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대의念佛大意
출처 / 純淨時代
말법시대 오탁악세의 중생들이 왕생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다른 법문을 닦아서는 안 되고, 오직 선도화상의 해석에 의거하여 일향전수一向專修를 하는 염불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한결같이 믿고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
왜냐하면 다른 법문에 마음을 두고 있거나 혹은 염불의 공덕을 귀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토왕생을 위한 진실한 발원과 전일하고도 깊이 믿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드문 것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이러한 이치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설사 천태종과 법상法相종에 관련된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모든 경론을 배우더라도 뜻이 전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불도를 닦으려면 마땅히 시대와 근기를 잘 살펴야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다섯 번째 오백년이 되면, 지혜를 밝히고 번뇌를 끊기가 어려울뿐더러 마음의 물을 맑혀서 선정을 얻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수행자들이 염불문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으니, 도작선사와 선도화상 과 같은 정토종의 조사들이 바로 그 시기의 사람이다.
하물며 요즘은 다섯 번째 오백년, 즉 투쟁이 견고한 시대여서 여타의 법문은 더욱 성취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염불법문은 말법의 말기에도 이익을 얻을 수 있거늘, 하물며 지금은 말법 만년의 초입인데 한 번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어찌 왕생할 수 없겠는가! 비록 우리들이 그 그릇이 못 된다 하더라도 어찌 말법시대 말기의 중생들과 같겠는가!
또한, 설사 석가세존의 재세시라도 즉신성불卽身成佛을 한 자는 용녀龍女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설사 즉신성불을 할 수 없더라도 이 성도문을 닦기에 적합한 보살·성문과 이 밖의 권자(權者:불보살의 화신)·성인聖人과 이 안의 비구·비구니 등과 지금의 경론의 배우는 학자·『법화경』의 수행자 등, 이들은 모두 최상의 근기와 최상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처한 시대와 근기로는 설사 성도문을 배우더라도 그 사람들에게는 더욱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말법시대의 중생들을 아미타불께서 미리 아시고 오겁 동안의 사유를 통하여 마흔여덟 가지 서원을 세우신 것이다. 그 중의 제18원에서 “시방세계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나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셨는데, 이미 성불을 하신지 10겁의 세월이 흘렀다.
이는 석가세존께서 설하신 경, 즉 『무량수경』 등의 정토삼부경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우리와 같은 중생들은 마땅히 오로지 염불수행을 하며 왕생을 기약해야 한다. 만약 악업이 많은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서원만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석가세존이 설하신 정토삼부경에 진실한 말씀이 어찌 한 마디도 없겠는가? 더군다나 시방제불의 증성(證誠:석가불의 말씀이 진실함을 증명함) 역시 오직 이 경에서만 보일 뿐, 다른 법문 중에 이와 같은 증성을 본 적은 없다.
그러므로 성도문의 시대가 이미 지났고 우리의 몸 역시 감당할 수가 없으니, 선정과 지혜를 닦기 보다는 차라리 현재에 이익이 있으면서도 제불이 증성하신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한, 수행자 중에 어떤 사람은 극락은 천박하고 아미타불은 열등하다고 여기면서 밀엄화장密嚴華藏의 세계를 기대하는데, 이는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무명을 끊은 보살만 갈 수 있을 뿐, 그 외에는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일향전수一向專修를 하는 염불문에 들어와서 매일 별도로 삼만 번, 혹 오만 번·육만 번, 내지 십만 번씩 전수염불을 하는 까닭에 여태껏 수지독송의 공덕을 쌓아오던 여러 경전들을 더 이상 독송하지 못한다면 죄가 될까 두려워하는 이러한 의심을 가진 무리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말법시대의 중생들이 성취하기 어려운 행을 닦을 바에는 어찌 먼저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고 염불왕생을 성취하여 정토에서 아미타불·관음·세지를 친견하고 모든 법문을 배우면서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만 하겠는가?
또한, 말법시대의 중생들이 전수염불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수많은 해석이 있다.
그 중에 『관경소』 제3 「산선의」에서 선도화상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다.
나머지 모든 행들은 비록 선善이라 부르지만, 만약 염불과 비교를 한다면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여러 경전 중의 도처에서 염불의 공덕을 널리 찬탄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무량수경』 의 48대원 가운데서는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왕생을 하는 것을 밝히셨고, 또 『아미타경』 가운데서는 하루에서 이레 동안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왕생하는 것을 밝히셨으며, 또 시방세계의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들께서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셨고, 또 이 경(관무량수경)의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글 가운데서는 오직 명호를 불러 왕생함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예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널리 염불삼매를 드러냄을 마친다.
또한, 선도화상의 『왕생예찬』 중의 ‘전수와 잡수에 대한 글’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잡수雜修를 하여 왕생을 하는 자는 백 명 중에 한·두 명이 드물고, 천 명 중에 세 명·다섯 명이 드물다. 전수專修를 하는 자는 열이면 열이 왕생하고, 백이면 백이 왕생한다.
