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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역행 최면요법가인 돌로레스 캐논 할머니(미국)가 말하는 윤회와 業(karma)
내가 가졌던 초기의 還生의 개념은,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당시로선 내가 아는 모든 것이었다.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번 이상 살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놀랍고 삶을 바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교회의 세뇌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전통에서 벗어나, 그 전통의 관념에 의문을 일으키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교회가 답을 갖고 있지 않은 질문은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성경에 없다면, 넌 알 필요 없어. 네가 죽을 때, 내가 가진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될거야. 아마도 그들은 거기서 모든 것을 설명할 명단을 보관하고 있겠지.” 하지만 점 점 더 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찾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고 있다. 그들은 점 점 더, 평생 믿도록 인도 받은 것 이상의 것이 저쪽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들은 질문하기 시작하고 있고, 해답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답변들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로서는 환생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주로 남부 침례교회)안에서 자랐다. 일요학교에서 배웠고, 성가대에서 노래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끈덕지게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성경이나, 목회자에게는 대답이 없는 질문들을 갖고 있었다. 많은 시간, 나는 설교를 들으면서 일요일 아침에 집회 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때 나는, 손을 들고 그가 말하고 있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하지만 문명화되고 훌륭한 크리스찬 소녀였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상대로 한 일요학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이야기가 흥미는 있었지만, 내가 더 이상 믿지 않는, 교의에 대한 가르침에 더 이상 휩쓸리지는 않았다. 내가 심령연구에 심취하게 될수록, 나는 나의 믿음을 남에게 알리지 않았다. 나의 믿음을 조롱에 노출되게 하기엔, 그 믿음들은 내게 너무나 소중했다. 나는 교회라는 정설을 버렸고 내가 종교의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종교와는 반대되는 것으로서인 靈性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종교와 靈性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내가 前生退行 치료요법을 專任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還生理論을 모두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다. 환생이란, 삶을 사는 단순한 과정이며, 여러분의 최선을 다하고, 교훈들을 배우고, 죽어서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것. 그리고 다양한 영혼들과 접촉하고 다시 신체로 돌아와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단순한 과정을 통해서 영혼은 점차로 지구라는 학교를 학년 학년 거치고, 그렇게 하여 지구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는 神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생각이 모두 이치에 맞았으므로 나는 그런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나를 찾아온 의뢰인들과 함께 다른 삶에서 유래된 문제들에 기초한 치료를 행했다.
내가 처음으로 책을 쓰던, 최면 연령퇴행을 하던 초기엔, 나는 線形 시간 패턴을 따르면서 前生을 보았다. 당시 나는 아직도 “아기 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한 삶과 그 뒤를 잇는 다른 삶이, 시간과 특정 날짜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고 이해했었던 것이다. 나의 초기의 의뢰인들 중 한 사람은 남다른 몽유병환자였다. 그는 최면 역행을 시도했을 때 완전히 다른 인격체가 되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그녀 안에서 발견한 생활스타일의 文化的, 神學的 등등에 관한 엄청난 양의 자세한 내용을 주었을 때, 나는 그것을 歷史를 탐험하는 완벽한 길로 보았다. 나는 그녀를 100년씩 점프하면서 과거로 돌아가서 25번의 별도의 전생으로 데리고 갔다. 각각의 인물은 분명히 구분되었고, 내가 한 것은 그녀에게 특정한 年度로 가라고 말하는 것이었고, 그러면 그녀는 대단히 동일함을 증명할 수 있는 인물이 되곤 했다.(* 즉 매번 동일한 년도의 과거로 돌아가게 하면 전에 나타났던 것과 동일한 인물이 나타났다는 말. 이는 전생퇴행요법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사례다.) 나는 그들과 매우 친숙해졌다.
그들의 목소리, 버릇, 몸짓 등등. 나는 그것이 통해 역사를 연구 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방법임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 일이 나의 天職이 될 것임과 내가 그에 관한 책을 계속 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초기 즉 80년대에 이 여성의 前生에 기초하여 두 권의 책을 썼다. 그것이 “예수와 옛세네파” 그리고 “영혼은 히로시마를 기억한다.”였다. 나는 풍부한 양의 정보가 있기에 내가 결국엔 몇몇 다른 인생을 포함하는 책을 쓰게 될 거란 걸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은 그런 초기의 시기 이후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갔다.
전생을 계속 탐험함에 따라, 다른 이론들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것을 모두 알아야만 했다. 나는 나의 믿음체계를 뒤흔드는 어떤 것이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첫 번째 것은 “인쇄하기”란 이론이었다.(이에 대해서는 “庭園을 지키는 자들”과 “죽음과 삶 사이”에 나온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많고 많은 삶을 살 필요가 없고, 다른 사람의 삶의 기억으로 인쇄(또는 들씌우다)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어떤 인물이, 달랐던 삶, 그리고 그것이 끌어올려질 배경이 없는, 그런 삶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되었다.
그들 삶의 기억들은 육신을 갖기 전에 (우리의 영적 안내자와 마스터들의 도움을 통해) 靈의 영역에 있는 거대한 도서관에서 취해져서, 우리의 영혼의 기억 속에 인쇄되거나 들씌워진다.(* 예전에 했던 영화 “토탈 리콜”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기억을 영혼 속에 인쇄하여 자신이 마치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 것으로 알게 하는 기술.) 그 당시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이 전생을 실제로 살았는지, 아니면 인쇄한 기억인지를 어떻게 알죠?” 대답이 “알 수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감정을 포함한) 인쇄할 모든 것이 들씌워지니까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 인물은 우리 세계에서 기능하기 위해 그 정보들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아무도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지구에 처음 온 영혼에게 지구에서 살았던 사람의 기억을 주입시켜서 지구에서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게 만든 것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구 생활이 서툴러서 많은 문제가 생김.) 그렇긴 하지만, 이러한 이상한 개념의 도입은 나의 기초를 정말로 흔들어 놓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 개념과 싸웠다. 나의 믿음 체계가 도전받고 있다면 이 분야의 일을 내가 계속하고 싶을까? 나는 삶과 죽음과 환생이 (선형적으로) 작동한다는 개념에 마음이 편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사과 파는 수레가 뒤집어지길 원하지 않았다.(믿음 체계가 잘못되도록 하는 것을 비유)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생각에 대한 나의 반응을 연구했을 때, 나는 만약 내가 적어도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조사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기만 해. 질문하지 말고.”라고 하는 신조를 가진 교회보다 내가 나은 게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새로운 개념과, 제공된 다른 것들(평행의 삶 또는 겹쳐지는 삶)에 대해 보다 가까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로 지혜가 나의 닫힌 마음 안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을 열고 새로운 개념을 연구하는 것은 도전적이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의 기초가 되는 아무런 지식적 배경과 교육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마음이 질문하기 시작하자,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여러분은 배운 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양탄자 아래로 쓸어 넣어버릴 수도 없다. 일단 캔을 열었으면, 벌레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3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 그들은 나에게 조금씩의 정보를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있었다.
내가 소화시킬 수 있게 조금씩 빵부스러기로 만들어서 나의 식욕을 돋우었던 것이다.(* 그들이란, 최면을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돌로레스에게, 필요한 시기에 적절하게 조금씩 정보를 줌으로써 그녀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외계의 존재들을 말함. 처음엔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가 오랜 기간 연구하는 도중에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챔.) 그들은 다음 정보를 주기 전에 내가 각 정보를 소화시킬 시간을 내게 주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보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정보를 벽에 내던져 버리고, “이해할 수 가 없어. 알고 싶지 않아. 왜 예전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시간여행과 역사연구가 내게 편한데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이 일을 그만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다른 계획들을 갖고 있다.
前生을 통한 치유를 위해 나를 만나러 온 거의 모든 의뢰인들은 꼭 같은 질문을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뭐죠? 왜 내가 여기 있죠? 내가 무엇을 하기로 되어 있죠?” 그러면 나는 항상 그들에게 우리는 그 이유를 만약 그것이 “적절하다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함께 일하고 있는) 잠재의식(* 심리학에서 말하는 잠재의식과는 다르다.)은, 의뢰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정보는 결코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이나 목적이 지금의 그것과 180도 다르다고 해보자.
만약 그 사실이 너무 일찍 알려진다면, 의뢰인들은 “안 돼! 그것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마지막 것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길에 블록을 쌓고는 자기 자신을 방해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잠재의식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들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경우가 있다.
자신이 태어난 목적을 알고 싶어 하는 한 남자를 만났는데, 최면유도 중에 내가 그 질문을 했을 때, 잠재의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린 아직은 그에게 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었으면 해요. 당신은 당신이 보는 것을 알지 못해요. 하지만 그가 당신이 20년 전이었던 곳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아기에게 하루 세 끼 거친 음식을 줄 순 없어요. 젖을 먼저 주고, 나중에 부드러운 씨리얼을 주고, 그러고 나서 채소를 갈아주죠. 그리고 훨씬 나중에 아기에게 딱딱한 음식을 주죠.” 이것은 완벽한 비유였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내가 겪은 것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소용돌이 치는 宇宙” 씨리즈는 계속해서 나의 마음을 확장시킨다. 내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저곳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내게 생각할 새로운 개념이나 이론을 주었다. 비록 그것이 이전과 너무나 다르고, 따라서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이 내게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는 그 삶의 계획안으로 그것을 적절히 맞게 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결국엔 이러한 보다 어려운 개념들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러면 나는 끊임없이 그들에게 말한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들은 그것을 더 분명하게 설명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내가 그것에 대해 책을 쓰고, 강의를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나의 질문은 계속되고, 적어도 그것이 무디지는 않다. 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바퀴자국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은 도발적인 생각에 의해 끊임없이 확장 중에 있다. 때로 나는 내가 역사를 탐구하고 그런 경우들에 대해 책을 쓰던 그 초기의 단순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했더라면 내가 많은 양의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잃어버렸을 것임을 깨닫는다.
나는 탐험을 계속한다, 오직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다른 영토로.
어떤 사람들이 還生의 개념을 처음으로 접하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보는 것은 여전히 놀랍니다. 그 생각을 그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당신 말은, 내가 전에도 살았었단 말인가요? 이 삶이 이곳 지구에서의 첫 삶이 아니란 말인가요?”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에게 그들이 적어도 한 번의 다른 삶이 있었다는 생각은 정신을 확장시킨다. 사실 그들이 수백번을 살았고, 상상할 수 있는 형태와 상상할 수도 없는 형태를 갖고 살았다는 것은 알지도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前生에서 반대의 性을 갖고 살았다는 것에 놀란다. “아뇨, 내가 여자였을 리가 없어요. 난 항상 남자였어요!” 내가 이 초보 의뢰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잠재의식은 그들에게 매우 친절했다. 그들은 보통 단순하고 세속적인 前生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다루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것을 보게 되면 의뢰인이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일상을 살아가는데 지장이 있게 되므로, 잠재의식이 의뢰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주기 때문.)
두 흑인이 같은 週에 나를 만나러 왔다. 한 사람은 바로 전생을 보았는데, 자신의 몸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건 백인의 손이잖아. 내가 백인일리 없어! 내 여친도 백인이네!”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이 고대 로마의 검투사임을 보았다. 그는 싸우는 게 싫었고, 그것을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지는 것뿐이었다.(* 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살인이 지겨웠다. 흑인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스포츠를 위해 데려와졌던 것이다. 그는 흑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일단 환생의 개념을 이해하면 더 이상의 편견도 판가름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신이 판가름하고 편견을 갖는 바로 그 대상으로 다시 세상에 돌아와야 함을 의미한다.
체계가 작동하는 그 방법의 논리성은 정말 아름답다. 당신은 하나의 육신이 아니다! 당신은 몸을 ‘갖고’ 있다. ‘진짜’ 당신은, 하나이자 유일한 ‘진짜’ 당신은 당신의 靈이다. 이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며, 한 육신에서 다른 육신으로 모험하며 교훈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각 삶에서 여러분이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복장을 갖는다. 다음 연극에서는 다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옷이 그렇듯이, 옷은 낡기 마련이다. 그 시점에서 여러분은 옷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새 옷을 입어야한다. 그러면 새로운 연극에서 다음 부분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연극의 계획이나 원고를 모른 채로. 지구는 하나의 학교다. 그것에 다니기로 결정한 것은 여러분이다. 각 생애는 배워야 할 많은 교훈이 있는, 하나의 학급과 같다. 여러분은 이번 학급에서 배워야 할 것을 모두 배우기 전까지는 다음 학급으로 갈 수 없다. (현실의 학급과 달리) 이것은 학년을 빼먹고 갈 수 없는 학교다. 하지만 학년을 반복할 수는 있다. 그것이 오래 걸릴 수도 짧게 걸릴 수도 있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얻을 때까지 그 학년을 계속해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이번 생애에서 교훈을 올바르게 얻지 못했다면, 다음 생애에서 동일한 문제와 교훈들이 주어질 것이다. 이는 여러분이 최종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그 생애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것을 배우게 될 때까지 반복된다.
그 후엔 다음 교훈, 다음 학급으로 옮겨간다. 그것은 보다 쉬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과정은 여러분이 최종적으로 졸업하여 靈的 측면(* 靈으로서 존재하는 세계를 말하는 듯)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 때까지, 즉 神에게 돌아갈 때까지 계속 된다.
“돌아가는 것이 돌아오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 할 수 있다면, 당신이 생애에서 남에게 하는 것은 반드시 그 대가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공짜로 타는 것은 없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는 것은 그들이 그 대가를 보답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난 30년간의 최면요법을 통해 수천 수만명의 전생 session을 가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보고 보고 또 보았다. 여러분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전생에서 무엇을 했건, 그것이 현생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당신은 전생에서 당신이 부당하게 취급했던 바로 그 사람과 만나게 된다.
당신은 항상 당신의 잘못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사람들이 이것만 이해해도, 얼마나 다른 세계를 보게 될 것인가.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현생에서 가고 있는 그 길이 다시 자신들을 늘 따라다니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그것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보답될 것이다. 이것이 까르마(業)라 불리는 宇宙의 법칙, 원인과 결과의 법칙, 균형의 법칙이다. 이것은 내가 의뢰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사람들은 온갖 잡다한 것을 갖고 다닌다. 어떤 것은 전생에서 기인한 것이고, 어떤 것은 금생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제거하지 못하고 결국 그로 인해 병이 들고 만다. 그 대부분은 전생에서 이월된 까르마(業)이고, 이따금 동일한 사람을 여러 번의 생애에 걸쳐 다룬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어떤 상습화 상태로, 어떤 경향성으로 들어간다. 그런 경향은 전혀 유용한 목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 그것이 금생에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다시 돌아와서 동일한 사람과 다시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인관계에서의 어떤 문제가 금생에 해결되지 않으면 또 다른 생에서 그 동일한 사람과 다시 만나 동일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또 다시 해결할 기회를 만나며, 이것은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반복된다는 의미.) 때로, 이 말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서 상황을 보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난 그 일들을 없애고 싶어! 난 그것들을 견딜 수 없어!” 그럴 때, 그들은 그 일을 처리하는 편이 좋다. 내가 한 번은 잠재의식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우리가 돌아오는 이유를 아는 것이 일이 더 쉽지 않을까요? 만약 우리가 우리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연결점들을 기억한다면요.” 대답은 “우리가 대답을 알았다면, 그것은 시험이 아니겠지요.”(* 답을 미리 가르쳐주면, 시험을 치는 것이 의미 없다는 의미)
우리가 새로운 인생으로 오기 전에, 우리가 우리가 막 떠나온 그 삶(* 바로 전생의 삶)을 재음미하면서 靈界에 있을 때, 우리는 이 문제를 관계된 다른 영혼들과 상의한다. 우리는 그들과 계약한다. “이봐, 우리는 지난번엔 그러그러한 좋은 일을 하지 못했어. 다시 시도하고 싶어? 이번엔 네가 남편이 되고, 나는 아내가 될게. 아마 그것이 그 길로 잘 될거야.”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그 동일한 사람과 그 일을 다시 시도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바꿀 수 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전생에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기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패턴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전생에서 하던 잘못을 반복한다는 의미)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가 없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무엇을 하건 다 잘못되요. 그들과 함께 사는 게 그냥 끔찍해요.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를걸요. 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아직도 쓰레기를 지니고 다니는 한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그들의 상황은 너무나 나빠서 다른 사람에게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말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이 경우 나는 다음과 같이 해볼 것을 추천한다.
그들에게 마음으로 마음 대 마음으로 말을 걸어보라. “아무개야, 나는 일이 잘 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애썼고, 너도 애썼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일이 잘 되지는 않는구나. 그러니 우리의 계약을 깨트리는 게 어떻겠니?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거지. 우리는 이런 일을 계속해서 겪을 필요가 없어. 난 너를 놓아줄게. (미워서가 아니라)사랑으로 말이야.”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이 계약서를 찢어서 던져버리는 장면을 마음에 상상하라.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악도 없고, 악마도 없다. 지옥도 없다. 오직 배워야할 교훈만이 있다. 긍정적 에너지와 부정적 에너지라는, 에너지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惡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단지 그 에너지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인간일 뿐이다. 사실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악마가 내가 그 짓을 하게 만들었어!” 또는 “부모님은 날 이해 못해.”하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 우리 모두는 나쁘고 불운한 일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그것이 인생에 관한 모든 것이다. 그것이 이른 바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쁜 환경에서, 당신은 무엇인가 배운 게 있는가? 만약 한 가지라도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런 나쁜 상황이 그대에게 닥친 목적이다. 하지만 반면에 그런 상황을 만나고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당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남을 비난이나 하고 있다면, 그땐 당신은 그 상황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이해할 때까지 그 부정적인 일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당신은 비로소 그 불행한 상황에서 풀려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전생을 탐험하면서 알게 된 가치와 아름다움이다. 비록 현생에 당신이 겪는 일이 부당해 보일지라도, 만약 前生을 탐구해 본다면, 우리는 원인이 거기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전생부터 축적했던 까르마를 갚고 있는 것이다.
기억하는가? 내가 앞에서 “돌아서가는 것이, 돌아서 온다.”고 한 말을. 우리는 죽는다고 해서 우리의 빚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빚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너무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슬레이트는, 그 빚이 보답될 때까지는 깨끗이 청소될 수 없다. 빚이 청산되어야, 우리는 깨끗하게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럼,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쉽게 빚을 청산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그것은 확실히, “당신이 날 해쳐? 그럼 나도 되돌려 주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까르마의 바퀴를 계속 돌게 만들 뿐이다. 그럼 어떤 것이 그 방법일까? 가장 빠른 방법은 “용서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하기 쉽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처는 너무나 깊어서 놓아버리기 어렵다. 하지만 당신은 용서해야만 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진짜로 아무런 제한 없이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용서해야 한다.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하기 힘든 일 중 하나다.
하지만 진정으로 까르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것을 되갚기 위해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판결을 받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일단 당신이 진정으로 그렇게 한다면, 마술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들은 더 이상 여러분을 해칠 수가 없다. 그들은 더 이상 당신을 폭발시키는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버튼을 누르면 반응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 일단 진정한 용서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바뀐다.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묘한 변화가 일고, 일이 보다 쉽게 됨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럼 다른 방도는 무엇일까? 까르마의 바퀴가 계속해서 돌고 돌고 돌게 만드는 것이다.
한 번은 온 몸이 암 때문에 아픈 사람이 찾아왔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암은 흔히 분노를 억누름에서 유발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분노를 잡고 있음으로써(특히 복부나 내장부위의 암일 경우) 그리고 그것을 표출하지 않음으로써. 이 일이 있으면, 분노는 휘젓기 시작하고, 해방구를 찾지 못한다. 그러면 몸을 파먹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아무리 의사가 암 조직을 수술을 통해 제거해도, 암은 다른 부위에 또 나타난다. 마치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언가에 화나 있군요.” 그는 소리치듯 대답했다. “물론이죠. 이혼한 내 전 마누라요! 증오스러워요! 마누라가 애들을 못 만나게 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용서하고 분노를 놓아버리라고 말했다. “용서할 수 없어요! 만약 내가 용서한다면, 마누라가 이길테니까!”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죽으면, 마누라가 이기는 겁니다.”(* 아내를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남편이 암으로 죽게 되고, 그것은 아내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말.)
이렇게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이, 매우 간단하면서도, 그렇게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래서 까르마의 바퀴는 계속 돌고 돌고 돌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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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윤회.인과에 관하여 (성철스님) (1) | 2018.01.10 |
윤회는 현실이다 - 안동민(심령과학자)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이 우주에는 무엇이든 원인 없이는 어떤 결과도 생기지 않으며, 또한 인간의 영혼은 자기가 이승에서 만든 원인의 결과로서 다음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신 말씀은 틀림없는 진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는 벌써 13년째 심령과 학자로서 수천을 헤아리는 많은 사람들과 매일과 같이 상종하는 가운데 수많은 체험을 통하여,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사실을 체험한 바 있거니와, 거기에 대한 몇 가지 체험담을 적어 볼까한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이 악행(惡行)을 거듭하고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내세(來世)에서 동물로 태어나는 일도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필자는 오랫동안 의문을 느껴온 터였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부처님의 이 말씀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기르기를 좋아했었다. 지금도 필자의 연구원에는 여러 가지 열대어와 잉꼬 종류를 기르고 있다. 가끔가다 손님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 일이 있다.
"원장님은 어째서 이런 작은 동물들을 기르고 계신가요? 꽤 손이 많이 갈텐데요." 이런 경우 필자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다른 사람들이 너무나 동물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제가 인류의 한 대표로서 속죄를 하고 있는 거죠." 몇 년 전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필자는 단골 새가게에서 '다르마 잉꼬'를 한쌍 사온 일이 있다. 새집 주인 이야기에 의하면, 무척 수명이 긴 새라고 했다. 그런데 이'다르마 잉꼬'는 두 마리 다 수놈이었고 무척 사이가 나빴었다.
어느 날 일이었다. 마당에 있는 새집 앞에 서있던 손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안 선생님이 쓰신 책을 보면, 인간의 영혼이 동물의 몸에 실려서 태어나는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이 새에도 과연 전생(前生)이 있을까요?" 질문을 받고, 필자는 방심상태가 되어서 '다르마 잉꼬'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필자의 눈앞에는 열대지방의 어느 섬의 풍경이 선명하게 펼쳐지는 것이었다.
두 명의 원주민(原住民)이 커다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새망을 쳐서 '다르마 잉꼬'를 사로잡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형제였고, 이름은 형은 바꾼다, 동생은 요쿤다였다. 그들은 사로잡은 '다르마 잉꼬'를 죽여서 박제(剝製)를 해서, 이 섬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토산품으로서 팔았던 것이다. 그들이 일생을 통하여 생포하여 박제한 잉꼬의 수효는 3만 마리가 넘었다.
때가 와서, 그들 형제도 죽어서 유계(幽界)에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까닭 없이 많은 목숨을 앗은 죄로 해서, 그들 형제는 재생(再生)의 과정에서 '다르마잉꼬' 의 몸 속에 갇인 채 태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필자는 생각한다.
인간의 영혼이 그대로 동물로서 재생(再生)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빙의 하는 형식으로 동물의 몸 속에 갇히는 게 아닌가 하고....
이 바쿤다, 요쿤다 형제가 바로 눈앞에 있는 두 마리의 '다르마 잉꼬'인 것이었다. 필자가 이때 본 환상(幻想)을 그대로 손님에게 이야기해 준 것은 물론이었다. 필자가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르마 잉꼬'는 매우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필자를 바라다보는 듯했다. 그 뿐만 아니라 어쩐지 몹시 슬퍼하는 기색이었다.
그 뒤, 몇 번인가 필자는 손님들을 보고 '다르마 잉꼬'가 보는 앞에서, 인간이 전생에서 저지른 죄의 결과로서, 동물의 몸 속에 그 혼이 갇혀진 실제의 산 예로서 이'다르마잉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터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부터 어찌된 셈인지, '다르마 잉꼬'는 두 마리가 다같이 기운이 없어지더니, 전혀 모이를 먹지 않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한 마리의 '다르마 잉꼬'는 새장 속에 죽어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서 나머지 한 마리도 굶어죽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자기들의 처지를 비통하게 생각하여 자살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전생(前生)에서 저지른 죄를 후회한 나머지, 자기들이 죽인 '다르마 잉꼬'로서 재생하여 좁은 새장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신세를 비관하여 자살한 모양이었다. 그들 '다르마 잉꼬'앞에서 전생 이야기를 한 것을 필자는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새들에게도 인간의 말의 뜻이 전달된다는 하나의 뚜렷한 증거이기도 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 하나 잉꼬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그 무렵, 필자는 한 쌍의 '세끼세이 잉꼬' 를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주 중증(重症)의 환자가 필자의 연구원을 찾아왔다.
여섯 명의 어린 자녀를 거느린 어머니였다. 남편하고도 사별(死別)하여, 혼자 힘으로 여섯 명의 자녀를 기르고 있는 어머니였다. 분명 중증의 신장염이어서 큰 몸이 누렇게 부어 있었다. 필자로서는 최선을 다해 드렸지만, 환자의 용태는 조금도 좋아지는 것같지가 않았다. 난처하게 여기고 있었던 바, 어느 날 밤 꿈속에서 기르고 있는 '세끼세이잉꼬'가 나타나서 분명히 이와 같이 말했던 것이었다.
"원장선생님, 저희들은 오랫동안 은혜를 입었습니다. 원장선생님 가르침 덕분에 저희들도 이 우주를 지배하는 인과율(因果律)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원장선생님은, 중증인 신장병 환자를 어떻게 해서든 완쾌(完快)시켜 주려고 애쓰고 계시지만, 저희가 보기에는 이미 저승사자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대신 죽으려고 생각 합니다. 그 동안 신세진 것에 대한 은혜를 갚는 뜻에서 저희들이 대신 죽어서 그분을 살려 드리려는 겁니다.
저승사자에게 부탁을 했더니, 원장선생만 승낙하신다면 어떻게 해보겠 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저희들은 이제부터 저승으로 떠나렵니다!" 다음순간, 필자는 꿈에서 깨었던 것이었다. 곧 새장에 달려갔더니, 분명 간밤까지도 아무렇지 않았던 두 마리의 잉꼬는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뒤, 중증이었던 신장병환자는 거의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던 것이었다. 이로부터, 필자의 연구원에서는 때때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작은 동물들이 갑자기 죽으면, 거의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기적이 일어나곤 했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대신 죽어간 새들과 열대어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리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필자는 생각한다.
그들은 다음 세상에서는 틀림없이 인간으로서 거듭 나게 되리라고. 살신성인(殺身成仁)하므로 서, 동물들도 보다 고등생명체(高等生命體)인 인간으로서 진화, 발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등동물은 언제까지나 하등동물로서 태어날 것이고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은 없는 게 아니겠는가?
오늘날, 심령과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도 대부분은, 동물에게는 영혼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인간으로서 태어날 수는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보다 높은 차원(次元)에서 본다면 모든 생명은 다같이 우주대생명에서 나온 가지에 불과한 것이며, 유독 인간의 생명만을 고귀하게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게 필자의 변함없는 신념임은 물론이다.
추가 자료 보기 http://www.sky33.org/146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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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불광출판사 <염불, 모든 것을 이루는 힘> 에서 발췌
중국의 원영 굉오스님의 권수염불문(勸修念佛文)을
불광출판사에서 <염불, 모든 것을 이루는 힘>이란 제목으로
정원규님이 번역하여 내 놓았다.
적공(寂空)스님의 전생과 극락왕생발원
여러 수행자들이여, 이글은 내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드리며 가르침 청하여 시방삼세의 모든 본존이신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간 것으로 진실하여 하나의 거짓도 없음을 밝혀둔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여러분이 나의 일을 거울 삼아 교훈을 얻어서 스스로 잘못을 고치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이다. 여러분이 하루라도 빨리 불도를 수행하려는 바른 마음을 일으키고 큰 보리심을 발해서 용맹정진하고 계를 지키며 일념으로 염불하여 정토왕생을 구하여 영원히 물러나지 않고 육도윤회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또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곧바로 보리를 증득하고 무상정등정각을 이룬 뒤 각자의 원(願)에 따라 다시 돌아와 여섯 가지 윤회의 세계에 몸을 나투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기 바란다.
나의 속가 성은 이(李)씨이다. 1989년 3월 해공(海空)법사를 은사로 불문에 귀의하였고,적공(寂空)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불가에 입문한 뒤, 하루하루 예불과 좌선을 열심히 하였다. 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늘 경전을 가까이하면서 불법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1992년 8월 25일 저녁 예불을 마치고 법당에 정좌하고 있었다. 저녁 10시 경 갑자기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가피를 얻어서 나 자신의 과거 생의 모습을 휜히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너무나 슬퍼서 크게 울음을 터트렸고, 열심히 불법을 공부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94년 8월29일 저녁 법당에서 염불을 할 때는 더 나아가 속가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의 과거 생의 모습까지 휜히 알게 되었다. 그 후 숙명(宿命) 즉, 과거생의 모습과 윤회에 대에 여러 차례 불보살의 증명을 얻게 되었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과거생의 기억은 여러 차례 증명을 통해서 입증된 것을 비로소 감히 밝히는 것이다.
600년 전 나는 출가한 비구였다.
나는 20세에 출가하여 삼당대계(三堂大戒)를 받고 50여 년을 수행하였다 .선한 업도 많이 지었지만, 속세의 일에 탐욕을 일으키고 연연하여 인간계와 천상계의 복된 과보를 바라고, 정토왕생은 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육도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삼악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으며 빚을 갚아야 했다.
스님으로서의 삶을 마친 뒤 부유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향락을 탐하게 되었는데, 온 종일 술과 여자를 탐하며 지내는 생황을 하였다 .내 주변에는 여덟 명의 시녀가 있었는데, 비록 여색을 탐하지는 않았지만 명예를 좇고 재물에 욕심내고 이익을 탐한 과보가 커서 악업을 지었다.
