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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의 의의

 

방생이란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병들은 중생을 구호하고 가난한 중생을 구호하며 윤회중생을 해탈시켜 주는 것이 방생입니다.

그러므로 살려주는데 특별한 규거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불교에서 방생을 하는 것은 죽어가는 생명을 건져 살리는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다시는 윤회악도에 물들지 않게 하고

설사 자기 서원에 의하여 윤회에 빠졌더라도 그 윤회에 속지 않게 하기 위하여

법문을 일러주는 것으로 방생의 체를 삼기 때문에 형식적이나마 이러한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연지대사일곱가지불살생 (蓮池大師七種 不殺生)

 

첫째는 생일에 살생하지 말라.
상서(尙書))에 가라사대 슬프다 부모시여 나를 낳아 수고하셨다 하셨으니 내몸이 출생하든 날은 어머님께서 거의 죽을 뻔하든 때라 이 날은 결코 살생을 경계하며 재계를 가지고 널리 선사(善事)를 행하여 선망부모로 일찍이 초승(超昇)을 얻게 하고 현재 부모로 복수를 증장케 함이어늘 애닯다 어찌 하야 어머니 곤란 겪은 경위를 잊고 망녕스리 생명을 살해하며 위로 부모에게 누를 끼치고 아래로 자기 몸에 이롭지 못하게 하는고, 이것을 온 세상이 습관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둘째는 자식을 낳거든 살생하지 말라
대저 사람이 자식이 없으면 슬퍼하고 자식이 있으면 기뻐하는데

일체금수도 각각 그 새끼 사랑함을 생각지 못하는구나

내 자식을 낳는 것은 좋아도 남의 자식은 죽게 함은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대저 어린 것이 처음 남에 적덕(積德)을 못할지언정

도리여 살생하야 업을 짓는 것은 가정 어리석음이라

이것을 온세상이 습관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셋째는 제사 지낼 때 살생하지 말라.
망령(亡靈)의 기일과 춘추소분(春秋掃墳)에 마땅히 살생을 경계하야 명복을 자라게 할 것인데

살생하야 제사 지내는 것은 한갖 악업만 더할지라 대저 팔진미(八珍味)를 망령 앞에 놓을지라도

어찌 구천(九泉)에 가신 유골을 일으켜 흠양(歆饗)토록 하겠는가.

조금도 이익은 없고 해만 됨이어늘 이것을 온 세상이 습관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넷째는 혼례에 살생하지 말라.
대저 혼인이라는 것은 생민(生民)의 시초가 아닌가.

삶의 시초에 살생을 하는 것은 이치가 벌써 틀린 것이요

또 혼례는 길사(吉事)인데 길일로써 흉한 일을 행함이 또한 참혹지 않은가

또는 결혼식을 하면 반드시 부처해로(夫妻偕老)를 축사하나니

사람은 해로하기를 원하면서 금수는 먼저 죽기를 좋아하는가

또 시집보내는 집에서 삼일(三日)동안 초 불을 끄지 않는 것은

모녀(母女)가 서로 갈린 것을 앗기나니 사람은 이별을 괴롭다 하면서

금수는 이별을 낙으로 하든가 혼례살생에 온 세상이 습관이 되어서

그 잘못됨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다섯째는 연회 할적에 살생을 말라.
양진미경(良辰美景)에 주빈(主賓)이 상대하여 담담(淡淡)한 다과(茶果)와

소식채갱(蔬食菜羹)이 말근 취미에 방해됨이 없거늘

어찌 살생을 많이 하여 목을 따고 배를 가름에 슬픈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니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야 어찌 비참하지 아니하랴.

만일 식탁에 아름다운 맛이 도마 위에 고통으로 쩧이 왔구나 하야

저에 극한 원한으로 나에 극한 환락을 작만 하였거니

생각하는 동시에 비록 먹더라도 목이 메일 것이어늘 연회살생(宴會殺生)에

온 세상이 습관이 되야 그 잘못됨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여섯째는 기도에 살생하지 말라
세상사람들이 병이 들 때 살생기도하여서 복받기를 바랄 뿐이고

자기가 기도하는 목적이 죽기를 면하고 살기를 구하는 줄 생각지 못함 이로다.

남의 목숨을 죽여다가 나의 목숨을 느리고져 함이 벌써 천리에 어기지 않는가.

