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법계(十法界)
● 육 도 중 생 (六 道 衆 生)
십법계(十法界) 가운데서 가장 낮은 법계가 지옥법계(地獄法界)입니다. 마치 땅속에 갇혀 있는 감옥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지옥법계는 우리 중생은 안보이니까 부인합니다. '그것은 권선징악으로 사람들한데 나쁜 짓을 못하게 하고 좋은 짓을 하게 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말했겠지' 하며 부인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지우주가 텅 비어있다는 즉, 제법공(諸法空)이란 경계에서 보면은 사람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공에서 본다면 사람도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람도 임시 동안 가짜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도 분명히 있습니다. 현상계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텅 비어서 부처님의 광명 뿐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리(理)에서, 불성(佛性)에서 안 보고, 차별적으로 본다고 할 때는 분명히 사람도 있고 지옥도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한정된 안목으로써 못 볼 뿐입니다. 우리가 전자(電子)나 또는 양자(陽子)를 눈으로 볼 수 있습니까? 못 보지요, 그와 똑같이, 인간의 한정된 안목으로 안 보일뿐이지 분명히 지옥은 존재합니다.
_1. 지 옥 법 계 (地 獄 法 界)_
상품(上品)의 오역(五逆) 십악(十惡)을 범(犯)하여 한열규환(寒熱叫喚)의 고(苦)를 수(受)하는 최하의 경계(境界) 지옥은 상품(上品)의 오역십악(五逆十惡)을 범하여 받는 경계입니다. 오역죄(五逆罪)는 죄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라는 것입니다.
1. 살부(殺父)라, 아버지를 죽이고,
2. 살모(殺母)라, 어머니를 죽이고,
3. 살아라한(殺阿羅漢)이라, 아라한은 성자를 의미합니다. 즉 말하자면 번뇌의 종자를 다 끊어버린 사람이 아라한입니다. 따라서 성자와 같지요, 이런 성자를 죽이고,
4. 파화합승(破和合僧)이라, 진리를 위해서 공부하는 단체가 화합승인데, 이간질이나 하고 화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5. 불신출혈(佛身出血)이라, 부처님 몸에서 피를 낸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부처님이 안 계시니까 부처님 법을 훼방하고 헐뜯거나 또는 없애려고 하면, 부처님 몸에서 피를 내는거나 똑같습니다. 이런 것이 오역죄에 해당합니다.
십선(十善)은 열 가지 선이데,
1. 불살생(不殺生)이라, 살생하지 않고,
2. 불투도(不偸盜)라, 도적질하지 않고,
3. 불사음(不邪淫)이라, 자기의 배필 이외의 음행,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출가승은 일체 음행을 금하고 재가승은 자기 배필 이외의 음행을 금합니다. 이러한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고, 사음 않는 것이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에 해당하고,
4. 불망어(不妄語)라, 거짓말 않고,
5. 불양설(不兩舌)이라, 이간하는 말 않고,
6. 불악구(不惡口)라, 욕설 않고,
7. 불기어(不綺語)라, 꾸미는 말로 궤변이나 음탕한 말을 하지 않고, 이러한 것은 우리의 구업(口業)에 해당합니다.
8. 불탐욕(不貪慾)이라, 탐욕 부리지 않고,
9. 불진에(不瞋에)라, 성내지 않고,
10. 불사견(不邪見)이라, 삿된 견해가 없는 것인데, 이것은 불치(不痴)라, 어리석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것은 우리의 뜻으로 짓는 의업(意業)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은 것이 우리 중생이 신(身), 구(口), 의(意)로 짓는 나쁜 소 행(所行) 즉, 악업(惡業)입니다.
이러한 오역을 범하고 십악을 짓는다 하더라도, 낮은 단계가 아니라 상품(上品)의 높은 단계로 아주 극심한 것을 말합니다. 중품(中品)은 조금 덜 극심하고 하품(下品)은 조금 어렴풋이 짓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지옥은 상품의, 아주 극심한 오역죄나 십악을 범해서 한열규환(寒熱叫喚)이라, 너무 춥고 너무 뜨거워 아파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팔한지옥(八寒地獄), 팔열지옥(八熱地獄)이라, 여덟 가지 아주 추운 지옥, 여덟 가지 아주 뜨거운 지옥이 있는데 이런 고(苦)를 받는 최하의 경계(境界)가 지옥입니다.
