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떤 것이 ‘일심불란’인가 (정종淨宗법사 법어 / 정전스님 역)
출처/純淨時代
【두 가지 해석】
이어서 『아미타경』에서는 “명호를 집지하여 하루나……이레 동안 일심불란하면”이라고 설하셨는데요, ‘일심불란’이란 네 글자는 두 번째 관문으로서 왕왕 우리 수많은 수학자修學者들로 하여금 보기만 해도 두려움을 느끼고 보기만 해도 뒷걸음질을 치도록 만듭니다. “아이고! 일심불란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궁극에는 정토법문을 포기해버립니다.
비록 염불을 많은 선근이라고 말하기는 하나, 만약에 반드시 선정상태의 일심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이러한 많은 선근은 여전히 쉽지가 않을 겁니다.
‘일심불란’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성도문의 해석을 따른다면 아주 어렵습니다. 선정의 일심불란·사일심불란事一心不亂·이일심불란理一心不亂……당신은 꿈도 꿀 수가 없습니다. 사일심불란은 아라한의 경계이고, 이일심불란은 초지이상 보살의 경계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정토종에서 해석하는 ‘일심불란’이란 바로 ‘전심으로 염불하여 난잡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일심’이 바로 전심專心이고 ‘불란’이 바로 난잡하지 않다는 것으로, 잡행잡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바로 ‘쉬운 행易行’이어서 누구든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토문에는 따로 규칙이 있다】
그럼 왜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해석이 나온 걸까요? 그것은 입장과 관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문의 관념대로라면 ‘만약에 번뇌를 조복하고 나아가 번뇌를 끊지 못한다면, 생사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써 ‘일심불란’에 대한 해석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일심불란이 바로 선정상태의 청정함과 번뇌를 조복함’ 등등이라 말하게 되겠지요. 만약에 정말로 그러하다면 정토법문은 ‘이행도’가 아니어서 ‘특별법문’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일반법문과도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됩니다. 인광대사께서는 이것은 일반법문의 교리·일반적인 자력수행·계정혜를 닦는 수행방법으로써 정토법문을 판단하는 것이라며, 이것을 ‘가로로 벗어나는(橫超:번뇌를 끊지 않고 윤회를 벗어남) 법을 가지고 세로로 벗어나는데(豎出:번뇌를 끊고 윤회를 벗어남) 사용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토법문은 본래 부처님의 원력으로 삼계를 횡초橫超하는 것인데, 결국 자력수행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기어오르는 성도문의 수행과 똑같게 되었으니, 이것은 틀려도 크게 틀린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자력수행법문관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정토법문 속으로 들어오면 마땅히 본래 수행하던 관념들을 내려놓고서 정토문의 규칙대로 정토종 조사님들의 전승에 따라서 해석하고 이해를 해야만 비로소 정확할 수 있습니다.
1) 이치로써 추론함
【범부가 반드시 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아미타경』은 석가모니불께서 특별히 우리 범부들을 위해 설하신 경으로서 수행이 쉬운 안락한 법문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중생들을 위해 설하신 것이라면, 틀림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일 겁니다. 만약에 ‘일심불란’이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깊은 공부의 경지여서 오탁악세의 범부들이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그럼 석가모니불께서 이 법문을 설하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이른바 ‘세 가지 근기에 두루 가피를 주고 영리한 근기와 둔한 근기를 전부 거두어들인다’는 말은 한 구절 빈말이 되고 말겠지요.
용수보살님의 『이행품』에서는 염불법문은 이행의 법문이요, 안락한 법문이요, 반드시 성취하는 법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염불을 하시면서 아주 괴롭게 염불하고 아주 힘들게 염불하며 왕생이 결정되지 않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염불법문의 특색이 아닙니다.
어떤 연우님이 저에게 말합니다. “스님, 저는 불칠법회에 자주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좋지요, 몇 번을 참가하셨나요?”
“저는 전국 각지에서 하는 법회를 열 몇 차례나 참가하였는데, 꼭 일심불란을 얻고 싶었습니다”
“아, 대단하십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습니까?”
“얻지 못했습니다!”
“얻지 못했다고요? 그래도 조금은 얻지 않았나요?”
“조금도 못 얻었습니다!”
“조금도 못 얻었다고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제가 개인적으로 조용히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는데 한 사람도 얻지 못했답니다. 장씨 당신은 일심불란을 얻었습니까? 아니요. 이씨는요? 아니요”
그는 도처에서 불칠법회에 참가하였는데, 사천에서 법회가 있으면 사천으로 달려가고, 복건에서 법회가 있다면 복건으로 달려갔습니다. 전국을 다 다녔지만 그가 방문한 사람치고 일심불란을 얻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석가모니불의 설법은 이치에 계합하고 근기에 계합합니다. 부처님께서 오탁악세의 중생들을 위해 설하신 법문이 뜻밖에도 전국을 다 돌아다녀 봐도 단 한 사람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근기에 계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설법이 근기에 계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군가 ‘일심불란’을 가지고 잘못 해석하고 치우치게 해석하였기에, 우리가 듣고 나서 어렵게 느껴지고 실천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리를 놓는 비유】
정토법문이 ‘이행도’라면 어디가 쉬울까요? 바로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력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게 쉬운 것이지요. 아미타불의 대원력이 바로 ‘염불왕생원’의 원력입니다. 따라서 염불은 반드시 쉬운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에 『아미타경』속의 ‘집지명호, 일심불란’에 대해 반드시 어떻게 깊은 선정에 들어서 망념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고 해석한다면 당연히 쉽지가 않겠지요.
여러분,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위해 설정해주신 왕생의 방법이 어려운 게 좋겠어요, 아니면 쉬운 게 좋겠어요. 여러분들이 말씀해보세요?
(대중) 쉬운 게 좋아요!
틀림없이 쉬운 게 좋겠지요! 쉬워야만 우리가 할 수 있고 그래야만 즐거움이 있겠지요. 만약에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괴로울 겁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동체대비同體大悲이시므로 우리의 괴로움을 당신의 괴로움으로 여기시고, 우리의 즐거움을 당신의 즐거움으로 여기십니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괴로우면 나도 괴롭고, 중생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중생들이 죄업이 두텁고 또 매우 게으르다고 해서 일부러 어려운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려서 그 사람이 수행을 하면서 모진 고초를 다 겪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구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전이 우리의 상황을 다 아시고 미리 우리를 위해 준비를 하시면서 “오탁악세의 중생들은 어리석어서 진리에 밝지 못하고, 죄악이 무겁고 나태하고 방일해서 전혀 수행할 수 없으므로, 내가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아주 쉽게 너희들을 구제하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우주법계 내에 가장 간단하고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기에 한 줄기 강이 있는데 아주 넓습니다. 강의 동쪽은 가난하고 강의 서쪽은 부유합니다. 동쪽 사람들이 서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다리가 없고 물살도 급해서 물에 들어가서 강을 건너려던 사람들은 한 명 한 명씩 전부 빠져죽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사람과 차량들이 편리하게 막힘없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비심을 내어 대교大橋를 하나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가 자비심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황들을 빈틈없이 꼼꼼히 고려하여 노인이든 어린이든 심지어 장애인들조차도 아주 편리하게 다리를 오를 수 있고 어떠한 차량도 전부 자유롭게 다리에 올라서 아주 순조롭게 건널 수 있을 겁니다. 절대 다리 입구를 오르기 힘들게 만든다거나 다리 중간에다 또 높은 담을 쌓아놓고서 가로막지 않을 것입니다.
육자명호가 바로 사바세계로부터 극락세계로 도달하는 다리입니다. 아미타불이 바로 다리를 놓은 사람이고, 석가모니불이 바로 다리 입구에 서서 우리더러 올라오라고 외치던 사람이지요. 우리가 빈손으로 걸어서 발걸음을 따라 다리를 밟기만 하면 올라갈 수 있으니, 아주 간단하고 아주 쉽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왕생을 원하기만 하면 아주 편리하고 아주 쉽게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심불란’을 가지고 아주 어렵게 해석해버렸으니,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만약에 선정에 도달하여 망념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왕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대교 가운데 중간 부분에다가 다시 몇 미터나 되는 높은 담을 쌓아놓고 모든 사람과 차량들을 전부 막아버린 게 되겠지요. 석가모니불께서 염불을 ‘일심불란’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 설마 명호의 대교 가운데 다시 담을 세워서 가로막은 것이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석가모니불께서 염불을 ‘일심불란’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를 보호하려는 것으로서, 우리가 염불을 조금 하다가 또 안 한다든가 염불을 조금 하다가 또 잡행잡수를 할까봐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따라서 ‘일심불란’은 명호대교 양쪽에 있는 가드레일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가 다리 밑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잘 가세요! 조심하시고요, 발걸음이 흩트려지게 해서는 안 돼요! 이 다리를 벗어나서는 안 돼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집지명호, 일심불란’이란 말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염불을 할 때 전심을 기울여야 한다! 잡다하게 하지 말고 함부로 주장을 내세워서 유일한 길인 염불을 버리고서 다시 길이 통하지 않는 다른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의 말씀이었습니다.
2) 삼경을 대조하여 설명함
다음으로 우리는 관련 있는 경전의 증거를 인용하여 ‘일심불란’의 참뜻을 설명하겠습니다.
