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출처 http://zhengjian.or.kr/zhengjian/
천고에 만나기 힘든 기이한 인연
작자: 정중(鄭重) 정리
[정견망] 송나라 시대에 한 젊은이가 술에 취해 다른 사람과 재물을 다투다가 화가 나서 상대방을 세게 때렸고 맞은 사람은 넘어져 죽어버렸다. 그는 죄가 두려워 먼 곳으로 도망쳤다. 나중에 참회하고 출가해 수행을 했는데 크게 깨우쳤으며 명심견성(明心見性)하여 대선사가 됐고 또 강단에 올라 설법을 했는데 배우는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가 70여세일 때 갑자기 어느 날 새벽 목욕 후에 자리에 올라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움직이지 말고 말도 하지 말고 이 노승을 보거라. 40년 전의 사건을 끝을 맺어야 겠다."
그는 정오까지 앉아 있었는데 어느 병사가 갑자기 절에 오더니 활을 당여 선사를 쏘아죽이려 했다. 노선사는 그 병사에게 합장하며 말했다.
"노승은 여기에서 이미 오래 기다렸소이다!"
병사는 매우 놀라 즉시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저는 스님과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왜 만나자 마자 당신을 죽이고 싶은 것일까요?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노선사는 말했다.
"빚진 것은 갚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평하지요. 그러니 시간을 끌지 말고 손을 쓰시지요."
아울러 고개를 돌려 뭇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은 이 거사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그 후에 집으로 돌려보내라. 만일 조금이라도 그를 나무란다면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며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며 나의 제자가 아니다!"
병사는 선사의 말을 듣고 더욱 의혹이 일어 반드시 선사의 설명을 듣고 싶어했다.
선사는 말했다.
"당신은 이미 한생을 지나 윤회하여 태에 들었으니 자연히 지난 생의 일을 잊어버렸겠죠." 그러며 예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원래 병사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큰소리로 한수의 시를 낭랑하게 읊었다.
서로의 원한은 언제 갚으려나
겹겹이 얽혀 있으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선사가 다 설명해주어
오늘은 서천(西天)으로 가는구나!
말을 마치고 화살을 들고 서서 왕생(往生)했다(서서 죽어 혼이 천당으로 올라갔다).
선사는 자리에서 내려와 그를 위해 머리를 깎아주고 법명을 붙여주었으며 옷을 갈아입힌 후 그를 불당의 감실(龕)에 넣었다.
그리고 나서 선사는 가부좌하여 앉고 사람들에게 작별을 하고 나서 좌화(坐化)했다(앉아서 죽어 혼이 천당으로 올라갔다는 뜻)
40년 전에 살인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데 비록 빚을 갚는 것이 좀 늦었을 뿐 빚은 갚아야 하는 이치는 바뀌지 않는다. 다행히 이 두 사람은 모두 높은 성품을 갖추어서 정면으로 만났을 때 원래는 원수로 맞아야 하지만 반대로 좋은 인연으로 맺었다. 이 병사는 죽음으로 목숨을 빚진 사람을 핍박하지 않고 오히려 이로 인해 수행했으며 그 자리에서 도를 얻었다. 또 선사는 기다려서 그가 목숨을 빚진 사람을 재촉했으며 이 때문에 피차의 원한을 풀었다. 그 즉시 한 사람은 왕생하고 한 사람은 좌화했으니 천고에 만나기 힘든 기이한 일이다.
만약 선사가 진정하게 득도하지 못했거나 이 병사가 높은 성품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는 반드시 빚을 받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즉 살인은 자살과 다름없는 이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명나라의 감산(憨山)대사가 한 말이 있다.
"생각은 일어나는 곳에서 반드시 간파해야하며 일은 이르지 않았을 때 함부로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만약 악념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자를 수 있다면 업력의 근본은 그 자리에서 제거된다. 망념도 일어날 곳이 없다. 그래서 속세를 초탈하여 성인이 되는 관건은 다 여기에 있다."
출전: 집복소재지도(集福消災之道)
황금으로 운명을 바꾼 동자
작자: 자열(紫悅)
[정견망] 원상보(袁尙寶)의 자는 충철(忠徹)인데 고향에 살고 있을 때 그의 친구 집에서 일하는 한 동자를 보았다. 동자의 용모가 수려하고 성격이 기민하여 상보는 그가 마음에 들었으나 그의 관상이 주인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해 친구에게 그를 쫒아버리라고 했다. 이 친구는 비록 평소에 그의 신기한 관상술을 우러러 보고 있었지만 속으로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상보는 또 여러 번 그 일을 제기했다. 그 친구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동자는 영문도 모르고 쫓겨나서 의지할 데가 없어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일하며 여러 사람 집을 다니며 빌붙어 살았다. 어느 날 밤 어느 낡은 절간에 거처를 정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벽에 구석에 떨어진 승복을 발견했다. 승복 안주머니에 황금과 은 수백 냥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본래 그것을 가지려 했으나 마음을 바꿔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운명이 천박하여 주인의 환심을 얻지 못하고 이런 화를 만나 쫓겨나게 됐다. 만일 오늘 탐욕심이 크게 일어나서 이런 물건을 삼킨다면 그건 불의한 일이 아닌가. 하늘은 나를 더욱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땅히 이곳을 지키며 주인이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날이 밝자 동자는 예전대로 절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곡소리가 들렸는데 문득 보니 어떤 부인이 얼굴을 가리고 울며불며 오는데 사방을 이리저리 돌아보며 찾으면서 길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말했다.
"우리 남편은 군졸인데 사고로 감옥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죄를 물으면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지휘관은 이 사건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 일을 알고 즉시 가산을 팔고 곳곳에서 돈을 빌려 약간의 금은으로 바꾸어 그에게 바치려고 했습니다. 찢어진 승복 안에 싸매어 줄곧 휴대하고 다녔는데 이 절에 들어와 잠시 쉬고 나서 뜻밖에 깜빡 잊고 떠나버렸습니다. 지금 온데 다 찾아다녀도 찾을 수 없으니 남편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동자가 그 금은이 각각 얼마나 되는지 자세히 물어본 후 승복을 가져와서 부인에게 돌려주었다. 부인은 감격해마지 않아 일부를 사례금으로 주려고 했으나 동자는 결코 받지 않으려 했고 부인은 할 수 없이 다 갖고 갔다. 남편은 이후 석방됐다.
이 부인은 동자의 미덕을 잊지 못해 도처에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그곳 지휘관은 이 일을 듣고 매우 놀라 사람을 보내 이 동자를 찾아 집에서 키웠다. 그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고 동자의 미덕과 지혜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그를 양자로 삼았다.
수년이 지난 후 지휘관은 퇴직하게 됐다. 이 양자는 부친의 직위를 세습하게 됐고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 원래 자기를 고용했던 주인을 찾아갔다. 주인은 찬탄하며 말했다. "원군의 관상술이 어찌 이같이 잘못 됐을꼬!" 그래서 그에게 원상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만류했다. 이어서 그에게 낡은 하인의 옷을 입게 해서 차를 받들고 가도록 했다.
원상보가 보더니 놀라 일어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원래 이 집에서 일하던 아이가 아니오? 그는 이 집을 떠났는데 지금 어째서 다시 이곳에 나타났소?" 옛 주인은 고의로 그가 쫓겨난 후 돌아갈 곳이 없어 오늘 또 왔다고 말했다.
원상보는 웃으며 말했다. "나를 놀리지 마시오. 지금 그는 당신의 하인이 아니라 삼품 무관이오. 용모와 얼굴을 보니 지난날과 완전히 다릅니다. 혹시 아주 좋은 일을 해서 이같이 된 것이 아니오?" 동자는 이에 상세히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이 친구는 비로소 탄복하며 충심으로 원상보의 관상술이 신기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찬탄했다.
