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아미타경핵심강기(정종淨宗법사 법어 / 정전스님 역)


출처/純淨時代


머리말


아미타경은 불문佛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독송되고 있는 한부의 경전이자 정토종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전체 경전의 핵심은 왕생의 정인을 설명하는 단락에 있는데, 100여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문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해가 매우 많아서 주로 적은 선근(少善根)’·‘일심불란(一心不亂)’·‘심불전도(心不顚倒)’라는 세 구절에 집중되어 있다. 오해로 인해 스스로 장애가 생겨 마음속에 두려움을 품게 되고 최후에는 왕생의 이익을 잃고 만다.

2005, 정종법사께서 중국 하문廈門의 계명사啓明寺에서 전적으로 이에 대해 강설을 하셨는데, 경전의 증거와 조사의 증거·이치적 증거·사실적 증거를 낱낱이 들면서, 아울러 여러 가지 비유를 더하여 적절하고 상세하고 분명하게, 간단명료하여 이해하기가 쉽게 강의하셨으므로 듣는 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 책이 바로 법사님의 강연을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인연 있는 분들이 읽고 나서 안심과 법희를 얻고 용맹정진하여 염불하며 결정코 왕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편자

2011년 4월


『아미타경』핵심강기

Ⅰ. 서론

 

【『아미타경』의 핵심】

 

적은 선근과 복덕인연으로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그 명호를 굳게 지니어, 하루나 이틀이나 혹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혹은 이레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임종을 할 때에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인 대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투시게 되나니,그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바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느니라.

 

(不可以少善根福德因緣, 得生彼國。若有善男子, 善女人, 聞說阿彌陀佛, 執持名號, 若一日, 若二日, 若三日, 若四日, 若五日, 若六日, 若七日…… 一心不亂, 其人臨命終時, 阿彌陀佛與諸聖衆, 現在其前; 是人終時, 心不顚倒, 卽得往生阿彌陀佛極樂國土。)

 

이 단락의 경문은 전부 합쳐서 겨우 백자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극락왕생의 정확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어서 전체 『아미타경』의 핵심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시 자주 오해를 받게 되는데, 일단 오해하고 나면 전체 『아미타경』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게 되고 왕생은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세 가지 점을 따름】

 

여러분들이 이 단락의 경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보증하기 위해 우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점을 확립해야 합니다.

 

첫째, 선도대사의 정토사상을 의거함을 근본지도로 삼는다.

둘째, ‘정토삼경’가운데 다른 두 부의 경전인 『무량수경』·『관경』 중의 관련된 경문, 특히 48원 가운데 제18‘염불왕생원’을 회통하여 해석한다.

셋째, 사례를 들어 증거로 삼고, 동시에 여러 가지 비유도 든다.

 

【정인과 정과(正因正果)】

 

이 단락의 경문을 이치상으로 말한다면 ‘비인(非因:원인이 아닌 것)을 배제시키고 정인(正因:정확한 원인)을 선택하여 정과(正果:바른 결과)를 명시하는’ 관계가 있으며, 일반 신도들의 심리적인 측면으로부터 말한다면 이른바 ‘세 가지 큰 고뇌와 두 곳의 의문’이 있습니다.

 

첫째, 비인을 배제시킨다(排除非因). 경문에서 말씀하시기를, “극락세계의 경계가 고묘高妙하여 적은 선근과 복덕에 의지해서는 왕생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적은 선근과 복덕’이 바로 비인이므로 먼저 배제를 시켜서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일에 정신을 팔지 않고 일심으로 곧장 나아가도록 해줍니다.

 

둘째, 정인을 선택한다(選擇正因). ‘명호를 굳게 지니면 바로 왕생한다’고 하셨으니, 명호를 굳게 지니는 것(執持名號)이 바로 정인입니다. 이른바 ‘정인’이란,

첫째는 정확함正確이니, 정확하여 그릇되지 않은 인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순정純正이니, 순수하고 올바르며 잡다하지 않은 인이라는 것이요;

셋째는 정직正直이니, 바르고 곧아서 우회적이지 않은 인이라는 것이요,

넷째는 필정必定이니, 반드시 왕생하는 인이어서 어떠한 불확정성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정과를 명시한다(明示正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듯이 명호를 굳게 지니는 것을 원인으로 삼아 두 가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첫째는 임종 시에 ‘부처님과 성인 대중들이 몸을 나투어 내영해주시는’ 결과이고, 둘째는 임종 시에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곧바로 왕생하는’ 결과입니다.

 

【세 가지 큰 고뇌】

 

이 단락의 경문은 『아미타경』의 관건이어서 만약 선도대사님의 해석을 따른다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고 누구나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마음속에 큰 고뇌가 생기게 되는데, 이 『아미타경』을 독송하면 할수록 두렵게 되고, 당신이 정토법문을 닦으면 닦을수록 더욱 고뇌하게 되어 심지어 아예 포기해버리고 닦지 않게 됩니다.

 

무슨 고뇌가 있을까요?

 

첫 번째 고뇌는 ‘많은 선근’에 대해서입니다. 왕생을 하려면 많은 선근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누가 감히 자신에게 많은 선근이 있다고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선근이 없으면 왕생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의 큰 고뇌입니다!

 

두 번째 고뇌‘일심불란’에 대해서입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담호색변(談虎色變)’이란 말이 있는데, 호랑이 이야기만 해도 얼굴빛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일심불란’이란 말만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자신은 온종일 망념이 분분하고 마음은 마치 야생마와 같고 미친 코끼리와 같아서 아무리 수습하려 해도 수습이 안 되므로 전혀 일심선정一心禪定에 도달할 수 없으니 어떡해야 합니까? 도달할 수 없다면 왕생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것도 고뇌입니다!

 

세 번째 큰 고뇌는 ‘심불전도’에 대해서입니다. 죽을 때 마음이 전도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는 자신이 죽을 때 어떻게 마음이 전도되지 않을 거라고 보증할 수 있을까요? 이 자리에 계시는 모든 분들, 우리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또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요즘에는 교통사고도 많고, 광산사고·물난리·비행기사고·차량사고·배사고; 뇌출혈·심장병·식물인간·중풍;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고, 화재를 당해 타 죽고, 물에 빠져 죽고……온갖 횡사와 급사들이 있는데 만에 하나 자신이 만난 다면요? 누가 감히 자신은 임종 시에 반드시 정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 가지 점은 우리의 마음을 가장 고뇌하게 만드는 것으로, 마치 세 개의 큰 돌덩어리가 우리의 마음을 누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곳의 의문】

 

그리고 또 의문이 두 군데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남자·선여인’에 관해서입니다. 우리는 선남자·선여인에 속할까요? “오직 선인만 왕생할 수 있나요? 저는 다소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식당을 하면서 살생을 많이 한 적도 있었고, 또 남을 속인 적도 있었으며, 남을 업신여긴 적도 있었고, 남을 욕한 적도 있고 때린 적도 있었으며, 벌어서는 안 될 돈을 번 적도 있었고 굴려서는 안 될 머리를 굴릴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죄업을 지었는데 염불하여 왕생할 자격이 있을까요?” 이것이 첫 번째 의문입니다.

 

두 번째는 ‘하루나……이레 동안’이라 하셨는데, 그럼 하루나 이레 동안만 염불하면 될까요?

이 몇 단락의 경문에 대해 만약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짙은 안개 속에 쌓여 왕생의 길에 온갖 위험과 어려움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Ⅱ. 본론

 

1. 어떤 것이 ‘많은 선근’인가

 

1) 전수와 잡행의 득실로부터 판단함

 

【두 가지 상반된 관점】

 

경에서 설하기를, “적은 선근과 복덕인연으로는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선근일까요? 다들 왕생을 하려면 염불은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전제하에 또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의 관점은 단지 염불만 하는 것이 바로 적은 선근으로서 왕생할 수 없으며, 염불 외에 여러 가지 선과 복을 닦는 수행을 더하여 회향해야만 비로소 많은 선근이 되어 비로소 왕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염불이 바로 많은 선근이어서 설사 다른 수행이 없더라도 오로지 염불에 의지하면 반드시 왕생하고, 그 외의 것은 모두 적은 선근이어서 아무리 많이 닦아도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관점을 들어보면 비교적 직관적인데, 곧 염불에 다른 수행을 더하면 염불보다 공덕이 크다는 것입니다. (염불 + 다른 수행) > (염불)

 

두 번째 관점을 들어보면 약간 독단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 말은 나는 염불에 염불을 더하면 염불에 다른 수행을 더한 것보다 공덕이 크다는 것입니다.

(염불+염불)>(염불+다른 수행)

 

도대체 어느 관점이 정확한 걸까요? 우리는 먼저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관점을 따라 수행하면 어떠한 다른 결과가 생기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전수와 잡행의 득실】

 

첫 번째 이해에 의하면 그는 틀림없이 여러 가지 법문을 닦아서 회향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해야만 선근과 복덕이 아주 많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이 경전도 독송하고 저 진언도 독송하고 이 법도 닦고 저 부처님께도 절을 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마침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신 잡행잡수雜行雜修에 떨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 이해에 의하면 염불이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므로, 그는 전수염불을 하며 일향전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왕생예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근래에 직접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여러 지방의 출가자와 재가자들 중에 해행(解行)이 다르고 전잡(專雜)이 달랐다.

 

“나 선도가 근래 한동안 직접 보고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다들 정토법문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 이해가 다르다 보니 수행방법도 달라 전수를 하는 이와 잡행을 하는 이가 있었다” 만약 단지 염불만 하면 적은 선근이어서 여러 가지 법문을 모두 닦아야 비로소 많은 선근이라고 여긴다면,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잡행잡수를 하게 될 것이고, 만약에 염불이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라 여긴다면, 그 사람은 하나의 법문으로 깊숙이 들어가 전수전념專修專念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얻은 결과는 어떨까요?

 

다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행을 닦는 자는 열이면 열 명 모두 왕생을 하지만;

잡행을 닦고 지심이 아닌 자들은 천 명 중에 (왕생을 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는 선도대사께서 직접 보시고 직접 들으신 것으로서, 대사께서는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은 열이면 열 명이 왕생하고, 백이면 백 명이 왕생한다. 그럼 잡행잡수를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천 명 가운데 왕생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전수염불을 하면 열이면 열 명이 왕생하므로, 당연히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고; 잡행잡수를 하면 천 명 중에 한 명도 없으니, 당연히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이겠지요.


2) 이치로써 설명함

 

이렇게 말한다면 아마도 어떤 분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불만스럽고 납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그들보다 닦은 법문도 많고 선근도 많고 그들보다 독경도 더 잘하고 진언도 더 잘 외우는데, 왜 내가 도리어 적은 선근이고 왕생이 결정되지 않는다고 하는가? 그들은 단지 염불만 할 줄 알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오히려 많은 선근이고 왕생이 결정되었다고 하는가?’ 마음속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아래에 우리는 이치·비교·비유·경문·조어祖語·사례 등의 각 방면과 여러 각도로부터 염불이 많은 선근이라는 것을 설명하여 여러분들로 하여금 결정적인 신심을 건립하고 ‘전수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한다’에 안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회의를 하는 비유】

 

앞서 경문에서 설하기를 극락세계에는 모두 불퇴전 내지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대보살들로서, 이러한 ‘으뜸가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는(諸上善人俱會一處)’ 곳이라고 하셨는데, 이른바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이 아무튼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라야 함께 모일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곳에 도달하려면 일반범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대아라한들마저도 자격미달이기 때문에 『왕생론주』에서 ‘대승의 선근계는 이승의 종성들이 태어나지 않는다(大乘善根界, 二乘種不生)’고 설하신 것입니다.

 

으뜸가는 훌륭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에 적은 선근으로는 왕생할 수 없습니다. 위는 아래와 상대되고, 많음은 적음과 상대되므로, 으뜸가는 선(上善)이 바로 많은 선(多善)이고 적은 선(少善)이 바로 아래 선(下善)입니다. 『아미타경』에서 어떤 사람을 으뜸가는 선인이라 하셨습니까? ‘아비발치’·‘일생보처’의 제대보살님들이십니다! 이러한 급에 도달하지 못하면 모두 적은 선이고 아래 선이어서 최소한 불퇴전의 보살, 더 나아가 일생보처의 대보살의 선근기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자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이런 사람들과 함께 모이고 싶어도, 당신이 그런 수준이 안 되는데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성장급(省長級:도지사급)의 회의에 시장은 참가할 자격이 없으며, 일반 서민들은 더욱 참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극락세계에는 이러한 대보살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인데, 우리의 선근과 복덕은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지한다면, 아무리 노력하여 수행하고 아무리 선근복덕을 쌓아도 전부 부족하여, 전부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이며, 엄청난 차이로 가히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묘한 국토는 오직 염불,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서 아미타불의 선근복덕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을 뿐, 부처님의 명호를 제외하고 범부들 자신이 닦은 일체 유루의 선법으로는 모두 왕생할 수 없습니다.

 

【국왕이 소견하는 비유】

 

예를 들어 왕궁은 국왕이 거처하고 문무대신들이 국정을 위해 출입하는 곳으로, 일개 백성이 왕궁에 가려면 자신의 신분에 의지해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국왕의 소견召見이 있고, 국왕의 명령이 있고, 국왕의 성지가 있다면 백성이 국왕을 알현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알현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약간의 상상력을 갖고 저에게 협조를 해주셔야 합니다. 모두 눈을 감으십시오. 시간이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들은 현재의 이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청나라의 두루마기와 마고자를 입고 머리는 길게 변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하문시도 없고 단지 작은 노점들과 찻집들만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을 합니다. “영명英明하신 황제페하 만세!” 어떤 사람이 놀립니다. “아, 이 영감! 언제 한번 영감도 자금성의 금란전金鑾殿에 가셔서 황제페하를 알현하여 진급을 할 수 있다면 우리도 얼마나 좋겠소? 덩달아 덕을 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잠꼬대 그만 하소, 우리 같은 일개 백성이 어떻게 황제를 뵐 수 있겠소!”

 

이 때 마침 옆에 기개가 비범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이 황제를 공경하고 찬탄하는 소리를 듣고, 게다가 황제를 뵙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절실하다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황제를 뵙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응? 당신이 누구신데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나에게 다 방법이 있소!” 그리고는 종이와 붓을 가져와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요?”라고 묻고는 그의 이름을 종이위에 적습니다. “아무개가 입궁하여 알현할 것을 특별히 허락한다”, 그 밑의 낙관은 ‘강희康熙’였습니다. [주: 청(淸) 성조(聖祖)의 연호(1662~1722)]

 

강희황제의 성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럼 이 백성은 황궁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중)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일반 백성·오탁악세의 범부들이고, 우리가 칭념하고 있는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는 보통 글자가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직접 초청해 주시는 서명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서명하신 초청장을 들고서 아미타불의 국토에 가는 것은,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제18원에서 말씀하시기를, “시방중생(당신과 나)들이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초청) 내지 십념(서명)을 한다면, 반드시 나의 나라에 왕생한다”고 하셨습니다.

 

육자명호가 바로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지聖旨이고, 육자명호가 바로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초청장이자 소견서召見書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육자명호가 있는데, 어떻게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없겠습니까?

 

이 외에, 예컨대 우리가 황제를 알현하려고 하는데, 당신이 말단 관리인 현령縣令를 찾아서 서명을 받는다면 쓸모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러분들이 말해보세요, 현령이 당신에게 서명을 해주면서 “됐소! 나의 글을 들고 직접 찾아가면 될 것이네”라고 말한다면 쓸모가 있겠습니까?

(대중이 답하기를)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요, 지방행정 장관을 찾아서 서명을 받으면 쓸모가 있겠습니까? 쓸모가 없습니다. 그도 감히 서명할 수 없습니다!

좋아요! 그럼 각 부처의 최고 장관을 찾아가 서명을 받으면 쓸모가 있겠습니까? 역시 쓸모가 없습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이 육자명호는 아미타불께서 직접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이고, 기타 모든 법문은 마치 최고 장관이나 지방 장관이나 말단 관리와 같은 것이어서 그들을 찾아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려 한다면, 그들도 전부 손을 저으면서 “아,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위덕이 없습니다”며 우리에게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려면 ‘당신은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고 일러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려면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에 승탁乘託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육자명호 속에는 아미타불의 위없는 공덕을 포함하고 있고, 또 육자명호는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에 대한 직접적인 선소(宣召:부처님의 부르심)여서 마치 국왕의 소견과 같고 국왕의 호령과 같아서 아무런 장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모든 신하와 백성들에게는 전부 이런 위덕이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시방제불이 다 같이 무량수불의 위신공덕威神功德의 불가사의함을 찬탄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는 이 『아미타경』속에서 우리에게 명호를 집지하는 것이 바로 많은 선근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명호를 집지함’을 제외한 모든 행은 전부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어서 왕생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치입니다.


3) 비교로써 설명함

 

【여러 가지 선근의 비교】

 

다음은 우리가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옛말에 ‘물건을 몰라보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여러 물건을 비교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네 구절의 말씀이 있는데, 제가 먼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계와 십선은 삼계에 체류하고, 五戒十善滯三界

성문과 연각은 대승이 아니며, 聲聞緣覺非大乘

보살은 만행이 원만하지 않았으니, 菩薩萬行未圓滿

육자와 비교하면 모두 적은 공덕일세. 較之六字皆少德

 

이 네 구절 말씀은 이해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오계와 십선이 선이기는 하나 여전히 삼계에 있어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라한도 선이어서 높이 삼계를 초월하여 영원히 윤회로부터 벗어났지만, 아라한은 단지 자신의 문제만을 해결한 자료한自了漢일 뿐 대보리심을 내지 않았으며, 보살은 더욱 선이어서 대보리심을 내어 널리 육도만행을 닦아 맹세코 일체중생을 제도하려고는 하나, 보살의 수행은 아직 원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에, 이런 것들을 가지고 아미타불의 원만한 공덕인 육자명호와 비교를 한다면, 전부 적은 선근이고 적은 복덕이라는 것이지요.

