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나는 용렬하고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하여 비록 불법을 공부한지는 여러 해가 지났지만, 여태껏 불법의 심오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였다. 비록 전수(專修)염불을 하고는 있지만 극락세계 왕생에 대하여 시종 자신이 없었다.
번뇌 망상은 마치 폭풍이 불고 소나기가 내리듯이 잠시도 멈추질 않았고, 억지로 부처님의 명호로 짓누르려고 하면 도리어 더욱더 거세지기만 하였다. 그래서 오랜 시간동안을 매일같이 방황하였으며 의지할 데가 없어, 늘 걱정되고 불안하였다.
다행히도 나중에 정토종의 선도류(善導流) 계열의 저술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글을 읽는 순간 문득 시원한 물줄기가 가슴 속 깊이 흘러드는 것 같았다.
아! 본래 아미타불께서는 십겁이란 세월동안 항상 우리처럼 유랑(流浪)하고 있는 고아들을 부르고 계시며, 절실한 마음으로 우리들이 하루 속히 고향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구나!
이 인연으로 우리 모두가 비록 깊고 무거운 업력을 가진 범부들이지만 역시 모두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완전히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한 것이므로,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바로 아미타불의 대원력의 배에 타고 있는 것과도 같아서, 반드시 극락세계 내 고향에 안온(安穩)하게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2009년 여름, 대중(大衆)들이 중국 심양에서 정토법문을 듣기 위해 혜정법사(慧淨法師)님을 초청하였는데, 자비하신 법사님께서는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법문을 하는 동안, 나는 스님 곁에서 법문을 들으면서 법희(法喜)로 충만되었고,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스님의 법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오하고 현묘(玄妙)한 이론들을 언급하시지 않으면서 완전히 당신 자신의 진실한 신앙의 발로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법문 중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이러한 신앙은 바로 당신의 생명이다. 신앙이 있다면 당신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이고, 신앙이 없다면 당신에겐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해탈의 생명이 없으며 성불의 생명 또한 없다. 따라서 신앙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이고 가장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부모님도 중요하고 자식도 중요하며, 남편과 아내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맨 나중에는 전부 우리를 버리고 떠나게 된다. 결국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뿐이고, 오직 우리 자신의 신앙뿐이다."
이런 말씀들은 구구절절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며 가슴을 설레게 하였고, 말씀마다 철저하게 진리를 보여 주셨는데, 한 치의 꾸밈도 없이 완전히 진실한 믿음의 표출이셨다.
초학자(初學者)들에 대하여 스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은,'나는 염불을 하는데 숫자를 정하지 않고 애써서 억지로 하지도 않는다. 염불은 제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며 염불을 하고 있다.'라 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 사람이 염불을 하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있어서, 익숙한 것이 생소하게 바뀌고 생소한 것이 익숙하게 되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온종일 망상과 잡념 속에서 살면서 하루 동안 염불한 숫자를 통계해 보면 몇백 번도 채 안될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조석으로 시간을 정해서 조용히 앉아 염불을 하거나, 아니면 하루 동안 규칙적으로 천 번, 오천 번, 만 번의 숫자를 정해서 염불을 한다면, 아무리 염불을 못해도 최소한 정해놓은 천 번, 오천 번, 만 번의 숫자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초학자들은 매일 염불하는 숫자를 정해두어야 한다. 조석으로 조용히 앉아서 염불을 하는 것 외에, 만약 낮에도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숫자를 정해서 염불을 하셔야 한다. 이렇게 오래오래 하다보면 습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설사 여러분이 염불의 숫자를 정하지 않고, 또 염주를 돌리며 염불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부처님을 떠올리며 염불을 하게 되는데, 입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자주 염불을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다."
평이하고 통속적이며, 낭랑하고 힘찬 이런 말씀들은 현대인들의 경망스럽고 나태한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하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완렴나립(頑廉懦立)」의 효과를 거두었으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연 있는 연우(蓮友)님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 혜정법사님의 법문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나의 천박함을 헤아리지 않고 법문하신 내용에 대하여 간략히 목차를 편집하고 정리를 하였다.
하지만 수준에 한계가 있으므로 불가피하게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여러 대덕님들께서 바로 잡아주시길 간절히 청하는 바이다.
부끄러운 후학 진우(陳羽)
심양 대불사에서 삼가 적음.
제1장 두 가지 정토
정토법문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수당(수나라와 당나라)의 정토이고,
둘째는 송명(송나라와 명나라)의 정토이다.
수당의 정토는 순수한 정토이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정토란 곧 정토종 선도류(善導流)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위로 용수(龍樹), 천친(天親), 담란(曇鸞), 도작(道綽)을 이어 선도(善導)에 이르기까지 전해져온 법맥의 정토교리사상이다.
이 법맥은 매우 순수한 정토여서, 잡다한 교리가 섞이지 않았고 장황하여 번잡하지가 않다.
순수하기 때문에 정확하다는 것인데 잡다한 교리가 섞이지 않고, 장황하여 번잡하지 않으므로 두루뭉술하지가 않다.
이 법맥을 의지해 수행을 한다면, 곧 이른바「백 명이면 백 명이 왕생하고, 만 명이면 만 명이 왕생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 법문에 의지해서 수행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극락세계에 왕생을 할 수 있으며, 금생에 바로 극락세계 성중(聖衆) 가운데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당의 정토로서, 선도류 법맥의 정토법문을 가리킨다.
송명의 정토는 잡다한 교리가 섞인 정토이다.
송나라와 명나라의 정토란 바로 북송(北宋)때 부터 줄곧 명나라 내지는 청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정토다. 이 정토와 수당(隋唐)시대 선도대사의 정토를 비교하자면 비록 똑같은 정토법문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송명의 정토는 이미 천태, 화엄, 선(禪)의 사상이 그 속에 섞여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는 매우 풍부하고 아주 광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성도문의 사상이 들어가 있으므로, 그 결과 수학(修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생의 큰일에 대하여 불확정적이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였다.
법보의 유실
무엇 때문에 송명의 정토가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선도대사의 이 정토법맥과 관련된 저서들인, 천친(세친)보살의《왕생론》, 담란대사의《왕생론주》, 도작대사의《안락집》, 선도대사의《5부 9권》은 당나라 말엽에 점차적으로 중국에서 유실되어 일본으로 전해졌는데, 일본에서 그 빛을 크게 발하게 되었다.
청나라 말엽에 이르러 양인산(楊仁山) 거사님께서 일본에 거주하는 지인을 통하여 중국에서 유실된 경론들을 다시 중국으로 반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더불어 남경에서「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를 설립하고, 이미 유실(遺失)되었던 경론들을 판각하고 인쇄를 하여 유통시켰다.
바로 이 선도류(善導流)라는 법맥의 정토교리사상이 당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실전(失傳)되었기 때문에, 그 뒤의 고승대덕들은 스스로 정토법문을 닦는다던가, 혹은 정토를 선양하는데 있어서 각자 본종(本宗)의 교리에 입각하여 해석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정토법맥의 교리를 설해놓은 서적들의 전거(典據)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천태종은 천태의 교리에 의거하여 정토를 해석하게 되었고, 화엄종은 화엄의 교리에 의거하여 정토를 해석하였으며, 선종에서는 선의 교리로써 정토를 해석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다보니 정토사상이 순수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이행도(易行道)
순수한 정토는 쉬운 법문이면서도 수승한 법문이다. 용수보살께서는 당신의 저서인《이행품(易行品)》에서 이 법문을「이행도」라고 말씀하셨다.
「이(易)」란 곧 용이(容易: 쉬움)하다는 말로서 어떤 사람이라도 닦을 수 있고, 전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으며, 모두 빨리 성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용이하다(쉽다)」고 하는 것이다.
쉬운 원인은 순수한 정토법문은 다만 한마디 나무아미타불만 불러도 충분히 왕생할 자격이 있으므로, 매우 간단하여 다른 경전과 진언을 독송하고, 다른 법문을 닦을 필요가 없는데 있다.
만약에 다른 경전과 진언, 혹은 기타 공덕과 수행이 섞여야만 왕생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번잡하여 간단하지가 않을 것이다.
