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독경천도(讀經薦度)


독경천도는 이름 그대로 영가에게 공덕이 되는 경전을 읽어주면서 행하는 천도법이다.

이렇게 공덕을 심어주는 경전들을 불가에서는 공덕경(功德經)이라고 하는데,
현재 널리 읽혀지고 있는 공덕경으로는 금강경, 아미타경, 지장경, 관음경,
약사경, 법화경 등이 있다.


이들 공덕경 중 어떤 경전을 택하여 읽어도 효과는 같으므로,
형편에 맞게 하나를 택하여 꾸준히 읽어주면 된다.

이제 구체적인 요령을 말하기 전에,
서울 신당동에 살았던 자명성 보살의 독경천도 영험담을 함께 음미해 보자.


1. 지장경을 읽어 사돈댁 영가를 천도하다.


자명성 보살이 불교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50대 초반에 3년 동안 신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사돈의 권유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다가,
꿈에 흰옷을 입은 할머니로부터 10여 차례 약물을 받아 마시고
완쾌됨으로써 불교를 깊이 믿게 된 것이다.



이 자명성 보살이 2남 2녀의 막내딸을 시집 보낼 즈음, 신랑집에서 예단을 보내왔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예단 한복판에 예물로 보내오지도 않은 족두리가 선명하게 보이면서,
꿈속인데도'무엇인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 사돈댁의 원귀가 예단에 묻혀 온 것이라 느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돈댁이 손을 대는 사업마다 모두 실패를 하고,
가족들도 이상하리만치 어려운 사정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보살은 꿈에서 깨어나자 곧바로 지장경을 독송하고 기원하였다.


"예단에 싸여 온 영가가 사돈댁과 인연이 있는 영가이든 또 다른 영가이든,
부처님과 지장보살의 공덕을 입어 밝은 길로 나아가지이다."



"예단에 싸여 온 영가들과 사돈댁 집안의 영가들이 극락에 왕생하여지이다."


이러한 축원을 하며 보살은 며칠동안 지장경을 하루에 한 편씩 정성껏 읽어주었다.

그러자 꿈에 옷을 단정히 입은 여자가 기쁨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나타나 공손히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런데도 예단에 싸인 족두리는 여전히 보였으므로 계속 지장경을 독송하고 축원하였다.
20일이 지나자꿈에 족두리를 쓴 단정한 젊은 여인이 나타나
정중한 자세로 정성을 다해 절을 하고 사라졌다.


자명성 보살은 사돈댁 영가를 위해 백 일을 기도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계속하였고,
백 일이 다 되었을무렵 노란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손에 흰 수건을 들고 나타나 절을 하고는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사돈댁에 원한이 있는 영가들이 구원을 받을 인연을 찾아왔다가
지장보살의 가피를 입어 모두 천도되었음을 보살은 직감하였다.

그 뒤 자명성 보살 사돈 집안의 우환은 저절로 사라졌고,
사업도 잘 풀려 예전처럼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2. 부모은중경사경과 지장경 독송으로 아버지의 영가를 천도하다.



현재 모전문대학의 교수로 있는 정박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유럽에서 박사 학위의 심사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임종의
소식을 듣고도 아내만을 고국으로 보내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논문심사를 마치고 박사가 되어 귀국한 정박사는 여러 학교를 찾아
교수 자리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오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던 정박사는 속칭 '보따리 장사'라고 하는
시간강사가 되었고, 아내는 학원강사가 되어 가정을 꾸려갔다.
그러나 돈은 늘 모자랄 뿐이었다.

또한 정박사의 꿈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더기를 입고 나타나
꾸짖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놈아!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버지의 꿈, 가난한 살림, 몇 년째 시간강사 신세 등으로 정박사의
신경은 갈수록 날카로워졌고, 아내와의 사이도 점점 멀어져만 갔다.

차츰 살아있다는 것까지 구차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충남 천안 광덕사를 찾은 정박사는 한 스님으로부터
영가 천도에 관한 말씀을 듣고, 광덕사 명부전의 지장보살님 앞에서
발원을 하였다.

"지장보살님! 불효자식에 대한 한을 품고 땅에 묻혀 계신 아버님을 위해,
49재를 지내는 마음으로 49일 동안 부모은중경 1부를 사경하고
지장보살본원경을 1백독 하겠나이다. 부디 아버님을 극락왕생케 하소서."

