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에 눌린 사람들에게 권하는 염불
(법철스님)
나는 78년 초여름부터 초겨울까지, 강원도 춘천 소양 댐 안에 자리한 청평사(淸平寺) 뒷 편에 있는 토굴에 홀로 기거하고 있었다. 토굴의 지붕은 오래된 함석지붕이었고, 황토 벽돌로 지은 작은 집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난생처음 산도깨비를 만났다.
나의 토굴에서의 일상의 생활은 공양시간이면 숲길을 내려가 큰절인 청평사에서 공양을 하고, 다시 혼자 숲길을 걸어 토굴에 돌아왔다. 나는 낮에는 경서를 보기도 하고, 밤에는 호롱불을 밝히우고 화두를 들고 면벽 참선을 했다. 의복을 세탁할 때는 토굴 옆 계곡에서 세탁을 하여 넓직한 바위에 널어놓고 역시 넓직한 바위에 돌 벼개를 하고 누워서 하늘을 우러러 보기도 하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그 해 추석날, 큰절에서 점심공양을 마치고 토굴 옆 계곡의 바위 위에 돌벼개를 하고 누워 푸른 하늘을 우러르니 갑자기 고향의 어머님 생각이 나고, 이어서 비감한 마음이 되면서 뜨거운 눈물이 양볼을 적시었다. 순간, 나는 비마(悲魔)가 나를 사로잡는다고 자책하여 마지 않았다. 수행자들이 특히 병든 수행자들이 비마가 들면 자살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수행자에게 비마는 무서운 것이다.
나는 얼른 생각을 달리 가졌다. (아아, 나는 얼마나 자유스럽고, 복된 사람이냐. 집착할 것이 없는 무애(無碍)의 경지에서 홀로 토굴생활을 하면서 자유스럽게 마음공부를 하지 않느냐. 호주머니에 동전 한 잎이 없어도 평안한 마음으로 오늘은 바위에 누워 푸른 하늘을 우러러 즐거워한다. 이 세상 수많은 사람이 있다 해도 욕망과 근심걱정이 많아서 몇몇이나 나와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어디서 왔는지 다람쥐 두 마리가 나타나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와서 친근히 바라본다. 두 눈을 감으니 온 천지에 계곡물 소리뿐이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제행무상 법문을 하는 것 같아 황급히 토굴에 돌아와 면벽 참선을 했다. 나는 승려가 된 후, 남다른 습관을 만들었다. 밤에 잠을 잘 때, 언제나 방문을 안으로 잠그지 않는 것이다.
방문을 안으로 잠근다는 것은 곧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집착이요, 겁을 먹는 자세라고 생각하여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고 귀신이고 그 무엇이든 나를 찾고 싶으면 찾으라는 뜻에서다. 토굴에서도 예외 없이 밤에는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나는 그때 토굴에서 자리를 깔고 정식으로 잠을 청해 본적이 없었다. 면벽 참선을 하다가 졸음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잠시 잠이 들뿐이었다.
토굴에서 홀로 수행하는 나에게 어느 날, 마장(魔障)이 찾아왔다. 그 날도 호롱불을 켜놓고 면벽참선을 하다가 졸음이 몰려와 쓰러지는 비몽사몽간에 개 대가리에 온몸이 누런 털로 덮힌 사람 몸에 개처럼 꼬리가 달린 자가 방문을 열고 불쑥 들어왔다. 그자의 키는 4∼5세의 아이 크기였다. 그 자의 두 눈은 사납게 번쩍였다. 그자는 누워있는 나를 번쩍이는 두 눈으로 내려보고는 톱날 같은 이빨을 악물고 내 몸 위로 올라타고서는 말없이 털로 덮힌 두 손으로 나의 목을 바싹 죄기 시작했다. 숨이 칵칵 막혀왔다.
나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뜨고서 벽력같이 그자를 질타했다. (네 이놈! 감히 누구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썩 물러나지 못할까!) 나의 완강한 저항에 그자는 놀라 목을 죄든 손을 풀고서 내 몸에서 내려와 방안에 서서 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후다닥 방문을 열고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달아났다. 그 자는 이틀사이로 나를 찾아와 비몽사몽간의 똑같은 방법으로 나의 목을 죄었다.
그때마다 나는 땀을 뻘뻘흘리면서 그자를 꾸짖고, 그 자는 달아나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스스로 문제를 풀수가 없어서 청평사를 떠나 존경하는 대선배 고승을 찾아갔다. 나는 고승에게 전후사정을 말씀드리고 대책을 여쭈었다. 고승은 파안대소 하면서 대답했다.