범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우리 자신이 닦을 수 있는 선근과 복덕은 기껏해야 오계와 십선정도인데, 오계와 십선을 원만히 닦을 수 있다면 당신은 아주 희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오계와 십선조차 실천하기 어려운 우리들에게 무슨 선근과 복덕이 있겠습니까?

 

오계와 십선도 선근복덕이어서 오계를 지키는 것과 오계를 훼범毀犯하는 것을 비교하면 선이라 할 수 있고, 십선과 십악을 비교하면 역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계와 십선은 여전히 삼계 내에 체류하고 있어서 삼계의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계와 십선을 잘 닦으면 다음 생에 다시 사람을 태어나 높은 관직에 오르고 큰돈을 벌 수 있으며, 천상세계에 태어나 천자·천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근과 복덕을 만약 아라한의 선근복덕과 비교한다면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대중) 없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라한은 이미 삼계를 벗어나 이른바 ‘삼계 밖으로 벗어나 오행 가운데 있지 않다(跳出三界外,不在五行中)’는 말이 있듯이 그는 이미 삼계를 벗어난 성자인데, 오계와 십선으로 어떻게 그들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아라한은 자신의 선근과 복덕에 의지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대중) 없습니다!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없습니다. 천친보살의 『왕생론』에서는 “극락세계는 ‘대승의 선근계여서 이승의 종성이 태어날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극락세계는 대승보살·대승선근의 경계여서 ‘이승’인 성문·연각――아라한과 벽지불이 자신의 선근과 복덕을 의지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려 한다면 자격미달이라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가려면 아라한의 선근과 복덕조차 부족하거늘, 범부의 오계와 십선으로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아라한의 선근과 복덕이 비록 범부들과 비교하면 아주 많다고 할 수 있지만, 만약에 보살과 비교한다면 누구의 선근과 복덕이 많겠습니까?

(대중) 보살입니다!

 

이 장부는 계산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자신의 생사만을 해결하는 자료한自了漢이어서 그들은 자신의 생사윤회만을 해결하지만, 보살은 광대한 보리심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살의 선근복덕을 아라한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이어서 하늘과 땅의 차이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보살의 심량이 광대무변하고 선근복덕 역시 무량무변하지만 보살은 필경 성불을 한 게 아니라 아직 보살의 지위에 있기에 원만하지가 않습니다. 그럼 보살의 선근복덕을 아미타불과 비교를 한다면 어느 분이 더 많을까요? 그것 또한 하늘과 땅을 비교할 수 없듯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비교해본다면 오직 부처님의 선근과 복덕만이 가장 철저하고 가장 원만합니다.

그럼, 아미타불의 선근복덕은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까요? 아미타불의 선근복덕은 육자명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조금 멀리 갔는데, 우리 세간의 일을 말하면 다들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명함과 제왕의 칭호에 대한 비유】

 

여러분, 우리는 일반시민으로서 우리의 복보福報를 가지고 시장과 비교한다면 누가 더 크겠습니까? 시장이 크고 우리가 작습니다.

 

시장의 복보와 위세가 큽니까, 아니면 성장省長의 복보와 위세가 큽니까? 성장이 큽니다.

성장의 복보는 어디에서 큽니까? 그가 성장이라는 데서 큽니다. 그가 밖에서 명함을 꺼내면서 “내가 성장이다”고 말하면, 다른 것 필요 없이 바로 성장이라는 이름 뿐인데, 성장의 이름이 그의 복보를 대표합니다.

 

성장의 복보가 큽니까, 아니면 국가주석의 복보가 큽니까? 국가주석이 큽니다. 국가주석의 복보는 어디에서 큽니까? 그가 국가주석이라는 데서 크며, 그에게는 이런 명분가 있습니다. 이 명분만 있으면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에게 복음福蔭이 되어줄 수 있으니, 이른바 명분이 정당하면 말도 이치에 맞아서 그 위치에서 그 정사를 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국가주석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그러한 명분이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무량무변하고 철저하고 원만한 선근복덕은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바로 여섯 자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비로소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를 이 여섯 자가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여섯 자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성불의 공덕과 능력이 있어야 비로소 성불하고 나서의 명호가 있는 것입니다.

 

시대별로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이제까지 ‘나눠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나눠졌습니다’ 천하대란이 일어날 때 제후들이 난투를 벌였지만 감히 제왕이라 자칭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최후에 각지의 제후들을 항복시키고 각지의 반란을 평정시키고 천하통일을 한 자만이 비로소 수도를 건립하고 제왕이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하나이고 제왕으로 불리는 것도 단지 제왕의 칭호를 얻은 것에 불과하지만, 이 제왕의 칭호는 쉽게 얻어진 게 아니라 수십 년의 문치무공과 남정북벌을 통해 천하를 평정하고 큰 성공을 이뤄서야 비로소 제왕의 칭호가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제왕의 칭호란 모든 문치무공과 강산통일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법장보살께서 오겁의 사유와 조재영겁의 수행을 거쳐 일체 번뇌의 적들을 소탕하고 모든 고난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며 무량한 공덕을 쌓아서 공덕이 원만해져야만 비로소 ‘나무아미타불’이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명호는 쉽게 얻어진 게 아니며, 아미타불께서 인지因地의 발심에서부터 과상果上의 정각을 이룰 때까지 모든 원만한 공덕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모든 보살의 수행과 모든 아라한의 수행을 육자명호와 비교한다면 전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 범부들의 오계와 십선은 더욱 말할 것도 없겠지요)

 

【성지 대 토산품의 비유】

 

연우님 여러분, 우리들이 닦은 오계십선의 선근이 많습니까, 아니면 육자명호속의 선근이 많습니까?

(대중) 육자명호입니다.

 

맞습니다! 대답이 정확하여 백점입니다!

우리 연우님들 가운데 가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서 “스님! 제가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하며 부르는데, 이 여섯 자를 부를 때 왠지 모르게 뭔가 허전하고 딱딱하고 괴로운 것 같습니다. 이처럼 허전하게 몇 글자를 부른다고 왕생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저기서 보시를 한다거나 절에서 기둥 하나를 만든다거나 방생을 한다거나……선근공덕이 아주 뚜렷합니다. 확실히 볼 수도 있고요. 이것을 의지하여 왕생하는 게 더욱 확실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것이 더 확실할 것 같습니까?

 

여전히 비유를 들겠습니다. 비유를 들어야만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여전히 방금 전의 비유입니다. 이 백성이 황제의 소견을 받아서 관직을 얻고 상을 받으러 가는데 당연히 기쁘겠지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이렇게 해서 어떻게 관직을 얻고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듣기로는 관직을 얻고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국가에 대해 공헌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던데, 내가 국가에 대해 아무런 공헌이 없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그래서 또 생각을 합니다. ‘그래! 좋은 방법이 있어. 우리 집에 토산품이 있는데, 내가 집에서 심은 고구마와 감자를 가져가서 공물로 바쳐야지!’ 그래서 그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고구마를 잘 심어서 황궁의 대문 앞까지 짊어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얼굴에 땀투성이가 되도록 짊어지고 갔지만 호위병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것이었지요. 왜냐하면 그가 황제의 성지를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지에는 단지 몇 글자 밖에 없어서 무게감이 없으며, 게다가 전혀 자신의 공헌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지요. 결국 그는 황궁의 대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닦은 오계와 십선, 모든 공덕들은 기껏 해봐야 고구마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육자명호는 아미타불께서 직접 우리들에게 하사해주신 성지와 호령입니다.

 

【명호를 한 번 부름에 십지를 초월함】

 

우리 정토문내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두 구절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의 칭념으로 십지를 초월함에 놀라지 말 것이니, 莫訝一稱超十地

마땅히 육자가 삼승을 포괄함을 알라. 須知六字括三乘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막아莫訝’, 놀라지 말라는 것인데, 분명히 우리들이 놀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전에 미리 “당신은 놀라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까? ‘한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십지보살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아! 그렇게 대합니다! 한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십지보살을 초월합니다!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이 여섯 자 속에는 삼승을 포괄하고 있어서, 성문·연각·보살도 전부 육자명호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방금 든 비유처럼 현령과 지방장관과 최고장관의 권력은 모두 제왕의 성지 속에 포함되어 있기에 그들은 모두 성지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그들의 직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라한의 선근복덕·벽지불의 선근복덕·보살의 선근복덕은 모두 나무아미타불의 육자명호 속에 농축되어 있고, 그 속에 전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한 구절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야만 비로소 십지보살을 초월할 수 있겠지요.

 

【태자 대 뭇 대신의 비유

 

인광대사님의 문초속에도 아주 좋은 비유 하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태자가 태어나자마자 譬如太子墮地,

그 귀함은 뭇 대신들을 압도한다. 貴壓群臣。

 

이 말씀은 이 어린 태자가 응애응애 울며 태어나지마자 그의 존귀함은 모든 대신들을 초월하여 재상도 그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태자로서 나중에 커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지요.

 

인광대사님의 말씀은 우리 염불하는 사람은 마치 갓 태어난 태자와 같아서 우리의 아버지는 아미타불이시고,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바로 부처님의 아들이며, 우리가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면 바로 부처님의 자식이 갓 태어나자마자 이승의 위로 초월한 것과 같아서 아라한과 벽지불을 초월하여 곧장 보살의 지위에 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이 많은 선근입니다.

4) 비유로써 설명함

우리는 다시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건물 대 창문의 비유】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이 미타보전彌陀寶殿속에 있는데, 우리가 ‘미타보전’ 넉자만 말해도 그 속에는 불상도 포함되고 기둥도 포함되고, 문·창문·벽·지붕……전부 그 속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단지 기둥만 얘기한다면 그 속에는 문을 포함할 수 없고, 문만 얘기하면 창문을 포함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를 말하더라도 전부 하나를 얻고 만 개를 빠뜨리게 되지만, 미타보전을 말하면 하나에 일체를 포함하고 있어 전체를 포괄할 수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는 총공덕總功德이어서 마치 ‘미타보전’이 총칭인 것과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단지 어느 한 부의 경만 독송한다거나 어느 하나의 다라니만 독송한다거나 어느 한 법만 닦는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문·창문·벽돌·기와와 같아서 단지 한 부분 한 부분의 공덕일 뿐, 전체의 공덕은 아닙니다.

기타의 수행, 예컨대 우리가 오계를 닦으면 오계의 공덕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구계의 공덕은 없습니다. 비구계를 닦으면 비구계의 공덕은 있겠지만 보살계의 공덕은 없습니다. 또 당신이 이 경전을 독송하면 이 경전의 공덕은 있어도 저 경전의 공덕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면, 모든 경전·모든 다라니·모든 계·정·혜가 전부 그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 되는 것입니다.

【마니 대 잡보의 비유】

‘마니摩尼’를 마니보주摩尼寶珠라 부르기도 하고 여의보주라 부르기도 합니다. 마니보주가 비록 작은 구슬에 불과하지만 어떤 보물이 필요하면 바로 어떤 보물이 나옵니다. 마니보주를 향해 “내가 지금 천하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려 하는데 황금 백 톤이 필요하다”고 기도하면,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마니보주 속으로부터 마치 비가 내리듯이 백 톤의 황금이 쏟아져 나옵니다. 만약에 “아직 부족하니까 다시 백 톤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곧바로 비가 내리듯이 백 톤의 황금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 보배를 마니보주라 부릅니다.

그럼 무엇을 잡보라 부를까요? 바로 금·은·진주·마노·적주 등등을 잡보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큰 창고 속에 수많은 보물들이 있는데, 황금·백은·진주·마노 등등의 모든 보물들이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운데 위치에 작은 마니보주 한 알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창고에 들어와서 보물을 가져다 중생들을 구제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보고는 “와, 대문 옆에 바로 한 무더기 황금이 있구나!”고 말하면서 바로 황금을 짊어지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황금이 비록 귀중하기는 하나 아주 빨리 소진되고 말 것입니다.

진정으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보물창고에 들어와서 어떤 보물을 가져갈까요?

(대중) 마니보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나는 저 마니보주를 가져갈 것입니다”고 말할 줄 압니다. 당신이 마니보주를 손에 쥐고 나서 구슬에게 “쌀 오십 톤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바로 쌀이 나오고, “천막이 천개 필요하다”고 말하면 전부 나오게 됩니다. 마니보주만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게 전부 있게 됩니다. 만약에 황금 또는 백은을 짊어진다면, 힘도 들고 또 수고롭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많고 적음에 대해 때로는 표면적인 수량만 봐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마니보주 같은 경우에 한 알뿐이지만 모든 보물을 뿜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주 많은 잡다한 보물들은 수량이 비록 많기는 하나 작은 여의보주 한 알 만 못합니다.

이 비유는 무엇을 설명하려는 걸까요?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가 바로 마니보주여서 이 육자명호 속에는 『금강경』의 공덕이 들어있고, 『법화경』의 공덕·『지장경』의 공덕·『능엄주』의 공덕·『대비주』의 공덕·『십소주』의 공덕도 전부 들어있기에 당신이 이런 공덕이 필요하다면 그 속에 전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기타 갖가지 수행법문도 비록 모두 매우 존귀하고 모두 불가사의하기는 하나 그런 공덕들은 마치 금·은·진주·마노……등의 잡보와 같습니다. 더욱이 우리 범부들이 닦은 오계와 십선의 공덕은 등급이 너무 낮아서 그야말로 깨어진 기와조각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닦은 공덕들은 아직 유루·유위의 선법善法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닦은 자그마한 오계와 십선을 가지고 염불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데, 그건 깨진 기와조각을 안고서 마니보주를 버린 격이니, 보물을 알아보는 눈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지요.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려 한다면 품속에 아미타불 육자명호의 마니보주를 갖고 있어야만 비로소 원만한 공덕을 얻을 수 있으며, 다른 온갖 법문을 닦은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하려 한다면 단지 잡보의 공덕만 얻게 됩니다.

우리는 육자명호가 곧 ‘만덕홍명’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만’은 일체를 포함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공덕이 전부 육자명호 속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게 바로 마니보주가 아니겠습니까? 담란대사님의 『왕생론주』에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컬어 ‘청정한 마니보清淨摩尼寶’라 하셨습니다. 마니보주가 비록 작은 구슬 한 알에 불과하지만 모든 보물들을 토해낼 수 있습니다. 이 한 구절 육자명호 역시 비록 간단하고 짧아서 여섯 글자밖에 안 되지만 일체 불법승 삼보의 공덕과 일체 경전·일체 다라니·일체 수행의 법문·일체 보살·성문·연각의 공덕을 전부 그 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이 마니보주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릴 테니 다들 잘 보관하셔서 잃어버리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오층 건물의 비유】

또 예를 들어, 오층으로 되어있는 높은 건물이 있는데, 일층에는 수만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이층 역시 적지 않은 수천 명이 살고 있으며, 삼층에도 수백 명이 있고, 사층에는 수십 명, 맨 윗층에는 오직 한 사람만 있습니다. 비록 아래 일층·이층·삼층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가장 높은 오층에 사는 사람이 볼 수 있는 범위와 경관과 비교한다면,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경관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위에 있는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을까요?

(대중)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층 건물위에 있는 그 사람이 볼 수 있는 경관이 가장 많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수량상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경계상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경계가 가장 높기 때문에 이른바 ‘천리 밖의 먼 곳을 보려면 누각 한 층을 더 올라가라’는 말이 있듯이 건물 꼭대기에 서서 시선을 멀리 두고 바라보면 끝없이 광활한 벌판이 전부 한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고 동쪽 서쪽으로 아무리 봐도 그 범위는 여전히 조금밖에 안 됩니다.

이 비유는 무엇을 설명할까요? 첫 번째 층은 인천人天의 선법을 대표하고, 두 번째 층은 성문을 대표하며, 세 번째 층은 연각을 대표하고, 네 번째 층은 보살을 대표하며, 건물꼭대기 다섯 번째 층은 곧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모든 선근공덕이 전부 육자명호 속에 들어있기에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면 건물의 오층에 올라간 것과 같아서 우리는 건물꼭대기에 서서 모든 경관을 하나도 빠짐없이 두루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어느 층에 있었을까요? “저는 아마도 일층에 있을 겁니다. 오계십선……” 진정으로 일층에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우리들은 아마도 지하실에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오계와 십선을 닦는 것도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계십선을 닦을 수 없다면 당신은 지하실에 있습니다. 지하실에도 삼층이 있는데, 지옥·아귀·축생으로서 어두컴컴하여 아무런 경관도 볼 수 없습니다.


5) 경문의 증거

 

앞에서 우리는 염불이 많은 선근이라고 충분히 분명하게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불법에서는 ‘성언량聖言量’을 중히 여깁니다. 다시 말해 성인께서 말씀하신 언교言敎를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과 조사스님들의 해석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말이 아무리 일리가 있어도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다음 우리는 경문과 조사의 해석을 근거로 삼아서 염불이 많은 선근이고, 그 외의 온갖 수행들은 염불과 비교하면 모두 적은 선근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열 가지 경문을 열거해보겠습니다.