⑴ 『아미타경』
우선 『아미타경』을 보겠습니다. 『아미타경』에서 먼저 ‘집지명호’를 설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일심불란’을 설하셨는데, 그 뜻은 명호를 집지하는데 마땅히 일심불란해야 한다는 것이고, 일심불란이야말로 명호를 집지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위험한 길에서 횃불을 드는 비유】
‘집지執持’라는 두 글자에는 모두 손수변이 있는데, ‘집’이란 꽉 잡고 놓지 않는 다는 것이고, ‘지’란 계속 이어져서 끊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둠속에서 위험한 길을 걸을 때 횃불을 들고 길을 비추는데, 주변이 온통 칠흑 같아서 오로지 이 횃불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한마음 한뜻으로 이 횃불을 꽉 잡고서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렇게나 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도중에 함부로 횃불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도중에서 횃불을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직 이 한 자루 횃불만 있기에 우리의 생명안전은 전부 거기에 의지해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한마음 한뜻이 될 것이며, 더 이상 딴 마음을 품을 수 없기 때문에 ‘일심’인 것입니다. 또한 도중에 포기를 해버리고 마음대로 다른 어떤 한 가지 물건을 막 잡지 않을 것이므로 ‘불란’인 것입니다. 딴 마음이 생기고 흩트려(난잡해)졌다면 수시로 낭떠러지와 깊숙한 구덩이로 떨어질 수 있으므로 감히 딴 마음을 품을 수 없고 흐트러질 수도 없습니다.
‘집지명호’ 역시 그렇습니다. 명호가 바로 이 횃불이고 신심이 바로 손입니다. 선도대사께서 『관경소』에서 말씀하시기를, “항상 깨끗한 믿음의 손으로 지혜의 빛을 잡는다(常以淨信心手,以持智慧之輝)”고 하셨습니다. 아미타불의 명호가 바로 지혜의 횃불이므로, 삼계육도의 어둡고 위험한 길을 통과하려면 우리는 오직 이 한 구절 광명명호를 완전히 의지하여 살아서부터 죽을 때까지 끝까지 집지(꽉 잡고)하여 조금이라도 감히 이것을 버리고서 우리의 근기와 상응하지 않는 법문을 배우지 않겠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명호를 집지하는 것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반면에 마음으로 집지하지 않고 딴 생각을 품고서 이리저리 망설이고 있다면 이것은 일심이 아닙니다. 염불이 이어지지 않고 염불이 중간중간에 끊어지며 염불에 전심을 기울이지 않고 염불을 좀 하다가 다시 내려놓고 다른 법문을 배우다 보면 난잡하게 되므로, 그것은 불란不亂이 아닙니다.
【동란하지도 난잡하지 않다】
난難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동란動亂이고, 하나는 난잡雜亂입니다. ‘일심불란’이란 바로 일심으로 명호만을 의지해서 전수염불하며 동란하지 않고 난잡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을 ‘동란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사람들로부터 “아! 아무개야! 당신의 염불은 공부성편功夫成片에 도달하지 못했고 청정심도 없고, 당신에게 아직 번뇌가 있고 아직 죄업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왕생한단 말인가?”라는 말을 들었어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마음이 당황하고 혼란스럽지 않으며, 그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스스로 ‘끝장이야, 왕생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미타불에게 이러한 위신력과 공덕이 있으시고 이러한 크신 서원력이 있으셔서 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흔들려서 “그러네요!”라고 말하지요. 그럼 마음이 혼란스럽게 되므로 일심이라 할 수 없겠지요. 무엇을 ‘난잡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마음이 동란(흔들리지)하지 않으면 행은 틀림없이 난잡해지지 않을 것이고, 마음이 매우 안정적이라면 우리는 착실하게 오로지 이 한 구절 명호만 부를 것입니다. 겉모습이 난잡한 사람은 마음도 틀림없이 동란할 것입니다. 그가 이 한 구절 명호를 부르면서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므로,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바로 “맞아요! 안 되지요.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어떡하긴요? 우선 저와 함께 『지장경』을 독송하여 업장소멸을 합시다”
“좋아요, 가르쳐 주세요” 그 다음은 『지장경』을 독송하게 됩니다.
『지장경』을 독송하는 게 좋을까요, 나쁠까요? 당연히 좋습니다! 그 다음에 『금강경』을 독송해서 지혜가 열리면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그것도 좋습니다. 전부 다 아주 좋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다 좋은데, 최후의 왕생은 어떡합니까? 그 사람 자신은 확신이 서지 않기에 동란하고 난잡하게 되겠지요.
우리 전수염불하는 사람은 오직 한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전념하는데 두 가지 마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⑵ 이역본 『아미타경』
다시 『아미타경』이역본을 보겠습니다. 현장대사께서 번역하신 『칭찬정토불섭수경』에서는 『아미타경』가운데 ‘집지명호’와 ‘일심불란’ 여덟 자를 한데 묶어서 ‘계념불란繫念不亂’이라는 네 글자로 번역하셨지요. 아미타불의 명호를 계념하여 난잡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아주 명백하고 아주 쉽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앞서 말씀드린 ‘집지명호’와 ‘일심불란’은 본래부터 일체여서 따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서 전지명호專持名號가 바로 일심불란이고, 일심불란이야말로 비로소 집지명호입니다.
⑶ 『무량수경』
【아미타불께서 직접 기준을 정하시다】
여러분들께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염불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라는 것은, 이 사바세계에서 어느 분이 우리에게 일러주신 겁니까? 아십니까?
(대중) 석가모니불이십니다!
예, 그렇습니다!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우리에게 일러줄 수 없습니다.
다시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염불왕생과 아미타불 본인이 설정하신 염불왕생은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대중) 다를 수 없습니다!
다를 수가 없겠지요! 아미타불께서 “너희들이 이렇게 염불만 하면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석가모니불께서 “너희들은 반드시 저렇게 염불해야만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도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염불과 아미타불의 48원 가운데서 설정하신 염불은 틀림없이 똑같은 것이어서 절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미타불의 48원 가운데 제18대원을 ‘염불왕생원’이라 부릅니다. 이 원에서는 우리가 응당 어떻게 염불왕생할 것인가에 대해 규정을 해주셨는데, 이것은 아미타불께서 직접 정해주신 기준입니다. 석가모니불이든 시방제불이든 제대보살들이든 염불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법문을 설하신다면 절대 아미타불의 제18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왕생의 근원】
『아미타경』속에서 말씀하신 염불왕생은 당연히 아미타불의 48원 가운데 제18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무릇 석가모니불께서 일대 불교 중에서 극락세계의 장엄을 설하시고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방법 등등을 설하신 내용들은 전부 『무량수경』의 48원을 벗어날 수 없으며, 특히 정토삼경은 더욱 한 맛의 경전이어서 하나의 맛 하나의 성질性質입니다. 예컨대 『아미타경』중의 ‘임명종시에 부처님과 성인 대중들이 그 사람의 앞에 나타나서’, 이 단락의 경문이 바로 48원 가운데 ‘임종 시에 대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제19원의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 제19원이 있었기 때문에 『아미타경』중에 임종의 내영이 있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아미타경』에서 “저 부처님의 국토에는 삼악도가 없느니라. 사리불이여! 그 부처님의 국토에는 악도의 이름조차 없거늘, 하물며 실지로 있겠느냐!”고 설하셨는데, 이것은 48원 가운데 제1원 ‘무삼악도원無三惡道願’과 제16원 ‘국무악명원國無惡名願’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48원 가운데 제1원에서 “내가 성불할 때, 나의 국토에 만약 지옥·아귀·축생 등의 삼악도가 있다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아미타경』속에서 ‘국무악도원’을 설하신 것이고, 제16원에서 “내가 성불할 때, 국토에 오로지 선만 있어서 나쁜 이름조차 들을 수 없을 것이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아미타경』에서 “악도의 이름조차 없거늘 하물며 실지로 있겠느냐”고 설하신 것이지요.
아무튼 극락세계의 갖가지 장엄한 모습에 대한 기술들은 전부 48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염불왕생을 설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48원 가운데 제18원 ‘염불왕생원’의 내용입니다. 선도대사께서 『아미타경』의 종지에 대해 해석하시면서 말씀하시길,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왕생한다專念彌陀名號得生”고 하셨는데,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제18원 ‘염불왕생원’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토종을 배우고 염불을 배우려 한다면 아미타불의 서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그 이치가 자명합니다.