집으로 돌아온 정박사는 그날부터 지장보살님 앞에서 발원한 대로
실천을 하였다. 그러나 한 차례 읽는데 2시간씩 소요되는 지장경을
두번씩 읽고, 한시간 가량씩 부모은중경을 쓰는 것이 여간 힘들지않았다.
강의 등 평소 생활을 그대로 하면서 하루 5시간을 더 노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박사는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생각을 경책하면서
불효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잠을 줄였고, 버스 속에서도 지장경을 읽어
지장보살님 앞에서 한 약속을 지켰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제사를 지내고 잠이 든
정박사는 꿈에서 다시 아버지를 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전처럼
누더기를 입지않고 아주 좋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운 것은 아니었구나. 네 덕에 이 아버지는
좋은 곳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멀어져가는 아버지를 좇아 달려가다가
정박사는 깨어났다. 그 뒤부터 정박사의 꿈에는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해 가을 전문대학의 교수로 채용되었다.

이 정박사의 경우처럼 영가천도는 당사자가 직접하여야 한다.
굿을 한다고 하여, 부적을 쓴다고 하여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절에서 올리는 천도재만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절에 계신 부처님이나 신장, 그리고 기도를 하는 스님들도
'나'의 정성에 감응하여 움직여주시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이라면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영가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도 '나'요, 천도를 하여 복되게 사는 것도
'나'라는 것을....... 그런데'나'의 문제를 어떻게 남에게
미룰 것인가?


내가 직접 하겠다는 자세와 각오가 없으면 천도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3. 금강경독송으로 삼촌의 영가를 천도하다.




1988년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있는 울산 학성선원에
다니는 불자중 미장원을 하는 미혼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고향은 경상남도 진영으로, 가족으로는 과수원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오빠, 언니, 아래로는 남동생이
있었다.

또 그녀에게는 숙부가 있었는데, 진영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매일같이 술만 퍼마시고 살았다.

어느 해, 추석전날 아버지는 동생인 숙부에게 장에가서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오도록 시켰다. 그러나, 해가
저물었는데도 숙부는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일러주었다.

"자네 동생이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 쓰러져있는데,
죽은 것이나 아닌지 도무지 깨어나지 않네."

온 가족이 마을 사람을 따라 현장에 가보았더니, 호흡과
맥박도 멎고 손과 발도 식어있었다. 오직 가슴만 따뜻할
뿐이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명절 전에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집에 두지않고 바로 산에 묻는 풍속이 있었다. 그 풍속대로
가족들은 숙부를 산에 묻게되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였다. 그 숙부의
영가가 '죽지도 않은 나를 파묻었다'며 보복을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시집을 간 언니에게서 먼저 시작되었다. 언니가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살림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는 수없이 친정에 데려다놓았더니, 집에 사람이 없을 때
혼자 집을 나갔다가는 집을 찾아오지 못했다. 그 때마다
온 집안과 동네사람들은 언니를 찾아 헤매어야했다.

가출이 잦아지자 그녀는 언니를 울산으로 데려와, 낮에는
미장원에서 밤에는 집에서, 하루 24시간을 함께 지내야했다.

또, 멀쩡했던 막내동생도 군에서 제대를 한 뒤부터 정신이
이상해져서, 칼이건 낫이건 손에 잡히는대로 들고 가족을
죽이려하였다. 할 수없이 가족들은 그 동생을 기둥에 묶어놓고,
어머니가 하루 세 끼밥을 떠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어야만했다.

집안이 이 지경에 이르러 굿도 여러차례 하였지만 효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그 녀가 학성선원으로 찾아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방법을 묻기에 말하였다.

"안 죽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숙부를 그냥 땅에 파묻었으니
그 원결(怨結)이 얼마나 깊겠느냐? 지독한 원결은 지극한
기도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다. 하루에 한글 금강경을 21번씩
백일동안을 읽을 수 있겠느냐?"

미장원을 하는 그녀가 하루에 금강경을 21번씩 읽으려면
잠을 제대로 잘 수조차 없기때문에, 참으로 무리한 주문이라
하지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겠다'고 하였다.

"그래, 힘들겠지만 해보아라. 집안을 위하여 작은
아버지를 천도해 드려라."

그리고, 10 여일이 지났을 때 그녀가 다급한 음성으로
전화를 하였다.

"스님, 언니가 집을 나갔는데 찾을 수가 없어요."

"그만 내버려둬라. 길거리에 쓰러져 죽었으면 그만이고,
살아있으면 기도 마칠 때쯤 찾아올거다. 언니를 찾으려하지말고
기도나 열심히해라."

"그래도 스님...."

"내 버려둬. 너에게는 기도하는 일이 더 바빠."

그녀는 금강경 독송의 기도를 계속하였고, 백일을 다 채우기
7일을 앞두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진영의 집에서 온 전화로,
울산역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언니를 데리고 있다는 연락이 왔으니
가보라는 것이었다.

