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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빛을 찾아서 (광덕 큰스님)

 

제1장:인간

 

◎종교는 왜 필요한가?

 

인간의 삶을 진실하게 하기 위해서 종교는 필요합니다. 개인적 삶도, 사회적 삶도, 또한 역사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진실하게 되기 위하여 종교는 필요합니다. 종교는 근원 진리를 밝히고 진리에 의한 참 인간을 밝혀서 참된 인간의 삶과 역사적 사회적 발전의 지표를 세워 줍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없는 개인이나 사회는 진리도 방향도 없는 무궤도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오직 야망이 우글대는 괴물이 십자가두 위에서 좌충우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과 역사의 진리를 모르므로 어떤 것이 참된 인간의 길이며 역사의 길인가를 모릅니다. 오직 욕망따라 왕성하게 달리고 또는 충돌하여 상처도 입고 적당히 자기 조절을 하여 움추리기도 하며 때로는 공포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정의도 질서도 확정한 기준없이 다만 요령껏, 눈치껏, 극단을 피해가며 일신의 영락만을 위해 살아가는 맹목적 군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개인을 참되게 하고 개인의 삶을 보람있게 하며 역사의 방향을 가치있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중심 역할을 합니다. 이와같이 인간과 그 생명과 근원 진리를 밝히는 종교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참된 진리를 갖추지 못한 종교가 있다면 그 해독도 참으로 클 것입니다. 종교를 달리 한다고 하여 대립하고 무자비하게 파괴하는가 하면, 인간도 역사도 부정하고, 환상을 쫓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종교를 배우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하겠으며 모든 사회적 시설이 또한 그러하여야 하겠습니다.

 

 

1) 최초 인간과 생활

 

질문1), 인간의 시초에 대해서 여러 말이 있습니다. 유인원이 진화했다고도 하고 어떤 종교에서는 신이 흙으로 만들어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관심은 없으나, 불교에서 사람의 시초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 가라고 물어올 때 답할 말이 없습니다. 최초의 인간에 대하여 경의말씀은 어떠하온지 또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다든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요.

 

우선 경전의 말씀부터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최초의 인간이 어떠하였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경전〈장아함경중 소연경, 세기경본연품, 중아함경 범지품.대루탄경 등등〉에 보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같습니다. 최초의 인간에 관한 경전의 말씀을 우선 요점만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최초의 사람은 색계(色界) 제2천광음천에서 복이 다하고 수가 다한 천인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광음천이란 색계천 제2선천에 3천이 있는 중, 그중의 제 3천으로 무량광천이라고도 하고 극광천이라고도 합니다. 이곳에 사는 중생(하는사람)은 말이 없이도 몸에서 발하는 광명으로 의사를 통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시초는 어떤 권능자가 와서 무엇무엇을 반죽하어 만든 것이 아니라 천상사람이 이 세계에 화생(化生)한 것입니다. 화생이란 말은 태어서 난 것이 아니라 변화하여 났다는 말입니다. 몸에서 스스로 광명을 내고 신통력이 있어서 자유로이 날아 다녔습니다. 새와 인간이 결합한 것 같은 날개돋친 사람이 아니라 천상사람이 지닌 정력의 연장으로 정상적 인간인 채로 날아다닌 것입니다. 음식은 생각만 하면 배가 부르고 시장을 몰랐습니다. 이런 샹태는 오랜 동안 계속됐는데 서로들 스스로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였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 땅에는 샘이 솟아났는데 그것을 감천(甘泉)이라 했습니다. 우유 같기도 하고 꿀 같기도 하여 맛이 매우 달았다고 합니다. 그때 중생들은 감천을 보고 「이것이 무엇일까. 한 번 먹어볼까」하다가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았습니다. 매우 맛이 좋으므로 마침내는 두 손으로 움켜쥐고 퍼마시고 싫은 줄을 몰랐습니다. 많은 중생들이 역시 그렇게 감천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중생들의 몸이 거칠어지고 살이 찌며 몸이 굳어져 천상사람의 아름답고 미묘한 형색을 잃었답니다. 뿐만 아니라 몸에서 나는 광명도 줄어들고 날아다니는 힘을 잃어 땅을 걸어다니게 됐습니다. 그후에 중생들은 다만 지미(地味)를 먹으면서 이 세간을 살아갔는데 그 가운데 지미를 많이 먹은 자는 얼굴빛이 거칠고 추하며 적게 먹은 자는 아직도 몸에서 광택이 났으니 이때부터 사람의 얼굴에 추한 사람과 단정한 사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서 단정한 자는 교만심을 내어 추한 사람을 업신여기며 얼굴이 추한 자는 또한 단정한 자를 질투하고 미워하게 되니 여기서 분쟁이 생기게 되었답니다. 이와 같이 서로 불목하고 다투고 음식에 탐식을 내면서부터 저절로 감천은 사라지고 그후에 자연 지비(地肥)가 생겨났습니다. 빛깔도 곱고 맛도 좋으며 향기로와서 먹을만 했습니다. 중생들은 이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기를 오래오래 지낸 동안 지비를 많이 먹은 자는 얼굴이 추하고 적게 먹은 자는 아직도 밝게 빛났습니다. 지비를 먹고 사는 동안에도 얼굴이 단정한자는 교만심을 내어 추한 자를 업신여기고 추한 자는 또한 단정한 자에 대해 미움과 질투심을 내니, 중생들은 또한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생활이 이렇게 거칠어지자 지비는 다시 나지 않았답니다. 자비가 없어지자 새로운 식량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파라(婆羅) 혹운 추후지비가 나왔답니다. 이것도 먹을 만하여 향기롭고 맛이 좋았다고 합니다. 중생들은 이것을 먹으며 오랜 동안 살았습니다. 파라도 여느때와 같이 많이 먹은 자는 얼굴이 추해지고 그 중에서 덜먹은 자는 얼굴이 밝으니 서로 미워하고 다툼을 일으켰고 끝내는 파라마저도 나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후에 자연 경미(自然경米)가 났습니다. 이것은 쌀 종류인 모양인데 빛은 희고 깨끗하며 거기에는 거친 은 겨가 없어서 그냥 먹을 수 있었답니다. 길이는 4치 정도이고 아침에 베면 저녁에 나고 저녁에 베면 아침에 돋아났으며 간이 맞고 먹음직했답니다. 중생들이 이것을 먹으면서부터 차차 모양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중생은 남자 형상이 되고 어떤 중생은 여자 형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녀의 형상이 생김을 서로 보고서 「악중생」이 났다고 말을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한 사람이 생기자 중생들은 서로 쳐다보고 살피고 하는 동안에 마음이 물들고 번뇌를 일으키며 마침내는 서로 애착심을 일으켜 성욕이 생겨 더욱 친근하게 되었답니다. 이윽고 부정행을 저지르니 다른 중생들이 보고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며 크게 꾸짖었습니다. 부정행을 한 남자도 스스로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내가 잘못했다 하고 땅에 엎드려 일어날줄 몰랐습니다. 부정행을 함께 한 여인이 음식을 갖다주니 여기에서 처(妻)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후에 중생들은 부정행을 더욱 더하게 되니 스스로 집을 만들어 그안에서 때도 없이 정욕을 함부로 했답니다. 여기에서 부부가 생기고 수명과 복이 다한 중생이 명을 다하고는 이 세간에 태어나 어머니의 태중에 드니 이것이 인간 태생의 최초랍니다. 이상이 여러 경전에 보이는 이 세상 최초의 인간에 관한 기록입니다. 어쩌면 일종의 신화라고 웃어 넘길런지 몰라도 그럴 수 없는 중요한 시사와 교훈을 거기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땅에 최초의 인간은 어떤 신이나 권능자가 만든 것이 아니고 천상사람이 화생했다는 점입니다. 색계천 중광음천에 사는 천인이 복이 다하고 명이 다함에 인간으로 화생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이 원래로 청정하여 동요가 없지만 중생은 미혹하여 번뇌를 일으켜 여러 가지로 그 마음이 동요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중생차별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그렇다면 광음천 중생이 번뇌를 일으켜 보다 거친 마음의 파동을 일으키게 될 때 당연히 광음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삼매력)정도의 세계를 만나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 땅에 회생한 광음천인도 그 마음이 더욱 거칠어지기전까지는 자기 광명으로 살고 생각으로 음식을 삼으며 자유로이 날아다녔다고 하는 점은 광음천 천인의 정력 속성인 것도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인간의 생활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는 매우 흥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식량문제인데 최초에는 감천을 마셨고 다음에는 지미를 먹었으며 3단계에서는 지비, 4단계에서는 파라, 5단계에서는 자연경미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초의 생각으로 음식을 삼았던 중생이 음식물에 마음을 일으키고 그 맛에 낙착하여 음식을 탐색하였을 때 몸에서 나던 광명은 사라지고 신통력은 잃었으며 미묘 단정한 천상사람의 모습을 잃어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활의 차별이 생겨 추한 자와 단정한 자가 심하게 나타나고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여 투쟁심을 일으키고 그러는 사이 식량은 점점 거칠어지고 생활은 어려워져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인간이 외적 감각에 탐착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거친 마음이 날 때 중생 자신이 원래로 지녀온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점점 상실하게 되고 또한 식량이라는 생활 조건의 변동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인간이 당초에는 남녀 구별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가 지닌 삼매의 힘이 어느 정도 남아 있고 감천이나 지미, 지비등을 양식으로 하고 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남녀의 성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만해도 광음천의 기본적 삼매력이 존속되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자연 경미를 먹기 시작한 때부터 남녀상이 나타나고 남녀가 서로 보매 점차 정욕심이 생겨서 서로 친근해지자 당시에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인간의 시초와 그 생활상을 살펴볼 때 무엇이 인간의 향상이며 무엇이 인간의 타락인가를 여실히 보는 것입니다. 경계에 빠져들어 감각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나아가 그 마음에 대립심이 생기며 증오하고 다툼이 일어날 때 이것은 인간 타락의 길이었습니다. 인간의 정신적 타락이나 생활상의 타락은 단순한 인간 자신의 타락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 생활환경이 급격히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적 감각에 의존하여 욕망을 일으키고 그 추구에 빠져들었을 때, 첫째는 인간이 지닌 정신적 능력이 감퇴하였고 다음에는 그 얼굴이나 몸매와 모습이 거칠고 추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생활 환경에 일대변화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최초의 인간설에 관한 경전의 말씀에서 우리들은 많은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보다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환락과 증대를 인간 조건으로 생각하며 물질 만능 문명의 지향성에 대하여 우리는 깊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자성불과 믿는 힘

 

질문2), 불교는 자기 성품이 부처님이며 마음이 부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믿고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하나 저희들은 힘이 없는 범부중생입니다. 저희들이 무엇은 할 수 있겠습니까? 어려움을 당하여 당황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부처이며, 마음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의 선포입니다.인간권위와 가치와 자력개발은 위해서 만들어 낸 이론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인의 실상이 부처이며 본성이 법입니다. 그런데 인간 실상이 부처이건만 우리가 의식하고 생활하는 세계는 미혹의 세계이며, 업의 세계입니다. 실재는 부처의 세계이건만 미혹과 업장 때문에 그렇게 보고, 그렇게 살아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품이라 하고 마음이라 말해도 그것은 미혹속의 말이며, 해탈을 말하고 청정을 말해도 업혹속의 말이 됩니다. "나"라고 말하나 그 "나"도 미혹된 의식입니다. 우리가 쓰고 의식하는 것은 업력의 소산이라는 말이 됩니다. 비록 그러하나 우리의 생명 본성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영겁을 통하여 변함없이 "여기 지금"에 있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부처님이 여기 계신다는 말이 됩니다. 부처님은 조금도 멀리계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자성불이라고 하는 말은 부처님은 곧 자기 본성이란 뜻이며 본성이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생각하고 움직이며 온갖 일을 이룩하는 것도 근본 힘인즉 죄업의 힘이 아니라 부처님의 위신력입니다. 우리 생명의 본바탕이 부처님의 은혜로운 신력으로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줄을 모르고 경계에 집착하여 미혹세계를 의식합니다. 우리가 의식하는 미혹세계는 장애도 많고 고난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장애와 고난이라는 것이 우리의 본래 세계인 부처님의 은혜의 세계에는 원래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애와 고난속에 헤매는 범부중생들이 고난에서 벗어나자면 고난이 없는 부처님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염불이지요. 부처님을 생각함으로써 미혹의 속박이 무너지고 은혜로운 공덕세계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 도리를 안다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염불하는 것이 먼 데 있는 부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기 참 생명인 부처님을생각하여 함께하는 것입니다. 자성불이라고 말하나 자성불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불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성불이라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미혹된 생각이 낳은 분별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깨달아 스스로 부처님 법을 사무처 보던지 아니면 대자대비, 무애 위신력인 부처님을 믿고 일심염불하는 것이 요긴합니다. 물으신 분은 힘이 없는 범부라고 하시나 자성불이 부처님이며, 가장 가까운 부처님이며, 진실한 자기 생명인 부처님인 것을 믿고 일심 염불하신다면 처처에 불신력이 나타난 것을 보실 것입니다.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불력으로 살며 업보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공덕세계를 사는 것을 보시리라 믿습니다.

 

3)부처님은 무한 진리일진대.............

 

질문3), 진리가 우리의 본성 자체라면 어찌하여 부처님이 우리에게 공덕을 주신다고 합니까? 또 진리 자체가 석가모니 부처님은 특징적으로 한정된 부처님인데 어찌하여 거기에 절대 무한한 진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말씀과 같이 진리 자체가 만인의 본성입니다. 그것은 법이며 일체 제불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주고 받을 것이 없습니다. 원래로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참 모습은 그런 것이지만, 범부들이 의식하고 있는 경계는 착각된 경계인 까닭에 그 원래의 진리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착각된 상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착각상태인 범부의 경지를 인정해 두고 말을 하자니 부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또는 원래부터 주셨다는 표현을 하게 된는 것입니다. 범부로서는 또한 그것이 사실입니다. 또 석가모니불이라는 명자에 사로잡혀 보면 부처님은 절대영원성이 아니고 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름과 모양에 사로잡혀서는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금강경에 거듭 말씀되고 있는 것을 다시 살피시기 바랍니다.

 

4)창조와 한정

 

질문4), 스님께서는 창조는 무한성의 자기 한정이라고 하셨고, 또한 "꿈의 날개를 펼쳐라, 자기 한정을 하지 말라" 고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잘 물으셨습니다".

 

우리 본성은 무한이며 한계를 넘어선 절대의 권능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자성을 모르고 항상 자기를 "이 정도다"하고 한정하고 생각하며 그렇게 자신을 비소한 존재로 생각하고, 환경과 조건 속에 갇히고 육체에 갇힌 자그마한 존재라고 자기 한정을 함으로써 사람의 능력과 성장이 위축되고 정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한정을 두지 말고 본성의 무한성과 원만성을 깨닫고 믿어서 용기있게, 활기차게 큰 꿈의 날개를 펼치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을 한정하고 환경조건의 종속자라고 생각하는데서 자기 힘은 개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에 '창조는 무한성의 자기 한정' 이라 한 것은 그 차원이 다른데 있는 것입니다. 원래로 진리 자체는 어떤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유(有)도 무(無)도 멀리 초월한 절대존재입니다. 그것이 시간과공간이라고 하는 선상에 구체적으로 형상을 나툰다고 하는 것은 무한성인 근본원리를 이러한 시공성 속에 한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그러므로 우리들은 무한절대의 자성진리를 구체적으로 깨달아서 원래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원만성으로 살고, 그것을 역사성 앞에 구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역사라 하는 시간과 공간적인 한정을 가함으로써 현상적 현실의 창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근본 형식입니다. 이 점을 혼동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5)진실이란 무엇인가?

 

질문5), 진실이란 과연 무엇이며 진실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

 

진실의 반대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진실의 반대는 허위이고 허망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 허망하다 하는 것은 주체적 자기 생명에 충실하지 못한 삶을 말하게 됩니다. 욕망을 쫓고 환경 적응에 시달리고 관계 상황에 한 눈을 팔며 팔랑개비처럼 돌아가는 인간의 삶이란 삶 자체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합니다. 인간이란 단지 욕망의 도구인가, 환경의 노예인가, 관계상황의 시녀인가, 물질 축적의 기계일 뿐인가.... 허다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그러한 활동의 근본에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기를 잃어 버린, 삶의 지표를 잃어 버린 인생은 이래서 공허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주체적 자기로 사는 것입니다. 본성대로 사는 것입니다. 본성인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가를 아는데서 옵니다. 본성을 알자면 허망한 그림자를 쫓는 생각을 놓아야 하며 밖에서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하며 어떤 확정적인 것에 대한 주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주착과 집착에서 벗어날 때 거기에 진실한 우리는 확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진실한 생명을 가리키고, 그 길을 행하게 하는 것이 불도입니다. 말이 추상적인 것에 치우친 감이 있어 말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욕망과 명예와 소득에만 매달리고 형상만 쫓는 삶은 허망합니다. 자비한 마음으로 일체에 화합하고 따뜻하게 대하며 대립없는 마음으로 부지런하고 활발하게 창조적 삶을 열어가는 것은 이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은 자기 생명을 사는 것이며 진리를 사는 것이며, 창조와 번영과 기쁨을 가져오고, 이웃에 평화 화합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진실하지 않은 삶의 특징은 이기심, 대립감정, 나태, 옹고집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6)왜 무능한가?

 

질문6), 사람은 누구나 본성이 불성이라 하는데 어째서 저에게는 고통이 많고 무능합니까?

 

고통이 많고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소견입니다. 고통이 많다 하지만 한 두 가지 고통 빼놓고 즐거운 일이 얼마나 당신에게 많습니까?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가 있고 밥이 있고 학교가 있고 사회가 있고 또 아름다운 자연이 무한정으로 있습니다. 또 몸만 하더라도 심장이 뛰고 맑은 피가 돌며 마음껏 호흡할 수 있고 따뜻하고 시원한 것을 분별하며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니 이 얼마나 풍부한 행복스런 환경입니까. 고통스럽다 하는 것은 그때 그때 흘러가는 흰구름 같은 것입니다. 생명의 진리에 어긋난 행을 했을 때 나타나는 적신호이고 새롭게 배울 것을 가르쳐 주는 교재입니다. 우리는 교재를 이수해서 참된 자기 생명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또 무능하지도 않습니다. 무능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무능의 시작입니다. 필요한 것, 참으로 바라는 것, 참으로 하고자 하는 것을 신념으로 흔들림 없이 계속해 나간다면 뜻한 바는 이루어 집니다.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참된 소망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바른 믿음과 결단적 행동과 지속적인 정진이 요구됩니다. 무지와 나태로는 손에 쥐어진 여의주도 결코 행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7)선악이 있는가

 

질문7),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서로 상대가 되어있는 듯이 보입니다. 선의 근본은 무엇이며 악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선과 악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지혜의 눈으로 보면 악은 원래로 없는 것이라 합니다. 있는 것이란 선 하나 뿐이라는 것이지요. 원래로 이 세계는 서로 돕고 힘이 되면서 제각기의 개성을 키워가며 전체를 아름답고 조화있게 꾸며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범부들은 그런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 속에서 착각을 일으켜 곡해도 하고 탐착을 냅니다. 그래서 원래로 밝고 착한 세계속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지혜의 눈을 열어 이 세계의 인간이 선하고 이 국토, 이 세계에 선이 가득한 것을 발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근본은 선입니다. 악은 없는 것이나, 미혹하여 악을 보고 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8)선악의 절대기준

 

질문8), 옳고 그름, 좋고 나뿜의 절대적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겉으로 보면 선악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도 보일 것입니다. 그때 그때 상황과 조건따라 기준을 달리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그 내면에 눈 돌리면 몇가지 통일된 공통의 기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평등과 공동성과 개성 존중과 발전입니다. 그렇지만 개성의 존중과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공동성이 깨질 때도 있고 평등이 위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발전을 능률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때로는 개성의 존중이 억압될 수도 있습니다. 공동성과 평등의 추구가 때로는 개아의 존엄과 창조적 발전을 저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나 방법을 들어서 이것이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됩니다. 여기서 돌이켜 살펴보면 하나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자칫하면 어떤 방법으로 고정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하는 것은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며 수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무엇을 위한 수단이며 방법인가에 착안하여아 합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과 사회의 진실한 안정이며 성숙이며 발달입니다. 인간이 참되게 안정되고 성숙하며 발전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그때 그때 상황과 존건따라 주의 사상과 방법과 체제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주의나 사상도 방법이나 체제도 그것이 절대적일 수 없으며 인간의 상위에 설 수 없으며 인간에 군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인간을 위한 수단이며 봉사를 위한 기능 이상의 것이 아니며 상황과 조건에 상응한 시간적 공간적 한계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 가치의 기준은 참된 인간성의 존중과 원만한 성숙과 자유스러운 계발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을 바꾸면 불성의 자유스러운 계발과 역사적 현장에서의 그 구체적 실현이라 할 것입니다.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신앙과 그를 위한 환경조건의 보장과 진리 실현의 의미는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큰 의미가 있음을 이런데서 이해하게 됩니다. 선악의 절대기준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선악을 만드는 자

 

질문9), 우리의 자성이 선과 악을 다 만드는 것입니까? 그래서 그 과보를 받는 것입니까?

 

겉보기에는 우리의 청정자성이 선악을 잘못 분별하여 선을 짓고는 천상에 나고, 악을 짓고는 악도에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청정자성은 오직 청정할 뿐입니다. 언제나 밝고 착하고 오직 진리공덕만이 가득합니다. 그밖의 것이란 없습니다. 청정자성에 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청정자성은 원만한 공덕이 충만한 것으로 믿어야 하겠고 그 밖에는 없는 것으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악한 법은 청정자성에는 본래 없는 것인데, 미혹하여 착각을 일으켜 나쁜 현상에 끄달려 악을 짓고 악한 과보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혹을 돌려 깨달음에 이르면 미혹의 결과인 온갖 고통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악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악에 적극적인 실체가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은 잘못입니다.

 

10)두뇌의 생각과 법성

 

질문10), 우리의 두뇌로 생각하는 것이 법성에 속한 것인지 육체의 연장인지 알고 싶습니다.

 

육체와 마음을 보는 범부의 경계는 모두가 색수상행식의 오온의 전개입니다. 두뇌는 색이고 생각은 식입니다. 그러므로 범부가 보고 느낀 것, 오온으로써 법성 자체를 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온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의식할 뿐이고 사실은 법성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래로 말하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법성의 실현입니다. 범부는 그것을 오온으로 삼고 달인은 오온에서 법성을 보는 것입니다.

 

11)천인이 있는가?

 

질문11), 하늘 사람이 정말 있습니까?

 

우리의 인간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만큼 역시 천상사람도 현실적으로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평상적인 인식능력,의식차원으로는 인식할 수가 없는 것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범부의 인식권밖에 있다는 말입니다. 원래 범부들은 본성에 있어서 법성이며 진리성입니다. 그런 만큼 완전합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미혹하여 완전한 진리본성을 그대로 개현하지 못하므로 중생이라 하는데 본성을 개현하지 못한 정도에 따라 무수한 차별중생이 있게 됩니다. 여기서 6도중생이 벌어지는 것이고 그 가운데 인간도 천상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천상 사람도 범부입니다. 본성은 미혹하고 있으나 그래도 디립심 미운 마음보다는 평화와 자비와 밝은 마음이 많은 중생이 천인보를 받습니다.(욕계의 경우) 5계를 지키면 인간이 되고 10선을 닦으면 천상에 난다는 말은 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천상에도 여러 차별이 있습니다. 미혹한 상태, 착하고 밝은 마음의 정도가 다르므로, 여러 천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중에도 착한 마음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천상도 있습니다. 그것은 색계천인데 거기에는 산란심이 없는 깊은 마음(선정)의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천상의 이름만 열거해 보겠습니다.1. 욕계천(6천) : 사왕천, 야마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

 

2. 색계천(18천)범중천, 범보천, 대범천(이상 초선천) 소광천,무량광천, 극광정천(이상은 제2선천),소정천,무량정천,변정천(이상제3선천)무운천,복생천,광과천,무번천,무열천,선현천,선견천,색구경천(이상제4선천)3. 무색계천(4천):공무변처천,식무변처천,무소유처천,비상비비상처천.

 

12)천상과 욕락

 

질문12), 천상에 태어난 하늘 사람에게도 세간과 같은 욕락이 있습니까?

 

천상도 중생이 사는 삼계 가운데에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천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삼독심이 담담하거나 마음이 착하고 맑고 안정된 상태에 있는 차가 있습니다. 천상이라 하여도 욕계천 색계천 무색계천에 차별이 있어서 그 사이에 세간적 욕락이 있고 차이가 있습니다. 욕계천에 태어난 천인들은 세간적 욕락이 모두 갖추어 있어 행복을 누립니다. 색계천 이상이 천상에서는 그 경지를 넘어서 맑고 안정된 마음의 기쁨을 누리므로 욕계천과는 질적인 차가 있습니다. 또 욕락을 즐기는 욕계천이라 하더라도 천상에 따라 즐기는 방법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욕계언의 사람들이 음사를 행할 때에 사왕천과 도리천에서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육체로 사귀고, 야마천에서는 서로 포옹하며 도솔천에서는 손을 잡고 화락천에서는 서로 쳐다보고 웃으며 타화자재천에서는 서로 쳐다봄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을 욕천의 오음이라 합니다만....