【판매업자의 비유】
예컨대 한 가지 제품에는 생산업자가 있고 판매업자가 있습니다. 판매업자가 판매하는 제품이 바로 생산업자가 생산한 것인데, 어떻게 판매업자가 판매한 제품이 생산업자가 생산한 제품과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다르다면 이것은 판매업자가 위조제품을 만들어서 소비자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아미타불은 생산업자이시고, 석가모니불과 육방의 항하사 제불은 모두 판매업자들입니다. 그 분들이 무엇을 판매합니까? 육자명호를 판매합니다. 그분들이 말씀하신 염불방법은 아미타불 본인이 세우신 제18원을 벗어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의 근원 하나의 맛으로서 절대 거짓이 섞여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선도대사께서 『관경』을 해석하시고 『아미타경』을 해석하시는 것은 모두 아미타불의 염불왕생의 본원의 입장에 서계시는 것입니다.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염원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시시각각 단단히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48원을 기준으로 삼아서 우리들이 왕생하는 길을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제18원의 경문】
제18원에서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내지 십념’만 하면 반드시 왕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념十念’에 대해 선도대사께서 ‘십성十聲’으로 해석하신 것은, 입으로 명호를 부르는 지명염불持名念佛입니다. 『아미타경』에서도 ‘명호를 집지할 것’을 말씀하시고, 『관경』에서도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닐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런 것은 모두 일치한 것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경』속에서 지명을 ‘일심불란’하게 해야 한다고 설하셨고, 아미타불께서는 제18원에서 칭명을 하는데 ‘지극한 마음至心·믿고 기뻐함信樂·왕생을 하고자欲生’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두 가지를 대조해 보면 ‘일심’이란 바로 ‘지심·신락·욕생’하는 마음, 믿고 발원하는 마음이며, 어떠한 선정의 마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선도대사께서 어떨 때는 ‘일심으로 믿고 기뻐함一心信樂’을 말씀하시고, 어떨 때는 ‘일심으로 왕생을 염원함一心願生’을 설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여 의심하지 않고 퇴전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일심불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삼배왕생문】
『무량수경』하권의 ‘삼배왕생문三輩往生文’ 상배·중배·하배에서 모두 ‘한결같이 오로지 무량수불을 부를 것(一向專念無量壽佛)’을 말씀하셨습니다. 선도대사께서 해석하시기를, “일체 중생의 근성이 달라 상중하가 있는데, 그 근성에 따라서 부처님은 모두 오로지 무량수불의 명호를 부를 것을 권유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일향전념’이야말로 석가모니불께서 일체 중생에게 염불을 권유하는 총강령과 총요구이며, 당신이 상근기든 중근기든 하근기든 간에 모두 ‘일향전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미타경』에서 상대하고 있는 근기들이 삼배의 밖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럼 ‘일심불란’이 바로 ‘일향전념’입니다.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향하되 다른 불보살님들을 향하지 않기 때문에 ‘일향’이 바로 ‘일심’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다른 수행과 다른 법문을 섞지 않기 때문에 ‘전념’이 바로 ‘불란’, 난잡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향전념’이 바로 ‘일심불란’이다! 이것 역시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⑷ 『관경』
다시 『관경』을 보겠습니다. 『관경』에서 비록 정선십삼관定善十三觀과 산선삼복업散善三福業을 설하셨으나, 마지막 ‘유통분’에서 석가모니불께서 아난에게 부촉하신 것은 13정관도 아니요 산선삼복도 아니며, 『관경』의 뜻을 드러내는 순서에 따라 마지막 관법·마지막 일품인 하하품(하품하생)의 칭명염불을 부촉하시면서 “아난아! 그대는 무량수불의 명호를 잘 지녀야 하느니라 阿難!汝好持無量壽佛名”고 설하셨습니다. 하하품의 지명염불은 어떠한 지명이었습니까? 경문에서 말씀하셨지요.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여 십념을 구족하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至心令聲不絕,具足十念,稱南無阿彌陀佛” 이것은 『아미타경』의 “명호를 집지하여 하루나……이레 동안 일심불란하면執持名號,若一日……若七日,一心不亂”과 『무량수경』‘제18원’에서 말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내지 십념으로至心信樂,欲生我國,乃至十念”와 모두 동일한 함의입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정토삼경이고, 똑같이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것이며, 똑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지념持念할 것을 설하셨고, 똑같이 아미타불의 제18원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일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로 대조를 해본다면 『무량수경』제18원에서 말하는 ‘십념’의 ‘염念’과 『관경』하하품에서 말하는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함’의 ‘칭稱’과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집지명호’의 ‘집지執持’는 동일한 부류로서 모두 염불하는 방식,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말하므로, 이른바 지명염불이란 실상實相·관상觀想·관상觀像·참구參究 등등의 염이 아닙니다.
제18원의 ‘지심·신락·욕생’과 『관경』하하품의 ‘지심’, 『아미타경』의 ‘일심’도 동일한 부류로서 모두 염불하는 심리, 즉 믿음과 발원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선정·청정·망념을 제거하는 등등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하품의 중생이 임종 시에 지옥의 광경이 전부 나타났는데, 그에게 무슨 선정심·청정심 등등이 있겠습니까? 그에게는 단지 일심으로 구원을 바라고 일심으로 의지하려는 마음, 즉 우러러 구제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제18원의 ‘내지’와 『관경』하하품의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함’과 『아미타경』의 ‘불란’은 동일한 부류로서 모두 염불하는 모습과 형태, 즉 전일하여 잡다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선도대사님은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함’을 ‘소리소리 이어지게聲聲相續’라고 해석하셨지요.
나아가 ‘내지 십념’과 ‘십념을 구족하게’와 ‘하루나……이레 동안’도 같은 부류로서 모두 염불하는 시절을 말하는 것인데, 일평생의 염불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십념·하루·이레에 국한되지 않고, 단지 중생들이 염불을 만나는 시간이 다르고 수명의 길고 짧음이 다르기 때문에 표현을 달리한 것뿐입니다. 선도대사님은 전체적으로 “위로는 백년을 다하고 아래로는 칠일·일일·십성·삼성·일성 등(上盡百年,下至七日、一日,十聲、三聲、一聲等)”이라 해석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삼부경에서 설하신 염불의 시절에 비록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지만 전부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지목하는 바도 모두 같은 것이어서 모두 일평생의 염불입니다. 이른바 “한번 발심하고 나서 맹세코 이번 생을 마칠 때까지 퇴전하지 않으며 오직 정토를 기약으로 한다(一發心以後,誓畢此生,無有退轉,唯以淨土爲期)”는 것이지요.
이렇게 『아미타경』과 『관경』을 비교해 보면 ‘집지명호’가 바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고, ‘일심불란’이 바로 ‘지극한 마음으로 끊이지 않는 것’이요, 바로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구제에 귀명하고 의지하여 끊임없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하며 잡다하게 뒤섞지 않는 것입니다. 역시 아주 쉬워서 어렵지 않습니다.
하하품의 중생이 비록 임종 시 죽음의 고통에 시달려서 마음이 한없이 두렵고 당황스러워 전혀 선정이 없었지만 그는 일심불란하게 염불을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을 바라기 때문이지요! 남에게 목숨을 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일심인데, 어떻게 이심二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심으로 남이 구해주기를 바라므로, 기타 개인적인 생각은 조금도 섞이지 않을 겁니다. ‘남의 구제가 필요 없이 나 스스로 나 자신을 구제할 수 없을까? 상대방이 나를 구제할 수 있을까? 나를 구제할 수 없다면 어떡하지? 나 스스로 다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은 모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연히 일심불란이 되는 것이지요.
하하품에서 임종 시 고통에 시달리던 중생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할 수 없겠습니까? 정말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공부가 부족해서 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하하품의 사람에게 무슨 공부가 있습니까? 구제를 바라는 마음이 없고 귀명하지도 착실하지도 않고 도리어 교만하다면, 이것이 바로 이심이고 난잡한 것이어서 일심불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선도대사께서 우리에게 “자신은 현재 죄악생사범부로서 광겁 이래 항상 침몰하고 항상 유전하며 출리의 기연이 없다는 것을 결정코 깊이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끌어주신 것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깊이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바로 하하품의 중생입니다.
3) 조사의 해석
⑴ 선도대사의 『법사찬』
‘일심불란’에 대해 선도대사님 역시 당신의 해석이 있습니다. 선도대사님은 『법사찬』속에서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專復專’는 세 글자로써 ‘일심불란’을 해석하셨지요.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네. 敎念彌陀專復專。
앞에서 우리도 배웠었지요. 석가모니불께서 우리에게 아미타불을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어떻게 부르라고 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일일에서 칠일 동안 일심불란’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지요. ‘일심불란’에 대해 선도대사님은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고 해석하셨는데, 우리더러 전일하게 또 전일하게 염불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전일하게, 더욱 더 전일하게 하라는 말씀인데요, 마음도 전일하고 행도 전일하고, 안에서도 전일하고 바깥에서도 전일하며, 사람들 앞에서도 전일하고 사람들 뒤에서도 전일하며, 현재도 전일하고 장래에도 전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의 ‘전專’자입니다. ‘일심’이 바로 전심이고, ‘불란’이 바로 뒤섞이지 않는 것, 기타 법문을 잡행잡수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간단하여 ‘일심불란’이 바로 ‘전專’입니다.
⑵ 선도대사의 『관경소』1
『관경사첩소』제1권 <현의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들으면 곧 마땅히 명호를 집지하여 일일에서 칠일까지 일심으로 왕생을 염원해야 한다. 그러면 임종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인대중들과 함께 영접하여 왕생한다. 若有善男子、善女人, 聞說阿彌陀佛, 即應執持名號, 一日乃至七日, 一心願生; 命欲終時,阿彌陀佛,與諸聖眾, 迎接往生。
이 단락의 선도대사님의 해석에 의하면 ‘일심불란’이 바로 ‘일심으로 왕생을 염원하는 것(一心願生)’임을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집지명호’ 앞에다 선도대사님은 ‘곧 마땅히(卽應)’ 두 글자를 더하셨는데, 이것은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권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른바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네’의 ‘가르침’입니다.
⑶ 선도대사의 『관경소』2
『관경소·산선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범부들이 일일에서 칠일까지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하면 반드시 왕생한다. 一切凡夫,一日七日, 一心專念,彌陀名號,定得往生。
선도대사께서 ‘집지명호, 일심불란’이라는 경문을 한데 합쳐서 ‘일심전념一心專念’으로 해석하셨는데 어려울까요? (대중) 어렵지 않습니다.