과연 언니는 그 집에 있었고, 음식점 주인은 언니를 보호하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약 70일전, 얌전하게 생긴 아가씨가 음식점으로 들어왔는데,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완전 거지옷이오, 얼굴에는 때가 가득
묻어있었으며, 이름도 사는 곳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불쌍한 생각이 들어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사다가 입혔더니,
그 집에서 나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틀 전에
말을 하였다.

"우리 친정집은 진영입니다. 아버지는 과수원을 하시고요."

그리고는, 아버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억해내어 집으로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백일기도가 끝나기 7일 전에 기억을 회복한 언니는 다시
시댁으로 들어가 아기를 낳고 잘 살고 있으며, 가족을 죽인다고
했던 막내동생도 예전의 상태로 돌아와 착하게 살고있다.


또 그녀는 기도를 하다가 이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사랑으로는
맛볼수없는 깊은 환희를 맛보게 되었고, 지금도 모범적인 불자로
잘 살아가고있다.






출처: 도서출판 효림 불교신행총서4 우룡큰스님저 영가천도


옮긴이의 말:


영가천도를 위한 경전독송에는 한문을 직독직해할 실력이 되지않는이상 잘 번역된 한글경전으로
소리내어서 독송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공부많이하신 분들이 하나같이 이르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영가천도 기도에 경전을 묵독하면 효과가 반감됩니다. 아주 큰 소리로 할 것까지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귀에 들리는 소리이상 조금 크게 영가님들께 들려드린다는 자세로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경전독송을 통해서 영가천도가 되지만 때로는 사경, 절, 주력, 염불과 같이 하기도하고 그것도 마음대로
순서를 할 것이 아니라 검증되고 잘 조화가되는 조합으로 하여야합니다. 임의로 이것저것 갖다붙여서 하는 방법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는 3배, 발원문3회독송, 지장보살본원경1편(=1권) 독송, (108참회), 나무지장보살염불 1080번, 광명진언 108번, 3배
이렇게 영가천도기도하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기도외 시간에도 광명진언을 끊임없이 소리내어 외시면 좋습니다.

매일 최소한 광명진언을 1080번이상은 외시는 것이 좋습니다.

.........................................................................................................................................................................

죽음의 종류와 영가천도 (우룡큰스님 법문)


오늘 법문은 ‘죽음, 어떻게 대비하고 다스릴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하겠습니다.

신도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일이 무엇일까요? 흔히 요즘은 돈 세상이라 하며,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돈을 벌어서 재산을 모으는 일이 가장 큰 일일까요?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은 명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데, 그 명예가 가장 중요할까요?

아니면 천하를 휘두를 권세를 잡는 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일까요?

아니면 결혼을 하여 2세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일까요?

인간살이에서는 돈도 벌어야 하고, 명예나 권세도 필요하고 중요할 때도 있으며, 가정생활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중생살이입니다.

그러나 돈이나 명예나 권세는 허망합니다. 거기에 인생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갖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가장 큰 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큰 일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일입니다.

자기의 생사문제보다 인생사에서 더 크고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이 세상이 존재하며 내가 있어야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으며, 나 없는 세상 무슨 뜻이 있으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희망이요 환희요, 행복이요, 축복이요, 존재 자체이며, 그 무엇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는 대단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리하여 나 뿐만 아니라 누구나 출생하면 기뻐하고
경사났다 하며, 축하하고 잔치도 벌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집안에 송아지가 나고, 강아지가 태어나도 주인은 싱글벙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이웃이나 친지에게서 축하도 받습니다.이와 같이 출생은 기분좋은 일이고 즐거운 일이며, 축복받을 일입니다.

이 출생이야말로 인생의 대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출생은 괴로움의 시작이요 죽음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출생의 끝은 죽음입니다.이 세상에 죽음처럼
확실하게 오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 있는 물체는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반드시 언젠가는 맞이해야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을 피할 곳은 이 세상에 아무데도 없습니다. 죽음에는 남녀노소(男女老少)도 없고, 빈부귀천(貧富貴賤)도 없습니다.