“수행자들에게는 마장이 있기 마련이네. 수행자로써 마장을 겪어보지 못했다면 진짜 수행자가 아니지. 더구나 산 속에 혼자 수행하고 있으면 더더욱 마장이 생기다네. 자네의 목을 죄는 그 자는 산소, 즉 산도깨비일세. 여우나, 이리, 오소리 등의 정령이라고 말할 수 있지. 산도깨비는 자네를 그곳에서 내쫓으려고 하는 것이지.
그 증세는 보통사람들의 가위눌리는 것이나 오십보 백보이지. 산도깨비는 수행자가 자기를 무서워하면 더욱 기승을 부리고 마침내는 목숨까지 빼앗으려 든 다네. 산도깨비는 수행자의 마음의 허(虛)와 기(氣)의 허(虛)를 기막히게 탐지하여 나타나 조화를 부린다네. 처방이 있다면, 첫째, 주력(呪力)을 통해 마음의 원기를 튼튼히 하고, 둘째, 잠자는 습관을 바꿔야 하네. 예컨대 동쪽에다 머리를 두고 자다가 산도깨비가 나타났다면,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지.
천수주(千手呪)를 하면 좋지만은 너무 길 것이니 잠들기 전에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을 반복하여 소리내어 부르고, 간절히 그 소리를 듣는 기도를 하면 그까짓 산도깨비는 물론이려니와 일체 가위 눌리는 증세는 금새 사라진다네. 나무관세음보살의 주력에는 우주의 신장(神將), 신병(神兵)들이 수호하는 불가사의한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네.”
나는 토굴에 돌아와 밤에는 백팔염주를 한 알씩 헤아리면서 ‘나무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즉 주력의 수행을 시작했다. 나는 잠 속에서도 주력을 하고 있었다. 과연 어느 날 밤, 산도깨비는 방문을 열어 들어오지는 않고 고개만 디밀고 잠시 나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더니 방안에 들어오지 않고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산도깨비는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잠이 들기 전 주력을 한다.
밤이면 비몽사몽간에 가위에 눌리고, 요괴정령이 목을 죄어 생사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여, 이 글을 접하는 즉시 의심하지 말고, 믿는 마음으로 몸을 깨끗이 하고 옷깃을 정제하여 향로에 향을 피우고 정좌하여 백팔염주를 헤아리면서 ‘나무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명호정근의 주력을 하시라. 공포가 사라지는 것이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이 나타나듯 한다는 것을 보장하는 바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좌보처(左補處)보살이신 관세음보살님
불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님은 항상 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無量壽佛)의 좌보처(左補處)보살로
항상 적정삼매(寂靜三昧)에 계시면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으시고(不離一步),
시방세계에 두루 모습을 나투시어(刹刹現身)
중생의 고난을 구해주시는 대성인이다.
관세음보살님은 남성과 여성의 성(性)을 초월한 분으로서
중생을 고난에서 구하지만 전해오는 바를 종합해보면
대체적으로 백의를 입고 오른손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나는 78년 초여름부터 초겨울까지, 강원도 춘천 소양 댐 안에 자리한 청평사(淸平寺) 뒷 편에 있는 토굴에 홀로 기거하고 있었다. 토굴의 지붕은 오래된 함석지붕이었고, 황토 벽돌로 지은 작은 집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난생처음 산도깨비를 만났다.
나의 토굴에서의 일상의 생활은 공양시간이면 숲길을 내려가 큰절인 청평사에서 공양을 하고, 다시 혼자 숲길을 걸어 토굴에 돌아왔다. 나는 낮에는 경서를 보기도 하고, 밤에는 호롱불을 밝히우고 화두를 들고 면벽 참선을 했다. 의복을 세탁할 때는 토굴 옆 계곡에서 세탁을 하여 넓직한 바위에 널어놓고 역시 넓직한 바위에 돌 벼개를 하고 누워서 하늘을 우러러 보기도 하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그 해 추석날, 큰절에서 점심공양을 마치고 토굴 옆 계곡의 바위 위에 돌벼개를 하고 누워 푸른 하늘을 우러르니 갑자기 고향의 어머님 생각이 나고, 이어서 비감한 마음이 되면서 뜨거운 눈물이 양볼을 적시었다. 순간, 나는 비마(悲魔)가 나를 사로잡는다고 자책하여 마지 않았다. 수행자들이 특히 병든 수행자들이 비마가 들면 자살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수행자에게 비마는 무서운 것이다.
나는 얼른 생각을 달리 가졌다. (아아, 나는 얼마나 자유스럽고, 복된 사람이냐. 집착할 것이 없는 무애(無碍)의 경지에서 홀로 토굴생활을 하면서 자유스럽게 마음공부를 하지 않느냐. 호주머니에 동전 한 잎이 없어도 평안한 마음으로 오늘은 바위에 누워 푸른 하늘을 우러러 즐거워한다. 이 세상 수많은 사람이 있다 해도 욕망과 근심걱정이 많아서 몇몇이나 나와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어디서 왔는지 다람쥐 두 마리가 나타나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와서 친근히 바라본다. 두 눈을 감으니 온 천지에 계곡물 소리뿐이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제행무상 법문을 하는 것 같아 황급히 토굴에 돌아와 면벽 참선을 했다. 나는 승려가 된 후, 남다른 습관을 만들었다. 밤에 잠을 잘 때, 언제나 방문을 안으로 잠그지 않는 것이다.
