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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이초 (歎異抄)

 

탄이초》(歎異抄)는 일본유이엔(唯圓, 1222∼1289)이 그의 스승인 신란스님(親鸞, 1173∼1263)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이다.

 

정토진종(淨土眞宗)을 개척한 신란스님은 일본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잘 알려진 스님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20∼30년 사이에 직계 제자들마저 하나둘씩 사라져가면서 아쉽게도 그의 신심과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이 사태를 슬퍼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느낀 제자 중 한 사람인 유이엔이,

 

스승 신란스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계승되어 세상의 빛이 되어가기를 기원하면서 만든 것이 이 《탄이초》다. 그는 진실한 신심에 대해 스승이 남긴 말씀을 글로 모으고, 나아가 잘못된 신심에 대해 비판을 덧붙이기로 했다. 그 결과, 그가 스승의 말을 기억하며 쓴 이 《탄이초》는 후대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탄이초 (歎異抄)

 

제1장.

아미타부처님께서 목숨을 걸고 맹세하시고 약속하신 본원의 불가사의한 작용으로 구제를 받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난다는것을 굳게 믿고 염불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 바로 아미타부처님께서 거두시어 버려지지

않으시는 최대의 이익을 주시어 무량한 지혜와 자비의 작용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는 노인이라든가, 젊은이라든가, 선인이라든가, 악인이라든가 하는 차별은 없다.

단지 신심 하나만은 긴요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는 것은, 악만을 겹쳐서 죄가 깊은 우리,

타고 있는 불과 같이 번민하고 괴로와하는 마음이 격렬한 우리들을 구제하겠다고 발원하신 것이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원을 믿는데는 다른 어떠한 선도 필요없다. 염불보다 수승한 선은 없기때문이다. 어떠한 악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방해할 만한 악은 없기때문이다. 라고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2 장.

당신들이 머나먼 간또에서 교도까지 십여개국의 국경을 넘어서 생명을 걸고 찾아온 그 목적은 아미타부처님

정토에 왕생하는 길을 물어 듣고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신란이 염불 이외에 정토에 가는

길을 알고 있다거나, 또는 그러한 것들이 쓰여져있는 경전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여 그 진상을 알고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나라나 히에이산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정토에

왕생하는 요점을 납득하고 흡족할 때까지 잘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란에게는 단지 염불하여

아미타부처님에게 구제받고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그것을 믿을 뿐 특별한 연유라고 하는것은 하나도 없다.

염불은 참말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씨앗이 되는 것일까? 또는 지옥에 떨어지는 업일 것인가? 하는 것들은

나에게는 알바가 아니다. 가령 호넹상인(법연스님)에게 속아서 염불하여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염불 이외에 수행함으로써 부처가 될 수 있는 몸이 염불을 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다면 속았다하는 후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수행도 하지 못하는 이 몸이기에,

나에게는 어차피 지옥은 면할 수 없는 결정된 곳이기 때문이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이 진실이라면 석존께서 설하신 가르침도 거짓말이 아닐 것이며 석존이 설하신 가르침이

진실이라고 하면 선도대사의 해석도 거짓말이 아닐 것이며, 선도대사의 해석이 진실이라면 호넹상인(법연스님)의

가르침 또한 어찌 거짓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호넹상인(법연스님)의 가르침이 진실이라면 신란도 지금까지 허망한 거짓말을 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답답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몸이 받은 나의 신심은 이런 것이다. 그러니 이 후로는 염불을 받아들여

믿든 않든 그것도 당신들 각자가 결정할 일이라고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3 장

선인조차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하물며 악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세간 사람들은 항상 이런식으로 말하고 있다.
악인인데도 정토에 태어난다. 하물며 선인은 말할 것도 없다 고 말한다.

