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1)
-인광대사 가언록에서-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불법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사를 끝마치는 일이오. 생사해탈 문제는 너무도 큰 일이라 논하기가 몹시 어렵소. 우리 범부들은 근기가 열악하고 지식도 천박한데다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삿된 스승과 외도(外道)들까지 득실거리니, 생사윤회를 도대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소? 오직 염불 법문밖에 없으니, 진실하게 믿고 간절히 발원하며 염불에 일심으로 정진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해야 할 것이오.
불법 가운데 방편 법문이 많으며 참선을 하거나 교리를 공부해도 모두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염불을 꼭 하라고 권하겠소? 왜냐하면 참선이나 교리 공부 등은 모두 완전히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데, 염불 법문은 부처님의 원력 가피를 함께 의지하여 훨씬 확실히 보장되기 때문이오.
바다를 건너는 일에 비유하자면, 자력에 의지하는 참선이나 교리공부는 홀로 헤엄치는 것과 비슷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존하는 염불은 큰 여객선을 타는 것과 같겠소. 몸소 헤엄치다 보면 거센 파도에 휩쓸리거나 기력이 다해 침몰할 염려가 크지만, 큰 여객선을 타면 저편 목적지에 틀림없이 닿게 될 것이오. 이 두 가지의 안전성과 효율성은 누구나 쉽게 비교할 수 있으리다.
결론을 말하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참선으로 도를 깨닫고 생사윤회를 끝마치기란 근기가 뛰어난 대가가 아니면 정말 쉽지 않소. 반면 염불로 정토왕생을 구하는 법문은 단지 믿음과 발원만 진실하고 간절하며 수행을 굳게 지속해가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오.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관계를 밝히고 참선과 정토(염불)의 난이도를 비교한 것 중에 가장 뚜렷하고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한 설법은 영명(永明) 연수(延壽) 대사의 사료간(四料簡:네 수의 게송)이 단연 으뜸이오. 그 사료간에 비추어 본다면, 참선과 교리에 밝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정말로 염불하여야 당연하지만, 참선과 교리에 통달한 사람들도 또한 더욱 열심히 염불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통달했더라도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 결국 염불을 해야 생사윤회를 해탈할 수 있는 거요.
영명 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이신데, 중생을 일깨워 건지기 위하여 대자대비를 베푸셨소. 사료간은 정말로 사바고해를 건너는 자비로운 항공모함〔慈航〕이며, 대장경의 핵심요점이자 수행의 귀감이오.
有禪有淨土
猶如戴角虎
現世爲人師
將來作佛祖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도 있으면
마치 뿔 달린 호랑이 같아,
현세에 뭇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
無禪有淨土
萬修萬人去
但得見彌陀
何愁不開悟?
참선수행은 없더라도 염불공덕이 있으면
만 사람이 닦아 만 사람 모두 가나니,
단지 아미타불을 가서 뵙기만 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걱정 하리요?
有禪無淨土
十人九蹉路
陰境若現前
瞥爾隨他去
참선수행만 있고 염불공덕이 없으면
열 사람 중 아홉은 길에서 자빠지나니,
저승(中陰) 경지가 눈 앞에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 그만 휩쓸려 가버리리.
無禪無淨土
鐵牀倂銅柱
萬劫與千生
沒個人依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공덕마저 없으면
쇠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
이 사료간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선(禪)이고 무엇이 정토(염불)이며, 있고 없고가 무슨 뜻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오. 선(禪)이란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선종에서는 부모가 낳아 주기 이전의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이라고 일컫소.
선종에서는 말을 다 갈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참구하여 스스로 얻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따름이오. 실제로는 주체〔能〕도 없고 객체〔所〕도 없으며 고요하면서도 밝게 비추는 무념무상의 신령스런 지각〔靈知〕이자,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자리〔純眞心體〕요.