옛말에 "상유심생(相由心生)"이라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그것을 증명하기에 족하다. 원래 동자의 운명은 다만 남의 하인으로 어렵게 살 운명이었는데 낡은 절에서 거액의 재물을 얻고서 비록 잠시 챙기려 했지만 생각을 바꿔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자기의 운명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돈을 잃은 부인 남편의 억울한 옥살이도 해결됐는데 그 부인까지 합해 세 사람을 구한 셈이 됐다.
물론 이것은 자비로운 하늘이 준 은혜이며 덕을 중하게 보는 하늘이 준 보답이다. 누가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던가?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일을 하고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면 하늘은 반드시 당신을 보호할 것이다.
- 육찬(陸粲)의 "경사편(庚巳編)"에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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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백성을 도살해 여러 차례 돼지로 환생
작자: 우진(宇眞)
【정견망】
옛말에 이르기를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면 칠층 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 고 하는데 생명은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면 큰 공덕을 쌓고 큰 복을 얻어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반대로 목숨을 해치면 바로 천리 하늘의 이치가 용납할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은 천상에서 안배하여 정한 것이므로 누구도 감히 신의 안배를 흩뜨릴 수 없으며 반드시 엄한 하늘의 제재를 받는다. 만일 살생의 업이 너무 많으면 일생(一生)일세(一世)에 다 갚지 못하므로 세세생생 축생으로 떨어져 피살되어 상환하며 줄곧 빚이 다 갚을 때까지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도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말의 다른 방면의 체현이다.
북송 시기에 송태조 조광윤 수하에 무예는 출중하지만 성격이 사납고 살생을 좋아하는 조한(曹翰)이란 장군이 있었다. 조한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강주성(江州城)을 함락한 후 포로로 잡힌 장군 호칙(胡則)을 참수하여 대중들에게 전시하라고 명령하고 또 부하에게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가 성중의 백성 수만 명을 도살하고 재물을 마음대로 약탈하며 호주머니를 채우게 했다.
조한의 잔인한 도살 행위는 하늘을 진노케 하여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는 악보를 받아 사망하게 되었다. 사후에 그는 축생도에 떨어져 돼지의 태에 들었으며 사람들에게 도축당해 잡아먹히는 것으로 업채(業債)를 갚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죄에 대한 보응은 그의 처자에 까지 미쳤다. 그의 아들은 다 자라기도 전에 요절했고 아내는 곤궁하게 살다가 마침내는 창기로 전락했다.
명나라 시기에 무관(無關) 지방에 유옥수(劉玉壽)란 지방장관이 있었다. 그의 집에서는 돼지 한 마리를 길렀다. 유옥수가 돼지를 잡으려고 하는 하루 전날 밤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한사람이 그에게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는 꿈을 꾸었다. 유옥수는 깨어난 후 잘 생각해보니 이 꿈은 자기가 잡으려는 돼지의 영혼이 나타난 것이라고 연상하게 되었다. 유옥수는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보니 착한 마음이 우러나 이 돼지를 죽이지 않기로 했고 이때부터 이 돼지를 잘 길렀다. 1년 후 이 돼지는 자연사했다.
어느 해 유옥수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 귀주(貴州)로 발령받아 갔는데 도중에 큰 병에 걸렸다. 꿈속에 건장한 사내가 걸어와 그 앞에 서는데 얼굴에는 간구하는 표정을 드러내었다. 유옥수가 그 이름과 내력을 묻자 그는 대답했다.
“저는 송나라의 대장군 조한입니다. 당시 강주성을 점령한 후 무고하게 사람을 죽이고 인명을 초개같이 여겨 하늘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누차 악보를 받아 축생으로 떨어졌으며 이전에 부하도 악귀, 지옥도 등에 떨어졌고 저도 돼지의 몸을 받았으니 장관께서 구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유옥수는 “저 역시 범부에 불과한데 어떻게 당신을 구한단 말입니까?” 그는 “당신의 심지가 선량하고 돼지라 잡혀죽는 것을 불쌍히 여깁니다. 당신이 왕년에 제 목숨을 구해주시고 일년간 길러준 일을 기억하십니까?”
유옥수는 깨닫는 바가 있는 듯 했지만 미심쩍은 듯 말했다. “기억이 납니다. 이전 집에서 돼지 한 마리 구해준 적이 있는데, 그게 어째서 당신인줄 알겠소? 현재는 또 어디에 가서 당신을 구하겠소?”
그 사람이 말했다. “지난날의 빚 때문에 나는 이미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디로 가서 또 돼지로 태어날지 모릅니다. 금일 당신과 인연과 은혜가 있어 귀주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잠시 후 또 장탄식하며 말했다.
“저는 당나라 시기에 한때 작은 관리가 되었었는데 어느 법사님이 불경을 강의하는 것을 듣고 나도 가서 공양하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 공덕으로 인해 세세생생 전생하여 관리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선에 대한 보답을 다 누렸습니다. 하지만 송나라 초에 악하게 생령을 살해했기에 누누이 이런 악보를 받습니다. 오늘 또 다행히 은인을 만나서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 물리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금후에 돼지가 잡힌 것을 보거나 우는 소리를 듣거나 사람이 잡아먹는 것을 보시면 기도를 해주시거나 아미타불을 외워주시면 우리 무리들은 잠시 고통을 참을 수 있고 인연 있는 자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살인한 죄업으로 인해 칼에 잘리는 고통을 받았고 송나라로부터 명나라에 이르는 600여 년 동안 아직까지도 축생의 탈을 벗지 못하고 있으니 징벌의 인과는 정말 심합니다! 은인님, 저는 일찍이 이 고해를 벗어나 다시 사람의 몸 받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말을 마치고 끊임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하는데 눈물을 비 오듯 흘려 잠시 후 바닥이 다 젖을 정도였다. 유옥수는 차마 어쩌지 못해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명나라의 감산대사(憨山大師)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몽유집(夢遊集)>에 사실을 기록해놓아 지금까지 유전되고 있다. 보아하니 이 일은 절대 꾸며낸 일이 아니다. 옛말에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고 악에는 악의 보응이 있다” 이 말은 천고불변의 천리이다.
<명현집(名賢集)>에 이런 말이 있다. “휴의시래세 수방시거시(休倚時來勢,須防時去時-세도가 있을 때 함부로 하지 말고 어려울 때를 대비하라는 의미)” 이 말은 인생의 철학의 자못 포함하고 있다. 권고하건대 이전의 폭정의 권세에 빌붙어 양민백성을 해치고 더군다나 진선인의 선량한 민중을 박해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의 앞길을 위해 생각해보라. 즉시 회개하고 잘못을 고쳐 공을 세워 보상하여 미래를 바꾸라. 선과 악은 행함은 자기 일념의 사이에 있다.
복을 받느냐 화를 받느냐 하는 것도 전부 자기의 오늘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절대 악보가 내리기를 기다리지 마라. 그 때 후회해도 늦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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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 한 눈이 멀게 된 사람
인과응보실록: "보응은 그림자처럼 따른다"
작자: 공학겸(恭學謙)
[정견망]
1. 문언박의 동료가 소로 변해 빚을 갚다.
송나라 문로공(文潞公) 문언박(文彥博)이 장안의 사법 수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제방 축조를 시찰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한 마리 소가 갑자기 사람의 말을 했다.
"나와 문언박은 같은 조정에서 20년간 관직을 지냈습니다. 오늘 내가 어떤 면목으로 그를 만나겠습니까!"
수로를 관리하는 한 사병이 소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느껴 이 일을 시찰하러 온 문언박에게 보고했다.
