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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수행자들이여, 이글은 내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드리며 가르침 청하여 시방삼세의 모든 본존이신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간 것으로 진실하여 하나의 거짓도 없음을 밝혀둔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여러분이 나의 일을 거울 삼아 교훈을 얻어서 스스로 잘못을 고치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이다. 여러분이 하루라도 빨리 불도를 수행하려는 바른 마음을 일으키고 큰 보리심을 발해서 용맹정진하고 계를 지키며 일념으로 염불하여 정토왕생을 구하여 영원히 물러나지 않고 육도윤회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또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곧바로 보리를 증득하고 무상정등정각을 이룬 뒤 각자의 원(願)에 따라 다시 돌아와 여섯 가지 윤회의 세계에 몸을 나투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기 바란다.

 

나의 속가 성은 이(李)씨이다. 1989년 3월 해공(海空)법사를 은사로 불문에 귀의하였고,적공(寂空)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불가에 입문한 뒤, 하루하루 예불과 좌선을 열심히 하였다. 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늘 경전을 가까이하면서 불법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1992년 8월 25일 저녁 예불을 마치고 법당에 정좌하고 있었다. 저녁 10시 경 갑자기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가피를 얻어서 나 자신의 과거 생의 모습을 휜히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너무나 슬퍼서 크게 울음을 터트렸고, 열심히 불법을 공부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94년 8월29일 저녁 법당에서 염불을 할 때는 더 나아가 속가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의 과거 생의 모습까지 휜히 알게 되었다. 그 후 숙명(宿命) 즉, 과거생의 모습과 윤회에 대에 여러 차례 불보살의 증명을 얻게 되었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과거생의 기억은 여러 차례 증명을 통해서 입증된 것을 비로소 감히 밝히는 것이다.

600년 전 나는 출가한 비구였다.

나는 20세에 출가하여 삼당대계(三堂大戒)를 받고 50여 년을 수행하였다 .선한 업도 많이 지었지만, 속세의 일에 탐욕을 일으키고 연연하여 인간계와 천상계의 복된 과보를 바라고, 정토왕생은 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육도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삼악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으며 빚을 갚아야 했다.

 

스님으로서의 삶을 마친 뒤 부유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향락을 탐하게 되었는데, 온 종일 술과 여자를 탐하며 지내는 생황을 하였다 .내 주변에는 여덟 명의 시녀가 있었는데, 비록 여색을 탐하지는 않았지만 명예를 좇고 재물에 욕심내고 이익을 탐한 과보가 커서 악업을 지었다.

하지만 전생에 출가수행한 공덕이 크기 때문인지, 목숨을 마친 뒤에 벼슬아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한 뒤 많은 병사를 거느리는 장군이 되었는데, 그 풍모가 당당하고 늠름하였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었다. 부귀영화가 넘쳐서 다 누리지 못 했고, 산해진미도 또한 넘쳐서 다 먹지 못했다.

 

 

온 종일 주지육림 속에서 보내곤 했는데, 당시 24명의 시녀를 옆에 두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면서 다시금 온갖 나쁜 업을 짓게 되었다. 특히 병사들에게 명령 내려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사람의 머리를 벤 뒤 그 시체를 강이나 개천에 버렸고 수풀에 숨은 적군도 모두 찾아내어 죽이는 등 많은 죄업을 지었다.

그리하여 그 몸을 벗은 뒤에는 삼악도에 떨어져 열 번을 윤회전생하면서 악업의 과보를 갚아야 했다.

 

먼저 세 번은 두꺼비의 몸을 받았다.

왜냐하면 장군으로 살때 많은 사람의 머리를 베어 죽이고 그 시체를 개천에 버렸기 때문이다. 그 과보로 머리 없는 두꺼비로 태어나 수시로 막대기에 맞고 낚시에 걸리고 복부가 뒤집혀서 물에서 죽어서 그 시체가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났다. 심지어 근육이 뽑히고 살갗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면서 전생에 지은 악업의 과보를 갚았다.

이렇게 세 번 두꺼비의 몸을 받은 뒤, 다시 뀡의 몸을 네 번 받았다.

그 이유는 장군으로 살 때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두려움에 떨면서 수풀에 숨어있는 적군을 찾아내서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부자와 장군으로 살 때, 입의 쾌락을 탐하여 온종일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살았다. 그 과보로 뀡의 몸을 받아서 창에 찔리고, 칼에 베여서 지지고 삶기고 볶이는 고통을 당하면서 빚을 갚아야했다.

네 번이나 뀡의 몸을 받고도 악업을 다 갚지 못하여, 다시 돼지 몸을 세 번 더 받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부자와 장군으로 살 때 먹기만 좋아하고 일하기는 싫어했기 때문이다. 시녀들이 밥을 가져오면 입을 벌려 먹고, 옷을 가져오면 손을 벌려 입히게 하고, 늘 고기 먹을 생각만 하면서 나쁜 업을 지었다.

그 때문에 돼지의 몸을 받아서 먹다 남아 버리는 음식과 상한 음식을 먹게 되었고, 채찍이나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이것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천 번 만 번 칼에 잘리고 뜨거운 솥에 들어가서 갖가지 고통을 당하였다. 두 번 사람 몸을 받아서 입의 쾌락을 탐한 악업의 과보를 이렇게 갚게 되었다.

일체의 고통과 모든 즐거움은 모두 나 스스로 지어서 직접 받는 것 (자작자수自作自受) 이며, 인과응보는 참으로 조금도 틀리지 않은 것이다. 여러 수행자들이여, 내가 삼악도를 윤회전생하면서 받은 갖가지 고통에 대해 알았을 때 너무도 상심하여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지극히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600년 전 수행으로 높은 경지에까지 도달했으면서도 인간과 하늘의 복을 탐하고 왜 정토왕생을 구하지 않았는가? 이 헛된 탐욕때문에 임종의 자리에서 한 생각 잘못하여 열 번이나 삼악도에 떨어졌구나.

붉은 흙먼지 가득한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600년을 헛되이 윤회하였구나. 어찌 가슴을 치며 통곡할 일이 아니겠는가. 600년!!! 이토록 긴 세월을 그리 비천하게 보내다니 또 어찌 부끄러워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어떤 귀신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 불법을 배운 후 인과의 가르침을 믿고 생명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진실로 자기 자신이 윤회해온 과정을 알고 나서 어찌 본사 석가모니불, 본존 관세음보살과 시방삼세 일체재불, 모든 대보살의 자비로운 가피에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제자가 자기의 본사, 본존의 면전에 꿇어 앉아 자기의 숙명을 이해하고 불법을 배우면서 또 한 단계 진일보하였을때, 또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에 나는 어떻게 해야 불보살님의 크나큰 은덕에 보답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결과 열심히 불법을 배우고 일념으로 염불하면서 정토왕생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걱하였다. 사람의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가르침 배우기 어려움을 생각하자, 현생에 어렵게 얻은 사람의 몸으로 열심히 수행하지 않는다면 불보살님께 죄송하고 부모님께 죄송한 일이다.

옛 성현께서 말씀하지 않았는가 "사람 몸얻기 어렵지만 금생에 이미 얻었고, 불법 듣기 어렵지만 금생에 이미 들었네, 이번 생에 불국정토에 가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에 갈 수 있으리오?"

 

사람 몸을 받고 태어났으니, 이번 생에 반드시 시간을 다투어 열심히 수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귀신이 왔을 때 뒷 일을 기약할 수 없다. 사람이 임종에 이르렀을 때 마음 속에 한 가지 생각 즉,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연꽃 가운데 화생하여 부처님을 뵙고 열심히 수행하여 성불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해냈는가? 아니다. 나는 잠잘때 꿈에 빠지며 또한 망념도 많다. 만약 꿈을 꿀 때조차 정념(正念)을 유지할 수 있으면 임종의 자리에서 반드시 서방극락정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서원하였다.

오늘 이후로 수시로 계(戒)의 조문을 굳게 기억하여, 지계(持戒)의 금강 같은 날카로운 검으로 오욕육진(五慾六塵)을 베고 삼독(三毒)을 소멸하겠다. 자주자주 무상(無常)을 생각하고 항상 사성제를 사유하며 자비심을 닦아 일체 중생을 숙세의 부모로 여기고, 늘 삼보와 스승의 은덕을 기억하겠다. 생각 생각마다 무상보리를 잊지 않고 용맹정진하겠다. 계를 지키며 염불하여 성불할 때까지 영원히 물러나지 않겠다. 나를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여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을 것을 서원한다.

 

 

나는 비구로 살면서 열심히 수행하였으나 정토왕생을 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두 생에 걸쳐 인간의 복보(福報)를 얻었다. 그러나 선을 쌓고 덕을 짓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갖가지 악을 지어 삼악도에 열 번이나 떨어졌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으로 그 과보를 갚고 나서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600년 세월을 헛되이 보내며 인과응보를 절감하였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어찌하여 아귀도와 지옥도에는 떨어지지 않았는가? 그것은 내가 출가하여 불법을 배운 공덕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부유한 집에 태어나 갖가지 악업을 지었지만 단지 축생도에만 떨어져 윤회하며 과보를 갚은 것이다.

악업의 인연이 다하고 나서, 불법에 대한 종자가 다시 한번 좋은 인연을 만나서 싹을 튀웠고 그리하여 현생에 다시 출가하여 불법배우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불법의 종자를 심은 다음에 이 종자가 썩지 않는다면 적당한 토양과 온도를 만났을 때 곧 싹을 튀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한 구절의 부처님 명호는 대광명장(大光明蔣)이며 한 번 이근(耳根)을 스치면 영원히 도(道)의 종자가 된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쫑카파 대사가 『보리도차제론』의 여러 곳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출가생활 오십년에 생사해탈 구하잖고

스스로를 얽어매어 다음생의 복된과보

생각하며 닦았다가 육백년을 윤회했네

 

부귀공명 비유하면 칼날끝의 꿀과같아

삼악도에 떨어져서 모든빚을 갚게되네

고기반근 탐닉하여 여덟냥을 갚게되고

금수축생 떨어져서 여러차례 윤회했네

참선하여 숙세일을 명백하게 알고보니

스승님은 성인이요 내자신은 범부로세

금생과보 확실하게 전생인연 때문이니

스승에게 절하오며 금강선을 닦아가네

 

굳센정진 영원토록 물러나지 아니하고

곧장바로 보리좌의 구품연대 오르리라.

 

사천성 중강(中江)에서 1995.10.17 일

-적공(寂空) 스님-

출처:<염불, 모든 것을 이루는 힘> 에서 발췌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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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을 간곡히 권하나니            

                                           
                                                수산스님


시방삼세 부처님 중 아미타불이 제일이시라.
구품 연대로 중생을 제도하사 위엄과 덕이 한량 없으시다.
제가 이제 크게 귀의하여 몸과 입과 뜻을 참회하오며
지은바 복과 선은 지극한 정성으로 정토에 회향합니다.
염불하는 사람과 한가지로
극락에 왕생하여 부처님을 뵈옵고
생사를 요달하며 부처님과 같이 중생을 제도하기를 원하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우리 인생은 생사고의 어둠에서
벗어나려 수행하는 수행자의 모습입니다.
나는 오늘 사부대중에게
생사대사의 고통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삼계 윤회가 우물 물 퍼내는 것과 같이
백겁 천겁 만겁 미지수 겁을 지내도다.
그러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에서 제도할 것인가’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삼계라는 것은 욕·색·무색계인데 이 사바세계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과 여섯 하늘을 엎어서 욕계(欲界)-욕심내는 세계라 하고,
그 위에 색계(色界)- 욕심은 없어도 물체,
즉 몸뚱이가 있는 세계라고 하는 빛깔이 있는 세계라 하고,
그 위에 또 네 하늘은 무색계(無色界)라 하여
몸뚱이가 없고 정신세계만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근데 하늘 복은 인간에 비하면 여러 만 배입니다.