정토란 정토삼부경〔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의 가르침을 깊이 믿고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지송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법문으로, 오직 우리 마음 안에 정토가 있고〔唯心淨土〕 자기 성품이 바로 아미타불이다〔自性彌陀〕는 추상 이치만 치중하는 편협한 의미는 아니오.
참선(수행)이 있다 함은 참구하는 힘이 지극하여 생각이 고요하고 감정이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러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진면목을 보는 확철대오를 가리키오. 이른바 명심견성(明心見性)이오. 정토(염불)가 있다 함은 진실한 보리심을 내어 깊은 믿음과 간절한 서원으로 흔들림 없는 염불 수행을 용맹스럽게 지속해 가는 것을 말하오.
선과 정토는 추상교리만 언급하는 개념이며, 선이 있고 정토가 있다는 말은 근기에 따른 구체 수행 방법을 두고 일컫는 표현이오. 교리로 보면 항상 변함이 없어 부처님도 덧보탤 수가 없고 중생도 덜어낼 수가 없지만, 근기에 따른 수행은 모름지기 교리에 의해 실천을 시작하고 실천이 지극히 무르익어 교리를 체득함으로써 그것이 진실로 자기 안에 존재함을 증명하여야 하오.
두 쌍의 용어는 표현이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크게 다르므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자세히 음미하여 그 차이를 느껴야 하오. 가령 참선을 아무리 오래 했더라도 깨닫지 못했거나 또는 깨달았더라도 철저히 관통〔확철대오〕하지 못했으면 참선이 있다고 말할 수 없소. 깨닫기만 하고 증득하지 못하면 결국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오.
“깨달으면 곧 생사가 없다”는 말은 전문가(대가)의 표현이 아니오.
깨달음이란 마음의 눈을 뜨는 것에 불과하며, 깨달은 뒤에 비로소 진실한 수행과 실제 증험의 길이 펼쳐지게 되오. 깨닫지 못한 자는 눈먼 소경이 길을 가는 것처럼 맹목적이고 미신적 수련으로 악마의 구렁텅이에 빠져들〔走火入魔〕 위험이 매우 크오. 그래서 먼저 마음의 눈을 뜨고 깨닫는〔開悟〕 공부가 수행의 첫걸음으로 매우 요긴한 것이오.
깨달은 바를 증득하여 대가가 되려면 불에 기름을 끼얹듯 더욱 용맹스럽게 가행정진(加行精進)해야 되오. 그런데도 세상사람들은 말라빠진 고목처럼 가만히 앉아 죽은 화두나 들고 있는 것을 마치 대단한 참선(수행)이 있는 줄로 생각하는구려. 이는 정말 크나큰 착각이고 오해요.
또 염불도 추상적인 유심정토(唯心淨土)와 관념적인 자성미타(自性彌陀)에 편협하게 집착하여 믿음과 발원이 없거나, 혹간 믿음과 발원이 있더라도 진실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으면서 유유자적하니 그저 입으로 공염불하거나, 또는 열심히 정진하더라도 마음이 세속에 미련을 못버리고 내생에 부귀스런 집안에 태어나거나 천상에 올라가 온갖 복덕과 쾌락을 누릴 생각이나 하든지, 아니면 내생에 스님으로 출가하여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지혜를 얻어 불도와 정법을 크게 펼침으로써 중생들을 두루 이롭게 하기나 바란다면, 이들도 마찬가지로 정토가 있다고 말할 수 없소.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2)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사료간 중 첫 번째 ‘참선도 있고 정토(염불)도 있다’ 함은, 공부가 이미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明心見性〕 경지에 이른 뒤 더욱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바라는 수행을 일컫소.
참선으로 깨달은 뒤 경장(經藏)의 가르침에 깊숙이 들어가 여래의 권실법문(權實法門)을 두루 통달하고, 다시 그 중에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는 정토 수행만이 자기와 타인을 동시에 두루 이롭게 할 확실하고 안전한 대도정법임을 깨달은 자가 여기에 해당하오.
확철대오하여 용맹스런 힘이 호랑이 같은데 다시 염불로 생사 해탈을 장악하게 되면 호랑이에 뿔이 달린 격 아니겠소?
