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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세계

화엄경에 의하면 연화장 세계의 최하에 풍륜이 있고, 풍륜 위에 향수해가 있고 향수해 가운데 대연화가 있고 연화 위에 십불가설 불찰 미진수 찰종이 있으니 이것을 화장세계라 하며 그 많은 찰종들은 모두 이십중세계로 되었다.

 

그 한복판에 있는 찰종의 제십삼층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가 있는 십삼불찰 미진수 세계로 둘러쌓였으며, 사바세계의 서쪽으로 십만억 세계를 지나가서 극락세계가 있으니 극락세계는 사바세계와 같이 제십삼층에 있다.

극락세계는 삼계 이외의 정토니 삼계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극락세계에는 오욕이 없으므로 욕계가 아니고, 극락세계는 대지에 의거하였으므로 색계가 아니며, 극락세계는 형상이 있으므로 무색계가 아니다.


극락세계는 땅이 칠보로 되어 광채가 빛나고 기묘하며 절결하기가 시방세계에 뛰어나고 국토의 넓이가 한량없으며, 땅이 평탄하여 산과 구렁과 골짝이 없고 바다와 강(보기를 원하면 나타남)이 없으며 대 중 소의 보배 연못이 있고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와 용이 없다.

극락세계에는 비와 눈이 없고 해와 달이 없으나 항상 밝고 어둡지 아니하며 밤과 낮이 없거니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으로 낮을 삼고 꽃이 지고 새가 쉬는 것으로 밤을 삼으며 극락세계의 일주야는 사바세계의 일겁이요 또 기후도 차고 더운 것이 없어 항상 봄과 같이 온화하고 밝으며 상쾌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극락세계는 땅위에서 허공에 이르기까지 한량이 없는 여러 가지 보배가 백천종의 향으로 되었으며 장엄한 것이 기묘하고 절승하며 광채가 휘황한 것은 다 말할 수 없다.

또 보배누각이 환희로우며 극락세계는 여러 가지 보배로 된 보망이 그 나라를 덮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보배 나무도 위에 있는 보망이 덮여 있고 그 주위에는 보배난간이 둘러져 있으니 교묘하게 꾸미고 광채가 찬란한 것은 형언할 수 없고

또 바람이 약간 불면 보배나무와 보배그물에서 미묘한 법음이 나며 꽃다운 향기가 퍼지고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백천종류의 음악 소리와 같으며 또 극락세계에는 여러 가지 음악이 있어서 끊어지지 아니하여 시방세계의 음악 중에 제일이며, 또 여러 하늘에서 백천가지 음악을 가지고 내려와서 불보살게 공양한다.

극락세계에는 각색 연화가 전국에 차 있으며 칠보로 된 연못에는 크기가 수레바퀴 같은 각색 연화가 미묘하고 향기롭고 정결하며 또 물이 연꽃사이로 을러서 아래 위로 돌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내는데 제각기 소원대로 듣게 된다.가령 법문 소리를 듣고자 하면 법문소리를 듣고, 음악소리를 듣고자 하면 음악소리를 듣는다. 극락세계에는 아미타불이 변화하여 만든 여러 가지 기묘한 새들이 온화하고 청아한 소리로 주야 육시에 설법한다.

극락세계에 태어날 때에는 칠보로 된 연못속의 연화에 화생하여 젖으로 기르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자라고 수명이 무수겁이요, 온몸이 금빛으로 광명이 있으며 용모가 잘나고 못난 것 없이 한결같고 형상이 단정하며 정결하기 수승하기가 세간 사람이나 하늘사람으로는 비교할 수 없다.


극락세계의 사람은 천안통, 천이통, 다심통, 숙명통, 신족통, 누진통의 육신통이 구족하다.
극락세계에는 낙만 있고, 생, 노, 병, 사의 고가 없나니, 태생하는 데는 고가 있으나 화생하는 데는 연화가 화생하므로 생고가 없으며, 춘하추동이 없고 절기가 바뀌지 아니하여 기후가 항상 온화하므로 노고가 없으며 화생한 몸이 미묘하여 향기롭고 정결하므로 병고가 없으며 도명이 한량이 없으므로 사고가 없다.

법장비구가 세운 사십팔원 가운데 제십팔원은 이러하다. 가령‘내가 성불하더라도 시방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신락하고 내 나라에 나고자 하여 내 이름을 염하기를 열번을 하고서도 만일 내 나라에 나지 못하면 나는 정각을 취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다만 오역과 정법을 비방한 이는 제외할 것입니다.’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성호인 만덕홍명을 일심으로 억념하면 임종시에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한다. 그 이유는 아미타불의 사십팔원중에 중생이 내 나라에 나려 하는 이가 내 이름을 열번만 염하면 임종할 때에 내 나라에 나서 승묘한 낙을 받으면 수명이 무량하리라 하였으므로 어느 중생이나 지성으로 염불하면 곧 왕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한 것이요, 중생의 자력이 아니다. 자력은 성취하기 어렵지만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면 성취하기 쉬운 것이다.

아미타불의 성호를 염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일을 석존께서 정토삼부경 등에서 말씀하지 아니하였으면 중생들이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간단한 묘법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에 한량없는 곤란을 겪지 아니하고 일생 중에 왕생 성불할 수 있게 되었다. 일심으로 염불하여 극락왕생함이 석존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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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의 화신 선도대사의 법을 이은

  대세지보살의 응신 법연상인의 전수염불 법문의 정수 선택본원염불집 選擇本願念佛集

 

대세지보살의 응화신(應化身) 법연상인

 

법연(法然: 1133~1212)상인은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개조(開祖)로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응신(應身)으로 존중받았다. 휘는 원공(圓空)이고 호는 법연방(法然房)이다. 9세 때 부친의 유언에 따라 그 지방의 보리사(菩提寺)로 출가하여 관각(觀覺)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세 때는 관각스님의 추천으로 비예산 원광(願光)스님 문하로 들어갔으며, 이어 황원(皇圓)스님에게 대승계를 받고 천태학을 배웠다. 상인은 교학에는 뛰어났으나 불교교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서 18세 때 흑곡(黑谷)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예공(叡空)스님에게 배웠다.

 

예공스님은 일승원계(一乘圓戒)를 지닌 화상이자 삼밀(三密)의 가르침을 전수 받은 대 아사리로, 상인에게 법연(法然)이라는 호와 원공(源空)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는 최초의 스승인 원광의 ‘원(源)’자와 뒤의 스승인 예공의‘공(空)’자를 취한 것이다. 이로부터 상인은 원돈대계(圓頓大戒)를 받고 그 정통을 계승하였으며 요가(瑜伽)의 비법까지 전수 받았다.

 

그러나 궁극의 진리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으므로, 24세 때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명한 스승을 찾아가 각 종파의 깊은 뜻을 참구하였다. 하지만 그는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다시 흑곡으로 돌아와 보은장(報恩藏)에서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상인은 대장경을 무려 다섯 번이나 읽었으며 불가사의한 지혜[神智]는 더욱 깊어졌다. 또한 내전(內典)에만 정통한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백가의 서적들을 읽고 잘 기억해 세상 사람들은 그를‘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 불렀다.

 

상인은 여러 종파의 교리를 깊이 알 뿐만 아니라 수행 체험 역시 많았다. 삼칠(21)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았는데, 이에 감응하여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타고 오시어 증명해준 적이 있었고, 산왕(山王) 다이곤겐(大權現)이 모습을 드러내 호위하기도 했다. 매번 진언종의 비밀스런 관법에 들 때는 늘 연화와 갈마(羯摩), 보주(寶珠)와 같은 상서로운 조짐[瑞相]을 감응하였다.

 

특히 밤에 독경할 때에 이마에서 빛을 놓아 등불을 밝힐 필요가 없었으며, 야간에는 실내에 등이 없어도 저절로 밝아 마치 대낮과 같아 대중이 모두 불가사의하게 여겼다. 관경(觀經)에서 이르길 “대세지보살의 또 다른 이름이 무변광(無邊光)이시니 지혜의 광명으로 일체를 두루 비추신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대만의 혜정스님은 선택집(選擇集) 편서(編序)에서 “상인은 대세지보살의 응신(應身)인 까닭에 늘 광명을 나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그러나 진리에 대한 상인의 마음은 여전히 부족하다 여겼는데, 43세 때 드디어 중국 선도(善導)대사의 관무량수경소[觀經疏]를 읽다가 아미타불의 거룩한 본원(本願)을 깨닫고 오랜 의문의 구름이 걷히듯 환하게 해결되었다. 이것이 전수염불종(專修念佛宗)이 개종된 역사적인 순간이다.

 

이때 법연상인은 “무거운 죄와 어지러운 생각을 갖고 있는 범부가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을 강한 인연으로 삼아 결정코 극락의 보토(報土)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면서 크게 기뻐함이 마치 어두운 밤에 밝은 등불을 만난 것 같았다. 이에 어느 날 밤 꿈에 선도대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당나라 선도이니라. 그대가 전수염불을 크게 유통하는 까닭에 증명하러 왔노라. 이후로 홍법(弘法)이 막히지 않아 널리 사방의 멀리 떨어진 곳까지 미칠 것이니라”고 하였다. 선도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부처님의 뜻에 부합하는 까닭에 증명을 해주러 오신 것이다.

 

드디어 상인은 43세에 낙동(洛東) 길수(吉水)에 암자를 짓고, 사람들에게 아미타불 염불을 권하니 비로소 정토종이 일본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종래의 일본불교는 자력(自力)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구한 것에 반해, 그는 번뇌를 끊지 못한 범부를 위해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음을 확신시키면서 오로지 칭명염불을 할 것을 설하였다. 그러자, 멀고 가까운 사부대중이 감복하여 귀의함이 마치 모든 하천이 다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심지어 다카쿠라(高倉) 천황까지 상인의 도가 높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궁내로 초청하여 정토종의 요지를 강의하게 하니 왕비와 궁녀, 고위 백관의 권속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가르침을 받들기에 이르렀다.

 

 

한 때, 영산사(靈山寺)에서는 21일간 불칠(佛七) 법회를 거행한 적이 있었는데, 5일째 되는 한밤중에 한 두 사람이 대세지보살이 대중을 따라서 경행염불(經行念佛)하는 것을 보고서 앞으로 나아가서 절을 하며 한참동안 우러러보니, 보살의 모습이 비로소 법연상인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소 상인이 대세지보살의 응화신(應化身)임을 알게 되었다. 7일째 밤이 되어 도량의 등불이 다 꺼졌으나 실내는 여전히 환하게 밝으니, 대중들이 기뻐하고 불가사의함을 느끼며 더욱 더 정진하였다.

 

또한 제자 승법(勝法)이 상인의 상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상인에게 직접 초상화의 제찬(題贊)을 청하니, 상인은 생각도 않고 즉시 세지원통장(勢至圓通章)의 “나는 본래 인지에서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을 증득하였고 지금 이 세계에서도 염불인을 거두어 정토에 돌아가게 하니라[我本因地 以念佛心 入無生忍 今於此界 攝念佛人 歸於淨土]”라는 글을 적어서 주셨다.

 

산슈(讚州)의 생복사(生福寺)에 계실 때, 상인은 손으로 직접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하여 복장에 들어가는 게송 한 편을 지으셨다. 게송에는 ‘법연의 본지신(本地身)은 대세지보살이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에 이 도량에 몸을 나투어 안치(顯置)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54세 때 상인은 천태종 현진(顯眞)스님의 초청으로 대원승림원에서 전수염불의 가르침을 설했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였으며 그 명성이 더욱 널리 퍼졌다. 66세 때 법연상인은 전수염불의 교리를 조직화하기 위해 이 책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을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전수염불의 성행에 따른, 구불교의 반발도 심했다. 1204년에는 천태종의 승려들이, 다음 해에는 여덟 종파가 조정에 똑같은 상소문을 올려 1207년 2월, 전수염불 정지 명령이 내려지고 법연상인은 75세의 고령에 환속되어 토좌(土佐)로 유배되었다.

 

상인은 그해 12월에 사면되었지만 수도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대판의 승미사(勝尾寺)에 머물렀다. 4년 후인 79세 때 가까스로 수도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어 귀환했으나, 고령으로 인해 다음 해 정월 입적하셨다.

 

상인은 80세가 되던 해, 2월 25일 정오에 왕생하셨는데, 이미 수일 전에 제자들에게 “나의 전신은 인도의 성문승(聲聞僧)이었는데, 항상 두타행을 닦았었다. 이번에 본국에 와서 천태종을 배우고 나중에는 정토문을 열어 오로지 염불법을 선양하였다”라고 하셨다.

 

제자 세관(勢觀)이 “성문승 가운데 어떤 분이셨습니까?”라고 묻자, 상인은 “사리불이네”라고 답했다.또 어떤 제자가 “스승님께서는 지금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상인은 “나는 본래 극락의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극락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대만의 혜정스님은 선택집(選擇集) 편서(編序)에서 이렇게 해설하였다. “사리불은 석존(釋尊)의 10대 제자 중에 ‘지혜제일’이었으며, 부처님께서 아미타경을 설하실 때, 사리불을 36번 부르면서 그를 대고중(對告衆: 경을 설하는 대상)으로 삼았었다. 사리불 존자가 대세지보살의 응화신이었고, 대세지보살 역시 아미타불의 지혜의 나툼인 까닭에 똑같이‘지혜제일’이라 불리고, 똑같이 ‘정토법문’을 계승한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왕생 3일 전인 22일, 상인의 제자들이 모두 쉬러 가고 오직 제자 세관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이때 한 귀부인이 수레를 타고 와서 혼자 상인과 대면하기를 요청하고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부인이 돌아갈 때 세관은 자못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뒤를 따라 나섰지만 멀리가지 않아 홀연히 사라졌다. 세관이 돌아와서 상인에게 여쭈어보니 상인은 “그녀는 위제희 부인이시다”라고 회답하였다. 23일부터 25일까지 고성염불(高聲念佛)을 하니 인연 있는 승려와 속인(道俗)들이 뜰 안에 가득 모여 다 같이 염불을 하였다.

 

25일 정오가 되자 상인은 승가리(僧伽梨)를 입고 머리는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서 “광명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염불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으시네[光明遍照,十方世界,念佛衆生,攝取不捨]”라는 게송을 읊으시며 기쁜 기색으로 입적하시니, 세수(世壽) 80세, 승납(僧臘) 66세이었다.

 

상인께서 왕생하신 지 16년 후에 제자들은 유체(遺體)를 모신 돌로 된 감실을 열어보았는데, 온 몸은 엄숙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기이한 짙은 향내가 났다. 승려와 속인 천여 명이 유골을 호송하여 서쪽 교외로 옮겨서 다비(荼毘)를 할 때, 기이한 향기가 풍기고 자줏빛 구름이 소나무에 드리웠기에 ‘자운송(紫雲松)’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곳에 건물을 짓고 오랫동안 염불을 하였으니, 지금의 광명사(光明寺)가 그 유적이다.

 

법연상인은 일본 원신(源信)스님의 왕생요집(往生要集)에 근거하여 정토사상을 심화시키고, 중국 선도대사의 관무량수경소에 의해 칭명염불 한 가지만을 택하여 전수염불을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법연상인은 정토종을 창종하고,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과 세친보살의 정토론을 소의경론으로 삼았다. 그는 선도대사로부터 이어지는 정토종의 계보를 세워 일본에서 전수염불이 끊이지 않고 현재에 이르도록 하였다.

 


 

선택본원염불집 選擇本願念佛集

 

 (도서명/정토신앙의 지남)


 호넨상인(法然上人) 저

 석도실 스님(釋道實) 역

 

 차례 / 정토신앙의 지남

 

한국어 판 출판에 즈음하여

 

제1장 깨달음과 구제(聖淨二門)

제2장 이종二種의 행行(正雜二行章)

제3장 구제救濟의 힘 (本願章)

제4장 삼종三種의 행인行人(三輩念佛往生章)

제5장 염불의 은혜(念佛利益章)

제6장 영원의 가르침 (特留念佛章)

제7장 구제의 빛 (光明攝取章)

제8장 세 가지의 마음가짐(三心章)

제9장 4종의 염불생활(四修章)

제10장 염불을 찬탄(化佛讚嘆章)

제11장 염불하는 사람을 칭찬함 (讚嘆念佛章)

제12장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촉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제13장 최고의 선근(念佛多善根章)

제14장 제불의 증명(諸佛證誠章)

제15장 제불의 보호(諸佛護念章)

제16장 선택된 가르침(名號咐囑舍利弗章)


 

역자의 말/석도실

 

한국어 출판에 즈음하여

 

『선택염불집』은 일본정토교 염불문의 원조인 호넨(法然)房 겐쿠(源空)(1133-1212)의 주저主著이며, 정토종 독립의 선언서이다.

 

호넨의 정토입교 개종의 목적은 범부의 보토왕생에 있다. 석존께서 열반에 드신 지 오래된 말법 세상에 일반서민들이 구제될 수 있는 불교는 정토종의 가르침 이외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호넨의 신념이었다.

 

이 주장은 깨달음을 구해 부처를 이룸을 목적으로 하는 성도문聖道門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일 것이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지혜를 밝히는 불교 쪽에서는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토문은 범부 구제의 업을 아미타 부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발원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법이 성도문聖道門이며 자력수행을 불가결로 한다면 범부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법은 정토문이며 타력왕생을 유일한 목적으로 한다.

 

지금 김도실金道實 스님이 경도 불교대학 문학부 불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정토학을 배우고 다시 동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정토교를 연구하며 학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 학문적 성과는 학부논문으로 중국선도대사의 범부관을 비롯하여 석사논문으로는 일본 호넨 『선택본원염불집』의 연구의 두 개의 논문으로써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 위에 『선택본원염불집』의 한국에서의 번역을 마음에 두어 많은 한국 민중들에게 정토교 염불문의 참된 뜻을 널리 펴고자 발원보급하려 하고 있다. 부처님 법은 아무나 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연있는 사람을 만나 펼 수 있다 하더니 이는 김도실 스님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스님은 평소 아미타불의 정토신앙이 다시 부흥될 때 한국에 다시 불교가 중흥되고, 그 신앙이 통일 될 때 민족이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정토신앙의 지남이 출간됨에 다시한번 이 자리에서 스님의 쾌거를 기뻐함과 동시에, 이것으로 염불의 가르침이 일찍부터 한국민족의 전통신앙으로 찬란한 꽃을 피웠던 한국 땅에 인연있는 분들이 깊이 믿고 자타가 함께 불도에 뜻을 세워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민중이 한 사람이라도 많이 생기기를 발원하면서 이 책 발간의 찬사를 올리는 바이다.

 

1991년 4월 25일

 불교대학 지도교수 深具慈孝





제 1 장. 깨달음과 구제(聖淨二門)

 

: 도작선사道綽禪師가 성도聖道와 정토淨土의 두 문(二門)을 세웠으나 성도문聖道門을 버리고 정토문淨土門에 귀의歸依할것을 설한 글

 

중국의 도작선사道綽禪師는 그의 저서인 『안락집安樂集』상권上卷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음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누구라도 불성佛性(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이들은 당연히 많은 부처님들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까지 이 몸은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으며 번뇌煩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대답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훌륭한 가르침에 의한다면 두 가지의 뛰어난 교법敎法이 있는데 그 법으로써 생사의 방황을 거두어 버리지 않으면 번뇌의 불길이 치솟는 이 세상을 빠져 나갈 수가 없다. 그럼 도대체 그 두가지 교법敎法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성도문聖道門이요 또 하나는 왕생정토문往生淨土門이다. 그 중에서 성도문은 오늘날의 우리가 깨우침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로 대성大聖 석존釋尊이 돌아가신지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체득體得해야 할 교리敎理는 심오深奧한데 비하여 그것을 체득해야 할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깊은 교리에 비하여 이해능력이 너무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집경大集經』의 「월장분月藏分」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나의 법法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수행修行을 하여 불도佛道를 얻으려고 하여도 단 한사람도 진리를 터득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오늘날이 말법의 시대로서 오탁五濁의 악세(惡世 ; 더럽고 부정不淨한 것이 꽉찬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문은 불도佛道를 터득할 수 있는 문이 못되고, 정토의 일문一門만이 불도에 도달할 수 있는 요로要路가 된다.

 

그리하여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도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람이 비록 일생동안 나쁜 일(惡事)만을 일삼아왔다 하여도 생명이 다해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에 내 이름(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불러도 정토에 왕생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만일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라고 설하고 있다.

 

 또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을 뒤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말법시대에는 진여眞如나 실상實相이나 또 그것들의 본체本體까지도 공空이라는 불교근본원리에 주의하면서 수행하는 자가 전혀 없다. 다음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말법시대에는 최초의 성聖스러운 행行인 사제四諦를 명료하게 관찰하여서 더욱 수련하거나, 또는 불환과不還果나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수행단계에 도달한 성자聖者가 되어서 본능적인 모든 욕망이나 번뇌를 물리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속道俗에 관계없이 그 일부분조차도 실천하는 자가 없다. 아무리 인간, 천상계天上界에 태어날 수 있는 과보果報를 받고 태어났다 하여도 그것은 사실 오계五戒·십선十善을 잘 지킨 과보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계나 십선을 지키고 보전하려고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그뿐이 아니다. 오히려 나쁜 일을 하거나 죄를 짓거나 하는 것이 마치 폭풍이나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지금 난폭하게 행해지고 있지 않는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들은 크나큰 자비慈悲로써 아미타불의 정토에 귀명歸命할 것을 권하고 계시는 것이다.

 비록 일생동안 나쁜 일을 하였다 하여도 오직 정성을 다하여 오로지 염불을 한다면 일체의 죄의 업장業障은 자연히 녹아져 반드시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훌륭한 가르침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요즈음 사람들은 깊이 생각도 아니하고 정토에 왕생하려고 아니하는가?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안락집安樂集』의 글에 대해서 내 생각을 잠시 말해보겠다. 처음으로 실천해야 할 가르침을 세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서 그 종파宗派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법상종法相宗의 경우는 삼시교三時敎로 분류하여 체계를 세워 석존이 일대一代에 걸쳐 설하신 가르침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였다. 즉 유有·공空·중中의 삼시三時가 바로 그것이다.삼론종三論宗에서는 이장二藏의 가르침을 분류하여 석존이 설하신 의 의도를 체계화하였다. 소위 보살장菩薩藏·성문장聲聞藏이 그것이다.

 

화엄종華嚴宗은 오교五敎로 분류하고 체계를 세워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른바 소승교小乘敎·시교始敎·종교終敎· 돈교頓敎·원교圓敎가 그것이다. 천태종天台宗은 사교四敎와 오미五味의 분류에 의하여 체계를 세우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교四敎라고 하는 것은 소위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를 말한다. 오미五味라는 것은 유미乳味·낙미酪味·생미生味·숙미熟味·제호미醍醐味를 말하는데 이 오미五味를 가지고 석존 일대의 가르침을 분류하고 체계를 세웠다. 진언종眞言宗은 이교二敎를 가지고 분류하고 체계를 세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른바 현교顯敎·밀교密敎가 그것이다.

 

지금 우리의 정토종淨土宗은 도작선사의 방법에 의하여 두 문으로 분류하고 체계를 세워 불교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른바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이 그것이다



제1장. 깨달음과 구제(聖淨二門)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맨 처음 종宗이란 이름을 세운 것은 화엄종이나 천태종 등의 8종宗 혹은 9종宗이었다.

 

정토종의 가르침에는 아직까지 종宗의 이름을 세웠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는데, 지금 정토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증거証據에 의해서인가 ?

 

대답 정토종이라고 부르는 증거가 꼭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라新羅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쓴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에는 ‘정토종의 의취意趣는 원래 범부를 위한 것이고 또 성인을 위한 것이다.’라고 씌어있다. 또 당唐나라의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쓴 『서방요결西方要訣』에는 ‘이 일종一宗에 의한다’라고 씌어있다.역시 같은 당나라의 가재대사迦才大師가 쓴 『정토문淨土門』에는 ‘이 일종一宗이야말로 단 하나 밖에 없는 요로要路이다’라고 적혀있다.

 

그 증거는 이상과 같으니 의문을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러 종宗의 가르침을 세우는 방식은 확실히 이 정토종을 세우는 방식과는 그 주지主旨가 다르다. 정토종의 입장에서 불교를 분류한다면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즉 자력自力으로 도道를 이루는 성도문聖道門과 부처님의 타력他力에 의하여 구제되어 정토에 왕생하는 정토문淨土門이다.

 

성도문에 있어서도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대승불교이고 두 번째가 소승불교이다. 대승불교 중에서도 진언종에서 내세우는 현교와 밀교, 천태종에서 내세우는 권교權敎와 실교實敎 등 그 분류만도 여러 가지 있지만, 이 『안락집安樂集』의 의취意趣는 오로지 현교의 대승과 권교의 대승에 있다.

 

이것은 빨리 진리를 터득하는 교敎가 아니고 긴 수행에 의해서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수행의 길에 해당할 것이다. 이것에 기준해 본다면 밀교의 대승과 실교의 대승도 똑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언眞言·불심佛心(禪)·천태天台·삼론三論·법상法相·지론地論·섭론攝論·화엄華嚴 8종種의 의취意趣도 역시 성도문聖道門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다음으로 소승불교라는 것은 소승小乘에 속하는 모든 경經·율律·론論으로 그 가르침을 설명한 성문聲聞(삼생三生 육십겁의 수행을 걸쳐 깨달음을 얻은 불제자)·연각緣覺(혼자서 깨달음을 얻음)의 입장이다. 즉, 번뇌의 방황을 털어버리고 정리正理를 터득하는 길이며, 성자의 경지에 들어가 궁극적인 깨우침을 얻는 길이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구사종俱舍宗·성실종成實宗 기타 제부諸部의 율종律宗도 포함시킬 수가 있다.

 

결국 이 성도문聖道門의 대의는 대승이나 소승에 관계없이 인간세계에서 사승四乘의 길을 수행하여 사승四乘의 결과를 증득証得하는 것에 있다. 사승四乘이란 성문·연각·보살·의 삼승三乘에 불승佛乘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 다음 왕생정토문往生淨土門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직접적으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설명한 가르침이고 또 한 가지는 간접적으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설한 가르침이다.

 

먼저 직접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설한 것에는 세가지 경經과 하나의 논論이 있는데, 이것을 삼경일론三經一論이라고 한다. 세가지 경전이란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이다. 그리고 하나의 논論이란 천친天親(세친世親)의 『왕생론往生論』을 말한다. 이 세 가지 경經을 일컬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하기도 한다.

 

물음 이와 같이 삼부경(三部經)이라 부르는 예가 있는가?

 

대답 삼부경三部經이라 부르는 예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법화삼부경法華三部經으로 『무량의경無量義經』·『법화경法華經』·『보현관경普賢觀經』이 있다.

 두 번째 대일삼부경大日三部經으로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소실지경(蘇悉地經』이 있다.

 세 번째 호국삼부경(護國三部經)으로 『법화경(法華經』·『인왕경(仁王經』·『금광명경(金光明經)이 있다.

 네 번째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으로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이있다.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의 삼부경三部經은 아미타불의 정토에 구제되는 가르침을 설한 경이기 때문에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한다. 아미타불의 삼부경이야말로 정토가 중심이 되는 경이다.

 

 그 다음‘깨달음의 도道’를 설해 가면서 한편으로‘구제(救濟)의 도道’를 간접적으로 왕생정토를 설하고 있는 경에는『화엄경』·『법화경』·『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존승다라니경(尊勝陀羅尼經』등의 경전이 있다. 또 『기신론起信論』』·『보성론寶性論』·『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섭대승론攝大乘論』등에 정토에 왕생할 것을 설명한 논論들이 있다.

 

제1장. 깨달음과 구제(聖淨二門) 3|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처음 도작선사가『안락집安樂集』가운데서 성도문과 정토문의 두 문을 세운 의미는 성도문을 버리고 정토문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에서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성大聖 석존釋尊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2500년 이상 긴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고, 둘째는 체득해야 할 교리는 심오한데 비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깊은 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 이해능력이 너무 얕고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불교를 성도문과 정토문으로 나누어 두 문을 세운 것은 도작道綽 한사람만은 아니다. 담란曇鸞·천태天台·가재迦才·자은慈恩 등의 제사諸師도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담란법사의『왕생론주往生論註』에서는 용수보살의『십주비바사론』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보살이 불퇴不退의 경지를 구하는 데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난행도難行道이고, 또 하나는 이행도易行道이다.

 

난행도難行道란 오탁으로 더럽혀진 이 세상에서 그것도 부처가 계시지 않는 말법시대에 불퇴의 경지를 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지극히 어렵다고 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대충 생략하고 다섯 가지 정도 그 이유를 들어 보겠다.

 

첫째는 외도外道의 차별적인 선善이 보살의 교법敎法을 혼란시킨다.

 

둘째, 자기만의 깨달음을 원하는 좁은 마음을 가진 소승의 사람들이, 큰마음으로 여러 사람을 구제하려고 하는 대승의 수행을 방해할 때가 있다.

 

셋째로, 타인을 돌볼 줄 모르고 자신을 반성할 줄 모르는 악인惡人이 오히려 타인의 훌륭한 덕을 시기하여 상처를 입히는 일이 있다.

 

넷째, 명예와 이익에 사로잡힌 행위만 하면서도 좋은 과보果報를 얻으려는 잘못된 생각이 불교의 바른 가르침을 손상시키는 일이 있다.

 

다섯째로, 참으로 약하디 약한 자신의 힘을 자만하면서 부처님의 큰 자비의 힘을 믿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들의 현실에서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난행도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비유해 본다면 육로의 보행은 힘들고 괴로운 것과 같이 ---

 

 이행도易行道라고 하는 것은 오직 부처님을 깊이 믿고 공경하고 의지하여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미타의 큰 서원의 힘을 입어 청정한 불국토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거기에는 아미타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의 힘을 입어 타락시키려는 악연이 없는 경지인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정정취正定聚란 퇴전退轉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비유한다면 육로를 걸어가는 것 보다 물위의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더 즐겁고 쉬운 것처럼 ---"

 

여기에서 난행도라 말하는 것은 성도문을 말함이요, 이행도란 정토문을 말함이다. 난행難行·이행易行이라고 하고, 성도聖道·정토淨土라고 하는 것도 그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의미는 같은 것이다. 천태대사나 가재대사도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이다.

또 자은대사의 『서방요결西方要決』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석존釋尊은 때를 맞추어 법을 설하시고 인연을 따라 중생을 인도하셨다.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또 인연을 널리 내려주셨다. 석존釋尊의 가르침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널리 퍼져, 마치 대지에 비가 흠뼉 내리는 것처럼, 부처님의 법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셨다. 늘 가까이 석존釋尊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각자의 힘에 맞는 깨달음의 도를 각각 터득하였다.

 

 그리고 복과 덕이 적고 인연이 옅은 자에게는 정토에 돌아갈 것을 권유하셨다. 이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은 오직 아미타 부처님을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며 휼륭한 보報의 근원이 되는 선행을 실천한다면 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미타의 본원은 반드시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신다.

 

위로는 일생동안 노력하여 염불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임종臨終을 맞이하여 최소한 열 번 염불을 외우는 자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반드시 함께 왕생할 수 있다."

 

또 이 『서방요결』의 후서後序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용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석존釋尊이 돌아가시고 나서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태어났다.

 

또 지금은 석존釋尊이 가르친 교법과 수행이 남아 있어 그 가르침이 바르게 실천되고 있는 듯 보이나, 깨달은 자는 없다고 하는 상법像法의 말법시대이다. 삼승三乘의 가르침을 받아도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없고, 인간·천상계에 태어난다 해도 이 세계의 생활은 항상 소란하여 번거롭고 불안한 상태이다.

 

혹, 지혜가 깊고 심정이 넓은 자는 기나긴 수행을 잘 참고 견디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신이 통일되지 못하고 수행이 깊지 못한 자가 있다면 아마 어두운 미망迷妄의 세계에 빠져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번뇌의 생활로부터 멀리 벗어나 마음을 깨끗한 정토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삼승三乘이라는 것은 바로 성도문이고, 정토라는 것은 정토문이다. 즉 성도문은 스스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길이고, 정토문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하여 정토에 구제되는 길이다. 정토를 공부하는 자는 이러한 주지主旨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비록 이전에 성도문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정토문에 뜻이 있다면 마땅히 성도문을 버리고 정토문에 귀의하여 아미타불의 구제의 본원력에 이 몸을 몽땅 맡겨버려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담란법사는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대지도론大智度論』『백론百論』등을 설한 용수보살을 받드는 사론종四論宗의 학자이지만, 이 모두를 버리고 오직 정토문에 귀의·전념하였다.

 

또한 도작선사는 『열반경涅槃經』을 이십회 이상 강찬講讚할 정도의 휼륭한 학자이지만, 정토문에 귀의하여 오직 일심一心으로 서방정토의 왕생행往生行을 넓혀 나가셨다. 옛날에 뛰어난 현철賢哲들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조차도 이러하거늘, 어찌 말세의 번뇌중생들이 이것을 좇지 않고 행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물음 성도문의 제종諸宗에서는 각각 스승에서 제자로 직접 전수傳授하는 계보가 있다. 예를 들어 천태종에서는 혜문慧門·남악南岳·천태天台·장안章安·지위智威·혜위慧威·현랑玄朗·담연湛然으로 차례로 상승相承되었다. 진언종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금강살타金剛薩埵·용수龍樹·용지龍智·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으로 상승相承되었고, 그 외의 제종諸宗에서도 각기 상승相承하는 법의 혈맥이 있다. 그런데 정토종에서는 사자상승師資相承하는 법에 혈맥의 계보가 있는 것인가?

 

대답 성도문의 제종諸宗의 혈맥과 마찬가지로 정토종淨土宗에도 혈맥(血脈)이 있다.

 

다만 정토淨土의 일종에 있어서도 계보의 계통이 똑 같은 것은 아니다.

 

이른바 여산혜원류廬山慧遠流·자민삼장류慈愍三藏流·도작道綽·선도류도작道綽·선도류導流의 삼류가 있다

 

도작·선도류의 계통으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혈맥을 논해 본다면 이것에도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보리유지삼장菩提流支三藏·혜총법사慧寵法師·도량법사道場法師·담란曇鸞법사·대해선사大害禪師·법상법사法上法師의 혈맥이다.(『안락집』의 설에 의함)

 

또 하나는 보리유지삼장菩提流支三藏·담란曇鸞법사·도작법사道綽法師·선도화상善導和尙·회감법사懷感法師·소강법사小康法師의 혈맥이다.(『당전唐傳』·『송전宋傳』의 설에 의함)


 

제2장. 이종二種의 행行(正雜二行章)

 


: 선도화상이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의 두가지 실천행을 세웠는데 잡행을 버리고 정행에 귀의歸依할것을 설한 글

 

 선도善導의 『관경소觀經疏』 제4권 「산선의散善義」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행으로는 크게 둘로 나눈다. 하나는 오직 아미타 일불一佛을 깊이 신信하여 닦는 바르고 순일한 정행正行이요, 또 하나는 아미타불 이외 여러 불·보살을 대상으로 닦는 잡행雜行이다. 즉 정행正行이란 오직 정토왕생을 설한 경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정행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1) 오직 일심一心으로 『관무량수경』·『아미타경』·『무량수경』 등을 독송하는 것

 

(2)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과 그 정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유· 관찰하여 억념憶念하는 것

 

(3)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께 예배禮拜하는 것

 

(4)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는 것(칭명稱名)

 

(5)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을 찬탄하고 공양하는 것

 

이러한 것을 이름하여 오종정행五種正行이라 한다.

 

정행正行에 대해서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정정업正定業이요 하나는 조업助業이다.

 

하나는 일상의 행주좌와行住坐臥·어묵동정語黙動靜 간間에 시간의 장단을 가리지 않고 오직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부르는일 이다(칭명). 이것을 정정업正定業이라고 한다.

 

왜 이 칭명稱名이 왕생에 결정적인 바른 업業이 되느냐하면 이 행은 아미타불이 법장法藏 보살로 있을 때 칭명稱名의 원願을 세워 그 원이 성취되어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그 원에 꼭 맞기 때문에 정정업正定業이라고한다.

 

그 밖의 독송·관찰·예배·찬탄·공양은 조업助業이 된다.

이 정정업과 조업의 두가지 업을 제외한 그 이외의 선행을 모두 잡행雜行이라고 한다.

 

만일 앞에서 말한 정정업과 조업에 부지런히 힘쓴다면 마음은 항상 부처님 곁에 있어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무간수無間修라고 한다. 또 나중에 예를 든 잡행을 행한다면 마음은 부처와 항상 소원疎遠하게 된다. 그것들도 정토에 회향迴向하면 왕생할 수가 있지만 마음에는 틈이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모두 소잡疎雜의 행行이라고 한다."

 

생각하건대, 이 문文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을 하면 좋은가 하는 것을 설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정행과 잡행을 비교해서 그 이양利養의 득실得失을 밝히는 것이다. 먼저 왕생하기 위해서 어떤 행을 하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도대사의 가르침에 의하면 왕생을 위한 행行은 많이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첫번째가 정행正行이요, 두 번째가 잡행雜行이다. 정행에는 개開·합合의두가지 견해가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오종으로 나누었고, 나중에는 이것을 합하여 2종으로 하였다. 오종五種이라고 하는 것은 제1 독송정행讀誦正行, 제2 관찰정행觀察正行, 제3 예배정행禮拜正行, 제4 칭명정행稱名正行, 제5 찬탄공양정행讚歎供養正行이다.

 

제1의 독송정행讀誦正)이란 오로지 『관무량수경』 등을 독송하는 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오직 심一心으로『관무량수경』·『아미타경』·『무량수경』 등을 독송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제2의 관찰정행觀察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불과 정토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과 그 정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유· 관찰하여 억념憶念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제3의 예배정행禮拜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불을 예배하는 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또는 예배한다면,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께 예배禮拜하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제4의 칭명정행稱名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또는 입으로 부른다면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바로이것이다

 

제5의 찬탄공양정행讚歎供養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불을 찬탄하고 공양하는 일이다.

 

즉, 전문前文의 ‘또는 찬탄하고 공양한다는 것은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을 찬탄하고 공양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합쳐서 이종二種이라 하는 것은 첫째가 정정업正定業이요, 두번째가 조업助業이다. 먼저 정정업正定業이란 오종정행五種正行 중에서 제4의 칭명정행稱名正行인데 이것을 결정코 왕생할 수 있는 바른 행이라 한다.

 

즉 전문(前文)의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워 일상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어떤한 경우에도 시간의 장단을 가리지 않고 한시도 잊지 않는것’이것을 정정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아미타불의 본원에 꼭 부합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다음 조업助業이란 제4의 칭명을 제외한 독송 등의 4종의 정행을 말한다.

 

즉 전문前文의 ‘이 이외의 예배·독송·관찰·찬탄공양을 조업이라고 한다’는 것이 이것에 해당한다.



제2장. 이종二種의 행行(正雜二行章)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무슨 이유로 오종정행五種正行 중에서 단 하나 칭명염불만을 따로 떼어서 정정업이라 하는가?

 

대답 그것은 아미타불의 본원에 꼭 맞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말한다면 칭명염불은 미타彌陀가 과거 법장보살로 계실 때 인행因行시 맹세한 본원本願의 행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미타불을 부른다면 미타彌陀의 본원本願의 힘에 의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말하기로 하겠다.

 

다음, 잡행雜行이라고 하는 것은 전문前文의 ‘정정업과 조업의 두 가지 업을 제외한 그 밖의 많은 선행을 모두 잡행이라고 한다’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의미를 말한다면 잡행은 그 수가 아주 많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종정행에 따라 5종의 잡행을 설명하여 보겠다.

 

 5종의 잡행이란 제1 독송잡행, 제2 관찰잡행, 제3 예배잡행, 제4 칭명잡행, 제5 찬탄공양잡행이다.

 

제1의 독송잡행이란 앞에서 말한 『관무량수경』 등의 정토에 왕생할 것을 설명한 정토경전을 제외한 그밖의 대승·소승·현교·밀교 등 여러 경을 받아들여 독송하는 것을 모두 독송잡행이라 한다.

 

제2의 관찰잡행이란 것은 앞에서 말한 아미타불과 극락의 휼륭한 모습을 제외한 그 이외의 대승·소승·현교·밀교와 현상적인 사상事象과 본체本體인 추상적인 평등성을 관찰하는 것을 모두 관찰잡행이라 한다.

 

제3의 예배잡행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아미타불을 예배하는 것을 제외한 그 외의 부처 보살 및 이 세상의 많은 신들을 예배하여 공경하는 것을 모두 예배잡행이라고 한다.

 

제4의 칭명잡행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것을 제외한 그 밖의 부처 보살 및 이 세상의 많은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모두 칭명잡행이라고 한다.

 

제5의 찬탄공양잡행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아미타불을 제외하고, 그 밖의 부처 보살 및 이 세상의 많은 신들을 찬탄하고 공양하는 것을 모두 찬탄공양잡행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보시布施·지계持戒 등 수많은 행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잡행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다.

 

다음으로 정행과 잡행의 이익의 득실을 판별한다면, ‘만일 앞에서 말한 정정업과 조업의 이업二業에 부지런히 힘쓴다면, 마음은 항상 부처님곁에 있어 부처를 생각하는게 끝이 없으므로 무간수無間修라고 한다. 그리고 만일 잡행을 행한다면 마음은 항상 부처와 소원疎遠해진다. 그것으로도 정토에 회향하여 왕생할 수 있지만 모두 소잡疎雜의 행이라 한다.

 

이 문장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정행과 잡행은 다섯가지 항목으로 대비對比된다.

 

제1은 친밀親密과 소원疎遠의 대비, 제2는 근近과 원遠의 대비, 제3은 유간有間과 무간無間의 대비, 제4는 불회향不迴向과 회향廻向의 대비, 5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대비이다.

 제1의 친밀親密과 소원疎遠의 대비라는 것을 말한다면,

 

먼저 친밀이란 정정업와 조업의 이업二業에 힘쓰는 자는 아미타불과 아주 친숙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관경소觀經疏』의 「정선의定善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생이 항상 아미타 부처님을 입으로 부르면 부처님은 곧 이것을 들어 주시고, 중생이 몸으로 항상 아미타 부처님에 예배하고 공경하면 부처님은 곧 바로 이를 보아 주시며, 중생이 마음으로 항상 아미타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은 곧 이것을 알게 되시며, 중생이 아미타 부처님을 억념하면 부처님도 역시 이 사람을 억념해 주신다.

 

부처님과 중생의 몸·입·마음의 세 개의 활동이 항상 따로 따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 그래서 친밀의 관계라고 하며 이것을 친연親緣이라고 한다."

 

다음 소원疎遠이라고 하는 것은 잡행을 말한다. 사람들이 입으로 부처님을 부르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을 듣지 않으시며, 몸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을 보지 않으시며,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이것을 알지 못하시며, 사람들은 부처님을 억념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도 역시 이 사람을 억념하지 않으신다.

 

부처님과 사람과 몸·입·마음의 활동이 항상 떨어져 있으므로 소원疎遠의 행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2의 가까운 것과 먼 것의 대비라는 것은, 정정업과 조업의 이업二業에 힘쓰는 자는 아미타불과 아주 가까이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관경소觀經疏』의 「정선의定善義」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중생이 부처님을 보고 싶다고 원하면 부처님은 곧 그 부름에 응하여 눈앞에 나타나신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운 관계, 즉 근연近緣이라고 한다."

 

 그 다음 멀다고 하는 것은 잡행을 말한다.

 

중생이 부처님을 보고 싶다고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곧 자기 생각대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멀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친연親緣과 근연近緣의 의미는 동일한 것 같지만 선도화상은 다른 의미로써 설명하셨다.

그 주지主旨는 『관경소觀經疏』의 「정선의定善義」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그것을 인용하여 따로 따로 설명한 것이다.

 

제3의 무간無間과 유간有間과의 대비라는 것을 말한다면,

 

무간無間이란, 정정업과 조업의 이업二業에 힘쓰는 자는 아미타불을 항상 억념한다. 그래서 부처님과는 빈틈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무간無間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 유간有間은 잡행에 힘쓰는 자는 아미타불을 억념하는 데 항상 빈틈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과는 마음에 항상 빈틈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제4의 불회향不迴向과 회향廻向과의 대비란, 정정업과 조업의 이업二業에 힘쓰는 자는 비록 회향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그것이 자연히 왕생의 업이 된다. 그래서 『관경소觀經疏』「현의분玄義分」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열 번 소리를 내어,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관무량수경』에서와 같이 그대로 열 가지의 소원과 열 가지의 행을 갖추는 것이 된다. 어떻게 갖추어지는가 하면, 나무南無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귀명歸命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자기가 힘쓰는 선善을 그쪽으로 향하게 하여 왕생을 원하는 의미로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발원회향發願廻向의 행行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그 다음, 회향廻向이라는 것은 잡행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그쪽으로 향하게 하는 회향을 준비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만일 회향을 준비하지 않을 때에는 왕생할 수 있는 원인이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회향하여 왕생할 수 있다고 하지만(과연 어떨까?)…’라고 하는 것이다.

 

 제5의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대비라고 하는 것을 말하면,

 

순일純一이란 정정업과 조업의 이업二業에 힘쓰는 자는 틀림없이 극락에 태어날 수 있는 행이다. 그 다음 잡다雜多라고 하는 것은 오직 극락에 태어나기 위한 행은 못된다. 인간계·천상계 및 성문·연각·보살의 삼승三乘에 통하고 또 시방의 정토에도 통하기 때문에 잡다雜多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방정토를 원하는 자는 마땅히 잡행을 버리고 정행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제2장. 이종二種의 행行(正雜二行章) 3|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이 순일純一·잡다雜多의 의미는 경이나 논 속에도 그 증거가 있는가?

 

대답 대승과 소승의 경·율·논 속에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구분을 짓고 있는 예는 많다.

 

대승에서는 석존釋尊의 교설敎說을 팔장八藏으로 나누어 그 속에 잡장雜藏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으로 칠장七藏은 순수한 것이고, 일장一藏은 잡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승에서는 네 개의 아함경阿含經 속에 『잡아함경雜阿含經』을 포함시키고 있다. 역시 이것으로 세 개의 아함경은 순일한 것이고 하나의 아함경은 잡다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율장에서는 이십편二十篇을 세워서 계戒의 구체적인 규정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 처음 19 편은 순일한 것이고 나머지 1 편이 잡건도雜犍度라고 불리는 것이다.

 

논論에서는 팔편八篇을 세워 사상의 본질과 현상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 처음 7편이 순수한 것이고, 나머지 1편이 잡건도雜犍度라는 것이다. 고승高僧의 전기인 현성집賢聖集의 『당전唐傳』과 『송전宋傳』에는 10분과分科를 두어서 고승의 뛰어난 행적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 처음의 9 과科는 순일한 것이고 나머지 1과科가 잡과雜科이다.

 

또 『대승의장大乘義章』에는 오취법문五聚法門이라는 다섯 가지의 분류가 있는데 처음의 4류類는 순수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가 잡취雜聚이다. 역시 현교뿐만 아니라 밀교에도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법이 있다.

 

예를 들면 『산가불법혈맥보山家佛法血脈譜』에 ‘첫째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陀羅의 혈맥의 보譜가 1수首, 둘째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陀羅의 혈맥의 보譜가 1수首, 셋째 잡만다라雜曼陀羅의 혈맥의 보譜가 1수首’라는 것이 있는데 처음의 2수首가 순일한 것이고 나머지 1수首가 잡다한 것이다.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의미는 수없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약간만을 예로 들었을 뿐이다. 이와같이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의미는 교법敎法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선도화상의 생각을 살펴보면 정토에 왕생하기위한 행에 대해서 순일純一과 잡다雜多를 논하고 있다.

 

이 순일純一·잡다雜多의 의미는 불교의 경전뿐만 아니라 불교 이외의 전적典籍 속에도 그 예는 많이 있다. 그러나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그 예를 여기에서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행을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은 선도화상뿐만이 아니다.

 

도작선사의 생각에 의하면, 정토에 왕생하기위한 행은 수없이 많지만 대충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염불로써 왕생하는 것이요, 두번째가 많은 선행善行에 의하여 왕생하는 것이다.

 

또 회감선사懷感禪師에 의하면 정토에 왕생하기위한 행은 많이 있지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염불해서 왕생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많은 선행을 닦아 왕생하는 것이다(혜심대사惠心大師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3사師가 각각 순행純行과 잡행雜行이라는 이행二行을 세우고 왕생하기위한 행을 정리해 놓은 것은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외의 제사諸師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염불을 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자는 이것을 잘 생각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선도화상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일생동안 끊임없이 염불에 힘쓰는 자는 열사람이면 열사람 모두 왕생할 수 있고,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모두 다 왕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1) 다른 것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정념正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고,

 

(2)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꼭 맞기 때문이며,

 

(3) 석존釋尊의 교설敎說과 일치하기 때문이고,

 

(4) 부처님의 말씀을 순수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행에 전념하지 않고 잡다한 행을 실천하는 자로 백 사람 중에 한 사람 이나 두 사람 밖에 왕생할 수 없고, 천 사람 가운데에 세 사람이나 다섯 사람 정도 밖에 왕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1) 여러 가지 방해가 들어와서 정념正念을 잃어 버리기 때문이며,

 

(2) 미타의 본원本願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며,

 

(3) 석존釋尊이 설한 교설과 다르기 때문이며,

 

(4)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5) 부처와 정토를 생각하는 마음에 틈새가 있기 때문이며,

 

(6) 부처와 정토를 기억하는 마음에 틈새가 있기 때문이며,

 

(7) 여러가지 선행을 닦지만 아미타불의 국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원이 진실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8) 탐욕과 성냄 등 많은 사견邪見의 번뇌가 항상 일어날 틈새가 있기 때문이며,

 

(9) 돌이켜보고 반성하여 새롭게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10) 항상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하여 보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며,

 

(11) 타인을 깔보고 교만한 마음으로 행동하며, 자기가 행한 일에 항상 명예나 이익을 구하기 때문이며,

 

(12) 아집我執에 사로 잡혀 자기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불도佛道를 실천하는 자나 올바른 도리를 가려쳐 주려는 자 옆에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며,

 

(13) 여러 가지 방해물 곁으로 먼저 다가가 왕생을 위한 정행正行을 스스로가 방해하고 타인에게도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요즈음 제방諸方의 출가出家·재가在家의 사람을 보고 듣고 하는데, 이해하는 방법이나 수행하는 방법이 서로 달라 전수專修하는 자, 잡수雜修하는 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다만 정성을 다하여 염불하면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모두 다 왕생한다. 이것저것 해보면서도 진심을 담을 수 없는 사람은 천 사람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왕생할 수 없다.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정행과 잡행의 득실은 이와 같다.

 

원하건대,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택할 것인가 스스로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이미 이 몸으로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자는 일상의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마음을 격려하여 자기를 극복하고 밤낮 할 것 없이 생애를 걸지 않으면 안된다.

 

전생애를 걸어서 염불하는 것은 약간은 어려운 일 같지만 현생에 복福을 수용하고 생명이 다하면 곧 바로 정토에 태어나서 영겁永劫으로 완전하고 평안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또 부처가 될 때까지 생사의 어둠을 헤매는 일이 없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것을 잘 명심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건대, 이제 당연히 잡행을 버리고 오직 한마음으로 정행正行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어찌하여 백사람이면 백사람 모두 왕생하는 전수정행專修正行(염불)을 버리고 어리석게 천 사람 중에서 한사람 정도도 왕생하기 어려운 잡행잡수雜行雜修에 빠질 수가 있단 말인가?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려는 자는 명심하여 이것을 잘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제3장. 구제救濟의 힘(本願章) 1|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3장. 구제救濟의 힘(本願章)

 

 : 아미타여래가 다른 행을 왕생往生의 본원本願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염불만을 왕생의 본원으로 하신 것을 설한 글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상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될수 있는 진리를 터득하였다 해도 모든 중생들이 정성을 다해 나의 말을 믿고 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해 적어도 열 번 내 이름을 불러 왕생할 수 없다면 나는 부처를 이루지 않으리.”

 

 선도대사의 저서 『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도 이 문장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될수 있는 깨우침을 얻었다 하여도 모든 중생들이 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여 나의 명호名號를 적어도 열 번 불러 나의 서원誓願의 힘에 의해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때까지 완전한 깨우침을 얻는 부처는 되지 못할 것이다.”

 역시 선도대사의 저서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도 이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는 깨우침을 얻었다 하여도 모든 중생들이 나의 명호를 열 번 불러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을 세웠던 법장보살은 아미타불이 되어 극락정토에 계시며 지금도 설법하고 계신다. 이것으로 미타彌陀가 과거 인행시因行時 서원하신 자비로운 마음의 서원이 성취되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중생이라도 아미타 부처님을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모든 부처는 부처의 공통된 서원인 총원總願과 독자적인 서원인 별원別願을 가지고 있다.

총원總願이란 것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말하고 별원別願이란 석존釋尊의 오백 가지 서원과 약사여래의 십이대원 등을 말한다.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별원은 아미타불의 사십팔원四十八願이다

 

 물음 아미타불은 언제, 어떤 부처님 앞에서 어떤 서원을 세웠는가?

 

 대답 『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멀고 먼 아주 옛날에 정광여래錠光如來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수많은 중생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방황의 세계로부터 구해주셨다. 그리고 불도佛道를 터득하게 하시고는 드디어 영원한 평안의 세계로 돌아가셨다.

 

다음에는 광원여래光遠如來가 ……다음에는 처세여래處世如來가 나타나셨다. 이렇게 부처가 계속해 나타나시어(53불) 모두 중생을 제도하셨다. 그 다음 출현하신 부처가 세자재왕여래世自在王如來이시다. 세자재왕 부처님이 출현하신 그 때에 어떤 국왕이 있었는데, 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속 깊이 감동을 받아 결국 참된 진리를 구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나라를 버리고 왕위를 내어놓고 출가하여 법장비구法藏比丘라는 수행자가 되었다.

 

그는 참으로 깊은 지혜와 모든 사람을 크게 사랑하는 깊고 넓은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이미 범속凡俗을 훨씬 뛰어 넘고 있었다. 그는 세자재왕불 전에 일체중생을 제도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아름다운 불국정토를 세우고 싶다고 원을 세웠다. 그가 이룩할 정토 및 거기에 왕생하는 방법에 대하여 세자재왕여래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그래서 세자재왕여래는 기쁜 마음으로 법을 위하여 210억이나 되는 제불諸佛의 국토에 대하여 천인의 선·악·귀함과 추함 등 심중의 원에 따라 낱낱이 눈앞에 제시하여 설명하셨다. 그때 법장비구는 부처님이 설명하신 엄숙하고 청정한 불국토를 듣고 또 보고 나서 모든 중생의 소원을 다 성취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서원을 세웠다.

 

이제 그의 마음은 참으로 조용해졌고 집착하여 동요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방황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평안한 마음이 되었다. 법장은 5겁이라는 긴 세월의 수행과 아름다운 불국토의 청정의 행을 사유하였다. 법장비구는 210억이나 되는 수많은 제불의 아름다운 국토 중에서 청정의 행만을 택하였다."

 

또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 부처는 곧 바로 210억이나 되는 부처의 국토에 살고 있는 신들이나 사람들의 선·악 그리고 수승하고 추한 일들을 구별하여 법장이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었던 것을 선택해 주었다. 세자재왕불의 설법을 들은 법장은 곧 천안天眼이 열리어 210억이나 되는 수많은 제불의 국토에 있는 신이나 사람들의 선악, 그리고 그 나라의 수승함과 추함을 모두 구별하여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던 것을 선택해서 24의 서원을 결정할 수 있었다. "

 

 평등각경平等覺經』도 역시 이것과 마찬가지다.

 

이 경 속에 ‘가려낸다(선택選擇)’는 것은 나누어 버릴 것은 버리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즉 210억에 이르는 수많은 제불의 정토 속에서 그곳에 살고 있는 신이나 사람들이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하여 그 국토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대아미타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선택選擇’의 의미는 바로 이것과 같다. 『무량수경』에도 ‘선택選擇’의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즉 210억이나 되는 제불의 훌륭한 국토에서 청정한 행을 받아들인다(섭수攝受)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선택選擇’과 ‘섭취攝取’란 그 말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다. 즉 청정하지 못한 행을 버리고 청정한 행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럼 사십팔원四十八願에 대하여 각각 ‘선택選擇’과 ‘섭취攝取’의 의미를 논해보기로 하자.

 

제1은 3 종의 나쁜 경지가 없는 서원인데 법장 두루 관찰한 결과 210억이나 되는 불국토 속에는 3종의 나쁜 경지가 있는 국토도 있고 그렇지 않는 국토도 있다. 그러므로 3종의 나쁜 경지가 있는 국토를 가려내어 선택하지 않고 3종의 나쁜 경지가 없는 국토를 선택하는 것을‘선택(選擇)’이라고 한다.

 

제2는 나쁜 경지로 바뀌는 법이 없는 서원인데 많은 불국토 속에는 비록 3종의 나쁜 경지가 없다고 해도 그 국토의 사람들은 수명이 다한 뒤, 그 국토를 떠나 다시 3종의 나쁜 경지로 되돌아가는 국토도 있으며 돌아가지 않는 국토도 있다. 즉 다시 말하면, 악도惡道에 돌아갈 것 같은 추잡한 국토를 선택하지 않고, 악도에 돌아가지 않는 보다 훌륭한 국토를 선택하는 것, 이것을 “선택選擇’이라고 한다.

 

제3, 모든 것이 금색이기를 원하는 서원으로 많은 부처의 국토 속에는 황색·백색의 2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국토가 있다. 또 순수한 금색만의 국토가 있다. 즉, 황색·백색의 2종이 있는 추잡한 국토를 택하지 않고 금색의 1색만이있는 휼륭한 국토를 가려내는 것, 이것을‘선택選擇’이라고 한다.

 

제4는 호추好醜의 구별이 없기를 바라는 서원인데 많은 불국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모든 모습이 보기 좋은것과 보기 흉한 구별이 있는 국토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원만·평등하고 수승하여 호추好醜의 구별이 없는 국토도 있다.

즉 호추好醜의 구별이 있는 추잡한 국토를 버리고 호추의 구별이 없는 원만·평등의 수승한 국토를 택하는 것, 이것을 ‘선택選擇’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생략하고 제18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을 예로 들어보자. 수많은 불국토 중에는 보시의 행으로써 왕생하는 불국토가 있고, 또는 계戒를 잘 지킴으로써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으며, 또 인내를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고, 정진노력을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다. 또는 선정을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고, 반야를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고, 깨우침의 지혜를 얻으려고 애쓰는 마음을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다.

 

또 육념六念을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고, 경전을 항상 곁에 놓고 읽는 것으로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다.

 또는 진언眞言을 외우는 것으로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고 당탑堂塔 을 세우고 불상을 만들어 사문沙門에게 음식을 공양하거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공경하며, 선후배를 돕는 행위로 각각 왕생의 행위를 하는 불국토도 있다.

 

또 그 나라의 부처님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것을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의 행위를 하나의 불국토에 배당하는 것은 그저 단순한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 해본다면, 하나하나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즉 한 부처님의 국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수행이 필요한 곳이 있고, 여러 부처님의 국토에 왕생함에 단지 하나의 행으로 충분한 곳도 있다.

 

이처럼 왕생할 수 있는 행위도 여러 가지로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전부를 말할 수 없다. 즉 앞에서 말한 보시나 계를 지키는 일, 또는 그 이외의 행위를 접어두고 여기서는 오직 아미타불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을 택하기 때문에‘선택選擇’이라고 한다.

 

제3장. 구제救濟의 힘(本願章)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아무튼 사십팔원 중에서 다섯 가지만을 요약해서 ‘선택選擇’의 의미를 논해 보았으나, 이것 외의 43원은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있다.

 

모든 서원을 요약하면, 누추한 것은 가려내어 버리고 좋고 수승한 것을 선택한다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제18원에서는 모든 행위를 버리고 오로지 염불이라는 하나의 행위만을 택하여 왕생의 본원으로 했단 말인가?

 

좋은 질문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깊은 뜻을 범부로서는 추측하기가 어렵고, 또 간단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두 가지 이유로 해석해 본다면 하나는 승勝열劣의 의미고 또 하나는 난難이易의 의미이다. 승勝열劣의 의미는 불교는 뛰어난 것이고 그밖의 행위는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이름은 어떠한 중생도 다 구제할 수 있는 일체의 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미타불 자신이 증득하신 삼신三身·사지四智·십력十力·사무소외四無所畏 등의 모든 내증공덕內證功德과 그 공덕이 외면으로 작용하여 사람들에게 미치는 광명·설법 그리고 부처님의 특별한 모습이나 형태,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이익 등의 모든 공덕은 아미타불의 이름 속에 전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이름의 공덕이 가장 뛰어난 것이고 그밖의 행위는 그렇지 못한 것이며, 각각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말로 비유해 본다면 세상에서 말하는 가옥과 같은 것이다. 가옥이란 말은 목재·대들보·서까래·기둥 등을 비롯한 모든 가구를 그 속에 포함시킨 총칭인데 반대로 목재나 대들보·서까래·기둥 등의 말 하나 하나에는 가옥의 전체 의미를 포함시킬 수는 없다. 이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아미타불의 이름의 공덕은 그 외의 모든 공덕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래서 뒤떨어진 것을 버리고 뛰어난 것을 선택하여 본원本願으로 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난이難易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염불은 받아들이기 쉽고 그밖의 모든 행위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선도대사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물음 왜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켜 부처를 관상觀想하도록 하지 않고, 곧바로 아미타불의 이름만을 부르도록 했는가?

 

대답 중생은 번뇌의 장애가 많고 생각하는 것도 좁으며 마음은 거칠고 마음의 활동도 복잡하고 이에그 정신상태도 안정되어 있지 못하여 관상觀想을 이루기란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대성大聖 석존釋尊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셔 곧바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도록 권하셨던 것이다.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계속 부르는 것만으로도 정토에 왕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원신原信의『왕생요집往生要集』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음 모든 선업에는 각각 그것에 맞는 이익이 있으며 그것에 맞춰 왕생할 수가 있다. 그런데 단지 염불만을 권하는 것은 무엇 이유에서인가?

 

대답 지금 여기서 염불을 권하는 것이 그 외의 모든 훌륭한 행위를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염불은 남녀귀천, 행주좌와의 선악을 가리지 않고 또 때나 장소 등 모든 조건에도 관계없이 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임종을 맞이하여 왕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이 염불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염불은 쉽기 때문에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다른 행위는 어려워서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왕생시키기 위해서는 어려운 것을 버리고 쉬운 것을 선택하여 부처님의 본원本願으로 하신 것이다.

 

만일 당탑堂塔을 건립하고 불상을 만드는 것을 본원으로 한다면 가난하고 빈궁한 자들이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져 버릴 것이다. 더구나 부유한 자는 적지만 가난한 자는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만일 지혜가 뛰어나고 재능을 가진 자를 본원의 대상으로 한다면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자는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져 버릴 것이다.

 

더군다나 지혜가 있는 자는 적고 어리석은 자는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만일 많이 보고 많이 들어 학문의 교양이 풍부한 자를 본원의 대상으로 한다면 얼마 배우지 못하고 학문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끊어질 것이다.

더구나 많이 보고 들어 학문의 교양을 쌓은 자는 적고 학문을 하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만일, 계율을 견지堅持하고 있는 자를 본원의 대상으로 한다면 파계破戒나 무계無戒의 사람들은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지게 된다. 더구나 계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얼마 안되고 파계한 자는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이밖의 행위를 본원의 대상으로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여러 가지 행위를 본원이라 한다면 왕생할 수 있는 자는 적고 왕생할 수 없는 자는 많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여래가 법장비구로 계셨던 먼 옛날에 모든 중생을 평등한 자비로 골고루 구제하기 위하여 불상을 만들거나 당탑堂塔을 건립하는 등의 많은 행위를 왕생의 본원으로 하지 않으셨다. 오직 칭명염불稱名念佛의 한가지 행을 본원本願으로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법조선사法照禪師의 『오회법사찬五會法事讚』에서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일찍이 아미타불은 수행 중에

 

중생을 위해 큰 서원을 세우셨네.

 

 내 이름을 듣고 나를 부르면

 

누구라도 극락으로 맞이하겠네.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구별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도 우둔한 자도 가리지 않네.

 

많이 배운 자도 많이 배우지 못한 자도

 

구별하지 않으며

 

계율을 잘 지키는 자이건 파계를 한 자이건,

 

죄가 많은 자이건 죄가 없는 자이건 가리지 않네.

 

오직 나의 죄를 깊이 반성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른다면

 

이 세상의 기왓조각을

 

저 세상의 황금으로 변變하게 하네."


 


제3장. 구제救濟의 힘(本願章) 3|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모든 보살은 자기의 서원을 세우고 있는데, 이미 완성한 자도 있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자도 있다. 그것에 비하여 법장보살의 48팔원은 완성되었는가? 아니면 아직 미완성인가?

 

대답 법장보살의 사십팔원의 서원은 그 일원願 일원願이 이미 완성되어있다. 왜냐하면 극락세계에는 이미 지옥·아귀·축생도의 삼악취三惡趣가 없기 때문이다.

 

즉 제1의‘무삼악취원無三惡趣願’은 완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하면 원성취문願成就文에 ‘또 지옥·아귀·축생·제난諸難의 취趣가 없음’이라고 적혀있는데 바로 이 사실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극락세계에는 사람의 수명이 다한다 하여 세 가지의 악취惡趣에 돌아가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이것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제2의 ‘불갱악취원不更惡趣願’을 완성한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가 있는가하면 ‘원성취문願成就文’에 “보살 또는 부처가 될 때까지 악취惡趣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극락의 사람들은 이미 부처만이 갖출 수 있는 삼십이상三十二相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사실로써 당연히 알 수 있듯이 제3의‘구삼십이상具三十二相의 원願’을 완성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원성취문에‘이 나라에 태어나는 자는 모두 32상을 구족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그 사실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최초의 ‘무삼악취원無三惡趣願’에서부터 최후의 ‘득삼법인원得三法忍願’에 이르기까지 이미 서원이 모두 완성되어 있다. 하물며 가장 중요한 서원인 제18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만이 완성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들은 모두 왕생한다. 그것은 염불왕생의 원성취문에 ‘모든 중생들이 내 이름을 얻어 깊은 마음으로 믿고 환희하여 일념一念으로 회향하여 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왕생할 수 있다’라고 설하여 이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원래 48서원에 의해서 정토가 아름답게 건설되었다. 그 세계의 아름다운 연꽃과 밝은 연못 그리고 보석으로 장식된 휼륭한 건물 등은 이 모두가 아미타 부처님의 서원의 힘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서원 중에서 단 하나 ‘염불왕생원’만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서원의 마지막에는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루지 않겠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아미타경』에는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신 지 벌써 십겁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라고 설해져 있다. 이것으로도 부처가 되기 위한 서원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선도대사는 『왕생예찬』의 후서後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부처가 되어 지금 서방정토에 계신다. 그러므로 부처가 약속하신 자비에 넘치는 본원은 허망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부처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물음 『무량수경』에는 ‘일념一念’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선도대사의 주석서인 『관념법문』에는 ‘십성十聲’이라고 되어 있는데 ‘념念’과 ‘성聲’의 의미는 동일한 것인가?

 

대답 ‘념念’과 ‘성聲’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下品下生’단段에 ‘소리를 내어 멈추지 않고 열 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라. 내 이름을 부르는 성성聲聲의 염불 속에 80억겁의 생사의 중죄가 녹아 없어진다’라고 설하고 있다.

 

지금 이 문장에 의하면 ‘성聲’은 ‘념念’이고 ‘념念’은 그대로 ‘성聲’라는 의미가 명료해진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대집경大集經』의 「월장분月藏分」에는 ‘대념大念은 대불大佛을 보고 소념小念은 소불小佛을 본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회감법사懷感法師가 주석注釋하여 ‘대념大念이란 대성大聲의 염불이고 소념小念이란 소성小聲의 염불을 말한다’라고 해석하였다.

이것으로써‘념念’이란 즉 ‘소리를 내어 부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음 『무량수경』권상에는 ‘내지乃至’라고 되어 있고 그의 주석 (『관념법문』「왕생예찬」후서後序)에는 ‘하지下至’라고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대답 내지乃至와 하지下至의 의미는 동일하다. 『무량수경』에 내지乃至라고 되어 있는 것은 많은 것에서 적은 것으로 향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많다’는 것은 위(上)로 임종 직전까지의 전생애를 가리키는 말이고, 적다는 것은 아래(下)로 십성十聲 또는 일성一聲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이다. 주석에‘하지下至’라고 되어 있는 것은 하下는 상上에 대한 말이므로 하下라는 것은 임종의 직전 일성一聲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이며, 상上이란 것은 임종 직전까지의 전생애를 가리킨다.


이와같이 상上·하下는 상대적인 말로서 그 예는 굉장히 많다. 제5의 ‘숙명통원宿命通願’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된 후에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자기의 전생前生에 대한 일을 모르고 아래로 백천억나유타겁百千億那由他劫 동안 있었던 일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일이 있다면 그동안은 완전한 깨우침을 얻은 부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6에서 제10까지의 ‘오신통원五神通願’및 제12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제13‘수무량원壽無量願’등의 문장에도 하나하나 ‘ 하지下至’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많은 것에서 적은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고 하下는 상上에 대조되는 의미이다.


이상에서 예를 든 8종의 원에 의해서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제18원의 ‘내지乃至’라는 것은 그대로‘ 하지下至’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 선도대사가 인용하여 주석하신 ‘하지下至’라는 말도 그 의미가 똑같은 것이다. 선도대사의 견해는 다른 선덕先德과 다르다. 다른 선덕들의 해석에서는 따로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비해, 선도대사 혼자만 총괄해서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고 하고 있다.

 

다른 선덕들이 따로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이라고 한 것은 그 생각이 폭넓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상上은 일생애에 걸쳐 염불한 자와 또 하下는 그저 일성一聲의 염불만을 한 자는 왕생할 수 없으며 오직 십념十念을 외운 자만이 왕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도대사가 총괄해서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고 한 것은 그 생각이 폭넓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상上은 일생애에 걸쳐 염불한 자나 하下는 단 한 번 염불한 자까지도 모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제4장. 삼종三種의 행인行人(三輩念佛往生章)|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4장. 삼종三種의 행인行人(三輩念佛往生章)

 

 정토왕생을 원하는 사람들의 능력에는 삼종의 구별이 있는데 염불에 의해서 모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설한 글

 

 

『무량수경』 하권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방세계에 살고 있는 많은 천인과 인간 가운데 진실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의 능력은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상배上輩라는 것은 집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출가사문出家沙門이 되어 오로지 무량수불(아미타불)을 사모하여 많은 선행을 쌓아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임종을 맞이하였을 때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 많은 대중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시느니라. 그래서 곧 바로 아미타불을 따라 정토에 왕생한다. 그는 곧 정토의 칠보의 연꽃 속에 눈 깜짝할 사이에 태어나 두번 다시 번뇌와 방황의 세계로 돌아오는 일이 없다.

 

몸에 갖추어진 참된 지혜에 의해서 사물의 경계에 굴복하는 일이 없이 초자연적인 힘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난아! 사람들이 지금이 이 세상에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친견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불도佛道를 이룩하려는 마음을 세우고, 선행을 쌓으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중배中輩라는 것은 시방세계에 살고 있는 많은 천인과 사람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저 국토에 태어나고자 원을 세우고 비록 출가사문이 되었지만 크게 공덕을 쌓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내어 오로지 일념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념念하는 사람들이다.

 

선행과 계율을 받들어 지키며 몸과 마음을 조심하고 자기의 행위를 반성하며 당탑堂塔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성하거나 사문에게 공양을 올리고 비단으로 깃발을 장식하고 불전에 등불을 밝히며, 예쁜 꽃을 올리고 향을 사르며 이러한 공덕을 회향하여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임종시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 화현化現으로 광명을 나투시며 많은 성중聖衆과 함게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시느니라. 그 사람은 곧 부처님을 따라서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전의 자리에 올라 두번 다시 번뇌와 방황의 세계에 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 공덕과 지혜는 상배上輩 다음으로 뛰어난다.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를, 다음 하배下輩란 것은 시방세계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비록 많은 선행을 쌓을 수는 없어도 진실하고 참된 마음으로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계속 불러 왕생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은 임종을맞이하였을 때 꿈속에서 부처님을 뵙고 곧 왕생한다. 지혜와 공덕은 중배中輩 다음 간다.

 

물음 3종의 구별가운데 상배上輩에 관한 문에는 염불 이외에 집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는 여행余行이 있었고, 중배中輩에 관한 문에는 당탑堂塔을 건립하거나 불상을 조성하는 등의 여행余行이 있었고 하배下輩에 관한 문에는 보리심菩提心 등의 여행餘行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직 염불만 하여 왕생한다고 하였는가?

 

대답 선도화상의 『관념법문』에 『무량수경』하권의 처음부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석존釋尊은 모든 사람을 그 사람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상중하上中下의 3종으로 구별하셨다. 그러므로 그러한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 수행방법을 설하였지만, 그럼에도 ‘어떤 사람이건 오직 아미타불을 념念하라!’고 권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임종을 맞이 하였을 때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여러 성중聖衆과 함께 손수 마중나와 한사람도 빠짐없이 극락정토에 왕생시킨다고 설하고 있다. "

 

이와같이 선도화상의 주석에 의하면 삼배三輩는 모두 염불에 의해서만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

 

물음 그러나 이 주석만으로는 앞에서 문제로 했던 의문이 풀려지지는 않는다. 왜 다른 제행諸行을 버리고 오로지 염불만 하라고 했는가?

 

대답 그 뜻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제1은 다른 행위를 그만두고 염불만을 하게 하기 위해서 제행諸行을 설법하셨다.

 

제2는 염불을 돕기 위하여 제행諸行을 설법하셨다.

 

제3은 염불과 제행諸行의 2부문을 요약하여 각각 3종의 구별이 성립하도록 하기위해서 제행諸行을 설법하셨다.

 

제1의 제행諸行을 그만두고 오직 염불에만 귀일歸一시키기 위해서 제행諸行을 설법하셨다는 것은 선도대사의『관경소』「산선의散善義」에서

 

"정선定善·산선散善 두 가지의 가르침에는 각각 이익이 있다고 설법하고 있지만, 아미타불의 본원에 맞추어 보면 석존釋尊이 설법하신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일향전심一向專心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데 있었던 것이다." 라고 설하고 있다.

 

이 주석의 의미에 비추어 잠시 생각해보자.

 

상배上輩자에 대하여 깨침을 얻고 싶다는 보리심菩提心 등의 여행余行을 설법하고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맞춰보면 그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오직 아미타불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게 하는데 있다. 그렇게 때문에 본원 속에는 다른 여행余行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삼배三輩 모두가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한 것이며 오직 일향一向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열심히 부르는 것이다.

 일향一向이란  이방면, 삼방면 등으로 향한다는 다방면적인 의미에 대칭하는 말이다. 예를 들면 고대 인도印度를 동서남북 중의 5인도로 나누어 3종의 절(寺)이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제1은 ‘마음을 오로지 향해 대승을 배우는 일향대승사一向大乘寺’인데, 이 절에서는 소승불교를 공부하지 않는다.

 

제2는 ‘마음을 오로지 향해 소승을 배우는 일향소승사一向小乘寺’인데, 이 절에서는 대승불교를 배우는 일이 없다.

 

제3은 ‘대승과 소승을 함께 배우는 대소승겸행사大小乘兼行寺’로서, 이 절에서는 대승불교·소승불교를 모두 함께 공부한다. 그래서 겸행사兼行寺라고 한다.

 

여기서 확실히 알 수 있듯이 대승만, 또는 소승만 공부하는 절에서는 일향一向이라는 말이 가능하지만 겸행兼行하는 절에서는 일향一向이라는말은 없다. 지금 이 경 속에서 말하고 있는 일향一向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일, 염불 이외에 다른 행위가 덧붙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일향一向이 아니다. 절로 비유하자면 겸행사兼行寺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향一向이라는 것을 제시하여, 다른 여행余行을 겸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셨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여행余行을 설법하고 계시지만, 나중에는 일향전심一向專心이라고 명언하셨다. 이렇게 다른 행위를 그만두고 오직 염불만을 부르기 때문에 일향一向 이라고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할 것이다. 만일 이렇게 설명하지 않는다면 일향一向이라는 말을 납득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제2의 염불을 돕기 위하여 제행諸行을 설법하셨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있다.

 

하나는 같은 종류의 선善으로 염불을 돕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종류의 선善으로 염불을 돕는 것이다.

 

첫째의 같은 종류로 염불을 돕는다는 것은 선도화상의 『관경소』「 산선의散善義」에서 염불일행念佛一行을 돕는 행위로 5종의 조행助行을 들고 있다. 자세한 것은 제2장의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의 2종의 행行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 다음 다른 종류의 조성助成이라고 하는 것은 먼저 상배자上輩者에 대하여 정행正行과 조행助行을 말한다면 오직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정행正行인데, 이것은 도움을 받는 쪽이다. 집과 욕심을 털어버리고 사문沙門이 되어 진리를 깨우쳐 터득하려는 마음을 세우는것은 조행助行인데, 이것은 도와주는 쪽이다.

 

결국 왕생을 위한 행업行業으로는 염불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기 때문에 일향으로 염불을 하기위하여 집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사문이 되어 진리를 터득하려는 마음을 세우는 것이다. 다만 출가라든가 발심이라는 것은 여기에서는 처음 출가했을 때와 처음 발심했을 때를 말한다.

 

염불이란 기나긴 일생동안 잠시도 멈추지 않는 행위이다. 때문에 이러한 행위들이 어찌하여 염불을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중배자中輩者 중에는 당탑堂塔을 건립하거나 불상을 조성하거나 비단으로 깃발을 장식하거나 불전佛前에 연등을 켜고, 아름다운 꽃을 올리고, 향기로운 향을 올리는 등 많은 행업行業이 있다.