하지만 전생에 출가수행한 공덕이 크기 때문인지, 목숨을 마친 뒤에 벼슬아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한 뒤 많은 병사를 거느리는 장군이 되었는데, 그 풍모가 당당하고 늠름하였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었다. 부귀영화가 넘쳐서 다 누리지 못 했고, 산해진미도 또한 넘쳐서 다 먹지 못했다.
온 종일 주지육림 속에서 보내곤 했는데, 당시 24명의 시녀를 옆에 두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면서 다시금 온갖 나쁜 업을 짓게 되었다. 특히 병사들에게 명령 내려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사람의 머리를 벤 뒤 그 시체를 강이나 개천에 버렸고 수풀에 숨은 적군도 모두 찾아내어 죽이는 등 많은 죄업을 지었다.
그리하여 그 몸을 벗은 뒤에는 삼악도에 떨어져 열 번을 윤회전생하면서 악업의 과보를 갚아야 했다.
먼저 세 번은 두꺼비의 몸을 받았다.
왜냐하면 장군으로 살때 많은 사람의 머리를 베어 죽이고 그 시체를 개천에 버렸기 때문이다. 그 과보로 머리 없는 두꺼비로 태어나 수시로 막대기에 맞고 낚시에 걸리고 복부가 뒤집혀서 물에서 죽어서 그 시체가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났다. 심지어 근육이 뽑히고 살갗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면서 전생에 지은 악업의 과보를 갚았다.
이렇게 세 번 두꺼비의 몸을 받은 뒤, 다시 뀡의 몸을 네 번 받았다.
그 이유는 장군으로 살 때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두려움에 떨면서 수풀에 숨어있는 적군을 찾아내서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부자와 장군으로 살 때, 입의 쾌락을 탐하여 온종일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살았다. 그 과보로 뀡의 몸을 받아서 창에 찔리고, 칼에 베여서 지지고 삶기고 볶이는 고통을 당하면서 빚을 갚아야했다.
네 번이나 뀡의 몸을 받고도 악업을 다 갚지 못하여, 다시 돼지 몸을 세 번 더 받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부자와 장군으로 살 때 먹기만 좋아하고 일하기는 싫어했기 때문이다. 시녀들이 밥을 가져오면 입을 벌려 먹고, 옷을 가져오면 손을 벌려 입히게 하고, 늘 고기 먹을 생각만 하면서 나쁜 업을 지었다.
그 때문에 돼지의 몸을 받아서 먹다 남아 버리는 음식과 상한 음식을 먹게 되었고, 채찍이나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이것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천 번 만 번 칼에 잘리고 뜨거운 솥에 들어가서 갖가지 고통을 당하였다. 두 번 사람 몸을 받아서 입의 쾌락을 탐한 악업의 과보를 이렇게 갚게 되었다.
일체의 고통과 모든 즐거움은 모두 나 스스로 지어서 직접 받는 것 (자작자수自作自受) 이며, 인과응보는 참으로 조금도 틀리지 않은 것이다. 여러 수행자들이여, 내가 삼악도를 윤회전생하면서 받은 갖가지 고통에 대해 알았을 때 너무도 상심하여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지극히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600년 전 수행으로 높은 경지에까지 도달했으면서도 인간과 하늘의 복을 탐하고 왜 정토왕생을 구하지 않았는가? 이 헛된 탐욕때문에 임종의 자리에서 한 생각 잘못하여 열 번이나 삼악도에 떨어졌구나.
붉은 흙먼지 가득한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600년을 헛되이 윤회하였구나. 어찌 가슴을 치며 통곡할 일이 아니겠는가. 600년!!! 이토록 긴 세월을 그리 비천하게 보내다니 또 어찌 부끄러워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어떤 귀신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 불법을 배운 후 인과의 가르침을 믿고 생명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진실로 자기 자신이 윤회해온 과정을 알고 나서 어찌 본사 석가모니불, 본존 관세음보살과 시방삼세 일체재불, 모든 대보살의 자비로운 가피에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제자가 자기의 본사, 본존의 면전에 꿇어 앉아 자기의 숙명을 이해하고 불법을 배우면서 또 한 단계 진일보하였을때, 또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에 나는 어떻게 해야 불보살님의 크나큰 은덕에 보답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결과 열심히 불법을 배우고 일념으로 염불하면서 정토왕생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걱하였다. 사람의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가르침 배우기 어려움을 생각하자, 현생에 어렵게 얻은 사람의 몸으로 열심히 수행하지 않는다면 불보살님께 죄송하고 부모님께 죄송한 일이다.
옛 성현께서 말씀하지 않았는가 "사람 몸얻기 어렵지만 금생에 이미 얻었고, 불법 듣기 어렵지만 금생에 이미 들었네, 이번 생에 불국정토에 가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에 갈 수 있으리오?"
사람 몸을 받고 태어났으니, 이번 생에 반드시 시간을 다투어 열심히 수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귀신이 왔을 때 뒷 일을 기약할 수 없다. 사람이 임종에 이르렀을 때 마음 속에 한 가지 생각 즉,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연꽃 가운데 화생하여 부처님을 뵙고 열심히 수행하여 성불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해냈는가? 아니다. 나는 잠잘때 꿈에 빠지며 또한 망념도 많다. 만약 꿈을 꿀 때조차 정념(正念)을 유지할 수 있으면 임종의 자리에서 반드시 서방극락정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서원하였다.
오늘 이후로 수시로 계(戒)의 조문을 굳게 기억하여, 지계(持戒)의 금강 같은 날카로운 검으로 오욕육진(五慾六塵)을 베고 삼독(三毒)을 소멸하겠다. 자주자주 무상(無常)을 생각하고 항상 사성제를 사유하며 자비심을 닦아 일체 중생을 숙세의 부모로 여기고, 늘 삼보와 스승의 은덕을 기억하겠다. 생각 생각마다 무상보리를 잊지 않고 용맹정진하겠다. 계를 지키며 염불하여 성불할 때까지 영원히 물러나지 않겠다. 나를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여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을 것을 서원한다.
나는 비구로 살면서 열심히 수행하였으나 정토왕생을 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두 생에 걸쳐 인간의 복보(福報)를 얻었다. 그러나 선을 쌓고 덕을 짓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갖가지 악을 지어 삼악도에 열 번이나 떨어졌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으로 그 과보를 갚고 나서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600년 세월을 헛되이 보내며 인과응보를 절감하였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어찌하여 아귀도와 지옥도에는 떨어지지 않았는가? 그것은 내가 출가하여 불법을 배운 공덕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부유한 집에 태어나 갖가지 악업을 지었지만 단지 축생도에만 떨어져 윤회하며 과보를 갚은 것이다.
악업의 인연이 다하고 나서, 불법에 대한 종자가 다시 한번 좋은 인연을 만나서 싹을 튀웠고 그리하여 현생에 다시 출가하여 불법배우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불법의 종자를 심은 다음에 이 종자가 썩지 않는다면 적당한 토양과 온도를 만났을 때 곧 싹을 튀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한 구절의 부처님 명호는 대광명장(大光明蔣)이며 한 번 이근(耳根)을 스치면 영원히 도(道)의 종자가 된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쫑카파 대사가 『보리도차제론』의 여러 곳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출가생활 오십년에 생사해탈 구하잖고
스스로를 얽어매어 다음생의 복된과보
생각하며 닦았다가 육백년을 윤회했네
부귀공명 비유하면 칼날끝의 꿀과같아
삼악도에 떨어져서 모든빚을 갚게되네
고기반근 탐닉하여 여덟냥을 갚게되고
금수축생 떨어져서 여러차례 윤회했네
참선하여 숙세일을 명백하게 알고보니
스승님은 성인이요 내자신은 범부로세
금생과보 확실하게 전생인연 때문이니
스승에게 절하오며 금강선을 닦아가네
굳센정진 영원토록 물러나지 아니하고
곧장바로 보리좌의 구품연대 오르리라.
사천성 중강(中江)에서 1995.10.17 일
-적공(寂空) 스님-
전생퇴행 최면요법가가 말하는 윤회와 업 (0) | 2018.0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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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는 현실이다 (실제 예) (0) | 2018.02.11 |
육도중생(六道衆生) -청화 큰스님- (0) | 2018.02.09 |
영혼.윤회.인과에 관하여 (성철스님) (1) | 2018.01.10 |
악행을 저지른 여사가 뱀으로 환생하다 (저승에는 불효 죄가 가장 크다) (0) | 2018.01.04 |
육도중생(六道衆生)
-청화 큰스님-
십법계(十法界) 가운데서 가장 낮은 법계가 지옥법계(地獄法界)입니다.
마치땅속에 갇혀있는 감옥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지옥법계는
우리 중생은 안보이니까 부인합니다. '그것은 권선징악으로
사람들한데 나쁜 짓을 못하게 하고 좋은 짓을 하게 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말했겠지' 하며 부인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지우주가 텅비어 있다는 즉, 제법공(諸法空)이란 경계에서 보면은
사람도 없다고 봐야합니다. 공에서 본다면 사람도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람도 임시동안 가짜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도
분명히 있습니다.
현상계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텅 비어서 부처님의
광명 뿐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리(理)에서, 불성(佛性)에서 안 보고, 차별적으로
본다고 할 때는 분명히 사람도 있고 지옥도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한정된 안목으로써 못볼 뿐입니다.
우리가 전자(電子)나 또는 양자(陽子)를 눈으로 볼수 있습니까?
못 보지요 그와 똑같이, 인간의 한정된 안목으로 안 보일뿐이지
분명히 지옥은 존재합니다.
1. 지 옥 법 계 (地 獄 法 界)
상품(上品)의 오역(五逆)십악(十惡)을 범(犯)하여 한열규환(寒熱叫喚)
의 고(苦)를 수(受)하는 최하의경계(境界) 지옥은 상품(上品)의
오역십악(五逆十惡)을 범하여 받는 경계입니다.
오역죄(五逆罪)는 죄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라는 것입니다.
살부(殺父)라,아버지를 죽이고, 살모(殺母)라,어머니를 죽이고,
살아라한(殺阿羅漢)이라, 아라한은 성자를 의미합니다.
즉 말하자면 번뇌의 종자를 다 끊어버린 사람이 아라한입니다.
따라서 성자와 같지요, 이런 성자를 죽이고, 파화합승(破和合僧)이라,
진리를 위해서 공부하는 단체가 화합승인데, 이간질이나 하고
화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불신출혈(佛身出血)이라, 부처님 몸에서 피를 낸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부처님이 안 계시니까 부처님 법을 훼방하고 헐뜯거나 또는
없애려고 하면, 부처님 몸에서 피를 내는거나 똑같습니다.
이런 것이 오역죄 에 해당합니다.
십선(十善)은 열 가지 선이데,
▷불살생(不殺生)이라, 살생하지 않고,
▷불투도(不偸盜)라, 도적질하지 않고,
▷불사음(不邪淫)이라, 자기의 배필 이외의 음행,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출가승은 일체 음행을 금하고 재가승은 자기 배필 이외의 음행을
금합니다. 이러한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고, 사음 않는 것
이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에 해당하고,
▷불망어(不妄語)라, 거짓말 않고,
▷불양설(不兩舌)이라, 이간하는 말 않고,
▷불악구(不惡口)라, 욕설 않고,
▷불기어(不綺語)라, 꾸미는 말로 궤변이나 음탕한 말을 하지 않고
이러한 것은 우리의 구업(口業)에 해당합니다.
▷불탐욕(不貪慾)이라, 탐욕 부리지 않고,
▷불진에(不瞋에)라, 성내지 않고,
▷불사견(不邪見)이라, 삿된 견해가 없는 것인데, 이것은
불치(不痴)라, 어리석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것은 우리의
뜻으로 짓는 의업(意業)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은 것이 우리 중생이 신(身), 구(口), 의(意)로 짓는
나쁜 소행(所行) 즉, 악업(惡業)입니다.
이러한 오역을 범하고 십악을 짓는다 하더라도, 낮은 단계가 아니라
상품(上品)의 높은 단계로 아주 극심한 것을 말합니다.
중품(中品)은 조금 덜 극심하고 하품(下品)은 조금 어렴풋이 짓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지옥은 상품의, 아주 극심한 오역죄나 십악을
범해서 한열규환(寒熱叫喚)이라, 너무 춥고 너무 뜨거워 아파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팔한지옥(八寒地獄), 팔열지옥(八熱地獄)이라,
여덟가지 아주 추운 지옥, 여덟 가지 아주 뜨거운 지옥이 있는데
이런 고(苦)를 받는 최하의 경계(境界)가 지옥입니다.
2. 축 생 법 계 (畜 生 法 界)
중품(中品)의 오역(五逆) 십악(十惡)을 범(犯)하여 탄담살륙
(呑啖殺戮)의 고(苦)를 수(受)하는 축류(畜類)의 경계(境界)
그 다음은 축생법계(畜生法界)입니다.
이것은 일반 동물계를 말하는데, 소나 개나 돼지나 새나
곤충이나 총망라한 말입니다. 상품보다 조금 정도가 낮은 중품(中品)
의 오역(五逆) 십악(十惡)을 범(犯)하여 탄담살륙(呑啖殺戮)의 즉
서로먹히고 잡아먹는 고(苦)를 받는 축류, 축생경계라는 말입니다.
3. 아 귀 법 계 (餓 鬼 法 界)
하품(下品)의 오역(五逆) 십악(十惡)을 범(犯)하여 기갈(飢渴)의
고(苦)를 수(受)하는 악귀(惡鬼)의 경계(境界) 그 다음은 아귀법계
(餓鬼法界)입니다.
하품(下品)의 오역, 십악을 범하여 주리고 목마른 기갈(飢渴)의
고통을 받는 나쁜 귀신인 악귀의 경계라는 말입니다. 귀신은
등급도 많고 수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귀신은 또 역시 몸이 없는 의식(意識)만 있어서 신통(神通)을 합니다.
의생신(意生身)이라 마음만 먹으면 그냥 광파(光波)보다도 더 빨리
순식간에 미국도 갔다가 한국도 갔다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귀신이
우리 사람 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가운데 특히 자기 배를 못 채워서
고통하는 그런 귀신이 아귀(餓鬼)인 셈입니다.
4. 아수라법계(阿修羅法界)
하품(下品)의 십선(十善)을 행(行)하고 통력자재(通力自在)를 득(得)
한 비인(非人)의 경계(境界) 그 다음은 아수라법계(阿修羅法界)입니다.
이것도 역시 사람 눈에는 안 보입니다. 이것은 귀신보다는 등급이
조금 더 높지만 성자의 지위도 못되고 천상도 미처 못 되지만
하여튼, 신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경계가 아수라법계입니다.
보통, 자칭(自稱) 도사라 하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이 아수라에
집혀서 그러는 경우가 있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수라는
하품(下品)의 십선(十善) 곧, 십선 의 정도가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별로 덜 지키는 하품의 십선 을 행(行)하고 통력자재(通力自在)라,
신통을 자재롭게 하는 것을 얻은 비인(非人)인, 사람이아닌 경계라 는
말입니다. 아수라들은 어떤 때는 우리들 앞에 극락세계 모양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야말로 찬란한 경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한 신통을 다 해서 자기도 보고 또 남에게 보여주기도 하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5. 인 법 계 (人 法 界)
오계(五戒) 또는 중품(中品)의 십선(十善)을 수(修)하여 인중(人中)의
고락(苦樂)을 수(修)하는 경계(境界).그 다음은 인법계(人法界)라,
이것은 사람 법계입니다.
오계(五戒)를 지키고 곧,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고, 사음하지 않고,
망령된 말하지 않고, 술먹지 않는 오계를 지키고 또는 중품(中品)의
십선을 닦아서, 비록 통력(通力) 신통도 못하고 좀 어정쩡할망정
그래도 역시 아수라보다는 더 정도가 높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랑으로 해야 합니다. 같은 십선도 아수라보다는
더 높은 십선을 닦아야만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이 오계를 지킨다거나, 중품의 십선을 닦아서 사람 가운데
고락(苦樂)을 받는 경계가 사람 법계입니다.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실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뭐라해도 역시 과거 전생에 오계나 십선을 닦았기에 사람으로
이렇게 태어나 있는 것입니다.
6. 천 법 계 (天 法 界)
상품(上品)의 십선(十善)을 수(修)하고 아울러 선정(禪定)을 수(修)
하여 천계(天界)에 생(生)하고 정묘(靜妙)의 락(樂)을 수(受)하는
경계(境界). 그 다음은 천법계(天法界)라, 이것은 하늘 나라 즉,
천상계를 말하는 셈이지요.
상품(上品)의 십선 을 닦고, 사람보다도 더 정도가 높게 지킨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고요한 데를 골라서 마음을 오로지 한 경계에
머물게 하는 정신통일의 참선으로 선정(禪定)을 많이 닦아 천계
(天界)에 나서 정묘(靜妙)한, 고요하고 묘한 안락(安樂)을 얻는
경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러면 천상이 사람보다 훨씬 좋겠구나' 이렇게
생각도 됩니다만 물론, 고요하고 묘한 안락을 받으니까 좋겠습니다만,
천상은 고요하고 안락 스러우니까 거기에 집착하고 안주하여
거기에서 벗어날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고통도 있고 안락도 있으니까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성불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계는 안락스러워서
거기에 머물려고 하지 나올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상사람들은 좀처럼 성불을 못하는 것입니다. 해탈(解脫)은
못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해탈한다는 견지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상은 우리 사람만도 못 한 것입니다. 사람은 그와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비록 고락(苦樂)으로, 고도 있고 락도 있고 또는 자재롭게 신통도
못한다 할지라도 역시, 그런 고통 때문에 고통이 역연(逆緣)이라,
그것이 나쁜 연이지만 거기에 거슬러서 벗어 날려고 애쓰는 그 마음
때문에 오히려 해탈(解脫) 하려는 인연이 되고 결국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더러 사업에 실패하는 것을 슬퍼도 하고 여러
가지로 좌절도 합니다만 실은, 그런 좌절을 당하고 고생하는 그것이
우리한테는 어느 면으로 봐서는 참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도인들은 누가 고생한다고 그러면 그 사람 말 따라서
'참,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은 거시적(巨視的)으로 그사람 해탈을
생각해서는 고생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고생이 기연(機緣)이되어서
무상(無相)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악 같은 것도 명곡을 들어 보십시요. 명곡에는 어떤 것이나
애조가 띠어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나 무상을 음률적으로 나타내지
않은 명곡은 없습니다. 그런것을 본다 하더라도 무상을 느끼는 것이
인간에게 굉장히 귀중한 것입니다.
무상을 느끼므로서 별것도 아닌 현실의 안락을 떠나 영생의 행복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는 위에 열거한 육도윤회를 초월한 무한한
광명과 생명의 정토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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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영혼은 있다 (성철스님)
1. 불교의 제8식
인간이 살아 있을 때는 정신이라 하고 죽어서는 영혼이라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논란과 시비를 거듭해 왔지만, 아직도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읍니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나 종교가는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영혼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싸움이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대승이나 소승이나 어느 경론이나 할 것 없이, 팔만대장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생사윤회를 말씀하셨읍니다. 곧 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지은 업에 따라 몸을 바꾸어 가며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윤회는 불교의 핵심이 되는 원리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윤회를 하는 실체를 말할 때 그것을 영혼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제8아뢰야식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나눌 때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을 제6식이라 하고, 그 안의 잠재의식은 제7말라식이라 하고, 무의식 상태의 마음은 제8아뢰야식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호흡이 끊어지고 혈맥이 끊어지고 목숨이 끊어져버리면 의식은 완전히 없어지고 오로지 제8아뢰야식만이 남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몰식(無沒識) 곧 죽지 않는 식, 없어지지 않는 식이라고 합니다.
또 장식(藏識)이라고도 爛求? 과거, 현재, 할 것 없이 모든 기억을 마치 곳간에 물건을 간수해 놓듯 전부 기억해 두고 있다가, 어떤 기회만 되면, 녹음기에서 녹음이 재생되듯이 기억이 전부 되살아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말할 때에는 무몰식이라 하고,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뜻에서 말할 때에는 장식이라 합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미래겁이 다하도록 윤회를 하는 동시에 무엇이든 한번 스쳐간 것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래의 불교학자들은 제8아뢰야식의 존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알아봅시다. 대승불교에 대해 이론을 가장 많이 발달시킨 일본에서도 가장 권위있는 사람이 우정백수인데, 그는 아뢰야식은 도저히 종잡을 수 없으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읍니다. 그리하여 영혼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윤회를 설명할 수 있겠읍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읍니다.
"윤회는 부처님께서 교화를 위해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지 실제로 윤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윤회가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면 사람은 두려워서라도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착하게 하려고 힘쓸 것이므로, 교육적인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상당히 그렇듯해 보이는 논리이지만, 그런 주장도 과학의 발달 앞에서는 꺽일 수밖에 없읍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이 물질적인 데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분야에서도 크게 발전을 이룸에 따라 영혼이 있다는 것이, 윤회가 있다는 것이, 또한 인과가 확실하다는 것이 점차로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렇다면 해탈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서야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데에서, 또 신앙 생활을 하는 데에서나 불교를 포교하는 데에서, 또는 수행하여 성불하는 데에서 꼭 갖추어야 할 흔들림 없는 근본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믿어야만 바른 행동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 근사(近死)경험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세계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그 궁금증과 신비가 차차 벗겨지고 있읍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지금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읍니다.
미국에 레이몬드 무디라는 철학자가 있읍니다. 그가 대학에서 철학을 배울 때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교수는 무디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읍니다.
"나는 수년 전에 두 번이나 죽었다가 깨어난 경험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의사가 와서 사망을 확인하고 장사를 치를 준비를 하는 도중에 깨어난 것인데, 깨어나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죽어 있는 동안이 깜깜한 것이 아니었다. 내 영혼이 죽어 있는 육체를 빠져나와 그것을 바라보고, 또 여러가지 활동을 한 것을 기억한다."
그 정신과 교수는 죽었다가 깨어나는 순간까지의 자기가 경험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는데,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너무나 허황딘 꿈 이야기나 거짓말 같아서 믿을 수가 없었읍니다.
무디는 그때에 그 이야기를 들어며 그저 웃고 말았지만, 뒤에 자신이 철학교수가 되어 강의를 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서부터 생각이 바뀌게 되었읍니다. 그 학생은 무디 교수에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이므로 영생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며칠전에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가 깨어났다고 하면서 그 때 할머니가 경험한 것을 들은 대로 이야기해 주었읍니다. 그 이야기는 무디 교수가 학생 시절에 앞의 정신과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똑같았읍니다. 무디 교수는 이러한 경험담이 단순히 웃어넘기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기로 결심했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롭게 의학을 공부하여 환자들을 상대로 이런 경험을 수집하기 시작했읍니다. 그로부터 몇해 뒤에 무디 교수는 150명의 사례를 수집하여 그것을 1975년에 책으로 출판할 수 있었읍니다. 그리고 그 사례를 보면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음과 같은 공통되는 경험을 겪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처음 죽었을 때는 캄캄한 어떤 터널 같은 곳을 빠져나간다. 그곳을 빠져 나오면 자신의 신체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이상하다. 내가 왜 이렇게 누워 있을까? 내가 죽었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아주 밝은 광명이 나타난다. 그 광명 속에서 자기가 지나간 한평생에 걸쳐 겪은 모든 일들이 잠깐 동안에 나타난다. 그 悶?자기가 아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서로 위로도 하고 소식도 묻고 이야기도 나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혼은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의사들이 자기를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라든지 가족들이 장사 지낼 의논을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다른 방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모두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눈 앞에 보이는 그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을 할 수가 없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좀처럼 믿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만났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가 없지만, 죽은 뒤에 그의 가족들이 한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들었으니 유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의사에 의해 죽었다고 판정되면 그 육신은 한갖 물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읍니다. 더구나 시신은 머리 끝까지 흰 천으로 덮어 놓았으니, 설령 거짓으로 죽었다고 하여도, 볼 수는 없읍니다.
그런데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은 자기가 죽어 있는 동안에 가족들이 한 이야기와 그들이 어디에 있었으며, 무슨 행동을 했는지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실지와 조금도 다름이 없읍니다. 누구든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사람이 죽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는 죽었어도 무엇인가 활동하는 활동체가 있어서 보고 듣는다는 것이 확인되었읍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깨어났다고 해서 누구나 이런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캄캄하여 아무 기억이 없다고도 합니다.
무디 교수는 이런 사례를 가진 사람들의 사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었읍니다. 그 책이 처음 출판되자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랐읍니다. 그래서 각 나라 말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 또는 [죽음의 세계] 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읍니다.
레이몬드 무디 교수의 연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그동안 영혼이나 죽음의 세계에 대해 연구를 해 오면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결과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여 여러 사람들이 새롭게 조사에 착수하였읍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근사경험이라고 하고, 또 영어로는 약자를 써서 NDA(Near Death Experience)라고 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근사연구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연구 결과 근사경험에 관한 사례는 수천 건이 수집되었는데, 그런 학자들 중에 가장 이름난 사람이 미국의 시카고대학에 있는 퀴불러 로스 교수입니다. 이 여자 교수는 무디 교수의 발표 이전에 이미 많은 자료를 수집해 놓고 있었읍니다. 무디 교수가 자신이 출판하려는 원고를 가지고 와서 그 여자에게 출판을 상의한 적도 있었읍니다.
퀴블러 로스 여사는 그 원고가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같고 또 결론도 동일하여 무디 교수의 책에 서문만 써 주고 자신의 책은 출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디 교수는 1977넌 두번째 책인 [사후생에 대한 회고]를 출판하여 좀더 자세하게 근사경험에 대해 발표했읍니다. 여기에서 그는 죽음 뒤에도 삶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읍니다.
이런 연구에 대해서 영혼이나 정신을 유물론적으로 보는 소련의 학자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서 뇌세포는 맨 나중에 소멸하므로 아직 죽지 않은 뇌세포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환상일 뿐이지 죽은 뒤에 실제로 어떤 활동체가 있어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게 공감을 주기는 했지만 여기에는 시간의 문제가 있읍니다. 소생기억이 일, 이 분 동안의 사망에 불과한 것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한두 시간이나, 길면 이틀이나 사흘씩 죽었다가 깨어나는 경우에는 그런 주장이 성립될 수 없읍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죽은 뒤에도 뇌세포만이 몇시간 동안 또는 며칠 동안 살아 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근사경험이라고 하는 소생기억에 대한 반대 의견들은 현재까지로서는 이렇다 할 만한 뚜렷한 자료나 근거를 뒷받침하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사후에 영혼이 있다는 주장에 관한 오래되고 유명한 기록이 플라톤의 [공화국]에 있읍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군인이 전사하였읍니다. 여러 날이 지난 뒤에 그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치르게 되었읍니다. 그런데 시체를 화장하려고 장작더미에 올려놓는 바로 그 순간에 그 군인이 되살아 났읍니다. 그는 깨어난 뒤에 자신이 죽어 있는 동안에 활동한 여러가지를 이야기하였읍니다.
이런 오랜 이야기는 무디 교수의 조사 사례와 일맥살통하는 점이 많음을 간과할 수는 없읍니다.
3. 영혼사진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에 의해 영혼이 있다는 것은 확인되었는데 영혼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원혼(怨魂)이라고 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단순히 전설로만 이해하려 들지만, 사실, 우주과학 시대라는 요즘에도 그런 일은 더러 일어나고 있읍니다.
다음의 사건은 1848년 3월 31일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미국의 뉴욕 주에 하인즈 빌이라는 촌락이 있었읍니다. 하루는 이 마을에 독일계 사람으로 폭스라는 이가 이사를 와서 살게 되었읍니다.
폭스가 이사온 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읍니다. 그 때 폭스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가족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냥 들어오라고 소리쳤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다시 가만히 있노라니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가보면 아무도 없고 해서 나중에는 큰 소리를 쳤읍니다.
그러자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렸읍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기는 사람이 아니고 영혼이라고 말하면서, 이름은 로스이고 이 집에서 죽었는데 자기의 시신이 지하실에 묻혀 있으니 그것을 파내서 장례를 치루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읍니다. 폭스의 가족들은 놀라서 경찰을 불러 지하실을 파 보니 과연 시신이 나왔읍니다.
그런데 경찰이 생각해 보니 폭스가 이사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하실에 시신이 묻혀 있응 곳을 정확히 아는 것을 수상히 여겨 폭스를 연행하였읍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또 여혼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를 장례까지 치러 주었는데 이렇게 고생을 시켜서 미안하다고 하며 자기를 죽인 사람은 옆집에 살던 죠지 백이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읍니다. 경찰이 다시 그 죠지라는 사람을 잡아 조사를 해 본 결과 그가 살인범이라는 것이 밝혀졌읍니다.
이 이야기가 전국에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영혼이 과연 존재하고 인간이 영혼과 접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1851년에는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에서 심령학회가 조직되었으며, 그로부터 1세기도 더 지난 1972년 12월에는 미국 로체스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하인즈 빌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울 것을 결이하여 뉴욕시 73번가에 8미터 높이로 기념비를 세운 한편,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활발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읍니다.
그 밖에도 영혼이 나타났다는 일화는 많이 전해지고 있읍니다. 다음 이야기는 신문에도 몇번 보도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트루민 대통령 재임 시에 네덜란드의 유리아나 여왕이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읍니다. 여왕은 백악관에서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자기의 시녀인 줄 알고 문을 열어 주었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 앞에는 링컨 대통령이 서 있는 것이었읍니다.
링컨 대통령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터라 한눈에 그 얼굴을 알아볼 수가 있었읍니다. 여왕은 그렇지 않아도 백악관에 영혼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실지로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자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잃고 말았읍니다.
옆방의 시녀들이 비명소리를 듣고 뛰어나와서 여왕을 간호했는데 그 때까지 링컨 대통령의 영혼은 그 자리에 서 있었읍니다. 그래서 시녀들도 영혼을 보게 되었읍니다. 만일에 여왕이 혼자서 보았다면 롼상이나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녀까지 함께 보았으니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수밖에 없읍니다.