대승 경전을 독송하여 제일의미〔第一義〕를 이해한 뒤 대지혜요 유창한 말재주〔大辯才〕를 겸비하여 악마와 외도가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간담이 서늘해진다면 그 용맹과 위력은 견줄 바가 없을 것이오.
그리고 자기가 깨닫고 수행하는 바를 가지고 중생들을 교화하여 마음의 눈을 틔워 주되, 사람들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설법하면서 참선과 염불을 함께 닦아도 좋을 사람은 선정쌍수(禪淨雙修)로 인도하고 오로지 염불수행에 전념해야 할 사람은 정토전수(淨土專修)로 이끌어 근기의 상중하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라도 그 도덕 감화의 혜택을 입지 않는 이가 없게 될 것이오. 인간뿐만 아니라 천상 세계의 위대한 사범(師範)이 되는 게오.
명심견성한 사람이 염불로 정토 왕생을 구하면 임종 때 9품 연화 가운데 최상품으로 화생(化生)하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연꽃이 피면서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금방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거나, 최소한 원교(圓敎)의 초주(初住) 지위에 올라 일백 부처 세계에 부처의 분신(分身)을 나투어 인연과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 제도하게 되나니, 바로 장래의 부처나 조사가 된다는 뜻이오.
그러면 저절로 두 번째 게송은 아직 확철대오하지 못하여 자기의 힘으로는 생사 해탈의 가망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아미타불께서 와서 맞이해 주시도록 발원하면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키오. 아미타불께서 과거 법장(法藏) 비구로 수행할 때 48 대서원을 발하여 어머니가 자식을 그리워하듯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 약속을 굳게 믿고,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지성으로 부처님을 생각〔念佛〕하면 감동과 호응의 길이 서로 통하여〔感應道交〕 마침내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선정과 지혜를 함께 깊이 닦은 이가 왕생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십악(十惡)의 죄를 저지른 패역무도의 중생이라도 임종 때 막심한 괴로움에 못 이겨 큰 참회심을 통절(痛切)히 일으키고 아미타불 명호를 간절히 염송하면 설령 열 번이나 아니 단 한 번만 부르고 숨이 끊어지더라도 부처님 화신의 인도를 받아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오. 단지 굳게 믿고 간절히 발원하며 진실하게 염불수행을 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극락 왕생할 수 있기에, 만 명이 닦으면 만 사람 모두 정토에 간다고 한 것이라오.
그렇지만 임종 때 염불 몇 번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말은 그 마음이 지극히 간절하고 맹렬하기 때문에 그처럼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는 뜻임을 알아야 하오. 그저 유유자적하니 염불의 횟수나 기간만 따지면서 미지근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왕생할 가망이 별로 없음을 명심하시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염불로 단지 부귀공명을 구하거나 천상에 나기만 바라는 사람은 정토가 결코 없소. 왕생하지 못하는 자는 오직 자신이 발원하지 않은 것을 탓해야지 행여 자비로운 아버지 아미타불께서 와서 맞이해 주지 않으심을 원망해서는 안 되오. 요컨대 발원만 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극락정토요.
일단 왕생하기만 하면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미묘한 설법을 들어 단박에 불퇴전(不退轉:阿脾跋致)의 지위를 증득하게 되오. 비록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올라 영원토록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으며, 근기와 성품에 따라 혹은 단박에 혹은 점차로 모든 과위(果位)를 증득하지요. 그래서 단지 아미타불만 뵈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겠느냐고 반문한 것이오.
세 번째 게송은, 비록 참선으로 확철대오하고 명심견성한 사람일지라도 보고 생각하는〔見思〕 번뇌를 끊어 버리기 쉽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소. 두 번뇌는 인연따라 꾸준히 단련하면서 남김없이 말끔히 제거해버려야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소. 조금이라도 덜 끊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터럭 끝만큼이라도 남아 말끔하지 못하면 여전히 육도 윤회를 피하기 어렵소.
