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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에 염불을 권하는 이유 (3)

방생자는 후생에 인간이나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더하여 염불을 하면 방생자와 방생물이 아미타불과 인연 되어지는 무량공덕이 됩니다

질문: 아미타부처님의 구제와 하나님의 구원에는 무엇이 다른가?

(정종스님 대답)
대답: 어떤 종류의 구제든 간에 모두 귀하고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간략히 말하면 양자에는 열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 공간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구에 국한되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시방의 일체 세계에 편만해 있습니다.

둘째: 시간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마감일이 있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영원히 멈추지 않습니다.

셋째: 넓고 좁음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인류에게만 미치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널리 일체 천인·인간·지옥·아귀·축생 등의 육도중생에게 미칩니다.

넷째: 확률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한 사람에게 단 한 번의 기회만 있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누구나 무수한 기회가 있어서, 설사 금생에 구제되지 못해 삼악도에 들어가더라도 아미타부처님은 여전히 따라다니면서 포기하지 않고 구제를 해주시거나 혹은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여 구제될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지가 않아서 반드시 일부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구제될 수 없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설사 죄업을 짓고 지옥에 들어간 중생일지라도 맹세코 한 중생도 빠짐없이 구제를 해주시기 때문에 끝없는 시간으로부터 볼 때 어떠한 중생도 백퍼센트 극락정토로 구제될 확률이 갖고 있습니다.

다섯째: 역할이 다르다. 하나님은 구원자이자 또한 심판자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은 순전히 구제자이지 심판자가 아닙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죄업을 짓고 고통 받는 중생을 자비로 가엾이 여겨 죄업이 두텁고 고통이 깊을수록 더욱 구제를 해주시고 나아가 영원히 아비지옥에 떨어진 중생도 맹세코 구제하려 하십니다.

여섯째: 어렵고 쉬움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하게 믿음만 강조하여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간단한 수단이 부족한 듯하다보니, 누군가 믿지를 못한다거나 믿음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언제 어디서나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할 수 있어서 편리하고 간단하고 쉽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들이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믿음이 깊든 믿음이 얕든 간에 모두 아미타부처님과 연결되고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의 비춤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일곱째: 이익이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천당에 태어나게 하지만, 진리와 완전한 한 몸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조물주는 영원히 평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께서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왕생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성불하고 진리와 완전한 한 몸이 되어 전혀 다름이 없는 절대적으로 평등한 진리의 경계입니다. (천상은 윤회하는 세계이며 극락은 윤회를 초월한 세계임)

여덟째: 자비가 다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구원은 자비가 작으면서 한계가 있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자비가 크고도 무한합니다.

아홉째: 이론이 다르다. 하나님의 구원은 창세론을 기반으로 합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만들었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조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구제를 해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은 불성과 연기론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고, 또 불성은 청정하고 평등하여 한 몸으로 둘이 아님이 진리의 본체이므로 창조도 없고 피조도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이 불성을 미혹하고 스스로 전도되어 죄업을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제불보살님들은 이 불성을 깨달아 대해탈과 대자유를 누리면서 중생이 미혹되고 전도되어 죄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연스럽게 평등한 대자비심으로 구제를 해주려고 하십니다.

열 번째: 깨달음이 다르다. 만약 “사랑이 곧 진리이다”라고 말한다면, 사랑의 깊이와 넓이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에 따라 결정됩니다. 두 가지를 서로 비교해보면, 매우 분명한 것은 유신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주·신)의 사랑과 아미타부처님의 자비는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신종교에서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한계가 있다 보니, 마치 안개 속에서 꽃을 보는 것처럼 억측의 성분이 있어서 합리적인 질의를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불교와 같이 확철대오를 통해 대자대비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이치와 사실은 어떤 질의도 이겨낼 수 있는 것만 못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출처/純淨時代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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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에 염불을 권하는 이유 (2)

방생의 궁극적 목표이며 최종완성은 육도윤회를 초월한 피안(극락정토)에 왕생 성불토록 함입니다

방생은(생명을 살리는 행위) 방생된 생명에게 한 생의 가장 큰 생명의 은인이자 복덕이며

염불은(나무아미타불) 무수겁 이래 육도윤회하는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성불케하는 가장 위없이 큰 공덕이며 영원한 은인(염불 권유자)입니다