여기에는 우선 그럴듯한 도리가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들지 모르나 아미타부처님의 본원 타력의 마음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힘을 신뢰하고 선행을 닦아서 그것에 의하여 깨달음을 열고자 하는 사람은

한줄로 본원의 작용을 믿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미타부처님 본원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자력에 빠진 마음을 뒤집어 타력을 믿으면 아미타부처님 진실의 세계에 태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번민이나 걱정거리를 모두 다 구비해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염불 이외에 다른 어떠한 수행으로도

미혹의 인생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깊이 슬퍼하시어 본원을 일으키신 아미타부처님의 진의는 이러한 악인을 부처로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 때문에

타력을 믿는 악인은 가장 수승한 왕생의 정인인 것이다. 그러기에 선인조차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하물며 악인은 말할 필요가 없다 라고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4 장

자비에도 성도의 자비와 정토의 자비 두 가지가 있다.
성도의 자비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온갖 생물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보육하고저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구제하기란 지극히 곤란하다.
정토의 자비라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본원을 믿고 염불하여 서둘러서 부처가
되어 부처의 대자대비의 마음을 가지고 마음먹은 대로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을 구제하는 것을말한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애처럽고 가여운 일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일이 있어도 자기 마음대로
구제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성도의 자비는 수미일관(처음부터 까지 한결같이 )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본원을 믿고 엄불하는 것만이 참답고 철저한 대자대비라고 할 수 있다라고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5 장

신란은 부모님에게 명복을 빌며 불공을 올리고 염불한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다라고 말한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모두 다 기나긴 세월동안 생애을 윤회하는 동안에 부모로도 되고 형제로도 되어왔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나 다 염불하는 사람들은 다음생애는 부처가 되어 구제할 것이다. 염불이 만약에

자기 힘을 신뢰하여 이루어지는 선행이라고 한다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불공도 올리고

염불을 회향하여 부모님을 구제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력에 사로잡힌 마음을 버리고 염불하여 부지런히 아미타부처님

정토에 태어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정토의 깨달음을 연다면, 가령 지옥에서도 아귀에서도 축생에서도

어떠한 세계에서 어떠한 고통에 빠진다해도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작용으로 우선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구제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6 장

오로지 염불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중에는 "자기제자다" "다른 사람 제자다" 하며 다투고 있는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란은 제자라고 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은 자기 역량으로 사람에게 염불을 하도록
할 수 있다면 제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나 다만 순전히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이끌려
염불하는 사람을 자기 제자라고 하는 것은 전혀 말도 안된다.
"맺을 연이 있으면 맺어지고 헤어지는 연이 있으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까지 모시고 염불하는

스승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따라 염불을 한다면 아미타부처님 세계에 태어날 수 없다. 고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부처님께서 주신 신심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돌려 받고자 하는 것인지, 그러한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아니될 일이다.

만약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의 자연도리에 맞는다면 스스로 부처의 은혜를 알고, 또 스승의
은혜도 알 것이다 라고 이렇게 신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7 장

염불은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외줄의 큰 길이다.
(그러기에 염불하는 사람을 무애일도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염불을 믿는 사람에게는 천지신명이 공경하고 모시기 때문에 마계에서나
외도에서도 방해할 수 없다.
어떠한 죄악도 그 행위결과를 느끼는 일이 없다. 어떠한 선도 이 염불에 미치는 것이 없다.
그러기에 염불은 무애일도인 것이다. 라고 신란성인께서 말씀하셨다.

제 8 장

염불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행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자기의 분별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이라고 한다.
자기의 분별로서 이루어지는 선도 아니기 때문에 비선이라고 한다.
염불은 전혀 아미타부처님 본원의 작용인 타력이지 자력의 분별을 벗어나 있다.
그러기에 염불을 칭하는 행자에 있어서는 행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라고 이렇게 신란성인께서 말씀하셨다.

제 9 장

"염불을 칭하고 있으나 펄쩍 뛰어오를 것같이 환희의 마음이 그토록 절실히 느끼지 못하며
또 부지런히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에 가고자 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하고 물어본 즉 '신란도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유이엥보야, 너도 같은
마음을 기지고 있었느냐? 곰곰히 생각하고 생각해보면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춤을 출 만큼
기뻐해야할 일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정토에 점점 왕생하는 것은 결정된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뻐할 마음을 누르고 기뻐하지 않게 하는 것은 번뇌의 짓인 것이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은 이미 이런 것들을 잘 알고,
"번뇌덩어리인 범부야" 하고 불러 주시기 때문에 아미타부처님의 타력의 비원은 이와같은
우리들을 구제하시기 위하여 일으키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더 믿음직하게 생각
될 것이다. 또 아미타부처님의 정토로 급히 가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잠시 병이라도 나면
죽는것이나 아닐까 하고 마음 졸이게 되는 것도 번뇌의 짓인 것이다.

