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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역행 최면요법가인 돌로레스 캐논 할머니(미국)가 말하는 윤회와 業(karma)


 Dolores Cannon 내가 가졌던 초기의 還生의 개념은,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당시로선 내가 아는 모든 것이었다.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번 이상 살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놀랍고 삶을 바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교회의 세뇌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전통에서 벗어나, 그 전통의 관념에 의문을 일으키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교회가 답을 갖고 있지 않은 질문은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성경에 없다면, 넌 알 필요 없어. 네가 죽을 때, 내가 가진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될거야. 아마도 그들은 거기서 모든 것을 설명할 명단을 보관하고 있겠지.” 하지만 점 점 더 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찾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고 있다. 그들은 점 점 더, 평생 믿도록 인도 받은 것 이상의 것이 저쪽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들은 질문하기 시작하고 있고, 해답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답변들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로서는 환생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주로 남부 침례교회)안에서 자랐다. 일요학교에서 배웠고, 성가대에서 노래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끈덕지게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성경이나, 목회자에게는 대답이 없는 질문들을 갖고 있었다. 많은 시간, 나는 설교를 들으면서 일요일 아침에 집회 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때 나는, 손을 들고 그가 말하고 있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하지만 문명화되고 훌륭한 크리스찬 소녀였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상대로 한 일요학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이야기가 흥미는 있었지만, 내가 더 이상 믿지 않는, 교의에 대한 가르침에 더 이상 휩쓸리지는 않았다. 내가 심령연구에 심취하게 될수록, 나는 나의 믿음을 남에게 알리지 않았다. 나의 믿음을 조롱에 노출되게 하기엔, 그 믿음들은 내게 너무나 소중했다. 나는 교회라는 정설을 버렸고 내가 종교의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종교와는 반대되는 것으로서인 靈性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종교와 靈性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내가 前生退行 치료요법을 專任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還生理論을 모두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다. 환생이란, 삶을 사는 단순한 과정이며, 여러분의 최선을 다하고, 교훈들을 배우고, 죽어서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것. 그리고 다양한 영혼들과 접촉하고 다시 신체로 돌아와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단순한 과정을 통해서 영혼은 점차로 지구라는 학교를 학년 학년 거치고, 그렇게 하여 지구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는 神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생각이 모두 이치에 맞았으므로 나는 그런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나를 찾아온 의뢰인들과 함께 다른 삶에서 유래된 문제들에 기초한 치료를 행했다.


 내가 처음으로 책을 쓰던, 최면 연령퇴행을 하던 초기엔, 나는 線形 시간 패턴을 따르면서 前生을 보았다. 당시 나는 아직도 “아기 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한 삶과 그 뒤를 잇는 다른 삶이, 시간과 특정 날짜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고 이해했었던 것이다. 나의 초기의 의뢰인들 중 한 사람은 남다른 몽유병환자였다. 그는 최면 역행을 시도했을 때 완전히 다른 인격체가 되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그녀 안에서 발견한 생활스타일의 文化的, 神學的 등등에 관한 엄청난 양의 자세한 내용을 주었을 때, 나는 그것을 歷史를 탐험하는 완벽한 길로 보았다. 나는 그녀를 100년씩 점프하면서 과거로 돌아가서 25번의 별도의 전생으로 데리고 갔다. 각각의 인물은 분명히 구분되었고, 내가 한 것은 그녀에게 특정한 年度로 가라고 말하는 것이었고, 그러면 그녀는 대단히 동일함을 증명할 수 있는 인물이 되곤 했다.(* 즉 매번 동일한 년도의 과거로 돌아가게 하면 전에 나타났던 것과 동일한 인물이 나타났다는 말. 이는 전생퇴행요법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사례다.) 나는 그들과 매우 친숙해졌다.

 

 그들의 목소리, 버릇, 몸짓 등등. 나는 그것이 통해 역사를 연구 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방법임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 일이 나의 天職이 될 것임과 내가 그에 관한 책을 계속 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초기 즉 80년대에 이 여성의 前生에 기초하여 두 권의 책을 썼다. 그것이 “예수와 옛세네파” 그리고 “영혼은 히로시마를 기억한다.”였다. 나는 풍부한 양의 정보가 있기에 내가 결국엔 몇몇 다른 인생을 포함하는 책을 쓰게 될 거란 걸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은 그런 초기의 시기 이후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갔다.