이러한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염불문으로 들어온 이상, 일향전심으로 다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높은 산에 사는 사람조차 왕래할 수 없는 가파른 산을 힘이 약한 사람이 돌 모서리나 나무뿌리를 잡고 올라가려는 것은 마치 잡행을 닦아서 왕생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에 저 산봉우리로부터 드리워진 밧줄을 잡고 오른다면 마치 아미타불의 원력을 깊이 믿고 한결같이 염불하여 왕생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일향전수를 하는 자에게는 세 가지 마음三心이 저절로 갖춰지게 된다.
세 가지 마음이란 첫째는 ‘지성심至誠心’이요, 둘째 ‘심심深心’이요, 셋째는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지성심’이란, 다른 부처님께 예배하지 않고 오직 아미타불께만 예배하며, 다른 수행을 하지 않고 오직 아미타불만 부르니 전일하고 또 전일하다는 것이다.
‘심심’이란, 아미타불의 본원을 깊이 믿는 것이다. 내 몸은 시작 없는 옛적부터 죄악생사범부로서 생사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으나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본원에 기대어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명호를 부른다면 염념念念마다 80억겁의 생사중죄를 소멸하게 되며 마지막 임종 시에는 틀림없이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게 된다.
‘회향발원심’이란, 자타의 행을 모두 진실한 마음으로 회향하고 발원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이 갖춰지면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이라도 빠지면 왕생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한다면 다른 행을 섞는 것이 비록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을 따져본다면 여전히 염불만 해서는 왕생이 결정되지 않을 거라고 여겨 조금이나마 의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법문을 덧붙이는 것이다.
또한, 이 세 가지 마음 중의 ‘지성심’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이해를 하고 있는데, 특히 본인이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확고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미타불의 본원의 본뜻에 위배되는 것으로 신심이 부족한 것이다. 아무리 지극정성인 사람이라도 역시 죄업을 짓는 범부의 몸으로, 자신의 역량에 의지하여 왕생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오직 아미타불 본원의 불가사의함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다.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본원은 본래 깊은 정성도 없고 착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세우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진실로 전수염불을 할 수 있는 자는 이 세간에 드문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담란대사께서 비록 지혜가 고원高遠하나 역시 사론四論의 강설을 버리고 오로지 왕생의 업을 닦으신 것인데, 한결같이 오로지 끊임없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현재 이미 왕생을 하셨다.
도작선사 역시 강설을 버리고 염불수행을 하셨으며, 선도화상도 잡수雜修가 싫어 전수염불을 부지런히 하셨던 것이다. 또 도작선사의 권유에 따라 병주 지방 세 현(幷州三縣)에 사는 사람들 중 칠세 이상이 한결같이 염불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일본)의 말법중생들은 어찌 감히 잡수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오직 마땅히 속히 아미타불의 본원과 석가세존의 말씀, 그리고 도작·선도의 주석을 배워야 할 것이다. 잡수를 해서 왕생이 결정되지 않을 바에는 어찌 전수를 하여 왕생이 결정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저 도작·선도 등은 비록 염불문 중의 대덕일지라도 따를 자가 없으시다.
법상종의 자은慈恩대사가 『서방요결』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다.
말법 만년에 다른 경전들은 다 사라지고 아미타불의 한 가르침만이 더욱더 중생을 이익케 한다.
또 말씀하시기를,
“삼공구단(三空九斷)의 문장과 십지오수(十地五修)의 가르침을 배우기에는 살아있는 세월이 촉박하고 죽을 날이 멀지 않다. 그러니 다문多聞의 광업廣業을 그만두고 염불의 한 가지 수행에 전념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셨다.
게다가 『대성죽림사기大聖竹林寺記』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대산 죽림사의 대강당에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동서방향으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중생들을 위해 미묘한 법문을 설하셨다. 이때 법조선사가 무릎을 꿇고 문수보살님께 여쭈었다.
“말법악세末法惡世의 범부들이 어떤 법을 닦아야만 영원히 삼계를 벗어나 정토에 왕생할 수 있습니까?” 이에 문수보살이 답하셨다.
“정토에 왕생하고자 한다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수행만한 것이 없고, 단박에 보리(깨달음)를 증득하는 길은 오직 칭념을 하는 한 (염불)문에 있다. 그런 까닭에 석가세존 일생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아미타불에 대한 찬탄이 많은 것이니, 하물며 미래 악세의 범부들이겠는가!”
이처럼 중요한 문구와 지혜로운 자들의 가르침을 듣고도 여전히 신심이 없고, 태어나기 어려운 인간 세상에 태어나고도 쉽게 갈 수 있는 정토에 가지 않는다면 후회한들 어찌하리오!
그러나 요즘 전수염불을 하는 행자들 가운데 자주 비방과 비난·조롱을 받는 이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것 역시 옛날의 권자權者들이 미리 알고 있었던 일이다.
선도화상의 『법사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존의 설법이 끝날 무렵,
은근히 미타의 명호를 부촉하시니
오탁이 증가할 때 의심과 비방이 많아지고
승속이 서로 싫어하여 들으려 하지 않는다네.