 

이것은 모두 그대로 염불을 돕는(助成) 것이다. 그 주지主旨는 혜심승도惠心僧都의 『왕생요집往生要集』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십문十門가운데 제5문의‘조념방법助念方法’의 장소나 공물·도구 등을 말한다. 또 하배자下輩者 중에는 역시 깨침을 얻으려고 발심하는 것과 염불이 있다. 행助行과 정행正行과의 관계는 이미 앞에서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의 염불과 제행諸行을 2부문으로 요약하여 각각 세가지 종류의 구별이 성립하도록 제행을 설법하셨다는 것은 먼저 염불을 요약해서 세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즉 이 세가지 속에는 공통으로‘모두 일향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을 염불문念佛門에 요약해서 세가지 종류를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왕생요집』제8문의 ‘염불증거문念佛証據門’에  "『무량수경』의 삼배三輩의 업業에는 깊고 얕음의 차差가 있지만 그러나 모두 공통으로 “오직 일향一向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부르라”고 설법하고 있다(회감법사도 같은 생각이다).

 

그다음 제행문諸行門을 요약하여 3종을 세운 것은 삼배三輩의 문文에 모두 깨침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등의 제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제행을 요약해서 3종을 세운 것이다.

 

그 때문에 『왕생요집』제9문의 ‘제행왕생문諸行往生門’에 『무량수경』에 설한 삼배三輩도 역시 이 3종과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은 3종의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어느것이나 ‘일향으로 염불하기위해’ 설법되어진 것에는 변함이 없다.

 

즉 제1의 의미는‘그만두게 하기 위하여’와 ‘염불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설법하신 것이다.

 

제2의 의미는‘조정助正’을 위한 설법으로, 염불의 직접 원인이 되는 바른 행위를 조장시키기 위해서 다른 행업의 간접 원인이 되는 행업을 설법하신 것이다.

 

제3의 의미는‘방정倣正’을 위해서 설한 것으로, 염불과 다른 행업과의 2 부문을 설법하였는데, 염불을 구제의 바른 실천행으로 했고 다른 행업을 부수적인 것으로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삼배자三輩者 모두에게 염불을 권하고 있다는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3종의 의미에 우열은 가리기 어렵다. 아무쪼록 어느 것을 택하고 버릴 것인가는 배우는 사람들이 스스로 잘 생각해서 택하기 바란다.

 

그러나 만일 선도화상의 해석을 살펴보면 제1의 의미인 ‘그만두게 한다(廢立)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였다.

 

물음 삼배三輩의 업業은 모두 염불하라는 의미는 확실해졌다. 그러나 『관무량수경』에 설명되어 있는 구품九品과 『무량수경』에 설명되어 있는 삼배三輩라는 것은 구별의 차이에서 비록된 것으로 그 구별의 차이란 원래 개합開合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만일 구별의 차이에서 개합開合의 차이가 생겼다고 하면 어째서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삼배三輩에서는 모두 염불하라고 했으며, 『관무량수경』의 구품九品의 단段에서는 상품上品·중품中品의 6품에서 염불을 설명하지 않고 하품下品의 3품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염불을 설명하였는가?

 

대답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제1은 질문의 첫 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무량수경』의 삼배三輩와 『관무량수경』의 구품九品은 그 개합開合에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래서 구품九品 속에는 모두가 염불이 있다.

 

왜냐하면 삼배三輩 속에 모두 염불이 있기 때문에 구품九品 속에 염불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생요집』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물음 염불은 구품九品중 어느 품品 속에 들어가 있는가?

 

대답 만일 경에서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수행한다면 당연히 상품상생자上品上生者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에는 승열勝劣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와같이 우열의 차이에 따라 구품으로 나눈 것이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 설해져있는 구품九品의 행업行業은 그저 그 일부분만을 나타낸 것으로 그 도리로부터 말한다면 실제로는 셀 수 없을 만큼 그 종류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이 구품九品의 어느 것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제2는『관무량수경』의 취의는 처음에 널리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두 행위를 설명하여 두루 사람들의 능력에 맞춘 다음 정선定善·산선散善의 두가지 행위를 없애 오직 염불의 일행一行에 귀일歸一시키는데 있다.

 

즉『관무량수경』의 마직막 부분에 나오는 ‘너는 이 말을 후세에 까지 전하여라’고 하는 부촉付囑의 문文을 말한다. 의미에 대하서는 나중 12장에서 자세히 말하기로 하겠다. 러므로 구품九品의 행위는 오로지 염불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5장 . 염불의 은혜(念佛利益章)

 

: 염불하는 자의 이익을 설한 글


『관무량수경』하권에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부처님께서 미륵彌勒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미타불의 이름을 듣고 환희용약歡喜踊躍하여 단 한 번이라도 염불한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을 것이다. 즉 이 이익이란 더없이 훌륭한 공덕을 몸에 지닌 것과 같다."

 

선도대사의 『왕생예찬』에서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들으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이 넘쳐 흘러

 

단 한번만 염불하여도

 

모두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네."

 

물음 앞에서 말한 삼배三輩의 문장에 의하면 염불 이외에 깨침을 얻고 싶다는 마음 등의 공덕을 예로 들고 있다. 어찌하여 이 공덕들을 내세우지 않고 단지 염불의 공덕만을 찬탄하는가?

 

대답 부처님의 깊은 뜻은 헤아릴 수 없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깊은 까닭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선도대사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결국 부처님의 취의趣意는 직접 정면으로 염불수행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사람의 능력에는 각기 차이가 있으므로 일단 그 능력에 맞추어 깨침을 얻으려는 마음 등의 여러 제행諸行을 설명하고서 삼배三輩에 대하여 깊은 것과 얄은 것을 구별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제행諸行을 버리고 오직 염불일행一行만을 선택하여 찬탄하셨다. 이 뜻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만일 염불에 한정해서 삼배三輩에는 왜 구별이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관념觀念의 심천深淺에 따라 삼배三輩를 구별한 것이고, 둘째는 염불의 다소多少에 따라 삼배三輩를 구별한 것이다.

 

깊고 낮다고 하는것은 전장前章에서 인용한 것처럼 『왕생요집』의 “만일 경에 설법되어 있는 대로 수행한다면 당연히 상품상생자上品上生者에 해당할 것이다” 라는 의미로 깊고 낮음이 존재하게 된다

 

그 다음 많고 적다는 것은 삼배三輩 중의 하배下輩를 설명한 문장 속에는 십념十念 내지乃至 일념一念이라는 숫자가 있다.

 

상배上輩·중배中輩에 속하는 자일수록 이것을 기준으로 그 숫자가 증가하기 때문에 결국 많고 적은 것이 있다는 것이 된다.

 

이것에 대해서 선도대사는 『관념법문(觀念法門)』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매일, 일만 편의 염불을 하여라. 또 가끔씩은 정토에 아름답게 있는 것을 찬탄·칭송하며 열심히 정진노력해야 한다. 또는 하루에 삼만·육만·십만 편의 염불을 하는 자는 모두 상품상생上品上生의 사람이다. "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삼만 편 이상의 염불을 하는 자는 상품상생上品上生에 도달하는 행위가 되고, 삼만 편 이하의 염불을 하는 사람은 상품上品 이하의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이미 염불 하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구품九品 등의 구별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일념一念이란 제3장에서 말하는 『무량수경』의 염불의 서원이 완성된다는 부분의 일념一念과 제4장의 하배下輩를 설명한 부분에서 분명해진 일념一念을 말한다.

 

원성취문願成就文에서 일념一念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아직 위대한 공덕의 이익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또 하배下輩를 설명한 문장에서도 일념一念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만 역시 위대한 공덕의 이익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에 이르러 일념一念의 위대한 이익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였고, 그것을 최고의 것으로서 찬탄하였다.

 

여기서 말할 수 있듯이 앞에서 말한 일념一念도 역시 이것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홀륭한 이익이란 것은 작은 이익에 상대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침을 얻으려는 마음 등의 여러 행위로써 작은 이익을 얻고 한번의 염불만으로도 위대한 이익을 얻게된다.

 

또 최고의‘무상無上의’ 공덕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여러 행위로는 보다 더 좋은 위上가 있는데 염불로서는 더 이상 좋은게 없는 최고의 것이라는 것이다.

 

단 한번의 염불조차도 더 바랄것 없는 무상無上의 이익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십념十念 이라면 십념十念 대로 더없는 이익을 얻는 것이고, 백념百念 이라면 백념百念대로, 천념千念이라면 천념千念대로 무상無上의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개해 가면 적은 것에서부터 많은 것에 이르러 염불을 갠지스 강의 수많은 모래알 만큼 많이 한다면 무상無上의 염불공덕도 역시 갠지스 강의 모래알 만큼 많아진다.

 

그러므로 왕생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무상無上의 위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염불을 하지 않고 억지로 적은 이익밖에 없는 다른 행위를 하려고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6장. 영원의 가르침 (特留念佛章) |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6장. 영원의 가르침 (特留念佛章)

 

: 말법세상이 되어 일만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에 불법佛法이 모두 소멸하여도 다만 염불만은 남는다는 것을 설법한 글

 

『무량수경』의 하권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윽고 먼 후세에는 경經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불법佛法이 모두 소멸되어 버려도 나는 자비慈悲와 측은惻隱함을 가지고 이 경經 만은 백년 동안 이 세상에 남겨 두겠다.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이 경經의 가르침을 만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두 불도佛道에 들어갈 수 있을 것 이다."

 

물음 경經에는‘특별히 이 경經만을 백년 동안 남겨 놓는다’라고 했을 뿐 염불만을 백년 동안 남겨 놓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지금 오직 염불만을 남겨 놓는다고 했는가?


대답 이 경經이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오직 염불에 있다. 그 주지主旨는 앞에서 말한 대로이기 때문에 재차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선도善導· 회감懷感·혜심惠心·승도僧徒의 선사先師들도 같은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經을 남겨 놓는다는 것은 바로 염불을 남겨 놓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경經에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어떠한 상태가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인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또 지계持戒라는 말이 있는데 어떠한 상태가 지계持戒인지도 아직은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보리심경菩提心經』등에는 어떤 상태가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인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만일 이 『보리심경菩提心經』이 먼저 소멸되어 버린다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의 수행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야만 하는가?

 

또 지계持戒의 양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대승·소승의 율장律藏에 많이 있다. 만일 이 율장律藏이 먼저 소멸해 버린다면 지계수행持戒修行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만 하는가?

 

이외의 여러 가지 행위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도화상은 『왕생예찬』에서 이『무량수경』 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일만년이 지나 삼보三寶가 소멸한다 하여도 이 『무량수경』 만은 더욱 백년간 남는다. 그때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한번이라도 염불하면 모두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난다."

 

이 문장을 해석해 보면 대충 네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제1은 성도문과 정토문淨土門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제2는 시방의 불국토와 서방정토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제3은 미륵보살의 도솔천과 아미타불의 정토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제4는 염불의 일행一行과 그 외 다른 많은 제행諸行의 수행방법 중 어느 쪽이 먼저 소멸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라는 것이다.

 

먼저 제1의 성도문과 정토문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하면, 성도문에 관한 모든 경經이 먼저 소멸한다.

 

그러므로 경經에 설해져 있는 모든 교법敎法이 다 소멸해 버린다 해도 정토문을 설한 이 『무량수경』만 유일하게 남기 때문에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기겠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성도문은 사람의 소질능력이 가르침의 조건에 맞지 않고 그저 표면적인데 비하여 정토문은 사람의 소질능력이 가르침의 조건에 맞아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2의 시방의 불국토와 서방정토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를 생각하면 시방의 불국토를 설명한 가르침이 먼저 소멸한다.

 

그러므로 ‘경經에 설해져 있는 모든 교법敎法이 다 소멸해 버린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방정토의 왕생을 설한 이 『무량수경』만을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기겠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시방의 불국토에서는 사람의 소질·능력이 가르침의 인연이 되지 않고 단지 표면적인 데 비하여 서방정토는 사람의 소질능력의 인연이 매우 깊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3의 미륵보살의 도솔천과 아미타불 정토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하면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이나 『심지관경心地觀經』 등에 설해져 있는 도솔천에 상생上生한다는 여러 가르침이 먼저 소멸한다.

 

그러므로 ‘경經에설해 있는 불도佛道가 모두 소멸해 버린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서방정토에 왕생할 것을 설한 이 『무량수경』만이 남는다. 그래서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기겠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도솔천은 가깝지만 사람과 접촉할 인연이 빈약하고 극락은 멀지만 사람과 접촉할 인연이 아주 깊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4의 염불과 제행諸行의 두 가지 수행 중에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하면 제행諸行으로써 왕생할 것올 설한 가르침이 먼저 소멸한다.

 

그러므로 경經에 설해 있는 불도佛道가 모두 소멸해 버린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염불로써 왕생할 것을 설한 이 『무량수경』만이 남는다. 그러므로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기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제행諸行에 의해서 왕생하는 것은 사람의 소질능력이 가르침의 인연이 되지 못하고 그저 표면적인데 비하여 염불로 인하여 왕생하는 것은 사람의 소질능력이 가르침의 인연이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뿐 아니라 제행諸行에 의해서 왕생하는 것은 사람을 구제할 인연이 적은 것이고 염불로써 왕생하는 것은 사람을 구제할 인연이 많은 것이다.

 

또 다른 여러 가지 제행諸行에 의해서 왕생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말법 만년까지라고 한정되어 있지만, 염불에 의해서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불법佛法이 소멸하고 난 다음에도 백년 동안 사람들을 구제하게 해주기 때문에 오래도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음 이미 말한 것처럼 『무량수경』에서 ‘나는 자비와 연민으로 이 경經만은 앞으로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겨 놓겠다’고 하셨다.

 

만일 석존釋尊께서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써 경經이나 가르침을 남겨 놓으셨다면 다른 경經이나 가르침을 남겨놓아도 좋았을 것인데 어째서 다른 경經은 남겨놓지 않고 오직 이 『무량수경』만을 남겨 놓았는가?

 

대답 만일 다른 어떤 경經을 남겨 놓는다 해도 특별하게 하나의 경經만을 남겨 놓는다면 똑같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 특별히 이 『무량수경』을 남겨 놓으신 것은, 선도화상의 생각에 의하면, 이 경經 속에는 중생이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이미 설명되어 있다. 석존釋尊의 대자비大慈悲는 이 염불을 남겨놓기 위해서 더욱 이 경經을 남겨 놓으신 것이다.

 

다른 경經들 속에는 중생이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아직 설해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釋尊의 자비는 그러한 경經들을 남겨놓지 않으셨던 것이다.

 

생각컨대 사십팔원四十八願은 모두 본원本願이지만 특히 염불을 왕생의 최고가는 규범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도화상의 주석인『법사찬法事讚』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큰 서원은 많아서 그 유類가

 

사십팔원四十八願에 이르지만

 

오직 일심一心으로 염불만을 한다면

 

아미타 부처님은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하시네

 

중생이 항상 입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부처님은 곧 그 목소리를

 

들어주시고

 

중생이 몸으로 항상

 

아미타불께 예배하면

 

부처님은 이를 보아주시네

 

중생이 항상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생각하면

 

부처님은 이를 알아주시고

 

중생이 아미타불을 억념憶念하면

 

부처님도 곧 이를 억념憶念해주시네

 

이렇게 아미타불과 나는 항상

 

떨어져 있지 않으니 아미타불과

 

나는 참으로 가까운 인연일세.

 

 

이와 같이‘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을 사십팔원四十八願 중에서 으뜸으로 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석존釋尊의 자비가 이 『무량수경』만을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겨 두시려고 하셨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 『관무량수경』에서 정선定善·산선散善의 행行을 설명하면서도 아난에게 이것을 잘 지켜 후세에 전하라고 하지 않고 오직 염불만을 후세까지 전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즉 이것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順彼佛願故) 염불일행念佛一行만을 잘 지켜 전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물음 앞으로 백년간 더 이 세상에 염불을 남겨두신 의미는 잘 알았다. 그런데 이 염불의 행行은 단지 말법末法의 만년이 지난 뒤 백년 동안의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시대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가?

 

대답 말할 것도 없이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의 어느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말법시대末法時代가 지나도 이익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말법시대末法時代인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염불을 권장(勸獎)하기 위해서 말세가 지난 뒤 더욱 백년간이라고 설법한 것이다.

 

제7장. 구제의 빛 (光明攝取章)

 

: 아미타불의 광명은 다른 여행余行하는 자를 비춰주지 않고 오직 염불하는 자만을 비추어 섭취攝取하신다는 것을 설한 글

 

부처님께서 『관무량수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은 팔만사천이나 되는 훌륭한 상호相好를 갖추고 있다. 그 하나하나의 모습에는 팔만사천의 특징이 각각 섬세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그 섬세한 특징에도 역시 팔만사천의 광명이 있다. 그 하나하나의 광명은 골고루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염불하고 있는 중생을 그 광명 속으로 섭취攝取하고 계시는데 단 한사람도 빠지는 일이 없다."


『관경소觀經疏』「정선의定善義」에서는 상上의 문文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에서부터 섭취불사攝取不捨에 이르기까지는 부처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특징을 관찰해서 그 속에 있는 광명이 염불하는 사람을 비추어 이익을 전해준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 바르고 아름다운 상호相好의 특징의 수를 밝혔고, 둘째 각 부분의 섬세하고 훌륭한 특징의 수를 밝혔고, 셋째 상호相好에서 빛나는 광명의 수를 밝혔으며, 넷째 신상身相의 광명이 어디까지 비추는가를 밝혔고, 다섯째 신상身相의 광명이 미치는 곳에서는 염불하는 모든 사람이 광명에 섭취攝取되어 이익을 받음을 밝혔다."

 

물음 그런데 앞에서는 열심히 많은 선행을 쌓아 정토에 회향하면 누구라도 왕생할 수 있다고 했는데 시방세계를 골고루 비추는 아미타의 광명이 어찌하여 염불하는 자만을 비추어 주시는가?


대답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친한 인연의 관계이다. 사람들이 염불의 행行을 시작하여 입으로 항상 아미타를 부르면 부처님은 이를 들어 주시고, 몸으로 항상 아미타 부처님께 예배하면 부처님은 이를 봐주시며, 마음으로 항상 아미타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은 이를 알게 되시며, 사람들이 아미타 부처님 을 항상 억념憶念하면 부처님도 이를 항상 억념憶念해 주신다. 이렇게 사람과 부처님이 몸과 입과 마음의 행위가 항상 밀접하고 친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친연親緣이라고 한다.

 

둘째 가까운 인연(近緣)의 관계다. 사람들이 아미타 부처님올 만나고 싶어하면 부처님은 그 생각에 응하여 눈앞에 나타나 주신다. 이렇게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근연近緣이라고 한다.

 

셋째, 힘을 도와 받는 인연(增上緣)의 관계이다.

 

사람들이 아미타 부처님을 부르면(念佛) 즉시 다겁의 생사 중죄重罪가 소멸되고, 임종을 맞이하였을 때는 아미타 부처님이 정토의 모든 성인들과 함께 손수 마중나와 주신다. 거기에는 방황하는 어둠의 세계에 붙들어 매는 어떤 나쁜 것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좋은 힘을 조장진전助長進展 시켜주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증상연增上緣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많은 중행衆行들도 선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만일 염불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염불과 상대가 안된다.

 

그러므로 많은 경經 속에 널리 염불의 수승함을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량수경』의 사십팔원四十八願 중에‘오로지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왕생할 수 있다’라고 설해져 있다.

 

또 『아미타경』속에는‘하루 또는 칠일 동안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왕생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또 ‘갠지스 강변에 있는 수많은 모래알 처럼 많은 시방의 부처님들이 염불하면 틀림없이 왕생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계신다’라고 설해져 있다.


또 『관무량수경』에는“잡념雜念을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오직 정토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정선定善과 산란한 마음 그대로 수행하는 산선散善을 설법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설법하신 참된 이유는 오직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라고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예는 이외도 많이 있다.

 

또 『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미타 부처님의 모습에서 나오는 빛나는 광명은 그 하나하나가 시방세계를 골고루 비추고 있지만 만일 열심히 염불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미타불의 심광心光은 항상 이 사람들을 비추고 지켜주어 버리는 일이 없다. 그 외 잡행雜行 잡업雜業을 수행하는 자를 비춰주시는지 어떤지는 논하지 않으셨다."

 

물음 아미타 부처님의 광명이 오로지 염불하는 자만을 비추어 주시고 다른 여행余行을 실천하는 자는 비춰주시지 않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대답 조용히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친연(親緣) 등의 세 가지 의미인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관경소觀經疏』에서 적혀있는 대로이다.

 

또 하나는 본원本願의 의미이다. 염불이 아닌 여행余行은 본원本願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비춰주지 않는 것이다. 염불은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비춰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선도화상의 『왕생예찬』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색신은

 

황금의 금산과도 같고

 

맑고 깨끗한 자비의 광명은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네

 

그러나 염불하는 자에게만 오직

 

미타의 금색광명이 빛나네

 

염불을 더욱 많이 하면

 

더욱 더 밝게 빛나리"

 

 

또 『관경소觀經疏』「정선의定善義」의 ‘그외 여러 여행余行 중행衆行들도 선善이라고 불려지고 있지만, 만일 염불과 비교한다면 전혀 상대가 안된다’라 는 의미는 정토문의 많은 제행諸行 가운데 비교 한 것이지만 염불은 이미 이백십억이나 되는 불국토에서 선택한 묘행妙行이다. 다른 제행諸行은 이미 이백십억이나 되는 여러 불국토 중에서 버려진 조잡한 행行이다. 그러므로 전혀 비교할 상대가 안되는 것이다.

 

염불은 본원本願의 실천행이며 다른 제행諸行은 본원本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비교할 상대가 못된다는 것이다.

 

 

제8장. 세 가지의 마음가짐(三心章)

 

 

: 염불을 행行하는 자는 반드시 삼심三心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을 설한 글


 

『관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삼심三心을 갖추는 것이 좋다. 그러면 곧 바로 왕생할 수 있다. 그럼 무엇을 3종의 마음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지성심至誠心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요, 셋째는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 설하기를, 첫째 지성심至誠心인데 지至라는 것은 진眞이고, 성誠이라는 것은 실實이다(즉 진실심의 의미).

 

누구라도 몸과 입과 마음의 행동에 의해서 도리를 배우거나 실천할 때는 반드시 진실심 속에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표면으로는 현명하고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내면은 어리석고 태만한 거짓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탐욕과 분노, 부정과 어리석음, 악담과 거짓말 등의 수많은 나쁜 마음이 있다.

 

그것은 마치 독에 찬 독뱀이나 전갈처럼 마음이 독하고 비뚤어 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친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뚤어진 몸과 마음의 자세로 수행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표면만 그럴듯한 잡독雜毒의 선善이라고 불리며 거짓의 행위요 진실한 수행이라고 볼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런 상태로 겉으로만 왕생을 원하며 행동하는 자는 아무리 몸과 마음을 각고정진刻苦精進하여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밤낮없이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며 수행한다 하여도 이는 역시 잡독雜毒의 선善이라고 불리는 더러워진 행위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이 잡독雜毒의 선善을 가지고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한다 해도 이는 왕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과거 인행시因行時 법장보살로서 부처가 되기 위하여 수행을 하고 있었을 때는 비록 일념一念 일찰나一刹那와 같이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몸으로 행하는 것과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모두 진실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맨처음 부처님께서 중생을 인도하고 제도하려고 할 때도, 진리를 터득하려고 할 때도, 모두 진실심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진실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리自利의 진실이고 또 하나는 이타利他의 진실이다.

 

자리自利의 진실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실심 속에서 자기의 악惡은 물론 타인의 악惡까지 물리치고 더러움으로 꽉 찬 속된 세계를 억제하고 이것을 싫어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행주좌와行住坐臥속에서 항상 보살이 모든 악惡을 싫어하고 버릴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악惡을 싫어하고 버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진실한 마음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선善을 행行하며, 타인의 착한 행위도 함께 기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행하신 선善을 모두 실행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항상 진실하게 아미타불 및 불신佛身과 불국佛國을 찬탄한다. 그리고 또 삼계三界를 헤매는 자타自他의 업보業報로써 얻은 이 몸이나 그 환경의 괴로움이나 악사惡事를 진심으로 싫어한다.

 

또 모든 사람들의 몸과 입과 마음의 활동에서 나온 선행을 진심으로 찬탄한다.

 

만일 좋은 행동이 아니면 멀리 피하고 그것을 수희隨喜하지 않는다.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몸의 자세로 아미타불과 그 정토에 두손을 모아 합장예배하며 음식·의복·침구·탕약·아름다운 꽃 등을 공양한다.

 

또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는 몸가짐은 이 번뇌의 세계에서 자타의 업보業報로써 얻은 이 몸이나 그 환경을 진심으로 싫어하며 아낌없이 버린다.

 

또 진실심으로 행하는 마음의 자세는 아미타불 및 그 불국佛國을 사모하고 관찰 억념憶念하여 눈앞에 나타나도록 한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이 번뇌의 세계에서 자타의 업보業報로써 얻은 이 몸이나 그 환경을 진심으로 싫어하고 버리려고 한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좋지 않은 일을 했다면 반드시 진실심으로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만일 몸과 입과 마음으로 좋은 일을 했다면 반드시 그것은 진실심 바로 그것이 아니면 안된다.

 

결국, 마음의 곁과 속의 모습이, 그리고 사람이 보고 있는 곳에서나 보고 있지 않는 곳에서나 항상 겉과 속이 똑같은 진실함이 아니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지성심至誠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2는 심심深心이다. 심심深心이란 깊게 믿는 마음이다. 이것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2종 심심深心)

 

하나는 결정코 자신은 지금 현재 죄악심중罪惡深重의 범부중생으로서 광겁曠劫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항상 번뇌의 세계에 유전流轉하고 침륜沈淪하여 생사의 길을 도저히 뛰어넘을 수가 없음을 깊이 믿음이다.(기機의 반성)

 

또 하나는 결정코 아미타불은 사십팔원四十八願을 세우시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계신다.

 

이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이몸을 맡기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스스로 깊이 믿는 마음이다.(법의 자각自覺)

 

또 석존釋尊은『관무량수경』에서 삼복三福·구품九品·정산定散 이선二善을 설하시고 아미타불의 불신佛身과 불국토를 찬탄하시고 아미타불 불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기뻐하고 사모하며, 기쁜 마음으로 염불하는 사람으로 털끝만치도 의심하는 일이 없이 깊이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아미타경』에서는 시방세계에 편재하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은 부처님이 모든 범부중생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받아 부른다면 반드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진심으로 권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깊이 믿는 것이다.

 

또 깊이 믿는 마음(심심深心)이라고 하는 것은‘삼가 원하옵건대, 일체의 수행자들은 일심一心으로 오직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신명身命을 돌아보는 일이 없이 결정된 굳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아미타 부처님께 맡겨버리고 오직 염불하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믿고 모든 것을 아미타 부처님께 맡겨버리는 마음이다.

 

또 부처님께서 버리신 법法은 그대로 따라서 버리고, 부처님께서 실천하신 법法은 그대로 따라 실천하라.

 

또 부처님께서 떠나신 이 사바의 예토穢土는 그와 같이 피하여 떠나가라.

 

이와 같이 행동함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따르는 길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길이며, 부처님의 의사에 따르는 길이요, 부처님의 뜻에 의지함이니라.

 

이와 같이 실천함이 곧 부처님의 서원에 따름이요. 부처님에 의지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천하는 사람을 진실한 부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오직 이 경전(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맡기고 깊이 믿어 행한다면 반드시 부처님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일이 결코 없느니라. 왜냐하면 부처님은 자비와 지혜가 원만구족하신 분이기 때문에 항상 진실한 말씀만 하시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아닌 이하의 보살들은 그 지혜와 수행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닦아야 할 수행의 지위에 있어서도 번뇌의 근본과 본체가 아직 없어지지 않아 번뇌의 습관과 같은 것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

 

또 부처가 될 만한 결과로서의 본원本願도 아직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수행의 여러 가지 단계에 있는 성자들은 예를 들어 많은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본의本意를 추측해 본다 하여도, 확실한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결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부족(不足)함이 있다고 할수 있다 설사 부처님의 본의本意를 분명하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하여도 반드시 부처님께 증명을 청하여 다시한번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그 추측이 부처님의 본의本意에 들어맞는다면 부처님께서는 이를 인가印可하여 “선재善哉라, 그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로다”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부처님의 본의本意에 맞지 않았을 때는, 부처님께서는, “너희들 이 설한 것은 맞지 않다”라고 말씀하신다.

 

부처님께서 인가를 하지 않은 법法은 무의미한 것으로 사람에게 아무 이익이 없는 말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것은 그대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그대로 바른 가르침, 바른 도리, 바른 행위, 바른 수행, 바른 활동, 바른 지혜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한 말씀은 때로는 많거나 때로는 적다 하더라도 모든 보살들과 신神들 그리고 인간에게 그것을 물어서 낱낱이 시비是非를 가릴 성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대로 완전한 가르침(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들이 설한 가르침은 모두 불완전한 가르침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일체의 인연이 있어 왕생을 발원하는 사람들은 오직 깊이 부처님의 말씀만을 믿고 오로지 일심一心으로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고 간절히 권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들이 설한 불상응不相應의 가르침을 신용하여 오히려 의혹과 장애를 일으켜 스스로 나아감에 갈팡질팡 망설이게 되어 왕생의 큰 이익을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또 심심深心이란 깊이 믿는 마음으로, 이것은 자기의 신념을 결연히 확립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고 그것에 대한 의혹을 영원히 없애버리고 자기와 달리 다른 교리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 다른 교리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 또는 다른 사상, 다른 학설, 다른 견해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미혹하여 동요하고 움직여서는 안된다.



제8장. 세 가지의 마음가짐(三心章)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범부라고 하는 것은 지혜가 얕고 또 장애가 의외로 깊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과 달리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많은 경론經論을 인용하여“때문에 일체의 죄장罪障이 깊은 범부는 절대로 왕생할 수 없다”고 증명하여 훼방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하여 그 비난을 타파하고 신심을 견고하게 하여 퇴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결연히 똑바로 나아갈 수가 있겠는가?

 

대답 만약 그렇게 많은 경론經論을 인용하여‘왕생할 수 없다’고 증명한다면 정업淨業을 닦는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즉시 다음과 같이 대답하면 좋을 것이다.

 

"당신이 경론經論을 인용하여‘왕생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내 마음의 상태는 확고하여 당신의 주장에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또한 많은 경론經論에서 인용된 말씀을 하나하나 전부 공손히 믿고 있다. 그렇지만 석존釋尊이 그러한 경經을 설하게 된 때는 때와 장소에 따라 듣는 사람의 기질과 능력도 다르고 그에 따라 얻는 이익도 다르다.

 

또 그러한 경經을 설하게 된 때는 『관무량수경』·『아미타경』 등을 설할 때와는 다르다.

 

또 석존釋尊은 법을 설할 때 듣는 사람의 소질과 능력에 맞추어 설법하고 또 설함에 시기도 다르다. 인용한 경經은 인간 또는 신, 보살들 에게 공통되는 교리와 그 실천방법을 설한 것이나, 지금 여기서 문제로 하고 있는 『관무량수경』은 위제희부인韋提希婦人을 위하여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법法을 설하고, 또 석존釋尊이 멸한 후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시대에 5고五苦 등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일체 범부중생을 위하여“왕생할 수 있다”고 증명하신 것이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나는 지금 오직 일심一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일체를 다 맡기고 확고한 신념으로 염불하고 있다.

 

설령, 그대들과 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왕생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나는 왕생을 발원하고 있는 나의 신심을 더욱 증진增進시켜 반드시 왕생을 성취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염불하는 행자行者는 더욱 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대들은 잘 듣는 것이 좋다. 나는 지금 그대들 때문에 더욱 확고한 신심을 설하리라. 설사 퇴보하지 않는 경지에 들어 있는 자, 또는 미완성의 보살·아라한·벽지불辟支佛 등의 경지에 있는 자 또는 한 사람, 또는 많은 사람들, 나아가 시방세계에 가득차 있어 모든 경론經論을 인용하여‘왕생할 수 없다’고 증명한다고 하여도 나는 조금도 의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 오히려 나의 맑은 신심을 더욱 증진增進시키는 일이 되어 반드시 왕생을 성취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은 변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도리를 설한 것으로,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부서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염불행자念佛行者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잘 들어야 한다. 만일, 앞에서 말한 경지보다 훨씬 더 나은, 방황이 없는 단계에 도달한 보살로서 그 제1단계로부터 최고인 제10단계에 이르는 분들까지도 모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석존釋尊은 아미타불을 칭찬하시며 방황의 세계인 삼계三界육도六道를 뛰어넘고, 더욱 사람들에게 염불할 것을 권하며, 또한층 다른 선행을 많이 쌓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따라서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여도 “나는 이런 말을 들어도 역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확고한 신심을 더 깊게 하여 반드시 나의 원願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변화하지 않는 도리를 말씀하신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모든 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며, 있는 그대로를 보며, 있는 그대로를 터득하신 것이지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들의 다른 견해, 다른 체득體得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말씀이 무너지는 일이 없다.

 

만일 진실된 보살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말씀을 하실 리가 없다”라고 대답하여라.

 

 그리고 다음 사항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잘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이 세상에 일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신 부처님이나, 서원을 이루신 모든 부처님들이 한 사람이든, 혹은 시방세계를 꽉 채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든 간에, 그분들이 각각 밝은 광명을 내시어 진실된 것을 약속하시고 그 모두가 입을 모아“석존釋尊이 아미타불을 칭송하시며 모든 죄많은 범부에게 열심히 염불하고


그밖에 또 좋은 선행을 쌓는다면 그것으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원願을 설하고는 계시지만,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고 하자. 그때 나는 이를 많은 부처님들이 설하신 것을 들었지만, 아주 짧은 한 순간이라도 의심하는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부처는 그대로 모든 부처이다. 모든 부처님의 생각·이해·실천·깨달음·수행으로써 얻은 불과佛果, 대비大悲는 모든 부처님들이 똑같아서 조금도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사람의 부처님이 해서는 안된다고 제지하신 것은 역시 모든 부처님도 제지하셨다.

 

예를 들어 앞에 나오신 부처님이 살생殺生 등의 십악十惡을 해서는 안된다고 제지하셨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어기지 않는 것이 십선十善·십행十行을 행하는 것으로, 육도六度를 따라 걷는 자라는 의미가 되는데 어째서 나중에 나오신 부처가 앞의 부처가 설하신 십선十善을 그만두고 십악十惡을 행하게 할 것인가? 그런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이 도리로써 추측해 본다면, 모든 부처님의 언행은 서로 다르지 않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석존釋尊이 모든 범부에게 목숨이 있는 한 열심히 염불하면 반드시 아미타불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면 또한 시방세계에 계시는 많은 부처님들도 모두 똑같이 칭송하시며 이것을 전하시고 증명하신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사람들의 괴로움올 자기의 괴로움으로 동조同調 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이시기 때문이다.

 

한 부처님의 교화敎化는 그대로 모든 부처님의 교화敎化며, 모든 부처님의 교화敎化는 실로 한 부처님의 교화敎化인 것이다.

 

즉 지금 말한 것에 대해서 그 증거를 경經에서 찾아본다면 『아미타경』에는 석존釋尊이 아름답게 장엄되어 있는 극락세계를 칭찬하셨다.

 

또“모든 범부는 하루 혹은 7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왕생할 수가 있다”라고 하셨다.

 

또 석존釋尊은 더러움으로 꽉 찬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시대에, 즉 먹을 것이 없고 병이 성행하는 악한 시대, 또 자기를 돌이켜 반성할 줄 모르는 악한 인간이 횡행하거나 이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번뇌에 사로잡힌다거나 사악한 마음으로 가득차 신앙이 없는 이러한 말세末世를 만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칭찬하시고, 그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격려하셨다. 게다가“갠지스 강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은 시방세계의 부처님들도 다 함께 이것을 극구 칭찬하셨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시방세계에 있는 부처님들은 사람들이 석존釋尊의 설하신 것을 믿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석존釋尊과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은 때에 모 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두루 덮을 수 있는 광장설상廣長舌相으로 성실한 말씀으로 진실한 약속을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모두 석존釋尊이 설하신 말씀이나 칭찬하신 것, 또는 터득하신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모든 어리석은 범부중생은 자기가 저지른 죄나 은혜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또 수행의 시간이 길고 짧음에도 관계없이 백년에 이르는 사람이든, 또는 하루나 혹은 7일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든 오직 한마음으로 열심히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수가 있다는 것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된다”라고 설하셨다.

 

즉 한 부처님이 설하신 것은 그대로 모든 부처님이 그 사실이 틀림없다는 것올 증명하신 것이다.

 

이상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확립시킨 것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실하게 세우도록 설명한 것이다. 

 

제3은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란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의 행위에 의해 닦은 선근공덕과 모든 범부나 성자들이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에 의해 닦은 선근공덕을 수희隨喜하고 자기와 타인의 선善을 모두 진실심과 심심深心을 바쳐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닦은 복福과 선善을 지극한 정성으로 정토에 회향하여 원願을 세우는 마음을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라고 한다.

 

또 선행을 쌓으며 원을 세워서 왕생하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진실한 마음으로 원해야만 왕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깊게 믿는 마음은 마치 금강석과 같이 단단하여서, 자기와는 견해와 사상이 다르고, 또 다른 교리를 배우고 실천방법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일은 결코 없다.

 

오직 이것뿐이라고 모든 것을 뿌리치고 똑바로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망설이거나, 마음이 약해진 나머지 번뇌의 세계에 빠져버려 왕생이라는 커다란 은혜를 잃어서는 안된다.


 

제8장. 세 가지의 마음가짐(三心章)3|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만일 이해나 실천이 다른 여러 부정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 와서 마음을 번거롭게 동요시키고 때로는 비난하고, 의심이 생기게 하여‘왕생할 수 없다’라고 하거나, 또는“당신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의 행위에 의해서 모든 범부나 성자들에게 십악十惡·오역五逆·사중四衆·방법謗法·천제闡提·파계破戒·파견破見이라는 죄를 만들었으나, 아직도 이 죄를 없애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이 죄들은 사람들을 번뇌의 나쁜 세계에 결박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불과 일생 동안 복덕을 쌓고 염불을 한다고 해서 번뇌를 벗어나고, 두번 다시 윤회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는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 영구히 죄를 짓지 않는 깨침을 어떻게 터득할 수 있단 말인가. 터득할리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 그것에 대해서 대답하건대,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행위는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으며, 그 가르침을 받는 인간의 소질능력의 조건도 그와 같이 많기 때문에 각각 그것에 따라 가르침을 설하는 방법도 많다.

 

예를 들면, 태양의 빛은 어둠을 밝히고, 천공天空은 그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대지는 초목을 자라게 한다. 또 물은 초목을 싱싱하게 키우며 불은 물건을 녹여 만들거나 태워버리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세상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므로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상대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상대相對의 법法이라고 부른다. 그 어느 것도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은 모두 천차만별이다. 자연현상조차 이러한데, 하물며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불법佛法에 많은 은혜가 없겠는가?

 

참으로 그럴 리가 없다. 따라서 가르침의 한 가지 문門을 나오면 그것은 그대로 한 가지 번뇌의 문을 나온 것이 되며, 가르침의 한 가지 문에 들어서면, 그것은 그대로 한 가지 번뇌에서 해방되어 괴로움에서 빠져나와 진실한 지혜의 문에 들어선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연을 따라 수행하여 각자 해탈解脫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비록 그것이 중요한 수행법일지라도 우리들과 인연이 없는데 왜 우리들을 혼동시키고 망치려고 하는가?

 

지금 우리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인연이 있는 수행법이지 그대들이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너희들에게는 인연이 있는 수행법이지만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에게 맞는 것을 각각 찾아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번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각각 원하는 것에 따라서 수행을 한다면 반드시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불도佛道를 이루려는 수행자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잘 알아두지 않으면 안된다.

 

즉 학문적으로 교리를 이해하고 배우려고 한다면 범부의 입장에서부터 성현의 경지나 나아가 부처가 될 수 있는 깨침의 경지까지도 자유롭게 모두 배우도록 하여라. 그러나 만일, 가르침의 실천을 배우려고 한다면 반드시 인연이 깊은 불법佛法에 의해서만 한다. 조금은 고생스러워도 큰 은혜를 입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여기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위하여 한 가지 비유를 들면 서 그 사람의 신심을 지키고 나쁜 생각에서 오는 외부의 비난을 막으려고 한다. 그 비유란 다음과 같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서쪽을 향해서 천리·만리나 되는 길을 걸어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길 양쪽으로 두 개의 강이 보였다.

 

하나는 불의 강(火河)으로 남측에 있었고, 또 하나는 물의 강(水河)으로 북측에 있었다. 강의 폭은 각각 백보 정도였는데, 깊이는 너무 깊어서 물 속 깊은 곳이 보이지 않았고, 남과 북의 길이는 어디까지인지 끝이 없었다. 그런데 물의 강(水河)과 불의 강(火河)의 중간에 한줄기의 하얀길(白道)이 있었다. 그 폭은 4·5촌寸 정도되어 보였고, 이 길은 동쪽의 언덕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백보 정도였다.

 

그리고 물의 강(水河)의 파도가 밀려와서는 길까지 적셨다. 불의 강(火河)의 불기운도 거세게 다가와서 길을 태워버렸다. 물과 불이 서로 다른 길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미 먼길을 걸어서 이 넓고 끝없는 곳에 왔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더욱 거기에는 악자惡者들과 무서운 짐승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여행자가 혼자라는 것을 알고, 서로 앞을 다투어와서 죽이려고 하였다.

 

여행자는 죽음 앞에 놓인 것이 너무 무서워 서쪽을 향해 뛰기 시작하니, 거기에는 바로 지금 말한 대하大河가 홀연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강(二河)은 남과 북으로 한없이 뻗어 있어서 그 끝 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그 중간에 한줄기 작고 하얀 길이 있는데, 그 폭이 아주 좁아 동쪽과 서쪽 사이가 불과 백보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데 어떻게 무사히 갈 수가 있을까? 오늘 죽는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주위에 모여 있는 도적들과 무서운 짐승들이 달려들고, 남쪽이나 북쪽으로 피하려고 하니 또 독충들과 맹수들이 내쪽으로 달려온다. 할 수 없이 한줄기 하얀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려고 하니, 물의 강과 불의 강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이러한 곤경에 처한 사람의 두려움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거기서 여행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나는 뒤로 돌아가도 죽을 것이고, 그냥 여기에 머물러 있어도 죽을 것이며, 다른 길로 가도 죽을 것이다. 어떤 길을 택하든 죽음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니 나는 그냥 이 한줄기 하얀길을 따라 나가자. 물에 휩싸이든 불에 타버리든, 또는 길이 좁든 간에 길인 것은 틀림없으므로 반드시 건널 수 있을 것이다.’바로 이때 동쪽 언덕에서“너는 굳은 마음으로 이 길을 따라 똑바로 가거라. 죽음의 공포는 결코 없을 것이다. 만일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곧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또 서쪽 언덕에 사람 이 나타나, “너는 오직 한마음으로 무서워하지 말고 이쪽으로 건너 오너라.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니, 물에 휩싸이고 불의 강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여행자는 이쪽에서는 저쪽으로 가게 하려고 하고 저쪽에서는 건너오도록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제 마음을 굳게 정하고서 의심하지 않고 똑바로 나아갔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정도 나아갔올 때, 동쪽의 언덕에 모여 있던 도적들이 소리를 지르며“되돌아 오너라. 이 길은 험악해서 건널 수가 없다. 건너다가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우리들은 나쁜 마음을 품고 너에게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여행자는 그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한마음으로 길(白道) 만을 생각하면서 똑바로 나아갔다.

 

드디어 서안西岸에 도착하여 오랜 동안 두려워했던 재난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고, 서안에 있던 착한 친구들과 만날 수 있어서 그 기쁨과 즐거움은 한량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의 선도대사의 유명한‘이하백도二河白道의 비유’이다.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 보면, 동안東岸은 번뇌의 불로 둘러싸인 집 속에서 살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의 생활을 나타내는 것으로 번뇌의 세계, 즉 사바세계를 비유한 것이다. 서안西岸이란 아미타불의 불국정토인 극락세계를 비유한 것이다.

 

군집을 이룬 도적이나 해를 끼치는 맹수들이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것은 인간의 육근六根·육식六識·육진六塵·오음五陰·사대四大 등의 요소가 세속의 때에 물들어 본래는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 더럽고 사악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광막한 늪이란 것은 항상 나쁜 친구와 어울려 진실한 진리를 가르쳐주는 자를 만날 수 없는 것을 비유한다. 물의 강水河과 불의 강火河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탐욕과 애착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마치 물과 같으며, 분노와 증오는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중간에 있는 4·5촌 정도의 하얀길은 인간이 탐욕이나 분노 등의 번뇌로 꽉찬 속에서도 깨끗한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서 마음을 세우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탐욕이나 분노 등이 강하다는 것을 물·불과 같다고 비유했으며, 선심善心은 하얀길에 비유했으며, 파도가 항상 길을 적시고 있다는 것은 애착심이 일어서 선심을 자주 번뇌 속에 빠뜨린다는 것을 비유했으며, 불기운이 항상 길을 태워 버린다는 것은 분노와 혐오심이 그동안 선행의 덕으로써 이룩한 불법佛法의 재산을 태워 버린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여행자가 서쪽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많은 선행으로써 서방정토에 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동안東岸에서‘저쪽으로 곧장 가거라’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서쪽을 향해 가는 것은 석존釋尊이 입멸入滅하시고 난 뒤 후세 사람들은 석존釋尊을 만날 수는 없지만 그 가르침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써 후세에서도 불법佛法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뒤쪽에서 소리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십보·이십보 정도 나아갔을 때, 모여 있던 도적들이 되돌아오라고 불렀던 것은, 다른 학문이나 수행을 하는 사람들과 사악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함부로 자기 견해를 설하여 혼란시키는 것이며, 더욱이 스스로 죄를 만들어서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서안西岸에서 사람이 나타나 부르는 것은 아미타불이 반드시 사람들 을 구제하신다고 약속하신 서원(本願)에 비유하신 것이다.

 

이윽고 서안西岸에 도착하여서 착한 친구들을 만나 기뻐한다는 것은 오랜 동안 생·사의 방황 속에 빠져 고통의 세계를 헤매면서 그 속에서 스스로를 묶어 헤어날 방법이 없을 때, 다행히 석존釋尊께서 서방정토에 가도록 지시해 주셨고, 또 아미타불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정토에 오라고 불러 주셨기 때문에 이 두 분의 의지를 믿고 따라 물의 강(水河)과 불의 강(火河)의 위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정토에 왕생할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서 아미타의 본원本願의 힘이라는 대도大道를 타고 나아갈 수 있었으며, 수명이 다한 뒤에는 정토에 왕생하여 부처를 만난 기쁨이 더할 나위 없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염불자念佛者는 행주좌와行住坐臥언묵동정간言黙動靜 간, 일상생활의 그 어느 때에도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는 밤낮 없이 또 시간의 장단도 가리지 않고 ‘이하백도二河白道의 비유’를 체득體得하여 늘 염두에 두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이것을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라고 한다.

 

회향이란 것은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난 뒤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일으켜, 이 고통의 세계에 다시 돌아와서 사람들을 교화敎化하는 것을 말한다.


 

제8장. 세 가지의 마음가짐(三心章)4|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이상의 세 가지 마음이 갖추어져 있다면 염불에 의해서 반드시 은혜(往生)를 입을 수 있다.

 

부처의 본원本願과 염불의 행위가 이미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왕생 할 수 없다는 도리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삼심三心은『관무량수경』의‘산선散善’에 대한 부분에 나와 있는데,‘정선定善’과도 통하여 그 의미는 지금까지 설명한 것과 같으므로 그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왕생예찬』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묻건대, 사람들을 위해서 왕생의 길을 권할 때는 어떠한 마음가짐과 행위, 또 생활을 해야만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할 것인가?

 

대답하건대, 꼭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고 싶다면『관무량수경』에 설법되어 있는 대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즉 삼심三心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하면 제1은 지성심至誠心이다. 모든 몸의 행위로써 아미타불을 예배하고, 입의 행위로써는 아미타불을 칭송하며, 마음(意)의 행위로써는 아미타불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몸身·입口·마음意 삼업三業을 행할 때는 반드시 진실한 마음에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지성심至誠心이라고 한다.

 

 제2는 심심深心이다.

 

이것은 진실한 신심을 말한다. 자기자신은 원래 번뇌에 꽉찬 어리석은 인간이고 선善을 행하는데 있어서도 아직 모자람이 많고, 고통의 세계를 떠도는 마치 번뇌의 불기둥이 활활 치솟는 집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서 지금이야말로 아미타불의 일성一聲 또는 십성十聲이든 미타彌陀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서원을 세우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깊이 믿음이다. 그래서 심심深心이라고 한다.

 

제3은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지금까지 자기가 행해온 모든 선善을 정토에 회향하여 왕생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라고 한다. 이 삼심三心을 갖추고 있으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왕생할 수 없다.

 

이것은『관무량수경』에도 자세히 설해져 있으니 참고하여 이해하기 바란다."

 

내 생각으로는 이상에서 인용한 삼심三心이란 염불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관무량수경』에는‘삼심三心을 갖추고 있는 자는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라고 설해져 있는데 이것으로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선도대사의『왕생예찬』에도, ‘만일 그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왕생할 수 없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삼심三心을 모두 완전하게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삼심三心 중에서 지성심至誠心이란 것은 진실한 마음을 말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으나 다만 여기에서,‘표면으로는 착하고 현명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아주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은, 어리석고 게으르며, 거짓 마음을 지녔다’는 부분의 표면이란 말은 내면에 상대한 말이다.

 

말하자면, 표면(表面)의 상태가 내면과는 조화되어 있지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겉으로는 지혜가 있는 것처럼 행동해도, 사실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현명(賢明)하다는 것은 어리석다에 대한 말로 표면은 영리한 것처럼 보여도 내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표면에 나타나 있는 만큼 내면에도 갖춰져 있다면, 그것은 번뇌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내면은 어리석고 게으르며, 거짓 마음을 품고 있다’에서의 내면은 외면에 대한 말로서, 내심內心과 표면의 상태가 조화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내면은 거짓으로 위장되어 있고 표면은 진실하다는 것인데 거짓은 진실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내심은 거짓으로 꽉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진실한 척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만일 내면에 나타나 있는 상태를 뒤집어 표면으로 옮길 수 있다면, 이것 역시 번뇌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심심深心이란 것은 깊게 믿는 마음을 말한다.

 

불법佛法을 의심하기 때문에 번뇌의 세계인 생사의 틀 안에 갇혀서 벗어날수 없는 것으로, 불법佛法을 믿는다면 깨우침의 세계인 열반涅槃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선도善導는 신심을 자기는 어리석은 범부라는 것을 인정하고 부처님의 서원을 믿음에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하였다.

 

깊게 믿는 마음으로 염불하면, 사람의 행위에 9종의 단계가 있어서 서로 다르다할지라도 그 모두 왕생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밝혔던 것이다.

 

또 이것들과는 다른 종류의 학문이나 실천·사상·견해는 성도문의 길을 추구하는 학문·실천·사상 견해를 의미하며 그 이외는 정토문을 의미한다.

 

자세한 것은 인용문에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선도대사의 본의本意도 역시 이 이문二門에 있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음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의 의미는 따로 다른 주석을 인용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명료明瞭하다.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앞에서 인용한 선도善導의 글을 읽고 잘 이해하길 바란다.

 

이 삼심三心을 총괄해서 말하면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실천법이라고 말할수 있는데, 특히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이 삼심三心은 불교의 모든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마음의 각오이다. 특히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행의 마음가짐으로써 설해졌기 때문에 그 의미가 넓은 것이다. 정토왕생을 원願하는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것을 잘 생각하여 그 마음가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제9장. 4종의 염불생활(四修章)|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9장. 4종의 염불생활(四修章)

 

 : 염불행자念佛行者는 4종의 실천방법을 선택하여 수행함을 설한 글 



 선도대사의『왕생예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리고, 또 네 가지의 실천해야 할 방법을 행하도록 권하였다. 무엇을 4종이라고 하는가?

 

제1은 공경수恭敬修이다.

 

서방정토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이신 아미타불과 정토에 계시는 모든 성자들을 공경하고 정중하게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공손하게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행한다고 해서 공경수恭敬修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또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장시간에 걸쳐서 행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 부른다.

 

제2는 무여수無余修이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부르고 또 아미타불 뿐만 아니라 그 정토에 계시는 모든 성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사모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다른 행위가 섞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다른 행위가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행하기 때문에 무여수無余修라고 한다.

 

이것은 또 일생을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장시간에 걸쳐 행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 한다

 

제3은 무간수無間修이다. 이것은 쉼이 없이 항상 공손하게 예배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경건하게 칭송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시켜서 모든 선행을 바쳐 정토에 왕생하기를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원하며 다른 행위가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쉬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간수無間修라고 하는 것이다.

 

또 탐욕이나 분노 등의 번뇌를 마음속에 품지 않도록 노력했는데도 죄를 저질렀다면, 그때마다 참회해서 하루 또는 한시간, 한순간이라도 틈을 두지 않고 계속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만 한다.

 

이것은 또 일생동안 멈추지 않고 장시간에 걸쳐 행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고 한다."

 

 『서방요결』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단 네 가지의 실천방법을 올바른 행위로 한다. 제1은 장시수長時修로서, 처음 불도佛道를 지향했을 때부터 진리를 터득할 때까지 항상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선행을 쌓으며, 번뇌의 세계에 빠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제2는 공경수恭敬修로 여기에도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인연이 깊은 성자를 존경하는 것이다.

 

이것은 길을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또는 잠을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그 언제든지 서쪽으로는 등을 돌리지 않고, 또 눈물을 흘리거나 침을 뱉어서도 안되며, 대소변을 볼 때도 서쪽을 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 인연이 깊은 불상이나 가르침을 설한 경전을 존경한다.

 

이것은 서방에 계시는 아미타불의 상像을 만들거나, 그 모습을 많이 그리기도 한다. 많이 만들거나 그릴 수가 없다면, 아미타阿彌陀 일불一佛과 관음觀音·세지世智의 두 보살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좋다.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것은『아미타경』등을 오색으로 된 함에 넣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자기도 읽으며 타인도 읽게 한다.

 

더욱 이 경經이나 불상을 방에 안치해 놓고 아침, 낮, 저녁, 밤, 한밤중, 새벽 등 여섯 번의 시각에 맞추어 예배드리며 참회하고, 또 향이나 꽃을 올려 특별히 소중하게 하면 아주 좋다.

 

셋째 인연이 깊은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는 사람을 공경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토의 가르침을 말하는 자가 천리만리 밖에 있든지 가까운 곳에 있든지, 그 사람에게 친절히 모시고 존경하며 받들어야 한다.

 

자기와는 다른 길을 설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공손한 마음으로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상대방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그 죄는 아주 무겁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

 

넷째, 인연이 깊어서 서로 같은 길을 가게 된 친구를 공경하는 일이다.

 

이것은 같은 수행에 힘쓰는 자로 혼자로는 장애가 많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지만, 좋은 붕우朋友와 함께 실천하면 위험을 피할 수가 있고, 재액災厄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으므로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로서의 좋은 인연을 기뻐하며, 서로 보호하며 존중해야 한다.

 

다섯째,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를 공경하는 일이다.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는 일단 그 의미상으로는 구별되지만 그 본질은 똑같다는것과 또 삼보가 각각 다른 존재라고 보는 견해도 역시 함께 존경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여기에서 자세히 적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주 조금밖에 수행하지 못한 자에게는 이러한 입장에서 실천할 수도 없고 완성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얄은 지식 밖에 없는 자를 위해서는 주지삼보住持三寶라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더 큰 인연이 될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주지삼보住持三寶라는 것은 불교를 후세에 전하고 유지시키기 위한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불상과 경經 그리고 출가한 승僧을 의미한다.

 

그중에서 불보佛寶라는 것은 백단白壇 등의 향기가 좋은 나무로 불상을 조성하고 또는 아름다운 비단에 수를 놓아 만든 불상이나 금박을 입힌 불상이나, 돌을 다듬어 만든 석불, 흙으로 빚은 불상 등, 그 어느 것도 빚어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진실을 담은 영상이기 때문에 특히 더 정중하게 모셔야한다. 잠깐 불상올 보는 것만으로도 죄는 사라지고 복덕은 더해간다.

 

그러나 만일 조금이라도 아만심我慢心으로 기껏해야 나무로 만든 등상 이지 않는가? 하고 가벼이 여긴다면 선善은 사라지고 점점 죄업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훌륭한 불상을 대할 때는 부처님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하여야 한다.

 

다음 법보法寶라는 것은 인간의 성질이나 능력에 따라 터득할 수 있는 세 가지의 길(道)을 설한 가르침을 말한다. 이것을 삼승三乘이라고 하는데, 번뇌의 세계에서 나오는 글자나 문장이 아닌 진리의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글자나 문장으로써 나타낸 경전으로, 이것은 우리를 번뇌의 그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인연이 되는 것이므로 우러러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올바른 지혜를 만들어 주는 근원이 되는 것이므로, 이 훌륭한 경經을 옮겨써서 항상 깨끗한 방에 안치하고, 상자 속에 넣어서 정중하게 모셔야 한다. 독송할 때는 항상 몸과 손 등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승보僧寶에 대해서는 존경받는 스님과 보살의 경지에 있는 자를 늘 진심으로 공경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아만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제3은 무간수無間修이다. 왕생하려는 원을 세워 끊임없이 염불하며 항상 마음속으로 정토에 대한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남에게 재산을 다 빼앗겨 신세가 처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괴로움을 당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생각나 서둘러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갈 비용도 없고 해서 타향에서 밤낮없이 부모를 그리워하였는데, 그 괴로움이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잠시라도 부모를 잊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차 겨우 여비가 마련되어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향에는 따뜻한 부모의 품이 기다려 주고 있어 그 기쁨이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염불행자念佛行者도 역시 이와 같다. 일찍이 번뇌에 사로잡혀서 선량한 마음이 무너지고 복덕과 지혜 등의 귀중한 보물을 모두 잃어버렸다. 오랫 동안 번뇌의 세계에 휩쓸려 빠져나오지도 못했고, 항상 나쁜 일만을 일삼는 악마에게 이용당해서 고통의 육도六道를 이리저리 헤매다 심신은 지칠대로 지쳤다.

 

그런데 다행히도 대자비의 아버지이신 아미타불의 큰 서원의 인연을 만나, 그 서원대로 모든 중생을 평등히 구제하신다는 말을 듣고 그 기쁨으로 마음 설레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왕생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노력해서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이 몸이 죽을 때까지 늘 마음에 새기며 잊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제4는 무여수無余修이다. 오로지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예배하고 칭송해야 한다.

 

그리고 이외의 다른 행위가 여기에 섞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날마다 해야 할 행위는 염불과 독경으로 그 외의 행위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된다."

 

 지금 여기에서 인용한 4종의 실천방법에 대한 문장은 읽으면 잘 알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번잡을 피하기 위해서 설명을 생략하겠다. 다만 전문前文『왕생예찬』에서 4종의 실천방법이라고 하면서도 세 가지의 실천방법만 예를 들고 있는 것은, 결코 한 가지를 빠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어떻게 그것올 알 수 있는가 하면, 네 가지의 실천방법이란 제1이 장시수長時修, 제2는 공경수恭敬修, 제3은 무여수無余修, 제4는 무간수無間修이다.

 

그런데 제1의 장시수長時修는 나머지 세 가지의 실천방법 중 그 어느 것에도 통용되는 것이다.

 

만일 공경수恭敬修가 허사로 돌아간다면, 공손하게 존중하는 행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만일 또, 무간수無間修가 허사로 돌아간다면, 다른 행위를 섞지 않고 순수하게 행하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역시 무간수無間修가 허사로 돌아간다면 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행하는 것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결코 세 가지의 실천방법을 달성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일생동안 장시간에 걸쳐 행하여야 하므로 이 문장에서는 세 가지의 실천방법만을 말하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허사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라고 설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세 가지의 실천방법 밑에‘목숨이 다할 때까지 결코 중지 하지 않는다. 즉 장시간에 걸쳐 행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고도 한다’라고 모두 끝맺음을 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예를 들면, 대승을 표방하는 구도자들이 실천규범으로 하는 여섯 가지의 완성해야 할 덕목의 하나인 ‘정진精進’이 다른 다섯 가지의 덕목에도 통용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10장. 염불을 찬탄(化佛讚嘆章)

 

: 인연에 응해서 임시의 모습을 나타내신 아미타불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마중오셔서 경經을 듣는 것 등을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직 염불한 것만을 칭찬하셨다는 것을 설한 글

 

『관무량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승의 경전만은 비난을 하지 않지만, 그 외의 다른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서슴치 않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다. 더구나, 스스로는 나쁜 일을 일삼으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이윽고 목숨이 다하여 임종의 순간에 이르러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을 만나 설법의 형식에 의해서 열두 가지로 나눈 대승의 여러 경전의 이름을 찬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 경전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천겁이라는 장시간에 걸쳐 거듭 거듭 지어온 무거운 업보를 제거할 수 있었다.

 

또 훌륭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합장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도록 하였다.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의해서 오십억겁 동안이나 번뇌의 세계를 헤매며 지어온 무거운 죄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때 아미타불은 관음觀音·세지勢至의 두 보살과 함께 염불행자念佛行者 앞에 나타나서 칭찬하시며 “착하도다. 은혜받은 그대여 ! 너는 부처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모든 죄가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너를 맞이하기 위해서 왔노라”라고 하셨다."

 

선도善導의『관경소』「산선의散善義」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경전의 이름을 듣고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서, 아미타불은 오직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稱名)만을 칭찬하시고 “나는 너를 맞이하러 왔다”라고 하셨다. 즉, 거기에는 많은 경經을 듣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미타彌陀의 서원의 본의本意를 생각해 보면 마음을 바르게 해서 오로지 미타彌陀의 이름을 부르는 것(稱名)만을 권하셨다.

 

정토에 왕생하는 본지本旨는,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다른 행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간단하고 신속한 것이다.

 

『관무량수경』과 다른 많은 경전 속에 설해져 있는 것처럼 미타彌陀의 이름을 부르는 것(稱名)을 칭찬하시고, 이것이야말로 번뇌의 세계에서 벗어나 큰 은혜(利益)를 입을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권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

 

생각하건대 많은 경經을 듣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부처의 본원本願은 아니다.

 

경經을 듣는 것은 많은 수행 중의 하나이나 염불은 미타彌陀의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칭찬하신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경經의 이름올 듣는 것과 염불하는 것에는 죄가 소멸하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

 

그것에 대하여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물음 어째서 12종으로 나누어진 대승의 여러 경전의 이름을 듣는 것으로는 그저 천겁 동안 지어온 죄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한데, 단 한번 만의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오백만겁에 이르는 죄가 사라질 수있단 말인가?

 

대답 죄가 많은 사람은 깨침을 얻기 위한 장해도 많고, 게다가 죽음의 고통이 그를 괴롭힌다. 그때 훌륭한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경經을 설하고 들려준다 하여도, 그 가르침을 잘 음미해서 받아들일 만큼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고 산란하기 때문에 죄가 사라진다 해도 아주 조금밖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의 이름은 단 하나이므로,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산란한 기분을 억누르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킬수 있다. 또 마음을 바르게 하여 부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오랜 동안 지어온 죄를 간단하게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의 힘에 의해서 유정有情 다겁多劫의 중죄가 녹아지는 것이다.



제11장. 염불하는 사람을 칭찬함 (讚嘆念佛章) 1|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11장. 염불하는 사람을 칭찬함 (讚嘆念佛章)

 

 

: 여러 가지 착한 행위에 따라 염불할 것을 찬탄한 글

 

『관무량수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염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백연화白蓮華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다. 관음觀音·세지勢至 두 보살은 이 사람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신다. 이렇게 염불하는 사람은 깨우침을 얻어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기 때문에 많은 부처가 살고 있는 곳, 즉 서방정토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 "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경經에서설하는‘만일 염불하는 사람이 있다면’에서 부터‘많은 부처가 살고 있는 곳, 즉 정토에 왕생할수 있다’까지는 올바른 염불삼매念佛三昧의 행위나 은혜가 다른 그 어떤 행위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사실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다.

 

제1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증명하셨다.

 

제2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칭찬하셨음을 증명하셨다.

 

제3은, 만일 쉬지 않고 염불하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아주 귀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흰 연꽃에 비유하여 그 훌륭함을 증명하셨다.

 

흰 연꽃에 비유함은 꽃 중의 귀한 꽃이요, 가장 훌륭한 꽃이요, 아름다운 꽃이므로, 꽃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꽃은 옛부터 중국에서는 거북이가 천년 동안이나 이 꽃 위에서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와, 이 꽃은 채화蔡華와 같다고 부르고 있다. 만일 염불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사람 중의 호인好人이요, 사람 중의 묘호인妙好人이요, 사람 중의 훌륭한 사람이요, 사람 중의 희유한 사람이요, 사람 중의 최승인最勝人이다.

 

제4는 미타彌陀의 명호名號를 오로지 부르는 자에게는 관음觀音·세지勢至 두 보살이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니며, 마치 친한 친구 혹은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는 사람처럼 지켜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제5는, 이 세상에서 이미 이러한 은혜를 입어 목숨이 다했을 때 곧바로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즉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정토에 가면 오랜 동안 법法을 틀을 수 있고, 많은 불국토를 거닐면서 부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다.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수행을 빠짐없이 이룩하여 그 결과로써 왕생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진리를 터득해서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그렇게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물음 『관무량수경』에 ‘만일 염불하는 사람이 있다면’이라고 말하고 오직 염불하는 사람만을 칭찬하였다.

 

그런데 선도대사는‘다른 여러 수행과는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째서 다른 여러 잡선雜善과 상대적으로 나열해서 오직 염불행念佛行만 칭찬하셨는가?

 

대답 경문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명료하다. 왜냐하면 이 경經은 이미 정선定善과 산선散善과 염불행(念佛行)을 설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오직 염불에만 초점을 모아 흰 연꽃에 비유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잡선雜善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염불행念佛行이 다른 많은 잡선雜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비교해 보았기 때문에 비로소 염불하는 사람은 인중호인人中好人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열악한 행위를 하는 자와 비교해서 칭찬한 말이다. 그리고 사람 중에서도 묘호인妙好人이란 것은 조악한 행위를 하는 자와 비교해서 칭찬한 말이고, 상상인上上人이라는 것은 가장 뒤떨어진 사람과 비교해서 칭찬한 말이다.

 

또 사람 중에서 드문 사람(希有人)이란 것은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람과 비교해서 칭찬한 말이고, 최승인最勝人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가치없는 사람과 비교해서 높이 칭찬한 말이다.

 

물음 염불을 가장 훌륭한 실천행이라고 한다면 왜『관경觀經』에 9종의 단계 가운데 최상인 상품상생上品上生에서 설하지 않고 제일 낮은 하품하생단下品下生段에서 비로소 염불을 설하고 있는가?

 

대답 제4장에서 염불행念佛行은 9품 중 그 어느 품에도 널리 포함된다고 설명하지 않았는가?

 

제4장에서 인용한『왕생요집』에서는‘사람의 능력의 승열勝劣에 따라 9품으로 나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품하생자下品下生者라는 것은 부모나 성자를 죽이고 부처님의 몸에 상처를 입혀 피를 흘리게 하거나 평화로운 교단敎團을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의 중죄重罪를 범한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중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수행에 의해서도 불가능하다. 오직 염불의 힘에 의해서만이 이 무거운 중죄를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극악한 최하의 사람을 위해서 가장 훌륭한 최상의 법을 설하셨다.

 

예를 든다면, 모든 병의 근원이 되는 무명無明의 병은 마음 가운데 있어 그것을 치료하는 것은 진실한 중도中道의 길이다.

 

즉 육신에 병의 근본을 치료하려면 오장육부의 귀중한 부분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오역五逆의 중죄는 중병의 근본연원이고 염불은 오장육부와 같이 중요한 부분을 치료하는 영약이다. 이 염불이 아니고서 어찌 중죄를 범한 중병을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제11장. 염불하는 사람을 칭찬함 (讚嘆念佛章)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그래서 홍법弘法대사의 『이교론二敎論』에서도『육바라밀경』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3 법보法寶라는 것은 과거에 많은 부처가 설하신 정법正法과 지금 내가(釋尊) 설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소위 팔만사천이나 되는 훌륭한 법을 모은 것으로, 이것에 의해서 인연이 깊은 사람들은 심신을 바르게 하여, 진리를 터득할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얻을 수 있다.

 

더구나 아난타阿難陀 등 많은 불제자들은 이 법을 한번 들으면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해서 체득體得해 버린다.

 

이 법들을 모두 총괄해서 다섯 가지로 분류하면, 제1 소달람素怛纜, 제2 비나야奈耶, 제3 아비달마阿毘達磨, 제4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제5 다라니문陀羅尼門이다.

 

이것을 오장五藏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을 교화敎化하며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설하고 있다.

 

만일 산이나 숲속 등 한적한 곳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오로지 하여 정신을 집중시키고 수행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한 경經즉 소단람素但纜을 설한다. 그리고 만일, 규율에 맞춘 올바른 기거起居를 배우고 정법正法을 호지護持하고 사이좋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언제까지라도 이 가르침을 후세에까지 전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인 율律, 즉 비나야장毘奈耶藏을 설하신다.

 

또 정법正法을 설하고 진실의 본체나 상대적 현상의 상태를 분석하고 되풀이해서 검토하며 깊은 진리를 밝히고 싶은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분석적 논의와 그 해석법을 의미하는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을 설한다.

 

또 대승에서 설하고 있는 진실한 지혜를 닦아 자기나 사상事象에 실체가 있다고 집념執念하거나 또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진실한 지혜의 완성, 즉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장藏을 설한다.

 

또 법法을 설법한 경經과 규율을 설법한 율律과 논의를 설법한 논論과 진실한 깨침의 지혜를 설법한 반야의 가르침을 체득體得할 수가 없거나 또는 모든 악보惡報를 초래하는 행위인 사중四衆· 팔중八衆·오무간죄五無間罪와 대승의 경전을 비난하거나 성불할 수 없는 일천제一闡提 등 종종의 중죄를 지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중죄를 없애고 조속히 해탈해서 곧 열반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재액을 제거하는 주술, 즉 다라니 장을 설법할 것이다.

 

이 오법장五法藏을 비유하면 우유의 5종의 정제법精製法과 같다. 즉 유乳·락酪·생소生酥·숙소熟酥 및 뛰어난 제호醍醐의 오미五味에 해당한다. 경經은 유乳와 같은 단계이고, 율律은 락酪과 같은 단계이며, 논論은 생소生酥와 같은 단계이고, 대승大乘의 진실한 지혜인 반야般若는 숙소熟酥와 같은 단계 이고, 다라니문陀羅尼門은 제호醍醐와 같은 단계이다. 제호醍醐의 맛은 우유를 정선한 중에서는 특히 미묘한 맛을 가지고 있어 가장 뛰어나다.

 

모든 병을 없애고 많은 사람들의 심신을 안락하게 할수 있다.

 

다라니는 경經이나 오장五藏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다. 중죄를 없애고 많은 사람들을 번뇌의 세계에서 해방시키며 신속하게 열반이라는 안락한 부처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이 중에서 오무간죄五無間罪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다섯가지의 중죄(重罪)를 말한다.

 

즉 제호醍醐와 같은 뛰어난 약이 아니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만큼 무거운 다섯 가지의 죄라는 중병은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은 염불문 이외의 가르침에 대한 것인데 염불도 이것과 마찬가지이다.

 

정토왕생淨土往生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 염불삼매念佛三昧는 역시 다라니陀羅尼와 같이 또 제호醍醐의 맛과 같이 가장 뛰어난 것이다.

 

염불삼매가 제호醍醐의 맛과 같은 약이 아니라면, 다섯 가지의 중죄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무거운 병을 치유하기 어렵다.

 

이것을 잘 알아야만 할 것이다.

 

물음 만일 지금 말한 것과 같이, 다섯 가지의 중죄를 범한 자가 제일 마지막인 하품하생下品下生자인데 제7의 하품상생下品上生자는 열 가지의 가벼운 죄를 범한 자라고 설해져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사람에게 염불을 권하고 있는가?

 

대답 염불삼매는 그 어떠한 중죄일지라도 소멸시킬 수 있다. 하물며 가벼운 죄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염불 이외의 다른 수행은 그렇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벼운 죄는 소멸시킬 수 있어도 무거운 죄는 소멸시킬 수 없을 때도 있다. 또는 한 가지 죄는 소멸시킬 수 있어도 두 가지 죄는 소멸시킬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염불은 그렇지 않다. 그 죄가 가볍든지 또는 무겁든지 간에 모든 죄를 녹여버리고 골고루 치유시킨다.

 

마치 아가타약阿伽陀藥이라고 불리는 영약靈藥이 모든 병을 낫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대승법大乘法에는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지만 염불은 그 가운데 최고의 수행법이므로 염불을 왕삼매王三昧라고 하는 것이다.

 

또 『관경(觀經』에 정토에 왕생하는 자를 구품九品으로 나누어 9종의 행인行人이 각각 닦은 바에 의해서 구제가 된다고 설하고 있지만 이것은 대충 분류한 의미일 뿐이다. 오역죄五逆罪를 범한 자일지라도 회심廻心하여 자기의 지은 죄를 진심으로 참회懺悔하고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염불한다면 제일 뛰어난 상품상생上品上生에 태어날 수가 있다.

 

차원이 높은 경전을 읽는다 할지라도 제일 낮은 하품하생下品下生에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십악十惡의 중죄를 범한 사람이나 또는 가벼운 죄를 범한 사람일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상품上品의 단계에, 또는 하품하생下品下生의 단계에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최승最勝의 진실한 도리를 체득體得한 자나 이제 막 보리심菩提心을 발한 자도 역시 상하품上下品에 공통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일법一法에 각기 구품九品이 있고 구품九品에는 9종의 단계가 있으니 99는 81종이 있다는 것이 된다.

 

가재迦才의 『정토론淨土論』에서는 사람들이 왕생을 원하는 행行을 일으킴에도 천차만별이듯이 왕생해서 정토를 보는 것도 천차만별이라고 하였다.

 

어쨌든 9종으로 나눈 경문經文의 내용을 보고서 인간의 행위나 성질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이라고 고정화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수행이 설해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염불이야말로 뛰어난 행行이므로 흰 연꽃과 같이 훌륭하다고 비유하였다.

 

이 비유의 의미를 깊이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염불행자念佛行者에게는 관음觀音·세지勢至 2대 보살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항상 지켜 주신다. 그렇지만 여행余行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또 염불행자念佛行者가 목숨이 다하였을 때는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지만 다른 여행余行을 수행하는 자는 왕생할 수 있는지 어쩐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선도대사가 염불하는 자에 대하여‘안중호인人中好人’이라는 등 다섯 가지의 칭찬하는 말을 하셨는데, 더욱 관음觀音·세지勢至 2대 보살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지켜주신다는 것은 이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큰 은혜이다.

 

또 정토에 왕생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미래에 받는 큰 은혜이다.

 

도작선사道綽禪師는 단하나 염불행念佛行은 처음과 끝이라는 두 가지의 은혜(利益)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안락집安樂集』에서 말하기를,

 

"염불하는 사람에게 부처님의 광명이 비추어 한 사람도 빠뜨리는 일이 없이 다 구제해 주신다(염불중생섭취불사念佛衆生攝取不捨). 이 사람의 목숨이 다하면 반드시 서방정토에 왕생한다.

 

이것을 처음의 은혜(利益)라고 한다.

 

마지막 은혜(利益)라는 것은 『관음수기경觀音授記經』에 의하면 아미타불이 정토에 조재영겁兆載永劫 계시다가 반열반般涅槃에 드셨을 때 관음觀音·세지勢至의 2대 보살만이 정토에 머물면서 시방세계의 사람들을 이끌어 안내하신다.

 

다만 아미타불이 반열반般涅槃에 드셨어도 옛과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정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부처를 만날 수는 없는데, 오직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아미타불을 불러서 왕생한 자만은 항상 아미타불이 눈앞에 계셔서 사라지는 일이 없다.

 

이것이 마지막 은혜(利益)이다.

 

이것으로 잘 알 수 있듯이 염불은 이와 같이 현재와 미래에 걸친 처음과 마지막의 은혜(利益)이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제12장.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촉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1|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12장.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촉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 석존釋尊은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제행諸行을 부촉付囑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염불일행一行만올 아난에 부촉하신 글

 

『관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을 향하여, “너는 이 말을 후세까지 잘 전하여라.” 잘 전하라고 하는 것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이름을 전지傳持하라는 말이 다.”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경經속의‘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였다. 너는 이 말을 후세까지 잘 전지傳持하여라’에서부터 그 이하의 문文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전하여 가져서 먼 후세까지 빠짐없이 골고루 행할수 있도록 하라는것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이다.

 

지금까지는 정선定善 산선散善이라는 두 가르침에 이익이 있다고 설하였지만,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비춰보면 석존釋尊이 이 경經을 설하신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곰곰이 선도善導의 주석서의 문文을 생각해 보면, 두가지의 실천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정선定善·산선散善이고, 둘째는 염불이다.

 

첫번째의 정선定善은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집중시키는 선善을 말하고, 산선散善은 산란한 마음으로 행하는 선善을 말한다.

 

먼저 정선定善에 대해서 말하면 13종의 방법이 있다.

 

제1은 태양에 정신을 집중하여 관하는 일상관日想觀,

 

제2는 물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수상관水想觀,

 

제3은 정토의 대지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지상관地想觀,

 

제4는 정토에 있는 칠보로 만들어진 수목樹木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보수관寶樹觀,

 

제5는 정토에 있는 보배의 연못(寶池)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보지관寶池觀,

 

제6은 정토에 있는 보배의 누각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보루각관寶樓閣觀,

 

제7은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아름다운 연화蓮華의 대台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화좌관華座觀,

 

제8은 부처님의 뛰어난 상호相好를 조각한 불상의 모습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상상관像想觀,

 

제9는 아미타불의 진신眞身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아미타불관阿彌陀佛觀,

 

제10은 관음보살에게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관음관觀音觀,

 

제11은 세지보살에게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세지관勢至觀,

 

제12는 드디어 정토에 구제가 되었을 때 스스로의 모습을 관하는 보왕생관普往生觀,

 

제13은 정토의 여러 가지 모습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잡상관雜想觀이다.