하여 곤경에 처한 생명체에게 방생과 염불을 겸해 준다면 그 수승함과 공덕은
무엇에 비하겠습니까


동물의 극락왕생 기록

1. 돼지를 위해 염불하자 돼지가 왕생하다

저는 중국 호북성 잠강시 어양진 쾌령촌(湖北省潛江市漁洋鎭快嶺村)에서 살고 있으며, 마을 입구에서 이발소를 열고 있습니다. 저희 집 근처에 도살장이 하나 있는데, 제가 매일 아침 일어나서 염불할 때면, 저 돼지들이 도살당하면서 지르는 비참한 비명소리에 마음이 매우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제해주고 싶어서 매일 제가 염불할 때 한 생각을 내어 저 돼지들이 구제되기를 바랐습니다.대략 한 주 정도 지나서 저의 제자 이홍송李洪松(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인데, 몇 년간 농아학교를 다녔었고 음계陰界의 물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서 이발기술을 배우고는 혼자서 이발소를 차렸다.)이 싱글벙글 웃으며 저희 집에 와서 저를 향해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두 손을 귀에다 대고 돼지흉내를 내더니, 또 두 손을 위로 바르게 펴고는 연꽃의 형상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키면서 돼지가 서방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는 감동도 되고 놀랍기도 해서 정확히 알고자 그와 함께 손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제자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그는 제가 염불하여 돼지들을 천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에게 돼지들이 어떻게 갔냐고 물었더니 돼지의 모습을 흉내 내고는 다시 합장하는 모습을 하고, 또 연꽃이 돼지들을 서방으로 데려갔다는 손짓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에서 염불을 했는데 돼지들이 어떻게 들을 수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를 가리키면서 손짓으로 내가 염불할 때 아주 강한 금색광명이 마치 용의 형상처럼 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제가 알아듣지 못할까봐 종이에다 ‘광光’자와 ‘용龍’자를 써 주고는 손짓으로 제가 이 명호를 부를 때에 용과 같은 빛줄기가 끊임없이 도살장을 향해 발사되었다는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검증하기 위해 제가 마음속으로 염불하는 것을 지켜봐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시방을 생각하면서 염불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지켜보던 그는 여덟 방향으로 나오는 광명이 마치 여덟 마리 금색용의 형상과 같았다고 손짓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의 성호聖號가 여덟방향으로 끊임없이 퍼져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도대체 방향이 몇 개나 되냐고 거듭 물었더니 그는 틀림없이 여덟 개 방향이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매일 저 돼지들을 위해 염불할 뿐만 아니라 허공법계에 가득한 인연 있는 중생들을 위해 염불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진서법陳緖法 기록 2004년 6월)


2. 오리를 위해 염불하자 연꽃에 올라 왕생하다


나무아미타불! 저는 불교를 믿은 지 오래되지 않았고, 정식으로 불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일 년 남짓 밖에 안 됐습니다. 매일 아침 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 저는 항상 ‘나무아미타불’을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육자홍명의 공덕이 불가사의하여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이고득락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재 인연이 되어 채식을 하고 있지만 저희 가족들은 불교를 믿지도 불법을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육식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수순하기 위해 저는 자주 생선과 육류(삼정육)를 사다가 먹여야만 했습니다.

2009년 7월 6일 아침에 저는 또 시장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이번에 오리머리와 오리날개·오리발 몇 개를 사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줄곧 그들에게 육자명호를 불러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뒤, 대략 9시쯤 되어서 오리들에게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오리)보살님, 저를 따라 함께 한 번에서 열 번 정도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시고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서 극락왕생하세요. 더 이상 이 육신에 대해 미련을 갖지 마십시오.

서방극락세계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집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열 번 염불을 하고 난 후, 이어서 ‘서방접인아미타불’을 열 번 부르면서 아미타불께서 그들을 서방극락세계로 영접해 가시길 기도했습니다.

환희심을 내어 염불을 하고 있던 저는 어느새 두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세 번째 ‘서방접인아미타불’을 부르고 있을 때, 갑자기 제 눈앞에 분홍색의 연꽃이 나타나더니 하얀 오리 한 마리가 연꽃위에 아주 편안하게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정말로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오리가 연꽃위에 앉아서 왕생한 것입니다! 저의 염불소리는 점점 더 커졌으며 점점 더 기뻤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이 오리가 죽음을 당한 것은 매우 고통스런 일이었지만 지금은 ‘나무아미타불’의 공덕으로 왕생성불 하러 가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이번에 오리가 왕생한 사건은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직접 아미타불의 원력이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중생들이 나의 명호를 부르되 적게는 열 번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 저 부처님은 지금 현재 극락세계에서 부처가 되셨으니, 마땅히 본래 맹세하신 크신 서원이 헛되지 않아 중생들이 칭념하면 반드시 왕생함을 알라!

