만 같은데, 어떤 사람이 염불을 가르쳐주면서 병이 낫기를 바라지 말고 오로지 왕생만을 구하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본래 나을 수 있는 병도 못 낫고 더 빨리 죽게 되는 게 아닌가?

 

: 그렇지 않다. 필사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며 왕생만을 구하고, 병이 낫기를 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오로지 염불에만 집중한다면 항상 불가사의한 기적을 이루게 된다. 이때 만약에 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업장이 신속히 녹아내리고 병고가 신속히 낫게 된다. 만약 명이 다했다면 비록 병이 있어도 큰 고통 없이 편안하고 순조롭게 불국토에 왕생할 수 있다. 병이 낫든 안 낫든 간에 모두 이익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111. 질문: 세속적인 일이 많고 자녀에 대한 미련도 버릴 수 없기에, 염불하여 우선 병이 낫기를 구하고 왕생은 구하지 않아도 되는가?

 

: 아미타부처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 ‘지금은 자녀들이 아직 어려서 저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는 저를 위해 주관자가 되어 저와 자녀들의 앞뒤와 인과를 살펴봐주세요! 만약에 남아서 그들을 보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저의 병이 하루 빨리 나을 수 있도록 해주시고, 만약에 필요가 없다면 저는 부처님을 따라 왕생하겠습니다. 자녀들은 부처님께 부탁드리오며, 저는 미련을 버리겠습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간에 전부 아미타불의 안배에 맡기는 게 가장 온당하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오안五眼과 육신통이 있어서 과거와 미래를 아시고, 모든 사람의 업보의 인연을 잘 알고 있으시기에, 각 방면의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가장 좋은 안배를 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생각이 꼭 가장 좋다고 할 수는 없으며, 어쩌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부처님께 표현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어떻게 해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꼭 자신의 고정된 생각에 집착하려 한다면 도리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장애하게 될 것이다.

 

112. 질문: 만약 아미타불께서 먼저 병을 치유해주신 다음에, 다시 극락으로 영접하여 주신다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다소 유감을 느낄 것이다.

 

: 이것은 모두 범부들의 생각으로 부처님의 지혜를 헤아리는 것이다. 아무리 말해봤자 다 우리가 이 몸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진짜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말씀하시면서, 인생은 본래부터 유감스러운 것이라고 하셨다. 병이 나으면 유감이 없을까? 병이 나으면 다시 장수하고 싶어지고, 장수하면 부귀를 바라고, 부귀하면 또 다시 자손들이 모두 영달하기를 바라고…… 언제쯤 끝이 있겠는가?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만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사바세계에서는 온통 모두가 유감일 뿐이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왕생하여 성불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원만하고 유감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언제 왕생하고 어떤 인연 속에서 왕생하는가에 관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고 적절한 안배가 있을 것이다.

 

113. 질문: 어째서 염불하는 사람 중에는 재물을 구하면 재물을 얻는 사람이 있고, 재물을 구해도 재물을 얻지 못할뿐더러 도리어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는가? 그 외에 구하는 바도 마찬가지로 소원을 들어주는 경우도 있고,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경우도 있는가?

 

: 재물을 구하여 재물을 얻게 되는 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이 사람의 복이 두터워 마치 두꺼운 판자가 무거운 물건을 견딜 수 있듯이 재물도 있고 누릴 복도 있으며, 자신과 다른 이에게 모두 이익이 된다면 부처님께서는 지혜의 거울로써 비추어 아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신다.

 

둘째, 이 사람의 심성이 연약하고, 과거의 선근을 볼 때에 뜻을 거스르지 않고 제도하는 게 적합한 경우이다. 만약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바로 의기소침해지고 부처님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되며 선근이 성숙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그 소원을 들어준다면 신심이 자라나고 선근이 점점 성숙해져서 불법문중으로 이끌어 들이기가 편리해진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지혜의 거울로써 비추어 아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다.

재물을 구해도 손해를 보는 데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이 사람은 본래 마땅히 크게 손해를 보게 될 상황이었지만 염불을 했기 때문에 은연중에 작은 손해로 바뀐 것이다. 이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염불을 하여도 여전히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이 사람이 박복하여 마치 얇은 판자가 무거운 물건을 감당할 수 없듯이 만약 재물이 있어도 누릴 복이 없으면 뜻밖의 재난과 소송, 납치, 사망을 당하는 등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이익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지혜의 거울로써 비추어 아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므로 재물을 구해도 재물을 얻지 못한다.

 

셋째, 이 사람의 심성은 고집이 세고 교만하며, 과거의 선근을 볼 때 뜻을 거스르며 제도하는 게 적합하다. 만약 소원을 들어주면 도리어 교만한 마음만 커지게 되고 세속에 더욱 더 빠져들고 미혹하여 돌아올 줄 모른다. 만약 그 교만한 기세를 꺾어 준다면 점차적으로 마음을 돌려서 불법을 믿게 된다. 부처님께서 지혜의 거울로써 비추어 아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기에, 재물을 구하지만 도리어 손해를 보게 된다. 그 밖에 구하고자 하는 것들도 이러한 예로써 알 수 있다.

 

아무튼 부처님의 지혜란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각자 정성을 다하여 구한다면 각자의 분에 알맞게, 많지도 적지도 않게 얻을 수 있다. 마치 대지에 만물이 생장하는 데 있어 높고 낮음과 크고 작음이 각각 적절하여, 많지도 적지도 않은 것과 같다.

 

114. 질문: 󰡔염불감응록󰡕 속에 보면 병으로 고통받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기적처럼 회복할 수 있었는데, 어째서 나는 정성을 다해 염불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인한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가?

 

: ⑴ 과거의 업력이 불가사의하여 본래 더욱 큰 병고가 있을 터인데, 염불을 하는 인연으로 은연중에 사라져서 더 이상 받지 않고 단지 지금의 병고만 있을 뿐이다.

⑵ 병이 낫기만을 바라고 왕생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조급하고 허망하여 부처님과 감응을 이루기 어려워 염불의 효과가 떨어진다. 일심으로 염불하여 숙세의 업장이 소멸되면 각자 그 이익을 얻을 것이니, 의심하지 말지어다.

 

115. 질문: 많은 사람들이 승용차와 별장을 즐기면서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사회발전으로 인한 기득 이익자(기득권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바세계에 대한 염리심을 내라고 권장한다는 것이 어찌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미타불께서는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치중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 논리에 맞다. 왜냐하면 인생이 무상하고 괴롭기 때문이다. 돼지가 음식의 즐거움을 탐하다가 드디어 살육을 당하게 되고, 사람은 오욕의 즐거움을 탐하다가 결국 윤회의 과보를 받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미혹하여 돌아올 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일찌감치 벗어나기를 구한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른바 사회의 고층과 저층이 있지만, 아미타불의 입장에서는 모두 같은 부류로 고뇌하고 죄를 짓는 범부들일 뿐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평등하여 간택이 없으시며, 어떤 사람이라도 모두 ‘아미타불께서는 나를 가장 편애하신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부귀한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부귀를 탐하고 좋아하는데, 극락정토에는 순전히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다. 그러니 어찌 아미타불께서 나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가난한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가난과 고생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가장 간절히 구제를 바라고 있다. 자비하신 아미타불께서 괴로움을 덜어주시고 즐거움을 채워주시니 어찌 극락세계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116. 질문: 어째서 평소에 염불을 안 하던 사람들도 임종 또는 죽은 뒤에 조념을 해주면 따라서 염불을 하고 왕생을 할 수 있는가?

 

: 평소에 염불을 못한 것에는 세 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그 사람에게 염불을 말해주는 좋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비록 염불을 말해주는 사람을 만났지만,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에 염불을 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는 비록 염불을 믿기는 하지만 세속적인 일에 얽매여서 항상 차일피일 미루다가 염불을 못한 것이다.

 

⑴ 지금은 임종 또는 이미 죽은 상태에서 누군가 오셔서 염불법문을 해주시니, 곧 첫 번째 장애가 사라진 것이다.

⑵ 본인의 임종 때에 중음신의 경계가 나타나거나 죽은 뒤에도 영혼이 소멸되지 않음을 직접 체험하고 나니, 부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인과응보가 실제로 존재함을 믿게 되니, 이로써 두 번째 장애가 사라진 것이다.

⑶ 평소에 큰 짐이 되었던 아내와 자식, 재산과 사업 등을 이때가 되면 내려놓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선지식의 법문을 들음으로 문득 깨닫게 되니, 곧 세 번째 장애가 사라진 것이다.

이로써 세 가지 장애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염불을 할 수 있고, 염불을 하면 바로 왕생하게 된다.

 

117. 질문: 어째서 평소에 염불하여 왕생을 구하던 사람들도 임종할 때에 갑자기 염불을 하지도 않고 왕생을 구하지도 않는 경우가 있는가?

 

: 이것이 바로 이른바 전도顚倒라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갑자기는 아니다. 이 경우는, 그 사람이 평소에 염불하여 왕생을 구한다는 것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단지 입으로만 말한 것이었음을 입증해준다. 이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진짜로 죽는 것도 두렵고, 아내와 자식 등에 대한 애착도 버릴 수가 없어서 오로지 더 살고 싶다는 생각에 왕생을 원치 않는 것이다. 진심으로 왕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왕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절대 전도되어 왕생을 하기 싫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염불하여 왕생을 구하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야지, 겉으로 말만 있어서는 안 된다.

 

118. 질문: 내가 수행을 많이 하신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은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암 제거 수술을 받은 뒤에 건강과 즐거움을 되찾았기 때문에 법희가 충만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불교를 믿을 것을 권장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항상 겸손하게 ‘저는 수행을 제대로 잘 하지 못해서 아직은 왕생할 수 있는 조건과의 거리가 굉장히 멉니다’라며 말씀하곤 하셨다. 그러던 그분이 임종할 때가 되자 도리어 육식을 하려 하고 조념을 해줘도 효과가 없었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

 

: 이것이 바로 업장이 나타나서 전도가 된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매우 큰 경각심과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 염불왕생에는 본래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스스로 조건을 정해놓고 자신은 그 조건과의 거리가 멀다고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미타불의 서원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왕생의 조건을 상정한다면 임종 때에 당연히 업장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일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착실하게 염불하고, 부처님을 의지하며, 자력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면 절대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염불이 천번만번 온당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119. 질문: 어째서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 한 번 영접하러 오시면 바로 따라가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 두 번, 세 번 영접하러 오셔야 비로소 왕생하는가?

 

: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간절한 사람이라면 부처님의 모습을 보자마자 진심으로 기뻐하며 즉시 부처님을 따라서 왕생한다.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고 세속의 일에 미련이 많은 사람은 비록 부처님께서 오셨음을 보았지만 마음속에서는 망설이게 된다. 부처님을 따라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지혜의 거울로써 비추어 아시고, 이 사람이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면 자비로운 마음으로 연화대를 들고 기다리신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왕생을 하기로 결정하면 부처님은 바로 이 사람을 연화대에 태워 극락으로 돌아가신다. 이 사람이 만약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부처님은 바로 모습을 감추신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다시 왕생을 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부처님께서 다시 오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자비는 비유할 방법이 없다.