수명이 길고 복이 많은 것도 복진 결과라.
복이 다하면 악도에 떨어지고
삼계가 불집이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항상 여기 죽어 저기 나고,
나면 다시 죽고 생사고통을 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삼악도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무서운데
지옥은 들어가게 되면 만사만생이라.

지옥에서는 하루 동안에 만 번 죽이고 만 번 살리는
고통을 받는데 칼로 찔러 죽이고, 맷돌로 갈아 죽이고
톱으로 캐 죽이고, 기름 관에 삶아 죽이고, 혀를 빼서 죽이고,
독사가 물어 죽이고, 얼음 얼어 죽이고,
천 가지 만 가지가
전부 죽이는 기구뿐으로 죽이고 나면
이상한 바람이 불어 다시 송장이 되어 살아난다고 합니다.
살아나면 또 죽이고, 만 번 죽이는데,
지옥은 워낙 해가 길어 인간 육십 겁이 지옥의 일주야라 하니
전부 죽이는 기구뿐이니 얼마나 고통이 심하겠는가.
사실 우리는 지옥에 가서 이런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근데 이제 「지옥」에서 벗어나면 또 「아귀」가 돼 그 고통을 받는데
그 아귀는 몸은 집통 만하면서 입은 바늘 구멍만해서
물 한 방울이 잘 안 넘어가고,
설령 물이 있다 하더라도
먹으려하면 금방 없어집니다.
또 밥이 있어 밥을 먹으려 하면
금방 밥이 불로 변하니 물도 못 먹고 밥도 못 먹고
항상 배가 고프고 목은 말라 있으며
업 태우는 불이 전신을 태우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아귀는 항상 울고 있지, 한시라도 편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귀 업을 다 받고나면 이제 「축생, 짐승」이 돼 사는데
짐승은 지옥에 비하면 신선이나,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습니다.
짐승끼리도 서로 잡아먹는 섭리가 있어
안심하고 살 수 없는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좋다는 「인간」세상도 나고 죽고 병들고 아프고 하는
고통을 못 면하거든. ...
어떻게 하면 우리는 그 고통을 면할 수 있을까.

우리 대중은 이런 고통을 받으며 천겁 만겁을 지내왔는데,
그 천겁 만겁의 일 겁은 만년도 훨씬 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일 겁도 모자라서
미진수 겁에 걸쳐 고통을 받으며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전생에 복을 쌓아 지금 인간이 돼
이 좋은 불법을 만났으니 이것은 무엇보다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근데 이 불법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생사를 해탈한 법, 죽지 않는 법이라.
이 불법을 잘 닦아 부처님을 잘 따라 수행하면
참선에 견성을 하던지, 극락세계를 가던지,
다시는 생사를 받지 않고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다시 생사윤회의 수레바퀴에 빠져 지옥에 가든지,
악도에 떨어진다고 하면
다시 여러 억천만겁으로 고생해 다시 태어나지 못 합니다.
그러니 금생에 이 몸을
제도하지 못하면 어느 생에 제도했겠습니까.
금생에 잘못해서 실수하면 일책 천책이라,
한번 미끌어 지면 천번만번 미끌어 지는 것.
한번 잘못해 악도에 떨어지면 천번만번 떨어지게 돼 헤멥니다.
그러니 금생에 어떻게 해서든 이 생사대사를 벗어나야 됩니다.
부처님이 팔만사천법문에 많이 말씀하신 것이 모두 생사해탈 법입니다.

모두 염불해서 삼매를 얻고,
참선해서 견성하고,
복도 짓고 해서 이 생사고통 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모두 그런 법문입니다.

근데 그 법문을 총괄해서 말하면
자력문과 타력문 얘기라 할 수 있습니다.
자력은 스스로의 힘으로 연구하고 수행해서 깨닫는 것 입니다.
타력은 나의 힘이 약하니깐 다른 이의 힘을 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타력으로써 생사고뇌를 해탈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참선을 해서 생사해탈을 하면 오매일여(寤寐一如) 경지가 되고,
화두를 잘 들어 화두 한가지로 일관할 때
정중일여(靜中一如), 고요한 가운데 하늘 같이 됩니다.

참선은 앉아서 할 때는 잘 되어도, 일어서 일을 하던지
길을 가던지 하다가 끊겨 화두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때 용맹스럽게 몇 만, 몇 년을 지속적으로 화두를 들면
‘동정일여’의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경지에서는 움직일 때 나 가만히 있을 때나 그 화두가 잘 됩니다.

그러나 ‘동정일여’가 돼도 밤에 잠 잘 때 꿈에서는
딴 꿈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꿈에서도 화두와 염불 같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꿈에서도 한 가지가 되려면 ‘몽중일여(夢中一如)’가 돼야 합니다.
또 꿈에서는 될지라도 꿈을 꾸지 않을 때는 안 되는데
꿈을 안 꿀 때 화두를 내버리고 자게 되는데
그때는 다시 정진해 ‘오매일여’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경지에서 좀 더 지나 더욱 정진하면
또 ‘확연대오(廓然大悟)’가 됩니다.
확연대오의 경지에서는 번뇌가 모두 사라집니다.
또 그때는 돈오돈수가 돼 생사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지에 가려하면 특수한 상근기가 아니면 도저히 안 됩니다.

육조대사니 하는 그런 분들은 벌써 전생에서 많이 수행하고,
복을 많이 지었기에 보살이 되어 법문 한번 듣고 깨치는 것이지만
보통의 사람은 그렇지 못 합니다.
그러니 자력성불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정토삼부경’을 통해 염불을 말씀하셨는데
오직 부처님을 믿고 염불하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성불하셔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는데
정반왕이 수차 례 사신을 보내 뵙기를 원하기에
정반왕의 일가와 7만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부처님이 법문하시기를
“염불해서 극락세계를 가야 성불이 빠릅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정반왕이 “진리를 바로 깨달으면 성불하는데
왜 하필 염불법문을 가르키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이 대답하시기를
“보통 범부로서 진여자성을 얻어 성불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기에 염불로서 성불하라고 한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정반왕이 이어 되묻기를
“그러면 염불 공덕이 어떠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지극정성으로 염불하면 극락세계에 가고
극락세계에 가면
탐·진·치 삼독심이 변해 자비심이 되고 성불합니다.”고 했습니다.
지극정성으로 부처님에게 의지하고
원을 세워 실행하면 성불이 가능합니다.

아미타불의 48원(四十八願)에서 전하기를
첫째, 내 나라에 나는 이는 악도에 다시 가지 아니한다.
둘째, 내 나라에 나는 이는 육신통을 구족한다.
세째, 내 나라에 나기만 하면
모두 정정취에 들어 결정코 성불한다고 했습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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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맨발 고행 감내한 ‘인욕보살’ 청담큰스님

 

조계종 통합종단 초대 총무원장과 종정을 지내며  승단의 재건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던 청담 순호(靑潭淳浩, 1902~1971). 1954년 식민지 불교의 청산을 기치로 본격화된 정화운동 중심에는 그가 있었고, 전혀 불가능해 보이던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것도 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청담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잇따른 승려대회를 비롯해 데모와 할복사건, 유혈충돌, 법정투쟁 등 숱한 희생과 우여곡절. 그 속에서 종단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청담은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문득문득 옛 아내를 떠올리고는 했다. 남편과 막내딸을 불문(佛門)으로 떠나보내고 온갖 번민과 근심을 끓이고 산다는 그녀의 소식을 접할 때면 팔만사천 번뇌를 여의었다는 청담조차 모래 위에 부어진 물처럼 아픔이 가슴 속 깊이 스며들었다.


자물쇠도 열쇠도 없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괴로워할 그녀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젊은 날 진주 호국사에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그에게 ‘목마름이야 물로 다스릴 수 있지만 마음이 탈 때에는 무엇으로 끌 수 있느냐’는 한 노스님의 말을 듣고 시작된 출가에의 의지. 대를 이어야할 2대 독자가 삭발출가하려 하자 아버지는 서둘러 그를 혼인시켰고, 청담과 차점이(1905~1988)와의 인연도 이렇게 시작됐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넉넉지 못한 농가로 시집와 소처럼 일하고 양처럼 순종했던 여인. 자신이 백양사로 해인사로 구름처럼 떠돌 때에도 그저 지켜만 보고, 일본에서 출가자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그저 고개만 끄덕이던 착한 여인. 고성 옥천사로 출가한 청담이 고향을 찾아가 이혼수속 얘기를 꺼냈을 때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아내의 야윈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모습을 그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기왕지사 출가했으믄 스님다운 스님이 되셔야지예. 지야 뭐, 당신이 하자는대로 해드리겠심니더.”

 

1930년 봄, 고향 낙성법회에 법문 왔다가 죽자 사자 매달리는 어머니에 이끌려 다시 찾은 고향집. 마지막 소원이라며 “가문 이을 씨앗 하나만 심어 놓고 가라”는 어머니의 한 맺힌 절규에 청담은 목건련을 떠올리며 ‘불쌍한 어머니, 저 분을 위해서라면 지옥엔들 가지 못하랴.’라고 마음을 굳혔다. 동시에 아들을 낳지 못해 주변의 핍박과 자괴감에 두고두고 시달릴 젊은 아내에게 옛 지아비로서 마지막 의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룻밤의 파계. 첫 닭이 울기도 전 버선도 신지 않은 채 속가를 뛰쳐나온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아! 수행자인 내가…. 수미산 같은 이 죄업을 어찌 다 씻을고.’

가혹하리만치 매서운 청담의 참회와 인욕수행이 시작된 것도 이 때부터다. 홑옷에 맨발 차림. 청담의 눈물겹도록 처절한 만행은 덕숭산, 오대산, 설악산, 묘향산을 거쳐 북간도로까지 이어졌다. 여윈 볼을 할퀴고 지나가는 칼바람에도,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을 때도 늘 맨발이었다.


살은 얼어 찢겨나가고 발은 쩍쩍 갈라져 피가 솟았다. ‘눈 위에 피 묻은 발자국이 있으면 청담 스님이 다녀간 자리’라는 말이 수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늙은 홀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출가의 길은 선택한 청담은 가족들의 고통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그쳐 피나는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청담이 서른 넷 이른 나이에 묘향산 설령대에서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모든 부처와 조사는 어리석기 그지없어

어찌 현학의 이치를 깨우쳤으랴.

만약 누가 나에게 한 소식 한 바를 묻는다면

길가에 서 있는 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하리라.