감은感恩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호남 연우: 성사聖思 구술, 불후佛煦 정리, 2009년 9월 8일)


3. 닭을 위해 염불하자 부처님께서 닭을 내영하다

저희 처형의 딸, 다시 말해 저희 작은 조카딸은 어릴 적부터 남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1997년 제 아들이 막 출생할 무렵, 겨우 한 살 남짓밖에 안 되던 조카가 장모님과 함께 저희 집에서 한 달 정도 머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사람이 조카가 혼자서 뛰어노는 것을 보고서 뭐하냐고 물었더니 “동생하고 놀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답니다. 집사람이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기에 다시 “동생이 어디에 있니?”라고 물었더니, “둘째 고모의 뱃속에 있자나요.”라고 답했답니다. 조카딸의 집 근처에 있는 임산부들은 뱃속에 들어있는 애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조카가 말만하면 정확히 맞췄답니다. 여러 번 말했지만 매번 맞았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자주 조카딸한테 물었다고 합니다. 저희 애도 조금은 볼 수 있었습니다. 불경에 설하시길, 어린이들의 마음은 단순하고 질박하며 오염이 적어서 흔히 이러한 능력들이 있으나, 성장하여 지식이 열리게 되면 어릴 때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능력들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이가 볼 수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2004년 정월 초삼일 날, 저희 가족은 외갓집에서 명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장인장모님께서 닭을 잡고 있었는데, 그 당시 이미 불자였던 저는 황급히 마음속으로 닭을 위해 아미타불을 불러주었습니다. 그렇게 몇 분간을 염불하고 나서 다시 방에 들어가 닭을 위해 잠깐 동안 염불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그 일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낮에 제가 옆집에 저희 애를 찾으러 갔었는데, 옆집에도 이미 닭을 두 마리 잡아놓은 상태었습니다. 저희 애도 그 곳에 있었고요. 제가 평소에 항상 아들에게 모든 동물들에 대해 자비심이 있어야 하고, 만약에 그들에게 상해를 입히는 광경을 목격한다면 그들을 위해 염불을 해주라고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아들에게 닭을 죽이는 것을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봤다면서 누나(저희 조카딸)와 함께 닭을 위해 염불해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또 아미타불께서 연꽃을 가지고 닭을 데리러 오셨는데, 닭이 연꽃위에 오르자마자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하늘로 올라가서 부처님을 따라 갔다고 말했습니다. 매우 기이하다는 생각이 든 저는 혼자 조카에게 달려가서 물어보니 두 애의 말이 똑같았습니다.

저녁식사를 할 때, 저는 갑자기 아침에 장인장모님께서 죽였던 그 닭이 생각나서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카에게 물었지요. “너희 집의 닭은 어떻게 된 거니?” 조카는 생각지도 않고 말했습니다. “아미타불이 데려갔어요.” 저는 매우 의아했습니다.

왜냐하면 닭을 잡을 때는 아직 이른 새벽이어서 조카딸이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거든요. 게다가 제가 닭을 위해 염불한 것을 조카가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물었지요. “네가 어떻게 안 거니?” “오늘 아침에 꿈속에서 봤어요. 꿈속에서 아미타불이 분홍색 연꽃을 가지고 우리 집 닭을 데리고 갔어요.” 조카의 대답이었습니다.

경전에서 설하길, 아미타불께서 사십팔대원을 세우셨는데, 오로지 죽은 영가들을 서방으로 영접해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닭도 중생이므로 누군가 염불해준 인연으로 서방에 왕생한 것은 이상할 것도 없겠지요. 제 생각에는 만약에 시장을 가는 사람마다 염불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부처님을 따라서 서방에 왕생하겠습니까!

닭이 스스로 공부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도와서 염불했음에도 역시 왕생할 수 있거늘,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사람의 지능은 더욱 수승하므로, 먼저 불경을 읽어서 이치를 깨닫고 나서 열심히 수행을 한다면 극락왕생이 더더욱 쉽지 않겠습니까?

(이강李剛 2006년 5월 20일 광주에서)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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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할때 염불을 권하는 이유 (1)

아미타불이 적힌 문자에 손이 닿자 광명이 보이다


경전에서 ‘육근호용六根互用’을 설한 적이 있다. 즉,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귀로는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것은 신통의 경계로서 범부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초능력이 있는 사람 가운데 귀로써 글을 보고 또는 손으로 글을 인식할 수 있는 자도 있다.