_2. 축 생 법 계 (畜 生 法 界)_
중품(中品)의 오역(五逆), 십악(十惡)을 범(犯)하여 탄담살륙(呑啖殺戮)의 고(苦)를 수(受)하는 축류(畜類)의 경계(境界)
그 다음은 축생법계(畜生法界)입니다.
이것은 일반 동물계를 말하는데, 소나 개나 돼지나 새나 곤충이나 총망라한 말입니다.
상품보다 조금 정도가 낮은 중품(中品)의 오역(五逆) 십악(十惡)을 범(犯)하여 탄담살륙(呑啖殺戮)의 즉, 서로 먹히고 잡아먹는 고(苦)를 받는 축류, 축생경계라는 말입니다.
_3. 아 귀 법 계 (餓 鬼 法 界)_
하품(下品)의 오역(五逆) 십악(十惡)을 범(犯)하여 기갈(飢渴)의 고(苦)를 수(受)하는 악귀(惡鬼)의 경계(境界) 그 다음은 아귀법계(餓鬼法界)입니다.
하품(下品)의 오역, 십악을 범하여 주리고 목마른 기갈(飢渴)의 고통을 받는 나쁜 귀신인 악귀의 경계라는 말입니다. 귀신은 등급도 많고 수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귀신은 또 역시 몸이 없는 의식(意識)만 있어서 신통(神通)을 합니다.
의생신(意生身)이라 마음만 먹으면 그냥 광파(光波)보다도 더 빨리 순식간에 미국도 갔다가 한국도 갔다가 하는 것 입니다. 이런 귀신이 우리 사람 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가운데 특히 자기 배를 못 채워서 고통하는 그런 귀신이 아귀(餓鬼)인 셈입니다.
_4. 아수라법계(阿修羅法界)_
하품(下品)의 십선(十善)을 행(行)하고 통력자재(通力自在)를 득(得)한 비인(非人)의 경계(境界)
그 다음은 아수라법계(阿修羅法界)입니다.
이것도 역시 사람 눈에는 안 보입니다.
이것은 귀신보다는 등급이 조금 더 높지만 성자의 지위도 못되고 천상도 미처 못 되지만 하여튼, 신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경계가 아수라법계입니다. 보통, 자칭(自稱) 도사라 하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 아수라에 집혀서 그러는 경우가 있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수라는 하품(下品)의 십선(十善) 곧, 십선의 정도가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별로 덜 지키는 하품의 십선을 행(行)하고 통력자재(通力自在)라, 신통을 자재롭게 하는 것을 얻은 비인(非人)인, 사람이 아닌 경계라 는 말입니다. 아수라들은 어떤 때는 우리들 앞에 극락세계 모양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야말로 찬란한 경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한 신통을 다 해서 자기도 보고 또 남에게 보여주기도 하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_5. 인 법 계 (人 法 界)_
오계(五戒) 또는 중품(中品)의 십선(十善)을 수(修)하여 인중(人中)의 고락(苦樂)을 수(修)하는 경계(境界).
그 다음은 인법계(人法界)라,
이것은 사람 법계입니다.
오계(五戒)를 지키고 곧,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고, 사음하지 않고, 망령된 말 하지 않고, 술 먹지 않는 오계를 지키고 또는 중품(中品)의 십선을 닦아서, 비록 통력(通力) 신통도 못하고 좀 어정쩡 할망정 그래도 역시 아수라 보다는 더 정도가 높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랑으로 해야 합니다. 같은 십선도 아수라보다는 더 높은 십선을 닦아야만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이 오계를 지킨다거나, 중품의 십선을 닦아서 사람 가운데 고락(苦樂)을 받는 경계가 사람 법계입니다.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실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뭐라해도 역시 과거 전생에 오계나 십선을 닦았기에 사람으로 이렇게 태어나 있는 것입니다.