생사의 바다는 깊고 험하며 깨달음의 길〔菩提路〕은 멀기만 한데 아직 고향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이 목숨 다하면 어떻게 되겠소. 확철대오한 사람도 열 가운데 아홉은 이 모양이라오.
차로(蹉路)란 길 가던 중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거나 망설임 또는 허송 세월로 시기를 놓친다는 뜻이오. 보통 차타(蹉陀)라 하고 세간에서는 담각(擔閣)이라고 부르지요.
또 음경(陰境)이란 중음신의 경계(中陰身境)인데, 임종 때 금생 및 과거 역대 전생의 모든 선악 업력(業力)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장면을 뜻하오. 이 경계가 한번 나타나면 눈 깜박할 사이에 그 중 가장 맹렬한 선악의 업력에 이끌려 가 그에 상응하는 생명을 받는다오. 마치 채무자가 파산한 경우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채권액이 가장 많은 사람이 큰소리 치듯이, 가장 강렬한 업력이 먼저 끌어당기면 자신은 마음속에 만 갈래 생각의 실마리가 엉클어지면서도 조금도 주인 노릇을 못하고 무거운 쪽으로 휩쓸려 떨어지게 되오.
오조(五祖) 계(戒) 선사가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가 노공(魯公)으로 환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음(陰)은 소리와 뜻이 음(蔭)과 같아 뒤덮는다는 의미요. 업력이 진여 불성〔眞性〕을 뒤덮어 제 모습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음을 뜻하오. 더러 차(蹉)가 길을 헷갈려 잘못 든다는 착로(錯路)이고, 음경(陰境)이 오음마경(五陰魔境:모음이 중생의 불성을 해칠 수 있기에 악마로 비유한 말)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도 있소. 이는 선〔禪〕과 있다〔有〕는 문자의 의미를 몰라서 오해하는 헛소리요.
확철대오한 선사가 어찌 열 명 중 아홉이나 길을 잘못 들고 오음마경에 홀려 주화입마로 미쳐 날뛰겠소? 교리도 모르고 자기 마음도 밝히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수련하는 증상만〔增上慢〕에 걸린 사람이나 미쳐 날뛰는 것이지, 어찌 확철대오한 수행자에게까지 그 악명을 덮어 씌운단 말이오. 너무 중대한 문제라 밝히지 않을 수 없소. 다만 아직 자신을 안정시키고 운명을 수립〔安身立命〕하는 진실한 경지까지 이르지 못해 생사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확실하게 스스로 주인 노릇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뿐이지요.
그러니 어찌 두렵고 무섭지 않겠소? 정말로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 극락 왕생하는 염불 법문이 가장 안심하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탄탄대로지요.
마지막 네 번째 게송은, 수행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명심견성의 참선공부도 안하고 염불로 극락 왕생하려는 발원도 없이 그저 죄악을 짓는 데만 골몰하여 그 업보를 피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까 염려하는 경고인 셈이오.
영명(永明)선사의 사료간(四料簡) (3)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법문이야 수없이 많지만 오직 참선과 정토(염불)만이 가장 근기에 합당한 길이오. 깨닫지도 못하고 왕생을 발원하지도 않은 채 다른 법문이나 그럭저럭 배우다 보면,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닦아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는 길도 열리지 않게 되오.
고작해야 평생 수행한 공덕으로 내생에 천상의 복록이나 누릴 것이오. 금생에 올바른 지혜〔正智〕가 없으니 내생에 복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오욕(五欲)의 향락에 탐닉하여 널리 악업만 지을 게 분명하오.
일단 악업을 지으면 죄악의 보답을 피할 수 없고, 날숨 한번 안 들어오면 곧 지옥에 떨어져 쇠 침대 위에 구리 기둥이나 껴안고 억겁이 지나도록 빛과 소리와 맛 등에 탐착하여 생명을 살상한 죄악 등을 갚아야 할 것이오. 그 때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이 대자대비를 몸소 베푸시더라도 죄악의 업장 때문에 그 가피를 받을 수가 없소.