먼 옛부터 지금까지 헤매어 오던 고뇌의 고향을 버리기 어렵고 또 태어나 보지도 않는 것은
참말로 어디까지나 번뇌의 심한 뿌리가 강하고 단단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헤어지기 섭섭할지라도 이 세상 연이 다 되어 자기로서는 어찌하지 못하게
되어 생명이 끝날때 아미타부처님의 정토로 가게 되는 것이다.

아미타부처님께서는 급히 정토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특히 측은하게 생각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점점 아미타부처님의 대자대비의 본원은 믿음직하며 왕생이
결정된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펄쩍 뛰어오를 환희의 마음도 있고 급히 정토로 가고싶다고
하면 번뇌는 없는 것일까? 하고 도리어 의심스럽게 생각될 것이다. 라고 이와같이 신란성인
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10 장

염불에는 인간의 분별이 없는 것을 가지고 본의로 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려나 분별을
가지고서는 말로 나타내어 찬사를 하거나 설하는 것도 생각으로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신란성인께서는 말씀하셨다.

제 11 장

문자하나 모르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염불을 칭하고 있는데 대하여 '너는 아미타부처님
서원의 불가사의를 믿고 염불하는 것인가' 하는 등으로 겁을 줄 뿐, 서원과 명호의 두 가지의

불가사의한 뜻을 잘 이해하도록 설명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헷갈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일은 아무쪼록 주의하여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아미타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을 전부 빠짐없이 구제하시고야 말겠다는 서원의 불가사의한
활동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유지하고 부르기 쉬운 명호를 골라서 ' 이 명호를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정토에서 맞이하리라' 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아미타부처님의 대비본원에서 나오는 불가사의한 힘에
구제받아 이 미혹의 세계를 떠나 정토에 태어난다. 고 믿고 염불을 부를 수 있는 것도
부처님의 마음에 의한 것이다라고 결정한다면 거기에는 자기의 사려에 그대로 아미타부처님

본원에 이루어져 진실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원의 불가사의가 구제의 근본이라고 믿으면 스스로 거기에는 명호의 위대한 활동도

갖추어지므로 서원불사의와 명호불사의는 원래 하나인 것이지 달리 틀린 것이 아니다.


다음에 스스로의 사려나 분별에 있어서 선과 악의 두 가지에 대하여 선은 왕생에 도움이 되고 악은 왕생에

방해가 된다는 두가지의 양상으로 구별하여 생각한다. 이것은 서원의 불사의를 믿지 않고 자기의 마음으로

왕생하기 위한 행을 분발하여 원래 염불은 본원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부르는 염불조차도 자력의

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본원의 불사의를 의심하고 염불하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명호의 불가사의도 믿지는 않는 것이다.
본원과 명호의 불가사의는 믿지는 않으나 염불의 힘으로 변지, 해만, 의성, 태궁이라는 방편세계에 왕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력의 염불을 하는 사람도 구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완수하시겠다는
맹세로 마침내 진실한 정토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명호의 크나큰 힘에 의한 것이며 이것은 그대로 서원불사의한 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서원과 명호는 완전히 하나인 것이다.

제 12 장

여러 가지 경전과 그 주석서를 읽으며 학문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토에 왕새할 수 있을 것인지 미덥지가 않다고

말하는데 대하여 이것은 전혀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의 진실한 취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 모든 성교는 어떠한 것이든 본원을 믿고 염불하면

부처가 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외에 어떠한 학문이 왕생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하는 것일까, 참말로 이 도리에

갈팡질팡 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학문을 해서 본원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경전과 주석서를 읽어가며

공부를 한다해도 성교의 참마음을 몰라서야 너무나 딱한 일이다.

문자 하나 모르는 무학자로서 경전과 주석서의 줄거리조차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하고자 하는

 나무아미타불의 명호이기 때문에 이 염불을 이행이라고 한다.
이것에 대하여 학문을 중심으로 자력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성자의 길로서 이것을 난행이라 이름한다.

'학문하면서 방향을 잘못 잡아 명예나 재물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이 일생이 끝이 나고
다음에는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가 된다는 것도 어떻게 되겠는지' 하고 가르쳐 주시는
확실한 문서도 현재에 있는 것이다.