다음 날 아침 트루먼 대통령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역시 링컨 대통령의 영혼을 여러번 보았다고 하는 것이었읍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에는 그 부인이 링컨 대통령의 영혼을 보았다고 증언한 적이 있읍니다.
이 사건은 거짓이라고 하여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증거가 뚜렸합니다. 그래서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영혼사진을 찍어보자고 해서 사진을 찍어 신문에 보도한 적도 있읍니다. 그 사진은 나도 본 적이 있는데 링컨 대통령이 살아 있던 때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았읍니다.
이렇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 갈수록 뚜렷하게 증명되고 있읍니다. 영혼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 특징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간추릴 수 있읍니다.
첫째로, 영혼은 모양을 드러냅니다. 그것을 여러 사람이 봅니다.
둘째로, 영혼은 말을 합니다. 이 말하는 것도 여러 사람이 듣습니다.
세째로, 영혼은 사람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눈에도 보입니다. 한 예로 여러 사람이 함께 사냥을 나갔을 때에 영혼이 나타나면 말이나 개들도 겁이 나서 숨는다고 합니다.
네째로, 영혼이 물체를 이동시킵니다. 잠가 놓은 문을 연다든지 방안의 물건을 이리저리 옮겨 놓기도 합니다.
다섯째로, 영혼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합니다. 영혼을 보았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지만 그래도 그것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사진으로 담는 데에 성공했다면 믿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영혼사진이 최초로 성공한 것은 지금부터 일백여 년 전인 1861년 미국 뉴욕시에 살던 멈리 씨에 의해서입니다. 멈리 씨가 하루는 교외에 가서 풍경사진을 찍었읍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현상을 해 보니 나무 밑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가 사진을 찍을 때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이상하게 생각했읍니다.
그 뒤에 멈러 씨는 다시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어면서 주위를 두루 살피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였읍니다. 그러나 현상을 해 보면 역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 차례 반복을 해 보았으나 늘 결과는 마찬가지였읍니다.
멈러 씨는 너무 이상해서 그 사진을 들고 인근 주민에게 물어 보았읍니다. 그랬더니 사진에 나타난 사람은 5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었읍니다. 멈러 씨는 그래서 이번에는 주민들과 함께 다시 그 자리에 가서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었읍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멈러 씨의 사진은 영혼사진이라고 소문이 났읍니다. 그때부터 그는 영혼사진사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읍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읍니다.
하루는 친달 부인이라는 여자가 그에게 와서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읍니다. 촬영을 마치고 현상을 해 보니 부인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 있는 링컨 대통령의 모습이 나타났읍니다. 그래서 그 부인에게 물어 보았더니 자신의 링컨 대통령의 미망인이라는 것입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미리 링컨 대통령의 미망인이라고 하면 링컨 대통령의 사진을 구해다가 거짓된 영혼사진을 찍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 부인은 신분을 숨기고 얼굴까지 가리고 사진을 찍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멈러 씨는 더욱 유명해지고 큰 돈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멈러 씨가 이렇게 유명해지자 정부 당국에서는 조사를 하기 시작했읍니다. 자기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대법원에까지 올라가게 되어 마침내는 과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언론인까지 동원시켜 조사하게 되었읍니다.
조사단은 멈러 씨와 함께 그가 처음으로 영혼사진을 찍었던 곳으로 가서 다시 사진을 찍게 한 뒤에, 모두가 엄중하게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현상을 해 보았읍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혼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대법원도 그의 사기혐의에 관해 결국 무죄판결을 내렸읍니다. 이것이 멈러 씨의 영혼사진 사건인데 1869년 4월 22일자 뉴욕타임즈에 상세히 보도된 적이 있읍니다.
이 사진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영혼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읍니다. 그 중에서는 직접 사진을 찍는데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가 영국의 허드슨 입니다.
그 당시에 윌레스라는 유명한 박물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다아윈과 같이 진화론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윌레스는 허드슨이 영혼사진 이야기를 듣고 허드슨에게서 자기도 사진을 찍어 보았읍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사진에 죽은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찍혀 나오는 것이었읍니다.
윌레스는 그 사진을 보고 영혼사진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학계에 그 사진을 첨부해서 보고서까지 제출했다고 합니다. 윌레스와 같은 대과학자가 영혼사진에 대해서 거짓으로 증언할 리가 없으므로, 이것은 믿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영혼사진을 찍어면 거기에 나오는 영혼이 어느 때,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영국의 호우프라는 사람은 신분이 확인된 영혼사진을 무려 삼천 장이나 촬영하는 데 성공했읍니다. 이쯤 되면 그 누구도 영혼사진을 무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영국이 유명한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크룩스도 호우프에게 가서 사진을 찍어 보았읍니다. 그랬더니 사진에 자신의 죽은 부인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었읍니다. 이때부터 크룩스 씨도 영혼사진이 결코 거짓이 아닌 사실임을 증언하게 되었읍니다.
이렇듯이 영혼사진은 많은 사람이 직접 찍고 또 이름난 과학자나 저명인사들이 그것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 스스로 증언까지 하게 됨으로써,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이 되었읍니다. 그래도 믿을 수 없다 하여 모두 거짓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일이 이 정도가 되면 영혼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영혼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와 관련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곧, 영혼이란 정신체인데, 죽은 사람의 정신체인 영혼이 카메라에 비친다고 하면 산 사람의 정신 작용도 카메라에 나타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미국의 세리우스라는 사람이 이에 관하여 열두 해에 걸쳐 연구하여 마침내 성공하였읍니다. 카메라으 준비해 두고 그 앞에서 자동차를 생각하고 있으면 자동차가 사진에 나타나고, 빌딩을 생각하면 빌딩이 찍힙니다.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대로 모두 사진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생각사진이라는 것으로, 세리우스는 이런 사진을 여든 장쯤 찍었읍니다. 그때에 아이젠버드라는 교수가 이 사람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3년 동안 연구하였읍니다. 속임수가 있는가 하여,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또 이렇게 실험해 보고 저렇게 실험해 보았으나, 결국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읍니다. 과연 생각하는 대로 사진이 나타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하여 아이젠버드 교수는 [세리우스의 세계]라느 책을 출판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읍니다.
이제, 생각사진까지 입증되고 보니,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사진으로 찍을 수가 있느냐는 의문은 더 이상 나올 수가 없게 되었읍니다. 따라서 영혼이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영혼의 물질화
우리나라에도 옛날 이야기에 보면 영혼이 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옵니다. 이를테면 어떤 선비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되어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읍니다. 이렇게 함께 살던 어느 날, 그 아가씨가 친정에 간다고 해서 따라가 보면 집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해 들어가서 물어보면 그 아가씨는 이미 죽은 사람인데 그 날이 바로 그 여자의 제삿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산 사람이 영혼과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와 같은 사례가 옛날 이야기로만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영국에서 실제로 일어났읍니다. 영혼을 기숙적인 방법으로 산 사람처럼 나타나게 해서 같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영혼의 물질화'라고 하는데, 앞에서 영혼사진을 입증했던 크룩스라는 학자가 바로 이 작업에 성공했읍니다.
그는 케디 킹이라는 여자의 영혼을 물질화시켜 여섯 달 동안 함께 생활하였읍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 따위가 보통 사람과 똑같았읍니다.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쳐 주고, 이야기도 하고, 손님이 오면 접대도 하는 등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읍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먹지 않는다는 것과, 몸무게를 달아보아도 무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 여자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싸가지고 자기 집에 가서 펴 보았더니 머리카락이 온데 간데 없다고 합니다. 또 바로 바로 옆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과학자인 크룩스가 영혼을 물질화시켜서 여섯 달 동안이나 함께 지냈다고 하자 그 소문이 영국 나라안에 모두 퍼졌읍니다. 그리하여 그때의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이 그 케디 킹이라는 영혼과 함께 사진을 찍었읍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수천 장이나 되는데 내게도 여러 장이 있읍니다.
지금까지 근사경험이니 영혼사진이니 하는 것들에 대하여 소개했읍니다. 그것은 단순한 흥미거리로서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일체만물이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들입니다. 물질적인 현상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불생불멸한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불생불멸이라면 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일이 거듭되어 왔는데 그 많은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지, 아니면 따로 영혼만이 사는 나라가 있는지가 궁금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윤회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때는 학자들이 윤회설은 인간들에게 권선징악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읍니다. 그런데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불생불멸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자 이러한 주장은 사라지게 되었읍니다. 실지로 전생과 윤회가 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과학적인 통계까지 나와 있읍니다.
불교에서는 육도윤회를 이야기합니다. 6도란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이 여섯 세계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해 6도를 윤회합니다. 인간이 되기도 하고 개나 소 같은 축생이 되기도 하니, 이 윤회는 바로 자신이 행한 바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앞날의 일이 전생에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이나 숙명론과는 다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에게 나쁜 일이 닥치면 자기의 업이나 팔자 탓으로 돌려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자기는 아무리 잘해도 업이 두텁고 팔자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비록 현재에 받는 과보는 지난날의 업에 의해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선업을 닦는 것은 지금의 자기 자신의 의지입니다. 물 속에 있는 무거운 돌을 입으로만 떠오르라고 외친다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돌을 떠오르게 하려면 스스로 힘을 쓰든지 기계의 힘을 빌든지 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최선의 일입니다.
이러한 윤회사상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부처님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것이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믿는 것입니다. 결국 이 윤회사상에 의하면 영혼은 따로 거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생을 거듭하면서 몸을 바꾸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5. 사자(死者)의 서(書)
티벳 지바의 경전 중에 바르도 토예돌 곧 [사자의 서]라는 책이 있읍니다. 이것은 죽는 사람과 죽음에 대한 안내서로서, 죽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영혼은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치카이 바르도)은 죽음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고, 둘째 부분(초이니드 바르도)은 죽음 직후에 잇달아 일어나는 꿈과 같은 상태를 설명하며, 세째 부분(시드파 바르도)은 출생 충동과 출생 이전의 과저에 관해 설명하고 있읍니다.
이 책에 따르면 죽음에서 출생에 이르기까지는 보통 49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 사자(死者)의 영혼이 나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부처님의 말씀인 대승경전을 읽어 주거나, 또는 [사자의 서]에 나오는 글을 읽어 주면 좋은 곳으로 왕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사람이 죽으면 49제를 지내는 것은 이러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의 서]에 나오는 죽음의 순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근래의 연구인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의 증언, 곧, 근사경험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사자의 서]에 보면 숨이 끊어질 때에 밝은 광며을 경험할 것이라 하면서 그것은 마음의 본래상태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사자의 영혼은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이 그들을 부르는 소리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므로 마침내 사자는 실망하고서 사라져간다고 합니다.
이 [사자의 서]는 티벳의 승려들 사이에서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다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00년대의 일입니다. 어느 누가 이 책을 미리 보고 마치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꾸며서 말했다고는 볼 수 없읍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예나 지금이나 죽음의 세계에 대한 경험은 똑같다는 것이 증명되는 셈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영혼을 중음신(中陰神) 곧 바르도라고 합니다. 이 중음신은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두려워하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 이 때 선업이 강하면 곧 안정을 되찾고 바로 다음 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거나 가족 친지의 울음소리가 너무 강하게 들리면, 그만 세사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 올바른 길을 찾아가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좋은 곳으로 왕생하라고 염불이나 경을 독송해 주는 것입니다.
이 중음신들은 자기의 업력에 따라 다음 생을 받아 다시 태어난는데 7일 만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고, 49일을 채우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영혼이 있다는 것과 그 영혼이 다음 생을 받아 다시 태어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이것이 종교적인 상상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어 왔읍니다. 윤회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자기의 전생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에 대하여 살펴보겠읍니다.
2장 윤회는 있다 (성철스님)
1. 전생기억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는 대개 두서너살 되는 아이들에게 나타나는데, 이들은 말을 배우게 되면서 전생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곧 "나는 전새에 어느 곳에 살던 누누인데 이러이러한 생활을 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사 해 보면 모두 사실과 맞곤 합니다. 이것이 전생기억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읍니다.
지금부터 25년 전 터어키 남부의 아나다라는 마을에 이스마일이라는 어린 아이가 있었읍니다. 그 집은 정육점을 하는데 이스마일이 태어난 지 일년 반쯤 된던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집에 갈 테야. 이 집에는 그만 살겠어요"
"이스마일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가 네 집이지 또 다른 집이 어디 있어?"
"아니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은 저 건너 동네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어. 내 이름도 이스마일이 아니고 아비스스루무스야. 아비스스루무스라고 부르세요. 그러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대답도 안 할 테야."
이러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면서 또 말했읍니다.
"난는 저 건너 동네 과수원집 주인인데 쉰살에 죽었어. 처음에 결혼한 여자는 아이를 못 나아서 이혼하고 새로 장가를 갔어. 그러고는 아이 넷을 낳고 잘 살았지. 그러다가 과수원에서 일하는 인부들과 싸음을 벌여서 머리를 맞아 죽었어. 마구간에서 그랬지. 그때 비명소리를 듣고 부인하고 애들 둘이 뛰어나오다가 그들도 맞아 죽었어. 한꺼번에 네 사람이 죽었지. 그 뒤에 내가 이 집에 와서 태어난 거야. 아이들 둘이 지금도 그 집에 있을 텐데 그 애들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그리고는 자꾸 전생의 자기 집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리를 못하게 하면 울고, 그러다가 또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크고 좋은 수박을 사왔는데, 이 어린 아이가 가더니 가장 큰 조각을 쥐고는 아무도 못 먹게 하는 것입니다.
"내 딸 구루사리에게 갖다줄 테야! 그 애는 수박을 좋아하거든."
그가 말하는 전새에 살던 집은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지방 사람이 더러 이 동네에 오는 경우가 있었읍니다. 한번은 왜 아이스크림 장수를 보더니 그 어린 아이는 뛰어나 나가서 말했읍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알 턱이 있겠읍니까.
"나를 몰라? 내가 아비스스루무스야. 네가 전에는 우리 과수원의 과일도 갖다 팔고 채소도 갖다 팔았는데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지? 내가 또 네 할례도 해주지 않았더냐?"
놀랍게도 그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과 일치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이 소문이 자꾸 자꾸 퍼져나가게 되었읍니다. 터어키는 회교국이기 때문에 회교 교리에 따라 윤회를 부인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환생을 주장하면 결국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비스스루스가 전생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자꾸 아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막을 도리가 없었읍니다.
아이가 세살이 되던 해였읍니다. 확인도 해볼 겸 아이를 그가 말하는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읍니다. 가는 도중에 사람이 다른 길로 가려면 아이는 "아니야, 이쪽 길로 가야 해" 하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장서서 과수원으로 조금도 서슴치 않고 찾아 들어가는 것이었읍니다.
과수원에는 마침 이혼을한 전생의 마누라가 앉아 있다가 왠 어린 아이와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눈이 동그랗게 되어 쳐다보았읍니다. 어린 아이는 전생 마누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더니 다리를 안으며 말했읍니다.
"너 고생한다."
어린 아이가 중년 부인을 보고 "너 고생한다"고 하니, 부인은 더욱 당황했읍니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의 전 남편인 아비스스루무스이다. 저 건너 동네에서 다시 태어나 지금 이렇게 찾아왔어."
또 아이들을 보더니, "사귀, 구루사리, 참 보고 싶었다"하면서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하는 것이었읍니다. 또 사람들을 자기가 맞아 죽은 마굿간으로 데리고 갔읍니다. 전에는 좋은 갈색 말이 한 필 있었는데 그 말이 안 보이니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서, 팔았다고 하니 무척 아까와했읍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일하던 여러 인부들을 보지도 않고서 누구, 누구 하며 한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느 동네에 산다고 말하는데 그 말들이 모두 맞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니 어떻게 전생의 과수원 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읍니까?
이것이 결국 세계적인 화제거리가 되어 이스마일이 여섯 살이 되던 1962년에 학자들이 전문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읍니다. 이 때 일본에서도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하였읍니다.
그 조사 보고서에 보면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전생기억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읍니다. 그 과수원 주인이 생전에 돈을 빌려준 것이 있었는데 돈을 빌려간 사람은 아비스스루무스가 죽어버리자 그 돈을 갚지 않았읍니다. 이스마일은 그 돈을 빌려간 사람을 불렀읍니다.
"네가 어느 날 얼마를 빌려가지 않았느냐. 내가 죽었어도 내 가족들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돈을 떼어먹고 여태 갚지 않았어?"
돈 빌려간 날자도 틀림없고 액수도 틀림없었읍니다. 안 갚을 수 있겠읍니까! 이리하여 전생 빚을 받아내었읍니다. 이 사실은 죽은 아비스스루무스와 돈 빌려 쓴 사람,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읍니다. 그런 것을 어린 아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것이며 또 누가 말하여 주었겠읍니까? 그리하여 조사단은 이스마일이 바로 아비스스루무스의 환생이라는 사실에 대해 확정을 짓는 보고서를 내었읍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례 중에서 또 유명한 것으로 인도의 산티 데비의 이야기가 있읍니다.
산티 데비는 1926년 인도의 델리에서 태어났는데 세살 때부터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읍니다. 자기는 전생에 무트라 지방에 사는 케다르라는 사람의 아내였는데 자기를 그곳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읍니다.
산티 데비는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러가지 전생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산티 데비의 부모는 처음에는 아이가 정신이 좀 이상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읍니다. 그러나 전생 이야기를 너무나 생생하게 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무슨 곡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읍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이가 말하는 무트라 지바에 가서 케다르라는 사람을 찾아 보았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아이가 말한 대로의 생활을 하고 있었읍니다. 산티 데비의 부모는 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자기 집에 일곱살 되는 계집아이가 있는데 자꾸 전생이야기를 하면서 당신의 아내였다고 하니 그것이 정말인지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읍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몇시에 자기 집으로 와서 확인해 보자고 했읍니다.
산티 데비의 부모는 이렇게 비밀리에 약속을 하고 돌아왔읍니다. 약속을 한 그날에 케다르 씨는 산티 데비의 집을 방문하였읍니다. 그가 문에 들어서자 이를 본 산티데비는 깜짝 놀라며 반색을 하고 뛰어나가 그를 맞이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면서 "당신을 항상 생각하며 당신에게 가려고 해도 이 집에서 보내주지 않아서 못 갔다"고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는 전생의 남편인 케다르를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이었읍니다.
산티데비는 옆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계속하던 중에 자기가 죽으면 재혼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왜 장가를 갔는냐고 다그치기도 했읍니다. 또 자기 어머니에게 케다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면서 그것을 준비해 달라고도 했읍니다. 이렇게까지 자신에 대해 상세히 말을 하자 케다르 씨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읍니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 등을 볼 때 전생의 자기 아내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읍니다.
산티데비의 전생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인도 정부에서는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읍니다. 조사단은 산티데비를 데리고 무트라 마을에 가서 조사를 시작했읍니다. 우선 집을 찾도록 했읍니다. 산티 데비는 너무나 오랫동안 산 곳이라 눈을 감고도 척척 찾는 것이었읍니다.
얼마쯤 가면 느티나무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길이 좁아지니 거기에 차를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읍니다. 이윽고 산티 데비는 앞장서서 옛날에 자기가 살던 집으로 들어가서 머리가 허연 노인에게 "아버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노인은 전새의 시아버님이었읍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불러서한 사람씩 이름을 말하는데 모두 사실과 다름이 없었읍니다.
산티 데비는 살림을 돌아보고 나서 살림이 궁색해졌다고 하며 지하실에 묻어 둔 금을 파서 살림에 보태 쓰라고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데리고 지하실로 가서 가리킨 곳을 파 보았으나 빈 퀘짝만 나오고 금은 나오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어보니 남편이 그 금을 파 내어 썼다는 것이었읍니다.
결국 그 이야기로 전생에 산티데비가 지하실에 금을 묻어둔 것은 사실임이 판명되었읍니다. 그래도 조사단은 계속해서 의심을 품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읍니다.
델리와 무트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말이 서로 달랐읍니다. 산티 데비는 델리에서만 살았고, 아직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무트라 지바의 말을 알 리가 없었읍니다. 그런데 무트라 지바의 말을 하는 것이었읍니다.
평범한 어린아이라면 무트라 지방이 있다는 것도 모를 텐데 억양도 말씨도 틀림없는 그 지방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었읍니다. 이 점에서 조사단은 더 이상 의심할 수가 없게 되었읍니다. 이러한 사실 외에도 여러가지를 검증해 본 결과 조사단은 산티 데비가 전생의 케다르 씨의 아내가 환생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읍니다. 그래서 인도 정부에 다음과 같은 공식 성명서를 냈읍니다.
"산타 데비의 환생 문제는, 더러 반대하는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전국적으로 권위있는 사람들이 직접 상세히 조사해 본 결과 이것이 조금도 거짓말이 아닌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전 세계에 알려져 전생기억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읍니다. 그 후 산타 데비는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에서 공무원으로 살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이가 많아 생존 여부는 확실하지 않읍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이스마일이나 산타 데비의 예와 같은 전생기억의 사례는 학계에 보고된 것만 해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에 한두 가지만 더 이야기 하겠읍니다.
몇 해 전 스리랑카에서의 일입니다. 태어난 지 3년 7개월 된 쌍둥이가 있는데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단이 그 아이를 전생에 살았다는 곳으로 데리고 갔읍니다. 그리고는 근처의 주민들을 수 백명 모으고 그 가운데에 그 아이가 말하는 전생의 무모 형제를 섞어 두었읍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더러 전생의 부모와 형제를 찾아보라고 했읍니다. 그러자 아이는 "이 사람은 아버지, 이 사람은 어머니, 이 사람은 누나, 이 사람은 형님..." 하면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찾아내는 것이었읍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의 전생 기억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읍니까?
또 세살 된 어느 아이도 전생 이야기를 하는데 그는 다이빙 선수였다고 자랑했읍니다. 그래서 물었읍니다.
"지금도 다이빙을 할 수 있겠니?"
"그럼요. 할 수 있고 말고요. 전에 많이 했는데요."
이리하여 세살 된 어린 아이를 높은 다이빙대 위에 올려놓게 되었읍니다. 그러자 어린 아이는 다이빙을 하는 것이었읍니다.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조금도 서툴지 않게 서슴없이 다이빙을 했읍니다.
전생기억이란 이런 식입니다. 또 흔히 천재니, 신동이니, 생이지지(牲而知之)니 하는 아이들이 있읍니다. 태어난 뒤로 한번도 글을 배운 적이 없는데 글자를 다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을 보아도 모두 읽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이지지라고 합니다. 곧 나면서부터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생이지지는 바로 전생기억에 의한 것입니다. 전생에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금생에로 그대로 가지고 넘어온 것입니다. 또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친근감이 가는 경우는 전생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생기억에 대해 누구보다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미국의 버지니아대학의 이안 스티븐슨 교수입니다. 그는 세계 각국에 연락기구를 조직하여 전생기억을 가진 아이나 어른이 있으면 학자들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여 확인했읍니다.
이리하여 그는 수년 동안에 600여 명의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인 사례를 뽑아서 책으로 출판하였읍니다. 바로[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라는 책으로, 뒤의 부록 1에서 소개됩니다. 전생기억에 대한 보고서로서는 가장 확신이 있고 어떤 사람이든 반대의 의견을 제시하기 어려운 유명한 책입니다.
그리고 1973년까지 약 2,000건의 전생기억을 가진 사례를 조사하여 보고하였읍니다. 자료가 이만큼이나 되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사람이 죽어면 그만이 아니고 윤회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읍니다.
이안 스티븐슨은 정신과 교수로서 전통적인 의학에 대한 연구 경력이 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고 있읍니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전통적인 이론은 인간의 성격을 유전과 환경적인 영향이라고 하지만, 이들 복합적인 요인만으로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규명해 보고자 앴다."
그는 윤회를 한다고 정식적으로 공포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보았읍니다. 왜냐하면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는 어른들보다 자신의 기억을 해석하려고 들지 않는 어린이의 사례 조사에서 90퍼센트 이상의 정확성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안 스티븐슨교수는 전생기억에 나타난 사례들에서 몇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읍니다.
첫째는 전생기억과 연령과의 관계입니다. 대개는 태어난 지 두서너살이 되면 전생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좀더 나이가 들어서나 아니면 말을 시작하자마자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읍니다. 대체로 말을 잘 할 수 없는 시기의 전생기억이 좀더 정확한 수가 많습니다.
어린 아이가 전새에 대해 말하는 첫 말은 대개 자신이 알았던 사람의 이름이나 지명입니다. 그러다가 다섯살에서 여덟살 사이쯤 되면 어린이들은 전생기억을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때가 되면 가정의 제한된 테두리를 벗어나 이웃과 학교에서 여러가지를 경험하고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점점 사라지는 전생기억 위에 새로운 경험이 축적되면서 전생기억은 아주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거나 위엄과 지혜를 갖는 등 일반적인 아이와는 그 행동이 다릅니다. 이러한 행동은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본인에게는 당연한 행동이며 그것은 전생의 자기 모습과 일치합니다.
세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자기 육체의 생소함을 말하고 합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이 작은 육체에 갇혀서 답답하다고 불평을 늘어놓곤 합니다.
네째로, 전생을 기어하는 아이들이 가장 생생하고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전생에서 죽음과 관련된 것이며, 바로 죽음의 순간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특히 죽음에 대한 전생기억 중에서 교통사고나 살인, 전쟁과 같이 격렬하게 죽은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런 죽음을 당한 사람만이 환생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경우일수록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격렬한 죽음의 경우, 전생기억을 하는 아이는 대개 죽음을 가져다 준 물건이나 환경에 대해 강한 공포시음 나타냅니다. 한 보기로서 어떤 어린이는 전생에 다리 위에서 버스를 지나가게 하느라고 비켜 서다가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고 기억했읍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다리, 버스, 물에 대해서 상당한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읍니다. 그 아이를 목욕시키려면 네 명의 어른이 강제로 붙잡아야 할 정도로 물에 대한 공포에 떤다고 합니다.
다섯째로, 사람과 환경의 변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처음 가는 집이라면 그 집이 어떻게 변하였고, 거기 사는 사람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보통의 사람은 알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에는, 처음 전생 집을 찾아갈 때, 구조가 어떻게 변경되었다는 둥 가족 주에 누가 안 보인다는 둥 그 집의 변화를 말한다고 합니다.
여섯째로, 환생을 예견한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아이를 출산하기 전에 어느 가정에 태어나기 위해 온다는 것을 꿈에 예고하는 경우가 있읍니다. 이런한 꿈이 동.서양에서 종종 화제가 되곤 합니다.
일곱째로, 임신 중의 비정상적인 식성을 들 수 있읍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에는 임신을 하게 되면 평소에 잘 안 먹던 음식이나 제 철이 아닌 음식에 대해 그 사람은 비상한 식욕을 느낍니다. 그것을 임산부의 변덕이라고 하여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읍니다.
그런데 전생기억을 하는 어린 아이의 경우, 전생에 좋아했던 음식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 음식이 바로 어머니가 임신 중에 먹고 싶어 했던 음식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여덟째로, 배우지 않은 기술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읍니다. 전생기억을 하는 어린이 중에는 배우지도 않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읍니다. 이것은 전생에 가졌던 기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보기를 하나 들자면 벨기에에 로버트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이 소년은 어느 날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5년에 죽은 자기 삼촌의 초상화를 보더니 그것이 자기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세살이 조금 지나서 로버트는 부모와 함께 처음으로 수영장에 갔는데 멋진 동작으로 다이빙을 하여 물속으로 뛰어들었읍니다.
알고 보니 그의 삼촌인 알버트는 훌륭한 수영선수였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수영은 세살 정도의 어린아이도 할 수 있지만 다이빙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영장에 처음 온 아이가 다이빙을 멋지게 해내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 아이갸 전생의 알버트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배우지도 않은 기술이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사례는 외국어를 말하는 경우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생리학자이며 심리학자인 동시에 노벨수상자이기도 한 샤를르 리히는 그러한 현상을 지노글로시Xchoglossy라고 이름을 붙였읍니다.
이안 스티븐슨은 이 지노글로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독백과 같은 것인데, 당사자는 이상한 언어의 조각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잠재된 기억 속에서 언어가 무의식적으로 도출되는 경우인데 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반응적인 경우인데, 이것은 직접 상대방과 그 외국어로써 대화를 할 수 있읍니다. 스티븐슨은 두번째 경우인 반응적인 지노글로시의 사례는 죽음 이후의 인간의 윤회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곧 전새에 그 언어를 배웠거나 사용한 사람이 아니면 그처럼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이 언어를 배우지도 못한 어린아이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 가운데 최초의 지노글로시는 19세기에 있었던 일인데 최면에 의해서 입니다. 1862년 독일의 왕자 갈리첸은 어떤 여인을 대상으로 최면 실험을 하였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인은 18세기의 휼률한 프랑스어로 브리타니에 살았던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읍니다.
갈리첸 왕자는 그녀가 프랑스어를 배웠는지 조사해 보았지만 그녀는 일반 교육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무학(無學)이었고, 다만 자기 지방의 독일어 방언 밖에는 말할 줄 모른다는 것이 판명이 되었읍니다. 따라서 이 여자는 전새에 프랑스에서 살다가 다시 독일에 태어난, 윤회의 시증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아홉째로, 출생 자국을 들 수 있읍니다. 아이가 출생할 때부터 흉터가 있거나 불구가 되는 수가 있읍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선천적 기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원인은 대부분 유전이나 임신 중의 약물 복용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고 있지만, 이것이 전생의 업보에 의해 생길 수도 있읍니다.
윤회를 입증하는 전생기억에 관한 사례는 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읍니다. [삼국지]라는 책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아무도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읍니다. 조조도 못하고 유비도 못하고 손권도 못하였읍니다. 정작 중국이 통일된 것은 세월이 흐른 뒤 진나라 때입니다. 그 때 진나라의 재상이며 군인이고 또 덕인(德人)이었던 양호라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그가 서너살이 되어서, 한번은 유모를 보고 가지고 놀던 금고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읍니다. 유모는 아기에게 금고리가 없다고 했읍니다. 그러니까 양호는 유모를 데리고 이웃집으로 갔읍니다. 그리고 그 집 마당의 큰 고목나무 밑으로 가서 썩은 나무 밑둥치의 구멍 속으로 손을 쑥 넣더니 금고리를 끄집어내는 것이었읍니다.