옛날부터 “수행하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지 않으면서 널리 많은 선행이나 닦는 것은 제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고 부른다”고 하였소. 금생의 수행으로 내생〔第三世〕에 복을 누리면서 복으로 말미암아 죄악을 짓고 그 다음 생에 타락하여 과보를 받을 것이니 말이오. 쾌락을 내생에 잠시 얻으면 고통은 영겁토록 물려받소. 설령 지옥의 죄업이 소멸되더라도 다시 아귀와 축생에 생겨나 사람 몸 회복하기가 정말 어렵고도 또 어렵게 되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손으로 흙 한 줌 집어 들고 아난에게 물으셨소.
“내 손의 흙이 많으냐? 대지의 흙이 많으냐?”
아난이 당연히 “대지의 흙이 훨씬 많습니다.”고 대답했겠지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비유하셨소.
“사람 몸 얻기란 내 손의 흙과 같고, 사람 몸 잃기란 대지의 흙과 같으니라.”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게송의 형식에 맞추느라 아주 간단히 축약한 표현이오.
그래서 네 번째 게송을 읽고 나면 마음이 놀라고 정신이 번쩍 들지요. 모두 생사고해를 깨닫고 보리심을 내어 정토(염불) 수행이 없는 사람은 재빨리 발원 수행으로 정토를 있게 하고, 정토가 있는 사람은 용맹정진하여 결정코 극락 왕생하길 구하는 것이 요긴하고 또 요긴하오.
다른 모든 법문은 오로지 자력에 의존하여 미혹의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야 생사를 끝낼 수 있는데, 정토 법문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지하여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 왕생하여 성인의 경지에 합류할 수 있소. 모두들 한번 생각해 보시오. 자력에 의지해 수행한다는데, 도대체 자기에게 무슨 힘이 있단 말이오? 단지 시작도 없는〔無始〕 때부터 쌓아온 업력밖에 무엇이 있소? 그래서 억만 겁이 지나고 천 만 생을 거치도록 해탈하기 어려운 것 아니오?
아미타불의 크고 넓은 서원력에 의지하면 저절로 일생에 모든 것을 끝마치게 되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법문 듣기 더욱 어려운데, 이미 보배의 산에 들어 왔다가 그냥 빈손으로 돌아간단 말이오?
또 반드시 알아야 할 게 있소. 염불 법문이 단지 하근기의 중생에게만 적합한 게 아니라 상중하 세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두루 통한다는 점이오. 최상의 지혜나 최하의 어리석음이나, 근기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부처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等覺菩薩〕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법문으로 일생에 생사를 끝마칠 수가 있는 것이오.
그래서 화엄경에 보면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0여 대선지식을 두루 참방(參訪)하여 무량 다라니문(陀羅尼門)에 들어선 뒤, 맨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이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에 돌아가도록 인도하셨소. 이걸 보아도 정토법문이 정말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원만한 법문임을 알 수 있소. 만약 염불이 어리석은 아저씨, 아주머니나 하는 것이고 궁극의 법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정말로 부처와 불법을 비방하는 지옥의 종자요, 그런 자들의 어리석음과 미친 기와 타락 운명은 너무도 가련하고 불쌍하오.
정토법문이 이처럼 고상하고 원만한 까닭은 자력에만 의지하는 다른 모든 법문과는 달리 부처님의 가피력을 함께 겸비하기 때문이오. 이는 보통의 교리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교리라오. 보통의 눈으로 특별한 교리를 보면 당연히 제대로 판단 평가할 수 없지요. 자력에 의지하는 보통 법문이 관직에서 단계대로 승진하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는 특별교리인 정토법문은 왕실에 태어나면서부터 태자가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그러나 정토 수행에 특별하거나 기이한 것은 전혀 없소. 단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구하면 저절로 가피를 입게 되오. 부처님이 중생을 보호하고 생각〔護念〕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함을 알아야 하오. 그래서 지성으로 감동시키면 반드시 가피력의 응답이 있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가 본디 지니고 있는 천진불성(天眞佛性)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천지우주를 두루 비추고 있소. 비록 악역무도(惡逆無道)한 죄인이라도 그의 본성이 지닌 신령스런 광명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소. 다만 맑은 거울이 먼지에 뒤덮여 있는 것과 같소. 어리석은 사람들은 광명이 없어 비추지 않는다고만 투덜거리고, 먼지를 닦아내면 금방 광명이 다시 나타날 줄은 모르는 것이오.