천하장사(天下壯士)나 영웅호걸(英雄豪傑)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들이 아무리 효자라도, ‘너 나대신 죽을래?’하면 펄쩍 뛸 것이며,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라도 죽음을 부탁하면 화를 벌컥 낼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비참하고 괴로운 것이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속담에도,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하고 “죽은 석숭(石崇, 중국 진나라 때 큰 부자)보다 산 돼지가 낫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죽음을 큰일 중의 큰일이라 합니다.경(經)에는 죽음의 종류가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수명이 다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죽음을 말하는데 수명이 다해 죽는 것은, 비유하자면 기름이 다 타고 나면 등불이 자연히 꺼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수명이 다하여 자연스럽게 죽는 것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목숨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더 살려고 몸부림치고 괴로워 해도 때가 되면 한 줌의 흙이나 한 방울의 물로 변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 기간은 생명체에 따라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기도 하고, 봄·여름에 생겨서 가을·겨울에 없어지기도 하고, 몇십 년 몇백 년을 존재하다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비록 빠르고 늦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둘째는 ‘복이 다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경에 이르시기를, “세간 사람들은 생사도 모르고 육안으로 죄와 복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일체 중생의 목숨은 마치 물거품이 기(氣)가 다하면 소멸하듯이 자신이 지닌 복의 과보가 다하면 죽게 됩니다. 이는 많은 재산을 흥청망청 다 써버린 부자가 전락하여 끝내 굶어죽거나 얼어죽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 번째의 유형은 ‘뜻밖의 죽음’입니다.

보통 말하는 횡사(橫死)입니다. 나이나 건강으로 보아서 아직 죽을 때가 안된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경우입니다.

요즘 많이 일어나는 교통사고라든가, 전쟁에 끌려가서 전사(戰死)한다든가, 화재로 죽는다든가,
남에게 타살된다든가, 호랑이나 늑대 같은 짐승들에게 물려죽는 등 불의의 사건이나 사고로 죽는 것을 말합니다.

네 번째는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죽음’입니다.

앞의 세가지 죽음은 예측할 수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도 없지만, 자유자재한 죽음은 스스로 알 수도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죽음입니다. 이런 죽음을 생사해탈의 경계라 합니다.

수행이 깊은 고승들처럼 생사가 자유로워 태어나고 싶으면 태어나고, 죽고 싶으면 죽는 죽음입니다.이 죽음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앞에서 죽음은 가장 비참하고 처절하며 누구나 두려워하고 피하려 한다고 했지만, 그 죽음도 수행만 잘하면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고 웃으면서 갈 수도 있습니다. 선가에서는 죽음을 옷을 갈아입는데 비유합니다.
옷을 입다가 옷이 낡거나 때가 묻으면 갈아 입듯이 새 몸을 받는다고 합니다.

수행이 대단한 선사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보통 예언을 합니다.

“내가 모일 모시에 가겠다”고 합니다. 이 예언은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수명이 그 날 그 시까지 밖에 안 된다는 수명의 기한을 말하는 경우도 있고, 그 날 그 시까지만 살다가 죽겠다,
자기의 의지, 자기의 뜻을 밝힌 예언일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기한을 말한 것보다 자기의 의지를 밝힌 경우가 더 대단하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어떤 큰 스님이 입적(入寂)하시면 문상간 객스님의 첫마디가 “어떻게 가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갔느냐, 즉 앉아서 갔느냐, 서서 갔느냐, 아니면 세속의 보통 사람처럼 인사불성인 상태로
괴롭게 갔는지 묻고 그것으로 그 스님이 도인인가, 보통 스님인가를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승이라면 대부분 좌탈입망(坐脫立亡), 앉아서 가셨습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처럼 꼿꼿하게 앉아서 정진하다가 가신 분도 있고, 어떤 대선사는 점심 공양하고 대중스님과 함께 차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어서면서, “나는 갈라네”하기에 처소까지 모셔드렸더니 앉자마자 “잘 있어”하면서 가시더랍니다. 어떤 스님은 서서 돌아가신 분도 있고, 어떤 스님은 높고 높은 미류나무 위에 올라가서 돌아가서 제자들이 시신을 내리는데 애를 먹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중국 당(唐)나라 때 등은봉(鄧隱峰)화상의 죽음은 유명합니다.

어느 날 스님은 대중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였습니다.

“제방의 큰 스님들이 돌아가실 때 앉아서 가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것이야 신통할 것이 없는 것이고,
선 채로 몸을 바꾸면 좀 신기하다고 할까?”

어떤 고승이 대꾸합니다.

“그렇습니다. 서서 간다면야 좀 특별하지요. 그러나 없었던 일은 아닙니다.

3조 승찬(僧璨)대사께서 큰 나무 밑에서 선 채로 대적정(大寂靜)에 드셨다는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은봉스님이 말을 받습니다.

“그렇지, 그러면 거꾸로 서서 갔다는 선사는 없는가?”

대중이 말이 없자,
“나는 거꾸로 서서 가야 겠다” 합니다.