 

자세한 것은『관무량수경』에 설해져 있다. 이 13종의 관법觀法 가운데 단 하나라도 자기의 힘에 따라 수행한다면 왕생할 수 있다. 이것은 경經에서 설한 대로이므로 결코 의심해서는 안된다.

 

다음은 산선散善인데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삼복三福이요, 둘은 구품九品이다.

 

첫째, 삼복三福이라고 하는 것은『관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1은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여 효도하고(孝養父母), 스승을 공손한 마음으로 받들며(奉事師長), 자비로운 마음으로 산 생명을 죽이지 않으며(慈心不殺), 열가지의 착한 선행을 쌓는다(修十善業).

 

제2는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귀의해서(受持三歸) 지켜야 할 모든 계행戒行을 다 지키며(具足衆戒), 일상의 규율과 위의威儀)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한다(不犯威儀).

 

제3은 깨달음을 원하는 마음 즉 보리심을 일으켜서(發菩提心) 원인과 결과를 깊이 믿으며(深信因果), 대승의 경전을 독송하며(讀誦大乘), 사람들에게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도록 권한다(勸進行者). 이상이 경經에서 설하고 있는 경문經文이다.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여 효양孝養한다는 것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세속에서 말하는 효양이고 또 하나는 세속을 초월한 효양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효양이란 중국의『효경孝經』등에서 설하고 있는 보통 세간적인 효행이다.

 

세속을 초월한 효양이란 불도佛道를 구하고 있는 자가 지켜야 할 생활규범인‘율律’속에 부모를 섬기는 일이다. 즉 참으로 부모를 잘 모시는 길은 불교를 믿도록 권하고 부처님의 법法을 공손히 받들도록 하는 길이다.

 

‘은사恩師를 공손하게 모신다’는 것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세속에서 말하는 은사를 말하며 또 하나는 세속을 초월한 은사를 말한다.

 

세속에서 말하는 은사는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등 세상의 일반적 인 도덕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세속을 초월한 스승이란 성도문·정토문 등 불도佛道를 가르쳐 주는 스승을 의미한다.

 

비록 다른 여러 수행을 하지 않아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효양孝養하고 공손히 모시는 것도 왕생의 업이 된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열 가지의 착한 선업을 닦는다는 것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제1의‘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무량심四無量心 중의 제일 처음인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처음의 한 가지를 들어 나머지 세 가지를 포함시키고 있다.

 

비록 다른 여러 수행을 못하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하면 이것도 왕생의 업이 된다.

 

다음‘열 가지의 착한 업을 닦는다’(修十善業)란,

 

첫째, 살생을 하지 않는다.

 

둘째,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셋째, 사음을 하지 않는다.

 

넷째,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섯째,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하지 않는다.

 

여섯째, 남을 험담하지 않는다.

 

일곱째,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다.

 

여덟째, 탐욕스런 마음을 갖지 않는다.

 

아홉째, 성내지 않는다.

 

열 번째, 삿된 생각을 품지 않는다 라는 열 가지의 행위를 의미한다.

 

제2는 처음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는다’와‘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준다’를 합쳐서 하나의 구句로 한 것이다.

 

처음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무량심四無量心 중에서 자무량심慈無量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십선十善 가운데 처음의 불살생不殺生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선행十善行의 일구一句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여러 가지 행行을 하지 않아도 부처님의 말씀에 따른 십선행十善行도 왕생의 업이 되는 것이다.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것은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인데 이것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대승의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승의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이다.

 

‘중계衆戒를 구족한다’는  것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대승의 계戒를 지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승의 계戒를 지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 위의威儀를 어기는 일이 없다’는 것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대승에서는 팔만, 둘째로 소승에서는 삼천에 이르는 위의威儀가 있다.

 

불도佛道를 지향하는 마음, 즉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 생각이 똑같지 않다.

 

예를 든다면 천태종에서는 불교를 4종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 4종에는 제1 소승의 가르침(三藏敎), 제2 소승과 대승에 공통되는 가르침(通敎), 제3 보살의 경지에 있는 자의 특별한 가르침 (別敎), 제4 완전한 부처의 진리를 설한 가르침(圓敎), 즉 『법화경法華經』의 경지에 서서 4종 보리심이 있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마하지관摩訶止觀』에 설해져 있는 것과 같다.

 

진언종에서는 3종의 보리심을 세우고 있다. 제1은 괴로움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을 구제하려고 원을 세워 깨달음에 나아가는 자비심이고, 제2는 모든 사물의 참된 도리를 궁구해 진실한 지혜를 얻어 깨달음에 들려는 마음이다.

 

제3은 원래 범부나 성자는 평등하다는 경지에 전주傳注하는 것으로, 자기를 고양시켜 남을 인도하는 보리심의 세계이다. 자세한 것은『보리심론菩提心論』에 설해져 있다. 화엄종에도 보리심이 있다. 『보리심의(菩提心義』및 원효元曉의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등에 설해져 있는 대로이다.

 

삼론종이나 법상종에서도 각각 보리심을 설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삼론종이나 법상종을 논한 논서論書 등에 밝혀 있다.

 

선도대사도 보리심을 주석하고 있는데 자세한 것은『관경소觀經疏』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보리심을 일으킨다고 하는 말은 하나이지만, 각각 종宗에 따라서는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보리심이란 일구一句는 폭넓게 많은 경전에 설명되어 있다.

 

또 가르침이 명료하여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교라든가 가르침이 심오해서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비밀로 설해져 있는 밀교까지도 설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의미하는 것은 깊고 넓기 때문에 알맞는 말로 표현해 보려고 생각해도 너무도 망막하여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원컨대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보리심에 대한 하나의 견해에만 사로잡혀서 다른 많은 견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왕생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종宗의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비록 다른 여러 가지 행行을 하지 않더라도 보리심만으로도 왕생할 수 있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제12장.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촉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인과因果를 깊게 믿음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세속에서 말하는 인과因果며, 또 하나는 세속을 초월한 인과因果이다.

 

세속에서 말하는 인과因果라는 것은 인간의 상태를 구분한 번뇌의 세계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육도六道의 경지에서 말하는 인과因果를 가리킨다.

 

이것은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 설해져 있는 것과 같다.

 

세속을 초월한 인과因果라는것은 불도佛道를 걷고 있는 사성四聖의 경지에서 말하는 인과因果인데, 대승·소승의 많은 경전에 설해져 있는대로 이다.

 

만일 어떤 원인으로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두 가지의 도리를 가지고서 많은 경전을 빠짐없이 받아들였다 하여도 그 해석은 학파에 따라 똑같을 수가 없다.

 

지금 잠시 동안 천태天台의 교의敎義에 의해서 보기로 하자.

 

천태에서는 석존釋尊이 일생 동안 설법하신 경전을 다섯 시기로 분류하였는데, 제1기에 설법하신 『화엄경』에는 부처와 보살에 대한 인과因果가 설해져 있다.

 

제2기에 설하신 『아함경』에는 가까이서 석존釋尊의 가르침을 듣고 그 경지를 최고로 하는 자들과 자기 혼자서 깨침을 얻는 경지의 이승二乘의 인과因果를 설하고 있다.

 

제3기에 설하신 많은 대승의 경전에는 4승四乘의 경지의 인과因果가 설해져 있다.

 

제4기에는 많은 『반야경』을 설하셨는데, 여기에는 소승과 대승에 공통되는 경지, 또 보살의 경지에 있는 자의 특별한 경지, 그리고 부처의 완전한 경지에 대한 세 가지의 인과因果가 설해져 있다.

 

제5기에는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하셨는데,『법화경』에는 부처가 되는 원인과 그 결과가 설해져 있고,『열반경』에는 4승四乘의 인과因果가 설해져 있다.

 

그러므로 인과因果를 깊게 믿는다는 말 속에는 석존釋尊이 일생 동안 설법하신 경전이 골고루 망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비록 다른 여러 행行은 하지 않더라도 인과因果의 도리를 깊게 믿는 것만으로도 왕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대승의 경전을 독송한다는 것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경經을 독송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전을 음미하는 것이다.

 

독송한다는 것에 대해『법화경』에 오종법사五種法師를 내세우고 있는데, 그중 경經을 읽는 사람, 경經을 암송하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그외 셋은 경經을 받아 전하고 보호하는 사람, 경經의 의미를 설하는 사람, 경經을 서사書寫하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또 옛부터 경經에 대한 마음가짐으로 유념해야 할 열 가지가 있는 데, 제1은 경經을 서사書寫하는 일, 제2는 경經을 공경恭敬하여 중요시 하는 일, 제3은 경經을 널리 펴는 일, 제4는 다른 사람이 경經을 읽을 때 마음을 고요히 하여 듣는 일, 제5는 자기가 경經을 읽는 일, 제6은 경經을 외워 잊지 않는 일, 제7은 경經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는 일, 제8은 경經을 암송하는 일, 제9는 조용한 곳에서 경經에 설해져 있는 도리를 깊이 생각하는 일, 제10은 경經의 뜻을 잘 알았다면 그대로 실천하는 일이다.

 

대승의 경전이란 소승의 경전과 구분해서 사용한 말이다. 특별하게 하나의 경經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일체의 대승경전을 말한다. 여기서 일체라는 것도 석존釋尊의 본의本意가 석존釋尊이 일생 동안 설법하신 모든 경전(經典)속에 있다는 것을 폭넓게 일컫는 말이다.

 

일생동안 설하신 가르침 중에서 이미 경전으로서 정리된 것도 있으며, 경전으로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리고 또, 경전으로서 이미 정리된 것 중에도 불교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용왕이 이것을 용궁에 숨겨두어 인간세계에 전해지지 않는 경전도 있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되어진 경전에 대해서 말해 보면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이라는 경전의 목록에는『대반야경』 육백 권에서부터 『법상주경法常住經』에 이르기까지 현교·밀교 대승경전의 총계, 육백삼십칠부部 이천팔백팔십삼 권이나 이름이 적혀져 있다.

 

이렇게 많은 경전이 모두 대승경전을 독송한다는 일구一句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행자行者는 각각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법화경(法華經』이나『화엄경』을 독송하거나 또는 대일여래(日如來를 비롯한 부처, 보살이나 그 밖의 훌륭한 분들에게 기원하는 법法 등을 전하여 가지고 독송하거나 많은 『반야경』이나 대승경전 및 『열반경』 등을 해설하고 옮겨 쓰거나 해도 정토에 구제되는 왕생업往生業이 되는 것이다. 단 이와 같이 대승의 가르침을 설한 경經을 읽는 일을 정토에 구제되는 수행으로 하는 것은 정토종의 소의경전所衣經典인 『관무량수경』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는데 현교와 밀교에서 설하는 주지主旨는 서로 다른데, 어째서 현교 속에 밀교가 들어 있다고 하는가?

 

그것에 대답한다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밀교와 현교로 크게 나누어 체계화한 입장에서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교 속에 밀교를 포함시켰다는 것은 아니다.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에서는 현교 밀교의 경전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승의 경전이라고 게재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승의 경전을 독송한다는 일구一句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다시 묻건대『법화경』에서는 석존釋尊이 설법하신 40여년 동안 진실된 가르침은 오직『법화경』에서 설하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관무량수경』은 『법화경』이전에 설해진 경전이 된다.

 

그『관무량수경』속에 왜 『법화경』이 포함되는가?

 

그것에 답한다면‘포함되어 있다’고 한 것은 천태종의 교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법화경』만이 진실한 가르침이고 그 이외의 경전에 설해진 것은 방편으로 설하여진 권교權敎라든가, 또『법화경』만 이 완전한 가르침이고 그 이외의 경전은 불완전하고 치우친 가르침이라는 등의 말은 가치체계의 의미에서 말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대승경전을 독송한다는 말은 석존釋尊의 생애 전후에 설해진 모든 대승견정을 말한다.

 

전에 설해졌다는 것은『관무량수경』이 설해진 이전에 설해진 대승경전을 가리키며 후에 설해졌다는 것은『관무량수경』이 인도 왕사성王舍城의 궁전에서 설해진 이후에 설해진 대승경전을 가리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름만 대승이라고 할뿐, 천태종의 체계로서 설한‘임시의 가르침’ ‘진실된 가르침’등의 의미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천태종에서 체계를 세운 경전 즉,『화엄경』·『방등경』·『반야경』·『법화경』·『열반경』 등 많은 대승경전도 함께 대승의 경전이라는 말 속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 불도佛道를 실천하도록 권한다는 것은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여러 행行이나 염불삼매 등을 권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어지러운 마음으로 행行하는 선행, 즉 산선散善을 두 가지로 나눈 것 중에서 구품九品을 설명하였는데, 구품九品이란 것은 세 가지의 복덕(三福)을 가져오는 선행을 세분해서 아홉 가지로 나눈 것이다.

 

즉 정토에 태어나는 데는 성질이나 행위에 따라서 아홉 가지로 구별할 수 있는데, 그 최상인 상품상생上品上生의 경지를 설하면서‘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세속의 복덕을 나타낸 사구四句 중 제3구에 해당한다.

 

그리고‘중계衆戒를 지킨다’는 말은 앞에서 인용한 부처님이 정하신 계율을 지키는 것에 의해 받을 수 있는 복덕을 설한 삼구三句 중 제2구에 해당한다.

 

역시 마찬가지로‘대승의 경전을 독송한다’는 말은 앞에서 인용한 대승의 가르침을 자기 스스로 행하며 남에게도 행하도록 하여서 받을 수 있는 복덕을 설한 사구四句 중 제3구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섯 가지의 대상에 정신을 집중시켜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육념六念을 수행한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3의 복덕 중 제3구에서 말하는 의미와 같다.

 

또 제2의 상품중생上品中生의 경지를 설하면서‘가르침의 의의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앞에서 인용한 제3의 복덕 중(中) 제2구와 제3구에서 말하는 의미와 같다.

 

제3의 상품하생上品下生의 경지를 설하면서‘인과因果를 깊이 믿으며 불도佛道를 지향하는 마음을 세운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3의 복덕 중 제1구와 제2구에서 말하는 의미와 같다.

 

제4의 중품상생中品上生의 경지를 설하면서‘오계五戒를 지킨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2의 복덕 중 제2구의 의미와 같다.

 

제5의 중품중생中品中生의 경지를 설하면서‘또는 일일일야一日一夜 팔제계八齋戒를 지킨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2의 복덕중 제1·2·3 구의 의미와 같다.

 

제6의 중품하생中品下生의 경지를 설하면서‘부모에게 열심히 효양孝養하며 세상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한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1의 복덕을 말한 사구四句 중에서 제일1·2구의 의미와 같다.

 

제7의 하품상생下品上生의 경지는 십악十惡이라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여 단 한 번만이라도 염불한다면 죄가 소멸해서 왕생할 수 있다.

 

제8의 하품중생下品中生의 경지는 파계破戒라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들 에 관한 것인데 임종을 맞이했을 때 아미타불이 그 수행의 과보로 얻어진 진실한 불신佛身과 그 정토에 갖추어져 있는 덕에 대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죄가 소멸되어 왕생할 수가 있다.

 

제9의 하품하생下品下生의 경지는 다섯 가지의 큰 죄를 범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임종을 맞이했을 때 열 번 염불하면 그 죄가 사라져 왕생할 수 있다.

 

이 제7·제8·제9의 3종의 경지에 있는 자는 평소에는 나쁜 일만 일삼으며 왕생하려는 마음조차 먹은 적이 없지만 임종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는 사람을 만나 이윽고 왕생할 수 있었다.

 

만일 이상에서 말한 세 가지 복덕 중 어느 한 가지에 규준規準을 둔다고 하면 제3의 복덕이야말로 대승의 본의本意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의미도 대개 같다.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지금까지 정선定善·산선散善의 두 가지 방법을 설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제12장.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촉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3|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다음 염불이란 것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염불의 의미는 지금까지 여러 번 설해 왔던 대로이다.

 

그런데 지금 ‘올바르게 아미타불의 이름을 전해가져 먼 후세까지 골고루 불려지도록 하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라는 것은 이 『관무량수경』에서 이미 정선定善·산선散善을 널리 설하기는 하였지만 이 두 가지의 선善을 후세까지 전하라고는 말씀하지 않고 오로지 염불삼매라는 일행一行만을 아난에게 전해 가지도록 하여 먼 후세까지 골고루 전하도록 하신 것을 의미한다.

 

물음 어째서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제행諸行은 후세까지 전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만약 천박淺薄과 심원深遠한 것이 있어서 천박한 것이 싫기 때문에 부촉咐囑시키지 않았다고 한다면 복덕을 입을 수 있는 삼복三福의 행行에도 천박과 심원이 있다는 것이 된다.

 

천박한 행行은 부모에게 효행孝行하고, 은사를 공손히 모시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심원한 행行은 많은 계를 지키고 보리심을 일으키며 인과因果를 깊이 믿고 대승의 경전을 독송하는 일이다.

 

따라서 천박한 행行을 멈추고 심원한 행行을 부촉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정신을 집중시키는데 있어서도 천박과 심원이 있다.

 

천박한 것은 일상관日想觀과 수상관水想觀이다. 심원한 것은 제3의 지상관地想觀에서부터 제13의 잡상관雜想觀까지 전부 11관이 있다.

 

따라서 천박하게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을 멈추고 심원하게 정신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부촉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제9관은 아미타불관阿彌陀佛觀으로 오로지 아미타 부처님의 진실한 모습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관불삼매觀佛三昧이다.

 

그러므로 12관을 버리고 관불삼매觀佛三昧를 부촉시켜도 좋았을 것이다.

 

또한 『관경소觀經疏』「현의분玄義分」에서는 ‘이 경經은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종宗으로 삼고 또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종宗으로 삼는다’라고 설해져 있으므로 이 두 가지의 행법行法이 이 경經의 중심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관불삼매를 버리고 염불삼매만을 부촉하셨는가?

 

대답 『관경소觀經疏』의 「산선의散善義」에‘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비추어 보면 석존釋尊이 이 경經을 설하신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데 있다‘라고 설해져 있으므로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제행諸行은 본원本願이 아니므로 부촉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이들 중 관불삼매는 훌륭한 행법이기는 하지만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아니므로 부촉시키지 않았고 염불삼매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석존釋尊은 아난에게 부촉시켰던 것이다.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비춰보면’이란 것은『무량수경』에 설해져 있는 사십팔원四十八願 중에서 제18원을 말한다.

 

‘오직 일향一向으로 염불한다’는 것은『무량수경』의 삼배단三輩段 속에 있는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염불한다’는 말을 의미한다. 본원本願의 의미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제3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물음 만일 그렇다면, 왜 바로 본원本願인 염불의 실천만을 설하지 않고 번거롭게 본원本願이 아닌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여러 가지 제행諸行을 설했는가?

 

대답 본원本願인 염불행念佛行에 대해서는『무량수경』에서 자세히 설했기 때문에 반복해서 설하지 않았을 뿐이다.

 

또 정선定善·산선散善을 설한 것은 염불이 다른 여러 제행諸行보다도 훨씬 훌륭하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여러 행行이 설해져 있지 않았다면 염불이 월등하게 뛰어나다는 것을 어떻게 표명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어『법화경』에 의하면 많은 경經들이 ‘이미 설해졌고 지금 설해지고 있으며 후에 설해질 것’이라고 하였는데『법화경』이전에 이미 설해진 『대품반야경』·『법화경』과 같은 자리에서 지금 설해지고 있는 『무량수경』·『법화경』보다 나중에 설해진『열반경』등에 비교하여 『법화경』이 뛰어남을 설하는 것과 같다.

 

만일 이와 같이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법화경』이 제일 뛰어난 경經이라는 것을 표명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므로 지금 정선定善·산선散善의 행行은 버리기(廢) 위해서 방편으로 설한 것이고, 염불삼매는 세우기(立) 위해서 방편으로 설한 것이다.

 

그러나 버리기 위해서 설해졌다고는 하여도 정선定善·산선散善의 행行은 모두 우리가 추측하기 어려운 것을 지니고 있다. 원래 정선定善의 행行은 닦은바 그 과보로 얻은 불신佛身 즉 아미타불이나 정토 등에 정신을 통일시킨다면 마치 거울을 보며 여러 가지 모습을 비추어 내듯이 아미타불이나 정토가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므로 이것에 의해서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자기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손쉽게 이루어진다.

 

또는 13관 가운데 단 한가지의 관상觀想을 잘 닦더라도 그 힘에 의해서 오랜 동안 거듭 지어온 죄를 소멸시킬 수가 있으며, 13관을 진심으로 닦으면 드디어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조용히 정신을 통일시키는 법을 수행하면 좋다. 그중에서도 특히 제9의 아미타불의 진실한 모습에 정신을 통일시키는 법은 관불삼매를 성취하는 방법이다.

 

만일 이 수행이 달성된다면 곧바로 아미타불의 불신佛身을 볼 수 있다. 또 아미타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많은 부처도 볼 수가 있다. 많은 부처를 볼 수가 있기 때문에 아미타 부처님은 바로 눈앞에서 그 사람이 앞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을 증명해 주신다.

 

이 관상觀想의 이익은 심원한 것이다.

 

그러나『관무량수경』의 끝부분에는 석존釋尊이 아난에게 왕생할 수 있는 간요肝要한 법法을 후세까지 널리 전하라고 부촉하셨는데, 불신佛身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법조차도 말씀하시지 않고 염불만을 택하여 후세까지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불신佛身을 관하는 관불삼매의 법法조차 부촉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일상관日想觀 수상관水想觀 등의 관상법觀想法을 부촉하셨을 리가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조용하게 정신을 통일시키는 열세 가지의 법은 어느 것도 부촉되지 않은 행법行法이다.

 

그러므로 불신佛身을 관하면서 염불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어긋나는 일이요 아난에게 부촉하신 석존釋尊의 말씀에도 어긋나는 일이 된다. 따라서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것을 잘 알아서 이해해야만 한다.

 

다음으로 산란한 평상심平常心의 마음으로 닦는 행行(散善) 가운데는 대승과 소승의 지켜야 할 계율이 설해져 있다. 보통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계를 지키는 것은 깨우침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에 계를 어긴 자는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보리심을 일으켜야 하는 것도 설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보리심이야말로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보리심이 없는 자는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또 가장 제일로 뛰어나고 진실한 도리를 체득體得하는 것에 대해서도 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름이나 형체나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진여眞如의 도리를 체득體得하는 관법觀法이다.

 

사람들은 또 보편적 진리는 불법佛法의 근원이므로 이 보편적 진리를 떠나서는 부처님의 정토를 원할 수 없으며 만일 진여眞如의 도리를 체득體得하는 관법觀法이 없는 자는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대승의 경전을 독송하는 것에 대해서도 설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대승의 경전을 독송하면 곧바로 왕생할 수가 있으며 만일 독송한 적이 없는 자는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먼저 한 가지는 지경持經(경經을 지키는 일)이며, 또 한 가지는 지주持呪(진언眞言을 지키는 일)이다.

 

지경持經이라는 것은 『반야경』·『법화경』등 대승의 많은 경전을 독송하는 것을 말한다.

 

지주持呪라고 하는 것은 『수래다라니경隨來陀羅尼經』·『존승다라니경尊勝陀羅尼經』·『금광명경金光明經』·『아미타고음성왕타라니경阿彌陀鼓音聲王陀羅尼經』등 많은 진언을 가져 낭송하는 것을 말한다.

 

산란한 마음 그대로 닦는 행行(散善)은『관경(觀經』에 부모에 효행孝行하는 일 등 열한 가지가 설해져 있어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두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앞에서 열거한 4종의 행行, 즉 계를 지키는 일, 보리심을 일으키는 일, 도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 대승의 경전을 읽는 일 등의 행行은 더욱 더 실천해야 할 행이다.

 

이러한 행行들이 불교의 전체를 차지하는 실천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것에 의해서 염불하는 것이 소홀해진 결과가 되었다.

 

부처님 경전의 뜻을 잘 살펴보면 이러한 여러 가지 행行을 후세까지 널리 전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염불행念佛行만을 후세까지 전하도록 부촉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제행諸行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지금 말한 것처럼 선도대사가『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 다른 제행諸行을 버리시고 오직 염불행念佛行 하나로 귀일歸一시키신 이유는 염불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일 뿐만 아니라 역시 또 석존釋尊이 제자 아난에게 부촉하신 행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행諸行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機)에 때(時)를 잃었고, 현금의 죄많은 범부중생인 우리들에 있어서는 염불해서 왕생하는 것이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의 소질능력에 적합하며 그 시기도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지금의 세상에 꼭 맞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사바세계의 괴로움에 신음하는 범부중생의 구원의 원願과 자비심 깊으신 부처님의 마음이 감응感應하니 서로 맞지 않을 리가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부처님은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원하는 바 마음에 따라서 잠시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실천방법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의 본의本意가 아니므로 뒤에는 이 문을 닫으셨다.

 

그리고 한번 열었다면 영원히 닫지 않는 문은 오직 염불이라는 일문一門뿐이다.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서원(本願)도 또 석존釋尊이 부촉하신 본의本意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기에 있었다.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러한 것을 잘 생각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경經 속에 ‘아주 먼 미래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무량수경』에 의할 것 같으면 말법末法 일만년이 지난 뒤에 백년간을 가리킨 말이다. 이것은 ‘아주 먼’이라는 말 속에 ‘가까운 시대’도 포함시켜 우리를 구제하려고 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불법佛法이 소멸한 시대에도 더욱 전해지는 것이 염불인데 하물며 그 전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염불이 전지傳持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당연히 전지傳持되어 그 이익을 모든 사람들이 입을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말법시대末法時代가 이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전해지고 있는 정법시대正法時代는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 형태만 전해지고 있는 상법시대像法時代에도 물론 모든 사람들은 염불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염불왕생念佛往生하는 길은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의 세 시대뿐만 아니라 불법佛法이 완전히 소멸한 뒤로도 더욱 백년간 남게 되어 그 어떤 시대에도 통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제13장. 최고의 선근(念佛多善根章)|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13장. 최고의 선근(念佛多善根章)

 


: 염불이라는 행위는 많은 선善을 만드는 근원이며 그외의 다른 선행은 약간의 선善만을 만든다는 것을 설한 문

 

『아미타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사리불아, 조그마한 좋은 일이나 복덕 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날 수 없다. 사리불아,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 이야기를 듣고 하루나 이틀, 혹 사홀,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을 아미타불의 명호를 가져 부르되 일심되어 산란치 아니하면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치려 할 때에 아미타불께서 모든 성중과 함께 그 앞에 나타날 것이니,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칠 적에 마음이 뒤바뀌지 아니하고 곧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가서 날 것이다."


선도대사는 이 경문經文을『법사찬』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극락은 번뇌가 없는 완전한 깨우침의 세계이므로 여러가지 소질이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많은 선행을 한다하여도 아마 극락에 왕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석존釋尊은 가르침 속에서 간요肝要한 것을 선택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을 염불하도록 가르치셨다.

 

불과 칠일칠야七日七夜 동안의 염불이라도 그 마음속에 빈틈을 두지 않아야 하고, 또 오랜 동안 염불함에도 역시 마음에 틈을 두지않고 정성을 다해야만 한다.

 

그러면 극락세계의 성자들은 연꽃을 타고 그 사람 앞에 나타나 염불하는 사람을 금연대金蓮臺에 태워 극락으로 인도하신다. 염불하는 사람이 금연대에 앉으면 곧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확고한 경지에 들어서게 되며, 그대로 아미타불 앞에 모셔지게 된다.

 

더욱 불도佛道를 함께 걷는 성자들은 서로 함께 법의法衣를 입혀준다. 그리하여 두번 다시 방황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올라 삼현三賢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내 생각으로는 경經속에서 ‘조그마한 좋은 일이나 복덕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가서 날 수 없다’라고 한 것은 염불 이외의 다른 행行으로써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도善導는 ‘여러 가지 소질이나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는 많은 선행을 한다 하여도 아마 왕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약간의 선善밖에 만들지 못하는 근원’이란 것은‘많은 선善을 만드는 근원’에 상대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선행은 약간의 선善밖에 만들지 못하는 근원인 것이다.

 

그것에 비하여 염불은 많은 선善을 만드는 근원이다.

 

『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1권에

 

양양襄陽(중국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석각石刻의 『아미타경』은 수隋나라 시대에 진인릉陳仁稜이 쓴 것으로서 그 자획字劃이 탈속脫俗했고 아름답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글자의 견본으로 하여 애호하였다.

 

그 문文에는‘일심불란一心不亂’이라는 말 다음에 ‘전심專心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모든 죄는 사라져 버린다. 즉 이것은 많은 선善을 만드는 복덕을 가지고 있는 인연이다(專持名號 以稱名故 諸罪消滅 卽是多善根 福德因緣).’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소의 구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대소의 구별도 있다. 여러 가지 선행은 적은 선근善根을 만드는 근원이며 염불은 대선근大善根을 만드는 근원이다.

 

또 승열勝劣의 구별의 의미도 있어서 여러 잡선雜善은 소선근小善根을 만드는 근원이며 염불은 승선근勝善根을 만드는 근원이다.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러한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제14장. 제불의 증명(諸佛證誠章)

 

: 갠지스 강가의 수많은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육방六方의 모든 부처님들이 염불 이외의 행行에 대해서는 증명하시지 않고, 오직 염불만이 왕생이 정해져 있다고 증명하신 것을 설한 문

 

 선도대사의『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아미타경』에 설해져 있는 것처럼 동東·서西·남南·북北·상上·하下의 육방六方에 무수한 불국토가 있어 거기에는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는데 그 부처님들은 각기 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다 덮으시고 진실한 말씀으로 설하셨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나 아니면 부처님이 돌아가셔서 계시지 않을 때에도 모든 죄를 지은 범부가 마음을 돌려서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위로는 백년간이나 열심히 염불한 자에서부터 아래로는 칠일 혹은 하루동안 십성十聲·삼성三聲·일성一聲이라도 염불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사람들이 임종을 맞이했을 때 아미타 부처님은 많은 성자들과 함께 손수 마중 나오셔서 곧바로 극락세계로 접인하여 주신다.

 

앞에서 예를 든 육방에 계신 부처님들이 진실한 말씀으로 설하신 것은 우리들 범부중생을 위해서 증명해 주심이고 모든 죄가 소멸되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만일 이 증명에 의해서 왕생할 수가 없다면, 육방에 계시는 부처님들이 진실한 말씀으로 설하신 혀가 일단 입에서 나왔어도 다시 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상처를 입어 혀는 다 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또한 『왕생예찬』에서도『아미타경』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방에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처님이 계시며 남·서·북방 및 상·하에도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는데, 그 부처님들의 혀가 각각 자기 나라에서 삼천대천세계를 다 덮을 만큼의 진실한 말로 설하셨다.

 

너희들 모든 중생들은‘모든 부처님들이 정성을 다하여 보호하시는 경經’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왜 ‘정성을 다하여 보호한다’라는 이름을 붙였는가 하면, 비록 십성十聲이나 일성一聲일지라도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정토에 왕생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보호하시는 경經’이라고 하신 것이다.

 

선도善導『법사찬法事讚』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육방에 계시는 무수한 부처님들

 

진실한 말씀으로 증명하셨네.

 

마음을 오로지하여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네.

 

그 나라에 이르러 아름다운 꽃이

 

핀 것을 보고 묘법妙法을 들으면

 

성자의 경지에 갖추어야 하는 원행願行

 

자연히 몸에 갖추어지게 되네.

 

 

또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도『아미타경』을 인용하고 있다 .

 

"또 시방에 편만해 있는 부처님들은 사람들이 석존釋尊 혼자서만 설하시고 증명하셨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하지는 않을까 해서 석존釋尊과 같은 마음과 또 같은 때에 모두 혀를 내밀어서 삼천대천세계를 다 덮고 진실한 말씀으로 설하셨다.

 

너희들 모두는 석존釋尊이 설하시고 칭찬하시고 증명하신 가르침을 믿어야 할 것이다.

 

모든 범부는 자기가 지은 죄나 복덕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또 수행시의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많게는 백년간이나 적게는 하루나 칠일간이라도 오직 한마음으로 정성껏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으므로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법사찬法事讚』에서 또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한생각 한생각 끊임없이 염불하되

 

의심을 품어서는 안되네.

 

육방의 수많은 부처님들이

 

거짓이 없음을 증명하셨기 때문일세.

 

몸(身)과 입(口)과 뜻(意)을

 

아미타불 한소리에 모으니

 

번뇌는 없어지고 마음은 평화로워

 

백보百寶의 아름다운 연꽃

 

알맞는 때에 피어나네.

 

 

법조선사法照禪師의 『정토오회법사찬淨土五會法事讚』에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만행萬行 중에 가장 먼저 서둘러야 할

 

중요한 가르침, 그 신속한 것은

 

정토문보다 나은 것 없네.

 

석존釋尊의 훌륭한 직설直說 일뿐 아니라

 

시방에 가득한 수많은 부처님들이

 

다함께 전하시고 증명하셨네

 

 

 

물음 어째서 육방에 계시는 수많은 부처님들이 틀림없다고 증명하시는 것이며 어째서 염불일행念佛一行에만 한정되어 있는가?

 

대답 선도대사의 본의本意를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미타불이 약속하신 본원本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틀림없다고 증명하신 것이고 염불 이외의 행行은 아미타불이 약속하신 본원本願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하지 않은 것이다.

 

물음 만일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염불에는 틀림이 없다고 증명하셨다면 『무량수경』이나『관무량수경』에서도 염불에 대해서 설하실 때 틀림이 없다고 증명하셔야 되는데 왜 증명하지 않았는가?

 

대답 내 생각으로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제1은『무량수경』이나『관무량수경』등에서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인 염불이 설해져 있는데 그것과 함께 염불 이외의 행行에 대해서도 설하셨기 때문에 증명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것에 비하여『아미타경』에서는 순수하게 염불만을 설하였기 때문에 증명하셨던 것이다.

 

제2는『무량수경』속에는 틀림이 없다고 증명한 말은 없지만,『아미타경』에서는 이미 증명하셨다.

 

이『아미타경』과 비교해서『무량수경』을 추측해 보면『무량수경』이나 『관무량수경』등에 설해진 염불도 역시 틀림이 없음을 증명하시는 의의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증명하는 말은『아미타경』에 있지만 역시 그 의미는『무량수경』등에도 통한다.

 

그러므로 천태지의天台智顗의『십의론十疑論』에서

 

또 『아미타경』·『대무량수경』·『고음성다라니경鼓音聲陀羅尼經』등에는 석존釋尊이 이 경經을 설하셨을 때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이 각기 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덮으시고 진실한 말씀으로 모든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아미타 부처님의 크신 본원本願의 힘을 입어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라고 설해진 것으로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제15장. 제불의 보호(諸佛護念章)

 

: 육방제불六方諸佛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특히 유의하셔서 보호하시는 일을 설한 글

 

『관념법문觀念法門』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아미타경』에 설해져 있는 것처럼 만일 중생이 칠일칠야七日七夜 동안 또는 일생동안 오직 한마음으로 정성껏 아미타불을 부르며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이 사람은 항상 육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들이 다함께 보호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특히 유의하셔서 보호하시는 경經’이라고 하는 것이다.

 

‘특히 유의하셔서 보호하시는 경經’이란 의미는 많은 악마나 귀신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갑작스럽게 병에 걸리거나 죽음 등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하여 모든 재난과 장해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다만 진실한 마음이 없는 자는 예외이다."

 

또 『왕생예찬』에서도 ‘만일 아미타 부처님을 칭송해서 왕생하는 자라면 이 세상에서는 육방에 많은 부처님들이 항상 유의하셔서 보호하시는 경經이라고 한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한다고 약속하신 본원本願에 맡겨야 한다. 어째서 열심히 노력해서 정토에 가려고 하지 않는가?

 

물음 육방에 가득하신 부처님들은 무엇 때문에 염불행자念佛行者를 유의하셔서 보호하시는가?

 

대답 육방의 제불諸佛들만이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관음觀音·세지勢至도 다가와서 보호하신다.

 

그래서『왕생예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십왕생경十往生經』에 ‘만일 어떤 사람들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며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아미타 부처님은 25보살을 보내시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보호하신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나 자리에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낮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그 어떤 시간 그 어떤 장소에도 나타나시어 악귀나 악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신다’라고 하였다.

 

또『관무량수경』에 설해져 있는 것처럼 만일 아미타불을 칭송하고 예배하고 부르면서 정토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아미타불은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무수한 부처님이나 관음·세지보살을 보내시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정성껏 보호하신다. 역시 또 앞에서 말한 25보살 등과 함께 염불행자念佛行者의 둘레를 백중천중百重千重으로 에워싸 행行·주住·좌坐·와臥·어語·묵黙·동動·정靜 간 그 어느 때 어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항상 염불수행자念佛修行者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 바로 이렇게 훌륭한 은혜가 있는 곳에 자기를 전부 맡겨야 한다.

 

부디 염불 이외의 길을 걷고 있는 자는 각기 진실한 마음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기 바란다."

 

또 『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관경(觀經』의 마지막 부분에 설해져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만일 지극한 마음으로 항상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음觀音·세지勢至의 두 보살을 부른다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위해 좋은 친구와 길 안내자가 되어 이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호保護하신다.

 

그리고 또『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의 행품行品에 의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일념一念으로 아미타불에 마음을 집중시켜 삼매를 닦는다면 모든 신들과 사천왕四天王 팔부신중八部神衆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호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마음으로 지켜보시며 영원히 악귀신惡鬼神이나 재난 장해 불행 등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

 

자세한 것은 다음의 『호지품護持品』속에 설하고 있는 것과 같다.

 

"또 아미타불의 경지를 감득感得하기 위해서 도량에 들어갈 때를 제외하고 매일 아미타불을 부르기를 일만 번씩 일생이 다하도록 계속하는 자는 아미타불의 가호加護를 받아 지금까지의 모든 죄장罪障을 없앨 수 있다. 또 부처님과 모든 성자들이 모두 함께 오셔서 정성껏 보호해주시므로 그 사람은 수명이 길어져 장생하게 된다."


제16장. 선택된 가르침(名號咐囑舍利弗章)

 

: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아미타불의 명호를 간절하게 사리불舍利弗 등에 부촉咐囑하심을 설명한 글


『아미타경』에 이르시기를

 

"부처님께서 이 경經을 설해 마치시니 사리불舍利弗을 비롯하여 많은 비구와 이 세상의 모든 신神·사람·아수라 등이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을 듣고 환희심歡喜心으로 받들면서 예배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선도대사는『법사찬法事讚』에서 이 문장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석존釋尊께서 설법하심을 마치시며 간절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후세에 전하여 끊이지 않도록 당부하셨다.

 

인간의 능력도 시기時期도 흐려짐이 증가해 가는 오탁시대五濁時代에 의혹이나 비난도 많아지고 따라서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가 가르침을 꺼려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이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하면서 미워하는 마음을 다투어낸다.

 

이처럼 천성적으로 장님의 눈을 고칠수 없는 것과 같이 발심하기 어려운 무리들이 신속히 미혹한 세계를 떠날 수 있는 가르침을 깨뜨리고 영구히 미혹의 세계에 잠기려고 하고 있다.

 

대지의 작은 먼지를 세는 것과 같은 긴 시간이 지나도 3종의 악도惡道에 떨어진 몸은 헤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마음올 하나로 해서 모든 불법佛法을 파괴하려는 대죄大罪에 떨어지는 소이를 알고 참회하여야 할 것이다. "


대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취지를 생각해 보면 많은 불도佛道를 구하는 행行 가운데 염불을 선택하여 귀착해야 할 것을 본지本旨로 하고 있다.

 

우선『무량수경』을 보면 3종의 선택選擇이 있다. 제1은 선택본원選擇本願, 제2는 선택찬탄選擇讚嘆, 제3은 선택유교選擇留敎이다.

 

제1의 선택본원選擇本願이라는 것은, 염불은 법장비구가 옛적에 이백십억의 불국토 가운데에서 선택된 정토에 왕생하는 단 하나의 행行이다. 상세한 이유는 앞에 설한것과 같다. 그 까닭에 선택본원選擇本願이라는 것이다.

 

제2의 선택찬탄選擇讚嘆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정토를 원하는 사람의 능력에 3종의 구별이 있는데, 그중 보리심 등의 다른 길을 구하는 방법을 들고는 있지만 석존釋尊은 염불 이외의 불도佛道를 구하는 방법을 칭찬하시지 않았다. 다만 염불만을 칭찬해 염불이야 말로 가장 수승한 공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까닮에 선택찬탄選擇讚嘆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3의 선택유교選擇留敎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염불 이외의 불도佛道를 구하는 방법에 의한 선과善果를 들고 있지만 석존釋尊은 오직 염불의 가르침 하나만을 선택하여 머물게 하였다. 그 까닭에 선택유교選擇留敎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관경(觀經』가운데도 3종의 선택選擇이 있다. 제1은 선택섭취選擇攝取, 제2는 선택화찬選擇化讚, 제3은 선택부촉選擇咐囑이다.

 

제1의 선택섭취選擇攝取라고 하는 것은『관무량수경』가운데에 정선定善·산선散善의 많은 행行을 설하고 있지만 아미타불의 광명은 다만 염불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비추어 섭취攝取하시어 버리시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 까닭에 선택섭취選擇攝取라고 하는 것이다.

 

제2의 선택화찬選擇化讚이라는 것은 하품상생下品上生의 능력자가 경經을 듣는 것과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의 두 가지 행위가 있다고 하여도 아미타불은 모습을 나타내시어 염불을 선택하여 너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까닮에 모든 죄가 소멸되었다. 나는 지금 마중하러 왔다고 하셨다. 그 까닮에 선택화찬選擇化讚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3의 선택부촉選擇咐囑이라는 것은 정선定善·산선散善의 많은 행行을 밝히고 있지만 다만 염불하는 행위 하나만을 후세까지 전해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 까닭에 선택부촉選擇咐囑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아미타경』에도 1종의 선택選擇이 있다 즉 선택증성選擇證誠이다. 이미 많은 경전 속에서 왕생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설하고 있지만 육방에 두루하게 계시는 부처님들께서 그 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덮으시고 확고하고 진실한 말씀으로 성실히 설하며 이 법法의 틀림없음을 증명하셨다. 그 까닭에 선택증성選擇證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서도 1종의 선택選擇이 설해져 있다. 즉 선택아명選擇我名이다.

 

아미타불께서 스스로 설하시길 “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항상 나의 이름을 불러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라”고 하셨다. 그 까닭에 선택아명選擇我名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의 8종 선택選擇 가운데 본원本願과 섭취攝取와 아명我名과 화찬化讚의 4종은 아미타불께서 선택한것이며, 찬탄과 유교留敎와 부촉咐囑의 3종은 석존釋尊께서 선택하신 것이다.

 

증성證誠은 육방에 편재한 갠지스 강가의 수많은 모래알처럼 많은 부처님들께서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석존釋尊·아미타불 그리고 시방의 제불諸佛께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염불행念佛行 하나만을 선택하셨고 염불 이외의 불도佛道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그 까닭에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은 모두 염불만을 선택해서 간요肝要한 것으로 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대들이 생사의 방황의 세계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한다면 2종의 뛰어난 방법 중 우선 성도문은 그대로 놔두고 정토문을 선택해서 들어가라.

 

정토문淨土門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정행正行·잡행雜行의 이행二行 중 우선 여러 가지의 잡행을 놓아버리고 정행을 선택해서 귀착해야 할 것이다.

 

정행正行을 실천하려고 한다면 정업正業과 조업助業의 이행二行 중 조업은 그냥 놔두고 정업을 선택하여 전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정업正業이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稱名)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의한 까닭이기 때문이다.

제16장. 선택된 가르침(名號咐囑舍利弗章)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화엄華嚴·천태天台·진언眞言·선문禪門·삼론三論·법상法相 등의 각 종宗의 고승들이 각각 정토의 가르침에 대해서 저술하고 있다. 어찌하여 이러한 고승들의 저작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선도대사 한 사람의 저작에 의지하는가?

 

대답 그들 고승들은 각각 정토의 가르침에 대하여 저술하였지만 정토를 종宗으로 삼지 않았고, 단지 성도聖道의 가르침으로 종宗을 삼았기 때문에 그들 고승들을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선도화상은 오로지 정토를 종宗으로 삼았고 성도聖道를 종宗으로 삼지 않았다. 그 까닭에 오로지 선도대사한 사람을 의지한 것이다.

 

질문 정토의 조사들도 그 수가 많으니 예를 들면 홍법사弘法寺의 가재迦才나 자민慈愍, 삼장三藏 등이있 다. 어찌하여 그들 고승들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다만 선도대사 한 사람만을 의지하는가?

 

대답 그들 고승들은 정토를 종宗으로 삼고 있지만 아직 부처님의 경지를 눈앞에 감득感得하는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선도대사는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어 이 경지를 감득感得하신 분이다. 이 경지에 관해서는 이미 증거가 있다. 그 까닭에 우선 선도화상에 의지하는 것이다.

 

물음 만일 부처님의 경지를 눈앞에 감하는 것에 의한다면 회감懷感법사도 또한 이 경지를 감득하신 분이다. 어찌하여 의지하지 아니하는가?

 

대답 선도화상은 스승이고 회감은 제자이다. 그 까닭에 스승에 의지하고 제자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스승과 제자 사이에 해석의 차이가 많이 있다. 그 까닭에 제자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물음 만일 스승을 의지하고 제자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도작선사道綽禪師는 선도화상의 스승이다. 더구나 정토의 조사祖師이다. 왜 이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가?

 

대답 도작선사는 사장師匠이기는 하지만 아직 삼매를 얻지 못해서 부처의 경지를 감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왕생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어서 제자인 선도善導에게 “나 도작道綽은 염불하고 있는데 왕생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선도善導는 일경一莖의 연화蓮華를 가지고 와서 이것을 불전佛前에 놓고서 “위의威儀를 바르게 하고 부처님 둘레를 칠일 동안 돌면서 염불하는 동안 이 연꽃이 시들지 않는다면 왕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도작道綽은 칠일 동안 그대로 일념一念으로 염불을 하였다. 과연 꽃은 시들지 않고 색이 변하지 않았다.

 

도작道綽은 선도善導의 수행이 깊은데 감탄하여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서 왕생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관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선도善導는 곧바로 삼매의 경지에 들어갔다 나오며 말하기를 “존경 하는 스승님, 당신은 세 가지 죄를 참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참회하면 지금 바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참회할 일은 첫째, 존사尊師가 일찍이 귀중한 불상을 문 밖에다 놓고서 자기는 따뜻한 안방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둘째는 출가자를 막부리며 일을 시켰습니다.

 

셋째는 집을 지을 때 많은 벌레를 죽이고 상처를 입혔습니다.

 

존사尊師는 시방에 계시는 불전佛前에 제1의 죄를 참회해야 하며, 사방에 있는 스님들 앞에 제2의 죄를 참회懺悔해야 하며, 모든 사람들 앞에 제3의 죄를 참회해야만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도작道綽은 조용히 과거의 과실을 떠올리며 선도화상이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서 참회하였다. 선도善導는 “존경하는 스승님의 죄는 소멸했습니다. 스승님 앞으로 흰 광명이 빛날 것인데, 이것은 존경하는 스승님이 왕생하는 표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상 『신수왕생전新修往生傳』)

 

여기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선도화상은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어 부처의 경지를 직접 감득感得할 수 있는 수행이 되어있고, 그 수행의 힘은 오히려 사장師匠인 도작道綽 만큼 훌륭하였다.

 

선도화상의 지혜와 수행력은 예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더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불법佛法이 동쪽의 중국에 전해지고 난 뒤, 지금까지 선도대사와 같이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예가 드문 높은 덕德은 아무리 칭찬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선도대사가『관경소觀經疏』를 서술함에 있어서 경經을 해석하기 위해 내용별로 과단科段올 나누어 기술할 때 기서奇瑞가 여러 번 나타나 때때로 몽중夢中에 아미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아미타 부처님의 힘을 입어 경經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힌 책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선도善導의『관경소觀經疏』를 아미타 부처님이 밝힌 ‘증정証定의 소疏’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후세사람들은 이 책을 부처님이 설하신 불경佛經처럼 귀중하게 대해 왔다. 이것에 관해서는 선도善導 자신이『관경소觀經疏』제4권의 오서奧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삼가 정토의 가르침에 인연이 깊은 지혜와 덕(德)이 뛰어난 훌륭한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아직도 생사의 고통 속을 헤매고 있는 어리석은 범부로서 지혜도 얄고 이해력도 부족하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심오深奧하여 범부의 지혜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관경(觀經』의 가르침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한 옛 선사先師들의 뛰어난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견해가 옳은지 어떤지를 알고 싶어서 나의 진심을 불전佛前에 바쳐서 나의 견해가 옳으면 영험靈驗 이 있기를 발원한다.

 

“지심至心으로 귀명歸命하나이다. 허공법계에 편만하신 일체삼보一切三寶·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아미타불阿彌陀佛·관음觀音·세지勢至 그리고 정토에 계시는 대해중보살大海衆菩薩과 그리고 일체장엄상一切莊嚴相에 지극한 마음을 바쳐 귀명하나이다. 나는 지금 이『관경(觀經』의 간요肝要한 의의意義를 밝히고 잘못된 고금의 견해를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만일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의 부처님들 그리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아미타阿彌陀 부처님, 당신들의 자비심에 넘치는 서원의 주지主旨에 맞는 것이라면 부디 꿈속에서 지금까지 말한 소원대로 정토의 모든 경계의 모습을 보여주기 바랍니다”라고 불전佛前에 원願을 세우고 매일『아미타경』을 삼편 씩 독송하고 아미타 부처님을 삼만편 씩 부르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자 그날 밤 꿈속에 서방의 공중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정토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계의 모습이 모두 나타났다. 여러 가지 아름다운 색깔로 된 보산寶山이 백중百重·천중千重으로 둘러싸여 있고 찬란한 오색광명이 대지를 비추고 있어서 넓은 대지는 마치 금색처럼 빛나보였다. 그 속에는 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계셨는데 앉아계시는 분도 있었고, 서계시는 분, 그리고 이야기하거나 그냥 조용히 계시는 분도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잠시 합장하고 있으니 꿈이 깼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났어도 그 기쁨과 환희함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관경(觀經』의 내용을 분과分科하여 개조적箇條的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이 뒤부터는 매일 밤 꿈속에 스님 한분이 나타나『관경(觀經』의 유현幽玄 한 도리를 분과별分科別로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 끝나자 두번 다시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뒤 초고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칠일동안 날마다 『아미타경』을 십편 씩 독송하고 아미타불의 국토에 장엄되어 있는 모습을 관상觀想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귀명歸命하여 꼭 전술한 것과 같이 예배·발원하였다.

 

그런데 그날밤 향과 화병花甁 그리고 촉대爥台 등 세 가지를 갖춘 둥근 맷돌이 길바닥에서 혼자 돌고 있었다. 그러자 흰 낙타를 탄 사람이 바로 앞에 와서 “당신은 열심히 노력해서 반드시 왕생하시오.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하시오. 이 세속 세계는 더러움과 악惡으로 꽉찬 세계니 욕심을 품고 그것에 힘써서는 안되오”라고 권고하였다.

 

그래서 “당신의 크고 친절하신 교훈을 명심하겠습니다. 내 일생 동안 결코 태만한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운운云云.

 

제2야夜에는 아미타불의 신체가 순수한 금색으로 빛나며, 칠보의 나무그늘 황금의 연화 위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부처님의 주위에 스님 열 분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역시 그 한분 한분도 일보一寶의 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나무위에는 천의天衣가 걸려있었다. 자세를 단정히 하고 서쪽을 향해 합장하고 앉으면서 이 모습을 관찰하였다.

 

삼일째 되는 밤에는 굉장히 크고 높은 깃대에 오색의 깃발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도로가 종횡으로 나 있어서 사람들을 보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영험을 이미 볼 수가 있어서 내가『관경(觀經』을 설한 내용이 틀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칠일을 채우지 않아도 되었다.

 

이상 내가 본영험은 내가 경험한 모습을 말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이지 결코 내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정토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결코 감추어 둘 수가 없다.

 

정중히 이 의의意義를『관경소觀經疏』의 끝부분에 덧붙여 두어 올바른 가르침의 표시로서 먼 후세까지 들려주고 싶다.

 

원컨대 뜻있는 자들은 이것을 듣고 믿음을 굳게 세워 서방정토에 귀명歸命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모든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베풀어 다함께 보리심을 발하여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를 상대하고 부처님의 눈으로 지켜주고, 깨우침을 얻어 획득할 때까지 친족과 같이 사귀며, 진실하고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는 자가 되어서 같은 정토에 태어나 불도佛道를 함께 이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관경소觀經疏』는 이미 증명을 청하여 그대로 틀림이 없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가멸加滅해서는 안된다. 만약 이것을 옮겨쓰고 싶은 자는 부처님 경전을 옮겨 쓸 때와 같이 정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문文을 잘 생각해 보면 선도善導의『관경소觀經疏』는 서방정토로 안내하는 지남指南으로서, 염불하는 자에게는 눈이나 발과 같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방정토를 발원하는 염불행자念佛行者는 반드시 우러러 공경해야만 한다. 특히 매일 밤 꿈속에서 스님이 나타나『관경(觀經』의 유현幽玄한 도리를 가르쳤다고 하는 그 스님은 아마 아미타불이 모습을 바꾸어서 나타난 것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관경소觀經疏』야말로 아미타불이 직접 전하시고 설하신 것이라고 하지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중국에서는 ‘선도대사야말로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분이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문文이야말로 아미타불이 직접 설하신 것이다‘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미 선도善導는 이것을 옮겨쓰고 싶은 자는 정중하게 부처님 경전과 같이 소중히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진실이다.

 

삼가 선도화상의 원래의 몸을 생각해 볼 때 사십팔원四十八願의 서원을 세우신 아미타 부처님이시고 십겁 전의 먼 옛날 서원을 세워 부처가 되신 분이기 때문에 그 본원本願에 의지하여 염불한다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화신化身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분이 선도대사기 때문에 오직 염불하라고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을 직접 만나서 전수받은 삼매정수三昧正受이므로 왕생하는 것에는 추호도 의문이 없다.

 

그래서 아미타불과 선도善導는 부처님과 사람이라는 상이한 차이는 있어도 교화敎化하는 길은 똑같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옛날『관경소觀經疏』를 펼쳐보고서 선도대사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곧바로 나머지 여타의 행行을 버리고 염불행念佛行에 귀의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오직 염불만을 내 자신 스스로도 행하고 남에게도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가끔 들어서야 할 길(道)을 묻는 자에게는 서방정토야말로 누구라도 들어설 수 있는 길임을 가르쳐주고, 어떤 행行을해야 하는지 묻는 자에게는 염불念佛이라는 다른 행行과는 다른 특별한 행行을 가르쳤다.

 

이것을 믿는 자는 아주 많았고 믿지 않는자는 아주 적었다.

 

이것으로도 잘 알 수 있듯이 정토의 가르침은 인간의 소질이나 능력에 따라 그것올 실천할 수 있는 시기상응時期相應의 법法이다.

 

또 염불을 행하면, 마치 달이 물위에 비치듯이 곧바로 염불하는 범부에게 부처님은 응답하신다.

 

그런데 지금 뜻밖에도(후지와라노 가네자네藤原兼實 공公의) 청을 받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미흡하나마 염불을 설한 중요한 문文을 한데 모았고, 거기에 염불의 깊은 의미를 말했다.

 

단지 이것은 청에 따른 것일 뿐이지, 내 자신의 어리석고 부족한 지혜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무참무괴無慚無愧할 따름이다.

 

부디 원컨대 한번 보시고 난뒤는 벽저壁底에 파묻어 창 앞에 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만일 믿지 않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비난한다면 바른 가르침을 비난한 죄로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역자의 말|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역자의 말

 

불교가 아무리 좋은 철학과 이상을 갖고 있다 하여도 민중을 구제하는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면 참다운 종교로서 환영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약 2500년전 인도에서 석존釋尊에 의해 개설된 불교의 목적이 “중생을 건지고 대중에 진실된 이익을 베풀기 위한 것”(『대무량수경』)이라고 할진대, 불교 또한 민중을 구제하는 종교임에는 틀림이 없고, 불교의 철리哲理가 깊고 깊다 하지만 그 근본은 민중을 위한 구제救濟의 종교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이와같이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는 데 그 출발점을 두고 있다면 사士·농農·공工·상商·빈貧·부富·귀貴·천賤·남男·녀女·노老·소少 어떤 사람 그 누구도 다 실천할 수 있는 불교가 되어야 하고, 절이든 집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행行·주住·좌坐·와臥·어語·묵默·동動·정靜 간에 그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는 불교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이러한 불교 본래의 뜻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져 있는 불교가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질이 풍족해지고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해감에 따라 인간의 정신계는 더욱 가난해져가고 혼탁의 세계에 오염되기 쉽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은 참된 밝은 진리의 세계를 잃고 방황하게 되어 정신적인 안정을 잃어버려, 아이러니하게도 미신 속에 일시적인 위로로 존귀한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이는 불교의 뜻을 바르게 보지 못하여 바르게 이끌지 못했던 곳에 큰 책임이 있음을 통감하여 우선 민중구제의 불교로 환원코자 관념불교에서 실천불교로, 귀족·엘리트 불교에서 서민대중의 민중불교로 바꾸어 놓았던 일본의 종교개혁자 호넨法然의 신앙서인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을 번역, 소개하고자 한다.

 

호넨法然(1133-1212)은 일본정토종조로서 1133년 4월 7일, 우루마시 도키쿠니漆間時國를 아버지로,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인到來人 하타우지 노키미(秦氏 출신)을 어머니로 하여 세이시마루勢至丸라는 이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인 도키쿠니는 쿠메군久米郡의 치안을 담당하는 무사武士(지금 같으면 경찰국장)였는데 법연의 나이 아홉 살 때 아카시 사다아키明石定明의 야습을 당해 죽음을 앞두고 세이시마루 호넨에게 “원수를 원수로 갚으면 그 원한은 끊일 날이 없다. 빨리 출가하여 보리를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임종하였다.

 

이러한 인자한 부모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법연은 피를 흘리고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무사의 가문을 버리고 13살(1145)의 나이로 히에이산(比叡山) 엔랴쿠지(延暦寺)에 출가하였다. 그리하여 1147년 나시타니西谷의 功德院에서 주석하고 있던 고엔皇圓의 배려로 엔랴쿠지(延暦寺) 계단원에서 계를 받고 출가의 본의를 이루게 되었다.

 

호넨은 엔라쿠지가 명리의 합전투쟁合戰鬪爭의 장소로 변함에도 불구하고 천태 삼대부를 마스터하였고, 1150년에 고엔의 실室을 떠나 에이쿠우(叡空)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히에이산이 명리名利를 탐하는 승가로 전락됨에 회의를 느낀 호넨은 둔세遁世의 결의를 하였다. 에이쿠후는 18세의 호넨에게 히에이산의 최초의 스승인 겐코(源光)과 자신의 에이쿠우(叡空)에서 일자씩을 취하여 ‘겐쿠(源空)’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당시 불교계는 호넨은 ‘지혜제일 호넨보(知慧第一法然房)’라고 부를 정도로 불도수행의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 빛나는 샛별과 같이 그 수행과 지혜가 뛰어났다.

 

그러나 호넨은 깊이 자기를 반성하여 “삼학三學의 비기非機 호넨보法然房”·“愚癡의 호넨보法然房”라고 말하고 내성적 자기성찰을 통해 ‘자기自己의 기機에 상응하는 법문’을 찾기 시작했다.

 

구로다니(黑谷)에는 염불의 별소別所가 있어 은둔의 염불성자에 의해 이십오삼매二十五三昧가 행해지고 있었다.

 

겐신源信(942-1017)이 시작했다고 하는 이 법회는 매월 15일에 도곡道谷이 함께 하여 오전에는 법화의 찬탄을 듣고 오후부터는 밤에 이르도록 부단염불不斷念佛을 행했다. 호넨은 겐신의『왕생요집』에 관심을 갖고 염리예토厭離穢土·흔구정토欣求淨土의 결단에 의해 둔세遁世의 성자의 길을 선택하였으나 이때에 걸치던 묵염墨染의 옷을 호넨은 일생을 통하여 걸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만행길에 사가嵯峨의 석가상 앞에서 말법의 구제를 구하는 많은 민중의 모습을 보기도 하였고, 난토南都를 방문하여 히에이산의 천태 정토교와 색다른 난토 정토교에 대하여 이해를 깊이하여 순수정토교의 대성자인 선도의『관경소사첩소觀經疏四帖疏』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부처님의 상호나 극락정토장엄의 관상觀想과 삼매발득三昧發得에 비중을 두는 기성 정토교와는 달리 말법 오탁악세의 재가민중에게도 구제의 문을 여는 정토교의 과제를 선도대사의 『관경소觀經疏』에 이르러 “일심전념미타명호一心專念彌陀名號”의 문구에 의해 본원타력本願他力의 구제를 자각하게 되었다.

 

호넨 나이 43세에 “나는 삼학三學의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내성적 자각을 출발점으로 한 호넨의 참된 구도는 번뇌구족의 죄악범부중생이라는 인간의 현실을 기조로 한 것으로 당시 귀족적이고 소수 엘리트들의 전유물인 듯 되어버린 관념적인 불교를 민중을 구제하는 신행불교로 바꾸어 놓았다.

 

즉 『일기물어一期物語』에서 호넨은,“내가 정토종을 세우는 의취意趣는 범부왕생을 나타내기 위함이다”라고 민중구제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어 빈궁곤핍貧窮困乏·우둔하지愚鈍下智·소문소견少聞小見·파게무계破戒無戒의 민중까지도 구제될 수 있음을 평등자비 아미타불에 의해 선택된 왕생정토의 본원타력 칭명염불에서 구한 것이다.

 

헤이안(平安)말기로부터 가마쿠라(鎌倉)초기에 이르는 겐뻬이 源平 양가兩家의 투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화염·기근飢饉 등의 천재지변에 의한 사회적 혼한, 이러한 시대적 위기의 상황에 직면함을 바라본 호넨은 모든 민중의 구제를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 속에서 발견하고 정토종을 세웠지만, 지혜를 궁구하고 자력에 의해 해탈을 구하는 성도문聖道門을 아주 배척하지는 않았다.

 

호넨은 『대원담의大原談義』에서 자기와 같은 범부중생에 있어서는 왕생정토뿐만이 구제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호넨이 정토종을 내세우는 것은 정토문이 성도문보다도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과 현재의 사람들의 근기에 비추어 정토문이 성도문보다도 적합하다는 시기상응의 법이라는 이유 때문인 것이다.

 

호넨은 자신을 “삼학비기三學非器”의 범부라고 반성하고 하심하였지만 그의 행상을 나타낸 『호넨상인행상회도法然上人行狀繪圖』에 의하면, 1159년에 일어난 헤이지(平治)의 쟁란爭亂을 거치면서도 “내가 성교聖敎를 보지 않은 날은 기소관자木會冠者가 가라쿠(花洛)에 난입한 때, 단 하루 성교聖敎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일체장경을 세 번이나 열람할 만큼 지혜와 정진의 힘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젊은 나이에 히에이산 천태좌주天台座主의 물망에 올랐으나 “닭벼슬과 같은 명문이양名聞利樣 때문에 출가하였는가?”라고 엄하게 경책하는 자모慈母의 훈계를 받고 전수염불專修念佛에 귀의하여 정업淨業을 닦는 염불수행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신앙의 길에 회심한 호넨은 항상 일체중생의 덕분에 살아간다는 감사 속에 엄한 지계持戒의 생활을 보냈고 ‘7개조七個條의 제계制誡’를 세워 문인門人들에게 아미타불의 본원타력을 겸손과 다행 속에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받들기를 당부하고 아미타불의 대자비를 잘못 이해하여 죽을 때 모든 죄를 미타의 명호속에 맡기면 된다고 지계를 가벼이 하는 안일한 사고방식을 엄하게 경계하였다.

 

여기에 소개되는 『선택본원염불집』은 호넨이 신라 원효(617-686)의 『유심안락도』에서 종명宗名을 따오고 그의 나이 43세, 66세에 염불삼매를 얻고, 순수정토신앙의 대성자인 중국의 선도대사와 몽중대면夢中對面의 신앙적 체험을 통해 쓴 정토종 교학의 사상체계와 구세의 경론을 집약한 호넨의 신앙서이다.

 

모두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왕생지업염불위선往生之業念佛爲先”이라고 한 것처럼, 아미타불에 의해 선택된 본원염불에 관한 요문要文을 모아 삼중 선택에 의해 불도수행의 모든 것이 칭명염불의 일행一行에 귀결함을 밝힌 정토종의宗義의 대망大網을 천명한 정토종의 지남서이다.

 

정토신앙은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민족의 전통신앙으로서 국민의 정신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남겨 주었으며, 이웃 일본의 난토 정토교에 큰 영향을 주어 일본인의 정신계의 차원을 높여 주었다.

 

그러나 이 거룩한 구제의 가르침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였으나 근래 차츰 다시 정업을 닦는 염불행자들이 늘어나고 정토신앙이 확산되어 가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업의 정토수행자들에게 정토신앙의 지남서로서 좋은 반려伴侶가 되리라 믿는다.

 

번역에 있어서는 이시야마 겐노石山善應 역의 『일본의 명저名著호넨』과 하토리 에아준 服部英淳 역 『일역和譯선택본원염불집』을 참고로 하였다.

 

“염불은 지극한 복락의 길이요 영원한 평화와 안녕의 길”이라고 아미타 부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무량한 생명의 광명을 비춰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기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오직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다.

 

끝으로 이 책 출판에 이르기까지 힘써주신 모든 여러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다함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 바이다. "나무아미타불”


무등산 규봉암圭峰菴에서

역자 합장




 『선택집(選擇集)』편서 - 석혜정釋慧淨|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약칭『선택집(選擇集)』은 『대정대장경(大正大藏經)』제83권에 실려 있다. 작자는 800년 이전 일본의 고승으로 정토종의 개조이신「호넨상인(法然上人)」(1133~1212)이다.

 

호넨상인 이전의 일본불교는 오직 대승 소승의 각 종파만 있었고 유일하게 정토종파만 없었는데, 정토문淨土門의 교단이 없어 정토문에 대한 올바른 소의경전과 교상敎相의 이론가교가 없었고, 왕생의 행체行體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서방정토에 왕생을 발원한 행자는 어느 시대나 인재가 없지 않는 법, 단지 모두 각 종문아래 신세를 지고 있어 잡행雜行 잡수雜修 연후에 회향하였으니 아른바 「종속적인 종파(寓宗)」이었고, 또한 그 각 종파의 교리로써 아미타의 정토를 판별하였으므로 정토의 의보정보와 왕생의 정인正因은 각 종파의 종의宗義에 따라 변했다.

 

천태종에 따르면 사토四土로써 아미타 정토를 판정하여서 범부왕생의 가장 비천한 범성동거凡聖同居土로 판정하였고, 또한 법상종에 따르면 아미타 정토를 매우 우수하다고 판정하였지만 단지 범부는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릇된 해석에 따르면 아미타불의 본의가 아니니, 선도대사께서는 이를 ‘스스로를 잃고 남을 그릇되게 하여 피해가 적지 않다(自失誤他,爲害不淺)’고 하셨다.

 

호넨상인은 이것에 대한 판별력이 있어 의연하게 각 종파의 바깥에 별도로 정토종파를 여시고 이 『선택본원염불집』을 저술하셔서 종파를 세우고 교의 「본전本典」을 세울 수 있었으니, 아미타불 본원의 의취意趣, 왕생의 행체行體에 도달하여 이를 드러내고 빠뜨림이 없었다. 신란상인(親鸞上人)은 이 책을 정대(頂戴 ; 이마로 모심)하고 경앙(敬仰)하여 “진종(眞宗)의 간요(簡要)와 염불의 깊은 뜻을 거두어들여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으니, 참으로 희유하고 가장 수승한 아름다운 글(華文)이고 더없이 깊고 미묘한 보전이라.」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무릇 정토문에 들어가고자 하는 행자는 청허한 마음으로 이 책을 상세히 읽고 깊고 자세히 연구하길 바란다. 만약 겨우 두 세번만 읽으면 그 깊은 뜻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모름지기 여러 차례 다독하면 반드시 깊은 신근(信根)이 생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선도대사의 해석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선도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5부9권의 저서는 의리義理가 널리 덮혀(磅礡) 처음 배우는 사람은 방침方針을 알기 어렵다. 이 『선택집』은 선도대사가 저술한 5부9권의 천리내용千里來龍으로 여기에 혈을 맺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5부9권의 진수眞髓가 모두 이 선택집에 있나니, 『선택집』즉 5부9권의 종지宗旨를 상세히 읽으면 불보듯 확실히 알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비상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비상한 일이 있다고 했다. 호넨상인은 대세지보살의 응신應身으로 그 생전과 멸후에 영묘한 감응과 기묘한 서상이 특별히 많아, 여기 『선택집』 앞에 조금이나마 적어 독자의 경신敬信을 증가시키고자 한다.

 

상인의 아버지 성씨는 우루마(漆間)이고 이름은 도키쿠니(時國)이었으며, 조정의 명을 받들어 한개 촌락을 도맡아 다스렸고, 어머니는 하타우지(秦氏)였다. 부모는 일찍이 강개慷慨하여 나이가 마흔 살임에도 아직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고 부부가 목욕한 후 사원에 가서 기도하였다. 7일 밤을 염송하여 게으르지 않고 7일 밤을 채우니,


비몽사몽간에 한 노승이 한 자루의 면도칼을 휴대하고 그녀를 삼키니 이를 따라 임신을 하였다. 도키쿠니는 곧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머지않아 출가하여 당대의 종사宗師가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그 후에 어머니 하타우지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늘 부드럽고 착했으며, 몸은 번뇌와 고통에 없어서 삼보에 깊이 귀의하여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탄생시 백번양수白幡兩首가 하늘에서 내려와 뜰 앞에 푸조 나무에 걸리고, 방울소리가 허공에 울렸으며, 광채가 눈부셨다. 그래서 이 나무를「양번푸조(兩幡椋)」라 이름지었다.

 

상인의 머리 정수리 들어간 곳에는 이랑이 있었고, 안중은 겹눈동자이었며 누렇고 빛이 났다. 유년시절에 툭하면 서쪽을 향해 우러러 공경하였고, 또한 스스로 「세지勢至」라 불렀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위해「세이시마루勢至丸」라 이름지었다. 네 다섯 살 이후 견식見識이 보통사람과 같았다.

 

아홉 살 때 부친이 적에게 살해당하자 임종 전에 「세이시마루」에게 분부하여 말하였다. “이는 나의 숙업宿業이니,절대로 적에게 원한을 품지말라. 원한으로 원한을 멈춤 수 없으니, 마치 보복심을 품어 다음 생을 거듭 태어날 때마다 서로 싸우고 죽여 윤회를 초래하여 다함이 없음과 같다. 나는 나의 고통에 속상해 하고 다른 사람은 그들의 고통에 속상해 하며, 나는 나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은 그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


사람들은 똑같이 이러한 마음이니, 나의 몸을 생각하고 곧 다른 사람을 알아라.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생명을 죽인다면 다음 생에 반드시 그 응보를 받는다. 금생의 망연妄緣을 단절하고 저 원적怨敵을 잊어라. 만약 원적을 잊지 못한다면 어찌 어느 세상인들 나서 생사의 굴레를 끊을 수 있겠는가. 네가 성인이 되면 왕생극락을 기도하여 나와 남의 평등한 이익을 생각하라.” 이와 같이 유언으로 분부한 후에 곧 서방을 향해 고성으로 염불하며 잠자듯이 숨을 거두었다.

 

상인은 보살의 권화權化이시니,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 또한 교화하여 인도하는 방편이니 바로 이른바 세상은 무상無常하고 인생은 고苦이라. 또한 소년은 곧 도를 향한 의지(보리심)를 발하였고, 세간의 명리를 매우 싫어했으며, 또한 아버님의 최후 유언을 잊지 않았다.

 

삼계三界를 유전하는 가운데,은혜와 사랑을 끊을 수 없으나 은혜를 버리고 무위無爲에 드는 것이 진실로 보은하는 사람이다. 이 때 상인은 칸가쿠(觀覺)법사가 계시는 그 지방의 보리사菩提寺에 출가하여 수학하였는데, 지혜로 잘 알아 민첩하고 날카로워서 한번 듣고 많은 것을 깨치는 재치識가 있었다. 칸가쿠 법사는 그의 범인과 다른 기량을 소중히 여기시고 변두리에 묻히는 것을 아쉬워하여, 곧 상인을 교토京都 불학佛學의 요충지인 히에이산(比叡山)에 보내어 겐코(源光) 법사의 문하(座下)에 들어가게 했다.

 

도중에 법성사法性寺의 다다미치(忠通)을 우연히 만났는데, 다다미치는 특별히 수레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였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자 다다미치는 “이 아이의 눈빛이 사람을 비추니 그것은 반드시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라.”라고 말했다.

 

히에이산에 올라서 오래지 않아 겐코 법사가 “이 아이는 천리마이니, 썩은 새끼줄로는 얽매게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이에 천태종의 철인인 고엔(皇圓) 아사리(阿闍黎; 모범이 되어 제자의 행위를 바로잡는 고승高僧)이 머무는 곳에 다시 보내어졌다. 아사리는 상인의 안색이 특별히 뛰어남을 단번에 보고서 큰 법기임을 알아채고, 곧 매우 좋아하며 “내가 어젯밤 꿈에 보름달이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찌 조짐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곧 제자로 삼아 계단에 올라 계를 받으니(登壇受戒) 이때가 상인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3년이 채 되지 않아 천태의 교리를 잡아 받고(秉受) 아침저녁으로 몸에 배도록 익혀서 깊은 뜻을 철저히 궁구하였다. 고엔 법사는 그를 천태종의 동량으로 기대하였으나 상인은 영예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출리出離의 마음이 견고하였다. 열여덟 살에 구루다니黑谷에서 에이쿠우 법사叡空法師에게 사사받았는데,


에이쿠우 법사는 일승원계一乘圓戒를 지닌 화상으로,삼밀三密을 병에 쏟은 대 아사리였다. 그는 비록 소년일지라도 단지 출리의 마음만 있을 뿐 책려策勵하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서, 「법이자연法爾自然」하여 발함을 깊이 찬탄하여 곧 「호넨法然」을 상인의 호로 삼고, 최초의 스승이신 겐코의 「源」과 뒤의 스승인 예이쿠우의 「空」을 취하여 「겐쿠(源空)」를 이름 삼았다. 이를 따라 원돈대계圓頓大戒를 품수稟受하고 그 정통을 계승하며 또한 요가(瑜伽)의 비법을 전하였다.

 

상인은 배우길 좋아해 피곤해 하지 않았고 모든 경·율·논 삼장을 연구하여 눈을 돌보지 않고 자세히 연구하였다. 자타 종파의 장소章疏를 게으름이 없이 펼쳐 보았다. 이 밖에 중국 일본 양 왕조의 전기傳記 및 고금의 모든 고덕의 비서秘書를 두루 읽었고, 각 종파의 뛰어난 재인才人을 찾아 만나 의리를 면담하며, 모든 가풍의 깊은 뜻을 탐구하여 모두 인가認可를 받았다.


상인은 일찍이 말씀하셨다.“나는 책을 세 번 읽고 의취意趣가 스스로 드러나게 하되,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므로 각 종파의 경론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질문에 따르지 않고 모두 스스로 뜻을 얻었다. 상인은 장경藏經을 합쳐서 다섯 번 읽고 탁월한 지혜(神智)가 날로 늘어났다. 다만 경전을 견성(精內)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모든 제자백가의 글을 읽어 널리 배우고 잘 기억하여 당대에 독보적이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존경하여 그를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 불렀다.

 

 상인은 여러 종파의 교리를 깊이 밝혔을 뿐만 아니라 수행 또한 증험證驗이 많았다. 일찍이 삼칠일 이내에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았는데,이에 감응하여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타고 오시어 증명하셨고, 또한 이에 감응하여 산노(山王) 다이곤겐(大權現)이 모습을 드러내 호위하셨다.

 

또한 『화엄경華嚴經』을 펼쳐 읽을 때 작은 푸른 뱀이 책상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어 법제자 신쿠(信空)가 이를 보고서 매우 무서워 그 뱀을 잡아 밖으로 보내니 잠시 후 그 뱀이 원래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마리 큰 용이 와서 “나는 화엄경을 수호하는 용신龍神이니 너에게 청컨대 다시 무서워 말라”라고 말하였다.

 

또한 매일 진언밀관眞言密觀에 들 때 마다 항상 연화와 갈마羯摩, 보주寶珠의 서상瑞相이 감응하였다.

 

또한 일찍이 야간에 독경을 할 때 불을 밝히지 않았는데 실내가 환하게 밝아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겨 방안을 보니, 등불이 없었고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광명이 밝게 비추어 매우 불가사의해서, 기쁨에 눈물이 넘쳐 흘러 내렸다.

 

또한 일찍이 독서를 할 때 이마에서 빛을 놓아 등불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야간에는 실내에 등이 없어도 저절로 밝아 대낮에 책을 읽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일이 항상 있었다.

 

 『관경觀經』에 이르길“대세지보살은 또한 이름이 무변광無邊光이시니 일체를 두루 비추네.”라고 하였다. 상인은 대세지보살의 응신應身인 까닭에 광명을 항상 나투는 것은 자연적이다.

 

그러나 상인의 마음은 오히려 미흡하다 여기시어 홀로 선도대사의『관경소觀經疏』에 특히 우러러 믿음仰信을 내시고 거듭해서 세 번 읽은 후 홀연히 아미타불의 온갖 세상을 넘어서는 서원의 뜻을 깨달으시니, 이른바 ‘죄가 무겁고 망상에 사로잡힌 범부는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을 강한 인연으로 삼아 결정코 보토報土에 왕생할 수 있을 것이다.’ 상인은 환희용약歡喜踴躍하여 마치 깜깜한 밤에 큰 밝은 등불을 만난 것 같아 즉시 종래에 익힌 성도聖道를 버리고 오르지 정토를 종지 삼아 염불왕생을 사방통달의 나루(通津)로 생각하였다.