 

⑴ 『아미타경』

 

우선은 『아미타경』입니다. 『아미타경』에서 먼저 설하기를,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

(不可以少善根福德因緣得生彼國。)

 

고 하셨지만, 어떤 것이 적은 선근인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곧바로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명호를 집지하여

(聞說阿彌陀佛,執持名號。)

 

고 설하셨으므로, 이렇게만 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명호만 집지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바로 많은 선근임을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적은 선근과 복덕으로는 왕생할 수가 없고, 오직 많은 선근이야만 왕생할 수 있는데, 많은 선근과 복덕에 대해 ‘명호를 집지하면 바로 왕생한다’고 설했기 때문에 ‘많은 선근과 복덕은 염불에 있다’고 말한 것이며, 계정혜삼학과 육바라밀 같은 것은 전부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미타경』의 위아래 경문의 순서이므로 이치가 그렇습니다.

 

⑵ 이역본 『아미타경』

 

『아미타경』에는 두 가지 번역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구마라집대사께서 번역하신 것으로서 바로 『불설아미타경』입니다. 이 외에 또 하나의 번역본이 바로 현장대사께서 번역하신 『칭찬정토불섭수경稱贊淨土佛攝受經』입니다. 이 경전에서는 『아미타경』 중에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와 대응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셨습니다.

 

무량수불의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명호를 듣고

(得聞如是無量壽佛,無量無邊,不可思議,功德名號。)

 

명호 앞에다 열 자를 더하여 묘사를 한 것인데,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이야말로 ‘많은 선근과 복덕’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지 이미 숫자로써 형용하고 표시할 수 없어서 ‘무량, 무변, 불가사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명호자체가 바로 많은 선근과 복덕이며, 수승하고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선근과 복덕입니다.

⑶ 범어본 『아미타경』

 

현재 발견된 『아미타경』의 범어원본에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는 이 구절에 대해, 만약 직역을 한다면 어떻게 번역될까요?

 

중생이 이 세상에서 지은 선행으로 인해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라

(眾生不因此世所做善行得生彼國。)

 

다시 말해 중생들이 이 세상에서 지은 갖가지 선행들은 모두 ‘적은 선근과 복덕’으로서 이것을 의지해서는 왕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문에서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육자명호만이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이며, 우리중생들이 이 세상에서 지은 선행들은 모두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에 속하므로 왕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우리가 지은 것들을 가지고 육자명호와 비교를 한다면 모두 적은 선근과 복덕에 속한다는 것이지요.

 

【강궁의 비유】

 

실제로 우리들은 육자명호와 비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 것들은 기껏해야 오계와 십선입니다. 오계와 십선의 선근복덕은 우리로 하여금 인천의 과보를 받도록 해줍니다. 오계와 십선의 선근복덕으로는 아라한조차 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성불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마치 활과 화살과 같은데, 활의 힘은 각각 다릅니다. 예컨대 오계와 십선이 바로 한 장의 활이라면 우리 모든 중생들은 바로 그 활시위에 재워진 하나의 화살입니다. 그럼 오계십선이라는 활시위를 한껏 당겼다가 놓아버리면 ‘휙――’하고 어디로 날아갑니까? 기껏해야 인도人道 혹은 천도天道이겠지요. 천도에 도착한 뒤에 힘이 다하면 또 ‘휙――’하고 떨어지게 되므로, 당신은 여전히 삼계의 인력범위 내에 있습니다. 마치 지구의 위성처럼 아직 지구의 인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지구의 인력범위 내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계십선의 힘, 이 활의 힘으로는 우리를 인간과 천상의 세계로 보낼 뿐, 아라한의 경계까지 보낼 수 없습니다. 만약에 아라한·벽지불의 경계를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사성제·십이인연법을 닦아야만 이 활의 힘이 매우 커서 ‘휙――’하고 삼계를 벗어나 아라한·벽지불의 궤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살의 궤도와는 아직 거리가 매우 멀어서 반드시 더욱 큰 힘을 가진 강궁을 사용해야 하므로, 대보리심을 일으켜 세세생생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촥――’하고 쏘면 보살의 궤도에 도달하게 되지요.

 

우리 현재 염불하는 사람들이 다들 알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도 모두 강궁强弓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활은 이미 오계십선이 아니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강궁입니다. 이 활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여 ‘제불중의 왕이요, 광명중의 극존(諸佛中之王,光明中之極尊)’이며, ‘위신공덕이 불가사의(威神功德不可思議)’한데, 이 활이 바로 육자명호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바로 육자명호라는 이 활시위에 재워진 화살이고, 우리가 염불을 하는 것이 바로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며, 아미타불이 바로 강궁수입니다. 우리들 이 화살이 비록 사바세계에 있지만 아미타불께서 육자명호의 강궁에 재워서 ‘휙――’하니 쏘아버리면 인도를 초월하고, 천도를 초월하고, 삼계를 초월하고, 아라한을 초월하고, 초지 이전의 작은 보살들을 초월하고, 초지 이상의 대보살들을 초월하고, 십지등각보살을 초월하여 곧장 불과를 향해 날아갑니다. 따라서 ‘한 번의 칭념으로 십지를 초월함에 놀라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화살을 쏘고 나서 어떻게 십지보살을 초월할 것인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살이 어디로 날아갈까요? 여러분들은 어디로 날아갈 건지 아십니까? 이 화살은 십만 억 불국토 밖으로 날아가서 곧바로 아미타불의 좌대 옆까지 갑니다.

 

만약에 육자명호의 활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오계십선으로는 기껏해야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서방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육자명호를 의지해야 하며, 육자명호야말로 많은 선근과 복덕으로서 모든 법문과 부처님의 가르침, 온갖 수행의 공덕을 그 속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지는 비유】

 

범어본의 경문은 실제로 하나의 비유로써 서로 증명을 하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물속에 빠졌습니다.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곧 가라앉으려 할 때, 우리가 물속에서 자란 수초를 잡는다면 언덕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수초는 본래부터 물속에서 자란 것입니다.

물속에 있는 돌을 붙잡으면 언덕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역시 안 됩니다.

 

물속에 있는 물건들은 영원히 우리로 하여금 물속에 있도록 만듭니다. 언덕위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언덕으로부터 뻗어 나온 물건을 잡아야 합니다. 만약에 언덕위에서 온 대나무 장대를 잡는다거나 혹은 구명튜브를 잡고서 언덕위의 사람이 잡아당겨주면 당신을 언덕위로 끌어낼 수 있겠지요.

 

우리는 생사의 고해가운데서 온갖 수행을 하고 있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육근이 상대하는 경계들은 전부 삼계내의 것들이고, 전부 생사고해에서 자란 수초와 같은 물건들이며 전부 윤회하게 만드는 인과들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삼계의 고해를 벗어나도록 해줄 수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육자명호는 마치 극락의 열반피안에서 우리의 고해 속으로 내민 하나의 긴 대나무 장대와 같아서 당신이 이 장대를 잡고 아미타불께서 당겨주신다면 바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언덕위에서 온 장대 혹은 구명튜브를 잡지 않고 스스로 물속에서 마구 잡으면서 “아, 옆에 있는 지푸라기 하나 잡았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물속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지은 모든 것들은 전부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깊이 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도록 합니다. 그런 까닭에 범어본의 경전에서 비로소 “중생들이 이 세상에서 지은 선행으로 인해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라”고 설하신 것이므로, 마땅히 저 부처님의 육자명호――아미타불께서 극락세계로부터 대광명을 놓아 우리들을 구제하기 위해 펼쳐주시는 육자명호의 공덕에 의지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해야할 것입니다.


⑷ 『무량수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은 선행으로 왕생할 수 없다면, 그럼 무엇을 의지해서 왕생해야 할까요?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지요.

 

중생들을 위해 법장을 열어 널리 공덕의 보배를 베풀어 주신다.

(爲眾開法藏, 廣施功德寶。)

 

또 설하기를,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신다.

(令諸眾生, 功德成就。)

 

고 하시고, 또 설하기를,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내지 한 번만이라도 염한다면,

이 사람이 큰 이익을 얻고 위없는 공덕을 갖추게 됨을 마땅히 알아라.

(其有得聞,彼佛名號 , 歡喜踴躍,乃至一念,

當知此人,爲得大利, 則是具足,無上功德。)

 

고 하셨습니다.

 

요 몇 단락의 경문을 한곳에다 모아놓으면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육자명호의 공덕을 널리 두루 보시해주셔서 우리와 같이 공덕이 없는 사람들도 공덕을 성취하게 해주시고, 게다가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해주십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이 죄업을 짓고 출리의 기연이 없어서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으며 공덕의 법재法財가 없다는 것을 가엾이 여기시어 우리들을 위해 불법의 보물창고를 열어 보편적이고 평등하게 우리에게 공덕의 보물을 보시해주십니다. 그런 까닭에 “중생들을 위해 법장을 열어 널리 공덕의 보물을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생’은 시방세계에 고뇌하는 중생을 말합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주시는 공덕의 보물을 받으셨나요?

(대중) 받았습니다!

 

아미타불께서 ‘널리 공덕의 보물을 베풀어 주시는데’ 만약에 당신이 받지 못하였다면 아미타불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줬다”고 말씀하십니다. ‘널리 베풀어 주셨기에’ 한명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주시는 공덕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대중) 육자명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또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에게는 공덕이 없습니다. 우리는 공덕을 바라고 있고, 우리는 자신이 공덕을 성취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우리는 ‘내가 이렇게 수행하고 저렇게 수행을 해봤지만 깨닫지 못하고 제법실상을 깨달아 들어가지 못했으니, 기껏해야 유루의 인천선법人天善法에 불과한데 이를 어찌할까?’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량수경』에서 설하시길, 아미타불께서 조재영겁동안 수행하신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려는 것’, 즉 우리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수표의 비유】

 

이는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키우는데, 아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가 편안하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생을 해가며 피땀 흘려 노동을 해서 자신이 번 모든 재산을 최후에 예금통장에 모두 넣고서 “나의 아들아, 이것을 너에게 주겠다”며 아들로 하여금 당신의 재산을 물려받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바로 이렇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특히 자녀가 아직 어리다면 그들을 위해 세심한 고려가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들아! 나는 이제 가야 한다. 이 작은 종이가 바로 내가 평생 모은 재산인데, 여기에 백억이 들어있다. 너에게 줄 테니 이것을 가지고 잘 살거라”고 말합니다.

 

이 어린 아들이 예금 수표를 꺼내서 봅니다. “아버지는 이것이 백억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종이 한 장이잖아! 이 종이는 지금 내가 배가 고픈데 나를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고구마 하나만 못하구나” 그는 이 한 장의 수표가 백억의 재산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아주 가볍게 이 수표를 한쪽에다 던져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아깝습니까, 아깝지 않습니까?

(대중) 아깝습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이것이 바로 눈이 있으면서도 귀한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이 바로 우리들의 자비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오겁의 사유와 조재영겁의 수행을 거쳐 당신이 모으신 모든 공덕을 육자명호의 예금 통장 속에 농축해 두셨지요. 이 육자명호는 마치 예금통장과 같고 한 장의 수표와 같아서 당신은 그것을 얕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없기에 아미타불께서 당신의 육자명호, 위없는 공덕의 결정체를 우리들에게 보시해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명호를 조금 부르고 나서 한쪽에 내려놓고는 “아이고, 이 육자명호는 딱딱하고 허전해서 내가 경전 한부를 독송하거나 또는 무엇을 닦는 것만 재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비유 중의 그 아들이 지혜가 열리지 않아 단지 고구마만 알뿐, 백억이 들어있는 수표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세요, 제가 어떤 공덕을 지었는데, 제가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두꺼운 경전 한권을 독송하였는데, 이 얼마나 진실합니까!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는 한 번 읽고 나면 없잖아요!” 이것은 우리가 무엇이 진실한 공덕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육자명호를 소중히 여기시고 이른바 ‘이 하나의 행을 귀중히 여기시어寶此一行’ 다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는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미타불아버지께서 그렇게 고생해서 닦은 육자명호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결국 우리는 모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육자명호를 다른 것들과 비교를 하면서 “이 육자명호도 좋기는 하지만 만약에 내가 보시·지계·정좌·참법 등의 여러 가지 수행을 한다면, 이런 공덕도 마땅히 큰 차이는 없을 거야!”고 말하는데, 그런 것들은 모두 아주 작은 공덕이어서 기껏해야 사탕 한 개·고구마 한 개·사과 한 개와 같아서 백천만억의 수표로도 비유할 수 없는 이 한 구절 육자명호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단돈 일원으로 빌딩을 사는 비유】

 

얘기가 여기에 이르러 여러분들에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어느 날 우리가 물건을 사러 거리에 나갔다가 평소와 다른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물건을 살 때는 항상 값을 흥정하였는데 이 날은 단돈 일원을 꺼냈지만 뜻밖에 빌딩 전체를 사게 되어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 오늘 돈 벌었다. 오늘 단돈 일원으로 빌딩 한 채를 샀으니 말이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만약에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빌딩 주인이 적극적으로 당신에서 주신 것일 겁니다. 단돈 일원으로는 빌딩 한 채를 살 수 없음에도 뜻밖에 샀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당신에게 주려는 것이었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공짜로 주면 당신이 감히 받지 못할까봐 염려하여 가격을 정하여 당신에게 파신 것이지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도 위안이 될 테니까요. “이것은 내가 돈 주고 산 것이야!”

 

우리 많은 사람들이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려 하는데, 서방극락세계의 과보는 무엇입니까? 성불입니다. 우리가 매일 십만 번씩 절을 하며 백년을 하더라도 이러한 고행을 가지고 성불의 인행因行과 비교를 한다면 당신의 가치는 일원입니다. 그렇다면 성불이란 그야말로 빌딩 한 채의 값어치를 훨씬 넘겠지요.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오계와 십선을 닦아서 그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합니다” 그렇습니다. 오계십선과 같은 온갖 수행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면 역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왕생은 당신의 오계십선의 힘에 의지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닦은 오계와 십선은 기껏해야 우리로 하여금 인천의 과보를 얻게 할 뿐인데, 뜻밖에도 이 오계십선을 가지고 성불의 과보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단돈 일원을 가지고 빌딩 한 채를 바꾼 것인데, 당신은 정말로 당신이 산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당신에게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본래부터 당신의 무량한 공덕을 무상으로 우리들에게 주시려 하지만, 우리의 포부가 옹졸하여 감히 당장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내가 너희에게 팔겠다”고 하신 것이지요. 우리에게 팔려고 하는데 우리가 살 형편이 못된다면 어떡해야 합니까? “그럼 가격을 낮춰서 너희에게 팔겠다”고 말합니다. 얼마에 팝니까? 단돈 일원입니다. 본래 아미타불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왕생을 하고 싶으면 명호만 부르면 너희에게 줄 테니 반드시 왕생한다!”고 하셨지만, 우리는 감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그럼 너희가 수행을 해서 수행공덕을 회향하라”(곧 당신에게 팔겠다는 것이다) 무슨 수행을 해야 할까요? “너희가 어떻게 수행하든 상관없다. 오계든 십선이든, 경전을 독송하든 다라니를 외우든 모두 괜찮으니까 회향을 하여 왕생발원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리어 ‘왕생은 내가 수행을 해서 얻은 것이다’고 여기는데, 우리들의 이 작은 인으로 어떻게 그처럼 큰 과를 감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위해 법장을 열어 널리 공덕의 보물을 베풀어 주시려고’ 우리에게 보시를 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궁자의 비유】

 

『법화경』속에 ‘궁자(빈궁한 자식)의 비유窮子喻’ 하나가 있는데, 방금 제가 말씀드린 이 예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부장자大富長者 한 분이 계셨는데 그의 외동아들이 어려서부터 이산되었지요. 시간이 흘러 대부장자의 연세가 많아졌는데 더 넓은 장원莊園과 풍부한 재산을 가졌음에도 후계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이미 연로하여 머지않아 곧 떠나야할 텐데 꼭 아들을 찾아야겠다!’ 그는 매우 수고롭게 도체에 아들을 찾아 나섰지요.

 

다시 이 아들을 말하자면 어려서부터 대부장자를 떠나 바깥에서 떠돌아다니면서 노숙자 생활을 하다 보니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풍찬노숙을 하며 몸을 제대로 가릴 옷도 없이 궁핍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기껏해야 일용직이나 머슴살이와 같은 하천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한 끼를 먹으면 한 끼를 굶어야만 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이 아들이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침내 대부장자의 대문 앞에 이르러 이 장원을 보고는 “와! 엄청나게 넓구나!”며 감탄을 합니다. 대문 밖에서 안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니 그 안에 매우 위엄 있게 생긴 장자 한분이 앉아계셨는데, 그 옆에 수많은 시종들이 있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거마車馬들이 꼬리를 물고 다녔으니, 그 풍채가 마치 국왕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궁자가 필경 노숙자 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이처럼 호화롭고 위세가 넘치는 곳에 오니까 마음이 편치가 않았습니다. ‘아이고! 안 돼, 여기는 나 같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여기서 오래 머물면 안 될 거야. 오래 머물다간 혹 누가 나를 잡아서 핍박하고 죄를 물을 수도 있어. 내가 빨리 이곳을 떠나 빈궁한 시골이나 가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잽싸게 달아났습니다. 이때 마침 그의 아버지(대부장자가 그의 아버지임)가 안에서 머리를 들자마자 그를 발견하고는 바로 알아봤습니다. ‘저자가 나의 아들이 아닌가? 내가 고생을 하며 도처에서 찾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래서 바로 사람을 부릅니다. “빨리, 빨리 저 사람을 잡아오너라. 도망가게 해서는 안 된다.”

