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불법금탕편(佛法金湯編)》 제11권에는 송나라를 건국한  초대황제인 태조 조광윤과 마의 화상과의 대화가 실려 있다.

 

중국 송나라(송나라:960~1279)의 창시자이며 초대 황제(960~976 재위)인  태조 조광윤은 전에 후주(後周)의 금군 고위 장교로 있을 때 후주 세종(世宗) 시영(柴榮)이 불교를 금지하고 보살의 동상을 녹여 화폐를 주조하는 것을 보고 몰래 마의 화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자고이래로 멸불(滅佛)한 황제가 있습니까?”

마의가 대답했다. “하필 고인의 일을 물을 것 있습니까? 세종의 가족이 곧 보응을 받는 것을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조광윤이 물었다. “주상께서는 총명하여 현인에게 일을 맡기고 밤낮 노력하며 부지런히 힘쓰며 천하 통일을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당태종과 같은 풍모가 있는데 천하는 언제쯤 평안해질까요?”

마의 화상이 말했다. “갑자년이 되면 천하가 안정될 것입니다.”

조광윤이 물었다. “고대 제왕이 불법(佛法)을 훼멸한 것과 주나라와 비교하면 결과가 어떻습니까?”

마의가 말했다.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가 불상과 절을 부수고 불경을 불사르며 승려들을 묻어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는 7년 후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의 부자 모두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는 절과 경전을 훼멸하고 스님을 강제 환속시킨 적이 있습니다. 얼마 후 온몸에 악질이 돋고 전신이 썩어 죽었는데 향년 겨우 36살이었고 3년이 안 되어 나라도 망했습니다. 당 무종(武宗)이 절을 부수고 멸불했을 때에도 그해에 단약에 중독되어 사망했는데 향년 불과 32살이었습니다. 이후 황소의 난이 일어나면서 당나라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조광윤이 말했다. “장기간 나라가 혼란해 백성들은 전쟁을 싫어합니다. 불법을 훼멸함은 국가의 복이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의가 말했다. “이미 흰 기운의 징조가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성스럽고 영명한 황제가 나타날 것이며 그 황제를 따라 불법도 흥성해지고 또 무궁하게 전해질 것입니다. 부디 제 말을 잘 기억하십시오.”

과연 마의 화상의 말대로 주 세종은 멸불 후 4년 만에 폭사했고 후주 역시 조광윤에 의해 소멸되었다. 조광윤은 송나라의 개국 황제가 된 후 마의 화상의 당부를 기억해 절을 중건하고 사원에 많은 전지를 내렸다. 또 불법을 널리 알려 나라가 안정되고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불법도 따라서 흥성해졌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멸불(滅佛) 사건이다. 멸불을 시행한 네 황제는 모두 악보(惡報)를 받았으며 결국 아주 처참했다. 정상적으로 사망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도 멸망하거나 전란이 발생했다. 이 네 명의 황제가 인간세상에서 받은 악보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사후는 어떠했을까? 고서에는 북주 무제 우문옹의 사후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 다른 세 사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와 북제(北齊)에는 불교가 매우 성행했다. 북주의 무제 우문옹은 정권을 맡은 후 이렇게 생각했다. ‘출가인은 재산이 없고 농사도 하지 않고 세금도 바치지 않으니 국가의 재정 수입이 감소되며 천하통일의 대업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불교 도교를 금지하라. 경전과 불상을 모두 없애고 사문, 도사를 모두 환속케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발표된 후 즉시 시행되었다. 이때 적지 않은 승려들이 서울로 들어가 법을 수호했으며 무제를 찾아가 멸불정책은 잘못임을 간했으나 모두 쫓겨났다. 서기 577년 무제는 북제를 멸망시킨 후 불교를 없애는 명령을 반포해 원래 북제에 있던 불교를 전부 멸하고 사원을 모두 파괴했다.