오로지 염불만 하며 생활하는 사람과 성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 교의에 대하여 논쟁을 하며
'자기의 종지만이 우월하고 타인의 종지는 뒤떨어진다' 는 등의 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불법을 비방하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자기가 믿는 불법을 파괴하고 가르침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모든 종파사람들이 똑같이 '염불은 쓸데 없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 종교는 천박하고 저속하다.

고 말하더라도 조금도 다투지 말고 우리와 같은 능력도 없고 평범한 인간이고
문자 하나 모르는 무학자가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한 줄기로 믿으면 즉시 구제된다는
가르침을 듣고 믿고 있기 때문에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자력으로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저속한 가르침으로 보일 것이나 우리에게는 더없는 거룩한 가르침이다.

가령 염불보다 다른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는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거기에 쫓아서

수행할 수 없다.
'나나 다른 사람도 다같이 생사의 미혹에서 벗어나 깨닫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본의일 것이나 우리들이

염불하는 것을 제발 방해하지 마십시요' 라고 말하고 보기 싫은 태도를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적대하겠는가.

거기에 또 '논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여러 가지 번뇌가 일어난다. 진실로 지혜 있는 자는 다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라고 하는 확실한 가르침의 말씀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안 계신 신란성인이 말씀하시기를 ' 이 염불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또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라고 전부터 부처님께서 설하여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미 믿고 있다.

그러나 또 비방하는 사람이 있음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실한 것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점점 결정된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
만약 비방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믿는 사람은 있을 것이나 어째서 비방하는 사람이 없을까 하고 생각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꼭 사람에게서 비방을 받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전부터 믿는 사람과 비방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잘 알고 계시어 사람들에게
의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설하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최근에는 학문을 하여 그 힘으로 사람을 비방하는 것을 누르고 오로지 노의나 문답에 주력을

집중하고자 몸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학문을 하면은 점점 깊이 부처님의 본원의 진실한 마음을 알아 그 비원이 얼마나 광대한 것인가를 양해하고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죄심한 몸으로는 대체로 왕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는 선인, 악인이라든가 정결한 사람, 더러운 사람이라든가 하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설하여 들려 주므로서 그것이 학문했다는 사람의 가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 일도 없이 순박하게 본원의 마음에 맞게 염불하는 사람에게 까지도
'학문해야만 왕생 할 수 있다'는 등 하는 말로 겁을 주는 것은 불법을 방해하는 악마이며
부처님에게 덤벼드는 적인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자신에게 본원타력의 진실한 신심의 부족할 뿐 아니라 잘못하여 타인에게도 갈피를

못 잡게 하게 되는 것이다. 삼가 두려워해야한다. 신란님의 마음을 거역함은 더 한층 슬픈 일이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 어긋나는 것을.

탄이초 13장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고 하여 악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요컨데 본원에 응석부리는

본원자랑으로서 그런 사람은 정토에 왕생시킬 수 없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이것은 본원을 의심하는 것이며

또 다시 선악이 숙업에 의한 것임을 모르는 것이다.

또 악을 생각해서나 행하는 것도 어쨓든 과거의 악행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지금은 안계신 신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토끼털이나 염소털 끝에 묻은 먼지만큼의 아무리 지응 죄악이라

해도 과거의 사려나 언동에 의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또 어느때 유이엔보는 내 말을 믿느냐. 하고 물으시기 때문에 네 믿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내가 하는

말에 절대 거역하지 않겠느냐하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래서 겸손하게 승락했던바 성인께서는 그렇다면 우선 사람을 천명 죽여주겠느냐, 그러면 너의 왕생은

틀림없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존엄한 말씀이나 단 한사람도 이 나의 힘으로는 죽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니 그렇다면 어째서 신란의 말을 거역하지 않겠다고 했느냐고 말씀하시며 이것으로 잘 알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왕생하기 위해서 천명 죽이라면 당장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사람도 죽일수 있는 업연이 없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는 것이다. 또 반대로 아무리 죽이지 않겠다고

생각해도 백명 천명이라는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우리들이 자기 마음이 좋은 것은 왕생을 위하여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이 나쁜 것은 왕생을

위하여 나쁜일이라고 스스로의 생각에 사로잡혀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의 불사의한 힘으로 구제 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 주신것이다.