 

오랫동안 괴롭혀오던 마음의 갈증이 해갈된 청담. 하지만 이 무렵 그에게 들려온 속가의 얘기는 그를 안타깝게 했다. 옛 아내가 또 딸아이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시어머니로부터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하고 있다는 것. 청담은 어머니가 더 이상 죄업을 지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늙은 홀어머니를 직지사 서전암으로 모셔와 출가토록 했다. ‘아들 스님’의 당부대로 비구니 성인(性仁)은 묵은 한을 내려놓고 열심히 염불정진 했다. 훗날 어머니가 임종을 얼마 앞두고 며느리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으며, 며느리도 사찰에 머물며 임종 때까지 시어머니를 돌봤다는 얘기를 들은 청담은 슬픔에 앞서 두 여인의 화해에 안도의 한 숨부터 먼저 내쉬었다.

 

청담과 차점이가 다시 만난 건 몇 해 뒤인 1943년 여름. 복천암에서 생식을 하며 안거수행을 하던 청담은 사월초파일날 상주경찰서로 연행됐다. 잦아들지 않는 독립운동에 골머리를 앓던 일제는 기미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청담이 북간도에 간 이유를 집요하게 추궁했고, 법(法)을 찾아 수월을 만나러 갔다는 그의 항변에도 연일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인욕제일 청담이건만 두 달여 계속된 잔학한 고문에 결국 실신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사경을 헤매야 했다. 이 때 멀리 진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이가 차점이였다.

 

“시님, 시님…. 이게 뭔 일이란 말입니꺼.”

 

낡고 찢긴 옷에 피골이 상접한 청담의 모습에 차점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마지막 남아있던 땅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청담을 경찰서에서 빼내 상주포교당으로 옮겼다. 차점이는 청담의 곁에 머물며 24시간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을 했다. 회복될 것 같지 않던 청담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고 조금씩 거동도 가능해졌다.


청담은 희끗희끗 흰머리가 돋기 시작한 옛 아내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성껏 들려주었다. 차점이는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에게서 처음으로 따뜻함이 느껴져 왔다. 지아비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냥 이렇게 세월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남편이 아니라 바람과 구름이 되어 떠도는 수행자였다.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되자 청담은 또다시 운수행각에 나섰고, 차점이는 그런 청담에게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든 바랑을 조심스레 건넸다.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이 보살이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보살이요, 남을 살리는 것이 보살입니다. 좋은 일 많이 하시고 염불도 지극정성으로 하도록 해요.”

“예, 시님…. 알겠심니더.”

 

다시 몇 해가 흘러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이른 1945년 초, 청담은 차점이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젊은 남자는 징용으로, 처녀는 정신대로 끌고 가고 있으니 둘째 딸을 데려다가 스님으로 만들어달라는 부탁이었다. 파계를 해가며 까지 나은 아이, 청담은 어쩌면 이 또한 숙세부터 이어져온 불연(佛緣)이라는 생각에 절친한 도반 성철의 도움을 얻어 머리를 깎도록 했다.

그러나 차점이는 막상 자신의 뜻대로 딸이 출가했건만 어린 딸이 절 생활은 잘 하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한시도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딸 묘엄스님이 조선 최고의 강백이라는 운허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도, 뒤늦게 동국대에 입학했을 때도, 청도 운문사로 내려가 강원을 개설해 학인들을 가르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차점이는 수시로 딸이 있는 곳을 찾았고 청담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늘 안타깝기만 했다. 청담은 절을 찾아 온 차점이에게 대도성(大道性)이라는 법명을 주고 걱정과 욕심을 내려놓을 것을 당부했지만 소용없었다.


조계종 종정직을 사퇴한 이듬해인 1968년, 청담은 옛 아내에게 간절한 편지를 띄웠다. 이제는 이런 저런 근심걱정 다 접어놓고 자신의 업장을 닦으라고, 그래서 훗날 극락정토에서 다시 만나자고….

 


지극한 염불로 극락정토에서 다시 만납시다


(청담스님이 옛 아내에게)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그 동안 염불공부 잘하셔서 죽을 때에 귀신한테 끌려서 삼악도로 가지 아니하고

극락세계의 아미타불님 회상으로 가실 자신이 섰습니까?


모진 병 앓고 똥이나 싸버리고 정신없이 잡귀신들에게 끌려가서

무주고혼이 되어서 밤낮으로 울고 천만겁으로 돌아다니면서

물 한 그릇도 못 얻어먹는 불쌍한

도가비 귀신이나 면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다 늙어서 서산에 걸린 해와 같이 금방 쏙 넘어가게 될 형편이 아닙니까?

살림걱정, 아이들 걱정 이 걱정 저 걱정 다 해봐야 보살에게는 쓸데없는 헛걱정이오,

죄업만 두터워질 뿐이니 다 제쳐놓고 염불공부나 부지런히 하시오.


앞날이 급했지 않습니까?


내나 보살이나 얼마 안 있어 우리들이 다 죽어서 업을 따라서 제각기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 아닙니까?


부디 쓸데없는 망상은 다 버리시고 염불만 부지런히 하셔야 하지요.

곧 떠나게 된 인간들이 제 늙은 줄도 모르고 망상만 피우고 업만 지으면

만겁의 고생을 어찌 다 감당할 것이오?


극락세계만 가놓으면 우리가 만날 사람은 다 만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다 집어치우고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 급했습니다. 부탁입니다. 절하고 빕니다.


늙은 중 합장

大道性보살 귀하

 

 

 

1971년 11월 15일 청담이 홀연히 열반에 들자 대도성은 자신의 삶을 지탱했던 대들보가 무너지는 듯했다. 십수 년 간 조석으로 기도하고 염불도 했건만 가슴 한 켠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허전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몇 해 뒤 보다 못한 묘엄은 대도성을 절로 모셔와 손수 머리를 깎아 출가토록 한 뒤 대도(大道)라는 법명과 함께 스님으로서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대도는 절에서 생활하며 옛 남편의 뜻을 따라 염불과 경전독송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세상사가 꿈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다’던 청담의 말을 비로소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1988년 5월 12일 마침내 대도는 고단한 삶의 여정을 접고 무정했던 남편, 인자했던 삶의 스승 청담이 있는 극락정토 아미타불 회상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청담 스님이 대도성 보살님께 보낸 편지는 현재 서울 도선사 청담기념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그러나 편지에 날짜가 기록돼 있지 않아 청담 스님이 정확히 언제 보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당시 대도성 보살님과 같이 생활했던 손자인 부산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는 1968년에 할머니가 청담 스님으로부터 그 편지를 받았다고 밝혔으며, 편지의 내용으로 미뤄보더라도 그 무렵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2일 입적한 봉녕사 승가대 학장 묘엄스님
(수원=연합뉴스) 비구니계의 원로이며 경기도 수원 봉녕사의 승가대학장인 묘엄 스님이 2일 오전 9시 5분 봉녕사에서 입적했다. 2011.12.2 << 문화부 기사 참조, 대한불교조계종 >> cool@yna.co.kr

 

비구니계의 큰어른인이자 봉녕사 승가대학장 세주당(世主堂) 묘엄(妙嚴·80) 스님이 2011.12. 2일 오전 9시 5분 경기 수원 봉녕사에서 입적(入寂)했다. 법납은 67년. 세수 80세. 뛰어난 율사(律師)였던 묘엄 스님은 조계종 2대 종정을 지낸 청담(淸潭·1902~1971) 큰스님의 친딸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당대 존경받는 고승들로부터 선·교·율 삼장을 전수받았는데.1945년 성철(性徹·1912~1993)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또 율사 자운(慈雲)스님으로부터 율장(律藏)을, 대강백 운허스님으로부터는 경학(經學)을 사사했다. 

 

청담큰스님 친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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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세계에 가야 하는 이유

출처 / 혜총스님 (조계종 포교원장)의 '공양 올리는 마음' (불광출판사  2011,11월 발행)에서 발췌


21세기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떤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납은 오늘날 세상을 ‘믿음이 상실된 시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불신의 시대’ 아닙니까? 설령 성인이 말씀하신 진리라 하더라도 그 진리가 내 눈앞에서 나를 안락하게 하는 실체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불신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이나 스승과 제자, 사업주와 종사자 등 사회 각계각층이 불신과 증오로 가득 찼습니다. 서로 믿지 못한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인간사에서 불행의 단초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믿음은 도를 이루는 근본 공덕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굳이 깨침이나 성불의 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들 일상사의 어떤 일도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지식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니 교수도 되고 박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부모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자식이 부모를 의지해 삽니다. 또 자식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부모가 희망을 갖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믿음의 구조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 이것을 복구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불자, 지식인들이 총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오늘날의 중생을 위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미타경을 설하시고 난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리불이여,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니라.

사실 나는 수많은 부처님들의 찬탄과도 같이 이 오탁악세인 사바세계에서 온갖 고행과 난행을 다 마치고 난 뒤 여기서 드디어 부처가 되었느니라. 그리고 일체중생들을 위해서 정말로 믿기지 아니한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느니라. 그것은 바로 박복한 중생들에게 극락세계의 장엄과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설명하고 그것을 믿으라고 권유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처님께서 살이 뜯기고 뼈가 바스러지는 난행과 고행을 한 다음에 아신 것이기에 박복한 중생의 안목으로 믿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인연이 닿는 중생은 믿어서 윤회의 사바세계를 벗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참으로 간절한 성인의 자비심이 엿보이는 말씀입니다.

 

세속에 인생의 목표가 있듯이 불교에도 삼생의 목표가 있습니다. 금생의 목표는 살아 있는 동안에 부처님의 가피를 잘 받아 복을 많이 지어서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고, 내생의 목표는 극락왕생하는 것이고, 그 후생의 목표는 성불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불자라면 반드시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삼생의 목표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현생에 복을 많이 짓고 부처님의 가피를 받은 사람이라야 행복하게 살다가 극락에도 가고 성불해서 윤회를 벗어나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가고 날 수 있는 것이지, 지금 이 생에 부처님의 가피를 받지 못하고 복도 짓지 않은 사람은 안락할 수도 없고 극락에 날 수도 없으며 더욱이 그 후생에 대원경지를 이루어서 중생을 제도하는 최상승의 삶을 살 수는 더더욱 불가한 일입니다.

 

그래서 소납은 이 현생에 행복해야 한다고 늘 강조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해야 극락에 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옵니까? 물론 물질적 풍요도 행복에 필요하지만 영원하지 않지요? 꿈같고 물거품같이 금방 스러지는 환상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참회하고 계율을 지키고 선근을 닦는 공덕을 통해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야 가능합니다. 불교는 이와 같이 꿈을 꾸면서 물거품 같이 사는 우리들을 편안하게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럼 극락에 가면 무엇을 하는가?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모릅니다.

극락에 가면 성불합니다. 천당은 부처님의 공덕으로 만든 세계가 아니라 중생업(衆生業)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복진타락(福盡墮落), 이 세상에서 지은 복을 다 소비하고 나면 타락하게 되지만, 극락세계는 아미타 부처님께서 48원(願)을 세워서 진실한 과보와 진실한 보답으로 만든 실보장엄토(實報莊嚴土)요, 아미타부처님께서 공덕을 지어서 만든 공덕장엄토(功德莊嚴土)이기 때문에 타락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설법을 많이 듣고 무량한 공덕을 짓고 지혜를 더 많이 닦아서 금방 성불하는 곳이 극락입니다. 그래서 역대 고승, 선지식이나 문수, 보현보살 등 제불보살이 모두 극락세계의 아미타 부처님을 뵙고자 서원을 세웠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스님, 스님은 극락세계에 가보셨습니까?” 하고 물어보는데 극락에 갔다 와서 극락이 있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이니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공덕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극락세계이기 때문에 어느 곳이 극락세계라고 중생이 판단할 수 없습니다. 중생은 “여기다. 저기다.”라고 말하지 말고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극락에 가고자 원을 세워서 간절하게 일심으로 염불을 자꾸 하면 문득 부처님의 가피로 가는 것입니다.