_6. 천 법 계 (天 法 界)_
상품(上品)의 십선(十善)을 수(修)하고 아울러 선정(禪定)을 수(修)하여 천계(天界)에 생(生)하고 정묘(靜妙)의 락(樂)을 수(受)하는 경계(境界). 그 다음은 천법계(天法界)라, 이것은 하늘 나라 즉, 천상계를 말하는 셈이지요. 상품(上品)의 십선을 닦고, 사람보다도 더 정도가 높게 지킨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고요한 데를 골라서 마음을 오로지 한 경계에 머물게 하는 정신통일의 참선으로 선정(禪定)을 많이 닦아 천계(天界)에 나서 정묘(靜妙)한, 고요하고 묘한 안락(安樂)을 얻는 경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러면 천상이 사람보다 훨씬 좋겠구나' 이렇게 생각도 됩니다만 물론, 고요하고 묘한 안락을 받으니까 좋겠습니다만, 천상은 고요하고 안락스러우니까 거기에 집착하고 안주하여 거기에서 벗어 날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고통도 있고 안락도 있으니까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성불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계는 안락스러워서 거기에 머물려고 하지 나올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상사람들은 좀처럼 성불을 못하는 것입니다. 해탈(解脫)은 못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해탈한다는 견지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상은 우리 사람만도 못 한 것입니다. 사람은 그와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비록 고락(苦樂)으로, 고도 있고 락도 있고 또는 자재롭게 신통도 못한다 할지라도 역시, 그런 고통 때문에 고통이 역연(逆緣)이라, 그것이 나쁜 연이지만 거기에 거슬러서 벗어날려고 애쓰는 그 마음 때문에 오히려 해탈(解脫) 하려는 인연이 되고 결국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더러 사업에 실패하는 것을 슬퍼도 하고 여러가지로 좌절도 합니다만 실은, 그런 좌절을 당하고 고생하는 그것이 우리한테는 어느 면으로 봐서는 참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도인들은 누가 고생한다고 그러면 그 사람 말 따라서 '참,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은, 거시적(巨視的)으로 그 사람 해탈을 생각해서는 고생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고생이 기연(機緣)이 되어서 무상(無相) 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악같은 것도 명곡을 들어 보십시요. 명곡에는 어떤 것이나 애조가 띠어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나 무상을 음률적으로 나타내지 않은 명곡은 없습니다.
그런것을 본다 하더라도 무상을 느끼는 것이 인간에게 굉장히 귀중한 것입니다. 무상을 느끼므로서 별것도 아닌 현실의 안락을 떠나 영생의 행복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 사 성 법 계 (四 聖 法 界)
_7. 성 문 법 계 (聲 聞 法 界)_
해탈(解脫)을 위하여 불(佛)의 성교(聲敎)에 따라 사제(四諦)의 관법(觀法)을 닦는 경계(境界).
그 다음은 성문법계(聲聞法界)라,
성문(聲聞)부터는 벌써, 성자(聖者)의 지위에 들어 갑니다. 성인(聖人)입니다. 부처님 법을 깨닫는 단계인 셈이지요. 해탈을 위하여 부처님의 성교(聲敎) 즉 부처님의 말씀에 의한 가르침인 교법(敎法)에 따라서 사제(四諦)의 관법(觀法)을 닦는 경계입니다.
사제(四諦) 법문은, '사체' 또는 '사제' 로 발음을 합니다만 편음으로 사제라 하고 본음으로는 사체입니다. 이것은 고, 집, 멸, 도(苦集滅道) 아닙니까, 역시 우리 불자는 삼보(三寶)가 무엇인가? 사제(四諦)는 무엇인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 무엇인가, 또는 팔정도(八正道)가 무엇인가, 육바라밀(六波羅蜜)은 무엇인가, 하는 기초 교리만은 외워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경전을 보더라도 그것이 기본이 되어서 해득(解得) 하기가 쉽습니다. 또 그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나 일반 철학을 배울 때도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됩니다.