일찌기 신란께서 살아계실때 비뚤어진 생각에 빠진 사람이 있어 죄악을 범한 사람을 구제하시러 나쁜 짓을

좋아하고 그것을 가지고 왕생의 업으로 삼고자 여러 가지 나쁜 짓을 거듭한다는 소문을 들으신 성인께서는

서신을 통하여 아무리 독을 없애는 약이 있다고 하여 독을 좋아서 마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고 쓰신 것은

그러한 사견에 사로잡히지 못하게 하기 위한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악이 왕생하는 방해된다는 것은 아니다.
계율를 지키므로서 만이 본원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어찌하여 생사의 미혹에서

해방할 수 있겠는가. 이와같이 한심한 죄악의 몸이라고 해도 본원을 만나 그 부처님 마음을 얻음으로써 참으로

본원의 존중함을 뽐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몸에 갖추어지지 않은 악업은 설마 범할 수도 없을 것이다.

또 바다나 강에서 그물을 치고 낚시를 하여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들과 산에서 새와 짐승을 수렵하여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나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모두 다 똑같아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될 업연에 재촉

받으면 인간은 어떠한 짓이라도 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신란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요즘에는 정말로 자기가

 

신심가나 되는 것처럼 굴면서 착한 사람만이 염불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혹은 염불도량에 써서 붙이기를

이러이러한 짓을 한 사람은 이 도량에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전혀 표면의 형체만 가장 재지에

우수한 자만이 선행 분발하고, 오직 불도에 정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고 있으나 그 내실은 잘못된

거짓말로 꽉 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본원을 자랑삼아 그것에 응석부려 범한 죄악도 숙업에 재촉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무엇이든 모두다 과거 행위의 결과라고 받아들이고 오직 본원을 믿어 타력에

의하여 살게되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유신초에도 아미타부처님에게는 도대체 얼마만한 힘이 있는 것이라고 알기에 자기와 같은 죄가 깊은

몸은 도저히 구제되기 힘들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닌가.

본원을 자랑하며 그것에 응석을 부릴만한 마음에 있어서만이 타력을 믿은 신심도 확실히 정해질 것이다. 대체로,

이 몸의 죄악과 번뇌를 완전히 끊어버린후에 본원을 믿는다고 한다면 본원에 응석부리는 마음이 없어도 좋을

것이나 번뇌를 끊어버리면 곧 부처가 되기에 그 부처에게는 오겁사유의 본원은 전혀 필요없는 것이 될 것이다.

본원을 자랑마라. 응석부리지 말라하고 경고하는 사람들도 역시 죄나 불결한 것을 모조리 그 몸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본원을 자랑하고 응석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떠한 악을 본원에 응석부리는 본원자랑이라고

하는 것일까. 결국은 본원을 자랑하는 사람은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실은 도리어 본원을 받아들일

마음이 얕고 유치할 것이다.

제 14 장


한 마디 염불로서 80억겁 동안이나 기나긴 세월을  두고 고통 속에서 헤메이는 중죄를 멸한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이 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이것은 십악, 오역의 중죄를 범한 사람이 평소에는
염불한 일이 없어도 생명이 다하려고 할 때에 처음으로 좋은 스승이 가르침에 따라 한 소리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면 80억겁이라고 길고 긴

 

세월동안의 죄가 소멸되고 열 번 소리내어
염불하면 또다시 그10배나 되는 중죄가 소멸되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십악오역이라는 죄의 중하고 심오한 것을 알리고자 일성의 염불, 십성의 염불로 말씀하신
것일까.


특히 이것은 임종에 있어서의 멸죄의 이익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멸죄를 기대하고 염불을
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믿는 타력 신심에는 아직도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을
비추어 소중히 지켜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한번 염불을 부를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금강과
같은 존중하고 견고한 신심을 주시므로

 