 

120. 질문: 처음에 부처님을 따라서 왕생하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반드시 다시 한 번 오시는가?

 

: 꼭 그렇지는 않다. 만약 이 사람이 다시 한 번 왕생을 하려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부처님께서는 틀림없이 몸을 다시 나투신다. 그러나 만약에 이 사람이 왕생을 하려는 마음이 사라지면 부처님 역시 다시 오지 않으신다.

 

121. 질문: 만약 임종인이 세간에 대한 미련이 많고, 부처님도 오셨다가 다시 가셨음을 발견했다면, 이때는 어떡해야 하는가?

 

: 임종 때에 부처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고 중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고, 중생 자신이 왕생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중생이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진실하지 않고 부처님의 기대를 저버렸음을 입증해준다. 다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구제를 하려면 반드시 첫째는 울거나 억지로 붙잡지 말아야 하고,

 

둘째는 지혜롭게 위로와 법문을 해주어 그 사람에게 세속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윤회에 떨어질 것이니, 다시 염불법문을 만나서 정토에 왕생하기란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이로써 임종 때 선지식의 법문과 조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122. 질문: 어째서 임종조념을 할 때는 종종 쉽게 불보살과 연꽃 등 수승한 경계를 볼 수 있는가?

 

: 첫째는 아미타부처님께 임종내영의 원력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조념하는 대중들이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하여 한 목소리로 염불을 하면 감응력이 크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있다.

무릇 염불을 하는 곳에는 반드시 불보살님과 광명이 있고, 그 외의 다른 장소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염불에 전념한다면 마찬가지로 쉽게 볼 수 있다.

 

123. 질문: 같은 장소에서 함께 염불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부처님과 광명, 연꽃 등을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볼 수 없는가? 그리고 어째서 보이는 경계에도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가?

 

: 이는 개개인의 근기와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종류의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다.

⑴ 선정의 공부가 깊은 사람

⑵ 좌선을 좋아하고 마음이 고요한 사람

⑶ 평소에 쉽게 통령通靈할 수 있는 사람

⑷ 음양 눈(陰陽眼)이 있는 사람

⑸ 숙세에 유사한 근기를 가진 사람

⑹ 어린이들

⑺ 조념을 받는 자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

 

124. 질문: 임종조념 때에 보이는 불보살님과 연꽃 등은 극락의 진실한 모습인가?

 

: 범부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감응현상으로, 극락세계 참모습의 투영일 뿐 완전히 진실한 모습은 아니다. 만약 삼매를 얻었다면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25. 질문: 갖가지 현상들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수행을 잘하고 공부가 깊다고 볼 수 있는가?

 

: 꼭 그렇지는 않다! 만약 선도대사처럼 깊은 삼매에 들어 항상 정신(영혼)이 정토를 노닐 수 있다면 당연히 두말할 것도 없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갖가지 경계를 볼 수 있는 것도 여러 가지 다른 인연이 있는 것이니,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123문問 참조) 따라서 경계를 볼 수 있냐 없느냐를 수행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대한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되며, 마땅히 착실하게 염불을 해야 한다. 보고 못보고는 각자의 근기와 인연에 달렸다. 경계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추구하지 말고, 경계를 보았다고 해서 기뻐하지도 말아야 한다. 평범하게 염불을 하는 것이 가장 온당하고 가장 안전하며 가장 수승한 것이다.

 

126. 질문: 아미타불께서 적극적이고 평등하게 모든 중생을 구제하신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이승에 남아 있는 권속들이 망자를 위하여 염불을 하여 천도불사를 해줘야만 비로소 그들을 구제해주시는가?

 

: 아미타불께서는 사람들이 망자를 위하여 천도불사를 해줘야만 비로소 그들을 구제해주시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권속들이 그 사람을 위해 염불하여 회향을 해주는 인연을 통하여 그 사람을 구제하시는 것이다. 마치 태양의 빛이 비치지 못하는 어두운 구석에 거울이 있어서 태양의 빛을 반사시켜 준다면 똑같이 비쳐지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살아 있는 권속들이 망자를 위해 염불하여 회향을 해준다면 그 작용은 바로 이 거울과 같다. 망자가 염불하여 회향한 공덕력에 힘입어 이고득락하여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자비 원력의 작용이다.

 

127. 질문: 살아생전에 염불을 하지 않다가, 오직 죽은 뒤에 사람들을 불러서 천도해주기를 바라도 되는가?

 

: 이런 생각은 매우 경솔한 것이다.

⑴ 자신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반드시 자신을 위하여 사람들을 불러 천도를 해줄 것이란 보장은 없다.

⑵ 설사 누군가 사람들을 부르려 해도 반드시 부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⑶ 설사 사람을 불렀다 하더라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⑷ 설사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천도를 해주는 사람이 충분히 정성스럽고 충분히 전념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⑸ 설사 천도를 해주는 사람이 충분히 정성스럽고 충분히 전념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죽은 뒤에 어느 도로 갈 것인지, 업장은 얼마나 두터운지, 부처님과 감응을 이룰 수 있는지의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다.

⑹ 설사 감응이 있다 하더라도 감응의 크기를 장담할 수 없다. 지옥에서 아귀로 태어난다거나 아귀에서 축생으로, 축생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천상으로 태어난다면 여전히 윤회를 할 뿐 정토에 왕생하지는 못한다.

⑺ 설사 (나중에는) 정토에 왕생한다 해도 무엇 하러 억울하게 삼악도를 다녀온단 말인가! 왜 지금부터 염불하여 살아서는 부처님의 보살핌을 받아 업장소멸을 하고, 죽어서는 정토왕생을 하여 다함께 불퇴전을 얻으려 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염불은 단지 일념의 마음속에 있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살아서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어찌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는가!

 

128. 질문: 망자를 천도하는 효과의 크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이 망자를 천도하는 효과를 결정한다.

첫째: 망자의 선근의 깊이

둘째: 살아 있는 권속들이 천도를 하는 정성

셋째: 천도를 하는 방법

망자의 선근의 깊이는 이미 정해져 있고, 천도하는 방법은 전수염불이 가장 좋으며, 마음은 정성스러울수록 좋다.

 

129. 질문: 절에서 천도재를 지내고 싶지만 길이 멀어서 직접 절에서 분향을 할 수 없으니, 어떡해야 하는가?

 

: 향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형체가 있는 향이다.

둘째, 형체가 없는 향이니 바로 우리의 경건하고 정성스런 마음이다.

셋째, 부처님 공덕의 향이니 곧 아미타불의 명호다.

절에서 분향을 하는 목적은 엄숙하고 장엄한 의식을 통하여 우리들이 경전하고 정성스런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대중스님들의 인도 하에 염불을 함으로써 망자에게 이익을 주려는 것이다.

 

절에서 천도재를 지내는데, 비록 길이 멀어 직접 현장에 참석할 수 없지만 본인의 집에서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 망자에게 회향을 해준다면 최상의 부처님의 공덕 향을 피우는 것과 같아, 시간과 돈을 들이지도 않고 먼 길을 가는 수고로움도 덜며 실제로 망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 만약 단지 형식만을 바라면서 염불을 버리고 먼 길을 바쁘게 뛰어다닌다면, 설사 절에서 분향을 하더라도 집에서 염불하는 것보다 훨씬 못하다.

 

130. 질문: 이미 돌아가신 망자가 환생을 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가 없는데, 천도를 해도 효과가 있는가?

 

: 환생을 했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다 효과가 있다. 만약에 아직 환생을 못했거나, 이미 지옥 또는 아귀도에 환생하였다면 염불회향을 해주면 곧바로 천도할 수 있다. 만약 천상‧인간‧축생으로 환생했다면 염불회향을 통하여 그분의 복덕을 추가해주고, 생활환경을 개선해주며, 또는 과보가 다했을 때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

 

131. 질문: 조념과 천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까운 사람이 별세하셨을 때 조념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천도를 선택해야 하는가?

 

: 조념의 대상은 주로 임종 또는 갓 돌아가신 사람이고, 천도의 대상은 주로 죽은 지 오래 된 사람들이다. 만약 일반도량이라면 조념은 비록 여전히 염불로 하겠지만, 천도는 대부분 그 외의 경전과 진언을 독송한다. 예컨대 수륙법회水陸法會‧염구焰口‧참법懺法을 하는 등이다. 정토종에서 조념과 천도는 모두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이다. 전념을 하기 때문에 효과도 좋다. 가까운 사람이 별세하셨을 때는 우선 조념을 해야 하고, 조념의 기회를 놓쳤을 때는 다시 천도를 하여 구제를 해야 하는데, 그 시기는 사망일로부터 가까울수록 좋다.

 

정종淨宗법사님 법문 / 정전淨傳스님 번역


출처 / 다음카페 나무아미타불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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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미타불은 본원本願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시다.

2. 아미타불은 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시다.

3. 아미타불은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이시다.

4. 아미타불은 임종 때 맞이하러 오시는 부처님이시다.

 

 

1, 아미타불은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다


 

아미타불이 나무아미타불이 되신 까닭은 그 부처님의 본원本願 때문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본원이 없으셨다면 이처럼 위대한, 능히 우리들을 구제하실 수 있는 부처님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한 분 한 분의 부처님들이 성불하신 까닭은 각 부처님마다의 본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미타불의 본원은 다른 모든 부처님들과는 차별이 있으시니, 이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에게는 없는 것이자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을 뛰어넘는 본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뒤에, 당신의 본원에 의하여 성취하신 큰 힘은 특별히 수승하고 광대하며 넓고 깊다는 것입니다.


‘본원’은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원에서의 ‘본本’ 역시 ‘인본(因本: 인지因地의 본원)’과 ‘근본(根本: 주요한 본원)’의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원’이란 두 글자부터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한 분 한 분의 부처님은 성불하시기 전에 모두가 반드시 먼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발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불문의 제자들은 매일 부처님 앞에서 ‘참회문懺悔文’을 읽으면서 자기의 죄업을 참회함과 동시에 보리심을 발發합니다. 발보리심發菩提心이란 사실상 바로 이 사홍서원이라는 게송을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길 서원합니다. 다함없는 번뇌를 끊기를 서원합니다. 한량없는 법문을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를 이루기를 서원합니다(眾生無邊誓願度, 煩惱無盡誓願斷, 法門無量誓願學, 佛道無上誓願成).”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이 똑같이 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홍서원’은 ‘총원’에 속하며, 한 분 한 분의 보살님과 부처님에게 다 통합니다.