방문을 안으로 잠근다는 것은 곧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집착이요, 겁을 먹는 자세라고 생각하여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고 귀신이고 그 무엇이든 나를 찾고 싶으면 찾으라는 뜻에서다. 토굴에서도 예외 없이 밤에는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나는 그때 토굴에서 자리를 깔고 정식으로 잠을 청해 본적이 없었다. 면벽 참선을 하다가 졸음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잠시 잠이 들뿐이었다.
토굴에서 홀로 수행하는 나에게 어느 날, 마장(魔障)이 찾아왔다. 그 날도 호롱불을 켜놓고 면벽참선을 하다가 졸음이 몰려와 쓰러지는 비몽사몽간에 개 대가리에 온몸이 누런 털로 덮힌 사람 몸에 개처럼 꼬리가 달린 자가 방문을 열고 불쑥 들어왔다. 그자의 키는 4∼5세의 아이 크기였다. 그 자의 두 눈은 사납게 번쩍였다. 그자는 누워있는 나를 번쩍이는 두 눈으로 내려보고는 톱날 같은 이빨을 악물고 내 몸 위로 올라타고서는 말없이 털로 덮힌 두 손으로 나의 목을 바싹 죄기 시작했다. 숨이 칵칵 막혀왔다.
나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뜨고서 벽력같이 그자를 질타했다. (네 이놈! 감히 누구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썩 물러나지 못할까!) 나의 완강한 저항에 그자는 놀라 목을 죄든 손을 풀고서 내 몸에서 내려와 방안에 서서 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후다닥 방문을 열고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달아났다. 그 자는 이틀사이로 나를 찾아와 비몽사몽간의 똑같은 방법으로 나의 목을 죄었다.
그때마다 나는 땀을 뻘뻘흘리면서 그자를 꾸짖고, 그 자는 달아나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스스로 문제를 풀수가 없어서 청평사를 떠나 존경하는 대선배 고승을 찾아갔다. 나는 고승에게 전후사정을 말씀드리고 대책을 여쭈었다. 고승은 파안대소 하면서 대답했다.
“수행자들에게는 마장이 있기 마련이네. 수행자로써 마장을 겪어보지 못했다면 진짜 수행자가 아니지. 더구나 산 속에 혼자 수행하고 있으면 더더욱 마장이 생기다네. 자네의 목을 죄는 그 자는 산소, 즉 산도깨비일세. 여우나, 이리, 오소리 등의 정령이라고 말할 수 있지. 산도깨비는 자네를 그곳에서 내쫓으려고 하는 것이지.
그 증세는 보통사람들의 가위눌리는 것이나 오십보 백보이지. 산도깨비는 수행자가 자기를 무서워하면 더욱 기승을 부리고 마침내는 목숨까지 빼앗으려 든 다네. 산도깨비는 수행자의 마음의 허(虛)와 기(氣)의 허(虛)를 기막히게 탐지하여 나타나 조화를 부린다네. 처방이 있다면, 첫째, 주력(呪力)을 통해 마음의 원기를 튼튼히 하고, 둘째, 잠자는 습관을 바꿔야 하네. 예컨대 동쪽에다 머리를 두고 자다가 산도깨비가 나타났다면,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지.
천수주(千手呪)를 하면 좋지만은 너무 길 것이니 잠들기 전에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을 반복하여 소리내어 부르고, 간절히 그 소리를 듣는 기도를 하면 그까짓 산도깨비는 물론이려니와 일체 가위 눌리는 증세는 금새 사라진다네. 나무관세음보살의 주력에는 우주의 신장(神將), 신병(神兵)들이 수호하는 불가사의한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네.”
나는 토굴에 돌아와 밤에는 백팔염주를 한 알씩 헤아리면서 ‘나무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즉 주력의 수행을 시작했다. 나는 잠 속에서도 주력을 하고 있었다. 과연 어느 날 밤, 산도깨비는 방문을 열어 들어오지는 않고 고개만 디밀고 잠시 나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더니 방안에 들어오지 않고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산도깨비는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잠이 들기 전 주력을 한다.