그런데 금고리를 본 그 집 주인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읍니다. 그것은 그 집의 죽은 아이가 가지고 놀던 것이데 그 아이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웃 아이가 와서 그것을 찾아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 이웃집의 아이가 죽어서 양호가 되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읍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증거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금고리입니다.
1986년에 죽은 양계초의 선생님인 강유위라는 대학자는 바로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전생이 있다고 주장했읍니다. 그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지입니다. 유교에서는 윤회를 부정합니다. 그런데도 유교학자인 강유위느 윤회를 절대적으로 주장하였읍니다. 그 증거가 바로 양호의 금고리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자가 양호의 금고리 사실 하나만으로 전생이 있고, 윤회가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없이 주자하고 있읍니다. 여기에 비하면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수집한 2,000여 건의 사례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여기서 잠깐 신라 통일시대의 김 대성의 이야기를 알아보기로 하겠읍니다.
김 대성이 처음 태어난 집은 아주 가난했읍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품을 팔아 근근히 먹고 살았읍니다. 그러다가 주인집에서 밭을 조금 떼어 주어서 그것으로 생활을 이어 나갔읍니다. 그런데 하루는 옆집에서 시주를 하자 스님께서 '시일득만배(施一得萬倍)'라고 축원하는 것을 김 대성이 듣게 되었읍니다.
김 대성은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자기네의 조그만 밭을 스님에게 시주 하였읍니다. 스님께서는 역시 '시일득만배'라고 축원하였읍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김 대성은 죽었읍니다. 그날 밤, 대신인 김 문량의 꿈에 '모량리의 대성이가 너의 집에 태어난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읍니다. 그래서 모량리에 가서 알아보니 과연 김 대성이 죽었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읍니다. 김 문량의 부인은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읍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날 때 손을 꽉 쥐고 있다가 이레 만에 손을 폈는데 손바닥을 보니 '대성'이라는 이르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 문량의 집에서는 이 아이가 모량리의 김 대성이 다시 환생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여 이름을 그대로 대성이라고 하였읍니다. 그리고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함께 있게 하였읍니다.
김 대성은 성장하면서 사냥을 좋아하였읍니다. 하루는 토함산에 가서 곰 한 마리를 사냥해 오다가 산 아래 마을에서 잠을 자게 되었읍니다. 그의 꿈에 곰의 혼이 나타나 자기를 죽였으니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며 달려드는 것이었읍니다. 김 대성이 너무 무서워 잘못했다고 빌었더니 곰의 혼은 자기를 위해 절을 지어달라고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뒤로 김 대성은 사냥을 끊었으며, 꿈에서 약속한 대로, 그 곰을 잡은 땅에다 장수사라는 절을 지어 주었읍니다. 그리고 다시 원(願)을 세워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짓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지금의 석국암을 창건했다고 합니다.
2. 차시환생(借屍還生)
또 전생기억 외에 차시환생이란 것이 있읍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태어난는 것이 아니고 제 몸뚱이는 아주 죽어버리고 남의 송장을 의지해서, 곧, 몸을 바꾸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입니다. 다음은 1916년 2월 26일자 중국 신주일보에 보도된 사실입니다.
중국 산동성에 최천선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무식한 석공이었읍니다. 이 사람이 서른두살이 되던 해에 그만 병이 들어 죽었읍니다. 장사 지낼 준비를 다 마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읍니다. 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사람 기척이 났읍니다. 부랴부랴 관을 깨고 풀어보니 관 속의 사람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쳐다보는 것이었읍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 아버지가 살았다."
그 부모의 처자식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는 식구들을 하나도 못 알아보는 것이었읍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읍니다. 죽었다가 때어나더니 정신착란이 되어서 집안 식구들도 못 알아보고 말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가보다고 식구들은 생각했읍니다.
그렇게 또 여러 날이 지났읍니다. 그동안 기운을 차리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읍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식구들을 못 알아보고 또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읍니다. 본인도 퍽 답답한 것 같았읍니다.
마침 주위에 붓과 벼루가 있는 것을 보더니 종이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읍니다. 그런데 본래는 일자무식이던 사람이 글을 아주 잘 쓰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써놓은 글의 내용을 보니 이 사람은 중국 사람이 아니고 인도지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도지나 지방에서도 말은 다르지만 글은 한자를 씁니다.
"나는 인도지나 어느 곳에 사는 유건중이라는 사람인데, 병이 들어서 치료하느라고 어머니가 두터운 이불을 덮어 씌워줘 땀을 내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여기 이렇게 외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위와 같았읍니다. 곧 그 몸은 죽어버리고 그 대신에 인도지나 사람의 혼이 산동으로 온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전생입니다. 전생이란 것이 반드시 몸뚱이가 죽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시 난는 것만이 아니고 죽은 육신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데 영혼만이 바뀌는 경우가 있읍니다. 이것을 '차시환생'이라고 합니다. 곧 남의 육체를 빌려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뒤에 중국말을 조금씩 가르쳐 주었읍니다. 여러 날이 지나자 중국말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자꾸 전생에 살던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널리 소문으로 퍼졌읍니다. 나중에는 북경대학에서 데리고 가서 여러가지로 정신감정을 해보고 치료도 해보았읍니다만, 정신은 조금도 이상이 없었읍니다.
또 그가 말하는 인도지나에도 사람을 보내어 조회를 해보았읍니다. 과연 유건종이란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고 또 그가 말한 전생의 일이 모두 다 사실이었읍니다. 결국 최천선이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깨어났으나 인도지나의 유건중의 혼이 초천선의 몸을 빌어 환생하였다는 것이 증명되었읍니다.
이런 일은 참 희귀한 일이라고 하여 정부에서는 이 사람에게 내내 연금을 주었읍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읍니다.
3. 연령역행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모두 당사자가 전생기억을 갖고 있어서 이야기하는 경우들이었읍니다. 그런데 또 심리학에서도 전생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읍니다. 심리학에서는 최면술을 이용하여 그 사람의 전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연령역행이라고 합니다. 실헝대상자에게 최면을 걸어놓고 그 상태에서 사람의 연령을 자꾸자꾸 거꾸로 역행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무살 되는 사람을 최면을 걸어서 열살로 만듭니다. 그러면 열살 먹은 사람이 되어 그때의 행동이나 말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또 네살이 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 네살 때의 노래를 하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한살로 만들어 놓으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합니다. 연령역행은 심리학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학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읍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났는데 아무래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읍니다. 그래서 연령역행을 시켜 그 원인을 조사해 보니 10년이나 20년쯤 전에 그 병의 원인이 되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읍니다. 또 간첩이 잡혔을 때에도 이용합니다. 본인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럴 때에 최면술을 이용하여 연령역행을 시킵니다. 그러면 간첩이 되기 위해 교욕받았던 것을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녹음해 두었다가 다시 물어보면 꼼짝없이 자백할 수밖에 없읍니다.
영혼과 윤회 3 (성철스님)
.. 그러면 이것이 전생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최면 상태에서 연령역행을 하여 한살로 만들어 둡니다. 그러면 사십대, 오십대의 어른도 손발을 바둥거리고 빽빽 울면서 어린 아이의 몸짓만 할 뿐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나서 묻습니다.
"네가 태어나기 일년 전, 이년 전에는 어디 있었는냐?"
그러면 주소 성명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보기를 들어 여기 해인사 꼴짜기에 사는 사람을 연령역행을 시켜서 한살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고서는 다시 태어나기 3년 전을 묻습니다. 그러면 주소 성명이 바뀌어 전라도 어느 곳의 누구라든지, 일본의 어느 곳 사람이라든지 하며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전생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과학에서 전생회기라고 합니다. 전생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전생으로 돌라가서 한 생뿌만이 아니고 이생, 삼생...여러 수십생까지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1)[브라이드 머피를 찾아서]
최면 상태에서 연령역행을 시켜 전생을 알아보는 전생회기에 대해 연구를 한 사람 중에 미국에 모리 번스타인이라는 사람이 있읍니다. 그는 루스 시몽 부인이라는 스물 아홉살의 여자를 연령역행시켜 그 여자의 전생을 거슬러올라갔읍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19세기에 아일랜드의 코우크 시에 살았던 브라이드 머피라는 사람이었읍니다.
이 여자는 최면 상태에서 자기가 코우크 시에 살았던 시절의 여러가지 생활 모습이나 신앙체험에 대해 자세히 말했읍니다. 모리 번스타인은 이것을 녹음하고 정리하여 그 여자가 말한 곳에 가서 실제로 조사를 해 보았더니 과연 녹음한 내용이 사실과 맞는 것이었읍니다. 이 일을 미국의 98개 신문에서 일제히 계재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온 세계가 깜짝 놀랐읍니다.
모리 번스타인이 이 실험을 한 것은 1952년 11월 29일이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브라이드 머피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1954년에 출간되었읍니다. 그 후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자(死者)와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읍니다.
또 휴즈 박사라는 사람은 열두살 된 자기 딸을 연령역핸시켜 보았읍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읍니다. 나주에 알아보니 그것은 이집트의 고어였읍니다. 그 말은 현대의 이집트인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전문학자에게 부탁하여 통역을 하게 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역사기록을 통해 알아보니 딸이 한 말이 역시 사실과 맞는 것이었읍니다.
그 밖에도 프로이노이라는 제네바대학의 심리학 교수는 열여섯살 되는 소녀를 대상으로 같은 실헝을 해 보았읍니다. 그 소녀도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는데 나중에 그 기록을 가지고 언어학자에게 의뢰한 결과 500년 전의 인도말인 것이 판명되었읍니다.
열여섯살 먹은 소녀가 오늘 날의 인도말도 아닌 500년 전의 인도말인 범어를 안다는 것은 결국 최면 상태에서 완전히 500년 전의 인도 사람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생회기의 사례들이 속속 사실로 밝혀지자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영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듯이 자꾸 윤회를 한다는 것이 증명되기 시작했읍니다.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학계를 움직인 근본적인 대사건이라고 했읍니다.
이러한 사례가 증명되기 시작하자 가장 곤란해진 것은 서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영혼이 있어서 기독교를 믿어면 죽어서 천당도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뿐이지 환생이나 윤회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브라이드 머피의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그러한 주장이 거짓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브라이드 머피라는 사람은 아주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읍니다. 그런데 천당에 가지 못하고 시몽 부인으로 미국에서 다시 태어났으니 문제는 아주 심각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측에서는 브라이드 머피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라디오, tv, 신문 등을 통해서 발표했읍니다. 그런데 이 전생회기의 사례는 브라이드 머피뿐만이 아니라 그 뒤로도 진실을 밝혀보려는 학자들에 의해 속속 수집되기 시작했읍니다.
2)[한번 이상 사는가?]
전생회기의 사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영국의 브록샴 테이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의 유명한 최면 요법사인 아이널 브록샴이라는 사람이 최면을 통한 연령역행으로 20여 년 동안 약 400명의 전생을 조사하여 테이프에 녹음을 한 것입니다. 그 테이프는 아직도 보존이 된고 있는데 거기에는 가지가지의 전생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이러한 갖가지 사례가 알려지자 브록샤 씨의 전생회귀는 큰 화제거리가 되었읍니다. 이렇게 소문이 퍼지자 세게에서 가장 권위가 있고 신뢰도가 높다는 영국의 국영방송인 BBC의 과학부 기자 두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조사를 해보기로 하였읍니다.
그들이 막상 조사를 시작해보니 그것은 참으로 굉장한 것이었읍니다. 조사를 해나감에 따라서 그것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게 되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조사에 열중하게 되었읍니다. 그들은 약1년 동안 테이프에서 전생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 말한 지명을 찾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가 보았읍니다. 또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역사학자, 고고학자, 심리학자들을 만나 일일이 확인도 하였읍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읍니다.
"우리는 이것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1년 동안이나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브록샴 테이프의 전생 조사는 조금도 틀림이 없는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이 조사 작업은 BBC TV에서 특집으로 방송되었고, 1976년에는 [한번 이상 사는가?]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판되기도 했읍니다. 이 책의 내용도 뒤의 부록 2에 간단하게 소개됩니다. 브록샴의 테이프에 나오는 사례 중에서 자기의 다른 전생을 여섯 가지나 이야기한 가정 주부의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에 관해서 한번 들어 보겠읍니다.
그 부인의 이름은 제인 에반스라고 합니다. 맨 처음에 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영국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가정 교사의 아내로 살았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1190년 영국 요크 시에서 유태인 여성으로 살았고, 세번째는 1451년 불란스 부르스 시에서 꿰르라는 사람의 하녀로 살았고, 네번째는 앤 여왕의 재위 시절에 런던에서 바느질로 품팔이 하는 소녀로 살았고, 그리고 가장 가까운 전생인 여섯번째는 미국의 메릴랜드 주에서 수녀로 살다가 1920년에 죽었다고 말했읍니다.
제인 에반스라는 여인의 전생은 서로 겹치지 않았으며,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는 간격이 가장 짧은 것이 20년 안팎이었읍니다.
전생 조사에 대한 실제의 보기가 이렇게 속속 출현하자 이제 이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게 되었읍니다. 졀국 기독교계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전생을 부인하고만 있을 수 없게 되자, 이 사실을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보고 교리와는 상관없이 연구해보고자 하여 관심을 갖는 신부나 목사도 더러 나오게 되었읍니다.
3)전생요법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정신상태를 세 가지 단계로 나눕니다. 우리가 모여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의식상태입니다. 의식상태 안에 잠재의식이 있고 잠재의식 속에 무의식상태가 있읍니다. 무의식상태는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입니다.
프로이드가 잠재의식은 왠만큼 연구하여 발표하였지만, 무의식에 대해서는 뚜렷한 연구 결과를 내지 못했읍니다. 이 무의식 상태에 대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영국의 캐논 박사입니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전생조사에 있읍니다.
그도 처음에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영혼도 있을 수 없고, 윤회도 없다고 철두철미 부정하였읍니다. 그러나 최면술을 이용한 무의식 상태에서 전생회귀를 시켜보니 사람들에게서 전생이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대하게 되어 생각이 바뀌었읍니다. 곧 연령역행을 통하여 열살, 한살, 출생이전으로 역행시키면 때로는 저 로마시대까지 역행되어 전생이 나타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그때에 실험 대상자들이 한 말을 역사의 기록과 대조하여 조사해 보면 모무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1,382명에 대한 전생자료를 수집하여 1952년에 [잠재력]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읍니다.
이것을 '캐논 보고서'라고도 하는데, 이 캐논 보고서에 의하면, 병이 들어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는 겨우에 전생회기를 통하여 조사를 해보면 그런 병들은 전생에서 넘어온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전생에서의 원인에 의지해서 치료함으로써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전생요법'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사례가 있읍니다.
어떤 사람이 물만 보면 겁을 냅니다.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고 강 옆에 살지도 않았읍니다. 그런데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데 아무리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전생회귀를 시켜보니 그는 전생에 지중해를 내왕하는 큰 상인의 노예였읍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서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닷물 속으로 던져져서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겠읍니까? 그러니 금생에서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밝힌 뒤에 이 원인을 의거해서 치료를 하니 그의 병이 다 낳았읍니다.
또 한 사람은 높은 계단을 무서위하며 오르지 못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보니 그는 젼생에 중국의 장군이었는데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만 보면 겁을 내는 것이었읍니다.
캐논 보고서의 이런 사례들에 의거해서 학자들이 전생요법을 개발하여 요즈음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읍니다. 1977년 10월 3일자 타임 지에 보면 이에 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읍니다.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잡지에서 자신있게 보도할 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전생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병을 치료하는 한 방법으로서 전생요법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는데도 전생과 윤회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믿을 수 있겠읍니까?
그러면 전생이 있고 윤회를 한다고 할 때 어떤 법칙에서 윤회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과연 내가 원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김 씨가 되고 남자가 되고 할 수 있는가? 캐논 보고서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순전히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법칙에 의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읍니다.
인과법칙이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입니다. 착한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원인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제 전새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전새에 착한 사람이었는지, 악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서 그 사람의 금생의 생활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비교해 봅니다. 전새에 악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불행한 사람이고 전생에 착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는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는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전생에 내가 착한 사람이었나 악한 사람이었나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는 것, 곧, 지금 내가 행복한 사람이냐 불행한 사람이냐를 살펴볼 것이며 내생에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불행하게 살 것이가를 알고 싶으면 지금 자신의 하는 일을 보면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는 이 인과를 인도말인 카르마라고 합니다. 본디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이라는 뜻이 담긴 이 말은 이제 세계적인 학술용어가 되었읍니다.
4.전생투시
인과 문제에 대해서 가장 큰 업적을 쌓은 사람은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전기(傳記)도 많이 나와 있는데 사람들은 그를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기적인'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행하는 기적은 이런 것입니다. 남의 병을 치료하는데 환자의 주소와 이름만 가르쳐 주면 수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사람의 병을 모두 진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찰하여 처방을 내고 병을 치료해 주면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치료한 사람은 무려 3만명이 넘습니다. 그는 미국 뉴욕에 앉아서 영국 런던에 있는 귀족들을 진찰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도 진찰할 수 있읍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구가 영국 런던에 갔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캐이시에게 물어봅니다. 그의 답을 듣고서 바로 런던에 전화를 해 보았더니 캐이시의 말이 모두 맞았읍니다.
이런 신기한 투시력을 가진 캐이시가 병을 진찰하다 보니 병이 전생에서 넘어오는 것이 많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에게는 전생을 꿰뚫어보는 힘이 있어 환자의 전생에서 병의 원인을 찾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교도였읍니다. 예수교에는 전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병을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읍니다. 그러나 주위의 학자들이 종교와 학문과는 다르다고 그를 설득하여 이것을 학문적으로 끝까지 조사해 보자고 의논이 되었읍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고, 전생 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500명의 전생을 조사하였읍니다. 그의 죽음(1974년) 뒤에도 버어지니아 비치에서는 원거리 진찰과 전생투시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초능력의 비밀]과 [윤회의 비밀], 이 두 권은 공산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번역되었읍니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투시에 의해 전생과 금생의 인과를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고 사는 부부인데도 그 사이가 무척 나빠서 그 전생을 알아보니 서로가 원한이 맺힌 사이였읍니다. 거꾸로 내외간에 잘 지내는 사람을 알아보니 전생에 아버지와 딸 관계이거나 혹은 어머니와 아들관계였읍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하겠지만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본래 인과란 그렇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숙명통(宿命通; 전생의 일을 환히 아는 능력)을 하여 전생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다만 우리들이 업장은 두텁고 눈이 어두워 이해가 가지 않으니 곤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때에 현대의 과학자들이 연구한 전생과 윤회 및 인과에 대한 좋은 자료를 소개하면 부처님 말씀을 믿고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 난장이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알아보니 부처님 말씀 그대로였읍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아만이 많아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면 내생에는 키가 작은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읍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을 올려다보아야 하고 남은 자기를 내려다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와 인과는 현대의 과학적 자료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대소승의 천경만론(千經萬論) 가운데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믿으면 그만이지, 캐논이든 스티븐슨이든 그런 과학자가 무엇이라고 그들이 수집한 자료를 인용하여 새로이 윤회를 설명하려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읍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읍니다.
운허스님은 올해 연세가 여든아홉입니다. '운허스님'하면 전국적으로 다 아는 큰스님 아닙니까? 한글 대장경 역경사업을 주관하신 데에다, 학식으로나 덕행으로나 두루 존경받는 어른입니다. 그 스님께서 몇 년 전에 백련암에 오셨는데,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내가 물었읍니다.
"스님께서는 경전에 대해 박식하시고 역경 사업에서도 큰 일을 하시는데, 그러면 전생을 믿어십니까?"
"허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안 믿을 수 있읍니까?"
"안 믿을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실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확실히 믿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글쎄요, 부처님 말씀에 분명히 전생이 있다고 하셨으니 믿기는 믿지만, 명확하게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
경전에 대해 그렇게 뛰어난 학식을 지니고 있고 수행도 잘 하시는 분이 '믿기는 믿지만 명확하게 이해는 안 된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양심입니다. 그래서 스님께 [사자와의 대화]라는 책을 드리며 읽어보시라고 했읍니다.
그 뒤에 대학생 수련대회 때 대학생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봉은사의 운허 큰스님께서 법문 때에 하시는 말씀이 해인사에 가서 [사자와의 대화]라는 책을 얻어와서 읽어보니 얼마나 좋은지 여러 번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윤회를 더 잘 이해하려면 그 책을 많이 읽어라고 학생들에게 여러 차례 권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학자의 양심입니다. 운허스님은 나보다 스무살이나 더 많은 분입니다. 그런 점쟎은 스님이 아니라면 내가 대중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읍니까? 부처님께서 분명히 윤회와 전생을 말씀하셔서 믿기는 믿지만 이해는 가지 않았는데, 브라이드 머피 사건의 전생 기록을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 학생들을 모아놓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뒤에 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 직접 물어보았더니 과연 '그렇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사람들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시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 보기로 근대 천체물리학에서 가장 중대하고도 큰 발견인 지동설이 처음 주창되었을 때를 들 수 있읍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지구는 고정되어 가만히 있고 해가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하는 천동설이 기독교 교리로 확립되어 있었읍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자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읍니다.
"땅이 움직이다니, 그러면 물이 모두 엎질러질 것이 아닌가?"
"사람이 거꾸로 허공 속으로 떨어버릴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런저런 의심을 품고 쿠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반박하였읍니다. 무엇보다도 지동설은 그때까지의 기독교 교리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하여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읍니다. 가장 먼저 희생당한 사람은 후스라는 종교개혁가였읍니다.
그 무렵에 천주교에서 가장 큰 신학자이면서 또한 과학자요 철학자였던 브루노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도 지동설을 주장하였읍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처음에 지동설을 주장하다, 사형에 한다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자기의 주장을 꺾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용기있는 다른 학자들은 그래도 그것을 주장하였으며, 브루노도 또한 지동설을 끝까지 주장하였읍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교황청으로서도 큰일이었읍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주교의 대표적인 성직자가 지동설을 주장하고 나서니 큰일이 아닐 수가 있겠읍니까? 그래서 브루노를 불러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지동설을 버리라고 타일렀읍니다. 그랬으나 브루노는 변함없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렇다면 너는 분형(焚刑)이다!"
"아무리 분형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지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결국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불에 태워 죽이는 분형을 선고받았읍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도 그의 사람됨이 휼륭하여 사람들은 그를 죽이기가 아까왔읍니다. 그래서 또 다시 지동설만 취소하면 살려주겠노라고 몇번이나 권유하였지만, 그는 끝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읍니다.
마침내 분형에 처하는 날, 나무 십자가에 붙들어매어 놓고 불을 붙였읍니다. 발 믿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을 때 브루노에게 십자가를 들이대며 말했읍니다.
"회개하라! 지동설을 취소하면 살려줄 터이다."
이에 브루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읍니다.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
브루노는 결국 불에 타 죽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지동설은 타 죽지 않고 뒤에 과학적으로 증명됨으로써 영구히 살게 되었읍니다. 이렇듯이 새로운 주장이나 이론은, 아무리 옳은 것이어도, 당대에 널리 이해받지 못하여 박해도 받고 죽기도 하고 바보 취급을 당하기도 하는 등 온갖 수모를 받기 마련인 것입니다.
불교의 윤회설도 도를 닦아 숙명통을 얻기 전에는 전생이 있음을 우리 중생들이 어떻게 알겠읍니까? 다행히도 요즈음에 정신과학이나 초심리학 같은 분야에서 연구가 진일보함에 따라 여러 방면에서 증명되고 있으니, 보기를 들면, 첫째가 전생기억으로 스티븐슨 씨가 무려 2,000건 이상의 사례를 발표하였고, 둘째는 전생회귀로 브록샴테이프나 캐논보고서가 그것이며, 셋째는 전생투시로 에드가 케이시에게서 볼 수 있는데,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윤회에 대해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생이 판명됨으로써, 그것을 금생과 맞추어 보면, 인과가 있는지 없는지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겠읍니까? 전생에 지은 그대로 금생에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에드가 케이시도 2,500명의 사례를 조사해 보았더니 전생과 금생이 인과로 연결되는 것이었읍니다. 이러니 어떻게 인과를 부정하겠읍니까?
이리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전생이 있다, 윤회가 있다, 인과가 있다 하는 것이 정신과학의 발달로 객관적인 사실로서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이 우주의 진리를 다 깨달은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캐논이나 케이시 같은 과학자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의 연구 결과를 보기로 이야기한 것은, 부처님께서 이미 삼천년 전에 모두 말씀하신 것인데, 현대과학이 이제야 그것에 가까이 오고 있음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제 문제는 영혼이 있고, 인과에 의해 윤회를 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대로 받고 말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생에서 잘못했으니 금생에 받아야 할까? 그것이야 당연하지요. 그러면 내생에는 어떻게 될까? 그것이야 뻔하지, 내생에는 불행하게 되지. 아무리 착하게 하려 해도 자꾸 남을 해치게 되고 또 그것을 받아야 할 테니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과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도둑질하고, 살인도 하도, 거짓을 일삼고 등등으로 온갖 짓을 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사입니다. 그러나 인과가 있음을 확실히 알면 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을 어떻게 하겠읍니까!
불교의 근본 목표는 바로 이 점에 있읍니다. 인간의 생명은 영원토록 영원토록 계속해서 윤회를 하여 영원토록 상주불멸인데, 불교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윤회를 하던 아무 상관이 없읍니다. 그러나 중생이란 악업은 많이 지어도 선업은 많이 쌓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어 업을 짓고, 윤회를 하고, 업을 짓고, 고(苦)를 받고 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을 따라서 수도를 하면 결국에는 자성(自性)을 깨쳐서 생사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윤회도, 인과도 모두 벗어나 대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스님, 불교에서는 윤회가 있다고 하는데, 윤회가 없으면 좋겠읍니다."
"왜?"
"죽고 나면 끝이라고 하면 무엇이든 해서 우선 편하게 살겠는데, 내생이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니, 겁이 나서 어떻게 해볼 수가 있어야지요?"
글쎄, 나도 인과가 없고 내생이 없었으면 좋겠어. 아무리 잘한다고 애써도 잘못하는 것이 더 많을 터이니, 그리하여 내생에 고를 더 받을 터이니, 인과가 없으면 좋겠어. 그런데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내생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한다고 없어질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게 할 수가 있을까? 그럴 수가 없지."
지금까지 영혼이 있다, 윤회가 있다, 인과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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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행을 저지른 여씨가 뱀으로 환생하다
작자: 워싱턴 DC 대법제자 자군(紫君)
【정견망】
이것은 기효람(紀曉嵐 청나라 초기 대학자이자 정치인)의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중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창주성(滄州城) 남쪽 상하애(上河涯)란 곳에 여사(呂四 여씨 집 넷째)란 무뢰한이 있었다. 그는 평소 온갖 나쁜 짓을 있는 대로 다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어느 날 밤 여사는 한무리 불량배들과 교외에서 한참 놀고 있는데 갑자기 날이 변하며 우레가 울리며 곧 비바람이 올 것 같았다. 보니 젊은 부인이 급히 비를 피하려고 강변의 낡은 절간으로 뛰어 들었다.
여사는 나쁜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날은 이미 저물었고 검은 구름이 잔뜩 밀려와 아무것도 잘 보이지 않았다. 여사는 이 불량배들을 데리고 절간으로 뛰어 들어 부인의 옷을 벗기고 나쁜 짓을 했다. 갑자기 번갯불이 번쩍하며 절 안을 비췄다. 여사는 그제야 젊은 부인이 바로 자신의 아내인 것을 발견했다. 그는 대단히 후회하며 부인을 강물에 던져버리려 했다. 그러자 아내가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해치려다가 결국 자기 아내를 해쳤소. 하늘의 이치는 명백하니 숨길 수 없소. 이제 나까지 죽이려는 겁니까?”
여사는 할 말이 없어 아내의 옷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옷은 이미 바람에 날려 강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여사는 어쩔 수 없이 방황하다가 그저 실 한올 걸치지 않은 아내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비가 그치고 날이 맑아졌기에 밝은 달이 높이 비춰 마을 사람들이 여사 부부의 낭패한 꼴을 보았다. 온 사람들이 다 웃으며 앞 다투어 나아가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수치심에 스스로 강에 뛰어 들어 죽고 말았다. 원래 여사의 아내가 친정으로 갔으며 한달 후에 돌아오려고 했는데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거주할 방이 없어 일찍이 돌아오게 된 것이었고 뜻밖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었다.
나중에 여사의 아내가 꿈에 남편을 봤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은 죄가 매우 심하여 본래 마땅히 18층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환생하지 말아야 했소. 하지만 저승 판관이 내 일생을 조사해보더니 그래도 모친께 효도를 많이 한 점이 참작되어 뱀의 몸을 얻었소. 이제 곧 몸을 얻으러 가야 하오. 당신은 곧 다른 남자를 만날 터이니 새 시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하오. 저승의 법률에는 불효 죄가 가장 심하니 지옥의 가마솥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오.”
여사의 아내가 개가하던 날 집 한 구석에 붉은 뱀 한마리가 고개를 늘어뜨리고 쳐다보는데 마치 연연해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여사의 아내는 꿈속의 일을 기억하고 그것이 여사임을 알았다. 이때 문밖에 사람을 영접하는 북소리가 울리자 뱀은 집 위에서 몇 번 펄쩍 뛰더니 급히 달아났다.