그러나 ‘별원’에 있어서는 각자 같지가 않습니다. 예컨대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500가지 원願을 발하셨고, 약사불께는 12가지 원이 있으시고, 아미타불께는 48대원이 있으신 것 등입니다. 󰡔무량수경󰡕 중에 아미타불께서 “나는 세상을 초월하는 원을 세우리라(我建超世願)”고 말씀하신 뜻은, 아미타불의 그 당시 발원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발원을 뛰어넘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에게는 없는 원이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불을 소개하실 때에도 “모든 부처님을 뛰어넘는 발원(發願逾諸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미타불께서 발하신 48원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의 원을 초월하는 원이라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께서 발원하신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다고 나옵니까? 경에서 (석가모니불께서) 말씀하시길 “5겁 동안이나 충분하게 불국토를 장엄하고 청정하게 할 행을 사유하여 선택하셨느니라(具足五劫, 思惟攝取, 莊嚴佛國, 清淨之行)”고 하셨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어떻게 하면 아주 간단하고 쉽게 시방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시방중생들이 한 번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빨리 성불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상세하게 고려하시고 계획하셨는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미타불께서는 5겁이나 되는 기나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사유하셨던 것입니다.


발원을 한 뒤에, 만약 계속하여 공덕을 쌓기 위해 육도만행六度萬行도 닦고 널리 무량한 법문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런 발원은 헛된 발원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공덕을 쌓으셨겠습니까? 경(󰡔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의 세월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고 심으셨다(於不可思議兆載永劫, 積植菩薩無量德行)”고 하셨습니다.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이라는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공덕을 쌓으신 것입니다.


‘조兆’와 ‘재載’라는 이 두 가지 숫자는 모두 매우 큰 숫자입니다. ‘조’는 그런대로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지만 ‘재’에 

이르면, 중국의 숫자 중에서 ‘재’보다 더 큰 숫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조재’ 이외에 또한 ‘영永’이 있는데, 이 숫자라면 더욱 깁니다. ‘영’은 영원하다는 것으로 시간을 초월합니다. ‘겁劫’은 천문학적인 숫자이지만 그래도 헤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에서 ‘불가사의’라는 네 글자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불가사의’는 말할 수도 없고 일컬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으시고 나서 비로소 당신이 세우신 48대원을 완성할 수 있으셨는데, 모든 원 하나 하나가 진실로 원만하게 구족했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이러한 48대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거치셨는데, 이 기나긴 시간 동안 다른 부처님들은 인지因地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불과를 증득하시고, 다시 과지果地에서 되돌아와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고는 열반에 드셨지만, 아미타불께서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수행을 하고 계셨고 여전히 중생을 위하여 공덕을 쌓고 계셨습니다.

 

 왜 48대원을 그렇게 긴 시간 동안이나 사유하셨을까요? 왜 48대원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그렇게 긴 시간(수행)이 필요하셨을까요? 이것은 48대원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근본 원’을 철저하게 성취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지因地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인지에서 세운 48대원은 하나하나의 원이 모두 인지의 본원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원이 있으니, 바로 제18원입니다. 무엇 때문에 정토법문에서 아미타불의 본원을 말할 때엔 전부 제18원을 지목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48원 가운데에 만약 제18원이 없다면 48원은 귀하고 수승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오직 제18원이 있어야 비로소 아미타불의 48원의 귀중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18원은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해야 할 원입니다. 시방세계 중생의 범위는 한없이 넓어 이른바 ‘십법계十法界’의 중생이 있습니다. ‘십법계’는 사성법계(四聖法界: 불‧보살‧연각‧성문)와 여섯 가지 범부법계(凡夫法界: 천도‧아수라도‧인도‧지옥‧아귀‧축생)를 포함합니다.

 

사성법계는 이미 범부를 초월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어(超凡入聖)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생사윤회를 하지 않는 성자들이며, 다른 여섯 가지 법계는 아직도 육도 가운데서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 범부들입니다. 이 십법계 가운데서 불법계를 제외한 나머지 구법계의 유정들은 모두가 다 아미타불의 구제의 대상이니, 이것이 바로 제18원이 구제하는 시방세계 중생입니다.

 

제18원은 정토법문의 근본입니다. 단지 아미타불의 본원일 뿐만 아니라,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의 본마음(本懷)이기도 하며, 심지어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권장하시고 칭찬하시고 호념하시는 원이기도 합니다.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미래 세상에 불도가 멸하고 경전이 다 없어진다 해도, 나는 자비한 마음으로 가엽게 여겨 특별히 이 경전만은 백 년 동안 세상에 더 머물게 할 것이니, 그 중생들 가운데 이 경전을 만나는 이는 원하는 바에 따라서 모두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다(當來之世 經道滅盡 我以慈悲哀湣 特留此經 止住百歲 其有眾生 值斯經者 隨意所願 皆可得度).


석가모니부처님의 이 말씀은, 제18원의 아미타불의 구제 법문이 영원히 우주 가운데 보존되어, 설령 앞전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다음의 부처님께서 아직 인간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법문이 영원히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18원은 모두 서른여섯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서른여섯 글자를 여러분들이 외울 수 있으면 되도록 외우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이 법문의 근본으로 가히 아미타불의 생명이요, 또한 우리들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8원이 있었기 때문에 법장비구가 아미타불이 되실 수 있었으며, 제18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금생에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합장하시기 바랍니다. 제18원의 서른여섯 글자를, 우리들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 번 독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서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정각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역죄를 범하는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제외합니다(設我得佛 十方眾生 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若不生者 不取正覺 唯除五逆 誹謗正法).”


합장을 푸십시오.

이 서른여섯 글자는 아미타불께서 당신 자신이 품고 계신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신(自我發露) 중요한 내용으로서, 당신의 성불은 시방세계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므로,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한결같이 ‘나무아미타불’이란 만덕홍명을 부르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이 중생이 금생에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라도, 아미타불께서 그 중생을 극락세계로 왕생토록 하지 못한다면 아미타불께서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왕생하지 못하는 중생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당신의 능력이 아직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았고, 아직 성불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모든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충분한 능력을 갖출 때까지 더욱더 수행을 해야 하고, 더욱더 공덕을 쌓아야만 비로소 성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다른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그나마 쉬운 편입니다. 삼대아승지겁이면 충분하니까요. 이른바 “삼대아승지겁 동안 복과 지혜를 닦고, 백겁 동안 상호를 장엄한다(三祇修福慧 百劫種相好)”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이라 하는 이 부처님께서 조재영겁의 시간을 거치면서 보살의 무량한 공덕을 쌓아 비로소 성불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께서 보편적이면서도 간편하고 쉽게 모든 중생을 구제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구제 대상은 ‘시방세계의 중생’입니다. 우리들 사바세계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貪嗔痴)이 특별히 왕성하고 강하며, 죄업이 유난히 깊고 무거운 범부들도 전부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야 할 대상입니다. 시방세계 중생에는 성인과 범부가 포함되어 있고, 범부에는 선인과 악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리고 아비지옥의 중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미타불의 구제는 분별이 없고 평등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인과 범부, 선인과 악인, 출가자와 재가자, 수행을 잘하는 자나 못하는 자나, 마음이 청정한 자나 청정하지 못한 자나 관계없이 모두가 다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어느 중생이든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하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그를 왕생하도록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조건은 매우 간단합니다. 바로 제18원에서 말씀하신,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면(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이니, 이렇게만 하면 곧바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至心信樂)”에서 “지극한 마음(至心)”은 바로 경건하고 정성스런 마음이며 진실한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마음은 진실되고 정성스러워야 합니다. 입으로는 왕생해야 한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도리어 왕생할 생각이 없거나, 혹은 장래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지극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이 “지극한 마음”에는 “기쁘게 믿고(信樂)”가 포함되어 있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하는(欲生極樂世界)” 마음이 포함되어 있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서(乃至十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모두 진실한 마음(眞心)이 필요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만약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바로 겉치레의 호의일 뿐이니. 그렇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고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삼계육도의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이 중요한 큰일에 어떻게 진실한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해주시는 조건은 바로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것입니다. “지극한 마음”이란 이 두 글자는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기쁘게 믿고(信樂)”는 바로 ‘믿음(信)’이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는 바로 극락왕생을 원하는 ‘발원(願)’이며,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염불은 바로 ‘수행(行)’입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믿고”는 바로 “기쁘게 믿고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여기에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더하면 바로 ‘신信‧원願‧행行’(삼자량)이 됩니다. 여기서 제18원은 신‧원‧행을 다 갖추고 있으며, “지극한 마음”은 신‧원‧행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극한 마음”란 곧 진실한 마음眞心이니, 우리들이 극락세계가 있음을 믿고 아미타불이 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극락세계가 있고 아미타불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그다지 확신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는다면 그것은 “지극한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극락세계가 있음을 믿고, 아미타불께서 계신다는 것을 믿으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극락세계가 우리의 마지막 종착점임을 믿는 것이니, 이것을 모두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아미타불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며 “너는 나의 극락세계로 왕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바로 “나는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발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하여 극락세계로 데려가신다는 것은 진심이니, 우리가 극락세계로 왕생하려는 발원도 진심이어야 하며, 남을 따라서 단지 회향게만 읽어선 안 됩니다.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름(乃至十念)”이란 바로 지금 이후로 우리에게 하루의 시간이 있으면 하루 동안 염불하고, 이틀의 시간이 있으면 이틀 동안 염불하며, 이레의 시간이 있으면 이레 동안 염불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렛날에 수명이 다하면 바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만약 수명이 연장되어 여드렛날이 되면 여드렛날 동안 염불하며, 만약 8년 혹은 80년을 더 산다면 한평생 동안 오로지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만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법문을 빌려 (정토로) 회향할 필요가 없이, 염불을 하는 즉시 왕생의 공덕이 모두 갖추어지게 됩니다.

 

제18원에서는 믿음과 발원과 수행(신信‧원願‧행行)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信)’이 바로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는(至心信樂)” 것이라면,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欲生我國)”는 무엇일까요? 아미타부처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이 당신의 구제를 받아 극락세계로 갈 수 있도록 매순간 우리들을 부르면서 우리들에게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께서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欲生我國)”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바로 “저 나라에 왕생하기를 원하는(願生彼國)” 것인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여 아미타불의 부름과 구제에 따르는 것이 곧 ‘발원(願)’입니다. ‘수행(行)’은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름(乃至十念)”으로, 지금 이후로 오직 한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비록 우리와 구제의 조건을 맺으셨다 해도, 이 구제의 조건은 사실 거의 조건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그 뒤로는 우리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남아 있으면 얼마간의 시간 동안만 염불을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불할 때에는 번뇌가 있건 없건, 망상잡념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이와 같은 조건만을 정해주셨기 때문에, 비록 조건이 있다 해도 거의 조건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지불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어떠한 손실도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가장 간단한 것이어서, 우리가 말만 할 줄 알면 염불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말을 하듯이 염불을 하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하고 극락왕생을 원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간단하고 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닐뿐더러 밑질 것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염불하는 시간에는 비교적 망상잡념 등의 번뇌가 없으니, 이러한 염불은 우리를 더욱 홀가분하게 해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중들: 그렇습니다.)