문언박이 그 사병에게 명해 소를 끌고 오라고 했다. 이 소는 문언박 앞에 오자 땅에 엎드려 고개를 낮추고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문언박은 소를 가리키며 주변 사람에게 큰 소리로 탄식했다. "이 동료는 살아있을 때 공금을 몰래 훔쳤기 때문에 오늘 이런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때부터 문언박이 집에 돌아가서 장부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명해 돈 20관을 꺼내어 이 소에게 주고 먹이를 더 주라고 했다.
관부의 돈은 사람들이 낸 세금이다. 문언박 과거 동료는 소로 변해서 제방 축조에 참여했는데 이는 바로 그가 빚진 백성들의 빚을 갚으러 온 것이었다. 현재의 관리들은 이 인과응보의 이 사실을 보고 자세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2. 목숨을 해치면 하늘의 징벌을 받는다
소주(蘇州)에 기름 파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기름을 팔 때 어느 부잣집 문 앞을 지나다가 그 집의 다섯 살 난 아이가 머리에 붉은 모자를 쓰고 가슴에 금장식을 달고 있는 것을 보고 나쁜 마음이 생겨 아이를 외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금장식을 빼앗고 아이를 죽였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부자가 됐다. 나중에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가 죽인 아이와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때문에 그는 이 아들을 몹시 싫어했다.
아이가 자라서 다섯 살이 됐을 때 마침 여름날 날이 매우 뜨거울 때였는데 상인은 잠깐 잠이 들었다. 아이는 그의 머리에 은비녀가 꼽혀 있는 것을 뽑아서 그의 가슴팍에 그으며 놀았다. 그 상인은 파리가 그를 무는 것으로 착각하고 손을 들어 팍 쳤는데 그 은비녀가 자기 가슴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재물을 탐하고 목숨을 해치는 사람에게 권한다. 절대 자기의 분수가 아니면 구하지 말라. 악은 보응이 있고 그림자처럼 따른다. 사람을 해친 자는 하늘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집복소재지도(集福消災之道)"
인과응보 실록 – 마음이 바르지 못해 공명이 깎여
작자 : 진필겸(陳必謙) 정리
[정견망]
복건에 이(李) 씨 성을 가진 수재(秀才)가 있었는데 박학다식했다. 어느 날 경성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도중 구주(衢州)의 한 객줏집에 들렀다. 그 전날 객줏집 주인이 꿈을 꾸었는데 토지신이 나타나 "내일 복건성의 이 수재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유숙할 것이다. 그는 이번 과거에 장원을 할 것이니 그를 잘 대접해야 한다." 하고 말했다.
다음 날 복건성에서 한 사람이 왔는데 과연 성이 이 씨이며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길이라고 했다. 객줏집 주인은 꿈에 토지신이 일러준 대로 아주 각별하게 대접을 잘 해 주었으며 꿈에 토지신이 한 말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이수재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분이 좋았으며 밤에 누워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번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높은 관리가 되겠구나. 그렇다면 내가 가난할 때 얻은 아내는 못생겨서 내 부인이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장래에 관리가 되면 젊고 예쁜 여자를 구해서 새로 장가를 들어야지." 그가 맘속으로 이렇게 헤아리고 있는데 누가 알았으랴, 신령은 그가 마음속에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읽고서 그의 공명을 삭제해버렸다. 그러나 이수재는 그것도 모르고 여전히 나름대로의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시험에 응시했다.
십여 일이 지나 그 객줏집 주인 꿈에 또 그 토지신이 나타나 "저, 이수재는 마음속에 불량함을 품고 있어서 공명을 아직 성취하지 못했다. 그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처자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한다. 그러니 명부에서는 이미 그의 공명을 삭제해 버렸다." 하고 말했다. 객줏집 주인은 토지신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
며칠이 지나 이수재가 시험에 떨어지고 돌아와 객줏집 주인을 만나자 매우 부끄러워하면서도 "주인이 환몽을 꾸고 거짓말을 하여 자신으로 하여금 헛된 꿈을 꾸게 했다."고 오히려 야단을 쳤다.
객줏집 주인도 그에게 애석하다고 말하면서 "제 꿈이 거짓이 아니라 이 수재 당신의 마음이 옳지 않은 것이지요." 했다. 그리고는 그가 떠난 다음날 밤 꿈에서 토지신에게 들은 말을 해주었다. 이 수재는 듣고 나서 크게 놀라고 부끄러워하며 돌아갔다.
바로 이러하다 :
어찌 안을 방어하고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가
아마 이수재 같은 이는
의로운 사람을 배신하는 나쁜 마음이 생기지 않았는가?
好事不成有原因
何防內找自捫心
許是也如李秀才
背信棄義生壞心
"좌화지과(坐花志果)" 중에서
인과응보 실록 - 신의 위엄은 범할 수 없다
작자 : 동북 대법제자
[정견망]
중국 5천년 문명은 신전문화(神傳文化)지만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독재 정권에 이용하여 무신론의 거짓을 전 국민을 세뇌시켰다. 전통을 훼멸하고 전 민중을 선동하고 이끌어 하늘, 땅, 사람과 싸우며 "그 즐거움이 무궁하다."고 까지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죄의 대가는 잔혹하고 무궁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빠짐없이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공산당 수괴와 각급 탐관오리들은 자기가 선양하는 무신론을 믿지 않고 신에게 절을 하며 신을 모시며 또 부처님에게 자기의 관직과 재산을 보호해 달라고 구하면서 그들은 그런 일들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지 백성은 공산당 간부의 무신론의 거짓을 믿고 신령을 감히 범하다가 하늘의 벌을 받아 재앙이 아들은 물론 그 후의 자손에까지 미치고 있는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며 조금도 허구가 없음을 밝힌다.
내가 소학교 3학년 때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우리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돌연 강풍이 사방에서 일어나면서 천지가 암흑으로 변했고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비는 대야로 쏟아 붓듯이 퍼부어 내렸다. 우르릉 쾅쾅하는 소리가 마치 머리 위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려 정말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서 목을 길게 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수업을 맡은 선생님은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번개가 너희들을 칠 것 같으냐?"
마침내 수업이 끝났다. 거리를 지날 때 사람들의 말이 분분했다. "절을 부쉈는데 앞장섰던 누구누구가 벼락을 맞아 죽었대!" 그런데 죽었다는 사람의 그 이름은 우리 마을의 백부가 아닌가? (이웃에 사는 사람이라 백부라 불렀다. 지금 살아 있다면 110세는 넘었을 것이다) 속으로 매우 놀라고 또 슬펐다. 그러나 "우리도 부숴버린 절에서 벽돌을 가져다가 화장실을 짓는데 쓰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나서 은근히 겁도 났다. 나중에 나는 외지에 나가 공부하고 일을 하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60년이 지났다.
금년에 고향에 돌아와 동생을 만나 이야기 하는 중 나도 모르게 벼락 맞아죽은 그 백부의 후손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물어보게 되었다. 그러자 동생과 제수는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말했다. "얼마나 비참한지 말도 마세요!"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내는 정신이 이상해져 멍청하게 살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고, 그는 손자가 둘 었는데 하나는 20세 때 노천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어떤 사람에게 맞아 죽었으며, 다른 하나는 살인 혐의로 감옥에 삼년간 갇혀 있다가 나중에 무죄 석방 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2년 후 30세 때 죽었다고 했다.