한 마디 나무아미타불은 단지 여섯 글자뿐이다. 간단하고 쉽기 때문에 세 가지 근기에 두루 가피를 줄 수 있어, 상근기·중근기·하근기를 막론하고 모두 배울 수 있고, 출가자든 재가자든 전부 닦을 수 있다.
이른바,「세 가지 근기에 두루 가피를 주고, 영리하고 둔한 근기를 모두 거두어들이니, 만인이 닦아 만인이 왕생한다.」는 것 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염불하는 사람은 금생에 극락왕생을 확정지을 수 있고, 왕생을 하면 신속하게 성불을 할 수 있으므로, 간단함의 이면에 경계의 높고 뛰어남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간단하지만 한 평생 동안 성취를 할 수 있을지 결정되지 않았다거나, 혹은 간단하여 왕생을 할 수는 있어도 왕생을 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성불의 과위를 증득할 수 있다면 수승하다고 말할 수 없다.
배를 타는 비유[乘船喩]
용수보살께서는 이 법문을 간단하면서도 쉽고, 편안하면서도 즐거운 법문이라 말씀하시면서 배를 타는[乘船] 비유를 드셨다.
배위에 앉아 있으면 신체가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행동이 자유롭든 자유롭지 못하든 상관없이 단지 배위에만 앉아 있으면 모두 편안하고 즐겁고 평등하게 여기(사바)에서 저 피안(극락)으로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로서, 생사윤회를 벗어나는데 있어 우리 범부들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 범부들은 사실상 업을 짓는 능력만 있을 뿐, 윤회를 벗어나고, 나아가 성불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래서 용수보살님께서는 어떠한 법문도 정토법문을 제외하고는 전부「난행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난행도(難行道)
이 어려움[難]을 용수보살님께서는 하나의 비유로드셨는데, 바로「길을 걸음[走路]」이다. 우리가 천 리, 만 리 먼 길을 가고자 했을 때, 만약 배나 혹은 비행기가 있다면 매우 가뿐할 것이고, 길을 걸어서 가야 한다면 매우 수고로울 것이다.
설사 수고스럽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넌다 하더라도 반드시 도착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길이 요원하여 도사리고 있는 위험부담이 많고 온갖 어려움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용수보살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드셨다. 마치 우리들의 두 손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들어 올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니, 어떻게 들어 올릴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힘으로는 50근, 100근 정도는 들 수 있겠지만 삼천대천세계는 아무리 애써 봐도 절대로 들어 올릴 수 없다.
용수보살님은 이러한 비유로써 자신의 힘으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고, 나아가 불과를 성취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표현하고 계신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처럼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비행기를 타면 하늘에서 짧은 시간을 비행할 수는 있겠지만 만약 비행기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단지「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른다」면, 곧 아미타불의 원력의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아서 여러분이 출가자든 재가자든, 수행을 할 줄 알든 모르든, 마음이 청정하든 청정하지 않던, 전부 극락세계에 왕생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미 육도윤회를 하는 범부가 아니라 극락세계 성중(聖衆) 가운데 일원이라 말할 수 있으며,「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은 원인[如是因]이면 반드시 이와 같은 결과[如是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잡다한 교리가 섞인 수행
송명의 정토도 역시 염불을 위주로 하며, 극락세계 왕생을 목적으로 하지만, 여러 가지 조건들이 붙으므로 염불 외에 공덕을 쌓아서 보조수행(助行)으로 삼아야 한다.
염불 외에 기타(다른) 공덕을 닦아서 조행으로 삼아야 했을 때, 공덕을 쌓을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쌓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덕에는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이 있는데, 사실상 우리가 지은 공덕에는 모두 탐·진·치가 들어 있으므로 모두 오염된 것이고, 유루(有漏)이며 진실한 공덕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공덕으로 어떻게 왕생의 자량을 삼을 수 있겠는가?
동시에 송명 정토사상에서의 염불은 반드시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를 하고 있는데, 이른바「공부가 한 덩어리를 이룸[功夫成片]」이거나, 혹은 견혹과 사혹을 끊어서 사일심(事一心)을 이룬다던가, 혹은 진사혹(塵沙惑)과 근본무명혹을 깨트리고 이일심(理一心)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왕생의 품위(品位)가 높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선도대사님의 이 법맥의 견해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여서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극락은 나의 고향
극락세계는 아미타불께서 우리 시방세계 중생들을 위해 건립한 곳이다.
시방세계 중생에는 성인이 있고 범부가 있으며, 또 범부 가운데는 선인(善人)도 있고, 악인(惡人)도 있으므로 모든 중생들을 전부 포괄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 건립한 곳으로서, 소유권과 사용권이 모두 우리들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공덕자량과 극락세계에서의 빠른 성불 또한 모두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위해 완성하신 것이며, 이 한 마디나무아미타불육자명호 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
만덕홍명(萬德洪名)
모든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할 때, 그 정인(正因)과 정업(正業), 공덕자량은 어디에 있는가?
나무아미타불의 육자명호 속에 있다. 이 명호는 원만하고 구족하며, 심지어 초월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 한마디 아미타불의 명호에는 8만 4천 법문의 공덕이 원만이 들어있고, 8만 4천 법문의 공덕이 구족하며, 8만 4천 법문의 공덕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락왕생에 필요한 정인, 정업, 자량과 공덕은 이 한마디 아미타불의 명호 가운데 전부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미타불 명호의 공덕은 왕생자에 대해서나, 성불에 대해서나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조금도 빠짐이 없이 원만하게 갖춰져 있으므로 이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을「만덕홍명」이라 존칭하는 것이다.
칭명을 하면 반드시 왕생한다[稱名必生]
선도대사의 이 법맥에 의거하여 염불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반드시 왕생한다.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중생들이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한다[衆生稱念, 必得往生]" 고 하셨으니, 단지 염불만 하면 백프로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
또 말씀하시길,
"저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반드시 왕생한다[乘彼願力, 定得往生]" 고 하셨으니, 아미타불의 원력을 의지하면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미타불께서는 본래부터 우리들을 위해 극락세계를 성취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셨으며, 만덕홍명인 이 한 마디 명호를 염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부 극락세계로 왕생할 수 있도록 발원하셨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저 부처님의 원력을 타면 반드시 왕생 한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부처님의 원력으로 쉽게 왕생한다[以佛願力, 易得往生]" 고 하셨으니, 아미타불의 원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이 모두 쉽게 왕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부처님의 원력으로 전부 왕생한다[以佛願力, 莫不皆往]" 고 하셨다.
아무튼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 면 성인과 범부, 선인과 악인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전부 아미타불의 정토로 왕생하게 되어 한 사람도 누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인천(人天)의 선악 범부가 모두 왕생하고, 저 극락세계에 이르면 아무런 차별 없이 다 함께 퇴전하지 않는다" 고 하신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타방세계의 범부와 성인이 원력을 타고 왕래하고, 저 극락세계에 이르면 차별 없이 다 같이 퇴전하지 않는다 "고 하셨다.
그러므로 선도대사님의 정토 교리는 기필코 왕생[必得往生]하는 법문이고, 반드시 왕생[定得往生]하는 법문이며, 쉽게 왕생[易得往生]하는 법문이고, 전부 왕생[皆得往生]하는 법문이며, 다 같이 퇴전하지 않는[齊同不退] 법문이다.
만약 이러한 교리가 아니라면 왕생이 확실치가 않다. 마음이 일단 확실치가 않으면 수행이 불안해지게 되는데, 마음이 결정되지 않는 사람을 누가 감히 그 사람이 현재 이미 왕생이 결정되고 왕생의 몫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오로지 선도대사님의 이 계통의 법문을 닦는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경전의 근거[經典依據]
이 법맥은 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만약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법이 아니라 외도이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뜻을 해석하면 삼세의 부처님들이 억울하다고 하시고, 경전에서 한 자라도 어긋나면 마설과도 같다[依文解義 三世佛冤, 離經一字 等同魔說]" 는 말씀이 있듯이, 어떠한 법문을 제창하든 간에 불교의 법문이라면 반드시 경전에 의거하여야 한다.
그럼 용수, 천친, 담란, 도작, 선도의 이 법맥에서 의거하는 것은 어떤 경전들인가?