 

극락에 가는 것도 내 힘으로 가는 것인 줄 착각하기 쉬운데 부처님의 가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주 외우는 <천수경>에도 보면 ‘원아결정생안양 원아속견아미타(願我決定生安養 願我決定阿彌陀)’라, 모든 제불보살들도 극락에 나서 아미타 부처님을 속히 친견하는 것을 커다란 서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극락왕생을 돌아가신 분이나 내세를 위해서만 기원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아주 큰 잘못입니다. 젊기 때문에 아미타 염불을 멀리 하고 참선이나 관세음보살만을 염한다는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남녀노소 누가 염불을 해도 염불하는 사람은 누구나 지켜주시는 이것이 모든 부처님을 마음에 받드는 제불호념(諸佛護念)입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모두 지켜주시기 때문에 장애도 없고 소원성취도 됩니다. 생전에는 편안하고 사후에는 극락왕생하고 또 극락왕생 후에는 성불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행을 실천하게 됨이 모두 부처님의 가피요, 불자의 목표이기에 우리는 꼭 극락에 나야 합니다.

 

중생계는 고금을 막론하고 힘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권력, 금력, 세력 등등 힘이 지배합니다. 우리 불자는 간절한 믿음의 대신력(大信力)과 굳센 대원력(大願力)과 변하지 않는 정진력(精進力)으로 오탁의 박복한 중생계에서 행복하게 사는 도리를 찾아야 합니다.

 

바쁜 일상을 탓하지만 말고 부디 무엇보다도 먼저 간절한 믿음으로써 종교생활의 초석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간곡한 발원을 세우고, 간절하게 부처님을 염하고 부처님의 행을 따라 행해서 받기 힘든 사람의 몸 받은 이생을 끝으로 다시는 윤회하지 말고 반드시 부처님을 뵙는 인연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염불의 업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그대들 수행자들은 ‘백 년 동안 악행을 저질렀을지라도 죽는 순간에 염불을 하면 극락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또 그대들은 단 한 번 살생한 과보로 지옥에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 말도 믿을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조그마한 돌은 물에 뜰 수 있습니까?”

“존자여,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왕이여, 백 개의 수레에 실을 만한 바위라도 배에 싣는다면 물 위에 뜰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능히 물 위에 뜰 수 있습니다.”

 

“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염불의 업은 배와 같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업 중에서도 제일 착한 업은 염불하는 업입니다. 왜 염불이 제일 착한 업이냐 하면 염불은 부처님을 가슴에 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한 순간도 부처님을 잊지 않으면 그 사람은 가슴에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업이 되니 만사형통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염불을 자꾸 하면 부처님과 한 마음이 되니 남에게 베풀 마음이 나고, 자꾸자꾸 염불을 하면 태어나고 죽는 문제도 햇살에 눈이 녹듯이 저절로 해결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염불하는 것은 착한 업이 됩니다. 착한 업과 악한 업을 말할 때는 제일가는 착한 업이 염불입니다.

 

삼계 대도사이고,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도 세 가지 불가능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우리들의 업을 부처님이 대신 소멸시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인연이 없는 고집이 센 중생을 제도시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세계가 끝날 날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이 업장을 소멸하고 윤회의 사슬을 끊는 방법을 펼쳐놓으셨는데도 우리는 그 길을 알면서도 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연이 닿지 않아 태어나기 힘든 사람의 몸을 받고도 다시 윤회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염불의 업은 큰 배와 같아서 중생계의 모든 중생을 모두 태우고도 남습니다. 누구든지 염불만 하면 불보살의 광명 속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염불을 많이 하면 악한 인연은 점점 멀어지고 착한 인연은 각처에서 무시로 만납니다. 어려움이 닥친 연후에 부처님을 찾지 말고 평소에 꾸준히 염불을 하면서 오는 인연, 가는 인연 가리지 말고 세월을 보내다 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옵니다.

 

나무아미타불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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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탱화)




염불에 무슨 이익이 있나이까?


옛적에 한 사람이 육조대사에게 묻기를

"염불에 무슨 이익이 있나이까?" 하고 묻는 말에

육조대사 답하기를


"일구(一句),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이 만세의 괴로움을 
뛰어 나는 묘도(妙道)요,  불(佛)을 이루고 조사가 되는 
정인(正因)이요,  삼계 인천(人天)의 안목이요, 마음을 밝히고 
성(性)을 보는 혜등(慧燈)이요, 지옥을 깨뜨리는 맹장이요, 
많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베는 보검이요, 

오천대장(五千大藏)의 골수요,  팔만총지(八萬總持)의 중요한 
길이요, 흑암(黑暗)을 여의는 명등이요, 생사를 벗어나는 
방방(良方)이요, 고해를 건너는 배요, 삼계를 뛰어넘는 
지름길이요, 최존최상의 묘문이며 무량무변의 공덕이니라. 

이 일구, 나무아미타불을 기억하여 염념(念念)이 항상 나타나고, 
시시로 마음에 떠나지 아니하며, 일이 없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고, 일이 있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안락할 때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병고가 있을 때에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살았을 때에도 이렇게 염불하고, 죽어서도 이렇게 염불하여, 
이와 같이 일념이 분명하면 또 무엇을 다시 남에게 물어서 
갈 길을 찾으랴. 

이른바 오직 아미타불 지니고 다른 생각 없으면 손 튀길 수고도 
없이 서방극락 가리라" 하였다.<禪淨雙修集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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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1)

-인광대사 가언록에서-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불법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사를 끝마치는 일이오. 생사해탈 문제는 너무도 큰 일이라 논하기가 몹시 어렵소. 우리 범부들은 근기가 열악하고 지식도 천박한데다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삿된 스승과 외도(外道)들까지 득실거리니, 생사윤회를 도대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소? 오직 염불 법문밖에 없으니, 진실하게 믿고 간절히 발원하며 염불에 일심으로 정진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해야 할 것이오.

 

불법 가운데 방편 법문이 많으며 참선을 하거나 교리를 공부해도 모두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염불을 꼭 하라고 권하겠소? 왜냐하면 참선이나 교리 공부 등은 모두 완전히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데, 염불 법문은 부처님의 원력 가피를 함께 의지하여 훨씬 확실히 보장되기 때문이오.

 

바다를 건너는 일에 비유하자면, 자력에 의지하는 참선이나 교리공부는 홀로 헤엄치는 것과 비슷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존하는 염불은 큰 여객선을 타는 것과 같겠소. 몸소 헤엄치다 보면 거센 파도에 휩쓸리거나 기력이 다해 침몰할 염려가 크지만, 큰 여객선을 타면 저편 목적지에 틀림없이 닿게 될 것이오. 이 두 가지의 안전성과 효율성은 누구나 쉽게 비교할 수 있으리다.

 

결론을 말하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참선으로 도를 깨닫고 생사윤회를 끝마치기란 근기가 뛰어난 대가가 아니면 정말 쉽지 않소. 반면 염불로 정토왕생을 구하는 법문은 단지 믿음과 발원만 진실하고 간절하며 수행을 굳게 지속해가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오.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관계를 밝히고 참선과 정토(염불)의 난이도를 비교한 것 중에 가장 뚜렷하고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한 설법은 영명(永明) 연수(延壽) 대사의 사료간(四料簡:네 수의 게송)이 단연 으뜸이오. 그 사료간에 비추어 본다면, 참선과 교리에 밝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정말로 염불하여야 당연하지만, 참선과 교리에 통달한 사람들도 또한 더욱 열심히 염불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통달했더라도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 결국 염불을 해야 생사윤회를 해탈할 수 있는 거요.

 

영명 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이신데, 중생을 일깨워 건지기 위하여 대자대비를 베푸셨소. 사료간은 정말로 사바고해를 건너는 자비로운 항공모함〔慈航〕이며, 대장경의 핵심요점이자 수행의 귀감이오.


 

 

有禪有淨土

猶如戴角虎

現世爲人師

將來作佛祖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도 있으면

마치 뿔 달린 호랑이 같아,

현세에 뭇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



 

無禪有淨土

萬修萬人去

但得見彌陀

何愁不開悟?

 

참선수행은 없더라도 염불공덕이 있으면

만 사람이 닦아 만 사람 모두 가나니,

단지 아미타불을 가서 뵙기만 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걱정 하리요?



 

有禪無淨土

十人九蹉路

陰境若現前

瞥爾隨他去

 

참선수행만 있고 염불공덕이 없으면

열 사람 중 아홉은 길에서 자빠지나니,

저승(中陰) 경지가 눈 앞에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 그만 휩쓸려 가버리리.



 

無禪無淨土

鐵牀倂銅柱

萬劫與千生

沒個人依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공덕마저 없으면

쇠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



 

이 사료간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선(禪)이고 무엇이 정토(염불)이며, 있고 없고가 무슨 뜻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오. 선(禪)이란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선종에서는 부모가 낳아 주기 이전의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이라고 일컫소.

 

선종에서는 말을 다 갈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참구하여 스스로 얻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따름이오. 실제로는 주체〔能〕도 없고 객체〔所〕도 없으며 고요하면서도 밝게 비추는 무념무상의 신령스런 지각〔靈知〕이자,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자리〔純眞心體〕요.

 

정토란 정토삼부경〔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의 가르침을 깊이 믿고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지송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법문으로, 오직 우리 마음 안에 정토가 있고〔唯心淨土〕 자기 성품이 바로 아미타불이다〔自性彌陀〕는 추상 이치만 치중하는 편협한 의미는 아니오.

 

참선(수행)이 있다 함은 참구하는 힘이 지극하여 생각이 고요하고 감정이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러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진면목을 보는 확철대오를 가리키오. 이른바 명심견성(明心見性)이오. 정토(염불)가 있다 함은 진실한 보리심을 내어 깊은 믿음과 간절한 서원으로 흔들림 없는 염불 수행을 용맹스럽게 지속해 가는 것을 말하오.

 

선과 정토는 추상교리만 언급하는 개념이며, 선이 있고 정토가 있다는 말은 근기에 따른 구체 수행 방법을 두고 일컫는 표현이오. 교리로 보면 항상 변함이 없어 부처님도 덧보탤 수가 없고 중생도 덜어낼 수가 없지만, 근기에 따른 수행은 모름지기 교리에 의해 실천을 시작하고 실천이 지극히 무르익어 교리를 체득함으로써 그것이 진실로 자기 안에 존재함을 증명하여야 하오.

 

두 쌍의 용어는 표현이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크게 다르므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자세히 음미하여 그 차이를 느껴야 하오. 가령 참선을 아무리 오래 했더라도 깨닫지 못했거나 또는 깨달았더라도 철저히 관통〔확철대오〕하지 못했으면 참선이 있다고 말할 수 없소. 깨닫기만 하고 증득하지 못하면 결국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오.