 

시위侍衛들이 대부장자의 명령을 받고서 단걸음에 달려갑니다. 그들은 키도 크고 건장하게 생겼으며, 용감하고 힘도 세고 옷차림도 아주 화려하고 기백이 넘쳤습니다. 궁자가 한참 거기서 이곳은 아마도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는데, 과연 그 속에서 우람한 체격을 가진 두 사나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앗! 큰일 났구나! 나를 잡으러 왔어”라고 소리 지르며 잽싸게 달아납니다. 그러나 도망을 갈수록 뒤에서 더욱 바싹 쫓아와서 결국 그를 붙잡아 강제로 끌고 갔지요. 이때 궁자는 두렵고 걱정되고 긴장한 나머지 그만 기절을 해버렸습니다.

 

대부장자가 보시고는 생각을 했지요. ‘큰일 났구나! 내 아들이 틀림없이 이런 위엄 있는 기세에 놀랐을 것이다. 그의 심량心量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시위에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찬물을 끼얹어서 그를 깨우거라, 깨어난 후에 그를 보내주어라”

 

정말로 그를 보내주는 걸까요? 대부장자는 그를 보낼 수가 없습니다! 수십 년 만에 찾은 아들을 어떻게 보냅니까? 그는 또 방법을 생각해야 했지요.

 

그는 다시 그다지 우람하지도 사납지도 않게 생기고, 다 헤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두 사람을 찾아서 당부합니다. “너희 둘이서 그를 미행하여 뒤를 쫓아가거라” 이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엔 궁자와 비슷하여 거지와 같았는데 비실거리며 쫓아갔습니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듯이 거지와 거지가 만나서 얘기를 나눕니다.

“자네는 어떻게 밥을 빌어먹나?”

“나는 이렇게 빌어먹지……”

“자네는 어떻게 일을 하나?”

“나는 이렇게 일을 하네……” 서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주 친해졌습니다.

 

이 두 사람이 그에게 말합니다.

“사실 자네가 이렇게 고생할 필요 없네. 우리가 일을 하는 그 곳 주인은 아주 자비로우신 분이어서 하루를 일하면 다른 곳에 이틀 치의 임금을 주시거든!”

“그렇게 좋은 곳이 있다니! 그럼 나도 가면 안 될까?”

“자네도 갈 수 있어!”

“그런데 난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나는 글을 몰라서 지식이 필요한 일이라면 다 할 줄 모른단 말이야!”

“그럼 넌 청소를 하면 돼지, 변소 청소 말이야”

“그건 내가 할 수 있어!” 노숙자 생활을 하던 사람이어서 그런 일에 전문이었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이 두 사람은 그를 대부장자의 장원으로 데려와 뒷문으로 돌아서 들어갑니다.(정문은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임) 들어온 뒤에 무슨 일을 할까요? 매일매일 변을 치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은 아주 편안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이 일은 나의 신분에 딱 맞는구나, 내가 바로 변소 청소하는 사람이니까’

 

그는 평생토록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생활도 안정되고 먹고 마실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으며 머물 곳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안심하고 지냈으며 있는 힘을 다해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거기서 변을 치우고 있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장자의 마음은 즐겁지가 않았지요. ‘내 아들이 어떻게 이런 천한 일을 한단 말인가?’ 그들 부자는 아직 알아보지 못했고 재산도 아직 물려주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대부장자는 아들에게 접근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어떤 방법을 생각했을까요?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화려한 복장을 벗어놓고 거친 천으로 만든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거나 변을 치울 때 입는 옷) 그리고는 또 변을 치우는 도구를 들고 아들과 함께 변을 치우면서 상냥한 얼굴로 안부를 묻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생활 형편을 살뜰히 보살펴주었지요.

 

궁자는 한평생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이런 장자를 만나서 자신에 대해 이처럼 자비롭고 관심을 갖고 아껴주시는 것을 보고는 대단히 감동을 하게 됩니다. ‘아,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다니!’ 그는 이때까지도 장자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임을 몰랐으며, 장자 역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서로 친숙해져서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을 때 장자는 살짝 자신의 신분을 폭로합니다. “자네를 속이지 않겠다. 내가 바로 이 장원의 주인일세!”

이 말을 들은 궁자는 깜짝 놀라서 ‘어르신’하고 부릅니다.(보세요. 자신의 부친을 ‘어르신’이라 부릅니다) 이 말을 들은 대부장자는 마음이 매우 괴롭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인데 나를 어르신이라 부르다니!’ 그는 궁자에게 말했지요. “내가 보니까 자네가 내 장원에 온 뒤에 사람이 매우 성실하고 본분도 잘 지키고 일을 하는데도 힘을 아끼지 않았네. 이렇게 하면 어떨까? 네가 나의 양아들이 되어주게나, 나는 연세도 많고 아들도 없으니 자네를 나의 아들로 삼으면 좋겠네. 나를 도와 일도 좀 해줄 수 있으니 거절하지 말거라”

 

이렇게 일개 거지가 갑자기 대부장자의 총애를 받아서 장자를 양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으니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지요. 그는 이 분이 자신의 친아버지임을 모르고서 친아버지를 양아버지로 모시면서도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해나가겠습니다. 또 한동안 시간이 지나서 대부장자는 천천히 그를 가르치게 시작하였지요. 회계와 출납, 그리고 재무관리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내가 너를 아들로 삼은 이상, 우리 서로 외인이 아니니,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네가 전부 관리하도록 하거라” 일꾼들을 파견하고 재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전부 그가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궁자는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일을 합니다. ‘오늘 수입은 얼마이고, 지출은 얼마……’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임시로 세운 가건물 속에서 살고 있고 매일 자신 몫의 임금을 받으며, 밤에 장부정리를 하면서도 “이것은 주인님의 몫, 그분 것이다. 나 자신의 몫은 십원이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또 한동안 시간이 지나서 대부장자가 보니 궁자(즉 자신의 아들)의 포부도 점점 높아졌고 심량도 점점 넓어졌으며 능력도 점점 갖춰지게 되었지요. 이 때 아버지는 그들이 부자관계임을 선포하려고 준비를 합니다.

 

이날 그는 국왕과 대신, 그리고 유명인사들을 전부 초청하여 ‘뉴스발표회’를 열어 부자관계임을 확인시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신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 늙었습니다. 저희 아들을 어느 해에 잃어버렸는데……” 궁자가 들을수록 자신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장자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씀하시면서 천천히 인도를 합니다. “현재 저는 아들을 찾았습니다. 내 아들이 누구냐면 바로 저 사람입니다” 장자는 자신의 아들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이제 나의 모든 재산을 전부 그에게 주어서 그가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들은 이때서야 알았지요. 알고 보니 나를 그렇게 자비롭게 대하시던 사람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의 아버지였음을!

 

그래서 『법화경』에는 네 구절 말씀이 있는데 어떻게 말씀하셨냐면,

 

나는 본래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이 없었건만

지금 이 보물창고가 저절로 들어왔도다.

(我本無心,有所希求。今此寶藏,自然而至。)

 

고 했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한량없는 진귀한 보물들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되었네.

오늘에서야 참으로 부처님의 자식임을 알았도다.

(無量珍寶,不求自得。而今乃知,真是佛子。)

 

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본래 내가 재물을 소유할 줄 몰랐는데(내가 이렇게 풍성한 공덕을 얻을 수 있을 줄 몰랐는데), 한량없는 보물창고가 어떻게 갑자기 나에게로 와서 하루 밤 사이에 호화롭고 부귀한 몸이 되었단 말인가! 오늘에서야 내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자식임을 알게 되었구나!’

 

이야기는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이 이야기를 가지고 한번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대부장자는 어느 분이십니까?

(대중) 아미타부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이십니다. 거지는 누구입니까?

(대중) 우리 중생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본성을 잃고서 아미타불의 열반성涅槃城밖에서 유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보셨을 때 바로 당신의 육자명호의 공덕을 우리에게 보시해주시려고 말씀하셨지요. “중생들아! 나의 외동아들아, 내가 극락세계를 전부 너희에게 줄 테니 너희는 그냥 그렇게 오면 된다! 나의 정토로 왕생하거라!”

우리는 깜짝 놀랍니다. “제가 무슨 자격을 극락세계로 갑니까?” 우리는 용기가 없어서 달아납니다. 아미타불로부터 멀리 도망을 갑니다.

 

이때 아미타불께서는 기타의 법문으로 우리들을 성숙시키는데, 우리로 하여금 수행을 하여 그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즉 자력으로 노동을 하는 것으로서 변을 치우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변을 치운다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의 더러운 때를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궁자가 변을 치우는 일을 의지해야만 비로소 대부장자의 장원에 들어설 용기가 나듯이 근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은 중생들은 여러 가지 법문을 닦아서 회향을 해야만 비로소 정토왕생을 구할 용기가 생깁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가 이미 자력수행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들을 성숙시켜야 했지요. ‘너희들이 여러 가지 공덕을 닦아서 회향하는 것도 매우 좋기는 하나, 나의 명호를 부를 수도 있지 않은가!’

 

명호가 바로 아미타불의 모든 공덕법재功德法財가 저장된 보물창고입니다. 우리에게 칭명염불을 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모든 공덕을 우리에게 보시해주시려는 것이지만 이때는 아직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대부장자가 궁자를 양아들로 삼고서 그에게 창고에 있는 재물들의 출납을 책임지도록 하셨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창고 전체의 보물을 그에게 맡기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기에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고 궁자도 몰랐던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매일 이 ‘나무아미타불’육자명호를 부르면서도 우리는 이 육자명호속의 모든 공덕이 바로 우리들 것인지를 모르고서 ‘내가 2만 번을 불렀으니 이 2만 번의 횟수만큼만 나의 것이고, 육자명호속의 공덕은 아미타불의 것이다’고 여깁니다. 마치 궁자가 이미 장원 안으로 들어가 매일매일 거기서 출납과 회계를 하면서도 자신의 손을 거친 이런 재물들은 모두 대부장자의 것이고, 자신은 자신이 일한 하루만큼의 임금만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아버지가 장원전체를 그에게 주시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또 한동안 시간이 지나 시기가 무르익자 아미타불께서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염불을 하는데, 너희는 본래 나의 자식이고, 극락세계는 너희의 소유이다” 전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때서야 비로소 기쁘게 받아드립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당신의 극락국토 전체를 우리에게 보시해주시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들이 받아들이도록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온갖 법문 속에서 힘들게 수행하게 하여 천천히 우리의 근기를 성숙시켜주시는데, 우리는 그때서야 비로소 육자명호의 공덕의 큰 보물을 받아들입니다.


【근기가 성숙하였다】

 

우리 모두가 염불하는 법문을 믿고 착실하게 염불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변을 치우는 작업을 거쳐서 대부장자가 뉴스발표회를 여는 시점에 이르렀기에 근기가 이미 성숙했다는 것으로, 많은 선근과 복덕이지 적은 선근과 복덕은 아닙니다. 큰 선근이 없고 큰 복덕이 없는 사람은 결코 착실하게 이 명호를 부를 수가 없으니까요.

 

마치 그 거지와 같아서, 그의 근기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 장원전체를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에 도망을 가버리고 기절을 해버린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을 보십시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아무개님, 염불하여 극락왕생하십시오!”라고 말하면

“이봐요, 안 갑니다. 안 가요!”라고 대답할 겁니다.

 

불자들에게 말해보세요.

“염불하여 극락왕생하십시오!”

“잠깐만요! 저는 인천의 복을 구하렵니다!”

 

수행하여 해탈하려는 사람에게 말해 보세요.

“염불하여 극락왕생하십시오!”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극락세계를 갑니까?”

이는 마치 그 거지가 스스로 자신에게는 이 장원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부처님 중의 왕이요, 광명 가운데 최고로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자비하신 아미타불아버지(彌陀慈父)께서는 우리들처럼 도처에서 유랑하고, 고집스럽고 오만불손하며, 은혜를 배반하고 거역한 중생들을 구제해주시므로, 우리 모두 부처님의 원력에 수순하고 부처님께 효순해야 합니다. 경전에서 설하시길, ‘부처님께 효순하는 것이 실로 큰 선이다’고 하셨습니다.

 

【서방에 왕생하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쉽다】

 

염불왕생은 아주 자연스럽고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에서 첫 번째로 쉬운 일이 바로 염불하여 왕생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쉬운 일이 바로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서방에 왕생하지 않으면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지게 되는데,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설사 금생에 당신에게 수행이 있어서 다음 생에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더라도 다다음 생에는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인광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방에 왕생하는 것은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욱 쉽다.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서방에 왕생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럼 왜 서방극락세계에 가서 성불하는 것은 쉽고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도리어 어려운 걸까요? 그 이유는 내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우리가 오계를 닦은 공덕에 의지해야 하므로 자력에 의지해야 하는 반면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은 불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쉬운 것입니다. 극락왕생에 대해 『무량수경』속에 몇 구절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나라에 가는 일은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않으며,

저절로 이끌려서 가게 되느니라.

其國不逆違,自然之所牽。

성불의 길에 오르게 되는 극락을,

가기는 쉬워도 가는 사람이 없느니라.

升道無窮極,易往而無人

 

왕생을 하기란 매우 쉽지만 결과적으로 왕생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다들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저절로 이끌려서 간다’고 말하는 걸까요? 자연스럽게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억지로 시키거나 인위적인 조작이 전혀 없다는 것으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하고 칭념만 하면 단 한사람도 왕생하지 못하는 이가 없기에 당신이 거기서 ‘내가 이렇게 해서 왕생할 수 있을까?’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목이 바다에 들어가는 비유】

 

비유를 한다면 우리가 나무 한 토막을 장강 속에다 던져버리면 이 나무는 틀림없이 강물을 따라서 동해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그렇죠? 틀림없이 동해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도중에 누군가 건진다거나 또는 나뭇가지에 걸린 경우만 아니면요. 우리가 배를 타고 나무토막 뒤를 쫓아가면서 ‘그래, 니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동해까지 가는구나’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무는 자연스럽게 도착할 겁니다. 설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가 바로 우리들이고, 강물이 바로 염불하는 법문, 즉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이며, 동해가 바로 극락보국極樂寶國입니다. 건져졌거나 걸렸다는 것은 바로 잡행잡수를 말하지요. 우리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아미타불께 던져서 귀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무라는 말은 곧 귀명이요,

아미타불이란 말은 곧 그 행이다.

言南無者,即是歸命;言阿彌陀佛者,即是其行。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미타불께 귀명하여 일생동안 오로지 염불하며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한다면 우리들 이 나무토막을 육자명호의 장강 속에다 던져버린 것과 같아서 어디에도 걸림없이 자연스럽게 앞물결·뒷물결의 물결 따라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자연스럽게 극락정토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것은 육자명호의 힘에 의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미타불의 원력에 이끌려서 가는 것으로서 이것을 ‘저절로 이끌려서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먼 곳을 쉽게 도달하는 비유】

 

집을 떠나 여행을 다닐 때, 때로는 만리 밖에 있는 장소를 도리어 백리 밖에 있는 장소보다 더 쉽게 도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통수단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가 여기서 금문도金門島까지 가려는데 스스로 헤엄쳐서 가야 한다면 굉장히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을 가는 것은 도리어 쉽습니다. 왜 그럴까요? 비행기를 타면 되니까요. 왜 그렇게 먼데도 도리어 쉽고, 이렇게 가까운데도 도리어 어렵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의지하는 힘이 달라서, 하나는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는 비행기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의지했을 때 이런 능력이 없다면 매우 어려울 것이고,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의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아주 쉬운 것이지요.

 

우리가 십만억 불국토 밖에 있는 극락세계에 가는 게 도리어 쉬운 것은 우리가 육자명호의 비행기를 탔기 때문이고, 사람 또는 천상세계로 환생하는 것이 도리어 어려운 것은 자신의 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러러 불력에 의지해야 하는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명호의 공덕보물】

 

법장보살께서 아미타불이 되셨는데, 그분께서는 우리의 공덕을 성취시켜 주시려고 널리 공덕의 보물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럼 공덕의 보물은 어디에 있을까요? 『무량수경·유통분』에 나오는 이 단락의 경문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셨지요.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거나 내지는 한번만이라도 염(念)하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됨을 마땅히 알아라.

其有得聞,彼佛名號, 歡喜踴躍,乃至一念,

當知此人,爲得大利, 則是具足,無上功德。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일러주셨지요.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 칭명염불을 하는 사람은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되고 아미타불께서 보시해 주시는 공덕의 보물을 얻게 되느니라” 따라서 아미타불의 공덕보물이 바로 육자명호입니다.

 

【뛸 듯이 기뻐함】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其有得聞,彼佛名號’란, 저 부처님명호의 위신공덕이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들은 사람이 ‘아! 육자명호에 이처럼 불가사의한 위신공덕이 있다니!’하면서 신순(信順:믿고 따름)하고 귀앙(歸仰:귀순하고 의지함)하게 되는 것을 말하지요.

