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말기에 관세음보살만을 불러 견성하신 무융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조선조 말기에 큰 도인으로 추앙을 받은 분으로
화두정진을 하는 사람이든 주력정진을 하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제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화두정진하여 근대의 한국 선을 중훙시킨 분으로 추앙받고 있는
경허 스님과는 동시대의 인물인데도 중생들에게 법을 쓰는 방법이나
방편을 쓰는 방법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무융스님은 순천 송광사에서 공양주 노릇을 하며 받은 봉급을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3년만에 공양주를 사표 내고 그 돈으로 양식을 준비했습니다.
그 길로 산중으로 들어가 굴에서 나오지 않고
3년 동안 관음주력을 하여 견성을 한 다음 굴에서 나와 납자들을 지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용성스님도 한때 스님의 지도 아래 정진을 했던 분입니다.
무융스님은 납자들을 지도하다가 간혹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공부만 하느라고 속도 허전할테고 운동량도 부족할테지
오늘 어느 동네에 가면 누구 집 결혼식이 있어.
가서 음식도 실컷 먹고 마른 것은 싸가지고 와서 먹도록 해라"
납자들이 가서 보면 말씀과 조금도 틀림이 없었습니다.
스님이 천안 광덕사의 후불탱화 점안식에 경허스님과 함께
증명법사로 초청을 받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두 분 스님은 계율 쪽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어른이 아니셨기 때문에,
불사를 잘 마쳐 보시금이 나왔을 때 주막집에 가서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융스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구하러 가야 안 되겠나.송광사로.."
"암,가야지" 경허스님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두 분이 거나한 상태로 순천 송광사에 들어가자
젊은 대중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위협했습니다.
"어디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땡초중이 곡차를 하고 승보 사찰인 송광사에 들어오느냐?"
젊은 장정들 서넛은 한방에 날릴 만큼 신체가 장대 하였던 두 스님은 웃옷을 벗고 앉았습니다.
"그래,몸이 지긋지긋했는데 어디 좀 맞아보자 두들겨 패봐라!"
젊은 대중들은 우르르 몰려들었다가 기가 질려 밀려 나며 말했습니다.
"저쪽으로 개울을 건너가면 물방앗간이 있으니,
거기 가서 지내시고 절 안으로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두 스님은 절 한쪽 편의 물방앗간으로 가서 곡차를 마시며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경허스님이 말했습니다.
"자 출발하자"
"좀 있어봐.내 할일이 하나 남았어"
무융스님은 걸망을 짊어지고 조실방 앞으로 가서 크게 외쳤습니다.
"동고당! 동고당! 동고당!" 큰 소리로 이름을 세 번 부른 스님은 또 외쳤습니다.
"한평생 중노릇을 한 이가 까치 새끼가 되겠다며 까치 집으로 들어가려 하다니!"
스님은 굵은 주장자로 마룻장을 '꽝꽝'울리고는 경허스님과 함께 송광사를 떠났습니다.
당시 송광사의 조실인 동고스님은 나이가 많아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웠습니다.
죽음에 임박한 동고스님은 비몽사몽간에 늘 산책을 다니던 송광사 문을 지나
그 앞의 개울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난데없는 누각이 보였고,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사람들의 풍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고 있는 듯했습니다.
마침 천연색의 옷을 입은 사람이 누각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스님은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기에 풍악소리가 들리고 노래소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까?"
"진신아미타불께서 헌신하여 설법을 하고 계십니다."
평생 정토왕생을 원하여 미타주력을 했던 동고스님은 귀가 확 뚫렸습니다.
'진신아미타불이 오셔서 헌신설법을 하시다니! 나도 들어가서 법문을 들어야지'
스님이 누각의 계단을 막 올라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험상궂게 생간 한 승려가 나타나
호통을 쳤습니다.
"한평생 중노릇을 한 이가 까치 새끼가 되겠다며 까치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느냐!" 그리고는
주장자로 등어리가 으스러지도록 내리치는 바람에 깨어났습니다.
그 이튿날부터 동고스님의 병은 차도가 있었고,
며칠이 지나 병이 다 나은 다음에 스님은 누각의 꿈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곳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누각이 보이기는 커녕,
까치집이 있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까치집 속에는 얼마 전에 부화된 새끼 몇 마리가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무융스님이 아니었으면 까치집으로 들어가 까치 세끼가 되었을 동고스님!
스님은 무융스님의 법력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보면 화두정진을 했던 경허스님보다
관음염불로 힘을 얻은 무융스님이 훨씬 더 큰 효력을 발휘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꼭 화두라야 견성할 수 있다고 고집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관음주력으로 득력하여 도를 깨치신 무융스님은
일상생활을 통해 납자뿐 아니라 일반 사람에게까지 값어지 있는 덕을 베푸셨고,
허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꼭 화두라야 된다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또 무융스님은 광덕사에서
동고스님의 일을 내다보시고 구하러 가야 되지 않겠느냐 는 말씀을 확실히 하셨는데
암 가야지 하며 맞장구를 쳤던 경허스님이 무융스님이 쳐다본 것을 보고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천 송광사에서 하룻밤을 쉬고 난 다음날에도 경허스님은 그대로 떠나려 하였고,
무융스님은 할일이 남았다며 동고스님께 가서 까치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그때에도 무융스님은 동고스님의 일을 분명히 보았는데 경허스님은 보았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
결론적으로 말해 평생을 화두정진을 하신 경허스님보다도
관음주력을 부지런히 하여깨쳤다고 하는 무융스님의 혜안이 더 밝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는 어떤 것이 더 낫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지만
관음주력을 해서 법안을 얻은 무융스님이
우리 중생들에게 더 가깝고 더 깊게 덕을 베풀어주신 것을 보면
꼭 화두선 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백용성 스님의 예를 들겠습니다.
용성스님은 의성 고운사에서 계셨던 수월 스님을 찾아뵙고 여쭈었습니다.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말세 중생은 업장이 두터워 마음의 공부를 지어도 경전 연구를 해도 장애가 많은 법이지
천수다라니를 열심히 외워 업장소멸을 한 다음에 공부를 하면 ,
화두 정진이든 경전이든 장애 없이 쉽게 이룰 수 있다네"
수월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용성스님은 열심히 천수다라니를 외웠습니다.
밤낮없이 부지런히 외워 9개월이 되었을 때 꿈을 꾸었습니다.
해인사 장경각 안에서 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훌딱 벗고 큰 대자로 드러누워 있는 꿈을 꾼 것입니다.
이 꿈에 대해 수월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업장 소멸이 다 되었다는 신호 같구나"
이는 용성스님이 화두정진을 하든 경전공부를 하든 장애 없이 쉽게 될 것 같다는 예언이었습니다.
그 뒤 용성스님은 꾸준히 화두정진을 하였습니다
돌아가신 춘성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용성스님은 화두해서 도를 깨치신 분이 아니라 천수다라니를 하여 도 깨치신 분이시다"
근래에 와서 용성스님이 화두를 하여 도를 깨치신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므로
모두가 용성스님이 화두로 도를 깨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옆에서 모셨던 춘성스님의 말씀처럼
용성스님은 화두보다는 천수다라니를 외워 힘을 얻었다고 하는 쪽이 가깝습니다.