 

“깨달으면 곧 생사가 없다”는 말은 전문가(대가)의 표현이 아니오.

 

깨달음이란 마음의 눈을 뜨는 것에 불과하며, 깨달은 뒤에 비로소 진실한 수행과 실제 증험의 길이 펼쳐지게 되오. 깨닫지 못한 자는 눈먼 소경이 길을 가는 것처럼 맹목적이고 미신적 수련으로 악마의 구렁텅이에 빠져들〔走火入魔〕 위험이 매우 크오. 그래서 먼저 마음의 눈을 뜨고 깨닫는〔開悟〕 공부가 수행의 첫걸음으로 매우 요긴한 것이오.

 

깨달은 바를 증득하여 대가가 되려면 불에 기름을 끼얹듯 더욱 용맹스럽게 가행정진(加行精進)해야 되오. 그런데도 세상사람들은 말라빠진 고목처럼 가만히 앉아 죽은 화두나 들고 있는 것을 마치 대단한 참선(수행)이 있는 줄로 생각하는구려. 이는 정말 크나큰 착각이고 오해요.

 

또 염불도 추상적인 유심정토(唯心淨土)와 관념적인 자성미타(自性彌陀)에 편협하게 집착하여 믿음과 발원이 없거나, 혹간 믿음과 발원이 있더라도 진실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으면서 유유자적하니 그저 입으로 공염불하거나, 또는 열심히 정진하더라도 마음이 세속에 미련을 못버리고 내생에 부귀스런 집안에 태어나거나 천상에 올라가 온갖 복덕과 쾌락을 누릴 생각이나 하든지, 아니면 내생에 스님으로 출가하여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지혜를 얻어 불도와 정법을 크게 펼침으로써 중생들을 두루 이롭게 하기나 바란다면, 이들도 마찬가지로 정토가 있다고 말할 수 없소.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2)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사료간 중 첫 번째 ‘참선도 있고 정토(염불)도 있다’ 함은, 공부가 이미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明心見性〕 경지에 이른 뒤 더욱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바라는 수행을 일컫소.

 

참선으로 깨달은 뒤 경장(經藏)의 가르침에 깊숙이 들어가 여래의 권실법문(權實法門)을 두루 통달하고, 다시 그 중에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는 정토 수행만이 자기와 타인을 동시에 두루 이롭게 할 확실하고 안전한 대도정법임을 깨달은 자가 여기에 해당하오.

 

확철대오하여 용맹스런 힘이 호랑이 같은데 다시 염불로 생사 해탈을 장악하게 되면 호랑이에 뿔이 달린 격 아니겠소?

 

대승 경전을 독송하여 제일의미〔第一義〕를 이해한 뒤 대지혜요 유창한 말재주〔大辯才〕를 겸비하여 악마와 외도가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간담이 서늘해진다면 그 용맹과 위력은 견줄 바가 없을 것이오.

 

그리고 자기가 깨닫고 수행하는 바를 가지고 중생들을 교화하여 마음의 눈을 틔워 주되, 사람들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설법하면서 참선과 염불을 함께 닦아도 좋을 사람은 선정쌍수(禪淨雙修)로 인도하고 오로지 염불수행에 전념해야 할 사람은 정토전수(淨土專修)로 이끌어 근기의 상중하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라도 그 도덕 감화의 혜택을 입지 않는 이가 없게 될 것이오. 인간뿐만 아니라 천상 세계의 위대한 사범(師範)이 되는 게오.

 

명심견성한 사람이 염불로 정토 왕생을 구하면 임종 때 9품 연화 가운데 최상품으로 화생(化生)하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연꽃이 피면서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금방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거나, 최소한 원교(圓敎)의 초주(初住) 지위에 올라 일백 부처 세계에 부처의 분신(分身)을 나투어 인연과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 제도하게 되나니, 바로 장래의 부처나 조사가 된다는 뜻이오.

 

그러면 저절로 두 번째 게송은 아직 확철대오하지 못하여 자기의 힘으로는 생사 해탈의 가망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아미타불께서 와서 맞이해 주시도록 발원하면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키오. 아미타불께서 과거 법장(法藏) 비구로 수행할 때 48 대서원을 발하여 어머니가 자식을 그리워하듯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 약속을 굳게 믿고,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지성으로 부처님을 생각〔念佛〕하면 감동과 호응의 길이 서로 통하여〔感應道交〕 마침내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선정과 지혜를 함께 깊이 닦은 이가 왕생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십악(十惡)의 죄를 저지른 패역무도의 중생이라도 임종 때 막심한 괴로움에 못 이겨 큰 참회심을 통절(痛切)히 일으키고 아미타불 명호를 간절히 염송하면 설령 열 번이나 아니 단 한 번만 부르고 숨이 끊어지더라도 부처님 화신의 인도를 받아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오. 단지 굳게 믿고 간절히 발원하며 진실하게 염불수행을 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극락 왕생할 수 있기에, 만 명이 닦으면 만 사람 모두 정토에 간다고 한 것이라오.

 

그렇지만 임종 때 염불 몇 번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말은 그 마음이 지극히 간절하고 맹렬하기 때문에 그처럼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는 뜻임을 알아야 하오. 그저 유유자적하니 염불의 횟수나 기간만 따지면서 미지근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왕생할 가망이 별로 없음을 명심하시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염불로 단지 부귀공명을 구하거나 천상에 나기만 바라는 사람은 정토가 결코 없소. 왕생하지 못하는 자는 오직 자신이 발원하지 않은 것을 탓해야지 행여 자비로운 아버지 아미타불께서 와서 맞이해 주지 않으심을 원망해서는 안 되오. 요컨대 발원만 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극락정토요.

 

일단 왕생하기만 하면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미묘한 설법을 들어 단박에 불퇴전(不退轉:阿脾跋致)의 지위를 증득하게 되오. 비록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올라 영원토록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으며, 근기와 성품에 따라 혹은 단박에 혹은 점차로 모든 과위(果位)를 증득하지요. 그래서 단지 아미타불만 뵈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겠느냐고 반문한 것이오.

 

세 번째 게송은, 비록 참선으로 확철대오하고 명심견성한 사람일지라도 보고 생각하는〔見思〕 번뇌를 끊어 버리기 쉽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소. 두 번뇌는 인연따라 꾸준히 단련하면서 남김없이 말끔히 제거해버려야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소. 조금이라도 덜 끊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터럭 끝만큼이라도 남아 말끔하지 못하면 여전히 육도 윤회를 피하기 어렵소.

 

생사의 바다는 깊고 험하며 깨달음의 길〔菩提路〕은 멀기만 한데 아직 고향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이 목숨 다하면 어떻게 되겠소. 확철대오한 사람도 열 가운데 아홉은 이 모양이라오.

 

차로(蹉路)란 길 가던 중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거나 망설임 또는 허송 세월로 시기를 놓친다는 뜻이오. 보통 차타(蹉陀)라 하고 세간에서는 담각(擔閣)이라고 부르지요.

 

또 음경(陰境)이란 중음신의 경계(中陰身境)인데, 임종 때 금생 및 과거 역대 전생의 모든 선악 업력(業力)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장면을 뜻하오. 이 경계가 한번 나타나면 눈 깜박할 사이에 그 중 가장 맹렬한 선악의 업력에 이끌려 가 그에 상응하는 생명을 받는다오. 마치 채무자가 파산한 경우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채권액이 가장 많은 사람이 큰소리 치듯이, 가장 강렬한 업력이 먼저 끌어당기면 자신은 마음속에 만 갈래 생각의 실마리가 엉클어지면서도 조금도 주인 노릇을 못하고 무거운 쪽으로 휩쓸려 떨어지게 되오.

 

오조(五祖) 계(戒) 선사가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가 노공(魯公)으로 환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음(陰)은 소리와 뜻이 음(蔭)과 같아 뒤덮는다는 의미요. 업력이 진여 불성〔眞性〕을 뒤덮어 제 모습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음을 뜻하오. 더러 차(蹉)가 길을 헷갈려 잘못 든다는 착로(錯路)이고, 음경(陰境)이 오음마경(五陰魔境:모음이 중생의 불성을 해칠 수 있기에 악마로 비유한 말)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도 있소. 이는 선〔禪〕과 있다〔有〕는 문자의 의미를 몰라서 오해하는 헛소리요.

 

확철대오한 선사가 어찌 열 명 중 아홉이나 길을 잘못 들고 오음마경에 홀려 주화입마로 미쳐 날뛰겠소? 교리도 모르고 자기 마음도 밝히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수련하는 증상만〔增上慢〕에 걸린 사람이나 미쳐 날뛰는 것이지, 어찌 확철대오한 수행자에게까지 그 악명을 덮어 씌운단 말이오. 너무 중대한 문제라 밝히지 않을 수 없소. 다만 아직 자신을 안정시키고 운명을 수립〔安身立命〕하는 진실한 경지까지 이르지 못해 생사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확실하게 스스로 주인 노릇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뿐이지요.

 

그러니 어찌 두렵고 무섭지 않겠소? 정말로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 극락 왕생하는 염불 법문이 가장 안심하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탄탄대로지요.

 

마지막 네 번째 게송은, 수행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명심견성의 참선공부도 안하고 염불로 극락 왕생하려는 발원도 없이 그저 죄악을 짓는 데만 골몰하여 그 업보를 피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까 염려하는 경고인 셈이오.



영명(永明)선사의 사료간(四料簡) (3)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법문이야 수없이 많지만 오직 참선과 정토(염불)만이 가장 근기에 합당한 길이오. 깨닫지도 못하고 왕생을 발원하지도 않은 채 다른 법문이나 그럭저럭 배우다 보면,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닦아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는 길도 열리지 않게 되오.

 

고작해야 평생 수행한 공덕으로 내생에 천상의 복록이나 누릴 것이오. 금생에 올바른 지혜〔正智〕가 없으니 내생에 복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오욕(五欲)의 향락에 탐닉하여 널리 악업만 지을 게 분명하오.

 

일단 악업을 지으면 죄악의 보답을 피할 수 없고, 날숨 한번 안 들어오면 곧 지옥에 떨어져 쇠 침대 위에 구리 기둥이나 껴안고 억겁이 지나도록 빛과 소리와 맛 등에 탐착하여 생명을 살상한 죄악 등을 갚아야 할 것이오. 그 때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이 대자대비를 몸소 베푸시더라도 죄악의 업장 때문에 그 가피를 받을 수가 없소.

 

옛날부터 “수행하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지 않으면서 널리 많은 선행이나 닦는 것은 제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고 부른다”고 하였소. 금생의 수행으로 내생〔第三世〕에 복을 누리면서 복으로 말미암아 죄악을 짓고 그 다음 생에 타락하여 과보를 받을 것이니 말이오. 쾌락을 내생에 잠시 얻으면 고통은 영겁토록 물려받소. 설령 지옥의 죄업이 소멸되더라도 다시 아귀와 축생에 생겨나 사람 몸 회복하기가 정말 어렵고도 또 어렵게 되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손으로 흙 한 줌 집어 들고 아난에게 물으셨소.

“내 손의 흙이 많으냐? 대지의 흙이 많으냐?”

아난이 당연히 “대지의 흙이 훨씬 많습니다.”고 대답했겠지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비유하셨소.