 전생을 계속 탐험함에 따라, 다른 이론들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것을 모두 알아야만 했다. 나는 나의 믿음체계를 뒤흔드는 어떤 것이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첫 번째 것은 “인쇄하기”란 이론이었다.(이에 대해서는 “庭園을 지키는 자들”과 “죽음과 삶 사이”에 나온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많고 많은 삶을 살 필요가 없고, 다른 사람의 삶의 기억으로 인쇄(또는 들씌우다)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어떤 인물이, 달랐던 삶, 그리고 그것이 끌어올려질 배경이 없는, 그런 삶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되었다.

 

그들 삶의 기억들은 육신을 갖기 전에 (우리의 영적 안내자와 마스터들의 도움을 통해) 靈의 영역에 있는 거대한 도서관에서 취해져서, 우리의 영혼의 기억 속에 인쇄되거나 들씌워진다.(* 예전에 했던 영화 “토탈 리콜”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기억을 영혼 속에 인쇄하여 자신이 마치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 것으로 알게 하는 기술.) 그 당시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이 전생을 실제로 살았는지, 아니면 인쇄한 기억인지를 어떻게 알죠?” 대답이 “알 수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감정을 포함한) 인쇄할 모든 것이 들씌워지니까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 인물은 우리 세계에서 기능하기 위해 그 정보들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아무도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지구에 처음 온 영혼에게 지구에서 살았던 사람의 기억을 주입시켜서 지구에서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게 만든 것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구 생활이 서툴러서 많은 문제가 생김.) 그렇긴 하지만, 이러한 이상한 개념의 도입은 나의 기초를 정말로 흔들어 놓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 개념과 싸웠다. 나의 믿음 체계가 도전받고 있다면 이 분야의 일을 내가 계속하고 싶을까? 나는 삶과 죽음과 환생이 (선형적으로) 작동한다는 개념에 마음이 편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사과 파는 수레가 뒤집어지길 원하지 않았다.(믿음 체계가 잘못되도록 하는 것을 비유)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생각에 대한 나의 반응을 연구했을 때, 나는 만약 내가 적어도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조사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기만 해. 질문하지 말고.”라고 하는 신조를 가진 교회보다 내가 나은 게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새로운 개념과, 제공된 다른 것들(평행의 삶 또는 겹쳐지는 삶)에 대해 보다 가까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로 지혜가 나의 닫힌 마음 안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을 열고 새로운 개념을 연구하는 것은 도전적이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의 기초가 되는 아무런 지식적 배경과 교육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마음이 질문하기 시작하자,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여러분은 배운 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양탄자 아래로 쓸어 넣어버릴 수도 없다. 일단 캔을 열었으면, 벌레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3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 그들은 나에게 조금씩의 정보를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있었다.

 

내가 소화시킬 수 있게 조금씩 빵부스러기로 만들어서 나의 식욕을 돋우었던 것이다.(* 그들이란, 최면을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돌로레스에게, 필요한 시기에 적절하게 조금씩 정보를 줌으로써 그녀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외계의 존재들을 말함. 처음엔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가 오랜 기간 연구하는 도중에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챔.) 그들은 다음 정보를 주기 전에 내가 각 정보를 소화시킬 시간을 내게 주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보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정보를 벽에 내던져 버리고, “이해할 수 가 없어. 알고 싶지 않아. 왜 예전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시간여행과 역사연구가 내게 편한데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이 일을 그만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다른 계획들을 갖고 있다.


 前生을 통한 치유를 위해 나를 만나러 온 거의 모든 의뢰인들은 꼭 같은 질문을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뭐죠? 왜 내가 여기 있죠? 내가 무엇을 하기로 되어 있죠?” 그러면 나는 항상 그들에게 우리는 그 이유를 만약 그것이 “적절하다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함께 일하고 있는) 잠재의식(* 심리학에서 말하는 잠재의식과는 다르다.)은, 의뢰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정보는 결코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이나 목적이 지금의 그것과 180도 다르다고 해보자.