그떄 이미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가 된다는 불퇴전의
지위에 머무르게 해주시어 생명이 끝날 때는 일체의 번뇌나 악의 방해가 방향을 바꾸어 생사를 떠나
절대무한, 그 자체가 된다는 무상의 깨달음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이 대비의 본원이 없더라면 우리들과 같은 한심한 죄악의 몸이 어떻게 생사의 미혹에서 자유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일생동안 부르는 염불은 모두가 다 이와 같은 우리들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의
자비의 은혜에 보은하는 그 광대한 공덕에 감사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염불을 할 때마다 그 염불의 힘으로 죄를 없애 보자고 미든 그것은 이미 자기의 힘으로 죄를 없애고 정토에
왕생하고자 힘쓰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일생 동안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은 전부 이 생사의 미혹의 세계에서 나의 몸을 붙들어
매는 굴레가 아닌 것은 없기 떄문에 생명이 다 할 최후까지 부지런히 염불을 지속해서만이 정토에
왕생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는 하나 인간의 생활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한정이 있을 것이니 어떠한 생각도 안했던
뜻밖에 일을 만나게 될른지 또 병으로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려 정념을 잊은 채로 생명이 끝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염불을 한다는 것은 좀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 염불을 부르지 못한 그간의 죄는
어떻게 없애겠다는 것일까.
만약 죄가 없어지지 않았으면 정토에는 왕생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그러나 섭취불사원을 신봉하면 어떠한 뜻하지 않는 일을 당하여 죄업을 범하여 염불을 부르지도 못하고
생명이 끊어 졌다 하더라도 즉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행히도 임종시에 염불을 하게 되는 것도 그것은 확실히 진실한 깨달음이 열리려고 할 때가 가까워
짐으로써 점점 깊이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믿고 광대한 은혜에 보사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염불하여 죄를 멸하고 그것에 따라서 왕생 할려고 생각하는 것은 자력의 마음으로 이것은 임종정념을
믿고 있는 사람의 본심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람에게는 타력의 신심이 부족한 것이다.

 

제 15 장

신심을 얻은 사람은 온갖 번뇌를 구비하고 있는 이 육신을 가진 채 그대로 이미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이것은 당치도 않는 일이다.
현재 살고 있는 이 육신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진언종에서 설하는 비밀의 가르침의 근본 마음이고
이것은 수행자의 손에 인을 맺고 입으로는 진언을 부르고, 마음으로는 본존을 본다는 삼밀의 수행의
대일여래의 신구의 삼밀에 상응되어 얻어지는 깨달음이다.


또 신심(안이비설신의)의 더러움을 씻어 흘려버려 깨끗이 하고 자유자재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승의 가르침인 법화경에 설하신 곳에 사안락행을 닦음으로써 감득하는 경지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부 보통사람이 행하기에는 어렵고 특히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아니면 견디지
못할 수행으로서 망념을 털어버리고 마음을 가라앉혀 진실을 관찰하고 체득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깨달음이다.


이것에 대하여 미래에 정토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여는 것은 정토진종, 절대타력의 근본정신이다.
다시 말하면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믿었을 때 바른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가 된다고 결정하는 길이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리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행하기 쉽고 보존하기 쉬운 염불의 대도이고
선인과 악인을 차별하지 않고 구제해주시는 진실교법인 것이다.
대체로 이 인생에 있어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번뇌와 악의 방해를 끊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기 때문에 진언이나 법화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성승조차도 이생애가
끝이 나면 다음에는 정토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열기를 비는 것이다.


하물며 이 우리들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서 깨달음을 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에게는 규율을 지켜 바르게 생활하는 일도 아니고 진실한 지혜를 가지고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일도 없다.


그러나 아미타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본원선에 승탁하여 끝이 없는 생사의 고해를 건너 정토의
피안에 도착하면 번뇌의 먹구름은 바로 거치고, 진여의 깨달음의 달은 신속하게 나타나 만월과
같이 빛나서 어떠한 것에도 방해 받지 않고 시방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비추는 아미타부처님의
광명과 한몸이 되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을 구제할 것이다.


그때야말로 진실로 깨달음을 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육신을 가진 채 깨달음을 열어
부처가 된다고 하는 사람은 석존과 같이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끌기 위하여
그 사람의 능력과 요구에 응하여 여러 가지로 모습을 변화하여 나타내는 그 몸은 크게는
32상, 적게는 80종호의 부처로서 귀중하고 뛰어난 특징을 전부 갖추고 법을 설하고
사람들을 구제하시는 것일 것이다.

