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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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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 감응록 바로가기 http://cafe.daum.net/amtb/Jd5c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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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은 어떤 부처님이신가?

(혜정 큰스님)


아미타불은 어떠한 부처님이십니까? (이에 대해) (事: 현실)와 이(理: 이치)의 두 방면으로 구별하여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미타불은 본원本願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시다.

2. 아미타불은 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시다.

3. 아미타불은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이시다.

4. 아미타불은 임종 때 맞이하러 오시는 부처님이시다.

 

 

1, 아미타불은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다


 

아미타불이 나무아미타불이 되신 까닭은 그 부처님의 본원本願 때문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본원이 없으셨다면 이처럼 위대한, 능히 우리들을 구제하실 수 있는 부처님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한 분 한 분의 부처님들이 성불하신 까닭은 각 부처님마다의 본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미타불의 본원은 다른 모든 부처님들과는 차별이 있으시니, 이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에게는 없는 것이자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을 뛰어넘는 본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뒤에, 당신의 본원에 의하여 성취하신 큰 힘은 특별히 수승하고 광대하며 넓고 깊다는 것입니다.



‘본원’은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원에서의 ‘본本’ 역시 ‘인본(因本: 인지因地의 본원)’과 ‘근본(根本: 주요한 본원)’의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원’이란 두 글자부터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한 분 한 분의 부처님은 성불하시기 전에 모두가 반드시 먼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발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불문의 제자들은 매일 부처님 앞에서 ‘참회문懺悔文’을 읽으면서 자기의 죄업을 참회함과 동시에 보리심을 발發합니다. 발보리심發菩提心이란 사실상 바로 이 사홍서원이라는 게송을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길 서원합니다. 다함없는 번뇌를 끊기를 서원합니다. 한량없는 법문을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를 이루기를 서원합니다(眾生無邊誓願度, 煩惱無盡誓願斷, 法門無量誓願學, 佛道無上誓願成).”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이 똑같이 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홍서원’은 ‘총원’에 속하며, 한 분 한 분의 보살님과 부처님에게 다 통합니다.


그러나 ‘별원’에 있어서는 각자 같지가 않습니다. 예컨대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500가지 원願을 발하셨고, 약사불께는 12가지 원이 있으시고, 아미타불께는 48대원이 있으신 것 등입니다. 󰡔무량수경󰡕 중에 아미타불께서 “나는 세상을 초월하는 원을 세우리라(我建超世願)”고 말씀하신 뜻은, 아미타불의 그 당시 발원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발원을 뛰어넘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에게는 없는 원이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불을 소개하실 때에도 “모든 부처님을 뛰어넘는 발원(發願逾諸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미타불께서 발하신 48원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의 원을 초월하는 원이라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께서 발원하신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다고 나옵니까? 경에서 (석가모니불께서) 말씀하시길 “5겁 동안이나 충분하게 불국토를 장엄하고 청정하게 할 행을 사유하여 선택하셨느니라(具足五劫, 思惟攝取, 莊嚴佛國, 清淨之行)”고 하셨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어떻게 하면 아주 간단하고 쉽게 시방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시방중생들이 한 번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빨리 성불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상세하게 고려하시고 계획하셨는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미타불께서는 5겁이나 되는 기나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사유하셨던 것입니다.


발원을 한 뒤에, 만약 계속하여 공덕을 쌓기 위해 육도만행六度萬行도 닦고 널리 무량한 법문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런 발원은 헛된 발원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공덕을 쌓으셨겠습니까? 경(󰡔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의 세월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고 심으셨다(於不可思議兆載永劫, 積植菩薩無量德行)”고 하셨습니다.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이라는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공덕을 쌓으신 것입니다.


‘조兆’와 ‘재載’라는 이 두 가지 숫자는 모두 매우 큰 숫자입니다. ‘조’는 그런대로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지만 ‘재’에 

이르면, 중국의 숫자 중에서 ‘재’보다 더 큰 숫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조재’ 이외에 또한 ‘영永’이 있는데, 이 숫자라면 더욱 깁니다. ‘영’은 영원하다는 것으로 시간을 초월합니다. ‘겁劫’은 천문학적인 숫자이지만 그래도 헤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에서 ‘불가사의’라는 네 글자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불가사의’는 말할 수도 없고 일컬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으시고 나서 비로소 당신이 세우신 48대원을 완성할 수 있으셨는데, 모든 원 하나 하나가 진실로 원만하게 구족했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이러한 48대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거치셨는데, 이 기나긴 시간 동안 다른 부처님들은 인지因地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불과를 증득하시고, 다시 과지果地에서 되돌아와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고는 열반에 드셨지만, 아미타불께서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수행을 하고 계셨고 여전히 중생을 위하여 공덕을 쌓고 계셨습니다.

 

 왜 48대원을 그렇게 긴 시간 동안이나 사유하셨을까요? 왜 48대원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그렇게 긴 시간(수행)이 필요하셨을까요? 이것은 48대원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근본 원’을 철저하게 성취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지因地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인지에서 세운 48대원은 하나하나의 원이 모두 인지의 본원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원이 있으니, 바로 제18원입니다. 무엇 때문에 정토법문에서 아미타불의 본원을 말할 때엔 전부 제18원을 지목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48원 가운데에 만약 제18원이 없다면 48원은 귀하고 수승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오직 제18원이 있어야 비로소 아미타불의 48원의 귀중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18원은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해야 할 원입니다. 시방세계 중생의 범위는 한없이 넓어 이른바 ‘십법계十法界’의 중생이 있습니다. ‘십법계’는 사성법계(四聖法界: 불‧보살‧연각‧성문)와 여섯 가지 범부법계(凡夫法界: 천도‧아수라도‧인도‧지옥‧아귀‧축생)를 포함합니다.

 

사성법계는 이미 범부를 초월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어(超凡入聖)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생사윤회를 하지 않는 성자들이며, 다른 여섯 가지 법계는 아직도 육도 가운데서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 범부들입니다. 이 십법계 가운데서 불법계를 제외한 나머지 구법계의 유정들은 모두가 다 아미타불의 구제의 대상이니, 이것이 바로 제18원이 구제하는 시방세계 중생입니다.

 

제18원은 정토법문의 근본입니다. 단지 아미타불의 본원일 뿐만 아니라,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의 본마음(本懷)이기도 하며, 심지어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권장하시고 칭찬하시고 호념하시는 원이기도 합니다.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미래 세상에 불도가 멸하고 경전이 다 없어진다 해도, 나는 자비한 마음으로 가엽게 여겨 특별히 이 경전만은 백 년 동안 세상에 더 머물게 할 것이니, 그 중생들 가운데 이 경전을 만나는 이는 원하는 바에 따라서 모두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다(當來之世 經道滅盡 我以慈悲哀湣 特留此經 止住百歲 其有眾生 值斯經者 隨意所願 皆可得度).



석가모니부처님의 이 말씀은, 제18원의 아미타불의 구제 법문이 영원히 우주 가운데 보존되어, 설령 앞전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다음의 부처님께서 아직 인간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법문이 영원히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18원은 모두 서른여섯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서른여섯 글자를 여러분들이 외울 수 있으면 되도록 외우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이 법문의 근본으로 가히 아미타불의 생명이요, 또한 우리들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8원이 있었기 때문에 법장비구가 아미타불이 되실 수 있었으며, 제18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금생에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합장하시기 바랍니다. 제18원의 서른여섯 글자를, 우리들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 번 독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서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정각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역죄를 범하는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제외합니다(設我得佛 十方眾生 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若不生者 不取正覺 唯除五逆 誹謗正法).”



합장을 푸십시오.

이 서른여섯 글자는 아미타불께서 당신 자신이 품고 계신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신(自我發露) 중요한 내용으로서, 당신의 성불은 시방세계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므로,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한결같이 ‘나무아미타불’이란 만덕홍명을 부르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이 중생이 금생에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라도, 아미타불께서 그 중생을 극락세계로 왕생토록 하지 못한다면 아미타불께서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왕생하지 못하는 중생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당신의 능력이 아직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았고, 아직 성불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모든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충분한 능력을 갖출 때까지 더욱더 수행을 해야 하고, 더욱더 공덕을 쌓아야만 비로소 성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다른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그나마 쉬운 편입니다. 삼대아승지겁이면 충분하니까요. 이른바 “삼대아승지겁 동안 복과 지혜를 닦고, 백겁 동안 상호를 장엄한다(三祇修福慧 百劫種相好)”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이라 하는 이 부처님께서 조재영겁의 시간을 거치면서 보살의 무량한 공덕을 쌓아 비로소 성불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께서 보편적이면서도 간편하고 쉽게 모든 중생을 구제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구제 대상은 ‘시방세계의 중생’입니다. 우리들 사바세계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貪嗔痴)이 특별히 왕성하고 강하며, 죄업이 유난히 깊고 무거운 범부들도 전부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야 할 대상입니다. 시방세계 중생에는 성인과 범부가 포함되어 있고, 범부에는 선인과 악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리고 아비지옥의 중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미타불의 구제는 분별이 없고 평등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인과 범부, 선인과 악인, 출가자와 재가자, 수행을 잘하는 자나 못하는 자나, 마음이 청정한 자나 청정하지 못한 자나 관계없이 모두가 다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어느 중생이든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하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그를 왕생하도록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조건은 매우 간단합니다. 바로 제18원에서 말씀하신,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면(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이니, 이렇게만 하면 곧바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至心信樂)”에서 “지극한 마음(至心)”은 바로 경건하고 정성스런 마음이며 진실한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마음은 진실되고 정성스러워야 합니다. 입으로는 왕생해야 한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도리어 왕생할 생각이 없거나, 혹은 장래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지극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이 “지극한 마음”에는 “기쁘게 믿고(信樂)”가 포함되어 있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하는(欲生極樂世界)” 마음이 포함되어 있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서(乃至十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모두 진실한 마음(眞心)이 필요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만약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바로 겉치레의 호의일 뿐이니. 그렇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고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삼계육도의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이 중요한 큰일에 어떻게 진실한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해주시는 조건은 바로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것입니다. “지극한 마음”이란 이 두 글자는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기쁘게 믿고(信樂)”는 바로 ‘믿음(信)’이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는 바로 극락왕생을 원하는 ‘발원(願)’이며,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염불은 바로 ‘수행(行)’입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믿고”는 바로 “기쁘게 믿고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여기에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더하면 바로 ‘신信‧원願‧행行’(삼자량)이 됩니다. 여기서 제18원은 신‧원‧행을 다 갖추고 있으며, “지극한 마음”은 신‧원‧행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극한 마음”란 곧 진실한 마음眞心이니, 우리들이 극락세계가 있음을 믿고 아미타불이 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극락세계가 있고 아미타불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그다지 확신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는다면 그것은 “지극한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극락세계가 있음을 믿고, 아미타불께서 계신다는 것을 믿으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극락세계가 우리의 마지막 종착점임을 믿는 것이니, 이것을 모두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아미타불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며 “너는 나의 극락세계로 왕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바로 “나는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발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하여 극락세계로 데려가신다는 것은 진심이니, 우리가 극락세계로 왕생하려는 발원도 진심이어야 하며, 남을 따라서 단지 회향게만 읽어선 안 됩니다.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름(乃至十念)”이란 바로 지금 이후로 우리에게 하루의 시간이 있으면 하루 동안 염불하고, 이틀의 시간이 있으면 이틀 동안 염불하며, 이레의 시간이 있으면 이레 동안 염불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렛날에 수명이 다하면 바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만약 수명이 연장되어 여드렛날이 되면 여드렛날 동안 염불하며, 만약 8년 혹은 80년을 더 산다면 한평생 동안 오로지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만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법문을 빌려 (정토로) 회향할 필요가 없이, 염불을 하는 즉시 왕생의 공덕이 모두 갖추어지게 됩니다.

 


제18원에서는 믿음과 발원과 수행(신信‧원願‧행行)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信)’이 바로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는(至心信樂)” 것이라면,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欲生我國)”는 무엇일까요? 아미타부처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이 당신의 구제를 받아 극락세계로 갈 수 있도록 매순간 우리들을 부르면서 우리들에게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께서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欲生我國)”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바로 “저 나라에 왕생하기를 원하는(願生彼國)” 것인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여 아미타불의 부름과 구제에 따르는 것이 곧 ‘발원(願)’입니다. ‘수행(行)’은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름(乃至十念)”으로, 지금 이후로 오직 한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비록 우리와 구제의 조건을 맺으셨다 해도, 이 구제의 조건은 사실 거의 조건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그 뒤로는 우리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남아 있으면 얼마간의 시간 동안만 염불을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불할 때에는 번뇌가 있건 없건, 망상잡념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이와 같은 조건만을 정해주셨기 때문에, 비록 조건이 있다 해도 거의 조건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지불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어떠한 손실도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가장 간단한 것이어서, 우리가 말만 할 줄 알면 염불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말을 하듯이 염불을 하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하고 극락왕생을 원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간단하고 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닐뿐더러 밑질 것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염불하는 시간에는 비교적 망상잡념 등의 번뇌가 없으니, 이러한 염불은 우리를 더욱 홀가분하게 해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중들: 그렇습니다.)



만약 번뇌가 생길 때나 혹은 몸이 아프고 마음이 매우 답답할 때, 염불을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평온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아미타불께서 이 한 구절 부처님 명호를 부르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오직 이로움만 있을 뿐 해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중들: 그렇습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것은 극락을 그리워하고 왕생을 원하는 일종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 자체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시간과 금전이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고, 동시에 본전을 까먹거나 손해를 볼 일도 없습니다. 극락왕생은 오직 백 가지 이익만이 있을 뿐, 손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기를 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비록 극락세계가 있음을 그다지 믿지 못하고 극락세계가 있음을 확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극락왕생을 원할 것입니다. 왜냐고요? 만약 진짜로 생사윤회가 없고 극락세계가 없다고 해도 본전을 잃거나 손해를 보는 어떠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생사윤회가 있고 극락세계가 있다면 공짜로 이득을 본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 이익은 계산할 방법이 없는, 우주에서 가장 큰 선근과 가장 큰 복덕을 전부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진짜로 극락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극락세계에 왕생함으로써 틀림없이 삼계육도의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게 되고,

 

틀림없이 성불을 하게 되며, 틀림없이 부처님과 같은 무량한 수명‧무량한 광명‧무량한 지혜‧무량한 자비를 갖게 되고, 아미타불과 같은 48대원을 갖추고서 타방세계‧시방세계‧무량세계에 분신으로 가서 널리 중생구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왕생을 원하는 마음으로 큰 이익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우리들이 범부여서 마음의 힘이 매우 약하고 어리석고 번뇌가 깊고 무거울지라도, 우리들이 단지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이 하나의 발원만 있다면 이 원은 바로 큰 원(大願)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 하나의 원이 능히 우리를 왕생하여 성불케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원이 없다면 우리들은 계속 육도에 윤회할 것이고, 만약 이 원이 없다면 가장 큰 선근과 가장 큰 복덕을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우리들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는 이 하나의 믿음은 ‘큰 믿음(大信)’이고 불가사의한 믿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미타불께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의외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이 믿음이야말로 어찌 불가사의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곳 하문의) 맞은편 기슭에 금문(金門, 금문현이란 섬)이 있고, 금문을 지나면 대만台灣이란 섬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본 적도 없고 두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우리는 금문과 대만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물론 이런 믿음도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믿음이 소중합니까? 이런 믿음에는 아무런 소중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거나 말거나, 우리가 생사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에 대해 증가(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감소(방해)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믿음은 단지 범부의 세속적인 믿음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음을 믿고 극락세계라는 돌아갈 곳이 있음을 믿는다면, 비록 같은 믿음이라 해도 내용이 다르므로 그 가치도 따라서 다르게 됩니다.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음을 믿고 극락세계라는 돌아갈 곳이 있음을 믿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삼계육도의 윤회를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며 끝내는 우리를 성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어찌 더할 나위 없이 높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단지 입을 벌리고 명호를 부르거나 마음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이와 같은 행이 바로 ‘큰 행(大行)’이어서, 우리가 오계를 지키고 십선을 닦는 공덕보다 훨씬 큽니다. 왜냐하면 오계를 지키면 우리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고, 십선을 지키면 우리를 천상에 태어나게 할 뿐이지만, 오계와 십선의 인因과 과果는 다 여전히 거짓이고 뒤바뀐 전도顚倒이며 새어남이 있는 유루有漏이며 청정치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담란대사께서) 󰡔왕생론주往生論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과 천상의 모든 선과 모든 과보는 원인이든 결과이든, 모두 전도된 것이고 모두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하지 못한 공덕이라고 부른다(人天諸善 人天果報 若因若果 皆是顛倒 皆是虛偽 是故名不實功德).”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육도윤회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은 청정한 것이고, 진실한 것이며, 위없이 큰 이익이 있는 불가사의한 공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더러운 마음과 깨끗하지 못한 입으로 청정하고 진실하며 지극히 높고 위없는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큰 행과 다름없기에 유루가 아닙니다. 이 말을 다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대중들: 네!)


그런 까닭에 정토법문을 “이행도(易行道: 행하기 쉬운 길)”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행도에서 이른바 ‘이(易: 쉬움)’란 바꿔 말해 다음과 같습니다.


(1) 천이淺易: 이해하기 쉽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행도의 이치는 굉장히 간단명료하여, 심오하거나 어렵지 않고 한 번 들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간이簡易: 단지 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바로 왕생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게 되고, 왕생의 자량(資糧: 밑천)을 즉각 완성하여 백 퍼센트 확실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경전을 많이 독송해야 하거나, 성지순례를 하면서 참회를 해야 하거나, 경전을 깊이 이해해야 하거나, 다라니나 주문을 많이 독송한 공덕을 통하여 왕생할 필요도 없습니다. 염불을 시작하는 때부터 임종 때까지 모두 다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이면 됩니다.


(3) 용이容易: 늙었거나 젊었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를 가리지 않고, 경전을 깊이 이해하거나 못하거나에 관계없이 사람마다 모두 다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쉽다(容易)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할 수는 있지만, 그 가운데 일부분의 사람들은 실천할 수가 없다면 이행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이행도’란 사람마다, 즉 어르신이나 어린아이나, 지혜가 있거나 없거나, 수행을 잘하거나 못하거나, 학문이 있거나 없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에 관계없이 모두가 다 실천할 수 있으며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행도’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법문을 배워서 성불을 하려 한다면 전부 ‘난행도(難行道: 가기 어려운 길)’인데, 이 난행도의 어려운 정도는 가히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매우 쉬워서, 여러분들 모두가 다 해낼 수 있습니다.


(4) 안이安易: 이 법문을 닦기 시작하면 매우 편안하고 즐겁고 자재하여, 전혀 괴로움이 없습니다. 자력적인 ‘난행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까닭에 용수보살께서는 불교의 모든 법문을 두 가지 법문으로 요약하셨는데 하나는 ‘난행도’이고, 하나는 ‘이행도’입니다. ‘이행도’는 바로 아미타불의 제18원에 의한 구제를 가리킵니다. 이 ‘이행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파와 다른 모든 법문의 수행은 전부 ‘난행도’에 속합니다.


우리가 난행도와 이행도의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용수보살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용수보살이 말씀하시길 ‘난행도’는 ‘걸어서 가는 것’과 같고, ‘이행도’는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 걸어서 가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배를 타고 가는 것은 편안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교통수단으로 배를 타거나 소달구지나 마차를 타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오늘날 비행기나 기차나 버스가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천리만리나 되는 먼 지방에 가야 하는데, 만약 두 다리로 걸어서 간다면 몸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갈 방법이 없습니다. 설사 신체가 건강하고, 심지어 세계에서 달리기를 제일 잘하는 유명한 선수라 해도 반드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재를 넘어서 먼 길을 고생고생하며 가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도처에서 도적을 만날 수도 있고, 굶주림과 추위와 피로로 인해 삼분의 일도 못 가서

 

 전부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자력수행으로써 삼계육도의 생사윤회를 벗어나 마침내 성불의 경계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한다면 매우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행도’는 바로 편안하고 즐거운 법문(安樂法門)이요, 편안하고 쉬운 법문(安易法門)입니다.



어째서 염불이 ‘이행도’일까요? 이는 전적으로 염불 그 자체에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 의한 크나큰 힘의 가피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원이,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그를 왕생하도록 하신다’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조재영겁(兆載永劫: 셀 수 없이 긴 세월)이란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공덕을 쌓으셨고, 우리가 극락세계에서 빨리 성불할 수 있는 공덕을 쌓으셨으며, 우리가 세세생생 동안 지어온 빚(업보)을 갚아주시기 위해 필요한 공덕을 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공덕을 모두 원만히 성취하신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성불하셨으며, 비로소 나무아미타불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에는 자연히 아미타불께서 조재영겁 동안 닦으신 만행萬行과 만선萬善과 만덕萬德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량없는 백천 다라니의 공덕이 모두 이 한 구절 명호 안에 털끝만치도 빠짐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호를 일러 ‘만덕홍명(萬德洪名: 만 가지 덕이 깃든 위대한 명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덕홍명에서 ‘만萬’은 숫자상의 백, 천, 만 할 때의 만이 아니라, ‘구족함‧완전 원만함(完滿)‧초월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왕생하고 성불하는 공덕이 이 명호 안에 완전 원만하고 온전하게 구족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육도윤회를 초월하여 일단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바로 삼현(三賢: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의 단계에 있는 보살)과 십성(十聖: 십지十地의 단계에 있는 보살)의 단계를 초월하여 신속히 성불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이 성취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들이 왕생할 수 있는 공덕이 완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성불은 무엇을 성취하신 것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왕생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왕생할 수 있는 공덕자량(조건,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이 한 구절 명호가 있게 된 것이고, 염불만 하면 즉시 우리가 왕생할 수 있는 공덕자량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어떠한 부처님이십니까? 바로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십니다! 이 말의 뜻은, 아미타불께서 이미 본원을 성취하셨고, 그 다음 다시 당신께서 성취하신 본원의 공덕을 전부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회향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까닭은, 우리의 왕생을 위하여 성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공덕도 동시에 모두 우리의 공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과지(果地: 묘각의 지위)의 깨달음을 인지(因地: 수행의 지위)의 마음으로 삼으니, 원인은 결과의 바다에 갖추어져 있고, 결과는 원인의 근원과 통하네(以果地覺 爲因地心, 因該果海 果徹因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뜻은, 아미타불께서 과지에서 성취하신 부처님 공덕으로써 우리와 같이 인지에 있는 범부가 왕생하고 성불하는 공덕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정각正覺은 우리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원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중생이 왕생할 수 있는 원인은 아미타불의 정각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성불은 바로 우리의 왕생이며, 우리의 왕생은 바로 아미타불의 성불입니다. 만약 우리가 왕생하지 못한다면 아미타불은 성불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단지 염불만 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왕생은 아미타불의 성불과 하나로 묶여 있어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은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향하는(從果向因)’ 법문이지,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향하는(從因向果)’ 법문이 아닙니다.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향함’이란 바로 범부로부터 줄곧 수행하여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를 거치고, 그런 다음에야 성불에 이르는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단계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법문은 ‘과지의 깨달음을 인지의 마음으로 삼은’ 것으로,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신 공덕을 우리가 왕생하여 성불하는 자량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와 같은 여러 가지 수행을 거칠 필요 없이 곧바로 단계를 초월하여 왕생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행도’를 일러 가로로 초월하는 ‘횡초橫超’ 법문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예컨대 타이베이에 101빌딩(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금융센터)이란 건물이 있는데, 만약 매 층마다 모두 걸어서 올라간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걸어가는 데 매우 고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직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매우 빨라, 순식간에 101빌딩의 옥상에 도달할 것입니다.



정토법문이 ‘이행도’이며 ‘횡초법문’이라 불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역시 아미타불의 본원에 있습니다! 만약 아미타불의 본원이 성취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지 못했을 것이지만, 한 번 본원이 성취되고 나서는 모두가 갖추어지게 되어, 우리가 왕생할 수 있고 성불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부처님마다 성불은 다 아주 어려운 일을 해내신 것이기에 매우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과 반드시 직접적인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처님들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제18원과 같은 원을 세우지 않으셨으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조재영겁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으시고 비로소 성불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미타불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아미타불의 성불은 바로 우리 중생의 왕생에 입각한 것이며, 우리의 왕생을 위해 그분의 생명을 담보로 내기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왕생케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분의 부처로서의 생명이 있는 것이며, 우리의 왕생이 없다면 그분의 부처로서의 생명도 없는 것이기에, 그분의 성불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성불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어떠한 부처님이신가?’에 대한 첫 번째 답은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신 것입니다.


2. 아미타불은 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아미타불의 성불은 시방중생을 구제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방중생들이 구제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성불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방중생들이 만약 “우리가 정말 구제될 수 있을까? 언제부터 구제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셨는지, 언제 성불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아직 성불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부를(稱念) 수 있는 부처님의 명호가 없을 것이고, 또 우리가 왕생하여 성불할 극락세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셨습니까, 못하셨습니까?

(대중들: 성불하셨습니다.)

성불하신 지는 얼마나 오래되셨습니까?

(대중들: 10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10겁이 지났습니다. 10겁 동안 아미타불께서는 밤낮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10겁의 세월 동안 아미타불께서는 무얼 해오셨습니까? 오로지 우리 시방중생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모든 착하거나 악한 범부들아! 너희들은 어서 나의 극락세계로 왕생하여라.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줄곧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심지어 우리에게 합장하시며 부탁하고 계십니다. ‘시방의 중생들은 모두 나의 외아들인데, 지금 삼계육도를 떠돌며 고통스럽게 윤회하고 있으니, 부모인 나로서는 견딜 수가 없구나. 아들들아! 너희들이 제발 속히 돌아오기를 부탁한다. 돌아오기만 하면 안락함을 얻을 수가 있단다. 너희가 돌아오는 데 필요한 양식(자량)을 나는 이미 모두 준비해 놓았다.

 

너희가 돌아오는 데 필요한 비용과 도구들 역시 내가 일찌감치 너희를 위해 알맞게 마련해 놓았다. 너희가 단지 차에 올라타기만 하면(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기만 하면)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다 있기에 네가 평안하게 극락 고향으로 돌아올 수가 있단다.’ 이와 같이 아미타불께서는 10겁 이래로 줄곧 우리를 향해 외치면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시방중생들을 매우 쉽게 구제할 수 있는 부처님이 되기 위해 어떻게 발원하셨습니까? 그 내용은 모두 48원 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시방중생들을 아주 수월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게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것도 역시 48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48원은 각각의 원 하나하나가 전부 시방중생을 구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그 중 하나의 원이라도 시방중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 원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아미타불께서는 차라리 이 원을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은 시방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십니다.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데에는 어떠한 조건도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굳이 조건이 있다고 말한다면 바로 당신이 단지 ‘왕생을 발원하고, 명호를 부르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극락세계가 아무리 청정하고 장엄하며, 아미타불께서 아무리 대자대비하시고 원력이 넓고 크시다 해도,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아미타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고, 계속해서 영원히 육도 안을 윤회하며 헤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먼저 반드시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합니다.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 이런 사람은 모두 백 퍼센트 반드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발원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도대사(善導大師, 613~681)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한다(衆生稱念 必得往生).”

 

시방중생들이, 즉 성인, 범부, 선인, 악인, 재가자, 출가자, 수행을 할 줄 아는 사람, 수행을 할 줄 모르는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 지혜가 없는 사람에 관계없이 그들이 단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른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본원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저 부처님은 지금 현재 성불하시어 극락세계에 계시나니, 마땅히 본래 서원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라!(彼佛今現 在世成佛 當知本誓 重願不虛)”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이 본래 서원은 허망하고 거짓된 원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이미 성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은 하나하나가 모두 중생을 위한 원입니다. 그러기에 단지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면서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우리는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는 마치 큰 원력의 배와도 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 육도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부침하며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바로 아미타불의 큰 원력의 배 위에 올라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미타불의 큰 원력의 배 위에 올라탄 사람은 때가 되기만 하면(세상에서의 수명이 다 되면) 곧바로 피안(저 언덕)에 도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비록 우리의 수명이 다하지는 않았고, 아직도 육도의 고통바다 속에 있지만, 다시는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아미타불의 큰 원력의 배를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당신이 아무리 호화로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 하더라도 모두 위험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이 거대한 원력의 배는 영원히 위험에 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는 아미타불께서 직접 만드시고 아미타불께서 직접 운전하시며 승무원들도 모두 극락세계의 보살님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피안에 도달할 수 있으며 어떠한 위험도 만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구제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단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왕생의 업인(業因: 결과를 위한 원인으로써의 행위)은 이미 성취된 것이어서, 이미 더 이상 육도를 윤회하는 범부가 아니며, 이미 극락세계 성중聖衆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이해하시겠습니까?

(대중: 이해합니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대중: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왕생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께 달려 있습니다. 마치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머물 곳도 없이 음식을 구걸하려고 밖으로 돌아다니던 한 아이가, 어느 날 그가 본래 국왕의 유일한 아들이며 태자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때부터 그는 바로 의젓하고 화려하고 귀한 신분이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유랑하는 거지가 아니라, 한 왕의 아래이자 만인의 위에 있는 태자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광대사(印光大师, 1861~1940. 정토종 제13대 조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생사를 벗어나려는 마음(生死心)이 간절하고, 한 생각의 의혹도 일어나지 않는 마음으로 믿을 수 있다면, 비록 아직 사바를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미 사바에 오래 머물 나그네가 아니며, 극락에 아직 왕생하지 못했더라도 이미 극락의 귀한 손님이니라.”

 

그러므로 왕생을 원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치 않고, 다른 수행을 섞지 않으며, 오롯하게 염불만 한다면 임종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고, 나중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지금부터 우리는 이미 극락세계의 성중이며, 이미 더 이상 육도를 윤회하는 범부가 아닙니다.

 

3. 아미타불은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이시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이 한 구절 명호를 ‘광명 명호(光明名號)’라고도 부르는데, 아미타불께서는 곧 한량없는 광명의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는 데 장애가 없는 까닭에 아미타라 하시느니라.”

 

이 말씀의 뜻은, 이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광명을 갖추고 계시는데, 그분의 한량없는 광명은 온 우주를 남김없이 비출 뿐만 아니라, 그분의 광명은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형상이 있는 해‧달‧별‧산‧강‧대지의 장애도 받지 않고, 또한 형상이 없는 우리 중생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탐진치貪瞋癡), 그리고 우리가 세세생생 동안 지어온 갖가지 죄업들의 장애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아미타불의 광명은 언제 어디서나 다 손쉽고도 빠르게 우리 곁으로 와서 우리를 보호하고 구제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을 또한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光明攝取)’ 부처님이라고도 부릅니다. 여기서 ‘광명’이란 아미타불의 불광佛光을 가리키며, ‘거두어주심’이란 아미타불께서는 지금부터 줄곧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으시며 우리를 지켜봐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시며 기다려주시다가, 임종 때가 되면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어 극락세계로 데려가신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께서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을까요? 우리가 밤에 잠잘 때 모기가 우리를 물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모기장 안에 있으면 모기는 우리를 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삼계육도 안을 윤회할 때에는 어떤 모기가 우리를 물려고 할까요? 원수와 채권자라는 모기가 있어 우리를 물려고 하며 우리에게 빚을 독촉합니다. 또 천마天魔와 외도外道라는 큰 모기가 있어 우리가 육도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지 염불만 한다면 영원히 아미타불의 광명이라는 모기장 안에 있게 되어, 큰 모기든 작은 모기든 모두 우리를 물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이 컵과도 같아서, 컵 속에 담긴 물은 밖으로 흐르지 않고 항상 이 컵 안에 있습니다. 염불하는 사람도 영원히 아미타불의 광명이란 컵 안에 있어 다시는 삼계육도에 윤회하지 않으며, 또한 갖가지 업력業力의 장애도 받지 않습니다. 이분이 바로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인은, 그가 부처님을 믿고 염불하기 시작하는 그때부터 한평생이 다할 때까지 아미타불의 광명이 거두어주시는 가호 가운데 있게 되어 아미타불의 보호를 받고, 원수나 채권자의 방해를 받지 않고, 천마나 외도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또한 재난의 상해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아미타불의 명호가 지니고 있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작용과 기능이어서, 따로 기도를 하며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불을 붙이면 불은 자연히 타오르게 되고, 물을 따르면 물은 자연히 아래로 흐르게 되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기능이어서, 원리를 안다거나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현세의 이익으로 보더라도 염불은 재난과 어려움들을 소멸할 수 있고, 복과 수명을 늘리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다 광명이 있는데, 그 광명의 크기는 그 사람의 염원과 복덕에 따라 다릅니다. 우리가 착한 생각만 일으켜도 상서롭고 좋은 빛이 매우 커지고, 악한 생각을 일으키면 혼탁하고 나쁜 빛이 나타나게 됩니다. 복덕이 크면 광명도 크고, 복덕이 작으면 광명도 작습니다. 만약 부모에게 효순하고 스승을 받들어 모시며 삼보를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광명은 더욱 맑고 깨끗하고 많을 것이며, 더 나아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다면 광명은 바로 온 우주에 두루 가득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 광명이 생기는 것일까요?

 

아미타불의 광명은 한량없는 광명인데, 아미타불께서 당신이 지니신 모든 공덕을 이 한 구절 명호로 변화시켜서 우리 중생들에게 회향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 명호에는 아미타불께서 지니신 모든 광명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범부가 미약한 마음으로 이 광명 명호를 부르더라도 곧바로 아미타불의 명호와 결합되고, 아미타불의 광명과 결합하게 되니, 어찌 우리 몸의 광명이 아미타불의 한량없는 광명을 따라 한량없이 큰 우주에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비록 단 한 방울이지만, 큰 바다에 떨어뜨리면 큰 바다와 융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염불하는 사람의 몸에는 모두 부처님의 광명이 나오는 것입니다.예전에 법사님 한 분이 미국에 홍법을 하러 가셨습니다. 그분께서 대중을 이끌고 법당에서 염불을 하고 있었는데, 염불이 막 끝나는 시간에 어떤 미국인 한 분이 그 법사님을 찬탄하며 말했습니다.

 

“스님! 스님! 저는 신통력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제가 법당에서 염불하고 계시는 대중들을 보았는데,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염불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몸에서 나는 광명이 매우 커서, 그 크기가 지구를 감쌀 만큼 그렇게 큰 광명이었습니다. 그다지 경건하지도 정성스럽지도 않게 단지 입만 벌름거리며 염불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광명이 아주 작아서 단지 입가에만 들락거릴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수승한 광경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저도 불교를 배우고자 합니다.”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염불하는 사람은 40리나 되는 광명이 몸을 비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40리가 매우 크다고 생각하겠지만, 우주와 비교하면 지구는 매우 작은 것이며, 지구와 비교하면 40리는 더욱 작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염불할 때 그에게서 나오는 광명은 지구를 감쌀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이 입이 깨끗합니까? 입을 열면 냄새가 고약합니다. 그렇지만 단지 우리가 한 번 입을 벌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광명이 나옵니다. 우리가 단지 입을 벌려 염불하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의 몸으로 드나드시며 광명을 놓으십니다. 비록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귀신이나 불보살님들은 모두 광명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염불만 하면 귀신이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힌 원한이 있다 해도, 염불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맺힌 원한도 풀 수 있으며, 지금 이후로 다시는 당신에게 빚을 독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염불을 하는 관계로 말미암아 상대방을 제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불을 할 때에는 어느새 귀신과 중음신이 제도되며, 우리가 염불을 하기 때문에 조상님들도 제도되고, 자손들도 보호받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염불이야말로 참으로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뛰어난 법문인 것입니다!

 

염불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부처님 명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중요성은 우리의 생명과도 같아서 이 부처님 명호가 있으면 우리의 생명이 있는 것이요, 이 부처님 명호가 없으면 우리의 생명도 역시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처님 명호가 없으면 사람이 죽은 뒤에는 곧바로 염라대왕의 처소로 가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러면 매우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4. 아미타불은 임종 때 맞이하러 오시는 부처님이시다

 

 

염불을 하는 사람은 염불하는 그때부터 아미타불께서 그분의 한량없는 광명으로 끊임없이 보호해주시고 돌봐주시며 잠시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임종에 이르렀을 때 몸을 나투시어 우리를 극락세계로 영접해주십니다. 󰡔아미타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치는 때가 오면 아미타불께서는 여러 거룩한 무리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투시므로,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칠 때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곧바로 아미타불의 극락국토로 왕생하게 되느니라.”

 

이제 막 목숨을 마치려는 사람은, 만약 그가 평소에 아미타불을 부르지 않았다면, 보통은 일단 숨이 끊어지고 나서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허둥대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떠나야 하고, 이 세상에서 일으켜 세운 모든 사업과 재산을 두고 떠나야 하며, 이런 환경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매우 아쉬워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원친채주(冤親債主: 원한 맺힌 사람들이나 채권자)들이 나타나 빚을 독촉할 것이며, 흑무상黑無常과 백무상白無常이란 저승사자가 쇠사슬로 가지고 나타나 그 사람을 묶어서 염라대왕 앞에 데려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니, 마음속으로 매우 고통스럽고 긴장되며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염불하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직접 오시어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영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임종이 다가와 막 숨이 끊어지려 하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아미타불께서 먼저 몸을 나투시게 되는데, 그 사람은 분명하게 아미타불을 뵐 수 있습니다. 그때에 그는 매우 기뻐하며 아미타불을 따라가서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직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한다면, 왕생할 시간이 됐을 때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맞이하러 오십니다. 지금부터 줄곧 임종 때까지 아미타불께서는 일분일초, 일찰나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잊어버리지 않으시며, 싫어하여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임종하는) 그 시간에 혼미하거나 깨어 있거나에 상관없이 아미타불께서는 한결같이 우리를 영접하러 오십니다.

 

 왜냐하면 혼미한 것은 단지 감각기관이 혼미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부인들이 볼 때는 혼미한 사람은 염불도 할 수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발을 움직일 수도 없을 거라고 여기겠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맑고 또렷합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염불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그 사람을 영접하러 오실 때에는 그 사람과 아미타불, 아미타불과 그 사람은 서로가 아주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동안 단지 염불만 책임지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왕생하는 일은(이는 아미타불의 소관이시므로) 아미타불께서 당연히 완전하고 완벽하게 책임지시고 우리를 극락세계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만약 어떤 염불행자가 임종할 때에 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를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는 위안이 있어서, ‘때가 되면 아미타불께서 영접하러 오신다’라고 생각하므로 이 염불인은 목숨이 마칠 때에 이르러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황하여 불안해하지도 않으며, 단지 조용히 아미타불께서 맞이하러 오시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편안하고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아미타불께서 맞이하러 오시기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아무튼, 아미타불께서 맞이하러 오신다는(내영來迎) 사실은 염불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위안과 희망이 가득하게 해줍니다.

 

어떤 사람은 “만약 내가 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부처님 명호를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상황을 아미타불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아미타불께는 대신통력과 대원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비와 대지혜로써 이 사람에게 어떠한 업장이 있으며, 어떠한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염불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혼미할 것인지 깨어있을 것인지에 대해 모두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며,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실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이 참으로 귀중합니까, 귀중하지 않습니까?

(대중들: 참으로 귀중합니다!)

 

그런 까닭에 단지 우리들이 평상시에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또 이 마음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고 진실하며, 지금 이후로 더 이상 잡수(雜修: 염불 외에 다른 수행을 섞음)나 잡념(雜念: 다른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름)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임종 때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임종할 때 의식이 혼미한가 혼미하지 않은가에 상관없고, 또한 임종할 때 병으로 몸이 아파 염불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와도 관계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단지 평상시에 염불만 책임지고 하면 됩니다.

 

 임종 때 만약 병으로 몸이 아파 염불을 할 수 없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시기만을 고요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이시고, 임종 때 맞이하러 오시는 부처님이시므로, 때가 되면 그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안온하고 위안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염불법문을 ‘이행도易行道’라고도 부르는데, 쉬운 법문이며 안락한 법문이라는 뜻입니다. 이 법문이 아니라면 중생들은 영원히 고통 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광명으로 우리를 거두어주시지 않고, 임종 때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지 않는다면, 설사 우리가 지금 염불을 한다 해도 마음속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끔찍하구나! 내가 지금 열심히 염불을 하고 있지만, 임종 때 만약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염불을 못하면 어떡하지? 만약 정신이 혼미하면 어떡하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사실 이런 걱정들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곳에 늘 계시며 대신통이 있으시기에, 그분께서는 당신의 상황을 다 아시고는 때맞추어 당신을 보호하시고 영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정토법문은 어떠한 조건도 없는 법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며, 다른 잡다한 수행을 하지 않고 완전히 아미타불께 의지하기만 한다면, 만약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법문에 의문점이 있으시다면 마음 놓고 질문해주시기 바랍니다.

 

 

5. 질문과 대답

 

 

질문: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입니다. 수행에는 믿음과 발원과 수행(信願行)이 구족되어야 하는데, 법사님께서는 법문하실 때 아미타불의 본원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수행으로서의 행(신원행 가운데 행)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지만 왕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단지 발원만 있고, 행의 정도(수준)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이는 일본의 본원법문(정토진종淨土眞宗 등에서 주창하는 염불법문)과 혼동되지 않겠습니까? 삼매(三摩地)에 들고, 깨끗한 마음이 끊이지 않게 이어지고(淨念相續), 한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一心不亂) 경지에 들도록 수행해야지 비로소 왕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변: 당신이 말한 그런 조건은 없습니다. 단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됩니다. 왜 ‘나무아미타불’이 ‘만덕홍명萬德洪名’이라 불릴까요? 그 이유는, 시방중생이 왕생하는 데 필요한 공덕과 자량이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 가운데 이미 다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 역시 마음 내키는 대로 멋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있으면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염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방중생들의 근기는 모두 한결같지 않아, 어떤 사람은 시간이 비교적 많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시간이 많은 사람은 염불을 많이 하시고, 시간이 적은 사람은 염불을 적게 하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수양이 비교적 좋은 편이고 성격도 비교적 좋은 편이며 마음도 비교적 평온한 편이어서, 염불할 때 당연히 마음에 비교적 잡념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성품이 비교적 억세고 습기(習氣: 쌓여온 습관의 힘)도 비교적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염불할 때는 망상과 잡념이 여전히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상관없습니다. 그가 염불만 하면 됩니다. 중생들에게 이러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아미타불께서 다 알고 계시니까요.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걸을 때나 머물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에 시간의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고, 순간순간 (염불을) 잊지 않는 것을 정정업(正定業)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원력을 따르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염불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가든지 머물든지 앉아 있든지 누워 있든지, 당신이 어느 곳에 가든, 어느 시간 때든, 무슨 볼일을 보든 간에 모두 염불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염불행자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시다고 했을 때, 무엇을 ‘대자大慈’라고 부릅니까?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대자’라고 부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제18원 속에서 단지 “내지십념乃至十念”만을 말씀하셨을 뿐, 반드시 어떤 기준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어떤 기준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왕생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왕생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은 일본의 (정토진종에서 말하는) 정토법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 본원법문은 아미타불의 제18원의 법문입니다. 제18원에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염불’을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본원을 살펴보니, 그 뜻은 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望佛本願 意在眾生 一向專稱 彌陀佛名).”

 

이 제18원을 (선도대사께서) 본원本願’이라 부르셨기 때문에, ‘본원칭명本願稱名’은 선도대사님에 의해 전해진 것입니다.

‘본원’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미타불께서 성불을 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체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본원을 살펴보니, 뜻은 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미타불이라는 만덕홍명을 칭념하는 것이 바로 본원에서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본원에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수행입니다.

 

방금 우리는 ‘본원칭명’이 선도대사님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선도대사 개인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용수보살께서는 󰡔십주비바사론󰡕 「이행품易行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은 이와 같으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를 생각하여 명호를 부르며(稱名) 스스로 귀의하면, 곧 필정(必定: 불퇴전)에 들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그러므로 항상 마땅히 억념(憶念: 굳게 기억하고 염불)해야 한다(阿彌陀佛本願如是 若人念我 稱名自歸 即入必定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常應憶念).”

 

용수보살께서는 이 문장의 말씀 속에서 ‘본원本願’이란 두 글자를 직접 지적하여 분명하게 밝히셨고, ‘칭명(稱名: 명호를 부르는 염불)’이란 두 글자도 분명하게 지적하며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제18원’이 바로 ‘본원’이며, ‘제18원’이 곧 ‘칭명염불’입니다.

 

“본원은 이와 같으시다(本願如是)”라고 했는데, 아미타불의 본원은 어떤 것일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若人)”는 시방중생을 가리키는데, 성인과 범부를, 범부 가운데서도 선인과 악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를 생각하고(念我)”에서 생각(念)은 의업(意業: 생각으로 짓는 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명호를 부르며(稱名)”는 구업(口業: 입으로 짓는 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稱念) 것입니다.

 

 “스스로 귀의하면(自歸)”이란 아미타불의 원에 수순하고 아미타불의 구제에 귀순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범부의 죄악의 생명과 생사의 생명, 그리고 윤회의 생명을 아미타불의 청정하신 생명과 영원한 생명, 윤회하지 않는 생명 속으로 완전히 귀의하여 들어가는 것인데, 이것을 일러 ‘스스로 귀의하면(自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극락왕생을 원하는 것을 곧 ‘스스로 귀의하면(自歸)’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원칭명’도 역시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근거가 아주 뚜렷하고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본원’은 용수보살님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일까요? 이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석가모니불께서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부처님 본래 세우신 원력

그 명호 듣고 왕생 원하면

모두 다 저 나라에 이르러

저절로 불퇴전에 오르리라.”

(其佛本願力 聞名欲往生 皆悉到彼國 自致不退轉)

 

“저 부처님(其佛)”은 아미타불을 가리키며, “본래 세우신 원력(本願力)”은 제18원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제18원에서는 기타의 삼학三學과 육바라밀을 말씀하시지 않고 “그 명호 듣고 왕생 원하면(聞名欲往生)”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이 한 구절 명호를 듣고서 극락왕생을 발원하여, 이때부터 오로지 나무아미불만 부르면 “모두 다 저 나라에 이르게(皆悉到彼國)”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으며, 또한 왕생하는 그 순간부터 자연히 불퇴전의 지위에 있게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무량수경󰡕에서 ‘본원’을 말씀하셨고, 용수보살께서는 이를 계승하셨으며, 선도대사께서 다시 널리 전하시면서 확정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본원은 일본의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본원입니다.

 

본원의 조건은 오직 ‘칭명염불’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신 “부처님 본원을 살펴보니, 그 뜻은 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에는 공부가 하나로 모아진 공부성편(功夫成片)이나, 자나 깨나 같은 경지인 몽매일여(夢寐一如)를 요구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조건이 필요하다면 묻고 싶습니다. ‘아미타불께서 누구를 구제하시겠다는 겁니까? 만약 이와 같다면 아미타불의 자비는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조건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신 “일심불란(一心不亂: 한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음)”은 예로부터 모두 잘못 해석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선도대사님의 해석을 보지 못했고, 모두 천태종의 사상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선종의 사상으로 해석하였으며, 정토의 사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모두 잘못 해석되어왔던 것입니다.

 

󰡔아미타경󰡕 가운데 다음의 세 단락은 예로부터 오랫동안 오해되어 왔습니다.

 

1.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는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不可以少善根 福德因緣 得生彼國).

 

2.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말씀을 듣고는, 명호를 굳게 지니고서 하루나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 한마음이 흐트러지지 아니하면(若有善男子 善女人 聞說阿彌陀佛 執持名號 若一日 若二日 若三日 若四日 若五日 若六日 若七日 一心不亂).”

 

3. “그 사람이 목숨이 마치려고 할 때에 아미타불께서 여러 거룩한 무리와 함께 그의 앞에 나타나시므로, 이 사람은 목숨이 마칠 때에 마음이 전도되지 않고 곧바로 왕생하게 되느니라(其人臨命終時 阿彌陀佛 與諸聖眾 現在其前 是人終時 心不顛倒 即得往生).

 

정토법문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은 송나라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특히 북송(北宋, 960~1127) 때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모두 천태종의 사상을 가지고 이 몇 단락을 해석했기 때문에 “일심불란”에 대한 해석이 다 그렇게 정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도대사님의 저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도대사님의 저작들은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유통된 반면, 중국에서는 당나라(618~907) 말 이후로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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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청나라(1644~1911)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에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중국인들은 선도대사님의 저작을 볼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일반 성도문聖道門의 교리를 사용하여 “일심불란”을 해석해왔습니다. “일심불란”을 가지고 선정에서의 일심, (수행)능력에서의 일심으로 생각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행도’의 원칙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가는 안락한 법문인 ‘이행도’가 아닌 해석들이 당연히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선도대사께서 정토법문을 어떻게 해석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선도대사께서는 (󰡔원생정토법사찬願生淨土法事讚󰡕에서) 극락은 무위열반계이다(極樂無為涅槃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극락세계는 보토報土의 경계이고, 열반의 경계이며, 이 경계에 들어가기만 하면 아미타불과 같은 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극락은 무위열반계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하지 못할까 두렵다(隨緣雜善恐難生)”고 하셨습니다. 일체의 다른 법문은 모두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입니다. 오늘 현교顯教를 만나면 현교의 법문을 배우고, 밀교를 만나면 밀교의 법문을 배우며, 천태교를 만나면 천태교의 법문을 닦아서 극락왕생에 회향하고, 선종을 만나면 선종의 법문을 닦아서 극락왕생에 회향하며,

 

어떤 법문을 만나면 어떤 법문을 닦고 그 법문을 닦은 공덕을 극락왕생에 회향하는데, 이것을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隨緣雜善)’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방식의 ‘인연에 따르는’ 수행이 바로 ‘잡다한 선’이며, 바로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少善根少福德)”입니다. 그래서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은 모두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多善根多福德)”일까요? 선도대사께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래께서 핵심 법문을 선택하셨으니,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고 가르치셨다(故使如來選要法 教念彌陀專複专).