“사람 몸 얻기란 내 손의 흙과 같고, 사람 몸 잃기란 대지의 흙과 같으니라.”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게송의 형식에 맞추느라 아주 간단히 축약한 표현이오.

 

그래서 네 번째 게송을 읽고 나면 마음이 놀라고 정신이 번쩍 들지요. 모두 생사고해를 깨닫고 보리심을 내어 정토(염불) 수행이 없는 사람은 재빨리 발원 수행으로 정토를 있게 하고, 정토가 있는 사람은 용맹정진하여 결정코 극락 왕생하길 구하는 것이 요긴하고 또 요긴하오.

 

다른 모든 법문은 오로지 자력에 의존하여 미혹의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야 생사를 끝낼 수 있는데, 정토 법문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지하여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 왕생하여 성인의 경지에 합류할 수 있소. 모두들 한번 생각해 보시오. 자력에 의지해 수행한다는데, 도대체 자기에게 무슨 힘이 있단 말이오? 단지 시작도 없는〔無始〕 때부터 쌓아온 업력밖에 무엇이 있소? 그래서 억만 겁이 지나고 천 만 생을 거치도록 해탈하기 어려운 것 아니오?

 

아미타불의 크고 넓은 서원력에 의지하면 저절로 일생에 모든 것을 끝마치게 되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법문 듣기 더욱 어려운데, 이미 보배의 산에 들어 왔다가 그냥 빈손으로 돌아간단 말이오?

 

또 반드시 알아야 할 게 있소. 염불 법문이 단지 하근기의 중생에게만 적합한 게 아니라 상중하 세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두루 통한다는 점이오. 최상의 지혜나 최하의 어리석음이나, 근기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부처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等覺菩薩〕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법문으로 일생에 생사를 끝마칠 수가 있는 것이오.

 

그래서 화엄경에 보면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0여 대선지식을 두루 참방(參訪)하여 무량 다라니문(陀羅尼門)에 들어선 뒤, 맨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이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에 돌아가도록 인도하셨소. 이걸 보아도 정토법문이 정말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원만한 법문임을 알 수 있소. 만약 염불이 어리석은 아저씨, 아주머니나 하는 것이고 궁극의 법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정말로 부처와 불법을 비방하는 지옥의 종자요, 그런 자들의 어리석음과 미친 기와 타락 운명은 너무도 가련하고 불쌍하오.

 

정토법문이 이처럼 고상하고 원만한 까닭은 자력에만 의지하는 다른 모든 법문과는 달리 부처님의 가피력을 함께 겸비하기 때문이오. 이는 보통의 교리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교리라오. 보통의 눈으로 특별한 교리를 보면 당연히 제대로 판단 평가할 수 없지요. 자력에 의지하는 보통 법문이 관직에서 단계대로 승진하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는 특별교리인 정토법문은 왕실에 태어나면서부터 태자가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그러나 정토 수행에 특별하거나 기이한 것은 전혀 없소. 단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구하면 저절로 가피를 입게 되오. 부처님이 중생을 보호하고 생각〔護念〕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함을 알아야 하오. 그래서 지성으로 감동시키면 반드시 가피력의 응답이 있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가 본디 지니고 있는 천진불성(天眞佛性)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천지우주를 두루 비추고 있소. 비록 악역무도(惡逆無道)한 죄인이라도 그의 본성이 지닌 신령스런 광명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소. 다만 맑은 거울이 먼지에 뒤덮여 있는 것과 같소. 어리석은 사람들은 광명이 없어 비추지 않는다고만 투덜거리고, 먼지를 닦아내면 금방 광명이 다시 나타날 줄은 모르는 것이오.

 

그래서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것은 부처님 생각에 의지해 잡념망상을 쫓아내는 일이며, 마음의 거울에 낀 먼지를 닦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오.

 

염불을 하다 보면 자기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신령스런 광명〔靈光〕이 아미타불 광명의 끌어당김을 받아 점차 환하게 드러나게 되오. 자력과 타력이 서로 호응〔自他相應〕하여 감응의 길이 열리게 되니〔感應道交〕 극락 왕생의 미묘한 뜻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소? 염불하는 사람은 단지 지성으로 간절하게 늘 부처님의 마음을 품고 부처님의 행동을 행하기만 하면 되오. 공경을 다한 만큼 이익을 얻고 정성을 보인 만큼 받아쓰기〔受用〕 마련이오. 모두 힘써 수행하기 바라오.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4

글 :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말법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 중생의 근기는 형편없고 업장은 막중한데 이끌어 줄 선지식조차 매우 드무니, 만약 정토 염불을 저버린다면 해탈할 길이 없게 되오.

 

영명 선사께서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것을 염려하며 특별히 사료간으로 후세인들을 일깨우고 계시니, 이는 정말로 나루터를 잃은 길손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뗏목이며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스승이 틀림없소. 그런데 애석하게도 온 세상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쳐 버리고 깊이 궁리하거나 음미하지조차 않으니, 이는 중생들의 사악한 업장이 가로막는 탓이오.

 

정토 염불 법문을 수행함에는 마땅히 믿음과 발원과 실행〔信願行〕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오. 믿음이란 부처님 힘〔佛力〕을 독실하게 믿는 걸 뜻하오. 아미타여래께서 원인 자리〔因地〕에 계실 때 48대 서원을 발하여 매 서원마다 중생을 제도하기로 다짐하셨소. 그 가운데 “나의 명호를 염송하고도 나의 국토에 생겨나지 못하는 중생이 있다면 나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소. 이제 그 원인 수행이 원만하여 그 과보로 아미타불이 되셨으니 우리가 지금 아미타불을 염송한다면 반드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자비력으로 중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자비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음을 믿어야 하오. 자식이 어머니만 그리워한다면 어머니는 늘 자식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품안에 받아들일 것이오.

 

그 다음으로 정토법문을 믿어야 하오. 영명 선사께서 사료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토법문과 다른 법문이 그 크기나 난이도 및 이해득실에서 얼마만큼 차이 나는지 분명히 알고, 비록 다른 스승들이 다른 법문을 몹시 칭찬한다고 할지라도 동요되지 말며, 설령 여러 부처님들이 눈앞에 나타나서 다른 법문을 닦으라고 권하신다 할지라도 이끌려 가지 않아야만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소.

 

서원이란 바로 이 생애에 틀림없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고 이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더 이상 여러 생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오. 머리(목숨)가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하면 할수록 미혹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오. 아울러 서방정토에 왕생한 뒤 다시 사바고해에 되돌아 나와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겠다는 발원도 함께 가져야 하오.

 

실행〔行〕이란 가르침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 나가는 것이오.

능엄경(楞嚴經)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염불삼매장(念佛三昧章)에 보면, “육근(六根:눈, 귀, 코, 혀, 몸, 뜻)을 모두 추스리고 깨끗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삼매(선정)를 얻으면 이것이 바로 제일입니다(都攝六根, 淨念相繼, 得三摩地, 斯爲第一).”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여기 보면 염불 법문은 마땅히 육근을 모두 추스려야 함이 잘 나타나오. 육근을 모두 추스리기 전에 특히 두세 근만 우선 추스릴 필요가 있소. 그 두세 근이란 바로 귀(耳)와 입(口)과 마음(心)을 가리키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여섯 글자 한 구절을 매 구절 매 글자마다 입안에서 또렷또렷(明明白白) 염송하면서 마음속으로도 또렷또렷 염송하고 그 염송소리를 귓속에서도 또렷또렷 듣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또렷하지 않은 데가 있다면 이는 곧 진실하고 간절한 염불이 못 되며 잡념망상이 비집고 생겨나는 틈을 주게 되오. 단지 염송만 하고 귀로 듣지 않으면 잡념망상이 생기기 쉽다오.

 

그래서 염불은 매 구절 매 글자마다 또렷하고 분명해야 하며(의미나 논리를 따지는) 사색을 해서는 안 되오. 그 밖에 간경(看經:독경) 또한 마찬가지요. 절대로 경전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별하지 마시오. 분별하면 감정과 생각만 많아질 뿐 얻는 게 적어지기 때문이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지성으로 경전을 베껴 쓰는데〔寫經〕, 얼마나 일심(一心)으로 전념(專念)했던지 오직 베껴 쓰는 데만 정신이 팔려 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다오. 그래서 하늘이 이미 어두컴컴해졌는데도 어두운 줄 모르고 여전히 쉬지 않고 계속 베껴 쓰고 있었소.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옆에 와서 “날이 이렇게 어두컴컴해졌는데(불도 쓰지 않고) 어떻게 경전을 베껴 쓸 수 있습니까?”라고 놀라 물었다오. 그러자 경전을 쓰던 사람은 그만 감정 생각이 생기면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소.

 

무릇 밝고 어둡다는 분별은 중생들의 허망한 견해〔妄見〕이자 속된 감정이오. 그래서 일심으로 전념할 때는 망상과 감정이 모두 텅 비어 버려 오직 경전 베껴 쓰는 것만 알고 날이 어두워진 줄은 모른 게오. 또 날이 어두워지면 빛이 없어 글씨를 쓸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 거지요. 그러다가 남이 옆에서 끄집어 흔들면서 그만 무명(無明)이 생겨나고 감정생각이 갈라졌소.

 

망상이 움직이자 광명과 암흑이 즉각 판연히 구별되고 더 이상 경전을 쓸 수 없게 된 거라오. 그래서 수행공부의 길은 정말로 오롯하게 추스리는〔專攝〕 데에 있소. 감정생각이 일지 않아 무념무상하다면 어디에 사견(邪見)이 있겠소. 사견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지혜〔正智〕지요.

 

〔옮긴이 보충해설 : 유가의 서경(書經)에는 요순(堯舜) 임금 때부터 전수되어 온 도맥(道脈)으로 알려진 16자 심법(心法)이 실려 있다. “사람 마음 오직 위태롭고 진리 마음 오직 미약하니, 오직 정성스럽고 오직 일념으로 중용의 도를 진실되게 붙잡아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進一, 允執厥中).”

 

우리 속담에는 “정신이 한 군데 집중되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리오?(精神一到, 何事不成?)”라는 말이 있고, 중국에는 정성이 미치는 곳에는 쇠와 돌도 열린다(精誠所致, 金石爲開)는 속담도 있다. 모두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염불 경지와 같은 도의 본질속성이다.〕

 

그리고 정토염불을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인과응보를 크게 제창하여야겠소. 최상의 지혜를 갖춘 사람이야 본디 윤리강상(倫理綱常)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알지요. 그러나 중하 근기의 중생들에게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그 구체 사례도 뚜렷한 증거로 소개해 줄 필요가 있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행실을 경계시킬 수 있겠소?

 

〔옮긴이 : 유형의 국가 정치에서 법령과 형벌을 제정하여 공포 시행하는 이치도 이와 똑같으며, 무형의 종교 도덕상 인과응보 법칙과 서로 표리관계로 일체(一體)를 이룬다.〕

 

그래서 인과응보는 진리〔道〕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오. 사실 인과응보의 법칙을 독실하게 믿는 일도 결코 쉽지 않소. 소승의 초과(初果:수다원)와 대승의 초지(初地)에 이르러야 진실로 인과응보를 독실하게 믿을 수 있다오. 그 아래 중생들은 한번 마음에 거슬리는 인연을 만나면 살생이나 도적, 간음, 거짓말 등의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소. 미혹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악업이 뒤따라 지어질 위험이 크지요.