순간 노인답지 않게 두 손으로 땅을 짚자마자
다리를 공중으로 번쩍 들고 거꾸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대중스님들이 아연실색하여 여기 저기서 모여 들었습니다.

화상은 거꾸로 선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입고 있는
법복이 조금도 흘러내리거나 벗겨지지 않고 몸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져 신도와 일반인이 구름같이 모여서 찬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에 장례식을 올리기 위하여 시신을 납관(納棺)하게 되었습니다.

시신은 여전히 거꾸로 선 자세 그대로 꼿꼿하여 아무리 밀고 당겨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대중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황당해 하였습니다.

이때 한 여승이 대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오더니 시신을 보고 꾸중을 하였습니다.

“오라버니 스님, 이 무슨 짓입니까? 살아서도 기행(奇行)을 하더니 열반에 들어서도 이렇게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까?”그러자 그렇게 꿈쩍도 않고 거꾸로 서있던 시신이 여동생이 손끝으로
슬쩍 밀자 힘없이 넘어졌습니다.이 여동생 스님도 오래 전에 도를 깨친 선승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실화입니다. 아주 대단한 스님은 이렇게도 죽음을 마음대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여러분과 같은 불교 신도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중국 당나라때 방온(龐蘊, ?∼808)이라는 유명한 불자가 있었습니다.
불교 역사상 인도의 유마(維摩)거사와 쌍벽을 이루는 대단한 도인입니다.

방거사는 자기뿐만 아니라 부인과 아들 딸까지 일가 4인이 모두 도를 깨쳐
“사자굴 가운데 다른 동물이 있을 수 없다”라는 말과 같이 도인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방거사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과거(科擧)보러 가는 길에 어떤 스님을 만났습니다.

“어디 가십니까?”“과거 보러 갑니다.”

“그래요? 과거에 합격해서 관(官)에 뽑히는 것보다 부처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방거사는 곰곰이 생각하니 부처되는 것이 바르고 더 좋은 길일 것 같아 길을 바꾸어
당시에 선승으로 유명한 마조 도일(馬祖道一)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여 크게 깨치게 됩니다.

방거사는 부모에게서 상속한 재산이 많은 갑부였는데, 재물은 허망하여 도 닦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하며,
일부는 불우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눌 수 없는 것은 동정호(洞庭湖)에 쳐넣고 맙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의식주는 해결해야 악업(惡業)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대나무로 조리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시장 바닥에서 무우 몇단 배추 몇포기를 놓고 팔아도 그만 못 팔아도 그만 오직 수행하며 살았습니다.

말년에는 호북(湖北) 양주 땅에 들어가 바위굴로 집을 삼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걸림없이
한가한 도인이 되어 살았습니다.

거사가 죽을 때가 되어 암굴 속에서 밖에 있는 총명한 딸 영조(靈照)를 불러 물었습니다.

“해가 어디까지 왔느냐? 오시(午時)가 되거든 알려라.”

영조가 대답합니다.“해가 이미 중천에 있습니다. 아버지, 일식을 하니 빨리 나와 보십시오.”

거사가 문밖으로 나가서 해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사이 영조는 방으로 얼른 들어가 아버지가 좌선하던 자리에 앉아서 합장한 채로 가버립니다.

죽음을 그렇게 마음대로 한 처녀 도인도 있었습니다.

거사는 해를 보고 방으로 들어가서 보니 딸 영조가 방거사의 마음을 헤아리고 먼저 죽은 모습을 보고는,
보통 아버지들 같으면 울고불고 야단들이겠지만 “내 딸이 아주 재빠르구나” 한마디 뿐이었습니다.

깨친 사람의 분상에서는 죽음도 슬퍼하고 괴로워 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방거사가 딸 영조의 다비를 마치고 일주일 되던 날입니다.

그 고을의 태수(太守) 우적이 암굴을 찾아왔습니다.

두사람은 오랜만에 만난지라 그간 쌓였던 정회를 풀고,
도에 관한 여러 가지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거사가 문득 일어나더니, 읊습니다.

“빈꽃의 그림자는 어지러이 떨어지고, 태양불꽃의 파도는 거세게 물결치는구나”

거사는 앉더니 태수의 무릎을 슬그머니 배고는 영구히 침묵하여 입적(入寂)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멀리 떨어져 있는 부인에게 전하였더니 조금도 놀라거나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담담하게 원망하였습니다.

“이 어리석은 딸과 무지한 늙은이가 나한테는 알리지도 아니하고 가버렸으니 이럴 수가 있는가.”

태수의 사자가 방거사의 아들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때 아들은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습니다. 그도 역시 사자로부터 애통한 소식을 듣고도 얼굴조차 변하치 않았습니다.