우리가 해탈을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사제(四諦)법문 즉 인생고(苦)는 무엇인가, 인생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인생고 (人生苦)는 고제(苦諦)이고, 인생고의 원인은 집제(集諦)인 것이고, 인생고를 다 없애버린 이상적인 경계가 멸제(滅諦)인 것이고, 고를 멸해버리는 길목을 말한 것이 도제(道諦)라는 사제(四諦)법으로 닦는 것이 소위 성문(聲聞)입니다. 그래서 깨달았지만은 아직은 구경지(究竟地)까지, 끄트머리인 정상(頂上)을 다 올라가지는 못한 경계를 말합니다.
_8. 연 각 법 계 (緣 覺 法 界)_
해탈(解脫)을 위하여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닦는 경계(境界)
그 다음은 연각법계(緣覺法界)라,
이것도 해탈을 위하여 닦는 역시 도인(道人)경계인데,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닦는 경계입니다. 12인연법도 역시 우리 사람이, 현재, 과거, 미래의 삼세(三世)를 통해서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죽는가, 하는 사람의 생사래왕(生死來往) 즉, 낳고 죽는 경계를 열두단계로 나누어서 말씀한 굉장히 중요한 법문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주로 12인연법을 닦아서 깨달으셨다는 말씀이 경전에 있는 정도로 우리가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서, 나(我)라는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굉장히 좋은 법문입니다.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현재의 나 밖에 모르니까 이런 몸뚱이에 집착하지만 과거의 나(我)가 무엇인가, 또는 미래의 내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현재의 몸뚱이에 집착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아는 법문이 12인연법입니다.
_9. 보 살 법 계 (菩 薩 法 界)_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위하여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는 경계(境界)
그 다음은 보살법계(菩薩法界)입니다.
우리는 흔히 '보살님, 보살님' 하며 쉽게 말합니다만, 원칙은 성자로서라도 특히 자비심이 아주 수승한 분이 실은, 보살인 셈이지요, 따라서 보살님이라는 말을 들으시는 분들은 자각을 하셔가지고 성자같은 정작, 보살같은 그런 심행(心行)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보살(菩薩)은 무엇인가, 하면,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위하여, 위없는 진리를 위하여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는 경계(境界)입니다.
육도(六度)는 육바라밀(六波羅蜜)로 역시 보살이 닦는 행동 범주인데 이것은, 보시(布施)하고 또는 지계(持戒)라 계행 지키고, 인욕(忍辱)이라 참고, 정진(精進)이라 진리를 위해서 자기 신명(身命)을 내걸고 부지런히 하고, 선정(禪定)이라 마음을 고요히 하고, 그 다음은 참다운 지혜(智慧)로 바르게 행동하고, 그와 같이 보살이 닦는 여섯 가지 덕목이 육도입니다. 그러한 육도를 원만히 만행(萬行)이라, 두루 다 행한다는 말입니다. 육도만행을 다 닦는 경계가 보살법계입니다.
_10. 불 법 계 (佛 法 界)_
자각각타(自覺覺他) 각행궁만(覺行窮滿)의 경계(境界)
그 다음은 가장 최상의 불법계(佛法界)입니다.
부처는 자각(自覺)이라, 스스로 깨닫고 또는 각타(覺他)라, 남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성문이나 연각이나 이러한 도인들은 겨우 자각이라, 자기 밖에는 못 깨닫는 단계입니다. 보살은 자각도 하고 남도 깨닫게 하지만 아직 원만히 못되는 것인데, 부처는 자기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는 것이 궁만(窮滿)이라, 끄트머리까지 완전무결하게 원만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부처입니다.