 

‘뛸 듯이 기뻐한다歡喜踴躍’; 왜 뛸 듯이 기뻐할까요? 당신에게 백만원을 주면서 “왕생할 수 없다. 죽어서 삼악도에 갈 것이다”고 말한다면 뛸 듯이 기뻐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른바 ‘뛸 듯이 기뻐함’이란 곧 ‘내가 결정코 생사해탈을 해서 불도를 성취할 수 있다. 내가 금생에 비록 가난뱅이어서 남들로부터 무시당하면서 살지만 일단 눈만 감으면 나는 바로 정토에 가서 성불할 것이다’, 이런 것을 뛸 듯이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왕생에 대해 결정적인 확신이 있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왕생이라는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두려워하며 ‘왕생할 수 있을까, 없을까? 만에 하나 왕생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삼악도에 떨어지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괴로워서 뛸 듯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육자명호는 틀림없이 나를 구제할 수 있다. 내가 육자명호를 칭념하면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런 마음이라야 ‘뛸 듯이 기뻐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내지 한번만이라도 염하면】

 

‘내지 한번만이라도 염하면乃至一念’; 일념의 믿고 따름과 염념의 칭명, ‘내지 일념’과 ‘내지 십념’은 모두 『무량수경』에서 설하신 것으로서, ‘일념’과 ‘십념’의 앞에 ‘내지’라는 두 글자가 붙은 것은 단지 일념·십념만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법문을 듣고서, 만약에 수명이 연장되었다면 그럼 하루·이레·일년·십년……, 만약에 당장에 수명이 끝나서 우리가 열 번밖에 염불을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면, 그럼 열 번(十念)만 하고, 한번만 염불하고 나서 숨이 끊어진다면 그럼 한번(一念)만 염불해도 모두 왕생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지 일념’의 뜻입니다.

 

【칭명의 선근이 부처님과 같음】

 

‘마땅히 이 사람이 큰 이익을 얻게 됨을 알라當知此人,爲得大利’;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서 신순信順하고 귀명하며 뛸 듯이 기뻐하는 이 중생이 일념사이에 ‘큰 이익을 얻게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성불하여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이익을 ‘큰 이익’이라 부르는 것이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된다’는 것은 한 구절 명호 속에 위없는 공덕을 원만히 구족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아라한은 위가 있는 공덕으로, 위에는 아직 보살이 있습니다. 보살 역시 위가 있는 공덕으로, 위에는 부처님이 계십니다. 부처님은 원만해지셨기에 위없는 공덕이라 부르지요. 아미타불께서 당신의 위없는 공덕을 육자명호 속에 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뛸 듯이 기뻐하며 내지 한번만이라도 염한다면’ 바로 위없는 공덕을 얻도록 해주셨지요. 그런 까닭에 우익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범부중생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하면,

선근복덕이 부처님과 다를 바 없다.

 

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한 구절 명호를 부르면 우리의 선근과 복덕은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아미타불께서 닦으신 모든 공덕이 전부 이 육자명호 속에 들어있는데, 이 명호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들이 평등하게 얻을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경문에서는 육자명호야말로 원만하고 위없고 구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선근공덕, 이른바 ‘위없는 공덕’임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⑸ 『관경』

 

다섯 번째 경문은 『관경』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여기서 인용한 것은 선도대사님의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관경』의 원문이 전후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선도대사님의 해석문에서는 그것을 한곳에다 병렬해놓고서 한 번의 염불과 갖가지 법문을 수행하는 선근과 복덕의 크기에 대해 비교한 것입니다.

 

『관경』의 하품상생에서 이 사람은 임종할 때서야 비로소 선지식이 불법을 설해주는 인연을 만났는데, 그에게 두 가지 법문을 설해주셨지요. 첫 번째는 대승의 12부 경전을 설해 주셨기에, 그가 대승 12부 경전의 제목이름, 즉 『금강경』·『법화경』·『능엄경』·『화엄경』등등을 듣게 되는데;

 

12부경전의 이름을 듣고서 단지 천겁의 죄를 소멸하였느니라.

聞經十二部,但除罪千劫。

 

대승불교에서는 경전을 12가지 종류로 분류하므로, ‘12부 경전’이란 모든 대승경전을 대표합니다. 또한 12부 경전을 듣는다는 것은 갖가지 수많은 대승경전을 들었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그 효과는 어떻습니까? 천겁의 극중한 악업을 소멸했다지요. 천겁이라, 하나의 대겁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요? 그것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천겁동안에 지은 죄업을 소멸했으므로 엄청 많이 소멸한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 그로 하여금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도록 하지 못한 것은 우리의 죄업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또 말씀하셨지요.

 

한번 칭명염불을 하여 50억겁 생사의 죄를 소멸하였느니라.

稱佛一聲,除五十億劫生死之罪。

 

‘나무아미타불’하고 한 번 부르는 동시에 50억겁의 생사의 죄를 소멸합니다. 다들 계산해보십시오. 입으로 한 번 염불을 하면 50억겁의 생사의 죄를 소멸하고, 12부경전을 들었을 때는 천겁의 죄를 소멸하였습니다. 만약에 12부 경전을 듣는 시간을 가지고 염불을 한다면 몇 겁의 죄를 소멸하겠습니까? 그럼 엄청나겠지요! 게다가 ‘생사의 죄를 소멸한다’고 말한 이상, 단지 수량상의 ‘50억’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부처님명호의 공덕이 너무 커서 한번만 칭명해도 영원히 생사윤회가운데 다시 떨어지지 않을 만큼 생사의 죄가 이미 소멸되었음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죄업을 많이 소멸했다는 것은 명호의 공덕이 크고 많기 때문에 소멸한 죄업이 많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로써 이 육자명호의 공덕은 이처럼 많은 죄업을 소멸할 수 있어 단박에 생사를 초월하여 단박에 극락으로 돌아가도록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타 일체 법문에는 이러한 기능과 효과가 없습니다.

 

【쌀밥의 비유】

 

12부경은 불교내의 모든 경전과 모든 법문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경전으로 겨우 천겁의 죄를 소멸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체법문을 가지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인지의 법문(因地法門)이지 과지의 법문(果地法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현재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 배가 고픈데 당신에게 ‘곡물재배기술’이라는 책을 주면서 어떻게 곡물을 재배하는지 이 책을 보라고 합니다. 이 책을 다 보고 난 후에 다시 두 번째 책을 보라고 합니다. 당신더러 어떻게 쌀을 가공하고 밥을 짓는지를 배우라고 하면서 쌀밥을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시간이 없어요, 배가 너무 고파요”라고 말하겠지요.

 

무슨 뜻일까요? 불경佛經에서는 우리에게 성불의 방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금강경』에서는 우리더러 네 가지 상인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타파하라고 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불하는 방법입니다. 『능엄경』·『화엄경』에도 각자의 방법이 있습니다. 보살은 인지에서 수행하는 과정 중에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성불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근기로는 금생에 눈을 감았다하면 바로 삼악도에 떨어지게 될 테니까요.

 

부처님의 명호는 이미 성취된 불과佛果로서, 마치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다시 당신더러 ‘곡물재배기술’을 읽도록 하는 게 아니라 직접 흰 쌀밥을 당신의 앞에다 갖다 주는 것과 같아서 당신이 배가 고프면 바로 먹기만 하면 됩니다!

 

이 두 가지 방법 중에 어느 방법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매우 분명한 것은 과지의 법문이라야 비로소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을 듣고서 소멸한 죄업이 적은 이유는 그것이 인지의 법문이기 때문이고, 염불하여 소멸한 죄업이 많은 것은 부처님의 명호를 칭념하는 것은 과지의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점입니다.

 

두 번째는 대승경전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말씀하시는데, 만약에 우리도 제법실상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죄업은 서리나 이슬과 같아서 지혜의 해로써 능히 소멸할 수 있고’, ‘천년동안 어두웠던 방에 등 하나만 밝히면 바로 어둠을 물리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도를 깨달을 수 없다면 소멸하는 죄도 적고 얻은 복보와 공덕도 매우 한계가 있습니다.

 

【향기를 맡는 비유】

 

또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법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모든 경전에서 설한 것은 전부 인지법문이어서 과지의 법문인 염불만큼 수승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근기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런 법문은 우리와 같이 죄업이 두텁고 마음이 들떠있고 수명이 짧은 근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소멸한 죄업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선도대사님의 『관경소』에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자명호를 칭념하는 것은 그것과 달라서, 이는 과지의 법문으로 직접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밥을 들고 와서 당신이 먹도록 주지 않고 밥의 향기만 맡으라고 한다면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겠지요. 12부 경전에서 어떻게 성불할 것인가를 설하고 있지만 우리 같은 하열한 근기의 입장에서는 설하신 것이 전부 성불의 향기뿐이어서 우리에게는 성불의 열매를 맛볼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풍겨오는 향기만 맡을 뿐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육자명호를 부르는데, 입으로 한번을 부르면 한 번의 위없는 공덕을 얻고 열 번을 부르면 열 번의 위없는 공덕을 얻게 되므로 아주 확실합니다. 동시에 이 육자명호를 부르는 데는 우리의 깨달음을 필요하지 않고 또 ‘청정심이 있어야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중생일지라도 단지 입을 열어 칭념하고 염불하기를 원하고 왕생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끝없는 공덕을 우리의 마음속으로 끌어당겨서 우리의 공덕이 되도록 할 수 있기에 매우 쉽고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따라서 용이하면서도 수승하고 수승하면서도 용이한 법문은 오직 염불에 있습니다.

 

【명호가운데서 큰 이익을 얻다】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거나 내지는 한번만이라도 염(念)하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됨을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게 되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된다’고 하셨는데, 어디에서 큰 이익을 얻게 될까요? 앞에서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큰 이익과 위없는 공덕은 아미타불의 명호가운데서 얻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아미타경』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명호를 집지하여……곧 왕생하게 되느니라’고 설하시고는 이어서 ‘내가 그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 이익을 보았다’는 그 이익이 바로 왕생이므로, ‘명호를 집지’하는 것으로부터 왕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두 부의 경전에서 일치하게 모두 육자명호를 위없는 공덕을 삼으셨으니, 이른바 ‘많은 선근과 복덕’입니다.

⑹ 『경전』의 말씀

 

여섯 번째 경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천하의 칠보로써 부처님과 보살·연각·성문들께

공양올린다면 많은 복을 얻게 된다.

若人以四天下七寶,供養佛及菩薩、緣覺、聲聞,得福甚多。

 

이것은 아주 많습니다! 사천하의 칠보, 즉 금·은·진주·마노 등등을 가지고 부처님·보살·성문·연각에게 공양한다면 얻게 될 복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또 말씀하셨지요.

 

사람들에게 한 번 염불하도록 권하는 것만 못하여

이 복은 저 칠보를 공양한 복을 뛰어넘는다.

不如勸人,念佛一聲,其福勝彼。

 

이는 경전에서 분명히 하신 말씀으로, 당신이 사천하의 칠보를 가지고 불보살님들께 공양한다면 당신이 이렇게 많은 복을 얻게 되지만, 사람들에게 염불을 한번 하도록 권하여 얻는 복이 그 사람을 초월하는 것만 못하므로, ‘사람들에게 한 번 염불하도록 권하는 것만 못하여 이 복은 저 칠보를 공양한 복을 뛰어넘는다’고 설한 것입니다. 그럼 더군다나 스스로 염불하고 매일매일 염불하고 한결같이 오로지 염불하는 것이겠습니까! 따라서 염불이야말로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라는 경문의 뜻은 아주 분명하여 따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이 있는 복덕은 많은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은 『금강경』을 독송하기를 좋아하시는데, 『금강경』속에 있는 두 구절 말씀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복덕에 복덕의 상이 있다면, 이 복덕을 복덕이 많음이라 말하지 않으며,

만약 복덕에 복덕의 상이 없다면 복덕이 많음이라 말하리라.

若福德有福德相,是福德不名福德多;若福德無福德相,是名福德多。

 

『금강경』을 독송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고 계실 텐데, ‘복덕에 복덕의 상이 있다면’ 이것을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을 수행하고 이것을 공양하고 보시하고 이것을……수행을 많이 해야 한다’ 이것은 모두 상이 있는 것으로서 이것을 많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덕의 상이 없어야만 비로소 복덕이 많은 것이지요.

 

우리가 이 육자명호를 부르면서 “보세요,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뭔가 허전해서 제가 여기서 실제로 좋은 일을 하는 공덕만 못한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복덕의 상이 있는 것이어서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육자명호는 태허공과 같아서 실상자체이자 상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복덕이 많은 것입니다.

⑺ 『대비경』

 

『대비경大悲經』에서 말씀하시기를,

 

한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 이 선근으로써

열반계에 들어가 다함이 없느니라.

一稱佛名,以是善根,入涅槃界,不可窮盡。

 

고 하셨습니다. 한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선근으로 ‘열반계에 들어가 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열반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성불을 했다는 것으로, 성불을 ‘대열반을 얻음’이라 말하며, 아직 다함이 없어서 여분이 남아있기에 ‘다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성불하고도 남음이 있다】

 

근대의 인광대사께서도 말씀하셨지요.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데 익숙해지면, 성불하고도 남음이 있거늘,

다른 법문을 배우지 않더라도 다시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一句南無阿彌陀佛念得熟,成佛有餘,不學他法,又有何憾?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만약에 당신이 전념하고 숙념熟念을 할 수 있다면 성불하고도 남음이 있으므로 다른 법문을 배우지 않아도 전혀 유감스럽지 않다는 것이지요.

 

본래 부처님은 원만한 경계여서 부족함도 없으시고 남는 것도 없으시지만, 여기서는 한 구절 명호의 선근공덕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 이 선근으로써 열반계에 들어가 다함이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선근을 어떻게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의 명호는 위없는 선근복덕이고, 다함이 없는 곧장 열반계에 들어가는 선근복덕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가 바로 열반계이므로, 육자명호를 칭념하면 바로 열반계인 극락정토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⑻ 『열반경』

 

여덟 번째 경문은 『열반경』에서 설하신 것입니다.

 

가령 큰 창고를 열어서 한달 동안에 일체중생에게 보시하더라도,

假令開大庫藏,一月之中,布施一切眾生,

 

큰 보물창고를 열어 사람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게 해서 ‘일체중생에게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매우 크고 복덕도 매우 큽니다.

 

얻은바 공덕은 어떤 사람이 입으로 부처님명호를 한번 부른 것만 못하여

그 공덕은 앞에서 보시한 공덕을 뛰어넘어 비교할 수 없느니라.

所得功德,不如有人稱佛一口,功德過前,不可較量。

 

이렇게 큰 공덕을 얻었음에도 남이 한 번 부처님명호를 부르는 것만 못하여 이 공덕이 앞의 공덕을 초월하여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반경』에서 하신 말씀은 조금도 모호하지가 않습니다.

 

⑼ 『증일아함경』

 

『증일아함경』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사사로써 염부제의 일체 중생에게 공양하더라도,

만약 소젖을 짜는 잠깐사이에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면

그 공덕은 위의 공덕을 뛰어넘어 불가사의 하느니라.

四事供養閻浮提一切眾生;

若有稱佛名號,如搆牛乳頃,功德過上,不可思議。

 

‘사사四事’란 곧 음식·의복·의약·침구 등으로서, 바로 우리가 필요한 일체 생활용품을 말합니다. 만약 현재로 말한다면 자동차·아파트 등등도 전부 그 속에 포함되겠지요. ‘염부제의 일체중생에게 공양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한다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중생들, 그들의 모든 생활용품을 전부 당신 혼자서 공양한다면 것인데, 그렇다면 당신이 얻은 복은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무아미타불명호를 칭념한다면, 설사 우유 한 컵을 짜는 시간만큼이라도 ‘그 공덕은 위의 공덕을 뛰어넘어 불가사의하다’, 사사로써 염부제의 일체 중생에게 공양한 공덕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경문에서는 비교를 통하여 염불만이 비로소 진정으로 많은 선근과 복덕이며, 다른 법문으로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⑽ 『대지도론』

 

용수보살께서도 『대지도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어떤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곧 하루에 천리 길을 천년동안 걸으면서

그 속에 가득한 칠보로써 부처님께 받들어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후대의 악세에서 한 번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만 못하여

그 복은 저 사람을 훨씬 뛰어넘느니라 .

譬如有人,初生墮地, 即能一日行千裏,足一千年, 滿中七寶,奉施於佛;

不如有人,於後惡世, 一聲稱念,阿彌陀佛,其福勝彼。

 

비유를 하나 하셨지요. 어떤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하루에 천리 길을 걸을 수 있는데, 이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걸었을까요? 천년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계산을 해본다면 하루에 천리인데, 천리는 얼마나 큽니까? 그 범위가 아주 커서 열흘이면 만리, 그럼 한달이면 삼만리이고, 일년이면 36만리입니다. 그가 천년 동안 이렇게 큰 범위를 지났는데, 지하‘속에는 칠보로 가득하여’, 그가 지나간 장소에는 전부 칠보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칠보로써 ‘부처님께 받들어 보시한다’, 가져다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면 그가 얻은 복이 클까요, 크지 않을까요? 많을까요, 많지 않을까요? 이 복은 정말로 엄청나게 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후대의 악세에서’, 석가모니불께서 열반하신 뒤에, 즉 우리 현재의 오탁악세, 이 말법시대를 말하는데 악세의 중생들은 마음이 청정하지 않아서 청정심으로 염불하는 게 아니라 악세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중생들입니다. ‘한번 아미타불을 칭념하면 그 복은 저 사람을 뛰어넘는다’, 한번 염불하는 선근과 복덕은 하루에 천리씩 천년을 걸어서 그 범위내의 칠보로써 공양한 공덕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생각으로 이 명호의 공덕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야말로 많은 선근과 복덕입니다.