당시 많은 승려들이 감히 항의조차 하지 못했지만 유독 혜원화상만은 무제의 악행에 대해 소리 높여 항변했다. “폐하께선 지금 왕의 힘으로 삼보(불법승)를 파괴하시는데 이는 나쁜 짓이며 아비지옥(18층 지옥)은 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폐하께선 안녕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무제는 이 말을 듣자 화가 나서 소리쳤다. “백성들이 즐거울수만 있다면 짐은 지옥에 들어가는 고통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혜원이 반박하며 말했다. “폐하께선 사법(邪法)으로 사람을 다스리며 현재 고통스런 업을 심고 있습니다. 백성들도 폐하와 함께 지옥에 떨어질 텐데 어디서 즐거움을 얻겠습니까?”

마침내 무제는 권고를 듣지 않고 원래 북제 경내에서 대대적인 멸불정책을 실시했다. 결과 4만여 곳의 절에서 모든 경전과 불상이 불에 탔고 사원의 재산은 관에 몰수 되었으며 승려들은 모두 강제로 환속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제는 악질에 걸려 온몸이 썩어가며 죽어갔다. 3년이 안 되어 수문제 양견이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나라를 세웠다.

<법원주림>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기술되어 있다. 수나라 개황 11년 대부사승 조문창이 갑자기 죽었는데 유독 가슴에만 약간의 온기만 있었다. 가족들이 감히 입관하지 못하고 있는데 얼마 후 그는 살아났다. 사람들이 놀라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조문창은 식구들에게 말했다. “내가 처음 죽었을 때 어떤 사람이 나를 끌고 염라대왕 앞으로 갔다. 염라대왕이 내게 ‘너는 일생동안 무슨 복덕을 지었느냐?’하고 묻기에 내가 대답했다. ‘저는 가정이 가난해 공덕을 세울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만 매일 <금강반야경>만 외웠습니다.’ 염라대왕이 내 말을 듣더니 칭찬하며 말했다. ‘좋군, 네가 <금강반야경>을 읽은 공덕은 매우 크오.’

염라왕은 즉시 사람을 시켜 나를 데리고 가더니 창고를 뒤져 금강반야경을 꺼내왔다. 나는 <금강반야경>을 염라왕 앞에 받들고 섰다. 염라왕은 한 사람에게 경을 들고 서쪽에 서 있으라고 하고 나를 동쪽에 서게 하고는 외우게 했다. 나는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웠다. 염라대왕은 매우 기뻐하며 사람을 시켜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사람을 시켜 나를 남쪽 문으로 나가게 했는데 문 입구에 도착하자 무제가 옆의 방에서 삼중으로 족쇄가 잠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를 소리쳐 불렀다. ‘그대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오. 잠시 이리로 좀 와 보시오. 내 할 말이 있소이다.’ 그래서 나는 즉시 가서 만났다.

무제가 말했다. ‘나를 알아보겠소?’


내가 말했다 ‘저는 전에 폐하의 시위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무제가 말했다. ‘그럼 나의 과거 신하로군. 그대는 집에 돌아가 수나라 황제에게 상주해주게나. 내가 지은 많은 죄는 모두 변명할 여지가 있지만 멸불(滅佛)을 실시한 죄는 너무 커서 사면 받을 수 없으므로 황제더러 나를 위해 약간의 공덕을 지어주시길 청하네. 이렇게 선을 쌓아 내가 지옥을 떠날 수 있도록 해주시게.’

나는 그의 청에 응답하고 떠나갔다. 남문을 벗어날 때 한 사람이 분뇨 구덩이 속에 있는데 머리만 위에 떠 있어서 나를 데리고 가는 사람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이는 진나라 대장 백기요. 그는 사십여 만 명의 항복한 조나라 군졸들을 묻어 죽여 하늘을 범하는 대죄를 지었기에 이곳에 감금되었는데 죄악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조문창은 집에 도착해 살아난 후 이 일을 수나라 문제에게 주상했고 문제는 영을 내려 사람들에게 돈을 내어 주 무제를 초도하는 법사를 지냈다. 삼일간의 큰 제사를 지냈으며 아울러 이 일을 기록하여 <수서(隋書)>에 써넣었다.