 

다시 말해 우리가 단지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기만 하면 당신에게 수행공부가 있든 없든, 마음이 청정하든 청정하지 못하든,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는 것에 부합했으며,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호를 굳게 지니고서, 한마음 흐트러지지 아니함(執持名號, 一心不亂)”이란 바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稱念彌陀專復專)”는 뜻입니다.

 

이른바 ‘일심불란一心不亂’에서 ‘일一’은 곧 둘이 아님이요, 둘이 아님은 곧 ‘오로지(專, 전적으로)’이며, ‘불란不亂’은 난잡하지 않고 잡다하게 섞이지 않음이니 역시 ‘오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잡다한 수행을 하지 않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른다면, 이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그것은 견사혹(見思惑: 견혹과 사혹)을 조복시키거나 끊는 것과 같은, (자력)공부에 있어서의 일심불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우리들은 모두 왕생할 수가 없으며, 아미타불께서는 시방중생을 구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자聖者들만 구제하시려는 것이 돼버립니다. 왜냐하면 (자력)공부에 있어서의 ‘일심불란’이란 ‘이치적인 일심(理一心)’이거나 아니면 ‘현실적인 일심(事一心)’인데, 그렇다면 이미 그는 삼계 밖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을 깨트렸거나 삼계 내의 견사번뇌(惑)를 끊은 성인聖人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정토법문을 배우는 데 있어 만약 확실하게 안심할 수 있고, 확실하게 왕생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먼저 아미타불의 제18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제18원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정토를 배운다면 자칫 어긋날 수 있어 우리들이 안심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일심불란’의 수행에 대해 우리는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출가자의 신분이므로, 출가자의 신분으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재가자의 신분이니, 재가자의 신분으로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출가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탐진치)의 번뇌가 강성하고, 업장이 깊고 무거우며, 망상과 잡념이 분분하게 많은 범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몸과 마음으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고 있습니다.

 

재가 불자님들 가운데 만약 번뇌가 적고 업장도 깊지 않아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기만 해도 마음이 매우 청정한 분이 계신다면 여러분들은 이러한 근기의 몸과 마음으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시면 됩니다.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근기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여러분은 모두 평등하게 왕생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 해도 아미타불의 원력의 배 위에 타고 있고, 당신이 악한 사람이라 해도 역시 원력의 배 위에 타고 있어서, 당신이 성인이든 범부든,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관계없이 똑같이 다 원력의 배 위에 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왕생은 이 한 구절 만덕홍명萬德洪名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들의 신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난 뒤에는 모두가 이전의 신분을 버리게 되고, 모두가 아미타불께 의지하여 피안으로 오르게 되며, 무위열반의 경계에 들어가 함께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사바세계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있고, 지혜와 학문의 높고 낮은 차별이 있으며, 선악의 업장이 많고 적은 차별이 있지만, 극락세계에 가는 데는 이러한 것들에 의지해 왕생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만 있다면 설사 재가자라도 좋고, 수행을 할 줄 몰라도 좋고, 마음이 청정하지 못해도 좋으며, 사혹이 있어도 좋고, 견혹이 있어도 좋으며, 또는 한 품의 무명조차 조금도 제거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모두가 똑같이 평등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성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도대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거나 천인이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모두 왕생할 수 있으며, 그곳에 이르면 아무 차별이 없이 모두가 가지런히 불퇴전에 오른다(人天善惡 皆得往生 到彼無殊 齊同不退).”

 

󰡔아미타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극락국토에 왕생하는 중생은 모두 아비발치(불퇴전)이며, 그 가운데는 일생보처도 많이 있느니라(極樂國土 眾生生者 皆是阿鞞跋致 其中多有 一生補處).”

 

그러므로 우리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모든 사람이 불퇴전의 계위에 오르게 되며, 또한 모두가 다 일생보처(다음번에 부처 될 후보)의 신분을 갖게 됩니다. 이 법문이 가장 귀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아미타불의 본원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아미타불께서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 아니셨다면 이렇게 귀중한 법문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원에는 ‘인본의 원(因本之願)’과 ‘근본의 원(根本之願)’이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48대원 가운데 오직 제18원만이 근본의 원이며, 나머지는 모두 인본의 원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제11원에서 “무릇 극락세계에 왕생한 사람은 모두 불퇴전이며, 뿐만 아니라 반드시 멸도(滅度, 열반)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만 하면 퇴전할 리가 없으며, 반드시 멸도에 이르게 됩니다. 제21원에서는 “32상과 80가지 수형호가 완전히 구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22원에서는 “당신이 일생보처가 되게 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불국토에 가서 널리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왕생과 우리들의 성불은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에 달려 있습니다. 48원이든 제18원이든 모두가 다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것은 본원이 있었기 때문에 성불하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며, 또한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귀한 부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질문: 두 번째 질문입니다. 현재 국내(중국)의 도량에서는 대부분 정토법문을 선양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법문들은 계속 쇠퇴하고 있습니다. 만약 강력하게 유식이나 천태 등 다른 종파들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불교가 더욱더 쇠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또한 종(宗: 선종)에도 정통하고 교(敎: 경전 내용을 근거로 하는 모든 종파의 가르침과 수행, 교종)에도 정통한 도량들이 더욱더 적어지지 않겠습니까? 이 외에 불법을 연구하는 데 있어 󰡔무량수경󰡕이나 󰡔아미타경󰡕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들도 반드시 읽고 공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답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목적은 바로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함이셨는데, 널리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목적이 달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중생이 불교를 공부하지만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못하고, 죽은 뒤에도 여전히 계속 윤회하게 된다면, 설사 선종(宗)과 교종(敎)에도 통달하고 경전들에 깊이 파고들어 팔만사천법문을 다 통달한다고 해도,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목적이 아니며 또한 우리가 불교를 배우는 목적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단 한 번 윤회하게 되면 이생에서 배운 것들이 다음 생에서 반드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업력에 따라 윤회하게 되는데, 만약 지옥에 떨어진다면 오직 고통만 받게 됩니다. 몸과 마음으로 온통 고통만 받기 때문에 과거에 공부한 것들을 다시 돌이켜 생각할 여력이 없습니다. 예컨대 만약 돼지의 태에 들게 된다면 바로 돼지의 습성과 성질과 어리석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배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정토법문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이 법문을 배울 뿐만 아니라, 우리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법문을 배울 수 있도록 권유해야 합니다. 이 법문을 배울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큰 지혜이며, 장차 이 법문을 널리 전파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대자대비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 법문을 배울 수 있으면 여러분은 바로 큰 선근과 큰 복덕을 지닌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법이 소멸되는 시대(滅法時代)가 이르면 전부 다 소멸되지만, 오직 이 정토법문을 선양하는 󰡔무량수경󰡕만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 경전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경전이 모두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경전과 논서의 목적은 우리를 해탈케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만약 해탈할 수 있다면 모든 경전과 논서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에 깊이 들어가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직 왕생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왕생하기만 한다면 경전에 깊이 들어가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삼명육통(三明六通: 세 가지 지혜와 여섯 가지 신통)과 무수한(百千) 다라니가 당장에 모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저에 대해 말씀드리면, 젊었을 때는 상당히 많은 경전을 외웠는데,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기억력이 쇠퇴하여 그 경문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세세생생 동안 제가 출가를 해본 적이 없다가 금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가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고승으로 지냈을 때는 경전을 깊이 연구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고, 모든 선한 일들도 다 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상에도 태어나 봤을 텐데, 사천왕천‧도리천‧아마천‧도솔천에도 다녀왔으며, 색계천과 무색계천에도 다 다녀왔을 것입니다.

 

모든 법문도 다 공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범부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람을 죽인 적도 있었는데, 세세생생 동안 저에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저에게 상해를 입은 중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저에게 도둑맞고, 강도당하고, 욕먹고, 모욕을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비지옥에 떨어졌던 적도 있었고, 도산지옥에 오른 적도 있었으며, 화탕지옥에 내려간 적도 있었고, 축생과 아귀가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차이는, 오직 극락세계에만 왕생한 적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출가하신 적이 있었나요?

(대중들: 있었습니다.)

고승으로 지낸 적은 있었나요?

(대중들: 있었습니다.)

일찍이 선정에 들 수 있었기에 오신통을 갖춘 적이 있었습니까?

(대중들: 모두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대중들: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고기를 먹은 적이 있습니까?

(대중들: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도 간접적인 살생인데, 하물며 직접적인 살생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세생생 동안 모두 오계五戒를 범한 적이 있었고, 십악十惡의 업을 지었던 적도 있었으며, 천상에도, 지옥에도 모두 다녀왔습니다.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에서는 “천상에서부터 지옥에 떨어지고, 지옥에서부터 천상에 오른다”고 말씀하셨고, 󰡔열반경󰡕에서는 “비록 다시 범천의 몸을 얻거나 심지어 비상비비상천의 몸을 얻는다 해도, 목숨을 마치면 다시 삼악도 가운데로 떨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색계천에 태어날 수 있으려면 선정의 경지가 상당히 높아야 합니다. 그런 선정이 있으면 신통력도 생기게 되는데 담벼락도 장애 없이 출입할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도 알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목숨을 마치고 복이 다하면 장차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색계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색계천에서 가장 장수하는 수명이 팔만 사천 겁인데, 그동안 매우 깊은 선정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죽으면 여전히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한 국왕이 되어 금과 옥으로 장식된 옷을 입더라도, 그가 바다 속에 빠질 때는 거지 한 사람이 바다 속에 빠지는 것과 다를 바 없어서, 둘 다 똑같이 죽고 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만약 삼계육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출가자든 재가자든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어야 비로소 궁극적인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러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법문은 배울 필요가 없으며 널리 전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염불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최선을 다해 인륜의 도리를 지키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삿된 생각을 방지하고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며, 또한 다른 교리들도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우선시되는 것이 있고 부차적인 것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이 정토 교리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 한 구절 명호를 마음속에 굳게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다른 것들은 각자의 인연과 능력에 따라서 하시라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일들도 물론 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유감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이러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었을 때, 만약 정신이 맑고 귀와 눈이 밝다면 그건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명이 긴 사람일수록 대부분 치매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들의 아뢰야식 안에는 3장 12부의 경전이 조금도 빠짐없이 모두 저장되어 있기에, 극락세계에 이르러 아미타불을 뵙게 되면 모두 열리어 완전하게 갖추어지게 됩니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보시기 전에는 범부였지만, 한 번 새벽별을 보자마자 단박에 삼명육통과 백천 다라니를 갖추시어 즉시에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제일의 부처님이 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왕생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하며, 우리가 널리 중생을 제도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다만 성불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왕생하면 반드시 성불하게 되어 있고, 성불하면 틀림없이 널리 중생을 제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모든 것은 먼저 왕생하고 나서 보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상(無常: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외출했다가 자동차에 부딪쳐 죽을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며, 차를 타다가 자동차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이 정토법문을 배워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상無常에 대한 관찰이 매우 깊은 사람이라야 착실하게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상에 대한 관찰이 깊을수록 그 사람이 열심히 정진하도록 동기부여가 되고, 그 사람이 현생에서 해탈할 수 있는 법문을 찾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무상에 대한 깊은 관찰이 없다면, 그는 노력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이리저리 찾아 헤매면서 하루하루를 허비하다가, 정말 무상(죽음)이 닥쳐왔을 때는 이미 늦어버리게 됩니다.

 

질문: 만약 오로지 아미타불만 부르고, 다른 법문은 모두 배우지도 묻지도 않는다면 아마 이제부터 정토종만 남게 될 것이고, 시간이 더 지나면 말법의 시기가 매우 빨리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토염불에만) 치우쳐 집착하지 말고 마땅히 중용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보살들도 모두 많은 법문을 다 닦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답변: 이 문제에 대해 방금 모두 답변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문수보살께는 한 수의 발원게(願偈)가 있는데, 이 게송에서 문수보살님은 당신의 심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하오니, 제가 목숨이 마칠 때

모든 장애 다 사라지고

눈앞에서 직접 아미타부처님 뵈옵고

곧바로 극락세계로 왕생하여지이다.”

 

원아임종시願我臨終時 진제제장애盡除諸障碍

면견아미타面見阿彌陀 즉생안락찰卽生安樂刹

 

이것이 문수보살님의 발원입니다. 문수보살님은 법조(法照: 정토종 제4조, 당나라 때 오회염불을 창시)대사에게도 오로지 아미타불을 불러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럼 보현보살님의 발원은 무엇일까요? 보살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하오니, 제가 목숨이 마치려 할 때

일체의 모든 장애 다 사라지고

눈앞에서 직접 저 아미타부처님 뵈옵고

곧바로 극락세계로 왕생하여지이다.”

 

원아임욕명종시願我臨欲命終時

진제일체제장애盡除一切諸障碍

면견피불아미타面見彼佛阿彌陀

즉득왕생안락찰卽得往生安樂刹

 

아울러 보현보살님은 화엄회상華嚴會上의 41위位 법신보살들을 인도하여 극락으로 왕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부처님 앞에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께서도 모두 스스로를 하품하생의 범부로 생각하시고, 임종 때에 모든 장애가 사라져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 극락에 왕생할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앙을 없애고 어려움을 면할 수 있는 공덕 또한 이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재앙을 없애고 수명을 늘이게 해주시는 약사여래불의 불호의 능력도 이 나무아미타불이란 만덕홍명萬德洪名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섯 자의 위대한 명호(洪名)는 바로 아가타약(불사약)이며,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오직 ‘나무아미타불’이란 한 부처님의 명호만 부르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미타불을 부르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약속이나 하신 듯이 일제히 우리를 찬탄하시고, 우리를 기억하여 보호(護念)하시며, 우리를 칭찬해주십니다. 그러니 이 법문을 선택한 것은 사실 매우 지혜로운 선택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정토법문을 배운 뒤에는 더 이상 또다시 관세음보살님이나 대세지보살님의 명호를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아미타불만 부르면 관세음보살님이나 대세지보살님께서는 아주 기뻐하시면서 당신의 벗이 되어주시고 형제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보살님은) 마치 그림자가 항상 형체를 따르는 것처럼 당신을 보호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부르는 부처님은 바로 그분들이 머리 위에 모시고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관세음보살님의 목적은 바로 고난에 빠진 중생을 인도하시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시는 것이며, 그런 다음 극락세계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세음보살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무척 피곤하구나! 그대가 아직도 윤회하고 있고 아직도 고난 속에 있으니, 내가 세세생생토록 거듭거듭 그대를 고난에서 건져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대가 지금 이생에서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면 내가 홀가분할 수 있겠구나!”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법문과 이 부처님과 이 보살님의 목적을 알고서, 문자에만 의지하여 뜻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샛길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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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블로그 '가릉빈가의 꿈' 
 
1.

눈 속에 갇힌 보살 구출작전
2014.2.11
 
 이 절에는 아주 특이한 보살이 살고 있다.
 그녀는 구태여 산 중턱에 버려진 토굴에서 혼자 살겠다고 하여
 대중들과는 떨어져서 살고 있었다.
 음산한 기운이 들기까지 하는 곳에서 어찌 여인네가 간도 크지...
 
 그런데 그 토굴이 이번 폭설로 인해 고립되어 버렸다.
 해서 이틀째 그녀는 토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간 큰 그녀는 일주일 정도 갇혀있어도 상관없다며 전화통화에서 웃었다.
 이참에 단식수행하니 얼마나 좋으냐며...
 
 그래도 우린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온 직원이 눈을 치우느라 쳤으니 외딴 산 중턱에 있는 그곳에 어찌 가느냐가 문제였다.
 다들 눈에서 넘어지고 구르고 하여 몸들이 말이 아닌데...
 
 그런데 오늘 구원의 전사들이 나타난 것...짠~하고 말이다.
 
 인적이 끊긴 이 곳에 점심이 되어갈 무렵 무림의 고수같은 사나이들이 도량에 나타난 것,
 그들은 입구에서 부터 눈을 헤치며 (사실은 오히려 길을 내며) 들어왔다.
 그들의 손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아마도 사진작가들인 것 같았다.
 폭설에 잠긴 산사를 촬영하기 위해 일부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이곳에 감히(?) 오겠는가.
 
 우린 순간적으로 저 사람들을 꼬셔서 ^^ 그녀를 구출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촬영을 끝내고 가려는 그들에게 웃음을 흘리며 공양간으로 끌어들였다.
 "공양 들고 가세요"
 여자들의 집중 공세에 남정네들은 얼싸좋다 하고 들어왔다.
 ㅎㅎㅎ
 
 그리고 식사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 내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 부탁드릴게 있는데요. 이왕 오셨으니 좋은 일좀 해주시면 어떨까요.
 산 중턱에 갇힌 보살이 있는데 그녀를 좀 구해주십시오.
 이틀째 굶고 있어요."
 
 씨익 미소짓는 사나이들이 우째 그리 멋있게 보이는지 ^^
 그들은 흔쾌히 그러마 했다.
 나는 커피까지 타서 서비스를 하며 그들의 마음을 녹였다.ㅎㅎ
 
 차를 마신 그들은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출발...
 나는 혹시라도 그들이 변심해서 산밑으로 가면 어쩌나 싶어 따라나섰다.
 눈길에 미끄러질까봐 빗자루 하나를 스틱삼아 들고서...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다섯명 중에 가장 젊은 남자분이 앞장서서 걸어가는데
 그 분은 눈 속을 헤엄치듯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지를 걷는 사람과 같았다.
 중간쯤에서 네명의 남자들은 사진 촬영한다고 멈추고 앞장섰던 한 남자만이 눈길을 헤치고 나가는데
 아주 특이한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는 눈치우는 삽으로 눈을 푹 누르고는 등산화로 밟고 나아갔다.
 뒤따라 가는 나는 허우적 거리면서 따라가는데 그는 조금도 지친 기색도 없었다.
 
 "혹시 특공대 출신입니까?"
 
 "아닙니다. 산악인입니다."
 
 "오우 그래요? 어쩐지..."
 
 "저 에베레스트까지 다녀왔습니다. 세계 50개국을 등반했어요."
 
 "흐음...그렇군요. 당신에게 이정도는 마른땅 걷기일 뿐이군요."
 
 산신님이 도우신게 틀림없어.
 토굴에서 홀로 정진하는 그녀를 예쁘게 여기신 산왕대신이 이 분을 불러들인게 틀림없어.
 
 토굴에 도착해서 그녀를 부르니 그녀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섯명의 남자가 삽으로 눈을 치우며 와도 3시간을 걸릴 거리를 불과 삼사십분만에 도착한 것이다.
 
 그녀 또한 온갖 운동을 한...철인3종경기 까지 했으며
 암벽등반에 윈드서핑에 스킨수쿠버까지 한 여자인데도 엄두를 못낸 눈 길을
 너무 간단히 제압하고 온 이 남자에게 호기심어린 눈으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처사님, 삽으로 눈을 누르는 방법좀 가르쳐주세요."
 
 대단한 체력을 가진 그녀가 그의 가르침을 따라 해 보았으나
 한마디로 텍도 없었다 ^^
 130센티 정도 쌓인 눈을 누르기에는 그녀의 팔힘이 너무 약했다.
 겨우 30센티 정도가 눌려졌다.
 
 오우...남자의 대단함이 새삼 느껴졌다.
 암튼 그 남자의 도움으로 우린 쉽게 목적달성을 하게 되었다.
 
 아...너무도 감사한 분,
 예리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던 거사님 감사합니다.
 좋은 일 한 공덕으로 올 한해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특이한 보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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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미스테리한 여자
 2014.2.11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묘한 여자를 이곳에서 만났다.
 그래서 난 이여자를 '미스테리녀' 라고 부른다.
 
 나이는 나보다 두살 아래이니 같은 세대를 살아온 사람이다,
 처음에 이여자를 봤을때는 꼭 청학동출신 같이만 보였다.
 화장기없는 얼굴에 생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고 늘 회색법복을 입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이여자의 고집스러운 표정이 영 접근불가를 느끼게 했다.
 
 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어려워하고 한편으로는 마땅치 않아하는 여자였다.
 매사가 너무 완벽하니 그녀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못마땅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일은 엄청나게 열심히 하는 일꾼이기도 했다.
 
 누가 이 고집세고 별스런 여자를 다스려야할지 고민들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으니 내보낼 수도 없는 일.
 스님들조차도 어려워했으니...
 
 그런 이여자와 내가 생각지 않게 가까와지게 되었다.
 이여자의 정식업무는 빨래보살이다.
 하지만 시간을 쪼개서 공양간 일도 돕고 있었다.
 마침 공양주 한 분이 그만두는 바람에 내가 공양간에 투입되어 일을 하면서 이여자와 말을 트게 되었다.
 처음엔 냉정하게 바라보던 그녀와 조금씩 말을 나누게 되면서
 난 참으로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청학동에서 온 것 같은 이여자,
 무뚝뚝하게 생각했던 이여자는 의외로 상냥하고 부드럽게 나를 대했으며
 나에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으며 자신의 이력을 들려주었다.
 
 명문가문에 태어나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해운업을 했었다고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돈도 벌었다고...
 
 난 깜짝 놀랐다.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이여자가 명문가문의 여자라고?
 그것도 해운업을 했었다고?
 오마이 갓!!!
 
 왜 이런 삶을 자청해서 사느냐의 질문에,
 "어느 순간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굶주린 이리같이 보였어요.
 정말 다들 이리같아요. 탐욕의 이리들 말에요.
 그런 세상이 너무 역겹고 싫었어요.
 나의 남편도 그랬어요.
 그래서 이혼을 요구했죠.

 다행히 아이가 없었으니 미련도 없었죠.
 짧은 결혼 생활을 마감했죠.
 제가 이 세상에서 사랑할 사람은 부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알았어요.
 엄청난 부를 걸머졌으나 제 가슴은 항상 허전했어요.
 참 화려한 삶을 살았지요.
 사업을 정리한 후에 산으로 들어왔어요."
 
 "왜 출가를 하지 그랬어요?"
 
 "했었지요. 행자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제 이력에 결격사유가 있어서 승인이 나지 않았죠.
 일찍 죽은 여동생의 딸을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제 호적에 올렸거든요. 
 양육할 자녀가 있으면 안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선지식 찾아다니며 공부하고 살았어요.
 삼년 후엔 타종단으로 출가할까도 생각하고 있어요.

 절을 지어서 선지식 모시고 살려고요.
 제가 존경할 만한 선지식만 만난다면 전 그 분을 업어서 모시고 살 수도 있어요.
 농사 지으면서 공양하며 살고 싶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참 선지식이 없네요...많이 찾아 헤맸는데..."
 
 물욕도 애욕도 이미 떨어져 나갔다는 그녀가 들려주는 그녀의 삶은 참 재미있었다.
 호기심 많은 나는 여러가지를 질문하고 물고 늘어졌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은 어디에 숨겨두었어요?"
 
 "호호...바다에 던져 버렸어요."
 
 "저런...차라리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시지..."
 
 "언젠가 제가 필요할 때가 되면 바다에 가서 건져오지요 뭐. 호호호
 전 화려하게 살았던 지난 날 보다 지금이 더 행복해요. 아주 좋아요."
 
 하루는 그녀가 자신이 혼자 살고 있는 토굴로 초대를 하였다.
 버려진 토굴인데 스스로 자청해서 살고 있었다.
 귀신이 출몰한다고 하여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집이었다.
 담력있는 스님들이 도전했다가는 다 포기했다는 토굴이었다.
 
 소문대로 토굴주변에선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육이오 전쟁터였던 곳이라 비명에 간 젊은 영혼들이 많이 떠돌고 있다고 하였다.
 미스테리녀는 몇군데에서 출몰했던 영혼들을 만났던 이야기
 그들을 염불의 힘으로 천도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그당시의 비밀스런 일들도 스크린처럼 보았다고 했다.
 
 그런 영적인 능력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런 능력은 치열한 수행의 결과 얻어진 것이에요?"
 
 "아뇨...어려서부터 있었어요. 그래서 세상이 더 시시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누군가 무슨 말을 하면 전 그 결과가 그려졌거든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달려가더라구요.
 그것을 떨구어보려고 공부에 몰두했고, 일에 미쳐서 살았고
 한때는 운동에 미쳐서 살기도 했지요.
 그러다 부처님 법을 만나서 큰 깨우침을 얻고는 세속을 접었답니다."
 
 그녀의 토굴에 들어가니 그 안은 밝고 맑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루종일 나무아미타불 염불테잎을 틀어놓고 있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정진을 하고,
 저녁에 일이 끝난 후엔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토굴에서 염불정진을 한다고 했다.
 티비도 컴퓨터도 없었다. 
 오로지 책과 염불테잎만 있었다.
 
 "염불하는게 그렇게도 좋수?"
 
 "그럼요...넘 행복해요. 언니 우리 나중에 꼭 극락세계에서 만나요.
 그곳에서 같이 수행하여 성불한 다음에 다시 중생제도하러 지구에 옵시다."
 
 "난 자신없는데? 그대는 자신있수?"
 
 "예...전 결정코 극락왕생할 겁니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을 절대적으로 믿거든요."
 
 오...참 그 지극한 신심이 부러웠다.
 내게는 없는...또는 부족한 면을 그녀는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는 온순하고 순종적인 면도 있었다.
 절식구들이 모두 마땅치 않아 하는 그녀의 단점.
 즉, 자신이 이 절 일을 모두 하는 것같이 상을 내는 점,

 자신이 없으면 이 절이 안 돌아갈 것 처럼 생각하는 점.
 그 점을 내가 조심스럽게 지적했더니 의외로 잘 받아들였다.
 강하게 부정하거나 반기를 들을까 좀 염려했었는데.
 역시 배운여자인지라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사람에겐 무장해제였다.
 
 "모든 사람들이 절 그렇게 생각했다면 제가 한참 공부가 안되었다는 증거네요.
 제가 고쳐야지요...이 도량이 너무 좋아서 3년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 짤리고 싶지는 않아요 ㅎㅎ. 
 제가 맞추고 살아야지요. 고치도록 노력할게요."
 
 요즘 너무 부드러워진 이보살,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한다.
 어쩜 자신의 세계를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난 기쁨때문인지도???
 
 요즘은 대화가 통하는 이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나의 기쁨이기도 하다.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기쁨을 어디에 비교하랴?
 
 "언니...하산하면 서울 삼청동에 있는 ㅇㅇㅇ 요리집에 가서 제 이름 대고 식사하세요.
 언니가 먹고 싶은 것 어떤 것이든지요...제가 돈은 지불할게요."
 
 호우... 그 비싼 요리집에???
 은근하게 자신의 재력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사회의 유명인사들과의 인맥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명가의 여인이니...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전혀 세련되지도 않은 
 흰머리가 꽤 많은데도 염색도 하지 않고 질끈 동여맨 이여자의 모습을 보고
 누가 명가의 여인이며 명문대 출신의 여자로 보겠는가.
 그것도 큰 사업을 해서 막대한 부를 이룬 여자로???
 하지만 이여자의 강한 기질로 봐서는 그런 사업을 했었음직해 보였다.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도 좋으냐니 상관없다 했다.
 이여자의 수행기는 또 다른 기회에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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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는 오직 나무아미타불입니다
2014.3.15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니 그녀의 수행기를 듣다보면
 마치 큰스님이 내 앞에 앉아서 설법을 하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내가 만난 보살들 중에서 최고의 근기와 수행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아니 전문 수행자들도 흉내내기 힘든 수행을 한 여자였다.
 
 매일 삼천배를 삼년이나 했으며...그것도 공양주를 하면서...
 위빠사나,참선,아비라기도,주력수행 등 해보지 않은 수행이 없었다.
 
 "전 전생에 천태지관 수행도 치열하게 했었어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일반사람들이 들으면 정신병자라든지,
 뭐에 잔뜩 씌인 사람의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들을때는 대단한 그녀의 이야기에 귀가 쫑긋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점차 내게 비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수많은 전생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때 어떤 수행을 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 생에도 내로라 하는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그 분들의 시중을 들어가며 수행을 했다고 했다.
 이런 공개적인 블로그에는 올릴 수 없는 많은 선지식들의 비화를 들려주었다.
 
 "그런 결과 저는 나무아미타불 염불만이 이 말세중생에게는 최고의 수행법임을 확신했답니다.
 솔직히 참선하는 사람들 화두가 뭔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이 시대에 참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사람 없습니다."
 
 참으로 건방지게 또는 교만하게 보이는 그녀의 결론적 견해였다.
 
 "좌복에 앉아서 보살들이 해주는 공양을 드시면서 편안하게 참선을 해서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그 분들에게서 전 치열함을 보지 못했어요. 원력도 없는데 뭔 도를 얻습니까"
 
 당돌한 그녀는 머무는 사찰의 스님들에게도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산신기도를 하는 스님에게는,
 "스님은 어찌 산신기도를 하십니까? 부처님 제자면 당연히 부처님께 귀의를 해야지요.
 그리고 이 산신각에 산신 없습니다"
 
 나는 놀랍기도 한 그녀의 당당한 발언에 호기심도 나서 은근히 물어보았다.
 "정말 이 산신각에 산신이 없습니까? 이 곳은 명산인데?"
 
 " ㅎㅎ...산신이 어디 산신각에만 앉아 계신답니까?
 여기 저기 돌아다니시지요. 이 절의 산신은 공부의 경지가 굉장히 높은 분입니다.
 산신각에 와서 복을 빈다고 들어주고 그런 분이 아닙니다.
 아마 누군가 산신상에 돌을 던져도 아무런 반응을 안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승려라는 분이 산왕대신 찾으면서 무언가를 빌고 있다니 우습지 않아요?
 이곳의 산신은 도가 높은 분이라 세분으로 몸을 나투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손을 들어
 "저기에 한 분...또 저기에 한 분...또 저기..." 하면서 산신이 계신 곳을 가르쳐 주었다.
 솔직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
 
 도량의 신장들을 보고 있었으며 신장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스님들의 얼굴만 보아도 그 스님이 어느정도 수행을 하셨는지 꿰뚫어 보았다.
 한 번은 염불을 열심히 하시는 젊은 스님에게도 직격탄을 날렸었다.
 
 "스님,요즘은 밤에 방에서 염불은 안하시고 계시나봅니다.
  스님 얼굴을 뵈니 기(氣)가 막혀있네요.
  장애가 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시는 겁니까? 상기가 되셨지 않습니까?
 그럭저럭 수행하며 사실라면 뭐하러 출가를 하셨습니까?
 이론은 탄탄하시지만 행이 안되고 있질 않습니까? "
 
 어휴...^.^
 그래도 쫒겨나지 않고 절에 머물고 있는게 기적이었다.
 그런데도 스님들이 그녀의 앞에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를 두려워하기 까지 했다.
 아마도 그녀는 이미 타심통도 한 것 같았다.
 스님들의 얼굴만 보아도 그 스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예불시간에 스님들의 독경소리만 듣고도
 그 스님이 지금 망상에 젖어서 하는지 어떤지를 알았으며,
 목소리만 들어도 수행을 얼만큼 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녀는 영 불편한 보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도 내보낼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보내려 한다면 많은 곤욕을 치뤄야 함을 알기에...
 아마 종정스님에게 찾아가서 왜 자신이 해고를 당해야 하는 지 낱낱이 따지고 들 사람이었다.
 사실 그녀처럼 주인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온갖 허드렛 일은 그녀의 몫이었다.
 쓰레기를 치울 때는 영락없는 머슴의 모습이었다.
 
 "전 지게를 지며 사는 게 제일 좋아요. 호 호 호..."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 날 화려한 인생을 산 여자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녀와 내가 친한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어떻게 저런 여자와 가깝게 지내는지 기적같다며...뭔 비결이냐고...
 
 비결이라구요?
 난 다만 그녀의 근기를 알아보았으며 그녀를 존중해 주었으며
 그리고 이제는 존경까지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기도 많이 했다, 수행 많이 했다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보았지만
 그녀처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머슴처럼 살면서 수행하는 사람은 보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오직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하기를 내게 권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확고한 이론과 수행으로 무장한 그녀의 설법에 어찌 반발할 수 있으랴.
 
 "우리가 왔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너무도 그리운 우리의 고향이지요...나무아미타불..."
 
 그래 그렇다.
 이 세상의 어떤 단어도 이 보다 아름답고 거룩할 수는 없다.
 나무아미타불...
 그리고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만큼 거룩한 원이 어디 있을손가.
 
 "말세중생에게는 염불수행법이 최고입니다.
 다른 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화두를 든다고 하지만 오분이상 지속하기 힘들어요.
 그래갖고는 이생에 성불하긴 어렵습니다.
 이렇게 업장이 두터운 몸으로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제가 참선을 해보지 않았다면 이런 말 못해요.
 전생에도 전 참선을 치열하게 했었어요. 천태지관수행도 치열하게 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 모양 이꼴로 살고 있습니다.
 제 업이 너무도 두터우니 또 윤회를 하여 온 것이지요.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했답니다.
 저의 스승은 오직 아미타부처님 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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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전생에 심은 소나무 두 그루 
2014.3.15
 
 그녀가 내게 산책을 하자고 제의를 했다.
 햇살이 아름다우니...
 하지만 아직은 눈이 다 녹지 않아서 봄을 느끼기에는 먼 느낌이 들었다.
 
 우리 둘은 도량을 걸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는데,
 도량 입구에 있는 적송이 많은 곳에 이르렀을 때 였다.
 
 "보살님, 저 끝에 있는 저 두 그루의 소나무 보이시죠.
 저 두 그루의 소나무는 전생에 제가 제 도반과 심은 소나무예요.
 그 도반과 다음 생에 이 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는데
 그 도반은 아직 나타나지 않네요."
 
 "그래요? 혹시 그 도반이 나 아닌가요?"
 
 " 호 호...그럴지도 모르지요. 호 호 호 "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앞서서 걸어갔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
 그녀는 가끔 의미심장한 얘기를 내게 던지고는 더 이상 말이 없고는 했다.
 내게 연애 편지라며 건네주고 간 쪽지에는
 '전생애를 걸어 염불하는 것은 약간은 어려운 일 같지만 현생에는 복을 수용하고
 생명이 다하면 곧바로 정토에 태어나서 영겁으로 완전하고 평안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또 부처가 될 때까지 생사의 어두움을 헤매는 일이 없다.' 이런 류였다.

 수시로 내 방에 와서 법담을 나누길 좋아했고,
 내게 필요한 물품들을 말없이 사다가 들여주었다.
 내가 피곤에 지쳐서 누워있으면 그녀는 옆에 앉아 무량수경을 읽어 주었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여서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그 사찰에 온 이래 그렇게 밝은 얼굴을 보인적이 없다고 모두들 얘길 하니
 어쩌면 전생의 도반을 만난 기쁨 때문에 상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도 그 도량에 가기 전에 의미있는 꿈을 꾸었었고
 누군가 지중한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을 예감했었다.
 그리고 그 꿈의 주인공은 대단한 큰스님이었다.

 이미 그녀는 큰스님의 경지고 또 전생에 대단한 스님이었을 게 분명하니
 현생에 승복을 입고 안 입고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전생에 티베트에 살았던 얘기, 일본에 살았던 얘기, 조선시대에 살았던 얘기 등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발뒤꿈치도 따라가기가 힘든 사람이다.

 그녀처럼 살 자신조차도 없다.
 삼년을 기도하기 위해 그 도량에 왔다고 했으므로
 특별한 일이 아니면 도량 밖을 나가지 않았고,
 단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았다.
 직원들의 회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철저히 계율에 충실했다.
 
 그런 그녀가 볼 때,
 백일기도를 왔다는 스님들이 툭하면 도량밖을 나가시는 게 못마땅할 것은 뻔했다.
 
 "백일도 저렇게 못참으시나 원..."
 
 참으로 어려운 보살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나도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내게는 늘 깍듯했고 다정했다.
 아마 미혹에서 헤매고 있는 전생의 도반을 끌어올려주기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속세에 대한 아무런 탐착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절에서 주는 보시금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절이 어려운 것 같을 땐 보시금 받기를 사양하기도 했다.
 아직 미혹이 많이 남아 있는 나로서는 부러운 그녀였다.
 
 그녀의 절대적 신심이 한없이 부러웠으며 또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새벽에 가장 먼저 일어나서 도량을 정비하는 그녀,
 기도스님이 나오시기 전에 이미 그녀는 법당에 앉아서 염불을 했다.
 단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염불삼매에 들어서 본 현상들을 내게 얘기해주곤 했다.
 떠도는 수많은 영혼들이 찾아온 이야기 그리고 그들과 같이 염불한 이야기 등...
 
 그리고 이제는 염불도 중요하지만 어울려 사는 법을 공부해야 겠다고 했다.
 그녀의 수행담과 법담은 글로 다 옮기기 힘들다.
 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많으므로...
 나의 질문에 늘 확고한 답변을 해준 그녀,
 그녀의 그 확고함이 부러웠다.
 
 남자들의 유혹에 직면했던 이야기를 해 줄 때는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아이구...자기처럼 청학동 낭자같은 여자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런 소리 말아요. 옛날에는 그래도 예쁘다는 소리 많이 들었고
 몸매도 죽여준다고 했어요."
 
 "응??? 몸매가 죽여준다고라??? 
 그럼 어디 한 번 벗어 봐. 호 호 호..."
 
 최근에 겪었던 유혹에 대한 이야기는 더 배를 쥐게 했다.
 또 그녀의 답변이 더 재미있었다.
 "그 양반이 워낙 궁한 사람이라 나같은 여자라도 찍었겠죠."
 
 호 호 호...
 
 화장기 없이 생머리를 질끈 동여맨 그녀지만 예쁘장한 얼굴인 것은 사실이었다.
 키도 보기 좋게 컸고...
 하지만 그녀의 진면목을 알면 모두 도망갈 것인데...^.^
 
 소나무 두 그루는 정말 그녀와 내가 심었던 것일까?
 아님 다른 도반과 그녀가 심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도반이 빨리 그녀 앞에 나타나길 빌어 주고 싶다.
 
 그녀의 나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지극한지
 그녀는 자신의 돈으로 법당에 내 등을 달아주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소나무의 주인공은 아닐지 몰라도 그녀와 한 때 도반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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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난 상근기의 잣대가 아닌 하근기의 잣대로 사람을 보거든요
2014.3.15
 
 어쩌면 완벽한 수행자의 자세와 마인드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누군가가 볼 때는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점도 많이 있었다.

 최상승근기를 가진 그녀였으니 도무지 세상 사람들이 마음에 들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자세로 절에 와서 살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식의 말이 수시로 나왔다.
 그럴때 마다 나는 그녀가 지적하는 사람을 감싸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그녀는 못마땅했었나 보다.

 "수한보살님도 사람을 잘 못 보시는 것 같아요.
 어떻게 저런 사람을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합니까.
 얼마나 꾀를 부리면서 일하는지 모르세요?"

 그녀의 질타에 나도 한 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살님은 상근기의 잣대로 사람을 보지만, 
 나는 하근기의 잣대로 사람을 보거든요?
 내 잣대는 그리 세지 않기 때문에 왠만하면 다들 괜찮게 보일 뿐이에요."
 
 "알았어요 알았어요...ㅎ ㅎ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생각이 잘못 되었네요."
 
 웃으면서 수긍하는 그녀의 얼굴에 가식이나 불쾌함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점이 대단한 그녀의 장점이기도 했다.
 
 너무도 뛰어난 그녀였기에 사실은 매우 외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물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고, 산이 높으면 오르려 하는 사람이 없듯이
 그녀 주변에 사람이 많을리는 없었다.
 가끔씩은 그런 그녀가 안쓰럽게 보였으며,
 내 견해로는 그녀가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안쓰럽게 보였다.
 내 눈에는 모두가 힘겨운 중생살이를 하는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치열하고 뛰어난 그녀에게 부족한 점은 중생에 대한 사랑이었다.
 내가 보는 견해로는 그랬다.
 아니 어쩌면 나의 견해가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절에 사는 개나 고양이에게는 지극한 애정을 보였으므로...
 그녀석들은 그녀를 엄마처럼 따랐다.
 심지어 나무 한 그루에게도 지극한 마음을 보이곤 했다.
 때로는 나무와도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하지만 왠지 사람에게만은 참으로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 난 사람에게 따듯함을 줄 수 있는 그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었다.
 그래서 까다로운 그녀의 잣대를 무너뜨리는 말을 많이 하게 되었었다.
 
 아무리 뛰어난 수행을 한 사람이라도 중생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사람을 난 좋아하지 않으므로...
 서로 사랑하고 살아도 부족한 삶이며, 다 아픈 중생들 아닌가.
 다들 깊은 얘기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삶이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 고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치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으랴.
 전문 수행자라도 말이다.
 가끔씩 사찰에서 물의를 빚고 떠나는 스님들을 볼 때도 
 한편으론 한심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측은했다.
 아직은 중생의 탈을 벗지 못하였으니 측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난 그녀가 중생을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수행자가 되기를 바랬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살려고 하는 그녀의 삶이 때로는 버거워보이기도 했으며 너무 고독해 보였다.
 외로운 소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살면 외롭지 않나요?"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요. 전 너무 행복해요.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사는데 뭐가 외롭습니까?"
 
 철저한 그녀의 신심이 부럽기도 했지만 
 때로는 사람의 냄새가 나는 그녀가 되었음 했다.
 독각승의 이미지를 풍기는 그녀가 난 안쓰러웠다.
 아무리 자신은 괜찮다고 하지만 
 난 그녀가 중생들과 더불어 울고 읏으며 사는 보살이 되기를 바랬다.
 염불을 하여 극락왕생하는 것도 좋지만 
 이 생에서 사람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수행자가 되었음 했다.
 많이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사람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변해갔다.
 나의 바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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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삼천배 한 것이 뭔 자랑입니까
2014.3.15
 
 보통은 한 달에 한 번 삼천배만 하여도 대단하다고 하며
 백일을 삼천배를 했다면 존경해 마지 않는 것이 풍속이다.

 그런데 그녀는 삼천배를 삼년을 했다고 했다.
 그것도 공양주를 하면서...
 그러니 하루종일 일하고 절만 했다는 얘기 아닌가.
 이건 사람이 아니다 싶었다.
 그 결과 그녀는 다리 관절이 망가져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공양주 노릇도 얼마나 치열하게 했는지 손이 엉망이었다.
 저 여자가 한 때 그렇게 화려하게 산 것이 맞는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한문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보았으며
 나와의 깊은 대화에서 상당한 인텔리임을 알아보았으니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일 삼천배를 삼년을 하였다???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얘기였다.
 
 "아니 어떻게 삼쳔배를 삼년씩이나 할 수 있어요? 사람 맞아요?"
 
 나의 질문에 바로 튕겨져 나온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삼천배 한 게 뭐 자랑할게 되는 일입니까?
 오죽 업이 많았으면 그렇게 지독하게 참회기도를 해야 했겠습니까?
 전 전생에 00나라의 큰 벼슬아치였는데 46살에 사약받고 죽었어요.
 그리고 지옥에 떨어졌지요.
 그 지옥의 고통을 기억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그래서 그 업을 참회하느냐고 치열하게 수행했어요."
 
 허억...나는 그녀의 답변에 입을 벌리고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저는요, 사람들이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때로는 한심해보여요.
 수많은 살생의 업을 가진 사람들이 어찌 건강해지기를 바란답니까.
 그것처럼 강한 탐욕이 없어요. 너무 염치없는 바램이지요.
 건강해서 뭐할라구요.

 조금더 명이 길어지는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건강한 몸으로 큰 일을 하려는 원이 있으면 모를까 그 탐욕은 버려야 합니다.
 전 스님들이 시자들에게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 모습도 영 마땅치 않았어요.
 아직 촉의 경계에 끄달리고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다리가 아프면 아픈대로 그 경계를 공부로 삼으면 되는데 왜 남한테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지..."
 
 아이쿠...나는 말문이 막혔다.
 누가 감히 그녀에게 수행을 말할 수 있으랴.
 
 "그런데 이 도량에 소나무를 심은 것은 어느 전생이유?"
 
 "전전생이에요. 그때 제가 수행을 하다 잠시 옆길로 빠졌거든요.
 그래서 그 다음생에는 벼슬아치가 되었고...탐욕도 부렸고 결국 사약받고 죽었지요 뭐.
 바로 환생에 들지 못하고 오랫동안 지옥고를 겪다가 이 생에 몸을 받았지요.
 이 생에 몸을 받아가지고도 전생의 탐욕이 남아가지고 사업을 했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 여겨져 세속을 접었어요.
 사람들은요 자신들이 얼마나 업보중생인지 모르고 탐욕만 부려요.

 그러니 부지런히 참회기도를 해야해요.
 참회기도 없이는 도를 못이룹니다.
 백날 가부좌 틀고 앉아 있어봤자 소용없어요.
 업장에 가려서 화두가 들리지 않아요. 온갖 장애가 일어나는데요 뭐.
 참회기도 없이는 그 장애를 뛰어넘지 못해요."
 
 참회기도 없이는 장애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녀의 말이 가슴깊이 와 닿았다.
 사실은 나도 선방에서 꽤 수행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엄청난 장애에 침몰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너무나 가슴 아픈 기억이었다.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다.

 한 경지에 이르려는 그에게 엄청난 마장이 왔었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조금은 실망도 했었고, 회의도 했었고, 슬프기도 했었다.
 꼭 엑소시스트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그것은 전생의 무서운 업에 의한 장애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녀도 나와의 대화로 인해 변해갔지만 
 나도 그녀와의 대화로 인해 변해갔다.
 더 깊이 내 속에 있는 탐욕의 근원을 보게 되었고 버리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대단한 선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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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그녀는 미타행자
2014.3.21

 미타행자,
 그녀의 호칭을 이렇게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직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만을 염하고 있으며 극락세계를 관하고 사는 여자이고
 모든 사람에게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를 전하는 원력을 세운 미타행자이기에...
 
 나는 그녀가 얼마만큼의 수행과 이론으로 말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
 이리 찔러 보고 저리 찔러 보면서 그녀를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때 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를 긴장하게 했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게 했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어설픈 수행력으로 하는 말들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 그녀가 잠시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고자 했던 분들은 
 왠만한 사람은 감히 친견하기 조차 어려운 당대의 선지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왜 화두를 들지 않느냐고 질문했을 때
 이런 글에서 밝히기는 좀 거북한 많은 경험담들을 들려주었다.
 도를 구하고자 선지식들의 시봉들기를 주저하지 않은 치열함
 그 당대의 선지식들에게서 공부하고 느꼈던 점들의 거침없는 설명은 나를 놀라게 했었다.
 생각외로 그녀가 굉장히 깊이 갔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선지식들께 원력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떠나왔다는 그녀의 당돌함엔
 통쾌하기도 하고 어의없기도 하고 미소짓게도 하고 그랬다.
 
 "솔직히 화두 제대로 두는 사람없어요. 모두 말장난이에요.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들을 하고 있어요.
 화두는 의심을 일으키는 것인데 그 의심을 과연 제대로 일으킬 수 있을까요?
 설사 일의킨다해도 몇분간 지속할 수 있을까요.
 금새 망념이 들어오고 대부분 졸고 앉아 있어요.
 고요함이 화두는 절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달마대사로부터 이어져온 선을 부정하는 겁니까?"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말법시대라 참선을 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우리나라 불교의 한심한 문제는 이상하게 선을 하는 사람은 굉장히 높이 보고
 염불하는 사람은 하근기 할매들이나 하는 것으로 무시하는 풍토라는 겁니다.
 진정 화두가 뭔지도 모르면서 선을 높이 보고
 진정 염불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시들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일반적으로 염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길로 알고 있잖아요?"
 
 "물론 염불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게 염불이기도 합니다.
 입으로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왼다고 다 염불은 아니지요.
 진정 그 마음속에 부처님을 담고 하는 것인지,
 부처님의 원력을 백프로 확신하고 하는지는 모를 일이지요,
 그냥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그건 염불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특히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는 상근기가 아니면 할 수가 없어요.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온갖 망념과 탐진치에 쩔어서 염불을 한들 그게 염불이 되겠습니까
 전 위빠사나든 참선이든 주력이든 염불이든 절수행이든 어떤 질문에도 확고하게 답변할 수 있으며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자신있게 지적할 수 있어요. 
 제가 다 치열하게 해보았으니까요."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상근기가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이라?"
 나의 의외의 답변에 좀 놀라왔다.
 내가 그동안 염불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살아온 듯 했다.
 
 "그럼요...근기에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염불이긴 하지만
 상근기가 아니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나무아미타불 염불입니다.
 우리의 본래면목 자리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며 하는 염불인데 쉽다고 보면 안되지요.
 솔직히 평생을 화두들었다는 큰스님들의 임종에 얽힌 비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다들 실망할 겁니다. 임종의 순간에도 화두를 들어야 하는데 놓친다 이 말입니다.

 그만큼 화두 드는것이 쉬운게 아닌데 왜 참선타령들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거기다 제대로 염불도 안 해 본 사람들이 왜 염불을 우습게 아는지 모르겠어요.
 그 마음 속에 진정한 신심도 없으며 원력도 없는 사람들이..."
 
 "....."
 나는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할 말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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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도량이 염불하는 것을 보세요 
2014.3.21
 
 "수한 보살님 얼른 산신각으로 와 보세요 좋은 것 보여줄께요"
 
 그녀가 상기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난 ' 알았어' 하고는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올라가지를 못했다.
 한시간 쯤 지나서 그녀가 내 방을 두드렸다.
 
 "왜 아까 산신각으로 오라고 했을 때 안왔어요.
 제가 근사한 선물을 드릴려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올라갈 기운이 없더라고, 그런데 무슨 선물을 준다고 그래
 누가 산신각에 좋은 공양물이라고 올렸는감?"
 