동생과 제수는 또 그때 절을 부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다른 사람은 벼락에 맞아죽진 않았지만 매우 가난하게 살았고 두 다리에 병이 생겨(종기 같은 병) 뼈를 찌르는 듯이 아파 일어설 수 없고 길을 걸을 수도 없어 기어 다니다 죽었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 역시 두 다리에 종기가 나서 마찬가지로 기어 다녔다. 두 손자 중 하나는 20세 때 토끼를 쫓다가 언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듬해에야 겨우 시체를 건져 올렸다. 또 다른 손자는 양곡을 실어 보낼 때 사람들에게 밀려 차에 깔려 죽었다. 외손녀는 생활 태도가 안 좋아 남편에게 맞아 죽었고 외손자는 강간, 강도죄로 현재 감옥에 있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매우 처량함을 느꼈다. 무지한 사람들이 신(神)을 모욕해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얼마나 불쌍한가? 나는 하나의 천리(天理)를 알았다. "신령(神靈)은 절대 모독해선 안 된다."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자기의 목숨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손 후대에까지 벌을 받으며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신에게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다. 동시에 자연히 공산당이 "하늘과 싸우니 즐거움이 무궁하도다" 하는 천지를 가득 채운 거짓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그것은 무진장의 재난을 가져다 줄 뿐 무슨 낙이 있는가? 그 죄는 무궁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삿된 무신론(無神論)은 거짓말이라 홍조(紅潮)는 무생문(無生門)으로 흘러가네"
"말겁 시기에 신으로 돌아오리니 중생을 구도해 과거 인연 풀리라" (홍음3)
선량한 사람들이여, 절대 신의 뜻을 위배하거나 멋대로 행하지 말라. 신이 우리를 구하러 왔는데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진선인(眞善忍)"은 우주 대법이니 부디 존중하기 바란다. 오직 대법만이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
인과응보실록 : 남의 목숨을 해쳐 보응을 받다
작자 : 상룡(翔龍)
[정견망] 많은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면 보응을 받는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늘 무절제하게 나쁜 일을 하며 재물을 탐하여 목숨을 해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하늘의 그물은 성근 것 같아도 누락이 없어 악한 일을 하면 반드시 징벌을 받는다.
금(金)나라 하동북로(河東北路) 정양현(定襄縣 지금의 산서성 정양 남쪽) 마을에 왕호(王胡)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들 왕생(王生)은 태화(泰和 1201-1208) 연간에 사람을 데리고 오대산에 성지순례를 갔다. 반쯤 갔을 때 말이 갑자기 놀라더니 왕생을 낙마시켰다. 수행하던 하인이 왕생을 구해 집으로 돌아왔다.
왕생이 깨어난 후 상태가 이상해져서 귀신같은 말을 하며 분노한 모습으로 아버지 왕호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관병의 체포를 벗어났으니 그 재물들을 균등하게 나누어 당신들이 치부할 수 있게 해 주겠소. 무엇 때문에 나쁜 마음을 품고 나를 불태워 죽이려는 거요. 당신들을 이렇게 오래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찾았으니 얼른 목숨을 내놓으시오." 하고는 부엌칼을 가지고 사람을 보는 대로 마구 찔렀다.
왕호는 어쩔 수 없이 당시 유명했던 하(何) 도사를 불러 귀신을 쫓아달라고 부탁했다. 하 도사가 술법을 해 보니, 왕씨 부자에 의해 억울하게 불에 타 죽은 어떤 귀신이 원한의 소송을 한 것이다. 하 도사가 그 귀신의 말을 듣고 나서 왕호에게 설명하기를 "반드시 진심으로 참회하고 원혼을 초도하시오. 그래야만 이 일을 화해할 수 있을 거요." 하고 말했다.
왕호는 하 도사의 요구대로 제단을 차려 놓고 사실대로 실토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씨 일가가 부자가 된 원인을 알게 되었다. 왕호는 원래 기와를 굽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 아들 왕생을 데리고 산동의 기와 가마로 갔다. 금나라 장종(章宗) 명창(明昌) 2년(1191년) 어느 날 각처에서 약탈을 일삼던 9명의 강도가 관병의 추적을 피해 왕호의 기왓가마로 도망쳐 숨어들어 왕호 부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많은 금과 은의 재물을 가지고 있는데 만일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 관병의 추격을 피할 수 있게 하여 생명을 보전한다면 이 재산을 당신 부자와 함께 공평하게 나누겠소." 하고 간청했다.
하지만 재물을 보고 욕심이 생긴 왕 씨 부자는 이 9명의 강도를 기왓가마 속에 숨겨 관병의 수색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관병이 떠나간 후에 왕가 부자는 갑자기 나쁜 마음이 생겨 이 가마에 불을 지펴 강도들을 태워 죽였다. 그리고는 강도의 모든 재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몇 년 만에 그곳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왕호가 참회하고 하 도사는 또 귀신들을 초도해 주었다. 그 후 왕가는 사당을 세워 대낮부터 저녁까지 기도를 해 주었다. 그러나 아들 왕생은 며칠 되지 않아 죽었다.
비록 왕가 부자가 살해한 것이 강도이고 또 빼앗아 온 것이 불의의 재물이지만 마지막에는 현세(現世)의 보응을 받았고 이로부터 선악은 정말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선심을 가지고 나쁜 짓을 적게 하기 바란다. 이렇게 해야만 자기에게 좋은 미래를 남겨줄 수 있다.
인과응보 실록 : 새 잡는 것을 직업으로 하다 아들이 단명
작자 : 상룡(翔龍)
[정견망] 나쁜 일을 한 보응은 아마 자기에게 떨어지거나 가족의 몸에 떨어진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나쁜 일을 한 사람에 대한 징벌이다.
금(金)나라 말기 하남(河南) 평흥현(平興縣)에 남함두촌(南函頭村)에 메추라기를 잡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장(張)노인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그에게 "메추라기(鵪鶉)"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장 씨는 늦게 외아들을 얻었는데 장동(張童)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장동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장 씨 부부는 늙어 의지할 데가 없자 정말 울며불며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그들은 아들을 따라 죽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 장동을 매장할 때 장 씨는 땅에 그저 한두 척 되는 구덩이만 파고 그 위에 벽돌로 묘를 쌓았다. 사람들이 왜 아들 묘에 보루를 쌓았느냐고 묻자 그는 슬피 말했다. "내 아들은 살아 있소!" 사흘이 되자 장 씨 부부는 다시 묘지에 와서 통곡하며 아들을 부르는데 갑자기 묘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놀라워하며 말했다. "아들의 혼이 정말 돌아왔소!" 그러면서 얼른 관을 파서 아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장동이 깨어난 후 미음을 마신 후 부모에게 그간의 경과를 이야기했다. 처음 죽었을 때 저승사자가 자신을 저승으로 데리고 갔다. 장동은 울면서 저승판관에게 고했다. "우리 부모님은 늙고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제가 그들을 좀 더 모시고 다시 와서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저승 관리가 장동의 효성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오늘 네가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말해라. 메추라기 잡는 직업을 포기할 수 있다면 네 명(命)을 연장할 수 있다고 말이야!"
장 씨는 즉시 망 등 새 잡는 도구를 다 불태워버리고 그 후 다시는 메추라기를 잡지 않았다.
무지로 화를 부르지 말라
작자 : 흑룡강성 신명(辛明)
[정견망]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 쌍류현(雙流縣) 합림향(合林鄉) 고봉촌(高峰村)에 절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이 절을 "고산사(高山寺)"라 부른다. 고산사는 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길이가 1,200미터에 달하며 50여 존의 불보살(佛菩薩)과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이 18층 지옥에 떨어져 업의 빚을 갚고 고생하는 장면이 있다. 중공이 정권을 잡기 전에는 주위 10리에서 8개 향(鄕)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향을 피우며 신명의 보우를 기도했다.
1950년 중공(중국공산당)이 지주를 없애는 운동을 할 때였다. 어느 날 촌장(村長) 고지운(高志雲)과 무장부장(武裝部長) 왕청운(汪清雲)이 한 무리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곡괭이, 호미 등 연장을 들고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 절을 마구 부수기 시작했다. 삼층 높이의 불상이 순식간에 다 부서졌고 절간 내의 모든 것들을 전부 밖으로 내팽개쳐졌다. 산허리에는 온통 신상의 파편, 끊어진 팔, 다리 등이 널려 있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촌장 고지운은 불상의 도금을 탐욕스럽게 긁어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후 사악한 정부의 촌사무소는 신성한 성지를 점령해 버렸다.