만약 번뇌가 생길 때나 혹은 몸이 아프고 마음이 매우 답답할 때, 염불을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평온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아미타불께서 이 한 구절 부처님 명호를 부르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오직 이로움만 있을 뿐 해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중들: 그렇습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것은 극락을 그리워하고 왕생을 원하는 일종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 자체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시간과 금전이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고, 동시에 본전을 까먹거나 손해를 볼 일도 없습니다. 극락왕생은 오직 백 가지 이익만이 있을 뿐, 손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기를 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비록 극락세계가 있음을 그다지 믿지 못하고 극락세계가 있음을 확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극락왕생을 원할 것입니다. 왜냐고요? 만약 진짜로 생사윤회가 없고 극락세계가 없다고 해도 본전을 잃거나 손해를 보는 어떠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생사윤회가 있고 극락세계가 있다면 공짜로 이득을 본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 이익은 계산할 방법이 없는, 우주에서 가장 큰 선근과 가장 큰 복덕을 전부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진짜로 극락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극락세계에 왕생함으로써 틀림없이 삼계육도의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게 되고,

 

틀림없이 성불을 하게 되며, 틀림없이 부처님과 같은 무량한 수명‧무량한 광명‧무량한 지혜‧무량한 자비를 갖게 되고, 아미타불과 같은 48대원을 갖추고서 타방세계‧시방세계‧무량세계에 분신으로 가서 널리 중생구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왕생을 원하는 마음으로 큰 이익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우리들이 범부여서 마음의 힘이 매우 약하고 어리석고 번뇌가 깊고 무거울지라도, 우리들이 단지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이 하나의 발원만 있다면 이 원은 바로 큰 원(大願)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 하나의 원이 능히 우리를 왕생하여 성불케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원이 없다면 우리들은 계속 육도에 윤회할 것이고, 만약 이 원이 없다면 가장 큰 선근과 가장 큰 복덕을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우리들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는 이 하나의 믿음은 ‘큰 믿음(大信)’이고 불가사의한 믿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미타불께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의외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이 믿음이야말로 어찌 불가사의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곳 하문의) 맞은편 기슭에 금문(金門, 금문현이란 섬)이 있고, 금문을 지나면 대만台灣이란 섬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본 적도 없고 두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우리는 금문과 대만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물론 이런 믿음도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믿음이 소중합니까? 이런 믿음에는 아무런 소중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거나 말거나, 우리가 생사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에 대해 증가(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감소(방해)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믿음은 단지 범부의 세속적인 믿음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음을 믿고 극락세계라는 돌아갈 곳이 있음을 믿는다면, 비록 같은 믿음이라 해도 내용이 다르므로 그 가치도 따라서 다르게 됩니다.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음을 믿고 극락세계라는 돌아갈 곳이 있음을 믿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삼계육도의 윤회를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며 끝내는 우리를 성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어찌 더할 나위 없이 높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단지 입을 벌리고 명호를 부르거나 마음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이와 같은 행이 바로 ‘큰 행(大行)’이어서, 우리가 오계를 지키고 십선을 닦는 공덕보다 훨씬 큽니다. 왜냐하면 오계를 지키면 우리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고, 십선을 지키면 우리를 천상에 태어나게 할 뿐이지만, 오계와 십선의 인因과 과果는 다 여전히 거짓이고 뒤바뀐 전도顚倒이며 새어남이 있는 유루有漏이며 청정치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담란대사께서) 󰡔왕생론주往生論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과 천상의 모든 선과 모든 과보는 원인이든 결과이든, 모두 전도된 것이고 모두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하지 못한 공덕이라고 부른다(人天諸善 人天果報 若因若果 皆是顛倒 皆是虛偽 是故名不實功德).”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육도윤회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은 청정한 것이고, 진실한 것이며, 위없이 큰 이익이 있는 불가사의한 공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더러운 마음과 깨끗하지 못한 입으로 청정하고 진실하며 지극히 높고 위없는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큰 행과 다름없기에 유루가 아닙니다. 이 말을 다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대중들: 네!)

그런 까닭에 정토법문을 “이행도(易行道: 행하기 쉬운 길)”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행도에서 이른바 ‘이(易: 쉬움)’란 바꿔 말해 다음과 같습니다.


(1) 천이淺易: 이해하기 쉽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행도의 이치는 굉장히 간단명료하여, 심오하거나 어렵지 않고 한 번 들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간이簡易: 단지 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바로 왕생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게 되고, 왕생의 자량(資糧: 밑천)을 즉각 완성하여 백 퍼센트 확실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경전을 많이 독송해야 하거나, 성지순례를 하면서 참회를 해야 하거나, 경전을 깊이 이해해야 하거나, 다라니나 주문을 많이 독송한 공덕을 통하여 왕생할 필요도 없습니다. 염불을 시작하는 때부터 임종 때까지 모두 다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이면 됩니다.


(3) 용이容易: 늙었거나 젊었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를 가리지 않고, 경전을 깊이 이해하거나 못하거나에 관계없이 사람마다 모두 다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쉽다(容易)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할 수는 있지만, 그 가운데 일부분의 사람들은 실천할 수가 없다면 이행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이행도’란 사람마다, 즉 어르신이나 어린아이나, 지혜가 있거나 없거나, 수행을 잘하거나 못하거나, 학문이 있거나 없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에 관계없이 모두가 다 실천할 수 있으며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행도’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법문을 배워서 성불을 하려 한다면 전부 ‘난행도(難行道: 가기 어려운 길)’인데, 이 난행도의 어려운 정도는 가히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매우 쉬워서, 여러분들 모두가 다 해낼 수 있습니다.


(4) 안이安易: 이 법문을 닦기 시작하면 매우 편안하고 즐겁고 자재하여, 전혀 괴로움이 없습니다. 자력적인 ‘난행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까닭에 용수보살께서는 불교의 모든 법문을 두 가지 법문으로 요약하셨는데 하나는 ‘난행도’이고, 하나는 ‘이행도’입니다. ‘이행도’는 바로 아미타불의 제18원에 의한 구제를 가리킵니다. 이 ‘이행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파와 다른 모든 법문의 수행은 전부 ‘난행도’에 속합니다.


우리가 난행도와 이행도의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용수보살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용수보살이 말씀하시길 ‘난행도’는 ‘걸어서 가는 것’과 같고, ‘이행도’는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 걸어서 가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배를 타고 가는 것은 편안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교통수단으로 배를 타거나 소달구지나 마차를 타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오늘날 비행기나 기차나 버스가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천리만리나 되는 먼 지방에 가야 하는데, 만약 두 다리로 걸어서 간다면 몸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갈 방법이 없습니다. 설사 신체가 건강하고, 심지어 세계에서 달리기를 제일 잘하는 유명한 선수라 해도 반드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재를 넘어서 먼 길을 고생고생하며 가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도처에서 도적을 만날 수도 있고, 굶주림과 추위와 피로로 인해 삼분의 일도 못 가서

 

 전부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자력수행으로써 삼계육도의 생사윤회를 벗어나 마침내 성불의 경계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한다면 매우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행도’는 바로 편안하고 즐거운 법문(安樂法門)이요, 편안하고 쉬운 법문(安易法門)입니다.


어째서 염불이 ‘이행도’일까요? 이는 전적으로 염불 그 자체에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 의한 크나큰 힘의 가피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원이,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그를 왕생하도록 하신다’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조재영겁(兆載永劫: 셀 수 없이 긴 세월)이란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공덕을 쌓으셨고, 우리가 극락세계에서 빨리 성불할 수 있는 공덕을 쌓으셨으며, 우리가 세세생생 동안 지어온 빚(업보)을 갚아주시기 위해 필요한 공덕을 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공덕을 모두 원만히 성취하신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성불하셨으며, 비로소 나무아미타불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에는 자연히 아미타불께서 조재영겁 동안 닦으신 만행萬行과 만선萬善과 만덕萬德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량없는 백천 다라니의 공덕이 모두 이 한 구절 명호 안에 털끝만치도 빠짐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호를 일러 ‘만덕홍명(萬德洪名: 만 가지 덕이 깃든 위대한 명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덕홍명에서 ‘만萬’은 숫자상의 백, 천, 만 할 때의 만이 아니라, ‘구족함‧완전 원만함(完滿)‧초월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왕생하고 성불하는 공덕이 이 명호 안에 완전 원만하고 온전하게 구족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육도윤회를 초월하여 일단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바로 삼현(三賢: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의 단계에 있는 보살)과 십성(十聖: 십지十地의 단계에 있는 보살)의 단계를 초월하여 신속히 성불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이 성취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들이 왕생할 수 있는 공덕이 완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성불은 무엇을 성취하신 것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왕생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왕생할 수 있는 공덕자량(조건,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이 한 구절 명호가 있게 된 것이고, 염불만 하면 즉시 우리가 왕생할 수 있는 공덕자량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어떠한 부처님이십니까? 바로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십니다! 이 말의 뜻은, 아미타불께서 이미 본원을 성취하셨고, 그 다음 다시 당신께서 성취하신 본원의 공덕을 전부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회향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까닭은, 우리의 왕생을 위하여 성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공덕도 동시에 모두 우리의 공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과지(果地: 묘각의 지위)의 깨달음을 인지(因地: 수행의 지위)의 마음으로 삼으니, 원인은 결과의 바다에 갖추어져 있고, 결과는 원인의 근원과 통하네(以果地覺 爲因地心, 因該果海 果徹因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뜻은, 아미타불께서 과지에서 성취하신 부처님 공덕으로써 우리와 같이 인지에 있는 범부가 왕생하고 성불하는 공덕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정각正覺은 우리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원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중생이 왕생할 수 있는 원인은 아미타불의 정각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성불은 바로 우리의 왕생이며, 우리의 왕생은 바로 아미타불의 성불입니다. 만약 우리가 왕생하지 못한다면 아미타불은 성불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단지 염불만 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왕생은 아미타불의 성불과 하나로 묶여 있어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은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향하는(從果向因)’ 법문이지,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향하는(從因向果)’ 법문이 아닙니다.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향함’이란 바로 범부로부터 줄곧 수행하여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를 거치고, 그런 다음에야 성불에 이르는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단계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법문은 ‘과지의 깨달음을 인지의 마음으로 삼은’ 것으로,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신 공덕을 우리가 왕생하여 성불하는 자량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와 같은 여러 가지 수행을 거칠 필요 없이 곧바로 단계를 초월하여 왕생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행도’를 일러 가로로 초월하는 ‘횡초橫超’ 법문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예컨대 타이베이에 101빌딩(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금융센터)이란 건물이 있는데, 만약 매 층마다 모두 걸어서 올라간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걸어가는 데 매우 고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직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매우 빨라, 순식간에 101빌딩의 옥상에 도달할 것입니다.


정토법문이 ‘이행도’이며 ‘횡초법문’이라 불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역시 아미타불의 본원에 있습니다! 만약 아미타불의 본원이 성취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지 못했을 것이지만, 한 번 본원이 성취되고 나서는 모두가 갖추어지게 되어, 우리가 왕생할 수 있고 성불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부처님마다 성불은 다 아주 어려운 일을 해내신 것이기에 매우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과 반드시 직접적인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처님들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제18원과 같은 원을 세우지 않으셨으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조재영겁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으시고 비로소 성불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미타불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아미타불의 성불은 바로 우리 중생의 왕생에 입각한 것이며, 우리의 왕생을 위해 그분의 생명을 담보로 내기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왕생케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분의 부처로서의 생명이 있는 것이며, 우리의 왕생이 없다면 그분의 부처로서의 생명도 없는 것이기에, 그분의 성불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성불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어떠한 부처님이신가?’에 대한 첫 번째 답은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신 것입니다.