 

13)악인은 죽어야 하는가?

 

질문13), 세상에서 악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꼭 죽어야 하는지 의심이 갑니다.

 

악한 사람은 죽여야 하는가? 가장 이성적인 집단인 국가가 악인이라고 하여 죽인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형벌로써의 사형제도 있다는 것은 국가가 어떤 사람에게 대하여 교정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인간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한 까닭이라 생각합니다. 악인은 원래로 없는 것입니다. 악한 환경, 악한 조건에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그릇된 행을 해서 자신도 사회도 국가도 함께 해룰 주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가로 죽음을 안길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천번 다시 될 수 있습니다. 겉모양이 잘못되었을지라도 스스로는 천번 만번 새로워져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원래가 본성이 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형법제도로써 사형을 두는 것은 통치 질서와 사회 안정상 부득이 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형이 가지는 일반 위혁적 효과와 악한 일을 한 자에게는 악한 과보가 따라야 한다는 인과응보적인 사고방식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하여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 속죄하며 원결을 푸는 것이 몇배나 나은 것입니다. 또 범죄로부터 사회를 방위한다는 이론도 반드시 사형을 합니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차라리 적정한 교도 방법을 통하여 그가 사회로부터 일정기간 격리되는 속에서 참회와 교욱으로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새 희먕을 부어줌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서 재생시킬 노려을 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한다 하겠습니다. 국가는 마땅히 인간에게 주어진 높은 가치를 계발하기를 도울지언정 근본적으로 파괴할 수는 없다고 샟각합니다. 그래서 설사 악인이라 보이더라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인리라는 판단이 결코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판단. 그 결과로서의 사형,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과오 이러한 무고한 짓을 어찌 정의의 이름에서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인생이란 영원을 향하여 성장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14)상근기와 하근기

 

질문14), 사람에 따라 상근기. 하근기가 원래로 있는 것인지 말씀하여 주십시요.

 

법보단경 반야품에서 혜능조사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원래 사람에게는 반야지혜가 갖추어 있어 거기에는 큰 지혜있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것이 없으며 다만 미록한 정도가 같지 않은 것 뿐입니다. 하근기라고 하는 것은 이와같은 본래로 차별이 없는 원만한 반야지혜를 알지 못하고 삿된 소견에 물들어 경계를 집착하고 망념을 일으키게 되므로 언제 나 명랑한 반야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줄만 알고 번뇌를 쉬면 거기에 어찌 근기의 크고 작은 것이 있겠습니까. 원각경에 말씀하시기를 <정법의 바른 수행문을 만나면 근기의 대소차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성불한다.>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15)인구와 본성

 

질문15), 세계는 지금 인구가 크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나 중생의 성품도 늘어나고 줄어듬이 있는지요?

 

지구상의 인구가 는다고 하지만 본성을 미혹한 중생의 영혼<영식>은 인간에게만 있어서 그것이 미국이나 영국이나 박씨나 김씨의 집으로 뱅뱅도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의 영식은 지옥. 아귀. 축생 내지 천상에 이르는 6도에 널려있습니다. 다만 자성을 깨달아야 중생경계를 벗어나고 6도 윤회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인구 절대수가 는다는 것은, 인간 외의 다른 중생이 인간으로 올수도 있고 천상이나 귀신계에 있던 중생도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거기에 모순은 없습니다. 영혼은 본성을 깨달을 때 중생성을 벗어나는 것이며. 중생의 본성에는 늘고 줄어듬이 없는 생각 밖의 <무한성>이라는 것을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제2장 : 부처님

 

1)부처님은 왜 불멸인가?

 

질문16), 부처님은인도 가비라국에서 출생하시고 구시나가라에서 입멸하신 것이 불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런데도 스님은 부처님은 불멸이라 하시고 영원한 현재성을 말씀하시니 어찌된 말씀입니까?

 

잘 물으셨습니다. 부처님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 불타관이 명확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경을 대하거나 믿는다면 흔들리게 됩니다. 사실 고오타마.싯달타, 석가모니 부처님은 약 3천년 전에 인도에서 나시어 그곳에서 입멸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부처님은 열반을 보이되 죽음이 아니며 실로는 항상 현재하건만 범부들이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사의 비유를 들어, 병들은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약을 만들어 놓고 먹을 것을 권하며, 다시 먹게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외지에서 죽었다고 말을 하고, 아들들이 약을 먹고 병이 나으니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비유처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자비심으로 짐짓 멸도상을 나투는 것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형상이나 음성으로 볼 수 없다 하시고, 여래는 온다거나 간다거나 생사의 모양이 실로 없다 하시고 <진여가 여래며 불성이 여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래로 부처님에 대한 이해를 분류하여 변화의 몸과 닦아서 이루신 완전한 몸과 법성생명 본래의 몸의 세가지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법성의 몸이시기에 생멸 거래가 상관이 없는 법성진여 그대로의 몸이십니다. 이것이 법신입니다. 부처님의 본래 몸입니다. 법신인 부처님은 원래로 대자대비하시므로 짐짓 닦는 상을 보이시며 성불상을 보이시며 또한 세간의 풍파와 고뇌속에 출현하시어 ㅜ행도 고행도 열반도 보이십니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보신이나 화신을 통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때로는 보신을 때로는 천백억 화신을 나투십니다. 3천년전에 룸비니에 나시고 구시나가라에서 멸도를 보이신 것도 대비 시현의 변화상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법성으로써 빛나는 지혜와 뜨거운 자비가 막힘없이 자약하시며,산너머 바다 너머 구름 너머 푸른 하늘에 영원한 태양처럼 자재하십니다. 어떤 분은 <법신은 비로자나불이시니 석가모니불이 아니다. 석가모니불은 법신이 아니라 화신일 뿐 >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신을 여읜 화신이 없고 보신도 없습니다. 화신에서 화신만 본다면 그성은 중생견입니다. 실로 일체 화신은 일찍이 법신을 어의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불은 법신이며 일체불의 대표적 명호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올 때 부처님은 오직 부처님일 뿐이며 그 이름은 석가모니불이라 하고 석가모니불의 화신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뜻은 법화경 수량품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처님은 3천년 전에 돌아가신 과거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위대한 교훈을 남기시고 먼 곳으로 떠나고 마신 영원한 인류의 스승만은 아닙니다. 오고 가시는 부처님이 아니시고 생사열반에 자재하신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은 영원한 현재성으로 영원한 공간에서 우리 모두의 절대적 주체성에서 가장 가까운 나의 생명의 원형으로 이해되고 파악되며 또한 그런 것이 영원한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가장 자비롭게 우리 생명을 키우고 살피시는 부처님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경에도 말씀하셨습니다.<너희들이 맑고 곧은 마음으로 일심으로 나를 찾으면 곧 내가 앞에 나타나서 '나 여기 있노라'하리라.> 이 믿음을 갖고 수행하는 모든 사람이 생생한 부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2)불교는 철학 사상인가 ?

 

질문17), 부처님은 29세에 출가하시어 35세에 성도하시고 80세에 열반에 드셨으니 우리는 오늘날 부처님 안계신 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의 말씀의 기록과 행적을 따라서 부처님을 우러러 보기도 하고 가르침을 따라 수행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교학체계, 사상체계를 따라서 가파른 길을 닦아 올라가는 듯한 적막감과 외로운 감정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옳은 생각이겠습니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신앙이 그렇게 허술해서는 안됩니다. 경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부처님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몸이 아닙니다. 항상 머무는 몸이시며 허물어지지 않는 몸이시며 밥을 잡수셔서 유지된는 몸이 아니십니다. 금강의 몸이시며 진리의 몸 법신이십니다. 불자는 모름지기 <부처님은 법신이다>하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법신이시므로 불생불멸 부증불감 하시고 영원자재 하시고 원만구족하시고 대자대비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래가 멸도의 모습을 보이지만 실로는 멸하지 않고 너희들이 곧고 바르고 간절한 마음으로 찾으면 언제나 네 앞에 나타나 '나 여기 있노라'하시고 >법을 설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부처님은 법신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법신이신 까닭에 인간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습을 하시고 인간계에 태어나 인간과 더불어 고뇌하시면서 해탈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면 인간들이 부처님을 알 수 없고 해탈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해탈의 뜻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천상중생을 제도하실 때는 하늘사람 모습을 나투시어 법을 설하십니다. 육도중생 앞에 천백억 화신의 몸을 나투시지만 실로 그 모습은 변화신이며, 중생을 위한 응화신이십니다. 부처님 자신은 일찍이 오신 바도, 가신 바도, 변화하신 바도, 열반에 드신 바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필요에 따라 바다에 갈 때는 수영복을 입고 산에 오를 때는 둥산복을 입으며 예식자리에 나아갈 때는 예복을 입고 달나라에 갈 때에는 그에 적합한 우주복을 입되 옷을 입은 주인공인 우리들 자신은 조금도 변화도 손상도 없는 거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또는 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보였다 하여 부처님이 온 것도 아니며, 간 것도 아니며, 멸도에 든 것도 아닙니다. 항상 법신으로써 여여할 뿐입니다. 대자대비하시고,대지혜이시고,대위신력 충만하신 부처님은 영원히 그대로이십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여래는 간 바도 없고 온 바도 없다.>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현재로서 일체처 일체중생 앞에 항상 나타난 계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법신인 도리를 안다면, 언제나 자비하시고 따뜻하시며 끝없는 은혜로 감싸주시는 부처님을 알게 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때나 흔들림없이 대자비 위신력에 의지해서 역경을 이기고 창조적 생화를 열어가게 됩니다. 끝없이 자비로우시고 영원 자재하신, 법신인 부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를 철학사상이니, 운리종교니, 교주가 죽은 적막종교니 하고 비방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거듭 기억해 두십시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열반을 보이시되 실로는 열반에 듬이 아니고 대자비 열반상, 대자비 구족상이 영원 불멸하고 항상 현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부처님은 몇분인가?

 

질문18), 설법을 듣거나 경을 읽어 봐도 많은 부처님이 계신 듯 합니다. 석가여래부처님, 아미타불, 미룩불 그밖에도 퍽 많습니다. 우리는 서가모니불을 본사라고도 하는데 또 미타경에서는 아미타불을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사방에 많이 계셔서 서로 찬탄하시면서 그 가르침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결국 우리들은 여러 부처님을 다 배워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좋을지요.

 

말씀하신 바와 같이 경에는 여러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연등불이 계시고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도 계십니다. 국토에 따라 여러 부처님이 계시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의 근원은 둘이 없습니다. 법인 부처님이 계실 뿐입니다. 참으로 부처님을 보는 사람이면 법을 본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도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또 <여래는 나고 죽는 몸이 아니며 음식을 먹어 지탱하는 몸이 아니라 금강신이며 항상 머무는 몸이며 법의 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본 몸은 법이고 법은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법인 까닭에 그 수명이 한량이 없고 또한 한량없는 국토에서 중생들을 교화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다. 나는 항상 사바세계에서 설법 교화하였으며 그밖에 다른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국에서 중생들을 교화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나는 연등불에게서 법을 얻었다고 말하고 또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방편으로 분별한 것이다. 나는 중생들의 근성을 관찰하여 그에 마땅한 바에 따라 제도하였으니 여러 곳에서 말하는 이름이 같지 않고 나이가 각각 다르며 열반에 든다고도 말한다.> <내가 성불한지는 매우 오래이고 한량없는 아승지겁 동안을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면 결국 부처님의 근원은 법이고 법인 부처님의 근원인 석가모니불이라 하여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석가모니불이란 이름이 석가족에서 난 성인이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어서 마땅하지 않은 점도 있으나 경전의 말씀을 비추어 그렇게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부처님은 필경, 일불이고 일불이 일체불인 것입니다. 중생을 위하여 나시는 국토나 때가 다르고 명호가 다르지만 그것은 중생을 위하여 발편을 따를 뿐이고 원래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라 하겠습니다. 대반야경에는 <반야바라밀이 세존이고, 세존이 반야바라밀이다.>하셨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근원부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법으로써 영원하시고, 법으로써 항상 현재하시며, 법으로써 대자대비하시고,법으로써 원만구족하신 부처님을 볼 뿐입니다. 가시지 않고 오시지 않고 언제나 법성으로 원만하시고 자재하시고 자비하신 은혜의 부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부처님은 일불인 동시에 다불이고 다불인 동시에 일불이시나, 법이신 부처님은 유무에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다 둘이다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 것을 알겠습니다.

 

4)부처님의 가피력

 

질문19), 우리들의 본래 생명은 불성 자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로운 가피력을 미칠 수 있는지요?

 

훌륭한 말씀입니다. 부처님은 불성자체로 계시며 우리의 본성이 또한 불성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우리의 본성과는 둘이 아닙니다. 주고 받을 것이 없습니다. 더하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우리의 본분을 잊고 있습니다. 망념에 사로잡혀 엉뚱한 경계를 짓고서 그에 빠져 삽니다. 우리의 본분 생명이 부처님과 하나이면서도 부처님 경계와는 아주 딴판인 경계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범부중생들의 경계는 실지가 아니고 허망한 것이어서 몽환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꿈세계에서 깨어나 본분세계에 돌아갈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꿈속에서마저도 욕심을 구하고 안락을 추구합니다. 이런 때에 부처님께서는 큰자비와 큰지혜로써 방편의 문을 여시어 우리를 제도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몽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부처님은 방편으로 몽환의 몸을 지으셔 우리에게 접근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타이르고 마침내는 깨달을 수 있도록 온갖 자비 시설을 베풉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 방편으로 몽환 속의 우리들은 안락과 기쁨과 성공도 얻고, 노력하고 정진하여 깨달음의 길로 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몽환 속의 범부를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자비심이 얼마나 지중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한다면 불성 본분에서는 도움을 주고 받을 것이 없지만 중생을 위하는 부처님의 대비방편에서 가피력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깨달음과 부처님 공덕

 

질문21), 부처님의 공덕이란 깨달음을 의미합니까? 법과 공덕과는 다른 것입니까?

 

부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진리란 위없는 법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은 법이며 진리이며, 진리가 곧 부처님이란 말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라 하셨는데 이것을 법불일여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공덕이란 진리가 지닌 모든 지혜와 자비와 위덕과 방편시설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완전하시고 무한하시며 원만하십니다. 멀고 가까운 거리도 없고 과거와 미래의 시간에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현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경계는 막힌곳이 없이 어느 때나 어느 곳에나 원만하지만 우리는 미혹하여 망견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부처님을 모르고 지냅니다.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믿고 닦아 나아가면 그 마음이 맑아짐에 따라 부처님의 자비하신 위신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범부들은 <부처님 은혜를 입었다. 부처님 공덕으로 성취되었다.>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안다면 우리는 언제나 부처님의 크신 진리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하겠으며 진실을 행하고 마음을 밝혀 일찍이 우리에게 주신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매사에 자신의 것으로 쓰도록 하여야 하게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환희와 창조의 생활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6)함께 하시는 부처님

 

질문22), 부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처님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법이시며, 법을 깨달으심이며, 중생을 위하여 대자대비 방편을 열으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에 두 부처님이 없습니다. 일체불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참 몸을 억지로 말하여 법신불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 부처님이 중생을 건지시고자 가지가지 형상을 가진 부처님으로 나투시기도 하고 또한 열반에 드시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 자체이시므로 시간 이전이시며 공간 이전이시니, 우리의 생각이나 논리나 비유로서는 집작하지 못합니다. 이 부처님이 뜨거운 자비심에서 한량없는 원력의 구름을 일으키시어 백천 방편을 베푸시게 되니 우리는 거기에서 부처님 말씀에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부처님이시고 우리의 모든 생활환경이 부처님의 크신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7)부처님이 복을 주시는가?

 

질문23), 부처님께서는 <니이다이> 같은 사회 최하계급 사람에게 지극한 자비를 행하셨는데 우리는 복을 비는 신앙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복은 우리가 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친히 행하여 보이신 절대평등의 자비행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그러나 복은 불보살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에 대하여는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범부들에게는 부처님께서 친히 보신 바 무량복덕세계를 모릅니다. 자기가 지어서 복을 얻는다는 견해는 부처님의 무진장 공덕문을 수용하는 자세가 못됩니다. <내가 짓는다>는 아견이 쉬어야 합니다. 그럴때 이미 주신, 바꾸어 말하면 현재 이미 갖추어져 있는 원만공덕문을 열게 됩니다.다시 말하면 무량공덕을 자유로이 쓰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을 제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무량공덕의 바다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생활조건과 환경과 뜻하는 바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기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짓는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아견과 집착을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서 보살의 원을 따라 행을 열어간다면 하나하나의 행에서 무량공덕이 넘쳐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온갖 것<복>은 부처님에게서 오는 것을 알 것입니다.

 

8)어머니 같은 부처님

 

질문24), 부처님이 어머니같은 친근감이 언제부터인지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왜그런지 알고 싶습니다.

 

나쁜 생각을 지니거나 불법을 비방한 사람은 부처님에게 친근감이 가지 않고 두려운 생각이 들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됩니다. 염불을 많이 하고 예경 많이하는 사람일수록 부처님께 친근감이 갑니다. 이것은 전생이나 금생이나 똑 같습니다. 아마도 귀하는 전생부터 염불을 많이 한 것으로 봅니다. 더욱 많이 염불하시고 부처님께 감사하여 부처님이라는 생각의 흔적도 없는 데까지 이르기를 바랍니다.

 

9)부처님이 무서울 때

 

질문25),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친한 감정이 우러나는 방법이 없습니까?

 

부처님 상호가 무섭게 생겨서 두려운 생각이 날 때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고 부처님 상호가 미묘 단정하더라도 단청과 울긋불긋한 원색적 강한 빛깔이 두려운 분위기를 자아낼 때도 있겠지요. 어쩌면 부처님은 선악을 꿰뚫어 보시고 죄있는 사람을 벌해 주는 거와 같은, 신비스럽고 두려운 존재라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그렇지 않은데 부처님이 두렵게 생각될 때는 좋은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첮째 부처님 앞에 떳떳한 바르고 큰 원을 세울 것이며, 둘째로 부처님은 지극히 자비하신 성인이라는 것을 깊이 믿고 일심으로 끊임없이 염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일체 중생과 자신의 무량겁으로부터 내려오면서 지은 바 모든 악업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만 실천하시면 부처님은 바로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임을 느끼게 될 것이고, 우리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용서하시고 언제나 조건없이 도와주시는 부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참회하고 부처님과 원을 같이 하는 사람, 지극히 자비하신 부처님을 믿고 일심으로 염불하는 사람, 그 사람은 부처님이 다시 없는 자비하신 아버지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10)부처님과 거리감

 

질문26), 부처님을 높은 진리를 깨달으신 위엄있는 성인으로 믿고 있으면 거리감이 있기 쉬운데 어떻게 하면 친근하게 부처님을 대하고 거리감같은 벽을 없앨 수 있을까요?

 

세 가지를 말씀드리지요. 첫째는 부처님의 구세대비원력을 같이 하여야 합니다. 둘째는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오기 전부터 또한 먼 미래까지 우리에게 절대적인 진리의 은혜를 베풀어 키워주고 계심을 믿고 나의 본래 면목이 부처님 진리생명이며 공덕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부처님 앞에 나의 진실한 소원을 바치고 그것이 지금 순간 순간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염불하고 독경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3장교리, 불교상식

 

1)불교는 자력인가?

 

질문27), 불교는 스스로 노력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종교이므로 자력의 종교라고 알고 있습니다마는 한편으로는 불보살님을 믿어서 그 위신력으로 고난을 이기고 장애에서 벗어나는 면도 있어 이점은 타력을 믿는 신앙으로 생각이 듭니다. 불교가 자력의 종교라 할지, 타력의 종교라 할지 어떻게 알고 있어야 할지 궁금합니다.

 

불교가 번뇌를 쉬고 마음을 바꾸며 바른 행을 통하여 힘써 수행하는 측면이 강한 것이 특색입니다. 힘들여 수행하는 것을 강조하고 수행의 결과로 깨달음의 영광을 얻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번뇌를 없애어 자성광명을 빛내는 것을 수행이라 하고 있으므로 철저한 자력주의 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를 자력종교냐 아니냐의 문제를 생각하는 데는 편의상 우리 스스로가 노력하는 측면과 노력하여 성취하는 측면을 일단 나누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하고 노력하는 나는 번뇌의 마음이 가득한 번뇌의 몸입니다. 번뇌 속에서 판단하고 번뇌 몸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번뇌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차원에서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번뇌 뿐 일 것입니다. 먹을 갈면 검은 먹물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수행하는 몸과 마음이 깨달음의 광명을 이룬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력으로 수행은 하지만 <깨달음>은 자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유를 들면 태양을 가린 구름이 범부요 번뇌라면 아무리 하더라도 검은 구름이 태양이 될 수가 없습니다. 노력하여 구름을 흩트려 버리든지 구름 밖으로 뛰어나오든지 또는 구름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태양을 만납니다. 거듭 말해서 우리가 밝아지고 막힘없이 자유스러워지고 허공처럼 일체를 갈무리는 무한 자율성은 번뇌인 구름으로 어찌했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건만 번뇌의 구름에 싸여있는 자가 깨닫지 못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번뇌를 없이하는 노력이요, 밝아지는 결과라 하겠습니다. 본래 밝은 자성은 나의 힘으로 밝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의 노력으로 더욱 밝아질 것도 없습니다. 원래부터 밝은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은 밝음을 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 뿐 입니다. 우리가 자력으로 이루는 수행이란 번뇌에서 벗어나는데 있는 것이고 우리가 밝아지는 것은 청정자성의 본래 공덕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살펴볼 때 수행은 우리의 노력으로 하는 것이지만 노력의 결과로 밝음을 이루는 것은 부처님 공덕이라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부처님 공덕은 번뇌가 본래없는, 자타가 없는 차원에서 오는 광명입니다. 법성 진여 자성광명의 존재성이 원래로 자타 분별을 여읜 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밝아지고 성취하고 기뻐할 온갖 공덕은 부처님에게서 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자타를 초월한 경지에 계시므로 자력이다. 타력이다 하는 분별심이 있는 상태에서는 부처님은 끝까지 저 언덕에 계시고 우러러 볼 상대입니다. 자타분별이 끊어지고 번뇌가 말끔히 쉬었을 때, 비로소 저 언덕, 이 언덕이 없고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는 법성 생명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는 자력이자 불력이요, 불력이자 자력이라 할 것입니다. 자력이란 자기의 불성으로 승화된 경지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것을 원만 성취시키는 숭고한 공덕은 어차피 말하자면 부처님의 것이며 부처님에게서 온 것이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바를 정리해 보면 불교는 스스로의 수행에 의하여 부처님을 이루는 종교입니다. 거듭 말씀드려서 일체를 성취시키는 거룩한 공덕은 모두가 부처님의 위덕이요,부처님의 공덕이며 우리를 완성시키는 지혜도 자비도 깨달음의 위력도 부처님의 위신력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의 공덕을 성취시키는 힘은 불력인 것입니다. 범부에 있어 불력은 타력으로 보이지만 번뇌를 쉬어 분별심이 끊어지면 불력은 불력이요, 타력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2)불성과 무명

 

질문28), 인간의 본성은 원래 불성이지만 미혹으로 인하여 중생이 되었다고 하는데 불성 자체인 우리가 어찌하여 미혹에 빠질 수 있습니까?

 

본래 밝은 눈으로 보면 실로는 미혹에 빠진 적이 없으며 범부중생을 따로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천번 만번 미혹하여 중생이 되었다 하더라도 실로는 불성청정이 있을 뿐입니다. 그 점은 물으신 분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중생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밝은 불성으로 살면서 밝은 불성에 착각을 일으킨 것입니다. 본래 밝은 불성에서 밝은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본래 청정하여 화활 자재한 자기 자신에게 어느 한 부분에 주착한 것이니 여기에서 자기 본성을 등지게 되고 집착으로 인하여 경계가 생기고 경계에서 분별이 생기고 다시 그것을 반복하게 되므로 중생의 미혹은 깊어집니다. 알고 보면 미혹하였다 하나 딴 것이 있는 것이 아닌데 착각을 일으킨 것 뿐입니다. 본래 청정한 자성국토에서 부질없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중생으로 비유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생각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보면 일찍이 청정본분이 조금도 변한 바가 없음을 알게 되고 일찍부터 본성을 보면 일찍이 청정본분이 조금도 변한 바가 없음을 알게 되고 일찍부터 자신에게 감추어진 무가보주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신과 영의 구별

 

질문29), 신과 영혼과는 어떻게 다르며 부처님의 위치는 어떤 것입니까?