대만대학의 이사잠李嗣涔 교수와 중앙연구원의 왕유공王唯工 교수, 그리고 기타 몇 분의 대학교수들이 요 몇 년동안 과학적인 방법과 기구를 사용하여 손가락으로 글자를 식별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어린이 세 명을 데리고 실험을 진행했었다고 한다. 수백 차례의 시험을 통해 그들에게 모두 손가락으로 글자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실험방법은 문자 또는 부호(기호)·그림 등을 종이 위에 적거나 인쇄하여 밀봉포장한 다음에 요 몇 명의 어린이들이 손가락으로 접촉하게 하여 그들이 이속에 어떤 글자 또는 어떤 그림인지를 감지하게 하는 동시에, 측정 기구로 그들의 손바닥·팔뚝 그리고 두뇌의 반응을 측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이 세 명의 어린이들이 모두 몇 십초 또는 몇 분 이내에 백프센트 정확하게 손으로 ‘본’ 것이다.

1999년 8월 말, 며칠 동안의 실험 도중에 어떤 교수가 ‘불佛’자를 적어 그들에게 주면서 손으로 식별하도록 하였다. 신기하게도 이 ‘불’이라는 글자가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불’자가 아닌 온통 매우 밝은 빛이었으며, 빛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있었고, 심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이 상쾌해지게 만드는 우렁찬 웃음소리도 들렸으며, 스님·절 등도 보였다고 한다. 또한 대만식 발음기호로 적은 ‘ㄈㄛ’, 또는 영문으로 적은 ‘Buddha’에서도 밝은 빛이번쩍이는 것만 보이고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만일 다른 글자나 그림이라면 바로 어떤 글자 또는 어떤 그림인지를 알아낼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빛도 없고 소리도 없었다고 하였다. 만약 ‘불’자와 함께 연결되어 있는 문장이었을 때, 예컨대 ‘불산佛山’·‘불미급佛米級’·‘비불리산장比佛利山莊’· ‘애불륵사봉埃佛勒斯峰(에베레스트산)’ 등의 경우, 그 결과 앞뒤 글자만 보이고 ‘불’자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불’자가 있는 곳은 온통 밝은 빛이었고, 심지어 불자 근처의 글도 광명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고유한 부처님의 명호, 예컨대 ‘아미타불’ 혹은 ‘약사불’·‘미륵불’ 등이라면 이를 더욱 초월하여 광명만 있을 뿐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은 없었다고 한다. 특히 ‘약사불’을 식별할 때에는 “한약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중간에 어떤 사람이 귀신 ‘귀鬼’자를 그 중의 한 명에게 식별하라고 주었더니, 그는 종잇조각을 만지면서 “온통 캄캄하다”고 말했다. 일분 정도 지나 또 “매우 어두운 검붉음”이라 말하였고, 30초 더 지나서야 ‘귀’자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금 줄곧 매우 춥고 매우 불편했었다고 하였다.
(이상의 실험은 이사잠 교수가 지은 『믿기 어렵다―과학자들이 신비한 에너지장을 탐구하다』에서 발표함)

요 몇 명의 어린이들이 정말로 초능력에서 말하는 세 번째 눈이 있거나 외부의 영적 존재가 붙었는지는 우선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번의 실험이 뜻밖에도 몇 분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놀랍고 찬탄하고 감동하고 흥분하고 온갖 상념이 끓어오르게 하였다. 또한 견문을 크게 넓혔고,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찬탄하였으며, 실험실 전체의 분위기가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불교내의 신성한 어휘 또는 특수한 음절에 신기한 에너지와 수승한 기능이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범부의 육안으로는 흰 종이에 검은 글자뿐이어서 전혀 특이할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초능력(영적 세계)의 ‘세 번째 눈’ 속에는 찬란한 광명 또는 장엄한 이상異像들로 보였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상 밖에도 부처의 세계가 존재하며, ‘부처님 명호’가 불국토로 들어가는 통로임을 드러내고 증명해낸 것이다.

경전에서 늘 말씀하시길 “부처님마다 모두 치성熾盛한 광명이 있다”고 하셨다. 이른바 “부처님과 부처님의 도는 똑같고, 광명과 광명에는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중에 특별히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존귀하고 최고여서 제불의 광명이 능히 미치지 못한다”고 찬탄하셨다.