 

하룻밤 일찍 꿈에서 감응하여 선도대사가 와서 “나는 당나라 선도이니라. 그대가 전수염불專修念佛을 크게 유통하는 까닭에 와서 증명하노라. 그 뒤로 홍법弘法이 막히지 않아 두루 사방에 멀리 떨어진 곳에 미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선도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부처님의 뜻에 합하는 까닭에 오셔서 증명하신 것이다.

 

상인은 43세에 구로다니黑谷를 떠나 낙동길수洛東吉水에 주석駐錫하며 정종淨宗을 개창開創하여 전수염불을 왕성히 홍법하니 멀고 가까운 사부대중이 감복하여 귀의하니, 마치 백천의 조정(朝) 큰 바다와 같았다.

 

다카쿠라(高倉) 천황은 상인의 도예(道譽)를 듣고 특별히 숭상崇尚하여 궁내로 들어와 정종의 요지를 강의해 줄 것을 초청하니, 왕비와 궁녀,고관 백관의 권속에 이르기 까지 모두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는 서 태후(西太后)가 상인에게 서문원西門院에서 칠일 간 설법을 청하니, 뱀이 문짝 위에 가지 않고 또아리를 틀어 청법하는 자세를 지었고, 법연法筵이 원만한 날에 이 뱀이 홀연히 죽어서 뱀의 머리가 갈라졌는데, 대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 신식身識이 흡사 천인과 같음을 보았고 하늘로 날아올라 가버리는 것을 보았다.

 

당시 수상인 후지와라노 가네자네(藤原兼實)은 상인에 대한 공경이 돈독篤敬하여 일찍이 상인을 월륜전月輪殿으로 청하여 정종의 요의(淨宗要義)를 묻기로 결심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나와서 월륜전 다리 위에 도착하자 후지와라노는 우러러 볼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며 땅에 엎드려 절하였고, 머지않아 비로소 좌우의 시종들을 향해 묻기를, “상인의 머리 위로 금색 원광이 나투고 땅에서 떨어져 연꽃을 밟으며 가심에 그 모습이 대세지보살과 같나니 그대들은 목격하였는가?”목격한 사람도 있고, 목격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이로 인해 이 다리를 「원광교圓光橋」라 이름지었다. 상인을 살아있는 부처로 여겨서 존숭尊崇함이 더욱 돈독해졌다.

 

또한 이전에 영산사靈山寺에서 21일간 불칠佛七 법회를 실시하였을 때 5일차 한밤중에 한 두 사람이 대세지보살이 대중을 따라가며 경행염불經行念佛하는 것을 보고서 앞을 향해가서 정례하고 한참동안 존경해 우러러보니, 보살의 형체가 호넨 상인의 모습으로 변하여 비로소 상인이 대세지보살勢至菩薩의 응화신應化身임을 알았다.

 

7일차 밤에 이르러 도량의 등불이 다 꺼졌으나 실내는 여전히 환희 밝으니, 대중이 너무나 기뻐서 불가사의함을 느끼고 더욱 더 정진하였다.

 

또한 공윤승정公胤僧正은 꿈에 상인에 다가와서 설법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시 한수로‘겐쿠源空의 본지신本地身인 대세지보살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까닭에 여러 번 이 세상에 오셨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상인은 몰래 본지의 밀인密因을 흘림이 근기 따라 같지 않았지만 다만 대세지보살의 응화신應化身으로 그 증명함이 가장 많았다.

 

제자 승법勝法은 일찍이 상인의 상을 그리고 상인에게 직접 초상화의 제찬題贊을 청하니, 상인은 생각하지 않고 즉시『세지원통장勢至圓通章』의 ‘나는 본래 인지에서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에 들어갔고 지금 이 세계에서도 염불인을 거두어 정토에 돌아가게 하니라(我本因地,以念佛心,入無生忍;今於此界,攝念佛人,歸於淨土).’의 문장을 서사하여 주었다.

 

또한 산슈讚州 생복사生福寺(지금의 호넨지法然寺)에 계실 때에 상인은 손으로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하여 밀장密藏 게송 한 수를 지어 붙였다. 게송에는 ‘호넨의 본지신本地身은 대세지보살이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는 까닭에 이 도량에 현치顯置한다’의 문구가 있다.

 

또한 제자 직성直聖은 일찍이 쿠마노산에 있을 때 의심병이 들어 단지 상인을 그리워해서 서둘러 교토京都에 돌아가 살피려 하는데 꿈에 다이곤겐(大權現)이 그에게 “그대에게 명하노니 곧 돌아가는 것은 좋지 않고 호넨상인을 대세지보살의 응신으로 생각하라.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상인은 80세 2월 25일 정오에 왕생하셨는데, 왕생하기 수일 전에 제자들에게“나의 전신은 인도에서 성문승聲聞僧이었는데, 항상 두타행을 하여 지금 본국에 와서 천태종을 배우고 최후에 정토문을 열어 염불을 전홍(專弘)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제자 세관勢觀은 “성문승 중에서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다. 상인은 “사리불이네”라고 답했다. 또 어떤 제자는 “스승님께서는 지금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상인은 “나는 본래 극락의 사람이었으니 자연히 극락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사리불은 석존釋尊의 10대 제자 중에‘ 지혜제일’이었는데, 부처님께서『아미타경』을 설하실 때,사리불을 36번 부르면서 그를 대고중(對告衆 ; 경을 설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사리불 존자는 이미 대세지보살의 응화대상이었고, 대세지보살 또한 아미타불 지혜의 현현顯現인 까닭에‘지혜제일’이라 똑같이 불렀고,‘정토법문’을 같이 받드는 것도 법이자연(法爾自然; 진리 그대로)의 일이다. 지금 호넨 상인 또한 그러하니, ‘대세지보살이 다시 오셔서’ ‘지혜제일’로‘ 정토문을 여셨으니’, 먼저 오신 성인이나 후에 오신 성인이 같은 한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 제자들이 아미타불상을 마련하고 상인에게 첨시瞻視를 요청하자 상인은 손으로 상공을 가리키며 “부처님께서 진신眞身을 나투셨으니, 그대들은 만나 뵈었는가? 나는 몇 십 년 동안 항상 불보살의 진신과 정토장엄을 보면서도 절대로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 임종을 맞이하여 그대들에게 알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노라”라고 말했다.

 

22일 제자들이 모두 휴식하러 가고 단지 제자 세관 한사람만 남아 있었는데, 한 귀부인이 수레를 타고 와서 혼자 상인과 함께 대면하기를 요청하고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갈 때 세관은 자못 이상하다 깨닫고 그 뒤를 따라 미행하였으나 멀리가지 않아 홀연히 보이지 않으므로 돌아와서 상인에게 물으니 상인은 “그녀는 위제희 부인이시다”라고 회답하셨다.

 

23일부터 25일까지 승려와 속인(道俗)이 결연하여 고성염불高聲念佛하니, 뜰 가득 소리가 하나로 합하였다. 25일 정오 무렵에 승가리僧伽梨를 입고 머리는 북쪽을,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서 “광명이 시방세계에 두루 비추니 염불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으시네(光明遍照,十方世界,念佛衆生,攝取不捨)’라고 게송을 염송하시고 기뻐하며 입적에 드시니 세수世壽 80세, 승납僧臘 66세이었다.

 

입적하시기 5일 전(2월 20일)에 자줏빛 구름이 뭉게뭉게 지붕위를 덮고 안색이 선명하여 모습이 탱화(圖繪) 속 불상과 같아서 승려와 속인 귀한 자와 천한 자, 먼 곳과 가까운 곳 승려와 속인(緇素) 가릴 것 없이 보는 자는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듣는 자는 그 기이함을 찬탄하였다. 제자들은 “이미 자줏빛 구름의 상서가 있었으니 스승께서 왕생하는 때가 다가왔다!”라고 말하였고 상인은 “옳다!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근信根을 증장增長시키기 위함이라”라고 말씀하셨다.

 

23일 낙하洛下는 “동산에 자줏빛 구름의 서상이 있다.”라고 말을 전하였다.

 

24일 자줏빛 구름이 크게 일어 서산을 덮었고, 나뭇꾼 수십명이 모두 보았다.

 

또 어떤 비구니 스승이 고류지(廣隆寺)에 가는 길에 자주빛 구름을 보고 곧 이 기이한 서상瑞相을 대중에게 알렸다.

 

왕생하신지 16년 후에 제자들은 유체遺體를 모신 돌로 된 감실을 열어보았는데, 온 몸은 엄숙하고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며 기이한 향이 향기로왔다. 승려와 선비(緇白) 천여 명이 유해를 호송하여 서쪽 교외 다비荼毘까지 옮길 때 색다른 향기가 났고 자줏빛 구름이 소나무에 드리워서 ‘자운송紫雲松’이라 이름짓고, 이곳에 건당建堂한 후 오랫동안(長行) 염불을 행하니 현재의 고묘지(光明寺)는 그 유적이다.


호넨상인이 왕생할 때 고운빛 구름의 기이함과 다비荼毘 때 유골의 수승한 상은 위와같이 약술하였지만, 평생동안 영묘한 서상(靈瑞)과 입멸후 감응感應은 특히 다 쓰기가 어렵다. 모든 이 서상과 감응은 호넨상인이 단지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생사 범부가 아니라 자비의 배를 되돌리는 다이곤大權보살로 오탁의 평범하고 어리석은 자를 연민하여


가없는 빛의 힘으로 사바에 오지 않고 맞이하러 와서(不來而來裟婆) 정토문을 열고, ‘일향一向으로 전념專念하는’뜻을 보이며, ‘죄가 중한 범부가 결정코 보토에 왕생하는’이치를 밝혔다. 마치 석존이 이미 80년 응화應化를 마친 것과 같이 (상인께서는) 머리는 북쪽을 얼굴은 서쪽을 향해 ‘광명이 두루 비추네光明遍照’라고 게송을 염송하고 정토에 돌아가지 않아도 돌아갔다(不還而還歸淨土).

 

만약 감응을 논한다면 기타 종교 내지 민간의 미신신앙도 또한 적지 않다. 만약 불교도 감응으로 숭상을 받는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겠는가. 종종 사람을 끌어들여 미신의 길에 들어가게 할 뿐만 아니라 종종 사람을 빠지게 하여 외도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감응한 후 교리로써 반드시 도와주고 구경해탈의 광명대해를 가리켜야 한다. 이치가 밝고 믿음이 깊으면 감응의 유무에 조금도 집착과 장애가 없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다만 교화하여 이끄는 방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라않고 빠져드는 악연이다.

 

담란曇鸞 대사는 사론四論의 강설講說을 버리고 일향으로 정토에 귀의했고, 도작道綽선사는 열반의 광업廣業을 제쳐놓고 오직 사방의 원행願行을 넓혔다.

 

어리석고 우둔한 무리(淨愚癡暗鈍之輩)와 극악하고 가장 아래의 부류(極惡最下之流)는 이 극선 최상의 수승한 법을 만나길 기약하지 않으니 가히 천생에도 만나기 어렵고 억겁에도 만나기 어렵다. 감응한 나머지 말에 그칠 수 없음이 있는 자(有不能已於言者)와 보는 자(見者)는 이를 살펴 알고, 또 이를 바로잡고 가르치는 길이 있기를 청한다.        

 

석혜정釋慧淨  삼가 서문을 지음

 

1993년 10월 23일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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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경핵심강기(정종淨宗법사 법어 / 정전스님 역)


출처/純淨時代


머리말


아미타경은 불문佛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독송되고 있는 한부의 경전이자 정토종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전체 경전의 핵심은 왕생의 정인을 설명하는 단락에 있는데, 100여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문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해가 매우 많아서 주로 적은 선근(少善根)’·‘일심불란(一心不亂)’·‘심불전도(心不顚倒)’라는 세 구절에 집중되어 있다. 오해로 인해 스스로 장애가 생겨 마음속에 두려움을 품게 되고 최후에는 왕생의 이익을 잃고 만다.

2005, 정종법사께서 중국 하문廈門의 계명사啓明寺에서 전적으로 이에 대해 강설을 하셨는데, 경전의 증거와 조사의 증거·이치적 증거·사실적 증거를 낱낱이 들면서, 아울러 여러 가지 비유를 더하여 적절하고 상세하고 분명하게, 간단명료하여 이해하기가 쉽게 강의하셨으므로 듣는 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 책이 바로 법사님의 강연을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인연 있는 분들이 읽고 나서 안심과 법희를 얻고 용맹정진하여 염불하며 결정코 왕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편자

2011년 4월


『아미타경』핵심강기

Ⅰ. 서론

 

【『아미타경』의 핵심】

 

적은 선근과 복덕인연으로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그 명호를 굳게 지니어, 하루나 이틀이나 혹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혹은 이레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임종을 할 때에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인 대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투시게 되나니,그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바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느니라.

 

(不可以少善根福德因緣, 得生彼國。若有善男子, 善女人, 聞說阿彌陀佛, 執持名號, 若一日, 若二日, 若三日, 若四日, 若五日, 若六日, 若七日…… 一心不亂, 其人臨命終時, 阿彌陀佛與諸聖衆, 現在其前; 是人終時, 心不顚倒, 卽得往生阿彌陀佛極樂國土。)

 

이 단락의 경문은 전부 합쳐서 겨우 백자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극락왕생의 정확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어서 전체 『아미타경』의 핵심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시 자주 오해를 받게 되는데, 일단 오해하고 나면 전체 『아미타경』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게 되고 왕생은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세 가지 점을 따름】

 

여러분들이 이 단락의 경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보증하기 위해 우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점을 확립해야 합니다.

 

첫째, 선도대사의 정토사상을 의거함을 근본지도로 삼는다.

둘째, ‘정토삼경’가운데 다른 두 부의 경전인 『무량수경』·『관경』 중의 관련된 경문, 특히 48원 가운데 제18‘염불왕생원’을 회통하여 해석한다.

셋째, 사례를 들어 증거로 삼고, 동시에 여러 가지 비유도 든다.

 

【정인과 정과(正因正果)】

 

이 단락의 경문을 이치상으로 말한다면 ‘비인(非因:원인이 아닌 것)을 배제시키고 정인(正因:정확한 원인)을 선택하여 정과(正果:바른 결과)를 명시하는’ 관계가 있으며, 일반 신도들의 심리적인 측면으로부터 말한다면 이른바 ‘세 가지 큰 고뇌와 두 곳의 의문’이 있습니다.

 

첫째, 비인을 배제시킨다(排除非因). 경문에서 말씀하시기를, “극락세계의 경계가 고묘高妙하여 적은 선근과 복덕에 의지해서는 왕생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적은 선근과 복덕’이 바로 비인이므로 먼저 배제를 시켜서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일에 정신을 팔지 않고 일심으로 곧장 나아가도록 해줍니다.

 

둘째, 정인을 선택한다(選擇正因). ‘명호를 굳게 지니면 바로 왕생한다’고 하셨으니, 명호를 굳게 지니는 것(執持名號)이 바로 정인입니다. 이른바 ‘정인’이란,

첫째는 정확함正確이니, 정확하여 그릇되지 않은 인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순정純正이니, 순수하고 올바르며 잡다하지 않은 인이라는 것이요;

셋째는 정직正直이니, 바르고 곧아서 우회적이지 않은 인이라는 것이요,

넷째는 필정必定이니, 반드시 왕생하는 인이어서 어떠한 불확정성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정과를 명시한다(明示正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듯이 명호를 굳게 지니는 것을 원인으로 삼아 두 가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첫째는 임종 시에 ‘부처님과 성인 대중들이 몸을 나투어 내영해주시는’ 결과이고, 둘째는 임종 시에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곧바로 왕생하는’ 결과입니다.

 

【세 가지 큰 고뇌】

 

이 단락의 경문은 『아미타경』의 관건이어서 만약 선도대사님의 해석을 따른다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고 누구나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마음속에 큰 고뇌가 생기게 되는데, 이 『아미타경』을 독송하면 할수록 두렵게 되고, 당신이 정토법문을 닦으면 닦을수록 더욱 고뇌하게 되어 심지어 아예 포기해버리고 닦지 않게 됩니다.

 

무슨 고뇌가 있을까요?

 

첫 번째 고뇌는 ‘많은 선근’에 대해서입니다. 왕생을 하려면 많은 선근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누가 감히 자신에게 많은 선근이 있다고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선근이 없으면 왕생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의 큰 고뇌입니다!

 

두 번째 고뇌‘일심불란’에 대해서입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담호색변(談虎色變)’이란 말이 있는데, 호랑이 이야기만 해도 얼굴빛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일심불란’이란 말만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자신은 온종일 망념이 분분하고 마음은 마치 야생마와 같고 미친 코끼리와 같아서 아무리 수습하려 해도 수습이 안 되므로 전혀 일심선정一心禪定에 도달할 수 없으니 어떡해야 합니까? 도달할 수 없다면 왕생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것도 고뇌입니다!

 

세 번째 큰 고뇌는 ‘심불전도’에 대해서입니다. 죽을 때 마음이 전도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는 자신이 죽을 때 어떻게 마음이 전도되지 않을 거라고 보증할 수 있을까요? 이 자리에 계시는 모든 분들, 우리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또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요즘에는 교통사고도 많고, 광산사고·물난리·비행기사고·차량사고·배사고; 뇌출혈·심장병·식물인간·중풍;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고, 화재를 당해 타 죽고, 물에 빠져 죽고……온갖 횡사와 급사들이 있는데 만에 하나 자신이 만난 다면요? 누가 감히 자신은 임종 시에 반드시 정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 가지 점은 우리의 마음을 가장 고뇌하게 만드는 것으로, 마치 세 개의 큰 돌덩어리가 우리의 마음을 누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곳의 의문】

 

그리고 또 의문이 두 군데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남자·선여인’에 관해서입니다. 우리는 선남자·선여인에 속할까요? “오직 선인만 왕생할 수 있나요? 저는 다소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식당을 하면서 살생을 많이 한 적도 있었고, 또 남을 속인 적도 있었으며, 남을 업신여긴 적도 있었고, 남을 욕한 적도 있고 때린 적도 있었으며, 벌어서는 안 될 돈을 번 적도 있었고 굴려서는 안 될 머리를 굴릴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죄업을 지었는데 염불하여 왕생할 자격이 있을까요?” 이것이 첫 번째 의문입니다.

 

두 번째는 ‘하루나……이레 동안’이라 하셨는데, 그럼 하루나 이레 동안만 염불하면 될까요?

이 몇 단락의 경문에 대해 만약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짙은 안개 속에 쌓여 왕생의 길에 온갖 위험과 어려움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Ⅱ. 본론

 

1. 어떤 것이 ‘많은 선근’인가

 

1) 전수와 잡행의 득실로부터 판단함

 

【두 가지 상반된 관점】

 

경에서 설하기를, “적은 선근과 복덕인연으로는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선근일까요? 다들 왕생을 하려면 염불은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전제하에 또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의 관점은 단지 염불만 하는 것이 바로 적은 선근으로서 왕생할 수 없으며, 염불 외에 여러 가지 선과 복을 닦는 수행을 더하여 회향해야만 비로소 많은 선근이 되어 비로소 왕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염불이 바로 많은 선근이어서 설사 다른 수행이 없더라도 오로지 염불에 의지하면 반드시 왕생하고, 그 외의 것은 모두 적은 선근이어서 아무리 많이 닦아도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관점을 들어보면 비교적 직관적인데, 곧 염불에 다른 수행을 더하면 염불보다 공덕이 크다는 것입니다. (염불 + 다른 수행) > (염불)

 

두 번째 관점을 들어보면 약간 독단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 말은 나는 염불에 염불을 더하면 염불에 다른 수행을 더한 것보다 공덕이 크다는 것입니다.

(염불+염불)>(염불+다른 수행)

 

도대체 어느 관점이 정확한 걸까요? 우리는 먼저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관점을 따라 수행하면 어떠한 다른 결과가 생기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전수와 잡행의 득실】

 

첫 번째 이해에 의하면 그는 틀림없이 여러 가지 법문을 닦아서 회향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해야만 선근과 복덕이 아주 많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이 경전도 독송하고 저 진언도 독송하고 이 법도 닦고 저 부처님께도 절을 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마침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신 잡행잡수雜行雜修에 떨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 이해에 의하면 염불이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므로, 그는 전수염불을 하며 일향전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왕생예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근래에 직접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여러 지방의 출가자와 재가자들 중에 해행(解行)이 다르고 전잡(專雜)이 달랐다.

 

“나 선도가 근래 한동안 직접 보고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다들 정토법문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 이해가 다르다 보니 수행방법도 달라 전수를 하는 이와 잡행을 하는 이가 있었다” 만약 단지 염불만 하면 적은 선근이어서 여러 가지 법문을 모두 닦아야 비로소 많은 선근이라고 여긴다면,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잡행잡수를 하게 될 것이고, 만약에 염불이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라 여긴다면, 그 사람은 하나의 법문으로 깊숙이 들어가 전수전념專修專念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얻은 결과는 어떨까요?

 

다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행을 닦는 자는 열이면 열 명 모두 왕생을 하지만;

잡행을 닦고 지심이 아닌 자들은 천 명 중에 (왕생을 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는 선도대사께서 직접 보시고 직접 들으신 것으로서, 대사께서는 “전수염불을 하는 사람은 열이면 열 명이 왕생하고, 백이면 백 명이 왕생한다. 그럼 잡행잡수를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천 명 가운데 왕생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전수염불을 하면 열이면 열 명이 왕생하므로, 당연히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고; 잡행잡수를 하면 천 명 중에 한 명도 없으니, 당연히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이겠지요.


2) 이치로써 설명함

 

이렇게 말한다면 아마도 어떤 분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불만스럽고 납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그들보다 닦은 법문도 많고 선근도 많고 그들보다 독경도 더 잘하고 진언도 더 잘 외우는데, 왜 내가 도리어 적은 선근이고 왕생이 결정되지 않는다고 하는가? 그들은 단지 염불만 할 줄 알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오히려 많은 선근이고 왕생이 결정되었다고 하는가?’ 마음속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아래에 우리는 이치·비교·비유·경문·조어祖語·사례 등의 각 방면과 여러 각도로부터 염불이 많은 선근이라는 것을 설명하여 여러분들로 하여금 결정적인 신심을 건립하고 ‘전수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한다’에 안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회의를 하는 비유】

 

앞서 경문에서 설하기를 극락세계에는 모두 불퇴전 내지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대보살들로서, 이러한 ‘으뜸가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는(諸上善人俱會一處)’ 곳이라고 하셨는데, 이른바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이 아무튼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라야 함께 모일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곳에 도달하려면 일반범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대아라한들마저도 자격미달이기 때문에 『왕생론주』에서 ‘대승의 선근계는 이승의 종성들이 태어나지 않는다(大乘善根界, 二乘種不生)’고 설하신 것입니다.

 

으뜸가는 훌륭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에 적은 선근으로는 왕생할 수 없습니다. 위는 아래와 상대되고, 많음은 적음과 상대되므로, 으뜸가는 선(上善)이 바로 많은 선(多善)이고 적은 선(少善)이 바로 아래 선(下善)입니다. 『아미타경』에서 어떤 사람을 으뜸가는 선인이라 하셨습니까? ‘아비발치’·‘일생보처’의 제대보살님들이십니다! 이러한 급에 도달하지 못하면 모두 적은 선이고 아래 선이어서 최소한 불퇴전의 보살, 더 나아가 일생보처의 대보살의 선근기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자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이런 사람들과 함께 모이고 싶어도, 당신이 그런 수준이 안 되는데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성장급(省長級:도지사급)의 회의에 시장은 참가할 자격이 없으며, 일반 서민들은 더욱 참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극락세계에는 이러한 대보살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인데, 우리의 선근과 복덕은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지한다면, 아무리 노력하여 수행하고 아무리 선근복덕을 쌓아도 전부 부족하여, 전부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이며, 엄청난 차이로 가히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묘한 국토는 오직 염불,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서 아미타불의 선근복덕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을 뿐, 부처님의 명호를 제외하고 범부들 자신이 닦은 일체 유루의 선법으로는 모두 왕생할 수 없습니다.

 

【국왕이 소견하는 비유】

 

예를 들어 왕궁은 국왕이 거처하고 문무대신들이 국정을 위해 출입하는 곳으로, 일개 백성이 왕궁에 가려면 자신의 신분에 의지해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국왕의 소견召見이 있고, 국왕의 명령이 있고, 국왕의 성지가 있다면 백성이 국왕을 알현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알현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약간의 상상력을 갖고 저에게 협조를 해주셔야 합니다. 모두 눈을 감으십시오. 시간이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들은 현재의 이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청나라의 두루마기와 마고자를 입고 머리는 길게 변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하문시도 없고 단지 작은 노점들과 찻집들만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을 합니다. “영명英明하신 황제페하 만세!” 어떤 사람이 놀립니다. “아, 이 영감! 언제 한번 영감도 자금성의 금란전金鑾殿에 가셔서 황제페하를 알현하여 진급을 할 수 있다면 우리도 얼마나 좋겠소? 덩달아 덕을 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잠꼬대 그만 하소, 우리 같은 일개 백성이 어떻게 황제를 뵐 수 있겠소!”

 

이 때 마침 옆에 기개가 비범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이 황제를 공경하고 찬탄하는 소리를 듣고, 게다가 황제를 뵙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절실하다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황제를 뵙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응? 당신이 누구신데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나에게 다 방법이 있소!” 그리고는 종이와 붓을 가져와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요?”라고 묻고는 그의 이름을 종이위에 적습니다. “아무개가 입궁하여 알현할 것을 특별히 허락한다”, 그 밑의 낙관은 ‘강희康熙’였습니다. [주: 청(淸) 성조(聖祖)의 연호(1662~1722)]

 

강희황제의 성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럼 이 백성은 황궁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중)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일반 백성·오탁악세의 범부들이고, 우리가 칭념하고 있는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는 보통 글자가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직접 초청해 주시는 서명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서명하신 초청장을 들고서 아미타불의 국토에 가는 것은,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제18원에서 말씀하시기를, “시방중생(당신과 나)들이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초청) 내지 십념(서명)을 한다면, 반드시 나의 나라에 왕생한다”고 하셨습니다.

 

육자명호가 바로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지聖旨이고, 육자명호가 바로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초청장이자 소견서召見書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육자명호가 있는데, 어떻게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없겠습니까?

 

이 외에, 예컨대 우리가 황제를 알현하려고 하는데, 당신이 말단 관리인 현령縣令를 찾아서 서명을 받는다면 쓸모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러분들이 말해보세요, 현령이 당신에게 서명을 해주면서 “됐소! 나의 글을 들고 직접 찾아가면 될 것이네”라고 말한다면 쓸모가 있겠습니까?

(대중이 답하기를)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요, 지방행정 장관을 찾아서 서명을 받으면 쓸모가 있겠습니까? 쓸모가 없습니다. 그도 감히 서명할 수 없습니다!

좋아요! 그럼 각 부처의 최고 장관을 찾아가 서명을 받으면 쓸모가 있겠습니까? 역시 쓸모가 없습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이 육자명호는 아미타불께서 직접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이고, 기타 모든 법문은 마치 최고 장관이나 지방 장관이나 말단 관리와 같은 것이어서 그들을 찾아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려 한다면, 그들도 전부 손을 저으면서 “아,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위덕이 없습니다”며 우리에게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려면 ‘당신은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고 일러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려면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에 승탁乘託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육자명호 속에는 아미타불의 위없는 공덕을 포함하고 있고, 또 육자명호는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에 대한 직접적인 선소(宣召:부처님의 부르심)여서 마치 국왕의 소견과 같고 국왕의 호령과 같아서 아무런 장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모든 신하와 백성들에게는 전부 이런 위덕이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시방제불이 다 같이 무량수불의 위신공덕威神功德의 불가사의함을 찬탄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는 이 『아미타경』속에서 우리에게 명호를 집지하는 것이 바로 많은 선근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명호를 집지함’을 제외한 모든 행은 전부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어서 왕생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치입니다.


3) 비교로써 설명함

 

【여러 가지 선근의 비교】

 

다음은 우리가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옛말에 ‘물건을 몰라보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여러 물건을 비교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네 구절의 말씀이 있는데, 제가 먼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계와 십선은 삼계에 체류하고, 五戒十善滯三界

성문과 연각은 대승이 아니며, 聲聞緣覺非大乘

보살은 만행이 원만하지 않았으니, 菩薩萬行未圓滿

육자와 비교하면 모두 적은 공덕일세. 較之六字皆少德

 

이 네 구절 말씀은 이해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오계와 십선이 선이기는 하나 여전히 삼계에 있어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라한도 선이어서 높이 삼계를 초월하여 영원히 윤회로부터 벗어났지만, 아라한은 단지 자신의 문제만을 해결한 자료한自了漢일 뿐 대보리심을 내지 않았으며, 보살은 더욱 선이어서 대보리심을 내어 널리 육도만행을 닦아 맹세코 일체중생을 제도하려고는 하나, 보살의 수행은 아직 원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에, 이런 것들을 가지고 아미타불의 원만한 공덕인 육자명호와 비교를 한다면, 전부 적은 선근이고 적은 복덕이라는 것이지요.

범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우리 자신이 닦을 수 있는 선근과 복덕은 기껏해야 오계와 십선정도인데, 오계와 십선을 원만히 닦을 수 있다면 당신은 아주 희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오계와 십선조차 실천하기 어려운 우리들에게 무슨 선근과 복덕이 있겠습니까?

 

오계와 십선도 선근복덕이어서 오계를 지키는 것과 오계를 훼범毀犯하는 것을 비교하면 선이라 할 수 있고, 십선과 십악을 비교하면 역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계와 십선은 여전히 삼계 내에 체류하고 있어서 삼계의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계와 십선을 잘 닦으면 다음 생에 다시 사람을 태어나 높은 관직에 오르고 큰돈을 벌 수 있으며, 천상세계에 태어나 천자·천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근과 복덕을 만약 아라한의 선근복덕과 비교한다면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대중) 없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라한은 이미 삼계를 벗어나 이른바 ‘삼계 밖으로 벗어나 오행 가운데 있지 않다(跳出三界外,不在五行中)’는 말이 있듯이 그는 이미 삼계를 벗어난 성자인데, 오계와 십선으로 어떻게 그들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아라한은 자신의 선근과 복덕에 의지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대중) 없습니다!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없습니다. 천친보살의 『왕생론』에서는 “극락세계는 ‘대승의 선근계여서 이승의 종성이 태어날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극락세계는 대승보살·대승선근의 경계여서 ‘이승’인 성문·연각――아라한과 벽지불이 자신의 선근과 복덕을 의지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려 한다면 자격미달이라는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가려면 아라한의 선근과 복덕조차 부족하거늘, 범부의 오계와 십선으로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아라한의 선근과 복덕이 비록 범부들과 비교하면 아주 많다고 할 수 있지만, 만약에 보살과 비교한다면 누구의 선근과 복덕이 많겠습니까?

(대중) 보살입니다!

 

이 장부는 계산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자신의 생사만을 해결하는 자료한自了漢이어서 그들은 자신의 생사윤회만을 해결하지만, 보살은 광대한 보리심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살의 선근복덕을 아라한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이어서 하늘과 땅의 차이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보살의 심량이 광대무변하고 선근복덕 역시 무량무변하지만 보살은 필경 성불을 한 게 아니라 아직 보살의 지위에 있기에 원만하지가 않습니다. 그럼 보살의 선근복덕을 아미타불과 비교를 한다면 어느 분이 더 많을까요? 그것 또한 하늘과 땅을 비교할 수 없듯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비교해본다면 오직 부처님의 선근과 복덕만이 가장 철저하고 가장 원만합니다.

그럼, 아미타불의 선근복덕은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까요? 아미타불의 선근복덕은 육자명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조금 멀리 갔는데, 우리 세간의 일을 말하면 다들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명함과 제왕의 칭호에 대한 비유】

 

여러분, 우리는 일반시민으로서 우리의 복보福報를 가지고 시장과 비교한다면 누가 더 크겠습니까? 시장이 크고 우리가 작습니다.

 

시장의 복보와 위세가 큽니까, 아니면 성장省長의 복보와 위세가 큽니까? 성장이 큽니다.

성장의 복보는 어디에서 큽니까? 그가 성장이라는 데서 큽니다. 그가 밖에서 명함을 꺼내면서 “내가 성장이다”고 말하면, 다른 것 필요 없이 바로 성장이라는 이름 뿐인데, 성장의 이름이 그의 복보를 대표합니다.

 

성장의 복보가 큽니까, 아니면 국가주석의 복보가 큽니까? 국가주석이 큽니다. 국가주석의 복보는 어디에서 큽니까? 그가 국가주석이라는 데서 크며, 그에게는 이런 명분가 있습니다. 이 명분만 있으면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에게 복음福蔭이 되어줄 수 있으니, 이른바 명분이 정당하면 말도 이치에 맞아서 그 위치에서 그 정사를 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국가주석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그러한 명분이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무량무변하고 철저하고 원만한 선근복덕은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바로 여섯 자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비로소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를 이 여섯 자가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여섯 자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성불의 공덕과 능력이 있어야 비로소 성불하고 나서의 명호가 있는 것입니다.

 

시대별로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이제까지 ‘나눠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나눠졌습니다’ 천하대란이 일어날 때 제후들이 난투를 벌였지만 감히 제왕이라 자칭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최후에 각지의 제후들을 항복시키고 각지의 반란을 평정시키고 천하통일을 한 자만이 비로소 수도를 건립하고 제왕이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하나이고 제왕으로 불리는 것도 단지 제왕의 칭호를 얻은 것에 불과하지만, 이 제왕의 칭호는 쉽게 얻어진 게 아니라 수십 년의 문치무공과 남정북벌을 통해 천하를 평정하고 큰 성공을 이뤄서야 비로소 제왕의 칭호가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제왕의 칭호란 모든 문치무공과 강산통일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법장보살께서 오겁의 사유와 조재영겁의 수행을 거쳐 일체 번뇌의 적들을 소탕하고 모든 고난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며 무량한 공덕을 쌓아서 공덕이 원만해져야만 비로소 ‘나무아미타불’이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명호는 쉽게 얻어진 게 아니며, 아미타불께서 인지因地의 발심에서부터 과상果上의 정각을 이룰 때까지 모든 원만한 공덕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모든 보살의 수행과 모든 아라한의 수행을 육자명호와 비교한다면 전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 범부들의 오계와 십선은 더욱 말할 것도 없겠지요)

 

【성지 대 토산품의 비유】

 

연우님 여러분, 우리들이 닦은 오계십선의 선근이 많습니까, 아니면 육자명호속의 선근이 많습니까?

(대중) 육자명호입니다.

 

맞습니다! 대답이 정확하여 백점입니다!

우리 연우님들 가운데 가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서 “스님! 제가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하며 부르는데, 이 여섯 자를 부를 때 왠지 모르게 뭔가 허전하고 딱딱하고 괴로운 것 같습니다. 이처럼 허전하게 몇 글자를 부른다고 왕생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저기서 보시를 한다거나 절에서 기둥 하나를 만든다거나 방생을 한다거나……선근공덕이 아주 뚜렷합니다. 확실히 볼 수도 있고요. 이것을 의지하여 왕생하는 게 더욱 확실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것이 더 확실할 것 같습니까?

 

여전히 비유를 들겠습니다. 비유를 들어야만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여전히 방금 전의 비유입니다. 이 백성이 황제의 소견을 받아서 관직을 얻고 상을 받으러 가는데 당연히 기쁘겠지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이렇게 해서 어떻게 관직을 얻고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듣기로는 관직을 얻고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국가에 대해 공헌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던데, 내가 국가에 대해 아무런 공헌이 없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그래서 또 생각을 합니다. ‘그래! 좋은 방법이 있어. 우리 집에 토산품이 있는데, 내가 집에서 심은 고구마와 감자를 가져가서 공물로 바쳐야지!’ 그래서 그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고구마를 잘 심어서 황궁의 대문 앞까지 짊어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얼굴에 땀투성이가 되도록 짊어지고 갔지만 호위병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것이었지요. 왜냐하면 그가 황제의 성지를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지에는 단지 몇 글자 밖에 없어서 무게감이 없으며, 게다가 전혀 자신의 공헌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지요. 결국 그는 황궁의 대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닦은 오계와 십선, 모든 공덕들은 기껏 해봐야 고구마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육자명호는 아미타불께서 직접 우리들에게 하사해주신 성지와 호령입니다.

 

【명호를 한 번 부름에 십지를 초월함】

 

우리 정토문내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두 구절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의 칭념으로 십지를 초월함에 놀라지 말 것이니, 莫訝一稱超十地

마땅히 육자가 삼승을 포괄함을 알라. 須知六字括三乘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막아莫訝’, 놀라지 말라는 것인데, 분명히 우리들이 놀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전에 미리 “당신은 놀라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까? ‘한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십지보살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아! 그렇게 대합니다! 한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십지보살을 초월합니다!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이 여섯 자 속에는 삼승을 포괄하고 있어서, 성문·연각·보살도 전부 육자명호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방금 든 비유처럼 현령과 지방장관과 최고장관의 권력은 모두 제왕의 성지 속에 포함되어 있기에 그들은 모두 성지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그들의 직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라한의 선근복덕·벽지불의 선근복덕·보살의 선근복덕은 모두 나무아미타불의 육자명호 속에 농축되어 있고, 그 속에 전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한 구절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야만 비로소 십지보살을 초월할 수 있겠지요.

 

【태자 대 뭇 대신의 비유

 

인광대사님의 문초속에도 아주 좋은 비유 하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태자가 태어나자마자 譬如太子墮地,

그 귀함은 뭇 대신들을 압도한다. 貴壓群臣。

 

이 말씀은 이 어린 태자가 응애응애 울며 태어나지마자 그의 존귀함은 모든 대신들을 초월하여 재상도 그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태자로서 나중에 커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지요.

 

인광대사님의 말씀은 우리 염불하는 사람은 마치 갓 태어난 태자와 같아서 우리의 아버지는 아미타불이시고,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바로 부처님의 아들이며, 우리가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면 바로 부처님의 자식이 갓 태어나자마자 이승의 위로 초월한 것과 같아서 아라한과 벽지불을 초월하여 곧장 보살의 지위에 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이 많은 선근입니다.

4) 비유로써 설명함

우리는 다시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건물 대 창문의 비유】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이 미타보전彌陀寶殿속에 있는데, 우리가 ‘미타보전’ 넉자만 말해도 그 속에는 불상도 포함되고 기둥도 포함되고, 문·창문·벽·지붕……전부 그 속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단지 기둥만 얘기한다면 그 속에는 문을 포함할 수 없고, 문만 얘기하면 창문을 포함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를 말하더라도 전부 하나를 얻고 만 개를 빠뜨리게 되지만, 미타보전을 말하면 하나에 일체를 포함하고 있어 전체를 포괄할 수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는 총공덕總功德이어서 마치 ‘미타보전’이 총칭인 것과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단지 어느 한 부의 경만 독송한다거나 어느 하나의 다라니만 독송한다거나 어느 한 법만 닦는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문·창문·벽돌·기와와 같아서 단지 한 부분 한 부분의 공덕일 뿐, 전체의 공덕은 아닙니다.

기타의 수행, 예컨대 우리가 오계를 닦으면 오계의 공덕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구계의 공덕은 없습니다. 비구계를 닦으면 비구계의 공덕은 있겠지만 보살계의 공덕은 없습니다. 또 당신이 이 경전을 독송하면 이 경전의 공덕은 있어도 저 경전의 공덕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면, 모든 경전·모든 다라니·모든 계·정·혜가 전부 그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 되는 것입니다.

【마니 대 잡보의 비유】

‘마니摩尼’를 마니보주摩尼寶珠라 부르기도 하고 여의보주라 부르기도 합니다. 마니보주가 비록 작은 구슬에 불과하지만 어떤 보물이 필요하면 바로 어떤 보물이 나옵니다. 마니보주를 향해 “내가 지금 천하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려 하는데 황금 백 톤이 필요하다”고 기도하면,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마니보주 속으로부터 마치 비가 내리듯이 백 톤의 황금이 쏟아져 나옵니다. 만약에 “아직 부족하니까 다시 백 톤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곧바로 비가 내리듯이 백 톤의 황금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 보배를 마니보주라 부릅니다.

그럼 무엇을 잡보라 부를까요? 바로 금·은·진주·마노·적주 등등을 잡보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큰 창고 속에 수많은 보물들이 있는데, 황금·백은·진주·마노 등등의 모든 보물들이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운데 위치에 작은 마니보주 한 알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창고에 들어와서 보물을 가져다 중생들을 구제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보고는 “와, 대문 옆에 바로 한 무더기 황금이 있구나!”고 말하면서 바로 황금을 짊어지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황금이 비록 귀중하기는 하나 아주 빨리 소진되고 말 것입니다.

진정으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보물창고에 들어와서 어떤 보물을 가져갈까요?

(대중) 마니보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나는 저 마니보주를 가져갈 것입니다”고 말할 줄 압니다. 당신이 마니보주를 손에 쥐고 나서 구슬에게 “쌀 오십 톤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바로 쌀이 나오고, “천막이 천개 필요하다”고 말하면 전부 나오게 됩니다. 마니보주만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게 전부 있게 됩니다. 만약에 황금 또는 백은을 짊어진다면, 힘도 들고 또 수고롭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많고 적음에 대해 때로는 표면적인 수량만 봐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마니보주 같은 경우에 한 알뿐이지만 모든 보물을 뿜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주 많은 잡다한 보물들은 수량이 비록 많기는 하나 작은 여의보주 한 알 만 못합니다.

이 비유는 무엇을 설명하려는 걸까요?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가 바로 마니보주여서 이 육자명호 속에는 『금강경』의 공덕이 들어있고, 『법화경』의 공덕·『지장경』의 공덕·『능엄주』의 공덕·『대비주』의 공덕·『십소주』의 공덕도 전부 들어있기에 당신이 이런 공덕이 필요하다면 그 속에 전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기타 갖가지 수행법문도 비록 모두 매우 존귀하고 모두 불가사의하기는 하나 그런 공덕들은 마치 금·은·진주·마노……등의 잡보와 같습니다. 더욱이 우리 범부들이 닦은 오계와 십선의 공덕은 등급이 너무 낮아서 그야말로 깨어진 기와조각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닦은 공덕들은 아직 유루·유위의 선법善法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닦은 자그마한 오계와 십선을 가지고 염불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데, 그건 깨진 기와조각을 안고서 마니보주를 버린 격이니, 보물을 알아보는 눈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지요.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려 한다면 품속에 아미타불 육자명호의 마니보주를 갖고 있어야만 비로소 원만한 공덕을 얻을 수 있으며, 다른 온갖 법문을 닦은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하려 한다면 단지 잡보의 공덕만 얻게 됩니다.

우리는 육자명호가 곧 ‘만덕홍명’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만’은 일체를 포함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공덕이 전부 육자명호 속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게 바로 마니보주가 아니겠습니까? 담란대사님의 『왕생론주』에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컬어 ‘청정한 마니보清淨摩尼寶’라 하셨습니다. 마니보주가 비록 작은 구슬 한 알에 불과하지만 모든 보물들을 토해낼 수 있습니다. 이 한 구절 육자명호 역시 비록 간단하고 짧아서 여섯 글자밖에 안 되지만 일체 불법승 삼보의 공덕과 일체 경전·일체 다라니·일체 수행의 법문·일체 보살·성문·연각의 공덕을 전부 그 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이 마니보주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릴 테니 다들 잘 보관하셔서 잃어버리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오층 건물의 비유】

또 예를 들어, 오층으로 되어있는 높은 건물이 있는데, 일층에는 수만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이층 역시 적지 않은 수천 명이 살고 있으며, 삼층에도 수백 명이 있고, 사층에는 수십 명, 맨 윗층에는 오직 한 사람만 있습니다. 비록 아래 일층·이층·삼층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가장 높은 오층에 사는 사람이 볼 수 있는 범위와 경관과 비교한다면,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경관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위에 있는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을까요?

(대중)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층 건물위에 있는 그 사람이 볼 수 있는 경관이 가장 많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수량상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경계상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경계가 가장 높기 때문에 이른바 ‘천리 밖의 먼 곳을 보려면 누각 한 층을 더 올라가라’는 말이 있듯이 건물 꼭대기에 서서 시선을 멀리 두고 바라보면 끝없이 광활한 벌판이 전부 한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고 동쪽 서쪽으로 아무리 봐도 그 범위는 여전히 조금밖에 안 됩니다.

이 비유는 무엇을 설명할까요? 첫 번째 층은 인천人天의 선법을 대표하고, 두 번째 층은 성문을 대표하며, 세 번째 층은 연각을 대표하고, 네 번째 층은 보살을 대표하며, 건물꼭대기 다섯 번째 층은 곧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모든 선근공덕이 전부 육자명호 속에 들어있기에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면 건물의 오층에 올라간 것과 같아서 우리는 건물꼭대기에 서서 모든 경관을 하나도 빠짐없이 두루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어느 층에 있었을까요? “저는 아마도 일층에 있을 겁니다. 오계십선……” 진정으로 일층에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우리들은 아마도 지하실에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오계와 십선을 닦는 것도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계십선을 닦을 수 없다면 당신은 지하실에 있습니다. 지하실에도 삼층이 있는데, 지옥·아귀·축생으로서 어두컴컴하여 아무런 경관도 볼 수 없습니다.


5) 경문의 증거

 

앞에서 우리는 염불이 많은 선근이라고 충분히 분명하게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불법에서는 ‘성언량聖言量’을 중히 여깁니다. 다시 말해 성인께서 말씀하신 언교言敎를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과 조사스님들의 해석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말이 아무리 일리가 있어도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다음 우리는 경문과 조사의 해석을 근거로 삼아서 염불이 많은 선근이고, 그 외의 온갖 수행들은 염불과 비교하면 모두 적은 선근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열 가지 경문을 열거해보겠습니다.

 

⑴ 『아미타경』

 

우선은 『아미타경』입니다. 『아미타경』에서 먼저 설하기를,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

(不可以少善根福德因緣得生彼國。)

 

고 하셨지만, 어떤 것이 적은 선근인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곧바로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명호를 집지하여

(聞說阿彌陀佛,執持名號。)

 

고 설하셨으므로, 이렇게만 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명호만 집지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바로 많은 선근임을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적은 선근과 복덕으로는 왕생할 수가 없고, 오직 많은 선근이야만 왕생할 수 있는데, 많은 선근과 복덕에 대해 ‘명호를 집지하면 바로 왕생한다’고 설했기 때문에 ‘많은 선근과 복덕은 염불에 있다’고 말한 것이며, 계정혜삼학과 육바라밀 같은 것은 전부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미타경』의 위아래 경문의 순서이므로 이치가 그렇습니다.

 

⑵ 이역본 『아미타경』

 

『아미타경』에는 두 가지 번역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구마라집대사께서 번역하신 것으로서 바로 『불설아미타경』입니다. 이 외에 또 하나의 번역본이 바로 현장대사께서 번역하신 『칭찬정토불섭수경稱贊淨土佛攝受經』입니다. 이 경전에서는 『아미타경』 중에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와 대응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셨습니다.

 

무량수불의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명호를 듣고

(得聞如是無量壽佛,無量無邊,不可思議,功德名號。)

 

명호 앞에다 열 자를 더하여 묘사를 한 것인데,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이야말로 ‘많은 선근과 복덕’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지 이미 숫자로써 형용하고 표시할 수 없어서 ‘무량, 무변, 불가사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명호자체가 바로 많은 선근과 복덕이며, 수승하고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선근과 복덕입니다.

⑶ 범어본 『아미타경』

 

현재 발견된 『아미타경』의 범어원본에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는 이 구절에 대해, 만약 직역을 한다면 어떻게 번역될까요?

 

중생이 이 세상에서 지은 선행으로 인해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라

(眾生不因此世所做善行得生彼國。)

 

다시 말해 중생들이 이 세상에서 지은 갖가지 선행들은 모두 ‘적은 선근과 복덕’으로서 이것을 의지해서는 왕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문에서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육자명호만이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이며, 우리중생들이 이 세상에서 지은 선행들은 모두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에 속하므로 왕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우리가 지은 것들을 가지고 육자명호와 비교를 한다면 모두 적은 선근과 복덕에 속한다는 것이지요.

 

【강궁의 비유】

 

실제로 우리들은 육자명호와 비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 것들은 기껏해야 오계와 십선입니다. 오계와 십선의 선근복덕은 우리로 하여금 인천의 과보를 받도록 해줍니다. 오계와 십선의 선근복덕으로는 아라한조차 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성불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마치 활과 화살과 같은데, 활의 힘은 각각 다릅니다. 예컨대 오계와 십선이 바로 한 장의 활이라면 우리 모든 중생들은 바로 그 활시위에 재워진 하나의 화살입니다. 그럼 오계십선이라는 활시위를 한껏 당겼다가 놓아버리면 ‘휙――’하고 어디로 날아갑니까? 기껏해야 인도人道 혹은 천도天道이겠지요. 천도에 도착한 뒤에 힘이 다하면 또 ‘휙――’하고 떨어지게 되므로, 당신은 여전히 삼계의 인력범위 내에 있습니다. 마치 지구의 위성처럼 아직 지구의 인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지구의 인력범위 내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계십선의 힘, 이 활의 힘으로는 우리를 인간과 천상의 세계로 보낼 뿐, 아라한의 경계까지 보낼 수 없습니다. 만약에 아라한·벽지불의 경계를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사성제·십이인연법을 닦아야만 이 활의 힘이 매우 커서 ‘휙――’하고 삼계를 벗어나 아라한·벽지불의 궤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살의 궤도와는 아직 거리가 매우 멀어서 반드시 더욱 큰 힘을 가진 강궁을 사용해야 하므로, 대보리심을 일으켜 세세생생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촥――’하고 쏘면 보살의 궤도에 도달하게 되지요.

 

우리 현재 염불하는 사람들이 다들 알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도 모두 강궁强弓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활은 이미 오계십선이 아니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강궁입니다. 이 활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여 ‘제불중의 왕이요, 광명중의 극존(諸佛中之王,光明中之極尊)’이며, ‘위신공덕이 불가사의(威神功德不可思議)’한데, 이 활이 바로 육자명호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바로 육자명호라는 이 활시위에 재워진 화살이고, 우리가 염불을 하는 것이 바로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며, 아미타불이 바로 강궁수입니다. 우리들 이 화살이 비록 사바세계에 있지만 아미타불께서 육자명호의 강궁에 재워서 ‘휙――’하니 쏘아버리면 인도를 초월하고, 천도를 초월하고, 삼계를 초월하고, 아라한을 초월하고, 초지 이전의 작은 보살들을 초월하고, 초지 이상의 대보살들을 초월하고, 십지등각보살을 초월하여 곧장 불과를 향해 날아갑니다. 따라서 ‘한 번의 칭념으로 십지를 초월함에 놀라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화살을 쏘고 나서 어떻게 십지보살을 초월할 것인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살이 어디로 날아갈까요? 여러분들은 어디로 날아갈 건지 아십니까? 이 화살은 십만 억 불국토 밖으로 날아가서 곧바로 아미타불의 좌대 옆까지 갑니다.

 

만약에 육자명호의 활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오계십선으로는 기껏해야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서방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육자명호를 의지해야 하며, 육자명호야말로 많은 선근과 복덕으로서 모든 법문과 부처님의 가르침, 온갖 수행의 공덕을 그 속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지는 비유】

 

범어본의 경문은 실제로 하나의 비유로써 서로 증명을 하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물속에 빠졌습니다.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곧 가라앉으려 할 때, 우리가 물속에서 자란 수초를 잡는다면 언덕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수초는 본래부터 물속에서 자란 것입니다.

물속에 있는 돌을 붙잡으면 언덕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역시 안 됩니다.

 

물속에 있는 물건들은 영원히 우리로 하여금 물속에 있도록 만듭니다. 언덕위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언덕으로부터 뻗어 나온 물건을 잡아야 합니다. 만약에 언덕위에서 온 대나무 장대를 잡는다거나 혹은 구명튜브를 잡고서 언덕위의 사람이 잡아당겨주면 당신을 언덕위로 끌어낼 수 있겠지요.

 

우리는 생사의 고해가운데서 온갖 수행을 하고 있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육근이 상대하는 경계들은 전부 삼계내의 것들이고, 전부 생사고해에서 자란 수초와 같은 물건들이며 전부 윤회하게 만드는 인과들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삼계의 고해를 벗어나도록 해줄 수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육자명호는 마치 극락의 열반피안에서 우리의 고해 속으로 내민 하나의 긴 대나무 장대와 같아서 당신이 이 장대를 잡고 아미타불께서 당겨주신다면 바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언덕위에서 온 장대 혹은 구명튜브를 잡지 않고 스스로 물속에서 마구 잡으면서 “아, 옆에 있는 지푸라기 하나 잡았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물속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지은 모든 것들은 전부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깊이 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도록 합니다. 그런 까닭에 범어본의 경전에서 비로소 “중생들이 이 세상에서 지은 선행으로 인해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라”고 설하신 것이므로, 마땅히 저 부처님의 육자명호――아미타불께서 극락세계로부터 대광명을 놓아 우리들을 구제하기 위해 펼쳐주시는 육자명호의 공덕에 의지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해야할 것입니다.


⑷ 『무량수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은 선행으로 왕생할 수 없다면, 그럼 무엇을 의지해서 왕생해야 할까요?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지요.

 

중생들을 위해 법장을 열어 널리 공덕의 보배를 베풀어 주신다.

(爲眾開法藏, 廣施功德寶。)

 

또 설하기를,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신다.

(令諸眾生, 功德成就。)

 

고 하시고, 또 설하기를,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내지 한 번만이라도 염한다면,

이 사람이 큰 이익을 얻고 위없는 공덕을 갖추게 됨을 마땅히 알아라.

(其有得聞,彼佛名號 , 歡喜踴躍,乃至一念,

當知此人,爲得大利, 則是具足,無上功德。)

 

고 하셨습니다.

 

요 몇 단락의 경문을 한곳에다 모아놓으면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육자명호의 공덕을 널리 두루 보시해주셔서 우리와 같이 공덕이 없는 사람들도 공덕을 성취하게 해주시고, 게다가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해주십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이 죄업을 짓고 출리의 기연이 없어서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으며 공덕의 법재法財가 없다는 것을 가엾이 여기시어 우리들을 위해 불법의 보물창고를 열어 보편적이고 평등하게 우리에게 공덕의 보물을 보시해주십니다. 그런 까닭에 “중생들을 위해 법장을 열어 널리 공덕의 보물을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생’은 시방세계에 고뇌하는 중생을 말합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주시는 공덕의 보물을 받으셨나요?

(대중) 받았습니다!

 

아미타불께서 ‘널리 공덕의 보물을 베풀어 주시는데’ 만약에 당신이 받지 못하였다면 아미타불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줬다”고 말씀하십니다. ‘널리 베풀어 주셨기에’ 한명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주시는 공덕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대중) 육자명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또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에게는 공덕이 없습니다. 우리는 공덕을 바라고 있고, 우리는 자신이 공덕을 성취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우리는 ‘내가 이렇게 수행하고 저렇게 수행을 해봤지만 깨닫지 못하고 제법실상을 깨달아 들어가지 못했으니, 기껏해야 유루의 인천선법人天善法에 불과한데 이를 어찌할까?’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량수경』에서 설하시길, 아미타불께서 조재영겁동안 수행하신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려는 것’, 즉 우리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수표의 비유】

 

이는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키우는데, 아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가 편안하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생을 해가며 피땀 흘려 노동을 해서 자신이 번 모든 재산을 최후에 예금통장에 모두 넣고서 “나의 아들아, 이것을 너에게 주겠다”며 아들로 하여금 당신의 재산을 물려받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바로 이렇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특히 자녀가 아직 어리다면 그들을 위해 세심한 고려가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들아! 나는 이제 가야 한다. 이 작은 종이가 바로 내가 평생 모은 재산인데, 여기에 백억이 들어있다. 너에게 줄 테니 이것을 가지고 잘 살거라”고 말합니다.

 

이 어린 아들이 예금 수표를 꺼내서 봅니다. “아버지는 이것이 백억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종이 한 장이잖아! 이 종이는 지금 내가 배가 고픈데 나를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고구마 하나만 못하구나” 그는 이 한 장의 수표가 백억의 재산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아주 가볍게 이 수표를 한쪽에다 던져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아깝습니까, 아깝지 않습니까?

(대중) 아깝습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이것이 바로 눈이 있으면서도 귀한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이 바로 우리들의 자비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오겁의 사유와 조재영겁의 수행을 거쳐 당신이 모으신 모든 공덕을 육자명호의 예금 통장 속에 농축해 두셨지요. 이 육자명호는 마치 예금통장과 같고 한 장의 수표와 같아서 당신은 그것을 얕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없기에 아미타불께서 당신의 육자명호, 위없는 공덕의 결정체를 우리들에게 보시해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명호를 조금 부르고 나서 한쪽에 내려놓고는 “아이고, 이 육자명호는 딱딱하고 허전해서 내가 경전 한부를 독송하거나 또는 무엇을 닦는 것만 재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비유 중의 그 아들이 지혜가 열리지 않아 단지 고구마만 알뿐, 백억이 들어있는 수표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세요, 제가 어떤 공덕을 지었는데, 제가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두꺼운 경전 한권을 독송하였는데, 이 얼마나 진실합니까!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는 한 번 읽고 나면 없잖아요!” 이것은 우리가 무엇이 진실한 공덕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육자명호를 소중히 여기시고 이른바 ‘이 하나의 행을 귀중히 여기시어寶此一行’ 다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는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미타불아버지께서 그렇게 고생해서 닦은 육자명호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결국 우리는 모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육자명호를 다른 것들과 비교를 하면서 “이 육자명호도 좋기는 하지만 만약에 내가 보시·지계·정좌·참법 등의 여러 가지 수행을 한다면, 이런 공덕도 마땅히 큰 차이는 없을 거야!”고 말하는데, 그런 것들은 모두 아주 작은 공덕이어서 기껏해야 사탕 한 개·고구마 한 개·사과 한 개와 같아서 백천만억의 수표로도 비유할 수 없는 이 한 구절 육자명호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단돈 일원으로 빌딩을 사는 비유】

 

얘기가 여기에 이르러 여러분들에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어느 날 우리가 물건을 사러 거리에 나갔다가 평소와 다른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물건을 살 때는 항상 값을 흥정하였는데 이 날은 단돈 일원을 꺼냈지만 뜻밖에 빌딩 전체를 사게 되어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 오늘 돈 벌었다. 오늘 단돈 일원으로 빌딩 한 채를 샀으니 말이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만약에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빌딩 주인이 적극적으로 당신에서 주신 것일 겁니다. 단돈 일원으로는 빌딩 한 채를 살 수 없음에도 뜻밖에 샀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당신에게 주려는 것이었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공짜로 주면 당신이 감히 받지 못할까봐 염려하여 가격을 정하여 당신에게 파신 것이지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도 위안이 될 테니까요. “이것은 내가 돈 주고 산 것이야!”

 

우리 많은 사람들이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려 하는데, 서방극락세계의 과보는 무엇입니까? 성불입니다. 우리가 매일 십만 번씩 절을 하며 백년을 하더라도 이러한 고행을 가지고 성불의 인행因行과 비교를 한다면 당신의 가치는 일원입니다. 그렇다면 성불이란 그야말로 빌딩 한 채의 값어치를 훨씬 넘겠지요.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오계와 십선을 닦아서 그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합니다” 그렇습니다. 오계십선과 같은 온갖 수행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면 역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왕생은 당신의 오계십선의 힘에 의지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닦은 오계와 십선은 기껏해야 우리로 하여금 인천의 과보를 얻게 할 뿐인데, 뜻밖에도 이 오계십선을 가지고 성불의 과보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단돈 일원을 가지고 빌딩 한 채를 바꾼 것인데, 당신은 정말로 당신이 산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당신에게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본래부터 당신의 무량한 공덕을 무상으로 우리들에게 주시려 하지만, 우리의 포부가 옹졸하여 감히 당장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내가 너희에게 팔겠다”고 하신 것이지요. 우리에게 팔려고 하는데 우리가 살 형편이 못된다면 어떡해야 합니까? “그럼 가격을 낮춰서 너희에게 팔겠다”고 말합니다. 얼마에 팝니까? 단돈 일원입니다. 본래 아미타불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왕생을 하고 싶으면 명호만 부르면 너희에게 줄 테니 반드시 왕생한다!”고 하셨지만, 우리는 감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그럼 너희가 수행을 해서 수행공덕을 회향하라”(곧 당신에게 팔겠다는 것이다) 무슨 수행을 해야 할까요? “너희가 어떻게 수행하든 상관없다. 오계든 십선이든, 경전을 독송하든 다라니를 외우든 모두 괜찮으니까 회향을 하여 왕생발원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리어 ‘왕생은 내가 수행을 해서 얻은 것이다’고 여기는데, 우리들의 이 작은 인으로 어떻게 그처럼 큰 과를 감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위해 법장을 열어 널리 공덕의 보물을 베풀어 주시려고’ 우리에게 보시를 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궁자의 비유】

 

『법화경』속에 ‘궁자(빈궁한 자식)의 비유窮子喻’ 하나가 있는데, 방금 제가 말씀드린 이 예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부장자大富長者 한 분이 계셨는데 그의 외동아들이 어려서부터 이산되었지요. 시간이 흘러 대부장자의 연세가 많아졌는데 더 넓은 장원莊園과 풍부한 재산을 가졌음에도 후계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이미 연로하여 머지않아 곧 떠나야할 텐데 꼭 아들을 찾아야겠다!’ 그는 매우 수고롭게 도체에 아들을 찾아 나섰지요.

 

다시 이 아들을 말하자면 어려서부터 대부장자를 떠나 바깥에서 떠돌아다니면서 노숙자 생활을 하다 보니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풍찬노숙을 하며 몸을 제대로 가릴 옷도 없이 궁핍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기껏해야 일용직이나 머슴살이와 같은 하천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한 끼를 먹으면 한 끼를 굶어야만 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이 아들이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침내 대부장자의 대문 앞에 이르러 이 장원을 보고는 “와! 엄청나게 넓구나!”며 감탄을 합니다. 대문 밖에서 안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니 그 안에 매우 위엄 있게 생긴 장자 한분이 앉아계셨는데, 그 옆에 수많은 시종들이 있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거마車馬들이 꼬리를 물고 다녔으니, 그 풍채가 마치 국왕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궁자가 필경 노숙자 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이처럼 호화롭고 위세가 넘치는 곳에 오니까 마음이 편치가 않았습니다. ‘아이고! 안 돼, 여기는 나 같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여기서 오래 머물면 안 될 거야. 오래 머물다간 혹 누가 나를 잡아서 핍박하고 죄를 물을 수도 있어. 내가 빨리 이곳을 떠나 빈궁한 시골이나 가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잽싸게 달아났습니다. 이때 마침 그의 아버지(대부장자가 그의 아버지임)가 안에서 머리를 들자마자 그를 발견하고는 바로 알아봤습니다. ‘저자가 나의 아들이 아닌가? 내가 고생을 하며 도처에서 찾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래서 바로 사람을 부릅니다. “빨리, 빨리 저 사람을 잡아오너라. 도망가게 해서는 안 된다.”

 

시위侍衛들이 대부장자의 명령을 받고서 단걸음에 달려갑니다. 그들은 키도 크고 건장하게 생겼으며, 용감하고 힘도 세고 옷차림도 아주 화려하고 기백이 넘쳤습니다. 궁자가 한참 거기서 이곳은 아마도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는데, 과연 그 속에서 우람한 체격을 가진 두 사나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앗! 큰일 났구나! 나를 잡으러 왔어”라고 소리 지르며 잽싸게 달아납니다. 그러나 도망을 갈수록 뒤에서 더욱 바싹 쫓아와서 결국 그를 붙잡아 강제로 끌고 갔지요. 이때 궁자는 두렵고 걱정되고 긴장한 나머지 그만 기절을 해버렸습니다.

 

대부장자가 보시고는 생각을 했지요. ‘큰일 났구나! 내 아들이 틀림없이 이런 위엄 있는 기세에 놀랐을 것이다. 그의 심량心量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시위에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찬물을 끼얹어서 그를 깨우거라, 깨어난 후에 그를 보내주어라”

 

정말로 그를 보내주는 걸까요? 대부장자는 그를 보낼 수가 없습니다! 수십 년 만에 찾은 아들을 어떻게 보냅니까? 그는 또 방법을 생각해야 했지요.

 

그는 다시 그다지 우람하지도 사납지도 않게 생기고, 다 헤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두 사람을 찾아서 당부합니다. “너희 둘이서 그를 미행하여 뒤를 쫓아가거라” 이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엔 궁자와 비슷하여 거지와 같았는데 비실거리며 쫓아갔습니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듯이 거지와 거지가 만나서 얘기를 나눕니다.

“자네는 어떻게 밥을 빌어먹나?”

“나는 이렇게 빌어먹지……”

“자네는 어떻게 일을 하나?”

“나는 이렇게 일을 하네……” 서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주 친해졌습니다.

 

이 두 사람이 그에게 말합니다.

“사실 자네가 이렇게 고생할 필요 없네. 우리가 일을 하는 그 곳 주인은 아주 자비로우신 분이어서 하루를 일하면 다른 곳에 이틀 치의 임금을 주시거든!”

“그렇게 좋은 곳이 있다니! 그럼 나도 가면 안 될까?”

“자네도 갈 수 있어!”

“그런데 난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나는 글을 몰라서 지식이 필요한 일이라면 다 할 줄 모른단 말이야!”

“그럼 넌 청소를 하면 돼지, 변소 청소 말이야”

“그건 내가 할 수 있어!” 노숙자 생활을 하던 사람이어서 그런 일에 전문이었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이 두 사람은 그를 대부장자의 장원으로 데려와 뒷문으로 돌아서 들어갑니다.(정문은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임) 들어온 뒤에 무슨 일을 할까요? 매일매일 변을 치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은 아주 편안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이 일은 나의 신분에 딱 맞는구나, 내가 바로 변소 청소하는 사람이니까’

 

그는 평생토록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생활도 안정되고 먹고 마실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으며 머물 곳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안심하고 지냈으며 있는 힘을 다해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거기서 변을 치우고 있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장자의 마음은 즐겁지가 않았지요. ‘내 아들이 어떻게 이런 천한 일을 한단 말인가?’ 그들 부자는 아직 알아보지 못했고 재산도 아직 물려주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대부장자는 아들에게 접근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어떤 방법을 생각했을까요?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화려한 복장을 벗어놓고 거친 천으로 만든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거나 변을 치울 때 입는 옷) 그리고는 또 변을 치우는 도구를 들고 아들과 함께 변을 치우면서 상냥한 얼굴로 안부를 묻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생활 형편을 살뜰히 보살펴주었지요.

 

궁자는 한평생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이런 장자를 만나서 자신에 대해 이처럼 자비롭고 관심을 갖고 아껴주시는 것을 보고는 대단히 감동을 하게 됩니다. ‘아,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다니!’ 그는 이때까지도 장자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임을 몰랐으며, 장자 역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서로 친숙해져서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을 때 장자는 살짝 자신의 신분을 폭로합니다. “자네를 속이지 않겠다. 내가 바로 이 장원의 주인일세!”

이 말을 들은 궁자는 깜짝 놀라서 ‘어르신’하고 부릅니다.(보세요. 자신의 부친을 ‘어르신’이라 부릅니다) 이 말을 들은 대부장자는 마음이 매우 괴롭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인데 나를 어르신이라 부르다니!’ 그는 궁자에게 말했지요. “내가 보니까 자네가 내 장원에 온 뒤에 사람이 매우 성실하고 본분도 잘 지키고 일을 하는데도 힘을 아끼지 않았네. 이렇게 하면 어떨까? 네가 나의 양아들이 되어주게나, 나는 연세도 많고 아들도 없으니 자네를 나의 아들로 삼으면 좋겠네. 나를 도와 일도 좀 해줄 수 있으니 거절하지 말거라”

 

이렇게 일개 거지가 갑자기 대부장자의 총애를 받아서 장자를 양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으니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지요. 그는 이 분이 자신의 친아버지임을 모르고서 친아버지를 양아버지로 모시면서도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해나가겠습니다. 또 한동안 시간이 지나서 대부장자는 천천히 그를 가르치게 시작하였지요. 회계와 출납, 그리고 재무관리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내가 너를 아들로 삼은 이상, 우리 서로 외인이 아니니,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네가 전부 관리하도록 하거라” 일꾼들을 파견하고 재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전부 그가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궁자는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일을 합니다. ‘오늘 수입은 얼마이고, 지출은 얼마……’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임시로 세운 가건물 속에서 살고 있고 매일 자신 몫의 임금을 받으며, 밤에 장부정리를 하면서도 “이것은 주인님의 몫, 그분 것이다. 나 자신의 몫은 십원이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또 한동안 시간이 지나서 대부장자가 보니 궁자(즉 자신의 아들)의 포부도 점점 높아졌고 심량도 점점 넓어졌으며 능력도 점점 갖춰지게 되었지요. 이 때 아버지는 그들이 부자관계임을 선포하려고 준비를 합니다.

 

이날 그는 국왕과 대신, 그리고 유명인사들을 전부 초청하여 ‘뉴스발표회’를 열어 부자관계임을 확인시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신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 늙었습니다. 저희 아들을 어느 해에 잃어버렸는데……” 궁자가 들을수록 자신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장자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씀하시면서 천천히 인도를 합니다. “현재 저는 아들을 찾았습니다. 내 아들이 누구냐면 바로 저 사람입니다” 장자는 자신의 아들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이제 나의 모든 재산을 전부 그에게 주어서 그가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들은 이때서야 알았지요. 알고 보니 나를 그렇게 자비롭게 대하시던 사람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의 아버지였음을!

 

그래서 『법화경』에는 네 구절 말씀이 있는데 어떻게 말씀하셨냐면,

 

나는 본래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이 없었건만

지금 이 보물창고가 저절로 들어왔도다.

(我本無心,有所希求。今此寶藏,自然而至。)

 

고 했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한량없는 진귀한 보물들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되었네.

오늘에서야 참으로 부처님의 자식임을 알았도다.

(無量珍寶,不求自得。而今乃知,真是佛子。)

 

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본래 내가 재물을 소유할 줄 몰랐는데(내가 이렇게 풍성한 공덕을 얻을 수 있을 줄 몰랐는데), 한량없는 보물창고가 어떻게 갑자기 나에게로 와서 하루 밤 사이에 호화롭고 부귀한 몸이 되었단 말인가! 오늘에서야 내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자식임을 알게 되었구나!’

 

이야기는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이 이야기를 가지고 한번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대부장자는 어느 분이십니까?

(대중) 아미타부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이십니다. 거지는 누구입니까?

(대중) 우리 중생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본성을 잃고서 아미타불의 열반성涅槃城밖에서 유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보셨을 때 바로 당신의 육자명호의 공덕을 우리에게 보시해주시려고 말씀하셨지요. “중생들아! 나의 외동아들아, 내가 극락세계를 전부 너희에게 줄 테니 너희는 그냥 그렇게 오면 된다! 나의 정토로 왕생하거라!”

우리는 깜짝 놀랍니다. “제가 무슨 자격을 극락세계로 갑니까?” 우리는 용기가 없어서 달아납니다. 아미타불로부터 멀리 도망을 갑니다.

 

이때 아미타불께서는 기타의 법문으로 우리들을 성숙시키는데, 우리로 하여금 수행을 하여 그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즉 자력으로 노동을 하는 것으로서 변을 치우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변을 치운다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의 더러운 때를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궁자가 변을 치우는 일을 의지해야만 비로소 대부장자의 장원에 들어설 용기가 나듯이 근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은 중생들은 여러 가지 법문을 닦아서 회향을 해야만 비로소 정토왕생을 구할 용기가 생깁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가 이미 자력수행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들을 성숙시켜야 했지요. ‘너희들이 여러 가지 공덕을 닦아서 회향하는 것도 매우 좋기는 하나, 나의 명호를 부를 수도 있지 않은가!’

 

명호가 바로 아미타불의 모든 공덕법재功德法財가 저장된 보물창고입니다. 우리에게 칭명염불을 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모든 공덕을 우리에게 보시해주시려는 것이지만 이때는 아직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대부장자가 궁자를 양아들로 삼고서 그에게 창고에 있는 재물들의 출납을 책임지도록 하셨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창고 전체의 보물을 그에게 맡기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기에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고 궁자도 몰랐던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매일 이 ‘나무아미타불’육자명호를 부르면서도 우리는 이 육자명호속의 모든 공덕이 바로 우리들 것인지를 모르고서 ‘내가 2만 번을 불렀으니 이 2만 번의 횟수만큼만 나의 것이고, 육자명호속의 공덕은 아미타불의 것이다’고 여깁니다. 마치 궁자가 이미 장원 안으로 들어가 매일매일 거기서 출납과 회계를 하면서도 자신의 손을 거친 이런 재물들은 모두 대부장자의 것이고, 자신은 자신이 일한 하루만큼의 임금만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아버지가 장원전체를 그에게 주시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또 한동안 시간이 지나 시기가 무르익자 아미타불께서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염불을 하는데, 너희는 본래 나의 자식이고, 극락세계는 너희의 소유이다” 전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때서야 비로소 기쁘게 받아드립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당신의 극락국토 전체를 우리에게 보시해주시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들이 받아들이도록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온갖 법문 속에서 힘들게 수행하게 하여 천천히 우리의 근기를 성숙시켜주시는데, 우리는 그때서야 비로소 육자명호의 공덕의 큰 보물을 받아들입니다.


【근기가 성숙하였다】

 

우리 모두가 염불하는 법문을 믿고 착실하게 염불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변을 치우는 작업을 거쳐서 대부장자가 뉴스발표회를 여는 시점에 이르렀기에 근기가 이미 성숙했다는 것으로, 많은 선근과 복덕이지 적은 선근과 복덕은 아닙니다. 큰 선근이 없고 큰 복덕이 없는 사람은 결코 착실하게 이 명호를 부를 수가 없으니까요.

 

마치 그 거지와 같아서, 그의 근기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 장원전체를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에 도망을 가버리고 기절을 해버린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을 보십시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아무개님, 염불하여 극락왕생하십시오!”라고 말하면

“이봐요, 안 갑니다. 안 가요!”라고 대답할 겁니다.

 

불자들에게 말해보세요.

“염불하여 극락왕생하십시오!”

“잠깐만요! 저는 인천의 복을 구하렵니다!”

 

수행하여 해탈하려는 사람에게 말해 보세요.

“염불하여 극락왕생하십시오!”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극락세계를 갑니까?”

이는 마치 그 거지가 스스로 자신에게는 이 장원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부처님 중의 왕이요, 광명 가운데 최고로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자비하신 아미타불아버지(彌陀慈父)께서는 우리들처럼 도처에서 유랑하고, 고집스럽고 오만불손하며, 은혜를 배반하고 거역한 중생들을 구제해주시므로, 우리 모두 부처님의 원력에 수순하고 부처님께 효순해야 합니다. 경전에서 설하시길, ‘부처님께 효순하는 것이 실로 큰 선이다’고 하셨습니다.

 

【서방에 왕생하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쉽다】

 

염불왕생은 아주 자연스럽고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에서 첫 번째로 쉬운 일이 바로 염불하여 왕생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쉬운 일이 바로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서방에 왕생하지 않으면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지게 되는데,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설사 금생에 당신에게 수행이 있어서 다음 생에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더라도 다다음 생에는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인광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방에 왕생하는 것은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욱 쉽다.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서방에 왕생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럼 왜 서방극락세계에 가서 성불하는 것은 쉽고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도리어 어려운 걸까요? 그 이유는 내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우리가 오계를 닦은 공덕에 의지해야 하므로 자력에 의지해야 하는 반면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은 불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쉬운 것입니다. 극락왕생에 대해 『무량수경』속에 몇 구절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나라에 가는 일은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않으며,

저절로 이끌려서 가게 되느니라.

其國不逆違,自然之所牽。

성불의 길에 오르게 되는 극락을,

가기는 쉬워도 가는 사람이 없느니라.

升道無窮極,易往而無人

 

왕생을 하기란 매우 쉽지만 결과적으로 왕생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다들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저절로 이끌려서 간다’고 말하는 걸까요? 자연스럽게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억지로 시키거나 인위적인 조작이 전혀 없다는 것으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하고 칭념만 하면 단 한사람도 왕생하지 못하는 이가 없기에 당신이 거기서 ‘내가 이렇게 해서 왕생할 수 있을까?’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목이 바다에 들어가는 비유】

 

비유를 한다면 우리가 나무 한 토막을 장강 속에다 던져버리면 이 나무는 틀림없이 강물을 따라서 동해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그렇죠? 틀림없이 동해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도중에 누군가 건진다거나 또는 나뭇가지에 걸린 경우만 아니면요. 우리가 배를 타고 나무토막 뒤를 쫓아가면서 ‘그래, 니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동해까지 가는구나’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무는 자연스럽게 도착할 겁니다. 설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가 바로 우리들이고, 강물이 바로 염불하는 법문, 즉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이며, 동해가 바로 극락보국極樂寶國입니다. 건져졌거나 걸렸다는 것은 바로 잡행잡수를 말하지요. 우리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아미타불께 던져서 귀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무라는 말은 곧 귀명이요,

아미타불이란 말은 곧 그 행이다.

言南無者,即是歸命;言阿彌陀佛者,即是其行。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미타불께 귀명하여 일생동안 오로지 염불하며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한다면 우리들 이 나무토막을 육자명호의 장강 속에다 던져버린 것과 같아서 어디에도 걸림없이 자연스럽게 앞물결·뒷물결의 물결 따라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자연스럽게 극락정토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것은 육자명호의 힘에 의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미타불의 원력에 이끌려서 가는 것으로서 이것을 ‘저절로 이끌려서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먼 곳을 쉽게 도달하는 비유】

 

집을 떠나 여행을 다닐 때, 때로는 만리 밖에 있는 장소를 도리어 백리 밖에 있는 장소보다 더 쉽게 도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통수단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가 여기서 금문도金門島까지 가려는데 스스로 헤엄쳐서 가야 한다면 굉장히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을 가는 것은 도리어 쉽습니다. 왜 그럴까요? 비행기를 타면 되니까요. 왜 그렇게 먼데도 도리어 쉽고, 이렇게 가까운데도 도리어 어렵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의지하는 힘이 달라서, 하나는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는 비행기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의지했을 때 이런 능력이 없다면 매우 어려울 것이고,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의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아주 쉬운 것이지요.