● 법계(法界)의 본성(本性)
우리는 이와 같은 법계(法界)의 한계를 아는 것이 필요한데 다만 이러한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알 것은, 본바탕은 부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람으로서 현재는 인법계(人法界)중에 있습니다. 우리 의식이 인법계에 있기에 또한 코, 입 등, 이런 몸을 받아 나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천법계(天法界)에 올라간다면 그때는 광명(光明)을 몸으로 합니다. 이런 허물어지고 냄새나고 더러운 몸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비록 우리 의식이 인법계에 있기에 이런 몸을 받아 나왔으나 우리 의식은 무한합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의 모든것이 마음으로 이루어졌고,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 세상 일체 만물인 만법이 다 오직 식(識), 의식뿐이다' 는 이런 말은 납득하기가 참 곤란스러운 말이나 이런 데서 불교의 참으로 심오(深奧)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사람이 되었으면 사람으로서, 그 사람이 김아무개는 김아무개로서 제한되어 있고 박아무개는 박아무개로서 제한되어 있어서, 현재는 비록 사람의 의식을 쓰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쓰는 사람의 의식은 하나의 촛점에 불과하고 우리의 잠재의식인 의식의 심층(深層) 가운데는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귀나 또는 아수라나 이런 요소가 다 갊아(藏), 숨어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 위로는 역시 천법계, 성문법계, 연각, 보살, 부처, 이러한 보다 높은 차원의 마음이 다 숨어 있습니다.
또한 지옥계의 지옥중생으로 태어나서 간단없이 고생을 받고 있다고 합시다. 지옥 중생은 지옥고를 받으면서 의식이 어떻게 판단도 못하고 고생만 합니다. 무간지옥(無間地獄) 같은 것은 고(苦)만 사뭇 받으니까 어떻게 숨도 내쉴 틈이 없다는 말입니다. 일일일야(一日日夜)에 만사만생(萬死萬生)이라, 하루 밤 하루 낮에 만번 죽고 만번 태어나니 어떻게 생각할 틈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고통을 받는 무간지옥일 망정 역시 그 식의 잠재의식 곧, 식(識)의 심층 깊이에는 역시 사람같은 식도 있고 부처같은 식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공평(公平)히 있는 것이 아니라, 본바탕(本性)은 부처가 본바탕이고 다른 것은 임시로 거기에 요소만 숨어있을 뿐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하는 부처님이나 도인들 말씀을 우리가 흔히 많이 씁니다. 이런 말씀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마음이 저만치 간격을 두고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심즉(心卽),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비록 사람일망정 우리 마음의 본바탕, 본성(本性)은 역시 부처 입니다. 지옥같은 마음, 사람같은 마음, 이런 마음들이 단지 요소로만 거기에 조금씩 묻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역시 본바탕, 본저변(本底邊)은 부처라는 말입니다. 겉에 뜬 촛점에서만 지옥이고 지옥같은 인연 따라서 되니까 지옥같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인연 따라 업(業)에 따라서 이렇게 사람같은 모양으로 태어나서 사람같은 마음을 쓰는 것이지, 이 마음도 역시 저변에는 모두가 부처뿐이라는 말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회광반조(廻光返照)라, 이 마음 돌이켜서 저변만 보면, 밑창만 보면 그때는 우리가 부처가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내가 누구다' 하는 때에는 항시 이러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미워할 때 그 미워하는 마음은 그 사람을 죽이고도 싶겠지요, 미워하는 마음이 사무치면 그 사람 죽이고 맙니다. 그 마음은 분명히 지옥 마음입니다. 남을 미워할 때는 가장 저속한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마음, 본래 마음은 부처인데 이 부처 마음은 일체중생을 다 깨닫게 하고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역시 이러한 부처의 마음자리, 이 마음자리를 안 놓치게 하는 것이 참선(參禪)이고, 참다운 염불(念佛)입니다.
우리가 알고 보면 부처님 가르침은 삼조(三祖) 승찬(僧璨 ?∼606)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도 있듯이 '지도무난이나, 유혐간택(至道無難唯嫌揀擇)이라' 지극한 진리인 도(道)는 별로 어렵지 않으나, 오직 간택을 꺼린다 즉, 우리 범부 망상(妄想)으로 자꾸만 헤아린다는 말입니다.
헤아리는 그것 때문에 자꾸 이렇게 얽히고 설키고 합니다.