정토삼경(淨土三經)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수많은 경전을 설하셨는데, 그 가운데 아미타불의 정토와 관련된 경전은 대략 2백여 부로서 전부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에 대하여 언급을 하셨다.
이 2백여 부의 경전 중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즉「여시아문」부터「작례이거」에 이르기까지 구구절절 전부 순전히 극락세계의 장엄과 수승함, 아미타불의 구제의 공덕을 설하신 경전은 오직 삼부의 경전 밖에 없으니, 곧《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이다. 따라서 이 삼부경을「정토삼부경」이라 부른다.
정의와 방의(正依旁依)
이 법문을 제대로 설명을 하려면 반드시 이 삼부의 경전을 의거해야만 순수한 것이다. 다른 경전은 보조역할만 할 뿐, 백 프로 의거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정식으로 의지하는「정의(正依)」와 참고로 의거하는「방의(旁依)」의 차별이 있다.
정식으로 의거함이란, 곧 백 프로 의거한다는 것이고, 참고로 의거함이란 다만 해당 경문 가운데 관련 있는 부분만 취하여 참고 또는 보조역할을 하고, 해당사항이 없는 부분은 채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정토법문에서 정식으로 의거하는 경전은 단지「정토삼부경」뿐이라는 것이다.
용수, 천친, 담란, 도작, 선도 이 분들께서는 순수하게 정토삼부경을 의거하여 정토법문을 해석할 뿐, 다른 종파의 교리가 그 속에 섞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엄선을 거쳤기 때문에 순수하여 혼잡하지 않고, 또한 이치에도 맞고 근기에도 계합한다.
전수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함[專修必定]
전수염불을 지향하는 이 순수한 정토법문은 방법상으로도 간단하고 쉬워서, 우리가 다만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곧 왕생의 직접적인 원인[正因]이 되어 반드시 왕생을 할 수 있다.
만약에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지 않는다면 결정되지 않아 왕생을 할 수도 있고 왕생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어느새 오로지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하게 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불력(佛力)과 원력, 공덕력에 의지하게 된다.
한 사람이 만약 전적으로 아미타불을 의지하고, 또 의지하는 대상이 의지할만한 대상이라면, 그렇다면 어찌 금생에 성취할 수 없겠는가?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 전수(專修)를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꼭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2장 제18원과 제19원
48원의 분류
지금부터《무량수경》에서 왕생과 관련 있는 원(願)에 의거하여 방금 말씀드린 이치의 근거로 삼고자 한다.
아미타불은 총 48대원이 있으신데, 만약 이 48대원을 귀납하고 분류를 한다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극락세계의 국토와 관련된 원과 아미타불 자신과 관련된 원과, 그리고 우리들의 왕생공덕과 관련된 원이 있다.
극락의 과보는 불가사의하다
이 48대원 중에 정토와 관련이 있는 원을 예로 들면, 앞부분의 제1원은「무악취원(無惡趣願)」으로서 극락세계에는 삼악도가 없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대자대비와 대원대력을 갖춘 아미타불께서 삼악도에 떨어지게 될 중생들과 삼악도의 죄업을 지은 중생들을 구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두 번 다시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무악취원(無惡趣願)」을 세웠기 때문이다.
제2원은「불갱악취원(不更惡趣願)」으로서, 염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극락세계에 왕생한 뒤, 시방세계를 다니면서 중생구제를 발원하며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2원이다.
제3원은「실개금색원(悉皆金色願)」이고, 제4원은「무유호추원(無有好醜願)」이다.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아미타불과 똑같은 금색신이고 생김새도 모두 똑같다.
여러분이 어떠한 신분으로 왕생하든 간에 생김새는 전부 아미타불처럼 32상, 내지는 8만 4천상으로 모두 똑같이 만덕장엄(萬德莊嚴)을 갖추게 된다.
마치《장엄경》에서 말씀하셨듯이「부처님의 금색신과 같아 미묘한 상호가 전부 원만하다[如佛金色身 妙相悉圓滿].」
제5원에서 제10원까지는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한 중생들은 전부 여섯 가지 신통을 갖추게 된다는 원이다.
제11원은「필지멸도원(必至滅度願)」이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한 사람들은 전부 곧바로 열반을 증득하게 되는데, 아미타불이 우리들을 위해 성취한 극락세계에는 이러한 공덕과 기능이 있다.
이어서 제12원은「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이고, 제13원은「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으로서, 이 두 원은 제11원에서 증득한 불과(佛果)와 아미타불이 똑같음을 나타낸다.
아미타불이 무량수이므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우리도 똑같이 무량수가 되고, 아미타불이 무량광이므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우리도 똑같이 무량광이 된다는 것이다.
저 부처님은 우리가 어떠한 중생이든 간에, 성인이든 범부이든, 출가자든 재가자든, 심지어 선인이든 악인이든 일단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만 하면, 전부 성불을 할 수 있게 해주신다.
따라서 본래 마땅히 삼악도에 떨어져야 할 사람이지만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나면 다시 삼악도에 떨어질 필요 없이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여 삼악도의 죄업이 소멸되고, 아미타불의 공덕에 의지하여 신속하게 성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제1원부터 제13원 까지만 보더라도 극락세계의 수승하고 장엄하며, 불가사의한 과보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 찬탄하시면서 해석하시길,
"극락은 무위의 열반 경계요[極樂無爲涅槃界], 염불이 곧 열반의 문이로다[念佛卽是涅槃門]."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길,
"티끌과 같은 옛 업들이 지혜에 따라 사라지고[微塵故業隨智滅],
어느새 열반의 문으로 들어가네[不覺轉入涅槃門].
크고 작은 아승지겁도[大小僧祇恒沙劫]
역시 손가락 한번 튕길 사이와 같구나[亦如彈指須臾間]."고 하셨다.
48원 가운데 아미타불이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제18, 19, 20원에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원을「섭생삼원(攝生三願)」이라고 부른다.
「섭생삼원」이란 곧 이 세 가지 원으로써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하여, 시방세계 중생들로 하여금 극락세계로 왕생하여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전부 성불을 할 수 있으며, 제12원과 제13원을 통하여 아미타불과 같이 무량광, 무량수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 원력인 18원과 19원, 20원이다.
만약 이 세 가지 원이 없다면, 설사 극락세계가 제아무리 청정하고 장엄하며, 제아무리 시방국토를 초월한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돌아올 몫은 없다. 따라서 이 세 원은 우리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당기원과 결연원[當機願 結緣願]
이 세 가지 원은 아미타불께서 시방세계 중생들을 섭수하여 구제하는 원력이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원의 내용은 다르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근기가 천차만별이므로 아미타불께서 일체 중생을 두루 섭수하기 위하여 반드시 18원과 19원과 20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원 가운데 18원과 19원을「당기원(當機願)」이라 부르는데, 이 두 가지 서원에 부합하면 금생에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것이다.
20원에 부합하는 중생을「결연원(結緣願)」이라 부른다. 비록 금생에 왕생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아미타불과 인연을 맺었으므로 부처님께서 영원히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연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 그 사람을 인도하여 다음 생, 혹은 다다음 생에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하신다는 원이다.
고승대덕들이 제20원을 표현하기를,
"바늘을 삼킨 물고기가 물속에서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제18원은 쉬움 중의 쉬움이다[易中易]
18원과 19원의 이 두 원은 모두 당기원(當機願)이다. 그러나 만약 자세하게 분석해보면, 오직 제18원만이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이행도의 법문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제18원에서는 단지「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함을 말하므로 이행도라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어린애도 부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앵무새도 부를 수 있으므로 가히 쉬움 중의 쉬움이며, 이행도의 극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9원은 정토종에서 난행도에 속하는데, 보리심을 일으키고 온갖 공덕을 닦은 다음 회향하여 왕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도문의 난행도와 비교를 한다면 여전히 이행도의 범주에 속하지만, 그러나 쉬움 중의 어려움이므로 제18원의 쉬움 중의 쉬움과는 이러한 차별이 있다.
제18원은 아미타불의 본마음이다[彌陀本懷]
제18원은 아미타불의 본래 마음이시다.
따라서 제18원에 의지하여 염불하는 중생은 아미타불과 직접적이면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러한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계는 갈라놓을 수가 없다.