목숨은 느리지도 못하고 살생업만 갖추는 것이다.

다시 살생하야 자식을 구하고 살생하야 재물을 구하고 살생하야 벼슬을 구하면서

그 아들과 재물과 벼슬이 다 본인의 분정(分定) 한 것이고

귀신의 능력이 아님은 알지 못하는도다 어찌 타원대로 되게 되면 이는 귀신이 신령하다 하야

더욱 믿고 더욱 행하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일곱째는 직업을 경영함에 살생하지 말라.
세상사람이 의식을 위해서 혹 전렵(佃獵)도 하며

혹 고기도 잡으며 혹 소도 잡고 개도 잡아서 생계를 하지만은

나는 생각하기를 이 노릇을 안하더라도 밥먹고 못입어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살생으로 직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천리를 어겼을 따름이라 지옥에 깊은 인(因)을 심고

내세에 악보를 받음이 이보다 심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따로 생계를 구하지 못하는고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적석도인의 일곱가지방생 (赤石道人 七放生)

 

첫째는 자식없는 자는 반드시 방생하라
세상사람이 자식을 두고저 함에 약먹기로 힘을 쓰나

그러나 왕왕히 한평생 먹더라도 효험을 못보는자 많은지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병이 있거든 약을 먹고 자식이 없거든 방생하라 하노니

대저 천지의 큰덕은 가로대 생함이라

그러므로 사람을 생하고 만물을 생해서 생생지이(生生之理)가 끊어지지 않나니

진실로 생해주는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서 저를 생해주는 것이

반드시 생함이라 방생만 하고 보면 꼭 다 남자(男子)의 경사를 얻을 것이라.

 

둘째는 자식을 배거든 반드시 방생하여서 산모를 보전하라.
세상사람은 자식을 배매

혹 귀신에게 빌어서 생산에 안녕을 바라고 방생하여서

만전지책(萬全之策)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도다.

대저 잉태해서 자식을 보는 것은 사람과 만물이 다르지 않고 사람과 만물은 천지의 생한바라

짐승의 새끼 뱀을 내가 구하여 주는데 내가 자식 뱀이 있으면 하늘이 어찌 보호하지 않으랴.

 

셋째는 기도함에 반드시 방생하여서 복을 맞으라.
세상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은 소식(素食)하고 귀신은 혈식(血食)한다 하나니 이는 크게 오해이다. 대저 부처님은 천과 신의 스승이요

신이란 자는 부처님을 받들어 어김이 없는 자이라

호생지덕(好生之德)은 신 불이 같은 배니 진실로 신불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체달하야

금수만물이 급한 경우를 당하거든 다소를 불구하고 보는대로 사서 놓아줄지며,

만일 금전이 없어서 어찌할 수 없는 동시는 염불이라도 하여 주면

자연히 상천이 감동되야 복을 얻음이 한량없을 것이니라.

 

넷째는 예수(預修)코져 하거든 방생부터 먼저하라.
세상사람이 매양 중을 청해서 불사를 작하야

미리 닦는 것은 진실로 죽은 뒤에는 육도(六途)에 윤회함에 업식이 망망(茫茫)할지라.

미리 불보살이 불쌍히 생각하여 줌을 구함이 아닌가.

대저 세간자선(世間慈善)은 방생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내가 자비지심(慈悲之心)으로 방생하야 불보살의 자비지덕에 감동되면

반드시 불보살의 복을 입을 것이니라.

 

다섯째는 재계를 가짐에 반드시 방생하라.
제불보살이 중생의 재계가짐을 좋아 하심은 만물의 자비심두기를 바람이라

일체중생이 불자아님이 없나니 진실로 재계를 가지는 날에 더욱이 방생으로 힘을 쓰면

제불보살이 몇 배나 환희심을 내지 아니하랴.

 

여섯째는 녹(祿)을 구함에 먼저 방생하여 복을 쌓으라.
개미가 송기(宋祈)에게 보은하고 용자(龍子)가 사막(思邈)에게 보은하였으니

방생하여 이익을 얻음은 결코 헛됨이 아니라. 대저 부귀명복은 요행으로 되지 않고

오직 복을 지은자가 반드시 명복을 얻나니 사람이 어진마음으로 물을 아껴서

그 목숨을 구제할 것 같으면 나의 구제를 입은 자가 기회를 보아 보답할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닌가.