대략 2년 후 촌장 고지운은 알 수 없는 괴질에 걸려 개처럼 기어 다니기만 했고 일어설 수 없었는데 오래지 않아 사망했다. 무장부장 왕청운 역시 괴질에 걸렸는데 고칠 수 없었다. 매일 오후가 되면 그때부터 그는 늘 혼자 있기를 두려워했다. 매우 무서운 표정이었고 밤이면 많은 사람이 자기를 잡으러 온다고 했다. 매일 밤 잠들지 못하고 고통이 극심하여 감당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점쟁이를 찾아가보라고 하여 가서 점을 치니 점쟁이가 "그가 불상을 부셔서 그렇게 된 것이다."고 했다. 그래서 왕청운은 집 뒤의 못 옆에 집을 하나 짓고 다섯 존(尊)의 불상을 모시고 매일 불공을 드렸다. 이름을 "왕가묘(汪家廟 왕씨 집안의 사찰)"라 하고 많은 향불을 피우게 했다. 나중에 그의 괴상한 병은 저절로 나았다.
이것은 정말 신상(神像)을 훼손해 악보(惡報)를 받았으며 다시 신을 모셔와 복을 받은 것이다.
인과응보 – 남의 이혼을 도와 장원을 잃다
작자 : 정수신(程守信)
[정견망]
사명(四明)지역에 갈정내(葛鼎鼐)라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 매일 학교를 갈 때마다 늘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土地廟) 앞을 지나야 했다.
어느 날 묘축(廟祝 신묘에서 향불을 관리하는 사람)의 꿈에 토지신이 나타나 말했다. "갈 장원이 매번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내가 일어나서 그에게 인사를 해야 하니 많이 번거롭다. 네가 나를 위해 작은 담을 쌓아 나를 그 안에 가리게 하여 내가 늘 그에게 일어서서 존경을 표하지 않아도 되게 하라." 하고 부탁을 했다.
묘축은 토지신의 뜻에 따라 작은 담을 쌓기로 하고, 막 일꾼을 모아서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또 꿈에 토지신이 부탁했다. "너는 담을 쌓을 필요가 없다. 갈정내가 남의 이혼서류를 쓰는 것을 도와주었고 이 때문에 그의 공명은 이미 하늘에서 지워졌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경의를 표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당시 향리(鄕裏)에 자기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글을 쓸 줄 모르므로 갈정내에게 대필을 부탁했던 것이다. 갈정내는 즉시 기뻐하며 이혼 문서를 써주었다. 그 사람은 그래서 얼른 갈 곳 없는 본처를 버렸다.
나중에 갈정내는 사당지기가 전하는 말을 듣고는 크게 후회하여 진력을 다해 이혼한 남편을 찾아가서 이혼했던 여인과 다시 재혼을 하도록 하여 혼인을 회복하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나중에 과거시험에서 그는 과연 장원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행동을 후회하고 뉘우쳤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그래도 향시에는 붙게 해 주어 성에서 거인(擧人)으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관직은 부사(副使)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출처: 집복소재지도
작자: 엄자율(嚴自律)
[정견망]
1. 진수(陳壽)가 책을 쓰는데 사심을 내다 해를 당해 죽다
진(晉)나라 역사학자 진수(陳壽)는 "삼국지"를 지을 때 당시 생활이 곤란했다. 그래서 정량주(丁梁州)에게 말했다. "나에게 양식을 1천곡 빌려 준다면 당신에게 좋은 전기를 써주겠소."
정량주는 진수의 청에 응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수는 그의 전기를 써주지 않았다. 진수가 쓴 "삼국지"가 완성된 후 사람들은 모두 그가 쓴 글에 문제가 있다고 하며 진수가 불공평한 마음을 품었다고 비난했다. 나중에 진수는 과연 해를 당해 죽었다.
2. 선한 행적을 지운 후 관직을 박탈당한 문인들
예전에 두 명의 문인이 있었는데 명을 받들어 강음현(江陰縣)의 현지(縣志)를 편찬하는 일을 맡았다. 그들이 구(舊) 현지를 보니 수절한 부인 두 명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은 평범하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 두 사람의 기록을 지워버렸다.
그날 밤 성황묘의 어느 도사는 두 부인이 성황신을 향해 울며 호소하는 말을 들었다. "우리 두 사람은 일생동안 고생하며 수절했는데 죽은 후 우리가 수절한 사실이 현지에 기록됐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이유도 없이 어떤 사람이 지워버렸습니다."
성황신은 듣고 난 후 말했다. "그 두 명의 문인은 본래 마땅히 공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이 다른 사람의 착한 일을 지워버렸으니 마땅히 그들의 관록도 지워야 한다." 두 부인은 성황의 말을 듣고 읍을 하고 감사하며 절을 하고 물러났다.
얼마 안 되어 두 문인은 그 도사가 해준 이 말을 듣고 반박했다. "이것이야 말로 허튼 소리요!" 두 문인은 이런 인과응보의 이치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해 두 문인은 과연 시험에서 성적이 너무 나빠 자격을 박탈당했고 이 때문에 억울해 하다 죽었다.
3. 운명을 고친 석광
예전에 석광(席匡)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점을 잘 본다는 관상가를 만났다. 그 관상가는 그에게 모 년에 죽을 것이라고 했다. 석광은 그 말을 듣고 매우 우려했다.
나중에 석광이 우연히 다른 사람이 규중에 남녀 간의 추문을 말하는 것을 듣게 됐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대해 단정히 앉아 매우 의분(義憤)한 모습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한 사람은 마음속으로 매우 부끄러워 다시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추문은 그래서 감춰지게 됐다.
관상가가 말한 그해가 됐다. 석광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병이나 무슨 재난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중에 석광은 관직에 올랐고 태보(台輔)까지 이르렀다.
그 관상가는 나중에 석광의 상황을 알고 말했다. "어느 자리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추문을 이야기 하는데 앉아 침묵해 그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을 멈춘다면 이는 말없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석광은 이 방면에서 우리가 배울 모범입니다. 그의 수명이 길어지고 관직이 올라간 것은 바로 신령의 보답을 받은 것입니다."
4. 정선이 실언을 피하다
정선(鄭瑄)은 위인됨이 소박하고 말수가 적었다. 그는 말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크게 떠들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의 질투를 일으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 중에 나쁜 일을 한 사람이 그 속에 있을 수 있는데 만일 그의 이야기를 한다면 그가 비록 말은 않지만 마음속에 유감을 가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관직을 지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시다. "관리가 되면 청렴해야 한다!" 그러면 청렴하지 않은 관리가 듣고는 화를 낼 것입니다. 친구에게 "친구가 되면 마땅히 피차간에 솔직하게 왕래해야 한다" 그러면 솔직하지 않은 친구가 듣고는 화를 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고의로 그런 말을 했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적게 하며 얼굴에 기뻐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문제를 묻는다면 그가 묻는 문제에 답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실수를 피할 수 있어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정선이 말하는 것은 처세의 요결을 깊이 터득한 것이다.
- "집복소재지도(集福消災之道)"에서
인과응보 실록: 남의 말(言)을 훔쳐 목숨을 잃다
작자:정실(程實)
[정견망] 주(周)나라 때 양산(梁山)에서 산사태가 났다. 진(晉)나라 임금이 대부(大夫 관직명) 백종(伯宗)을 불러 산이 무너진 정황을 알아보려 했다.