‘부처님 명호’와 접촉하면 밝고 따뜻하고 편안했지만,‘귀’자와 접촉하면 반대로 온통 캄캄하고 음랭하며 매우 불편함을 느낀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님을 억념하며 염불하면 그 사람의 몸에는 불광이 생기고, 현생에서는 본래 있던 지혜를 계발하고 어두운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으며, 임종할 때 정토에 왕생하여 다 같이 무량광 무량수를 증득할 수 있다. (대만의 혜정스님 적음)


생각건대: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가장 존귀하고 제일이어서 제불의 광명이 능히 따라올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처님의 광명이 있는 곳에는 나쁜 기운이 사라지고 원결이 풀리며 악은 선으로 바뀌게 된다.
만약 삼악도에서 이 광명을 본다면 다시 고뇌가 없고 모두 해탈을 입게 된다.
귀신이 있는 곳은 불길한 곳이므로 응당 부처님의 명호를 둠으로써 망령을 천도해야 한다.

출처/純淨時代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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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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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가피


방생인의 임종시에는 이런일이...


금생에 방생을 하면 죽음을 맞이하는 중음(中陰)이 찾아왔을 때 방생된 중생(방생된 중생의 좋은 인연들 포함)이 앞에 와서 감사하며 좋은 길로 인도한다.

살생을 하면 살생한 자가 죽음을 맞이할때 죽임을 당한 중생이 찾아와 지극한 분노와 원한을 나타내면서 공격하며 그를 강제로 지옥악도로 끌고간다.

중음구언론(中陰救言論)


살생을 하지않는 것이 모든 계戒의 우두머리이고, 방생을 하는 것이 모든 선의 으뜸이다.

세간에서 지극히 무거운 것은 목숨이고, 천하에서 가장 참혹한 것은 살생이니, 살생을 하지않고 염불과 방생을 겸수하면 극락에 상품으로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불인선사(佛印禪師)



질병(단명)이 생기는 까닭은 살생가운데서 온다.
고로 유독 방생을 강조하는 것이다.

​연지대사(蓮池大師)



살생을 금하고 방생을 자주 행하는 자는 내세에 사천왕천에 태어나 끝없는 복을 누립니다. 이 사람이 만약 염불수행까지 겸하면 서방 극락세계에 바로 왕생하니 그 공덕이 실로 무량합니다.

​인광대사(印光大師)​



​방생공덕으로 천상(天上)에 태어나다.


한 현청에 낮은 벼슬아치가 있었다. 
성은 장씨이고 이름은 제형으로서 아주 정직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였으며 널리 선행을 베풀었다.

돈이 모여지면 도살청에 가서 장차 죽게 될 짐승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길렀다. 그는 비록 급이 낮은 벼슬아치였으나 집안은 점점 부유해졌다. 아들이 많아 집안은 벌족하였으나 그는 계속해서 힘닿는대로 죽이려는 짐승을  사다가 길렀다.

후에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가없어 퇴직하여 집에서 쉬었다. 그 사다가 사육한 짐승들이 늙어서 죽으면 반드시 땅을 파고 잘 묻어주었다.

이웃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지만 그는 거기에 조금도 개의치않았다. 아울러 자손들에게 철저히 살생은 금지시키고, 채식을 권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방생을 많이했으므로, 나이가 고희가 넘었어도 보통사람들과 달리  매우 건강하였다.

후에 100여세가 되던 어느 날 온 집안 식구들을 한데 다 모아놓고 식구들에게 말을 하였다.

"나는 평생동안 방생을 많이하여 쌓은 공덕이 깊고 두터워 오늘 천궁(天宮)에서  사람을 보내서 나를 맞이하러 올 것이다.

우리 장씨집안은 이후에도 계속 흥할 것이고 자손들은 모두 병없이 명이 되는대로  살 것이니 내가 가고난 후에라도 가훈을 엄수하여 절대로 살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말을 마치자 허공중에서 천인들의 노랫소리와 악기소리가 들리는데 매우 듣기가  좋았다.

그 천인들의 음악소리는 먼 데서 점점 가까이 들려오더니, 후손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그것을 쳐다보았다.

얼마있다가 그 음악소리는 점점 멀리 사라졌다.

음악소리가 사라지고나자 식구들은 생각난 듯 노인을 바라보니 노인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둔 그 얼굴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과 같았다.

조정에서 그 소문을 듣고 그에게 생원벼슬을 추증하였다.  그 집안은 그 노인의 유훈에 따라서 살생을 금하고 독실한 불교집안이  되었다.

-연지대사의 방생행복 살생불행에서-

  출처 / 방생하는 불자들의 '방생의 행복' 밴드
https://band.us/n/a1a44dF1meu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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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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