다만 김 매던 호미를 놓아버리면서 “그래요?”하고 대답하더니 서서 가버렸습니다.

사자는 아들이 간 줄도 모르고 얼마를 있어도 마치 고목나무처럼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자 이상하게 여기고
건드려 보니 이미 뻣뻣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놀라고 당황한 사자는 쏜살같이 부인한테로 달려가서 이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못난 자식 같으니……”비통해 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못났다고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부인은 녹각사(鹿角寺)라는 절에서 남편과 아들 딸의 재를 지냈습니다.

유나(維那)스님이 부인에게 회향축원을 청했습니다.

부인이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뽑아서 머리 뒤에 다시 꽂고 나서 “회향을 다 마쳤습니다.”하고 곧 나가 버렸습니다.
대단한 법문입니다. 후에 부인은 고향 사람들에게 고별인사를 하고 떠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불자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아마 못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죽음도 옷을 갈아입듯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수행의 힘입니다.

수행이 지극하여 깊은 선정에 들어가면 생사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이상은 자기의 성품을 보아 스스로 부처가 되고 열반(涅槃)의 경지에 들어가 생사까지도 초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본래는 부처입니다.
래 부처라는 것은 본바탕은 부처님과 꼭 같다는 것입니다.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생사까지도 초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 할 뿐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죽음이 두렵고 내생이 걱정스럽거든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수행하십시오.

염불을 하든지, 주력을 하든지, 아니면 선을 하든지 어느 한 가지는 반드시 하십시오.

수행법 중에서 최상승법은 화두참선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과 진정한 보람은 수행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수행을 깊게 해서 깨달음을 얻고 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사후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진리의 세계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후를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수행이 산 사람이 생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이라면,
천도(薦度)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다스려 주고 선도(善途)에 태어나게 해주기 위한 의식입니다.

수행이 누구나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듯, 천도도 영가를 위하여 반드시 해야 되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한줌의 흙이나 물로 변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숨이 떨어지자마자 육체를 떠납니다.

육체를 벗어난 영혼을 불가에서는 영가라 하고, 중음신(中陰身)이라고도 합니다.

이 영가 중음신이 전생의 업에 따라서 새 몸을 받아 윤회하면서 살아가는 세계를 크게 나누어 3계(三界)라 하고,
이를 세분하여 6도(六途)라고 합니다.

3계는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로 나눕니다.

중생들의 탐욕의 정도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한 것입니다.

화엄경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듯이 우주도 중생의 마음에 의해 건립된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의 마음의 차이, 즉 정신적인 욕구의 차이에 의해 살기 좋은 세상 또는 그렇지 못한 세상이 생긴 것입니다.

욕계는 욕망의 세계, 곧 욕심이 많은 중생들이 사는 세계를 말합니다.

욕망은 다섯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물질욕, 음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 등이 극심한 세계,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욕계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욕계입니다.색계는 물질 위주의 세계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물질은 아주 아름답고 깨끗하기 때문에 욕계의 오염된 물질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세계는 욕계의 중생보다 복력이 월등하게 많은 중생들이 태어나 복락을 누리는 세계입니다.
무색계는 앞의 두 세계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세계, 순수한 정신적인 세계입니다.
무색은 물질이 아닌 진리의 체성(體性)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중생들은 아직은 정신적으로 아주 작은 번뇌가 남아 있으므로 완전한 낙원이 아니고
사바세계의 중생에 속합니다. 하지만 욕계와 색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평화와 복락이 많은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삼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며, 이곳에서 더욱 정진하면 마침내 중생의 탈을 벗고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곳입니다.

중생은 이 세계를 윤회하면서 나고 죽고를 되풀이 하는데, 이를 삼계윤회라 하고 비록 무색계는 살기 좋은 곳이긴 하지만
복락이 다하면 다시 윤회하기 때문에 이를 마치 불난 집과 같다고 하여 삼계화택(三界火宅)이라 합니다.

다음은 육도(六道)가 있습니다. 도(道)는 길(途)과 같은 말이고 또 취(趣)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취(趣)는 간다는 뜻의 한자말입니다. 어떤 절대자나 주재가 있어서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
스스로가 자신은 지은 업력에 따라 끌려가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가서 난다’는
뜻으로 왕생(往生)이라 하고, ‘길’이라든지 ‘취’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육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갈래길을 말합니다.
앞의 셋은 악도(惡道) 또는 악취(惡趣)라고 하는데 악한 업을 지은 중생이 태어나는 길이고,
뒤의 세 길은 선업을 많이 쌓은 중생이 태어나는 길입니다.