 

그런데 총명하고 글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들은 인과응보를 오히려 경시하고 마치 중하 근기의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나 알려 주는 것으로 여기고 있소. 그 뜻만 대강 알아서는 믿는다고 말할 수 없거니와, 설령 잘 안다고 할지라도 이를 몸소 실천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오직 초과(初果)와 초지(初地)에 올라 성인(聖人)의 부류에 끼어야만 미래의 생사윤회를 받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빛·소리·냄새·맛·느낌·생각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독실한 믿음이라고 일컬을 수 있소.

 

그래서 몽동(夢東, 徹悟) 선사께서도 “심성(心性)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인과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며, 인과를 깊이 믿는 사람은 마침내 반드시 심성을 크게 밝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소.

 

세상에 염불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정말로 생사윤회를 끝마치는 사람은 왜 그리 적은지 한번 생각해 보시오. 이는 오직 염불하는 사람들이 깊은 믿음과 간절한 발원이 없거나, 내세에 부귀공명을 누릴 복덕의 과보만 구하기 때문이오. 내세의 부귀공명이란 게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과 같아서 추진력이 다하면 되돌아 자기에게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요.

 

금생에 염불하는 사람이 내세의 인간이나 천상의 복록을 구한다면 그 복록으로 부귀공명을 얻겠지만 올바른 지혜가 없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인과응보를 믿지 아니하겠지요. 인과응보를 믿지 않는 사람이 부귀공명의 지위에 올라앉으면 마치 사나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어 죄악만 더욱 증대시키게 될 것이오. 그래서 복록이 클수록 죄악도 더욱 많이 지어 그로 말미암아 다음 생에 막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제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는 것이오.

 

그러므로 염불 수행하는 사람은 복록을 보답 받을 생각일랑 절대로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오. 오직 용맹스럽고 날카롭게 앞으로 곧장 나아가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만이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미묘한 법문으로 믿어야 하오. 그래서 철오(徹悟:夢東〕 선사께서 일찍이 “정말로 생사를 위해 보리심을 내고 깊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라(眞爲生死, 發菩提心, 以深信願, 持佛名號).”고 가르치셨소. 이 16글자는 정말로 염불법문의 큰 강령(綱領)이요, 종지(宗旨)요.

 

또 “아미타불 한 구절은 우리 부처님 마음의 요체이니, 세로로는 다섯 시기〔五時:부처님의 다섯 설법 시기인데, 보통 천태종에서 화엄·녹야원(소승 아함경)·방등(方等:유마경·승만경 등 대승경전)·반야·법화 열반으로 나누는 견해가 대표적이다.〕를 관통하고, 가로로는 여덟 가르침(八敎:三藏敎·通敎·別敎·圓敎의 네 化法과 頓敎·漸敎·秘密敎·不定敎의 네 化儀를 합쳐 부르는 천태종의 개념)을 포괄하네(一句彌陀, 我佛心要, 竪徹五時, 橫該八敎)”라고 찬탄하셨소.

정말로 ‘나무아미타불’ 한 구절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하오.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그 궁극 경지를 알 수 있으며,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等覺〕 보살조차 다 알지 못하는 게 있다오. 그래서 보살도 조금밖에 모른다〔菩薩少分知〕고 말하는데, 하물며 우리 범부들이야 더욱 더 믿고 실행해 나갈 일이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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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법시대에는 염불만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대집경)

 

 

이 시대에는 어떤 수행(신행)을 닦는 것이 가장 좋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대집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법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하더라도

한 사람도 도를 얻기 어려우니, 오직 염불을 의지해야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말법시대에는 가르침도 많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가르침과 사람의 근기가 서로 맞지 않아서 깨달음을 얻은 이가 드물다. 

염불법문을 수행하는 이만이 나고 죽음의 고해를 뛰어 넘어 육도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부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빛가운데 빛이고 부처님가운데 부처님이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앞서 말법중생들에게 해탈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정토법문을 남겨 주셨다. 불자라면 부처님이 일러 주신 이 정토법문을 기쁘게 받아 지녀야 할 것이다. 

 

 

죄업이 깊고 무거운 중생도 아미타불을 부르면 구제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에게 달렸다. 그대로 믿고 정토에 태어 나기만을 바라고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틀림없이 구제 될 수 있다. 『관무량수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중생이 오계,팔계,구족계 같은 청정한 계율을 깨트리고 살면서도 참회하지 않는 마음이 없다면 죽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죽어 지옥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대부분은 “이제는 영영지옥을 피할길이 없겠구나” 하고 체념해 버린다.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때라도 좋은 스승을 만나 광명이 끝없는 아미타불의 공덕과 서원을 찬탄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염불하면 80억겁의 죄업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무서운 지옥불은 맑고 서늘한 바람이 되어 가지가지 하늘꽃을 흔들고 그 꽃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부르는 중생을 맞아 주시니 한 생각에 극락정토의 연꽃속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죄업이 무겁고 깊어 지옥,아귀,축생 같은 삼악도에 떨어져 끝없는 죄업을 받을 이라도 염불하는 한 생각속에 80억겁의 죄업을 없앨 수 있다. 

그리하여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고 극락정토에 태어나 길이 윤회의 바다을 건너 바로 깨달음에 이른다. 그러니 지옥에 떨어질 중생이라도 죽어 지옥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한 생각에 깨달음을 이루게 됨이 결코 허망한 말이 아님을 뚜렷이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인과는 털끝 만큼이라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질이가 어떻게 아미타불을 부르는 한생각으로 무서운 인과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는가?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부르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뜻밖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인연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덕의 씨앗이 무르 익어야 피어난다. 지옥불앞에서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마음이야 말로 무르익은 인연이요 공덕의 끝이 아닌가.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님들은 한결 같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염불하는 공덕은 금강을 먹는 것과 같아서 결코 없어 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전에 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큰 호랑이를 만났다.나그네는 너무 바쁜 나머지 “나무불!!”하고 외쳤다. 이 한마디의 공덕으로 오랜세월이 지난뒤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어 아라한과를 이루었다. 염불수행자는 결코 염불공덕을 의심하지 말고 나고 죽음을 생각하는 참마음으로 용맹스럽게 염불해야 한다. 염불이야말로 죽음을 벗아나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어떤 중생이라도 염불하면 해탈한다. 

 

정토법문은 위,아래,가운데 모든 근기의 중생들을 함께 끌어안고 율종,선종 같은 여러 종파들을 다 아우르는 법문이다. 정토법문은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때 맞춰 내리는 단비와 같고 강물을 다 받아 들이는 큰 바다와 같다. 변(邊),원(圓),돈(頓),점(漸)의 모든 가르침이 다 이법문 가운데서 흘러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을 한데 아울러 모두 참 진리를 얻게 하고, 성인과 범부를 함께 이끌어 정토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구계(九界)가 모두 귀의하고 시방삼세가 함께 찬탄하고, 경전마다 이 가르침을 밝히고 논장마다 이가르침을 펴니, 이는 가르침의 가르침이고 일승에 큰 빛이라 이를 만하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말법시대 중생들에게 이 정토법문에 귀의해 해탈하라고 가르치셨다. 관음세지, 문수, 보현 같은 모든 위대한 보살들도 정토법문을 수행하고 아미타불을 염불해서 극락정토에 태어나 물러섬 없는 땅에 이르러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라고 권하셨다.

 

 

염불법문에는 어떻게 한생각에 부처를 이루는 힘이 있는가? 

 

이런 힘의 뿌리는 아미탑불의 48원의 알멩이인 "결정코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겠다는 원력과 열번의 아미타불을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원력이 있다. “결정코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는 원력이란 무엇인가? 극락정토에 태어난 이는 이미 지은 업장의 무겁고 가벼움에 가릴 것 없이 한결 같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겠다는 원이다.그렇다면 정토에 어떻게 갈 수 있는가? 아미타불을 부르면 그렇게 된다.

 “열번 아미타불을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원력이란 무엇인가? 아미타 부처님은 과거 원력보살로 수행할 때 “내가 만약 성불하면 시방중생이 나의 국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고 내 이름을 열번만 부르면 정토에 태어나게 하리라. 만약 한 중생이라도 정토에 태어나지 못하면 나는 깨달음을 이루지 않으리라.” 는 원력을 세웠다.

 시방중생이란 사람 뿐만이 아니다. 중음세계 중생이든 나아가 짐승, 아귀, 지옥중생할 것 없이 신령하고 밝은 깨달음의 성품은 그대로 이니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손에 이끌려 정토에 태어나 성불하고 만다. 더욱이 중음세계의 중생은 그 영성이 생전보다 아홉배나 밝으니 이 같은 영성으로 지극 하게 부르면 아미타불을 원력을 타고 한생각 사이에 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이룬다. 

 

 

중음세계가 아무리 험해도 아미타불만을 부르면 벗어날 수 있는가? 

 

성불하기에 가장 쉽고 빠른 길은 밝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중음신에게 보이는 온갖 밝은빛,기쁨과 성냄에 모습을 나투는 여러 성상과 나찰, 맹수,우박 같은 현상들은 모두 스스로의 의식이 바뀌어 나타난 모습이다. 살아 있을 때 중음세계를 이해 하지 못하고, 죽어서 위에서 말한 여러가지 경계를 만나면 그런 경계들의 참모습을 알지 못해 자성불(自成佛)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구제할 기회를 놓쳐 윤회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만다.

 이와 같이 참으로 위험한 상황속에서도 만약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구하면 문득 허망된 의식의 흐름이 끊어지고 변화해 나타난 허망한 경계들이 사라진다.아미타불은 결코 스스로 세운 서원을 저버리시는 일이 없다. 부르는 소리를 따라 바로 오시고 이끌어 정토에 태어 나신다. 부르는 중생이 비록 삼천대천 세계의 큰 불로 가득찬 곳에 있다 하더라도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활활타는 불꽃바다을 뛰어넘어 정토에 태어나 바로 깨달음을 이룬다.

 

 

염불문은 늙은이에게나 맞는,낮은 수행법인가? 

 

정토법문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이것은 지혜있고 공덕을 짓는 이의 말이 아니다. 왜 그런가. 정토법문을 믿고 수행할 수 있는 이는 수많은 생을 통해 수행공덕을 쌓는 큰 지혜인으로 낮은 근기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량수경』에 “이미 복덕과 지혜를 닦지 않은 이는 이 정토법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 하셨고 또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기쁜 마음을 일으켜 우러러 아미타불께 귀의하고염불수행을 한다면 이런 이는 작은 근기가 아님이라. 그런 사람은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제자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참으로 정토법문을 듣고 맑은 믿음으로 받들어 실천하는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난 생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수행한 복덕과 지혜가 크고 깊은 이들로서 으뜸가는 부처님의 제자 인것이다. 부처님조차도 찬탄하신 이 법문을 힘써 수행하는 염불행자를 얕잡아 보는 일은 참으로 삼가할 일이다. 염불법문의 수승한 공덕은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도 잘 밝혀 주고 있다.