 "호호... 그게 아녜요.
 오늘 이 도량이 염불을 하더라구요.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수한보살님께 보여주려 했어요.
 산신각에서 보면 도량 전체가 다 보이잖아요."
 
 "하이구...도량이 염불을 한다구요?"
 
 "그럼요. 도량도 염불을 하지요."
 
 "흐음...그렇다한들 내가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말이지..."
 
 "그때는 도량전체에 바람이 분답니다.
 하지만 그냥 부는 바람하고는 달라요. 
 보살님과 같이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다음에 제가 부르면 얼른 오세요, 보여줄게요.느껴라도 보시라구요."
 
 완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네...^.^
 
 " 도량에 계신 산신님은 저와 천 년 전에 인연이 있던 분에요."
 
 "으잉??? 그것까지 안다고라???"
 
 "예...천 년 전에 이 곳 산신님은 ㅇㅇ국의 왕자님이었고 전 일본 귀족의 딸이었지요.
 그 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었어요.호호호...^.^
 왕자님은 다음 생엔 ㅇㅇ국의 큰스님이었던 ㅇㅇ국사로 불리었지요.
 아주 도가 높은 큰스님이었던 분이 이 곳 산신으로 계신답니다."
 
 못살아 정말...
 
 "그래서 이곳에서 만나니 기뻤겠네요?"
 
 "호...이미 남녀의 애욕을 떠나신 분인데요 뭐 호호..."
 
 "그래 두 분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수?"
 
 이 대화만큼은 나만 알고 있어야 겠다? ^.^
 
 "근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다 알 수가 있어요?"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죽어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보살님이 알고 싶은 것 다 알 수가 있어요.
 그리고 전 전생에 천태지관수행을 치열하게 했었다고 했잖아요."
 
 상기된 얼굴로 미소지으며 내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맑고 어린아이같이 귀엽다.
 별난 그녀와 별난 이야기들을 나누는 기쁨만이 그 도량에서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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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미타행자 그녀는 날 두렵게 했다
2014.3.21
 
 미타행자 그녀는 늘 간곡하게 내게 염불하기를 권했다.
 말세중생이 생사의 고해를 건너가는 방법은 나무아미타불 염불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에, 즉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있다고  했다.
 그 본원력에 의지하지 않고 고해의 바다를 건널 생각을 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생각이라고.
 아니 어림도 없는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점점 한숨이 나왔으며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고,
 그녀의 경지가 날 두렵게도 했다.

 그녀는 선지식들이 쓴 책만보고도 그 사람의 사생활까지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감히 그녀 앞에서 나를 자랑한다든가 거짓을 말한다든가 하는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어느 사람들은 신기가 있다고 폄하해서 말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듣는 것도 다 자신이 전생에 사람들의 운명같은 것을 봐준 업보임을 알기에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쉽게 신기가 있어서라고 폄하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내로라 하는 선지식들과 법거량을 하면서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여자이니...
 나는 매우 깊이 있게 그녀를 점검해 보았었고,
 그녀에게서 나오는 답변은 늘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삼매에 드는 것도 진정한 삼매는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업장이 소멸되지 않고는 삼매에 들 수 없다고 했다.
 욕계의 중생은 설사 삼매에 든다고 해도 거친 삼매에 들 뿐이라고 했다.
 모두들 진정한 삼매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말장난들을 한다고 강하게 항변했다.
 
 화두를 든다고 하나, 의정을 일으키는 게 무언지 제대로 알고 하는 사람이 없으며
 조사의 경지에 간 선지식이 아니면 화두를 제대로 들 수 없다고 했다.
 자신도 한 때는 화두를 들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속았다고 말했다.
 화두를 든다고 생각하는 순간 화미에 빠지는 것이며
 진정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를 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것이라고...
 
 "그럼 일반적으로 견성이라는 것을 생각이 끊어진 무념의 자리를 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또 어느 선지식은 화두는 적극적인 무념이라고 하셨는데?"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본래면목자리라고 본다는 것은 너무 한심한 생각입니다.
 본래면목자리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화두를 적극적인 무념이라고 말했다면 그 분은 화두가 뭔지를 진정으로 모르고 계신 겁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무념은 참나의 경지가 아닙니다.
 선에서 말하는 그 자리 하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 하고는 전혀 다른 얘깁니다.
 다들 참선을 이상하게 이해하고 말하고 있어요."
 
 "그래도 요즘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공부가 익은 사람은 걸음걸이도 다르고 손놀림도 달라요.
 전혀달라요...자칭 깨달았다고 하는 분들 만나보니 아니었어요.
 다들 말장난 하고 있고, 그 말장난에 속고들 있어요.
 진짜 화두를 들라면 깨달은 이후에나 들 수 있다고 전 생각해요.
 그 전에는 절대로 화두 못 들어요.
 그러니 보살님도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염불이나 부지런히 하세요."
 
 참으로 단호하고도 무서운 말이었다.
 점점 그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같이 웃고 떠들면서도 그녀는 나의 행동거지를 모두 들여다 보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모두를 그녀를 그냥 좀 특이한 여자, 또는 별난 여자,
 때로는 지멋에 겨워 사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수행에 관한 한 그녀의 공부는 굉장히 깊었다.

 이론적으로도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년기도 중 지금 2년 가까이 되었는데 단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았으며
 단 하루도 정진을 빠뜨리지 않을 만큼 치열했다.
 그러면서도 도량의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

 쓰레기 치우고 지게지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보통의 사람이면 월급을 더 달라고 할 터이지만
 그녀는 자기는 돈 쓸데가 없는 사람이니 그 마저도 받지 않으려 할 때가 많았다.
 그녀와 대화를 하면서 내 다리에 힘이 빠져갔다.
 맥이 탁 풀렸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내가 한 공부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갑자기 수행에 대해서 누구와 얘기 하는 것도
 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감히 근기도 안되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산 것은 아닌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행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잘못된 관념을 버리고 고치고 하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바르게 선지식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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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처님의 손을 잡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014.3.21
 
 미타행자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이제껏 제대로 부처님의 세계를,
 또는 부처님의 본원력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성찰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날 나의 스승이었던 분의 경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했다.
 나의 근기가 너무 하열했으므로...
 
 나는 오랜만에 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이제서야 왜 정토삼부경이 모든 경전을 공부한 후에 마지막으로 공부해야 하는 경전임을 알게 되었다.
 그냥 환상의 세계같은 아미타경이 얼마나 어려운 경전인지 인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는 아직 아미타경을 이해는 커녕 읽을 수 있는 경지도 아니라고 했다.
 관무량수경을 읽으나 극락세계를 제대로 관할 수도 없는 하열한 경지이며
 업보중생의 몸으로는 솔직히 극락세계를 마음에 그리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위대하고 심오한 경전을 너무 쉽게 해석들을 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나는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이 얼마나 위대한 원인지 새삼 느끼게 되어
 마음이 착잡하고 힘들고 슬프기 까지 했다.
 지난 날 나의 스승은 어느 사찰에 가든 늘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을 읽으셨다.
 그 분이 왜 그러셔야 했는지를 그 분의 그 간절한 심정을 이제서야 제대로 알게 되어 슬프기도 했다.
 
 그 분은 늘 말세중생은 부처님의 손을 잡고 가지 않고는 절대로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강조하셨었다.
 이 생에서 내가 만난 백프로의 절대적인 신심을 가진 유일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번에 미타행자인 그녀를 만나면서 그녀 역시 백프로의 신심을 가진 여자임을 알게 되었다.
 
 아, 지난 날 나는 왜 그리 어리석었을까.
 나의 스승이 내게 한 눈 팔지 말고 부처님을 염송할 것을 그리 권하셨으나
 나는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며 진실하게 정진하지를 않았었다.
 아니 나에겐 믿는 마음이 부족하였으니...
 
 그녀도 내게 믿는 마음이 부족함을 나무랐다.
 나를 염불행자로 만들기 위해 그녀는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을 깊고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다시금 부처님을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아니 내 마음 속에 지극하게 모시기 위하여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의 수행은 이제부터 진정 시작됐다고 해도 될 터였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수행의 첫시작으로...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이제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만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며 행복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날의 방황과 공부가 헛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방황과 공부는 값진 거름이 되었다.

 보다 넓게 세상을 알게 되었고 수많은 편견도 버리게 되었으니...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은 죽는 날까지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난 모든 진리의 말씀은 사랑할 것이며
 법을 전하는 모든 선지식들을 경배할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이 여섯자 속에 얼마나 많은 공덕이 들어있는지 아느냐고 그녀가 말했었다.
 그래서 이 여섯자를 염송하는 사람은 그 어떤 무거운 업도 소멸할 수 있다고 했다.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의 힘에 의해 그리 된다고 강조했다.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을 의심하지 말고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생사의 바다를 건너자고...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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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우리 공양주 결사 해볼까요? 
2014.3.23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수한보살님 우리 둘이서 일년 동안 공양주 결사 한 번 안해볼래요?"

 "응...? 공양주 결사라고요? 호 호 호..."

 난 너무 우스웠다.
 만일염불 결사도 아니고 공양주 결사라니?
 
 "같이 한 번 해보고 싶어요.
 공양주 노릇 하는 것이 공부에는 최고에요.
 공양간에서 일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어요.
 밥 먹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이 보이고 공부정도가 보여요.
 또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을 지으면서 자신을 보는 공부도 되고요.
 복도 짓고 업장소멸도 하고...공양주가 최고지요."
 
 공양주 일은 이미 회향했다더니 왠일이래?
 아마도 나와 공양간에서 일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재미있고 좋았나?
 그녀의 소임은 빨래와 청소지만 공양간에 항상 사람이 부족하다보니
 수시로 공양간을 들락거리며 일을 거들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눈빛에서 
 어쩌면 그녀가 나에 대한 배려로 그런 제의를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업을 팍팍 녹여줄라고...
 그래야 소멸될 업을 그녀가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계획이 있고 또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승낙을 못했다.
 그녀와 같이라면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녀가 있었기에 그동안 어떤 도량에 머물때 보다 즐거웠으며 행복했다.
 대화가 통하는 도반과 같이 살고 같이 일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즐겁다.
 하루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그녀의 얼굴이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듯이...
 
 그녀는 나를 설레게 했다.
 오늘은 또 어떤 대화들을 나누게 될까 해서...
 난 점점 그녀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사랑하게 되었다.
 또 한 사람의 선지식으로서...
 
 공양간에서 일하다보면 공양주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이
 스님들의 음식타박이다.
 이 점은 나역시도 가장 못마땅한 부분이었다.
 매우니 싱거우니 짜니...
 
 그때마다 그녀의 입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참내 스님도... 자성이 없다고 하시고서 와그라시노?
 매운 맛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조금 있으면 사라질터인데
 왜 없는 자성에 끄달리신단 말인고?"
 
 "호 호...그러게 말이야."
 
 "제가요. 아무개큰스님 밑에서 시봉을 들었었는데요.
 세상에나 얼마나 음식이 까다로우신지요 공양주들 죽여주데요.
 그러시고서 무슨 한소식을 했다고 그러시는지...
 전 음식타박 하는 스님은 절대로 한소식했다고 인정 안합니다.
 한소식했으면 그럴 수가 없어요.
 미각에 걸려 있는데 무슨 한소식입니까?"
 
 그녀는 출가수행자보다 더 계율에 철저했다.
 육식은 절대로 안했는데,
 그 이유가 살생의 인연을 맺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들 업 중에서 가장 큰 업이 바로 살생의 업이라고...
 오신채도 음욕과 화를 북돋운다고 먹지 않았으며 오후불식 하였다.
 
 "제대로 수행을 한 사람은 육식을 하라 해도 못합니다.
 오신채도 먹으면 몸에서 금방 신호가 와요. 
 그걸 못느낀다면 그는 수행을 제대로 한 사람이 아니지요.
 계는 일부러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야 해요.
 또 여러가지 음식을 먹는 것은 일견 골고루 먹어서 좋은 것 같지만
 수행자에게는 산만심을 길러줘요.
 음식을 간결하게 먹는 사람일수록 수행의 깊이가 있다고 보면 돼요."
 
 그녀가 있어서
 그녀에게 법문을 들을 수 있어서
 그녀에게 어떤 궁금한 질문도 할 수 있어서 
 그래서 그곳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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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렇게 살기 위해 많은 걸 버렸답니다
2014.3.26
 
"전 이렇게 살기 위해 모든 걸 다 버렸어요. 하지만 후회도 미련도 없어요."

 청소 하고 빨래 하고 남는 시간은 치열하게 염불정진하는 그 삶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도 안가고 안타깝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몇달 전에 그녀의 동생이 찾아와 언니가 사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바가지로 흘리고 갔다고 했다.
 
 하긴 그렇기도 할 것이다.
 세속말로 스펙이 화려한 그녀이니 기가 막히기도 했을 것이다.
 
 불교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카톨릭교도 였으며 모태신앙이라고 했다.
 그녀는 의대를 나와서 한동안 카톨릭계에서 운영하는 나환자들을 위한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었다고 했다.
 그녀의 보살심은 이미 타고난 것이었나 보다.
 가장 낮은 곳으로...가장 힘든 곳으로 가려고 하는 보살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종교의 보살행과 불교의 보살행은 비교할 수 없는 경지라고 말했다.
 타종교의 보살행은 '나'가 남아있지만 불교의 보살행은 철저히 '나'를 부정하고 내세우지 않는 행이라고,
 
 여차여차한 사유로 인해 의사생활을 접고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이유는 오직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는 그 돈으로 중생구제사업을 할 생각을 했다고 했다.
 고아들 40명쯤 데려다 키울 생각을 했었다고...
 그 뜻을 같이 할 남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던 중
 뒤늦은 나이 사십에 겨우 만나서 결혼을 하였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니 남편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더 큰 돈만 추구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단다.
 허탈한 마음에 우연히 해인사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운명을 전환할 발심을 하게 되었단다.
 해인사 부처님에게 홀딱 반해서 이혼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이혼을 안해주려는 남편과 힘들게 정리를 했지요.
 이혼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락을 해 오는 남편 때문에 많이 울었답니다.
 눈에 핏줄이 터지도록...저의 친정부모님은 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까지 했어요.
 신부가 된 두명의 삼촌들은 불교로 개종한 저를 무척 나무라셨습니다.
 결국 식구들 몰래 산으로 도망갔어요."
 
 "... 혹시 남편에 대한 미련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나요?"
 
 "아니요...전생의 빚을 갚기 위해 만났던 건데요 뭐.
 제가 전생에 큰 벼슬아치였는데 당연히 많은 첩을 두었겠지요?
 그때 오로지 저만 바라보고 일편단심 사랑한 여인이 현생의 남편이었어요.
 사랑을 혼자 독차지하고 싶던 그 열망때문에 이생에 부부로 만난 것 같애요."
 
 "지금의 삶에 대한 후회같은 건 없어요?"
 
 "ㅎ 어느 사찰에 있을 때 어떤 보살님이 제게 그러데요.
 '이렇게 젊고 고운 보살이 아깝게 왜 이렇게 사느냐' 고요.
 ㅎㅎ 제가 이렇게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요.
 세속의 인연들 때문에 밤이 하얗게 새도록 운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늘 결론은 똑같았어요.
 이 선택을 잘했다구요.이렇게 사는 것이 넘 행복하답니다."

 
 "아직도 고아들을 키우고 싶다던 꿈은 간직하고 있나요?"

 "불교로 개종하고나서 그것만이 최선의 삶의 방식은 아님을 알았답니다.
 좋은 일...하면 좋지요. 하지만 전 이생에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싶답니다.
 몇년 후 다른 종단으로 정식출가를 하여 절을 하나 짓고 살까 생각도 하는데
 그때 그 꿈을 펴게 될 수도 있지요.

 지금은 그저 기도에만 충실하고 싶어요.
 무엇을 하든 제 업이 왠만큼 소멸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어오는 업장의 바람을 막을 수 없거든요.
 참회기도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종교인들이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전 참회해야 할 업이 너무 많은 사람에요."
 
 그녀는 참회기도의 중요성을 늘 내게 강조했다.
 업장이 두꺼운 사람들은 기도도 잘 안되고 어떤 수행을 해도 마장에 걸려 넘어지며
 세속의 일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일단은 내 안의 쓰레기들을 먼저 치우고 깨끗한 그릇을 만든 다음에
 무엇을 담아도 담아야 한다고...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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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전 선(禪)을 할 근기가 못됩니다 
2014.3.26
 
 오직 나무아미타불 염불만을 할 것을 강조한 그녀지만 선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수승한 선을 하지 않고 왜 염불을 선택했습니까" 물어보았다.
 
 "아이고 보살님...제가 선을 할 근기가 안되니까 그렇지요.
 선이야 말로 최상상근기가 하는 것 아닙니까.
 해보니 제 근기같고는 안되더라 였어요."
 
 "그런 대단한 근기를 갖고도 선을 할 수 없다면 누가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선을 할려면요.
 걸식수행을 하여야 하고,
 분소의를 입어야 하고,
 한 나무 밑에서 하루 이상 잠을 자지 않을 정도가 되야 해요.
 이 시대에 그럴 수 있는 수행자 있습니까?

 편하게 선방에 앉아서 보살들이 해드리는 공양 드시면서 무슨 선을 합니까?
 그건 제대로 된 수행이 아닙니다. 그래갖고는 선은 못합니다 어림도 없지요.
 다들 수행이라는 겉멋만 잔뜩 들어있어요.
 재가자들도 선방에만 다니면 목에 힘주고 다녀요.
 웃기는 착각들이고 작태들이지요.
 선이 뭔지 화두가 뭔지 알고나 그러는지 한심해요."
 
 난 할 말이 없어서 헛헛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내게 하는 말이,
 "보살님도 이제는 염불할 근기가 된 것 같습니다."
 
 "와 하 하...이제서야 염불할 근기가 되었다구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상당히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쁜 말이기도 했지만
 난 어처구니가 없고 기운이 빠지기도 해서 한바탕 웃어제꼈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내게 했으면 심하게 반격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행의 고수가 하는 말이니 수긍하지 않을 수도 없고...ㅎㅎㅎ
 
 "염불이 아무나 하는 건줄 압니까.
 입만 달싹거린다고 염불이 아니잖아요.
 그동안 이런 수행 저런 수행 하면서 간도 보고 맛도 보았을터이니
 이제는 흔들림없이 염불수행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느정도 진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도 있고 업장도 많이 녹아내린 사람이 할 수 있는게 염불수행입니다.
 복을 비느냐고 하는 염불은 참된 염불이 아닙니다.
 그건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듯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에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라?"
 그녀는 참으로 신랄했다.

 "제가 그렇게 말하니 어떤 사람이 항의하데요.
 그럼 기도할 수 있는 근기가 되는 사람도 없겠다고요."
 
 "그렇게 반격할 수 있지요. 중생의 마음이란 건 소원성취에 목이 마르니까요."
 
 "소원성취는 참회기도를 열심히 하면 저절로 되요.
 업이 녹아내리면 저절로 되는 것인데 자꾸 부처님이나 신들에게 청탁을 하고 거래를 하려고 드니 문제에요."
 
 "그럼 참회기도는 어찌해야 합니까?"
 
 "저는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를 지극하게 염하면 참회는 저절로 된다고 봐요.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없이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면서요.
 그러면 업장이 녹아내려요.
 전 저의 이 몸뚱이는 부처님을 예경하는데만,
 이 입은 염불을 하는데만 쓰고 살다 가고싶어요.
 그런데 요놈의 입은 그게 잘 안되네요. ㅎㅎㅎ "
 
 참으로 절대적인 신심을 가진 여자다.
 난 그녀의 신심이 너무 부러웠다.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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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주력수행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2014.3.26

 "내가 말했다.
 전 주로 주력수행(진언,다라니)을 많이 했어요."
 
 "제가 봐도 보살님은 전생에 주력수행으로 한 경지에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주력수행을 그만두고 염불을 하라 합니까?"

 "부처님의 명호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주력수행은 위험성이 많아요.
 저도 한 때는 백련암에서 아비라 기도를 했습니다.
'아비라의 여신'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치열하게 했습니다.
 남들은 두꺼운 방석을 깔고 호궤합장을 하였지만 저는 얇은 방석을 깔고 했어요.
 삼천배를 21일 한 후에 시작하였죠.
 당연히 능엄주와 법신진언도 치열하게 했지요.

 그때 많은 경계체험을 했습니다.
 제 전생도 보이고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의 전생도 보이고 뭐 그랬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니겠지요.
 능엄주를 할 때 아주 이상한 현상을 겪었어요.
 보통 5분이면 일독을 하는데 하루종일 했는데도 21일독을 못 넘어가는 거에요.
 입에서는 계속 침이 나와서 옆에 물컵을 두고 침을 뱉어가면서 했어요.
 죽어라고 하는데도 21일독을 겨우했어요.

 그리고 무서운 경계를 보았어요.
 그 이후 '아, 능엄주는 아무나 해서는 안되는구나' 깨닫고는 접었답니다.
 성철스님도 하루 7독이상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지금의 한국불교에선 능엄주를 하루 백팔독,또는 그 이상을 하고 있어요.
 전 매우 문제가 심각하다고 봅니다.
 능엄주를 하면 모든 부처님과 신들과 조사들까지 다 불러들여 모시고 하는 것인데
 다 모셔놓고는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요?

 수습할 능력도 뭣도 없으며서 잔뜩 불러서 모셔놓고 어떡하겠다는 건지...
 다른 주력수행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주력은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그 다라니를 수호하는 신들까지 청하는 것이거든요.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결려서 무서운 현상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수행법이 염불법임을 알게 된 겁니다."
 
 "하긴 전에 저의 스승였던 분께서도 능엄주나 천수다라니 하는 것을 경계하셨어요.
 당신의 체험으로는 능엄주는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아니면 안되고
 천수다라니는 보살행을 서원하는 사람이 아니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어요.
 주력수행을 하다보면 당연히 신통이 오는데 그걸 감당할 근기들이 아니면서 
 이상한 욕심에 끌려서 하고 있으니 위험하다고 했지요."
 
 "사실은 저에게도 신통이 왔지요.
 손에서 열이나고 얼마나 뜨거운지 합장조차 할 수 없었어요.
 누군가가 제 손으로 다른 사람의 아픈 부위를 만지면 나을 수 있을 거라 했어요.
 손에 치유의 능력이 왔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 능력을 안쓰면 오히려 제게 화가 미칠거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 그 능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안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인가 손의 열이 식기 시작하더군요."
 
 '대부분은 그 능력을 쓰고 싶어 했을텐데 용케 극복하셨네요."
 
 "전 누구 운명 봐주고 병 고쳐주고 그런 것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다고 운명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병 고쳐준다고 그 사람이 영원히 삽니까?
 신통한 사람의 능력에 의존하여 병을 고치면 다른 것으로 곤욕을 치뤄야 합니다.
 그게 철저한 인과법의 세계거든요. 이 세상엔 공짜 없습니다.
 전 한때 신장에 이상이 생겨서 이식수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를 상황까지 갔지만
 그 모든 것을 저의 업으로 알고 오직 참회기도를 하여 병을 낳았습니다.
 작은 병은 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지만 큰 병은 참회기도 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느 선지식께선 참회기도만 하고 가도
 이 생에서 훌륭한 수행을 하고 가는 것이라고 했나 봅니다.
 아, 저도 근기도 안되는 사람이 너무 많이 기웃거리고 산 것 같습니다."
 
 "ㅎ 하지만 해보지 않은 것보다는 해보는 것이 나아요.
 그래야 그 문제점도 알고 다시는 흔들림 없이 염불정진할 수 있으니까요.
 경전공부도 해야 할 땐 해야해요.그러지 않으면 자칫 사도에 빠질 수 있거든요.
 이제는 보살님도 흔들림없이 염불수행을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처음 이 곳에 오실 때보다는 업장이 엄청 녹아내렸어요.
 아주 짧은 시간에 무척 많이 녹아내린게 보이네요.
 이제 진짜 염불을 하실 수 있는 근기가 된 것 같아요.
 염심히 해보세요. ㅎㅎㅎ "
 
 "흐음...ㅎ ㅎ ㅎ "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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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수행할 땐 명산의 지기를 받는 것도 좋아요 
2014.3.26

 그녀는 내가 그 도량에 오래 머물기를 청했으나
 나는 한 도량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떠나겠다고 말했다.
 한 곳에 오래 있다보면 타성이 생기고 이런 저런 문제들에 휘말려들어가기가 쉽다.
 그때부터 수행은 끝이다.
 
 이런 내 의중을 그녀는 십분 이해했다.
 자신도 한 도량에 일년 이상 머문 적이 없는데 이 곳 만큼은 2년가까이 머물고 있다고...
 3년 기도를 발원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3년 기도를 꼭 한 도량에서 할 필요는 없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도량이 편해져서 내 집같은 마음이 들면 그때부터 나태함이 고개를 듦을 경계하고 있었다.
 자신도 언제 떠날지 모른다며 내게 지리산 쪽을 한 번 가보라고 권했다.
 
 "수행을 할 때는 이 곳 저 곳의 명산의 지기를 받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옛 수행자들이 만행을 하면서 돌아다닌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분들은 아무리 좋은 명산 명찰이라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지요.
 좋은 것에 탐착하는 마음을 경계한 때문이겠지요.
 공부가 경지에 오르면 그 때는 명산 명찰을 찾는 마음도 버려야 하겠지만요.
 그래도 경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좋은 지기를 받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게 제일 좋은 공부지요."
 
 '호 호...전 뭐 그런 거창한 뜻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고
 이왕이면 삶의 다양함을 체험하는 게 좋아서 그래요. 여행 삼아서...
 많은 사람들과 많은 경계에 직면하다보니 저의 모난 면들이 깎이더라구요.
 이젠 아무 곳에서나 자도 잠도 잘 오고,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고...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게 되었어요.
 그저 주어지는데로 사는 것이지요.

 전에는 내 집이 아니면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는데
 현재 제가 머무는 곳이 제 집이거니...현재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려니 하고 살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공부는 뭔가를 늘 생각하지요.
 거창하게 도를 구한다거나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아서 그럴 뿐입니다.
 더 늙으면 이 짓도 못하겠지요.^.^ "

 내가 떠난다니 그녀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는가 보았다.
  "이 세상에 도반같이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서로 용기도 북둗아주고, 나태할 땐 충고도 해주면서 같이 가는 게 얼마나 좋아요?
 제가 나중에 절을 지으면 그 때는 조념염불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려 해요.
 조념염불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평상시 염불을 잘 했어도 임종시에는 무척 힘들거든요.
 그 때 도반이 곁에서 조념염불을 지극정성 해주면 왕생의 길이 더 순탄할 겁니다.
 그 때 저의 도량에서 머물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환영할께요.
 단 조건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꼭 해야 한다는 겁니다.ㅎㅎ
 제가 바다 속에 던진 업을 건져와서 설립을 하게 될 수 있어요.
 아직은 생각뿐이지만요."
 
 바다속에 던진 그녀의 업???
 그녀는 한 때 사업을 하여 번 돈을 자신의 업이라고 표현했다.
 그 많은 돈을 어디에 감춰두었냐고 물으면 웃으면서 "바닷속요" 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으면 사랑은 해보았습니까?"
 
 "안해봤을것 같아요? 제가 혈액형이 B형에요. 얼마나 감정이 섬세한데요.
 수행을 안했음 아마 황진희처럼 살았을지도 몰라요 호 호.
 제가 성당에 다닐 때 신부님 한 분이 저때문에 옷을 벗기도 했어요.
 당신 혼자 짝사랑한 것이니 제 책임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훗날 제가 삼천배 할 때 그 또한 제 업임을 알고 많이 울었어요.
 그 업으로 인해 삼천배 할 때 무척 힘들었답니다."
 
 "옷을 벗겼다구요? 난 옷을 입혔는데? "
 
 와 하 하 하...우리 둘은 배를 쥐고 웃었다.
 흠...거짓말이 아닌데...
 
 진정한 보살은 세속에 쩔은 남자를 세속을 벗어나게끔 인도한다는데???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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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화두를 든다는 착각을 하고 있지요 
2014.3.27

 내로라 하는 선승들 밑에서 선을 공부한 그녀가 자신은 선을 할 근기가 아니라며
 염불수행을 하고 있으니 그녀가 알고 있는 선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래서 우리는 염불에 대한 대화보다는 선에 대한 대화를 더 많이 했었다.
 오히려 선방에 머물때 보다,
 선수행자들과의 대화에서 보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선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선을 하는 사람들은 망념이 일어날 때 '이 뭐꼬' 하고 얼른 화두를 챙긴다고 말합니다."
 
 "그게 바로 착각이지요.
 그건 화두를 드는 게 아닙니다.
 망념이 일어날 때 '이 뭐꼬'를 하는 것은 
 망념이 일어날 때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지요.
 망념에 다른 언어를 대입하는 것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냥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편이지 화두는 아닙니다.
 화두는 철저히 의정이 일어나야 하는데 솔직히 의정이 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은 저도 선방에 있을 때 그것이 참 갑갑했습니다.
 스님께선 참선 초보자들에게도 '의정이 일어나느냐' 고 질문을 하시는데
 전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거든요.
 의정이 뭔지 저도 솔직히 모르겠더라구요.
 제 성격이 확고한 이해가 없이는 발을 들이지 않는 지라 머리가 아팠습니다.
 회의도 들었구요."
 
 "그게 작금의 불교계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어떤 선수행자에게 물었습니다.
 '참선이 무엇이냐' 구요.
 그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내려놓는 것' 이라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위빠사나 아닙니까."
 
 "그렇지요, 위빠사나의 수행법이지요.
 그래서 선을 지도하는 사람들도 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관수행법입니다.
 참으로 좋은 수행이지요. 자기자신을 늘 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경지입니다.
 하지만 선은 직지인심입니다.
 즉각 본래면목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업보중생이라 업의 작용으로 인해 그 자리를 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면 왜 스님들은 우리에게 화두를 챙기라고 하시는 걸까요?"
 
 "비록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망념을 줄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또 그러다보면 그 중에 누군가는 진짜 화두를 드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그럼 선수행을 많이 한 선승들이 입적 때 방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분들이 제대로 화두를 들지 못했음에도 방광하지 않습니까."

 "그건 마음을 한데 모으는 수행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선수행이 아니라 염불이나 주력수행등 기타 수행을 많이 한 사람들도 방광을 하지 않습니까.
 범부중생들은 망상이 많기 때문에 마음의 에너지가 분산이 되고 있지만
 수행자들은 마음의 에너지가 하나에 모이기 때문에 방광을 하는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그가 방광을 하였다하여 도를 성취했다고 보는 것은 고려해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그 점을 경계하셨으니까요.
 그런 현상에 취하는 것이야말로 외도라 하셨습니다."
 
 "그럼 선을 할 수 있는 근기란 어떤 상태를 말함입니까?"

 "저는 청정심이라고 생각해요.
 근기란 어느만큼 그가 청정한가의 척도라고 전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선이란 최고의 경지를 말함이니 그만큼 청정심이 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다고 봐요.
 안타깝게도 저도 아직은 선을 한 근기가 아닙니다.
 청정하지도 않은 수행자가 삼매니 선정이니 말하는 것은 신뢰할 것이 못됩니다.
 혼침의 상태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거나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행위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참선 참선하고 있는 걸까요?
 참선 수행자에게는 공양도 지극정성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공덕이 엄청나다고 하지 않습니까."
 
 "겉보기에 선을 한다고 하면 멋져 보이잖아요. ㅎㅎ
 염불을 한다면 왠지 촌스러워보이구 구닥다리같고 하근기같고...ㅎㅎ
 사실 수행자들이 선을 제대로 할려면 걸식수행을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상이 떨어져나가야 하거든요.
 오죽하면 잠도 한 나무 밑에서 하루 이상 자면 안된다고 할까요.
 길들고 편안해지고 정이들고 이런 모든 것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죠.

 그 무엇에도 맛에도 잠자리에도 옷에도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진짜 선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계에서 하는 선은 겉멋만 잔뜩 부리고 있어요.
 너무 편안하게 수행들을 하고 있지요. 그건 수행이 아닙니다.
 대부분 앉아서 졸고 있든 망상에 빠져 있든 그래요.
 얼마나 의정을 일으키고 또 그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지는 본인들이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좀더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렇군요...참 수행이란 게 하면 할 수록, 알면 알 수록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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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염불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2014.3.27
 
 "염불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능엄경에 나오는 이근원통법이 최고지요.
 처음엔 저도 경전을 읽을 때 묵독을 주로 했고 염불도 그리했어요.
 그런데 그건 좋은 수행법이 아니더라구요.
 망념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어느새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래서 가장 원초적인 수행법이 가장 좋은 수행법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묵송엔 문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묵송을 하다보면 금방 염불을 놓치더라구요.
 그런데 전 소리내서 하면 몸이 많이 지치더라구요.
 에너지가 빠져나가서요."
 
 "그건 염불법이 바르지 않아서 그럽니다.
 질량불변의 법칙에 의해 나의 에너지는 일정하게 존재합니다.
 바르게 염불을 하면 빠져나간 에너지가 다시 들어옵니다."
 
 "ㅎ...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염불법입니까?"
 
 "전 일정한 톤과 소리와 리듬을 갖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빠르게 하다 느리게 하다 높이 하다 낮게 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몸을 상하게 합니다.
 처음엔 저도 잘못해서 기맥이 막히곤 했습니다. 상기도 되구요."
 
 그러면서 그녀는 대만에 계신 혜정스님의 염불법을 들려주었다.
 나무...아미...타...불...
 정확히 네번 끊어서 하는데 톤이 높지도 낮지도 않으며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처음 대하는 염불법에 의아하기도 신기하기도 또 적응이 안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꾸 듣고 하다보니 마음에 평정심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혜정스님(http://cafe.daum.net/sunsujeongto/)의 염불테입에서 금빛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내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원...^.^
 
 "그런데 참선이든 염불이든 치열하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십리 밖도 보이고
 부처님도 보이고 신장들도 보이고 영가들도 보이는가 본데 이건 뭡니까?
 본인도 그런 현상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대단한 것 아닙니다.
 실은 색.수.상.행.식에서 색의 경계를 못벗어났다는 증거지요.
 그 또한 마경이라고 하지 않슴까.
 다만 집착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에 탁 걸려서 넘어지니까 문제지요.
 혹자는 대단한 경지인양 자랑하고 또 그런 사람을 추종하는 게 더 문제겠지요.
 그냥 염불만 열심히 하세요.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환해짐을 체험할 겁니다."
 
 "환해진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함인지요."
 
 "ㅎㅎ 뭐가 보인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알아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사물의 이치등이 그냥 알아집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어느 경계에 떨어져있는지
 또 어떤 업에 의해서 그 사람이 그런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 알게되며
 앞으로 어떤 상태에 떨어질지도 알게 되고 죽어서 어디로 떨어질지도 그냥 알게 됩니다.
 죽어라고 한 번 해보세요. 그러면 알고 싶은 것 다 알게 되요.
 물론 저도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직 그 경지는 아녜요. ㅎㅎ"

 
 그녀와 같이 법당에서 염불을 할 때
 난 그녀의 목소리와 자세가 한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보았다.
 염불을 하며 법당을 한시간 가량 도는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난 간간히 비틀거리는데...ㅎ
 목소리 톤도 굵기도 모두 일정했다.
 저래서 염불삼매에 들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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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자성을 모르는데 어떻게 자성염불을 한다고 말합니까
2014.3.28
 
 미타행자 그녀에게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했던 자성염불에 대해 질문을 했다.

 "염불이 깊어지면 자성염불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본인도 자성염불이 되고 있습니까?"
 
 "자성염불요? 아니 자성이 뭔지도 아직 모르는데 어떻게 자성염불을 합니까?"
 
 난 순간 멍해졌다...의외의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염불이든 주력이든 치열하게 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몸의 어느 부분에선가
 나오는 염불이나 주력소리를 듣는다고 하던데요?
  주력으로 유명한 어느 보살의 수행기를 읽어보니 그럽디다.
 다라니가 몸의 어느 한 부분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 돌아갔으며
 자신은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됐다구요."
 
 "그건 굉장히 위험한 얘깁니다.
 저도 한 때는 가슴의 중앙 부분에서 염불소리가 났었어요.
 하지만 나중에 그곳의 기맥이 막힌 것을 알고 부황을 떠서 피를 많이 뽑아냈어요.
 몸의 이 곳 저 곳에 다라니나 염불소리가 자리잡는다는 것은
 그가 기운용을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봐요.
 그것을 자성염불이라고 말한다니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솔직히 우리는 아직 자성이 무엇이라고 확고하게 말할 급수가 아니에요.
 말로만 자성 자성하지 자성을 보기라도 했습니까?
 학문적 용어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들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서 얘기들을 하는데 참 안타까워요."
 
 "호오...그런가요.
 그런데 저도 가끔은 어디선가 들리는 염불소리를 듣곤 했어요.
 비구스님인데 아주 청아하게 염불을 하시더라구요.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가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근원은 없는데
 제 귀에는 분명 들렸습니다.그래서 그런 현상이 자성염불인가 생각했거든요."
 
 "그건 보살님이 전생에 비구승였을 때의 그 모습을 보고 들은 것이지요.
 아뢰야식에 새겨진 전생의 식이 작동했다고 보는게 옳을 거에요."
 
 "전 꿈에서도 가끔은 염불이나 특히 다라니를 많이 하곤 했습니다.
 어떤 땐 전혀 해보지 않은 왕생정토주를 하기도 했어요.
 꿈에서 깨어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는 그 다라니가 왕생정토주임을 알았지만요."
 
 "아마 보살님은 전생에 주력수행으로 한경지를 갔을 겁니다.
 앞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다보면 그 때 어느 경지까지 갔었는지 스스로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현상을 자성염불의 경지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봐요.
 그건 그냥 식에 깊게 새겨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자성이 뭔지도 잘 모르지 않습니까.
 기도를 하다가 어떤 특이한 현상을 체험하게 되면 그것을 한 경지를 얻은 것인양 착각하면 안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수행 중에 특이한 현상을 경험하면 거기에 탁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 신비감에 빠져서 이상해지기도 하구요."

 "그래서 염불을 할 때도 항상 소리를 내서 하라는 겁니다.
 소리를 내기 힘들 때는 입모양이라도 내야 합니다.
 그래야 몸 전체의 기운도 같이 움직이거든요.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너무 빨리해도 기맥이 막힐 수 있어요.
 조금할 때는 모르지만 아주 많이 할 때는 반드시 장애가 옵니다."
 
 "보통은 망상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빨리 하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군요."
 
 "제 경험으로는 기맥이 막혀서 혼났습니다.
 대만의 혜정스님을 뵈었을 때
 '아, 이 염불법이야 말로 내가 찾던 염불법이구나' 했답니다.
 마음이 들뜨지도 않고 기맥이 막히지도 않는 아주 수승한 염불법이지요.
 나무아미타불을 관하면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염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나도 혜정스님의 염불법을 따라하다보니
 굉장히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처음 대했을 떄는 너무 생소해서 이상하기만 하더니
 익숙해지니 전에 하던 염불법이 오히려 어색했다.
 특히 여섯자를 관하면서 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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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가위눌리는 현상에 대하여
2014.3.29
 
 "전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가위에 많이 눌렸답니다.
 잠을 자기가 두려울 정도로요.
 늘 나를 죽이러 온 누군가가 내 방에 들어올까봐 방문을 잡고 늘어지다 깨고
 어떤 때는 그 존재가 제 목을 조르거나 제 목에 칼을 댈때 진언을 외고는 간신히 풀려나곤 했어요.
 아마도 제가 전생에 악업을 많이 지은 것 같아요."
 
 내 얘기를 듣던 그녀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했다.
 
 "그렇다면 전생의 악연이 가까이에 있다는 증거에요."
 
 "오...그래요?"
 
 "예, 악업의 결과가 몇 생 후에 받아야 할 업인 경우는 그런 꿈을 꾸지 않습니다.
 그 악연이 지금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런 현상을 겪는 겁니다.
 내 옆에서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지요.
 겉으로 볼 떄는 좋은 사이일 수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거나 부부이거나 자식일 수 있지만
 인과의 세계에서는 전생에 깊은 악연으로 맺어진 사람일 수 있는거죠.
 그래서 내게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줍니다."

 아, 하고 난 탄성을 질렀다.
 그 악연이 누구인지를 나라고 모르겠는가.
 내 인생이 심한 휘오리바람에 휘말렸을 때는 유독 그런 현상이 나타났으니까.
 가위에 눌린다는 것은 일단 운세가 하향세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지만
 물론 몸이 허약해서 가위에 눌리기도 하겠지만
 그 허약함도 사실은 전생에 살생을 많이 한 연고이니 그 또한 악연의 장애라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가위에 눌린다면 가까이에 악연이 원수갚을 태세를 하고 있든 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은
 그녀에게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럼 빙의는 왜 되는 걸까요?"
 
 "전생의 빚받으러 오는 거지요.
 그래서 늘 염불을 하면 그 존재도 좋은 세계로 인도할 수 있으니 장애가 해결됩니다.
 오래 염불을 하면 귀신의 장애를 스스로 알 수 있어요.
 왔구나 하는 것도 갔구나 하는 것도요.
 그리고 그들과 같이 염불하여 그들이 집착과 원한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전에 어느 사찰에 머물 때의 일이었어요.
 굉장히 수행이 깊은 도반이었는데 한 밤중에 이상한 경계에 처한 것을 보게되었답니다.
 큰 방에서 여러명이 같이 잤는데요 갑자기 괴성을 지르는 겁니다.
 그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짐승, 그것도 수컷이 울부짖는 소리였어요.

 우린 너무 무서워서 다들 머리가 쭈뼛 섰답니다.
 소름이 쫙 끼치더군요. 얼마후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코를 골며 자더군요.
 아침에 잠에서 깨어서도 그 도반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대단한 수행이력을 가진 사람이 왜 저럴까 실망스럽기도 슬프기도 했어요
 그 현상은 뭐였을까요?"
 
 "전생의 까르마가 작동했을 수도 있고 빙의 현상이라고 봐야겠지요.
 그 현상을 극복하는 방법은 지극한 참회기도 밖에 없습니다."
 
 "......"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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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사경보다는 염불이 수승합니다
 2014.3.30

 "그런데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지 않고 사경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전 염불보다는 사경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사경보다는 염불하는 게 더 수승합니다.
 사경이 산란한 마음을 집중하는 데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염불만큼의 공덕은 입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견해로는 그렇습니다.
 염불을 하게 되면 온몸의 기운도 같이 돌기 때문이며
 염불 할 때 나오는 파동에너지가 온 몸 세포 구석 구석까지 전달되기 때문이며
 주변에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도 그 파동이 전달되기 때문에 많은 공덕을 입습니다."
 
 "예...현대물리학에서도 파동에너지의 효과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언의 효과에 대해서도 긍정적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티벳에서는 절벽 위에 사원을 지을 때 수많은 스님들이 모며 진언을 외움으로써
 그 파동의 힘으로 무거운 돌을 들어올려 건축하는 비밀이 전해내려 오고 있답니다.
 피라미드도 그렇게 건축했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때의 진언은 진언으로 높은 경지에 간 수행승들에 의해 선택된
 진언을 하겠지요. 그래서 밀교라고 하잖아요.
 제 체험으로는 진언만큼 위험한 수행이 없다고 봐요.
 진언수행이야말로 스승없이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진언을 잘못하면 때로는 귀신을 불러들이기도 하니까요.

 저도 한 때 옴마니반메훔을 죽자사자 했었는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경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었지요. 많은 신묘한 체험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요.
 밀교수행은 밀교수행으로 한경지를 이룬 사람의 검증하에 해야한다고 전 주장합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따라한다는 식의 진언수행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염불수행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예...염불수행법을 만나기 위해 전 천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전생에도 염불수행을 한 적은 있겠지요. 하지만 제대로 하지를 않았지요.
 염불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으니까요.
 이생에도 호기심이 많아서 온갖 수행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수행법입니다.
 이제는 흔들림없이 갈 수 있습니다."
 
 "칭명염불에도 여러부처님의 명호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왜 아미타불입니까"
 
 "아미타부처님이 법장비구로 계실 때의 원력 때문이지요.
 아미타부처님의 48원을 능가할 수 있는 대원이 있습니까?
 아미타란 명호에는 48원의 힘이 다 들어있고
 아미타란 세글자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법장비구의 서원과 공덕으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란 명호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공덕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란 명호에서 나오는 파동에너지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건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어요.
 나무아미타불 염불 수행을 하면서 많은 장애가 사라졌어요.
 그래서 자신있게 권하는 겁니다."
 
 "그런데 테이프를 틀어놓고 염불을 듣는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큰 공덕은 없습니다.염불 할 수 있는 종자는 심어지겠지만요.
 어떤 수행이든 수행은 철저히 스스로 힘들여 해야 공덕이 있습니다.
 온 몸을 부딛쳐서 수행하지 않으면 도를 얻기 힘들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다보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찾아오는지 몰라요.

 뱀도 있고,곤충들도 있고...그런데 그들이 염불소리를 듣고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때로는 금빛 몸으로 떠나는 것을 보면 얼마나 환희로운데요.
 일체중생이...온 법계가 같이 염불한다는 것을 알게 될거에요.
 아미타불 염불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그만큼 선근이 있어야 한답니다."
 
 "그럼 아미타불 염불을 하면 천도재같은 것은 안해도 되는 겁니까?"

 "꾸준히 열심히만 하면 그렇지요.
 꾸준히 하다보면 인연 있는 영가들이 환희로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얽혀있는 주변도 서서히 정리가 됨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것이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의 힘입니다."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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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공양올리는 수행을 해보려했으나 
2014.3.31
 
  그녀가 말했다.
 "저는 한때 공양올리는 것으로 수행을 해보려 했던 적이 있어요."

 "공양을 올리는 것도 수행이라고요?"

 "그럼요. 대단한 수행이지요.
 공양을 올리는 자의 마음도 청정해야 하고,
 공양물도 청정해야 하고,
 공양을 받는 자의 마음도 청정해야하지요.
 세가지가 다 청정해야 공양올리는 것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공양은 공양의 완성은 아니겠군요.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니까요."
 
 "그렇지요...
 제가 어느 암자에 머물때 였습니다.
 그곳 주지스님이 법당에 작은 종불사를 하고 싶다고 하시는거에요.
 스님은 삼백만원이면 될 것 같다고 하셨어요.
 오죽하면 저에게 말씀하시나 싶었어요.
 수중에 돈은 없고해서 궁리를 했지요.
 조금 경제적여유가 있는 아는 스님께 전화를 드렸지요.

 '스님 제가 이러저러해서 돈 삼백만원이 필요하니 통장으로 입금해주십사' 하고요.
 그대신 제가 일년 동안 그 절에 가서 공양주살이를 해드리겠다고 했지요.
 스님은 좋다고 하시며 얼른 부쳐주시데요.
 삼백만원을 종불사에 쓰시라고 드리고 저는 약속대로 공양주살이 하러 갔었어요."
 
 "맙소사...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갔듯이요?
 그래서 정말 일년 동안 공양주살이로 삼백만원을 갚았습니까?"
 
 "일년은 아니고 십개월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 지극한 신심으로 불사금을 드린 것인데
 후에 알게된 사실은 그 스님은 다른 보살들에게도 그런식으로 여러 차례 돈을 받았음을 알았어요.
 매우 화도 나고 실망도했지요.
 그때 깨달은 것은 이 사바세계에선 청정한 공양의 완성은 있을 수 없겠구나 였습니다.
 욕계의 세계에선 뭐든지 완성은 할 수가 없음을 알았어요.
 수행의 완성도요...

 그래서 더 극락에 나기를 원을 세우게 되었고,
 일단 극락에 왕생한다음에 그곳에서 청정한 수행을 마무리지어 성불해야겠다구요.
 성불한 후에는 다시 사바세계에 와서 보살행을 해야지요.
 말이 보살행 보살행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요?
 진정한 보살행은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라는 상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청정한 보살행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요...청정한 보살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냥 주변 사람과 더불어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할 뿐이지요.
 다만 보살행의 씨앗을 뿌리는 수준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니 수한보살님 우리 꼭 극락에서 만납시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을 죽는 날까지 놓치지 마세요.
 그럼 왕생할 수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끄덕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난 그녀처럼 수행할 자신은 없다.
 결정코 극락에 나겠다는 간절한 원도 아직은 미흡하다.
 그녀처럼 청정한 수행자의 길을 가기에는 아직 소멸해야 할 업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그녀가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어쩌면 저렇게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청정한 마음으로 수행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내 손을 잡는 그녀의 손은 나무껍질같았다.
 얼마나 일을 심하게 했으면...
 무엇이 부럽고 무엇이 아쉬워 곱상한 여인네의 몸으로 저렇게 살기를 좋아할까.
 
 "전 태를 받아 태어나는 고통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이 생으로 끝마치려고요. 수행중에 수많은 전생을 보았는데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져요.
 이제 가장 수승한 염불법문을 만났으니 이 문으로 계속 가려구요."
 
 그러시구려...그러시구려...꼭 극락왕생하시구려.
 님이 극락왕생하지 않으면 누가 극락왕생할 수 있을손가.
 
 어쩌면 그녀는 내 인생에 만났던 사람중에 가장 수승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또 그런 수행자를 만날 수 있을까 싶다.
 한점의 의심도 없이 부처님의 세계를 믿고 행을 하는 수행자.
 
 공부도 치열하게 했고,
 일도 치열하게 했고,
 돈도 치열하게 벌었고,
 봉사도 치열하게 했고,
 수행도 치열하게 한 여자...
 난 그녀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또 만나겠지만 그 인연줄에 얶매이는 여자가 아니니 나 또한 연연하지는 않으리라.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후에 또 만난다면 그때 또 다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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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대부분 혼침을 삼매로 알고 있습니다
2014.04.01
 
 미타행자 그녀와 나의 인연이 지중했음인가,
 어제부로 그녀의 이야기를 마치려했으나 오늘 아침 수행 중 궁금한 현상이 있어
 그녀에게 전화를 하여 물어보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혼침입니다..."