 

만약 그 사실이 너무 일찍 알려진다면, 의뢰인들은 “안 돼! 그것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마지막 것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길에 블록을 쌓고는 자기 자신을 방해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잠재의식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들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경우가 있다.

 

자신이 태어난 목적을 알고 싶어 하는 한 남자를 만났는데, 최면유도 중에 내가 그 질문을 했을 때, 잠재의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린 아직은 그에게 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었으면 해요. 당신은 당신이 보는 것을 알지 못해요. 하지만 그가 당신이 20년 전이었던 곳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아기에게 하루 세 끼 거친 음식을 줄 순 없어요. 젖을 먼저 주고, 나중에 부드러운 씨리얼을 주고, 그러고 나서 채소를 갈아주죠. 그리고 훨씬 나중에 아기에게 딱딱한 음식을 주죠.” 이것은 완벽한 비유였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내가 겪은 것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소용돌이 치는 宇宙” 씨리즈는 계속해서 나의 마음을 확장시킨다. 내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저곳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내게 생각할 새로운 개념이나 이론을 주었다. 비록 그것이 이전과 너무나 다르고, 따라서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이 내게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는 그 삶의 계획안으로 그것을 적절히 맞게 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결국엔 이러한 보다 어려운 개념들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러면 나는 끊임없이 그들에게 말한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들은 그것을 더 분명하게 설명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내가 그것에 대해 책을 쓰고, 강의를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나의 질문은 계속되고, 적어도 그것이 무디지는 않다. 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바퀴자국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은 도발적인 생각에 의해 끊임없이 확장 중에 있다. 때로 나는 내가 역사를 탐구하고 그런 경우들에 대해 책을 쓰던 그 초기의 단순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했더라면 내가 많은 양의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잃어버렸을 것임을 깨닫는다.

 

나는 탐험을 계속한다, 오직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다른 영토로.

어떤 사람들이 還生의 개념을 처음으로 접하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보는 것은 여전히 놀랍니다. 그 생각을 그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당신 말은, 내가 전에도 살았었단 말인가요? 이 삶이 이곳 지구에서의 첫 삶이 아니란 말인가요?”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에게 그들이 적어도 한 번의 다른 삶이 있었다는 생각은 정신을 확장시킨다. 사실 그들이 수백번을 살았고, 상상할 수 있는 형태와 상상할 수도 없는 형태를 갖고 살았다는 것은 알지도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前生에서 반대의 性을 갖고 살았다는 것에 놀란다. “아뇨, 내가 여자였을 리가 없어요. 난 항상 남자였어요!” 내가 이 초보 의뢰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잠재의식은 그들에게 매우 친절했다. 그들은 보통 단순하고 세속적인 前生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다루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것을 보게 되면 의뢰인이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일상을 살아가는데 지장이 있게 되므로, 잠재의식이 의뢰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주기 때문.)


 두 흑인이 같은 週에 나를 만나러 왔다. 한 사람은 바로 전생을 보았는데, 자신의 몸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건 백인의 손이잖아. 내가 백인일리 없어! 내 여친도 백인이네!”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이 고대 로마의 검투사임을 보았다. 그는 싸우는 게 싫었고, 그것을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지는 것뿐이었다.(* 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살인이 지겨웠다. 흑인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스포츠를 위해 데려와졌던 것이다. 그는 흑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일단 환생의 개념을 이해하면 더 이상의 편견도 판가름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신이 판가름하고 편견을 갖는 바로 그 대상으로 다시 세상에 돌아와야 함을 의미한다.


 체계가 작동하는 그 방법의 논리성은 정말 아름답다. 당신은 하나의 육신이 아니다! 당신은 몸을 ‘갖고’ 있다. ‘진짜’ 당신은, 하나이자 유일한 ‘진짜’ 당신은 당신의 靈이다. 이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며, 한 육신에서 다른 육신으로 모험하며 교훈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각 삶에서 여러분이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복장을 갖는다. 다음 연극에서는 다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옷이 그렇듯이, 옷은 낡기 마련이다. 그 시점에서 여러분은 옷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새 옷을 입어야한다. 그러면 새로운 연극에서 다음 부분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연극의 계획이나 원고를 모른 채로. 지구는 하나의 학교다. 그것에 다니기로 결정한 것은 여러분이다. 각 생애는 배워야 할 많은 교훈이 있는, 하나의 학급과 같다. 여러분은 이번 학급에서 배워야 할 것을 모두 배우기 전까지는 다음 학급으로 갈 수 없다. (현실의 학급과 달리) 이것은 학년을 빼먹고 갈 수 없는 학교다. 하지만 학년을 반복할 수는 있다. 그것이 오래 걸릴 수도 짧게 걸릴 수도 있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얻을 때까지 그 학년을 계속해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이번 생애에서 교훈을 올바르게 얻지 못했다면, 다음 생애에서 동일한 문제와 교훈들이 주어질 것이다. 이는 여러분이 최종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그 생애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것을 배우게 될 때까지 반복된다.