 

이 석존과 같이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을 이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
의 모범이라고 말하고 것이다.
신랑성인께서는 와상에 흔들림이 없는 진실한 신심이 결정될 그때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대비의
광명에 섭취되어 영구히 생사의 미혹을 벗어나게 해주신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과 같이 진실의
신심이 결정할 때 한번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속에 섭취되면 두 번 다시 버려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벌써 이미 미혹의 세계에 돌아가 끝도 한도 없는 생사를 반복하는 일은 없다. 그러기에 영구히
생사의 미혹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고 아는 것을 어찌하여 깨달음을 열어서 부처가 된다고 얼버무리는 것으로 좋을
것인지 참으로 애처롭고 딱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정토진종의 가르침은 이 현생에 있어서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을 믿고 염불하는 몸이 되어
피안의 정토에 왕생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라고 호넹상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라고
지금은 안계신 신랑성인께서는 말씀하신 것이다.

제 16 장

본원을 믿고 염불을 부르고 있는 사람은 알게 모르게 무의식중에 화를 내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같은 염불을 배우는 친구끼리 언쟁할 때는 그 때마다 반드시 회심해야 한다는 말은 자기힘으로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닦아서 정토에 왕생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그저 한마음으로 본원을 믿고 염불만을 부르는 사람에 있어서는 회심이라는 것은 생애에 단
한번 밖에 없다.


그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아미타부처님의 본원과 절대타력으로 많이 구제될 수 있다고 설하는
정토진종의 가르침을 몰랐던 사람이 아미타부처님 지혜를 얻어 지금까지 먹고 있든 마음으로서는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력에 빼앗겼던 마음을 뒤집어 본원타력을 믿는 것을
회심이라고 한다.


만약 모든 것이 조석으로 쉴새없이 회심하여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의 목숨은 내뱉은
숨을 들어마시기도 전에 목숨을 거두게 될것인즉 회심도 못하고 온화하고 평화한 마음,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거역하지 않는 인욕의 마음이 되기도 전에 목숨이 끊어진다면, 모든 사람들을 섭취불사
한다는 아미타부처님의 서원은 아무 역할도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입으로만 본원의 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악인을 구제 하겠다고 하는
본원이 아무리 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역시 선인을 우선 구제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염불의 가르침을 받고 있으면서도 본원의 힘을 의심하고 타력을 믿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진실한 정토에서는 멀고먼 변지에 태어나서 거기에 머물러 있게되어 결국에는 구제 받지 못하고
끝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한번 신심이 결정되면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아미타부처님의 뜻대로 하시게 되는 것인지라 결코
자력으로 분별해서는 안된다.
내 몸의 나쁜 것을 안다고 해도 점점 이와 같은 악인을 구제하시는 본원의 힘을 받들면 자연의 도리에
의하여 유화하고 인욕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왕생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똑똑한 체하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홀딱 반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의 은혜가 심중하다는 것을 언제나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그러면 염불도 혼자서 부를 수 있어, 이것이 자연이다.
우리 인간들의 사려나 분별이 섞이지 안고 자력의 계량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한다.
이것이 말하자면 본원타력인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과는 별도로 특별한 것으로 있는 것같이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한탄스러운 일이다.

제 17 장

정토의 변지에 왕생하는 사람은 최후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느
경전, 주석서에 그 증거가 될만한 문서가 있단 말인가?
거기다 이런한 말이 학자라고 하는 사람 중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경전이나 주석서 등의 성전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진실의 신심이 부족한 염불은 아미타의 본원을 의심하기 때문에 정토의 변지에 태어나 본원을
의심한 죄의 깊음을 알아서 그 죄를 다 받은 다음 진실한 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열어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다.


진실한 신심을 얻은 염불자는 적기 때문에 아미타부처님께서는 자력으로 염불을 불러 본원을 의심
하는 사람도 정토에 끌어들여 넣고자 그 과정으로서 변지에 왕생할 것을 많이 권장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 변지에 왕생하는 사람은 최후에는 허무하게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되는 것이다.

제 18 장

불사를 하고 있는 사원이나 승려에게 시주 돈을 많이 내고 적게 내는 데 따라 정토에 태어나서
큰 부처가 되고 작은 부처가 된다는 것은 전혀 언어도단인 것이며, 매우 꽤씸한 일이다.
우선 먼저 부처님 몸이 크고 작다는 그 분량을 정한다는 것 등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저 안양정토의 교주이신 아미타부처님의 불신의 크기를 경전에 설하고 계신 것도 그것은 우리들이
부처님의 진실과 그 무한한 힘에 눈 뜨게 하시기 위하여 설하신 임시의 모습인 방편의 형태인 것이다.
만약 한번 진실하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여법성의 깨달음을 열고 길다거나 짧다거나 사각이라든가
둥글다거나 하는 모양을 초월하여 청,황,적,백,흑 이라는 색을 떠난다면 어떻게 불신의 크고 작음을
정할 수 있겠는가.