 

영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과 같은 것이며 이것은 인간이 육체로써 생존하다가 육체가 무너져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합니다. 스스로의 진리성품을 미혹한 상태인 점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으나 다만 육체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났으므로 육체에 대한 강한 집착의 여파로 심히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이 영의 일반상입니다. 여기에서 영에게 깨달음을 주고 의지할 곳을 가르치며 새로운 밝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기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천도입니다. 그러므로 영은 스스로 새로운 삶을 받든지 천도의 공덕을 입어 새 생을 받아 태어나면 그것으로 안정됩니다. 그런데 새로 태어나는 생이 인간과 같은 육체형태를 갖지 않을 때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악신, 잡신,천신같은 경우입니다. 이러한 신들이 착한 마음을 내어 불법을 옹호하면 선신이라 하고 설사 천상에 태어난 천신이라도 불법을 믿지 않는 신도 있고 그릇된 집착<사견>을 가지는 신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천상에 태어난 신은 선량하고 위덕이 있고 행복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신들은 저급신으로서 미혹한 생을 거듭하는 범부적 생애를 반복하게 됩니다. 천신 가운데는 큰 지혜와 높은 덕성과 큰 위력을 가진 고급 천신이 있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러한 위덕은 일반적으로 착한 마음, 정결한 행을 닦는 데서 오는 과보이므로 원인이 유위이고 유한이므로 천상의 복락도 유한합니다. 복이 다하면 다시 새로운 생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색계천에 태어나는 천신이나 무색계천에 태어나는 천신들은 대개 착하고 정결한 행을 닦는 외에도 정력을 갖추어 선정의 힘으로 뒷받침 되어 있으므로 수승한 경계를 누리기는 하나 이것 역시 유위이므로 유한합니다. 인간에 있어서 법을 깨달아야 하는 것처럼 영혼들도 진리를 깨달아야 고와 속박과 유한에서 벗어나며, 저급신이나 천신이나 고급신들도 마땅히 법을 깨달아야 중생의 속박경계를 벗어납니다. 법을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근원진리인 법성을 회복한 것으로서 법성 생명을 완전 회복한 것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진리자체이시므로 일체에 걸림이 없고 완전하고 원만하며 무한정의 생명과 대자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신성과 위덕의 근원이라 할 것입니다.

 

4)불교에서 신앙이란 부당한가?

 

질문30), 불교는 깨달음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까? 따라서 거기에는 각을 탐구하고 각을 실천하는 행위가 있을 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교에서 신앙을 말하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저는 불교에서 신앙이라는 말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귀하의 말씀에서 불교는 각이고 각행이 모두라는 말씀은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거나,말로만 각을 말할 것이 아니라 직접 깨닫고 깨달음의 행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불가불 수행이 있게 되는데, 이 수행과정에서는 불가불 신앙이 있게 됩니다. 깨닫지 못한 자는 완전히 깨달은 분을 믿고 그 가르침을 배워서 행하여야 합니다. 깨닫지 못한 자가 깨달은 분을 믿지 않고 그 가르침에서 구원을 받을 뜻이 없으면 몰라도 깨달은 깨달음을 이루려는 뜻이 있는 한 깨달음의 법과 깨달은 부처님과 그 밖에 성자에 대한 믿음과 숭앙이 반드시 따르게 됩니다. 미완성인 자는 완성을, 중도에 있는 자는 궁극에 이른 자를, 가고 있는 자는 승리하고 돌아오는 자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수행에서는 믿음과 이해가 온전히 갖추어야 바른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깨달음 자체이신 부처님이 나 밖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듯 하여 도 수행이 진행됨에 따라 부처님은 사뭇 가까이 계시고 마침내는 귀하 말씀대로 다시 밖으로 더 구할 것이 없는 본래상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스스로 각이오, 스스로 각행을 전개할 뿐인 것을 바르게 실천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큰 믿음에서 큰 수행,큰 수행에서 큰 성취가 있다는 말을 다시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5)쉬운 불교

 

질문31), 불교는 그 구성이 너무나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반대중은 접근하기 어렵고 포교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불교의 핵심을 쉽게 알고 전법하는 법문을 말씀해 주십시오.

 

불교는 원래 가장 쉬운 가르침인데 배우는 사람들이 온갖 논리적 무장을 가지고 있어 믿지 않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어려운 법문도 열려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불교는 높은 철학이 있는가 하면 치밀한 논리가 있고 접근하기 어려운 웅대한 교학체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불교의 진리나 불교가 설명하고 있는 온갖 중생의 차별세계는 부처님이 중생교화를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달나라에 갔다 온 사람이 달나라 설명을 한다 하여 그 사람이 달세계를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부처님의 말씀도 부처임의 밝은 지혜에 드러난 것을 설명한 <사실>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도 진리는 그렇게 있고우리가 믿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 존재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부처임의 가르임은 모두가 진실이고 중생을 미혹과 고뇌에서 건지시려는 지극한 자비이시고 최상의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워도 법문은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밝히는데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원래부터 온전히 드러나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인데 이런 법문을 어렵다고 회피하여 허망한 경계를 방황한다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물으신 바 가장 쉬운 법문 하나를 소개하지요. <모든 사람은 본성이 불서입니다. 원래부터 부처님의 무한 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스스로 존경하고 모든 이웃을 존중하며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에게 갖추어진 부처님의 무한공덕 무한능력을 발휘합시다. 수행하는 방법은 부처님께 감사하며 일심 염불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예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하면 부처님의 무한공덕 세계가 우리와 사회와 국토 위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행복과 성공이 있게 됩니다.

 

6)모든 종교는 6같은가?

 

질문32), 우리 주변에는 불교 외에도 여러 종교가 있습니다.그런데 이 모든 종교들이 필경한 진리에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모든 종교는 필경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서로 대립하는 것인가요?

 

우리 사회에 어떤 명목으로든 뿌리 내리고 있는 종교들은 각기 나름대로 우리 사회와 우리 겨레에게 도움을 주는 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종교들의 근원 진리가 하나인데서 그렇다기 보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역사 속에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점이 같다고 해서 종교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평화와 안녕을 가져오는 종교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목표하는 바와, 진리와 추구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습니다. 비유를 약방에 있는 약을 들어 말한다면, 어떤 약은 감기치료에 유효하고 어떤 약은 소화촉진에 도움이 되기도 할 것이며, 어떤 약은 위장을 튼튼하게 만드는 건위제도 될 것이며, 또 어떤 약은 몸 전체를 튼튼하게 하는 보약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약은 외부 세균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하고, 또는 일시적 마취나 진통의 효과를 가져오는 약도 있습니다. 이런 약들이 모두 건강에 필요하다는 점은 같으나 기능과 효용의 범위에는 큰 차이가 있씁니다. 어떤 약은 잠정적으로 써야지 자주 쓰면 해로운 임시적 효용이 있기도 하고, 어떤 약은 몸을 해롭게도 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또 어떤 약은 장복할수록 심신을 건전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종교도 어쩌면 약을 비유로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 교설이나 수행론이 일시적 위안이나 안정을 가져올 때도 있고, 때로는 그런 방법이 심화하면 할수록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부정하고 인간의 삶의 의미를 부정하는 해독을 낳는 종교 주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설사 똑같이 자비와 관용의 실천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가 목표하는 진리에 있어서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입니다. 일체 대립을 초월한 완전무결한 절대적 주체적 진리에는 원래로 아가 없고 따라서 대립이 없고 따라서 원만과 긍정과 진실과 창조가 있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지혜의 깊고 옅음에 따라 그가 도달한 진리도 높고 낮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처음부터 깊은 지혜로 높은 진리를 믿고 닦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여 가령 옅은 진리에서 대립과 차별과 죄악과 고뇌가 있는 차원의 종교에 머물어 있게 되면 필경 낭패를 봅니다. 고뇌에서 해탈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모르고 인간가치를 몰각하며 인간과 역사의 방향을 그르치게 되니 그런 종교의 해독은 참으로 큽니다. 때로는 인간이 어떤 절대적 권능자의 종속화가 되어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혹은 피아대립으로 사회계층의 대립이 격화되며 아나가 혼란, 전쟁이 떠나지 않게 됩니다. 종교는 모름지기 근원진리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체존재와 대립이 없는 궁극적 평화, 구원, 번영을 기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같이 살펴볼 때 우리 주변에 있는 건전한 종교들은 모두가 함께 우리 인간사회에 이익을 주는 점이 있고 대립하는 바가 설사 없다 하더라도 그가 목표하는 바나 근거한 진리에 옅고 낮음이 있으므로 같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7)번뇌의 본질

 

질문33), 번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번뇌는 원래없는 것입니다. 번뇌 번뇌하고 찾고 이것이 번뇌다라고 추궁하는데에 번뇌가 있게 됩니다. 원래없는 번뇌를 있다고 하는 것은 밖을 향하여 경계를 위하고 다시 경계를 집착하여 분별심을 일으키는 데서 생기게 됩니다. 혜능스님 말씀과 같이 <밖을 향하여 닦는 것을 국집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마음에서 바른 지견을 일으키면 >번뇌에 물들을 리가 없고 번뇌에 상관이 없게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체번뇌 경계를 당하여 오직 취하거나 버리지를 아니하면 번뇌는 원래로 없는 것이므로 깨달음도 또한 없어서 일체작용이 모두가 대광명체가 되는 것입니다.<다만 집착하지만 아니하면 곧 업에서 벗어난다.>하신 달마스님의 말씀은 이런 뜻에서도 이해될 줄 압니다.

 

8)멸도가 의미하는 것

 

질문34), 멸도에 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멸도에 들었다 함은 원래 열반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번뇌가 다 위어서 청정한 본 성품 경계가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멸도라 하면 열반을 증득한 것, 대도를 통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용은 좀 다릅니다. 이 몸이 있는 것은 번뇌의 표시이므로 이 몸이 죽었을 때를 번뇌가 사라진 것으로 해석을 하여 멸도에 들었다고도 말하며, 대개는 스님들이 입적하신 것을 멸도에 들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9)본 생명이 있는 곳

 

질문35), 생명은 나지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면 원래의 본 생명은 어디에 있다는 말이 됩니까?

 

사람은 생멸이 있는 면과 없는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육체 생명은 모태에 수태할 때에 시작하고 육체의 죽음으로 끝이 됩니다. 그러나 육체 생명을 가져온 뿌리인 미혹된 업식은 무명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이 무명 때문에 집착과 증애가 반복되어 여러 형태의 업식을 낳고 변화하는 생을 반복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육도를 윤회하며 생멸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의 눈에서 보면 무명이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본래 청정한 본성뿐이요,바라밀뿐이요,진여법성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생멸이 없습니다. 이것을 법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인간이 본성을 깨달아 법신을 알게되면 생멸이 없는 생명을 얻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생멸이 없는 속에서 무한히 생멸을 맛보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미혹중생이지요.본 생명이 있는 곳을 물으셨는데 저에게 질문하시고 저의 대답을 듣는 곳에 있다 하겠습니다.

 

10)지혜와 방편

 

질문36), 지혜와 방편의 차이는 어떤 것입니까?

 

지혜는 사람마다 자기 본성의 밝은 빛을 말합니다. 본성은 지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죄 지어서 변질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때 묻을 것도, 변할 것도, 다시 얻을 것도, 없는 본성 자체는 바로 법성이며 위 없는 진리입니다. 이 본래로 밝은 자성의 빛을 지혜라고 할 것이고 방편은 미혹한 사람에 대한 자비심과 밝음으로 이끄는 지혜가 미혹한 중생병에서 베풀어지는 특색이 있습니다.

 

11)불공의 활물

 

질문37), 스님께서 쓰신 <반야심경강의>를 보니 <무소득>에 대한 설명 가운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그러나 죽은 것이 아니라... 불공의 활물이라>하셨는데 유도 무도 아닌데 어째서 불공이라 하며 또한 활물이라 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요긴한 대문에 착안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무는 유의 한 형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밖에 어떠한 무도 우리 생각속의 유입니다. 그러므로 유.무도 아닌 도리로 헤아려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첫째 믿고 닦아가면 스스로 알아집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바로 이 유도 무도 아닌 한 물건의 전면적인 현전이라고만 우선 말씀드리겠습니다.

 

12)삼세상과 육추상

 

질문38), 범부들이 도를 깨달으려면 삼세 육추를 끊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삼세 육추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요?

 

자세한 것은 사전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는 이해에 참고가 되는 정도로 말씀드리지요. 삼세육추란 중생의 마음속에 형성되고 있고 미혹상태를 세밀한 것 3가지와 거친 것 6가지로 분류한 것입니다. 기신론에 있는 말씀입니다. 인간본성인 진여가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온갖 생멸과 유무를 나타내고 유전하는 미혹의 현상을 9가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세밀한 것이란 진여본심에서 주관도 객관도 나누어짐이 없이, 그 작용하는 형태가 미세하여 분명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거칠다고 하는 것은 근본 마음에서 주관과 객관이 대립하고 서로 상응하여 작용을 일으켜 그 모습이 거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청정보성에서 최초의 미세한 미혹은 삼세가 되고, 경계를 대하여 대상을 집착하고 분별하는 것이 육추가 됩니다. 삼세란 1. 무명업상을 말합니다. 그냥 업상이라고도 합니다. 근본무영에 의하여 청정진여심이 움직인 최초의 상태입니다. 여기에는 아직 주관도 객관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2. 능견상 : 견상이라고도 하고 전상이라고도 합니다. 무명업상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이것이 대상을 인식합니다. 즉 주관심입니다. 3. 경계상 : 현상 또는 경상이라고도 합니다. 능견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망령되이 나타나는 인식대상 즉 객관을 말합니다. 그리고 육추란 1.지상 : 이것은 경계상에 의하여 나타난 망령된 경계를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움직여 그 대상에서 맑다든가 더럽다던가 구별하여 혹은 좋아하고 혹은 멀리하는 지혜의 작용을 말합니다. 2. 상속상 : 앞서의 지상이 계속하는 모습으로 여기서 고와 낙을 구별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3> 집취상 : 고락을 구별하므로써 더욱 크게 집착을 일으킵니다. 4. 계명자상 : 집착한 사물에 대하여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형성합니다. 5. 기업상 : 이상에 집착과 미혹에 의하여 가지가지 선악행위를 하여 업을 짓습니다. 6. 업계고상 : 업을 지으므로써 괴로운 과보를 받고 육도에 속박되어 자유를 잊어 버린 상태입니다. 이상을 살펴보면 세밀한 데서 거친 데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힘써 업을 쉬고,집착을 쉬며,분별심을 여의는 수행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삼세심을 끊는데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이 삼세육추 상을 끊는 것이며, 그중에서 삼세심을 끊으므로써 필경 해탈이 있게 됩니다. 참선수행은 삼세심을 끊는데 중요한 방법이라 할 것입니다.중생의 망령된 경계가 삼세육추 상의 전개된 모습인 것을 알 때, 중생 경계 모두는 실로 공허하고 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르침에서 우리들은 망경에서 벗어나 항상 진여본성을 비추어 청정행을 닦아 나아갈 것을 힘써야 하겠습니다.

 

13)정토는 극락 뿐인가 ?

 

질문39), 저희들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정토는 극락세계 뿐인지, 또 있는지 말씀하여 주십시요.

 

정토는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공덕이 충만한 청정 국토입니다. 반대로 중생들이 사는 곳을 예토라고 부르는 것은 번뇌 때문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락에 머물어 계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중생들을 제도하시며, 그러기 위하여 큰 원을 세워, 오랜 겁을 닦으셔서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깨달음의 진리 자체이므로 둘이 없고 깨달음의 정토도 둘이 없을 것이나, 부처님께서 중생제도를 위하여 원을 세웠기 때문에 원을 따라 성취한 정토가 또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고 하였으므로 깨달음에 따라 청정을 성취하면 거기에 정토가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사바세계가 곧 정토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정토는 하나이고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은 깨달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 부처님께서 각기 원에 따라 정토를 성취하시므로 여러 정토가 있게됩니다.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라던가, 아촉불의 동방묘희세계, 약사불의 동방정유리세계라든가 여러 정토가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의 정토가 얼마나 수승한 공덕장엄인가는 유마경 불국품에 잘 보이는 바입니다.

 

14)오탁악세란 무엇인가?

 

질문40), 사바세계는 오탁악세라 하여 혼란이 많다고 말을 합니다. 오탁악세란 어떤 것입니까? 확실히 있는 것입니까?

 

오탁이란 5가지 장애요인을 말합니다. 첫째는 겁탁인데 시대가 오염되어 이 시대에 들면 기근, 역병등 천재나 전쟁 등이 발생하여 사회가 악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견탁인데 모든 삿된 사상이나 견해가 번창하여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고, 셋째는 번뇌탁인데 중생들이 탐심,진심등 온갖 정신적 폐단이 왕성하다는 것이고, 넷째는 중생탁인데 중생의 신심적 자질이 저하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명탁인데 수탁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수명이 짧아집니다. 이 오탁설은 인간 수명이 짧아지면서 오탁현상이 나타나고 처음에는 오탁이 희박하다가 차차로 성장하여 치열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탁현상은 원래 인간수명이 8만세에서 2만세가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지혜가 협소해져서 그에 따라 사회적 정신적, 생리적 혼돈현상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지견에 의지해서 굳세게 닦는 사람은 오탁현상에 상관없이 청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구체적 예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오탁악세에서 성불하시고 교화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시대와 환경을 탓하지 말고 바른 믿음을 세워 견고하게 정진하므로써 길이 청정한 자성을 빛내고 국토를 밝힐 결의가 있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반야바라밀법문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더욱 강한 자신감을 주고 있음은 다 아는 바입니다.

 

15)두타행이란 무엇인가?

 

질문41),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가섭존자를 두타제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두타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두타란 범어로 Dhuta입니다.한문으로는 頭陀,杜多,投多라고도 씁니다. 두타가 뜻하는 바는 닦고 털고 버린다는 뜻입니다.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려서 심신을 닦는 것을 뜻합니다. 털어 버린다는 것은 번뇌의 티끌을 털어 버리고 망념과 혼침을 털어 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두타수행에는 12항의 생활규범이 있어서 이것ㄱ을 12두타행이라고 합니다. 1) 인가를 멀리 한 조용한 곳에 머물고 2) 항상 걸식하며 3)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로 걸식하고 4) 하루에 한번 먹으며5) 절도를 지켜 과식하지 않으며 6)오후에는 먹지 않으며 7) 헌 누더기 옷을 입으며 8) 옷 3벌만 가지며 9) 묘지에 머물고 10)나무 밑에 머물고 11)빈 땅에 앉고 12) 항상 앉아 수행하고 눕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타행은 부처님 당시의 인도스님들의 생활규범이었는데 후세와 와서 두타는 산과 들을 다니며 고생을 견디며 행각 수행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행하며 행각수행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가섭존자는 가장 모범적으로 두타수행을 하셨다 합니다.

 

16)금강경 법문

 

질문42), 금강경은 <파의집현삼공> 법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무슨 뜻입니까?

 

금강경은 의심과 집착을 파하고 세가지가 공한 도리를 드러낸 법문이란 뜻입니다. 금강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평상대로 공양하시고 발을 씻고 법좌에 앉으시니 수보리존자가 의문되는 것을 부처님께 묻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의심을 풀어주시면 수보리는 다시 <법이 이런 것이거니>하는 지견을 내어 집착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그것마저도 옳지 않음을 말씀하시어 거듭 미혹의 구름을 헤쳐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설법은 중생들이 아에 집착을 하고 다음에는 법에 집착을 하고 다음에는 아도 법도 아닌 중도에 집착을 하며 유두 무도 아닌 삼제에 집착하는 것을 확연히 깨뜨려 버립니다. 이렇게 하므로써머문 바 없고 상이 없고 집착할 것이 없는 법성본분을 명랑하게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러기에 금강경법문이 일체지불과 일체제불의 법이 나온 곳이라 하는 것이며 반야를 일컬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 하는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17)옴의 뜻

 

질문43), 진언 앞에는 대개 <옴>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진언은 해석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옴자에 대하여 뜻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요.

 

진언은 번역하지를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진언은 범어이므로 당연히 뜻이 있습니다. 수행상 번역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므로 옛부터 번역하지 않았는데 뜻도 여러 가지를 지니고 있어 한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옴자에 대해서 참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옴은 범어 옹의 음사입니다. 기도할 때에 쓰는 말로 신성한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부터 기도어로써 쓰이고 철학 종교서의 첫머리에 두었다고 합니다. 원래의 음은 아 우 움의 합성된 것으로써 부라만교에서 늑별히 존중하는 3신을 뜻하기도 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진언 첫머리에 두는 것은 다 아는 바입니다. 수호국계다라니경에서는 옴은 부처님의 법신,보신,화신의 3신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여 옴자를 관할 것을 권하고 있고 그 공덕으로 무상보리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옴자에는 귀명, 공양, 3신, 깨달음, 섭복의 5가지 뜻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옴자가 법신, 보신, 화신 3신을 포함한 큰 뜻을 지닌 것으로 안다면 옴자를 염하고 관하는 방법도 얼마간 아해가 될 줄을압니다.

 

18)대세지보살은 누구인가?

 

질문44), 극락세계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얼마간 들어서 알고 있지만 대세지보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간략한 설명을 바랍니다.

 

대세지보 살은 득대세지, 득대세,대정진이라고도 번역되는 보살인데 세지는 그 약칭입니다. 대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에 의하면 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곁에서 모시는 미타삼존입니다. 대세지보살은 대지혜의 문을 주관하여 큰 지혜가 일체처에 이르러 대세력을 갖고 있으며 그 광명과 지혜가 제일이라고 합니다. 대세지보살의 지혜광명이 일체를 두루 비추어 지옥. 아귀. 축생에서 벗어나게 하며 또한 위없는 능력을 얻게 한다 하였습니다. 또한 이 보살이 가는 곳마다 항상 땅을 울리며 그 세력으로 인하여 수행자를 보호하고 악신 무리들의 장난을 끊는다고도 합니다. 또 아미타불이 열반에 들면 관세음보살이 성불하며, 다시 관세음보살이 입멸한 뒤에는 대세지보살이 성불하여 서방안락세계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19)금강경 사구게

 

질문45), 저는 금강경을 지송하고 있습니다만 경에는 사구게라고 읽고 외워 남을 위하여 해설해 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구게가 무엇입니까?

 

글자대로 말하면 4글귀로 된 게송을 사구게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8자로 된 4글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경의 뜻인 즉 4 글귀의 하나의 법문을 이룬 짧은 글이라 할 것이므로, 짤막한 법문이라도 읽고, 외우며,다른 사람을 위하여 해설해 주라는 것이 원뜻 같습니다. 종애에 사구게는 4글귀로 된 게송이라고 일러 오고 금강경에 4구게 또는 7사구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지송하는 금강경에는 게송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짤막한 글귀로 하나의 법문을 이룬 대문은 퍽 많습니다. 그러므로 금강경 사구게에 대해서도 경전 서술 형식에서 게송이라고 한 것 외에 ㅈ짤막한 법문 그 모두는 경에 말씀한 수지돗송하고 남을 위하여 설해 줄 사구게로 알아도 좋을 것입니다.

 

20)금강경 사구게는 어느 것인가?

 

질문46), 사구게에 대한 말씀 잘 알았습니다. 4글귀로 하나의 법문을 이룬 것을 사구게라 하셨는데 금강경에서는 어떤 것이 사구게가 되는지 다시 말씀해 주시면 저도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겠습니다.금강경에는 사구게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라는 것이 퍽 많습니다.

 

★흔히들 아시는 법문인데 또 물으시니 대답하지요.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여래는 보지 못하리라

 

◎무릇 있는 바 상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나의 설한 바 법을 뗏목으로 비유한 줄 알지만 법도 오히려 버리려든 하물며 법 아님이겠는가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잠깐이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여길지니라.

 

◎여래는 오는 바도 없고 또한 가는 바도 없으니 여래라 하느니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응당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이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아가 없고 인이 없고,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이 일체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글귀로 하나의 법문을 이룬 경전대문을 찾아보면 더 많이 있겠으나 우선 널리 알려진 것 몇 귀만 소개합니다. 잘 읽고 기억하시고 뜻을 이해하시어 수행에 힘쓰고 이웃에게도 널리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1)밀교는 무엇인가?

 

질문47), 밀교(密敎)가 무엇입니까?

 

밀교란 비밀하게 말씀하신 가르침으로서 겉만 보는 범부 지견으로는 알 수 없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원래 우리들이 이해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을 건지시고자 한량없이 닦으신 큰 공덕을 성취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중생들의 성질이나 능력에 상응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현교(顯敎)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의 몸이신 법신불(法身佛) 자신의 깨달은 내용을 보이신 가르침은 오직 부처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신불인 대일(大日) 여래의 설법을 밀교라 합니다.

 

22)밀교의 삼밀수행은?

 

질문48), 밀교의 삼밀(三密)수행이란 무엇입니까?

 

비밀한 삼업(三業)이란 뜻입니다. 부처님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행위를 범부들은 짐작할 수 없으므로 삼밀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삼업중 진리의 작용인 용대(用大)는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어서 삼밀이라 합니다. 또 중생들이 닦는 바 삼업이 부처님의 삼밀과 서로 응하게 되면 중생의 삼밀도 성취하게 됩니다.원래로 부처님의 삼밀은 전 우주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중생이 몸으로 결인(結印)을 하고 입으로 진언을 외우며 뜻으로 본존을 관하면 이것을 유상(有相)의 삼밀이라 하는데, 이 중생의 삼밀 위에 부처님의 삼밀이 가(加)하게 되면 삼밀 상응(相應)이라 하여 수행자와 부처님이 한 몸이 되어 그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 합니다.

 

23)신통이 사실 있는가?

 

질문49), 축지법이나 천안통 같은 신통이 사실 있는 것입니까?