 

 그 후엔 다음 교훈, 다음 학급으로 옮겨간다. 그것은 보다 쉬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과정은 여러분이 최종적으로 졸업하여 靈的 측면(* 靈으로서 존재하는 세계를 말하는 듯)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 때까지, 즉 神에게 돌아갈 때까지 계속 된다.


 “돌아가는 것이 돌아오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 할 수 있다면, 당신이 생애에서 남에게 하는 것은 반드시 그 대가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공짜로 타는 것은 없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는 것은 그들이 그 대가를 보답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난 30년간의 최면요법을 통해 수천 수만명의 전생 session을 가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보고 보고 또 보았다. 여러분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전생에서 무엇을 했건, 그것이 현생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당신은 전생에서 당신이 부당하게 취급했던 바로 그 사람과 만나게 된다.

 

 당신은 항상 당신의 잘못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사람들이 이것만 이해해도, 얼마나 다른 세계를 보게 될 것인가.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현생에서 가고 있는 그 길이 다시 자신들을 늘 따라다니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그것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보답될 것이다. 이것이 까르마(業)라 불리는 宇宙의 법칙, 원인과 결과의 법칙, 균형의 법칙이다. 이것은 내가 의뢰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사람들은 온갖 잡다한 것을 갖고 다닌다. 어떤 것은 전생에서 기인한 것이고, 어떤 것은 금생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제거하지 못하고 결국 그로 인해 병이 들고 만다. 그 대부분은 전생에서 이월된 까르마(業)이고, 이따금 동일한 사람을 여러 번의 생애에 걸쳐 다룬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어떤 상습화 상태로, 어떤 경향성으로 들어간다. 그런 경향은 전혀 유용한 목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 그것이 금생에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다시 돌아와서 동일한 사람과 다시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인관계에서의 어떤 문제가 금생에 해결되지 않으면 또 다른 생에서 그 동일한 사람과 다시 만나 동일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또 다시 해결할 기회를 만나며, 이것은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반복된다는 의미.) 때로, 이 말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서 상황을 보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난 그 일들을 없애고 싶어! 난 그것들을 견딜 수 없어!” 그럴 때, 그들은 그 일을 처리하는 편이 좋다. 내가 한 번은 잠재의식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우리가 돌아오는 이유를 아는 것이 일이 더 쉽지 않을까요? 만약 우리가 우리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연결점들을 기억한다면요.” 대답은 “우리가 대답을 알았다면, 그것은 시험이 아니겠지요.”(* 답을 미리 가르쳐주면, 시험을 치는 것이 의미 없다는 의미)


 우리가 새로운 인생으로 오기 전에, 우리가 우리가 막 떠나온 그 삶(* 바로 전생의 삶)을 재음미하면서 靈界에 있을 때, 우리는 이 문제를 관계된 다른 영혼들과 상의한다. 우리는 그들과 계약한다. “이봐, 우리는 지난번엔 그러그러한 좋은 일을 하지 못했어. 다시 시도하고 싶어? 이번엔 네가 남편이 되고, 나는 아내가 될게. 아마 그것이 그 길로 잘 될거야.”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그 동일한 사람과 그 일을 다시 시도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바꿀 수 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전생에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기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패턴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전생에서 하던 잘못을 반복한다는 의미)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가 없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무엇을 하건 다 잘못되요. 그들과 함께 사는 게 그냥 끔찍해요.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를걸요. 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아직도 쓰레기를 지니고 다니는 한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그들의 상황은 너무나 나빠서 다른 사람에게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말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이 경우 나는 다음과 같이 해볼 것을 추천한다.