‘일심전념’은 조금도 어렵지 않잖아요! 당신이 이 명호를 부르기를 원치 않으면 몰라도. 물론 어렵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고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전념할 수 없습니다. 이 어려움은 법문이 어려운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한 구절 명호를 부르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여섯 자만 부르면 되거든요. 만약에 당신더러 반드시 『법화경』·『화엄경』등을 외우라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여섯 자는 아무리 어렵다 해도 누구나 외울 수 있기에 일심으로 전념하기만 하면 됩니다.
⑷ 선도대사의 『관념법문』
『관념법문』에서도 말씀하셨지요.
만약 어떤 남자와 여인이 하루나 이레 동안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한다면, 그 사람이 임종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자연히 영접하러 오셔서 곧바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한다. 若有男子、女人,或一日、七日, 一心專念, 彌陀佛名。 其人命欲終時,阿彌陀佛與諸聖眾, 自來迎接, 即得往生,西方極樂世界。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선도대사님은 똑같이 ‘일심전념’을 가지고 지명의 ‘일심불란’을 해석하셨는데, 역시 하나의 ‘전專’이었습니다.
⑸ 선도대사의 『왕생예찬』
『왕생예찬』입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들었다면 곧 마땅히 명호를 집지하여 하루나 이틀이나 이레 까지 일심으로 칭명염불을 하여 난잡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임종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곧바로 저 나라에 왕생하게 된다. 若有眾生,聞說阿彌陀佛, 即應執持名號, 若一日,若二日,乃至七日, 一心稱佛不亂; 命欲終時,阿彌陀佛,與諸聖眾, 現在其前; 此人終時,心不顚倒,即得往生彼國。
선도대사님은 경문 ‘일심불란’의 중간에다 두 글자 ‘칭불稱佛’을 더하여 ‘일심칭불불란’이라 하셨는데, 이렇게 해서 앞의 문장을 받아서 뒷 문장을 잇는 작용을 일으키니, 그 의미는 아주 분명합니다. 일심으로 무엇을 합니까? 일심으로 칭불稱佛을 합니다. 칭불을 어떻게 합니까? 칭불을 불란不亂하게 합니다. 즉 한 마음 한 뜻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서 난잡하지 않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하고 아주 분명하지 않나요? 어디에 그처럼 심오하고 복잡한 게 있습니까!
【한 글자――전專】
우리가 앞서 선도대사님께서 하신 ‘일심불란’에 대한 해석을 보면 모두 아주 간단하여 조금도 복잡하지 않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어떻게 선정을 닦아서 마음을 쉬어야 하고 망념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며, 도처에서 아주 간절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일심으로 전념해야 한다. 전專! 전專!” 아무튼 선도대사께서 ‘일심불란’을 해석하시는 데는 하나의 ‘전’자를 강조하십니다. ‘전’이 바로 ‘일심’이고, ‘전’이 바로 ‘불란’이므로, 이는 석가모니불께서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신 ‘일향전념’에 부합합니다.
【서방정토는 어지러운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라 선도대사께서 특별히 설명도 하셨는데,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경』에서 특별히 서방극락세계를 가리켜 보이시며 우리더러 왕생하라고 타이르신 이유가 바로 극락세계는 ‘범부들의 어지러운 생각凡夫亂想’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법사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불국토가 다 장엄하고 청정하여 범부의 어지러운 생각으로 왕생하기 어렵도다. 여래께서 특별히 서방국을 지목하시니 여기서부터 십만 억(불국토)을 지나야 하느니라. 一切佛土皆嚴淨, 凡夫亂想恐難生; 如來別指西方國, 從是超過十萬億。
모든 제불의 국토는 전부 다 매우 장엄하고 청정하지만 어지러운 망상으로 분분한 범부들이 왕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불국토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마음을 고요히 하여 성자의 경지를 깨달아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은 말법시대 오탁악세 범부들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석가모니불께서 특별히 십만억 불국토 밖에 있는 서방극락세계를 가리켜 보이시며 우리더러 왕생하라고 타이르시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극락세계는 범부들의 어지러운 생각을 싫어하지 않고, 마음을 쉬고 망념을 제거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선도대사님은 아미타불의 화신답게 그분의 해석은 우리가 안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천 가지 만 가지 해석들은 설명하면 할수록 복잡하고 설명하면 할수록 심오해서 아미타불의 본원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우리의 근기에도 부합하지 않아 맨 마지막에는 왕생의 몫을 잃게 됩니다.
【삼경의 종지가 일치하다】
선도대사님의 해석에 의거하면 『아미타경』·『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에서 설하신 염불은 완전히 일치하여 모두 지명持名을 말하고 모두 아주 쉽고 모두 아미타불의 제18원 ‘염불왕생원’을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무량수경』에서는 왕생이 아주 쉽다고 말하는데, 『관경』에서 말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관상觀想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것도 역시 어려운 것이어서 선정에 도달하여 망념을 쉬어야 하고……’ 이렇게 되면 일치하지가 않겠지요.
선도대사께서 이 삼부경의 사상을 해석하신 것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일심불란’ 바로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신 ‘일향전념’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보시하는 비유】
선도대사님의 해석은 우리로 하여금 안심을 하게 해줍니다. 염불로 안심하면 옳은 것입니다.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염불을 하면서 안심을 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안심하지 못했었습니다. ‘염불하면 정말로 왕생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왕생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럼 큰 일 난거 아니야?’
안심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여 안심을 할까요? 우리가 안심을 하려면 안심할만한 물건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안심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배가 고파서 곧 죽게 생겼는데, 만약에 당신이 그에게 사과 한 알을 주든가 빵 한 조각을 주든가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말로만 “아무개님, 안심하세요! 절대 죽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빵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안심할 수 없겠지요. 그를 안심시키는 것은 아주 간단한데, 그에게 빵만 주면 안심시킬 수 있습니다.
‘걱정’으로부터 ‘안심’으로 나아가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공부에 의지하려 합니다. “제 염불이 공부성편功夫成片이 되고 몽매일여夢寐一如가 되면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갈수록 걱정만 늘어나게 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웬만하면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좋아요, 삼년을 노력해 보니까 삼년 뒤엔 더욱 걱정이 됩니다. “아아! 삼년이 지났는데도 도달하지 못했구나!” 또 삼년이 지나 최후에는 포기를 해버립니다. 애초에는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두려운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까요? 아미타불의 서원이 우리로 하여금 안심할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보증하시기를, “아무개야, 너희가 나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걱정할 거 없다. 임종 할 때 내가 너희를 영접하러 올 테니 반드시 나의 정토에 왕생할 것이다” 우리는 그래도 또 묻습니다. “만에 하나 왕생할 수 없으면요?” “만에 하나 왕생할 수 없다면 내가 책임지겠다!”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너희가 왕생할 수 없다면 나는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다. 내가 성불의 공덕으로써 너희의 왕생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 나는 이 책임을 질 수 있다”
여러분! 오직 아미타불만이 우리의 이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왕생할 수 없다면 그분께서 전부 책임을 져주시겠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책임질 수 없으므로 우리가 왕생할 수 없다면 여전히 왕생할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왕생이라는 이 일은 전적으로 아미타불께서 처리해주시는 것입니다. |
⑹ 원신대사의 안심법어
일반인들은 염불을 하더라도 항상 ‘망상이 있고 망념이 있어서 마음이 청정하지 않은데 어떻게 왕생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걱정을 합니다. 우리는 다음으로 원신源信대사님의 염불법어 한 단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망념은 본래 범부의 본체여서 망념밖에 따로 마음이 없으니,
임종에 이를 때까지 여전히 한결같은 망념범부라네.
이를 알고 염불하면 곧 (부처님의) 영접을 받게 되니,
연화대에 오를 때 망념은 각심覺心으로 바뀐다네.
망념으로부터 나온 염불은 마치 연꽃과도 같아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아니하여,
틀림없이 왕생하니 의심하지 말지어다.
망념이 많음을 싫어말고 마땅히 믿음이 얕음을 한탄하라!
그런 까닭에 깊은 믿음으로 항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지어다.
妄念原是,凡夫本體,妄念之外,別無心也。
直至臨終,猶是一向,妄念凡夫。
知此念佛,即蒙來迎。
乘蓮台時,能翻妄念,成爲覺心。
從妄念中,所出念佛,猶如蓮花,不染汙泥。
決定往生,不可有疑。
莫厭妄念多,應歎信心淺。
故以深信心,常稱彌陀名。
이 법어는 이해하기가 아주 쉬워서 제가 이렇게 읽어내려 가면 아마 어떤 분들은 벌써 그 뜻을 이해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알아듣기가 아주 쉽고 우리를 아주 안심하게 해주지요.
‘망념은 본래 범부의 본체여서 망념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 우리 범부들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중생입니까? 경문이든 아니면 조사님의 해석이든 ‘범부’ 앞에다 왕왕 ‘죄업’ 짓는 범부·‘윤회’하는 범부·‘망념’의 범부·‘난상亂想’의 범부·‘부정不淨’한 범부 등등의 수식어들을 갖다 붙이는데, 이것은 우리의 본래면목입니다. ‘망념은 본래 범부의 본체이다’, 범부라면 곧 망념을 본질로 삼고 체성體性으로 삼는다는 것이고; ‘망념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 망념을 제외하면 따로 마음이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임종에 이를 때까지 여전히 한결같은 망념범부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당신은 망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당신이 바로 망념의 범부라는 것입니다. 망념을 여의었다면 성인이지 절대 범부가 아니지요.