요즈음 중국에서는 아미타불을 불러 극락세계에까지 직접 갔다오셨다는 스님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스님은 인간이 세상에서 7년 동안이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불과 며칠 동안 극락세계에 가서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었으며,
돌아가신 자기 스승도 뵙고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인쇄가 되어 우리 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는데
그 스님의 경우도 화두정진이 아니라 미타염불이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통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꼭 화두선 이라야 된다는 규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노력대로 꾸준히 한 가지 공부를 끝까지 밀어부치면,
결과는 모두 같은 자리로 귀착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도 뚜렷한 입각지에 이르지 못하였으면서 무책임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옛날 어른들의 기록 근래 어른들의 정진하는 모습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비추어보더라도 귀착점은 같은 자리가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어떤 정진 방법도 다 최후의 귀착점인 성불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공부를 부지런히 닦아가면 업이 극복이 되고 혜안이 열리고,
더 나아가 최고 차원에 도달하여 최고의 법을 쓸 수 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화두 아니면 견성을 하지 못한다 는 이상한 말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의 공부를 꾸준히 지어나가기를 당부드립니다. - 우룡 큰 스님
정녕 원을 세운 우리 불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원과 함께 정한 한 가지 공부를 끝까지 밀어부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공부를 선택해서 죽어라고 밀어부쳐 끝까지만 가버리면
같은 차원에 도착해서 법을 같이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점을 늘 불자들에게 강조합니다.
꼭 명심하십시오 공부 방법을 함부로 바꾸면 안됩니다.
새로운 공부와 연이 닿아 어떤 큰스님께 화두를 간택을 받았는데
여태까지 몇십 년 연구하던 공부가 쑥 들어가버리고
그 화두가 확실히 자리를 잡아 다시는 흔들리지 않게 된 경우라면 화두정진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태까지 해온 공부를 그대로 밀고나가야 합니다.
이 공부도 욕심이 나고 저 공부도 욕심이 나서
이 공부를 조금 하다가 저 공부를 좀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의 공부 방법을 택하여 꾸준히 밀고나가면 결국은 도착지가 같아지는 것입니다.
물론 뚜렷한 계기가 있으면 공부 방법을 바꾸어도 좋습니다.
어떤 이는 염불을 하다가 곁에서 누가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홀연히 어떤 화두에 대해 의심이 샘솟아 화두공부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경전을 보거나 큰스님을 친견하여 법문을 듣다가 뜻밖의 한말씀에 고리가 걸려 버리면,
여태까지 하던 공부를 그만 두고 바로 그 의심 쪽으로 파고들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항상이 참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기가 없는 일반의 경우에는 하던 공부 그대로 해야 합니다.
그대로만 향상해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불자들은 화두정진이라야 견성을 하지
화두 아니면 견성을 못한다는 이상한 말 때문에
오히려 자기 공부에 대한 주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많은 듯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공부를 할 때 염불이면 염불 주력이면 주력 간경이면 간경을 꾸준히 해나가면 됩니다.
실로 어떤 계기로
"지금의 네 공부는 잘못되었고 다른 공부가 좋다"는 말을 듣게 되면
그것이 잠재의식 속에 박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어떤 것이 걸리든지 상관하지 말고 처음 공부를 버리지 말고
그대로 밀고나가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자기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중간에 엉뚱한 쪽으로 걸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무융스님께서는 한평생 관음주력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한평생을 관음주력만 가지고 몰아부쳤는데도 크나큰 공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절대로 자기 꾀를 부리지 마십시오.
얄팍한 자기 꾀는 방해만 될 분 전혀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 '누구는 그 공부를 하여 성취를 했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게되면
그 공부에 쉽게 미련이 붙습니다.
그리고 암암리에 그쪽으로 자꾸 욕심이 생겨 마음에 남고,
심지어는 그것이 여태까지 잘 해오던 '나'의 공부를 못하게 방해를 하고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결국 '나'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과가 생기는 것이므로
내가 처음 설정한 그 길을 죽어라고 그대로 밀어부쳐야 됩니다.
기도나 염불을 함에 있어서도 어떤 때는 나무아미타불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어떤 때는 관세음보살 어떤 때는 지장보살을 해야 한다는 식의 구분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한 사람이 관세음보살을 택하여 늘 공부를 해왔었는데
"가까운 이가 죽었으니 이제 지장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해아 된다"고 하면
자꾸 흔들리게 됩니다.
이것도 결국 내가 약하니까 흔들리는 것입니다.
불보살님은 대우주 그 자체이신데,
관세음보살이 따로 있고 지장보살이 따로 있고 나무아미타불이 따로 있겠습니까?
다만 옛 어른들이 중생들의 그때 그때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한말씀씩 하신 것을 결정적인 말씀처럼 착각하여 그와 같은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일부 스님네들은 꼭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관세음보살
죽은 사람에게는 지장보살
자신의 앞길을 위해서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고정된 진실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신도들에게도 그대로 이야기를 해줍니다.
얼마 전에 한 노보살님이 찾아와 부탁을 했습니다.
"스님 저는 한평생 동안 불교의 어떤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공부를 하다가 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스님 마지막까지 지녀야 될 공부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그 보살님은 글도 모른다 하고 일 년에 몇 차례 절에 다닐 뿐 이라 하고
나이도 육십이 넘은 것 같아 나무아미타불을 하라고 권해드렸습니다.
그런데 당장 돌아오는 반응이 묘했습니다.
"스님 나무아미타불은 내 앞길을 위해서 하는 염불이 아닙니까?
아들이나 딸을 위해서는 관세음보살을 불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스님께서는 왜 저의 앞길만을 위하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라고 하십니까?"
누구나 이 보살님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대우주의 어느 부처님은 살아 있는 사람만 돌봐 주시고
어느 부처님은 돌아가신 분만 돌봐 주신다는 확정된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옛 어른들이 그때 그때 쓴 방편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고 크게 울고 있으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서는 이렇게 이렇게 해라"는 식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면서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드린 방편설입니다.
꼭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관세음보살 염불이라야 되고
죽은 이에게는 지장보살 염불이라야 되고
내 앞길을 위해서는 나무아미타불 염불이라야 된다는 것처럼 느끼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그 힘 하나 가지고도 그 공부힘 하나만 가지고도
살아 있는 아들딸들 돌아가신 조상님네들 나의 앞길을 다 밝힐 수 있고
지장보살이라는 이름 하나만 가지고도 다 이루고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부처님은 살아 있는 자식들만 봐주고
어떤 부처님은 돌아가신 영가들만 봐준다는 차별적인 생각을 갖지 말고
흔들림 없이 자기가 하던 공부를 그대로 지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든 남에게 모진 인연을 만들지 말고 꾸준히 처음 선택한 것을 공부해 나가면
결국 이루게 됩니다.