지옥도(地獄道)는 가장 악한 죄업을 지은 중생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지옥은 ‘지하의 감옥’이라는 뜻으로 경전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인간계에서
지하로 2만 유순 가량 내려가면 있다고 합니다.

지옥 중에서도 가장 아래층에는 무간지옥이 있는데 여기서부터 위로 차례 차례로 8대 지옥이 위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8대 지옥은 같은 지옥이지만 그 업력에 차이가 있어 최초의 지옥은 죄업이 가벼운 중생이 태어나고,
최후의 지옥인 무간지옥은 가장 극악한 죄인이 태어나는 곳으로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입니다.

무간지옥은 ‘고통이 쉴새 없다’는 뜻으로 무간이라고 합니다.

아귀도(餓鬼道)는 우리가 보통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와 같습니다.
전생에 악업을 짓고 탐욕을 많이 부린 자가 아귀로 태어나는데 항상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아귀들의 생활은 각양각색으로 스스로 죄보를 받는 아귀도 있고 우리 인간계에 내려와 인간에게
많은 피해를 주는 아귀도 있다고 합니다.

이 아귀의 세계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계에서 인간과 함께 거주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별도로 아귀들만이 사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부류입니다.

축생도(畜生道)는 짐승, 물고기, 곤충 등을 말합니다.
축생은 고통이 많고 즐거움은 적으며 식욕과 음욕만 강하여 부자형제간에도 의리가 없고
싸우고 서로 잡아먹기 때문에 항상 공포 속에서 살게 되는 괴로운 중생입니다.

아수라도(阿修羅道)는 육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아수라는 성을 잘 내며 싸움을 잘하는 중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운 광경을 아수라장이라고 하는 경우도 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아수라는 앞의 삼악도와는 달리 삼선도에 들기도 하지만 악업을 지어서 태어나기 때문에
악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선도와 악도의 중간지점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인간도는 바로 우리들을 말합니다.

인도(人道)는 천상 다음으로 선한 복업을 지은 중생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괴롭다고 할지라도 어떤 면에서는 천상보다 더 바람직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상은 복락이 너무 많아서 다음 생의 괴로움을 생각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복이 다하면 다시
더 낮은 세계에 윤회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 태어나 마음과 행실을 잘 닦으면 영원히 윤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도(天道)는 하늘나라, 천상(天上), 천유(天有), 천계(天界)라고도 하는데, 육도 가운데 가장 높고 복력이 뛰어난
중생이 사는 세계 또는 그 중생을 말합니다.

천도에 사는 중생을 천인(天人) 또는 천중(天衆)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신(神)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상 삼계와 육도는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인간이 바라는 이상의 세계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벗어나기 위하여 수행을 해야 하고 천도가 필요합니다.

천도는 전생에 지은 업이 두터워 지옥세계, 아귀세계, 축생계와 같은 악도에 떨어질 영가나 중음신으로
새 인연을 맺지 못하고 우주 고혼이 되어 떠돌아 다니는 영혼에게 부처님의 진리의 법음(法音)을 들려주어서
영가 스스로 깨닫게 하고, 부처님과 여러 보살님의 가피를 입게 하며, 스님들의 법력과 유가족들의 공덕으로
새 인연을 맺어 극락세계나 천상세계, 인간세계 또는 아수라세계 등 선도에 태어나게 하는 의식입니다.

천도의 종류에는 49재 천도와 일반 천도, 특별 천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49재는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매 7일마다 재(齋)를 베풀고 선도로 인도하는 의식입니다.
특별천도재는 49재를 올려도 천도가 되지 못하고 100일, 1년, 수년, 수십년 심지어 수백년이 지나도
천도가 안 되는 영가를 위하여 특별히 베푸는 재입니다.

이런 영가는 지난 생애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천도가 어렵다고 합니다.

일반천도재는 7월 백중 우란분재(盂蘭盆齋)처럼 법계(法界)의 유주무주(有主無主)
모든 고혼을 다 모시는 재를 일컫습니다.

천도의 방법에는 보통 염불천도(念佛薦度), 독경천도(讀經薦度), 사경천도(寫經薦度)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염불천도는 이름 그대로 불보살님의 명호를 지극하게 간절하게 불러서 그 가피력으로
영가를 좋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천도법입니다.

천도할 때 많이 부르는 불보살님의 명호는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입니다.
어느 불보살님이나 영가를 천도시킬 권능은 있지만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의 서원력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은 “나의 이름을 부르는 중생은 누구나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근본 원을 세우고 있으며,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삼악도를 벗어나도록 하고 마침내는 육도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대단한 서원을 세운 분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면서 그 원력에 의지하게 되면 영가가 그 분들의 가피를 입어
선도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염불천도입니다.