【흙으로 빚은 소상과 숯의 비유】
예컨대 진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은 진흙으로 빚었기 때문에 진흙이 바로 소상의 본체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그것을 씻는다 해도 깨끗이 씻을 수 있겠습니까?
용왕묘龍王廟 속에 진흙으로 빚은 용이 있는데, 그 위에 먼지가 있어서 당신이 그것을 깨끗이 씻으려 한다면, 가장 안쪽에 있는 용의 힘줄까지 씻는다 해도 여전히 흙일 것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거니까요. 따라서 아무리 어떻게 해봐도 그것은 역시 흙을 벗어날 수 없겠지요.
우리 범부들이 바로 망상으로 이루어졌기에 망념이야말로 우리의 본체이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떻게 해봐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가상假相이 나타나 좀 청정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거친 망념이 조금 적어졌을 뿐, 미세한 망념은 여전히 매우 많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알아차림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망념)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예컨대 숯이 한 덩어리가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든 간에 모두 검정색이어서 당신이 아무리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으며, 아무리 씻어도 숯은 흰색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씻어도 여전히 검정색이고, 그것으로 그림을 그려봐도 여전히 검정색 선이 나올 겁니다.
우리의 망상심은 숯과도 같아서 우리가 아무리 어떻게 해봐도 전부 암흑·무명·죄를 짓는 중생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깊이 인식하여 거기서 쓸데없는 공을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수행하다 보면 때가 되면 괜찮아지겠지. 그때 가서 다시 말하자……’ 만약에 정토법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고, 우리는 죄를 짓고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있는 범부이므로 오직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병이 위중함을 아는 비유】
따라서 선도대사님은 두 가지 깊은 믿음을 강조하시는데, 첫 번째가 자신은 죄악생사범부로서 윤회를 벗어날 방법이 없고 오직 절망의 외길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조건 하에서만이 당신은 비로소 아미타불의 서원을 완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이처럼 죄를 짓고 타락하고 출리의 기연이 없는 범부임을 믿지 못한다면, 아미타불에 대한 당신의 신심에는 힘이 없을 겁니다.
예컨대 환자가 자신의 병이 위중하여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대해 중시하지 않고 건성건성 들을 겁니다. “아이구! 저는 아주 건강해요! 아직 괜찮은 거 같아요……” 그러다가 일단 자신의 수명이 곧 다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누군가로부터 “이 분은 신의神醫여서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의사가 ‘흥’하고 코 소리 한 번만 내도 모두 자세히 들을 것입니다. “아! 방금 무슨 약을 말씀하셨지요?” 사실 그 의사가 재치기 한번 한 것뿐인데도 그는 전부 자세히 들으려 합니다.
우리가 만약 느긋하게 ‘나는 자신을 의지해도 아마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주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 법문에 대해 존중하지 않게 되고 쉽게 소홀히 하게 되겠지요.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교만하고 게으른 자는 이 법을 믿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통째로 내려놓다】
인광대사님에게 두 구절 말씀이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통째로 내려놓고, 철저하게 기댄다.
通身放下, 徹底靠倒。
통째로 내려놓으려면 솔직해져야 하고 자신은 죄를 짓는 범부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그런 교만한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통째로(通身)’는 우리의 몸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을 말하는데, 신체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가리킵니다. 당신이 온몸을 ‘통째로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철저하게 기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들 모두 밤이면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럼 매일 밤 잠을 잘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온몸을) 통째로 내려놓고 (침대에) 철저하게(완전히) 기댈 것’입니다. 몸을 반쯤 내려놓고 반쯤 내려놓지 않고, 반쯤 기대고 반쯤 기대지 않는다면 잠을 잘 수가 없겠지요. 그런 자세로 어떻게 잠을 잡니까? 그 자세로는 굉장히 힘들어서 2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통째로 내려놓는다’면 어디에다 내려놓아야 할까요? 아미타불의 서원 속에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아미타불의 서원만이 의지할 수 있고 보증할 수 있으니까요. 아미타불께서는 당신의 대비원력으로써 말씀하십니다. “시방의 중생들아, 내가 너희를 구제하겠다. 너희의 죄업을 내가 감당하고, 너희에게 공덕이 없으면 내가 너희를 위해 성취하고, 너희가 타락하려 한다면 내가 너희를 건져주고, 너희가 왕생할 수 없으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러 오겠다. 너희는 단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망념이 각심으로 바뀌다】
우리가 이미 자신이 이러한 범부임을 확실히 인식하였다면 우리는 망념범부의 신분으로써 아미타불을 불러야 합니다. ‘망념범부가 이를 알고 염불하면 곧 (부처님의) 영접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이처럼 죄를 짓는 범부·망상이 분분한 범부·시시각각 망념이 끊이질 않는 범부라는 사실을 알고서 염불만 한다면 임종 시에 아미타불께서 영접하러 오신다는 것이지요.
‘연화대에 오를 때, 망념이 각심으로 바뀐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실 때, 우리는 아미타불의 연화대에 올라앉게 되는데, 바로 이 때 찰나 간에 대해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셨지요. “임종할 때 성중들이 연꽃을 들고 나투시니, 심신이 용약하여 금색 연꽃에 앉게 되는데, 앉는 순간 바로 무생법인 얻고, 일념 사이 영접하여 부처님 전에 이른다네” 연화대에 올라앉는 순간 바로 무생법인을 얻고 당장 환하게 큰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망념들이 즉각 분쇄되어 밝게 빛나는 정각正覺의 마음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의 입장에서는 어디에 깨달음의 마음이 있겠습니까? 아미타불의 접인(영접)을 받아서 ‘연화대에 오를 때 망념이 각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연꽃이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는 비유】
다음 몇 구절들은 특히 우리로 하여금 위안과 감동을 느끼게 해줍니다. ‘망념으로부터 나온 염불은 연꽃과도 같아서 더러운 진흙에 물들이 아니한다’, 우리에게 비록 망념이 있다지만 우리가 망념이 가운데서 내는 염불소리,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우리의 마음이 비록 망념으로 가득하여 진흙과 같이 더러우나, 우리가 부르는 이 한 구절 명호 자체는 마치 청정한 연꽃처럼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고 미묘하고 향기롭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다들 느낌이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더러운 것이고 오염된 것이고 망념이 있는 것이지만 이 명호는 우리의 망념으로부터 물들지 않기 때문에 정토종을 ‘연종蓮宗’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연꽃의 특징이 바로 ‘더러운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 것’인데, 어느 곳에서 진흙이 나옵니까?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진흙처럼 더러워서 탐진치의 번뇌가 있습니다. 어느 누가 탐진치의 번뇌가 없겠습니까? 없는 분이라면 곧 아라한일 겁니다.
우리 같이 탐진치 번뇌가 있는 마음은 도리어 염불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염불합니까? 왜냐하면 죄업이 있어서 해탈을 바라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서원을 의지하여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연못 속의 진흙이 도리어 연꽃이 자라는데 자양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청신한 연꽃이 진흙으로부터 독립해서 나오게 되며 미묘한 향기를 풍기게 되지요.
우리의 마음이 비록 오염되어 있다지만 우리가 부르는 명호는 청정한 것입니다. 육자명호의 공덕과 향기는 우주법계에 가득 차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망념으로부터 나온 염불은 연꽃과 같아서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속지 말아야 한다】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이 한 송이 연꽃, 이 한 구절 육자명호가 우리를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염불은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연꽃을 봐야 하고 우리의 코는 연꽃의 향기를 맡아야 합니다. 다들 연못가에 가셔서 자신의 코를 진흙 속에다 박아 넣으면 안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맡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악취일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의 코는 연꽃의 향기를 맡아야 합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염불을 하면서 ‘비록 나의 마음이 오염되어 있고 죄업이 있고 청정하지 않다지만, 내가 부르는 이 한 구절 명호는 연꽃과 같이 향기로워서 이 명호가 나를 왕생하게 하는 것이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자신의 마음을 생각해야 합니까? 이 마음은 우리가 던져 버려야할 물건, 우리가 갖다버려야할 물건이거든요! 우리는 생멸하는 허망한 이 마음을 의지해서 왕생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이 마음을 꺼집어 내어 깨끗이 닦고 난 다음에 다시 왕생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생멸이 없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명호를 의지하여 왕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방향과 관념이 잘못 되어서 항상 자신의 망상심을 가지고 거기서 꾸미고 다듬고 하는데, 이는 마치 이 연꽃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진흙 속에다 넣은 다음에 이 진흙을 가지고 거기서 씻고 걸러내고 해서 한 송이 연꽃모양으로 만들려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설사 이 진흙을 가지고 한 송이 연꽃으로 만든다하더라도 거기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진심眞心이고, 하나는 망심妄心입니다. 망심으로 일처리를 한다면 나귀의 해 말의 달(驢年馬月)이 되더라도 역시 해탈할 수 없습니다. 범부에게도 비록 전부 진심불성眞心佛性이 있다지만 확철대오하여 부처님과 같은 큰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진심불성이 드러나질 않습니다. 평소 일처리를 할 때 모두 망심을 사용하는데, 이 망심을 당신이 아무리 짓누르고 아무리 움직이지 않게 해봐도 그것은 여전히 해탈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이 이미 확철대오하여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진심과 망심의 차별을 부숴버리고 망심이 본래부터 진심이었다는 것을 철저히 증득해야만 비로소 해탈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겨우 선정의 공부, 또는 일종의 비교적 청정하고 경안(輕安:몸과 마음이 상쾌하고 편안한 상태)한 상태를 가지고는 아직 거리가 너무나 멉니다. 그것은 해탈과는 전혀 무관하여 해탈의 원인이 아닐뿐더러 도리어 윤회의 업이 됩니다.