 

범부로서는 헤아릴 수 없고 걸림없는 신력을, 마음을 닦는 사람은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이나 물리학의 법칙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것을 능히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원래 우리의 상식이나 과학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평상시의 의식차원에 건립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범상적 인간의 의식 차원을 깨뜨려 깊은 삼매와 같은 높은 의식 차원에 이르면 우리의 상식이나 과학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경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귀하에게 부탁할 것은 신통력은 도를 닦아 가는데서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것이 도이거나 법은 아니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신통에 관심을 아주 버리고 바른 깨달음에 노력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24)불교의 이타행

 

질문50), 불교는 석가모니불이 인간에서 출발하여 성불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불교는 스스로 수행하는 데 치우치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행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불교는 자기 일신 수도에만 힘쓰는 이기적인 종교가 아닙니까?

 

원래로 자기와 남을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약하면 세간이 불행하고 자신이 발고 덕스러우면 그만큼 사회는 밝고 따뜻해집니다. 스스로 힘써 닦는다는 것, 그것이 이기행만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남을 돕고 이롭게 하자면 자타 대립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오직 남을 위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자기 수행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 순수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위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자신에 있는 불심을 닦고 키우며 발휘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수행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리와 이타는 나눌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수행이 있습니다. 자기 수행에만 치우친다고 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성불의 길을 닦는 보살의 수행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 하여야 합니다. 거기에는 일체 중생을 위하여 또한 무상보리를 위하여 영겁을 두고 심신을 바치는 봉사와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귀하의 말씀은 불교 수행에서 각(覺)을 내세운 나머지 이기적 고집이나 안일을 경계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25)천당과 천상

 

질문51), 스님은 기독교의 천당을 인정하고 기독교 성경의 진실성을 인정하십니까? 또 기독교의 천당과 불교의 천상은 같은 것입니까?

 

기독교의 천당에 대하여는 그쪽에 물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성경의 말씀에 혹 불합리한 점이 있더라도 합리가 곧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부정하기 보다는 진실한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이 공부인의 자세입니다. 기독교 성경이 예수님이나 기독교 성인의 말씀의 기록이라면 그런 성인의 지견에 도달하여야 그 말씀의 뜻이 해독되리라 생각됩니다. 선행을 하고 계행을 가지면 천상에 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신 즉 성인을 믿고 사랑을 실천하면 어찌 선과가 없겠습니까? 천당과 천상의 이동(異同)에 대하여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불교가 보는 천상에도 많은 차별이 있습니다. 욕계천에서 무색계천에 이르는 사이에 28천이 있다 합니다. 따라서 천상이라 해도 복덕과 수명의 차이가 현격합니다. 기독교의 천당이 어떤 것인지는 성경 말씀에 근거 해야할 것입니다. 다만 두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함이 있는(有爲) 선행에는 유한의 과(果)가 따른다는사실과, 선행을 했더라도 법을 깨달아야 영원과 자재의 법본연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행을 했더라도 선심의 차이 정도에 차가 있어 선행의 결과인 선과에도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며, 선행도 유한하므로 선한과보도 유한이 되고 선과가 다하면 다시 다른 생을 받게 되니 결국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필경 법을 깨쳐 청정본성을 회복하여야 윤회에서도 벗어나고 영원과 자재를 누린다는 말입니다. 한 말씀 덧붙일 것은 불교의 천상은 이것이 상징이나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활 환경 국토가 엄연하듯 천상도 엄연한 중생 현실입니다.

 

26)불교의 종파에 대하여

 

질문52), 불교의 종파는 얼마나 됩니까? 종파가 벌어진 원인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불교 종파는 아마도 18개(80년10월 당시)정도가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것은 문화공보부에 등록된 단체입니다. 원래 불교 종파는 세 가지 기본요건을 갖추어야 성립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 : 종조(宗祖)가 명확하며, 둘째 : 부처님의 일대교설 가운데서 종조가 주장하는 종파로서의 독특한 교판(敎判)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교판은 부처님의 일대교설 중에서 자신의 교파가 뚜렷이 독립해서 성립하며 그것이 독립한 교단으로 성립될 만한 교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 그러한 종조가 주창한 특별한 종지(宗旨)를 여실하게 수행하는 수행자의 모임이있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종도(宗徒)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있는 약20개에 달하는 불교 종파가 과연 이 세 가지 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불교종파가 역사적으로 깊은 연원을 가진 종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정부의 법령에 따라 등록함으로서 종파가 된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등록과정에서 이와같은 불교의 독립된 종파로서 성립될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불교 전문가들의 권위 있는 심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27)불교의 현주소

 

질문53), 어떤 사람이 불교의 현주소를 물어 왔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종겠습니까?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는 어두운 황야에 횃불을 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땅 범부들이 진리를 모르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속에 지혜의 등불을 들고 나타나신 것이 바로 부처님이 오신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중생의 어두운 곳의 빛으로 오셨으니 불법의 주소를 묻는 다면 첫째 : 중생이 사는 곳, 둘째 : 중생이 고통받는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경에이르기를 "중생을 알면 불성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중생을 여의고 불법이 없고, 세간을 여의고 다른 곳에 불법을 구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횃불을 들고 중생 곁에 오신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들 불자들은 중생과 세간 살이에 모든 현실 속에 의한 평화 광명이 드러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8)사업장애와 선세업장

 

질문54), 저는 쉬운 일도 많은 곡절과 장애가 따릅니다. 이것은 선세업장인지요?

 

장애나 고난은 업장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무사, 안한(安閑), 안락보다는 고난이 오히려 인생을 키워가는데 요긴하고 정상일 수 있습니다. 수난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움은 우리의 힘을 길러주고, 용기와 자신을 키워줍니다. 지혜도 열리고 여러 가지 성격상의 결함도 고쳐줍니다. 고난이라 하는 인생에 대한 저항 요인이나 부담물이 없다면 인생은 발전하기 어렵고 오히려 퇴보하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업장이라고 생각될 만한 재난도 이것이 중대한 인간 수행을 가져다 주는 것이며 또한 선세에 지은 바 잘못된 허물이 소멸되는 과정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므로 고난이 나타나면 그것으로 고난 된 원인은 소멸되는 것이니 새로운 인을 짖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과거에 지은 허물이 잠복 상태에 있다가 나타나면서 소멸되니 이 점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나와 나의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이 과거에나 금생에서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행으로 새로운 인을 심어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어떠한 고난이라도 진실한 바른 믿음을 새워 굳은 신앙으로 나아가면 그 모두는 마침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재난 앞에 두려워 떨고 회피나 일시적 호도책을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여곡절이 많다" 그것은 생각 나름입니다. 그런 생각보다는 희망과 성취가 앞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가져 적극적, 긍정적, 낙관적, 희망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지혜이며 자기 자신의 생활을 밝혀가는 등불인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29)어떻게 업장을 소멸할까?

 

질문55), 우리의 생활에 고난과장애가 있는 것이 모두가 업장 탓이라고들 합니다. 업장을 소멸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입니까?

 

업장이라는 것이 원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니 의지에 의한 심신의 활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청정한 본성을 어기고, 상대와 경계를 보고 생각하며 활동하는 그 모두를 말합니다. 그런고로 본성을 어겨 경계를 보고, 상대에 떨어져 대립관계에 있게 되므로 업의 결과는 진리세계에서 벗어난 대립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업의 결과로써 장애가 생기니 이것이 업장입니다. 그러면 업장을 소멸하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 미혹에서 벗어나 청정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향하여 수행하는 염불참선이나 그밖의 수행들이 모두가 업장소멸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둘째 : 자기 중심의 생각을 버리고 집착을 버린 자비한 마음으로 보시를 행하는 등 애착된 마음을 너그럽게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탐심을 버리고 자비보시하는 모든 행이 업장을 소멸시킵니다.

 

셋째 : 대립감정을 버리고 자비심으로 협동하고 너그럽게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움을 버리고 원망을 버리고 노여움 등 대립감정에서 오는 일체 감정을 버리도록 힘쓰며, 평화하고 너그러운마음이 업장을 소멸시킵니다

 

넷째 : 사심없는 평등행을 행하고, 매사에 남을 돕는 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대립이 없고 밝고 청정한 참자기를 운용하는 것으로 큰 지혜의 행이 됩니다. 미혹에서 오는 속박된 행을 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 하루하루의 생활은 이것이 지금까지 지어온 바 과거업의 실현이므로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이 하루하루 업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새로이 업을 짖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청정본성행을 행할 때 많은 업장은 소멸됩니다. 원래 업은 미혹한 중생의 경계이고, 깨달은 본분에는 없는 것입니다. 본분상에 업이 없고, 업장이 없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반야입니다. 그러므로 청정본분을 깨달아 끊임없이 청정을 닦고 행하는 것이 해탈의 길을 행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이나 보현행원 등은 모두가 청정본분을 행하여 업장의 무(無)를 실현하는 수행이기도 합니다. 항상 부처님의 대자비 위신력을 믿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구하는 바 없이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업장소멸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참회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지은 바 모든 허물을 지성으로 참회하는 것입니다. 알고도 범하고, 모르고 범하기도 한 모든 허물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불보살전에 깊이 참회하며 염불 독경 기타 선행을 닦습니다. 참회에서 주의할 것은 진심으로 참회하면 죄업이 소멸되는 것을 믿고 무거운 죄의식이나 자기 처벌의식에서 벗어나 밝은 마음으로 선공덕을 닦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30)업장과 성불

 

질문56), 업장이 두터운 저희들도 성불할 수 있습니까?

 

업장이 있다고 하나 그 뿌리를 찾아보면 업장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오히려 공부를 방해하였던 업장이나 번뇌 망상이 깨달음의 광명인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록 지금 업장이 망망하여 업장에 갇혀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미혹하여 그렇게 느낄 뿐 실로는 불성광명 찬란한 것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현실로 느끼는 온갖 사항에 마음 팔리지 않고 일심으로 마음의 근원을 추궁하는 등 공부를 지어가면 아침 해가 솟아오르듯 우리의 마음의 진리의 태양도 밝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밝은 성품을 보면 다시 성불을 논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견성이 성불인 것입니다. 견성공부는 번뇌심으로 시작하는 것이지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조사들이 그러하였습니다.

 

31)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관계

 

질문57),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반감을 일으키거나 원한이 없이 오히려 감사하라고 들었습니다만 가해자는 내생에 과보를 받고 피해자와 위치가 바뀌어 다시 대립관계가 있게 되는 것입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반감을 일으키거나 원한이 없이 오히려 업장소멸이라고 생각하고 감샇면 그 사람은 가해자와 관계에서 같은 대립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생에 입장을 바꾸어서 다투는 일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피해자 측이 피해의식없이 용서하고 무심하여졌지 때문입니다. 만약 분하게 여기거나 보복심을 일으키면 설사 금생에 보복하지는 않았더라도 후생에 위치가 바뀐 대립관계가 밥복됩니다.또한 피해자는 용서하고 무심한데 가해자가 가해심이 쉬지 않으면 가해자 마음이 거칠고 불량하므로 그 과보를 단독으로 받게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32)지은 업과 견성

 

질문58), 견성한 사람이라도 견성하기 전에 지은 업을 받게 됩니까?

 

지은 업에 따른 과보는 반드시 받습니다. 그러나 견성한 사람에게 과보가 나타나도라도 과보로서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비유를 들어 말하면 과보라는 구름이 덮여 와도 견성한 사람은 구름 위 태양 같은 위치에[ 있으므로 구름이 구름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하여 도력을 이룬 사람이 업장이 소멸된다는 것도 이런 뜻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3)윤회의 근거

 

질문59), 윤회는 참으로 있는 것입니까? 윤회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윤회는 눈을 열고 보면 고통스러운 생사의 세계가 아니고 온 천지가 해탈 경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는 윤회는 윤회가 아니게 됩니다. 또 미혹한 경계의 연속인 윤회는 이것이 미혹에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윤회전체가 하나의 꿈속을 돌고 도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꿈을 깬 자리에서 보면 윤회가 없는 것이고 꿈속에서 보면 분명히 윤회가 있는 것입니다. 귀하가 참으로 눈을 열었다면 윤회로써 자재할 것이며 또한 윤회가 없는 경계를 수용하겠지만 만약 그러하지 못한다면 윤회의 경계를 엄연한 현실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하면 윤회의 근본인 힘은 자성의 신령하고 묘한 힘이라고 하겠으며 윤회라는 경계를 나투게 되는 것은 이 자성을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경계를 취하므로서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해답도 있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자성을 깨닫는 것이요, 둘째는 경계를 취하지 않고 경계에 물들지 아니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아니하고 항상 마음에서 정견을 일으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34)영혼의 존재

 

질문60), 사람이 죽어서 영육이 분리되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질문과 같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었을 때를 말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사유라 한다. 사유라는 말은 죽는 순간의 존재를 뜻하는데 이는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진실한 생명체는 영원하고 불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불멸하는 생명체는 곧 아라야식이라고 한다. 이 아라야식은 윤회의 주체로서 업력에 따라 인연이 화합하는 세계에 가서 태어났다가 만약 인연이 다 되면 또 그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출생하고 사망하는 것을 겉으로만 보고 몸이 무에서 출생하고 또 그 몸은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사라져 없어진다고 하는 단절된 견해를 갖기 쉽다. 그러나 내면의 생명체는 몸의 출생과 사망에 관계없이 영원한 것이다. 다만 선업과 악업 등의 업력과 이승에 사는 부모의 연과 화합하여 나타나는 과보 즉 인간의 몸을 나투고 동시에 그 몸에 의탁하여 일생을 이승에 머물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이 의탁하고 이ㅐㅆ는 이승의 몸은 생.노.병.사 등 무상한 진리에 의하여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몸에 의탁할 수 없는 시기가 오면 아라야식은 곧 몸에서 이탈하여 또 다른 인연처를 만나러 떠나게 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이 몸에서 떠나는 순간을 사유라 하고 또 세속적으로는 죽음이라 표현한다.그러므로 아라야식의 체성은 <몸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사람이 죽으면 영원히 없어져 버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며 여기에 허무감을 갖게 된다. 이러한 허무감과 생명의 단절 사상을 없애주는 것이 운회사상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몸에서 벗어난 아라야식,즉 영혼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까지를 중유라고 한다. 중유라는 말은 다른 인연처를 만나기 전까지의 중간 생명체를 뜻하는 것인데 이 중유의 존재시기설은 다양하다. 그것은 중생들의 업력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인간의 영혼에 업력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 죽자마자 즉시 저승에 가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는 영혼이 중유기간을 갖지 않고 사후 즉시 지옥이나 색계 이상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왜냐하면 지옥에 가는 영혼은 악업이 너무나도 강하고, 또 무색계등에 내어날 중유는 선업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이다. 최고로 강한 업력은 즉시 힘을 발휘하여 또 다른 과보를 즉시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영혼은 우주공간에 머물러 있다가 저승에 태어나게 된다. 저승에 태어날 때까지의 머무르는 기간은 매우 다양한 것으로서 어떤 영혼은 1주일 또는 2주일만 머물다가 인연을 만나 태어나게 된다. 그래도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3주일,4주일 5주일 내지 7주일을 공간에 머무르게 된다. 7주일일이 되면 거의 저승의 인연을 만나 각양각색의 몸을 받고 또 환경을 만나 출생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7주일이 되어도 인연을 만나지 못한 혼이 있으면 그후로도 계속 우주의 고혼으로서 기약없이 헤매게 된다고 한다.그런데 저승에 태어나기 이전의 중유는 업력에 의하여 윤회하는 것이 잠시도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다만 내생의 몸만 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윤회하고 있는 모습은 이승과 똑 같다는 것이다. 그 중유의 모습들은 이승의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하며 그것은 각자가 지은 업력이 천태만상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장으로 어떤 장소에 다 찍으면 그 장소는 도장과 같이 인쇄되듯 이 중유의 업력도 마치 도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유는 금생의 업력에 의하여 허공애 존재하게 되며 크기는 인간의 5,6세 정도의 몸을 가지고 생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 중유들 가운데 악업을 많이 지은 중유는 흑색의 광명을 나누며 살고 또 항상 암흑세계에서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선업을 많이 지은 중유는 백색의 광명을 나투며 광명의 세계에서 별고 구애없이 자유록베 거주한다고 한다. 이 흑색의 광명설은 흑은 악을 뜻하고 백은 선을 의미한다는 경전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리고 악은 무지이면서 고와 연결되고 선은 지혜로우면서 낙과 연결되기 때문에 중유의 기간에 있는 중생들도 비록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몸은 받지 안했다고 하더라도 이승에서 지은 선악의 업력에 의하여 찰나 찰나 고락의 과보를 받으면서 생활한다. 그러므로 이들 중유의 영혼은 이승의 중생들과 같이 몸이 사망하고 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업력에 의한 생과 사가 있게 된다. 업력이란 습기가 본질인 것이며 각자가 습관적으로 익힌 기운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중유의 중생들도 이승에서 습관을 익힌대로 생활하게 되는데 선업을 가진 중유들은 역시 악업을 가진 중유들끼리 모여 산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제각기 업력대로 관찰하기는 하지만 모든 장애물의 구애를 받지 않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천안을 갖고 있으며 도시에 서로 보고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다.그리고 식사는 냄새만을 먹고산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공갼에 있는 냄새를 식사한다고 해서 중유를 건달바라고 이름한다. 또 다른 이름을 보면 다음의 생을 구하려 한다는 뜻에서 구유라 하고 또 정신적인 체성이라는 뜻에서 의성이라고도 별명을 붙인다. 이들 이름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중유 기간에 있는 영혼들도 자신의 생의 애착이 강하다. 동시에 중유들은 선도와 악도에 태어날 가능성을 뜻하는 표시로 업력에 따라 그 태도가 다르다고 한다. 예를 들면 색계와 같은 선도에 가서 태어날 중유들은 머리를 위로 쳐다보며 행동하고,반대로 지옥과 같은 악도에 가서 태어날 중생들은 머리를 아래로 쳐다보며 행동하는 등 여러 가지 태도를 나타내며 생활을 한다. 이는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익히고 배운 습관에 의하여 언어와 행동등을 서로 다르게 행동하는 것과 같이 미루어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유기간에 있는 영혼들은 의성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바와 같이 뜻이 매우 예민하여 색다른 인연을 만나면 즉각 변화를 일으키는 가능성이 가장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천도식을 거행할 때 그 천도의식에 나타난 독경의 진리가 곧 중유에게 전달될 수 있고 또 영혼의 악업을 없애주고 극락세계로 천도할 수 있는 기회는 곧 중유의 기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중유가 멀리 볼 수 있는 천안도 가지고 있지만 먼 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천이와 천안은 멀리 보고 듣고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뿐이며 천국의 천인들과 같은 청정무구한 천안과 천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유는 업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 업을 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존재임을 생각의 예민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망하고 있는 도중은 물론 사망 직후와 적어도 49일 까지는 천도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그 사망자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다.

 

35)인간으로 태어남

 

질문61), 어떤 절차로 다음생의 육체를 만나는가?

 

앞에 사후의 영혼의 존재하는 모습들에 대해서 말한 바와 같이 사망 직후와 또는 49일까지는 내생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밖의 주장은 49일 이후에도 내생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우주 공간에 더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중유기간에 자신이 태어날 곳을 쉴새없이 찾아 헤맨다고 한다. 그러다가 만약 자신이 태어날 곳을 발견하게 되면 즉각 태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중유기간의 아라야식<영혼>은 이승에서 지은 모든 업력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존하고 있는 가운데 악업은 곧 무명이라는 번뇌와 같기 때문에 진실을 왜곡하고 착각을 야기시키는 쪽으로 영혼을 유도한다. 반대로 선업은 지혜와 같은 슬기를 조장해 주며 모든 사물을 올바로 관찰하도록 영혼을 유도한다. 이와 같이 악업과 선업의 작용이 아주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악업은 영혼의 지혜를 가로막고 지옥과 아귀와 축생 등의 삼악도라 할지라도 오히려 낙원으로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선업은 지옥과 같은 악도는 괴로운 곳이고, 천상세계와 극락세계와 같은 곳은 곧 안락한 곳이라는 진실 그대로 알 수 있는 지혜를 갖게 한다. 이러한 업력의 장난 때문에 아라야식에 해당하는 영혼은 악업에 의하여 지옥을 낙원으로 착각하고 즉시 가서 태어나는가 하면 선업의 힘으로 천상세계와 극락세계를 올바로 관찰하고 즉시 가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업력의 힘을 불가사의하게 발휘된다. 그런데 태어나는 모습은 태에 의지해서 태어나는 것과 알에 의지하여 태어나는 것과 습기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과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단독으로 몸을 타나내는 것등 사생의 형태가 있다. 이 가운데 태생은 우리 인간이 태어나는 모습이기 때문에 이를 비유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가령 어떤 영혼이 인간으로 태어나려 한다면, 첫째로 삼대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부친과 모친과 영혼이 서로 화합하여야 하며 그 가운데 부모에게 병이 있거나 또는 부모들의 뜻이 서로 맞지 아니하면 그곳에 내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영혼은 중유기간에는 신통력이 대단하여 자유롭게 다니고 활동하지만 만약 태어날 곳을 발견하고 또 그곳의 환경과 인연이 화합하는 조건이 마련되면 그때는 중유의 업력이 그 부모와 환경에 알맞는 업력으로 변화한다. 왜냐하면 업력이란 자신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면서 현세에도 그 환경에 적응되지만 내세에도 그곳의 환경에 적응되도록 하는 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 인간이 평소에 보고 듣고 한 지식이 현재의 생활에 적응하는 힘을 발휘하듯이 내생에도 자신이 익힌대로 그 사회의 환경에 적응시미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인간으로 태어날 때는 인간적인 정신과 몸을 받아 살도록 하는 업력이 있는데 이를 불공업이라 한다. 불공업이란 말은 곧 자신만이 수용하는 업력이며 다른 사람과는 공동으로 수용하는 업력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이 조성한 업력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수용하는 업력이 있는데 이르 공업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비롯한 사회 등과 함께하고 대자연을 함께 수용할 수 있는 업력을 우리는 현재 조성하고 있고 또 인간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그러한 업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업력은 개인과 공동의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인력이 있는데 그서을 한 말로 표현 하여 계계라고 한다. 계계의 의미는 업력은 자신이 태어나는 세계에 계박 또는 구속시킨다는 뜻이다.다시 말하면 업력대로 삼계육도 가운데 어디든지 가서 그 세계의 몸과 환경을 받아 살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업력을 낚시바늘에다 비유하기도 한다. 낚시바늘이 비록 작지만 큰 고기를 꼼짝 못하도록 하고 목적지까지 끌고 가는 것을 업력에다 비유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업력은 영혼을 꼼짝 못하게 하여 전생에 지은대로 그 세계에 가서 과보를 받오록 한다. 만약 인간세계에 태어날 업력을 가진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은 인간계의 부모와 환경을 택하도록 하고 또 부모들의 모습을 닮아 의식생활까지도 유사하게 하도록 하는 업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욕계에 속한 인간의 부모는 애정을 갖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로 태어날 영혼도 업력대로 부모를 발견하게 되면 그 부모에게 필연적으로 애정을 품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욕계중생은 오욕이 있으며 오욕 가운데서도 음욕이 우선하는 업력이 발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약 남자로 출생할 영혼은 특히 어머니에게 애정을 품고 점점 접근하게 된다. 또 여자로 태어날 영혼은 인간세계의 성생활과 간이 성의 반대인 부친에게 애정을 품고 접근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영혼에게는 어머니 의 태중이 마치 궁중과 같이 보이고 또 더없는 낙원으로 착각하며 그곳에 도착한다고 한다. 아라야식이 중유의 기간을 마친 순간은 곧 어머니 태중에 도착한 순간을 말하며 태중에 도착한 순간을 생유라 한다. 생유는 모태에 순간을 뜻하는 것이며 동시에 바로 인간으로서 생활하는 본유가 시작된다. 본유는 어머니 태중에 태어나서 지상에 나와 죽는 순간까지를 말한다. 생유에 대해서 좀더 말해보기로 한다. 영혼<아라야식>은 전생의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있고 또 그 업력으로 말미암아 본래 윤회의 주체인 아라야식을 비롯한 모든 정샌계와 육체까지도 출생케 할 수 있다는 뜻에서 총인, 또는 이숙인이라 한다. 이러한 업인은 연을 만나지 못하면 결과인 과보를 받지 못하게 되는데, 이때의 연은 곧 부모가 된다. 그리하여 전생의 아라야식<영혼>을 중심한 모든 업력은 인이 되고 부모는 연이 되어 이 두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라는 형태를 마련할 수 있는 과보를 받게 된다. 이때의 과보를 총보라 하는데 그것은 이 최초의 과보가 바탕이 되어 다음의 이목구비와 오장육부등 모든 인간 형체를 구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총보에 대하여 다음의 여러 형체는 별보라고 하는데 별보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인간의 정신계는 아라야식이 최초로 변화하여 말나식과 의시등 칠식을 발생시킨다고 해서 초능변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최초의 생명체인 아라야식이 동시에 육체 등 여러 형체도 발생시킨다.소승불교를 비롯한 여러 논전에는 이러한 최초의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를 갈라람이라 한다. 갈라람은 응활이라고도 번역하는데 그것은 부모의 정혈과 전생의 업력을 가진 아라야식<영혼>과 화합한 최초의 태아가 응고된 물방울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태아가 한낱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부모도 잘 모르는 태아기를 뜻한다. 그리고 갈라람은 생후 일주일을 뜻하는데 이로부터 액부담위와 폐시위등의 오위 내지 팔위의 성장을 거쳐 9개월 또는 10개우러 만에 모태로 이 지상에 태어나게 된다. 우리는 이 지상에 태어난 것을 생일이라고 하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위에서 말한 생유의 순간인 것이다. 영혼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대략 이상과 같으며 이는 신앙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만이 그 내용과 부합될 것이다.