 "호...그럼 혼침중에도 전생이 보이고 빛이 보이기도 하고 그런 겁니까?"
 
 "예...대부분 수행 중에 보이는 현상은 혼침 중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삼매가 아닙니다.
 저도 앉아서 십리 밖 백리 밖도 보았어요.
 때로는 제모습도 보았고 미세한 박테리아까지도 보였어요.
 사람의 몸을 보면 뼈속까지 보여서 어디에 병이 있는지 그 병이 언제 어떻게 될지까지 다 알았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기도하는데 제가 그 사람 앞에 앉아있었다며
 혹시 유체이탈한 것 아니냐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유체이탈도 아니고 바람직한 경계가 아닙니다.
 선방에 앉아 있다보면 대부분 혼침에 빠져서 헤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 그가 혼침 중에 어떤 현상에 취해있는 지 알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대부분 스님들은 제자가 혼침에 빠져 있어도 모르던지
 설사 알아도 어떻게 인도해줄지 몰랐습니다.
 그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제가 영가가 보인다고 하면 스님들은 '신기가 있어서 보이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말하는 스님도 영가를 보고있는게 보였습니다.
 스님들은 자신의 경계는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말하고 속이곤 했지요.
 자신의 경계는 도력이고 우리의 경계는 마장이고 신기라고 폄하해서 말하더군요.
 저도 제가 빙의가 된 게 아닌가 많이 의심하고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답을 알아갔습니다.

 그런 경계는 제가 무언가 바라는 게 있을 때 일어난다는 것을요.
 소원성취라든가,어떤 경계를 체험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을때요.
 염불수행을 하면서 많은 답을 얻었습니다.
 건방진 말인진 몰라도 솔직히 아직 전 이 땅에서 저를 인도해줄 스승은 못 만났습니다.
 기도 중에 한 분이 계신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아직 인연이 아닌지 만나지 못했어요."

 "그럼 대부분의 수행자가 삼매에 들어서 무언가를 보았느니 하는 게 삼매가 아니란 겁니까?"

 "혼침에 들어도 어떤 경계가 쫙 펼쳐집니다. 그걸 삼매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혼침 중에 일어나는 현상은 70%가 귀신의 장난입니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수행 중 무언가 보았다고 해도 그것은 생사해탈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그런다고 인생이 바뀌는 것도 현실적인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요."

 "어떤 사람은 참선을 하다가 자성불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구요. 그것도 마경입니까?"
 
 "ㅎㅎ 예,마경입니다. 아니면 집착으로 인해서 오감을 통하여 환(幻)이 보인거지요.
 다들 그런 경지가 대단한 줄 알고 자랑하고 부러워하고 그러는 것이 안타까와요.
 그냥 수행 중 일어나는 현상일 뿐인데요."

 "누군가는 명상 중에 빛을 보거나 백회가 열리는 체험도 했다 합니다."

 "별거 아녜요. 혼침 중에 보는 겁니다.그건 백회가 열리는 게 아닙니다.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쓰잘데 없는 말들에 취해서 사람들이 다들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것 같아요.
 전 사람들이 제게 그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봅니다.
 전 그사람의 미세한 마음작용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걸로 그 사람의 경지를 알 수 있어요.

 다들 혼침 상태를 삼매로 착각하고 말하더군요.
 변덕이 죽끓듯 하고,화도 잘 내고 탐욕을 부리고 여자라는 생각,남자라는 생각을 못 벗어나고
 입고 싶은 것,먹고 싶은 것,갖고 싶은 것, 이런 저런 두려움, 근심 걱정...
 그런 것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삼매에 듭니까 택도 없습니다.
 삼매는 업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는 못듭니다."

 "그럼 본인은 삼매에 듭니까?"

 "저도 아직은 아닙니다. 들었다해도 거친 삼매일뿐이지요.
 해인삼매의 경지는 어림도 없지요."

 "그럼 삼매의 경지는 어떤 겁니까?"
 
 "글쎄요...말로 딱히 하기는 힘드네요.태풍의 눈 같은 고요한 상태라 할까요.
  굳이 표현하자면 삼매가 공의 상태라고 말할 순 있겠네요."

 "그런데 요즘 잠자리에 누워서도 염불을 하는데 괜찮습니까?"

 "괜찮지만 그때는 묵송을 하여야 합니다.
 누운상태에서 소리를 내어 염불을 하면 기 순환에 혼란이 옵니다."

 "예...그렇군요.
 그런데 철야기도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지마세요. 혼침에 빠져 마경에 떨어질 확률이 높아요.
 기도는 욕심내지 말고 낮에 하세요. 깊은 밤에는 안 하는 게 좋아요.
 일할 땐 일 하고 잠 잘땐 잠 자고 염불할 땐 염불하고 그러면 돼요.
 저는 하루종일 기도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일을 하면서 하는 게 더 좋아요.
 하루 종일 앉아 있는다고 도를 얻지는 못해요.
 이상한 경계에 빠질 위험이 커요.
 백장청규가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경지에 이르렀습니까?"
 
 "아유...어림없어요. 그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데 제가 거기에 이릅니까.
 잠시 그런 상태에 이른다해도 그게 얼마만큼 지속이 되겠습니까?
 업이 덕지 덕지 묻어 있는 이 몸으로는 힘들어요."

 "그런데 삼천배를 삼년씩이나 했다면서 그땐 어땠습니까?"

 "ㅎ...솔직히 전 삼천배하는 것 보다 염불하는 게 더 힘들어요.
 염불이 절 보다 더 수승하고 어려운 수행입니다.
 몸을 조복 받고 하심하는 데는 절이 좋지만요."

 "염불이 삼천배보다 어렵다구요? "

 "그럼요...보통사람들이 중얼중얼 하는 것은 염불이 아녜요.
 그건 염불도 아니고 수행도 아니고 뭣도 아녜요.
 제대로 염불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무언가 바라는 것도 없이 해야 해요.
 오로지 내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부처님께 지극하게 귀의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라 하지만 그건 염불에 대한 모독입니다."

 아 어렵다 어려워...
 그녀와 대화를 하다보면 이제까지의 나는 염불을 한 것도 수행을 한 것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부처님께 공양 올린 것도 보시한 것도 불사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다 내가 무언가 바라는 마음으로 했으니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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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우리 탁발 나갈까요?
2014.04.10

 이제는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미타행자 그녀,
 그곳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그리워지곤 하는데...

 오늘은 문득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보살님 우리 저자거리로 탁발 나갈까요?"

 "으잉??? 탁발이라고라? "

 호.호.호...

 경기가 않좋아서든 불교계의 침체로 인해서든 요즘 어느 사찰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인데
 그곳이라고 예외일리는 없었다.
 지난 겨울엔 눈까지 너무 많이 내려서 인적이 끊긴 상태였었다.
 그녀는 나름 절 운영 문제가 신경이 쓰였었나 보다.
 '이달엔 월급을 안받아야 되나 어쩌나' 고민하는 모습이더니
 어느 날 갑자기 탁발하러 가자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
 내가 얼마나 당혹스럽고 우스웠겠는가.

 "호 호 호...그래 그럴까?
 대신 목탁은 자기가 치고 깡통은 내가 들께 호 호 호..."

 그녀는 일년 동안 행자생활을 했던 경력이 있는지라 목탁을 기가막히게 잘쳤응께.
 나는 농담을 하며 배를 쥐고 웃었는데 그녀는 전혀 농담이 아닌 얼굴이었다.
 
 "이 상태로 가면 초파일이 되어도 얼마나 등이 달릴지 모르겠어요.
 초파일 전에 한 번 나가면 좋을 것 같은데...등 많이 달라고 권선하면서리..."

 "그래 그래보지 뭐...초파일 경기가 너무 않좋을 조심이면 그때 한 번 나가보자구."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나도 농담만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탁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녀라면 시내 한복판에서 하루종일 절을 하면서 시주금을 걷을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눈이 녹기 시작했을 때 그 곳을 떠나왔으니 그녀와의 탁발수행은 해보지 못하게 되었다.
 솔직히 좀 아쉽다....ㅎㅎ
 
 이제껏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별스럽고 대단한 그녀였으니...
 그녀는 밥을 먹을 때도 꼭 탁발해서 먹는 것 처럼 먹었었다.
 대접에다가 밥과 국 반찬을 모두 섞어서 퍼먹었다.
 처음엔 왜 밥을 그리 품위없이 먹느냐고 한 마디 했었는데
 그래도 그녀는 늘 그렇게 먹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가 일부러 그렇게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먹는 것도 그녀에겐 철저히 수행이었다.
 짜니 싱거우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하는 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간단하게 식사를 하곤 했다.

 내가 꼭 청학동에서 내려 온 사람같다고 놀리면 굉장히 좋아하였다.
 마치 그 모습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양...
 늘 회색 법복에 생머리 질끈 동여매고 화장도 전혀 안하고
 전혀 안하는 정도가 아니라 스킨 조차 바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어느 산에서 지게 지다가 내려왔냐" 고 물으셨다 한다.
 또 어느 스님은 한글도 모르는 판무식쟁이로 아셨다가
 어느 기회에 그녀가 영어를 쓰는 것을 보고 뒤로 넘어지셨다나??? 
 이런 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즐겁게 웃곤 했었는데...
 이젠 그 시간이 추억이 되었버렸다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무상하게만 느껴진다.

 그저 현재를 사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인가 보다...
 
 그래도 가끔씩 그리워할 추억마저 없으면 삶이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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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꿈속에서 염불하기를 권하다 
2014.04.26

  오랫만에 신묘한 꿈을 꾸었다.
  기도를 열심히 할 때는 신묘한 꿈들을 꾸지만 최근 몇 년 간은 기도보다는 공부를 했기 때문인지
  신묘한 꿈은 별로 꾸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요즘 마음 먹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서 그런가,

  오늘 새벽 꿈이다.

  어느 여인이 나를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보살님 저의 집에 자꾸 귀신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인의 얼굴엔 탁기가 가득 서려있었다.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황당하기도 하고 뭐라고 답변해주어야 할 지 막막했다.
  그 때 누군가가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라고 하면 되잖아,'
  그래서 나는 그 여인에게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세요' 했지만 
  왠지 내 말에 힘이 없는 것이 느껴졌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확연히 알 수 없으면서 무조건 염불만 권한다고 될 일인가 싶었다.
  그때 꿈속인데도 난 미타행자 그녀를 찾았다.

  그녀에게 물으면 답을 말해 줄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니 
  확실하게 상황 판단을 하여 처방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녀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 여인은 떠나지 않고 내 옆에 앉아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어쩌란 말인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왜 난 힘있게 권하지 못하는가.
  과연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한다고 그 여인네 집의 문제가 풀릴까.
  그러다 내가 생각해 낸 것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에 곁들여 아미타경을 매일 1독씩 21일간 하면 될 것이라는...

  아미타경을 읽어 귀신들을 정토로 인도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그러면 왠지 힘이 붙을 것 같았으며 그 여인네 집에 더 이상 귀신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론 누구에게나 그렇게 처방을 내려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하고는 꿈에서 깨어났다.
  
  너무도 선명한 꿈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사념에 잠겼었다.
  내가 염불을 자신있게 권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내게 염불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그러기에 당황하고 안절부절 못했으며 힘있는 미타행자를 찾았던 것이다.

  부처님이 내 공부를 점검하기 위해 여인의 몸으로 나투신 것이 아닐런지...
  내 공부가 아직 많이 시원찮은 것이다.
  치열하게 정진을 하여야 하는데...
  왜 전처럼 힘이 붙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번뇌가 많은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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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염불하는 중에 찾아오는 영혼들
2014.4.26

  미타행자 그녀는 염불하는 중에 많은 영혼들이 찾아 온다고 하였다.
  그녀가 있는 사찰은 6.25 전쟁 격전지였던 곳인지라 젊은 나이에 죽은 병사들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지박령이 되어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한 맺힌 영혼들이 그녀에게 하소연을 한단다.
  어느 병사는 너무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던 장면을 보여주는데
  영화 스크린처럼 그 장면이 그녀의 눈 앞에 펼쳐젔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 병사에게 인과법을 설하고는 나무아미타불 염불하기를 간곡하게 권했고
  그 때부터 새벽기도 시간이면 그 병사가 법당에 나타나서 같이 염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병사는 손을 흔들며 떠났다고 한다.
  그런 예가 부지기수 였다.
  때로는 산에서 죽은 동물들까지 법당에 나타나서 염불하는 것을 듣고는 했다 한다.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럼 모든 영혼들을 다 볼 수 있느냐'고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찾아오는 영혼 또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죽은 영혼이 보이면 무섭지 않냐고 했더니,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몸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인데 뭐가 무섭냐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게 일반적인데.
  그녀는 산 자와 죽은 자를 평등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섭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떠도는 영혼들을 제도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를 전하는 것을 사명인양 생각하는 듯 했다.
  일체중생이 극락에 나기를 간곡히 원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그녀와 도량을 걷다보면 참 재미있었다.

  "저 일주문 앞에 지금 횐빛이 나는 신장님이 서 계시네요.
  그 옆에 계시는 신장님은 금빛 몸이구요."

  그러면 나는 그 앞에서 얼른 합장을 하면서
  "신장님 안녕하세요. 저 잘 좀 봐 주세요. 제 소원이 뭔지 아시죠?" 하며 장난기를 부리기도 했다.
  도무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니 어쩌랴...

  완전히 혼자 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그녀,
  쉽게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세계에서 살고 있으니 나름대로 고충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늘 행복해 했다.
  염불하는 낙으로...

  정토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나 이제는 빨리 가고 싶다는 마음도 놓았다고 했다.
  이 생에서 업갚음을 다 하고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업으로 오는 장애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했다.
  설사 업으로 인해 귀머거리, 장님이 된다 해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업을 닦아서 극락에 갈 수만 있다면 그녀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그녀의 그런 신심 하나는 정말 너무나 부러웠다.
  하지만 난 아직도 업의 장애는 두렵고 피하고 싶다.
  어느 생에나 그녀와 같은 근기를 갖출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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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축생도 염불을 하나요? 
2015.04.29

 ㅡ 수 한
 
 미타행자 그녀가 있던 절에서 머물때 였다.
 
 아침 공양시간에 그녀가 내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어 왔다.
 "수한 보살님, 오늘 새벽기도를 하는데요.
 하얀 산토끼 한마리가 법당 탁자 위에 누워 있는거에요.
 이상하다 생각하며 산토끼를 위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주었더니
 이내 아주 평온한 얼굴이 되어갔어요."
 
 "뭣이라구라?
  산토끼 영가님이 오셨다구라?  호호..."
 
 그렇게 가볍게 받아 넘겼는데,
 그날 정오시간 쯤 되어서 제설작업을 하던 거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제설작업을 하는데 눈 속에 얼어죽은 산토끼 한마리를 발견했어요.
 어제 밤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죽었나 봅니다.
 대충 땅 파서 묻어 주고 왔어요."
 
 난 팔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잽싸게 그녀에게 달려가서 사건을 알려주고 질문을 하였다.
 
 "축생들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좋아하는가?
 그리고 그들도 염불을 할까?"
 
 "당연하지요 보살님.
 어떤 때는 날개가 반쪽 밖에 없는 나방도 제가 염불할 때 찾아와서 염불소리를 듣곤 해요.
 뱀도 있고...그들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답니다."
 
 호오라...영적인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나의 경험으로도 꿈 속에서 축생들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것은 본 적이 있지만...
 한창 조상천도 기도를 할 때인데,
 자는데 내 방 앞에 새 한마리가 찾아와서 구슬프게 울었다.
 새는 이윽고 나무아미타불을 외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꼭 산 사람처럼 울었다.
 꿈이니 나는 그냥 상징으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그녀는 심안이 열리고 영안이 열린 사람인지라,
 보통사람은 볼 수 없는 세계를 보는 여자이니...
 
 그녀는 잠시 스승으로 모시려 했던 스님께서 
 '축생이 무슨 염불을 하냐' 고 하시는 바람에 발길을 돌렸다고 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힘이 쫘악 빠지는 느낌이었어요.
 기운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 분의 강설은 단지 교학일 뿐이라고 단정지었어요."
 
 그녀의 그 마음이 요즘 내게도 있다.
 새로운 선지식을 발견했다고 좋아서 열심히 강의를 들었던 어느 분의 말씀 중에
 "축생에겐 마음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순간 나도 힘이 쫘악 빠졌다.
 아니 삼라만상이 모두 마음으로 지어진 것인데 어찌 축생이라고 마음이 없다 하시는가.
 나무들도 마음이 있어 목이 마르면 물.물.물 찾기에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온다는데,
 단순한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나무들이 스스로 우주의 수기(水氣)를 불러들인다고 하지 않는가.
 사막의 물주머니 개미는 수억년 동안의 진화과정을 거쳐 배에 물주머니를 달고 태어나게 되었다는데
 어느 학자의 말이 그것은 개미들의 집단 무의식이 뜨거운 사막에서 물을 찾는 마음이
 물주머니를 창조했다고 발표를 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창조의 주체이며 결과물이다.
 그런데 어찌 인간만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인지...
 
 오...진정한 선지식은 없는 것인가.
 물론 고차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은 축생에게 없을 수 있다.
 아니 이것도 틀린 말일 것이다.
 축생중에도 수행자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실례들이 많지는 않지만 있긴 하니까.
 
 작금의 선지식이라고 하는 분들이 너무 교학에만 밝은 게 아닌지...
 심안이 열려서 법계를 보는 사람의 말처럼 가슴에 와 닿지 않으니...ㅠㅠ
 어쩌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이나 하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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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어떤 사람이 화주를 하여야 할까
2015.05.02 14:25 

          ㅡ 수 한

 오랫만에 미타행자 그녀에게 전화를 했더니
 청소보살에서 이젠 법당소임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축하해. 진급했구먼?"
 
 그러자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설레 설레 한다.
 
 "보살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전 청소보살이 더 좋습니다.
 갑자기 법당보살이 그만두는 바람에 제가 임시로 하게 되었는데
 벌써 몇 달째 사람이 구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슴다.
 화주까지 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업 짓는 소임입니까.
 그래서 저는 스님에게 화주는 못하니 그냥 오는 사람 반갑게만 맞이 하겠습니다 했어요."
 
 "솔직히 자기처럼 법당보살로 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어?
  교학도 탄탄하겠다. 수행력과 법력도 있겠다..."
 
 "아이고...보살님 제가 무슨 법력이 있습니까. 중생에겐 법력같은 건 없습니다."
 
 그녀의 말 뜻이 무엇인지는 안다.
 중생심에서는 참다운 법력이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법력은 참나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히 신도들에게 축원카드 많이 받는 거 좋은 일 아닙니다.
 그거 다 빚지는 겁니다.
 그래서 화주 잘못하면 지옥행이라고 하지 않슴까.
 법당보살을 하고 있으니 별별 사람들이 다 매달립니다.
 어떻게 소원성취가 안 될까 하고요.
 그럴 때 마다 바른 법으로 인도하느냐고 진땀이네요.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가는 저를 교주처럼 따르려 할 테고...ㅠㅠ
 전에 있던 화주보살님은 신도들에게 옷도 얻어 입고 했다는데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 보살님이 몰라서 그랬겠지요.
 아울러 스님들도 신도들에게 공양받는 거 무서운 일인지 아셔야 하는데...
 그게 다 빚입니다. 빚...
 잘못하면 이생에 빚만 잔뜩 지고 가는 겁니다."
 
 그렇겠지 빚만 지고 가는 것이겠지.
 중생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공양물을 어찌 두려워 하지 않으랴.
 백일기도니 천일기도니 입재한 신도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부쳤겠는가.
 때로는 처절한 심정으로, 
 떄로는 벼랑끝에 몰린 심정으로,
 때로는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나름대로의 수많은 사연과 염원과 한이 서려 있다고 보아야 겠다.
 그 염원이 담긴 축원카드를 아무 생각없이 
 그저 주소와 이름 석자 읽어주는 식으로 축워카드를 읽어서야 무슨 효험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 축원에 목이 마른 중생의 애처로움이란...
 
 그래서 화주를 겸한 법당보살은 아무나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일체중생을 위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저 호구지책으로 또는 생각없이 하고 있다면 신중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내가 아는 서울 큰 사찰의 화주보살님은 화주로서의 자격을 갖추신 분이었다.
 물론 직업이 아닌 봉사로서 하시고 있지만...
 그분은 화주 역할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부처님 법으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보살님은 화주노트를 늘 가방에 넣어 갖고 다니시는데
 차를 타고 갈 때는 화주노트를 무릎에 놓고 거기에 적힌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신다.

 하루의 일을 끝낼 때는 그 날 시주를 한 사람들의 명단을 읽고 
 그 분들을 위해 금강경을 읽어 주신다.
 그래서 그런지 그 분은 화주역할을 참으로 잘하고 계셨다.
 한 마디로 척 척 붙는다.
 이런 사람들이 화주의 자격을 갖추었다 할 것이다.
 중생을 위한 마음이 열린 대보살들이 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이다.
 
 내게도 법당보살 소임을 맡아달라는 청이 여러 번 있었지만 거절하였다.
 아직 내가 그럴 만한 그릇이 안되었으므로...
 말로야 중생을 위한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진짜 그런가?
 아직은 사사로운 마음이 많이 도사리고 있으니 청을 받아들이기가 조심스럽다.
 
 미타행자 그녀야 말로 법을 아는 사람이니 염려하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그 기회는 부처님이 그녀에게 주신 선물이며 숙제라고 생각 한다.
 이제 공부가 익었으니 중생에게 그 공부를 회향하라고 하심이 아닐런지.
 그녀의 뛰어난 수행력은 인정하지만 보살행의 부분에서는 소극적이라 아쉬움이 있었는데
 부처님이 그 것을 아시고 그녀에게 보살행의 길을 열어주심이다.
 보다 한 차원 더 공부시키기 위함이 아니시겠는가.
 
 진흙밭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연꽃을 딸 수 있으랴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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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3년 결사 중이에요                                                       

 2016.03.01 20:41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린다.

 모니터를 보니 미타행자 그녀가 아닌가.

 "어...왠일야? 전화를 다 하고?"

 실로 오랜만의 전화였다.

 늘 치열하게 정진을 하는 그녀인지라 누군가에게 전화를 잘 하지도 않으며

 나 또한 방해할까봐 전화를 하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오늘 아침 갑자기 보살님 생각이 났어요."


 "어구...그래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니 반갑구랴."


 "잊다니요?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잊을 수가 있어요?

 늘 마음 속엔 남아 있지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내 생각이 난거야?"


 "실은 오늘 아침에 법당에 나가 보니 누군가가 갖다 놓은 경전이 한 권 보였어요.

 자비도량참법 인데... 누군가가 법보시 한 경전이더라구요.

 혹시 이 경전이 보살님 스승이었다는 분이 법보시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경전 겉장에 뭐라구 쓰여 있던데 맞나요? 이 분이 보살님 스승 맞지요?"


 "에고...귀신이구먼 맞아.

 그 경전 우리가 돈 천만원 모아서 천권 찍어서 전국에 무료로 배포한 경전야."


 "호오...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스승님은 아직도 소식이 없으신가 보죠?"


 "응... 아마도 만행 하고 계시겠지 싶어.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그곳에서 3년 기도 끝났지 않나?"

 "작년 6월에 회향 했지요.

 글구 다시 3년 기도 입재 했는데요.

 이 번에는 산문밖 출입을 안하기로 하고 정진 중입니다."


 "흐음...암튼 대단하셔.

 어떻게 3년 동안 밖에를 안나가고 하려고해?

 가끔 병원에도 가고 해야 할텐데..."


 "그러잖아도 다리 아픈게 도져서 한동안 걷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한 때 하루에 3쳔배씩 3년을 정진했던지라 무릎이 다 망가져 있었다.

 

"으응??? 그런데 그 다리로 견디고 있다는 것이야?

 미쳤구먼 그러다 앉은뱅이 되면 어쩌려구?"

 "그저 부처님을 믿는 마음으로 밀어붙였더니

 이제는 걷는데는 별 지장이 없어요. 살만해요."


 "에고...참으로 대단해.

 다음에 내가 신유능력이 있는 어떤 보살을 한 번 데리고 가 볼까?

 나도 그녀에게 망가진 손가락 하나 치료 받았는데 좋아졌거든? "


 "보살님... 그런 능력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에요.

 불보살의 경지에 가지 않고 쓰는 신유능력은 진정 사람을 구제하지 못합니다.

 자기 공부에 방해만 될 뿐에요."


 "그래도 중생에게 이롭게 쓰면 되지 뭘.

 그녀는 돈 안받고 치료해 줘.

 지금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거든? 인도 유학파고 말야."


 내가 이런 저런 설명을 했더니

 조금 관심이 가는 가 보았다.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문제라면 대개 그들이 그 능력을

 자신의 돈벌이에 쓴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물론 먹고 살아야 하니 자연히 그리되는 것인데

 그 유혹을 뿌리치고 보살행을 한다는 것은 왠만한 경지가 아니면 기실 어려운 일이다.


 "암튼 보살님. 언제 놀러오세요.

 저는 3년 회향 하기 전에는 절대로 절 문 밖에 나가지 않을 것이니

 보살님이 와 주세요. 보고 싶네요."


 그려...그려...

 이 세상에 도반처럼 좋은 관계가 있으랴.

 밤을 세워 도담을 나누어도 지치지 않는 사이가 도반 아니던가.

 

 "그런데 보살님, 요즘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계속 하고 계신가요?
 혹시 다른 수행 하고 계신 것 아니죠?"

 ㅋㅋ 내 가슴이 잠시 뜨끔했다.

 "아냐 하고 있어."


 "흐음... 다행이네요.

 우리 꼭 극락에서 만나야 지요. 아셨죠?"


 그래...극락에서 만날 수 있음 좋겠다.

 나야 그녀처럼 염불만 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아미타불께 지심귀명례는 드리고 있다.

 그리고는 나 하고 싶은 수행을 하고 있당께???

 그녀에게 쪼끔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녀이고 나는 나인데 뭐.

 나도 내 스타일대로 사는 거지 뭐.




[ 위의  글들은 현재 강원도 모 사찰에서 (자세한 소재지와 연락처공개를  염불행자님께서 원치 않아 공개하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종무하며 오롯이 나무아미타불 염불하시는 염불행자님의 실화입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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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재칠시 (無材七施)


     어떤이가 석가모니를 찾아가 호소를 하였답니다.
     "저는 하는일 마다 제대로 되는일이 없으니 이 무슨 이유 입니까?"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기 때문이다."


    "저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빈 털털이 입니다."
    "남에게 줄것이 있어야 주지 뭘 준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느니라." " 아무 재산이 없더라도
    줄 수 있는 것은 일곱가지는 있느리라."

 

 

첫째: 화안시(和顔施)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이다.

 

 

둘째: 언시(言施)
         말로써 얼마든지 베풀고 있으니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양보의 말, 부드러운 말 등이다.

 


셋째: 심시(心施)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이다.

 


넷째: 안시(眼施)
        호의를 담는 눈으로 사람을 보는것 처럼 눈으로 베푸는 것이다.

 


다섯째:신시(身施)
       몸으로 때우는 것으로 남의 짐을 들어 준다거나 돕은 일이다.

 

 

여섯째:좌시(座施)
       자리를 내어 양보하는것입니다,.

 


일곱째:찰시(察施)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속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 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네가 이 일곱 가지를 행하여 생활화하면
       너에게 영원한 공덕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관련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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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스님의 눈물


옛날, 일본에 양관(良寬1758-1831)이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므로
동생이 집안의 대를 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에게 마저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자가 이만저만 속을 썩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힐 뿐 아니라, 싸움꾼에 노름까지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자 때문에 속을 썩이다 썩이다가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양자를 패기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문중회의를 열기 위해 집안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며 당연히
그 자리에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자 큰아버지인
양관 노스님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회의가 열리자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양자의 못된 점을
조목조목 늘어놓으며, 양자를 패기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양관 노스님께 결론을 내려줄 것을 청했습니다.

"이 집안의 가장 웃어른은 스님이시니 스님께서 마지막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처음부터 한 마디 말씀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계셨던 양관스님께서는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습니다.

"벌써 날이 저물었구나. 이제 그만 절로 돌아가야겠다..."

방을 나온 양관스님이 짚신을 신기 위해 마루 끝에 걸터앉자,
그 문제꾸러기 양자가 달려와 신을 신겨주고 짚신끈을 묶어
주었습니다.

자신을 내몰지 않은 큰아버지 양관 노스님에 대한
뭉클한 정감을 느껴 은연중에 신을 신겨 드린 것입니다.

그때 신끈을 묶고 있는 양자의 손등에 몇 점의 물방울이 떨어져,
고개를 들어 스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 물방울은 노스님의 주름진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었습니다.


노스님의 눈물.......


그날 이후 양자의 성격과 행동은 백팔십도로 달라져 너무나 착한 사람
으로 바뀌었습니다.

가족 수십 명이 달래고 꾸짖어도 고쳐지지 않았던 양자의 버릇이
노스님의 눈물로 완전히 고쳐진 것입니다.



이처럼 불자는 자비의 눈물이 있어야 됩니다. 

 

그 내면에 이웃을 향한 자비의 눈물이 있어야 하고
참된 인정이 있어야 하고 피가 통하여야 합니다.

 

일체 불보살님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모든 중생을 위한 지장보살님의 눈물이 그러하듯이...

모든 중생을 위한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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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 (료칸良寬 ; 1758-1831) 스님은 에도시대 후기의 고승이며, 시인. 화가로도 이름이 높다. 22세 때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시작했다. 철저한 청빈주의, 고행주의로 일생을 살았으며 시와 그림에 능통하였다. 료칸스님이 산깃슭에 조그마한 오두막을 짓고 살 때였다. 어느날 밤 도둑이 들었으나 가난한 스님에게서 훔쳐갈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실망한 도둑을 붙잡고 료칸스님에게 말했다.

 

 "그대는 우리 집까지 먼길을 왔는데 빈손으로 가서야 되겠는가? 이 옷을 벗어 줄 터이니 가져 가시게." 도둑은 스님이 벗어 주는 옷을 들고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뛰었다. 벌거숭이가 된 료칸 스님은 뜨락에 앉아 달을 바라보며 중얼 거렷다. "저 아름다운 달까지 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달은 줄 수도 훔칠 수도 없구나." 

 

한번은 그 지방의 번주(藩主)가 료칸 선사를 초청하기 위해 심부름하는 사람을 보냈다. 마침 료칸 스님이 탁발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심부름꾼은 스님을 기다리는 동안 암자 주위의 무성한 잡초를 뽑고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이윽고 돌아온 료칸 스님이 주위를 돌아보면서 탄식했다. "풀은 다 뽑아 버렸으니 이제는 풀벌레 소리도 듣지 못하겠군."

 

심부름꾼이 돌아가 료칸 스님의 궁핍한 생활을 전하자 번주는 다시 심부름꾼에게 스님을 돕겠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이에 선사는 다음과 같은 하이쿠(俳句)로 답하여 이를 사양했다. "땔 정도의 낙엽은 바람이 가져다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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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걸하다 소나기를 만나

잠시 낡은 사당으로 비를 피하네

우습구나, 바랑 하나와 바리때 하나

생애 맑고 깨끗한 무너진 집의 바람

 

 

今日乞食逢驟雨

暫時廻避古祠中

可笑一囊與一鉢

生涯潚灑破家風

 

 

- 驟雨 / 良寬

 

 

료칸[良寬, 1758-1831]은 무욕의 화신, 거지 성자로 불리는 일본의 선승이다. "다섯 줌의 식량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라는 말이 뜻하듯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무욕과 무소유의 최고 경지를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료칸은 떠돌이 걸식 생활을 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유지했다. 말 그대로의 청빈을 실천하며 산 사람이다. 단편적으로 듣게 되는 료칸의 일화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다.

 

료칸의 생애를 통해 대현[大賢]은 곧 대우[大愚]와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깨달음이란 바보로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료칸은 평생 명성을 멀리 하며, 어린아이와 작은 생명들을 사랑했다. 늙어서도 료칸이 제일 좋아한 것은 아이들과 어울려 연을 날리고 숨바꼭질을 하며 노는 것이었다.

 

 

'료칸 선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들이나 산으로 놀러 가기를 좋아했다. 그때마다 한참을 돌아서 간다거나 어떤 곳에서는 마치 장애물 경주를 하듯 겅중겅중 뛰어넘으며 갔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꽃을 밟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애써 핀 꽃을 밟는 것은 꽃에게 미안한 일입니다. 또한 꽃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그것을 밟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료칸 선사는 탁발을 하는 도중에 새 떼를 만나면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새들이 날아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을라치면 어느새 새들이 날아와 걸망 속에 든 쌀이나 잡곡을 쪼아먹곤 했지만 선사는 굳이 그들을 쫓으려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어느 날 료칸 선사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 배의 뱃사공은 성질이 못된 이였다. 그는 료칸 선사가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음을 알고 '좋다. 오늘 내가 이 선사가 화내는 모습을 한번 봐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손님이 선사 한 사람뿐이었다. 뱃사공은 강 한가운데서 실수인 척하며 노로 물을 튀겨 선사의 옷을 적셨다. 선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뱃사공은 '어럽쇼!' 하며 이번에는 배를 좌우로 크게 흔들어 선사를 강물에 빠뜨렸다. 선사는 헤엄을 칠 줄 몰라 곧 익사할 지경이었다. 뱃사공도 결코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강물로 뛰어들어 선사를 구해냈다.

선사는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뱃사공님,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죽었을 것이오."

배가 선착장에 닿자 선사는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덕분에 생명을 구했소. 감사합니다."'

 

 

료칸의 말년에 시인이며 제자인 데이신[貞心,1798-1872] 비구니와의 정신적인 사랑 또한 범인들과는 다른 것으로 기억된다. 료칸은 데이신을 통해서 우주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 남녀간에 육체적 욕망을 떠난 순수한 정신적인 사랑이 가능할까,인간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무욕과 무집착, 무소유의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를 료칸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정신적, 영적 경지를 속세의 우리들이 감히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허망한 꿈을 쫓아 평생을 허둥대다가 가는 우리들에게 선사의 생은 죽비소리 같은 깨침을 준다.

 

료칸의 또 다른 시가 있다.

 

 

한평생 입신 출세에는 뜻이 없어

자연 그대로 천진에 몸을 맡기고 사네

자루 속 석 되의 쌀

이로리 옆 한 다발의 땔감

누가 미오(迷悟)를 묻는가

명리는 티끌과 같은 것

밤비 내리는 초암

두 다리를 마음껏 쭉 펴고 사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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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대교서 바라본 병원


43년간 소록도봉사   외국인 수녀 2분, 

편지 한 장 남기고 홀연히 떠나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 온
외국인 수녀 2명이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 넘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  마가레트(70) 수녀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떠난 것입니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상처에 약을 발라줬습니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습니다.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습니다.

이들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이 편지로 용서를 빈다”고 말했습니다.

김명호(56) 소록도 주민자치회장은

“주민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수녀님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였다”며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떠난 두 수녀님 때문에 섬이 슬픔에 잠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록도 해수욕장

 

오스트리아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는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이 소속 수녀회에 전해지자
1962년과 66년 차례로 소록도에 왔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오후엔 죽도 쑤고,  과자도 구워 들고,  마을을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습니다.
꽃다운 20대는 수천 환자의 손과 발로 살아가며 일흔 할머니가 됐습니다.

숨어 어루만지는 손의 기적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는 베품이
참베품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상이나 인터뷰를 번번이 물리쳤습니다.

10여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습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습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습니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개만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외로운 섬,
상처받은 사람들을
반세기 가깝게 위로한 두 수녀님의 사랑의 향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덥혀 주리라고 믿습니다.

"처음 갔을 때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된 것입니다.

할 일을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답니다.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봐 조용히 떠나갔습니다.

두 분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가 고향 오스트리아는 도리어 낯선 땅이 되었지만,
3평 남짓 방 한 칸에 살면서 방을 온통 한국의 장식품으로 꾸며놓고
오늘도 '소록도의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그 분의 방문 앞에는
그분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습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


 

 43년간 소록도에서 봉사한

 마가레트 수녀(왼쪽)와 마리안 수녀(오른쪽에서 두 번째).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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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어느 ROTC장교의 영혼 부탁

(광덕스님 글)


이것은 필자가 봉은사를 맡아 있던 1965년 여름의 일이다. 그 해 홍수가 났다. 신문에는 피해복구공사 중에 장교(중위) 한 분이 순직했음을 알았다. 그 얼마 후 한 노신사 부부가 봉은사를 찾아왔다. 신문에서 본 그 군인의 천도를 의논해 온 것이다. 노부부는 망인의 부모님었다. 7재를 올리기로 한 그 얼마 후 노신사의 이야기다.

"얼마 전 점심을 먹고 잠깐 앉아 있다가 아마 잠깐 졸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역력합니다. 내 곁에 죽은 자식이 찾아오지 않았겠어요. 나는 멍청히 그 애의 얼굴만 쳐다 보았어요. 그 애는 평상시와 같이 활달했어요.

나에게 하는 말이 '아버지, 어머님을 위로 해 주십시요. 어머님은 제가 죽었다고 저렇게 슬퍼하고 계시는데 조금도 그러실 것 없습 니다. 아버지 저기를 보십시요.' 합디다.

그래 손으로 가르키는 곳을 보니 좀 떨어진 멀 지 않은 곳에 한 세계가 벌어져 있지 않겠어요. 자세히는 못 보았어도 아름다운 동산에 거루고각이 대궐같이 솟아 있었어요.

자식이 하는 말이 '저 집이 멀지 않아 제가 가서 살 집입니다. 이 세상 즐거움이란 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아버님 어머님 부디 제 걱정을 하지 말아주십시요.

그리고 아버님은 이제 좀 한가로우시니 어머님을 위로해 주십시요. ' 하지 않겠어요. 사실 저는 얼마 전까지 시골에서 공직생활(면장이었다)을 하며 살아왔고, 우리집 사람은 아이가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서울에 와 있었어요. …"

노부부에게는 아들이란 이 하나뿐이었다.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장교로 입대했었다.
그런데 7재가 지난 후 다시 그의 어머니에게도 나타났다. 현몽이었다. 안락처로 간다는 인사였다.



2. 여고생 영혼의 어리광

(광덕스님 글)


그 때는 필자가 범어사 선원에 있던 1951년 여름의 일이다. 산 너머 양산군 동면 내송리 사베부락에서 중년 부부가 찾아왔다. 맏딸이 갑자기 죽어서 서러워서 왔다.

딸은 동래여고 3년,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두고 바깥마당에 나가더니 차에 밀려 쓰러졌다. 외상 하 나 없는데 혼은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그 여학생의 7재는 올려지고 위패는 지정전 한 모퉁이에 안치되었다.

그런데 절에 재식이 겹치는 날이면 병풍이 여럿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쉬울 때 나는 여학생 영단에 펼쳐 있던 병풍을 다른 곳으로 가져다 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님이 왔다.

망인의 현몽을 전해 온 것이다.
"어제 낮 방에서 비몽사몽간에 애가 보였어요. 그리고 생전에 어리광 부리듯 내 두 무릎에 매달리면서 '스님들 정성으로 제가 아주 좋은 데로 간답니다. 그런데 내 곁에 병풍은 왜 자주 가져가지요?' 하며 못마땅해 하더군요."

이 사실은 필자만이 아는 사실이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학생 영단에 놓으려고 다홍빛 산리라를 몇 번이고 꺽어왔다. 그 후 7재를 마친 후에도 부부는 오래도록 절에 와서 염불을 하고 설법을 들었다.

7재 후에 죽은 딸이 부모에게 기쁜 얼굴로 현몽하며 '이제 저는 아주 좋은 곳으로 태어납니다. 엄마 아빠 안녕'하더라는 것이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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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선원 천도법어

 

영가여! οοο 영가여!

지금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영가들은 분명히 지금 이 자리에 오셔서 천도薦度 법어를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어서 더러는 모양이 있고 모양이 없고 합니다. 인연 따라서 과거세에 지은 그런 업의 힘으로 해서 한동안 사람 같은 몸을 받았다 해도 인연이 다하면 사람 같은 모양은 사라집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생명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모양이 있는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 바람기운, 또는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기운들이 모여서 하나의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그때는 죽음도 있고 이별도 있고 또는 아프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천지우주라 하는 것도 역시 달이 있고 지구가 있고 해가 있고 이렇게 한다고 생각 할 때는 이것도 형체가 이루어졌다가 또는 그런 모양이 변화가 됐다가 또는 그 모양이 파괴가 됐다가 다시 모양이 텅텅 비어버리는 것입니다. 텅텅 빈 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생명자체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생명자체는 불생불멸 不生不滅이라. 생명자체는 본래 낳지 않고 또는 모양이 바꿔진다 하더라도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습니다.

 

오늘 천도를 받으시는 영가들이시여! 금생今生에 인연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가 인연이 다해서 다시 저승길로 가신 것입니다. 저승길은 어두운 세계입니다. 사람도 어두운 밤길을 갈 때에는 등불이 없거나 안내인들이 없으면 헤매기도 하고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죽음 길도 그와 똑같아서 한 번 죽어서 갈 길을 모르면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십 년도 머무르는 것이고 때로는 백년도 머무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복아 많으셔서 좋은 후손들을 두셔서 어두운 길을 밝히는 참다운 등불, 참다운 지혜를 오늘 들으시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사람이라 하는 것은 금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과거 전생에는 사람보다 못 한 개나 소나 돼지 같은 그런 축생畜生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그 보다 더 못해서 과거 전생에 어느 생에는 지옥이라 하는 지독한 그런 고생만 연속되는 세계에도 태어났다가 다시 죽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어떠한 누구나가 다 그런 지옥 같은 생도 받았고 또는 사람이외에 동물 같은 생도 받았고 또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귀신같은 그런 생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과거 전생에 닦은바가 있어서 생각도 좋은 생각을 하고 말도 좋은 말을 하고 행동도 바른 행동을 취해서 사람 될 만치 착한 그런 성품 때문에 금생今生에 사람 몸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또는 헤어지는 것입니다. 또는 이별도 있는 것이니까 사람도 별로 좋은 데는 아닌 것입니다. 사람보다 더 좋은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만이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이 제일 좋다.’ 합니다만 사실 인간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죽음이 있고 또는 이별이 있고 슬픔이 있고 또는 병도 있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 하나의 고해苦海란 말입니다. 우선 그때그때 쾌락적인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모두가 다 고의 원인으로 해서 이루어져서 잠시간 허망한 찰나에 불과합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사람으로 계시다가 지금 어두운길을 헤매시는 가운데 이와 같이 좋은 후손들을 만나서 정말로 참다운 행복한 나라, 헤어짐도 없고 병도 없고 죽음도 없는 그런 나라로 가시는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사람보다 좋은 천상세계가 있습니다. 천상세계 중생들의 몸은 사람 같은 그런 몸이 아닙니다. 사람 몸은 아프기도 하고 또는 배가 고프면 물질적인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만 천상세계는 그런 것을 먹지 않더라도 살 수 있는 세계입니다. 천상세계는 몸도 이렇게 냄새가 나고 때가 묻고 하는 그런 몸이 아닌 것입니다. 천상세계의 몸은 광명신光明身이라, 빛으로 몸이 되어 있습니다. 빛으로 몸이 되어 있거니 때 묻지 않고 또는 이러한 물질적인 껍데기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천상세계가 한 군데 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선량한지, 얼마나 바로 살았는가 하는 그런 행위 따라서 천상도 28층이라, 스물여덟 층의 천상단계가 있습니다. 업장業障이 무거운 사람들은 저 아래층에 가 있는 것이고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업장이 가벼운 만치 거기에 비례해서 보다 높은 천상에 있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그러나 천상이 최상의 세계는 아닙니다. 비록 천상일지라도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서 몇 천 년, 몇 만 년을 산다고 합니다. 업장 가벼운 중생이 태어나면 가벼운 중생들일수로 더 오래 사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천상은 팔만 겁이라 하는 오랜 세월을 삽니다만 이것도 역시 인연이 다하면 죽음이 도래합니다. 따라서 이런 천상세계도 역시 사실은 죽고 살고 헤어지고 하는 것을 면치 못 하는 중생세계입니다. 이렇게 뱅뱅 돌아서 천상으로 갔다가 다시 복이 다하면 인간으로 뚝 떨어졌다가 또 지옥으로 갔다가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 중생은 정말 답답하기도 하고 개미 쳇바퀴 돌듯이 참담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이 이러한 고생바다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사람이나 천상이나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그런 세계만 뱅뱅 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세계를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스러운, 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병도 없고 헤어짐도 없는 세계인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러한 영생해탈, 영생행복의 길을 가르쳐주고 계신데 다만 중생들이 게을러서 가고 안 가고 합니다. 극락세계는 중생들에게 좋은 일 하라고 방편方便으로 한 말씀이 아닙니다. 극락세계는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의 세계입니다. 사람세계나 또는 축생의 세계나 천상세계나 이러한 것은 하나의 흘러가는 과정적인 세계에 불과합니다만 극락세계는 흘러가는 세계가 아닙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성인成人들은 분명히 본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번뇌에 가리어서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는 번뇌만 거두시면 바로 극락세계에 가시는 것입니다. 지금 가리고 있는 번뇌가 무엇인가? 가시는 길에 번뇌는, 사람으로 계실 때 쓰시던 칠팔십 년 동안 자기 평생에 무척이나 아끼던 몸입니다. 어느 누구나 사람이면 자기 몸이 제일 소중합니다. 몇 십 년 동안 그 몸을 아껴왔으나 죽은 뒤에 몸뚱아리는 화장을 하면 재가 되는 것이고, 땅에 파묻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만 번뇌를 못 벗어나고 지혜가 밝지 못한 그런 중생들은 죽은 뒤에도 평소에 쓰던 몸에 대해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 쓰시던 그 몸은 이미 영가들의 몸이 아닙니다. 영가들의 몸은 화장 하면 재가 되고 파묻으면 흙이 되고 마는 그러한 것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가들이 쓰시던 마음은 몸과 더불어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은 영생하는 참다운 생명입니다. 몸은 뜬구름 같고 거품 같이 한 동안 인연 따라서 모아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존재입니다. 광야에다 집을 지을 때 나무요, 흙이요 이것저것 다 모아서 집을 올리면 하나의 집이 되겠지요. 그러나 나중에 집을 헐고 집을 파괴해버리면 집은 흔적도 없습니다. 나무나 흙이나 그런 것으로 밖에는 안 남아 있습니다. 그와 똑같이 사람 몸뚱아리도 산소요, 수소요, 탄소요, 질소요 그런 원소의 기운이 업장業障기운 따라서 하나의 형상을 나툰다 하더라도 생명자체의 인연이 다해 생명의 힘이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 떠나가면 몸뚱아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자기 몸에 대한 애착, 자기 목숨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자기 갈 길을 바로 못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번뇌는 자기 권속에 대한 애착, 자기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요, 자기 남편이요 이러한 자기가 금생今生에 인연 따라서 사람세상의 인연 따라서 만난 그런 권속, 자기 친구 그러한 인연들 때문에 잘 못 가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가 돌아간 뒤에 자기 아들을 생각하고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으면 그런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살아있는 자기 권속들이 행복하면 좋은데 그 반대로 돌아가신 분들이 자꾸 뒤돌아보고 남은 분들을 생각하면 생각한 만치 남아있는 분들한테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자기가 쓴 자기 세간, 자기 집, 자기 논밭, 자기 금붙이 같은 것은 허물어지는 몸뚱아리가 있을 때 필요한 것이지 몸뚱아리가 한 번 떠나버리면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자기가 쓰던 세간 때문에 자꾸만 뒤돌아보고 또 애착이나 미련을 갖습니다. 이것도 역시 무서운 번뇌가 되어서 여러분이 갈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자기 몸도 흙이 되고 재가 되고 마는 허망한 것이거니 아들이나 딸이나 역시 한 동안 만난 허망한 인연에 불과합니다. 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집도 허망한 것에 불과합니다. 허무한 것에 불과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간에서 쓰던 버릇 때문에 내 것이요, 내 권속이요 하는 마음 때문에 바로 못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그러한 것은 가치가 없고 거품이요, 메아리인 것이고 실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가들이 가실 곳은 오직 생사를 초월하고 행복만 있는, 또는 영원히 아프지 않고, 영원히 이별도 없고, 영원히 살 수 있고, 또는 모든 안락을 다 얻을 수가 있고, 또는 지혜를 다 얻을 수가 있는 곳은 극락세계뿐입니다. 지금 지옥에 사는 중생이나 또는 축생畜生으로 있는 중생이나 사람중생이나 또는 천상중생이나 결국 모두가 다 극락세계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고향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다시 이루어지고, 허물어지고하는 그런 과정에서 어쩌다가 우리는 극락세계에서 생각을 한 번 잘못해서 뚝 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어떠한 존재나 본 고향은 모두가 다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부처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모든 것이, 거기에 사는 존재나 또는 그 환경이나 모두가 다 조금도 흠축이 없는 그런 청정미묘한, 불변한 광명光明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극락세계를 다시 바꿔서 말하면 광명정토光明淨土라고 합니다.