2. 아미타불은 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아미타불의 성불은 시방중생을 구제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방중생들이 구제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성불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방중생들이 만약 “우리가 정말 구제될 수 있을까? 언제부터 구제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셨는지, 언제 성불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아직 성불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부를(稱念) 수 있는 부처님의 명호가 없을 것이고, 또 우리가 왕생하여 성불할 극락세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셨습니까, 못하셨습니까?

(대중들: 성불하셨습니다.)

성불하신 지는 얼마나 오래되셨습니까?

(대중들: 10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10겁이 지났습니다. 10겁 동안 아미타불께서는 밤낮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10겁의 세월 동안 아미타불께서는 무얼 해오셨습니까? 오로지 우리 시방중생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모든 착하거나 악한 범부들아! 너희들은 어서 나의 극락세계로 왕생하여라.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줄곧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심지어 우리에게 합장하시며 부탁하고 계십니다. ‘시방의 중생들은 모두 나의 외아들인데, 지금 삼계육도를 떠돌며 고통스럽게 윤회하고 있으니, 부모인 나로서는 견딜 수가 없구나. 아들들아! 너희들이 제발 속히 돌아오기를 부탁한다. 돌아오기만 하면 안락함을 얻을 수가 있단다. 너희가 돌아오는 데 필요한 양식(자량)을 나는 이미 모두 준비해 놓았다.

 

너희가 돌아오는 데 필요한 비용과 도구들 역시 내가 일찌감치 너희를 위해 알맞게 마련해 놓았다. 너희가 단지 차에 올라타기만 하면(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기만 하면)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다 있기에 네가 평안하게 극락 고향으로 돌아올 수가 있단다.’ 이와 같이 아미타불께서는 10겁 이래로 줄곧 우리를 향해 외치면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시방중생들을 매우 쉽게 구제할 수 있는 부처님이 되기 위해 어떻게 발원하셨습니까? 그 내용은 모두 48원 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시방중생들을 아주 수월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게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것도 역시 48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48원은 각각의 원 하나하나가 전부 시방중생을 구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그 중 하나의 원이라도 시방중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 원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아미타불께서는 차라리 이 원을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은 시방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십니다.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데에는 어떠한 조건도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굳이 조건이 있다고 말한다면 바로 당신이 단지 ‘왕생을 발원하고, 명호를 부르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극락세계가 아무리 청정하고 장엄하며, 아미타불께서 아무리 대자대비하시고 원력이 넓고 크시다 해도,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아미타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고, 계속해서 영원히 육도 안을 윤회하며 헤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먼저 반드시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합니다.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 이런 사람은 모두 백 퍼센트 반드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발원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도대사(善導大師, 613~681)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한다(衆生稱念 必得往生).”

 

시방중생들이, 즉 성인, 범부, 선인, 악인, 재가자, 출가자, 수행을 할 줄 아는 사람, 수행을 할 줄 모르는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 지혜가 없는 사람에 관계없이 그들이 단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른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본원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저 부처님은 지금 현재 성불하시어 극락세계에 계시나니, 마땅히 본래 서원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라!(彼佛今現 在世成佛 當知本誓 重願不虛)”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이 본래 서원은 허망하고 거짓된 원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이미 성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은 하나하나가 모두 중생을 위한 원입니다. 그러기에 단지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면서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우리는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는 마치 큰 원력의 배와도 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 육도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부침하며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바로 아미타불의 큰 원력의 배 위에 올라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미타불의 큰 원력의 배 위에 올라탄 사람은 때가 되기만 하면(세상에서의 수명이 다 되면) 곧바로 피안(저 언덕)에 도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비록 우리의 수명이 다하지는 않았고, 아직도 육도의 고통바다 속에 있지만, 다시는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아미타불의 큰 원력의 배를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당신이 아무리 호화로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 하더라도 모두 위험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이 거대한 원력의 배는 영원히 위험에 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는 아미타불께서 직접 만드시고 아미타불께서 직접 운전하시며 승무원들도 모두 극락세계의 보살님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피안에 도달할 수 있으며 어떠한 위험도 만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구제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단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왕생의 업인(業因: 결과를 위한 원인으로써의 행위)은 이미 성취된 것이어서, 이미 더 이상 육도를 윤회하는 범부가 아니며, 이미 극락세계 성중聖衆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이해하시겠습니까?

(대중: 이해합니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대중: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왕생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께 달려 있습니다. 마치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머물 곳도 없이 음식을 구걸하려고 밖으로 돌아다니던 한 아이가, 어느 날 그가 본래 국왕의 유일한 아들이며 태자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때부터 그는 바로 의젓하고 화려하고 귀한 신분이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유랑하는 거지가 아니라, 한 왕의 아래이자 만인의 위에 있는 태자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광대사(印光大师, 1861~1940. 정토종 제13대 조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생사를 벗어나려는 마음(生死心)이 간절하고, 한 생각의 의혹도 일어나지 않는 마음으로 믿을 수 있다면, 비록 아직 사바를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미 사바에 오래 머물 나그네가 아니며, 극락에 아직 왕생하지 못했더라도 이미 극락의 귀한 손님이니라.”

 

그러므로 왕생을 원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치 않고, 다른 수행을 섞지 않으며, 오롯하게 염불만 한다면 임종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고, 나중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지금부터 우리는 이미 극락세계의 성중이며, 이미 더 이상 육도를 윤회하는 범부가 아닙니다.

 

3. 아미타불은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이시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이 한 구절 명호를 ‘광명 명호(光明名號)’라고도 부르는데, 아미타불께서는 곧 한량없는 광명의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는 데 장애가 없는 까닭에 아미타라 하시느니라.”

 

이 말씀의 뜻은, 이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광명을 갖추고 계시는데, 그분의 한량없는 광명은 온 우주를 남김없이 비출 뿐만 아니라, 그분의 광명은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형상이 있는 해‧달‧별‧산‧강‧대지의 장애도 받지 않고, 또한 형상이 없는 우리 중생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탐진치貪瞋癡), 그리고 우리가 세세생생 동안 지어온 갖가지 죄업들의 장애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아미타불의 광명은 언제 어디서나 다 손쉽고도 빠르게 우리 곁으로 와서 우리를 보호하고 구제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을 또한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光明攝取)’ 부처님이라고도 부릅니다. 여기서 ‘광명’이란 아미타불의 불광佛光을 가리키며, ‘거두어주심’이란 아미타불께서는 지금부터 줄곧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으시며 우리를 지켜봐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시며 기다려주시다가, 임종 때가 되면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어 극락세계로 데려가신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께서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을까요? 우리가 밤에 잠잘 때 모기가 우리를 물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모기장 안에 있으면 모기는 우리를 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삼계육도 안을 윤회할 때에는 어떤 모기가 우리를 물려고 할까요? 원수와 채권자라는 모기가 있어 우리를 물려고 하며 우리에게 빚을 독촉합니다. 또 천마天魔와 외도外道라는 큰 모기가 있어 우리가 육도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지 염불만 한다면 영원히 아미타불의 광명이라는 모기장 안에 있게 되어, 큰 모기든 작은 모기든 모두 우리를 물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이 컵과도 같아서, 컵 속에 담긴 물은 밖으로 흐르지 않고 항상 이 컵 안에 있습니다. 염불하는 사람도 영원히 아미타불의 광명이란 컵 안에 있어 다시는 삼계육도에 윤회하지 않으며, 또한 갖가지 업력業力의 장애도 받지 않습니다. 이분이 바로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인은, 그가 부처님을 믿고 염불하기 시작하는 그때부터 한평생이 다할 때까지 아미타불의 광명이 거두어주시는 가호 가운데 있게 되어 아미타불의 보호를 받고, 원수나 채권자의 방해를 받지 않고, 천마나 외도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또한 재난의 상해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아미타불의 명호가 지니고 있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작용과 기능이어서, 따로 기도를 하며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불을 붙이면 불은 자연히 타오르게 되고, 물을 따르면 물은 자연히 아래로 흐르게 되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기능이어서, 원리를 안다거나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현세의 이익으로 보더라도 염불은 재난과 어려움들을 소멸할 수 있고, 복과 수명을 늘리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다 광명이 있는데, 그 광명의 크기는 그 사람의 염원과 복덕에 따라 다릅니다. 우리가 착한 생각만 일으켜도 상서롭고 좋은 빛이 매우 커지고, 악한 생각을 일으키면 혼탁하고 나쁜 빛이 나타나게 됩니다. 복덕이 크면 광명도 크고, 복덕이 작으면 광명도 작습니다. 만약 부모에게 효순하고 스승을 받들어 모시며 삼보를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광명은 더욱 맑고 깨끗하고 많을 것이며, 더 나아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다면 광명은 바로 온 우주에 두루 가득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 광명이 생기는 것일까요?

 

아미타불의 광명은 한량없는 광명인데, 아미타불께서 당신이 지니신 모든 공덕을 이 한 구절 명호로 변화시켜서 우리 중생들에게 회향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 명호에는 아미타불께서 지니신 모든 광명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범부가 미약한 마음으로 이 광명 명호를 부르더라도 곧바로 아미타불의 명호와 결합되고, 아미타불의 광명과 결합하게 되니, 어찌 우리 몸의 광명이 아미타불의 한량없는 광명을 따라 한량없이 큰 우주에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비록 단 한 방울이지만, 큰 바다에 떨어뜨리면 큰 바다와 융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염불하는 사람의 몸에는 모두 부처님의 광명이 나오는 것입니다.예전에 법사님 한 분이 미국에 홍법을 하러 가셨습니다. 그분께서 대중을 이끌고 법당에서 염불을 하고 있었는데, 염불이 막 끝나는 시간에 어떤 미국인 한 분이 그 법사님을 찬탄하며 말했습니다.

 

“스님! 스님! 저는 신통력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제가 법당에서 염불하고 계시는 대중들을 보았는데,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염불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몸에서 나는 광명이 매우 커서, 그 크기가 지구를 감쌀 만큼 그렇게 큰 광명이었습니다. 그다지 경건하지도 정성스럽지도 않게 단지 입만 벌름거리며 염불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광명이 아주 작아서 단지 입가에만 들락거릴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수승한 광경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저도 불교를 배우고자 합니다.”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염불하는 사람은 40리나 되는 광명이 몸을 비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40리가 매우 크다고 생각하겠지만, 우주와 비교하면 지구는 매우 작은 것이며, 지구와 비교하면 40리는 더욱 작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염불할 때 그에게서 나오는 광명은 지구를 감쌀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이 입이 깨끗합니까? 입을 열면 냄새가 고약합니다. 그렇지만 단지 우리가 한 번 입을 벌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광명이 나옵니다. 우리가 단지 입을 벌려 염불하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의 몸으로 드나드시며 광명을 놓으십니다. 비록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귀신이나 불보살님들은 모두 광명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염불만 하면 귀신이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힌 원한이 있다 해도, 염불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맺힌 원한도 풀 수 있으며, 지금 이후로 다시는 당신에게 빚을 독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염불을 하는 관계로 말미암아 상대방을 제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불을 할 때에는 어느새 귀신과 중음신이 제도되며, 우리가 염불을 하기 때문에 조상님들도 제도되고, 자손들도 보호받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염불이야말로 참으로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뛰어난 법문인 것입니다!