제19원의 중생은 아미타불과 본래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보리심을 발하여 온갖 공덕을 닦는 등, 기타 법문으로 회향하는 것은 오로지 아미타불을 의지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므로 아미타불과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연관이 없다고 말하지만 역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닦은 공덕을 회향하여 정토왕생을 발원하였기 때문에 대자대비하신 아미타불께서는 구제할 수 있는 중생이라면 최선을 다해 구제해 주신다.
이 사람이 보리심을 내어 온갖 공덕을 닦아 극락왕생을 원한다면, 아미타불께서는 당연히 이 기회를 잡아서 그 분을 구제할뿐더러 그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임종할 때에 영접을 하셔서 극락왕생을 할 수 있도록 보증을 해주신 것이다.
다만 두 원을 서로 비교해보면, 아미타불의 본뜻은 제18원의「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에 있으므로 선도대사께서는,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데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본원은 제19원이 아니다.
제18원
지금부터 내가 원문(願文)을 따라 해설을 하겠다.
"만약 제가 부처님이 될 적에, 시방세계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좋아하며,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여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렀을 때에[乃至十念],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 다만 오역죄와 정법을 비방한 자들은 제외하겠다."
우선 제18원부터 해석하겠다.
제18원은 총 서른여섯자로 이루어졌는데, 원문의 대의(大意)는 이러하다.
아미타불께서 만약 성불을 하지 않으셨으면 몰라도, 만약 성불을 하셨다면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당신의 구원을 믿고, 당신의 극락세계야 말로 시방세계 중생들의 영원한 안락처임을 믿으며, 극락세계왕생을 발원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반드시 왕생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시다.
「지심」이란 완전히 자신의 내심으로부터 나온 마음인데, 진심(眞心) 또는 진정(眞正)이란 뜻이다. 우리가 일처리를 하거나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반드시 진심이어야 한다.
만약 진심이 아니라면, 그 일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친구를 사귈 때에 반드시 진심으로 대해야 비로소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지, 만약 거짓된 마음으로 서로 이용만 하려 한다면 어찌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매일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회향문만 읽을 뿐,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진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발원이 아니라면, 이것은「지심」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지심」이란 여기서는 아주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으니, 곧 내가 진심으로 극락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진심으로 극락왕생을 원하며, 진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지심이라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지심」을 해석하는데 상당히 복잡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매우 현묘(玄妙)하기까지 하여 일반인들이 이해를 할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정토법문이「이행도」인 이상, 교리적으로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 뿐더러 방법상에도 쉽게 실천을 할 수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지심」이란 두 글자는 진심, 즉 진실한 마음이란 뜻이다. 만약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바로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이다.
내가 지극정성으로 간절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지극정성으로 간절하게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지심」은 믿음까지 관철(貫徹)되어야 하므로, 믿음은 자신의 내심으로부터 나온 진정한 믿음이어야 한다.
「지심」은 또한 발원까지 관철되어야 하므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발원은 진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발원이어야 한다. 「지심」은 역시 염불에도 관철되어야 하므로 염불 역시 진정한 염불이 되어야지 성의 없이 적당히 하고 만다든가 마지못해 형식적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 혹은 다른 사람들이 부르니까 나도 따라 부르는 식으로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지심」은「신·원·행」삼자량에 관철되어야 한다.
「신(信)」은 곧 믿음으로서, 극락세계가 실제로 있고 아미타불이 진실로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인데, 이것은 초보적인 믿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락세계는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위해 발원하고 만드셨으므로 우리들의 세계이고, 우리들의 집이며, 우리들의 소유임을 믿고, 모든 소유권과 사용권이 전부 우리들의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돌아가려면 아주 자연스럽게 돌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극락세계가 우리들의 집인 이상,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일종의 천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신(信)」이다.
우리가 좋아하면서 신심과 환희심을 갖고 극락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곧「신요(信樂)」이다.
그 다음은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信受彌陀救度]. 아미타불께서는 적극적으로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구제해 주시고, 아무런 조건 없이 구제해 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을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미타불의 구제는 적극적이고 평등하며, 조건이 없으시다.
아미타불께서는 5겁의 사유를 통하여 널리 48대원을 세우시고, 또 한량없는 세월[兆載永劫] 동안 보살의 덕행을 쌓고 심으셨다. 한량없는 세월 전에 아미타불께서는 이미 우리들을 위해 발원을 하셨고, 우리들을 위해 수행을 시작하셨다.
그 시절에 우리들은 육도윤회를 하면서 삼악도에 빠져 머리를 잠깐 내밀었다가 다시 빠지곤 하였다.
그때에 아미타불께서는 적극적으로 우리와 같이 어리석고 괴로우며, 죄업을 지어 끊임없이 윤회를 하고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발원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미타불께 부탁을 했거나 합장하며 그 분께 구걸을 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적극적(주동적)으로 우리들을 구제하겠다는 발원을 하신 것이다.
모자의 비유[母子喩]
부모가 아기를 낳고 나면 자연히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서 그 애를 사랑하고 키우고 교육을 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이 갓난애가 부모에게 합장을 하며 부탁을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육하고 키우는 것은 일종의 천성이다. 천성에는 꾸밈이 없고 배양할 필요도 없어 자연스럽게 선천적으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로서는 억지로 강요할 필요 없이 자연히 자식을 아끼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녀들이 안전하도록 보호를 해줄 것이다.
우리들의 부모님은 탐·진·치 삼독이 있는 업력범부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까지 해줄 수 있는데 하물며 부처님이시겠는가?
그 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시방세계 중생들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평등하면서도 조건 없이 우리들을 구제해 주시겠다고 발원을 하셨다.
부처님께서 우리 범부들처럼 차별적인 관념이 있겠는가? 없으시다!
부처님은 이른바 아견(我見), 인견(人見), 중생견(衆生見), 수자견(壽者見)이 없을뿐더러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역시 없으시다.
또한 원수와 친한[寃親]이 평등하고 자타(自他)가 하나인 분으로서, 이런 분이라야 비로소 부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은 상대적인 관념 속에 계시지 않으므로 성인과 범부, 선인과 악인, 재가자와 출가자라는 관념이 없으신데 이런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만약 아직도 이런 차별된 관념을 갖고 계신다면 여전히 범부이지 부처님이라고 할 수 없다.
「욕생아국(欲生我國)」이란 이 네 글자는 부처님께서 발원하시는 입장에 서서 말씀하신 것이다.
아미타불께서 발원하신 목적은 시방세계 중생들을 불러서 구제하려는데 있다.
"너희들은 나의 극락세계로 오너라!
너희들은 빨리 나의 극락세계로 오너라!
너희들이 오고 나면, 다시는 윤회를 하며 죄업을 짓고 괴로움과 어려움을 겪지 않을뿐더러 영원히 늙고 병들지 않으며, 영원히 죽지도 않는다.
여섯 가지 신통력을 구족할 뿐만 아니라 신속히 부처님의 과위(佛果)를 증득할 수 있느니라"
아비지옥의 고통 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
《장엄경》에서 아미타불은 시방세계 중생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셨다.
"윤회를 하는 중생들이여! [輪廻諸趣衆生類]
속히 나의 나라에 태어나 안락을 누려라. 速生我刹受安樂].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유정들을 건지시니, [常運慈心拔有情]
아비지옥 중생 남김없이 제도하리라." [度盡阿鼻苦衆生].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께서「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欲生我國]」라고 부르(외치)신 것이다.
육도윤회를 하고 삼악도에 빠져있는 모든 중생에게,
"속히 나의 나라에 태어나 안락을 누려라.
빨리 극락세계에 왕생하거라.
이곳이 너희들의 편안하고 즐거운 집이니라."
그렇지 않으면,
"삼계가 편안하지 않기를 마치 불타는 집과도 같아 온갖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매우 두렵고 무섭다"라고 외치신 것이다.
아비지옥 중생 남김없이 제도하리라』
아비지옥의 중생은 세간에서 죄업이 가장 무거운 중생이다. 그들이 지은 죄업은 모든 죄업 가운데서 가장 무겁다는 것이다.