 

영가여! 천지우주는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번뇌에 때 묻은 영가의 몸이라던가,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라던가, 추한 것, 좋은 것. 나쁜 것, 그런 것 모두가 청정미묘한 극락세계의 광명으로 된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서 자기를 소중히 하는 그런 이기심, 그것 때문에 가리어서 탐욕심을 내고 또는 무엇을 얻지 못하면 성을 내고 자기 기분이 안 내키면 분노를 하고 하는 어리석은 마음들 때문에 우리가 천지우주의 그러한 행복스러운 본질을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우주의 본질이라 하는 것은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시고 또는 예수나 공자나 그 뒤에 달마스님이나 그런 위대한 도인들이 다 말씀하신 그대로 우주란 것은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광명세계입니다. 광명세계, 이것은 영원히 변치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이 탐욕심 또는 분노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러한 마음에 가리어서 그런 광명세계를 잘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가 그 극락세계, 광명정토光明淨土에 가시기 위해서는 광명정토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다른 곳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광명정토는 우리들 고향이다. 내가 영원히 쉴 고향이다.’ 이와 같이 생각을 하십시오.

 

그리고 광명정토의 이름인 동시에 일체중생의 본마음이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우리 고향인 광명세계를 마음으로 생각하십시오. 과거에 쓰던 자기 몸, 자기 권속, 자기 세간이 모두가 다 한 동안 인연 따라서 쓰던 허망한 것에 불과합니다.

 

영가들이시여! 영원한 세계, 극락세계는 나무나 또는 땅이나 모두가 다 광명으로 이루어져있는 행복스러운 세계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헤어지지 않는 세계입니다. 극락세계의 참 이름은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또는 일체중생의 참 이름도 역시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지장보살이고 문수보살입니다. 극락세계의 대명사, 극락세계의 모두를 합한 이름이 아미타불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를 생각하시고, 또는 극락세계의 참 이름인 아미타불을 일념으로 외우신다고 생각할 때는 영가들은 한 생각 가운데 그냥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유가족, 친지들이시여! 지금 어두운 길을 빠져나가신 영가를 위한 가장 좋은 공덕은 이와 같이 재를 모셔 부처님 법문으로 해서 극락세계의 길을 가시도록 천도해드리고 안내해 드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가는 가르침입니다. ‘나’라는 것에 집착을 내지 말고, ‘나’라는 것에 이기심을 내지 말고, ‘나’라는 이 몸뚱아리 때문에 한 동안 살다 허물어지고 마는 거품 같은 몸뚱아리 때문에 집착을 내지 말고, 탐욕심을 부리지 말고 또는 어떠한 경우도 우리가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또는 얻는 것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해서 성내는 마음, 그러한 마음을 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은 더욱 더 굳어지고 오염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더욱 더 오염되고 몸도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업장業障, 우리의 죄가 더욱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본래 고향인 극락세계에서, 아미타불 그 자리에서 더욱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 성내면 성낸 만치, 한 번 탐욕심을 부리면 부린 만치, 나쁜 걸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내면 낸 만치, 우리 마음도 어두워지고 몸도 어두워집니다.

 

성자의 말씀은 조금도 거짓말이 없습니다. 석가나 예수나 공자나 노자나 그런 분들이 무슨 필요로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살아있는 자기 행복을 위해서나 오늘 재를 받으시는 영가를 위해서나 부처님을 생각하고, 극락세계를 생각하고 한 생각도 생각을 놓치지 말으시고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생각하시는 것이 돌아가신 어버이를 위해서 가장 지극한 최상의 효심인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를 생각하시고 아미타불을 생각하시고 한 생각에 최상의 행복, 우리가 필경 돌아가야 할 고향자리로 왕생하시길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1990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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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천도법어

 

 

부처님 말씀 중에 ‘영겁회귀永劫回歸’라는 귀중한 금언金言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이나 또는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나 영겁회귀라 하는 소중한 금언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어느 것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두가 다 순간 찰나찰나 변화무상해서 종단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종단에는 다 하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 하나의 자리가 무엇인가?’ 하나의 자리가 바로 대총상법문대총상법문 자리입니다. 그럼 대총상법문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가? 대총상법문이란 것은 바로 우리의 자성自性, 우리 인간의 본성 자리이자 우주의 본성 자리가 대총상법문 자리입니다. 마명馬鳴대사의『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심진여心眞如시대총상법문체是大總相法門體하라 ‘심진여心眞如’라, ‘마음 심자 ‘참 진자 ‘같을 여자 우리 마음 바탕인 진여, 이것이 바로 모든 만법의 기본적인 본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법을 말할 때 어떤 때는 그때그때 법의 줄거리를 그냥 잊어버리고서 법의 상대유한적인 상을 많이 말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더욱 더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그래서 꼭 본체를 안 여읜다는,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부처님 법을 말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보가 너무 적으면 장사도 잘못 하고 공부도 암중모색하는 그런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현대는 아시는 바와 같이 정보의 홍수시대 아닙니까. 정보의 홍수시대에 우리가 정보를 적당히 처리를 못 하면 우리 마음이 항상 산란스럽고 혼란스러워서 스트레스를 도저히 해소시킬 길이 없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서구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200년 동안이나 산업사화가 계속 되어서 물질생활은 상당히 편리하고 풍요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보의 홍수라 하는 우리가 바라지 않는 것이 이루어져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도 정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정보를 적당히 소통시키고 정화를 시키는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부처님 법 같은 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우주에 홍수같이 밀려 내려오는 그런 정보를 정화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간적인 가르침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대유한적인 복잡한 가르침입니다. 하나의 상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본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본체를 여의지 않는 이것이 아까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총상법문입니다. 이른바 진여의 불성이 바로 본체란 말입니다. 『육조단경六祖』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아소설법我所說法불리자성不離自性’ ‘내가 지금 설한 법문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니 불’자, ‘떠날 리자,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을 떠난 것은 상대적인 말씀이란 말입니다. 상대적인 말이란 것은 우리를 더욱 좁게 만듭니다.

 

‘자성’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가 자성에 대해서 특히 명심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성’이란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육조혜능 스님께서는 『육조단경』에서 ‘자성’이라는 말씀을 백 번도 더 했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자성’이라는 말씀을 더러 많이 들으십니다. ‘자성’이라는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란 말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모두가 본래 성품자리는 자성입니다. 자성을 또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자, ‘불성’이라는 말이나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自性’이라는 말이나 똑 같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무명無明 가운데, 무명의 그 중요한 근원이 무엇인가? 우리 중생이 무지하기 때문에 사물의 본래면목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이나 저것을 자꾸 분할을 시킨다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일원적인 진리인데 우리 중생들은 일원적인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둘로 나누어 보고 셋으로 나누어서 보고 이와 같이 구분하고 분할한단 말입니다. 제가 허두에 ‘영겁회귀’라는 말씀을 했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본래로 자성이라 하는 청정미묘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어디로 갈 것인가? 다른 데로 가지 않고서 바로 자성으로 돌아갑니다. 자성에서 왔다 자성으로 돌아갑니다. 현대기계문명이라든가 그런 상대적인 가르침과 우리 부처님 가르침과의 차이는 그 모든 존재를 하나의 진리로 보는 그런 원만 무결한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이렇게 저렇게 구분해서 보는 가르침은 과학이라든가 다른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인간 존재가 미처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나 자성은 본래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서 예지叡智가 발동합니다. 예란 ‘슬기로울 예자 ‘지혜 지’자 예지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한테나 미처 계발은 못 되었다 하더라도 예지는 항상 조금도 흠결이 없이 갖추어있습니다.

 

사실은 예수 같은 분도 부처님 가르침같이 원대한 말씀을 못 했다 하더라도 좋은 말씀은 많이 했습니다. 복음 성서에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 그러면 무엇이든 그대에게 갖추어지리라.” 이런 것도 우리 불교에서 “자성을 깨달으면, 본래면목을 깨달으면 모두가 다 부처가 된다.”는 말씀이나 흡사한 말씀입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같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사람과 사귄다 하더라도 ‘사람과 화해하는 것이 우주에 맞고 불교에 맞는 도리가 아닌가.’ 생각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과, ‘우리가 본래로 저 사람이나 나나 모두가 다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하고서 이웃과 사귀는 것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주위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한 이웃이 있다고 합시다. 이웃을 볼 때에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까 그냥 보통 생각에서는 아무리 친하게 사귀려고 해도 사귀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논리적으로 ‘저 사람도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똑같은 진여불성을, 그 본래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은 다 뿌리가 똑같단 말입니다. ‘생명의 뿌리가 똑같다.’ 고 생각할 때는 저 사람한테 함부로 하면 생명의 뿌리가 똑같기 때문에 나한테도 그냥 해가 온단 말입니다. 그 반대로 저 사람한테 우리가 용납을 하고 관대하다고 생각할 때는 나한테도 그냥 그대로 복덕이 돌아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이라 하면 달마스님께서 ‘문자를 배격하고서 오직 마음만 깨닫는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통 가르침을 받드신 조사님들은 절대로 하나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법이 본래로 원융무애하고 또는 한결같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 진여불성을 떠나지 않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신 법문도 여러 가지 법문이 많이 있으나 보통『소실육문少室六門 』에서 여섯 문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어요. 그런 가운데 후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고증을 받아가지고서 ‘『소실육문』 가운데서 두 가지는 달마스님이 했으나 네 가지는 달마스님 법문이 아니다.’ 이렇게도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달마스님의 두 가지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을 때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종교를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종교란 것은 우리 마음을 평온히 하고 모든 사람끼리 서로 화해하고 더불어서 영원한, 자성 청정한 진리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인데,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마음이 편안치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마음이 편안한 안심법문이 중요한가.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흔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깊이 느끼시고 명심해서 그렇게 말하는 분들은 많지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정말로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을 논할 수가 없고 우리 마음밖에 부처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본래 부처입니다. 나 같이 별스럽지 않은 그런 마음이 어떻게 부처라고 할 것인가.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 범부중생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육조단경』에서도 또 말씀했습니다만, 우리 마음, 바로 이것이 우리 자성인데, 우리 자성 가운데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에 본래로 포함되어 있는 모든 불성 지혜공덕이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입니다. 그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모양을 나투고 또는 변화하는 그러한 차원에서는 천백억화신불千百億化입니다. 즉, 우리 마음 가운데에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삼신이 원만히 들어있습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우주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우주생명과 더불어서 둘이 아닌, 법신이 온전히 다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또는 그 가운데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는 생명과 또는 다시없는 행복스러운 극락의 행복과 또는 신통자재하는 대아大我라, 이른바 삼명육통明六通을 다 갖출 수가 있고 만덕을 갖춘 것이 우리 마음과 관계되어 있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의 본체는 번뇌가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청정이란 말입니다. ‘때가 끼었다, 때가 안 끼었다.’ 그런 것은 우리 중생이 봐서 그런 것이지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사실은 때가 낄래야 낄 수가 없습니다. 도둑질을 많이 해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만한 그런 죄를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사실은 오염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잘못 생각해서 자승자박이라, 스스로 자기 어리석음에 묶여서 분노가 되고 내가 나쁜 놈이다 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성, 공간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금생에 잘못 살아서 한도 끝도 없이 오랫동안 지옥고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청정한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 가운데는 부처님의 청정법신이 그대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라 그 자리는 지혜, 행복, 자비, 능력이 다 들어있습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분은 대천재라 불렸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될 것인가?’ 이렇게 조금도 의심을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슈바이처 같은 분은 아프리카밀림의 성자이지 않습니까. 의사인 동시에 철학자요, 신학자요, 대음악가라고 합니다. ‘그런 천재는 잘나고 나는 대체로 무엇인가?’ 이렇게 비교를 해 볼 때는 한심스럽겠지요. 그러나 아인슈타인이나 슈바이처나 또는 성인이라고 하는 간디나 우리나 마음자리는 똑 같습니다. 조금도 흠절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자리나, 예수 마음이나, 달마스님 마음이나 마음의 본바탕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할 일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겁회귀永劫回歸라. 우리는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다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가 되어버리면 또 어떨 것인가?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중생의 공업력共業力 따라서 텅텅 빈 그런 공겁空劫으로 부터서 다시 우주가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성겁成劫이라, 성겁이 되면 그때는 여러 가지 동물이나 식물이나 존재가 의지해서 산다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겁住劫이라, 그럼 차근차근 찌꺼기가 생깁니다. 물질이란 것은 오랫동안 되다보면 불가역에너지라, 이른바 다시 활용할 수 없는 에너지로 화한단 말입니다. 그 에너지가 찌꺼기가 자꾸만 쌓이면 나중에는 그것이 산화되어서 불이 난단 말입니다. 괴겁壞劫이라, 우주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파괴가 됩니다. 파괴가 된 뒤에 물질은 허공무물虛空無物이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심식心識은 남아 있습니다. 무색계 중생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그 무색계 중생이 텅텅 빈 공겁세계에서 아직은 중생이니까 ‘좋다, 싫다.’ 하는 그런 마음이 있겠지요. ‘좋다, 싫다,’ 하는 그런 마음, 그런 에너지가 상호작용 되어가지고서 다시 우주를 형성합니다. 그럼 다시 텅텅 빈 공겁에서 우주가 성겁이 되고 그럼 또 중생이 살고 또 다시 파괴되고 텅텅 빈 우주가 되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도 역시 영겁회귀 합니다. 우주 존재가 바로 텅텅 비어버린 다음 다시 이루어지고 다시 모든 존재가 살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역시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꼭 부처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어가는 하나의 나그네 길에 있습니다.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정보의 홍수 가운데서 부처님 가르침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지를 모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것저것 알기는 많이 알지만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인간이 할 일이 뭐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다행히 부처님 가르침을 알기에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모든 것이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다 환상이나 같단 말입니다. 있다는 것이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분명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있지 않은 것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있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제법공 도리를 몇 십번, 몇 백번 들으셨겠지요. 오온개공五蘊皆空 이라, 오온개공도 물질이라는 것은 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도 변하지 않고서 변화무상한 즉, 다시 어려운 말로 하면 공간성, 시간성이 없단 말입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공간성이 있고 시간성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인연생의 법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은 시간성, 공간성이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여!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우리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본래는 태어남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한데, 본래로 우리 생명의 본바탕인 것이기 때문에 거품 같은 모양으로 해서 이런 사대색신四大色身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멸본무멸滅本無滅이라, 이 육신六身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다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자체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불생불멸하는 생명의 존재는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해서 영원히 존재합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를 인격화 시킬 때 아미타불이요, 약사여래불이요,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불생불멸한 영원한 생명이니까 무생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아미타불이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라, 영원한 생명이란 뜻입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아미타불에 갖추어져 있는 모든 공덕이 끝도 갓도 없이 많다는 말입니다. 또 광명무량光明無量이라, 진리의 광명이란 것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내가 생명이거니 내 생명의 본고향 자리가 바로 법신불입니다. 바로 영원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바로 우주생명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생명이니까 훨씬 크고 내 마음자리는 아주 왜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질 같으면 비교가 되겠지만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은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다 들어가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다 들어가고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어서 오직 하나의 진리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은 참 복덕이 많습니다. 해인사 주지스님은 아주 덕이 높으신 스님이시고 염불도 아주 잘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침에 와서 보니까 주지스님 염불소리가 도량에 쩌렁쩌렁 울려서 저도 그냥 환희심이 났습니다. 영가들도 춤을 추면서 극락세계에 가게 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니까 ‘영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존재가 허망虛妄 무상無常하지만 이와 같이 존재의 뜻이, 영혼이 우리 중생의 제한된 육안肉眼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안天眼이라든가 불안佛眼이라든가 법안法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인간 모양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생명인데 그 생명이 갈 곳을 잘 모르면 이른바 중음中陰에 오랫동안 헤매는 것이고 갈 곳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혼연히 올라가는 것입니다. 극락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 따지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들한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권유하는 권선징악의 방편이지 극락이 어디 있을 것인가? 천상도 마찬가지 아닌가? 천상도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우리 인간도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하면 다 무상이라, 꿈같은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대로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천상도 천상세계도 다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란 것은 생명자체가 본래의 생명에 안주하는 자기고향에 돌아가는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태어난 분들은 모두가 다 광명의 몸입니다.

 

‘극락이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을 근원적으로 따지는 사람들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열심히 보시면 부처님께서 어떻게 극락세계를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이 생길 줄로 믿습니다.

 

극락은 분명히 우리가 생명의 본고향에 돌아가는 곳입니다. 진여불성의 자리에 돌아가는 그러한 성자의 영혼이 안주하는 곳이 극락입니다. 이른바 영생의 고향이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극락에서 쉬다가 다시 중생세계로 돌아온다고 할 적에 중생들이 불쌍해서 그 자리에서 원력을 세워서 중생계로 태어나기도 하고 천상에 내려오기도 하고 지옥도 가고 그런 것입니다. 진여불성이 되어 온갖 인간고뇌가 없고 오직 행복으로 존재하는 그런 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감회에 불과한 그런 허무의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광명을 몸으로 하고 우주를 몸으로 한, 그런 자리는 물질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순수생명자리이기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오늘 인연 따라서 모이신 모든 불자들이여! 저 밖에 계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법이 얼마나 수승하면 아직도 싸늘한 날씨인데 추운 곳에 앉아 계신다고 생각할 때 송구스럽고 한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부처님 법은 대총상법문이라, 모든 법을 다 포섭해 있습니다. 과학이나 무엇이나 부처님 법안에는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과학 자체가 전문 과학이 되어서 우리가 여러모로 편리를 많이 봅니다만 차곡차곡 가면 갈수록 우리 부처님 법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의 본바탕, 이것은 다 허무한 것이란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상 자체는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대물리학이 증명합니다. 어떻게 증명하는가? 하이덴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라, 이것은 그 어느 존재 어느 미세한 물체에 있어서도 그 위치와 운동을 동시에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측정이 안 되니까 불확정성의 원리라, 물질이 가장 미세하게 되면 사실은 증명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자나 양자나 그런 것도 항상 그대로 고요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상호작용이 되어서 ‘이것이 되었다, 저것이 되었다’ 합니다. 금방금방 그러한 소립자는 그대그때 사라지게 됩니다.

 

역시 현대과학 자체가 ‘물질이란 것도 비어있구나, 본래 허망하구나,’ 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 법의 제법공諸法空 자리를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다만 현대 과학이 물질이란 것은 공이 아닌 생명 그 자리, 생명 본래 자리, 진여불성 자리라는 것을 알 턱이 없습니다. 어째서 모르는 것인가 하면 물질이 아니니까 측정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마음이 바로 부처님 자체입니다. 우리 마음이 일체가 바로 청정법신이요, 모든 지혜, 자비, 공덕, 행복 이런 모든 것을 갖춘 즉 말하자면 원만보신입니다. 모든 행동과 모든 작용과 모든 모양 이런 것이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입니다. 이 삼신三身이 우리한테 온전히 다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삼신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안 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려는 것입니다. ‘일체중생一體中生 개유불성皆有佛性, 일체중생一體中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두가 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꼭 반드시 단정적으로 부처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영가들이여! 그 어두운 중음세계에 헤매지 마시고 부처님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아서 영원히 극락세계에서 안주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많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2001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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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천진암 천도법어

 

 

제법 추운 날씨에 밖에 계시게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살다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생활을 본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복잡다단한 생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뭐라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사生死문제,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대체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인가?’ 하는 삶의 정의 문제 또는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죽음 문제, ‘죽어서 가는 곳은 대체로 어떤 곳인가?’ ‘죽은 뒤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는 생사대사生死大事라, 석가모니가 나오신 것이나 또는 다른 도인이 나오신 것이나 모두가 다 생사대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오셨단 말입니다. 오늘은 3년 지장기도 회향일입니다. ‘생사대사라 하는 인간의 큰 문제와 지장기도를 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런 것에 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을 대체로 구분해보면 어두운 생활과 밝은 생활이 있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사는 세계는 역시 어두운 세계와 밝은 세계가 있습니다. 어두운 세계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유명계幽冥界 ’라 ‘그윽할 유자’, 어두울 명자‘ 어두운 세계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밝은 세계가 있습니다.

 

어두운 세계는 어떤 곳인가 하면 우리 중생이 자기 인생이나 또는 모든 존재의 참다운 본성을 모른다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모릅니다. 그래서 ‘나 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주는 무엇인가?’ 그런 원인을 모른다 말입니다. 원인을 모르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말도 바르게, 이치에 맞게, 도리에 맞게 못할 것이고 행동도 또 바른 행동이 나오기가 어렵겠죠. 그러한 자기 인생이나 또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근본 도리를 모르는 세계는 어두운 세계, 유명세계입니다.

 

그에 반해서 밝은 세계는 한문 투로 말하면 광명세계光明世界가 되겠지요. 지장보살님은 어두운 세계를 구제하는 이른바 유명교주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지장보살님을 오늘 청해서 여기에 인연 깊은 영혼들뿐만 아니라, 법계法界라 하는 것은 온 우주를 말하는 것인데 법계의 모든 유주무주有住無住영혼들을 천도하는 법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그렇게 헤매서 어두운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인간의 본래 생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자기를 모른단 말입니다. 참 자기라 하는 본래면목을 조금 어려운 불교말로 하면 그때는 천진불天眞佛이라, 천진자성天眞自性이란 말을 씁니다. 영가 현각스님이라, 그 분은 6조 혜능스님한테서 법을 받은 위대한 스님입니다. 영가 현각스님이 지은 증도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 가운데서 ‘법신각료法身覺了 무일물無一物’이라, 법신法身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그때는 ‘무일물’이라, 물질이라는 것은 없단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없다.’ 는 그 말이 굉장히 엄청난 말씀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분명히 있고 또는 산하대지에 산천초목이 있는 것인데 어째서 ‘물질이 없다.’ 하는 것인가? 물질은 분명히 있는데 잘 닦아서 본래면목을 훤히 아는 그런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법신각료 무일물’이라, 법신을 깨달아 놓고 보면 그때는 물질은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없는 그 자리가 그냥 없는 허망한 자리가 아니라, ‘본원자성천진불本源自性天眞佛’이라, 사람이나 일체존재의 모든 그런 끄트머리의 본 성품은 천진불天眞佛이라, 조금도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운 모든 공덕을 갖춘 부처란 말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장보살님은 그러한 어두운 세계에서 헤매는 중생을 구제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자기의 본래면목을 못 깨달았으면 어두운 세계입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 하는 갔다왔다하는 육도六道중에 저 밑은 지옥 아닙니까. 가장 컴컴한 세계, 가장 번뇌가 무거운 세계가 지옥 아닙니까. 좀 나아지면 그때는 아귀라, 아귀는 귀신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천도하는 그러한 존재들은 보통 다 아귀계입니다. 어두운 세계에는 그런 중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어두운 세계 아귀계라, 조금 덜 어두우면 축생계라, 그 다음에는 아수라세계, 아수라세계는 싸움을 좋아한단 말입니다. 지금 같이 서로 분열하고 서로 투쟁하고 이런 때는 아수라세계가 굉장히 극성을 부린단 말입니다. 아수라세계의 그런 기운이 범람하니까 이와 같이 싸우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광명세계로 나아가면 그때는 인간계라, 그 다음은 하늘세계, 하늘세계라 하는 것은 우리 불교적인 의미에서 풀이하면 하늘이라는 뜻은 바로 광명이란 뜻입니다. 빛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중생의 번뇌가 좀 엷어져서 어둠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더 나아가면 그때는 성문聖聞의 세계로 우주의 본성을 그때는 안단 말입니다. 알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다 알지는 못했단 말입니다. 더 올라가면 연각緣覺세계, 더 올라가면 보살菩薩세계라, 가장 끄트머리 광명자체가 되어버리는 생명이나 부처님한테 의지하는 환경이나 모두가 다 광명정토光明淨土라, 광명세계가 되어버리는 그 자리가 부처란 말입니다.

 

이러한 광명자체가 되어버리는 생명자체의 본래면목자리,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진한 꾸밈도 없고 번뇌의 때가 조금도 안 묻은 그대로의 본래세계가 부처님세계란 말입니다. 부처님세계는 바로 극락세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은 그러한 본래면목자리인, 본래천진부처자리인 그런 불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때는 어두운세계가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성자가 되어서 훤히 알아버리면 사실은 지장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지장천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자체가 성자가 못되어 놓으면 아직은 어두운 세계에 있기 때문에 지장천도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어두운 세계라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분상에서 중생이 잘 못 봐서 어두운 것이고, 깨달은 부처님 분상에서 생각할 때는 어두운 세계도 사실은 어두움이 깔려있지 않습니다.

 

현대는 그렁저렁 살 때가 아닙니다. 상당히 복잡한 때라서 우리가 먼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두운 세계는 그냥 어두움만 깔려있어서 조금도 광명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두운 세계에 주눅들어가지고서 밝은 지혜가 없는 것이니까 어둡게 보는 것이지, 비록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장 못되고 어두운 지옥이 있고 또는 아귀가 있고, 축생이 있고, 아수라가 있고 또는 그렁저렁 하는 인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버릇이 되어가지고서 미처 광명세계를 몰라 그렇지 정말로 광명세계가 되어버리면 부처님뿐입니다. 성자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도 훤히 빛나고, 아귀도 훤히 빛나고, 축생계도 훤히 빛나고,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세계도 싸우는 그대로 훤히 빛나있고, 인간도 훤히 빛납니다. 그런 도리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의 물이 기온이 낮아 얼어서 얼음이 된다 말입니다. 얼음이 되고, 기온이 높아져 녹아서 물이 되고, 다시 열을 가해서 수증기가 되고 말입니다. 다시 구름이 되어 올라가서 물방울이 되고, 이렇게 가지가지로 모양은 변한다 하더라도 물이라 하는 산소와 수소가 합해서 된 성분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천지만유의 근본성품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만이 실상實相이고 실존이기 때문에 우주의 본바탕인, 실상인 부처님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지옥도 되고 또는 아귀도 되고, 축생도 되고 이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부처라는 그 자리는 조금도 변질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의 수분이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고 또는 얼음이 된다 하더라도 수분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인생이나 우주의 본래면목인 부처자리, 부처님이라는 성품,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그때는 불성, 부처님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나쁜 버릇을 붙인단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서 불성만 있는, 다시 말하자면 물질은 조금도 없이 광명만 존재하는 광명정토, 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다시 광명 그 자체에는 불성으로서 무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다시 이것이 오랜 시간이 경과 되면 다시 우주가 형성 됩니다. 형성이 되면 또 그 자리에서 중생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생이 나오면, 그 중생들이 그냥 제한이 없이 나온다면 모르지만 제한을 받는단 말입니다. 제한을 받으면 우리는 제한을 받은지라 본래 불성자리를 그때는 제대로 못 봅니다.

 

사람으로 생겨나버리면 그때는 사람으로 제한되어 버리니까 가장 시초야 부처님이지만 이렇게 저렇게 순환과정에서 우주가 텅 빈 광명자리에서 성겁成劫이 되고, 형체가 이루어지고 또는 중생이 살고 그런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아서 각 중생이 여러 가지 차이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래 놓으면 자기 본래면목 자리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한데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이요 또는 아귀요, 축생이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태어나서 한 번 버릇되어 놓으면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또는 성자 같은 분들이 안 나오시면 우리가 절대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나면 인간만치 좋은 곳에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고 그렇게 하다가 다시 죽어지면 또 인간으로 된단 말입니다. 또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우리가 본래 선근이 깊지 못해 가지고서 나쁜 일을 많이 한단 말입니다. 아주 표독스럽단 말입니다. 표독스러우면 표독스러운 그런 업장에 묻혀서 그때는 지옥으로 간단 말입니다. 다른 것에 비례해서 욕심을 많이 부린단 말입니다. 욕심이 지독하게 강하면 그때는 다른 데로 못가고 욕심이라는 그것에 구속당해서 아귀로 간단 말입니다. 또 사리분별을 못해 놓은 그런 어리석은 사슬에 걸려서, 그것에 꽁꽁 묶여서 그때는 축생으로 간단 말입니다. 싸움 좋아하고 투쟁을 잘해 놓으면 그때는 거기에 구속당해서 아수라가 된단 말입니다.

 

사람이 된 것은 그래도 오계五戒라, 다섯 가지 계율은 지켰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인간의 늪에서, 어두운 세계에서 헤어나야 하겠는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은 부처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가 못 되면 그때는 천만년도 헤매는 것입니다. 천만년도 뱅뱅 쳇바퀴 돌듯이 헤맨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런 자리에서 헤어날 것인가.

 

헤어나기 위한, 즉 말하자면 위대한 성인 가운데서 한 분이 지장보살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부처님이라 하면 지장보살님도 계시지만 관세음보살 또 무슨 보살 그런 여러 가지 부처님이나 보살님들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관세음보살님은 어떤 분이고 지장보살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는 의심을 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들은 지장보살님을 외우면 좋은 분들은 ‘지장보살님이 최고다.’ 이렇게 해서 관세음보살님을 몇 십 년 동안 하신 분한테도 ‘그것 말고 지장보살님 외우십시오.’ 이렇게 하는 분도 있단 말입니다.

 

또는 인연이 관음보살님과 깊은 분들은 관음보살님으로 해서 가피加被도 입고, 그런 분한테 ‘지장보살님은 별것 아닙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외우십시오.’ 이렇게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불교가 참 저급한 종교가 되고 맙니다. 그뿐만 아니라 문수보살, 보현보살 같은 보살님 이름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현대적인 불교인들은 마땅히 그런 면에서 회통이라, 이런 보살 저런 보살, 이런 부처님 저런 부처님 명호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통일 원리로 해서 회통시키는 그런 지혜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 대상은 내내야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인데 ‘부처님을 어째서 이렇게 저렇게 많이 부르는 것인가?’ ‘부처님이 따로따로 지장보살님 몸 또는 문수보살님 몸이 따로 있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인가?’ 이래저래 의심을 많이 품습니다. 상당히 불교를 공부 한 분도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편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신 보람으로 모든 보살님, 부처님을 다 통틀어서 모아서 하나로 회통시키는 바른 이해가 꼭 필요합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이른바 우주나 인생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른 생활을 하려고 애씁니다만 바르게 못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 실상을 모른단 말입니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 잘나고 못나고 남녀가 모두 있지 않은가. 마음이야 보이지 않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갖는 무명無明 가운데 가장 못된 무명입니다. 이른바 인간관, ‘인간이 무엇인가?’ 이걸 잘 모른단 말입니다. 이걸 모르니까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 우리 인생의 바른 의미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인간은 물질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이 꽁꽁 얼어서 얼음이 된다 하더라도 얼음 그 자체가 실상이 아니라 얼음의 그 실상은 역시 물이듯이 우리 인간도 우리가 번뇌업장 따라서 이런 몸뚱이를 지녔다 하더라도 인간은 절대로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이것은 다 불성이란 말입니다. 머리카락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불성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불성입니다.

 

인간의 몸뚱이를 분석해 놓으면 내내야 미세한 하나의 원자란 말입니다. 원자 또는 가장 미세한 것은 텅텅 비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제일 미세한 원자라고도 할 수 없는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 산이나 냇이나 모든 존재를 다 분석한 가장 미세한 물질이 내내야 소립자나 원자 아닙니까. 그런 것은 텅텅 비어있는 물질이 아닌 무엇인가의 하나의 파동, 진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 중생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가? 우주의 순수한 생명 그것이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불성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 부처님의 불성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고 진동해서 양성자가 되고 전자도 되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몸뚱이가 대체로 무엇인가? 우리 중생의 제한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남자고 여자고 잘나고 못나고 하더라도 내내야 분석해 놓으면 그때는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란 말입니다. 더 분석하면 그때는 원자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원자가 무엇인가해서 더 분석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의 그야말로 참 광명만 되어버리고 말입니다. 가장 미세한 것은 그야말로 참 광파光波라 또는 광립자라 하나의 광명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광명자체는 무엇인가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인들은 훤히 보는 것입니다. 성자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훤히 우주의 본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견성見性이라, ‘볼 견'자, '성품 성’자 말입니다. 불성을 보기 때문에 견성이란 말입니다. 불성은 무엇인가? 불성은 물질이 아닌 시간이나 공간성이 없는 천지우주의 근본성품을 말합니다. 그런 불성을 본단 말입니다. 불성을 못 보면 그때는 범부인 것이고, 불성을 보면 성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천지우주는 그와 같이 모두가 다 사실은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제가 허두에서 몇 말씀하다 말았습니다만 ‘법신각료法身覺了 무일물無一物’이라, 법신은 우주의 본래모양, 본래실상이 법신인데 법신을 깨달아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일물이라, 물질은 그때는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우리가 많이 씁니다. 그러나 ‘어째서 모두가 마음뿐인가?’ 이렇게 깊이 생각을 잘 못한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정신뿐, 순수한 생명뿐입니다. 물질은 없단 말입니다. 다만 순수 생명이 이렇게 저렇게 진동함으로 해서 상이 보인단 말입니다. 상이 보이니까 중생은 그 상만 봅니다. 법성法性은 못 보고 그 상만 봅니다.

 

불교라는 것은 모두가 상을 떠나서 본성으로 가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어두운 세계가 없단 말입니다. 그때는 유명세계, 어두운 세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본 성품이 불성이기 때문에 항상 훤히 빛나 있단 말입니다.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고, 영원히 시공을 떠나서 빛나있는 그런 영생의 생명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 자리는 조금도 변동 없는 또는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있는 하나의 부처님 생명뿐이기 때문에 또는 그런 불성으로 부터서 일체의 것이 나오기 때문에 잘나고 못나고 또는 재주가 있고 없고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있는 기운입니다. 자비나 지혜나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불성은 영원히 존재하고 또 거기에 들어있는 성품공덕은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그런 공덕들을 한 말로, 한 개념으로 표현을 못합니다.

 

따라서 어두운 세계를 다스리는 그런 부처님 공덕으로 해서 표현할 때는 지장보살인 것이고 또는 자비로운 쪽으로 표현 할 때는 관세음보살이고 또는 지혜로운 면으로 말할 때는 문수보살이고 약이나 또는 의술로 해서 중생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약사여래입니다. 그리고 한 번에 다 몰아서 말할 때는 이른바 총대명사라,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내내야 우주의 근본생명은 하나의 생명인데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알아서 회통을 딱 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가령 지장보살님을 우리가 외운다 하더라도 관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이나 거기에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여기에 촛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광명이 이렇게 있습니다만 이 촛불 빛이나 저 촛불 빛이나 서로 상충이 안 됩니다. 촛불이 이 법당 안에 몇 십 개가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촛불의 광명과 밝음에 대해서 다툼이 없단 말입니다. 불꽃은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같이 다 하나가 되어서 혼연일체가 되어서 그때는 하나의 밝음만 있을 뿐인 것이지, 이 촛불 빛 저 촛불 빛 따로따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천지우주에는 천만번 부처님의 이름을 우리가 외운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그때그때 따로따로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제가 말씀 드린바와 같이 원융무애한 부처님인데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는 것이고 또는 부처님 지혜라는 것은 하늘의 별도 되고 또는 그야말로 태양도 되고 또는 달도 되고 또는 산천초목이 되고 인간이 되고 각 중생이 그 자리에서 나왔으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신통지혜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면 그냥 일시에 천개 만개 부처님 광명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부처님의 모양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차원에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융무애한 하나의 불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바른 이해를 한 후 공부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유주무주의 영가들이여!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이시여!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또는 수라나 인간이나 천상이나, 천상도 아직은 번뇌를 다 끊은 세계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세계만이 참다운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결국 부처님의 세계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一體中개유불성皆有佛性이요 일체중생一體中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은 다 본래생명이 부처거니 마땅히 부처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게으름 부리고 나쁜 짓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종당에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고생고생하고 뱅뱅 돌다가 되겠지요.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우리사회나 모두가 다 혼란스러운 것은 참다운 자기 본성을 모르는데서 온단 말입니다. 본 성품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본 성품은 바로 밝은 것이고 또는 일체 공덕을 갖춘 그런 것이 본 성품이기 때문에 나쁜 말을 할 수 없고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어두운 세계를 떠나서 광명세계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둡다는 것은 다른 것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광명세계뿐인데 다만 우리가 지혜가 없어서 그렇게 못 본단 말입니다. 어두워서 못 봅니다. 따라서 그런 어리석음은 벌써 어두운 것이고, 어리석기 때문에 그때는 내내야 ‘나’를 고집한단 말입니다.

 

바른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원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몸뚱이를 우리가 한계를 세워서 ‘내 몸뚱이 내 몸이요 내 손이요’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잘못 보니까 ‘나’라고 한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리석어서 ‘나’ 라는 한계를 세운 다음에 나한테 좋게 하면 그때는 욕심을 낸단 말입니다. 이 몸뚱이에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고, 이 몸뚱이에 보다 더 옷도 좋게 입고 싶단 말입니다. ‘나’ 라는 관념이 생겨버리면 그때는 나한테 대해서 좋게 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것이 욕심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한테 해로운 것, 내 몸뚱이에 대해서 욕을 한다거나 할 때에 진심瞋心이라, 싫어하는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나’ 라는 생각이 벌써 이와 같이 어두운 생각입니다. 욕심을 내면 낸 만치 더욱더 어두워집니다. 이런 것이 모이고 쌓여서 그때는 더 집착하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이란 말입니다.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마음이 투영되어서 가장 컴컴한 세계가 지옥세계 아닙니까.

 

인간이란 그 보다는 좀 나아서 오계五戒를 지켰기 때문에 인간으로 온 것입니다. 살생을 않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도둑질도 별로 않고, 음란한 짓도 않고 말입니다. 거짓말도 도둑질도 않고 술 같은 것도 맑은 정신으로 덜 먹고 말입니다. 오계는 제법 지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그래도 인간이 되었단 말입니다. 인간이 되었다 하더라도 인간 그 자리에서 참다운 밝은 등불이 없으면 참다운 지혜가 없으면 그때는 다시 인간으로 되는 것이고 또는 잘 못살면 그때는 지옥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밝은 지혜란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너무 옹색한 생각으로 버릇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 라는 관념을 버리기가 어렵지요. 무아無我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기가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분명히 내가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 것인가? 역시 그러한 것은 견성이라, ‘근본성품 자리, 나의 근본도 불성이요, 너의 근본도 불성이요 천지우주가 불성뿐이다.’ 이렇게 딱 되어버린 뒤에는 분명히 무아가 되겠지요. 그러나 못 본 사람들은 아무리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안 보이니까 ‘무아’라 또는 ‘원래 소유가 없어야한다.’ 이런 말을 해도 실감이 잘 안 온다 말입니다. 그러나 안 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진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저 밖에 있는 대밭 너머에 차가 몇 대가 있다고 합시다. 그 차를 본 사람은 ‘차가 있다’고 한단 말입니다. ‘대밭 저쪽에 차가 몇 대가 서 있습니다.’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차가 안 보이는 사람은 ‘차가 없다’고 하겠지요. ‘차가 없다’고 부인 하겠지만 분명히 그 차를 자기 눈으로 보고 와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우리가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똑 같이 부처님께서나 각 도인들은 그런 인생과 우주의 본래성품을 훤히 보신 분이란 말입니다. 보신 분들의 말을 우리가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성인의 말씀을 안 따르면 그때는 고생이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인생고해人生苦海라, 생노병사의 고 또는 기타 가지가지 고생을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렁저렁 삼독심三毒心으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부처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보다 심각한 인생의 그런 고통의 구렁으로 안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가정이나 우리를 어두운 길로 이끌어가는 못된 어리석음 또는 탐욕심 또는 성내는 불끈한 마음 그런 마음을 우리가 떠나지 않고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본 생명도 부처요, 너의 본 생명도 부처요 천지우주가 다 본래로 부처라고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이요, 우리 중생이 바로 못 봐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나쁜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다.’ 이렇게 우리가 지혜로 해서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참다운 화합이나 또는 참다운 행복의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은혜를 『화엄경』에 십종대은十種大恩이라고 풀이 하고 있습니다. 십종대은 가운데서 어떤 은혜가 있는가 하면 ‘은승창렬은隱勝彰劣恩’이라, ‘숨을 은’자, ‘수승할 승’자 말입니다. 창렬이라 ‘나타날 창’자 ‘용렬할 렬’자 말입니다. 좋은 점을 감추고서 나쁜 점을 보이는 은혜란 말입니다. 도둑놈이나 그런 나쁜 사람들은 겉의 상은 비록 나쁘게 보인다 하더라도, 본래는 부처기 때문에 부처의 자리에서는 김가라는 부처, 박가라는 부처, 부처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근본은 똑같단 말입니다.

 

하나의 바닷물에서 천파만파 파도가 나온다 하더라도 똑같은 바닷물이듯이, 부처 가운데서 일체만유의 중생이 나온다 하더라도 같은 부처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눈앞에서 나쁜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상뿐인 것이지 본래가 나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만덕을 갖춘 부처님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상으로 그와 같이 나쁘게 우리한테 보인단 말입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무엇인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안단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아는 것이 불교란 말입니다.

 

불교의 참다운 신앙은 자기가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나나 너나 천지우주의 모든 생명의 본바탕은 부처님이다. 모든 공덕을 갖춘 부처님이다.’ 이렇게 믿는 그것이 불교의 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 믿음이 확실하면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 믿을 신자, 가득할 만滿자, 믿음만 확실하면 그때는 성불하는 것입니다. 참선도 않고 또는 염불도 않더라도 말입니다. 정말로 온전히 믿으면 그때는 성불한단 말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성불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잘나고 못나고 지금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꿈을 깨면 그때는 다 같은 부처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릇이 많기 때문에 금생에 길들여진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고 잘못 말한 버릇, 과거 전생에 우리가 붙인 버릇 그런 버릇 때문에 그렇게 온전히 다 믿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보통 불교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성을 훤히 보는 분이 아니고서는 항상 회의심에 가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불성이 있을 것인가?’ ‘정말로 불성이 빛날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믿음을 자꾸만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님도 한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그렇게 부르면 부르는 만치 그때는 우리 마음이 정화되어 온단 말입니다. ‘명호부사의名號不思義’라 부처님 이름은 모두가 다 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모두가 다 우리 삼독심을 녹이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이 자리에도 염주를 헤아리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모두가 다 한번 헤아리면 한번 헤아리는 대로 업장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먼저 딱 믿고서 화두를 드는 사람들은 화두를 들고, 염불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염불을 하고 또는 주문을 외우는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는 그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 지켰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하면 큰 공덕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 천진암 스님네가 3년 동안 지장보살을 모시듯이, 염불도 기도하려면 부단염불不斷念佛이라, ‘아니 불’자 ‘끈을 단’자 말입니다. 간단이 없이 해야 합니다.

 

어두운 세계에서 헤매는 영가들이시여! 우리는 좋아서 고기를 먹습니다만 고기에는 축생의 탐욕심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으면 그때는 업장 많은 축생의 세포가 우리한테 들어오니 좋을 턱이 있습니까. 고기를 적게 먹어 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말썽 많은 고기를 수입할 필요가 있습니까.

 

오늘 천도를 받는 모든 영가들이시여! 사람이 낳을 때는 생유生有요, 사는 것은 본유本有요, 죽을 때는 사유死有요, 죽어서 가는 데는 중유中有입니다. 그 중유에서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아직 갈 곳을 못가고 헤매는 그런 영가들이여! 축생 영가들이여! 우주에 있는 모든 영가들이여! 바로 생각 한다고 할 때는 그대들의 본 모습도 역시 천진불天眞佛이거니, 부처님의 위없는 법문을 믿고서, 바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온전히 믿음만 가지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그대들이 앉은 그 자리가 바로 훤히 빛나는 광명으로 빛나는 연꽃 연화대蓮花臺로 화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여! 그대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본래는 나와 남이 없고 천지우주가 천차만별로 삼천대천세계가 구분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원융무애한 부처님뿐이거니, 지장보살을 외우나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참다운 염불이라 하는 것은 그 자리를 안 놓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그냥 부처님한테 우리가 기원 드려서 도를 찾는다.’ 그것은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천지우주가 부처님이거니, 우리 중생은 너무나 버릇이 많아놔서 그냥 잊어버린단 말입니다. 그 자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 사부대중이시여! 영가들이시여!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은 모두가 다 우리가 본래면목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운문스님의 똥 마른 막대기라, 소중한 부처님을 똥 마른 막대기라, 달마스님께서 온 뜻은 우리한테 모두가 다 어두운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헤치고서 성불하게 만들기 위해서 왔단 말입니다. 그런 성불하게 만드는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을 묻는데 똥 마른 막대기라 이렇게 대답했단 말입니다. 똥 마른 막대기나 다른 모두가 다 바로 보면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원통한 것은 그와 같이 우리가 어두워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리석은 마음 또는 탐욕심 내는 마음 또는 성내는 마음 이런 마음이 컴컴하니까 이런 것에 가리어서 못 본단 말입니다. 우리 원수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남한테만 탓을 합니다. 물론 정치를 하는 분들은 제도도 바르게 하고 해야 하겠지만 기본적인 원수는 자기한테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본래면목, 천지우주가 부처님인데 부처님을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마음 또는 어리석음을 더욱 깊게 하는 탐욕심, 더욱 깊게 하는 성내는 마음, 이것이 자기 원수입니다. 남을 탓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남을 탓하지 않고 자기한테 있는 어리석음, 탐욕심, 성내는 마음, 그 마음만을 우리가 정화시키고 나간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인간사는 그냥 즉시에 그야말로 광명정토, 영원히 화락한 세계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부대중 또는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내가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나의 본래면목, 우주존재의 본래면목은 천진불天眞佛이라 했습니다. 마땅히 천진불이란 그 말을 꼭 외우셔야 합니다. 천진불이라, 우리 본래면목이 천진불입니다. 아무리 미운자라도 천진불입니다. 천진불임을 믿고서 천진불이 못되게 하는 원수인 어리석은 마음 또는 탐욕심 또는 성내는 마음, 이 마음을 제거해서 영생의 공부에서 염불도 그야말로 부단염불을 간단치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더라도 그지없이 염념불멸念念不滅해서 생각생각에 딴 생각이 못 끼게끔, 그렇게 하염없이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말씀하면 ‘아! 그대 같은 스님들은 할 수가 있지만 우리 재가불자는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재가불자님도 충분히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아내나 자기 남편이나 자기 아들이나 또는 못된 놈이나 말입니다. 지금 먹는 음식이나 바로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아내를 봐도, 아들을 봐도 부처님 말입니다.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다시 인연 따라서 아내의 도리, 남편의 도리, 아버지의 도리들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근본 생각만은 ‘다 부처님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공부해서 꼭 금생에 성불하시기를 바라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지장보살!

나무관세음보살!

                                                                                                  1989년 10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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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 천도법어

 

 

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자연도 우리 인생도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 하나의 진리 이른바 불이법문不二法聞이라, 하나의 진리를 깨달은 분이 이른바 성인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나 공자나 노자나 예수나 마호메트나 그런 성인들은 하나의 진리를 깨달은 분들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인데 하나의 생명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중생이고 범부凡夫인 것입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개인적인 불행이라든가 또는 민족사의 그런 비극이라든가 모두가 다른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의 생명을 모르는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사의 수난 가운데서 그때그때 그 억울하게 산화하신 영혼들, 그러한 영령들의 품은 한은 영령들 개인적인 한인 동시에 우리 민족의 한인 것이고 또는 우리 민족 자체의 무명無明의 소생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 무지 때문에 업을 짓는 개인적인 죄업이 있고 또 공통적으로 우리 인간 자체가 다 같이 짓는 그런 공업共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래가 진리가 둘이 아닌 것인데 둘이라고 생각하고 셋이라고 생각하고 ‘불교만이 옳다’, 또는 ‘기독교만이 옳다’, 또는 ‘노자만이 옳다’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 가운데서는 필연적으로 현대사회의 비극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위신력 또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따라서 이 자리에 나와 계시는 지리산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우리 민족사의 불행과 더불어서 사망하신 영령들이 이 자리에 분명히 계시는 것입니다.

 

영령들이여! 깊이 명심하시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영령들이나 우리 인간이나 모든 생명존재가 그 과정 중에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사람이라 하는 그런 과정에 있는 것이고 또는 영령들은 영령대로 삶의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영령들이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인가? 모든 존재의 본 고향은 천당이고 바로 극락極樂인 것입니다. 표현만 다른 것이지 절대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천당이나 극락이라 하는 것은 영생의 자리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그 인생의 나그네 길에서 또는 영원히 그런 저승에서 헤매다가 필경 돌아가야 할 근본 고향이 바로 천당이고 극락인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특히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영령들이 그러한 여러 가지 업, 또는 공업共業으로 해서 설사 한이 있다 하더라도 한, 이것은 사실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이나 우리 인간이 그때그때 사실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보면 모두가 다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 몸이라 하는 것도 역시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역시 각 원소가 합해서 잠시간 모양을 낸 것이지 실존적으로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이 시간 스쳐지나가는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령들이여! 제 명명대로 못 살다간 그런 한을 절대로 품어서는 안 됩니다. 한을 품는다는 것은 결국 무지에서 옵니다. 자기 몸뚱이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이고 잠시간 인연 따라서 할애된 하나의 허망한 존재에 불과한 것인데 그런 것에 우리가 한을 품고 집착하고 애착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산이나 물이나 공기나 모두가 따로따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도 내 생명과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물도 내 생명과 더불어서 둘이 아닙니다. 우주생명, 우주의 순수한 에너지가 물에 가 있으면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용왕이라 하는 것이고 산에 가 있으면 산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우주의 하나의 생명이 우주의 기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우주의 기가 땅에 가 있으면 지장보살이라 하는 것이고 태양에 가 있으면 관세음보살이라 하는 것이고 별에 가 있으면 묘견보살이라 하는 것이지 따로따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사상, 무슨 주의, 무슨 이데올로기 같은 허상이 아니라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聞 입니다. 진리가 절대로 둘이 아닌, 하나의 법문이란 말입니다.

 

영령들이시여! 모든 한을 없애시고 영령들이 돌아갈 고향인 천당이나 극락세계로 가셔야 영령들이 영생의 행복을 보장 받을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영령들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봉사 하는 것도 영령들이 그 저승이라 하는 방황하는 그런 미혹된 세계를 벗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정성에 사무친 추도사를 해주시고 또는 열화와 같은 기도로 영령들이 보다 빨리 저승길에서 헤매지 않고서 극락세계나 천상에 가도록 까지 기원해 주셨습니다. 대단히 축복스러운 일입니다.