밤이면 비몽사몽간에 가위에 눌리고, 요괴정령이 목을 죄어 생사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여, 이 글을 접하는 즉시 의심하지 말고, 믿는 마음으로 몸을 깨끗이 하고 옷깃을 정제하여 향로에 향을 피우고 정좌하여 백팔염주를 헤아리면서 ‘나무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명호정근의 주력을 하시라. 공포가 사라지는 것이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이 나타나듯 한다는 것을 보장하는 바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좌보처(左補處)보살이신 관세음보살님
불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님은 항상 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無量壽佛)의 좌보처(左補處)보살로
항상 적정삼매(寂靜三昧)에 계시면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으시고(不離一步),
시방세계에 두루 모습을 나투시어(刹刹現身)
중생의 고난을 구해주시는 대성인이다.
관세음보살님은 남성과 여성의 성(性)을 초월한 분으로서
중생을 고난에서 구하지만 전해오는 바를 종합해보면
대체적으로 백의를 입고 오른손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중생을 구원하는 감로수가 들어 있다는
정병(淨甁)을 든 천상천하에 유일한 복덕과 지혜를 갖춘
아름다운 여인상으로 많이 나투고 있으니, 이는
관세음보살님이 우주의 일체중생의
대자대비한 어머니의 상징인 것이기도 하다.
또 관세음보살님은 인적이 끊긴 외로운 섬(海岸孤絶處)에
있다는 성산(聖山)인 보타낙가산(寶陀洛迦山)의
죽림원(竹林院)에서 상주 하면서, 고난에 처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설흔두가지의 몸을 나투고(三十二應身),
열 네가지 두려움이 없는 위력(十四無畏力)과 네 가지
불가사의한 덕(四不思議德)을 걸림이 없이 받아
쓰기도(受用無碍)하면서, 팔만사천의
빛나는 머리(八萬四千 迦羅首)와 팔만사천의 팔과 손
(八萬四千母陀羅臂)에 항마(降魔)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신기(神器)를 들고,
팔만사천의 청정하고 보배로운 눈(八萬四千淸淨寶目)으로
우주를 통찰하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대자비로
항마를 위해서는 위신력(或慈或威) 을 보이며
우주에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이(分形散體) 몸을 나투워
고해중생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감응도교(感應道交)를
이루면 기도중생의 마음속의 구하는 바에 따라서 반드시
낙을 얻게(拔苦與樂) 해주는 대성인이시다.
고해대중이여, 이제부터라도 현세의 짧은 무상한
허욕에서 심기일전 하여 마음을 비우고,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대자대비 관세음보살님을 가슴으로 영접할지어다.
그대 가슴에 마음을 비우고 오직 관세음보살님을 영접하면
그대의 가슴에도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심이 충만하게되고,
그대의 초능력인 잠재의식이 관세음보살님을 의지하여 자가
발전을 일으켜 마침내 관세음보살님과 일체를 이루어,
그대가 지은 업의 윤회의 고통에서 반드시 해탈하여 살아서
마음의 평안과 소원의 성취는 물론이요,
세연이 다해 그대 홀로 저세상의 먼길을 외롭게 떠날때
관세음보살의 인도를 받을것이다.
믿음으로 고해를 향해 소리쳐 송(頌)하노니,
대자대비하신 구세주 관세음보살님시여 우주의 오직 한 분,
청정법신불의 화신이로다 관세음보살님시여,
업보의 윤회에서 고통받는 고해의 중생을 인도하여 주소서
이교(異敎)에 올바른 정신을 빼앗기고, 탐욕으로 올바른
정신을 빼앗긴 자들의 속안(俗眼)에 관세음보살이 어디있느냐,
보이지 않는다, 하면서, 불신하고 조롱하는 자들이 있도다.
믿음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불신의 업보로서 하루낮
하룻밤에 만번 살고 만번 죽어야 하는(一日一夜 萬生萬死)의
생사윤회의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로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는 분, 관세음보살을 믿는 중생들은,
어둠속에 대광명을 만나듯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으로 살아서나
죽어서나 관세음보살님의 가호로 윤회의 업보가 소멸되어
마침내는 극락세계로 인도받아 영원한 영화속에 살 것이로다.
아침에도 관세음보살님께 경배 드리고,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하고
(朝念觀世音菩薩), 저녘에도 관세음보살님께 경배 드리고,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하는(暮念觀世音菩薩)
바른 신행을 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반드시
제불보살(諸佛菩薩)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축복을 받을것이로다
법철스님 프로필
1948년 출생
조계종 스님
9대 종회의원
1948년 출생
조계종 스님
9대 종회의원
'가피와 영험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음기도로 다리를 고친 화엄스님 (0) | 2018.02.09 |
---|---|
낙태아 영가천도 영험담 모음 (0) | 2018.02.09 |
성일스님의 기도영험이야기〈1〉 기도영험은 실재 (0) | 2018.02.09 |
관세음보살님의 가호하심과 관음경 (0) | 2018.02.09 |
금강경 지험록 (金剛經 持驗錄) (0) | 2018.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