우리를 해탈하도록 해주는 것, 우리를 생사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두 가지 일입니다. 진흙 속에서 자라난 연꽃, 그 연꽃이 우리를 구제할 수 있듯이, 망상심 가운데서 나온 부처님의 명호, 그런 부처님의 명호가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명호가 바로 이 망상심을 구제하려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우리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바로 입을 열 때마다 연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 얼마나 자재합니까! 당신이 구태여 자신의 그 마음을 상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무량수경』속에서 석가모니불께서는 네 글자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염불하는 비결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일향전념’하라.
一向專念。
‘일향’이란 바로 유일하게 부처님의 방향으로 향하되 자신의 방향으로 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망상인지 아니면 청정한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눈빛은 부처님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다시 우리 범부 쪽으로 돌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겠지요.
다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염불을 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염念한다면, 그것으로 어떻게 왕생합니까?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든 더럽든 우리 모두 거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윤회를 해온 이유가 바로 우리의 이 마음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보세요, 지금 이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어요! 이것은 하나의 좋은 마음이기에 나는 이 마음이 필요해요…… 지금은 매우 번뇌하고 있고 출렁이고 있거든요! 이것은 나쁜 마음이기에 나는 이 마음을 필요치 않아요!’ 그러면 당신은 이 마음에게 속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이 출렁이든 망상·잡념이 있든 아니면 비교적 안정적이든, 이것은 전부 망념이고 이것은 전부 번뇌의 마음이어서 전부 던져 버려야 할 물건들이기에, 우리는 유일하게 이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전부로써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겁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전부 상관하지 마세요. 번뇌가 오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번뇌가 가더라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바람을 따르는 구름의 비유】
번뇌란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과 같을까요? 번뇌는 마치 허공중에서 바람을 따라 지나가는 구름 한 점과 같은 것인데, 당신이 염불을 한다면 염불만 하면 되지 이 구름을 간섭할 필요까진 없잖아요? 번뇌가 왔다고 해서 ‘아, 이 구름은 흰색이네! 흰 구름이 왔으니까 내가 염불하면 아마도 왕생할 수 있을 거야! 어! 다시 검은 구름이 왔네! 검은 구름이 왔으니까 아마도 왕생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틀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흰 구름이라 부를까요? ‘내가 염불하는데 조금 청정해진 것 같다’고 느끼는 것, 이것이 흰 구름입니다. ‘나의 마음이 청정하지가 않아, 아이구! 애들이랑·가정이랑! 직장과 사업……수많은 일들로 진짜 짜증나네’, 이것은 검은 구름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아서 오면 오는 것이고 가면 가는 것이기에, 우리의 왕생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이 염불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염불하는 마음을 멈추고서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면 잘못된 것이지요!
따라서 당신의 그 마음을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그것을 간섭해 봐도 당신을 위하여 체면을 세워줄 수 없을뿐더러 당신은 거기에 속게 됩니다. 당신이 그것을 간섭할수록 그것은 더욱 득세하게 되고, 그것이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낄수록 당신은 그것에 대해 더욱 방법이 없게 됩니다. 당신이 그것을 철저하게 꿰뚫어 보고, 당신이 그것을 철저하게 던져 버리고, 당신이 그것을 철저하게 냉대했을 때, 그것은 고분고분해지며 말을 듣게 됩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 할머니가 되신 분들도 계실 텐데, 어린 손자 녀석이 거기서 울고 있다면 할머니가 가셔서 그를 달래주려 할 겁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달랠수록 그는 더욱 울고, 더욱 울수록 할머니는 더욱 달래주게 되며, 달랠수록 그는 더욱 울게 됩니다. 나중에 할머니가 방법이 없어서 아예 그대로 내버려두지요. 그러니까 조금 울다가 울음을 그쳐버립니다.
우리의 번뇌도 이와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번뇌는 우리 자신이 키운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마다 모두 통통한 번뇌아기를 키우고 있거든요. 우리는 매일매일 그것을 키우면서 씻어주고 만져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던져 버리시고 거들떠보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아미타불이 계시므로, 우리는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는데, 이것을 ‘일향전념’이라 부릅니다. ‘망념으로부터 나온 염불은 마치 연꽃과 같아서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습니다’
【염불하여 방광을 한 이야기】
이쯤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나를 해드릴 텐데요, 이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대만의 어느 법사님 한분이 미국에서 홍법을 하고 계실 때였는데, 코쟁이 미국인이 법문을 들으러 오셨답니다. 법문을 다 듣고 나서 이 미국인은 법사님께 본인은 전문적으로 신통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도 어느 정도 신통력이 있어서 그가 염불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염불만 하면 광명을 토해낼 수 있는데, 염불을 한번 하면 한줄기 빛이 입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당나라 때 선도대사님께서 염불을 한번 하실 때마다 한 줄기 빛이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의외로 우리 자신도 방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선도대사님은 삼매를 증득하신 성자이셨기에 그분이 염불하며 놓은 광명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염불하여 놓은 광명은 신통이 있는 사람이나 영계의 중생들, 그리고 불보살님들은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놓은 광명은 어떨까요?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 있는 사람이 염불하면 그 광명이 매우 커서, 어느 정도까지 크냐하면 마치 지구전체를 감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지구를 한번 안아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여러분들도 방광을 한번 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성심껏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성심이 없는 사람이 염불하면 어떨까요? 역시 방광을 하지만 광명이 아주 작아서 약간 반짝·반짝하면서 마치 등잔불처럼 언뜻 보이다가 바로 사라져버린답니다.
그럼, 무엇을 성심이 있다고 말하고, 무엇을 성심이 없다고 말할까요? 성심이란 바로 믿음이요, 바로 전專입니다. 당신이 의심을 하고 잡다하게 한다면 성심이 부족한 거예요! 믿고 따르고 전수염불하며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중해서 염불을 한다면, 그렇게 해서 나온 광명은 아주 큽니다. 그러나 만약에 단지 인연만 맺을 정도로 ‘남들이 부르니까 나도 한 마디 부르지만 도대체 극락세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왕생할 수 있을까요? 아! 운에 맡기는 거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심이 부족한 것이어서 염불의 광명은 매우 작습니다.
따라서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비록 죄업을 짓는 범부이기는 하나, 우리도 이 한 구절 명호를 부르면 한 줄기 광명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금 말씀드렸듯이 ‘망념으로부터 나온 염불은 마치 연꽃과 같아서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염불의 공덕은 무량무변하여 어떠한 중생이라도 진정으로 왕생을 원하고 진정으로 염불을 한다면, 왕생하지 못하는 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의사와 환자의 비유】
따라서 ‘결정코 왕생하니 의심하지 말지어다. 망념이 많음을 싫어말고 마땅히 믿음이 얕음을 한탄하라! 그런 까닭에 깊은 믿음으로 항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지어다.’ (우리는 마침 거꾸로 되어 있지요) 대사님은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망념이 많은 것을 싫어하지 말라. 싫어해도 방법이 없다. 망념이란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당신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기 때문에 그것을 싫어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은 마땅히 역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우리의 믿음이 얕은 것을 한탄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너희에게 망념이 많아서 내가 너희를 구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정반대로 아미타불께서는 ‘너희에게 망념이 많기에 내가 너희를 구제하려는 것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들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망념이 많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해주시려는 것인데, 우리에게 망념이 없다면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라한이라면 이미 생사를 벗어났을 테니까요.
이는 마치 의사와 같아서 의사는 환자의 병을 봐주는 사람이지 건강한 사람의 병을 봐주는 사람은 아니지요. “당신이 환지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의 병을 봐주는 거예요”
아미타불은 대의왕이신데, 우리에게 탐진치 번뇌가 있고 우리에게 망념이 있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내가 너희를 구제하려 하니 너희들은 나의 육자명호를 불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망념이 너무 많다고 싫어할 게 아니라 마땅히 우리의 믿음이 너무 얕은 것에 대해 슬퍼하며 탄식해야 합니다. 망념이 많아도 왕생을 장애하지 않지만, 믿음이 얕아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지 못하고 칭명하여 왕생하는 것에 대해 의심한다면 왕생을 장애하게 됩니다.
만약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가셨다면 당신이 거기서 “보세요, 제가 이렇게 많은 병을 앓고 있어서 너무 짜증이 납니다”라며 원망할 게 아니라 마땅히 고명한 의사선생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어차피 병에 걸린 이상, 이럴 때일수록 고명한 의사선생님을 찾아야 하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망상잡념이 있다고 해서 의심을 합니다. ‘제가 이렇게 염불해서 왕생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염불에 대해 의심을 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도리어 의심을 한다면, 마땅히 슬퍼하며 탄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일수록 염불해서 왕생하기가 딱 좋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깊은 믿음으로써 항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깊이 믿어서 의심하지 않는 마음으로써 항상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큰 길을 다니는 행인의 비유】
다들 오늘부터 집에 돌아가신 뒤에는 모든 망념들을 털어서 던져버리고 상관하지 마십시오.