                                                                                                         2001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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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암 천도법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사의不思義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우리 인간 존재가 실존적으로 있다고 생각할 때 마음도 실재합니다. 그와 똑같이 부처님이라는 우리가 숭앙하는 신앙대상도 역시 지금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는 분들은 ‘우리 마음도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실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실존적으로 분명히 있다고 생각할 때 부처님도 분명히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과 부처님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똑같은 생명의 실상實相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 최상의 그런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체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비열하고 가장 위선적인 그것도 역시 우리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잘 쓰면 부처요, 마음 잘 못쓰면 바로 지옥이요, 축생畜生이고, 또는 아수라阿修羅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을 지금 제대로 공부하고 계십니까? 저는 법회 때마다 가끔 인용을 합니다만 그 마하트마간디 같은 성인成人이 기독교를 평할 때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천을 싫어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네들이 예수를 따르지 않으니까 싫어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 불교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부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을 제대로 닮고 있는 것인가? 칠순이 될 때까지 부처님을 의지해서 한 50년 세월동안 지내온 저 같은 사람 역시 ‘부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을 닮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괴무참慙愧無慙합니다. 과거를 생각해 보면 조금씩 애는 썼지만 온전히 부처님을 닮아 보지를 못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궁무진 합니다. 우선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구분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아셔서 소승적인 차원을 떠나서 대승적인 차원으로 우리 마음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소승이고 어떠한 것이 대승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교리체계가 있지만 우선 간단히 한 말씀으로 하면 소승은 부처님을 석가모니부처님으로 한정 짓지만 대승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과거나 현재, 미래 언제나 실존적으로 계시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이른바 법신法身부처님입니다. 소승의 가르침은 법신부처님이란 말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 마음과 부처님은 온전히 한 몫, 한 생명입니다. 내 마음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시간성이나 공간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성이나 공간성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은 내 몸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끝도 갓도 없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생명의 존재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도 자비를 좀 베풀고 남한테 봉사도 좀 하고 자기 가족은 훨씬 더 사랑하고, 자기 이웃에게는 우리가 더 관심을 두고 이런 정도로 연다는 것은 참다운 것은 못됩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이른바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소식을 알아야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 것인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은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도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닮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공덕功德, 무한 공덕이 우리한테도 미치는 것이지 부처님을 닮지 않고서 부처님 공덕이 우리한테 올 수가 없습니다. 법신부처님,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영생불멸하게 나지 않고 죽지 않는 그런 참다운 부처님, 이 부처님은 그냥 영생불멸하는 그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는 만공덕장滿功德藏이라, 헤아릴 수 없는 무수무량의 공덕이 온전히 거기에 다 갖추어 있습니다. 법신부처님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도 역시 그와 같이 한없는 그런 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만 믿으면 그런 마음 공덕功德을 다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마태복음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가 자기 제자들한테 하는 말씀인데 “그대들이 겨자씨만한 신앙심이 있다고 하면 앞에 보이는 산을 보고 저쪽으로 옮겨가라고 하면 틀림없이 옮겨가는 도다.” 이랬단 말입니다. 불자님들 실감이 안 나시지요. 아무리 공부를 한 성자라 하더라도 산을 어떻게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거짓말을 할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법신法身부처님, 불성佛性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마음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몸뚱이라 하는 것은 우리마음의 그런 업식業識 따라서 잠시간 인연으로 합해진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시간성, 공간성이 없는 업식이라 하는 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인 세포가 우리 몸이기 때문에 이것도 사실은 참말로 있다고 보기는 힘든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는데 부처님의 실상實相을 알고 믿어야 우리에게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공덕이 온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실상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믿고 있는 신앙의 대상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합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100% 믿어야 하는 것인데 그 신앙대상의 공덕이 제한된다거나 또는 인격이 온전하지 못하면 참다운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허망虛妄무상無常한 것이 자기생명, 자기 몸뚱이를 다 바친다 하더라도 조금도 회한이 없다 할 정도로 신앙이 되어야 온전한 신앙이 될 것인데, 신앙대상에 대한 그런 공덕을 믿지 못하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많은 영가들을 천도薦度 합니다만, 우리가 잘못하면 부처님 법을 닦는 것을 뒤로 미루고 영가천도에만 매달리는 폐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가들이 모양이 안 보인다 해서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마음이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듯이 영혼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죽어지면 죽어있는 생이라, 이른바 쉬운 말로 하면 저승입니다. 저승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바로 살았으면 지은대로 극락極樂도 가고 또는 십선업十善業을 닦았으면 천상도 가고 또는 오계五戒를 잘 닦았으면 인간으로 다시 인도환생도 되고 하는 것입니다. 오계마저도 제대로 못 닦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자기가 지은대로 분명히 지옥도 가는 것이고 축생畜生도 되는 것이고 또는 아귀餓鬼라 하는 그런 귀신도 되는 것입니다. 현상적인 눈에 보이는 그런 세계만 긍정하는 현대인들은 ‘영가를 천도薦度한다.’ 라고 하면 자칫하면 미신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이것은 미신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시아귀施餓鬼라, ‘베풀 시施’자 아귀는 음식을 구하지만 미처 얻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귀 귀신세계인데, 구하기는 구하지만 얻지를 못하는 그런 고통이 굉장히 크지 않습니까. 이른바 구부득고求不得苦라, 그 구부득고가 우리 중생세계에도 있지만 특히 아귀세계는 더욱 더 치성한 것입니다. 먹고는 싶지만 사람처럼 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귀 목구멍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음식을 넘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애써 구하지만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기 후손들이나 또는 불자님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바치지만 가까스로 냄새만 맡지 먹을 수가 없습니다. 냄새, 그것 역시 부처님법문이 들어가야 이른바 법식法食이라, 비로소 냄새를 맡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귀의 음식이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전쟁에서 죽은 그런 영가들, 또는 돼지 영가, 소 영가, 닭 영가 또는 뱀들의 영가 말입니다. 그런 영가들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계 천변지이天變地異라, 폭풍우가 일어나고 그런 몹쓸 병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도 영가들하고 관계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다 있겠지만 우주의 그런 부조화스런 기류 또는 모든 곤충이나 이른바 병균들도 역시 영가들하고 아주 상당히 깊은 관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영가니까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것이 더 번식이 되더라도 알 길이 없단 말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부처님 법문을 깊이 들으시고 중음계中陰界라 하는 그런 세계를 떠나셔야 합니다. 영가들도 우리 사람의 마음과 똑같이 영가들의 마음도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또는 개나 소나 그런 영가들의 마음도 역시 불심입니다. 우주만유가 불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도리가 불교 술어로 하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법성연기法性緣起라,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란 말입니다. 불심佛心이라 하는 그 한도 끝도 없는 생명의 실체가, 모든 공덕을 갖춘 생명의 실체가 그때그때 자기의 갖추어진 인연 따라서 태양이 되고, 달이 되고, 해가 되고, 인간이 되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란 것은 깊이 들어가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부처님 아니고는 아무 것도 없는 이른바 화엄사상의 화장세계華藏世界라, 화장세계란 특별히 빛나는 어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사는 이렇게 모순으로 차 있고 이렇게 위기일발의 무섭고 어려운 세계 역시 화장세계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눈으로 봐서 제대로 볼 수가 없을 뿐입니다.

 

우리는 복을 짓지 않고 복을 받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복만 지으면, 원인만 지으면 그때는 ‘복불가피福不可彼’라, 복은 피할 수 없이 우리에게 오고야 맙니다. 그런데 우리 행동이 그 반대의 행동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고불가피苦不可彼’라, 인생고를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 인생고를 초래하는 원인인 것인가? 어떠한 것이 우리의 참다운 행복과 아울러서 영생의 행복을 우리한테 보장하는 그런 원인이 될 것인가?’ 이런 것을 아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불자님들 우리 눈에 마음이 안 보여도 분명히 있고 부처님이 안 보여도 부처님이 우주에 충만히 계시듯이 부처님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계가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나 우리 몸에나 또는 공기에나 물에나 어디에나 다 들어 계십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안목이 밝다고 생각할 때는 흙을 보나, 물을 보나, 사물을 보나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입니다. 우리 중생의 업에 가리어서 인간 정도의 업을 짓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한계 있게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밉다’고 해서 꼭 실존적으로 미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영원적인 차원, 그 불성佛性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인데 불성차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자만이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같은 물도 사람이 볼 때는 먹는 물 아닙니까. 거기에 사는 고기가 본 다고 할 때는 고기가 사는 집이란 말입니다. 천상사람들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청정한 유리보배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보실 것인가? 청정한 부처님 안목, 번뇌를 떠나 버린 실상實相을 실상대로 볼 수 있는 부처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존재, 물이나 산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그런 세계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만이 실제 존재하는 실존적인 세계입니다. 또는 그 세계는 이 우주가 형성되기 전에도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는 물질적인 한계가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는 사람의 생사에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이루어지고 또는 중생이 살고 파괴가 되고 또는 텅텅 비어버리는 공겁空劫이 되고 이런 것에도 극락세계라는 참다운 세계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낳지 않고 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른바 무생無生의 세계입니다. 낳지 않는 세계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새삼스럽게 낳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또 그때는 없어질 필요도 없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짤막한데도 그런 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원래 진리란 것은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하지도 않고 덜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염될 것도 없고 오염을 받을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의 가르침을 다 포함해 있습니다. 우리가 금생今生에 부처님 가르침을 믿었다는 것은 얼마나 전생前生에 복을 많이 지었던가 스스로 우리가 반조를 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지금 겪고 있는 이 경제 한파 또는 세계적인 위기상황 또는 무서운 이데올로기 싸움 말입니다. 이러한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인간존재가 바로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바른 가치관, 인생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철학의 부재, 철학의 빈곤이라, 현대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과학만능시대이고 과학으로 해서 우리의 생활이 편리하고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라 하는 것은 형체가 있는 한계, 상대적인 경계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의 근본 본체를 아는 것은 종교뿐입니다. 종교도 부처님 가르침 같은, 아주 궁극적으로 다른 성인들은 부처님처럼 진리당체를 궁극적으로 다 밝히지는 못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하나부터 백까지 모두를 다 훤히 밝게 가르친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그 중음계中陰界라 하는 어두운 세계를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과거 생에 잘못 살아서 원인을 지어서 지금 옥고를 받고 있습니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욕심 때문에 아귀餓鬼라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철학도 못 배우고 과학도 못 배우고 참다운 진리를 못 배웠기 때문에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축생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는 투쟁을 좋아하고 걸핏하면 진심瞋心을 많이 내고 그러한 생활을 한 분들은 틀림없이 아수라阿修羅 세계에서 싸움으로 자기 생명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계시든지 간에 그러한 모든 생명의 근본은 부처님입니다. 지옥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아귀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또는 축생畜生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세계도 근본은 다 부처님입니다. 사람을 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받아서 곧 사형집행이 될 그런 사람들 역시 똑같이 다 본래성품은 부처님입니다. 이런 것을 본래로 다 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사회의 부조화는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관심론觀心論』에서, 『관심론』은 그 전에는 달마達磨스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요즈음은 신수神秀스님의 저작이라 하기도합니다. 달마스님의 말씀이 아닌 신수스님의 말씀이라 해도 모두가 다 진리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약능요심若能了心만덕구비萬德具備”라 제가 풀어서 말씀 드리면 만약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깨닫는다면 만덕萬德이 구비具備라, 만덕을 갖추게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고뇌나 개인적인 그런 몸의 아픔이나 가족적인 그런 갈등이나 우리 민족적인 그런 불행이나 모두가 다 마음을 깨닫는 쪽에 초점을 두고 생활한다고 할 적에는 모두가 다 해소가 됩니다.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 한 점 눈이 녹아내리듯이 해소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우리 생활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어려운 길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이 제일 쉬운 길입니다. 부처님을 애쓰고 찾으려고 몇 십 년 동안 지내온 저 같은 사람도 그때그때 많은 경험도 하고 또는 체험을 해서 실증도 어느 정도는 많이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믿는 것이 제일 쉽고 제일 편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스님 법문에도 ‘안심법문安心法問’이라는 법문이 있어요. 안심법문이라, 부처님법문은 안락법문安樂法問입니다. 참 쉬운 법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란 것은 우주의 법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모두가 다 우주의 법도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의식이 발달된 우리 인간은 우주의 법도대로 잘못 따른단 말입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말도하고 잘못된 행동도 합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고통의 씨앗을 심은 것이니 필연적으로 인생고를 받습니다.

 

우주의 법도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부처님의 계율戒律과 부처님한테다가 마음을 집중시키는 선정禪定말입니다. 또는 ‘우주 자체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느끼는 지혜와 이것이 바로 불교의 정견正見이란 말입니다. 같은 정견도 소승정견과 대승정견의 구분이 있습니다. 소승정견은 그냥 ‘모두가 다 허망虛妄무상無常하다’ ‘이런 저런 것이 인연 따라 낳으니까 이것저것이 허망하고 무상하다’ 그러니까 ‘모두가 다 허망한 공이다’ 이런 정도만 말씀을 했습니다. 허망하고 무상한 것은 사실입니다. 인연 따라 생겨난 인연생의 존재는 모두가 다 허망하고 무상합니다. 실상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내 것이다, 좋다, 궂다’ 하는 생각은 분명히 실상實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은 무상하고 허망하고 결국은 ‘공’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공’이 허망이 아닌 생명의 본체, 이것은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진리’인 동시에 바로 ‘부처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법성法性’이나 ‘주인공’이나 또는 ‘실상’이나 ‘열반’이나 또는 ‘도’나 ‘진리’나 ‘하나님’이나 모두가 다 같은 뜻인데 이런 자리에서는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이것은 인도음인데 ‘광명변조光明邊照’라 번역됩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안 보이듯이 우리 중생은 그 자리가 안 보이는 것이니까, 보이는 것이 다 라고 생각해서 보이는 것 때문에 노예가 된단 말입니다. 불교는 심심미묘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눈이 안 보이는 세계,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긍정하지 않으면 불교가 못 됩니다. 어려우셔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올곧은 정견을 가져야 그래야 부처님한테서 오는 공덕功德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아까 제가 법회 시작하기 전에도 여러분들이 아프고 집안도 잘 안된다고 저한테 호소를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고생이라고 느끼는 것은 사실은 허무한 것입니다.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자취가 없는 것을 우리가 자취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 범부들은 없는 것은 있다고 생각하고 참말로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도리를 그 영가永嘉 현각玄覺스님이 『증도가證道歌』에 여실하게 표현했단 말입니다.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天’이라, 우리 인간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내가 있다고 생각한 이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꿈입니다. 고유한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들, 내 소유인 내 재산,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꿈속의 잠꼬대나 똑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현각스님도 ‘몽리夢裏’, ‘꿈 몽’자, ‘속 리’자,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육취明明六趣’라, 명백히 지옥이고, 아귀고, 축생이고, 인간이고, 아수라고, 천상이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지요.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축생도 있고 또는 천상은 안 보이지만 조금 맑아져서 천안통天眼通을 하면 천상도 보인단 말입니다.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天’이라, 깨달은 뒤에 정말로 우주의 실상實相을 보는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대천無大天’이라, 내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네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하늘에 있는 천체나 달이나 별이나 태양이란 것도 사실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오온五蘊이 화합되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변하고 있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도 세포가 화합되어 변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그 변동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렇게 아셔서 정견正見을 가지셔야 불교를 비로소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견을 가지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고를 떠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의 해탈解脫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냥 재산 좀더 많이 모이고 또는 내 몸이 더 건강한 그런 정도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온전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어지간한 병 같은 것은 사실은 다 물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가 그와 같이 산을 움직일 수가 있다고 정말로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스스로도 신통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몸이 하늘로 솟아오른다고 꼭 믿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위시해서 위대한 도인들이 신통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신통은 외도外道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성공덕佛性功德을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도 훤히 보이고 미래도 훤히 보고 자기 몸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런 무한신통을 온전히 구족원만具足圓滿이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은 존엄스럽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 하찮은 것 때문에 우리 생명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영생으로 비약 할 수 있는 것인데 있지도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낭비를 많이 합니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무아無我의 도리인데 감투인들 어디에 있습니까. 간디 같은 그러한 대 철인, 양심의 표본 같은 그런 분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에 예수를 닮지 않은 크리스천이 좋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한국이나 일본이나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을 닮지 않은 우리 불교인들이 좋게 안 보이겠지요. 바로 살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떠나서 비켜서면 전복되고 말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우주의 도리를 못 따라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불행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가 위기상황을 겪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지어서 우리가 받습니다. 남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남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이런 것도 모두 다 허망한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나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고기 먹지 마십시오. 저번에 어디 가서 보니까 생명나누기 운동을 하는 분들도 역시 고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생명나누기 운동을 하면서도 고기를 먹는단 말입니다. 얼마나 모순이 되겠습니까. 생명나누기 운동, 그냥 ‘산 생명만 조금 보살핀다.’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또 ‘사람한테 우리가 장기를 보시한다.’ 그것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다 똑같은 생명입니다. 근본은 다 부처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과거 전생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르는 개가 과거 전생 어느 때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고기를 우리가 먹는단 말입니다. 죽이기는 남이 죽이고 먹기는 자기가 먹고 얼마나 용렬한 짓입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을 온전히 바치고도 조금도 회한이 없는 그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과거 전생담을 보면 부처님께서 살타 왕자 때 새끼를 아홉이나 낳고 주려서 죽게 된 범한테 조금도 아낌없이 자기 몸을 바쳤단 말입니다. 그 덕에 살타 왕자는 12겁이나, 무려 한 겁도 무량세월인데 12겁이나 빨리 성불成佛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의 몸뚱이를 부처님 법을 위해서 몽땅 바친다고 생각할 때는 그와 같이 몇 겁을 빨리 성불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 아낀다고 그래서 더 건강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기를 먹어서 절대로 살로 안갑니다. 피로 안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려서 돼지 죽이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돼지를 죽일 때 동네가 떠나가도록 까지 아주 원망스러운 소리를 냅니다. 거기에 진심瞋心이나 원망이 얼마나 사무치겠습니까. 그 고기에는 그 원망과 진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돼지는 사람보다 훨씬 더 진화가 더딘 것입니다. 그런 고기가 보다 더 진화된 우리 세포에 들어온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세포가 좋겠습니까. 고기 먹고 싶은 하찮은 버릇은 버리셔야 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주의 궤도에 따라야 합니다. 우주의 도리를 안 따르는 그때는 우주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때는 전복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부처님 법은 영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그러한 법입니다. 영가들이 지금 계시는 중음계中陰界는 괴로운 세계입니다. 구해도 구하지 못하고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세계입니다. 또는 고통이 한도 끝도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의 고통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부처님 말씀을 깊이 새기십시오. 영가들의 본래 생명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 부처님자리를 굳건히 믿고서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신앙이 됩니다. 의심 없이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부처님 공덕功德이 온전히 자기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바른 견해를 가지고서 바른 행동을 취하고서 꼭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는 영생해탈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광명의 세계입니다. 행복만이 있는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우리가 떠나온 고향입니다. 우리 중생은 실향민입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계율戒律은 우리 인간이 성불하기 쉬운 하나의 법도입니다. 그 계율을 떠나면 되겠습니까? 자기가 자기의 행복을 훼손시키면 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 선지식들 말씀을 신수봉행해서 꼭 금생에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의 도리, 누구한테 꿀 것도 없는 부처님 가르침을 깨달아서 영생의 행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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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명사 천도법어

 

궂은 날씨에 오시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 기상 이변 때문에 여러 가지로 우리가 고난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 인생살이 한 세상 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이렇게 일기마저도 불순하니까 더욱 더 고난이 심각해집니다. 사실은 이 일기라 하는 것도 우순풍조雨順風調라, 비도 적당히 오고 바람도 순탄하면 좋을 것인데 이렇게 되지 않아서 우리가 그때그때 살아가는데 장애를 많이 받습니다.

 

사실은 이 바람이나 비나 이런 것도 우리 인간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오존층 파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존층은 태양과 우리 지구와의 사이에 있는 성층권成層圈도 미처 못 가서 하나의 탄산가스라던가 그런 가스로 해서 구성된 구름층입니다. 그런 구름층이 있으니까 태양광선이 지구까지 온다 하더라도 대체로 우리 인간에게 유해한 그런 광선은 다 흡수해 버리고 가리어서 인간에게 유익한 광선만이 오는 것이니까 우리가 이 태양광선을 제대로 받고 삽니다만 만일 오존층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생활에 유해한 그런 광선이 오기 때문에 우리가 지대한 장애를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업사회라 하는 사회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에너지를 소모하다 보면 이른바 이산화탄소 그 탄산가스라 하는 것이 생성되어 차근차근 더 쌓이고 농도가 짙어지는 것 때문에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오존층을 파괴한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태양으로부터 우리한테 무익한 해로운 광선이 올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바람이나 그런 것도 역시 나쁜 영향을 받아 순탄하게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또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인간의 마음도 이 기상관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남을 지독하게 미워한다고 생각할 때는 미워하는 그 마음이 우리가 사는 이 주변 공기를 오염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또 나쁜 쪽으로 이산화탄소보다도 더 독한 쪽으로 우리 공기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또는 그와 동시에 우리가 욕심을 많이 부리는 그런 탐욕심도 역시 우리 분위기, 우리가 사는 공간 세계를 오염시킨단 말입니다. 그런 것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비가 더 많이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야말로 태풍도 불고 이런 것 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맞이하는 여러 가지 그런 자연적인 환경 모두가 다 우리가 스스로 지어서 우리가 도로 되받는단 말입니다. 이심전심以心轉心으로 우리가 남을 지독하게 미워하면 또 그 사람도 우릴 미워하듯이 그런 사람 사람끼리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연과 우리와의 관계도 밀접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함부로 하면 그만치 우리가 더 보복을 받는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오늘 이렇게 영혼 천도薦度를 하시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영혼세계를 잘 모르고 천도 하는 것과 영혼세계에 관해서 그 윤곽이나마 상식적으로 알고 하는 것과는 아주 차이가 많습니다. 이렇게 천도하면서도 영혼이 지금 눈에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관욕灌浴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례적으로 하는 것이지 영혼이 정말 있을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고 우리도 이렇게 천도를 하는 것 아닙니까. 영혼이라 하는 것은 삶의 형태만 우리 인간과 차이가 있는 것이지 생명적인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뚱이가 천만 번 바뀌든, 바뀌어지지않든 영혼자체는 절대로 소멸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실은 우리 영혼은 그대로 영생永生하는 것입니다. 본래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는 도리를 분명히 알면 그때는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하는 그런 법문하고 걸맞은 말씀이 되겠지요. 따라서 죽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금생에 사람이라 하는 인간의 세간적인 인연이 다하면 그때는 죽는단 말입니다. 기계도 쓰다보면 차근차근 노화되어 가지고서 못쓰게 된단 말입니다. 못쓰게 되면 응당 바꿔야 하는 것인데 이 몸뚱이에 의지해 살다 보니까 이제 바꾼다고 생각할 때는 바꾸기가 싫단 말입니다.

 

사람 고생 가운데 죽음이라 하는 고생이 제일 심각한 고생 아닙니까? ‘자기가 죽는다.’ 그 금쪽 같이 아끼는 자기가 죽는단 말입니다. 그 자기 몸을 아끼기 위해서 반지 끼고 별별 옷을 다 입고 말입니다. 어떤 때는 귀에 구멍 뚫어 가지고 귀걸이를 다 걸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 봐야 결국 죽고 만단 말입니다. 자기 몸도 그렇고 자기 아내 몸도 그렇고 자기 남편 몸도 그렇고 자기 아들이나 딸 모두가 결국은 죽고 맙니다. 죽고 말지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허망한 몸뚱이, 바로 전생의 업장 따라서 잘나고 못나게 생긴, 그 몸뚱이만 사라지는 것이지 생명자체는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가령 지금 교통사고를 만나 가지고서 당장에 머리가 깨지고 사지가 찢어지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자체는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자기 생명자체는 자기 몸뚱이가 지금 머리가 깨지고 사지가 찢어지는 그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지, 생명의 본 고향이 어디인지를 안 생명들은 그냥 해매임 없이 갑니다만 보통은 갈 곳을 모릅니다.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저승에서 평생 또 오랫동안 해맬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죽은 다음에는 굉장히 해매는 것입니다. 저승에는 스승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인간 세상이야 스승도 있고 책도 있고 그러니까 배우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그러지만 저승은 그믐 같은 껌껌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길을 모르면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네 동생이나 우리네 아들이나 또 누구네 남편이나 그런 분들이 갑자기 죽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영혼이 갈 곳으로 쉽게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괴로우니까 괴로운 걸 면해줘야 할 것인데, 괴로움을 면해주지 못하면 첫째는 그 영혼이 한없이 심각한 고통을 받는 것이고 동시에 괴로운 영혼들, 방황하는 영혼들이 산사람 근처에서 보통은 자기 가족들 근처에서 오락가락 해매는 것입니다. 해매다 보면 그냥 더러는 스치기도 하고 만지기도 한단 말입니다. 산사람 끼리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면 좋겠지만 죽은 영혼이 우리 몸에 닿아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산사람은 굉장히 시달림을 받습니다. 분명히 아파서 병원에 가서 진찰 해봐도 무슨 병명이 안 나온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프기는 분명히 아프고 그런 때는 틀림없이 영혼이 스쳐가고, 영혼이 만지고 그래서 아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리 형제간이 죽고 이런 경우에는 의무적으로 부처님 법으로 해서 꼭 길을 알려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집안에 영혼들은 천도薦度를 많이 해주고 사람도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천상도 갔겠는데, 그랬으면 그만인 것이지 자주 되풀이 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건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가령 우리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지금 천도도 하고 또 오랜 세월이 되가지고서 인도환생이라, 다른 사람 세상에 태어났다고 합시다. 이러는 경우는 우리가 소박한 생각에서는 ‘태어나시면 그만인 것이지 우리가 뒤에 사람들이 무슨 불공佛供을 모셔드리고 하는 것이 무슨 보람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만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느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수명이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고 재수도 더 많고 적고 병치레도 많이 하고 않고 그러겠지요. 그러는 경우도 우리 후손들이 불공도 해주고 또는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또는 방생도 하고 하여튼 어떻든 간에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생명이라 하는 것은 신비하기 때문에 우리 자손이 좋은 일을 하면 틀림없이 인간 세상에 자기 조상이나 형제가 있던 또는 저 천상에 가 있던 어느 세상에 있던지 간에 틀림없이 거기 가 있는 그 분들이 그만치 우리가 공을 들인 만치 행복을 받는 것입니다. 가피加被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녀들이 지금 미국이나 영국이나 있다 합시다. 그렇게 있다고 생각할 적에 한국에서 그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모시면 가피가 있으니까, 덕이 있으니까 기도를 모시고 하는 것이지 미국이나 어디나 그렇게 멀게 있는 자기 자식들이나 친척들이 아무 도움도 못 받는데 여기서 우리가 한국에서 기도를 모시고 공을 빌고 하겠습니까?

 

염력念力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염력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광파光波도 초속이 30만 킬로미터㎞라, 뻔쩍하는 광명하나에도 그 속도가 일초에 30만 킬로미터㎞입니다.

 

모든 것을 다 만드는 것이 마음입니다. 어떠한 존재나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마음, 네 마음도 둘이 아니라 원래 마음이라는 것은 우주에 가득 찬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입니다.

부처님 성품이라, 법성法性 ‧ 불성佛性 다 같은 뜻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은 우주의 어느 곳에나 언제나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또한 낳고 죽음도 없단 말입니다. 영생불멸하고 상주부동한 그런 생명체가 우주에는 항상 있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지구가 이루어지고 달이 이루어지고 또는 사람이 태어나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뭣 때문에 하는 것인가? 우리 중생들은 지금 겉만 보고 삽니다. 중생은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겉만 보고 삽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 우주의 진여불성이라 하는 부처님 기운에서 이루어진 것이 우주의 모든 만물이란 말입니다. 내 몸이나 네 몸이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산이나 냇이나 하늘에 있는 별이나 모두가 다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순수생명 위에서 인연법因緣法 따라서 이루어지고 또는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고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일은 생명의 본체인 생명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 자리 그 자릴 깨닫는 것이란 말입니다. 기독교나 도교나 또는 유교나 다 그런 것입니다.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잠시간 있다가 스러지는 그러한 모양인 상을 떠나서 그 모든 상의 근본자리인 부처님 자리, 불성자리, 참된 진리자리, 그 자리를 깨닫는 것이 모든 철인이나 성자의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가르침 가운데서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철저하고 가장 투철하고 완벽하고 가장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모든 철인哲人, 성인成人들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하나의 방향으로 허망 무상한 상을 떠나서 본 성품으로 가는 것인데 다른 성인들은 확실히 잘 모르니까 어렴풋이 말도 하고, 또는 공부를 조금 더 한 분들은 더 확실히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조금도 흠절이 없이 원만 무결하게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생명의 근본자리를 밝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치 더 훌륭하고 위대하고, 그 자리에서 멀어지면 멀어진 만치 더 어리석고 어둡고 불행하단 말입니다. 참다운 행복은 그 자리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밝혀야 자기 생명이 무엇인가도 알고 또는 참다운 행복이 있습니다. 자기 생명의 근본도 모르고 고향도 모르고 집도 모르면서 어떻게 자기가 있겠습니까. 참다운 자유나 평등이나 모두가 다 생명의 근본을 밝히는 자리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자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중생들이 애지중지 하는 자기 몸뚱이, 자기 가족 몸뚱이 그것 때문에 탐욕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한단 말입니다. 가장 훌륭한 지혜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지혜라 하는 것은 방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모든 상을 떠나서 천지만유가 본래로 하나다. 본래로 하나의 부처님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라, 반야般若의 지혜란 말입니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다 그런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의 업에 가리운 흐릿한 그런 마음으로 보는 것이니까 잘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근본은 안 보이고서 그냥 현상만 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 못 보는 그런 이른바 가상假相 말입니다. 그게 바로 망상입니다. ‘망상을 얼마만치 많이 떠나는가.’ 이것에 따라서 우리 인생의 가치가 규정됩니다. 양심적인 사람들은 그런 망상, 탐욕심, 분노의 마음 그런 마음을 더 많이 떠날 것이고 흐리멍덩한 사람들은 자기 몸뚱이에 평생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자기 가족 몸뚱이의 평생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 가상을 떠난 그 자리, 실상의 자리를 밝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원 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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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천도법어

 

 

 

오늘 천도를 받으시는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하나님의 믿음과 부처님의 믿음 아래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 모양이 있고 또는 이름이 있는 상대유한적인 세계에서는 모양도 믿음도 차이가 있습니다만 모양과 믿음을 떠난 영원적인 세계에서는 모양도 믿음도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부처님이고 부처님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모든 진리는 영원적인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 부처님입니다. 영가들 가운데는 기독교를 신뢰하는 분도 계시고 부처님을 신뢰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는 종교를 믿지 않는 무종교인도 계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한결같이 우주생명을 근거로 하는 이른바 우주종교 세계종교 이런 차원에서는 모든 종교가 다 하나의 진리로 귀의됩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생차원에서 볼 때는 분명히 죽음도 있고 이별도 있고 그러한 차이가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참다운 진리 세계에서는 죽음은 절대로 없습니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우리 몸뚱이 형상만 있고 인연 따라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는 과거이래에 한 번도 죽어본 적도 없고 또는 종교를 통해서 미래에 영구히 다시 죽지 않습니다. 영생불멸이라는 것은 우리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지금 저승에 계십니다. 길목에 계십니다. 저승이라 하는 것은 오랫동안 머무를 장소가 아닙니다. 영생의 안락安樂을 약속하는 그런 천당세계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잠시간 머물다 가는 어둡고 망망한 세계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비록 현상계에서는 우리 몸뚱이라는 그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모양이 아닌 순수생명 자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생명들은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와 남의 차별이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참다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몸뚱이만을 자기로 생각하고 또는 가상가명假相假名에 지나지 않는 그런 모든 분별시비를 참다운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형상을 떠나서 보는 형이상학적인 근원적인, 궁극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봐서는 일체생명이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중생이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잘못 살아서 지옥도 가고 또는 조금 잘 살아서 인간도 되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옥이나 인간세상이 영원적인 참다운 세계가 아닙니다. 잠시간 지나가는 하나의 길목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방편方便을 떠나서 진실로 말하면 우리 인간존재의 그 각자 마음이 모두가 바로 하나님이요 부처님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분명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바로 느끼지 못하면 우리가 잘못 살아서 끝없이 지옥도 가고 인간존재로 나서 무서운 생로병사 만나고 아프고 늙고 또는 죽는 그러한 한계상황 속에서 인생고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슬퍼할 것도 없고 또는 불안하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인간이 무명無明에 가리어서 분별하고 그러는 것이지 생명자체는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원래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런 영생불멸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차원에서는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이요 부처님입니다. 여러 가지 각 종교에서 방편으로 말씀을 하시지만 어느 성인들이나 말씀의 근원적인 뜻은 다 똑 같습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냥 영가들이 잘못 알고서 무명에 사로잡히면 갈등 없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생로병사를 맛봐야 되는 거지요. 또는 영생의 윤회과정이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잘못 살아서 지옥도 가는 것이고 또 돼지나 소 같이 살아서 분명히 축생畜生으로 전락이 되는 것이고 조금 낫게 살아서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자체도 역시 우리가 영원히 그리워하고 추구할 그런 곳은 못됩니다. 인간도 역시 제행무상諸行無常한 우주의 법칙 따라서 잠시 살다가 가는 하나의 길목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 장차 돌아가실 고향은 천당이요, 극락세계입니다. 천당이나 극락세계는 각 종교의 차별도 없습니다. 오직 그 하나의 진리, 우주적인 진리만을 위하기 때문에 정말 진정한 천당세계 또는 극락세계로 가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영가들은 아직은 중생세계인지라 자기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몸뚱이는 지금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의 몸뚱이도 뜬구름 같이 다 허망한 것입니다. 하물며 그 몸뚱이를 인연 따라서 잠시 버리고서 지금 저승에 계신 영가의 몸뚱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고, 영가가 먹었던 음식이라던가, 또는 영가가 사용했던 재산이라던가, 그런 것도 모두가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 본래적으로 영가의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뚱이도 자기 것이 아닌데 인간세상에서 잠시간 만났던 자기 권속, 자기의 지위 또는 자기의 재산, 이런 것이 참다운 자기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마음을 고요히 해서 깊이 명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우리 생명은 어느 때 언제나 우주에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부처님과 더불어 영가들의 마음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는 우리는 어디에 있으나 다 안락하고 행복스럽고 평온을 느끼게 됩니다만 우리 중생들이 꼭 개별적인 자기 몸뚱이에 국한된 그런 인연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불안스럽고 막막하고 또는 인생의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 차별하는 그런 마음을 버리셔야 됩니다. 그와 동시에 영가들이 지금 계시는 저승세계는 정말로 불안스럽고 잠시간 거쳐 가지 않을 수 없는 어둠의 세계인 것이지 우리가 안식할 그런 세계는 절대로 못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느끼시고 과거에 자기가 쓰던 몸에 대한 애착도 버리시고 또는 사랑하는 권속도 극락세계나 천당 가서 영원으로 만나는 그런 세계에서 만나야 참답게 만나는 것이므로 인간세상에서 만나는 그런 인연들에 대해서 집착을 뿌리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하나님, 부처님 또는 모든 종교들의 근원적인 것은 하나의 자리인 것이고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그 현세에 잘못된 삶을 산 사람들의 마음이라든가 이런 마음도 역시 현세에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근원적인데 있어서는 다 똑같이 하나님이요 부처님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분명히 깨달으셔서 영원히 생명이 없는 그런 세계에 가서 태어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영가천도를 마련해 주신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과 화엄사, 오늘 천도재의 모든 경비를 맡아주신 임창욱 거사님, 박영규 거사님의 공덕에 대해서도 영가를 대신해서 산승의 입장에서 심심한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정말로 유가족 되시는 분들은 가슴이 오죽이나 슬프시겠습니까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에서 만나는 것은 잠시간 만나는 것입니다. 어차피 언젠가 헤어져도 헤어질 것을 인연이 도래해서 금생今生에 비참하게 이별을 하셨다 하더라도 또 영원히 만나는 천당이나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만나는 그런 인연으로 다시 그렇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우선 영가들이 방황하는 저승을 떠나서 극락세계나 천상에 편히 계셔야 할 것이고 또는 남아있는 분들이 정말로 차별이 없는 종교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꾸만 차별을 하니까 인간세상에서 모순이 생기고 서로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본래 없고 모든 생명이 하나의 진리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도 똑같이 하나님으로 보고 부처님같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간세상의 모순이나 갈등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조금도 주저마시고 정말로 환희심을 내십시오. 영가들은 지금 아무 손해가 없습니다. 생명자체가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통해서 죽지 않고 영생을 하는 것이고 지금 행복만이 약속된 천당 극락세계에 영가들은 분명히 가시는 것입니다. 사람 몸이 있으면 그냥 들어 갈 수가 없으나 영가들은 지금 사람 몸이 아닙니다. 사람 몸이 아닌 영가 몸이기 때문에 한 생각 바로 하면 극락세계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지금 사람 몸이 아니어서 그런 총명한 정도가 수승한 것입니다. 한 생각 바꾸셔야 합니다. 한 생각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한 생각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자기의 본래 생명이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사실은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생각은 다 방편적인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우리 생명의 본고향인 천당이나 극락세계에 가셔서 영원의 행복을 느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오늘 이 법회를 마련한 모든 인연들에 대해서 영가를 대신해서 다시금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나무 하나님!

나무아미타불!

나무 유명세계 지장보살마하살!

마하반야바라밀!

 

                                                                                                                  2001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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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타회 천도법어

 

현시대에 있어서 가장 결핍된 분야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철학의 빈곤입니다. 철학이라 하는 것은 순수하게 인과율因果律을 따져 들어가서 ‘가장 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내 생명의 근본뿌리는 무엇인가? 우주의 근본도리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밝혀 아는 것이 철학이란 말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근본뿌리는 모르고서 그냥 겉만 본단 말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세상은 갈등이나 반목이나 불행이 항상 연속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경전에도 “상을 떠나지 못하고 사는 생활은 괴로움이요 또는 가시의 종기”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상만 보고 삽니다. 현상적인 상에만 구속 되어서 사는 생활, 이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괴로움입니다. 천지개고天地皆苦라, 천지가 다 괴로움뿐이란 말입니다. 낳고 죽고 병들고 다 괴로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 중생이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다른 묘방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중생이 잘못 본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상을 떠나는 것은 어떻게 떠나는 것입니까? 우선 자기 존재를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결국은 자기 존재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인데 또는 이 공기가 아니면 내가 살 수 없는 것이고 물이 아니면 살 수 없고 흙이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와 같이 종종무진으로 이렇게 얽히고 저렇게 얽히고 우리 생명이 이와 같이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리 가운데서 한 고리만 떼어버려도 안 됩니다.

 

그러기에 진리라는 것은 우주 가운데 티끌 하나만 없어도 진리가 못 된다 말입니다. ‘나쁜 놈 저놈 때문에 우리가 불행하다. 저놈을 그냥 지구상에서 온전히 소멸을 시켜버려야 되겠다.’ 이래서 우리가 이제 사형선고를 내려 가지고 사형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소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으면 원한을 품은대로 어디 가서 태어난단 말입니다. 생명자체는 영원불멸한 것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생불멸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우주가 모두 다 개별적이 아닌,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현대에 있어서 가장 부족한 것은 ‘무슨 지식이 부족하다. 또는 무슨 재산이 부족하다.’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그 궁극적인 철학, ‘내 생명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우주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하는 철학의 빈곤이란 말입니다. 우리 사회나 가정이나 또 학교나 대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투철하게 생명의 본질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무슨 도덕적인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때는 자기 가장 가까운 인연인 자기 부모한테 함부로 하겠습니까. 형제간에 함부로 하겠습니까.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우리가 생각할 때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만 생각한 사람들은 ‘영가 따위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한번 죽어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자기 스스로를 생각할 때는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내 생명이 어딘가에는 남아있겠지.’하고 기대를 갖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 생명이 본래로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마음, 석가모니 마음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보통은 ‘나는 그렇게 정직하게 살지도 않고 그렁저렁 살았기 때문에 내 마음은 석가모니 마음과 다르지 않은가.’ 이렇게 자기를 비하하기가 쉽지만 우리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지금 현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우리 마음은 순수하고 정다웁고 또는 무한의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나쁜 버릇 때문에 가리어서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지 실상實相의 상태에서는 똑같습니다.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우수한 특징입니다. ‘나는 잘못 살았으니까 내 마음은 그야말로 참 못된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이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모양이 없는 것은 오염시킬래야 오염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나쁜 버릇 때문에 옹고집을 내가지고서 자기 스스로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할 때에 돈오頓悟라, 문득 깨닫는 것 아닙니까. 돈오라, 나쁜 짓도 많이 하고 때 묻은 그런 마음이라고 하면 문득 깨달을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쁜 짓이라는 것도 역시 흔적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모양이라 하는 불교말로는 상이라, 모양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연구를 하십시오. 깊이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모양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잘못 하시면 우리 생활도 역시 깊은 생활이 못됩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같이 여법한 생활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모양, 이것이 본래로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모양이 있지가 않은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자기 정신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본래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 모양이 어째서 있지가 않은 것입니까? 천지우주가 모양 때문에 서로 ‘좋다, 궂다, 싸우고 죽이고’ 하는 것인데 성자들의 그 맑은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백백히 모양은 없는 것입니다. 모양이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승려들이 우리 중생더러 욕심을 내지 않기 위해서 모양이 있는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모양이 없는 것입니까? 아까 인연법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느 것이나 인연 따라서 잠시간 가상假相을 낸단 말입니다.『반야심경』에 있는 법문 아닙니까. 우리 몸뚱이나 우리 몸은 가화합假和合이란 말입니다. 법이 가짜로 임시간 이렇게 모여 있단 말입니다. 오온가합五蘊假合이라, 오온五蘊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반야심경』 해설을 보셨지요. 오온 이것은 물질을 구성한 색인 지地 ‧水 ‧火 ‧ 이라, 물질을 구성한 지 풍과 또는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또는 우리가 응용하고 우리가 분별하고 말입니다. 수水 ‧ 이란 말입니다. 지 풍인 물질과 또는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응용하고 분별 시비하는 그 마음이 모인 것이 내 마음과 몸이란 말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내 몸이나 마음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다 아시지 않습니까. 현대식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것으로 우리 몸뚱이를 구성해 있습니다. 그런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고유하게 있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에너지 기운이 어떻게 진동하는가?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 그것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각 원소가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분석하고 분석해서 더 분석할 수 없는 작은 알갱이가 전자, 중성자, 양성자 그런 것 아닙니까. 전자 그것이 본래로 고유한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정기가, 우주의 기운이 어떻게 지금 움직이고 있는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우주의 정기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그것 따라서 전자라 이름 붙이고 양자라 이름 붙인단 말입니다. 마이너스 기운을 내면 전자고 플러스 기운을 내면 양자란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 모든 물질의 구성은 가장 작은 알맹이가 결국은 따지고 보면 결국 우주정기, 하나의 에너지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에너지란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란 것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있기 때문에 물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에너지는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가짜 상을 낸단 말입니다. 가짜 모양을 낸 것입니다. 그림자 같이 말입니다.

 

항상 말씀드립니다만 이 ‘다 비었다.’는 ‘모양이 본래 없다.’는 소식을 우리가 알기가 어려워서 그때그때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 모양이 분명히 있는데 부처님은 ‘없다’ 했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모양이 없다’는 것을 알아들어야 그래야 비로소 소승을 떠나서 대승이 됩니다. 그걸 모르면 『반야심경』『금강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모르면 그때는 참다운 불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각할 때는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지만물 각 산소, 수소, 철이요, 금이요, 다이아몬드가 있지만 성자들은 근본바탕에서 보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근본뿌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비어 있단 말입니다. 아무리 어려우셔도 이 도리는 꼭 아셔야 됩니다.

그것을 모르면 자기 상을 못 떠나고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자기 몸을 구성한 것이나 우리 마음을 구성한 것이나 오온법五蘊法이 다 비었다고 깨달아야 비로소 인생고를 떠난단 말입니다. 우리 정신이나 우리 몸뚱이나 일체 물질이 비었다는 소식을 모르면 그때는 인생고를 못 떠납니다.

 

불교는 인생고를 떠나는 것입니다. 슬기롭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불교란 말입니다. 무엇이 슬기입니까? 참다운 지혜라는 것은 부처님 지혜, 제법諸法이 공한 도리, 제법이 공한 도리를 모르니까 우리 승가나 속가나 부질없이 분별하고 싸운단 말입니다. 다 비었다는 소식을 알아야 몸도 시원하고 가뿐합니다. 정말로 우리 번뇌의 뿌리가 다 뽑혀서 정말로 확실하게 비었다고 확신이 생기면 우리 몸이 하늘로 뜨는 것입니다. 본래로 빈 것이니 모여서 금이 되고 몸뚱이 되고 했거니 본래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에너지가 무슨 무게가 있습니까. 무게가 없는 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운동함으로 해서 가상假相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가상을 ‘참말로 있다.’고 생각한데서 마음도 무거워지고 몸도 무거워지고 한단 말입니다. 남을 지독하니 미워할 때 우리 몸도 훨씬 무겁습니다. 무게로 재서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 기운이 무겁습니다.

 

정말로 예수의 기적이라든가, 석가모니 삼명육통三命六通 그런 것이 거짓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보다 더 깊은 신앙을 주기위해서 그런 기적을 말하고 부처님 신통을 말했다.’ 이렇게 보통 봅니다. 우리 스님네도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신통神通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함경』은 부처님 육성 같은 초기 경전인데, 아함경 수십 군데에 ‘삼명육통’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하면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간성, 내 마음 자리, 내 마음의 본바탕인 불성佛性자리를 분명히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내 마음 가운데 모든 행복과 모든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밖에서 안 구해도 다 들어있습니다.

 

성인들은 그 자리를 깨달아서 그 자리에 자기 마음이 머물러 있으니까 다른 헛된 짓을 않습니다. 예수가 큰 교회당을 짓고 설법했습니까. 갈릴리 해안에서 그 구차한 사람들과 그 같이 모여 가지고서 베드로나 요한이나 모두가 다 어부 입니다. 이리 저리 다니면서 설법했단 말입니다. 석가모니도 집을 나간 뒤에 팔십 노인이 어디 집에 들어가 돌아갔겠습니까. 나무 밑에서 도를 통하고 동시에 나무 밑에서 가셨단 말입니다. 가장 존귀한 우리 교조가 나무 밑에서 도를 깨닫고 한데서 자고 돌아가실 때도 한데서 낙엽을 깔고 다 떨어진 누더기 걸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절 가지고 싸우겠습니까. 뭘 가지고 싸우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지금은 본질적으로 문제를 생각할 때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살면 절대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병은 가벼운 병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무명無明병이라, 무지無知병입니다. 밝지 못한 병입니다. 어떻게 밝지 않는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그와 같이 난행고행을 해가지고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우주의 실상實相을 그대로 다 깨닫고서 우리한테 말씀해 주셨건만 우리 중생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꼭 쥐꼬리만 한 자기 범부소견 이른바 관견管見이라, 바늘구멍으로 하늘을 보면 다 보이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지금 동굴에 갇힌 어두운 안목으로 삽니다. ‘나요 너요 좋다 궂다’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어두운 동굴에서 어두운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흐리멍덩한 눈으로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이 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절대로 다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다 우리 인간을 마음 편하고 번뇌를 다 해탈하고 참다운 행복으로 인도한단 말입니다.

 

을 쭉쭉 외운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공부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런 상을 떠나면 성자고, 상이 있으면 범부凡夫란 말입니다. 상을 두고서 행복을 구하면 연목구어緣木求魚라, 나무에 올라가서 고기를 구한단 말입니다.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떠나지 않으면 자기 마음의 평화도 없고 지상의 참다운 평화나 어떠한 안락安樂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경전에도 우리가 상을 떠나지 않고서 진리를 구하려고 할 때는 증사작반蒸沙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한단 말입니다. 모래를 삶으면 밥이 되겠습니까. 우리 중생은 그런 모양입니다. 감투를 구하고 황금을 구하고 욕심으로 행복을 구합니다. 모양만 갖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모래를 삶아서 밥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맨날 노력해도 안 됩니다. 유구한 역사가 다 증명하지 않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정말 깊이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한 공식입니다. 한 치도 오류가 없습니다. 상을 떠나면 이것은 참다운 행복과 성자의 길로, 해탈의 길로 가는 것이고 상을 못 떠나면 범부로서 항상 부딪치고 남과 갈등되고 반목되고 합니다. 우리 범부가 어떻게 상을 떠날 것인가? 우리 범부는 상 가운데 사는데 어떻게 상을 떠날 것인가? 그렇게 절대로 낙담을 말으십시오.

 

우리한테는 본래로 불성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하에서 도를 이루셨습니다. 석가모니 당신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산천초목이나 중생이 모두가 다 부처란 말입니다. 요새 지존파 같은 나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석가모니가 보면 어떻게 볼 것인가? 그 나쁜 사람도 역시 겉만 그런 것이지 성자가 본 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뿌리를 못 봅니다. 그 뿌리를 보지 못하니까 상만 내세운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뿌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나쁜 사람이다 해서 사형선고를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실은 불성佛性을 말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적어도 상을 못 떠나는 우리 중생들은 다 공범자입니다. 허물이 더 많고 적고 차이뿐인 것이지 성자가 아닌 한에는 모두가 다 공범자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욕심도 내고 더러는 음욕淫慾도 내고 말입니다.