한 가지 공부를 꾸준히 하는 것 부디 이를 마음에 잘 새겨,
설악산 대청봉에 오늘 그날까지
흔들림 없이 공부를 잘 지어가시기를 당부드리고 또 당부드립니다. - 우룡 큰 스님
앞의 장에서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여러 정진 방법 가운데
나와 인연 있는 한 가지 공부를 선택하여 수행을 하면,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듯이 결국은 최고의 차원에 도달하여
법을 간이 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제 그 공부 방법 중 먼저 주력에 대해 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력의 주(呪)는 밀교의 진언이나 다라니를 뜻하며
우리 나라에도 옛날에는 주력의 방법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어떤 형식으로 해야 한다는 기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때에 와서는 주력을 전공으로 연구하신 어른이 안 계셨고
그러다 보니 지금은 염불과 주력이 별다른 구분 없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에 힘력자를 붙여 주력이라 하는 까닭은
노력하여 주문을 외우면 힘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곧 노력하면 힘이 생긴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불가능한 것 같지만 자꾸 노력을 하다가 보면
하루에 오천배도 할 수 있게 되고 육천배도 할 수 있게 되며,나아가 만 배까지도 가능해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노력을 한 사람에게는 그만한 힘이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를 통하여 힘을 얻는다 고 해서 주력이라고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관음염불 이니 관음주력이니 하는 말을 통용하여 많이 쓰지만
열반하신 철우노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염불을 정의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입으로만 부르는 것은 송불이다.
염불이라고 하면 부처를 생각해야 되는데 참 염불을 하고자 하면 관을 해야 한다.
지금은 송불을 염불이라고 착각을 하는데,송불과 염불은 엄연히 다르다"
지금에 와서는 덮어놓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거나 지장보살을 부르면
무조건 염불한다고 하지만
철우노스님처럼 옛 어른들은 염과 송이 다르다는 말씀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기도를 하면 관음주력 이라 해버리고
지장보살을 부르며 기도하면 지장주력 이라고 합니다.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며 기도하는 것을 주력이라고도 하고 염불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염불과 주력의 방법이 서로 다르지만
염불을 한다고 하면서 자꾸 송불을 하니까 그만 주력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염불을 하려면 관을 해야 한다고 앞에서 잠깐 말씀드렸는데,
관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쪽으로 습관을 들이든지
아니면 주력법을 끊지 않고 오래 노력할때 이루어집니다.
앞에서 용성스님께서 천수다라니 하신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용성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면서 얼마나 익어졌든지
호흡,곧 숨 한 번 내쉬면서
'나모라 다나다라'부터 '사바하'까지 천수다라니 1편을 외웠고,
숨 판 번 들이키면서
'나모라 다라다라'부터 '사바하'까지 1편을 다 외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송이 완전히 떨어져 버린 상태이고
염 자체도 이미 떨어져 버린 관의 차원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가 주력이다 염불이다.기도다 하지만
결국 하나의 마지막 궁극점으로 가는 그 중간 과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이름을 각각 다르게 붙인 것입니다.
예컨대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기도할 때 어른들로부터 각각 달리 이야기를 듣다보면
도대체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았더니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내 귀로 들어오는 것을 놓치지 말고 늘 생각을 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밑에서 기도를 하는 스님들에게 늘 같은 부탁을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든 지장보살을 부르든
내 소리 내 귀에 들어오는 것을 놓치지 않도록 그것만 잘 붙잡아라.
그렇게만 하면 절대 옆길로 가지 않고 공부가 흔들리지 않게 된다"
실제로 이 방법에 따라 염불을 하는 이들은 거의 옆길로 가지 않는데
이 방법을 무시하는 이들은 중간에 엉뚱한 쪽으로 가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결국 자기 생각이 잘못되면 공부가 옆길로 흘러갑니다.
자기 생각이 다른 것을 기대할 때 기도 중간에 장애가 붙을 때 그 장애를 잘못 생각하면
방해에 속아 엉뚱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우룡 큰 스님
8.15해방 후 내가 해인사로 출가했을 무렵에는
어른들이 공부 방법에 대해 특별히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옛날 어른들은 이렇게 공부하셨다 저렇게 공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뿐,
화두 공부가 어떤건지 주력 공부가 어떤건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강원에서 처음 글을 배울 때는 30명가량이 함께 출발하여 초심반과 치문반으로 나뉘어졌는데,
당시 강사를 맡았던 나의 은사 고봉 스님께서는 마을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는 식으로
그날 배운 글을 그날 암송시켰습니다.
예불의식도 책을 갖고 가면 어른들이 한 번 읽어 주시고 '따라 읽어라' 하면 따라 읽고
'여기까지 외워라'하면 그 다음날까지 암송하는 식으로 공부를 배웠습니다
그 당시 해인사에는 우리 용성 문중의 사숙님 되시는 월주 스님이 계셨습니다.
예식에 밝고 경에도 밝으셨고 정진을 아주 잘하신 분이셨는데
강원의 학인들이 글을 못 외워 쩔쩔매고
하루종일 책상머리에서 끙끙거려도 암송을 못 하는 학인들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태어나서 업장이 두텁고 박복한 중생들이 업장 참회할 생각은 않고 까불거리고 있으니까
공부에 무슨 진척이 있겠느냐? 옛날 어른들은 천수다라니를 해서 업장소멸 하셨다"
그리고는 수월 스님께서 천수주하여 깨달음을 이룬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수월스님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셨는데 아버지,어머니가 모두 세 살 안에 돌아가셔서
외삼촌 집에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조선 말기에 내 가족들도 못 먹여 살리는 형편이었으므로
외삼촌은 남의 눈도 있고 하여 생질을 데려다 놓았지만
부담도 되고 힘도 들어 머슴처럼 부렸습니다.
20세가 넘어가면서 스님은 동네 사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결혼을 하여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산골로 들어가 중노릇을 하며 살리라'
결심을 한 그는 서산 천장사로 출가하여 성원스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하여 불경을 배워도 쉽게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성원스님이 예불문을 일러주면서 '따라 읽어라'고 하면 따라 읽었지만
'혼자서 읽어보라'고 하면 한구절도 못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해보다가 은사 성원스님은 글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밥을 짓는 공양주등의 소임을 3년 동안 맡겼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월스님이 불공할 때 올릴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갔을 때
마침 부전스님(불공을 주관하는 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송하고 있었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스님은 이를 한 번 듣고 모두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머리가 좋지 않다고 구박을 받았는데
총 422 글자의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저절로 외워진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나무를 하러 가거나 밥을 짓거나 마냥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흥얼거리며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사 성원스님이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마지 오기를 기다리는데
당연히 제시간에 와야 할 마지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고
밥 타는 냄새만 절 안에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부엌으로 찾아간 성원스님은 전혀 예상 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수월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면서 계속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밥이 까맣게 탄 것이 문제가 아니라,솥이 벌겋게 달아 곧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속에서 대다라니를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본 성원스님은 수월스님에게 방을 하나 내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너에게 이 방을 줄 터이니 마음껏 대다라니를 외워 보아라
배가 고프면 나와서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마음대로 자거라
나무하고 밥 짓는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수월스님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가마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짝에 달았습니다.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방 밖으로는 밤낮없이 대다라니를 외우는 소리가 울려 나왔을 뿐,
물 한 모금 마시러 나오는 일도 없고 화장실 가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8일째 새벽 성원스님이 예불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그 소리가 딱 그쳤습니다.
그때 수월스님이 방을 뛰쳐나오더니 소리쳤습니다.
"스님 스님! 이겼어요"
"뭐라고 했느냐"?"
"스님 제가 이겼어요 잠 귀신이 '너한테 붙어 있다가는 본전 못 찾겠다'고 하면서
멀리 가버렸어요 잠 귀신도 도망갔어요 스님 제가 이겼어요"
은사스님은 수월스님이 기도를 하다가 미친 것이라 생각하고 호된 꾸중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수월스님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합장을 하고 서 있는 뜻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걸 모른다"
"어딜 가야 답을 들을 수 있습니까?"