다들 무엇을 ‘상관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제가 상관하지 않아도 망념은 저절로 찾아옵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면 오는 것인데, 왔더라도 그것을 상관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당신이 그것을 상관했기 때문에 그것이 온 것입니다. 당신에게 그것을 상관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이 오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오면 온 것이라는 겁니다. ‘오면 오는 것이고, 가면 가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큰 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하는데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남녀노소·빈부귀천·선악현우善惡賢愚 등 모든 사람들이 다 있지만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서 창가에 기대어 그 사람들을 주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귀한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는 마음을 내고 빈천한 사람을 보면 깔보는 마음을 내며, 잘생겼니 못생겼니 따지면서 이렇쿵 저렇쿵 쓸데없는 얘기를 하다보면 자신이 하던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게 되지요. 그더러 바깥의 행인들을 상관하지 말고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라고 말하면 도리어 번뇌를 일으킵니다. “저도 그들을 상관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이 자꾸만 저기서 왔다 갔다 해서 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염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에 망념으로 분분한 것은 망념의 일인데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망념은 그대로 망념이고 염불은 그대로 염불입니다. 염불은 정업正業(주)이고 망념은 길거리의 손님(객)이므로, 망념의 길거리 손님들을 주시하지 말고, 더욱이 그들을 따라가지 말 것이며, 당신의 염불을 방해한다고는 더욱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불의 정념이 한 번 일어나면 수많은 망념이 있더라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그 사람이 방에서 일심으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면 큰 길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사람들이 천천만만이 되더라도 전부 그와 상관이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망념을 다스리는 데는 바로 한 가지 비법이 있으니 오로지 염불만 하는 것입니다! 망념을 상관하지 마시고요!
【길가에서 자라는 화초의 비유】
그것을 상관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말살시키려는 게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가 큰 길을 걷고 있는데, 길가에 수많은 꽃들이 피어있고 또 수많은 풀들이 자라나 있으며 심지어 이 풀들이 길 가운데로 자라나 우리의 발등을 뒤덮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길을 걷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서 칼을 들고 이 풀을 베어버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풀을 풀대로 자라고 우리는 그 길을 지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서 이 꽃에 향기가 있는지 없는지 냄새를 맡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 이 꽃에서 나쁜 냄새가 나네, 정말 귀찮구나!” 얼른 돌아가 호미를 들고 와서 그 꽃을 파버리고는 다시 거기에다 꽃 한 송이를 심는다면, 당신은 쓸데없이 일을 만드는 겁니다! 당신이 지나가기만 하면 될 텐데, 그 꽃이 향기롭든 악취가 나든, 그 풀이 당신의 발을 덮든 말든 건너가기만 하면 될 겁니다.
이 향기가 나는 꽃·악취가 나는 꽃·향기가 나는 풀·독이 들어있는 풀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갖가지 생각들입니다. 이 큰 길이 바로 우리가 왕생하는 길이므로 우리는 오로지 염불만 하면서 지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제의 망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상관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것을 상관하지 마세요! 이것을 일러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겁니다.(우리가 호미를 들고 그것을 파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그것들이 자라면 자라는 거고 안 자라면 안 자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불을 하는데 염불을 하는 게 아니라 되돌아와서 이 풀을 파고 있습니다. 그는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아이구!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무리하게 소란을 피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길을 잘 걷고 있었음에도 길가에 있는 꽃이 자신을 방해한다면서 반드시 그것을 없애고서야 비로소 만족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불의 대로 위에서 망상이 우리의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무슨 일을 방해했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망상잡념은 전혀 우리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오로지 그 길을 지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매운 음식을 먹으면 맵다고 느끼는데, 매우면 매운 것이지요. 이것은 인연입니다. 우리가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서 귀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모두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생리상의 반응은 아주 자연스런 것이어서 범부들이 바로 이러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중생들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되는 것이고 이렇게만 하면 왕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상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염불한다면 아주 홀가분하고 자재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분신을 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데, 염불하는 나야말로 진정한 나이고, 또 다른 나는 사실 그림자와 같은 겁니다. 마치 일종의 뭐와 같냐면……어떻게 말할까요? ‘그림자’라는 단어가 조금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마치 하나의 허망한 그림자와 같아서 그(망념)는 그의 일을 하고 나는 염불해서 왕생을 하는 겁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 그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마 어떤 일들 때문에 그의 마음이 괴롭고 슬프거나 또는 기뻐하는 등등의 감정을 느끼고 온갖 정서적인 파동이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망상은 본래부터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망념에는 본래 뿌리가 없는 것인데 당신이 그것을 집착하기 때문에 뿌리가 생겨난 것이고 업력이 생겨난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육도윤회를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돌아와서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에 기대면서 전혀 그것을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을 어찌할 방법이 없게 됩니다. 만약에 당신이 그를 주인과 같이 여기면서 그를 상관하려 든다면 그로부터 통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⑺ 인광대사의 꾸지람
일반인들은 염불을 하면서 모두 ‘염불을 잘하고 못하고’의 관념이 있는데,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염불을 잘 한 것이고, 도달하지 못하면 염불을 잘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이로써 자신에게 더욱 노력하여 염불하고 정진하여 염불하는데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아미타불의 본원을 더욱 의지하고 사바세계에 대한 염리심을 내고 극락세계에 대한 흔구심을 더욱 내도록 요구한다면, 이런 생각들은 좋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만. 만약에 ‘아이구! 내가 이렇게 염불을 잘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마도 왕생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러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광대사님의 이야기 하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번은 제자 한 분이 보타산으로 인광대사님을 친견하러 오셨다가 대사님께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말씀드렸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일 년 전에 한 번 크게 앓은 적이 있었는데 병이 위중할 때 사람이 곧 죽게 되어 피를 토하면서 근근이 숨만 내쉬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상황을 회상하면서 자신은 첫째 당황하지 않고, 둘째 두려워하지도 않아서 마음이 매우 안정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이것은 이미 쉽지가 않은 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그런 상황이 되면 당황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약간 유감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가 무엇이 유감스러웠을까요? “아! 내가 염불을 잘 하지 못했구나” 그는 수행자이자 정토종의 염불행자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염불을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인광대사께서는 여기까지 듣고 나서 즉각 벽력같은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염불을 잘한 것이라 말하는가? 십념으로도 마땅히 왕생할 것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서방에 갈 수가 없을 것이다!” 당장에 “염불을 하는데 무엇을 잘 했다고 하고 무엇을 잘하지 못했다고 하느냐? 십념으로도 왕생할 수 있다! 네가 만약에 ‘내가 염불을 잘하지 못했기에 아마도 왕생할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서방극락세계를 너는 갈 수 없을 것이다”며 비평하고 꾸짖은 것입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염불을 잘 했습니다’ 무엇을 잘했다고 말하는 겁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 겁니까? 이렇게 물으면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제가 염불을 하는데 입에 침이 생겼어요, 내가 염불을 하는데 몸에 열이 났어요, 제가 염불을 하는데 마음이 아주 상쾌해졌어요. 이것을 잘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그럴 듯하나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꼭 기준을 말해야 한다면 역시 있습니다. 바로 아미타불의 서원이신 ‘내지 십념으로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광대사님께서는 “십념으로도 마땅히 왕생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심불란은 아주 쉽다】
염불은 아주 간단해서 우리 개개인의 근성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겁니다. 만약에 마음이 비교적 차분하고 안정적이라면 차분하고 안정적인 마음으로 염불을 하고, 만약에 지금 당장 번뇌하는 마음이라면 번뇌하는 마음으로써 염불해도 똑같이 왕생합니다!
인광대사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이 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염불을 잘 했다고 말하는가! 십념으로도 마땅히 왕생한다” ‘십념으로도 마땅히 왕생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미타불의 서원에 있습니다. 무엇을 잘했다고 말하고 무엇을 잘하지 못했다고 말합니까? 당신이 열 번만 불러도 왕생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잘 불렀다고 말합니까? 『관경』에서 하품하생을 한 그 사람이 염불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그 때 만약에 ‘염불을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왕생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이구! 아무개님! 당신은 이제 곧 죽게 생겼는데 당신은 반드시 염불을 잘 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염불을 잘 하지 못하신다면 왕생할 수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염불만 하면, 입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반드시 왕생합니다!” 그는 자연히 왕생할 것입니다.
인광대사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공덕의 크기와 공부의 깊이를 막론하고 염불만 하면 모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염불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은 우리의 공부의 깊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의 공부가 깊어도 왕생하고 당신의 공부가 얕아도 역시 왕생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일심불란’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것인데, 바로 전수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다들 이해가 가십니까?
(대중) 이해가 갑니다!
아직도 ‘일심불란’이란 네 글자를 두려워할 겁니까?
(대중) 두렵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미타경』을 독송하다가 여기에 이르면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 일심불란·일심불란, 갈수록 더욱 혼란스럽고 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요……’ 나중에는 수습이 안 됩니다. 만약에 ‘일심으로 염불하여 난잡하지 않고 동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염불할수록 더욱 기뻐하게 되는데, 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4) 사례를 들어 설명함
【송나라 황타철의 이야기】
이어서 송나라 때 황타철黃打鐵의 이야기 한 편을 말씀드릴 텐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그의 성은 황씨이고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대장장이였기 때문에 황타철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는 한편으로 쇠를 두들기면서 한편으로 염불을 하였는데, 망치로 한 번 두들기며 “아미타불!”, 다시 한 번 두들기며 “아미타불!”하고 불렀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신이 쇠를 두들기는 것만 해도 너무 힘드실 텐데 염불까지 하신다면 더욱 힘들지 않나요?”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그건 당신이 모르는 거요! 본래 쇠를 두들길 때 팔이 시큰거렸었는데 염불을 하니까 도리어 시큰거리지 않고, 본래 쇠를 두들길 때 많이 힘들었었는데 염불을 하니까 도리어 힘들지가 않는구려!”