 

36)전생사의 기억

 

질문62), 우리가 전생사 등 과거에 대해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전생사 등 과거사에 대해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기억력을 방해하는 업력 때문이다. 업력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혜롭게 무엇이나 알수 있도록 하는 힘도 발휘하지만 그 반면에 지혜롭지 못하게 하는 방해의 역할도 한다. 왜냐하면 정신과 육체는 전생의 업력에 구속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계계(繫界)의 법칙에 의해서 그러하다. 또 하나는 번뇌의 장애 때문이다. 번뇌는 진리를 바로 알고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알 수 있는 지혜를 방해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번뇌를 장애(障碍) 또는 부폐라고도 부른다. 이는 마치 장님이 무엇이든지 볼수 있는 심안(心眼)을 가지고 있지만 눈이 불구가 되므로 서 육안(肉眼)의 장애를 받아보지 못함과 같다. 이와 같이 인간은 전생사를 기억해 낼 수 있는 지혜가 있지만 무명(無明)을 비롯한 번뇌의 장애를 받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부처님과 보살님들과 같이 육신통(六神通)의 신통력을 이미 보존하고 있지만 번뇌와 업력의 장애 때문에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색계천(色界天)에 살고 있는 천인들은 전생의 일들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것은 산업과 지혜를 많이 갈고 닦았기 때문이다. 선업(善業)은 몸을 자유롭게 해주고 또 지혜를 나타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거천(空居天)의 천인들은 업력과 번뇌의 장애를 받지 않아서 전생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계는 물론 선도(善道)에 속하기는 하지만 아직 업력이 두텁고 번뇌의 장애가 심하기 때문에 전생사는 물론현생에서 경험한 일도 자주 잃어 버리게 된다. 그러나 수년 전에 기억 상실증에 걸려 과거사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다가 다시 과거사를 생생하게 기억해 내는 경우가 있는 바와 같이 우리도 전생에 경험했고 체험했던 일들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아라야식이라는 마음의 주체에 모든 과거사를 저장해 놓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재생하여 기억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라야식은 모든 업력을 유실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정신체로서 업력과 번뇌가 정화되면 과거에 체험했던 모든 일들을 정화된 지혜를 통하여 생생하게 기억하고 또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이때의 지혜는 과거사를 알 수 있는 숙명통을 비록해서 육신통이 될 수 있고 또 성소작지(成所作智)와 묘관찰지(妙觀察智)와 평등성지(平等性智)와 대원경지(大圓鏡智)등 사지(四智)를 말한다. 이들 지혜는 번뇌의 마음과 업력이 정화되므로서 다시 나타나는 인강의 본성이다. 이들 지혜는 모든 지혜를 대표할 수 있으며 또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전생사뿐 아니라 무엇이든지 알 수 있도록 하는 본성의 작용이다. 우리는 업력과 번뇌 때문에 어머니 태중에 태어나서 지상에 출생할 때까지 어떻게 해서 태어나는지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본성이 항상 지혜로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정화하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사는 것이 불자의 생활이라 생각한다. 수행의 목적은 내생에 극락 가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금생에 모른 것을 알 수 있고 또 모든 진리를 알고자 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데 수행 목적이 있으며 더욱 나아가서 보살이 되고 성불까지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전생사를 아는 것쭘은 오히려 지말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사망하여 태어날 때까지의 중간 생명이 무엇ㅇㅣㄴ가를 알고 싶고 또 태어나는 과정과 전생사를 알고 싶어하는 충동이 가끔 있다. 그러나 모두 인간세상 이전의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 적은 것이 추상적인 것이 될 우려가 없지 않으나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확실히 믿고 그 말씀에 의하여 여기에 간단히 소개한 것이다.

 

37)윤회의 끝

 

질문63), 범부는 자기가 지은 바에따라 육도를 윤회한다 하는데 윤회에 끝이 있는 것입니까?

 

윤회란 미혹에서 있는 말이며 미혹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잘못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입자에서 보면 윤회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또 범부가 미혹으로 인하여 윤회가 시작되었을진데 깨달음에 이르면 윤회는 없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미혹과 함께 끝이 없습니다.

 

38)바라밀 수행과 해탈

 

질문64), 불교의 근본 목적은 열반에 들어 일체 속박에서 해탈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다면 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듯이 자신을 닦아가며 국가와 사회를 밝게 해 나가도록 정진하는 것은 윤회를 끊고 해탈하는 목적과는 거리가먼 것이 아닙니까?

 

좋은 말씀입니다. 열반이란 일체 번뇌가 없는 것이므로 만약 열반을 이루면 번뇌를 근거로 하는 일체 속박에서 해탈하고 윤회라는 몽환의 휘돌림을 벗어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해탈의 길에 이르는 수행하고 닦는 방법이 어떤 것이냐가 문제되어야 합니다. 물으신 분도 말했듯이 국가 사회를 혁명적으로 개혁하기에 앞서 먼져 자신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미망에서 벗어났을 때 그가 행하는 모든행동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에 진리의 빛을 비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닦아 간다는 것이 요점인데 닦는데는 대체로 두 길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본래로 번뇌가 없고 속박도 없고 생사가 없는 것을 깨닫는 길이고 또 하나는 자기 본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번뇌가 없으며 오직 진실만이 참자기인 것을 알아서 그것을 구김없이 내어 쓰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머무름 없이 집착함이 없이 청정행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위 두가지 방법에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며 그 모두는 닦는 것이 근본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닦아가며 사회를 밝히는 수행이 불교 목적과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궁극 목적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39)영혼니 오고 가나?

 

질문65), 사람의 영혼은 수백개라고들 하던데요, 49재를 베풀어 영가가 좋은 곳으로 태어났다면 그 사람의 기일에 제사 지낼 필요가 있을 까요? 그런데도 천도행사에 오래된 선망부모까지 동참 축원할 필요가 있을까요? 영가는 벌써 업을 따라 육도중 어느곳이든 가지 않았겠습니까? 또 혼이 여러개 있어서 혹은 업대로 가고 혹은 무덤에 남아 있기도 하는가요? 또 집터에 명당이 있다던가 사주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는가요? 금생의 노력에 따라 운명적 사주팔자도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불법은 원래가 이론이나 사유밖에 도리이므로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원래가 어려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물을 대하여 사유하고 논리적 합리과정을 거쳐 긍정도 부정도 하고 있으므로 말이 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역시 말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문하신 바 혼에 대하여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째 물음이 혼이 하나이냐? 여러개이냐? 인데 혼은 미혹한 의식형태,행위와 사유의 의식적 형태라고 할런지... 하여튼 혼이란 업의 총체적 표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미혹상태는 우리가 육체로 볼 수 있듯이 업의 형태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체는 원래가 법성진여가 있을 뿐이고 미혹하여 나타난 겉현상은 실이 아닙니다. 미혹한 경계에서만 있게 되는 것이지요. 법성은 원래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라고도 할 수 없고 절대라고 하여도 부득이 한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실로는 법성 본성이므로 나뉘어도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절대적인 하나 법성진여일 뿐입니다. 깨달아도 그것, 미혹해도 그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인간이 댔든,죽었든,천상에 태어났든, 이웃집 아기로 태어났든 원래가 동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이 수백 개라고 말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디에 태어났든 그를 향하여 공양하거나 그를 위하여 독경하는 것은 그 사람의 면전에서 하는 거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위패를 차려 놓고 제사지내는 그 자리와 새로 태어난 천상이나 이웃 사람과 거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위패를 차려놓고 제사지내는 그 자리와 새로 태어난 천상이나 이웃 사람과 거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49재 이후 타방세계에 태어난 사람에게 제사나 도경공양하는 것이 유효합니다. 기도때나 우란분재에 천도공양해도 유효합니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영가가 간다 온다 하지만 법성은 본래가 거래가 없는 것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또 집에서 3대까지 제사를 모시는데 그 제사에 올 영가가 없다는 생각도 해답이란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삼흔칠백을 물으셨는데 저는 아직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미혹한 사람의 구조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예 : 심령학), 사람은 육체 아래에 감정과 욕망을 통솔하는 유체가 있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에텔제, 그리고 유체보다 깊고 안정된 이성체인 영체 그리고 근본 중심인 실체, 또는 본체가 있다고 하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깊은 심성과 겉육체에 이르는 사이에 다층의 단계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보면 욱체에 가까운 유체나 에텔제 등은 육체는 설사 허물어져도 잠정적 존속이 가능하나 그것은 깊은 본체의 뒷받침이 없으므로 조만간 소멸된다고 볼 것입니다. 옛부터 이르기를 사람이 죽으면 혼은 극락에 돌아가고 백은 땅속 유택에서 편히 머물라 한 것도 이런데서 온 생각이 아니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이 분열될 수 없고 나뉠 수 없습니다. 육체다, 영혼이다. 나누는 것은 현상적인식을 토대로 한 입장에서 분별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 부별에 따르면 현상적인 일을 이해하는데 혹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실다운 지리로 사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법성본분과 독존난사의 믿음을 바탕으로 모든 일에 하나하나 정성을 다하는 것을 권합니다. 끝으로 명당자리와 사주를 물으셨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런 일에 관심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런 문제는 너무 관심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운명은 스스로가 지운 것이며 또한 지금 스스로 짓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묵은 타성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그것이 확고하여 오늘 우리에게 위압적 힘으로 작용해 오는 듯 보여도 그 모두는 원래가 공이므로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바꾸어 법성진리에 수순한 확신으로 살아갈 때 밝은 앞날이 열리리라 생각됩니다.

 

40)인과는 속박인가?

 

질문66), 우리들은 전생에 지은대로 금생을 운명적으로 만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인과에 속박되어 전생에 지은대로 살아가는 참으로 답답한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인과라고 하는 것은 남이 만들어서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인공입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새로운 인연을 지으며 끝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과는 연을 따라오는 것이지요. 마치 그림자와도 같습니다. 본체가 움직이는 대로 위하는 자세대로 그림자는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생각하지 말고 자기의 바른 목표를 향하여 지혜롭고 용기있게 전진하는 것이 인간 자세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과는 속박의 법이 아니라 창조의 법이며, 자율의 법이며 해탈의 법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인과법칙을 속박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고난의 현실이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내가 만나는 사건 등은 물론 이제까지 우리 자신이 지은 원인에 대한 과보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우리가 만든 것이며 지금도 새로운 원인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완전한 채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것입니다. 절벽을 만났으면 몸을 회전하고 장애물을 만났으면 그를 넘어서 가듯이 무한 대한 지혜와 힘을 우리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착안하여 창조적 생애를 열어가는 것이 인과법입니다. 아무리 기왕에 지은 업의 타성이 밀어 닥쳐도 그 업의 조종자는 우리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때 꼭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업의 실체는 실로 무라는 사실입니다. 있어도 환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있는 것은 법성 실상 뿐이요, 자성 광명 뿥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알면 자재하게 인과법을 구사하여 뜻대로 스스로와 환경에 변혁을 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과를 위한 방식이 아니라 진리를 사는 원리인 것입니다.

 

41)불구아와 과보

 

질문67), 사람이 태어날 때에 불구자나 기형아로 태어난 경우 이것도 인과에 따른 과보를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요?

 

신생아가 가진 신체적 특징은 일반적으로 전생의 과보로 보아야 하겠지요.나쁜 과보를 특별히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전생의 미혹으로 인한 업인에 근거하여 업과를 받은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그런 과보가 나타나므로써 업인이 소멸하는 것입니다. 다만 예외도 있습니다. 높은 영적 수준을 가진 고급령들이 보다 높은 수업으로 자기향상을 하고자 짐짓 선택한 불구아의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태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심히 격한 노여움이나 기타 감정을 품었을 때 그로 인한 독성 때문에 아기가 귀머거리가 되는 경우입니다. 그밖에는 역시 태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약을 잘못 먹었을 경우인데 이것은 현대의학이 증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42)전생업과 수행

 

질문68), 선한 업을 지으면 좋은 과보를 받고, 악한 행을 한 자는 나쁜 과보를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고 수행하여도 전생의 악한 과보를 받는 것입니까?

 

하나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계속되는 행위를 중단하거나 변경하였을 때도, 그 결과 발생도 정지되거나 변경되는 것도 또한 필연의 이치입니다. 대개 원인에 대한 결과는 동시에 있는 것이지만은 원인에 대해 진행을 중단시미는 새로운 행위를 하였을 때 중단시킨 방향으로 수정되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행위의 결과는 같은 생에 받기도 하고 다음 생에 받기도 하고 사뭇 그 뒷 생에 받기도 하지만 전생이나 금생에 들어와 지은 행위의 과보도 참회 염불수행을 통하여 과보가 변경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을 맑고 바른 방향으로 바꾸었을 때 보다 자비롭고 본성에 가까운 방향으로 바꾸는 수행을 하였을 때 마음에 나타나는 환경이 또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과거인에 대한 결과를 수정한 것이 됩니다. 또 깊은 수행에 그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설사 과거생에 지은 과보가 나타나더라도 고통으로 작용하지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다 갚은 수행에 머물게되면 근본적으로 업으로 인한 관계가 없는 경계에 이르게 되므로 일체 업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름지기 과거 업을 마음에 두지 말고 항상 부처님의 본성 공덕을 생각하여 자비와 보시를 행하고 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며 본래 청정한 자성을 깨닫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43)선행에 복이 오는가?

 

질문69), 착한 행을 하면 복이 온다는 것은 착한 행을 권하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까?

 

착한 행을 하고 착한 마음을 가지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착한 행을 하면 스스로 그 마음이 밝고 기쁘니 복을 받는 것이고, 착한 행을 받은 상대방이 기쁘니 다른 사람의 기쁨을 보는 것이 복을 받는 것이고 착한 행을 하여 그 마음이 밝아졌으니 마음이 밝음에 따라 복의 문이 열리므로 복스런 과보를 받을 것이고 그러한 마음이 뿌리가 되어 그와 인연되는 새로운 복연이 열리게 됩니다. 착한 행을 하여도 복된 결과를 받지 않는다면 선행의 복보다는 말이 거짓이 되겠지만 이것이 사실일진대 어디까지나 사실에 대한 설명이며 모르는 자에 대한 지혜의 말씀입니다. 선행을 하면 내생에 훌륭한 과보를 받는다는 거솓 또한 사실입니다. 선행에서 커가므로 선심이 뿌리가 되어 새로운 선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도 무지자가 모르는 사실을 지혜자가 사실대로 설명해 준 것입니다. 결코 방편설이 아닙니다.

 

44)인연은 순응한가?

 

질문70),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의 뜻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곧잘 처합니다. 그런 때에도 제 자신을 죽이며 함께 따라가야 하는 것을 잘 알도 있습니다.그러나 저의 뜻이나 저의 천품으로 보아서나 전혀 관계없는 방향으로 일이 돌아갈 때 이런 것도 인연이라 생각하고 저항없이 순응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생활에 대자대비 부처님의 위신력이 부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긍정이며 또한 그것을 받는 행위일지언정 나타난 현상적인 사항 모두를 옳다고 인정하여 행동을 함께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환경이나 사건들은 미혹한 범부들이 과거생이나 현세에 지은 업연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연을 짓는 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업연을 받아들여서 행동하는 주체자가 우리들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큰 깨달음을 이루어함이 없는 청정열반을 증득하지는 못하더라도 끊임없는 새로운 행을 전개하므로써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받는 자세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며 밝고 창조적인 새로운 행을 지으므로써 밝고 창조적인 새 환경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적이며 창조적인 권능은 누구이든 주어져 있으며 결코 빼앗긴 자가 없고 빼앗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인연은 새로운 창조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아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개혁할 거룩한 뜻을 펴나가야 하겠습니다. 불자가 가지는 인연관에는 이와같이 평화적인 긍정의 원리와 적극적인 변혁의 원리와 함께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45)운전기사의 내생

 

질문71), 저는 택시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내생이 분명히 있어 또 금생과 같이 고생하고 택시 운전이나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할 때가 있습니다. 내생이 꼭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좋은 내생을 받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요.

 

금생에 살고 있는 범부로서의 이 생활이 고통스러운 생활로 느껴지지만 조금더 지혜의 눈으로 비춰보면 오늘의 범부적 삶이 실로는 깨달음의 삶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망견으로 망령되게 고통스러운 중생경계를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범부가 보는 고통세계는 미망의 결과이므로 실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망이 끊이지 않는 한 중생세계는 끝이 없이 계속됩니다. 본성을 깨닫거나 미망의 꿈을 깨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삶을 알게 되며 금생이나 내생의 분단적인 삶의 종말이 오게됩니다. 귀하가 금생에 깨치지 못하면 분명히 범부적 내생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과와 필연의 법칙이 작용하게 됩니다. 오늘의 삶에 불평불만을 버리고 매사에 거룩한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한 생각을 항상 그리고 끊임없이 하면 반드시 밝은 내생을 환희와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삼보님을 깊이 믿고 정결한 마음을 항시 가지며 어려움을 이기며 자비로서 보시를 실천하면 반드시 인간세상에서나 천상에서 큰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지금 종사하시는 일은 많은 사람에게 친절과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좋은 직업입니다. 힘들고 돈벌이 적은 직종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요.돈벌이에 인생을 판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끊임없는 인내와 봉사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수행하고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행복해지며 나날이 밝은 날이 되고 내생에는 더욱 행복한 생을 받을 것입니다.

 

46)전생과 금생의 인과

 

질문72), 보통 사람은 인과에 따라 후생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정신박약아 또는 백치들은 후생이 어떻게 됩니까?

 

스스로 판단할 정신적 능력이 없는 백치같은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지은 업의 한 단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금생에 비록 의지적인 행이라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더라도 범부업식의 내면에는 보다 많은 과거행의 축척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치의 후생은 선세에 지은 업의 반영이므로 새 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보통 사람과 다른점은 선세에 지은 바 업에 대하여 좋거나 나쁘거나 적극적인 수정행위가 없었다는 점이고 백치라는 결과를 받으므로써 그런 업이 소멸되는 소극적인 업식의 수정은 건강인과 다름없이 당연히 있게 됩니다. 이상은 법력이 없는 범부의 경우이고 법력이 있거나 신령한 삼매의 힘이 있어 스스로 선택하여 행위 무능력자가 되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47)천상과 극락

 

질문73), 저는 25세 때 별안간 병이 나서 걷지 못하게 됐는데 절에가서 불공을 하고 나았습니다. 그런데 근래 기독교인이 말하기를 내생을 생각해서 예수를 믿으라 하니 어찌할까요?

 

예수님을 바로믿고 사랑을 행하면 내생에 천당 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믿어 극락에 나면 끝없는 자유를 얻고 성불하여 온 세상을 마음데로 출입하며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니, 내생이라면 극락보다 나은 것이 없지요. 천상은 유한이며 극락은 무한이며 퇴전이 없습니다.

 

48)천상도 불완전한가?

 

질문74), 세상에서는 착한 일을 하여 천상에 난다고 흔히 말합니다. 또 어떤 종교는 천국을 지상목표로 삼는 것도 있습니다. 천상은 완전항 국토입니까?

 

인강이 자기 본성의 진리를 바로 깨달으면 진리 본연의 완전한 국토를 즉시 보게 됩니다. 그것은 불국토지요. 그러나 본성을 깨닫지 못하고 탐욕심을 억제하여 보시를 행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제어하여 청정한 계행에 힘쓴다면 착하고 청정한 마음 정도에 상응하는국토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천상이지요. 따라서 천상도 여러 차별이 있게 됩니다. 착하고 안정된 마음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천상이 28천이 있어 모두가 같지 않으며 또한 완전한 것도 아닙니다. 중생이 지은 선업이 나타나는 과보일 따름입니다.

 

49)재일이 무엇인가?

 

질문75), 6재일, 10재일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재일이란 세속에 사는 신자가 몸과 마음을 삼가고 착한 행동을 닦으며 정진하는 날입니다. 1일, 8일, 15일을 4재일이라 하고;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을 6재일이라 하며; 이날은 4천왕이 그 권속들과 더블어 세간을 돌아보고 인간의 선악을 특별히 관찰한다는 날이라 합니다. 이밖에 6재일에 1일, 18일, 24일, 28일을 더한 것을 10재일이라고 합니다. 또 삼장재일이 있는데 정월, 5일, 9월의 석달의 전반 15일동안 재가 8계를 지키는 것을 삼장재라고 하고 거기에 6재일을 보태어 9재일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8일의 약재일, 15일의 미타재, 18일의 지장재, 24일의 관음재일을 숭상하고 있는 것은 잘 아싱 것입니다.

 

50)불공은 장사속인가? (불공의 뜻)

 

질문76), 불공을 장사속이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공의 뜻을 가르쳐 주십시요.

 

장사란 돈을 주고 그에 상당한 물건이나 봉사를 받는 것입니다. 돈과 재화나 그 밖의 가치의 교환이지요. 그러므로 불공도 돈내고 그에 상당하는 물겅이나 봉사를 구하는 것이라면 장사속이라 하겠지요. 그러나 불공을 장사속이라 말하는 사람 가운데는 진실한 불공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개 불공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며 그 의식 절차는 귀의, 예경, 참회, 공양, 발원으로 이루어 집니다. 이 절차는 불자로서의 기본적인 수행 법식이기도 하지요. 삼보께 귀의하고, 예경하며, 참회하고, 공양하며, 다시 커다란 보살의 서원을 세운다는 것은 참으로 무엇에도 비유하기 어려운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마음으로 거룩한 행을 할 때에 당연히 거룩한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며 거룩한 공덕도 이 세간 현실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점은 여러 경전의 말씀이 그렇고 또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역력히 체험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러한 불공의 성스러운 뜻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불공하고 복을 받는다는 것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장사속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는 사기속이라 할 것입니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는 제바부부가 병장바라문에게 오백냥을 빛을 내어 그 손으로 부처님과 대중을 공양한 대문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빛을 내어 공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으시고 그에게 법문을 하시며 축복을 하셨습니다. 제바부부는 부처님과 대중이 떠난 후 마당 한구석에서 보물을 파내게 되어 큰 부자가 된 기록이 있습니다. 부처님께 공양하고 복을 바란다는 것은 그 심리가 비속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 복이 흘러 오는데야 어찌합니까. 또 불공에는 부처님에게 음식을 공양하기도 하고 옷이나 약이나 그 밖의 생활도구를 공양할 때도 있습니다. 또 스님들이나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공양하고 저들을 안락하게 하는 공양도 있으니 그 모두는 불공이고 그 공덕은 불가사의합니다. 불공의 참뜻이 부처님께 공양하고 중생을 성숙시키며 자신의 깨달은 마음을 밝혀가는 것이니 우리는 불공의 뜻을 바로 알아 영원히 끊임없이 지칠줄 모르는 불공을 겨속 하여야 하겠습니다. 경에 이르기를 "이 길이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길"이라 하였으니 소소한 세간 복보를 얻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51)방생은 필요한가?

 

질문77), 사람의 희생과 고난은 못본 체 하고 고기 방생에 열을 올리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방생은 인간 방생을 위주로 하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지당한 말씀입니다. 인간이 한 사회에서 불우하고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을 때 그를 돕고 그의 권익을 찾아 주도록 힘쓰는 것은 방생의 뜻을 아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방생은 자비의 종자를 심고 키우는 불사입니다. 모든 생명의 신성을 존중하고 필경 성취를 도모하는 것이 방생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물고기나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꾸어가고 생명가치를 존중하고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의 성숙을 도모하며 내지 협동과 우예로 진리를 존중히 열어가는 평화운동으로 발전될 것입니다. 고기를 방생한다는 것이 한 낱 물고기를 보호하고 그 생명을 해탈인연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물고기 방생하는 사람 마음 속에 자비와 깨달음의 빛이 더해간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52)식사때의 의식

 

질문78), 불교에서는 식사때 어떤 의식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한번 답변해 드린 적이 있으나 다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식사 때 의식은 오늘날 대중생활을 하시는 스님들이 잘 행하고 계십니다. 요점만 말씀드리면 먼저 발우를 내리고 공양을 받음에 임해서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비라에서 나시고 마갈타에서 성도하시고 바라나에서 법문 설하시고 구시라에서 열반에 드셨으니" 이렇게 소리를 내어서 외우고 발우를 폅니다. 그리고 10념으로 불보살님의 명호를 외우며 생각합니다. 그 다음 발우에 공양을 받고 오관계를 외우고 나서 신들에게 밥을 주고 공양을 듭니다. (그 다음 약간의 의식이 있습니다만 생략합니다. ) 위에서 살펴 보면 공양 때의 의식의 핵심은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과 오관계에 있다 하겠습니다. 오관계는 다음과 같은 5가지입니다.

 

첫째 : 식사가 되기까지의 농부나 취사인 등의 노력이 귀하고 또한 시주의 은혜가 큰 것을 생각한다.(計功多小量彼來處)

 

둘째 : 자기 수행의 다소를 돌이켜 보며 음식을 대한다.(忖己德行全缺應供)

 

셋째 : 악한 마음을 막고 허물을 멀리하는 데는 탐심을 버리는 것이 요긴하다.(防心離過 貪等爲宗)

 

넷째 : 음식은 기갈을 면하고 병나지 않게 하는 좋은 약이라고 생각한다.(正思良藥過 爲療形枯)

 

다섯째 : 진리의 길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 음식을 먹는다.(爲成道業 應受此食) 등입니다.