경전에는 염불을 부를 때 그 사람 세계에 모습을 나타내 주시는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설하고 계신
것을 성교에서는 큰소리로 염불하면 큰 부처님을 보고 작은 소리로 염불하면 작은 부처님을 본다고 말씀했던
말인가.


또는 그 경전 말씀을 가지고 시주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큰 부처님과 작은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리고 또 이것은 불도수행에 있어서 보시행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인가. 그러나
아무리 제보를 아까워 하지 않고 부처님 전에 바치고 은사와 승려에게 기부를 한다고 해도 신심이
부족하면 전혀 의가 없는 것이다.


가령 단 종이 한 장이고 돈 반푼조차 사원이나 승려에게 기부하지 안더라도 본원타력에게 마음을 던져
놓고 신심이 깊어지면 그것이야말로 본원의 마음에 들어맞은 일이다.
대체로 모든 불법을 핑계삼아 세속적인 욕망이 있는 것이라 이런 말을 하여 염불의 가르침에 결속된
동붕을 공갈하는 것일까.

후서

이상 밝힌 18조의 이의는 어느 것이든 모두다 신랑성인이 밝히신 진실의 신심과 틀리기 때문에
일어난 것일 것이나 지금은 안 계신 성인께서 일찍이 이러한 것을 말씀해 주신 일이 있었다.


호넹상인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제자들 중에서 상인과 같은 신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신란은 동붕들과 신심에 대해서 논쟁을 하신 일이 있었다는 것은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젱싱의 신심도 호넹상인의 신심이나 동일하다.고 한즉 세이강보와 넹부쓰보 등의 여러 동붕들이
그런 말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라고 반박하면서 어찌하여 호넹상인의 신심과 젱싱보의 신심과
동일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하니 신랑성인께서는 과연 호넹상인은 지혜나 재능이 뛰어나신 분이다.
그래서 그것과 같다고 하면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정토에 왕생하는 신심은 전혀 달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뿐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어째서 그런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다. 하며 의문과 비난이 있었음으로
결국 호넹상인이 계신 곳에서 쌍방이 주장에 어느 것이 옳은지를 결정하게 되어 이러한 말을 상세히
말씀드렸더니 호넹상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겡구의 신심도 부처님에게서 얻은 신심이다

.

그러기에 전혀 동일하다. 이것과 다른 신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경구가 가고자 하는 정토에
는 설마 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거이나 요사이 오직 염불만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신랑성인
의 신심과 동일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니 한탄스럽게 생각된다.

번뇌덩어리같은 우리 범부는 불타는 집과 같이 덧없는 이 무상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다
거짓이고 가짜뿐이고 무엇하나 진실은 없는데 다만 염불만이 진실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귀의심이 아미타불에게 향하고 있으면 염불이고 정토에 향하고 있으면 왕생이 된다.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고는 하지만 그 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는 것이다.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신호에
불과하다.


염불은 원생의 신호이고 그 길은 아미타부처님께서 안에서 열어주시는 것이다.
신랑에게는 선인 호넹상인의 가르침을 무조건 믿을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염불은 행자를 위해서는 비행비선이다.
그것은 나의 분별에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염불을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격려하지 않아도 부르게 되는 것이고, 부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아니나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필경에는 내가 염불하는 것이 아니고 염불이 나를 나로 이룩해주는 것이다.

내생이라고 하는 것은 현생을 현생으로 이루어주는 것으로서의 차원인 것이다.
따라서 내생이야 말로 현생에 있어서 말하자면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이 있으면 내세가 없을 수 없고, 내세가 없다면 금생은 있을 수 없다.
미래의 정토를 귀의처로 하지 않고 현생의 생활이라는 것이 있을수 있겠는가.
범부가 말하면 정토는 없을 것이라는 몽상을 해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다면은 정토는
있다고 말할 것이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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