 더 깊이 공부해 보려는 이는 『정토 삼부경』을 보면 된다. 무량수경에서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의 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고 관무량수경에서는 염불법문이 높고 깊은 유식수행의 뿌리임을 알 수 있고 아미타경에서는 근기가 서로 다른 중생들이 염불수행으로 빠짐없이 구제를 받는 불가사의한 경계를 알 수 있다. 

 

 

 

마(魔)는 수행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인데 ,염불법문을 수행하면 마가 없을까?  

 

『수능엄경 오십음마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러 귀신의 무리들과 함께하는 말법시대에 이르면 천마(天魔),외도, 귀신, 요정, 같은 기운들이 불길처럼 일어나 모든 수행자들을 괴롭힌다. 참선이나 밀법을 닦는 이가 계율을 지키지 않고 바른 견해가 없으면 바로 마군의 그물에 걸려들고 만다. 그러나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고 염불법문을 받아 지닌 이는 삿된 마군의 괴롭힘에 걸려 들지 않는다

.” 왜 그런가?『십왕생경』말씀을 보자 “어떤 중생이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정토에 태어나길 원하면 아미타불께서 스물다섯 큰보살을 보내어 수행자를 보살펴, 가거나 앉거나 머물거나 눕거나 밤이거나 낮이거나 어떤 때 어떤 곳을 가림 없이 악귀나 악신이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또 아미타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경을 받아 지니거나 여러 부처님의 이름을 들으면 이 선남자 선여인들은 모두 부처님들께서 보살펴 주시나니, 모두 물러섬이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 이렇듯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수행자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님들의 보살펴 주시사 언제나 40리에 뻗치는 밝은 빛속에 있어 어떤 마도 가까이 할 수 없다. 염불법문이야 말로 이 말법시대 중생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쉽고 간단하고, 가장 근기에 맞는 수행법이자 생사해탈을 가장 완전하고 빠르게 이루어주는 성불의 문이다.

 

 

 

나고 죽음을 벗어나는 빈틈없는 해탈공부 

 

어렵고 어려운 일은 죽음뿐 모든 것이 사라 질 때 죽음이 올 때 그대여, 죽음을 죽음이라고 알아서 그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가? 나고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그대는 공부를 해 두었는가? 『화엄경』<보현행원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 모든 감각은 다 흩어져버리고 가족도 이웃도 다 떠나버린다.명예도 위엄도 재물도 다 사라진다. 따르던 이들도 헐뜯던 이들도 함께 갈 수 없는 죽음의 길에 오직 함께하는 것은 정토를 그리던 이 마음뿐.자나깨나 아미타불을 그리던 마음의 빛이 죽음의 길을 환하게 비추어 한 순간에 정토에 태어나게 하리라.

 정토에 태어나면 아미타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같은 수많은 보살님께 에워싸여 연꽃 속에 태어나며 부처님께 수기를 받으리라. 죽으면 가장 아끼던 몸이며, 눈, 귀, 코, 혀, 같은 모든 감각기관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다시는 쓸 수 없게 된다. 그뿐인가.사랑하던 가족과 이웃들도 영영 헤어지게 되고 피땀 흘려 모은 재산도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부리던 이라도 숨길 한번 끊어지면 한 사람도 뜻대로 부릴 수 없다. 이같은 죽음을 맞이하여 창자를 끊는 듯한 괴로움속에 몸부림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중음의 세계는 친척도 없고,벗도 없고 기댈 사람도 없다.시커먼 어둠의 두려움 속에는 살려달라고 부를 이름도 모습도 없어 지은 업대로 곤두박질치며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살아 있을 때 가족이나 이웃이 이런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힘이 될 수 있을까.나아가 우리는 스스로 이같은 중음의 고통속에 빠져있을 때를 대비해 지금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나고 죽음만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삶의 문제를 깔끔히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온갖 현상은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음을 깨달아 욕심과 애착을 놓아버려야 한다.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아미타불을 그리는 마음을 키워나가고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원을 닦으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해야 한다. 이렇게 힘써 수행한 이는 죽음에 이르러 한꺼번에 온갖 세상 인연들이 사라질 때 불보살님의 가피의 빛살이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정토로 이끌어 주신다.그리하여 한 순간에 극락정토의 연화속에 태어나 아미타불님의 수기를 받고 자기가 성불할때와 나라와 이름을 밝게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뛰어나고 시원한 일인가! 이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이는 죽음을 뛰어넘어 번뇌의 굴레를 벗어나서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나아가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들까지도 인연따라 구제하게 될것이니 어찌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을 윤회의 깊은 강에서 건지지 못할까 걱정할 것인가.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도 이 정토의 맑은 가르침을 따른 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해 보기가 어려운 모든 근심과 집착을 놓아 버리게 된다.

또 정토의 부신 빛살에 눈이 뜨여 한마음 한뜻으로 정토에 태어나길 소원하게 되나니, 다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게 되더라도 끝내 정토를 향한 큰 소망을 남김 없이 어느 생엔가는 이루게 된다. 사람 몸을 받고서도 정토의 길 안 닦으면 보배산에 들어가서 빈손으로 나옴과 같도다.!

 

 

출처 / (중음신제도법)  - 정토와 밀교의 핵심되는 가르침-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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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염불을 권하는 경전들 

[내용 요약]


<아미타경> 

사리불아, 만약에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말씀을 듣고 명호(名號)를 잡아 지녀 혹은 일일 혹은 이일 삼일 사일 오일 육일 칠일 동안 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때에 아미타 부처님이 여러 성중과 함께 그 앞에 나타나시니라. 이 사람은 목숨이 다하는 때에도 마음이 뒤바뀌지 아니하니 아미타불의 극락국토에 곧장 왕생하게 되느니라. 

[반주경]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1일동안 염불하고 2일에도 생각을
끊이지 않고 계속하면 아미타불이 앞에 나타나 곧 왕생한다. 

[무량수경] 

아미타불을 염하는 마음을 꼭 잡고 끊이지 않으면 곧 왕생한다. 

[대비경] 

낮과 밤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주위 사람들에게 서로 권하면 함께 왕생한다.

[대보적경] 

열번 생각하면서 저 무량수불을 부르면 죽음을 맞이할 때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극락세계에 태어날 것임을 결정해 준다. 

[관무량수경] 

오역죄를 짓고 지옥에 떨어질 중생이 지옥의 불길이 앞에 나타날 때 열번 
아미타불을 부르면 곧 왕생한다. 

[대법고경] 

임종시에 능히 부처님을 관하거나 염불하지 않았으나 아미타부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만 있어도 곧 왕생한다. 

[미타대경] 

염불을 하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내면 벗어날 수 없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결의경] 

말법시대 일만년 동안은 염불하는 것이 가장 견고한 수행이다. 

[월장경] 

나의 가르침의 말법시대에도 수많은 중생이 행을 일으켜 도를 닦을 것이지만 
마지막에는 한 가지 얻을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오직 염불의 한 문이니라. 
가히 통하여 그 길에 들어서서 염불을 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구하면
만명 가운데 한 명도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불성경] 

항상 보살이 있는데 한 분은 관세음이라 하고 또 한 분은 대세지라고 이름한다. 
오색구름 위에 여섯 개의 이빨을 한 흰 코끼리를 타고 때때로 연화대에서 
염불하는 사람들을 맞이하여 부동국(극락)에 태어나 자연히 즐겁게 한다. 

[법화경]

 

만일 여래께서 멸도하신 후 500년에 이르러 어떤 여인이 이 경전을 듣고 그 설한 바와 같이 수행하면, 그 목숨을 다 마친 뒤에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큰 보살 대중들이 둘러 있는 곳에 가서 연꽃 가운데의 보배 자리에 태어나리라. 
 

그리하여 다시는 탐욕하려는 번뇌가 없고, 성내고 어리석은 번뇌도 없으며, 또한 교만하고 질투하는 여러 가지의 더러운 번뇌가 없으리라. 그리고는 보살의 신통과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서 눈이 청정해지며, 이 청정한 눈으로 7백만 2천억 나유타 항하의 모래 같은 여러 부처님 여래를 보게 되느니라.

 

[화엄경]

 

또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치려는 마지막 찰나에 온갖 기관은 모두 무너지고 친속들은 모두 떠나게 되고 모든 세력은 모두 잃어져서, 정승이나 대관이나 궁전 안팎의 코끼리·말·수레·보배나 숨은 광들이 하나도 따라오지 않더라도 이 열 가지 원은 서로 떠나지 아니하고, 어느 때에나 앞길을 인도하여 잠깐 동안에 극락세계에 가서 나게 되리라.

 

가서는 곧 아미타불과 문수사리보살·보현보살·관자재보살·미륵보살 들을 뵈올 것이며, 이 보살들은 몸매가 단정하고 공덕이 구족하여 아미타불을 둘러 앉은 가운데서 이 사람은 자기 몸이 연꽃 위에 나서 부처님의 수기 받음을 볼 것이며, 수기를 받고는 무수한 백천만억 나유타 겁을 지나면서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시방세계에서

 

지혜의 힘으로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 이롭게 할 것이며, 오래지 않아서 보리 도량에 앉아 마군을 항복 받고 원만하고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고 미묘한 법륜을 굴리어 부처님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많은 세계의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 하고 근기를 따라서 교화하여 성취시키며,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모든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리라.



시방제불 보살과 종사들의 찬양


칭찬정토불섭수경에는 시방제불이 극락정토를 극구 찬양 하셨고

보적경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버지인 정반왕에게 염불 왕생을 간절히 권하셨고

보살내계경에는 보살의 세 가지 원주에 두 번째 원이 아미타불 국토인 극락세계에 왕생을 원하는 것이고


화엄경에는 보현보살이 왕생을 발원 하셨고
문수발원경에는 문수보살이 왕생을 발원 하셨고
선종 제십이조인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에서 아미타불을 찬양 하였고 세친보살의 무량수경론에서 왕생을


이 외에도 선종에서 많은 선덕들이 미타법문을 겸해서 닦은 이가 많으며 혹은 비밀리에 닦기도 하고

법문을 설하기도 하고 논문을 지어서 극락왕생을 권장하기도 하고 경문을 주석하여 미타법문을 광포 한 이들이 많았다.

임제종의 백장회해선가는 그가 지은 백장청규에서 병승과 망승을 위하여 나무아비타불 육자 명호 염불을 염송하게 하였다. 또한 선종 이 외의 율종 삼록종 천태종사들도 미타법을 겸해서 닦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여 닦게도 하고 미타문 소의경전을 주석하여서 미타신앙을 광포한 이가 많았다

 
※[팔만 대장경 총 940여부 가운데 270여부에서 아미타불과 극락 
그리고 염불을 말씀하셨다.] 


이 밖에도 [업보차별경] [정토경] [문수경] [대집경] [대화엄경] [금색등경] 
[천친론] [보왕론] [기신론] 등 팔만 대장경 총 940여부 가운데 
270여부에서 아미타불과 극락 그리고 염불을 말씀하셨다. 



 

먼 미래에 이 세상에서 불법이 망하고 모든 경전이 다 없어진다 하더러도

나는 자비한 마음으로 말세 중생을 가엾이 여겨 특히 이 무량수경 만은

백년을 더 오래 머물게 할 것이니라

 

그래서 누구든지 이 무량수경을 만나서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이는 그들의 소원대로 모두 극락세계에 왕생 할 수 있을 것이니라

 

[무량수경에서]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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