 

염불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부처님 명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중요성은 우리의 생명과도 같아서 이 부처님 명호가 있으면 우리의 생명이 있는 것이요, 이 부처님 명호가 없으면 우리의 생명도 역시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처님 명호가 없으면 사람이 죽은 뒤에는 곧바로 염라대왕의 처소로 가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러면 매우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4. 아미타불은 임종 때 맞이하러 오시는 부처님이시다

 

 

염불을 하는 사람은 염불하는 그때부터 아미타불께서 그분의 한량없는 광명으로 끊임없이 보호해주시고 돌봐주시며 잠시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임종에 이르렀을 때 몸을 나투시어 우리를 극락세계로 영접해주십니다. 󰡔아미타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치는 때가 오면 아미타불께서는 여러 거룩한 무리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투시므로,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칠 때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곧바로 아미타불의 극락국토로 왕생하게 되느니라.”

 

이제 막 목숨을 마치려는 사람은, 만약 그가 평소에 아미타불을 부르지 않았다면, 보통은 일단 숨이 끊어지고 나서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허둥대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떠나야 하고, 이 세상에서 일으켜 세운 모든 사업과 재산을 두고 떠나야 하며, 이런 환경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매우 아쉬워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원친채주(冤親債主: 원한 맺힌 사람들이나 채권자)들이 나타나 빚을 독촉할 것이며, 흑무상黑無常과 백무상白無常이란 저승사자가 쇠사슬로 가지고 나타나 그 사람을 묶어서 염라대왕 앞에 데려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니, 마음속으로 매우 고통스럽고 긴장되며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염불하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직접 오시어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영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임종이 다가와 막 숨이 끊어지려 하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아미타불께서 먼저 몸을 나투시게 되는데, 그 사람은 분명하게 아미타불을 뵐 수 있습니다. 그때에 그는 매우 기뻐하며 아미타불을 따라가서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직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한다면, 왕생할 시간이 됐을 때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맞이하러 오십니다. 지금부터 줄곧 임종 때까지 아미타불께서는 일분일초, 일찰나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잊어버리지 않으시며, 싫어하여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임종하는) 그 시간에 혼미하거나 깨어 있거나에 상관없이 아미타불께서는 한결같이 우리를 영접하러 오십니다.

 

 왜냐하면 혼미한 것은 단지 감각기관이 혼미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부인들이 볼 때는 혼미한 사람은 염불도 할 수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발을 움직일 수도 없을 거라고 여기겠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맑고 또렷합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염불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그 사람을 영접하러 오실 때에는 그 사람과 아미타불, 아미타불과 그 사람은 서로가 아주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동안 단지 염불만 책임지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왕생하는 일은(이는 아미타불의 소관이시므로) 아미타불께서 당연히 완전하고 완벽하게 책임지시고 우리를 극락세계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만약 어떤 염불행자가 임종할 때에 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를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는 위안이 있어서, ‘때가 되면 아미타불께서 영접하러 오신다’라고 생각하므로 이 염불인은 목숨이 마칠 때에 이르러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황하여 불안해하지도 않으며, 단지 조용히 아미타불께서 맞이하러 오시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편안하고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아미타불께서 맞이하러 오시기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아무튼, 아미타불께서 맞이하러 오신다는(내영來迎) 사실은 염불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위안과 희망이 가득하게 해줍니다.

 

어떤 사람은 “만약 내가 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부처님 명호를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상황을 아미타불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아미타불께는 대신통력과 대원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비와 대지혜로써 이 사람에게 어떠한 업장이 있으며, 어떠한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염불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혼미할 것인지 깨어있을 것인지에 대해 모두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며,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실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이 참으로 귀중합니까, 귀중하지 않습니까?

(대중들: 참으로 귀중합니다!)

 

그런 까닭에 단지 우리들이 평상시에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또 이 마음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고 진실하며, 지금 이후로 더 이상 잡수(雜修: 염불 외에 다른 수행을 섞음)나 잡념(雜念: 다른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름)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임종 때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임종할 때 의식이 혼미한가 혼미하지 않은가에 상관없고, 또한 임종할 때 병으로 몸이 아파 염불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와도 관계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단지 평상시에 염불만 책임지고 하면 됩니다.

 

 임종 때 만약 병으로 몸이 아파 염불을 할 수 없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시기만을 고요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이시고, 임종 때 맞이하러 오시는 부처님이시므로, 때가 되면 그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안온하고 위안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염불법문을 ‘이행도易行道’라고도 부르는데, 쉬운 법문이며 안락한 법문이라는 뜻입니다. 이 법문이 아니라면 중생들은 영원히 고통 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광명으로 우리를 거두어주시지 않고, 임종 때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지 않는다면, 설사 우리가 지금 염불을 한다 해도 마음속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끔찍하구나! 내가 지금 열심히 염불을 하고 있지만, 임종 때 만약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염불을 못하면 어떡하지? 만약 정신이 혼미하면 어떡하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사실 이런 걱정들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곳에 늘 계시며 대신통이 있으시기에, 그분께서는 당신의 상황을 다 아시고는 때맞추어 당신을 보호하시고 영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정토법문은 어떠한 조건도 없는 법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며, 다른 잡다한 수행을 하지 않고 완전히 아미타불께 의지하기만 한다면, 만약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법문에 의문점이 있으시다면 마음 놓고 질문해주시기 바랍니다.

 

 

5. 질문과 대답

 

 

질문: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입니다. 수행에는 믿음과 발원과 수행(信願行)이 구족되어야 하는데, 법사님께서는 법문하실 때 아미타불의 본원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수행으로서의 행(신원행 가운데 행)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지만 왕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단지 발원만 있고, 행의 정도(수준)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이는 일본의 본원법문(정토진종淨土眞宗 등에서 주창하는 염불법문)과 혼동되지 않겠습니까? 삼매(三摩地)에 들고, 깨끗한 마음이 끊이지 않게 이어지고(淨念相續), 한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一心不亂) 경지에 들도록 수행해야지 비로소 왕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변: 당신이 말한 그런 조건은 없습니다. 단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됩니다. 왜 ‘나무아미타불’이 ‘만덕홍명萬德洪名’이라 불릴까요? 그 이유는, 시방중생이 왕생하는 데 필요한 공덕과 자량이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 가운데 이미 다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 역시 마음 내키는 대로 멋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있으면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염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방중생들의 근기는 모두 한결같지 않아, 어떤 사람은 시간이 비교적 많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시간이 많은 사람은 염불을 많이 하시고, 시간이 적은 사람은 염불을 적게 하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수양이 비교적 좋은 편이고 성격도 비교적 좋은 편이며 마음도 비교적 평온한 편이어서, 염불할 때 당연히 마음에 비교적 잡념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성품이 비교적 억세고 습기(習氣: 쌓여온 습관의 힘)도 비교적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염불할 때는 망상과 잡념이 여전히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상관없습니다. 그가 염불만 하면 됩니다. 중생들에게 이러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아미타불께서 다 알고 계시니까요.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걸을 때나 머물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에 시간의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고, 순간순간 (염불을) 잊지 않는 것을 정정업(正定業)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원력을 따르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염불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가든지 머물든지 앉아 있든지 누워 있든지, 당신이 어느 곳에 가든, 어느 시간 때든, 무슨 볼일을 보든 간에 모두 염불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염불행자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시다고 했을 때, 무엇을 ‘대자大慈’라고 부릅니까?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대자’라고 부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제18원 속에서 단지 “내지십념乃至十念”만을 말씀하셨을 뿐, 반드시 어떤 기준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어떤 기준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왕생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왕생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은 일본의 (정토진종에서 말하는) 정토법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 본원법문은 아미타불의 제18원의 법문입니다. 제18원에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염불’을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본원을 살펴보니, 그 뜻은 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望佛本願 意在眾生 一向專稱 彌陀佛名).”

 

이 제18원을 (선도대사께서) 본원本願’이라 부르셨기 때문에, ‘본원칭명本願稱名’은 선도대사님에 의해 전해진 것입니다.

‘본원’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미타불께서 성불을 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체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본원을 살펴보니, 뜻은 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미타불이라는 만덕홍명을 칭념하는 것이 바로 본원에서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본원에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수행입니다.

 

방금 우리는 ‘본원칭명’이 선도대사님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선도대사 개인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용수보살께서는 󰡔십주비바사론󰡕 「이행품易行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은 이와 같으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를 생각하여 명호를 부르며(稱名) 스스로 귀의하면, 곧 필정(必定: 불퇴전)에 들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그러므로 항상 마땅히 억념(憶念: 굳게 기억하고 염불)해야 한다(阿彌陀佛本願如是 若人念我 稱名自歸 即入必定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常應憶念).”

 

용수보살께서는 이 문장의 말씀 속에서 ‘본원本願’이란 두 글자를 직접 지적하여 분명하게 밝히셨고, ‘칭명(稱名: 명호를 부르는 염불)’이란 두 글자도 분명하게 지적하며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제18원’이 바로 ‘본원’이며, ‘제18원’이 곧 ‘칭명염불’입니다.

 

“본원은 이와 같으시다(本願如是)”라고 했는데, 아미타불의 본원은 어떤 것일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若人)”는 시방중생을 가리키는데, 성인과 범부를, 범부 가운데서도 선인과 악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를 생각하고(念我)”에서 생각(念)은 의업(意業: 생각으로 짓는 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명호를 부르며(稱名)”는 구업(口業: 입으로 짓는 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稱念) 것입니다.

 

 “스스로 귀의하면(自歸)”이란 아미타불의 원에 수순하고 아미타불의 구제에 귀순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범부의 죄악의 생명과 생사의 생명, 그리고 윤회의 생명을 아미타불의 청정하신 생명과 영원한 생명, 윤회하지 않는 생명 속으로 완전히 귀의하여 들어가는 것인데, 이것을 일러 ‘스스로 귀의하면(自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극락왕생을 원하는 것을 곧 ‘스스로 귀의하면(自歸)’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원칭명’도 역시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근거가 아주 뚜렷하고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본원’은 용수보살님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일까요? 이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석가모니불께서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부처님 본래 세우신 원력

그 명호 듣고 왕생 원하면

모두 다 저 나라에 이르러

저절로 불퇴전에 오르리라.”

(其佛本願力 聞名欲往生 皆悉到彼國 自致不退轉)

 

“저 부처님(其佛)”은 아미타불을 가리키며, “본래 세우신 원력(本願力)”은 제18원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제18원에서는 기타의 삼학三學과 육바라밀을 말씀하시지 않고 “그 명호 듣고 왕생 원하면(聞名欲往生)”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이 한 구절 명호를 듣고서 극락왕생을 발원하여, 이때부터 오로지 나무아미불만 부르면 “모두 다 저 나라에 이르게(皆悉到彼國)”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으며, 또한 왕생하는 그 순간부터 자연히 불퇴전의 지위에 있게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무량수경󰡕에서 ‘본원’을 말씀하셨고, 용수보살께서는 이를 계승하셨으며, 선도대사께서 다시 널리 전하시면서 확정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본원은 일본의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본원입니다.