 

일곱째는 염불함에 반드시 방생부터 하라.
산중에 있어서 참선을 오래도록 하다가 하루 아침에 견성오도(見性悟道)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홍진중(紅塵中)에 있어 염불하는 자는 자비심으로써 방생을 주로 할지라.

물(物)을 구제함이 인(人)을 구제함보다 낫다 함은 아니지만

사람이 극형을 범하는 것은 대개 자작장난(自作障難)이나 동물을

무슨 죄로 참혹한 환란을 자주 만나는가.

누구든지 연지대사와 영명연수선사의 방생으로써 급무(急務) 삼음을 보아 깨칠지니라.

 

아 --- 이 얼마나 거룩하신 말씀인가. 대저 방생은 불타의 마음이요 천인의 마음이라.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기를 불타에게 공양 올림을 게을리 할지라도 방생부터 부지런히 하라 하니

 

왜냐하면 보라.

어떤 사람이 자식을 많이 두었는데 다 각각 자작지화로 어떤 자식은 옥에 갇혀있고

어떤 자식은 수해중에 빠져 있거든 이웃사람이 그 여러 자식들의 고통은 모른 체 하고

진수성찬을 차려 그 아버지에게 받든다 하면 아버지된 자가 그 밥맛이 있다 하겠는가.

한 사람은 그와 반대로 옥에 갇힌 자식을 놓아주고 수화에든 자식을 건져준다 하면

그 아버지는 밥을 아니 먹어도 배가 부를 것이고

또 건져준 사람에 대하여 감사한 생각이 아까 밥을 주는 자에 비하겠는가.

대저 부처님은 태란습화 생을 적자가치 생각하는지라 한중생이라도 고통을 받는다면

부처님의 대자비로써 뼈가 녹는 듯 불쌍히 여기실지라 그 고통받는 중생을 건져주는자에 대하여

복을 주심이 공양 받드는 자보다 천만억배나 수승할 것은 정한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공부자께서도 부모의 입과 몸을 봉양함보다 부모의 마음을 보양함이 참으로 효자라 하셨으니

우리 불교신자도 불타의 본회를 체달하며

연지대사와 적석도인의 말씀을 실행함이 급선무라 하여 힘써 행할 지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는 싫어합니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치던 사람도 막상 죽음을 당하게 되면

두려움에 떨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칩니다.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소도

한결같이 큰 눈을 휘 번득 거리면서 뒷걸음질을 친다고 합니다.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축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한결같이 자기의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은 새나 물고기와 같은 축생이라고 해서 덜하고

사람이라고 해서 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똑같은 불성을 갖고 있습니다.

불성이란 모든 생명체의 근원입니다. 바로 생명체의 주인공입니다.

비록 겉 모습은 새와 물고기가 다르고 사람과 짐승이 다르지만

그 속의 주인공인 불성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보리수아래서 성도하신 후에

모든 중생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놀랍게도 모든 중생들이

똑같이 지혜의 성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널리 일체중생을 살펴보니

모두가 여래와 똑같은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래는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성품이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도를 깨치신 후에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똑같은 불성을 갖고 있는데 사람도 되고 개도 되고 물고기도 되느냐?

똑같은 불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천태만상의 차별상을 이루는 까닭은

각자가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가 될 짓만 하다가 죽으면,

다음 생에는 개로 태어나게 되고 소가 될 짓을 하다가 죽으면

다음 생에는 한 마리의 소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태어나기도 하고 아귀도나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축생이나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도 모두가 자기의 지은 바 업에 의한 것입니다.

 

중생들이 똑같은 불성을 생명의 근원으로 하면서도

갖가지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이처럼 자기가 지은 바 업에 의한 것입니다.

 

자작자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작자수의 과보로 태어나는 중생의 종류에는 육도(六道)가 있는데

천상. 인간. 지옥. 아귀. 축생. 수라라는 여섯갈래의 중생들입니다.

 

이 가운데 축생이란 일반적으로 이리석음을 상징하는 중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살아 생전에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하거나,

죽어서 영혼이 다음 세상으로 갈 때 어리석은 생각을 해도 새둥지가 대궐로 보이고

물 속이 황금 연못으로 보여 새가 되기도 하고 물고기가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잘못하면 다음 세상에 축생보를 받게도 된다 - 이 말입니다.