예전부터 선에는 선한 보답이 있고 악에는 악한 보응이 있다고 한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던지 결국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발표시간: 2014년 2월 13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27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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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된 왕중주
(일타스님)
6.25사변 직후의 일입니다. 금강산에 계시던 이혜명스님이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나를 비롯한 여러 스님께 한 편의 실화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혜명 스님은 경전에도 밝을 뿐 아니라 재를 지내는 등의 각종 의식 집전은 물론 범패도 아주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 '팔방미인 큰스님'으로 불리어지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한때 중국의 불교성지를 두루 참배하고 명승지를 구경하였는데, 한 번은 중국 상해의 큰 공원을 들렀더니 공원 한 쪽 편의 까만 소한 마리를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스님도 이상한 호기심이 생겨 소 앞에 세워 놓은 게시판을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그 간판에 적힌 글은 더욱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남녀노소 여러분들이여, 이 소의 배를 보십시요..." 이렇게 시작하여 장광설을 늘어놓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상해 근처에 큰 부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이유 때문에 죽마고우인 왕중주에게 자신의 재산을 관리해 주도록 부탁하고 상당한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왕중주에게 등기서류뿐만 아니라 인감도장까지를 모두 맡겼습니다. 그러나 왕중주는 친구의 은혜로운 부탁을 등지고 합법적으로 모든 재산을 가로챘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친구가 자기 재산을 교묘하게 사취한 것을 알게 된 부자는 분한 마음을 이길 수 없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재산을 다 빼앗기고 거지가 되다시피한 그는 조금 남은 패물을 팔아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짓게 됐습니다. 그리고 논과 밭을 갈 암소를 한 마리 사서 길렀습니다. 몇 해가 지나자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 새끼 배에 글씨가 몇 자 새겨진 흔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자기를 배신했던 철천지원수 왕중주의 이름 석 자였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알아본 결과, 왕중주가 얼마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한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 원수가 죄값을 치루려고 내 집에 태어난 것이구나... 이 놈! 잘 만났다. 사람이 죽을려면 3년 전분터 환장한다는 말은 있다만, 너처럼 환장한 놈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네가 죽어 이제 빚을 갚으로 온 모양이다만, 송아지로 내 집에 태어난 것만으로 나의 분하고 원통한 빚을 다 갚는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이제부터 네 놈에게 원수를 갚을 터이니 견뎌 보아라." 이렇게 다짐을 한 그는 아주 모지고 기이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는 왕중주의 후신인 송아지를 가두어 놓고 끼니 때마다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밤중이 되면 촛불을 밝혀 놓고 시퍼렇게 간 칼을 들고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여 있는 송아지 목에 큰 칼을 들이대고는 살기 띤 음성으로 속삭였습니다. "네 이 놈! 왕중주, 이 나쁜 놈!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더냐? 네 놈이 이리와 같은 놈이었으니 그런 짓을 했겠지. 이 나쁜 놈! 내 너를 지금 당장은 죽이지 않는다. 조금 더 키워서 잡되 그것도 단번에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네 놈앞에 숯불을 피워 놓고 시퍼렇게 칼을 갈아 하루에 살 한 점씩만 베어낸 다음,네 놈이 보는 앞에서 구워 술안주로 삼을 것이다. 네 이 놈! 단단히 들어 두어라!" 그는 이 일을 매일같이 계속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중주의 이름이 새겨진 송아지는 뻐쩍 마르기만 할 뿐 자라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동안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왕중주의 아들이 느닷없이 찾아와서 마당 한 가운데에 넙적 엎드려 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르신네, 제발 널리 용서해 주시옵고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 재산을 돌려드림은 물론 모든 것을 영감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부디 아버지만 살려 주십시오." 아들은 수없이 절을 하면서 간청했습니다. "나는 지금 꼭 돈만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너의 아버지 소행이 너무나 괘씸하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너는 어찌된 일이냐? 어떻게 이 사연을 알게 되었느냐?" "저희 선친이 어르신네의 은공을 저버리고 사취한 것을 저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사오나 자세히는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여러 달 전부터 어머니와 저의 꿈에 선친께서 자주 나타나서 그 동안 지은 죄를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르신네 집의 소로 태어나 죄 값을 갚으려 하지만, 그 죄가 워낙 크기 때문에 소의 몸을 버리고 나더라도 다시 무서운 지옥으로 떨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의 괴로움도 괴로움이거니와 재산을 어서 돌려드려야만 당신의 죄를 벗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살아생전에 자세한 내용을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당신이 떳떳하지 못한 행동 가족들이 아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었고, 그 내용을 알면 저희들이 떳떳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르신네께서 계신 이 곳을 꿈속에서 일러주셨습니다. 이제 저희가 모든 재산 문서를 이렇게 가지고 와서 사죄를 드리오니, 널리 용서하시옵소서. 부디 이것을 거두어 주시고 저희 아버지를 돌려 주시기만 하면, 그 은혜 백 번 죽어도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는 지극정성으로 간청하는 아들의 효심에 감동하여 재산을 되돌려받고 송아지를 내어 주었습니다. 왕중주의 아들은 아버지 후신인 송아지를 데리고 가서 음식도 잘 대접하고 각별히 보살폈습니다. 그 소가 자란 다음에는 공원에다 좋은 우리를 지어 놓고 아침 저녁으로 정성껏 여물을 쑤어 대접하면서, 오고가는 만 천하 사람들이 이 소를 보고 경각심을 일으켜서 인과를 믿고 선행을 닦으라는 뜻으로 사연을 쓴 안내판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윤회를 깨우친 진재열의 죽음 (일타스님) 1952년 3월 2일,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옥천사에서는 윤회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인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절에서 나무를 하던 부목 진재열이 몇 사람의 일꾼들과 함께 산에 나무를 베러 갔다가, 굴러내리는 통나무에 치어 질식사를 하였습니다. 시체는 즉시 옥천사로 옮겨졌으나, 진재열의 영혼은 옛 고향 집으로 갔습니다. 배가 많이 고픈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의 혼은 집에 오자마자 길쌈을 하고 있는 누나의 등을 짚으며 밥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어머니와 함께 길쌈을 짓던 누나가 갑자기 펄펄 뛰면서 머리가 아파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누나가 아프다고 하자 면목이 없어진 그는 한 쪽에 우두커니 있었는데 어머니가 보리밥과 풋나물을 된장국에 풀어 바가지에 담아 와서 시퍼런 칼을 들고 이리저리 내두르며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네 이놈 객귀야, 어서 먹고 물러가라." 기겁을 한 재열은 '그래도 절 인심이 좋구나' 생각하며 옥천사로 올라왔습니다. 얼마를 오다 보니 아리따운 기생들이 녹색 옷에 홍색 띠를 두르고 장구를 치며 노는 모습이 가히 볼 만하였습니다. 더군다나 한 젊은 여자가 다가와서 같이 놀자며 옷자락을 잡아 끌었습니다. 그 때 재열은 "환락에 빠진 여인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스님의 말씀이 떠올라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절문 앞에 이르렀을 때 평소와는 달리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맨 수십명의 무인들이 활을 쏘아 잡은 노루를 구워 먹으면서 함께 먹을 것을 권하였습니다. 재열은 이를 간신히 뿌리치고 옥천사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고, 그와 동시에 죽었던 재열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집에서 보았던 누나와 어머니는 물론 여러 조객들이 자기를 앞에 놓고 슬피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던 재열은 울다 말고 기절초풍을 하는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여기 와서 울고 계십니까?" "네 놈이 어제 오후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죽었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초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상은 진정 일장춘몽이었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재열은 다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제 집에서 누나가 아픈 일이있었습니까?" 살아나다 "그럼, 멀쩡하던 년이 갑자기 죽는다고 하여 밥을 바가지에 풀어서 벼렸더니 다시 구나." 재열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생들이 놀던 곳을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비단 개구리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지 않겠습니까? 또 절 문 앞의 무인들이 활 쏘던 곳으로 가 보니 벌들이 집을 짓느라고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무릎을 쳤습니다. "윤회생사가 바로 이러한 것이로구나.내가 만일 그 기생 틈에 끼었으면 나는 분명 비단 개구리가 되었을 것이고, 무인의 틈에 끼었으면 벌 새끼가 되고 말았을 게 아닌가?" 이 때 재열은 윤회전생을 분명히 깨달았고, 그 뒤 열심히 불도를 닦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옥천사에 가면 들을 수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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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중국] 청나라 강희제 시기, 강소(江蘇) 지역에 유수(鈕琇)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직언을 서슴치 않는 청렴한 관리였으며 많은 명작들도 남겼다. 그의 저서 ‘고잉(觚剩)’에는 황제를 놀라게 했던 한 여아의 환생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 * *
북경성 동북 지역 한 평민 집에서 갓 태어난 여아가 바로 입을 열어 “나는 조정 관리인 정렴(鄭濂)의 부인인데 왜 내가 여기에 있나요? 지금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부모는 곧장 사람을 시켜 정렴이라는 사람이 사는 곳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집에서 2리 떨어진 곳에 정렴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부모는 그 같은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지만 비밀로 한 채 여아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여아가 자라서 걸을 수 있게 되자 더는 기다릴 수 없었는지 정렴의 집을 찾기 위해 혼자 마을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부모는 딸이 혼자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문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아이는 하루하루 자랐지만 정렴의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매일 그렇게 지키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정렴의 집으로 찾아가 사실대로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정렴은 가마를 준비해 당시 8살 된 이 여아를 맞이하러 갔다.
정렴의 집은 넓고 방이 많았는데도 여아는 전혀 낯설지 않은 듯 바로 안방을 찾아 들어가 남쪽을 향해 앉은 채 많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 아들과 며느리는 어디에 있느냐? 빨리 나를 만나러 나오지 않고…….” 사람들은 아이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입을 막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정렴이 밖에서 들어오자 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별한지 오래 되었는데 저를 알아보시겠는지요?”라고 하면서 자신이 전생에 입었던 옷과 신발을 찾아냈는데 정렴의 부인의 생전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렴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날 여아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상황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이야기를 퍼뜨려 그 지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황궁까지 소식이 전해졌다.
소문을 들은 황제는 놀라 정렴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황제 앞이라 정렴은 거짓을 고할 수 없어서 사실대로 말했다. 정렴의 말을 들은 황제는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여아의 전생 부부의 연을 이번 생에도 다시 맺으라는 것이었다. 정렴은 급히 사양하며 “나이차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미 손자까지 봤는데, 이 늙은이와 어린 아내가 서로 부부라고 부르면 입장이 곤란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황제는 “천명을 거역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그때 혼인하면 되지 않는가? 누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결국 여아가 10여 세가 되었을 때 정렴은 황제의 명에 따라 혼례를 올리고 금생에 다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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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생에 대해 다소 아는 이가 종종 있다. 미국의 유명 팝가수 마돈나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그녀가 처음 베이징 자금성을 산책할 때 작고 외진 골목길조차 매우 익숙했다.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傅儀)의 여종이라고 단언했다. 또 007 첩보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미국 영화배우 숀 코네리도 얼마 전에 자신이 전생에 아프리카에서 무(武)를 숭상하는 토착민족 의사였다고 밝힌 적 있다.
이는 현대 유명 서양인의 사례다. 동양에서 윤회와 환생은 매우 보편화된 관념이다. 중국 고대에서 이를 기록하는 것도 매우 보편화되었는데 유명한 문인 소동파가 바로 그 중 한 사례다.
“나는 세 번의 생(生)에 수행한 적 있다”
소동파의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으로 동파는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그의 별칭이다. 현재 많은 사람은 단지 그가 북송의 대문호이자 서예가였음을 알고 있으나 그가 전생에 수행을 한 승려였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시문에서 여러 차례 자신의 전생을 언급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시 ‘남화사(南華寺)’에서 이렇게 읊었다. “나는 원래 수행자로 세 번 생(生)을 수행했네. 그러다가 생각을 잘못 가져 이렇게 백 년 동안 사람으로 태어났네.” 또 ‘장자야와의 삼절구(三絶句)’에서는 “전생에 나는 항주(杭州)에 이르러 긴 시간동안 노닐었노라”라고 했다.
원풍(元豊) 7년 4월 소동파가 균주(筠州)에 가기 전, 운암(雲庵)스님은 자신이 소철(蘇轍)과 총(聰)스님과 함께 오계스님을 마중하러 성 밖으로 나가는 꿈을 꾸었다. 깨어난 후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어 이 꿈을 소철에게 말했다. 소철이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총스님이 왔다.
소철이 “금방 운암과 꿈 얘기를 하고 있었네. 자네도 와서 함께 꿈을 말해보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총스님은 “어제 밤 꿈에 우리 세 명이 함께 오계스님을 마중하러 갔다네”라고 말했다. 소철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세상에 과연 세 사람이 같은 꿈을 꿀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이상하군!”
얼마 안 돼 소동파가 도착하자 이들은 자신들이 같은 꿈을 꾼 이야기를 했다. 소동파는 잠깐 사색하더니 “나도 8,9세 때 전생에 내가 한 스님이었는데 섬우(陝右, 지명) 사이를 오가던 꿈을 꾸었었네. 또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 한 스님이 꿈에 나타나 잠자고 가겠다고 청했다네. 스님은 품위가 있었고 한 쪽 눈이 멀었다네”하고 말했다.
운암은 소스라치듯 놀라며 “오계스님이 바로 섬우 사람이었다네. 또 한 쪽 눈이 멀었었지.” 여럿이서 계산해보니 오계스님은 돌아간 지 50년이 됐고 소동파는 현재 바로 49세였다. 시간, 장소 그리고 여러 사람이 같은 꿈을 꾼 것을 보면 소동파는 바로 오계스님이 환생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소동파는 늘 승복 입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아마 전생의 인연 때문일 것이다.
“전생에 나는 항주에서 긴 시간을 노닐었노라”
소동파가 항주에 있을 때 친구 참료(參寥)와 함께 서호 수성사(壽星寺)에서 노닐었다. 소동파는 주변 정경을 둘러보고 “나는 살아생전에 이곳에 와 본적이 없네. 하지만 지금 본 것은 마치 직접 겪은 듯해. 이곳에서부터 참회당까지 92개의 계단이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사람을 시켜 세어보니 정말로 그가 말한 대로였다. 소동파는 참료에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산에서 도를 닦던 스님이었지. 바로 이곳 사원에서였어.” 그 뒤 소동파는 늘 이 불당에 머물러 쉬어가곤 했다.
어느날 소동파는 대(大) 시인 황정견(黃庭堅)과 함께 한 노인을 만나러 갔다. 노인은 소동파를 만나서 대뜸 소동파가 전생에 오계스님이며 황정견은 전생에 한 여자였다고 말했다. 소동파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이 없었으나 황정견은 전혀 믿지 않았다. 이에 노인이 말했다.
“자네가 부릉(涪陵)에 도착하면 누군가가 알려줄 걸세.” 부릉은 좌천된 관리들이 가는 곳임을 아는 황정견은 생각했다. ‘내가 어찌 그런 곳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그는 과연 부릉으로 좌천됐고 몇 차례 꿈에서 한 여자가 그에게 전생의 일을 알려주었다. 그제야 황정견은 노인이 한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일념을 잘못 가져 백년 인생을 살게 되다
오계스님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한쪽 눈이 멀었으며 명오(明悟)라는 사형과 함께 도를 닦고 있었다. 오계는 일념을 잘못 가져 홍련이라는 여자와 간음계를 범했다. 이는 공능이 있는 명오에게 발견됐고 오계는 부끄러운 나머지 다시 속인으로 환생했다.
명오는 오계가 인간이 되어 부처를 비방하고 승려를 비방할 것을 예견했다. 그렇게 되면 오계는 벗어날 길이 없게 되기에 그도 오계를 따라 속세로 환생했다. 이번 생에 오계는 소동파로 환생했고 명오는 소동파의 좋은 친구 불인(佛印)스님으로 환생했다. 처음에 소동파는 정말 명예와 금전에 눈이 멀고 불법(佛法)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불인스님은 포기하지 않고 항상 그를 따르며 마음을 다해 그에게 불법을 권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과 불인스님의 끊임없는 권고로 소동파는 마침내 깨달음을 가졌다. 소동파는 윤회를 깊이 믿었을 뿐만 아니라 불법을 숭상했으며 마음을 조용히 하고 수련했다.
불인선사와 소동파는 후세에 재밌는 이야기를 남겼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마주하고 좌선했는데, 소동파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불인선사에게 물었다. “내가 좌선한 자세가 어떠한가?” 불인선사는 “부처님 같구만”하고 답했다. 소동파는 득의양양해졌다. 불인선사도 소동파에게 반문했다.
“그럼 자네가 보기에 내 자세는 어떠한가?” 소동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자네는 마치 한 무더기 소똥 같네!” 불인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아미타불!” 소동파는 집에 돌아와 어깨를 으쓱이며 여동생에게 자신이 한층 더 높다고 자랑했다. 여동생은 연유를 듣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오라버니, 오늘 너무 비참하게 패하셨네요! 불인선사는 마음속이 모두 부처이기에 어떤 중생을 보아도 모두 부처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전부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오라버니는 육근이 청정한 불인선사를 소똥으로 보셨네요. 이는 크게 참패한 것이 아니고 뭡니까?” 소동파는 그제야 부끄러워했다.
동파선생묘지명東坡先生墓誌銘’에 의하면, 소동파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1102년 7월 18일 세 아들을 불러, ‘나는 일생동안 추호도 악행惡行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다음 절대로 지옥地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부디 울며불며 통곡痛哭하지 말라![오생무악吾生無惡 사필불타死必不墮 신무곡읍慎無哭泣]’는 최후의 한마디를 남겼다고 합니다.
[시사중국]글: 명여회(明如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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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는 있다 (성철스님)
전생기억이란 이런 식입니다.
또 흔히 천재니, 신동이니, 생이지지(牲而知之)니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태어난 뒤로 한번도 글을 배운 적이 없는데 글자를 다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을 보아도 모두 읽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이지지라고 합니다.
곧 나면서부터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생이지지는 바로 전생기억에 의한 것입니다.
전생에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금생에로 그대로 가지고 넘어온 것입니다.
또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친근감이 가는 경우는
전생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생기억에 대해
누구보다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미국의 버지니아대학의 이안 스티븐슨 교수입니다.
그는 세계 각국에 연락기구를 조직하여
전생기억을 가진 아이나 어른이 있으면
학자들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여 확인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수년 동안에 600여 명의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인 사례를 뽑아서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바로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라는 책으로,
뒤의 부록 1에서 소개됩니다.
전생기억에 대한 보고서로서는 가장 확신이 있고
어떤 사람이든 반대의 의견을 제시하기 어려운 유명한 책입니다.
그리고 1973년까지
약 2,000건의 전생기억을 가진 사례를 조사하여 보고하였습니다.
자료가 이만큼이나 되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윤회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안 스티븐슨은 정신과 교수로서 전통적인 의학에 대한 연구 경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전통적인 이론은
인간의 성격을 유전과 환경적인 영향이라고 하지만,
이들 복합적인 요인만으로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규명해 보고자 했다."
그는 윤회를 한다고 정식적으로 공포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는 어른들보다
자신의 기억을 해석하려고 들지 않는 어린이의 사례 조사에서
90퍼센트 이상의 정확성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안 스티븐슨교수는 전생기억에 나타난 사례들에서 몇 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생기억과 연령과의 관계입니다.
대개는 태어난 지 두 서너 살이 되면 전생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좀더 나이가 들어서나 아니면 말을 시작하자마자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로 말을 잘 할 수 없는 시기의 전생기억이 좀더 정확한 수가 많습니다.
어린아이가 전생에 대해 말하는 첫 말은
대개 자신이 알았던 사람의 이름이나 지명입니다.
그러다가 다섯 살에서 여덟 살 사이쯤 되면 어린이들은 전생기억을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때가 되면 가정의 제한된 테두리를 벗어나
이웃과 학교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점점 사라지는 전생기억 위에 새로운 경험이 축적되면서
전생기억은 아주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거나 위엄과 지혜를 갖는 등
일반적인 아이와는 그 행동이 다릅니다.
이러한 행동은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본인에게는 당연한 행동이며 그것은 전생의 자기 모습과 일치합니다.
세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자기 육체의 생소함을 말하고 합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이 작은 육체에 갇혀서 답답하다고 불평을 늘어놓곤 합니다.
네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가장 생생하고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전생에서 죽음과 관련된 것이며, 바로 죽음의 순간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특히 죽음에 대한 전생기억 중에서
교통사고나 살인, 전쟁과 같이 격렬하게 죽은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런 죽음을 당한 사람만이 환생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경우일수록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격렬한 죽음의 경우, 전생기억을 하는 아이는
대개 죽음을 가져다 준 물건이나 환경에 대해 강한 공포심을 나타냅니다.
한 보기로서
어떤 어린이는 전생에 다리 위에서
버스를 지나가게 하느라고 비켜서다가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다리, 버스, 물에 대해서 상당한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목욕시키려면
네 명의 어른이 강제로 붙잡아야 할 정도로 물에 대한 공포에 떤다고 합니다.
다섯째로,
사람과 환경의 변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처음 가는 집이라면 그 집이 어떻게 변하였고,
거기 사는 사람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보통의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에는,
처음 전생 집을 찾아갈 때,
구조가 어떻게 변경되었다는 둥 가족 중에 누가 안 보인다는 둥
그 집의 변화를 말한다고 합니다.
여섯째로,
환생을 예견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아이를 출산하기 전에 어느 가정에 태어나기 위해 온다는 것을
꿈에 예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꿈이 동서양에서 종종 화제가 되곤 합니다.
일곱째로,
임신 중의 비정상적인 식성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에는
임신을 하게 되면
평소에 잘 안 먹던 음식이나 제 철이 아닌 음식에 대해 그 사람은 비상한 식욕을 느낍니다. 그것을 임산부의 변덕이라고 하여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생기억을 하는 어린아이의 경우,
전생에 좋아했던 음식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 음식이 바로 어머니가 임신 중에 먹고 싶어했던 음식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여덟째로,
배우지 않은 기술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생기억을 하는 어린이 중에는 배우지도 않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생에 가졌던 기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보기를 하나 들자면
벨기에에 로버트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이 소년은 어느 날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5년에
죽은 자기 삼촌의 초상화를 보더니 그것이 자기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세 살이 조금 지나서 로버트는
부모와 함께 처음으로 수영장에 갔는데
멋진 동작으로 다이빙을 하여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의 삼촌인 알버트는 훌륭한 수영선수였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수영은 세살 정도의 어린아이도 할 수 있지만 다이빙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영장에 처음 온 아이가 다이빙을 멋지게 해내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 아이가 전생의 알버트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배우지도 않은 기술이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사례는 외국어를 말하는 경우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생리학자이며 심리학자인 동시에
노벨 수상자이기도 한 샤를르 리히는
그러한 현상을 지노글로시Xchoglossy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안 스티븐슨은 이 지노글로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독백과 같은 것인데,
당사자는 이상한 언어의 조각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잠재된 기억 속에서 언어가 무의식적으로 도출되는 경우인데
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반응적인 경우인데,
이것은 직접 상대방과 그 외국어로써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슨은 두번째 경우인 반응적인 지노글로시의 사례는
죽음 이후의 인간의 윤회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곧 전생에 그 언어를 배웠거나 사용한 사람이 아니면
그처럼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이
언어를 배우지도 못한 어린아이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 가운데 최초의 지노글로시는
19세기에 있었던 일인데 최면에 의해서 입니다.
1862년 독일의 왕자 갈리첸은
어떤 여인을 대상으로 최면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인은
18세기의 휼률한 프랑스어로 브리타니에 살았던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리첸 왕자는
그녀가 프랑스어를 배웠는지 조사해 보았지만
그녀는 일반 교육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무학(無學)이었고,
다만 자기 지방의 독일어 방언 밖에는 말할 줄 모른다는 것이 판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여자는 전생에 프랑스에서 살다가 다시 독일에 태어난,
윤회의 심증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아홉째로, 출생 자국을 들 수 있습니다.
아이가 출생할 때부터 흉터가 있거나 불구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선천적 기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원인은 대부분 유전이나 임신 중의 약물 복용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것이 전생의 업보에 의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윤회를 입증하는 전생기억에 관한 사례는
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삼국지]라는 책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아무도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습니다.
조조도 못하고 유비도 못하고 손권도 못하였습니다.
정작 중국이 통일된 것은 세월이 흐른 뒤 진나라 때입니다.
그 때 진나라의 재상이며 군인이고 또 덕인(德人)이었던 양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서너 살이 되어서,
한번은 유모를 보고 가지고 놀던 금 고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모는 아기에게 금 고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양호는 유모를 데리고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집 마당의 큰 고목 나무 밑으로 가서
썩은 나무 밑둥치의 구멍 속으로 손을 쑥 넣더니 금 고리를 끄집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금 고리를 본 그 집주인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집의 죽은 아이가 가지고 놀던 것이데
그 아이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웃 아이가 와서 그것을 찾아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 이웃집의 아이가 죽어서 양호가 되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금 고리입니다.
1986년에 죽은 양계초의 선생님인 강유위라는 대학자는
바로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전생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유교에서는 윤회를 부정합니다.
그런데도 유교학자인 강유위는 윤회를 절대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양호의 금 고리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자가 양호의 금 고리 사실 하나만으로 전생이 있고,
윤회가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 없이 주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수집한 2,000여 건의 사례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신라 통일시대의 김 대성의 이야기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김 대성이 처음 태어난 집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품을 팔아 근근히 먹고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집에서 밭을 조금 떼어 주어서 그것으로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옆집에서 시주를 하자 스님께서 '시일득만배(施一得萬倍)'라고 축원하는 것을 김 대성이 듣게 되었읍니다.
김 대성은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자기네의 조그만 밭을 스님에게 시주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역시 '시일득만배'라고 축원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김 대성은 죽었습니다.
그날 밤, 대신인 김 문량의 꿈에
'모량리의 대성이가 너의 집에 태어난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모량리에 가서 알아보니 과연 김 대성이 죽었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김 문량의 부인은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날 때 손을 꽉 쥐고 있다가 이레만에 손을 폈는데
손바닥을 보니 '대성'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 문량의 집에서는
이 아이가 모량리의 김 대성이 다시 환생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여
이름을 그대로 대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함께 있게 하였습니다.
김 대성은 성장하면서 사냥을 좋아하였습니다.
하루는 토함산에 가서 곰 한 마리를 사냥해 오다가 산아래 마을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에 곰의 혼이 나타나 자기를 죽였으니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며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김 대성이 너무 무서워 잘못했다고 빌었더니
곰의 혼은 자기를 위해 절을 지어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김 대성은 사냥을 끊었으며,
꿈에서 약속한 대로, 그 곰을 잡은 땅에다 장수사라는 절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원(願)을 세워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짓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지금의 석굴암을 창건했다고 합니다.
영원한 자유
출판사-장경각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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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에 관하여
-성철스님-
만사가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어
무슨 결과든지 그 원인에 정비례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우주의 원칙이다.
콩 심은 데 팥 나고 팥 심은 데 콩 나는 법 없나니
나의 모든 결과는 모두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를 맺는다.
가지씨를 뿌려놓고 인삼을 캐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미친 사람일 것이다.
인삼을 캐려면 반드시 인삼씨를 심어야 한다.
불법도 그와 마찬가지로
천만사가 다 인과법을 떠나서는 없다.
세상의 허망한 영화에 끄달리지 않고
오로지 불멸의 길을 닦는 사람만이 영원에 들어갈 수 있다.
허망한 세상 길을 밟으면서 영생을 바라는 사람은
물거품 위에 마천루를 지으려는 사람과 같으니
불쌍하기 짝이 없다.
이것이 생사윤회하는 근본원칙이니
대도를 닦아서 불멸을 얻으려는 사람은
모든 행동을 이원칙에 비추어
일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영원을 위해서
나쁜 인과는 맺지 않아야 한다.
모든 일이 다 내 인과 아님이 없나니
추호라도 남을 원망하게 된다면
이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며
이같이 못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모두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인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만약 원망한다면 맑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울면서 거울 속의 사람보고는
웃지 않는다고 성내는 사람이다.
또 몸을 꾸부리고 서서
그림자 보고 바로 서지 않았다고 욕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어리석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천만사가 전생이건 금생이건 다
내 인과인 줄 깊이 믿어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가 더욱 더 노력하여야 할 것이니
이래야 인과를 믿는 사람이라고 이름할 것이다.
털끝만큼이라도 남을 해치면
반드시 내가 그 挽?받는다.
만약 금생이 아니면 내생, 언제든지 받고야 만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여 남을 해침은 곧 나를 해침이고
남을 위하여 나를 해침은 참으로 나를 살리는 길이다.
-성철스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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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는 미국의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윤회에 대한 사례를 1973년까지 약 2,000건을 수집 연구한 것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스무 가지를 수록한 것입니다. 이 책은 근년에 우리나라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上 下』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발생지이며, 힌두교를 믿고 있는 인도에는 종교적으로 전생이나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그에 대한 조사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직접 조사한 사례들이다.
제1화. 전생의 춤을 추는 스완라다.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스완라타 미슈러는 1948년 3월 2일 마디아 프라디슈 주(州)의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그녀를 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세살 때였다. 1971년 11월의 어느 날,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한 지방도시 중류 가정집 응접실에서 스완라타가 노래를 부르며 추는 춤을 보았는데 곁에는 이 집의 주인인 스완라타의 아버지도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춤의 율동에 따라서 벵골어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벵골 지방의 가을추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스완라타가 처음으로 이 춤과 노래를 보여준 것은 그녀가 대여섯살 때였다. 그런데 춤을 추지 않고 노래만 생각해내거나 노래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거나 하지는 못하고, 반드시 양쪽을 함께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스무세살의 스완라타는 젊은 나이로 챠타라푸울 지방대학의 식물학 강사로 재직하고 있지만 벵골어는 한 마디도 이해하는 것이 없었다. 인도에는 열 가지도 넘는 언어가 있고 그녀는 힌두어(語) 지역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결국 스완라타는 다섯살 때부터 이 노래와 춤을 추어 왔지만, 전생기억의 상태가 아니면 이것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에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 특징으로 그녀는 두개의 전생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의면, 자신은 벵골 지방과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두 곳에서 두개의 서로 다른 전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 이 벵골의 춤은 물론 벵골 지방에서 생활한 전생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징은, 대개의 경우 열살쯤되면 전생기억을 잊어버리는 것과 달리, 성장한 후에도 전생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스완라타가 마디아 프라디슈 주에서 살았던 "비야"로서의 전생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스완라타는 1948년 3월 2일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세살 반쯤 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가는 도중에 카트니 시(市)를 지나가다가 스완라타는 문득 "우리 집 쪽으로 가줘요"라고 말했다. 이들이 카트니 시내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차를 마셨는데 이때에 또 그녀는 자기 집에 가면 더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아버지 미슈러 씨는 딸아이의 말에 난처해졌지만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스완라타는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카트니 시의 파사크 집안의 딸인데 이름은 "비야"라고 하며 결혼해서 아들이 둘 있었다고 말하더니 그들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스완라타는 가끔씩 이렇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행동은 퍽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 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몇 년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가 대여섯살쯤 되었을 때 앞에서 말한 춤을 처음으로 가족들 앞에서 추어 보였다. 그리고 춤과 함께 벵골에서의 전생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58년, 그녀가 열살 때,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었다.