 

본원의 조건은 오직 ‘칭명염불’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신 “부처님 본원을 살펴보니, 그 뜻은 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에는 공부가 하나로 모아진 공부성편(功夫成片)이나, 자나 깨나 같은 경지인 몽매일여(夢寐一如)를 요구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조건이 필요하다면 묻고 싶습니다. ‘아미타불께서 누구를 구제하시겠다는 겁니까? 만약 이와 같다면 아미타불의 자비는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조건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신 “일심불란(一心不亂: 한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음)”은 예로부터 모두 잘못 해석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선도대사님의 해석을 보지 못했고, 모두 천태종의 사상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선종의 사상으로 해석하였으며, 정토의 사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모두 잘못 해석되어왔던 것입니다.

 

󰡔아미타경󰡕 가운데 다음의 세 단락은 예로부터 오랫동안 오해되어 왔습니다.

 

1.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는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不可以少善根 福德因緣 得生彼國).

 

2.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말씀을 듣고는, 명호를 굳게 지니고서 하루나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 한마음이 흐트러지지 아니하면(若有善男子 善女人 聞說阿彌陀佛 執持名號 若一日 若二日 若三日 若四日 若五日 若六日 若七日 一心不亂).”

 

3. “그 사람이 목숨이 마치려고 할 때에 아미타불께서 여러 거룩한 무리와 함께 그의 앞에 나타나시므로, 이 사람은 목숨이 마칠 때에 마음이 전도되지 않고 곧바로 왕생하게 되느니라(其人臨命終時 阿彌陀佛 與諸聖眾 現在其前 是人終時 心不顛倒 即得往生).

 

정토법문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은 송나라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특히 북송(北宋, 960~1127) 때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모두 천태종의 사상을 가지고 이 몇 단락을 해석했기 때문에 “일심불란”에 대한 해석이 다 그렇게 정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도대사님의 저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도대사님의 저작들은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유통된 반면, 중국에서는 당나라(618~907) 말 이후로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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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청나라(1644~1911)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에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중국인들은 선도대사님의 저작을 볼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일반 성도문聖道門의 교리를 사용하여 “일심불란”을 해석해왔습니다. “일심불란”을 가지고 선정에서의 일심, (수행)능력에서의 일심으로 생각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행도’의 원칙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가는 안락한 법문인 ‘이행도’가 아닌 해석들이 당연히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선도대사께서 정토법문을 어떻게 해석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선도대사께서는 (󰡔원생정토법사찬願生淨土法事讚󰡕에서) 극락은 무위열반계이다(極樂無為涅槃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극락세계는 보토報土의 경계이고, 열반의 경계이며, 이 경계에 들어가기만 하면 아미타불과 같은 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극락은 무위열반계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하지 못할까 두렵다(隨緣雜善恐難生)”고 하셨습니다. 일체의 다른 법문은 모두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입니다. 오늘 현교顯教를 만나면 현교의 법문을 배우고, 밀교를 만나면 밀교의 법문을 배우며, 천태교를 만나면 천태교의 법문을 닦아서 극락왕생에 회향하고, 선종을 만나면 선종의 법문을 닦아서 극락왕생에 회향하며,

 

어떤 법문을 만나면 어떤 법문을 닦고 그 법문을 닦은 공덕을 극락왕생에 회향하는데, 이것을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隨緣雜善)’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방식의 ‘인연에 따르는’ 수행이 바로 ‘잡다한 선’이며, 바로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少善根少福德)”입니다. 그래서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은 모두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多善根多福德)”일까요? 선도대사께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래께서 핵심 법문을 선택하셨으니,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고 가르치셨다(故使如來選要法 教念彌陀專複专).

 

다시 말해 우리가 단지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기만 하면 당신에게 수행공부가 있든 없든, 마음이 청정하든 청정하지 못하든,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는 것에 부합했으며,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호를 굳게 지니고서, 한마음 흐트러지지 아니함(執持名號, 一心不亂)”이란 바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稱念彌陀專復專)”는 뜻입니다.

 

이른바 ‘일심불란一心不亂’에서 ‘일一’은 곧 둘이 아님이요, 둘이 아님은 곧 ‘오로지(專, 전적으로)’이며, ‘불란不亂’은 난잡하지 않고 잡다하게 섞이지 않음이니 역시 ‘오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잡다한 수행을 하지 않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른다면, 이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그것은 견사혹(見思惑: 견혹과 사혹)을 조복시키거나 끊는 것과 같은, (자력)공부에 있어서의 일심불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우리들은 모두 왕생할 수가 없으며, 아미타불께서는 시방중생을 구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자聖者들만 구제하시려는 것이 돼버립니다. 왜냐하면 (자력)공부에 있어서의 ‘일심불란’이란 ‘이치적인 일심(理一心)’이거나 아니면 ‘현실적인 일심(事一心)’인데, 그렇다면 이미 그는 삼계 밖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을 깨트렸거나 삼계 내의 견사번뇌(惑)를 끊은 성인聖人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정토법문을 배우는 데 있어 만약 확실하게 안심할 수 있고, 확실하게 왕생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먼저 아미타불의 제18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제18원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정토를 배운다면 자칫 어긋날 수 있어 우리들이 안심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일심불란’의 수행에 대해 우리는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출가자의 신분이므로, 출가자의 신분으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재가자의 신분이니, 재가자의 신분으로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출가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탐진치)의 번뇌가 강성하고, 업장이 깊고 무거우며, 망상과 잡념이 분분하게 많은 범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몸과 마음으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고 있습니다.

 

재가 불자님들 가운데 만약 번뇌가 적고 업장도 깊지 않아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기만 해도 마음이 매우 청정한 분이 계신다면 여러분들은 이러한 근기의 몸과 마음으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시면 됩니다.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근기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여러분은 모두 평등하게 왕생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 해도 아미타불의 원력의 배 위에 타고 있고, 당신이 악한 사람이라 해도 역시 원력의 배 위에 타고 있어서, 당신이 성인이든 범부든,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관계없이 똑같이 다 원력의 배 위에 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왕생은 이 한 구절 만덕홍명萬德洪名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들의 신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난 뒤에는 모두가 이전의 신분을 버리게 되고, 모두가 아미타불께 의지하여 피안으로 오르게 되며, 무위열반의 경계에 들어가 함께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사바세계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있고, 지혜와 학문의 높고 낮은 차별이 있으며, 선악의 업장이 많고 적은 차별이 있지만, 극락세계에 가는 데는 이러한 것들에 의지해 왕생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만 있다면 설사 재가자라도 좋고, 수행을 할 줄 몰라도 좋고, 마음이 청정하지 못해도 좋으며, 사혹이 있어도 좋고, 견혹이 있어도 좋으며, 또는 한 품의 무명조차 조금도 제거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모두가 똑같이 평등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성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도대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거나 천인이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모두 왕생할 수 있으며, 그곳에 이르면 아무 차별이 없이 모두가 가지런히 불퇴전에 오른다(人天善惡 皆得往生 到彼無殊 齊同不退).”

 

󰡔아미타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극락국토에 왕생하는 중생은 모두 아비발치(불퇴전)이며, 그 가운데는 일생보처도 많이 있느니라(極樂國土 眾生生者 皆是阿鞞跋致 其中多有 一生補處).”

 

그러므로 우리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모든 사람이 불퇴전의 계위에 오르게 되며, 또한 모두가 다 일생보처(다음번에 부처 될 후보)의 신분을 갖게 됩니다. 이 법문이 가장 귀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아미타불의 본원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아미타불께서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 아니셨다면 이렇게 귀중한 법문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원에는 ‘인본의 원(因本之願)’과 ‘근본의 원(根本之願)’이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48대원 가운데 오직 제18원만이 근본의 원이며, 나머지는 모두 인본의 원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제11원에서 “무릇 극락세계에 왕생한 사람은 모두 불퇴전이며, 뿐만 아니라 반드시 멸도(滅度, 열반)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만 하면 퇴전할 리가 없으며, 반드시 멸도에 이르게 됩니다. 제21원에서는 “32상과 80가지 수형호가 완전히 구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22원에서는 “당신이 일생보처가 되게 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불국토에 가서 널리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왕생과 우리들의 성불은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에 달려 있습니다. 48원이든 제18원이든 모두가 다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것은 본원이 있었기 때문에 성불하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며, 또한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귀한 부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질문: 두 번째 질문입니다. 현재 국내(중국)의 도량에서는 대부분 정토법문을 선양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법문들은 계속 쇠퇴하고 있습니다. 만약 강력하게 유식이나 천태 등 다른 종파들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불교가 더욱더 쇠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또한 종(宗: 선종)에도 정통하고 교(敎: 경전 내용을 근거로 하는 모든 종파의 가르침과 수행, 교종)에도 정통한 도량들이 더욱더 적어지지 않겠습니까? 이 외에 불법을 연구하는 데 있어 󰡔무량수경󰡕이나 󰡔아미타경󰡕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들도 반드시 읽고 공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답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목적은 바로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함이셨는데, 널리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목적이 달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중생이 불교를 공부하지만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못하고, 죽은 뒤에도 여전히 계속 윤회하게 된다면, 설사 선종(宗)과 교종(敎)에도 통달하고 경전들에 깊이 파고들어 팔만사천법문을 다 통달한다고 해도,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목적이 아니며 또한 우리가 불교를 배우는 목적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단 한 번 윤회하게 되면 이생에서 배운 것들이 다음 생에서 반드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업력에 따라 윤회하게 되는데, 만약 지옥에 떨어진다면 오직 고통만 받게 됩니다. 몸과 마음으로 온통 고통만 받기 때문에 과거에 공부한 것들을 다시 돌이켜 생각할 여력이 없습니다. 예컨대 만약 돼지의 태에 들게 된다면 바로 돼지의 습성과 성질과 어리석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배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정토법문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이 법문을 배울 뿐만 아니라, 우리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법문을 배울 수 있도록 권유해야 합니다. 이 법문을 배울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큰 지혜이며, 장차 이 법문을 널리 전파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대자대비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 법문을 배울 수 있으면 여러분은 바로 큰 선근과 큰 복덕을 지닌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법이 소멸되는 시대(滅法時代)가 이르면 전부 다 소멸되지만, 오직 이 정토법문을 선양하는 󰡔무량수경󰡕만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 경전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경전이 모두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경전과 논서의 목적은 우리를 해탈케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만약 해탈할 수 있다면 모든 경전과 논서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에 깊이 들어가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직 왕생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왕생하기만 한다면 경전에 깊이 들어가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삼명육통(三明六通: 세 가지 지혜와 여섯 가지 신통)과 무수한(百千) 다라니가 당장에 모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저에 대해 말씀드리면, 젊었을 때는 상당히 많은 경전을 외웠는데,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기억력이 쇠퇴하여 그 경문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세세생생 동안 제가 출가를 해본 적이 없다가 금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가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고승으로 지냈을 때는 경전을 깊이 연구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고, 모든 선한 일들도 다 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상에도 태어나 봤을 텐데, 사천왕천‧도리천‧아마천‧도솔천에도 다녀왔으며, 색계천과 무색계천에도 다 다녀왔을 것입니다.