이처럼 윤회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찮은 짐승이라고 업신여기는 강아지가

어쩌면 전생에서는 여러분의 부모형제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아귀도에 떨어졌다가

존자의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다음에는 개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짐승이라고 해서 물고기라고 해서

함부로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여러 생명들과 부부나 부모자식 형제자매의 인연들을 맺고 살아왔으므로

알고 보면 어느 생명이든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무연중생(無緣衆生)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언제부터 방생을 하게 되었는지

그 유래를 바로 알아 보다 뜻 깊은 방생법회가 되도록 합시다.

 

남들이 방생을 하니까 나도 덩달아 한다든가

아무런 뜻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하니까 방생법회에 동참한다고 해서야

어찌 참다운 불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먼 과거세에 유수장자라는 유명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유수장자는 의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마음이 자비로워서

병고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다녔습니다.

 

어느날은 깊은 산골을 지나가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독수리. 승냥이. 이리 등 육식동물들이 모두 한 곳을 향하여 날아가고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유수장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들이 달려가는 곳을 찾아 가보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작은 연못은 물이 줄어들어 이제 바닥이 막 드러나려는 찰나였습니다.

독수리. 솔개등 날짐승과 이리. 승냥이들이

모두들 작은 연못으로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서 모여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못 속에는 수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의사인 유수장자로서는

차마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는 참혹한 정경이었습니다.

마치 물고기들이 의사인 유수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던 것입니다.

 

유수장자는 그들을 살리려고 주변에서 물줄기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적당한 물이 없었습니다. 마침 한 곳에 큰 강물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줄기를 다른 데로 돌려

물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수해서 마른 연못에 물을 댄다는 것도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황급히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에게 엎드려 사정을 하였습니다.

"제가 백성들을 위하여 제반 질병을 고쳐주어 모두 편안하게 해주고 길을 가다가

마침 한 비어있는 못에 이르렀더니 그 못이 마르려고 하는데

수많은 물고기들이 햇빛에 쬐어 멀지 않은 장래에 죽게 되었습니다.

원컨데 대왕이시여 자비를 베푸셔서

저에게 큰 코끼리 20마리만 주시면 물을 길러다가 고기의 목숨을 건지겠습니다.

제가 여러 병든 사람의 목숨을 건지듯 이 물고기의 목숨을 건지도록 하여 주십시요"

라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왕은 평소에 유수의 공로를 잘 알고 있던 터라 순순히 승낙을 하였습니다.

장자는 큰 코끼리 20마리를 빌리고,

또 가죽주머니를 많이 빌려가지고 강으로 가서

가죽주머니에 물을 가득 담아 코끼리에 지워가지고 연못으로 갔습니다.

 

코끼리에 지워온 물을 작은 연못에 쏟아부으니 금방 연못은 물이 가득찼습니다.

장자는 기쁜 마음으로 연못주위를 돌면서 물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들이 이상하게도 장자를 따라서 물가를 빙빙돌아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장자는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물고기들이 그동안 물이 줄어 물 속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파서 그러는 줄을 깨달았습니다.

 

즉시 다시 코끼리를 집으로 보내어 물고기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가져와 물 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유수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일단 음식을 보시하여 물고기들의 목숨을 구했으니,

이제 이들이 목숨을 마친후에는 좋은 세상에 태어나도록 해야겠다>이렇게 생각하고는

"나무 과거 보게여래.... 이 부처님은 옛적에 보살행을 닦을 때에 이런 서원을 세웠다.

시방세계 모든 중생이 목숨을 마쳐 죽을 때에

나의 이름을 듣는 이는 33천에 태어날지어다"라고 말하고 나서

12인연법을 물고기들을 위하여 설하였습니다.

법문까지 해주고는 두 아들과 함께 흡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한편 그 연못의 물고기들은 똑같이 목숨을 마치고는 33천에 태어났습니다.

삼십삼천은 도리천이라고 하는 살기좋은 하늘나라를 말합니다. 천당과 같은 곳입니다.

 

이 이야기는 <금광명최승왕경>에 나오는 설화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은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시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 유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득한 전생에 바로 석가모니부처님 자신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 부처님께서도 과거세에 이처럼 물고기들을 위해서

마치 의사가 병든 사람을 구제하듯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부처님의 행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불자입니다.