"동학사에 가면 경허 사숙님이 계신다.그 스님께 여쭈어 보아라"
"가도 됩니까?"
"도시락은 내가 싸줄 테니 짚신은 네가 삼아라"
수월스님은 서산의 천장암에서 동학사까지 걸어가 경허스님의 방문을 열고는 여쭈었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합장을 하고 서 있는 뜻이 무엇입니까?"
경허스님이 답을 해주시는데 뜻이 서로 상통하였고,
거기에서 수월스님은 천수삼매를 증득하여 무명을 깨트리고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불망념지를 증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글을 몰라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 쓰지 못하였지만
불망념지를 이룬 후부터는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도 막힘이 없게 되었으며
수백 명의 축원자 이름도 귀로 한번 들으면 불공을 드릴 때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수삼매를 얻은 뒤에도 참선정진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잠을 쫒았다는 그 말씀대로
일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백두산 간도 지방 등에서 오고가는 길손들에게 짚신과 음식을 제공하며
보살행을 실천했던 수월스님!
오늘까지 자비보살이요 숨은 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수월스님의 도력은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 우룡 큰 스님
나는 수월스님의 이야기를 감명깊게 들은 다음
주력을 하여 업장소멸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자 생각에 천수다라니는 너무 긴 것 같아 옴마니만메훔 육자주를 선택했습니다.
곁의 어른들께 상의도 하지 않고 나 혼자 옴마니반메훔을 선택한 다음
사람들이 없으면 소리내어 외웠고 사람들이 있으면 속으로만 했습니다.
절 마당을 거닐든 밭에 가든 예불하러 가든 밥을 먹든
경전공부를 하는 틈틈이 나는 언제나 육자주를 놓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얼마를 계속하였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겨울에 접어들 무렵이었습니다.
해인사 강원인 궁현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속으로 육자주를 외우며 각 법당 예불을 하기 위해
대웅전 축대 위에 올라서서 극락전 쪽을 바라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사라진 듯하였고 갑자기 눈앞의 모든 것도 사라졌습니다.
앞에 있던 산도 없고 옆의 대적광전,밑의 마당,뒤쪽의 건물 모두가 없어지고
수천만리의 평평한 평지가 펼쳐졌습니다.
약간 옅은 황금색을 띤 누르스름한 대지가 수천만리 펼쳐져 있는데,
그 대지의 끄트머리에 옴마니반메훔 여섯 글자가 범자로 해돋이처럼 빨갛게 땅에서 솟아나
공중에 똑바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서 있다는 생각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해처럼 빨갛게 솟아 있는 여섯 글자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굉장히 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때 밑에서 올라온 도반스님이 내 등을 두드렸습니다.
"여기서 뭐하고 서 있니? 빨리 예불하러 가야지" 순간 나는 번쩍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잠시 깜깜해지더니 산과 건물과 마당이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그 시간이 나한테는 한없이 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불과 5분도 못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는 일상생활에 이상한 일들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도반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 혼자 엉뚱한 짓을 더러 하였습니다.
그 무렵에는 절에서 향로에 불을 담아 사용했습니다.
향나무 열매를 따서 말려두거나 뿔나무를 썰어 말려두었다가 그것을 향으로 사용했습니다.
하루 세 차례 곧 아침예불 때와 사시마지 때와 저녁 예불에 불을 담아 써야 하기 때문에
부전 스님이 저녁에 방에 있는 화로에 불을 담아 놓으면
그 불이 하루종일 가거나 적어도 다음날 새벽까지는 갔습니다.
한번은 우연히 향로에 불을 담으러 부엌에 갔다가 장난이 벌어졌습니다.
공양주 스님이 큰 목탁을 탁탁치며 밥물이 넘었다 불을 끄집어내어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나는 밤새도록 쓸 벌건 숯불을 화로에 담고 난 다음 느닷없이 그 숯불을 손으로 만져봤습니다.
벌건 숯불을 만지고 그 숯불을 손에 드니 곁에 있던 공양주와 어른 들이 놀라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불이 조금도 뜨겁지 않았습니다.손도 전혀 데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놀라고 꾸지람을 하셨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 다음
나는 나에게 다른 어떤 기운의 충동 때문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죄스럽지만 생각만 나면 해인사 대적광전 지붕을 수시로 올라갔습니다.
6.25사변 직적인 그 때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 평소에는 고무신도 운동화도 신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멀리 출타를 할 때는 고무신을 신었지만
집 안에 있을 때는 타이어 찌꺼기로 만들어 발가락만 끼우는 게다짝을 신고 다녔습니다.
그 게다를 신고 시도 때도 없이 스르르 방을 빠져나가 발로 땅을 한번 툭 치면
나의 몸은 이미 대적광전지붕 위에 올라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게다를 신은 채로 지붕 위와 용마루 위를 평지처럼 밟고 뛰어 다녔습니다.
보통사람은 맨발로 다녀도 경사가 급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지붕 위를.
게다를 신고 평지처럼 왔다갔다하고 막 뛰어다녔습니다.
나와 같이 있던 도반들은 이러한 나를 보고 밑에서 소리쳤습니다.
"야,저것 봐라 미쳤다.저것 봐라 미쳤어"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가야산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가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가야산 중허리의 마애불까지 순식간에 다녀왔고
가야산 꼭대기와 매화산과 미륵봉 등을 한 바퀴 도는데
불과 10분 내지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축지법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훌쩍 뛰어올라 첫 봉우리만 나의 발에 닿으면 전체 산봉우리가 다 나의 발 밑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 산봉우리 밟고 한번 뛰어 저 산봉우리 밟으며 가야면 일대를.
가야산 전체를 다 둘러보며 다녔습니다.
또 한번은 마애불 근처로 가서 집채만한 바위를 밀어보았더니 바위가 그냥 밀려갔고
주먹을 불끈 쥐고 바위를 쳤더니 마치 물 속으로 들어가듯
팔이 바위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상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한편으로 나는 나 자신이 점점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원만하게 지냈는데
나 자신이 날카로워지면서 거슬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꾸만 톡톡 쏘아붙였습니다.
나 자신이 어른들께 그 당시의 이상한 기운에 대해 소상하게 말씀을 드리지 않았고
어른들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유심히 살피지 않고 지내다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고비를 그렇게 넘기고 있었습니다.
까딱하면 마구니나 외도의 차원에 도착할 뻔했습니다.
다행히 나 자신이 신경이 자꾸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고 어른들한테도 마구 대하였으며,
곁에서 저아이 좀 이상해졌다 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여 육자주를 그만두었습니다.
6.25사변 직전까지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그 때가 해인사 강원에 있을 때였습니다. - 우룡 큰 스님
우리가 강원에서 공부를 배울 때는 그 날 배운 것을 다음날 공부 시간에 암송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잠들기 전까지 미처 암송이 안 된 글은 다음날 자꾸 더듬거리게 되고
특히 강사스님께서 한 번씩 소리를 지르시면 기가 죽어 막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래서 밤 9시에 잠자리에 누우면 일단 배운 것을 한번 암송해보고 자는데
그 때까지 외우지 못하였으면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육자주를 외우던 무렵,
밤바다 꿈을 꾸면 천정이나 벽이나 방바닥이 온통 글로 가득하고,
그 글 속에서 내가 뱅뱅 돌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 미처 암송되지 않은 글이 몇장 몇째줄 몇째글자라는 것이
꿈에 또렷하게 기억이 되면서 그 글자가 그대로 외워지는 현상이 자꾸 나타났습니다.