아미타불께서는 항상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부르고 계시며, 영원히 평등하고도 조건 없는 자비심으로 아비지옥의 중생을 포함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해 주시는데, 그들이 극락왕생 발원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
단지 극락왕생 발원만 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으므로,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유정들을 건지시니, 아비지옥 중생 남김없이 제도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욕생아국」즉,「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라」는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구제이시다.
열 번만이라도[乃至十念]
이어서 아미타불께서는「내지십념」을 말씀하셨다. 이「내지십념」은 염불을 하는데 최소한의 기준이어서, 이것보다 더 적을 수는 없다. 거의 아무런 조건과 넘어야할 문턱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전부 실천할 수 있고 전부 희망이 있게 된다.
「내지십념」이란, 곧 내지 일생동안 불법을 배우고, 염불수행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임종할 무렵 짧은 시간동안 겨우 열 번 나무아미타불을 불러도 역시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는 말로서, 지금부터 극락왕생 발원을 하고, 지금부터 염불수행을 한다면 전부 왕생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내지십념」으로 모든 염불하는 중생들을 포함시키며 어떠한 사람도 염불만 하면 전부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내지십념」이란 곧「평생의 근기는 위로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임종의 근기는 아래로 열 번 내지 한 번까지」의 염불을 말한다.
내지 십념할 때의「십념」은 이 사람이 곧 임종할 사람으로서, 평소에 불법을 배우고 염불하고 선행을 실천하고 덕을 쌓은 적이 없을 뿐더러, 심지어는 삼귀의조차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많아야 열 번 정도의 염불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을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아무리 어리석고 졸렬하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염불을 열 번 이상은 했을 것이니, 그런 사람들도 왕생을 하는데 하물며 우리들이겠는가?
아미타불께서는 이것을 기준으로, 다만 왕생을 발원하고 칭명염불을 한다면 어떤 사람들도 모두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왕생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중생을 구제하시는데 조건이 없으시다. 부처님께서는 내지십념, 즉 우리가 단지 오로지 당신의 명호만 부르면 된다고 하시고, 그 다음에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만약에 가르침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생을 할 수 없다면, 당신께서는 부처가 되지 않겠으며, 반드시 수행을 계속 더 해서 우리가 왕생을 할 수 있는 공덕을 쌓아야만 성불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18원에 의지하는 염불중생들은 아미타불과 직접적이면서 밀접한, 심지어 한 몸으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약불생자, 불취정각(若不生者, 不取正覺)」이란 이 두 구절의 여덟 글자의 뜻은 매우 심원(深遠)하다.
"너희가 왕생을 할 수 없다면, 나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이 반드시 왕생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불을 하겠다."
"내가 없으면 너희들은 왕생을 할 수 없겠지만, 만약 내가 있다면 너희들은 반드시 왕생을 할 수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정각(正覺)을 이룬 부처님의 몸을 볼모로, 시방세계의 모든 죄악 중생들을 구하여 육도윤회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여 성불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여덟 글자 속에 이러한 뜻이 담겨져 있으니, 어찌 아미타불의 성불과 우리들의 왕생이 한데 묶여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데 묶여 있다는 것은 한 몸이 되어 분리될 수 없다는 말로서, 만약 우리들의 왕생이 없다면 아미타불이 있을 수 없고, 아미타불이 없다면 우리들의 왕생 역시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내지십념」이란 무엇을 염(念)한다는 것인가? 바로 아미타불이라는 정각을 이룬 부처님의 명호를 염(부름)하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당신께서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의 명호로써 중생들을 구제하시므로 이 부처님의 명호를 중생들에게 부르도록 하시고,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전부 이 육자명호 속에 갖춰져 있으므로 시방세계 중생들이 칭명을 하면 반드시 왕생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미타불께서는 만약 이러한 공덕이 있는 명호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성불을 못한다면 이 부처님의 명호 역시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이 명호가 있어서 칭명염불을 하는 모든 중생들이 왕생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성불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니「약불생자, 불취정각」이란 이 여덟 글자는 우리들과의 관계가 매우 중대하고 매우 밀접하다.
물론 제18원의 글자마다 하나하나의 내용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겠지만 이 여덟 글자에 담긴 뜻은 특별히 깊고도 크다.
제18원 속에서 우리와 아미타불, 아미타불과 우리는 영원히 함께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18원이 성취되어야만 모든 원력이 성취되고, 제18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모든 원력이 성취될 수가 없다.
제17원
18원과 17원은 서로 연관이 있다. 18원의「내지 십념」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서, 이 한 마디 명호는 우리가 제17원으로부터 들은 것이다.
제17원에서 아미타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부처님들이 모두 나의 이름을 찬탄하지 않는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
다시 말하면, 아미타불께서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이 전부 당신 명호의 위신력과 공덕을 찬탄하고 당신 명호의 불가사의함을 찬탄하도록 원력을 세우신 것이다.
이처럼 찬탄을 함으로써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공덕이 광대하고 무량무변하며, 불가사의한 이 한 마디 아미타불의 명호를 들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17원의 뒤에 바로 제18원이 있는 것이다.
사실상 제17원과 제18원의 두 원은 하나이다. 18원의 내지 십념은 17원에서 모든 부처님이 선양하고 찬탄하시는 이 한 마디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17원이 있었기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아미타불의 이 명호로써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는 공덕력(功德力)을 설하신 것이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정토법문을 설하시면서 아미타불의 명호에 담긴 무량무변하고도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부처님의 명호를 듣게 되었고, 비로소 오로지 이 한 마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잡수잡행(雜修雜行)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명호 속에 모든 공덕이 들어 있다 [名號具萬德]
제17원에서 모든 부처님이 찬탄하신 아미타불 명호의 공덕은 모든 공덕을 초월하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명호를 만덕홍명(萬德洪名)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이 명호의 공덕은 오계의 공덕을 초월하고 십선의 공덕도 초월하며, 육도만행(육바라밀)의 공덕을 초월하고 모든 중생이 보리심을 내어 온갖 공덕을 닦는 공덕 또한 초월한다.
그래서 아미타불의 명호의 공덕을 듣고 우리는 감동을 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 이 한 마디 나무아미타불 속에 들어있는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을 믿을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한 마디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아미타불의 명호에는 모든 공덕이 들어 있으며, 이러한 공덕은 또한 왕생의 바른 원인[正因]이기도 하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자량(資糧)은 이 명호 속에 전부 들어 있어서 조금도 부족하지가 않다.
왕생이든 성불이든 이 한 마디 아미타불의 명호 속에 전부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명호의 공덕을 듣고 나서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이란 이 명호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왕생과 성불, 중생과 부처는 하나다 [往生正覺, 機法一體]
동시에 아미타불께서는 만약 중생들이 칭념(稱念)하고 왕생할 수 있도록 이 명호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성불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가히 우리들과 한데 묶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왕생과 성불, 중생과 부처는 하나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의 왕생과 아미타불의 정각(성불)은 한데 묶여 있다. 우리들의 왕생이 없다면 아미타불의 성불이 있을 수 없고, 아미타불의 성불이 없다면 우리의 왕생 역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아미타불은 우리가 자력수행을 통하여 능히 왕생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야 성불을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하여 왕생의 공덕을 완성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18원이다.
친연(親緣)
따라서 제18원의 염불중생은 아미타불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 관계를 정토종의 조사이신 선도대사님은「친연(親緣)」으로 해석하셨다.
마흔 여덟 크신 서원 [弘誓多門四十八]
오직 염불이 가장 친함을 나타내니 [偏標念佛最爲親],
사람이 염불하면 부처님 또한 이 사람 염하고 [人能念佛佛還念]
전심으로 부처님 생각하면 부처님은 이 사람을 알지니라[專心想佛]佛知人].
「마흔 여덟 크신 서원」은 아미타불께서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하는 크고도 넓은 서원이 마흔 여덟 가지가 있음을 나타내고, 그 중에「오직 염불이 가장 친함을 나타냄」에서「편(偏)」은「오직[專]」이란 뜻인데, 곧 유일(唯一)하여 둘도 없고, 전일(專一)하여 잡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제18원인 염불왕생원이야말로 아미타불과의 관계가 친하여 소원하지 않고 가까우며 멀지가 않다. 기타 두 원인 19원과 20원은 아미타불과의 관계가 친하지도 가깝지도 않다.