 

【항공모함 대 작은 어선의 비유】

 

다들 여기까지 배우고 나면 염불하는데 신심이 생겨서 “이렇게 하면 안 될까요, 저렇게 하면 안 될까요……”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허전해하면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 염불마저 안 된다면 그럼 끝장이죠.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염불은 제일 잘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래도 안 된다면 그럼 또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는 마치 우리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은데, 슈퍼 항공모함을 타고도 거기서 ‘이것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다시 작은 어선 하나를 구해서 대비를 해놓았다가 만에 하나 항공모함이 뒤집어지게 되었을 때 나의 이 작은 어선으로 한동안 버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항공모함조차 건널 수 없다면 당신의 작은 어선이 쓸모가 있겠습니까? 이는 그가 항공모함에 대해 모를뿐더러 작은 어선마저도 모른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왜 그럴까요? 항공모함으로 건널 수 없는 바다가 없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고, 작은 어선으로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것도 그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가 항공모함을 너무 얕보고, 자신의 작은 어선을 너무 높게 보았기에 두 가지가 다 틀렸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염불이 바로 아미타불의 항공모함에 올라타는 것이고, 염불이 쓸모 없을까봐 다시 여러 가지 잡행잡수를 한다는 것이 바로 작은 어선을 대비해놓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만에 하나 염불해서 왕생할 수 없을 때, 다시 내가 닦은 이것을 가지고 보충을 해야지” 이는 마치 “육자명호의 대원선이 만약에 우리를 구제할 수 없다면 다시 우리가 수행한 것을 의지하여 보충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잡행잡수입니다. 그럼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염불의 항공모함마저도 안 된다면 잡행의 작은 어선인들 되겠습니까? 따라서 염불이야말로 반드시 왕생하는 길이지요.

 

잡행잡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너무 경시하고 자신의 잡행공덕을 너무 높이 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이 육자명호에다 집중하라는 것이지 ‘그럼 나는 선행을 닦고 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두 가지 다른 개념으로서 그것은 우리 불교도들이 마땅히 실천해야할 것들입니다. 다만 우리 범부들이 지은 독이 섞인 유루와 유위의 선을 가지고 육자명호를 능가하려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고, 또한 육자명호의 수승한 공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음】

 

이상 열 단락 경문의 증거들인데, 매 단락의 경문마다 모두 부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므로 모두 힘이 넘치고도 단호하십니다. 우리는 불교도로서 부처님을 믿어야 하지만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범부이므로 때로는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믿으려면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으면 당신이 어떻게 믿어야 비로소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염불하면 왕생한다고 말씀하셨으므로 당신이 “염불하면 정말로 왕생할 수 있습니까?”라며 물음표를 던져서는 안 됩니다.

 

“이봐, 이씨!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자네가 보기엔 왕생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없을 것 같은가?”

이씨가 말합니다. “내 생각엔 안 될 것 같아!”

“아아, 그럼 자네의 말을 듣겠네. 장씨,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장씨도 말합니다. “나도 위험하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도대체 부처님을 믿어야 합니까, 아니면 장씨·이씨를 믿어야 합니까? 당신이 만 명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전부 “단지 염불만 해서 왕생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오직 석가모니부처님만이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극락왕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석가모니불을 믿지 못하고 범부속인들을 믿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당장에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장에 믿고 따를 수 있다면 당신은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은 사실 이해가 필요 없고 당신이 많은 책을 읽을 필요도 없이 부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으면 당신은 어떻게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컨대 석가모니불께서는 『아미타경』에서 시작부터 말씀하십니다.(이 말씀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지요)

 

여기에서 서쪽으로 십만 억의 불국토를 지나서 극락이라는 세계가 있느니라.

그 나라에‘아미타’라고 부르는 부처님이 계시는데, 지금 현재 법을 설하고 계시느니라.

從是西方, 過十萬億佛土, 有世界,名曰極樂, 其土有佛,號阿彌陀。

 

십만억 불국토 밖의 극락세계를 당신이 본 것도 아니고, 당신이 망원경을 가지고 보더라도 보이지 않으며 과학자들이 허블망원경을 사용하여 허공을 향해 보아도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믿으면 믿는 것입니다. 당신이 교수라서 비로소 이 말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일반백성이고 일자무식하다고 해서 믿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믿으면 믿는 것입니다.

 

신심은 지혜의 체현體現입니다. 동시에 역량의 체현이기도 한데,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을 수 있다면 지혜가 있고 역량이 있는 것이지요! 한사람이 제아무리 학문이 있다하더라도 만약에 그가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의 마음은 여전히 연약하고 무기력한 것입니다.


6) 조사의 해석

 

우리는 계속해서 여섯 번째 ‘조사의 증명祖證’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조사님의 교증敎證으로써 염불이 많은 선근과 복덕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열 가지 문장을 열거하였습니다.

 

⑴ 담란대사의 『왕생론주』

 

【진실한 공덕】

 

첫 번째 단락입니다. 담란대사께서 『왕생론주』에서 말씀하시기를, “공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진실한 공덕이고, 하나는 진실하지 못한 공덕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무엇이 진실한 공덕일까요?

 

보살의 청정한 지혜의 업으로부터 일어나 불사를 장엄하며,

법성을 의지해 청정한 모습으로 들어가니,

이 법이 전도되지 않고 허위가 아니기에 진실한 공덕이라 부른다.

어째서 전도되지 않은가?

법성을 의지하고 이제를 수순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허위가 아닌가?

중생을 거두어 필경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從菩薩清淨智慧業起, 莊嚴佛事, 依法性, 入清淨相,

是法不顛倒,不虛偽,名爲真實功德。

云何不顛倒?依法性,順二諦故;

云何不虛偽?攝眾生,入畢竟淨故。

 

이 단락을 자세하게 해석하기란 쉽지가 않겠지만, 그 대의는 아주 명백합니다. 보살이 닦은 바는 법성에 수순하므로 진실한 공덕이 되는 것이고, 전도되지 않고 허위가 아니어서 중생을 거두어 정토로 돌아가서 필경에 성불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장보살께서 역겁歷劫 동안을 법성에 수순하여 수행하여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를 성취하셨기에, 염불인들을 섭수하여 정토에 돌아가 성불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자명호가 바로 진실한 공덕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공덕】

 

어떤 것이 진실치 못한 공덕일까요? 범부중생들이 닦은 모든 인천의 제선(人天諸善)들은 전부 다 진실한 공덕이 아닙니다. 진실한 공덕이 바로 많은 선근이라면 진실치 못한 공덕은 당연히 적은 선근복덕이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없는 것과 같아서 ‘적다’라고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원문을 보겠습니다.

 

범부가 닦은 인천의 모든 선과 인천의 과보들은,

원인이든 결과든 모두 전도되고 모두 허위인 까닭에

진실치 못한 공덕이라 부른다.

凡夫人天諸善,人天果報,若因若果,

皆是顛倒,皆是虛偽,是故名不實功德。

 

우리는 범부이므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인천의 선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착한 원인을 닦으면 착한 과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인중因中의 인천제선人天諸善이든 아니면 과상果上의 인천복락人天福樂이든 ‘모두 전도되고 모두 허위이다’는 것입니다.

 

왜 전도되었다고 말하는 걸까요? 앞에서 “유루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법성을 수순하지 않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아상을 여의지 못했으며, 법성을 수순하지 않고 법의 근본과 괴리되어 위로 오르기를 바라나 도리어 아래로 떨어지고 마는 격이니 영원히 삼악도에 가라앉아 벗어날 수 없기에 전도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허위라고 말할까요? 덧없이 변화하고 생멸하여 진실하지 않아서 법성의 공덕에 계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허위라 말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보시를 말한다면 보살은 삼륜의 체가 공(三輪體空)하여, 보시하는 나도 본래 공하고, 보시를 받는 사람도 공하며, 보시를 하는 물건도 공하므로 닦은 공덕이 진실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범부는 세 가지 상이 견고하여 내가 보시를 하여 장래에 복을 받는다――아상에 대한 희구가 견고하고, 남이 나의 보시를 받았으니 나의 은혜를 받았다――인상에 대한 아만심이 견고하며, 이런 재물들은 모두 내가 보시한 것이다――물건의 상에 대해 탐내고 아끼는 마음이 견고합니다. 이렇게 수행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을 닦아도 생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성의 공덕입장에서 말한다면 우리의 이 같은 수행들은 유루와 유위의 생멸법이기에 때문에 허위라고 말하고 진실하지 못한 공덕이라 말합니다.

 

【인과가 서로 부합함】

 

여러분들께 묻겠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공덕을 가지고 진실한 공덕의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것은 전도된 인을 가지고 극락의 전도되지 않은 과를 얻으려 하는 것인데,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과가 서로 부합하지 않습니다.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의 청정하고 장엄하고 진실한 열반의 국토이므로, 진실한 열반의 정토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진실한 열반의 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 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육자명호입니다. 육자명호는 본래부터 실상법이어서 아미타불의 위없는 공덕입니다. 따라서 육자명호를 지니고 극락국토에 왕생하는 것은 인과가 서로 부합하는 것입니다.

 

어제 든 비유와 같이 국왕의 성지를 가지고 왕궁에 들어가 국왕을 알현해야만 비로소 인과가 부합하고 완전히 상응하며 경계가 일치한 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이 적은 쪽지 하나를 들고 국왕을 만나려 한다면 만날 수가 없겠지요.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직접 서명을 해주신 명호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자명호로써 우리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시방의 중생들아, 나의 명호를 부르면 내가 너희들을 영접하여 나의 정토로 돌아가겠다!” 이 육자명호가 바로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초청장입니다.

 

⑵ 선도대사의 『법사찬

 

두 번째 단락을 보겠습니다. 이 문장은 선도대사님의 『법사찬』에서 나온 것입니다. 『법사찬』은 선도대사께서 찬탄하는 게송讚偈의 형식으로 『아미타경』의 중요한 뜻을 해석하신 것입니다. 그중의 이 네 구절 말씀은 굉장히 유명한데, 『아미타경』의 ‘적은 선근으로 왕생할 수 없으니, 명호를 집지하여 일심불란하면 곧 왕생하게 된다’는 왕생의 정인正因에 관한 이 단락의 경문을 해석하신 것입니다.

 

극락의 무위열반계는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아마도 왕생하기 어렵나니,

여래께서 요법을 선택하시어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시네.

極樂無爲涅槃界,隨緣雜善恐難生,

故使如來選要法,教念彌陀專複專。

 

【열반의 보토】

 

‘극락의 무위열반계’라, 선도대사께서는 극락세계를 보토·무위열반의 경계라고 판정하셨습니다. ‘위爲’는 곧 인위적인 조작이고, ‘무위無爲’는 인위적인 조작을 멀리한다는 것으로서 성품자리의 공덕이 저절로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일체의 조작은 전부 유위이지 무위가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가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건물은 유위법이어서 장래에 사라지게 되며, 절을 지어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황폐해지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유위법입니다.

 

오직 불성만이 무위인데, 극락세계는 무위이고 열반의 경계입니다. 열반은 불생불멸이어서 쇄함도 변함도 없이 본래 그대로 상주常住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아무튼 이것은 매우 고묘한 불국토의 경계이자 불성이 완전히 드러난 경계입니다.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할 수 없음】

 

이처럼 고묘한 불국토의 경계를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아마도 왕생하기 어렵도다’란 말이 바로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에 대한 해석입니다. 선도대사님은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을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隨緣雜善)’이라는 네 글자로 설명하신 것이지요. 무엇을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이라 부를까요?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지 않고 자신의 취미와 인연에 따라서 이 법을 만나면 이 법을 배우고 저 법을 만나면 저 법을 배우는 것을 ‘인연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도 닦고 저것도 닦는 것을 ‘잡다함’이라 말하며, 닦은 바가 모두 선법이므로 ‘선’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들의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써(앞서 담란대사께서는 ‘진실하지 않은 공덕’이라 말씀하셨음) 저 열반계에 왕생하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아마도 왕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마 당신은 왕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비교적 완곡하게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우리더러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을 버리고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수염불을 하라는 것이지요.

 

【전수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함】

 

그래서 다음에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 요법(핵심법문)을 선택하시어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시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 요법을 선택함’이란 바로 경문에서 말씀하신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서’입니다. 우리가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불의 명호에 대해 설해주시는 것을 듣는 것,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를 위해 요법을 선택해주시는 것입니다.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할 수 없고, 앞에서 석가모니불께서 또 우리에게 왕생하라고 타이르고 있으며, 우리는 기껏해야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을 조금 닦을 수밖에 없고, 또 이것으로는 왕생할 수도 없다면, 그럼 어떡해야 합니까? 석가모니여래께서 기왕 우리에게 왕생하라고 타이른 이상, 그 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왕생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선택해 주셔야 하겠지요. 선택이란 석가모니불께서 선택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정토법문의 선생님은 매우 고명하신 석가모니불이신데, 그 분께서 직접 우리를 위해 골라주신 것이기에 아주 정확하고 아주 온당하며 복잡하지 않고 아주 안락합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들을 위해 선택하신 법문에 착오가 있고 실수가 있을 수 없겠지요.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를 위해 선택하신 방법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고, 게다가 가장 수승하고 최고여서 두 번째·세 번째가 될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우리 오탁악세의 중생들을 위해 선택해 주신 ‘요법’은 어떤 법문입니까?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시네’가 바로 ‘명호를 집지하여 하루나……이레 동안 일심불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우리에게 아미타불을 전일하게(專), 더욱 더 전일(專)하게 부르라고 가르치고 계시는데, 하나의 ‘전專’자로는 석가모니불의 간절한 노파심을 표현하기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오탁악세의 중생들이여, 너희들은 오로지 염불을 해야 한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이미 오로지 염불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전념하고 있지만 더욱 더 전념해야 한다!”

 

끝까지 전념해서 마음도 전일하고 행도 전일하고, 오늘도 전일하고 내일도 전일하고, 법당에서 전일하고 법당을 떠나서도 여전히 전일하게 하는 것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단락의 찬게讚偈에서는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은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므로 왕생할 수 없다는 것이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일하게 또 전일하게 칭념한다면 결정코 왕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것이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를 위해 선정해주신 것이고, 이것이 바로 많은 선근과 복덕이라는 것입니다.

 


⑶ 선도대사의 『반주찬』1

 

계속해서 다음 글을 보겠습니다. 선도대사님의 『반주찬』 가운데 찬게 한 송이 있는데, 네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온갖 사량과 교묘한 방편으로,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법문을 선택하셨으니,

일체 선업을 회향하여 왕생하는 이익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 못함일세.

種種思量巧方便,選得彌陀弘誓門;

一切善業回生利,不如專念彌陀號。

 

『선도대사전집』 제570쪽에 있으니, 다들 돌아가셔서 상하의 문장을 대조해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온갖 사량·온갖 고려를 다하고, 갖가지 선교善巧·갖가지 방편을 운용하여 우리를 위해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이신 대원업력의 법문을 선택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일체 선업’, 정선定善과 산선散善 등등을 수행한 일체 선업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한다면 모두 이익이 있겠지만,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 못함’의 이익이 더욱 큽니다.

 

이른바 ‘온갖 사량과 교묘한 방편’이란, 바로 ‘일체 선업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석가모니불께서 교묘하게 세우신 방편으로서, 그 목적은 이 방편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돌아가도록 인도하기 위해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의 법문을 선택하신 것이니,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의 법문’이 바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일체 선업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것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 못합니다. 매우 분명한 것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바로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고, 이를 제외한 ‘일체 선업’은 모두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이라는 것이지요.

 

⑷ 선도대사의 『반주찬』2

 

이어서 『반주찬』입니다.

 

만행을 전부 회향하면 모두 왕생은 하나,

염불일행이 가장 존귀하도다.

회향왕생하는 잡선의 힘이 약할까 두려운데,

일일에서 칠일 동안 염불하는 것만 못하구나.

萬行俱回皆得往,念佛一行最爲尊;

回生雜善恐力弱, 無過一日七日念。

 

갖가지 수행과 자그마한 모든 선을 전부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기만 하면 역시 왕생할 수는 있으나, 염불과는 여전히 비교할 수 없어서 염불일행이 가장 존귀하여 최상이고 최고입니다. 온갖 잡행과 잡선을 의지하여 극락세계에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려 한다면 아마도 그 힘이 부족할 것 같다는 것인데, 잡선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힘이 너무 약하기에 ‘회향왕생하는 잡선이 힘이 약할까 두려운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앞에서 말한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아마 왕생하기 어려울 것이다’와 같은 이치입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일일에서 칠일까지 염불하는 것만 못하다’, 회향왕생하는 잡다한 선은 일일에서 칠일까지 염불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일일에서 칠일까지’란 바로 『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신 ‘하루나……이레’ 동안 전심으로 염불하는 것으로, 이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행은 모두 존귀하지 않고 염불이 가장 존귀하며, 잡다한 선은 힘이 약할까 두렵지만 염불의 공은 가장 강합니다. 따라서 만행과 같은 잡선들은 적은 선근이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많은 선근입니다.