둘째, 독경천도입니다.

독경천도는 영가에게 공덕이 될 경전을 읽어줌으로써 천도하는 법입니다.
공덕경(功德經)에는 『금강경』, 『아미타경』, 『지장경』, 『관음경』, 『법화경』등을 많이 읽습니다.
공덕경 중에서 마음에 드는 한 가지를 택하여 천도 기간 중 매일 몇 번씩 또는 몇 수십 번씩 읽어주면 됩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빠뜨리는 날이 없어야겠습니다.

공덕경을 읽을 때는 이해할 수 있는 경전을 택하십시오.

한문 경전을 많이 읽는데, 한문 해독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문 원문으로 읽는 것도 좋지만,
한문 해독이 충분하지 못한 이는 한글로 풀어 해석해 놓은 것을 읽으십시오.

읽는 사람이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가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가는 육신이 없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존재이므로 독경자의 이해가 꼭 선행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읽을 때는 영가를 앞에 모시고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려 준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껏 읽어야 합니다.

그냥 계획대로 읽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정성도 없이 집중하지도 않고 읽으면 영가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뜻을 새기듯이 이해하면서 성심성의껏 읽으십시오

셋째는 사경천도입니다.

경전을 한자 한자 정성껏 씀으로써 영가를 깨닫게 하여 선도로 인도하는 천도법입니다.
어떤 스님은 법화경 사경천도를 하는데 한 자 한 자를 정성껏 쓰고 지장보살을 간절하게 부르며
삼배를 하고 또 한자 한자를 썼다고 합니다.

사경은 앞에서 말한 공덕경 중에서 하나를 택해서 시간을 정해놓고 쓰든지,
양을 정해놓고 쓰는 것도 좋습니다. 쓰는 도구는 붓이 좋지만 펜이나 싸인펜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독경과 사경을 함께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또 염불과 독경과 사경을 하면서 공덕경이나 다른 경전이나 어록을 택해서 법보시를 한다든가
방생을 하는 것도 영가를 위해 좋은 일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천도법 중에서 염불천도가 불보살님의 가피력에 의지하여 영가의 천도를 하는 천도법이라면, 사경천도와 독경천도는 법보(法寶)에 의지하여 법문을 영가에게 들려주고 영가의 이름으로 공덕을 쌓아 줌으로써 천도를 시키는 것입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백 세의 부모도 천도가 된다”하였고, “극악무도한 영가도, 악업을 지은 영가도 천도되어 선도에 태어나거나 천상락(天上樂)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가천도를 하면 영가에게만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유가족에게 더 큰 이익이 따릅니다.

『지장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이를 위하여 재를 지내면 그 공덕의 7분의 1만 죽은이에게 가고 7분의 6은 재를 지내는 사람에게 간다”고 하였습니다.

천도재는 단지 가신 사람의 명복을 빌고 제도하는데 그치지 말고,
자기 천도의 기회를 삼아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되게 해야겠습니다.
천도재는 영가를 위한 효행(孝行)중의 효행이요, 선행 중의 선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가족이 망자를 위해 아무리 괴로워하고 몸부림쳐도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도재는 영가와 인연만 계합되면 선도에 태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악도에 태어날 영가를 좋은 세계로 안내하고 인도하여 제도하는 것은 영가를 위해서 최상의 공덕이 될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사람은 나이 40세만 되면 죽음을 준비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무슨 말이냐, 한창 나이에!”하며 펄쩍 뛰실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준비된 죽음을 맞이해야 됩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올 수도 있고, 한밤중에 급습하듯이 올 수도 있습니다.

언제 오더라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고, 웃으면서 맞이한다든가, 자유자재로 맞이해야 잘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되거든 수행을 깊숙이 하여 염불하시는 사람은
염불삼매(念佛三昧)는 꼭 들어보시고, 참선하시는 분은 선정(禪定)에는 꼭 들어 보십시오.

그 경계만 되어도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고 생이 곧 사요,
사가 곧 생이라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런 정도를 체험하면 죽음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이해가 되고,
천도는 왜 해야 하는지 바로 느끼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고,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께 절이 저절로 나오고,
존안(尊顔)을 바로 뵙기가 송구스럽고 고마운 눈물이 앞을 가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띠끌세계를 벗어나서 본 모습이 드러나니밝고 묘하고 신령(神靈)하도다
한 점의 공적영지(空寂靈知)여 일체를 벗어났고 일체를 초월하여 생사까지도 초탈하였네.

Posted by 慧蓮(혜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