따라서 오직 제18원만이 친한 관계이므로「오직 나타냄[偏標]」이라고 하신 것이다.
「친」자의 해석[親字解]
우리 염불하는 중생들과 아미타불의 관계는 얼마나 친할까?
우리는 먼저「친(親)」자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의 한문은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부 자체의 내용이 있다. 비단 외관적으로 예술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내면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이「친」자는「설 립(立)」자와「나무 목(木)」자와 「볼 견(見)」자로 구성되었는데, 높은 나무 위에 서서 사방을 향해 멀리 바라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교통수단이 편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차량이나 전화 핸드폰 등이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밖에서 일을 하거나, 혹은 자신의 어린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저녁이 되었거나 비가 올 때, 애지중지하던 자식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지 얼른 나무위에 올라가서 저 멀리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친(親)」이다.
세간의「친」[世間親]
우리와 아미타불의「친」은 한 몸이면서 불가분의「친」이다. 우리 세간의 친에는 일등 친(일촌), 이등 친(이촌), 삼등 친(삼촌) 등이 있다. 부모와 자식은 일등의 친(일촌관계)이며, 이등의 친과 삼등의 친은 일등의 친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예를 들면, 큰 아버지와 삼촌, 고모와 이모 등은 일등의 친이 있기 때문에 이등의 친과 삼등의 친이 있는 것이지, 만약 부모님의 형제자매가 없다면 어떻게 그 분들을 큰 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친 가운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가장 친하다. 이 친은 선천적인 것으로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다. 자식은 부모가 낳았기 때문에 부모가 없으면 자식 역시 없다.
자식은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만났을 때에, 자신의 신식(神識: 영혼)이 입태(入胎)를 해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영혼 외에도 부모의 정혈(精血)이 있어야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식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부모의 피지 큰아버지, 또는 삼촌의 피가 아니며, 외부 사람들의 피는 더욱이 아니다. 이 친은 선천적이면서 자연스런 친이다.
그의 몸은 부모로부터 유전자와 정혈(精血)을 물려받았으므로 외부 사람들이 제아무리 친하다 할지라도 친생(親生)의 관계는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관계는 선천적이고 천륜(天倫)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미타불과의 친[彌陀親]
이처럼 아미타불과 우리들과의 친한 관계도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시방의 부처님들은 우리들을 위해,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우시지 않았지만, 오직 아미타불만이 우리들을 위해"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라는 발원을 하셨기 때문이다.
아미타불께서,"너희들이 왕생할 수 없다면 나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너희들의 왕생이 곧 나의 성불이고 나의 성불이 곧 너희들의 왕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계를 선도대사님께서는"오직 염불이 가장 친함을 나타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미타불과 제불[彌陀與諸佛]
시방세계의 제불은 모두 부처님이시며, 모두 대자대비하시다. 이른바"염불을 한번 하면 항하사 모래와 같은 죄업이 소멸되고, 부처님께 한번 예배하면 한량없는 복이 자라난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 업장을 소멸하고 복과 지혜가 자라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방제불 중에 어느 부처님이 극락세계를 지어 우리들에게 주셨던가? 없다!
우리가 시방제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삼계육도를 벗어나서 신속하게 성불을 할 수 있겠는가? 없다!
시방제불 중에,"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우신 부처님이 계시는가? 없다!
시방제불 중에 오직 아미타불만이 우리들을 위하여 48대원을 세우셨으며, 제18원에서"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왕생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미타불께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 성불을 한 공덕에 있다. 부처님의 공덕이 우리들의 공덕이 됨이 마치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우리의 몸이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공덕이 곧 우리의 공덕이고, 아미타불의 재산이 곧 우리들의 재산인 셈이다.
아미타불에게 무엇이 있으면 우리에게도 무엇이 있게 되는데, 마치 아버지에게 무엇이 있으면 아들에게도 무엇이 있듯이 아버지의 재산이 곧 아들의 재산인 것과도 같다.
아미타불께서 시방제불을 초월하는 원력이 있기 때문에 널리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으시다. 그래서 시방제불이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찬탄을 하시고, 아울러 시방세계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며,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 것을 권유하신 것이다.
염불이 원인이고, 왕생은 결과다[念佛是因, 往生是果]
따라서 우리가 염불만 하면 반드시 왕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염불이 원인이고 왕생은 결과이듯이, 이와 같은 원인은 반드시 이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우 리가 염불을 했음에도 왕생을 하지 못한다면 원인은 있지만 결과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토법문을 닦는다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 것이며, 절대로 잡수잡행(雜修雜行)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전수(專修)염불을 하면 왕생을 하는데 자신의 몫이 있으며,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이야말로 비로소 순수하고도 바른 정토법문의 교리적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정업(正定業)
선도대사님께서는 염불이 곧「정정업」이라고 말씀하셨다.
「한결같은 마음(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행·주·좌·와에 시간의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고 염념마다 (명호를) 버리지 않는 것을 정정의 업[正定業]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원력을 따르는(수순하는) 까닭이다.」
염불이 곧「정정업」이다.「정정(正定)」은「부정(不定)」,「사정(邪定)」과 서로 대조적인 관계로서, 정정이란 곧 백 프로 이러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이러한 결과가 있다는 것이며, 이것을「정정(正定)」이라고 부른다.
부정과 사정[不定與邪定]
무엇이「부정(不定)」인가?
원인이 잡다하므로 그 사람은 이 결과(왕생)를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부정」이라고 부른다.
「사정(邪定)」이란 이 사람에게 전혀 원인이 없으므로 이러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표현으로, 이것을「사정」이라 부른다. 이 사(邪)는 사악하다는 사가 아니라 피차지간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음을 나타낸다.
염불이 곧 정정업이다[念佛卽是正定業]
정토법문의 입장에서는 제18원인 염불왕생원이 곧「정정업」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선도대사께서「정정업」이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정토수행을 하지만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지 않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원력을 의지하지 않으며, 잡수잡행을 한다면 이것은「정정업」이라 할 수 없다.
만약 다른 법문을 닦는 사람들이 정토법문을 닦지 않고 극락세계왕생을 발원하지 않았다면, 정토왕생의 입장에서는 이것을「사정업(邪定業)」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이 법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도대사님께서는 염불이 곧「정정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19원
이제 계속해서 제19원을 해석하겠다.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보리심을 일으켜 온갖 공덕을 닦고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발원을 하였으나, 그들의 임종시에 내가 대중들과 함께 그 사람을 둘러싸고 앞에 나툴 수 없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
온갖 공덕을 닦음[修諸功德]
「 온갖 공덕[諸功德]」할 때,「온갖[諸]」은 매우 많다는 뜻이다. 이「온갖 공덕」은 육도만행(六度萬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계·십선·사성제·십이연기·육바라밀 등의 모든 법문의 수행과 모든 선업(善業)의 실천을 포함하여 전부「온갖 공덕을 닦음[修諸功德]」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온갖 공덕을「만행(萬行)」혹은「제행(諸行)」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의 입장에서는 온갖 공덕을 닦아 회향하여 왕생하는 것을 선도대사께서는「잡행(雜行)」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너무 많고 너무 잡다하여 순일하지도 한결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온갖 공덕을 닦는 것은 불교도들의 기본적인 실천 덕목이지만 아미타불의 정토법문에 있어서는, 온갖 공덕으로써 회향하여 왕생하는 조건으로 삼았기 때문에「잡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의지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구제를 의지한다면 온갖 공덕을 닦더라도 잡행이라고 할 수 없다.
자신이 닦은 온갖 공덕에 의지하여 왕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명호의 공덕에 의지하여 왕생을 하기 때문이다.
아미타불께서 이 제19원을 세우신 것은 주로 온갖 공덕을 닦는 근기를 가진 중생을 접인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모든 근기들이 전부 곧바로 제18원으로 들어 올 수 없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이러한 근기를 가진 중생에게,
"너희가 닦은 모든 공덕을 극락세계에 왕생하는데 회향을 하기만 하면 내가 너의 임명종시에 대중을 거느리고 너의 앞에 몸을 나투어 너를 영접해주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19원이다.
이 제19원은 첫째,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둘째,「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가 아니다.