 

앞에서 ‘만행을 전부 회향하면 모두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한 것은 모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고, 아래에 또 ‘회향왕생하는 잡선은 힘이 약할까 두렵다’고 설한 것은 바로 아마 왕생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이지 않을까요? 모순이 아닙니다! 잡행을 회향하여 비록 왕생할 수는 있지만, 왕생을 하더라도 변지邊地의 연태蓮胎 속에 있게 되므로, 곧장 보토에 들어가서 연태에 머물지 않으려면 그 힘이 부족하기에 반드시 전수염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⑸ 선도대사의 『관경소』

 

『관경소』 중에 선도대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머지 온갖 선들을 비록 선이라 부르기는 하나,

만약에 염불과 비교한다면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自餘眾行,雖名是善, 若比念佛者,全非比較也。

 

‘그 나머지(自餘)’란 염불을 제외한 모든 수행들은 ‘비록 선이라 부르기는 하나’, ‘비록’이란 글자는 변화를 나타내는 어투이고, ‘선’이란 예컨대 우리가 참법을 닦는다든가, 경전을 독송한다든가, 진언을 외운다면 모두 공덕이 있고 모두 이익이 있으며, 모두 불교내의 선법수행이라는 것인데, 비록 선이기는 하나 염불과 비교한다면 어떨까요? ‘만약 염불과 비교한다면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서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당신이 이 경전을 독송하는 것과 저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비교할 수 있어도 염불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똑같은 지면위의 사물들이, 일층의 건물은 낮고 백층의 건물은 높으며, 작은 산은 낮고 큰 산은 높지만, 그들이 얼마만큼 차이가 나던 지간에 아무튼 서로 비교할 수는 있으나 하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높고 낮음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타의 여러 가지 수행들은 비록 선이기는 하나, 만약에 염불과 비교를 한다면 다른 수행들은 땅과 같고 염불은 하늘과 같아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정토종의 개종조사이신 선도대사님의 해석이었습니다.

 

⑹ 연지대사의 『아미타경소초』

 

명나라의 연지대사께서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경소초』중에서 연지대사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저 나라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 있어야 한다.

지금 명호를 집지하는 것은 선근 가운데 선근이고, 복덕 가운데 복덕이다.

명호를 집지하며 아미타불을 친견하고자 하는 것이,

진실로 많은 선근이자 최고로 수승한 선근·불가사의한 선근이다.

따라서 마땅히 지명을 정행으로 삼고, 다시 지명을 발보리심으로 삼아야 한다.

欲生彼國,須多善多福。 今持名,乃善中之善,福中之福。

執持名號,願見彌陀, 誠多善根、最勝善根、不可思議善根也。

故當以持名爲正行,複以持名爲發菩提心。

 

극락정토에 왕생하려면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 필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을 갖출 수 있을까요? ‘지금 명호를 집지하여’, 아미타불의 명호를 잡아서 부르는 것,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것이 ‘선근 가운데 선근이고, 복덕 가운데 복덕’이라는 것이고, ‘명호를 집지하며 아미타불을 친견하기를 원하는 것이 진실로 많은 선근이자 가장 수승한 선근·불가사의한 선근이다’는 것이며, ‘따라서 마땅히 지명을 정행으로 삼고 다시 지명을 발보리심으로 삼아야 한다’, 지명을 우리가 정토에 왕생하는 정행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보리심은 성도법문과 정토법문의 각종각파에서 모두 아주 중요시하는 것인데, 연지대사께서는 여기서 ‘당신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정토왕생을 발원하기만 하면, 이것이 바로 발보리심이다’고 해석하셨습니다. 발보리심을 선근이라 말하고, 육도만행을 닦는 것을 복덕이라 말하는데, 우리가 염불하면 복덕이면서 또한 선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명호 속에 전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⑺ 우익대사의 『미타요해』1

 

다음은 우익대사님의 해석입니다. 대사님은 『미타요해』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성문과 연각은 보리선근이 적고, 인천의 유루복업은 복덕이 적어서,

모두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

聲聞、緣覺, 菩提善根少, 人天有漏福業, 福德少, 皆不可得生淨土。

 

이것은 ‘적은 선근과 복덕’에 대한 해석입니다. ‘성문과 연각’이란 바로 아라한과 벽지불을 말하는 것인데, 그들은 이미 삼계를 벗어난 성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으로도 여전히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보리선근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직 광대한 보리심(보리심이 곧 선근임)을 일으키지 못하고서 자신의 생사만을 해결하셨기 때문에 보리심이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극락세계는 대승의 선근계善根界여서 성문과 연각이라도 자신을 의지해서는 왕생할 수 없으며, 범부들이 닦은 인천의 유루의 복업은 복덕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인천의 모든 선과 성문·연각, 그들은 모두 저 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의지해야 왕생할 수 있을까요? 다음을 보십시오.

 

⑻ 우익대사의 『미타요해』2

 

아미타불은 만덕홍명인데,

명호로써 덕을 불러오는데 다하지 않음이 없다.

阿彌陀佛是萬德洪名,以名召德,罄無不盡。

 

육자명호가 만덕홍명이므로, 명호로써 아미타불의 공덕을 불러오고 포괄하고 있는데, 이 모든 공덕을 전부 명호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조금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명호가 바로 많은 선근복덕이며, 원만한 선근복덕입니다.

 

‘명호로써 덕을 불러온다’는 것은, 세간에서 이와 상응하는 비유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데, 우리는 대략적으로 세간의 예를 통하여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예컨대 세속의 말 가운데 ‘존함을 오래 전에 들었는데, 명성이 자자하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도덕과 학식·공적이 모두 그 사람의 이름 가운데 포함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존함을 오래 전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브랜드상표의 비유】

 

상표에 대한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상표가 바로 하나의 상업표시이자 하나의 등급이며, 명품 역시 하나의 이름이자 하나의 간판입니다. 그러나 유명한 세계적인 상표브랜드는 왕왕 수억 달러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름으로써 재물을 불어온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재물이 이름이 되고, 이름이 바로 재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장縣長·시장市長·성장省長을 말하는 것도 모두 이름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이름이 있으면 곧 이러한 권력이 있으므로, 이것을 ‘이름으로써 권력을 불러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력이 이름이 되고, 이름이 곧 권력인 셈이지요. 당신에게 어떠한 이름이 있으면 바로 어떠한 권력이 있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세간적인 것입니다. 상업계는 이름으로써 재물을 불러들이고, 정계에서는 이름으로서 권력을 불러들입니다. 불보살님들은 출세간적인 공덕계이므로 ‘명호로써 공덕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제왕이 죄를 사면하는 비유】

 

강희대제康熙大帝(청나라 황제)의 경우, 그가 어필로 ‘강희’라고 적으면 이 이름 속에는 제왕의 위덕이 들어있습니다.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당신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고, 일반백성이라도 관직으로 등용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 육자명호의 위덕은, 우리를 삼계육도의 윤회로부터 면제시킬 수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사형을 선고받아 곧 지옥에 떨어져야 하지만, 육자명호는 우리의 죄업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부처님 중의 왕이요, 광명 가운데 가장 존귀한 분’으로서 시방중생을 대사면 해주십니다. ‘내가 부처가 되었으니, 시방중생의 죄업을 두루 사면하여 그들이 다시는 윤회하지 않고 전부 나의 정토에 돌아오도록 하겠다’ 그분께서 뭘 믿고 하는 말씀일까요? 당신의 명호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성불을 한다면 무량수라 명호를 세우리니, 중생들이 이 명호를 듣고 다함께 나의 나라에 오게 되리라’ 육자명호에는 모든 공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널리 평등하게 우리들을 구제할 수 있고, 우리들의 죄업을 사면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명호가 곧 공덕이고 공덕이 곧 명호이므로, 아미타불에게 공덕이 얼마가 있으면 명호의 공덕도 얼마여서, 선근과 복덕이 많고 원만하여 위가 없는 것입니다.


⑼ 우익대사의 『미타요해』3

 

다음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원으로써 중생들에게 많은 선근의 인을 지어주시고,

대행으로써 중생들에게 많은 복덕의 연을 지어 주시어,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염불을 하는 이들로 하여금 염념마다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게 하셨다.

佛以大願,作眾生多善根之因,

以大行,作眾生多福德之緣;

令信願持名者,念念成就如是功德。

 

우익대사님의 요 몇 구절 말씀은 확실히 아주 적절하고 아주 좋습니다. 우리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미타불께서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도록 해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도록 해주실까요? 『무량수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 내지 한번만이로 염하는 이가 있다면” 곧 위없는 공덕을 얻게 된다고요. 우익대사님 역시 이 경문에 의거하여 해석하신 것입니다. 『아미타경』에서 서방정토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많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설하셨는데, 선근은 왕생의 인이 되고 복덕은 왕생의 연이 되기에 ‘선근·복덕·인연’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근의 인이 있고 복덕의 연이 있으면 인연이 구족하여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단지 인만 있고 연이 없어도 왕생할 수 없고, 연만 있고 인이 없어도 역시 왕생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선근도 없고 복덕도 없습니다. 인도 부족하고 연도 적다면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에게 없기에 부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실까요?

 

‘부처님께서 대원으로써 중생들에게 많은 선근의 인을 지어주신다’, 당신이 세운 48대원으로써 우리에게 많은 선근의 인을 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선근의 인이란 쉽게 말하면 바로 정토왕생을 염원하는 원심願心인데, 이 원심만 있으면 곧 왕생의 인이 있게 됩니다. “죄업을 짓는 중생들아, 너희에게 대원이 없어서 감히 제불의 정토에 왕생하려는 마음을 내지 못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위해 48대원을 세워서 너희들이 나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 아미타불께서 48대원을 세우신 유일한 목적이 바로 우리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부처님의 원심이 곧 우리의 원심이 된 것과 같겠지요. 부처님의 원심은 선근의 극치입니다. 부처님의 원심이 우리의 원심이 되었는데 어찌 선근이 많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선근의 인’이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우리에게 복덕이 없으므로 부처님께서는 ‘대행으로써 중생들에게 많은 복덕의 연을 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른바 ‘대행’이란 바로 조재영겁의 육도만행(육바라밀)인데, 그분의 모든 수행과 우주법계에 가득한 복덕과 지혜의 공덕을 전부 육자명호 속에 넣어서 우리에게 보시를 해주심으로써 우리의 복덕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왕생할 수 있는 ‘많은 복덕의 연’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신원행이 일체이다】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염불을 하는 이들로 하여금 염념마다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케 하신다’, 믿음과 발원을 갖추고 염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염념마다 부처님과 똑같은 공덕을 성취하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함信願持名’――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고,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신원행은 일체一體가 됩니다. 믿음은 염불왕생을 믿는 것이고, 발원은 염불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며, 행은 염불왕생을 행하는 것입니다. 신원행은 모두 ‘염불왕생’을 체로 삼기에 믿음은 이것을 믿는 것이고, 발원은 이것을 발원하는 것이며, 행도 여전히 이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염념마다 성취한다念念成就’,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는 사람은 염념마다 그가 한 번 한 번 염불할 때마다 즉시에 육자명호와 같은 공덕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명호는 선근이면서도 복덕이고, 인이면서도 연입니다. 염념마다 염불을 하면 염념마다 인연이 구족하고, 염념마다 인연이 구족하면 염념마다 왕생이 성취되는 것이지요. 일념은 성취되고 일념은 성취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또 선정상태인 일심의 염불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성취되고 도달하지 못하면 성취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또 평소의 염불로는 성취되지 않다가 임종할 때 최후의 일념이라야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발원으로 염념염불念念念佛을 하면 염념마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성취란 바로 완성되고 결정되어 다시는 바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고, 염념마다 성취한다는 것은 바로 염념마다 왕생이 결정되고 성불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덕如是功德’, 부처님의 대원과 대행으로 성취한 공덕이 바로 명호의 공덕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인데, 어떻게 우리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실까요? 바로 당신의 대원과 대행으로 닦은 모든 공덕을 육자명호 속에 넣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데, 오겁 동안 사유한 대원과 조재영겁의 대행이 모두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이 되어서 믿고 발원하고 염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얻어서 부처님과 평등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은 많은 선근과 복덕으로서 부처님과 평등할 정도로 많습니다. 이외에 또 어떤 법문이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외딴섬의 주민들이 배를 건조하기를 발원하는 비유】

 

여기서 다시 설명을 좀 해드릴 필요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아미타불께서 48대원을 세우셨는데, 우리가 만약에 극락세계에 왕생하려 한다면 우리도 48원을 세워야 합니다. 만약에 48원을 세우지 않는다면 부처님과 상응하지 않아서 왕생할 수 없으며, 48원을 세우면 상응하여 왕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옳을까요, 옳지 않을까요?

(옳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울 수 있습니까?

(대중) 세울 수 없습니다!

 

법장보살께서 48원을 세우는데 오겁 동안의 사유를 거쳤으며, “내가 세간을 초월하는 원을 세워 발원은 모든 부처님을 뛰어넘으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48대원은 제불조차도 세울 수 없는 대원들인데, 그것을 가지고 우리 오탁악세의 범부더러 세우라고 한다면 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원, 저 나라에 왕생하려는 발원 하나만 세우면 됩니다. 마치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경』에서 우리들에게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원을 세워 저 나라에 왕생하기를 발원해야 하느니라(衆生聞者,應當發願,願生彼國)”고 일러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48대원, 내지 무량무변한 대원이 전부 다 있게 되겠지요. 석가모니불께서는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저 나라에 왕생하기를 발원해야 하나니, 48대원을 세워 아미타불과 같이 해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예컨대 우리가 외딴섬에서 살고 있는데, 지금 곧 해일이 일고 사나운 바람과 거센 파도가 일어나려 합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우리를 구하려고 배를 몰고 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나의 큰 배로 올라오세요! 내가 당신들을 구해서 이 외딴섬을 벗어나도록 해주겠습니다” 그럼 섬에 살고 있는 주민으로서 대답을 하고 배에 오르기를 원하기만 하면 바로 선장의 마음과 상응하게 되겠지요. 선장이 우리더러 배에 오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배에 오른다면 선장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므로, 이것을 상응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섬에 사는 주민들이 “선장이 큰 원을 세워 배 한 척을 건조하여 우리를 구하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도 큰 원을 세워 배를 건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도리어 선장의 마음과 상응하지 않겠지요. “시간이 없어요! 당신들이 배를 건조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배를 몰고 와서 당신을 구하려는 것인데, 당신들이 나의 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됩니다.”

 

선장이 바로 아미타불이시고 큰 배가 바로 명호인데, 우리가 육자명호를 부르기를 원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바로 아미타불의 원심과 상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왕생하기를 바라고 우리 역시 왕생하기를 바란다면 이것을 일러 ‘일념이 상응하면 일념이 부처이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당신이 거기서 아미타불의 48원을 던져버리고서 스스로 발원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께서 당신을 구제해주실 필요 없이 당신 스스로 당신을 구제하면 되겠지요.

 

【어린 아이가 젖을 먹기를 거부하는 비유】

 

지금 이 자리에 어머니가 되신 분들이 계시는데, 어머니가 자식에게 젖을 먹이겠다고 발원하였으나 이 애가 기어코 당신의 젖을 먹지 않겠다면서 스스로 ‘나에게 젖이 있기를 바란다’고 발원한다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어머니가 자식에게 젖을 먹이려 할 때 자식이 어머니의 젖을 먹는다면 이것이 바로 모자가 상응한 것이지요. 그러면 그가 건강하게 잘 자라날 것입니다.

 

아미타불 육자명호의 젖이 우리를 기르고 우리의 보리도의 싹을 증장시키고 우리의 법신혜명을 기르려고 하는데, 우리가 염불을 하면서 아미타불 육자명호라는 법의 젖(法乳)을 빨아먹는다면 아주 좋잖아요! 이렇게 되면 상응한 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근기로써 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아미타불의 원심에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극락세계에 왕생한 뒤에 자연히 수승한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요즘과 같은 이러한 시기에 그처럼 광대한 보리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⑽ 우익대사의 『미타요해』4

 

계속해서 다음을 보겠습니다. 우익대사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하면 부처님의 공덕을 전부 거두어 자신의 공덕이 된다.

信願持名,全攝佛功德成自功德。

 

이런 말씀들은 모두 매우 힘이 있습니다.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함’――아미타불께서 당신을 구제하려 하신다는 것을 믿고, 또 당신을 구제할 수 있으시다는 것을 믿으며; 아미타불께서 당신을 구제해 주시기를 원하고; 아미타불께서 당신을 구제해주시는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부처님의 공덕을 전부 거두어 자신의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전부(全)’란 완전하여 조금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거둔다(攝)’란 꽉 잡아서 흡수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을 한다면 아미타불의 공덕을 완전히 흡수하여 자신의 공덕이 되는데 조금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앞에서 “명호로써 공덕을 불러오는데 다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여기서는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하면 부처님의 공덕을 전부 거두어 자신의 공덕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치는 똑같습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집지하는 자는 선근과 복덕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낱낱의 염불소리에 전부 많은 선근과 복덕을 갖추게 된다.

持佛名者,善根福德,同佛無異。 則一一聲,悉具多善根福德也。

 

우리는 조사님의 이러한 해석을 읽고 나서 마땅히 재삼 절을 올려야 합니다. 조사님은 역시 조사님이십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집지하는 사람은 선근과 복덕이 부처님과 차별이 없으시고, 부처님과 평등하여 똑같습니다. 우리 염불하는 사람은 선근복덕이 아미타불과 같다는 것을 감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대중) 믿을 수 있습니다.

 

“아! 스님! 저도 믿는다고 대답하고 싶고, 저도 스님께서 믿는다고 대답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제가 거울을 들고 제 모습을 비춰보니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어떡합니까!” 거울을 들고 비춰보면서 “아! 나 같은 사람의 선근복덕이 아미타불과 똑같다고?”라며 의심을 하지요.