어른들 말씀이 '그럴 때에 재주가 는다.지혜가 는다'고 하셨는데
시마과에서 사집과 초기까지 그와 같은 일을 꿈 속에서 많이 겪었습니다.
또한 이 경험과 함께 주력을 계속하면서 정신적으로 무언가 날카로워졌지만
외우는 것이 분명 쉬워졌던 것을 보면 글공부와 주력공부가 따로 떨어져서 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공부하는 도중에 앞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차원이 나타나는 것을 식이 발동한다고 하여
식광이라고 합니다.
그와 같은 식광은 공부를 지어나가는 과정에서 흔히 겪는 일입니다.
어른들께서는 그런 고비를 식광의 고비라고 표현하셨고
그런 체험을 말씀드리면 식광은 겪었구나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식광에 대해서는 나중에 관련된 부분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식광의 고비는 의식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상태라고 해야할까?
의식을 가지고 체험이 되지 않는 제3의 시간과 공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불자들에게 늘 부탁을 합니다.
"의식의 세계로는 안 되는 제3의 세계를 체험해보라"
염불이든 주력이든 화두든 한 가지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나면
공부가 깊어진 만큼 불교에 대한 확신이 서고 자신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일본 점령기 말기에 용성노스님은 안위에 화과원 이라는 농장을 만들어 농사도 짓고
과수원도 경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독립군들에게 군자금을 조달하셨습니다.
그 시절에 나의 은사이신 고봉스님께서는 강원에서 대교까지 다 마치고 화과원에 가서
용성노스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점심공양 후에 바람좀 쏘이러 가자는 노스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용성노스님은 복숭아꽃이 활짝 핀 것을 보시며 말했습니다.
"네가 직접 한마디 일러보아라"
"화과원리도화발"
이에 노스님은 시치미 뚝떼고 정색을 하며 호통을 쳤습니다.
"이놈이 공부하는 중인 줄 알았더니 천하의 마구니새끼구나 그러고도 네가 절밥을 먹고 있느냐!"
이에 고봉 스님은 기가 죽어 대꾸를 못하고 되물었습니다.
"스님께서 한말씀 일러 주십시오"
"화과원리도화발이니라"
은사스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내가 자신이 있었으면 용성노스님께서 욕을 하든 꾸지람을 하든
한마디 더 걸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이 없으니까 당한 것이야"
무슨 일이든지 자신이 서야 합니다.
내가 자신이 서지 않으면 어른들 수단에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님의 경우 화과원에서 "화과원리도화발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으면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용성노스님의 호통에 자신을 잃어 한마디 더 걸치지 못하고 물러나 버린 것입니다.
도를 닦는 집안에서는 이런 상태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확신이 있어야 하고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자신이 뭔가를 체험하여 확신이 서야함을
불교집안에서는 그만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경,주력,참선,염불 등 어떤 공부로 정진을 하든
체험을 하고 확신을 이룰 때까지 밀고나가야 합니다.
분명히 체험이 있고 나면 자신감이 생겨 공부가 크게 향상이 됩니다.
어떤 공부를 하든 체험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스승과 선배들의 지도를 받으며 부지런히 진정하십시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지도를 받아야 옆길로 가지 않습니다.그래야만 도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도 한 과정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집착하지 말고 놓아버려야 합니다
놓아버리고 또 새롭게 나아가면 깨달음이 더욱 깊어지고 해탈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우룡 큰 스님
해인사 강원에 있을 무렵 '옴 마니 반메 훔'육자주를 외워 식광의 고비를 체험하면서
강원에서 배우는 글 공부는 깊어졌지만
나가 아닌듯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육자주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6.25사변을 맞았습니다.
빨치산의 점렴으로 해인사에도 큰 사건이 생겼고
은사이신 고봉 스님도 모함을 받아 수난을 당하는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여러 고비를 넘기며 마무리를 다한 다음 나는 오대산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전란 때문에 오대산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청화 보경사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나는 보경사 서운암에서 능엄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스님들이 아침 시간에 지금 많은 불자들이 하고 있는 능엄경의 대능엄주를 하지 않고
대능엄주의 마지막 부분의 70여자로 된 아주 짧은 것을 외웠습니다.
이 능엄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무 대불정여래 밀인 수증요의 제보살만행 수능엄
다냐타 옴 아나례 비사제 비라 바아라 다리 반다 반다니 바아라 바니반 호움 다로옹박 사바하
나도 백일 목표로 이 능엄주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식사는 일체의 부식 없이 소금간만으로 밥을 먹었는데
한 2주쯤 지나자 밥 생각만 하여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백일기도였으므로 신체적으로 너무 무리를 주는 것은 좋지않겠다고 판단하여
법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주로 보행을 하면서 능엄주를 마음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60일을 넘기고 70일쯤 되었을 때부터 심한 장난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녘이 되어 눈을 뜨면 '오늘 몇시에 어디에 사는 누가 온다'라는 생각이 드는 데
정말 그때가 되면 그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이 더 지나자 가만히 방에 앉아 이십리 삼십리 밖의 신도들 집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공부가 완전히 마무리된 단계에서 생긴 일이 아니라.
공부를 지어나가는 과정에 이 장난이 붙은 것입니다.뿐만이 아닙니다.
생각만 일으키며 내 눈 앞의 텔레비젼을 보듯이 동네의 모든 집이 보이고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도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밥상위의 반찬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가 낱낱이 보였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느날 아침,어머니가 아이와 다투는 것이 다 보이고 다 들렸습니다.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오늘까지 월사금을 가져가지 않으면 선생님이 혼을 낸댔어,빨리 줘"
"오늘 구해 놓을테니 내일 가져가거라"
"오늘 가져가지 않으면 혼나,학교가지 않을거야"
"그러지 말고 가거라"
"싫어"
"이 놈의 자식이!"
이렇게 모든 내용이 생생하게 보이고 표정까지 또렷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어떤 사람이 내 앞에 서면 그 사람의 몸이 마치 투명체처럼 다 들여다 보이고 ,
뼈 마디마디 까지 그대로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아무 것도 못 느끼고 있건만,
병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까지 진행 되었으며
얼마 후면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아픈 상태가 벌어진다는 것이 내 눈에는 다 읽혀졌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아픈 사람에게 내 생각대로 앞에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주면서
'이것을 씹어서 잡수시'라든지 이파리를 따서 '이걸 달여 먹으면 낫는다'고 하면
약도 아닌데 분명히 그 사람이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그와 같은 장난이 붙는 시간이 이어지자 호기심이 자꾸만 일어났고,
마지막 20여일은 기도를 하였으나 제대로 집중을 하지 않고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 해 겨울을 보경사에서 나고,이듬해인 덕숭산 정혜사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도를 깨달은 금봉 노스님이 계셨고,
그때 나는 도인이라 하고 도를 통한다고 하는 것을 내가 체험한 것인가?'하는 헛생각이 들어
그 일들을 노스님께 자랑처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금봉스님은 대뜸 호통부터 치셨습니다.