 그들에게 마음으로 마음 대 마음으로 말을 걸어보라. “아무개야, 나는 일이 잘 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애썼고, 너도 애썼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일이 잘 되지는 않는구나. 그러니 우리의 계약을 깨트리는 게 어떻겠니?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거지. 우리는 이런 일을 계속해서 겪을 필요가 없어. 난 너를 놓아줄게. (미워서가 아니라)사랑으로 말이야.”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이 계약서를 찢어서 던져버리는 장면을 마음에 상상하라.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악도 없고, 악마도 없다. 지옥도 없다. 오직 배워야할 교훈만이 있다. 긍정적 에너지와 부정적 에너지라는, 에너지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惡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단지 그 에너지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인간일 뿐이다. 사실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악마가 내가 그 짓을 하게 만들었어!” 또는 “부모님은 날 이해 못해.”하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 우리 모두는 나쁘고 불운한 일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그것이 인생에 관한 모든 것이다. 그것이 이른 바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쁜 환경에서, 당신은 무엇인가 배운 게 있는가? 만약 한 가지라도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런 나쁜 상황이 그대에게 닥친 목적이다. 하지만 반면에 그런 상황을 만나고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당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남을 비난이나 하고 있다면, 그땐 당신은 그 상황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이해할 때까지 그 부정적인 일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당신은 비로소 그 불행한 상황에서 풀려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전생을 탐험하면서 알게 된 가치와 아름다움이다. 비록 현생에 당신이 겪는 일이 부당해 보일지라도, 만약 前生을 탐구해 본다면, 우리는 원인이 거기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전생부터 축적했던 까르마를 갚고 있는 것이다.


 기억하는가? 내가 앞에서 “돌아서가는 것이, 돌아서 온다.”고 한 말을. 우리는 죽는다고 해서 우리의 빚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빚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너무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슬레이트는, 그 빚이 보답될 때까지는 깨끗이 청소될 수 없다. 빚이 청산되어야, 우리는 깨끗하게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럼,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쉽게 빚을 청산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그것은 확실히, “당신이 날 해쳐? 그럼 나도 되돌려 주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까르마의 바퀴를 계속 돌게 만들 뿐이다. 그럼 어떤 것이 그 방법일까? 가장 빠른 방법은 “용서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하기 쉽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처는 너무나 깊어서 놓아버리기 어렵다. 하지만 당신은 용서해야만 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진짜로 아무런 제한 없이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용서해야 한다.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하기 힘든 일 중 하나다.

 

하지만 진정으로 까르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것을 되갚기 위해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판결을 받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일단 당신이 진정으로 그렇게 한다면, 마술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들은 더 이상 여러분을 해칠 수가 없다. 그들은 더 이상 당신을 폭발시키는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버튼을 누르면 반응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 일단 진정한 용서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바뀐다.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묘한 변화가 일고, 일이 보다 쉽게 됨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럼 다른 방도는 무엇일까? 까르마의 바퀴가 계속해서 돌고 돌고 돌게 만드는 것이다.


 한 번은 온 몸이 암 때문에 아픈 사람이 찾아왔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암은 흔히 분노를 억누름에서 유발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분노를 잡고 있음으로써(특히 복부나 내장부위의 암일 경우) 그리고 그것을 표출하지 않음으로써. 이 일이 있으면, 분노는 휘젓기 시작하고, 해방구를 찾지 못한다. 그러면 몸을 파먹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아무리 의사가 암 조직을 수술을 통해 제거해도, 암은 다른 부위에 또 나타난다. 마치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언가에 화나 있군요.” 그는 소리치듯 대답했다. “물론이죠. 이혼한 내 전 마누라요! 증오스러워요! 마누라가 애들을 못 만나게 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용서하고 분노를 놓아버리라고 말했다. “용서할 수 없어요! 만약 내가 용서한다면, 마누라가 이길테니까!”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죽으면, 마누라가 이기는 겁니다.”(* 아내를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남편이 암으로 죽게 되고, 그것은 아내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말.)

이렇게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이, 매우 간단하면서도, 그렇게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래서 까르마의 바퀴는 계속 돌고 돌고 돌 수밖에 없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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