 

그러므로 방생법회는 부처님께서 전생에서 하신

거룩한 행을 본받아 우리들이 지금 행하는 것임으로 참으로 뜻 깊은 불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는지 모릅니다.

꼭 소나 돼지나 물고기를 직접 죽이지 않는다고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을 보면 남의 생명을 빼앗아 만든 것이 대부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식물이라도 생명체이기 때문에 채식만 한다고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 칠 수는 없습니다.

 

또 식물을 가꾸기 위해서는 농약을 살포해서 얼마나 많은 곤충들을 죽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부득히 최소한도의 살생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다거나,

도살장에서 소나 돼지를 죽이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살생은

그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하는 공업(共業)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이 길을 가다가 벌래들을 밟아 죽이는 것을 염려해서

벌래들이 무성한 여름철에는 제자들에게 출입을 금지시키셨습니다.

 

여름철에 석달동안 하안거라고 해서 스님들이 두문불출하고 정진하는 것도

사실은 이처럼 생명을 고귀하게 여긴대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행승이 아닌이상 생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전혀 살생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라의 원광법사는 세속오계를 통해 살생유택(殺生有擇)을 화랑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살생을 하더라도 가려서 하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연지대사는, 특별히 살생을 해서는 안되는 날을 정했는데,

자기생일, 자식을 낳았을 때, 결혼식 때, 제사 때 기타 즐거운 연희 때는

절대로 살생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살생을 하면 그 인과가 분명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한을 사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미물이라도

자기의 목숨을 빼앗은 상대에게는 강한 원한을 갖게 됩니다.

 

그 원한은 언젠가는 살생을 한 당사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방생은 이 원한을 씻어주는 공덕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살생을 한데 대한 참회의 의식이기도 합니다.

 

여러 신도님들은 방생의 유래와 그 의미를 아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그 뜻이 아무리 좋아도 방법 또한 좋아야만 참다운 공덕이 됩니다.

 

방생은 <죽을 목숨을 살려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멀쩡한 고기를 잡아다가 다시 살려주는 것은 참다운 방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말로 병 주고 약주는 것입니다.

 

죽을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단순히 물고기에만 국한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것에는 다 해당하는 것입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며,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는 일도 방생입니다.

 

그러나 절에서 굳이 물고기를 상대로 방생을 하는 것은 하찮아 보이는 미물일지라도

어엿한 생명, 불성을 가진 고귀한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 불자들이 깨달아서

일체중생이 평등함을 일깨우는데 보다 더 큰 뜻이 있다고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경전을 통하여 산 생명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내 몸과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생명의 고귀함과 모든 생명의 평등함을 일깨워주신 말씀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방생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차별하는 마음,

독한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몰아내고,

부처님처럼 일체중생을 내 몸처럼 생각하는 동체대비심으로 가득 채워 다같이 성불합시다.

나무아미타불

 

유산가(遊山歌)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和方暢)하니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山川景槪)를 구경가세
죽장망해(竹杖芒鞋) 단표자(簞瓢子)로
천리강산(千里江山) 들어가니
만산홍록(滿山紅綠)들은 일년일도(一年一度) 다시피어
춘색(春色)을 자랑노라.
색색(色色)이 붉었는데
창송취죽(蒼松翠竹)은 창창울울(蒼蒼鬱鬱)하고
기화요초(琦花瑤草) 난만중(爛漫中)에
꽃속에 잠든 나비 자취없이 나라난다.

유상앵비(柳上鶯飛)는 편편금(片片金)이요
화간접무(花間蝶舞)는 분분설(紛紛雪)이라
삼춘가절(三春佳節)이 좋을씨고,
도화만발(桃花滿發) 점점홍(點點紅)이로구나
어주축수애산춘(漁舟逐水愛山春)이라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예 아니냐
양류세지(楊柳細枝) 사사록(絲絲綠)하니,
황산곡리당춘절(黃山谷裡當春節)에
연명오류가(淵明五柳)가 예 아니냐.
제비는 물을 차고, 기러기 무리져서
거지중천(居之中天)에 높이 떠서
두 날개 훨씬펴고 펄펄 백운간(白雲間)에 높이 떠,
천리강산(千里江山) 머나먼 길에 어이 갈고 슬피운다.