"이 죽을놈 ! 마구니의 자식새끼! 중노릇을 한게 아니고 마구니 노릇을 했구나
너 같은 놈은 당장 죽여버려야 된다.너 같은 놈 살려놓으면 여러 사람을 망쳐놓는다.
당장 주문을 버리든지 이 자리에서 죽든지 택해라"
그날부터 스님께서는 일체 바깥 출입을 못하게 하셨고,
곁에 두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 또한 의식적으로 능엄주를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무의식 중에 능엄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노스님께서 "지금 뭐하노?" 하시면,깜짝 놀라며 "아무 것도 안합니다" 고 답하였지만
나도 모르게 능엄주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금봉 노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참말로 아무 것도 안하나? 그거 뗄려면 죽기보다 더 힘이 들거다" 정말 그랬습니다.
막상 눈 앞에서 전개되는 신통한 일에 호기심이 붙고 재미가 붙은 상태에서는 뗄려고 해도
참으로 떼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노스님의 '죽기 보다 더 힘들거다'하시는 말씀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 우룡 큰 스님
그러므로 일단 공부길에 들어서면 눈밝은 어른들께 자주 물어야지.
멋대로 공부를 지어나가서는 안됩니다.
나 자신을 뒤돌아보면 ,지나간 시간에 정법과 깊은 연이 있었든지,
전혀 엉뚱한 쪽으로 가지 않고 바른 수행의 길로 계속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천행처럼 느껴집니다.
또한 어른들께 물을 줄 몰랐던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생각도 들고
곁에 계시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주의깊게 살펴주셨다면 그와 같은 탈이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도 듭니다. 실로 나는 이때의 여러가지 체험을 통하여 공부 초기에는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말처럼 눈밝은 어들들께 자꾸 물어야 한다는 것과
어른들 또한 젊은 사람을 관찰하면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차원까지 갔는가를
잘 살펴 다독거려 주셔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나는 근래에 와서 신도님이나 초심자들에게 자주 부탁을 드립니다.
"공부 자리가 완전히 잡힐 때까지 될 수 있으면 어른들에게 자주 물어라
자주 물어야 길을 그르치지 않는다.잘못하면 그르치게 된다"
나 또한 내가 체험한 몇가지를 어른들께 말씀드렸더니
"식광까지는 체험했구나 분명히 식광은 쳐다봤다"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식광이라는 그 자체가 아직까지 공부 중간입니다.
미처 공부의 한 70% 정도도 못간 고비에서 겪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식광의 체험! 흔히 제6식이라고 하는 의식이 분명하고 또렷이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그와 같은 세계를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하다가 의식이 떨어져버리는 상태에 이르면 식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곧 안이비설신의 5근과 관련된 전5식의 파도를 넘고 제6식과 제7식의 파도도 넘고
제8식의 파도를 넘어가면서 식광의 고비가 터지는 것입니다.
나의 체험으로 보면 수행자가 전 5식의 파도 곧 눈 앞의 모든 것이 흔들리는 고비가 넘어가고 나면
좀 조용해집니다. 그러다가 다시 제6식의 파도가 나타나고 그 파도를 극복하고 나면
제7식의 세계가 나타나며,그때 전생이 보이게 됩니다.
제 6식의 파도를 넘어 제 7식의 파도에 가면 전생이야기가 눈에 비치고
전생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7식의 파도를 다 넘어서서 제8식의 파도를 넘다가 보면
식광이 세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식광의 세계 가지고는 참된 공부가 이루어졌다고 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행과 마음가짐이 점점 더 익숙해져야 합니다.
24시간 언제나 화두나 주력이나 염불 속에서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공부를 짓다가 잘못 되어 완전히 정신병자처럼 된 스님도 있고
약간 정신이 이상해진 언행을 하는 사람도 더러 만납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다 끝까지 도착했다고 큰 소리를 치는 분들 중에서도 아직 멀었습니다.
스님 그것 가지고 끝까지 갔다고 자부하면 완전히 옆길로 가버립니다.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나는 칼날이 넘을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칼날을 넘지 않고 중단했다는 것으로도
천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나는 식광의 고비까지 도착하면서
옛 어들들이 신통 이라고 하는 그런 차원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만
수행과정중에 나타나는 이러한 신통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물론 부처님 말씀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히 익어진 차원에서 나타나는 신통은
마음대로 부려도 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도착을 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겪는 고비는 짐짓 나를 망치고
남을 망치는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경우를 보면,
그런 고비를 체험하고 그것을 중단은 하였지만 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파가 오랜 시간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나중에 여러 어른들께 내가 체험한 것을 말씀드렸더니
동산 노스님께서는 꽁꽁 맺힌 놈 이라 하셨고
나의 은사이신 고봉 스님은 다른 이야기 없이 "아직 멀었다"고만 하셨습니다.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노스님은
"그래 애는 썼는데 거기에서 막히면 안된다 그 고비를 넘기고 가야 된다" 고 일러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어른들은 공부에 대해 대부분 자상하게 일러주시지 않습니다.
"아직 멀었다"라는 말로만 표현을 해버리지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지 않습니다.
'철투철미하게 네가 체험해서 가야 된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교계의 풍토가 정말 아쉽습니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금봉 노스님 같은 어른을 만났을 때 계속 지도를 받으며 공부를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공부는 그 길을 그대로 유지하며 계속 밀고 나가야 합니다.
계속 밀고 나가야 무엇을 얻든지 어떤 자리까지 도착을 할 수 있지 중간에 단절을 하면
공부의 향상이 더 이상 없게 됩니다.
공부하는 이들은 이점을 잘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 우룡 큰 스님
그 뒤 나는 강화 보문사에 가서 7일동안 나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는 우리 스님을 모시고 글을 배우는 시절이었으므로
나의 원도 경전공부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제가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하는 동안 지혜가 남에게 뒤지지 않게 하옵소서.
중노릇 할 동안 장애없이 공부 잘하게 하옵소서"
그때는 강화 보문사에 요즘처럼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기도객도 많을 때는 대여섯분, 어떤 때는 혼자서 기도를 하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주지를 맡은 노스님이 기도객 각각에게 다기와 목탁을 나누어주시면
자기의 다기물을 자기가 받아서 올리고,목탁도 각자가 쳤습니다.
다만 제일 먼저 와서 터 잡은 사람의 목탁소리에 자기의 목탁소리를 맞추어야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에게 지기 싫어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많은 경을 외우고 여러가지 예식을 할 수 있는 것도
곁의 도반들이나 선배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는 특별한 가르침을 줄만한 어른이 있으면 악착같이 찾아가 배우고 익혔습니다.
나한기도를 할 때도 마찬기지였습니다.
남에게 지기가 싫어 남보다 먼저 일어나 법당에 가고,
남보다 늦게까지 남아 목탁을 두드리며 독하게 제대성중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7일기도의 마지막날 밤이었습니다.
그날도 늦게까지 기도를 하고 내려와 잠깐 누웠는데,잠결에 목탁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차 늦었다'는 생각에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단히 세수를 한 다음 다기물을 떠서
법당에 올라가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밤중인지 새벽이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법당에 올라왔으므로 천수경을 외우고 정근을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기도객들이 들어왔고,그 사람들에게 밀려 불단 바로 앞에서 목탁을 치며
제대성중 제대성중을 불렀던 것까지는 분명히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아차하는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내 몸이 함께 정근하고 있던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 법당문 밖에 떨어졌습니다.