 

우리가 십만억 불국토 밖에 있는 극락세계에 가는 게 도리어 쉬운 것은 우리가 육자명호의 비행기를 탔기 때문이고, 사람 또는 천상세계로 환생하는 것이 도리어 어려운 것은 자신의 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러러 불력에 의지해야 하는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명호의 공덕보물】

 

법장보살께서 아미타불이 되셨는데, 그분께서는 우리의 공덕을 성취시켜 주시려고 널리 공덕의 보물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럼 공덕의 보물은 어디에 있을까요? 『무량수경·유통분』에 나오는 이 단락의 경문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셨지요.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거나 내지는 한번만이라도 염(念)하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됨을 마땅히 알아라.

其有得聞,彼佛名號, 歡喜踴躍,乃至一念,

當知此人,爲得大利, 則是具足,無上功德。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일러주셨지요.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 칭명염불을 하는 사람은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되고 아미타불께서 보시해 주시는 공덕의 보물을 얻게 되느니라” 따라서 아미타불의 공덕보물이 바로 육자명호입니다.

 

【뛸 듯이 기뻐함】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其有得聞,彼佛名號’란, 저 부처님명호의 위신공덕이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들은 사람이 ‘아! 육자명호에 이처럼 불가사의한 위신공덕이 있다니!’하면서 신순(信順:믿고 따름)하고 귀앙(歸仰:귀순하고 의지함)하게 되는 것을 말하지요.

 

‘뛸 듯이 기뻐한다歡喜踴躍’; 왜 뛸 듯이 기뻐할까요? 당신에게 백만원을 주면서 “왕생할 수 없다. 죽어서 삼악도에 갈 것이다”고 말한다면 뛸 듯이 기뻐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른바 ‘뛸 듯이 기뻐함’이란 곧 ‘내가 결정코 생사해탈을 해서 불도를 성취할 수 있다. 내가 금생에 비록 가난뱅이어서 남들로부터 무시당하면서 살지만 일단 눈만 감으면 나는 바로 정토에 가서 성불할 것이다’, 이런 것을 뛸 듯이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왕생에 대해 결정적인 확신이 있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왕생이라는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두려워하며 ‘왕생할 수 있을까, 없을까? 만에 하나 왕생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삼악도에 떨어지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괴로워서 뛸 듯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육자명호는 틀림없이 나를 구제할 수 있다. 내가 육자명호를 칭념하면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런 마음이라야 ‘뛸 듯이 기뻐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내지 한번만이라도 염하면】

 

‘내지 한번만이라도 염하면乃至一念’; 일념의 믿고 따름과 염념의 칭명, ‘내지 일념’과 ‘내지 십념’은 모두 『무량수경』에서 설하신 것으로서, ‘일념’과 ‘십념’의 앞에 ‘내지’라는 두 글자가 붙은 것은 단지 일념·십념만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법문을 듣고서, 만약에 수명이 연장되었다면 그럼 하루·이레·일년·십년……, 만약에 당장에 수명이 끝나서 우리가 열 번밖에 염불을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면, 그럼 열 번(十念)만 하고, 한번만 염불하고 나서 숨이 끊어진다면 그럼 한번(一念)만 염불해도 모두 왕생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지 일념’의 뜻입니다.

 

【칭명의 선근이 부처님과 같음】

 

‘마땅히 이 사람이 큰 이익을 얻게 됨을 알라當知此人,爲得大利’;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서 신순信順하고 귀명하며 뛸 듯이 기뻐하는 이 중생이 일념사이에 ‘큰 이익을 얻게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성불하여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이익을 ‘큰 이익’이라 부르는 것이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된다’는 것은 한 구절 명호 속에 위없는 공덕을 원만히 구족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아라한은 위가 있는 공덕으로, 위에는 아직 보살이 있습니다. 보살 역시 위가 있는 공덕으로, 위에는 부처님이 계십니다. 부처님은 원만해지셨기에 위없는 공덕이라 부르지요. 아미타불께서 당신의 위없는 공덕을 육자명호 속에 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뛸 듯이 기뻐하며 내지 한번만이라도 염한다면’ 바로 위없는 공덕을 얻도록 해주셨지요. 그런 까닭에 우익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범부중생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하면,

선근복덕이 부처님과 다를 바 없다.

 

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한 구절 명호를 부르면 우리의 선근과 복덕은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아미타불께서 닦으신 모든 공덕이 전부 이 육자명호 속에 들어있는데, 이 명호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들이 평등하게 얻을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경문에서는 육자명호야말로 원만하고 위없고 구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선근공덕, 이른바 ‘위없는 공덕’임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⑸ 『관경』

 

다섯 번째 경문은 『관경』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여기서 인용한 것은 선도대사님의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관경』의 원문이 전후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선도대사님의 해석문에서는 그것을 한곳에다 병렬해놓고서 한 번의 염불과 갖가지 법문을 수행하는 선근과 복덕의 크기에 대해 비교한 것입니다.

 

『관경』의 하품상생에서 이 사람은 임종할 때서야 비로소 선지식이 불법을 설해주는 인연을 만났는데, 그에게 두 가지 법문을 설해주셨지요. 첫 번째는 대승의 12부 경전을 설해 주셨기에, 그가 대승 12부 경전의 제목이름, 즉 『금강경』·『법화경』·『능엄경』·『화엄경』등등을 듣게 되는데;

 

12부경전의 이름을 듣고서 단지 천겁의 죄를 소멸하였느니라.

聞經十二部,但除罪千劫。

 

대승불교에서는 경전을 12가지 종류로 분류하므로, ‘12부 경전’이란 모든 대승경전을 대표합니다. 또한 12부 경전을 듣는다는 것은 갖가지 수많은 대승경전을 들었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그 효과는 어떻습니까? 천겁의 극중한 악업을 소멸했다지요. 천겁이라, 하나의 대겁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요? 그것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천겁동안에 지은 죄업을 소멸했으므로 엄청 많이 소멸한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 그로 하여금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도록 하지 못한 것은 우리의 죄업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또 말씀하셨지요.

 

한번 칭명염불을 하여 50억겁 생사의 죄를 소멸하였느니라.

稱佛一聲,除五十億劫生死之罪。

 

‘나무아미타불’하고 한 번 부르는 동시에 50억겁의 생사의 죄를 소멸합니다. 다들 계산해보십시오. 입으로 한 번 염불을 하면 50억겁의 생사의 죄를 소멸하고, 12부경전을 들었을 때는 천겁의 죄를 소멸하였습니다. 만약에 12부 경전을 듣는 시간을 가지고 염불을 한다면 몇 겁의 죄를 소멸하겠습니까? 그럼 엄청나겠지요! 게다가 ‘생사의 죄를 소멸한다’고 말한 이상, 단지 수량상의 ‘50억’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부처님명호의 공덕이 너무 커서 한번만 칭명해도 영원히 생사윤회가운데 다시 떨어지지 않을 만큼 생사의 죄가 이미 소멸되었음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죄업을 많이 소멸했다는 것은 명호의 공덕이 크고 많기 때문에 소멸한 죄업이 많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로써 이 육자명호의 공덕은 이처럼 많은 죄업을 소멸할 수 있어 단박에 생사를 초월하여 단박에 극락으로 돌아가도록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타 일체 법문에는 이러한 기능과 효과가 없습니다.

 

【쌀밥의 비유】

 

12부경은 불교내의 모든 경전과 모든 법문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경전으로 겨우 천겁의 죄를 소멸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체법문을 가지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인지의 법문(因地法門)이지 과지의 법문(果地法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현재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 배가 고픈데 당신에게 ‘곡물재배기술’이라는 책을 주면서 어떻게 곡물을 재배하는지 이 책을 보라고 합니다. 이 책을 다 보고 난 후에 다시 두 번째 책을 보라고 합니다. 당신더러 어떻게 쌀을 가공하고 밥을 짓는지를 배우라고 하면서 쌀밥을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시간이 없어요, 배가 너무 고파요”라고 말하겠지요.

 

무슨 뜻일까요? 불경佛經에서는 우리에게 성불의 방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금강경』에서는 우리더러 네 가지 상인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타파하라고 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불하는 방법입니다. 『능엄경』·『화엄경』에도 각자의 방법이 있습니다. 보살은 인지에서 수행하는 과정 중에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성불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근기로는 금생에 눈을 감았다하면 바로 삼악도에 떨어지게 될 테니까요.

 

부처님의 명호는 이미 성취된 불과佛果로서, 마치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다시 당신더러 ‘곡물재배기술’을 읽도록 하는 게 아니라 직접 흰 쌀밥을 당신의 앞에다 갖다 주는 것과 같아서 당신이 배가 고프면 바로 먹기만 하면 됩니다!

 

이 두 가지 방법 중에 어느 방법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매우 분명한 것은 과지의 법문이라야 비로소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을 듣고서 소멸한 죄업이 적은 이유는 그것이 인지의 법문이기 때문이고, 염불하여 소멸한 죄업이 많은 것은 부처님의 명호를 칭념하는 것은 과지의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점입니다.

 

두 번째는 대승경전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말씀하시는데, 만약에 우리도 제법실상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죄업은 서리나 이슬과 같아서 지혜의 해로써 능히 소멸할 수 있고’, ‘천년동안 어두웠던 방에 등 하나만 밝히면 바로 어둠을 물리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도를 깨달을 수 없다면 소멸하는 죄도 적고 얻은 복보와 공덕도 매우 한계가 있습니다.

 

【향기를 맡는 비유】

 

또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법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모든 경전에서 설한 것은 전부 인지법문이어서 과지의 법문인 염불만큼 수승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근기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런 법문은 우리와 같이 죄업이 두텁고 마음이 들떠있고 수명이 짧은 근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소멸한 죄업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선도대사님의 『관경소』에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자명호를 칭념하는 것은 그것과 달라서, 이는 과지의 법문으로 직접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밥을 들고 와서 당신이 먹도록 주지 않고 밥의 향기만 맡으라고 한다면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겠지요. 12부 경전에서 어떻게 성불할 것인가를 설하고 있지만 우리 같은 하열한 근기의 입장에서는 설하신 것이 전부 성불의 향기뿐이어서 우리에게는 성불의 열매를 맛볼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풍겨오는 향기만 맡을 뿐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육자명호를 부르는데, 입으로 한번을 부르면 한 번의 위없는 공덕을 얻고 열 번을 부르면 열 번의 위없는 공덕을 얻게 되므로 아주 확실합니다. 동시에 이 육자명호를 부르는 데는 우리의 깨달음을 필요하지 않고 또 ‘청정심이 있어야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중생일지라도 단지 입을 열어 칭념하고 염불하기를 원하고 왕생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끝없는 공덕을 우리의 마음속으로 끌어당겨서 우리의 공덕이 되도록 할 수 있기에 매우 쉽고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따라서 용이하면서도 수승하고 수승하면서도 용이한 법문은 오직 염불에 있습니다.

 

【명호가운데서 큰 이익을 얻다】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거나 내지는 한번만이라도 염(念)하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됨을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게 되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된다’고 하셨는데, 어디에서 큰 이익을 얻게 될까요? 앞에서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큰 이익과 위없는 공덕은 아미타불의 명호가운데서 얻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아미타경』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명호를 집지하여……곧 왕생하게 되느니라’고 설하시고는 이어서 ‘내가 그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 이익을 보았다’는 그 이익이 바로 왕생이므로, ‘명호를 집지’하는 것으로부터 왕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두 부의 경전에서 일치하게 모두 육자명호를 위없는 공덕을 삼으셨으니, 이른바 ‘많은 선근과 복덕’입니다.

⑹ 『경전』의 말씀

 

여섯 번째 경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천하의 칠보로써 부처님과 보살·연각·성문들께

공양올린다면 많은 복을 얻게 된다.

若人以四天下七寶,供養佛及菩薩、緣覺、聲聞,得福甚多。

 

이것은 아주 많습니다! 사천하의 칠보, 즉 금·은·진주·마노 등등을 가지고 부처님·보살·성문·연각에게 공양한다면 얻게 될 복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또 말씀하셨지요.

 

사람들에게 한 번 염불하도록 권하는 것만 못하여

이 복은 저 칠보를 공양한 복을 뛰어넘는다.

不如勸人,念佛一聲,其福勝彼。

 

이는 경전에서 분명히 하신 말씀으로, 당신이 사천하의 칠보를 가지고 불보살님들께 공양한다면 당신이 이렇게 많은 복을 얻게 되지만, 사람들에게 염불을 한번 하도록 권하여 얻는 복이 그 사람을 초월하는 것만 못하므로, ‘사람들에게 한 번 염불하도록 권하는 것만 못하여 이 복은 저 칠보를 공양한 복을 뛰어넘는다’고 설한 것입니다. 그럼 더군다나 스스로 염불하고 매일매일 염불하고 한결같이 오로지 염불하는 것이겠습니까! 따라서 염불이야말로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라는 경문의 뜻은 아주 분명하여 따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이 있는 복덕은 많은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은 『금강경』을 독송하기를 좋아하시는데, 『금강경』속에 있는 두 구절 말씀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복덕에 복덕의 상이 있다면, 이 복덕을 복덕이 많음이라 말하지 않으며,

만약 복덕에 복덕의 상이 없다면 복덕이 많음이라 말하리라.

若福德有福德相,是福德不名福德多;若福德無福德相,是名福德多。

 

『금강경』을 독송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고 계실 텐데, ‘복덕에 복덕의 상이 있다면’ 이것을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을 수행하고 이것을 공양하고 보시하고 이것을……수행을 많이 해야 한다’ 이것은 모두 상이 있는 것으로서 이것을 많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덕의 상이 없어야만 비로소 복덕이 많은 것이지요.

 

우리가 이 육자명호를 부르면서 “보세요,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뭔가 허전해서 제가 여기서 실제로 좋은 일을 하는 공덕만 못한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복덕의 상이 있는 것이어서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육자명호는 태허공과 같아서 실상자체이자 상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복덕이 많은 것입니다.

⑺ 『대비경』

 

『대비경大悲經』에서 말씀하시기를,

 

한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 이 선근으로써

열반계에 들어가 다함이 없느니라.

一稱佛名,以是善根,入涅槃界,不可窮盡。

 

고 하셨습니다. 한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선근으로 ‘열반계에 들어가 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열반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성불을 했다는 것으로, 성불을 ‘대열반을 얻음’이라 말하며, 아직 다함이 없어서 여분이 남아있기에 ‘다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성불하고도 남음이 있다】

 

근대의 인광대사께서도 말씀하셨지요.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데 익숙해지면, 성불하고도 남음이 있거늘,

다른 법문을 배우지 않더라도 다시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一句南無阿彌陀佛念得熟,成佛有餘,不學他法,又有何憾?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만약에 당신이 전념하고 숙념熟念을 할 수 있다면 성불하고도 남음이 있으므로 다른 법문을 배우지 않아도 전혀 유감스럽지 않다는 것이지요.

 

본래 부처님은 원만한 경계여서 부족함도 없으시고 남는 것도 없으시지만, 여기서는 한 구절 명호의 선근공덕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 이 선근으로써 열반계에 들어가 다함이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선근을 어떻게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의 명호는 위없는 선근복덕이고, 다함이 없는 곧장 열반계에 들어가는 선근복덕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가 바로 열반계이므로, 육자명호를 칭념하면 바로 열반계인 극락정토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⑻ 『열반경』

 

여덟 번째 경문은 『열반경』에서 설하신 것입니다.

 

가령 큰 창고를 열어서 한달 동안에 일체중생에게 보시하더라도,

假令開大庫藏,一月之中,布施一切眾生,

 

큰 보물창고를 열어 사람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게 해서 ‘일체중생에게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매우 크고 복덕도 매우 큽니다.

 

얻은바 공덕은 어떤 사람이 입으로 부처님명호를 한번 부른 것만 못하여

그 공덕은 앞에서 보시한 공덕을 뛰어넘어 비교할 수 없느니라.

所得功德,不如有人稱佛一口,功德過前,不可較量。

 

이렇게 큰 공덕을 얻었음에도 남이 한 번 부처님명호를 부르는 것만 못하여 이 공덕이 앞의 공덕을 초월하여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반경』에서 하신 말씀은 조금도 모호하지가 않습니다.

 

⑼ 『증일아함경』

 

『증일아함경』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사사로써 염부제의 일체 중생에게 공양하더라도,

만약 소젖을 짜는 잠깐사이에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면

그 공덕은 위의 공덕을 뛰어넘어 불가사의 하느니라.

四事供養閻浮提一切眾生;

若有稱佛名號,如搆牛乳頃,功德過上,不可思議。

 

‘사사四事’란 곧 음식·의복·의약·침구 등으로서, 바로 우리가 필요한 일체 생활용품을 말합니다. 만약 현재로 말한다면 자동차·아파트 등등도 전부 그 속에 포함되겠지요. ‘염부제의 일체중생에게 공양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한다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중생들, 그들의 모든 생활용품을 전부 당신 혼자서 공양한다면 것인데, 그렇다면 당신이 얻은 복은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무아미타불명호를 칭념한다면, 설사 우유 한 컵을 짜는 시간만큼이라도 ‘그 공덕은 위의 공덕을 뛰어넘어 불가사의하다’, 사사로써 염부제의 일체 중생에게 공양한 공덕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경문에서는 비교를 통하여 염불만이 비로소 진정으로 많은 선근과 복덕이며, 다른 법문으로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⑽ 『대지도론』

 

용수보살께서도 『대지도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어떤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곧 하루에 천리 길을 천년동안 걸으면서

그 속에 가득한 칠보로써 부처님께 받들어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후대의 악세에서 한 번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만 못하여

그 복은 저 사람을 훨씬 뛰어넘느니라 .

譬如有人,初生墮地, 即能一日行千裏,足一千年, 滿中七寶,奉施於佛;

不如有人,於後惡世, 一聲稱念,阿彌陀佛,其福勝彼。

 

비유를 하나 하셨지요. 어떤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하루에 천리 길을 걸을 수 있는데, 이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걸었을까요? 천년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계산을 해본다면 하루에 천리인데, 천리는 얼마나 큽니까? 그 범위가 아주 커서 열흘이면 만리, 그럼 한달이면 삼만리이고, 일년이면 36만리입니다. 그가 천년 동안 이렇게 큰 범위를 지났는데, 지하‘속에는 칠보로 가득하여’, 그가 지나간 장소에는 전부 칠보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칠보로써 ‘부처님께 받들어 보시한다’, 가져다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면 그가 얻은 복이 클까요, 크지 않을까요? 많을까요, 많지 않을까요? 이 복은 정말로 엄청나게 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후대의 악세에서’, 석가모니불께서 열반하신 뒤에, 즉 우리 현재의 오탁악세, 이 말법시대를 말하는데 악세의 중생들은 마음이 청정하지 않아서 청정심으로 염불하는 게 아니라 악세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중생들입니다. ‘한번 아미타불을 칭념하면 그 복은 저 사람을 뛰어넘는다’, 한번 염불하는 선근과 복덕은 하루에 천리씩 천년을 걸어서 그 범위내의 칠보로써 공양한 공덕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생각으로 이 명호의 공덕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야말로 많은 선근과 복덕입니다.

 

【항공모함 대 작은 어선의 비유】

 

다들 여기까지 배우고 나면 염불하는데 신심이 생겨서 “이렇게 하면 안 될까요, 저렇게 하면 안 될까요……”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허전해하면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 염불마저 안 된다면 그럼 끝장이죠.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염불은 제일 잘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래도 안 된다면 그럼 또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는 마치 우리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은데, 슈퍼 항공모함을 타고도 거기서 ‘이것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다시 작은 어선 하나를 구해서 대비를 해놓았다가 만에 하나 항공모함이 뒤집어지게 되었을 때 나의 이 작은 어선으로 한동안 버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항공모함조차 건널 수 없다면 당신의 작은 어선이 쓸모가 있겠습니까? 이는 그가 항공모함에 대해 모를뿐더러 작은 어선마저도 모른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왜 그럴까요? 항공모함으로 건널 수 없는 바다가 없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고, 작은 어선으로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것도 그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가 항공모함을 너무 얕보고, 자신의 작은 어선을 너무 높게 보았기에 두 가지가 다 틀렸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염불이 바로 아미타불의 항공모함에 올라타는 것이고, 염불이 쓸모 없을까봐 다시 여러 가지 잡행잡수를 한다는 것이 바로 작은 어선을 대비해놓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만에 하나 염불해서 왕생할 수 없을 때, 다시 내가 닦은 이것을 가지고 보충을 해야지” 이는 마치 “육자명호의 대원선이 만약에 우리를 구제할 수 없다면 다시 우리가 수행한 것을 의지하여 보충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잡행잡수입니다. 그럼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염불의 항공모함마저도 안 된다면 잡행의 작은 어선인들 되겠습니까? 따라서 염불이야말로 반드시 왕생하는 길이지요.

 

잡행잡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너무 경시하고 자신의 잡행공덕을 너무 높이 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이 육자명호에다 집중하라는 것이지 ‘그럼 나는 선행을 닦고 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두 가지 다른 개념으로서 그것은 우리 불교도들이 마땅히 실천해야할 것들입니다. 다만 우리 범부들이 지은 독이 섞인 유루와 유위의 선을 가지고 육자명호를 능가하려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고, 또한 육자명호의 수승한 공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음】

 

이상 열 단락 경문의 증거들인데, 매 단락의 경문마다 모두 부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므로 모두 힘이 넘치고도 단호하십니다. 우리는 불교도로서 부처님을 믿어야 하지만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범부이므로 때로는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믿으려면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으면 당신이 어떻게 믿어야 비로소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염불하면 왕생한다고 말씀하셨으므로 당신이 “염불하면 정말로 왕생할 수 있습니까?”라며 물음표를 던져서는 안 됩니다.

 

“이봐, 이씨!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자네가 보기엔 왕생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없을 것 같은가?”

이씨가 말합니다. “내 생각엔 안 될 것 같아!”

“아아, 그럼 자네의 말을 듣겠네. 장씨,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장씨도 말합니다. “나도 위험하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도대체 부처님을 믿어야 합니까, 아니면 장씨·이씨를 믿어야 합니까? 당신이 만 명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전부 “단지 염불만 해서 왕생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오직 석가모니부처님만이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극락왕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석가모니불을 믿지 못하고 범부속인들을 믿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당장에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장에 믿고 따를 수 있다면 당신은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은 사실 이해가 필요 없고 당신이 많은 책을 읽을 필요도 없이 부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으면 당신은 어떻게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컨대 석가모니불께서는 『아미타경』에서 시작부터 말씀하십니다.(이 말씀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지요)

 

여기에서 서쪽으로 십만 억의 불국토를 지나서 극락이라는 세계가 있느니라.

그 나라에‘아미타’라고 부르는 부처님이 계시는데, 지금 현재 법을 설하고 계시느니라.

從是西方, 過十萬億佛土, 有世界,名曰極樂, 其土有佛,號阿彌陀。

 

십만억 불국토 밖의 극락세계를 당신이 본 것도 아니고, 당신이 망원경을 가지고 보더라도 보이지 않으며 과학자들이 허블망원경을 사용하여 허공을 향해 보아도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믿으면 믿는 것입니다. 당신이 교수라서 비로소 이 말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일반백성이고 일자무식하다고 해서 믿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믿으면 믿는 것입니다.

 

신심은 지혜의 체현體現입니다. 동시에 역량의 체현이기도 한데,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을 수 있다면 지혜가 있고 역량이 있는 것이지요! 한사람이 제아무리 학문이 있다하더라도 만약에 그가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의 마음은 여전히 연약하고 무기력한 것입니다.


6) 조사의 해석

 

우리는 계속해서 여섯 번째 ‘조사의 증명祖證’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조사님의 교증敎證으로써 염불이 많은 선근과 복덕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열 가지 문장을 열거하였습니다.

 

⑴ 담란대사의 『왕생론주』

 

【진실한 공덕】

 

첫 번째 단락입니다. 담란대사께서 『왕생론주』에서 말씀하시기를, “공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진실한 공덕이고, 하나는 진실하지 못한 공덕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무엇이 진실한 공덕일까요?

 

보살의 청정한 지혜의 업으로부터 일어나 불사를 장엄하며,

법성을 의지해 청정한 모습으로 들어가니,

이 법이 전도되지 않고 허위가 아니기에 진실한 공덕이라 부른다.

어째서 전도되지 않은가?

법성을 의지하고 이제를 수순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허위가 아닌가?

중생을 거두어 필경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從菩薩清淨智慧業起, 莊嚴佛事, 依法性, 入清淨相,

是法不顛倒,不虛偽,名爲真實功德。

云何不顛倒?依法性,順二諦故;

云何不虛偽?攝眾生,入畢竟淨故。

 

이 단락을 자세하게 해석하기란 쉽지가 않겠지만, 그 대의는 아주 명백합니다. 보살이 닦은 바는 법성에 수순하므로 진실한 공덕이 되는 것이고, 전도되지 않고 허위가 아니어서 중생을 거두어 정토로 돌아가서 필경에 성불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장보살께서 역겁歷劫 동안을 법성에 수순하여 수행하여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를 성취하셨기에, 염불인들을 섭수하여 정토에 돌아가 성불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자명호가 바로 진실한 공덕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공덕】

 

어떤 것이 진실치 못한 공덕일까요? 범부중생들이 닦은 모든 인천의 제선(人天諸善)들은 전부 다 진실한 공덕이 아닙니다. 진실한 공덕이 바로 많은 선근이라면 진실치 못한 공덕은 당연히 적은 선근복덕이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없는 것과 같아서 ‘적다’라고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원문을 보겠습니다.

 

범부가 닦은 인천의 모든 선과 인천의 과보들은,

원인이든 결과든 모두 전도되고 모두 허위인 까닭에

진실치 못한 공덕이라 부른다.

凡夫人天諸善,人天果報,若因若果,

皆是顛倒,皆是虛偽,是故名不實功德。

 

우리는 범부이므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인천의 선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착한 원인을 닦으면 착한 과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인중因中의 인천제선人天諸善이든 아니면 과상果上의 인천복락人天福樂이든 ‘모두 전도되고 모두 허위이다’는 것입니다.

 

왜 전도되었다고 말하는 걸까요? 앞에서 “유루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법성을 수순하지 않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아상을 여의지 못했으며, 법성을 수순하지 않고 법의 근본과 괴리되어 위로 오르기를 바라나 도리어 아래로 떨어지고 마는 격이니 영원히 삼악도에 가라앉아 벗어날 수 없기에 전도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허위라고 말할까요? 덧없이 변화하고 생멸하여 진실하지 않아서 법성의 공덕에 계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허위라 말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보시를 말한다면 보살은 삼륜의 체가 공(三輪體空)하여, 보시하는 나도 본래 공하고, 보시를 받는 사람도 공하며, 보시를 하는 물건도 공하므로 닦은 공덕이 진실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범부는 세 가지 상이 견고하여 내가 보시를 하여 장래에 복을 받는다――아상에 대한 희구가 견고하고, 남이 나의 보시를 받았으니 나의 은혜를 받았다――인상에 대한 아만심이 견고하며, 이런 재물들은 모두 내가 보시한 것이다――물건의 상에 대해 탐내고 아끼는 마음이 견고합니다. 이렇게 수행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을 닦아도 생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성의 공덕입장에서 말한다면 우리의 이 같은 수행들은 유루와 유위의 생멸법이기에 때문에 허위라고 말하고 진실하지 못한 공덕이라 말합니다.

 

【인과가 서로 부합함】

 

여러분들께 묻겠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공덕을 가지고 진실한 공덕의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것은 전도된 인을 가지고 극락의 전도되지 않은 과를 얻으려 하는 것인데,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과가 서로 부합하지 않습니다.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의 청정하고 장엄하고 진실한 열반의 국토이므로, 진실한 열반의 정토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진실한 열반의 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 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육자명호입니다. 육자명호는 본래부터 실상법이어서 아미타불의 위없는 공덕입니다. 따라서 육자명호를 지니고 극락국토에 왕생하는 것은 인과가 서로 부합하는 것입니다.

 

어제 든 비유와 같이 국왕의 성지를 가지고 왕궁에 들어가 국왕을 알현해야만 비로소 인과가 부합하고 완전히 상응하며 경계가 일치한 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이 적은 쪽지 하나를 들고 국왕을 만나려 한다면 만날 수가 없겠지요.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직접 서명을 해주신 명호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자명호로써 우리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시방의 중생들아, 나의 명호를 부르면 내가 너희들을 영접하여 나의 정토로 돌아가겠다!” 이 육자명호가 바로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초청장입니다.

 

⑵ 선도대사의 『법사찬

 

두 번째 단락을 보겠습니다. 이 문장은 선도대사님의 『법사찬』에서 나온 것입니다. 『법사찬』은 선도대사께서 찬탄하는 게송讚偈의 형식으로 『아미타경』의 중요한 뜻을 해석하신 것입니다. 그중의 이 네 구절 말씀은 굉장히 유명한데, 『아미타경』의 ‘적은 선근으로 왕생할 수 없으니, 명호를 집지하여 일심불란하면 곧 왕생하게 된다’는 왕생의 정인正因에 관한 이 단락의 경문을 해석하신 것입니다.

 

극락의 무위열반계는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아마도 왕생하기 어렵나니,

여래께서 요법을 선택하시어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시네.

極樂無爲涅槃界,隨緣雜善恐難生,

故使如來選要法,教念彌陀專複專。

 

【열반의 보토】

 

‘극락의 무위열반계’라, 선도대사께서는 극락세계를 보토·무위열반의 경계라고 판정하셨습니다. ‘위爲’는 곧 인위적인 조작이고, ‘무위無爲’는 인위적인 조작을 멀리한다는 것으로서 성품자리의 공덕이 저절로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일체의 조작은 전부 유위이지 무위가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가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건물은 유위법이어서 장래에 사라지게 되며, 절을 지어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황폐해지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유위법입니다.

 

오직 불성만이 무위인데, 극락세계는 무위이고 열반의 경계입니다. 열반은 불생불멸이어서 쇄함도 변함도 없이 본래 그대로 상주常住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아무튼 이것은 매우 고묘한 불국토의 경계이자 불성이 완전히 드러난 경계입니다.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할 수 없음】

 

이처럼 고묘한 불국토의 경계를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아마도 왕생하기 어렵도다’란 말이 바로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에 대한 해석입니다. 선도대사님은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을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隨緣雜善)’이라는 네 글자로 설명하신 것이지요. 무엇을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이라 부를까요?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지 않고 자신의 취미와 인연에 따라서 이 법을 만나면 이 법을 배우고 저 법을 만나면 저 법을 배우는 것을 ‘인연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도 닦고 저것도 닦는 것을 ‘잡다함’이라 말하며, 닦은 바가 모두 선법이므로 ‘선’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들의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써(앞서 담란대사께서는 ‘진실하지 않은 공덕’이라 말씀하셨음) 저 열반계에 왕생하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아마도 왕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마 당신은 왕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비교적 완곡하게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우리더러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을 버리고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수염불을 하라는 것이지요.

 

【전수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함】

 

그래서 다음에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 요법(핵심법문)을 선택하시어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시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 요법을 선택함’이란 바로 경문에서 말씀하신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서’입니다. 우리가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불의 명호에 대해 설해주시는 것을 듣는 것,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를 위해 요법을 선택해주시는 것입니다.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할 수 없고, 앞에서 석가모니불께서 또 우리에게 왕생하라고 타이르고 있으며, 우리는 기껏해야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을 조금 닦을 수밖에 없고, 또 이것으로는 왕생할 수도 없다면, 그럼 어떡해야 합니까? 석가모니여래께서 기왕 우리에게 왕생하라고 타이른 이상, 그 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왕생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선택해 주셔야 하겠지요. 선택이란 석가모니불께서 선택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정토법문의 선생님은 매우 고명하신 석가모니불이신데, 그 분께서 직접 우리를 위해 골라주신 것이기에 아주 정확하고 아주 온당하며 복잡하지 않고 아주 안락합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들을 위해 선택하신 법문에 착오가 있고 실수가 있을 수 없겠지요.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를 위해 선택하신 방법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고, 게다가 가장 수승하고 최고여서 두 번째·세 번째가 될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우리 오탁악세의 중생들을 위해 선택해 주신 ‘요법’은 어떤 법문입니까?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시네’가 바로 ‘명호를 집지하여 하루나……이레 동안 일심불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우리에게 아미타불을 전일하게(專), 더욱 더 전일(專)하게 부르라고 가르치고 계시는데, 하나의 ‘전專’자로는 석가모니불의 간절한 노파심을 표현하기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오탁악세의 중생들이여, 너희들은 오로지 염불을 해야 한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이미 오로지 염불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전념하고 있지만 더욱 더 전념해야 한다!”

 

끝까지 전념해서 마음도 전일하고 행도 전일하고, 오늘도 전일하고 내일도 전일하고, 법당에서 전일하고 법당을 떠나서도 여전히 전일하게 하는 것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단락의 찬게讚偈에서는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은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므로 왕생할 수 없다는 것이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일하게 또 전일하게 칭념한다면 결정코 왕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것이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를 위해 선정해주신 것이고, 이것이 바로 많은 선근과 복덕이라는 것입니다.

 


⑶ 선도대사의 『반주찬』1

 

계속해서 다음 글을 보겠습니다. 선도대사님의 『반주찬』 가운데 찬게 한 송이 있는데, 네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온갖 사량과 교묘한 방편으로,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법문을 선택하셨으니,

일체 선업을 회향하여 왕생하는 이익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 못함일세.

種種思量巧方便,選得彌陀弘誓門;

一切善業回生利,不如專念彌陀號。

 

『선도대사전집』 제570쪽에 있으니, 다들 돌아가셔서 상하의 문장을 대조해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온갖 사량·온갖 고려를 다하고, 갖가지 선교善巧·갖가지 방편을 운용하여 우리를 위해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이신 대원업력의 법문을 선택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일체 선업’, 정선定善과 산선散善 등등을 수행한 일체 선업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한다면 모두 이익이 있겠지만,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 못함’의 이익이 더욱 큽니다.

 

이른바 ‘온갖 사량과 교묘한 방편’이란, 바로 ‘일체 선업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석가모니불께서 교묘하게 세우신 방편으로서, 그 목적은 이 방편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돌아가도록 인도하기 위해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의 법문을 선택하신 것이니,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의 법문’이 바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일체 선업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것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 못합니다. 매우 분명한 것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바로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고, 이를 제외한 ‘일체 선업’은 모두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이라는 것이지요.

 

⑷ 선도대사의 『반주찬』2

 

이어서 『반주찬』입니다.

 

만행을 전부 회향하면 모두 왕생은 하나,

염불일행이 가장 존귀하도다.

회향왕생하는 잡선의 힘이 약할까 두려운데,

일일에서 칠일 동안 염불하는 것만 못하구나.

萬行俱回皆得往,念佛一行最爲尊;

回生雜善恐力弱, 無過一日七日念。

 

갖가지 수행과 자그마한 모든 선을 전부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기만 하면 역시 왕생할 수는 있으나, 염불과는 여전히 비교할 수 없어서 염불일행이 가장 존귀하여 최상이고 최고입니다. 온갖 잡행과 잡선을 의지하여 극락세계에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려 한다면 아마도 그 힘이 부족할 것 같다는 것인데, 잡선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힘이 너무 약하기에 ‘회향왕생하는 잡선이 힘이 약할까 두려운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앞에서 말한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아마 왕생하기 어려울 것이다’와 같은 이치입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일일에서 칠일까지 염불하는 것만 못하다’, 회향왕생하는 잡다한 선은 일일에서 칠일까지 염불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일일에서 칠일까지’란 바로 『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신 ‘하루나……이레’ 동안 전심으로 염불하는 것으로, 이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행은 모두 존귀하지 않고 염불이 가장 존귀하며, 잡다한 선은 힘이 약할까 두렵지만 염불의 공은 가장 강합니다. 따라서 만행과 같은 잡선들은 적은 선근이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많은 선근입니다.

 

앞에서 ‘만행을 전부 회향하면 모두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한 것은 모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고, 아래에 또 ‘회향왕생하는 잡선은 힘이 약할까 두렵다’고 설한 것은 바로 아마 왕생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이지 않을까요? 모순이 아닙니다! 잡행을 회향하여 비록 왕생할 수는 있지만, 왕생을 하더라도 변지邊地의 연태蓮胎 속에 있게 되므로, 곧장 보토에 들어가서 연태에 머물지 않으려면 그 힘이 부족하기에 반드시 전수염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⑸ 선도대사의 『관경소』

 

『관경소』 중에 선도대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머지 온갖 선들을 비록 선이라 부르기는 하나,

만약에 염불과 비교한다면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自餘眾行,雖名是善, 若比念佛者,全非比較也。

 

‘그 나머지(自餘)’란 염불을 제외한 모든 수행들은 ‘비록 선이라 부르기는 하나’, ‘비록’이란 글자는 변화를 나타내는 어투이고, ‘선’이란 예컨대 우리가 참법을 닦는다든가, 경전을 독송한다든가, 진언을 외운다면 모두 공덕이 있고 모두 이익이 있으며, 모두 불교내의 선법수행이라는 것인데, 비록 선이기는 하나 염불과 비교한다면 어떨까요? ‘만약 염불과 비교한다면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 서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당신이 이 경전을 독송하는 것과 저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비교할 수 있어도 염불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똑같은 지면위의 사물들이, 일층의 건물은 낮고 백층의 건물은 높으며, 작은 산은 낮고 큰 산은 높지만, 그들이 얼마만큼 차이가 나던 지간에 아무튼 서로 비교할 수는 있으나 하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높고 낮음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타의 여러 가지 수행들은 비록 선이기는 하나, 만약에 염불과 비교를 한다면 다른 수행들은 땅과 같고 염불은 하늘과 같아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정토종의 개종조사이신 선도대사님의 해석이었습니다.

 

⑹ 연지대사의 『아미타경소초』

 

명나라의 연지대사께서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경소초』중에서 연지대사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저 나라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 있어야 한다.

지금 명호를 집지하는 것은 선근 가운데 선근이고, 복덕 가운데 복덕이다.

명호를 집지하며 아미타불을 친견하고자 하는 것이,

진실로 많은 선근이자 최고로 수승한 선근·불가사의한 선근이다.

따라서 마땅히 지명을 정행으로 삼고, 다시 지명을 발보리심으로 삼아야 한다.

欲生彼國,須多善多福。 今持名,乃善中之善,福中之福。

執持名號,願見彌陀, 誠多善根、最勝善根、不可思議善根也。

故當以持名爲正行,複以持名爲發菩提心。

 

극락정토에 왕생하려면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 필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을 갖출 수 있을까요? ‘지금 명호를 집지하여’, 아미타불의 명호를 잡아서 부르는 것,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것이 ‘선근 가운데 선근이고, 복덕 가운데 복덕’이라는 것이고, ‘명호를 집지하며 아미타불을 친견하기를 원하는 것이 진실로 많은 선근이자 가장 수승한 선근·불가사의한 선근이다’는 것이며, ‘따라서 마땅히 지명을 정행으로 삼고 다시 지명을 발보리심으로 삼아야 한다’, 지명을 우리가 정토에 왕생하는 정행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보리심은 성도법문과 정토법문의 각종각파에서 모두 아주 중요시하는 것인데, 연지대사께서는 여기서 ‘당신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정토왕생을 발원하기만 하면, 이것이 바로 발보리심이다’고 해석하셨습니다. 발보리심을 선근이라 말하고, 육도만행을 닦는 것을 복덕이라 말하는데, 우리가 염불하면 복덕이면서 또한 선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명호 속에 전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⑺ 우익대사의 『미타요해』1

 

다음은 우익대사님의 해석입니다. 대사님은 『미타요해』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성문과 연각은 보리선근이 적고, 인천의 유루복업은 복덕이 적어서,

모두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

聲聞、緣覺, 菩提善根少, 人天有漏福業, 福德少, 皆不可得生淨土。

 

이것은 ‘적은 선근과 복덕’에 대한 해석입니다. ‘성문과 연각’이란 바로 아라한과 벽지불을 말하는 것인데, 그들은 이미 삼계를 벗어난 성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으로도 여전히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보리선근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직 광대한 보리심(보리심이 곧 선근임)을 일으키지 못하고서 자신의 생사만을 해결하셨기 때문에 보리심이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극락세계는 대승의 선근계善根界여서 성문과 연각이라도 자신을 의지해서는 왕생할 수 없으며, 범부들이 닦은 인천의 유루의 복업은 복덕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인천의 모든 선과 성문·연각, 그들은 모두 저 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의지해야 왕생할 수 있을까요? 다음을 보십시오.

 

⑻ 우익대사의 『미타요해』2

 

아미타불은 만덕홍명인데,

명호로써 덕을 불러오는데 다하지 않음이 없다.

阿彌陀佛是萬德洪名,以名召德,罄無不盡。

 

육자명호가 만덕홍명이므로, 명호로써 아미타불의 공덕을 불러오고 포괄하고 있는데, 이 모든 공덕을 전부 명호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조금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명호가 바로 많은 선근복덕이며, 원만한 선근복덕입니다.

 

‘명호로써 덕을 불러온다’는 것은, 세간에서 이와 상응하는 비유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데, 우리는 대략적으로 세간의 예를 통하여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예컨대 세속의 말 가운데 ‘존함을 오래 전에 들었는데, 명성이 자자하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도덕과 학식·공적이 모두 그 사람의 이름 가운데 포함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존함을 오래 전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브랜드상표의 비유】

 

상표에 대한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상표가 바로 하나의 상업표시이자 하나의 등급이며, 명품 역시 하나의 이름이자 하나의 간판입니다. 그러나 유명한 세계적인 상표브랜드는 왕왕 수억 달러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름으로써 재물을 불어온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재물이 이름이 되고, 이름이 바로 재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장縣長·시장市長·성장省長을 말하는 것도 모두 이름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이름이 있으면 곧 이러한 권력이 있으므로, 이것을 ‘이름으로써 권력을 불러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력이 이름이 되고, 이름이 곧 권력인 셈이지요. 당신에게 어떠한 이름이 있으면 바로 어떠한 권력이 있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세간적인 것입니다. 상업계는 이름으로써 재물을 불러들이고, 정계에서는 이름으로서 권력을 불러들입니다. 불보살님들은 출세간적인 공덕계이므로 ‘명호로써 공덕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제왕이 죄를 사면하는 비유】

 

강희대제康熙大帝(청나라 황제)의 경우, 그가 어필로 ‘강희’라고 적으면 이 이름 속에는 제왕의 위덕이 들어있습니다.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당신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고, 일반백성이라도 관직으로 등용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 육자명호의 위덕은, 우리를 삼계육도의 윤회로부터 면제시킬 수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사형을 선고받아 곧 지옥에 떨어져야 하지만, 육자명호는 우리의 죄업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부처님 중의 왕이요, 광명 가운데 가장 존귀한 분’으로서 시방중생을 대사면 해주십니다. ‘내가 부처가 되었으니, 시방중생의 죄업을 두루 사면하여 그들이 다시는 윤회하지 않고 전부 나의 정토에 돌아오도록 하겠다’ 그분께서 뭘 믿고 하는 말씀일까요? 당신의 명호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성불을 한다면 무량수라 명호를 세우리니, 중생들이 이 명호를 듣고 다함께 나의 나라에 오게 되리라’ 육자명호에는 모든 공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널리 평등하게 우리들을 구제할 수 있고, 우리들의 죄업을 사면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명호가 곧 공덕이고 공덕이 곧 명호이므로, 아미타불에게 공덕이 얼마가 있으면 명호의 공덕도 얼마여서, 선근과 복덕이 많고 원만하여 위가 없는 것입니다.


⑼ 우익대사의 『미타요해』3

 

다음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원으로써 중생들에게 많은 선근의 인을 지어주시고,

대행으로써 중생들에게 많은 복덕의 연을 지어 주시어,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염불을 하는 이들로 하여금 염념마다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게 하셨다.

佛以大願,作眾生多善根之因,

以大行,作眾生多福德之緣;

令信願持名者,念念成就如是功德。

 

우익대사님의 요 몇 구절 말씀은 확실히 아주 적절하고 아주 좋습니다. 우리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미타불께서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도록 해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도록 해주실까요? 『무량수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 내지 한번만이로 염하는 이가 있다면” 곧 위없는 공덕을 얻게 된다고요. 우익대사님 역시 이 경문에 의거하여 해석하신 것입니다. 『아미타경』에서 서방정토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많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설하셨는데, 선근은 왕생의 인이 되고 복덕은 왕생의 연이 되기에 ‘선근·복덕·인연’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근의 인이 있고 복덕의 연이 있으면 인연이 구족하여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단지 인만 있고 연이 없어도 왕생할 수 없고, 연만 있고 인이 없어도 역시 왕생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선근도 없고 복덕도 없습니다. 인도 부족하고 연도 적다면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에게 없기에 부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실까요?

 

‘부처님께서 대원으로써 중생들에게 많은 선근의 인을 지어주신다’, 당신이 세운 48대원으로써 우리에게 많은 선근의 인을 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선근의 인이란 쉽게 말하면 바로 정토왕생을 염원하는 원심願心인데, 이 원심만 있으면 곧 왕생의 인이 있게 됩니다. “죄업을 짓는 중생들아, 너희에게 대원이 없어서 감히 제불의 정토에 왕생하려는 마음을 내지 못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위해 48대원을 세워서 너희들이 나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 아미타불께서 48대원을 세우신 유일한 목적이 바로 우리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부처님의 원심이 곧 우리의 원심이 된 것과 같겠지요. 부처님의 원심은 선근의 극치입니다. 부처님의 원심이 우리의 원심이 되었는데 어찌 선근이 많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선근의 인’이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우리에게 복덕이 없으므로 부처님께서는 ‘대행으로써 중생들에게 많은 복덕의 연을 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른바 ‘대행’이란 바로 조재영겁의 육도만행(육바라밀)인데, 그분의 모든 수행과 우주법계에 가득한 복덕과 지혜의 공덕을 전부 육자명호 속에 넣어서 우리에게 보시를 해주심으로써 우리의 복덕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왕생할 수 있는 ‘많은 복덕의 연’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신원행이 일체이다】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염불을 하는 이들로 하여금 염념마다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케 하신다’, 믿음과 발원을 갖추고 염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염념마다 부처님과 똑같은 공덕을 성취하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함信願持名’――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고,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신원행은 일체一體가 됩니다. 믿음은 염불왕생을 믿는 것이고, 발원은 염불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며, 행은 염불왕생을 행하는 것입니다. 신원행은 모두 ‘염불왕생’을 체로 삼기에 믿음은 이것을 믿는 것이고, 발원은 이것을 발원하는 것이며, 행도 여전히 이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염념마다 성취한다念念成就’,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는 사람은 염념마다 그가 한 번 한 번 염불할 때마다 즉시에 육자명호와 같은 공덕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명호는 선근이면서도 복덕이고, 인이면서도 연입니다. 염념마다 염불을 하면 염념마다 인연이 구족하고, 염념마다 인연이 구족하면 염념마다 왕생이 성취되는 것이지요. 일념은 성취되고 일념은 성취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또 선정상태인 일심의 염불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성취되고 도달하지 못하면 성취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또 평소의 염불로는 성취되지 않다가 임종할 때 최후의 일념이라야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발원으로 염념염불念念念佛을 하면 염념마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성취란 바로 완성되고 결정되어 다시는 바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고, 염념마다 성취한다는 것은 바로 염념마다 왕생이 결정되고 성불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덕如是功德’, 부처님의 대원과 대행으로 성취한 공덕이 바로 명호의 공덕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인데, 어떻게 우리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실까요? 바로 당신의 대원과 대행으로 닦은 모든 공덕을 육자명호 속에 넣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데, 오겁 동안 사유한 대원과 조재영겁의 대행이 모두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이 되어서 믿고 발원하고 염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얻어서 부처님과 평등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은 많은 선근과 복덕으로서 부처님과 평등할 정도로 많습니다. 이외에 또 어떤 법문이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외딴섬의 주민들이 배를 건조하기를 발원하는 비유】

 

여기서 다시 설명을 좀 해드릴 필요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아미타불께서 48대원을 세우셨는데, 우리가 만약에 극락세계에 왕생하려 한다면 우리도 48원을 세워야 합니다. 만약에 48원을 세우지 않는다면 부처님과 상응하지 않아서 왕생할 수 없으며, 48원을 세우면 상응하여 왕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옳을까요, 옳지 않을까요?

(옳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울 수 있습니까?

(대중) 세울 수 없습니다!

 

법장보살께서 48원을 세우는데 오겁 동안의 사유를 거쳤으며, “내가 세간을 초월하는 원을 세워 발원은 모든 부처님을 뛰어넘으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48대원은 제불조차도 세울 수 없는 대원들인데, 그것을 가지고 우리 오탁악세의 범부더러 세우라고 한다면 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원, 저 나라에 왕생하려는 발원 하나만 세우면 됩니다. 마치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경』에서 우리들에게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원을 세워 저 나라에 왕생하기를 발원해야 하느니라(衆生聞者,應當發願,願生彼國)”고 일러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48대원, 내지 무량무변한 대원이 전부 다 있게 되겠지요. 석가모니불께서는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저 나라에 왕생하기를 발원해야 하나니, 48대원을 세워 아미타불과 같이 해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예컨대 우리가 외딴섬에서 살고 있는데, 지금 곧 해일이 일고 사나운 바람과 거센 파도가 일어나려 합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우리를 구하려고 배를 몰고 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나의 큰 배로 올라오세요! 내가 당신들을 구해서 이 외딴섬을 벗어나도록 해주겠습니다” 그럼 섬에 살고 있는 주민으로서 대답을 하고 배에 오르기를 원하기만 하면 바로 선장의 마음과 상응하게 되겠지요. 선장이 우리더러 배에 오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배에 오른다면 선장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므로, 이것을 상응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섬에 사는 주민들이 “선장이 큰 원을 세워 배 한 척을 건조하여 우리를 구하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도 큰 원을 세워 배를 건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도리어 선장의 마음과 상응하지 않겠지요. “시간이 없어요! 당신들이 배를 건조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배를 몰고 와서 당신을 구하려는 것인데, 당신들이 나의 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됩니다.”

 

선장이 바로 아미타불이시고 큰 배가 바로 명호인데, 우리가 육자명호를 부르기를 원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바로 아미타불의 원심과 상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왕생하기를 바라고 우리 역시 왕생하기를 바란다면 이것을 일러 ‘일념이 상응하면 일념이 부처이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당신이 거기서 아미타불의 48원을 던져버리고서 스스로 발원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께서 당신을 구제해주실 필요 없이 당신 스스로 당신을 구제하면 되겠지요.

 

【어린 아이가 젖을 먹기를 거부하는 비유】

 

지금 이 자리에 어머니가 되신 분들이 계시는데, 어머니가 자식에게 젖을 먹이겠다고 발원하였으나 이 애가 기어코 당신의 젖을 먹지 않겠다면서 스스로 ‘나에게 젖이 있기를 바란다’고 발원한다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어머니가 자식에게 젖을 먹이려 할 때 자식이 어머니의 젖을 먹는다면 이것이 바로 모자가 상응한 것이지요. 그러면 그가 건강하게 잘 자라날 것입니다.

 

아미타불 육자명호의 젖이 우리를 기르고 우리의 보리도의 싹을 증장시키고 우리의 법신혜명을 기르려고 하는데, 우리가 염불을 하면서 아미타불 육자명호라는 법의 젖(法乳)을 빨아먹는다면 아주 좋잖아요! 이렇게 되면 상응한 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근기로써 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아미타불의 원심에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극락세계에 왕생한 뒤에 자연히 수승한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요즘과 같은 이러한 시기에 그처럼 광대한 보리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⑽ 우익대사의 『미타요해』4

 

계속해서 다음을 보겠습니다. 우익대사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하면 부처님의 공덕을 전부 거두어 자신의 공덕이 된다.

信願持名,全攝佛功德成自功德。

 

이런 말씀들은 모두 매우 힘이 있습니다.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함’――아미타불께서 당신을 구제하려 하신다는 것을 믿고, 또 당신을 구제할 수 있으시다는 것을 믿으며; 아미타불께서 당신을 구제해 주시기를 원하고; 아미타불께서 당신을 구제해주시는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부처님의 공덕을 전부 거두어 자신의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전부(全)’란 완전하여 조금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거둔다(攝)’란 꽉 잡아서 흡수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을 한다면 아미타불의 공덕을 완전히 흡수하여 자신의 공덕이 되는데 조금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앞에서 “명호로써 공덕을 불러오는데 다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여기서는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하면 부처님의 공덕을 전부 거두어 자신의 공덕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치는 똑같습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집지하는 자는 선근과 복덕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낱낱의 염불소리에 전부 많은 선근과 복덕을 갖추게 된다.

持佛名者,善根福德,同佛無異。 則一一聲,悉具多善根福德也。

 

우리는 조사님의 이러한 해석을 읽고 나서 마땅히 재삼 절을 올려야 합니다. 조사님은 역시 조사님이십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집지하는 사람은 선근과 복덕이 부처님과 차별이 없으시고, 부처님과 평등하여 똑같습니다. 우리 염불하는 사람은 선근복덕이 아미타불과 같다는 것을 감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대중) 믿을 수 있습니다.

 

“아! 스님! 저도 믿는다고 대답하고 싶고, 저도 스님께서 믿는다고 대답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제가 거울을 들고 제 모습을 비춰보니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어떡합니까!” 거울을 들고 비춰보면서 “아! 나 같은 사람의 선근복덕이 아미타불과 똑같다고?”라며 의심을 하지요.

 

우리가 염불하면 선근복덕은 반드시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선근복덕이 모두 육자명호 속에 들어있기에 우리가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을 하면 곧 부처님의 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므로 똑같아서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누더기 천과 황금의 비유】

 

물론 우리가 현재로서는 아직 부처님의 상호와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공덕과 능력이 없지만, 그렇다고 선근복덕이 부처님과 평등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여전히 평등하여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시절인연이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 우리가 염불하는데 그 속에 갖춰진 선근복덕이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치 하나의 누더기 천 조각 속에 황금을 집어넣었는데, 누더기 천을 열어보기 전에 겉모습만 보면 누더기 천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황금이 들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더기 천을 열어젖히면 황금의 본색이 들어나게 되고 마음대로 가져다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고 이 몸의 과보가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불이 비록 황금이기는 하나, 몸은 여전히 누더기 천과 같아서 가리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일단 몸이 망가지고 수명이 다해서 몸의 과보가 끝나 극락세계에 가게 되면 당장에 부처님과 같은 32상·80종호·삼명육통三明六通이 일시에 드러나게 됩니다. 비록 그때서야 드러나지만 여전히 지금 염불할 때 심은 것이고 구족한 것입니다.

 

‘그러니 낱낱의 염불소리마다’, 일성 일성의 염불마다 전부 많은 선근복덕을 포함하고 구족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당연히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라 부르겠지요! 그럼 생각해보세요, 이제까지 육자명호밖에 다른 것을 가지고 많은 선근복덕이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문인 아라한은 보리선근이 적고, 인천의 유루복업은 복덕이 적기에, 모두 적다고 말하지 많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발원으로 지명염불을 한다면 낱낱의 염불소리마다 모두 많은 선근과 복덕을 구족하게 됩니다.

 

조사님들의 교증敎證은 이 점(오직 염불만이 많은 선근이고 다른 것들은 모두 적은 선근이다)에 대해 명명백백하게 설명해 주셨기에 아주 분명하여 모호하지 않습니다.


7) 사례를 들어서 설명함

 

경전의 문구와 조사의 말씀들은 ‘이론적인 증거理證’입니다. 다시 말해 교리상의 증거로써 염불은 많은 선근이고 나머지 행들은 적은 선근임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두 가지 실제 사례를 말씀드려서 ‘사실적 증거事證’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즉 실제 사례를 들어서 염불이 많은 선근이고 염불 이외의 수행은 선근복덕이 염불만 못하다는 증명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사례는 모두 홍원사에서 출간한 『염불감응록』제1집에 나오는 것입니다.

 

【『법화경』을 독송한 비구니의 이야기】

 

『염불감응록』제1집에 나오는 ‘법화경을 독송하던 비구니가 관기로 환생하다(誦法華尼,轉生官妓)입니다. 『법화경』을 독송하던 사람이었는데, 전생에 그녀는 출가한 비구니스님이었지요. 그러나 결국 다음 생으로 환생하고 나서 타락하여 관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문을 읽으면서 해석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양영숙이 영주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이다(歐陽永叔知潁州)’, 구양영숙은 사람의 이름이고, 그가 영주 지방에서 지방 관리를 지냈다는 것입니다. ‘지知’는 벼슬을 한다는 말로서, 지현知縣이라든가 지부知府(예전에, 중국의 관명(官名)을 이르던 말)등의 관직을 지냈다는 것입니다. ‘관기官妓 한 명이 있었는데 입에서 연꽃향이 나왔다’, 그녀가 말을 할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아주 맑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는데 마치 연꽃의 향기와 같았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 사람은 평범하지가 않습니다! 말을 할 때 모두 연꽃의 향기가 났습니다. ‘전생을 아는 스님 한 분이 계셨다’, 어떤 스님이 과거와 미래를 아는 신통력이 있었지요. 그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기생의 전생은 비구니스님이었고, 『법화경』을 삼십년을 독송하였는데, 한 생각 차이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금생은 관기였고, 전생에는 출가스님이었는데, 그녀가 수행하던 법문은 오로지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이었지요. 『법화경』은 우리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경전입니다. 그런 『법화경』을 그녀가 삼십년을 독송한 것입니다. ‘한 생각 차이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을 한 생각 차이라 말할까요? 바로 그녀가 정토왕생을 구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데, 이 한 생각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한 생각 차이가 있으면 타락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 스님께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구양영숙은 믿지 못하고서 관기에게 물었지요. “『법화경』을 읽은 적이 있느냐?” 그러자 관기가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정조를 잃은 몸이 어찌 독경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제가 이 지경까지 전락하여 관기가 되었는데, 어떻게 한가한 시간이 있어서 경전을 독송하겠습니까?)

 

그래서 ‘『법화경』을 건네주자 막힘없이 줄줄 독송하였다’, 시험 삼아 그녀에게 『법화경』 한 권을 주자, 그녀가 비록 읽은 적이 없었지만 경을 독송하는데 마치 흐르는 물처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조금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다른 경전을 주자 읽지를 못하였다’, 다른 경전을 바꿔서 주니까 읽을 줄 몰랐다는 것이지요.

 

‘이로써 그 스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음을 알았다’, 이로써 그 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녀가 전생에 『법화경』을 삼십년 독송하여 이러한 훈습이 있었기 때문에 금생에 『법화경』을 가져다주자, 비록 금생에 경전을 독송한 적이 없었지만 독송하는데 아주 순조롭고 아주 유창했던 것이고, 다른 경전을 줬을 때는 읽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가 전생에 틀림없이 『법화경』을 독송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사례는 송나라 때 왕일휴의 『용서정토문』속에 기재되어 있던 것입니다. 용서거사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만약에 이 비구니가 서방법문을 알았었다면 상품상생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을 몰라서 기생으로 타락하였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그녀가 전생에 비구니였을 때 만약에 염불하여 서방정토의 왕생을 구하는 이 법문을 알았었다면, 그녀의 삼십년 공부로써 아미타불을 불렀다면 상품상생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녀가 몰라서 염불을 하지 않았고 서방정토의 왕생을 구하지 않았기에 결국 금생에 환생하여 관기로 타락을 해버렸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의 공행功行은 그녀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녀가 삼십년 동안 『법화경』을 독송하였는데, 우리로서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을 겁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서방법문으로써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자는, 그 구제의 공덕이 커서 복보를 어찌 쉽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만약에 정토염불법문으로써 사람들에게 서방극락세계에 왕생을 구하기를 가르치면, 그럼 중생을 구제하는 공행과 힘이 매우 크고 복보 역시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아래에 혜정법사님께서 평어 하나를 적어서 화룡점정畫龍點睛을 해주셨습니다. ‘평하기를: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는 것도 이미 쉽지 않은 것이고’, 출가하여 수행할 수 있다는 것도 이미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삼십년의 고행은 더욱 쉽지 않았다’, 하물며 그녀가 삼십년의 고행으로 『법화경』을 독송했다는 것은 더욱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지요. ‘오로지 자력만 의지하고 타력의 가지加持가 없었기에 번뇌를 조복하지 못하고서 다시 윤회하여 미혹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은 자신의 수행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어서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업력의 보호와 가지가 없었고 또 번뇌를 끊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육도윤회를 하게 되었는데, 도리어 한 생이 한 생만 못하여 전생의 수행을 미혹했을 뿐더러 금생에 더 이상 『법화경』을 독송하지 않았으며, 금생에도 출가를 못하고서 관기로 전락한 것입니다.

 

‘다른 법문에서 도를 배우는 것은 개미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염불하여 왕생하는 것은 순풍에 돛단배가 물결을 따르는 것과 같다’, 기타 법문에서 불도를 이루려면 그것은 마치 개미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너무나 어렵습니다. 염불왕생은 어떨까요? 마치 순풍에 돛단배처럼 물의 흐름을 따르고 바람의 흐름을 따라서 아주 빠르다는 것입니다. ‘극락에 왕생하지 않으면 여전히 사바에 있게 되지만, 일단 서방에 태어나면 영원히 윤회를 끊어버린다’, 당신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않는다면 모두 사바세계에서 윤회를 하며 빙빙 돌아야 하지만, 일단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이 비구니스님이 삼십년 동안 어렵게 『법화경』수행을 하셨다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육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습니다. 그럼, 만약에 염불을 했었다면요? 완전히 달라져서 틀림없이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었겠지요.

 

【최파의 이야기】

 

다음은 또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겠습니다. (두 가지 사례를 대조하며 설명할 수 있습니다) ‘최파가 게송을 지으니, 혀가 연꽃을 닮았다崔婆作偈,舌如蓮花’인데, 『염불감응록』제1집에 있습니다.

 

최파, 이름만 들어도 바로 평범한 백성이고 평범한 아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아낙네들이 지위가 없었을 때,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장씨 집안이면 ‘장파’라 부르고, 이씨 집안이면 ‘이파’라고 불렀습니다. 최파는 아주 평범한 아낙이고 지위가 낮아서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염불을 해서 지혜가 열렸고 게송도 지을 줄 알았으며, 나중에 그녀가 왕생한 뒤 혀의 모양은 연꽃을 닮았습니다.

 

송나라 때, 동평東平이라는 지방에 양씨 성을 가진 집안이 있었지요. 그 집의 하인인 최파는 치주淄州 사람으로서, 선의랑 원명의 유모였습니다. ‘선의랑宣義郎’은 관직의 이름이고, 이 사람의 이름은 원명元明이었습니다. 최파는 평생을 채식하였고, 성품은 아주 어리숙하여 지혜가 없었으니, ‘동배들과 길고 짧음을 다툴 수 없었다’, 관직이 높은 집안에는 수많은 하인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 중의 한 명이었지요. 그런데 성정이 매우 어리석고 말이 서툴러서 남들과 비교하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지요. 옳아도 틀린 것이고, 틀려도 여전히 틀린 것이며, 무슨 일이 생겨서 그녀가 어떻다는 말만 나오면 무조건 그녀가 틀린 것이었는데, 그런대로 그녀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녀의 여주인인 조부인은 ‘선학에 뜻을 두었다’, 선종을 배우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최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옆에서 여주인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여주인이 불교를 믿고 있었기에, 그녀도 그 영향을 받아 불교를 믿게 되었지만, 선종을 배울 수가 없었지요. 그녀처럼 이렇게 어리석은 성품으로는 선을 배우려 해도 배울 수가 없었기에 오로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주인은 선을 배우고 그녀는 오로지 아미타불만 불렀던 것입니다. ‘경건한 정성으로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그들만의 장점이 있는데, 바로 매우 경건하고 정성스러워서 계산하고 따지는 마음이 없으며,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광대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녀가 비록 어리석기는 하나 수많은 총명한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가지 못하지요’

 

그녀는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 염불하기를 원하고 착실하게 염불을 하였는데, 매우 경건하고 정성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不少輟)’, ‘철輟’은 멈춘다는 뜻으로, 그녀가 여태껏 염불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염주를 돌리지 않았기에 몇 천만번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평소에 염불을 할 때, 염주를 들고 숫자를 세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도대체 하루에 염불을 얼마나 하였는지, 평생 동안 염불을 얼마나 하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아주 평범하고 아주 어리숙하고 아주 착실하고 본분을 하는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염불인으로, 전수염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녀는 글도 모르고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고, 오로지 염불만 할 줄 알았습니다.

 

‘소흥18년紹興十八年’, 즉 1148년에, ‘72세가 되던 해’, 그 해에 그녀는 72세였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병이 생기게 되는데, 그녀 역시 병이 나서 ‘설사를 하며 침대를 내려올 수 없었다’, 대소변을 모두 침대위에서 보면서 침대를 내려올 수 없었으니, 병세가 매우 심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염불을 더욱 성실히 하였다’, 비록 이렇게 심한 병에 걸렸지만 염불은 오히려 더욱 정성스럽게 더욱 성실하고 공경스럽게 하신 것입니다. ‘문득 아무 일 없듯이’, 갑자기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염불을 하더라도 비록 병이 날 수 있지만 그래도 고통은 적습니다. 그녀는 게송 한 수를 지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보세요, 글자를 모르고 유모를 하던 노파가 72세가 되어서 뜻밖에 게송을 지어서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불렀을까요? 곡조는 모르겠지만 네 구절 말씀이 있습니다.

 

서방으로 가는 길 수행하기가 쉬운데,

위로는 재 하나 없고 아래로는 구덩이가 없으니,

가실 때 신과 양말을 신을 필요 없이

연꽃을 밟으며 걸음걸음 왕생한다네.

西方一路好修行, 上無條嶺下無坑,

去時不用著鞋襪, 腳踏蓮花步步生。

 

이 네 구절은 매우 수수하고 매우 평이하며, 또 이해하기가 매우 쉽고 분위기 역시 매우 아름답습니다.

 

서방으로 가는 길 수행하기가 쉬운데’, 그녀가 말하기를,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이 길은 걷기가 아주 좋다고 하였는데, 교리상으로는 ‘이행도’라 부르지요. 그녀는 ‘이행도’라는 세 글자를 말할 줄 몰랐기에 ‘서방으로 가는 길 수행하기가 쉽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수행이 쉬울까요?

 

‘위로는 재 하나 없고 아래로는 구덩이가 없다’, 아마도 그녀가 사는 곳이 산간 지역이어서 집을 나서면 산을 오르거나 구덩이로 들어가야만 했기에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서방으로 가는 길은 매우 평탄하여 위로는 재가 없고 아래로는 구덩이라든가 움푹 파인 곳이 없는 평탄한 대로라는 것입니다.

 

‘가실 때 신과 양말을 신을 필요 없이’, 일반적인 풍속으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옷차림이 가지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죽은 뒤에 입을 옷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서방정토에 왕생하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설사 길가에서 죽어서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는 거지가 다 헤어진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맨발로 있더라도 똑같이 장엄하게 왕생합니다. 이 세상의 물건들은 그곳에 가면 아무런 쓸모가 없고, 서방극락세계에 도착하면 ‘도반들이 서로 와서 옷을 입혀준다’, 보살들이 서로 앞 다투어 하늘 옷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므로 여기 것은 모두 쓸모가 없습니다.

 

‘연꽃에 밟으며 걸음걸음 왕생한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아미타불의 연꽃을 밟으며 걸음걸음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합니다.

 

좋습니다! 그분이 노래하신 네 구절의 말씀은 운율과 분위기가 모두 아주 좋아서 ‘읊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녀가 매일매일 거기서 이 네 구절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묻습니다. “아, 최파! 당신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누가 지은 것입니까?”

그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제가 지었습니다” (이 게송은 제가 지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또 묻습니다. “아! 당신이 지은 것이라면, 그럼 당신은 언제 가십니까?” (‘서방으로 가는 길은 수행하기가 쉽다’고 하셨으니, 가신다면 언제 가시는 겁니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신시에 갑니다’ 옛날에는 시간을 계산할 때 요즘처럼 몇시 몇시라고 말하지 않고 12시진을 사용하였기에, “신시(申時:오후 3시에서 5시까지)가 되면 저는 갑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과연, 그 시간이 되자 그녀는 편안하게 왕생하였는데, 그 때가 10월 5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스님들이 다비식을 하는 방법으로 그녀를 화장하였습니다. 화장을 한 뒤 전부 다 타버렸지만 오직 그녀의 혀만 남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연꽃과 같았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 노파는 아무 것도 모르고 단지 어리숙하게 염불만 하였지만, 왕생은 이렇게 수승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설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아미타불만 부르기만 하면 위없는 깊고 미묘한 선이라 부른다無上深妙禪”고 하신 것입니다. 그녀의 주인은 선을 닦는 분이셨고, 그녀 자신은 오로지 한 구절 부처님명호만 부를 줄 알았지만, 가실 때는 이렇게 소탈하고 자재하셨으니, 이를 두고 ‘위없는 깊고 미묘한 선’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육자는 삼아승지겁을 초월한다】

 

무엇이 많은 선근이고 무엇이 적은 선근인가에 관해서 이해가 다르면 수행도 다르게 되고 심리상태 역시 다르게 됩니다.

 

만약에 단지 글자만 보고 대강 뜻을 짐작하는 정도로 이해하여 ‘염불은 단지 한 가지 수행일 뿐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적은 것이고, 여기다 기타 갖가지 수행을 보탠다면, 이것을 많은 선근이라 부른다’고 생각한다면, 만약에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마음은 불안하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법문을 닦아야 하는가? 도대체 어느 정도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많은 선근에 도달할 수 있는가?’

 

만약에 우리가 ‘육자명호 속에는 이미 모든 선근공덕을 총괄하고 있기에 나무아미타불명호만 칭념하기만 한다면 바로 많은 선근과 큰 선근·위없는 선근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마음은 안정이 될 것이고, 안심하고 염불할 수 있을 것이며,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내가 나이도 많고 독경도 할 줄 모르고 다라니를 외울 줄도 모르고, 여러 가지 법문을 배울 줄도 모르는데, 그럼 나는 도대체 왕생할 수 있는가 없는가?”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딱 좋습니다! 다른 것을 할 줄 모를수록 때마침 전수염불을 해서 아미타불의 본원에 부합한다면 이것이 바로 많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 되므로, 이것이면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기쁨이 생기게 되겠지요.

 

인광대사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삼아승지겁 동안 복과 지혜를 닦을 필요 없이

오로지 육자를 의지하여 윤회를 벗어난다.

不用三祇修福慧, 但憑六字出乾坤。

 

이 두 구절의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수행하려면 복과 지혜를 닦아야 하는데, 자력수행에 따르면 삼대아승지겁을 거칠 필요가 있으므로, 이른바 ‘삼아승지겁 동안 복과 지혜를 닦고, 백겁동안 상호를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득히 먼 시간을 거쳐서 복과 지혜를 닦아야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토법문에서는 그럴 필요 없지요. 당신이 삼아승지겁 동안 복과 지혜를 닦으면서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을 누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의지할까요? ‘오로지 육자를 의지하여 윤회를 벗어난다’, 당신이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를 의지하기만 하면 삼계육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육자명호는 삼아승지겁의 복과 지혜를 초월하는 큰 선근이자 큰 복덕입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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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떤 것이 ‘일심불란’인가 (정종淨宗법사 법어 / 정전스님 역)

 

출처/純淨時代

 

 【두 가지 해석】

 

  이어서 『아미타경』에서는 “명호를 집지하여 하루나……이레 동안 일심불란하면”이라고 설하셨는데요, ‘일심불란’이란 네 글자는 두 번째 관문으로서 왕왕 우리 수많은 수학자修學者들로 하여금 보기만 해도 두려움을 느끼고 보기만 해도 뒷걸음질을 치도록 만듭니다. “아이고! 일심불란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궁극에는 정토법문을 포기해버립니다.

 

  비록 염불을 많은 선근이라고 말하기는 하나, 만약에 반드시 선정상태의 일심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이러한 많은 선근은 여전히 쉽지가 않을 겁니다.

 

  ‘일심불란’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성도문의 해석을 따른다면 아주 어렵습니다. 선정의 일심불란·사일심불란事一心不亂·이일심불란理一心不亂……당신은 꿈도 꿀 수가 없습니다. 사일심불란은 아라한의 경계이고, 이일심불란은 초지이상 보살의 경계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정토종에서 해석하는 ‘일심불란’이란 바로 ‘전심으로 염불하여 난잡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일심’이 바로 전심專心이고 ‘불란’이 바로 난잡하지 않다는 것으로, 잡행잡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바로 ‘쉬운 행易行’이어서 누구든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토문에는 따로 규칙이 있다】

 

  그럼 왜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해석이 나온 걸까요? 그것은 입장과 관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문의 관념대로라면 ‘만약에 번뇌를 조복하고 나아가 번뇌를 끊지 못한다면, 생사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써 ‘일심불란’에 대한 해석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일심불란이 바로 선정상태의 청정함과 번뇌를 조복함’ 등등이라 말하게 되겠지요. 만약에 정말로 그러하다면 정토법문은 ‘이행도’가 아니어서 ‘특별법문’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일반법문과도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됩니다. 인광대사께서는 이것은 일반법문의 교리·일반적인 자력수행·계정혜를 닦는 수행방법으로써 정토법문을 판단하는 것이라며, 이것을 ‘가로로 벗어나는(橫超:번뇌를 끊지 않고 윤회를 벗어남) 법을 가지고 세로로 벗어나는데(豎出:번뇌를 끊고 윤회를 벗어남) 사용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토법문은 본래 부처님의 원력으로 삼계를 횡초橫超하는 것인데, 결국 자력수행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기어오르는 성도문의 수행과 똑같게 되었으니, 이것은 틀려도 크게 틀린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자력수행법문관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정토법문 속으로 들어오면 마땅히 본래 수행하던 관념들을 내려놓고서 정토문의 규칙대로 정토종 조사님들의 전승에 따라서 해석하고 이해를 해야만 비로소 정확할 수 있습니다.

 

  1) 이치로써 추론함

 

 【범부가 반드시 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아미타경』은 석가모니불께서 특별히 우리 범부들을 위해 설하신 경으로서 수행이 쉬운 안락한 법문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중생들을 위해 설하신 것이라면, 틀림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일 겁니다. 만약에 ‘일심불란’이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깊은 공부의 경지여서 오탁악세의 범부들이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그럼 석가모니불께서 이 법문을 설하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이른바 ‘세 가지 근기에 두루 가피를 주고 영리한 근기와 둔한 근기를 전부 거두어들인다’는 말은 한 구절 빈말이 되고 말겠지요.

 

  용수보살님의 『이행품』에서는 염불법문은 이행의 법문이요, 안락한 법문이요, 반드시 성취하는 법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염불을 하시면서 아주 괴롭게 염불하고 아주 힘들게 염불하며 왕생이 결정되지 않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염불법문의 특색이 아닙니다.

 

  어떤 연우님이 저에게 말합니다. “스님, 저는 불칠법회에 자주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좋지요, 몇 번을 참가하셨나요?”

  “저는 전국 각지에서 하는 법회를 열 몇 차례나 참가하였는데, 꼭 일심불란을 얻고 싶었습니다”  

  “아, 대단하십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습니까?”

  “얻지 못했습니다!”

  “얻지 못했다고요? 그래도 조금은 얻지 않았나요?”

  “조금도 못 얻었습니다!”

  “조금도 못 얻었다고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제가 개인적으로 조용히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는데 한 사람도 얻지 못했답니다. 장씨 당신은 일심불란을 얻었습니까? 아니요. 이씨는요? 아니요”

 

  그는 도처에서 불칠법회에 참가하였는데, 사천에서 법회가 있으면 사천으로 달려가고, 복건에서 법회가 있다면 복건으로 달려갔습니다. 전국을 다 다녔지만 그가 방문한 사람치고 일심불란을 얻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석가모니불의 설법은 이치에 계합하고 근기에 계합합니다. 부처님께서 오탁악세의 중생들을 위해 설하신 법문이 뜻밖에도 전국을 다 돌아다녀 봐도 단 한 사람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근기에 계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설법이 근기에 계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군가 ‘일심불란’을 가지고 잘못 해석하고 치우치게 해석하였기에, 우리가 듣고 나서 어렵게 느껴지고 실천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리를 놓는 비유】

 

  정토법문이 ‘이행도’라면 어디가 쉬울까요? 바로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력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게 쉬운 것이지요. 아미타불의 대원력이 바로 ‘염불왕생원’의 원력입니다. 따라서 염불은 반드시 쉬운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에 『아미타경』속의 ‘집지명호, 일심불란’에 대해 반드시 어떻게 깊은 선정에 들어서 망념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고 해석한다면 당연히 쉽지가 않겠지요.

 

  여러분,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위해 설정해주신 왕생의 방법이 어려운 게 좋겠어요, 아니면 쉬운 게 좋겠어요. 여러분들이 말씀해보세요?

  (대중) 쉬운 게 좋아요!

 

  틀림없이 쉬운 게 좋겠지요! 쉬워야만 우리가 할 수 있고 그래야만 즐거움이 있겠지요. 만약에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괴로울 겁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동체대비同體大悲이시므로 우리의 괴로움을 당신의 괴로움으로 여기시고, 우리의 즐거움을 당신의 즐거움으로 여기십니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괴로우면 나도 괴롭고, 중생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중생들이 죄업이 두텁고 또 매우 게으르다고 해서 일부러 어려운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려서 그 사람이 수행을 하면서 모진 고초를 다 겪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구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전이 우리의 상황을 다 아시고 미리 우리를 위해 준비를 하시면서 “오탁악세의 중생들은 어리석어서 진리에 밝지 못하고, 죄악이 무겁고 나태하고 방일해서 전혀 수행할 수 없으므로, 내가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아주 쉽게 너희들을 구제하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우주법계 내에 가장 간단하고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기에 한 줄기 강이 있는데 아주 넓습니다. 강의 동쪽은 가난하고 강의 서쪽은 부유합니다. 동쪽 사람들이 서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다리가 없고 물살도 급해서 물에 들어가서 강을 건너려던 사람들은 한 명 한 명씩 전부 빠져죽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사람과 차량들이 편리하게 막힘없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비심을 내어 대교大橋를 하나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가 자비심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황들을 빈틈없이 꼼꼼히 고려하여 노인이든 어린이든 심지어 장애인들조차도 아주 편리하게 다리를 오를 수 있고 어떠한 차량도 전부 자유롭게 다리에 올라서 아주 순조롭게 건널 수 있을 겁니다. 절대 다리 입구를 오르기 힘들게 만든다거나 다리 중간에다 또 높은 담을 쌓아놓고서 가로막지 않을 것입니다.