수행자를 보면 화를 내고
방편으로 파괴하여 서로 원한이 생겨나네.
이 같은 생맹生盲과 천제闡提의 무리들이
돈교를 훼손하고 길이 침륜하니
대지의 티끌 수 겁이 지나도록
삼악도의 몸 벗어날 수 없구나.
대중은 한 마음으로
정법을 파괴한 모든 죄업 참회함세.
그리고 『평등각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와 같은 정토법문을 듣고 희비가 교차하여 온몸의 털이 선다면 이 사람은 과거에 이미 불도를 닦았던 사람임을 알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도 아무런 믿음과 기쁨이 없다면 이 사람은 삼악도로부터 왔음을 알라.
또한, 십선十善을 굳게 지키지 못하면서 도리천·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상응하기 극히 어렵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오역죄를 지은 사람도 염불에 의지해 왕생하거늘, 하물며 십악을 지은 사람은 더욱 장애가 없다.
또한, 비록 미륵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기대하지만 56억 7천만년이나 되는 세월을 기다리기란 더욱 어렵다. 타방의 모든 정토에는 이러한 본원이 없고, 오직 극락정토만이 아미타불의 별도의 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아미타불의 원력이 깊을 진데 어찌 다른 것을 구하리오! 또한, 이 생에 이미 불법과의 인연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생三生·사생四生 후의 해탈에 마음을 두는 무리들이 있는데, 이러한 발원은 굉장히 확실치가 않다.
대통여래大通如來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비록 참괴(慚愧:부끄러움)의 옷 속에 일승의 값을 매길 수 없는 옥을 품고 있음을 믿고 기뻐하고 있으며, 다음 생에 바로 잊지 않았으나 삼천 티끌 수 겁 동안 육도윤회를 하지 않았던가!
설사 삼생·사생 내에 반드시 해탈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여기서 기다리는 동안 받게 될 윤회의 고통은 가장 참기 어렵다. 우리는 이번 생에 처음으로 인간계에 태어난 것이 아니며, 이미 세세생생 동안 여러 부처님의 교화와 보살들의 홍경(弘經:불경을 세상에 널리 퍼뜨림)을 만났을 터인데 오직 믿지 않음으로 인해 그 교화로부터 빠진 것이다.
삼세의 제불과 시방의 보살들을 생각해보면 모두 옛적의 친구들이었다. 석가세존도 오백 티끌 수 겁五百塵點劫전의 옛날에, 아미타불도 십겁 동안 성불하기 전에 서로 부모형제사이였던 것이다.
부처님은 앞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선지식의 권유를 믿으며, 일찍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성불한지 오래지만 우리들은 신심이 얕은 까닭에 지금까지도 생사에 머물고 있다. 과거에 윤회를 할 때를 돌이켜 보면 미래에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비록 이승(성문·연각)의 마음을 내어보지만 보살의 마음을 내기란 어렵다.
그렇게 때문에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보여주시고, 타력왕생의 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오탁악세의 중생이 비록 자력에 힘쓰며 백천 겁이 지나도록 난행고행難行苦行을 하더라도 부지런히 힘쓴 바는 오히려 타력왕생의 법만 못하다.
또한, 저 성도문을 닦는 자들은 반드시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그 행을 닦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만약 게으르고 신심이 없다면 수행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를 얻게 된다.
그러나 염불문을 닦는 이라면, 걸을 때나 멈출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깨어있을 때나 잠을 잘 때나 명호를 부르는데 어려움이 없어 매우 편리하면서도 죄나 허물이 없으며, 어떠한 근기도 마다하지 않아 모두 왕생의 업이 된다.
그래서 법조대사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저 부처님 인중因中에서 세우신 크신 서원
이름 듣고 나를 부르면 모두 마중 나온다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아니하고
어리석음과 지혜를 가리지 않으며,
많이 듣고 청정한 계율 지키는 자 가리지 아니하고
파계하여 죄 깊은 이 가리지 않으시니
다만 마음 돌려 염불 많이 하면
깨어진 기와 조각도 금덩이로 변한다네.
또한, 미묘하고 수승한 성인의 말씀이 담긴 경론일지라도 마지막 임종 시가 되면 비록 지혜로운 자라도 그 문장들을 암송할 수 없다. 그러나 염불행자라면 설사 목숨을 마칠 때라도 명호를 칭념하기가 어렵지 않다.
또한, 제불의 서원을 논한다면 약사여래의 열두 가지 서원에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원력이 없으시고, 천수(관세음보살)의 발원에는 비록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다지만,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하셨다.
오직 아미타불께서 발한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만이 성취되어 성불하신지 이미 십겁의 세월이 지났다. 아미타불의 서원을 믿는 사람은 다른 법문의 신앙으로 따라올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한결같이 전수염불하며 다른 마음이 없이 하루 종일 조석으로 행·주·좌·와에 게으름 없이 명호를 칭념해야 할 것이다.
전수염불을 하던 사람들이 금생에 이미 왕생한 사례는 그 수자가 매우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잡수雜修를 한 사람들이 왕생했다는 얘기를 들어보기란 극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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