가사 장삼을 입은 채로 마당으로 날아와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생각도 나지 않고 상상도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목탁은 놓아버렸는지 들고 나왔는지 어떻게 날아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잘못하여 나한님이 꾸지람을 하고 벌을 주는 것인가?'
대중방에 내려와 미닫이문에 등을 대고 무릎을 고여 앉아있으니
주지 스님이 오셔서 달래주셨습니다.
"기도 잘 했는데 왜 그러고 있느냐? 기도 성취했다"
"성취가 어디 있습니까? 벌 받았는데요" 순간 나는 설움이 복받쳐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벌 받은게 아니다"
그러나 주지스님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앉은 채로 잠깐 잠이 들었는데 잠 속에서 어떤 노스님이 오셔서
손으로 턱을 톡톡치며 말했습니다.
"얼굴 좀 들어봐라 이놈아 네가 미워서 그런게 아니다.
하도 코 밑까지 다가와서 제대성중을 외쳐대니 귀가 얼마나 따가웠겠느냐?
그래서 너를 살짝 밀었더니 그만 그렇게 되었구나 네가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기도 잘 했다"
나는 그와 같은 가피를 입었을 뿐아니라
보문사 주지 스님이 회향할 준비를 다 해주셔서 무사히 기도를 마쳤습니다.
강화에서 기도할 때 겪은 이 일은 일종의 수기를 받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법계는 그대로 부처님이므로
법계의 가피력,곧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여러가지 묘한 영험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중생심으로는 추측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대우주의 신비이고 대우주의 모습입니다.
평소에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지만 지극한 기도를 하면
부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맞는 적절한 모습을 나타내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고 법계에 가득한 성현들께서도 순간적으로 큰 가피력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 예로 폐엽사에 계시던 하은 스님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 우룡 큰 스님
하은스님은 13세에 구월산 패엽사로 출가하여 20년 동안 경전을 연구하였고
다시 20년 동안 참선정진을 하여 도를 깨쳤습니다.
대중들이 스님을 패엽사 조실로 추대하였지만 스님은 조용히 정진을 하고 싶어
대중들 몰래 도망을 쳤습니다.
하루종일을 걸어 스님은 그날 밤 패엽사에서 삼사십리 바깥에 있는 주막에 투숙했습니다.
그런데 밤늦게 하은스님이 묵고 있는 방에 땡초 중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손님은 많고 방은 없으니 스님끼리 같이 주무시라는 생각에서
주막집 주인이 들여보낸 것이었지만 하은스님이 볼때는 이 땡초 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하은스님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고기며 술을 시켜 거침없이 먹었습니다.그러더니 곰방대에다 담배를 넣어 뻑뻑 피워대는데
그 조그만 방안에 담배연기가 꽉 차서 코가 따갑고 눈이 따가워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담배를 다 피우고 나더니 주인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하여 방안에 앉아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한다음 똑바로 앉아 큰 소리로 화엄경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길고 긴 80권 화엄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청산유수라는 말 그대로 줄줄줄 막힘없이
외워나갔습니다.
화엄학의 대강백으로 추앙받았던 하은스님이었지만 온몸이 얼어붙었습니다.
나중에는 입에서 광명이 나오는 듯했습니다.
간혹가다가 그 스님이 하은스님 쪽을 쳐다보는데,
하은스님은 두려움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경을 다 외웠을 때는 이미 새벽녘이 되어 있었고, 그때 땡초스님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하은 하은 이라고 하기에 제법인 줄 알았더니 대수롭지도 않은 인물이구먼
다른데 가봐야 별 수 있을까봐 돌아가서 패엽사나 지키지,가긴 어딜 가!"
그리고는 방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은스님은 발걸음을 되돌려 패엽사로 돌아와 대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보현보살께서 오셔서 나에게 수기를 주고 가신 것이야
패엽사 대중이 그렇게 갈망하는데도 대중을 배신하고 나간 것을 꾸지람하러 오신거야"
그 뒤 하은스님은 평생을 패엽사에 계시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셨습니다.
하은스님의 경우나 나의 보문사 기도처럼 법계에 가득하신 불보살님은 필요에 따라
적절한 모습을 나타내어 수시를 주시고 가피를 내려주십니다.
오직 우리가 다해야 할 바는 정성 입니다.정성껏 기도하고 정성껏 수행하면
꼭 가피를 입어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우룡 큰 스님
서울에서는 비구 대처가 한창 다툴 무렵이었고,
나 개인적으로는 강화도 보문사에 가서 기도를 마치고 난 뒤 입니다.
나는 부산 연등사에서 여름 석달 동안 지장 기도를 하였는데,
기도하는 중간에 또 식광의 고비가 나타났습니다.
어느날 오전 시간에 지장보살을 부르는 지장정근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눈 앞에 계시던 부처님도 없고 벽도 없고 집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펼쳐졌습니다.
분명히 눈을 뜨고 쳐다보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변광야처럼 환하게 텅 비어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 전까지는 목탁을 치고 지장보살을 불렀는데
그 순간에는 내가 목탁을 계속 치고 있었는지 지장보살을 계속 부르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끝낸 다음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분명히 목탁도 계속 쳤고 지장보살도 계속 불렀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맑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계속 정근을 했다는데
내 자신은 그것까지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런 공간과 그런 상태에서 나 자신도 의식을 못한채 두시간 내지 세시간을
그대로 보낸 것입니다. - 우룡 큰 스님
연등사에서 지장기도를 마친 나는 사천 다솔사로 갔습니다.
그때는 강원의 학인들이 비구 대처 싸움 때문에
강원에서 경전조차 제대로 펴지를 못할 때였으므로..
다솔사에 가서 한철 살면서 백일 관음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 2시 40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다기물을 떠서 법당에 들어가려고
법당문을 열었는데 순간적으로 온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그때의 느낌은 내 몸의 털 하나 하나에 한 사람씩 붙어 잡아당기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털부터 시작하여 몸 위쪽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털 한 개씩을 위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고
아래로도 수많은 사람이 털 한 개씩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 같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법당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기도 싫은 상태였지만
그대로 억지로 들어가서 예불을 드리고 관세음보살 정근을 마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법당을 쳐다보기도 싫은 상태가 며칠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이는 두려움의 마구니인 포마의 시련을 겪은 경우인데
이러한 고비를 경험하고 나서는 지금까지 그러한 경우를 다시는 당하지 않았습니다.
또 어느날 저녁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은사 스님께서는 내가 법당에 있는 동안은 잘 찾지 않으시는데,
그 날은 분명히 법당 밖에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기도를 하다말고 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계속 기도를 하였습니다.
은사 스님은 세 번을 부르다가 화가 나셨는지 법당문을 발로 쾅 차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은사 스님의 목소리요 행동이었습니다.
정근을 마친 다음 나는 은사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제가 기도하고 있을 때 법당 밖에 오셔서 저를 부르셨는지요?"
"안 불렀다 네가 기도하는 도중에 언제 너를 부른일이 있었느나?
법당 쪽으로는 근처도 가지도 않았다"
이처럼 기도정진을 하다보면 결코 거부하기 어려운 분이 나타나 방해를 함으로써
기도를 중단시켜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중단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중단을 하게 되면 업장을 녹이지 못하여 원성취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우룡 큰 스님
다솔사에서 관음기도를 하면서 먼저 포마를 겪은 다음에는 희마 경계가 찾아왔습니다.