스완라타는 아버지와 함께 어그니호트리 교수댁을 방문하였다. 교수의 부인이 다과를 들고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 지금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스완라타가 갑자기 얼굴을 들더니 부인을 지긋이 바라보는데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을 담은 표정이 떠올랐다. 부인은 괴이하게 생각했다. 인도에서는, 특히 계집아이는 자기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친밀감을 보이지 않도록 엄격히 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완라타가 갑자기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나는 카트니 근방에 살던 파시크 가(家)의 비야에요."
사람들은 놀랐다. 입을 다문 채 그녀를 응시하는 부인에게는 스완라타는 이어서 말했다.
"부인과는 티롤러 촌(村)의 결혼식에 함께 갔었지요...."
교수 부인은 비야와 함께 시골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과 그 때 화장실을 찾느라고 애먹었던, 아주 오랜 옛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인도의 농촌에는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데 도시에서 자란 두 사람은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줄 알고 온 집 안을 찾아헤매었던 것이다.
스완라타의 부친은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딸이 하는 말의 진실성을 인정하고 그녀가 하는 말들을 문서로 기록해 두었다. 1958년 9월의 일이다. 스완라타의 나이로 보면 세살 반에서부터 열살 사이에 그녀가 한 말들이다.
"전생에서 그녀는 카트니 시의 파사크 가의 딸 비야였다. 두 명의 아들이 있고 이름은 크리슈나 다타와 시빈 다타라고 했다. 파사크 가의 주인은 하리 라르 파사크이다. 집에는 자동차가 있었다. 목의 병으로 죽었다. 자바르푸울의 나피 가(街)에 있는 S.G.바브랫드 의사에게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본격적으로 입증되기 시작한 것은 이 사건이 있은 지 반년 후인 1959년 3월에 이 방면의 연구가인 버너어지에 의해서이다. 그는 스완라타에게서 전생 이야기를 듣고 카트니 시의 파사크 가를 찾아나섰다. 오직 스완라타의 말만을 의지하여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파사크 가는 백색 건물로 문은 검은색이고 쇠빗장이 걸려 있다. 앞문에는 석판(石板)이 깔려 있다. 집 뒤에는 여학교가 있고 가까운 곳에 있는 석회 공장과 철도 선로가 집에서 보인다. 파사크 가에는 석회를 바른 방이 넷 있고, 다른 방은 별로 고급으로 꾸며놓지 않았다."
버너어지 씨가 파사크 가를 찾아갔을 때 그는 비야의 제일 큰 남동생인 프라서드 파사크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버너어지 씨는 스완라타가 말하던 전생의 이야기들이 그녀 자신의 전인격(前人格)이라는 비야의 생애와 꼭 부합하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비야는 카트니 시 북쪽에 있는 도시 마이하르에 사는 친타미니 판데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갔으며 1939년에 사망한 것 등을 프라서드 씨로부터 알아냈다.
진정 이것은 믿기 어렵지만 스완라타가 세살 반 무렵부터 얘기했던 것은 모두 정확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버너어지 씨는 파사크 가를 방문해서 스완라타의 전생의 기억이 정확하고 상세한 것을 보고는 그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한 가지 실험을 시도하였다. 이 해 여름 프라서드 파사크 씨는 아무런 예고없이 챠타라푸울의 미슈러 씨를 방문했다. 스완라타는 부친 미슈러와 함께 이 낯선 방문객과 만났다.
스완라타는 "하리 라르 파사크"하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비야의 부친의 이름과 프라서드의 이름을 뒤섞은 것이었다. 프라서드가 말이 없자 그녀는 정확하게 그를 기억한 듯 다시 "바브"라고 불렀다. 그것은 가족끼리 부르던 프라서드의 애칭이었다.
카트니에 돌아온 프라서드는 자기가 겪은 일들을 마이하르의 비야의 유가족에게 전했다. 그리고서 약 한달 뒤에 비야의 남편과 아들을 비롯한 열한 명의 사람들이 챠타라푸울의 스완라타를 만나러 갔다. 스완라타는 그곳에 찾아온 사람들을 한 사람씩 지적하면서 모르는 사람은 분명히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인 친타미니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한 태도로 "당신을 카트니와 바이하르에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타미니가 40여년 전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그중에서 소년 시절의 친타미니를 가리켰다. 또 아들을 보자 "내 아들 줄리"라고 정확히 이름을 대어 지적했다. 이전에는 기억이 혼란해서 아들의 이름을 크리슈나 다타라고 불렀지만 이때에는 아들을 보고 정확하게 기억을 되살렸던 것이다.
이 만남에서 스완라타는 한 가지 사건을 말했다. 그것은 비야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남편인 친타미니가 자기가 상자 속에 넣어둔 돈 1,200루피를 훔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도난 사건은 비야와 남편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런 놀라운 만남이 있었던 같은 해 여름, 스완라타는 비야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고장으로 옮겨가면서 전생 일을 확인해 보였다. 먼저 카트니의 파사크 가에 갔을 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형제들은 물론이고 친척, 가정부 등 모두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비야 생전의 사실 두 가지를 그녀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파사크 가의 집 밖에 달려 있던 난간인데 이것은 비야가 죽은 뒤에 집을 개조하면서 없어졌다. 또 하나는 마당에 있던 나무에 대해서 "왜 그 나무를 베었는가?"하고 물은 것이었다. 그 나무는 이, 삼개월 전에 태풍으로 뿌리채 뽑혀버려서 아무도 거기에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파사크 가에서 "바다"라는 과자를 내놓자 그녀는 "예전에 잘 먹던 과자다"라고 했다. 사실 비야가 좋아한 과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챠타파푸울의 미슈러 가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과자였다.
또 바이하르의 시댁에서는 마흔 명쯤 되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을 지적해냈다. 또 비야의 방과 강으로 목욕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비야보다 먼저 사망한 시누이의 이야기도 했다. 티롤러 부락은 비야가 죽기 직전에 있던 곳인데, 여기서도 비야가 죽은 방을 가리키는 등 비야 생전에 있었던 집안 일에 대해 질문하기도 해서 전생기억의 정확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앞에서 말한 춤과 노래는 벵골지방에서의, 스완라타의 또 하나의 전생 시절에 배운 것이었다. 그녀가 벵골의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것도 비야로서의 전생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서너살쯤의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두개의 전생기억이 서로 뒤섞여 혼동되는 듯 싶더니 차츰 성장함에 따라서 그녀는 두개의 기억을 따로따로 구별하게 되었다. 벵골에서의 스완라타는 다음과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앗삼 지방 지렛트에서 생활하였고 이름은 카무렛슈였다. 그것은 비야의 다음 생애였다. 아홉살까지 살다가 미슈러 가에 환생했다."
곧, 스완라타의 전생이야기에 의하면, 그녀의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은 비야로서의 전생과 현생의 스완라타와의 중간에 끼어 있는 약 9년 동안이 되는 셈이다. 곧, 다시 말해 비야의 죽음이 1939년, 스완라타의 탄생이 1948년임을 생각하면 그 중간의 9년간이 카무렛슈의 생애인 셈이다.(비야의 죽음이 1939년인 것은 버너이지 씨가 파사크 가를 방문한 1959년 3월에 비로소 확인된 것이다.)
중간적 전생이 9년 정도라는 그녀의 주장은 실제의 사실과 잘 부합된다. 또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에 대해서 그녀가 말하는 것은 비야에 비하면 훨씬 단편적이지만, 그래도 지렛트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대한 그녀의 말은 현실적인 지렛트의 지리적 상황과 잘 부합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카무렛슈가 지렛트의 어느 집의 누구였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앗삼 주의 지렛트 지구가 1947년 인도의 파키스탄 분할에 의해 현재는 방글라데시에 편입되어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스완라타의 춤"은 벵골 지역의 앗삼 주에 있는 지렛트에서의 그녀의 전생에 의거한 춤이라는 것이다. 스완라타가 보통 사람들이 노래나 춤을 배우는 것과 같은 방법, 곧, 통상적인 경로를 통해서 "스완라타의 춤"을 배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완라타가 자라온 마디아 프라디슈 주는 힌두어를 쓰는 곳으로서 벵골지방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러나 그녀가 춤을 출 때에 부르는 노래는 벵골어인데 그녀의 양친은 물론이고 친지 중에도 벵골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노래가 벵골어라는 것이 판명된 것은 1963년으로 열다섯살 때이다. 벵골 출신의 파르 교수가 그 춤을 보고 이를 기록한 수 조사해 보니 그녀가 부르는 세개의 노래 중 두개는 벵골 출신의 시성(詩聖) 타골의 시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노래는 인도에서 1940년 이후 영화, 라디오, 레코드에 사용된 적은 있었지만, 스완라타는 열살이 될 때까지 영화관에 간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 춤을 보여 준 것은 대여섯살 때의 일이다.)
파르 교수는 그 뒤 타골 자신이 설립한 학교를 방문했을 때 스완라타가 부르는 노래와 춤의 일부분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곡조나 춤이 그녀가 하는 것과 꼭 같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지금까지도 매년 봄의 축제가 열리고 있고 그 때에는 스완라타의 춤의 일부분이 소녀들에 의해서 연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지렛트에 살고 있을 때 벵골어의 노래와 춤을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배웠다"고 하는 말은 그녀의 말대로 전생에 지렛트의 카무렛슈라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다.
현세의 스완라타가 살고 있는 미슈러 가(家)와 전생의 비야가 살았던 파사크 가(家)의 양 집안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2년이 지난 1961년, 스완라타가 열세살일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때 전생 일을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파사크의 가족에 대해 강한 친밀감을 보이고 그들과 헤어질 때나 만날 때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비야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머니 비야"로서의 태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미 장성한 서른다섯살의 아들과 열세살의 어린 어머니, 이는 세상에서도 진기한 모자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미슈러 가의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그녀는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미슈러의 가족들에게도 애정을 갖고 있었다. 스완라타의 경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열살쯤 되면 전생기억이 차츰 희미해지는 많은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그녀의 기억이 오래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1971년에도 "스완라타의 춤"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1973년 5월 그녀는 결혼한다고 했다.
그녀 스스로 두개의 생애에 대한 기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 생애의 일에 생각이 몰입되어 있을 때에는 현재의 일은 잊어버립니다만 그러다가 곧 현재로 되돌아옵니다.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에 나의 마음에는 그것과 관련이 있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서 전생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나를 만족시켜 줍니다. 요컨대 과거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커다란 요소는 그 시점에서의 상황조건인 것입니다."
제2화. 소생한 후 딴 인격으로 바뀐 자스비아.
1954년 인도 무자파르나갈 지방의 라스르푸울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마을에는 천연두가 나돌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세살 반 되는 자스비아라는 아이도 이 병으로 죽었다. 아이가 죽은 시간이 너무 늦은 밤이라 그 부모는 시신 앞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서 한밤중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들의 유해를 지켜보던 두 사람은 문득 이상한 기색을 느꼈다. 작은 유해가 희미하게 살짝 꿈틀거린 것이다. 그리고서 또 유해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차츰 꿈틀거리는 동작이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튿날 아침에는 라르의 아들 자스비아는 완전히 되살아났다.
이 사례를 조사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혹시 죽지 않은 것을 잘못 알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여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자스비아는 호흡이 정지되고, 입이 열려져 있었고, 항문과 신체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확실한 것이다.
"부활"한 지 몇 주일이 지나 몸이 회복되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자스비아는 부모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 "나는 바라문이다. 이 집의 음식은 먹을 수 없다. 바라문 식으로 조리한 음식이 아니면 안 먹겠다"는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이나 옷을 가리킬 때에도 바라문계급만이 사용하는 고상한 말로써 하였다. 무엇보다도 부모를 놀라게 한 것은 자기는 자시비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상카 소바 라므 차기이고 베디 마을에 산다. 그리고 데리고 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계급제가 엄연히 지켜지고 있는 인도에서는 최상급인 바라문계급과 다른 계급과는 식사 습관에서 조리법까지가 다르게 되어 있는데, 그는 차기 가(家)의 사람으로서 바라문계급이니 바라문 식으로 조리를 한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계속 음식을 먹지 않자 그의 부친은 하는 수 없어 한 동네에 사는 바라문 가에 요리를 부탁하였다. 자스비아는 결국 가족들의 강압에 의해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2년 가까이 바라문 가에서 조리한 음식을 먹었다.
자스비아는 세살 반에서 예닐곱살이 될 때까지는 자라는 동안에 라므로서의 생애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곧 자기는 바라문 가문으로, 베디 마을의 샹카의 아들 소바 라므이고 아내는 모르나 마을 태생이며 아들도 있다고 하였다. 집앞에는 피이팔나무가 있고 마을에는 암거(暗渠)의 배수로가 잇다고 하였으며,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심히 이야기하였다. 어느 결혼식에서 베디 마을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머리에 부상을 입고 그로 인해 죽었다는 것이다. 곧 결혼식장에서 독이 든 음식을 먹은 탓에 현기증이 심해져 우차에서 떨어졌는데, 자기에게서 돈을 꾸어간 사람이 빚을 면하기 위해 자기를 죽이려 한 것이라며 그 이름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의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여기고 라므의 생애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자스비아가 일곱살이 되던 1957년의 일이다. 샤모스크라라는 바라문계급의 여인이 5년 만에 친정이 있는 이곳 라스르푸울 마을에 다니러 왔는데, 그녀는 자스비아가 다섯살이 될 때까지 바라문 음식을 만들어주던 사람과 아는 사이였다. 거기에서 자스비아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샤모는 자신이 베디 마을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베디 마을의 이야기를 한다는 아이에 흥미를 가진 것이다. 샤모가 방문했을 때 자스비아는 집에 있었다. 문으로 들어오는 샤모를 보자 자스비아는 "큰 어머니!"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샤모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는 베디 마을의 샹카 차기의 형이었다. 그러므로 자스비아는, 적어도 그의 말에 의하면, 차기의 아들 라므였던 것이니 그의 말은 맞는 것이다. 얼마 후 베디 마을로 돌아온 샤모는 자스비아라는 기이한 아이가 라스르푸울에 있다는 것을 그녀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와 라므의 부친 샹카 차기에게 전했다. 그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라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바 라므는 결혼식장에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입은 상처로 죽었다. 그것은 1954년 5월 22일이었다. 그에게
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자스비아는 라므로서의 사망 날짜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밖의 것은 정확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순한 사고사(事故死)로 믿고 있었던 그 죽음을 독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리하여 샹카가 가족을 데리고 며칠 뒤에 라스르푸울에 옴으로써 베디 마을의 차기 가(家)와 라스르푸울의 라르 가(家)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처음 샹카네가 라스르푸울에 와서 자스비아의 집 가까이에 왔을 때 자스비아는 집앞에서 놀고 있었다. 문득 길 저쪽을 바라보던 그는 표정이 싹 변하더니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갔다.
"뭘 그렇게 허둥지둥해?"
그의 형이 물었다.
"응, 큰일났어. 나의 아버지가 왔어. 베디 마을에서 온 거야."
자스비아는 숨을 헐떡이고 목소리가 들떠서 대답하고는 집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급히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시니까 얼른 바라문의 식사를 준비해주어요!"
이때 샹카와 함께 라스르푸울을 방문한 이는 라므의 동생과 숙부였는데 자스비아는 이들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또 전생의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더니,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바르슈와르다"고 했다.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수년 전부터 말했지만 이름을 말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뒤에 차기 가(家)에서는 여러 가지로 노력하여 자스비아를 베디 마을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가 차기 가의 사람들에게 보인 친근감을 보고는 아들을 차기 가에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의 베디행을 어렵게 승낙하였다. 자스비아는 여러 날 동안 차기 가에 머물면서 그 가족들을 분간해보였다. 농장으로 안내되어서는 구획이 많이 나 있는 밭들 속에서 정확하게 차기 가의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아들인 바르슈와르에 대해서는 특히 강렬한 애정을 표시하면서 한 침대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바르슈와르가 학교에 가고 안보이자 아들이 없어진 데에 대해 불평을 하였다. 1957년의 첫방문 이후로 자스비아는 베디 마을에 가기를 퍽 좋아하였고 다시 라르 가(家)에서 데리러 오면 언제나 울면서 반항하였다.
자스비아는 그가 세살 반이었을 때, 한때 죽어 있던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라므)는 육체를 상실하고 있는 동안에 영계(靈界)에서 한 성자(聖者)를 만났는데, 그 성자가 나에게 라르의 아들 자스비아의 육체 속에 숨으라고 말했다
제3화. 전생의 직업에 집착하는 피아모드.
이야기의 주인공인 피아모드 샤르마는 1944년 10월 11일 모라다밧드에서 남쪽으로 약 150㎞ 떨어진 작은 도시인 비사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라르 샤르마는 대학교수이다. 그가 두살 반쯤 되었을 때 어느 날 부엌에 들어오더니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혀로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자기 음식은 만들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였다. 왜냐고 어머니가 물으니까 모라다밧드에 부인이 있어서 그녀가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뒤 그가 세살에서 다섯살 사이에 말한 것을,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피아모드는 전생에 모한 브라더즈 회사의 직원으로서 모라다밧드에서 비스켓과 소다수를 파는 큰 상점을 갖고 있었는데, 아내와 아들 넷 그리고 딸 하나가 있었으며, 또 모한 브라더즈는 더욱 번창하고 있어서 생활도 호화롭고 좋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가정이 너무 검소한 데에 대해 부만을 표시하였다."
피아모드는 혼자 놀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마당에서 흙을 반죽해서 과자처럼 만들어 놓거나 벽돌을 쌓아서 집처럼 만드는 장난밖에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흙으로 만든 과자는 비스켓이고 벽돌집은 상점이었다. 때로는 흙으로 만든 비스켓과 물을 가져와서 부모에게 "자 어서 잡수셔요"라고 할 때도 있었다. 이 때의 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차(茶)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부모를 곤란하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목욕과 카아드(요구르트와 비슷한 것으로 이유기에 먹는 음식)를 아주 싫어한다는 것이다. 목욕뿐만 아니라 물에 들어가는 것도 질색하며 싫어하였다. 강제로 목욕을 시키려고 하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카아드는 더운 지방인 인도사람의 중요한 영양원이어서 이것을 싫어하는 인도인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카아드 거부증은 단순히 먹기 싫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병적인 공포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 그는 가끔씩 영어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하였다. 샤르마 교수의 가정에서는 힌두어를 쓸 뿐 영어를 쓰는 일은 없었다. 특히 그가 자주 쓰는 말은 바스 터브[목욕조], 베이커리[제과점], 타운홀[공회당]―그는 "도운 홀"이라고 발음했다―의 세가지 말이었다.
피아모드가 네살 반이 되던 1949년 초여름에 그의 아버지는 동료인 프라셔드 교수에게 무심코 아들의 이상한 언행을 이야기했었다. 그 얼마 뒤에 이 교수댁에 그의 친척이 다니러 왔고, 교수는 이 친척에게 피아모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사람이 피아모드가 전생에 살았다는 모라다밧드에 살고 있다는 점이 교수의 입을 가볍게 했는지도 모른다. 교수의 친척은 우연히도 모한 브라더즈라고 불리는 모라다밧드의 메헤라 가(家)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는 모라다밧드로 돌아오자 곧 메헤라 가를 찾아가서 비사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주인인 모한 메헤라에게 들려주었다. 그 아이의 이야기는 모한의 남동생인 파아마넌드의 경우라면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는 1943년 5월 9일 복막염으로 죽었는데, 평소에 좋아하던 카아드를 과식한 탓으로 만성 위장병이 악화되어서, 그 치료를 위하여 입욕요법(入浴療法)을 하던 중에 죽은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피아모드가 자기는 "카아드의 과식으로 병이 되었고, 그리고 욕조 안에서 죽었다"고 하던 말과 꼭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린 피아모드가 자신도 결코 카아드를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말라"고 충고한 것이라든지, 목욕을 하지 않으려고 병적인 공포를 보인 것 등도 전인격인 파아마넌드의 죽음의 상황과 견주어 보면 잘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해 여름 메헤라 가에서는 파아마넌드의 사촌형이 비사우리의 샤르마 가(家)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마침 피아모드는 집에 없어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곧 피아모드는 그의 아버지와 사촌형과 함께 모라다밧드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들이 모라다밧드 역에 내렸을 때 피아모드는 마중나온 그의 사촌형을 알아보고서 인사하였다.
"아, 저카라므 챤드 형, 난 파아마넌드야!" 그는 처음으로 자기의 전생 이름이 파아마넌드라고 하였다. 이들은 곧 마차를 타고 1㎞쯤 떨어진 모한 브라더즈의 비스켓 상점으로 갔다. 피아모드는 그 사이의 꾸불꾸불한 길을 잘 지시하였으며, 상점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공회당을 지날 때에 "도운 홀"이라고 하면서 가게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점 안으로 안내된 그는 두 가지 일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하나는 소다수를 만드는 복잡한 기계장치를 정확히 설명하였는데, 그를 시험할 목적으로 일부러 연결호스를 모두 풀어두었던 것이다. 또 그는 상점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주인이 앉도록 해 둔 "가데이"라는 자리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그의 사망후에 상점을 개조하면서 없앤 것이다. 이어서 그는 메헤라 가의 전생의 가족들을 알아보았고 각자의 이름도 말하였다. 그는 방 가운데 앉아서 전생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매우 즐거운 듯이 보였다. 스무살이 넘는 아들들이 그를 "피아모드"라고 부르면 "나를 피아모드란 이름으로 부르는 게 아니야, 아버지라고 불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가끔씩 모라다밧드에 가서 메헤라 가의 가족들과 만날 때에는 언제나 파아마넌드에 적합하고 어울리게 행동하였다. 그가 열일곱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전생의 딸이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슬퍼하였다.
어린 시절의 피아모드는 지능이 우수한 아이로 여겨졌지만 차츰 다른 동급생보다 뒤떨어지게 되었다. 진학도 뜻대로 되지 못했고 스물다섯살이 되던 1969년에는 주(州)의 임시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상점 경영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당신의 인도에서는 시대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4화. 전생의 어머니에게 환생을 예언한 프라가슈.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스라로 통하는 연변에는 코시카란과 쳇다라는 두 도시가 겨우 10㎞ 정도의 간격으로 차례로 나타난다. 인구 구천의 작은 도시 쳇다에서 1951년 8월 프라가슈는 태어났다. 그는 네살 반쯤 되어서부터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코시카란 사람이고 이름은 니르말이라 한다." 그러면서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강경하게 부모를 졸라대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밖으로 뛰쳐나가서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도 코시카란에 가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그가 너무도 강경하게 졸라대니까 어머니는 시동생 다르에게 그를 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보라고 했다. 한번 데리고 가주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르는 프라카슈를 데리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때 잘못해서 코시카란의 반대 방향인 마스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러자 프라카슈는 삼촌의 잘못을 곧 알아채고 울면서 길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서 코시카란으로 갔다. 그날 프라카슈가 말한, 코시카란의 아버지의 상점은 "아버지"가 부재중이어서 닫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얼마 뒤에 프라카슈가 말한 그 상점의 주인인 보라나스의 귀에 자신을 찾아온 쳇다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 들어갔다.
프라카슈는 이전보다 더 강경하게 자기를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우기며 또 니르말로서의 생애에 대하여도 상세하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가 이 무렵에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코시카란의 사람으로 이름은 니르말이다. 아버지 이름은 보라나스이고 상점을 네 개 갖고 있다. 곡물가게, 옷가게, 잡화점 등이다. 그리고 누이의 이름은 타라다." 그리고 그밖에도 몇 사람의 이름을 말하였다.
프라카슈의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니르말이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했고 프라카슈라고 부르면 대답을 안하는 때도 가끔 있었다. 또 그는 전생의 집은 좋은 벽돌집이었는데 지금 집은 흙벽집이라 옹색하다고도 했다. 또 지금의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고도 하였다. 프라카슈는 긴 못을 하나 갖고 있었는데, 코시카란에 있는 자기 금고의 열쇠라는 것이었다.
다섯살이 되면서부터 그런 전생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되어갔지만, 아버지의 억압이 심했기 때문에, 실제로 눈에 띄는 행동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1956년부터 5년 동안은 평화로운 상태로 지나갔다.
그러다가 1961년 초여름이 되었을 때였다. 보라나스는 상업상의 볼일로 딸 메모를 데리고 쳇타 시에 왔다가 용무를 끝내고 코시카란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이들 쪽을 향해 오는 한 소년이 있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잠시 후 그들 곁에 다가와 보라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난 니르말이예요. 아버지는 코시카란에서 샤쓰를 팔고 있는...."
보라나스의 표정이 싹 변했다. 분명히 그의 잡화점에서는 샤쓰를 팔고 있다. 그러나 그가 표정이 변한 것은 좀더 이상하고 기이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5년전인 1956년에 쳇다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찾아왔더라는 이야기를 상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10년 전의 이상한 광경을 생각해 내고 있었다. 1950년 4월 보라나스의 아들 니르말은 열살 때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는데, 죽기 전에 니르말은 헛소리를 하는 상태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다. 당신은 쟈트계급의 여자다.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마스라와 같은 방향에 있는 쳇다 마을 쪽을 가르켰다. 니르말은 물론 쳇다라고 도시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히 쳇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서 몇 시간 뒤에 그는 죽었다.
지금 프라카슈가 "코시카란의 아버지"라고 했을 때에 보라나스는 바로 그 광경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는 그 광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곁에 있는 딸 메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너의 오빠다." 소년은 메모의 손을 잡았다. "비르마, 내 여동생!" 이라고 하며 프라카슈는 메모를 향해 니르말의 누이 타라와 형 자레이슈의 일도 물었다. 그러나 지금 프라카슈의 말 중에서 메모의 이름만은 정확하지 않다. 비르마는 실은 니르말의 또다른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보라나스는 프라카슈와의 이 우연한 만남을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여러 날 뒤에 보라나스 제인 가(家)의 사람들이 바아슈나이 가(家)를 찾아왔다. 제인 가에서 온 세 사람이 바아슈나이 가에 도착하자 입구로 달려나온 프라카슈는 "아아, 타라 누님"하면서 처음 보는 젊은 여성에게 달라붙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들이 응접실로 안내되자 프라카슈는 타라의 무릎에 올라앉아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하며 니르말의 어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내 어머니다." 그리고 열대여섯살쯤 된 한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내 동생 데베드라!" 사실 찾아온 세 사람은 니르말의 모친과 누이와 동생이었던 것이다. 프라카슈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들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울며 졸라댔다. 결국에는 우는 코시카란으로 달래기 위해 할 수 없이 코시카란에 가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프라카슈는 그의 아버지 브리지랄 등과 함께 코시카란으로 가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보라나스의 집까지는 약 1㎞의 거리로 복잡하고 옆골목이 많은 길이지만 프라카슈는 일행의 앞에 서서 당당히 보라나스의 집까지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전생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을 만난 코시카란은 여러 가지의 전생에 대한 지식을 나타내 보였다.
그 때까지 그가 말한 것은 모두 그대로 사실임이 판명됨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그의 전생 지식은 정확했다. 니르말의 생존 중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여동생 메모의 이름을 모르고 그 위의 여동생인 비르마와 혼동해서 이름을 부른 것이나 제인 가의 개조한 대문 앞에 머물러 서서 망설였던 것은 모두 니르말 생존 중의 지식을 그가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지금은 가게를 하고 있지 않는 이웃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알아보았고 그들의 가게에 자주 물건을 사러 갔다고도 말했다. 또 그는 니르말이 죽을 때 있었던 방에 와서는 그가 죽은 방이라고 했고, 금고가 있는 방에 와서는 그 금고 속에 있는 니르말의 서랍을 지적했다. 금고 안에는 여러 개의 서랍이 있어서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서랍을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 열쇠도 가지고 있었다. 프라카슈가 어렸을 때 말한 못은 이 금고 서랍의 열쇠였던 것이다.
그 뒤 프라카슈는 스무살이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세일즈맨으로 일하였다. 이 때에도 한달에 한두번은 코시코란에 다니고 있었다. 이전에 기억했던 것을 아직까지 기억해낼 수 있다고 한다.
제5화. 목에 칼자국 흉터를 가진 샹카.
라뷔 샹카는 1951년 7월 카나우지 시(市)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목에 흉터가 길게 나 있었는데 마치 칼로 입은 큰 상처가 아문 것 같아보였다. 이 아이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세살 때부터 자기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이발사 제게스와르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는 부모에게 장난감을 사 달라고 할 때는 언제나 "전생에 그 장난감을 갖고 있었어. 그러니 그걸 갖고 싶다"고 하며 사 달라고 졸랐다. 그가 전생에 가지고 있었다는 장난감은 용수철이 달린 공, 크리슈나왕(王)으 장난감 상(像), 목제 코끼리, 장난감 권총 등이었다.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던 그는 죽을 때의 상황에 대해 살해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전생에 그는 목이 잘려 살해된 뒤에 매장되었다. 살해되기 전에 구우바스를 먹고 있었으며 강가로 끌려가서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살인범의 이름까지 말했다. 목 주위에 있는 모반(母斑)은 전생에 목이 잘리울 때 생긴 상처 자국이라고 말했다.