그래서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것은 부처님 생각에 의지해 잡념망상을 쫓아내는 일이며, 마음의 거울에 낀 먼지를 닦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오.
염불을 하다 보면 자기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신령스런 광명〔靈光〕이 아미타불 광명의 끌어당김을 받아 점차 환하게 드러나게 되오. 자력과 타력이 서로 호응〔自他相應〕하여 감응의 길이 열리게 되니〔感應道交〕 극락 왕생의 미묘한 뜻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소? 염불하는 사람은 단지 지성으로 간절하게 늘 부처님의 마음을 품고 부처님의 행동을 행하기만 하면 되오. 공경을 다한 만큼 이익을 얻고 정성을 보인 만큼 받아쓰기〔受用〕 마련이오. 모두 힘써 수행하기 바라오.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4
글 :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말법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 중생의 근기는 형편없고 업장은 막중한데 이끌어 줄 선지식조차 매우 드무니, 만약 정토 염불을 저버린다면 해탈할 길이 없게 되오.
영명 선사께서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것을 염려하며 특별히 사료간으로 후세인들을 일깨우고 계시니, 이는 정말로 나루터를 잃은 길손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뗏목이며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스승이 틀림없소. 그런데 애석하게도 온 세상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쳐 버리고 깊이 궁리하거나 음미하지조차 않으니, 이는 중생들의 사악한 업장이 가로막는 탓이오.
정토 염불 법문을 수행함에는 마땅히 믿음과 발원과 실행〔信願行〕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오. 믿음이란 부처님 힘〔佛力〕을 독실하게 믿는 걸 뜻하오. 아미타여래께서 원인 자리〔因地〕에 계실 때 48대 서원을 발하여 매 서원마다 중생을 제도하기로 다짐하셨소. 그 가운데 “나의 명호를 염송하고도 나의 국토에 생겨나지 못하는 중생이 있다면 나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소. 이제 그 원인 수행이 원만하여 그 과보로 아미타불이 되셨으니 우리가 지금 아미타불을 염송한다면 반드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자비력으로 중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자비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음을 믿어야 하오. 자식이 어머니만 그리워한다면 어머니는 늘 자식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품안에 받아들일 것이오.
그 다음으로 정토법문을 믿어야 하오. 영명 선사께서 사료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토법문과 다른 법문이 그 크기나 난이도 및 이해득실에서 얼마만큼 차이 나는지 분명히 알고, 비록 다른 스승들이 다른 법문을 몹시 칭찬한다고 할지라도 동요되지 말며, 설령 여러 부처님들이 눈앞에 나타나서 다른 법문을 닦으라고 권하신다 할지라도 이끌려 가지 않아야만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소.
서원이란 바로 이 생애에 틀림없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고 이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더 이상 여러 생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오. 머리(목숨)가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하면 할수록 미혹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오. 아울러 서방정토에 왕생한 뒤 다시 사바고해에 되돌아 나와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겠다는 발원도 함께 가져야 하오.
실행〔行〕이란 가르침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 나가는 것이오.