같은 형제간에도 의견이 각각 다르고 소위 민주주의 사회라 하지마는 한 나라에서 정당(政黨)이 이렇게도 많이 구구하게 있는 것을 보십시요.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부처 마음이 아니라 범부의 마음으로 자기 몸뚱이를 중심으로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현상계를 보고서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스피노자(Spinoza 1632∼1677)같은 철인들은 참 좋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영원의 상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 그대 마음은 영원에 참여한다'
이런 말은 바꿔서 보면 내나야 부처나 도인들 견지에서 현실을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은 현상적인 범부 소견에서 현실을 봅니다. 따라서 바로 볼수가 없습니다. 산으로 비유하면, 산기슭이나 중턱에서 보니까 시야가 좁아서 다 못 봅니다. 조금 공부했다 하더라도 산에 올라가다가 중턱도 못 가서 보니까 또 역시 시야가 미처 다 안 보입니다. 도인들은 산봉우리에서 사방을 다 보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한다고 하면 미워하는 사람, 미운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무명에 가려 잘못 보고서, 잘못 보는 그 마음으로 미워합니다. 또한 남을 지나치게 애착(愛着)하면은 애착하는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면 다 부처뿐인 것인데 바로 못 보는 그 마음 때문에, 자기 스스로가 좋아서 결국은 좋아하는 그 마음을 스스로 애착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 때문에 자기 스스로 괴로워합니다. 제 마음 제가 보고서 말입니다.
우리가 염불하는 것은 부처가 현전(現前)에 눈에 안 보이므로, 일체만유가 부처임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누가 미워지면 '관세음보살이라' 생각하고, 분명히 바로 보면 다 그대로 관세음 보살이니까 말입니다. 누가 너무 좋아지면 '이것이 역시 부처인데' 하고 부처라 보면 누구를 특별히 좋아할 턱이 없죠. 그때는 다같이 봐야지 말입니다. 그러니 '관세음보살이라, 다 부처라' 그러면 모든 애착이 거기에서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순간 찰나라도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부처님을 재인식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염불선(念佛禪)이 되고 참다운 부처님 공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선하는 동안에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많이 나옵니다. 이따금 그야말로 참, 관세음보살같은 찬란스런 모양이 나오기도 하고, 더러는 관음 보살이 수없이 보이기도하고, 더러는 우주에 꽉 차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주정상(無住定相)이라, 부처님은 하나의 모양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상(相)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일정한 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는 것은 마음이 그마만치 선량(善良)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좀 선량하고나, 내가 좀 공부가 되는구나!' 이렇게 자기 스스로 흐뭇하게 느낄 망정 그것이 도(道)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어떤것이 보인다 하더라도 근심할 필요도 없고 슬쩍 지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문제는 구경지(究竟地)요, 실상묘법(實相妙法), 진공묘유(眞空妙有)자리입니다. 천지우주가 텅 빈 가운데 무량광명(無量光明)이 충만하다는 표현이나 뜻은 똑같습니다. 진공(眞空)은 끝도 갓(邊)도 없이 빈 공간이요 묘유(妙有)는 다만 비지 않고 거기에 가득 찬 무엇인가 있다는 말입니다. 빛나는 무엇 그것은 무량광명이라, 한없는 광명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한 것입니다.
아무튼, 무엇이 나타나든지 간에 집착 말고서 혼연스럽게 궁극의 자리, 진공묘유 자리, 천지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무량한 광명이 충만한 그 자리를 보고서 공부를 하면 되는데, 또 너무 볼려고 애쓰면 그때는 상기(上氣)가 됩니다. 그런 때는 그냥 가만히 놓아버리면 됩니다. 가만히 바보같이 놓고 있다가 또 이제 끄떡끄떡 침몰하면 다시 챙겨서 볼려고 애쓰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 원래 부처인지라 진정으로, 삿된 지옥같은 마음 안 가지고 부처같은 마음만 가질려고 애만 쓰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어떠한 계시(啓示)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무한의 신통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바른 사람들에겐 이상한 어떤 계시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번 용맹정진 기간 동안에 기어코 높은 경계를 공부해서 결정신심(決定信心)으로 정정취(正定聚)라, 극락 세계나,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결정코 변할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오르시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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