 

이상의 식사의식은 출가한 스님들이 행하는 바이지만 재가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주원을 하고 식사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대자대비 부처님, 크신 은혜 이 공양, 일체중생 발보리 마하반야바라밀"이것은 식사를 당하여 합장하고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크신 은혜로 이 공양을 받습니다. 바라옵건데 일체 중생이 보리심을 발하여 무상도를 이루어지이다." 하는 뜻인데 이렇게 기원하고 공양을 드는 것입니다.

 

53)불교의 결혼의식

 

질문79), 세간에서 결혼의식은 일생에 한번 있는 중대사입니다. 불교의식으로 결혼의식을 올리는 것을 봅니다만 그 구성과 내력이 어찌된 것입니까?

 

불교의식에서 결혼의식은 신랑신부가 함께 불도를 다짐하며 출발한다는 점이 일반 결혼의식에 첨가되어 특색이 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현제 가정의례준칙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랑신부가 서로 만나 예를 교환하고 결혼서약을 하고 주례자는 성혼을 선언하며 주례사를 하는 것이 일반의식의 골격입니다. 그리고 축가를 부른다던가 신랑신부가 내빈에게 인사를 한다던가가 첨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의식내용은 결혼당사자가 생애를 같이할 부부가 된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주례가 그것을 확인하는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불교의 결혼의식은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 삼귀의를 하여 어느 곳에서든지 부처님의 광명 아래에서 의식을 행하는 것이 되고,

 

둘째 : 부처님께 축도를 올려 당사자 두사람이 결혼함에 부처님 인행 때의 보살도를 함께 원을 세웠던 것처럼 금일의 결혼 또한 그러하기를 발원하며 아울러 부처님의 증명과 자비하신 가호를 기원합니다.

 

셋째 : 헌화인데 이것은 신랑신부가 과거세에 세웠던 보살서원을 상징하고 이 꽃이 신부에게 간직된 것을 결혼의사 합의를 통하여 꽃을 부처님께 헌공하여 금생에 다시 피어나는 보살의 행을 뜻합니다. 그밖에 일반 결혼의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불교의 결혼의식의 골격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주례법사와 신랑신부가 차례로 입장 등단하고, 둘째 : 모두가 삼귀의례를 행하며,

 

셋째 : 주례법사가 축도문을 봉독하고, 넷째 : 신랑신부가 맞절하며,

 

다섯째 : 심부에게 꽃을 받아 헌화하며, 여섯째 : 결혼서약,

 

일곱째 : 주례법사의 성혼선언, 여덟째 : 주례사,

 

아홉째 :내빈깨 인사, 행진, 기념촬영 등으로 행하여집니다.

 

전체적으로 부처님 광명 아래 성불의 길을 닦는 보살생애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점이 진하게 착색된 의식입니다.이 불교의 결혼의식은 아마도 약50여년 전(1931년) 안 진호 강백이 종래의 불교의식문을 총망라하여 석문의법이라는 의식문을 출판할 때에 창작 수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불교의식의내력은 부처님이 과거세에 선혜라는 수행자로 있을 때 부처님께 꽃을 헌공하고자 어떤 여인에게서 꽃을 사서 공양한 고사를 인용하여 의식문을 구성한 것입니다. 그 때에 성혜행자가 올린 꽃이 일곱송이라하여 오늘도 그리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54)구병시식

 

질문80), 병이 나면 병을 고치는 불교의식이 있습니까?

 

몸에 병이 났다는데 대하여는 의학적 고찰 외에 몇 가지 관찰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 마음속에 미움이나 노여움이나 슬픔이나 그밖에 어둡고 불안한 생각들을 가졌을 때입니다. 이것이 병을 부르는 뿌리이므로 모든 집착을 놓고 이제까지 지었던 생각들을 다 풀고 참회하여야 합니다.

 

둘째 : 그릇된 소견에 빠져 정법을 등지고 아집과 탐착으로 진리를 등진 때입니다. 이런 때에는 바른 믿음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셋째 : 미혹한 영과의 관계입니다. 다시말하면, 인연있는 영들이 미혹하여 방황하고 또는 그 영들이 가까이 접근하여 고통을 호소하는 등 가까운 관계에 있을 때입니다. 이런 때에는 영으로 하여금 미혹을 돌려 집착을 버리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인도하여야 합니다. 미혹의 원인인 상에 대한 스릇된 집착이나 분노나 원망이나 또는 굶주림 등의 고통을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영들의 고통을 살펴서 그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 요긴합니다.

 

위의 세 가지 이유중 첫째와 둘째의 경우에는 대개 불전에 기도하고 염불독경하며 귀의, 참회, 발원, 회향식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쁜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의 영의 집착의 경우에는 구병시식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망령의 미혹된 마음을 열어 주고 집착을 풀게 하며, 굶주림을 채워주고 밝은 길로 인도하는 의식입니다.

 

55)불교의 상례의식

 

질문81), 불교의 상례의식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불교의 상례의식은 망인으로 하여금 생과세간에 대한 애착심을 쉬고마음을 밝히도록 인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개 상례의식을 3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망인이 숨을 거두고 출상할 때까지의 의식이며, 둘째 : 출상 의식이고,

 

셋째 : 다비 또는 매장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의식에서는 염불, 독경이 위주인데 그중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무상게와 시세, 장엄의식입니다.

 

무상게는 이 몸을 위시하여 온 세계가 필경 허물어지는 것이며, 특히 이 몸은 생노병사우비고뇌가물결쳐 필경 죽고 사대원소로 돌아가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몸이 흩어짐에 애착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으니 애석한 마음을 놓게 합니다. 그리고 12인연법을 일러주어 점차로 관하여 생멸에서 벗어난 신령한 본성을 깨닫게 합니다. 시세의식에서는 머리를 정결히 하고 목욕을 시키고 손과 발을 씻어 주며 새 옷을 입히고 입감할 때까지의 일일 과정에서 망인이 본성을 깨달아 생사에서 벗어난 신령한 자성에 눈뜨도록 인도합니다. 시세입감의 열까지 단계의 의식이 모두가 그런 법문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장례차비가 다 되었을 때 영결식을 합니다. 영결식에서는 역시 망인이 육체나 생전 감정에 휘감기지 않고 생사에서 벗어난 훤출한 자성에 눈뜨도록 인도합니다. 그 사이에 설법이 있고, 독경이 있고. 제문을 낭독하고, 부처님의 광명으로 장엄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셋째 다비의식인데 시체를 화장할 때에 불을 붙이고 뼈를 거두어 뼈를 갈아 흩어 버릴 때까지 그때마다 망인이 일체 애착에서 벗어나고 훤출하고 초촐한 자성을 깨우쳐 갑니다. 화장하였을 때는 그렇고 매장할 때는 좀 간단합니다. 영결식까지는 같고 하관하는데 이르러서 망인이 심신이나 세간의 애착을 끊도록 누누히 말해주고 본성을 깨달아 극락국에서 안식하도록 염불을 합니다. 불교의 상례의식의 골격은 이상과 같이 첫째는 망인이 육체나 세간사에 대하여 애착을 쉬고 생사 없는 자기 본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요. 둘째는 염불 독경하여영가가 마음을 쉬고 부처님 광명에 의지하여 극락세계에 안주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56)예수재란 무엇인가?

 

질문82), 근일 예수재를 권유 받았는데 예수재의 뜻을 잘 모릅니다. 또 망인도 예수재를 한다고 하는데 천도와 예수재는 같은 것입니까?

 

예수재는 생전예수재란 것으로 죽은 후에 천도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복을 짖고 허물을 멸하여 왕생공덕을 닦는 의식입니다. 예수재는 불보살님께 헌공하고, 명부시왕과 그 권속들에게 공양하며, 한편 명전을 바쳐 빛을 갚고 경전을 독송하여 지혜를 닦으며, 기도하고 청법하여 깨달음의 덕을 닦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예수재는 의식을 진행하는 가운데에 이와 같이 참회, 발원, 공양, 수복혜를 행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미혹의 허물을 소멸하고 밝은 본분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재 의식이 갖는 뜻은 진실하고 무량공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의 진행과 수행을 여법히 하여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근일 예수재의 뜻을 잘못 알고 허망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예수재가 지닌 참뜻을 이해하지 않은데서 온 것으로 봅니다. 예수재는 당연히 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망인을 예수재에 동참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는 예수재의식이 망령을 깨우쳐주고 공덕을 닦아주며 기도에 불가사의 위력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재는 대개 49일 기도가 병행됩니다. 또 우리의 일상 수행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면 그것이 바로 무상공덕을 닦아가는 것으로서 원만한 예수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재를 해야 한다고 강조되는 것은 평소에 여법한 수행을 하기 어려운 분에게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57)천도재가 무엇인가?

 

질문83), 불교에서 망령을 천도하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어떤 법식으로 천도하는 것입니까?

 

사람은 본래 본성이 불성입니다. 범부가 되었다고 하여 불성이 변질되거나 그 능력이 감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범부는 미혹하여 어떤 경계를 보고 그것에 착함으로써 분별망상을 거듭하게 되고범부성을 더해가는 것입니다. 이 범부성이라는 것도 범부의 생각으로 망령스러이 그렇게 불 뿐이지 범부성이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에 이르기를 "무 색수상행식, 무 성향미촉법, 무 안계내지, 무 의식계"라 한 것도 이 뜻입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하나 본래는 생사가 없는 가운데 망령되이 생사를 보는 것 뿐입니다. 이 미혹을 깨닫고 본성에 눈뜨게 하는 것이 천도의식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천도의식은 생사가 없다는 것을 기초로 삼고 생사가 꿈인 것을 깨닫도록 인도합니다. 사람이 죽었다고하나 실로는 죽을 수 없는 것이므로 방편으로 이도리를 말해주면 망자도 깨닫게 됩니다.

 

천도의식에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작법우로 영가를 천도합니다.

 

첫째 : 부처님의 크신 위덕을 여는 큰 법문을 굴립니다. 여기에는 경전을 읽기도 하고 다라니를 외우기도 하며 설법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혹한 망령들이 정신을 가다듬게 하고 고통속에서 고통이 없는 방향으로 마음을 일깨웁니다.

 

둘째 : 망령을 위하여 착한 공덕을 짓는데 거기에는 출판하거나 대법회를 가지거나 무차시회를 베풀거나 하여 공덕을 닦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범중에 큰 횃불을 밝히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셋째 : 망자의 목마르고 시장함을 채워 주고 인정에 수순하는 음식을 차려 공양하며 애착을 끊고 법식을 먹어 해탈하도록 인도합니다.

 

넷째 : 망자와 함께 염불하거나 선정에 들어 망자가 지혜를 밝히는 길을 도와 줍니다.

 

천도재는 위 4가지를 모두 행하기도 하고 그 중 일부를 행하기도 하여 천도합니다.

 

58)불사에 차별이 있는가?

 

질문84), 우리들은 불법을 믿으면서 절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불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어느 불사에나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불사는 다 똑 같다고 보이야 할지요. 특별히 수승한 불사는 있는지요? 이런 불사는 꼭 동참하여야 한다는 특별한 불사가 있는지요?

 

불사란 깨닫는 사업이며 깨닫게하는 사럽이라 할 것입니다. 불(佛)이란 곧 깨달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미혹을 밝혀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모든 사업이나 행사는 불사라 할 것입니다. 또 밝은 깨달음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는 일체의 사업을 불사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사의 첫째 목표가 중생을 건지고 사회를 밝히며, 진리의 가르침을 빛내는데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법회를 열어 설법하고 염불하며 독경하고 수행하는 것은 말할 곳도 없고 참선하고 경을 출판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모두가 불사입니다. 수행하고 법을 전하며 지혜와 자비를 실현하는 사업이 불사의 핵심입니다. 이와 같은 불사를 하자면 여러 가지 물자도 필요하고 노력도 시설도 필료합니다. 이러한 물자나 시설이나 노력은 깨닫는 사업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도 불사입니다. 설법하고 참선, 염불수행하기 위하여 선원이나 설법전이나 그에 필요한 시설에 관한 사업 등 모두가 불사가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이러한 전법 또는 수행을 위하여 필요한 것과 전법, 수도, 구호, 사회사업 등 모든 불사시설을 운영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업도 불사가 됩니다. 이렇게 살펴볼 때 불사는 첫째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 깨달음의 가르침을 전하는 전법이 불사의 핵심이고, 둘째로 그러한 불사를 위한 모든 시설을 위한 사업이 불사이며, 셋째는 구러한 시설의 운용을 위한 사업도 불사라 하는 것입니다. 위 세 종류의 불사에 우열은 없으나 불사의 목표가 첫째 종류에 있는 것임을 알아서 수행과 깨달음과 전법의 기여도가 낮은 사업은 낮은 불사라 할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반성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사는 반드시 깨달음과 수행과 전법에 직접 또는 간접, 크게 기여하는 방향으로 기획되고 운용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목표는 소흘히 하고 화려한 시설이나 관광 목적이나 위락의 효과를 관심한다면 불사의 순수성은 그만큼 감소될 것입니다. 만약 불사의 명목 아래 수행도 전법도 아랑곳없이 다른 목적에 초점을 거두나, 깨달음의 법을 전하는 것이 아닌 미혹한 행사를 불사로 잘못 알고 있지 않나 주의할 것입니다. 끝으로 불사라 하더라도 오늘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불사가 수승한 불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를 효도에 든다면 병든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집이나 짓고 새옷나 만들어 드리고 진수성찬만 바친다면 그것은 잘목된 효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간이 미혹의 어둠에 덮여 물질주의, 관능주의의 탁류가 도도히 흘러 그 속에 겨레와 인류가 자기 상실로 인한 고난과 악에 빠져 있는데, 이들에게 법을 설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사회가 참된 인간을 위한 광명 질서로 바뀌도록 노력하지 않고 집 단장이나 관광시설이나 교통편의에힘쓴다면 불조에 효도의 불사라 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위에 말씀 드린 바를 비추어 불사의 우열과 선후와 요점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59)신중단의 구성과 신앙

 

질문85), 법당에는 정면에 부처님을 모시고 그 곁에 신장님을 모신 것이 일반입니다. 그런데 신장님은 어떠한 분이신지 우리는 어떻게 공경하고 대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니요.

 

신중단은 불법을 옹호하는 성중들을 모십니다. 진리의 세계는 깨달음의 법밖에 다른 것이 없지만 미혹한 중생에게는 미혹한 수많은 중생들이 뒤엉켜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인간도 있고 인간 외의 중생들도 있어서 혹은 되는대로 막 살기도 하고 나쁜마음에 젖어 악행을 업으로 삼아 살고 있는 중생도 있고 성인의 가르침을 배워 참된 길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발심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착한 일을 돕고 정의에 편드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사람이 아닌 신중(神衆)가운데도 역시 발심하여 착한 사람과 착한 일을 돕고자 하는 선신도 있으며, 진리를 깨달아 중생들을 깨우치고 가르치고 온갖 모습을 나투는 성현도 계십니다. 신중단에는 불법을 옹호하고 착한 사람을 돕고자 발심한 선신들과 불법과 발심한 사람들을 돕고자 서원력으로 화신을 나투신 성현들도 계십니다. 팔대금강신장은 발심한 성현이고, 이 땅을 착하고 평화하게 지키고자 하는 제석천이나 사왕천 대범천 등은 천상의 성중들이며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등 팔부 신장 신부의 성중입니다. 그밖에 많은 호법선신들이 있어 부처님을 찬탄하고 불법을 옹호하고 착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이와같이 신중단에는 부처님이 아닌 호법을 발원한 선신들을 모셨으므로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를 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신앙은 부처님이며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중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때로는 기원을 할 때도 없지 않으나 신앙의 표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중단에 모신 성현들은 지혜스럽고 자비로우며 위력이 대단합니다. 혹은 자비, 혹은 위엄을 나투시면서 정법을 수호하고 착한 사람들을 가호합니다.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을 수호하겠다고 원을 세웠고 또 부처님에게서 부촉을 받은 바이므로 특별히 청하지 않아도 착한 불자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60)산신과 칠성은 무엇인가?

 

질문86), 큰 절에 가면 칠성각이나 산신각이 있습니다. 어떤 불교책을 보니 산신과 칠성은 토속신앙이 불교에 들어온 것이고 원래 불교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절에 산신과 칠성을 모신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고유 풍습 가운데 산신 숭배나 칠성신앙이 있어 왔고, 그것이 전래의 토속신앙이거나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점은 저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찰에 봉안된 산신이나 칠성은 이름은 같지만 토속신앙이나 다른 교회에서 들어온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경에 보이는 신앙 또는 산신이라 하는 불교의 신앙은 불보살의 부촉을 받고 불법을 외호하며, 불교 믿고 착한 사람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선신의 종류입니다. 산신은저급의 선신도 있겠지만 보살화현의 대비원력을 지닌 산신이 그 근본이 되므로 외도의 산신과는 같지 않습니다. 또 칠성도 칠성여래의 화현으로 나툰 칠원성군이 착한 사람을 돕고 착한 원을 보호해 주는 거룩한 성현입니다. 이들 산신이나 칠성은 그가 나투는 형상이 천상사람으로 나투고 그 본분이 불법외호에 있으므로 불교에서는 호법성중이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산신이나 칠성은 불교도의 신앙대상이 아니고, 불교를 돕고 불교도를 보호하는 외호중인 것입니다. 불교의 신앙은 부처님이시고, 보살은 큰 선배님이시고, 조사는 스승이시며, 천상과 신장 중에 발심한 것은 외호중이 됩니다. 따라서 법당에 가면 신중단이 있는데 거기에는 발심한 천상의 천왕이라든가 금강신장 등과 함께 산신 칠성 등이 옹호중으로서 봉안되고 있습니다.

 

61)신중단과 반야심경

 

질문87), 법당에서 예불할 때 부처님께 예경한 다음 신중단에 대하여는 예경을 하지 않고 반야심경만 독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신중단에는 어떤 성인을 봉안하였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 어느분의 질문에서 잠시 언급하였습니다만. 사찰에서 성현을 봉안하는데 불보살님은 상단이라 하고, 신장님은 중단이라고 합니다. 신중단에는 불법을 외호하는 성현을 모셨는데 거기에는 대개 세 가지로 분류되는 성현이 봉안됩니다.

 

첫째 : 불보살의 화현이라 하는 금강신장들입니다.

 

둘째 : 대범천왕 등 여러 천상의 성현들입니다.

 

셋째 : 그밖에 호법선신들입니다.

 

불자들은 상단 불보살님께 예경하고 신중단에 대하여서는 항상 저두하는데 그치는 것은 신중단의 성현들이 호법신으로 나투었기 때문입니다. 호법신중들은 불법을 외호하는 것이 본분이며 불법을 외호하고 스님들을 돕는 것으로 공덕을 삼기 때문에 비구스님에게 예경을 받으면 도리어 손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선신중보다 높은 화현신이라 하더라도 신중으로 나투었기 때문에 그 점은 같습니다. 따라서 신중들은 불법을 듣는 것이 소망인 것입니다. 이 점을 감안하여 종전 예경때에는 스님들이 신중단에도 일일이 삼시로 예경하였으나 근래에 와서 반야심경에 그치고 있습니다.

 

62)사리는 무엇입니까?

 

질문88), 고승이 열반에 들어 다비하고 나서 사리를 얻었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재가 신자에게도 사리가 나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리는 어떤 것이며 어떤 사람에게서 얻어지는 것입니까?

 

종래 스님들이 입적했을 때 절에서 다비를 합니다. 다비할 때 보면 장작이나 숯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놓으며 그 위를 젖은 가마니로 두릅니다. 그리고 시신 바로 아래 깊숙히 밀폐한 단지를 묻고 단지에는 물을 담습니다. 또 화장장 사방 네모퉁이에도 물 그릇을 놓습니다. 이 단지와 물 그릇은 사리를 거두자는 뜻입니다. 종래 사리는 이와같이 해서 다비한 후에 단지나 물그릇에서 얻은 구슬모양의 영체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사리는 시신에서 나온 신령한 구슬로 일러지고 고승에 한하여 나오는 것으로 알려 옸으며, 때로는 고승의 사후 기도해서 얻은 사리도 있고 그밖에 신비하게 볼 수 있는 사리도 있다 했습니다. 오늘날에 사리라는 것이 어떻게 얻어지고 있는지 분명치 않으나 어쨌든 구슬같은 영골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리는 원래 신체, 신골의 뜻으로서 시신이나 유골을 말합니다. 범어의 샤리이라를 사리라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사리는 이와같이 유골의 뜻이며 통상적으로 부처님의 유골을 불사리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신령한 구슬의 일종으로 알려지고 이것은 두터운 신심으로 산 사람, 정결한 계행을 가진 사람, 중생을 위하여 널리 헌신한 사람, 깊은 경지의 수행을 쌓은 사람에게만 나오는 것이며, 그러므로 사리는 원래적인 의미보다 통설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63)목탁의 요령

 

질문89), 불공, 기도 등 불교의식에는 목탁 요령을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의식에 목탁, 요령이 어떤 뜻이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요.

 

목탁에 대하여는 이미 몇 번인가 언급한 것으로 생각되니 간단히 말씀 드리지요. 목탁은 미혹한 마음, 침체한 마음을 흔들어 깨우친는 뜻이 있습니다. 원래 어리석은 마음이 근본이 되어 탐심을 함부로 부려 악도에 떨어진 것을 목탁소리를 울려 깨우치게 하고 경계하는데 목탁의 유래가 있습니다. 오늘날 염불, 독경하며 목탁을 울린단는 것은 염불하는 대중에게 운곡을 맞게 한다는 뜻 이상의 항상 말끔한 정신을 일으켜 깨달은 마음이 드러나도록 하는데 주된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또 요령은 흔들어서 쇠소리 즉 방울소리를 냅니다. 종소리든 쇠소리든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사무치는 특성이 있어 활활 일어나는 생각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습니다. 종소리를 울려 서 번뇌를 끊는다는 말은 이 뜻입니다. 번뇌가 쉬므로 마음이 안정되고 밝아집니다. 그래서 종을 울리면은 마음이 평화로와지고 지옥불이 꺼진다고 합니다. 마침내 깨달음의 빛을 보고 윤화라는 범부경계를 벗어나 성불하게 됩니다. 요령도 비록 작기는 하지만 번뇌를 쉬고 중생들이 미혹된 업ㅇㅡ로 지은 여러 장벽을 허물며 지옥이니 천상이니 모든 막힘을 털고 햇살이 막힘없이 비치듯 어떤 것이나 막히는 것없이 통하는 위력이 있습니다. 불교의식에서 요령을 사용하는 때는 진언을 풍송할 때나 성형이나 천인이나 망령들을 초청할 때에 많이 쓰입니다. 종소리가 온 누리에 떨쳐 진언의 법력이 두루 퍼지며 또한 여러 성현이나 고혼들 세계를 통하게 하는 뜻을 지닌 것을 알겠습니다.

 

64)종각에 있는 것(사물)

 

질문90), 절에 가면 종각이 있고 거기에는 큰 종과 북등이 걸려 있습니다. 종각에서 울리는 종이나 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종각 도는 종루라고 하는 건물에는 종, 북, 묵어, 운판이 장치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사물이라고 합니다. 이 사물은 새벽 예불이나 저녁 예불 때 울립니다. 종에대하여는 앞에 말한 것으로 대신합니다. 북을 치는 것은 축생들을 미혹과 혼침에서 각성하게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운판은 구름모양을 한 청동으로 만든 편편한 판인데 이것은 허공계 중생들의 번뇌를 쉬게 하고 사심을 멀리하게 합니다. 목어는 나무로 만든 것인데 고기 형상을 하고 있고 이것을 울리는 것을 물 속의 중생들을 깨닫게 하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참고로 : 종을 울릴 때에 생각하고 읊는 글귀를 소개하겠습니다. [바라건데 이종소리 법계에 퍼져 철산위 깊은 지옥 밝아 지이다.삼악도 벗어나고 지옥이 깨져 일체 중생 빠짐없이 성불하여지이다.]

 

65)염주의 내

 

질문91), 염주의 내력과 염주를 지니는 뜻을 말씀해 주십시요.

 

염주에 관하여서는 소파호동자청문경(蘇婆呼童子請問經) 불설교량수주공덕경(佛說校量數珠功德經) 금강정유가염주경(金剛頂瑜伽念珠經) 그밖에 요러 경전에 말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염주는 일찍부터 사룔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율장에 언급이 없고 중국에도 전해오지 않는 듯 중국에서는 도작스님(562~645)이 처음으로 염주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경에는 "마음이 탁란하지 않게하고저 하거든 수주를 사용하라" 하고 있습니다. 염주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염불할 때나 진언을 외울 때에 그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 염주를 가집니다. 염주는 오늘날 번뇌를 끊는 도구 즉 수행하는데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염주알을 굴릴 때 마다 번뇌가 끊어지므로 그 만큼 부처님 광명이 자신에게 충만해지고 죄업이 소멸되고 복이 납니다. 이런 점에서 염주 한 알은 바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라는 신앙이 있게 되고 따라서 염주는 불보살처럼 소중히 여기는 신앙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염주는 108개로 만드는 것이 기준입니다. 108번뇌를 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는 그 10배인 1,080개일 때도 있으며, 그반인 540개일 때도 있습니다. 으리나라에서 염주를 만드는 재료는 한정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리자, 금강주, 모간주, 연실, 율무, 향나무, 그밖에 향단으로도 만듭니다. 또 호박, 마뇌, 유리, 산호, 진주 등으로도 만들고 있습니다. 불자들은 염주를 가지고 염불하므로 항상 반야광명이 충만하고 지혜와 자비와 용기를 쓰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66)목탁이 의미하는 것

 

질문92), 목탁은 불교에서 상징이라 하리만치 절에서 많이 쓰는데 그 내력이 어찌된 것입니까?