 

우리가 염불하면 선근복덕은 반드시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선근복덕이 모두 육자명호 속에 들어있기에 우리가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을 하면 곧 부처님의 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므로 똑같아서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누더기 천과 황금의 비유】

 

물론 우리가 현재로서는 아직 부처님의 상호와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공덕과 능력이 없지만, 그렇다고 선근복덕이 부처님과 평등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여전히 평등하여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시절인연이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 우리가 염불하는데 그 속에 갖춰진 선근복덕이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치 하나의 누더기 천 조각 속에 황금을 집어넣었는데, 누더기 천을 열어보기 전에 겉모습만 보면 누더기 천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황금이 들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더기 천을 열어젖히면 황금의 본색이 들어나게 되고 마음대로 가져다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고 이 몸의 과보가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불이 비록 황금이기는 하나, 몸은 여전히 누더기 천과 같아서 가리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일단 몸이 망가지고 수명이 다해서 몸의 과보가 끝나 극락세계에 가게 되면 당장에 부처님과 같은 32상·80종호·삼명육통三明六通이 일시에 드러나게 됩니다. 비록 그때서야 드러나지만 여전히 지금 염불할 때 심은 것이고 구족한 것입니다.

 

‘그러니 낱낱의 염불소리마다’, 일성 일성의 염불마다 전부 많은 선근복덕을 포함하고 구족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당연히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라 부르겠지요! 그럼 생각해보세요, 이제까지 육자명호밖에 다른 것을 가지고 많은 선근복덕이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문인 아라한은 보리선근이 적고, 인천의 유루복업은 복덕이 적기에, 모두 적다고 말하지 많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염불을 한다면 낱낱의 염불소리마다 모두 많은 선근과 복덕을 구족하게 됩니다.

 

조사님들의 교증敎證은 이 점(오직 염불만이 많은 선근이고 다른 것들은 모두 적은 선근이다)에 대해 명명백백하게 설명해 주셨기에 아주 분명하여 모호하지 않습니다.


7) 사례를 들어서 설명함

 

경전의 문구와 조사의 말씀들은 ‘이론적인 증거理證’입니다. 다시 말해 교리상의 증거로써 염불은 많은 선근이고 나머지 행들은 적은 선근임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두 가지 실제 사례를 말씀드려서 ‘사실적 증거事證’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즉 실제 사례를 들어서 염불이 많은 선근이고 염불 이외의 수행은 선근복덕이 염불만 못하다는 증명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사례는 모두 홍원사에서 출간한 『염불감응록』제1집에 나오는 것입니다.

 

【『법화경』을 독송한 비구니의 이야기】

 

『염불감응록』제1집에 나오는 ‘법화경을 독송하던 비구니가 관기로 환생하다(誦法華尼,轉生官妓)입니다. 『법화경』을 독송하던 사람이었는데, 전생에 그녀는 출가한 비구니스님이었지요. 그러나 결국 다음 생으로 환생하고 나서 타락하여 관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문을 읽으면서 해석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양영숙이 영주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이다(歐陽永叔知潁州)’, 구양영숙은 사람의 이름이고, 그가 영주 지방에서 지방 관리를 지냈다는 것입니다. ‘지知’는 벼슬을 한다는 말로서, 지현知縣이라든가 지부知府(예전에, 중국의 관명(官名)을 이르던 말)등의 관직을 지냈다는 것입니다. ‘관기官妓 한 명이 있었는데 입에서 연꽃향이 나왔다’, 그녀가 말을 할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아주 맑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는데 마치 연꽃의 향기와 같았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 사람은 평범하지가 않습니다! 말을 할 때 모두 연꽃의 향기가 났습니다. ‘전생을 아는 스님 한 분이 계셨다’, 어떤 스님이 과거와 미래를 아는 신통력이 있었지요. 그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기생의 전생은 비구니스님이었고, 『법화경』을 삼십년을 독송하였는데, 한 생각 차이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금생은 관기였고, 전생에는 출가스님이었는데, 그녀가 수행하던 법문은 오로지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이었지요. 『법화경』은 우리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경전입니다. 그런 『법화경』을 그녀가 삼십년을 독송한 것입니다. ‘한 생각 차이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을 한 생각 차이라 말할까요? 바로 그녀가 정토왕생을 구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데, 이 한 생각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한 생각 차이가 있으면 타락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 스님께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구양영숙은 믿지 못하고서 관기에게 물었지요. “『법화경』을 읽은 적이 있느냐?” 그러자 관기가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정조를 잃은 몸이 어찌 독경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제가 이 지경까지 전락하여 관기가 되었는데, 어떻게 한가한 시간이 있어서 경전을 독송하겠습니까?)

 

그래서 ‘『법화경』을 건네주자 막힘없이 줄줄 독송하였다’, 시험 삼아 그녀에게 『법화경』 한 권을 주자, 그녀가 비록 읽은 적이 없었지만 경을 독송하는데 마치 흐르는 물처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조금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다른 경전을 주자 읽지를 못하였다’, 다른 경전을 바꿔서 주니까 읽을 줄 몰랐다는 것이지요.

 

‘이로써 그 스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음을 알았다’, 이로써 그 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녀가 전생에 『법화경』을 삼십년 독송하여 이러한 훈습이 있었기 때문에 금생에 『법화경』을 가져다주자, 비록 금생에 경전을 독송한 적이 없었지만 독송하는데 아주 순조롭고 아주 유창했던 것이고, 다른 경전을 줬을 때는 읽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가 전생에 틀림없이 『법화경』을 독송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사례는 송나라 때 왕일휴의 『용서정토문』속에 기재되어 있던 것입니다. 용서거사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만약에 이 비구니가 서방법문을 알았었다면 상품상생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을 몰라서 기생으로 타락하였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그녀가 전생에 비구니였을 때 만약에 염불하여 서방정토의 왕생을 구하는 이 법문을 알았었다면, 그녀의 삼십년 공부로써 아미타불을 불렀다면 상품상생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녀가 몰라서 염불을 하지 않았고 서방정토의 왕생을 구하지 않았기에 결국 금생에 환생하여 관기로 타락을 해버렸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의 공행功行은 그녀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녀가 삼십년 동안 『법화경』을 독송하였는데, 우리로서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을 겁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서방법문으로써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자는, 그 구제의 공덕이 커서 복보를 어찌 쉽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만약에 정토염불법문으로써 사람들에게 서방극락세계에 왕생을 구하기를 가르치면, 그럼 중생을 구제하는 공행과 힘이 매우 크고 복보 역시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아래에 혜정법사님께서 평어 하나를 적어서 화룡점정畫龍點睛을 해주셨습니다. ‘평하기를: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는 것도 이미 쉽지 않은 것이고’, 출가하여 수행할 수 있다는 것도 이미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삼십년의 고행은 더욱 쉽지 않았다’, 하물며 그녀가 삼십년의 고행으로 『법화경』을 독송했다는 것은 더욱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지요. ‘오로지 자력만 의지하고 타력의 가지加持가 없었기에 번뇌를 조복하지 못하고서 다시 윤회하여 미혹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은 자신의 수행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어서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업력의 보호와 가지가 없었고 또 번뇌를 끊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육도윤회를 하게 되었는데, 도리어 한 생이 한 생만 못하여 전생의 수행을 미혹했을 뿐더러 금생에 더 이상 『법화경』을 독송하지 않았으며, 금생에도 출가를 못하고서 관기로 전락한 것입니다.

 

‘다른 법문에서 도를 배우는 것은 개미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염불하여 왕생하는 것은 순풍에 돛단배가 물결을 따르는 것과 같다’, 기타 법문에서 불도를 이루려면 그것은 마치 개미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너무나 어렵습니다. 염불왕생은 어떨까요? 마치 순풍에 돛단배처럼 물의 흐름을 따르고 바람의 흐름을 따라서 아주 빠르다는 것입니다. ‘극락에 왕생하지 않으면 여전히 사바에 있게 되지만, 일단 서방에 태어나면 영원히 윤회를 끊어버린다’, 당신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않는다면 모두 사바세계에서 윤회를 하며 빙빙 돌아야 하지만, 일단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이 비구니스님이 삼십년 동안 어렵게 『법화경』수행을 하셨다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육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습니다. 그럼, 만약에 염불을 했었다면요? 완전히 달라져서 틀림없이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었겠지요.

 

【최파의 이야기】

 

다음은 또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겠습니다. (두 가지 사례를 대조하며 설명할 수 있습니다) ‘최파가 게송을 지으니, 혀가 연꽃을 닮았다崔婆作偈,舌如蓮花’인데, 『염불감응록』제1집에 있습니다.

 

최파, 이름만 들어도 바로 평범한 백성이고 평범한 아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아낙네들이 지위가 없었을 때,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장씨 집안이면 ‘장파’라 부르고, 이씨 집안이면 ‘이파’라고 불렀습니다. 최파는 아주 평범한 아낙이고 지위가 낮아서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염불을 해서 지혜가 열렸고 게송도 지을 줄 알았으며, 나중에 그녀가 왕생한 뒤 혀의 모양은 연꽃을 닮았습니다.

 

송나라 때, 동평東平이라는 지방에 양씨 성을 가진 집안이 있었지요. 그 집의 하인인 최파는 치주淄州 사람으로서, 선의랑 원명의 유모였습니다. ‘선의랑宣義郎’은 관직의 이름이고, 이 사람의 이름은 원명元明이었습니다. 최파는 평생을 채식하였고, 성품은 아주 어리숙하여 지혜가 없었으니, ‘동배들과 길고 짧음을 다툴 수 없었다’, 관직이 높은 집안에는 수많은 하인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 중의 한 명이었지요. 그런데 성정이 매우 어리석고 말이 서툴러서 남들과 비교하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지요. 옳아도 틀린 것이고, 틀려도 여전히 틀린 것이며, 무슨 일이 생겨서 그녀가 어떻다는 말만 나오면 무조건 그녀가 틀린 것이었는데, 그런대로 그녀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녀의 여주인인 조부인은 ‘선학에 뜻을 두었다’, 선종을 배우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최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옆에서 여주인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여주인이 불교를 믿고 있었기에, 그녀도 그 영향을 받아 불교를 믿게 되었지만, 선종을 배울 수가 없었지요. 그녀처럼 이렇게 어리석은 성품으로는 선을 배우려 해도 배울 수가 없었기에 오로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주인은 선을 배우고 그녀는 오로지 아미타불만 불렀던 것입니다. ‘경건한 정성으로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그들만의 장점이 있는데, 바로 매우 경건하고 정성스러워서 계산하고 따지는 마음이 없으며,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광대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녀가 비록 어리석기는 하나 수많은 총명한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가지 못하지요’

 

그녀는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 염불하기를 원하고 착실하게 염불을 하였는데, 매우 경건하고 정성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不少輟)’, ‘철輟’은 멈춘다는 뜻으로, 그녀가 여태껏 염불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염주를 돌리지 않았기에 몇 천만번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평소에 염불을 할 때, 염주를 들고 숫자를 세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도대체 하루에 염불을 얼마나 하였는지, 평생 동안 염불을 얼마나 하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아주 평범하고 아주 어리숙하고 아주 착실하고 본분을 하는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염불인으로, 전수염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녀는 글도 모르고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고, 오로지 염불만 할 줄 알았습니다.

 

‘소흥18년紹興十八年’, 즉 1148년에, ‘72세가 되던 해’, 그 해에 그녀는 72세였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병이 생기게 되는데, 그녀 역시 병이 나서 ‘설사를 하며 침대를 내려올 수 없었다’, 대소변을 모두 침대위에서 보면서 침대를 내려올 수 없었으니, 병세가 매우 심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염불을 더욱 성실히 하였다’, 비록 이렇게 심한 병에 걸렸지만 염불은 오히려 더욱 정성스럽게 더욱 성실하고 공경스럽게 하신 것입니다. ‘문득 아무 일 없듯이’, 갑자기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염불을 하더라도 비록 병이 날 수 있지만 그래도 고통은 적습니다. 그녀는 게송 한 수를 지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보세요, 글자를 모르고 유모를 하던 노파가 72세가 되어서 뜻밖에 게송을 지어서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불렀을까요? 곡조는 모르겠지만 네 구절 말씀이 있습니다.

 

서방으로 가는 길 수행하기가 쉬운데,

위로는 재 하나 없고 아래로는 구덩이가 없으니,

가실 때 신과 양말을 신을 필요 없이

연꽃을 밟으며 걸음걸음 왕생한다네.

西方一路好修行, 上無條嶺下無坑,

去時不用著鞋襪, 腳踏蓮花步步生。

 

이 네 구절은 매우 수수하고 매우 평이하며, 또 이해하기가 매우 쉽고 분위기 역시 매우 아름답습니다.

 

서방으로 가는 길 수행하기가 쉬운데’, 그녀가 말하기를,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이 길은 걷기가 아주 좋다고 하였는데, 교리상으로는 ‘이행도’라 부르지요. 그녀는 ‘이행도’라는 세 글자를 말할 줄 몰랐기에 ‘서방으로 가는 길 수행하기가 쉽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수행이 쉬울까요?

 

‘위로는 재 하나 없고 아래로는 구덩이가 없다’, 아마도 그녀가 사는 곳이 산간 지역이어서 집을 나서면 산을 오르거나 구덩이로 들어가야만 했기에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서방으로 가는 길은 매우 평탄하여 위로는 재가 없고 아래로는 구덩이라든가 움푹 파인 곳이 없는 평탄한 대로라는 것입니다.

 

‘가실 때 신과 양말을 신을 필요 없이’, 일반적인 풍속으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옷차림이 가지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죽은 뒤에 입을 옷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서방정토에 왕생하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설사 길가에서 죽어서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는 거지가 다 헤어진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맨발로 있더라도 똑같이 장엄하게 왕생합니다. 이 세상의 물건들은 그곳에 가면 아무런 쓸모가 없고, 서방극락세계에 도착하면 ‘도반들이 서로 와서 옷을 입혀준다’, 보살들이 서로 앞 다투어 하늘 옷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므로 여기 것은 모두 쓸모가 없습니다.

 

‘연꽃에 밟으며 걸음걸음 왕생한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아미타불의 연꽃을 밟으며 걸음걸음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합니다.

 

좋습니다! 그분이 노래하신 네 구절의 말씀은 운율과 분위기가 모두 아주 좋아서 ‘읊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녀가 매일매일 거기서 이 네 구절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묻습니다. “아, 최파! 당신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누가 지은 것입니까?”

그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제가 지었습니다” (이 게송은 제가 지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또 묻습니다. “아! 당신이 지은 것이라면, 그럼 당신은 언제 가십니까?” (‘서방으로 가는 길은 수행하기가 쉽다’고 하셨으니, 가신다면 언제 가시는 겁니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신시에 갑니다’ 옛날에는 시간을 계산할 때 요즘처럼 몇시 몇시라고 말하지 않고 12시진을 사용하였기에, “신시(申時:오후 3시에서 5시까지)가 되면 저는 갑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과연, 그 시간이 되자 그녀는 편안하게 왕생하였는데, 그 때가 10월 5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스님들이 다비식을 하는 방법으로 그녀를 화장하였습니다. 화장을 한 뒤 전부 다 타버렸지만 오직 그녀의 혀만 남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연꽃과 같았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 노파는 아무 것도 모르고 단지 어리숙하게 염불만 하였지만, 왕생은 이렇게 수승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설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아미타불만 부르기만 하면 위없는 깊고 미묘한 선이라 부른다無上深妙禪”고 하신 것입니다. 그녀의 주인은 선을 닦는 분이셨고, 그녀 자신은 오로지 한 구절 부처님명호만 부를 줄 알았지만, 가실 때는 이렇게 소탈하고 자재하셨으니, 이를 두고 ‘위없는 깊고 미묘한 선’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육자는 삼아승지겁을 초월한다】

 

무엇이 많은 선근이고 무엇이 적은 선근인가에 관해서 이해가 다르면 수행도 다르게 되고 심리상태 역시 다르게 됩니다.

 

만약에 단지 글자만 보고 대강 뜻을 짐작하는 정도로 이해하여 ‘염불은 단지 한 가지 수행일 뿐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적은 것이고, 여기다 기타 갖가지 수행을 보탠다면, 이것을 많은 선근이라 부른다’고 생각한다면, 만약에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마음은 불안하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법문을 닦아야 하는가? 도대체 어느 정도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많은 선근에 도달할 수 있는가?’

 

만약에 우리가 ‘육자명호 속에는 이미 모든 선근공덕을 총괄하고 있기에 나무아미타불명호만 칭념하기만 한다면 바로 많은 선근과 큰 선근·위없는 선근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마음은 안정이 될 것이고, 안심하고 염불할 수 있을 것이며,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내가 나이도 많고 독경도 할 줄 모르고 다라니를 외울 줄도 모르고, 여러 가지 법문을 배울 줄도 모르는데, 그럼 나는 도대체 왕생할 수 있는가 없는가?”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딱 좋습니다! 다른 것을 할 줄 모를수록 때마침 전수염불을 해서 아미타불의 본원에 부합한다면 이것이 바로 많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 되므로, 이것이면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기쁨이 생기게 되겠지요.

 

인광대사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삼아승지겁 동안 복과 지혜를 닦을 필요 없이

오로지 육자를 의지하여 윤회를 벗어난다.

不用三祇修福慧, 但憑六字出乾坤。

 

이 두 구절의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수행하려면 복과 지혜를 닦아야 하는데, 자력수행에 따르면 삼대아승지겁을 거칠 필요가 있으므로, 이른바 ‘삼아승지겁 동안 복과 지혜를 닦고, 백겁동안 상호를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득히 먼 시간을 거쳐서 복과 지혜를 닦아야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토법문에서는 그럴 필요 없지요. 당신이 삼아승지겁 동안 복과 지혜를 닦으면서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을 누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의지할까요? ‘오로지 육자를 의지하여 윤회를 벗어난다’, 당신이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를 의지하기만 하면 삼계육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육자명호는 삼아승지겁의 복과 지혜를 초월하는 큰 선근이자 큰 복덕입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