백종은 조정으로 임금을 보러가는 도중에 어느 마부를 만나 그에게 물었다.
"너는 최근에 무슨 소식을 듣지 못했는가?"
마부가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양산에서 산이 무너졌는데 무너져 내린 토석이 강을 막아버려서 물이 흐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임금께서는 이 일 때문에 마침 대부 백종을 불러 만나보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지 상의하려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백종이 물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는가?"
마부가 말했다.
"매우 간단합니다. 임금께서 문무백관을 친히 이끌고 양산에 가서 신령에게 울며 제사를 지내면 강은 흐를 것입니다."
백종이 임금을 알현하자 과연 이 일에 대해 물었다. 백종은 마부의 말대로 건의했다. 임금이 그대로 받아들여 시행했더니 강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임금은 매우 기뻐하며 백종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제사 지내는 방법으로 이 난제를 해결할 줄 알았소?"
백종이 답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해낸 것입니다."
공자(孔子)는 이 사건의 내막을 알고 난 후 말했다.
"아, 백종 이 사람은 후대가 끊어지겠구나! 남의 좋은 말(言)을 훔쳐 자기의 말로 삼았으니!"
나중 과연 백종은 해를 입어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대부의 지위도 끊겼다.
아! 백종은 그저 다른 사람의 한마디 말을 가로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엄중한 천벌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성과와 소득을 훔치면 더욱 나쁜 보응을 받게 될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출처: "집복소재지도(集福消災之道)"
인과응보실록: 억울한 옥사로 가뭄이 들다
작자:육진(陸眞)
[정견망] 승상 서평후인 우정국(于定國)은 서한(西漢) 선제(宣帝) 시대 사람이다. 집은 동해군 하비현에 있었다. 우정국의 부친은 "우공"이라고 불렸다. 우공은 한때 현의 옥리(獄吏)를 지낸 적이 있고 나중에 승진해 군(郡)의 옥관부좌로 지냈다. 그는 판결을 공정하게 하고 좋은 사람을 억울하게 다스린 적이 없었다. 군에서 법령을 어긴 자가 있으면 우공의 판결을 거치면 감히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 동해군 백성은 우공이 살아있을 때 그를 위해 사당을 만들었는데 "우공사"라고 했다.
동해군에 효부가 있었는데 자녀가 없고 젊어서 과부가 되었지만 시어머니를 공경하게 모시고 매우 근검했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개가시키려고 했으나 그녀는 응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이웃 사람에게 말했다. "나를 매우 공손하게 모시는 이 효성스러운 며느리가 자녀도 없고 과부가 된 지도 오래되고 나는 이미 늙었소. 어떻게 젊은 사람을 이렇게 오래 두겠소?" 얼마 안 되어 시어머니는 목매어 죽었다. 시어머니의 딸은 관부에 가서 말했다. "모친의 며느리가 죽인 것입니다."
관부에서는 며느리를 체포했고 그녀는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사건을 조사하는 관리는 독한 형벌과 고문으로 다스려 효부는 고통을 못 이기고 거짓 죄명을 시인했다.
이 안건은 확정된 후 상급 관부에 보내졌다.
우공(즉 우정국의 부친)은 이 효부가 시어머니를 모신지 십년 동안 효성으로 소문이 났는데 시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태수는 그의 의견을 듣지 않았고 우공은 여러 차례 변론했으나 태수의 의견을 바꿀 수 없어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직했다.
태수는 결국 효부를 사형에 처했고 이후 군에서는 삼년간 가뭄이 들었다.
후임 태수가 가뭄의 원인을 점쳐보고 우공을 찾아 정황을 물었다. 우공은 "그 효부를 죽이지 말아야 했습니다! 전임태수가 억지로 그녀를 사형에 처했기에 대 가뭄이 이곳에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신임태수는 소를 잡아 효부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태수 이하의 관리는 모두 직접 가서 제사를 올렸다. 그러자 하늘에서는 감응이 있어 즉시 큰비가 내렸고 그해는 오곡이 풍성해졌다. 군의 사람들은 이 때문에 더욱 우공을 존중했다.
우공은 자기의 집을 짓는 목수에게 말했다. "대문을 높고 크게 지어주시오. 내가 판결한 안건은 억울한 일이 없었으므로 나의 후손은 반드시 임금의 봉토를 받는 높은 관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이 대문은 큰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오."
나중에 그의 아들 우정국은 관연 과연 승상이 되어 서평후에 봉해졌다.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과 "한서(漢書) 우정국전(于定國傳)"에 근거함]
인과응보 실록: 사람의 셈은 하늘만 못하다
작자:화한(華翰)
【정견망】
청나라 시대의 작가 증연동(曾衍東)은 자신이 쓴 <소두붕(小豆棚)>에서 다음과 같은 실화를 기록했다.
완평(宛平-지금은 북경 풍대구)에 단유익(單有益)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고리대금으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아무리 작은 이자라도 사정없이 모두 챙겼다. 우연히 먼 곳에서 오거나 전적으로 급한 돈을 구하러 온 사람이면 고리를 받아도 될 것임을 알고 돈을 빌려주기 전 선이자를 떼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당신이 그에게 백원을 빌리면 먼저 30원을 이자로 내야 하니 일단 삼십원을 떼고 70원만 준다. 하지만 계산은 백원을 빌려준 것으로 친다. 갚을 날이 되면 원금과 이자를 다시 계산해야 한다. 그곳 사람들은 그를 단주판(單算盤-계산을 잘한다는 뜻)이라고 불렀다. 그와 사귄 사람들 중 손해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단주판"은 다른 사람의 기물(器物)을 보고 마음에 들면 무슨 수를 쓰든지 반드시 손에 넣고야 말았다. 수법이 치밀하고 지독해 그의 가정환경은 곧 부유해졌다. 그는 좋은 집을 짓고 실내에 골동품을 진열했으며 매우 귀한 몸이 되었다. 아내 하나에 첩을 넷이나 거느렸고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었다. 또 하녀에, 하인이 끄는 마차를 탔으며 있을 것은 모두 다 있어 아주 의기양양했다.
어느 날 단주판이 마당에서 낮잠을 자는데 꿈에서 푸른 옷을 입은 관리가 커다란 주판을 들고 와서 탁자위에 놓는데 주판 알은 모두 오얏만큼 컸다. 주판의 가로목에는 백, 십, 분, 양 등의 숫자가 없었으며 대신 처, 첩, 자, 녀, 재산, 농토 등의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 관리가 말했다. "너는 사람들의 재물을 약탈해 이렇게 큰 재물을 모았다. 하늘에서 셈을 제대로 하고자 한다. 악산(惡算)으로 당신의 각산(刻算)을 벌할 것이다."(그 뜻은 하늘에서는 당신의 장부를 정리하여 무수한 차례의 고리대금을 단번에 청산하려 한다는 뜻)
그러면서 그 관리가 손으로 그 주판의 알을 탁탁 튕기자 모든 알이 다 움직였다. 모두 하나씩 지워지고 다만 "여(女)"자 한자 아래에 한 알의 주산 알만 남았다. 관리는 셈을 끝내고 나서 그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설사 이 여자를 없애더라도 아직 당신의 죄악을 다 갚지 못할 것이오. 잠시 그녀를 남겨두는데 이후에 다시 와서 나머지 빚을 받아갈 것이오!"
관리는 그 커다란 주판을 들더니 "단주판"에게 보여줬는데 단주판이 갑자기 깨어났다.
이때부터 단가에는 전염병이 크게 일어나더니 전 가족이 다 죽었고 딸 하나만 남았다. 그녀는 병이 들지 않았으나 창기가 되었다. 단주판 자신은 죽음을 면했지만 집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거지가 되었다.