 

  육자명호가 바로 사바세계로부터 극락세계로 도달하는 다리입니다. 아미타불이 바로 다리를 놓은 사람이고, 석가모니불이 바로 다리 입구에 서서 우리더러 올라오라고 외치던 사람이지요. 우리가 빈손으로 걸어서 발걸음을 따라 다리를 밟기만 하면 올라갈 수 있으니, 아주 간단하고 아주 쉽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왕생을 원하기만 하면 아주 편리하고 아주 쉽게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심불란’을 가지고 아주 어렵게 해석해버렸으니,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만약에 선정에 도달하여 망념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왕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대교 가운데 중간 부분에다가 다시 몇 미터나 되는 높은 담을 쌓아놓고 모든 사람과 차량들을 전부 막아버린 게 되겠지요. 석가모니불께서 염불을 ‘일심불란’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 설마 명호의 대교 가운데 다시 담을 세워서 가로막은 것이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석가모니불께서 염불을 ‘일심불란’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를 보호하려는 것으로서, 우리가 염불을 조금 하다가 또 안 한다든가 염불을 조금 하다가 또 잡행잡수를 할까봐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따라서 ‘일심불란’은 명호대교 양쪽에 있는 가드레일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가 다리 밑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잘 가세요! 조심하시고요, 발걸음이 흩트려지게 해서는 안 돼요! 이 다리를 벗어나서는 안 돼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집지명호, 일심불란’이란 말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염불을 할 때 전심을 기울여야 한다! 잡다하게 하지 말고 함부로 주장을 내세워서 유일한 길인 염불을 버리고서 다시 길이 통하지 않는 다른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의 말씀이었습니다.

 

 2) 삼경을 대조하여 설명함

 

  다음으로 우리는 관련 있는 경전의 증거를 인용하여 ‘일심불란’의 참뜻을 설명하겠습니다.

 

  ⑴ 『아미타경』

 

  우선 『아미타경』을 보겠습니다. 『아미타경』에서 먼저 ‘집지명호’를 설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일심불란’을 설하셨는데, 그 뜻은 명호를 집지하는데 마땅히 일심불란해야 한다는 것이고, 일심불란이야말로 명호를 집지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위험한 길에서 횃불을 드는 비유】

 

  ‘집지執持’라는 두 글자에는 모두 손수변이 있는데, ‘집’이란 꽉 잡고 놓지 않는 다는 것이고, ‘지’란 계속 이어져서 끊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둠속에서 위험한 길을 걸을 때 횃불을 들고 길을 비추는데, 주변이 온통 칠흑 같아서 오로지 이 횃불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한마음 한뜻으로 이 횃불을 꽉 잡고서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렇게나 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도중에 함부로 횃불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도중에서 횃불을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직 이 한 자루 횃불만 있기에 우리의 생명안전은 전부 거기에 의지해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한마음 한뜻이 될 것이며, 더 이상 딴 마음을 품을 수 없기 때문에 ‘일심’인 것입니다. 또한 도중에 포기를 해버리고 마음대로 다른 어떤 한 가지 물건을 막 잡지 않을 것이므로 ‘불란’인 것입니다. 딴 마음이 생기고 흩트려(난잡해)졌다면 수시로 낭떠러지와 깊숙한 구덩이로 떨어질 수 있으므로 감히 딴 마음을 품을 수 없고 흐트러질 수도 없습니다.

 

  ‘집지명호’ 역시 그렇습니다. 명호가 바로 이 횃불이고 신심이 바로 손입니다. 선도대사께서 『관경소』에서 말씀하시기를, “항상 깨끗한 믿음의 손으로 지혜의 빛을 잡는다(常以淨信心手,以持智慧之輝)”고 하셨습니다. 아미타불의 명호가 바로 지혜의 횃불이므로, 삼계육도의 어둡고 위험한 길을 통과하려면 우리는 오직 이 한 구절 광명명호를 완전히 의지하여 살아서부터 죽을 때까지 끝까지 집지(꽉 잡고)하여 조금이라도 감히 이것을 버리고서 우리의 근기와 상응하지 않는 법문을 배우지 않겠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명호를 집지하는 것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반면에 마음으로 집지하지 않고 딴 생각을 품고서 이리저리 망설이고 있다면 이것은 일심이 아닙니다. 염불이 이어지지 않고 염불이 중간중간에 끊어지며 염불에 전심을 기울이지 않고 염불을 좀 하다가 다시 내려놓고 다른 법문을 배우다 보면 난잡하게 되므로, 그것은 불란不亂이 아닙니다.

 

 【동란하지도 난잡하지 않다】

 

  난難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동란動亂이고, 하나는 난잡雜亂입니다. ‘일심불란’이란 바로 일심으로 명호만을 의지해서 전수염불하며 동란하지 않고 난잡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을 ‘동란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사람들로부터 “아! 아무개야! 당신의 염불은 공부성편功夫成片에 도달하지 못했고 청정심도 없고, 당신에게 아직 번뇌가 있고 아직 죄업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왕생한단 말인가?”라는 말을 들었어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마음이 당황하고 혼란스럽지 않으며, 그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스스로 ‘끝장이야, 왕생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미타불에게 이러한 위신력과 공덕이 있으시고 이러한 크신 서원력이 있으셔서 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흔들려서 “그러네요!”라고 말하지요. 그럼 마음이 혼란스럽게 되므로 일심이라 할 수 없겠지요. 무엇을 ‘난잡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마음이 동란(흔들리지)하지 않으면 행은 틀림없이 난잡해지지 않을 것이고, 마음이 매우 안정적이라면 우리는 착실하게 오로지 이 한 구절 명호만 부를 것입니다. 겉모습이 난잡한 사람은 마음도 틀림없이 동란할 것입니다. 그가 이 한 구절 명호를 부르면서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므로,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바로 “맞아요! 안 되지요.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어떡하긴요? 우선 저와 함께 『지장경』을 독송하여 업장소멸을 합시다”

  “좋아요, 가르쳐 주세요” 그 다음은 『지장경』을 독송하게 됩니다.

 

 『지장경』을 독송하는 게 좋을까요, 나쁠까요? 당연히 좋습니다! 그 다음에 『금강경』을 독송해서 지혜가 열리면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그것도 좋습니다. 전부 다 아주 좋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다 좋은데, 최후의 왕생은 어떡합니까? 그 사람 자신은 확신이 서지 않기에 동란하고 난잡하게 되겠지요.

 

  우리 전수염불하는 사람은 오직 한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전념하는데 두 가지 마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⑵ 이역본 『아미타경』

 

  다시 『아미타경』이역본을 보겠습니다. 현장대사께서 번역하신 『칭찬정토불섭수경』에서는 『아미타경』가운데 ‘집지명호’와 ‘일심불란’ 여덟 자를 한데 묶어서 ‘계념불란繫念不亂’이라는 네 글자로 번역하셨지요. 아미타불의 명호를 계념하여 난잡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아주 명백하고 아주 쉽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앞서 말씀드린 ‘집지명호’와 ‘일심불란’은 본래부터 일체여서 따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서 전지명호專持名號가 바로 일심불란이고, 일심불란이야말로 비로소 집지명호입니다.

 

  ⑶ 『무량수경』

 

 【아미타불께서 직접 기준을 정하시다

 

  여러분들께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염불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라는 것은, 이 사바세계에서 어느 분이 우리에게 일러주신 겁니까? 아십니까?

  (대중) 석가모니불이십니다!

 

  예, 그렇습니다!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우리에게 일러줄 수 없습니다.

 

  다시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염불왕생과 아미타불 본인이 설정하신 염불왕생은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대중) 다를 수 없습니다!

 

  다를 수가 없겠지요! 아미타불께서 “너희들이 이렇게 염불만 하면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석가모니불께서 “너희들은 반드시 저렇게 염불해야만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도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염불과 아미타불의 48원 가운데서 설정하신 염불은 틀림없이 똑같은 것이어서 절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미타불의 48원 가운데 제18대원을 ‘염불왕생원’이라 부릅니다. 이 원에서는 우리가 응당 어떻게 염불왕생할 것인가에 대해 규정을 해주셨는데, 이것은 아미타불께서 직접 정해주신 기준입니다. 석가모니불이든 시방제불이든 제대보살들이든 염불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법문을 설하신다면 절대 아미타불의 제18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왕생의 근원】

 

 『아미타경』속에서 말씀하신 염불왕생은 당연히 아미타불의 48원 가운데 제18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무릇 석가모니불께서 일대 불교 중에서 극락세계의 장엄을 설하시고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방법 등등을 설하신 내용들은 전부 『무량수경』의 48원을 벗어날 수 없으며, 특히 정토삼경은 더욱 한 맛의 경전이어서 하나의 맛 하나의 성질性質입니다. 예컨대 『아미타경』중의 ‘임명종시에 부처님과 성인 대중들이 그 사람의 앞에 나타나서’, 이 단락의 경문이 바로 48원 가운데 ‘임종 시에 대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제19원의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 제19원이 있었기 때문에 『아미타경』중에 임종의 내영이 있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아미타경』에서 “저 부처님의 국토에는 삼악도가 없느니라. 사리불이여! 그 부처님의 국토에는 악도의 이름조차 없거늘, 하물며 실지로 있겠느냐!”고 설하셨는데, 이것은 48원 가운데 제1원 ‘무삼악도원無三惡道願’과 제16원 ‘국무악명원國無惡名願’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48원 가운데 제1원에서 “내가 성불할 때, 나의 국토에 만약 지옥·아귀·축생 등의 삼악도가 있다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아미타경』속에서 ‘국무악도원’을 설하신 것이고, 제16원에서 “내가 성불할 때, 국토에 오로지 선만 있어서 나쁜 이름조차 들을 수 없을 것이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아미타경』에서 “악도의 이름조차 없거늘 하물며 실지로 있겠느냐”고 설하신 것이지요.

 

  아무튼 극락세계의 갖가지 장엄한 모습에 대한 기술들은 전부 48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염불왕생을 설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48원 가운데 제18원 ‘염불왕생원’의 내용입니다. 선도대사께서 『아미타경』의 종지에 대해 해석하시면서 말씀하시길,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왕생한다專念彌陀名號得生”고 하셨는데,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제18원 ‘염불왕생원’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토종을 배우고 염불을 배우려 한다면 아미타불의 서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그 이치가 자명합니다.

 

 【판매업자의 비유】

 

  예컨대 한 가지 제품에는 생산업자가 있고 판매업자가 있습니다. 판매업자가 판매하는 제품이 바로 생산업자가 생산한 것인데, 어떻게 판매업자가 판매한 제품이 생산업자가 생산한 제품과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다르다면 이것은 판매업자가 위조제품을 만들어서 소비자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아미타불은 생산업자이시고, 석가모니불과 육방의 항하사 제불은 모두 판매업자들입니다. 그 분들이 무엇을 판매합니까? 육자명호를 판매합니다. 그분들이 말씀하신 염불방법은 아미타불 본인이 세우신 제18원을 벗어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의 근원 하나의 맛으로서 절대 거짓이 섞여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선도대사께서 『관경』을 해석하시고 『아미타경』을 해석하시는 것은 모두 아미타불의 염불왕생의 본원의 입장에 서계시는 것입니다.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염원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시시각각 단단히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48원을 기준으로 삼아서 우리들이 왕생하는 길을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제18원의 경문】

 

  제18원에서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내지 십념’만 하면 반드시 왕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념十念’에 대해 선도대사께서 ‘십성十聲’으로 해석하신 것은, 입으로 명호를 부르는 지명염불持名念佛입니다. 『아미타경』에서도 ‘명호를 집지할 것’을 말씀하시고, 『관경』에서도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닐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런 것은 모두 일치한 것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경』속에서 지명을 ‘일심불란’하게 해야 한다고 설하셨고, 아미타불께서는 제18원에서 칭명을 하는데 ‘지극한 마음至心·믿고 기뻐함信樂·왕생을 하고자欲生’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두 가지를 대조해 보면 ‘일심’이란 바로 ‘지심·신락·욕생’하는 마음, 믿고 발원하는 마음이며, 어떠한 선정의 마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선도대사께서 어떨 때는 ‘일심으로 믿고 기뻐함一心信樂’을 말씀하시고, 어떨 때는 ‘일심으로 왕생을 염원함一心願生’을 설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여 의심하지 않고 퇴전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일심불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삼배왕생문】

 

 『무량수경』하권의 ‘삼배왕생문三輩往生文’ 상배·중배·하배에서 모두 ‘한결같이 오로지 무량수불을 부를 것(一向專念無量壽佛)’을 말씀하셨습니다. 선도대사께서 해석하시기를, “일체 중생의 근성이 달라 상중하가 있는데, 그 근성에 따라서 부처님은 모두 오로지 무량수불의 명호를 부를 것을 권유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일향전념’이야말로 석가모니불께서 일체 중생에게 염불을 권유하는 총강령과 총요구이며, 당신이 상근기든 중근기든 하근기든 간에 모두 ‘일향전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미타경』에서 상대하고 있는 근기들이 삼배의 밖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럼 ‘일심불란’이 바로 ‘일향전념’입니다.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향하되 다른 불보살님들을 향하지 않기 때문에 ‘일향’이 바로 ‘일심’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다른 수행과 다른 법문을 섞지 않기 때문에 ‘전념’이 바로 ‘불란’, 난잡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향전념’이 바로 ‘일심불란’이다! 이것 역시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⑷ 『관경』

 

  다시 『관경』을 보겠습니다. 『관경』에서 비록 정선십삼관定善十三觀과 산선삼복업散善三福業을 설하셨으나, 마지막 ‘유통분’에서 석가모니불께서 아난에게 부촉하신 것은 13정관도 아니요 산선삼복도 아니며, 『관경』의 뜻을 드러내는 순서에 따라 마지막 관법·마지막 일품인 하하품(하품하생)의 칭명염불을 부촉하시면서 “아난아! 그대는 무량수불의 명호를 잘 지녀야 하느니라 阿難!汝好持無量壽佛名”고 설하셨습니다. 하하품의 지명염불은 어떠한 지명이었습니까? 경문에서 말씀하셨지요.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여 십념을 구족하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至心令聲不絕,具足十念,稱南無阿彌陀佛” 이것은 『아미타경』의 “명호를 집지하여 하루나……이레 동안 일심불란하면執持名號,若一日……若七日,一心不亂”과 『무량수경』‘제18원’에서 말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내지 십념으로至心信樂,欲生我國,乃至十念”와 모두 동일한 함의입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정토삼경이고, 똑같이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것이며, 똑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지념持念할 것을 설하셨고, 똑같이 아미타불의 제18원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일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로 대조를 해본다면 『무량수경』제18원에서 말하는 ‘십념’의 ‘염念’과 『관경』하하품에서 말하는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함’의 ‘칭稱’과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집지명호’의 ‘집지執持’는 동일한 부류로서 모두 염불하는 방식,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말하므로, 이른바 지명염불이란 실상實相·관상觀想·관상觀像·참구參究 등등의 염이 아닙니다.

 

  제18원의 ‘지심·신락·욕생’과 『관경』하하품의 ‘지심’, 『아미타경』의 ‘일심’도 동일한 부류로서 모두 염불하는 심리, 즉 믿음과 발원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선정·청정·망념을 제거하는 등등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하품의 중생이 임종 시에 지옥의 광경이 전부 나타났는데, 그에게 무슨 선정심·청정심 등등이 있겠습니까? 그에게는 단지 일심으로 구원을 바라고 일심으로 의지하려는 마음, 즉 우러러 구제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제18원의 ‘내지’와 『관경』하하품의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함’과 『아미타경』의 ‘불란’은 동일한 부류로서 모두 염불하는 모습과 형태, 즉 전일하여 잡다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선도대사님은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함’을 ‘소리소리 이어지게聲聲相續’라고 해석하셨지요.

 

  나아가 ‘내지 십념’과 ‘십념을 구족하게’와 ‘하루나……이레 동안’도 같은 부류로서 모두 염불하는 시절을 말하는 것인데, 일평생의 염불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십념·하루·이레에 국한되지 않고, 단지 중생들이 염불을 만나는 시간이 다르고 수명의 길고 짧음이 다르기 때문에 표현을 달리한 것뿐입니다. 선도대사님은 전체적으로 “위로는 백년을 다하고 아래로는 칠일·일일·십성·삼성·일성 등(上盡百年,下至七日、一日,十聲、三聲、一聲等)”이라 해석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삼부경에서 설하신 염불의 시절에 비록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지만 전부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지목하는 바도 모두 같은 것이어서 모두 일평생의 염불입니다. 이른바 “한번 발심하고 나서 맹세코 이번 생을 마칠 때까지 퇴전하지 않으며 오직 정토를 기약으로 한다(一發心以後,誓畢此生,無有退轉,唯以淨土爲期)”는 것이지요.

 

  이렇게 『아미타경』과 『관경』을 비교해 보면 ‘집지명호’가 바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고, ‘일심불란’이 바로 ‘지극한 마음으로 끊이지 않는 것’이요, 바로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구제에 귀명하고 의지하여 끊임없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하며 잡다하게 뒤섞지 않는 것입니다. 역시 아주 쉬워서 어렵지 않습니다.

 

  하하품의 중생이 비록 임종 시 죽음의 고통에 시달려서 마음이 한없이 두렵고 당황스러워 전혀 선정이 없었지만 그는 일심불란하게 염불을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을 바라기 때문이지요! 남에게 목숨을 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일심인데, 어떻게 이심二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심으로 남이 구해주기를 바라므로, 기타 개인적인 생각은 조금도 섞이지 않을 겁니다. ‘남의 구제가 필요 없이 나 스스로 나 자신을 구제할 수 없을까? 상대방이 나를 구제할 수 있을까? 나를 구제할 수 없다면 어떡하지? 나 스스로 다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은 모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연히 일심불란이 되는 것이지요.

 

  하하품에서 임종 시 고통에 시달리던 중생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할 수 없겠습니까? 정말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공부가 부족해서 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하하품의 사람에게 무슨 공부가 있습니까? 구제를 바라는 마음이 없고 귀명하지도 착실하지도 않고 도리어 교만하다면, 이것이 바로 이심이고 난잡한 것이어서 일심불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선도대사께서 우리에게 “자신은 현재 죄악생사범부로서 광겁 이래 항상 침몰하고 항상 유전하며 출리의 기연이 없다는 것을 결정코 깊이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끌어주신 것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깊이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바로 하하품의 중생입니다.


 3) 조사의 해석

 

  ⑴ 선도대사의 『법사찬』

 

  ‘일심불란’에 대해 선도대사님 역시 당신의 해석이 있습니다. 선도대사님은 『법사찬』속에서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專復專’는 세 글자로써 ‘일심불란’을 해석하셨지요.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네.  敎念彌陀專復專。

 

  앞에서 우리도 배웠었지요. 석가모니불께서 우리에게 아미타불을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어떻게 부르라고 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일일에서 칠일 동안 일심불란’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지요. ‘일심불란’에 대해 선도대사님은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고 해석하셨는데, 우리더러 전일하게 또 전일하게 염불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전일하게, 더욱 더 전일하게 하라는 말씀인데요, 마음도 전일하고 행도 전일하고, 안에서도 전일하고 바깥에서도 전일하며, 사람들 앞에서도 전일하고 사람들 뒤에서도 전일하며, 현재도 전일하고 장래에도 전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의 ‘전專’자입니다. ‘일심’이 바로 전심이고, ‘불란’이 바로 뒤섞이지 않는 것, 기타 법문을 잡행잡수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간단하여 ‘일심불란’이 바로 ‘전專’입니다.

 

  ⑵ 선도대사의 『관경소』1

 

 『관경사첩소』제1권 <현의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들으면

  곧 마땅히 명호를 집지하여 일일에서 칠일까지 일심으로 왕생을 염원해야 한다.

  그러면 임종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인대중들과 함께 영접하여 왕생한다.

  若有善男子、善女人, 聞說阿彌陀佛, 即應執持名號, 一日乃至七日, 一心願生;

  命欲終時,阿彌陀佛,與諸聖眾, 迎接往生。

 

  이 단락의 선도대사님의 해석에 의하면 ‘일심불란’이 바로 ‘일심으로 왕생을 염원하는 것(一心願生)’임을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집지명호’ 앞에다 선도대사님은 ‘곧 마땅히(卽應)’ 두 글자를 더하셨는데, 이것은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권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른바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네’의 ‘가르침’입니다.

 

  ⑶ 선도대사의 『관경소』2

 

 『관경소·산선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범부들이 일일에서 칠일까지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하면

  반드시 왕생한다.

  一切凡夫,一日七日,

  一心專念,彌陀名號,定得往生。

 

  선도대사께서 ‘집지명호, 일심불란’이라는 경문을 한데 합쳐서 ‘일심전념一心專念’으로 해석하셨는데 어려울까요?

  (대중) 어렵지 않습니다.

 

  ‘일심전념’은 조금도 어렵지 않잖아요! 당신이 이 명호를 부르기를 원치 않으면 몰라도.

  물론 어렵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고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전념할 수 없습니다. 이 어려움은 법문이 어려운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한 구절 명호를 부르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여섯 자만 부르면 되거든요. 만약에 당신더러 반드시 『법화경』·『화엄경』등을 외우라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여섯 자는 아무리 어렵다 해도 누구나 외울 수 있기에 일심으로 전념하기만 하면 됩니다.

 

  ⑷ 선도대사의 『관념법문』

 

 『관념법문』에서도 말씀하셨지요.

 

  만약 어떤 남자와 여인이 하루나 이레 동안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한다면,

  그 사람이 임종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자연히 영접하러 오셔서

  곧바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한다.

  若有男子、女人,或一日、七日, 一心專念, 彌陀佛名。

  其人命欲終時,阿彌陀佛與諸聖眾, 自來迎接,

  即得往生,西方極樂世界。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선도대사님은 똑같이 ‘일심전념’을 가지고 지명의 ‘일심불란’을 해석하셨는데, 역시 하나의 ‘전專’이었습니다.

 

  ⑸ 선도대사의 『왕생예찬』

 

 『왕생예찬』입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들었다면 곧 마땅히 명호를 집지하여

  하루나 이틀이나 이레 까지 일심으로 칭명염불을 하여 난잡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임종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곧바로 저 나라에 왕생하게 된다.

  若有眾生,聞說阿彌陀佛, 即應執持名號,

  若一日,若二日,乃至七日, 一心稱佛不亂;

  命欲終時,阿彌陀佛,與諸聖眾, 現在其前;

  此人終時,心不顚倒,即得往生彼國。

 

  선도대사님은 경문 ‘일심불란’의 중간에다 두 글자 ‘칭불稱佛’을 더하여 ‘일심칭불불란’이라 하셨는데, 이렇게 해서 앞의 문장을 받아서 뒷 문장을 잇는 작용을 일으키니, 그 의미는 아주 분명합니다. 일심으로 무엇을 합니까? 일심으로 칭불稱佛을 합니다. 칭불을 어떻게 합니까? 칭불을 불란不亂하게 합니다. 즉 한 마음 한 뜻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서 난잡하지 않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하고 아주 분명하지 않나요? 어디에 그처럼 심오하고 복잡한 게 있습니까!

 

 【한 글자――전專】

 

  우리가 앞서 선도대사님께서 하신 ‘일심불란’에 대한 해석을 보면 모두 아주 간단하여 조금도 복잡하지 않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어떻게 선정을 닦아서 마음을 쉬어야 하고 망념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며, 도처에서 아주 간절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일심으로 전념해야 한다. 전專! 전專!” 아무튼 선도대사께서 ‘일심불란’을 해석하시는 데는 하나의 ‘전’자를 강조하십니다. ‘전’이 바로 ‘일심’이고, ‘전’이 바로 ‘불란’이므로, 이는 석가모니불께서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신 ‘일향전념’에 부합합니다.

 

 【서방정토는 어지러운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라 선도대사께서 특별히 설명도 하셨는데,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경』에서 특별히 서방극락세계를 가리켜 보이시며 우리더러 왕생하라고 타이르신 이유가 바로 극락세계는 ‘범부들의 어지러운 생각凡夫亂想’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법사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불국토가 다 장엄하고 청정하여

  범부의 어지러운 생각으로 왕생하기 어렵도다.

  여래께서 특별히 서방국을 지목하시니

  여기서부터 십만 억(불국토)을 지나야 하느니라.

  一切佛土皆嚴淨, 凡夫亂想恐難生;

  如來別指西方國, 從是超過十萬億。

 

  모든 제불의 국토는 전부 다 매우 장엄하고 청정하지만 어지러운 망상으로 분분한 범부들이 왕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불국토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마음을 고요히 하여 성자의 경지를 깨달아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은 말법시대 오탁악세 범부들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석가모니불께서 특별히 십만억 불국토 밖에 있는 서방극락세계를 가리켜 보이시며 우리더러 왕생하라고 타이르시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극락세계는 범부들의 어지러운 생각을 싫어하지 않고, 마음을 쉬고 망념을 제거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선도대사님은 아미타불의 화신답게 그분의 해석은 우리가 안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천 가지 만 가지 해석들은 설명하면 할수록 복잡하고 설명하면 할수록 심오해서 아미타불의 본원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우리의 근기에도 부합하지 않아 맨 마지막에는 왕생의 몫을 잃게 됩니다.

 

  【삼경의 종지가 일치하다】

 

  선도대사님의 해석에 의거하면 『아미타경』·『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에서 설하신 염불은 완전히 일치하여 모두 지명持名을 말하고 모두 아주 쉽고 모두 아미타불의 제18원 ‘염불왕생원’을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무량수경』에서는 왕생이 아주 쉽다고 말하는데, 『관경』에서 말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관상觀想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것도 역시 어려운 것이어서 선정에 도달하여 망념을 쉬어야 하고……’ 이렇게 되면 일치하지가 않겠지요.

 

  선도대사께서 이 삼부경의 사상을 해석하신 것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일심불란’ 바로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신 ‘일향전념’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보시하는 비유】

 

  선도대사님의 해석은 우리로 하여금 안심을 하게 해줍니다. 염불로 안심하면 옳은 것입니다.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염불을 하면서 안심을 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안심하지 못했었습니다. ‘염불하면 정말로 왕생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왕생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럼 큰 일 난거 아니야?’

 

  안심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여 안심을 할까요?

  우리가 안심을 하려면 안심할만한 물건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안심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배가 고파서 곧 죽게 생겼는데, 만약에 당신이 그에게 사과 한 알을 주든가 빵 한 조각을 주든가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말로만 “아무개님, 안심하세요! 절대 죽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빵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안심할 수 없겠지요. 그를 안심시키는 것은 아주 간단한데, 그에게 빵만 주면 안심시킬 수 있습니다.

 

  ‘걱정’으로부터 ‘안심’으로 나아가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공부에 의지하려 합니다. “제 염불이 공부성편功夫成片이 되고 몽매일여夢寐一如가 되면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갈수록 걱정만 늘어나게 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웬만하면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좋아요, 삼년을 노력해 보니까 삼년 뒤엔 더욱 걱정이 됩니다. “아아! 삼년이 지났는데도 도달하지 못했구나!” 또 삼년이 지나 최후에는 포기를 해버립니다. 애초에는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두려운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까요? 아미타불의 서원이 우리로 하여금 안심할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보증하시기를, “아무개야, 너희가 나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걱정할 거 없다. 임종 할 때 내가 너희를 영접하러 올 테니 반드시 나의 정토에 왕생할 것이다”

  우리는 그래도 또 묻습니다. “만에 하나 왕생할 수 없으면요?”

  “만에 하나 왕생할 수 없다면 내가 책임지겠다!”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너희가 왕생할 수 없다면 나는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다. 내가 성불의 공덕으로써 너희의 왕생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 나는 이 책임을 질 수 있다”

 

  여러분! 오직 아미타불만이 우리의 이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왕생할 수 없다면 그분께서 전부 책임을 져주시겠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책임질 수 없으므로 우리가 왕생할 수 없다면 여전히 왕생할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왕생이라는 이 일은 전적으로 아미타불께서 처리해주시는 것입니다.

                                                

    ⑹ 원신대사의 안심법어

 

  일반인들은 염불을 하더라도 항상 ‘망상이 있고 망념이 있어서 마음이 청정하지 않은데 어떻게 왕생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걱정을 합니다. 우리는 다음으로 원신源信대사님의 염불법어 한 단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망념은 본래 범부의 본체여서 망념밖에 따로 마음이 없으니,

  임종에 이를 때까지 여전히 한결같은 망념범부라네.

  이를 알고 염불하면 곧 (부처님의) 영접을 받게 되니,

  연화대에 오를 때 망념은 각심覺心으로 바뀐다네.

  망념으로부터 나온 염불은 마치 연꽃과도 같아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아니하여,

  틀림없이 왕생하니 의심하지 말지어다.

  망념이 많음을 싫어말고 마땅히 믿음이 얕음을 한탄하라!

  그런 까닭에 깊은 믿음으로 항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지어다.

  妄念原是,凡夫本體,妄念之外,別無心也。

  直至臨終,猶是一向,妄念凡夫。

  知此念佛,即蒙來迎。

  乘蓮台時,能翻妄念,成爲覺心。

  從妄念中,所出念佛,猶如蓮花,不染汙泥。

  決定往生,不可有疑。

  莫厭妄念多,應歎信心淺。

  故以深信心,常稱彌陀名。

 

  이 법어는 이해하기가 아주 쉬워서 제가 이렇게 읽어내려 가면 아마 어떤 분들은 벌써 그 뜻을 이해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알아듣기가 아주 쉽고 우리를 아주 안심하게 해주지요.

 

  ‘망념은 본래 범부의 본체여서 망념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 우리 범부들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중생입니까? 경문이든 아니면 조사님의 해석이든 ‘범부’ 앞에다 왕왕 ‘죄업’ 짓는 범부·‘윤회’하는 범부·‘망념’의 범부·‘난상亂想’의 범부·‘부정不淨’한 범부 등등의 수식어들을 갖다 붙이는데, 이것은 우리의 본래면목입니다. ‘망념은 본래 범부의 본체이다’, 범부라면 곧 망념을 본질로 삼고 체성體性으로 삼는다는 것이고; ‘망념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 망념을 제외하면 따로 마음이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임종에 이를 때까지 여전히 한결같은 망념범부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당신은 망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당신이 바로 망념의 범부라는 것입니다. 망념을 여의었다면 성인이지 절대 범부가 아니지요.

 

 【흙으로 빚은 소상과 숯의 비유】

 

  예컨대 진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은 진흙으로 빚었기 때문에 진흙이 바로 소상의 본체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그것을 씻는다 해도 깨끗이 씻을 수 있겠습니까?

 

  용왕묘龍王廟 속에 진흙으로 빚은 용이 있는데, 그 위에 먼지가 있어서 당신이 그것을 깨끗이 씻으려 한다면, 가장 안쪽에 있는 용의 힘줄까지 씻는다 해도 여전히 흙일 것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거니까요. 따라서 아무리 어떻게 해봐도 그것은 역시 흙을 벗어날 수 없겠지요.

 

  우리 범부들이 바로 망상으로 이루어졌기에 망념이야말로 우리의 본체이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떻게 해봐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가상假相이 나타나 좀 청정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거친 망념이 조금 적어졌을 뿐, 미세한 망념은 여전히 매우 많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알아차림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망념)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예컨대 숯이 한 덩어리가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든 간에 모두 검정색이어서 당신이 아무리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으며, 아무리 씻어도 숯은 흰색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씻어도 여전히 검정색이고, 그것으로 그림을 그려봐도 여전히 검정색 선이 나올 겁니다.

 

  우리의 망상심은 숯과도 같아서 우리가 아무리 어떻게 해봐도 전부 암흑·무명·죄를 짓는 중생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깊이 인식하여 거기서 쓸데없는 공을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수행하다 보면 때가 되면 괜찮아지겠지. 그때 가서 다시 말하자……’ 만약에 정토법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고, 우리는 죄를 짓고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있는 범부이므로 오직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병이 위중함을 아는 비유】

 

  따라서 선도대사님은 두 가지 깊은 믿음을 강조하시는데, 첫 번째가 자신은 죄악생사범부로서 윤회를 벗어날 방법이 없고 오직 절망의 외길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조건 하에서만이 당신은 비로소 아미타불의 서원을 완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이처럼 죄를 짓고 타락하고 출리의 기연이 없는 범부임을 믿지 못한다면, 아미타불에 대한 당신의 신심에는 힘이 없을 겁니다.

 

  예컨대 환자가 자신의 병이 위중하여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대해 중시하지 않고 건성건성 들을 겁니다. “아이구! 저는 아주 건강해요! 아직 괜찮은 거 같아요……” 그러다가 일단 자신의 수명이 곧 다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누군가로부터 “이 분은 신의神醫여서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의사가 ‘흥’하고 코 소리 한 번만 내도 모두 자세히 들을 것입니다. “아! 방금 무슨 약을 말씀하셨지요?” 사실 그 의사가 재치기 한번 한 것뿐인데도 그는 전부 자세히 들으려 합니다.

 

  우리가 만약 느긋하게 ‘나는 자신을 의지해도 아마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주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 법문에 대해 존중하지 않게 되고 쉽게 소홀히 하게 되겠지요.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교만하고 게으른 자는 이 법을 믿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통째로 내려놓다】

 

  인광대사님에게 두 구절 말씀이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통째로 내려놓고, 철저하게 기댄다.

  通身放下, 徹底靠倒。

 

  통째로 내려놓으려면 솔직해져야 하고 자신은 죄를 짓는 범부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그런 교만한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통째로(通身)’는 우리의 몸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을 말하는데, 신체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가리킵니다. 당신이 온몸을 ‘통째로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철저하게 기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들 모두 밤이면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럼 매일 밤 잠을 잘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온몸을) 통째로 내려놓고 (침대에) 철저하게(완전히) 기댈 것’입니다. 몸을 반쯤 내려놓고 반쯤 내려놓지 않고, 반쯤 기대고 반쯤 기대지 않는다면 잠을 잘 수가 없겠지요. 그런 자세로 어떻게 잠을 잡니까? 그 자세로는 굉장히 힘들어서 2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통째로 내려놓는다’면 어디에다 내려놓아야 할까요? 아미타불의 서원 속에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아미타불의 서원만이 의지할 수 있고 보증할 수 있으니까요. 아미타불께서는 당신의 대비원력으로써 말씀하십니다. “시방의 중생들아, 내가 너희를 구제하겠다. 너희의 죄업을 내가 감당하고, 너희에게 공덕이 없으면 내가 너희를 위해 성취하고, 너희가 타락하려 한다면 내가 너희를 건져주고, 너희가 왕생할 수 없으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러 오겠다. 너희는 단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망념이 각심으로 바뀌다】

 

  우리가 이미 자신이 이러한 범부임을 확실히 인식하였다면 우리는 망념범부의 신분으로써 아미타불을 불러야 합니다. ‘망념범부가 이를 알고 염불하면 곧 (부처님의) 영접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이처럼 죄를 짓는 범부·망상이 분분한 범부·시시각각 망념이 끊이질 않는 범부라는 사실을 알고서 염불만 한다면 임종 시에 아미타불께서 영접하러 오신다는 것이지요.

 

  ‘연화대에 오를 때, 망념이 각심으로 바뀐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실 때, 우리는 아미타불의 연화대에 올라앉게 되는데, 바로 이 때 찰나 간에 대해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셨지요. “임종할 때 성중들이 연꽃을 들고 나투시니, 심신이 용약하여 금색 연꽃에 앉게 되는데, 앉는 순간 바로 무생법인 얻고, 일념 사이 영접하여 부처님 전에 이른다네” 연화대에 올라앉는 순간 바로 무생법인을 얻고 당장 환하게 큰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망념들이 즉각 분쇄되어 밝게 빛나는 정각正覺의 마음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의 입장에서는 어디에 깨달음의 마음이 있겠습니까? 아미타불의 접인(영접)을 받아서 ‘연화대에 오를 때 망념이 각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연꽃이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는 비유】

 

  다음 몇 구절들은 특히 우리로 하여금 위안과 감동을 느끼게 해줍니다. ‘망념으로부터 나온 염불은 연꽃과도 같아서 더러운 진흙에 물들이 아니한다’, 우리에게 비록 망념이 있다지만 우리가 망념이 가운데서 내는 염불소리,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우리의 마음이 비록 망념으로 가득하여 진흙과 같이 더러우나, 우리가 부르는 이 한 구절 명호 자체는 마치 청정한 연꽃처럼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고 미묘하고 향기롭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다들 느낌이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더러운 것이고 오염된 것이고 망념이 있는 것이지만 이 명호는 우리의 망념으로부터 물들지 않기 때문에 정토종을 ‘연종蓮宗’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연꽃의 특징이 바로 ‘더러운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 것’인데, 어느 곳에서 진흙이 나옵니까?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진흙처럼 더러워서 탐진치의 번뇌가 있습니다. 어느 누가 탐진치의 번뇌가 없겠습니까? 없는 분이라면 곧 아라한일 겁니다.

 

  우리 같이 탐진치 번뇌가 있는 마음은 도리어 염불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염불합니까? 왜냐하면 죄업이 있어서 해탈을 바라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서원을 의지하여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연못 속의 진흙이 도리어 연꽃이 자라는데 자양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청신한 연꽃이 진흙으로부터 독립해서 나오게 되며 미묘한 향기를 풍기게 되지요.

 

  우리의 마음이 비록 오염되어 있다지만 우리가 부르는 명호는 청정한 것입니다. 육자명호의 공덕과 향기는 우주법계에 가득 차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망념으로부터 나온 염불은 연꽃과 같아서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속지 말아야 한다】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이 한 송이 연꽃, 이 한 구절 육자명호가 우리를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염불은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연꽃을 봐야 하고 우리의 코는 연꽃의 향기를 맡아야 합니다. 다들 연못가에 가셔서 자신의 코를 진흙 속에다 박아 넣으면 안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맡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악취일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의 코는 연꽃의 향기를 맡아야 합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염불을 하면서 ‘비록 나의 마음이 오염되어 있고 죄업이 있고 청정하지 않다지만, 내가 부르는 이 한 구절 명호는 연꽃과 같이 향기로워서 이 명호가 나를 왕생하게 하는 것이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자신의 마음을 생각해야 합니까? 이 마음은 우리가 던져 버려야할 물건, 우리가 갖다버려야할 물건이거든요! 우리는 생멸하는 허망한 이 마음을 의지해서 왕생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이 마음을 꺼집어 내어 깨끗이 닦고 난 다음에 다시 왕생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생멸이 없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명호를 의지하여 왕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방향과 관념이 잘못 되어서 항상 자신의 망상심을 가지고 거기서 꾸미고 다듬고 하는데, 이는 마치 이 연꽃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진흙 속에다 넣은 다음에 이 진흙을 가지고 거기서 씻고 걸러내고 해서 한 송이 연꽃모양으로 만들려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설사 이 진흙을 가지고 한 송이 연꽃으로 만든다하더라도 거기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진심眞心이고, 하나는 망심妄心입니다. 망심으로 일처리를 한다면 나귀의 해 말의 달(驢年馬月)이 되더라도 역시 해탈할 수 없습니다. 범부에게도 비록 전부 진심불성眞心佛性이 있다지만 확철대오하여 부처님과 같은 큰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진심불성이 드러나질 않습니다. 평소 일처리를 할 때 모두 망심을 사용하는데, 이 망심을 당신이 아무리 짓누르고 아무리 움직이지 않게 해봐도 그것은 여전히 해탈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이 이미 확철대오하여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진심과 망심의 차별을 부숴버리고 망심이 본래부터 진심이었다는 것을 철저히 증득해야만 비로소 해탈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겨우 선정의 공부, 또는 일종의 비교적 청정하고 경안(輕安:몸과 마음이 상쾌하고 편안한 상태)한 상태를 가지고는 아직 거리가 너무나 멉니다. 그것은 해탈과는 전혀 무관하여 해탈의 원인이 아닐뿐더러 도리어 윤회의 업이 됩니다.

 

  우리를 해탈하도록 해주는 것, 우리를 생사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두 가지 일입니다. 진흙 속에서 자라난 연꽃, 그 연꽃이 우리를 구제할 수 있듯이, 망상심 가운데서 나온 부처님의 명호, 그런 부처님의 명호가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명호가 바로 이 망상심을 구제하려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우리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바로 입을 열 때마다 연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 얼마나 자재합니까! 당신이 구태여 자신의 그 마음을 상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무량수경』속에서 석가모니불께서는 네 글자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염불하는 비결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일향전념’하라.

  一向專念。

 

  ‘일향’이란 바로 유일하게 부처님의 방향으로 향하되 자신의 방향으로 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망상인지 아니면 청정한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눈빛은 부처님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다시 우리 범부 쪽으로 돌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겠지요.

 

  다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염불을 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염念한다면, 그것으로 어떻게 왕생합니까?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든 더럽든 우리 모두 거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윤회를 해온 이유가 바로 우리의 이 마음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보세요, 지금 이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어요! 이것은 하나의 좋은 마음이기에 나는 이 마음이 필요해요…… 지금은 매우 번뇌하고 있고 출렁이고 있거든요! 이것은 나쁜 마음이기에 나는 이 마음을 필요치 않아요!’ 그러면 당신은 이 마음에게 속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이 출렁이든 망상·잡념이 있든 아니면 비교적 안정적이든, 이것은 전부 망념이고 이것은 전부 번뇌의 마음이어서 전부 던져 버려야 할 물건들이기에, 우리는 유일하게 이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전부로써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겁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전부 상관하지 마세요. 번뇌가 오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번뇌가 가더라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바람을 따르는 구름의 비유】

 

  번뇌란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과 같을까요? 번뇌는 마치 허공중에서 바람을 따라 지나가는 구름 한 점과 같은 것인데, 당신이 염불을 한다면 염불만 하면 되지 이 구름을 간섭할 필요까진 없잖아요? 번뇌가 왔다고 해서 ‘아, 이 구름은 흰색이네! 흰 구름이 왔으니까 내가 염불하면 아마도 왕생할 수 있을 거야! 어! 다시 검은 구름이 왔네! 검은 구름이 왔으니까 아마도 왕생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틀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흰 구름이라 부를까요? ‘내가 염불하는데 조금 청정해진 것 같다’고 느끼는 것, 이것이 흰 구름입니다. ‘나의 마음이 청정하지가 않아, 아이구! 애들이랑·가정이랑! 직장과 사업……수많은 일들로 진짜 짜증나네’, 이것은 검은 구름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아서 오면 오는 것이고 가면 가는 것이기에, 우리의 왕생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이 염불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염불하는 마음을 멈추고서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면 잘못된 것이지요!

 

  따라서 당신의 그 마음을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그것을 간섭해 봐도 당신을 위하여 체면을 세워줄 수 없을뿐더러 당신은 거기에 속게 됩니다. 당신이 그것을 간섭할수록 그것은 더욱 득세하게 되고, 그것이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낄수록 당신은 그것에 대해 더욱 방법이 없게 됩니다. 당신이 그것을 철저하게 꿰뚫어 보고, 당신이 그것을 철저하게 던져 버리고, 당신이 그것을 철저하게 냉대했을 때, 그것은 고분고분해지며 말을 듣게 됩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 할머니가 되신 분들도 계실 텐데, 어린 손자 녀석이 거기서 울고 있다면 할머니가 가셔서 그를 달래주려 할 겁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달랠수록 그는 더욱 울고, 더욱 울수록 할머니는 더욱 달래주게 되며, 달랠수록 그는 더욱 울게 됩니다. 나중에 할머니가 방법이 없어서 아예 그대로 내버려두지요. 그러니까 조금 울다가 울음을 그쳐버립니다.

 

  우리의 번뇌도 이와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번뇌는 우리 자신이 키운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마다 모두 통통한 번뇌아기를 키우고 있거든요. 우리는 매일매일 그것을 키우면서 씻어주고 만져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던져 버리시고 거들떠보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아미타불이 계시므로, 우리는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는데, 이것을 ‘일향전념’이라 부릅니다. ‘망념으로부터 나온 염불은 마치 연꽃과 같아서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습니다’

 

 【염불하여 방광을 한 이야기】

 

  이쯤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나를 해드릴 텐데요, 이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대만의 어느 법사님 한분이 미국에서 홍법을 하고 계실 때였는데, 코쟁이 미국인이 법문을 들으러 오셨답니다. 법문을 다 듣고 나서 이 미국인은 법사님께 본인은 전문적으로 신통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도 어느 정도 신통력이 있어서 그가 염불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염불만 하면 광명을 토해낼 수 있는데, 염불을 한번 하면 한줄기 빛이 입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당나라 때 선도대사님께서 염불을 한번 하실 때마다 한 줄기 빛이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의외로 우리 자신도 방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선도대사님은 삼매를 증득하신 성자이셨기에 그분이 염불하며 놓은 광명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염불하여 놓은 광명은 신통이 있는 사람이나 영계의 중생들, 그리고 불보살님들은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놓은 광명은 어떨까요?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 있는 사람이 염불하면 그 광명이 매우 커서, 어느 정도까지 크냐하면 마치 지구전체를 감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지구를 한번 안아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여러분들도 방광을 한번 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성심껏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성심이 없는 사람이 염불하면 어떨까요? 역시 방광을 하지만 광명이 아주 작아서 약간 반짝·반짝하면서 마치 등잔불처럼 언뜻 보이다가 바로 사라져버린답니다.

 

  그럼, 무엇을 성심이 있다고 말하고, 무엇을 성심이 없다고 말할까요? 성심이란 바로 믿음이요, 바로 전專입니다. 당신이 의심을 하고 잡다하게 한다면 성심이 부족한 거예요! 믿고 따르고 전수염불하며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중해서 염불을 한다면, 그렇게 해서 나온 광명은 아주 큽니다. 그러나 만약에 단지 인연만 맺을 정도로 ‘남들이 부르니까 나도 한 마디 부르지만 도대체 극락세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왕생할 수 있을까요? 아! 운에 맡기는 거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심이 부족한 것이어서 염불의 광명은 매우 작습니다.

 

  따라서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비록 죄업을 짓는 범부이기는 하나, 우리도 이 한 구절 명호를 부르면 한 줄기 광명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금 말씀드렸듯이 ‘망념으로부터 나온 염불은 마치 연꽃과 같아서 더러운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염불의 공덕은 무량무변하여 어떠한 중생이라도 진정으로 왕생을 원하고 진정으로 염불을 한다면, 왕생하지 못하는 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의사와 환자의 비유】

 

  따라서 ‘결정코 왕생하니 의심하지 말지어다. 망념이 많음을 싫어말고 마땅히 믿음이 얕음을 한탄하라! 그런 까닭에 깊은 믿음으로 항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지어다.’ (우리는 마침 거꾸로 되어 있지요) 대사님은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망념이 많은 것을 싫어하지 말라. 싫어해도 방법이 없다. 망념이란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당신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기 때문에 그것을 싫어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은 마땅히 역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우리의 믿음이 얕은 것을 한탄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너희에게 망념이 많아서 내가 너희를 구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정반대로 아미타불께서는 ‘너희에게 망념이 많기에 내가 너희를 구제하려는 것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들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망념이 많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해주시려는 것인데, 우리에게 망념이 없다면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라한이라면 이미 생사를 벗어났을 테니까요.

 

  이는 마치 의사와 같아서 의사는 환자의 병을 봐주는 사람이지 건강한 사람의 병을 봐주는 사람은 아니지요. “당신이 환지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의 병을 봐주는 거예요”

  아미타불은 대의왕이신데, 우리에게 탐진치 번뇌가 있고 우리에게 망념이 있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내가 너희를 구제하려 하니 너희들은 나의 육자명호를 불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망념이 너무 많다고 싫어할 게 아니라 마땅히 우리의 믿음이 너무 얕은 것에 대해 슬퍼하며 탄식해야 합니다. 망념이 많아도 왕생을 장애하지 않지만, 믿음이 얕아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지 못하고 칭명하여 왕생하는 것에 대해 의심한다면 왕생을 장애하게 됩니다.

 

  만약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가셨다면 당신이 거기서 “보세요, 제가 이렇게 많은 병을 앓고 있어서 너무 짜증이 납니다”라며 원망할 게 아니라 마땅히 고명한 의사선생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어차피 병에 걸린 이상, 이럴 때일수록 고명한 의사선생님을 찾아야 하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망상잡념이 있다고 해서 의심을 합니다. ‘제가 이렇게 염불해서 왕생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염불에 대해 의심을 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도리어 의심을 한다면, 마땅히 슬퍼하며 탄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일수록 염불해서 왕생하기가 딱 좋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깊은 믿음으로써 항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깊이 믿어서 의심하지 않는 마음으로써 항상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큰 길을 다니는 행인의 비유】

 

  다들 오늘부터 집에 돌아가신 뒤에는 모든 망념들을 털어서 던져버리고 상관하지 마십시오.

  다들 무엇을 ‘상관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제가 상관하지 않아도 망념은 저절로 찾아옵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면 오는 것인데, 왔더라도 그것을 상관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당신이 그것을 상관했기 때문에 그것이 온 것입니다. 당신에게 그것을 상관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이 오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오면 온 것이라는 겁니다. ‘오면 오는 것이고, 가면 가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큰 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하는데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남녀노소·빈부귀천·선악현우善惡賢愚 등 모든 사람들이 다 있지만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서 창가에 기대어 그 사람들을 주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귀한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는 마음을 내고 빈천한 사람을 보면 깔보는 마음을 내며, 잘생겼니 못생겼니 따지면서 이렇쿵 저렇쿵 쓸데없는 얘기를 하다보면 자신이 하던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게 되지요. 그더러 바깥의 행인들을 상관하지 말고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라고 말하면 도리어 번뇌를 일으킵니다. “저도 그들을 상관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이 자꾸만 저기서 왔다 갔다 해서 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염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에 망념으로 분분한 것은 망념의 일인데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망념은 그대로 망념이고 염불은 그대로 염불입니다. 염불은 정업正業(주)이고 망념은 길거리의 손님(객)이므로, 망념의 길거리 손님들을 주시하지 말고, 더욱이 그들을 따라가지 말 것이며, 당신의 염불을 방해한다고는 더욱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불의 정념이 한 번 일어나면 수많은 망념이 있더라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그 사람이 방에서 일심으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면 큰 길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사람들이 천천만만이 되더라도 전부 그와 상관이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망념을 다스리는 데는 바로 한 가지 비법이 있으니 오로지 염불만 하는 것입니다! 망념을 상관하지 마시고요!

 

 【길가에서 자라는 화초의 비유】

 

  그것을 상관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말살시키려는 게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가 큰 길을 걷고 있는데, 길가에 수많은 꽃들이 피어있고 또 수많은 풀들이 자라나 있으며 심지어 이 풀들이 길 가운데로 자라나 우리의 발등을 뒤덮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길을 걷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서 칼을 들고 이 풀을 베어버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풀을 풀대로 자라고 우리는 그 길을 지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서 이 꽃에 향기가 있는지 없는지 냄새를 맡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 이 꽃에서 나쁜 냄새가 나네, 정말 귀찮구나!” 얼른 돌아가 호미를 들고 와서 그 꽃을 파버리고는 다시 거기에다 꽃 한 송이를 심는다면, 당신은 쓸데없이 일을 만드는 겁니다! 당신이 지나가기만 하면 될 텐데, 그 꽃이 향기롭든 악취가 나든, 그 풀이 당신의 발을 덮든 말든 건너가기만 하면 될 겁니다.

 

  이 향기가 나는 꽃·악취가 나는 꽃·향기가 나는 풀·독이 들어있는 풀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갖가지 생각들입니다. 이 큰 길이 바로 우리가 왕생하는 길이므로 우리는 오로지 염불만 하면서 지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제의 망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상관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것을 상관하지 마세요! 이것을 일러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겁니다.(우리가 호미를 들고 그것을 파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그것들이 자라면 자라는 거고 안 자라면 안 자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불을 하는데 염불을 하는 게 아니라 되돌아와서 이 풀을 파고 있습니다. 그는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아이구!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무리하게 소란을 피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길을 잘 걷고 있었음에도 길가에 있는 꽃이 자신을 방해한다면서 반드시 그것을 없애고서야 비로소 만족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불의 대로 위에서 망상이 우리의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무슨 일을 방해했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망상잡념은 전혀 우리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오로지 그 길을 지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매운 음식을 먹으면 맵다고 느끼는데, 매우면 매운 것이지요. 이것은 인연입니다. 우리가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서 귀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모두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생리상의 반응은 아주 자연스런 것이어서 범부들이 바로 이러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중생들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되는 것이고 이렇게만 하면 왕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상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염불한다면 아주 홀가분하고 자재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분신을 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데, 염불하는 나야말로 진정한 나이고, 또 다른 나는 사실 그림자와 같은 겁니다. 마치 일종의 뭐와 같냐면……어떻게 말할까요? ‘그림자’라는 단어가 조금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마치 하나의 허망한 그림자와 같아서 그(망념)는 그의 일을 하고 나는 염불해서 왕생을 하는 겁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 그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마 어떤 일들 때문에 그의 마음이 괴롭고 슬프거나 또는 기뻐하는 등등의 감정을 느끼고 온갖 정서적인 파동이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망상은 본래부터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망념에는 본래 뿌리가 없는 것인데 당신이 그것을 집착하기 때문에 뿌리가 생겨난 것이고 업력이 생겨난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육도윤회를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돌아와서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에 기대면서 전혀 그것을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을 어찌할 방법이 없게 됩니다. 만약에 당신이 그를 주인과 같이 여기면서 그를 상관하려 든다면 그로부터 통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⑺ 인광대사의 꾸지람

 

  일반인들은 염불을 하면서 모두 ‘염불을 잘하고 못하고’의 관념이 있는데,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염불을 잘 한 것이고, 도달하지 못하면 염불을 잘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이로써 자신에게 더욱 노력하여 염불하고 정진하여 염불하는데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아미타불의 본원을 더욱 의지하고 사바세계에 대한 염리심을 내고 극락세계에 대한 흔구심을 더욱 내도록 요구한다면, 이런 생각들은 좋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만. 만약에 ‘아이구! 내가 이렇게 염불을 잘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마도 왕생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러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광대사님의 이야기 하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번은 제자 한 분이 보타산으로 인광대사님을 친견하러 오셨다가 대사님께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말씀드렸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일 년 전에 한 번 크게 앓은 적이 있었는데 병이 위중할 때 사람이 곧 죽게 되어 피를 토하면서 근근이 숨만 내쉬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상황을 회상하면서 자신은 첫째 당황하지 않고, 둘째 두려워하지도 않아서 마음이 매우 안정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이것은 이미 쉽지가 않은 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그런 상황이 되면 당황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약간 유감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가 무엇이 유감스러웠을까요? “아! 내가 염불을 잘 하지 못했구나” 그는 수행자이자 정토종의 염불행자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염불을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인광대사께서는 여기까지 듣고 나서 즉각 벽력같은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염불을 잘한 것이라 말하는가? 십념으로도 마땅히 왕생할 것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서방에 갈 수가 없을 것이다!” 당장에 “염불을 하는데 무엇을 잘 했다고 하고 무엇을 잘하지 못했다고 하느냐? 십념으로도 왕생할 수 있다! 네가 만약에 ‘내가 염불을 잘하지 못했기에 아마도 왕생할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서방극락세계를 너는 갈 수 없을 것이다”며 비평하고 꾸짖은 것입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염불을 잘 했습니다’ 무엇을 잘했다고 말하는 겁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 겁니까? 이렇게 물으면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제가 염불을 하는데 입에 침이 생겼어요, 내가 염불을 하는데 몸에 열이 났어요, 제가 염불을 하는데 마음이 아주 상쾌해졌어요. 이것을 잘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그럴 듯하나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꼭 기준을 말해야 한다면 역시 있습니다. 바로 아미타불의 서원이신 ‘내지 십념으로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광대사님께서는 “십념으로도 마땅히 왕생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심불란은 아주 쉽다】

 

  염불은 아주 간단해서 우리 개개인의 근성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겁니다. 만약에 마음이 비교적 차분하고 안정적이라면 차분하고 안정적인 마음으로 염불을 하고, 만약에 지금 당장 번뇌하는 마음이라면 번뇌하는 마음으로써 염불해도 똑같이 왕생합니다!

 

  인광대사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이 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염불을 잘 했다고 말하는가! 십념으로도 마땅히 왕생한다” ‘십념으로도 마땅히 왕생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미타불의 서원에 있습니다. 무엇을 잘했다고 말하고 무엇을 잘하지 못했다고 말합니까? 당신이 열 번만 불러도 왕생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잘 불렀다고 말합니까? 『관경』에서 하품하생을 한 그 사람이 염불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그 때 만약에 ‘염불을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왕생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이구! 아무개님! 당신은 이제 곧 죽게 생겼는데 당신은 반드시 염불을 잘 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염불을 잘 하지 못하신다면 왕생할 수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염불만 하면, 입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반드시 왕생합니다!” 그는 자연히 왕생할 것입니다.

 

  인광대사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공덕의 크기와 공부의 깊이를 막론하고 염불만 하면 모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염불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은 우리의 공부의 깊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의 공부가 깊어도 왕생하고 당신의 공부가 얕아도 역시 왕생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일심불란’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것인데, 바로 전수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다들 이해가 가십니까?

  (대중) 이해가 갑니다!

  아직도 ‘일심불란’이란 네 글자를 두려워할 겁니까?

  (대중) 두렵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미타경』을 독송하다가 여기에 이르면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 일심불란·일심불란, 갈수록 더욱 혼란스럽고 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요……’ 나중에는 수습이 안 됩니다. 만약에 ‘일심으로 염불하여 난잡하지 않고 동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염불할수록 더욱 기뻐하게 되는데, 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4) 사례를 들어 설명함

 

 【송나라 황타철의 이야기】

 

  이어서 송나라 때 황타철黃打鐵의 이야기 한 편을 말씀드릴 텐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그의 성은 황씨이고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대장장이였기 때문에 황타철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는 한편으로 쇠를 두들기면서 한편으로 염불을 하였는데, 망치로 한 번 두들기며 “아미타불!”, 다시 한 번 두들기며 “아미타불!”하고 불렀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신이 쇠를 두들기는 것만 해도 너무 힘드실 텐데 염불까지 하신다면 더욱 힘들지 않나요?”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그건 당신이 모르는 거요! 본래 쇠를 두들길 때 팔이 시큰거렸었는데 염불을 하니까 도리어 시큰거리지 않고, 본래 쇠를 두들길 때 많이 힘들었었는데 염불을 하니까 도리어 힘들지가 않는구려!”

 

  그가 쇠를 두들기려면 풀무질을 해야 했었지요. 풀무질을 할 때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하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한 망치 두들기고 한 구절, 풀무를 한 번 젓고 또 한 구절 부르면서 이렇게 몇 년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그가 몸도 괜찮고 병도 나지 않았는데 문득 크게 느끼어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글을 쓸 줄 모르고 오직 대장장이 일만 할 줄 알았기에 이웃을 불러서 네 구절 말씀을 적었습니다. 그가 어떤 네 구절 말씀을 적었을까요? (역시 그의 생활과 관련된 것인데, 그 최파와 같습니다. 최파는 ‘위로 재 하나 없고 아래로 구덩이가 없다’고 쓰셨는데, 그녀가 쓴 것 역시 자신의 생활이었습니다. 남의 유모노릇을 하면서 신과 양말을 기워 신었기 때문에 ‘갈 때 신과 양말을 신을 필요가 없다’고 쓴 것이니 그의 생활과 아주 가까운 것이지요. 황타철도 마찬가지로 네 구절을 지었는데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땡그랑땡그랑,

  오랫동안 정련하여 강철이 되듯,

  태평이 곧 다가오니,

  나는 서방으로 왕생하려네.

  叮叮當當, 久煉成鋼,

  太平將近, 我往西方。

 

  이 네 구절 말씀을 마치고는 망치를 내려놓자마자 왕생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수승하고 얼마나 멋집니까!

 

  ‘땡그랑땡그랑, 오랫동안 정련하여 강철이 되듯’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그가 매일매일 땡그랑땡그랑·땡그랑땡그랑하고 쇠를 두들기잖아요? 쇠를 두들기는 목적은 오래오래 정련해서 강철을 만들기 위한 것이므로 천천히 두들겨야 하겠지요. 이것 역시 자신의 수행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데, 육자명호는 마치 망치와 같아서 한 망치 한 망치씩 그의 마음에다 두들겨서 그의 마음을 갈수록 유연하게, 습기는 갈수록 적어지게, 범부로부터 부처님이 되도록 두들긴 것입니다. 서방극락세계에 성불하러 가셨기 때문에 ‘땡그랑땡그랑, 오랫동안 정련하여 강철이 되듯’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태평이 곧 다가온다’, 태평한 날이 곧 올 거라는 겁니다. 만약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지 않고 생사윤회의 큰일로부터 해탈하지 않는다면, 그럼 태평한 날을 보낼 수 없습니다! 염라대왕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태평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달랐습니다. ‘태평이 곧 다가오니 나는 서방으로 왕생하려네’, 서방극락세계로 성불하러 가겠다고 말한 것이지요.

 

  당신은 이 황타철에게 선정일심禪定一心의 공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쇠를 두들기면서 선정에 들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에게는 이른바 깊은 선정에 들어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공부가 없을뿐더러 도리어 크게 힘쓰고 땀흘리고 쇠를 두들기면서 염불해야 했지만 그는 왕생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비록 선정은 없었으나 그는 일심불란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염불하고 극락왕생을 염원하며 조금도 뒤섞이지 않았으니 진정한 일심불란이었지요! 그는 글도 모르고 시간도 없고 먹고 살기가 바빠서 한편으로 쇠를 두들기면서 한편으로 염불을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잡다하게 하라고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배워야 합니다. 옷을 씻을 때에도 이렇게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채소를 썰을 때에도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침에 체조를 할 때에도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하고 염불해야 합니다. 우리 대만의 연우님 몇 분은 손을 앞뒤로 내젓는 염불체조를 하시면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하시는데, 이렇게만 염불해도 왕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선정에 도달했는지 이러한 공부가 있는지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장애가 없기에 염불만 하면 반드시 왕생합니다.

 

 【홀가분하게 염불하다】

 

  물론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도 어쨌든 마음이 좀 청정해지고 망상잡념이 좀 적어지길 바랄 겁니다. 그것도 방법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좀 더 집중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외출을 하거나 길을 걷거나 차를 타거나 볼일을 보거나 할 때, 그렇게 집중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인 혼자 앉아서 염불할 때에는 역시 좀 더 집중해야 할 겁니다. 집중하는 방법이란 바로 본인이 염불하고 본인이 듣는 것인데, 인광대사께서 제창하신 ‘십념기수법十念記數法’을 채택하여 한편으로 염불하고 한편으로 숫자를 세면서 얼마만큼 집중할 수 있으면 얼마만큼 집중하시면 됩니다. 다만 마음을 지나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너무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보세요, 또 도망 갔어요……”라며 또 번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도망을 갔으면 잡아오고, 또 도망가면 다시 잡아오고, 잡아온 다음에 잘 감시를 해야 하겠지요. 마치 게임을 하듯이 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아주 홀가분해져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염불할 수 있을 겁니다.

 

 【편안하고 침착하게 염불하다】

 

  그리고 숫자를 세는 것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숫자를 세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으로서 역대 조사대덕들께서 모두 제창하셨습니다. 착실하게 숫자를 세면서 염불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방법의 묘한 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염불을 하면서 단지 염불의 횟수만 채우려고 숫자를 세기 위해 숫자를 세지 마시고, 염불을 위해 숫자를 세는 방법을 채택한 것이기에, 편안하고 침착하게 한 구절 한 구절씩 불러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당신은 한 구절 한 구절씩 염불하면 됩니다. 만약에 숫자를 너무 많이 정해놓고서 숫자를 채우기 위해 너무 빨리 부르게 되면,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때로는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고, 심장이 안 좋은 분들은 더욱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예컨대 본인 스스로 매일 삼만 번의 염불을 정해놓았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거기서 급히 서둘러 숫자를 쫓고 있으니 너무 힘이 들겠지요! 그렇게 염불하다가는 심장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보세요, 염불을 해서 제가 심장병이 생겼어요!”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염불을 해서 생긴 게 아니라 당신 스스로 조절을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편안하고 침착하게 염불하되, 삼만 번을 부를 수 없다면 그렇게 많이 정하지 마시고 이만 번·만 번 정도로 정하면 됩니다. 한 구절 한 구절씩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부르면 아주 좋습니다!

 

  5) 총결을 지으며 역으로 나타냄

 

【여섯 가지 큰 과실】

 

  ‘일심불란’과 관련해서 우리는 총결을 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시작부터 일심불란에는 두 가지 이해가 있다는 설명을 드렸었는데, 하나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선정상태의 일심과 망상잡념이 일어나지 않는 일심이고; 또 하나는 정토종경론의 가르침에 따른 이해인데, 일심불란이 바로 일향전념이라는 것으로, 이것 역시 선도대사님의 일관된 해석이었습니다.

 

  오직 선도대사님의 해석을 따라야만 비로소 정확한 것입니다. 만약에 반드시 어떻게 선정상태의 일심을 얻어서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해석하고, 게다기 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왕생할 수 없다는 생각을 견지한다면, 그럼 그 과실은 너무나 큽니다.

 

  첫째, 그렇다면 그것은 석가모니불자신이 설하신 ‘정토삼경’이 서로 모순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무량수경』은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것으로, “상중하 세 가지 근기를 가진 사람들이 일향전념만 하면 모두 왕생한다”고 말씀하셨고, 『관경』도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것인데 “하하품의 사람이 임종 시에 고통에 시달려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나, 열 번을 염불하여 곧 왕생하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두 부의 경전에서 설하신 왕생은 모두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아미타경』에서는 도리어 어떻게 선정의 일심에 도달해야 한다고 아주 어렵게 말씀하셨다면, 그렇다면 서로 모순되지 않겠습니까?

 

  둘째, 석가모니불께서 본인스스로 모순될 뿐만 아니라 아미타불의 본원과도 모순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염불왕생의 본원에서 설하신 방법은 아주 쉬워서 중생들이 단지 ‘내지 십념’으로 염불만 하면 되지만, 석가모니불께서는 도리어 아주 어렵게 설하시어 마음을 쉬고 생각을 모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어찌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불을 등지고서 스스로 따로 극락왕생의 조건을 제시하여 문턱을 높여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셋째, 또 석가모니불의 설법이 근기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경』은 석가모니불께서 오탁악세의 범부들을 상대로 설하신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높게 설하시어 우리 누구도 실천할 수 없다면, 그 법이 근기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넷째, 용수보살님의 정토법문에 대한 판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용수보살께서 설하신 정토법문에서는 아미타불의 본원이 하열한 근성의 중생에게 적합한 ‘이행도’·‘안락문’이라 하셨는데, 지금은 사일심·이일심 등등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이행도가 아니기 때문에 용수보살님의 교판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섯째, 또한 고금 이래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사실과도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왕생한 수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선정을 얻어서 마음을 집중하는 경지에 도달한 게 아니라 그들은 단지 착실하게 염불하고 일향전념하며 의심하지 않았을 뿐인데 모두 왕생하였고, 게다가 모두 매우 수승하게 왕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가장 큰 과실로서 우리 자신이 왕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선도대사님의 해석을 의지한다면, 위로는 아미타불의 본원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의 근기에 계합하므로, 정토삼경의 종지가 완전히 일치하고, 석가모니불의 말씀이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누구나 안심하고 염불할 수 있고, 누구나 다 왕생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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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떻게 ‘심불전도心不顚倒’를 보증할 것인가 (정종淨宗법사 법어 / 정전스님 역)

 

출처/純淨時代

 

 『아미타경』의 이 단락과 관련해서 우리는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첫째,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바로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다.

  둘째,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바로 ‘일심불란’이다.

 

  이 두 가지 관문을 우리가 모두 통과하였으니,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큰 돌멩이 두 개를 다 치운 거나 다름없습니다. 좋아요, 이제 우리는 좀 쉴 수가 있습니다. 자, 가슴들을 쫙 한번 펴보세요. “아! 일심불란이라는 이 큰 돌멩이가 줄곧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서 곧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았었는데, 오늘 끝내 그것들을 뒤엎어버렸으니 참으로 통쾌하구나!” 우리는 홀가분해졌고 이제 힘도 생겼으니, 승승장구로 추격하여 다시 어떻게 ‘심불전도’를 보증할 것인가라는 세 번째 난관을 공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의 두 관문을 해결하고 나니 또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염불이 곧 많은 선근이다. 좋아요, 됐습니다. 그럼 저는 전수염불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심불란이 되어야 한다는 또 하나의 난제難題가 있다니…… 예! 일심전념을 하는 것이 바로 일심불란이라면, 그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요, 저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어려움이 남아있습니다. 만에 하나 임종할 때 혼수상태에 빠진다든가, 정념을 일으킬 수 없다든가, 잊어버렸다든가, 부처님 명호를 부를 수 없다든가…… 그때는 어떡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아미타경』에서 ‘마음이 뒤바뀌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뒤바뀌지 않도록’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방법이 있습니다!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1) 오해를 깨트림   

 

 【오해 1】

 

  사실은요,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상황은 아예 존재하지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상황은 절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의 경문에 대해 우리가 오해를 하였기 때문에 걱정이 생겨난 것인데, 만약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오해를 하였을까요?

 

  첫 번째 오해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모두 ‘평소에 염불을 얼마나 많이 했든 상관없이 만약에 임종하는 순간에 염불을 못한다면, 평소의 한 염불 역시 공염불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임종할 때 염불을 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부처님께서 영접하러 오시고 비로소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고 여기는데, 이러한 이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임종할 때 염불을 못하면 왕생할 수 없다는 것은 평소에 염불하지 않고 왕생을 원하지 않던 사람을 지목하는 것으로서, 그 사람이 지금 곧 목숨이 끊어지려 하는데, 이때에도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기회가 없어서 목숨이 끊어지면 바로 윤회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임종염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관경』의 하배삼품의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경우인데, 임종할 때 한 번·열 번을 염불하여 왕생을 하였습니다. 『관경』에서 말하고자하는 의미는, 설사 일생동안 온갖 악업을 짓다가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염불을 만난 사람도 겨우 열 번·한 번의 염불로 모두 부처님의 영접을 받아 모두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평소에 염불하던 사람이라면 왕생에 더욱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선도대사께서 “전수염불은 왕생을 하는데 정정의 업이어서 열이면 열이 모두 왕생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임종할 때 염불을 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정토삼경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모두 평생의 염불을 말한 것인데, 다만 표현함에 있어서 치중하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무량수경』의 ‘내지 십념’과 ‘일향전념’은 총강령·총원칙·총요구로서, 위로는 평생의 염불을 포함하고 아래로는 임종의 열 번한번의 염불을 포함합니다. 『관경』의 하삼품에서 말하는 것은 임종염불의 상황으로, 이로써 일생의 염불을 포괄하는 것이며, 『아미타경』의 하루나 이레까지에서 말하는 것은 평생염불의 상황인데, 아울러 이로써 임종의 염불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법문을 만나고 나서 아직 하루의 수명이 남아있으면 하루 동안 염불을 하고, 아직 이레의 수명이 남아있으면 이레 동안 염불을 하는 것으로, 수명의 장단에 따라서 한평생 염불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아래에 다시 전문적으로 연구토론을 할 것입니다.

 

  평소에 ‘하루에서 이레 동안 명호를 집지하여 일심불란해야 한다’, 다시 말해 믿음과 발원이 견고한 전수염불하는 사람은, 이 사람은 어떨까요? 그도 역시 죽을 거잖아요! 그는 일생동안 염불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곧 목숨을 마칠 때가 되었는데, 어떻습니까? 이어서 그 다음의 경문에서 말씀하셨지요.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치려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것이니라.

  其人臨命終時,阿彌陀佛,與諸聖眾,現在其前。

 

  평생을 염불하던 사람은 임종할 때 부처님께서 성중들과 함께 자연히 그 사람 앞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때에 그 사람이 염불을 하든 못하든 간에 부처님과 성중들이 모두 오셔서 몸을 나투시기 때문에 경문에서는 임종할 때에도 다시 염불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지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치려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란 바로 평생에 전수염불을 하던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평소에 염불하며 왕생하기를 발원하였기 때문에 평소에 이미 원인을 심어서 이때에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평소에 염불을 했다하더라도 임종할 때에도 반드시 염불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부처님께서 영접하러 오시지 않아 왕생할 수 없을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문에 대한 아주 분명한 오해입니다.

 

 【오해 2】

 

  계속해서 두 번째 오해는 자신에게 임종할 때 ‘마음이 전도되지 않도록’ 보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선 왕생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아미타경』의 경문에 의거하면 임종할 때 ‘마음이 전도되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힘으로 보증을 해주시는 것으로서, 평생을 전수염불하여 임종할 때 부처님께서 자연히 영접하러 오시는데, 부처님께서 영접하러 오셔서 자비원력으로 우리를 가지加持해 주시어 자연히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정념가운데 머물게 하여 마음이 전도되지 않고 부처님을 따라 왕생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다음의 경문에서 말씀하셨지요.

 

  그 사람이 임종할 때 마음이 전도되지 않고, 곧바로 아미타불의 극락국토에 왕생하게 되느니라.

  是人終時,心不顚倒, 即得往生,阿彌陀佛,極樂國土。

 

  그럼 부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이 사람은 부처님을 친견하고 마지막 한 숨을 내쉬고는 목숨을 마치게 되는데, 이때 찰나 간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경문에서 직접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는 ‘마음이 전도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 여전히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 역시 부처님께서 영접을 오시면서 가지를 해주신 결과이지 우리 범부들 자신의 능력은 아닙니다.

 

  현장대사께서 번역하신 『아미타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자비롭게 가지와 보호를 하여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해주시니라.  

  慈悲加佑,令心不亂。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것’이 바로 ‘마음이 전도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자비롭게 가지와 보호’를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이 어지럽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들은 매우 괴롭습니다. 사대가 흩어지는 괴로움·가족과 헤어지는 괴로움·몸을 버려야하는 괴로움과 과거의 모든 업력들이 나타나게 되는 등의 갖가지 괴로움들이 있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비로소 우리에게 “내가 큰 광명을 놓아 이때에 반드시 너희들을 영접하고 위로하러 올 것이다”고 위로를 해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안온해질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요.

 

  우리가 임종할 무렵, 아미타불께서 큰 광명을 놓아서 우리들을 영접하러 오실 때, 우리의 모든 업장과 모든 괴로움과 불안함은 즉각 상쾌함으로 변하여 마음은 아주 편안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비로소 “자비롭게 가지와 보호를 하여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심과 부처님의 서원과 공덕이 우리를 가지하고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의 마음이 안정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 마음이 전도되지 않을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에게 먼저 마음이 전도되지 않을 능력이 있은 다음에 부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마음이 전도되지 않아야만 비로소 부처님께서 영접하러 오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염불을 하면 부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마음이 전도되지 않는 것이지요. 이점을 확실히 아셔야 합니다!

 

 【오해 3】

 

  세 번째 오해는 ‘부처님께서 비록 임종할 때 나를 영접하러 오신다고는 하셨지만, 만약에 그때 내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다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겉모습이 혼미해 있으면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 역시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겉모습은 비록 혼미해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아주 뚜렷하게 바깥 경계들을 인식하고 있어서 부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면 우리는 아주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염불감응록』제3집 제136편에 귀양貴陽에 사는 장묘신蔣妙信 연우님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두 눈이 실명된 맹인으로 평소에 전수염불을 하셨는데, 대변을 보시다가 너무 힘을 준 탓에 뇌혈관이 파열되었지요. 여러 날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바로 “부처님께서 나를 영접하러 오셨으니, 난 이제 왕생한다!”고 말씀하시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가 당일 날 오후에 왕생하셨는데, 가시는 모습이 아주 좋았습니다. 선천적인 실명으로 일생동안 색깔조차 분간하지 못하던 맹인이 혼수상태에서 부처님께서 그녀를 영접하러 오신 모습을 친견하셨다니 이 얼마나 희귀합니까! 게다가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도 염불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영접하러 오실 때는 눈이 먼 것도 장애가 되지 않고, 혼미한 것도 장애가 되지 않으며, 임종 직전에 염불을 했느냐 못했느냐 여부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평생에 염불을 하여 우리의 마음과 아미타불의 마음 사이에 서로 감응을 이루어서 자연히 왕생하는 것입니다. 마음(心識)은 어둡지 않고, 영원히 사라지지도 파괴되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뒤에서 우리는 다시 두 가지 현실의 사례를 들어 증명을 하도록 할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쇼크 상태에 빠져서 인사불성이 되었다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신체기관의 고장으로 인해 혈관이 막혔다거나 정신이 혼미해진 것뿐이므로, 그것은 임종할 때 마음의 상태는 아닙니다.

 

 【명종의 세 단계】

 

  임종에서 명종命終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심식心識에는 이른바 세 단계가 있으니, 곧 명료심위·자체애위·불명료심위가 있습니다.

 

  첫째는 명료심위明了心位입니다: 명종상태에 가까워질 때, 전5식인 눈·귀·코·혀·몸에는 여전히 작용이 있고 제6의식도 여전히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으며 심식도 뚜렷하게 깨어있기 때문에 ‘명료심위’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곧 사망에 이르게 되면서 사대오온이 흩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은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지만, 다른 방면에서는 또 아주 분명하게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처자식과 집안의 재산과 재물 등 평생을 사랑하던 사람이나 물건을 마주할 때, 마음속으로 차마 헤어질 수가 없어서 참으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되지요.