희마가 찾아오면 하염없이 기쁘고 좋아,자꾸 웃음이 터져나오는 상태가 됩니다.
나는 아무런 좋은 일이 없는데도 웃음이 났습니다.
혼자 있어도 웃음이 터져나오고 무엇을 쳐다보기만 하여도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우는 사람을 보면서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근하는 도중에도 웃음이 터져나오고,천수를 치다가도 혼자서 웃기를 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스님께 불러가서
"무엇이 그렇게 좋아 실성한 놈처럼 싱글벙글거리고 다니느냐?"며 꾸중을 듣는 그 자리에서도
계속 싱글벙글거렸습니다.
하지만 이 희마의 상태는 일주일가량 이어지다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 우룡 큰 스님
희마가 사라지자 그 다음에는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비마를 경험한 것입니다.
처음,비마의 경계가 찾아온 것은 오후 2시간을 정진할 때였습니다.
법당에 들어가서 천수를 마치고 다기를 연 다음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대자대비간세음보살
하면서 정근 목탁을 치기 시작한 것까지는 분명히 기억을 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정근을 마칠 시간쯤 되어서 보면,
목탁은 이쪽으로 떨어져 나가 있고 목탁채는 저쪽으로 떨어져 나가 있었으며
나는 나대로 좌복에 엎드려 얼마를 울었는지 좌복이 눈물이 흥건히 젖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왜 이럴까? 내가 언제부터 이랬을까?' 그러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정근 시간에도 별다른 주의없이 기도를 시작했는데
낮에 겪은 비마를 그대로 체험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똑같은 경우가 벌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역시 기도를 하다가 또 그대로 당했습니다.
"내가 왜 이럴까? 정신을 차려야지" 낮시간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기물을 올리고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대자대비관세음보살' 부를 때까지만
의식이 있고 그 다음의 동작은 전혀 기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일주일쯤 계속 되더니
언제 어떻게 그치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그런 상태가 없어졌습니다.
희마에 휩싸일 때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지만,
비마의 차원은 지금까지도 전혀 가늠할 수가 없을 만큼 슬픔에 깊이 빠졌습니다.
이렇게 비마의 상태가 지나가고 난 다음 소름이 끼치는 상태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경험한 포마의 경우처럼 심한 두려움의 상태가 아니라
수시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었습니다.
두렵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소름이 몇번씩이나 찾아오는 그런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별다른 장애없이 정진을 잘하여 백일 관음기도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결국 나는 다솔사에서의 백일 관음기도를 통하여
두려움의 마구니,기쁨의 마구니, 슬픔이 마구니가 왔다 가는 체험을 고루고루 다 겪었습니다.
옛어른들의 말씀대로라면 모든 업장을 소멸하고 원결이 풀어지는 고비를 경험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경계는 개개인의 다 다르기 나타납니다.
근기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적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겪어가는 과정에서 비슷비슷한 마장들이 나타나므로 이러한 경계를 체험하고 나면
후학들에게 그런 고비가 있을 때 흔들리지 말고 극복을 해나가는 이야기를
자신있게 해 줄수 있습니다.
결국 한 단계를 극복하고 나면 극복한 만큼 향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보통의 경우에는 희마.비마,포마의 경계를 넘어서고 난 다음에 식광의 고비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나처럼 식광이 먼저 나타나고 희마.비마,포마가 그 다음에 나타나는 예는
별로 없습니다.
어른들의 체험담을 들어보고 종합해보면
희마.미바 등의 고비를 넘어가고 난 다음에 식광의 차원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우룡 큰 스님
실로 수행 도중에 장애가 붙을 때,
그 장애를 잘못 생각하면 속아서 엉뚱한 결과가 오게 됩니다.
약 삼십년 전 남해 보리암에서 준제진언을 외우며 기도를 하다가
영영 불구자가 된 스님 얘기를 나는 가끔씩 합니다.
그 스님은 눈 앞에 나타난 보살의 환영을 보고 환희심에 도취되었습니다.
'아,내가 이렇게 애를 쓰니까 보살님께서 직접 시현을 하셨구나.
그리고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내 신심을 시험하시는구나' 이렇게 환희심에 도취되어
마구니의 수단에 빠져들었고,스스로 성기까지 절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가 두려워 수행을 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림없이 정진하기만 하면 마장이 수행을 도와줍니다.
마장이 극복되면 그만큼 깨달음도 커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우리 불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마장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
능엄경에는 50종변마사라하여 공부할 때 나타나는 50가지의 마구니의 길을
상세하게 설하고 있지만
이는 비마,포마,곧 슬픔.기쁨,두려움의 세 가지 종류에 다 포함됩니다.
참선.염불,주력 등의 공부를 하다가 이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나타난 경계를 긍정하지 말고 부정을 해버리는 쪽으로 밀어 부쳐야 합니다.
만약 나타난 경계를 긍정하기 시작하면 마구니의 수단에 휘말려 버리고 맙니다.
물론 나타난 경계를 긍정하지 않더라도
무의식 중에 그 수단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다솔사에서 관음기도 중에 겪은 비마의 경험은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보통 7일 내지 길어도 보름이면 끝이 납니다.
하지만 이 경계에 흔들려 기도를 그만두게 되면 그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한평생을 비감 속에,슬픔 속에 빠져 공부도 더 이상 계속 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한평생을 이상한 사람처럼 웃음 속에서 넘기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희마.비마,포마의 장애가 생겨났을 때 일념으로 노력하여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망상 속에서 살던 그 전의 상태를 넘어서서 언제나 편안하고 아름답고 기쁜 상태가 됩니다.
또한 일상생활이나 수행 정진을 통하여 체험하는 경계가
훨씬 더 너그러워지고 넓어지고 커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마장과 관련하여 꼭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희마.비마.포마의 경계나 식광의 경계 모두 공부를 지어 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비일뿐,
이것이 전체도 공부가 끝난 자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법 공부에는 적당히가 통하지 않습니다.
공부가 다 익어진 다음이라야 그 살림살이가 나의 살림살이가 됩니다.
수행 도중에 아무리 신통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마에 불과합니다.
실로 공부의 중간 과정에서 나타는 신통한 경계에 대해서는 믿음을 주어서도 믿어서도 안 됩니다.
그 차원은 완전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대우주 그대로를 집으로 삼고 대우주 그대로를 내 몸으로 삼아 사는 차원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부디 부처님의 차원에 도착할 그때까지
임시로 나타나는 식광이나 시험의 상태에서 벌어지는 것들에 대해 집착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 경계를 경험하면서 이제 내 공부가 다 되었다 고 받아들이면
돌이킬 수 없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부가 완전히 익어 내 살림살이가 될 때 까지
내가 하던 공부를 흔들림없이 꾸준히 지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잘 명심하시어 자타일시 성불도를 성취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 우룡 큰 스님
'가피와 영험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보살님의 세가지 가피 (0) | 2020.04.16 |
---|---|
mp3파일 경전 폴더에도 가피가 있어요 (0) | 2020.04.16 |
가위에 눌린 사람들에게 권하는 염불 (0) | 2020.04.16 |
친구의 불치병을 삼천배 수행으로 치유시키다 (불필스님글 옮김) (0) | 2020.04.16 |
알 수 없는 전생의 업(業) (0) | 2020.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