이 글은 <소두붕>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문장의 제목이 <큰 주판>이다. 이 큰 주판이 가리키는 것은 자연히 그 관리가 가져온 하늘의 큰 주판이다. 단씨가 늘 쓰던 주판은 사리사욕을 위한 작은 주판일 뿐이다. 사람의 셈은 하늘의 셈보다 못하다. 이는 영원불변의 진리이다!
내가 직접 목격한 현세현보
작자: 탁진(濯塵)
【정견망 2010년 5월 4일】 내가 12살 되던 해, 즉 1947년의 일이다. 우리 마을에 갑자기 많은 병사들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들을 현대대(縣大隊 역주: 중공이 조직한 민병대)라고 불렀다. 우리 마을은 아주 구석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병사를 본 적이 없었다.
소위 현대대는 바로 현에서 새로 징병된 민병(民兵)으로 농촌에서 선발해 이곳에 주둔한 사람들이었다. 아이의 눈에는 이것도 신기한 일이어서 늘 접근하고 싶어했다. 하나둘씩 멀리서 보다가 점점 그들에게 가까이 갔고 심지어 그들의 숙사까지 들어가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대다수 매우 선량하다고 느꼈다. 다만 몇몇 사람은 좀 흉악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결코 자원하여 병사가 된 것이 아니었고 강제로 잡혀 어쩔 수 없이 온 사람이었다.
한번은 그들이 대회를 열어 전체 병사들은 모두 운동장에 앉아 있고 위에서 교도원이 훈화를 했는데 대체적인 뜻은 때가 되면 전선으로 나가 싸울 준비를 해야하니 태도를 표명하라는 것이었다. 교도원이 물었다. "너희들은 전선으로 가서 싸우겠는가? 아니면 후방에 남아 지키겠는가?" 그러자 절대 다수가 대답했다. "후방에 남아 지키겠습니다."
단 한사람만이 "전방이나 후방이나 마찬가지니 분부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많은 사병들은 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거짓 열성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이 전선이 어디 있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중화민국 정부 군대와 싸우는 것으로 바로 내전이었다.
평소에 그들은 백성들과 왕래가 있었는데 백성들에게 가축을 빌린다던지 맷돌을 빌린다던지 하는 일이 있었다. 한번은 그들이 일부러 작은 당나귀를 빌려간 후 일을 너무 많이 시켜 당나귀가 쓰러졌다. 당나귀가 오래살기 힘들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당나귀 주인과 상의해 당나귀를 잡아 사병들의 생활을 좀 개선하고자 했다.
입으로는 "3대규율이니 주의할 8가지" 등을 외치지만 사실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수작이었다. 또 한번은 어느 농민을 잡아 들보에 매달아 놓고 그 집의 가축이 대대의 농작물을 먹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마을의 팔로군(八路軍)의 규율이었다.
이제 본론을 말하자. 어릴 때 내가 살던 곳에 지성묘(至聖廟)가 있었다. 사당 내에는 많은 동으로 된 불상이 있었고, 공자와 그의 제자들도 있었다. 또 관우(關帝라고 한다) 그의 사자인 주창(周昌), 지장왕, 현무대제, 태상노군, 팔선 등등 많은 분들이 모셔져 있었다.
현대대가 오기 전까지 이곳에는 마을 사람들이 올리는 분향이 끊이지 않았지만 대대가 온 후 사당을 부수기 시작했다. 조각상은 전부 철거한 후 농가의 마차를 징발해 모두 실어서 현성으로 보냈다. 이때 2개의 불상은 수레에 싣지 못해 사찰밖에 버려졌다. 두 병사가 상의하더니 이 불상을 폭파하기로 했는데 나머지 사병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제지하지도 않았다.
이 두 사병은 하나씩 맡아 폭파하기로 했다. 그들은 두개의 수류탄을 묶어 빈 동상 속에 던져 넣고 수류탄의 뇌관에 긴 끈을 묶어 다른 한쪽은 손으로 불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고 와서 준비! 하고 소리쳤다. 곧 폭발음이 들렸고 화약 냄새가 온통 퍼졌다. 방금까지 건재하던 불상은 파편으로 사분오열이 되었다.
당시 우리 어린이들은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 멀리서 신나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뒤에서 걱정했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게 된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밤이 되자 그 두 병사는 모두 괴상한 병에 걸렸다. 온몸에 붉은 반점이 나고 아파서 떼굴떼굴 굴렀다. 손발이 다 가렵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으며 멈추지 않았다. 어떤 병사가 바깥에 나가서 무당한데 물어보니 불상을 폭파한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두 병사는 해가 밝기도 전에 비명횡사했다.
이런 종류의 현세현보(現世現報)는 내가 어렸을 때 인근 마을에서 늘 나타났었다. 하지만 모두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다. 유독 이 사건만 내 주위에 일어난 것이며 지금까지 눈에 역력하다.
1949년 이후 절이 모두 다 파괴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늘 동냥하던 노스님이나 도사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아직도 종교에 관한 일이나 인과응보의 일을 듣는 사람은 큰일을 만난 것처럼 전전긍긍한다. 백성들에게 신앙자유와 인과를 믿지 않도록 한 현실은 이렇게 조성된 것이다. 유구한 신전문화읮 전통을 지닌 중화민족의 큰 비애가 아닐 수 없다.
불가고사: 7차례 창에 찔려 묵은 빚을 갚다
작자: 대법수련생
【정견망 2010년 4월 21일】
청나라 순치(順治) 원년에 있었던 일이다. 안휘성 청양(青陽)에 오육방(吳六房)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하인 중에 오모(吳毛)가 있었다. 오모는 줄곧 진지하고 성실하게 부처님을 믿었으며 계율을 지키고 선을 닦았다. 그는 또 매일 불호(佛號)를 외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한 와중에 일부 난병(亂兵)들이 강을 건너왔다. 오 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고 오모만 홀로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오모는 불행히도 난병들이 휘두른 창에 7차례나 찔렸다. 나중에 그의 동생이 달려와 그를 살펴볼 때에야 가까스로 의식이 돌아온 오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업장(業障)이 많아 장차 7차례에 걸쳐 돼지의 몸으로 태어나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재계하고 염불한 힘으로 7차례 창에 찔리는 것으로 과거에 맺었던 원한들을 풀었으니 이제 곧 서방정토로 갈 것이다!" 말을 마친 후 그는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며칠 후 오육방이 비몽사몽간에 공중에 뜬 신인(神人)을 보았다. 앞뒤로 당번(幢番 신불 앞에 세우는 깃발)을 세우고 존엄하기 그지없었다.
신인은 그에게 "저는 오모입니다. 지금 인연이 있어 천계(天界)에 가는데 지나는 길에 당신께 작별인사를 드립니다." 오육방은 그가 이미 아주 좋은 곳으로 갔다는 것을 알고는 곧 그의 초상화를 그려 더욱 공경하게 예를 올렸다.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었던 오모는 일곱 차례나 창에 찔려 사망했다. 속인이 보기에 그의 죽음은 비명횡사한 참혹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의 진상은 도리어 일곱 차례 창에 찔리는 형식으로 미래 일곱 세(世)에 걸쳐 받아야 할 고통을 없애버린 것이다. 아울러 그의 생명이 위치한 층차도 높아졌으니 사실은 아주 좋은 일이다.
인간세상에서 중생의 인연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 대법제자로서 고통을 당할 때는 반드시 바른 믿음이 확고하다면 세간에서 어떤 형식으로 표현되든지 막론하고 최후의 결과는 반드시 좋을 것이다.