두 원의 차이[兩願差別]
제19원과 제18원은 다르다. 제18원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오로지 아미타불 한 부처님만 의지한다.
동시에 아미타불께서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발원을 하셨기 때문에 염불하는 사람과 한데 묶여 있으며, 일대일의 관계다.
염불인의 왕생이 곧 아미타불의 성불이고 아미타불의 성불이 곧 염불인의 왕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왕생과 성불과 일대일로 한데 묶여 있다.
제19원은 자신을 의지하여 스스로 보리심을 일으키고 자신의 근기로 온갖 공덕을 닦는다. 이러한 근기는, 성인의 근기든 범부의 근기든 영리한 근기든 하열한 근기든 각자 닦은 크고 작고 깊고 얕은 공덕으로 회향하여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아미타불께서 오셔서 이 사람을 영접해 주신다는 것이므로, 제19원과 아미타불은 거의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사람이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하기를 발원하였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그 사람을 영접하러 오신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미타불의 성불은 주로 제18원의 근기들을 위해 성취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불을 하심과 동시에 간접적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지 않고 오로지 아미타불을 의지하지 않는 중생을 접인하여, 그런 부류의 중생도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법문을 닦는 중생은 왕생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9원과 18원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하나는 아미타불과 불가분의 관계로서 아미타불은 이러한 중생을 위하여 성불을 하신 것이고, 하나는 아미타불과 분리가 되어있어서 본래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왕생발원을 하였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임종할 때에 오셔서 이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없이 큰 이익[無上大利]
동시에 제18원은 제17원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으로, 시방제불이 이 명호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함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19원은 그렇지 않다. 각자 자신의 근기에 따라 닦은 공덕이기 때문에, 그들이 닦은 공덕과 아미타불의 이 명호의 공덕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아미타불의 공덕은 부처님의 공덕이고 무루(無漏)의 공덕이다. 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의 이 명호를「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의 명호」라고 하셨다.
그리고《무량수경》에서 제18원의 염불공덕을 드러내면서 말씀하시길: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뛸 듯이 기뻐하거나 내지는 한 번만이라도 염(念)한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됨을 마땅히 알아라."고 하셨다.
따라서 염불은 위없는 큰 이익이고 위없는 공덕이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범부들이 스스로 일으킨 보리심은 대부분이 거짓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보리심을 가지고 아미타불의 진실하고도 불가사의한 공덕과 비교를 한다면 어떻게 비교가 되겠는가?
우리가 닦을 수 있는 공덕은 많아봐야 오계, 십선의 공덕이다. 이로부터 여기에서 말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고 온갖 공덕을 닦으며, 내지는 여러 법문을 함께 닦고, 여러 법문을 함께 선양하더라도 전부 이 명호와는 비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보리심을 일으키고 온갖 공덕을 닦는 공덕을 훨씬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18원의 성취문[十八願成就文]
그래서 제18원의 성취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중생들은 그 명호를 듣고 신심을 내어 기뻐하거나, 혹은 한 생각만이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하여 극락국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한다면 즉시 왕생하여 불퇴전에 머물게 될 것이다. 오직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된다."
제18원의 성취문은 바로 제18원에 대한 해석이다. 아미타불이 이미 성불을 하셨기 때문에 제18원의 기능이 이미 드러나서 자체의 역량(力量)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18원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이와 같은 과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곧 제18원의 성취문이다. 제18원의 성취문 앞에는 제17원의 성취문이 있다.
"시방세계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들도 전부 무량수불의 불가사의한 위신력과 공덕을 찬탄하느니라."고 하셨다.
이어서 바로 제18원의 성취문인데, 중생이 시방제불께서 찬탄하시는 불가사의한 위신력과 공덕을 구족한 이 한 구절 명호를 들은 다음에, 내지 일념만이라도 부처님을 의지한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즉시 왕생하여 불퇴전에 머물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퇴전(不退轉)
이 사람은 바로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퇴전(물러남)을 하지 않는다. 불퇴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의 불퇴전이란 성불의 경지에서 퇴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즉시 불퇴전에 이르며, 또한 바로 일생보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시길,
"극락세계에 태어난 중생들은 전부 아비발치(불퇴전)이며, 그 가운데는 수많은 일생보처가 있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일생보처란 바로 등각보살을 의미하는데, 성불을 기다리는 그런 지위를 말한다.
태자의 비유[太子喩]
이것은 마치 태자가 천자의 자리에 올라서 황제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동궁에서 거처하면서 태자라고 불린다.
황제가 만약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그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태자는 국왕의 자격은 있지만 때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전부 성불의 자격이 주어진다. 그러나 극락세계에는 아직 아미타불이 부처님으로 계신다.
아미타불은 무량수이므로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비록 아미타불과 똑같은 무량광 무량수이지만 그래도 한 단계 내려와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같은 일생보처의 보살로 불리게 된다.
흰 연꽃의 비유[芬陀利花喩]
그래서《관무량수경》에서는 염불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며 찬탄하셨다.
『만약 염불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은 사람 중의 흰 연꽃(분다라화)과도 같으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 사람의 훌륭한 벗이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염불하는 사람은 바로 사람 가운데 흰 연꽃과도 같다. 이 흰 연꽃은 부처님의 대명사이며, 부처님이 바로 흰 연꽃이다.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을 이미 흰 연꽃과도 같은 존재라고 찬탄하신 것은 염불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왕생을 하게 되고, 또한 극락세계는 성불의 경지이므로 반드시 성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우리의 훌륭한 벗이 되는 것이다.
훌륭한 벗의 해석[勝友解]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도 탐·진·치 삼독을 구족한 범부라 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고 성질을 부리기도 한다. 매사에 불평불만이 있어 한 번 화를 내면 마치 태풍이 불고 소나기가 내리는 것과도 같다.
단지 우리가 염불을 한다는 이유로 등각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데 이는 우리가 염불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오로지 염불을 의지하지 않고 잡수잡행을 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18원과 19원은 신분과 기능이 완전히 다른데, 성취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중생들은 그 명호를 듣고 신심을 내어 기뻐하거나, 혹은 한 생각만이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하여 극락국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한다면 즉시 왕생하여 불퇴전에 머물게 될 것이다."
즉시에 왕생을 할 수 있는 신분을 갖추고 바로 불퇴전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락의 글은 제18원을 해석하는 것이지, 제19원에 대한 해석은 아니다.
제19원에서는 보리심을 일으키고 온갖 공덕을 닦는다고 했다. 그 사람이 비록 보리심을 일으키고 여러 가지 법문을 닦은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한다지만 사실상 그 사람의 공덕은 여전히 유루(有漏)여서 번뇌가 섞여있다.
오로지 아미타불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결코「즉시 왕생하여 불퇴전에 머무른다.」는 이러한 신분을 얻지 못한다.
제3장 문답
1. 믿음에 관하여
염불에는 여러 가지 이익이 있다고 했는데 무슨 증거가 있는가?
저희가 편찬한《염불감응록》속에는 여러 가지 수승한 사례들이 있는데, 여러분이 한 편으로는 염불의 이치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염불에 관한 감응사례들을 보면서 서로 대조하면서 확인을 해본다면 믿음을 일으킬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불성이 있고 불성 속에서 지혜의 성품[慧性]이 있기 때문에 책을 많이 보다보면 이치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여러분들 스스로 사고하고 분별하여 판단을 할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교리도 모르고 이러한 사실의 증거도 모른다면 당연히 의문이 생길 것이다. "진실로 그런 일이 있을까?" "아미타불을 친견한 사람은 극소수 일뿐인데…."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부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아직 인연이 닿지 않아서 일뿐이지, 언젠가는 친견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우리가 임종할 때가 되면 반드시 아미타불을 친견할 수가 있다.
지금 우리가 아직 부처님을 뵙지 못했지만 우선 《염불감응록》을 통하여 아미타불의 존재와 아미타불의 구제, 그리고 염불하는 사람들이 재난을 소멸한 사례들을 많이 보고나면 자연히 믿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믿고 나서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다.
그런데 믿고 나서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다면 지금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상 사람은 모두 번뇌가 있으므로 때로는 탐·진·치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가끔씩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을 품을 수도 있다.