 

우리 병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골수에 사무쳐있는 무명無明병입니다. ‘남한테 조금 베푼다, 조금 참는다.’ 그런 걸로 해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도덕이 부재不在라, 도덕성은 지금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왜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인가? 인간성을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지키지 말라고 해도 자동적으로 다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어느 누구한테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자연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라 때 무상無相대사는 중국 사천성에 들어가서 그 당시에는 청나라인데 아주 험준한데 들어가서 어떻게 음식을 얻을 수 없단 말입니다. 산중에서 황토를 먹고 살았습니다. 황토에도 영양이 있습니다. 흙도 영양이 있습니다. 공기도 영양이 있습니다. 하물며 물 같은 액체가 영양이 없겠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꼭 무슨 단백질 얼마를 먹고 칼로리 얼마를 섭취하고 그래야만이 건강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인간의 물질관을 고쳐야 됩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선진국으로 가고자해서 발돋움을 합니다. 그러나 너무 먹거리 때문에 힘을 굉장히 낭비 합니다. 지금 미국 같은 곳도 관광지에 가서 보면 음식점이 통 눈에 안 보입니다. 관광지에서 나와서 다른 곳에는 있겠지만 관광지에서는 음식점이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조용하게 그렇게 관광만 즐기고 감상한단 말입니다. 한국 관광지 가면 횟집이고 갈비집이고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로 우리는 우리 몸뚱이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질로 해야 된다고 생각할 때는 행복은 절대로 얻을 수가 없고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제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참선을 해서 우리 마음을 맑히고자 해도 우리 몸뚱이가 맑혀져야지 몸뚱이는 마약도 하고 또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함부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몸뚱이가 정화가 안 됩니다. 마땅히 부처님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매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범부심으로 해서 함부로 모양에 취해서, 모양에 노예가 되어서 살던 것을 돌이켜서 회광반조回光反照라, 다시 속된 흐름을 역류해서 영생해탈의 그런 청정한 흐름에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안에는 약간 무리가 되겠지요. 고기 먹던 사람이 안 먹으면 그것도 약간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뿐입니다. 단식을 안 해본 사람들은 단식을 일주일이나 이주일이나 한 뒤에 그때 소생되는 그 무서운 힘을 느끼지를 잘 못하실 것입니다. ‘생명은 얼마나 먹어야 된다. 칼로리를 얼마나 먹어야 된다.’ 그런 공식만 생각한 사람들은 단식을 일주일이나 이주일이나 한 뒤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솟아나오는 힘을 느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해를 못합니다.

 

이 ‘나’라는 것의 생명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우리 마음의 생명위에 상응되어 이루는 하나의 거품에 불과합니다. 거품 그것 때문에 우리가 너무나 힘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미국 사람들도 보면 5분의 3이 비만 때문에 고생한단 말입니다. 몸이 비만하면 가지가지 병의 원인이 됩니다. 너무 많이 먹었을 겁니다.

 

을 못 떠나면 불자가 아닙니다. 상은 본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한 모양을 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림자 같이 메아리 같이 메아리 그것이 모양이 있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리 몸뚱이도 본질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양이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그림자를 보듯이 잘못 본단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상實相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상假相만 봅니다. 부처님 말씀이니까 그걸 믿고서 자기 스스로 그런 가상을 떠나야 한단 말입니다. 가상을 떠나기 위해서 불경이 있는 것이고, 주문이 있는 것이고, 기도를 모시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이 안 보여도 우리가 지장보살을 열심히 부르지 않습니까. 지장보살은 우리 지구를 축으로 해서 충만해 있는 에너지기운이란 말입니다. 그런 기운 따라서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지장보살만 부르고 관세음보살은 부르지 말 것입니까.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 때문에 지금 사람들은 굉장히 갈등을 많이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몇 십 년 동안 한 사람한테도 ‘지장보살이 좋다’는 말 듣고서 그 사람한테 ‘관세음보살 그만 두고 지장보살 하십시오.’ 합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그 분이 여태까지 생리나 심리에 ‘관세음보살’이 딱 배어있는데 그걸 그만 두고서 ‘지장보살’ 하자니 굉장히 무리가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저는 법문 때마다 말씀을 꼭 드립니다만 부처님 믿는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모양이 없는 세계 아닙니까. 형이상학적인 모양이 전혀 없는, 모양이 없는 생명자체, 생명자체의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자리란 말입니다. 근본의 뿌리자리, 현대 물리학적으로 순수에너지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자린인데 그 자리는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있어야 ‘이것이 뭣이다.’ ‘저것이 뭣이다.’ 그럴 것인데 모양이 없어서 어떻게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만 있고 어디에는 없는 게 아니라 모양이 없기 때문에 천지우주에 두루 해 있습니다. 무량무변無量無邊이라,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두루 해 있는 것이 모양이 없는 우리 마음자리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모양이 없는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님인지라, 그 부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것입니까? 그 부처님 자리는 무한의 그런 공덕功德자리, 일체만덕을 갖춘 자리이기 때문에 그 덕상을 전부 다 헤아려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호가 있고 또는 이름이 있고 자가 있고 하더라도 내내야 그 사람 아닙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 명호도 그 무량무변의 공덕 따라서 모양이 없는 자리를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기 때문에 어떻게 말하나 하나의 부처님을 부른다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지장보살을 구태여 안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왼다 하더라도 천도薦度가 되고 공덕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이른바 총대명사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진리만을 구할 때는 다른 보살이름도 좋습니다만 ‘나무아미타불’을 보통 많이 합니다. 또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할 때는 천지우주의 교주, 부처님의 총대명사가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보통 많이 부르는 것입니다. 또는 참선할 때도 역시 참선을 염불로 하실 때는 나무를 떼버리고서 아미타불 넉자를 화두로 해서 ‘아미타불, 아미타불.......’ 이와 같이 부처님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염불선念佛禪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아까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안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고, 안 보이는 그런 우리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기 때문에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긍정하지 않으면 불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심信心이라,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지 우리 눈에 안 보이니까 우리가 ‘의심한다.’ ‘안 믿는다.’그래 버리면 그때는 바른 신앙이 될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그런 영가나 살아계신 분이나 다 동일생명의, 하나의 생명의 끈에 다 매어져 있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우리 부모님이나 모두가 다 우리생명과 같은 끈으로 같은 생명의 줄로 이어져있습니다. 우리 형편이 좋지 않아 천도를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활이 부처님 앞에 정당하고 신심있고 남한테 베풀고 남하고 화해하고 그런 때는 그만치 화해한 기운, 정당한 기운이 우리 조상들한테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오늘 부처님의 상이 없는 법문, 무상법문無相法門을 듣고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는 그러한 도상道上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나 유명幽冥에 있는 영가들이나 모두가 다 지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중생계에서 영생해탈의 길로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만치 내가 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모양에 집착을 해서 자기 재산 또는 자기 몸뚱이 또는 밉다. 사랑한다 하는 그런 것, 자기 관념 이런 것에 집착되면 집착된 만치 우리는 길을 잘 가지 못하고 한눈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한눈을 팔고 있는 것인가? 않은 것인가? 이것은 상을 두는 것과 안 두는 것의 차이입니다. 상은 본래로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중생이 잘못 봐서 상을 두는 것입니다. 같은 상도 천상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같이 보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정당하다는 것도 천상에서 본다고 할 때는 부당하게 볼 수 있단 말입니다. 초등학생이 옳다고 보는 것을 대학생이 꼭 옳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인간의 그런 성품 차원에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이 꼭 옳지가 않단 말입니다. 성자가 보는 것만이 사실을 사실로 보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성자의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나’라는 상상,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라는 상 또는 ‘우리 생명이 짧다, 길다.’는 상 이런 것이 모두가 다 허망한 상인 것입니다. 우리생명은 본래로 영생불멸한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본래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지 않은 것인데 다만 인연 따라서 업장業障으로 해서 잠시간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지 생명은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근본을 보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모양이 좀 아프면 큰 탈이구나.’ ‘모양이 없어지면 내 생명 전체가 손해구나.’ 이렇게 낙담, 절망할는지 모르겠지만 모양에 애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지금 바로 살았다고 하면 내 목숨이 떠나자마자 즉시에 뒤에 보다 더 나은 좋은 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 믿는 분들은 대체로 가시자마자 훨씬 더 좋은 몸을 받습니다. 따라서 어느 때 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조금도 섭섭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극락세계는 모든 상을 떠난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이 번뇌를 떠나버린 세계입니다. ‘나’라는 것을 떠나보낸 세계입니다. ‘나’라는 관념, ‘너’라는 관념 또는 ‘좋다, 궂다, 밉다, 사랑한다.’ 하는 관념을 떠나버린 세계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극락세계의 땅이나 또는 극락세계의 물이나 극락세계의 나무나 항상 영생불멸한 미묘한 부처님법문을 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극락세계까지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우선 천당만 간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들을 수 없는 음악이 항상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런 것을 듣지 못합니다. 왜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상 때문에 가리어서 못 듣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중생이 ‘나’라는 관념, ‘있다’는 관념, ‘사랑한다’는 관념을 떠나버린다고 생각할 때는 들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오늘 천도법회에 나오신 우리 불자님들! 오늘 지금 법회에 계신 법주, 바라제하신 스님은 굉장히 공부를 잘 하신 스님입니다. 참다운 스님입니다. 영가란 것은 모양이 안 보이는 생명인데, 모양이 안 보이는 그런 생명이기 때문에 같은 염불소리도 굉장히 청아하고 정말로 사무친다고 생각할 때는 훨씬 더 감명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영가들은 참 행복하신 영가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데 상에 구속된 사람들은 지옥도 가는 것입니다. 지옥이나 아수라阿修羅나 축생畜生이나 인간이나 모두가 다 얼마만치 상에 매이는가, 상의 경중 따라서 상이 무거운가, 가벼운가 따라서 삼악도三惡道로 갈 것인가 좋은 데로 갈 것인가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이 정말로 무아행無我行이라, 이런다고 생각할 때는 즉시에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조상님 천도가 절대로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생명과 같은 생명의 줄로 이어져 있어서 우리 조상이 갈 곳으로 못가고 중음계中陰界라, 어두운 세계에서 헤맨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세상도 항상 막히고 곤란스럽고 어디가 아프기도 합니다. 정말로 병원에 가서 무슨 병인지 진단도 안 나오는데 그런 아픈 병들은 대체로 영가 때문에 그럽니다. 따라서 영가천도가 절대로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영가천도를 참 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염불도 하고 법문도 하지만 여러분들께서 바르게 생활을 하셔야지 여러분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여러분들이 바른 정당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조상들이나 영가들이 자꾸만 뒤돌아보고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또는 같은 핏줄이기 때문에 우리 살아있는 분들이 정당하게 바른 생활을 하면 돌아가신 영가들의 생명을 나중에 증장시키는 것이고, 우리가 정당하지 못하면 오염된 기운이 영가한테로 미치는 것입니다. 꼭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한테 효성 하는 것이 영가천도만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부모님 묘를 잘 정리해서 장엄스럽게 꾸미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르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성자의 길 따라서 산목숨 죽이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은 갖지 않아야합니다. 낭비하는 것도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은 훔친다 그러면 꼭 남의 것을 훔치는 것만을 죄로 알는지 모르겠지만 부처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 없이 목걸이하고, 필요 없이 팔찌끼고 이런 것도 모두가 다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우리생명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됩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은 저 아프리카에 있는 생명이나 우리나 같은 생명의 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네들이 불행할 때는 우리가 행복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우간다나 방글라데시나 이런 데는 지금도 하루에 몇 백 명씩 아사餓死해서 죽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우리가 둘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닙니다. 진리로 여법히 가는 길입니다. 보다 더 결단을 내려서 인생을 바르게 사십시오. 바르게 살려면 될수록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는 물질은 덜 붙이고 살면 됩니다. 그렇게 바르게 사신다고 생각할 때는 영가들도 춤추고 극락세계로 빨리빨리 왕생할 것입니다.

 

오늘 천도薦度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부디 모든 허망상을 다 여의십시오. 자기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 외에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몸뚱이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자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의 공덕功德위에서 영생해탈을 가기위해서 잠시간 이런 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바르게 공부하셔서 우리 살아계신 불자님들, 우리 영가들 금생에 모든 번뇌를 여의시고 금생에 극락세계로 지상의 행복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나무 지장보살마하살!

 

                                                                                                 1994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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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당 추월선사 49재 천도법어

 

 

 

삶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추월스님을 뵌 지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유명幽冥을 달리하시고 다만 식만이 우리 앞에 남아 계십니다.

 

이와 같이 무상無常은 신속합니다. 그러나 다만 중생의 안목으로 봐서 무상無常을 보고 허무를 보고 또는 이별의 슬픔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상에서 바로 본다고 생각하면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원래 생이라 하더라도 참다운 생이라 할 수 없는 것이고 또는 멸본무멸滅本無滅이라, 이생에 우리 생명이 다해 돌아간다 하더라도 역시 돌아가는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와 같이 생이 없고 멸滅도 없는 생멸生滅을 떠나버린 그 자리, 참다운 불성만 상주하는 참다운 생만 상주하는 그런 실상세계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어리석어서 그러한 실상경계를 보지 못하니까 그냥 생멸生滅을 보고 생겨났으면 났다 하고 인연 따라 사대四大가 합해지고 또는 거기에서 사대오온四大五蘊이 결합되어서 이것이 하나의 모양을 나투면 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연이 다해서 사대四大가 흩어지고 또는 오온五蘊이 각기 소멸되어서 흩어져 버리면 그때는 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보면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다만 하나의 진여법성, 실상만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생멸生滅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태안사를 떠나시는 추월스님이시여!

스님께서는 인생을 바로 사셨고 또한 여법히 살다 가신 것입니다. 영가가 가시는 길은 오직 한 곳 실상세계, 생멸을 떠나고 시비나 분멸을 떠나버린 영원한 실존세계, 이러한 세계에 가신 것입니다. 그 세계는 영가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지금 추월스님께서는 극락세계에서 영접해 오시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삼존보살님과 거기에 따르는 무수한 보살들이 내미는 금색바라의 연화대에 올라 계신 것입니다.

 

추월스님이시여!

스님이 바라시는 참다운 고향인 극락세계에 가신다 하더라도 스님의 본래 서원은 그냥 극락세계에서 자기 혼자만 영생을 누리는 소승의 마음은 아니십니다. 스님의 대 서원은 설사 우리 사회 속에서 괴롭다 하더라도 사바세계 중생과 더불어서 모든 중생을 제도 하시겠다는 대 서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추월스님이시여!

부디 극락세계에서 잠시간만 사바세계의 괴로움을 쉬시다가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오셔서 스님의 본래서원대로 무량중생을 제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스님이시여!

안녕히 가십시오.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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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를 보내는 49재 천도법어

 

 

 

ΟΟ후인 ΟΟΟ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시게. 영가와 헤어진지가 100일도 못 되어서 이렇게 유명幽命을 달리하고 만나게 되니 감개무량하고 또한 비감悲感을 이루 말할 수 없네.

 

영가여!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만나고 헤어짐은 우리 사바세계의 철칙이거니 나이 많은 사람이 나중에 갈 수도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이 먼저 갈 수도 있으나, 순리로 봐서는 내가 먼저 가고 영가가 내 조문을 해줘야 할 것인데 거꾸로 됐네.

 

영가여! 사바세계의 도리는 이렇게 무상하고 허무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본래의 자리, 사바세계를 떠나버린 깨달음의 세계에서 본다고 할 적에는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원래 낳는다 하더라도 낳음이라 하는 것이 없는 것이고 또는 죽음이라 하더라도 역시 참다운 죽음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네. 참다운 죽음이 있을 수가 없기에 영가는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천도법어를 듣는 것이 아닌가.

 

영가여! 깊이 생각하고 잘 관찰해서 본래 생이 없고 또는 본래 죽음이 없는 그 자리를 깨달아 주길 바라네.

 

영가여! 우리 중생들은 모양만 보고 참다운 생명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모양이 없어지면 죽었다 하고, 모양이 있으면 살았다고 좋아 하는 것이네. 그러나 바른 눈으로 본다고 할 적에는 우리가 보는 모양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아서 이것은 실제 모양이 아닌 것이네. 구름 따라서 갔다 왔다 하는 그러한 존재, 또는 잠시간 풀끝에 맺힌 이슬 같은 존재, 또는 안개 같은 그런 허무한 존재, 안개가 일었다가 그냥 사라지고 말듯이 구름이 생겼다가 소멸되고 말듯이 풀끝에 맺힌 이슬이 금방 떨어지고 말듯이 그와 같이 이 마음은 허망한 것이네.

 

다만 바람기운 또는 불기운 또는 물 기운 또는 땅기운 그러한 원소의 기운들이 우리 업장業障 따라서 잠시간 모여서 사람모양을 하는 것인데 사실은 그 모양도 실제가 없는 것이네. 이렇게 모여서 다만 빙빙 돌고 있는 세포덩어리를 우리 사람들이 잘 못 봐서 ‘사람 몸’이라고 하는 것이고 거기다가 이름을 붙여서 박 씨 집안 태어나면 ‘박 누구’라고 하는 것이고 김 씨 집안 태어나면 ‘김 누구’라고 하는 것이네. 그러나 실제에서 본다고 할 때에는 정말 모양이 없는 것이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시게. 영가는 지금 살아서의 그러한 모양이 없는, 사실로 봐서는 헛된 모양인 구름 같은 몸뚱이 또는 이슬 같은 몸뚱이, 안개 같은 몸뚱이를 버리고서 참다운 세계,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이별이 없는 그 세계로 가는 것이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시게. 사람이 죽어서 갈 때는 자기 모양이 허망한 것인데 ‘내 모양이 있다’ ‘내 뼈가 있다’ 이와 같이 집착을 하는 것이네. 아까 법당에서 관욕灌浴을 할 때에 영가가 분명히 허망한 몸을 완전히 벗어 버린 것을 나는 느꼈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시게. 그 몸뚱이 애착 때문에 참다운 세계, 허망한 세계를 못 떠나서 참다운 극락세계를 못 가는 것이고 또는 내 몸이라고 생각할 때는 내 아내가 있고, 내 자식이 있고, 내 친구가 있고 그런 것이네. 또는 내 몸이라고 생각할 때는 금생今生에 잠시간 왔다가는 그 몸뚱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그에 따른 재산도 내 것이고 모든 그런 세간이나 또는 권력이나 이것이 내 것이라고 고집을 하는 것이네. 이러한 자기 몸에 대한 애착심, 자기 권속에 대한 애착심 또는 자기 재물에 대한 애착심 이런 것에 걸리고 구속돼서 바른 길로 못 가는 것이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시게. 이러한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만났다 헤어지는, 꿈결에서 만났다 헤어지는, 꿈에서 싸우기도 하고 꿈에서 사랑도 하고 좋아도 하지만 꿈에서 깨면 무엇이 남던가.

 

영가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정말 꿈인 것인데, 사람들은 꿈을 꿈으로 못 보니까 자기 몸에 붙들리고 또는 남의 몸에 붙들리고 자기 아내 몸에 붙들리고 자기 자식 몸에 붙들리고 또는 모두가 다 헛것인데 권력도 헛것이요, 이름도 헛것이요 모두가 헛것인데 그런 것에 다 붙잡히고 구속이 돼서 자기 갈 길을 못 가는 것이네.

 

바로 살지 못 하는 것도 모두가 다 그런 모양에 집착한 데서 원인이 있는 것이네. 모양에 집착 안 하면 성인成人이고 부처고, 모양에 구속이 돼서 모양에 집착하면 범부凡夫요 중생인 것이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시게. 뒤돌아보고 누구한테 애착을 품고 과거에 쓰던 자기 재산, 과거에 사귀던 자기 아내, 자기 자식, 자기 권속들 이렇게 자꾸만 못 잊어 뒤돌아보는 이것이 영가가 할 일이 아니네. 영가가 뒤돌아보면 그만치 영가의 권속도 더욱더 애착을 가지고 영가를 추모할 것이고 영가의 권속이 영가를 추모하고 영가가 자기 유가족을 자꾸만 뒤돌아보고 생각할 때는 영가는 영가의 갈 길을 못 가고 영가의 권속도 바른 생활을 못하는 것이네.

 

영가여! 깊이 생각하고 깊이 관찰하소. 영가가 가는 곳은 오직 극락세계인 것이고 영가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가는 종국의 고향은 극락세계인 것이네.

 

극락세계는 어떠한 곳인가? 극락세계는 광명光明으로 되어있는, 부처님의 무량광명無量光明으로 되어있는 세계이네. 극락세계는 땅도 광명으로 빛나고 나무도 광명으로 빛나고 시냇물도 광명의 물인 것이고 극락세계에 있는 누각들도 역시 모두가 다 극락세계의 장엄 찬란한 그런 세계인 것이네. 또는 극락세계에는 무수한 성자들이 아미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항상 행복에 충만한 곳이네. 환희와 행복이 완벽한 곳이 극락세계인 것이네. 우리 중생은 애초에 극락세계에서 살았는데 어쩌다가 인과因果의 수레바퀴에 걸려서 사람이 되고 또는 잘못 살면 지옥 갔다가 또 좀 나아지면 아귀餓鬼가 됐다가 좀 더 나아지면 축생畜生이 됐다가 좀 더 나아지면 아수라阿修羅세계로 갔다가 더 나아지면 우리 같이 인간세계로 오는 것이네. 개미가 쳇바퀴 돌 듯, 누에가 자기 몸에서 나온 실로 해서 고치를 만들어서 그것에 갇히듯 우리 중생은 그러하네. 사람이 되면 사람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인데, 과거의 몸이 현생에 닮은 그런 몸도 아닌 것인데 말일세.

 

영가여! 과거의 영가의 몸은 今生금생에 나와서 가진 ΟΟΟ와 같은 그런 몸이 아니었네.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가 또는 그 속에서 죽어서 과거 전생에 지은 업장業障 따라서 금생에 인간이 되가지고서 ΟΟΟ이라 는 몸을 받았던 것이네.

 

그러나 영가여! 영가가 뒤돌아보고 영가가 영가의 권속을 생각하고 영가의 재물을 생각하고 이러할 때에는 다시 구속을 받아서 구속이 심하면 지옥으로 뚝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좀 나아진다 하더라도 다시 인간 몸 받고서 생로병사의 고생과 그 무수 무량한 인생고를 받는 것이네.

 

영가여! 사람이라 하는 것은 몸뚱이 때문에 죄를 짓고 남도 미워하고 사랑도 하는 것이네. 다행히 원수와 같은 그 몸뚱이 그것을 벗고서 지금 극락세계로 가는 것이네. 영가와 나는 세속에서도 사제지간이고 또는 자네가 한 때나마 승려생활을 할 때에도 스승과 제자가 됐네.

 

영가여! 생각해보게. 얼마나 인연이 깊은가. 극락세계라 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이 다 들어가서 영원히 행복스럽고 영원히 이별이 없는 세계네. 그 세계를 놔두고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

 

영가여! 몸을 벗으실 때에, 아까 자네가 관욕灌浴을 할 때에 분명히 나는 느끼고 보고 냄새를 맡았네. 영가가 몸을, 헌옷의 껍데기를 벗는 그 소릴, 영가가 모든 번뇌의 때를 벗는 환희심, 그것을 분명히 나는 느끼고 보았네.

 

영가여! 영가가 정말로 영가의 몸에 대한 애착을 뿌리치고 영가의 권속에 대한 그런 미련을 갖지 않고 재물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을 때에 영가는 홀연히 벗어나네. 영가가 그런 모든 번뇌를 벗어나서 미움도 사랑도 집착도 다 벗어나서 눈을 들고 바로 보게. 아미타불이 모든 보살님들을 데리고 계시고 영가가 타고 갈 그 광명 찬란한 금색 찬란한 연화대蓮花臺가 영가 옆에 있을 것이네.

 

영가여! 뚜렷이 보게. 자기 몸에 대한 애착, 자기 뼛가루에 대한 애착, 자기 권속에 대한 애착, 자기 자식에 대한 애착,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을 다 버리고 이것이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이 다 꿈같은 것인데 꿈을 벗어야지 않겠는가? 꿈을 벗어나야 하네. 꿈을 벗고서 분명히 눈을 들고 보게.

 

극락세계로 가는 길은 무수 무량의 먼 거리지만 번뇌를 털어버리면 그런 청정한 영가에 있어서는 순식간에 한 생각에 거기에 입성할 수가 있는 것이네. 이렇게 하는 것이 영가가 가장 아내를 사랑하고 가장 자식을 사랑하고 자기 친구를 사랑하고 모든 것을 위한 최선의 길인 것이네. 영가가 미련 두고 있는 것은 도리어 아내한테도 해롭고 또는 자식한테도 해롭고 누구한테나 해로운 것이네. 영가가 극락세계에 가서 극락세계의 그런 신통 자재하는 힘으로 해서 아내를 생각하고 자식을 생각하고 자기 권속을 생각해야 할 것이네.

 

유가족들이여! 돌아가신 분을 위한 가장 좋은 길은 무엇입니까? 자꾸만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영가를 위한 길이 아니라 ‘모든 것이 허망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든 것이 허망하고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만났지만 돌아가신 분은 응당 극락세계에 하루 빨리 가셔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극락세계의 교주 또는 우주의 교주, 인생과 우주 모든 만 중생의 구세주이신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와 같은 부처님한테 귀의하는 것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가장 최선의 효성이 되는 것이고 정성이 되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가 가고자 하는 그런 극락세계, 영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서 또는 만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 『반야심경』을 외우지 않았는가. 『반야심경』의 도리가 모두가 허망하다는 도리인 것이네. 그것을 다시금 느껴서 자네 앞에 있는 연화대蓮花臺에 올라타서 극락세계에 가서 영생의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네. 영가의 유가족도 금생에 부처님 바로 믿고 남한테 베풀고, 없는 사람한테 동정하고, 아픈 사람한테 간호하고 이렇게 베풀다가 나중에 인연 따라서 가게 되면 그냥 즉시에 극락세계에 가서 똑같이 영생의 행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1989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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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ΟΟΟ거사 49재 천도 법어

 

 

 

ΟΟ후인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영가를 뵌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영가는 비록 백수풍신白首風神이시지만 늠름하시고 당당하신 그런 풍채이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과거 전생에 바로 사셨고 또는 금생今生에 나오셔서 정직하게 인생을 사신 그러한 상으로 생각됩니다.

 

한번 생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 하는 이른바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생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일체 모든 현상은 모두 무상한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생인지라 각 성인成人들의 가르침은 이러한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영가는 지금 저승이라 하는 세계에 계신 것입니다. 사람이 막 태어나서는 ‘생유生有’, 사는 동안에는 ‘본유本有’, 죽는 동안에는 죽을 ‘사’자를 써서 ‘사유死有’, 그리고 저승에 가는 것은 ‘중유中有’, 즉 저승길입니다. 영가는 지금 저승길에 계시다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타고서 이 자리에 계시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나와서 바로 살기도 어려운 것이고 그 가운데서 참다운 종교를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종교라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특히 불법佛法은 인생과 우주의 참 도리를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대체로 무엇이고 대체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인생은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다행히 과거 전생의 선근공덕善根功德으로 해서 금생에 나오셔서 불법을 만나셨습니다. 불법을 만났어도 복이 적은 사람, 게으른 사람들은 바로 못 믿습니다. 바로 못 믿으면 자기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라 하는 소중한 법도 그르치고 마는 것입니다. 승가에서나 속가에서나 부처님 법을 빙자하고서 바로 못 사는 사람들은 자기도 죄를 짓고 부처님법도 망치는 것입니다. 영가가 비록 세속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렇게 의젓하고 당당하신 것은 바로 사셨고 부처님법도 바로 믿으셨다는 그런 증거였습니다. 영가가 그렇게 바로 살고 부처님 법을 바르게 실천하셨기 때문에 임종 때도 여여하게 도인 행색같이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흔연스럽게 가신 것입니다.

 

영가여! 몸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각 물질이 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합한 것은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고 맙니다. 바로 전생의 인연, 부모님의 인연 따라서 사람 몸 받아서, 인연이 다하면 다시 그런 것은 흩어지고 맙니다. 본래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뚱이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에 몸뚱이가 얼마나 소중합니까만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전생에 이런 몸뚱이가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죽은 뒤에 이런 몸뚱이가 다시 또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영가여! 영가는 지금 저승길에서 극락으로 가는, 우리 인생이 종단에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가는 응당 극락에 가실 것을 믿습니다. 영가와 깊은 인연이 있는지 한 번 밖에 안 만나 뵈었지만 백수풍신白首風神의 그 늠름한 모습이 산승山僧의 눈에는 지금도 선합니다. 그러한 인연 따라서 산승의 노파심으로 마지막 천도薦度법어를 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인간이 자기라는 것이 허망한 것인데 허망한 것에 집착할 적에 가지가지의 재앙을 만나는 것입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있는 것은 사람 몸이나 물질이나 지위나 모든 것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중생은 그림자 같은 것을,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그림자가 아니고 실제라고 생각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몸도 허망한데, 자기 몸도 두고 가는 것인데, 자기 처자식도 데리고 갈 수도 없는 것이고 자기가 쓰던 재산이나 권력이나 모두 다 팽개치고 가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못 따라 갑니다. 몸도 못 따라 가는데 다른 것이 따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영가여! 우리 중생들은 그런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는 데서 문제가 생겨서 탐욕심을 내는 것이고 또 그러한 물질이라던가, 또는 지위나 몸뚱이에 해를 끼치면 성내고 진심瞋心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인셍의 무지無知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무지라는 것은 방금도 말씀한 바와 같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는 것입니다. 몸, 이것도 허망한 것인데 허망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고, 권력도 허망한 뜬구름 같은 것인데 이것도 사실로 소중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시초에 모두가 다 극락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 본 고향은 극락인 것입니다. 어쩌다가 우리 몸뚱이에 가려서 본래 참다운 성품을 못 보는 것입니다. 참다운 성품은 어느 누구나가 다 부처님과 똑같은 것입니다. 석가모니, 예수, 공자, 또는 노자 그런 분들의 마음이나 우리 중생의 마음이나 똑같이 우주의 본바탕, 본 진리를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우주의 본바탕 진리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본바탕이 부처님이고 하느님인데 이것이 우리가 쓰다 버리는 몸뚱이 때문에, 몸뚱이 잘 먹이고 몸뚱이 치장하고 또는 자기 몸뚱이에 인연된 아들이요 딸이요 또는 친구요 하는 그런 인연 때문에 얽혀서 바로 못사는 것입니다.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는 깊이 느끼시는 분이셨습니다. 영가는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영가가 쓰던 모든 그런 세간이라던가, 영가의 권속이나 그런 것을 가시는 길에 뒤돌아보시고 애착을 품을까 봐서 산승山僧이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영가여! 중생이 바로 못 보는 것이 모두 다 번뇌가 되어서 번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저 밑에 지옥으로, 또는 좀 더 나아다면 아귀餓鬼로, 또는 더 나아지면 축생畜生으로, 더 나아지면 아수라阿修羅로, 더 나아지면 인간으로, 우리 인간도 이것이 별로 좋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나쁜 일도 해가지고 지옥으로 뚝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마음 잘 먹고 행위를 바르게 해가지고 천상이나 극락으로 갈 수도 있는 것도 인간입니다. 업장業障이 가벼우면 인간에서 천상으로, 천상에서 우주의 도리를 아는 그런 성문聲聞 또는 연각緣覺으로 또는 중생과 더불어서 진리를 깨닫는 그런 보살로 그렇게 되어서 부처가 됩니다. 이와 같이 비록 우리가 지금 저 지옥에 있다 하더라도 또는 하나의 소가 되고 개가 되고 말이 되고 한다 할지라도 근본마음은 모두 다 부처님인 것입니다. 모두가 다 업장이 무거워서 그런 곳으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영가여! 영가는 지금 극락으로 가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그냥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애착을 뿌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대한 애착, 자기 권속에 대한 애착 또는 자기 재산, 자기권력, 자기에 관계된 그런 모든 구속을 벗어버려야 극락에 가시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몸도 마음도 무게도 없는 그런 광명의 몸, 조금도 무게가 없는 그런 중생만이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가여! 한 생각 놓아서 몸에 대한 애착, 권속에 대한 애착 또는 생전에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뿌리치십시오. 그리고 영가가 눈을 들고 보시면 극락세계는 훤히 보이시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어느 중생한테나 다 보이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스스로 못 보는 것입니다.

 

‘자작범부自作凡夫’라, 우리 중생이 스스로 잘못 생각해서 업장을 짓고 스스로 고를 받는 것입니다. 번뇌를 짓는 것이고 이 무지無知 때문에 우주의 본바탕,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기 본래 실존을 잘 모르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고 번뇌 때문에 나쁜 말을 하게 되고 나쁜 행동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인생고를 받는 것입니다. 인생고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 때문에 잘 못 봐서, 잘못 보기 때문에 잘못 행동해서 자기 스스로 자업자득으로 받는 것입니다.

 

영가여! 오는 모이신 유가족들이시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본래 행복스러운 것인데 중생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해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행복스럽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삼복三福을 지어라”는 부처님말씀이 있습니다. ‘석 삼’자, ‘복 복’자 세 가지 복입니다.

 

맨 처음에는 ‘세복世福’이라, ‘인간 세世’자, ‘복 복’자 인간 복입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어른들을 공경하고 또는 일반대중들한테 베풀어주고 이런 것이 세상복인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나와서 세상 복을 받는 사람들은 우연히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금생에는 별로 안 지었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모두가 그와 같이 복을 지었던 것입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어른들을 공경하고 친구지간 우애하고 신의가 있고 또는 남한테 모두를 베풀고 이런 사람만이 정말로 태어나면서부터 행복을 받는 것입니다. 잘못 생긴 사람, 불행한 사람은 과거 전생에 세복世福을 못 지은 것입니다.

 

그 다음은 ‘계복戒福’이라 계행戒行을 지키는 복이란 말입니다. 계복은 어떤 것이냐 하면 생물을 죽이지 않고 또는 훔치지 않고,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고 정당한 수입이 아니면 갖지 않고 또는 자신의 배필 이외의 이성들 하고 음란한 짓을 않고, 또는 거짓말· 욕설·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고 또는 술 먹지 않고 이러한 등등의 계행을 지켜야 만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돌아가신 ΟΟ영가와 같이 그렇게 당당하시고 늠름하신 분들은 모두가 이와 같이 세상 복을 짓고 또는 계행을 지키는 그런 복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행복行福’이라, ‘행할 행’자, ‘복 복’자, 이것은 성자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자의 길이라는 것은 우주의 도리입니다. 공자나 석가나 예수나 맹자나 노자나 모두가 우주의 길을 깨닫고서 우주의 길을 가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주의 길, 우주의 도리를 따를 적에 인간의 행복이 오고 사회도 평안스러운 것입니다.

 

우주의 도리를 안 따를 적에 개인의 마음도 불안스럽고 또는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전생에 지은 복으로 인해서 금생에 좀 잘산다 하더라도 바로 못 살면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이와 같이 세상 복을 짓고 계행을 지키는 복을 짓고 또는 성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동하는 그런 삼복三福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극락세계가 저 십만 억 국토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눈앞에 바로 이 자리,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바로 이곳이 극락세계입니다. 이 세상이 바로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극락세계인데 중생은 무지無知로 또는 탐욕심으로 또는 성내는 진심瞋心으로 가리어서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여! 모든 그런 얽힘을 다 떠나십시오. 허망한 이름, 눈에 보이는 일체 현상들은 모두가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중생이 꿉 같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가상가명假相假名’이라, 가짜 상 가짜 이름을 떠나서 저 극락세계 광명정토光明淨土 끝도 갓도 없이 빛나는 그 극락세계를 생각하십시오. 극락세계에 계시는 분은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그와 같이 무수한 부처님, 보살들, 성자만이 계십니다.

 

영가여! 그렇게 생각하실 적에 영가는 극락세계에 순식간에 가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 앞에 있는 오색찬란한 그런 구름을 타고서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그런 구름을 타고서 영가는 순식간에 극락세계에 가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아미타불은 극락세계 교주의 이름인 동시에 모든 중생의 본래 이름이고 또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근본 뿌리입니다. 일체중생 본래성품, 본래 실상實相 자리는 아미타불입니다. 영가가 지금 생각하실 것은 광명이 빛나는 극락세계이고 영가가 지금 부르실 것은 아미타불입니다. 우주의 진리인 동시에 자기의 참 이름 극락세계의 교주인 그 아미타불을 일심으로 생각하십시오.

 

김가 박가 같은 그 이름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붙인 가명假名에 불과합니다. 유가족들도 지금 극락세계에 가시는 어른을 위해서 추모하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영가와 똑같이 참다운 우리 생명의 이름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입으로 속으로 외시고 생각으로는 극락세계의 끝도 갓도 없이 훤히 빛나는 극락세계를 생각하시는 것이 돌아가신 어른을 추모하는 가장 최선의 길입니다.

 

영가여! 주저 없이 뿌리 치셔서 해탈의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1989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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ΟΟΟ와 유가족을 위한 49재 천도법어

 

 

 

ΟΟΟ영가여! 세월은 흘러가는 강물 같아서 영가가 가신지가 49일이 지났습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중생은 ‘모양이 있으면 살았다 하고 모양이 없으면 죽었다’ 합니다. 그러나 모양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생명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이 없고 바로 영생永生 하는 것인데 중생이 어두워서 생명의 본질을 못 보기 때문에 모양이 있으면 살았다 하고 모양이 안 보이면 죽었다 합니다. ‘금유전무今有前無’라, 지금은 있어도 앞에는 모양이 없었습니다. 박아무개 김아무개라 하는 그런 인간 존재가 지금 있다고 하더라도 과거에는 없었습니다. 없다가 부모 인연 따라서 금생今生에 사람 몸 받아 나와서 사람 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금유후무今有後無’라, 금생에는 모양이 있다 하더라도 인연이 다해서 자기 몸이 사라지면 다시 죽은 다음에는 모양이 없습니다. 과거에 없던 모양이 금생에 있고 금생에 있던 모양이 미래에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양이 있고 없고 간에 생명은 존재합니다.

 

 

ΟΟΟ영가여! 생각해 보십시오. 영가는 분명히 이 자리에 와서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바고해는 언제나 탐욕심이나 또는 분노심이나 또는 사물을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마음 때문에 바른 생활을 못합니다. 바른 생활을 못 하기 때문에 여러 갈래로 헤매는 것입니다. 자기 업장業障의 무게에 따라서 업장이 가장 무거워지면 지옥으로 갔다가, 좀 가벼우면 축생畜生 갔다가,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서 육도윤회六道輪廻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阿修羅· 인간· 천상 이와 같이 육도를 헤매는 것입니다.

 

이런 업장의 무게가 다 끝나서 본래마음, 본래 생명으로 돌아가면 그때는 한계를 초월해서 욕심을 주로 하는 욕계欲界나 또는 모양이 있는 색계色界나 의식만 존재하는 무색계無色界나 이런 삼계를 초월해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업장의 무게라는 것은 탐욕심이나 또는 분노심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마음이지만 더없이 사물에 집착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업장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몸이 있다가 사라질 때에는 세 가지 무거운 업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쓰던 몸이 내 것이다’ 하는 집착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 각 원소가 모이고 우리 의식이 모여 이것이 부처님 말씀대로 하면 사대오온四大五蘊인데 사대오온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여 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몸이 인연이 다하면 그때는 각 원소는 원소대로 해서 흩어지고 마는 것이고 다만 그 쓰던 이 마음만 가지고 갑니다.

 

평소에 쓰던 그 마음은 몸은 사라졌다 하더라도 생명은 존재하는 것인데 그러한 마음에 집착이 붙어 놓으면 그런 집착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 그런 삼계三界를 뱅뱅 돌면서 해탈解脫을 못 하는 것입니다. 해탈을 못 하면 우리생명의 본고향인 극락세계에 못 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우리 인간이 돌아갈 적에 집착심인가 하면 우선 자기 몸에 대한 집착심입니다. 내 얼굴, 내손, 내발 이와 같은 것에 대한 집착심입니다. 매장하면 매장하는 거기까지 따라가면서 ‘아! 저 몸이 내 몸이다. 지금 땅에 묻힌 몸이 내 몸이다’ 하면서 집착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화장하면 집착심은 적어지지만 그래도 역시 그러한 집착한 흔적 때문에 자기 쓰던 몸에 대해서 느끼던 그런 애착심은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각 원소가 합해지고 또는 자기의식, 자기 분별 시비하는 그런 식이 합해져서 사람 몸이 이루어졌습니다. 자기 몸을 구성했던 그런 원소가 흩어져버리면 몸은 간 곳이 없습니다. 흔적이 없습니다. 텅 빈 광야에다가 여러 가지 자재를 구해서 집을 만듭니다. 그러나 집이 필요 없어서 또는 인연이 다해서 집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러면 흙 또는 텅 빈 광야만 남습니다. 그와 똑같이 사람 몸도 역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몸으로 나툴 뿐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그때는 모양은 없습니다. 몸을 구성하는 산소는 산소대로 수소는 수소대로 또는 탄소는 탄소대로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로 보면 이와 같이 중생의 몸은 없는 것인데 그러면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두컴컴할 적에 지푸라기를 잘못 보고서 ‘저건 뱀이다’ 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그릇된 상을 냅니다. 그러나 지푸라기나 새끼토막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뱀이라고 느끼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수水··풍사대四大가 합해진 각원소가 합해진 그 몸뚱이들을 ‘내 것이다’ 하는 그것은 마치 어두컴컴할 적에 짚으로 꼬아진 새끼토막을 뱀이라고 보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이것은 정유리무情有理無라, 다만 우리 망상된 마음이 있는 것이지 사실은 없습니다. ‘나다’하는 강 아무개, 김 아무개 하는 그것도 역시 방금 말씀드린 대로 똑같이 어두컴컴할 적에 새끼토막을 가리켜서 잘못 보고서 ‘이것은 뱀이다’ 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새끼토막에 불과한 것인데 따라서 바로 보면 새끼토막이고 정말로 바로 보면 그때는 지푸라기뿐입니다. 성자들은 그러한 그릇된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새끼토막을 보고 ‘뱀이다’ 이래 가지고서 ‘뱀이다’라는 그 마음 때문에 자꾸만 업을 짓습니다. 이 몸뚱이가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인데 ‘내 것이다’하는 잘못된 개념 때문에 이 몸뚱이에 좋게 하면 그때는 환희심을 내는 것이고 몸뚱이에 싫게 하면 그때는 성내는 진심瞋心을 내는 것입니다.

 

바른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지금 몸뚱이 이것이 내 것이 아니다’는 지혜, 즉 말하자면 ‘몸뚱이를 구성한 내 몸이 본래 없다’ 하는 마치 물에 비치는 달그림자 같이 ‘사실은 달이 아니고서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느끼지 못하는 한에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그러한 윤회하는 길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새끼토막의 본질은 지푸라기이듯이 우리 사람도 역시 본바탕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본바탕은 부처님인데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못 본단 말입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이 우리 중생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본바탕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으로 보는 이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보는 그런 견해가 없는 한에는 우리 중생은 몇 만생의 생을 나고 죽고 되풀이 하면서 욕계欲界나 색계 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아수라阿修羅, 인간, 천상 이러한 경계를 뱅뱅 돌아서 윤회하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 하십시오. 우리 인간이 돌아갈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어느 곳도 머물 곳이 없습니다. 머물 곳은 그때그때 무상한 일시적인 것입니다. 몸은 흔적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마음도 역시 집착하는 마음, 욕심을 부리고 또는 성을 내고 또는 자타自他를 구분하고 하는 그런 마음은 삼계三界를 윤회하는 저 지옥으로 뚝 떨어졌다가 또는 조금 나아지면 귀신이 됐다가 또는 축생이 되었다가 그렇게 헤매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중생이 가야 하는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광명光明으로 이루어져서 극락세계의 나무나 숲이나 집이나 또는 환경, 모두가 다 찬란한 광명으로 이루어진 빛나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영생하는 세계입니다. 여기로 가야만이 우리 인생은 비로소 인생고를 떠나서 생로병사를 떠나서 또는 영원히 만나서 헤어지지 않는 그러한 무량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생명이 본바탕은 바로 부처고 우리가 가야할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이시여! 영가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도 역시 우리의 참 모습은 우리의 참 생명은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참 생명은 바로 부처님이시고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극락세계입니다. 비록 우리 인연이 복잡해서 바로 극락에는 못 가도, 참 생명인 부처님이 바로 못 되도 언젠가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못 가고 못 되면 우리는 그만치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또는 아수라阿修羅 그런데서 헤매고 생로병사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가서 영생하는 길 외에는 모두가 다 죽고 살고 아프고 늙고 하는 생로병사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영가가 가는 길은 오직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또는 금생今生에 대한 그런 미련을 버리고 또는 자기가 아끼던 주변의 세간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오직 부처님한테 가는 길, 부처님 되는 길뿐입니다. 부처님 되는 길이나 극락세계에 가는 길은 똑 같은 길입니다. 부처님이 되어야 비로소 극락세계에 가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가야 참다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극락은 바로 인간 누구나 갈 수 있는, 꼭 가야하는 우리 근본생명의 고향인 것입니다.

 

영가여! 자세히 관찰하십시오. 돌아갈 고향인 극락세계는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세계입니다. 아미타부처님, 관세음보살님 또는 대세지보살님 무수한 보살님들이 계시는 세계입니다.

 

영가여! 집착만 버리고, 욕심이나 진심瞋心이나 어리석은 마음이나 그러한 업장業障을 구성하는 마음만 버리고 눈을 들면 극락세계의 찬란스러운 영원의 세계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께서 관음보살이나 무수한 보살을 거느리고 계시고 영가가 타고 가실 찬란한 연화대蓮花臺가 보이는 것입니다.

 

영가여! 눈을 바로 들고서 보살님들이 내미는 그런 금색 연화대에 오르셔서 조금도 미련 없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유가족이시여! 돌아가신 ΟΟΟ 영가를 위하는 가장 지극한 효심은 오직 영가가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의 참다운 이름 또는 영원한 생명의 이름 또는 우주의 이름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하는 것입니다.

 

유가족이시여! 다시 명심하십시오.ΟΟΟ영가를 위한 가장 큰 효심은 영가를 위해 무수한 재물을 쌓는 그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다만 영가를 위해서 바른 생각, 바른 마음을 가지고서 바른 생활을 하면서 오직 인간 모두의 참 이름, 일체 중생의 참 생명의 이름 또는 우주의 이름, 내 생명의 참 이름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님을 일심으로 외우면서 ΟΟΟ영가가 하루 빨리 극락세계에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최선의 효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돌아가신 영가나 우리 사부대중이나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 본고향인 극락세계로 하루 빨리 돌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1987년 3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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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ΟΟ거사 49재 천도법어

 

 

 

 

사바세계의 인연은 무상無常하고도 허무합니다. ΟΟΟ,ΟΟΟ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몸이라 하는 것은 색신色身이기 때문에 모양이 있고 또는 여러 가지 거기에 따르는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 몸인 법신法身은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사람은 죽어서 화장을 하면 재만 남는 것이고 매장을 하면 그냥 흙만 남는 것입니다. 영가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영가의 몸은 지금 매장 되서 묻혀있습니다. 그러나 영가의 법신은, 법신위에 때 묻은 영가의 업식業識은 분명히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이 자리에 와서 천도薦度법어를 듣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떠나온 본래 자리는 가상假相 가명假名을 떠난 순수한 불성佛性입니다. 우리의 참 면목은 모든 명상名相을 떠나버린 순수한 생명, 순수한 불성인 것인데 사바세계의 인연 따라서 헤매다가 거꾸로 잘못 보기 때문에 각 원소가 그때그때 합해진 이러한 몸을 자기 몸이라 고집하고 또는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또는 분별시비하는 그러한 업을 자기 마음이라 고집합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風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은 인연이 다하면 그냥 허물어져서 아무 것도 없는 자리로 돌아가고 맙니다. 모양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냄새도 공이요, 다 공입니다.

 

영가여! 영가가 가시는 길에는 아무도 못 따라갑니다. 영가의 사랑하던 아내도, 아들도 딸도 다 못 따라갑니다. 영가의 재산도 영가를 못 따라갑니다. 중생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잘못 보기 때문에 자기 몸이 아닌 것을 자기 몸이라 고집하고 자기 마음이 아닌 것을 자기 마음이라 고집하기 때문에 삼계육도삼계육도에서 한량없는 고생을 받는 것입니다. 욕심을 못 떠나면 욕계欲界중생, 진심瞋心을 아직 못 떠나면 그때는 색계色界중생, 무명심無明心의 끄트머리를 못 떠나면 그때는 무색계無色界중생, 이러한 삼계三界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 세계입니다. 이 자리에서 자기 본래 생명을 바로 못 볼 때는 영원히 윤회하고 마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는 오늘 자기가 아닌 그런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서 참다운 면목을 발견해서 우리 생명의 본래 고향인 극락세계로 가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가시는 길에 장애가 무엇인가? 자기 몸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꾸로 본 그런 망상된 생각들이 자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권속이 있고 또는 자기 몸이 있고 자기 재산이 있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기가 평생 동안 쓰던 몸을 굉장히 소중히 여깁니다. 더러는 분도 바르고 더러는 향수도 바르고 또는 금가락지도 끼고 또는 다이아몬드 반지도 끼고 이렇게 해서 사랑하고 가꾸고 합니다. 몇 십 년 동안 그렇게 아끼고 자기 몸을 아끼는 나머지 더러는 남을 죽이기도 하고 배신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이렇게 해서 아낀 자기 몸이기 때문에 인연이 다해서 갈 때에도 자기 몸 때문에 잘 못 갑니다.