인과응보 실록 - 항복한 군사들을 살육한 백기는 만 겁에도 용서할 수 없어
작가 : 샤오후이(晓辉)
[정견만 2008년 3월 19일]
진조 대장 백기는 매번마다 군대를 통솔하여 출정할때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한번은 조나라와의 전투에서 그는 기만수단으로 투항한 군사 40만 명을 살육하여 시체를 산같이 쌓았다. 죄악이 하늘에 사무쳐 얼마 안 지나 대장 백기는 진나라에서 살해당하고 자손들까지 멸족되었다.
수나라 개황년간에 태부사승 조원창이 죽었다가 부활한 후 그가 음간에서 본 정경을 이야기했다. 주무제는 세 갈래의 집게에 묶여 한 방안에 갇혀 있었다. 주무제가 조원창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인간세상으로 돌아가면 수나라 황제에게 나의 갖가지 죄행은 모두 조사 처리되었다고 알려주시오. 오직 불법(佛法)을 멸한 죄업이 너무나 중하다. 감면은 불가능한 것이다. 나를 위해 공덕비석을 세워 내가 지옥에서 탈리하도록 되길 희망한다." 조원창이 죽음에서 벗어난 후 똥구덩이에 어떤 사람의 머리카락이 나왔길래 누군인가고 물어니 지옥의 옥리(冥吏)가 답하는 말이 "진나라 대장 백기다"라고 했다.
당나라때 우뢰가 한 마리 소를 쳐죽였는데 소의 몸에는 "백기"라는 글자가 있었고, 명조때 우뢰가 한 마리의 지네를 쳐죽였는데 몸에는 "백기"라는 두글자가 있었다. 백기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가히 알 수 있다.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불법(佛法)을 멸한 것은 죄업이 모두 큰 것이다. 백기와 주무제의 말로는 오늘날 악인들의 경종인 것이다."
(자료출처 : "태상감응편")
<<속고승전·지현(智炫)전>>에 보면 지현(智炫)이 변론에서 도사 장빈(張賓)을 힘껏 꺽어 버리자 무제는 도교의 단점을 덮어두고 불교가 깨끗하지 않다며 배척하였다. 이에 지현은 "도교의 부정(不淨)이 더 심합니다"라고 답변하였다.
북주 무제는 도사들이 힘써 다투지 않았다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불교와 도교 두 종교를 금지한다. 경전(經典)과 불상(佛像)을 모두 없앨 것이며 승려와 도사를 모두 평민으로 환속시킨다." 이 조서는 반포된 직후부터 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불상을 녹이고 경전을 불태우며 승려들을 구타하고 탑을 파괴하고…… 보찰(寶刹) 가람을 모두 속인의 주택으로 삼으며 승려들은 흰옷을 입혀 평민으로 환속시킨다."
이때 촉신주(蜀新州) 과원사(果愿寺)의 승려인 승맹(僧猛)은 수도에 가서 무제와 멸불정책의 부당성을 논(論)하였고, 정애(靜 ) 법사(法師)도 또한 무제를 직접 만나 멸불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였으나 모두 밖으로 축출되었다. 의주(宜州)의 승려인 도적(道積)은 다른 7명과 함께 단식하여 목숨을 끊었는데 그 사적(事跡)이 아주 장렬하였다.
건덕(建德) 6년(577년)에 북제(北齊)를 멸망시킨 이후 북주의 무제는 멸불정책을 원래 북제(北齊)의 영토까지 확대 실시하였다. 무제는 친히 북제의 수도인 업성( 城,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臨 縣) 남서쪽 20km 지점 장수( 水)에 인접해있다)에 가서 승려들을 궁전에 불러들인 후 폐불령(廢佛令)을 내려 원래 북제 국경내에서도 멸불할 것을 명령했다. 사원이 훼멸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참가한 500여명의 승려들은 모두 머리들 숙이고 명령을 듣고 있었는제 오직 혜원(慧遠) 화상만이 소리를 높여 항변하였다.
"폐하! 지금은 권력을 믿고 계시지만 삼보(三寶, 불법승(佛法僧)을 말한다)를 파괴하시면 곧 사악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아비지옥(阿鼻地獄, 불교에서 말하는 18층 지옥의 이름이다)에 떨어지게 되는데 폐하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무제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화가 나서 두 눈을 부릅뜨고 화상을 바라보면서
"짐은 단지 백성들이 편안하다면 지옥의 고통이라도 사양하지 않겠다."
혜원화상이 반박하면서 "폐하께서 사법(邪法)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지금 고업(苦業)을 짓고 있으니 백성들도 모두 폐하와 같이 지옥에 떨어질 터인데 그들이 어디에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무제는 이 권고를 듣지 않고 폐불정책을 원래 북제땅까지 확장하여 실시하였다. 결과적으로 4만여 개의 사찰이 모두 왕공(王公)들의 집으로 하사되었고 일체 경전이나 불상이 불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사원의 재산은 모두 관(官)에 귀속되었으며 승려들은 칙령에 의해 평민으로 환속되었다.
오래지않아 무제는 몸에 악질(惡疾)을 앓게되어 전신이 문드러지다가 죽었다. 새로운 황제인 주정제(周靜帝)가 등극한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황제가 양견(楊堅, 수(隨)나라를 세운 개국황제이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북주(北周)는 이로써 멸망하였다.
수나라 황제가 새로 나라를 세운지 11년째 되던 해에 대부시승(大府寺丞) 조문창(趙文昌)이 갑자기 죽었는데 오직 심장부위에만 온기(溫氣)가 남아있었다. 집사람들이 감히 염(殮)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참 후에 다시 소생하였다. 그는 소생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처음에 죽었을 때 어떤 사람이 나를 염라대왕에게 끌고 갔는데, 염라대왕이 내게 "너는 일생동안 무슨 좋은 일을 했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저는 집안이 어려워서 특별히 공덕(功德)을 세운 일이 없고 단지 매일 근면하게 불경을 묵념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이 말을 듣고는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숙이고는 찬양하면서 "아주 훌륭하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염라대왕은 사람을 파견하여 나를 남문(南門) 밖으로 나가게 해주었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무제(武帝)가 문간방안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3겹이나 되는 족쇄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는 내게 "당신은 우리나라 백성 같은데 잠시 이곳에 왔다가면 내가 할말이 있소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즉각 절을 하고 무제를 배알했다.
무제가 "나를 아는가?"하고 묻기에
"저는 과거에 폐하의 시위(侍衛)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제는 곧 "과거에 내 신하였다면, 지금 돌아가서, 나를 대신하여 황제에게 말해주게나. 내가 지은 허다한 죄에 대해 모두 능히 명확히 설명할 수 있었지만 단지 불법을 없앤 무거운 죄만은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바라건데 수나라 황제께서 나를 위해 자그마한 공덕을 세워주셨으면 하네."라고 말했다.
남문 밖을 나가기 위해 기다리고있는데 한사람이 똥통 속에 머리만 남긴 채 잠겨있는 것을 보았다. 길가의 사람에게 물으니 바로 진(秦)나라의 대장이었던 백기(白起)가 이곳에 잡혀와서 아직 죄를 다 갚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문창은 집에 돌아온 후에 곧 부활하였다. 이에 곧 황상(皇上)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설명 드리니 황제가 천하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사람마다 돈을 약간씩 내어 무제를 초도(超度)하기 위한 법사(法事)를 베풀 자금을 마련하게 하였다. 당시 3일 동안이나 큰 제사를 치렀는데 이 일이 수사(隨史)에 기록되어있다.
후기: 지금 중국대륙에서 고금(古今)의 모든 고문방법을 총 동원하여 법륜불법(法輪佛法) 수련생들을 박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단지 18층 지옥뿐이 아니라 몇 백층, 몇 천층, 만만(萬萬)층 지옥에 떨어져도 지나치지 않다.
자료내원 : 《태평광기(太平廣記)》, 《구도석도(九都釋道)》, 《중국에 영향을 끼친 100가지 사건(影向中國的100次事件》 등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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