샹카가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1955년 초여름, 그의 나이 네살이 되기 조금 전에, 프라셔드가 샹카가 지금 살고 있는 구프타 가(家)를 찾아왔다. 샹카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샹카의 아버지 구프타는 샹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여 프라셔드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프라셔드는 얼마 후 샹카의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겨우 샹카와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1955년 7월 30일의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오다 말고 프라셔드 씨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잠시 후 그에게 다가와서 무릎에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 난 치팟테이의 학교에서 책을 잘 읽었지. 내 나무접시는 찬장 속에 들어있고.... " 샹카는 첫대면인 프라셔드 씨를 자기의 아버지로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치팟테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 나무접시가 찬장 안에 있다는 것 등의 새로운 전생 지식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프라셔드 씨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프라셔드의 죽은 아들 믄나의 생애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믄나의 살해사건은 1951년 1월 19일 샹카가 태어나기 6개월 전의 일이었다. 믄나의 시체는 잘려진 머리와 함께 옷만 발견되었다. 믄나는 밖에서 놀다가 유괴되어 살해된 것으로 보여졌고, 두 사람의 용의자가 나타났지만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들은 근방에 사는 사람으로 한 사람은 프라셔드의 친척인 이발사이고, 또 한 사람은 세탁부였다. 샹카가 전생기억에서 말한 살인범도 이 두 사람이었다. 프라셔드 씨가 샹카를 만나서 직접 들은 구체적 살해 상황은 프라셔드를 만족하게 했다. 그 뒤에 그는 처음의 용의자에 대한 재수사를 청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샹카는 프라셔드와 만난 뒤에 어머니를 따라서 사원의 재에 갔다가 거기에서 거기에서 범인의 한 사람인 세탁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샹카는 즉시에 그를 알아보면서 공포를 나타내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로 구프타는 샹카에 대해 더욱 엄중해졌으며, 나중에는 샹카를 집에 두지 않고 다른 먼 곳에 맡겨버렸다. 집에 두면 상황이 더 나빠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생기억은 살인사건을 포함하고 있으니만큼 실제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샹카는 한때는 범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지만 성장하면서 차츰 그런 감정이 엷어졌고 1969년 이후로는 범인들에 대한 감정이 모두 없어졌다고 했다.
제6화. 전생의 남편을 섬기는 스크라.
캘커타에서 약 60㎞ 떨어져서 캄바라 마을이 있다. 스크라는 1954년 3월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겨우 한살 반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다가 목침만한 나무토막을 집어서 껴안고는 "미누, 미누"하며 마치 아기를 달래듯 어루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베개나 나무토막을 보면 꼭 그것을 껴안고 "미누, 미누" 하였다. 그러더니 차츰 말을 익히게 되자 전생의 일을 자세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트파라 마을의 라사라라는 지역에서 "그 사람"과 케토우, 카르나와 함께 살았으며 미누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영화구경을 갔다 오는 길에 맛있는 요리를 먹은 이야기도 했다. 그러더니 아버지에게 바트파라에 데리고 가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혼자서도 갈 수 있다.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크라의 아버지 K.N.센 구프라는 철도원이어서 딸아이가 이야기하는 바트파라를 열차를 타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캘커타에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트파라가 실제로 있는 줄은 알고 있었다. 그는 바트파라 가까이에 사는 직장 동료인 파르에게 스크라가 하는 말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파르는 바트파라 마을에 그의 친척이 있다고 하면서 라사라라는 지역이 있는지 또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파르의 회답을 받고 구프라는 스크라를 데리고 바트파라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 회답은 이러했다.
"바트파라 마을에는 분명히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조카 중에는 미누라는 아이가 있다. 미누의 어머니 마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 죽었다. 1948년 1월의 일이다. 그 집 주인은 아므리타랄 차크라바트리라고 하는 바라문계급이다."
이 회답의 내용에 따라 스크라를 미누의 어머니로 가정해 보면 꼭 들어맞는 것이다.
이리하여 스크라가 다섯살이 되던 1959년 여름에 파르의 친척이 주선을 하여 바트파라에 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차크라 바트리 가에도 알렸다. 스크라의 아버지 구프타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서 스크라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교차로가 많고 사잇길이 많아 복잡한 길인데도 조금도 헤매는 기색이 없이 전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 앞에서는 마나의 시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집안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전생의 남편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미누의 삼촌인 케토우와 카르나도 알아보았다. 딸 미누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축제용 수레인 라스를 넣어두는 건물이 있는 것도 지적해냈다. 라스를 두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라사라"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스크라의 전생기억에서 특이한 점은, 결혼하여 지낸 수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마나가 그 생애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친정 식구들을 거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가족은 물론이고 그 집을 방문하여서도 물건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첫방문 이후에도 스크라는 바트파라 마을을 자주 방문하였고, 그녀의 전생기억도 많이 나타났다. 한번은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달라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리고 식사 때에 마나의 남편인 하리단과 함께 먹게 되면 언제나 그가 남긴 것을 그대로 먹곤 했다. 인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이 먹고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이 부부간의 정법(定法)인 것이다. 스크라의, 딸 미누에게 대한 애정은 무척 커서 미누가 아프다는 말만 듣고서도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와했다. 또 스크라는 많은 옷을 넣어둔 옷상자 속에서 마나가 사용하던 세 벌의 옷을 골라내었다. 마나가 쓰던 재봉틀을 보자 반가운 듯이 만지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 재봉틀은 마나 생전에 열심히 일하던 것이다.
스크라의 전생기억은 세살에서 일곱살 사이에 가장 또렷하였고, 그 이후로는 차츰 희미해져갔다. 전생기억이 흐려짐에 따라서 하리단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도 차츰 냉담해졌다. 그래도 그녀가 열두살쯤 될 때까지는 하리단의 방문을 환영했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어린 소녀가 전생의 남편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열다섯살 때에는 재혼한 하리단이 그의 아내와 함께 왔다 간 뒤에 "저 사람들이 자꾸 가까이 오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열일곱살이 되자 전생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고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말하고 있다.
제7화. 전생의 가정에 애착을 가진 마릭카.
인도의 베로레 시(市)에 살던 "데비"라는 처녀는 1949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녀의 언니 곧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폰테이세리에 살고 있었다.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서는 1956년 7월 집의 아래층을 세를 놓았다. 이 일층에 세든 사람은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친척으로 그 집에는 1955년 12월 4일생인 딸 마릭카가 있었다.
마릭카는 자라면서 위층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강한 애착을 보이게 되었다. 그녀가 네살이 채 되기 전에, 처음으로 윗층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집에 놀러왔다가 거기서 의자 위에 있는 수놓은 쿳션을 보더니, 그것을 가리키며, "이건 내가 만들었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모우로가시마니의 아내는, 그것은 여동생인 데비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10년도 더 전에 죽은 여자가 만든 거야"라고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그러자 마릭카는 고개를 저으며 "그 여자가 바로 나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그녀는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처음에는 "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동생의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아주머니라고 불러라" 하고 마릭카에게 가르쳐 주었다. 마릭카는 이 "언니"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지고 기회만 있으면 "윗층집"에 올라와 놀면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이 "언니"와 함께 있으려고 했다.
이 "언니"는 마릭카의 행동이나 태도에서 죽은 데비와의 유사점을 많이 발견했다. 목욕하는 방법이나 당황했을 때의 몸짓 같은 것도 닮았으며, 남의 앞에서 좀 거만하게 걷는 걸음걸이도 닮았다. 또 마릭카의 카레 요리 솜씨는 나이에 견주어 꽤 상당한 솜씨인 것 같았다.
마릭카가 자기의 전생이 데비였노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뒤에 "언니"는 그녀를 베로레 시에 있는, 자기의 오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 집에서 커다란 사진 앞에 가서는 "나의 부모야"라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데비의 부모 사진이었다. 집안 식구의 사진을 보여주니까 그녀는 이집 주인인 오빠를 가리키며 "이건 나의 오빠야, 그렇지만 지금은 집에 없어"라고 말했다. 실제로 데비의 오빠는 이때 직장 관계로 먼 곳에 있었다. 얼마 후 마릭카는 데비의 오빠와 만났을 때에도 이 사람을 바로 "오빠"라고 알아보고서 "언니"와 마찬가지로 강한 애정을 보였다.
마릭카에게 있어 데비로서의 전생기억은 한 가지뿐이었다. 어느날 마릭카가 있는 자리에서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끼리 우연히 소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그러자 마릭카는, "나는 "카운다비"의 일을 기억한다. 그리고 카운다비의 젖을 송아지처럼 빨던 강아지도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데비가 살았을 때 그녀는 한 마리의 암소에게 "카운다비"라는 인도 왕자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그러나 이 소는 마릭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죽고 없었다. 또 마릭카가 말한 강아지는 카운다비가 새끼를 낳고 난 뒤에 그 젖을 빨아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은 이 소와 개의 이야기를 마릭카에게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마릭카의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 대한 애착은 대여섯살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 가족에 대한 것보다도 더 강한 애착을 갖는 것 같았다. 또한 자신의 부모에게는 전생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언제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들 앞에서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데비의 형제, 자매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마릭카의 사례에서는 그녀의 집이 "언니"가 살고 있는 한 건물 안으로 이사를 했다는 이상한 우연성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데비의 생애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어떤 자극 요인이 있을 때에만 의식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제8화. 형의 아들로 환생한 위지라트네.
이 이야기는 1947년 1월 스리랑카의 무갈칼토타에 태어난 위지라트네의 이야기이다. 그의 부모는 결혼 후 10여년이 지나서 이 아이를 낳았다. 이미 몇 아이를 기른 후였지만 이런 모습의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왼쪽 가슴에 둥글게 패인 곳이 있고, 또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은 손바닥에서 잘 벌어지지 않으며 다른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선인장처럼 손바닥 끝에 왼손 손가락의 첫째 관절 정도의 길이로 나와 있을 뿐이어서,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손바닥의 연장인 것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스리랑카는 전통적인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난 선천적인 불구자는 전생에서 한 행위의 업보를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아이가 두살이 좀 지났을 때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자기의 손이 이처럼 조막손인 것은 전생에 아내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아들의 이 중얼거림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남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러자 남편은 그 말이 맞는 말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20년 전에 그의 동생이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 때 동생 하미가 자기는 죽어서 형님 댁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라트란 하미는 자기 아내인 포디 메니케를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리랑카의 결혼 풍습은 두 단계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법률적으로 결혼해서 부부가 되고 다음에 혼례식을 올려 완전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률적으로 부부가 되어도 몇 달 동안은 친정에서 그대로 지내다가 뒤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남편의 집으로 가면 완전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라트란 하미와 포디 메니케는 법률적 부부관계였던 것이다.
1927년 10월 14일 하미는 관례대로 정식 혼례를 치루기 위해 아내를 데리러 처가집에 갔다. 하미는 기쁜 목소리로 메니케를 불렀지만 메니케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가 대신 인사를 하였는데 하미는 혼례식을 앞둔 말쑥한 신랑 차림으로 서 있었다. 장모와 같이 들어온 하미는 아내인 메니케가 밥을 먹고 있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건넸으나 메니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게다가 메니케는 하미와 같이 가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 큰 소리로 말다툼이 벌어지고 하미는 흥분한 채로 그 집을 뛰쳐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점심 때가 못 되어서 하미는 다시 메니케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메니케의 집으로 들어온 하미는 방으로 들어가 갑자기 메니케의 등을 칼로 찔렀다. 메니케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온 집안은 수라장이 되었고 하미는 도망치는 메니케의 뒤를 쫓아가서 다시 크리스 칼을 휘둘렀다. 그 때 누군가가 하미를 때려눕히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이미 메니케는 숨을 거둔 뒤였다.
행복한 삶을 시작하기로 한 날에, 그와 정반대로, 두 사람은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미는 이 사건으로 기소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1928년 7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7년, 하미의 형 집에 위지라트네라는 소년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실은 나의 전생의 형이다. 나는 전생에서는 라트란 하미였고 웃갈칼토타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사형당하던 그때의 상황을 위지라트네는 전생기억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수형이 행해지기 직전에 나를 위해 한 스님이 최후의 독경을 행하였다. 검은 헝겊이 머리에 씌어졌다. 트랩이 빗겨졌다. 나는 형의 일만 생각했다. 그리고 목이 조이는 것을 느끼고 불이 타오르는 도가니 속으로 떨어져 간다는 느낌이 되었다."
위지라트네가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후, 그가 네다섯살이 되었을 때에, 콜롬보대학 교수가 이 사례를 처음으로 조사했다. 그 뒤에 행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많은 부분이 당시의 재판기록과 일치했으며 어떤 부분은 재판기록에는 빠진 것도 있었다고 하였다.
하미의 결혼관계에 대해 재판 기록에는 미혼(未婚)이라고 되어 있다. 위지라트네 자신의 전생기억에 의하면 "하미"는 메니케에 앞서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첫아내는 병으로 죽었는데 이 일이 하미의 불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메니케의 살해사건을 재판기록에서 찾아보자. "일단 메니케의 집을 사건 당일 뛰쳐나온 하미는 얼마 후 크리스를 들고 다시 되돌아가서 메니케를 죽였다"는 것이 재판에서의 사실인정이다. 이 부분에 대한 위지라네느의 전생기억은 다음과 같다.
"메니케는 모하티하미라는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모하티하미는 메니케가 전생의 나, 곧, 라트란 하미와의 결혼을 거부하도록 그녀를 설득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메니케의 집에서는 그날 아침 식사준비가 되어 있어서 뭔가가 끓고 있었다."
"결혼 최종 단계가 되었기 때문에 나(라트란 하미)는 메니케의 집에 가서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메니케는 거부했다."
"아내가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걸어서 5마일 떨어진 우리 마을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 위에서 크리스를 갈았다."
"메니케를 설득시키지 못하였고 또 메니케의 집에서 나의 경쟁자라고 생각하던 사나이를 보았기 때문에 메니케를 찔렀다."
이상의 전생 발언은 현실의 재판에서의 범인의 진술처럼 현장감이 있다. 당시에 크리스를 갈던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는 그 뒤 몇 십년이 지나도 그냥 그대로 있었다. 위지라트네가 현재의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그것을 가리켜 보였다고 한다.
또 재판기록에 의하면 하미는 "나는 모하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져 체포되었다. 그래서 나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크리스를 휘둘렀다. 애초부터 살인할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고의 살인이라고 인정되어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여기에 대해 위지라트네의 전생 발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메니케가 나의 집에 오기를 거부했을 때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을 가지고 죽였다."
"모하티하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죽인 것을 메니케 집의 가정부에게 들켜서 그것은 허사가 되었다."
"죽이고 난 뒤에 모하마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졌다."
이 세 가지의 전생 발언은 앞서 말한 "크리스를 갈았다"고 한 발언과 마찬가지로 재판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재판 기록에만 의지해서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형이 선고되고 사형집행까지의 한달 동안을 하미는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하미의 사형 집행 며칠 전, 형 티레라트네가 주선하여 부처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법회가 십여 명의 스님들에 의해서 하미가 수감되어 있는 감방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하미는 말했다.
"형,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는 형의 아들로 환생해서 다시 올거야."
이 "환생"의 약속은 위지라트네의 전생 발언에서도 확인되었다. 곧 "사형집행 오일 전에 형이 형무소에서 나를 위해 거행해 준 법회에 참석한 스님들의 이름까지도 말했다.
한 스님에 의해 최후의 독경이 행해진 사실과 검은 헝겊을 머리에 씌운 것은 사형집행의 관례로 보아서 당시에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목이 조여드는 느낌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위지라트네는 나중에는 전생의 일만이 아니고 죽은 뒤의 일까지도 기억해 내고 있다. 즉 영계(靈界)의 일이라든지 위지라트네로 태어나기 전에 "새가 되어 살았다"라든지 하는 중간적 전생의 것들이다. 어느 것도 확인해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불교도들이 믿고 있는, 죄인은 인간보다 낮은 동물이 되어 환생한다는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제9화. 불교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영국인 조종사 란지스.
란지스는 스리랑카의 콧테에서 1942년 순수한 스리랑카인 가정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두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실버는 란지스가 확실한 전생기억 같은 것을 상당히 가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 그의 행동은 스리랑카인의 아리라기보다 영국 아이에 어울리는 특징을 보이곤 하였다. 그가 두살 무렵에 구토증을 느끼고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스리랑카 사람들은 구토증이 나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국식의 구토촉진술이다. 또 음식에 대한 취향도 마치 서양 사람 같아서 쌀밥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먹을 때에도 서양식으로 먹었다. 빵에는 서양인처럼 두텁게 버터를 발라 먹기를 좋아했다. 그는 사용한 적이 없는 포오크와 나이프를 호텔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다루었고 사용하는 방법도 다른 형제와는 달리 서양식이었다.
그가 부모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놀랄 정도로 빨리 영어를 습득한다는 것이었다. 스리랑카는 150여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들을 기회가 많고 또 실버의 가정에서도 영어와 실론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의 놀라운 영어 습득 능력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병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카메라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진 찍히는 것을 아주 싫어하여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 당황하면서 도망을 쳤다. 부모를 부를 때에도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라고 하는데 그는 "부모"라고 불렀다. 실론의 어느 아이도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가 가족내에서 뚜렷하게 고립적인 태도를 나타내보인 것은 서너살 무렵이었다. 그는 엄마와 형제들을 보고 "모두 나의 엄마나 형제가 아니다"고 하며, "나의 부모, 나의 가족은 영국에 있다"고 말했다. 이 일로 인하여 아버지는 그의 전생기억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전생 이야기를 들어보였다. 그는 대강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영국인이다. 나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형제 중에 톰, 짐, 마가렛이 있다. 아버지는 큰 기선을 타며 파인애플을 선물로 사 왔다. 기선에서 점심을 먹었다. 집은 언덕 위의 외딴 집이다. 저어지나 오버코트를 입는 일도 있었다. 마당이나 길에 얼음이 어는 추운 날 아침에는 불 옆에서 몸을 녹였다. 길의 얼음을 치우러 차가 온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인이지 불교인이 아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다. 그 때에는 내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형제들을 태우고 갔다."
얼음을 치우러 오는 차가 모터가 달린 차인지 아니면 말이 끄는 것인지를 묻자 그는 마차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어떤 옷을 입었는가라는 물음에 스커트와 재킷을 입고 있었다고 했으며, 어떤 과일을 먹었는가 하고 물으니 포도와 사과를 먹었다고 한다. 이런 란지스의 이야기에 나오는 얼음이나 마차는 실론에는 없는 것들이다.
란지스가 네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지방 방송국에 부탁해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전문을 영어로 방송해 달라고 부탁했다. 누이가 미리 그에게 "오늘 오후 5시 영국에서 엄마가 너의 생일을 축하하는 말을 방송해 온다"고 일러두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가족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았고 그가 가장 가까이에 앉았다. 잠시 후 여자 아나운서가 영어로 "란지스의 생일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나팔같이 만들어서 라디오에 대고 "엄마, 나 실론 사람의 집에 있어. 그리고 데려가줘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생일축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역시 엄마야, 엄마는 나를 "다아링"이라 하고 가끔 "스위트 하트"라고 했어." 곁에 있던 숙부가 "어떻게 엄마 목소리인 줄 알았지?" 하고 묻자, 그는 "엄마는 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처럼 천천히(softly) 얘기하니까"라고 대답했다. 라디오에서는 분명히 말을 천천히 했다. 그러나 실론 사람이 영어로 "천천히" 말할 때는 slowly라고 하지 softly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방송 사건은 란지스를 우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란지스가 전생 일을 빨리 잊어버릴 수 있도록 하라고 엄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동안 란지스도 전생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란지스가 십대가 된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 두고 자동차 수리공장에 취직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는 그의 소원을 허락했고 그는 자동차 수리공장에 일하러 나갔다. 그러자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자동차의 구조와 운전에 숙달되었다. 이리하여 그가 열여덟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영국으로 보내주었다. 그가 자동차 엔지니어가 되었으면 하고 막연히 기대했던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영국에 머물었는데, 영국인과 친숙하게 사귀었으며 런던이나 그 근교의 거리가 옛날부터 익숙한 장소인 듯이 느끼곤 하였다. 그리고 훗날 그는 영국에서 보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귀국하여 자동차 관계 회사에 근무하였는데, 1970년 11월 스물 다섯살 때에 이안 스티븐슨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영국인 조종사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 비행기가 내가 태어난 콧테 근방에 추락해서 죽었고 거기에서 환생한 것 같아요." 2차대전 중 콧테에는 영국 공군기지가 있었고 그 주변에서 죽은 영국인 조종사도 많았다. 그러나 그의 전생 이야기 중에는 조종사로서의 전생을 조사할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구체적 자료가 불충분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많다는 점에서 란지스의 경우는 좋은 실례가 된다 하겠다.
제10화. 전생의 애인을 그리워하는 이맷드.
이맷드 에라와르는 1958년 12월 22일 라일 레바논의 코오나엘에서 모하멧드 메라와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코오나엘은 베이루트에서 동쪽으로 24㎞정도 떨어진 곳으로, 도루스교도들의 유일한 거주지이다. 이맷드가 자라면서 처음 걷기를 배우고 또 말을 하게 되자 그는 곧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걸을 수 있게 되어서 정말 행복해."
그의 이런 말은 그의 어머니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살 반에서 두살이 될 무렵 '쟈이레'와 '마하모드'라는 두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하였다. 전생 발언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고는 보우햄지 가(家)의 가족과 함께 크리비이 마을에 살았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사람의 이름도 말했다. 크리비이 마을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손짓까지 해가면서 "아주 먼곳에 잇다"고 하였다. 실은 코오나엘 근처에 같은 이름의 마을이 있었지만 그가 손짓까지 하는 그 '먼곳'의 마을은 아닌 듯 싶었다. 또 손가락을 두개 가지런히 해보이면서 쌍동(雙胴)의 총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이맷드가 두살이 되던 어느 날 할머니 손을 잡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한 남자쪽으로 달려가더니 그의 다리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의아해했다.
"아가야, 이 아저씨를 아니?"
"그럼요, 우리 마을 사람인 걸요."
그는 사림 아슈라고 하며 이맷드가 말하던 '먼곳', 곧, 크리비이 마을 사람이다. 사림은 코오나엘에 있는 처가집에 왔던 것이다.
이멧드가 네살이 되던 해 가을, 이맷드의 집을 방문한 마셀쇼프 마을의 여자가 있었다. 쇼프 마을은 크리비이에 가까운 곳인데 그녀는 이맷드가 말한 이름의 사람들이 실제로 크리비이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코오나엘로 시집온 딸을 찾아온 것이다. 이 여자는 이맷드와 함께 그의 부모와 대화를 하다가 말했다. "아가야, 네가 말하는 케말 조움브랫드 씨는 벌써 죽었어." 케말은 이맷드의 전생 발언에 따르면 그의 전생의 친구였다. 이 말을 듣고 이맷드가 하도 슬픈 표정을 짓기에 그 여자는 이맷드에게 자기가 거짓말로 그렇게 해 보았다고 말하자 그는 성난 얼굴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나가, 이 거짓말쟁이야." 이것은 그의 부모가 처음으로 본, 전생에 대한 아주 강한 감정의 반응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맷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동안 이맷드가 자주 말한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이렇게 추정하였다. "이맷드의 전생은 크리비이 마을의 마하모드 보우햄지이고 쟈미레라는 아내를 갖고 있었다."
1963년 12월 이맷드가 다섯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크리비이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코오나엘에서 24㎞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보우햄지 가의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고 이내 돌아왔다. 이맷드가 자주 말한 전생 발언 중의 하나가 자동차 사고였다. 그는 버스 사고와 트럭 사고를 생생하게 말했다. 또 아주 어릴 때부터 대형 자동차를 거의 병적이라고 할 만큼 무서워하였다. 이맷드의 아버지가 장례식 때문에 크리비이에 갔을 때, 그 장례를 치르는 셋드 보우햄지라는 사람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오래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이맷드는 '셋드라는 친구가 있다'고 말했고 이어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는데, 그들이 친척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셋드가 사실은 이맷드 본인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맷드가 다섯살 하고 삼개월이 되었을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우연하고도 다행스럽게도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이 사건의 조사를 직접 진행할 수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크리비이 마을에 처음 와서는 이맷드의 전인격은 트럭 사고로 죽은 셋트 보우햄지라고 한 아버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셋드는 1943년에 트럭 사고로 죽었다는 것과 작년에 죽은 셋드와는 친구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전생의 친구라고 한 '유셀프 하리비'를 만나서 그가 셋드와 친구였다고 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셋드의 아내는 쟈이레가 아니라는 것과 마하모드 보우햄지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셋드의 아들 하페츠를 만났을 때 그의 부친이 환생한 인물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시리아의 같은 도루스 교인에게 시집 간 셋드의 여동생의 아들로서 스레이만이라는 사람이다. 셋드가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은 1943년 6월 8일이고 스레이만은 그 반년 후에 출생하여 지금은 스무살이 되었다고 한다.
이 스레이만의 출현으로 인하여 이맷드의 전인격(前人格)은 공중무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페츠는 말했다.
"그 아이가 말한 것 중에서 부친의 생애와 꼭 부합되는 것은 트럭 사고 뿐입니다. 그 아이는 사냥도 좋아하고 총도 가지고 있었으며 집앞의 도로는 가파른 고갯길이라고 말했는데, 그것도 전혀 틀립니다. 또 부친은 쟈미레라는 여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도 이미 알지 않습니까?"
사실 그랬다. 하페츠가 지금 사는 집은 셋드가 살고 있던 집 그대로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맷드가 말하던 집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셋드가 사고로 인해서 부상을 입고 그 후에 치료 받은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맷드가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에, 이것이 하페츠로 하여금 보우햄지 가(家)의 인물 중에서 이맷드의 전인격을 다시 찾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셋드의 사촌 이브라힘을 생각해내었다.
"이브라힘이라는 사람도 트럭 사고로 죽었습니까?"
"아니요, 그는 폐병으로 죽었어요. 그렇지만 그는 다른 점에서는 모두 합당해요." 하페츠는 즉시 우리를 창가로 안내하여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한 채의 집을 가리켰다.
"저기 벚꽃나무가 보이지요?"
분명히 이맷드의 전생 발언에서는 집에 벚꽃나무가 있었고 그 근방은 가파른 경사길이었다. 또 셋드와 친구인 하리비가 이브라힘과도 친구 사이인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맷드의 전인격을 이브라힘이라고 본다면 그의 전생 발언은 맞는 셈이다.
이브라힘은, 1949년 9월 18일에, 그전에 일년 정도 요양원에서 치료하다가 스물다섯살에 사망했고 그것은 이맷드가 출생하기 9년쯤 전의 일이다. 셋드의 아들 하페츠의 증언으로 일단 이맷드의 전인격은 이브라힘인 것으로 단정을 지었다. 그러나 큰 의문점이 남아 있다. 이맷드가 보여준 자동차 공포증이며 또 걸을 수 있는 일의 행복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 일까? 또 하나의 새로운 의문으로, 이맷드는 "트럭 사고는 운전수와의 싸움 뒤에 일어났는데 운전수는 일부러 치어죽이려 했다"고 말했지만, 하페츠는 싸움이 있었을 리가 없다고 하였는데, 당시의 재판 기록에서도 운전사의 단순과실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다른 점에서는 모두 정확한 이맷드의 전생 발언이 왜 여기서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이브라힘의 임종에 대한 하페츠의 설명에 의하면 이브라힘은 일년 정도 결핵요양원에서 지내다가 스물다섯살에 죽었다. 마지막 반년 동안은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다가 죽기 이틀 전에 자택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임종은 자택에서 하고 싶다는 희망에서였던 것 같다. 하여튼 젊고 원기왕성하던 그가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강요당했으니 걷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희망했겠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럼 자동차 사고는 어떻게 된 일인가? 트럭 사고와 버스 사고에 대한 이맷드의 발언에 대해 많은 증언을 모은 결과 그의 발언에는 틀린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입증하기 곤란한 것은, 트럭 운전수와 싸웠는데 그 운전수가 죽이려고 고의적으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싸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재판기록에는 충돌사고는 단순과실이라고 되어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셋드의 환생인 스레이만 보우햄지에게서 셋드가 죽을 때의 상황을 전생기억으로 확인했다. 그는 셋드로서의 자신이 사고가 나기 전에 싸웠다는 것은 현재까지 생각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이맷드의 전생기억이 틀린 것이다.
셋드는 사고 후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몇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셋드의 자동차 사고는 이브라힘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다. 자기 집안에서도 버스와 트럭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버스 사고 후에는 운전을 두려워하여 죽을 때까지 버스를 운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브라힘의 대형 자동차 공포증은 스티븐슨 교수가 만난 다섯살 무렵에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스레이만도 모든 차에 대해서 심한 자동차 공포증을 보였는데 그것은 열한살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이브라힘은 트럭과 자동차의 두가지 차 사고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맷드의 전생기억 중 가족과 친구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전생에 '후다'라고 하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가 어릴 때 태어난 여동생의 이름을 '후다'라고 하자고 부모를 졸랐다. 또 그는 '셋드'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형제라고 했다. 그들은 이브라힘의 사촌이거나 가까운 친척들이다. 케말 조움브랫드는 쇼트 마을의 여자가 거짓으로 죽었다고 말해서 이맷드가 화를 내었던 그 사람이다. 그는 이브라힘과 셋드와 공통의 친구로 도루스 교도 중에서는 유명한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다.