능엄경(楞嚴經)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염불삼매장(念佛三昧章)에 보면, “육근(六根:눈, 귀, 코, 혀, 몸, 뜻)을 모두 추스리고 깨끗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삼매(선정)를 얻으면 이것이 바로 제일입니다(都攝六根, 淨念相繼, 得三摩地, 斯爲第一).”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여기 보면 염불 법문은 마땅히 육근을 모두 추스려야 함이 잘 나타나오. 육근을 모두 추스리기 전에 특히 두세 근만 우선 추스릴 필요가 있소. 그 두세 근이란 바로 귀(耳)와 입(口)과 마음(心)을 가리키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여섯 글자 한 구절을 매 구절 매 글자마다 입안에서 또렷또렷(明明白白) 염송하면서 마음속으로도 또렷또렷 염송하고 그 염송소리를 귓속에서도 또렷또렷 듣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또렷하지 않은 데가 있다면 이는 곧 진실하고 간절한 염불이 못 되며 잡념망상이 비집고 생겨나는 틈을 주게 되오. 단지 염송만 하고 귀로 듣지 않으면 잡념망상이 생기기 쉽다오.
그래서 염불은 매 구절 매 글자마다 또렷하고 분명해야 하며(의미나 논리를 따지는) 사색을 해서는 안 되오. 그 밖에 간경(看經:독경) 또한 마찬가지요. 절대로 경전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별하지 마시오. 분별하면 감정과 생각만 많아질 뿐 얻는 게 적어지기 때문이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지성으로 경전을 베껴 쓰는데〔寫經〕, 얼마나 일심(一心)으로 전념(專念)했던지 오직 베껴 쓰는 데만 정신이 팔려 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다오. 그래서 하늘이 이미 어두컴컴해졌는데도 어두운 줄 모르고 여전히 쉬지 않고 계속 베껴 쓰고 있었소.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옆에 와서 “날이 이렇게 어두컴컴해졌는데(불도 쓰지 않고) 어떻게 경전을 베껴 쓸 수 있습니까?”라고 놀라 물었다오. 그러자 경전을 쓰던 사람은 그만 감정 생각이 생기면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소.
무릇 밝고 어둡다는 분별은 중생들의 허망한 견해〔妄見〕이자 속된 감정이오. 그래서 일심으로 전념할 때는 망상과 감정이 모두 텅 비어 버려 오직 경전 베껴 쓰는 것만 알고 날이 어두워진 줄은 모른 게오. 또 날이 어두워지면 빛이 없어 글씨를 쓸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 거지요. 그러다가 남이 옆에서 끄집어 흔들면서 그만 무명(無明)이 생겨나고 감정생각이 갈라졌소.
망상이 움직이자 광명과 암흑이 즉각 판연히 구별되고 더 이상 경전을 쓸 수 없게 된 거라오. 그래서 수행공부의 길은 정말로 오롯하게 추스리는〔專攝〕 데에 있소. 감정생각이 일지 않아 무념무상하다면 어디에 사견(邪見)이 있겠소. 사견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지혜〔正智〕지요.
〔옮긴이 보충해설 : 유가의 서경(書經)에는 요순(堯舜) 임금 때부터 전수되어 온 도맥(道脈)으로 알려진 16자 심법(心法)이 실려 있다. “사람 마음 오직 위태롭고 진리 마음 오직 미약하니, 오직 정성스럽고 오직 일념으로 중용의 도를 진실되게 붙잡아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進一, 允執厥中).”
우리 속담에는 “정신이 한 군데 집중되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리오?(精神一到, 何事不成?)”라는 말이 있고, 중국에는 정성이 미치는 곳에는 쇠와 돌도 열린다(精誠所致, 金石爲開)는 속담도 있다. 모두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염불 경지와 같은 도의 본질속성이다.〕
그리고 정토염불을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인과응보를 크게 제창하여야겠소. 최상의 지혜를 갖춘 사람이야 본디 윤리강상(倫理綱常)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알지요. 그러나 중하 근기의 중생들에게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그 구체 사례도 뚜렷한 증거로 소개해 줄 필요가 있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행실을 경계시킬 수 있겠소?