그가 쇠를 두들기려면 풀무질을 해야 했었지요. 풀무질을 할 때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하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한 망치 두들기고 한 구절, 풀무를 한 번 젓고 또 한 구절 부르면서 이렇게 몇 년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그가 몸도 괜찮고 병도 나지 않았는데 문득 크게 느끼어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글을 쓸 줄 모르고 오직 대장장이 일만 할 줄 알았기에 이웃을 불러서 네 구절 말씀을 적었습니다. 그가 어떤 네 구절 말씀을 적었을까요? (역시 그의 생활과 관련된 것인데, 그 최파와 같습니다. 최파는 ‘위로 재 하나 없고 아래로 구덩이가 없다’고 쓰셨는데, 그녀가 쓴 것 역시 자신의 생활이었습니다. 남의 유모노릇을 하면서 신과 양말을 기워 신었기 때문에 ‘갈 때 신과 양말을 신을 필요가 없다’고 쓴 것이니 그의 생활과 아주 가까운 것이지요. 황타철도 마찬가지로 네 구절을 지었는데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땡그랑땡그랑, 오랫동안 정련하여 강철이 되듯, 태평이 곧 다가오니, 나는 서방으로 왕생하려네. 叮叮當當, 久煉成鋼, 太平將近, 我往西方。
이 네 구절 말씀을 마치고는 망치를 내려놓자마자 왕생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수승하고 얼마나 멋집니까!
‘땡그랑땡그랑, 오랫동안 정련하여 강철이 되듯’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그가 매일매일 땡그랑땡그랑·땡그랑땡그랑하고 쇠를 두들기잖아요? 쇠를 두들기는 목적은 오래오래 정련해서 강철을 만들기 위한 것이므로 천천히 두들겨야 하겠지요. 이것 역시 자신의 수행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데, 육자명호는 마치 망치와 같아서 한 망치 한 망치씩 그의 마음에다 두들겨서 그의 마음을 갈수록 유연하게, 습기는 갈수록 적어지게, 범부로부터 부처님이 되도록 두들긴 것입니다. 서방극락세계에 성불하러 가셨기 때문에 ‘땡그랑땡그랑, 오랫동안 정련하여 강철이 되듯’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태평이 곧 다가온다’, 태평한 날이 곧 올 거라는 겁니다. 만약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지 않고 생사윤회의 큰일로부터 해탈하지 않는다면, 그럼 태평한 날을 보낼 수 없습니다! 염라대왕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태평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달랐습니다. ‘태평이 곧 다가오니 나는 서방으로 왕생하려네’, 서방극락세계로 성불하러 가겠다고 말한 것이지요.
당신은 이 황타철에게 선정일심禪定一心의 공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쇠를 두들기면서 선정에 들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에게는 이른바 깊은 선정에 들어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공부가 없을뿐더러 도리어 크게 힘쓰고 땀흘리고 쇠를 두들기면서 염불해야 했지만 그는 왕생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비록 선정은 없었으나 그는 일심불란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염불하고 극락왕생을 염원하며 조금도 뒤섞이지 않았으니 진정한 일심불란이었지요! 그는 글도 모르고 시간도 없고 먹고 살기가 바빠서 한편으로 쇠를 두들기면서 한편으로 염불을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잡다하게 하라고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배워야 합니다. 옷을 씻을 때에도 이렇게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채소를 썰을 때에도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침에 체조를 할 때에도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하고 염불해야 합니다. 우리 대만의 연우님 몇 분은 손을 앞뒤로 내젓는 염불체조를 하시면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하시는데, 이렇게만 염불해도 왕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선정에 도달했는지 이러한 공부가 있는지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장애가 없기에 염불만 하면 반드시 왕생합니다.
【홀가분하게 염불하다】
물론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도 어쨌든 마음이 좀 청정해지고 망상잡념이 좀 적어지길 바랄 겁니다. 그것도 방법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좀 더 집중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외출을 하거나 길을 걷거나 차를 타거나 볼일을 보거나 할 때, 그렇게 집중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인 혼자 앉아서 염불할 때에는 역시 좀 더 집중해야 할 겁니다. 집중하는 방법이란 바로 본인이 염불하고 본인이 듣는 것인데, 인광대사께서 제창하신 ‘십념기수법十念記數法’을 채택하여 한편으로 염불하고 한편으로 숫자를 세면서 얼마만큼 집중할 수 있으면 얼마만큼 집중하시면 됩니다. 다만 마음을 지나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너무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보세요, 또 도망 갔어요……”라며 또 번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도망을 갔으면 잡아오고, 또 도망가면 다시 잡아오고, 잡아온 다음에 잘 감시를 해야 하겠지요. 마치 게임을 하듯이 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아주 홀가분해져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염불할 수 있을 겁니다.
【편안하고 침착하게 염불하다】
그리고 숫자를 세는 것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숫자를 세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으로서 역대 조사대덕들께서 모두 제창하셨습니다. 착실하게 숫자를 세면서 염불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방법의 묘한 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염불을 하면서 단지 염불의 횟수만 채우려고 숫자를 세기 위해 숫자를 세지 마시고, 염불을 위해 숫자를 세는 방법을 채택한 것이기에, 편안하고 침착하게 한 구절 한 구절씩 불러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당신은 한 구절 한 구절씩 염불하면 됩니다. 만약에 숫자를 너무 많이 정해놓고서 숫자를 채우기 위해 너무 빨리 부르게 되면,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때로는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고, 심장이 안 좋은 분들은 더욱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예컨대 본인 스스로 매일 삼만 번의 염불을 정해놓았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거기서 급히 서둘러 숫자를 쫓고 있으니 너무 힘이 들겠지요! 그렇게 염불하다가는 심장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보세요, 염불을 해서 제가 심장병이 생겼어요!”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염불을 해서 생긴 게 아니라 당신 스스로 조절을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편안하고 침착하게 염불하되, 삼만 번을 부를 수 없다면 그렇게 많이 정하지 마시고 이만 번·만 번 정도로 정하면 됩니다. 한 구절 한 구절씩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부르면 아주 좋습니다!
5) 총결을 지으며 역으로 나타냄
【여섯 가지 큰 과실】
‘일심불란’과 관련해서 우리는 총결을 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시작부터 일심불란에는 두 가지 이해가 있다는 설명을 드렸었는데, 하나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선정상태의 일심과 망상잡념이 일어나지 않는 일심이고; 또 하나는 정토종경론의 가르침에 따른 이해인데, 일심불란이 바로 일향전념이라는 것으로, 이것 역시 선도대사님의 일관된 해석이었습니다.
오직 선도대사님의 해석을 따라야만 비로소 정확한 것입니다. 만약에 반드시 어떻게 선정상태의 일심을 얻어서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해석하고, 게다기 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왕생할 수 없다는 생각을 견지한다면, 그럼 그 과실은 너무나 큽니다.
첫째, 그렇다면 그것은 석가모니불자신이 설하신 ‘정토삼경’이 서로 모순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무량수경』은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것으로, “상중하 세 가지 근기를 가진 사람들이 일향전념만 하면 모두 왕생한다”고 말씀하셨고, 『관경』도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것인데 “하하품의 사람이 임종 시에 고통에 시달려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나, 열 번을 염불하여 곧 왕생하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두 부의 경전에서 설하신 왕생은 모두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아미타경』에서는 도리어 어떻게 선정의 일심에 도달해야 한다고 아주 어렵게 말씀하셨다면, 그렇다면 서로 모순되지 않겠습니까?
둘째, 석가모니불께서 본인스스로 모순될 뿐만 아니라 아미타불의 본원과도 모순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염불왕생의 본원에서 설하신 방법은 아주 쉬워서 중생들이 단지 ‘내지 십념’으로 염불만 하면 되지만, 석가모니불께서는 도리어 아주 어렵게 설하시어 마음을 쉬고 생각을 모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어찌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불을 등지고서 스스로 따로 극락왕생의 조건을 제시하여 문턱을 높여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셋째, 또 석가모니불의 설법이 근기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경』은 석가모니불께서 오탁악세의 범부들을 상대로 설하신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높게 설하시어 우리 누구도 실천할 수 없다면, 그 법이 근기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넷째, 용수보살님의 정토법문에 대한 판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용수보살께서 설하신 정토법문에서는 아미타불의 본원이 하열한 근성의 중생에게 적합한 ‘이행도’·‘안락문’이라 하셨는데, 지금은 사일심·이일심 등등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이행도가 아니기 때문에 용수보살님의 교판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섯째, 또한 고금 이래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사실과도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왕생한 수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선정을 얻어서 마음을 집중하는 경지에 도달한 게 아니라 그들은 단지 착실하게 염불하고 일향전념하며 의심하지 않았을 뿐인데 모두 왕생하였고, 게다가 모두 매우 수승하게 왕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가장 큰 과실로서 우리 자신이 왕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선도대사님의 해석을 의지한다면, 위로는 아미타불의 본원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의 근기에 계합하므로, 정토삼경의 종지가 완전히 일치하고, 석가모니불의 말씀이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누구나 안심하고 염불할 수 있고, 누구나 다 왕생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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