 

오늘날 절에서 대강 3가지 의미를 담아 쓰이고 있습니다.

 

첫째 : 목탁을 울려서 사람을 모이게 하는 등 신호하는 도구요.

 

둘째 : 독경, 불공 등 의식에 소리를 맞추는데 쓰이고.

 

셋째 : 혼침에 들었을 때 정신을 차리라고 깨우치게 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목탁의 원형이라 할 목어(木魚)는 종루[종, 북, 운판, 목어 등을 장치한 누각]에 걸어놓고 울리는데 이것은 수중중생들을 깨우치고 편안하게 하는 뜻이 있으니 목어는 의식에 쓰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목탁은 고기 형상으로 만든 목어를 변형한 것입니다. 또 목탁에는 2마리의 용머리를 손잡이로 하고 몸은 하나인 형상으로 만들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는 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는 것처럼 범부에서 성인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탁은 고기 형상을 그리지 않고 이ㅆ지만 이것은 편의에 따른 것 뿐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목탁에 고기 형상을 새기게 된 내력은 다음 2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설 :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침에 빠지지 않고 말끔히 깨우친 상태를 뜻합니다.

 

둘째설 : 망인을 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께 공양할 음식을 장만하다가 먼져 먹은 과보로 물고기가 되고 그 물고기 등에 나무가 나서 고통이 심하므로 물고기가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면서 자기 등에 난 나무를 베어 두들겨 사람을 경계하여 달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우치를 거울삼아 세간 사람들을 경책하게 하고 그렇게 한 공덕으로 자기가 혜탈을 얻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돌이켜 보면 목탁은 원래 혼침과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원래의 뜻이라 하겠고 그 다음에 집단생활에서 집합신호나 의식도구로 쓰이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사회의 경종이 되는 행위를 사회의 목탁이라 이르게 된 것도 이런데서 온 것이 겠지요.

 

67)연꽃이 의미하는 것

 

질문93), 불교에서 연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읍니까?

 

연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진흙에 뿌리박고 있되 그 잎은 진흙에 물들지 않으며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꽃이 필 때 연밥(연실)이 동시에 생깁니다. 불교에서 연꽃은 세간과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심을 의미합니다. 연꽃은 높은 산이 아닌 진흙같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보살을 의미합니다. 또 청정한 행은 그것이 바로 깨달음과 불국토가 동시에 형성된다는 인과가 함께 있는 진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68)절의 명칭에 대하여

 

질문94), 절의 명칭에는 사 또는 암 또는 정사라고 한 곳이 있고 큰 절에는 총람이라 하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절의 명칭에 대해서 어떤 구분이 있는지요.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여러 명칭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나 부처님 존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이 머물며 수행과 전법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 절입니다. 대개로 사, 암, 정사, 난야, 총림과 같이 여러 이름이 있으나 뜻은 같은 것입니다. 범어에 비하아라와 상가아라아마가 있는데 전자는 유행처라고 번역되고 후자는 가람이라고 적고 중원이라고 번역되나 모두다 정사라고 통역돠고 있습니다. 정사는 수행에 힘쓰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라고 하는 것은 원래 중국의 관청 부서의 명칭인데 외국인을 접대하는 홍로사에 맨 먼저 오신 분이 서역에서 온 분이었기 때문에 뒷날 스님이 머무는 곳을 모두 사라고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혼자 수행하는 곳을 암자라고 하나 이것은 다만 작은 절이라는 뜻 이상의 규정은 없습니다. 난야는 범어의 아랸야를 적은 것인데 산중 또는 돌판이라는 것이 원뜻입니다. 스님들이 머물며 수행하기 적당한 처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워리처(遠離處), 적정처(寂靜處), 공한처(空閑處), 무쟁처(無諍處)라고 번역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절의 명칭은 사, 암, 정사, 난야 어느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총림은 숲처럼 많은 스님들 이 모여서 규율 바르게 화합하며 도를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종합 수도원을 의미하고 또 종단에서 총림으로 인정을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종합적 수도원 시설이란 선을 공부하는 선원과 교학을 공부하는 강원과 율을 공부하는 율원 등 시설을 갖춘 곳을 말하는데 오늘날의 총림은 그러한 수도원의 격을 말할 뿐 사찰 명칭으로는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제4장 : 수행에 관하여

 

1)믿음의 내용

 

질문94),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어떤 종교에서 말하듯이 만물을 만들어내는 조물주처럼 믿는 것입니까?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완전구족한 불별의 진리가 부처님인 것을 믿는 것이며 또한 그 부처님 진리는 일체 중생에 있어서 차별없이 같은 법성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원래로 부처님 진리 자체이지만 그것이 미혹한 정도에 따라서 온갖 경계를 나타나며 그 속에 사는 것이 범부중생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세계 그 모두는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생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며 중생이 중생 세계를 구성하는 원동력은 부처님 진리라 할 것이고 중생이 중생 세계를 출현하는 직접 계기는 무명(無明)이며, 미혹이며하여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만들어 내는 창조자입니다.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밝은 세계를 창조하고 미혹이 깊을수록 어두운 중생 세계를 그 속에 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지옥도 천당도 어떤 권능자가 만들어 놓고 맞이 하거나 끌고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자신이 지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은 끊임없이 깨달음을 통하여 참된 진리 공덕을 드러내고 이 땅위 우리의 삶이 그모두가 불국토를 이루어 가는 창조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닦아가는 것을 보살행이라 합니다.

 

2)죽지 않는 도리

 

질문95), 불도를 믿는 것은 진리를 알아서 밝고 보람있게 산다는 것이 저희들의 목적이며 동기입니다. 그런데 불도를 닦으면 생사를 면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니 과연 불법수행을 하면 죽지 않는 것입니까? 도인들이 죽지 않는 도리를 안다고 합니다만 근거가 있는 말입니까?

 

불법을 믿는 것은 물론 밝고 기쁜 생활, 값있는 생활을 하자는 것이 본 뜻일 게고, 그 이상의 사업이 잘 된다거나, 병이 낫는 다거나, 죽지 않는 다거나,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좋지 않게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법을 믿어서 밝고 값 있게 산다는 것은 단순한 깨끗하고 높은 인격을 닦아가는 교양있는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확실히 생명의 바른 모습인 진리를 믿고 닦으며 자기 향상의 길을 가는데서 결과적으로 밝은 생활도 있고, 인격 향상도 있으며, 때로는 이변적인 성공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불법을 믿어 건강해졌다든가 사업이 원만해졌다던가 생사 없는 도리가 있다던가, 하는 말은 결코 우매한 사람의 말이거나 요사한 마음의 바램도 아닌 진리에 상응한 자연스런 결과인 것입니다. 우선 불도를 닦아서 생사를 벗어나느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범부들은 대개 미혹한 세계에 세계에 살고 있어 업을 짖고 그 결과로 미혹한 세계를 출입합니다. 이것이 생사이고 윤회입니다. 미혹상태가 개선되거나 해결되지 않는 한 업은 쉴 날이 없고 생사도 끝없이 반복하게 되며 고뇌의 세계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런 줄을 알아서 미혹을 돌리고 깨달음을 향하여 닦아감으로써 생사가 없는 열반경지에 이르게 되니 이것이 해탈입니다. 여기에는 수행하는 정도에 따라서 몇가지 차별이 있습니다.

 

첫째 : 일반 범부의 경우인데 선악의 업을 짖고 번뇌를 일으켜서 그 과보를 받는 가운데 한몸이 다하면 다시 욕계이던 삼계에 과보를 받아 태어납니다. 이 땅에서 몸을 버리고 나서 새 과보의 몸을 받는 것이지요. 이런 때 받는 과보의 몸은 수명의 장단이라던가 육체의 대소라던가 등 일정한 제한적 특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런 몸을 분단신(分段身)이라고 하며 범부들은 모두가 분단신을 받아서 인간이나 천상 등 6도를 윤회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사를 분단생사(分段生死)라고 하지요. 불법을 믿고 수행한다 하더라도 삼매의 힘을 얻거나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분단생사는 면하지 못합니다. 착한 행을 해서 천상에 나고 혹은 인간에 나며 잘못해서 악도에 떨어지지요. 불도를 닦아 선정의 힘을 이루거나 깊은 진리를 깨달으면 분단생사를 받지 않는 경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수행하여 도력을 이루신 성현들, 나한님, 벽지불 그밖에 대보살 등은 분단생사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깨달아 알고 있는 것이 도리어 장해가 되어[所知障] 이것 때문에 삼계 밖의 수승한 과보를 받은 몸이 됩니다. 이것을 의생신(意生身)이라고 합니다. 의생신을 받은 도인들은 그 몸으로써 써 삼계내에 다시 들어와 보살행을 닦기도 하며 그래서 보다 향상하여 성불하기도 합니다. 대자비 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명도 육체도 자유로이 바꿀 수 있으므로 이것을 변역신(變易身)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대개 불도를 바르게 닦아 깊은 지혜를 이룬 도인들은 자유로이 육체의 몸을 벗을 수 있으며, 육체를 벗어서 범부들은 죽었다고 말하나 본인은 항상 살아서 변함이 없는 도리를 수용합니다. {누구나 힘써서 참선하거나 염불하면 사람은 원래가 죽지 않는다. 죽음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여름에 무성했던 풀이 말라도 오히려 그 뿌리는 단단하고 더욱 실해서 새 인연을 만나 보다 큰 싹을 피우고 꽃과 과실을 맺는거와 같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불법은 철저한 진리의 길을 배우는 것이며, 닦고 개달아서 성취하는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의 세계를 헤아릴 수 없어서 불가사의라고 하는데, 설사 우리의 자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여 부정하거나 과소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참된 뜻을 알지이다} 하는 경건하고 진지한 자세가 대 진리를 배우는 불자의 기본자세입니다.

 

3)믿음을 키우는 법

 

질문96), 저는 불교교리는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해일 뿐 절대적 믿음이 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자라나도록 도와 주십시요.

 

불교교리는 깨달음에 이르는 안내기라고도 말합니다. 그렇다면 안내기만 가지고 있어서는 저 언덕에 이르는 기쁨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불법은 모두 실천하는 데서 진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바라건데 경의 말씀을 믿고, 삶의 목표를 부처님 법 안에서 분명히 하고 큰 소망 큰 원을 발하십시요. 재가불자로서 조석으로 독경 염불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끊임없이 부어지는 부처님의 자비 위신력을 생각하면서 일심으로 기도 정진 하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럴 때 기쁨도, 자신도, 새로운 희망도 보다 뚜렷하고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4)믿음과 수행

 

질문97), 부처님 법은 수행이 위주가 되는지 믿음이 앞서는 것인지 가르쳐 주십시요.

 

부처님 법은 자기 성품을 깨닫고 법의 안목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법의 안목이 밝지 못한 범부들은 먼저 닦아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닦아야 자성과명을 밝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닦자면 불가불 부처님 법을 크게 믿어야 하며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도 없고, 바른 이해도 없이 닦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믿고 바로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수행하여 법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바로 믿고 교법에 대한 이해가 명료하다 하더락도 그것은 닦아서 법안이 열린 다음에야 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법을 배우는 사람은 큰 믿음과 바른 이해의 기초 위에서 끊임없는 수행이 있어야 하겠고 수행에 따라 믿음과 이해도 보다 참되고 밝아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5)참믿음의 방해요인

 

질문98), 일체 성취의 근원이 되는 믿음을 갖는데 방해되는 요인을 끄집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귀하의 뜻에 맞게 꼬집는 것이 되는지 모르겠으나 대충 말씀드리는 것으로 양해를 바라며 또한 이에 관련된 사항에 대하여는 제가지은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의 기도분에 얼마간 적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결정적 믿음의 방해요인이 되는 것으로 이 자리에서는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 [부처님은 열반에 드셨다. 3천년 전의 부처님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부처님을 말한 것이 못됩니다. 형상인 부처님은 중생교화를 위하여 방편으로 변화신을 나투신데 불과합니다. 변화로 나투신 몸을 부처님 본신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옛부터[부처님의 보신도 화신도 참이 아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은 법신(法身)입니다. 진리의 몸입니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이 없습니다. 그 모두에 뛰어나고 현재하시는 법신입니다. 지금 부처님의 법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다만 3천년 전에 80년간 재세했던 위대한 성자라고만 알고 그렇게 책에 ㅆ고 선전하는 것을 보니 딱한 노릇입니다. 부처님은 법신이라는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영원히 현재 설법하시는 대자대비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 들 것은 중생이 이 몸은 육체이고 죄가 쌓인 몸이고 업보가 뭉친 몸이고 숙명적 고난 속의 인생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몸의 현상적 관찰에서 나온 말입니다. 으리의 육체는 현상적으로 온갖 고뇌와 망념과 장애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그 내면을 살펴보고 다시 반야의 가르침에 마음을 돌릴 때 인간은 측면이 사뭇 다른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체이고, 물질이고, 정신이고, 감정의 덩어리인 듯한 이 몸은 미혹의 눈에 드러난 형상일 뿐 그 본성은 법성(法性)이요, 진여(眞如)요, 불성(佛性)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에 이으기를 [오온<육체와 정신>은 공했다]하였으며 또한 {일체 중생이 여래덕성이 구족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말을 믿지 않고 {나는 죄인이다. 업보로 된 몸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성취할 것은 불행과 실패 뿐입니다.

 

셋째 : 생각할 것은 진실하지 못한 점입니다. 마음속에 허위와 감정과 대립과 불신 등을 품고 있으면서 참회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런 어두운 덩어리를 가슴 속에 품고서 버리고자 하지 않으면 거짓이 되고 마빈다. 일체 성취의 믿음을 이루자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일체허물을 참회하여야 합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어두운 마음, 뭉쳐진 마음, 집착한 마음, 모두를 털어 놔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을 뿌리내리지 못하게하고, 성장을 가로막으며, 병고와 불행을 부르게 됩니다.

 

넷째 : 진지한 자세의 결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명의 진실로 진지하게 받아들려야 합니다. 이론으로 알아서 지식화하거나 관념적인 이해로 만족하여 실천이 없고 자기 혁신이 없어서는 참된 믿음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 감사하고 돈이나 물자를 흔연히 보시하며 수행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어려움을 참아 견디면서 남을 이롭게 하는 전법보살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진지한 자세가 선행되는 것입니다. 이상 간략한 네 가지를 참고하시어 일체 성취의 큰 믿음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시기를 합장 기원합니다.

 

6)왜 예경하는가?

 

질문99), 박가리경에 박가리비구가 부처님께 예배하려하니 [이 몸뚱이에 절을 해서 뭘 하려느냐? 절을 그만 두어라.]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어째서 부처님께 예경해야 합니까?

 

박가리경에서 부처님은 박가리비구에게 말씀하시기를 [법을 보는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법을 보는 자야말로 부처님을 뵙는 것이며 예경하게되는 것이니 이것은 실상례(實相禮)라고 할 것입니다. 법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님의 유무, 내외, 거래가 없음을 요달하여 그와 같은 평등성지에 머무는 것은ㄴ 무상례라고 할 것입니다. 따로 형상을 취하여 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부처님의 지혜와 덕성과 뜨거운 자비와 가없는 서원력을 우러러 합장하고 일심이 되고 몸을 굽혀 지극존경심의 뜻을 나툴 때 여기에 공경례가 있는 것이며 몸의 공경의 뜻을 나타내고 그 마음이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향하며 그 생각이 일심일 때 비록 범부의 예경일 망정 부처님께 예경하는 의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유한, 속박의 범부성에서 무한, 자재의 부처님을 향한 공경례로서 부처님에 대한 예경은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으신 분은 실상례를 행하시던 분을 따라서 거기에 부처님의 공덕바다는 함께 너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겉모양은 비록 예경의 거동을 취하더라도 아상을 여의지 못하고 공경심이 순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경이 아니요 이른바 아만례가 되니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7)예불의 뜻

 

질문100)저희들은 오늘날 부처님께 예배드릴 때나 공양드릴 때 3배, 7배 또는 그밖에 절을 많이 할 때가 있습니다. 부처님님께 예경하는 횟수에 대하여 그 골격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3보께 에경드린다는 뜻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3배를 하게 됩니다. 7배나 10배나 20배를 하더라도 그 내용은 역시 3보입니다. 예를 들어 7배의 경우를 말한다면 처음 1배는 석가모니불께 두 번째는 그밖에 모든 부처님께 그리고 세 번째는 부처님의 거룩한 법보께 예배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등 그밖의 많은 보살 님들께 예경하고, 다써번째는 부처님 당시의 수많은 아라한 등 성자들한태 예경하며, 여섯 번째는 부처님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조사님께 예경하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그밖의 모든 스 님들께 예경하는 것입니다. 위에 말한 것은 예경할 때의 기본적인 것을 말한 것이고 그밖에 특별히 참회하거나 특별한 원을 세우신 부처님께 따로 예경하는 것은 별도입니다.

 

8)예불하는 마음가짐

 

질문101), 예불할 때의 마음자세를 어떻게 가져야 할지 말씀하여 주십시요.

 

어떻게 하는 것이 참 예경인가에 대하여는 앞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좀 각도를 바꾸어서 말씀드리지요. 예경은 참되게 합장한 마음이 근본자세라 할 것입니다. 두손을 합한 일념에는 모든 때묻은 생각이나 사사로운 생각들이 말끔히 없어집니다. 합장 앞에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일념이 된 때에는 이것이 바로 자기를 비우고 부처님 광명 앞에 자기의 온 몸을 던진 것이 됩니다. [몸과 말과 뜻을 모두 기울여서 예경한다.]는 것은 정성스럽게 몸을 낮추고 오체투지하며 일심으로 산란한 마음을 비워 오로지 거룩한 광명만을 우러러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을 기울여 무념이 되어 청정심이 되었을 때 거기에 비로서 예경하는 마음이 이루어 졌다고 하겠습니다. 먼져번에 말씀드린 실상례, 무상례, 공경례도 여기서 있계되는 것이며 이 마음자세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비록 겉모양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예경의 진실은 잃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9)수행일과의 시간

 

질문102), 수행일과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 일정한 시가ㄴ에 꼭 일과정진을 한다는 것은 그 정성과 노력의 정도가 시간 있을 때 아무때나 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간절합니다. 일정한 시간에 정근하므로써 신앙과 정성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둘째 : 수행하는 생활의 기틀이 잡힙니다. 하루의 생활에서 일생 동안의 생활이 진리에 계합되고 생명 발전 원리에 부합되는 생활로 생활이 정돈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셋째 : 영가나 조상을 위하여 독경할 때 꼭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천도받는 영혼이 복받는데 편리한 이유가 있습니다.

 

10)수행일과 시간(재가자로서)

 

재가불자로서 수행일과 시간은 어느 때가 좋습니까?

 

수행은 모든 시간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 수행일진대 수행은 살아있는 모든 시간이 수행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일과시간을 말하게 되는 것은 모든 생활이 수행이 되기 위해서 특별히 시간을 정해서 하는 것입니다. 즉 귀의, 예경, 염불 독경, 발원, 좌선 등을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하는 것이지요. 수행일과가 이러한 성격의 것이므로 그 시간은 하루의 시작인 아침이 좋을 것이고 잠자는 시작인 자기 전에 시작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한결 같은 수행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생활사정상 조석시간이 어렵다면 그 밖의 시간도 무방합니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되도록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지켜가는 것이 좋을 뿐만아니라 중요합니다. 불법 수행은 일과염불만이 아니므로 불자들은 생활하는 모든 시간에 항상 밝은 마음과 바른 행을 닦아가야 합니다.

 

11)일과 공부를 못하게 될 때

 

질문103), 집에서 일에 쫓기거나 부득이한 일이 생겨서 조석일과를 못 지키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일과공부를 못하게 될 때라도 할 수 없다 하고 포기하여서는 안됩니다. 설사 부득이한 일이 생겨서 정해진 시간에 일과공부를 못하더라도 마음에서는 놓치지 말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시간 아니라고도 다른 시간에 하게 되고 설사 정해진 일과를 다 못하더라도 반이나 일부만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매일 108배 하는 사람이 그날에 못하였으면 다음날에는 배를 더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공부자세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방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정이 있어 부득이 했다 하고 이유를 붙여 방심하면 믿음은 퇴실하기 쉽습니다. 결코 이유를 붙여 방심하지 마십시요.

 

12).경전 독송시 마음가짐

 

질문104), 저는 조석으로 독경을 합니다. 한문 경전 독경할 때에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요.

 

독경할 때에는 경건히 합장하는 마음으로 모든 망념을 쉬어야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한참 동안 좌선 또는 염불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체 망념을 놓은 맑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내가 읽는 것이나, 실제는 경전 독송을 통해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맑은 마음에서 일심으로 독경할 것이고 반연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더욱이 서두르거나 과도하게 소리치는 것은 독경 태도가 아닙니다. 청정심으로 정중하게 일심으로 반복 독송하면 진정 부처님의 자비하신 진리의 은덕이 우리의 심신에 넘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13).독경하는 장소가 따로 있는가?

 

질문105), 저는 집에서 조석으로 금강경을 읽고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지장경도 천수경도 독송합니다. 그런데 스님들이나 신도들간에 금강경은 집에서 읽지 않는다던가 지장경은 영단 또는 절에서나 읽는다는 등 말이 많습니다. 또 천수경도 집에서 독송하지 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근일 유식한 사람이 많아서 경전에 대하여 절에서 읽는 경전, 집에서 읽는 경전, 스님들이 독송하는 경전, 신도들이 독송하는 경전을 가려 말하는 모양입니다. 저도 어느 누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수지 독송에 대하여는 경전에 직접 말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전의 말씀을 따를 것이요. 경전의 말씀과 어긋나는 유식한 사람들의 말을 따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금강경도 선남자 선여인이 수지독송하라 했으니 재가출가를 묻지 않는 것이고 지장경이나 그밖의 경전이 모두 그렇습니다. 지장경도 일체 죄고중생들을 위하여 설하시고 일체 중생이 수지독송하여 무량공덕을 얻는 것인데 경전에 어긋나는 그릇된 주장은 사견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전은 재가이든 출가이든 지심으로 수지독송하는 데서 무량무변 공덕을 얻는 것입니다.

 

14).위패와 가정독경

 

질문106), 가정에서 위패를 모셔 놓고 독경을 해도 좋습니까?

 

가정에서 망인의 복을 돕기위해 독경만으로 족합니다. 일심으로 독경하면 맑은 마음과 지혜광명이 나타나 부처님의 위덕이 적용합니다. 그래서 독경은 수행이며, 기도이며, 부처님의 공덕을 받는 행위이며, 자신과 주위를 밝히는 작법이기도 합니다. 특정한 사람을 위하여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수행공덕을 입게 됩니다. 일심으로 독경하는 것이 중요할 뿐, 특정한 망인의 위패를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15)독경 공덕의 차이

 

질문107), 염불 독경하는 사람따라 다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 공덕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원래로 충만합니다. 그 공덕밖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처님 공덕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미혹에 의한 분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으로 염불독경 수행하여 망견을 버리고 미혹을 돌리고 망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서 범부들은 부처님의 공덕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중생의 근기와 염불독경 수행하는 정도에 따라 저들이 느끼는 공덕의 차이가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불보살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 차별없이 완전한 것을 주시지만 중생의 수행따라 받는 것에 차이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16)오계의 근본정신

 

질문108), 오계법문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오계에는 살아 있는 목숨을 죽이지 말라.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등 금지하는 형식으로 이룩된 5개의 덕목입니다. 이 하지마라는 형식 부작위형식으로 규정된 계의 본뜻은 무슨 행위를 하지 않고 가만 있는 것이 계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적극적으로 어떤 비른 행을 할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 목숨 죽이지 마라)는 계는 목숨을 존중한는 행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계의 뜻인 즉 아무 행위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첫째 : 생명을 존중하고 억압하거나 아니면 손상하거나 내지는 죽이지 말라.

 

둘째 : 아낌없이 그 생명에게 베풀어주고 그리고 결코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하지 말라.

 

셋째 : 청정행을 행 할 것이요.결코 사음을 하지 말 것이요.

 

넷째 : 진실한 말만을 할 것이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다섯째 : 바른 마음을 항상 지키고 술에취해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계는 적극적인 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계를 지킨다는 것은 진실하고 청정한 행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계가 추구하는 청정 진실행의 근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즉 육체도 번뇌도 감각도 마음도 온갖 분별도 모두 여윈 법성행입니다. 우리의 진면목인 법성, 즉 불성을 구체적 생활 가운데 내어 쓰는 행동을 5가지로 분류한 것이 오계라 하겠습니다. 오계는 바로 불성의 표현이며 법성면목의 산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계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은 우리의 본분을 순수하게 지켜가고 본분공덕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계를 행하는 사람은 법성여여하게 행하고 오계를 행하는 상이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오계를 가지므로써 법성이 지닌 무한 공덕을 함께 하게 됩니다. 오계가 가지는 큰 뜻을 우리는 잘 알아 실천해 가야겠습니다.