 

  둘째는 자체애위自體愛位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온갖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때가 되면 몸과 마음은 더욱 더 허약해지고 전5식은 이미 작용을 일으키지 않아서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으며, 오직 제6의식의 미세한 생각만 존재하게 됩니다. 이때에는 이미 벌써 자신의 일만으로도 힘에 벅차기 때문에 바깥의 처자식과 재물 등에 대한 생각도 내버리고서 오로지 한 가지 생각, 즉 자신의 몸을 애착하고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마음만 있게 되기 때문에 ‘자체애위’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맨 마지막은 불명료심위明了心位입니다: ‘난심위亂心位’라고도 부르지요. 즉 죽는 순간을 말합니다. 몸에 대해 아무리 집착하고 아껴 봐도 보존할 수가 없어, 이때가 되면 모든 신체의 기관들이 기능을 멈추게 되며, 제6의식 역시 신체기관의 기능들이 사라짐에 따라 사라지게 됩니다. 제6의식의 작용이 없으면 윤회환생을 좌우하는 아뢰야식이 떠오르게 됩니다. 금생 및 세세생생의 선악업들이 떠오르게 되는데, 마치 꿈을 꿀 때 제6의식이 비교적 약하기 때문에 순서·논리·조리가 전혀 없고, 시간·공간도 모두 매우 혼란하여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주인 하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바로 이와 같아서 업력의 종자가 떠오르게 되면 마치 한 나라에 국왕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나라에 왕이 없기 때문에 도적들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서로 왕이 되려고 다투게 되는데, 이때는 누구의 힘이 강한지를 봐서 그 사람이 왕이 됩니다. 같은 이치로 목숨을 마칠 때 현생 및 역겁歷劫의 선악업력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게 되는데, 업력이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중에 가장 맹렬한 선악의 업력을 따라서 선악의 도 가운데 태어나게 되며, 조금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람이 빚을 지게 되면 가장 큰 빚쟁이가 먼저 끌어당기게 되고, 마음의 실마리는 여러 갈래지만 무거운 쪽으로 치우쳐 떨어지기 되는 것과 같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죽을 때 모두 이와 같아서 앞에서 말한 세 단계 중에 어느 단계에 처해있든 막론하고 모두 극심한 괴로움과 두려움이 생기고, 놀라고 당황하여 허둥지둥하게 됩니다.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목숨이 다하려 할 때 회한과 두려움이 번갈아 엄습해 온다”고 하셨는데, 그 뜻은 목숨이 다하려 할 때 후회하고 놀라고 두려운 생각이 한꺼번에 마음속을 향해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후회할까요? 예전에 항상 명예를 위하고 이익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고 사업을 위해 살기만 했을 뿐, 여태껏 자신의 생사대사를 위해 고민해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과거에 선행을 실천하고 공덕을 쌓지 않았으며 불법을 수행하여 생사대사를 위해 준비해두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놀라고 두렵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갈 것이지를 몰라서 두려운 것이지요.

 

  사람이 이때가 되면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른바 전도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고, 삿된 견해가 생겨하기도 하고, 미련이 생겨나기도 하고, 난폭해지기도 하고, 부부간의 애정이 생겨나기도 하는데, 이때에 원친채주冤親債主들도 이 기회를 노리고 와서 방해를 하여 정념을 잃게 만듭니다.

 

 【내영은 명료심위에서다】

 

  그러나 염불하는 사람은 이상의 상황들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는 것은 바로 첫 번째 명료심위에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왕 임종조념을 할 때 임종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영접하러 오신 불보살님들을 친견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염불하는 사람도 비록 죽음의 고통은 있지만 아주 경미하지요. 왜냐하면 아미타불과 제대보살님들의 내영이 있어서 부처님의 광명으로 두루 비춰주시고 부처님의 힘으로 보살펴주시기 때문에 마음이 전도되지 않고 마음이 착란을 일으키지 않으며, 명료심위에서 기쁜 마음으로 정념왕생正念往生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삼경을 대조함

 

 【세 가지 시기】

 

 『아미타경』속에 세 가지 단계가 있는데, 하나는 평소, 하나는 임종, 또 하나는 명종입니다.

 

  평소란 바로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명호를 집지하여 하루나……이레 동안 일심불란하게’ 전수염불을 하는 것으로, 이것이 평소입니다. 그럼 임종에는 어떨까요? 임종할 때 당신은 자연히 그 결과를 얻게 되지요: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치려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십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신 다음은 곧 세 번째 단계인 명종입니다.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뒤바뀌지 않느니라”, 부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는 것이 먼저이고, 우리가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뒤바뀌지 않는 것이 그 다음이므로, 우리의 마음이 뒤바뀌지 않아야만 비로소 부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경문의 순서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 역시 아미타불의 제19원과도 완전히 딱 들어맞습니다. ‘목숨을 마치려 할 때에 내가 그 사람 앞에 나타나 영접을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 따라서 우리 전수염불하는 사람들은 ‘임종할 때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 부처님께서 영접하러 오시지 않을까봐 두렵고, 내가 왕생할 수 없을까봐 두려워요……’라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보증】

 

  48원 가운데 제19에서는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해 아미타불께서 다음과 같은 보증을 해주셨습니다.

 

  임종 시에 내가 대중들과 함께 그 사람을 둘러싸고 나타나지 못한다면 성불하지 않겠다.

  臨壽終時, 假令不與大眾圍繞,現其人前者,不取正覺。

 

  “너희가 나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목숨을 마칠 때에 내가 너희를 영접하러 올 텐데, 만약에 내가 오지 않는다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

 

  아미타불께서는 성불을 하셨나요?

  (대중) 성불하셨습니다!

  성불하셨지요. 그분이 성불을 하셨다면 이 발원은 실현되었을까요, 실현되지 않았을까요?

  (대중) 실현되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만약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그분께서 그때가 되면 오실까요, 오시지 않을까요? 그분께서 일시적으로 잊어버린다거나 약속을 어긴다거나 오시지 않는다거나 그럴까요?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실 겁니다! 그럼 부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셨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전도될까요?

  (대중) 아닙니다!

 

  우리는 전도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은 자연히 정념 가운데 머물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심부전도’는 아미타불의 서원이 우리를 위해 보증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임종할 때 내영을 해주시므로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전도되지 않는 것이지요.

 

 【구품 하나하나가 모두 전도되지 않는다】

 

  왕생하는 사람들의 임종상황과 관련해서 『아미타경』에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설하셨는데, 두 구절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임종할 때 부처님과 성중들이 나타나 영접을 해주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전도되지 않고 곧바로 왕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관경』에서는 하나하나 세부적인 사항으로 나누어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셨는데, 아홉 가지로 귀납할 수 있습니다.

 

  ⑴ 부처님과 성중들이 오신다. 수행자가 임종을 할 때에 아미타불과 여러 보살대중들이 함께 호호탕탕하게 오시는데, 번幡과 꽃들이 밝게 비치고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허공에 가득합니다.

 

  ⑵ 시자가 꽃을 들고 있다. 문득 보니 관음·세지 양대보살께서 두 손으로 직접 연화보대蓮花寶台를 받쳐 들고서 공손히 아미타불을 모시고 곁에 서 계시면서 친절하게 우리들이 연화보대에 올라오기를 기다리십니다.

 

  ⑶ 아미타불께서 방광을 하신다. 이때에 아미타불께서는 큰 광명을 놓아 곧장 수행자의 몸을 비추시는데, 수행자가 부처님의 광명에 비춰지면 모든 업장들이 완전히 없어져서 마음에 위안을 얻고 크게 기뻐하게 되며, 기뻐하는 마음속에서 목숨을 뚝 마치게 됩니다.

 

  ⑷ 아미타불께서 손을 내미신다. 이때에 아미타불께서는 무수한 화불化佛들과 함께 동시에 보배 손을 펴서 드리우며 수행자를 불러 영접하십니다.

 

  ⑸ 손을 잡고 연화대에 오른다. 수행자가 부처님께서 드리워주신 보배 손에 잡히게 되면 자연히 몸과 마음이 가볍게 떠올라 곧바로 연화보대에 오르게 됩니다.

 

  ⑹ 아미타불께서 찬탄하고 위로를 해주신다. 아미타불께서 부처님의 입으로 직접 말씀을 해주시는데, 보살대중들과 함께 한 목소리로 찬탄을 하시면서 “선남자여! 그대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까닭에 모든 죄가 소멸되어 내가 그대를 영접하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⑺ 수행자가 기뻐한다. 이때에 수행자는 이미 부처님께서 직접 몸을 나투시어 영접하러 오신 것을 보았고, 또 보살님들이 두 손으로 연화대를 받쳐 들고 기다리시는 것을 보았으며, 또 부처님의 광명이 곧장 자신의 몸을 비추시는 것을 보았고, 또 빛을 뿌리며 드리워주시는 보배 손의 접인을 받았으며, 또 자신이 이미 연화대에 앉아있음을 보았고, 더욱이 몸소 찬탄과 위로를 해주시는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고서 기쁘기가 그지없고 그지없이 기뻐하게 되었으니, 더욱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로 연화좌에서 머리를 숙여 부처님께 예배를 합니다.

 

  ⑻ 수행자가 보고 듣다. 위에서 말한 모든 상황들을 왕생하는 사람이 직접 경험하고 똑똑히 두 눈으로 보고 정확히 두 귀로 들었기에, 아주 뚜렷하여 조금도 어렴풋하고 답답함이 없습니다.

 

  ⑼ 부처님을 따라 왕생한다. 수행자가 아직 연화대에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머리를 들어보니 어느새 이미 아미타불의 극락보국에 도착하여 칠보로 된 연못 가운데서 화생을 하였습니다.

 

  구품은 모든 범부중생을 대표하는 것으로, 상근기·중근기·하근기·선인·악인, 그리고 상상품의 용맹정진을 하는 무리들과 하하품의 임종십념을 하는 근기들도 전부 그 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관경』에서 말하는 구품내영의 구체적인 세부사항들에 대해 비록 각 품 사이에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체적인 상황은 같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왕생하는 사람들이 임종하기 전에 부처님께서 영접하러 오신 것부터 명종을 한 다음에 부처님을 따라서 왕생하는 하나하나의 모든 광경에 이르기까지 전부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이므로,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여 조금도 애매모호하지가 않아서, 마음이 전도되는 일들이 절대 존재하지 않으며 다들 모두 기쁜 마음으로 목숨을 마치게 됩니다.

 

  따라서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렸듯이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죽는 것입니다. 보세요, 『관경』에서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신 것을 보고서 우리는 ‘뛸 듯이 기뻐하고(歡喜踴躍)’·‘마음으로 크게 기뻐한다(心大歡喜)’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전도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3) 사례를 들어 설명함

 

 【뢰조하의 이야기】

 

  여기서 현실의 사례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일반인들은 ‘만약에 내가 혼수상태에 빠진다면 어떻게 왕생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걱정을 하기 때문이지요. 사실은 사람이 비록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아니면 식물인간이 되어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뢰조하賴朝河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대만 사람으로 군대에서 총기와 탄약을 관리하는 사병이었습니다. 하루는 실수로 탄약이 폭발하였는데 마침 그가 폭발사고를 당하여 그 자리에서 바로 의식을 잃고 말았지요. 얼굴과 몸 전체에 모두 화상을 입고서 의식을 잃었지만 정말로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봤을 때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말을 못하고 오직 미약한 호흡만 있었기 때문에 의사들은 서둘러 긴급치료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봤을 땐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진 상황이었지만, 그는 아주 뚜렷하고 아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상태였을까요? 그는 자신의 신식(神識:영혼)이 몸을 떠나 있는 것을 보았고, 주변에 수많은 의사들이 거기서 자신을 구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의 몸은 한 겹 한 겹으로 미라와 같이 싸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옆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도 그는 아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지요. 그를 치료할 때 어떤 사람이 이렇게 건의를 했습니다. “이 사람을 대만 본도에 보내서 치료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곳 병원의 치료여건이 비교적 좋습니다”(그가 어디에 있었냐면 마조馬祖라는 곳에 있었는데, 바깥 섬이었지요) 그러자 옆에 있던 의사한분이 동의를 할 수 없다며 말했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이 사람은 곧 죽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허약한데 어떻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의사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그는 아주 분명하게 들었는데, 그가 좋다 싫다는 의견을 말하고 싶었지만 의사들이 들을 수가 없었기에 공연히 애만 태울 뿐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 그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답니다. 게다가 그의 눈은 저절로 천안통을 갖추어서 벽을 사이에 두고 의사들이 옆방에서 어느 여성 환자에게 수술을 하는 광경도 아주 뚜렷이 볼 수 있었으며, 위층도 볼 수 있고 아래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벽의 장애도 받지 않고 단번에 들어갈 수 있었답니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는 즉각 그 사람 앞에 나타날 수 있었으니, 그렇게 신기합니다.

 

  나중에 그는 대만 본도로 이송되었습니다. 부대에 있는 친구들이 마조에서 종자粽子를 만들어 먹으면서 말했지요. “뢰조하가 만약에 사고를 당하지 않았으면 오늘 밤의 종자를 그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이름이 불리자 그는 바로 듣고서 본도로부터 마조까지 왔답니다. 이름이 불리었을 때 그는 이미 도착하여 “이 종자들을 잘 포장해서 뢰조하가 먹도록 몇 개를 보내자”라는 뒤 부분의 말도 들었습니다.

 

  총 23일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에 대해, 그는 아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삼일 동안 그는 아주 좋은 향기를 맡았는데, 무슨 원인일까요? 그의 어머님은 감응이 있어서 마음속으로 매우 불안하였답니다.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그래서 뢰조하의 형더러 전화를 해서 현재 그가 어떠한지 알아보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뢰조하가 폭발사고를 당한 뒤에 부대에서 그의 가족들이 불안해 할까봐 소식을 봉쇄하였기 때문에 그의 형이 전화를 해봐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더욱 불안한 느낌이 들어 스님을 찾아서 여쭤봤습니다.

  “스님, 어떡하면 좋을까요?”

  스님이 그녀에게 말했지요.

  “당신이 오로지 염불만 하시면 재난을 소멸하고 모든 게 다 좋아질 겁니다”

 

  그의 어머니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연락을 하려해도 연락이 닿지가 않거든요) 집으로 돌아온 뒤에 정성을 다해 염불을 하셨습니다. 그 삼일 동안 그녀는 아주 정성스럽게 집중하여 염불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최고급의 전단향도 사오셨습니다. 그 결과, 삼일 동안 그의 어머님이 부처님께 올리셨던 전단향의 향기를 뢰조하가 병원에서 맡았던 것입니다. 보세요, 이렇게 감응을 이루고 이렇게 불가사의합니다. 전화로 연락할 수도 없고 모든 소식이 끊겨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염불을 하면 감응할 수가 있어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례는 최소한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설명합니다.

 

  첫째, 사람이 죽으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가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식물인간처럼 말도 못하고 음식도 못 먹는다고 해서 그가 혼미해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의 심식은 뚜렷이 깨어있어서 아주 분명히 느끼고 있었지요. 심지어 그를 치료해주시던 의사들도 타지에서 모셔온 분이어서 본래 그가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23일 뒤에 깨어나서 그분들의 이름을 전부 부를 수 있었답니다. 사람들이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지요. “나는 자네와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었는데, 자네가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안 거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당신들 동료들끼리 서로 부르는 이름을 제가 들은 지 벌써 20여일이나 지났기 때문에 제가 당신을 알아보는 거죠!” 그가 입을 열자마자 이름을 불렀으니 얼마나 신기합니까?

 

  셋째, 그에게 신통력이 있어서 그의 이름만 부르면 바로 현장에 도착한다는 점입니다.

 

  그럼 우리도 생각을 해보자고요, 그의 신통이 클까요, 아니면 아미타불의 신통이 클까요?

  (대중) 아미타불입니다!

 

  그의 몸은 타이베이의 병실에서 식물인간처럼 그 곳에 누워있었지만, 마조에 있는 친구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즉시 그는 마조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조차도 이러한 신통력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겠습니까?

 

 【아미타불께서 소리에 응하여 바로 나타나다】

 

  우리가 여기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아미타불께서 즉각 이곳에 오신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열 사람이 부르면 부처님은 열 사람 곁으로 오십니다. 그분은 백천만억의 분신分身을 나툴 수 있으니까요!

 

  선도대사님은 『관경소』에서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중생이 행을 일으켜 입으로 항상 부처님을 부르면 부처님께서 바로 들으시고;

  몸으로 항상 부처님께 예경하면 부처님은 바로 보시고;

  마음으로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은 바로 아신다.

  중생이 부처님을 억념하면 부처님 역시 중생을 억념하신다.

  중생이 부처님을 뵙기 원하면 부처님은 바로 그 생각에 응하여 눈앞에 나타나신다.

  衆生起行, 口常稱佛, 佛即聞之;

  身常禮敬佛, 佛即見之;

  心常念佛, 佛即知之。

  衆生憶念佛者, 佛亦憶念衆生。

  衆生願見佛, 佛即應念, 現在目前。

 

  중생들이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부처님은 즉각 들으시고, 중생들이 몸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하면 부처님은 즉각 보시고, 중생들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억념하면 부처님은 즉각 아신다는 것입니다. 중생이 염불하며 부처님을 뵙기를 원하면 부처님은 즉각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시니, 바로 이렇게 빠릅니다!

 

  선도대사님께서는 『관경』의 하품을 해석하실 때에 “아미타불께서 소리에 응하여 바로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관경』에서 하품중생의 사람은 부처님의 명호를 한 번 밖에 부르지 않았지만 아미타불께서 즉각 그 사람 앞에 나타나셔서 그를 영접하여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였습니다. 마치 당신을 부르는 우리의 소리에 응답하듯이 즉각 우리 앞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생은 아주 아주 쉬운 겁니다.

 

  이 사례 역시 임종할 때에 비록 식물인간·혼수상태 등등이더라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식물인간이 왕생한 이야기】

 

어제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해 조념을 해준다지만 그 사람은 이미 혼수상태에 빠졌잖아요! 제가 그에게 법문을 해준들 그가 들을 수 있을까요?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제가 그에게 염불을 해주면 효과가 있을까요?”

 

반드시 효과가 있습니다! 반드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그가 아주 분명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절대로 그에게 미안한 얘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개야, 내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나에 대한 험담을 하다니! 당신은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은가!” 그땐 좋은 말로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어야 하는데, 그럼 그는 아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상인(혜정법사)의 사촌매형은 한평생을 오로지 교사생활만 하시던 분이셨는데, 종교신앙이라곤 전혀 없었을 뿐더러 종교를 연구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는 63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30여년의 교사생활을 하셨지요. 이 30년 동안에 그는 교육계에서 40여 차례 표창을 받았고 25차례 공을 세웠으며, 또한 대만의 최고지도자의 접견도 받았으니, 교육방면의 그의 성과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에 대해 굉장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셨으며 거기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었지요.

 

그가 63세가 되던 해에 그의 학교에서 100주년 개교기념일 행사를 하게 되었는데, 개교기념일 행사에 관한 업무들을 처리하기 위해 많은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과로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얼굴이 시퍼렇고 검게 변하여 급히 병원으로 보내어 구급치료를 하였지요. 그의 딸이 와서 보고는 깜짝 놀라 “아버지!”하고 부르는 소리에 기적이 나타나 심장의 박동은 회복되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때 그의 부인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아! 나에겐 아직 스님생활을 하고 있는 사촌동생 한명이 있잖아. 아마 스님에게는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서 스님을 모셔왔습니다. 그녀는 스님에게 무슨 신통력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고명한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스님께선 병원으로 오신 뒤에 그 상황을 보시고는 바로 그에게 염불을 해주셨지요. 그의 병이 매우 위중하여 중환자실에 계셨기에 매번 30분씩 매일 세 번을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이 30분 중 15분가량의 시간을 가족들로 하여금 그에게 말을 걸도록 하였지요. “아버님! 우리는 당신을 매우 사랑합니다. 꼭 살아나셔야 합니다!” 그의 부인도 그의 머리를 빗겨주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머리를 빗는 것을 많이 좋아하셨는데, 제가 머리를 빗겨드릴게요, 아주 멋져요!”(그는 한평생 부처님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남은 15분 동안은 스님께서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아주 정성스럽게 염불을 하셨지요.

 

환자는 줄곧 깨어나질 못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43일이 지났습니다.

 

43일 째 되던 날 그의 셋째 딸(평소에도 불교를 믿지 않았습니다)은 어떻게든 자신의 아버지를 살리려고(그들은 매우 효순하였습니다) 하는데, 마침 어느 도량에서 불공드릴 준비를 하면서 “아무개님, 여기로 오셔서 불공을 한번 드려보세요, 아마도 당신의 아버님께 도움이 되실 거예요”라는 말을 듣고 바로 거기로 가서 염불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염불을 하다가 점심 11시가 되었을 때 하나의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아주 큰 연꽃위에 장엄하게 앉아서 허공중으로부터 표연하게 내려오셨는데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출가한 스님들처럼 빡빡 깍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게다가 입고 있던 옷도 스님들이 입는 가사, 비스듬히 걸친 가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딸은 종교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기에 이런 현상을 보고도 이것이 서상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질 않았습니다.

 

이때 그녀가 전화 한통을 받았지요. “아버님이 곧 임종할 것 같아, 빨리 돌아와”(같은 시간에 그녀의 아버지는 심장박동을 멈추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매우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아요” 그녀는 매우 슬펐습니다.

 

그 당시, 이 도량에 티벳 라마 한분이 계셨는데 점심공양을 할 때 그녀가 급히 떠나려는 것을 보시고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남아서 공양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녀를 대신해서 대답을 하였지요. “그녀의 아버님이 위독하셔서 급히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라마께서 그녀를 위로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슬퍼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의 아버님은 현재 부처님과 함께 계셔요. 오늘 우리가 여기서 드린 불공 중에 가장 성공적인 불공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공을 드릴 때 라마께서는 진언을 외우고 계셨지만 그녀는 진언을 외울 줄 몰랐습니다. 불자가 아니었기에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남들이 진언을 외울 때 그녀는 혼자서 아미타불만 불렀던 것입니다. 대략 11시 정도에 이런 광경을 본 것이었지요.

 

이 광경은 충분히 그녀의 아버지가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한평생 불교를 믿지 않으셨는데다가 빛이 나도록 머리를 빗고, 매끈하고 줄이 선 양복까지 입고 계셨는데, 어떻게 딸이 본 아버지의 모습처럼 뜻밖에도 그런 출가자의 모습이겠습니까? 게다가 어떻게 가사를 입고 연꽃에 앉아서 방광을 하며 오셨겠습니까?

 

이에 대해 혜정법사님께서는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사실 요 43일 동안 그가 계시던 병원의 중환자실은 폐관수행을 하는 관방關房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혜정법사님께서 그에게 법문하시기를, “아무개님, 당신은 현재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이 바로 사망하기 전 단계라는 겁니다. 만약에 살아날 수 있다면 당연히 아주 좋겠지만, 살아날 수 없다면 곧 죽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평소 종교신앙이 있든 없든 잠시 차치하고, 만약에 사후세계가 없다면 그럼 그만이겠지만,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육도윤회를 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므로 마땅히 염불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해야 합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절대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절대 당신을 싫어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다음 그에게 염불을 매번 15분씩 세 번, 총45분을 해주셨으며, 평소에도 염불기 한 대를 머리맡에 틀어놓고 하루 24시간을 부처님명호를 들려주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장엄하게 왕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에 그가 법문을 듣고 나서 마음속으로 ‘아, 이건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라고 느끼고서 염불을 했을 거라고 말입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땐 ‘그 사람은 완전히 죽은 사람이잖아요, 저기에 누워서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불러도 듣지를 못하고 말을 걸어도 대답을 못하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반인들의 상황입니다.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평소에 염불을 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그런 상황까지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많이 좋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때가 되면 아미타불께서 틀림없이 오셔서 우리를 영접해주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마음속으로 편안하고 즐겁고 가뿐하게 아미타불을 따라서 극락세계로 갈 것입니다.

 

【염불을 한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죽을 때 상황】

 

다들 죽을 때의 상황을 알고 싶으세요? 염불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온 하늘과 땅이 컴컴하고 염라대왕과 큰 귀신 작은 귀신들이 작살과 칼과 쇠사슬……등등을 들고서 칼 빛과 검 그림자가 온 하늘을 가리며 몰려와서 그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그럼 염불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이때는 온통 상서롭고 온화한 기운들로 가득하지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봤을 땐 우리가 크게 숨을 쉬고 작게 숨을 쉬고, 눈을 크게 떴다 작게 떴다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심식은 이미 아미타불께서 영접하러 오신 것을 봤습니다. 아! 온통 부처님의 광명으로 가득한 가운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수많은 불보살님들이 호호탕탕하게 무량무변하게 계시고, 공중에서 미묘한 하늘음악을 연주하고, 하늘에서 갖가지 미묘한 연꽃들이 흩날려 떨어지며, 갖가지 미묘한 향기들이 허공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보살 성중들은 손에 보배 연꽃을 들고 우리 앞에 다가 오시고, 우리가 밤낮으로 그리던 아미타불께서 마침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어 대광명을 놓아 우리를 가지加持해 주십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그대가 한결같이 염불한 까닭에 내가 그대를 영접하러 왔노라!”고 하시면서, 보배 손으로 한번 손짓하면 우리는 순식간에 연화보대위로 올라가게 되는데, 그 때에 우리는 대단히 기뻐하지요! 직접 부처님의 존안을 친견하고서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우리는 절을 합니다. 선도대사님께 두 구절 말씀이 있는데, 우리들의 왕생의 쉬움과 수승함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머리 숙여 예불할 땐 이 세상이었는데,

머리 들어보니 이미 아미타불의 나라에 이르렀다네.

低頭禮佛在此界, 擧頭已到彌陀國。

 

우리가 머리를 숙여 예불을 할 때에는 아직 사바세계였으나, 머리를 들어 보니 이미 극락세계에 이르렀다는 말이지요. 바로 이렇게 빠르고 이렇게 쉽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평소에 일향전념만 한다면 임종할 때 정념이 없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주 분명하고 아주 뚜렷하게 자신이 성중들을 따라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점은 모두 난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복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많은 선근’――염불이 바로 많은 선근입니다.다들 할 수 있겠지요?

(대중)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선근이 없을까봐 걱정하실 건가요?

(대중) 아닙니다!

 

만약에 걱정이 된다면 그래도 염불을 해야 합니다. 염불만 하면 바로 많은 선근이니까요.

 

두 번째, ‘일심불란’――전專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전심專心이 바로 일심이고 전념專念이 바로 불란입니다.다들 할 수 있겠습니까?

(대중)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심불란’은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우리가 전수염불하고 일심불란하게 염불만 한다면 임종할 때 부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실까요, 오시지 않을까요?

(대중) 오십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는데, 그럼 우리는 전도될까요, 전도되지 않을까요?

(대중) 전도되지 않습니다!

 

전도되지 않아요! 반드시 왕생합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점은 모두 난관이 되질 않습니다. 만약에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미타불을 부르면 부를수록 더욱 기뻐하게 될 겁니다. 좋아요! 염불이 바로 많은 선근이니, 나는 현재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전일함이 바로 일심불란이므로 나는 전일하고 또 전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임종할 때가 되면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영접하러 오시므로, 목숨을 마칠 때에 나의 마음은 뒤바뀌지 않습니다. 아주 자연스런 겁니다.

 

그렇다면 『아미타경』의 이 단락의 경문은 아주 간단하고 아주 분명하여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다음은 아직 두 가지 작은 문제가 남아 있는데, 약간의 마무리 작업이니 우리는 그것을 해결해보겠습니다.                         

                         

4. ‘선남자·선여인’에 관해서

 

【염불이 바로 선남녀이다】

 

첫 번째 문제, 무엇이 ‘선남자·선여인’일까요?

경문에서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명호를 집지한다”고 하셨지요.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비록 염불을 하더라도 만약에 오계십선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왕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미타경』에서 선남자·선여인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우리 많은 사람들은 또 눈이 휘둥그레질 겁니다. 자신을 생각해 보면 ‘오계십선을 실천하였는가? 아니다!’ 그럼 왕생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이것도 문제입니다.

 

사실은 이것 역시 문젯거리가 되는 게 아니라 경문에서 말씀하신 ‘선남자·선여인’에 대해 오해를 한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아미타불께서 스스로 ‘시방중생’을 구제하시겠다고 발원을 하셨는데, 시방중생에는 삼배구품과 일체 선악범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불께서 어떻게 중간에서 방해를 하며 오직 선인만이 염불해서 왕생할 수 있을 뿐, 악인은 염불을 해도 왕생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경문에서는 분명히 ‘선남자·선여인’을 말씀하셨으니,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정답부터 말씀드릴게요. 당신이 염불을 하면 바로 선남자·선여인이고, 당신이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설사 오계십선을 닦는다하더라도 역시 ‘선남자·선여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관경』에서 부처님의 찬탄】

 

우리는 경문의 증거를 보겠습니다. 예컨대 『관경』하품상생의 경우, 본래 십악의 죄를 지은 사람이었지요. 경문에서 ‘많은 나쁜 짓을 저질러 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하셨는데, 살생·투도·사음·망어·양설·악구·기어·탐·진·치…… 등을 전부 다 범했습니다. 그는 한평생 좋은 일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나쁜 짓만 일삼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곧 죽게 되었는데, 이런 사람이야말로 마땅히 진정한 악인이라 불러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럼 임종하기 직전에는요, 그가 선지식을 만났는데, 선지식은 그에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라고 가르쳐주셨지요. 그래서 그가 바로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부르자 아미타불께서 즉각 나타나 그를 영접하시면서 찬탄을 하셨는데, 뭐라고 찬탄하셨습니까?

 

선남자여!

그대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까닭에

모든 죄가 소멸되어 내가 그대를 영접하러 왔노라

善男子! 以汝稱佛名故, 諸罪消滅,我來迎汝。

 

한번의 염불을 했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그를 선남자라고 찬탄하신 것이지 그의 평소 행위에 의해서 찬탄한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그에게는 온갖 나쁜 행위만 있었기에 언급할 수가 없거든요. 그가 염불을 한 까닭에 아미타불께서 그에게 ‘선남자’라는 칭호를 한 것입니다. 왜 염불만 하면 선남자라 불릴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염불을 하면 모든 죄업이 사라지고 공덕을 구족하고 악인이 선인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 까닭에 ‘내가 그대를 영접하러 왔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남자’든, ‘모든 죄업이 소멸됨’이든, ‘내가 그대를 영접하러 왔노라’든 모두 염불을 했기 때문이므로, 네 구절 가운데 ‘그대가 염불을 한 까닭’이 핵심입니다. 즉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까닭에 선남자라 부르는 것이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까닭에 모든 죄업이 소멸되는 것이며,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까닭에 내가 그대를 영접하러 왔노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죄가 얼마나 큰지를 막론하고 당신이 염불만 한다면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관경소』의 해석】

 

우리는 선도대사님의 해석 몇 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관경소·산선의』

 

『아미타경』에서 설하시길,

“일체 범부가 일일에서 칠일 동안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하면 반드시 왕생한다”

고 하셨다.

《彌陀經》中說:“一切凡夫,一日七日,一心專念彌陀名號,定得往生。”

 

선도대사님은 『아미타경』의 경문을 인용하여 해석을 하셨는데, ‘선남자·선여인’을 ‘일체범부’로 해석하셨습니다. 따라서 ‘일체’라고 말한 이상, 그 속에는 선인도 포함하고 악인도 포함하므로 일체 선악범부를 말하는 것이지요.

 

【『관념법문』의 해석 1】

 

2. 『관념법문』

 

『아미타경』에서 설하시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남자·여인이 하루나 이레 동안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한다면, 그 사람이 임종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자연히 오셔서 영접하게 되어,

곧바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하셨다.

《彌陀經》中說:“佛言:若有男子、女人,或一日、七日,一心專念,彌陀佛名。

其人命欲終時,阿彌陀佛與諸聖衆自來迎接,即得往生西方極樂世界。”

 

이 단락의 경문 중에서 선도대사님은 ‘선善’자를 생략해버리고, 직접 ‘남자·여인’이라 말씀하셨는데, 이것 역시 선악에 관계없이 선악을 모두 그 속에 포함한다는 의미입니다.

 

【『관념법문』의 해석 2】

 

3. 『관념법문』

 

『아미타경』에서 설하시길,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든,

일체 죄업 짓는 범부들이 다만 마음 돌려 아미타불을 부르며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되,

위로는 백년을 다하고 아래로는 칠일, 일일, 열 번, 세 번, 한 번 등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면)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 부처님과 성중들이 자연히 영접하러 오시어 바로 왕생을 하게 된다”

고 하셨다.

《彌陀經》云:“若佛在世,若佛滅後,一切造罪凡夫,但回心念阿彌陀佛,願生淨土;

上盡百年,下至七日、一日,十聲、三聲、一聲等;

命欲終時,佛與聖衆,自來迎接,即得往生。”

 

이 단락은 더욱 명쾌합니다. ‘일체 죄업 짓는 범부’라고 말한 것은, 곧 당신이 선한 범부든 아니면 악한 범부든 막론하고 일단 범부라면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더욱 높습니다. 염불을 완전한 선으로 간주한 것이므로, 염불의 선에 견주어 볼 때 범부의 선은 여전히 죄업이어서 전혀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경문에서 ‘선남자·선여인’을 말한 것은 그가 이미 염불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고, 선도대사님의 해석은 본래 그가 아직 염불을 하지 않은 각도에서 말한 것입니다. 본래는 ‘일체 죄업을 짓는 범부’였지만 염불을 해서 ‘선남자·선여인’으로 불리게 된 것이므로, 이는 『관경』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선의 기준】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윤리도덕의 관념도 우리는 선이라 부르지요. 우리는 “아무개는 선을 닦고 덕을 쌓은 선인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은 세간의 윤리도덕을 기준으로 삼는 게 아니라 극락왕생하여 성불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오계십선으로는 자격이 안 되므로 ‘선남자’라 불릴 자격이 없겠지요.

 

이 ‘선남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걸까요? 『아미타경』의 앞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 으뜸가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느니라.

諸上善人,俱會一處。

 

또 ‘적은 선근과 복덕’을 가진 사람은 왕생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으뜸가는 훌륭한 사람’이란 당연히 아비발치阿鞞跋致의 보살과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들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등급을 기준으로 한다면 오계십선을 으뜸가는 선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광대사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세간의 선업을 만약에 염불의 정업淨業에 견주어 말한다면 여전히 악업이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윤회하는 것이고 여전히 오염된 것이어서 기껏해야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도록 해줄 수 있을 뿐, 생사해탈하도록 해줄 순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아라한과 같은 성인일지라도 만약에 아비발치·일생보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분들은 성불의 싹을 틔울 수 없는 ‘바싹 마른 새싹과 썩은 종자焦芽敗種’에 불과하므로, 선이 아니라 악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선이라 불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염불을 하면, 육자명호 속에 아미타불의 과지의 공덕이 원만히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선근·큰 선근·가장 수승한 선근·위없는 선근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선남자·선여인’으로 불리를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선을 닦고 덕을 쌓는 사람만이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고 아주 좋은 선심善心이 있어서 그런 사람이 염불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나는 어떤가? 망상도 있고 잡념도 있고, 또 나쁜 생각들도 있기에 나는 염불해도 아마 왕생할 수 없을 거야’ 이렇게 의심하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염불만 하면 모두 ‘선남자’라 불리게 되고, 장래에 왕생하여 ‘으뜸가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살게’ 됩니다.

 

이것이 ‘선남자·선여인’에 대한 해석입니다.

5. ‘약일일약칠일’에 관해서

【임종에 이를 때까지】

두 번째 문제, 무엇이 ‘약일일……약칠일’일까요?『

아미타경』에서 ‘명호를 집지하여 약일일……약칠일 일심불란하게(執持名號, 若一日……若七日,一心不亂。)’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약일일……약칠일’은 하루나 이레에 한정된 게 아니라 한평생을 염불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방금 우리가 배운 선도대사님의 『관념법문』에서는 “위로는 백년을 다하고 아래로는 칠일·일일·열 번·세 번·한 번에 이르는 등”이라 해석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의 48대원 중 제18원에서 말하는 ‘내지 십념’입니다. ‘내지’란 곧 많게는 한평생의 염불로부터 적게는 열 번·한 번의 염불을 말하는 것인데요, 그래서 선도대사님께서 총괄적인 설명을 해주셨지요.

 

한번 발심하고 나서,

맹세코 이번 생이 다할 때가지 물러남이 없이,

오직 정토왕생을 기약으로 한다.

一發心以後,誓畢此生,無有退轉,唯以淨土爲期。

이것을 ‘약일일……약칠일’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일단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심하면, 나는 죽을 때까지 한평생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를 말하는 겁니다.

 

경문의 ‘약若’은 ‘또는或者’과 같은 정해지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부정사不定詞입니다. 그럼 왜 정해지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이 법문을 만나게 되는 시간에는 각자 빠름과 늦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 법문을 만나고 나서 그 다음날에 바로 숨이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 하루 동안 그가 일심불란하게 전수염불을 한다면, 이것을 ‘약일일, 일심불란’이라 부르고, 또 어떤 사람이 삼일 째 되는 날에 숨이 끊어져 이틀 동안 염불할 시간이 있었다면, 이것을 ‘약이일, 일심불란’이라 부르며, 또 어떤 사람이 염불하여 칠일이 되는 날에 숨이 끊어졌다면, 이것을 ‘약칠일, 일심불란’이라 부릅니다.

 

이치대로라면 그 뒤로 아직 약팔일·구일·십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럼 언제까지일까요? 쭉 목숨을 마칠 때까지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경』에서 “약일일……약칠일”을 설하고 나서 바로 이어서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치려 할 때”라고 설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매우 분명한 것은 쭉 임종할 때까지 끊임없이 명호를 집지해야만 비로소 ‘목숨을 마치려 할 때’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선 이 시기에 당신더러 염불을 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끝없이 예를 들 수는 없기 때문에 칠일을 들어 기한으로 삼은 것인데, 이것 역시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표현법으로서 칠일을 하나의 주기로 삼은 것입니다. 칠일이 지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약일일·약이일……약칠일이 되는 것이지요.

 

또 지나면 다시 약일일……약칠일, 끝없이 반복됩니다. 이는 마치 한 주에 칠일이 있는 것처럼 칠일이 지나면 다시 처음부터 월요일·화요일…… 계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끝없이 길어도 역시 칠일이어서 칠일이 곧 영원한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목숨이 끝나야만 비로소 상관없게 되겠지요.

 

염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끝없이 되풀이되므로 선도대사께서 해석하시길, “칠일 밤낮 마음에 틈새 없고, 장시간 행을 일으켜 배가 됨도 모두 그러하네. 임종할 때 성중들이 꽃을 들고 나타나니, 심신이 용약하여 금색 연꽃에 앉노라(七日七夜心無間,長時起行倍皆然;臨終聖衆持華現,身心踴躍坐金蓮。) ”고 하셨지요. 배가 된다는 게 바로 곱절에 곱절을 반복한다는 말로서, 시시각각 죽음을 준비하되 죽지 않으면 계속해서 임종할 때까지 염불한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체득】

‘약일일……약칠일’과 관련해서 저 개인적으로는 ‘사람의 목숨은 덧없다, 염불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왕생은 쉽다’ 등의 세 가지 체득이 있습니다.

 

⑴ 사람의 목숨은 덧없다: 매일 죽는 날이 다가올 것을 준비하면서 일찍 정토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지요. 오늘도 염불소리 가운데 또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 죽지 않았구나?! 아! 그럼 이것이 바로 약일일이고, 오늘도 또 죽지 않았다면, 이것이 바로 약이일입니다.

 

⑵ 염불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정토왕생을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자연히 염불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인데, 죽지 않고 한 숨만 붙어있어도 하루 동안 염불을 하는 겁니다. 칠일을 일주기로 반복하고, 또 칠일을 일주기로 반복하고 해서 어쨌든 죽지 않고 살아만 있으면 염불하는 것이지요.

 

⑶ 왕생은 쉽다: 일일에서 칠일까지 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한다고 하니, 듣기만 해도 아주 쉽고 환희심이 생기지요. 만약에 성도문의 수행을 말한다면 그들은 ‘삼대아승지겁’을 말해야 하는데, 그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감히 생각조차 못할 겁니다.

 

. 총결

핵심 중의 핵심

아미타경의 이 단락 경문에 대해 우리는 이미 자세히 배웠습니다. 다들 좀 복습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많은 선근과 복덕에 관해서고, 둘째는 일심불란에 관해서고, 셋째는 심부전도에 관해서고, 넷째는 선남자·선여인에 관해서고, 다섯째는 약일일……약칠일에 관해서입니다. 이 다섯 가지 점에 대해 일반인들은 왕왕 글자 그대로 뜻을 짐작하기 쉬워서 오해가 생길 수 있지요. 그러나 만약에 선도대사님의 해석에 의거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아주 분명해질 것이고, 마음이 분명해지면 신심도 견고해지고 확고해져서 수행하는데 힘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선도대사님은 어떻게 해석하셨습니까? 선도대사님의 해석은 곧 하나의 ――전칭불명(專稱佛名: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전칭불명이 바로 많은 선근이요,

전칭불명이 많은 선근인 까닭에 선남자·선여인이라 부르는 것이요,

전칭불명하여 각자 수명대로 길고 짧음의 제한이 없는 것이 바로 약일일·약칠일이요,

전칭불명하되 순일하여 뒤섞임이 없는 것이 바로 일심불란이요,

전칭불명하면 임종할 때 부처님께서 자연히 영접하러 오시어 불력으로 보호해 주시므로 자연히 심부전도하여 정념으로 왕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야말로 핵심 중의 핵심이고, 중점 중의 중점이며, 관건 중의 관건입니다.

【경문과 조사해석의 대조표】

 

 

다음은 아미타경의 이 단락 핵심경문과 선도대사님의 해석에 대해 문장별로 대조하는 도표를 만들었는데, 도표 위에는 선도대사님 저서의 명칭 및 문자를 인용한 선도대사전집중의 쪽 번호를 열거해 놓았습니다.

 

아미타경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명호를 집지하여

일일이든 ……칠일이든

일심불란하면

그 사람이 임종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이 사람 앞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칠 때 마음이 전도되지 아니하고 바로 아미타불의 극락국토에 왕생하게 되느니라

관경소

현의분48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들었으면 마땅히 명호를 집지해야 하는데

일일 내지 칠일 동안

일심으로 왕생을 발원하면

목숨을 마치려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영접하여 왕생한다

관경소

산선의250

일체 범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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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에서 칠일을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하면

반드시 왕생한다

관경소

산선의250

일체 범부는 죄와 복의 많고 적음, 시절의 오래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다만 능히

위로는 백년을 다하고 아래로는 일일에서 칠일에 이르기까지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하면

반드시 왕생한다

관념법문

344

만약 어떤 남자와 여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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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일 밤낮 및 일생을 다하여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전념하며 왕생을 발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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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법문

355

만약 어떤 남자여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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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든 칠일이든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전념하면

이 사람이 임종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자연히 영접하러 오시어, 곧바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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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법문

360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든, 일체 죄업 짓는 범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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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마음 돌려 아미타불을 부르며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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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백년을 다하고 아래로는 칠일, 일일, 열 번, 세 번, 한 번 등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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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 부처님과 성중들이 자연히 영접하러 오시어 바로 왕생을 하게 된다

왕생예찬

539

만약 어떤 중생이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들었으면 마땅히 명호를 집지해야 하는데

일일이든,

이일이든,

내지 칠일이든

일심으로 칭명염불을 하여 난잡하지 않으면

목숨을 마치려 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이 사람 앞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죽을 때 마음이 전도되지 않고 바로 저 나라에 왕생하게 된다

왕생예찬

540

만약 어떤 중생이

아미타불을 칭념하되

칠일 및 일일이든, 아래로 십성 내지 일성·일념 등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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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왕생한다

법사찬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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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께서 요법을 선택하여 아미타불을 부르라 가르치시니

칠일 밤낮으로 마음에 틈새가 없고, 장시간 행을 일으켜 배가 됨도 모두 그러하네

전일하고 또 전일하게

임종할 때 성중들이 연꽃 들고 나타나시니, 심신이 용약하여 금색 연꽃에 올라앉게 되는데, 앉을 때 바로 무생법인 얻고, 일념사이 부처님 전으로 영접한다네


이 도표는 일목요연합니다. 선도대사전집가운데 총 아홉 곳에서 아미타경의 이 단락 경문을 인용하고 있지요.

선남자·선여인을 해석하실 때 자를 전부 생략해버렸고,

약일일·약칠일을 해석하실 때는 곧 수명의 장단에 따른 위로는 백년을 다하고 아래로는 한 번에 이르기까지한평생의 염불이라 하셨습니다.

일심불란이 바로 일심전념이라 해석하셨으며, 총 여섯 번 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심부전도는 모두 생략해버리고 해석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당연한 것이어서 해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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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 감응록

극락과 염불 2017. 12. 12. 15:23

염불 감응록 게시판 바로가기☞ http://cafe.daum.net/amtb/Jd5c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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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집월장경大集月藏經에 이르시길,

“말법시대에는 수억 명의 사람이 수행해도 한 사람 득도하기가 드무니라.

오직 염불에 의지해 득도할 뿐이다(末法億億人修行 罕一得道 唯依念佛得度).” 하였다.


대집경에 이르시길

"말법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하더라도

한 사람도 도를 얻기 어려우니, 오직 염불을 의지해야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하였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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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블로그 '가릉빈가의 꿈' 
 
1.

눈 속에 갇힌 보살 구출작전
2014.2.11
 
 이 절에는 아주 특이한 보살이 살고 있다.
 그녀는 구태여 산 중턱에 버려진 토굴에서 혼자 살겠다고 하여
 대중들과는 떨어져서 살고 있었다.
 음산한 기운이 들기까지 하는 곳에서 어찌 여인네가 간도 크지...
 
 그런데 그 토굴이 이번 폭설로 인해 고립되어 버렸다.
 해서 이틀째 그녀는 토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간 큰 그녀는 일주일 정도 갇혀있어도 상관없다며 전화통화에서 웃었다.
 이참에 단식수행하니 얼마나 좋으냐며...
 
 그래도 우린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온 직원이 눈을 치우느라 쳤으니 외딴 산 중턱에 있는 그곳에 어찌 가느냐가 문제였다.
 다들 눈에서 넘어지고 구르고 하여 몸들이 말이 아닌데...
 
 그런데 오늘 구원의 전사들이 나타난 것...짠~하고 말이다.
 
 인적이 끊긴 이 곳에 점심이 되어갈 무렵 무림의 고수같은 사나이들이 도량에 나타난 것,
 그들은 입구에서 부터 눈을 헤치며 (사실은 오히려 길을 내며) 들어왔다.
 그들의 손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아마도 사진작가들인 것 같았다.
 폭설에 잠긴 산사를 촬영하기 위해 일부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이곳에 감히(?) 오겠는가.
 
 우린 순간적으로 저 사람들을 꼬셔서 ^^ 그녀를 구출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촬영을 끝내고 가려는 그들에게 웃음을 흘리며 공양간으로 끌어들였다.
 "공양 들고 가세요"
 여자들의 집중 공세에 남정네들은 얼싸좋다 하고 들어왔다.
 ㅎㅎㅎ
 
 그리고 식사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 내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 부탁드릴게 있는데요. 이왕 오셨으니 좋은 일좀 해주시면 어떨까요.
 산 중턱에 갇힌 보살이 있는데 그녀를 좀 구해주십시오.
 이틀째 굶고 있어요."
 
 씨익 미소짓는 사나이들이 우째 그리 멋있게 보이는지 ^^
 그들은 흔쾌히 그러마 했다.
 나는 커피까지 타서 서비스를 하며 그들의 마음을 녹였다.ㅎㅎ
 
 차를 마신 그들은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출발...
 나는 혹시라도 그들이 변심해서 산밑으로 가면 어쩌나 싶어 따라나섰다.
 눈길에 미끄러질까봐 빗자루 하나를 스틱삼아 들고서...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다섯명 중에 가장 젊은 남자분이 앞장서서 걸어가는데
 그 분은 눈 속을 헤엄치듯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지를 걷는 사람과 같았다.
 중간쯤에서 네명의 남자들은 사진 촬영한다고 멈추고 앞장섰던 한 남자만이 눈길을 헤치고 나가는데
 아주 특이한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는 눈치우는 삽으로 눈을 푹 누르고는 등산화로 밟고 나아갔다.
 뒤따라 가는 나는 허우적 거리면서 따라가는데 그는 조금도 지친 기색도 없었다.
 
 "혹시 특공대 출신입니까?"
 
 "아닙니다. 산악인입니다."
 
 "오우 그래요? 어쩐지..."
 
 "저 에베레스트까지 다녀왔습니다. 세계 50개국을 등반했어요."
 
 "흐음...그렇군요. 당신에게 이정도는 마른땅 걷기일 뿐이군요."
 
 산신님이 도우신게 틀림없어.
 토굴에서 홀로 정진하는 그녀를 예쁘게 여기신 산왕대신이 이 분을 불러들인게 틀림없어.
 
 토굴에 도착해서 그녀를 부르니 그녀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섯명의 남자가 삽으로 눈을 치우며 와도 3시간을 걸릴 거리를 불과 삼사십분만에 도착한 것이다.
 
 그녀 또한 온갖 운동을 한...철인3종경기 까지 했으며
 암벽등반에 윈드서핑에 스킨수쿠버까지 한 여자인데도 엄두를 못낸 눈 길을
 너무 간단히 제압하고 온 이 남자에게 호기심어린 눈으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처사님, 삽으로 눈을 누르는 방법좀 가르쳐주세요."
 
 대단한 체력을 가진 그녀가 그의 가르침을 따라 해 보았으나
 한마디로 텍도 없었다 ^^
 130센티 정도 쌓인 눈을 누르기에는 그녀의 팔힘이 너무 약했다.
 겨우 30센티 정도가 눌려졌다.
 
 오우...남자의 대단함이 새삼 느껴졌다.
 암튼 그 남자의 도움으로 우린 쉽게 목적달성을 하게 되었다.
 
 아...너무도 감사한 분,
 예리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던 거사님 감사합니다.
 좋은 일 한 공덕으로 올 한해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특이한 보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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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미스테리한 여자
 2014.2.11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묘한 여자를 이곳에서 만났다.
 그래서 난 이여자를 '미스테리녀' 라고 부른다.
 
 나이는 나보다 두살 아래이니 같은 세대를 살아온 사람이다,
 처음에 이여자를 봤을때는 꼭 청학동출신 같이만 보였다.
 화장기없는 얼굴에 생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고 늘 회색법복을 입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이여자의 고집스러운 표정이 영 접근불가를 느끼게 했다.
 
 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어려워하고 한편으로는 마땅치 않아하는 여자였다.
 매사가 너무 완벽하니 그녀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못마땅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일은 엄청나게 열심히 하는 일꾼이기도 했다.
 
 누가 이 고집세고 별스런 여자를 다스려야할지 고민들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으니 내보낼 수도 없는 일.
 스님들조차도 어려워했으니...
 
 그런 이여자와 내가 생각지 않게 가까와지게 되었다.
 이여자의 정식업무는 빨래보살이다.
 하지만 시간을 쪼개서 공양간 일도 돕고 있었다.
 마침 공양주 한 분이 그만두는 바람에 내가 공양간에 투입되어 일을 하면서 이여자와 말을 트게 되었다.
 처음엔 냉정하게 바라보던 그녀와 조금씩 말을 나누게 되면서
 난 참으로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청학동에서 온 것 같은 이여자,
 무뚝뚝하게 생각했던 이여자는 의외로 상냥하고 부드럽게 나를 대했으며
 나에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으며 자신의 이력을 들려주었다.
 
 명문가문에 태어나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해운업을 했었다고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돈도 벌었다고...
 
 난 깜짝 놀랐다.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이여자가 명문가문의 여자라고?
 그것도 해운업을 했었다고?
 오마이 갓!!!
 
 왜 이런 삶을 자청해서 사느냐의 질문에,
 "어느 순간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굶주린 이리같이 보였어요.
 정말 다들 이리같아요. 탐욕의 이리들 말에요.
 그런 세상이 너무 역겹고 싫었어요.
 나의 남편도 그랬어요.
 그래서 이혼을 요구했죠.

 다행히 아이가 없었으니 미련도 없었죠.
 짧은 결혼 생활을 마감했죠.
 제가 이 세상에서 사랑할 사람은 부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알았어요.
 엄청난 부를 걸머졌으나 제 가슴은 항상 허전했어요.
 참 화려한 삶을 살았지요.
 사업을 정리한 후에 산으로 들어왔어요."
 
 "왜 출가를 하지 그랬어요?"
 
 "했었지요. 행자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제 이력에 결격사유가 있어서 승인이 나지 않았죠.
 일찍 죽은 여동생의 딸을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제 호적에 올렸거든요. 
 양육할 자녀가 있으면 안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선지식 찾아다니며 공부하고 살았어요.
 삼년 후엔 타종단으로 출가할까도 생각하고 있어요.

 절을 지어서 선지식 모시고 살려고요.
 제가 존경할 만한 선지식만 만난다면 전 그 분을 업어서 모시고 살 수도 있어요.
 농사 지으면서 공양하며 살고 싶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참 선지식이 없네요...많이 찾아 헤맸는데..."
 
 물욕도 애욕도 이미 떨어져 나갔다는 그녀가 들려주는 그녀의 삶은 참 재미있었다.
 호기심 많은 나는 여러가지를 질문하고 물고 늘어졌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은 어디에 숨겨두었어요?"
 
 "호호...바다에 던져 버렸어요."
 
 "저런...차라리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시지..."
 
 "언젠가 제가 필요할 때가 되면 바다에 가서 건져오지요 뭐. 호호호
 전 화려하게 살았던 지난 날 보다 지금이 더 행복해요. 아주 좋아요."
 
 하루는 그녀가 자신이 혼자 살고 있는 토굴로 초대를 하였다.
 버려진 토굴인데 스스로 자청해서 살고 있었다.
 귀신이 출몰한다고 하여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집이었다.
 담력있는 스님들이 도전했다가는 다 포기했다는 토굴이었다.
 
 소문대로 토굴주변에선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육이오 전쟁터였던 곳이라 비명에 간 젊은 영혼들이 많이 떠돌고 있다고 하였다.
 미스테리녀는 몇군데에서 출몰했던 영혼들을 만났던 이야기
 그들을 염불의 힘으로 천도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그당시의 비밀스런 일들도 스크린처럼 보았다고 했다.
 
 그런 영적인 능력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런 능력은 치열한 수행의 결과 얻어진 것이에요?"
 
 "아뇨...어려서부터 있었어요. 그래서 세상이 더 시시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누군가 무슨 말을 하면 전 그 결과가 그려졌거든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달려가더라구요.
 그것을 떨구어보려고 공부에 몰두했고, 일에 미쳐서 살았고
 한때는 운동에 미쳐서 살기도 했지요.
 그러다 부처님 법을 만나서 큰 깨우침을 얻고는 세속을 접었답니다."
 
 그녀의 토굴에 들어가니 그 안은 밝고 맑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루종일 나무아미타불 염불테잎을 틀어놓고 있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정진을 하고,
 저녁에 일이 끝난 후엔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토굴에서 염불정진을 한다고 했다.
 티비도 컴퓨터도 없었다. 
 오로지 책과 염불테잎만 있었다.
 
 "염불하는게 그렇게도 좋수?"
 
 "그럼요...넘 행복해요. 언니 우리 나중에 꼭 극락세계에서 만나요.
 그곳에서 같이 수행하여 성불한 다음에 다시 중생제도하러 지구에 옵시다."
 
 "난 자신없는데? 그대는 자신있수?"
 
 "예...전 결정코 극락왕생할 겁니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을 절대적으로 믿거든요."
 
 오...참 그 지극한 신심이 부러웠다.
 내게는 없는...또는 부족한 면을 그녀는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는 온순하고 순종적인 면도 있었다.
 절식구들이 모두 마땅치 않아 하는 그녀의 단점.
 즉, 자신이 이 절 일을 모두 하는 것같이 상을 내는 점,

 자신이 없으면 이 절이 안 돌아갈 것 처럼 생각하는 점.
 그 점을 내가 조심스럽게 지적했더니 의외로 잘 받아들였다.
 강하게 부정하거나 반기를 들을까 좀 염려했었는데.
 역시 배운여자인지라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사람에겐 무장해제였다.
 
 "모든 사람들이 절 그렇게 생각했다면 제가 한참 공부가 안되었다는 증거네요.
 제가 고쳐야지요...이 도량이 너무 좋아서 3년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 짤리고 싶지는 않아요 ㅎㅎ. 
 제가 맞추고 살아야지요. 고치도록 노력할게요."
 
 요즘 너무 부드러워진 이보살,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한다.
 어쩜 자신의 세계를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난 기쁨때문인지도???
 
 요즘은 대화가 통하는 이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나의 기쁨이기도 하다.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기쁨을 어디에 비교하랴?
 
 "언니...하산하면 서울 삼청동에 있는 ㅇㅇㅇ 요리집에 가서 제 이름 대고 식사하세요.
 언니가 먹고 싶은 것 어떤 것이든지요...제가 돈은 지불할게요."
 
 호우... 그 비싼 요리집에???
 은근하게 자신의 재력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사회의 유명인사들과의 인맥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명가의 여인이니...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전혀 세련되지도 않은 
 흰머리가 꽤 많은데도 염색도 하지 않고 질끈 동여맨 이여자의 모습을 보고
 누가 명가의 여인이며 명문대 출신의 여자로 보겠는가.
 그것도 큰 사업을 해서 막대한 부를 이룬 여자로???
 하지만 이여자의 강한 기질로 봐서는 그런 사업을 했었음직해 보였다.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도 좋으냐니 상관없다 했다.
 이여자의 수행기는 또 다른 기회에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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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는 오직 나무아미타불입니다
2014.3.15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니 그녀의 수행기를 듣다보면
 마치 큰스님이 내 앞에 앉아서 설법을 하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내가 만난 보살들 중에서 최고의 근기와 수행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아니 전문 수행자들도 흉내내기 힘든 수행을 한 여자였다.
 
 매일 삼천배를 삼년이나 했으며...그것도 공양주를 하면서...
 위빠사나,참선,아비라기도,주력수행 등 해보지 않은 수행이 없었다.
 
 "전 전생에 천태지관 수행도 치열하게 했었어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일반사람들이 들으면 정신병자라든지,
 뭐에 잔뜩 씌인 사람의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들을때는 대단한 그녀의 이야기에 귀가 쫑긋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점차 내게 비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수많은 전생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때 어떤 수행을 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 생에도 내로라 하는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그 분들의 시중을 들어가며 수행을 했다고 했다.
 이런 공개적인 블로그에는 올릴 수 없는 많은 선지식들의 비화를 들려주었다.
 
 "그런 결과 저는 나무아미타불 염불만이 이 말세중생에게는 최고의 수행법임을 확신했답니다.
 솔직히 참선하는 사람들 화두가 뭔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이 시대에 참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사람 없습니다."
 
 참으로 건방지게 또는 교만하게 보이는 그녀의 결론적 견해였다.
 
 "좌복에 앉아서 보살들이 해주는 공양을 드시면서 편안하게 참선을 해서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그 분들에게서 전 치열함을 보지 못했어요. 원력도 없는데 뭔 도를 얻습니까"
 
 당돌한 그녀는 머무는 사찰의 스님들에게도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산신기도를 하는 스님에게는,
 "스님은 어찌 산신기도를 하십니까? 부처님 제자면 당연히 부처님께 귀의를 해야지요.
 그리고 이 산신각에 산신 없습니다"
 
 나는 놀랍기도 한 그녀의 당당한 발언에 호기심도 나서 은근히 물어보았다.
 "정말 이 산신각에 산신이 없습니까? 이 곳은 명산인데?"
 
 " ㅎㅎ...산신이 어디 산신각에만 앉아 계신답니까?
 여기 저기 돌아다니시지요. 이 절의 산신은 공부의 경지가 굉장히 높은 분입니다.
 산신각에 와서 복을 빈다고 들어주고 그런 분이 아닙니다.
 아마 누군가 산신상에 돌을 던져도 아무런 반응을 안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승려라는 분이 산왕대신 찾으면서 무언가를 빌고 있다니 우습지 않아요?
 이곳의 산신은 도가 높은 분이라 세분으로 몸을 나투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손을 들어
 "저기에 한 분...또 저기에 한 분...또 저기..." 하면서 산신이 계신 곳을 가르쳐 주었다.
 솔직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
 
 도량의 신장들을 보고 있었으며 신장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스님들의 얼굴만 보아도 그 스님이 어느정도 수행을 하셨는지 꿰뚫어 보았다.
 한 번은 염불을 열심히 하시는 젊은 스님에게도 직격탄을 날렸었다.
 
 "스님,요즘은 밤에 방에서 염불은 안하시고 계시나봅니다.
  스님 얼굴을 뵈니 기(氣)가 막혀있네요.
  장애가 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시는 겁니까? 상기가 되셨지 않습니까?
 그럭저럭 수행하며 사실라면 뭐하러 출가를 하셨습니까?
 이론은 탄탄하시지만 행이 안되고 있질 않습니까? "
 
 어휴...^.^
 그래도 &#51922;겨나지 않고 절에 머물고 있는게 기적이었다.
 그런데도 스님들이 그녀의 앞에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를 두려워하기 까지 했다.
 아마도 그녀는 이미 타심통도 한 것 같았다.
 스님들의 얼굴만 보아도 그 스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예불시간에 스님들의 독경소리만 듣고도
 그 스님이 지금 망상에 젖어서 하는지 어떤지를 알았으며,
 목소리만 들어도 수행을 얼만큼 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녀는 영 불편한 보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도 내보낼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보내려 한다면 많은 곤욕을 치뤄야 함을 알기에...
 아마 종정스님에게 찾아가서 왜 자신이 해고를 당해야 하는 지 낱낱이 따지고 들 사람이었다.
 사실 그녀처럼 주인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온갖 허드렛 일은 그녀의 몫이었다.
 쓰레기를 치울 때는 영락없는 머슴의 모습이었다.
 
 "전 지게를 지며 사는 게 제일 좋아요. 호 호 호..."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 날 화려한 인생을 산 여자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녀와 내가 친한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어떻게 저런 여자와 가깝게 지내는지 기적같다며...뭔 비결이냐고...
 
 비결이라구요?
 난 다만 그녀의 근기를 알아보았으며 그녀를 존중해 주었으며
 그리고 이제는 존경까지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기도 많이 했다, 수행 많이 했다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보았지만
 그녀처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머슴처럼 살면서 수행하는 사람은 보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오직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하기를 내게 권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확고한 이론과 수행으로 무장한 그녀의 설법에 어찌 반발할 수 있으랴.
 
 "우리가 왔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너무도 그리운 우리의 고향이지요...나무아미타불..."
 
 그래 그렇다.
 이 세상의 어떤 단어도 이 보다 아름답고 거룩할 수는 없다.
 나무아미타불...
 그리고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만큼 거룩한 원이 어디 있을손가.
 
 "말세중생에게는 염불수행법이 최고입니다.
 다른 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화두를 든다고 하지만 오분이상 지속하기 힘들어요.
 그래갖고는 이생에 성불하긴 어렵습니다.
 이렇게 업장이 두터운 몸으로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제가 참선을 해보지 않았다면 이런 말 못해요.
 전생에도 전 참선을 치열하게 했었어요. 천태지관수행도 치열하게 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 모양 이꼴로 살고 있습니다.
 제 업이 너무도 두터우니 또 윤회를 하여 온 것이지요.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했답니다.
 저의 스승은 오직 아미타부처님 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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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전생에 심은 소나무 두 그루 
2014.3.15
 
 그녀가 내게 산책을 하자고 제의를 했다.
 햇살이 아름다우니...
 하지만 아직은 눈이 다 녹지 않아서 봄을 느끼기에는 먼 느낌이 들었다.
 
 우리 둘은 도량을 걸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는데,
 도량 입구에 있는 적송이 많은 곳에 이르렀을 때 였다.
 
 "보살님, 저 끝에 있는 저 두 그루의 소나무 보이시죠.
 저 두 그루의 소나무는 전생에 제가 제 도반과 심은 소나무예요.
 그 도반과 다음 생에 이 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는데
 그 도반은 아직 나타나지 않네요."
 
 "그래요? 혹시 그 도반이 나 아닌가요?"
 
 " 호 호...그럴지도 모르지요. 호 호 호 "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앞서서 걸어갔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
 그녀는 가끔 의미심장한 얘기를 내게 던지고는 더 이상 말이 없고는 했다.
 내게 연애 편지라며 건네주고 간 쪽지에는
 '전생애를 걸어 염불하는 것은 약간은 어려운 일 같지만 현생에는 복을 수용하고
 생명이 다하면 곧바로 정토에 태어나서 영겁으로 완전하고 평안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또 부처가 될 때까지 생사의 어두움을 헤매는 일이 없다.' 이런 류였다.

 수시로 내 방에 와서 법담을 나누길 좋아했고,
 내게 필요한 물품들을 말없이 사다가 들여주었다.
 내가 피곤에 지쳐서 누워있으면 그녀는 옆에 앉아 무량수경을 읽어 주었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여서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그 사찰에 온 이래 그렇게 밝은 얼굴을 보인적이 없다고 모두들 얘길 하니
 어쩌면 전생의 도반을 만난 기쁨 때문에 상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도 그 도량에 가기 전에 의미있는 꿈을 꾸었었고
 누군가 지중한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을 예감했었다.
 그리고 그 꿈의 주인공은 대단한 큰스님이었다.

 이미 그녀는 큰스님의 경지고 또 전생에 대단한 스님이었을 게 분명하니
 현생에 승복을 입고 안 입고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전생에 티베트에 살았던 얘기, 일본에 살았던 얘기, 조선시대에 살았던 얘기 등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발뒤꿈치도 따라가기가 힘든 사람이다.

 그녀처럼 살 자신조차도 없다.
 삼년을 기도하기 위해 그 도량에 왔다고 했으므로
 특별한 일이 아니면 도량 밖을 나가지 않았고,
 단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았다.
 직원들의 회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철저히 계율에 충실했다.
 
 그런 그녀가 볼 때,
 백일기도를 왔다는 스님들이 툭하면 도량밖을 나가시는 게 못마땅할 것은 뻔했다.
 
 "백일도 저렇게 못참으시나 원..."
 
 참으로 어려운 보살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나도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내게는 늘 깍듯했고 다정했다.
 아마 미혹에서 헤매고 있는 전생의 도반을 끌어올려주기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속세에 대한 아무런 탐착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절에서 주는 보시금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절이 어려운 것 같을 땐 보시금 받기를 사양하기도 했다.
 아직 미혹이 많이 남아 있는 나로서는 부러운 그녀였다.
 
 그녀의 절대적 신심이 한없이 부러웠으며 또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새벽에 가장 먼저 일어나서 도량을 정비하는 그녀,
 기도스님이 나오시기 전에 이미 그녀는 법당에 앉아서 염불을 했다.
 단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염불삼매에 들어서 본 현상들을 내게 얘기해주곤 했다.
 떠도는 수많은 영혼들이 찾아온 이야기 그리고 그들과 같이 염불한 이야기 등...
 
 그리고 이제는 염불도 중요하지만 어울려 사는 법을 공부해야 겠다고 했다.
 그녀의 수행담과 법담은 글로 다 옮기기 힘들다.
 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많으므로...
 나의 질문에 늘 확고한 답변을 해준 그녀,
 그녀의 그 확고함이 부러웠다.
 
 남자들의 유혹에 직면했던 이야기를 해 줄 때는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아이구...자기처럼 청학동 낭자같은 여자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런 소리 말아요. 옛날에는 그래도 예쁘다는 소리 많이 들었고
 몸매도 죽여준다고 했어요."
 
 "응??? 몸매가 죽여준다고라??? 
 그럼 어디 한 번 벗어 봐. 호 호 호..."
 
 최근에 겪었던 유혹에 대한 이야기는 더 배를 쥐게 했다.
 또 그녀의 답변이 더 재미있었다.
 "그 양반이 워낙 궁한 사람이라 나같은 여자라도 찍었겠죠."
 
 호 호 호...
 
 화장기 없이 생머리를 질끈 동여맨 그녀지만 예쁘장한 얼굴인 것은 사실이었다.
 키도 보기 좋게 컸고...
 하지만 그녀의 진면목을 알면 모두 도망갈 것인데...^.^
 
 소나무 두 그루는 정말 그녀와 내가 심었던 것일까?
 아님 다른 도반과 그녀가 심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도반이 빨리 그녀 앞에 나타나길 빌어 주고 싶다.
 
 그녀의 나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지극한지
 그녀는 자신의 돈으로 법당에 내 등을 달아주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소나무의 주인공은 아닐지 몰라도 그녀와 한 때 도반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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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난 상근기의 잣대가 아닌 하근기의 잣대로 사람을 보거든요
2014.3.15
 
 어쩌면 완벽한 수행자의 자세와 마인드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누군가가 볼 때는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점도 많이 있었다.

 최상승근기를 가진 그녀였으니 도무지 세상 사람들이 마음에 들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자세로 절에 와서 살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식의 말이 수시로 나왔다.
 그럴때 마다 나는 그녀가 지적하는 사람을 감싸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그녀는 못마땅했었나 보다.

 "수한보살님도 사람을 잘 못 보시는 것 같아요.
 어떻게 저런 사람을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합니까.
 얼마나 꾀를 부리면서 일하는지 모르세요?"

 그녀의 질타에 나도 한 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살님은 상근기의 잣대로 사람을 보지만, 
 나는 하근기의 잣대로 사람을 보거든요?
 내 잣대는 그리 세지 않기 때문에 왠만하면 다들 괜찮게 보일 뿐이에요."
 
 "알았어요 알았어요...ㅎ ㅎ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생각이 잘못 되었네요."
 
 웃으면서 수긍하는 그녀의 얼굴에 가식이나 불쾌함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점이 대단한 그녀의 장점이기도 했다.
 
 너무도 뛰어난 그녀였기에 사실은 매우 외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물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고, 산이 높으면 오르려 하는 사람이 없듯이
 그녀 주변에 사람이 많을리는 없었다.
 가끔씩은 그런 그녀가 안쓰럽게 보였으며,
 내 견해로는 그녀가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안쓰럽게 보였다.
 내 눈에는 모두가 힘겨운 중생살이를 하는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치열하고 뛰어난 그녀에게 부족한 점은 중생에 대한 사랑이었다.
 내가 보는 견해로는 그랬다.
 아니 어쩌면 나의 견해가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절에 사는 개나 고양이에게는 지극한 애정을 보였으므로...
 그녀석들은 그녀를 엄마처럼 따랐다.
 심지어 나무 한 그루에게도 지극한 마음을 보이곤 했다.
 때로는 나무와도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하지만 왠지 사람에게만은 참으로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 난 사람에게 따듯함을 줄 수 있는 그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었다.
 그래서 까다로운 그녀의 잣대를 무너뜨리는 말을 많이 하게 되었었다.
 
 아무리 뛰어난 수행을 한 사람이라도 중생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사람을 난 좋아하지 않으므로...
 서로 사랑하고 살아도 부족한 삶이며, 다 아픈 중생들 아닌가.
 다들 깊은 얘기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삶이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 고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치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으랴.
 전문 수행자라도 말이다.
 가끔씩 사찰에서 물의를 빚고 떠나는 스님들을 볼 때도 
 한편으론 한심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측은했다.
 아직은 중생의 탈을 벗지 못하였으니 측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난 그녀가 중생을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수행자가 되기를 바랬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살려고 하는 그녀의 삶이 때로는 버거워보이기도 했으며 너무 고독해 보였다.
 외로운 소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살면 외롭지 않나요?"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요. 전 너무 행복해요.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사는데 뭐가 외롭습니까?"
 
 철저한 그녀의 신심이 부럽기도 했지만 
 때로는 사람의 냄새가 나는 그녀가 되었음 했다.
 독각승의 이미지를 풍기는 그녀가 난 안쓰러웠다.
 아무리 자신은 괜찮다고 하지만 
 난 그녀가 중생들과 더불어 울고 읏으며 사는 보살이 되기를 바랬다.
 염불을 하여 극락왕생하는 것도 좋지만 
 이 생에서 사람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수행자가 되었음 했다.
 많이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사람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변해갔다.
 나의 바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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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삼천배 한 것이 뭔 자랑입니까
2014.3.15
 
 보통은 한 달에 한 번 삼천배만 하여도 대단하다고 하며
 백일을 삼천배를 했다면 존경해 마지 않는 것이 풍속이다.

 그런데 그녀는 삼천배를 삼년을 했다고 했다.
 그것도 공양주를 하면서...
 그러니 하루종일 일하고 절만 했다는 얘기 아닌가.
 이건 사람이 아니다 싶었다.
 그 결과 그녀는 다리 관절이 망가져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공양주 노릇도 얼마나 치열하게 했는지 손이 엉망이었다.
 저 여자가 한 때 그렇게 화려하게 산 것이 맞는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한문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보았으며
 나와의 깊은 대화에서 상당한 인텔리임을 알아보았으니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일 삼천배를 삼년을 하였다???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얘기였다.
 
 "아니 어떻게 삼쳔배를 삼년씩이나 할 수 있어요? 사람 맞아요?"
 
 나의 질문에 바로 튕겨져 나온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삼천배 한 게 뭐 자랑할게 되는 일입니까?
 오죽 업이 많았으면 그렇게 지독하게 참회기도를 해야 했겠습니까?
 전 전생에 00나라의 큰 벼슬아치였는데 46살에 사약받고 죽었어요.
 그리고 지옥에 떨어졌지요.
 그 지옥의 고통을 기억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그래서 그 업을 참회하느냐고 치열하게 수행했어요."
 
 허억...나는 그녀의 답변에 입을 벌리고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저는요, 사람들이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때로는 한심해보여요.
 수많은 살생의 업을 가진 사람들이 어찌 건강해지기를 바란답니까.
 그것처럼 강한 탐욕이 없어요. 너무 염치없는 바램이지요.
 건강해서 뭐할라구요.

 조금더 명이 길어지는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건강한 몸으로 큰 일을 하려는 원이 있으면 모를까 그 탐욕은 버려야 합니다.
 전 스님들이 시자들에게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 모습도 영 마땅치 않았어요.
 아직 촉의 경계에 끄달리고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다리가 아프면 아픈대로 그 경계를 공부로 삼으면 되는데 왜 남한테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지..."
 
 아이쿠...나는 말문이 막혔다.
 누가 감히 그녀에게 수행을 말할 수 있으랴.
 
 "그런데 이 도량에 소나무를 심은 것은 어느 전생이유?"
 
 "전전생이에요. 그때 제가 수행을 하다 잠시 옆길로 빠졌거든요.
 그래서 그 다음생에는 벼슬아치가 되었고...탐욕도 부렸고 결국 사약받고 죽었지요 뭐.
 바로 환생에 들지 못하고 오랫동안 지옥고를 겪다가 이 생에 몸을 받았지요.
 이 생에 몸을 받아가지고도 전생의 탐욕이 남아가지고 사업을 했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 여겨져 세속을 접었어요.
 사람들은요 자신들이 얼마나 업보중생인지 모르고 탐욕만 부려요.

 그러니 부지런히 참회기도를 해야해요.
 참회기도 없이는 도를 못이룹니다.
 백날 가부좌 틀고 앉아 있어봤자 소용없어요.
 업장에 가려서 화두가 들리지 않아요. 온갖 장애가 일어나는데요 뭐.
 참회기도 없이는 그 장애를 뛰어넘지 못해요."
 
 참회기도 없이는 장애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녀의 말이 가슴깊이 와 닿았다.
 사실은 나도 선방에서 꽤 수행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엄청난 장애에 침몰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너무나 가슴 아픈 기억이었다.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다.

 한 경지에 이르려는 그에게 엄청난 마장이 왔었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조금은 실망도 했었고, 회의도 했었고, 슬프기도 했었다.
 꼭 엑소시스트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그것은 전생의 무서운 업에 의한 장애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녀도 나와의 대화로 인해 변해갔지만 
 나도 그녀와의 대화로 인해 변해갔다.
 더 깊이 내 속에 있는 탐욕의 근원을 보게 되었고 버리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대단한 선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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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그녀는 미타행자
2014.3.21

 미타행자,
 그녀의 호칭을 이렇게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직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만을 염하고 있으며 극락세계를 관하고 사는 여자이고
 모든 사람에게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를 전하는 원력을 세운 미타행자이기에...
 
 나는 그녀가 얼마만큼의 수행과 이론으로 말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
 이리 찔러 보고 저리 찔러 보면서 그녀를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때 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를 긴장하게 했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게 했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어설픈 수행력으로 하는 말들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 그녀가 잠시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고자 했던 분들은 
 왠만한 사람은 감히 친견하기 조차 어려운 당대의 선지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왜 화두를 들지 않느냐고 질문했을 때
 이런 글에서 밝히기는 좀 거북한 많은 경험담들을 들려주었다.
 도를 구하고자 선지식들의 시봉들기를 주저하지 않은 치열함
 그 당대의 선지식들에게서 공부하고 느꼈던 점들의 거침없는 설명은 나를 놀라게 했었다.
 생각외로 그녀가 굉장히 깊이 갔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선지식들께 원력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떠나왔다는 그녀의 당돌함엔
 통쾌하기도 하고 어의없기도 하고 미소짓게도 하고 그랬다.
 
 "솔직히 화두 제대로 두는 사람없어요. 모두 말장난이에요.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들을 하고 있어요.
 화두는 의심을 일으키는 것인데 그 의심을 과연 제대로 일으킬 수 있을까요?
 설사 일의킨다해도 몇분간 지속할 수 있을까요.
 금새 망념이 들어오고 대부분 졸고 앉아 있어요.
 고요함이 화두는 절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달마대사로부터 이어져온 선을 부정하는 겁니까?"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말법시대라 참선을 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우리나라 불교의 한심한 문제는 이상하게 선을 하는 사람은 굉장히 높이 보고
 염불하는 사람은 하근기 할매들이나 하는 것으로 무시하는 풍토라는 겁니다.
 진정 화두가 뭔지도 모르면서 선을 높이 보고
 진정 염불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시들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일반적으로 염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길로 알고 있잖아요?"
 