 

한 번 죽어지면 죽어진 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장하면 재만 남고 땅에 파묻으면 썩어서 흙만 남습니다. 몸의 피는 수분으로 돌아가고 불기운, 물 기운과 같은 모든 원소는 다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 남습니다. 참다웁게 남는 것은 본래면목자리, 참 생명뿐입니다. 영원하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내 몸이라고 의지해서 살 때에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자기아내, 자기남편, 자기자식, 이런 자기 권속들을 내 것이라고 고집합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재산도, 아내도, 권속도 아무 것도 못 따라갑니다. 다만 영가가 평소에 쓰던, 어떻게 마음을 썼던가 하는 그런 업식만 영가를 따라갑니다.

 

영가여! 영가는 복이 많은 분입니다. 영가와 산승山僧이 만난 지도 상당히 깊은 인연입니다. 영가는 훌륭한 부인을 두셨습니다. 재재 때마다 천리 길을 마다 않고 자녀분들을 거느리고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하셨습니다. 오는 이와 같이 지성스런 불자님들이 많이 모이신 것도 영가의 복이요, 영가가 훌륭한 부인과 자식을 두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불성佛性, 부처님 성품인 것이고 바로 부처님입니다. 지장보살이고 관세음보살이고 아미타불이고 또는 문수보살이고 또는 대일여래이고 모두가 다 부처님이름입니다. 우리 부처님 공덕功德은 한도 끝도 없고 부처님 공덕은 바로 내 본 성품 공덕인 것이고 부처님 공덕은 바로 우주고 바로 우주의 진리, 우주가 부처님 몸이고 우주의 모든 존재, 모든 능력 이것이 부처님 공덕인 것입니다.

 

부처님 공덕이 한량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자비나 지혜광명이 빛나는 자리에서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고 또는 부처님의 지혜나 자비광명은 우주에 가득 차 있으니까 광명변조光明邊照이고, 부처님한테 깃들어 있는 모든 존재의 생명에 깃들어 있는 그러한 기쁨은 한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 또한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라, 또는 우리 본래면목인 동시에 우주의 본래면목 자리인 부처님은 기쁨이나 그런 행복이 한이 없기 때문에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자비나 능력이나 어떠한 것이나 원만무결하게 갖춘 것이 부처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 부처님 자리하고 우리 중생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는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업을 지어서 지금 김 아무개, 박아무개고 이렇게 부른다 하더라도, 이것은 겉만 차이가 있고 형상적인 차이만 있는 것이지 본래면목자리는 김가나 박가나 또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떠한 광물이나 모두가 다 똑같은 부처님 성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중생의 몸 어느 부분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 머리카락부터 발가락까지 조금도 빈틈없이 부처님이 꽉 차 계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영가가 쓰시던 그 몸은 영가의 참다운 몸이 아닙니다. 잉연 따라서 잘못 봤기 때문에 본래면목자리, 불성佛性자리를 잘 못 봤기 때문에 삼계육도삼계육도에서 오랫동안 헤맸던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오랜 나그네 길입니다. 고향 떠나와서 바로 못 보면 천만 생 윤회하고 윤회하다가 고생만 받는 것입니다.

 

영가여! 본래면목을 깨닫고서 지금 바로 눈을 뜨십시오. 자기 몸에 대한 애착, 자기권속에 대한 애착, 모든 애착을 다 털어버리고서 바로 눈을 뜨십시오. 사바세계의 만남은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사바세계의 삶은 결국 죽고 마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금생今生에 만났던 그런 좋은 인연들, 훌륭한 아내, 선량한 자식들 또는 좋은 친구들 이런 분들하고 영생에 만나는 길은 무한공덕인 것입니다. 부처님 공덕功德을 자비로운 쪽으로 보면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보면 문수보살, 또는 유명계幽冥界의 중생을 다스리는 쪽에서 볼 때는 지장보살, 우리 중생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또는 극락세계의 교주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실상實相의 명호名號, 이것이 아미타불인 것입니다. 극락세계의 교주인 동시에 영가의 본래면목의 이름이기도 한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처님은 모든 중생을 극락세계의 교주인 동시에 영가의 본래면목의 이름이기도 한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처님은 모든 중생을 극락세계에 오도록 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아미타불 부처님이 관세음보살님을 거느리고 영가 앞에 지금 서 계십니다. 금색찬란한 그런 광명으로 이루어진 연화대蓮花臺가 바로 영가 앞에 있습니다. 모든 상을 떠나버린 참다운 극락세계의법성法性이 영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가여! 훌훌 털어버리시고서 정말로 쾌활한, 정말로 가벼운 그런 몸으로 연화대에 앉으셔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1989년 5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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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ΟΟ스님 모친 49재 천도법어

 

 

ΟΟΟ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한 아들이 출가해서 도를 닦아서 공부를 하면 구족九族이 생천生天 하는데 네 아들이 다 출가해서 공부를 하고 계시고, 또 한 아들은 5년째 묵언수행을 하고 계십니다. 그 공덕功德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물며 오늘 49재를 맞이해서 성실하고 반듯하신 좋은 시식施食을 받고 계십니다. 따라서 영가께서는 틀림없이 왕생극락을 하실 것입니다.

 

산승山僧은 영가 아드님과는 사제지간의 인연관계가 있고 또한 영가하고도 인연이 깊습니다. 산승이 새삼스럽게 좋은 법문을 안 한다 하더라도 영가의 그런 선근공덕善根功德으로 해서 극락왕생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한 인연관계로 해서 산승이 노파심에서 마지막 인도의 법문을 하겠습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사람이라 하는 것은 마음이 밝을 때는 어떠한 것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그대로 마음세계뿐이고 또는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아수라阿修羅나 인간이나 천상天上이나 그러한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무명無明에 가릴 때는 분명히 지옥도 있고 아귀도 있고 축생도 있고 아수라도 있고 인간도 천상도 모두 있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천지우주가 모두 다 광명光明뿐이고 또는 찬란한 화장세계華藏世界인데 깨닫지 못하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삼계三界가 있고 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그런 육도六道중생의 갈래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잘못 살면, 마음 깨닫지 못하고 어두우면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삼악도三惡道로 전락되는 것이고 조금 잘 살면 아수라, 인간, 천상으로 갈 것이나 이것도 역시 인간의 본마음 자리는 못됩니다.

 

영가여! 영가는 과거 전생에 선근善根을 많이 심어서 자연히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금생今生에 나와서는 네 분의 출가사문을 낳을 정도로 훌륭한 어머니셨습니다. 또 영가는 어떤 곤혹스러운 때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선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린 적이 없습니다. 산승山僧이 여기 칠장사에 머물다가 5년 전에 여기를 떠나갈 적에 영가께서는 산승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 그 전에도 여러 차례 만났는데 그럴 때마다 한 번도 얼굴이 흐린 적을 못 보았습니다. 그 밝은 얼굴, 밝은 미소가 산승의 뇌리에는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영가께서는 선근善根이 지극히 깊어 보이십니다. 그러기에 네 분의 스님을 낳으셨습니다.

 

영가여! 영가가 생전에 하신 공부도 많으셔서 영가의 공덕功德으로 해서는 틀림없이 극락왕생이 결정되시지만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육근청정六根淸淨한 그런 성자의 존재가 못 되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차마 잊어버리실까봐 산승이 노파심에서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연을 만나서 한 번 나오면 그때는 ‘날 생’자, ‘있을 유’자 ‘생유生有’라 하는 것입니다. ‘생유’에서 낳고 ‘본유本有’에서 한 세상 살고 또는 ‘사유四侑’에서 바로 죽고, 죽어서 미처 갈 곳을 모르고서 헤매는 그때는 ‘중유中有’란 말입니다. 영가는 지금 ‘중유’에서 극락세계로 비약적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은 업장業障이 무거워서 헤맬 때는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삼계三界를 윤회하는 것이지만 한 생각 깨달아서 밝은 마음이 생기고 또는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깨달아 버리면 그냥 극락세계로 바로 왕생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도 자기 바탕 근본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극락세계가 하품하생下品下生이요, 그 다음이 하품중생下品中生이요, 그 다음이 하품상생下品上生이요, 또는 올라가서 업장이 가벼우면 중품하생中品下生이요, 올라가서 중품중생中品中生이요, 올라가서 중품상생中品上生이요, 또는 올라가서 상품하생上品下生, 상품중생上品中生, 또는 상품상생上品上生이라, 바로 깨달아서 마음의 그림자 하나라도 없으면 그때는 상품상생으로 가는 것입니다.

 

영가여! 사람 몸이라 하는 것은 과거 전생에 업 따라서 자기 몸을 구성한 지·수·화·풍 사대, 지금으로 말하면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탄소나 그러한 각 원소가 합해서 우리 몸이 됩니다. 이런 것이 합해서 몸이 되는 것인데 우리의 마음은 대체로 어떤 것입니까? 마음은 우리가 잠수하고 또는 상상하고 또는 의식하고 또는 분별시비하고 수와 상과 행과 식이 모여서 우리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범부라 하는 것은 그 오온五蘊 이것이 허망한 줄을 모르고서 사대四大가 합해진 색신色身 이것이 참다운 자기 몸이요 또는 분별 시비하는 그 마음이 자기 마음이라고 집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나’라고 집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라 하는 것은 지·수·화·풍 사대가 잠시간 합해졌기 때문에 이런 것은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잠시도 지·수·화·풍 사대가 합해서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순간도 자기 몸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몸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것이나 산하대지 삼라만상 두두물물 모두가 이러한 물질적인 존재는 어느 순간도 머물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무상인 것입니다. 어느 공간에 머물러 있어야 그래야 시간적으로도 존재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어느 공간에도 머물러 있지가 않거니 어느 시간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무상無常이요, 공입니다. 무상이요, 공인 것은 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공인 것입니다.

 

바로 본다고 할 때는 어느 사람이나 어느 존재나 모두가 다 무상한 존재요, 무상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은 공이요, 또는 공이기 때문에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본체를 못 보고 현상적인 그런 모양만 보기 때문에, 모양도 그때그때 잠시간 모여서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을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몸뚱이 이것이 내 몸이요, 분별 시비하는 마음이 내 마음이라 합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우리 중생들이 성품을 못 보고서 그냥 현상만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본체를 못 보고 이름에 걸리고 이른바 명상名相에 집착하기 때문에 참다운 자기 생명을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여! 참다운 생명은 자기 몸, 이 색신이 아니고 자기가 지금 분별 시비하는 이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거품같이 또는 뜬구름 같은 가상假相에 불과합니다.

 

영가여! 오늘 인연 따라서 모이신 우리 사부대중이시여! 도둑놈 가운데서 참 도둑놈 또는 배신자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배신자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몸뚱이가 가장 지독한 도둑놈이고 가장 악독한 배신자입니다. 생전에 제아무리 산해진미로 호위호식을 시키고 또는 온갖 비단으로 해서 몸을 치장을 시키고 또는 금 은 폐물을 몸에 찬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종당에는 인사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태우면 재가 되고, 흙에 묻으면 그때는 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피나 우리 고름이나 우리 눈물이나 흔적도 없습니다.

 

ΟΟΟ영가여! 우리 사부대중이시여! 이 몸이 대체로 무엇입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몸 이것은 안개가 모인 것과 같고 또는 꿈의 부스러기가 모인 것과 같습니다. 지· 수· 화·풍風 사대의 땅기운 지도 역시 허망한 것이요 또는 물 기운 수도 허망한 것이요 또는 불기운 화 이것도 허망한 것이요 또는 바람기운 풍 이것도 허망한 것입니다. 산소도 허망한 것이요, 수소도 허망한 것이요, 질소도 허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에너지라 하는 물질이 아닌 하나의 생명이 진동하고 운동해서 그러한 것이 될 뿐입니다. 중생들은 본바탕을 못 보고 상만 보기 때문에 한동안 이루었다가 사라지는 구름 같은 존재를 ‘나’로 고집합니다.

 

그러나 이 도둑놈은 어떠한 경우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도둑놈은 욕심도 한정이 없어서 백만 원이 있으면 천만 원이 갖고 싶고 천만 원이 있으면 억대를 갖고 싶고 정말로 히말라야 산 보다도 더 많은 금덩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 못하는 것이 도둑놈 호주머니입니다. 다이아반지를 끼어 보나 무얼 끼어 보나 죽은 다음에는 자기 손가락이 흔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참다운 우리 생명의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가 바로 부처님인데 이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바로 그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지옥으로 아귀餓鬼로 축생畜生으로 헤매는 것입니다. 무명심만 없다고 할 때는 바로 내 몸이 천지우주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나의 본 생명 또는 일체 존재의 본 생명 이것을 아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뿐인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학인 동시에 철학이요 또는 종교인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인 인과율因果律 이것은 철두철미한 과학인 것이고 또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아는 참다운 철학, 또는 그 자리를 증명하는 참다운 종교는 역시 불교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허망虛妄무상無常한 상을 떠나서 참다운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를 믿고 사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인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가 갈 곳은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삼독심三毒心을 떠나버린 곳으로 무명심無明心을 떠나버린 분만이 갈 수가 있습니다.

 

영가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십시오. 극락세계는 필경 돌아가야 할 일체 중생의 고향입니다. 극락세계는 땅도 황금으로 되어있고 나무도 숲도 모두가 다 금색 찬란한 광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극락세계는 광명정토光明淨土입니다. 극락세계의 교주는 극락세계에서 우리 중생에게 법문하시는 부처님은 아미타불입니다. 또한 극락세계는 삼독심을 떠난 무수한 보살들이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에 가는 첩경捷徑을 말씀하신 법문인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에는 법장비구가 극락세계를 건립할 때에 세운 48원의 원력願力이 있습니다. 그 원력 가운데서 십팔원이라,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 염불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그러한 법문이란 말입니다. 그 법문 가운데서 우리 중생이 설사 업장이 무겁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누구가 업장이 없겠습니까. 삼독심이 있는 중생이라면 누구나가 다 업장이 있습니다. “범부凡夫가운데서 비록 업장이 무겁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참다운 마음으로 열 번만 ‘나무아미타불’을 왼다고 하면 틀림없이 극락세계에 태어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전에 일심으로 조금도 남을 미워하지 않고 참다운 평등심을 가져야 할 것인데 보통 사람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가여! 영가의 참 생명은 영가의 몸도 아니요, 영가의 자식도 아니고, 영가의 처자도 아닙니다. 자기의 몸도 자기를 못 따라오고 자기 자식도 자기를 못 따라오는 것이고, 자기 아내도 자기 남편도 못 따라옵니다. 어떠한 것도 못 따라옵니다. 오직 자기의 그런 업식業識만 가지고서 홀로 가는 것이 우리 중생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몸이 있고 자식이 있고 형제가 있고 이럴 때는 일념이 되기가 어려우나, 업식만 가지고 있는 그러한 심식心識이기 때문에 마음만 잘 먹어 한 생각 돌이키면 그냥 일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무한의 세계이기 때문에 어떠한 세계나 한도 끝도 없이 모두가 다 극락세계입니다. 우리 중생이 본다고 할 때에는 극락 따로 있고 지옥 따로 있습니다만 밝은 분들이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비단 도인들이 가는 그 세계가 극락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도 바로 화장세계華藏世界라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우리 중생들은 상만 보고 또는 겉만 보는 것이지만 본 성품을 보는 성자의 안목에서는 본 성품이라 하는 것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기 때문에 나무나 소나 어떠한 것이나 우리 중생들이 상에 가려 중생들이 나쁘고 더럽다하더라도 더러운 것은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이대로가 바로 극락세계요 화장세계이기 때문에 극락세계라 하는 것은 정말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광명정토라 어느 곳 어느 처소 모두가 다 진여불성의 청정미묘한 영생의 광명으로 충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영가여! 영가가 아직은 그렇게 안 보인다 하더라도 영가가 가실 극락세계는 조금도 흠이 없는 훤히 빛나는 자비慈悲요, 지혜요, 또는 일체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그러한 광명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극락세계의 그 마음을 단 한 순간도 안 놓치기 위해서 극락세계의 교주, 참다운 생명의 이름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부르십시오.

 

영가여! 극락세계, 우리가 갈 참다운 고향 또는 우주의 참다운 실상實相인 동시에 일체존재, 일체중생이 돌아가야 할 참다운 고향 이 자리를 마음에 간직하시고서 다만 한시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참다운 이름, 우리 진여불성자리의 참다운 이름인 동시에 우주의 이름 또는 극락세계의 교주의 이름인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부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우리 사부대중이시여! 오늘 천도薦度를 받는 청신녀

ΟΟΟ영가의 극락왕생을 돕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섭섭하다, 슬프다’ 그러한 습정習情에서 우러난 말들은 극락세계의 왕생을 돕는 힘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다운 생명의 고향은 극락세계다 우리 참다운 생명의 본체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믿고서 참 이름, 우주의 참 이름 또는 일체 존재의 참 이름인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외우시기바랍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오늘 극락세계로 바삐 가시는 ΟΟΟ영가의 왕생을 촉진하는 제일의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그러한 중생의 망념으로 볼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밝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러한 것은 흔적도 없이 모두가 다 청정미묘한 광명세계인 것입니다. 깨달으면 바로 부처요 또는 바로 극락이고 깨닫지 못하면 바로 지옥이요 또는 아귀요 또는 축생이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간에 있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무서운 도둑놈인, 가장 배신자인 내 몸뚱이 이것을 생각하고 참다운 생명을 외면할 때는 영원히 청정한 빛을 등지고 어두운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우리 인간에 있어서는 어두움과 광명이 따로 있습니다. 자기 몸뚱이만 생각하고 자기와 가까운 권속의 몸뚱이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물질위주만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주의 참다운 도리 이것은 누구나가 참다운 진리의 부처님을 딱 믿고서 그 자리를 확신하고서 그 자리에 가도록 가상假相이나 또는 가명假名을 떠나서 우리가 생활도 하고 공부도 하는 것이 우리가 우주의 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진리에 반하는 길은 참다운 자유와 참다운 행복이 없습니다. 진리를 따라야 만이 참다운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1990년 9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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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ΟΟΟ49재 천도법어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우리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죽고 살고 하는 생사生死입니다. 다른 것은 그때그때 허망虛妄무상無常합니다만 생사대사生死大事, 이것은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영가들은 지금 죽음 길에 계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삶만 있고 죽음은 없으면 좋겠고 또는 만남만 있고 이별이 없으면 좋겠습니다만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하는 것은 꼭 상대적으로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또는 밤이 있으면 낮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영영 죽어져버려서 다시 부활이라 하는 신생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나쁜 것이겠습니다만 죽음이라 하는 것은 금생今生에 어설픈 인간이 생生을 그만 두고서 새로운 생으로 다시 한 단계 높은 생으로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세상이 완벽한 지상의 행복이 아닐 바에는 꼭 죽음은 필요한 것입니다.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사람 생명이 한 번 있으면 꼭 네 가지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탄생이라 하는, 출생이라 하는 남이 있고 한 번 났으면 오랫동안 인연이 다 할 때까지 살아야 하는 그런 생이 있고, 그 다음에는 다시 다른 생으로 옮기는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 다음에는 다시 중유中有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과정 즉 맨 처음에 태어나는 그런 생유生有와 그 다음에 한 세상 사는 그런 본유本有라, 그 다음에 죽어지는 ‘죽을 사’자 사유死有라, 그 다음에 죽어서 다음 세상 까지 가는 그런 죽음세계, 저승세계 이것이 이른바 중유세계입니다. 생유, 본유, 사유, 중유 이러한 네 가지 과정은 누구나 다 거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 지금 바르게 사셨고 복도 많으시기 때문에 이 자리에 이렇게 유족들이 많이 계셔서 영가들의 명복을 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 하는 것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풀잎 끝에 이슬같이 허망虛妄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죽음은 노소부정老小不定이라, 늙은이라 해서 빨리 가는 것도 아닌 것이고 나이가 적다해서 반드시 뒤에 가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중생들은 그런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것을 허망하지 않다고 하는데서 우리 중생의 고뇌가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몸은 어떠한 것인가? 사람 몸이란 것은 불교적인 술어로 하면 땅 기운 또는 물 기운 또는 불기운 바람 기운 이러한 기운이 모여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대적인 말로 한다 하면 역시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이러한 것들이 잠시간 인연 따라 모여서 우리 몸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 있는 이 몸은 본래 있던 몸이 아닌 것이고 바로 전생에 이와 닮은 몸도 아니었습니다. 또는 태어 날 때는 이와 같이 성인成人의 몸도 아니었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금생에도 그때그때 변동해서 잠시간 각 원소가 모여서 구성 되는 그 몸, 그 몸은 종당에는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변동해서 마지않는 그 몸 또는 내생 가서는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그 몸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는 데서 모든 인간의 고뇌가 생겨납니다. 내 몸도 그렇고 또는 자기 아내 몸도 그렇고 자기 남편 몸도, 자기 자식 몸도 똑같이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습니다. 현재도 그때그때 변동해서 마지않습니다. 이렇게 허망한 것을 우리 중생들이 잘 모르고 내 몸이요, 네 몸이요, 내 권속이고 내 아내고 그렇게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근본도리를 탐구하는 깊은 철학이라던가, 인생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던가 이러한 것은 모두가 다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역설합니다. ‘허망虛妄무상無常’하다, ‘꿈같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꿈’인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우리 인간이 죽음도 없고 이별도 없고 상대적인 허망 무상한 것을 떠나서 가는 세계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생명이 정말 허망 무상으로 끝나버리면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이 본래적으로 떠나온 생명의 고향도 있는 것이고 또는 장차 돌아가야 할 생명의 고향도 있습니다. 이것이 극락세계입니다. 어떠한 누구나가 다 극락세계에서 와서 다시 극락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어째서 극락을 떠나 왔는가? 혹시 천지 우주의 순환과정 따라서 그때그때 인연이 우리 심식心識을, 우리 마음을 덮어 버리면 모두가 다 본래에서 ‘나’라는 것이 없는 것인데 ‘이것이 나다’ 이렇게 고집하는 데서, 그래서 우리가 극락세계라 하는 영원한 낙원, 영원히 행복스러운 데서 추방되는 것입니다.

 

추방은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둡기 때문에 잘 몰라서 이래저래 구하고 헤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죄를 많이 지어 이 몸뚱이에 너무나 지나치게 탐욕심을 내다보면 그때는 저 아귀餓鬼로도 뚝 떨어지는 것이고 또는 이 몸뚱이 지키기 위해서 이 몸뚱이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해치면 지옥으로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더욱 보호하고 자기 권속이나 자기 가족의 몸뚱이를 더욱 더 보호하기 위해서 살다보면 사람이 거칠어지고 아수라阿修羅 같은 세상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다행이 그런 가운데도 탐욕심도 그렇게까지는 많이 안내고 성내는 그런 번뇌도 그렇게 많이 안내고 또는 거칠어지는 마음도 어느 정도는 사라지고 선행善行도 하고 나쁜 마음도 내고 이렇게 우리가 생활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과거 전생에 선행을 많이 지어서 금생今生에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제가 뵙기에 굉장히 선량한 어른이셨습니다. 그래서 금생에 인생을 살고 가실 때는 마땅히 돌아갈 근본고향으로 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고향으로 못 가시면 다시 인간으로, 복이 적으면 인간 가운데도 박복하고 병도 많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갈래고 윤회하는 것인데 앞서 말한바와 같이 가장 못 살면 지옥 가는 것이고, 분명히 지옥도 실존적인 세계입니다.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더러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지옥이나 그런 세계는 우리 중생의 권선징악을 위해서 우리 중생한테 선행을 권장하기 위해서 방편方便으로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나 이것은 방편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분명히 있듯이 지옥 존재도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인간 존재가 허망하듯이 지옥도 허망할 뿐입니다. 잘못 살면 지옥으로, 조금 낫게 살면 그때는 일반 동물로, 더 낫게 살면 아귀餓鬼귀신으로, 조금 나아지면 싸움만 좋아하는 그런 신의 세계인 아수라신으로, 더 나아지면 사람으로, 조금 더 나아지면 천상으로 또는 성문聲聞으로, 연각緣覺으로, 보살로 부처로 이렇게 뱅뱅 도는 것입니다만 생명의 본바탕은 부처님입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라 하는 이것이 본래의 생명인데 불성을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모양을 ‘내 것이다.’ 집착하는 데서 나한테 좋게 하면 탐욕심을 내고, 남을 시기하고 성내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마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근본번뇌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의 몸, 이것이 허망한 것인데 허망하지 않다고 보고 ‘이 몸이 영구히 존재한다.’ 이렇게 고집하는 데서 우리 무지無知의 근본된 번뇌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탐욕심이 나오고 성내는 마음이 나오고 그렇게 해서 이 세계라 하는 것은 아수라阿修羅라 하는 혼란스러운 그런 갈등된 세상이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영가여! 영가가 가실 곳은 극락세계입니다. 또는 만 중생이 돌아갈 세계도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 이것은 광명光明의 세계이고 죽음도 없고 이별도 없고 또는 실패도 없는 영원한 만남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상대적인 것을 떠나보내는 참다운 시작의 세계이기 때문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불구부정不咎不淨이요, 청정하거나 더러워질 것도 없고, 또는 부증불감不增不感이라, 더하고 덜하지 않은 그러한 세계입니다. 마치 에너지가 천차만별로 무수한 그런 현상계가 나온다 하더라도 에너지 불멸법칙이라, 에너지는 조금도 늘지 않고 감하지 않듯이 부처님의 세계, 영원의 실상세계인 극락세계도 역시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행복만 충만한 세계입니다. 한번 만나면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세계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우리가 돌아갈 근본고향인 것입니다.

 

영가여! 이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의 눈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석가모니를 위시한 예수나 또는 공자나 무수한 성자가 다 증명한 길입니다. 명명백백한 실상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영원히 존재하는 광명으로 충만된 세계, 이러한 물질적인 몸이 아니라 순수한 장엄스러운 광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땅도 숲도 모두가 다 광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세계를 가기위해서는 분명히 이 자리를 믿어야합니다. 본래 이 자리가 우리 마음의 본성자리지만 이 자리를 안 믿으면 이 자리에 갈 기약이 없습니다. 딱 믿고서 그 자리에 계시는 모든 그런 성중聖衆들, 모든 성중들이 본래 생명자리, 모든 성중들을 거느리는 가장 어른자리, 그 자리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생명 본바탕인 동시에 극락세계의 바탕이고 또는 주인공이고 또는 모든 중생의 본래 주인공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다 아미타불이 본래 생명자리인데 거기까지 미처 못 가니까 구분해서 보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도 역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상품상생上品上生이요, 상품중생上品中生이요, 상품하생上品下生이요, 우리의 그런 업장業障이, 우리 번뇌가 녹아짐에 따라서 비록 가벼운 업장 때문에 극락세계는 갔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가장 순수한 단계는 온전히 부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순수하지 못하면 상품중생이요, 상품하생이요, 중품상생中品上生이요, 중품중생中品中生이요, 중품하생中品下生이요, 하품상생下品上生이요, 하품중생下品中生이요, 하품하생下品下生이요, 이런 세계는 가장 순수한 곳에는 미치지 못하는 세계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도 극락極樂의 범주이기 때문에 고통도 없고, 이별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순수도가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되어서 완전무결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중생이나 모두가 다 이것이 근본자리이기 때문에 인간뿐만이 아니라 딴 동물이나 딴 식물이나 딴 무생물이나 모두가 다 근본은 그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부처님자리인 것입니다. 하나의 티끌이나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자리로 부터서 인연 따라서 이렇게 태어나고 저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음이온 양이온 결합하는 양에 따라서 산소나 수소나 그런 구분이 있고 또는 거기에서 각 세포라던가 일체 물질이 구성되듯이 일체 존재 역시 모두가 근본, 가장 순수한 에너지, 가장 순수한 생명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이 자리에서 모든 중생이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은 종당에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몸뚱이는 좋아하고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 몸뚱이는 싫어하겠지요.’ 이렇게 구분하고 업을 짓기 때문에 본래 고향자리, 부처로 못 가는 것입니다.

 

영가여! 극락세계는 우리 눈앞에 훤히 전개가 되어 있습니다. 에너지가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전자가 되고 한다 하더라도 에너지 자체는 변동이 없듯이 부처님자리, 부처님의 그런 생명자리는 어떻게 변화가 됐다 하더라도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광명光明은 사람한테나 또는 하나의 티끌에나 또는 독사한테나 어디에나 훤히 빛나 있습니다. 다만 중생이 색안경에 가리어서 중생의 번뇌에 가리어서 부처님의 그런 참다운 도리, 참다운 광명을 못 볼뿐입니다.

 

영가여! 영가의 몸은 영가의 몸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받은 몸입니다. 따라서 이 몸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영가여! 영가의 권속도 어쩌다가 금생今生에 태어나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나그네 길에서 스쳐가듯이 인연지은 인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권속도 영구히 자기의 소유가 못 됩니다. 자기가 쓰던 그런 세간, 재물, 자기 권력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것도 자기 마음 외에는 자기 순수한 마음 외에는 자기 것이 못 됩니다. 이러한 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할 때는 우리 본 고향인 극락에 못 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꿈같은 것입니다.

 

영가여! 그러나 금생에 지은 인연이 참 소중한 것입니다. 영가가 금생에 지은 아들이요 딸이요 자기 형제간들이 잘 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베품은 무엇인가? 이것은 극락세계의 도리, 부처님의 도리, 우주의 진리에 따라서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것을 허망 무상하다고 분명히 인식하고 극락세계로 바로 가시는 그것이 자기 권속들한테 가장 좋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적에 자기 아들이나 딸이나 아내가 다 극락세계의 길로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 사람 역시 극락세계의 길로 지향해서 허망한 것에 대해서 집착을 끊고서 바른 생활로 ‘원래 나와 너는 둘이 아니거니 천지우주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우주라 하는 그러한 하나의 생명체와 동질성이라, 모두가 다 같은 차이가 없는 생명체 가운데서 다만 바다 가운데 일어나는 거품 모양으로 나요 너요 구분이 있습니다만 모두가 바닷물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체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느껴버려야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을 끊습니다.

 

영가여! 자기 몸은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거품과 똑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서 극락세계로 빨리 가시는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권속들한테, 또는 친구들한테 누구한테도 가장 좋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권속 또한 역시 극락세계, 자기 본래적인 고향으로 빨리 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뿌리가 하나고, 같이 상통하기 때문에 ‘내 자식이나 내 친구가 빨리 바른 우주의 진리에 따라서 바른 길로 가야하겠구나.’ 이렇게 한번 마음먹을 적에 그런 기운이 거기에 미치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薦度에 동참하시는 유가족들이시여! 돌아가신 영혼에 대해서 가장 좋게 우리가 받들어 드리는 그런 명복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슬프게 울고불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많은 물질로 공양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계시는 유족들이 행동을 바르게 하고 말을 바르게 하면서 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우리 본고향 자리를 지향해서 애쓰고 바르게 사시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내 개인만 내가 아니라 우주가 하나의 생명인데 ‘모든 생명과 더불어 내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적에 자기를 위해서 남을 구박한다거나 해코지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모든 생명은 본바탕에서 본다고 할 때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기랑 뿔뿔이 헤어진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모든 생명이란 하나’라는 생각, 그 생각을 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 ‘자기 이웃을 위해 베풀어야 하겠다. 자기만을 위해서 착취를 안해야 하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는 말도 중생의 마음을 상하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모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 역시 생물은 근본이 같거니 하나의 곤충이나 모두가 다 근본생명이 같거니 어떠한 것도 생물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 또 음탕한 행동도 말고 거짓말도 않고 허튼 음식도 먹지 않고 이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 생명은 본래생명 자리로 보다 빨리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돌아가신 영가에게 귀중한 최상의 효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시면 나중에 같이 극락세계에 가셔서 영생의 만남, 영생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ΟΟΟ 영가여, ΟΟΟ 영가여! 자기 본래 생명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인 부처님을 생각하시고 아미타불을 생각하시고 이렇게 하셔서 한 생각도 흐트러짐이 없이 한 생각도 부처님을 생각함에 후회함이 없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극락세계를 생각한다고 할 때는 순식간에 영가는 극락세계에 상품상생上品上生, 가장 좋은 그런 윗자리에 계시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왕생극락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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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족행 할머니의 극락왕생 -

 

 (정토마을 http://www.jungtoh.org/능행스님 글)

 

 

 

지난 오월 ...

새들이 노래하고 토끼가 딩구는 이곳에 지족행 보살님이 오셨다.

위암 말기

복수가 차서 걸을 수 가 없었다.

풍경이 처마끝에서 땡그렁 ~~땡그렁

시님 참 좋소 ~ 우메 내가 무슨 복일까여?

참말로 좋군마~~ 내는 마 부처님 도량에서 죽는게 팽생 소원이여지라.

칠십노구에 깊은 병이 든 보살님

스님들의 간호를 받고 무지무지 해복해 하신다.

오메 네가 안아퍼면 우리시님들 옷하나씩 만들어 드릴터인디~~우짠디야

말씀이 많으시다.

막내아들과 딸 손잡고 오신 당신을 기억 합니다.

송광사에서 구산스님께 지족행이란 불명을 받고 30년을 꼬박 절집에서
삼보를 받들고 살아오셨다고 말씀 하셨다.

뼈만 남은 사지에 불러온 복수가 고통스러워보여 복수뽑고 미음을 드리고 목욕시키고 기도해드리고...

시님 나 여거서 죽어도 되지라 ~ 그럼요

아들들이 못가게 하는 대두 네가 와버러지라 스님이 계신다고 했어

여기온께 서너달 더 살고픈디...
어쩐디야 진짝에 서둘러 와야 하는 건디...

휠채어타시고 법당에 갔어 맨바닥에 절을 하신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저는 요 극락으로 갈텐께 부처님 그리 알아쁘리소

날 꼭 데리고 가야허요 부처님 !나무아미타불

아이구 못일어나신네 간호사들 난리났다.

시님 나 울매나 살거소
나부처님 한께로 갈텐께 아무걱정없어라~~~

매느리들 한께 쪼개 미안허요 팽생 절에다닌다므 우째 이런 몹쓸병이 들어을까?하고 부처님 영험이 떨어질까 말이여

다 내 업인디 ~ 그러지라 시님?

오신지 한달 ...

가족들이 수시로 오고 전화도받고 ....

점점 육신이 무너저 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중환자 실로 옮겨 모셨다.

내가 드려주는 아미타 노래에 푹 잠기시는 지족행 보살님...

오는 지~ 가는 지~ 있는 지~ 흔적없이, 소리 없이, 허드래 일 다하시며 염불수행하신 지족행보살님...

나는 사십구제 필요없어라~ 바로 갈텐께
그리허두 자식들이 흔다믄 혀야제

몇칠 못가실것 같아 딸에게 부탁드려렸다

가실려고할때 갈라입힐 고운 바자마 한벌 사오라고...

사오셨다 멋진것으로

시님 나 갈려고 할때 이옷 입소 ~예~
병원복 입고 가믄 쓰것소 고운것 입어야제

맞소~맞어 성품 좋으신 보살님!
함께 조금더 살고싶은데 떠나려고 준비를 하시는 것 같다.

임종이 닥아오면 지 수 화 풍 이 차례대로 무너진다.

임종의 예후를 보이기 시작하신다.

임종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 지어온 업력에 따라서 그리고 마지막 종착역에서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향해 다가서는가에 따라서 죽음의 질이
천차 만가지다.

잘 살아야 잘 죽는다. (어떤삶이 잘 사는 삶 일까?)

유월 바람이 풍경을 스치며 지나가던 날 새벽..

사력을 다해 염불을 하신다 임종이 닥아오는 것같다.

자식들에게 연락을 했다

몇시간후에 임종하실것 같다고.

3남 1녀를 두셨는 데 큰아들 내외만 늦었고 다른자식들은 3시간 이내 도착 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아미타 삼존불 모시고 향피우고 향 물로 몸 닦고 이제 떠날 준비가 다되었다.

혈압 맥박 신체적인 증상 모두 임종의 임박함을 말해주었다.

혀가 말려 들어가고 동공이 풀렸다

작은아들이 어머니!!! 형 저그오고있는 디 조금만 기다렸다가 보고가소

녜! 보고가세요 불효자식 만들지말구요

보살님 ! 지족행 보살님 ! 부처님 어디에 계세요 ?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저~기 구름타고...

아미타부처님이세요 ?

관세음 보살님이세요?

아미타불 ....

혼자오셨어요?

고개를 좌 후로 흔들어주신다.

팔을 벌려 갑짝이 무엇을 잡으려 하다가 푹 팔을 떨어떨인다.

모두 깜짝 놀랬다.

그러더니 풀린 동공이 다시모이고 혈압 맥박 다시정상 으로 돌아오고

눈을 뜨신다.

아이 ~이놈아 !

부처님 손을 잡으려고 하는데 니가 너그 형보고 가라고 하니

부처님이 구름위에서서 잠시있다가 오겠다고 하시고 갔어뿌렸다.

우리는 잠시후라는 말씀듣고 임종을 기다렸다.

큰아들 며느리가 도착했다.

부처님이 니 만나고 오라고 했다께.

아들얼굴도 만져보시고 며느리 손도 잡아주시고...

한시간이 넘게 흘러갔다 .그런데 보살님은 더욱 선명한 모습으로 깨어나셨다.

한참후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고 크게 한바탕 웃었다.

오늘은 우리어머니 예비소집일이였다.작은아들 유머

둘째가 남고 모두돌아갔다.

보살님 웃으시면서 거실에 나와 나 옷 벗을래

우리는 또 웃었다

이옷 벗겨주고 병원복입혀줘 이거 나중에 입고 가야제

우리는 많은이야기를 들었다 .

구름을 타고 오신 부처님이 당신손을 잡으려 하다가 아들의 애원을 들어시고 잠시 시간을 허락 하셨단다.

그리고 48시간이 지난 다음 다음 새벽날 이였다.

갑짝이 맥박이 떨어지고 혈압도 뚝~뚝떨어진다.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다 이제는 실제 사항이라고...

막내가 먼저 도착했다 .어머니 !

나 부러지말거래

예~알겠습니다. 잘들 살거래

혀가 말려 들어가고 숨을 몰아쉰다 .

그러더니 지금 달려오고있는 큰아들을 찾는 다

지금 오고있어요

나~~빠쁜게 (손을 귀에다 덴다) 전화~~~ 내가 알아들었다.

큰아들께 전화 통화를 하고싶어하셨다.
핸드폰을 귀에다 데 주었다.

야야 너는 성질이 급한께 천천히 오거레 그리고 형제지간에 우애있게살고 ...애미는 ? 애미야 고맙다 ! 맏이로 고생많았다. 잘 살아라
내가 니 사랑하는 거 알제 니만 믿고 간데 부처님 공부 잘허구) 나는 민망스러워다 다른 자식은 와 있어도 찾지도 안고 큰아들 며느리만 찾으니...

천천히 오거레 ~~천천히~~~

전화를 놓으신다 아들이 수화기를 통해 어머니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불러다 보살님 ! 부처님은...?
고개를 끄떡이신다.

그리고 웃으신다 .
그러더니

눈~딱 감으시고 입속으로 염불히시더니 힘없는 손을 모아 합장하고

부처님 우리나라 잘되게 해주고 우리자식들 부처님 공부 잘 하게 해주시고 우리 시님 병원 빨리 지을수 있게 도와 주시오
나무아미타불

좋고 좋군아 ~ 좋고 좋군아~
나무아미타부~~불울 들어간 숨이 나오지 않았다 .
동공이 풀렀다. 아침 8시 경

아무도 울수없는 기쁨이 충망한 열반이여!

합장 한 체 로 당신께옵서는 무량수 부처님 품으로 돌아 갔습니다.

아! 아! 거룩한 보살이여!

아~~아~~거룩한 열반이여!

니르바나에 들었다. 합장한체....

복수도 다빠지고 메마른 얼굴레 홍조가 띈다.

어디에선가 향기가 진동을 했다 .

나무이미타불

필시 정토의 향기여라.

우리는 수시로 들어가 그 그윽한 향기를 맡았다.
8시간정도...

너무나 아름다운 고인의 모습이 거룩하여 얼굴을 덮을 수 가 없었다.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이시여 고이안고 가시옵소서

당신께옵서 이곳에 오신줄 압니다 .

거룩하신부처님 ! 이몸을 던저 찬탄 예경 올리옵니다.

오거룩한 님이시여!

나무아미타불

지족행이여 ! 연꽃으로 다시 이땅에 피어나소서!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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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직접쓰신 유명한 책인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 소개된 전생요법과 관련된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만 보면 겁을 냅니다.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고 큰 강 옆에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데 아무리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생회귀를 시켜 보니,
그는 전생에 지중해를 내왕하는 큰 상선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상선의 상인들에게 죄를 지어서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닷물 속으로 던져져서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러니 금생에 물만 보면 겁을 내는 것입니다.


이 원인에 의거해서 치료를 하니 병이 나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높은 계단이 무서워 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보니,
그는 전생에 중국의 장군인데 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만 보면 겁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캐논 보고의 사례에 의거해서 학자들이 전생요법을 개발하여 요즈음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1977년 10월 3일자 ‘타임’지에 보면 이에 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잡지에서 자신 있게 보도할 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전생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병 치료에 있어서도 전생요법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는데도
전생과 윤회에 대한 의심을 갖는다면 불교를 안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전생이 있고, 윤회를 한다고 할 때 어떤 법칙에서 윤회를 하는가?
내가 마음대로 원하기만 하면 김씨가 되고, 남자가 되고 할 수 있는가?

캐논 보고에 의거해서 살펴보면
그것은 순전히 불교에서 얘기하는 인과법칙(因果法則)에 의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인과법칙이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 (惡因惡果)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착한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원인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제 전생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전생에 착한 사람이었는지 악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서
그 사람의 금생(今生)의 생활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비교해보면
전생에 악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불행한 사람이고,
전생에 착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에서 말씀하셨습니다.

[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

전생에 내가 착한 사람이었나 악한 사람이었나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는 것, 지금 행복한 사람이냐 불행한 사람이냐를 살펴보면 됩니다.


내생에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불행하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현대 정신과학에서는 인과(因果)를 인도 말인 카르마(Karma,業)라고 하여
이제는 세계적인 학술용어가 되었습니다.

인과 문제에 대해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전기도 많이 나와 있으며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를 ‘기적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기적을 행사하느냐?
남의 병을 진찰하는데,
주소 성명만 가르쳐 주면 수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병을 모두 진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서 처방을 내고 병을 치료하는데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무려 3만 명 이상이나 치료를 했습니다.
미국 뉴욕에 앉아서 영국 런던에 있는 귀족들을 진찰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사람들도 진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구가 영국 런던에 갔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케이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서 바로 뉴욕에 전화를 해보면 그의 말이 그대로 맞습니다.
케이시는 병을 진찰하면서 그 원인이 전생에서 넘어오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교도였습니다.
예수교에는 전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병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학자들이, 종교와 학문은 다르다고 그를 설득하여,
이것을 학문적으로 끝까지 조사해 보자고 의논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병 치료하는 것은 그만두고 전생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500명의 전생을 조사하였습니다.
그의 사후에도 버지니아 비치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그의 원거리 진찰과 전생투시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연구하고 있으며
많은 책들이 발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초능력과 비밀』과 『윤회의 비밀』,
이 두 권은 공산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쟁투시에 의한 전생과 금생의 인과를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고 사는 부부간인데도 그 사이가 무척 나쁩니다.
그 전쟁을 알아보니 서로 원한이 맺힌 사이입니다.

내외 간에 잘 지내는 사람을 알아보니
전생에 부녀 관계이거나 혹은 모자 관계입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하겠지만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본래 인과(因果)란 그렇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업장은 두텁고, 눈은 어두워 이해가 가지 않으니 곤란한 것입니다.
숙명통을 하여 전생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서 이런 때에 현대의 과학자들이 연구한 전생과 윤회 및 인과에 대한 좋은 자료를 소개하면
부처님 말씀을 믿고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 난쟁이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알아보니 부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야망이 많아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면 내생에는 키가 작게 되는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을 올려다봐야 하고 남에게 내려다보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 윤회를 한다 - 인과가 있다]는 것은

현대의 과학적 자료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본 스님이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우주의 진리를 다 깨달은,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캐논이라든가 케이시라고 하는 과학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3천여 년 전에 모두 말씀하셨는데
현대과학이 이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부처님 말씀 중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 이해가 부족한 줄을 알아야지
무조건 배척하거나 반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며 알고 또 바르게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성철스님의 "자기를 바로 봅시다' 중에서

옮긴글입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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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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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서 ‘육근호용六根互用’을 설한 적이 있다. 즉,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귀로는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것은 신통의 경계로서 범부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초능력이 있는 사람 가운데 귀로써 글을 보고 또는 

손으로 글을 인식할 수 있는 자도 있다. 

대만대학의 이사잠李嗣涔 교수와 중앙연구원의 왕유공王唯工 교수, 그리고 기타 몇 분의 대학교수들이 요 몇 년

동안 과학적인 방법과 기구를 사용하여 손가락으로 글자를 식별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어린이 세 명을 데리고 실험을

진행했었다고 한다. 수백 차례의 시험을 통해 그들에게 모두 손가락으로 글자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실험방법은 문자 또는 부호(기호)·그림 등을 종이 위에 적거나 인쇄하여 밀봉포장한 다음에 요 몇 명의 어린이들이 

손가락으로 접촉하게 하여 그들이 이속에 어떤 글자 또는 어떤 그림인지를 감지하게 하는 동시에, 측정 기구로 그들의

손바닥·팔뚝 그리고 두뇌의 반응을 측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이 세 명의 어린이들이 모두 몇 십초 또는 

몇 분 이내에 백프센트 정확하게 손으로 ‘본’ 것이다. 

1999년 8월 말, 며칠 동안의 실험 도중에 어떤 교수가 ‘불佛’자를 적어 그들에게 주면서 손으로 식별하도록 하였다. 

신기하게도 이 ‘불’이라는 글자가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불’자가 아닌 온통 매우 밝은 빛이었으며, 빛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있었고, 심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이 상쾌해지게 만드는 우렁찬 웃음소리도 들렸으며, 스님·절 등도 

보였다고 한다. 또한 대만식 발음기호로 적은  ‘ㄈㄛ’, 또는 영문으로 적은 ‘Buddha’에서도 밝은 빛이

 번쩍이는 것만 보이고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만일 다른 글자나 그림이라면 바로 어떤 글자 또는 어떤 그림인지를 알아낼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빛도 없고 

소리도 없었다고 하였다. 만약 ‘불’자와 함께 연결되어 있는 문장이었을 때, 예컨대 ‘불산佛山’·‘불미급佛米級’

·‘비불리산장比佛利山莊’· ‘애불륵사봉埃佛勒斯峰(에베레스트산)’ 등의 경우, 그 결과 앞뒤 글자만 보이고 

‘불’자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불’자가 있는 곳은 온통 밝은 빛이었고, 심지어 불자 근처의 글도 광명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고유한 부처님의 명호, 예컨대 ‘아미타불’ 혹은 ‘약사불’·‘미륵불’ 등이라면 이를 더욱 초월하여 광명만 있을 뿐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은 없었다고 한다. 특히 ‘약사불’을 식별할 때에는 “한약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중간에 어떤 사람이 귀신 ‘귀鬼’자를 그 중의 한 명에게 식별하라고 주었더니, 그는 종잇조각을 만지면서 

“온통 캄캄하다”고 말했다. 


일분 정도 지나 또 “매우 어두운 검붉음”이라 말하였고, 30초 더 지나서야 ‘귀’자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금 줄곧 매우 춥고 매우 불편했었다고 하였다. 
(이상의 실험은 이사잠 교수가 지은 『믿기 어렵다―과학자들이 신비한 에너지장을 탐구하다』에서 발표함)

요 몇 명의 어린이들이 정말로 초능력에서 말하는 세 번째 눈이 있거나 외부의 영적 존재가 붙었는지는 우선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번의 실험이 뜻밖에도 몇 분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놀랍고 찬탄하고 감동하고 흥분하고 온갖 상념이 

끓어오르게 하였다. 또한 견문을 크게 넓혔고,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찬탄하였으며, 실험실 전체의 분위기가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불교내의 신성한 어휘 또는 특수한 음절에 신기한 에너지와 수승한 기능이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범부의 육안으로는 흰 종이에 검은 글자뿐이어서 전혀 특이할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초능력(영적 세계)의 ‘세 번째 

눈’ 속에는 찬란한 광명 또는 장엄한 이상異像들로 보였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상 밖에도 

부처의 세계가 존재하며,  ‘부처님 명호’가 불국토로 들어가는 통로임을 드러내고 증명해낸 것이다.

경전에서 늘 말씀하시길 “부처님마다 모두 치성熾盛한 광명이 있다”고 하셨다. 이른바 “부처님과 부처님의 도는 똑같고, 

광명과 광명에는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중에 특별히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존귀하고 최고여서 제불의 광명이 

능히 미치지 못한다”고 찬탄하셨다.

‘부처님 명호’와 접촉하면 밝고 따뜻하고 편안했지만,
‘귀’자와 접촉하면 반대로 온통 캄캄하고 음랭하며 매우 불편함을 느낀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님을 억념하며 염불하면 그 사람의 몸에는 불광이 생기고, 현생에서는 본래 있던 지혜를 계발하고 

어두운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으며, 임종할 때 정토에 왕생하여 다 같이 무량광 무량수를 증득할 수 있다.     (혜정 적음)


생각건대: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가장 존귀하고 제일이어서 제불의 광명이 능히 따라올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처님의 광명이 있는 곳에는 나쁜 기운이 사라지고 원결이 풀리며 악은 선으로 바뀌게 된다.
만약 삼악도에서 이 광명을 본다면 다시 고뇌가 없고 모두 해탈을 입게 된다.
귀신이 있는 곳은 불길한 곳이므로 응당 부처님의 명호를 둠으로써 망령을 천도해야 한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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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통한 실험 등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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