이맷드의 전생이 셋드가 아니고 이브라힘이라고 추정한 후에 스티븐슨 교수는 그를 크리비이로 데리고 왔다. 우선 처음에 셋드의 전생집(지금은 하페츠가 사는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무 것도 분별하지 못했다. 사진첩을 보여주며 몇몇 사람을 지적했지만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페츠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음에는 셋드의 집을 나와 이브라힘의 생전 집으로 갔다. 이브라힘이 죽은 뒤에 그 집은 폐쇄되어 있었다. 이맷드의 전생 발언대로 마당에는 벚나무가 있고 집 앞은 가파른 언덕길이 뻗어 있었다. 여동생 '후다'는 알아보았지만 어머니는 알아보지 못했다. 지난 10여년 동안에 너무 많이 늙어버린 것이다. 사진을 한 장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 사진의 인물은 바로 자기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이브라힘의 사진이었다. 그의 전인격을 최종적으로 확정짓는 결정적인 발언이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고는 남동생인 '파우드'라고 하였다. 자기가 마지막 이틀 동안 누워 있던 침대를 알아보았다. "아가가 죽을 때 무슨 말을 했어?" 하고 후다가 물었다. "후다, 파우드를 불러줘"라고 말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락은 두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다. 그 사이의 칸막이를 가리키며 거기에 종을 감추어 두었다고 했다. 이브라힘은 사냥을 무척 좋아하며 법으로 금지된 라이플 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 벽 칸막이에 총을 숨겨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 뿐이었다. 이맷드는 이전부터 "총을 다락방에 숨겨두었다"고 말했다. 이 지방에서는 보통 쇠사슬에 매어주지 밧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맷드가 집에 대해 말한 것도 거의 맞았다.
"집에는 우물이 두 개 있다."
"내가 죽을 무렵 정원을 고쳤다. 벚나무와 능금나무를 새로 심었다."
"차고가 둘 있었다."
"기름난로가 있었다."
한편 이맷드가 어릴 때부터 항상 말해오던 쟈이레라는 미인이 있는데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대개 이런 여자이다.
"나에게는 쟈이레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미인이다. 옷 입은 맵시가 예쁘고 하이힐을 신었다. 빨간색의 옷을 잘 입었고 또 자주 사주었다."
그러나 레바논에서 하이힐을 신는 여자는 도루스 교도 중에는 퍽 드물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하페츠로부터 쟈이레에 관해서 어느 정도 정보를 들었다. 그녀는 이브라힘이 결핵으로 죽기 직전까지 그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그 후 그녀는 이웃 동네의 남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맷드가 크리비이에 왔을 때 스티븐슨 교수는 쟈이레가 어느 마을에 사는지를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맷드는 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는 쟈이레가 살던 마셀 쇼프 마을 방향을 정확히 지적해보였다. 그러나 이맷드가 코오나엘에서는 그녀의 일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며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정작 쇼프마을에 좀더 가까운 크리비이에 와서는 그녀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전생에서의 연애사건을 가족 앞에서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심리적 측면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후 쟈이레가 결혼하여 이웃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맷드는 열살이 되었을 때 엉뚱한 발상을 갖고 있었다. 자기는 쟈이레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된 그녀와는 결혼할 수 없으니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생과 현생에서 죽음의 단층(斷層)을 넘어서는 참으로 기구한 사랑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맷드는 열살이 지나서도 상당한 전생기억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열살 때에 처음으로 마하모드 씨를 만났다. 이브라힘의 삼촌으로 그의 전생기억에서 맨 처음으로 말하던 사람이었다. 이때 마하모드 씨는 수염이 없었지만 수염이 있는 사진을 보여주니 금방 알아보았다. 또 마하모드 씨와 함께 크리비이 마을의 큰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한 군인을 만났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함께 프랑스 군대에 입대했다고 말했다. 이브라힘이 프랑스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맷드도 학교 공부 중에서 특히 프랑스어를 잘하였다.
한편 이맷드는 한때 다하르엘아하르에서 산 일이 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그것은 이브라힘과는 다른 생애이다. 그러나 그의 중간적 전생이 너무 단편적이어서 증명하거나 조사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는 1973년에 열다섯살이 되어 정상적인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에서 셋드의 환생인 스레이만 보우햄지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셋드 보우햄지가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은 1943년 6월 8일이고, 그의 환생인 스레이만은 같은 해 12월 3일에 시리아의 라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셋드의 여동생으로, 같은 도루스교도의 집안에 시집온 것이다. 스레이만은 말을 하게 되면서 자신은 셋드의 환생이라고 하였다. 서너살 무렵에 처음 크리비이 마을에 왔다. 당시 열한살쯤 되었던 하페츠의 말에 의하면 스레이만은 혼자서 셋드의 집을 정확하게 찾았다. 셋드의 사고와 죽음의 상황을 이야기했고 하페츠 등 아이들을 알아보며 이름을 말했다. 또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에게 부친다운 태도를 보이며, 자기의 어머니를 '여동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페츠 자신도 어린 시절 크리비이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분간했던 것, 마을의 밭이나 포도밭의 경계를 정확히 지적했던 일, 셋드의 소유인 권총과 웃옷 등을 구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제11화. 전생에서 환생을 약속한 마르따.
1917년 10월에 스물여덟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리아 준아리아 데 오리베이로는 브라질의 돈 페리시아 마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두번이나 연애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나머지 폐병으로 죽었다. 특히 그녀의 두번째 애인이었던 후로징호가 주위의 반대로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자 자살해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충격은 더욱 컸던 것이다.
마리아가 죽고 열달이 지난 1918년 8월 14일, 이 지방의 학교 교사인 로렌쯔 부부 사이에 열두번째의 아이인 마르따가 태어났다. 그녀가 두살 반이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에, 그 부모는 즉시 이 아이는 마리아 준아리아의 환생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마르따가 한살이 되기 조금 전에 그녀의 전생의 아버지인 오리베이로가 로렌쯔 씨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는 오리베이로 씨에게 안기려 하며 '아빠'라고 부르는 듯 하였던 것이다.
마르따는 자기의 전생이름을 '마리아'라고도 하고 또 '싱하'라고도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이름 하나는 '준아리아'라고 하느냐고 그의 아버지가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녀의 전생 이야기는 사망한 싱하의 아버지 오리베이로 씨의 농장의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소와 양들이 많이 있고 오렌지가 많이 열렸다고 하며, 우물물을 먹었다고 했다. 또 어머니의 말안장을 보면서 자기와 함께 산 것이라고 했다. 싱하와 이다는 사이가 좋아서 사실 그랬던 것이다.
마르따는 자기가 싱하였을 때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고 했다. 그것은 마을 축제에 구경갔다가 심한 비를 맞은 이후부터였다고 했다. 싱하는 폐병으로 죽었다. 싱하의 임종 직전에 문병을 갔었던 마르따의 어머니 이다는 그때 일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다 곁으로 다가와서 그 귀에 속삭이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난 꼭 환생할 거야, 당신의 딸이 되어서. 그리고 지금의 나의 생애의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거에요."
그러나 그때 싱하가 겨우 한 말은 "난, 난 약속해...." 하는 말이었다. 이 '마지막 약속'은 마르따가 전생 발언을 시작하기까지는 로렌쯔 부부만이 알고 있었다. 싱하의 장례식은 폐병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겨우 몇 사람만 참석했는데 마르따는 그때 참석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그녀는 갑자기 일어나 소리질렀다. 세리카가 "싱하, 싱하"하면서 자기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리카의 환상(幻想)을 본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세리카의 죽음이 전해졌다. 세리카가 죽은 시각은 마르따가 환상을 본 시각과 꼭 맞았다. 세리카는 싱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다는 싱하에게 물어보았다.
"싱하는 내가 농장에 갔을 때 어떻게 나를 대해주었지?"
"커피를 준비하고 집앞의 돌 위에 축음기를 장치하고서 집 밖에 나가 기다렸지요."
사실이었다. 이다의 집과 싱하의 농장과는 12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싱하는 이다가 오는 날을 미리 알고는 이렇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싱하도 마르따와 같이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
마르따는 자기 집에 온 싱하의 첫번째 애인을 알아보았다. 또 사촌도 알아보았다. 어느날 부친의 상(喪)을 당한 마을 여인이 마르따의 집에 왔을 때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생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것이예요. 나를 보세요. 나도 죽었었지만 이렇게 아직 살아있잖아요."
마르따가 열두살 때 오리베이로의 농장에 갔다. 가면서 농장으로 가는 도중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전생의 집안에 들어가서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시계 뒤에 금색으로 자기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고 했다. 벽에서 떼내어 보니 과연 금색으로 '마리아 준아리아 데 오리베이로'라는 싱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흑인 노예의 이야기, 집에 있던 고양이 따위에 대한 전생기억은 모두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싱하는 일부러 병사(病死)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최후는 목과 폐를 앓아서 거의 말도 하지 못했었다. 마르따도 어릴 때부터 기관지염을 잘 앓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잠겼다고 한다. 또 마르따는 피와 비에 대해 거의 병적인 공포를 갖고 있었다. 그 후 쉰살이 더 지나도록 싱하의 자살한 애인 후로징호에 대한 기억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제12화. 언니가 죽어서 남동생으로 환생한 파우로.
파우로는 앞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르따의 남동생이다. 그는 마흔세살에 피해망상증으로 누이인 로오라의 집에서 자살하였다. 파우로 역시 어느 인물의 환생이었다. 곧 로렌쯔 집안에는 형제들 중에 환생한 아이가 둘이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렌쯔 씨에게는 파우로 위로 열두명의 형제들이 있었는데, 맨 위의 누이가 '에미리아'라고 했다. 그녀는 열아홉살이던 1921년 10월 12일에 약물자살을 하였다. 로렌쯔 씨가 심령문제를 연구하였듯이 그의 아내도 심령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영매(靈媒)의 역할을 하여 영혼과 직접 교신을 하기도 했다. 에미리아가 자살한 얼마 후에 모친은 에미리아의 영혼에게서 통신을 받았다. 그녀는 자살한 것을 후회하며 남자아이로 환생해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런 예언이 있은 뒤에 에미리아가 자살한 지 약 1년 반이 지난 1923년 8월 3일에 파우로가 태어났다.
파우로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아이하고만 놀고 남자와는 놀지 않았으며, 또 인형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리고 옷도 바지를 입지 않고 스커트만을 입으려고 하였다. 음식 먹는 데 있어서 그에게는 흥미로운 버릇이 있었다. 빵을 먹을 때에는 아무리 새로 만든 부드러운 빵이라도 가장자리를 뜯어내고 먹었다. 이것은 에미리아와 같은 버릇이었다. 네살 때에는 배운 적도 없는 재봉틀을 사용하여 바느질을 하였는데, 집에 있는 재봉틀을 보고 자기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자기에게 재봉하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데 그것은 에미리아으 재봉 수업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에미리아가 동생들 중에서 로오라를 가장 귀여워했듯이 파우로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누이인 로오라의 집에서 함께 살고 싶어하였다.
에미리아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에 불만을 품어왔다. 20세기 초의 브라질에서는 여자에게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고, 특히 미혼여성이 혼자서 여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미리아가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동생들에게 자주 말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파우로도 여행을 무척 좋아하였다. 스티븐슨 교수가 그를 만난 것은 그가 서른아홉살이었을 때인데 그는 그때가지도 여성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교수는 그에게 일종의 심리 테스트를 해보았다. 그것은 동성애의 남자와 여자를 테스트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파우로는 여성경향도를 보여주었다. 이때 그는 독신이었고 결혼할 뜻도 없는 듯 하였다. 그는 여행 등의 자유에 대한 희망과 여성적인 경향의 두 가지 이유로 독신으로 지내다가 마흔세 살 때 자살하였다.
제13화. 손자가 되어 환생한 윌리엄.
다음에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는 알래스카와 카나다에 살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여러 부족들을 통칭하는 트란짓트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이들은 모두 가명을 썼는데 남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다는 관계자들의 희망을 받아들인 것이다.
윌리엄 죠오지 1세는 훌륭한 어부였다. 그는 다른 트란짓트인과 마찬가지로 환생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으며,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환생하고 싶은 소망은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자기 아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셋째 아들과 며느리에게 자기가 만일 환생한다면 그들의 아들로 환생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 몸에 있는 두개의 반점을 가리키면서 그 아이는 이와 똑같은 모반(母斑)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니 이 표시로써 자기가 환생한 것인 줄 알라는 것이었다. 그 두개의 반점은 하나는 왼쪽 어깨에, 또 하나는 왼쪽 팔꿈치 옆에 있었다. 윌리엄 죠오지 1세는,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금시계를 아들에게 주면서 그 시계를 잘 보관해 두라고 하였다. 훗날 환생할 것임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했다.
그러고서 몇 주일 후인 1949년 8월에 그는 자신이 일하던 어선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그 뒤에 얼마 안 가서 셋째 며느리는 임신을 하여 1950년 5월 5일에 아기를 낳았다. 이 아이는 아홉번째 아이였다. 윌리엄 죠오지 1세의 실종이 있은 지 9개월이 경과한 뒤였다. 며느리는 출산시의 진통 중에 꿈을 꾸었다. 시아버지가 나타나서 빨리 자기 아들과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꿈에서 깨어난 뒤, 마치 시아버지가 있는 것 같은 환각에서 주위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녀가 꿈속에서 본 시아버지는 죽기 전의 어른 모습 그대로였다.
태어난 아기에게는 시아버지의 경우처럼 왼쪽 어깨와 왼쪽 팔에 검은색의 모반(母斑)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아기에게는 윌리엄 죠오지 2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성장하면서 그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죠오지 1세의 환생이라는 확신을 더욱 갖도록 하였다. 1세와 얼굴이 닮은 것은 물론이고 걸음걸이와 성격까지도 비슷하였다. 그리고 고기잡이나 배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어느 만(灣) 부근이 제일 좋은 어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어선의 그물 사용법도 배우기 전부터 이미 아는 듯이 보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보석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방에 우연히 들어왔다가 금시계를 보더니 "이건 내것이야"하면서 자기가 갖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후 열살쯤 되면서부터는 전생기억들이 거의 없어졌다.
제14화. 부족 전쟁에서 전사 후 환생한 찰스.
이 사례에서는 어린 시절에 전생기억을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당사자가 자기의 전생을 이야기하였다. 1961년 스티븐슨 교수가 조사할 당시에 찰스 포터 씨는 쉰살이 넘은 사람으로서, 이제는 전생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며 그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로써 자기의 전생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 사례는 다른 것과는 좀 다른 특징을 갖는다.
어린 시절에, 그는, 트란짓트 인디언 부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싸우다 창에 찔려 죽은 사람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해당한 장소와 죽인 상대방의 이름, 또 자기의 전생의 이름 등도 말했다는데, 전생에 자기를 죽였다는 사람은 그의 외숙부였으며 당시에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찰스가 자기의 죽음에 관해 말할 때는 오른쪽 배를 가리키며 창에 찔려 죽었다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처가 있는 줄을 안 것은 성장한 뒤에라고 말했다. 그의 오른쪽 배의 늑골 바로 밑에 검은색 반점이있는 것을 스티븐슨 교수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리를 창으로 찔린다면 간장을 상해서 즉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찰스 포터는 1907년 시트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다섯살 위인 누이의 말에 의하면, 찰스가 부족 전쟁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한 시기는 1909년에서 1915년 경의 일이다. 그리고 그를 죽인 사람이라고 한 노인이 아직 살아 있었다. 가령 이 노인이 1910년에 적어도 예순다섯살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1845년에 출생한 셈이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트란짓트인이 부족 전쟁에서 점차로 창을 사용하지 않게 된 시기는 1852년에서 1882년 사이일 것이라고 한다. 1845년에 태어난 사람이 장성하여 창을 쓰는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는 것이다. 부족 전쟁 중에 창으로 살해되었다는 찰스의 말은 이 점에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다.
이미 아흔살이 넘은 찰스의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전인격(前人格)이 살해되었다고 하는, 문제의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이나 참가 인물 등의 일을 이 이상 확인할 수가 없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그 뒤에도 62년, 63년, 65년, 72년에 각각 앨러스카의 그를 방문하였고, 때로는 편지연락도 했다. 1972년 예순다섯살인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제15화. 창검에 대한 공포를 가진 데레크.
1852년(또는 1853년)에 알래스카의 시트카와 랑겔 두 지역의 트란짓트인들 사이에는 화평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시트카 측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랑겔의 대표자 사십여 명을 살해했으며 그 중 몇 명만이 겨우 랑겔로 도망쳐 돌아왔다. 이 일이 있는 뒤로 1918년에 새로이 화평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 양 부족 사이에는 반목이 계속되었다.
데레크가 출생한 것은 1918년으로, 그 참극이 있은 지 60여년이나 지나서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배에 모반(母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자신은 어릴 때부터 이 점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자신의 조상 중 어떤 한 사람의 신상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서른여덟살이 된 1955년이었다. 어느 날 문득 웬 할머니가 그 모반을 보더니 랑겔의 토착민인 '쿠'라는 사람이 입은 치명상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일러준 것이다.
데레크는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쿠'라는 사람은 앞서 말한 참사가 일어났을 때, 자기 부족인들을 죽이려거든 자기를 먼저 죽이라고 하며 맨손으로 당당하게 대항하다가 가장 먼저 살해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데레크 자신은 전생의 기억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쿠에 대한 전생기억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와 쿠와의 사이에서 깊은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는 점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첫째가 어린 시절부터 칼, 총, 창 등에 특별한 공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소년 시절에도 다른 아이들처럼 칼을 가지고 놀거나 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군대에 입대했으나 총검의 훈련을 아주 싫어했다. 또 자신의 아이들도 칼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그의 병적인 공포증은 총과 같은 다른 무기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고 칼날이 달린 무기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는 랑겔 태생인데 시트카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시트카에 거주하면서 시트카의 트란짓트인의 조직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 두 지역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좌절과 실망을 거듭하면서도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 시트카의 트란짓트인에 대한 그의 행동에서, 화평 교섭을 위해 시트카에까지 원정을 가서 생명을 잃은 쿠와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이 지나고 장년기에 이르도록 칼에 대한 공포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식사 때에 나이프를 쓴 적이 없다고 하였다. 또 데레크 자신은 긴장했을 때 가끔씩 배에 통증을 느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전생과 질병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16화. 조카딸의 아들로 환생한 콜리스.
트란짓트인들 중에 빈센트라는 사람은 죽기 1년쯤 전에 그의 누이의 딸, 곧, 조카딸인 초트킹 부인에게 강한 친근감을 보이면서 그녀의 아들로 환생할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는 지금의 자기처럼 말더듬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꼭 같은 흉터를 갖고 있을 터이니 그것이 자기의 환생 증표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등에 있는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또 코 오른쪽에 있는 점을 가리키며 그것도 증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센트가 죽고 8개월이 지난 1947년 12월에 초트킹 부인은 아들을 낳고, 그를 콜리스 초트킹 2세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빈센트가 죽기 전에 말했던 것과 똑같은 점과 흉터를 코와 등에 갖고 있었다. 콜리스가 말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물으면 '카코디'라고 하였다. 그것은 빈센트가 속해 있던 부족 이름인데, 빈센트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족 이름인 '카로디'로 알려져 있었다. 콜리스는 그것을 완전한 트란짓트의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숙모가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곧 그녀는 콜리스가 태어나기 좀 전에 빈센트가 초트킹에 와서 살게 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콜리스가 두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빈센트의 딸과 아들 그리고 그 부인을 만났는데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빈센트와 친척 사이인 사람들을 몇 명 알아보았다. 그는 빈센트와 관련된 사건 두 가지를 말하였다. 하나는 생전의 빈센트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엔진 고장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배의 구조를 받은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전생의 빈센트로서 자기 부인과 함께 현재의 콜리스 씨 집을 방문했을 때에 잠자던 방을 기억해낸 것이다.
콜리스의 어머니가 놀란 것은 그가 보여준, 빈센트와 흡사한 몇 가지 행동의 특징이었다. 콜리스는 머리를 빗을 때 언제나 이마쪽으로 머리를 내려빗었는데 그것은 빈센트와 똑같은 습관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부모가 빗어주던 머리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또 빈센트는 아주 심한 말더듬이었다. 환생해서는 말더듬이가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까지 했지만 콜리스도 심한 말더듬이었다. 유달리 신앙심이 깊은 것도 같았다. 빈센트처럼 콜리스는 배와 해상생활을 좋아해서 바다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빈센트가 왼손잡이였듯이 콜리스도 어린 시절에는 그랬었다.
트란짓트인들 중에 빈센트라는 사람은 죽기 1년쯤 전에 그의 누이의 딸, 곧, 조카딸인 초트킹 부인에게 강한 친근감을 보이면서 그녀의 아들로 환생할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는 지금의 자기처럼 말더듬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꼭 같은 흉터를 갖고 있을 터이니 그것이 자기의 환생 증표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등에 있는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또 코 오른쪽에 있는 점을 가리키며 그것도 증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센트가 죽고 8개월이 지난 1947년 12월에 초트킹 부인은 아들을 낳고, 그를 콜리스 초트킹 2세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빈센트가 죽기 전에 말했던 것과 똑같은 점과 흉터를 코와 등에 갖고 있었다. 콜리스가 말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물으면 '카코디'라고 하였다. 그것은 빈센트가 속해 있던 부족 이름인데, 빈센트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족 이름인 '카로디'로 알려져 있었다. 콜리스는 그것을 완전한 트란짓트의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숙모가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곧 그녀는 콜리스가 태어나기 좀 전에 빈센트가 초트킹에 와서 살게 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콜리스가 두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빈센트의 딸과 아들 그리고 그 부인을 만났는데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빈센트와 친척 사이인 사람들을 몇 명 알아보았다. 그는 빈센트와 관련된 사건 두 가지를 말하였다. 하나는 생전의 빈센트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엔진 고장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배의 구조를 받은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전생의 빈센트로서 자기 부인과 함께 현재의 콜리스 씨 집을 방문했을 때에 잠자던 방을 기억해낸 것이다.
콜리스의 어머니가 놀란 것은 그가 보여준, 빈센트와 흡사한 몇 가지 행동의 특징이었다. 콜리스는 머리를 빗을 때 언제나 이마쪽으로 머리를 내려빗었는데 그것은 빈센트와 똑같은 습관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부모가 빗어주던 머리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또 빈센트는 아주 심한 말더듬이었다. 환생해서는 말더듬이가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까지 했지만 콜리스도 심한 말더듬이었다. 유달리 신앙심이 깊은 것도 같았다. 빈센트처럼 콜리스는 배와 해상생활을 좋아해서 바다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빈센트가 왼손잡이였듯이 콜리스도 어린 시절에는 그랬었다.
제17화. 데자 뷰에 의해 전생을 기억한 노먼.
노먼은 1944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서너살쯤 되던 어느 날 부모와 함께 고향에서 50㎞쯤 떨어진 외딴 바닷가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노먼은 갑자기 흥분하여 자기는 이 바닷가에서 훈제소를 하고 있었고 나중에 장님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흥분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하며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노먼은 이 바닷가에서 한 말 이외에는 전생의 말을 하지 않았다.
노먼의 이 말은 그의 할아버지인 헨리 데스피스 1세의 생애와 두가지 사실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업에 종사하며 이 바닷가에서 훈제소를 갖고 있었다. 1935년에 여든다섯살로 죽었는데 마지막 4년 동안은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1930년에 이 훈제소를 버렸고, 노먼이 그곳에 간 1947년에는 말뚝 몇 개가 남아 있을 뿐 훈제소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노먼은 이 바닷가에서 한 말 이외에는 전생의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것으로써 노먼은 할아버지가 환생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노먼은 시력이 약해서 열네살 때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다. 심한 근시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나 또 그의 네 형제들은 시력에 아무 장애가 없었다.
이 사례에서처럼, 처음보는 상황이 과거 어느 때에 체험한 것 같다는, 일종의 착각 현상인 데자 뷰(Deja-Vu) 경험에 의해 환생을 말하는 사례는, 구체적인 자료는 적으나, 세계적으로 많이 발생하는 환생 사례이다.
제18화. 누님의 아들로 환생한 지미.
지미 스벤손은 1952년 11월 22일 시트카에서 태어났다. 그가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두살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전생에 현세의 엄마의 동생이었으며 크러쾅 마을에 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트카에서 약160㎞쯤 떨어진 크러쾅에는 엄마의 동생인 존 시스코가 이전에 살았었다. 지미는 화가 날 때면 이렇게 이삼년 동안 전생 이야기를 하다가 그 뒤로는 말하지 않게 되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1961년에 이 사례를 조사했는데 그때 아홉살이던 지미는 이미 전생 일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록은 그의 부모와 형제들의 간접증언에 의한 것이다.
지미의 외삼촌 존 시스코가 죽은 것은 1950년 여름으로 스물다섯살 때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여인과 함께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에 뱃놀이를 나갔는데 몇 시간 뒤에 보트만 발견되었다. 그의 사망이 단순한 사고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두 여인의 질투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지미는 자기는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배에는, 태어날 때부터, 총탄 자국으로 보이는 네개의 모반(母斑)이 있었다.
그밖에도 몇개의 환생기억을 이야기했다. 자기는 존이지 지미가 아니라 하면서 크러쾅에 가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뒷날 크러쾅에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나 장로에게 강한 친밀감을 보였으며, 시스코의 친구였던 이를 만나서는 고기잡이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외삼촌 한스 시스코에게 "나는 조카가 아니고 동생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전생기억은 네살 때부터 흐려지기 시작했다.
제19화. 전생의 총탄 흉터를 가진 헨리.
헨리 엘킨은 1899년 앙군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가슴과 등에는 모반이 있었는데, 서로의 위치로 볼 때에 총탄이 앞뒤로 관통한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해 전생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앙군의 공회당에 갔을 때에, 건물 안의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서 예전에 외할머니를 자주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을 뿐이다. 1880년 이전에는 여자들이 이 공회당에 모여 전쟁에 나간 남자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헨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었다.
헨리는 여덟살 때에 전생에 대한 일을 문득 기억해냈다.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진 두 사람을 구해준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그런 사건은 있었지만 그것은 헨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라고 했다.
헨리의 이런 기억들을 확인할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그의 진술에 의거할 뿐이다. 스티븐슨 교수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 바다에서의 사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말했다. 곧 부모에게서 "그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해줄 무렵에는 아직 너의 누이가 살아 있었고 누이는 그때 아버지의 배에 타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누이란 아직 헨리가 어렸을 때 열두어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이야기에서 볼 때 이 누이가 죽었을 때 그는 대여섯살쯤 되었으리라고 보면, 헨리는 1899년에 태어났으니, 누이의 죽음은 대략 1905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때가 열두어살 때였다고 한다면, 그녀는 1892년에 출생한 셈이다. 이 누이가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것은 대여섯살 이후였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문제의 인명구조 사건은 1897년 쯤의 일이다. 헨리가 태어난 1899년에서 불과 2년 앞선 일이다.
헨리의 전생기억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전생경험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다면 이런 기억들을 그가 환생하기 이전의 중간적 생애에 대한 기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사례는 트란짓트인의 사례 조사에서 중간적 생애에 대한 전생기억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20화. 여자로 환생한 그나나틸리카.
그나나틸리카는 1956년 2월 14일 스리랑카(실론)의 헤두나훼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두살이 조금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종합해 보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버지는 우편배달부다. 어머니는 뚱뚱하다. 다아다사라는 형이 있는데 개에 물린 적이 있다. 누이 한 사람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자주 땔감을 샀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마을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약 30㎞ 떨어진 탈라와켈레에 갔다온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서 돈을 주고 땔감을 산다는 얘기는 전에 그나나틸리카가 말했던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녀의 아버지는 속으로 깜짝 놀랬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마을 사람의 이야기가 그나나틸리카를 강하게 자극한 듯했다. 그 때부터 더욱 상세하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생에 탈라와켈레에 살았다. 거기에는 야자나무가 없다. 학교 갈 때 기차를 타고 간다. 긴 터널을 지나간다. 누나인 수두아카도 학교에 간다."
그나나틸리카가 네살 때에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탈라와켈레에 찾아갔다. 전생의 집이 있었다는 우체국까지는 잘 찾았는데 막상 그 집은 찾지 못했다. 그곳은 건물이 없는 빈터였다. 그녀가 전생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전해들은 데라 스님은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그녀의 전인격(前人格)을 찾아냈다. 그는 탈라와켈레에 살았던 소년으로, 틸레케라트네라고 했고 1954년 11월 9일 열세살로 죽었다.
이런 소문을 전해듣고서 텔레케라트네가 다니던 중등부의 교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나나틸리카는 금방 그 선생님을 알아보면서 이름도 기억해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는 한번도 꾸중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을 한번도 야단친 일이 없는 특이한 교사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부처님이 고행에서 성불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 선생님이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었다.
또 그나나틸리카가 "기차를 타고 학교에 통학했고 긴 터널을 지나갔다"고 한 전생 발언도 이 선생님의 방문으로 입증되었다. 틸레케라트네는 햇튼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학교 가는 길에 실론에서 가장 긴 터널이 있어서 그는 학교를 다니느라 하루에 두번 이 터널을 통과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또 아직 보지도 못한 햇튼 시(市)의 거리 모습을, 특히 학교와 역을 중심으로, 정확히 그려보였다. 또 그녀의 오빠가 어느 큰 행사 때에 춤을 보이러 탈라와켈레에 간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 행사는 실론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영국 여왕의 방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여왕이 타고 있던 기차의 창너머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본 일이 있다고 말했다. 또 이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생전의 틸레케라트네는 인간은 죽어서 환생하는가를 묻고 환생할 때에 남자가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1961년 초 그나나틸리카가 다섯살일 때 그녀는 다시 틸라와켈레에 왔다. 그녀는 부모와 스님, 그리고 선생님들이 모인 곳에서 전생 가족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모두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 때 특기할 것은 틸레케라트네가 좋아했던 누이에게는 특별히 친밀감을 보이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불상(佛像)을 깨뜨린 형에게는 반감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틸레케라트네의 전생의 태도와 상응하는 것이다.
그 후 열네살이 될 즈음 그녀는 극히 평범한 소녀가 되었다. 머리 모양이나 체격 등 어디로 보나 남자의 환생이 아니라 정상적인 여자 아이였다. 그러나 언제나 파란 하늘 빛깔을 좋아했다. 그것은 틸레케라트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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