 

17) 불살생

 

질문109), 불교에서는 불살생을 첫째가는 계명으로 삼는 것 같습니다. 그 본뜻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지키는 것인지요?

 

불살생의 본 뜻은 생명을 존중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은 절대 가치입니다. 생명은 모든 생명에서 동일하고, 인간과 역사가 발전한다고 해도 필경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생명이 무시되거나 위협받거나 존중되지 않는다면 그밖에 훌륭한 것이 아무리 많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의 안전과 충분한 보호에서, 불안 공포가 제거되고 생명이 가장 자유스러운 상태에 놓여 생명이 가지는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여 참으로 생명이 보람을 누릴 수 있는 생활과 역사를 이룩해 가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생명의 무한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생명이 바로 불성의 실현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소중한을 깨달아 스스로 존귀하고 모든 이웃이 존경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이 지니고 있는 무한의 능력, 무한의 지혜와 덕성을 발휘하여 온 이웃을 위하여 내어 써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삶의 보람은 여기서 거둘 수 있습니다. 이런 생명존중은 개인 뿐만아니라 모든 국가 사회의 제도를 통하여도 보장되고 조성되어야 합니다. 생명존엄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유물주의 사상이며두째는 이기주의입니다. 이 그릇된 사상들이 인간생명을 야욕 달성을 위한 도구이거나 물량생산의 기계로 삼고 인간사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존엄을 실현하는 방법은 스스로 생명이 불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모든 이웃에게 깨닫도록 가르치는 일입니다. 여기서 상해도, 살생도, 억압도 없는 그래서 진정 빛나는 생명가치를 모두 발휘하는 아름다운 진리의 국토가 이룩됩니다.

 

18)계행과 수행

 

질문110), 계행을 지키는 거와 수행하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염불 수행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처님 광명을 자신 위에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염불하면 번뇌가 쉬고 마음이 맑아지며 지혜가 나고 힘이 납니다. 그러므로 염불은 바로 부처님의 공덕의 문을 여는 작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계행을 가지는 것은 부처님의 행, 즉 깨달은 행을 닦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 행을 행하며 부처님 공덕을 마음에서 이루면 이것이 깨달음이며 바로된 스행입니다. 만약 염불 수행을 하면서 계행을 닦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음과 행이 서로 어긋나서 수행이 될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면 나무에 불을 붙이고자 하는 사람이 부지런히 불을 붙이는 것은 염불 수행이고 나무를 말리고 부채질하는 것은 계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행을 가지며 수행하여야 바른 수행이 됩니다.

 

19)마하반야 바라밀의 의의

 

질문111), 마하반야 바라밀에 대해여 그 의의를 알고 싶습니다.

 

마하반야 바라밀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큰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관심을 가질 것은 장차 완성한다든가 어떤 조건이 붙은 완성이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완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어떻다고 설명할 수 없는, 생각이나 마음을 초월한 무한 절대의 완성, 진리 본연의 완성을 뜻합니다. 경에 이르기를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이 나온 곳" 이라고 하여 불모(佛母)라고 합니다.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게 된 근거는 반야바라밀이라 하였으며 모든 부처님에 앞서 반야바라밀을 공경하고 공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구하는 사람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완성에 있어서나 사회의 완성에 있어서나 역사와 국토의 완성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반야바라밀을 구하라는 뜻이 됩니다. 반야바라밀은 근원적 진리이며 주체적 진리입니다. 우주와 시간이 벌어지기 이전의 원모습이며, 시간과 역사가 벌어진 후에도 그 원모습이며, 무한한 시간과 공간과 존재와 발전의 근원적 원모습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을 생각하고 부처님과 그 거룩한 진리를 알려면 반야바라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멸의 근원이 반야바라밀이고, 우리의 참모습이 반야바라밀이고, 일체 존재를 초월한 실존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참된 인간을 확립하고 진실한 자기를 회복한다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아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이 땅, 이 사회, 이 질서가 진리 본연의 질서가 되어 인간 생명을 진리로 가꾸고자 하면 역시 반야바라밀에 의한 사회이어야 하겠고 그에 따른 운영이어야 하는 말도 됩니다. 인간 개개인의 덕성과 지혜와 창조적 힘을 발휘하는 것도 반야바라밀의 활용에서 오게 됩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반야바라밀은 진리이며, 실존이며, 일체 생명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일체 생명이 삶의 보람을 누리고 발전과 평화를 이루자면 모름지기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반야심경은 이 점을 가장 짧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둘러싼 감각적, 육체적, 물질적, 자연적, 정신적 일체의 한계를 초극합니다. 일체 고난을 없이하고 일체 장애와 두려움을 소탕합니다. 반야바라밀은 무상진리로 인도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반야바라밀은 문자 그대로 대 지혜의 완성이며, 진리 생명의 완성이며, 진리 국토의 완성이라 할 것입니다.

 

20)신념과 마력

 

질문112), 신념이 있으면 무엇이든 이루어 질 수 있습니까?

 

신념은 일체 환경을 움직이고 자신을 새롭게 형성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 어긋나는 그릇된 신념은 이루어질 수 없고 자기를 해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된 신념도 때로는 성취를 가져올 수 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고 번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법이 무엇인가 바로 알아, 바르고 착하고 모두가 합께 이로울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1)운명에 도전하는 법

 

질문113), 사람이 살아가는데 부닥친 고난을 이기고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에 도전한다고 할까요,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생활상에 당하는 여러 가지 뜻하지 아니하는 일들, 특히 병 같은 고난스런 일들은 그 원인을 대체로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스스로가 알던 모르던 간에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일입니다. 미워하거나 분노하고 있었거나 슬퍼하거나 그릇된 생각에 빠져 있거나 여러 가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반성해서 고쳐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타나는 현상들은 과거에 지은 원인이 해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일에 대하여 그것이 비록 고통스러운 일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나타나면서 사라지는 것이다"하고 생각하여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재난의 업장이 소멸된다"고 기뻐하여야 합니다. 운명적인 어려움을 당하여 그것을 뜻하는 바 방향으로 열어가는 방법은 한가지 있습니다. 자신이 부처님의 무한 공덕을 지신 안에 지니고 있는 자이며, 자신의 참 생명은 무한 공덕 그 자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큰 진리에 뒷 받침이 되는 자신의 꿈을 크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실현을 향하여 용기 있게, 자신있게, 지혜스럽게, 실천해 나아가는 일입니다. 세간에 그릇된 일들은 모두가 허망한 그림자 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뒷받침이 된 참된 원을 세워서 진리의 믿음으로 용기 있게 실천해 나아갈 때 마침내 현실 위에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운명이라 하는 것이 자기에게 압박해 올여지가 없어집니다. 운명은 타인이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과거에 지은 것입니다. 금생에 받음으로서 소멸되고, 금생에 진리적인 힘을 전개 함으로써 새로운 운명이 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거나 운명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진리의 주인공으로서 창조행을 전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2)부동심 수행방법

 

질문114), 어떠한 경계에 부닥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지려면 어떤 수행을 하여야 합니까?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마음이 흔들린다고 하는 것은 여러 경우가 있으나 그 중에서 불안한 흔들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경계에 의하여 마음을 내고 경계에 의존하여 안정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계가 흔들리면 마음도 흔들리고 불안해 집니다. 경계란 끊임 없이 변하는 것이며 그 뿌리를 추궁해 보면 공허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계에 매달리면 끊임없는 변화 속에 안정을 잃고 불안하기도 하며 경계에 매달려 인생을 살다보면 그 마음이 공허하고 적막해지며 더욱이 육체가 노령에 가까워질수록 쇠약해지니 심각한 허무감에 빠져 듭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경계란 그림자이며 필경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경계에 부닥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경계에 의지함이 없는 본 마음의 수행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 수행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불교의 모든 수행이 경계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일심 수행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염불도 그렇고 참선도 또한 매 한가지입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염불 수행할 때에 일체 바깥 경계를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의 경계도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시고 한량없는 공덕을 생각하고 무조건 동요되지 않는 부동심을 얻고 크게 안온한 땅에 미루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23)사랑(愛慾)을 버릴 것인가?

 

질문115), 사람은 사랑즉 애욕심(愛慾心)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것을 버렸을 때 어떻게 되는 것이지 말씀하여 주십시요.

 

경(經)에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이 은애(恩愛)와 탐욕(貪慾)으로 말미암아 윤회가 있게 되고 모든 중생이 음욕(陰慾)으로 인하여 그 목숨을 정하나니 따라서 윤회는 사랑이 근본이 된다."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중생에 있어 사랑이 그 목숨의 근본과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을 알겠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어떻게 써야 바른 것인지 사랑의 근본이 어떤 것인지를 밝힌 연후에야 사랑을 버리고 혹은 안 버리고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욕망과 결합하여 자기 세계를 형성합니다. 그 욕망은 협소한 작은 것에 탐착할수록 자기가 적은 것으로 전략하고 큰 것을 욕망하여 그것을 사랑으로 충만할수록 가치는 확대되고 기쁨도 보람도 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욕망이나 사랑이 나쁜 것이 아니고 대상을 작은 것으로 구하고 그것에 탐착할수록 저열 저질의 사랑이 될 것이며 욕망의 대상을 한 사회라든가 국가라든가 공익이라든가 하는 등으로 넓게 구하고 거기에 사랑이 확충될수록 값있고 성스러운 사랑으로 빛을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이나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선택하고 발휘하는 지견과 지혜에 따라 차별이 벌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원래 욕망은 대상을 선택한 것이고 사랑은 그와 더블어 둘이 아님을 나타내는 힘입니다. 사랑의 뿌리는 탐이며 탐은 진리의 직접 표현인 힘이라 하겠습니다. 진리가 만법과 둘이 아님을 이루는 힘이 탐이니 말을 바꾸면 탐은 진리의 동력이라 할 것입니다. 순수한 입장에서 관찰하면 탐은 선악을 초월하여 있으며 일체를 성취시키는 힘이라 할 것이므로 이를 허물하기 보다 오히려 거룩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탐애를 죄악시하는 것은 탐애의 근본인 진리 본연대로 그 탐을 쓰지 아니하고 일신이나 일가족이나 일당을 위하는 식으로 협소하고 편벽지게 쓰기 때문에 그 결과는 전체와 조화를 깨뜨리고 부조화와 혼란을 야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탐의 표현이며 탐애는 법성진리의 동력이므로 탐애를 넓고 크고 높은 차원에 두고 {원대하고 고매한 욕망} 생을 펴나갈 때 거기에는 성자의 출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고에 악명 높은 도적은 자기 일신을 중심산아 탐애를 부린 것이요, 국민경재를 혼란시키는 독점기업의 횡포는 자기 사업에 탐애의 준심을 둔 것이요, 충무공이나 안중근의사는 조국에 탐애의 중심을 둔 것이요,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예수는 인류를 일신으로 삼는 욕망에 산 사람이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온 법계 일체중생을 자신으로 삼는 법 본분을 중심하여 탐의 힘을 발휘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밝은 눈, 평들한 지혜로 큰 사랑을 펼쳐갈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무런 욕망도 없고 의욕도 없다는 것은 자기생명 본분에 대한 반역입니다. 부처님의 무연대비를 배우고 차별없는 대자대비를 닦는다는 것은 이것이 법성 본연의 사랑을 쓰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애욕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자칫하면 육체적인 개아나 자기 일가족 중심으로 욕망을 일으키기 쉬운 범부의 타성에서 벗어나라는 뜻이지 욕망을 없애라는 뜻은 아닙니다. 애욕은 육체적 애착을 의미하는 것으로 협의로만 본다 하더라도 그 도리는 매 한가지입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분별하고 치우치지 아니하고 평등 속에 차별을 차별속에 집착이 없는 사랑이란 이것이 허물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24)이성에 무심해서야...

 

질문116), 중생세계는 모두 이성관계를 통해서 번창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성관계에 무심한 도(道)를 닦는다는 것은 중생세계가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중생세계 모두가 이성관계를 통해서 번창한다는 생각은 속단입니다. 중생이사는 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 하여 삼계라고 합니다만 그 중 욕계만이 탐욕으로 움직이는 세계이고 그 외는 탐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색계만 하더라도 이성관계를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본래 인간은 본성이 나뉠 수 없는 하나이며 따라서 대립될 존재가 없습니다. 순수하고 전성적(全性的)이며, 전일적(全一的)이며, 절대적인 것이 본성이며 원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전일적 인간 존재가 경계를 보고 혹은 집착하고 대립하는 데서 중생세계가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자성이 순수한 상태일수록 큰 안정과 화합과 전일성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고, 자성의 순수성을 벗어난 정도에 따라 그 안정성도, 전일성도 그만큼 적은 것이 되고 거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성이 순수 할수록 큰 순수삼매를 지키는 것이고 자성을 몰각한 정도에 따라 산란심이 더해 마음이 격한 파랑이 일게 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안정정된 상태에는 대립이 없거나 어찌 이성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색계천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합니다. 경계를 보고 마음이 움직여 산란심이 많은 욕계에 이르러서 이성도 생기고 탐욕심도 생기고 탐착행위도 거칠게 발달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욕계라 하더라도 인간계가 아닌 욕계천(欲界天) 정도가 되면 이성을 탐착하는 음욕행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욕계천 천인들이 음욕행위를 할 때, 사왕천과 도리천에서는 인간세계와 같이 육체로 행하고야마천에서는 서로 포옹하며 도솔천에서는 손을 잡고 화락천에서는 서로 웃으며 타화자재천에서는 쳐다보는 것으로 음사가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육체관계와 서로 웃는 차이에서 보듯이 낮은 중생일수록 거친 음욕행위를 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이성관계는 자성의 순수성에서 벗어난 세계의 현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성관계에서 되도록 무심(無心)하고 평등(平等)하며 차별없이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욕걔의 중생들이 탐욕이 바탕이 되어 있으므로 이성 현상이 벌어져 있어도 성욕에 탐착하여 욕락에 빠지는 것은 자기의 본성 상태에서 멀어지고 마음상태를 거칠게 움직이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므로 삼가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불교에서는 인간의 이성관계를 정상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되 탐착하지 말고 경계를 당하되 되도록 본심의 안정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그 질을 향상시키는데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가 인에 있어서는 이성관계를 인정하되 절도와 예절을 가르치고, 출가 수행인에게 무심을 가르치며, 모두가 거룩한 가치를 지닌 자로써 존중하고 그 완성을 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계를 발전시키는 것이요. 인간을 거룩한 차원으로 향상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에 이르시기를 "중생이 생사에서 벗어나 윤회를 면하고자 하거든 먼져 탐욕(貪慾)을 끊고 애갈심(愛渴心)을 제하라" 하셨으며 또한 "ㅇ'ㄹ체 중생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무명(無明)을 발휘한다" 고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필경 우리를 생사없는 대각(大覺)의 언덕으로 인도하시는 깊고 큰 곳에 뜻이 계심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25)미운 사람을 사랑하라.

 

질문117), 미운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은 이해가 됩니다만 미운 사람을 사랑하고존중하라는 뜻은 어떤 이유인지 알고 싶습니다.

 

밉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밉게 보이는 것은 미운 것이 자기를 떠나서 자기 마음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밉다고 하는 것도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마음은 본래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모든 우주 만물과 함께하는 크고 너그럽고 하나인 생명, 하나인 존재로서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대립하고 미워할 대상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대립도 자기 마음의 분별을 다시 분별하도록 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미운 것도 자기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나와 대립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자기와 한 마음, 한 몸입니다. 한 자리, 한 자비, 하나의 따사로운 체온으로 살고 있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대립할 자 없고, 미워할 자 없습니다. 한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원래의 도리입니다. 나는 넓은 마음이고 미운 짓 하는 상대방은 어리석은 존재이니까 불쌍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밉게 본 것은 보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망령되 소견으로 대립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닦아 행복하고자 한다면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합니다. 넓고 큰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미운 생각 버리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그 행복을 기원하며 감사하는 일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미워하는 가슴이 어둡고 괴로워 집니다. 심하면 병이 생기고 생활 환경에 불행이 찾아 옵니다. 어두운 마음에서 어두운 결과가 찾아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자비하고 사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일수록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밝아지고 행복해 집니다.

 

26)은혜와 애착

 

질문118), 불교에서는 애착을 끊으라고 하고 한편은 사랑에 대하여 보답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은애를 알아 갚으라는 것입니까? 무심하라는 것입니까?

 

불교에서는 은애(恩愛)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뜻으로 봅니다. 즉 부부 친자의 사이처럼 강한 집착과 애정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사람들은 부모에 대하여 애착에 젖어 항상 서로 엉켜 속박되고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은애로 된 감옥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은애를 버리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은혜를 갚는 것이라 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 사랑에 대하여 몇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탐착하고 집착하는 것이며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욕망의 포로가 되어 만족을 구하는 심정입니다. 이것은 성욕이나 정욕같은 욕애와 생존을 추구하는 유애(有愛) 등입니다. 그리고 한편에는 법으로 청정해진 애가 있습니다. 애착으로 물든 애와 애착이 끊긴 청정한 애의 두가지를 볼 수 있는데 전자는 탐착이 근본이고 후자는 믿음이 근본입니다. 그래서 경론에는 욕애(欲愛)와 법애(法愛)의 두가지를 말하기도 합니다. 욕애란 처자 등을 애착하는 탐욕이 뿌리이고, 법애는 일체 중생에게 평등한 자비심이 근본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물들은 애욕은 버리라 하는 것이고 삼보의 은혜,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 국가 사회의 은혜 등에는 깨달은 밝은 마음으로 받들어 섬기게 되면 그것은 속박이 아니라 자성의 문을 열어가는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27)말세의 근거

 

질문119), 말세에는 장애가 많아서 고통도 많고 수행도 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어떤 것입니까?

 

말세란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실하게 실천하기 어렵게 되다는 역사관에 근거한 것입니다. 정법시대, 상법시대, 말법시대로 나누고, 말법시대가 끝나면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 힘들다는 설이 있습니다. 대개 부처님의 교법과 그 실천 수행과 교법의 증득이 모두 갖추어진 시대를 정법시대라 하고, 교설과 수행만이 있는 시대를 상법이라 하며, 교설만이 있는 시대를 상법시대라 하고 있습니다. 대개는 정법 오백년, 상법 일천년, 말법 일만년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반야의 가르침에서 살펴 볼 때 부처님 법이 숨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워래로 정법은 영원하다 할 것입니다. 다만 범부들이 형상에 집착하고 불법도 관념적 이해를 앞세우기 때문에 상법이나 말법시대가 논의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정법 영원을 믿고, 믿음을 견고히 하며 수행을 한결같이 해 나갈 때, 그와 같은 수행자체가 이미 불법의 증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말세를 탓하지 말고 정법을 바로 배워 여실히 수행하는 것이 요긴하다 하겠습니다.

 

28)어떻게 창조 생활을 할 것인가?

 

질문120), 우리들은 번뇌와 업보의 몸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번뇌가 끊어진 열반의 공덕을 쓸 수 있겠습니까? 깨칠 때까지를 기다려야 합니까? 알도록 가르쳐 주십시요.

 

우리들의 몸을 번뇌와 업보에 매인 숙명적 고통을 안고 있다고 보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지혜의 눈을 뜬 반야(般若)의 안목에서 보면 그러한 중생의 구속적 차별 현상의 꿈이요, 환상이요, 실이 아닙니다. 오직 청정한 부처님의 무량공덕이 활발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견성(見性)하신 조사님들은 이 도리를 분명히 보시고 의심없이 활발하게 수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참 공덕(供德)을 가로막고 있다는 번뇌(煩惱) 망상도 실로는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가히 제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불자들은 부처님의 깨달은 경계의 말씀을 바르게 믿고 솔직하고 용감하게 실천함으로서 우리의 참 면목에 깃든 부처님의 무량공덕(無量供德)을 받아쓰고 내어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 모두와 온 세계에 평화와 창조의 찬란한 빛이 넘치게 됩니다. 부디 반야 법문을 굳게 믿고 슬기로운 창조적 실천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9)외로움을 이기는 법

 

질문121), 저는 처음 법회에 나왔습니다.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고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이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덜 느끼고 될 수 있으면 떨쳐 버리고 초연하게 살 길은 없는지 말씀해 주십시요.

 

외로움이란 우리들 가슴에서 지우기 어려운 검은 점인가도 합니다. 어쩌면 구름에 갇힌 달처럼 숨박꼭질하듯 우리 마음에 숨었다가는 얼굴을 내미는 요물인가도 합니다.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자아의식의 성장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과 가족의 품에서 안정을 얻고 지내다가 점점 자아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가정밖에 자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좀 더 성장하면 부모님도 자기와 다른 몸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좀 더 개아(開我)에 눈을 뜰 때 자신은 사회와의 관계 속의 개아(開我)이며 자연도, 우주도 자기 밖의 자연과 우주로써 그 관계는 홀로 스스로가 짓고 홀로 짊어지고 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자아가 형성해 감에 따라 인간은 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런 의식의 성장과정에는 여행이라든가, 군에 입대 한다든가, 혼자 먼 곳으로 떠나간다든가, 또는 어려운 과업 앞에 홀로 대결 한다든가. 하는 인생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개아의식의 성장과 생활환경의 변화과정에서 우리의 가슴에는 외로움이 고이게 됩니다. 어떤 때는 막연한 외로움일 때도 있고, 때로는 심각한 고독과 쓰라린 공허감 일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외로움의 근원은 인간 심정의 공허에 근거 합니다. 이런 외로움을 당하여 우리는 대개 그 해결보다도 도피 또는 외면 하는데 급급한 것이 현실입니다. "즉 군중 속에 파묻히고, 향락에 빠지고, 자극과 환락속에 뛰어드는가하면, 망각으로 피신하기도 합니다. 또 그러는 사이에 결혼을 통하여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텅 빈 가슴을 채우기도 하고, 부귀나 권력으로 안정을 쌓기도 하며, 왕성하고 화려한 활동 속에 자신을 사정 없이 몰아 넣어 외로움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으로는 일시적 호도나 잠시 잠시 회피는 할 수는 있지만 그런 것으로는 근원적인 인간의 공허가 치유 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텅 빈 가슴은 더욱 황량한 가슴으로 마음으로 깊어 지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간 고독은 다시 고개를 들게 되고 인생은 필경 허무라는 것을 가슴과 마음으로 뼈져리게 그리고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권세도, 부귀도, 형제도, 친족도, 모두가 자기를 버리고, 떠나며, 결국에는 홀로 자기만이 남은 적막한 고독을 느끼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우선 결혼으로 일시적으로 잠재울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고 가정 속에 묻혀 사는 동안 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 해결은 거기에는 없습니다. 참된 자기를 발견하며 참된 진리 생명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 진리인 생명, 영원 불멸한 생명, 모두와 함께한 만덕 구족한 생명, 대자대비 행복한 생명등, 이러한 도리를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믿고 일심 염불하여야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설사 큰 진리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일심 염불하는 생활을 지어가면 가슴에 외로움의 물결이 밀려 오지를 못합니다. 염불의 힘이 성장할수록 점점 안정과 기쁨이 용솟음치고 가슴에서 밝은 태양이 빛나는 따뜻한 언덕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자비심을 행하고 베풀고 돕는 행을 닦아 가면 기쁨이 솟아오고 생활 속에서 부처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는 외로움의 그림자가 찾아 들지 못합니다. 항상 기쁨과 편안이 함께 하게 됩니다.

 

30)고난을 당할 때

 

질문122),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여러 고난을 단하게 됩니다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대하여야 합니까?

 

세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 고난이 나타난다는 것은 자기의 현재나 과거생활 속에서 그 마음가짐이 어딘가 청정하고, 자비하고, 따뜻하게 화합한 자기 본 성품을 제대로 가꾸어 가지 않은 데가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난이 닥치거든 원인을 밖으로 구하지 말고 자신을 향하여 먼져 살펴 보십시요. 신뢰와, 사랑과, 헌신과, 향상적인 노력과, 그밖에 어딘가에 잘 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대립하거나, 원망하고 성을 내고 슬퍼하거나, 게으르고 침체하고 어두운 마음으로 있다거나, 남의 잘못을 꼬집어 파고 비판하는데 열을 내거나, 등등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을 발견해서 참회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반드시 바꾸어야 합니다.

 

둘째 : 현재 나타나는 현상은 이것이 과거에 지은 것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나타나면 즉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잠복상태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슬퍼하거나, 원망하거나, 마음 졸이기 보다는차라리 시원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셋째 : 이미 말한 바이지만 나타나 보이는 모든 현상은 실로는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크게 빛나는 권능적인 본분을 발휘하되 사자와 같이 용맹스럽게, 코끼리와 같이 온건 착실하게 지어나가 역사의 중심이 자기 한 몸에서 열려 간다는 깊은 긍지를 닦아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편안한 것은 구하고 고난은 피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지요. 그러나 실로는 굴하지 않는 활기찬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고난만큼 숨은 능력을 발휘하게 하고 진실한 자기 능력과 덕성을 키우는 것이 없습니다. 편안한데 낙착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여 오히려 고난을 오히려 희롱하듯 활기차게 피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맡 부딪처서 이겨나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 할 것이고 바라밀 행자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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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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