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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열 대감의 삼생(三生) 이야기

 

윤웅렬 대감은 윤보선 대통령의 조부(윤영렬)의 형님이다. 1903년 조선조 말 [광무7년 봄] 군부대신이었던 윤웅열 대감이 아들 윤치호와 호위병을 데리고 석왕사를 찾았다.

 

하루를 묵고 난 윤대감은 아침에 갑자기 산중의 대중스님들을 모인 자리에서 “지금으로부터 한 백년 전후하여 해파 여순(海坡 與淳) 이라는 사람의 행적을 아는 분이 있느냐“고 묻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윤대감은 무척 답답해하였다. 왜 윤대감이 해파 여순의 행적을 알고 싶어 하는지 그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한말 고종 때 대원군과 민중전 사이에 한참 전쟁이 생겼을 때 윤대감이 참소를 입어 전라도 완도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윤대감이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궁금하고 답답하여 하루는 몸종이 어디를 갔다 오더니, “대감님! 문두라는 여인이 점을 어찌나 잘 보는지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였다. 대감은 믿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처지가 답답하여 시험 삼아 한번 가보았다.

 

대감이 묻기를

“내가 도대체 어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는지 알 수 있겠느냐?”

“예 영감님은 서울 사람인데 유배를 왔습니다.”

 

“그럼 언제쯤 풀려나겠느냐?”

“죄가 없으니 이제 한 보름만 있으면 해배문자(귀양이 풀렸다는 문서)가 올 것입니다.“

“누구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와서 있으니 아들의 소식이 궁금하니 알려 줄 수 있겠느냐?”

“영감님의 자제는 유학을 하고 있는데, 청국에서 유학 온 여자와 내년가을 상해에서 결혼식을 합니다. 그때는 부자가 상봉 하겠습니다.“

 

“그것은 모두 훗날 일이니 당해봐야 알 것이고 나의 전생에 대하여 말 해줄 수 있겠느냐? “

"예 영감님은 전생에 스님 노릇을 하다 온 분입니다.“

 

“어디서 스님 노릇을 하였단 말이냐?”

“함경도 안변 석왕사였는데 법호는 해파이고 법명은 여순이라 불렀습니다.”

 

“수행을 잘 한 스님이었느냐?”

“영감은 형제가 다 출가하여 중이 되었는데, 대감은 수행을 잘하다가 열반하신 뒤 다음 생을 중국에서 태어나 일품 대신의 벼슬을 하여 이름을 천하에 날렸고, 두 번째는 조선에 태어나 오복이 구족함으로 얼마 안가서 대감의 소리를 듣겠소이다.

 

그러나 영감님의 형님은 중노릇을 하면서 공부도 하지 않고 시주 돈만 받아 수용한 과보로 지옥에 들어가 고초를 받다가 인간으로 세상에 오기는 했으나, 빈궁 보를 받아 지금 강원도 통천군 새 술막에서 술장수를 하고 있는데 두 손이 조막손인데다 이경운 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윤대감은 그제서야 가슴에 깊이 와 닫는듯하여 문두 여인이 말해준 것들을 모두 쪽지에 기록해 두었다.

 

그 후 윤대감은 문두의 말대로 보름이 지나자 귀양에서 풀려났고, 이듬해 가을에는 아들 치호가 중국 상해에서 결혼식을 한다는 연락이 와서 부자상봉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부대신에 오르는 등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네 가지는 다 맞았지만, 석왕사에서 중노릇 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려고 아들과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석왕사에 온 것인데, 이 절의 스님들 모두가 모른다 하니 답답하였다.

 

그래서 뒷산에 있는 내원암에 참배를 하려고 가다가 잠시 쉬는데 암자입구의 부도들이 무성한 풀에 덮여있는 것을 보고 뽑아주려는 순간 그 부도에 해파 여순 이란 이름이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대감은 깜짝 놀라면서 아들 치호와 수행원들을 불러 부도에 절을 시키고 주머니에서 문두에게 듣고 적은 종이쪽지를 보여주는데 해파 여순이라 쓰여 있었다.

 

대감은 석왕사 절로 내려와 산중스님들을 모이게 한 뒤 완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대중스님들이 놀랐다. 이때 원로인 설하 화상께서 “완도 유배지에서 삼생사를 말해준 분은 문두라는 점쟁이 여자가 아니라 법당에 앉아 계시는 문수보살이었습니다.

 

“설하 큰스님은 모든 일을 그토록 잘 아시면서 왜 묵묵부답이었습니까? “

”불보살이 하시는 일에 소승이 참견해서야 되겠습니까? 대감께서 직접 행하여 깨닫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설하 스님의 말씀을 듣고 윤대감이 대웅전으로 들어가 문수보살님 앞에 절을 올리고 얼굴을 들어 쳐다보니 자신에게 점을 보아주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여 불상좌대 아래 쓰여 있는 조성내역을 적어 놓은 명문을 읽어보니 거기에도 증명비구 해파 여순이라 적혀있었다.

 

윤대감은 보살상 앞에 엎드려, “자비하신 불보살님께서 인연중생을 버리지 않고 구제하여 주시니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나이다.“ 며 무수히 절을 올렸다.

 

윤대감은 그길로 윤 대방이라는 수행원을 시켜서 “강원도 통천군 주막집에 가서 술장수를 하는 이경운[李慶雲]이라는 사람을 찾아 데려 오너라 두 손이 다 조막손이라니 찾기도 쉬울 것이니라“

 

명을 받은 윤 대방이 강원도 통천군 주막에 도착하니 정말 술장수를 하고 있는 이경운 이라는 조막손을 가진 사람이 있어 4일 만에 데려 왔다.

 

수행원들이 대감께 절을 올리라하자 그만두고 앉으라 한 뒤 전생담을 말해주며,

“살기가 매우 곤란해 보이니 돈 백량과 흰 광목 열 필을 줄 것이니 논밭이나 좀 사고 옷이나 지어 입으시오. 이 모두가 부처님의 한량없는 은덕이니 과거사를 뉘우치고 염불참회를 많이 하여 업장소멸 하시오“ 하였다.

 

이경운 이라는 사람은 “전생의 동생이 금생의 부모보다 낫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그리고 석왕사에는 시주금 2백량을 바치면서“내가 전생에 복을 닦은 절이니 부처님 공양금으로 써 달라” 하고는 그 다음날로 서울로 귀경하였다 한다.

 

이는 안변 석왕사(釋王寺) 사지(寺誌)에 기록되어있는 실화이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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