 

모든 법문도 다 공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범부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람을 죽인 적도 있었는데, 세세생생 동안 저에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저에게 상해를 입은 중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저에게 도둑맞고, 강도당하고, 욕먹고, 모욕을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비지옥에 떨어졌던 적도 있었고, 도산지옥에 오른 적도 있었으며, 화탕지옥에 내려간 적도 있었고, 축생과 아귀가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차이는, 오직 극락세계에만 왕생한 적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출가하신 적이 있었나요?

(대중들: 있었습니다.)

고승으로 지낸 적은 있었나요?

(대중들: 있었습니다.)

일찍이 선정에 들 수 있었기에 오신통을 갖춘 적이 있었습니까?

(대중들: 모두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대중들: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고기를 먹은 적이 있습니까?

(대중들: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도 간접적인 살생인데, 하물며 직접적인 살생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세생생 동안 모두 오계五戒를 범한 적이 있었고, 십악十惡의 업을 지었던 적도 있었으며, 천상에도, 지옥에도 모두 다녀왔습니다.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에서는 “천상에서부터 지옥에 떨어지고, 지옥에서부터 천상에 오른다”고 말씀하셨고, 󰡔열반경󰡕에서는 “비록 다시 범천의 몸을 얻거나 심지어 비상비비상천의 몸을 얻는다 해도, 목숨을 마치면 다시 삼악도 가운데로 떨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색계천에 태어날 수 있으려면 선정의 경지가 상당히 높아야 합니다. 그런 선정이 있으면 신통력도 생기게 되는데 담벼락도 장애 없이 출입할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도 알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목숨을 마치고 복이 다하면 장차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색계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색계천에서 가장 장수하는 수명이 팔만 사천 겁인데, 그동안 매우 깊은 선정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죽으면 여전히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한 국왕이 되어 금과 옥으로 장식된 옷을 입더라도, 그가 바다 속에 빠질 때는 거지 한 사람이 바다 속에 빠지는 것과 다를 바 없어서, 둘 다 똑같이 죽고 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만약 삼계육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출가자든 재가자든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어야 비로소 궁극적인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러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법문은 배울 필요가 없으며 널리 전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염불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최선을 다해 인륜의 도리를 지키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삿된 생각을 방지하고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며, 또한 다른 교리들도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우선시되는 것이 있고 부차적인 것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이 정토 교리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 한 구절 명호를 마음속에 굳게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다른 것들은 각자의 인연과 능력에 따라서 하시라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일들도 물론 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유감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이러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었을 때, 만약 정신이 맑고 귀와 눈이 밝다면 그건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명이 긴 사람일수록 대부분 치매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들의 아뢰야식 안에는 3장 12부의 경전이 조금도 빠짐없이 모두 저장되어 있기에, 극락세계에 이르러 아미타불을 뵙게 되면 모두 열리어 완전하게 갖추어지게 됩니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보시기 전에는 범부였지만, 한 번 새벽별을 보자마자 단박에 삼명육통과 백천 다라니를 갖추시어 즉시에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제일의 부처님이 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왕생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하며, 우리가 널리 중생을 제도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다만 성불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왕생하면 반드시 성불하게 되어 있고, 성불하면 틀림없이 널리 중생을 제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모든 것은 먼저 왕생하고 나서 보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상(無常: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외출했다가 자동차에 부딪쳐 죽을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며, 차를 타다가 자동차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이 정토법문을 배워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상無常에 대한 관찰이 매우 깊은 사람이라야 착실하게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상에 대한 관찰이 깊을수록 그 사람이 열심히 정진하도록 동기부여가 되고, 그 사람이 현생에서 해탈할 수 있는 법문을 찾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무상에 대한 깊은 관찰이 없다면, 그는 노력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이리저리 찾아 헤매면서 하루하루를 허비하다가, 정말 무상(죽음)이 닥쳐왔을 때는 이미 늦어버리게 됩니다.

 

질문: 만약 오로지 아미타불만 부르고, 다른 법문은 모두 배우지도 묻지도 않는다면 아마 이제부터 정토종만 남게 될 것이고, 시간이 더 지나면 말법의 시기가 매우 빨리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토염불에만) 치우쳐 집착하지 말고 마땅히 중용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보살들도 모두 많은 법문을 다 닦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답변: 이 문제에 대해 방금 모두 답변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문수보살께는 한 수의 발원게(願偈)가 있는데, 이 게송에서 문수보살님은 당신의 심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하오니, 제가 목숨이 마칠 때

모든 장애 다 사라지고

눈앞에서 직접 아미타부처님 뵈옵고

곧바로 극락세계로 왕생하여지이다.”

 

원아임종시願我臨終時 진제제장애盡除諸障碍

면견아미타面見阿彌陀 즉생안락찰卽生安樂刹

 

이것이 문수보살님의 발원입니다. 문수보살님은 법조(法照: 정토종 제4조, 당나라 때 오회염불을 창시)대사에게도 오로지 아미타불을 불러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럼 보현보살님의 발원은 무엇일까요? 보살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하오니, 제가 목숨이 마치려 할 때

일체의 모든 장애 다 사라지고

눈앞에서 직접 저 아미타부처님 뵈옵고

곧바로 극락세계로 왕생하여지이다.”

 

원아임욕명종시願我臨欲命終時

진제일체제장애盡除一切諸障碍

면견피불아미타面見彼佛阿彌陀

즉득왕생안락찰卽得往生安樂刹

 

아울러 보현보살님은 화엄회상華嚴會上의 41위位 법신보살들을 인도하여 극락으로 왕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부처님 앞에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께서도 모두 스스로를 하품하생의 범부로 생각하시고, 임종 때에 모든 장애가 사라져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 극락에 왕생할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앙을 없애고 어려움을 면할 수 있는 공덕 또한 이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재앙을 없애고 수명을 늘이게 해주시는 약사여래불의 불호의 능력도 이 나무아미타불이란 만덕홍명萬德洪名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섯 자의 위대한 명호(洪名)는 바로 아가타약(불사약)이며,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오직 ‘나무아미타불’이란 한 부처님의 명호만 부르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미타불을 부르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약속이나 하신 듯이 일제히 우리를 찬탄하시고, 우리를 기억하여 보호(護念)하시며, 우리를 칭찬해주십니다. 그러니 이 법문을 선택한 것은 사실 매우 지혜로운 선택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정토법문을 배운 뒤에는 더 이상 또다시 관세음보살님이나 대세지보살님의 명호를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아미타불만 부르면 관세음보살님이나 대세지보살님께서는 아주 기뻐하시면서 당신의 벗이 되어주시고 형제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보살님은) 마치 그림자가 항상 형체를 따르는 것처럼 당신을 보호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부르는 부처님은 바로 그분들이 머리 위에 모시고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관세음보살님의 목적은 바로 고난에 빠진 중생을 인도하시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시는 것이며, 그런 다음 극락세계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세음보살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무척 피곤하구나! 그대가 아직도 윤회하고 있고 아직도 고난 속에 있으니, 내가 세세생생토록 거듭거듭 그대를 고난에서 건져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대가 지금 이생에서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면 내가 홀가분할 수 있겠구나!”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법문과 이 부처님과 이 보살님의 목적을 알고서, 문자에만 의지하여 뜻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샛길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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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극락과 아미타불과 본원(本願)이다.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여 극락정토에 왕생(往生)하는 것이 정토신앙의 요체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란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는 말이다. 산스크리트로는 2 가지로 표현된다.

Namo-Amit bha = Namas + a + mita + bha
Namo-Amit yus = Namas + a + mita + yus

Namas 는 귀의한다는 말이며, a 는 부정의 의미를 지닌 접두사이며, mita 는 헤아린다[잰다]는 말이다.

bha 는 광명(光明)이며, yus 는 생명[수명,壽命]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 광명에 귀의합니다ㆍ 헤아릴 수 없는 생명에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말이다.

무한광명(無限光明)[=무량광(無量光)]에 귀의하고, 무한생명(無限生命)[=무량수(無量壽)]에 귀의한다고 하는 말은, 다르마[法,dharma]에 귀의하는 것이며, 진리 그 자체에 귀의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구의 삼업(身口意 三業)을 총동원하여 진리 그 자체에 귀의하는 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이다. 그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한다.

『무량수경』에서는 이 부분을 강조하기 위하여 불불상념(佛佛相念)의 개념을 도입하고 다. "불(佛)과 불(佛)이 서로 염(念)한다"라는 것은 "부처가 염불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미타삼매(彌陀三昧)에 들어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설하셨으며, 무한광명과 하나가 되고, 무한생명과 하나가 되어 저절로 진리 그 자체와 하나가 되어 왕생극락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속적인 욕망이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으며, 순수가치만이 존재하며, 순수신앙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久遠)의 과거에 정광불(錠光佛)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에 들게 한 연후에 조용히 열반에 드시었다. 이어서 53불이 차례로 출현하시어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드시었다. 마지막으로 출현하신 부처님이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이었다. 이때에 한 국왕이 모든 명예와 재산을 버리고 출가하였으니, 그가 바로 법장(法藏)비구이다.

법장 비구는 세자재왕 여래를 통하여 210 억의 불국토의 장엄을 관찰하였으며, 오겁사유(五劫思惟)를 거친 연후에 48원(願)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중생을 향한 약속이며, 그 약속은 아미타불의 성불이란 형태로 이행되었다. 그리고 극락정토는 완성되었다.

제불보살(諸佛菩薩)의 본원을 관찰해 보면, 일관되게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정신을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모든 부처님들[諸佛]이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하화중생이다. 이제 아미타불이 극락정토를 준비하신 것도, 오로지 정토에 중생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다.

법장(法藏)비구는 전념염불(專念念佛)하는 사람들을 남김없이 모두 정토에 맞이하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이 약속(願)을 성취하기 위하여 조재영겁(兆載永劫=매우 오랜 세월)에 걸친 수행을 쌓았으며, 수행의 공덕을 모두 중생들에게 회향하신 것이다. 우리들은 5탁악세(五濁惡世)에 태어나 말법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서원(誓願)에 의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스스로 「아건초세원(我建超世願)」이라 선언하셨지만, 이렇게 간절하게 거듭 거듭 약속을 확인하면서 본원을 세운 붓다는 달리 찾을 수 없다. 「모든 중생이 그 이름을 들어 지심(至心)·신요(信樂)·욕생(欲生)의 타력삼신(他力三信)을 얻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염불하거나, 그렇게 10번 하는 사람이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붓다가 되지 않으리」(제18원)라고 굳은 약속을 했으며, 그 약속은 성취되었다.

또 경(經) 가운데에,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은, 중생이 그 이름을 들어 왕생하고자 바란다면, 누구든지 모두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스스로 불퇴전(不退轉)에 이르게 하리라」하고 또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은 본원력의 불가사의함을 들어내 보이는 말이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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