 "물론 염불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게 염불이기도 합니다.
 입으로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왼다고 다 염불은 아니지요.
 진정 그 마음속에 부처님을 담고 하는 것인지,
 부처님의 원력을 백프로 확신하고 하는지는 모를 일이지요,
 그냥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그건 염불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특히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는 상근기가 아니면 할 수가 없어요.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온갖 망념과 탐진치에 쩔어서 염불을 한들 그게 염불이 되겠습니까
 전 위빠사나든 참선이든 주력이든 염불이든 절수행이든 어떤 질문에도 확고하게 답변할 수 있으며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자신있게 지적할 수 있어요. 
 제가 다 치열하게 해보았으니까요."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상근기가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이라?"
 나의 의외의 답변에 좀 놀라왔다.
 내가 그동안 염불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살아온 듯 했다.
 
 "그럼요...근기에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염불이긴 하지만
 상근기가 아니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나무아미타불 염불입니다.
 우리의 본래면목 자리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며 하는 염불인데 쉽다고 보면 안되지요.
 솔직히 평생을 화두들었다는 큰스님들의 임종에 얽힌 비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다들 실망할 겁니다. 임종의 순간에도 화두를 들어야 하는데 놓친다 이 말입니다.

 그만큼 화두 드는것이 쉬운게 아닌데 왜 참선타령들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거기다 제대로 염불도 안 해 본 사람들이 왜 염불을 우습게 아는지 모르겠어요.
 그 마음 속에 진정한 신심도 없으며 원력도 없는 사람들이..."
 
 "....."
 나는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할 말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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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도량이 염불하는 것을 보세요 
2014.3.21
 
 "수한 보살님 얼른 산신각으로 와 보세요 좋은 것 보여줄께요"
 
 그녀가 상기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난 ' 알았어' 하고는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올라가지를 못했다.
 한시간 쯤 지나서 그녀가 내 방을 두드렸다.
 
 "왜 아까 산신각으로 오라고 했을 때 안왔어요.
 제가 근사한 선물을 드릴려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올라갈 기운이 없더라고, 그런데 무슨 선물을 준다고 그래
 누가 산신각에 좋은 공양물이라고 올렸는감?"
 
 "호호... 그게 아녜요.
 오늘 이 도량이 염불을 하더라구요.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수한보살님께 보여주려 했어요.
 산신각에서 보면 도량 전체가 다 보이잖아요."
 
 "하이구...도량이 염불을 한다구요?"
 
 "그럼요. 도량도 염불을 하지요."
 
 "흐음...그렇다한들 내가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말이지..."
 
 "그때는 도량전체에 바람이 분답니다.
 하지만 그냥 부는 바람하고는 달라요. 
 보살님과 같이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다음에 제가 부르면 얼른 오세요, 보여줄게요.느껴라도 보시라구요."
 
 완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네...^.^
 
 " 도량에 계신 산신님은 저와 천 년 전에 인연이 있던 분에요."
 
 "으잉??? 그것까지 안다고라???"
 
 "예...천 년 전에 이 곳 산신님은 ㅇㅇ국의 왕자님이었고 전 일본 귀족의 딸이었지요.
 그 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었어요.호호호...^.^
 왕자님은 다음 생엔 ㅇㅇ국의 큰스님이었던 ㅇㅇ국사로 불리었지요.
 아주 도가 높은 큰스님이었던 분이 이 곳 산신으로 계신답니다."
 
 못살아 정말...
 
 "그래서 이곳에서 만나니 기뻤겠네요?"
 
 "호...이미 남녀의 애욕을 떠나신 분인데요 뭐 호호..."
 
 "그래 두 분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수?"
 
 이 대화만큼은 나만 알고 있어야 겠다? ^.^
 
 "근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다 알 수가 있어요?"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죽어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보살님이 알고 싶은 것 다 알 수가 있어요.
 그리고 전 전생에 천태지관수행을 치열하게 했었다고 했잖아요."
 
 상기된 얼굴로 미소지으며 내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맑고 어린아이같이 귀엽다.
 별난 그녀와 별난 이야기들을 나누는 기쁨만이 그 도량에서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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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미타행자 그녀는 날 두렵게 했다
2014.3.21
 
 미타행자 그녀는 늘 간곡하게 내게 염불하기를 권했다.
 말세중생이 생사의 고해를 건너가는 방법은 나무아미타불 염불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에, 즉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있다고  했다.
 그 본원력에 의지하지 않고 고해의 바다를 건널 생각을 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생각이라고.
 아니 어림도 없는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점점 한숨이 나왔으며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고,
 그녀의 경지가 날 두렵게도 했다.

 그녀는 선지식들이 쓴 책만보고도 그 사람의 사생활까지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감히 그녀 앞에서 나를 자랑한다든가 거짓을 말한다든가 하는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어느 사람들은 신기가 있다고 폄하해서 말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듣는 것도 다 자신이 전생에 사람들의 운명같은 것을 봐준 업보임을 알기에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쉽게 신기가 있어서라고 폄하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내로라 하는 선지식들과 법거량을 하면서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여자이니...
 나는 매우 깊이 있게 그녀를 점검해 보았었고,
 그녀에게서 나오는 답변은 늘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삼매에 드는 것도 진정한 삼매는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업장이 소멸되지 않고는 삼매에 들 수 없다고 했다.
 욕계의 중생은 설사 삼매에 든다고 해도 거친 삼매에 들 뿐이라고 했다.
 모두들 진정한 삼매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말장난들을 한다고 강하게 항변했다.
 
 화두를 든다고 하나, 의정을 일으키는 게 무언지 제대로 알고 하는 사람이 없으며
 조사의 경지에 간 선지식이 아니면 화두를 제대로 들 수 없다고 했다.
 자신도 한 때는 화두를 들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속았다고 말했다.
 화두를 든다고 생각하는 순간 화미에 빠지는 것이며
 진정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를 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것이라고...
 
 "그럼 일반적으로 견성이라는 것을 생각이 끊어진 무념의 자리를 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또 어느 선지식은 화두는 적극적인 무념이라고 하셨는데?"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본래면목자리라고 본다는 것은 너무 한심한 생각입니다.
 본래면목자리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화두를 적극적인 무념이라고 말했다면 그 분은 화두가 뭔지를 진정으로 모르고 계신 겁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무념은 참나의 경지가 아닙니다.
 선에서 말하는 그 자리 하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 하고는 전혀 다른 얘깁니다.
 다들 참선을 이상하게 이해하고 말하고 있어요."
 
 "그래도 요즘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공부가 익은 사람은 걸음걸이도 다르고 손놀림도 달라요.
 전혀달라요...자칭 깨달았다고 하는 분들 만나보니 아니었어요.
 다들 말장난 하고 있고, 그 말장난에 속고들 있어요.
 진짜 화두를 들라면 깨달은 이후에나 들 수 있다고 전 생각해요.
 그 전에는 절대로 화두 못 들어요.
 그러니 보살님도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염불이나 부지런히 하세요."
 
 참으로 단호하고도 무서운 말이었다.
 점점 그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같이 웃고 떠들면서도 그녀는 나의 행동거지를 모두 들여다 보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모두를 그녀를 그냥 좀 특이한 여자, 또는 별난 여자,
 때로는 지멋에 겨워 사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수행에 관한 한 그녀의 공부는 굉장히 깊었다.

 이론적으로도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년기도 중 지금 2년 가까이 되었는데 단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았으며
 단 하루도 정진을 빠뜨리지 않을 만큼 치열했다.
 그러면서도 도량의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

 쓰레기 치우고 지게지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보통의 사람이면 월급을 더 달라고 할 터이지만
 그녀는 자기는 돈 쓸데가 없는 사람이니 그 마저도 받지 않으려 할 때가 많았다.
 그녀와 대화를 하면서 내 다리에 힘이 빠져갔다.
 맥이 탁 풀렸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내가 한 공부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갑자기 수행에 대해서 누구와 얘기 하는 것도
 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감히 근기도 안되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산 것은 아닌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행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잘못된 관념을 버리고 고치고 하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바르게 선지식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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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처님의 손을 잡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014.3.21
 
 미타행자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이제껏 제대로 부처님의 세계를,
 또는 부처님의 본원력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성찰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날 나의 스승이었던 분의 경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했다.
 나의 근기가 너무 하열했으므로...
 
 나는 오랜만에 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이제서야 왜 정토삼부경이 모든 경전을 공부한 후에 마지막으로 공부해야 하는 경전임을 알게 되었다.
 그냥 환상의 세계같은 아미타경이 얼마나 어려운 경전인지 인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는 아직 아미타경을 이해는 커녕 읽을 수 있는 경지도 아니라고 했다.
 관무량수경을 읽으나 극락세계를 제대로 관할 수도 없는 하열한 경지이며
 업보중생의 몸으로는 솔직히 극락세계를 마음에 그리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위대하고 심오한 경전을 너무 쉽게 해석들을 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나는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이 얼마나 위대한 원인지 새삼 느끼게 되어
 마음이 착잡하고 힘들고 슬프기 까지 했다.
 지난 날 나의 스승은 어느 사찰에 가든 늘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을 읽으셨다.
 그 분이 왜 그러셔야 했는지를 그 분의 그 간절한 심정을 이제서야 제대로 알게 되어 슬프기도 했다.
 
 그 분은 늘 말세중생은 부처님의 손을 잡고 가지 않고는 절대로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강조하셨었다.
 이 생에서 내가 만난 백프로의 절대적인 신심을 가진 유일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번에 미타행자인 그녀를 만나면서 그녀 역시 백프로의 신심을 가진 여자임을 알게 되었다.
 
 아, 지난 날 나는 왜 그리 어리석었을까.
 나의 스승이 내게 한 눈 팔지 말고 부처님을 염송할 것을 그리 권하셨으나
 나는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며 진실하게 정진하지를 않았었다.
 아니 나에겐 믿는 마음이 부족하였으니...
 
 그녀도 내게 믿는 마음이 부족함을 나무랐다.
 나를 염불행자로 만들기 위해 그녀는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을 깊고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다시금 부처님을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아니 내 마음 속에 지극하게 모시기 위하여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의 수행은 이제부터 진정 시작됐다고 해도 될 터였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수행의 첫시작으로...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이제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만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며 행복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날의 방황과 공부가 헛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방황과 공부는 값진 거름이 되었다.

 보다 넓게 세상을 알게 되었고 수많은 편견도 버리게 되었으니...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은 죽는 날까지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난 모든 진리의 말씀은 사랑할 것이며
 법을 전하는 모든 선지식들을 경배할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이 여섯자 속에 얼마나 많은 공덕이 들어있는지 아느냐고 그녀가 말했었다.
 그래서 이 여섯자를 염송하는 사람은 그 어떤 무거운 업도 소멸할 수 있다고 했다.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의 힘에 의해 그리 된다고 강조했다.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을 의심하지 말고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생사의 바다를 건너자고...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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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우리 공양주 결사 해볼까요? 
2014.3.23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수한보살님 우리 둘이서 일년 동안 공양주 결사 한 번 안해볼래요?"

 "응...? 공양주 결사라고요? 호 호 호..."

 난 너무 우스웠다.
 만일염불 결사도 아니고 공양주 결사라니?
 
 "같이 한 번 해보고 싶어요.
 공양주 노릇 하는 것이 공부에는 최고에요.
 공양간에서 일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어요.
 밥 먹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이 보이고 공부정도가 보여요.
 또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을 지으면서 자신을 보는 공부도 되고요.
 복도 짓고 업장소멸도 하고...공양주가 최고지요."
 
 공양주 일은 이미 회향했다더니 왠일이래?
 아마도 나와 공양간에서 일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재미있고 좋았나?
 그녀의 소임은 빨래와 청소지만 공양간에 항상 사람이 부족하다보니
 수시로 공양간을 들락거리며 일을 거들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눈빛에서 
 어쩌면 그녀가 나에 대한 배려로 그런 제의를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업을 팍팍 녹여줄라고...
 그래야 소멸될 업을 그녀가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계획이 있고 또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승낙을 못했다.
 그녀와 같이라면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녀가 있었기에 그동안 어떤 도량에 머물때 보다 즐거웠으며 행복했다.
 대화가 통하는 도반과 같이 살고 같이 일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즐겁다.
 하루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그녀의 얼굴이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듯이...
 
 그녀는 나를 설레게 했다.
 오늘은 또 어떤 대화들을 나누게 될까 해서...
 난 점점 그녀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사랑하게 되었다.
 또 한 사람의 선지식으로서...
 
 공양간에서 일하다보면 공양주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이
 스님들의 음식타박이다.
 이 점은 나역시도 가장 못마땅한 부분이었다.
 매우니 싱거우니 짜니...
 
 그때마다 그녀의 입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참내 스님도... 자성이 없다고 하시고서 와그라시노?
 매운 맛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조금 있으면 사라질터인데
 왜 없는 자성에 끄달리신단 말인고?"
 
 "호 호...그러게 말이야."
 
 "제가요. 아무개큰스님 밑에서 시봉을 들었었는데요.
 세상에나 얼마나 음식이 까다로우신지요 공양주들 죽여주데요.
 그러시고서 무슨 한소식을 했다고 그러시는지...
 전 음식타박 하는 스님은 절대로 한소식했다고 인정 안합니다.
 한소식했으면 그럴 수가 없어요.
 미각에 걸려 있는데 무슨 한소식입니까?"
 
 그녀는 출가수행자보다 더 계율에 철저했다.
 육식은 절대로 안했는데,
 그 이유가 살생의 인연을 맺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들 업 중에서 가장 큰 업이 바로 살생의 업이라고...
 오신채도 음욕과 화를 북돋운다고 먹지 않았으며 오후불식 하였다.
 
 "제대로 수행을 한 사람은 육식을 하라 해도 못합니다.
 오신채도 먹으면 몸에서 금방 신호가 와요. 
 그걸 못느낀다면 그는 수행을 제대로 한 사람이 아니지요.
 계는 일부러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야 해요.
 또 여러가지 음식을 먹는 것은 일견 골고루 먹어서 좋은 것 같지만
 수행자에게는 산만심을 길러줘요.
 음식을 간결하게 먹는 사람일수록 수행의 깊이가 있다고 보면 돼요."
 
 그녀가 있어서
 그녀에게 법문을 들을 수 있어서
 그녀에게 어떤 궁금한 질문도 할 수 있어서 
 그래서 그곳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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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렇게 살기 위해 많은 걸 버렸답니다
2014.3.26
 
"전 이렇게 살기 위해 모든 걸 다 버렸어요. 하지만 후회도 미련도 없어요."

 청소 하고 빨래 하고 남는 시간은 치열하게 염불정진하는 그 삶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도 안가고 안타깝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몇달 전에 그녀의 동생이 찾아와 언니가 사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바가지로 흘리고 갔다고 했다.
 
 하긴 그렇기도 할 것이다.
 세속말로 스펙이 화려한 그녀이니 기가 막히기도 했을 것이다.
 
 불교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카톨릭교도 였으며 모태신앙이라고 했다.
 그녀는 의대를 나와서 한동안 카톨릭계에서 운영하는 나환자들을 위한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었다고 했다.
 그녀의 보살심은 이미 타고난 것이었나 보다.
 가장 낮은 곳으로...가장 힘든 곳으로 가려고 하는 보살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종교의 보살행과 불교의 보살행은 비교할 수 없는 경지라고 말했다.
 타종교의 보살행은 '나'가 남아있지만 불교의 보살행은 철저히 '나'를 부정하고 내세우지 않는 행이라고,
 
 여차여차한 사유로 인해 의사생활을 접고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이유는 오직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는 그 돈으로 중생구제사업을 할 생각을 했다고 했다.
 고아들 40명쯤 데려다 키울 생각을 했었다고...
 그 뜻을 같이 할 남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던 중
 뒤늦은 나이 사십에 겨우 만나서 결혼을 하였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니 남편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더 큰 돈만 추구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단다.
 허탈한 마음에 우연히 해인사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운명을 전환할 발심을 하게 되었단다.
 해인사 부처님에게 홀딱 반해서 이혼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이혼을 안해주려는 남편과 힘들게 정리를 했지요.
 이혼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락을 해 오는 남편 때문에 많이 울었답니다.
 눈에 핏줄이 터지도록...저의 친정부모님은 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까지 했어요.
 신부가 된 두명의 삼촌들은 불교로 개종한 저를 무척 나무라셨습니다.
 결국 식구들 몰래 산으로 도망갔어요."
 
 "... 혹시 남편에 대한 미련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나요?"
 
 "아니요...전생의 빚을 갚기 위해 만났던 건데요 뭐.
 제가 전생에 큰 벼슬아치였는데 당연히 많은 첩을 두었겠지요?
 그때 오로지 저만 바라보고 일편단심 사랑한 여인이 현생의 남편이었어요.
 사랑을 혼자 독차지하고 싶던 그 열망때문에 이생에 부부로 만난 것 같애요."
 
 "지금의 삶에 대한 후회같은 건 없어요?"
 
 "ㅎ 어느 사찰에 있을 때 어떤 보살님이 제게 그러데요.
 '이렇게 젊고 고운 보살이 아깝게 왜 이렇게 사느냐' 고요.
 ㅎㅎ 제가 이렇게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요.
 세속의 인연들 때문에 밤이 하얗게 새도록 운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늘 결론은 똑같았어요.
 이 선택을 잘했다구요.이렇게 사는 것이 넘 행복하답니다."

 
 "아직도 고아들을 키우고 싶다던 꿈은 간직하고 있나요?"

 "불교로 개종하고나서 그것만이 최선의 삶의 방식은 아님을 알았답니다.
 좋은 일...하면 좋지요. 하지만 전 이생에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싶답니다.
 몇년 후 다른 종단으로 정식출가를 하여 절을 하나 짓고 살까 생각도 하는데
 그때 그 꿈을 펴게 될 수도 있지요.

 지금은 그저 기도에만 충실하고 싶어요.
 무엇을 하든 제 업이 왠만큼 소멸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어오는 업장의 바람을 막을 수 없거든요.
 참회기도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종교인들이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전 참회해야 할 업이 너무 많은 사람에요."
 
 그녀는 참회기도의 중요성을 늘 내게 강조했다.
 업장이 두꺼운 사람들은 기도도 잘 안되고 어떤 수행을 해도 마장에 걸려 넘어지며
 세속의 일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일단은 내 안의 쓰레기들을 먼저 치우고 깨끗한 그릇을 만든 다음에
 무엇을 담아도 담아야 한다고...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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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전 선(禪)을 할 근기가 못됩니다 
2014.3.26
 
 오직 나무아미타불 염불만을 할 것을 강조한 그녀지만 선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수승한 선을 하지 않고 왜 염불을 선택했습니까" 물어보았다.
 
 "아이고 보살님...제가 선을 할 근기가 안되니까 그렇지요.
 선이야 말로 최상상근기가 하는 것 아닙니까.
 해보니 제 근기같고는 안되더라 였어요."
 
 "그런 대단한 근기를 갖고도 선을 할 수 없다면 누가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선을 할려면요.
 걸식수행을 하여야 하고,
 분소의를 입어야 하고,
 한 나무 밑에서 하루 이상 잠을 자지 않을 정도가 되야 해요.
 이 시대에 그럴 수 있는 수행자 있습니까?

 편하게 선방에 앉아서 보살들이 해드리는 공양 드시면서 무슨 선을 합니까?
 그건 제대로 된 수행이 아닙니다. 그래갖고는 선은 못합니다 어림도 없지요.
 다들 수행이라는 겉멋만 잔뜩 들어있어요.
 재가자들도 선방에만 다니면 목에 힘주고 다녀요.
 웃기는 착각들이고 작태들이지요.
 선이 뭔지 화두가 뭔지 알고나 그러는지 한심해요."
 
 난 할 말이 없어서 헛헛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내게 하는 말이,
 "보살님도 이제는 염불할 근기가 된 것 같습니다."
 
 "와 하 하...이제서야 염불할 근기가 되었다구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상당히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쁜 말이기도 했지만
 난 어처구니가 없고 기운이 빠지기도 해서 한바탕 웃어제꼈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내게 했으면 심하게 반격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행의 고수가 하는 말이니 수긍하지 않을 수도 없고...ㅎㅎㅎ
 
 "염불이 아무나 하는 건줄 압니까.
 입만 달싹거린다고 염불이 아니잖아요.
 그동안 이런 수행 저런 수행 하면서 간도 보고 맛도 보았을터이니
 이제는 흔들림없이 염불수행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느정도 진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도 있고 업장도 많이 녹아내린 사람이 할 수 있는게 염불수행입니다.
 복을 비느냐고 하는 염불은 참된 염불이 아닙니다.
 그건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듯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에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라?"
 그녀는 참으로 신랄했다.

 "제가 그렇게 말하니 어떤 사람이 항의하데요.
 그럼 기도할 수 있는 근기가 되는 사람도 없겠다고요."
 
 "그렇게 반격할 수 있지요. 중생의 마음이란 건 소원성취에 목이 마르니까요."
 
 "소원성취는 참회기도를 열심히 하면 저절로 되요.
 업이 녹아내리면 저절로 되는 것인데 자꾸 부처님이나 신들에게 청탁을 하고 거래를 하려고 드니 문제에요."
 
 "그럼 참회기도는 어찌해야 합니까?"
 
 "저는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를 지극하게 염하면 참회는 저절로 된다고 봐요.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없이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면서요.
 그러면 업장이 녹아내려요.
 전 저의 이 몸뚱이는 부처님을 예경하는데만,
 이 입은 염불을 하는데만 쓰고 살다 가고싶어요.
 그런데 요놈의 입은 그게 잘 안되네요. ㅎㅎㅎ "
 
 참으로 절대적인 신심을 가진 여자다.
 난 그녀의 신심이 너무 부러웠다.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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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주력수행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2014.3.26

 "내가 말했다.
 전 주로 주력수행(진언,다라니)을 많이 했어요."
 
 "제가 봐도 보살님은 전생에 주력수행으로 한 경지에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주력수행을 그만두고 염불을 하라 합니까?"

 "부처님의 명호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주력수행은 위험성이 많아요.
 저도 한 때는 백련암에서 아비라 기도를 했습니다.
'아비라의 여신'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치열하게 했습니다.
 남들은 두꺼운 방석을 깔고 호궤합장을 하였지만 저는 얇은 방석을 깔고 했어요.
 삼천배를 21일 한 후에 시작하였죠.
 당연히 능엄주와 법신진언도 치열하게 했지요.

 그때 많은 경계체험을 했습니다.
 제 전생도 보이고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의 전생도 보이고 뭐 그랬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니겠지요.
 능엄주를 할 때 아주 이상한 현상을 겪었어요.
 보통 5분이면 일독을 하는데 하루종일 했는데도 21일독을 못 넘어가는 거에요.
 입에서는 계속 침이 나와서 옆에 물컵을 두고 침을 뱉어가면서 했어요.
 죽어라고 하는데도 21일독을 겨우했어요.

 그리고 무서운 경계를 보았어요.
 그 이후 '아, 능엄주는 아무나 해서는 안되는구나' 깨닫고는 접었답니다.
 성철스님도 하루 7독이상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지금의 한국불교에선 능엄주를 하루 백팔독,또는 그 이상을 하고 있어요.
 전 매우 문제가 심각하다고 봅니다.
 능엄주를 하면 모든 부처님과 신들과 조사들까지 다 불러들여 모시고 하는 것인데
 다 모셔놓고는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요?

 수습할 능력도 뭣도 없으며서 잔뜩 불러서 모셔놓고 어떡하겠다는 건지...
 다른 주력수행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주력은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그 다라니를 수호하는 신들까지 청하는 것이거든요.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결려서 무서운 현상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수행법이 염불법임을 알게 된 겁니다."
 
 "하긴 전에 저의 스승였던 분께서도 능엄주나 천수다라니 하는 것을 경계하셨어요.
 당신의 체험으로는 능엄주는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아니면 안되고
 천수다라니는 보살행을 서원하는 사람이 아니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어요.
 주력수행을 하다보면 당연히 신통이 오는데 그걸 감당할 근기들이 아니면서 
 이상한 욕심에 끌려서 하고 있으니 위험하다고 했지요."
 
 "사실은 저에게도 신통이 왔지요.
 손에서 열이나고 얼마나 뜨거운지 합장조차 할 수 없었어요.
 누군가가 제 손으로 다른 사람의 아픈 부위를 만지면 나을 수 있을 거라 했어요.
 손에 치유의 능력이 왔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 능력을 안쓰면 오히려 제게 화가 미칠거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 그 능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안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인가 손의 열이 식기 시작하더군요."
 
 '대부분은 그 능력을 쓰고 싶어 했을텐데 용케 극복하셨네요."
 
 "전 누구 운명 봐주고 병 고쳐주고 그런 것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다고 운명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병 고쳐준다고 그 사람이 영원히 삽니까?
 신통한 사람의 능력에 의존하여 병을 고치면 다른 것으로 곤욕을 치뤄야 합니다.
 그게 철저한 인과법의 세계거든요. 이 세상엔 공짜 없습니다.
 전 한때 신장에 이상이 생겨서 이식수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를 상황까지 갔지만
 그 모든 것을 저의 업으로 알고 오직 참회기도를 하여 병을 낳았습니다.
 작은 병은 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지만 큰 병은 참회기도 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느 선지식께선 참회기도만 하고 가도
 이 생에서 훌륭한 수행을 하고 가는 것이라고 했나 봅니다.
 아, 저도 근기도 안되는 사람이 너무 많이 기웃거리고 산 것 같습니다."
 
 "ㅎ 하지만 해보지 않은 것보다는 해보는 것이 나아요.
 그래야 그 문제점도 알고 다시는 흔들림 없이 염불정진할 수 있으니까요.
 경전공부도 해야 할 땐 해야해요.그러지 않으면 자칫 사도에 빠질 수 있거든요.
 이제는 보살님도 흔들림없이 염불수행을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처음 이 곳에 오실 때보다는 업장이 엄청 녹아내렸어요.
 아주 짧은 시간에 무척 많이 녹아내린게 보이네요.
 이제 진짜 염불을 하실 수 있는 근기가 된 것 같아요.
 염심히 해보세요. ㅎㅎㅎ "
 
 "흐음...ㅎ ㅎ ㅎ "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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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수행할 땐 명산의 지기를 받는 것도 좋아요 
2014.3.26

 그녀는 내가 그 도량에 오래 머물기를 청했으나
 나는 한 도량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떠나겠다고 말했다.
 한 곳에 오래 있다보면 타성이 생기고 이런 저런 문제들에 휘말려들어가기가 쉽다.
 그때부터 수행은 끝이다.
 
 이런 내 의중을 그녀는 십분 이해했다.
 자신도 한 도량에 일년 이상 머문 적이 없는데 이 곳 만큼은 2년가까이 머물고 있다고...
 3년 기도를 발원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3년 기도를 꼭 한 도량에서 할 필요는 없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도량이 편해져서 내 집같은 마음이 들면 그때부터 나태함이 고개를 듦을 경계하고 있었다.
 자신도 언제 떠날지 모른다며 내게 지리산 쪽을 한 번 가보라고 권했다.
 
 "수행을 할 때는 이 곳 저 곳의 명산의 지기를 받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옛 수행자들이 만행을 하면서 돌아다닌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분들은 아무리 좋은 명산 명찰이라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지요.
 좋은 것에 탐착하는 마음을 경계한 때문이겠지요.
 공부가 경지에 오르면 그 때는 명산 명찰을 찾는 마음도 버려야 하겠지만요.
 그래도 경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좋은 지기를 받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게 제일 좋은 공부지요."
 
 '호 호...전 뭐 그런 거창한 뜻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고
 이왕이면 삶의 다양함을 체험하는 게 좋아서 그래요. 여행 삼아서...
 많은 사람들과 많은 경계에 직면하다보니 저의 모난 면들이 깎이더라구요.
 이젠 아무 곳에서나 자도 잠도 잘 오고,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고...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게 되었어요.
 그저 주어지는데로 사는 것이지요.

 전에는 내 집이 아니면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는데
 현재 제가 머무는 곳이 제 집이거니...현재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려니 하고 살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공부는 뭔가를 늘 생각하지요.
 거창하게 도를 구한다거나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아서 그럴 뿐입니다.
 더 늙으면 이 짓도 못하겠지요.^.^ "

 내가 떠난다니 그녀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는가 보았다.
  "이 세상에 도반같이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서로 용기도 북&#46167;아주고, 나태할 땐 충고도 해주면서 같이 가는 게 얼마나 좋아요?
 제가 나중에 절을 지으면 그 때는 조념염불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려 해요.
 조념염불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평상시 염불을 잘 했어도 임종시에는 무척 힘들거든요.
 그 때 도반이 곁에서 조념염불을 지극정성 해주면 왕생의 길이 더 순탄할 겁니다.
 그 때 저의 도량에서 머물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환영할께요.
 단 조건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꼭 해야 한다는 겁니다.ㅎㅎ
 제가 바다 속에 던진 업을 건져와서 설립을 하게 될 수 있어요.
 아직은 생각뿐이지만요."
 
 바다속에 던진 그녀의 업???
 그녀는 한 때 사업을 하여 번 돈을 자신의 업이라고 표현했다.
 그 많은 돈을 어디에 감춰두었냐고 물으면 웃으면서 "바닷속요" 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으면 사랑은 해보았습니까?"
 
 "안해봤을것 같아요? 제가 혈액형이 B형에요. 얼마나 감정이 섬세한데요.
 수행을 안했음 아마 황진희처럼 살았을지도 몰라요 호 호.
 제가 성당에 다닐 때 신부님 한 분이 저때문에 옷을 벗기도 했어요.
 당신 혼자 짝사랑한 것이니 제 책임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훗날 제가 삼천배 할 때 그 또한 제 업임을 알고 많이 울었어요.
 그 업으로 인해 삼천배 할 때 무척 힘들었답니다."
 
 "옷을 벗겼다구요? 난 옷을 입혔는데? "
 
 와 하 하 하...우리 둘은 배를 쥐고 웃었다.
 흠...거짓말이 아닌데...
 
 진정한 보살은 세속에 쩔은 남자를 세속을 벗어나게끔 인도한다는데???
 

 나무아미타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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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화두를 든다는 착각을 하고 있지요 
2014.3.27

 내로라 하는 선승들 밑에서 선을 공부한 그녀가 자신은 선을 할 근기가 아니라며
 염불수행을 하고 있으니 그녀가 알고 있는 선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래서 우리는 염불에 대한 대화보다는 선에 대한 대화를 더 많이 했었다.
 오히려 선방에 머물때 보다,
 선수행자들과의 대화에서 보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선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선을 하는 사람들은 망념이 일어날 때 '이 뭐꼬' 하고 얼른 화두를 챙긴다고 말합니다."
 
 "그게 바로 착각이지요.
 그건 화두를 드는 게 아닙니다.
 망념이 일어날 때 '이 뭐꼬'를 하는 것은 
 망념이 일어날 때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지요.
 망념에 다른 언어를 대입하는 것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냥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편이지 화두는 아닙니다.
 화두는 철저히 의정이 일어나야 하는데 솔직히 의정이 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은 저도 선방에 있을 때 그것이 참 갑갑했습니다.
 스님께선 참선 초보자들에게도 '의정이 일어나느냐' 고 질문을 하시는데
 전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거든요.
 의정이 뭔지 저도 솔직히 모르겠더라구요.
 제 성격이 확고한 이해가 없이는 발을 들이지 않는 지라 머리가 아팠습니다.
 회의도 들었구요."
 
 "그게 작금의 불교계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어떤 선수행자에게 물었습니다.
 '참선이 무엇이냐' 구요.
 그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내려놓는 것' 이라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위빠사나 아닙니까."
 
 "그렇지요, 위빠사나의 수행법이지요.
 그래서 선을 지도하는 사람들도 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관수행법입니다.
 참으로 좋은 수행이지요. 자기자신을 늘 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경지입니다.
 하지만 선은 직지인심입니다.
 즉각 본래면목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업보중생이라 업의 작용으로 인해 그 자리를 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면 왜 스님들은 우리에게 화두를 챙기라고 하시는 걸까요?"
 
 "비록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망념을 줄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또 그러다보면 그 중에 누군가는 진짜 화두를 드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그럼 선수행을 많이 한 선승들이 입적 때 방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분들이 제대로 화두를 들지 못했음에도 방광하지 않습니까."

 "그건 마음을 한데 모으는 수행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선수행이 아니라 염불이나 주력수행등 기타 수행을 많이 한 사람들도 방광을 하지 않습니까.
 범부중생들은 망상이 많기 때문에 마음의 에너지가 분산이 되고 있지만
 수행자들은 마음의 에너지가 하나에 모이기 때문에 방광을 하는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그가 방광을 하였다하여 도를 성취했다고 보는 것은 고려해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그 점을 경계하셨으니까요.
 그런 현상에 취하는 것이야말로 외도라 하셨습니다."
 
 "그럼 선을 할 수 있는 근기란 어떤 상태를 말함입니까?"

 "저는 청정심이라고 생각해요.
 근기란 어느만큼 그가 청정한가의 척도라고 전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선이란 최고의 경지를 말함이니 그만큼 청정심이 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다고 봐요.
 안타깝게도 저도 아직은 선을 한 근기가 아닙니다.
 청정하지도 않은 수행자가 삼매니 선정이니 말하는 것은 신뢰할 것이 못됩니다.
 혼침의 상태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거나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행위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참선 참선하고 있는 걸까요?
 참선 수행자에게는 공양도 지극정성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공덕이 엄청나다고 하지 않습니까."
 
 "겉보기에 선을 한다고 하면 멋져 보이잖아요. ㅎㅎ
 염불을 한다면 왠지 촌스러워보이구 구닥다리같고 하근기같고...ㅎㅎ
 사실 수행자들이 선을 제대로 할려면 걸식수행을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상이 떨어져나가야 하거든요.
 오죽하면 잠도 한 나무 밑에서 하루 이상 자면 안된다고 할까요.
 길들고 편안해지고 정이들고 이런 모든 것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죠.

 그 무엇에도 맛에도 잠자리에도 옷에도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진짜 선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계에서 하는 선은 겉멋만 잔뜩 부리고 있어요.
 너무 편안하게 수행들을 하고 있지요. 그건 수행이 아닙니다.
 대부분 앉아서 졸고 있든 망상에 빠져 있든 그래요.
 얼마나 의정을 일으키고 또 그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지는 본인들이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좀더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렇군요...참 수행이란 게 하면 할 수록, 알면 알 수록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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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염불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2014.3.27
 
 "염불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능엄경에 나오는 이근원통법이 최고지요.
 처음엔 저도 경전을 읽을 때 묵독을 주로 했고 염불도 그리했어요.
 그런데 그건 좋은 수행법이 아니더라구요.
 망념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어느새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래서 가장 원초적인 수행법이 가장 좋은 수행법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묵송엔 문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묵송을 하다보면 금방 염불을 놓치더라구요.
 그런데 전 소리내서 하면 몸이 많이 지치더라구요.
 에너지가 빠져나가서요."
 
 "그건 염불법이 바르지 않아서 그럽니다.
 질량불변의 법칙에 의해 나의 에너지는 일정하게 존재합니다.
 바르게 염불을 하면 빠져나간 에너지가 다시 들어옵니다."
 
 "ㅎ...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염불법입니까?"
 
 "전 일정한 톤과 소리와 리듬을 갖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빠르게 하다 느리게 하다 높이 하다 낮게 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몸을 상하게 합니다.
 처음엔 저도 잘못해서 기맥이 막히곤 했습니다. 상기도 되구요."
 
 그러면서 그녀는 대만에 계신 혜정스님의 염불법을 들려주었다.
 나무...아미...타...불...
 정확히 네번 끊어서 하는데 톤이 높지도 낮지도 않으며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처음 대하는 염불법에 의아하기도 신기하기도 또 적응이 안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꾸 듣고 하다보니 마음에 평정심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혜정스님(http://cafe.daum.net/sunsujeongto/)의 염불테입에서 금빛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내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원...^.^
 
 "그런데 참선이든 염불이든 치열하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십리 밖도 보이고
 부처님도 보이고 신장들도 보이고 영가들도 보이는가 본데 이건 뭡니까?
 본인도 그런 현상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대단한 것 아닙니다.
 실은 색.수.상.행.식에서 색의 경계를 못벗어났다는 증거지요.
 그 또한 마경이라고 하지 않슴까.
 다만 집착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에 탁 걸려서 넘어지니까 문제지요.
 혹자는 대단한 경지인양 자랑하고 또 그런 사람을 추종하는 게 더 문제겠지요.
 그냥 염불만 열심히 하세요.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환해짐을 체험할 겁니다."
 
 "환해진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함인지요."
 
 "ㅎㅎ 뭐가 보인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알아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사물의 이치등이 그냥 알아집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어느 경계에 떨어져있는지
 또 어떤 업에 의해서 그 사람이 그런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 알게되며
 앞으로 어떤 상태에 떨어질지도 알게 되고 죽어서 어디로 떨어질지도 그냥 알게 됩니다.
 죽어라고 한 번 해보세요. 그러면 알고 싶은 것 다 알게 되요.
 물론 저도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직 그 경지는 아녜요. ㅎㅎ"

 
 그녀와 같이 법당에서 염불을 할 때
 난 그녀의 목소리와 자세가 한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보았다.
 염불을 하며 법당을 한시간 가량 도는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난 간간히 비틀거리는데...ㅎ
 목소리 톤도 굵기도 모두 일정했다.
 저래서 염불삼매에 들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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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자성을 모르는데 어떻게 자성염불을 한다고 말합니까
2014.3.28
 
 미타행자 그녀에게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했던 자성염불에 대해 질문을 했다.

 "염불이 깊어지면 자성염불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본인도 자성염불이 되고 있습니까?"
 
 "자성염불요? 아니 자성이 뭔지도 아직 모르는데 어떻게 자성염불을 합니까?"
 
 난 순간 멍해졌다...의외의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염불이든 주력이든 치열하게 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몸의 어느 부분에선가
 나오는 염불이나 주력소리를 듣는다고 하던데요?
  주력으로 유명한 어느 보살의 수행기를 읽어보니 그럽디다.
 다라니가 몸의 어느 한 부분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 돌아갔으며
 자신은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됐다구요."
 
 "그건 굉장히 위험한 얘깁니다.
 저도 한 때는 가슴의 중앙 부분에서 염불소리가 났었어요.
 하지만 나중에 그곳의 기맥이 막힌 것을 알고 부황을 떠서 피를 많이 뽑아냈어요.
 몸의 이 곳 저 곳에 다라니나 염불소리가 자리잡는다는 것은
 그가 기운용을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봐요.
 그것을 자성염불이라고 말한다니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솔직히 우리는 아직 자성이 무엇이라고 확고하게 말할 급수가 아니에요.
 말로만 자성 자성하지 자성을 보기라도 했습니까?
 학문적 용어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들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서 얘기들을 하는데 참 안타까워요."
 
 "호오...그런가요.
 그런데 저도 가끔은 어디선가 들리는 염불소리를 듣곤 했어요.
 비구스님인데 아주 청아하게 염불을 하시더라구요.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가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근원은 없는데
 제 귀에는 분명 들렸습니다.그래서 그런 현상이 자성염불인가 생각했거든요."
 
 "그건 보살님이 전생에 비구승였을 때의 그 모습을 보고 들은 것이지요.
 아뢰야식에 새겨진 전생의 식이 작동했다고 보는게 옳을 거에요."
 
 "전 꿈에서도 가끔은 염불이나 특히 다라니를 많이 하곤 했습니다.
 어떤 땐 전혀 해보지 않은 왕생정토주를 하기도 했어요.
 꿈에서 깨어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는 그 다라니가 왕생정토주임을 알았지만요."
 
 "아마 보살님은 전생에 주력수행으로 한경지를 갔을 겁니다.
 앞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다보면 그 때 어느 경지까지 갔었는지 스스로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현상을 자성염불의 경지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봐요.
 그건 그냥 식에 깊게 새겨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자성이 뭔지도 잘 모르지 않습니까.
 기도를 하다가 어떤 특이한 현상을 체험하게 되면 그것을 한 경지를 얻은 것인양 착각하면 안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수행 중에 특이한 현상을 경험하면 거기에 탁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 신비감에 빠져서 이상해지기도 하구요."

 "그래서 염불을 할 때도 항상 소리를 내서 하라는 겁니다.
 소리를 내기 힘들 때는 입모양이라도 내야 합니다.
 그래야 몸 전체의 기운도 같이 움직이거든요.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너무 빨리해도 기맥이 막힐 수 있어요.
 조금할 때는 모르지만 아주 많이 할 때는 반드시 장애가 옵니다."
 
 "보통은 망상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빨리 하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군요."
 
 "제 경험으로는 기맥이 막혀서 혼났습니다.
 대만의 혜정스님을 뵈었을 때
 '아, 이 염불법이야 말로 내가 찾던 염불법이구나' 했답니다.
 마음이 들뜨지도 않고 기맥이 막히지도 않는 아주 수승한 염불법이지요.
 나무아미타불을 관하면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염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나도 혜정스님의 염불법을 따라하다보니
 굉장히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처음 대했을 &#46468;는 너무 생소해서 이상하기만 하더니
 익숙해지니 전에 하던 염불법이 오히려 어색했다.
 특히 여섯자를 관하면서 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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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가위눌리는 현상에 대하여
2014.3.29
 
 "전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가위에 많이 눌렸답니다.
 잠을 자기가 두려울 정도로요.
 늘 나를 죽이러 온 누군가가 내 방에 들어올까봐 방문을 잡고 늘어지다 깨고
 어떤 때는 그 존재가 제 목을 조르거나 제 목에 칼을 댈때 진언을 외고는 간신히 풀려나곤 했어요.
 아마도 제가 전생에 악업을 많이 지은 것 같아요."
 
 내 얘기를 듣던 그녀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했다.
 
 "그렇다면 전생의 악연이 가까이에 있다는 증거에요."
 
 "오...그래요?"
 
 "예, 악업의 결과가 몇 생 후에 받아야 할 업인 경우는 그런 꿈을 꾸지 않습니다.
 그 악연이 지금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런 현상을 겪는 겁니다.
 내 옆에서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지요.
 겉으로 볼 &#46468;는 좋은 사이일 수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거나 부부이거나 자식일 수 있지만
 인과의 세계에서는 전생에 깊은 악연으로 맺어진 사람일 수 있는거죠.
 그래서 내게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줍니다."

 아, 하고 난 탄성을 질렀다.
 그 악연이 누구인지를 나라고 모르겠는가.
 내 인생이 심한 휘오리바람에 휘말렸을 때는 유독 그런 현상이 나타났으니까.
 가위에 눌린다는 것은 일단 운세가 하향세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지만
 물론 몸이 허약해서 가위에 눌리기도 하겠지만
 그 허약함도 사실은 전생에 살생을 많이 한 연고이니 그 또한 악연의 장애라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가위에 눌린다면 가까이에 악연이 원수갚을 태세를 하고 있든 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은
 그녀에게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럼 빙의는 왜 되는 걸까요?"
 
 "전생의 빚받으러 오는 거지요.
 그래서 늘 염불을 하면 그 존재도 좋은 세계로 인도할 수 있으니 장애가 해결됩니다.
 오래 염불을 하면 귀신의 장애를 스스로 알 수 있어요.
 왔구나 하는 것도 갔구나 하는 것도요.
 그리고 그들과 같이 염불하여 그들이 집착과 원한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전에 어느 사찰에 머물 때의 일이었어요.
 굉장히 수행이 깊은 도반이었는데 한 밤중에 이상한 경계에 처한 것을 보게되었답니다.
 큰 방에서 여러명이 같이 잤는데요 갑자기 괴성을 지르는 겁니다.
 그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짐승, 그것도 수컷이 울부짖는 소리였어요.

 우린 너무 무서워서 다들 머리가 쭈뼛 섰답니다.
 소름이 쫙 끼치더군요. 얼마후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코를 골며 자더군요.
 아침에 잠에서 깨어서도 그 도반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대단한 수행이력을 가진 사람이 왜 저럴까 실망스럽기도 슬프기도 했어요
 그 현상은 뭐였을까요?"
 
 "전생의 까르마가 작동했을 수도 있고 빙의 현상이라고 봐야겠지요.
 그 현상을 극복하는 방법은 지극한 참회기도 밖에 없습니다."
 
 "......"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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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사경보다는 염불이 수승합니다
 2014.3.30

 "그런데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지 않고 사경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전 염불보다는 사경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사경보다는 염불하는 게 더 수승합니다.
 사경이 산란한 마음을 집중하는 데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염불만큼의 공덕은 입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견해로는 그렇습니다.
 염불을 하게 되면 온몸의 기운도 같이 돌기 때문이며
 염불 할 때 나오는 파동에너지가 온 몸 세포 구석 구석까지 전달되기 때문이며
 주변에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도 그 파동이 전달되기 때문에 많은 공덕을 입습니다."
 
 "예...현대물리학에서도 파동에너지의 효과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언의 효과에 대해서도 긍정적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티벳에서는 절벽 위에 사원을 지을 때 수많은 스님들이 모며 진언을 외움으로써
 그 파동의 힘으로 무거운 돌을 들어올려 건축하는 비밀이 전해내려 오고 있답니다.
 피라미드도 그렇게 건축했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때의 진언은 진언으로 높은 경지에 간 수행승들에 의해 선택된
 진언을 하겠지요. 그래서 밀교라고 하잖아요.
 제 체험으로는 진언만큼 위험한 수행이 없다고 봐요.
 진언수행이야말로 스승없이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진언을 잘못하면 때로는 귀신을 불러들이기도 하니까요.

 저도 한 때 옴마니반메훔을 죽자사자 했었는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경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었지요. 많은 신묘한 체험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요.
 밀교수행은 밀교수행으로 한경지를 이룬 사람의 검증하에 해야한다고 전 주장합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따라한다는 식의 진언수행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염불수행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예...염불수행법을 만나기 위해 전 천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전생에도 염불수행을 한 적은 있겠지요. 하지만 제대로 하지를 않았지요.
 염불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으니까요.
 이생에도 호기심이 많아서 온갖 수행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수행법입니다.
 이제는 흔들림없이 갈 수 있습니다."
 
 "칭명염불에도 여러부처님의 명호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왜 아미타불입니까"
 
 "아미타부처님이 법장비구로 계실 때의 원력 때문이지요.
 아미타부처님의 48원을 능가할 수 있는 대원이 있습니까?
 아미타란 명호에는 48원의 힘이 다 들어있고
 아미타란 세글자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법장비구의 서원과 공덕으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란 명호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공덕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란 명호에서 나오는 파동에너지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건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어요.
 나무아미타불 염불 수행을 하면서 많은 장애가 사라졌어요.
 그래서 자신있게 권하는 겁니다."
 
 "그런데 테이프를 틀어놓고 염불을 듣는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큰 공덕은 없습니다.염불 할 수 있는 종자는 심어지겠지만요.
 어떤 수행이든 수행은 철저히 스스로 힘들여 해야 공덕이 있습니다.
 온 몸을 부딛쳐서 수행하지 않으면 도를 얻기 힘들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다보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찾아오는지 몰라요.

 뱀도 있고,곤충들도 있고...그런데 그들이 염불소리를 듣고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때로는 금빛 몸으로 떠나는 것을 보면 얼마나 환희로운데요.
 일체중생이...온 법계가 같이 염불한다는 것을 알게 될거에요.
 아미타불 염불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그만큼 선근이 있어야 한답니다."
 
 "그럼 아미타불 염불을 하면 천도재같은 것은 안해도 되는 겁니까?"

 "꾸준히 열심히만 하면 그렇지요.
 꾸준히 하다보면 인연 있는 영가들이 환희로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얽혀있는 주변도 서서히 정리가 됨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것이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의 힘입니다."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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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공양올리는 수행을 해보려했으나 
2014.3.31
 
  그녀가 말했다.
 "저는 한때 공양올리는 것으로 수행을 해보려 했던 적이 있어요."

 "공양을 올리는 것도 수행이라고요?"

 "그럼요. 대단한 수행이지요.
 공양을 올리는 자의 마음도 청정해야 하고,
 공양물도 청정해야 하고,
 공양을 받는 자의 마음도 청정해야하지요.
 세가지가 다 청정해야 공양올리는 것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공양은 공양의 완성은 아니겠군요.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니까요."
 
 "그렇지요...
 제가 어느 암자에 머물때 였습니다.
 그곳 주지스님이 법당에 작은 종불사를 하고 싶다고 하시는거에요.
 스님은 삼백만원이면 될 것 같다고 하셨어요.
 오죽하면 저에게 말씀하시나 싶었어요.
 수중에 돈은 없고해서 궁리를 했지요.
 조금 경제적여유가 있는 아는 스님께 전화를 드렸지요.

 '스님 제가 이러저러해서 돈 삼백만원이 필요하니 통장으로 입금해주십사' 하고요.
 그대신 제가 일년 동안 그 절에 가서 공양주살이를 해드리겠다고 했지요.
 스님은 좋다고 하시며 얼른 부쳐주시데요.
 삼백만원을 종불사에 쓰시라고 드리고 저는 약속대로 공양주살이 하러 갔었어요."
 
 "맙소사...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갔듯이요?
 그래서 정말 일년 동안 공양주살이로 삼백만원을 갚았습니까?"
 
 "일년은 아니고 십개월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 지극한 신심으로 불사금을 드린 것인데
 후에 알게된 사실은 그 스님은 다른 보살들에게도 그런식으로 여러 차례 돈을 받았음을 알았어요.
 매우 화도 나고 실망도했지요.
 그때 깨달은 것은 이 사바세계에선 청정한 공양의 완성은 있을 수 없겠구나 였습니다.
 욕계의 세계에선 뭐든지 완성은 할 수가 없음을 알았어요.
 수행의 완성도요...

 그래서 더 극락에 나기를 원을 세우게 되었고,
 일단 극락에 왕생한다음에 그곳에서 청정한 수행을 마무리지어 성불해야겠다구요.
 성불한 후에는 다시 사바세계에 와서 보살행을 해야지요.
 말이 보살행 보살행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요?
 진정한 보살행은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라는 상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청정한 보살행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요...청정한 보살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냥 주변 사람과 더불어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할 뿐이지요.
 다만 보살행의 씨앗을 뿌리는 수준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니 수한보살님 우리 꼭 극락에서 만납시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을 죽는 날까지 놓치지 마세요.
 그럼 왕생할 수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끄덕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난 그녀처럼 수행할 자신은 없다.
 결정코 극락에 나겠다는 간절한 원도 아직은 미흡하다.
 그녀처럼 청정한 수행자의 길을 가기에는 아직 소멸해야 할 업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그녀가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어쩌면 저렇게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청정한 마음으로 수행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내 손을 잡는 그녀의 손은 나무껍질같았다.
 얼마나 일을 심하게 했으면...
 무엇이 부럽고 무엇이 아쉬워 곱상한 여인네의 몸으로 저렇게 살기를 좋아할까.
 
 "전 태를 받아 태어나는 고통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이 생으로 끝마치려고요. 수행중에 수많은 전생을 보았는데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져요.
 이제 가장 수승한 염불법문을 만났으니 이 문으로 계속 가려구요."
 
 그러시구려...그러시구려...꼭 극락왕생하시구려.
 님이 극락왕생하지 않으면 누가 극락왕생할 수 있을손가.
 
 어쩌면 그녀는 내 인생에 만났던 사람중에 가장 수승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또 그런 수행자를 만날 수 있을까 싶다.
 한점의 의심도 없이 부처님의 세계를 믿고 행을 하는 수행자.
 
 공부도 치열하게 했고,
 일도 치열하게 했고,
 돈도 치열하게 벌었고,
 봉사도 치열하게 했고,
 수행도 치열하게 한 여자...
 난 그녀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또 만나겠지만 그 인연줄에 &#50614;매이는 여자가 아니니 나 또한 연연하지는 않으리라.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후에 또 만난다면 그때 또 다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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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대부분 혼침을 삼매로 알고 있습니다
2014.04.01
 
 미타행자 그녀와 나의 인연이 지중했음인가,
 어제부로 그녀의 이야기를 마치려했으나 오늘 아침 수행 중 궁금한 현상이 있어
 그녀에게 전화를 하여 물어보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혼침입니다..."

 "호...그럼 혼침중에도 전생이 보이고 빛이 보이기도 하고 그런 겁니까?"
 
 "예...대부분 수행 중에 보이는 현상은 혼침 중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삼매가 아닙니다.
 저도 앉아서 십리 밖 백리 밖도 보았어요.
 때로는 제모습도 보았고 미세한 박테리아까지도 보였어요.
 사람의 몸을 보면 뼈속까지 보여서 어디에 병이 있는지 그 병이 언제 어떻게 될지까지 다 알았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기도하는데 제가 그 사람 앞에 앉아있었다며
 혹시 유체이탈한 것 아니냐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유체이탈도 아니고 바람직한 경계가 아닙니다.
 선방에 앉아 있다보면 대부분 혼침에 빠져서 헤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 그가 혼침 중에 어떤 현상에 취해있는 지 알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대부분 스님들은 제자가 혼침에 빠져 있어도 모르던지
 설사 알아도 어떻게 인도해줄지 몰랐습니다.
 그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제가 영가가 보인다고 하면 스님들은 '신기가 있어서 보이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말하는 스님도 영가를 보고있는게 보였습니다.
 스님들은 자신의 경계는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말하고 속이곤 했지요.
 자신의 경계는 도력이고 우리의 경계는 마장이고 신기라고 폄하해서 말하더군요.
 저도 제가 빙의가 된 게 아닌가 많이 의심하고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답을 알아갔습니다.

 그런 경계는 제가 무언가 바라는 게 있을 때 일어난다는 것을요.
 소원성취라든가,어떤 경계를 체험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을때요.
 염불수행을 하면서 많은 답을 얻었습니다.
 건방진 말인진 몰라도 솔직히 아직 전 이 땅에서 저를 인도해줄 스승은 못 만났습니다.
 기도 중에 한 분이 계신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아직 인연이 아닌지 만나지 못했어요."

 "그럼 대부분의 수행자가 삼매에 들어서 무언가를 보았느니 하는 게 삼매가 아니란 겁니까?"

 "혼침에 들어도 어떤 경계가 쫙 펼쳐집니다. 그걸 삼매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혼침 중에 일어나는 현상은 70%가 귀신의 장난입니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수행 중 무언가 보았다고 해도 그것은 생사해탈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그런다고 인생이 바뀌는 것도 현실적인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요."

 "어떤 사람은 참선을 하다가 자성불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구요. 그것도 마경입니까?"
 
 "ㅎㅎ 예,마경입니다. 아니면 집착으로 인해서 오감을 통하여 환(幻)이 보인거지요.
 다들 그런 경지가 대단한 줄 알고 자랑하고 부러워하고 그러는 것이 안타까와요.
 그냥 수행 중 일어나는 현상일 뿐인데요."

 "누군가는 명상 중에 빛을 보거나 백회가 열리는 체험도 했다 합니다."

 "별거 아녜요. 혼침 중에 보는 겁니다.그건 백회가 열리는 게 아닙니다.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쓰잘데 없는 말들에 취해서 사람들이 다들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것 같아요.
 전 사람들이 제게 그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봅니다.
 전 그사람의 미세한 마음작용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걸로 그 사람의 경지를 알 수 있어요.

 다들 혼침 상태를 삼매로 착각하고 말하더군요.
 변덕이 죽끓듯 하고,화도 잘 내고 탐욕을 부리고 여자라는 생각,남자라는 생각을 못 벗어나고
 입고 싶은 것,먹고 싶은 것,갖고 싶은 것, 이런 저런 두려움, 근심 걱정...
 그런 것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삼매에 듭니까 택도 없습니다.
 삼매는 업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는 못듭니다."

 "그럼 본인은 삼매에 듭니까?"

 "저도 아직은 아닙니다. 들었다해도 거친 삼매일뿐이지요.
 해인삼매의 경지는 어림도 없지요."

 "그럼 삼매의 경지는 어떤 겁니까?"
 
 "글쎄요...말로 딱히 하기는 힘드네요.태풍의 눈 같은 고요한 상태라 할까요.
  굳이 표현하자면 삼매가 공의 상태라고 말할 순 있겠네요."

 "그런데 요즘 잠자리에 누워서도 염불을 하는데 괜찮습니까?"

 "괜찮지만 그때는 묵송을 하여야 합니다.
 누운상태에서 소리를 내어 염불을 하면 기 순환에 혼란이 옵니다."

 "예...그렇군요.
 그런데 철야기도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지마세요. 혼침에 빠져 마경에 떨어질 확률이 높아요.
 기도는 욕심내지 말고 낮에 하세요. 깊은 밤에는 안 하는 게 좋아요.
 일할 땐 일 하고 잠 잘땐 잠 자고 염불할 땐 염불하고 그러면 돼요.
 저는 하루종일 기도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일을 하면서 하는 게 더 좋아요.
 하루 종일 앉아 있는다고 도를 얻지는 못해요.
 이상한 경계에 빠질 위험이 커요.
 백장청규가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경지에 이르렀습니까?"
 
 "아유...어림없어요. 그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데 제가 거기에 이릅니까.
 잠시 그런 상태에 이른다해도 그게 얼마만큼 지속이 되겠습니까?
 업이 덕지 덕지 묻어 있는 이 몸으로는 힘들어요."

 "그런데 삼천배를 삼년씩이나 했다면서 그땐 어땠습니까?"

 "ㅎ...솔직히 전 삼천배하는 것 보다 염불하는 게 더 힘들어요.
 염불이 절 보다 더 수승하고 어려운 수행입니다.
 몸을 조복 받고 하심하는 데는 절이 좋지만요."

 "염불이 삼천배보다 어렵다구요? "

 "그럼요...보통사람들이 중얼중얼 하는 것은 염불이 아녜요.
 그건 염불도 아니고 수행도 아니고 뭣도 아녜요.
 제대로 염불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무언가 바라는 것도 없이 해야 해요.
 오로지 내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부처님께 지극하게 귀의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라 하지만 그건 염불에 대한 모독입니다."

 아 어렵다 어려워...
 그녀와 대화를 하다보면 이제까지의 나는 염불을 한 것도 수행을 한 것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부처님께 공양 올린 것도 보시한 것도 불사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다 내가 무언가 바라는 마음으로 했으니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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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우리 탁발 나갈까요?
2014.04.10

 이제는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미타행자 그녀,
 그곳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그리워지곤 하는데...

 오늘은 문득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보살님 우리 저자거리로 탁발 나갈까요?"

 "으잉??? 탁발이라고라? "

 호.호.호...

 경기가 않좋아서든 불교계의 침체로 인해서든 요즘 어느 사찰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인데
 그곳이라고 예외일리는 없었다.
 지난 겨울엔 눈까지 너무 많이 내려서 인적이 끊긴 상태였었다.
 그녀는 나름 절 운영 문제가 신경이 쓰였었나 보다.
 '이달엔 월급을 안받아야 되나 어쩌나' 고민하는 모습이더니
 어느 날 갑자기 탁발하러 가자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
 내가 얼마나 당혹스럽고 우스웠겠는가.

 "호 호 호...그래 그럴까?
 대신 목탁은 자기가 치고 깡통은 내가 들께 호 호 호..."

 그녀는 일년 동안 행자생활을 했던 경력이 있는지라 목탁을 기가막히게 잘쳤응께.
 나는 농담을 하며 배를 쥐고 웃었는데 그녀는 전혀 농담이 아닌 얼굴이었다.
 
 "이 상태로 가면 초파일이 되어도 얼마나 등이 달릴지 모르겠어요.
 초파일 전에 한 번 나가면 좋을 것 같은데...등 많이 달라고 권선하면서리..."

 "그래 그래보지 뭐...초파일 경기가 너무 않좋을 조심이면 그때 한 번 나가보자구."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나도 농담만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탁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녀라면 시내 한복판에서 하루종일 절을 하면서 시주금을 걷을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눈이 녹기 시작했을 때 그 곳을 떠나왔으니 그녀와의 탁발수행은 해보지 못하게 되었다.
 솔직히 좀 아쉽다....ㅎㅎ
 
 이제껏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별스럽고 대단한 그녀였으니...
 그녀는 밥을 먹을 때도 꼭 탁발해서 먹는 것 처럼 먹었었다.
 대접에다가 밥과 국 반찬을 모두 섞어서 퍼먹었다.
 처음엔 왜 밥을 그리 품위없이 먹느냐고 한 마디 했었는데
 그래도 그녀는 늘 그렇게 먹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가 일부러 그렇게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먹는 것도 그녀에겐 철저히 수행이었다.
 짜니 싱거우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하는 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간단하게 식사를 하곤 했다.

 내가 꼭 청학동에서 내려 온 사람같다고 놀리면 굉장히 좋아하였다.
 마치 그 모습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양...
 늘 회색 법복에 생머리 질끈 동여매고 화장도 전혀 안하고
 전혀 안하는 정도가 아니라 스킨 조차 바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어느 산에서 지게 지다가 내려왔냐" 고 물으셨다 한다.
 또 어느 스님은 한글도 모르는 판무식쟁이로 아셨다가
 어느 기회에 그녀가 영어를 쓰는 것을 보고 뒤로 넘어지셨다나??? 
 이런 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즐겁게 웃곤 했었는데...
 이젠 그 시간이 추억이 되었버렸다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무상하게만 느껴진다.

 그저 현재를 사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인가 보다...
 
 그래도 가끔씩 그리워할 추억마저 없으면 삶이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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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꿈속에서 염불하기를 권하다 
2014.04.26

  오랫만에 신묘한 꿈을 꾸었다.
  기도를 열심히 할 때는 신묘한 꿈들을 꾸지만 최근 몇 년 간은 기도보다는 공부를 했기 때문인지
  신묘한 꿈은 별로 꾸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요즘 마음 먹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서 그런가,

  오늘 새벽 꿈이다.

  어느 여인이 나를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보살님 저의 집에 자꾸 귀신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인의 얼굴엔 탁기가 가득 서려있었다.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황당하기도 하고 뭐라고 답변해주어야 할 지 막막했다.
  그 때 누군가가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라고 하면 되잖아,'
  그래서 나는 그 여인에게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세요' 했지만 
  왠지 내 말에 힘이 없는 것이 느껴졌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확연히 알 수 없으면서 무조건 염불만 권한다고 될 일인가 싶었다.
  그때 꿈속인데도 난 미타행자 그녀를 찾았다.

  그녀에게 물으면 답을 말해 줄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니 
  확실하게 상황 판단을 하여 처방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녀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 여인은 떠나지 않고 내 옆에 앉아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어쩌란 말인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왜 난 힘있게 권하지 못하는가.
  과연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한다고 그 여인네 집의 문제가 풀릴까.
  그러다 내가 생각해 낸 것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에 곁들여 아미타경을 매일 1독씩 21일간 하면 될 것이라는...

  아미타경을 읽어 귀신들을 정토로 인도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그러면 왠지 힘이 붙을 것 같았으며 그 여인네 집에 더 이상 귀신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론 누구에게나 그렇게 처방을 내려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하고는 꿈에서 깨어났다.
  
  너무도 선명한 꿈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사념에 잠겼었다.
  내가 염불을 자신있게 권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내게 염불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그러기에 당황하고 안절부절 못했으며 힘있는 미타행자를 찾았던 것이다.

  부처님이 내 공부를 점검하기 위해 여인의 몸으로 나투신 것이 아닐런지...
  내 공부가 아직 많이 시원찮은 것이다.
  치열하게 정진을 하여야 하는데...
  왜 전처럼 힘이 붙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번뇌가 많은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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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염불하는 중에 찾아오는 영혼들
2014.4.26

  미타행자 그녀는 염불하는 중에 많은 영혼들이 찾아 온다고 하였다.
  그녀가 있는 사찰은 6.25 전쟁 격전지였던 곳인지라 젊은 나이에 죽은 병사들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지박령이 되어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한 맺힌 영혼들이 그녀에게 하소연을 한단다.
  어느 병사는 너무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던 장면을 보여주는데
  영화 스크린처럼 그 장면이 그녀의 눈 앞에 펼쳐&#51220;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 병사에게 인과법을 설하고는 나무아미타불 염불하기를 간곡하게 권했고
  그 때부터 새벽기도 시간이면 그 병사가 법당에 나타나서 같이 염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병사는 손을 흔들며 떠났다고 한다.
  그런 예가 부지기수 였다.
  때로는 산에서 죽은 동물들까지 법당에 나타나서 염불하는 것을 듣고는 했다 한다.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럼 모든 영혼들을 다 볼 수 있느냐'고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찾아오는 영혼 또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죽은 영혼이 보이면 무섭지 않냐고 했더니,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몸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인데 뭐가 무섭냐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게 일반적인데.
  그녀는 산 자와 죽은 자를 평등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섭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떠도는 영혼들을 제도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를 전하는 것을 사명인양 생각하는 듯 했다.
  일체중생이 극락에 나기를 간곡히 원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그녀와 도량을 걷다보면 참 재미있었다.

  "저 일주문 앞에 지금 횐빛이 나는 신장님이 서 계시네요.
  그 옆에 계시는 신장님은 금빛 몸이구요."

  그러면 나는 그 앞에서 얼른 합장을 하면서
  "신장님 안녕하세요. 저 잘 좀 봐 주세요. 제 소원이 뭔지 아시죠?" 하며 장난기를 부리기도 했다.
  도무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니 어쩌랴...

  완전히 혼자 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그녀,
  쉽게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세계에서 살고 있으니 나름대로 고충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늘 행복해 했다.
  염불하는 낙으로...

  정토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나 이제는 빨리 가고 싶다는 마음도 놓았다고 했다.
  이 생에서 업갚음을 다 하고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업으로 오는 장애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했다.
  설사 업으로 인해 귀머거리, 장님이 된다 해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업을 닦아서 극락에 갈 수만 있다면 그녀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그녀의 그런 신심 하나는 정말 너무나 부러웠다.
  하지만 난 아직도 업의 장애는 두렵고 피하고 싶다.
  어느 생에나 그녀와 같은 근기를 갖출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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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축생도 염불을 하나요? 
2015.04.29

 ㅡ 수 한
 
 미타행자 그녀가 있던 절에서 머물때 였다.
 
 아침 공양시간에 그녀가 내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어 왔다.
 "수한 보살님, 오늘 새벽기도를 하는데요.
 하얀 산토끼 한마리가 법당 탁자 위에 누워 있는거에요.
 이상하다 생각하며 산토끼를 위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주었더니
 이내 아주 평온한 얼굴이 되어갔어요."
 
 "뭣이라구라?
  산토끼 영가님이 오셨다구라?  호호..."
 
 그렇게 가볍게 받아 넘겼는데,
 그날 정오시간 쯤 되어서 제설작업을 하던 거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제설작업을 하는데 눈 속에 얼어죽은 산토끼 한마리를 발견했어요.
 어제 밤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죽었나 봅니다.
 대충 땅 파서 묻어 주고 왔어요."
 
 난 팔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잽싸게 그녀에게 달려가서 사건을 알려주고 질문을 하였다.
 
 "축생들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좋아하는가?
 그리고 그들도 염불을 할까?"
 
 "당연하지요 보살님.
 어떤 때는 날개가 반쪽 밖에 없는 나방도 제가 염불할 때 찾아와서 염불소리를 듣곤 해요.
 뱀도 있고...그들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답니다."
 
 호오라...영적인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나의 경험으로도 꿈 속에서 축생들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것은 본 적이 있지만...
 한창 조상천도 기도를 할 때인데,
 자는데 내 방 앞에 새 한마리가 찾아와서 구슬프게 울었다.
 새는 이윽고 나무아미타불을 외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꼭 산 사람처럼 울었다.
 꿈이니 나는 그냥 상징으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그녀는 심안이 열리고 영안이 열린 사람인지라,
 보통사람은 볼 수 없는 세계를 보는 여자이니...
 
 그녀는 잠시 스승으로 모시려 했던 스님께서 
 '축생이 무슨 염불을 하냐' 고 하시는 바람에 발길을 돌렸다고 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힘이 쫘악 빠지는 느낌이었어요.
 기운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 분의 강설은 단지 교학일 뿐이라고 단정지었어요."
 
 그녀의 그 마음이 요즘 내게도 있다.
 새로운 선지식을 발견했다고 좋아서 열심히 강의를 들었던 어느 분의 말씀 중에
 "축생에겐 마음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순간 나도 힘이 쫘악 빠졌다.
 아니 삼라만상이 모두 마음으로 지어진 것인데 어찌 축생이라고 마음이 없다 하시는가.
 나무들도 마음이 있어 목이 마르면 물.물.물 찾기에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온다는데,
 단순한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나무들이 스스로 우주의 수기(水氣)를 불러들인다고 하지 않는가.
 사막의 물주머니 개미는 수억년 동안의 진화과정을 거쳐 배에 물주머니를 달고 태어나게 되었다는데
 어느 학자의 말이 그것은 개미들의 집단 무의식이 뜨거운 사막에서 물을 찾는 마음이
 물주머니를 창조했다고 발표를 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창조의 주체이며 결과물이다.
 그런데 어찌 인간만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인지...
 
 오...진정한 선지식은 없는 것인가.
 물론 고차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은 축생에게 없을 수 있다.
 아니 이것도 틀린 말일 것이다.
 축생중에도 수행자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실례들이 많지는 않지만 있긴 하니까.
 
 작금의 선지식이라고 하는 분들이 너무 교학에만 밝은 게 아닌지...
 심안이 열려서 법계를 보는 사람의 말처럼 가슴에 와 닿지 않으니...ㅠㅠ
 어쩌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이나 하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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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어떤 사람이 화주를 하여야 할까
2015.05.02 14:25 

          ㅡ 수 한

 오랫만에 미타행자 그녀에게 전화를 했더니
 청소보살에서 이젠 법당소임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축하해. 진급했구먼?"
 
 그러자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설레 설레 한다.
 
 "보살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전 청소보살이 더 좋습니다.
 갑자기 법당보살이 그만두는 바람에 제가 임시로 하게 되었는데
 벌써 몇 달째 사람이 구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슴다.
 화주까지 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업 짓는 소임입니까.
 그래서 저는 스님에게 화주는 못하니 그냥 오는 사람 반갑게만 맞이 하겠습니다 했어요."
 
 "솔직히 자기처럼 법당보살로 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어?
  교학도 탄탄하겠다. 수행력과 법력도 있겠다..."
 
 "아이고...보살님 제가 무슨 법력이 있습니까. 중생에겐 법력같은 건 없습니다."
 
 그녀의 말 뜻이 무엇인지는 안다.
 중생심에서는 참다운 법력이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법력은 참나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히 신도들에게 축원카드 많이 받는 거 좋은 일 아닙니다.
 그거 다 빚지는 겁니다.
 그래서 화주 잘못하면 지옥행이라고 하지 않슴까.
 법당보살을 하고 있으니 별별 사람들이 다 매달립니다.
 어떻게 소원성취가 안 될까 하고요.
 그럴 때 마다 바른 법으로 인도하느냐고 진땀이네요.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가는 저를 교주처럼 따르려 할 테고...ㅠㅠ
 전에 있던 화주보살님은 신도들에게 옷도 얻어 입고 했다는데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 보살님이 몰라서 그랬겠지요.
 아울러 스님들도 신도들에게 공양받는 거 무서운 일인지 아셔야 하는데...
 그게 다 빚입니다. 빚...
 잘못하면 이생에 빚만 잔뜩 지고 가는 겁니다."
 
 그렇겠지 빚만 지고 가는 것이겠지.
 중생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공양물을 어찌 두려워 하지 않으랴.
 백일기도니 천일기도니 입재한 신도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부쳤겠는가.
 때로는 처절한 심정으로, 
 &#46468;로는 벼랑끝에 몰린 심정으로,
 때로는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나름대로의 수많은 사연과 염원과 한이 서려 있다고 보아야 겠다.
 그 염원이 담긴 축원카드를 아무 생각없이 
 그저 주소와 이름 석자 읽어주는 식으로 축워카드를 읽어서야 무슨 효험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 축원에 목이 마른 중생의 애처로움이란...
 
 그래서 화주를 겸한 법당보살은 아무나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일체중생을 위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저 호구지책으로 또는 생각없이 하고 있다면 신중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내가 아는 서울 큰 사찰의 화주보살님은 화주로서의 자격을 갖추신 분이었다.
 물론 직업이 아닌 봉사로서 하시고 있지만...
 그분은 화주 역할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부처님 법으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보살님은 화주노트를 늘 가방에 넣어 갖고 다니시는데
 차를 타고 갈 때는 화주노트를 무릎에 놓고 거기에 적힌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신다.

 하루의 일을 끝낼 때는 그 날 시주를 한 사람들의 명단을 읽고 
 그 분들을 위해 금강경을 읽어 주신다.
 그래서 그런지 그 분은 화주역할을 참으로 잘하고 계셨다.
 한 마디로 척 척 붙는다.
 이런 사람들이 화주의 자격을 갖추었다 할 것이다.
 중생을 위한 마음이 열린 대보살들이 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이다.
 
 내게도 법당보살 소임을 맡아달라는 청이 여러 번 있었지만 거절하였다.
 아직 내가 그럴 만한 그릇이 안되었으므로...
 말로야 중생을 위한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진짜 그런가?
 아직은 사사로운 마음이 많이 도사리고 있으니 청을 받아들이기가 조심스럽다.
 
 미타행자 그녀야 말로 법을 아는 사람이니 염려하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그 기회는 부처님이 그녀에게 주신 선물이며 숙제라고 생각 한다.
 이제 공부가 익었으니 중생에게 그 공부를 회향하라고 하심이 아닐런지.
 그녀의 뛰어난 수행력은 인정하지만 보살행의 부분에서는 소극적이라 아쉬움이 있었는데
 부처님이 그 것을 아시고 그녀에게 보살행의 길을 열어주심이다.
 보다 한 차원 더 공부시키기 위함이 아니시겠는가.
 
 진흙밭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연꽃을 딸 수 있으랴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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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3년 결사 중이에요                                                       

 2016.03.01 20:41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린다.

 모니터를 보니 미타행자 그녀가 아닌가.

 "어...왠일야? 전화를 다 하고?"

 실로 오랜만의 전화였다.

 늘 치열하게 정진을 하는 그녀인지라 누군가에게 전화를 잘 하지도 않으며

 나 또한 방해할까봐 전화를 하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오늘 아침 갑자기 보살님 생각이 났어요."


 "어구...그래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니 반갑구랴."


 "잊다니요?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잊을 수가 있어요?

 늘 마음 속엔 남아 있지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내 생각이 난거야?"


 "실은 오늘 아침에 법당에 나가 보니 누군가가 갖다 놓은 경전이 한 권 보였어요.

 자비도량참법 인데... 누군가가 법보시 한 경전이더라구요.

 혹시 이 경전이 보살님 스승이었다는 분이 법보시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경전 겉장에 뭐라구 쓰여 있던데 맞나요? 이 분이 보살님 스승 맞지요?"


 "에고...귀신이구먼 맞아.

 그 경전 우리가 돈 천만원 모아서 천권 찍어서 전국에 무료로 배포한 경전야."


 "호오...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스승님은 아직도 소식이 없으신가 보죠?"


 "응... 아마도 만행 하고 계시겠지 싶어.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그곳에서 3년 기도 끝났지 않나?"

 "작년 6월에 회향 했지요.

 글구 다시 3년 기도 입재 했는데요.

 이 번에는 산문밖 출입을 안하기로 하고 정진 중입니다."


 "흐음...암튼 대단하셔.

 어떻게 3년 동안 밖에를 안나가고 하려고해?

 가끔 병원에도 가고 해야 할텐데..."


 "그러잖아도 다리 아픈게 도져서 한동안 걷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한 때 하루에 3쳔배씩 3년을 정진했던지라 무릎이 다 망가져 있었다.

 

"으응??? 그런데 그 다리로 견디고 있다는 것이야?

 미쳤구먼 그러다 앉은뱅이 되면 어쩌려구?"

 "그저 부처님을 믿는 마음으로 밀어붙였더니

 이제는 걷는데는 별 지장이 없어요. 살만해요."


 "에고...참으로 대단해.

 다음에 내가 신유능력이 있는 어떤 보살을 한 번 데리고 가 볼까?

 나도 그녀에게 망가진 손가락 하나 치료 받았는데 좋아졌거든? "


 "보살님... 그런 능력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에요.

 불보살의 경지에 가지 않고 쓰는 신유능력은 진정 사람을 구제하지 못합니다.

 자기 공부에 방해만 될 뿐에요."


 "그래도 중생에게 이롭게 쓰면 되지 뭘.

 그녀는 돈 안받고 치료해 줘.

 지금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거든? 인도 유학파고 말야."


 내가 이런 저런 설명을 했더니

 조금 관심이 가는 가 보았다.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문제라면 대개 그들이 그 능력을

 자신의 돈벌이에 쓴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물론 먹고 살아야 하니 자연히 그리되는 것인데

 그 유혹을 뿌리치고 보살행을 한다는 것은 왠만한 경지가 아니면 기실 어려운 일이다.


 "암튼 보살님. 언제 놀러오세요.

 저는 3년 회향 하기 전에는 절대로 절 문 밖에 나가지 않을 것이니

 보살님이 와 주세요. 보고 싶네요."


 그려...그려...

 이 세상에 도반처럼 좋은 관계가 있으랴.

 밤을 세워 도담을 나누어도 지치지 않는 사이가 도반 아니던가.

 

 "그런데 보살님, 요즘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계속 하고 계신가요?
 혹시 다른 수행 하고 계신 것 아니죠?"

 ㅋㅋ 내 가슴이 잠시 뜨끔했다.

 "아냐 하고 있어."


 "흐음... 다행이네요.

 우리 꼭 극락에서 만나야 지요. 아셨죠?"


 그래...극락에서 만날 수 있음 좋겠다.

 나야 그녀처럼 염불만 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아미타불께 지심귀명례는 드리고 있다.

 그리고는 나 하고 싶은 수행을 하고 있당께???

 그녀에게 쪼끔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녀이고 나는 나인데 뭐.

 나도 내 스타일대로 사는 거지 뭐.




[ 위의  글들은 현재 강원도 모 사찰에서 (자세한 소재지와 연락처공개를  염불행자님께서 원치 않아 공개하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종무하며 오롯이 나무아미타불 염불하시는 염불행자님의 실화입니다]

Posted by 慧蓮(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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