만약에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무방하다. 스스로 우리들에게 두 번째 길이 없고, 오직 염불을 해야만 구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비록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심이 들더라도 크게 장애되지는 않는다.
여러분이 설사 의심이 있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여전히 아미타불의 존재를 믿고 아미타불의 구제를 안다면 여전히 계속해서 염불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아미타불의 광명의 섭취 가운데 있으므로 임종시에 아미타불께서 몸을 나투셔서 영접을 하게 된다.
우리의 법문은 여러분이 알든 모르든, 믿든 믿지 않던 간에 염불만 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중생들이 칭명을 하면 반드시 왕생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원점으로 돌아와서 만약 여러분이 전혀 이해를 못하고 전혀 믿을 수 없다면 전수염불을 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를 하고 믿음을 일으켜야 전수염불을 할 수 있으며, 이렇게 되어야만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지 않고 장애가 되지 않는다.
2.염불의 숫자
저는 금강념(金剛念)을 강조하는데 가늘게 흐르는 물이 끊임없이 오래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음이 무기력하면 입으로써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마음속에 힘이 없다면 입을 이용해야 한다. 염불하는 사람이 입을 움직이면 마음도 자연히 따라서 부르게 되는데, 만약 입을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마음속으로만 부른다면 아주 쉽게 염불을 잃게 되고 쉽게 망상과 잡념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는 염불을 하는데 숫자를 정하지 않고 애써서 억지로 하지도 않는다. 염불은 제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며 염불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 사람이 염불을 하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있어서, 익숙한 것이 생소하게 바뀌고 생소한 것이 익숙하게 되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온종일 망상과 잡념 속에서 살면서 하루 동안 염불한 숫자를 통계해 보면 몇 백 번도 채 안될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조석으로 시간을 정해서 조용히 앉아 염불을 하거나, 아니면 하루 동안 규칙적으로 천 번, 오천 번, 만 번의 숫자를 정해서 염불을 한다면, 아무리 염불을 못해도 최소한 정해놓은 천 번, 오천 번, 만 번의 숫자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초학자들은 매일 염불하는 숫자를 정해두어야 한다. 조석으로 조용히 앉아서 염불을 하는 것 외에, 만약 낮에도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숫자를 정해서 염불을 하셔야 한다.
이렇게 오래오래 하다보면 습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설사 여러분이 염불의 숫자를 정하지 않고, 또 염주를 돌리며 염불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부처님을 떠올리며 염불을 하게 되는데, 입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자주 염불을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다.
3. 신앙은 곧 생명이다
인생에서 신앙은 매우 중요하며 신앙은 곧 수행인의 생명이다.
나의 신앙은 오직 불교만이 육도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고, 오직 불교만이 우주와 인생의 진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8만 4천 법문 중에서 나는 오직 아미타불만이 나를 위하여 48대원을 세웠고, 나를 위해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우셨음을 믿는다.
시방세계에 부처님이 비록 많고 많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오직 아미타불 한 분만 계신다.
8만 4천 법문 중에서 나의 마음속에는 오직 나무아미타불께서 중생들을 구제해주시는 이 법문만이 나로 하여금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고, 비단 육도윤회를 벗어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생하여 성불을 할 수 있으며, 다른 부처님과 다른 법문에는 없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몸과 마음의 생명, 즉 생사윤회를 하는 이 목숨을 전부 아미타불에게 바쳐 의지해야 한다. 오직 아미타불 한 부처님만을 내가 이 몸이 다 할 때까지 목숨 바쳐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 빨리 성불을 할 수 있는 의지대상으로 삼을 뿐, 두 번째 부처님도 세 번째 부처님도 없고 다른 법문 역시 없다.
이럴 수만 있다면 이러한 신앙은 바로 당신의 생명이다. 신앙이 있다면 당신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이고, 신앙이 없다면 당신에겐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해탈의 생명이 없으며 성불의 생명 또한 없다. 따라서 신앙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이고 가장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부모님도 중요하고 자식도 중요하며, 남편과 아내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맨 나중에는 전부 우리를 버리고 떠나게 된다. 결국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뿐이고, 오직 우리 자신의 신앙뿐이다.
4. 아미타불은 본존이다[彌陀本尊]
우리의 법당에 모셔진 본존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한 분 뿐이다. 그 외에 다른 불보살님도 없고 서방삼성(西方三聖)도 없으며, 오직 아미타불 한 분밖에 없다. 왜 그런가?
가장 근본이고 가장 중요하며, 가장 높고 가장 귀하며, 유일무이하여 대신할 수 없는 분을「본존(本尊)」이라 부른다. 본존은 신앙자의 근본이며 유일무이하게 받드는 분이시며, 신앙자가 생명의 전부를 의탁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이 본존이 계셔야 자신의 생명이 있고, 이 본존이 안 계시면 자신의 생명 역시 없으므로, 자신의 해탈의 생명과 성불의 생명은 전적으로 본존에게 의지하게 된다. 따라서 본존은 왕과도 같아서, 제일 높고 절대적이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유일무이하여 둘도 셋도 넷도 없다.
절대로 이 불보살님은 나의 본존이고, 저 불보살님도 나의 본존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일은 없다.
아미타불에 대해 비교해서도 안 되고 동등한 입장에서 논해서도 안 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을 수도 없다. 우리의 본존은 시종일관 아미타불 한 분밖에 없으시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려면 오직 아미타불께만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께 예배를 하려면 오직 아미타불께만 예배하며,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려면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만 불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專)이다. 여기서 한 사람의 유일무이한 신앙이 드러난다. 진리는 하나다. 따라서 우리의 법당은 잡다하지 않게 오직 나무아미타불 한 분만 모셔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법문을 닦으신다면 수행하는 법문에 따라 각자 다른 본존을 모실 수 있다.
그러나 정토법문을 닦는 분이라면 법당에 모시는 부처님은 오직 나무아미타불 한 분이면 족하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은 아미타불의 협시(脇侍)이자 시자이며 아미타불을 의지하여 왕생한 분들로서, 우리와는 훌륭한 벗의 관계이므로 따로 본존으로 모시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전부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 등 여러 대보살님들도 항상 따라다니므로 오로지 아미타불을 믿고 명호를 부른다면 자연스럽게 수승한 효과를 보게 된다.
우리가 만약 이 부처님도 모시고 저 보살님도 모신다면 믿음이 순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행도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수승한 효과를 볼 수가 없다.
5. 법당의 배치
우리의 법당에 걸려 있는 것은 전부 극락세계와 아미타불, 우리의 이 법문과 전부 관련이 있다. 관련이 없는 것들은 우리는 걸지도 배치해 두지도 않는다. 우리는 아미타불의 내영도, 극락세계장엄도, 혹은 이 법문의 경전법어, 조사 법어를 걸어둘 수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신앙을 나타내는데, 그 사람에게는 신앙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속(專屬)적인 신앙이 있어 잡신잡행(雜信雜行)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6. 수행자의 생활
우리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할 줄 알아야 한다. 집안에 물건들의 배치는 소박하면서 간결하여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하거나 뒤죽박죽 난잡해서도 안 된다. 필요한 것만 꺼내놓고 필요 없는 것들은 일절 배치해두지 않으며, 배치를 한다면 반드시 가지런하면서 청결하게 해야 한다.
이 세상은 우리들이 잠시 머무는 여관과도 같고 우리들은 잠시 쉬었다가는 나그네와 같다. 따라서 불필요한 잡동사니들은 신외지물(身外之物)이므로 너무 세속적인 물건들은 배치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배치를 하더라도 전부 불법과 정토와 관련이 있는 것들로, 우리의 눈에 띄는 것들은 전부 극락세계와 관련 있는 풍경들이여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나타내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가 아직 부족하고 한계가 있으며 심지어 천박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앙이 깊을수록 그 법문의 정수(精髓)를 얻을 수 있으며, 우리의 이 법문은 신앙이 깊고 전일(專一)할수록 천명이 닦으면 천명이 왕생하고, 만 명이 닦으면 만 명이 왕생할 수 있다.
원컨대 이 공덕으로 [願以此功德]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게 베푸나니 [平等施一切],
다 함께 보리심을 내어 [同發菩提心]
극락세계에 왕생할지어다 [往生安樂國].
출처 / 純淨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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