원산(遠山)은 첩첩(疊疊)
태산(泰山)은 주춤하야,
기암(奇巖)은 층층(層層)
장송(長松)은 락락(落落),
에이 구부러져
광풍(狂風)에 흥을 겨워
우줄우줄 춤을 춘다.
층암(層巖) 절벽상(絶壁上)에
폭포수(瀑布水)는 콸콸,
수정렴(水晶廉) 드리운듯,
이골물이 주루루룩 저골물이 솰솰,
열에 열골물이 한데 합수하야,
천방져 지방져 소크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건너 병풍석(屛風石)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소부(巢父) 허유(許由) 문답(問答)하던
기산(箕山) 영수(潁水)가 예 아니냐
주각제금(住刻啼禽)은 천고절(千古節)이오,
적다정조(積多鼎鳥)는 일년풍이라
일출낙조(日出落照)가 눈앞에 버려나니,
경개무궁(景槪無窮) 조흘씨고.

 

* 해설 꽃이 봄 성에 난만하고, 만물이 한창 소생하여 기를 펴고 자라나는구나. 때가 좋구나 친구들아, 산천 경치를 구경 가세. 대 지팡이 짚고 미투리 신고, 표주박하나 들고 머나먼 강산에 들어가니, 산에 가득한 붉은 꽃과 푸른 초목은 일 년에 한 번씩 다시 피어 봄빛을 자랑하느라고 여러가지 빛으로 붉어 있는데, 푸른 소나무와 푸른 대나무는 울창하게 무성하고, 기이한 꽃과 아름다운 풀이 찬란하게 얽혀 있는 속에 자고 있던 나비가 흔적 없이 날아가버리는 구나. 버드나무 위에 꾀꼬리가 날아가는 모양은 조각조각의 금덩이요, 꽃 사이에 나비가 춤추는 모양은 사방팔방으로 휘날리는 눈송이와 같도다. 봄 석달 동안의 아름다운 시절이 좋구나. 복사꽃이 활짝 피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양이 마치 붉은 점을 찍어 놓은 것 같구나. 고기잡이 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산 속의 봄철을 사랑하는 격이 되었으니, 저 도연명이 말한 복사 꽃이 만발한 무릉현의 별천지가 여기가 아니냐? 버드나무의 가는 가지가 수많은 실과 같이 늘어져 푸르니, 황산의 골짜기에 봄철을 당한 셈이요, 도연명이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다는 오류촌이 여기가 아니냐? 제비는 물을 차고 기러기는 떼를 지어서 하늘 허공을 높이 떠서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펄펄 흰 구름 사이에 높이 떠서 천리나 되는 머나먼 강산을 어떻게 갈꼬 하고 슬프게 우는구나. 먼 산은 겹겹이 포개져 있고, 큰 산은 달리다가 문득 멈춰 선 듯이 우뚝 솟았으며, 기이한 바위는 층층으로 쌓이고, 길고 큰 소나무는 가지가 축축 늘어져 한쪽으로 치우쳐 구부러져서, 미친 듯이 사나운 바람에 흥을 못 이기어 우쭐우쭐 춤을 추는구나. 층층이 쌓인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 위에 폭포수는 콸콸콸 떨어져 수정 알로 만든 발을 늘어뜨린 것 같고, 이 골짜기의 물이 주루루룩, 저 골짜기의 물이 솰솰솰 소리를 내며, 백이나 되는 골짜기의 물이 한 곳에 합치어서, 일정한 방향도 없이 흘러, 혹은 위로 솟아 부풀어 오르고, 또는 옆으로 벙벙하게 흘러, 넝쿨과 같은 물줄기를 이루기도 하고, 또는 물방울을 이루기도 하여, 저 건너 병풍처럼 둘러친 석벽으로 으르르렁 콸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결이 백옥같이 흩어지니, 옛날 소부가 송아지를 몰고 가다가 귀를 씻는 허유를 보고 서로 주고받고 이야기하던 기산과 영수가 여기가 아니냐? 주걱새 울음소리는 먼 옛날 태고의 시절같이 한가롭고, 소쩍새 울음소리는 한 해의 풍년들 징조를 알리는 구나. 해 돋는 풍경 해지는 풍경이 눈 앞에 벌어지니, 경치가 끝없이 좋기만 하는구나.- 진각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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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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