고대 통치자의 멸불은 이처럼 비참한 결말이 났다. 그렇다면 오늘날 통치자가 멸불한 결과는 또 어떠하겠는가?

<9평 공산당>에 의하면 중공은 법도 없고 하늘도 없으며 공산당만이 홀로 위대하다고 하면서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다. 독재정부를 건립하기 위해 무신론을 크게 떠벌리며 사람에겐 전생이나 내생이 없고 인과응보가 없다고 고취시켰다. 중공의 모택동은 “하늘과 싸우고” “소귀신과 뱀신”을 비판했으며 “절대 그것들이 자유로이 범람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

모택동을 두목으로 하는 중공의 명령 하에 정권 초기 종교에 대해 잔혹한 진압을 했으며 각종 회도문(會道門)의 취소를 명령했다. 1950년 시작되어 전국에 파급된 신앙박해 운동 중 각급 정부는 기독교, 천주교, 도교, 불교 등의 조직을 해산했고 교회, 절, 불당의 구성원들은 정부에 등록하고 반성하게 했다. 등록하지 않을 경우 나중에 조사해서 드러나면 엄정하게 다스렸다.

1951년에는 또 문건을 반포해 회도문 활동을 계속 진행하는 자에게 사형 혹은 무기 징역에 처하게 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이 당시 운동에서 300여만 명의 신도, 방회의 구성원이 피살되었다. 가정 기독교 신도 중 13만 명이 거주지 감시를 당했다. 또 1957년 이전에 일만 일천 명의 신도가 피살되었고 대량의 신도들이 임의로 구금되거나 벌금을 강요당했다. 문화혁명 중에는 또 무수한 절이 파괴되었고 승려들은 길거리로 내몰렸으며 티벳에서는 90%의 사찰이 파괴되었다.

중공 두목에게는 정말 법과 하늘이 없는가? 아니다! 이때부터 인간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도 모택동이 지은 죄는 집안에 재앙이 미쳤고 그의 최후는 매우 비참했다. 모택동에겐 10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과반수가 요절하거나 실종되었다.

첫째 아들 모안영은 한국 전쟁 중에 미군에 의해 맞아 죽었고 둘째 모안청은 정신병으로 병사했다. 부인인 강청은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 집행이 2년 늦추어졌다. 나중에 무기로 감해졌으나 1991년 5월 14일 자살했다.

중공 특무 두목 주은래는 너무나 나쁜 일을 많이 저질러 자식이 없었고 후대가 끊어졌다.

그렇다면 이들의 사후(死後)는 어떠했을까? 성도 동쪽 교외의 석능에는 저승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에 따르면(천지에는 인간, 귀, 신의 삼계가 있는데 인간은 양계에 있고 귀는 음계에 신은 천계에 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사후에 모두 지옥에 갔으며 18층 지옥에 갇혀 있다고 한다. 그들의 죄는 깊고 깊어 아직도 다 갚지 못했으며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또 1975년에 그가 저승에 내려가보니 모택동의 꽃나무(매 개인은 음간의 화원에 자기의 운명과 신체에 관련된 꽃 나무가 있다. 꽃이 시드는 것은 사람의 운명과 신체의 좋고 나쁨을 반영한다)는 이미 다 시들었고 이 사람의 목숨이 거의 다 하려고 함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생산대 사람에게 말했다. “모택동 내년을 넘기지 못한다.” 대대의 한 가난한 농민이 이 말을 본 향 혁명 위원회에 전달했고 그는 이 때문에 “위대한 수령 모 주석을 악독하게 모멸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잡혀있었다. 1976년 모택동이 그의 말대로 죽자 그는 풀려 날 수 있었다.


 

출처 - http://zhengjian.or.kr/new/

'윤회와 인과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수로 저지른 일의 갚음은 실수로 받는다.  (0) 2018.01.22
삼세인과[三世因果]경  (0) 2018.01.22
윤회전생의 사례  (0) 2018.01.22
업보(業報)와 윤회(輪廻)  (0) 2018.01.22
살생의 인과실화 모음  (0) 2018.01.22
Posted by 慧蓮(혜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