〔옮긴이 : 유형의 국가 정치에서 법령과 형벌을 제정하여 공포 시행하는 이치도 이와 똑같으며, 무형의 종교 도덕상 인과응보 법칙과 서로 표리관계로 일체(一體)를 이룬다.〕
그래서 인과응보는 진리〔道〕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오. 사실 인과응보의 법칙을 독실하게 믿는 일도 결코 쉽지 않소. 소승의 초과(初果:수다원)와 대승의 초지(初地)에 이르러야 진실로 인과응보를 독실하게 믿을 수 있다오. 그 아래 중생들은 한번 마음에 거슬리는 인연을 만나면 살생이나 도적, 간음, 거짓말 등의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소. 미혹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악업이 뒤따라 지어질 위험이 크지요.
그런데 총명하고 글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들은 인과응보를 오히려 경시하고 마치 중하 근기의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나 알려 주는 것으로 여기고 있소. 그 뜻만 대강 알아서는 믿는다고 말할 수 없거니와, 설령 잘 안다고 할지라도 이를 몸소 실천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오직 초과(初果)와 초지(初地)에 올라 성인(聖人)의 부류에 끼어야만 미래의 생사윤회를 받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빛·소리·냄새·맛·느낌·생각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독실한 믿음이라고 일컬을 수 있소.
그래서 몽동(夢東, 徹悟) 선사께서도 “심성(心性)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인과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며, 인과를 깊이 믿는 사람은 마침내 반드시 심성을 크게 밝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소.
세상에 염불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정말로 생사윤회를 끝마치는 사람은 왜 그리 적은지 한번 생각해 보시오. 이는 오직 염불하는 사람들이 깊은 믿음과 간절한 발원이 없거나, 내세에 부귀공명을 누릴 복덕의 과보만 구하기 때문이오. 내세의 부귀공명이란 게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과 같아서 추진력이 다하면 되돌아 자기에게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요.
금생에 염불하는 사람이 내세의 인간이나 천상의 복록을 구한다면 그 복록으로 부귀공명을 얻겠지만 올바른 지혜가 없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인과응보를 믿지 아니하겠지요. 인과응보를 믿지 않는 사람이 부귀공명의 지위에 올라앉으면 마치 사나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어 죄악만 더욱 증대시키게 될 것이오. 그래서 복록이 클수록 죄악도 더욱 많이 지어 그로 말미암아 다음 생에 막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제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는 것이오.
그러므로 염불 수행하는 사람은 복록을 보답 받을 생각일랑 절대로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오. 오직 용맹스럽고 날카롭게 앞으로 곧장 나아가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만이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미묘한 법문으로 믿어야 하오. 그래서 철오(徹悟:夢東〕 선사께서 일찍이 “정말로 생사를 위해 보리심을 내고 깊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라(眞爲生死, 發菩提心, 以深信願, 持佛名號).”고 가르치셨소. 이 16글자는 정말로 염불법문의 큰 강령(綱領)이요, 종지(宗旨)요.
또 “아미타불 한 구절은 우리 부처님 마음의 요체이니, 세로로는 다섯 시기〔五時:부처님의 다섯 설법 시기인데, 보통 천태종에서 화엄·녹야원(소승 아함경)·방등(方等:유마경·승만경 등 대승경전)·반야·법화 열반으로 나누는 견해가 대표적이다.〕를 관통하고, 가로로는 여덟 가르침(八敎:三藏敎·通敎·別敎·圓敎의 네 化法과 頓敎·漸敎·秘密敎·不定敎의 네 化儀를 합쳐 부르는 천태종의 개념)을 포괄하네(一句彌陀, 我佛心要, 竪徹五時, 橫該八敎)”라고 찬탄하셨소.
정말로 ‘나무아미타불’ 한 구절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하오.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그 궁극 경지를 알 수 있으며,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等覺〕 보살조차 다 알지 못하는 게 있다오. 그래서 보살도 조금밖에 모른다〔菩薩少分知〕고 말하는데, 하물며 우리 범부들이야 더욱 더 믿고 실행해 나갈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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